--- 서문(序文) --1605 모든 무공을 가장 크게 두가지로 구분한다면 정(正)과 사(邪)로 나뉜다. 어느 사이엔가 무공의 원류는 2가지로 나뉘더니 서로가 피를 피로씻는 복수와 반목 을 통해 왜 서로간에 싸웠는지 그 시초조차 아리송하여졌다. 정파는 사파를, 사파는 정파를 서로가 원수보듯 하며 서로가 서로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고 죽였다. 정파는 달마가 역근(易筋)과 세수(洗髓)의 두 진경(眞經)을 중원에 보급한 것 에 맞춰 그것을 기반으로 성장한 무공으로 대부분이 불가(佛家)나 도가(道家) 계통의 무술들이 주종을 이뤘고 이른바 5대 세가의 경우도 원류를 따지면 9파 1방 중의 속가제자중 뛰어난 자가 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파에서 뛰어난 자들이 튀어나와 새로운 문파를 만들다 보니... 근래에 이르러서는 그 갈래 조차 희미해질 정도다. 고대의 무술은 짐승이나 조류의 행동을 흉내내고 모방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유명한 소림오권(小林五拳)은 호랑이, 표범, 뱀, 원숭이, 학의 움직임을 보고 이루어졌으며, 도가(道家)로부터 전수된 검법(劍法)도 동물들을 흉내내어 시 작되었다. 이러한 검법(劍法), 도법(刀法), 창법(槍法), 봉법(棒法), 권법 (拳法), 장법(掌法) 등의 무술을 통털어 외공(外功)이라 한다. 반면에 내공 (內功)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이나 숨을 뱉고 쉬는 법을 일컫는 토납술(吐納 術)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린시절부터 오랜 기간을 두고 토납을 반복하면 몸속 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이 쌓이게 되고 그 무형의 힘을 권이나 장, 또는 검 에 실어 내보내는 무술을 내공이라 한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이 어느정도 쌓이 게 되면 몸 안을 일주천 시키며 더욱 그 힘을 증폭시켜 그것이 쌓이는 속도를 증가시키게 된다. 하지만 이때 그 힘을 어떤 순서로 어떤 혈도로 보내느냐에 따라 각종의 운기조식의 기법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정파의 경우 내공을 익히는데 있어, 그 공력이 천천히 쌓여 나간다. 그렇기에 다른사람의 진신내공(眞身內功)을 얻거나 영약을 복용하지 않고서는 통상의 경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을 해도 절정고수에 이르려면 40세가 넘어야 가 능했고 초절정의 고수가 되려면 60세가 넘어야 가능했다. 물론 타고난 신력 (神力)으로 외공(外功)을 사용하는 자들도 있지만 내공이 받쳐지지 않고서는 절정고수에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이렇듯 정파 내에서도 무공을 쌓는 방법에 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마교에서 처럼 파격적인 방법으로 속성으로 내공을 쌓 지는 않는다. 정파의 경우 자칭 명문(名門)이라 불리는 많은 방파가 있다. 그 들은 대부분 도가나 불가 계통이며 뛰어난 고수들을 많이 배출했기에 그런 명 가의 칭호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명가의 제자들이 방문외도(傍門外道 : 명 가가 아닌 다른 다수의 군소 방파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라 칭하며 깔보는 경 향도 있지만 실질적인 정파의 저력은 소수의 명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숫자를 자랑하는 군소방파들에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군소방파들은 내가무공 보다는 외가무공을 익히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사파와는 달리 내가무공이 없 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외가무공을 익히고 가르치는 것이다. 명가(名家)의 경우 후계자에게 진신내공(眞身內功)을 전수하거나 영약을 섭취 시켜 빠른 속도로 내공을 쌓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각 문파의 정통 무공들이 교육되었고 그들은 적전제자라고 불린다. 적전이 아 닌 제자들의 경우 내공 부분에서 상당한 취약함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 초식의 위력은 최소 10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고 한다. 상대에게 진신내공을 전수하는 경우 엄청난 고통이 내공을 전수하는 쪽에 가 해지기 때문에 일가 피붙이라도 잘 전수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진신내공의 전수에는 한가지 위험이 따른다. 같은 수련을 한 사람의 진신내공인 경우 성 질이 같기에 진신내공을 전수받아도 상관없지만 상대가 다른 종류의 수련을 하여 얻은 내공을 전수한 경우 아예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 자 신의 진신내공과 얻은 진신내공이 합쳐지지 않고 서로 충돌하여 더욱 안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일반적으로 치료나 공격 등의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내공 불어넣는 경우 그것 은 진신내공이 아니기때문에 내공을 받은 사람의 경우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이종(異種)의 내력이 소멸하고 또 내공을 집어넣은 사람도 곧이어 내력이 회 복된다. 정파의 경우 내공을 특출한 경지까지 연마한 고수들을 일컬어 사람들은 삼경 (三境)의 고수라 부르고 있다. 초절정 고수의 경우 내공의 정도와 그의 무술 실력이 거의 비례하기 때문에 삼경의 고수에 들어가는 경우 거의 적수를 찾기 어렵다고 하겠다. 제일경(第一境)은 조화경(造化境), 즉 화경(化境)이다. 이것은 천지인(天地 人)의 삼화(三化)와 수목금화토(水木金火土)의 오기(五氣)를 고루 몸 안에 이 루어낸 삼화취정 오기조원(三化聚頂 五氣造元)의 고수를 말한다. 온 몸이 무 예를 시전하기에 최적의 상태로 바뀌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을 경험하며, 이러 한 경지가 되면 능히 소리로 사람을 죽이고 손가락을 들어 작은 산을 무너뜨 릴 수 있다. 화경에 오른 현존하는 고수는 7명이며 그들을 삼황사제(三皇四 帝)라고 불렀다. 거의 비슷한 무공 수준이었지만 삼황과 사제로 구분하는 이 유는 서로간의 나이차 때문이 첫째 이유였고 사제보다는 삼황이 더욱 배분이 높은데다가 무공이 높았다. 정파의 고수들은 가장 뛰어난 마교가 배출한 4명 의 고수에게 사천왕(四天王)이란 칭호를 줬는데 그 칭호에서 자신들의 은근한 비 정상적인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과거 현경의 고수가 한명 있었지만 그가 죽은다음 최강의 고수들인 이들은 모든 정도 무림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 제이경(第二境)은 신(神)으로의 입문이라 할수 있는 현묘(玄妙)한 경지(境地) 즉, 현경(玄境)이라 한다. 현경의 경지가 되면 몸에 만독이 침범하지 못하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이 되며 겉으로 전혀 정기가 드러나지 않는 반박귀진(返縛 歸眞)의 상태가 된다. 또한 나이가 연로한 사람이 이 경지를 이루면 머리가 다시 검어지고 치아가 새로나는 반로환동(反老換童)를 경험하며 몸에서 뿜어 나오는 예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현경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수천년 무림사에 과거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을 창설한 조사인 신검 대협(神劍大俠) 구휘(區揮) 단 한명 뿐이었다. 마지막 제삼경(第三境)은 불노불사(不老不死)의 진정한 신의 경지 즉, 생사경 (生死境)이다. 인간의 생과 사를 초월하고 우주만물의 법칙을 한눈에 꿰뚫어 내는 무예의 최고경지로 단 한명도 그 근처까지 접근조차 하지 못했기에 추측 만 있을 뿐 마지막의 생사경은 완전한 미지의 세계다. 수천년 무림사에 단 한 명도 탄생할 수 없었던 지고무상의 경지가 바로 생사경이다. 정파의 무공이 이상과 같다면 사파의 무공은 정파의 무공과는 완전히 다른 길 을 가고있다. 사파는 달마가 전래한 무공 대신 중원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무술이다. 그렇기에 토납술에 있어 정파와는 다른 방법을 택한다. 대부분의 사파의 경우 녹림(綠林;산적이나 해적 등 남을 등쳐먹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의 집단, 창부 등도 여기에 속함)이나 사파 무공을 익히는 역사가 짧은 작은 군소 방파들의 경우 내공의 기술이 정파보다는 떨어지므로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상대무공에 대한 파해식이나 기괴한 초식 등을 개발하여 기교 에서 앞서가는 외가무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때문에 약간의 기술과 그에 대한 숙련도만 있으면 되므로 빠른 시일안에 고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절정 고수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파 고수들이 미숙한 상태 기 때문에 이들의 무공은 상당히 위협적이다. 사파의 경우 검뿐 아니라 무기 에서 상대방에 대해 실리를 취하기위해 각종의 다양한 무기를 개발하여 사용 하며 암기 종류도 많이 애용되고 있다. 하지만 일반 사파들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있는 방파가 있으니 그는 마교 (魔敎)다. 마교의 경우 오랜 역사와 전통에따라 각종 토납술이 개발되었고, 그들이 택한 것은 속성으로 내공을 쌓는 기술 중에서 가장 빠른 성취도를 이 룰 수 있는 역혈기공(逆穴氣功)이었다. 운기조식을 할때 내공을 몸에서 일주 천 시키는 방향을 반대로 한다면 대단히 속성으로 내공을 쌓게된다는 것을 알 아낸 이후 마교는 이 기공을 통해서 수많은 고수들을 배출했다. 세월이 흐르 면서 수많은 역혈기공의 기법들이 개발되었고 또 그에따른 패도적인 많은 마 공들이 개발되어 정파인들의 숨통을 끊어놨다. 속성으로 내공을 쌓는데 좋은 점도 많았지만 몇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번째 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릴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내공을 쌓는 속도가 빠 른 기술일수록 그 확률은 더욱 올라간다. 그때문에 마교에서는 처음 입문한 무사들은 가장 빠르게 내공을 쌓는 기술을 사용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 가 되면 좀 더 안전한 방법으로 바꾸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잘못하면 지금까지 고생해서 쌓은 내공은 고사하고 목숨까지 바쳐야 될 것이 뻔하기 때 문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생기는 이점은 주화입마의 위험도를 잊어버릴 만큼 대단하다.마교의 경우 20대에 절정고수가 가능할 뿐더러 30대에 초절정고수 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때문에 마교의 고수들은 외가의 무공보다는 장풍(掌 風), 지풍(指風), 검풍(劍風), 검기(劍氣) 등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는 내가 의 무공을 사용했고, 특히나 패도적인 장풍을 쏘아내는 기법들이 많이 발달해 있었다. 그 다음으로 생기는 문제점이 산공(散功)의 위험이다.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 며 자신이 여태까지 쌓아놓은 내공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그 고통의 시간은 내공을 얼마나 쌓았느냐에 따라 다르며 절정의 고수일수록 그 고통의 시간은 증가한다. 하지만 마교에서 그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산공은 늙거나 병들어서 죽기 일보직전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 교의 고수들은 정파의 고수들처럼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를 염원했다. 그 다음 문제점은 일정수준 이상 무공을 쌓았을때 벽에 막힌 것처럼 더이상 진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을 마교의 고수들은 '보이지 않는 벽'이라고 불렀고 그 벽을 뚫으면 마(魔)의 정점(頂点)이라고 불리는 극마(極魔)의 경지 로 들어설 수 있다. 정파에서 삼경의 고수가 있듯이 마교에서도 그들이 익히기를 염원하는 경지가 있다. 그 첫째가 마인(魔人)의 정점인 극마(極魔)의 경지다. 온 몸이 무예를 시전하기에 최적의 상태로 바뀌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경험하며, 마기(魔 氣)를 몸안에 고루 갈무리하여 자연스럽게 뻗어나오는 마기만으로 사람들을 전율시키며 내력이 약한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투지를 잃고, 보통 사람들은 생명을 잃기도 한다. 또 마음먹기에 따라 완벽하게 마기를 몸안에 갈무리하여 밖에 드러나지 않게 할 수도 있다. 뿜어낸 마기만으로 능히 주변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고, 손가락을 들어 작은 산을 무너트릴 수 있다. 정파의 화경의 고 수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고수로서 현존하는 극마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4명 이며 사람들은 이들을 4마제(魔帝) 또는 사천왕(四天王)라 부르며 두려워한 다. 그들은 보통때는 마기를 거의 밖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신경질이 나면 자 신도 모르게 살인적인 마기를 밖으로 흘린다. 그렇기에 그것을 보는 수하들은 피가 얼어붙는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탈마(脫魔)의 경지로서 마인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탈마의 경지에 이르면 몸에 만독이 침범하지 못하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이 된다. 은 연중에 몸에서 뿜어나오는 마기는 극마의 경지에서 최대가 되었다가 차츰 안 으로 갈무리되어 사라지며, 탈마의 경지에 이르면 몸안으로 마기가 완전히 갈 무리되어 겉으로 전혀 마기가 드러나지 않게 된다. 또한 나이가 연로한 사람 이 이 경지를 이루면 머리가 다시 검어지고 치아가 새로나는 반로환동(反老換 童)을 한다. 모든 마인(魔人)이 두려워하는 산공이 없어지기에 마를 벗어났다 고 하여 탈마의 경지라 불린다. 탈마의 경지에 이르면 그 무한대의 마력(魔 力)으로 태산(太山)을 부술 수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윗단계는 없으며 아마 일부 마인들은 탈마의 윗부분은 정파의 생사 경과 같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그들은 무공의 시작은 다르지만 끝 은 같은 것으로 종결지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탈마의 경지에 이른 사 람도 없는 형편이었으니 그 추측은 어디까지나 일부 마인들의 망상일 뿐이라 고 정파의 사람들이 일축하고 있다. 운명의 시작 갑자기 마교의 교주는 장로급 이상이 모두 모이는 1년에 1번 뿐인 정기집회 (定期集會)에서 특이한 안건을 내놨다. 현 마교 교주인 흑마대제(黑魔大帝) 한중길(韓中吉)은 극마의 경지에 이른 고수로서 일부러 충분히 마기를 숨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기를 언제나 은은히 뿜어내기를 좋아한다. 그가 익힌 자전마공(紫電魔功) 때문에 온 몸이 은은한 보라색을 띄고 있었기에 보는 사 람으로 하여금 괴기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본교는 사파 최대의 방파로서 2만에 가까운 고수를 보유하고 있소. 하지만 각 지단에 파견되어있는 하수들을 제외하고 그런대로 쓸만한 고수들만 든다면 10,000명도 되지 않소. 그 중에서도 정예를 가려 뽑는다면 5,000명이 될까말 까 하는 형편이니 현재 정파의 쓰레기들에 비했을때 언제나 열세에 몰리는 것 이오. 좀 좋은 방법이 없겠소?" 그러자 삼면인마(三面人魔) 소무면(簫無面) 장로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호 가 말해주듯 그는 세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정파와의 싸움에서는 미친듯한 광소(狂笑)와 잔인한 손속, 그리고 피에 굶주린 광기(狂氣)를 보여주며, 무림 인이 아닌 일반 백성들에게는 활불(活佛)과 같은 인자함을, 교내(敎內)에서는 엄격하고 치밀하며 자상한 면모를 보여줬기에 붙은 명호였다. 그는 교내 많은 수하들에게 인기있는 인물이다. "정파의 잡것들을 물리치는데는 현재의 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왜 고수가 없 다고 탓하십니까?" 소장로의 말에 대한 답을 적미살소(赤眉殺笑) 혁무상(赫武相) 장로가 했다. 그는 장로 서열 3위의 인물로서 그가 오랜시간 익혀온 적혈수라마공(赤血修羅 魔功) 탓에 긴 눈섭의 끝부분이 약간 붉은 빛을 띄고 있다. 그리고 죽이고자 하는 상대에게 보내는 살기띈 미소는 상대로 하여금 죽음에의 공포를 심어줬 다. 치밀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무공도 뛰어났지만 그 심계(心界)가 깊어 교주 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현재 교내의 정보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삼비대(三 秘隊)의 수장(首長)이다. "험, 그 이유는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직 미미한 단계이지만 아수혈교 (阿修血敎)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아수혈교는 모두들 처음 들어보는 말인지라 수석장로(首席長老)인 천도왕(天 刀王) 여지고(黎志高)가 물어왔다. "아수혈교가 뭐요?" "혈교(血敎)의 후신입니다. 이름만 바꾼 거지요." 혈교와의 과거 80년 전 치열했던 전투를 생각하며 좌중은 약한 신음을 흘렸 다. "음...." 그러자 혁무상 장로는 말을 이었다. "정파와의 대결이라면 큰 문제가 없지만 거기에 아수혈교가 끼어든다면 문제 가 있습니다. 저 옛날 아수혈교의 전신인 혈교(血敎)와의 전투를 잊으셨습니 까? 그때 혈교와의 정면 충돌로 본교 전력(戰力)의 4할이 무너졌었습니다. 본 교는 그 타격을 회복하는데 자그마치 50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했습니다. 그리 고 암흑마교의 움직임도 생각해야 합니다. 암흑마교의 움직임은 잡히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조심은 하는 것이 좋겠지요." 혈교는 강시나 실혼인 등을 제작하여 상대에 비해 떨어지는 무공을 각종 사이 한 대법이나 기술로서 보완하는 무리들로서 먼저 이들의 움직임을 처음 포착 한 것은 정파의 첩보기관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그 막강한 파괴력을 자 랑하는 강시라든지 아니면 사이한 대법 등을 파해하려면 보통의 무사들로는 힘에 부쳤다. 강시와 대결을 벌일려고 해도최소한 1갑자 이상의 내공을 갖춘 내가고수(內 家高手)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타격을 입힌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적의 각종 대법에 걸리지 않으려면 웅후한 내력을 가지고 있어야 걸리지 않으므로 정파는 꾀를 부렸던 것이다. 무림맹 회의에서 그들과의 정면충돌을 견딜 수 있는 대량의 절정고수들을 보 유한 문파가 없었기에 쓸쩍 마교에게 그물을 씌워 계략을 통해 그들과 먼저 충돌하게 만들었다. 그때 정파가 옆에서 인심쓰는 척 하며 도와줬지만 마교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었다. 아마 정파와 마교가 연합전선을 펼친 것은 이때가 처음일 것이다. 물론 이때 정파에서는 초절정 고수들만을 파견해서 도왔다. 그 전투가 있은 후 정파에서 는 참가자들에게 함구령(緘口令)을 내렸고 마교에서도 그 일을 외부에 선전하 지 않았으므로 마교와의 연합전선은 영원히 묻혀진 사실이었다. 만약 그때 정 파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마교의 피해는 더욱 컸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마교의 사생아(私生兒)라고 볼 수 있는 암흑마교가 있는데, 이는 혈교와의 전투 후에 혈교로 부터 입수한 각종 서적들을 바탕으로 "우리 도 이런 사이한 대법을 사용합시다."를 외쳤던 집단들이다. 그만큼 혈교가 사 용했던 각종 기술들은 마교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던 것이다.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부교주 장인걸은 교주가 그들의 제안을 묵살하자 자신의 추종자 들을 이끌고 노획한 서적들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 후 그는 명호를 흑 살마제(黑殺魔帝)로 바꾸고 암흑마교(暗黑魔敎)를 창단했다. 그렇기에 암흑마 교의 경우 마교의 무공과 혈교의 사이함이 합쳐진 특이한 단체가 되었다. 염왕적자(閻王笛子) 한중평(寒重平)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새로운 정예고수들을 좀 더 키운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교주가 약간의 흥미를 보이며 말했다. "고수를 키우고는 싶지만 어떤 방법이 좋겠소?" "각 지단에 연락하여 10세가 되지않은 기재들을 대량으로 납치하여 교육시키 는 것이 좋겠습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없어지면 관(官)이나 정파에서 눈치 를 챌지도 모르니 3,000명 정도만 납치하면 어떻겠습니까?" 한장로의 말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삼면인마(三面人魔) 소무면(簫無面) 장로였다. "여태까지 본교에서 태어나는 아이들 외에 보통 1년에 300명 정도를 납치해다 가 전사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10배인 3,000명이라니? 그 많은 수를 납치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들을 어디서 교육시킨단 말입니까?" 그러자 혁무상 장로가 말했다. "그건 제가 대답을 하도록 하죠. 실상 3,000명을 데려왔다 하더라도 초고수로 키운다면 초기단계 내공을 쌓는 과정에서 최소한 1,000명 정도는 상실하는 것 은 익히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각종 무공 훈련을 시키다 보면 그중에 서 잘해야 500명 정도 쓸만한 인재를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실상 3000명이나 되는 식구를 가르킬 훈련장은 필요 없습니다. 어린애 3000명이 주 거할 허름한 숙소를 만들어 그들의 내공훈련을 시키고, 그 사이에 2,000명 정 도가 훈련할 수 있는 수련장을 만들면 됩니다. 거기서 키워진 500명 정도는 현재 있는 수련장만으로도 상승무공의 교육이 충분할 겁니다." 그의 말을 듣고 교주가 상당한 흥미를 느끼는 듯 했다. "듣고보니 그 말도 일리는 있소. 그렇다면 외총관. 아이들은 언제까지 준비될 수 있겠소?" "그래도 좀 괜찮은 애들을 뽑아와야 하니까 5달은 걸립니다. 통보하여 납치하 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리로 쥐도새도 모르게 데리고 오는것이 문젭니다." "그건 외총관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존명" "이번 훈련을 할 훈련장의 건설의 총 감독은 소무면 장로가 수고해 주시오." "존명" "이번 훈련은 한중평 장로가 책임지고 해주시오. 이번에 키울 고수들의 능력 에 따라 마교의 장차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힘써 주시오." "존명" "그리고.... 내 직속의 암살대는 있지만 이들로는 좀 모자를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드니까 새로운 암살자들을 추가로 50명 정도 만들었으면 좋겠소. 그들은 흑살대(黑殺隊)라고 이름짓고 누구의 휘하에 두는 것이 좋을까......" 그러자 모든 장로들의 눈에 약간의 갈망과 희망이 떠올랐다. 교주가 직접 지 휘해서 만든 단체는 최정예일것이 분명했고 그들이 자신의 밑에 배속된다면 그만큼 자신의 입지도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좌중을 한번 둘러본 후에 교주는 입을 열었다. "그렇군. 내총관이 이들을 지휘하는 것이 좋겠어. 그리고 나머지는 능력이나 그때의 상황을 봐서 결정하기로 하지." 회의가 끝난 후 교주는 삼비대의 수장인 혁무상 장로를 비밀리에 불렀다. "아수혈교의 총단은 알아냈소?"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세력이 점차적으로 잡히고 있습니 다. 그들도 현재 세력을 키워나가는 형편이기 때문에 움직임을 아주 조심하고 있기에 정보수집에 힘이 듭니다." "그들의 준동은 언제쯤이라고 생각하시오?" "빨라도 10년정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암흑마교의 경우는?" "그들의 움직임도 쫓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렇다할......." "그렇다면 혹시나 아수혈교와 암흑마교가 연합할 가능성은 없나?" "거의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에 대비해서 연구 조사하고도 있습 니다." "아직까지는 큰 문제는 없다고? 참! 정파 녀석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알고 있 나?" "아마 무림 최대의 정보집단이라는 개방이나 무영문(無影門)에서는 얼마간 알 지도 모르지만 글쎄요.... 저희도 아주 우연한 기회에 포착한 사실이라....." "전에 정파 녀석들에게 당한만큼 돌려주는 방법은 어때?" "돌려준다 하심은?" "아수혈교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그들이 알게 해주는거야. 총단의 위치를 알 려주면 더욱 좋고." "흐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하자는 말씀?"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본교가 혈교와의 싸움에서 얼마나 많은 타격을 받았 나? 우리끼리 싸울게 아니라 정파(正派) 녀석들도 사파의 무서움을 알게 해줘 야 한다구." "하지만 그들이 전처럼 먼저 사파의 통일을 우선시한다면, 그때는 전과같은 전투를 각오해야 할텐데요?" "그러니까 아수혈교 녀석들에게도 사파 통일보다는 정파의 핵심세력을 비밀리 에 기습해서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 더욱 이득이 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만 들어야지. 그들이 먼저 맞붙는다면 세력 회복에 최소한 10년, 아니 30년은 걸 릴거야. 그동안에 우리도 준비를 해야지. 고수 1명을 키우는데 1,2년이면 되 는줄 알아?" "숫자만 자랑하는 그 개방의 돌대가리들은 속이기가 쉽겠지만 그 여우같은 무 영문의 옥화무제(玉花武帝) 할망구는 속이기가 어려울 텐데요? 그리고 그 수 하들도 원체 교육이 잘된 녀석들이라....." "무영문에는 아주 조금만 알려줘. 그럼 그 악착같은 할망구가 알아서 할테니 까." "전처럼 그들이 공작을 한다면 우리가 역으로 당할수도 있습니다." "대신에 우리가 구파 일방과 오대세가의 세력이나 방어망 등 정보를 넌지시 아수혈교에 알려주면 돼. 아수혈교 녀석들도 바보는 아닐테니까 이 철옹성인 본교총단보다는 허술한 정파의 본거지들을 기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겠지. 일단 기습하고 나면 그다음은 정파와의 전면전쟁이 되도록 유도하는거야."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바쁠텐데 이만 물러가도록." 음모와 또다른 음모..... 힘이 월등한 단체가 등장하지 못하는 무림이고보니 각종 술수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모든 무림인들의 꿈이무림일통(武林一統)이 었지만 사실상 그것은 꿈에 불과했다. 서로가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는 무림에 서 월등한 힘을 가진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불가능했다. 어떤 한 집단에 만 초절정 고수를 대량으로 키워 낸다는 것도 힘들었다. 만약 그것이 밖으로 밝혀지면 상대방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필사적으로 방해 하기 때문이다. 특이한 인물 2044호 그로부터 10년 후...... "흑살대(黑殺隊)의 교육은 끝났나?" "예. 성공리에 끝마쳤습니다. 그런데 좀 안심이 안되는 부분이 좀 있습니다." "뭔가?" "그러니까..... 2044호가......" "2044호라면 들은 기억이 있군, 검에 특출난 재능을 보인다는 녀석이지?" "예. 쾌검이나 경신술, 은잠술의 달인인 녀석으로 아주 천부적인 암살자로서 의 재질을 타고난 녀석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암살에는 적성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글쎄, 암살보다는 정당한 대결에 더 맞다고 해야 할까요? 이상하게 완벽하게 암살을 행하고 있는데도 어둠의 살인자와는 거리가 먼 것같은 인상을 주고 있 습니다. 아직까지는 위의 지시를 잘 받아들이고 있는데 문제는 언제 그가 성 질을 부리느냐입니다." "그렇다면 딴 녀석으로 교체하면 어때?" "대단히 능력있는 1급 살수라서...... 그리고 특급살수로 성장할 가능성도 대 단히 크고........ 또, 대체할 만한 이렇다 할 녀석이 따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당히 써 먹다가 나중에 다른 소속으로 옮겨주는 것이좋겠군."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암살에 필요한 것 말고는 어떤 기술도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석의 검술에 대한 집착은 너무 커서, 지금은 아무것도 가르치 지 않고 있지만 스스로 터득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검수로서는 미래가 기대되는 녀석이군." "예. 그런데 지금은 살수가 필요하니 문제죠." * * * 그는 2044호로 불려졌다. 그가 이곳에 온지 벌써 10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의 나이 17세, 그는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곳에 온 이후로 끊임 없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먼저 내공을 쌓았다. 그로서는 별로 힘든 일도 아니 었는데 수련중에 한명씩 쓰러졌고, 그 후로 그들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그 리고 틈틈히 격투 훈련을 받았다. 4년이 지난 후 흑의를 걸친 무사들 12명이 오더니, 아이들 팔의 경맥의 두께 를 보고 두패로 나뉘었다. 그런다음 한패를 데리고 떠났다. 그들은 다음부터 볼 수 없었다. 그의 경우 팔의 경맥이 가늘어 장법보다는 검법이 맞다는 판정 을 받고 검술 훈련을 했다. 그가 배운 것은 5가지의 쾌검술과 경신술, 신법 등이었다. 다시 3년이 지나자 그중에서 200명이 차출되었다. 그 2044호도 그 무리에 있 었다. 그들은 여태까지 배우던 무리에서 떨어져서 그들만의 훈련을 새로이 받 았다. 그것은 전문적인 살인술이었다. 이때 배운 검법은 여태까지 배운 검법 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쾌(快)....... 완전한 속도위주의 검법으로 방어는 무시하고 적을 죽이는 방법만을 배웠다. 그리고 은잠술과 기척을 죽이고 이동하거나 매복하고 있을 수 있는 여러가지 기법들을 배웠다. 이곳 마교에 와서 2044호가 정을 붙인 것은 검이었다. 친구 로 사귄 아이들은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여러 친구들과 헤어지며 그들과 소식이 끊기자 그는 사람보다는 검에게로 애정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2044호는 살수로서의 훈련을 받으면서 검을 만들어 가졌다. 살수란 직업상 자 신의 손에 맞는 검을 각자의 취향에 맞춰 주문제작한다. 가장 아끼는 자신의 검에 묵혼(墨魂)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백련정강(百鍊精剛)으로 만들어 약 간 푸른빛이 도는 백색 광택의 반월형 기형검은 검신에 묵향의 주문에 따라 묵혼(墨魂)이란 글씨가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묵혼은 2척 3촌(약 70Cm)길 이의 짧은 검신과 1척 길이의 긴 손잡이를 가진 기형검으로 칼날받이도 없이 검은색의 수수한 검집과 손잡이를 가진 검이다. 2044호는 하루에 한번씩 무인 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검을 닦을때 묵혼의 그 탄력있는 아름다운 검신을 들 여다 보며 정신을 빼앗겼다. 주) 묵혼검이 휘어진 반월형인 모양인데도 검이라 불리는 이유는, 검과 도를 나누는 기준이 휘어지고 안휘어지고 간에 검은 양면에 날을 가진 것이고 도는 한쪽면에만 날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검은 양면에 날을 가지고 있지만 베 기보다는 찌르기를 위주로 한다. 그렇기에 일부 검들의 경우 손상가기 쉬운 검날을 일부러 뭉툭하게 만들고 찌르기에 사용되는 앞부분만을 날카롭게 만들 어 사용하기도 한다. 베기가 주축인 도는 그 공격이 단조롭게 보이는 것에 반 해 검의 경우 찔러나갈 때 손목이 조금만 움직여도 상당한 변화를 일으키기기 에 검법은 도법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보인다. 그의 첫번째 살인은 정파의 천수검귀 공손수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훈련 의 마지막 과정에 있는 것으로서 이제까지의 이론을 실습하는 기회였다. 그에 게 주어진 인물이 공손수였다. 교관은 그에게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성명 : 공손수 호 : 천수검귀 특기 : 그의 독문검법 귀나천리도법 내공수위 : 1갑자 특기사항 : 대단히 뛰어난 검객. 여색을 많이 밝힘. 현재 7명의 첩이 있으며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음. 대금을 갚지 못할 경우 딸이나 부인을 뺏아 팔아버 리기도 함. 그가 거주하는 저택에는 20명의 2급 무사와 2명의 1급 무사가 지 키고 있으며 총 600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음. 4개의 도박장과 2개의 전장 (錢場: 은행과 같으며 고리대금업을 한다.), 7개의 전당포를 가지고 있으며 고리대금업과 사기도박을 통해 거둬들이는 돈은 막대한 액수다. 그를 지키는 6명의 1급 무사들의 능력은 뛰어나다. 그들은 교대로 공손수를 경호하며 밖에 외출할 경우 그들 중 3명만이 따라간다. ....... 생략........ 주의사항 : 10일 이내로 죽여야 하며,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말것. 그가 읽고 있는데 교관이 말했다. "2044호, 이자를 해치우는 것은 너의 실력이면 충분하다. 살아봤자 별볼일 없 는 쓰레기 같은 녀석이니 별로 마음쓰지 마라." "알겠습니다." 2044호는 공손수의 저택 가까이에 접근해서 우선 6일을 기다렸다. 6일간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헛점을 노렸다. 하지만 무사들을 죽이지 않고 숨어 들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전장을 둘러보러 나간 공손수에게 표창을 던졌다. 공손수의 무공을 실험할 겸 호위무사들의 능력을 실험할 목적도 있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집에서 1급 무사들을 떼어놓는 것이 었다. 그러자 다음날 공손수는 기습공격을 받고 조심성이 발동해서 6명의 1급 무사 들을 모두거느리고 전장에 나타났다. 이제 기회는 온 것이다. 2급 무사 정도 의 수준으로 그가 집안으로 숨어들어가는 것을 눈치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집안으로 숨어 들어와 끈기있게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6일간의 감시를 통해 공손수는 잠을 잘때 8명의 첩이나 부인의 방 중 아무나 그때 기분에 따 라 들어갔다. 그렇기에 야습을 하기에 아주 힘이 들지만 9일간의 감시를 통해 거의 3-4일에 하루꼴로 새로 들어온 7번째 첩에게 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7번째 첩의 방에 숨어들어와서 2일간 묵혼은 초인적인 인내로 인기척을 감추 고 숨어있었다. 원래 숨어 들어가기 전에 용변을 마쳤고 완전히 빈속에 숨어 들어가서 빈속으로 최악의 경우 4일간을 버텨야 하는 것이다. 먹을 것이나 마 실것을 준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먹고나면 먹을 때는 좋지만 용변을 처리 하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숨어 들어가서 7번째 첩의 침대 아랫쪽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서 기다렸다. 운 좋게도 2일째 저녘이 되자 공손수가 들어 왔다. 2044호는 공손수와 계집이 성교를 한다고 헉헉거리는 신음소리를 기준 으로 공손수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에 천천히 검을 윗쪽으로 올렸다. 검소리 조차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숨어든 그 순간부터 검을 뽑아놓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손수의 위치를 잡은 순간 최대한 빠른 속도로 공손수의 숨결이 들려오는 방 향을 향해 찔렀다. 가벼운 신음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린 후 잠시 기다렸다. 더이상의 움직임은 없어지고 방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칼은 그대로 두고 침 대 밑에서 조용히 빠져나온 다음 그가 본 광경은 남녀의 머리를 관통하고 올 라온 묵혼의 검신이었다. 공손수는 여자를 껴안은 상태에서 머리에 칼이 관통 되어 죽어 있었다. 칼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에서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 고 그때문에 피비린내는 나지 않고 여인의 체취와 정사(情事)의 냄새만이 방 안을 감돌고 있었다. 2044호는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떤 감시 고 간에 새벽이 되면 느슨해진다. 그리고 2044호가 새벽을 기다리는 첫번째 이유가 1급 고수들이 새벽 5시에 교대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약간의 빈틈이 있었다. 2044호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집안을 빠져나왔다. 묵혼을 집 안을 빠져나오기 직전에 뽑았기 때문에 거의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2044호가 실습을 마치고 훈련장으로 돌아온 다음 교관의 호출을 받았다. "2044호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교관은 종이뭉치를 들여다 보며 2044호에게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2044호! 자네는 왜 지금까지 5가지 검술을 익혔는데 그중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찌르기만을 해서 상대를 죽였지?" "분명히 증거를 남기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검술을 사용하면 시체의 상 흔(傷痕)을 통해서 죽인자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오.... 가르치지도 않은 것을 빨리도 깨닫는군. 자네는 현재 그를 죽이는 데 3가지 흔적을 남겼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 있나?" "예! 호위무사들의 주의를 돌리려고 사용한 표창, 그리고 시체의 머리에 있는 검흔, 나머지 하나는 침대밑의 구멍일 겁니다." "잘 아는군! 왜 표창을 사용했나? 돌같이 알아보기 힘든 것을 사지않고?" "그 표창은 무기점에서 많이 파는 것입니다. 본교에서 제작된 것이 아닙니다.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구입해서 사용했습니다." "생각은 좋지만 수소문하다보면 누가 그걸 사갔는지 밝혀낼수도 있다. 앞으로 는 표창보다는 동전이나 돌맹이를 이용해라!" "예!" "검을 그냥 찌르기만 한 것은 잘 했다. 현재 밖으로 드러난 것은 살수가 죽였 다는 것 뿐 누가 죽였는지는 도저히 오리무중이지. 그런식으로 하면 되는거 야. 앞으로도 열심히 해보도록!" "예" "이번에 성공한 자들을 위해 연회가 준비되어 있다. 내일부터는 마지막 훈련 이 시작된다." "알겠습니다." * * * 그는 훈련 과정에서 5번의 살인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훈련이 끝났을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1급 살수라는 칭호와 묵향이라는 이름이 전부였다. 그는 언제나 검은색 무복을 입고 있었고 검은색을 칠한 죽립이나 두건을 애용했으 며 검도 손잡이나 검집이 모두 검은색, 그러다 보니 묵향이란 별칭이 붙었다. 묵향은 그를 지칭하는 일종의 별칭이었지만 7살때부터 이름이 없이 2044호로 불리다 보니 예전의 이름은 벌써 잊어버린지 오래고, 그러다 보니 이것이 정 식 이름이 되어버렸다. 그는 이번에 새로 조직된 흑살대에 배치되었다. 흑살 대는 마교내 서열 9위인 내총관의 휘하에 있었기에 상당히 좋은 대우를 받았 다. 하지만 묵향은 모든 동료들이 긴장감을 풀거나 쾌락을 위해서 주색에 탐익하 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지속적으로 무공을 연마하는데 노력했다. 실상 살수의 경우 단 1초의 공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데다가 빠른 경공과 믿을 수 있는 은신술만 지니고 있으면 된다. 대부분의 시간은 사냥물을 기다리는 인내와 끈 기를 요하지만 그렇게 높은 무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재미있는 점이 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무공의 높낮이가 필요한 때도 있었다. 어떤 때 인가 하면 살인을 달성한 다음 탈출할 때가 그것이다. 죽기로 마음먹는다면 못죽일 사람이 없지만 자신은 살고 상대를 죽이자니 힘이 드는 것이다. 묵향이 검술을 익히는데 있어 가장 중요시 한 점은 속도였다. 여러번 기습을 통해 많은 고수들을 죽이며 무공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점 중의 하나가 쾌(快)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경공과 신법이었다. 숨 어있다가 최대한의 빠른 속도로 적에게 다가가서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빠 른 신법(身法)이 필요하다. 그리고 적을 해치운 다음 탈출하는데 필요한 경공 술이 뒷받침 되어야 했다. 물론 탈출하면서 추격하는 적과 전투를 벌여야 했 지만 살수는 결코 검법을 이용해서는 안되었다. 검법을 사용하면 정체가 탄로 나기 때문이다. 물론 살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끈기와 인내였다. 기다림이야 말로 기회를 만들어 주는 가장 큰 기술이었다. 그리고 적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 하여 분석할 수 있는 관찰력과 두뇌도 필요하다. 남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 은 상대의 약간의습관이나 버릇이 그에게 득을 주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 다. 묵향이 검술에 미쳐있는 것을 알고있는 대주(隊主)는 그에게 새로운 검술을 가르키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경신술이나 은잠술 등 각종 살수에게 필요한 기술은 가르쳤지만 유독 검술만은 가르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주가 봤을때 묵향의 검술 조예는 거의 살수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봤기 때문이다. 대주가 봤을때도 묵향의 실력이라면 그 자신은 정면대결을 안해봐서 잘 모르고 있었 지만 정면공격을 해도 충분히 모두 다 죽이고 탈출할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한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검술이 강하다는 것을 모르던지 아니면 필요 없는 살생을 싫어하는 탓인지 그는 거의 전통적인 살수의 살인기법들을 선택 했고, 언제나 흔적도 없이 빠져나왔다. 아침일찍 일어난 묵향은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 다. '과연 검술의 끝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말하는 검에서 뿜어 나오는 검풍, 검기, 검강이란 것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질까? 현재 검에 공력 을 주입한 상태에서 휘두르면 뒤로 무형의 기운이 뻗쳐 나무 등을 자르는데 이것이 검풍인가? 아니면 검기인가? 그리고 뛰어난 고수는 검기 만으로 100장 밖의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하던데 이것은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 어검술 (御劍術)을 펼치면 검에서 빛이 나와 눈이 멀 지경이라고 들었는데 이것은 어 떤 조화일까? .......' 묵향이 이렇게 검술에 대해 끊임없는 사색을 하게 된 원인은 대주에게 있었 다. 우선 눈에 보이는 목표가 없으니 현재 알고있는 자신의 지식으로 한단계 씩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마교의 무사는 전통적으로 많 은 마공을 익힌다. 한가지 마공을 익히면 또 다른 마공을 익히기 위해서 힘쓴 다. 대부분의 경우 그 마공들은 갈수록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것들이었고, 상당한 내력을 소모시켰지만 마교의 고수들인 경우 정파의 고수들은 꿈도 못 꿀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내공의 증진을 보였기에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 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가 되려면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말이나 구결로서 알려 줄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정파의 경우 내공이 매우 천천 히 쌓이므로 자신의 검술을 익히는 데 한계를 가진다. 어떤 일부 검술들은 내 공이 딸려서 후반부를 익히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고, 그런 와중에서 적 과의 전투를 벌이거나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이 알고있는 것들을 연결하여 더 욱 더 강한 검술의 경지를 이룩하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교의 경우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할 필요도 없이 막강한 내공만으로 도 상대 고수들을 공격할 수 있고, 또 내공이 모자를 경우 마교의 비전(秘傳) 을 이용하여 순간적으로 자신의 공력을 최고 5배 까지도 증폭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그정도로 뿜어내면 목숨이 위태롭기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3배 정도로 만족한다. 3배 정도의 증폭은 공력이 약한 경우 그것이 죽음으로 연결되지만 고수의 경 우에는 일순간 그정도 내공을 뿜어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 때문에 마교의 고수들은 더욱 패도덕인 마공을 원했지만 마공을 익히면서 통 생각할 필요를 못느낀다. 이러다가 가장 윗부분까지 다가가다 보면 벽에 막힌 듯이 더이상의 진보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음을 얻은 소수만이 극마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아수혈교의 출현 장로급 이상들 만이 모인 임시회의에서 때아닌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모두 들 긴장하는 이유는 부교주가 출석했기 때문이다. 부교주는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면 참석하지 않았기에 모두들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먼저 지금까지 행해 졌던 작전들을 적미살소(赤眉殺笑) 혁무상(赫武相)의 설명으로 들은 좌중들은 일시 침묵을 지켰다. 이때 가장 먼저 입을 연것은 교주였다. "이번 작전의 실패는 어디에 원인이 있다고 보시오? 비영대(秘影隊)의 특급요 원이 2명이나 죽었소. 원인을 알아야 그에 대해 대처를 할 게 아니겠소?" "교주님, 이번에 얻은 최신의 정보에 따라 침투한 아수혈교가 대망산(大網山) 에 건설한 분타는 대단히 치밀한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진법과 많은 고수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첩보요원 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교주는 약간 침중한 표정에 빠지며 말했다. 약간씩 흘러나오기 시작한 마기 (魔氣)를 통해 장내의 모든 고수들은 교주의 심기가 별로 편하지 못하다는 것 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교주같은 극마(極魔)의 고수인 경우 평상시에는 마기를 잘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나?" "정탐 등을 위해 키운 특수요원들은 은잠, 공작 등에는 뛰어난 교육을 받았지 만 무공이 약한 것이 흠입니다. 이번에는 3명 정도를 1 조로 만들어 투입할 계획입니다. 침투, 추격에 뛰어난 자 1명과 침투, 진법에 뛰어난 자 1명을 뽑 았는데 나머지 이들을 호위할 만한 뛰어난 실력을 지닌 무사가 없습니다. 물 론 침투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그러자 교주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느닷없이 부교주에게 말문을 돌렸다. "부교주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부교주인 벽안독군(碧眼毒君) 능비계(凌非癸)는 거의 틀에박힌 공식적인 행사 에는 잘 참석하지 않지만 교내에서도 상당한 실력자로 통했다. 그는 교내에서 도 몇명 되지않는 극마(極魔)의 고수였다. 하지만 교주와 다른점이 있다면 숨 통을 조일것 같은 마기(魔氣)를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은잠과 무공이 뛰어나야 한다면 살수가 좋지 않을까요?" 부교주의 말을 받아 수석장로(首席長老)인 천도왕(天刀王) 여지고(黎志高)가 말했다. "특급 살수 1명이나 2명 정도를 투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대호법 흑풍마령(黑風魔靈) 황노각(黃老角)이 말했다. "저는 반대입니다. 살수는 통상적인 기습공격에 능하지만 변칙적인 상대의 공 격에는 취약합니다. 저의 휘하에 있는 호법원의 초절정 고수 2명을 데려가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러자 긴 침묵을 깨고 환영비마(幻影飛魔) 구양운(丘陽雲) 장로가 말했다. "저는 대호법의 의견에 반대입니다. 호법원의 호위무사들의 경우 은잠이나 매 복과는 상관없는 정통적인 상승고수들입니다. 그들이 이번 임무에 적합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호법원의 무사들 보다는 천마혈검대(天魔血劍隊)의 고수 몇 명을 데려가는 편이 좋을겁니다. 이녀석들은 전장(戰場)에서 다져진 몸, 도움 이 될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멸절신장(滅絶神掌) 제갈천(諸葛天) 장로가 말했 다. "그런 살인밖에 모르는 검귀들을 데리고 어떻게 첩보활동을 한다는 말이요? 아예 저의 무영대(無影隊)의 고수 몇명을 보내는 것이 좋을겁니다." 교주가 약간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좋겠군. 원체 암행 감찰을 하는 집단이라 은잠, 침투는 뛰어날것이고 무공도 높으니." 그러자 흑살대(黑殺隊)를 맏고있는 수라혈신(修羅血神) 북궁뇌(北宮雷)가 말 했다. "저희 흑살대의 살수 1명을 천거합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2명은 무영 대의 고수로 하고 살수 1명도 같이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교주가 말했다. "내총관이 추천하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요?" "예, 전에도 말씀드린 묵향이란 녀석입니다. 특급살수는 아니지만 검술이 뛰 어납니다. 오히려 정면대결에 있어서는 특급살수보다 뛰어날 정돕니다. 살수 답게 침투에도 뛰어나지만 대단한 검귀로서 그의 검술실력은 제가 보장하겠습 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비영대의 1급 요원 2명과 무영대의 고수2명, 그리 고 살수 1명으로 하는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모두들 말했다. "그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그러자 교주가 일어서서 나가면서 말했다. "처음 작정한 것 보다는 대부대가 되어 버렸지만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 자들이니까 그들이 그만큼 조심하면서 꾸미는 일이 무엇인지 밝혀보도록 하시 오." 그러자 일제히 일어나서 포권하며 외쳤다. "존명!" 회의가 끝난 다음에 부교주가 대호법에게 물었다. "태상(太上)께서는 요즘 건강이 어떠시요?" 태상이란 은퇴한 전임교주인 독수마제(毒手魔帝) 한석영(韓夕英)을 말하는 것 이다. 교주보다 35세가 많으며 교주의 아버지다. 그는 너무나 손속이 잔인해 서 독수(毒手)라는 칭호가 붙었다. 사마제(四魔帝)의 한사람이며 극마의 고수 다. "아직 정정하십니다." "요즘 통 얼굴을 못보겠으니, 원....... 원로원에도 한번씩 와 주십사 하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자네가 그분에게 좀 더 각별히 신경을 써드리게나." "알겠습니다.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체 세상을 등지신 분 이라...... 요즘은 매화(梅花)를 벗삼아서 지내시죠. 전에도 매화를 끔찍히 좋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부교주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껄껄... 나는 매화를 그렇게 좋아하시는 분이 명호가 독수마제(毒手魔帝)라 니 예나 지금이나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모시는 저희들이야 취미가 그러시니 한결 편하죠. 거의 연공실이 아니면 정 원에서만 지내시니까요." "그분께서도 아직 더 높이 올라갈 경지가 있다는 것인가?" "혹시 압니까? 열심히 노력하면 최초로 탈마의 경지에 오르실지?" "아!.... 옛날이 그립구만, 사마제(四魔帝)가 함께 생활하던 그때가......." "어쩔 수 있습니까? 운명이 그런 것을....... 태상께서도 그때 일에 약간 충 격을 받으신 것 같았었는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장인걸(張仁傑) 그녀석 흑살마장(黑殺魔掌)이 일품 이었는데...." 흑살마제(黑殺魔帝) 장인걸(張仁傑)은 사마제(四魔帝)의 일원으로 부교주 직 에 있다가 그의 추종자를 이끌고 탈교(脫敎)하여 암흑마교를 세웠다. 극마지 체(極魔之體)에서 뿜어 나오는 10성의 흑살마장은 공포의 대명사로 알려져있 다. "그럼 다음에 보기로 하지." 대호법이 정중이 포권하며 말했다. "예. 안녕히 가십시오." 음모(陰謀) 혁무상 장로는 교주에게 불려가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모종의 작전 실패 때문이었다. "도대체 그렇게 많은 정보를 개방이나 무영문에 흘려 보냈는데 왜 감감무소식 이오?" "그게 그러니까...... 아마 무영문의 그 할망구가..... 농간을 부리는 것 같 습니다." "농간이라니?" "지속적으로 개방에는 약간씩 정보를 흘리고 있고..... 무영문에는 운을 띄운 후 감시 중입니다. 그리고 무림맹이나 각 명문정파를 감시한 결과....." "......." "그들이 혈교의 움직임을 눈치챘고, 특히나 무영문의 경우 상당히 깊은 부분 까지 파고 들었음이 확실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무영문이 본교보다 더욱 뛰어 난 정보력을 가지니까요. 우리와 달리 그들은 대부분의 고수들이 모두 다 첩 자 교육을 받으니까 확실히 알것이 분명한데......"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게 반응이 없습니다. 무림맹도 조용하구요. 명문정파들도 조용 합니다. 설마 혈교의 마수(魔手)가 벌써 명문정파를 잡고 있을 가능성은 없는 데 말입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한번 조사해 보게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소림사(小林寺)가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할 수 있으니 그만큼 영향력도 클터, 소림의 속가제자가 세운 문파는 없나? 소림과 밀접한 교류가 있다면 더욱 좋고." "그렇게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황룡문(黃龍門)이 있습니다. 그 문주는 석산(石山) 대사의 속가제자입니다. 지금도 긴밀히 교류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룡문은 어느정도 규모의 문파인가?" "그렇게 큰 규모의 문파는 아닙니다. 하지만 상당한 고수가 10여명 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주인 황룡태검(黃龍太劍) 이문학(李文鶴)도 상당한 고수고요." "그렇다면 황룡파를 통해 아수혈교의 준동을 알게 해주게나. 그러면 자연스레 소림까지 흘러들지 않을까?" "그것이 좋겠습니다. 참, 언듯 떠오르는 계책이 있는데 이것은 어떨지?" "말해보라." 그 말에 혁무상 장로는 전음으로 교주의 질문에 답했다. "............." "그것 참 괜찮은 수법이군. 당장 시행하도록!" "그런데 도와주셔야 할게 있습니다." "뭔가?" "................................" "그건 본좌가 부교주에게 부탁하지. 그리고 소품은 내일 천마보고(天魔寶庫) 에 일러둘테니 찾아가도록." "존명. 그리고 죄송하지만 아직 말씀드릴 기회가 없어서.... 전번의 침투작전 은 성공했습니다." "호오.... 그래? 어떻게 되었나?" 그 말에 혁무상 장로는 전음으로 교주의 질문에 답했다. "....................." "뭐야? 5,000구나?" "....................." "새롭다니?" "................" "실종된 고수?....." "......................" "이건 나 혼자서 독단으로 처리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 서열 9위까지 암흑소 실(暗黑小室)에 집합시키시오. 비밀회의를 해야겠소." "존명" * * * 실내에는 9명의 숨막히는 마기를 뿜어내는 고수들이 원탁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혁무상 장로의 보고내용을 간략하게 들은 후 입을 열었 다. 처음 입을 연것은 수석장로 여지고였다. "상대가 그정도로 사악한 방법으로 힘을 모으려 하다니...... 좀 의외로군요. 분명히 강시 5,000구가 맞소?" 그 말에 혁무상 장로가 답했다. "예. 하지만 더욱 위험한 것은 떠중이 강시들이 아니라 200구가 제작중인 신 형 강시들입니다. 그들의 능력은 아직 미지수입니다. 아마 예상컨데 그것들은 종래의 강시들 보다 최소한 3배 이상의 힘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는 강시만을 제작중인거요?" "그런것 같습니다. 적의 방비가 단단해서 자세한 것은 알아내기 힘들었습니 다. 대량의 여자들을 잡아들이는 것도 포착했는데 그 여자들을 강시에 쓸건지 아니면 흡정대법(吸精大法)에 쓸건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후자가 맞다면 일 부 고수들도 그곳에서 양성한다고 봐야겠지요." "교주님. 지금 고수들을 모아서 선제공격을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상당한 모험입니다. 3할 정도의 강시는 이미 완성되어 실전에 투입될 날을 기다리는 모양인데 지금 처들어갔다가 그들과의 전면전쟁이 되면 그 피해 는....." "저도 동감입니다. 저들이 강시를 제조하는 곳이 그곳 한곳 뿐이라면 문제는 다르지만 또 다른곳에도 있다면 그 선제공격은 큰 가치가 없지요." "그렇다면 혁 장로는 어쩌자는 말이요?" "저도 그것을 궁리중인데..... 그 무영문(無影門)의 옥화무제(玉花武帝)가 있 잖습니까? 그러니까 옥화무제에게 마교라는 것을 숨기고 적당히 둘러대어 그 곳에서 어떤 인물 등을 찾아달라고 하는 겁니다. 참, 첩자가 봤을때 그.. 혈 수마인(血手魔印) 공손(孔孫)을 그 강시 중에서 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 망산 부근에서 그를 한번 봤었는데 좀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그러자 좌중은 모두들 약간씩 고개를 끄덕여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면 무영문의 첩자들이 혈교의 계획을 알게 될것이고... 시일이 촉박하다 보니 우리들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보다는 먼저 정파에서 치겠죠." "음..... 그 계획이 참 묘(妙)하군요. 교주님! 그 계책을 사용하는게 어떻겠 습니까?" 그러자 교주는 말했다. "만약 안걸려 들수도 있소. 전번에도 할망구와 개방을 이용해서 아수혈교의 준동을 슬며시 흘렸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 아니오?" "그건 아마 아직도 아수혈교 총단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듣고 침중한 표정으로 부교주가 말했다. "그래도 약간이라도 아수혈교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다면 명문정파들의 움직 임이 약간 이상할텐데 도대체가 기척이라곤 없으니........" "그래서 제2단계 작업도 추진중입니다. 걱정 마시기를.." 차석장로 사혈천신(蛇血天神) 호계악(胡戒惡)이 궁금함을 나타내며 말했다. "2단계라.... 그건 뭐요?" "그건 극비라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에 알려 드리 겠습니다." 이때 갑자기 대호법 황노각이 분통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런데 10만 사파 연합의 맹주인 마교에서 그따위 아수혈교의 총단위치를 알 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의 질책에 혁무상 장로가 급히 말했다. "저도 열심히 알아보고 있으나... 분타주 이상급들만 알고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분타주 한명을 잡아다가 족쳐보면 알 것 아니오?" "괜히 그러면 타초경사(打草警巳;풀을 때려서 뱀을 놀라게 한다.)의 우(愚)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대호법은 입을 다물었으나 거의 입을 열지 않는 부교주가 말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인 감시는 해야 합니다. 삼비대(三秘隊)의 인원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교주님, 추가로 인원을 더 보충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자 혁무상 장로가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혈화궁(血花宮)과 연계하여 첩보를 하고 있습니 다." 신중한 표정으로 수석장로인 여지고가 말했다. "흐음.... 혈화궁까지! 하지만 혈화궁은 원체 그런 단체다 보니, 정보가 역으 로 셀 우려도 있는데, 그에 대한 대비책은 있나?" "그에 대해서는 혈화궁의 일부 요인들만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한 주의는 충분히 하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이까지 말이 나왔을때 교주가 말했다. "제군들이 언제나 명심할 일은 전처럼 정파에서는 아수혈교와 본교(本敎)가 정면충돌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자식들 손안대고 코풀 작정이겠지... 수하들을 엄중히 단속하여 될수 있으면 아수혈교를 자극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라." "존명!" 내총관인 수라혈신(修羅血神) 북궁뇌(北宮雷)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현재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지위가 낮았기에 신중한 태도였다. "그런데 아수혈교가 먼저 선제공격을 가해올때는 어떻게 합니까? 전번의 전투 도 그쪽에서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닙니까?" 교주가 조용히 그의 질문에 답했다. "그에대한 공작은 하고있으니 염려말라!" ............. 기연(奇緣) 노상(路上)을 한 젊은이가 걷고 있다. 그의 등에 찬 검으로 보아 무림인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둑 솟은 태양혈과 눈에 감도는 정기(精氣)를 통해 상당한 수련을 거친 고수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시원스레 솟은 콧날과 맑은 눈을 가진 잘 생긴 용모의 젊은이다. 아마 20대 중반쯤 되었으리 라...... 그는 천천히 길을 내려가 마을로 들어섰다. 그가 처음으로 찾은 곳은 작은 식 당이었다. 그가 들어오자 점소이가 환대를 한다. "어서오십시오." "만두 한접시하고, 술, 그리고 오리탕을 주게나." "예!" 그는 천천히 식당안을 둘러보았지만 눈에띄는 특이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무림인들이 많다고 하지만 중원천지에 특별한 어떤 사건이 없고서는 나돌아 다닐때 거의 무림인들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그는 명문까지는 안되지만 그래 도 꽤 정파에서는 알아주는 문파의 수제자이며, 사부의 딸인 미영(美影) 소저 와 장래를 약속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다. '전번 여행에서는 청수(淸修)를 데려와서 별로 심심하지 않았었는데 역시 혼 자 하는 여행은 너무 쓸쓸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옆 자리에 앉은 3명의 중 년 남자들이 주고받는 말이 들려왔다. "이번에 주서방집 딸이 없어졌다지?" "글쎄 말일세. 그 아이까지 합하면 이 근방에서 사라진 처녀가 8명이야. 도대 체 어떤 색마(色魔)가 날뛰는지...." "관부에서도 조사중인데 속수무책(束手無策)이라던데, 글쎄 증거조차 잡지 못 했다는 거야." "처녀들의 시신(屍身)이 발견되지 않는걸로 보면 야산에 묻었던지, 아니면 인 신매매단이 아닐까?" 그러자 앞의 사내는 벌컥 술을 비우며 말ㅎ다. "커... 글쎄말일쎄.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정말 살기가 각박해지는구먼." "제기랄! 진평(陳平)쪽에는 그래도 정도의 큰 문파가 자리잡고 있어 이런일이 들하다던데.... 도대체 관부 녀석들은 뭐하는건지....." "쉿! 이사람아 딴사람이 듣겠어. 잘못하면 잡혀가서 치도곤을 당한다고.." "에이 시팔.... 자 술이나 드세..." "자네. 대낮부터 술이 과한거 하닌가?" "이런 빌어먹을 세상, 술이나 좀 들어가야 제대로 보이지." "껄껄, 그도 그렇군." 그는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다가 음식이 나오자 천천히 먹기 시작했 다. '음, 이 근방에 인신매매단이 있는 모양이군. 어제 없어졌다는 걸 보면 좀 조 사를 해보면 운이 좋으면 잡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사부님 의 편지를 빨리 전달해야 하니 오랫동안 시간을 끌수도 없고.... 어떻게 한 다? 그래도 이삼일의 여유는 있으니 그동안 약간이라도 조사를 해보고 그동안 알아낸 것이 있으면 관부(官部)에 알려주고 떠나면 그들에게도 좋겠지..' 일단 마음을 잡자 그는 일어서서 옆의 장한들에게 다가가 포권을 하며 물었 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근처를 지나던 사람인데, 형장들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 다. 죄송하지만 이 근처에 색마가 날뛰는 모양인데 약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 까해서..." "젊은이, 뜻은 고맙지만 한두명이 아니라면 젊은이 혼자 객사(客死) 할수도 있으니 그냥 가시는게 좋을거요." "저도 꽤 알려진 문파의 제자, 산적쯤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 니다." "그렇다면 말인데..... 저쪽으로 가면 대홍산이 있소. 그곳에 김서방이 나무 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지. 관에서도 조사를 했었는데 알아내지 못했소. 만약 조사를 한다면 먼저 그쪽을 조사하는 것이 좋을 거요." "고맙습니다." "여보시오. 주인장! 말린 고기 5근하고 술 2병을 주시오." "여기있습니다. 모두 15냥(兩)입니다." "여기있네."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대홍산으로 향했다. 대홍산은 산세가 가파르고 수풀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큰 산이었다. 그는 술과 말린 고기를 먹으며 산을 하루 종일 뒤졌다. 하 지만 아무런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오기를 가지고 계속 뒤져 나갔 다. 대홍산 중턱 부분에서 많은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뒤지다 보니 처음엔 몰랐는데 약간느낌이 이상했다. 방금 본 경치가 다시 나타나는 것 같은 느낌 이 들었던 것이다. '이상한데...? 혹시나 모르니 다시 한번 더 해보자.' 역시나 느낌대로 한참을 걸어가니 제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자신이 처음 출발 하면서 나뭇가지로 땅에 써놓은 글자들이 증명하고 있었다. '역시! 제자리야. 한번 실험을 해보자.' 그 글자를 중심으로 나뭇가지로 한번씩 가본 방향을 표시하며 한참을 왔다갔 다 하면서 알아낸 사실은 꼭 북쪽으로만 가면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앞에 진법이 있다.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지? 지금까지의 형태로 보 아 사람을 살상하기 위해 만든 진법이 아니라 이목을 속이기 위한 진법이야.' 그는 천천히 진법을 연구했다. 사부와 사모에게 진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렇 게 높은 진법에 대한 지식은 없었는지라 그는 진법을 깨는데 엄청난 시간을 투입했지만 역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법을 좀 더 자세히 배워두는건데..... 휴우.... 지금 후 회하면 뭐하나? 일단 해가 지고 있으니 어디 잠자리를 찾아서 쉬고 내일 아침 에 다시 시작하자.' 다음날 아침 그는 검(劍)으로 나무 막대기를 많이 만들었다. 길이는 젓가락 2 개 길이로 한 다음 그것을 앞에 놓고 안발작 앞으로 걸어간 다음 다시 젓가락 을 놓고 한발작 앞으로.... 한참을 가다보니 다시 제자리. 그 자리에 서서 앞 을 바라보니 젓가락이 약간씩 왼쪽으로 꺽이면서 빙 둘러서 이쪽 방향으로 다 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좋아! 7번째 막대기부터 옆으로 휘어져 있군. 그럼 7번째에서부터 약간씩 오 른쪽으로 돌리자.' 다시 시도를 한다음 제자리에 서서 그는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보고, 또 시도 를 했다. 10번째 시도가 끝나자 그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이 진법이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냥 사람의 이목을 속여 안으로 들어오지만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다행이야. 응 그런데.... 저게 뭐지?' 그는 나무 밑에 아주 자그만하게 만들어 놓은 초가집으로 다가갔다. 초가집은 아주 낡은 나무로 된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집인 것 같았으며 대강 손으로 만들어 놓아 안에는 서너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것이 한두 사람이 단시간 내에 대강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혹시 녀석들이 이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검을 천천히 뽑아 꽉 쥐고 기척을 죽이며 다가갔다. 초가집의 앞부분을 발로 부수고 검을 들이밀고 보니 안에는 한 중년인이 좌정하고 있었다. "쿨룩! 가까이 오지말게! 나는 독에 당했어." 그 말을 듣고 혁련운은 걸음을 멈췄다. 중년인은 혁련운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힘이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누구인가?" "저는 혁련운(赫蓮運)이라 합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자네에게서 뿜어지는 정기로 보아하니 정파의 인물이군. 쿨룩!" "그렇습니다." "나는 능비영이란 사람. 아수혈교(阿修血敎)의 뒤를 쫓다 이렇게 되었지." 혁련운은 그 중년인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능비영 선배님이시군요. 아수혈교? 저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쿨럭! 나는 거의 밖으로 활동을 안해서 거의 아는 사람이 없지. 자네는 혈교 라고 들어봤나?" "예. 사부님께 들었습니다. 대단히 사악한 단체였다고 하더군요. 마교에게 멸 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으윽!" 그러면서 능비영은 시커먼 피를 한웅큼 밖으로 토해냈다. "이제 좀 편하군. 보시다시피 완전히 박살났어. 전신 혈맥이 부숴지고 뼛속까 지 독기(毒氣)가 침투해서 오래 살 수 없다네. 참 그 혈교의 후신이 아수혈교 지." "그럴수가!" "그들의 사악함은 정말 대단하지. 부녀자들을 납치하는 것도 그들이네. 강시 를 만들기 위해서지." "강시라구요?" "왠만한 고수는 죽일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이 강시지. 그들은 새로운 전 보다 더 강한 강시를 200구나 만들고 있어. 쿨룩! 보통의 강시만도 5,000구나 만들고 있다네. 지금 3할 정도가 완성되었다. 빨리 전해서 그 수가 더 늘어나 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해." "강시가 만들어지는 곳은 어딥니까?" "대망산일세. 우리는 그곳에서 놈들에게 들켜서 이곳까지 그들과 싸우면서 도 망쳤네.... 자네를 만난것도 하늘의 도움인 것 같군. 모두들 죽고 나까지 이 모양이 되었으니 소식을 전하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정말 운이 좋군. 쿨 럭, 쿨럭 우욱" "괜찮으십니까? 선배!" "별로 괜찮지 않다네. 거의 오장 육부까지 독기가 침투했어. 내가 죽으면 나 무를 줏어다가 태워주게나. 내 몸을 만지는 것도 위험하네.... 쿨룩.... 사망 시독(死亡屍毒)만 아니었어도 이꼴은 안됐을 텐데...... 쿨룩, 쿨룩" "선배님,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십시오." "말도 안되는 말은 하지말게.... 빨리 말을 전해야지. 나에게 남은 시간이 별 로 없다네.... 내 무공이 내 대에서 끊어지는 것이 원통하구만.... 쿨룩! 이 것도 인연인데 자네, 내 부탁 좀 들어주겠나?" "말씀하십시오." "자 이것이 내가 익혔던 비급이네. 이걸 혼자 익히기는 어렵겠지만 자네가 익 히고 비급과 내 소식을 전해주게." "누구에게 전하면 됩니까?" "장안(長安)에 천안루(天安樓)라는 객점이 있네. 그곳 객점 2층의 오른쪽 첫 번째 방에 투숙한 후 종이에 問(문)이라는 글자를 써서 창문에 밖에서 보이게 달아두게. 그러면 이틀 안으로 사람이 와서 만날 수 있을거야. 그에게 비급과 내 소식을 전해주면 돼." "알겠습니다." "꼭 전해줘야 하네." "예." "고맙네......" 그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는 죽었다. 혁련운은 그의 부탁대로 검으로 부근의 소나무를 잘라 오두막에 던져 넣은 후 불을 질렀다. 그는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길을 떠났다. 진법 안에서 밖으로 나올때도 소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따라 나오니 간단히 끝났다. 그는 사부의 편지를 전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태산파(泰山派)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날 여관에 묵은 후 그는 경황중이라 그냥 품속에 갈무리 한 비급 을 꺼내 들었다. 겉표지에는 '청월검법(靑月劍法)'이라 씌워져 있었다. 그 안 을 본 그는 깜짝 놀랐다. 이것은 대단한 경지의 상승무공(上昇武功)이었다. 그는 우선 이 비급을 약속대로 돌려줘야 했기에 비급을 이해하기 보다는 외우 기에 전념했다. 그는 사부의 편지를 태산파의 장문인에게 전한 후 그 답장을 받아들고 물었 다. "죄송하지만 한가지 약속이 있어서 그러는데, 이 답장은 사부님께 빨리 전해 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화급한 전갈은 아니네. 아마 자네 볼일을 보고 전해도 상관없을 거 야. 어떤 볼일인데 그러나?" "이번에 이곳으로 오면서 희한한 일을 당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는 태산의 장문인에게 무공비급을 전한 것을 제외하고 모든 사실을 말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군. 자네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되네." "하지만 저는 그분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하기야. 자네가 설명한 그정도의 고수를 기른 단체라면..... 그들도 알아야 하지. 그런데 그는 정파의 인물이었나?" "혹시 장문인께서는 청월검법이라는 무공을 아시는지요?" "청월검법이라고? 청월검법은 대단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무공이지. 그 검법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는 그 패도적인 위력 때문에 익히는 것을 금지하기 까지 했었지만 마교와의 다툼이 시작되면서 그 금제는 사라졌지." "정파의 무공입니까?" "음... 청성파(靑城派)가 자랑하는 검법이지. 장문인 외에는 익히는 것이 금 지된 무공이었지. 하지만 중간에 절전된데다 비급마저 사라졌어. 그런데 그가 설마 청월검법을 사용했다는 것인가?" "예. 그의 독문무공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시독(死亡屍毒)만 아니었다면 당하 지 않았을 거라고 했습니다." "사망시독! 이것은 혈교(血敎)가 자랑하는 극독이지. 혈교가 자랑하던 사악한 무공인 수라혈시마공(修羅血屍魔功)에 맞으면 사망시독에 중독된다고 알려져 있네. 진정 혈교의 준동이 맞는 모양이군." "그런데, 그의 시체는 묻었는가?" "아닙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독이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태웠 습니다." "자네... 혹시 그의 품속을 뒤져봤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 독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가까이 오지 말라 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멀직이 떨어져서 대화만 나눴죠. 대화 중에도 기침과 함께 독혈(毒血)을 토했습니다." "휴우... 아까운 일이군. 어쩌면 자네의 무욕(無慾)으로 인해 귀중한 비급이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아닐쎄. 이만 가보게나." "안녕히 계십시오." 그는 태산파(泰山派)를 떠나 장안으로 향했다. 넓은 장안에서 천안루를 찾기 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장안에서도 이름난 대규모 음식점이었던 것이다. 그는 천안루에서 음식을 먹고 오른쪽 첫번째 방에 든 다음에 問(문)이라는 글 씨를 적어 창문에 걸어뒀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아무도 그를 찾아오는 사 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3일이 지난 후 그는 사부님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길을 나섰 다. 길을 가면서 혹시나 누가 따라오지 않을까 생각되어 주변을 살폈지만 아 무런 이상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저녘 마을에 들러 식사를 마치고 객점 에 들었다. 그는 또다시 비급을 오랜시간 들여다 보다가 잠이 들었다. 이제 모든 내용을 외웠지만 극성을 익히면 반월형의 푸른색 검강이 초식을 따라 뻗 어 나가 상대를 공격하며 무적의 위력을 자랑한다고 써져있는 이 비급을 혹시 나 한자라도 틀리게 외웠을지 걱정되어 밤마다 보고 또 보고 있었다. 한참 잠이 들었다가 목에 싸늘한 감촉을 느끼고 잠이 깼다. 그는 곧이어 이 감촉이 잘 드는 검날의 감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채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너는 누구지?" 비로소 눈을 뜨고 보니 한명의 복면을 한 괴한 검을 자신의 목에 겨눈채 서 있었다. 그는 상당히 작은 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굵직하면서도 힘이 있었으 며 싸늘했다. "본인은 혁련운이라는 사람이오." "청운신검(靑雲神劍)은 어떻게 되었나?" "청운신검이라뇨?" "청운신검 능비영을 모른다는 말인가?" "아! 혹시 능비영 선배를 만나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그렇다." "제 품속에 비급이 한권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마지막 남긴 말씀도 있구 요." 그 괴한은 혁련운의 품속에서 비급을 더듬어서 가져간 후 칼을 겨눈채 약간 떨어졌다. 그걸 본 혁련운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때 있었던 모든 일들을 차근차근 말했다.그의 말을 모두 다 들은 후 괴인은 말했다. "청운신검 같은 고수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놀랍군. 자네는 초막에서 청 운신검 한사람만을 봤나?" "예." "우리는 아수혈교가 하는 일을 정탐하기 위해 특급 고수 5명을 투입했는데 그 중 혼자만이 그것도 대리인을 통해 소식을 듣게 되는군. 자네에게 칼을 들이 대서 미안하이. 다음에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번에 있었던 일은 다른사람에게 말하지 않는게 자네 신상에 좋을거야. 목숨은 하나 뿐인 것이니까." 그 말과 동시에 괴인은 사라져버렸다. "후우... " 괴인이 사라지자 혁련운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생각에 잠겼다. '정말 대단한 고수로군. 거의 사부님과 같은, 아니 더 무서운 고수다. 빨리 이 일을 사부님에게 알려야 겠다. 나에게 이런 기연(奇緣)이 있을 줄이야. 이 번에 얻은 청월검법만 빨리 완성하면 나도 절정고수의 자리에 올라 설 수 있 어. 하지만 청월검법을 완성하려면 내공이 있어야 하는데..... 할 수 없지 그 건 세월이 해결해 주겠지.' * * * 혁련운이 사문에 도착하자마자 사부로 부터 불호령을 들었다. "너는 심부름을 시킨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서야 나타나느냐? 이번 심부름은 중요한 것이기에 너를 보냈는데 대제자라는 녀석이 이모양이라니..... 쯧 쯧...."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운이 나름대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사부님, 사모님, 이번 일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여기 태산파 장문인의 편지 입니다. 그리고 두분에게만 비밀히 아뢸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안되겠느냐?" "죄송합니다." "그럼, 내실로 들어가자." "예." 내실에 들어가자 혁련운은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이상한 일을 겪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혁련운의 말이 끝날때까지 침중한 표정으로 듣고있던 사부가 말했다. "정말 놀라운 기연이구나. 혈수마교에 대한 정보는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청 월검법까지 얻다니. 그 비급은 돌려줬겠지만 내용은 외웠느냐?" "예. 능비영 선배가 내용은 봐도 좋다고 허락하셨기에." "잘되었다. 우리 문파는 그 무공으로 더욱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여보, 나는 소림사에 잠시 다녀올테니 그동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경계를 철저히 하 시오." "예." "그리고 영아." "예. 사부님" "너는 내가 돌아올때까지 청월검법을 소상하게 기록해 둬라. 청성파(靑城派) 의 실전된 비급이니, 우리가 익힌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그럼 다녀오겠소." "안녕히 다녀 오십시오." * * * 이문학은 소림사에 도착했다. 그를 보자 정문 앞 마당을 쓸고있던 스님이 그 를 반겼다. "어서오십시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나야 편안하네. 자네는 어떤가?" "예. 석산 스님께 연락을 드릴까요?" "아닐쎄. 수도하는 도중만 아니면 내가 그냥 가지." "그럼 저와 함께 가시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한참을 걸어간 후 어떤 방 앞에 서서 말했다. "석산 스님, 황룡파 장문인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기쁨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라 해라." "예.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사부님" "오랜만이구나." "긴히 드릴 의논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 일인데 그러나?" "다름이 아니옵고.........." "나 혼자서 알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구나. 이건 방장 스님과 의논을 해봐야 결론이 나겠어. 따라오너라." "예." * * * "수고스럽겠지만, 아까 내게 했던 말을 다시 해 주게." "예" ............................. 설명을 듣고나서 방장인 공지대사(空知大使)는 놀라움을 나타내며 말했다. "아미타불.... 이건 놀라운 소식이군요. 이 장문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우리는 벌써 아수혈교의 준동 상태를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10년 전부터요?" "그렇소. 하지만 그들에게 손을 쓰지 않은 이유가 그들의 총타의 위치를 알아 낼 수 없었기 때무이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분명히 3할이라고 하 셨지요?" "예. 강시는 3할 정도 완성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1,500구 정도가 만들어 졌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수는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새로운 강시라고 봐야 할 것입니 다. 그의 말에 따르면 최소한 보통 강시의 3배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 고 했습니다." 그러자 공지대사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이건 노납이 혼자서 처리할 수 없고, 무림맹을 소집하여 각 문파 의 장문인들과 의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그때 그들을 치게 된다면 장문께서도 좀 도와주십시오." "미진한 힘이지만 손이 되는만큼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하오. 그런데 언제나 기연이라면 이것이 우연일 수도 있지만, 기연을 가 장한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예?" "능비영이라는 인물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강시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곳 이라면 대비 또한 만만치 않을터! 그곳을 상대에게 들켰는데도 어떻게 빠져나 왔는지 이상하지 않소? 보통의 고수로는 힘들기 때문이오." 그 말이 공지대사(空知大使)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황룡문주는 갑자기 말문을 닫았다. 그동안 고뇌하는 흔적이 역력했으므로 두 노승은 그가 생각을 정리하 고 말문을 열기를 끈기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마침 내 그는 말문을 열었다. "한가지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자 공지대사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해 보십시오." "대사께서는 청월검법이란 것을 알고 계신지요?" 공지대사는 가벼운 놀람을 나타내며 말했다. "청월검법! 그것은 청성파의 진산지보인데,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놀랍게도 그는 청월검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험... 청월검법을 익힌 고수라면 그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 하지는 않았겠지요." "예. 저의 제자의 말로는 그는 마지막에 이런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망시독 (死亡屍毒)만 아니었어도 이꼴은 안됐을 텐데' 하는 말입니다. 그의 동지 4명 도 사망시독에 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석산대사가 가벼운 놀람을 나타냈다. "사망시독?" "예, 사부님. 저주받은 마공인 수라혈시마공(修羅血屍魔功)의 부산물 말입니 다. 저의 제자와 얘기를 나무면서 끊임없이 독혈을 토해내더니 나중에 자신의 친구에게 자신과 동지들의 소식을 전해주길 부탁하면서 같이 부탁한 것이 청 월검법이었습니다." 공지대사는 궁금함을 나타내며 물었다. "그래서 비급은 황룡파에 있소이까?" "아닙니다. 그의 친구에게 전해줬습니다. 대신에 그가 보는 것은 허락했으므 로 제자가 그 비급을 완전히 외웠습니다. 제가 이리 오기전에 제자보고 기억 나는 것을 모두 써놓으라고 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청성파에서 알면 그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저도 그점이 걱정이라 망설였던 겁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공지대사가 제안했다. "시주께서는 사본을 하나 더 만들어 청성파에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옆에서 듣고있던 석산대사가 동의했다. "방장스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청성파에도 한부를 준다면 그들도 별로 시비를 걸지 않을겁니다." "저도 그점도 생각해보지 않은것은 아니나, 원체 이름높은 비급이다 보니 욕 심이 앞서서...... 죄송합니다. 사부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장문인께서 중제를 좀 잘 해 주십시오." "이르다 뿐이겠소? 청성파도 완전히 잃었다고 생각했던 비급이 힘안들이고 돌 아오는 것이니 그들도 찬성해줄 겁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그리고 거기에 밟히는 기는 놈 여기는 무림맹, 무림맹이라고 해봐야 그렇게 대단한 크기의 문파는 아니다. 무림맹의 맹주가 1명 있고, 무림맹 내에 각 명문대파(名門大派)의 지부와 각 지부에 고수들이 파견나와 있는 정도의 형식적인 문파다. 그리고 무림맹의 맹 주는 10년의 임기를 가지며 연임이 가능했다. 맹주로 취임한 명문대파의 제자 는 그의 일가(一家) 고수들을 이용해 무림을 이끌어 간다. 하지만 맹주라고 해봐야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림맹 맹주 단독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하면 1개 문파 정도의 숫자도 동원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 다. 무림맹이 만들어진 궁극적인 취지는 사파(邪派)의 발호를 정파의 힘을 모아 막자는 의도였으므로 한 인물에게 대량의 권력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잘못되어 한사람에게만 모든 힘을 집중한다면 오히려 더 안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림맹의 소회의실. 회의실의 문 위에는 청룡실(靑龍室)이라는 간판이 걸려있 다. 대단히 기밀을 요구하는 회의만 이곳에서 소집되며 대규모 집회는 백호실 (白虎室)에서 열린다. 이곳에는 사각진 넓은 탁자를 기준으로 맹주와 함께 구 파일방의 장문인과 오대세가의 장문인, 그리고 요즘 대단한 세력을 떨치고 있 는 신진 5개 문파의 장문인들이 모여 있었다. 현 정파무림의 태두(泰斗)들이 모인 자리였지만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들의 나이를 거의 20대 후반에서 30 대 후반 정도로 봤을 정도로 모두 다 젊게 보였다. 모두들 엄청난 내공의 소 유자임을 그 용모를 통해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석산대사의 보고를 신중히 청취(聽取)한 다음 모두들 생각에 잠겼다. 이때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연것은 현 무림맹 맹주인 무극검황(無極劍皇) 옥청 학(玉靑鶴)이었다. "아수혈교가 날뛰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들이 그토록 대규모로 전력(戰力) 을 키우고 있는 줄은 소림 장문께서 말씀해 주셔서 처음 알았소.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소?" 패도적인 기상으로 유명한 제갈세가(諸葛世家)의 가주(家主)인 패검천령(覇劍 天嶺) 제갈기(諸葛忌)가 말했다. "기습공격을 하여 적을 먼저 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공지대사(空知大使)가 말했다. "아미타불. 아무리 기습공격이라 해도 엄청난 방비를 하고 있는 적진에, 그것 도 1,500여구의 강시가 있으니 대단한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이외다." 그러자 두개로 나뉜 개방( 幇)을 대표해 참석한 북개방(北 幇)의 만통신개 공수걸(孔收乞) 장문인이 동의를 표했다. "맞습니다. 전번에 혈교와의 정면대결에서 그 강력한 마교조차도 세력의 4할 을 상실했었습니다. 마교가 회복하는데 30여년이 넘는 세월이 들었다는 것은 모두 다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점창(點蒼)의 청허자(淸許子)는 딱하하는 듯이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하지만 먼저 선공을 하는 외에 딱히 좋은 방법이 없으니...." 그러자 남궁세가(南宮世家)의 매화검(梅花劍) 이옥연(李玉然)이 말했다. 그녀 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어린 가주(家主)와 남궁세가를 이끌고있는 강인한고 교활한 여자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마교를 이용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들에게 슬며시 정보를 흘리는 겁니다. 그러면 해묵은 감정도 있으니 전처럼 아수혈교와 사생결단(死 生決斷)을 하겠죠." 그러자 무영문(無影門)의 옥화무제(玉花武帝) 매향옥(梅香玉)이 반론을 제기 했다. "그것은 힘들어요. 우선은 시간이 없는데다 마교도 전에 뜨거운 맛을 봤기에 강시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요. 그리고 마교는 핵심고 수들이 모두 총단 안에만 거주하기 때문에 정보공작을 하기가 대단히 힘들어 요." 그러자 개방의 만통신개 공수걸(孔收乞) 장문인이 동의를 표했다. 매향옥은 20대 정도의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할머니(?)였지만 모두들 뒤에서 구미호(九 尾狐)라고 쑤근거릴 정도로 속을 알 수 없는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모두들 그 녀의 말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맞습니다. 십만대산은 요새중의 요새, 마교로서도 참고 기다리면 무림맹과 아수혈교가 먼저 붙을게 뻔한데 피해를 각오하고 아수혈교의 콧털을 뽑을 이 유가 없죠."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맹주가 매향옥에게 물었다. "그런데.... 전에 말했던 공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수혈교가 마교를 먼저 공격할까요? 사파의 통일은 상당히 먹음직한 먹이일텐데....." "그것이.....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교가 역공작을 하고 있 는 것 같습니다." "역공작이라뇨?" "현재 각 명문대파의 전력(戰力)에 대한 정보가 아수혈교 쪽으로 넘어가고 있 어요. 그것도 대단히 상세하게....."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이오? 마교는 예전부터 힘만을 존중해온 단체! 잘 못 안것이 아니오?" "아닙니다. 전에 혈교와의 충돌을 통해 그들도 깨달은 것이 있는지 정보망을 대폭적으로 확충해서 지금은 거의 본 무영문(無影門)과 막상막하(莫上莫下)에 이르러 있습니다. 과소평가할 자들이 아닙니다." 맹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그렇다면 마교와 아수혈교를 충돌시키는 것은 힘들겠군." 청성(靑城)의 옥양자(玉陽子) 장문인이 맥빠진 어조로 말했다. "무량수불... 참으로 난감한 일이외다." 무당(武當)의 장노백(張盧栢) 장문인이 큰일이라는 듯이 쏟아부었다. "정말 큰일입니다. 아수혈교와 붙으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마교만큼이나 큰 힘을 지닌 단체가 본맹을 제외하고 어디 있어야지 말이죠." 그러자 제갈기(諸葛忌) 가주가 동의했다. "맞소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붙으면 마교의 세력은 누가 견제합니까?" 그때 갑자기 매화검(梅花劍) 이옥연(李玉然) 가주(家主)가 갑자기 생각난 듯 외쳤다. "맞아요!그만한 힘을 가진 단체가 하나 더 있어요." 그 말에 공지대사는 궁금함을 나타내며 물었다. "아미타불.. 도대체 어디입니까?" "황궁! 황궁이에요." 하지만 그녀의 말에 점창(點蒼)의 청허자(淸許子)는 강한 회의를 나타내며 말 했다. "무량수불.. 시주의 말은 약간 모순이 있소이다. 황궁은 무림의 일에 여태까 지 관여하지 않았소이다." 그런데 정보통인 옥화무제(玉花武帝) 매향옥(梅香玉) 방주가 매화검 남궁옥연 의 말에 약간 음흉한 미소를 띄며 조심스런 찬성을 나타냈다. "매화검 장문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요즘들어 황궁에서 황궁무고의 무학 을 미끼로 대대적으로 무림인사들을 포섭하고 있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犬)도 다 아는 사실! 하지만 황궁은 아직까지 정보망이 별볼일 없는 미련한 존재들 이니 이용을 하는 것도 쉬울것 같아요." "시주는 어째서 황궁이 정보에 약하다 하시오? 시주도 알다시피 황궁은 금의 위와 같은 정보에 능한 단체들이 있지않소?" "호호...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반역도나 황권 수호를 위해 존재하는 단체! 무림의 일에는 어두울 수 밖에 없어요. 그들이 무림인들로 찬황흑풍단(贊皇黑 風團)을 만들어 어디에 사용하고 있나요? 해봐야 겨우 새외의 떨거지들 청소 에 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걸 증명하고 있잖아요?" 매향옥의 말에 말에 맹주도 찬성했다. "확실히 찬황흑풍단은 그 지닌바 힘에 대해 너무 시시한 일을 하는 것은 사실 이요.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이용한다는 말이오?" "황궁은 무림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지만 황권의 보호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 지 않죠. 황궁에 약간의 뇌물을 써서 동조자를 만든 다음에 '아수혈교가 황실 을 넘보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그와함께 '그 증거로 10만 황군을 괴멸시 키고 수도를 함락하기 위해 강시 5,000구를 대망산에서 제조중이다.'하는 정 보를 흘리는 거에요." 제갈기가 감탄하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며, 약간 우려하는 점을 말 했다. "그것 참 괜찮은 생각이오. 그러면 아마 황궁에서는 찬황흑풍단을 투입하여 그들을 괴멸하려 들거요. 하지만 그러면 황실의 피해도 대단할텐데....." "그점은 염려없어요. 그들의 대망산의 방어상황을 자세히 찬황흑풍단에 알려 주면 그들도 그렇게 엄청난 피해를 당하지는 않을거에요." 이제 적당히 의견이 모이자 평소에 가졌던 불만을 토로하며 종리세가(鍾里世 家)의 가주 패도(覇刀) 종리영우(鍾里英宇)가 말했다. "휴우..... 이것으로 사건은 한단락 되었군. 그런데 찬황흑풍단 얘기가 나왔 으니 말인데.... 점점 더 황궁에서 강한 제자들을 보내달라고 재촉을 해대서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오. 고수를 키우는 것은 우리 문파를 위해서지 황궁을 위해서가 아니지 않소?" 제갈기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말했다. 그와 종리영우는 호형호제(呼兄呼弟) 하는 사이로 혼사(婚事)까지 거론되고 있는 절친한 사이었다. "맞습니다. 전에는 2류 제자들을 보내도 만족하더니 요즘은 적전제자들을 보 내달라고 성화를 부려 못살지경입니다." 무당(武當)의 장노백(張盧栢) 장문인이 말했다. "어떻게 하든지 해야지 원...... 맹주께서는 고견이 없으십니까?" "본좌도 어떻게 할 수가 없구려. 날이면 날마다 뛰어난 제자들을 보내달라고 성화라..... 만명이나 모았으면 되었지. 더이상 모아서 뭘하려고 하는건 지...." 맹주가 하소연을 하자 만통신개 공수걸(孔收乞)도 동의를 표했다. "맞습니다. 지금에이르러 찬황흑풍단의 힘만 봐도 거의 마교와 맞먹을 정도 입니다." 그러자 매향옥은 공수걸의 말에 의의를 제기했다. "아니에요. 아직 그정도 까지는 안되요." 그러자 발끈한 공수걸은 매향옥에게 따졌다. 정파의 2대 정보통 중 하나라고 자부하는 북개방의 방주가 공개적인 망신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 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거요?" "아무리 뛰어난 고수들을 받아들였고, 또 황궁무고의 무학을 더 가르켜 막강 한 고수들만을 거느린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마교의 힘에는 못미쳐요." "황궁무고는 500년 이상 황궁의 무사들이 돌아다니며 모아들인 무공비급(武功 備急)들이 모여있는 장소! 그 무공을 익힌다면 범에 날개를 다는 격일텐 데..... 아무리 마교가 강하다 하나 그런 고수가 만명인데 어찌?" "마교는 천년 이상을 수많은 무학들을 발전시켜 왔어요. 요 근래에 비밀리에 입수된 정보로는 거의 1,000명에 가까운 고수가 새로 흡수된 것으로 파악되었 습니다. 이번 고수들은 아마 아수혈교와의 충돌을 대비해 키워진 자들로서 처 음부터 상승무공을 가르킨 인재들인 만큼 지금은 사용되지 않겠지만 그들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10년 정도 후에는 대단한 힘이 될거에요. 마교의 무 공은 우리 명문정파들이 흉내내지도 못할 만큼 속성으로 고수를 키워낼 수 있 어요." "하지만 겨우 1,000명이 더 가세한다 해도 저들을 막아내는데는 역부족이라 생각되오. 거기다 그들은 아직 완성된 고수들이 아니지 않소?" "마교의 진정한 저력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거야 강력한 마공(魔功)을 지닌 2만의 고수에 있는 것이 아니겠소?" "아니에요. 마교의 가장 강력한 저력은 은퇴한 거마(巨魔)들로 이루어진 원로 원에 있어요. 원로원 소속에는 최소한 500명의 전대(前代)의 노마(老魔)들이 있어요. 사실상 그들의 힘은 마교 전체 힘의 3할에 해당해요." 그러자 이들의 말을 한참 듣고있던 무당(武當)의 장노백(張盧栢)이 끼어들었 다. "하지만 원로원의 고수들이 무림을 횡행한 적은 없지않소? 노납도 원로원이라 고는 이번에 처음 들어보니 말이외다." "아니요. 딱 한번 있었어요. 과거 신검대협(神劍大俠) 구휘(區揮) 대협께서는 무림통일(武林統一)을 할 욕심이 없었지만, 그의 아들 구천(區天)대협은 구 휘 대협이 남긴 무학(武學)과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의 힘을 이용해 무림통 일을 위해 혈겁(血劫)을 일으켰었죠. 초반에 그렇게 기세가 높았던 그가 마양 에서 마교에게 대패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때 마교가 천하제일문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원로원의 막강한 고 수들 때문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죠. 실지 원로원을 뺀 상태에서 의 마교의 힘은 천하제일문을 능가할 수 없었어요." "호오.... 그렇다면 마교와 전면 대결을 하려면 숨어있는 3할의 힘을 언제나 생각해야 겠군." "아니오. 그럴 필요까지는 없죠. 그들은 은퇴한 고수들이기에 마교가 멸망할 위험에 처했을때만 나타나요. 그러니 마교가 공격을 해 들어올때는 그들을 볼 염려가 없어요." "그것 참 다행구료." "그 원로원 때문에 마교의 천년역사가 지켜진 것이죠. 어떤 문파라도 그렇게 강대한 힘을 자랑하면서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단체는 마교를 제외하고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수도 있구료." 이들의 말을 한참 듣고있던 맹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잡담은 이만하고, 황궁에 올가미는 매 여협(女俠)께서 해주시겠소?" "그러죠." * * * 마교 교주의 방, 그곳에 지금 3명의 인물이 차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고 있 었다. 찻잔이 놓인 식탁 위에는 낡은 책자가 1권 얹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간단한 다과가 올려져 있었다. 교주는 부교주에게 말문을 열었다. "이번 일은 수고했네." "뭘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부교주님의 연기 실력이 대단하셨습니다. 부교주님께서 무림에 들어 오신 것은 뛰어난 연극인이 한명 중원에서 사라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죠." "껄껄... 무슨, 교주님 앞에서 과찬을..... 그녀석 비급을 보고 좋아하는 꼴 이라니.... 표정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 눈빛은..... 킬킬.... 그리고 두 번째로 복면을 하고 살기를 뿜었더니 덜덜 떨더구만..... 짜식 그정도로 간이 작아가지고 나중에 무슨 일을 하려고...." "그렇지만 내상과 독상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연기를 고수의 안목을 속일정도 로 완벽하게 해내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그녀석이 밖에서 불을 놓을 때 움막 안으로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서 숨어야 하는데, 그녀석도 꽤 실력있는 고수라 서 그 이목을 속이고 숨어들기도 보통노릇이 아니죠." "허허... 이거 교주님 앞에서 내 얼굴에 완전히 금칠을 하는군." "덕분에 지금 무림맹에는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습니다. 이정도로 효과가 좋 을 것이라고 생각은 못했었는데요." 교주가 궁금함을 나타내며 물었다. "동정이 어떻던가?" "각파의 장문인들이 비상소집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로서 한바탕 혈풍이 불겠군." "저희 삼비대가 만들어진 이후 최대의 걸작품입니다.녀석들은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그렇게 깊게 조사를 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도 꽤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정보니까, 그들도 조사를 쉽게 하기는 힘들겁니다. 그리고 이 번에 모인것도 혹시나 우리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모의를 하는 것이 분명 한데, 우리가 그 올가미에 걸릴지도 의문인 상태에서 시간을 죽이다가는 강시 들은 더욱 많이 만들어 질거고.... 아무리 쑥덕공론을 해봐야 결론은 기습밖 에는 없다는 것이 드러날 겁니다." "자네도 수고했네. 그리고 자네도 참 수고했고." 부교주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앞으로도 부담갖지 마시고 시켜 주십시오." "만약 정파에서 기습을 한다고 가정하고 어느정도의 피해를 입을 것 같은가?" "확실히는 모르지만 현재 만들어진 강시들과 또 그곳에 쳐져있는 진법, 그리 고 상당히 뛰어난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으니 알고 들어가더라도 엄청난 피해 는 각오해야 할 겁니다." "또 다른 강시를 제조하는 곳은 발견하지 못했나?" "예. 현재 중원에서 부녀자들이나 무림인사들을 상대로 납치 여부를 신중히 탐문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할 꼬투리는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 렸던 5곳은 휘하 고수들을 보내 조사해본 결과 인신매매단임이 밝혀졌습니 다." "그녀석들은 어떻게 처리했나?" "생껍질을 홀랑 벗겨서 소금을 뿌린 후에 던져뒀습니다." "허허허... 꼴이 가관이었겠군." "낄낄.... 전해들은 말로는 혼자보기 아까운 장면이었다고 하더군요. 그 외에 도 계속 조사중입니다." "전에 듣기로 상당수의 부녀자들이 새외로 납치되어 나간다고 했지않나? 그것 도 인신매매단인가?" "예! 아쉽게도 대규모 인신매매단이었습니다. 혹시나 아수혈교와 연관되어있 나 해서 잡는 놈 마다 철저하게 고문을 했지만 아수혈교는 관계가 없었습니 다. 부녀자들을 노예로 파는 것을 몽땅 다 잡아서 혈도를 제압한 다음 사막에 던져서 말려 죽였습니다. 사막과 같은 불모지에서 벌어진 전투라서 그런지 혹 시나 몰라서 구양운(丘陽雲) 장로가 거느리는 천마혈검대(天魔血劍隊)를 보냈 는데 구장로에게 들으니 사막을 건너면서 기막힌 고생을 했다고 그러더군요. 물이 떨어져 고생중인데 운좋게 마적단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들에게서 물을 얻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부교주가 경악하면서 말했다. "세상에! 이번에 천마혈검대까지 투입했단 말입니까? 교주께서는 너무 적들을 과대평가하는게 아니신지요. 그 100명에 환영비마(幻影飛魔)까지 합치면 그 힘은 파천(破天)에 이르는데 과거 사파의 하늘이라던 사사천림(死邪天林)도 그들에게 무너졌는데 전면전(全面戰)도 아니고 그들을 출동시킨 것은 너무 과 한 처사가 아닙니까? 잘못해서 사막에서 아사(餓死)할 수도 있는데, 무사히 귀환한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그래 그 마적단 녀석들에게는 충분한 사례를해 줬다고 그러던가?" "예. 몽땅 다 발바닥 가죽을 벗겨서 사막 한가운데 풀어놨답니다. 살려서 보 낸것만 해도 얼맙니까? 낄낄.... 나중에 태양에 바짝 말라 죽었다 하더라도 그건 그녀석들의 실력이 부족해서 죽은것이지 우리탓은 아니지요." 그러자 교주가 느긋하게 거들었다. "만약 그들이 아수혈교였다면 기왕에 투입한 전력(戰力)으로 전면전을 벌여야 하기에 천마혈검대를 투입한 것이니 자네는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말게나." "예" 혁무상이 조심스럽게 교주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번에 만든 올가미 말입니다. 겨우 이런 일을 하려고 사용한 밑밥으 로는 너무 과한 것을 사용한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냥 그럴듯한 무공비급 한 권 정도만 줘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야. 그정도 경계를 뚫고 나올 정도의 고수라면 품속에서 청월검법(靑月 劍法) 정도의 절전지비(絶傳之秘)는 꺼내놔야 말이되지." "하긴 그렇군요. 하지만 나중에는 이 패도적인 무공을 익힌 자들이 많이 생길 것이니 그때가 큰일입니다. 이 청월검법의 위력은 대단하니 그에 대한 대비책 을 세워야 합니다." 교주는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청월검법은 마교 내에서 많은 연구를 거친 검법. 그것에 극성인 검법을 이미 개발했기에 그들에게 돌려준 것이네. 요 근래에 본좌가 부교주와 함께 벽마혼 원공(壁魔混元功)을 만들었네. 이 무공은 청월검법의 극성이니 이것을 3성만 익혀도 9성의 청월검법을 막아낼 수 있고, 4성 정도를 익히면 10성의 청월검 법을 막아낼 수 있네. 벽마혼원공은 그야말로 별볼일 없는 무공이긴 하지만 6 성 이상 익히면 타 무공도 일부 막아낼 수 있는 방어위주의 무공이라 할 수 있지." 교주는 품속에서 책 한권을 꺼내어 혁무상에게 주면서 말을 이었다. "이것이 벽마혼원공이니 복사하여 각 고수들에게 익히라고 하게나. 대신 이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청월검법을 쓰는 고수를 만나면 가지고 놀 생각을 말 고 무조건 빨리 죽여버리라는 말을 잊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수하들에게도 전하겠습니다." 교주는 탁자위의 비급을 들어 혁무상 장로에게 주면서 말했다. "혁 장로, 이걸 나중에 천마보고(天魔寶庫)에 갖다두게." 혁무상 장로는 교주의 손에서 청월검법이라 쓰인 고서를 받아들며 말했다. "예." 기는 놈의 결말(結末) 수천년 무림사를 두고 피를 피로 씻는 복수와 복수가 행해졌다. 하지만 이것 은 어디까지나 무림(武林)이라는 한정된 세계의 사람들 끼리의 전쟁이었기에 관(官)에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약 무림인들을 전부 없애버리려면 100만의 군사를 동원해도 불가능했기때문이다. 그리고 관에서 무림을 건드리지 않는 두번째 이유는 정파의 인물들인 경우에 한했지만 외적의 침입이 있을때 무림인들이 도와주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 리고 사파의 인물들인 경우 일정한 대가를 지불할 용의를 보이면 도와주기도 했다. 그리고 각 문파들이 들어선 곳의 부근에는 산적 등이 얼씬도 하지 못했 다. 자체적으로 각 문파의 체면이 있었기에 부근의 치안까지도 그들이 책임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관에서 관심을 보였던 점은 군부(軍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개개인 의 능력이었다. 초절정 고수들의 경우 대부분 정파의 명가(名家)나 마교 출신 이 대부분이었기에 거의 만나기 힘들었지만 한번씩 볼수있는 3류 정도의 무림 인들이라도 그들이 보기에는 그 무공이 대단했던 것이다. 이래서 관부는 장군부 직속으로 무림인들을 모아 강력한 무력집단을 만들 계 획을 세웠다. 부귀영화를 보장하며 끌어모았지만 의외로 무림인들은 모이지 않았다. 모인다는 것들은 대부분 2류도 안되는 인물들이었다. 그러하기에 관 부에서는 무림인들에 대해 더욱 많은 조사를 했다. 최후에 나온 결론은 무림인들은 무공 연마를 밥먹듯이 좋아하며 부귀영화 보 다는 한권의 비급(備急)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래 서 오랜 시간 관부에서는 무림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무림에 떠도는 각종 무 공비급들을 수집했다. 그것이 쌓이고 쌓였고 또 황궁 내에서 그 무공들을 익 힌 자들이 독창적인 무공들을 개발하기도 해서 모인것이 황궁무고(皇宮武庫) 였다. 이 황궁무고를 미끼로 무림의 인사들을 끌어들인 결과 5,000 명의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고수들의 집단을 만들 수 있었다. 이들로 구성된 기병대를 찬황 흑풍단(贊皇黑風團)이라 불렀다. 초기에 황궁에서 끌어들일 수 있었던 무림인 들은 거의 3류 고수들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을 무장시켜놓고 보니 대단한 힘을 발휘했다. 찬황흑풍단에는 뛰어난 명마(名馬)들이 주어졌고, 각 개개인들을 위해 완벽한 무구(武具)들이 지급되었다. 장검(長劍), 방패, 창, 활과 화살, 각종 암기(暗 器) 등등 자신이 원하는 무기들 이외에 두터운 갑옷과 투구, 그리고 말들을 보호하기위한 갑옷까지 지급되었다. 원래가 무림인들은 갑옷을 입지 않고, 설 혹 입는다고 하더라도 일부 중요부위만을 가리는 가벼운 것을 입는다. 그 이 유는 경공술을 사용하는데 무게가 많이 나가면 불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찬 황흑풍단은 기병대기때문에마상(馬上) 전투를 하기에 각자의 무게는 큰 문제 가 되지 않는다. 이렇듯 무장까지 잘 시켜놓다보니 이들은 기대 이상의 힘을 보여주었다. 황궁에서는 새외의 이민족들을 평정하는데 찬황흑풍단을 이용했다. 무공을 모 르는 이민족들에게는 무공을 약간이라도 할 수 있는 그들이 대단한 존재였다. 찬황 흑풍단은 처음 전투에서의 대승을 거두며 그 엄청난 힘을 과시하여 황실 을 놀라게 했다. 보통 10만 대군을 동원해야 할 정도의 사태에도 이들만 동원 하면 충분했던 것이다. 10만의 군세(軍勢)를 동원하는 것과 5,000의 군세를 동원하는 것은 엄청난 차 이가난다. 10만 정도의 군사력이라면 무조건 후방에서의 병참지원을 받아야 하지만 5,000명 정도라면 노획물이나 민가에서의 징발, 또 현지 군대들에게서 약간씩 얻어도 충분히 활용이 가능하다. 아주 싼 가격으로 이민족들을 평정하던 황궁에서는 재미를 붙여 더욱 찬황 흑 풍단의 규모를 키워나갔고, 예전에는 3류 정도면 되던 것을 약간씩 등급을 올 려 나중에는 양과 질을 충분히 만족하는 무적(無敵)의 기병군단(騎兵軍團)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찬황흑풍단은 점점 더 그 수를 늘려갔고 현재에 이르러 1만명 의 고수를 가지고 있었으며 5,000명씩 좌우 흑풍단의 2개의 부대로 나눠 관리 되고 있었다. 그들의 수장(首長)은 찬황흑풍단이 가지는 그 무시무시한 힘 때 문에 황제가 특별히 신임하는 무사만 임명되었다. 금의위와 마찬가지로 황제 직속의 단체였다. * * * 이곳은 황궁내 은밀한 밀실. 지금 이곳에는 황제와 찬황흑풍단의 단주, 금의 위의 수장인 대영반이 모여 비밀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 회의는 대영반이 황 제에게 특별히 간청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대영반은 아직 오지 않았고 현재 밀실에는 황제와 흑풍단의 단주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황제는 이런 저런 얘기를 먼저 나누다 문득 생각난 듯이 찬황흑풍단의 단주 옥영진 대장군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흑풍단의 인물들은 대부분이 정파의 인물들이오? 일부 사파의 인물 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 수가 너무나 작소. 본인이 알기로 사파의 거두라는 마 교는 최강의 고수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던데 어째서 마교의 인물들은 한명도 없는가?" 옥영진 대장군은 나이 80을 헤아리는 노고수로서, 황실의 친족이었다. 무예를 사랑했던 정평왕의 아들로서 청성파의 속가제자로 한때 무정검(無情劍)이라는 별호를 얻었던 검의 고수였다. 황제의 특명으로 찬황흑풍단의 단주로 임명되 어 그 뛰어난 무공과 실력으로 찬황흑풍단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낸 실력자 였다. "폐하, 그것이..... 흑풍단을 뽑는다는 전단을 각 문파에 발송하면 각 문파에 서 뛰어난 기재들이 추천서를 가지고 찾아오나이다. 하지만 명문정파의 적전 제자(適傳弟子)는 한명도 오지 않는 것이 통례고...... 마교의 경우 여태까지 한명도 보내오지 않았사옵니다." "이런 괘씸한! 이것은 짐에 대한 불충이 아닌가? 짐은 최강의 고수들을 보고 싶고, 또 거느리고 싶다." "그런데 문제가 있사옵니다." "어떤 문제인가?" 옥영진 대장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정파나 사파의 경우는 상관이 없지만.... 마교의 경우는 철저한 약육 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이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연공서열은 중요하지 않으며 무공의 강약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 하옵니다. 만약 그들의 우두머리 인 교주라 해도 더 강한 무공을 익힌 자가 있으면 그자리에서 쫓겨난다 하옵 니다." "그래서?" "마교의 인물을 받아들일 경우, 그들보다 더 강한 정파의 인물이 있어야 통제 가 가능하옵니다. 만약 대단히 강한자가 왔을때 잘못하면 반란의 여지 가......." "흠.... 그럴 수도 있겠군. 어렸을때 부터 그런 방식의 교육만 받았다면.... 그럴수도 있겠어....." "그러니 마교의 인물은 좀 더 재고(再考)를 하심이 좋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경이 말했듯이 힘이 지배하는 단체라면 그대의 무공이 강하면문제없 을 것이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왜 문제를 삼지?" "폐하! 마교란 단체는 대단한 전통을 자랑하는 무림의 강자이옵니다. 그쪽에 서 초고수(超高手)를 보내온다면 소신(小臣)도 이긴다는 보장을 할수가 없사 옵니다." "그들이 그정도로 강하다는 것인가?" "폐하! 마교에는 사파의 4천왕이 모두 모여있사옵니다. 그들의 능력은 태산도 무너뜨린다고 전해지옵니다." "흐음.... 그렇다면 정파의 인물들이라도 좀 더 강한자들을 뽑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럴러면 더욱 더 향기로운미끼가 있어야 하는데.... 사실 아직 비급을 모 으기 시작한지가 300년 정도라 명문정파의 무공에는 황궁의 무학이 떨어지옵 니다. 그것이 문제지요." "역대 황제들의 칙명으로 무공비급을 모으기 시작했는데도 아직 그렇게 양이 적단 말인가?" "폐하, 송구스런 말씀입니다만, 양이 문제가 아니옵니다. 질(質)이 문제이옵 니다." "질(質)이라..... 그렇게도 황궁의 무학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현재에 이르러 황궁 무학의 질도 그렇게 대단히 떨어지는 것은 아니옵니다. 하지만 현재 황궁 3대 무공의 경우 소신을 비롯한 일부 지휘관들만이 익히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이런 무학들을 공개해 버린다면 문제가 되옵니다. 더욱 뛰어난 무학들을 입수한 연후에 그것들을 공개해야 하옵니다. 그러다보니 그 렇게 강한 무공들은 구하기가 너무나 힘들어...." "변명은 하지 마시오. 전에 경이 말했던 무학이 몇가지 있었는데 구했소? 그 러니까 대단히 강력한 무공들인데 주인이 없기 때문에 구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않았소? 그것들이 뭐라고 했더라......." "폐하, 북명신공과 거기서 파생되어 나온 뇌전신공, 화염신공이옵니다." "그렇지, 바로 그것들이오. 그런데 북명이라 하면 저 요하의 동쪽, 그러니까 예전 고구려나 발해같은 이민족의 국가들이 들어섰던 자리가 아니오?" "그러하옵니다. 북명이란 바로 발해지방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북명신공이면 오랑캐 동이(東夷)족이 만든 무공이란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무공은 중원의 무공이 최고인데 어찌 그따위 오랑캐의 무공을 구하려고 하시 오."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 폐하, 북명신공은 정확하게 말하면 발해의 상승무 공들을 모아놓은 책이옵니다. 무림사상 가장 강하다고 칭송받는 구휘라고 하 는 무림인이 만년에 이르러 이민족의 무공에 관심을 보이다가 발해지방에서 대단한 무공들을 발견했사온데, 그것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 북명신공이옵니 다." "그 무공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말인가?" "북명신공은 남은 많은 무공들의 조각들을 모아서 만들었기에 체계가 없이 하 나의 부분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난해한 무공이옵니다. 이 신공(神功)은 대 자연의 숨결을 흡수해 자신의 공력을 높이고, 초 상승의 무예 경지로 올라갈 수 있는 참고서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초식보다는 무에를 익히는데 필요한 마음가짐이나 조심할 점,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무예를 익히는 것이 가장 좋은지가 일부 기록되어있다고 하옵니다. 많은 무림인이 북명신공을 익 혔으나 너무나 난해하고, 초식조차 거의 없으며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인데다 설상가상으로 완전한 내용이 아니라 상당 부분이 상실된 채였기 때문에 너무 나도 익히기가 어려워 이것을 익힌 자들은 거의 득을 보지 못했다 하옵니다. 그때문에 북명신공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점들을 뽑아내어 발전시켜 여러 무공 이 발생했사옵니다. 그것들이 화염신공과 뇌전신공이옵니다. 구휘는 이 북명 신공이란 비급을 만든다음 수하들로부터 왜 자신의 능력을 더 보태 완벽한 비 급으로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고 하옵니다. '내가 여기 에 토를 붙인다고 한다면 이 무공이 처음에 나타내고자 하는바를 무심결에 없 앨 수가 있다. 이것들은 다만 조각들일 뿐이지만 그 하나하나만으로도 너무나 도 완벽해서 더 이상 보탤 말이나 뺄 말이 없다. 나조차도 이것을 완벽히 이 해할 수가 없으니 언젠가 이것을 완벽히 연성할 수 있는자가 나타난다면 그자 는 아마 생사경의 고수일 것이다.'" "경이 말한대로 그렇게 익히기 어렵다면 구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 아니오?" "아니옵니다. 그 자체로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비급을 한번 보기위해 모여드는 무림인들은 많을 것이옵니다. 아직도 북명신공은 대단히 매력적인 미끼이옵니다." "흠... 그런데.... 서론이 긴걸 보니 구하지는 못한 모양이구려." "황송하옵니다. 소신의 능력으로는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알수가 없었나이 다." "그렇다면 화염신공은? 화염신공이라는 것을 보니 양강의 무학인 모양이지?" "그러하옵니다. 극양의 무공으로 북명신공의 대자연의 기를 흡수하는 대신 손 쉬운 상대방의 공력을 흡수하는 것과 강철도 녹인다는 화염장을 주 무기로 한 다고 하옵니다. 여러가지 장점이 있었으나 너무 극양의 무공이라 배우기가 힘 들고, 포획한 진기의 융합에도 문제점이 많은 약간 미완성의 무공이옵니다. 지옥염화단(地獄炎火團)의 절기였으나 그들이 갑자기 멸망하면서 그 비급이 사라졌사온데 현재 조사한 바로는 아마 마교로 흡수된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사옵니다. 마교의 인물들이 흡성대법이라는 무공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화염 신공의 발전형으로 보아지기 때문이옵니다." "그렇다면 화염신공은 주인이 있구만. 뇌전신공은 어떻소?" "뇌전신공은 북명신공의 무예적인 요소를 한층 발전시킨 것으로 북명신공의 패도적인 파괴력을 이용하여 거기에 수많은 초식을 만들어 합해 더욱 정밀한 무공으로 발전시킨 것이옵니다. 과거 사파의 하늘이라 불렸던 사사천림(死邪 天林)의 무공으로 사사천림의 갑작스런 멸망과 함께 사라졌사옵니다. 지금은 사사천림이 누구에게 멸망당했는지도 모르는 지경이라 더욱 조사해보면 알 수 있을것이라 생각되옵니다." 이때 대영반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는 황제에게 인사를 드린 후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신(臣) 장무기(張武己)아뢰옵니다. 신이 회의를 소집하기를 간한 것은 현재 무림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첩보 때문이옵니다." "심각하다니?" "예. 사악한 무림의 한 문파가 황권을 노리는 대역죄를 범할 준비를 하고 있 다는 것이옵니다." "말해보라!" "예. 신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아수혈교라는 무림의 문파가 있사온데, 이 들이 강시를 5,000여구나 제작중이라고 하옵니다. 이 강시는 왠만한 도검으로 는 상하게 할 수 없는지라 황궁의 하급무사들로는 당해낼 수가 없사옵니다. 이들이 이 강시를 제작하여 황궁으로 처들어 올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는 첩 보가 입수되었사옵니다. 현재 3할 정도가 완성되었다고 하오니 더이상 만들어 지기 전에 근심을 없애버리는 것이 좋겠나이다." "대장군은 그래도 예전에 무림에 있었던 사람! 강시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가? 겨우 5,000 정도로 황권을 넘볼 수 있을까?" "신 옥영진 아룁니다. 소신이 듣기로 강시란 것은 일단 죽은 사람을 각종 약 물과 특이한 대법으로 제조하여 인성을 상실한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이온데, 전체적인 힘은 어떨지 몰라도 도검이 들어가지 않고, 원래 죽은 사람이라 왠 만한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다고 들었사옵니다. 만약 5,000 구의 강시라 한다 면 황궁을 넘볼 수 있을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그렇다면 큰일이구료. 속히 대장군이 흑풍단을 이끌고 황권이 존엄함을 보여 주시오. 언제쯤 그 악도들을 응징할 수 있겠소?" "예. 현재 우흑풍단(右黑風團)은 오랑캐를 치러 변경에 나가 있으니 그들이 돌아오는대로 좌우흑풍단을 출동시키겠나이다." 그러자 황제는 자신이 찬 보검을 끌러 대장군에게 주며 말했다. "복마천신검(伏魔天神劍)을 앞세워 반역도를 응징하고 오라." 복마천신검은 10대 기병(奇兵) 중의 하나다. 명장(明匠)인 여진(呂眞)이 만들 었다고 전해지는 보검(寶劍)으로 사악한 힘을 제압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전해진다. 강시 등 사악한 술법으로 만들어진 것들에 천적인 병기로 언제나 황제가 지니고 있었다. 대장군은 두손을 받들어 보검을 받으며 말했다. "신, 옥영진. 폐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한시가 급한 것 같으니 경은 지금 당장 나가보시오." "예!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 * * 그로부터 20일 후 최대한의 속도로 돌아온 우흑풍대를 포함하여 찬황흑풍대 총군세 10,325기(騎)가 출동했다. 여기는 대망산에서 20리(약 6Km)떨어진 지 점. 이곳에 대원수의 주력부대(主力部隊)가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막사 안 에는 옥영진 대장군 몇명의 휘하 장수들과 지도를 펼쳐놓고 의논을 하고 있 다. 이때 밖에서 한 젊은 장수가 들어오며 말했다. "지천수 상장(上將)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오! 빨리 들어오시라 해라." 지천수는 4명의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정중히 포권 하며 옥영진에게 말했다. "대장군을 뵈오. 늦어서 죄송하오이다." "아니오. 때맞춰 왔소. 이리 오시오." "예" "상장은 지금 얼마나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소?" "어림군 5만을 거느리고 왔소이다. 더 못데리고 와서 죄송하오이다." "5만이면 충분할 것 같소. 5만을 3개 대로 나누어 이쪽과 이쪽 그리고 이곳에 주둔하여 반역도들의 퇴로를 차단하여 주시오." "알겠소이다." "그리고 전양 장군은 황군 2만을 반으로 나누어 이곳과 이곳을 맡아주시오. 절대로 반역도들이 밖으로 탈출해서는 안되오." 옥영진이 막대기를 이용해서 지도의 요소요소를 짚으며 각 부대가 맡을 장소 를 알려주자, 전양 장군이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미 탈출했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이까?" "이미 탈출한 적들은 생각할 필요 없소. 아마 적들도 이곳을 완전히 포기하지 는 못할 터, 아마 소규모의 탈출, 또는 연락병이 탈출했을 수도 있기에 그에 대한 처리는 이미 해뒀소. 지금 현재까지의 정보를 토대로 할때 아직 적의 주 력은 계속 남아있음이 확실하오. 천령과 청남 일대의 향방군과 어림군 12만에 게 비상대기령이 떨어져 있고 그들에게 모든 통행인과 수송화물에 대해 검문 을 엄중히 하라고 일러뒀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 연락용 비둘기나 매가 날아갈 것에 대비해서 그에 대해서도 대비해 뒀으니 제장들은 염려하지 마시 오." "대장군의 작전대로라면 찬황흑풍단만 반역도의 본거지로 돌격합니까?" "그렇소. 창칼이 잘 통하지 않는 무리들이니 일반 정병들로는 무리인것 같아 흑풍단만 쓰기로 했소. 그래도 좀 안심이 안되는 부분이 있으니 혹시 휘하의 부하들 중에서 신병이기(神兵異器)를 가진 자들이 있으면 그걸 좀 모아주시 오. 흑풍단에도 각종 신병이기를 가진 자들이 많으나 그래도 강시라고 하니 좀 걱정이 되는구려." "알겠소이다. 그런데 공격은 언제 시작됩니까?" "내일 새벽에 시작할 참이오. 그때까지 무기를 인도해 주면 고맙겠소. 그 명 세서는 착실히 작성하여 전투가 끝난 후 되돌려 줄 수 있게 해주시오. 만약 빌려준 신병이기가 파괴되면 그에따른 충분한 보상은 해줄것이오." "알겠소이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날 새벽 여명을 이용하여 찬황흑풍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고수들 과 강시들 덕분에 아무리 강대한 흑풍단이라고 해도 그 피해는 컸다. 흑풍단 의 고수 2000여명이 죽음을 당했고 부상자는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그래도 이정도로 끝난 것이 무쇠를 무우베듯 할 수 있는 신병이기 덕분이었다. 그나 마 보통의 무기로 상대했다면 그 피해는 더욱 컸을 것이다. 특히나 푸른색의 옷을 입은 강시는 정말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의 강시들은 동작 이 느렸지만 그들의 속도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흑풍단 피해의 3할은 그들 때 문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은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외곽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던 7만의 군세(軍勢) 덕분에 적은 단 한명도 도망 가지 못하고 전멸을 당했다. 그리고 그 반도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서적이나 서류 등은 압수되었다. 적들이 불을 질러서 일부는 불타버렸지만 책들은 불에 잘 타지 않기에(책이란 원래 속까지 완전히 재가 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 함) 겉부분은 탔을망정 대부분을 압수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책들은 황궁무고 로 보내졌고, 황궁의 각 무사들에 의해 그들의 무공이나 술법 등이 분석, 연 구되었다. 한명이라도 더 많은 고수(高手)를... "교주님! 예상외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적미살소 혈무상이 방에서 쉬고있던 교주에게 긴급면담을 청한 후 다급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가?" "아수혈교와 황궁이 격돌했습니다." "황궁이?" "예! 찬황흑풍단이 대망산을 공격하여 모든 강시들과 그곳에 있던 고수들을 진멸(鎭滅)했다 합니다." "찬황흑풍단이라면 무림의 고수를 골라 뽑아, 거기에 황궁무고의 무공을 더 가르쳐 주어 무공이 대단한 경지라 들었다. 그 강대한 힘은 태산을 무너뜨린 다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그런데...... 그게...." "뭔가? 말해보게" "찬황흑풍단이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고 합니다. 거의 전사자가 2000명 정도이 고 부상자가 6000명을 넘어간다고 합니다." "그럴수가 찬황흑풍단은 무림인들과 달리 중갑주(重鉀 : 두꺼운 갑옷과 투 구)를 입을 뿐더러, 말에게까지 갑옷을 입힌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피해가 클 수가 있나?" "정보로는 이미 만들어져 있던 강시 2,000여 구, 50여 구의 신형강시, 그리고 수비 무사들이 1000여명, 그중에도 대단한 고수들이 몇 있었는데 그들에게 입 은 타격이라고합니다." "하기야 황궁의 무리들은 내공보다는 외공에 치중하는 무리들! 하지만 그래도 찬황흑풍대는 일반 무사들과는 달리 내공을 쌓은 자들일텐데....." "무림인들을 상대로 했을때는 그들도 그정도의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겁니다. 무림인들은 칼을 맞으면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니까요. 문제는 왠만한 상승고 수가 아니면 죽일 수 없는 강시들 때문이죠. 그나마도 피해가 그정도에서 끝 난것은 두터운 갑주(鉀 )와 방패 덕분이라고 합니다." "하여튼 일이 재미있게되어가는군. 어떻게 된것이 붕어 미끼를 썼는데 잉어 가 잡히나?" "아마 무림맹에서 아직 무림의 사정에 어두운 황궁에 올가미를 씌운 것 같습 니다." "무림맹도 꽤 하는군. 클클클....." "이번의 사건으로 생각한 것인데..... 될수있으면 차후에 있을 충돌을 대비하 여 고수들을 많이 확보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각종 무공에 뛰어난 성취 를 보이는 녀석들만 골라서 특별히 교육시켜 다음세대의 고수들을 길러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의 사건을 통해 고수들의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었습니다." "자네가알아서 하게나." "예. 지금 투입되어있는 묵향에 관한 말씀인데.... 1급 살수로서 23명을 완벽 하게 없앴지만 아직도 무공 면에서는 미숙합니다. 그녀석이 임무를 성공적으 로 수행한 것은 무공보다는 머리를 잘 굴렸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임무가 없을때는 무공을 익히고 있는데..... 이녀석은 검에 능하니 뽑아서 교 육시켰으면 합니다." "하기야...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인데도 상층부에서도 녀석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들이 많을 정도로 암살 실력과 검술이 뛰어나니..... 하지만 이미 본좌가 알아서 하라고 한 이상 자네 마음대로 하면 될것 아닌가?" "그렇지만 나머지는 수련생이라 상관없사오나 묵향의 경우 살수로서 내총관의 휘하에 있는지라 제가 그냥 데려가는 것 보다는 교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면 서 로간에 입장이 편할 것입니다." "알겠네. 내 북궁 내총관에게 말해두지." "감사합니다." * * * 묵향이 7번째로 만난 교관은 상당히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혀 살수같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살수란 완전히 살수같이 보이지 않는다.누가 살수같 이 보이는 사람과 같이 있겠는가. 진정한 살수는 살인을 하는 그 순간에도 살 기를 드러내지 않는것이다. 여태까지 그를 지도했던 교관들은 모두 다 전직 아니면 현직 살수들이었다. 살수들 중에서 나이가 많이 들어 현역으로 뛰기 어려우면 후배들을 가르키는 데 투입된다. 하지만 이번의 교관만큼 완벽한 살 수라고 느낀 사람은 없었다. 생강은 오래 묵은 것일수록 맵다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오랜 연륜과 경험에서 오는 숙련미(熟練美)라고 할까..... 나이가 들 수록 그 진수를 뿜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교관들은 현재의 실력있는 살 수보다는 오랜 살수생활을 해서 은퇴한 고수들이 한다. 그럼으로서 그들이 자 신이 얻은 경험과 지식을 후배들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새로운 교관은 40대 초반으로 보였으며 그런대로 잘생긴 얼굴의 남자였다. 그의 얼굴 에는 상흔이 깊지는 않아 왼쪽 눈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왼쪽 눈위에서 코 쪽 으로 난 긴 검상이 있었다. "본인은 환사검(幻邪劍) 유백(柳伯)이라 한다. 이제부터 너를 가르칠 것이 다." "유선배께서는 살수십니까?" "그건 왜 묻는가?" "도저히 살수같지 않아서 그럽니다." "클클클.... 나도 예전에는 살수를 한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검술교관을 하고있지. 나는 이제부터 자네만을 가르칠 것이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는 자네도, 나도 몰라. 어느정도 상부에서 원하는 정도까지 내가 지도할것이 야. 위에서도 많은 고심을 했는 모양이지만 드디어 자네를 살수로서 소모시키 기 보다는 무사로서 쓰기로 합의를 본 모양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살수란 상 대를 죽이기는 쉽지만 일단 상대를 죽이고 난 다음에 탈출하기가 정말 힘들거 든....." "알겠습니다." "검술을 익히면서 끊임없이 내공의 수련은 계속해야 하네. 하지만 본인이 느 낀 바로는 내공이 최고로 중요한 것은 아니야. 문제는 깨달음이지. 어떤 경지 를 익히면 내공은 자연적으로 얻어진다네. 그걸 꺼꾸로 얘기하면 어떤 경지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내공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말도 성립이 되지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선배님이 말씀하신 첫번째 생각에 찬성합니다." "실지 명문 검파의 젊은이들이 보통 타파의 젊은이들 보다 더욱 빠른 내공의 진보를보이지. 자네도 무림에 나가봐서 알겠지만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나이 많은 고수를 격패시키는 것을 왕왕 봤을 것이네. 그것은 깨달음이 빨랐다는 것이지 실지 내공 수련을 그 젊은녀석이 노인보다 더 많이 했다는 것은 현실 적으로 불가능해. 내공의 경지를 1갑자, 2갑자 등으로 표시하는 것은 밀실에 박혀 60년 혹은 120년동안 내공만 닦았다는 것이 아냐. 하나의 주기(週期)를 나타내는 것이지. 그 주기를 넘었느냐 못 넘었느냐에 따라 그의 실력이 결정 되는 것. 그 한 주기를 넘음에 따라 최소한 10배 이상의 힘이 생기지. 그리고 내공이란 음(陰)에도 양(陽)에도 치우치지 않게 익혀야 해. 한쪽으로 치우치 게 익히면 단기간에 고수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 다 헛거야. 높은 경지로 올라갈수록 힘들어지지. 나중에는 생명까지 위험해져. 그러니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는 건 익히지 않는게 몸에 좋지. 나중에 내공이 계속 쌓이다 보면 그렇 게 무리하게 내공을 연마하지 않아도 극양, 극음의 무공을 할 수 있어. 물론 두가지 다 할수 있지. 구태여 모험을 하면서 처음부터 말도안되는 내공을 쌓 을 필요는 없는거야. 참, 듣자하니 자네는 검을 잘 다룬다고 그러던데....." 그러면서 유백은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은 뽑혀 나오자 투명 한 옥빛을 띄는 것으로 보아 보검(寶劍)임이 확실했다. 그의 검은 일반 강호 의 무리들이 사용하는 패검(覇劍;얇고 긴, 그러면서 앞부분의 날은 잘 발달되 어 있지만 양쪽의 검날은 무뎌서 베기보다는 찌르기에 유리한 검)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점이 있다면 양쪽의 날이 대단히 날카로워 베기도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검(劍)이란 원래 베기 보다는 찌르는 것에 중점을 지닌 무기지. 그렇다고 베 기를 전혀 하지 않는것은 아니지만 찌르기를 더욱 중요시 하는 무기야. 강호 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패검의 경우 군인들이 사용하는 검과 달리 가볍고 가늘 며 길다는 점이 다르지. 그때문에 적이 베거나 찌르기를 해올때 그것을 막는 데 날카로운 날이 서 있다면 칼날만 상하고 어쩌면 상대방 무기의 압력때문에 검이 부서질 수도 있기에 날을 날카롭게 세우지 않지. 하지만 보검의 경우 그 강도(强度)가 뛰어나므로 날을 날카롭게 세워도 무방하지. 그에 비해 도(刀) 의 경우 한쪽만 날이 있고 날을 직선이 아닌 보통 반월형으로 만들어 찌르기 보다는 적을 베는데 전문적으로 사용한다. 물론 찌르기를 못하는 것은 아냐. 도의 경우 날이 없는 두터운 부분 덕분에 적의 강력한 일격에도 도가 부숴질 염려가 없지. 어떤 이들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적을 공격하기 편하도록 아 주 무거운 도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어. 심한 놈들은 60근(30Kg)에 가까운 걸 사용하지. 자네의 무기를 한번 보기로 할까?" 묵향은 그의 검을 반 정도만 뽑아서 유백에게 보여줬다. 예의상 윗사람에게 무기를 보일때 검을 완전히 뽑으면 안된다. 윗사람이 받아들고 자신이 완전히 뽑는 경우는 예외지만 대부분의 경우 3할에서 5할 정도만 뽑아야 한다. 묵향 과 같은 살수의 경우 1차 훈련이 끝나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검을 제작한다. 나중에 취향이 바뀌면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바꾸기도 한다. 어떤 살수는 상 대에게 더욱 큰 타격을 주기 위해서 검의 날을 완전히 톱니와 같이 만들어 베 기보다는 상대의 살을 찢어내도록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검에 찔리면 검 이 뽑힐때 엄청난 고통을 준다. 그리고 내부의 장기(臟器)를 톱니가 끌고 나 옴으로 인해 더욱 큰 타격을 준다. 물론 피부를 베었을때도 잇점이 있다. 피 부를 베면 일직선으로 베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뜯고 지나감으로 인해 나중 에 치료하기가 힘들고 출혈이 심하다. 살수가 각종 기형적인 무기들을 사용하 는 이유는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상대를 확실히 저세상에 보내야 하기 때 문일 것이다. 묵향의 애검 묵혼(墨魂)검은 반월형의 검으로 검신의 길이는 2 척 3촌(약 70Cm) 손잡이 부분의 길이 1척으로 칼날받이도 없는 기형검이다. 검신의 손잡이 부분 가까운 곳에 묵혼(墨魂)이란 글자가 음각(陰刻)이 되어 있었다. 검을 찬찬히 보던 유백이 입을 열었다. "누가 살수 아니랄까봐 자네도 상당히 특이한 검을 애용하는군. 묵혼검이라. 하지만 검신이 검지는 않군?" "지금은 좀 더 좋은 오철(烏鐵;검은색이 나는 합금으로 정강보다는 강도가 뛰 어나다.)같은 검은색이 나는 강한 금속으로 검을 만들어 주겠지만 이걸 만들 당시만 하더라도 제 직위가 낮아 백련정강(百鍊精剛;100번이나 연마한 정순한 강철로 된 검, 대단히 튼튼..)으로 만들었으니 그렇죠." "왜 이런 검을 만들었나? 전체 길이는 보통 검과 마찬가지지만 손잡이가 너무 길어 들고다니기에 불편할 것 같은데...... 지금도 허리 뒷부분에 비스듬하게 걸리는게 고작이잖아? 이래서는 너무 눈에 띄지." "하지만 그 잇점도 많습니다. 손잡이의 뒷부분을 잡으면 이 검의 길이는 3척 이 되고 짧게 잡으면 2척 3촌이죠. 저는 검을 사용하면서 계속 잡는 위치를 변화시키므로 상대방이 저와의 간격(間隔)을 잡기가 어렵습니다.(검도를 해본 분은 이말이 이해되겠죠?) 유선배님도 알다시피 짧은 검은 속도가, 긴 검은 속도는 떨어지지만 장거리 공격이 가능하다는 각각의 상반된 장점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검의 날을 날카롭게 세운 것은 베기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죠. 여태까지 제 공격은 거의 모두 다 암습이었기에 적의 무기와 무딪친 적은 없 습니다." "흠..... 그렇게 말한다면 자네도 이 검을 만든다고 상당한 잔머리를 굴렸군. 하지만 절정의 검술은 겨우 간격을 헤깔리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냐. 적을 단 한번에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일격필살(一擊必殺)의 각오가 없이 너는 죽고 나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지닌다면 도 저히 절정의 경지로 들어서지 못한다네..... 살구멍을 찾으면서 휘두르는 검 은 도저히 그 날카로움이 나타나지 못하지. 정면대결을 할때,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적수는 최악의 경우 같이 죽겠다는 양패구상의 검법을 구사하는 녀석 이지. 아예 실력이 떨어진다면 몰라도 비슷하다면 이기기 어렵고, 설혹 실력 이 약간 떨어지더라도 그녀석을 해치우려면 부상은 각오하고 싸워야지, 안그 러면 오히려 자기 목숨을 날린다네. 병법에도 이르지 않던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것이라고...." "후배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정든 녀석이니 버리고 새걸로 바꿀수도 없습니 다." "그건 자네 마음대로 하고, 여태까지 몇가지 검법을 익혔나?" "12가지를 익혔습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한번도 검술을 써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검술을 사용하면 들통나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검술을 사용 하지 말고 그냥 죽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흠.... 원래 검법이란 것은 각종 공격과 방어의 초식을 모아놓은 것. 일단 공격과 방어의 개념을 자세히 이해하면 초식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 지... 그렇다고 초식이 완전히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닐세.... 나는 자네한테 20가지 검법을 가르칠 예정이네. 하지만 이 검법 자체를 사용해선 안돼. 초식 의 일부분만을 이용해야 해. 이 검법들은 모두 정파(正派)의 검법들로 여러 파의 검법들이지. 초식 전체를 펼치지 않고 초식의 일부만을 이용하여 상대와 겨룬다면 왠만한 실력자가 아니라면 그 근원을 알아내기는 힘들지. 그 초식이 완전히 펼쳐지지 않고 일부만 사용되기 때문에 그에대한 대비를 하기도 어려 워. 자네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무적의 검법이란존재하지 않아. 어떤 검법이 라도 그 천적(天敵)인 검법이 있기 마련.... 그때문에 명문인 무가에서는 최 후에 사용하는 1-2가지 검법은 꼭 숨겨두지. 그것들은 생사의 갈림길이 아닌 한 사용되지 않아. 그 이유는 상대가 그 검법을 알면 그에대한 대항초식이 만 들어진다는 점을 알기때문이지. 하지만 이렇게 초식을 잘라서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일반 초식을 익히는 것 보 다 잘라서 사용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네. 본인도 이것을 깨닫는데 오랜 새월 이 걸렸지. 그리고 이렇게 사용하면 살수에게는 또 한가지 잇점이 생기지. 여 러 파의 검법을 조각조각 내서 이용하면 상대는 흉수를 알아내기가 아주 힘들 어. 그리고 전문가가 보더라도 시체의 상처를 보고 그 흉수를 알기는 힘들지 혹시 알아낸다 하더라도 여러가지 검법이 어우러져 있으니 확실히 알아낼 재 간이 없지.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이간질을 시킬려고 일부러 초식전체를 사용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잘라서 사용하게 나. 우선 자네는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도록 수련해야 하네. 시각이야 모 든 이들이 타고난 것이고, 청각을 예민하게 다지는 것이 중요하지. 소리만으 로 부근의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 해. 나머지 감각들도 차례로 개발해 가자구. 살수이니 만큼 감각은 꽤 잘 발달되어 있을테니 자네 는 그만큼 덕이라는 점을 감사히 여기고, 언제난 검술을 수련하면서 명심해야 할 점은 검술을 잘 한다는 것과 살인을 잘한다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점이 라는 것을 이해해야해. 수많은 고수들이 암습에 의해 저세상에 갔지.... 눈앞 의 적 보다는 등뒤의 적이 무서운 거라네..... 그러니 수련하는 도중에 나는 자네를 틈만 나면 암습할 생각이야. 그 점 잊지말고 대비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참, 자네 여자를 아는가?" "예?" 묵향이 갑작스런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는 다시 물었다. "여자와 성합(性合=性交)을 해본 적이 있느냔 말이다." "아직 없습니다." 묵향은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답했다. "그렇다면 너는 내공 수련에 있어 2가지 선택할 수 있구만. 여태까지 자네가 배운 것을 사용해도 상관없고, 또 하나는 그것을 약간 변형한 방법인데.... 일종의 동자공(童子功)을 혼합하는 방법이지. 후자의 방법이 훨씬 더 빠른 성 취를 볼 수 있으나 단점이 있다면 여자와 한번이라도 잠자리를 함께하면 동자 공 자체가 파괴된다는 단점이 있다. 선택은 자네한테 달려있어." "선배님의 생각으로는 어느쪽이 더 좋습니까?"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빠른 성취를 원한다면 동자공이 좋아. 하지만 무림이 란 곳이 원래 정면대결보다는 암습과 술수가 난무하는 곳이라 잘못해서 미약 종류에 당한다면 모든게 끝장이지. 선택은 자네가 해야해." "예, 그럼 여태까지 해오던 방법을 쓰겠습니다. 괜히 동자공을 익히다가 적의 술수에 걸려 모든걸 잃을 수는 없거든요." "그럼 이제 시작해 보세나...." 유백의 교육은 지독했다. 면벽수련을 통해 아침 저녘으로 청각을 단련했고, 또 내공을 닦았다. 그 외의 시간에는 검법과 암기술, 경신술을 익혔다. 그에 게 가장 힘든 것은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암습이었다. 서로가 얘기를 잘 나누 다가도 유백은 한번씩 검을 뽑아 기습을 했고, 아슬아슬하게 날아드는 그의 검과 표창( 槍)을 막으면서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이것도 세월이 가 면서 익숙해져 적당히 막아낼 수 있게끔 되었다. 하지만 유백은 점점 더 공격 에 쏟는 공력을 늘려갔으므로 묵향으로서는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절정(絶頂)의 세계로 유백은 대단한 실력의 검사였으며 각종 검술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다. 그는 수련 도중 틈틈이 묵향에게 무림에서 사용되는 여러가지 무공들을 얘기해 줬 고, 그 대처방법도 일러줬다. 그와 함께 한지도 5년이 지난 어느날 유백은 묵 향에게 말했다. "자네는 내 나이가 얼마나 되어 보이나?" "40대 후반 정도가 아닌지요?" "아닐쎄... 내 나이 벌써 70이 넘었지. 자네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 '맙소사.... 세상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것도 당연한 이치군' "스물 일곱입니다." "그런가... 좋을때군.... 자네도 벌써 결혼하고 아이 몇은 거느리고 있을 나 이인데 검술을 익힌답시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군. 나도 참 오랜시간 그놈의 검을 다룬다고 허송세월을 보냈지. 내 이미 은퇴를 했어야 하는데.... 아직도 무슨 미련이 있다고 여기에 매달려 있는지 모르ㄱ군. 아마 자네를 가르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게 될것 같아. 참! 자네는 내공을 수련한 사람의 육체 가 완전히 삭아가는 나이가 얼마 정도라고 생각하나?"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60세야. 이 60세가 모든 것의 분수령이지. 60세가 되기 전에 극마(極魔), 그 러니까 정파에서 말하는 화경(化境)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급속 도로 근력이 떨어지지. 만약 극마에 들지 못하면 10을 익힌다면 4 이상의 성 취를 얻기도 힘들지. 거기에 약간이라도 수련을 게을리하면 3씩 퇴보하는거 야. 때문에 60세 이후에 화경에 들기는 하늘에 별따기 보다 어렵다네. 나도 극마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어. 여태까지 극마에 들어간 사람 중에 살아있는 사람은 고작 4명 정도..... 내공을 익히는 속도에 있어 본교를 따라갈 집단은 없는데 이상하게도 최고의 경지까지 도달하는 사람이 드문것은 아마 내가 생 각하기에 수련방법이 잘못된 것 같아. 나도 요 근래에 들어 그런 생각이 들었 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내가 살수생활을 오래해서 그럴거 야. 살수란 원래 본교의 초식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좀 진보가 있던가요?" "별로...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60이 넘으니까 내공은 상관없지만, 근골 (筋骨)이 외관상으로 표시는 안나지만 삭아 들어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더군. 외관이야 내공의 힘으로 노화를 막는다던지 아니면 주안술(珠顔術)을 사용해 서 젊음을 유지하는 자들도 있어. 하지만 근골의 쇠퇴는 어떻게 할 수가 없 지. 내 친구 중에도 흡성대법(吸成大法)을 익혀 엄청나게 내공을 쌓은 자도 있지만 끝내는 극마(極魔) 근처에도 못가더군. 오히려 나중에는 그게 방해가 되어 오래전에 죽었어. 상대에게 흡수한 공력은 어떻게 해도 완벽한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어. 오죽하면 본교(本敎)의 상층부에 들어가는 고수들은 흡성 대법을 익히지 않았겠어? 그러니 자네도 이런말 하기는 뭣하지만 무공의 정도 (正道)를 걷게나. 속성으로 되는것은 아무것도 없어." "유선배님 같은 경우, 다종(多種)의 무기를 사용하는 자들을 어떻게 생각하십 니까? 제 동료 중에서 살인을 저지를때마다 무기를 바꾸는 녀석이 있거든요. 그녀석은 권술(拳術), 장술(掌術), 검술(劍術), 창술(槍術), 봉술(棒術), 편 술(鞭術) 등 못하는 게 없죠. 저도 부러울 정돕니다. 그러니 큰 문제만 없다 면, 선배님께서 제게 그것도 가르쳐 주십시오. 벌써 선배님께 검술 교육만 받 은지 5년이 흘러가고 있어서 약간 지겨운 면도...." "헛소리....." 유백은 큰 소리로 묵향을 꾸짖은 후 말을 이었다. "무술은 모두 함께 통하는 것이야. 모든 무술은 손이 기본이지. 검술이나 창 술이나 모두 다 손의 길이가 약간 더 늘어난 것이라 생각하면 돼! 쓸데없이 이것저것 익히면 그것에 시간이 들어가 한가지에 대성을 할 수 없어. 지금 정 파 무림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떨치는 문파가 어디냐? 소림이냐?" "아닙니다. 소림이 예전에는 이름을 크게 떨쳤지만 요즘은 무당이 더 이름이 높죠." "소림은 72종 무예라 하여 수많은 무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기본으 로 하고 있고.... 각종 무기를 다루는 것을 초반부터 배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그에비해 무당의 경우 오로지 검! 검이 아니냐? 무당의 고수 들이 어느정도나 검술에만 미쳐있는가 하면 손으로 바위도 깨지 못한다구. 아 예 그런 무공 자체가 없어. 어떻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손으로 바위에 구멍을 낼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진 무당의 고인들도 많다구. 그렇지만 그들의 손에 검이 잡혔을 때 무당의 고수들을 만만히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구. 너 도 그들과 같이 한우물을 파야한다. 검을 이용해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마지 막 한방울까지 뽑아낼 수 있어야 해.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선배님, 상당히 궁금한 점이 있는데.... 대답을 해 주실 수 있는지요?" "뭔가?" "선배님은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계신데... 그 얼굴의 상흔(傷痕)은 어떻게 생긴 겁니까?" 그러자 유백은 무심결에 상흔을 만지면서 말했다. "이건... 내가 53번째 목표를 없앨때 생긴거지. 물론 그 목표는 저세상으로 보냈어. 그 뒤에 탈출하다가 생긴거지. 상대는 자네가 알지 모르겠네만환상 검수(幻像劍手)라고 들어봤나?" "예. 청성파가 배출한 대단한 검의 고수라고 들었습니다." "그녀석이 53번째 목표물의 호위무사였어. 암습하기 전에 딴 방향으로 유인했 다고 생각했는데 어찌된 셈인지 돌아와서는 나를 이모양으로 만들었지. 몇번 검을 섞어보니 분하지만 나보다 고수더군.... 본교의 초식을 사용한다 하더라 도 이길 수 없었어. 그래서 싸우는 도중에 암기를 기습적으로 발사했는데 이 게 그녀석의 허벅지에 맞았지. 서로의 내공이 큰 차이가 나지 않은 덕분에 내 암기는 녀석의 호신강기를뚫고 박혔어. 하지만 내가 보니 전력으로 던졌는데 도 겨우 반치 정도도 못 뚫은 것 같더군. 암기 끝에 독물을 발라뒀던 덕분에 녀석이 독물때문에 동작이 둔화된 것을 이용해 도망치는데 성공했어. 너도 알 지 모르지만 고수를 만났을때는 무조건 1개의 암기만을 쏴야해. 여러개를 쏘 면 그중 하나가 맞더라도 호신강기를 뚫지는 못해. 1개의 암기에 내력을 최대 한 실어 쏘면 운 좋으면 상대의 호신강기를 뚫을 수 있지. 쓸데없는 말을 주 절주절 하고있었군.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이런 식으로 매일 무공을 익히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유백은 자신이 아는 모 든 것을 묵향에게 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유백으로서도 묵향이 자신이 키운 최후의 제자기 때문에 그 애착이 더 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알려 준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수련하고 또 수련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 을 보고 가르치는 보람을 더욱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묵향 또한 여러가지 살수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의문점들을 유백의 답변을 통해서 이해하면서 점점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서고 있었다. * * * 묵향이 30세가 된지 2달 정도가 지난 어느날 유백은 묵향의 검술이 이제 완벽 하게 초식을 잘라서 사용하는데 무리가 없음을 보고 잠시 쉬는 시간을 통해 말했다. "네녀석의 검술은 이제 거의 완성되어 가는구나." 그 말을 듣고 묵향은 빙긋이 웃으면서 정중히 포권하며 유백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어. 검술의 완성은 무초식에 있다. 초식을 계속 자르고 잘라 가다 보면 나중에는 완전히 초식이 없는 지경까지 이르지. 쓸데없이 초 식을 사용하는 것은 공력의 낭비야. 내가 한가지 검법을 시범을 보일테니 이 것이 무슨 검법인지 맞춰 보거라." "예." 유백은 검을 잡고 일어섰다. 그는 검을 잡고 약간 자세를 잡더니 개문식(開門 式;어떤 무공을 행하는데 있어 그것의 이름을 상대가 알 수 있도록 하는 독특 한 자세. 모든 무공은 이것을 행한 후 시작한다.)도 하지않고 초식을 운용하 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검빛에 뒤덥히면서 사방으로 살벌한 검기가 뻗어나왔 다. 그때 문득 전방으로 붉은 빛의 반월형의 검강(劍剛) 수십개가 튀어나오며 10장 밖의 담장에 부딪치며 괭음을 냈다. 콰쾅... 먼지가 가라앉은 후 보니 흙과 돌로 다져서 쌓은 담장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약간 놀란 얼굴로 보고있는 묵향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 를 띄고있던 유백이 물었다. "어떤 검법이냐?" "히히... 제가 속을 줄 아십니까? 그건 검법이 아닙니다. 본교가 자랑하는 수 라월강도법(修羅月剛刀法)을 검으로 펼치신게 아닙니까?" "클클... 자식 눈썰미는 제법이군. 이 도법을 익힌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걸 배워보자. 나도 아직 9성밖에 익히지 못해 제위력은 나오지 못하 지만 그런대로 쓸만한 도법이지. 그 외에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도 가르 쳐 주마. 둘다 9성 이상 익히면 강기(剛氣)를 검에서 뿜어내어 적을 공격할 수 있다는 잇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력의 소모가 엄청나지. 하지만 너도 생각해봐라. 이 두 무공을 조각내어 사용하여 검강 한가닥만 뿜어낼 수 있다 면 대단한 것이 아니겠냐? 나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너는 해낼 수 있을거라 생 각한다. 나는 그것을 알아내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 우선 알아둬야 할 것은 검강의 모양이다. 도법에서 뿜어 나오는 강기는 대부분 반월형이지. 그 리고 검법에서 뿜어나오는 검기는 대부분 막대모양이야. 천강혈룡검법에서 혈 룡이란 명칭이 붙은 것도 붉은 용과 같은 모양의 둥글고 긴 강기가 뻗쳐나오 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알겠느냐?" "혹시 도는 휘두르는 상황에서, 검은 찌르는 상황에서 강기가 뿜어지기 때문 이 아닙니까?" "크하하하.... 맞아. 바로 그거야. 그때문에 모양이 그렇게 되지. 너도 살수 니까 잘 알겠지만 사람이란 동물은 별로 강하지 못하다. 단 하나! 단 하나의 치명상이면 된다. 2개도 필요없어. 적에게 1개의 치명상만 주면 돼. 뭣때문에 그렇게 많은 상처를 입힐려고 내력을 소모한단 말이냐. 그리고 내가 듣기로는 일단 강기(剛氣)를 뿜어내는 요령을 익히면 거의 무적에 가까운 경지에 들어 선다고 했다. 꼭 내가 언급한 두가지 무공을 거치지 않아도 강기를 뿜어낼 수 있지. 정파에는 현문(泫門)이라는 단체가 있다. 들어봤느냐?" "저... 무당 같은 도가계통을 보고 현문이라 하지 않는지요?" "맞아. 현문에서 최고로 치는 무공이 강기다. 일단 강기를 뿜어낼 수 있는 경 지에 이르면 손(手), 검(劍), 도(刀), 막대기, 풀줄기 어디서든지 강기를 뽑 아내어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검이나 도를 이용하는 것이 풀줄 기를 이용하는 것 보다는 강기를 뿜어내기 쉬울 것이다. 검 자체가 가지는 예 기(銳氣:날카로운 기운)가 있기에 아마 풀줄기를 이용하는 것 보다는 공력이 적게 들겠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지. 때문에 절정에 오른 고수일수록 검의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 생기지 않겠냐? 현문에서는 강기 자체를 이해하 여 그것을 뿜어내지만 본교의 무공은 그와 다르다. 일종의초식을 만들어 강 제로 강기를 뽑아내기에 그 위력에 비해 내공의 소모가 너무 심해. 아무리 본 교의 공력이 타파에 비해 강하다고 하지만, 그런 초식을 몇번 쓰고나서 공력 이 고갈될 정도라면 아예 안쓰는게 낫지. 그러니 네녀석도 그따위 무공에 연 연하지 말고 우선 강기에 대해 이해를 해보거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강기를 뿜어내는 헛고생을 하는 것 보다는 천강혈룡검법과 수라월강도법을 가 르쳐 줄테니 이 두가지 무공에서 강기를 뿜어내는데 따르는 차이점을 생각해 보는 것과 또 조각조각 잘라보는 것. 이 두가지를 하다보면 남들보다는 빨리 이해할 수 있겠지. 나도 원래 검만을 쓰지만 수라월강도법을 배운 이유가 두 가지를 비교해 볼 욕심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늙은 머리로는 도저히 더이상 깊이 들어가기가 힘들구나. 너는 아직 젊으니 한번 나의 꿈을 이뤄내기를 바 란다." "알겠습니다." 또다시 피와 살을 말리는 수행이 재개되었다. 묵향으로서는 어떤 목표가 생기 고 또 그 구체적인 방법이 대강이라도 나온이상 그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 려갔다. 하지만 1년... 2년... 세월이 흘러가는 가운데서도 강기에 대해서는 도저히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는 어느덧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과 수라 월강도법(修羅月剛刀法)을 9성까지 익혔지만 그나마 강기를 익히기 위한 자료 로 익히고 있는 이 두가지 무공도 10성까지 익히기도 어려웠다. 9성까지는 그 런대로 빨리 익혔지만 9성에서 10성으로 진입하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왜 자 신이 본 최고의 고수인 유백이 두가지 무공을 9성까지 밖에 익히지 못했는지 이해를 했다. 그가 너무 밤낮으로 애쓰는 것을 본 유백이 보다못해 옆에서 참 견을 했다. "9성에서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진정한 강기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검기가 약간 응축된 형태라고나 할까? 실지 강기란 못부수는 것이 없는 순수 한 파괴의 정점(頂點)이라 할 수 있지. 9성에서 벽을 향해 발사한 강기는 담 벼락을 파괴하지만 아마 실지 엄청난 힘을 가진 진짜 강기는 아마 벽에 큰 구 멍을 뚫는 대신 작은 구멍 수십개를 뚫을거야. 너도 알잖냐? 주먹으로 공력을 모아 벽을 칠때 권풍에 밀려 큰 구멍이 뚫리지만 일정한 힘을 벗어나면 오히 려 작은 구멍이 뚫리지. 대신 더욱 깊게 깊게 파고든다. 그걸 보면 이건 강기 가 아냐. 그냥 검기의 발전형이라고 봐야지. 너무 조급해할 것 없다. 너는 아 직 내공이 딸려 10성의 경지로 들어서지 못하는 것 뿐이야. 좀 더 시간을 두 고 차분히 수련을 하고 명상을 해라. 그러면 다른 방법이 생길꺼야." "알겠습니다. 가르치심 감사합니다. 그런데 유선배님 선배님께서는 제게 너무 잘해주시는군요. 그점 제가 죽는다 해도 잊지 못할 겁니다." "컬컬.... 아마 나도 늙어서 그런가봐. 옛날에는 엄하게 제자를 다스렸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게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 엄하게 할 놈이 있고 부드럽 게 할 놈이 있어. 너는 후자에 속해서 그런 것 뿐이야. 그리고 나 자신도 너 가 마지막 제자라 생각하니 약간 더 감상적이 되어가는 것 같구나...." 어느덧 묵향의 나이도 서른일곱이 되었다. 그는 문득 아침에 명상을 하며 유 백을 만난 것은 자신이 얻은 최고의 행운이란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이 죽었 다 깨어나도 얻을수 없을만큼 막대한 지식의 소유자였다. 그는 무인이며 또한 여러가지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점심과 저녘때 묵향과 대련하는 시간이나, 묵향을 암습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유백은 오전중에 수련을 끝내고 여러가지 일을 했다. 지금 묵향과 유백이 거처하는 곳 부근에는 여러가지 나무들이 심 어졌고 유백은 그중에서 매화를 특히나 좋아했다. 그리고 틈틈히 꽃들도 가꿨 고, 50세가 넘어 시작했다는 수묵화(水墨畵)도 그렸다. 그리고 밤에는 퉁소나 금(琴;거문고)도 탔다. 그러면서 틈틈이 묵향에게 그것들을 가르쳤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무인이란 무식한 칼잡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서도 약간은 가르쳐 줬는데 유백 자신의 지식이 짧아서 그런지 그렇게 깊게 까지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 외에 자신이 알고있는 몇가지 진법들도 틈틈이 교육을 시켰다. 그러던 어느날 묵향은 의문을 가지고 유백에게 물었다. "진법이란 것이 제가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것 같은데 이런 걸 배울 필요가 있나요?" 묵향의 질문을 들은 유백은 아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내가 이런놈을 잡고 가르치고 있었다니.... 이 무식한 놈아! 모르 면 잠자코 줏어들어. 진법이란 원래 가장 간단한 천(天), 지(地), 인(人)을 뜻하는 삼재진(三才陣)으로 시작되어 더욱 복잡하게 발전되어 나가는 거다. 만약 1사람을 공격하는데 무턱대고 3이서 공격하는 것 보다 어떤 일정한 법칙 을 잡고 공격하면 서로간에 같은편에게 방해를 받지않고 더욱 효과적으로 한 사람을 밀어붙일 수 있지. 이렇게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기위해 여러가지로 발전된 것이 진법이지. 하지만 이 진법을 부수는데는 방법이 있 어. 하나는 생문(生門)을 찾아 뚫고 나가는 방법인데... 이건 진법을 알고 있 다면 어느정도 실력만 되면 누구나 할 수 있지. 그렇기때문에 내가 알고있는 한 많은 진법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거야. 하지만 너처럼 무식한 녀석은 2가지 를 선택할 수 있지." "뭡니까?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 있나요?" "아주 간단하지. 들어가서 죽는거야. 진법을 깰 실력이 못되면 죽어야지... 암... 진법에 자신도 없는놈이 진 안에 왜들어가?" "그럼 또 다른 방법은요?" "무공이 극강(極剛)의 경지에 이르면 왠만한 진은 설령 사문(死門)에 들어가 도 살아나올 수 있지. 눈에 보이는 놈은 모조리 죽이는거야. 하지만 그정도의 고수가 되기는 힘들지. 아마 왠만한 진법은 그냥 파괴하려면 무림에서 20대 고수 안에 들어가야 가능할거다." "..." "극마(極魔)의 경지에 들어서면 마(魔)의 극한(極限)에서 뿜어나오는 힘에 의 지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지. 진법을 이루고 있는 왠만한 녀석들은 모두 저세상에 보낼 수 있다는 말이야. 아무리 진법이 강하다 해도 그 진법 자체도 사람이 만든 것이지. 예를들어 7명이 구성하는 것이 소북두진(小北斗陣)인데 그 북두진은 7명이 서로 도와 1명 또는 다수의 적을 한번에 공격하고 방어하 는 것이 주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야. 만약 상대가 공격하면 1명이나 또는 3명 정도가 방어하고 나머지는 모두 공격, 상대가 방어에 열중하면 모두가 다 공 격. 뭐 이런 건데.... 이때 방어하는 사람과 공격하는 사람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동료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도와 일 종의 상승효과까지 얻으므로 아주 강한 힘을 내지. 물론 상대가 이 7명을 한 번에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7명 다 죽을 수 밖에.... 하지만 그정도 실력이 안되는 상태라면 어떤 녀석이 공격하 고 어떤 녀석이 방어할지, 또 그들의 움직임이 어떨지 알고있다면 그들을 공 격해서 진법을 짜서 움직이는 걸 방해하거나 아니면 그 진법을 역이용해서 공 격할 수도 있는거야. 알겠냐? 이 무식한 놈아!" "예.... 그런데 '무식한 놈'이란 건 좀 심한 말이 아닙니까?" 유백은 묵향의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말했다. "갈(曷)! 말도 안되는 푸념하지 말고 열심히 익혀." * * * 묵향의 나이 마흔이 되었을때, 아침에 명상에 잠겨있는데 어떤 생각이 번쩍 떠오름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앞으로 피를 토했다. 이것 을 옆에서 보고있던 유백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외쳤다. "대성을 축하하네.... 이제 깨달았나?" "예. 선배님 조금 더 명상을 하고 보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명상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깨닫음을 얻고 그 엄청난 충격에 피를 토하는 경우는 정파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마교에서는 거의 없다. 하지만 유백의 경우 마도의 무공에 한계를 느끼고 정 파쪽 무공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에 대해 줏어들은 것이 많아 그렇게 외쳤던 것이다. 묵향의 명상은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묵향이 명 상을 끝낸 후 그는 애검 묵혼을 가지고 언제나 유백과 비무를 하던 뜰에 섰 다. "제가 깨달은 것입니다.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간단하게 유백에게 예를 취한 후 천천히 검을 뽑았다. 검을 뽑 아 비스듬히 들고 있는데 검에서 붉은 빛 광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걸 보 고 유백은 숨을 죽였다. 붉은 광채는 점점 커지면서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얼 마 지나지 않아 반장(半丈)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붉은 사슬과 같기도 하고 뇌 전(雷電)같기도 한것이 뻗어나갔다. 그때 나지막한 기합소리가 들리며 검이 위에서 아래로 허공을 베고 나갔다. 그러자 검에서 반월형의 붉은 색 강기(剛 氣)가 앞으로 순간적으로 뻗어 나가며 벽에 구멍을 세로로 길게 뚫었다. 다시 한번 기합소리가 들리며 이번에는 앞으로 찌르기를 한번 하자 붉은색 끈같은 것이 앞으로 뻗어나가며 벽에 작은 구멍을 하나 뚫고 지나갔다. 그것을 본 유 백은 외쳤다. "정말 대단하군! 이것이 검강이란 것인가? 노부가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진짜 검강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야. 드디어 자네 대단한 고수가 되었군." "글쎄요.... 아직도 얼떨떨 한 기분입니다. 그렇게도 검강이 되지 않더니.... 심지어는 초식으로도 만들기 어려웠는데 어제 아침에 문득 길을 잘못들고 있 다는 생각이 들더니 갑자기 강기가 뭔지 깨달아 지더군요. 검강을 뿜어내는 방법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지만 정말 그 순간은 대단히 평안하고 기분이 좋 았습니다." "껄껄... 이제 자네는 나보다도 더 고수가 되었어. 이제 나도 자네를 두고 은 퇴할 수 있겠어." "아직 선배님께 배울게 많습니다. 은퇴는 좀 더 미루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럴까.....무공에 대해서는 자네에게 가르킬 것이 없지만 딴거라면 아직도 자네보다는 내가 낫지. 정도 많이 들었으니..... 술한잔 걸직하게 내면 내 마 음을 바꿀 수도 있지...."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묵향은 최고로 속도를 내어 경공술을 펼쳐 술통을 들고왔다. 묵향과 유백이 술잔을 나누며 여태까지 하지못했던 여러가지 대화를 펼쳤다. 유백은 여태까 지 묵향을 까마득한 후배로서 묵향이 도저히 넘지못할 어떤 선을 긋고 그를 대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니, 무공을 보여준 후에는 대접이 완전히 달라졌 다. 그는 묵향을 자신의 오랜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해줬다. 그만큼 묵향의 성 취를 그는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자네의 성취가 이토록 빠르니 언젠가는 자네가 오랜 본교의 숙원을 이룩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오랜 숙원이라뇨?" "원래 무공이란 그 깊이가 끝이없어서 익히면 익힐수록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지. 어떤 이는 검술의 한계를 느끼고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자 도 있을정도로 어떤 한가지에 깊게 파고든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야. 하지만 자네는그래서는 안돼. 왜 쓸데없이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나? 지금 안되면 나 중에는 될거야. 만약 자네가 안되면 자네 제자는 해낼거고.... 자신이 익힌 모든것을 후대에 알려주면 되지. 하기야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선배도 있군...." "그 사람이 누굽니까?" "옛날 오랜 옛날 발해라는 이민족이 건설한 국가가 있었다네. 자네 혹시 아 나?" "예. 한번 들어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배웠지요. 위대한 우리 한족도 아니고 겨우 변방의 오랑캐에게 멸망한 걸 보면 별볼일 없는 국가였던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세워졌던 고구려같은 경우 아주 대단했다고 얼핏 들었 던 것 같지만요." "아니야... 자네가 잘 못 안거야. 발해란 국가는 대단한 국가지. 딴건 모르겠 지만 무공에 있어서는 대단한 나라야." "대단하다니요? 무공이 대단한 국가가 겨우 이민족에게 무너진단 말입니까?" "자네 혹시 신검대협(神劍大俠) 구휘(區揮)란 사람을 아나?" "예. 들었었습니다. 누구도 올라가지 못했던 현경(玄境)까지 올라간 고수가 아닙니까?" "맞아. 현경이라 함은 본교에서 말하는 탈마(脫魔)와 같은 경지. 그 누구도 올라가 보지 못한 곳이지. 탈마에 이르면 완전히 마(魔)에서 벗어난다고 전해 지네. 누구도 올라가 보지 못했으니 잘 모르지만 극마에 이른 사람은 좀 있으 니 그들을 보면 거의 알 수 있어. 극마의 경지 가까이만 가도 자신이 밖으로 뿜어나오는 마기의 량을 조절할 수가 있지. 자네도 우리들 끼리 있으니 잘 모 르겠지만 진짜 마도의 인물들을 만나보면 이해를 할걸세. 우리들이야 살수니 까 처음부터 마기를 밖으로 나타내지 않기 위해 특별한 교육을 받거나 아니면 아예 마공을 익히지 않지만 나머지는 그런 훈련을 받지 않거든. 참, 그런데 얘기가 잠시 샛길로 빠졌군..... 어디까지 얘기하다가 이리왔지?" "구휘에 대해....." "그래 그 구휘가 만년에 무공을 여러가지로 연구하다가 옛 발해의 무공들을 긁어모았다네. 그런다음 그것들을 모아서 북명신공(北冥神功)이라 이름붙였 지. 원래 북명(北冥)이란 것은 발해가 속해있던 지방을 말하는 거야." "그 구휘가 신공(神功)이란 말을 붙일 정도로 대단한 무공입니까?" "그렇지. 너무 대단해서 아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야." "무슨 말씀인지...." "원체 오래된 것이고, 또 국가까지 멸망해서 없어진 상태에서 여기저기서 닳 아빠진 양피지 등에 새겨진 것들을 줏어모은 것이기에 상당히 많은 부분이 사 라졌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신공(神功)은 대자연의 숨결을 흡수해 자신 의 공력을 높이고, 초 상승의 무예 경지로 올라갈 수 있는 참고서 같은 형식 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초식보다는 무에를 익히는데 필요한 마음가짐이나 조심 할 점,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무예를 익히는 것이 가장 좋은지가 일부 기록되 어있다고 하더군. 많은 무림인이 북명신공을 익혔으나 너무나 난해하고, 초식 조차 거의 없으며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인데다 설상가상으로 완전한 내용이 아니라 상당 부분이 상실된 채였기 때문에 익힌 사람은 한명도 없다네." "아무도 못익힌다면 그건 휴지나 다름없쟎습니까?" "아니지. 이 북명신공에서 파생된 무공이 몇개 있는데 자네도 들어봤을거야. 흡성대법, 화염신공, 뇌전신공이 그것들이라네. 이중에서도 흡성대법은 그렇 게 대단한 것이 못되지. 초기에 이게 개발되었을때는 많은 사람들이 익혔었는 데 뒷탈이 큰덕분에 요즘은 거의 안익혀. 이 흡성대법은 화염신공에서 분화되 어 나왔지. 화염신공 또한 대단한 무공이지만 많은 문제점을 안고있어 이게 본교로 흘러든 후 흡성대법으로 발전했네. 하지만 발전형인데도 흡성대법은 화염신공보다 못하지. 너무나도 진기의 흡수와 그 관리에만 매달리다 보니 본 래의 공격력이 없어졌어. 그때문에 단순히 그냥 내공흡수쪽으로만 더욱 발전 된거야. 그리고 뇌전신공(雷電神功)이 있는데 그 파괴력은 엄청나다고 그러더 군. 하지만 익히기가 대단히 힘든 무공이야. 이건 북명신공의 파괴력만을 발 전시킨 무공인데 엄청난 내공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익히기가 힘들고 또한 내 력 소모가 심해서 거의 안익히지. 이것도 본교에 있는데 상층부 고수들은 익 힌다는 소문이 들리더군." "상층부 고수들이 익힌다면 대단한 무공이겠군요." "아니야. 모두다 북명신공의 발전형..... 말이 발전형이지 내가 보기에는 퇴 보형이야. 그러니 자네는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발해의 문자를 익히게나. 내 내일부터 그에대한 서적을 구해줄테니 익히라구. 북명신공은 본교에 보관되어 있어. 아주 상층부 고수들만이 그 책을 볼 수 있다고 하더군." "그런데 언젠가 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책을 보기위해 글을 새로 익힌다 는 것도 좀 우습군요." "헛소리 하지말고 익혀. 그리고 자네 다음에 무림에 나가면 여자를 조심하게 나. 여자는 무공을 익히는데 있어 천적이야. 시간을 좀먹지. 나중에 나처럼 나이가 들어서 여자를 탐해도 늦지 않다구." "히히... 선배님의 나이가 여든이 넘으셨는데 아직도 여자 생각을 하십니까?" "헛소리 하지말고 조심해. 그리고 혹시나 외부에 나갈때 적이다 싶으면 무조 건 뜸들이지 말고 해치우라구. 괜히 시간 끌다가 자네의 실력이 탄로나면 상 대도 조심하게 되니까, 처음부터 강공으로 나가는게 최고지. 그리고 증거는 절대 남기지 말라구. 자네의 살인 장면을 본 사람은 모두 죽여버려. 알겠나? 이건 네 스승으로의 명령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쓸데없이 손속에 인정을 두다가 죽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있어. 그러니 자네도 자네보다 고수에게 죽는다면 별문제지만 자네보다 하수에게 죽는다는 건 내 체면이 용서하지 못해." 고수(高手)의 출현(出現) 그로부터 3년간 묵향은 별 일 없이 평안한 생활을 보냈다. 그는 그동안 끊임 없이 강기(剛氣)를 수련했고 드디어는 완전히 강기를 이해하게 됐다. 그는 적 수공권(赤手空拳)으로도 강기를 뿜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발해의 문자 도 틈틈히 익혔다. 그러면서도 시간을 내어 유백으로 부터 여러가지 잡기들을 배워 자신의 교양을 채워나갔다. 끊임없이 무식한 놈이라는 말을 들으며.....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한명이 찾아왔다. 그는 상당한 고수로서 10장 내에 다 가오기 전까지 기척을 알아챌 수 없었다. 그는 정중히 유백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유백 어르신" "오... 자네가 왠일인가? 이봐! 향아, 이 어르신은 장양(張楊)이란 분이다. 인사해라." "안녕하십니까? 후배, 묵향이라 합니다." "상당한 고수로군. 유선배님 확실히 후배 교육시키는 실력은 대단하십니다. 아마 이번이 마지막 제자겠군요. 그런데 왜 한명만 교육시키십니까? 여러명을 시키면 본교로서도 더욱 이익일텐데...." "글쎄... 나는 이녀석만 교육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네.... 나도나이가 있으니 봐준거겠지. 덕분에 편하게 교육시켰어."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묵향에게 볼일이 있어섭니다." "묵향에게?" "예. 이것 받게나." 그러면서 장양은 묵향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서신을 뜯어보니 낙양에 있는 분 타에 가서 일을 도와주라고 써져 있었다. 그리고 부분타주로 임명한다는 말과 함께 서신 안에는 부분타주의 명패와 부분타주로서의 부임 서류가 들어있었 다. 장양은 옆에서 힐끗 보더니 부분타주의 명패를 보고 축하를 해줬다. "묵형제 축하하네... 자네 출세가 빠르구만, 벌써 부분타주라니. 그것도 낙양 은 상당히 중요한 곳이라 꽤 많은 교도(敎徒)들이 있는 곳이라네. 요즘 들어 서 그곳에 꽤 많은 고수들이 파견되고 있어. 아마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 질지도 모르니 가서 조심하게나." "감사합니다." "그럼 언제 떠날려나?" "오늘은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출발 준비를 하고 내일 떠나려고 합니다. 서신 에는 언제 출발하라는 지시가 없는 걸 보니 화급을 요하는 것 같지는 않군 요." "그럼 내 위에는 그렇게 전해 두겠네. 그럼 수고하네나. 그리고 선배님도 안 녕히 계십시오." 그날 묵향은 여행준비를 간단히 마치고 늦은 시각까지 유백과 술을 마시며 이 별의 슬픔을 달랬다. 그런후 그는 부임지를 향해 다음날 새벽에 출발했다. * * * 묵향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낙양쪽으로 가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그는 될수있 으면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가 검을 뽑은것은 시시한 산적들 5 명이 길을 막았을때 뿐이었다. 그는 유백의 가르침 대로 그들의 목을 단칼에 잘라 죽였다. 그런다음 유유히 갈길을 재촉했다. 그가 행로에 오른지도 벌써 13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날 저녘 그는 약간 이른시간이기는 했지만 여관을 잡아 투숙했다. 지금 떠난다면 노숙을 할게 뻔했으므로 그는 여관을 잡아 투 숙한 다음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저녘시간이 되자 그는 방에서 나와 1층에 있 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쭉 둘러봤지 만 자리가 보이지 않자, 위로 올라갔다가 나중에 내려올까 하는 생각도 했지 만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줏어듣는 것도 약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점원을 불 렀다. "부르셨습니까요,나리" "자리가 있나?" "보시다시피 자리가 없는뎁쇼. 혹시 합석이라도 상관없습니까요?" "부탁하네." 그러자 점원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손님들에게 의사타진을 하더니 곧이어 묵향이 있는 곳으로 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나리" 묵향이 간 자리에는 나이 많은 남자1명과 젊은 남자 1명이 앉아 있었다. 본능 적으로 묵향은 그 젊은이가 여자임을 알아챘다. 둘다 패검을 차고 있는 것으 로 보아 무림인 인 것이 확실했다. 묵향 또한 짧은 검을 차고 있기에 점원은 무림인들 끼리 앉게 한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은 칼을 차고있는 무림인들과 합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때문이다. 그들은 묵향이 다가오자 묵향을 힐끗 처다봤다. 그들은 눈은 묵향이 비스듬히 허리 뒷쪽으로 차고있는 검에 순간적으로 머물렀다가 다시 묵향을 바라봤다. 묵향의 검은 일반적으로 사용 하는 도(刀)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해있었다. 묵향이 강기를 익히자 유백의 조 언으로 묵혼의 손잡이를 약간 줄여 6치로 바꾼 것이다. 그러니 딴 사람들은 그의 반월형으로 휘어진 검집을 보고 약간 짧은 도(刀)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런 모양의 도를 사용하는 사람 중에 유명한 도객이 없었으 므로 그들은 내심 긴장을 풀며 묵향을 바라봤다. 묵향은 그들의 눈길이 자신 에게 향하자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자리를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나이많은 남자가 답례를 했다. "뭘요. 사해가 동포라 했으니 어려울때 도와야지요. 앉으시오." "예. 이봐, 오리탕 하고 만두 약간, 그리고 죽엽청을 주게나." "예, 나리" 묵향은 그의 앞에 놓인 녹차를 마시며 주변에서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 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 오가는 대화는 그에게 있어 쓸모없는 것이었다. 이때 나이많은 사람이 물었다. "젊은이는 어디로 가는가?" "예, 천양으로 갑니다." "오오.... 천양에는 어쩐 일로 가는가?" "예, 천일루(泉溢樓)에 들를까 해서요." "호오. 이번이 무림에 초출이신 모양이군." "하하.... 몇번 무림에 나온적은 있는데 그때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무림초 출은 꼭 들른다는 천일루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이 좀 여유가 있어 한번 가보려고 합니다." "그리로 가는 길이면 노부와 같이 갑시다. 길동무도 될것이고... 저 아이도 이번이 초출이라 그곳에 가서 노부가 한턱 낼려고 하는데 젊은이의 의향은 어 떻소?" "좋지요. 저는 묵향(墨香)이라 합니다. 선배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 지...." "묵향? 특이한 이름이군. 노부는...... 그냥 노백(老伯;그냥 늙은이라는 뜻) 이라 부르구려. 그리고 저아이는 무령(武玲)이라 부른다네." 묵향은 이 40대 초반 혹은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이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둘러댄다는 것을 눈치챘다. 노백이라 함은 일가를 이룬 우두머리 를 말함이니 무림의 선배임은 확실하고..... 또 저 젊은이의 이름이 령(玲)이 니 여인임이 분명했다. 노백은 그 기도로 볼때 상당한 고수임이 확실했으므로 약간 꺼림직한 면도 있었으나, 그는 자신도 신분을 알려줄 필요가 없기에 이 들과 그냥 어울리기로 생각하고 이것저것 쓸데없는 말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이 근처에 천령산이 경치가 좋으니 쪽으로 둘러서 구경하고 가 요." "자네는 어떤가? 시간이 나겠나?" "저도 이 근처로는 와본적이 없으니 선배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알겠네. 그런데 자네의 사문(師門)이 어떻게 되나?" "하하...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선배님도 안밝히시는데..... 후배 또한 밝 힐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밝히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대단하군." "뭐가 대단하다는 거에요? 할아버지" "소협의 스승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정도의 기재를 배출하다니... 대단 한 명문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러자 무령은 깜짝 놀란듯이 한번 자세히 묵향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칭찬하시기는 이번이 처음이네 요." "아마 자네가무림의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최고인 것 같군..... 노부와 겨룬 다고 해도 노부의 생각으로는 이기기 힘들정도야. 소협은 나이가 어떻게 되 나?" "소협이랄 것도 없습니다. 이제 마흔 셋입니다." "이런... 내가 착각을 해도 유분수지... 미안하구만 자네 얼굴을 보니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 정도라 생각해서 실수를 했네. 주안술(珠顔術)을 익혔나?" 묵향은 주안술을 익힌 적은 없지만 그의 높은 공력과 산골에서 적막하게 생활 하다 보니 감정에 치우칠 일이 거의 없어 아주 젊게 보인 것이다. 하지만 묵 향은 자신의 실력이 너무 상대에게 노출된다는 생각에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 다. "예. 젊었을때부터 주안술을 익혔고, 산골에서 적막하게 생활하다 보니 그렇 게 나이를 많이 먹지 않은 것 같습니다." "흠.... 주안술이란 것이 대단한 무공이긴 하지만 너무 그것에 빠져들지는 말 게나. 외모로는 젊게 보이지만 실지로는 공력의 소모가 따르고, 또 자신도 근 골이 늙어가는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으니 될수 있으면 사용하지 않는게 좋 지." "약간의 공력 소모야 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자식은 있나?" "없습니다. 동자공(童子功)을 익힌 덕분에 결혼은 꿈도 못꾸죠." 묵향이 천연덕 스럽게 거짓말을 하자 노백이 약간 안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동자공은 정말 익힐 게 못되는데, 자네같은 젊은이가 후손이 끊기니 정말 안 타까운 노릇이군." 그러자 옆에서 듣고있던 무령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할아버지 동자공이 뭐에요? 대단한 무공인가요?" 그러자 노백은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 손녀에게 동자공을 설명해 주려고 생각 을 해보니 막막해서 약간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동자공은 공력 상승이 큰 심법이지만 약점이 많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익 히지 않는단다." "약점이 뭔데요?" "그건 험험....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될테니 지금 여기서 묻지 말아라. 소협과 얘기하고 있는데 왜 자꾸 끼어드냐?" "흥....." 노백의 퉁명스러운 대답을 듣자 무령은 낮게 콧방귀를 뀌면서 외면했다. 아마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었다. "자네는 동자공 때문에 그렇게 나이가 적게 들어보이는 모양이군. 하지만 동 자공이 깨지면 대단히 위험하니 언제나 조심하는 게 좋을걸쎄." "예." 묵향은 노백과 함께 술과 음식을 들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자리에 서 일어났다. 다음날 아침 일행은 출발하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구경을 했 다. 노백은 동행이 된지 3일 후 무령이 자신의 손녀라는 것을 소개했다. 강호 에는 여러가지 거친 일들이 많기에 변장을 하고 같이 여행을 한다는 말이었 다. 하지만 묵향으로서는 그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실지 노 백은 상당한 수준의 고수였고, 또 손녀인 무령 역시 그런대로 실력이 있어 자 신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자신들의 정체를 숨 기고 여행을 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들과의 동행이 시작된지 15일이 지나자 일행은 천일루에 도착했다. 천일루 는 3층이나 되는 거대한 주루로, 강변에 세워져 있었으며 주변의 경관이 빼어 났다. 역시나 이곳에는 무기를 휴대한 강호인들이 많이 보였는데 대부분이 선 배인 듯한 사람이 같이 와서 초출을 축하하며 여러가지 주의사항이나 강호의 정세 등을 일러주며 술을 권하고 있었다. 일행은 3층에는 자리가 없어 2층에 자리를 잡았다. 2층에서 보는 주변의 경치도 대단히 아름다웠다. 그들은 몇가 지 안주와 술을 시키고는 둘러앉았다. "이곳은 정말 경치가 아름다워요. 할아버지." "아무렴. 그러니 이곳에 강호인들 말고도 많은 일반인들이 경치구경을 하러 오는 거란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갑자기 옆의 탁자에서 시비가 붙었다. 옆의 탁자에는 3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가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 옆쪽에 앉았던 남자가 시비를 건 것이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여기서 유명한 한서삼귀(寒 三鬼) 나으리들을 뵙 다니.. 너희들 같은 사파(邪派) 놈들이 어딘줄 알고 여기로 굴러왔냐?" 이 말을 듣고 묵향이 보니 저쪽 탁자에 앉아있는 자들은 8명으로 이쪽보다 개 개인의 무공이 강한 것이 확실했다. 5명의 남녀가 8명의 남자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묵향은 이것을 그대로 놔두고 모른척 할려고 처음에는 생 각을 했으나..... 사파의 마음은 사파가 안다고 외면하기는 너무나 힘이 들었 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대신에 앞에 앉은 노백에게 부탁하기 로 마음을 먹었다. "노백선배, 저들을 좀 도와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흠흠.... 내 도와주기 어려운 것은 아니나.... 좀 사정이 있어 나서기가 힘 드네. 저따위 녀석들이 정파라고 깝죽거리다니, 세상이 말세로군." "그래도 선배께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도와줄 순 있잖습니까?" "힘들어. 저 세녀석은 표안나게 제압할 수 있지만 저 5명은 얘기가 다르지. 지금 저들은 자칭 무산오웅(巫山五雄)이라고 칭하는 녀석들인데 모두 상당한 무공실력을 자랑하기 때문에 행패가 심하지만 그래도 누구 하나 나서서 저들 을 벌할 사람이 없는 형편이야. 노부도 저들과 맞붙는다면 200초가 넘어야 결 판이 날텐데... 거기다 저들이 아무리 문파에서 따돌림을 받는 녀석들이라 하 지만 저들을 죽이면 무당파에서 묵인을 할지 그것도 미지수고... 현재 구파일 방(九派一 ) 중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나타내는 것은 무당이니 아무도 무당 과 원수를 맺을려고 하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 자연 저녀석들이 더 설치는거 겠지. 노부로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군." 잠시 묵향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걸 이대로 모른체 넘기기는 힘들었다. 따끔한 맛을 보여놔야지 사파에 대한 정파의 푸대접이 약간은 식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시비를 거는 녀석들중의 한명에게 말을 건넸다. "어이, 형씨..." 새파란 녀석이 불러대는 것을 보고 무산오웅중의 한명이 가당치도 않다는 표 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나를 불렀냐?" "그렇소. 너무하는 것이 아니오? 근처에 많은 손님들이 있는데 좀 조용히 해 주시는게 어떻겠소?" "이런 빌어먹을 녀석이..... 헛소리 하지말고 어르신들 하는 일을 닥치고 구 경이나 하거라." "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러시오. 그냥 조용히 있는 사람들에게 시 비를 걸 필요가 있소?" "무슨 헛소리. 모르면 닥치고나 있어. 이녀석들은 냄새나는 사파의 녀석들이 란 말이다. 이런 자식들이 옆에 앉아 있으면 구린내가 나서 음식이 목구멍에 내려가질 않는다구. 네녀석은 그런것 신경을 쓰지 않거든 닥치고 앞에놓인 음 식이나 퍼먹고 꺼져." "흠.... 나도 사파(邪派)니 참견을 안할 수가 없어서 그러오." "흐흐흐.... 그래? 그렇다면 네녀석도 이곳에서 꺼져줘야 겠군." 묵향이 사파라는 말을 하자 앞에 앉은 노백과 무령의 표정이 약간 바뀌었다. 그것을 묵향은 놓치지 않고 봤다. 아마 그들도 사파에 대해 약간의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할 수 없군. 실력행사를 하고싶지는 않았는데...." "뭐? 네녀석이 실력행사? 흐흐흐 죽을려고 환장을 했군." 그러면서 모두들 각자 가지고있는 무기들을 뽑았다. 그걸 보면서 묵향은 주위 를 향해 외쳤다. "여기 이 녀석들과 상관없는 사람들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오. 공연히 목숨 을 날리지 말고.... 만약 셋을 셀때까지 남아있는 자들이 있다면 같은 패거리 로 생각하고 공격하겠소. 혹시 사파의 분들이 여기 있다면 같이 물러나시오. 동도를 같이 저세상으로 보내기는 싫소.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시오." 그의 내공이 실린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섬주섬 일 어났다. 4개의 탁자에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 무산오웅과 그 옆 자리에 앉은 6명의 남자들, 그리고 사파인 당사자들, 동행이 아직 남아 있었다. 무산 오웅은 그의 내력이 실린 목소리를 듣고 약간 움찔 하는 것 같았지만 다수를 믿고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도 상관없는 자들이 남아있 었으므로 묵향은 그들에게 충고했다. "노백 선배님과 무령 소저도 잠시 나가주십시오. 같이 싸울게 아니라면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쪽에 있는 다섯 분도 좀 나가주 시오. 당신들이 있어봤자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이오." 그가 약간 심하게 말을 하자 5명의 흑도(黑道=邪派)인들은 약간 노려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노백과 무령도 밖으로 나갔다. 무산오웅 패거리들도 묵향과 같이 있던 2사람이 나가자 상대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므로 그들이 나갈때까지 손을 쓰지않고 기다렸다. 그들이 나가자 14명의 거한들은 묵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묵혼이 뽑혔다. 묵향은 노백에게 들은 말도 있고 또 유백의 당부도 있었기에 처음부터 강공(强攻)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묵향이 검을 뽑자마자 주위로 달려들던 거한들의 몸이 강기의 회오리 속에 말 려 들어갔다. 그러자 그중의 한명이 다급한 신음소리를 질렀다. "이럴수가....모두들 조심해라 검....." 챙챙챙..... 그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고 병기가 부딪치는 소음속에서 끊어졌다. 그리 고는 거의 동시에 14명의 몸이 토막이 났다. 사방에는 두토막이 난 그들의 무 기들과 토막난 몸체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하나같이 그들의 눈은 경악과 불 신을 말하고 있었다. 죽어가는 그들 자신도 도저히 자신들의 죽음을 믿지 못 하는 듯 했다. 묵향은 천천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다음 밖으로 몸을 날렸 다. 그런다음 마굿간으로 달려가서 자신의 말을 탄 다음 낙양으로 달려갔다. 더이상 이곳에 남아있어봤자 좋을것이 없었다. 재수없으면 관원들이 뒤쫓을 수도 있었다. 원래 대부분의 경우 관원들이 무림의 일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무림인이 묵향을 고발하면 귀찮은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체 하면 할수록 그의 얼굴을 더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게 되어 무당파와 시비가 붙 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2층이 조용하자 자리를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올라왔다. 그들이 본 것은 14구의 시체들로서 아주 깨끗하게 뼈채로 토막이 나 그들을 벤 사람의 실력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손님의 상당수가 무림인이었기때문에 그들은 시체와 무기 조각들을 보면서 이들이 어떤 무공에 의해 주살되었는지 각자 추리를 하기 시 작했다. 그 중에는 노백과 무령도 있었다. 노령은 몸통이 갈라진 시체의 잘라 진 부분을 주의깊게 보면서 손녀에게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 아주 깨끗이 잘렸어. 여기를 봐라. 그녀석의 섬세하 면서도 비범한 솜씨가 보이지 않냐?" 그러자 손녀는 역겹다는 표정으로 찡그리며 대꾸했다. "무슨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보기에는 정말 끔찍해요. 할아버지. 무기들이 이정도로 토막이 나 있는 걸로 봐서 아마 보도(寶刀)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 요?" 그러자 노백은 잘려진 무기 조각을 들고 손녀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그런 것 같지도 않구나. 이 잘라진 귀두도(鬼頭刀)을 봐라. 아주 두텁고 큼 직한게 아마 30근(15Kg)은 족히 나가는 중병(重兵)일거야. 여기를 봐라, 아주 깨끗하게 잘려 나갔잖아. 이건 일격에 두부썰듯 잘랐다는 말이지. 거기다 도 신(刀身)이 은은한 보라색을 띈걸 보니 합금으로 만든 것 같은데..... 거기다 저 철봉(鐵棒)을 봐라. 저것도 합금으로 만든거야. 약간 검붉은 색을 내잖냐? 저것도 일격에 토막이 났어. 이것들을 그녀석이 가지고있는 얄팍한 도(刀)로 는 아무리 보도(寶刀)라 해도 일격에 토막내긴 힘들다. 이건 무공에 의해... 그러니까 십중팔구 강기(剛氣)에 의해 끊어져 나갔다고 봐야 할거야. 거기에 모든 녀석들이 모두 일검에 죽었어. 어떤 상승도법(上昇刀法)의 초식을 사용 한 것이 아냐. 그냥 벤거야. 그러면서도 도강을 뿜어냈다면 이건 대단한 고수 (高手)다. 사람과 무기는 토막이 났으되 루의 기둥이나 벽에는 이상이 없을 정도로 강기를 잘 제어한다면 혹시 그녀석이 말로는 사파(邪派)라고 했지만 현문(泫門;도가의 제자들을 통털어 현문이라고 부름.)의 제자가 아닌지 모르 겠구나. 현문의 제자들 만이 이정도의 강기를 수련할 수 있지. 나도 꽤 안목 이 높다고 자신하며 그녀석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보 니 노부가 오히려 과소평가 했구나." "그렇다고 꼭 현문의 제자일 가능성은 없잖아요. 혈마(血魔)의 경우에도 사파 의 인물인데도 강기를 사용하잖아요?" "그렇군.. 혈마의 제자일 수도 있겠어. 하지만 혈마가 직접 한다고 해도 이정 도로 깨끗하게는 처리하기 힘들 걸... 직접 구석에서 구경을 해두는건데.... 노부의 생각이 짧았어. 그녀석이 이길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 리고 상승의 무공을 사용해서 끝을 낼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강기(剛氣)라는 게 그렇게도 대단한 거에요?" "아무렴. 강기를 뿜어낼 수 있는 고수는 몇 되지 않아. 설마 했는데 이녀석은 벌써 화경(化境)에 들어간 고수로구나. 화경에 들어 삼화취정(三化聚頂) 오기 조원(五氣造元)의 경지에 들지 않고서는 절대로 임의로 강기를 만들어 낼 수 없단다. 그렇지 않고 검법에 의해 강기를 만들 수도 있는데.... 청성파의 청 월검법(靑月劍法)이라든지 남해파가 자랑하는 청룡천승검법(靑龍天昇劍法) 같 이 억지로 강기를 만드는 검법과는 차원이 다르지. 그건 내공만 많이 쌓으면 시전이 가능하지만 내력의 소모가 심해 별로 경제적인 검술이 아니다. 반면 정반칠식(正反七式)같은 경우 내력의 소모가 심하다는 단점은 해결한 뛰어난 검법이지만 아주 정밀한 공격이 가능한 대신 위력이 제한적이라 적에게 큰 타 격을 입히기가 힘들어." "혹시 이게 정반칠식이 아닌가요?" "그건 아니다. 현재 이들의 모양을 보아하니 거의 2초의 검법에 절단났어. 앞 쪽의 무리들을 먼저 벤 다음에 순간적으로 뒤로 돌아서서 뒷쪽의 나머지들을 베어버린 거지. 초식도 뭣도, 아무것도 아냐. 그리고 아무리 정반칠식이라도 이정도로 강력한 위력은 없어. 이정도의 합금강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을 토막 내는게 어디 쉬운 일인줄 아냐? 믿어지지 않는다면 네 검을 뽑아서 내가 들고 있는 도를 한번 쳐봐라." 그러면서 노백은 자신이 들고있던 귀두도를 옆으로 들어올려 손녀가 치기쉽게 만들어주었다. 손녀는 얄팍한 2척 반 길이의 검을 뽑았는데 싸늘한 예기(銳 氣)를 뿜어내는 것이 평범한 검은 아닌 것 같았다. 손녀는 모진 기합소리와 함께 귀두도의 토막을 내려쳤다. "얍" 챙----! 무령의 검과 부딪친 귀두도의 토막에서는 불꽃이 일어나면서 약간의 흠집이 만들어졌다. 이걸로 보아 소녀의 검이 상당한 보검(寶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손이 얼얼해질 정도로 힘껏 내려쳤는데도 약간의 흠집만이 만 들어진 것을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정말 단단하군요." "아무렴. 내 전에도 말했지만 이들도 보통 잡졸들이 아냐. 무산오협이란 녀석 들하고 저쪽에 뻗어있는 세녀석은 상당한 고수라서 노부도 그들 전부를 제압 하려면 500초는 걸린다구.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일을 무당에서 어떻게 처리할지 그것이 문제로구나. 피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도 이걸 보고 하늘위에 하늘이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까불지 만 말고 무공에 힘 쓰도록 해라." 부임(赴任) 묵향은 낙양에 들어섰다. 낙양은 오랜 옛날 수도였던 도시로, 지금도 이 근방 의 교통, 상업, 문화, 군사의 중심지로서 황제가 거하는 중경(中京)으로의 동 쪽 관문이었다. 낙양은 정북원수부(正北元帥府)가 위치하고 있으며 정북 원수 부는 휘하의 20만 정병(精兵)을 이용해 낙양 외곽 수비와 몽고족들에 대한 국 경수비를 하고있었다. 그리고 중경에는 4명의 왕중 한명인 영양왕(英揚王)의 별장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묵향은 우선 낙양성을 약간 구경하고 분타로 가기로 작심한 후 성안으로 들어갔다. 남문을 통해 들어가면서 보니 성문을 지키는 수비병들의 보였다. 수비병의 복장은 그가 보통 보아오던 각 관청에 소속되어 민생치안을 담당하며 유사시에나 출동하는 향방군(鄕防軍;지방군)과 달리 전투를 전담하는 어림군(御臨軍;중앙군)이라 그런지 눈초리가 매서웠고 잘 발달된 근육이 상당한 훈련을 받은 정병(精兵)들임을 무언중에 나타내고 있었다. 어림군(御臨軍)은 향방군과는 달리 각 장군들이 지휘하며, 순전히 전투를 위 해 존재하는 군대다. 이들은 국경을 위시하여 각 지방의 중요 거점, 수도 외 곽을 방위하기 위해서 주둔한다. 어림군은 황제가 통솔하는 중앙정부의 명령 만을 받으며 그 수는 112만에 달한다. 어림군 안에는 10만 정도의 직업군인들 로 이루어진 군대와 5만 정도의 외인군(外人軍;용병)들도 있으며 그 전투력은 통상의 어림군보다 강하다. 어림군은 각 지방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들 이나 변경의 요새들에 주둔한다. 그 외에 이이제이(以夷除夷;오랑캐로서 오랑 캐를 제압한다.)의 원칙에 따라 교묘한 외교정책으로 국경을 접한 오랑캐들을 적절히 다스려 그들이 연합하지 않고 서로 다투도록 만들어, 오랑캐들의 세력 이 강대해지는 것을 억제하고 있었다. 어림군의 최고 계급은 원수, 대장군, 상장군, 장군의 4계급으로 구분되며 5명 의 원수가 각각 20만명씩의 어림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대규 모 전쟁이 벌어지면 그 지역의 향방군과 대비군(對備軍;예비군 - 각 관청에 소속되며 농한기에만 군사훈련을 받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출동하게 된다.), 타 지역에서의 지원군을 통괄 지휘하게 되므로 어떤때는 100만에 가까운 군세 를 1명의 원수가 지휘하기도 한다. 대원수(大元帥)란 직책도 있긴 하기만 통 합된 작전을 위해 전시(戰時)에나 직분이 생기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거의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다음 그가 늙어서 은퇴하면 후임 자를 뽑지 않기에 평상시에 대원수란 직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황제가 아닌 다른 한사람에게 군권(軍權)을 집중하면 그만큼 위험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는 낙양성을 구경한 다음 낙양성에서 나와 낙양성 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낙양의 서쪽 외곽에 천령원(天領院)이라는 큰 장원이 있다. 이 천령원은 부근 에 상당한 면적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모든 농토를 소작농에게 대여하 고 있었다. 천령원의 주인인 방대인(龐大人)은 그런대로 소작농에게 후한 편 이라 부근의 주민들에게 평이 좋았다. 그리고 방대인은 엄청난 자금력으로 주 변의 상권의 3할을 잡고 있었으며 많은 장인(匠人)들을 고용해 여러가지 상품 을 만들어 짭짤한 재미를 보고있는 위인이었다. 근래에는 천령표국(天領慓局) 까지 만들어 부근의 물품이나 군수물자(軍需物資) 수송사업에도 참여해 상당 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뒷구멍으로는 전장이나 도박장, 주루(酒 樓) 등을 만들어 고리대금업 등 약간 불법적인 사업을 하여 방대한 돈을 긁어 모았다. 묵향은 천령원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며 다가갔다. 그가 다가서자 정문을 지 키던 호위무사가 그를 제지시켰다. "멈추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서 오셨습니까?" 호위무사의 눈초리나 분위기와는 달리 그의 말은 상당히 정중했다. 아마 손님 접대에 대해서 상당히 훈련을 받은 친구인 모양이다. 묵향은 호위무사에게 말 했다. "방대인을 뵈올려고 왔습니다." "사전에 약속이 있으십니까?" "예. 대산(大山)에서 왔다고 하시면 아실겁니다." 무사는 '대산'이라는 말을 듣고 허겁지겁 안으로 통보를 했다. 대산이라 하면 마교의 본타가 있는 십만대산(十萬大山)이 아니겠는가? 봉우리가 10만개나 되 지는 않지만 많은 봉우리를 가진, 절정의 산악에 마교가 뿌리를 내렸고 십만 대산이라 하면 왠만한 멍청이가 아니면 '마교'를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험악한 산세와 그 산세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요새들에 힘입어 그 오랜 마교의 전통이 지켜져 내려왔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갔던 무사는 쫓아와서 묵향에게 말했다. "고삐를 이리 주시고 안으로 드십시오. 오서오십시오. 방대인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는 서둘러 안에있는 하인을 불러 묵향을 안내해 주기를 부탁하고, 또 다른 하인을 불러 말을 마굿간으로 가져가서 정성껏 돌볼것을 지시했다. 그가 하인 에게 호들갑을 떨고있는 것을 보고 묵향이 보다못해 말했다. "그 말은 내가 아끼는 애마도 아니고 그냥 길을 떠나기 위해 구입한 말이야. 그러니 그렇게 신경쓸 필요는 없네. 말에있는 짐은 나중에 내방으로 보내주게 나. 그럼 수고하게...." "알겠습니다. 대인" 방대인은 들어서는 묵향을 상당히 반겼다. "어서 오시게. 기다리고 있었네." "안녕하십니까? 소생은 묵향이라 합니다. 주위를 좀 물리쳐 주실 수 있겠는지 요?" 그의 말을 듣자 방대인은 말했다. "취월아. 차를 빨리 가져오너라. 잠시만 기다리시게나. 차를 내온 후에 같이 얘기를 나누기로 하지" 묵향과 방대인은 차가 나올때까지 여행에서 있었던 일이나 기타 별 쓸데없는 한담으로 시간을 죽였다. 일단 차를 하녀가 가져오자 그는 하녀에게 일렀다. "손님과 조용히 할 말이 있으니 주위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라." "예, 나으리" 취월이 나가자 묵향이 입을 열었다. "총단에 왔습니다. 여기 영패와 부임서류가 있습니다." 방대인은 묵향이 내미는 서류와 영패를 보고 난 후 그에게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본타에서는 한가지 사업을 새로이 시작했소. 표국(慓局)을 개설했는 데 이 표국 사업에 본교의 상층부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계시는 중요한 사업이오. 자네는 혹시 표국 사업에 대해 좀 아는 게 있나?" "표국에 대해서, 아니 일체의 상행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검술 뿐이죠." "호.... 자네의 말을 듣고보니 큰 힘이 되는군. 표물운송 사업이란게 원래가 신용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보니, 우선 맏은 물건을 안전하고 신속하게 원하는 장소로 보내줘야 한단 말일쎄. 그런데 곳곳의 깊은 산중에는 산적이나 도적들 도 많고.... 그리고 이곳은 약간 변방이기때문에 치안이 상대적으로 약한 지 역이라, 이번에 총단에 좀 실력있는 고수들을 보내달라고 했지. 얼마 전에도 30여명 정도 도착했는데... 영 내 마음에는 차지 않더군. 그래 자네 나이는 어떻게 되나? 그리고 그전에 한 일은 뭐고?" "이제 마흔 셋입니다. 살수로서 흑살대(黑殺隊)에서 일하다가 20년 전에 검수 로 뽑혀 계속 교육을 받았습니다. 20년만에 세상에 나왔으니 세상사에 어두운 편이라 잘 부탁드립니다." 흑살대라는 말이 나오자 거드름을 약간 피우던 방대인 나으리의 안색이 확 변 했다. 흑살대라면 내총관 직속의 암살대다. 뛰어난 인재들만을 보유하고 있었 고 그들의 능력은 엄청나다는 소문을 약간이나마 듣고 있었던 것이다. "흐.... 흑살대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흑살대에에서 무슨 일을 했나?" "1급 살수로서 3년 정도 일했습니다." "1급 살수...." 그러면서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을 꺼내어 닦았다. 그런 후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더니 말을 이었다. "20년 전에 1급 살수... 셨다면... 대단하시군요. 허허... 몰라뵙고 실수를 저질렀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방대인은 묵향으로 부터 그렇게 대단한 기도가 느껴지지 않자, 총단에서 보내 온 하급무사나 아니면 행정쪽에 뛰어난 인물인줄 알고 처음에는 수하를 다루 듯 거드름을 피우다가 묵향의 신상내력을 알고난후에는 가슴이 철렁내려앉았 다. 표물의 안전한 운송을 위해 고수를 원하긴 했지만 너무 강한 고수가 온 것이다. 20년 전에 1급 살수였다면..... 끅! 그 뒤는 생각 안해봐도 알만하 다. 마교란 본래 무공의 고하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는 단체다. 그렇기에 그에 게는 더욱 조바심이 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중 다행인 것은 이자가 상행 위에는 거의 백치나 다름없는 순수 무골(武骨)이라는 점이다. 아마 그때문에 그에게 부타주의 직위를 맡겨 이곳으로 보낸 모양이다. 그리고 본타에서 직접 온 인물인 만큼 자신에 대한 감시자의 임무도 약간은 띠고 있을거라는 생각에 방대인은 이 평범한 옷을 입고 검은색 반월형의 도(刀)를 차고있는 녀석에게 식은땀이 날만큼 조심에 조심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아마 본타로 돌아간다 면 자신의 바로 윗자리도 아닌 한참 윗자리에 포진할 것이 뻔한 이녀석에게 잘 대해주고 좋은 인상을 주면 나중에 자신의 꿈인 총단으로의 승진에 보탬이 될지도 모르고 또 다음에 유력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이라는 계산도 작용했다. "표국은 요 근래에 시작해서 꽤 장사가 잘되는 관계로 여기저기에 새로 만들 어놓은 분점(分店)들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흩어져있는 많은 고수들에 대한 통제도 문제고.... 또 제가 벌여놓은 많은 일들도 있어 직접적으로 표국을 운 영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에 총단과 분타들에서 50여명의 고수들이 새로이 배 치되어왔지만 그래도 역부족이죠. 아무래도 대규모의 표물 운송에는 힘이 붙 여 뛰어난 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습지요. 그런데 이렇게 높으신 분이 오셔 서...."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엄연히 부분타주로 왔습니다. 저에게 하대를 하십시오. 그런식으로 말씀을 하시면 껄끄럽습니다. 그리고 수하들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구요. 그냥 수하들에게는 고수를 한명 초빙해 왔다고 말하 고 그러니까.... 제 이름은 유향(柳香)이라고 수하들에게 소개 하시죠." "이거 원.... 그런데.... 자네가 이번에 온 것을 모든 사람에게 비밀로 붙여 야 하나?" "그렇게 해 주십시오. 방대인 같은 경우 믿을 수 있으나 그 나머지는.. 특히 대인의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리고 무공이 있으니 수하들에게 의심받지 않고 움직일려면 표두(慓頭)로 행세를 하는게 좋겠군요. 그래야 표 물 운송에도 참가할 수 있을 것 같구요.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있는 본교의 고 수들은 얼마나 됩니까?" "분타 자체의 인원이 1,000여명 정도 되네. 그리고 각 분타나 총타에서 파견 나온 고수들이 100여명 있지. 그중에서 50여명은 요 근래에 도착한 고수들이 네. 그들은 각곳에 배치되어 일을 하고 있지. 전방, 기방, 전당포 등 안하는 일이 거의 없네. 합법적인 사업도 많고 불법적인 사업도 많은데 특히 불법적 인 사업의 경우 무력이 많이 필요하지. 지금 낙양 상권의 3할을 잡고 있는 데... 표국 업무가 정상화되면 그 비율은 더욱 늘어날거야. 표국의 신용이 올 라가면 변방으로 보내는 병참금의 수송에 관여하면 더욱 큰 돈을 벌수있지. 일반 군수물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군의 수송부에서 관할하지만 병참금의 경우 돈에 눈이 뒤집힌 산적들이 덤벼들 가능성이 있어 표국을 이용하지." "낙양에 이곳 말고 표국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표국 5개가 더 있네. 그중 3곳은 작지만 2곳은 상당히 크지. 어차피 그들과 경쟁을 할 수 밖에 없어. 그렇지만 실지 외부에서 표물을 거의 위탁받지 않더 라도 낙양분타에서 돌리는 물자가 엄청나기때문에 그것만 해도 상당한 일거리 지. 그 외에 변방에서 말이나, 양, 모피 등 많은 물자들을 수입해올 생각으로 있는데 그쪽의 통로가 개척되면 변방으로의 무역로가 열려 막대한 이익을 줄 것으로 생각하네. 그 외에도 인력과 돈만 있으면 정당한 방법으로도 더욱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네." "집안의 하인들은 어떻습니까? 본교의 인원들인가요?" "아닐쎄. 지금 원체 사업을 확장해놔서, 그정도 여력이 없어. 기밀이 중요하 기는 하지만.... 아주 중요한 곳에 출입하는 자들과 밀정으로 심어놓은 자들 만 본교의 인물들이지." "그렇다면 저에대한 비밀을 철저히 유지해 주십시오. 암수에 걸려 목숨을 잃 기는 싫으니까요. 아무리 고수라도 암수에 걸리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 보지 도 못하고 가는것이 정석이니까요. 그리고 대인께서 알아두셔야 할 점이 있는 데.... 저는 동자공을 익혀 여색을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만약 어느날 갑자기 제가 여자를 청한다면 그건 가짜라고 보면 옳겠죠. 그리고 또 대인이 저에게 여자를 붙여준다면 그 또한 대인이 가짜라고...." "알겠네.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 그런데 가족에게도 안되나?" "예. 많은 사람이 알수록 비밀이 샐 가능성이 더욱 높아집니다." "할 수 없군. 그런데 미리 양해를 구해두겠는데.... 자식들 중에 몇명이 아주 버릇이 고약한 놈들이 있으니.... 그때문에 실례를 범할 수도 있기에 하는 말 일쎄." "그정도는 상관 없습니다. 상대를 안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제 방은 좀 작은 걸로 해서... 안채와 좀 떨어진 곳이 좋겠는데... 괜찮은 곳이 있습니까?" "흠... 표사중에 한명이 쓰던 집이 있는데 좀 낡기는 했지만 수리를 하면 쓸 만할거야. 하지만 너무 집이 작아서..." 하면서 방대인은 묵향의 눈치를 봤다. 그로서는 묵향의 취향을 가늠하기 힘들 었던 것이다. "작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밥을 지어줄 하녀는 제가 구해서 쓸테니 걱정 하지 마십시오. 그럼 오늘은 물러가겠습니다." 인연(因緣)의 시작(始作) 묵향이 머무르게 된 집은 작은 방이 3개, 부엌이 1개, 천장에 다락이 1개 있 는 자그마한 초가집이었다. 묵향은 우선 하인들이 머무르는 작은 방을 하나 차지하고 앉아서 집의 수리부터 시작했다. 그가 수리를 하기위해 나온 인부들 에게 지시를 한 후 4일만에 집은 깨끗이 수리되었다. 방 1개를 욕실로 만들고 천장이나 벽을 수리하는 작업이었기에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방 대인이 하녀를 한명 주겠다고 했지만 실지 식사는 표국에서 했으므로 목욕하 고 잠만자는 집을 위해 하녀를 둘 필요는 없었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표두로서 물품이 안전하게 운송되도록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자 얼마 되지않 던 인원들이 300명 정도로 늘어났고 표국은 각종 화물의 출입에 따라 쉴사이 없을 정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묵향은 바쁜 와중에서도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 시간이 없으면 잘시간 을 줄여서라도 운기조식을 했다. 그는 여러가지 무공을 익히고 있었고 요즘 그가 힘쓰고 있는 것은 어검술(御劍術)이었다. 어검술이란 글자 그대로 칼 (劍)을 다스리는(御) 기법이다. 강기와는 달리 어검술은 진기를 이용하여 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밖으로 끌어내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어검술 을 사용하면 보통의 강철 검으로 신검(神劍)와 같은 파괴력을 낼 수 있다. 그 의 어검술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다. 그는 검강을 뿜어내기 직전 검에 붉은 빛 의 강기가 뇌전이 흐르는 것 같이 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어검술이 아닐까 하 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 파고들면 파고 들수록 이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노릇인지 궁금증만 쌓여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날도 묵향은 검과 씨름을 하다가 골치가 아파짐을 느끼고 밖으로 나왔다. 여러가지로 심경(心境)이 복잡할때는 바람을 쐬면서 걷는게 상책이다. 집구석 에 들어앉아 골을 싸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가 여기저기 기웃 거리며 돌아보고 있을때 한 계집아이가 만두를 훔치는 것을 봤다. 그 아이는 만두를 가지고 얼마 가지도 못해 잡힌 다음 뭇매를 맞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 다못한 묵향이 끼어들었다. "아직 어린앤데 너무 심한게 아니오?" 묵향은 코피를 흘리고 있는 때가 꼬질꼬질 묻은 옷을 입은 비쩍 마른 12살 가 량의 소녀를 보면서 안스럽다는 듯이 주인에게 말했다. "이것도 심한게 아니오. 얘는 맞아야 해. 어디가서 일해서 벌어먹을 생각은 하지않고 도둑질 부터 할려고 드니....." 그러면서 또다시 그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이는 그냥 포기한 듯 맞고 만 있었다. 그 반항하지도 않는 아니 반항할 기운도 없는 그 아이를 보고 묵 향의 마음이 움직였다. 묵향은 또다시 쥐어박으려는 가게 주인의 손을 잡은 후 말했다. "아이를 놓아 주시오." 묵향이 잡은 손에 힘을 약간 더 주자 사내는 바로 손을 놓았다. 그러자 묵향 도 그 주인의 손을 놨는데 그 손에는 붉게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묵향은 소 녀를 보고 물었다. "왜 훔쳤니? 일을 해서 벌수는 없었냐?" "저는 너무 어려서 아무 일도 시켜주지 않아요." 아이는 힘없이 대답했다. 묵향이 바라보니 아이는 그렇게 맞았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 "너 요리 잘하냐?" "예? 못해요." "할 수 없지. 날 따라 오너라." 아이가 주섬주섬 망설이자 묵향이 말했다. "일자리를 주려는 거다. 일을 하고 싶으냐?" 그 말을 듣자 아이는 조르르 따라왔다. 묵향은 천천히 걸으면서 아이에게 물 었다. "이름이 뭐냐?" "소연(蘇衍)이요." "좋은 이름이구나. 식구는 있냐?" "집에 아픈 엄마가 있어요." "어버지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너 말고는 식구가 없냐?" "예." "너희 집이 어디냐?" "그건 왜 물어요?" "너에게 일을 시키려면 너의 어머님께 허락을 받아야 될 것이 아니냐." "응.... 그럼 따라오세요." 그러면서 소연이는묵향을 안내했다. 소연이의 집은 낙양 구석의 빈민가에 있 었다. 다 쓰러져가는 작은 집에 소연이는 묵향을 안내했다. 묵향은 망설이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창을 넘어 들어온 하수구의 냄새 때문인지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고 방 구석에는 다 떨어져 걸레가 되어있는 이불을 덮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 소연이의 어머니의 병세가 심각한 것 처럼 보였다. 그래서 묵향은 소연이의 어머니를 급히 안고는 의생(의사)을 찾아 갔다. 가마 따위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안고가는 것이 환자에게 충격이 적게 가기 때문에 그는 그냥 그 여인을 안고갔다. 의생의 말로는 그 여인은 과로와 영양 실조가 병의 원인이었다. 그는 의원 부근에 자리를 잡고 그 여인이 적당히 회 복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마를 불러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 다음부터 묵향의 기묘한 동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여인은 1달 가량 영양 있는 음식과 탕약을 먹으며 몸을 조리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 여인 을 자신의 가정부로 고용했다. 그런다음 1달에 1번 이상 충분하고도 남을 정 도의 돈을 가져다 주었으므로 집은 작은 편이었지만 상당히 모녀에게는 풍족 한 삶이 시작되었다. 여인은 어려운 생활 때문인지 음식솜씨가 형편 없었지만 묵향과 소연이가 열심히 먹어대는 동안 어느덧 시간이 흐르자 차차 나아져 갔 다. 그리고 소연이는 점점 밝은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그는 소연이와 함께 집 앞에 작은 정원을 만들고 꽃씨를 뿌렸다. 그리고 소연이에게 자신이 아는 한 도 내에서 글이나 그림, 음악 등을 가르쳤다. 소연이가 곧잘 했으므로 바쁜 와중에서도 소연이를 가르치는 것은 묵향의 조그마한 기쁨이기도 했다. 어느날 밖에서 놀다가 들어온 소연이가 마루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묵향에게 물었다. "아저씨, 아저씨도 무술을 해요?" "뭐?" 퍼뜩 정신이 든 묵향이 되물었다. "아저씨도 무술을 할줄 아느냐고요." "왜그러니?" "오늘 거리에서 칼싸움을 하는데 사람이 하늘로 새처럼 붕붕 날았어요. 아저 씨도 날줄 알아요? 아저씨도 칼차고 있잖아요? 좀 가르쳐 줘요." 아마 소연이는 근처 마을에 놀러갔었던 모양이다. 묵향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소연이가 살던 낙양 성에서 좀 떨어진 곳이다. 그래서 심심하면 아이들과놀 기위해 가까운 마을로 갔다. 이번에는 아마 무림인들이 싸우는 걸 보고 놀란 모양이다. 소연이의 말도 안되는 질문에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아저씨는 하늘을 날 줄 몰라." "아저씨는 약해요?" "??... 응, 약하지. 그러니까 이렇게 작은 집에서 살고 있잖아. 내가 강하면 많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이만큼 큰 집에서 살겠지." 묵향이 과장스럽게 손짓을 해대며 말하자 소연이는 이해한 모양이다. 묵향은 소연이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까불다가 잠든 소연이를 보며 생각에 잠 겼다. '소연이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것이 좋을까? 쓸데없이 피비린내 나는 무림 의 세계에 발을 들이밀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리 저리 생각하다가 아무리 여자애라도 약간의 호신술을 알고있는 것이 좋 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연이도 무술을 배우고 싶냐?" "예." "그럼 가르쳐 주기로 하지. 내가 잘 모르니까 그렇게 대단한 건 못가르쳐 준 다. 그렇지만 무술을 배우면 심신을 닦는데 많은 도움이 되니 한번 배워보 렴." "예. 그러면 아저씨가 내 사부가 되는거에요?" "아니. 그냥 배우는 거지, 사부는 무슨.... 나는 제자를 받을 생각은 없어. 우선 심법(心法)부터 배우는 게 좋다. 이건 태허무령심법(太虛無靈心法)이란 것으로 정통적인 도가(道家)의 내공을 쌓는 심법이지. 이걸 꾸준히 익히면 무 병장수할 뿐 아니라 몸과 마음이 예뻐진단다." "아저씨도 그걸 익혔어요?" "익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너에게 가르키겠냐?" "하지만 아저씨의 모습은 예쁜게 아니잖아요?" "음..... 그러니까 내 말은..... 실수했구나. 예쁜게 아니라 튼튼해 지는 것 이다. 이건 우연히 내가 배운 것인데.....(마교에서 훔쳐배웠다고는 죽어도 못가르쳐 주지...) 여태까지 내가 익히던 것 보다는 좀 더 뛰어난 심법이지. 이것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내가 좀 수정을 해서 만든 것이니 다른 이들 에게 말해서는 안된다. 알겠냐?" "예." "그리고 이걸 한번 익히면 아침에 일어났을때와 자기전에 2각에서 4각(30분에 서 1시간) 정도 매일 수련해야 한다. 할 수 있겠냐?" "예." "이걸 익히기 시작한 다음에는 다른 심법(心法)은 익히지 말고 언제나 이것만 을 익혀야 한다. 안그러면 내공(內功)이 정순(靜純)하지 못해서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단다." "예. 그런데 내공은 뭐고 정순하다는 건 또 뭐에요?" "내공이란 건 몸 속에 쌓이는 형태가 없는 힘인데 이걸 이용해서 네가 말한대 로 날아 다니는 거란다. 너도 날아 다니는 걸 봤다면서?" "예. 그게 내공을 이용해서 날아가는 거에요?" "그렇지. 정순하다는 건 맑고 순수하다는 말이야. 내공이란 건 정순해야지 그 렇지 않으면 나중에 너가 말한대로 날아다닐 수 없어. 알겠니?" "예." "도가(道家)의 심법(心法)은 마음을 편안히 다스리는데 그 모든 요결이 있지. 그 때문에 심마(心魔)에 빠지지 않고..." "심마가 뭐에요?" "그러니까.... 에..... 심마란 여러 가지 잡념을 말하는 거야. 오욕칠정 에....(이런 말을 해서 알아듣나?) 아니, 심마란 나쁜 거란다. 이게 생기면 아주 나쁜 일을 당하게 되니까 그냥 그렇게 알고 있거라." "예..." 묵향은 소연이에게 약간씩 무공을 가르쳤다. 그는 소연이에게 위험부담이 대 단히 큰 마교의 심법을 가르치기 보다는 그보다 덜한 도가계통의 것을 가르치 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현문의 내공심법을 익히면 사술(邪術)에 걸리지 않는 다. 심신을 맑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묵향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 작고 귀여운 소녀에게 사술에 걸리지 않게 해주는 현문의 심법을 가르치기로 작정 한 것이다. 정통 마교의 고수들과는 달리 살수 등 특수한 계층에 종사하는 마교의 고수들 은 상대방 즉 사파나 정파의 무공을 폭넓게 익힐 수 있다. 그 무공의 장단점 을 알아야 쉽게 기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무공들은 마교가 한번씩 정파 와 충돌을 벌이면서 습득하거나 훔쳐낸 것들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소림이나 각 문파들에 비해 더 많은 정파의 무공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 마교라고 볼 수 도 있다. 마교의 본거지인 십만대산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험의 요새였고, 그 덕분에 한번도 본거지가 괴멸당한 적은 없다. 그리고 관부(官部)에서도 손을 못쓰는 결과 수많은 무공들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정파의 무리 들은 황궁의 압력에 일부 무공들을 뺏기기도 해서 황궁에서도 많은 수의 무공 서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지 각 문파의 최고 무공은 약탈하지 않는 한 압력을 가한다고 뺏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소연이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로 묵향은 매일 밤 소연이의 방에서 두세시진을 보냈다. 처음 소연이가 잠든 이후 묵향이 그 방에 들어오자 소연 이의 어머니가 약간 놀랐다. 다짜고짜로 묵향이 방에 들어온 다음 소연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묵향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으리, 어째서 이러십니까?" "왜 그러느냐?" "소연이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십니까요?" "그게 아니다. 나는 다만 안마를 해줄 뿐이다. 지금 아이에게 무공을 약간 가 르쳐 주고 있는데 밤에 안마를 해주면 좀 더 빨리 익힐 수 있지." "그렇습니까?" 그녀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물러섰다. 그러자 묵향은 속옷을 남기고 다 벗긴 다음 천천히 내력을 쏟아 소연이의 혈도를 뚫어나갔다. 거의 2 시진동안 안마를 해댄 묵향은 아직도 자지않고 옆에서 지켜보고있는 그녀에게 말을 했 다. "이걸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시오." "꼭 비밀로 해야 합니까요? 나으리." "그럼 내가 맨날 안마한다고 온 마을에 떠벌일 일이오?" "알겠습니다. 나으리" 대강의 내용을 안 그녀는 손쉽게 허락했다. 하지만 묵향이 말하지 않은 것이 몇가지 있으니, 내공을 익힐 때 낮에 무공을 익히거나 심법을 익힐때는 내력 이 강제적으로 혈도를 돌아 천천히 내공이 쌓이지만 밤이되어 잠이들면 그 내 력은 멈춰 원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밤에 내공의 고수가 혈도를 타고 강제적으로 내력을 돌려주면 낮에 익히는 것의 2배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부(師父)들이 제자에게 이걸 해주지 못하는 이유는 이 작업은 먼저 시술자가 2갑자 이상에 이르는 내력이 있어야 한다는 기본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정도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시도하다 간 시술자의 몸이 견디질 못하고 또 진기의 유도(誘導)에 실패하면 상대방도 심한 내상을 입을 수 있다. 그리고 2갑자에 이른다 하더라도 그걸 매일 몇 시 진씩 해대면 잘못하다간 내력의 소모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칫 진원지기(眞原 之氣=진신내공;眞身內功)를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시진에 걸친 이 인타유기혈공(引他誘氣穴功)을 땀한방울 안흘리고 묵향이 했기에 그녀는 그가 단순한 안마를 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다음날 딸이 아주 상쾌한 기분에 잠 에서 깨어나서 심법을 행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묵향이 하는 것을 완전히 믿 었고 더 이상의 의문은 제기하지 않았다. 살육전(殺戮戰) 밤낮으로 소연이를 가르치면서 묵향은 내공을 주로 가르쳤지 검술이나 권술 등은 일부러 조금만 가르쳤다. 묵향은 소연이가 무림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쓸만한 남자를 만나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렇게 평 화스러운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날 갑작스런 방대인의 호출에 놀라 급히 그에 게로 달려갔다. 그러자 방대인은 다급하게 말했다. "큰일났네." "무슨 일입니까?" "황량산 쪽에서 오던 표물이 산적에게 강탈당했어. 이번의 표물은 군자금을 수송하는 것이라서 본교의 고수를 5명이나 넣었는데도....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나? 자그마치 은자 10만냥(은 3125Kg)이라구." "누가 손을 댔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군자금을 건드릴 정도로 간큰 도적들은 그렇게 많지 않지. 그리고 자네는 온 지 오래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산적에게 털리면 국주가 직접 충분한 예물 을 가지고 가서 사정하며 표물을 돌려주는게 원칙이지. 돌려주지 않는 집단이 있으면 모든 표국의 공동 적이 되어 멸망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이번의 적은 쉽게 돌려주지않을 것 같아서 그러네. 보통 산적의 경우 표사들을 잘 죽이지 않아. 설령 죽인다 하더라도 짐꾼을 죽이지는 않는다네. 그런데 이번에는 모 두 다 죽었어. 호위무사 10명과 짐꾼 30명까지 몽땅 다 죽였다고. 이걸 보면 아마 적은 완전히 증거를 없애 모든 짐을 꿀꺽할 심산인 모양이야.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다 보니 자네를 불렀네." "우선 조사를 하십시오. 상대가 누군지 알아 보고 저에게 통보를 해 주십시 오. 그러면 제가 본교의 고수 20명 정도를 이끌고 가서 예물을 가지고 한번 접촉을 해보고 안되면 모두 다 없애버린 후 물건을 찾아오면 됩니다. 그것도 귀찮으시면 제가 가서 통보도 필요없이 다 없애버리죠." 1달 후 방대인은 도적들의 거처를 알아냈다. 황령산에서 좀 떨어져있는 대설 산에 똬리를 틀고있는 산적들의 소행이었다. "대설산의 산적들의 짓임이 밝혀졌네." "흠... 좀 이상한데요. 아무리 하급이라 해도 본교의 무사 5명이 함께 갔는데 겨우 산적들에게 모두 피살되었다는 게 이상합니다." "대설산의 산채는 이 부근에서는 제법 큰 규모요. 200명 정도의 도적들이 있 지. 관군이 토벌작전을 벌인다 하더라도 쉽게 전멸시키기는 어려울 정도의 규 모요. 거기다가 외부에서 고수 몇명을 영입하여 같이 해치운 것 같소." "그렇다면 그 고수들은 어디있습니까?" "조사한 바에 따르면 3명은 아직 산채에 남아있고... 3명은 자신의 몫을 챙긴 다음 떠난 걸로 알고있소." "그렇다면 총타에 통보하여 그 세녀석을 추적하여 없애버리라고 하십시오. 저 는 20명 정도 데리고 그녀석들을 저세상으로 보내주고 오겠습니다. 본교의 고 수들 중에 대설산의 지리를 알고있는자를 한두명 포함시켜 주십시오." "알겠네." "그럼 준비가 되는대로 떠나겠습니다." "예물을 가지고 가겠는가?" "아뇨. 그냥 기습을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편이 피해가 적을 것 같군요." "알겠네. 부탁하네." * * * 묵향은 20명의 고수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일행이 길을 나선지 12일 만에 대 설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묵향은 대설산 가까운 마을의 객잔에 말들을 매어 놓은 후 도보로 대설산에 접근해갔다. 산을 올라가자 과연 산채가 있었다. 그 의 수하들은 모두 다 쓸만한 고수들이었기에 묵향은 길을 따라 올라가지 않고 수풀을 헤치며 올라갔다. 그때문에 산적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산채 가까운 곳 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일단 산채에서 400장(1.2Km) 정도 떨어진 거리 까지 접근할 후 수하들에게 말했다. "모두들 건량(乾糧)을 먹고 좀 쉬어라. 기습은 묘시(卯時) 초(새벽 5시)에 하 기로 하지." "존명!" 지시를 내린 후 묵향은 건포(乾脯)를 뜯으며 요기를 한 후 휴식을 취했다. 드 디어 묘시 초(卯時 初)가 되자 그는 수하들과 함께 산채에 바싹 접근한 후 지 시를 했다. "내가 들어가서 공격을 시작하면 도망치는 놈들이 생길거다. 너희들은 사방에 잠복해 있다가 도망가는 놈들은 한놈도 남기지 말고 없애버려라." "존명" 그는 묵혼을 빼든 후 산채로 뛰어들었다. 그는 처음부터 인정사정없이 공격을 전개했다. 묵혼이 휘둘릴때마다 산적의 몸뚱아리가 토막이 나며 떨어져 나갔 다. 그가 순식간에 40여명을 해치웠을때 통나무집 안에서 4명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모두 상당한 고수였지만 가죽을 깁어서 만든 옷을 입은 자의 무공이 제일 떨어졌다. 아마 그가 이 산채의 주인인 듯 했다. 그두목이 외쳤다. "너는 왠 놈이냐?" "...." 하지만 묵향은 그의 말은 들은척도 안하고 근처에 모여드는 산적들을 토막내 고 있었다. 그걸 본 두목은 옆의 3명에게 말했다. "형님들 빨리 저녀석을 없애주시오." "알겠네." 그 세명이 묵향 근처로 뛰어드는 순간 묵향은 강기를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공력이 약한 2장 내에 있던 산적 3명이 강기의 회오리에 휩쓸리면서 몸의 앞 부분의 옷가지와 함께 피부가 찢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모진 기합소리와 함께 묵향 부근에 모여있던 산적들과 3명의 무림인들이 토막이 나 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렇게 급한 일도 없었기에 묵향은 상대의 무기와 함 께 몸통을 베는 방법을 쓰지않고 무기는 놔둔 상태에서 상대의 몸에만 구멍을 내거나 잘라 나갔다. 적에게 입은 피해가 큰 이상 이녀석들의 무기를 팔아서 라도 약간은 보충을 할 작정이었다. 내부에서 난리가 나자 망루위에 있던 녀석들이 묵향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댔 다. 묵향은 경공술과 신법을 사용해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산적들을 베고 있었으므로 묵향쪽으로 날아온 화살은 거의 없었다. 설혹 날아온다 하더라도 그가 먼저 눈치를 채고 칼로 막았다. 그러던 중 1개의 화살이 묵향의 등에 맞 았다. 망루에서 쏜 화살 중 한대가 우연히 맞은 것 같았다. 하지만 화살은 묵 향의 호신강기에 막혀 헛되이 옷에나 구멍을 뚫을까 피부를 뚫고 들어가지 못 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산채 밖에서 대기중이던 부하들이 암기를 날려 망루에 있던 산적들을 모두 해치웠다. 일각(1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산체 안에는 살아있는 자들은 한명도 없었 다. 묵향의 손에 죽은 인원만 140여명이 넘었다. 그리고 나머지 묵향의 악마 같은 살겁을 보고 반쯤 정신이 나가서 비명을 지르며 탈출을 시도한 60여명도 모두 밖에서 대기하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살인의 축제가 끝난 후 묵향은 아직도 산채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혹시 살아있는 놈이 있으면 모두 확실히 숨통을 끊어라. 한놈도 살아 나가서 는 않된다. 시체 밑에 숨은 녀석도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 확인해라. 밖에서 부터 하나하나 확실히 처치해라. 죽었다 하더라도 몸뚱이가 두토막이 나지 않 은 시체는 확실히 두토막을 내버려라." "존명" 밖에서 부하들이 산적의 시체들을 토막치고 있을때 묵향은 오두막 안으로 들 어갔다. 이곳 산채에는 12채의 통나무 집이 지어져 있었다. 묵향은 한채 한채 확실히 뒤져갔다. 5번째 통나무 집에 들어갔을때 침대 위에는 벌거벗은 계집 이 이불로 몸을 감싸며 앉아 있었다. 묵향은 천천히 다가가서 바로 여자의 몸 을 두토막 내어 버렸다. 침대 밑까지 착실하게 뒤져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 는 것을 확인한 후 묵향은 다음 통나무 집으로 들어갔다. 통나무 집 안에는 14명이 구석에 있었다. 13명의 반은 벌거벗다 시피한 계집들과 산적 두목이었 다. 두목은 칼을 계집들에게 겨누고 발악했다. "더이상 가까이 다가오면 이년들을 없애버리겠다." 그 모양을 보고 묵향의 얼굴에는 짙은 살기를 띈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천천 히 다가서며 말했다. "안그래도 죽여버릴 계집들이니 마음대로 하시게나." 인질을 사용하는데도 상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두목은 약간 당황했다. 납치 한 여자를 구출하기 위해서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녀석은 뭣때문에 온 것인가? 그때 갑자기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천령표국의 부탁을 받고 오셨소?" "잘 아는군....." "네녀석이 훔친 걸 숨기기 위해 짐꾼까지 모두 다 죽였듯이 나 또한 자네에게 예물을 주고 부탁하는 순서가 빠졌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죽여야 해. 안그러면 주변의 표국들로 부터 비웃음을 받을게 뻔하 니까.... 이제 소문은 이렇게 날걸쎄.... 천령표국에서 값비싼 예물을 올리고 자네에게 은자를 들려줄 것을 간청했지만 네녀석이 거절해서 할 수 없이 산채 를 토벌한 후 은자를 찾아왔다고....." 말을 하면서 묵향은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그의 얼굴과 분위기를 읽은 두 목은 자신이 도저히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옆에 있 는 이 계집들 역시.... "안돼.." 그의 비명은 순간적으로 끊어졌다. 왜냐고 묻는다면 허파에서 분리된 머리통 은 더이상 비명을 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두목을 없애버린 후 묵향은 나머지 계집들도 모두 다 없애버렸다. 안량한 자비심으로 계집들을 놓아보낼 수는 없 었다. 만에 하나 이들 중에 산적 패거리가 끼어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 자 산적도 있으니까.... 묵향의 패거리는 날이 밝을 때까지 주변을 자지않고 계속적으로 감시했다. 혹시나 탈주자가 있으면 큰 탈이기 때문이다. 아침이 되어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시체를 하나하나 뒤지며 혹시 나 살아있는 놈이 있는지 확인을 했다. 완벽히 처리가 되었다는 것이 확인되 자 산적들이 여태까지 약탈해서 모아둔 모든 물건들을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 다. 점심때가 가까워지자 표국에서 짐꾼들과 표사들이 도착했다. 묵향은 그들 에게 모든 짐을 맡긴 후 산채를 불태웠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숨은 놈이 있는 지 감시의 눈길을 쉬지 않았다. 산채가불바다가 된 후 일행은 떠났다. 하지 만 묵향은 수하 5명을 데리고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후 기척을 숨기고 천천히 산채에 접근해서 기다렸다. 그날 저녘때가 되어 사방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벌거벗은 여자 1명을 베 었던 그 통나무 집이 있던 곳의 잿더미가 흔들거렸다. 그런후 좀 지나자 안에 서 머리통 하나가 약간 나오더니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폈다. 밖에서 아무런 동정이 보이지 않자, 보따리가 하나 밖으로 던져져 나왔다. 그런 후 한명의 거한이 안에서 기어올라왔다. 거한은 한숨을 쉬면서 나직이 말했다. "정말 대단한 악귀들이군. 내가 10년에 걸쳐 이룩해놓은 모든 것을 하룻밤 사 이에 없애버렸어. 먼저 큰형님께 찾아가 이녀석들의 잔악상을 말하고 천령표 국에 복수를 해야겠어." 그는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펴보다가 아무런 이상이 없자 안심했다. 그가 투 덜거리면서 고개를 숙여 보따리를 줏어들고 막 걸음을 옮겨 놓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한 사람이 서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는데 고개를 숙였다 들자 사람이 서 있는 것이다. 그순간 그의 등 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녀석은 어디서 나온거지?' 하지만 그의 생각은 오랜시간 이어지지 못했다. 눈앞이 번쩍하는 느낌과 동시 에 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묵향은 그 괴한이 쓰러지고 난 후 남겨놓은 보따리를 살펴봤다. 그 안에는 금 과 보석 등이 들어있었다. 묵향은 낮은 목소리로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저자의 몸을 뒤져서 돈될만 한건 모두 챙겨라. 그리고 자네는 저 보따리를 들어라. 검은 어떤가? 돈이 좀 될것 같아?" 검을 약간 뽑아 살펴보던 사나이가 말했다. "보도는 아니지만 상당히 좋은 도입니다. 꽤 비쌀 것 같은데요." "좋아. 이제 철수하자." "존명!" * * * 사무실에서 묵향과 방대인은 이번에 약탈한 물품에 대한 명세서를 총관에게서 듣고 있었다. 묵향으로서는 계산은 질색이었지만 자신이 가져온 것을 방대인 에게 인수인계를 해야했기 때문에 동석하고 있는 것이다. 총관은 말했다. "이번에 되찾은 금액은 다음과 같습니다. 은화 8만 5천냥, 금화 50냥, 금화 10냥에 맞먹는 금괴 12덩어리 그러니까 금화 120냥, 진주목걸이2개 합쳐 은 화 1100냥, 보석이 붙은 금반지 9개 합쳐 은화 1200냥, 보석이 붙은 금목걸이 2개가 합계 은화 1150냥, 그 외의 각종 패물을 몽땅 합하면 은화 8430냥, 산 적들의 무기 중 보검 1자루 은화 500냥, 상급의 도(刀) 1자루가 은화 40냥, 상급의 검 2자루 합계 은화 100냥, 그러니까... 여기까지가 은화 10만920냥입 니다." "그 외에는?...." "그리고... 나머지 모든 무기류를 합해 계산하면 대략 12350냥, 싯가 50냥인 상급 비단이 60필 그러니까 3000냥, 싯가 384문인 비단이 120필 그러니까 은 화 4608냥, 싯가 25냥인 하급 비단이 100필 그러니까 2500냥, 싯가 12냥인 고급 무명이 240필 그러니까 2880냥, 싯가 10냥인 무명이 120필 그러니까 1200냥, 싯가 8냥 정도의 하급 무명이 150필 그러니까 1200냥, 그리고 쌀이 300석이니까 11520냥, 그 외 잡곡이나 육류 등 나머지 잡다한 것들을 몽땅 긁 어모아서 대충 4750냥, 그리고 전체 산채에서 뒤져서 긁어모은 잔돈이 83456 냥, 그래서 합하면 127464냥! 그러니까 은화 663냥 하고 168냥.... 그러니까 앞의것과 뒤에것을 합하면 총 긁어들인 것이 은화 101583냥 하고 168냥입니 다." 주) 냥(兩)이란 중국의 화폐의 단위가 아닌 무게의 단위다. 그당시 중국은 0.1냥 무게의 구리덩어리로 동전을 만들어 '문'이라 불렀다. 구리와 은과의 환율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심하지만 여기서는 1920문이 은화 1냥으로 했다. 그리고 1냥 무게의 구리덩어리로 만들어진 것이 동전(銅錢) 1냥이다. 그러니 까 동전 10문이 동전 1냥이란 말이다.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주화인 경우 언제나 금, 은을 밝혀야 한다. 서로간의 오해가 없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다. 은대 금의 환율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여기서는 20:1로한다. 그러니까 은화 20냥이 금화 1냥에 해당한다. 여기 나열된 물건의 가격은 그당시 현실을 최대 한 자료를 토대로 반영한 것이니 그런대로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이당시 금과 은의 환율은 1대 20! 그러니까 은화 20냥이 금화 1냥이란 말이 된다. 그렇기에 언뜻 생각하면 은화 십만냥이면 1000관(貫;3125Kg)인데 비해 금화 5000냥(156.25Kg)이면 50관(貫)이니 금으로 운반하는 것이 훨씬 운반하 기가 수월하다. 그러데도 왜 군(軍)에서 그 자금을 덩치크고 무겁게 은화로 부탁했는가 하면 이걸 금화 오천냥으로 운반하면 훨씬 덩치는 작아지지만 그 것을 장병들의 녹봉으로 지급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총관의 계산을 듣고있던 묵향은 약간 안심이 되었다. "휴... 그런대로 본전치기는 하신 것 같군요, 축하드립니다. 방대인" "아니야! 관부와 군부에 무마하기 위해 사용한 뇌물들, 산채의 위치를 파악하 는데 들어간 비용, 그리고 지금 3명이 각기 은화 오천냥씩 들고 도망간 모양 인데 이들을 추적하는데 들어갈 비용을 생각하면 이건 본전치기도 못돼! 만약 놈들을 빨리 잡아서 은화의 일부를 회수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상 당히 믿지는 장사가 될거야. 이보게... 유표두!" "예!" "그자들은 은자 오천냥씩 가지고 갔으니 아마도 말이나 나귀 등속에 짐을 싫 고 있을꺼야. 그놈들이 전장(錢場=은행)에서 은표로 바꾸기 전에 잡아내야 해. 수하들에게 지시는 해놨나?" "예. 산채에서 없어진 은자를 파악한 다음 지시를 했습니다. 전장부터 시작해 서 거액의 은자를 바꾼 자들을 추적해 나갈 것입니다. 그 외에도 묵직한 물건 을 실은자들을 포착하여 수색하라고 일렀습니다. 은자 오천냥이면 50관이나 되는 무게니까 손쉽게 꼬리가 잡힐것입니다." "안그럴지도 몰라. 어쩌면 어디 산속 깊이 묻어두고 돌아다닐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렇게 되면 난감해지는 거지." 그렇게 묵향에게 대꾸한 다음 총관에게 말했다. "빨리 돈을 만들어 오늘내로 수송을 시작해라. 몽땅 다 팔아버리고 빨리 팔리 지 않을 물건에 대해서는 그 액수만큼 전장(물론 자신이 경영하는)에 가서 돈 을 대출해와라. 그 외에 무기종류는 표국과 호위무사들에게 배급하고 쓸모없 는 것들은 대장간에 팔아버려. 자 빨리빨리 움직여라!" 그런다음 다시 묵향에게 정중히 말했다. "이번에는 유표두(柳慓頭)가 직접 10명 정도 이끌고 호위를 해 주게나. 시간 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원수부(元帥府)에는 협조를 얻어놨으니 별 문 제는 없을걸쎄. 그리고 총관에게 물어보면 좋은 술 20통을 줄테니 그것도 같 이 가져다 주게나. 표물을 전해주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걸 주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이 사건이 있은 다음 천령표국의 신용도는 더욱 높아졌다. 천령표국은 표물을 뺐겼지만 예물을 가지고 산채로 갔는데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을 완전히 산적들 을 토벌하면서까지 되찾아와서 표물을 운송해 줬던 것이다. 그 외에 운송이 2 달 이상이나 지체된 것에 대해 의뢰자에게 약소한 예물을 올리며 정중히 사과 함으로서 모든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여기까지가 강호에 퍼진 소문이었다. 하 지만 실지 산적한테 예물은 주지도 않았고, 순전한 기습적인 살륙전이었는데 다 위약금(약속을 어겼을때의 비용으로 표물 운송대금으로 받은 금액의 2배로 변상해야 한다.)을 내지 않기위해 여기저기 20만냥(약 은화 1040냥)에 가까운 액수를 뇌물로 뿌린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야 약간 지체되었다 하더라도 대규모 운송을 깨끗하게 마무리 지었다는 점을 높이 사서 표물 의뢰 가 쏟아지기 시작해 2달도 안되어 이때 입은 손해를 만회했다. 묵향이 낙양에 도착한지 3년이 지나자 그도 표물 운송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 들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천령표국의 경우 소극적으로 산적에 대해 방어 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있은 후 일부 고수들을 동원해 산적의 본거지들 을 소탕해 들어갔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낙양 부근에 산적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산적을 소탕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수익도 상당한 액수라 북쪽에 대 규모 산적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소수로 이루어진 가난한 산적들은 아직 남아 있었짐나 이들의 힘으로는 표사들을 헤치우고 표국의 표물을 뺏는다는 것은 꿈도꿀수 없는 일이었다. 낙양분타의 표국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르자 방대한 량의 물품을 운송, 저장하는 그 능력을 바탕으로 낙양의 상권을 점차 침식해 들어가 3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상권의 6할을 주무르게 되었다. 묵향으로서는 자신의 할 일이 거의 없어지자 무공수련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거의 밤낮을 가리지 않는 수련으로 소연도 묵향의 얼굴을 거의 못볼 지경이었 다. 물론 소연의 어머니는 묵향이 소연이가 잠든 후 안마를 해주러 올 때 오 랫동안 볼 수 있었지만 소연이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소연이의 경우 표 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16살의 건강하며 아름답고 귀여운 아가씨로 성장 해 갔다. 거친 표사들이 소연이를 보고 아씨라고 존칭을 쓰며 공대하는데는 물론 묵향이 거의 자신의 수양딸처럼 보살펴주고 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 다. 15살의 생일때 묵향이 선물한 조랑말을 타고 소연이는 열심히도 이곳저곳 을 돌아다녔다. 표사들이 다투어 무술을 가르쳐 주는 바람에 요즘 들어서는 소연이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물론 묵향이 봤을때는 어린애 장난이었지만.... 영전(榮轉) 그렇게 평화스런 하루하루가 지나가던 여름의 어느날 문득 방대인이 수련실에 서 무공수련을 하고있는 묵향을 불렀다. 묵향이 서둘러 가보니 방대인은 흑의 (黑衣)를 입은 중년인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중년인은 상당한 고수 로서 은근한 마기를 풍기고 있는 걸로보아 아마 총단에서 온 인물인 모양이 다. "대인(大人)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묵향이 의례적인 인사를 하자 대인은 기겁을 한 듯이 놀라 도리어 인사를 했 다. "대인의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어리둥절해서 묵향이 자리에 앉자, 흑의를 입은 중년인이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셨습니까? 총단에서 연락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번에 성취하신 공적에 대해 총단에서 대단히 만족해 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읽어 보시지요." 서신을 뜯어보니 그 안에는 총단으로 돌아오라는 명령과 함께 천랑대(千狼隊) 의 백인대장(百人隊長)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과 그 명패가 함께 들어있었다. 천랑대라면 마교서열 12위 천리독행(千里獨行) 철극광(鐵極光)이 지휘하는 단 체다. 철영(鐵營)은 천리길을 혼자 달릴 수 있다 하여 외호가 천리독행인 그 는 자를 극광(極光)이라 붙였을 정도로 경공술의 달인이다. 천랑대는 엄청난 1000여명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다. 실지로는 정확히 1000명은 아니고 또 그 들은 각기 서열이 정해져 있다. 그 안에는 십인대장(十人隊長)과 백인대장의 직책이 있다. 천랑대는 마교가 자랑하는 5개의 강력한 무력단체 중의 하나인 만큼 그 안에 소속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며 그 권한과 힘도 막강하다. 그 중에서도 백인대장 급으로 발령을 받았으니 분타주라 해도 그 서열은 까마득 하게 차이가 난다. 앞의 두명이 그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언제까지 총단에 가면 되나?" "여러가지 정리할 점도 있으실테니 2달 이내로 오시면 됩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묵향은 편지를 품속에 갈무리한 다음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총단에서 보기로 하세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타주" "예" "지금 돈이 여유가 좀 있나?" "뭘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지금 내가 돌봐주는 모녀를 독립시키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그리고 돈은 얼마나 들까?" "모녀에게 가장안전한 방법은 땅을 많이 사주고, 그 땅을 소작에 붙이는 겁 니다. 그런다음 그 돈으로 생활하면 되죠. 지금 있는 곳도 괜찮지만 마음에 안드시면 치안이 좋은 곳에 한채 새로 장만하면 될겁니다. 별로 돈도 안들구 요." "그렇게 하기로 하세. 자네가 좀 알아봐주겠나?" "알겠습니다. 맏겨만 주십시오." 묵향은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보니 소연은 망아지를 타고 밖에 놀 러가고 없었다. 작은 집에 살기는 하지만 풍족한 살림이었다. 소연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묵향에게 매달려 귓속말로 소곤소 곤 부탁하곤 했다. 만약 큰 소리로 부탁하다 엄마의 귀에 들리면 잔소리를 듣 기때문에 애교를 부리며 귓속말을 하면 그녀의 소원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묵향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 으면 사서 표사를 시켜 집으로 보내줬으므로 소연은 집은 초가집이었지만 걸 치고있는 옷차림은 대가집 아가씨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소연은 해질녘이 되어 돌아왔고 셋은 방에 모여 식사를 했다. 소연의 어머니 는 묵향과 같이 산지 3년이 흘러 둘의 사이는 밤에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 는 것과 언제나 '나으리'로 부른다는 것 뿐 거의 부부와 마찬가지였다. 오래 간만에 식사를 하면서 모녀와 같이 늦게까지 정담을 나눈후 묵향은 잠자러 옆 방으로 가는 소연에게 말했다. "내일은 모두 함께 갈데가 있으니까 밖으로 나가지 말아라." 그러자 소연이는 조금 과장되게 우는 소리를 하며 애교띈 투정을 했다. "이잉... 친구들하고 약속을 했는데..." "소용없어. 내일 함께 가볼데가 있으니 밖에 나가지 말아라." 묵향이 드물게도 엄하게 말하자 소연은 군말없이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어 쨋건 이집의 가장(家長)은 묵향이었으니까..... 다음날 점심때가 가까워서 표국에서 표사가 뛰어왔다. 그는 두툼한 봉투와 궤 짝 1개를 묵향에게 전해준 후 표사는 묵향과 모녀를 데리고 새로 생긴 넓은 농토를 보여주며 소작농들과 인사를 주선해 줬다. 그런 후 그들은 낙양 시내 로 들어갔다. 4명은 식당에서 늦은 점심 식사를 한 후 표사의 안내로 한 기와 집으로 갔다. 기와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는 아담하 고 운치있는 집이었다. 그리고 1명의 하녀도 있었다. 그녀는 방대인이 급히 구해서 보내준 믿을 수 있는 하녀였다. 기와집 안을 구경한 다음 묵향에게 물 었다. "이게 이제부터 우리 집이에요?" "그럼. 네가 좋은 방 1개를 골라라. 이제 너도 다 컸으니 어머니와 한방을 쓸 수는 없지 않겠냐?" "와아!....." 소영은 환성을 지르며 방을 고르려고 뛰어 들어갔다. 소연이 들어가고 나자 묵향은 소연의 어머니에게 두툼한 봉투를 주며 나지막히 말했다. "이것은 집문서와 땅문서요. 잘 보관하도록 하시오." "예, 나으리." "옛 집에서 물건들을가져다가 쓰던지 아니면 새로 장만해서 가구와 집기들을 들여다 놓으시오. 소작준 땅에서 나오는 돈만 해도 충분히 살고도 남을거요. 그리고 소연이 시집도 보내야 하니 약간씩 저축도 해두는 것이 좋겠소." "예, 나으리. 그런데 어제부터 나으리의 안색이 좀 평상시와 다른것 같습니 다. 몸이 좀 않좋으십니까?" "아니오. 안의 방은 적절히 분배해서 당신이 사용하면 될것이고 집 뒤편에 작 은 마굿간이 있으니 거기에 조랑말을 넣어두면 되오." 그런다음 묵향은 작은 상자와 돈이들어있는 주머니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 주머니에 들있는 돈이면 충분히 올해 수확할때까지 쓸 수 있을거요. 그리 고 이 상자에는 금화 3개가 들어있소. 이건 잘 보관해 뒀다가 소연이 결혼식 때 보태쓰시오." 금화 3개는 엄청난 금액이다. 그것은 은자 60냥이니 보통 한 식구가 1년 생활 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은화 5냥이 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액수인 것이다. 소연이 어미로서는 평생에 만져보기는커녕 구경도 하기 힘든 거금이 었기 때문에 묵향의 말을 듣고 경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으리,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나는 내일 길을 떠날거요. 아마 다시는 만나기 힘들거요. 물론 죽으러 가는 길은 아니오. 다만 외인들과 단절된, 그래서 당신네 모녀들과는 같이 갈 수가 없소. 여러가지로 준비를 한 것이니 이정도면 아마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거요. 당신과 소연이는 이곳에 계속 있으시오. 표국에서 초가집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이리로 보내 줄거요. 그럼 안녕히 계시오." "나으리.....흐흑.." "소연이를 잠시 불러 주시겠소? 작별인사를 하고싶소." 그러자 잠시 후 소연이와 그녀의 어머니가 같이 나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계 속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소연아. 이번에 나는 오랬동안 여행을 해야 할 것 같구나. 몇달 정도 걸릴 것 같으니 어머님 말씀 잘 듣고 얌전히 지내야한다. 알겠지?" "예" 원체가 묵향은 자주 몇칠, 또는 몇주일씩 산적사냥을 한답시고 돌아다녔으므 로 소연이는 그가 오랜 여행을 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는 떠나는 묵향을 향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묵향도 같이 손을 흔들어 답을 하며 표국으로 돌아왔다. 표국에서 묵향은 여행에 필요한 돈과 말을 방 대인으로 부터 받은 후 곧바로 길을 떠났다. 비무(備武) 총단에 돌아온 후 단조로운 일상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가 마교의 주력(主力)이 되는 5대 단체의 구성원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 같다. 훈련... 훈련... 훈련.... 그것이 혼자만의 수련이든 그렇지 않으면 집단으로 모여 진 을 펼쳐 적을 상대하는 것이든 연속되는 훈련이다. 마교에서 위로 올라가려면 남보다 강한 무공을 지녀야 하기에 모든 이들이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하루에 한번씩 10명이 펼치는 십절마검진(十絶魔劍陣), 일주일에 3번씩 100명 이 펼치는 백랑검진(百狼劍陣), 일주일에 1번씩 1000명이 모여 펼치는 천랑검 진(千狼劍陣)을 연습한다. 언제나 혼자서 무공을 수련해왔던 묵향으로서는 처 음에는 배울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이틀 지나면서 나중에 는 모든 것을 이해하자 그다음부터는 심드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모든것 이 너무 시시했던 것이다. 아예 이따위 시시한 검진 연습할 시간에 혼자서 수 련을 좀 더 하는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도 없는 것이 유사시에 총력을 내기 위해서는 필요없는 훈련이라 하더라도 꾸준히 받 아두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은 잘 할 수 있다고 자신이 빠지고나면 자신이 이 끌어야 할 100명의 대원들은 천랑검진에서 누굴 지휘자로 움직여야 할까.... 답은 나오지 않으니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부장(副長)을 불러 지시했다. "다음부터는 자네가 본대를 이끌어 검진을 펼치도록 하게나. 그리고 평상시의 훈련도 자네가 이끌어줬으면 좋겠어." 그러자 그는 난색을 띄며 반대했다. "하지만 대장. 그건 규칙에 어긋납니다. 제게 모든 지시를 받던 아이들이 실 지 큰 전투가 벌어지면 대장과 손발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 그러면 그때도 자네가 지휘하고 나는 뒤로 빠지면 되니까..." "하지만...." "쓸데없는 말 하지말고 자네가 해. 나는 이번에 떠오른 몇가지 생각때문에 머 리가 터질 지경이니까!"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이행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얄팍한 수단은 바로 다음에 들통이 났다. 모두들 같은 복장이기 에 표가 나지 않을것이라고 묵향은 생각했지만 천리독행(千里獨行) 철극광(鐵 極光)의 예리한 눈이 그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는 훈련이 끝나자마자 묵 향을 호출했다. 묵향은 천리독행 근처에 가기도 전에 그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래서 묵향은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대주(隊主)를 뵈옵니다." 대주는 주위에 있는 수하들을 의식해서인지 극도로 화를 억누르며 말문을 열 었다. "네녀석은 뭘하고 있었나?" "예?" "정해진 훈련시간에 뭘하고 있었냔 말이다." "수련하고 있었습니다." "검진의 훈련보다도 중요한 일인가?" "......." "빨리 대답하라!" "그렇습니다." "흥. 그렇다면 네놈의 그 알량한 수련이 어느정도인지 노부가 심사를 해주겠 다. 따라오라." 그런다음 독이오른 천리독행은 대천랑검진이 펼쳐졌던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 뒤를 묵향과 수하들도 하는 수 없이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저 영감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지?' 연무장의 중간에 온 천리독행은 천천히 검을 뽑으며 싸늘하게 외쳤다. "자 빨리 검을 뽑아라." "그럼 삼가 묵향이 대주께 비무를 청합니다." "헛소리 하지말고 검이나 빨리 뽑아!" 천리독행은 독이 오를대로 올랐는지 묵향의 의례적인 절차에 따른 인사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묵향은 천천히 묵혼을 뽑았다. "자! 어디 네녀석이 익히고 있는 검초가 어느정도 위력이 있는 것인지 한번 노부에게 보여봐라. 그런대로 위력이 있는 거라면 노부가 용서해주지." 용서해준다는 말을 듣고 묵향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 러자 검이 용트림치듯 웅웅거리기 시작하며 주위에 푸르스름한 안개같은 것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천리독행이 경악해서 외쳤다. "맙소사. 검기인가? 아니 이것은 눈에 보일 정도의 유형(有形)의 것이니 검강 (劍剛)! 검강이로구나." 이미 검강은 1장(3M정도) 밖으로까지 천천히 뻗어나가고 있었고 그 푸르스름 한 안개같은 것에 가려져 묵향의 모습은 희미하게 밖에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근처까지 그 강기가 다가오자 천리독행은 놀라고 있을수만도 없었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내친 걸음이니 할수도 없었다. 그는 검을 들어 진기를 돋우어 뻗어나오는 검강을 후려쳤다. 불꽃이 번쩍거리 며 힘들게 검강의 일부를 잘라내는데 성공했지만 곧 그것들은 다시 합쳐졌고 계속 밖으로 뻗어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천리독행은 훌쩍 2장뒤로 도약해서 물러선 다음 모진 기합성과 함께 검초를 펼쳤다. "이얍" 그가 펼친 검초는 천강혈룡검법중의 일초인 유운혈룡(流雲血龍)! 그것도 10성 의 공력으로 펼쳐지며 붉은 혈룡 10여마리가 묵향이 만들어낸 강기들과 부딪 쳐갔다. 두가지의 강기들이 부딪치며 엄청난 굉음이 울려펴지며 강기의 회오 리가 일어났지만 끝내 천리독행의 혈룡들은 두터운 푸른 강기의 막을 뚫고 들 어가지는 못했다. 그러자 독이오른 천리독행은 더욱 진기를 끌어올려 강기를 발사했다. 이번에는 전번보다 더욱 큰 혈룡들이 날아갔다. 그러자 갑자기 푸 른 강기의 막 속에서 묵향이 앞으로 달려나오며 묵혼검으로 혈룡을 쳐냈다. 이때 묵혼검은 푸른 빛을 내고 있었는데 그 검신은 두께가 5치(15Cm)정도 되 는 푸른 기운이 이글거리며 뿜어 나오고 있었다. 뚫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붉 은 강기들이 이글거리는 묵혼검과 부딪치자 폭음을 일으키며 튕겨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천리독행의 눈동자는 더욱 크게 부릅떠졌다. 그러면서 힘빠진 말이 새어나왔다. "어검술(御劍術)까지...." 검강(劍剛)이란 검에서 유형의 강기를 응축시켜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의 위 력은 검기나 검풍에 비해 더욱 강력하다. 이 검강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같 은 검강이나 아니면 어검술(御劍術)을 쓰는 것이다. 어검술이란 검(劍)을 완 전히 다스릴(御) 수 있는 사람만이 펼칠 수 있는 수단(術)으로 자신의 진기를 이용하여 검이 가진 모든 능력을 뽑아내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일반 철검을 가지고도 강철을 두부자르듯 할 수 있다는 전설적인 무예다. 어검술보다는 약 간 질이 떨어지지만 어기충검술(御氣充劍術)이 있다. 이것은 기를 다스려(御 氣) 검(劍)에 기를 충만히(充) 채워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術)로 어검술과 같 은 이글거리는 광택은 없지만 시술자의 경지에 따라 여러 광택이 나며 그 위 력은 어검술보다 떨어진다. 어검술을 펼치면 그 무엇도 자르지 못할 것이 없 는 상태가 되는데 이때 우수한 보검이나 신검 종류라면 어기충검술 정도로도 어검술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상대도 보검으로 어검술을 펼친다면 막기 힘 들다. 어검술에 더욱 능숙해지면 진기로서(以氣) 어검술을 펼친 검을 어검술을 유지 한 채 날려 100장밖의 고수들도 마음대로 해칠 수 있는데 이것을 이기어검술 (以氣御劍術)이라 불렀고 검술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것은 심검 (心劍)과 함께 검술에 있어 최상승의 경지였다. 일반 무림인들이 진기를 다스 려(御氣) 검을 움직여(動劍) 사람을 해치는 어기동검술(御氣動劍術)과는 그 파괴력에서 차원을 달리한다. 같은 어검술이나 검강이 아니면 이기어검으로 날아오는 검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검강은 상대의 검과 맞부딪칠 뿐, 지속 적인 힘이 없기에 실질적으로는 어검술이 아니면 어검술을 막을 수 없다는 말 이 된다. 만약 있다면 한가지 심검(心劍)뿐인데 이것은 전설상에나 있는 최고 의 기술로 어검술보다 윗단계의 무공이다. 이것 또한 검강의 한갈래이므로 막 대한 내력의 소모를 필요로 하지만 어검술은 검강에 비해 검의 능력을 최대한 짜내는 것이므로 진기의 소모가 훨씬 작다. 묵향은 천리독행이 경악하건 말건 그대로 어검술로 천리독행을 향해 직선으로 찔러 들어갔다. 이제 천리독행이 할수있는 행위는 2가지 뿐이었다. 그 쳐들어 오는 검을 막던지 아니면 아주 찔러들어가 상대와 동귀어진하는 방법 뿐이다. 하지만 어검술로서 들어오는 검을 신검(神劍)이 아닌 다음에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천리독행은 이를 꽉 다물고 마주 찔러들어갔다. 묵향은 천리독행의 검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틀면서 순간적으로 돌려진 몸 의 탄력을 이용해 상대의 하체를 향해 베어나갔다. 그러자 천리독행도 순간적 으로 몸을 옆으로 틀면서 묵향의 단전을 찔러갔다. 근접전이 시작되자 일초일 초가 모두 동귀어진(同歸御盡)의 초식이었다. 천리독행이 묵향의 어검술을 상 대로 이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무시무시한 경신법 덕분이었다. 만약 그의 신법(身法)이 조금이라도 느렸다면 그는 벌써 패배를 자인했을 것 이다. 하지만 천리독행은 입으로 말은 안했지만 벌써 자신이 패했다는 것을 뼛속깊이 느끼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호흡이 가쁜 자신에 비해 묵향은 담담하게 일초일초 그를 향한 공격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접전이 시작된 후 30초가 지나자 묵향은 뒤로 도약해서 4장여를 떨어져 나 온 후 검을 아래로 내려가게 잡으며 포권하며 말했다. "대주의 검술은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소인 많은것을 깨달았습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소인을 용서해주실 수 없겠는지요?" 천리독행은 더이상 근접전이 진행되면 둘중 한사람은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사실과 또 그 사람이 십중팔구는 자신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 었다. 묵향의 몸은 어검술을 사용해서 검이 빛나는 와중에도 초식에 따른 예 정된 움직임이 아닌 천리독행의 움직임에 따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하면 서도재빠르게 움직이며 천리독행의 혼을 빼놨던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이렇 게 숙이고 나오자 자신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묵향이 물러났다는 것을 알아챘 다. 그래서 그도 마지못해 검을 천천히 검집에 넣으며 그에대해 답례를 했다. "험험... 자네의 검술이 이정도로 진전을 봤는지는 노부가 몰랐군. 내 밑에 있을 정도의 실력이 아니라는 걸 노부가 미리 알아채지 못해 미안하구만. 이 제부터는 모든 훈련에 참가할 필요가 없네." "대주,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가자..." 그 말과 함께 천리독행은 수하들을 이끌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천리독행 은 이미 이 비무의 결과가 오늘중으로 교주에게 알려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 었다. 마교 내에는 수많은 교주의 눈과 귀가 숨어있는 것이다. 이들의 보고가 교주의 귀로 들어간다면 묵향은 어쩌면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서 양보했던 것이다. 사이가 안좋은 상태에서 나중에 묵향이 그의 윗자리로 승진한다면 그것만큼 골치아픈 것도 없으니까.... 그 사건이 있은 후 2주일 후 묵향은 교주의 부름을 받았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오.... 요즘 열심히 수련을 하고있다는 말은 들었네. 이번에 자네를 부른 것 은 한가지 일을 맏기기 위해서야." "하명만 하십시오." "흠... 자네가 설명해 주게나." 그러자 교주의 옆에 서있던 혁무상이 말을 시작했다. "이번에 자네도 낙양에서 일을 해서 잘 알고 있겠지만 본교에서는 요즘들어 은밀하게 세력확장을 꾀하고 있네. 쓸데없는 분타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 라 여러 사업을 확장중에 있어. 그중에서도 낙양을 시작으로 꽤 효과가 좋았 기에 3개의 표국을 더 열었네. 그리고 각종 사업채들도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있지. 그런데 아주 우연한 기회에 우리들이 하는 사업장과 제령문 (諸令門)이 충돌했어. 제령문의 경우 200여명의 식솔을 거느리는 작은 방파지 만 그 문주가 대단한 사람이지. 자네는 강호 사정에 어두워 잘 모르겠지만 삼 황오제에 들어가는 뇌전검황(雷電劍皇)이 이끄는 문파지. 아마 좀 더 시간이 지난다면 그 문파에서 그 부근에 뿌리를 내리려는 본교의 의도를 알아챌 가능 성이 높아.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네." "뇌전검황을 없애란 말씀입니까?" "그렇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자를 1달 내로 없애버려. 문주가 없어 지면 그들의 세력이 꺽일거야. 그 문파에는 20명 정도의 대단한 고수들이 있 다고 하지만 문주가 없어지면 우두머리가 없으니 이제부터 한풀 꺽이겠지." "하지만 그정도의 고수가 암살당하면 그 뒷감당을 하기가..." "자네는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정파의 초고수들 가운데 파악하기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은 몇 안돼. 그렇기에 본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그 자를 없앨 필요가 있다구. 실로 무림은 너무나도 넓은 곳, 삼황오제에 필적하 는 고수가 숨어지내고 있다고 해도 알기는 어렵지. 그들에 대한 경고차원에서 라도 이번의 임무는 꼭 성사되어야 해. 알겠나?" "존명!" "자네의 퇴로를 지원하기 위해서 본교의 고수 4명을 지원해주겠네. 그들을 데 리고 가게나." "필요없습니다. 속하 혼자 가도 충분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기이한 만남 그날 저녘 묵향은 조용히 총단을 떠났다.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었기에 그는 천천히 길을 재촉해 제령문이 있는 산서로 향했다. 검은색 일색의 옷차림에 테가 짧지만 경사가 급해 눈아래까지 내려오는 삿갓을 쓰고있는 그의 옷차림 새는 약간 눈에 띄는 것이지만 옷 자체가 과거 낙양에 있을때 소연의 어머니 가 만들어준 것이라서 많이 낡은데다가 묵혼도 아무런 치장이 없는 싸구려 검 으로 보이는지라 주위 사람들은 그가 방랑하는 거렁뱅이 무사 쯤으로 생각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거기에 묵향의 경우 거의 직선으로 나가고 있었기 에 산과 들을 통과하며 야숙(野宿)을 하는지라 거의 사람들과 만날 일도 없었 다. 그러던 어느날 제법 넓직한 황무지(荒蕪地)를 통과하다가 저녘밥으로 토끼 두 마리를 잡아 불에 굽고 있었다. 이때 멀리서 오솔길을 따라 말4필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묵향에게 다가오더니 그중 한사람이 말을 건넸다. "안녕하시오?" "안녕하시오?" "혹시 이 근처에서 이런 사람을 못봤소?" 그러면서 그는 품속에서 종이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 두루마리에는 그런대로 준수하게 생긴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현상금 은화 40냥이라고 씌여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오. 대체 그사람이 뭐하는 사람이오?" "뭐긴 범법자지. 이제 날도 저물어가니 이곳에서 함께 야숙을 해도 상관없겠 소?" "좋을대로 하시구려." "고맙소." 그러자 일행이 모두 말에서 내리는데 그중 한명은 상당히 덩치가 좋은 대한이 었고 또 한명은 여자였다. 묵향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그중에서는 가장 나이 가 많은 사람인 모양이다. 그들은 서둘러 주변에 흩어져 사냥을 해 토끼 3마 리를 잡더니 불에 구으면서 말 안장에서 만두와 빵, 술을 꺼냈다. 그런다음 놋쇠 주전자에 물을 붓고는 불에 묻어 차를 끓이기 위해 물을 덥히기 시작했 다. 먼저 묵향의 고기가 다 익혀졌으므로 묵향은 그들에게 예의상 같이 먹기 를 권했다. 그러자 그 나이많은 사람은 토끼 한마리를 들고가면서 제법 큰 만 두 1덩어리와 술을 권했다. 모두들 식사를 시작하면서 그 나이많은 사람이 얘 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찾는 사람은 이름은 잘 모르오. 하지만 대단히 뛰어난 고수라고 그러 더군요. 천일루에서 14명의 고수를 죽인 살인귀(殺人鬼)인데.... 그때 죽은 사람 가운데 무산오웅(巫山五雄)이 끼어있다고 그러더군요. 그리고 이때 죽은 사람 가운데 1명이 이제 강호 초출인 태진문 문주의 아들이 끼여있는게 화근 이라.... 그 장문인이 무당파 장문인과 공동으로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들었 소." 묵향은 토끼고기를 우물거리며 그의 말을 듣다가 다 씹은 고기를 꿀꺽 삼킨 후 그에게 물었다. "그렇지만 너무 막연하지 않소? 당신들도 현상금 사냥을 하는 사람들인 모양 인데 그정도 정보만 가지고 상대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그러자 그 사내는 싱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우리들도 그때 목격자들을 만나 자세하게 물어봤소. 상대의 이름은 모르지만 그자가 검은 옷을 즐겨입고... 또 검은 색 검을 차고......" 그러다가 그 나이많은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과 얘 기를 나누고있는 상대방이 지금 입으로 지껄이고 있는 현상범과 인상착의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사내가 말을 끊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묵향은 천천히 그 들이 준 술을 마신다음 말문을 열었다. "노형이 알려줘서 고맙소. 원체 오래전의 일이라 깜빡 잊고 있었구려. 앞으로 는 검은색 옷도 입지 못하게 생겼군. 꽤 정이 들었던 옷인데....." 그러자 4명은 튕기듯이 일어나 병기를 뽑은다음 묵향의 기습에 대비했다. 그 모양을 보면서 묵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벌써 골백번도 더 죽였을거고, 또 지 금이라도 그대들을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니 이리 앉으시오. 나에게 무기를 겨눈 자를 살려준 적은 없지만 그대들은 나에게 만두와 술을 권한 사람들이니 내 이번은 용서해 주고싶소." 가만히 앉아서 추호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말하는 묵향의 기도에 잠시 그들은 압도되었다. 하지만 그중 덩치큰 사내가 큼직한 귀두도(鬼頭刀)를 들고 앞으 로 달려 나갔다. 그때 나이많은 사람이 그 덩치 큰 사내를 손으로 제지하며 외쳤다. "막내! 멈춰라. 도저히 우리가 손쓸수 없는 상대다." 그러자 옆에있던 여자가 아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형(大兄) 저자가 그렇게 강하다는 거에요?" 하지만 나이많은 사내는 그 대답에 답하는 대신 묵향에게 정중히 포권을 하며 말을 던졌다.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하오. 우리는 지금 물러서겠지만 당신도 그렇게 많은 상금이 걸려있으니 조심을 좀 하셔야 할 거외다." "클클... 겨우 은화 40냥에 눈이 먼 자들이라면 그렇게 대단한 실력자는 없을 거요. 대신 자네들에게 한가지 정보를 알려 주지." "뭡니까?" "나는 지금 뇌전검황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는게 어떻겠소? 만약 내가 그자에게 패한다면 내 목만 들고가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을거요." 그러자 4명은 경악하며 외쳤다. "뇌전검황! 그대는 뇌전검황이 어느정도의 실력자인지 몰라서 찾아간다는 거 요?" "나는 무림에 거의 나오지 않기에 이번에 그 명호는 처음 들었소. 혹시 실례 가 안된다면 자네들이 안내를 좀 해주지 않겠나? 혼자서 찾아갈 수도 있지만 자네들의 안내를 받는 것 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 피차 밑지는 장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자 그 나이많은 사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좋소. 같이 갑시다." 그렇게 해서 묵향은 그들과 기묘한 여행을 시작했다. 그 나이많은 사내의 이 름은 정량(玎良)이라 했고 나머지는 현상금 사냥을 하면서 만난 동지들로 서 로 형제의 의리를 맺고는 여태까지 같이 지내오고 있다고 했다. 그중에서 민 옥(玟玉)이라는 젊은이는 입담이 좋아서 여행에서 동행들이 피곤하지 않게하 는 재주가 있었다. 모두들 얘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다 보면 어느새 다음 목적 지까지 와 있는 것이다. 모두들 서로 중요한 것들은 숨기고 있겠지만 같이 얘 기들을 나누다 보니 상당히 친해졌다. 여행을 시작한지 25일째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묵향은 당당하게 문을 지키는 호위무사에게 물었다. "검황을 만나뵙고 싶소. 안내를 하던지 아니면 연락을 좀 해주시겠소?" "나으리께서는 지금 거의 문의 일에서 은퇴를 하고 총관 나으리에게 대소사를 일임하고 계십니다. 볼일이 있으시다면 총관님을 뵙는게 낫지요." "이 일은 노가주(老家主)가 아니면 안되오." "나으리께서는 저곳의 초가(草家)에서 지내십니다. 시중드는 몇사람만을 거느 리고 계시는데 혹 가시더라도 만나뵙기는 어려울 겁니다." "알려줘서 고맙소." 묵향 일행은 말을 달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묵향은 산길을 지나가다가 갑 자기 멈춰서며 소리쳤다. "모습을 나타내라!" 그러자 갑자기 4명의 흑의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난 그들을 보고 동행들은 경악하며 출수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 하지않고 묵 향은 흑의 복면인들에게 물었다. "누가 보내서 왔느냐?" 그러자 그중 한명이 대답했다. "혁장로께서 보내셨습니다. 대장(隊長)을 지원하라는 분부셨습니다." "돌아가라." "그렇게 말씀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속하들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흠.... 그럼 할 수 없군. 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되 결코 내 지시가 없이는 손 을 써서는 안된다. 약속할 수 있느냐?" "명에 따르겠습니다." "좋다. 따라오라!" 중인들은 따라오기 시작한 4명의 복면인들이 극도로 훈련된 고수들이라는 사 실을 깨닫고 농담도 집어치우고 묵묵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거의 기척이 없 이 따라오는 그들의 움직임으로 봤을때 정상적인 무림인은 아님을 사냥개의 감각으로 곧 알아챘던 것이다. 묵향이나 그 흑의 복면인들도 말이 없었으므로 초가에 도착할때까지 모두들 말없이 길을 재촉했다. 초가에 도착할때는 저녘 때가 다되어 모두들 시장기가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초가에 도착해보니 한 노인이 정원의 매화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고, 그 옆에 는 청의동자(靑依童子) 한명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는 것을 보 고있던 노인이 반갑게 말을 걸었다. "어서들 오시게나. 식사는 했나? 얘야. 빨리가서 문향주 위로 모든 고수들을 불러오너라. 급한 일이라 일러라." "예." 답을 하더니 동자는 쪼르르 경신술을 써서 달려 내려갔다. 순간 흑의인들이 잠시 꿈틀했지만 묵향의 말없는 제지를 받고 동자가 멀어지는 모습을 그냥 지 켜봤다. "령(鈴)아! 손님들이 오셨으니 차를 내오거라. 모두들 이리 오시게나." 검황은 손님들을 안내해서 마루 한쪽편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흑의 복면인들은 그냥 마당에 서 있을뿐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을 보다못한 묵향이 노인에게 말했다. "저들에게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럼 신경쓰지 않기로 함세. 자네는 이리와서 나하고 얘기좀 하지 않겠나?" "예 그러죠." 복면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령이라 불리는 홍의소녀(紅依少女)가 가져 오는 차와 간단한 음식을 먼저 들었다. 묵향이 차를 마시는 것을 물끄러미 보 던 노인이 물었다. "차마시는 모양을 보니 완전한 야인(野人)이 분명하군. 예절 교육이라곤 받지 않은 모양이네 그려." "저는 태어나서 지금껏 그런 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마지막 사 부를 만나 여러 가지를 배웠지만 오랜동안 습관이 되어 고치기가 어렵군요."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고치지 않은 거겠지." "하하... 그거나 그거나 비슷한 거죠. 저는 세세한 사항에 얽매이기는 싫습니 다." "자네는 보아하니 천하를 탐할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데 어찌하여..." "의리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차맛이 어떤가?" "좋군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차맛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냥 입맛에 맞다 안맞다만 느낄 뿐 그 외에는 모르겠습니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군. 자네들은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나?" "예." "그럼 령아, 음식과 술을 준비해라." "예." "산속이라 별로 찬은 없으니 이해해 주시게나." "별말씀을요." 모두들 노인과 묵향이 주고받는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지금까지 들 리는 말에 의하면 그런대로 노인이 이쪽에 호의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태도는 언제 바뀔지 모르는 노릇이고, 묵향 자신이 이 노인을 해치 러 왔으니 앞으로 어떻게 사정이 바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노인 의 환대에 의아해 했지만 그냥 잠자코 있으면서 마음속으로 대비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밑으로 연락을 하러 달려간 청의동자에 대한 걱정도 있 었다. 그녀석이 많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오면 일이 복잡하게 되는 것이다. 하 지만 묵향이 잠자코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 고받는 가운데 홍의소녀가 가져오는 음식들을 들었다. 모두들 술과 음식을 들 면서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에도 흑의 복면인들은 그냥 한군데에 서 있을뿐 자 리에 끼어들지 않았다. 식사가 거의 끝날 때 즈음에 밑에서 15명 정도의 고수들이 최대한 빠른 속도 로 경공을 펼쳐 올라왔다. 그들의 신법으로 보아 상당한 수련을 거친 자들임 이 확실했다. 모두들 우려하던 현실이 다가오자 바짝 긴장하면서 만일의 사태 에 대비했다. 정량의 패거리는 직접 싸우러 온 자들이 아닌만큼 긴장이 들하 기는 했지만 불문곡직(不問曲直) 달려든다면 자신들도 위험하므로 싸늘한 긴 장감이 흐르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이들이 달려들어오는데도 묵향의 표정 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는 달려오는 고수들을 보며 노인에게 말했다. "상당히 잘 단련된 아이들이군요." "클클... 다 허장성세(虛張聲勢)일 뿐 저들 중에서 쓸만한 녀석은 몇 안돼 네." 제자들은 달려온 다음 그 중에서 한명이 노인에게 포권을 하면서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오냐. 너희들은 거기 앉아 이 늙은이가 나누는 얘기나 듣고 있거라. 많은 도 움이 될지도 몰라 내 부른 것이다." "예." 그러더니 그들은 그 노인 뒷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이 앉을 자리가 충 분하지 않았기에 홍의소녀는 돗자리를 내와서 대부분은 마당에 자리를 잡았 다. 그들에게도 차가 주어졌다. "자네 무공 말고도 배운 것이 있나?" "몇가지 배웠죠. 모두 마지막 사부가 가르쳐 준 것인데, 음악과 수묵화를 좀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부가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하셨기에 그것도 어깨너 머로 좀 배웠습니다. 원체 재주가 없어서 별로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습니 다." "음악을 좀 한다구? 그럼 혹시 금(琴)을 탈줄 아나?" "조금" "령아. 금을 가져오너라." "예..." 홍의소녀가 금을 가져오자 그 노인은 금을 넘겨주며 말했다. "별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한곡 들려주면 감사하겠군." "그럼.." 묵향은 줄을 고른 후 금을 타기 시작했다. 묵향은 금음에 약간의 내공을 불어 넣어 운용했기에 듣는이의 심금을 울리는 부분이 있었다. 이것은 마교의 음공 (音功)의 일부를 모방한 것으로 실지 이런 방식으로 내공을 더욱 많이 주입한 다면 듣는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묵향의 경우 그걸 유백 에게 배웠지만 자신은 음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석에 어긋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사람의 심금을 울리도록 조미료로 내공을 이용하고 있었 다. 이때 옆에서 듣고있던 홍의소녀와 제자들보다 나중에 달려온 청의동자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자라 그런지 홍의소녀는 참지못하고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그걸 본 묵향은 연주를 멈추며 말했다. "미천한 곡을 계속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확실히 자네의 금을 타는 솜씨는 별볼일이 없어. 하지만 그 오묘한 내공의 운용은 정말 대단한 경지로군. 령아가 눈물을 흘릴 지경이니.... 본격 적으로 금을 배우면 음공만으로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겠군. 자네의 생각 은 어떤가?" "음악이란 음(音)을 이용해서 마음에 감동을 받으며 즐기기(樂)위한 것이지 그걸로 사람을 죽이라는 건 아닌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 은 많고 많은데 무엇 때문에 그 방법을 택하겠습니까?" "특이한 친구군. 내공이 강한 경우 음악을 사용하는 것도 대단한 득이 되지. 만통음제(萬通音帝)의 경우 그 살인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나? 많 은 사람을 한번에 별 수고도 없이 죽이는데는 그게 최고인 것 같더군." "저는 좀 힘들더라도 음을 살인에 사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네는 검이란 뭣이라고 생각하나?" "아니? 검을 아직도 모른단 말입니까?" "......" "지금 저들이 차고있는게 검이 아닙니까? 양쪽에 날을 가진 아름다운 살인도 구죠. 보통 길이는 2척 8촌정도...." "내가 그걸 묻는게 아닌줄은 자네도 잘 알텐데..." "그게 그거죠. 무공이란 무공인 것이고, 검은 검, 도는 도입니다. 왜 무공과 검을 혼동하십니까?" "대단하군. 그정도 경지에 이르렀다니.... 하지만 아직도 많은 멍청이들이 그 걸 혼동하고 있지. 저기있는 내 아들녀석도 그걸 혼동하지. 실지 검이란 아무 것도 아냐. 그냥 손이 좀 더 길어진 정도에 불과하다고 할까? 오랜만에 자네 와는 밤새워 얘기를 할 수 있을 기분이 드는군. 자네는 어떤가?" "좋죠." 비무의 결과(結果) 묵향과 그 노인은 밤새워 얘기를 나눴다. 거의 대부분은 무공에 대한 것이었 지만 무공외의 얘기도 많이 오갔다. 하지만 둘의 대화는 그뿐으로 서로의 신 상이나 주변의 얘기는 일체 없었다. 그들은 술을 조금씩 마시며 동이틀때까지 얘기를 나눴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 들의 대화는 대단히 높은 경지의 무공에 대한 것들이었고, 그들이 이해하기는 너무나도 힘든 부분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노인과 묵향은 신이나서 서 로의 이론에 반박하기도 하면서 대화는 계속되었다. 노인이 사는 곳에서 해지 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지만 앞으로는 탁 트여 해뜨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해가 떠오르자 모두는 하던 대화를 멈추고 그 장관을 혼이 나간 듯이 즐겼다. 해가 완전히 나오자 노인은 다시 물었다. "자네는 좋은 검을 만들어 나가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러자 갑자기 묵향은 안색이 약간 굳어지며 말했다. "그 질문의 대답은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차선(次善)의 대답은 해드릴 수 있죠. 모두 잊으면 됩니다. 완전히 잊으면 좋은 검이 만들어질 겁니다." "모두 잊는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실행이 불가능한 대답이군. 그럼 최선의 답 은 뭔가?" "그건 제가 구상중에 있는 검법의 서문(序文)이기에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 검법은 아무에게도 알려줄 생각이 없거든요." "다음에 받을 제자에게도 말인가?" "저는 제자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무공의 끝이 어딘지 알고 싶을 뿐 입니다. 계속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다가 늙어 죽을 생각입니다." "대단한 친구군. 그렇다면 구상중인 검법의 이름을 좀 알려줄 수 있겠나? 참 궁금하군." "무상검법(無上劍法)이라 지었습니다." "대단히 광오한 명칭이군. 무상(無上)이라. 더 이상의 검법이 없다는 말이 니... 어떤 것인지 더욱 궁금하네 그려." "좀 있다가 보시게 될겁니다." "그 무상검법은 몇가지 초식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고정된 초식은 없습니다." "초식이 없다구? 그렇다면 어찌 검법이랄 수 있나?" "무초식의 초식을 내포하고 있죠. 초식이 있다면 그걸 역이용한 대응 무공이 나오게 되어있죠. 하지만 초식이 없기에 그것이 무상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검법은 어떤 형태로 되어있나?" "지금까지는 총 4개의 장(章)으로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더 늘려갈 생각입니 다." "그걸 간단히 알려줄 수 있나?" "어려울 것 없죠. 1장은 검기(劍氣), 2장은 검풍(劍風), 3장은 어검(御劍), 4장은 검강(劍剛)입니다. 실질적으로는 검을 이용했다 뿐이지 검법도 아닙니 다. 하지만 그렇게 이름붙이고 싶어서 불렀을 뿐입니다." "전설적인 무공들이 모두 망라되어있군. 더욱 구미가 당기는군. 자네도 여태 껏 기다리느라 진이 빠졌을테니...... 령아. 내 검을 다오." 그러자 홍의소녀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검을 말씀입니까?" "오냐." 홍의소녀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고검(古劍) 1자루를 가 지고 나와 노인에게건넸다. 그러자 노인은 검을 천천히 뽑아 묵향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내가 이녀석을 30여년 전에 우연히 구해 아직도 애지중지 하고 있다네. 아주 대단한 보검이야. 내 손에 들어온 것을 나는 아직도 감사한다네. 어떤가?" "아주 훌륭한 검이군요. 검신이 곧은 것이 산악(山岳)의 기운을 담고 있으니 대단한 보검이라 생각됩니다. 그 검의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요?" "패왕검(覇王劍)이라네. 일반적인 보검과 같은 예기가 없어 보통 검처럼 보 여, 나도 처음에는 이녀석의 진면목을 잘 알아보지 못했지. 하지만날이 갈수 록 마음에 드는 녀석이라 내가 그렇게 이름을 지었지. 자네의 검은 어떤 것인 가?" "제것은 그냥 정강(精剛)으로 만든 보통 검입니다. 아주 오랜세월 정이 들었 기에 그냥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뭐 보검도 뭣도 아니죠. 하지만 아주 제 마 음에 쏙 들게 잘 만들어진 검입니다." 묵향은 묵혼을 꺼내어 보이며 말했다. "짧은 검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그렇지도 않습니다. 예전에는 검자루의 길이가 1척이나 되어 그걸로 사람의 눈을 현혹하길 즐겼지만 지금은 그것도 귀찮아서 잘라버려 보통 검보다 약간 긴 정도일 뿐이죠." "1척이라. 대단하군. 확실이 자루가 1척이나 된다면 보통 고수가 아니고서는 간격을 잡기가 힘들지. 그럼 이제 자네의 실력을 보고싶군. 이리 따라오게." 두명이 일어서자 모두들 따라 일어섰다. 그걸 본 노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모두들 여기에서 구경하는 게 좋겠군. 우리는 저 밑에서 비무를 할테니 까.... 정(靜)아. 너는 만약에 이 아비가 죽더라도 복수할 생각을 말아라. 이 것은 비무일 뿐 그 무엇도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서진(徐眞)아." "예. 사부님" "내가 죽으면 이 패왕은 너가 가져줬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그것은 사부님의 신물(信物)인데 어찌 제자가 감히." "이건 장문인을 나타내는 신물이 아니다. 그냥 내가 애용하던 검일뿐. 너는 아직 미숙하나 그 기상과 기운이 나의 젊은 시절을 생각나게 하기에 이걸 너 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걸 가지고 정이를 도와주도록 해라." "예, 사부님." 노인은 천천히 묵향의 뒤를 따라 내려와 오두막 밑에있던 밭의 가운데에 섰 다. 밭은 평평하고 제법 넓직해 20장 정도의 넓은 비무장을 제공해 주고 있었 다. 노인은 성큼성큼 걸어가 거의 묵향과 7장(약 21M) 거리까지 떨어진 다음 천천히 검을 뽑으며 말했다. "이제 시작해 보자구." 고수들이 사용하는 강력한 무공들의 경우 거의 강기 계통을 사용하여 상대를 공격하기에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결투가 시작된다. 묵향도 검을 천천히 뽑은 후 정안으로 겨누어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예의는 필요없이 처음부터 살수(殺手)를 쓰기로 하죠." 언제나 실전이 아닌 비무에서는 예의가 있다. 비무라는 말이 나오면 동년배끼 리는 서로 3초를, 후배와 선배가 상대할 때는 선배가 3초를 양보한 다음에 본 격적인 대결이 시작된다. 말과 동시에 묵향의 몸 주위로 푸른색 구름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본 노인은 대경해서 말했다. "검강! 대단하군. 이런 식으로 검강을 만들어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본적이 없네. 이것도 무상검법인가?" "예. 지금것은 4장 3절, 망강(網剛;강기의 사슬)이라는 것입니다. 수비에 효 과적이죠." 그러자 노인은 앞으로 달려나오며 우렁찬 목소리로 기합을 토했다. "으얍" 그와 동시에 강맹한 초식이 펼쳐졌고, 노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강기의 회 오리와 푸르스름한 안개가 부딪치며 불꽃을 튕겼다. 하지만 약간 갈라지던 안 개는 곧이어 원상태로 돌아갔다. 이걸 본 노인은 신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대단한 보호력이군. 뚫고 들어가기는 힘들겠어." 그러자 안개 저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노야(老也)의 능력이라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겁니다. 괜히 투덜거리지 마 십시오." 그와 동시에 노인은 앞으로 뛰쳐 나오며 외쳤다. "묵룡세(墨龍勢)!" 그와 동시에 노인의 검에서 십여가닥의 강력한 강기가 뇌전처럼 뿜어져 나오 며 안개를 찢어놓기 시작했다. 강기와 강기가 부딪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검강, 검기의 회오리가 일어났다. 검강의 사슬인 경우 얇고 가는 가슬이 두텁 게 연결되어 있기에 강력한 검기라 하지만 뚫고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어느정도 강기의 사슬을 찢는데 성공하자 노인은 즉시 묵향에게 검을 찔러넣 으며 외쳤다. "용신세(龍身勢)" 패왕검은 웅웅거리는 검음과 함께 푸르스름한 빛을 띄면서 묵향을 향해 덮쳐 왔다. 수십마리의 용들이 자신을 덮쳐오는 환각이 일어날 정도로 푸른 빛을 띈 패왕검이 묵향을 향해 순간적으로 10여번 전신요혈을 향해 찔러왔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검기가 함께 일어나며 묵향의 전신을 덮쳐왔다. 이때 묵향이 "3장 1절, 어검"이라는 말을 낭랑히 말함과 동시에 평범하던 묵혼검에서 푸른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상태로 묵향은 묵혼을 들어 찔러들어오는 패왕검의 검초를 막았다. 몇번 패왕검의 검초를 몸에서 약간씩 빗나가게 흘려보냈다. 이때 묵향의 어검술과 노인의 막강한 검기가 부딪치며 엄청난 폭음과 함께 회 오리가 일어났다. 노인은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어느순간 묵혼검과의 사이에 서 일어나는 회오리와 같은 반탄력을 이용해 뒤로 튕겨나가며 외쳤다. "비룡세(飛龍勢)" 그와 동시에 빛이 나는 패왕검은 노인의 손을 떠나 막 노인을 추격하려는 묵 향을 향해 빛과 같은 속도로 찔러 들어갔다. 묵향은 찔러 들어오는 패왕검을 옆으로 쳐내며 노인을 따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튕겨나간 패왕검은 타원을 그 리며 다시 묵향을 향해 덮쳐왔다. 묵향은 그것을 보고 나지막히 말했다. "3장 2절 이기어검" 그와 동시에 묵향의 손에서 묵혼이 빠져나가 어기동검술(御氣動劍術)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패왕검과 공중에서 부딪쳐 나갔다. 묵향은 묵혼이 자신의 손에 서 떨어져 나간 그 순간 노인이 있는 곳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러면서 "4장 1 절, 통강(通剛)" 그와 동시에 그의 장심(掌心)에서 푸른색의 길쭉한 용과 같 이 생긴 것이 노인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것을 본 노인은 대경해서 옆으로 피했다. 노인이 옆으로 피해 나가자 묵향은 이번에는 손을 수평으로 그으면서 말했다. "4장 2절, 절강(絶剛)" 그러자 그의 손에서 푸른색의 반월형과 비슷한 물체가 노인이 피해나간 위치 를 향해 광범위하게 날아왔다. 거의 동시에 노인은 위로 몸을 날렸다. 노인의 신발 아래쪽으로 아슬아슬하게 그 반월형의 물체가 날아갔고 그것이 밭의 바 깥부분에 있던 나무들에 맞자 일순간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곧이어 나무들 이 밑동이 잘려서 쓰러져 나갔다. 수십그루가 잘려 나가는 걸로 보아 그것의 위력이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노인이 위로 떠오르자 묵향은 기다렸다는 듯이 노인이 날아오르는 위치에 손 을 뻗으면서 말했다. "4장 1절, 통강" 그러자 이번에도 길쭉한 푸른색 용이 각각 그의 양손에서 노인이 있는 위치로 쏘아져 나갔다. 노인은 그걸 보고 외쳤다. "좋군! 부룡장(浮龍掌)" 노인은 오른쪽 상방을 향해 장풍을 발사하고 그 힘에 의지해서 옆으로 떨어져 내리며 묵향의 공격을 피해냈다. 화경의 고수라면 능공허보를 펼칠 수 있다. 공중을 걸어다닐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갑작스럽 게 빠른 움직임은 불가능하므로 그런 동작이 필요할때는 장법(掌法)을 써서 그 반동을 많이 사용한다. 노인은 땅에 착지하자마자 묵향을 향해 손가락을 오그리며 외쳤다. "탄령지(彈翎指)" 그와 동시에 열손가락에서 각기 지풍이 뻗어 나오며 묵향을 덮쳐 왔다. 그러 자 묵향은 오른손을 들어 노인을 향하면서 말했다. "2장 1절, 잠룡풍(潛龍風)" 묵향의 손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는데 곧이어 노인의 손에서 뻗쳐 나온 10 줄기의 지풍은 공중에서 산산조각 나며 굉음을 울렸다. 노인은 옆으로 피하면 서 외쳤다. "무형(無形)의 권풍(拳風)인가?" "아닙니다. 그냥 검풍(劍風)일 뿐이죠." 그러자 노인은 대경해서 외쳤다. "그럼 여태까지 사용한 모든 것이 장법(掌法)이나 권법(拳法)이 아니라 모두 검법(劍法)이란 말인가?" "일정 실력을 벗어나면 한낫 풀뿌리도 검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왜 사람 몸속 의 뼈는 검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까?" "오호라. 묘(妙)하군 묘해." 그와 동시에 묵향은 저쪽에서 서로 아직도 패왕검과 싸우고 있는 묵혼을 불렀 다. 노인과 묵향은 정신과 진기를 잘 조절해 사용했기에 두 검은 아직도 싸우 며 서로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을 견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묵혼이 묵향이 있는 곳으로 날아오자 뒷따라서 패왕검도 다가왔다. 묵향은 묵혼을 쥐자자마 외쳤다. "1장 1절, 탄(彈)" 그와 동시에 묵향으로부터 엄청난 기운이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거의 강풍과 같기도 했다. 그 강렬한 반탄력에 밀려 주위 3장 안의 밭에 심어져 있던 콩 줄기와 흙이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노인이 그 튕겨져 나가는 힘을 막기 위해 앞으로 자세를 잡으며 버티자 곧바로 묵향의 음성이 들려왔다. "1장 2절, 흡(吸)" 그와 동시에 노인은 엄청난 흡인력(吸引力)에 안그래도 앞으로 쏠렸던 힘이 가세하여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묵향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묵향의 말소 리가 들렸다. "4장 1절, 통강" 노인은 그 말뜻이 뭔지 알고 있었기에 그 말과 동시에 위로 뛰어올랐다. 노인 의 발 밑으로 묵향이 발사한 강기가 지나가는 걸 느끼고 식은땀이 흘렀다. 비 무가 아니었다면 실지 이런식으로 자신이 사용할 초식을 알려주며 대결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걸 알려주지 않고 구령과 실질적인 무공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지만 않았어도 노인은 이미 저세상에 갔을 것이다. 노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수세에 몰리자 노인의 제어(制御)를 잃은 패왕검은 묵향의 옆에 떨어 져 땅에 꼽혔다. 만약 노인이 이때 패왕검을 계속 사용하여 묵향을 밀어붙였 으면 이정도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인은 그런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고 있을 때 묵향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1장 3절 파(破)" 그와 동시에 묵향의 위로 솟아오른 노인의 복부쪽으로 엄청난 검기의 회오리 가 몰아쳤다. 노인은 순간적으로 손을 아래로 내리며 외쳤다. "비룡파(飛龍破)" 그와 동시에 엄청난 굉음과 함께 노인이 뿜어낸 장풍과 묵향이 뿜어낸 검기가 부딪치면서 토해낸 반탄력에 의해 몸이 더욱 높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노 인의 애검 패왕검이 위로 떠올라 노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노인은 검을 잡음 과 동시에 외쳤다. "파룡세(破龍勢)" 그와 동시에 수십가닥의 강기가 묵향의 머리위에서 날아왔다. 하지만 묵향은 옆으로 피하는 대신 그냥 가만히 있었다. 노인은 이때 묵향의 목소리를 들었 다. "1장 4절 방(防)" 노인은 묵향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리던 수많은 검강들이 묵향 주위 반장 정도 거리에서 더 이상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막히는 것을 보았다. 노인의 강기들 은 묵향이 꼭 반원형의 보이지 않는 막을 친 것처럼 더 이상 안으로는 들어가 지 못했다. 묵향의 주위는 엄청난 량의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강기들이 땅에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폭발로 좌욱한 먼지가 일어났다. 묵향은 노인의 일격을 받은 후 천천히 검을 노인쪽으로 올리며 말했다. "2장 2절, 파황풍(破荒風)! 3장 2절, 이기어검" 그러자 묵혼이 묵향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며 맹렬한 기세로 노인을 향해 날아 왔다. 노인은 묵향이 2가지 초식을 사용한 것을 알고 있지만 새로운 초식은 아무런 느낌도 그에게 주지않았다. 노인은 푸른 빛을 발하며 덮쳐오는 묵혼 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2장은 검풍, 검기와 검풍은 검강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검강이 가장 강하나 눈에 보이기에 막을 시간적 여유가 있고, 검기는 그 위력이 약하기에 내 호신강기를 뚫지 못한다. 하지만 검풍은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 위력은 강 기에 떨어진다고 하나 그래도 엄청나지.... 대신 검풍은 검강보다 속도가 떨 어지는데 약점이 있지. 이녀석이 지금 뭘 하려는지 알겠다.' 생각이 정리되자 그는 지체없이 몸을 오른편으로 꺽으며 왼손으로 장풍을 발 사하며 그 반탄력으로 더욱 속도를 내어 사지(死地)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빠져 나왔다. 이때 묵혼이 따라오며 그를 괴롭히자 그는 다시 묵혼을 향해 검 을 던지며 외쳤다. "비룡세" 그와 동시에 땅에 내려선 노인은 옆의 풀줄기를 뽑아들며 외쳤다. "묵룡세(墨龍勢)" 그와 동시에 휘둘러진 풀줄기에서 수십가닥의 강기들이 묵향을 향해 날아갔 다. 묵향은 그 강기를 피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다음 노인을 향해 오른 손을 뻗으며 외쳤다. "1장 5절, 박(縛)" 그런다음 왼손을 뻗으며 외쳤다. "2장 2절, 파황풍(破荒風)" 노인은 묵향의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또다시 새로운 2가지 초식이 나왔군. 도대체 뭔지 모르지만 일단 피하고 보 자' 생각은 찰나. 노인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생각만 옆으로 몸을 날렸을 뿐 어떤 끈적끈적한 아교 같은 것에 몸이 완전히 갖힌 것 처럼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노인은 대경했다. '이것이 1장 5절 박인 모양이군. 정말 사로잡힌 것처럼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 하군. 하지만 이제 곧 검풍이 닥칠 건데......' 노인은사력을 다해 외쳤다. "풍룡세(風龍勢)" 그와 동시에 노인이 가진 풀줄기에서 초식에 따라 엄청난 검기가 뿜어져 나왔 고 그 검기들이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던 기운과 부딪치며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노인은 잠시 몸이 자유스러워짐을 느꼈다. 이때를 이용해 노인은 옆으 로 5장 가량 도약해 움직인 다음 외쳤다. "백룡세(白龍勢)" 이걸 본 묵향이 나직이 말했다. "대단하시군요. 여태껏 박을 뚫을 수 있는 고수는 없을거로 생각했는데...." 하지만 묵향도 한가하게 말할 처지가 못되었다. 말이 백룡이지 100마리는 안 되겠지만 거의 그정도는 될것같은 수없이 많은 강기들이 노인의 몸에서 뿜어 져 나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면서 유선형으로 움직여 모든 강기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묵향에게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대단한 초식입니다. 1장 4절 방" 이들의 대결을 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다 손에 땀을 쥐었다. 묵향과 노인이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노인의 말과는 달리 묵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노인이 외치는 목소리만 쩌렁쩌렁 계곡을 울리고 있었 다. 이들의 대결은 정말 대단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초식들이 강호 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높은 수준의 무학이었고 서로의 검기와 검강이 부딪치 며 튕겨나오는 강기의 회오리에 주변의 숲과 땅이 초토화가 되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걸 보고 여정(呂靜)이 사제들에게 말했다. "잘 봐 두거라. 아버님께서 목숨을 걸고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보배와도 같 은 무공들이다. 아버님도 대단하시지만 저사람도 대단하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예. 사형. 사부님께서 저토록 고생하시는 상대는 처음보는 것 같습니다. 저 자의 능력은정말 대단하군요." "무상검법이라길래 무슨 이름이 그렇게 대단한가 했더니 정말 보기 드문 검법 입니다. 사부님의 10성에 이르는 창룡검법(漲龍劍法)에 저정도로 버티는 사람 이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지만 창룡검법은 익히기가 너무나 힘든 검법이다. 초식의 대부분이 검기나 검강을 주축으로 상대를 공격하기에 엄청난 공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그래 서 대부분이 시작도 못해볼 정도고 여태까지 그 검법을 10성까지 익히신 분은 본문에서 두 분 밖에 없으셨어. 너무나도 난해한 검법인데 그걸 막아내다 니..... 저자의 검법도 대단하군." 말을 나누면서도 초가 주위에 모인 사람들의 눈은 두사람의 움직임을 주시하 고 있었다. 이들의 검법을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다음에 이 검법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 대단한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둘의 검법은 거의가 일정한 틀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강기의 발사를 주무기로 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근거리에서 정신없이 공격하여 강기를 발사하지 못하도 록 막는 외에 표족한 수가 없음을 모두들 느끼고 있었다. 이때 두사람의 비무 는 끝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묵향의 공격을 피한 노인은 묵향의 3장 거리로 순간적으로 다가가며 외쳤다. "뇌룡세(雷龍勢)" 그와 동시에 노인의 검에서는 번개와 같은 강기가 뻗어 나오며 사방을 뒤덮었 다. 묵향이 시전하는 망강(網剛)과도 비슷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좀더 강기 의 두께가 두껍고 강력하지만 안개와 같이 촘촘하지는 않고 빈틈이 많은... 그러니까 방어 위주의 망강보다는 근거리에 다수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초식 인 모양이었다. 묵향은 뇌전과 같은 강기가 노인의 몸에서 뻗어 나오자 뒤로 후퇴하지 않고 노인의 몸으로 뛰어들어가며 외쳤다. "4장 3절, 망강! 3장 1절, 어검(御劍)" 그와 동시에 묵혼에서 뻗어나온 망강과 패왕검에서 뻗어나온 뇌전과 같은 강 기가 부딪치며 엄청난 소음과 반탄력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 고 묵향은 더욱 접근해 들어오며 푸른색으로 이글거리는 묵혼으로 너무나 강 해서 망강을 뚫고 들어오는 강기들을 잘라내며 노인에게 접근했다. 그와 동시 에 강기를 잘라내기 위해 밑으로 내려갔던 검을 위로 쳐올렸다. 노인은 대경 하며 외쳤다. "묵룡세(墨龍勢)..." 하지만 노인의 초식은 이어지지 못했다. 묵향의 검은 너무나도 빨리 노인의 몸쪽으로 파고들었다. 노인은 초식을 펼칠 시간이 없자 최대한 검에 기를 주 입하여 묵혼을 막았다. 그와 묵혼과 패왕검이 부딪힘과 동시에 묵향은 그 반 탄력을 이용하여 노인의 다리로 묵혼을 베어나갔다. 노인은 뒤로 물러나며 묵 향의 목을 찔러왔다. 묵향은 피하며 노인의 팔을 베어나갔다. 이런 식으로 물 고 물리는 근접전이 펼쳐졌다. 이런 난투극이 벌어지면 뛰어난 감각과 시력, 순간적인 판단력, 빠른 검놀림과 경공술이 필요하다. 이제 더 이상의 초식은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노인의 경우 묵향은 어검술을 사용하지만 자신은 초식 을 사용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상당한 불리함을 안고 있었다. 대신 노인의 패 왕검은 보검중의 보검이라 기를 주입한 상태만으로 묵향의 어검술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검이 묵혼과 같은 일반적인 정강으로 만든 검이라면 벌 써 검과 함께 몸이 두토막이 났을 것이다. '이 상태로는 내가 불리해. 약간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몸을 뒤로 빼면서 비룡 세를 펼칠 수 있는데....' 하지만 그 약간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노인은 왼손을 이용해서 허리에 차고있는 검집을 뽑아냈다. 이 검집으로는 어검술을 막을 수 없지만 패왕검으로 어검술을 막고있는 사이 이걸로 상대의 몸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 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노인의 오른손과 왼손은 따로 놀기 시작했다. 오른손 의 패왕검으로 묵혼을 막으면서 왼손에 쥔 칼집을 움직이며 외쳤다. "뇌룡세" 그와 동시에 칼집에서 번개와 같은 강기가 뻗어 나오기 시작하자 묵향은 급히 왼손을 앞으로 들이밀며 외쳤다. "4장 4절, 수강(守剛)" 그러자 묵향의 왼손이 팔뚝까지 푸른 강기에 뒤덮였다. 그런다음 왼손을 강기 가 뻗어나오는 노인의 검집을 향해 뻗었다. 묵향의 손과 뇌전의 검강이 무딪 치자 불꽃이 일어났다. 묵향은 더욱 손을 뻗어 검집을 움켜 쥐었다. 검집이 잡히자 묵향은 나직이 말했다. "2장 3절, 측파풍(側破風)" 그와 동시에 노인이 쥐고있던 검집에서 검풍이 일어나며 노인을 강타했다. 순 간적으로 노인의 검집을 쥐고있던 손이 팔목까지 터져나갔다. 노인은 엄청난 충격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검을 중심으로 측면으로 강 렬하게 뻗어나온 검풍의 회오리가 노인의 왼손을 손목까지 피떡을 만들고도 모자라 호신강기를 파괴하면서 너무나 강렬한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노인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 나가자 묵향도 따라서 튀어 오르며 쫓아갔다. 노인 이 회전하며 중심을 잡기도 전에 번쩍하며 묵혼이 푸른 빛을 토해냈다. 그걸 로 끝이었다. 쓰러진 노인의 옷은 아래에서 위로 완전히 찢어져 있었고 바지 는 동강이 나서 아래로 내려가버려 성기(性器)까지 드러나 있었다. 몸의 아래 위로 붉은 선(線)이 그어져 있다는 것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을뿐 그 외에는 거의 외상이 보이지 않았다. 노인이 쓰러지자 제자들이 아우성치며 위에서부 터 달려 내려왔다. 그들은 검을 뽑아 묵향을 막으며 사부를 보호하려고 했다. 이때 노인이 그들을 제지하며 묵향에게 물었다. "대단한 실력이군, 젊은이. 자네가 봐주지 않았다면..... 나는 내 실력을 제 대로 펼쳐보기도 힘들었을거야...... 자네의 이름을 알려줄 수 있나?" "묵혼지주(墨魂之主;묵혼의 주인)라 불러 주십시오." "이름을 알려주기 싫다면 할 수 없지. 그렇다면 묵혼지주, 내 제자들을 해치 지 말아주게..." "알겠습니다." 묵향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답을 얻어내자 노인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 유언은 알고 있을거다. 만약 너희들 중에서 복수하고 싶은 자가 있다면 나정도의 고수가 5명이 모이기 전에는 꿈도꾸지 말아라. 맹세할 수 있느냐?" "제자. 맹세하겠습니다." "문파를 잘 다스려 나가기를 바란다. 정아, 네게 문파를 맏기니 부탁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현경(玄境)의 고수와 겨뤄보다니 정말...... 영광..... 큭" 그러면서 노인의 몸은 아래에서 위로 두토막이 났다. 노인은 심후한 내력으로 두토막이 나려는 몸뚱이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죽음직전에 최대한 긁어모았던 내력이 고갈되자 몸이 두토막이 나면서 세상을 떠났다. 노인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자 제자들 중에서 가장 성질이 팔팔한 곽 삼(郭杉)이 검을 뽑아들고 나서며 외쳤다. "이런 죽일놈, 이정도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그와 동시에 그는 묵향을 찔러갔다. 곽삼의 움직임에 4명의 제자가 동조하며 나섰다. 그들도 곽삼의 움직임에 맞춰 검을 뽑으며 묵향을 향해 공격을 가했 다. 하지만 그들의 의욕만 앞섰을뿐 묵향이 검을 휘두르자 검과함께 모두들 두토막이 나서 좌우로 쓰러져갔다. 묵향에게 제자들이 죽임을 당하기 시작하 자 나머지 제자들도 이성을 잃고 검을 빼들며 묵향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모 양을 지켜보던 여정(呂靜)이 서진(徐眞)에게 일렀다. "너는 빨리 패왕검을 가지고 이곳을 벗어나서 사정을 동문들에게 알려라." "하지만 대사형..." "잔소리 말고 빨리 도망가라. 아버님을 격패시킨 현경의 고수다. 우리들이 덤 빈다고 될 상대가 아니야. 이건 모두의 생사가 달린 일이다. 여민(呂敏)이를 나처럼 잘 도와주기 바란다. 빨리 가거라." 그러자 서진은 최대한 공력을 돋우어 산아래로 도망쳐 내려갔다. 그걸 본 묵 향이 외쳤다. "죽여라." 그러자 여태까지 묵묵히 위에서 지켜보던 흑의 복면인들 중에 2명이 아래로 쏜살같이 쫓아 내려갔다. 서진이 도망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위에 올라왔던 모든 제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제일 마지막으로 죽은 것이 여정이었다. 그는 노인의 수제자 답게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묵향과 같은 초고수를 상 대하기에는미숙했던 것이다. 묵향은 모두를 다 죽인 후 초가로 올라갔다. 그 곳에는 청의동자와 홍의소녀가 떨며 서 있었다. 그것을 보고 묵향은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너도 노인의 제자냐?" "아뇨. 사손(師孫)입니다." 청의소년의 겁에 질렸으면서도 애써 당당히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묵향은 미 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꽤 그럴듯한 녀석이 되겠군. 너는?" 그러자 홍의소녀가 말했다. "저는 시녑니다. 음식과 차를 장만해 드리죠." 묵향은 이번에는 정량의 패거리에게 말했다. "미안하군. 내가 죽어줬어야 자네들이 현상금을 탔을텐데...." 그러자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하늘을 몰라 뵙고 헛소리를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건 그렇고 이일을 어쩐다......" 이때 밑에서 두명의 흑의 복면인이 달려 올라왔다. 그들을 보고 묵향이 외쳤 다. "어떻게 되었느냐?" "죄송합니다. 대장. 도망쳤습니다. 대단한 실력자였습니다. 처음에 기습당해 암기를 맞는 바람에 도저히 그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그정도 실력을 가지고 나를 돕겠다고 오다니..... 멍청한 자식들! 이만 돌아 가자." "하지만 저들은?" "닥쳐!" 그런다음 묵향은 정량의 패거리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해 자네들만 헛걸음을 했군. 하지만 나중에 도 기회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니 너무 낙심하지 말게. 미안하지만 혹시 시간 이 나거든 내가 무당파와 태진문에 나에게 현상금을 건 사실에 대해 문책을 하러 언젠가 들릴 것이라고 전해주게나. 지금은 시간이 없어 나중에 다시 강 호에 나오면 꼭 한번 갈테니까 말이야. 전해줄 수 있겠나?" "전해 드립죠." "그럼 수고비로 이걸 받게. 은화 4냥일세. 이정도면 수고비로는 충분하겠지. 일부러 시간내서 갈 필요는 없고 시간이 얼마나 흐르던지 간에 나중에 그 근 처에 들를 일이 있거든 전해주게나. 만약 내가 먼저 가도 그녀석들이 재수없 어 그런거니 자네들 탓은 아무도 하지 않을걸세." "명심합지요." 정량의 패거리에게 말을 마친 묵향은 청의동자에게 말했다. "다음에 훌륭한 고수가 되면 만나자꾸나. 그럼 잘 있거라." 그런다음 흑의 복면인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묵향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정량이 한숨을 쉬면서 그 동료들에게 말했다. "휴.... 아까 그젊은이가 도망쳤으니 망정이지 안그러면 여기서 목이 날아갈 뻔 했군." 그러자 뚱뚱한 남자가 물었다. "그는 그렇게 부드럽게 말했는데 왜 대형은 그런 말씀을 하시오?" "원래 노인만 죽였다면 상관없었겠지만, 그 제자들까지 다 죽여놨으니 완전히 입을 막기 위해서 다 죽여야 하는거야. 하지만 1명이 살아서 도망쳤으니 1명 이 살아있으나 7명이 살아있으나 매한가지지. 실지 우리들로서는 그에 대해 아는게 거의 없으니까, 그러니까 목숨을 건진거야. 빨리 떠나자. 혹시나 마음 이 변해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그 말과 동시에 그들은 오두막을 떠났다. 서진(徐眞)은 추격자들을 기습을 가해 격퇴하고 급히 산을 내려갔다. 그가 낭 패한 몰골로 경공을 최대한 전개하여 내려오자 문을 지키는 무사들이 놀라서 물었다. "공자님, 어쩐 일이십니까?" "빨리 비상을 걸어라. 습격에 대비해, 빨리! 그리고 여민(呂敏) 사형은 돌아 오셨냐?" "예, 오늘 아침에 돌아오셨습니다. 금화당에 계실 겁니다." 그러자 서진은 금화당으로 달려갔다. 금화당은 각 동문들 중의 고수들이 기거 하는 곳으로 제법 큼직한 방들이 많이 붙어있는 집이다. 이들보다 조금 더 실 력이 떨어지는 자들이 은화당의 작은 방에서, 그보다 떨어지는 자들은 동화당 의 큰 방에서 여러명이 집단생활을 한다. 그는 금화당으로 뛰어들어가 여민이 기거하는 방문을 급히 열었다. 여민은 몰래 밖으로 나가 마신 술기운때문인지 아직도 술냄새를 풍기며 자고 있었다. 그는 급히 여민을 흔들어 깨우며 말했 다. "사형, 큰일났습니다. 사부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은 들은 여민은 술이 완전히 깬 듯 눈이 둥그래지며 물었다. "아버님의 몸이 안좋으시다는 말은 못들었는데..... 모두들 오두막에 있나?" 그러면서 그는 일어나 급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게 아닙니다. 비무에 져서 돌아가셨습니다." "비무에 지셨다고, 상대는 누구냐?" "묵혼지주(墨魂之主)라 칭하는 자입니다. 엄청난 고수였습니다. 사부님이 임 종시(臨終時)에 '현경의 고수와 겨뤄서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부님은 어 떤 일이 있어도 복수를 하지말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복수를 하지말라고? 어떻게 복수를 안할 수 있단 말이냐!" "모두들 복수를 하려고 달려들었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한명한테요. 상 상하기도 힘든 고수입니다. 어쨋건 전설의 현경의 고숩니다. 우선 그자가 이 리로 쳐들어 올수도 있으니 대비부터 해야 합니다." "형님은?" "대사형도 돌아가셨습니다." "형님까지? 음....." 여민은 침울한 표정으로 한탄했다. "예. 대사형께서 사형을 장문으로 임명한다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대사형이 돌아가시는 모습을 저는 보지 못했지만 대사형은 동문들과 묵혼지주의 싸움이 시작되자 저보고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사부님께서 제게 물려주신 패왕검을 적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고 하시면서요." "크흑.... 청량(晴梁)있느냐?" 그러자 밖에서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 "모든 동문들을 모아서 적의 내습에 대비하라고 일러라." "모두들 대비하고 있습니다. 몇 명 추려서 산쪽으로 보냈는데 아무런 동정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10명 정도 이끌고 산에 올라가 동정을 살펴 보시게."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버님의 유언과 이 일이 일어난 사정을 말해봐라." "예, 어제 일이었습니다. ......" 여민은 서정에게 모든 경과를 보고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여민은 서진에게 말했다. "아버님이 목숨을 걸고 싶을 정도로 높은 현경의 경지까지 올라간 고수다. 너 는 바깥일에는 신경쓰지 말고 기억나는 대로 밤새도록 아버님과 그자가 나눈 대화를 기록해라. 아버님이 본문의 무공이 한계(限界)가 있다고 언제나 말씀 하셨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그 돌파구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 "알겠습니다." 2시진 정도가 지나자 산위로 올라갔던 정찰조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차마 시 체를 들고올 생각은 못하고 문파로 돌아오고있던 미령(美鈴)과 이숙(李淑)을 데려왔다. 여민이 그들에게 물어보자 서진이 한 말과 일치했다. 그는 미령과 이숙에게도 밤에 주고받은 대화를 기록하라고 일렀다. 그런다음 미령과 이숙 이 자신의 방으로 가는 것을 보며 청량에게 말했다. "자네는 빨리 가서 장의사와 의생들을 모셔오게나. 모든 시신들이 그렇게 토 막이 나 있다면 어쨌건 살들을 붙이고 꿰매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어머님도 마지막으로 가시는 아버님의 시신을 한번이라도 뵐 수 있을테니까 말일세. 자 네가 수고해 주게나."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고속 승진 묵향은 마교로 돌아온 다음 상세한 보고를 올렸다. 교주는 묵향보다도 그를 수행했던 4명의 고수들이 보고한 것을 읽어보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묵향을 맞이했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이번 임무의 성과는 잘 받아보았다. 그런데 왜 암살을 하지않고, 정면대결을 택했나? 이겼으니 다행이지만 졌다면 본좌는 우수한 고수를 한명 잃을 뻔 하 지 않았나?" "송구스런 말이지만 그정도의 고수와 만난 이상 죽더라도 한번 검을 섞어보고 싶었습니다. 덕분에 배운것도 많습니다." "클클.... 그따위 말을 하다니... 제법 간이 큰 녀석이군. 네녀석은 본좌와 대결을 해서 이길 자신은 있느냐?" "기회만 주어진다면...." "크하하하... 광오한 녀석이군. 3황 중의 한명을 죽일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 정도의 배짱은 있어야 하겠지. 그래 네녀석이 원하는 것은 교주의 자리냐?" "아닙니다. 저는 무공을 더욱 익히고 싶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혼자였고, 또 많은 수하들을 이끌 자신도 없습니다." "흠... 독보천하(獨步天下)는 가능하지만 무림제패(武林制覇)는 불가능한 친 구로군. 너는 무림을 제패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제 한몸 다스리기도 힘든데 어찌 무림 전체를 손에 넣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을 하고싶지도 않습니다." "내 아들은 무공이 너만큼 뛰어나지 못하다. 너는 나이도 어리지만 거의 본좌 와 겨룰 수 있을 정도의 무공을 쌓았다. 내가 너에게 교주의 직위를 이어주려 하는데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싫습니다. 교주의 직책은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 제가 무공을 쌓을 시간이 없습니다." "크흐흐흐... 세상을 살다보니 별녀석도 다있군. 유백에게 들으니 너의 무공 의 주(主)는 마공이 아니라 정파의 무공이라고 그러더군. 자네가 생각하기에 는 어떤가?" "마공이 주축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정파의 무공도 주축이 아닙니다. 둘다 섞여있다고 봐야지요. 살수란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하기에 여러가지 정파의 무공을 익혔을 뿐, 제가 마공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으로 익힌 것은 아닙니다." "그것 또한 유백에게서 들었다. 이번에 부교주와 의논을 해본결과 너를 부교 주로 임명하고자 하는데 어떻냐?" "충분히 자유시간을 주신다면 좋습니다." "물론 시간은 충분히 주어질 것이다. 대신 본교의 원칙상 부교주는 수하를 거 느리지 못한다. 대신 5명 정도의 독립호위대를 거느리지. 잡다한 일이 없는만 큼 자네에게는 아주 괜찮은 직위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좋습니다." "호위는 어떻게 하겠나? 자네가 지명할 사람이 있나?" "교주님이 뽑아서 주십시오. 대신 마기(魔氣)를 풍기는 사람이 아니면 좋겠습 니다." "나중에 보내 주겠네. 숙소는...." "말씀중에 죄송하지만 교주님, 제 숙소는 좀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작은 초가집 하나만 세우고 거기서 밥해줄 사람 한명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번잡한 곳에 숙소를 잡으면 신경이 집중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건 자네 좋을대로 하게나. 위치를 말해주면 내총관이 알아서 해줄거야. 그 럼 모든 사항은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 보게나. 부교주로 정식 임명되는 것은 1달 후에 할 것이네. 그때 임명식에 사용할 검을 골라보게. 천마보고(天魔寶 庫)에 쓸만한 검들이 몇 개 있으니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나. 호위무사들 에게 말해놓을테니 들어가서 고르게나." 묵향은 묵혼을 가르키며 교주에게 말했다. "저는 이걸로도 충분합니다." "아니야. 마교의 부교주가 정강으로 만든 보통 검을 사용한다면 모든 이들이 비웃지." "하지만 저는 이런 모양의 검에 익숙해져서 다른 것은 사용하고싶지 않습니 다." "흠..... 그렇다면 내가 지시해서 새로 하나 만들어주지. 좀 시간은 걸리겠지 만 내 무량(武樑)에게 일러둘테니 그에게 말하면 만들어 줄거야."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피곤할테니 이만 물러가 보게나." 묵향은 교주에게 인사를 건넨 후 유백에게 가서 얘기를 나눴다. 본타에서 정 이 많이 든 사람은 유백 한사람 뿐이었고, 또 그를 그만큼 아껴준 사람도 그 뿐이었다. 유백은 묵향을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했다. 유백은 묵향이 오랜만에 부교주가 되어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해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그 도중에 유백은 묵향에게 한가지 조언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네는 본교 내에서 격리된 곳에서 생활해서 잘 모르겠지만, 마교 내에는 여 러개의 무공비급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어. 서열 100위 이상급이 들어갈 수 있 는 장소가 천마보고(天魔寶庫)지.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초상승 마공과 정파에 서 탈취한 상승의 무공들이 들어있어. 그리고 마존무고(魔尊武庫)의 경우 2000위 이상급의 고수들이 들어갈 수 있지. 그 외에 4곳 천동무고(天東武庫), 지서무고(地西武庫), 현남무고(玄南武庫), 황북무고(黃北武庫)의 무공은 모두 똑같은 책들이 들어있는데 이곳은 그 외의 하급고수들이 사용하는 마공들이 들어있지. 왜 네곳을 만들어 놨느냐 하면 그중에 한곳이 소실될 우려도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다 보니 한곳에 같은 비급 4권을 놔두는 것 보다는 다른 비급들을 4곳의 장소에 보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만든 거 야. 자네의 경우 모든 곳에 다 들어갈 수 있으니 좀 더 마음에 드는 새로운 무학들을 연구할 수 있을거야. 그중에서도 마존무고에 들어있는 북명신공은 꼭 한번 살펴보게나. 북명신공은 교주의 허락이 있어야 볼 수 있는 3가지 무 공 중의 하나지. 나머지 2가지는 교주가 허락하지 않겠지만 북명신공은 아마 관람(觀覽)을 허락할거야. 나중에 밑져봐야 본전이니 한번 청해보도록 하게 나." "예." 유백은 술한잔을 입에 털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마교의 고수들이라면 흑미륵마공(黑彌勒魔功)을 꼭 익히지. 이걸 들어봤나?" "아뇨." "금강불괴란 말은?" "들어봤습니다." "금강불괴란 것은 소림사가 만든 금강불괴신공에서 유래된 것인데 신체를 강 철과 같이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무공이지. 그와 비슷한 것으로 고목신공(枯 木神功)이란 것도 있지. 이것은 사람의 신체를 나무와 같이 딱딱하게 만들어 왠만한 도검(刀劍)으로는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무공이야. 이에 비해 마교에도 그에 대비하는 무학들을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흑미륵 마공이지. 이 마공을 운용하면 왠만한 타격에는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지. 몸의 껍질만을 튼튼히 만들어주는 금강불괴와는 반대로 혈관(血管)과 혈도(穴 道), 뼈를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주어 왠만한 타격에서는 치명상을 입지 않게 막아준다네. 이건 꼭 익히면 좋을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네의 경우 원체 강기를 잘다뤄 별 문제는 없겠지만 적수공권에서는 소수마공(素手魔功)만한 것이 없지. 아니면 혈수마공(血手魔功)이나. 소수마 공의 경우 극음, 혈수마공의 경우 극양의 마공이야. 그 마공을 운용한 팔은 희거나 붉은 광택을 발하며 도검이 불침하고 그 뿜어나오는 한기나 열기에 적 이 치명상을 입는다고 전해지지. 아주 근거리의 적을 공격하는데는 최적의 무 공이지. 일부 초고수들은 그중 하나나 아니면 둘다 익히고 있을거야. 자네도 익혀두는게 좋을걸세." "명심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무학들이 있지. 교주의 경우 자전마공을 극성까지 익히고 있는데 왜 자네도 봤잖아? 교주의 얼굴이 자색(보라색)을 띄어 기괴하게 보이 는 걸...." "예" "자전마공의 경우 그 위력이 엄청나다고 들었어. 그것 또한 상당히 배우기 어 려운 극양의 마공이지. 조금 익혀가지고는 별 효과를 보기 힘들지만 8성이상 익히면 그 위력이 대단한 마공이야. 물론 자네의 경우는 좀 힘들거야.... 큭 큭...." 갑자기 유백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묵향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소리 죽여 웃을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하하... 자네는 여자를 멀리하는 인물인데.... 자전마공을 익히는데는 여자 가 필수거든." "필수라뇨?" "너무가 강력한 양강(陽剛)의 무학이라 그 양기(陽氣)를 주체할 수가 없지. 끊임없이 욕정이 일어나게 돼. 하루에도 여러번씩 정사(情事)를 치루지 않으 면 그 욕화를 다스릴 방법이 없지. 그러면서 자연스레 여자의 음기(陰氣)를 흡수하여 균형을 잡는거야. 그렇지 않으면 혈맥이 터져서 죽는다네. 이제 알 겠나? 킬킬..." 그 말을 들은 묵향은 약간 얼굴색이 붉어지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래도 제가 익히지 못할거는없잖아요?" "자네는 동자공(童子功)을 익힌다고 헛소문을 내, 나중에 있을 사태에 대비하 는데 그걸 익히면 말짱 여태까지의 노력은 헛거지...." "아.... 그점까지는 생각을 못해봤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외에 무형마공(無形魔功)도 익혀둘 만 하지. 유마권(柔魔拳), 마영지(魔 影指), 마음장(魔陰掌)의 세가지가 있는데 모두 무형(無形), 무성(無聲)이라 상대가 방어하기 대단히 까다로와. 대체적으로 위력이 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기습에는 최고지. 거기에 10성까지 익히면 상대의 내장만 가루 로 만들 수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저는 그것 비슷하게 펼칠 수 있는뎁쇼?" "그래도 한번 봐두는게 좋아. 네가 펼치는 수법과 어떤 방식이 다른지 봐두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알겠습니다." "흑살마장(黑殺魔掌)도 한번 봐두게나. 익히는 걸 권하지는 않지만, 엄청난 위력을 지닌 마공으로 그 장법에 격중되면 살이 검게 급속도로 썩어들어가기 에 붙은 명칭이지. 약간의 상처라도 입으면 그 부분부터 썩어들어가기에 조금 이라도 방심하면 그걸로 끝이야. 거기에 이걸 극성으로 익히면 강기의 형태로 이걸 발사할 수 있지. 너무나 악랄한 마공이고 또 익히기도 까다롭지만 그래 도 그 위력은 대단하다네. 그걸 극성으로 익힌 사람은 탈퇴한 부교주인 암흑 마교 교주, 흑살마제(黑殺魔帝) 장인걸(張仁傑)뿐이야. 9성 이상 익히기가 대 단히 힘든 마공이지. 다음에 이사람을 만나면 아주 조심해야 해. 알겠나?" "예. 마음에 새겨두겠습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눈 묵향은 다음날 일찌감치 무량을 찾아갔다. 무량은 천마창(天魔廠)이라 불리는 고수들을 위한 무기 제작소를 책임지는 뛰 어난 장인(匠人)이다. 그가 만든 이름있는 마병(魔兵)들이 많았고 서열 500위 안에 들어가는 인물들은 그에게 직접 부탁해서 병기들을 만들어 사용했다. 천 마창은 마교 주력부대(5대 무력세력)들의 무기 생산장소로 이름이 높은 곳이 었다. 그들 외의 일반 마도의 무리들은 마전창(魔戰廠)이라는 곳에서 생산하 는 무기를 사용했다. 그가 도착하자 무량이 반갑게 맞이했다. 무량은 50세는 넘어 보이는 나이든 장인으로 잘생기지는 못해지만 우락부락한 표정에 굵은 호랑이 수염이 뻗쳐있는 당당한 노인이었다. "어서오십시오. 교주님께 통보는 받았습니다." 묵향은 묵혼을 허리에서 풀어 무량에게 주며 말했다. "이 모양대로 만들어 줄 수 있겠나? 가볍고 날카롭게...." "예. 교주님께서 현철(玄鐵)을 보내주셨습니다. 그걸 사용하면 현철 자체의 무게가 있는지라.... 가볍게는 안되는뎁쇼?" "그렇다면 최대한 검신을 얇게 만들어 주게나." "현철 자체가 너무나 강해서 얇게 만들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얇게는 힘들겁니 다. 시간이 좀 많이 걸려도 상관 없습니까?" "상관없어. 내 살아생전에 못써도 상관없으니 천천히 자네 마음껏 만들게." "손잡이 이쪽을 자르셨군요. 손잡이 길이는 이정도로 해드릴까요? 그리고 아 주 수수한 모양의 검집을 가지고 있고, 칼날받이도 없군요." "칼날받이는 만들지 말고, 손잡이는 정확히 그정도, 그리고 검신의 길이도 그 대로 해주게." "그렇다면 검의 이름은?" "이것과 같이 묵혼(墨魂)이라고 음각으로 검신에 파주게나." "그러시다면 이 검을 파기할 생각이십니까? 아주 검날이 깨끗한데요? 오래 사 용하신 것 같은데도 검날에 손상이 없는 걸 보니 대단히 아껴서 사용하신 것 같군요. 같은 이름, 같은 모양의 검을 두자루나 가지실 필요가 있을까요?" "파기할 생각이네. 검은 1자루면 충분해. 너무 많아도 필요없어."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러더니 무노인은 들어가서 묵직한 현철 한덩어리를 가져오더니 묵향에게 내 주며 말했다. "여기에 진원지기(眞原之氣)를 약간만 불어 넣으십시오." 약간 의아하게 생각한 묵향이 물었다. 진원지기란 거저생기는 것이 아니다. 일가 피붙이에게도 나눠주는 것을 꺼릴정도로 무림인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진원지기를? 왜그래야하나?" "진원지기는 각 무인의 품성을 나타내죠. 그걸 불어넣어 검을 만들면 그 주인 의 마음에 꼭 드는 녀석이 나옵니다. 지독한 마인(魔人)일수록 엄청난 마검 (魔劍)이 만들어 지니 부교주님 마음에 쏙 드는 마검이 만들어질 겁니다." "알겠네." 묵향은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진원지기를 현철 덩어리에 불어 넣었다. 묵향이 현철에 진원지기를 불어넣는 것을 보며 무노인이 다시 물었다. "묵혼검은 짧고 얇기 때문에 만드는데 현철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 않아 현 철이 많이 남을겁니다. 그걸로 뭘 만들어 드릴까요? 표창을 몇 개 만들어 드 릴까요?" "아닐세. 묵혼검과 비슷하게 생긴 얇고 작은 단검을 하나 만들어 주게나. 야 숙할 때 사슴이라도 잡으면 썰어먹는데 쓰게." "알겠습니다. 그럼....." 그러면서 묵향을 힐끗 쳐다본 후 무노인은 말을 이었다. "평상시 밖에 나가실때도 그차림 그대로 나가십니까?" "왜, 내 모양이 어때서?" "보아하니, 암기를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요." "나는 암기를 안써. 단도도 없어서 큰 사슴을 잡으면 묵혼으로 썰어서 구워먹 었는데.... 검으로 하자니 귀찮아서그러네." "세상에... 검으로 사슴고기를 써시다니... 알겠습니다. 신경써서 단도 하나 를 만들어 드리죠." "고맙네. 나중에 완성되면 연락을 주게나." "빨리 만들기는 힘들겁니다. 한 반년 정도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 안은 이녀석을 사용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묵혼을 다시 묵향에게 건네줬다. 묵향은 그 묵혼을 허리에 찬 다음 떠나며 말했다. "알겠네. 그럼 수고하게나." 그런다음 묵향은 여태 봐뒀던 마교 총단 건물에서 많이 떨어진 산 중턱쯤 으 슥한 지역에 작은 집을 한채 만들도록 지시했다. 작은 방 2개, 목욕탕 1개, 부엌 1개가 다인 작은 집으로 그전에 소연이 모녀와 함께 살던 집과 거의 같 은 구조였다. 집이 완성된 다음 묵향은 그 곳에서 묵었다. 한번씩 유백이 놀 러오는 외에 아무도 묵향의 집에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그의 경우 딴 사람들 이 말하는 정상적인 코스를 거쳐오지 않은 벼락출세를 한 장본인인데다 살수 출신이라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일종의 비밀병기같은 성격도 띄고있는 인물이라 그가 부교주의 직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도 거의 없었다. 사군자의 결성 묵향은 부교주 임명때 그의 독립호위대 4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임명식에 참가한 인물은 채 30명이 되지 않았다. 이때 묵향은 부교주임을 나타내는 살 아있는 듯한 룡이 그려진 작은 옥패를 받았다. 원래는 이때 교주가 주는 무기 도 받아야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그건 묵혼검으로 대신했다. 그의 호위들은 남자 3명에 여자 1명이었는데 묵향의 요구대로 마기를 풍기지 않는 고수들이었다. 그걸로 봐서 이들은 정통 마공을 익힌 자들이 아닌 것만은 확 실했다. 아마도 살수나 첩자 계통의 여러 분야에서 일하던 인물들인 모양이 다. 교주는 그들을 옥련(玉蓮), 환수(幻壽), 마식(馬殖), 진춘(辰椿)이라 소 개했다. 하지만 묵향의 경우 그들의 무공 수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그들 을 이끌고 초옥으로 가면서 물었다. "자네들의 명호는 있나?" 진춘이 모두를 대표해서 답했다. "없습니다. 정식으로 활동하지 않았기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럼 자네들 전직을 물어봐도 괜찮나?" "예. 저와 옥련은 얼마전까지 비영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은퇴한 것 이지요." 그러자 마식이 말을 이었다. "속하는 호법원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끝으로 환수가 말했다. "속하는 흑살대 소속이었습니다." 환수의 말을 들은 묵향이 반가워했다. "나도 흑살대 소속이었네. 반갑군. 같은 살수를 만나다니.... 그런데 그렇게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좀 다르게 이름을 바꾸기로 하는게 어떻겠나?" "명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자네들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네. 그래도 4명이니 사군자(四君子)로 정 하는 게 어떻겠나?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이라 하고 그에 맞는 이름은 자네들이 정하게나." "독립호위대의 명칭은 그들의 주인이 정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교주님의 호위 대 같은 경우 십혈룡(什血龍)이라 불리고 붉은 옷에 각자의 서열을 붉은 두건 위에 써두고 있는 걸 아실 겁니다. 사군자라. 괜찮군요. 그런데 너무 마교같 지 않은 기분이 드는데요?" "괜찮아. 아주 괜찮은 이름이라구. 딴 녀석이 시비를 걸면 나한테 끌고 오게 나. 껍질을 벗겨놓을테니. 각자의 명칭은 어떻게 정하는게 좋을까?" 그러자 유일한 여자인 옥련이 말했다. "소녀는난을 하겠습니다." "그거 괜찮군." 묵향이 찬성하자 냉큼 마식이 말을 이었다. "그럼 속하는 죽을 하죠. 나머지는 너무 남자같지 않아서...." 그러자 이에 질세라 진춘이 말을 이었다. "속하는 매를 하겠습니다. 나무라서 그래도 국보다는 나을 것 같군요." 묵향은 환수를 보며 말했다. "자네가 국이라도 상관 없겠나?"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그럼 모두 정해졌군. 나는 이제부터 집에 가서 무공연마나 할테니까 자네들 도 돌아가서 쉬게나. 호위따위는 필요없으니, 무공연마를 하든 술을 마시든, 뭘하든 자네들 마음대로 하게나." 그러자 매가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부교주님을 모시는 독립 호위들인데..." "교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나?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밖에 나갈때만 호 위해 주게나. 그리고 나한테 맡겨질 일이라면 대단한 고수들을 상대해야 할 가능성도 크니 자네들도 열심히 수련을 쌓아 두는 것이 좋을거야. 처음으로 맡은 부하들이 내 눈앞에서 죽는 걸 보고싶지는 않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1개월 후 묵향은 사군자를 소환했다. 그들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궁금함을 약간 눈에 비치며 묵향에게 도착했다. 그들을 보고 묵향이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잊은게 있어서 불렀어. 자네들의 무공이 어느정도인지 확인 을 해보고 싶네. 나를 따라 오게나." 묵향은 그들을 거느리고 넓직한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묵향은 한명씩 무 기를 들고 나서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처음 무기를 들고 나선 것은 매였다. "속하는 도(刀)를 사용하겠습니다." "자네가 가진 모든 기량을 펼치게. 암기도 상관없어.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좋으니 마음쓰지 말고 공격해 보게나." 그 다음 둘은 비무를 하기 시작했다. 매의 무공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독립호위대에 끼일 정도로 대단한 실력은 아니었다. 둘은 열심히 비무 를 했고 묵향은 매와 70초식을 겨룬 다음 말했다. "매! 정말 제법이군. 하지만 아직 미숙한 점이 많구나. 자네의 실력은 이제 알겠으니 이번에는 난의 실력을 알고싶군." 그러자 난이 나섰다. 그녀의 무공은 매보다는 좀 떨어졌지만 경공은 매보다 약간 뛰어났다. 그녀는 정통 검법과 더불어 뛰어난 암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 다음으로 나선 사람은 죽이었다. 죽은 호법원 출신답게 사군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국은 흑살대 출신 답게 살기를 숨기는 실 력이나 은잠술(隱潛術)이나 살인에는 뛰어났지만 사군자 중에서는 무공이 가 장 약했다. 하지만 그의 원칙을 벗어난 살인검술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는 것이었다. 비무를 마치고 잠시 생각해본 다음 묵향은 입을 열었다. "자네들의 무공은 모두 거의 비슷한 수준이야. 하지만 그중에서 죽이 가장 뛰 어나니 자네가 수장(首長;우두머리)이 되게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네들의 무공은 보통의 독립 호위대 수준보다 좀 떨어지지. 그건 내 가 무공을 기준으로 선발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라 마기(魔氣)를 좀 적게 풍기는 녀석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야.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자네들 의 모자라는 무공을 내가 닦아줘야겠어. 1명씩 아침에 나한테 오게나. 2각(30 분)정도 대련을 하면서 무공을 가르쳐 주겠네. 그런다음 나머지는 자네들끼리 알아서 수련을 하게나." 그러자 모두들 감격하여 외쳤다. 이정도 뛰어난 고수가 직접 지도해주는 것은 정말 대단한 영광이며 생애에 한번 만날까 말까한 기연이었기 때문이다. "부교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연한 해후 묵향은 사군자를 교육시키면서도 남은 시간을 모두 자신의 수련에 사용했다. 하루하루 지나감에 따라 더욱 넓고도 깊은 무학의 길에 감탄을 하면서 끊임없 는 수련을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묵향은 더 이상 발전이 잘 안되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수련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면 3시간 정도 운기조식(運氣調息)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해서 마 루에 앉아 사군자의 한명이 도착할때까지 명상을 했다. 그런다음 사군자의 한 명과 2각 정도 대련을 하면서 지도를 해준 후 그가 가져온 음식으로 아침식사 를 했다. 식사를 끝낸 다음 휴식을 취하다가 10시가 되면 다시 폭포로 가서 8 시간동안 폭포물을 맞으며 명상에 잠긴다. 6시에 저녘식사를 한 후 이번에는 방안에 앉아 조용히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명상에 잠기든지 아니면 경공 수련을 하든지 또는 꽃밭을 가꾸든지 그것도 아니면 무공비급을 읽었다. 이런 수련이 처음에는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마교의 무공비급은 방대한 분량이었 고 수많은 각종 무공이 있었다. 묵향이 수많은 무공비급을 가져다 보자 일시 마교의 수뇌부는 긴장했지만 묵 향이 그걸 익히는 것도 아니고 거의 하루에도 수십 종류 정도의 무공비급들을 보는 것을 보고 모두들 어떤 특이한 무공을 찾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묵향은 자신이 알고있는 방식이 아닌 좀 더 색다른 방식의 무공이 있는지 궁 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공들은 거의 똑같은 내용들을 가지고 조금 씩 초식을 바꾼 것 뿐 어떤 일정할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한번씩 특이한 내 용을 담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정파의 무공이었다. 정파의 무공들은 대단한 깊 이를 담고있는 것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일시 한순간 뿐.... 보고 (寶庫) 구석에 쌓여있던 혈교의 비급은 더욱 쓰레기였다. 간혹 파격적인 내용 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 꽤 쓸만한 것 들도 있었지만 사술(邪術)로서 사 람을 현혹시는 내용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따위 사술로서 현혹시키는 것은 내공이 낮은 사람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내공이 시술자보다 높거나 아니 면 현문의 정순한 내공을 익힌 사람들에는 통하지 않는다. 처음의 명상을 위주로한 수련은 여러 가지 비급을 보면서 생겨난 의문점들이 나 생각들을 정리하는데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더 이상 볼 비급이 없어지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수련방법을 바꾸고 자 했다. 하지만 뾰족한 좋은 수련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거의 탈마(脫魔)의 경지를 넘어선 이상 다른 교내의 고수들과 비무를 해봐도 별 소용이 없었고 또 교내의 여러 가지 수련관문들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 하는 것이었지만 묵향에게는 어린애 장난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무공을 배 우기 위해 찾아온 죽(竹)은 묵향이 골돌히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한참을 기 다리다가 도저히 묵향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자 살며시 물었다. "부교주님. 왜 그러시는지요." 일시 정신을 차린 묵향이 되물었다. "뭐라구?" "왜 그러시는지요?" "자네 생각으로는 어떤 일이 불가능한 일일 것 같은가? 인간이 하기 힘든 일 일수록 좋아. 새로운 수련방법을 찾는데 영 좋은 방법이 없군" "불가능이라.... 십만대산 서쪽의 마신봉쪽의 절벽이 있는데 거길 올라가 보 시면 어떠신지?" "그건 나한테는 쉬운거야." "그렇다면... 장강(長江;양자강)을 걸어서 건너보시면?"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긴 한데..... 양자강은 너무 멀어. 그리고 가려면 교주 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구." "그렇다면.... 바위부수기? 아니지... 참! 여기서 남쪽으로 5리 정도 가면 소 나무 숲이 있는데 나뭇잎이나 세어보시죠." "나뭇잎이라.... 정말 좋은 생각이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전에 소림사에서 말썽꾸러기 고수가 한명 나타났는데 그를 금제하는 방법으 로 써먹은 거라고 들었습니다. 1000그루의 소나무잎을 헤아린다면 밖으로 나 와도 좋다구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그곳에는 지형상 하루에 두 번씩 강한 바람이 부는데 오후에 뜨거워진 공기 가 골짜기 안으로 불어서 들어가고 저녘에는 차가와진 공기가 반대로 뿜어져 나오죠. 그 때문에 소나무 잎들이 흔들려서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도저히 그 것들을 셀수는 없습니다. 결국 소나무 숲 안에서 늙어죽었죠. 그 안에서 늙어 죽도록 수련을 한걸 보면 그래도 신의는 대단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정말 잘 생각해줬어. 거기에는 소나무가 몇그루나 있나?"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3000그루 정도 있습니다. 대신 바람은 안부니까 그자와 조건은 비슷할 겁니다." "알겠네. 조언을 잘 해줘서 고맙군. 그럼 이제 수련을 시작해볼까..." 묵향은 매일 소나무잎을 헤아리러 숲에 갔다. 소나무잎을 헤어보니 뛰어난 암 산실력과 시력, 그리고 경공술이 필요하다는 걸 즉시 알 수 있었다. 그는 하 루하루 잎파리를 헤아려 나갔다. 처음 헤아릴때에는 10그루도 셀 수 없었던 것이 차츰 요령이 생기면서 계속 그 숫자가 늘어나갔다. 그는 계속 잎을 세어 나가면서 아마도 무공의 끝이 이 안에 있지 않을까 하는 절망감까지 들 정도 로 진척의 속도는 느렸다. 하지만 그래도 숫자상으로는 그날 보다는 다음날 헤아린 잎의 수가 하나라도 많았기에 그는 질릴 줄 모르고 잎을 헤아려 나갔 다. 이윽고 겨울이왔지만 소나무는 상록수(常綠樹)라 잎이 많이 남아있어 겨 울에도 그의 수련은 계속되었다. 소나무잎을 헤아리기 시작한 후 날만 밝으면 그는 소나무 숲속에 있었고 그에게 무공을 배우러 사군자도 소나무숲으로 왔 다. 그러면서 사군자는 그날 먹을 식사를 가져왔다. 그날도 난이 식사를 가져온 다음 묵향에게 전하면서 말했다. "저어... 부교주님." "뭐냐?" "실은 무량(武樑)이 사죄할 것이 있다고 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래? 거의 2년만이군. 알겠다. 지금 가보지." 묵향이 마전창(魔戰廠)에 도착하자 무량이 묵향의 앞에 엎드려 사죄하며 말했 다. "부교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조금 당황한 묵향이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무슨일이오?" "그게.... 실은 검을 만드는데 시간을 좀 더 주셨으면 해서 그렇습니다." "왜? 별로 잘 안되고 있소?" "그게...." "시간은 언제까지나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소? 내가 죽은 후라도 괜찮다고 말 했을텐데..." "실은... 다시 한번 더 진기를 불어넣어 주시면 안될까요?" "왜그러시오? 검을 만드는데 실패했소?" "예. 실패했습니다. 그것도 이만저만한 실패가 아니라.... 검을 만들기는 했 는데 아무래도 파기하고 다시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릎쓰고 부교주 님을 뵙자고 청한 것입니다." "검을 만들기는 만들었다고? 그럼 됐잖소. 그걸 주시오. 본좌는 그렇게 좋은 검을 필요로 하지는 않소." "하지만...." "괜찮으니 주시오." 그러자 무량은 마지못한 듯 구석에 처박아둔 검을 꺼내왔다. "이겁니다. 제 일생일대의 실패작(失敗作)이라...." 그러자 묵향은 검을 받아들면서 미소지으며 말했다. "괜찮소. 겉모양은 그럴 듯 한데...?" 그러면서 천천히 검을 뽑았다. 은은한 묵빛이 풍겨나오는 2척 3촌의 얄팍한 검. 대단히 얇은 검신에 높이도 낮았고 적당히 휘어져 올라간 검신이 현재 묵 향이 차고있는 묵혼검과 거의 유사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아주 좋군. 내 마음에 꼭드는군. 그렇게 신경쓰지 마시오. 그런데 내가 보기 에는 괜찮은데 뭐가 마음에 안든다는 거요?" "저는 본교 역사에 남는 마검(魔劍)을 만들어 바치고자 했는데 이건... 이 건... 마검도 신검도 아닌 이상한게 되어버렸습니다." "신검이나 마검이나 그검이 그검 아니겠소?" "엄연히 다릅죠. 원래가 마인은 마검을 차야 하는법. 그래야 마공(魔功)의 위 력이 배가됩니다. 그런데 이따위 검으로는 강대한 마공을 펼치기 어렵습니 다." "그래? 그럼 한편 펼쳐볼까?" 묵향이 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묵혼검이 웅웅거리며 강렬한 마기가 검신 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의 혼백을 앗아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마기앞에 내공이 약한 무량은 한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이때 묵향이 묵직한 함성을 터트리며 하늘을 향해 초식을 전개했다. "진파천월!" 그러자 하늘을 향해 엄청난 청색 검강들이 강렬한 마기를 뿜어대며 날아올랐 다. 그걸 보면서 묵향은 미소하며 말했다. "보시오. 아주 좋지않소?" "그럴 리가.... 이 검은 마와 정의 기운을 동시에 가지고 있군요. 소인의 생 각이 짧았습니다. 왜 이런 엉터리가 만들어 졌는지만 생각한다고 부교주님의 내공이 마와 정이 혼합된 것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이건 부교주님의 손에서만이 최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검이 될것입니다." 그러자 묵향은 자신이 검대에 차고있던 묵혼검을 끌러 무량에게 넘겨주며 말 했다. "이녀석을 파기해 주시게나." 그런다음 검대에 새로운 묵혼검을 묶으며 말했다. "그런데 검집이 너무 호화로운 것 같군." 그러자 무량은 약간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림의 소눈깔들 중에서 그 검집이 그렇게 화려하다는 걸 알아볼 수 있는 자 들은 흔치 않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어쨌든 고맙네..." 그런다음 묵향이 돌아가려고 하자 황급히 비수를 한자루 가져다 주며 말했다. "묵혼검과 짝으로 만든 비수입니다. 소인이 멋대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묵영 비(墨影匕)라고 합니다." "좋은 이름이군... 잘쓰겠네..." "이 비수는 써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슴가죽 벗기는데나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죠." 그러자 묵향은 미소지으며 이 장인의 솜씨와 쏟아준 정성에 찬사를 보낸다음 다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 * * 사군자의 말을 빌리면 '미친짓'이라는 수련을 계속해 나가던 따뜻한 봄. 그날 묵향은 오랜만에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자려고 소나무 숲을 나섰다. 요즘 들어 서는 거의 사흘에서 일주일 단위로 집에 갔다. 소나무잎을 세지 않을때는 사 군자와 비무 할때를 제외하고 모든 시간을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더 많은 잎 파리를 셀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사용했다. 그는 집에 가까워오자 누군가가 집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명이군. 제법 뛰어난 실력을 갖춘 자들이다. 그런데 풍겨나오는 기(氣)로 봐서 본교의 인물들은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어떤 간큰 녀석들이 본교에 들 어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묵향은 집으로 다가갔다. 그렇지만 그는 추호도 자신이 벌써 눈치채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 그는 벌써 그 에대한 대비를 하고있었고 또 서서히 진기를끌어모으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명이 비수를 들어 묵향의 목에 들이댔다. 하지만 살기(殺氣) 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묵향은 반격을 하지 않았다. 혹시나 교주가 실력을 시 험하기 위해 보낸 본교의 무사들이라면 죽이면 안되기 때문이다. 비수는 묵향 의 목에서 반치(1.5Cm)정도 되는 곳에서 멈췄고 나지막한 남자의 위협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해!" 그와 동시에 옆에있던 또다른 사람이 묵향의 허리에 찬 검을 빼았았다. 묵향 이 방을 둘러보니 그에게서 검을 빼앗은 남자의 호흡이 일정하지 않은 걸로 보아 상당한 부상을 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명은 저쪽 구석에 누워있었다. 가슴이 불룩히 솟아있는 걸로 보아 그 사람은 여자인 모 양이다. '셋다 부상을 당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본교의 인물들은 아닌 모양인데? 지금 해치울까? 아니면 좀 있다가?' 묵향은 후자를 택했다. 이들은 언제나 해치울 수 있는 자들이다. 지금 해치우 는 것 보다 시간을 끌면서 이들의 정체를 파해치는게 더 좋다는 생각이 들자 묵향은 그들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여기는 어디냐? 이곳에서 마교의 영역을 벗어나려면 얼마나 더 가야하지?" "마교의 영역을 벗어나려면 30리는 더 가야하죠." 그러자 칼을 뺏었던 사람이 절망적이라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사형 어떻하면 좋죠?" 그러자 칼을 들이밀었던 인물이 다시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너는 누군데 여기서 살고있나?" 그러자 묵향은 겁에 질린듯한 어조로 말했다. "소인은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죠. 예전에는 마교에서 한자리 했었는데 권력 다툼에 밀려서 이곳에 쫓겨난 분이 소인의 선친(先親;돌아가신 아버지)이시라 여기서 계속 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무술을 익히면 마교에 들어가려고 요." "그래?" 그 남자는 부싯돌을 한번 튕궈 잠시동안 일어나는 불꽃을 이용해서 묵향의 용 모를 보더니 딴 사람에게 말했다. "정말인 것 같군. 마기도 없고 도저히 무술을 잘 모르는 것 같아. 거기다 상 당히 젊쟎아. 너는 우리를 안내해서 마교의 영역 밖으로 보내줄 수 있나?" "소인도 목숨이 걸린 일이라. 헤헤.... 돈을 좀 주셔야 겠는뎁쇼." "돈은 나중에 줄 수 있다. 은자 1냥이면 되겠냐?" "쓰는김에 좀 더 쓰시죠. 나으리" "좋아. 5냥 주마." "좋습니다요. 그런데 저쪽에 계신분의 몸조리를 좀 한 다음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요. 소인이 의술을 좀 알고 있으니 제가 상처를 봐도 되겠는지 요?" 그러자 그 사내는 비수를 치우며 말했다. "좋다." 묵향은 등불을 켠 다음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 여자는 상당한 외 상과 함께 심각한 내상까지 입고 있었다. '흑마장(黑魔掌)에 당했군. 이쪽 상처는 칼에 긁힌 상처인데... 별로 깊지는 않아. 그 외에 몇대 더 먹었는데 가장 심하게 당하기로는 유마권(柔魔拳)이 야. 본교의 무형마공중 무형의 권풍을 일으키는 유마권을 사용한 자의 수준이 그렇게 깊지 않았는데다가 현문의 정순한 내공을 지니고있어서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야. 아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맞았겠지. 내상이 심해서 빨리 치 료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겠어... 그런데 이 얼굴은 낮이 익은 것 같 군.... 그런데 누구더라....? 꽤 오랫동안 현문의 정통심법을 수련한 사람중 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없는데....' 묵향은 이생각 저생각 하면서 그 여자의 옷을 벗긴 다음 침을 꺼내어 그 여자 에게 찔러넣었다. 옷을벗기고 보니 그렇게 심각한 외상은 많지 않았다. 묵향 은 품속에서 금창약(禁瘡藥)을 꺼내어 발라줬다. 그런다음 마교에서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 복용하는 단환을 3알 먹였다. 그리고 나머지 두명의 남자들도 치료해줬다. 그중 검을 뺏었던 남자는 복부에 깊은 검상이 있었지만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게도 단환과 함께 금창약을 발라줬다. 무림인들이 가지 고 다니는 필수품이 금창약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금창약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걸 보면 일단 잡혀서 금창약 등을 뺏긴 다음 다시 탈출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 다. 묵향으로서는 알 수 없는 점이 한가지 있었다. 여자는 현문의 정통 심법을 익 혔는데 나머지 두명의 남자는 현문의 심법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내력은 두 남자가 여자보다 강했지만 그 정순함에 있어서는 여자가 더욱 뛰어 났다. 아마도 이삼십년이 지나면 여자가 두 남자들을 앞서갈 것이 분명했다. 왜 이들은 심법이 서로 다를까? 이것이 묵향의 고민중의 하나였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난(蘭)이 수련을 하기위해, 또 묵향의 식사를 가져다 주 기 위해 왔다. 묵향은 마루에서 명상을 하며 기다리다가 난에게서 음식물을 받아들고 말했다. "고마워. 영영! 지금 집에 쌀과 반찬이 떨어졌는데 좀 사다주지 않겠어? 나도 계속 얻어먹을 수만은 없어서 집에서 좀 해먹어야겠어. 그리고 금창약하고 내 령마속환(內逞魔屬丸)이 떨어져서 그러니 한 30알 정도 가져다 줘." 그러면서 묵향은 약간의 은자를 난(蘭)에게 건넸다. 난은 묵향의 말이 평상시 와는 다르다는 걸 알고 약간 당황한 듯 전음(傳音)을 보내왔다. <왜그러십니까? 부교주님. 혹시 탈출한 무리들이 이곳에 왔나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내가 지시한 걸 좀 가져다 줘. 좀 알아볼 게 있 다.> "알겠습니다. 곧 가지고 올게요." 1시진 반 정도 지나자 난은 3명의 하인들을 시켜서 음식물들과 약품들을 묵향 에게 가져다 줬다. "수고해줘서 고마워. 잘 먹을게." 그러면서 인부들에게 동전 3냥씩 수고료를 쥐어줬다. 그러면서 난에게 전음을 보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는 않았겠지?> <알리고 말고 할것도 없어요. 지금 모두들 이들이 부교주님 집에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부교주님이 그냥 계시니까 모두들 가만히 있는거죠.교주님께 서도 알고 계십니다.> "나는 바빠서 오래 얘기를 나눌 수 없군. 잘가." <이들은 누구냐?> "몸조심 하세요. 다음에 뵈요." 난은 인부들과 함께 천천히 멀어지면서 전음을 보내왔다. <그들은 천지문(天地門)의 제자들입니다. 천지문과 본교가 충돌했고 그들 중 200여명을 뇌옥에 가둬뒀었는데 그들의 일부가 탈출을 시도했어요. 모두 잡아 들였는데 그중 3명만이... > <나중에 매(梅)보고 지붕에 올라오라고 해. 물어볼 것이 있으니까.> '천지문이라... 낙양에 있는 문파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도대체가 알수가 없 군. 매는 비영대 출신이니까 좀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묵향이 그들을 치료하는데 지붕위에 사람이 올라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매 의 은잠술이 뛰어나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묵향은 매에게 전음 을 보냈다. <이들은 누구냐?> <천지문의 제자들입니다.> <천지문의 제자들이 왜 본교에 있지?> <2달 전에 천지문과 본교간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천지문은 낙양에서도 알아 주는 대 문파입니다. 그래도 이들이 본교에 도전할 수는 없는데 본교의 비밀 분타를 건드린게 그들의 화근이죠. 낙양에서 20리(약7Km)정도 떨어진 지점에 서 본교의 고수들과 충돌해서 몽땅 다 잡아다가는 뇌옥에 넣어뒀는데 이들이 도망친겁니다. 꽤 감시를 엄밀히 했는데도 제법 실력이 있는 자들이라 그 만... 그래서 본교의 고수들이 출동해서 몽땅 다 잡아들였는데 이쪽으로 도망 친 세명만이 아직 잡히지 않았죠. 교주님께서도 왜 부교주님께서 이들을 잡아 들이지 않는지 궁금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부교주님이 하시는 일이라 모두 들 어쩌지 못하고 있지만 이 근처에 5명의 고수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부교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하명해 주십시오.> <너는 교주님께 내가 하는일에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려라. 이번에 사로 잡은 천지문의 인물들은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천지문도 거의 고수들의 삼분지 일을 상실했기 때문에 상당히 당황하는 모양입니다. 그들로서도 알 수 없었겠죠. 비밀분타는 노출되었기 때문에 팔아버리고 다시 새로운 곳으로 옮겼습니다. 이들을 다시 천지문에 돌려주고 몸값을 받을건지... 아니면 모두 처형해버릴건지 결정되지 않은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수석장로와 차석장로, 혁무상 장로에게 이 일은 내가 처리할 생각 이니 내 얼굴을 봐서 간섭하지 말라고 전해주게. 천지문 녀석들이야 구워먹던 삶아먹던 내가 상관할 필요 없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게 있어서....>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해 두겠습니다.> <부탁하네.> <존명!> <참, 천지문은 현문의 한 갈래인가?> <아닙니다. 도가계통이라기 보다는 불가계통이라고 보시는 것이 옳습니다. 천 지문을 일으킨 시조가 소림사의 속가제자라고 들었습니다.> <알겠네. 지시할 사항이 생길지도 모르니 하루에 한번은 지붕위로 오게나. 이 제 그만 가보게나.> 그와 동시에 지붕위에서 사람의 기척이 사라졌다. 묵향은 그들을 한달 정도 치료하면서 여러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묵향이 낮익어하던 여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남자들은 여자를 소사매(蘇師妹)라 고 불렀고 나머지 묵향에게 칼을 들이댔던 사람이 그들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모양인데 전사형(田師兄)이라 불렸으며 또 다른 묵향에게서 칼을 뺏았던 남자는 임사제(林師弟)라 불렸다. '소사매(蘇師妹)라. 그러면 성이 소(蘇)씨군.... 소씨 여자 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가? 소씨라.... 소씨라..... 그리고 현문의 정통..... 그 렇군 내가 왜 그생각을 못했지?' 그걸 눈치챈 다음부터 묵향은 이들에게 상당히 정성을 쏟았다. 1달 정도가 지 나자 모두의 상처가 거의 나았다. 그들은 묵향이 자신들을 성의껏 대해주는 걸 알고 상당히 기뻐했고 속으로 의심하던 마음도 차츰 풀려갔다. 이들의 상 처가 거의 낫자 묵향은 이들을 모아놓고 탈출할 방도에 대해서 설명을 해나가 기 시작했다. "여기서마교의 영역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도 최소 3번 이상 마교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숨어서 나간다 해도 어떻게 할 수 없죠. 변장을 하고는 당당하게 나갈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경비가 허술한 곳이 없습니까?" "경비가 허술한 곳은 없어요. 탈출할 곳은 이쪽을 통해섭니다." 묵향은 붓을 들어 종이에 대강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했다. "여기서 이쪽을 통해서 나가면 5번 보초에게 발각되게 되죠. 그리고 여기저기 매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도 띌겁니다. 하지만 이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 니기 때문에 내가 앞장서서 나가면 나는 자주 이곳을 왕래했기 때문에 별로 의심받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변장을 잘해야되요." 그러자 전사형이라 불린 사람이 의심에 가득찬 눈초리로 묵향을 바라보며 말 했다. "당신이 말한 것은 너무 눈에 잘띄는 길이에요. 산길을 타고 갈 수는 없습니 까?" "산길로는 매복이 더 심하죠. 그리고 각종 진법들이나 기관매복이 깔려있습니 다. 이곳은 마교의 총타가 위치한 곳입니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마교가 아 직 단 한번도 총타를 적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이유가 뭐겠습니까? 아무리 숲 속이 총타의 내부보다 매복이나 함점들이 적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수많은 첩 자들이 저세상으로 떠날 정도로 강력해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거랴면 좀 더 편하고... 그러면서 가능성이 많은 쪽을 택하는 것이 좋을거요." 소사매가 묵향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길이 가장 안전하다는 말인가요?" "그래요. 나는 이길의 통행증을 가지고 있고 또 자주 왕래하기에 모두와 안면 이 많습니다. 모두들 망태기를 지고 속에다가 약초 등속을 집어넣은 다음 여 기서 약초를 캔 다음 시내에 내다 팔거라고 말하면 되죠. 얼굴에 진흙을 묻히 고 내가 옷을 줄테니 그걸 입고나가면 됩니다. 당신들이 입고있는 그 옷을 입 고 나가면 1리도 못가서 잡혀갈게 뻔합니다." 그들은 어찌되었던 묵향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기에 묵향을 따라나섰다. 허 름한 옷과 망태기에는 약초를 몇뿌리씩 넣고 그들은 길을 재촉했는데 벌써 묵 향의 지시를 받은 보초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제제도 하지않았다. 묵향은 그들 을 거느리고 십만대산을 내려온 다음 말했다. "십만대산을 기준으로 100리 안쪽까지는 마교의 영향권 안이오. 일단 100리만 벗어나면 그래도 좀 안심할 수 있을겁니다. 낮에는 쉬고 밤에는 걸어가면 괜 찮을 겁니다. 헤헤.... 그런데 돈은 어떻게? 지금 계산하시겠습니까?" "지금은 돈이 없습니다. 나중에 본문에 돌아간 다음 사람을 보내어 계산해 드 리죠." "제 칼도 돌려주시죠. 이제 위험은 벗어났는데 제 칼까지 뺏아가는 건 너무하 시는 처사인데요." 그러자 임사제라는 사람이 등에진 봇짐을 풀어 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정말 좋은 검이더군요. 잘 썼습니다." 묵향은 검을 받아 허리에 찼다. 그런다음 싱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주 예의가 없는 친구들은 아니군." 묵향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자 그들은 안색이 변했다. 그러면서 모두들 진기를 끌어올리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묵향은 그들의 행동에 아랑곳 하지 않고 외쳤 다. "난(蘭)!" 그러자 난이 숲속에서 섬전과 같은 속도로 뛰어나와 묵향의 앞에 부복했다. 그 전에 식량과 약재들을 가져다 줬던 여자임을 알아본 그들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지며 만전을 기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부탁한걸 주게나." "여기있습니다." 묵향은 난에게서 건네받은 작은 꾸러미를 소사매라 불린 여자에게 내밀며 말 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좋은걸 준비할 수 없었다. 자그마한 나의 성의로 알고 받아주렴." 묵향이 부드럽게 말하자 소사매라 불리는 여자는 망설이는 기색으로 그 꾸러 미를 받아들었다. 묵향은 꾸러미를 건넨 후 품속에서 주머니를 하나꺼냈다. 그런다음 그걸 전사형이라 불리는 남자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 안에 은자가 약간 들어있다. 모두들 무일푼일테니 여비로 쓰게나." 그런다음 묵향은 아주 먼곳을 바라보는 듯한 추억에 잠긴 시선으로 소사매라 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다. 몸조심 하거라." 그런다음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때 소사매라 불리는 여자는 그 꾸러 미를 풀어보자 그 안에는 예쁜 한쌍의 귀걸이와 작은 보석이 달려있는 금목걸 이가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여자는 그걸 보면서 한참 말이없더니 급기야 뭔가 떠오른 듯 멀어져가는 묵향을 향해 외쳤다. "아빠!" 그렇지만 묵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에게서 멀어져갔다. 이걸 보고 난 (蘭)이 궁금한 듯 묵향에게 물었다. "따님이십니까?" "응. 내 양녀(養女)지. 낙양에 있을 때 거둬들였었는데.... 천지문에 들어갔 을 줄은 생각도 못했군. 무림인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었는데 말이야." "그러면 좀 아는체라도 하시는 것이...." "아니야... 나는 사파고 저 아이는 정파니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게 저 아 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을거야. 그리고 내가 이렇게 젊은 얼굴을 하고있는데 다른 두명이 설마 의심하겠어? 그냥 내가 저 여자애에게 흑심을 조금 품었나 하고 생각하겠지. 죽(竹)에게 연락해서 저들이 천지문에 도착할때까지 저들이 모르게 호위해 주라고하게나." 묵향이 집으로 돌아가자 국(菊)이 초조한 듯 기다리고 있다가 묵향이 오자 말 했다. "교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빨리 오시랍니다." "알겠네." 묵향이 교주가 기다리고있는 곳으로 가자 그곳에는 장로들과 능비계 부교주까 지 앉아있었다. 묵향이 다가가 교주에게 인사하자 교주는 약간 노기가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묵향 부교주, 이번일은 어떻게 설명하겠나? 왜 그들을 놓아줬지?" "사정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지 확정되어 있 었습니까?"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자네 혼자서 독단으로 처리할 정도로 가벼운 사항은 아니었어." "감히 교주님께 청합니다. 천지문의 포로들을 돌려보내고 그들과 비밀리에 교 섭을 하여 될 수 있으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자네가 왜 그러나? 천지문이란 곳이 2000명 정도의 제자들을 거느리 는 제법 큰 방파라 하더라도 우리가 숙이고 들어갈 필요없이 정예고수들을 보 내어 초토화를 시켜버리는 것이 간단해. 왜 쓸데없이 그들과 협정을 맺느니 어쩌니 해서 시간을 낭비하나? 이번에 놓아준 사람 중에 한명이 친분이 있는 사람인가?" "예." 교주는 탁자에 놓인 서한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묵향에게 말했다. "자네가 여자애한테 그정도로 빠질줄은 몰랐군." "제 양녀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0년도 전에 낙양에서 헤어졌고 또 핏줄도 아닌데 자 네가 그정도로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들을 놓아줄 필요가 있나? 그렇다면 사전 에 나한테 상의라도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교주는 들고있던 서한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흐유.... 자네가 그렇게 정이 많은사람인줄은 몰랐군. 겨우 낙양에서 3년 정 도 같이 있었고 거기에 그 여자애는 자네가 부리던 하녀의 자식이 아닌가? 집 안이 좋은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네의 무예를 전수받은 제자도 아니 고.... 그런 거렁뱅이한테 상당한 재산까지 투자해서 독립시켜 줬으면 자네가 할 도리는 다한 것이 아닌가?" "그래도 저의 양녀인지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일단 자네가 저지른 일이니 자네가 수습하게나. 혁무상 장로." "예" "자네가 묵향을 도와주게. 그리고 이번 일에 책임을 물어 묵향 자네는 이번 일을 수습하는대로 5년간 근신할 것을 명하네." "교주님의 은혜 감사드립니다." "그만 물러가게나... 쯧쯧... 모두들 물러가게...." 그런다음 능비계 부교주를 가르키며 말했다. "자네는 남게나. 내 할말이 있네..." 뒷 수습 묵향은 교주가 묶고있는 천마전(天魔殿)에서 나오자 밖에는 사군자가 기다리 고 있었다. 묵향은 그들과 집으로 걸어가며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죽(竹)은 떠났나?" 그의 질문에 난(蘭)이 대답했다. "예. 그들이 모르게 호위해 주라고 전했습니다." "매(梅), 자네는 비영대 출신이니까 여러 가지 정보수집에 능할거다. 너는 난 (蘭)과 국(菊)을 데리고 지금 낙양으로 출발해라. 그런다음 소연이가 어떻게 해서 천지문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좀 알아보게. 그리고 소연이의 어미는 어 떻게 지내는지... 등 세부사항을 알아보도록 하게." "존명" "그리고 천지문의 문주가 어떤 사람인지 철저히 조사를 해봐. 과연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1달의 시간을 주겠다. 철저히 알아보도록!" "존명!" 묵향은 품속에서 부교주를 나타내는 영패(令牌)를 꺼내 매에게 주며 말했다. "될수있으면 최대한 빨리 알아내라. 그 일을 하는데 모든 수단을 사용해도 상 관없다. 내가 연락을 해둘테니까 너희들이 낙양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낙양의 비밀분타와 천령원의 방대인(龐大人)이 사람을 풀어 조사를 시작할거야. 자네 들은 그 자료들을 검토해서 정확한 사실을 뽑아내라. 그리고 너희들이 도착하 는대로 그들을 지휘해서 더욱 확실한 정보를 나에게 보내주면 된다. 대략적인 자료는 비영대에 있을테니 내가 원하는 것은 비영대도 모르는 정확한 자료가 필요하다. 1달은 짧은 시간이지만 죽자고 파해치면 알아낼 수 있을거야. 나는 한달 후에 낙양에 갈거다. 그때 나에게 그 자료를 알려주도록!" "존명." "그리고 낙양으로 가고있는 죽(竹)에게 연락해서 임무가 끝난 다음 본교로 복 귀하지 말고 낙양에서 합류해서 자네들의 일을 도우라고 하게. 죽이 실질적인 수장이지만 이번일은 정보수집이니 임시로 매가 수장으로서 모두를 이끌도록 하라." "존명" "빨리 가봐라." 수하들을 보낸 후 묵향은 혁무상 장로를 찾아갔다. 혁무상 장로는 교주가 묵 향에게 전권을 위임했기 때문에 묵향의 의도를 물어왔다. "교섭을 하러 사람을 언제 보낼까요?" "교섭이 빠를 필요는 없소. 자네는 천지문의 문주가 누군지 아나?" "예." 그러더니 옆에서 기다리고있던 문사(文士)사림을 한 중년의 사내에게 지시했 다. "천지문의 문주에 대한 자료를 가져와라. 그리고 천지문에 대한 모든 자료를 가져와." "예." 문사차림의 사내는 곧이어 한 뭉치의 서류들을 가져왔다. 그중에서 하나의 서 류를 골라낸 다음 혁무상은 묵향의 앞에 펼치며 말했다. "이자가 천지문의 문주인 대력도패(大力刀覇) 진양(振揚)입니다. 6척 1촌 (185Cm)의 장신에 근육질의 사내로서 대단히 뛰어난 무인입니다. 현재까지 드 러나기로는 대단히 광명정대한 인물입니다. 가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죠. 그 런데 마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젭니다." "마교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마교의 고수와 싸우다가 치명상을 입고 거의 5달의 치료를 받 다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뭐 그냥 흔히 있는 일이죠. 낙양에 저희들이 세력권을 뿌리내리던 초기에 천지문과 약간의 충돌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그는 마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보기보다는 증오한다고 봐야겠죠." "흠...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 그거지." "예. 그렇지만 증오는 이성을 잃게 만들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천지문의 제자가 2000명 정도라고 교주님이 말씀하셨는데 그중에 쓸만한 자 들은 몇 명인가?" "예. 500명 정도는 꽤 실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번의 충돌로 인해 그중 삼 분지 일은 본교의 뇌옥안에 있다고 봐야하지요. 만약 화해 쪽으로 끌고나가신 다면 그들도 응해올겁니다. 진양 문주도 바보가 아닌이상 한번만 더 본교와 충돌하면 멸문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을테니까요." "그들이 외부 세력을 끌어들일 가능성은?"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진양은 무림맹에 원조를 청했고 무림맹의 고수 200명 이 천지문에 와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원체 잘난척을 하며 거드름을 피워대서 천지문의 수하들과 약간씩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도 알아냈습니다. 무림맹의 용천익 당주가 그들을 이끌고 있는데 그들의 행태에 진양까지도 별로 곱지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꽤 자세히 알고있군." "예. 저야 교내의 모든 정보를 책임지다 보니, 저의 맡은바 일에 충실할 따름 입니다." "만약 한치라도 그 정보가 잘못된 점이 드러난다면?" "속하의 목을 치시죠." "글쎄...." 그러면서 그는 무의식을 가장해서 묵혼의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혁무 상 장로의 안색이 미세하게 바뀌는 것과 함께 기(氣)가 불안정해지며 그가 한 껏 속으로 긴장했다는 것을 알고는 묵향은 내심 만족해했다. 그의 마지막 사 부인 유백의 말에 따르면 한번씩 이렇게 겁을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고 묵 향은 그걸 실천한 것이었다. 묵향의 검술실력은 마교 내에서도 최강(最强)이라는 사실을 수뇌부에 있는 인 물들은 모두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뇌전검황(雷電劍皇)을 죽일때부터 마 교의 수뇌부들은 묵향이 탈마의 경지에 들어서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래 서 일단 묵향이 헤치우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교주도 그의 검을 피할 수 없다 는 점을 모두들 말은 안했지만 알고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교주도 그에게 교주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던 것이다. 마교에서는 교주 앞 2장(6m정도) 안 으로 검을 차고 접근하는 것은 금지된 사항이었다. 암습을 방지하기 위한 것 이었는데 그것에 예외가 인정된 최초의 인물이 묵향이다. 묵향의 경우 거리에 상관없이, 그리고 검을 가지고있건 그렇지 않건 교주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묵향은 의아한 듯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혁무상 장로에게 능청스레 물었다. "왜그러시오?" "예? 예 갑자기 좀...." 묵향은 짐짓 자신의 손을 보는 척 한 다음 능청을 떨었다. "아하. 검을 만지는 건 오랜 습관이라.... 미안하오. 이거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오. 만약 자네를 없애려고 한다면 검따위 필요도 없 으니까..." 그 말을 들은 혁무상의 안색이 더욱 시퍼래졌다. 묵향은 이제 화제를 돌릴때 라고 생각했다. "본좌는 진양에게 서로 불가침 협정을 맺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렇지만 그건 천지문으로서도 지키기 힘듭니다. 무림맹에서 만약 협동하여 본교를 대적한다면 그들만 빠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교와 연합하는 세력이라고 오해를 받고 심한 경우에느 무림의 공적(共敵)으 로 몰리게 되면 본교보다도 먼저 멸문당할 우려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건 그걸 피해나가면서 평상시에는 평화적으로 지낼 수 있는 조건이 없느냐 이말이오." "그렇다면 협정 항목에 정파가 사파를 연대해서 공격한다면 그에 동참해도 된 다는 게 있어야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예외적인 사항들을 인정해 줘야 하기 때문에 불가침은 어렵고 조건부 불가침은 가능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군." "........." "자네가 먼저 협정서의 초안을 잡아주게나. 물론 천지문이 그 협정서를 타 문 파에게도 공개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 주게.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의심 을 받게되고 쓸데없이 무림맹의 시선이 낙양쪽으로 돌아가게 되지. 그러면 여 태까지 본교에서 벌여놓은 여러 가지 일이 들통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협정서는 언제까지 완성할 수 있겠나." "여러가지로 의논을 해봐야 하니까 1주일은 걸릴겁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도 될까요? 정파와 협정서를 나눈 적은 본교의 역사상 한번도 없 었던 일입니다." "괜찮아. 서로가 그런대로 편안하게지내면 되지. 왜 쓸데없이 긴장을 고조시 켜 피를 흘리나. 일단 피를 흘리면 완전히 뿌리를 뽑아서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하게 만드는게 좋지만 처음부터 아웅다웅 할 필요는 없지." 10일 후 묵향은 총단에서 출발하여 낙양으로 향했다. 이번길은 여러명이 함께 했으므로 제법 숫자가 많았다. 혼자서 다니기 좋아하는 묵향으로서는 별로 마 음에 들지 않았지만 교주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 묵향은 사혈천신(蛇血 天神) 호계악(胡戒惡) 차석장로와 고루혈마(枯 血魔) 옥관패(玉冠覇) 외총 관, 음희(淫嬉) 설약벽(薛若碧) 좌외총관, 묵인겁마(墨刃劫魔) 초진걸(楚眞 杰) 좌호법과 그가 거느리는 호법원의 고수 20명이 따라왔다. 묵향에게는 옥 관패 외총관이 눈에 거슬렸다. 고루혈마(枯 血魔)라는 명호에 어울리게 추하 게 생긴 비쩍마른 곱추였는데 안그래도 별로 예쁜 구석이 없는데 거기에 흑시 마조(黑屍魔爪)를 극성까지 익혀 광택이 나는 검푸른 빛을 띈 손을 가지고 있 어 더욱 혐오감을 느끼게 했다. 이 흑시마조(黑屍魔爪)는 마교가 자랑하는 최강의 조법으로 10성까지 익힌 사 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걸 익히면 소수마공계열과는 달리 손의 모양이 갈쿠리 와 같이 비쩍 마르며 살이 빠지고 검푸른 빛을 띄게된다. 그모양이 아주 기괴 (奇怪)하기에 파괴력은 좋으나 여자들은 절대로 익히지 않는다. 아무래도 무 공을 익힐바에는 소수마공처럼 손이 희고 투명해져 너무나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도 있는데 궂이 이런 걸 익힐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흑시마조(黑屍魔 爪)를 익힐 때 처음 시작은 소의 뇌에 손을 담근 상태에서 익히기 시작하며 2 성이 넘으면 그때무터 시체를 이용하여 시독(屍毒)을 흡수하는 방법을 병행하 게 된다. 강철과 같은 손까락에 긁히면 시독에 중독되어 죽고마는 대단히 악 랄한 마공이다. 이것과 유사한 정파의 무공으로는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가 있고 그 익히는 방법도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 정파가 자랑하는 구음진경이라는 비급에 있는 데 구음백골조와 흑시마조는 상당히 유사점이 많기에 그에대한 논쟁이 분분했 다. 서로가 상대방이 베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파의 무공으로서는 구음백 골조는 익히는 방법이나 또 그 사악함에 있어 타 무공과 차이가 있기에 지금 에 이르러서는 구음백골조가 흑시마조를 상당부분 본따서 만들었다는 것이 지 배적인 의견이 되어가고 있다. 흑시마조는 마교에서 끊임없이 전해져 내려왔 지만 구음진경의 경우 매우 뛰어난 비급임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실전되어버렸 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길을 가면서 쉬엄쉬엄 간 결과 20일만에 낙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가 길을 재촉하지 않은 이유는 사군자에게 1달 후 도착할 것이 라고 알렸었고 또 음희(淫嬉) 설약벽(薛若碧)에게서 금(琴)을 배우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음희는 처음 자신이 명호를 음공(音功)을 사용해 서 사람을 기쁘게 해서 죽일 수 있다는 뜻으로 음희(音僖)라 지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냉혹한 성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금음으로 즐거워하다 죽게 만드는 재간을 보고 모두들 같은 음인 음란함을 즐긴다는 음희(淫嬉)로 바꿔 불렀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다 보니 그녀 자신은 음희(音僖)라고 우겼 지만 종내는 음희(淫嬉)로 바뀌어버린 웃지못할 사연이 있는 여고수다. 낙양분타에 묵향이 도착하자 사군자가 지금까지 조사한 것들을 묵향에게 설명 했다. 물론 묵향의 사생활인 소연 모녀에 관계된 자료는 발표하지 않았다. 매 는 묵향에게 두터운 서류뭉치를 건네며 말했다. "대력도패(大力刀覇) 진양(振揚)은 내공(內功)과 외공(外功)을 고루 익힌 뛰 어난 고수로서 여태까지 약속을 어긴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산적토벌에 앞장서거나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돈을 아끼지 않 고 주변의 주민들을 도와 꽤 인심을 얻고있습니다. 그는 1명의 부인과 2명의 첩을 거느리고있으며 또다른 1명의 정부(情婦)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정부는 지금 32살난 여자로 시어머니를 모시고있는 미색이 출중한 과부인데 그때문인 지 조심해서 만나고있으며 정부와의 사이에 1명의 딸이 있습니다. 시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 시어머니가 죽고나면 정식으로 받아들일 계획인 모 양입니다. 그 외에 부인에게 2명, 두 첩에게서 3명 합해서 4남 2녀의 자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식들을 아주 사랑하며 부인들과의 사이도 꽤 원만한 것으 로 알려져 있고 저희들이 1주일간 주야로 감시했는데 한가지를 제외하고 소문 대로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더 정확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하인을 몇 명 납치해서 주리를 틀수도 있겠지만 부교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행실도 대단히 좋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방금 한가지를 제외하고라고 했는데 뭔가?" 그러자 매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말했다. 마교의 인물들은 여색에 있어서 거의 극과 극을 달린다. 일부 여체를 필요로 하는 마공을 익힌 자들의 경우 완전히 호색한으로서 수많은 여자들과 동침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마교내의 빡빡한 훈련과 수련, 그리고 각종 임무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보니 여색을 탐 할 시간조차 얻기 힘든 경우가많았다. 매도 후자의 경우로 그는 동자공을 익 힌것도 아니지만 본의아니게(?) 아직도 동정(童貞)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조금 변태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한번에 두세명 의 부인과 함께 성교를 나눈다던지, 손발을 묶어놓고 성교를 나누기도 하 고.... 심지어는 항문에다가도...." 주변에서 듣고있던 사람들이 킥킥거리자 매의 얼굴이 좀더 붉어지며 말을 멈 췄다. "뭐... 조금 변태적인 짓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나쁠 건 없지. 안그래?" 그러자 호계악(胡戒惡) 차석장로가 웃으면서 묵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하하.. 그럼요. 자고로 침실에서까지 정인군자인 친구는 없다고 들었습니 다. 하하하" 그의 말을 들은 모든 남자들이 키득거리며 웃으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 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유일한 예외는 음희(淫嬉) 설약벽(薛若碧)이었다. 그 녀는 명호와는 달리 얼굴이 벌개지면서 고개를 숙이고있더니 조금 지나자 그 냥 놔두면 음담패설(淫談悖說)이 언제 끝날지 몰라 말문을 막기위해 묵향에게 질문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진양이란 자는 꽤나 정대한 인물인 모양인데 부교주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요. 계획대로 그들과 협정을 맺으실겁니까?" 묵향은 두터운 서류뭉치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이걸 살펴보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별일이 없다면 3일 후에 찾아가기로 하 지. 그동안 자네들은 좀 쉬게나." "알겠습니다." 일단 불이붙은 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초진걸 좌호법은 나가면서 매한 테 물었다. "하하하... 그래 그친구 양물(陽物)의 크기가 얼만하기에 그 안에 들어간단 말인가?" "이만 하던데요." 기어들어가는 매의 목소리... 그러자 놀랍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인가?" 그러자 또다른 약간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그만한걸 그 안에 집어넣다니... 사람잡겠군...." "킬킬킬..." 모두들 히히덕거리며 물러간 다음 묵향은 매를 조용히 불렀다. "소연 모녀의 일은 알아봤나?" "예. 그 안에 적혀있습니다." "이걸 어느 새월에 읽는단 말인가? 무공비급도 아니고 시간낭비야. 그래 지금 소연의 어미는 어디서 살고있나? 예전의 그집인가?" "아닙니다. 지금은 천지문 근처에있는 작은 집에서 살고있습니다. 수소문을 해본 결과 진양은 시간이 날때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재능이있는 인재를 모아들이는데 우연히 낙양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녀가 상당한 수준 의 무공을 알고있다는 걸 눈치채고 몇가지 시험을 해보는 중에 내력(內力)은 상당한 수준인데 약간의 호신술 정도밖에 알지 못한다는 걸 알고 그녀를 제자 로 받아들였다고 하더군요. 타 문파의 무공을 익혔지만 그녀가 현문의 정통심 법을 익혔다는 걸 알고 진양은 따로 심법을 가르치지 않고 그걸 계속 익히기 를 권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지금 14살 위인 셋째 제자 장진(張璡)이라는 사 람을 좋아하는 걸로 알고있는데 장진은 또 진양의 둘째 딸을 좋아해서 아마 결혼은 힘들거라고 그러더군요." "뭐... 그런거야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장진은 지금 어디에 있나? 뇌옥에 있나?" "예. 같이 탈출한 모양인데 본교의 추적을 받고 뿔뿔이 흩어져 도당치다가 장 진은 다시 체포되어 뇌옥에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소연 어미는 건강하던가?" "예. 정정하시더군요. 아주 지조있고 말수가 적으며 언제나 아름다운 꽃밭을 가꾸는 중년 부인으로 주변에 좋은 인상을 주는 여자였습니다. 몇번 청혼이 들어왔었는데 모두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멍청하기는... 결혼을 하는 것이 좋을텐데. 자네는 이만 나가보게나." 묵향은 이틀동안 천지문 주위를 배회했다. 소연의 어머니도 볼 수 있었는데 그녀는 마당에 묵향이 과거에 그들과 지내며 마당에 심었었던 화초들을 가꾸 고 있었다. 묵향은 그녀가 꽃밭에 물주는 모습을 멀리서 한참동안이나 바라보 다가 소연이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천지문은 상당히 넓은 문파였고 또 그 주변에서 안을 살펴볼수도 없어 묵향은 언덕위에서 그냥 천지문 내부를 쳐다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언덕에서 2시진 정도 밑을 내다보는데 옆에서 어린 남자애가 다가왔다. 아마 도 12살쯤 되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 아이는 매우 개구쟁이 인 모양으로 옷은 흙투성이에 여기저기 풀잎이 붙어있었다. 그 애는 묵향에게 다가오더니 나무칼을 묵향에게 겨누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꼼짝마. 너는 밀정이지." 묵향은 그 애의 행동을 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니라면?" 그 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면 왜 여기서 천지문을 바라보고 있느냐?" 꽤 말투에 위엄을 지어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고, 그 아이의 의복이 상당 히 좋은 걸로 미루어 아마 이 아이의 아버지는 천지문에서 꽤 높은 직위를 차 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묵향은 갑자기 장난이 하고싶어져서 그 애에게 말했 다. "내가 천지문을 바라보고있는건 너를 납치하기 위해서인데, 마침 잘 만났군." 그러면서 묵향이 천천히 칼을 빼들자 그 애는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무.... 무.... 무엄하다." "무엄하고 자시고.." 그러면서 묵향은 그 애를 향해서 묵혼검을 찔렀다. 그러자 그 애는 제법 침착 하게 대응했다. 묵향의 검이 그렇게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그 아이에게 여 유가 생긴 모양이다. '자식이 다시 간이 커졌군.' 그 애는 초식을 펼쳐 묵향의 검을 비스듬히 쳐내며 묵향의 허리를 베어왔다. 제법 격식이 갖추어진 초식이었다. 그 애는 묵향의 허리에 목검이 격중되자 자신만만한 어조로 외쳤다. "내가 이겼다!" 하지만 묵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튕겨진 묵혼검을 다시 돌려 그 애의 목 쪽으로 비스듬히 베어내렸다. 그 아이는 묵향이 졌다는 내색도 하지않고 자신 의 목을 향해 베어오자 놀란 모양이다. "앗. 비겁하다. 내가 먼저 베었는데..." 하지만 그 아이의 검은 목검이었고 별로 힘도 없어서 묵향에게는 모기가 무는 정도의 타격도 주지 못했지만 묵혼검의 경우는 달랐다. 아무리 살살 베어도 그 애의 허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이다. 그 애는 놀라서 씨근 거리며 묵향을 향해 도술(刀術)을 펼쳐왔다. 아이를 데리고 노는것도 꽤 재미 가 있었다. 그 아이를 가르친 사람은 상당한 수준인 모양이고 제법 내공의 기 초도 잡혀있었다. 아마도 7살도 되지 않아서 심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거라 고 묵향은 생각했다. 아이는 24가지 초식을 쓰더니 이제 밑천도 다 떨어졌는 지 더이상의 초식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응용력은 대단해서 여러 가지 변 초(變招)로 묵향을 공격하거나 방어했다. 묵향은 그 아이의 초식만으로도 천 지문의 도법이 어느정도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천지문의 도법은 변화가 다양했고 상당히 많은 변초를 내포하여 상대의 헛점을 찌르는 교묘한 초식이 많았다. 하지만 변화가 너무 심해 어떤 면으로봤을때는 가벼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도법이란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야 한다. 항상 중 도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한시간 정도 애를 데리고 놀자 그 아이는 급기야 힘이빠져 핵핵대기 시작했고 땀을 비오듯 흘렸다. 묵향은 순간적으로 아이의 6군데 혈도를 봉쇄한 다음 천 지문에서 제일 가까운 음식점으로 어깨에 이고 갔다. 점소이를 불러 음식을 시키고 아이를 의자에 앉힌 다음 다리 혈도를 제외하고 모든 혈도를 풀어주면 서 말했다.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음식을 들어라. 너도 방금 내가 점혈하는데 쓴 초식을 보고 내 실력을 짐작했겠지. 다른건 몰라도 너같은 아이는 100명이 와도 안된 단 말이야." "먹기 싫어." 묵향은 일부러 인상을 쓰면서 위협조로 말했다. "안먹겠다면 끌고가서 똥을 입속에 퍼넣겠다." 그러자 아이는 혀를 빼서 묵향에게 내밀며 비웃듯이 말했다. "아저씨는 비겁해요." "그럼 나는 아주 비겁하지." "그리고 치사해요. 아이를 핍박하다니..." "그럼... 아주 치사하지... 그런데 이왕이면 격조높게 비열(卑劣)하다고 하거 라." 아이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얼굴이 벌개 지며 성을 내는데 이양반은 한술더뜨기 때문이다. "못할줄 알아요? 아저씨는 비열해요." "그럼 그럼... 사양말고 칭찬해." 아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욕을 칭찬으로 듣고있으니 더 이상 떠들어봐야 입만 아프기 때문이다. 음식이 나왔다. 제법 괜찮은 요리였고 묵 향은 술을 천천히 마시면서 아이의 얼굴을 노려봤다. 아이는 입속에 똥을 넣 겠다는 말도 안되는 위협에 대해 절대로 똥은 먹을 수 없다는 듯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차곡차곡 천천히 꼭꼭 씹어서 음식을 먹는 자세 를 보고 묵향은 꽤 교육을 잘 받은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맛이 괜찮니?" 그라자 아이의 시큰둥한 목소리. "아뇨. 맛없어요." 묵향은 싱긋이 웃으며 일부러 말소리를 낮춰서 위협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똥은 어떨까?" 그러자 아이는 잠시 얼어붙는 것 같더니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예... 예.. 이거 아주 맛있어요. 둘이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겠는데요." 적당히 음식을 먹은 다음 묵향은 아이의 다리 혈도를 풀어주면서 말했다. "오늘 아주 즐거웠다. 너도 그렇지?" 그러자 혈도가 풀린 아이는 저만큼 도망가더니 소리쳤다. "이 나쁜녀석아. 나중에 두고보자." "하하하... 그래, 나중에 보자." 그 아이는 천지문을 향해서 달려갔다. 묵향도 이곳에 남아서 천지문과 시비를 벌일만큼 바보는 아니므로 혼자서 키득거리며 분타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친 후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다가 모두들 천지문으 로 갔다. 묵향일행이 도착하자 천지문의 위병은 갑자기 30여명의 무장한 무림 인들이 들이닥치자 일부는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매는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 려 바짝 긴장하고있는 위사(衛士)에게 다가가 말했다. "우리는 천마신교(天魔神敎)에서 왔소. 문주를 뵙고 상의할 일이 있소. 안에 기별해 주시오." 그러자 안으로 위사중 한명이 달려서 들어갔다. 1각 정도 지나자 그 위사는 또다른 중년인을 데리고 나왔다. 그 중년인은 묵향일행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문주께서는 귀교와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매가 말했다. "그러면 뇌옥에 갖혀있는 귀 문하의 300여명의 목이 떨어져 나가도 상관없 소?" "그대들은 우리에게 협박을 하러 찾아온겁니까?" "아니오. 몇가지 협상을 할게 있어서 찾아왔소. 먼저 문주를 만나게 해주시 오." "기다리십시오." 그러더니 2각 정도를 기다리자 그 중년인이 다시 나와서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묵향이 말에서 내려 걸어들어가자 나머지도 하는 수 없이 말에서 내렸다. 묵 향의 뒤에서 지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남아 말을 돌보고 있어라." 묵향 일행은 문에 10명의 무사들을 남겨두고 중년인을 따라 들어갔다. 묵향일 행이 기다리는 중에 준비했는지 넓은 마당에 넓직한 탁자 2개가 연결되어 놓 여있고 의자 6개가 놓여있었다. 실지 탁자의 넓이로 봤을 때 충분히 10개 이 상의 의자를 놓을 수도 있는데도 한쪽에 3명씩 앉을 수 있도록 의자의 수를 제한해 놓은 것은 상대의 우두머리가 누군지 알아보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저쪽의 의자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고 100여명의 고수가 검을 허리에 찬 채로 서있는 것으로 보아 문주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묵향은 이쪽에 할당된 세 개의 의자중에 중간에 위치한 의자에 털썩 앉은 다음 문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1각 정도 더 기다리자 문주가 나왔고 그 뒤에는 크고 두꺼운 도(刀)를 가진 젊은이가 뒤따랐다. 과연 보고대로 6척이 넘는 큰 키에 다부진 근육을 가지고 있는 부리부리한 눈매의 소유자였다. 그는 중간의 의자에 어떻게 보면 문약한 서생같이 그렇게 근육이 발달하지도 않은 새파랗게 젊은 인물이 앉아있는 것 을 보고 약간 놀란 듯 했다. 그리고 앉기전에 한번 둘러본 다음 대부분의 위 사들이 40대 정도의 용모라는 점과 그 외에 상당히 젊게 보이는 사람들이 많 았고 또 왼편에 앉은 깡마른 곱추의 손이 검푸른 광택을 내는 것을 보고 점점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다음 묵향의 뒤쪽에 서있는 여자의 손이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것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을 보고 밖으로 내색은 안했지만 거 의 경악할 정도까지 놀랐다. '이들은 마교의 최고 정예다. 저 검푸른 광택의 말라비틀어진 손에 말라깽이 곱추라면 마교서열 13위 외총관 고루혈마(枯 血魔) 옥관패(玉冠覇)가 틀림없 어. 그리고 저 서생같은 자 뒤의 사이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계집은 소수마공 을 극성까지 익혔고 금음(琴音)으로 사람을 웃으며 죽게 만든다는 음희(淫嬉) 설약벽(薛若碧) 좌외총관이다. 대부분 평생가도 저들 중 한명의 얼굴도 보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이 둘이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소문대로라면 저 둘만으 로도 본문을 멸문시킬 수 있을거야.' 이때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 가 다가왔다. 아주 깨끗한 고급옷을 입은걸로 보아 제법 신분이 높은 것 같았 다. 허리에 패도를 찬 걸로 보아 천지문의 인물은 아닌 모양이다. 그자는 문 주의 오른쪽에 비어있는 의자에 거만하게 앉더니 말했다. "천마신교에서 여기 무슨일이오?" 그러자 곱추인 옥관패가 비웃음을 띄며 입을 열었다. "네녀석은 여기서 입을 열 신분도 못돼. 우리는 네녀석이 아닌 문주하고 얘기 하기 위해서 총타에서 이곳까지왔단 말이다." 거들먹거리던 그 젊은이는 곱추를 째려봤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곱추의 손에 멈추자 일순간 말을 잊을 정도였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가 말했다. "귀하는 고루혈마(枯 血魔) 옥관패(玉冠覇)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알면서 왜 묻나?" "이런 구석진 곳에 어떻게 천마신교 서열 13위의 나으리가 오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본좌보다 더 높은분도 와 계신데 내가 못올것도 없지." 그 말을 들은 그 젊은이는 이제 정신을 차려 마교측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봤 다. 마교의 인물들 중에서 외부에 드러난 고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여태까지 고작해야 고루혈마 옥관패 외총관과 그 수하인 우외총관 천진악과 좌외총관 설약벽이 밖에 드러난 최고의 고수들이다. 그런데 그중 두명이 이곳에 있고 그나마도 음희 설약벽은 앉지도 못하고 서있는 걸 보고 그는 도무지 지금 돌 아가는 사태를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이정도 고수들이 이 구석진 곳에 왜 왔지? 솔직이 저뒷쪽에 서있는 인물들에 게서 뿜어져나오는 강렬한 마기(魔氣)로 보아 모두다 보통 고수들이 아니야. 앞의 세명은 빼고 저기 서있는 자들의 반만 동원해도 이따위 시골 문파쯤 잿 더미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겠군. 맹에서 파견된 우리들까지 포함해서... 그런데 이해할 수가 없는건 이 중간에 앉은 젊은 녀석이군. 도무지 마기를 느 낄 수가 없어. 무림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겠어. 어쩌면 마교의 핵심 인물인 혁무상인가? 혁무상이 마교의 두뇌라고 들었는데....' 그가 잠시 할말을 잊은 사이에 설약벽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대력도패(大力刀覇) 진양(振揚) 문주님. 이번에 저희들은 귀 문파와 협상을 하기위해서 왔습니다. 본교는 귀 문파와 조건부 불가침 협정을 맺고자 합니 다." 그러자 오른편에 앉은 젊은이가 말했다. "문주님 속아서는 안됩니다. 저들은 계략을 통해 이 문파를 통채로 먹으려고 하는 겁니다." 설약벽은 그 젊은이에게 말했다. "이 협정은 천지문과 본교와의 일입니다. 협정을 맺을 것인지는 천지문의 문 주님이 결정하실 일이지 무림맹의 용천익 당주 따위가 끼어들 일이 아니에요. 문주님, 이 협정이 맺어지면 물론 귀 문파에세 잡혀온 300여명의 포로들을 돌 려드릴겁니다. 이것이 그 협정서입니다." 일단 밑져봐야 본전이었으므로 진양은 그 협정서를 읽기 시작했다. "一 : 이 협정서는 상대방이 해제를 원하거나 상대 문파의 수장(首長)이 바뀌 기 전까지 유효하다. 만약 한쪽의 수장이 바뀌면 다시 협정서를 작성, 협의해 야 한다. 二 : 천마신교와 천지문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하고 설혹 실수로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면 무력보다는 상호 토의를 통해 원만히 처리함을 원칙 으로 한다. 아울러 천마신교는 천지문 문파를 기준으로 20리 안에는 절대로 침범할 수 없다. 三 : 만약 피치못할 사정으로 이 협정서를 위반해야 할 일이 발생하면 협정 서 해제를 원하기 1달 전에 상대방에게 통보해야 한다. 예외로 천지문의 경우 정파의 모든 문파가 서로 합동하여 천마신교를 침입해야 할 때 통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 예외의 경우 타 문파들의 압력에 의해 자의가 아닌 행 동이 되므로 아직 협정서는 유효하게 된다. 따라서 천마신교는 공격해 들어오 는 천지문의 제자들은 공격할 수 있으나 절대 천지문을 공격할 수는 없다. 四 : 만약 천지문에서 200리 내에서 천마신교가 정파계열의 문파와 충돌했을 때 천지문에서 중제를 요청하면 최대한 무력행사를 자제해야 하며 중제 요청 과 동시에 1달간 천마신교는 절대로 무력행사를 하지 않는다. 五 : 천마신교를 위협하는 세력이 천지문 20리 내에 존재할 때 천마신교는 그들을 임의로 공격할 수 없고 반드시 천지문의 허락을 얻어야 공격이 가능하 다. 六 : 천지문은 꼭 천마신교가 타 문파와 충돌을 일으켰을 때 도와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천마신교는 천지문에서 지원을 요청하면 도와주어야 하고 만약 돕지 못한다면 천마신교에 서신도착 후 1달이내에 돕지 못하는 사유를 적어 천지문에 통보해 주어야 한다. 七 : 위의 여섯가지 내용은 협정서가 유효한 한 지켜져야한다." 찬찬히 읽은 다음 진양은 왼쪽에 앉은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인에게 협정서를 넘겨주며 말했다. "제가 읽어보니 이건 일방적으로 천마신교가 불리한 조항들이 많소. 귀하들의 진심을 알고싶소." "우리들의 진심은 그것입니다. 첫째항을 둔 이유는 본교에서는 진양 문주님을 믿을 수 있지만문주님의 후계자까지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건 귀 문파도 마 찬가지일 것입니다. 저희 교주님께서도 20년 안에 소교주님께 모든 권한을 넘 기실 겁니다. 귀 문파도 소교주님을 못믿기는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렇소." "이번에 생긴 일도 서로가 잘 상의해서 넘길 수 있는 일인데도 귀 문파는 수 상한 점이 있다고 본교의 비밀분타를 공격해 왔습니다." "그건... 원체 수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고... 우리들은 그걸 산적들의 소굴로 판단하고 공격을 했는데 공격해 들어간 제자들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1 주일 전에서야 그중 3명이 돌아왔소. 그 아이들의 말을 듣고는 귀교와 충돌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이번 일은 교주님의 허락하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본교는 귀 문파와 충돌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이걸 거절하신다면 저 희들은 지금 귀 문파를 멸문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을 충분히 고려해 주 십시오." 진양은 힐끗 무림맹에서 파견나온 용천익 당주를 보더니 말했다. "본인은 이 협정서의 일곱가지 내용을 수락하오." 여태까지 말이없던 묵향이 자신의앞에 놓여있는 협정서에 서명하고 인장을 찍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본교와 천지문은 조건부 불가침 협정을 맺은 것입니다. 그 협정서 에 인장을 찍어 이리 주십시오." 진양이 서명하고 인장을 찍은 후 그 협정서를 묵향에게 넘겨주자 묵향도 자신 이 서명하고 인장을 찍은 협정서를 넘겨줬다. 옆에서 설약벽이 서로간에 협정 서 교환이 끝나자 말했다. "건네 받으신 협정서에 다시 자신의 서명과 인장을 찍어주십시오. 각 협정서 는 각 문파에 따로 보관되며 협정이 유효한 한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 입니다." 진양 등은 넘겨받은 협정서에 써져있는 서명을 보고 경악했다. 용천익 당주는 서명을 보더니 얼굴을 들어 묵향을 멍청히 바라봤다. 그도 그럴것이 그 서명 은 이렇게 씌여 있었다. <천마신교 교주 대리, 천마신교 부교주 묵향> '겨우 이런 문파에 2만의 정예 고수를 가지고있고, 또 10만 사파를 영도한다 는 마교의 부교주가 오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진양이 이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용천익 당주는 약간 다른 생각을 하고있었 다. '마교에 새로운 부교주가 임명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정보다. 만약 저자가 진 짜 부교주라면 최소한 극마의 경지를 넘어선 자야. 빨리 본맹에 연락을 해야 겠군.' 서로가 각기 머리를 굴리는 사이 묵향은 벌써 자신이 보관할 협정서에 서명하 고 인장을 찍은 후 그 협정서를 설약벽에게 건넸다. 그런다음 주위를 둘러보 다가 갑자기 일어섰다. 묵향이 갑자기 일어서자 모두들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이때 묵향이 건물의 오른쪽 얕은 토담을 향해서 외쳤다. "이봐. 이리 나와. 맛있는거 사줄께." 그러자 토담 안에서 한 개구쟁이의 얼굴이 나오더니 말했다. "이젠 안속아. 이 비열한 녀석아." 그러자 갑자기 진양과 진양의 왼편에 앉은 40대 초반 사내의 얼굴이 동시에 홍당무가 되었고 주변에 있던 천지문의 고수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곤욕스런 표정이었다.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묵향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어제 둘이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다고 해놓고는.." "헛소리 하지마! 우리 할아버지한테 일러서 네녀석을 죽여버릴거야." "어제는 두고보자고 하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할아버지를 찾는거냐? 꼬맹 아." "난 꼬맹이가 아니야. 그럼... 그럼... 나중에 내가 직접 너를 죽여버릴거 야." 그 말을 듣고 묵향은 비웃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말했다. "흥! 나중에? 나중에 언제?" 아이는 한참 망설이는 것 같더니 말했다. "10년 후에 두고보자." "하! 10년 후라." 그와 동시에 약간 묵향의 신형이 움직이는 것 같더니 그 순간 묵향은 제자리 에 서 있었다. 다른점이 있다면 그 소년을 잡고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주변의 인물들은 묵향의 신법이 빠름에 경악했다. 거의 순간의 시간에 5장 (15m정도)거리에 있는 아이를 잡고는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묵향은 아이한 테 짐짓 화났다는 태도로 말했다. "나한테 할아버지 잘못했어요 하고 빌어라.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그렇게는 못해! 놔 이자식아." 그러자 묵향은 가소롭다는 듯이 콧웃음을 치며 말했다. 묵향의 말투는 상대를 한껏 깔보는게 확연했다. "흥! 그럼 내가 그 말을 하도록 만들어 주마! 좋게 말할 때 빌어!" 아이는 고집스런 얼굴로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안해! 못해! 놔 아자식아....." "못된녀석! 네녀석이 비명을 지르고 잘못했다고 벌벌 떨게 만들어 주지." 그런다음 순간적으로 아이의 혈도 64곳을 점했다. 그런다음 아이의 몸 곳곳을 만져대자 뼈가 부서지는지 우두득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애와 장난 을 치는 줄 알고 모두들 재미있어 했지만 사태가 진전될수록 진양과 그 왼쪽 에 앉은 사내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더니 급기야 제지하고 나섰다. "이럴수가 있소?" 그런데 이때 설약벽이 언제 다가왔는지 진양의 손을 잡고 말렸다. 진양은 그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 이 터지도록 입을 꽉 다물고 신음하고있는 손자를 보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가 려 했다. 하지만 그의 괴성은 나오지도 못했고 몸은 앞으로 나갈수도 없었다. 그는 이 순간 요사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미녀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하 기조차 힘든 경지에까지 올라선 고수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협정을 맺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린애를 저렇게 괴롭히다니... 세상에... 어린애한테 분근착골(粉筋鑿骨)의 고문을 행하다니 저자식은 사람도 아니다.' 그의 눈에는 피눈물이 쏟아졌다.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수하들도 문주와부문주 그리고 부문주의 아들이 사로잡혀있기에 칼을 빼들고 달려들 수조차 없이 숨을 죽이고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림맹에서 파견된 용천익 당주도 자신의 1장 앞에서 노려보고있는 고루혈마(枯 血魔) 옥관패(玉冠覇)의 위세에 질려 식은땀을 흘리며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수하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빨리 비명을 질러 이자식아.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이번에는 뼈다귀를 부숴 버릴거야." 묵향은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그 아이를 위협했고 그 아이는 그에 질수 없다 는 듯이 비명도 지르지 않고 묵향의 고문을 견뎠다. 2각(30여분)이 지나자 아 이는 차츰 혈색이 돌아왔다. 아이의 몸속에서 들려오던 우드득거리는 소리는 멈춘지 오래였다. 또다시 1각여가 지나자 아이는 정신을 차렸다. 이제 모든 고통이 끝난 것이다. 그러자 묵향이 이번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직히 말했 다. "내가 진기를 유도할테니 운기조식을 해라." 묵향은 아이의 머리위에 손을 올린 다음 그 애의 운기조식을도왔다. 그런데 좌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방식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상하군. 운기조식을 도운다면 등에 장심을 붙이고 진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인데 저녀석은 왜 머리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거지..' 점점 시간이 지나자 아이의 얼굴은 더욱 평안해졌다. 운기조식을 시작한지 2 각 정도가 지나자 묵향은 손을 떼고는 아이를 일으켜 주며 말했다. "정말 용감하게 견뎠다. 내가 협정서가 조인된 기념으로 너에게 준 선물이다. 방금 너가 익힌 심법은 현문의 태허무령심법(太虛無靈心法)이다. 이미 정파에 서는 실전된 무공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며 모든 사마(邪魔)가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준다. 너는 매일 1시진씩 이 심법을 행해야 하고 그 어 떤 다른 심법도 익히면 안된다. 진기가 정순(靜純)하지 못하면 태허무령심법 으로 쌓은 내력은 별로 힘을 쓰지 못해. 이것은 내력이 쌓이는 속도는 느리지 만 일단 경지에 이르면 대단한 진전을 보이는 것이 장점이지. 너는 내가 임의 로 근골의 형태를 바꿔 환골탈태(換骨奪胎) 한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하면 더욱 빨리 무공을 익힐 수있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진짜를 맛볼거다. 그런데 이 방법은 대단한 효과가 있지만 그 고 통이 너무나 지독해 도저히 인간으로서 참을 수가 없지. 단 한번이라도 비명 을 지르면 기가 흩어져 그때까지의 고생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거기다 다시는 이방법을 쓸 수가 없다. 네가 참아낸 것이 대견하구나." 그러면서 묵향은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런 다음 아직도 어벙벙 한 상태에있는 좌중을 훑어본 다음 진양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그럼 안녕히... 저아이는 나중에 천지문을 이끌어나갈 최고의 고수가 될 것 입니다. 잘 키우시기 바랍니다." 그런 후 아이에게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꼬마야! 다음에 만났을때는 그따위 엉터리 도법이 아닌 좀 더 좋은 솜씨를 보여주기 바란다." 그런다음 외쳤다. "돌아가자." 모두들 묵향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하는데 미소를 머금은 설약벽이 진양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손자분의 성취에 축하드립니다. 저 무공은 진골축근마공(珍骨縮筋魔功)으로 극마(極魔)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시전이 가능한 대단히 높은 경지의 무공입니 다. 모든 천마신교의 젊은이들이 저 수법을 받아보기를 원하지만 실지로 받은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의외로 부교주님께서 손자분이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저 수법을 받는 도중에 아이에게 충격을 주면 안되기에 다급한 상황이라 손을 썼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뇌옥에 갖힌 천지문의 제자들은 본교의 제자들이 호위해서 안전하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설약벽은 경신술을 사용해 순간적으로 말이 기다리고있는 문쪽으로 몸을 날렸 다. 천지문의 중인들은 그녀의 그 비쾌한 경신술을 보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 다. "정말 대단한 신법이군." "음희(淫嬉)는 냉혹하고 지독한 손속에 음란(淫亂)한 계집이라고 들었는데 소 문이란게 얼마나 믿을게 못된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겠군." 현상범은 싫어요 묵향은 천지문을 벗어나자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급히 호계악 차석장 로가 쫓아오더니 말했다. "부교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교주님께서는 이 일이 끝나는 대로 근신하시라 고...." "일이 아직 안끝났어. 매(梅), 국(菊)!" "예!" "너희들은 호 장로를 모시고 교로 돌아가라. 그리고 옥 외총관" "예" "설 좌외총관을 좀 빌립시다." "예?" "나는 어디 좀 다녀올데가 있는데 여태까지 금을 배우던 것이 있어 며칠 더 빌립시다. 그리고 교주님께는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갈거라고 전해주시오." "시간이 얼마나 걸리시는지?" "2달 내로 돌아갈거요." "제발 부교주님! 그러시면 저희들 목이 위태롭습니다. 좀 더 줄여주십시오." "그럼 1달 반! 더 이상은 안돼"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오실거라고 교주님께 아뢰겠습니다." * * * 묵향은 설약벽에게 금을 배우며 천천히 길을 갔다. 뒤따르던 설약벽이 궁금하 다는 듯이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응.. 묵은 빚을 받으러" "빚이라구요?" "그래." "어디에 빚이 있으십니까?" "무당파와 태진문! 그녀석들이 간 크게도 본좌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지. 많이 걸면 본좌도 묵인해 주려고 했는데 겨우 은자 40냥 정도... 날 뭘고보고..."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그 두 문파 장문인 녀석들 다리뼈를 부숴놔야겠어." "그러시면 안됩니다. 그러면 혈풍이 불게 된다니까요" "상관없어. 혈풍따위 불어도... 내가 천마신교에 관계되어 있다는 걸 아는사 람은 없어. 너희들은 근처까지 따라와서 내가 그 두 문파를 완전히 초토화 시 키는 걸 구경이나 하라구." 난과 죽, 그리고 설약벽은 무당파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묵향을 설득하려 했지만 묵향의 고집을 꺽을 수가 없었다. 최후에는 설약벽이 결심한 듯이 외 쳤다. "만약 뒤집어 엎으려면 아예 무당파를 멸문시켜 증인을 완전히 없애버려야 합 니다. 그러려면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근처 분타들에 연락하겠습니다." "그럴필요없어. 상대는 군대가 아니야. 활이나 쇠뇌따위로 공격하지 않고 방 패도 쓰지 않지. 나 혼자서도 충분해." 그러더니 문앞에서 보초를 서고있는 무당파의 제자 5명에게 걸어갔다. 그런다 음 차갑게 말했다. "장문인을 불러다오." "뭐라고. 웬 미친놈이..." 제자들은 검을 반도 뽑기전에 4명은 기절하고 한명은 묵향에게 목이 잡혔다. 묵향은 혈도를 짚는 수고를 생략하고 한방씩 주먹떡을 선사했고 늑골이 부숴 지고 오장육부가 진동하는 충격에 모두들 기절한 것이다. 묵향이 서서히 손아 귀의 힘을 가하자 점점 목이 졸려오는 걸 느낀 무당파의 제자는 기절초풍해서 검을 뽑을 엄두도 못내고 부들부들떨며 종내는 검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 다. "장문인에게 안내해." 묵향은 그자의 목을 그러쥔 상태로 무당파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삼인은 묵향이 하는 짓을 보며 경악해서 그냥 멍청히 바라볼 뿐이었다. 한 괴한에게 동문제자가 목이 잡힌채 엉거주춤 들어오자 모두들 검을 뽑아들고 외쳤다. "왠놈이냐." "게 섰거라." "겁도없군" 저마다 한마디씩 했지만 묵향은 단 한가지만을 원할 뿐이었다. "장문인을 불러와라. 과거 빚진걸 받으러 왔다고 하면 알거다." 반시진 정도를 기다리고 있자니 한 도인이 여러명의 도인들을 거느리고 다가 왔다. 그는 묵향의 앞에서 간단히 포권하며 말했다. "시주께서는 본좌에게 무슨 빚이 있다고 찾아오셨소?" 묵향은 이제 장문인을 만났기에 더 이상 그 제자를 잡고있을 필요를 못느끼고 주변에 칼을 뽑아든 채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던졌다. 상대는 갑자기 동문을 자신에게 던지자 앞으로 겨눴던 칼을 황급히 내리며 날아오는 동문을 구출한 다음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묵향이 그냥 목만 잡고있었는데도 그의 목 에는 묵향의 손자국이 벌겉게 찍혀있었다. "왜 왔느냐고? 당신은 나를 보고싶었으니까 내 목에 현상금을 걸었을게 아닌 가?" 묵향의 싸늘한 대답을 듣고 장문인은 경악했다. '바로 그 검귀로구나. 뇌전검황이 고혼이 된 걸로 미루어 보아 오늘은 길(吉) 보다는 흉(凶)이 많겠구나. 전 제자가 달려든다면 죽일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그 피해가 어느정도일지 짐작이 가지 않으니.... 그렇다고 벌써 은거하신 사 숙조(師叔祖) 어르신을 부를수도 없고...' 장문인은 먼 산을 가만히 보고있더니 제자들에게 명했다. "모두들 물러서라." 이때 장문인의 왼편에 서있던 젊은이가 장문인을 말리며 말했다. "장문인께서는 참으십시오. 제가 해보죠." 그런다음 묵향의 앞으로 나섰다. "그대는 누군가?" "나는 황룡문의 부문주다." "자네와는 별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은데.... 또 황룡문과 원수지기는 싫으니 비키게나." "황룡문을 알고있다면 여기서 물러서 주시오." "제기랄! 황룡문은 어디에있지? 나는 지금 시간이 별로 없어. 황룡문까지 잿 더미로 만들시간은 없다구. 빌어먹을 빨리 비켜!" 그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자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기운을 읽으며 묵향도 천천히 묵혼검을 뽑으며 말했다. "제법이군." 그 젊은이는 묵향의 빈정거림에 약간 화가났는지 기를 있는대로 끌어올렸다. 그는 옷이 한껏 부풀어오르자 곧바로 공격을 가해왔다. "직교단월(直交斷月)!" 그와 동시에 10여개의 반월형의 푸른 검강(劍剛)들이 묵향을 향해 뻗어나갔 다. 순간 묵향의 몸이 앞으로 튕겨져 들어왔다. 그때 묵혼검은 검게 빛나며 검푸른 빛과 같은 것이 검신 주위를 5치 두께나 타오르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묵향은 묵혼검을 이용해서 푸른 검강들을 파괴하며 앞으로 다가서더니 곧바로 젊은이의 오른쪽 허리에서 왼쪽 어깨위 방향으로 베어올렸다. 그 젊은이는 경 악해서 최대한 빠른속도로 몸을 뒤로 빼며 자신의 도로 막았다. 하지만 묵혼 검은 그 젊은이의 도를 두토막내며 위로 올라갔다. 다행히 그 젊은이는 몸은 묵혼검의 사정권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묵혼검이 짧기에 얻어진 요행이었 다. 하지만 묵혼검의 앞쪽으로 흘러나온 어검술의 강기에 휘말려 젊은이의 호 신강기는 완전히 박살났고 그의 옷과 함께 오른쪽 허리에서 왼쪽 어깨까지 살 덩어리가 찢어져 나갔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았기에 내장까지 흘러내릴 정 도는 아니었다. 주변의 무당파 제자들이 황급히 그를 부축하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피를 토했 다. 아마 호신강기가 무너지면서 상당한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요행이라도 그 젊은이의 호신강기가 강력했기에 이정도에서 끝난 것이 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검술에서 뻗어나온 강기의 회오리에 말려 두토막이 났 을 것이다. 그걸 본 묵향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쯧쯧... 겨우 청월검법(靑月劍法)따위를 믿고 나를 상대하려고 했다니... 자 네는 그 검법을 10성까지 익힌다고 고생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정도 무공으 로 다른사람 대신 목숨을 걸고 나설정도는 아닌 것 같군. 이보시오 장문인! 이제 당신이 나설차례인 것 같소만...." 제자들이 방금전에 보여준 묵향의 무공에 경악하여 엉거주춤 물러서자 장문인 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이 모든 일은 본인 혼자서 저지른 일이오. 나만 죽이면 될것이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검을 뽑지않지?" "뇌전검황도 그대의 손에 목이 날아갔는데 빈도는 도저히 그대의 적수가 되지 못하오. 5초도 안되어 끝날텐데 반항해서 뭣하겠소. 그냥 내 목을 벤 다음 조 용히 떠나주시오." 뇌전검황의 목이 날아갔다는 말에 방금전에 묵향에게 덤벼들었던 <우물안 개 구리>는 경악한 시선으로 묵향을 바라봤다. 장문인은 옆에있는 도인에게 말했 다. "풍진(楓進) 사제가 내 뒤를 이어주시게나. 절대로 내 복수는 하지말게. 뇌전 검황의 제자들도 그의 유언을 듣지않고 복수를 하려다가 결과가 어떻게 되었 는지 자네도 알걸세" 묵향을 에워싼 무당파의 제자들은 무림인같지도 않은 새파랗게 젊게 보이는 눈앞의 청년이 사실은 반노환동(反老還童)의 경지에 들어선 고인(高人)이라는 점에 놀랐는지 모두들 조금씩 더 뒤로 물러섰다. 묵향은 초연한 장문인을 보 고는 선뜻 베지 못하고 묵혼검의 그 맑게 빛나는 검은 검신(劍身)을 한참 들 여다 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 그대와 같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주 힘드는 일이오." 그런다음 묵혼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대의 목숨을 살려줄테니 나중에 나의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겠나?" "그럴 수 없소. 지금 내 목을 치시오." "목숨을 잃는 것보다 작은 부탁 하나를 들어주는게 더 좋을텐데.." "어떤 부탁은 목숨을 잃는 편이 더 좋은것도 있소."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군. 나는 자네가 내 부탁 한가지를 나중에 들어주기를 원하네. 물론 그 부탁을 들어본 후에 자네가 거절한 권리도 있지. 자네는 내가 부탁한 것 중에서 당신이 부탁을 들어줘도 상관없는 것 하나만을 택해 들어주면 되네." "그렇다면 당신의 조건을 받아들이겠소." "이건 부탁은 아니지만 한가지 물어보겠네. 태진문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는게 가장 빠르지?" "저쪽으로 걸어가면 되오. 60리(20Km정도) 정도 가면 볼 수 있을거요. 하지만 내가 사과할테니 태진문으로 가는 건 그만두는게 서로가 좋지 않겠소? 현상금 은 내가 태진문주에게 말해서 취소하겠소." 묵향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소. 나도 쓸데없는 살생은 하고싶지 않소." 그런다음 묵향은 무당파에서 걸어나가며 정문 부근에 서있는 3명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묵향 일행이 말을 타고 멀어지는 걸 보며 혼자말을 나직히 뱉었다. "오늘 운이 아주 좋은지도 모르겠군. 내 평생 전설의 어검술(御劍術)을 볼 수 있을줄이야. 어검술에 죽을 수 있다면 억울한것도 아니지...." 장문인이 부상입은 청년에게 말했다. "너무 억울해 하지 마시게나. 저정도 검객과 검을 섞어본 것을 영광으로 생각 하시게나. 저자는 아마 무림사상 두 번째 현경(玄境)의 고수로 기억될거야." 그러자 그 청년도 피가묻은 입 주변을 소매로 쓱 닦은 후 미소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사람이 저정도로 강해질수도 있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괴물과 은원(恩怨)을 맺으셨습니까?" "말하자면 길다네..... 안으로 들어가세나. 치료도 해야하고..." 북명신공(北冥神功) 묵향은 본타로 돌아가서 교주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다. 임무를 끝낸 후 5년간 근신을 해야 하는데 교주의 허락도 없이 말썽을 더 부렸다는 걸 교주가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묵향은 무당산에 올라간 죄로 2년의 근신이 추가되었다. 묵 향은 매일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며 단조로운 생활을 보냈다. 그의 무공도 솔 잎을 셀 수 있는 숫자만큼 계속 증가되어 나갔다. 그것도 4년, 4년간 솔잎을 세자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묵향은 1년간 왜 그런지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집어봤지만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교주를 찾았다. 교주에게는 묵향이 오래전부터 원해왔던 것이 있었고 어쩌면 그것이 묵향의 앞을 가로막고있는 장벽을 무너뜨릴 하나의 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때문이었다. 교주는 묵향이 근신중이었지만 그가 무공의 수련 때문에 상 의할 것이 있다는 요청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묵향이 들어서서 인사를 올리자 교주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뭣 때문에 그러나." "북명신공(北冥神功)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북명신공은 역대 교주들만이 보아온 무공이다. 그렇기에 자네는 볼 수 있는 권한이 없어." "그래도 교주님의 은혜를 바랍니다." "왜 그러나. 북명신공을 익히지 않아도 자네는 강해. 왜 그렇게 강함에 집착 하나." "강함에만 집착하는 게 아닙니다. 무공의 끝을 알고싶을뿐... 그 이상도 이하 도 아닙니다. 요 근래에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는데... 더 이상의 진전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한계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제 실력으로는 도 저히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한계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이 혹시나 있을지 몰라서 부탁하는 겁니다." "역대의 교주들은 모두 다 그 비급을 봤고, 본좌도 그걸 봤다. 하지만 자네가 말하는 그정도의 도움이 되기는 힘들거야....." "그래도 한번 보기를 원합니다." "자네가 아무리 원한다 하더라도 역대 교주들이 정한 규칙을 어길수는 없어. 나를 이어 교주가 되겠다면 그걸 보여줄 수도 있네." "그건 벌써 얘기가끝난걸로 아는데요." "그렇다면 나는 이걸 보여줄 수는 없네. 내 목을 따기 전에는 규칙을 어길수 는 없어." 그러자 묵향은 순식간에 기를 끌어모으며 묵혼검을 뽑아들었다. 뽑아들었다 싶은 순간 묵혼검은 푸른빛으로 이글거리며 교주의 목을 향해 날아가고있었 다.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있었던 듯 교주는 가까스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 서 외쳤다. "잠깐... 내 보여주겠네. 원.... 성미가 이렇게 급해서야....." 그러면서 교주는 목을 만지며 투덜거렸다. "아직도 붙어있는지 의심이 가는군.... 정말 자네의 어검술은 공포스럽군. 아 무리 내가 내 목을 따야한다고 말했지만 정말 딸려고 들줄이야.... 혹시나 하 고 준비하고 있었기에 다행이지 안그랬으면 농담 한마디 하고 저세상 갈뻔 했 군." "보여 주시겠습니까?" "보여주겠네. 대신 자네 혼자만... 그리고 들고 나갈수는 없고 내 연공실(硏 功室)에서 보고 나가게나." "감사합니다." "따라오게..." 묵향이 교주 전용의 연공실에서 기다리자 교주는 곧 책자 한권을 가지고 왔 다. 교주는 묵향에게 그것을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있네. 도움이 될지모르겠군..." 묵향은 떨리는 마음으로 책자를 바라봤다. <北冥神功(북명신공)> 그가 첫 번째 종이를 펼치자 웅대한 필치로 글이 써져 있었다. 필체로 보아 글쓴이의 호쾌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본좌는 저 멀리 북명(北冥)의 하늘에서 열두조각의 별을 모아 이곳에 남기니 이것을 북명신공이라 명명했다. 개개의 조각은 연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 며 또 무공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니 이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자 천하 무림인이 꿈꾸어온 생사경(生死境)을 열리라.> 그 다음장을 열어보자 한쪽에는 오래된 양피지에 팥알 정도 크기의 옛 발해의 문자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양피지는 놋쇠조각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책장 에 붙어있었고 그 뒷장부터는 그 양피지의 발해문자를 한문으로 번역해놓은 형태로 내용이 이어지고 있었다. 양피지는 12장이었고 대부분이 오랜 세월에 의해 헤어져서 일부 글자를 알아보기가 힘들었고, 일부는 찢어진 것도 있었으 며, 일부는 불에타서 약간의 내용이 소실된 것도 있었다. 뒷장의 번역을 보니 앞장의 웅장한 필치와는 달리 세심하고 꼼꼼하며 부드러운 필체로 된 것을 보 아 아마 이것을 번역한 서생의 필체임이 확실했다. 아마 구휘는 발해어를 모 르다 보니 발해어를 할 줄 아는 서생에게 부탁해 번역한 것이 분명했다. 묵향 은 이 북명신공을 보기위해 유백에게 발해문자를 익히라는 조언을 들은 후 오 랜 시간 발해 문자와 씨름을 해온 결과 그럭저럭 발해어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양피지의 원문을 읽어나가며 해석을 해서 그것이 서생의 해석과 맞아떨 어지는지 살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읽어나가던 묵향은 이 내용이 상당히 친숙한 감이 있다는 걸 느꼈다. 조금 더 읽어보자 이건 바로 어검술에 관계된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자신이 사용하는 방법에 비해 서생의 진기의 운용 방법이 약간 틀리다는 걸 알아낸 묵향은 그 부분을 더욱 꼼꼼이 해석해 나갔다. 그결 과 그가 알아낸 것은 이 해석이 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진기의 운용의 일부가 틀리게 기술되어 있었다. 이건 일부러 틀리게 기록한 것이 확실했다. 그 서생이 왜 착오를 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묵향은 원문의 내용과 자신이 알고있는 내용을 서로 비교하고 검토하며 또다시 실험을 하면서 어느 쪽이 더욱 좋은 방법인지 차근차근 연구해 나갔다. 이것이 자신이 알고있는 내용이었으므로 일부 읽을 수 없는 글자부분까지 모두 짐작이 가능했다. 오랜 시간 첫째장을 가지고 씨름한 결과 묵향은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미 소한 차이에 따라 어검술의 위력이 더욱 차이가 남을 그는 깨달은 것이고 자 신이 어검술을 익히는데 어떤 부분을 잘 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묵향의 경우 어검술을 오랜 경험과 깨달음으로 알아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여 러 종류의 어검술과 비슷한 내용을 가지는 검술을 짜맞추기로 해서 익혀낸 것 이기에 정통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를 보니 이것은 상승의 무공을 익히는데 있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수련을 행하는데 있어 신경써야 할 부분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거의 상당부분을 묵향이 몸으로서 체득해낸 것이기에 이것을 알아내기는 그렇게 어 렵지 않았다. 세 번째를 보니 이것은 무공이라는 그 자체를 두고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설명 을 하고 있었다. 공력이 쌓이는 과정이나 그 공력을 제어하여 뿜어내는 기법, 그리고 그걸 한번에 끌어올려 자신의 10성의 공력을 있는대로 뿜어내는 요령 도 써져있었다. 이것을 읽으면서 묵향은 대단한 희열을 느꼈다. 무림인들은 언제나 상대를 만나면 싸우기 전에 먼저 공력을 끌어올려 준비를 한다. 아무 런 준비도 없이 그냥 한번에 10성의 공력을 뿜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준 비도 없이 그냥 있다가 상대의 기습을 맞받아치기 위해 5성의 공력 정도만 갑 자기 끌어올려도 그 영향으로 상당한 내상을 입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고수들이 자신보다 무공이 떨어지는 살수들에게 암습당해서 저세상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있는 내용은 순간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량의 내공을 자신의 8성 공력까지라고 기술하고 그 기법에 대해 써져있었다. 하지 만 좋아하던 것도 잠시 이것의 밑부분의 일부가 찢어져 나가고 없었기에 묵향 으로서는 그 밑부분을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었다. 네 번째는 검(劍)과 도(刀)를 다루는데 있어서 주의할 여러 가지 조언들이 써 져있었다. 그중에서는 상승의 검법을 이루는데 필요한 많은 내용이 있었다. 이것의 내용은 크게 두가지로 갈라져 나가고 있었는데 기를 검에 가두는 방법 과 기를 검에서 뿜어내는 방법이다. 가두면 어검술이 되고 뿜으면 검기, 검 풍, 검강이 된다. 그 수많은 요령들과 주의해야 할 점들이 간략히, 그러면서 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꼭 집고 넘어가는 것이 정말 어떤 자가 양피지에 기술 했는지 대단한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다섯 번째는 강기(剛氣)에 대한 내용이었다. 강기를 발생시키는 여러 가지 기 법들에 대해 써져있었고 여러가닥을 뿜어내면서 어떤 식으로 기를 조절해야 하는지가 기술되어있었다. 여섯 번째는 기를 제어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으로 능공섭물(能空攝物)에서부 터 시작하여 어기전성(御氣傳聲)까지 무엇이든 기를 응용하여 사용하는 방법 은 대부분 짚고넘어가고 있었다. 다만 너무나 간략하게 설명해놓은지라 알아 보기에 힘든 것이 문제점이라고나 할까... 일곱 번째는 이기어검술에 대한 내용이 써져있었다. 이 부분은 앞쪽의 상당부 분이 어검술에 대해 기록한 부분과 비슷한 것이 많았다. 오른쪽 옆부분이 불 에타서 없어져버려 전체적으로 알아보기에는 대단히 힘들었다. 여덟 번째는 강기(剛氣)를 제어하는 기법에 대해 써져있었다. 뿜어낸 강기를 제어하는 요령으로 더욱 깊게 들어가면 심검(心劍)으로 들어가는 내용이었다. 아쉽게도 일부가 찢어져 나가서 모든 내용을 알수는 없었다. 아홉 번째는 기를 뿜어내는 여러 가지 요령에 대해 써져있었다. 강기에 비해 서 이것은 광범위한 영역을 파괴하기 위한 요령들이었다. 기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부드러운 성질, 강한성질, 폭발적인 성질, 끌어당기는 성질 등 등 여러 가지 성질의 기를 발하는 요령에 대해 기술되어 있었다. 열 번째는몸속의 쓸데없는 나쁜 기를 없애는 방법에 대해 기록되어있었다. 이것은 폭좁게 사용한다면 해혈수법에도 응용이 가능했지만 이건 더욱 차원이 높은 방법이었다. 주화입마를 통해 폭주하는 기를 없앤다던가 심지어는 자신 이 가지고있는 모든 내공을 소멸시킬 수도 있는 기법이 써져있었다. 열한 번째는 기의 흡수방식에 대해 써져있었다. 대자연의 기를 흡수하여 자신 의 체내에 흡수하는 기법이 써져있었는데 이걸 약간 응용하면 상대의 내공을 흡수하는 방법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원래 여기서는 자연의 기를 흡수하여 정순한 내공을 쌓는 기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내공을 흡수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기술되어 있었고 일단 모든 기법을 터득하 고 나면 신의 경지를 만들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열두 번째는 자신의 기를 골고루 체내에 쌓아두는 요령이 써져있었다. 필요없 을 정도로 넘쳐나가는 내공을 체내에 분산시키는 기법이었다. 이 내용을 전부 다 읽고 난 다음에야 묵향은 어떻게 해서 마교의 흡성대법이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흡성대법을 묵향도 읽어봤지만 상대 내공의 흡수와 함께 그 내공을 체내에 쌓아두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열한번째와 열 두번째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무공인데 쌓아만 두자니까 자신의 내공이 아닌 이종(異種)의 내공이라 이것을 억누르기가 힘들어 소림의 금강합환심법(金剛 合幻心法)을 훔쳐다가 이종의 진기를 녹여서 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 는 너무 많은 내공을 흡수하면 몸이 버티지 못한다는 것에 있었고 또 아무리 금강합환심법으로 이종의 진기를 섞어서 흡수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진기간의 미세한 충돌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심한 경우 진기의 제어에 실패해서 주화입마당하여 비명횡사하는 경우도 종종있었다. 그 때문에 마교에서 정통의 무공을 익히는 고수라면 흡성대법을 익히지는 않는다. 그런데 묵향이 약간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열한 번째 양피지였다. 양피지의 아 랫부분에는 좀 더 오래된 발해문자로 무어라고 써져있었고 그 부분의 번역된 부분은 찢어져 나가고 없었다. 이 부분의 글자는 묵향으로서도 해석이 불가능 했기에 아마 대단히 중요한 무엇이 있을거라 생각하고 그 부분만을 베껴적었 다. 묵향은 다시 맹렬히 수련을 시작했다. 북명신공은 간략하게 설명되어 그 전반 적인 내용을 알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거라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고 그 것을 익히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새월이 흘러 드디어 교주가 제한한 근신기간의 종료가 1년앞으로 다가왔을 때 묵향은 교주의 호출 을 받았다. 묵향이 교주에게 가보니 교주는 여러명의 장로들과 의논을 하고있 다가 묵향을 반겼다. "어서오게나. 이번에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불렀네." "어떤 일이십니까?" "사천에서 당문(唐門)과 약간의 일이 생겼네.처음엔 별거아닌 일로 사파연합 의 한 방파인 지령회(蜘逞會)와 시비가 붙었는데 이게 서로가 한치도 양보하 지 않다 보니 나중에는 겉잡을 수 없이 일이 벌어져 벌써 3번에 걸친 혈투를 벌인 모양이야. 거기에 오대세가(五大勢家)의 둘까지 가담해서 공방전을 해대 니 급기야는 그들이 본교에 지원을 요청했고 본교의 3개 분타에서 고수들을 보냈지만 상대가 원체 대단하다 보니 이렇다할 성과를 못올리고 있어. 까짓거 사천당문 쯤이야 한번에 쓸어버릴 수도 있지만 오대세가는 만만하게 볼 수 없 지. 그들의 뒤에는 구파일방과 무림맹이 버티고 있단 말이야. 이런 쓸데없는 일로 전면전을 펼치고 싶지 않고 거기에 지금은 때가 아니야. 될 수 있으면 서로가 좋은 상태에서 사태를 종결짓고싶은데 자네가 이 일을 처리해 주겠 나?" "글쎄요... 저는 근신중이라...." "하하하... 근신은... 잊어버리게나. 기억력도 좋군. 나는 벌써 잊었는데 말 이야..... 난 자네의 부탁을 다 들어줬는데 자네는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 다는 말인가?" "저 말고도 좋은 사람이 있잖습니까? 예를들어 혁무상 장로같은..." "아니야. 이놈의 사건이 원체 언제 전면전으로 발전할 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본교에서는 총력을 투입할 수 없는 입장이야. 일단 아수혈교도 있고 그놈의 암흑마교도 있고... 그래서 전면전이 벌어지면 지금의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해 나가야 한단 말일세. 내가 자내를 보내는 이유는 최악의 경우 자네라면 전면 전으로 몰고나가지 않고 그들의 우두머리들만 몽땅 다 저세상으로 보내버리 면..." "아하! 왜 제가 필요한지 알겠군요.... 좋습니다." "알겠네. 자네에게 수라마참대(修羅魔斬隊)를 빌려주겠네." "적당히 마무리 짓는데 그들을 데리고 갈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야. 이들을 사용하라는 말이 아니라 무력시위(武力示威)용이야. 될수있 으면 쌍방간의 위신을 세워주면서 분쟁을 종결시키되 도저히 말로해서 통하지 않으면 어느정도 맛을 보여주도록 하게나. 이것들이 요즘 우리들이 조용하니 까 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이야. 만약 갑작스럽게 전면전이 된다면 그 부근 에 있는 3개 분타와 1개의 비밀분타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힘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 그것도 대비해서 데리고 가라는 걸쎄. 그리고 인원도 500명 정도밖에 안되니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을거야." "알겠습니다. 그 외에 부탁하실 게 있습니까?" "흐음.... 험험...." 그러더니 교주는 묵향에게 어기전성(御氣傳聲)으로 말했다. 어기전성이란 전 음과는 달리 완전히 기(氣)를 제어(御)하여 거기에 소리(聲)를 실어 상대에게 전달(傳)하는 무공으로 내공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시전이 불가능하 다. 내공이 높을수록 그 전달할 수 있는 거리도 멀어지며 화경에 이르면 5장 (15M정도) 정도의 거리에 소리를 보낼 수 있다. 일반 무림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전음(傳音)의 기술이 소리에 내공을 실어 멀리 보내는 것이기에 일단 아 주 작은 소리라도 내어야 하므로 전음을 사용하려면 약간이라도 입을 움직여 야 하지만 어기전성은 기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므로 입을 움직일 필요가 없었 다. 일부 복화술(腹話術)을 배운 무림인들이 어기전성을 흉내내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음의 변형된 형태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기전성이 전음에 비해 뛰어남을 알고 있지만 전음이 애용되는 이유는 익히기도 어려울 뿐더러 전달할 수 있는 거리가 짧다는 데도 문제가 있었다. <낮뜨거운 부탁이네만.... 험험... 내가 알고있는 사람이 사천 부근에 살고있 는데.... 등량산(燈亮山)이라는 곳에 가면 정량사(整良寺)라는 절이 있는데 거기에 가면 지석(知晳)스님이 계신데... 그분에게 이걸 전해 주게나.> 그러면서 교주는 품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내어 묵향에게 줬다. 그런 후 아수 라의 모습이 생동감있게 새겨진 흑옥패(黑玉佩)를 주며 말했다. "이 천마령(天魔令)을 가지고 가서 모든 일을 처리하게. 이번 일을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말고 재빨리 종결짓게나. 그 모든 행위를 교주의 이름으로 허락 하겠네." "존명!" 묵향은 전반적인 사태 파악 및 정보수집을 위해 사군자를 먼저 파견한 다음 인도(人屠) 동방뇌무(東方雷武)를 호출했다. 동방뇌무는 마교의 최고 정예인 5무력세력중 두 번째 수라마참대(修羅魔斬隊)를 지휘하는 마교서열 11위의 장 로다. 수라마참대가 교외에 출동한 적은 단 3번. 하지만 수라마참대에 대해 거의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가 증인이 될만한 사람은 모두 다 저세상에 보냈다는 데 있다. 그야말로 상대 문파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개한 마리 남기지 않고 모두 다 죽여버렸으니 그에대한 소문이 퍼질 리가 없었다. 깡마른 체구에 4척 3촌(127Cm)이나 되는 장검(長劍)을 등에 지고있는 그가 묵 향에게 도착했다. 키가 5척 6촌(170Cm)인 이 양반은 깡마른 몸매로 인해 더욱 크게 보였다. 길게 째진 눈과 광대뼈가 튀어나온 그의 얼굴은 그의 성격이 잔 인하고 무자비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어서오시오. 다름이 아니라 사천에서 벌어진 일을 해결하는데 좀 도와주셔야 겠소." "예" "수라마참대를 이끌고 비밀분타에서 대기하시오. 만일의 경우 부르겠으니 내 가 부르기 전까지는 부하들을 풀어놓지 말기 바라오. 이번일은 최선을 다해 화친(和親)을 해야 하오. 그것이 불가능할 때 무력을 행사할 것이니....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예." "3일 내로 출발하도록 하시오." "존명!" 묵향은 그날 오후에 출발했다. 날씨도 그럴듯하니 좋았고 오랜만에 하는 세상 구경이라 기분도 상당히 좋았다. 거기에 귀찮은 수하들을 몽땅 다 따로 움직 이게 만들어 뒀으니 홀가분해서 더욱 기분이 좋았다. 그는 말을 천천히 몰아 길을 가면서 여기저기 구경을 했고 색다른 풍물이 있으면 가던 길을 잠시 멈 추고 구경했다. 이상한 유괴범과 인질 묵향이 길을 나선 후 5일째. 작은 마을이라 큰 식당은 한곳밖에 없었다. 묵향 이 그 식당으로 들어서자 안에는 40여명의 무림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여 기저기 빈자리도 몇 개 있었다. 그는 살벌한 남자들을 피해 아름다운 4명의 아가씨들이 식사를 하는 곳 옆에 자리를 잡았다. 두명은 상전인 듯 했고 2명 은 하녀들인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들어오자 일제히 모두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때 점소이가 다가오더니 말했다. "나으리. 이곳은 벌써 예약이 끝났으니 다른 식당을 이용해 주십시오." 점소이는 사색이 되어 말했지만 묵향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나는 간단히 식사만 하고 갈거고 여기 빈 자리도 많은데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나? 여기 만두 1접시하고 고량주 1병만 가져다 주게."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덩치가 크고 키가 6척은 되어보이는 사내가 묵향에게 다가오더니 시비를 걸었다. "이봐. 밖으로 나가라는 말 못들었어?" "왜 자리가 있는데도 그러시오? 어련히 밥만 먹으면 나갈텐데..." "이녀석도 꼴에 검을 가진 무림인이라고 뻐기는 모양인데 뼈다귀 몇 개 부러 져 나간 다음 기어나가고 싶지 않으면 지금 꺼지셔." "만약 나가지 못하겠다면?" "소원대로 해주지." 그러더니 그자는 묵향을 향해 주먹떡을 선사했다. 묵향은 그자의 주먹을 손바 닥을 이용해서 옆으로 흘린다음 가까이 다가온 그의 단전을 향해 주먹떡을 되 돌려줬다. 사내는 엄청난 충격을 단전에 받자 단전을 감싸쥐며 주저앉았다. "내 소원은 이거야. 조용히 밥을 먹게 해달라는 거다." 그러자 옆에있던 얼굴에 면사를 드리운 여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녀석을 끌어내!" 그러자 일제히 주위에 앉아있던 무사들이 일어서면서 칼을 뽑았다. 그와 동시 에 묵향은 그 여인에게 전광석화처럼 다가갔고 다가섬과 동시에 혈도를 짚었 다. 그런 다음 손에서 비수(匕首)를 꺼낸 다음 그 소녀의 목에 가져다 대고는 나지막히 말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안그러면...." 모두들 그 비수가 검은 광택을 띄고있는 대단히 훌륭한 보검이란 걸 알고 묵 양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묵향은 비수를 흔들면서유쾌한 듯이 말했다. "이게 제법 쓸만하군. 사슴고기 자를려고 만들라고 한건데 이렇게 위협하는데 도 괜찮군." 그러자 그 소녀의 분노를 억누른 음성이 들려왔다. "고인(高人)을 몰라봤군요. 그 신법은 정말 대단하군요. 점혈수법도 그렇 고... 탄지신통 같던데 소림 문하인가요? 본녀한테 이렇게 무례하게 굴고 편 할줄 알아요?" "시비는 누가 먼저걸었는데 내 탓을 하지?" 묵향은 한껏 비꼬아 말한 다음 그 여자의 몸을 더듬었다. 여인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떨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묵향은 그녀의 품속에서 찾아낸 것들을 봤다. 그 속에는 재미있는 모양의 암기가 몇개 있었고 작은 비수 하나 와 옥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武(무)라고 씌어진 봉황이 그려진 명패도 있었다. 그 외에 푸른색과 붉은색의 옥병도 있었는데 묵향은 그걸 냄새를 맡아봤다. 하나는 지독한 독이었고 또 하나는 그 해약이었다. 묵향은 그것들을 몽땅 다 자신의 품 속에 집어넣은 다음 다시 뒤져서 지갑(紙匣)도 찾아냈다. 그 속을 보니 5냥짜리 은표 7장과 10냥짜리 은표 5장이 들어있었다. 그 외에 은화 20 냥 정도도 나왔다. "흐흐흐... 오늘은 재수가 좋구만..." 그러면서 묵향은 그것들을 몽땅 다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비수를 왼 손으로 바꿔쥐고 그녀의 목에 댄 다음 오른손으로 젖가락을 집어서 탁자위의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쩝쩝.... 맛이 괜찮군. 이 요리는 뭐라고 부르지?" "이런.... 네녀석의 뼈를 갈아서 마시지 않는다면 내 성을 갈겠다." "쩝쩝... 아마 힘들거외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몇 되는데 아무도 성공한 사 람이 없거든... 쩝쩝... 이것도 맛이 괜찮군... 내가 떠난 다음 혈도 푸는데 고생하지 말고 그냥 기다리면 내일 아침쯤 풀릴테니 그때 쫓아오시구려... 쩝 쩝" "흥... 네녀석이 내일 아침까지 살 수 있을줄 알았더냐?" "쩝쩝... 아마 살 수 있을거야. 내가 떠나고 난 다음 여기 수하들이 많으니 몇 명은 너를 지키고 나머지는 나를 죽이라고 보내겠지?" "잘 아는군."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쉽게 되는게 아냐." 묵향은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흰색 병을 꺼냈다. 그런다음 그 안에서 빨 간 환약을 하나 꺼낸 후 짐짓 황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냄새를 한번 쓱 맡은 다음 말했다. "이게 뭔지 아냐?" "본녀가 알게 뭐냐?" "이건 환희천락환(歡喜天樂丸)이라는 거지. 아주 약효가 뛰어난데 이 향긋한 약을 뱃속에 집어넣으면 뱃속까지 시원해지다가 반시진 정도 지나면 뱃속에서 열화가 피어오르지. 풀 수 있는 해약은 거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고생이 되니까 그냥 옆에 잘생긴 남자들도 많으니 눈 딱감고 쾌락을 즐기면 모든게 해소되지. 너가 쾌락을 즐기는 사이 이몸은 멀리멀리 도망갈테니 까..." 묵향이 느긋하게 조롱하는 투로 말하자 여인은 몸을 가볍게 떨면서 치가 떨리 는지 가만히 있었다. 묵향은 느긋하게 계속 음식을 집어먹으면서 말했다. "설마하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세상은 언제나 편하고 좋은게 아니라니깐..." 그러면서 묵향은 그녀의 코를 막았다. 여인은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용을쓰고 호흡을 참았지만 사람이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다는 변함없는 진리에 따라 입 을 벌리고 말았다. 그러자 묵향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약을 입속에 집어넣은 다음 내공을 이용해서 입속 깊이 밀어넣고 그녀의 이마를 탁 치자 여인의 의 지와는 상관없이 약은 뱃속깊이 들어가버렸다. 약을 삼킨 다음 여인은 너무 놀라서 까무라칠 지경이었다. "쩝쩝... 이 약을 해독하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있지." 그런다음 묵향은 품속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 쓱쓱 쓰면서 말했다. "이걸 가져다가 약효가 발작하기 전에 꼭꼭 씹어서 삼키면 되는데 이때 웅담 (熊膽)도 같이 먹으면 더 좋지. 이때 주의할 것은 약의 량이 조금도 틀리면 안된다는 거야. 잘 씹어서 먹으면 8할은 해독이 될거고, 완전히 해독시키려면 하루에 1번씩 2번 더 복용하면 된다구. 이 시골구석에서 이것들을 구하려고 뛰어다니자면 나를 잡으러 다닐 생각은 애시당초 말아야 할걸... 아참! 내가 실수를 했군. 혈도를 짚어놓으면 쾌락을 즐기는데 방해가 될텐데 내가 생각이 모자랐어." 묵향은 여인의 혈도를 몇군데 치고난 다음 말했다. "이제 약효가 발작할때쯤 되어 혈도가 풀릴테니 잘 즐기도록 하시게나. 그리 고 너는 영 차가와서 말동무가 되지 않겠고...." 그와 동시에 묵향은 여인의 옆에 앉아있던 여자를 잡았고 순식간에 혈도를 제 압해버렸다. 모두들 그 수법의 빠르고 정확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이 아이가 그럴 듯 한 것 같으니 인질로 데려가겠다. 그 와중에도 나를 추격 해 귀찮게 하면 안되니까.... 나중에 보내줄테니 걱정하지마. 만약 나를 추격 하면 이 년의 무공을 폐해버린 다음 창녀굴에 팔아넘겨버릴테니 알아서 하라 구." 그런다음 그 여자를 왼손으로 잡고는 오른손에 든 비수로 목을 겨누면서 일어 서서 식당을 나서며 말했다. "식사대접 고와웠어. 아주 맛있었어. 다음에 보자구. 하하하..." 그런다음 묵향은 말에 올라타고는 쏜살같이 도망쳐버렸다. 30리 가량 죽자고 달리던 묵향은 이제 느긋하게 지친 말을 끌고는 즐기면서 가기 시작했다. 앞쪽에 엎어놨던 여자도 아혈은 풀어서 말은 할 수 있도록 만 들어준 다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갔다. 아혈을 풀어주자 그 여자는 말 했다. "당신 정말 간이 크군요. 우리가 누군지 알아요?" "누구긴... 지나가는 사람 등쳐먹는 칼잽이들이지. 정말이지 산적과 다를바가 없다니까... 그건 그렇고 너 이름은 뭐냐?" "...." "이름을 안말하면 너도 그 약을 먹일거야." 그러자 그녀는 황급히 말했다. "옥령인(玉零仁)이에요." "령인(零仁)이라 재미있는 이름이군. 아마 이슬비 오는날 태어난 모양이지?" "예. 그래서 零(령)자를 붙이셨죠." 3리 정도 더 가자 옥령인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언니는 괜찮은 거에요?" "언니라니?" "아까 약을 먹였잖아요. 그 해독약은 확실한 거에요?" 묵향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보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 보더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터트렸다. "하하하... 해독이라구? 그 약은 춘약같은게 아냐. 내가 가지고있던 내상을 고치는 약일 뿐이지. 그냥 재미있을거 같아서 먹였는데 그녀가 진짜인줄 아는 것 같아서..... 참 너도 알다시피 그 여자 아주 성격이 못된 것 같던데 아니 냐?" "아니에요. 언니는 검술이 뛰어나서 남자를 좀 우습게 본다는 것 말고는 나무 랄데가 없는 성격이죠. 그런데 그 약이 정말 내상약이에요?" "하하하... 내상약이지... 좀 더 골려주고 싶어서 쓰기로 이름난 한약재들을 골라서 적어줬으니 그걸 꼭꼭 씹어서 먹으려면 혼백이 달아날걸... 지금쯤 약 을 씹으면서 아예 쾌락을 즐기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있겠지. 하하하.." 평소에 그렇게 냉정하고 침착한 언니가 그 지독하게 쓴 한약을 꼭꼭 씹어먹으 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그녀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어렸 다. "그런장난은 별로 좋지 않아요. 당신은 성격이 별로 좋지 않군요." "그럼... 그럼... 나는 성격이 아주 안좋지. 나를 알고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런다구." "아무리 그래도 여자를 상대로 그렇게 치사한 장난을 칠 필요는 없잖아요." "나는 원래가 치사하니까 마음쓰지 말라구. 그건 그렇고 너는 몇살이냐?" "스물 다섯이에요." "네 언니와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던데?" "고수의 눈은 못속이겠군요. 언니는 서른 여덟살이에요." "그런데 결혼은 했을텐데 왜 형부가 안보이지? 덕분에 재미있게 놀았지만... 형부가 있으면 같이 즐기면 그만이니 그걸 씹을 리가 있겠어?" "언니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어요. 언니는 오직 검에만 뜻을 뒀고 아버님에게 자신과 비무를 해서 이기는 상대와 결혼을 승낙하겠다고 했죠." "별로 무공이 대단한 것 같아 보이지 않던데?" "언니를 그렇게 가볍게 다루는 분은 오늘 처음봤어요. 여태까지 언니한테 청 혼한 사람이 60명이 넘었는데모두들 들것에 실려 나갔거든요." "그건 아마 무공이 비슷한 상태에서 상대방은 신부로 맞아들일 생각이니까 살 수를 쓰지 않았을거고 반대로 언니는 죽자고 살초를 펼쳤을테니 자명한 사실 일테지. 겨우 여자하나 못 해치울 사람이 어디있어?" "당신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요. 비겁하게 암수를 써서 기선을 제압했잖아 요." "나는 원래 비겁하다니까... 그래도 비겁하다는 말은 듣기에 별로 좋지않군." "그런말을 들을짓을 하니까 그렇죠." "아냐. 이왕이면 격조높게 비열하다고 하라구. 하하하... 비겁이라든가... 치 사하다든가... 너무 격조가 떨어지는 것 같아.." 그러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정말 못말릴 사람이군요." "흐흐.... 그러고 보니 여자하고 함께 말타는 것도 오랜만이군. 아주 기분이 좋은데..." 그러면서 묵향은 노골적으로 옥령인의 유방을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이러지 말아요." 옥령인은 계속 부탁하다가 도저히 묵향이 들어주지 않자 급기야는 울음을 터 트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묵향은 손을떼며 말했다. "울지 말아. 손을 뗐는데도 계속 울면 아예 울음소리를 들으면서계속 만지겠 다." 그러자 옥령인은 황급히 울음을 멈췄다. "제법 말을 잘 듣는군. 이제 화제를 바꿔서 같이 얘기나 나누면서 가자구. 긴 여행이 될 것 같으니까.. 그리고 도망가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혈도도 풀어주 지." "약속해요." 묵향이 혈도를 풀어주자마자 옥령인은 묵향의 명치를 향해 공력을 있는대로 끌어모아 팔꿈치로 한 대 먹인 후에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묵향의 명치는 돌덩어리 마냥 딱딱했고 옥령인은 팔이 부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풀어주자마자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군. 일단 첫 번째니 간단하게 벌을 주겠 다. 혹시 들어봤는지 모르겠군." "뭘요?" "분근착골(粉筋鑿骨)이라고..." 그 말과 동시에 묵향은 옥령인의 혈도 몇군데를 쳤다. 옥령인의 몸속에서는 뚜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의지와 상관없이 비명이 터져나왔다. 묵향은 잠시 후 분근착골을 풀어주며 말했다. "탈출을 시도할때마다 시간은 2배씩 늘어날거야. 알아서 하라구." 묵향이 빙글거리며 말하자 옥령인은 악에 받쳐서 소리질렀다. "비열한 자식!" "하하하... 나한테는 더없이 좋은 찬사지. 난 원래 성격이 그렇다니까... 좀 더 칭찬하라구!" "....." 유괴범과 인질은 하루이틀 지나자 점점 친숙해지며 급기야는 농담을 나누면서 길을 가게 되었다. 묵향은 첫 번째 마을에 묵으면서 그녀에게 말을 사줬고 그 녀는 다음날 아침 말을타고 두번째 탈출을 시도했다가 혼찌검이 난 다음 아예 탈출을 포기했다. 묵향이 그녀에게 못되게 구는것도 아니었고 그녀 또한 꽁할 정도로 성격이 여린편도 아니었다. 묵향이 자주 농담을 걸면서 편하게 대하자 그녀로서도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자연스레 동화되어버린 것이다. 하루도 안되어 옥령인은 묵향이 금을 잘타고, 피리또한 잘 불며 대단한 수준의 무공 을 익힌 고수라는 걸 알게되었다. 거기에 처음에 그녀에게 유방을 만지며 장 난을 좀 쳤을뿐 그 후로는 그녀에게 무례한 짓을 하지 않았다. 도중에 여관에 서 잠을 잘때는 방 1개를 잡은 다음 옥령인과 함께 잤지만 그녀의 혈도를 짚 어 못 도망가게 만든 후 운공조식을 하며 밤을 새웠다. 놀랍게도 이 납치범은 그녀가 봤을 때 1각도 잠을 자지 않았다. 이때 그녀는 그의 머리위에 뿜어져 나온 기가 완전히 뭉쳐 하나의 연꽃 형상이 되는 것을 보고 엄청난 고수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서로가 깔깔거리며 길을 가며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다 보니 묵향은 이 옥령 인이라는 여자가 대단히 총명하다는 걸 알게되었고 각종 서적이나 진법 등 수 많은 책을 읽었다는 걸 알게되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무식한 묵향으로서는 말빨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함께 길을 간 후 7일째 되는 날 옥령인이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다가 묵향에 게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에요?" "친구집에.." "친구집에 납치한 저를 데리고 가겠다는 거에요?" 잠시 생각하더니 묵향이 입을열었다. "이번에 가는 일은 아주 골치아픈 거야. 그래서 한가지 조언을 구하고자 하는 데... 네가 원체 똑똑한 것 같아서 물어보는거야." "뭔데요?" "내 친구는 그런대로 재산도 많은 부자야. 하인들도 많지. 그런데 그녀석이 사는 동네에는 또다른 부자집이 하나 더 있어. 이 둘은 서로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급기야는 싸우기 시작했지. 일의 발단은 이쪽집과 저쪽집의 하 인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한건데 그 일이 커지다 보니 나중에는 주인들이 각기 하인들을 거느리고 곡괭이를 들고 육박전을 벌인거지." "정말 대단하군요. 그런 곳에 고수인 당신이 가면 한순간에 싸움이 끝나겠는 데요? 그런데 뭘 물어봐요." "일이 그렇게 쉬운게 아니라니까. 그래서 서로 싸우다가 이들은 각기 자신의 힘만 가지고는 상대를 완전히 항복시킬 수는 없다는 걸 알고 각기 외부에 도 움을 청했지." "그래서 가는게 당신인가요?" "아니야. 먼저 간 사람들이 있다구. 그들은 서로 주변에 안면이 있는 지주들 이나 무술도장에 부탁해서 사람을 동원했고 정말 박터지게 싸우고있는데... 나는 이걸 중제해 주러 가는거야." "당신이 한쪽편을 들고있다면 상대를 그 무공을 써서 단숨에 굴복시키면 되잖 아요." "그런데 나를 보낸 사람은 서로가 체면을 세운 상태에서 서로서로 좋게 끝내 라는 거였어." "그런식으로 해결한다면 상당히 어려운 일이군요.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할 건 지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듣기로 그 상대방 집에 금지옥엽인 손녀가 하나 있는데 걔를 납치한 다 음 그애를 미끼로 협상을 하면서 풀어나가면..." "오히려 더욱 사태를 악화시킬텐데요." "그게 문제라니까.. 저쪽에도 그렇게 많은 하인들의 머리가 깨졌으면 휴전을 하자고 나와야 하는데 이녀석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만약 좋은 방법이 없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먼저 그 지주와 그를 도와주는 지주들의 집으로 몰래 들어가서 몽땅 다 목을 따버릴 생각이거든. 그러면 아마 싸움이 종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데...." "당신의 실력으로는 별로 어려울 것이 없겠지만... 그래도 모두 죽인다는 건 좀 심한 게 아닐까요? 갑자기 모두들 살해당하면 그 아들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거기에 관(官)에 신고라도 하면..." "그것도 문제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지경이야." "그들을 찾아가서 담판을 해보는 건 어때요? 그러면서 실력을 보여주는거에 요. 당신의 무예를 좀 보여주면 상대의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죠." "상대방 안에도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구. 협공을 당하게 되면 잘못하 다간 내 목을 거기 두고와야 할판이야." "그래도 그 수 밖에는 없잖아요. 중제자가 나서야지요. 당신이 도와줄 지주한 테 '하인을 보내어 휴전하자'고 말하게 한다면, 먼저 당신이 도와줘야할 지주 가 자신의 체면이 꺽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흐유... 이래저래 내가 갈 수밖에 없나? 참. 너가 가면 안될까? 예쁜 아가씨 가 가서 중제를 해주면 서로 좋아할텐데..." "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걸요. 도중에 나설 명분이 없잖아요?" "네 이름은 필요없어. 너는 그런대로 말을 잘하니까... 내 이름을 빌려서 서 로를 달래면 된다구. 내가 따라가서 너를 보호해 줄테니 걱정말고..." 묵향이 산길로 접어들자 의아한 듯이 옥령인이 물었다. "이길로 들어가면 지주집은 없는데요? 그 지주라는 사람이 산적(山賊)을 겸업 (兼業)하고 있나요?" "아니야. 난 지금 절에가는 길이야. 이리 가면 정량사(整良寺)라는 절이 있다 고 아침에 여관 주인이 그러더군." 묵향은 절에 도착하자 한 동자승을 불러 지석(知晳)스님을 만나뵙게 해 달라 고 부탁했다. 옥령인과 얘기를 나누며 잠시 기다리자 지석스님이 나왔다. 놀 랍게도 그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아릿따운 여승(女僧)이 었는데 한창때는 대단한 미인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묵향은 그녀에게 합장을 했다. 그러자 지석스님도 함께 합장을 하며 물었다. "중길(中吉)님이 보내서 오셨군요." "예. 이걸 전해드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묵향은 교주에게서 받은 작은 꾸러미를 전해줬다. "이걸 받을 이유가 없어요.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돌려주세요." 쌀쌀하게 말한다음 그녀가 돌아가려 할 때 묵향이 그 여승에게 물었다. "혹시 시주를 좀 할 수 없을까요? 이건 한중길님이 보내는 게 아니라 제가 시 주를 하는 겁니다만..." "시주야 안받을 수 없죠." 묵향은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어 그 안에 든 돈을 몽땅 다 지석스님에게 전했 다. 지석스님은 그 액수에 약간 놀란 것 같았지만 다음순간 평정을 되찾고 있 었다. 오히려 안색이 변한 것은 옥령인이었다. 그녀가 다급히 말하려고 하자 묵향은 그녀의 아혈을 제압해서 말을 못하게 만든다음 능청스럽게 말했다. "전해드리는 물건을 그래도 성의가 있으니 좀 봐주십시오." "아무리 시주를 많이 하셨다고 해도, 소승은 이미 받지 않겠다고 말씀 드렸는 데요." "정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보시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석스님에게 이걸 보여드려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으니까요. 만약 계속 거절하신다면 먼저 절을 불태운 다음...." 묵향이 악담을 시작하자 지석스님의 안색이 핼쓱하게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묵향에게 기습을 가해왔다. 놀랍게도 그녀가 사용한 무공은 불문의 무학이 아 니라 극성의 소수마공(素手魔功)이었다. 묵향은 그녀가 순간적으로 내력을 끌 어모으는 것을 느끼고 대비를 했지만 여승의 손에서 마공(魔功)이 전개되자 상당히 놀랐다. 여승은 묵향이 교주가 특별히 보낸 만큼 상당한 고수일 거라 고 생각하고는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모은 다음 기습을 가해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소수마공은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없었다. 그녀의 벽옥(碧玉)처 럼 아련한 푸르스름한 광채를 띈 희디흰 손은 은은한 빛을 내며 묵향을 향해 뻗어들어갔지만 묵향이 손으로 막자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묵향의 손에서는 푸르스름한 강기가 뻗어나왔고 그 강기의 막에 막혀 여승의 손은 불 꽃을 튕기며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여승은 묵향이 강기를 사용하 자 약간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현문의 강기를 익혔지?" 그녀는 소수마공을 응용하여 각종 권법과 장법을 사용했다. 그녀의 실력으로 보아 과거 마교에 있을때는 대단한 수준의 고수였음에 틀림없었다. 그녀의 장 법은 모두 다 소수마공을 통해 뿜어졌으므로 모두 다 강력한 한기(寒氣)를 내 포하고 있었다. 묵향은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자 바로 옥령인의 혈도를 찍은 다음 뒤로 던져버렸다. 옥령인은 갑자기 혈도가 잡힌 다음 날아오르자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아혈까지 제압된 상태라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몸이 땅에서 2자 거리까지 맹렬하게 떨어져 내리다가 그 다음부터는 속도가 줄어들며 부드럽게 땅에 안착하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일단 위기상 황이 끝나자 옥령인은 두 고수의 대결을 열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그들이 사용하는 정밀한 무공의 뒷수까지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 의 실력이 안되었지만 한눈에도 여승은 마교의 상승무공을 사용하고 있었고 또 자신을 납치해오고 나서 절에 불을지르겠다고 협박하는 파렴치한 인간은 정파의 상승무공을 사용하는 걸 보고 온 정신이 뒤죽박죽 얽히기 시작했다. 저 둘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옥령인은 묵향이 여승에게 지기를 간절히 염 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승의 무공은 가공할 만 했으나 묵향의 적수는 아니었다. 묵향은 강기를 제 마음대로 다루고있었고 시종 여승 을 압도하더니 급기야는 여승의 혈도를 짚고 말았다. 여승은 쓰러지더니 소리 쳤다. "날 죽여라." "당신은 이걸 보기만 하면 됩니다. 만약 안보시겠다면 먼저 절에 불을 지르겠 습니다. 그래도 안보신다면 여기 있는 중들을 하나하나 고문을 하기 시작하겠 습니다. 그래도 안된다면 한명씩 죽이기 시작해서..... 모두 다 죽이고 난 다 음에도 안된다면 또 다른 절을 한군데 찾아갈겁니다. 마침 저 옆산에 절이 하 나 더 있는걸 봐뒀거든요. 그쪽에서도 같은 행동을 할겁니다. 당신이 이걸 풀 어서 보기 전까지 나는 계속 절을 불지르고 중들을 고문한 다음 죽일겁니다. 만약 스님께서 이걸 보시지 않으시고 자살하신다면 저는 최소한 20군데 이상 의 절을 완전히 박살내 드리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누가 먼저 이기는지 한번 시작해볼까요?" 하지만 지석스님은 설마 불지르랴 싶었는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묵향 이 절의 부엌으로 가서 불이 붙은 나무를 가지고 나오자 당황해서 소리쳤다. "이보게... 내가 졌네." "생각 잘하셨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그런다음 묵향은 지석스님의 혈도를 풀어줬다. 묵향이 자신의 혈도를 완전히 풀어줬다는 걸 안 지석스님은 그의 자신감에 놀랐다. "혈도를 완전히 다 풀었군." "예." "내가 다시 기습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나?" 그러자 묵향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다시 혈도를 제압한 다음 설득하면 되죠." 지석스님은 한숨을 쉬며 꾸러미를 풀면서 말했다. "시주의 자신감과 무공은 정말 놀랍군. 한중길이라도 자네만큼은 안될걸쎄." "감사합니다." 꾸러미 안에는 편지가 하나 들어있었고 또 몇장의 은표가 들어있었다. 여승은 편지를 다 읽고 난 다음 삼매진화(三昧眞火)로 편지를 불사르면서 말했다. "그의 뜻은 잘 알겠다고 전해주게. 여러 가지로 신경써줘서 고맙다는 말도 함 께 전해줬으면 고맙겠군."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시주는 현경(玄境)을 깨닳은 모양이군. 축하하네." "현경이 아니라 탈마(脫魔)라고 하시는 것이 듣기에 좋습니다. 마인에게 는...." "시주는 마공보다는 현문의 정통무공을 더욱 깊이 익힌 것 같은데 그렇지 않 나?" "예. 제 신분상 할 수 없이 마공보다는 정파의 무공을 더 많이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현경이 맞군. 자네는 처음부터 마인(魔人)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물론 내공자체는 마교의 정통심법으로 익혁겠지만 그 무학의 근본은 정 파의 것이기 때문이지." "그럼 현경이라고 해두죠." "참! 빨리가서 동행의 혈도를 풀어주게나. 뒤로 던진 것은 이해하겠는데 왜 혈도를 짚었나?" "소중한 인질이거든요. 도망가면 골치 아프기 때문입니다." 지석스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인질이라구?" 그녀로서는 그들을 처음 봤을 때 도저히 인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 이다. 묵향이 혈도를 풀어주자 옥령인은 옷을 털고 일어나며 날카롭게 쏘아댔다. "철두철미 하군요. 그사이 내가 도망이라도 갈까봐서 그랬어요?" 그러자 묵향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엄. 여태까지 네가 한 행동으로 봐서 너도 안그렇다고는 못할껄..." "이제 여승에게 중길이란 분의 심부름을 해준 모양이니 다음에는 어디로 갈거 에요?" "내가 말 안했던가? 친구집에 볼일을 보러 간다구." "아. 그 화해건이요? 당신은 해결사인가요?" "좀 대체적으로 그런편이지." "무슨 대답이 그래요?" "모든 골치아픈 일은 모두 다 나한테 넘어오거든."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말해줄래요?" "뭔데?" "당신 사문(師門)은 어디에요? 그리고 사부님이 누구시죠?" "그건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될거야." "그럼 내가 알아맞춰볼께요." "좋을대로..." "혹시 저 전설의 전진(專眞)의 제자가 아니세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했지?" "우선 당신이 사용하는 무공은 모두 현문의 초상승무공이죠. 무당이나 점창 청성 종남 등 수많은 현문의 명가들이 있지만 당신만큼 강기(剛氣)를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비뚤어진 성격에 한번 한다면 물불 을 가리지 않죠. 그건 정파의 성격에는 벗어나니.... 자연 떠오르는 문파는 전설의 전진문파 밖에 없죠. 전진문파는 무공에 있어 꼭 정파의 방식을 고집 하지 않고 각종 사파 무공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그 장점을 채택하여 함께 배 워나간 문파죠. 원체 전진의 제자들이 나타난 적이 거의 없어서 전설이 된 문 파지만 그 제자들의 무예는 가히 세상을 경악시킬 정도였잖아요?" "네가 전진이라고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알고있으라구. 잠시동안은 즐거울 테니까." 묵향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도 옥령인은 지지않고 말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나한테 전진의 무공을 좀 가르쳐 줘요. 예?" "내가 왜 너한테 무공을 가르치는 수고를 해야하냐?" "에이.... 그래도 납치범은 인질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인질이 이렇 게 원하는데 그러지 말고...." 계속 옥령인이 응석을 부려대며 묵향에게 끈질기게 부탁을 해대자 나중에는 묵향이 두손 들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어떤 수단을 쓰던간에 이 어처구니 없는 사태에서 빠져나갈 생각뿐이었다. "좋아. 하지만 너도 나한테 무공을 가르쳐 줘야 서로가 공평하지." "하지만 제가 아는 무공은 당신의 것에 비해 형편없는것들 뿐인데요." "상관없어." "그럼 제가 가장 자신있는건 본문의 적하무류검법(赤霞舞柳劍法)이에요. 아직 실력이 별볼일 없어서...." "괜찮으니 한번 보자구." "그러니까 구결은" "구결따위 필요없으니 초식을 한번 펼쳐봐." "이 검법은 검무(劍舞)로 만들어져있는 아주 부드러운 검법이에요. 36초로 이 루어져있고 변초가 각기 12가지씩 총 432초식으로 구성되어있죠." 그런다음 허리에서 2척 5촌 길이의 검을 뽑았다. 묵향은 한번씩 그녀의 혈도 를 제압했을 뿐 그녀의 검을 뺏지는 않았다. 옥령인이 검을 빼들고 덤벼봤자 묵향에게 별 타격을 주지도 못했으므로 일부러 뺏지않고 그냥 둔 것이다. 그 녀는 검을 뺀 다음 격식에따라 검신이 아래로 향하게 한 다음 손잡이를 쥔 채 로 가볍게 묵향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미숙한 실력이지만...." 옥령인은 예법에 따라 각 무공이 가지고있는 독특한 개문식(開門式)의 자세를 취해 그가 사용할 무공을 상대에게 알렸다. 그런 후 검초를 시작하며 외쳤다. "적하매장(赤霞每壯)! 적하유천(赤霞流天)! 적하정심(赤霞靜沈)!...." 옥령인의 검법은 꽤 정심한 것이것고 부드러운 가운데 무서운 살초들이 감춰 진 아주 뛰어난 것이었다. 적하(赤霞)라 이름붙였을 만큼 검무를 펼치는데 있 어 검에서 은은한 붉은색 광채를 띄는 검기가 배어나왔고 각 초식은 여러 방 향으로 움직이며 상황에 따라 각종 변초를 사용하기 쉽게 안배가 되어있었다. 묵향은 그녀가 432초식을 끝낼때까지 기다렸다가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움직임이 꽤 절도가 있고 막힘이 없으니 과연 명문의 검법이라고 부를만도 하긴 한데 이건 내가 알고있는 적하마령검법(赤霞魔令劍法)을 훔쳐서 좀 고친 거야." 그러자 옥령인은 얼굴이 벌개져서 따지고 들었다. "무슨 말도 안되는 말을 하는거에요?" "그럼 내가 보여주지. 잘 보라구. 본 후에도 딴소리 하지말구." 묵향은 천천히 묵혼검을 뽑은 후 예의는 일단 생략하고 개문식따위도 생략한 다음 바로 초식을 전개했다. "적하매장(赤霞每壯)! 적하유천(赤霞流天)! 적하정심(赤霞靜沈)!...." 묵향은 일단은 옥령인이 하는 초식을 훔쳐서 뼈대로 삼은 후 그 상당부분을 고쳐서 검초를 전개했다. 초식의 이름은 짓기도 귀찮고 힘들었기에 그대로 그 냥 뒀다. 묵향의 검법은 검무의 형태가 아니었고 대단한 속도를 가진 쾌검의 형태였으며 가공할만큼 패도적인 기운과 파괴력을 가지고있었다. 옥령인은 그 녀의 초식과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어떤 면으로는 완전히 다른 검법을 보고 경 악하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묵향이 이미 정해진 초식의 틀에 억매이지 않는 인물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그 안에초식의 상당부분을 어검술이나 검강, 그리고 붉은빛이 나오도록 가공할만한 검기를 뿌려대자 정말 자신의 검법이 적하마령검법(赤霞魔令劍法)을 훔쳐서 만들어진 검법인줄 착각하기 시작했다. 묵향은 432초식이나 펼치는 수고를 생략하고 과감하게 필요없는 부분은 없애 버려 144초식만을 사용했다. 검법이 끝나자 부근의 나무들이 쓰러지고 날아가 버려 넓직한 공터가 만들어져있었다. "이래도 네가 알고있는 무공이 적전(適傳;바르게 이어짐)이라고 우길거냐?" 묵향이 원체 자신있게 말하자 옥령인은 점점 자신이 없어져 기어들어가는 목 소리로 변명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건 할아버지께서 어느날 저녘놀을 보시고 거기서 깨 달음을 얻으신 다음 3년에 걸쳐 완성하신 무공이라고 들었다구요." "흥! 그 영감탱이는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남의 무공을 훔쳐서는 자신의 것이 라고 우기다니. 기분나빠서 가르쳐주지 못하겠어." "그러지 말고 가르쳐 주세요. 그걸 가르쳐 주시면 또 다른 무공도 알려드릴게 요." "그따위 무공 아무리 가르쳐 줘도 필요없어." 이때 묵향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묵향은 자신의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게 짐짓 정색하며 말했다. "좋아. 적하마령검법(赤霞魔令劍法)을 가르쳐 줄테니 내가 친구한테 화해하러 갈건데 거기가서 날 좀 도와줘야해." "별로 도움이 될것같지 않은데요?" "아냐. 넌 말도 잘하고 설득력도 있고, 또 배운것도 많으니 그 일에 적합할 것 같다. 거기에 당사자도 아닌 제 3자 입장이니 둘다 네 말은 잘 들을 것 같 군. 어때 허락하겠냐? 물론 생명의 안전은 내가 책임지지." "좋아요. 빨리 가르쳐 줘요." "이걸 누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좋아요 맹세할께요.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저 옥령인이" "따라하라구. 묵향에게서 배운 적하마령검법(赤霞魔令劍法)을 다른사람에게 절대로 알려주지 않겠습니다. 만약 알려준다면 하늘에서 천벌이 떨어질 것입 니다. 언제 비명횡사를 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니 굽어 살펴 주십시오." "묵향에게서 배운 적하마령검법(赤霞魔令劍法)을 다른사람에게 절대로 알려주 지 않겠습니다. 만약 알려준다면 하늘에서 천벌이 떨어질 것입니다. 언제 비 명횡사를 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니 굽어 살펴 주십시오. 그런데 당신 이름 이 묵향이에요?" "내가 말 안해줬던가?" "그런데 맹세의 내용이 좀 이상해요. 비명횡사를 한다니... 설마 알려준게 당 신 귀에 들어가면 나를 비명횡사 시키겠다는 협박이에요?" "그럼. 너도 알지? 나는 내뱉은 말은 책임을 지는 사람이야. 이제부터 구결을 부를테니 잘 기억해라. 설마 네 할애비가 초식을 훔쳤다 하더라도 구결까지 훔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말이야." "예" 초식(招式)이란 무공의 외형이다. 몸을 움직이는 순서나 그 방법이 초식이라 서 초식만 알아서는 진정한 그 무공의 파괴력이나오지 않는다. 그 초식을 펼 치는 순간순간의 내공의 흐름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 구결(口訣)이다. 이 구결 에 따라 모든 초식을 연결해 나가야 하니 둘중 하나라도 빠지면 진정한 위력 을 가진 무공이 되기는 애시당초 그른 노릇이다. 하지만 무공에따라 약간씩 그 중요도가 바뀌기도 하니... 예를들어 소수마공(素手魔功)의 경우 초식은 없고 구결뿐인 무공이다. 초식은 기타 여러 가지 장법이나 권법을 사용하되 그 구결만을 소수마공으로 사용하면 소수마공이 가진 그 엄청난 음기로 상대 에게 치명타를 줄수 있는 것이다. 묵향은 자신이 거짓으로 펼친 적하마령검법(赤霞魔令劍法)의 도중에 행했던 진기의 이동을 기억하여 천천히 구결로 불렀다. 대부분의 무공구결은 일부러 비밀의 방지를 위해 어려운 말로 함축해서 표현하거나 수많은 암호들을 나열 해 암기하기가 대단히 까다롭다. 그에 비해 묵향은 각 구결을 함축할 단어들 을 생각할 시간여유도 없었을뿐더러 그걸 함축할 만한 지식도없었다. 그러기 에 옥령인으로서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말이 순서에 따라 이 치에 맞았기에 옥령인으로서도 다른 무공의 비급을 익힐때처럼 말도안되는 문 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기억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묵향이 세 번 불 러주자 옥령인은 모든 글자를 완전히 다 기억할 수 있었다. 옥령인은 모두 다 한자도 틀리지 않고 외운다음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 구결은 정말 쉬워요. 모든 구결이 이렇게 앞뒤가 잘 맞으면 한결 기억하 기 쉬울텐데..." "그럼. 훔쳐배운 것 하고 정통과는 이런 큰 차이점이 있지." 묵향의 말에 옥령인이 발끈하며 항변했다. "계속 그렇게 할아버지를 욕하지 말아요." 묵향은 심심풀이삼아 옥령인에게 검법을 가르치며 지령회(蜘逞會)를 향해 나 아갔다. 며칠 더 가자 옥령인이 궁금한 듯 물었다. "설마 우리가 가는 곳이 사천은 아니겠죠?" "아니! 사천이야." "그럼 당문(唐門)의 당 아저씨 부탁을 받은 건가요?" "너는 그런 건 몰라도 돼." "저도 관련이 좀 있어요. 당문과 지령회(蜘逞會)간의 충돌은 무림에 쫙 소문 이 나 있다구요. 모두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데요?" 한참 더 가서 갈림길을 들어서자 옥령인이 다급히 말했다. "이 길이 아니라구요. 길을 잘못 들었어요." "아냐. 이길이 맞아." 묵향이 자신있게 대답하자 옥령인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런가?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나? 하기야 원체 오래전의 일이라..." "일단 도착하고나면 너는 내 동행이라고 소개할테니 잠자코있어. 안그러면 시 끄러워지니까. 나는 너를 장로의 망나니 딸이라고 소개할테니 너는 그렇게 알 고 있으라구. 갖혀 지내다 보니 바깥바람을 쐬고싶다고 앙탈을 부려 할수없이 데리고 왔다고 하면 상대는 아주 대우를 잘해줄거야. 그리고 내 근처에서 떨 어지지 말고... 안그러면 꽁꽁묶어서 처박아둘거다." 묵향의 으름장에도 옥령인 소저는 생글거리며 가만히 있었다. 그녀로서는 당 문에 도착하기만 하면 반대로 묵향을 잡아 묶어놓고 지금까지 당한 수모를 돌 려줄 생각에 마음속까지 뿌듯하게 차오르는 쾌감을 즐기고있었다. 하지만 그 녀의 그런 즐거움도 오래가지 않았다. 최종 종착점이 지령회(蜘逞會)라는 걸 알게되었던 것이다. 10리 정도 더 말을 타고 도착한 곳은 제법 그럴듯한 커다 란 장원이었고 정문위에는 커다란 현판이 붙어있었다. 蜘逞會(지령회) 이 글자를 읽은 옥령인 소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 자신과 함께 가는 인물이 약간 사파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임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무공으 로 보아 명문정파의 제자라고 굳게 믿고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그런 속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묵향은 느긋하게 말을 타고 나가 지령회의 수문(守門) 무사 들을 향해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보였다. 그러자 그들은 높은 상전이라 도 만난 듯이 호들갑을 떨며 그들을 반겼다. 옥령인은 먼저번의 묵향의 부탁 대로 조용히 사태가 돌아가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묵향일행은 곧이어 안채로 안내되었고 그곳에서 지령회주(蜘逞會主)의 환대를 받았다. 여기서 옥령인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묵향의 호칭이었다. "어서오십시오. 부교주님.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교주님이라는 말이 나오자 옆에 서있던 옥령인 낭자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옥령인 낭자는 경악하기는 했지만 현명 하게 그냥 잠자코 있었다. "오다가 교주님의 부탁이 있어 잠시 지체되는 바람에 좀 늦었네. 사군자가 와 있을텐데 그들은 지금 어디있나?" "정보수집차 밖에 나가셨습니다. 저녘때는 돌아오실겁니다." "저 아가씨는 천리독행의 손녀로 원체 세상구경이 하고싶다고 해서 데리고 왔 네. 철소저라고 부르면 될거야." "예." "먼저 목욕부터 좀 하세나. 오랜 여행을 했더니 먼지 때문에 말이아니군." "예예.. 소화, 매화가 시중을 들어드릴겁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지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오는길에 봤더니 시체도 없고 조용하더군. 소강상태(小康狀態)인가?" "아닙니다. 3일전에 또 심하게 붙었는데 그 때문에 조용한거죠. 각 분타주님 들이 도와주셔서 그런대로 버티고 있습니다." "이번일은 내가 확실히 마무리를 지어줄테니 걱정하지말게나. 자네도 바쁠텐 데 내가 너무 잡고있는 것 같군. 나중에 사군자가 오면 그때 같이 회의를 하 기로 하세나." "알겠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목욕후 산뜻한 향기가 나는 차를 마시며 시비(侍婢)들을 물리친 다음 옥령인 은 나직한 소리로 묵향에게 싸늘히 말했다. "그대가 마교의 부교주인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왜? 실망하셨나?" "어떻게 정파의 무공을 익혔죠?" "언제나 예외적인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기 마련이야. 그리고 너도 알아둘건 오랜 다툼으로 인해 마교의 서고(書庫)에는 엄청난 분량의 정파의 무공이 들 어있다는 점이지. 십만대산은 1000년동안 본교의 요새로서 단 한번도침략을 당하지 않았지. 그에비해 역대 정파들의 대부분의 문파들이 본교에게 한번씩 은 집안을 털려봤을테니 그걸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텐데?" "하지만 마교에서는 정파의 무공을 마공보다 많이 익히면 안된다는 규정이 있 을텐데요?" "있지. 하지만 예외라는 게 있어. 나는 원래 살수(殺手)출신이야. 살수란 직 업상 본문의 무공을 익힐수는 없어. 예를들어 너가 정파의 인물이고 내가 너 를 암습한다면 내가 마공을 사용해서 너를 죽일 것 같아? 아니지 정파의 무공 을 사용할거야. 그래야 표시가 안나거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정파의 무공을 그렇게 깊게까지 익힐 필요는 없잖아요. 당신 실력의 반만으로도 기습할 경우 상대가 저항하지도 못할텐데...." "아니지... 너의 할아버지가 상당한 고수라고 했으니 그 영감탱이를 기준으로 말해보자구. 내가 만약 그 영감을 죽이려고 든다면 별로 어려울게 없어." "그럼 뭐가 문제라는 거에요?" "죽이고 난 다음 탈출하는게 문제지. 탈출하는 과정에서 그 영감이 기른 수많 은 제자들이 덤빌거고 나는 그들과 암습이 아닌 정식으로 검으로 그들의 포위 망을 돌파하고 도망쳐야 하는거야. 그때 마공을 사용하면 모든게 끝장이지. 요컨데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마공을 사용하면 안되는거야." "그래서 마공을 처음부터 배우지 않았나요?" "배우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았어. 나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마공을 배웠다구. 그걸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단순히 마공만 사용해도 웬만한 고수들은 모두 다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어. 한번 보여줄까?" 옥영인이 호기심을 느끼며 말했다. "예.." "이게 뭔지 알겠어?" 묵향의 손이 점차 약간 푸르스름하면서도 하얀 광채를 띄기 시작했다. 좀 시 간이 지나자 묵향의 손은 완전히 하얀 광채를 띄며 살속까지 무색투명해져 손 의 혈관까지 비쳐보일 정도가 되었다. 이걸 본 옥령인은 차가운 한기(寒氣)에 몸을 떨며 말했다. "그때 그 여승이 펼친 소수마공(素手魔功)이잖아요." 그러자 이번에는 묵향의 손이 붉은빛으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사방으로 열기가 퍼져나갔다. 팔목까지 투명한 붉은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걸 보고 옥령인이 말했다. "이건 혈수마공(血手魔功) 같은데요?" "그래. 혈수마공이지. 나는 이 두개를 같이 익혔기 때문에 소수마공이나 혈수 마공을 익히면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 손에 나타나지 않아. 내 손은 그런 대로 곱고 아름답긴 하지만 투명할 정도로 하얗지 않지. 그리고 손이 고우면 서도 붉은빛도 띄지 않아. 그래서 본교 내에서도 내가 이걸 익힌 걸 아는 사 람은 없어. 하기야 강기를 사용하면 이건 별 필요도 없지만...." "참. 이번 일은 어떻게 할거에요. 당아저씨와 싸울건가요? 아니면 전에 나한 테 말한대로 평화롭게 해결할건가요." "일단은 너를 앞세워 평화롭게 처리해나갈거야. 상황을 보고 3일이내에 당문 에들어가서 교섭을 해봐야지." "만약 교섭이 안된다면?" "나는 귀찮은건 딱 질색이야. 능력도 없는것들이 까불어대는 꼴을 느긋이 볼 정도로 마음이 좋지 못하거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수라마참대(修羅魔斬隊) 를 데리고왔지." "수라마참대라구요?" "왜 알고있나? 본교의 일은 거의 밖에 알려진게 없는걸로 아는데.." "할아버지한테 들었어요. 마교에는 여러개의 무력단체가 있지만 그중에 5개가 가장 강하다고 했어요. 천마혈검대(天魔血劍隊), 수라마참대(修羅魔斬隊), 천 랑대(千狼隊), 염왕대(閻王隊), 자성만마대(紫星萬魔隊)가 그들인데 그중에서 자성만마대는 자주 무림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나머지 4개는 거의 나오지 않는 다고 그러더군요. 특히나 천마혈검대나 수라마참대는 한번도 무림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셨어요." "아니야. 둘다 무림에 몇번 나왔지. 대신 그걸 알고있는 사람이 없는거야." "하지만 무림에는 개방이라든지 무영문같은 정보에 능한 단체가 있는데요?" "그들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아. 이번에 수라마참대를 끌고 온것도 나는 혼자서 싸우는 것은 자신있지만 무리를 지휘할줄은 몰라. 병서따위를 읽은 적 도 없고 진법같은 것은 거의 백지나 다름없지. 그래서 통째로 데려온거지. 도 저히 안되면 나는 한마디만 하면 끝난다구. '이봐 인도(人屠)한테 싹 쓸어버 리라고 전해.' 그렇게 말이야." "그럼 사람백정(人屠)이란 사람이 모든걸 알아서 처리한단 말인가요?" "그럼. 그친구 아주 대단한 백정(屠)이거든. 그러니까 너는 그 사람들을 잘 설득하라구. 내가 최후의 수단을 쓰지 않게 말이야." "어떻게 하면 되죠?" "우리가 그런대로 양보할 수 있는건 양보할 수 있어. 상대의 조건이 너무 건 방지지만 않다면 말이야. 이쪽에서도 겨우 사천당문 따위와 씨름하는 것에 수 라마참대를 오랜시간 밖에 내놓을 수 없다구. 마교에는 언제나 많은 적들이 있어왔고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해. 지금 너는 잘 모 르겠지만(사실은 묵향도 잘 모름) 드러나지 않은 단체들이 많다구. 그들 때문 에 마교는 지금 정파와 정면격돌을 원하지 않는다구. 그렇지만 단기간에 분쟁 이 종식된다면 어떤 수단을 써도 상관없다는 허락이 있으니까 모든게 틀어지 면 먼저 상대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다암살한 다음 수라마참대를 풀어서 기습 공격으로 끝장을 내버릴 생각이야. 어때 나도 꽤 똑똑하지?" 묵향의 자신있는 말투에 옥령인이 뽀루퉁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어이가 없군요. 상대의 우두머리들이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것 같아요?" "내가 직접 나선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 때문에 교주도 나를 이리로 보낸거 고." 그러자 옥령인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그럼. 나는 언제나 자신감으로 넘치고있지. 나는 지금 무림에서 무적이라 구." 옥령인은 한껏 비웃는 어조로 말했는데도 묵향이 한껏 우쭐대며 자화자찬을 해대자 그만 말문이 막혔다. "세상에...." '정말 못말릴 정도로 멍청한 자식이군... 저런녀석이 어떻게 부교주가 되었 지?' 저녘이 되자 사군자가 돌아왔다. 사군자가 모두 인사를 올리자 옆에서 보고있 던 옥령인은 약간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교육받기에는 마교의 인 물들은 모두 지령회주(蜘逞會主) 처럼 마기가 스산하게 풍겨나오는 악당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군자의 경우 전혀 그런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 파의 인물들을 보는 것 같이 그냥 높은 수준의 무예를 익혔다는 점만 신체상 의 특징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때 매(梅)가 입을 열었다. "3일 전에도 치열한 다툼이 있었지만 속하들이 조사해본 결과 당문의 뒤에는 종리세가(鍾里世家)와 제갈세가(諸葛世家)가 있습니다. 그 두 가문의 가주(家 主)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먼저 종리세가가 끼어들자 제갈세가도 돕겠다고 들어온거죠. 당문의 경우 암기와 독극물로 유명한 문파라서 이쪽의 피해가 상 당히 큽니다. 빨리 손을쓰지 않으면 피해는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지 금까지 조사한 보고서입니다. 상대방의 전력(戰力)이 자세히 파악되어있습니 다." 묵향은 그 보고서를 대강 들춰본 다음 말했다. "인도에게도 보냈나?" "예. 동방 장로께도 보냈습니다. 동방 장로께서는 명령만 내리시면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겠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옆에있던 난(蘭)이 거들었다. "속하가 비영대를 통해 알아본 바로는 부근의 정파계열의 문파들도 참여하려 고 주시하고 있으며 무림맹에서도 이쪽으로 사람을 보낸 것으로 알고있습니 다." "무림맹까지?" "예. 그들의 목적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으나 매화문검(梅花文劍)이 50여명의 고수들과 함께 당문으로 출발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무림맹까지 끼어들기 전에 조속히 종결을 지으라는 교주님의 분부가 계셨습니다." "국" "예. 내가 준비해 두라고 한 소품은 준비해 뒀나?" "예." "교주가 몇권이나 주던가?" "3권입니다." "그 세 개 다 당문에는 실전된 게 확실한가?"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알겠다. 내일 아침에 당문에 가서 협상을 해봐야겠군. 회주께서는 나중에 협 상이 되면 될 수 있으면 응해 주시오. 그래야 내가 수고한 보람이 있지." "예. 노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일찌감치 쉬고 내일 출발하기로 하지. 죽(竹)!" "예." "자네가 회주와 상의해서 간단하게 예물을 준비해라." "예." "그만 물러가도록." 담판(談判)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지령회를 나선 묵향일행은 당문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점심때가 지나서 당문에 도착한 일행은 문주와의 회담을 원했고 그 회담은 받 아들여졌다. 먼저 일행을 안내한 나이든 고수는 태청당(太晴堂)이라는 건물로 묵향일행을 안내했다. 묵향이 바라보니 크지않으면서도 꽤 위엄있게 잘 지어 진 건물에는 웅대한 필치로 太晴堂(태청당)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었다. 이때 그들을 안내해온 나이가 지긋한 사내가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기는 가지고 가실 수 없으니 저에게 맡기시지 요." "알겠네. 너도 검집을 풀어라." 묵향은 묵혼검과 옥령인의 검을 죽에게 주며 말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난(蘭), 예물을 다오." 준비한 예물을 난이 묵향에게 건네주자 묵향은 옥령인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 갔다. 안에는 7명이 묵향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쪽에는 6개의 의자가 놓여있 었고 그 반대쪽에는 7개의 의자가 놓여있었다. 그 의자에 모두들 앉아있다가 일어나며 묵향 일행을 맞이했다. 그런데 묵향으로서도 경악스러운 것은 사천 으로 오는 도중에 놀려준 그 여인이 7개의 의자 중 중간에 앉아있다가 일어서 며 똥씹은 얼굴로 묵향을 노려보있다는 사실이었다. 묵향은 그 여인을 잠시 바라본 다음 껄껄 웃으며 말ㅎ다. "하하하... 정말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그러더니 오랜만이구료. 옥소저." 그 여자는 노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허리의 검을 뽑으며 외쳤다. "흥! 못된녀석! 네녀석의 농간 때문에 그 쓴 약재를 3번이나 씹어먹었는데 당 문주의 말로는 그게 절대 춘약이 아니라고 하더군. 나를 가지고 놀다니 내 기 필코 네놈을 찢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묵향이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 화해는 그른 것 같은데 할 수 없이 지금 모두 죽여서 조속히 해결해야 겠다."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묵향의 손에서 푸른색 강기가 치솟아올랐다. 그 길이는 무려 3척에 이르렀고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막대기 같은 모양이었다. 모두들 이걸 보고 경악성을 터트리며 다급히 검을 뽑아들며 일어섰다. "심검(心劍)을..." 묵향은 중인들이 경악하건 말건 싸늘히 외쳤다. "나를 원망하지 말게나..." 그와 동시에 묵향의 신형은 앞으로 쏘아나갔다. 제일 첫 번째 목표는 옥소저 라는 그 버릇없는 계집이었다. 묵향이 섬전과 같은 속도로 자신에게 쏘아져 들어오자 옥소저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고 대신 옥소저의 좌우에있던 사내들이 날렵하게 몸을 날리며 묵향의 강기를 맞받았다. 검과 강기의 덩어리가 충돌하 며 불꽃을 일으켰고 다음순간 두 남자는 피를 뿜으며 뒤로 퉁겨져 나갔다. 묵 향이 재차 목표를 향해 강기의 덩어리를 날리려는 순간 옥령인이 묵향의 앞을 가로막았다. 묵향은 싸늘히 그녀를 향해 외쳤다. "비켜." "이러지 마세요. 말로 해결하면 될 것을 꼭 힘으로 해결해야 하나요? 이리 온 것도 서로 좋게 해결하기 위해서잖아요. 그리고 그걸 저한테 다 맏긴다고 했 잖아요. 그런데 왜?" "지금 분위기를 보고도 몰라. 저쪽에서 먼저 검을 뽑았다구. 그럼 내가 목을 내밀며 '날 죽여주슈' 할줄 알았어?" 묵향과 옥령인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있던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그들의 대화 를 들어보고 아직도 말로 풀수있다는 희망이 있음을 깨닫고 그들의 대화에 끼 어들었다. "이보시오 대협. 우리 서로 말로 잘 풀자고 모인게 아니오. 서로 이성을 찾고 말로 해결해 봅시다." 그 남자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도 묵향의 무공을 보고 도저히 이 방 에있는 모든 사람이 덤빈다 하더라도 상대가 불가능한 고수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심검(心劍)은 왕년의 정파 최고의 고수 구휘조차도 이론적으로 가 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힘들다고 두손을 들었던 지고(至高)의 무공이다. 그런 데 이걸 익힌자라고 한다면 구휘보다 더 강했으면 강했지 약할리가 없기 때문 이다. 일단 나중에 싸우게 되더라도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서 믿질거는 없기 에 그는 대화를 청하고 나온 것이다. 이때 튕겨나가서 벽과 심하게 부딪쳐 그 호신강기 덕분에 벽에 구멍을 뚫을 뻔한 남자가 몇번 기침을 한 다음 피를 뱉 아내고는 일어서며 말했다. "잘 해결하자고 모인것이니 서로 말로서 해결하도록 해봅시다." 그러면서 옆에 떨어진 자신의 애검을 보니 검날은 다행히 상하지 않았다. 그 의 검이 보검이었기에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검과함께 반토막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옆의 사람을 보니 그도 주춤주춤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도(刀)도 대 대로 물려내려오는 보도였기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때 밖에서 한명이 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약 50여명의 수하들이 검을뽑고 서있 었다. "문주님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묵향에게 말로 해결하자고 하던 건장한 체격의 그 남자가 말했다. "약간의 오해가 있었으니 너희들은 소란떨지말고 나가거라." "예.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그 건장한 체격의 꽤 정성들여 수염을 다듬은 문사풍의 얼굴을 가진 사내는 수하들이 물러가자 묵향에게 말했다. "아직 소개를 못했군요. 본좌는 이곳의 문주인 당진천(唐眞天)이라고 합니다. 자자 모두들 앉으십시다." 그러면서 그가 자리에 앉자 묵향으로서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울 수 없어서 강 기를 거둬들인 다음 의자에 앉았다. "밖의 분들은 안들어 오십니까?" "아. 그들은 모두 제 수하들입니다. 그 아이들은 적수공권(赤手空拳)에 능하 지 못해서 저혼자 들어왔죠. 그리고 제 검과 이 소저의 검을 지킬 사람도 필 요하구요. 너도 거기 서있지 말고 이리와서 앉거라." 옥령인이 묵향의 옆에 앉자 묵향이 정식으로 자기 소개를 했다. "본인은 지령회를 대신해서 중재를 위임받은 마교의 부교주 묵향이라고 하오. 그리고 이쪽은 그쪽과 대화를 풀어나갈 옥령인 낭자요." 그러자 상대방 남자는 옥령인의 얼굴을 보고는 잠시 곤욕스런 표정을 지었는 데 그 반대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한결같이 이상했다. 물론 묵 향으로서는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아무래도 저 여자와 자매라고 하 니까 그래서 그럴거라는 생각만 하고있었다. 이번에는 저쪽에서 소개를 해왔 다. "저분은 종리세가(鍾里世家)의 패도(覇刀) 종리영우(鍾里英宇) 대협이십니 다." 그러자 묵향에게 도를 맞대고 튕겨나갔던 그 남자가 포권을 해왔다. "그리고 이분은 제갈세가(諸葛世家)의 패검천령(覇劍天嶺) 제갈기(諸葛忌) 대 협이십니다." "대협은 무슨.... 아무튼 그대의 대단한 무공에는 정말 놀랐소이다." 그러면서 검을 잡고 튕겨나갔던 사내가 포권을 해왔다. "그리고 이쪽은 무림맹에서 나오신 매화문검(梅花文劍) 옥매화(玉梅花) 여협 이십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묵향을 모르는체 했다. 그녀로서는 방금전에 놀란 가슴이 진정이 안되었는지 거친숨을 아직도 내쉬고 있었다. "이쪽은 내 자식인 당인걸(唐仁傑)입니다. 귀하의 눈에는 차지도 않겠지만 그 래도 무림에서는 꽤 소질이 있는 기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식인지 당 문주는 자랑을 약간 한 다음 다음사람을 소개했다. "저 두사람은 본문의 외총관 이정과 내총관 당평입니다. 그럼 회의를 진행해 보기로 하지요. 이봐라. 차를 가져오너라." 그러자 밖에서 시비(侍婢) 3명이 들어와 각자의 의자옆 팔걸이에 차를 올려줬 다. 묵향은 시비중 한명에게 예물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작은 성의이니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서로 말을 잘 해뒀으 니 옥령인과 상의를 해보십시오." 그러자 당 문주는 의아한 듯이 묵향에게 물었다. "저 옥령인 소저는 무림맹주의 손녀입니다. 그런데 그녀와 만약 의논을 해서 합의점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귀교에서 그걸 받아들일 겁니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옥령인 소저에게는 내가 모든 걸 말해뒀으니 서 로 상의해 보도록 하십시오. 나는 원래 여기 저 소저의 생명의 안전만 책임지 기로 하고 따라왔으니 말이오." 그러자 옥령인 소저가 말했다. "천마신교는 지령회와 당문이 쓸데없는 일에 자존심을 세워 지금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냥 서로 휴전할 수는 없을까 요?" 그러자 내총관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본문이 입은 피해는 상당합니다. 우리는 그 피 해에 대한 보상을 어느정도 받기를 원합니다." "만약 보상을 안해주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옥매화 소저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렇다면 회의는 해보나 마나야." 그녀의 말에 외총관도 거들었다. "다시 소모전을 하는 수밖에 없소." 당 문주가 그들의 말에 추가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밝혔다. "무림맹에서 추가로 40여명의 고수가 가담했고 새로이 제갈세가와 종리세가에 서도 100여명의 고수가 도착했습니다. 그 외에 주변의 문파들에서 다음에 벌 어질 충돌에 자신들의 제자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문파가 3곳이나 됩니다. 우리는 지령회의 회주가 당문에 정중히 사과하고 피해를 어느정도 보상해 줘 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묵향이 나직히 그러나 또박또박 물었다. "그 문파들의 이름을 알려줄수 있습니까?"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당 문주가 말했다. "그건 왜 묻습니까?" 그러자 옆에 앉은 옥령인이 말했다. "묵향 부교주는 이곳에 오실 때 수라마참대를 이끌고 오셨습니다." 그러자 앞에 앉은 사람들은 경악했다. 수라마참대라면 마교의 최고 정예가 아 닌가? 그들을 이런 별볼일 없는 소모전에 끌고오다니... 거기다이 싸움은 마 교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것도 아닌데..? 정신을 수습한 당 문주가 묵향에게 물었다. "옥령인 소저가 하는 말이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귀하는 우리들에게 협박을 하는 겁니까?" 그러자 옥령인이 당 문주에게 대답했다. "협박이 아니에요. 지금 천마신교는 이 별볼일 없는 소모전이 오래 끄는걸 원 하지 않습니다. 너무 질질끌면 천마신교의 이름에 먹칠이 된다는 것이죠. 그 래서 협상을 해보고 잘 끝나면 다행이지만 만약 무력을 써야한다면 수단 방법 을 가리지 말고 재빨리 종결지어버리라는 교주의 명령이 있었답니다." "아무리 수라마참대라도 당문과 2대 세가를 한번에 무너뜨리기는 쉬운일이 아 닐거요." "만약 협상이 결렬되면 묵향 부교주는 지금 앉아계신 여러분들부터 먼저 죽인 다고 했습니다. 그런 후 수라마참대를 풀어 우두머리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나 머지를 한번에 처리할거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하는 말은 거짓이 보태진건 없 습니다. 대신 여기서 서로가 화해를 한다면 서로간에 예물이 와야하며 서로간 에 사과가 대외적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대신 천마신교측에서는 예물을 보태 어 좀 더 많이 이쪽으로 드릴것입니다. 천마신교가 원하는 것은 양쪽 다 외부 에 체면을 손상당하지 않고 일이 끝나는 것이죠. 그리고 이건 빨리 해결되어 야 합니다." "귀교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모르겠군요. 우리 두 세가가 여기 합동한 것도 귀교가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랜시간 모른체 하다가 갑자기 빨리 화 해하지 않으면 쓸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다니... 그 이유부터 설명해주지 않 겠습니까?" 그러자 묵향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그대들은 암흑마교(暗黑魔敎)라는 단체를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옥맹화 소저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알고있어요. 본맹에서 수집한 정보로는 그것은 혈교의 한 분파인 것 같으며 그수는 거의 5000에 이르는데 고수들이 많아 정보수집에 어려움을 겪고있어 요." "그 암흑마교는 본교에서 이탈한 1000명의 제자들이 세운 단체요. 그대들이 말하는 사천왕의 한명인 흑살마제(黑殺魔帝) 장인걸(張仁傑)이 그를 추종하는 천여 고수들을 이끌고 나가 세운 단체지요. 그들의 행동을 본교에서는 치밀하 게 감시하고있고 또 아수혈교도 그렇고 여러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판치고있 습니다. 그들에 대해 신경쓰는 것만 해도 마교에서는 벅찰 지경이오. 몇해 전 에는 많은 부녀자들이 납치되는 것을 보고 일종의 사이한 대법을 연성하는 무 리가 있는 줄 알고 새외(塞外)로 천마혈검대(天魔血劍隊)가 출동하기도 했소. 그들을 토벌하고 나니 단순한 인신매매단이라는 걸 알고 철수했지만.... 아무 튼 우리들은 지금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으로 정신이 없소. 그래서 교주의 명령으로 그대들과의 협상을 중재하고 있고 만약 안된다면 수라마참대를 빨리 본교로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기습을 가해 잿더미로 만들 수밖에 없소." 그러자 옥매화 소저가 비웃는듯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 알았으니 기습은 힘들텐데요." 그러자 묵향은 싱긋 웃으며 옥령인에게 말했다. "당신 언니는 이번에 쓴약을 너무 먹어서 머리가 잘못된 모양이군. 왜 내가 돌아갔다가 이리 다시 와야하지? 솔직히 말해서 당문쯤 박살내는건 나와 사군 자만 있어도 충분해. 지금 수라마참대는 제갈세가와 종리세가를 부술 준비를 하고있지. 당문이 박살났다는 말을 들음과 동시에 그 두 세가도 끝장날거야." 그럼과 동시에 문 밖에서 묵향의 검이 날아들어왔다. 묵향은 자신의 앞에 날 아와서 둥둥떠있는 묵혼검을 집어서는 허리에 차며 말했다. "그대들은나에대한 예비지식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군. 본교에서도 교주의 근 처 2장 안으로 들어가려면 검을 차고있어서는 안된다는 규정이 있지. 역대로 제법 많은 교주들이 암습으로 저세상에 갔거든. 하지만 그 규정에 유일한 예 외로 인정받은 사람이 나야. 아무리 교주라도 내가 검을 가지고 있던 없던간 에 내가 죽이고자 마음먹으면 곧장 천국으로 보내드릴 수 있다는 걸 모두들 알기때문이지. 자 그대들은 어떻게 하시겠소? 화해요? 아니면 싸움이오?" 그러자 당 문주가 굳어진 얼굴로 대꾸했다. "이건 완전한 협박이란걸 알고 있소?" 그의 말에 묵향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당신에게 불리한 걸 권하는게 아니오. 오히려 유리하지. 본교에서는 그 대가 화해에 응한다면 은화 2000냥을 드릴거요. 대신 그대들도 우리쪽에 예의 를 표시해야 하오. 그대들이 지령회에 은화 1000냥 정도 주면 그들은 아주 좋 아할거요. 그리고 본교에서 가지고있는 당문의 실전된 무공비급 중 3가지를 돌려드리겠소. 내가 양보할 수 있는건 여기까지요. 서로 상의들 해보시오." 그런다음 옥령인에게 말했다. "너는 밖에서 기다려라." "예? 왜그래요?" "만약 혈투가 벌어지면 사군자가 너를 지켜 줄거다." "당문에서 거절한다면 살육전을 시작할건가요?" 묵향이 말없이 고개를 약간 끄덕이자 그녀는 슬픈듯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그냥 여기서 언니를 도와 당신과 싸울거에요." 그런다음 옥령인은 천천히 걸어서 옥매화 소저의 앞에 섰다. 그런 모습을 보 며 묵향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배운 적하마령검법(赤霞魔令劍法)으로 말인가?" "예. 그동안 저한테 정말 잘해주셔서 감사해요." 이때밖에서 옥령인의 검이 날아와서 옥령인의 앞에 멈춰섰다. 묵향은 진기를 이용해 옥령인의 검을 주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싸우고 싶다면 검이 있어야겠지. 일단 시작되면 서로 편하게 제일 먼저 저세 상에 보내줄께. 내가 해줄수있는건 이것밖에 없구나." "고마워요." 전음으로 쑤근거리면서도 그들은 묵향과 옥령인이 하는 대화를 모두 들었다. 묵향은 거의 방심상태인 듯 진기를 끌어모으지도 않고 앉아서 습관적으로 가 만히 묵혼검을 쓰다듬고있었고 옥령인도 그런 묵향을 바라보며 그냥 서있었 다. 이때 묵향이 긴 침묵을 깨고 말했다. "함께한 시간이 얼마되지도 않았지만 정말 즐거웠어. 이런 상황에서 만났다는 게 아쉽군.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로 지낼 수도 있었을텐데..."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너무 장난이 심해서 아주 친한 친구는 안될 것 같아 요." "하지만 재미있잖아. 우리가 처음만났을 때... 큭큭큭.... 너의 언니에게 십 전마령환(十煎魔寧丸)을 먹인다음 그걸 춘약이라고 하니까... 하하... 너는 옆에 있으면서 그 당황한 표정을 못봤지?" 그러자 상황이 이렇게도 급박한데도 옥령인은 까르르 웃고말았다. 반면 저쪽 에서 열심히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던 옥매화의 얼굴은 점점 뻘개지기 시작했 다. "그때 정말 그 표정 걸작이었다구. 그런데 나는 지금도 궁금한건 네 언니가 내가 써준 약재들을 꼭꼭 씹어먹으면서 어떤 표정을 짓고있었을까 하는 점인 데.... 하하하... 이거 원 웃음이 멈추지 않는군." 옥매화는 그 비웃는 말에 머리꼭대기까지 화가나서 검을잡고 묵향에게 뛰어들 려고 했지만 주변에있는 사람들이 잡는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했다. 묵 향이 옥령인을 잡고 여행중에 있었던 재미있는 사건들을 골라서 얘기해대자 옥령인은 배를잡고 웃어대며 맞장구를 쳤고 묵향도 미소를 지으며 얘기를 나 눴다. 이때 옆에서 당문의 문주가 헛기침을 몇번 하더니 말했다. "험험... 묵향 부교주. 이쪽은 결론이 났습니다." "어떻게 하실건지?" 그와 동시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정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묵향이 기를 끌어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있었다. 정말이지 묵향은 순식간에 엄청 난 공력을 끌어모아 출수를 준비했고 얼마나 그 기세가 대단했는지 주변에 바 람이 일 정도였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한 부분중 하나도 이때 벌어졌다. 묵향과 마찬가지로 옥령인도 최대한 빠른속도로 기를 끌어모으며 준비하기 시작했고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려 발검자세를 취했다. 이들은 지금 까지 농담을 나누며 히히덕 거렸었는데.... 이곳에 모인 7명은 묵향이 방금전 에 농담처럼 했던 가장먼저 너를 죽이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라고 했던 말이 진담이라는 것을 모두들 느꼈다. 아마도 묵향이 최대한도의 공력을 끌어모으는 것을봤을 때 자신이 가진 최강의 무공을 사용해옥령인을 비롯해 여기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일격에 죽일거라는 것을 어렵지않게 짐작 할 수 있었다. 당문의 문주는 막상 대답을 하려하는데 묵향이 필요이상으로 기를 끌어올려대자 그 엄청난 위용에 압도되어 온 몸이 떨려오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저.... 그대의 조건을 ... 받아들이겠소." 그러자 모두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묵향의 폭발 적으로 증가하던 기는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보통 기를 끌어모으는 것도 시간이 많이 들지만 일단 최고조로 끌어모은 기를 다시 가라앉추는데도 약간 의 시간이 걸린다. 이것들이 거의 순간적으로 벌어졌다는 것은 묵향이 자신이 가진 모든 공력을 끌어모으지 않았다는 걸 단적으로 말해준다. 묵향의 기가 순간적으로 사라진것에 비해 옥령인은 아직도 몸 전체의 기를 천천히 해소하 며 근장했던 근육들을 풀고있었다. "잘되었소. 그럼 이걸로 그대들과도 이별이군. 교주님께서도 그대들의 선택에 만족해 하실 것이오." 그러더니 밖에다가 외쳤다. "국(菊)!" "예." "준비한 것을 가져오라." "예." 국이라 불리운 사내가 안으로 들어오며 천으로 감싼 꾸러미 세개를 묵향에게 건넸다. 지금까지 사군자가 무엇인가를 들고온 것이 보이지 않았던 점으로 미 루어 이 각각의 꾸러미는 사군자 3명이 각각 품속에 보관하고있었던 모양이 다. 묵향은 국에게서 그것을 받은 다음 국에게 말했다. "너는 지금 동방 장로에게 가서 본교로 귀환하라고 일러라. 본좌도 곧 따라갈 것이다. 너는 동방 장로와 함께 귀교해라." "존명!" 그와 동시에 국은 섬전과 같이 튀어오르며 최고의 속도로 경공술을 펼치며 사 라져갔다. 그 엄청난 속도를 보며 중인들은 경악했다. 그 속도만으로 봤을때 는 거의 자신들의 아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들이 부교주를 직접 호위하는 자들이니 뭔가 달라도 다른점이 있을거라 생각하고있을때 묵혼이 국 에게서 받은 세 개의 꾸러미를 당 문주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이 약속한 비급들이오. 물론 모두 다 정본이오. 대신 본타에는 이것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베낀 사본이 있으니 그점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 니다." 그런다음 품속에서 금표한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것은 꽤 신용있는 전장에서 발행한 금표로 금화 100냥입니다. 오늘 중으로 화해를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지령회주에게는 벌써 말해두었으니 그도 화 해를 아주 좋아할겁니다." 묵향이 화해의 선물로 약속했던 것들을 순식간에 내주자 당 문주는 다소 얼떨 떨한 표정이었다. "될 수 있으면 서로 좋게 지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에 본교에서 사 건이 좀 생기지 않았으면 이렇게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었을거요. 그럼 본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묵향은 그들에게 정중히 포권한 후 옥매화에게 말했다. "깜빡 잊고 그냥갈뻔 했군. 이건 당신거니 돌려드리겠소." 그런다음 품속에서 전에 옥매화에게서 뺏았았던 모든 물건들을 걸상위에 올렸 다. 그 속에는 텅빈 지갑도 끼어있었다. "죄송하게도 지갑안에는 돈이 한푼도 없는데... 가난한 절에 당신의 건강을 빌며 시주했으니 아마 죽을때까지 춘약의 피해는 입지 않을거요." 묵향이 이죽거리며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머리 끝까지 화가난 옥매화 소저가 순간적으로 검을 빼들고는 묵향을 찔러왔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묵향의 몸 근처에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했다. 무엇에 막힌 것처럼 튕겨나갔던 것이다. 그걸 보고 옥매화가 낭패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이게 무슨 사술(邪術)이냐?" 그걸 보고 묵향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대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면 이게 뭔지 알려줄거요." 묵향은 고소하다는 듯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옥령인 이 조르르 따라나오면서 물었다. "벌써 갈려고 그래요?" "그럼. 올때도 말했지만 나는 해결사나 비슷한 존재야. 본교에서 해결하기 힘 든 일이 있을때만 내가 나서게 되지. 이제 일이 끝났으니 돌아가야지." "돌아가시면 뭘 하시는데요?" "뭘하긴. 매일같이 수련이지. 너도 나같은 고수가 될 수 있어. 매일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죽자고 수련만 한 30년 하면 되지." "저는 그럴수가 없어요. 어떻게.... 아무리 무공을 좋아하는 언니도 그정도까 지는 안한다구요."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어. 일이 끝났으니 가서 또다시 수련을 해야지." "당신같은 고수도 수련이 필요해요?" "나는 아직 너희들이 말하는 현경(玄境)의 수준에 머물러있어. 그래도 남자로 태어나서 생사경은 넘어봐야 하지 않겠냐?" "본맹에 한번 찾아오실수는 없으세요? 할아버지가 참 좋아하실거에요." 그러자 묵향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갑작스런 묵향의 웃음에 옥령인은 약간 괘씸한 듯 물었다. "왜 웃는거에요?" "네 할아버지는 정파의 기둥이고 나는 천마신교의 부교준데 뭘 좋아하겠니? 이 철없는 아가씨야... 네 언니처럼 검을 뽑아들고 죽이려고 하지 않으면 다 행이지." "그건 당신이 만날때마다 언니를 놀려대니까 그러죠." "내가 없더라도 적하마령검법(赤霞魔令劍法)을 열심히 익힐 수 있지?" "예." "그럼 다음에 혹시 만나면 비무를 해보기로 하지. 그때는 그런 엉터리 검무를 추지 않기를 바래." 그런다음 사군자를 향해 외쳤다. "돌아가자." 암흑마교와의 결합 묵향이 교내에 돌아왔을때는 이상하게 마교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다. 사군자 를 보내 알아보니 뭔가 큰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때 교주는 묵 향이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비밀 회의가 있다고 교내의 핵심 고수들을 소집했 다. 모두들 긴장해서 긴 탁자에 서열 순으로 앉았다. 모두 착석하자 교주는 혁무상 장로에게 사태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이번에 토의하게 될 안건은 본교를 탈퇴했던 암흑마교의 교주 흑살마제(黑殺 魔帝) 장인걸(張仁傑)에 대해서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로 무림의 패권(覇權) 을 장악하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자신의 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이 번에 다시 본교와 암흑마교를 합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현재 암흑마교의 교 도는 5000여명으로 그중에서 고수급은 많아봐야 2000여명 정도입니다. 장인걸 은 부교주의 지위로서 자신들의 수하들과 함께 본교에 '통합'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에대해 토의하기 위한 회의입니다." 그러자 음침한 시선으로 이 혁무상을 바라보고있던 구양운이 질문을 했다. "만약 암흑마교를 받아들인다면 집안에 호랑이를 놔두는 격이 되지 않을까 요?" "그점도 생각을 해봤소. 장인걸이 본교를 탈퇴하면서 이끌고 떠난 고수가 거 의 1000여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걸 장인걸은 빠른 시간동안에 다섯배로 불 려놨습니다. 솔직히 그들의 힘은 대단합니다. 본교에서도 1000여명을 다시 보 충하기 위해서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정도로 그 암흑마교의 주축세력인 1000 여명의 고수들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그들을 제대로 흡수한다면 본교에 더 바 랄것이 없을 정도로 이득을 가져다 주겠지만 만약 그들이 두마음을 품고 들어 온 것이라면 어쩌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지고 수석장로가 노성(怒聲)을 터트렸다. "그들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소! 밖의 적은 본교의 사정을 잘 모르므로 기습을 당할 우려가 적지만 그들이 안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오." "수석장로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요즘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무림의 정 세에 비추어 5000명의 세력은 꽤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그 중에서 최소한 1000명은 대단한 실력자들입니다. 그점도 감안을 해야 합니다. 이들을 바로 흡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힘을 적당히 해소를 해서 힘을 좀 빼놓은 후에.... 아니면 합병 후 장인걸을 없애버리면 자연히 그들의 세력은 본교에 완전히 흡수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적당히 해소한다는 건 무슨 뜻이오?" "그러니까.... 장인걸이 본교로 들어온 이후에 이들을 여러개의 전투집단으로 만들어각각 뭉치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 그들의 일부가 모반 을 일으키더라도 본교의 피해는 최소화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하! 5000명 정도니까 실력별로 나눠서 한 10개나 20개 정도의 부대로 나눈 후 각각을 이곳 저곳에 배치한다는 말이오?" "그 의견이 묘(妙)하군.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장인걸에게도 일부 세력을 직속부대로 주어야 한다는 데 있습 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개로 나눠놨다 하더라도 은밀히 연락하여 모반을 획책 하지 못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이러면 어떨까요? 5000명 중에서 300명 정도의 고수만을 거느리고 본교에 들 어올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그들은 장인걸 직속에 배치해 주는 겁니다. 나 머지는 20개 정도로 토막을 친 다음 여기저기 배치한 후 부교주 모르게 그들 의 지휘관들을 장악해 나가는 겁니다. 본시 본교는 힘의 단체, 그 누구도 의 리따위를 지킬 사람은 없습니다. 강자 밑에 복속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요." 그러자 교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을 표했다. "괜찮은 의견인 것 같기도 하군." "그런다음 장인걸을 철저히 감시해 만약 조금이라도 모반의 증거가 보이면 처 치해 버리면 됩니다. 아무리 장인걸이라도 교주님께서 직접 나서시면 처치하 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도 장인걸이 아무리 사천왕에 들어가지만 사천왕 중 2명이 협공을 한다면 처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교 안에는 사천왕에 들 어가는 고수가 3명이나 있고 또 이번에 새로 부교주가 된 묵향까지 있으니 그 의 처치는 손쉬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마교와 암흑마교는 5개월 후 통합되었다. 암흑마교의 교주 장인걸은 부교주로 추대되었으며 여태까지와의 예외적인 상황을 감안해서 그가 거느리고 총타로 들어온 300명의 고수는 사사혈시마대(邪死血屍魔隊)라는 칭호와 함께 붉은 옷 을 입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들에게 붉은 옷을 입힌 이유는 먼저 눈에 잘 띄는 색이었으므로 감시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총타에 편입된 300명 을 제외한 나머지는 30등분이 되어 각 지점에 비밀리에 배치되었으며 그들은 모두 익히 알려진 기존의 거점이나 아니면 기존에 있는 분타 중에서 외부에 노출되어있는 분타들에 배치되었다. 즉 이들은 마교가 새로이 만들어놓은 비 밀 분타나 아니면 각종 세력확장을 위해 만들고 있는 주루나 전방, 표국 등에 는 배치하지 않아 마교의 전체 세력을 도저히 알기 힘들게 했다. 그 외에 여태까지 암흑마교가 만들어 놓은 총타 1곳과 분타 5곳. 그리고 전 방, 기루, 토지 등 각종 사업채도 완전히 정리되었다. 그중 토지는 상관없지 만 나머지는 모두 암흑마교와 상관없는 것 처럼 철저히 파괴하거나 은폐해 놓 은 다음 팔아버렸다. 그런 후 거기서 나온 돈으로 새로운 사업채에 투자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런 식으로 돈줄을 완전히 막아버리면 또다시 분리 하고 싶어도 5000명이나 되는 인원이 탈퇴해서 나가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 외에 암흑마교가 모아놓은 각종 무공비급이나 무기류 등속은 마교로 운반되어 분배되었다. 마교에 돌아온 장인걸 부교주는 교주에게 직접 몇권의 무공비급들을 바쳤다. "교주님, 이것들은 제가 힘들게 모은 것들로서 아주 대단한 비급들입니다. 받 아 주십시오." 교주가 보니 무공비급에는 각각 응혈신장(凝血神掌), 귀혼강신대법(歸魂 身 大法), 응혈귀조(凝血鬼爪)라고 씌여져 있었다. 이것을 본 교주가 천천히 입 을 열었다. "모두 처음보는 무공들이군. 이것들은 어떻게 구하게 되었나?" "예, 우연한 기회에 응혈귀조라는 무공을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그걸 좀 더 강력하게 발전시킨 무공이 응혈신장입니다. 조법(爪法)을 장법(掌法)으로 만 들었는데 그 위력이 더욱 강력합니다. 이것들은 격중되면 사람의 피를 엉기게 만들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공으로 아주 지독한 무공입니다. 한번 격중되면 거의 치료가 불가능한 무공들입니다." "대단하군." "그리고 귀혼강신대법은 마교의 마공과 혈교의사술을 혼합하여 만든 것으로 이것을 대성하면 거의 강시에 가까운 육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익히기가 대 단히 어렵다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불사(不死)에 가까운 육체를 만들 수 있는 마공입니다." "불사라구?" "예. 이 마공을 익히면 육체의 복원력이 불가사이할 정도로 증폭되어 칼로 베 어도 죽지않게 됩니다. 만약 칼에 베여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그것을 줏어 다가 붙이기만 하면 순식간에 원상태로 붙어버립니다. 그리고 육체를 나무토 막처럼 만들어 웬만한 도검은 뚫고 들어오기 힘들죠. 약점이라면 황제가 가지 고 있는 복마천신검(伏魔天神劍) 같은 사마(邪魔)를 제압할 수 있는 신병(神 兵)으로 공격당했을 때 상처의 복원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죠. 그 외에도 몇가 지 극성을 가지고있는 무공이 있으나 그리 대단한 타격을 줄 수 있는건 아닙 니다." "대단하군. 누가 이 마공을 익힌 사람이 있소?" "익힌 사람은 1000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그중 5성 이상 성취한 이들은 이번 에 제가 이끌고 온 300명 정돕니다. 이 마공을 이용하여 진기를 내뿜었을 때 그것에 격중된 사람은 급속도로 살이 썩어들어가므로 아무리 고수라도 방심하 고 있다가 간단하게 상처를 입어도 나중에는 치명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대단하군. 사용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도움을 주고 상대에게는 조금의 상처라 도 치명상을 입히다니.... 그대는 어느정도까지 연성했소?" "9성까지 연성했습니다. 교주님께서도 한번 연성을 해보심이 좋을것입니다." "그것도 좋겠군. 고맙소." 장인걸이 마교에 합류한 다음 마교의 수뇌부의 걱정과는 달리 큰 문제가 벌어 지지 않았다. 교주는 암흑마교에서 새로이 입수한 12가지 마공들을 묵향에게 주어 검토해보라고 했고 묵향은 그것들을 세밀히 살펴보았다. 묵향은 그 무공 들을 차근차근 살펴봤고 상당히 파격적인 공격법이나 치밀한 수비법, 거기에 공격에 있어 상대를 고통속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고야 마는 그 악랄한 수 법들에 혀를 내두르며 그 무공들을 살펴봤다. 하지만 이 무공들 중에 일부는 혈교의 요술적 요소를 가지고있는 것들이 있었고 정통무공들만을 수련한 묵향 으로서는 그것들을 익힌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예상과 달리 암흑마교와 마교간의 합체는 아주 부드럽게 이루어졌고 장인걸이 몇가지 사건들을 해결해내자 그의 마교내에서의 위치도 점점 더 올라가기 시 작했다. 특히나 장인걸이 거느린 300명의 고수들은 고수들과의 싸움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무림인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수들과의 싸움에서 괴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거의 강시에 가까운 강인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이한 사술(邪術)도 많이 사용해 정력(靜力)이 적은 상대를 대량으로 살상하는데 특 히나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생일 축하객 장인걸이 마교에 합류한지도 거의 8개월이 흘러 어느덧 가을이 찾아왔다. 그 날도 묵향은 언제나와 같이 소나무 밭에 서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때 한 괴 영(怪影)이 극도로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묵향에게 접근해왔다. 3장거리까지 접근하자 소나무 사이로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묵향이 갑자기 괴 영을 향해 강기를 뿜었다. 괴영은 경악하여 피할려고 했지만 묵향의 강기는 엄청난 속도로 다가와 그의 몸을 두토막으로 만들었다. 천천히 묵향이 괴한에 게 다가오자 그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표정을 띄고 묵향을 바라봤다. 이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이 허리부분이 두토막이나서 피를 흘리고있 었는데 어느덧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하여 묵향이 그의 앞에 다다를 즈음 그의 상처는 거의 다 낫아있었다. 그는 묵향을 향해 부복(俯伏)하며 말했다. "교주께서 부르십니다." 묵향은 상대에게 싸늘히 말했다. "네녀석은 누구냐?" "속하는 장인걸 부교주님의 수하이옵니다. 교주님께서 묵향 부교주님을 부르 려고 하시자 장 부교주님이 저를 보내 통지하라 하셨습니다." 묵향은 이자가 귀혼강신대법(歸魂 身大法)을 익힌 고수라는 사실을 눈치챘 다. '겨우 이따위 마공을 익힌주제에 나를 시험하려고들어?' 묵향은 자신도 귀혼강신대법을 본 다음 자신이 그걸 익히기에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아서 그만뒀지만 대신 그것의 약점은 파악하고 있는 상태다. 귀혼강 신대법이 가장 강한 위력을 보이는 부분이 상대가 검이나 도 같은 무기로 공 격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처가 최소화되어 손쉽게 상처수복이 가능하다. 하지 만 철퇴같은 것에 한 대 맞으면 그 상처가 엄청나게 크므로 수복하는데 시간 이 많이 걸린다. 특히나 머리에 맞아 완전히 머리가 부숴져버리면 수복은 커 녕 목숨까지 날아가는 것이다. "흥! 본좌는 내 근처로 모습을 감추고 숨어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네녀 석의 머리통을 부숴버리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으로 생각해라. 혹시 다음에 도 본좌의 부근에 숨어드는 녀석이 있다면 골통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겠다." 상대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묵향이 교주에게 인사를 드리자 교주는 장인걸과 얘기를 나누다가 묵향을 반 겼다. "어서오게나. 이쪽은 알고있겠지? 장인걸일세." "안녕하셨습니까? 장인걸 부교주님" "그대도 안녕하셨소? 본교 최고의 고수를 뵙게되어 영광이군. 공식적인 행사 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셔서 오늘에야 만나게 되는군요." "죄송합니다." 서로간에 인사가 끝나자 교주가 입을 열었다. "실은 묵향 부교주에게 한가지 부탁할게 있어서 불렀소." "무엇입니까?" "이번에 무림맹주 옥청학이 140세 생일을 맞이해서 본교에 초청장을 보내왔 지. 도대체 그놈의 속을 알수가 없단 말이야. 여태까지 무림맹과 서로 인사를 나눈적이 한번도 없는데 갑자기 그러는 이유를 알 수 없어. 하지만 무림맹주 의 생일 인사니 아무나 보낼 수 없고.... 그래서 내 손녀를 보내기로 했지." "....." "그런데 이년이 원체 방자해서 웬만한 교내의 고수를 붙여놔도 통제가 불가능 이란 말씀이야. 그래서...." "장인걸 부교주님께서 동행을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한영영(韓永瑛)은 장 부교님에게는 고양이 앞의 쥐로 알고있는데요." "그래서 장 부교주에게 부탁했더니 한사코 싫다고 하는거야. 자네도 들었을테 지? 원체 하나뿐인 손녀라고 애지중지 길렀더니 버릇이 없어. 그래 자네를 불 렀지. 꼭 자네가 해주게나." 묵향은 한영영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익히 그 더러운 소문을 듣고있었다. 버 릇없기로 천하 제일이며 수하들을 마음대로 구타하고 등등.... 그따위 계집을 호위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 목구멍 위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교주의 애원하는 듯한 시선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제가 하죠." "껄껄.... 고맙네. 자네가 간다면 내 위안이 되지." "출발은 언젠가요?" "3일 후. 모든 준비는 다 해놓을거야. 호위는..." "사군자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예물을 들고가기도 귀찮은 노릇이니 그리 중요 한 예물이 아니라면 표국에 맞겨서 우리가 도착하기 하루전쯤에 상대에게 도 착하게끔 만들어 두십시오." "그편이 편하다면 그리 해주겠네." * * * 한영영은 한중길의 손녀로 현재 소교주의 딸이다. 천마신교의 법전에 의하면 마교에서는 교주, 소교주 등 무공이 뛰어난 사람은 그 지위가 높지만, 교주의 아들 딸이라도 소교주로 채택되지 않은 사람은 그의 무공이 강해서 한자리 차 지하지 않았다면사실상 권력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주의 친족들이 권세 를 부리지 않은것도 아니다. 지금 마교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한영영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용모에 많은 책을 읽어 총명하고 또 그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무공을 익혔다. 하지만 그녀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그건 바로 원체 귀하게 대접받아서 그런지 완전히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는 점이었다. 실지 23살이란 나이에 무공을 익혔으면 얼마나 익혔겠는가... 모두들 그녀를 두들겨 패거나 핍박할 수 없으니 똥이 무서워서피하냐 하는 식으로 슬금슬금 그녀만 나타나면 도망쳤고 재수없게 그녀에게 걸린 사람들은 곤욕을 치뤄야만 했다. 여지고 수석장로조차 30년을 애지중지 길러온 수염을 홀랑 태워먹었을 정도니 다른 사람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올해 23살에 이른 이 못말릴 아가 씨는 오늘도 어디 먹이가 없을까 해서 어딘가를 두리번거리며 찾아다니고 있 을 것이 틀림없었다. 3일후 묵향이 한영영을 만나보니 과연 소문대로 예쁜 아가씨기는 했다. 그런 데 교활한 눈을 두리번거리며 묵향을 훑어보는 걸 보고 묵향으로서도 좋은 기 분이 될 수 없었다. 묵향은 난과 죽에게 마차를 몰고 매와 국은 말을타고 뒷 따르며 호위하라고 명한 후 묵향은 한영영과 그 시비(侍婢) 1명과 함께 마차 안에 타고 출발했다. 한영영으로서도 이번이 처음하는 세상구경이라 원체 많 이 바뀌는 풍물과 경치에 정신이 팔려 묵향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묵향이 지긋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그녀는 암암리에 공력을 끌어 모아 묵향의 혈도를 가격해왔다. 펑하는 소리가 나고 오히려 손이 부숴지는 아픔에 비명을 지른건 묵향이 아니라 한영영쪽이었다. "아악!" 묵향은 비명을 지르며 아픈 손을 주무르고있는 그녀를 쓱 쳐다본 다음 느긋하 게 입을 열었다. "제법 손속이 악랄하군. 그냥 가만히 있으면 나도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시 작은 네가 먼저 했으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그런다음 비쾌하게 그녀와 시비의 혈도를 점한 다음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남에게 기습을 가해 골탕을 먹이는 건 내 방법이야. 너같은 계집애가 쓰는게 아니라구. 자... 이제 어떻게 한다?" 묵향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 경악한 한영영이 소리쳤다.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줄 알았냐? 날 풀어라." 한영영이 악을 쓰던지 말던지 묵향은 잠시 생각하더니 과장되게 손벽을 치며 즐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꼭 해야할 여행이면 편한게 좋지. 네년들이 마차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거 자 리가 불편해서 안되겠다. 이봐 난! 마을은 멀었냐?" "2각 후면 도착할겁니다." "그럼 계집애 둘이 들어갈만한 큰 상자 하나를 사와라." "예." 다음 마을에서 상자하나를 구입한 묵향은 충분히 숨을 쉴수있게 구멍을 여기 저기 숭숭 뚫어놓고는 고래고래 악을 쓰는 한영영과 시비를 그 속에 집어넣었 다. 그런다음 아혈까지 봉해버려 조용하게 만든 후 마차 뒤에 그 상자를 묶어 버렸다. 그런다음 다음 목적지까지 콧노래를 부르며 편안하게 갔다. 저녘때가 되어 마을에 도착한 묵향은 상자에서 두 계집을 꺼냈다. 그런 다음 혈도를 풀어주자 바로 한영영의 손바닥이 날아왔다. 한영영은 묵향의 빰을 철 썩 치면서 외쳤다. "나쁜자식!" 하지만 묵향의 뺨은 색깔하나 안변했고 오히려 깨질 듯이 아픈건 한영영의 손 바닥. 묵향은 싱긋 웃더니 바로 한영영의 뺨을 4대나 때렸다. 짜자작하는 비 쾌한 타격음이 들리고 휘청거리는 한영영을 묵향은 모질게 잡아 끌고는 식당 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은 후 점소이에게 말했다. "이봐. 만두 7접시하고 고량주 4병! 그리고 신선한 채소로 만든거 있으면 좀 가져다 주게." "예." 그러자 한영영이 씨근덕거리면서 외쳤다. "만두라구? 난 그딴 것 안먹어. 이봐 여기 잘하는 음식이 뭐냐?" 묵향은 그녀의 혈도를 바로 짚어서 더 이상 떠들지 못하게 만든 후 점소이에 게 다시 말했다. "이 소저가 하는 말 신경쓰지말고 가서 빨리 음식이나 가져와." "예" 묵향은 혈도가 짚여 꼼짝못하고 앉아있는 한영영을 그냥 놔둔채 음식을 들었 다. 옆에 앉았던 시비가 한영영의 혈도를 풀어주려 하자 묵향이 눈을 부라리 며 나직히 말했다. "네년도 혈도가 짚히고 싶냐?" 묵향의 말에 그녀는 고양이 앞의 쥐신세가 되어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묵향 은 수하들과 통쾌하게 술과 음식을 먹은 후 한영영의 허리를 짐짝처럼 잡아 들고 여관으로 갔다. 여관에 도착하자 방 2개를 잡은 후 한방에는 한영영과 시비를 둘다 혈도를 짚어 침대어 던져놓고 난에게 지키게 한 후 자신은 나머 지 수하들과 방 하나에 들어가 쉬었다. 묵향은 거의 잠을자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방을 잡는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묵향은 그 둘의 혈도를 풀어줬다. 한영영은 묵향에게 으 르렁거렸지만 말로 협박할 뿐 더 이상 행동으로 어쩌지는 못했다. 한참 잔소 리를 듣던 묵향이 더 이상 못듣겠다는 듯이 짜증스런 표정을 짓자 그녀는 황 급히 입을 닫았다. 그 다음의 행동은 말을 안해도 뻔했기 때문이다. 식당으로 내려간 다음 묵향은 점소이를 불러 어제와 똑같은 주문을 했다. 이번에는 한 영영도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녀는 어제 점심과 저녘을 굶었기에 배가 몹시 고팠던 것이다. 식사후 출발할때가 되자 묵향은 상자를 마차에서 내리게 한 후 한영영에게 말했다. "나는 혼자서 조용히 하는 여행을 좋아해. 내가 상자속에 들어가기는 싫으니 너희들이 양보해줘야겠어. 그냥 들어갈래? 아니면 혈도를 짚힌 후 들어갈래?" "그냥 들어가죠." 묵향은 그녀들이 들어간 다음 또다시 상자를 마차뒤에 묶고는 출발했다. 한참 마차가 달려가고있을 때 한영영은 상자를 부수고는 탈출을 시도했다. 한영영 은 마차에서 뛰어내린 다음 시비와 함께 경공술을 전개하여 도망치며 말했다. "본교에 돌아가서 두고보자! 못된자식!" 하지만 그녀가 뒤돌아보며 욕을 한 후 앞을 보자 어느새 나타났는지 묵향이 거기 서 있었다. 그녀는 멈추려 했지만 앞으로 나가던 속도가 있어서 둘다 묵 향의 품속으로 뛰어든 결과가 되었다. 묵향은 두 계집을 각각 손으로 잡은 후 말했다. "전에도 말안듣고 도망치는 계집이 있었는데... 그때 어떻게 했더라? 맞아! 분근착골(粉筋鑿骨)을 몇번 해주니까 조용해 졌었지." 묵향의 말을 들은 두 여자는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묵향은 그녀들을 놔주더니 곧바로 두 여자의 혈도들을 쳤다. 곧이어 두 여자는 얼굴빛이 더욱 창백해지 기 시작하며 몸을 뒤틀었고 온 몸에서는 뚜둑거리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묵향 은 그녀들의 비명을 들으면서 반각(7분 정도)의 시간을 기다렸다. 이윽고 반 각이 되자 둘의 고문을 풀어준 다음 싱글거리며 말했다. "어때? 즐거우셨나? 이번은 처음이니까 반각이지만 다음에는 1각, 그 다음에 는 2각이지. 즐거운 비명소리를 나도 다시 듣고싶으니 또 도망쳐 보시도록." 한영영은 이빨을 갈아댔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서 다시 묵향에게 끌려갔 다. 묵향은 다음 마을에서 식사를 한 후 다시 상자를 하나 구입했고 환기구멍 을 숭숭 뚫으면서 말했다. "어때? 내 취향은 알고 있겠지. 그냥 들어갈래? 아니면 묶여.." 묵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여자는 상자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때까지 감히 도망은 엄두도 못내고 들어있었다. 저녘때가 되 어 마을에 도착하자 죽은 곧 상자를 꺼내어 열어줬고 한영영은 상자 안에서 나오며 손수건으로 땀을 ㄸ으며 가을의 시원한 공기를 즐겼다. 아무리 가을이 라도 상자안에 두명의 여자가 들어있으니 엄청 더운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주루에서 또다시 묵향이 만두와 고량주를 시키자 한영영이 조심스럽게 말했 다. "저.... 매일 만두만 먹으면 질리지 않아요? 우리 다른것도 좀 먹자구요." "흐음.. 그래도 만두는 맛있는데?" "만두 말고도 맛있는게 많다구요. 사군자한테 물어보시면 알거에요." 묵향이 얼굴에 인상을 잔뜩쓰고 노려보며 사군자에게 으르렁거렸다. "만두 말고도 맛있는게 있다니 정말이야?" 법은 멀고 눈앞의 주먹은 살벌하기 그지없으니 사군자는 할 수 없이 말했다. 사실은 그들도 이번 여행에 매일 만두만 먹기가 질렸지만 할 수 없었다. "아니오? 헤헤... 만두가 제일 낫죠." 묵향은 그보라는 듯이 으시대며 점소이에게 말했다. "빨리 가져와." 식사후 웬일인지 한령령이 조용했기에 묵향은 그녀의 혈도를 짚지 않고 잠자 게 해 줬다. 3경이 되어 묵향은 왼쪽방에서 기(氣)가 움직이는 걸 알아챘다. 슬며시 따라가보니 한영영이 시비를 데리고 살며시 눈치를 보며 도망쳐 나와 마굿간으로 가는게 보였다. 한영영과 시비는 마굿간으로 들어가기 직전 온 몸 이 마비되며 쓰러졌다. 곧이어 지독한 통증이 온 몸을 타고 흘렀고 뼈가 어긋 나는 소리가 몸속에서 울려퍼지는 것이 들려왔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비명이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나왔다. 이때 비웃는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화장실에라도 가나 해서 놔뒀더니 겁도없이 도망가려고 하는군. 말했지 이번 에는 1각이라고...." 1각후 묵향은 거의 탈진한 두 여자를 혈도를 봉해버린후 한팔에 한명씩 잡고 는 방 속에 던져넣었다. 그런다음 난을 바라보니 혈도가 짚힌채 뻗어있었다. 묵향은 빙긋이 웃으며 난의 혈도를 풀어줬다. 난은 얼굴을 붉히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깜빡 잠이들었는데...." "괜찮아. 내가 너를 이 안에 놔둔건 저 여자들을 감시하라는 게 아니라 외부 로부터의 침입을 방지하는데 있으니까." 그런다음 묵향은 다시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명상에 잠겼다. 다음날 아침 또다시 두 여자의 혈도를 풀어준 다음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두 여자는 어제저녘 또다시 엄청난 고생을 해서 그런지 만두를 꾸역꾸역 입속에 넣었다. 아무리 만두가 질려도 체력이 떨어지면 도망도 못치기 때문이다. 한 영영은 만두를 억지로 씹어서 삼킨 후 말했다. "당신은 잠도 안자요?" "사군자한테 물어보면 알지만 나는 밖에 나오면 잠을 안자. 교내에 있을때도 거의 하루에 두세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지." "그럼 잠을 안자고 뭐하는거에요?" "운기조식도 하고 명상도 하고.... 뭐 그런거지." 그러자 한영영은 이제 도망치기는 거의 틀렸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으며 부 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당신 이런식으로 나를 대접하면 나중에 본교에 돌아가서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어요?" "어떻게 되는데?" "아빠한테 말해서 당신을 혼내줄거에요." "네 아빠면 한영성(韓永省) 소교주를 말하는거냐?" "예." "혼내준다면 네 아빠가 나를 몇초만에 죽일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당신은 아빠한테 이십초지적(二十招之敵)도 안되요." 그러자 묵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천진난만한 아가씨야. 사실은 그 반대지. 네 할애비조차 나한테 20초지적 이 될까말까 한데 그따위 소릴 하다니...." 그러자 한영영이 경악해서 말까지 더듬거리며 위협조로 말했다. "교주님을 보고 할애비라니 당신... 당신... 그러다가 제명에 못죽을거에요." "상관없어. 할애비보고 할애비라고 부르는거지. 그리고 그 할애비는 본좌를 절대적으로 신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인데 나를 어떤 방식으로 혼내주겠다 는건지 한번 물어보고 싶군." "할아버지가 왜 당신같은 망나니를 신임한다는거죠?" "그건 간단히 설명해줄 수 있지. 교주 옆에 1장 안으로 검을차고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이건 아주 절대적인 신뢰의 표시가 아니겠어?" 잠시 생각하더니 한영영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직히 말했다. "당신이 그 부교주군요. 할아버지가 교주자리를 권했는데도 차버렸다는.." "어쭈? 제법 소식이 빠르군. 그분이 바로 이분이시지. 그리고 네가 알아둬야 할 사항은 내가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태상교주도 아니고 소교주도 아닌 바로 교주야. 그렇기에 나한테 명령을... 아니지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도 교주밖 에 없다구. 교주는 나한테 너를 무림맹까지 데려다 주라고 부탁했고 그 방법 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았어. 너를 꽁꽁 묶어서 상자속에 넣어가 건 마차에 매달고 끌고가건 그건 내마음이란 말이야. 생각같아서는 마차에 묶 어서 끌고가고 싶지만 예쁜 얼굴에 상처가 나면 나도 곤란하단 말씀이지. 하 지만 교주는 나한테 절대 상처를 내지 말라는 지시도 안했으니 나중에는 그 방법도 한번 써볼까 하고 생각중이야." 한영영은 묵향의 말을 듣고는 기도안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묵향 모르 게 구석에 앉아있는 죽이 가만히 어기전성(御氣傳聲)을 보내왔다. <부교주가 하시는 말은 거의 대부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음먹으면 꼭 하고야 마는성격이죠. 그러니 더 이상 자극하시면 곤란합니다. 진짜 매달고 갈지 몰라요.> 한마디 쏘아주려고 했지만 죽의 말을 듣고는 그 말이 목구멍 위까지 올라왔다 가 다시 내려가버렸다. 이 교활한 한영영 소저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더 이상 상자속에서 가기는 싫었던 것이다. "저... 마차를 타고가면 안될까요? 떠들지 않고 조용히 조용히 있을께요. 예?"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묵향이 무자비하게 말했다. "안돼. 나는 조용히 혼자 가는게 더 좋다고 했잖아. 밥도 먹었으니 출발하 자." 묵향이 뭐라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시비와 한영영은 상자속으로 들어갔다. 그 녀들도 원체 많이 겪다보니 출발의 순서를 잘 알고있는 것이다. 죽은 그 상자 를 마차에 묶은 다음 출발했다. 한영영은 점심때도 만두를 먹으면서 묵향에게 계속 부드럽게 부탁했다. "상자속은 덥다구요. 조용히 있을테니 좀 태워줘요. 구석에 앉아서 쥐죽은 듯 앉아있겠다니까요." 계속적으로 부탁해대자 묵향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는 움찔했지만 의외로 묵향에게서 나온 말은 부드러웠다. "좋아." 묵향은 눈을 지그시 감고 가만히 앉아있었고 그 앞에 앉은 두 여자는 감히 숨 소리도 크게 못내고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시간 정도 흐르자 점점 간이 커지기 시작한 한영영은 주변경치를 바라보며 옆의 시비와 쏙닥거 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묵향이 가만이 있자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 더니 저녘때가 되어 제법 큼직한 마을에 도착할때쯤에는 마음 푹 놓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영영은 한가지 목표를 달성하자 이번에는 음식을 바꾸려고 들었다. 마을에 도착하기 전부터 제발 만두는 그만먹자는 말을 시작해서 식탁에 앉을때까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묵향을 설득해댔고 그 옆에서 시비까지 거들어댔다. 사람 이 똑같은 소리를 듣는데도 한도가 있다. 그걸 한영영도 알기에 묵향이 인상 을 쓰면 딴 소리를 하다가도 조금만 지나면 다시 화제는 만두로 넘어왔다. 드 디어 식당 안으로 들어올 때 쯤에는 묵향도 지쳐 될대로 되라는 상태까지 와 있었다. 발광을 한다면 혈도를 제압해서 처박아두면 되는데 그게 아니었기에 묵향으로서는 그 말을 그냥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또 묵향으로서도 이 버릇없 는말괄량이를 길들인다고 만두를 먹고 있지만 자신도 입에서 밀가루 냄새가 날 정도로 슬슬 만두에 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입이 아프게 두 여자가 묵향 을 향해 설득작전을 벌인 효과는 식당에 들어가서 나타났다. 묵향은 난을 보 고 말했다. "네가 음식을 시켜라." 이 후로는 제법 그럴듯한 여행이 되어갔다. 한영영이 묵향의 성질을 적당히 파악한 후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았기에 비교적 조용하게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이 더 지나자 그녀는 묵향이 잔소리를 심하게 해도 왠만큼은 듣 고있을 수 있을만큼 신경이 굵다는 것과 못먹는게 없을 정도로 잡식성이라는 점. 거기에 그냥 내버려두는 것도 좋아하지만 슬슬 말해서 꼬면 곧잘 말도 잘 하고 농담도 잘한다는 점을 알아냈다. 거기에 칭찬까지 곁들여서 약간 아부를 하면 금(琴)도 들려준다는 사실이다. 묵향의 금을 타는 실력은 근래에 들어 눈부신 발전을 이뤄 그의 금에서의 사 부라고 할 수 있는 음희(淫嬉) 설약벽(薛若碧)을 탄복하게 만들었을 정도였 다. 처음에는 죽이 어기전성으로 슬며시 묵향이 금을 잘타니 졸라보라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 하며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살며시 구슬려봤더니 금을 타줬다. 묵향의 실력은 한영영을 놀라게했고 그 다음부터는 줄곧 금을 타달라 고 졸라댈 정도였다. 묵향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냥 졸 듯이 가만히 눈감고 앉 아 명상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말괄량이가 같이 동석하게 된 다음부터 그는 그런 편안한 시간을 즐길 틈이 거의 없었다. 드디어 무림맹에 도착하자 묵향일행은 생각보다 무림맹의 규모가 적다는 것을 알았다. 마교의 총타가 거의 1만명에 가까운 인구밀집지대라고 한다면 이곳은 5000여명 정도가 있는 시골정도라고 보아야 했다. 이렇게 정파의 기둥이라 불 리는 무림맹의 규모가 작은 이유는 마교와는 달리 맹주에게 집중된 힘이 적었 고 맹주는 보통 오대세가나 구파일방 등 거대 명문 중에서 나왔는데 한번 맹 주가 되면 죽을때까지 그가 맹주가 되지만 맹주의 직위는 대물림되지 않고 무 림대회를 펼쳐 새로운 맹주가 선임되었다. 거기에 그의 호위무사는 각 문파들 에서 일부 고수들을 파견하는 식으로 보내주기에 그 질(質)에서 떨어졌다. 무 림맹주란 일종의 명예직으로 각 문파에서는 맹주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수많은 방법으로 막고있었으므로 자연 마교에 비해 그 위세가 떨어졌다. 하지만 맹주의 지시로 움직이는 고수의 수는 마교보다 몇배나 많았으니 그 이 유는 거의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사파보다는 정파계열이었기 때문이다. 매(梅)가 달려가 수문(守門) 무사에게 마교에서 인사차 사람이 왔다는 걸 알 려주자 그중 2명이 나와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묵향은 방을 배정해준 다음 한영영에게 나지막히 으르렁거렸다. "만약 여기서 어떤 말썽이라도 부린다면 돌아갈 때 꽁꽁 묶어서 마차에 매달 고갈거야. 일단 인사는 끝난 다음일테니 상처가 좀 생겨도 교주가 아무말 못 할껄" 묵향의 협박에 한영영은 혀를 쑥 내밀며 응수를 한 다음 시비와 함께 무림맹 을 구경하기 위해 나갔다. 그녀의 뒤를 죽과 국이 멀직이서 뛰따르며 호위했 다. 이번 맹주의 생일잔치는 3일간 거행되었는데 그 안에는 무예대결까지 포 함되어 생일잔치가 아니라 거의 축제같은 분위기까지 풍겼다. 낮에는 여기저 기서 벌어지는 행사에 참석한 후 밤이되어 저녘식사때가 되면 모두들 모여 만 찬을즐겼다. 이때 각 파의 장문인 급들은 큰 건물에 모여 맹주와 함께 식사 를 했다. 식사전에 당일 도착한 각 문파에서 온 축하객들이 선물을 바친 후 곧바로 약간의 볼거리가 제공되며 만찬이 시작된다. '滿博殿(만박전)'이라는 현판이 붙은 만찬이 시작되는 이 커다란 건물에 묵향 일행이 다가가자 주위를 지키던 호위무사들이 다가왔다. 그중에서 검은 콧수 염을 기른 중년의 무사가 한영영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무장을 하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검을 저희들에게 맡기시지 요." 한영영이 보석이 손잡이와 검집에 박힌 호화로운 보검을 풀자 묵향은 그것을 받아 죽에게 건네줬다. 그런다음 자신도 묵혼검과 비수를 그에게 주며 말했 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묵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영영을 따라 들어가자 짐꾼 4명이 마교에서 준비 한 예물을 가지고 그들을 뒤따랐다. 그들이 만박전에 들어서자 정문에서부터 큰 탁자까지 붉은 양탄자가 깔려있었고 그 탁자 주위에는 여러 가지 선물이 쌓여있었다. 그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한 무사가 종이를 보고 소리쳤다. "천마신교에서 맹주님의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 축하객을 보냈습니다." 천마신교라는 말이 나오자 중인들이 술렁거리며 한영영 일행을 주의깊게 바라 봤다. 한영영은 큰 탁자에 앉아있는 20대 후반의 부드러운 눈빛을 가지고있는 사내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시옵니까? 소녀(小女)는 한영영이라 하옵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하셨소. 그래 교주께서는 안녕하시오?" "예, 덕분에 평안하십니다.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이것은 저의 할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맹주는 그녀를 환대하며 말했다. "이리와서 앉으시오. 현재 무림 최대의 방파인 천마신교의 교주를 대신하는 신분을 가지신 분이니 본좌의 옆에 앉아도 누구도 뭐라하지 못할 거외다." 무림맹주는 한영영을 따뜻하게 맞이했고 자신의 옆자리에 앉게하고는 여러 가 지로 신경을 써주며 말을 건네자 한영영은 더욱 간덩이가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영영을 맹주 옆에 앉게 한 다음 저쪽 구석에 자리잡은 묵향의 싸늘 한 눈초리와 마주치자 커지던 간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도저히 저자와는 어떻게 할 수 없군...' 후... 하고 한숨을 쉰 다음 맹주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북명신공의 위력 묵향이 술을 한잔 하고있는데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 당신은 이곳에 오고도 나를 찾아보지도 않는군요." 묵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의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시오." 여인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자 묵향은 그제서야 그녀를 쳐다보고 옥령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 누군가 했더니.... 내가 멍청했군.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어." "일부러 할아버지한테 부탁해서 당신을 불러냈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에 요?" "일부러라니?" 그러자 옥령인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말했다. "할아버지 생신에 묵향 부교주를 초대한다고 정중하게 써서 보냈단 말이에 요." 그제서야 묵향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수 있었다. 교주는 묵향이 가 지않을 것을 뻔히 알고 자신의 말썽꾸러기 손녀를 미끼로 묵향을 보낸 것이 다. "이런 빌어먹을...." 묵향의 욕을 듣고 옥령인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지자 묵향은 곧바로 사과했다. "아.. 그게 아니고 지금 엄청난 혹을 달고와서 그렇소. 교주는 내가 당신처럼 그런식으로 움직이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망나니 손녀를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나를 붙였지. 저 말썽꾸러기는 장 부교주나 내가 아니면 감당할 수 가 없다나? 실지 수석장로의 수염을 불사른 악녀니까 누구도 어찌할 수 없 지." "미안해요. 괜한 부탁을 해서..." "그래 무공은 좀 정진이 있었나?" 묵향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묻자 옥령인은 얼굴이 뻘개지며 항의했다. "당신 때문에 망신당한걸 생각하면..." "왜?" "당신이 했던 얘기를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렸더니 할아버지가 빙긋이 웃으시며 뭐라고했는지 알아요?" "뭐라고했는데?" "나보고 순진하게도 완전히 속았다고 그러시더군요." "정말이야?" "예." "이상하군." "뭐가 이상하다는 거에요?" "내딴에는 꽤 잘만든 무공인데.... 실지 구결을 들려줬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텐데.... 네가 어떻게 시범을 보였는데 그랬던 거야?" 그러자 그녀가 침중한 안색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 할아버지 말씀이 맞군요. 할아버지는 제가 사형과 비무하면서 적하마 령검법(赤霞魔令劍法)을 사용하는걸 보시고 진전이 대단히 빠르다고 칭찬해 주셨죠. 제 사형은 저보다 조금 더 실력이 좋았었는데 요즘은 제가 사형보다 조금 더 좋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대로 있을수 없어서 사연을 얘기했어요. 당 신이 할아버지를 욕하며 사문의 무공을 훔쳤다고 욕하더라고 했죠." 묵향은 속이 찜찜해짐을 느끼며 물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당신이 가르쳐준 초식을 펼쳐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그대로 했죠. 그러자 할아버지는 확실히 적하마령검법(赤霞魔令劍法)이 적하무류검법(赤霞舞柳劍法)보다 더욱 뛰어나며 무서운 검법이라고 했어요. 그런다음 저에게 구결을 알려달라고 하셨죠. 제가 그건 안된다고 하니까 다시 한번 더 저보고 힘껏 초식을펼쳐보라고 한 다음 그 둘의 차이를 꼼꼼이 비교 해보더니 말씀하셨어요. 적하무류검법은 상승검법인 백류매화검법(白流梅花劍 法)을 익히는 중간단계에나 어울리는 검법이지만 이 적하마령검법은 진기의 소통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사용자의 힘을 있는대로 끝까지 끌어내니 극성까지 익히면 오히려 백류매화검법보다 무서운 검법이라고 하셨죠. 그러면서 말씀하 시기를 적하무류검법은 분명히 직접 만드신 거니 이 둘이 비슷한 것은 우연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신이 내 무공을 보고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거라고 하셨어 요. 그러면서 저보고 넌지시 돌려서 물어보면 나중에 알 수 있을거라고 하셨 죠." 묵향은 무안해서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뒤가 쿠리니까 제풀에 불고말았군. 끝까지 우기는건데.... 그래 할아범이 그렇게 칭찬한 나의 독문무공은 좀 진척이 있나?" "그런데 그게 잘 안되요. 3번째 초식에서" "그런식으로 말하면 나는 몰라. 초식을 직접 보여줘야지. 적하마령검법 따위 몽땅 잊어버린지 오래라구." 묵향의 말에 옥령인은 경악했다. "그때 당신은 극성으로 그 검법을 펼쳤다구요. 그리고 할아버지도 그렇게 높 게 평가했던 검법인데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지요?" "나는 원래 잘 잊어버려. 본교의 마공도 거의 대부분 다 잊어먹은지 오래라 구. 그따위거 기억해서 어디다 써? 말로는 잘 안되니까 나중에 비무하면서 아 르켜 주지. 자 너도 한잔 하라구." 묵향이 따라주자 옥령인은 미소지으며 술을 약간 마시다가 다급히 잔을 내려 놓고 말했다. "언니가 와요. 어서 피해요. 당신을 보면 찢어죽이겠다고 벼르고있단 말이에 요." 하지만 묵향은 정작 태연했다. "그실력으로 찢어죽여? 내가 그렇게 상대한테 당했으면 슬슬 피해가겠다." 이죽거리며 묵향이 술을 마시는데 챙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 순간 묵향의 목에 칼이 닿아있었다. 그리고 분노를 억누른 나지막한 소리. "너 잘-- 만났다...." 하지만 그녀의 복수극은 벌어지지도 못하고 끝나야 했으니 그녀가 칼을 뽑자 놀란 근처의 사람들이 벌떼같이 웅성거렸고 그걸 눈치챈 맹주의 불호령이 떨 어졌다. 맹주도 대강의 사정을 옥매화에게서 들었지만 실지 놀린 것 뿐이지 어떤 해악을 가한것도 아니었기에 그로서도 묵향에게 따질 필요를 못느끼고있 었다. 거기에 묵향이 옥령인을 대단히 잘 대해주고 있었으며 매우 강력한 검 법까지 가르쳐 줬으니 묵향이 처음부터 악의로 그녀에게 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옥매화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검집에 꼽아넣은 후 밖으로 씨근거리며 나가버렸다. 신경질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그녀의 뒷 모습을 보면서 묵향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아직 혼이 덜 난 모양이군." 그런 그를 보고 옥령인이 난처한 듯 말했다. "저한테는 그렇게 잘해주시면서 왜 언니는 그렇게 못살게굴죠? 좀 잘해주실수 없어요?" "아니. 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사람이야. 상대가 잘해주면 나도 잘해주 지만 상대가 나를 못살게굴면 나는 더 상대를 못살게 굴지. 이건 천성이니까 너가 옆에서 이러쿵 저러쿵 할거 없어." 그런 다음 술을 쭉 들이키며 말했다. "이제 그만 일어서야겠군." 그와 동시에 밖에서 매와 국이 들어오며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저 말괄량이 감시 잘해. 잘못해서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어떻게 될지 알지?"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이만 가보겠다." 묵향이 밖으로 나오자 옥령인이 따라나오며 졸라댔다. "언제 돌아가실거에요?" "잔치가 끝나는대로 곧." "그러면 이번 검술제가 있는데 참석해보지 않으시겠어요? 푸짐한 상품도 주는 데..." "그따위 대결 시시해. 죽! 검을 다오." 묵향은 묵혼검을 차면서 말했다. "맹주정도 나온다면 몰라도 내가 무슨 할짓이 없어서 일초지적(一招之敵)도 안되는 애숭이들을 잡고 놀겠어?" "그러면 3일만에 가신다면 저하고 같이 술마시면서 얘기해요. 저쪽에 작은 정 자(亭子)가 있는데 그리고 안주하고 술을 가져오게 할께요." "그렇다면 좋지. 자네들도 같이 가세." 옥령인은 주위의 시녀에게 뭐라고 지시한 다음 그들을 만박전(滿博殿)에서 그 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정자로 안내했다. 그들이 정자에 자 리잡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녀들이 간단한 안주와 술을 가져왔다. 시녀 들이 물러간 다음 옥령인은 묵향이 무의식적으로 묵혼검을 만지고있는걸 보고 말했다. "당신은 무예가 그토록 강한데 왜 언제나 검을 가지고 있죠? 그때도 심검(心 劍)을 쓰는 걸 보고 모두들 경악했잖아요." "내가 심검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아. 심검은 엄청난 내력 을 소모시킨다구. 그 위력은 겨우 어검술(御劍術)정도밖에 안되는데 말이야.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이걸 가지고 있지. 실지 나같은 경우 마음만 먹으면 상대 의 검을 뺏아서 사용할 수 있어. 하지만 이녀석은 내가 직접 주문해서 만든거 고 또 손에 익어서 다른걸 만지고싶지 않아." "좀 보여주세요. 당신 검은 한번도 자세히 본적이 없잖아요. 겉은 괭장히 수 수하게 생겼는데...." 묵향이 검집채로 넘겨주자 옥령인은 그걸 받으면서 말했다. "길이는 짧은데도 괭장히 무겁군요." 검을 반쯤 뽑은다음 바라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그때 기억이 맞군요. 왠지 검은색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좀 이상하게 생각 하고 있었는데.... 이건 현철(玄鐵)로 만든 건가요?" "응." "그래서 이렇게 무겁군요. 겉은 수수하면서 알맹이는 이렇게 호화롭다니..." 옥령인의 입에서는 하마터면 '당신과 같이..'라는 말이 나올뻔 했다. 하지만 그 말을 씹어삼키고 말을 이었다. "이렇게 좋은 보검을 이런 검집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 을거에요. 여기에 글자가 써져있네... 墨魂(묵혼) 이게 이 검 이름인가요?" "응" "아주 좋은 이름이군요. 생긴것과 딱 맞는 것 같아요. 잘 봤어요." 묵향은 검을 다시 허리에 찬 다음 수하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대 화는 거의가 옥령인과 묵향이 했고 수하들은 그들의 대화에 감히 끼어들지 못 했다. 옥령인은 검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질문을 해대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이번 생일에 좋은 금(琴)을 선물받았거든요." 그러면서 시비를 부르더니 자신의 방에서 금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런다음 묵향에게 말했다. "아주 좋은건데 좀 쳐주세요. 예?" 옥령인이 계속 사정하자 묵향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네가 먼저 치면 나도 하지." 시녀가 금을 가져오자 옥령인은 금줄을 몇번 튕겨보더니 이윽고 금을 타기 시 작했다. 금소리가 아련히 울려퍼지자 주변에 있던 호위무사들이 정자쪽을 바 라보며 모두들 귀를 기울였고 주변에서 술을 마시던 취객들도 정자쪽을 바라 봤다. 작은 정자였고 그 안에 네명이 들어가서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하고 있 었기에 그들의 흥취를 방해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저안에 있 는 사람이 마교의 인물들인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인지 아무도 근접하지는 않았 다. 옥령인은 금을 타면서 흥취가 동했는지 노래까지 불러대더니 나중에 금을 내려놓으면서 얼굴이 빨개져서 사과를 했다. "미숙한 실력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묵향과 그 수하들은 박수를 치며 치하했다. "아주 잘탔소. 전번보다 실력이 많이 는 것같은데?" 묵향의 칭찬을 받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연습을 좀 많이했죠. 이제는 당신도 타보세요." 묵향은 금을 무릎위에 올린 다음 금줄을 몇번 튕기며 조율을 한 후 금을 뜯기 시작했다. 과거부터 절묘한 내공의 조화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는데 거기에 음희의 지도까지 받아 음희로부터 본교에서 가장 금을 잘타는 분이라는 말까 지 들은 그였기에 묵향이 금을 타자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밤하늘을 타고 금음이 멀리 퍼져나가자 만박전에서 떠들어대던 소리까지 조용해졌다. 묵향의 금음에 보태어 옥령인이 시를 읊으며 더욱 흥취를 돋구었다. 청산은은수초초(靑山隱隱水 ) 추진강남초목조(秋盡江南草木凋) 이십사교명월야(二十四橋明月夜) 옥인하처교취소(玉人何處敎吹蕭) (청산은 아득하며 물길은 머나멀고, 강남 늦가을 초목은 조락(凋落)했는데. 이십사 교(橋) 회영청 달 밝은 밤, 님은 어디서 쉬며 피리를 불고 있나!) 이것은 당나라 풍류객 두목(杜牧)의 '기양주한작판관(寄揚州韓綽判官)'으로 무식한 묵향으로서야 그걸 알리 없지만 그런대로 달밝은 밤에 이런 시를 들으 니 제법 마음이 동했다. 그래서 한곡조 더 뜯은 다음 옆에 금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하... 본좌의 금솜씨는 누구도 따를 수 없지." 묵향의 뻔뻔한 자화자찬에 잘탄다는 말이 목구멍 위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가며 되려 퉁명스러운 다른 말이 나왔다. "너무 잘난체 하지 말아요. 별로 좋은 실력도 아닌 걸 가지고..." 묵향은 그녀의 면박이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오늘 자리는 이걸로 끝내기로 하지. 내일 보자구." 그러자 자신이 면박을 줘서 그런 것 같아 옥령인은 아쉬운 마음에 사정했다. "좀 더 있다가 가지 그래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저기 그 말괄량이가 나오고 있거든..." 묵향이 일어서자 모두들 그 뒤를 따라 나왔다. 높은 자리에서 점잖을 빼면서 재미없는 얘기를계속적으로 나누고있던 한영영은 묵향이 왠 여자와 시시덕거 리는 걸 보고 열이뻗쳐 더욱 열심히 맹주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하나도 재미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공력이 실려서 멀리까지 퍼져나온 묵향의 금소리가 들리자 그 감미로움에 매료되어 맹주를 꾀어 함께 묵향과 합석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묵향은 그녀가 나오자 정 자에서 걸어오더니 말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이제 주무셔야지요." 묵향의 말투는 사근사근했지만 한영영을 쏘아보는 눈초리는 공포스러운 무언 의 압력이 있었다. 한영영은 맹주를 이용해서 묵향의 말을 거부할 생각도 해 봤지만 또다시 총단으로 돌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그와 같이 돌아가야 하므로 아무리 그녀로서도 상자속에 갖혀서, 또는 묵향의 위협대로 마차에 묶인체 끌 려서 가기는 싫었다. 그래서 그녀는 황급히 맹주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소녀는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군요." "좀 더 즐기다 주무시지 않고..." * * * 다음날 아침 맹주는 산책을 하다가 바삐 걸어가는 손녀를 만났다. 그녀를 본 맹주는 반갑게 말을 걸었다. "벌써 일어났느냐?" "할아버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냐. 그런데 이번 일은 미안하게 됐구나. 교주에게 정중하게 편지를 보내 네가 원하는 그녀석을 청했는데도 자신의 손녀를 보냈으니 네 부탁을 지킬수 가 없었다." 그러자 옥령인은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벌써 이뤄 주셨는걸요. 정말 고마워요." "뭐? 이상하군. 네가 원한 사람이 그 교주의 손녀란 말이냐?" "아뇨. 부교주에요. 지금 만나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실래요?" "네 얘기를 듣고 노부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 안내하거라." 조손(祖孫)은 나란히 얘기를 나누며 한영영 일행이 묶고있는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문을 두드리자 난(蘭)이 나오며 그녀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예. 난 소저도 안녕하세요? 부교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러자 난은 생긋 웃으며 안내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지금 수련중이시거든요." "여기서도 수련을 하세요?" 그러자 난도 못말린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맞장구를 쳤다. "언제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니까요." 난을 따라가니 묵향은 가을의 따스한 햇볕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무릎위 에 검을 올린채 눈을 지그시 감고있었다. 난이 다가가 속닥거리자 묵향은 난 에게 무어라고 지시를 내린 후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난은 옥령인에게 다가 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새벽수련을 방해받고싶지 않으시답니다. 그냥 돌아가시라는데요." "저 수련은 언제 끝나는데요?" "본교에 있을때는 몇날 며칠을 계속 앉아 계시기도 했습니다. 설마 밤까지 계 속 앉아계시지는 않겠죠." 이때 지그시 묵향을 바라보던 맹주가 옥영영에게 물었다. "저자가 묵향이란 부교주냐?" "예."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 뇌전검황이 스스로 비무를 신청했다기에 별일이다 싶 었더니 노부도 맹주란 직위만 아니면 비무를 신청하고 싶구나. 이보게." "예." "자네 주인에게 노부와 술한잔 하면서 논검(論劍)할 기회를 좀 달라고 부탁하 지 않겠나?" 맹주가 그렇게 말하자 난이 매우 놀란 표정으로 살짝 맹주를 바라보더니 다시 묵향에게 다가갔다. 난이 묵향에게 가는걸 보면서 맹주가 옥령인에게 말했다. "제령문(諸令門)에서 사람이 와서 뇌전검황이 돌아가셨다고 했을 때 그에게 물어보니 검황은 저자와 밤새도록 논검을 했다고 하더군. 그러면서 제자들에 게 꼭 새겨들어 기억하라고 일렀다는거야. 그래서 노부는 제령문으로 직접 달 려가서 여러 가지 조사하는 중에 그 논검한 내용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지. 하 지만 누구도 알려주려 하지 않더군. 원체 오래전의 일이라 다 잊어버렸다는 거야. 그러면서 속으로는 사부님이 목숨을 바쳐 제자들에게 알린거라면서 외 부에는 극비로 하는거야. 비밀리에 알아보니 그때의 대화내용을 책자로 만들 어 소중히 간직하는 모양이더군.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일정수준 이상에 다다르 면 오히려 쓸데없는 비급보다 그런 대화가 더욱 소중한 거란다. 무림 최고의 비급이라 불리는 북명신공(北冥神功)도 비급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후배들에 대한 권고사항을 나열한 책이라고 봐야지. 그런 무림의 무상지보(無上之寶)가 실전되어 버린 것은 정말 크나큰 손실이야." 이때 난이 돌아와서 맹주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틈을 봐서 말했다. "논검도 하시기 싫으시답니다. 대신 조금 있다가 수련이 끝나니 옥소저께서는 남아계시다가 함께 비무를하자고 하시더군요." "그럼 폐가 안된다면 노부도 남아있다가 손녀가 비무하는걸 구경할까 하네." 이때 묵향이 일어서더니 맹주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묵향은 정중히 포권하 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맹주도 답례를 하며 말했다. "들으셨겠지만 폐가 안된다면 노부도 남아있다가 손녀가 비무하는걸 구경할까 하는데 허락해 주게나." "그러죠. 따라와라." 옥령인이 묵향을 따라 조금 넓직한 곳으로 나오자 묵향이 말했다. "어제 질문했던걸 다시 설명해봐." "그러니까 3초 적하정심에서" 그러면서 초식을 펼쳐보이며 말했다. "여기가 좀 이상해요. 구결대로 진기를 움직이는데도 잘 안되요." "그 부분의 구결을 전음으로 말해봐." "....." 묵향은 전음을 듣고 한참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거기 말고도 잘 안되는 부분이 있냐?" "예. 8초와 12초, 16초, 21초," 그러면서 잘 안되는 부분의 초식들을 펼쳐나갔다. 그걸 가만히 보고있던 묵향 이 말했다. "초식을 펼치면 이상하게 진기가 잘 안흐르는 것 같고 또 힘이 막 빠지는 것 같으며 거기에 ㄱ쳐서 피로감이 증대되는 것 같고, 또 어떤때는 진기가 역류 하는 것 같기도 하지?" "예! 맞아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그러자 묵향은 가엾다는 듯한 표정으로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가야. 그건 네 내공이 워낙 보잘 것 없어서 그런 거란다. 내공을 증진하기 위해서 좀 더 힘을 쓰면 모든게 저절로 해결되지." "이걸 좀 단시간에 해결할 수 없어요?" "방법은 있지만 그건 네 자질에 달려있지. 자 손을 줘봐. 진맥을 한번 해보 자." 묵향은 진맥을 하면서 자신의 진기를 옥령인의 몸속으로 집어넣어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한참이 지나자묵향이 기쁜 듯이 말했다. "영약을 복용하지 않았구나." "예. 언니는 먹었는데 저는 보시다시피 무공에 별로 소질이 없다며 약이 아깝 다고 안주셨어요." "영약을 안먹었다면 1번의 기회가 있지." 묵향은 자신과 옥령인이 나누는 대화를 맹주가 체통도 잃고 유심히 듣고있다 는 걸 알았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공력을 주입해줄 수 있다. 하지만 네 공력은 원체 엉망이라 별로 도움 이 되지 못해. 가장 좋은 방법은 네 쓸모없는 공력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다시 진기를 채워넣는 방법이지." "공력을 없앤다구요?" "왜? 겁나면 안해도 돼. 나는 최선의 방법만 말해주고 있을뿐. 선택은 자유니 까." 묵향이 자신에 대한 불신감을 표명하는 것 같아 약간불쾌한 듯 말하자 옥령 인은 다급히 말했다. "아뇨. 당신을 못믿는게 아니라 고통이 좀 심할까봐.." "그깟 고통이 좀 있지만 참으라구. 좀 아프겠지만 온 몸을 꿈틀대도 상관없으 니 입만 열지 않으면 돼. 할 수 있겠냐? 입을 열면 모든게 끝장이야." "해볼께요." "해볼께요가 아니라 해내야해. 안그러면 최악의 경우 무공을 상실할 수도 있 어. 알겠어?" "좋아요. 해낼께요." "좋아. 가부좌를 틀고 앉거라. 그냥 아무생각없이 가만히 앉아있어. 모든건 내가 알아서 해줄테니까. 이봐 난! 너는 호법을 서라." 옥령인의 등에 장심을 붙이고있던 묵향이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말했다. "공력은 완전히 제거했어. 이제부터 대자연(大自然)의 숨결을 네게 전해주겠 다. 그걸 내가 이끄는대로 일주천시켜라." 시간이 점점 흐르자 옥령인의 머리위에는 옥령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가 응축되어 구름모양의 형상을 만들었다. 옥령인이 고통스러운 표정인데 반해 묵향은 아무런 이상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자 옥령인의 표 정이 변해갔다. 점점 더 평안한 표정을 짓기 시작하더니 2각 정도가 지나자 완전한 평온함에 빠져들었다. 1시간 정도가 지나자 옥령인은 묵향의 유도로 머리위에 응축된 기를 코로 흡입하면서 모든 작업을 끝마쳤다. 묵향은 그녀가 일어서자 아주 기쁜 듯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건 처음이 중요한데 잘 참았다. 정말 잘했어." 그런다음 난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이제 호법은 필요없으니 쉬도록 해라." "그런데 방금 한 것 있지요. 제가 지금까지 배운 토납술하고는 좀 다른 것 같 야요.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맑게 가라앉으면서 평안한게... 이게 뭐에요?" "그건 태허무령심법(太虛無靈心法)이지. 원래 이건 처음부터 익혀야 하는데 네 무공이 워낙 정순하지 못해서 최후의 수단을 쓴 것 뿐이야. 다음부터 운공 조식은 태허무령심법만 해야해. 안그러면 지금의 고생이 물거품이 된다구. 알 겠어?" "예." "태허무령심법은 정통적인 현문의 토납술인데 오랜시간 익히면 익힐수록 더욱 정진이 빨라지는 잇점이 있고 또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므로 절대 주화입마 (走火入魔)에 걸릴 염려가 없지." "정말 이상한건 당신이 가르쳐준 무공 중에서 사파의 무공은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본교의 무공을 아무에게나 가르쳐 줄수는 없지. 그리고 그때 한 약속은 지금 도 유효한거야." "무슨 약속이요?" 묵향은 옥령인을 쥐어박으며 말했다. "무공을 익히면서 맹세한거 잊었어?" "하지만 제가 말 안해도 다른사람이.." "절대 그럴리 없어. 태허무령심법은 정파에서는 이미 절전된지 오래야. 만약 세상에 돌아다닌다면 너밖에는 범인이 없다구." "알겠어요." "대신 네 자식에게는 전수해주는 걸 허락하지. 하기야 태허무령심법은 정순함 을 그 생명으로 하기 때문에 여태까지 다른 토납술을 사용하던 사람이 이걸 사용해봤자 득보다는 실이 더 많으니 가르쳐줘봤자 상대를 주화입마 상태로 만드는거나 다름없지. 이제 쉴만큼 쉬었으니 본좌가 전수해준 적하마령검법을 한번 펼쳐보라구." 옥령인이 검법을 펼치는데 그전과는 사뭇 기세가 달랐다. 매 초식마다 웅후한 기상과 힘이 느껴졌고 그녀의 검을통해 끊임없이 붉은 노을같은 검기가 뻗어 나왔다. 그녀가 잘 안된다고 짜증을 부리던 검초들에 이르러는 검 전체가 엷 은 붉은 빛이 돌며 그녀의 수준이 미숙하기는 하지만 어기충검(御氣充劍)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매 검초마다 붉은 검기가 뻗어 나가며 그 사이로 한번씩 붉은빛 검기의 덩어리가 뻗어나가 흙과 부딪치면서 폭발을 일으켰다. 그녀의 어기충검은 초식에 따른 어기충검일 뿐 이것은 공력만 심후 하게 쌓은 후 초식에따라 내력을 운용하면 생기는 결과다. 화경에 이른 사람 이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어기충검과는 그 질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 다. 그녀의 36초식이 끝나자 묵향은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이제 제법 모양이 갖춰졌군. 이제 비무를 해보자." "좋아요." 그런다음 그녀는 자신있게 묵향을 향해 검초를 펼쳤다. 그런데 묵향은 자신의 만만했던 사형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검초의 사이사이로 검을 찔러들어왔다. 그때마다 옥령인은 경악성을 터트리며 초식을 끝까지 펼치는 것을 포기하고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묵혼검은 그녀가 검으로 막으면 다시 옆으로 꺽어져 나가며 다시 다른 헛점을 찔러댔다. 1시간 정도 지나자 옥령인의 몸은 완전히 땀 투성이었고 묵향은 숨한점 흩어지지 않고 상대를 농락하고있었다. 옥령인은 시간이 갈수록 절망감을 느꼈고 급기야는 울고말았다. 옥령인이 울 음을 터트리자 묵향이 다가가서 달래면서 말했다. "네가 초식을 잘못 운영해서 결과가 이렇게 된거야." 그러자 옥령인은 훌쩍이면서 반박했다. "저는 초식을 제대로 펼쳤다구요." "너와 내가 비무를 하면서 서로간의 거리가 어느정도였지?" "1장정도?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가까웠던지." "적하마령검법은 근거리의 적에게는 그렇게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해. 36개의 초식 중에서 근거리에 사용할 수 있는 초식은 10개 정도에 불과하다구. 거의 대부분이 검기종류를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기에 상대방의 최소한 1장 밖에 있어야 되지." "그러면 가까이 다가온 상대는 어떻게 해요?" "아주 가깝게 다가온 상대는 검을 쥐지않은 손으로 급소를 치거나 아니면 발 로 차야하지. 그리고 그보다 좀 더 떨어진 상대는 직접적으로 검으로 공격해 야 하는데... 그건 숙달이 말해주는거야. 아직도 네 응용력이 떨어져서 그건 어쩔 수 없지." "그건 속성할 수 있는 방법이 없나요?" "있긴 있어. 이건 누구나 사용하는 방법인데 근거리에서의 접근전은 눈보다는 오감(五感)을사용해야 할 경우가 많지. 그런 감각을 키우는데는 가만히 눈을 감아봐. 그런다음 소리를 들어봐. 바람소리. 새소리. 발자국소리. 수많은 소 리들이 들리지? 그걸 들으면서 그것과 너사이의 거리를 생각해보라구.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놓치면 안돼. 노승들이 면벽수련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구." "모두들 그렇게 수련해요?" "그럼. 최소한 사군자는 그렇게 수련시켰지. 덕분에 사군자의 경우 근접전에 있어서는 본교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라구. 내가 열심히 가르쳤거든." "그럼 사군자는 당신의 제자겠군요. 그리고 저두요." "아니야. 나는 절대 제자를 받지 않아. 그냥 약간씩 인연이 닿으면 내가 알고 있는 무공의 일부를 전수해줄뿐. 진정한 내 무공은 그 누구에게도 알려준 적 이 없어. 또 알려줄 생각도 없고." "왜요? 당신이 가진 무공이 그냥 사라진다면 무림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까 요?" "아니지. 무림의 복이기도 하지. 이걸 좋은 녀석이 이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피바람이 불겠지. 나만 해도 혼자서 왠만한 문파 하나쯤은 절단낼 수 있으니까."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거 아니에요?" "아니야.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평가한다구. 누구나 잡고 물어봐. 이 무식한 아가씨야. 현경(玄境)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가 어느정도의 능력을 펼치는지. 그리고 나는 그냥 현경이 아니라 내 느낌으로는 지금 거의 생사경을 눈앞에 두고있다구." "정말이에요?" "그렇지. 하지만 생사경을 눈앞에 두고있다는 것과 진짜 생사경은 달라. 예를 들면 생사경에 근접한 현경인 나와 지금 현경에 근접하고는 마지막 벽을 뚫지 못해서 저기서 귀를 기울이는 네 할아버지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큰 실력 차이가 난다구."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그 벽을 깨고 현경에 들어선다면요?" "그러면 나와의 실력차이는 현격하게 좁혀들게 되지. 그래도 현경의 아래와 위도 차이는 좀 심한 편이니까 최소한 내가 지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그렇다면 지금은요?" "네 할아버지같은 고수 10명이 덤벼도 안돼." "하지만 곧 할아버지는 현경에 들어가실거에요. 너무 그런식으로 말하지 말아 요." "아니지. 곧 현경인데도 그 마지막 벽을 못뚫은 사람이 한두명인줄 알아? 수 많은 사람이 화경에도 못 올라가는게 현실이고 그 화경에 올라간 사람들도 고 작 나까지 2명 정도야. 네 할아버지가 이 상태로 계속 현경에 머무르다 간다 고 해도 이상할게 하나도 없지." "하지만 당신의 말은 신빙성이 없어요. 그 한단계 차이를 너무 심하게 과장한 거 아니에요? 말해봐요. 내 말이 맞죠? 좀 과장이 들어간거죠?" 그러자 저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있던 맹주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이 맞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대는 북명신공을 익힌 모양이군." 맹주의 말을 듣고는 묵향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하시죠?" "내가 들은 바로는 북명신공은 대자연의 숨결을 흡수하여 자신의 공력을 높인 다고 들었어. 자네는 방금 자네의 진신내력을 저아이에게 전해준게 아니라 자 네의 몸을 통해 대자연의 기를 흡수해서 저아이에게 전해준 매개자 역할밖에 하지않았어. 그렇지 않다면 자네가 그렇게 방대한 진신내력을 방출하면서도 땀한방울 안흘릴 리가 없지. 북명신공은 천마신교에 있나?" "그 대답은 할 수가 없군요. 만약 제가 답을 한다면 맹주님을 죽여야 하거든 요. 더 이상 그건 묻지 말아주십시오." "알겠네. 충고 고맙군. 쓸데없는걸 물어서 미안하구만. 손녀와의 비무도 끝난 것같은데 같이 논검이나 하는게 어때? 내 가장 아끼는 후아주(侯亞酒)를 대접 함세." "할아버지도 참. 아침부터 술이에요?" "술 때문에 내일 당장 죽는다 하더라도 상관없어. 이정도 고수를 만나기가 어 디 쉬운줄 아냐? 이것도 기연이라구. 내 평생 기연(奇緣)이라고는 만난적이 없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한잔하기로 하죠. 하지만 영영이가 심심할테니까 같 이 데리고 가는게 좋겠습니다. 제가 옆에 없으면 무슨 말썽을 불릴지 불안해 서..." "자네 좋을대로 하게나." 자매간의 비무 맹주는 묵향을 본채의 넓직한 거실로 안내했다. 묵향은 사군자와 한영영을 데 리고 맹주를 따라갔다. 한영영도 묵향이 귀한 후아주 맛을 보게 해준다고 꼬 셨으므로 과연 그 맛이 어떤지 보기위해 두말않고 따라나섰다. 묵향일행이 거 실에서 기다리고있는데 맹주는 5명의 사람들을 함께 데리오 왔다. 그 들은 그 의 아들, 손자, 손녀 등 일가족들이었는데 그중 옥매화는 묵향이 거실에서 기 다리고 있는걸 보고 눈에 쌍심지를 돋웠지만 지엄(至嚴)한 할아버지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맹주는 각자의 자리를 정해준 다음 말했다. "오랜만에 지기(知己)를 만났으니 오늘 노부가 한턱 내겠다. 너희들도 사양말 고 많이 들거라." 그러면서도 주위에있는 그의 혈육들에게 어기전성으로 한마디 하는걸 잊지 않 았다. <대화를 새겨듣거라. 주옥(珠玉)과도 같은 논검이 될 것 같으니까..> 그런다음 묵향의 앞에 자리를 잡은 후 후아주를 한잔 가득히 부어준 후 자신 의 잔에도 부으면서 말했다. "뇌전 영감과는 어떤 대화를 나눴나? 듣자하니 밤새도록 얘기를 나눴다고 그 러던데.." "그건 제령문(諸令門)의 제자들에게 물어보시죠. 꽤 재미있는 대화였습니다." "뇌전영감도 나와 비슷한 경지던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직접 겨뤄봐야 완전히 알수있죠. 두분다 정파의 최고에 들어가시는 분들이 아닙니까?" "자네는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나?" "여러 사부들에게 배웠죠. 그중에서 유백 사부에게서 가장 많은걸 배웠습니 다." "유백? 들어본 적이 없군. 그의 검술이 그렇게 대단한가?" "아뇨. 별로 대단하지는 못하죠. 하지만 제자들을 참 잘 가르치시더군요." "제령문에서 듣고도 설마했는데 아까 령인이와 비무를 할 때 보니 그대는 특 히 근접전에 강하더군. 노부도 근접전을 벌인다면 적수가 되기 힘들거야. 어 쩌면 떨어진 거리에서는 꽤 오래 버틸지도 모르지만 근접전에서는 10초도 넘 기기 어렵겠더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냐. 자네는 초식을 초월했더군. 그정도 경지에 오르기는 참으로 힘 들지. 노부도 오랜 연습을 해왔지만 그정도까지 부드럽게 넘기기는 힘들어. 자네는 어떤 검법을 익혔나?" "여러가지죠. 본교의 검법, 불문의 검법, 도가의 검법 등 본교에 보관중인 건 거의 다 봤죠. 하지만 그게 다 그거더군요. 요즘 들어서는 이게 그건지 저건 지 헤깔려서 아예 상대가 쓰는 검법이 뭔지 잘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무초식의 검법을 구사한다 하더라도 하나의 큰 규칙성은 띄게 마련이지. 그 검법의 이름은 뭔가?" "오래전에 제가 한가지 검법을 만들었는데 그건 무상검법(無上劍法)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검법이라고 부르기는 그렇고 그냥 그저그런 무공입니다. 제가 무공을 사용하면서도 예전에는 무상검법의 형식을 따르려고 노력했지만 요즘들어서는 그것도 귀찮아져서 되는대로 펼치고있죠." "그 검법의 비급은 만들었나?" "아뇨. 처음에는 만들려고도 했지만 원체 많은 글자를 기록해야 했기에 처음 에 만들려고 여러 가지로 생각했었는데 그 양이 너무많아 끝이없을거 같아 아 예 포기했습니다." "자네는 노부가 마지막 벽을 못뚫어서 아직 현경에 못올라갔다고 했는데 그 벽이 뭔가? 알려 줄 수 있나?" "못알려드릴 것 없죠. 너무 생각이 많아서 그러시는거죠." "생각이 많다니?" "저자를 어떻게 죽이면 되지? 다음 검초는 뭘쓸까? 저자가 쓰는 검법은 뭔데 그중에서 어떤 초식을 쓰면 요런 초식으로 맞받아쳐야지... 상대는 강한 것 같은데 피하는게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상대는 수가 많으니 한명씩 꾀어내서 하나씩 죽이는게 좋을거야. 상대는 수가 많으니 이쯤에서 도망가는게 좋겠 지.. 뭐 이런것이죠." "자네말이 틀렸네. 노부는 적과 싸울 때 무아의 경지에서 자신을 잊고 대결을 하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않아." "하지만 그걸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입장일걸요? 내 수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만 너무 들어가는게 아닌가? 수하들을 후퇴시키고 나혼자서 저들을 절단내 버리는게 피해가 적겠지.... 안그래요?" "하지만 그건 수하들을 거느리는 자로서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니죠. 정말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완전히 모든걸 잊고 무아의 상태에서 오직 베고베고 또 베고 피를 덮어써야 하는거죠. 내가 지금 적을 만나 어떤 초식을 사용할 것인지 조차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순간 한순간을 나의 의지가 아닌 검이 원하는 지점을 따라가며 검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신검합일 (身劍合一)의 상태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검의 의지가 나의 의지이고 나의 의 지가 검의 의지! 이것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좋은 검법을 만들지 못하죠." "신검합일(身劍合一)이라. 노부는 이미 그 경지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겠죠. 그건 검을 맹주님의 의지에 완전히 일치시켰을 뿐. 검의 의 지는 하나도 살아나지 않았죠. 그걸 이룩하면 바로 어검(御劍)의 경지가 눈앞 에 펼쳐질겁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있던 옥매화가 냉소를 흘리며 비웃었다. "흥! 말은 잘하는군." 묵향은 싸늘하게 옥매화를 쏘아보며 말했다. "모르면 옆에서 닥치고있어. 이 어르신이 말씀하는데 젖비린내 나는 것이 까 불기는.." 그러자 옥매화가 대노(大怒)해서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네녀석이 남자라면 한번 비무를 해보자. 너같은 쓰레기가 그렇게 고수라는걸 본 낭자는 믿지 못하겠다." "너같은 것 하고 겨뤄봐야 이 어르신의 품위만 손상될 뿐이야." "미친녀석! 겁먹은 주제에 둘러대기는..." "정 그렇다면 상대해주지. 나와라." 옥매화는 검을 검집에 넣고는 앞장서서 나가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못나갈줄 알고? 빨리 따라와!" 옥매화가 앞장선 가운데 넓직한 공터로 나온 후 옥매화는 씨근거리며 검을 뽑 았다. "검을 뽑아라. 네녀석에게 본맹의 무공이 어느정도인지를 알려주지." "흥! 네년이 상대할 사람은 본 어르신이 아니라 옥령인이지. 이봐! 네가 비무 를 해봐." "저는.... 저는... 언니는 저보다 훨씬 더 강해요." "괜찮아. 이제부터 내가 네게 전음으로 지시를 할테니 그대로 해라. 이 비무 를 잘 기억한다면 대단히 높은 성취를 얻을 수 있을거야. 내가 말하는대로 재 빨리 펼쳐야 한다. 준비되었느냐?" "예." "본인은 옥령인 소저의 몸을 빌려 무공을 사용하려 하오. 물론 차력대나인수 법(借力大拿引手法)을 사용하는건 아니고 그냥 전음으로 지시만 할거외다. 여 기서 옥령인 소저가 진다면 그건 본좌가 진 것으로 생각해도 무관하오. 그럼 시작해보기로 하지." 차력대나인수법은 자신의 공력을 남에게 빌려주어 (借力) 그의 몸을 완전히 사로잡아 (大拿) 원하는데로 이끄는(引) 수법이다.(手法) 허공을 격하여 공력 을 전해 상대를 움직이므로 시술자의 공력이 대단히 많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바 대로 움직임을 펼쳐나갈 수 있다. 그렇지만 묵향은 전음으로 지시만을 하겠다고 했으므로 당연히 약간의 시간차이가 생기게 되고 또한 사 용할 수 있는 무공도 옥령인이 알고있는 것으로 한정되므로 옥매화에게 있어 서는 대단히 좋은 조건이었다. 옥매화는 그래도 옥령인이 묵향의 지시로 움직인다는 생각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내력을 끌어올려 상대가 검을 뽑기를 기다렸다. 옥령인은 천천히 검을 뽑은 후 옥매화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언니, 그럼 이제 시작하기로 해요." 옥매화가 옥령인의 예에 답하는 걸 보고 묵향이 말했다. "예법은 생략하고 곧바로 시작합시다." 묵향의 말은 예의상 헛초를 교환하기 번거로우니 바로 실초를 사용하자는 말 이다. <곧바로 달려나가면서 6초, 피하면 그방향으로 따라붙으며 12초> 그와 동시에 옥령인의 몸이 앞으로 쏘아나갔다. 옥령인은 옥매화에게 뛰어나 가는 상태에서 초식을 펼쳤다. "적하비룡(赤霞飛龍;핏빛 노을속에 용이 난다.)" "흥! 겨우 적하무류검법(赤霞舞柳劍法)따위로.... 악!" 옥매화는 처음에 공격해 들어오는 초식을 보고 자신이 잘 알고있는 적하무류 검법인줄 알았지만 순간적으로 그것이 검무가 아닌 패도적인 검초로 피빛 노 을과 함께 몇줄기의 강인한 검기가 쏘아오는 걸 보고 경악성을 지르며 피했 다. 그와 동시에 검초를 펼치려 했지만 한번 잃은 선기를 잡을수는 없었다. 옥매화가 옆으로 피함과 동시에 더욱 가까이 따라붙은 옥령인은 두 번째 초식 을 펼쳤다. "적하매개(赤霞梅開;핏빛 노을속에 매화 꽃이핀다.)" 그와 동시에 6번의 찌르기. 공력이 충만히 실려 검에서는 약간 푸른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옥매화가 이 기습적인 공세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 이 적하무류검법을 아주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래 적하무류검 법에서는 실초와 헛초를 포함해 24번의 찌르기가 들어가지만 그걸 6번으로 줄 인만큼 모두가 실초였으며 더욱 깊이 찔러들어왔다. 그녀가 가까스로 오른쪽 으로 피해가자 묵향은 옥령인에게 말했다. <선채로 22초> 옥령인은 묵향의 지시대로 옥매화가 가까스로 피해나가자 제삼초를 날려왔다. "적하낙일(赤霞落日;핏빛 노을속에 해가 떨어진다)" 그와 동시에 옥령인의 검에서 하나의 붉고 큰 검기덩어리가 붉은 노을사이를 빠져나와 엄청난 속도로 옥매화에게 덮쳐왔다. 옥매화는 더 이상 수세에 몰리 면 재미없겠다는 걸 느끼고 맞받아 치기로 작정했다. "백매낙월(白梅落月;흰 매화꽃잎이 달밑에서 떨어진다.)" 그녀의 자세는 불안했지만 그런대로 훌륭히 검초를 펼쳤고 검기의 덩어리와 그녀의 검초에서 뿜어낸 검기가 충돌해 폭발성을 울렸다. 서로가 그 충격에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옥매화는 뒤로 물러선 후 외쳤다. "이건 엉터리에요. 저자는 분명히 자신의 공력을 전해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번 초식으로 저 파렴치한 인간이 차력대나인수법을 사용해 공력을 보냈다는 게 확실해졌어요." 그러자 묵향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헛소리 하지마라. 그건 분명히 옥령인의 공력이야. 안그렇습니까? 맹주" 그러자 맹주는 약간 안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 옥령인은 오늘 부교주의 도움으로 엄청난 내력의 증가를 거 뒀지. 대신 부교주가 지금까지 적하무류검법(赤霞舞柳劍法)에서 발전시킨 적 하마령검법(赤霞魔令劍法)만 쓰고있으니 잘 해보도록 해라." 두 자매의 공방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옥령인이 묵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지만 언제나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기에 옥매화가 그렇게 밀리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50여 초식이 교환되었고 묵향이 조합해 나 가는 초식을 보면서 맹주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하면서 그 초식의 운용에 감탄했다. 아마 직접 묵향이 옥령인과 같은 공력으로 적하 마령검법을 펼쳤다면 5초도 되기전에 끝났겠지만 옥령인은 실전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시종 묵향의 주문대로 부드러운 초식의 연결을 하지 못한다는데 치 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50초가 넘어서자 이대로 장기전으로 들어가면 불리함 을 깨달은 묵향이 연속공격을 주문해댔다. <따라붙으며 6,2,22초를 동시에> 그러자 미꾸라지처럼 피해나가는 옥매화를 향해 검을 들고 뛰어들면서 외쳤 다. "적하비룡(赤霞飛龍),적하유천(赤霞流天),적하낙일(赤霞落日)" 옥매화는 그 엄청난 공세를 신법과 백류매화검법으로 가까스로 헤쳐나가며 자 신의 실력을 있는대로 발휘해나갔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겨우 지시만 받는다 고 동생이 이정도로 괴력을발휘할줄은 짐작도 못하고 있었던터라 내심 당황 하고 있었다. '여태껏 검만 알고 살아온 내가 겨우 버티기만 할 수 있을줄이야... 우선 공 격을 해대면 령인이가 겁에질려 지시를 어기게 되지 않을까?' 일단 생각을 굳히자 몸을 돌보지 않고 강공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백매천심(白梅天沈), 백매일절(白梅一切), 백매유향(白梅流香)" 그녀의 검기와 검풍이 사방으로 몰아쳐대자 급기야 실전경험이 떨어지는 옥령 인의 눈에 공포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녀는 묵향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마 음대로 몸을 놀려 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거기에 그녀는 묵향의 지시에 따 라 강공을 펼칠 때 차마 언니에게 독수를 쓰지 못하고 손속에 인정을 두어 몇 번이나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 후라 언니가 이토록 물불을 안가리고 독수를 펼 쳐대자 심약한 그녀로서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자신의 지시로는 어떻 게 되지 않음을 느낀 묵향은 100초식 정도 지시를 해대다가 입맛을 다시며 말 했다. "본인이 졌습니다. 저 바보같은 맹꽁이는 내말을 듣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 군요." 그러자 옆에서 보고 그 속사정을 짐작한 맹주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묵향을 위로했다. "저아이가 심약해서 그런거니 꼭 자네가 진게 아니네. 20초 정도 싸웠을 때 상대가 피할 길목을 골라 연속된 검초로 적을 몰아넣는 그 방법은 본좌로서도 감탄했다네. 그런데 저아이가 차마 독수를 못써서 잠시 미루는 사이 매화가 빠져나간거지. 저 둘이 자매간이 아니면 자네가 이겼을거야." 그러나 일단 재미가 없어져버린 묵향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진건 진거죠. 그러니 더 이상 헛소리하지 않고 제 숙소에 들어갈까 합니다. 그럼." 맹주로서도 그를 말릴 수 없었고 일이 이런식으로 풀려버려 묵향에게 더욱 많 은 질문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운명과 옥매화의 경솔함에 울분이 터졌지만 이미 떠나버린 화살이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묵향은 그런대로 3일동안 한영 영을 잘 통제하여 본타로 돌아왔다. 한영영은 원체 묵향에게 혼찌검이 나서 그런지 돌아올때는 별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구출작전의 결과 묵향은 교내로 돌아온 다음에도 계속적인 수행을 거듭했다. 묵향은 거의 대부 분의 시간을 집과 소나무 숲 사이를 왕복하고있었다. 요즘들어서는 소나무숲 보다는 집에있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때때로 음희 설벽약이나 유백 사부를 방문하는 걸 제외하고는 언제나 집안에만 박혀있었다. 그건 언제나 있었던 일 이었으므로 사군자로서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런식으로 하루이틀 세 월이 흘러가 5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 묵향은 갑작스럽게교주의 호출을 받았 다. 하지만 언제나와 같이 회의실이나 집무실이 아닌 십만대산의 높직한 절벽 에 만들어진 정자에서였다는 점이 달랐다. 묵향이 부근에 도착하자 교주의 호 위대는 정자부근에 매복하고있었으며 정자안에는 한명도 없었다. 묵향이 경공 술을 전개하여 정자에 오르자 교주는 반갑게 맞아들였지만 어딘지 근심이 있 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오게나. 실은 긴박한 일이 있어 그대를 불렀다네." "무슨 일입니까?" 교주는 다급하게 말했다. "장 부교주가 일을 벌였어." "모반을 꾸몄다는 겁니까?" "아니야. 더 나쁜거야." "예??" "그는 무림맹주의 두 손녀를 납치했서 비밀리에 가둬두고 있어." "뭐라구요?" "이로서 무림맹과는 매꿀 수 없을정도로 깊은 골이 파인 셈이지. 그래서 이걸 좋은 방향으로 해결해야만 해. 될 수 있다면 조용하게. 최악의 경우에는 장인 걸을 죽여서라도 말이야." "그가 왜 두 손녀를 납치했단 말입니까?" "그는 모반을 일으키기에 앞서 본좌의 이목을 그쪽으로 돌려놓을 속셈으로 아 주 극비리에 납치에 성공했고 그녀들은 지금 장인걸의 숙소 주위에 갖혀있네. 본좌는 그 일대에 천라지망을 펼쳐두고 비밀리에 감시하고있지만 그녀들의 생 명이 위태롭기에 손을 아직 못쓰고 있는 형편이지." "그러면 저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자네가 사군자를 이끌고 잠입하여 그녀들을 탈출시켜야만 해. 장교주의 숙소 주위는 그의 수하 300명이 지키고있네. 장인걸의 교내 지위상 무턱대고 집을 수색할 수는 없어. 거기에 그자가 눈치채고 먼저 빼돌린다음 책임을 물어오면 그때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구." "하지만 300명의 고수라면 그렇게 대단한 숫자도 아닌데 이 기회에 장인걸을 없애버리면 어떻습니까?" "그럴수도 없어. 심증만으로 그를 처단해버리면 교내에서 그의 처리에 대해 의심을 품고 따지는 무리들이 생겨날 수 있지. 그래서 본좌의 생각으로는 먼 저 인질들의 안전이 우선인지라... 여기를 보게나." 그러면서 교주는 한 장의 지도를 품속에서 꺼냈다. "이건 십만대산 부근을 아주 정밀하게 그려놓은 지도야. 장인걸의 집은 이곳 이고 자네가 여기 들어가서 그녀들을 구출해야 해. 하지만 그녀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아마 지하에 있는 밀실에 감금되어있지 않을까 하 고 의심하고 있다네. 아주 조심해서 처리해야 해. 그녀들을 구출한 다음 이쪽 으로 그녀들을 이끌고 오면 되네. 거기에는 본좌가 장인걸을 비롯한 고수들을 초대하여 술을마시고 있을테니 그녀들의 신변이 확실히 확보되는 대로 이리 오면 그 자리에서 장인걸을 문책하여 잠재우도록 하세나." "왜 이렇게 일을 힘들게 하려고 하십니까? 그냥 쳐들어가서 목을 베어버리면 끝나는 일을..." "원래 무리를 이끌다보면 이렇게 귀찮게 일을 처리할줄도 알아야 하네. 그래 야 수하들이 본좌를 믿을테고 그래야 본교가 유지되지. 서로가 믿지 못하면 아무리 본교라도 금새 무너져 내리게 되지. 자네한테 부탁한 일을 제대로 처 리할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제대로 처리하도록 하죠. 그럼 언제 잠입해 들어가면 됩니까?" "3일 후 장인걸을 불러낼거야. 그때 해주게." 최종 결정이 나자 묵향은 포권하며 외쳤다. "존명!" 2일 후 묵향은 사군자와 함께 장인걸의 사택으로 향했다. 마교에서는 그 사택 의 규모를 거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므로 장인걸의 경우 거의 요새를 방 불케하는 거대한 사택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게 할당된 300명의 사사혈시마대 (邪死血屍魔隊)를 거느리고 사택을 방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교의 정예였으 므로 묵향으로서도 섣불리 안으로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일단 사택 부 근에 자리를 잡은 다음 경비가 허술한 밤시간을 이용해 진기를 이용해서 극음 (極陰)의 장력으로 벽을 가루로 내며 살며시 파고들어가는데 성공했다. 극양 의 장력과는 달리 극음의 장력은 외부는 멀쩡하고 내부를 소리없이 가루로 만 들 수 있다. 익히기는 어려우나 그 무서움은 오히려 극양을 뛰어넘는 것이다. 묵향은 그 무음(無音)을 이용해 밤에 뚫고 들어가는데 성공했으며 난과 죽, 매는 탈출을 돕기위해 남아있고 살수출신의 국(菊)만을 데리고 잠입했다. 살 수란 원래 표시안나게 침투, 먹이가 올때까지 소리없이 구멍을 뚫고 몸을 숨 긴 상태에서 장시간을 버티도록 특수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둘 다 살수출신이 라 묵향과 국은 손발을 맞춰 재빨리 파고들어간 다음 내부를 정탐하기 시작했 다. 가장먼저 지하실로 뚫고 들어간 묵향과 국은 거의 호흡조차 멈춘 채로 주 위의 기척을 살폈다. 그러자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교대시간 안됐나?" "이제 2각 남았어." "그렇게 악을 써대더니 이제 좀 조용해졌군. 두 계집 중에서 언니라는 년이 정말 독종이란 말이야." "그러게나 말일쎄. 하지만 그 상판이나 몸매는 정말 끝내주더군. 고놈의 성질 만 죽이면 정말... 흐흐.." "군침 흘릴 거 없어. 저런 계집이 어디 우리한테까지 차례가 오겠어? 높은 분 들끼리 시식하고 첩으로 삼겠지." "옆에 가만히 있는 계집도 정말 괜찮지 않아? 그런데 왜 혈도를 봉한 다음 묶 기까지 해서 밥을 안에까지 가져다 주게 만드는지...." "왜 좋쟎아? 자네는 아직 밥을 안줘서 모르겠지만.... 흐흐.... 밥을 앞에 가 져다 주면서.... 흐흐....." "왜그러나? 갑자기 뭐가 그렇게 좋다고 음흉한 웃음을 짓기는.." "그 두계집 정말 유방이 정말 토실토실하면서도 탄탄하더군. 눈앞의 떡인데 표시안나게 만져는 봐야지... 흐흐..." "정말 그런 방법이 있었군. 김가(金家)녀석 나한테 인심이나 쓰는 듯한 표정 으로 자기가 밥을 주겠다고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묵향으로서는 더 이상 들어볼것도 없었다. 일단은 국에게 지시해서 목표가 눈 앞에 있으니 쉬고있다가 내일 낮이되면 움직이자고 지시한 다음 눈을감고 명 상에 들어갔다. 묵향이 기다리는 사이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고 드디어 때가 되었다. 묵향은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국에게 일렀다. <자네.. 검술말고 권법이나 장법도 좀 할줄아나?> <예. 권법은 좀 알고있습니다. 거기에 소림의 철수공(鐵手功)도 좀 익혔죠.> <저들에게 검을 써봤자 별로 타격을 주지못해. 거의 강시와 같은 강인한 신체 와 회복력을 가지고 있다. 검집 자체를 이용하거나 손을 이용해 상대의 머리 를 바숴라.> <알겠습니다.> <먼저 내가 뛰어들어서 두놈을 작살내겠다. 너는 통로를 장악하여 내가 인질 을 구출하는 사이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라.> <예.> <가자!> 묵향은 그 말과 동시에 쏘아져나갔다. 묵향은 지루한 보초시간을 매꾸기위해 농담을 즐기고있는 두명의 고수를 향해 달려들어 순식간에 머리를 부숴버렸 다. 보초의 머리와 묵향의 벌겉게 달아오른 듯한 손이 부딪치자 뇌수가 터지 면서 살타는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이거 혈수마공은 냄새가 지독해서 못쓰겠군. 다음부터는 소수마공을 사용해 야겠어.' 언뜻 생각을 하면서도 쓰러진 보초의 옷속에서 열쇠를 찾아낸 다음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두 여자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묵향 은 비수를 꺼내어 둘을 묶고있는 오철(烏鐵)로 만든 수갑과 족쇄를 끊어버렸 다. 그런다음 그녀들의 혈도를 풀어준 다음 전음으로 물었다. <둘 다 몸은 괜찮소?> 그러자 옥매화의 의외로 부드러운 음성. <덕분에 살았어요. 몸은 괜찮아요. 그냥 미혼약에 당한 다음 혈도를 막은 후 잡혀왔기에 혈도가 소통되니 살 것 같군요. 그건 그렇고 우리들한테도 뭔가 무기를 좀 줘요.> 묵향은 해치운 두 고수의 몸을 살짝 문을 열고 바라봤지만 그들은 장법이나 권법 등 전통적인 마공을 익힌 고수라 그런지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 서 묵향은 할 수 없이 묵혼검을 뽑아 옥매화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부드럽게 사용해 주시오.> <알았어요. 나중에 돌려 드리죠.> <이건 그대가 사용하시오.> 묵향은 자신이 가진 비수를 옥령인에게 건네준 후 그녀들을 이끌고 빠져나왔 다. 일단 인질이 구출된 다음 묵향에게는 거리낄게 없었다. <자! 이제 조용히 나갑시다.> 묵향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묵향의 손에서는 엄청난 양강의 장력이 뻗어나 갔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하실에서부터 비스듬히 윗쪽으로 장력이 쓸고지나가며 거대한 구멍을 만들었다. 그의 돌연한 행동에 옥매화가 기가찬 듯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헛소리말고 따라와" 묵향은 앞장서면서 벌떼처럼 달려드는 300여명의 사사혈시마대를 헤치워갔다. 상대는 거의 2초도 안되어 묵향에게 머리가 터지며 숨을 거뒀다. 아무리 귀혼 강신대법이라도 머리가 터져나간 이상 그 머리를 복구하기 위해 머리통 대신 명령을 내릴 신체기관이 없는 것이다. 묵향은 순식간에 30여명을 때려죽이며 사군자와 합류하였고 사군자가 그녀들을 호위하자 이제는 거칠 것 없이 주위 를 돌아다니며 덤벼드는 사사혈시마대를 상대했다. 묵향은 50여명을 더 해치 운 다음 그들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교주일행과 합류했다. 묵향이 교주가 지정한 장소에 도착하니 교주는 장인걸 이하 주축 고수들과 술 자리를 벌리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인걸은 묵향이 두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나타나니 조금 경악한 듯 외쳤다. "묵향 부교주. 그녀들은.... ?" "당신도 잘 알텐데?" 그러자 교주 이하 십여명의 고수들이 그녀들에게 다가온 다음 물었다. "너희들이 맹주의 손녀들이 맞냐?" 옥매화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하자 교주는 장인걸을 향해 외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그러자 장인걸은 광소를 터트린 다음 외쳤다. "크하하하.... 천하가 손앞에 있었는데.... 내가 죽더라도 네녀석만은 용서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장인걸은 묵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묵향 또한 그에 사양하지 않 고뛰어들었다. 장인걸은 진기를 한계까지 뽑아올리며 강공으로 나왔다. 먼저 묵향과 부딪치기 직전에 극성의 흑살마장(黑殺魔掌)을 뿜었다. 묵향이 검풍을 뿜어 막아내자 1장 거리까지 접근한 그는 흑시마조, 혈수마공 등을 사용하며 몇초식을 교환한 후 뒤로 튕겨나오며 검을 뽑아들고는 외쳤다. "받아랏!" 그와 동시에 수십가닥의 검강이 뿜어져 나왔다. 묵향이 손을 휘젓자 그의 손 에서 강기들이 뻗어나가며 장인걸의 강기막을 뚫고서 그의 몸에 박혔다. 피와 살이 튀었지만 장인걸은 멀쩡하게 서있었고 곧이어 그 상처는 재빨리 아물어 버렸다. 묵향은 장인걸에게 결정타를 입히기 위해 장인걸에게 접근해 들어가 다가 곧바로 등에 와닺는 강력한 충격을 느꼈다. 묵향이 순간적으로 뒤돌아보 니 교주는 쓰러져있고 그 옆에 있는 능비계 부교주가 무음 무형의 마음장(魔 陰掌)을 이용해서 그에게 기습을 가해온 것이다. 묵향은 갑작스런 기습에 상 당한 내상을 입고 대노하여 장인걸을 버려두고 능비계를 덮쳤다. 능비계는 묵 향이 뿜어낸 강기의 세례를 받고는 엄청난 충격에 뒤로 피를 뿜으며 날아갔 다. 묵향은 교주를 일으키며 말했다. "괜찮으시오? 교주! 정신차리시오." 그와 동시에 묵향은 엄청난 충격을 단전으로 느끼며 뒤로 날아갔다. 묵향은 옥령인과 옥매화가 있는 지점까지 충격으로 밀려간 다음 그녀들과 부딪치면서 간신히 몸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묵향은 피를 토하면서 외쳤다. "교주. 왜 암습을?" 그러자 교주는 서둘러 일어서서 방어자세를 갖추며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정말 대단하군. 아무리 기습을 하기위해 8성의 공력밖에 사용하지 못했지만 자전강기(紫電剛氣)를 정통으로 맞고도 살아있다니..." 교주의 말을 들은 묵향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올라 외쳤다. "네녀석을.. 으악!" 묵향은 교주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진기를 끌어올리는 도중 단전으로 파고 든는 강렬한 통증에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그의 아랫배로 익히 자신이 보아 왔던 검은색의 검신이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묵향이 뒤를 바라보자 옥매화 가 묵혼검으로 묵향이 딴곳에 정신을 팔고있는 사이 기습을 가한 것이다. 묵 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녀석이 너무 강하고 오만하기에 자초한 일이니 날 원망하지 말아라. 이번 일은 너를 없애기 위해 할아버지와 교주가 만들어낸 합작이지. 정파에서는 너 를 없애버리는 것이 마교와의 균형을 잡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마교에서는 오 만하고 아무에게나 무공을 가르쳐대는 너를 없애고 싶어했거든? 그래서." 옥매화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묵향이 어느새 그 몸을 이끌고 옥 매화에게 접근했는지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들정도의 빠른 동작이었다. 옥매화 는 묵향에게 결정타를 날린 후 방심하다가 멱줄을 잡힌 것이다. 묵향은 옥매 와의 목을 그러쥔 상태에서 허공에 들어올리며 교주를 보고 외쳤다. "교주. 이 계집의 말이 사실이오?" 그때 묵향은 또다른 엄청난 고통이 심장을 통해 파고드는걸 느꼈다. 그와 동 시에 묵향의 손은 반사적으로 그 상대를 향해 파고들었다. 뱃속 깊이 묵향의 손이 파고들어간 옥령인은 입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미소지으며 말했다. "할아버지의 말을 저는 어길 수가 없었어요. 용서하세요. 당신과 했던 맹세는 지켜진 것 같군요. 저는 맹세를 어기고 할아버지에게 모든 걸 말할 수밖에 없 었..." 묵향은 옥령인이숨을 거두자 이왕 내친 것 옥매화의 목뼈까지 부숴버린 다음 시체를 던졌다. 하지만 그의 피해는 너무나도 엄청났다. 묵향은 이곳에서 살 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함을 깨달았다. 그는 최후의 방법으로 역혈수라마 공(逆血修羅魔功)을 끌어올려 진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여러차례의 암습으로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고 또한 단전이 파괴되었기에 그가 공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이걸 사용하면 단시간은 공력의 회복이 가능하나 몸 이 버티지 못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급속도로 육체가 사그라들며 죽음에 이 르게 된다. 묵향은 손에 푸른 강기를 뿜어대며 교주를 향해 덮쳐갔다. 그러자 교주는 뛰 어드는 묵향을 향해 외쳤다. "가랏!" 그와 동시에 교주의 장심에서는 가공스러운 극성의 자전강기(紫電剛氣)가 뿜 어져 나왔다. 하지만 묵향은 그 강기를 뚫고 앞으로 나왔다. 공포스러운 묵향 의 기세를 보고 주변의 고수들까지 묵향을 향해 장풍을 날렸고 급기야 그들의 합공에 밀린 묵향의 몸은 튕겨나가며 뒤로 날아갔다. 정신을 잃기전에 묵향은 자신의 몸이 날아가다가 누군가의 손에 잡힌 것을 알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잡아랏!" "놓치지 마라!" 묵향의 몸을 안은 국이 최고의 속도로 경신술을 전개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묵향 부교주. 그대는 우리들 살수에게 있어서는 거의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저는 당신을 모시게 된다는 걸 알았을 때 정말 기뻤고 또 당신이 저에게 무공 을 가르쳐 줄 때 너무나도 고마웠습니다. 당신을 헤치우기 위해 이번에 수많 은 고수들이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예상을 뒤엎고 빨리 쓰러 진 것은 주위의 사람들을 너무 믿은 탓이겠지요. 교주가 당신을 없애고자 마 음먹은 것은 이번 무림맹 방문 후부터였습니다. 당신이 맹주에게 현경으로 들 어가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걸 안 교주는 당신을 없애기로 결정했고 맹주에게 연락해서 그 자매를 불러들인 겁니다. 죄송합니다. 부교 주. 빨리 당신에게 말해야 했지만 저는 교주의 함구령(緘口令)을 거역할 용기 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쓰러지는 걸 보고서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나선겁니 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때 국의 뒤에서는 추격하는 마교의 고수들이 쏘아대는 암기들이 계속 날아 왔다. 묵향은 꺼져가는 의식속에서도 국에게 중얼거렸다. "용서하네..." 국은 죽어라고 도망치면서 지속적으로 몸을 좌우로 움직여 뒤에서 날아오는 암기들을 피하고 있었지만 원체 많은 숫자가 날아왔으므로 그것들을 모두 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덩치큰 것들이나 공력이 비교적 많이 실린 것들은 피했지만 몸에 격중되어도 충분히 호신강기로 버틸 수 있는 것들은 그냥 맞으 면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공력도 이제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달려온 거리는 거의 25리. 이제 몇 리만 더가면 탄령하(嘆靈河) 다.' 국은 탄령하라 이름붙여진, 유속이 엄청나게 빨라 마치 저승에 떠도는 영혼들 이 탄식하는 소리를 내는 것 같다고 이름붙여진 탄령하에 묵향을 던져넣을 작 정이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묵향이 이곳에서 살아날 가능성은 거 의 없었지만 그냥 이대로 있으면 무조건 죽을것이 확실하므로 그 작은 실낱같 은 가능성에 한번 걸어보기로 작정하고 도망쳐온 것이다. 사군자는 이미 묵향 제거계획을 알고 있었기에 묵향이 멍청하게 탄령하로 도망갈 리 없다는 점을 들어 마교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많은 길목과 나룻터를 중심으로 천라지망 이 펼쳐져 있다는 걸 알고있었다. 그렇기에 국은 실낱같은 가능성에 모험을 걸어본 것이다. 국이 탄령하에 도착하기 직전 십여명의 고수들이 그곳에 진을 치고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입은 옷으로 보아 수라마참대(修羅魔斬隊)의 고수들이 분명했 다. 이번 묵향을 죽이는 것에 마교는 전 세력을 동원했다. 묵향은 마교의 장 악에 뜻이 없었기에 교내에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그래서 사군 자가 교주의압력을 받아 그를 배신하자 그 엄청난 마교의 주력부대(主力部 隊)들이 움직이는데도 그 사실이 묵향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 만 묵향의 무공이 어느정도 무서운지 익히 아는 교주인지라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전 세력을 동원하고도 결정타를 입히지 못하면 그를 없앤다는 것이 불가 능함을 알고 무림맹주를 설득하여 그의 손녀들을 빌려온 것이다. 그의 두 손녀를 빌려오기는 쉬웠다. 묵향을 죽이는 일이라고 하자 원체 묵향 과 감정이 많던 옥매화는 자원해서 나섰고 옥령인의 경우 마음이 여려 맹주의 강압에 그들을 도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원래 옥령인은 맹주의 아들 옥진호 (玉振湖)의 첩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그래서 맹주는 예전부터 무공에 열심인 옥매화를 편애하여 마교에서 옥령인을 원하자 선뜻 보내겠다고 약속했던 것이 다. 그런데 그걸 ㅇ들은 옥매화가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우겨 자매가 함께 온 것이다. 묵향이 입은 타격중 이 자매가 입힌 것이 가장 컸다. 교주도 묵향이 묵혼검을 옥매화에게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사사혈시마대(邪 死血屍魔隊)에 무장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고 옥매화에게는 그에게 무기를 달라고 조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기를 안줄 경우를 대비해 그녀들 은 각기 1자루씩의 비수를 가지고 있었지만 묵향이 그녀들에게 준 마교의 명 장(明匠)이 현철로 만든 묵혼검과 비수와는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묵향을 암습할 때 호신강기를 꿰뚫을 수 있는 비수를 그녀들이 사용한 다면 그 예기(銳氣)를 묵향이 알아챌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국은 강가에서 10여명의 고수들을 보자 바로 그들에게 뛰어들었다. 상대방도 각자 무기를 빼들고 국과 묵향을 끝장내려고 덤볐지만 국은 처음부터 그들과 싸울 생각 자체가 없었다. 국의 등은 이미 진기가 다해 호신강기가 엷어지면 서 날아와 박힌 수많은 암기로 엉망진창이었다. 국은 수라마참대(修羅魔斬隊) 의 고수들에게 접근하자마자 묵향을 탄령하로 던지면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암기들을 던졌다. 상대방이 암기를 피하는 그 순간 그도 따라서 탄령하로 뛰 어들며 세심하게 신경써서 묵향의 옆에서 떨어져내렸다. 수라마참대의 고수들 은 묵향과 국을 향해 암기와 장력을 뿜었지만 그건 고스란히 국이 모두 다 맞 았다. 이렇게 해서 묵향은 실낱같은 생명을 유지한 채 급류에 실려 떠내려가 게 되어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의 기적 10여평 남짓한 제법 아담한 방안에 몇 사람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들은 모두 어떤 한 인물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열과 성을 다 쏟고 있 있었다. 침상 위에는 한 사내가 누워있었다. 그 사내는 한쪽 얼굴은 그런대로 미남이라고 보기에는 좀 모자르지만 그렇다고 추남도 아닌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반쪽은 완전히 뭉개져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정도 였다. 사내는 엄청난 고통에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곧이어 이어지 는 더욱 큰 고통에 신음하며 다시 누워야만 했다. 이때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 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사내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 니 처음에는 희미한 기척만이 보였으며 눈앞을 어른거리는 대강의 형상만 보 일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이 점점 더 또렷한 형상을 만들어가 기 시작했다. "이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군. 기적이야. 빨리 대인께 알리게." "예." "이걸 좀 마셔보게나." 그런다음 상대는 사내에게 쓴 한약을 줬다. 그 상대의 부드러운 눈빛을 보며 그 사내는 상대가 입에 대주는 한약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런다음 그는 다시 누워 잠이들었다. 한동안 그가 한 일은 약먹는 일과 잠자는 일밖에 없었다. 거의 1달이란 시간이 다시 지나자 그 사내는 그런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 다. 그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자 한 남자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아주 근 엄하게 생긴 학자풍이 풍기는 사람으로 수염을 곱게 길렀으며 상당히 고급 옷 감을 사용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누워있는 사내를 보고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는가?" "....." 누워있는 남자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그는 옆에있는 의생을 한번 쳐다 본 다음 다시 누워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낚시하면서 건졌다면 알겠나? 꿈에 아주 큰 잉어가 걸려 올라오 기에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더니 이건 잉어가 아니라 인어(人魚)를 낚아버렸 군. 자네 이름은 뭔가? 이름... 이름 말일세." "이름?" 누워있는 사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시 질문하자 상대는 의생을 바라 보며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가 기억을 못한다는게 사실이구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왔는 데...." "너무 그렇게 아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한 야인(野人)을 이정도까지 구해주 셨는데... 그도 고마워 할것입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닐세. 저자의 몸에서 뽑아낸 검은 저자의 것이 확 실한 것 같나?" "예. 그 검(劍)은 기이하게도 도(刀)처럼 적당히 휘어진 형상을 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아주 짧더군요. 하지만 대단한 명검입니다. 한번 구경을 해보시겠 습니까?" "그러세나." 그러자 그 의생은 옆에 치워둔 자그마한 검을 그 사내에게 내밀었다. 사내는 검집에서 검을 약간 뽑아본 다음 말했다. "과연... 대단한 명검이군. 그런데 이자는 어찌해서 자신의 검에 단전을 찔렸 을까?" "그건 소생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 심장에도 비수가 박혀있었는데 비수 가 빠지지 않은 덕분에 출혈이 적어 살았지요. 침술로 그의 심장이 아주 서서 히 뛰게 만든후 비수를 뽑아내고 명약으로 다스렸는데... 거의 살아날 가능성 이 없는데도 살아났습니다. 그의 생명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 비수도 이자의 것일까?"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비수의 집은 그의 품에서 발견되지않았습니다. 대 신 그의 몸에서 옥패(玉牌) 하나와 이것 하나만 발견됐습죠." 그런다음 기이한 문자가 적혀있는 천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어디의 문자인가?" "그건 소생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야 학문이 짧아서..." "자네가 모른다면 됐네. 혹시 그의 신분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될지 모르니 내 가 보관하기로 하지. 이정도 보검을 가지고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무림에서 도 잘 알려진 인물일텐데 혹시 자네는 들어본 적이 없나? 과거에는 자네도 무 림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했잖나?" "저야 그렇게 대단한 고수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자의 얼굴은 대단히 젊지만 그의 이빨이 누런걸로 보아.... 실지 젊은이는 이정도로 이빨이 상하지 않거 든요. 혹시나 말로만 들어본 반노환동(反老還童)을 한 고수가 아닌가 하고 의 심하고 있습니다." "설마하니 그정도 고수일라구." "아닙니다요. 그 墨魂(묵혼)이라는 글자가 음각된 보검이나 이 비수. 그 외에 온 내장이 뒤틀릴 정도의 심한 내상(內傷), 그리고 아무리 제가 침술이 좋다 하지만 전신 혈맥(穴脈)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소생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는 데도 살아나는 대단한 생명력과 치유력. 이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고수가 아니면 힘들죠. 거기다 그의 상처도 대부분 무공에 의해 입은 상처입니다." "대부분?" "예. 물에 흘러내려오며 바위에 찍힌 상처를 제외하면 모두라는 뜻입니다." "자네가 보기에 어느 문파의 무공인 것 같소?"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그 장력의 독랄함을 가지고 말한다면 아마 사파(邪 派)의 것인 것 같지만 정파(正派)라 자처하는 문파에도 이정도로 악독한 무공 을 약간씩 가지고 있기에 짐작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이게 무기에의해 입 은 상처가 아니고 대부분이 장력을 통해 입은 것이기에 더욱 파악하기 힘들 죠." "참 안됐군. 얼굴을 보니 그런대로 잘생긴 얼굴인 것 같았는데 완전히 절반은 떡이 되었으니...." "바위에 부딪치며 생긴 상처로는 이만하면 아주 작은 것이죠. 거기에 뼈들도 여러군데가 부러져나가 지금 겨우 접골(接骨)이 된 상태인걸요." "만약 이자가 무림인이라면 무공을 회복할 수 있을까?" "무공을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대신 어쩌면 기억을 회복한다 면 자신이 익힌 비급의 내용을 알려줄수는 있겠죠." "호... 맞아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군. 나는 이만 일이 있어서 나가볼테니 잘 돌봐주게." "예." * * *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병신이라고 불렀다. 그는 기억을 완전히 상실하여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다 한쪽 다리를 절었으며 왼손마저도 약간 이상하게 붙어있었 다. 그 병신은 상장군(上將軍) 옥상(玉桑) 대인 나으리의 저택에서 말을 돌보 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옥상 나으리는 자를 청영(淸永)이라 부를 만큼 대쪽처 럼 꼿꼿한 위인이었는데그의 아버지 옥영진 대장군의 후광이 아니었으면 아 마 그놈의 청렴한 성격 덕분에 간신배 나으리들의 모함을 받아 일찌감치 몸통 과 목이 분리될 가능성이 다분할 정도로 융통성(融通性)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위인이었다. 거기에 옥청영 나으리는 지금까지 군무에만 종사해왔고 현 감 등 약간의 아부성 뇌물도 필요한 관직을 거치지 않은것은 그에게는 더욱 운이 따랐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병신은 마굿간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성격이 그 런지 몸이 불편한데도 열심히 일을했다. 이 옥청영 나으리의 자제분은 4명이 있었는데 둘은 사내였고 둘은 계집아이였다. 계집아이들은 병신의 모습을 한 번씩 훔쳐보기는 했으되 그건 어디까지나 경멸이 어린 시선이었다. 첫째 아들 은 무림의 한 방파에 가서 무술수련을 하고있었고 둘째 아들인 막내는 제법 의젓한게 도령의 풍도가 풍기는 아이였는데 이 아이가 말타는 걸 좋아하여 자 신의 애마(愛馬)를 잘 돌봐주는 병신을 좋아해서 자신이 먹다남은 간식이 있 으면 손수건에 싸두었다가 병신에게 가져다 주곤 했다. 그리고 첫째 아씨는 그런대로 명문의 대가집 여인네처럼 다소곳하며 순해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둘째 아씨는 꽤 팔팔한 성격으로 말타기를 즐겼고 어쩌다 성질이 나면 말이 더럽다는 트집을 잡아 그 병신을 괴롭히면서 기분전환을 하곤 했다. 그 병신이 집에 들어온지도 어언 6개월이 흘렀다. 병신의 힘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6개월여가 흐르자 그 병신은 보통 장정 2명이 힘을 합쳐야 겨우 들수 있는 것들을 혼자서 들어 옮겼다. 그 때문에 하인들은 힘든 일이 있으면 그를 불러 시킨 다음 술을 약간 사줬는데 병신은 특히나 고량주를 좋아해 고 량주를 사준다면 그 많은 짐나르기를 혼자 하라고 해도 좋아서 열심히 날라댔 다. 그러다 보니 자연 그 모습이 옥청영 나으리의 눈에도 띄게 되었고 그에 놀란 옥청영 나으리는 마굿간을 책임지는 하인을 불렀다. 하인이 굽신거리며 다가오자 옥청연은 그 하인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마굿간에서 일하는 그 젊은이 정말 힘이 좋은거 같더군. 그래 전부터 힘이 참 좋던가?" "아닙니다요. 처음에는 닭한마리 잡을 힘이 없더니 이게 하루이틀 지나면서 이상하게도 비쩍 마른놈이 힘이 세지더니 요즘들어서는 집안의 온갖 무거운 물건은 그녀석이 다 나르고 있습니다요." "그래? 이상하군. 그래 그 젊은이는 일은 잘하나?" "아이구. 말도 마십시오. 기분이 내켜야만 하죠. 말 돌보는 일은 그래도 열심 히 하는데 그 외의 일은 아예 손도 안대죠. 거기다 자신이 하기싫다고 생각하 면 무슨짓을 해도 안합니다. 물건 나를때는 그놈이 원체 고량주를 좋아하는지 라 술로 꾀어서 일을 시키고 있습죠." "자네 말을 들으니 그는 꽤 좋고 싫은걸 많이 가리는 모양이군." "예. 하루는 한참 바쁜데 ㄴ을 잃고 국화(菊花) 꽃을 바라보고 있기에 소인이 화가나서 엉덩이를 한번 차줬을 정도로 국화를 좋아합죠. 물어보니 웬지 뭉클 한 기분이 들고 따스한 느낌이 들어 좋다고 하더군입쇼." "그러면 그는 꽃을 아주 좋아하는 모양이군." "아닙니다요. 그녀석이 가을부터 지금까지 있었으니까 알아낸 사실인데 매화 (梅花)를 끔찍이도 싫어합니다. 꽃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고 이상하게 싫다고 그러더군요." "그래? 그럼 그 외에도 싫거나 좋다고 하는 게 있나?" "그 외에는 거의 그저그런 편입죠. 그렇게 좋아하지도싫어하지도 않습니다만 원체 황소고집이라 자기가 한번 싫다고 작정하면 뭘로 꾀어도 안듣습니다. 그 래서 처음부터 고량주 줄테니 부탁좀 들어줄래? 하는 식으로 꾀어서 나중에 일거리를 일러주면 왠만한 일은 다 합죠." "이수량(李修良) 의생 댁에 사람을 보내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해주게. 그리고 의생이 도착하면 그 젊은이좀 나한테 보내주게." "알겠습니다요." "그럼 물러가보게나." "예, 나으리." 이 의생이 도착하자 옥청영 나으리는 그를 환대한 후 말했다. "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 그대를 불렀소." "이상한 일이라뇨?" "그 젊은이가 무공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소?"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없을겁니다." "그런데 그의 힘이 점점 세진다니... 이게 아마 공력(功力)이 돌아오는 증거 가 아닐까 해서 그대를 불렀소. 좀 있으면 그가 올테니 진맥좀 해주시구려." "예." "마침 저기 오는군. 이리 오너라." 그 병신이 다가오자 옥청영 나으리는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이른 후 이 의생 에게 진맥을 시켰다. 이 의생은 진맥을 한참 하더니 말했다. "기괴(奇怪)한 일이군요. 내력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럼 언제쯤 회복될 것 같소?" "지금 그의 몸에는 상당한 내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몸의 여러곳의 혈 도가 파괴된 채인지라 아직도 몸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예전 과는 달리 거의 상당수의 혈도가 다시 뚫렸군요. 이상한 일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막혔거나 파괴되었던 혈도가 자신의 내력으로 뚫릴 가능성 이 없는거요?" "없다고 봐야죠. 안그러면 왜 그렇게도 무림인들이 주화입마(走火入魔)를 겁 내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자는 저절로 뚫렸으니.... 어쩌면 저자가 뚫었는지도 모르죠." 그와 동시에 이 의원의 주먹이 재빨리 병신의 면상을 향해 날아갔다. 이건 그 가 충분히 공력을 실어 날린 주먹질이기에 맞으면 소(牛)도 뻗을 정도로 강맹 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자 그 병신이 그의 주먹을 간발의 차로 피하며 순간적으로 의생의 면상을 향해 자신의 오른주먹을 날려왔다. 의생은 반격까 지 있을지는 예상하지 못한지라 경악성을 지르며 왼손으로 병신의 주먹을 흘 려버린 후 본격적으로 초식을 사용하여 상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질적으 로 초식을 사용하여 권을 날리자 그 병신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한쪽 다리 가 말을 잘 안듣는지라 고스란히 5대를 얻어맞고 말았다. 쓰러진 병신이 몹시 아픈 듯 맞은 곳을 주물러대는 걸 보며 이 의생이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처음의 주먹을 피했지?" "너는.... 너는... 나쁘다. .... 왜 나를 때리냐? 나는 잘못한게... 없어." 병신이 억울한 듯 씩씩거리며 말하자 이 의생은 한숨을 쉬면서 옥청영 나으리 에게 말했다. "대단하군요. 모든 기억을 소실한 지금도 여태까지 쌓아둔 수련에 따라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다니. 거기다 그의 주먹질에는 대단한 공력이 실려 있었습 니다. 그의 몸 동작 하나하나에 공력이 실려있습니다. 지금 자세히 보니 모든 걸 알겠군요." "동작 하나하나에라니. 그렇다면 저자의 모든 동작이 초식이란 말이오?" "믿을 수 없지만 사실입니다. 많고 적고의 차이가 있을뿐.... 그의 움직임에 는 공력이 실려있습니다. 세상에 들어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의식중에 자신의 몸 동작 모든 것에 공력이 실려있 다면.... 뜻이 일어나면 진기가 흐르고 진기가 흐르는데 따라 몸이 움직인다 는 그 무림에서 말하는 현묘(玄妙)한 경지(境地)를 말하는 것이오?"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믿어지지 않는 일이 현경의 고수는 정파의 기둥으로 추앙받던 구휘대협 뿐입니다. 만약에라도 이자가 현경의 고수였다면 벌써 무림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실지 이자가 현경의 고수일리는 없죠. 하지만 어쨋던지 그에 근접한 경지까지 접근했던 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옥청영 나으리가 생각에 잠긴 듯 하자 잠시 말을 않고있던 이 의생이 갑자기 말했다. "참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뭐요?" "그에게 무공을 가르켜 보는겁니다. 혹시나 예전에 한번이라도 익힌적이 있는 무공이라면 반응이 약간 다를겁니다. 그러다보면 그의 사문(師門)을 알아낼수 도 있겠죠." "그것 참 좋은 의견이오. 그런데 그렇게 잡다한 무공을 알고있는 사람이 있을 까?" "큰 나으리께 부탁해 보시죠." "아버님도 지금 눈코뜰새없이 바쁘셔서 내 부탁을 들어줄 시간이 없을거야. 지금까지도 찬황흑풍단의 잃어버린 세력의 반도 회복을 못한 상태라..... 참! 비급을 좀 보내달라고 하면 되겠군. 그리고 각 파의 몇명의 고수들을 좀 보 내달라고 해서 가르쳐 보는 방법도 있었군.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자 네가 좀 가르쳐 볼수는 없겠소?" "예. 좋습지요. 한번 해보겠습니다." 다음날부터 병신에 대한 무공수련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의생의 성질을 건 드리는 것은 그 병신이 도무지 무공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신 이 아는 한도 내에서 여러 가지 검법(劍法)을 가르쳐도 보고 장법(掌法), 지 법(指法), 조법(爪法), 권법(拳法), 각법(脚法) 등을 가르쳐 봤으나 도무지 관심이 없는 상대를 가르치는데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꾀를 내어 그 병신이 있는 주변에서 막내아들에게 무공을 가르쳤다. 막내 아들은 평소에 병신에게 잘 대해주어 꽤 신뢰를 받고 있었기에 그를 통해 병신을 꼬실려고 생각한 것이다. 막내아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동안 병신은 부근에서 구경도 하고 국화를 보기도 했다. 아직 국화가 필때가 아니라 파릇하게 잎만 무성할 뿐 봉오리조차 없는데도 병신은 국화를 좋아했고 자주 국화를 돌보는데 시간 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이날도 이 의원은 막내아들의 무공을 열심히가르치고 있었다. 요즘들어서는 꽤 잘 따라했으므로 그로서도 관심도 안보이는 병신보다는 이 붙임성있는 아이에게 흠뻑 빠져들어 막내를 가르치는데 솔솔한 재미를 느끼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는 그날 그 아이에게 토납법(吐納法)을 가르치고 있었다. "단전에 호흡을 천천히 끌어들였다 내뱉는 것을 토납술이라 하는데 거기에 더 하여 그때마다 온몸에 기를 일주천시키는 방법에 따라 수많은 운기행공법(運 氣行功法)들이 존재한단다." "일주천이 뭐에요?" "그러니까 기를 어떤 정해진 혈도를 따라 몸 전체를 한바퀴 돌리는 것을 일주 천이라 하지. 기를 통과시켜야 하는 혈도는 각 문파의 운기조식법에 따라 조 금씩 다르다. 그리고 언제 숨을 내뱉고 마실지도 세심하게 정해져있어서 만약 조금이라도 틀리면 큰 화를 당할 우려가 있다." "그런데 왜 꼭 호흡을 도중에 정확히 분배해야 하죠?" "그 이유는 대자연의 기를 호흡을 통해 몸속에 끌어들여...." 그 병신은 자연의 기라는 말을 듣고는 뭔가 떠오르는 듯 머리를 감싸쥐며 괴 로워했다. 그 병신은 날마다 꾸는 악몽 때문에 언제나 밤을 겁냈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자 그는 온 몸을 떨며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악몽의 내용은 언제나 거의 비슷했다. 그런데 그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깨고보 면 악몽의 내용을 기억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악몽의 시작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거기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이 그의 몸에 시 커먼 칼을 찔러넣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대화의 내용 은 알 수 없고, 그냥 분노, 공포와 후회... 살아야 한다는 생각 등 수없이 많 은 불가사이한 감정들이 그에게 솟아올랐다. 그런다음 끝은 언제나 국화꽃이 그를 포근히 감싸주는 것이지만 곧이어 그 국화꽃도 악당들의 손에 찢어져 나 가고 그다음은 그 공포에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병신은 구석진 곳에 숨어들자 좀 안심이 되기 시작했고 마음이 안정되자 다시 자신에게 공포를 안겨줬던 단어를 머리에 떠올렸다. '대자연의 기? 대자연의 기를 끌어들여..... 대자연의 기를 끌어들여....' 한번 맴돌기 시작한 그 단어들은 그의 마음속을 끊임없이 감싸돌기 시작했고 그는 어느새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어갔다. 그러면서 그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기가 병신의 몸에 모여들며 어느 한순 간 단전에 차오르자 그 기는 순식간에 깨어진 단전을 회복시켜버렸다. 그런 후 그 엄청난 기는 몸속을 용솟음치며 차례차례로 막히거나 파괴된 혈도를 뚫 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일어났지만 이미 병신은 그 고통을 잊 을 정도로 깊은 세계에 들어가 있었다. 온 몸의 모든 혈도가 뚫리자 그 다음 에는 몸 전체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의복은 재가되어 흩날 렸고 피부도 새카맣게 타버렸다. 이 병신이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기의 회오리 를 즉시 감지한 이 의생은 놀라서 다가온 다음 병신이 뭔가를 행하며 그 엄청 난 기를 방출하고 있는 걸 보고 질리고 말았다. '정말로 이자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고수로구나. 저건 아마 말로만 듣 던 환골탈태(換骨奪胎)인 모양인데.... 환골탈태에 이르려면 거의 화경의 경 지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저자는 진짜 화경의 고수란 말인가?' 어느덧 병신의 기는 점점 잦아들기 시작해 밖으로 뿜어나오던 기는 사라져버 렸다. 그런 후에도 오랫동안 병신의 눈은 떠지지 않았다. 그걸 보고 혹시나 죽은게 아닌가 해서 막내아들이 만져보려 하자 이 의원이 그의 손길을 막으며 말했다. "그를 방해하면 안된다. 조금이라도 잘못되어 주화입마(走火入魔)를 당하면 지금의 그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어." "그렇게 주화입마가 무서운거에요?" "그럼 잘못하며 생명을 잃거나 병신이 되기도 하지. 고수들은 그 나름대로 폭 주하기 시작하는 기를 한곳에 가두어 생명을 구하는 기법들을 알고있지만 저 자는 그걸 모두 잊어버렸기에 잘못되면 바로 생명을 잃게 된단다." 이윽고 그 병신은 눈을 떴다. 그런다음 구석에 숨어있는 자신을 두 사람이 뚫 어져라 보고있음을 느끼고 약간 챙피해져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고 일어섰 다. 그런데 그의 의복이 가루가 되어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그의 피부위를 덮 고있던 검게 탄 부분이 떨어져 내리면서 백옥과도 같은 피부가 드러났고 얼굴 한쪽을 흉악하게 만들고 있던 상처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걸보고 가장 놀 란 것은 작은 아들이었다. 병신은 자신이 완전히 발가벗은 상태라는 걸 깨닫 자 나는 듯이 달려가서 자신의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병신 이 아니었다. 이 일이 있은지 며칠이 지나자 병신이라 불리던 사내의 모든 이빨이 몽땅 다 빠져버렸다. 그런다음 새로 하얗고 예쁜 이빨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가 한 동안 이빨이 빠져나간 상태로 돌아다니자 사람들은 그를 할아범이라고 놀려대 더니 시일이 지난 후 그의 이빨이 완전히 다 자라나자 그가 제법 미남이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더욱 젊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이 이지경에 이르자 옥청영 나으리는 자신의 아버지인 옥영진 나으 리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그러자 만사를 제쳐놓고 옥영진 나으리께서 달려왔 다. "어서 오십시오, 아버님." 오랜만에 만난 아들은 본체만체 하고 옥영진 나으리는 먼저 '그'의 행방부터 물었다. "네가 말한 그는 어디있느냐? 한번 만나보고 싶으니 이리 불러오너라." "그전에 한번 보실게 있습니다. 청아!" "예, 아버님" "묵혼검을 가져오너라." "예." 그러더니 둘째딸은 마지못해 묵혼검을 그의 아버지에게 줬다. 말괄량이인 이 아가씨는 제법 무공을 익히고 있었고 아버지의 방에 놓여진 묵혼검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려 몇날 며칠을 졸라대서 겨우 빼앗았던 것이다. 그는 그걸 옥영 진 나으리에게 주면서 말했다. "처음 그자를 발견했을 때 단전에 박혀있었는데 그자가 허리에 차고있던 검집 에 꼭 맞는걸로 보아 아마 그자의 검인 것이 확실합니다." 옥영진 나으리는 검을 뽑아보며 탄성을 질렀다. "아주 좋은 검이다. 조금 짧은 것이 흠이군. 여기에 음각으로 써져있군. 墨魂 (묵혼)이라고... 이건 보기 드물게 완전히 현철(玄鐵)로 만들었구나. 거기다 이 섬세한 솜씨는 정말 보기드문 명장(明匠)이 만든거야." 그런다음 묵혼검의 검집을 살펴보며 말했다. "아주 투박한 듯 하면서도 고고한 기상이 어려있으니 이 검집도 또한 이 검을 만든 사람이 같이 만든 듯 하구나." "아버님. 그렇다면 이건 누가 만든것인지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자의 심 장에 박혀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탁자에서 하나의 비수를 꺼내어 옥영진 나으리에게 건넸다. "비수의 집은 제가 부근의 장인에게 부탁하여 만들었습니다. 그자의 몸속에서 비수의 집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흠 이건 墨影(묵영)이라 음각되어있군. 이 묵영비(墨影匕)를 만든자의 세심 하고도 섬세함은 과연 묵혼검을 만든자의 실력과 비슷해. 거기다 묵(墨)자를 같이 넣어만든 이름이나 그 손잡이의 모양까지 거의 유사함이 많구나.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한벌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자는 기억을 잃고있으나 본능적으로 대단한 경지의 무공을 몸으로 기억하 고 있는 듯 합니다. 환골탈태하여 자신의 몸을 스스로 치료하는 걸로 보아 최 소한 화경의 고수라고 생각됩니다. 거기다 그가 매화를 아주 싫어하며 국화와 고량주를 아주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한번 자신이 싫다고 생각되면 돌이키지 않는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매화라.... 너는 매화란 말을 듣고 떠오르는게 없냐?" "글쎄요...." 옥청영이 멋적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옥영진 나으리가 아들을 나무라며 말했다. "멍청한 녀석! 너는 현 무림맹주가 누군지도 모르느냐?" "그거야 무극검황(無極劍皇) 옥청학(玉靑鶴)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의 절기는 뭐냐?" "백류매화검법(白流梅花劍法).... 아! 제가 멍청했습니다." "이걸로 그자에 대한 정보를 최소한 무림맹에만은 흘러들어가게 해서는 안된 다는 것을 알 수 있구나. 그의 사문(師門)은 어디인 것 같더냐?" "그건 직접 보시고 짐작해 보시죠. 소자로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 다. 거기에 이수량(李修良)이라는 의생이 있는데 그는 무림인 출신이라 그에 게 부탁하여 여러 가지로 알아봤지만 도저히 추측이 불가능했습니다. 여봐 라." "예." "가서 국광(菊狂)이를 데려오너라." "예." "국광이라니?" "그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니까 소자도 몰랐는데 모두들 그를 병신이라고 부른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요즘들어 모든 상처가 없어져버리자 그가 국화를 광적으로 좋아한다고 붙여준 이름인 모양입니다." "국광이라... 그것도 괜찮군." 이때 밖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르셨습니까요?" "들어오게나." 옥영진 나으리에게 있어서 국광과의 만남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우선 그자 의 몸과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숨기지 않는 정심한 기에 먼저 압도되는 자신 을 느낀 것이다. '정말 대단한 고수! 그렇지만 저정도에 이르면 기를 숨기는데 이자는 숨기지 를 않는구나. 하지만 몸 속으로 갈무리되어 미미하게 흘러나오기에 고도로 무 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이 알아채기는 힘들거야.' "자네가 국광인가?" "예. 모두들 그렇게 부릅죠." "자네, 노부를 도와 일해줄 수 없겠나?" "그건 나으리의 부탁이십니까? 아니면 주인 나으리의 부탁이십니까?" "노부의 부탁일세." "그렇다면 싫습니다." "왜?" "저는 이 집이 좋고 말들도 좋거든요." 일단 국광이 말을 뱉어버린 후인지라 옥청영은 기급을 하고는 국광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진땀을 빼기 시작했다. "자네. 아버님을 따라가게." "왜 제가 저 나으리를 따라가야 합니까?" "그건..... 그건.... 자네를 나보다는 아버님이 필요로하기 때문이지. 아버님 을 잘 모실 수 없겠나?" "주인 나으리의 부탁이라면 들어드립지요. 대신...." "대신?" "그 부탁은 주인 나으리가 살아계신동안만 지켜질 것입니다." "만약 내가 도중에 죽는다면?" "제 생명의 은인은 주인 나으리 한명 뿐.... 그 누구도 아닙니다. 그 다음은 제가 마음내키는 대로 할겁니다. 그점은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네의 생각이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내가 오랫동안 살아있다면 자 네에게는 손해가 아닌가?" "그거야 어쩔 수 없는 노릇입죠." "아버님, 언제 떠나실 건지요?" "내일 아침에 떠날거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서로간의 회포(懷抱)나 풀자구 나." "예. 자네는 나가보게나. 아참! 이건 자네것이니 가져가게." 국광은 검은색의 검과 비수를 보면서 약간 망설이는 것 같더니 물었다. "이게 제것이 확실합니까?" "그렇네. 이제와서 말이네만 이 검은 자네의 아랫배에 박혀있던 것이야." 그 말을 들은 국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옥청 영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검집은 자네의 허리의 검대(劍帶)에 묶여있던 것이고 그런데 두개가 완전히 일치하는 걸로 보아 이 묵혼검은 자네의 것이 확실하네. 그리고 이 묵 영비의 경우 자네의 심장에 박혀있었는데 집은 자네에게 없었지만 그래도 묵 혼검을 만든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만든 것이 분명해. 그러니 그것 또한 자네 것이야. 그러니 자네가 가져가게. 이 둘은 대단한 보검으로 이만한걸 다시 구 하기도 힘들걸쎄." 국광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며시 묵혼검을 약간 꺼내봤다. 검은색의 검신이 빠져나오자 국광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꿈에서 그렇게 오랬동안 보아오며 의문을 품었던 그 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묵혼이라는 이름이 전 혀 낮설지 않은 걸로 보아 아무래도 자기것이 분명한 것 같기에 검대(劍帶)를 허리에 찬 다음 비수를 품속에 넣었다. 국광이 주섬주섬 챙기는 모양을 보던 옥청영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이것도 자네 것일쎄." 그러면서 서랍속에 보관해 뒀던 천조각과 옥으로 섬세하게 다듬은 자그마한 옥패(玉牌)를 가져와 국광에게 내밀었다. "그 외에 다른 종이조각들도 자네 품속에 들어있었지만 원체 오랜시간 물에 불은 탓인지 그게 뭔지도 알 수 없었네. 그런데 이상한건 자네 품속에 돈이 한푼도 없다는 점이었어. 어쩌면 은표나 금표만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종이는 완전히 물에 녹아버렸으니 알수는 없는 노릇이지. 오직 있는건 이것 뿐이었네. 이 천조각에는 기이한 문자가 써져있는데 지금은 자네가 읽을 수 없겠지만 나중에 기억을 되찾는데 보탬이 될지도 모르니 소중하게 간직하게. 그리고 이 패는 아마 자네의 신분을 나타내는 걸거야. 붉은 옥에 용이 살아있 는 듯 생동감있게 조각되어있는데 대단한 솜씨의 작품이지. 잘 간직하다 보면 아마 자네의 과거를 알아내는데 보탬이 될지도 모르네. 거기에 자네의 몸에 꽂힌 것들이 자네의 검과 비수라고 한다면 아마 자네가 아주 잘 아는 사람에 게 암습당했을 가능성이 크니 될 수있다면 자네를 드러내지 않는게 좋을거 야." "마음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여태까지 열심히 일해준 보답일쎄." 하지만 국광은 옥청영이 내미는 은자를거절했다. "생명을 살려주신것만도 고마운데 그것까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요. 그리고 제 가 그냥 집을 나서는 것도 아니고 큰 나으리를 따라가는데 먹고 자는데 불편 이 없을테니 돈은 필요없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런다음 황급히 인사를 하고 국광이 나가버리자 옥청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님. 아무래도 한가지 확실한 건 저자는 완전한 무인일 것이라는 점입니 다. 돈 자체를 우습게 보는 것 같으니까요.... 국광을 잘 부탁드립니다. 여태 까지 같이 지내면서 알아본 바로는 처음부터 살살 꼬시는 방법이 최고죠. 어 떤 말을 꺼냈을 때 거부하겠다고 말한다면 그걸 뒤집는다는 건 불가능할겁니 다. 그러니 그자 좋은대로 그냥 놔두는게 좋을겁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고 해도 그 타고난 성격은 아마 지속되는 모양이지요. 아마 과거에도 저자는 제마음대로에 융통성이 하나도 없었을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다면 저정도의 고수가 이름도 없이 자신의 검에 찔린채로 떠내려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되살아난 북명신공 다음날부터 국광에게는 완전히 다른 인생이 펼쳐졌다. 그가 아는 거라고는 말 을 돌보는 것 뿐. 그런 그에게 옥영진 나으리는 무공을 익혀라! 뭘 해라 하면 서 많은 지시들을 해댔고 처음에 국광은 그 말을 따라하는 것 같더니 나중에 는 지겨워졌는지 모든 지시를 한귀로 흘려버린 다음 빈둥거리기 시작했다. 하 지만 조금 더 지나자 빈둥거리기도 질렸는지 이사람 저사람 찾아다니며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옥영진 나으리는 국광이 글을 모조리 잊어버렸다 는 걸 눈치챘다. 그런 그에게 무공비급을 던져줬으니 짜증을 낼만도 한 것이 었다. 옥영진 나으리가 여러명의 우수한 선생들을 붙여줬고 국광의 지식은 급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번 하려고 마음먹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 냈고 죽자고 책을 읽어대는 바람에 옥영진 나으리로서는 그의 내력을 몰랐다 면 과거에 서생인줄 착각할 정도였다. 그는 여러 가지 책들을 읽어대더니 나중에는 병서(兵書)를 읽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진법(陣法)을 기록한 서적들을 열심히 읽어댔다. 몇날 며칠을 매일 서고(書庫)에서만 생활하니 옥영진 나으리가 그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 정도였 다. 그는 읽고 읽고 또 읽어대더니 끝내는 서고안의 모든 책을 다 읽은 다음 에야 서고에서 나왔다. 국광이 서고에서 나왔다는 말을 수하에게서 전해들은 옥영진 나으리는 국광이 만나고 싶어 수하에게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서고에서 나오더니 국화가 심어진 후원에서 열심히 국화만 들여다 보고 있습 니다. 속하가 불러올까요?" "아니.. 내가 가보지." 옥영진 나으리가 후원에 들어서자 국광은 아직도 계속 국화를 들여다보고 있 었다. 옥영진 나으리는 그를 방해하기가 미안해서 기척을 숨기고 뒤로 다가섰 다. 국광의 3장 뒤로 다가섰을 때 갑자기 국광의 신형이 번쩍이더니 옥영진 나으리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국광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오른손을 뻗어 옥영 진 나으리의 멱줄을 거머쥐려고 하다가 순간 그가 옥영진 나으리라는 사실을 알고는 급히 초식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섰다. 국광이 물러선 다음에도 옥영진 나으리의 창백해진 안색은 회복되지 않았고 그제서야 사지가 떨려왔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보면서 국광이 퉁명스 럽게 말했다. "그렇게 기척을 죽이고 제 뒤에 접근하지 마십시오." "자네의 무공이 정녕 놀랍군. 그게 무슨 무공인가?" "그냥 본능적으로 펼쳤을 뿐입니다. 저 자신도 제가 방금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니까요." "그렇다면 그게 무의식중에 펼쳐진 것이란 말인가? 그런 자네가 어찌해서 등 뒤로 칼을 맞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그건 저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국광이 자신을 바라보는 걸 보고 옥영진 나으리는 자신 이 호의로 국광의 뒤에 조심스럽게 다가간 것이 치명적인 실수라는 것을 깨달 았다. 국광이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니 아마 한동안은 조심해야 그 의심이 풀릴것이라 생각했다. 옥영진 나으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가 너무 열심히 국화를 바라보기에 부르기가 미안해서 조용히 다가간 것 뿐일세. 그런 눈초리로 보지 말게나. 이번에 온건 혹시 황궁무고(皇宮武庫)에 들어가볼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려고...." "황궁무고란 뭡니까?" "황궁안에 무림에서 모아들인 무공비급을 쌓아둔 장소를 이르는 말이지. 한번 가서 읽어보고 마음에 드는 무공이 있으면 가져다 익혀도 상관없네. 대신 황 궁 3대무공은 자네가 익힐 수 없어." "한번 읽어보는거야 뭐 별 상관없겠죠. 그 황궁무고란 건 어디에 있습니까?" "내일 노부가 안내해주겠네." 다음날 국광은 황궁무고로 들어갔다. 황궁무고로 국광을 넣은 다음 옥영진 나 으리는 감시자를 보내 그를 지속적으로 살펴보며 그가 어떤 비급에 특이한 반 응을 보이는지 알아보게 했다. 혹시나 눈에익은 비급이 있다면 그는 당연히 그 비급에 반응을 보일것이라는 생각에 착안했기 때문이다. 옥영진 나으리의 의도대로 며칠 후 국광을 감시하기 위해 보낸 수하가 돌아와서 보고했다. "그는 열심히 비급을 읽고있습니다." "그래.. 어디 특정 비급에 관심을 보이던가?" "아닙니다. 그냥 한쪽 귀퉁이에서부터 계속 읽고만 있습니다. 한권의 비급을 읽고나면 그 옆의 것을 이런식으로 밥먹는 시간과 자는시간, 용변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그냥 읽고만 있습니다." "그자가 비급을 보고 초식을 흉내내보던가 하는 행동은 하지 않던가?" "아뇨. 그냥 계속 제자리에 앉아 읽고만 있습니다. 도대체가 무공을 익힐 생 각이 없는 것 같던데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냥 계속 놔두게나. 시간이 지나면 좀 달라질지도 모르지." "예." 하지만 옥영진 나으리의 예상은 빗나갔다. 국광은 그냥 계속 비급을 읽어댔고 10개월의 시간이 흐르자 비급의 절반 정도를 읽는데 성공했다. 그러고도 그는 계속 읽어댔고 2년이 흐르자 무고안의 3,000여 가지 비급을 몽땅 다 읽어버렸 다. 비급을 모두 다 읽어버린 후에도 뭔가 달라진 점이 있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옥영진 나으리의 저택으로 돌아와서 방에 틀어박혀있거나 아 니면 그가 가장 제일 좋아하는 장소인 국화밭에 가 있었다. 국광에게 거의 2 년여의 시간을 들였는데도 아무런 진척이 없자 옥영진 나으리는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국광은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는 느긋한 표정으로 꽃도 피지않은 국화를 보고있었다. 전에 한번 뜨거 운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라 옥영진 나으리는 짐짓 헛기침을 하여 인기척을 내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셨는가?" "....." "그래 무고에 들어갔다 나오니 뭔가 깨닫는 점이 있나?" "....." 상대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속이 천천히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광은 그의 수하도 아니었고 자신의 아들이 그냥 돌봐주기를 부탁해 서 붙어있는 상태니 성질을 부릴수도 없어서 그는 다시 조금 더 큰 소리로 물 어봤다. "그래 무고에 들어갔다 나오니 뭔가 깨닫는 점이 있나?" "... 예. 책이 정말 많더군요." 그러자 옥영진 나으리는 약간 자랑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모으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들었지." "하지만 그 내용이 그 내용이던데... 왜 그렇게 많은 책들을 썼을까요?" "무슨 말인가? 각 비급은 좀 비슷한 점이 있더라도 각각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 완전히 틀린 것들이라구." "저것들이 다 틀리다면 그럼 그때 나으리가 말한 3대무공도 그정도라는 말입 니까?" "아니야. 황궁의 3대 무공은 여태까지 모아들인 무림의 비급들을 토대로 집대 성하여 독특한 황궁만의 것으로 재편성하여 만들어낸 아주 패도적이고 강력한 비급이지. 너무 강한 무공이라 익히도록 허락받은 사람의 수가 적은거야." "그렇다면 그 황궁의 3대 무공을 익힌 사람은 천하무적(天下無敵)이란 말인가 요?" "노부의 생각으로는 천하무적이란 말은 아무도 쓸 수 없지. 물론 현경이 경지 에 오른 구휘정도의 인물이라면 몰라도.... 모든 무공의 비급들은 각각의 장 단점이 있어. 그러니까 갑(甲)이란 무공을 을(乙)로 이긴다면 그 을은 병(炳) 에게 지고 또 병은 다시 갑에게 지는 식으로 말이야. 아직까지도 무림에는 무 상(無上)의 신공(神功)은 만들어지지 않았다네." 국광은 무상의 신공이란 말을 듣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뇌리에는 계속 적으로 한가지 단어만이 휘몰아치듯 돌아다녔다. '무상의 신공... 무상의 신공.... 무상의.... 무상... 무상... 무상...' 국광이 잠시 멍청한 상태로 있자 옥영진 나으리가 뭐라고 몇마디 더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다시 무시를 당하자 더 이상 노화를 억누 르기 힘든 상태가 된 옥영진 나으리가 외쳤다. "지금 노부의 말을 듣고 있는거야?" 하지만 조금 멍청한 표정으로 국광이 중얼거렸다. "무상의 신공.... 무상.... 무상이란 말이 아주 마음에 와닫는군요. 아무래도 예전에 무상이란 말이 들어가는 무공을 익혔다고 생각돼요. 무상신공? 무상장 법? 무상지법? 무상지공? 참 내가 검을 가지고 있으니 무상검공? 무상검법? 무상검결? 또 뭐가있지?..... 그 중에서 무상검법이 가장 입에 익은 것 같은 데 무상검법... 무상검법... 무상검법... 무상검법... 무상검법... 무상검 법... 무상검법... 무상검법..." 국광이 계속 무상검법이란 말만 중얼거리자 더 이상 참기 어려워진 옥영진 나 으리는 꽥 소리를 질렀다. "갈! 무상검법이라니? 그런 검법은 노부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 다. 무슨 얼어죽을 무상검법이야. 지금까지 무상의 신공이라 불릴 만한 건 노 부가 조사해본 결과 구휘대협이 만든 북명신공(北冥神功)밖에 없어." 북명신공이란 말이 튀어나오자 국광은 멍청한 눈으로 말했다. "북명신공? 북명신공... 북명신공.... 장자는 소요유 편에서 이렇게 말씀하 셨다. 북극에 큰 바다(冥)가 있으니 그 이름은 천지(天池)라고 한다. 거기에 큰 물고기가 사는데 그 길이는 천리(千里)에 이르고 수명은 길어 헤아릴 길이 없다. 이 고기의 이름은 곤(鯤)이라고 하는데 어느날엔가 큰 새로 변하니 그 새를 붕(鵬)이라 한다. 붕새가 나래를 펴면 그 길이가 구만리(九萬里)에 이른 다. 붕새는 드넓은 창공을 날아서 남쪽으로 간다. 무릇 물이 모여 깊게 되면 큰 배를 띄울 수 있나니 큰 바다도 결국은 한 잔의 물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 이다. 북명의 무공은 장자에서 나오는 비유와 같이 대자연(大自然)의 진기(眞 氣)를 체내에 축적하여, 바닷물이 큰 배를 띄우듯 축적된 진기로 큰 힘을 발 휘하는 데에 첫번째 묘용이 있다. 진기가 쌓여 내력이 웅후하게 되면 천하의 무공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응용할 수 있으니 이는 북명(北冥)과 마 찬가지로 크고 작은 배를 모두 띄우고 곤과 같이 큰 물고기도 포용할 수 있는 이치다. 따라서 진기를 으뜸으로 하고, 치고받는 동작은 하찮은 것으로 여긴 다. 우선 낮에는 태양의 양기를 밤에는 달의 음기를 흡수하며 대자연의 기를 흡수하는 요령을 익혀.." 국광이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경악한 옥영진 나으리는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악! 너는... 너는.... 북명신공을 봤구나!" 옥영진 나으리가 외치자 그 소리에 놀란 국광은 순간적으로 제정신으로 돌아 왔다. 그가 입을 다물자 뒷부분이 궁금해진 옥영진 나으리가 그를 달래며 뒷 부분을 들려달라고 했지만 국광은 막무가내였다. 한번 다문 입은 더 이상 열 리지 않았다. '세상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북명신공을 익힌 자가 있을줄이야. 이건 생각보다 더 대단한 거물(巨物)일지도..?' 옥영진 나으리는 국광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북명신공은 무림의 무상지보(無上之寶)라 할 수 있다. 그걸 자네가 알고있 다니 잘 되었군. 내가 서기(書記)를 붙여줄테니 그걸 불러 비급으로 만들면 황궁의 무공은 더욱 발전하게 될거야." "이 무공은 무상지보인지는 모르나 제 마음 속에서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저에게 묻지 말아주십시오." 그런다음 국광은 다시 국화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옥영진 나으리는 국광이 다시금 국화로 시선을 못박으며 입을 다물자 별 수 없이 물러서고 말았다. "저자식은 꽃도안핀 국화가 뭐 볼게 있다고 저렇게 열심히 바라보는지 원... 지겹지도 않나?..." 괜한 국화만 옥영진 나으리의 원망을 들을 뿐이었다. 제자(弟子) 옥항(玉恒)은 오랜만에 와본 중경의 혼잡한 거리를 바라보며 뿌듯한 기분에 괜히 나오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검의 명가로 알려진 청성 파(靑城派)에 가서 검을 수련한 후 자신감을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는 적전제자(適傳弟子)가 아니었고 또 장문인이 원해서 받은 제 자도 아닌 장군가의 후광(後光)과 위압(威壓)에 의해 받은 제자였기에 그가 배운 무공의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버지인 옥청영 나으리는 꼿 꼿한 성격에 비해 무공의 깊이가 얕아 흑풍단에 있지 못하고 장군으로서 일반 군무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그는 이번의 수련을 통해 익힌 무공으로 흑풍단에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관부의 젊은이들에게 대단한 무공이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흑풍단은 매력적인 존재였다. 옥항이 관부의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모여사는 주작로(朱雀路)에 들어서자 으리으리한 거대한 건물들이 줄을지어 나타났다. 그는 그중에서 그렇게 크지 는 않지만 제법 위용있게 지어진 집으로 들어갔다. 그의 할아버지 옥영진 나 으리는 그를 반겨 맞아주었다. 하지만 그에게 거처를 정해준 다음부터는 만나 기도 어려웠다. 집사에게 물으니 요즘 흑풍단의 재건으로 눈코뜰새없이 바쁘 시다는 답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정도 고수를 수천명이나 구할려니 하루아 침에 될리도 만무했고 또 새로 받아들인 고수들의 훈련에도 많은 시간이 들었 던 것이다. 그가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온 다음 가장 눈에 거슬린 존재는 국광이라는 젊 은이였다. 그는 여태껏 장군가의 손자라는 후광으로 모두에게 깍듯한 존경을 받아왔는데 국광이라는 미친녀석에게는 싸늘한 눈총만을 받았고 그가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건 모른다는 말이나 싸늘한 비웃음뿐이었다. 그래서 성질같아 서는 주리를 틀겠지만 할아버지의 손님이라는 말에 참고있었던 것이다. 하기 야 국광은 거의 자신의 거처에서 나오지 않았기에 옥항이 그곳으로 찾아가지 않는다면 그녀석을 볼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국광의 처소 근처에는 가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옥영진 나으리는 애지중지하는 손자를 불렀다. 옥항이 문 앞 에서 인사를 기별을 드린 후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렇게 크지 않은 아담한 내부가 나타났고, 여러 무기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과연 무인이 기거하는 방인 듯이 보였다. 이 방은 옥영진 나으리의 서재로 각종 병서 등의 서책이 한쪽 벽면에 있는 서가에 빽빽이 꽃혀있었고 다른쪽 벽면에는 여태껏 옥영진 나으 리가 사용하던 2자루의 검(劍)이 차례로 용의 형상으로 새겨진 흑색 좌대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좌대의 왼편에는 3개의 갑주(鉀 )가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예식용의 호화로운 경갑주(輕鉀 )였고 또 하나는 흑색의 전 투용 중갑주(重鉀 ), 그리고 근래에 이르러 사용하기 시작한 흑색의 경갑주 였다. 갑주들과 그 뒤쪽에 놓여있는 4개의 방패가 잘 손질되어 있는 걸로 보 아 옥영진 나으리가 이것들의 보관에 대단한 신경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방안에는 전체적으로 무기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가구가 없었지만 등불이 나 책상 등 일단 놓여있는 것들은 모두 오래된 최상품인 것이 이 소박한 무인 의 가문이 오랜 전통을 가진 명가임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옥영진 나으리는 근래에 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애검을 언젠가 사냥해온 호피 (虎皮)위에 앉아 닦고 있었다. 옥영진 나으리는 과거 정정할때는 대부분의 관 부의 장교들이 그렇듯이 좌대 위에 놓여있는 30근 정도되는 중검(重劍)을 사 용했다. 하지만 요즘은 기운이 딸려서 길이 3척의 13근 정도나가는 靑影(청 영)이라는 보검을 구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무림인들과는 달리 관부의 무사들은 무거운 중병(重兵)을 애용한다. 그이유 는 좀 힘이 들더라도 무거워야 단번에 두터운 갑주(鉀 ;갑옷과 투구)를 꿰뚫 고 상대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두터 운 방패까지 사용하기에 웬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관부의 정병(精兵;정예군)과 맞붙어 싸우려는 사람은 없었다. 장교급 정도 되는 장사(壯士)들은 힘이 좋아 두터운 갑주외에 심장을 보호하 는 둥그런 강철판인 엄심갑(掩心甲)을 착용하고 가죽을 몇겹으로 덛대어 어깨 부터 아랫배까지 내려오게 만든 보호의(나시와 비슷하게 생겼음)를 입은 후 그 위에 두터운 갑옷을 착용한다. 갑옷은 보통 2가지로 나뉘는데 갑옷 전체를 용린(龍鱗)과 같이 만든 비늘갑옷이 있는데 기운이 좋은 사람일수록 두터운 비늘의 갑옷을 선호한다. 그리고 또한가지는 어깨나 옆구리 부분, 그리고 허 벅지부분은 비늘갑옷이지만 복부(腹部)와 배부(背部;등쪽)는 둥그런 통짜의 철판을 댄 것으로 일부 갑옷종류는 배부의 철판을 없애고 비늘을 사용하기도 한다. 복부에 철판을 댄 갑옷은 그 철판에 각종 양각을 통해 멋을 낼 수 있기 에 젊은이들이 선호하며 또 통짜 철판이기에 방어력도 좋다. 하지만 노장들의 경우 비늘갑옷을 즐겨입는 것은 그것이 훨씬 움직임이 자유스럽고 편하기 때 문일 것이다. 그런 중갑주에 방패까지 사용하므로 무림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얄팍한 도검 으로 꿰뚫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놈의 갑주나 방패가 무림인들이 자랑하는 호 신강기(護身剛氣)처럼 보통 2각 정도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마르고 닳도록 사용자의 몸을 지켜주기에 무림인들로서도 관부와의 충돌은 될 수있으면 피하 는 것이다. 이런 갑주를 뚫고 상대를 공격해야 하기에 관부에서는 무거운 중 병을 애용했고 또 그 중병을 사용함으로서 인해 생기는 체력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황궁무예는 날카롭지만 단조로운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신병이기(神兵異器)의 경우 가벼우면서도 쇠를 가볍게 베어낼수 있기에 돈이 많은 노장(老將)들이 즐겨 이용했고 또 그들은 군을 통제하여 효율적으로 작 전을 수행하는데 첫째 목표를 두고있기에 직접 싸울 일이 거의 없어 대부분의 경우 갑주도 얇은 것을, 그리고 검도 될 수 있으면 가벼운 것을 선호했다. 옥항이 한참을 할아버지가 검닦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힐끗힐끗 뒷편에 세워 져있는 할아버지의 전투용의 흑색 중갑주(重鉀 )를 훔쳐봤다. '흑색 갑주....' 흑색의 갑주를 훔쳐 보면서 그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혹시나 하고 조바심을 치고 있는데 드디어 옥영진 나으리가 입을 열었다. "청성파에서 얼마나 수련을 했느냐?" "5년이옵니다." "5년이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구나. 그래 좀 진전은 있었느 냐?" "예." "아주 대답이 자신이 있구나." "예. 소손(小孫)이 그래서 흑풍단에" "흑풍단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조금 더 검술을 배우거라." "다시 청성파로 가란 말씀이십니까?" "아니야. 그보다 더 좋은 상대가 있지. 국광이란 사내를 본적이 있냐?" "예." '아주 건방진...'이라는 말이 따라나오려는 것을 황급히 참으며 옥항이 고개 를 숙여 약간 당황한 자신의 얼굴을 숨겼다. "그에게 검술을 좀 더 배워라." "그에게 말씀입니까? 제가 보기에 그는 체격이 별로 좋지.." "무공이란 체격으로 하는게 아니야. 아무리 국광이 나약한 겉모습을 하고 있 다 하더라도 그는 대단한 고수다." 그 말을 옥항은 믿을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 그 건방진 태도 하며... 그는 국광이 제법 믿는 구석이 있는 모사(謀事)정도로 봤던 것이다. 옥항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옥영진 나으리가 말했다. "할애비의 말을 못믿는 모양이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믿습니다." "검은 가지고 왔느냐?" "예. 청성파에서 쓰던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중검(重劍)이냐?" "아닙니다.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그런 가벼운 겁니다." "그럼 그 검을 가지고 국광의 처소로 나오너라. 내 거기 가있을테니 빨리 오 너라." "예." 옥진영 나으리가 국광의 처소에 도착했을 때 국광은 책을 읽고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오십시오." "자네도 안녕한가? 실은 긴한 부탁이 있어서 왔네." "부탁이라뇨?" "손자녀석의 검술을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나?" "싫습니다." "왜그러나?" "제가 왜 어린아이의 검술까지 가르쳐야 합니까?" "허허... 어린아이는 아니네. 금년으로 스물 하나가 되지. 5년이나 청성파에 서 검법을 수련했으니 자네가 조금만 힘을 써주면 될거야." "저는 검법은 거의 잘 모르고 또 알고 있다 하더라도 기억도 나지않는데다가 과거에 배워 펼치는 기술만 몸에 배여있지 그걸 상대에게 전할 수는 없습니 다." "허허... 그러니까 누구 하나를 골라 가르치다 보면 좀 더 자극이 되어 과거 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글쎄요... 어쩌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믿져야 본전이니 한번 가르쳐 보라니까... 가르쳐 보다가 영 재미없으면 그 만두면 될거 아닌가?" "좋습니다. 하루 한 시진(2시간) 정도 가르쳐 보죠. 그런데 손자는 어디 있습 니까?" "검을 가지러 갔으니 조금 있으면 올거야." "알겠습니다." 그런다음 국광은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뒤져대더니 2척 반 정도의 나무 몽둥이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그걸 어디다 쓰려고?" "검술을 가르치라면서요?" "진검을 안쓰고?" "이걸로 충분합니다." 이때 옥항이 들어왔다. 그의 허리에는 무림인들이 보통 사용하는 2척 8촌 길 이의 패검이 걸려있었다. 국광은 옥항의 검집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검을 좀 보세나." "여기..." 옥항이 내미는 검을 자세히 들여다 보더니 국광이 말했다. "이 검을 얼마나 사용했나?" '이자식은계속 반말이군...' 하지만 할아버지가 묵인하고 있었기에 옥항으로서도 속으로 삭혀야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10년 정도 되었소." "흠.... 10년이라... 계속 이검을 썼단 말이지?..." 조금 생각하는 듯 하더니 국광은 검을 다시 주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 공격을 한번 해보게나." 그러면서 몽둥이를 잡은채로 가만히 서있었다. 몽둥이를 잡고 그래도 수비 자 세라도 잡았으면 옥항으로서도 그렇게까지 신경질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안 그래도 몽둥이만 잡고있어 자신을 얕잡아보는 것 같은데거기에 수비 자세까 지 취하지 않으니 옥항은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어 형식적으로 인사를 간 단히 한 다음 바로 살초(殺初)를 펼치기 시작했다. 각 방향으로 세 번 찌르기를 한 다음 국광의 행동을 보아 후퇴하면 따라 들어 가며 벨려고 했는데 국광은 그냥 살짝살짝 몸을 틀어 세 번의 찌르기를 피하 면서 그대로 몽둥이로 손을 쳐왔다. 놀란 옥항은 조금 뒤로 빠지면서 검길이 에 의존해서 국광의 몽둥이를 후려쳤다. 하지만 국광은 살짝 몽둥이를 틀어 옥항의 검을 흘리면서 앞으로 한발자국 정도 거리를 엄청난 속도로 좁혀오며 옥항의 목을 베어왔다. 아무리 몽둥이라도 그 기세로 보아 맞으면 목뼈가 부 러질 것이 확실하다는 걸 느낀 옥항은 몽둥이의 사거리를 벗어나려고 몸을 뒤 로 빼면서 검을 수평으로 베었다. '몸을 뒤로 뺐지만 저녀석의 몽둥이를 피할 수 없어. 그래도 이쪽이 3촌 (10Cm)이 기니까 이쪽이 승산이 있다. 거기에 저쪽은 나무고 이쪽은 쇠니 맞 으면 어느쪽이 타격이 클지는 뻔한 노릇..' 옥항으로서는 꽤 잔머리를 굴려 펼친 초식이었는데 국광이 갑자기 왼발을 이 용하여 옥항의 손을 찼고 동시에 국부에 국광의 오른발이 박혀 들어왔다. 급 소를 차인 옥항은 온 몸에 힘이빠져 일어설수도 없을 지경이었고 그냥 그 부 분을 잡고는 신음하고있는데 위에서 비웃는 듯한 국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리를 생각하지 않았군. 자네와 나의 거리는 충분히 각술(脚術)을 쓸수있었 어. 자네도 머리가 있다면 각술을 썼어야지." "이... 이건 검술 대련이 아니오?" "오.... 내가 말 안했던가? 일단 검을 들고 상대와 섰을때는 수단방법을 가리 지 말아야 살아남는다구." "그건 비겁한 짓이오." "비겁은... 죽은 녀석이 비겁찾게 생겼어?"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옥항은 계속 국광을 공격했지만 국광의 옷자락도 건드 릴 수 없었다. 국광은 별 치사한 방법을 다 사용했고 심지어는 살짝 흙을 조 금 왼손에 집어 옥항의 눈에 뿌리기까지 했다. 2시간동안 몽둥이와 손발로 얻 어터진 옥항은 아무리 운동으로 몸이 다져졌다 하더라도 대련이 끝나고 나자 안아픈 곳이 없었다. 탈진해서 뻗어있는 옥항에게 국광은 '그럼 내일 봅시 다... 흐흐...' 하는 비웃음만 남겨두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옥항은 국광이 정통적인 검술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 을 깨달았다. 우선 연결되는 똑같은 초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거기에 초 식은 거의 일격필살을 노려 상대의 헛점을 파고들던지 아니면 헛초로 신경을 그쪽으로 쏠리게 만들어 두고는 비어있는 왼손이나 발을 사용해서 공격했고 그 공격방식도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하지만 국광이 즐겨쓰는 초식은 몇가지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것들이 서로 불규칙하게 연결되어 괴력을 내고있 었다. 국광이 공격에 힘을 적절히 안배해 완전히 맞고 뻗을 정도는 아니고 그 렇다고 안아프지는 않은 정도였지만 두들겨맞는 부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까인 다리가 퉁퉁 부어올라 약을 사용해서 찜질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공격을 해보면 국광은 움직임이 미꾸라지처럼 빨라 도저히 따라붙기가 힘들 정도였으니 그 경공술과 신법은 어디서 배웠는지 찬탄이 나올 정도였다. 3개월이 지나자 옥항은 겨우 국광의 발차기를 가까스로 한번 피할 수 있었다. 국광은 간발의 차이로 피한 옥항을 보더니 씩 웃으면서 말했다. "어쭈... 피해? 이건 어때?" 그러더니 더욱 공격에 속도를 붙여 더욱 신나게 두들겨 팼다. 국광의 수법들 은 얄팍한 잔재주들 같았지만 자신도 국광과 상대를 하면서 그런 편법적인 수 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길수 없음을 깨닫고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곧이어 깨달은 것은 이 특이한 공격 움직임이 아주 자연스럽게 펼쳐지려면 보통 숙련도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옥항이 틈틈히 손발을 이용해 반격을 하면서 제법 용을 써대자 국광은 그날 열심히 두들겨 팬 다음 뻗어있는 옥항에게 책 3권을 던져주며 말했다. "내가 여태까지 사용한 무공은 모두 이것들을 응용한거다." "이게 뭡니까? 사부? 저는 정파(正派)의 문하라서 사파(邪派)의 무공은 안배 워요." 몇 달 지나면서 옥항의 국광에 대한 말투가 존대로 바뀐 것은 자신보다 뛰어 난 고수에 대한, 또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예의였다. 국광의 무공은 확실이 뛰어났기에 조금 쯤은 배워볼 생각도 있었지만 명문정파의 무공을 익 혔다는 얄팍한 자존심이, 강하다고 해도 사파적인 무공을 익히는 것을 거부했 다. "뭐긴 뭐야. 황궁무공 3권이지. 권법, 검법, 각법인데 꽤 초식들이 재미있으 니 열심히 배워보기를 바래. 모두 읽은 다음 옥 대인께 반납하도록." "그럼 지금까지 사부가 펼친게 모두 황궁무공이란 말입니까?" "그럼. 그 세가지를 응용해서 조합한 것이지." '도대체 어떻게 단순공격 위주의 황궁무공을 조합하면 저런 치사한 공격법이 되는거지?' 대련이 끝난다음 욱신거리는 몸으로 비급들을 읽으면서 그가 놀란 사실은 국 광의 말대로 그가 사용한 모든 초식들이 거기 다 있다는 사실이었다. 국광이 준 3권의 비급은 황실에서 많은 무관들이 익히는, 강하지만 그런대로 잘 알려 진 무공들이었다. 하지만 결코 이들은 광명정대하게 적을 정면에서 힘으로 제 압하는 무공들이지 이런 식으로 서로 조합하여 상대의 헛점을 공격하는데 사 용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옥항이 놀란점은 다른데 있었다. 국광이 즐 겨 쓰는 진린검법(進躪劍法)이란 공격일변도의 검법중 4가지 초식과 칠세연권 법(七勢連拳法) 중 3가지 초식, 천영팔황각법(千影八荒脚法)의 4가지 초식을 보면서 옥항으로서는 그 초식들이 서로 연결되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 불가 사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비급 세권을 펼쳐놓고 자신이 열나 게 맞았던 것인데도 비급들의 내용으로는 그것이 도저히 연결되지 않았고 도 리어 서로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밤새껏 궁리를 해본다음 날이 밝자 옥항은 국광의 처소로 비급들을 가지고 달 려갔다. "밤새 생각을 해봤는데 이게 비급 상으로는 사부가 사용하던 초식처럼 도저히 연결이 안되는데요?" "쯧쯧... 멍청한 녀석. 왜 연결이 안돼. 왼발로 비천각뢰를 쓴 다음 이 상태 에서 흔들린 중심을 오른쪽의 손이나 발을 사용해서 초식을 펼쳐 상대와 부딪 치면 자연스레 중심은 잡히는 것이고 또 이리로 발이 나갔으면 왜 돌아와서 펼쳐야 하느냐? 그 기세를 이용해서 운천직권(雲千直拳)을 펼치면 다시 뒤로 돌아가기도 편하잖아? 그 초식들을 보면 셋을 서로 연결하면 다소 무리가 있 지. 하지만 그걸 상대에게 사용하면 상대는 어떻게 해서든 그걸 막거나 아니 면 맞을테니까 그 반동을 이용하면 초식이 자연스레 연결되는거야." "아... 상대가 있어야만 서로 연결되는군요." "대신 상대가 피하면 다른 방법을 써야지." "그런데.... 언제까지 대련을 계속 하실 생각입니까? 요즘은 저녘에 누우면 안아픈 곳이 없다구요." "글쎄.... 언젠가 그만 끝이 나겠지. 언제나 명심할 것은 검을 사용하는데 있 어 너무 초식이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그냥 마음이 가는대로 몸이 따라 가고 몸이 가는대로 마음이 움직이면 되는거야. 황궁무공은 깊게 익히면 아주 대단한 경지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 지금 네가 익힌 수박 겉핥기 식의 무공과 는 확연히 다르지. 정식 사제간은 아니니 지금이라도 내 방식이 싫으면 그만 둬도 상관없고 또 나도 가르치기 귀찮으면 언제라도 그만둘테니 딴데 신경쓰 지 말고 열심히 해봐. 너와 함께한지도 5개월.... 이제 몸이 많이 부드러워지 고 또 안목이 올라갔으니 어느정도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되면 그때 대련을 끝 내고 진지하게 교육을 해볼까 생각중이야." "그런데 지금 제가 하고있는 수련방법은 청성파에서 배우던 것과는 너무 다른 데요?" "내가 너무 심하게 하나?" "좀... 그렇죠. 어디서도 이렇게 무공을 가르쳐 주시지는 않고 제자를 이렇게 두들겨 패기만 하지는 않는다구요." "그럼 넌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원하는데?" "강력한 무공을 가르쳐 주셔야죠. 그래야 더 강해질거 아닙니까?" "강해진다... 내가 황궁무고에서 수많은 비급을 읽어보고 느낀점이 뭔줄 아 나?" "글쎄요..." "절대적인 신공(神功)이란 존재하지 않아. 어떤 무공이라도 헛점이 있지. 모 든 무공이 물고 물리는 관계에 있어. 갑이라는 무공이 을이라는 무공을 제압 한다면 을은 병에게 제압되지. 그 병은 또다시 돌고돌아 갑에게 지는거야. 이 건 물론 똑같은 수준의 무인들끼리 겨뤘을때에 한해서지. 예를들어 너와 나는 엄청나게 무공수준에서 차이가 나지. 그건 너도 느꼈을거야. 나는 소위 무림 에서 3류축에도 끼지 못하는 무예들만으로 너가 배운 청성파의 1류 무술을 박 살낼 수 있어. 요컨대 무공이 얼마나 강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걸 사용 하는 사람의 자질이 어느정도냐가 중요한거야." "그렇다면 강한 무공은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겁니까?" "아니지. 강한 무공을 꼭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무공이 가진 깊 은 뜻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 "깊은 뜻이라뇨?" "가령 네가 한번씩 나한테 사용하는 청성파의 추의환영검법(追意幻影劍法)에 서 환사영주(幻蛇影走)라는 초식이 이렇게 나가지?" "그렇죠." "하지만 이렇게 찌르기를 들어간다면 누구나 알아챌게 뻔하쟎아. 대신 초식 사용자가 아주 뛰어난 속도로 전개한다면 상대가 당하겠지만..." "그 때문에 변초를 쓰는거 아닙니까?" "그렇지. 변초를 쓰지. 1류의 검법일수록 이 변초가 아주 발달되어있어. 하지 만 꼭 변초까지 외워서 사용할 필요는 없지. 요컨데 상대를 속이기만 하면 되 는 거니까... 어떻게 하더라도 베거나 찌르기만 하면 되지 어떤 틀에 꼭 맞춰 휘두를 필요는 없는거야. 초식이란 그걸 빠른 속도로 펼치자니 능력이 안되어 할수없이 빨리 펼치기 위해 만들어놓은 한가지의 틀일 뿐이야. 상대가 약해서 헛초조차 막지 못하는데 그 헛초를 다시 돌려서 거두어 들인다음 진짜 초식을 쓸 필요가 있을까? 상대가 못막으면 헛초였다고 해도 그대로 찔러 들어가야 해. 그리고 실초라도 상대가 막을 기색이 보이면 회수하여 그걸 허초로 만들 어 상대의 정신을 딴 쪽으로 쏠리게 유도해야 하고... 요컨데 꼭 틀에 맞출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게 저를 두들겨 패는것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멍청한 녀석! 매에는 장사가 없으니 두들겨 맞다보면 맞기 싫어서라도 피하 게 되어있고 내가 공격하는 방식을 익히게 되어있어. 너도 요즘들어서는 조금 씩 피하고 반격까지 하게 되었잖아?" "그러고 보니..." "먼 거리에서 대결한다면 강한 초식이 우위를 차지하겠지만 근거리에서 대결 한다면 누가 실전경험이 많은지가 가장 크게 작용하지. 그러니 잔말 말고 나 한테 맞다보면 모든 걸 다 깨닫게 되어있어." 그러자 옥항은 과장되게 놀란척 하면서 말했다. "그럴수가? 너무 무책임한 대답인데요?" "참. 너는 살인을 해본적이 있냐?" "예? 아직 없습니다." "무공이 높은 사람은 살인을 잘할 수 있는 소질이 있지. 하지만 반대로 살인 을 잘하는 사람이 꼭 무공이 높지는 않아. 자네가 살인을 안해봤다고 하니 말 인데 꼭 죽여야 할 상대가 아니면 싸울 필요가 없고, 또 그 약점을 발견했으 면 무조건 찔러 죽일 마음가짐이 필요해. 안그러면 그 멈칫하는 순간에 상대 에게 당하게 되지. 상대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진자와 그렇지 못 한하는 아주 큰 차이가 있어." "사부는 할아버지께 들으니 모든 기억을 상실했다고 들었는데 그걸 어찌 아십 니까? 실지 그 후에 사부가 살인한 적은 없잖아요?" "몇번 초식을 써보면서 느꼈지. 상대가 공격했을 때.... 또 자네와 처음 초 식을 주고받았을 때.... 모두 다 상대의 헛점을 보자마자 아무런 거리낌 없 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발이 나가더군. 내가 힘을 줄이지 않았으면 모두들 저세상에 갔겠지. 그걸 느끼자마자 나는 이전부터 수많은 살인을 하지 않았 을까 하는 생각을 해왔어. 과연 나는 이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또 왜 이렇게 무공이 강할까....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았을까? 나에게 처자 식이 있을까? 하기야 처자식에 대해서는 그리운 생각이 나지 않는걸 보면 아 마 없는 것 같아." 빙긋이 미소짓는 국광을 보면서 옥항은 사부가 무자비한 무례한인줄 알았는 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전부터 조금씩 느껴왔지만 지금에 이르러 확신하게 되었다. "사부님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살인귀(殺人鬼)는 아니었을 겁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그로서는 국광이 남몰래 과거에 대해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하 지만 국광의 말을 듣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 그 한마디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할아버지께 기루에라도 모시고 가서 기분을 풀어드리라고 부탁해 야 겠군.' * * * 잘 정돈된 방.... 방안의 호화로운 가구들이 그 주인의 신분을 알려주고 있 다. 그 방은 둘로 나누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발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발 앞에는 두명의 남자와 한명의 아릿다운 묘령의 여인이 부복하고 있다. 그 중 약간 앞쪽에위치한 남자가 발을 향해 말했다. "금의위에서 비밀리에 조사하는 것을 저희들이 입수하여 조사한 결과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러자 발 속에서 상큼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금의위에서 하는 일이야 황실 모반따위나 감시할텐데 그걸 조사해 봐야 뭐 좋은게 있다고..." "아니옵니다. 실은 금의위에서 1년 전부터 비밀리에 무림을 돌며 고수 1명을 찾고있었습니다." "어떤 인물인가요?" "거의 화경의 경지에 이를 정도의 초고수인데 갑자기 실종되었다거나 아니면 살해되었다던가 하는 자입니다." 그러자 발 안에서 약간 흥미를 느낀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 찾았나요?" "예. 찾았기에 말씀을 올리는 겁니다. 그정도의 고수는 거의 무림에서 손가 락에 꼽을 정도로 수가 적습니다. 하물며 갑자기 실종되거나 사망했다면 알아 내기 편할거로 속하가 생각했는데 의외로 힘들었습니다." "그래 그가 누군가요?" "마교의 부교주로 묵향이라는 인물입니다." "묵향? 들어본 적이 없는데..." "예. 마교의 일은 거의 세상에 들어난 게 없으니까요. 지금 마교가 조금 술 렁거리는 입장이기에 과거와 달리 정보입수가 가능했습니다. 지금 마교는 문 주께서도 아시다시피 교주와 장인걸 부교주가 다투고 있는 중이라..." 알고있는 사실을 주절거리자 약간 짜증난 음성이 들려왔다. "요점만 말하세요." "예. 속하가 입수한 정보로는 마교사상 최강의 고수라고 합니다." "그런자가 어떻게 밖에 드러나지 않았지?" "그의 출신 때문이죠. 살수출신으로 환사검(幻邪劍) 유백(柳伯)이란 인물의 마지막 제자입니다. 그의 실력은 사부를 넘어서서 최강의 고수로 올라섰지만 살수라는 신분상 마교의 검술만을 익힌 것이 아니라 정파계열의 검법도 많이 익혔기에 외부에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종의 이단자인 셈이군. 그래 그자의 무공이 어느정도기에 금의위에서 흥 미를 느낀다는 말인가요?" "현경의 고수라 합니다." 그러자 약간 놀란듯한 연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현경이라고? 그럴리가... 정파의 무공을 죽을때까지 익힌 자들도 오르기 힘 든 것이 현경이거늘... 하물며 마교에서 엉터리로 배운 정파의 무공으로 현경 에 오른단 말이오? 그의 사부인 환사검 유백이란 인물도 들어본 적이 없고.." "묵향이 현경의 고수라고 추정되는 이유는 제령문의 뇌전검황을 벤 자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묵향의 사부도 마교에서는 환사검(幻邪劍)으로 통하지만 그는 일선에서 은 퇴한 다음 3년 정도 무림을 떠돌며 이름을 날린 인물입니다. 독고구패(獨孤九 敗)라는 명호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무림의 내노라 하는 고수들을 쓰러트리고 갑자 기 사라진 그자의 제자란 말인가?" "예. 속하가 조사해본 바로는 그가 은퇴하기 직전에 가르쳤던 마지막 제자가 묵향이란 인물이고 또 마교에서 은퇴 후 3년여를 무림을 떠돌며 그가 만년에 야 창안해낸 검법을 시험하러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다음 묵향이란 인물 이 마교에서 살해된 다음 실종되었습니다." "살해되었다고? 설마.... 현경의 고수를 누가..." "그의 무공이 너무 강한것에 위기감을 느낀 교주가 제거했다고 하며 이건 미 확인된 정보지만... 맹주도 그의 제거에 관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금의위에서 수소문을 하고 있 다는 거지요?" "그래서 속하가 관부쪽으로도 조사를 했더니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 니다. 그가.... 묵향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상당히 흥미를 느낀듯한 음성이 날아왔다. "살아있다고?" "예. 지금 옥영진 대장군 저택에 식객으로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국화를 좋 아한다고 해서 국광(菊狂)이라 불리고 있는데, 처음 그가 발견되었을 때 무공 에 의한 상처 외에도 급류에 휩쓸려 극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 신의 혈맥이 파괴된데다가 모든 기억까지 상실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실망한 듯한 목소리... "그런 폐인이라면 이용가치가 없쟎아요?" "그런데... 그게 폐인이 아닙니다." "폐인이 아니라니?" "어느날 갑자기 모든 상처가 다 낫았다고 하더군요." 발 속의 여인은 경악한 듯이 되물었다. "완전히?" "예. 거기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기억은 지워졌지만 그가 익히고 있었던 무 공을 몸이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옥 대장군의 배려로 황궁무고에 들어갔다 나와서 지금은 거의 화경의 경지까지 회복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미가 당기는군..."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발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그를 이쪽으로 회유할 수는 없겠나요? 우리편으로만 만든다면 대단한 성과가 될거에요." "이렇다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구명의 은혜를 갚겠답시고 머물고 있는 자 를 어떤 방법으로 끌어내겠습니까?" "과거의 기억에 대한 정보를 미끼로 한다면?" "그것도 어렵습니다. 한달도 안되어 금의위에서도 속하가 알아낸 사실을 모두 다 알아낼 겁니다." "금의위의 정보 입수를 방해할 수는 없나요?" "그것도 힘듭니다. 잠시... 한달이나 두달정도 지체시키는 것은 되겠지만 그 이상은 무립니다." "아깝군..... 근래에 드문 먹음직한 먹인데...." 기루와 금(琴) 5일 후 그날도 격렬한 대련이 끝난 후 국광이 옥항에게 말했다. "이제 제법 움직임이 갖춰지기 시작하는구나." "정말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검을 사용하는데 너무나 제멋대로구나." "예? 하지만 초식은 별로 신경쓰지 말라고 사부님께서..." "그런 말이 아니다. 너는 검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있어. 그냥 너 마음내키는 대로 검을 휘두를 뿐이다. 조용히 검을 잡고 생각해 보거라. 검이 상대를 찌 르기를 원하는 부분을 찾아라. 그리고 검을 따라 그 부위를 찌르거나 베어가 는거야. 검과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좋은 공격이 될 수 없지." "신검합일(身劍合一)이란 말씀인가요?" "말을 만들어 붙이면 그렇게도 부를 수 있겠구나. 너는 전혀 그걸 생각하지 않고있어. 앞으로는 주의하거라." "말은 쉽지만 신검합일을 하려면 어떻게?" "방금 말했지 않느냐?" 국광은 자신이 지금까지 옥항을 두들기는데 사용하던 몽둥이를 들어 옥항이 내려치기 좋은 위치까지 들어올린 다음 말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베어 보거라." 옥항이 죽을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이 몽둥이는 잘리지 않았다. 아니 흠집도 낼 수 없었다. 그냥 튕겨져 나와 옥항의 손아귀에 엄청 난 충격만을 주었다. 옥항은 당황하면서도 손이 저려와 검을 내려놓고 손아귀 를 주무르며 국광에게 말했다. "이 몽둥이가 왜 잘리지 않죠?" "나는 몽둥이와 하나가 되어 너의 힘을 막은 것 뿐이고 너는 그냥 손아귀 힘 만 믿고 쇳덩이로 내려쳤을 뿐이니 잘릴 리가 있겠느냐?" "...." "무릇 검을 쓸때는 그 한동작 한동작에 마음이 움직여야 하고 또 그 마음에 따라 기를 움직여야 한다. 기의 움직임은 곧 마음의 움직임. 검과 기가 동시 에 뻗어나가야 하는 거야." "그럼 처음부터 공력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시면 될걸 가지고 무슨 마음이 어쩌 고..." "떽! 네녀석은 몸통위에 있는 이거 사용안하고 뭐하려고 붙여놨냐?" 그러면서 국광은 옥항의 머리를 콩콩콩 쥐어박으면서 말했다. "너도 나중에 지나보면 느낄거다. 공력을 쓰자고 마음을 먹고 공력을 사용한 다면 그건 별볼일 없는거야. 무의식중에 마음이, 또 육체가 움직이면 기도 함 께 일어나야 하는거야. 이건 무술에 있어서 상당히 높은 경지다. 이걸 네가 익힐 수 있느냐 없느냐는 너의 노력에 달려있어. 언제나 검을 사용할 때 검과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노력해라." 그러자 약간 쑥쓰러운 듯 옥항은 조금 과장되게 머리가 아프다는 시늉을하면 서 말했다. "예. 가르치심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부님..." "왜그러느냐?" "저... 할아버지께서 같이 가실데가 있다고 준비를 좀 하시라던데요." "준비? 준비할것이 있냐? 옷은 이것 뿐인데..."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옥항은 나는 듯이 달려가더니 잠시 후에 옷을 한벌 가지고 왔다. 연한 푸른색 비단을 사용한 옷으로 한눈에도 고급스럽게 보이는 옷이었다. "이건 뭐냐?" "수련이 끝나고 난 다음에 잘 차려입고 할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오시랬어요. 아마 함께 같이 가실곳이 있는 모양이던데요." "그래?" 옥항은 옥영진 나으리를 꼬셔서 국광과 함께 기루에 가기를 권했다. 마침 수 도인 중경(中京)에는 아주 그럴듯한 기루가 수없이 많았고 또 그중에는 아주 유명한 곳도 몇군데 있었다. 옥영진 나으리는 손자의 부탁을 받아들여 손자를 가르친다고 수고해주는 국광을 데리고 분위기 좋은 기루에 갈 것을 작정했고 그날이 오늘이었다. 국광은 어느날 갑자기 정신을 차린 이래 최고로 화려한 복장을 하고 옥영진 나으리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옥영진 나으리가 국광을 안내한 곳은 중경에서 아주 큰 몇 개 안되는 기루(妓樓)들 중 하나였다. 국광이 그 화려하고 거대한 집의 문을 보니 정문의 커다란 현판에 제법 격식을 갖춘 글씨로 請成樓(청성 루)라는 글씨가 써져있었다. "여기는 어딥니까?" "아주 괴상한 법칙이 존재하는 기루지." "괴상하다뇨?" "이 기루는 아주 화려하고 거대하게 새워졌기에 처음 만들어질 때 꽤 화제의 대상이 되었던 곳이야. 현판이 말하듯이 請成樓(청성루) 즉, 뭔가 뜻을 이룬 사람을 청한다는 곳인데 술값도 비싸지만 손님을 가려받기로 유명한 곳이지. 돈만 많다고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이곳에는 아주 좋은 술 과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아 고관대작들도 권세를 믿고 좀 더 나은 대접을 받 으려고 하지만 원체 까다로워서...." "뭐가 까다롭다는 겁니까?" "손님을 받는 조건이지. 아까도 말했잖아? 뭔가를 이뤄야만 한다고... 일단 그 손님이 가진 재주 중에서 뛰어난 것을 시험해서 그 실력에 따라 술시중을 드는 여인들이 들어오지. 이곳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계집들을 만나본 사람은 거의 손가락에 끼일 정도고.... 루주(樓主)를 만난 사람은 한명도 없어." "어떤 재주라도 상관없습니까?" "그렇네. 시, 서, 화, 금, 무공, 진법 등등.... 아부하는 재주 말고는 안들어 주는 조건은 거의 없지. 어때 자네도 들어가 볼텐가?" "원래 그러려고 오신게 아닌가요?" "허허... 그래이곳 손님대접이 제법 쓸만하지. 너무 계집들이 음란하지도 않 고 상당히 재간있는 아이들이 많아. 내 이름만으로도 꽤 괜찮은 계집들을 만 날 수 있지. 노부도 처음에는 시험을 거쳐서 지금의 위치를 받아냈거든... 자 들어가세나." 그들이 문을 들어서자 위사인 듯한 사내가 장검을 차고 길을 막으며 말했다. "손님. 검을 가지고 들어가실 수는 없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국광은 다시 돌아 나가며 옥영진 나으리에게 말했다. "저는 이 검이 없으면 마음을 놓지 못하니 검을 가지고도 마실 수 있는 곳으 로 가죠." 이때 옥영진 나으리의 얼굴을 알아본 한 사내가 황급히 쫓아나오며 말했다. "왜그러십니까요? 대장군 나으리" "노부가 데려온 동행에 약간의 말썽이 있는데.... 좋은 방법이 없겠나?" "무슨 말썽이십니까?" "검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는 거야." "그렇다면 이렇게 하죠. 본채로는 들어가시지 못하고, 저쪽에 별채가 지어져 있는데 그리로 가셔서 즐기시면 어떻겠습니까요?" "좋네. 안내해 주게나." 국광은 옥영진 나으리와 방에 들어간 다음 묵혼검을 풀어서 옆쪽 구석에 치워 뒀다. 국광은 묵혼검을 언제나 허리에 차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묵영이라 불리는 비수는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보통 한번씩 옥영진 나으리가 국광을 데리고 사냥을 갈 때 가지고 다녔는데 그걸 이용해서 사슴의 가죽을 벗기는데 사용하는 걸 보고 옥영진 나으리는 그 좋은 보검을 이용해서 가죽이나 벗기는 데 사용하는 걸 보고 속으로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리잡고나서 잠시 지나자 아름다운 두명의 여인이 들어왔다. 그들의 말투나 시중드는 자세, 그리고 금을 타는 솜씨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국광의 옆에 앉은 여자가 몇 등급 떨어지는 걸 묵향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는 국광의 나으리였으므로 처음 온 그로서는 아무런 불평도 있을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제법 깔끔하게 차려진 맛깔스런 안주상에 풍미가 넘치는 술에 깊이 매혹되기 시작했다. 국광은 옆에 계집이 앉아있는게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으므로 그녀에게 금을 타줄 것을 부탁했고 그녀는 옆에서 금을 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열심 히 술을 마셔댔다. 국광이 말도 않고 급히 술만 마셔대는 걸 보고 옆에 앉은 자신을 취월(就月)이라 소개한 여인이 그를 멸시하는 시선으로 힐끔바라보는 걸 느낀 옥영진 나으리는 약간 쑥스러운 감정이 생겨 국광을 나무랐다. "술이란 천천히 그 향기와 맛을 음미하며 마셔야지 그렇게 마구 마시면 안 돼." "원래 술이란 통쾌하게 마셔야지. 뭘 그렇게 좀스럽게 마신다는 겁니까?" "허어... 이사람이..." "이 술은 아주 깊은 맛이 있고... 향기가 진한걸로 보아 볕이 잘드는 땅에서 수확된 작물로 만들었다는 걸 알수있죠." "왜 볕이 잘드는 땅에서 만들어졌다는 건가?" "볕이 잘 안들면오곡백과나 과실이 충분히 익지 못하니 이정도 풍미를 풍기 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좋은 술이 계절을 잘 못만나 나으리께서는 별로 맛을 제대로 보고 계시지 못한 것 같으니 그게 아쉬울 뿐입죠." "계절을 잘 못 만나다니?" "지금은 여름이라 국화가 쑥쑥 자라나는 계절로 밤낮으로 무더우니 이 술 을..." 그런다음 한잔 꿀꺽 한 다음 말을 이었다. "아무리 지하의 서늘한 곳에 보관했다 하더라도 여기서 좀 지나면 뜨뜻해져 제맛을 못내죠. 원래 이 술은 약간 차게 해서 마셔야 더욱 좋죠." "그걸 어찌 아나?" "뭔가 모자라기에 좀 술을 덮여서도 먹어봤고 차게도 먹어봤고... 여러 가지 로 해보니 역시 약간 차게 마시는게 가장 좋은 맛이더군요. 나으리도 그렇게 드시겠습니까?" "그러세나." "그럼 잔을 비우시죠." 그런다음 국광이 술을 직접 따라주며 말했다. "다시 온도가 올라가기 전에 드시죠." "과연... 맛이 더욱 뛰어나군. 훌륭해..." 그러자 취월이 국광의 앞에 놓인 술병을 쥐어보고 그 술병이 아주 차다는 것 에 놀랐다. 그녀가 약간 놀란 눈으로 국광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고보니 음공(陰功)을 익히신 분이셨군요." "뭐 음공이랄것도 없고 그냥 술병을 차게 했을 뿐이야. 그러니 술이 더워지기 전에 열심히 먹어야지. 다시 술잔을 잡고 차게 만들어대며 마시기는 귀찮거 든. 이봐 자네도 이리와서 한잔 하게나." 그러자 여태껏 금을 타던 혜영(慧瀛)이라 소개했던 여인이 와서 그의 옆에 앉 았다. 국광은 그녀에게 술을 한잔 따라 준 다음 말했다. "지금껏 금을 탄다고 수고했으니 쭉 마시게." "감사합니다." "뭐 나한테 감사할건 없어. 계산은 저 나으리가 하는 거니까..." 그의노골적인 말투에 약간 아미(蛾眉)을 찌푸리는 것 같았지만 잔말않고 술 을 쭉 마셨다. "어때 술맛이 괜찮나?" "예." "그런데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건데... 왜 저 안주에 해주분(解酒粉)을 뿌려 놨는지 대답을 해주실까?" 그러자 그녀는 경악한 표정이 흘러지나갔지만 곧이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건... 소첩들이 술에 취해버리면 제대로 시중을 못들기에 저희들이 술을 깨기위해 준비해둔 겁니다. 그건.... 그건... 나으리들께서 드시기 위해 준비 한게 아니죠." "그래? 그럼 그런걸로 알고 있겠어." 또다시 국광이 직접 술을 따라 쭉 마시자 취월이 말했다. "나으리, 혜영이 마음에 안드신다면 다른 아이를...." 그러자 국광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나는 이 아이로 충분해. 혜영아. 금을 이리 다오." "여기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국광이 금을 달라고 하자 옥영진 나으리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 사이에 금도 배웠나?" "아뇨. 한번 만져보고 싶어서 그럼니다." 묵향은 기분 내키는대로 금의 현을 튕겨댔다. 보다못한 혜영이 국광에게 금의 현을 어떻게 다루는지 옆에서 조금 가르쳐 줬다. 그러자 국광은 조금 지나자 아주 자연스럽게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쳐대더니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그 튕겨대는 소리는 하나의 곡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두 여자는 묵향의 처음에는 장난같던 솜씨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걸 보고 처 음에는 일부러 잘치는 사람이 장난삼아 못치는 척 하다가 자신들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들은 경악하기 시작했다. 약 한 시진 정도 뜯어대니 그 실력은 이미 거의 보기드물 정도의 명인(名人)의 수준 이었다. 국광이 점점 더 자신이 받고있는 그 감동을 현을 통해 분출해 나가자 급기야는 혜영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일 정도까지 발전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 기 국광이 금을 치던걸 중단했다. 모두들 곡에 취해있다가 갑자기 중단하자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국광은 금을 혜영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정말 아주 좋은 소리가 나는군요." "이렇게 잘타는줄 몰랐는데 내 다음에 좋은 금을 선물함세."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때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런다음 문이 열리며 한 아름다운 여인이 금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말했다. "혜영아. 너는 나가거라." 그런다음 국광에게 깊숙히 인사하며 말했다. "고인(高人)을 몰라 뵙고 소녀가 맞이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소녀의 이름 은.." "네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저 아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내보내는 거 지?" "혜영이가 잘못한게 아니라 혜영이의 능력으로는 나으리가 힘에 부친지라 제 가.." "나는 혜영이가 나으니 자네는 돌아가게.." "하지만 이건 저희 루에서" "자네가 꼭 나를 대접해야 하는 것이 루의 규칙인가?" "루의 규칙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니면 됐네. 나는 술자리에서 옆사람이 바뀌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 아이 를 다시 불러다 주게." "그렇지만 금에 있어서는 혜영이보다 낫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겠는지요." "내가 원하는건 금실력이 아냐. 혜영이는 각법(脚法)만 익혀서 내가 기습당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너같은 애가 옆에 있다가 기습하면 나는 감당하기 힘들 지." 그러자 금을 든 여인의 얼굴색이 노래졌다. 그 말을 들은 옥영진도 대경해서 물었다. "저 아이가 무공을 할줄 안단 말인가?" "그럼요. 제가 검을 풀지 않겠다고 한것도 이 술집이 원체 고수들이 많아, 만 약에 어떤일이 벌어지면 제 짧은 무공실력으로는 검 없이 나으리를 보호하기 힘들거든요. 여기같으면 그래도 밖으로 탈출하기가 쉽기에 따라들어온 겁니 다." "몰랐군.... 여태껏 오면서 여기에 고수들이 있다는건 조금도 짐작을 못했는 데...." "그건 나으리 탓이 아니죠. 남자의 경우 무공을 익히면 태양혈이 불쑥 튀어나 오지만 여자는 아니니까요. 거기다 자신의 내력(內力)이나 무공 정도를 숨기 는 방법들이 많지않습니까? 혜영의 경우도 일부러 장법이나 그런 기타의 손을 사용하는 무공을 익히지 않아 보통 손이나 얼굴, 눈만 보고 짐작하는 방법으 로는 알아내기 힘들죠." "그럼 자네는?" "저요? 참 설명하기 힘들군요. 그냥 느낌이랄까... 여기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이곳에 고수들이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 아이들이 처음 들어올때부 터 저 아이들도 무공을 익혔다는 느낌이 오더군요. 특히나 제 옆에 앉은 아이 는 그래도 각법만 익힌 것 같아서.... 이봐 너는 나가라구. 나는 금음도 좋지 만 마음놓고 술을 마시고싶어." 그러자 여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고 곧이어 혜영이가 다시 들 어왔다. 그녀는 자신을 다시 불러주어 감사한 마음과 엄청난 고수인 것 같은 정체모를 사내에 대한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술을 마셨지만 이곳이 무림인들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걸 눈치챈 사람 은 없었기 때문이다. 혜영은 용기를 내어 국광에게 말했다. "나으리는 참 불가사이한 분이군요. 처음에는 옥 나으리가 모시고 오신 무관 인줄 알았는데..." "왜 무관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관부에 있는 사람은 그정도로 무공이 고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라고 생각하나?" "혹시... 무림의 어떤 방파에?" "아냐. 나는 그냥 옥 나으리의 수하일뿐... 어떤 무림인도 아냐. 그런데 너는 왜 각법만 익혔냐?" "저희 루에서는 모두들 처음에는 각법을 익힙니다. 어렸을때부터 각법을 익히 면 다리가 날씬하고 탄탄해서 손님들이 좋아하시거든요." "오호... 그런다음 공력이 쌓여 충분히 손의 모양이 망가지지 않을때쯤 손을 사용하는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는거군. 기루의 여인이 무공을 배워서 뭘하려 고?" "그냥 호신과 미용을 위해섭니다." "호신을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좀 과한편이지만 그냥 그렇다고 해두고 참.. 술 을 마시니 국화 생각이 나는군. 혹시 여기 국화가 있으면 좀 가져다 줄수없 나? 한송이라도 좋아. 안되면 국화 그림이라도 좋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혜영은 밖에 나가더니 조금 후 국화 한송이를 물병에 담아 들어왔다. 물병을 탁자위에 놓자 국광은 추억에 어린 평안한 눈동자로 국화를 지긋이 바라보며 술을 한잔 한잔 마시기 시작했다. 국광이 술만 마시는 걸보고 혜영이 안주를 집어주며 말했다. "술만 드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안주도 좀...." "나는 안주는 안먹어..... 너는 지붕위에 있는 녀석보고 지금 사라지지 않으 면 몸통 위에 머리가 붙어있기 힘들거라고 전해줘." "예?" "아... 지금 도망갔으니 전할 필요는 없겠군. 여기는 편히 술마시기는 정말 힘든 곳이야." 그러면서 국광은 열심히 술을 마셔댔다. 혜영이나 그곳에 있는 여자들로서도 이정도 주광(酒狂)은 본적이 없었다. 국광은 혼자서 거의 10병의 술을 마셨 다. 지금 국광이나 옥영진 나으리가 마시는 술은 아주 향기롭고 맛있는 술이 지만 상당히 강한 미옥주(迷玉酒)라는 술이다. 그 맛과 향기에 취해 마시다 보면 정신을 잃기 쉽상인 술이다. 그런데도 이자는 보통 무림인들이 하는 짓 거리인 내공을 통해 술기운을 몸밖으로 토해내지도 않고 그냥 술을 마셔대고 있는 것이다. 보통 내력이 강하지 않고서는 6병을 넘기기 힘든 술을 이렇듯 마셔대는 걸 보고 그녀들은 놀랐다. 그래서 혜영이 말했다. "술을 좀 천천히 드시지요. 미옥주는 아주 독한 술입니다." "상관없다. 돈계산할 나으리와 가까운 친구, 그리고 좋은 술이 있으니 이때가 아니면 언제 술을 마셔보겠나?" "자네, 이 술맛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내 다음에 이 술 몇통을 구해다가 집에 가져다 두지." "뭐... 그렇게 마음쓰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무 술이나 마시면 되죠. 그리고 제일 좋은건 안마시는거죠. 술을 마시는건 몸에만 안좋을 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폭주를 할 필요는 없잖나?" * * * "살펴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정말 대단한 고수로군요. 그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본문의 사람으로 만들어 야 해요." "노력은 해보겠지만 거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지금 옥영진의 밑에 있는 것은 구명에 대한 은혜 때문입니다. 묵향을 떼놓으려면 옥영진을 없애는 수밖에 없 죠. 하지만 그건 쉬운일이 아닙니다." "시도를 한번 해보세요." "벌써 시도를 했습니다. 본문의 1급 살수를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옥영진은 살아있다는 건가요?" "예. 어떻게 알았는지 밤에 잡입하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강렬한 살기가 느 껴지더니 곧바로 목에 싸늘한 검이 와 닫더랍니다. 뒤로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기에 거의 기절할만큼 놀랐다고 그러더군요. 그가 하는말이 지금 당장 사라지지 않으면 몸뚱이 위에 있는 물건이 무사하지 못할거라고 낮게 말 하기에 아무생각없이 죽자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미행은?" "미행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살수만 쫓아냈을 뿐... 더 이상의 행동은 없 었습니다." "거의 짐승에 가까운 감각을 지니고 있는 자로군요." "예. 적이 된다면 가장 힘든 상대죠. 그 때문에 교주도 그를 없애려고 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여간 어떤 변화가 없는지 그를 감시하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과거에 대 한 정보제공을 미끼로 본문에 가입할 의사가 없는지 물어보세요. 그가 복수하 는데 본문이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을 거라는 말도 함께 하세요. 그런데 마교의 상태는 전과 같나요?" "예.. 지금도 신경전 중인데 아마 어떤 계기가 있다면 사건이 벌어질 것 같습 니다." "누가 유리한가요?" "장인걸 부교줍니다. 지금 묵향이란 희대의 고수를 없애는데 있어서 대단히 비열한 방법을 동원했기에 교내의 핵심고수들의 상당수가 교주에게 등을 돌렸 거나 아니면 방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상탭니다. 장인걸의 경우 묵향과 처음부터 끝까지 정면대결을 펼쳤기에 그에게는 별로 이번의 암살이 명성에 지장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교체에 있어 가장 강력한 열쇄를 쥐고있는 자들은 원로원이라고 봐야합니다. 원로원에서 지금의 사태를 방관할지 아니면 누군가 의 손을 들어줄지에 따라 주인이 바뀔 가능성이 큽니다." "전대교주가 간섭할 가능성은?" "전대교주는 지금의 난국이 교주의 치졸한 암습에의해 벌어진 일이기에 중립 적인 위치에서 관망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렇기에 아마 나서지 않을 것 같 습니다. 어쩌면 교주를 폐하고 현재 소교주를 올릴수도 있겠지만 소교주의 무 공은 아직 부교주들과 겨눈다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누가 주인이 될지에 따라 현 무림의 정세가 결정될 일이니까 신경써서 감시 하세요. 지금까지의 정보로는 최악의 상대가 장인걸입니다. 장인걸은 상당히 호전적인 인물로 알려져있고 혈교의 무공을 흡수한 전례가 있는 만큼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자인 것 같아요." "명심하겠습니다." 행운의 여신 I 거대한 탁자위에 중원을 비롯한 새외변방(塞外邊方)까지 그런대로 자세히 그 려진 거대한 지도가 놓여져 있다. 그 위에는 크고작은 모형 말이나 사람들이 놓여져 있었는데 각 말이나 사람 등의 모형에는 작은 깃발이 달려있고 그 깃 발에는 글이나 숫자가 써져있었다. 여러명의 늙은 장군들이 그 탁자를 둘러싸 고 서서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에는 옥영진 나으리도 포함되어 있었 다. "요와의 국경선에 좀 더 병력을 증파할 수는 없소이까? 요의 위세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간단 말이외다." 칠순의 나이에도 장대한 체구를 유지하고 있는 북동원수부의 부원수(副元帥) 마룡(馬龍) 대장군이 사정을 하자 정군관(征軍館;총 사령부)의 수장(首長)인 진길영(晋吉領) 원수가 딱하다는 얼굴로 사정을 얘기한다. "실지 전선에 계신분이 그런 부탁을 하신다면 어쩔 수 없소만 그곳에 돌릴 군 사력이 없소이다. 부원수는 지금 작전협의차 이곳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요와의 국경선에는 북동원수부(北東元帥府) 소속의 20만 어림군 (禦臨軍;중앙 정예부대)과 중앙원수부(中央元帥府) 소속의 12만 어림군이 투 입되어있소이다. 더이상의 병력을 줄수는 없소이다. 영정왕부(英精王部)에 통 지해서 향방군(鄕防軍;지방군)을 동원해야지 더 이상의 어림군은 불가능하 오." "그렇다면 황군이라도 좀..." "허허... 황군이 변방이나 지키라고 만든 군사인줄 아시오? 지금 영정왕부에 서 동원해준 향방군만 해도 20만을 넘고있지 않소이까? 총합 52만의 군세인데 그래도 모자른단 말씀이오?" "지금 북동원수부는 총력을 다해 요와의 전쟁을 억지하고 있소이다. 겨우 52 만으로 더 이상 그들을 위협하여 전쟁을 억지한다는 건 무리가 있소이다. 요 는 이번에 새로이 50만 대병을 준비하고 있다하오. 이들이 어디로 올지 모르 오. 기병 위주인 요의 정예에 비해 보병위주인 향방군의 전투력이 너무 차이 가 나서 요의 정예들과 전투가 벌어지면 그저 숫자나 채울뿐 실질적으로 필요 가 없는지라 그러는 거요."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중앙원수부 소속의 남은 군사 8만은 뺄 수 없소이다." "지금 몽고쪽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기에 정북원수부의 군사도 뺄수 없소이 다." "그러면 딴곳은 어떻소?" "아시다시피 정서원수부에서는 천산쪽의 무역로를 방위해야 하기에 빼기 어렵 소. 가뜩이나 요즘들어 마적단이 많이 출몰해 많은 통로를 지킨다고 그쪽도 힘든 모양이오." "동남원수부에서 남경과 동경의 외곽 수비병력을 뺀다면 5만 정도는 더 뺄수 있을 것 같소. 하지만 그것도 정진남 원수의 허락이 있어야 하오." 진길영 원수가 계속적으로 병력의 증파를 반대하자 마룡 대장군이 얼굴이 굳 어지며 대들었다. "지금 요가 본국과의 국경선에 배치한 병력이 얼만줄 아시오? 80만이란 말이 오. 자그마치 80만 대병이 송의 속살을 파먹으려고 대기중이란 말이외다." "그쪽 사정이 딱한 것은 알고있소이다. 하지만 곧 요에대한 정벌이 시작될것 이니 그때까지 그 병력으로 방위를 해주는 수밖에 없소. 누구는 주고싶지 않 아서 안주는 줄 아시오?" "그렇다면 정벌은 언제 시작되는겁니까? 아직까지도 황제폐하의 허가조차 떨 어지지 않고 있지 않소이까? 그러면서 전방의 정예군을 북경 부근으로 정벌 준비를 위해 집결시킨답시고 빼내고 있으니 더욱 국경이 취약해질 수밖에 더 있습니까?" "곧이어 시작될 것이오. 이창해 원수 자네가 좀 설명좀 해주게." 그러자 정길영 원수의 왼쪽에 서있던 백발의 긴 수염을 가진 깡마른 중앙원수 부의 수장인 이창해(李滄海) 원수가 싸늘한 안광을 뿌리며 좌중을 둘러본 다 음 입을 열었다. "현재 정벌군의 주축은 중앙원수부 소속의 20만이 될것이오. 그리고 북동원수 부에서 15만이 동원될 것이외다." 그러자 마룡 대장군이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따져물었다. "그래봐야 겨우 35만이 아닙니까? 그리고 북동원수부에서 15만의 병력을 빼내 면 북동부의 방위는 누가 합니까? 겨우 북동원수부에 남은 5만의 어림군과 얄 팍한 향방군으로 모든 걸 책임지라는 말씀입니까?" "아니오. 일단 정벌이 시작되면 각 왕부에 연락을 보내어 향방군 중에서 무술 실력이 뛰어난 자들을 5만씩 뽑아들이면 25만을 만들 수 있소. 그들 중 15만 을 정벌에 동원하고 나머지 10만을 각 요처의 수비병력으로 주둔시킬 것이 오." "하지만 그래봐야 50만입니다. 지금 요의 국경선에는 80만이 있고 후방에 50 만을 더 준비해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합하면 130만인데 그걸 50만으로 공격 한다면 그야말로 이란격석(以卵擊石;계란으로 바위치기)이 될겁니다." "아니외다. 송에서 동원하는 병력만 50만이고 정안국에서 3만, 고려에서 20 만, 여진의 각 부족장들도 군사지원을 약속했소. 여진족들만 합해도 30만은 될것이오. 그렇게 되면 총 103만이 될거요." 마룡 대장군이 약간 냉소적인 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엄청난 대군이군요. 하지만 그걸 효과적으로 운영하기도 어렵고 또 그 보급은 어떻게 합니까?" "모두들 보급은 각자에게 맏기기로 되어있소. 여진의 군대는 8만은 북쪽으로 15만은 중앙으로, 그리고 나머지 7만은 고려군과 함께 남쪽으로 진격해 들어 갈 것이오. 그리고 정안국의 3만은 본국의 군세와 합류하여 행동하기로 되어 있소." 모두들 이창해 원수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마룡 대장군이 약 간 후회가 된다는 투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총군세 103만 이라고 해도 걱정이 되는군요. 지금 원체 요가 맹위를 떨치는 데다가 몽고쪽이 문제가 많아서... 일찍이 요가 발원했을 때 싹부터 잘라버렸 어야 하는건데.... 후회가 되는군요. 찬황흑풍단이 재기하는 동안 변방에 신 경을 안쓴 것이 화근이 되어 변방의 오랑캐들이 통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를 줬고 더구나 요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진게 문제요. 일찍이 중앙원수부 소 속의 용병대라도 보내어 적절히 요리를 해놨으면 이정도 사태에 이르지는 않 았을 것입니다." 진길영 원수가 그의 말에 수긍하며 말했다. "지금와서 후회하면 뭘하겠소? 사실 지금까지 너무 변방 이민족을 정벌하는데 흑풍단에만 의존했기에 관군의 실전경험이 많이 떨어져 그것이 문제요. 거기 에 이번 전쟁이 장기화되면 국고의 손실도 손실이려니와 가뜩이나 강대한 기 마민족인 몽고가 통합되지나 않을지 그게 걱정이오. 가장 좋은건 이제 자라나 는 싹인 몽고부터 없애버리고 시작하는건데..." 그 말에 옥영진 대장군도 동의를 표했다. "맞는 말이오. 몽고는 원체가 척박한 기후와 토양에서 자라난 민족들이라 아 직 통합이 안되어서 그렇지 그들이 통합된다면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것입 니다. 지금 가장 골치거리는 서북방에서 칸으로 추대된 철진천(鐵進天)이란 자요. 작은 부족장에서 시작해 40여세가 될 때까지 주변의 부족들을 통합해 강대한 세력으로 키워 회색늑대라 추앙받는 용자(勇者)인데 그가 가장 위험한 인물이죠." 마룡 대장군이 진길영 원수에게 동의를 구한다는 듯이 말했다. "암살이라도 해버리면 어떨까요?" 그 말에 진길영 원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몇번 시도를 해봤지만 원체가 척박한 땅이라실패했소. 암살자들이 그가 위 치한 곳까지 도착이나 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오." 옥진영 대장군이 진길영 원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황제폐하께서는 이번 요에대한 선제공격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 요? 예전에는 큰 일이 있을 때 상의를 해주시더니 요즘은 통...." "그놈의 간신 엄승(嚴承)이 농간을 부려 아직도 결정을 못하고 계시오. 아시 다시피 엄승은 왜그런지 몰라도... 아니 아마 요에서 뇌물이라도 받아처먹었 는지도 모르지. 그놈은 요와의 화친을 주장하고 있소이다. 그가 옆에서 감언 이설(甘言利說)로 황제폐하를 설득해대니 무식한 무장들이 재간이 있겠소이 까?" 마룡 대장군이 함께 울분을 터트렸다. "겨우 애첩의 오라비 주제에 정사는 물론이고 군무에까지 깊숙이 관계를 한다 는 건 너무한 일이오."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이창해 원수가 말했다. "황제폐하께서도 예전엔 그렇지 않으셨는데 엄귀비(嚴貴妃)에게 빠지신 다음 부터 정사(政事)를 등한히 하시니 원... 나이도 드셨는데 황태자께 양위를.." 그러자 진길영 원수가 그의 말을 제지했다. "이사람이 큰일날 말을.... 말조심 하게나. 잘못 확대되면 역적의 누명을 쓸 수 있어." 그러자 발끈한 이창해 원수가 말했다. "말이야 바른말이 아니오? 엄승이 지금 금의위의 수장까지 자신의 친족으로 바꾸려고 물밑작업을 벌이고 있단 말이오." 옥진영 대장군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자신은 없는 듯 부정하지는 못하며 중 얼거렸다. "설마... 임 대영반이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충신이신데 그를 바꿀 리가...." "앞일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 그렇게 된다면 조정의 모든 정보를 엄 승이 쥐게 되는데 그때는 말한마디도 실수하면 살아남기 힘들게 될거요." "......." "말세로군.... 성군으로까지 불리셨던 분께서 어째서 만년에 이르러 이런 큰 실수를 하시는지...." * * * 엄승의 제지로 모든 준비를 갖추고도 출정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요에대한 정 벌은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다. 이미 동북방의 모든 방위는 향방군에게로 이양된 상태였고 어림군은 북경 외곽에 집결해서 요와의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 낭보(朗報)가 중경의 정군관(征軍館;총 사령부)에 날아든다. 낭 보를 접하자마자 대장군 이상 고위 장성들의 정군관에의 집합령이 내려졌다. 넓은 지도가 그려진 탁자 위. 요나라 위에 있던 많은 인마(人馬)의 모형들이 사라지고 없어졌다. 그 수는 거의 50만에 가까운 병력이 없어졌다는 걸 나타 내고 있었다. 그걸 확인하는 수많은 장수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치고 있었 다. 그걸 재확인하는 듯이 정군관(征軍館;총 사령부)의 수장(首長)인 대사마 (大事磨) 진길영(晋吉領) 원수가 미소띈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고려에서 아주 희소식이 도착했소. 우선 송과 싸우기에 앞서 뒤를 튼튼히 하 기 위해 고려정벌에 나섰던 요의 군사 50만을 고려의 맹장(猛將) 강감찬이 대 파하여 살아돌아간 수가 수천뿐이라고 하오." 마룡 대장군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도대체 어떤 기책을 썼기에 50만이 수천으로 줄어든단 말입니까?" "정보에 의하면 대단히 치밀한 작전에 녹아난 것 같소." "대체 어떤 작전입니까?" "우선 침입 예상로에 있는 모든 민가를 철수시켜 식량의 노획을 막았다고 하 오. 그런다음 상대가 깊이 들어올 때를 기다려 보급로를 소수의 복병으로 공 략하여 철저히 식량의 보급을 차단했으니 자연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더 있겠 소?" "묘책이군요." 마룡 대장군의 수긍에 이창해 원수가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그렇게 대단한 작전도 아니군요. 그건 삼국지에도 촉나라에서 유비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하려고 했던 누구나 알고있는 작전이 아닙니까?" 진길영 원수가 그의 말을 듣고는 잘못된 점을 상세히 지적했다.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막상 사용하기는 힘든 작전이지요. 그 많은 주민들을 생활터전을 없애고 철거시켜야 하는데 이게 보통 배짱이 없고서는 밀어붙이기 힘든 작전이오. 삼국지에도 유장이 그 계책을 사용하면 백전백승 할터인데도 백성을 생각해서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써져있소. 그에 비하면 그 강감 찬이란 장수는 정말 대단한 인물임이 틀림없소." "정말 대단하군요. 백성의 안위는 살피지도 않고 가장 지독한 전쟁법을 택한 걸 보니...." "허허... 너무 그런식으로 말씀하지 마시오. 저쪽도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이 라 그랬을 거외다. 강감찬은 보급을 막은 연후에 각 지점에서 화공이나 기습 공격을 가해 적을 피곤하게 만든 후 일거에 그들이 지나가는 길목의 둑을 터 트려 치명타를 가했다고 하오. 하지만 50만 대병이나 되니 겨우 강뚝 하나 터 졌다고 그렇게 큰 타격이 될리는 없지요. 거란의 대병을 지휘한 대원수 소배 압은 그래도 침략의 의욕을 잃지 않고 계속 남하하다가 끝내는 보급문제와 지 속적인 기습에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 후퇴를 시작했다고 하오. 강감찬 장군은 일단 상당한 손실을 입고 퇴각하는 적을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면서 추격전을 편 결과 50만 대군 중에서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에 이른다 고 들었소이다." 그 말을 들은 장군들은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고려는 이번까지 3번에 걸친 요의 대규모 침입을 받았소. 소국으로서 그정도 로 요의 병력을 막아낸 것은 단순히 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고려의 승리 는 하늘의 도우심이니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되오. 일단 금에대한 우려 는 잠시 없어졌으니 작전을 변경하여 자라나는 싹인 몽고의 철진천부터 없애 버려야 하오. 30만에서 40만 정도 어림군을 투입하면 곧이어 결판이 날거외 다. 그런다음 병력을 돌려 요를 멸할 것이오. 요와의 전쟁에는 이미 여진의 족장들이 지원을 약속했고 고려도 전쟁에 지치긴 했지만 우리의 출진 제의를 거절하지는 못할거요." 진길영 원수의 대략적인 설명에 중앙원수부의 부원수인 임청(任淸) 대장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요는 강대한 국가라 전쟁이 얼마나 오래 끌지 모릅니다. 거기에 거란족은 유 목민족이라 거의 대부분의 장정이 훌륭한 군인이라고 봐도 무방하오. 아무리 50만이 없어졌다고 하나 그래도 다시 새로이 병력을 모아 버틴다면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을것입니다. 너무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 민심이 흉흉해 질것이니 그게 문제로군요." "민심이 조금 흉흉해지는건 큰 문제가 되지 않소." "그래도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는 건 위험합니다." 임청 대장군의 의견에 마룡 대장군도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맞습니다. 만약 민란이라도 벌어지면 모든 군사력이 요에 가있는데 진압하기 가 곤란합니다. 그 강대했던 한나라도 겨우 황건적 때문에 망했는데 송이라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란 법은 없소이다." 여태까지 가만히 듣고있던 정북원수부에서 작전 상의차 수도에 온 공상지(孔 相支) 대장군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약 본국에서 몽고를 친다면 요의 황제도 바보는 아니 니까 우리들이 자신을 치기 전에 뒷정리를 한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입니다. 그들이 선제공격을 해온다면 우리측의 피해는 더욱 커질겁니다. 그러지 말고 몽고와 요에 대해서 양동작전을 벌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지금 요는 크나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이니 단시간에 군사력을 재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초반 에 승세를 탄다면 주변의 약소한 유목민족들을 회유하기도 쉬울뿐더러 그들을 전장에 투입하면 더욱 피해가 적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전투를 시작하 니까 몽고를 끝내고 요로 들어가는 것보다 전쟁 기간이 훨씬 줄어들겁니다." 공상지 대장군의 의견을 들은 후 진길영 원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 하지만 딱히 몽고에 까지 파병할 만큼 병력의 여분이 없소." 이때 옥영진 대장군이 말했다. "몽고는 소장이 책임지겠소이다. 만명만 지원해주면 되오. 강노(强弩) 200대 와 보병만 주면 주면 됩니다. 흑풍단 자체가 기병이긴 하지만 그래도 강노의 지원이 있다면 피해가 적을거외다. 그리고 2만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니 군 량도 많이 필요없소. 아마 지금 몽고 국경에 저장된 군량미만 가지고도 충분 할 거로 생각되니 거의 총력을 요와의 전선에 투입해도 될것이오." 옥영진 대장군의 말이 떨어지자 진길영 원수가 임청 대장군에게 물었다. "정북원수부에서 1만 정도를 빼내도 상관없겠소?" "예... 1만이 아니라 5만이라도 상관없소이다." "알겠소 임장군." 그런다음 옥영진 대장군에게 말했다. "고맙소. 옥장군. 그럼 그대가 몽고를 책임져 주시오. 정북원수부에서 1만 어 림군을 뽑아가시오.정북원수부의 남은 19만 어림군은 예비병력으로 사용할 예정이니까 만약 필요하면 더 요청하시오. 그리고 될 수있다면 몽고 원정을 빨리 끝내줄 수 있겠소?" "흑풍단을 따로이 사용하실 데가 있습니까?" 그러자 진길영 원수가 약간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이창해 원수와 함께 새운 기밀작전이 있어서 그러오." "소장들에게도 기밀입니까?" 그러자 이창해 원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허허허... 아니오. 이번 기회에 노부는 요뿐만 아니라 여진까지 정벌할 생각 이오. 그 때문에 모든 정벌이 끝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거요. 그동안 새외의 이민족들의 움직임을 옥 대장군이 차단해주셨으면 좋겠소이다." "여진까지라뇨?" "여진도 지금 제법 큼직한 부족장들이 나타나고 있소. 그래서 이번에 여진의 부족장들에게 압력을 가해 병력을 차출해 요와의 전쟁에서 소모한 후 요와 전 쟁이 끝나면 여진까지 정벌하고 돌아올 생각이오. 그리고 노부가 옥장군에게 바라는 점은 이번에 몽고를 원정하면서 사정을 봐주지 말아 다시는 중원을 넘 볼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시오." "알겠소이다. 그런데 대사마께서는 엄승의 반대를 어떤 방식으로 뚫으실 요량 이신지?" 그러자 진길영 원수가 대답했다. "우선 일을 만들어서 엄승을 한 일주일 정도 정령산(靖靈山)으로 보낼 생각이 오." "정령산이라면?" "그렇소. 국가의 다급한 일이 있다든지 할 때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지요. 요의 대군을 고려가 다행히 격멸한 고로 한동안 국가가 평안하게 되었으니 하 늘과 조상님들에게 감사를 올려야 한다고 황제 폐하께 상소할 생각이오. 그런 다음 황제폐하께 그 적임자로 엄승을 추천할거요. 감사제의 제사장(祭司長)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니 엄승을 좋게 보시는 황제폐하도 찬성할 거로 생 각하고 있소." 그러자 모든 장수들이 말했다. "묘책이군요." "3일정도 제를 올리고 정령산까지 오가는데 4일 정도 걸리니까 일주일의 시간 이 나오게 되지요. 그동안에 집중적으로 황제폐하께 간한다면 허락을 받아낼 수 있을거로 생각됩니다. 어디 이보다 더 좋은 의견이 있거나 아니면 보충할 만한 점이 있다면 말씀을 해주시오." 그러자 잠시 생각하더니 마룡 장군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참! 정령산에서 조금 떨어진 의양성에 엄귀비의 생가가 있으니 황제폐하께 몇가지 좋은 물건을 준비해 주면서 엄귀비의 생가에 하사하는게 좋겠다고 상 소하는 겁니다. 그런다음 엄정인(嚴靖仁)의 아들인 엄승이 하사품을 가지고 가는 길에 제사도 지내게 하는 것이 좋을것이라고 상소한다면 엄승이 가지 않 고는 알될 것입니다." "그것도 묘책이외다. 둘다 함께 사용해 보기로 합시다." 행운의 여신 II 귀가한 옥영진 나으리는 국광과 옥항을 불렀다. 그런다음 그들을 데리고간 곳은 옥영진 나으리의 서재였다. 옥영진 나으리의 서재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단촐한 꾸밈새에 여러 가지 무기들과 무구(武具)들이 놓여있다. 그 한 구석에 는 몇가지 새로이 가져다 놓은 것들이 있었는데 2벌의 갑옷과 그에따른 여러 가지 부속 장비들... 또 새로운 무기들이 몇 개 있었다. 그 앞으로 그들을 인 도하며 옥영진 나으리가 말했다. "좀 있으면 몽고와의 전쟁이 벌어질거야. 그때 나는 너희들을 데리고 가고자 한다. 둘 다 아마 전쟁터는 처음일테니.. 노부가 몇가지 준비해온 것이 있는 데 한벌 마음에 드는걸로 골라보게나." 옥항은 신품의 흑색 갑주앞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며 한벌의 갑주에 살며시 손을 댔다. 그러자 옥영진 나으리가 그 모양을 보더니 말했다. "그 갑주는 국광의 것이고 네것은 저것이다." 한눈에도 옥영진 나으리가 지목한 갑주는 국광의 것보다도 더욱 두터운 강철 로 만들어져 있었다. 슬며시 한번 만져본 다음 옥항이 항의했다. "이건 너무 무겁다구요. 이걸 입고 어떻게 싸워요?" "국광에게는 이미 물어본 다음 구해온게 저거다. 국광은 원체 무공이 높아 실 지 갑옷 따위가 별 필요없는 정도지만 너는 달라. 이정도가 아니면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 살아남기 힘들지." 그때 국광이 이것저것을 보더니 직경 1척 정도의 방패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뭔가요?" "저건 손에 장착하는 작은 방패인 '착완순(着腕盾)'이라는 거야. 한번 사용해 보겠나?" 그러더니 옥영진 나으리는 직접 국광의 왼손에 착완순을 붙여줬다. 일반의 방 패와는 달리 이건 넓은 가죽끈으로 단단히 팔에 고정해서 사용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착완순은 폭이 1척이라 손목부터 시작해서 팔꿈지를 약간 벗어나는 지점까지 부착되어 손목을 자유로이 쓸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착완순을 부착한 상태에서도 활을 쏘거나 검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문제는 그 크기가 작기에 방어할 수 있는 폭이 한정되므로 일반 어림군에서는 사용되 지 못하고 무공이 뛰어난 흑풍단의 무사들에게만 주어지는 독특한 방어병기 다. 손목까지가 자유롭기에 화살이 만약 비오듯 쏟아지면 왼손으로 다시 말에 매어놓은 넓은 방패를 잡아서 사용할 수도 있으므로 무사들에게 아주 호평을 받는 몇 안되는 장비중의하나였다. 국광은 착완순을 왼손으로 퉁퉁 쳐본 다음 말했다. "과연 뒤쪽에 부드러운 안감을 대서 충격이 아주 적게 전달되는군요." 그런다음 옆에 놓여있는 5척길이의 마상용(馬上用) 장도(長刀)를 들고는 긴 자루를 두손으로 잡고는 휘둘러본 다음 말했다. "도를 사용하는데도 거의 착완순이 방해되지 않는군요. 아주 잘 만들어진 방 팹니다." "그렇지. 하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 면적을 크게 만들 수 없어서 동작이 느린 일반 사병들은 사용할 수도 없는 장비야. 그래 그 장도(長刀)는 마음에 드나? 항아는 창을 사용하지만 자네는 오직 검밖에 못쓰니까 마상용 장도를 가져왔 네." "아주 좋군요. 무게도 알맞습니다. 좋군요..." 국광은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저쪽 구석에 놓여있는 괴이한 물건을 보고 물었다. 그건 착완순 처럼 손에 붙이도록 만들어져 있지만 착완순처럼 둥근 방패가 붙은게 아니라 삼각형의 긴 쇠막대기가 붙어있다는 점이 달랐다. 아마 모양만으로 봤을 때 손에 장치하여 사용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모양이 여러 가지가 있었다. 어떤 것은 길이가 반척 정도인 것부터 어떤 것은 1척인 것도 있었다. 어떤 건 1척3촌 정도의 길이인 것도있었는데 그건 끝부분이 유 연하게 휘어져 올라가(스키처럼)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들며 물었다. "이건 뭡니까?" "그건 검지판(劍止版;Sword Stopper)이라는 거야. 이렇게 쓰지." 그러면서 옥영진 나으리는 그걸 오른손에 감으면서 말했다. "착완순은 왼손에 장착하지만 착완순 자체가 넓은 물건이라 검을 사용하면 자 연 속도가 떨어지지. 그래서 만들어진게 이 검지판이야. 이건 검을 쓰는 오른 손에 장착하고 상대방 검이나 창을 막는거지." 국광이 검지판을 이리저리 만져보는 걸 보며 옥영진 나으리가 덧붙였다. "그 위의 홈들은 상대방 검이 옆으로 흐르는 걸 방지하기 위해 검지판 위에는 요철의 문양을 만들어 놓은거야." "아.. 예.." "자네처럼 무공이 강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대부분 무공이 그렇게 강하지 못한 사람은 마상(馬上)에서의 전투시에 갑자기 날아오는 적의 검을 피하거나 막기 어려운 경우가 있어. 그때 이 검지판을 이용하지. 실지 마상이 아니고 그냥 벌어지는 전투라면 단순히 뒤로 뛰어서 물러설 수도 있지만 말이란 놈이 그렇 게 주인의 마음에 맞게 잘 안움직여 준단 말이야. 그래서 만든거야." "이건 왜 이렇게 생겼죠?" 예의 이상하게 생긴 검지판을 보고 말했다. "직접 장착해보면 알 수 있지." 국광의 손에 끼워주자 국광도 그 이유를 금새 알 수 있었다. "과연...." 이 검지판은 너무 길게 나와 손목 이상 튀어나오면 손의 움직임에 방해를 받 기 때문에 일부러 손목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완만하게 밖으로 튀어나가 손목 의 움직임에 방해를 주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 다. 그리고 검지판은 검의 흐름을 방지하기 위해 요철의 문양을 새긴 것 외에 도 삼각형 쇠막대의 곳곳에 우아한 문양을 음양각으로 새겨넣어 품위를 덧붙 이고 있었다. "노부도 이것덕분에 못숨을 구한 적이 있어. 이 검지판과 착완순은 수 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만들어낸 흑풍단만이 가지고 있는 방어장비지. 보통 많은 이 민족들을 정벌하면서 1대 1의 대결은 꿈에도 못꿔... 대부분이 최소한 3배, 4 배 이상의 적들을 상대하기에 난전(亂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비 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지. 마음에 드는 것들을 준비해두게나. 아마 늦어도 5 일 이내에는 출동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국광은 약간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이런걸 꼭 해야만 합니까?" "자네가 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모두들 하니까 자네만 안하면 좀 이상하 게들 생각할꺼야." 그러자 국광은 잠시 생각하더니 1척정도의 짧은 검지판 2개를 집어든 다음 말 했다. "그러면 저는 이 두개만 하죠. 그래도 걸리적 거리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좋을대로 하게나. 하지만 항아 너는 이거.. 이거... 이것들 모두 착용해라. 이건 할애비로서 명령이야." * * * 4일 후 황제로부터 무력정벌에 대한 윤허가 떨어졌다. 송의 주력부대는 요와 의 국경선으로 급속도로 이동하여 재배치되기 시작했으며 찬황흑풍단은 요와 의 전쟁 중에 있을지도 모를 몽고와의 변란을 사전에 억제하기 위해서 몽고와 국경지대를 소탕하는 임무를 띄고는 북상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흑풍단은 요 를 자극하지 않기위해 요와의 전쟁 후에 몽고와 전쟁을 시작하라는 지시를 받 았기에 그 이동속도는 느렸다. 사실상 중경으로부터 몽고와의 국경은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요와의 국경은 멀었으므로 핵심장수들이 모두 중경에서 급히 출발한 다음 자신의 부대로 돌아가는데는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 문이다. 찬황흑풍단은 모든 장병이 검은색 갑주를 착용한다. 그리고 방패도 마찬가지 로 검은색, 말에 입히는 마갑(馬鉀)도 검은색.... 흑풍단이라는 이름에 맞게 검은색 일색이다. 흑풍단의 군기(軍旗)마저도 검은색이다. 검은 바탕에 금실 로 수놓은 皇(황)자가 흑풍단의 가장 호화로운 색깔이었다. 흑풍단은 천여명 씩 10개 부대로 나뉘어지고 그 천인대(千人隊)는 다시 10개의 백인대(百人隊) 로 나뉘고 백인대는 또다시 10개의 십인대(十人隊)로 나뉜다. 각 부대에는 장 (長)이 있어 자신보다 높은 장(長)의 명령을 전달받은 즉시 하부의 장(長)들 에게 지시하여 빠른 행동력을 보인다. 이건찬황흑풍단 만이 가진 독특한 진 용으로 상부의 명령이 신속히 하부까지 전달되도록 만들어진 장치였다. 흑풍 단처럼 소수정예인 부대에서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그 하부 병력들이 신속히 움직여 기동력으로 대부대를 제압하는 것이 효과적이었기에 만들어진 자구책 이었다. 10개의 천인대 중 4개는 전군(前軍), 4개는 중군(中軍), 2개는 후군(後軍)으 로 나뉘에 진격하면서 후군은 휘하에 배속된 어림군 1만명과 각종 보급물자와 2만여필의 말을 수송하는 수송대의 호위 임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흑풍단 은 기병대였기에 만일을 대비하여 각자 3필씩의 전마(戰馬)를 지니고 있었고 그 말들의 보호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전군(前軍)은 그중 1개의 천인대를 십인대 100개로 잘라 부채살 모양의 정찰망을 쳐 불의의 기습에 대비한 정찰 진용을 훈련하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옥영진 나으리의 말대로 찬황흑 풍단은 기습을 받지 않는 한 쉽사리 전멸할 부대가 아니었기에 그 휘하의 장 수들도 기습을 받지 않도록 최대의 노력을 다했다. 시간은 충분했으므로 옥영진 나으리는 일종의 기동훈련도 겸해서 이동했는데 그중 옥영진 나으리의 골치를 썩이는 부대가 사육(四六) 백인대(百人隊)였다. 흑풍단에서는 각 부대들을 부르는 일종의 방편으로 숫자를 사용한다. 각 부대 들은 아주 잘 잘라져 있기 때문에 그 위쪽부터 숫자로 붙여서 나가면 하나의 부대 이름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칠칠(七七) 백인대라고 한다면 제칠천인 대(第七千人隊) 소속의 제칠백인대(第七百人隊)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십인 대를 말하려면 칠칠팔 십인대라고 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소부대까지 전투중에도 손쉽게 그 부대를 지칭할 수 있기에 이런 약식 명명법 은 꽤 인기리에 사용되고 있었다. 옥영진 나으리의 골치인 사육 백인대는 개개인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나지만 그 구성원들이 고관의 자제거나 아니면 약간 무림에서 명성을 받았던가 해서 대체적으로 말안듣는 녀석들만 모아놓은 부대다. 거기에 다루기 힘든 계집애 들까지 25명이나 속해있었다. 원체가 무공의 자질로 뽑는 것이 흑풍단이다 보 니 무공이 대단히 뛰어났기에 여자라고 안받을 도리가 없었던 것인데.... 실 지 받고보니 이게 제멋대로인 계집들이 몇 있어서 후회막급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대장자리는 비워뒀다가 국광에게 맏겼던 것인데 역시나... 그 또한 통제가 안되고 있었다. 허기야 국광 자체도 통제불능의 인간이었으니... 그렇다고 다시 백인대장에서 잘라버리기도 뭣하 고 해서... 속만 끓이고 있는 것이다. 일단의 기동훈련이 끝난 다음 국광에게 10명의 십인대장들이 몰려왔다. 그들 중의 3명은 여자였는데 이렇게 갑주를 입혀놓고 보니 껴입은 것이 많아서 그 런지 사낸지 계집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모두들 거의 돼지만큼 뚱뚱한 상태로 숨을 쉴때마다 비늘갑옷이 약간씩 부풀어올랐다가는 다시 내려가고 있 었다. 계집들은 역시 계집인지라 약간의 모양을 내긴 하지만 그래도 검에 장 식한 수실을 좀 화려한 걸 사용한다거나 아니면 검지판의 문양이 화려하거 나... 또는 착완순의 문양이 화려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다 검은색에서 음 양각의 문양이나 차이가 날뿐... 또 사내녀석들 중에서도 화려한 걸 좋아하는 인간들도 많으니... 상대를 알아낼 재주라고는 갑옷에 그려진 각 천인대를 표시하는 숫자 즉, 국 광이 소속된 천인대는 사(四), 제육백인대를 나타내는 六(육) 그리고 각 십인 대를 나타내는 숫자를 보고 상대를 알 수밖에 없다. 흑풍단에서는 그 문양이 나 숫자가 적게 그려진 사람이 가장 끗발이 높은 사람이었으니... 단주나 부 단주 두명은 아무런 표시도 없는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각 천인대장들 은 모두들 한자리 숫자만 써진 갑주를... 백인대장들은 문양 뒤에 두자리 숫 자... 최고 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인대의 대원들은 무려 4자리 숫자의 번 호를 달고 있었다. 솔직히 국광의 수하로 있는 자들로서는 국광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전술기 동에 대해 상세히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무공이 높아 보이지도 않 는다. 송에서는 무장들은 검(劍)은 단전 옆, 그러니까 완전히 옆구리는 아니 고 그렇다고 정면도 아닌 조금 앞쪽에 착용한다. 하지만 이녀석은 건방지게도 야만족들처럼 검을 엉덩이부분에 걸릴 정도로 뒤로 달고있었다. 거기에 모두 들 하고 다니는 착완순은 어디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검지판 2개만 덩그러니 착용한데다가 갑주를 입은 꼬라지로 보아하니 엄심갑이나 기타 보호구는 입지 도 않고 얄팍한 경갑주(輕鉀 )만 '체면상 입어준다' 하듯 덩그라니 입고있는 꼴을 보니 묵직한 철갑들을 주렁주렁 달고있는 그들로서는 뱃속이 뒤틀리지 않을 수 없다. 이자식은 거의 옥영진 나으리의 후광으로 들어와서 대장노릇을 하는 모양인에 사실 자신들도 믿는 구석들이 있으니 그런것에 주눅들 사람들 도 아닌지라 한판하러 온 것이다. 그들 중에서 선두에 선 인물이 말ㅎ다. 사육삼(四六三)이라는 숫자로 보아 제 삼십인대의 대장인 냉비화녀(冷飛花女) 마화(馬花)임이 분명했다. 실지 목소 리도 여자의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걸로 보아 국광의 짐작이 정확했다는 걸 말해줬다. 마화는 북동원수부 부원수인 마룡 대장군의 손녀로서 대단한 무 공을 지닌 여걸이었으며 외호와는 달리 성격이 급하면서도 호탕했다. 만약 국 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사육 백인대의 대장이 될것이 확실시되는 여걸이었기 에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서생같은 국광을 보자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올라 십 인대장들을 이끌고 항의하러 온 것이다. "이봐! 신참. 너 전투교본(戰鬪敎本)을 읽어보기나 한거야? 흑살천마진(黑殺 千馬陣)을 아예 모르고 있잖아?" "흠... 이제부터 읽어볼 생각이다. 그러니 그런 잔소리라면 집어치우고 해산 해." "뭐라고? 이게 정말... 단장 나으리의 후광을 믿고 까부는거냐!" 그러면서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검 손잡이 끝에 붙은 붉은 수실 끝에는 비 취로된 작은 꽃송이가 매달려있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외호가 만들어진 기원을 알려주고 있었다. 검은 대단히 좋은 보검으로 그녀가 검을 뽑자마자 싸늘한 예기가 뻗어나왔다. 모두들 흠칫하는 표정들이었으나 정작 국광은 무표정한 눈으로 마화를 쳐다볼 뿐이었다. "어쭈... 내가 찌르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네가 찌르고 안찌르고는 상관없고 너희 모두가 다 덤벼도 나를 어떻게 할 수 는 없어. 모두들 닥치고 돌아가!" 싸늘한 대답을 남긴다음 국광이 몸을 돌린다음 돌아가려고 하자 분기탱천한 마화가 검을 찔러들어왔다. 거기에 그의 비웃는 듯한... 깔보는 듯한 대답을 듣자 안그래도 자신이 한가닥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머지 십인대장들도 말 릴 생각은 접어두고 분기탱천하여 둘의 격돌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국광은 마화가 찔러들어오는 검을 살짝 왼편으로 몸을틀어 피하면서 신경질나 서 너무 쎄게 찌른김에 깊이 따라들어온 마화의 투구 뒷통수부분을 손목까지 올라와있는 왼손의 검지판을 이용해서 후려쳤다. 퍽! 엄청난 타격을 입은 마화는 거의 1장여나 날아가서 저쪽에 철퍼덕 뻗은 후 곧 이어 튕겨오르듯 일어섰다. 아무리 검지판을 이용한 일격이었다고 해도 투구 를 때린 것이기에 그녀에게 큰 타격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심한 충격으로 뒷부분이 찌그러든 그녀의 투구는 날아가버렸고 안면보호대(顔面保護待) 윗부 분으로 오똑한 콧날의 윗부분과 아름답지만 타고난 성깔을 나타내는 쌍심지 돋은 두 눈... 그리고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흥!... 태극권(太極拳)? 제법 한가닥 하는 재주가 있었군. 검을 뽑아랏!" 엄청난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건조한 대답뿐... "알아서 뽑을테니 좋을대로.." "흥! 적수공권이라고 봐줄거라고 생각..." 그와 동시에 국광의 왼쪽가슴팍을 향해 섬전과 같은 일초가 날아왔다. 국광이 왼손의 검지판을 이용해 막는 그 순간 검은 방향을 바꿔 원을 그리며 허리 아 랫부분을 쓸어들어왔다. "제법 괜찮군...." 그와 동시에 국광은 왼손을 내려 검지판으로 막는 순간 그대로 오른발을 마화 의 아랫배를 향해 날렸다. 마화는 그걸 느끼고 급히 몸을 왼편으로 틀었으나 국광은 피하는 마화에게 두 번째 발차기를 연속으로 날렸다. 퍽! 단전 부위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마화의 몸이 붕 날아 다시 1장여를 날아오 르더니 퍽하고 떨어졌다. 두터운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각법에 의한 충격은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갑옷의 무게를 더해서 떨어져 내린 충격은 대단한 것이 었다. 그러나 마화에게 있어서 그 충격은 그렇게 큰게 아니었다. 자신의 자존 심이 패대기쳐진 것이 더욱 억울했던 것이다. 다시 일어서는 마화의 몸에서는 짙은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화가 검을 꽉 잡고 자세를 가다듬는 순간 국광의 태도가 달라졌다. 국광은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그 검은 짙은 묵빛의 특이한 검으로 장식없는 수수한 검집이 형편없이 싸구려처럼 보여 모두들 주의하지 않았으나 얼핏봐도 그의 검은 대단한 보검으로 보였다. 천천히 검을 뽑아 그냥 앞으로 내밀며 대 강의 수비자세를 잡았는데도 벌써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검이 없을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엉성하게 보이는데도 거의 빈틈이라고는 찾기 힘들었기 때 문이다. 아니... 어쩐 일인지 압도되어 빈틈이 보여도 들어갈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네가 살기(殺氣)를 품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그와 동시에 엉성하게 앞으로 뽑아낸 묵빛 검에서는 더욱 강렬하게 묵빛이 흘 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바라보던 십인대장들 중 한명의 입에서 힘빠진 듯한 목소리가 새나왔다. "어기충검(御氣充劍)...." 살기를 내뿜고 필살의 검법을 펼치기 위해 자세를 잡았던 마화의 검은 어느새 슬금슬금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실력으로 저정도의 고수 를 상대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아니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어기충검(御氣充劍)이라면 신검합일(身劍合一)은 통과했고 어검술(御 劍術)에는 못미치는 절정고수들이 펼치는 절예다. 초식에 의존하지 않고 저렇 게 검을 든 상태에서 어기충검을 구현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거의 화경 (化境)에 도달했다고 봐야한다. 어기충검술은 화경에 이른 고수들만이 펼칠 수 있는 고급검법이었던 것이다. 마화가 살기를 없애자 국광은 아무 일 없었 다는 듯이 검을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싸울 의사가 없으면 해산해라." 돌아서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는 국광을 경악한 눈으로 보며... 하지만 힘없 는 목소리로 마화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는 누구냐...." 국광이 아무 말 없이 멀어져가자 째지는 음성으로 고성을 질렀다. "누구냔 말이다!" 하지만 국광은 멀어져버렸고 멍청히 남은 마화에게 주위에 남은 십인대장들이 모여들어 어깨를 툭툭치면서 위로했다. "저정도의 고수라면 져도 챙피할 거 없어..." "맞아요.. 저정도 고수라면 무림을 10년간 해매고 다녀도 만나기 힘들어요.. 비무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구요." "실망하지 말아요.." 그들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마화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정도의 고수가 무슨 할 일이 없어서 흑풍단에 들어온거지? 겨우 장 군(將軍)이란 칭호를 받고싶어서? 무림에 나가면 부귀(富貴)와 공명(功名)이 함께할텐데... 겨우 그것도 백인대장으로.... 도저히 나는 믿을 수 없어...' 마화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니.. 믿지 못하겠어. 저녀석이 누군지 단장에게 물어봐야겠어." 그러자 옆의 십인대장이 말했다. "미쳤냐? 대장군이 너를 무슨 할 일이 없어서 만나준다는 거야?" "내 성격에는 안맞지만 할아버지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물어봐야겠어." "휴... 어쩔 수 없군... 모두들 같이가자. 그러면 잘하면 만나주실거야." 십인대장들의 요청을 옥영진 나으리는 물리치고 싶었지만 그들의 배후에 대단 한 인물들이 많았기에 만나주지 않을 수 없었다. 군례를 올리는 십인대장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둘려보며 옥영진 나으리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마화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사육 백인대장은 도대체 누굽니까?" 그러자 옥영진 나으리는 이해가 간다는 눈초리로 마화의 덕지덕지 흙먼지가 붙은 갑옷의 아래위를 지긋이 훑어보더니 나직히 말했다. "이미 한판 해보고 알았을텐데 뭘 물어보나?" "하지만 소장(小長)은 알아야겠습니다. 왜 그런 고수가 여기 있는지..." 그러자 빙긋이 웃으면서 옥영진 나으리가 말했다. "나에게 빚이 있다면 이해하겠느냐?" "빚이요?" "그렇지... 그는 너희들도 보았듯이 무림인이다. 하지만 개인의 무공만 강할 뿐... 집단전에는 별 경험이 없는지도 모르지... 그러니 너희들이 그를 잘 이 끌어주어라." 잠시 멍청하게 있던 마화가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저정도의 고수가 대장군께 빚이 있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그와 동시에 마화의 귀에는 전음이 들려왔다. <그는 지금보다 더 대단한 고수다.> 마화는 경악했다. "예?"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정도나 강하다는 말이야?' <그는 어쩐 일인지 모르나 대단히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본좌의 아들에 게 발견되었다. 그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하지만 모든 기억은 잊어버린 상 태... 그래서 근래에 다시 무공을 익혀 저정도까지 올라간거다. 하지만 본좌 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자신이 가진바 모든 실력을 다 발휘한다고는 볼 수 없 어. 그리고 전음으로 네게 말해주는 이유는 그의 상처를 검사한 모든 이들의 한결같은 의견이 국광은 암습을 당했다는... 그것도 대단히 가까운 상대에 게...> 마화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전음으로 반문했다. <대단히 가까운상대라구요?> <그렇다. 너같으면 친밀하지 않은 상대에게 네 검을 맏기고 등을 보이겠냐? 그의 상처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상대를 모르는만큼 이 사실을 절대로 외부에 유출시키지 마라. 알겠느냐?> 마화는 포권을 하며 전음으로 말했다. <목숨을 걸고...> 모두들 옥영진 나으리의 막사에서 나온 후 그들은 초반에 진행된 옥영진 나으 리와의 전음을 이용한 대화에 대단한 관심을 나타냈다. "언니는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어낸 거에요?" "응..." "그래 대장군께서 뭐래?" "말할수 없어. 안그랬으면 전음으로 말할 필요가 없쟎아? 하지만 이건 단언할 수 있어. 우리가 만난 대장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 "어째... 우리가 이번 원정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지극히 높다는 말처럼 들리 는데?" "그래... 어쩌면 행운의 여신이 우리에게 다가온건지도 모르지." 단편적인 과거와의 만남 흑풍단은 거의 1달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서 국경에 도착했다. 중간에 계속적인 기동훈련을 펼치며 온것이므로 사실상 장병들로서는 한가한 행군은 아니었다. 흑풍단 전원이 참여한 상태에서의 기동훈련과 전군, 중군, 후군간의 각각의 훈련도 병행되었다. 거기에다 정북원수부로부터 지원받은 1만의 어림군과의 통합방어훈련도 함께 실시되자 하루하루가 거의 화살처럼 지나갔다. 이 한달여의 시간동안 옥영진 나으리가 경악할 정도로 놀란점은 국광의 모습 이다. 처음 행여나 하는 기대감으로 사육 백인대를 맏긴 것인데 그가 의외로 잘 통제해 나가는 걸 보고 놀랐던 것이다. 거기에 하루가 다르게 수하들을 이 끄는 솜씨가 늘어나는 것, 특히나 그중에서 난전(亂戰)의 상태에서 수하들을 장악하여 지휘하는 실력은 탁월한 것이었다. 옥영진 나으리는 엉키고 설킨 난 전의 상황에서 수하들을 이끌고 가상적인 제오천인대의 중앙을 돌파하려고 하 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정도의 상황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수하들을 가장 피해가 적게 규합하여 이 끄는 실력이 타고날수는 없어. 저런 난전의 상황에서 주위 상황을 폭넓게 관 찰하고 또 적의 집중공격이 있을때는 본대와 뭉쳐서... 공격해야만 할 때는 본대와 이탈하며 전광(電光)과 같은 속도로 수하들을 휘몰아치는 솜씨... 아 무래도 저자는 과거에 상당수의 수하들을 지휘해본 경험이 있음에 틀림없어. 도대체가 저자의 내력이 무엇이기에....' 제오천인대와 제사천인대의 가상대결은 제사천인대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났 다. 제사천인대의 일부가 갑자기 중앙을 돌파하여 제오천인대의 대장을 거꾸 러트렸기때문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옥영진 나으리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 다. 무공은 뛰어나지만 너무좋은 출신배경 때문에 가장 말썽이 끊이지 않던 사육백인대가 이제는 흑풍단 내에서도 최고의 정예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훈련이 끝난 후국광은 수하의 십인대장들을 불러모았다. 거의 한달여의 시간 이 지난 지금 국광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흐 르면서 뛰어난 무공실력만이 아니라 그 지휘, 통제력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모두들 모여있는데 마지막으로 마화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자리에 앉으며 말 했다. "무슨일입니까? 대장" 국광은 짐짓 목소리에 무게를 잡아 말했다. "대장군의 명령이다. 국경선과의 거리는 이제 120리(36Km정도). 오늘부터 여 기서 야영하면서 정벌이 시작될때까지 주둔한다. 내일부터는 어림군과의 통합 훈련에 더욱 역점을 둘 예정이라고 하니 그리 알고있어라.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 1개 천인대는 적정을 정찰하기 위해 투입될 예정이다. 우선 제칠천인대 가 갈거야. 그러니 자네들도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훈련이 끝나고나면 수하들 을 푹 쉬게 해서 정찰활동에 대비하도록." 제이십인대의 대장인 정상(鄭想)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대장, 정벌은 언제 시작됩니까?" "10일 후다. 지금 들어오는 정보로는 철진천이 이미 대병력을 소집하여 방어 선을 치고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흑풍단이 국경근처에 주둔중이니 신경이 쓰 이겠지. 대장군도 계속 훈련을 하는 이유가 이게 침략이라는 걸 숨기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 같으니까... 몽고에서 따지면 훈련중이라고 대답하면 될테 고..." 이까지 말했는데 마화가 약간 기묘한 표정으로 사정하는 투로 말했다. "오랜만의 휴식이나 다름없는데... 술을 마셔도 되나요?" "술?" 술이라는 말이 나오자... 입속 가득히 침이 괴이면서 냉정하던 국광의 생각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술이라... 마시면 군율에.... 하지만... 하지만...술이라... 좋지..' 잠시간의 머뭇거림이 사라지고 이성보다는 감정의 승리! "흠.... 어디 구할데라도 있나? 수하들에게도 나눠주려면 한두통 가지고는 어 림도 없을텐데..." 그러자 마화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국광의 얼굴을 보고 지금 그의 마음 의 움직임을 알아챘다는 듯이... "하하... 수하들 생각은 끔찍이도 해주시는군요. 이미 제가 수하들을 풀어서 대량으로 준비중입니다. 그 때문에 늦었죠." "자네 마음에 드는군. 좋아! 술값은 모두 내가 내지. 나중에 술값을 계산해서 받아가도록!.... 그래! 좋아. 저녘에는 오랜만에 통쾌하게 마셔보기로 하지." "하하하... 통한번 크십니다요. 대장이 오시고 처음의 술자린데.. 함께 마시 죠. 수하들에는 술을 적당량 나눠주겠습니다. 그녀석들은 있는대로 마셔대니 많이주면 오히려 내일의 후환(後患)이..." "좋을대로 하게나. 술이 구해지는 대로 본인의 막사에서 만나기로 하지." 그러자 제칠십인대의 대장인 창룡객(蒼龍客) 임충(任充)이 말했다. 그는 무림 에서 제법 이름을 날린적도 있는 검객이었는데 무림에서 활동해서 그런지 잔 머리 굴리는게 보통이 아니었다. "아뇨... 대장의 막사는 대장군의 막사와 너무 가깝습니다. 제 막사에서 하기 로 하죠." "좋아. 그럼 술이 준비되는 대로 기별을 하게나." "예." * * * 국광은 잠에서 깼다. 어제 저녘 수하들과 통쾌하게 마신 후 마화를 비롯한 4 명의 백인대장이 주량을 이기지 못하고 뻗어버리자 그들을 모두 다 자신의 막 사에 던져넣은 후 돌아와서 잠시 잠이 들었던 것인다. 한데 그의 단잠을 깨운 것은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스산한 기분이었다. 국광은 곧이어 정신 이 들자마자 소리나지 않게 살며시 묵혼검을 잡았다. 그런다음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신법을 전개하여 막사사이로 몸을 감추며 이동을 하기 시 작했다. "방향이 틀린 것 같은데?" 갑자기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전방의 막사들을 주의깊게 관찰하고있던 흑 의를 입은 자는 기급을 할 정도로 놀란 듯 잠시 굳어버렸다. 그걸 보고 국광 이 다시 말했다. "대장군의 막사는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야. 하기야 그것도 여기서 살아나간다 면 필요하겠지만..." 그러면서 검을 소리가 거의 나지 않게 천천히 뽑았다. 스르르르릉.. 흑의를 입은 사내는 국광을 돌아보더니 묵빛검을 찬찬히 본 다음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귀하를 만나러 온겁니다. 묵혼(墨魂)의 주인을요. 속하는 자객이 아닙니다." 그러자 국광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말했다. "뭐? 크흐흐.... 원.... 농담도..." 그러면서 천천히 검을 올리는데 상대의 애원하는 듯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 고 함께 상대의 몸에 무기가 없다는 것도 동시에 알아냈다. "요즘은 무기도 없이 암살을 하나? 권이나 장을 이용하면 소리가 좀 시끄러울 텐데... 하기야 극음(極陰)의 장법이나 암기도 있으니..." 흑의를 입은 그는 자신이 문주의 지시였지만 비무장인 상태로 이리 들어온 것 과 또 그것을 재빨리 알아챈 상대의 실력을 신(神)께 감사하며 말했다. "저는 비무장입니다. 대인께서도 느끼실테지만 저는 암살자로 키워진 인물이 아닙니다. 첩자교육만 받았을뿐... 제가 익힌 검법은 정통검법이라구요. 검은 저쪽에 풀어놓고 왔습니다. 속하는 문주의 지시를 받고 당신을... 묵향(墨香) 대인을 만나러 온겁니다." "묵향.... 이라고?" '왠지 친근한 이름이군.' "예. 저희 문주께서는 대인께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문주께서는 대인 의 과거를 다 알고계십니다. 묵향 대인께서 본문에 들어오신다면 당신의 과거 를 모두 아실 수 있을뿐더러 본문은 대인에게 암해를 가한 자들에 대한 복수 에 최선을 다해 도울것입니다." 국광은 검을 천천히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제안을 하는군." "문주께서는 묵향 대인께 부문주의 자리를... 제안하셨습니다. 그건 본문의 규모로 봤을 때 대인께도 별로 손해보는 제의는 아닐겁니다." "자네 혼자왔나?" "예." "그럼 이렇게 하는게 더 쉬울거라는 생각은 안해봤나?" "어떤?" "내가 자네를 족쳐서 내 과거를 알아내는 것이 번거롭지도 않고 더 빠를뿐더 러 더욱 쉽지." 그러자 복면사이로 상대의 두눈에 공포가 어렸다. 누구보다도 상대가 어떤 괴 물인지 잘 알고있는 것이다. 그는 멋적은... 공기빠지는 것 같은 웃음을 흘리 며 말했다. "헤헤헤... 소인은 대인의 과거를 잘 모릅니다. 소인을 족쳐보셔도 얻는건 별 로 없을겁니다." 그러자 국광도 지지않고 낮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흐흐흐.. 그래도 믿져봐야 본전이니, 시도는 해보고 싶군." 국광이 천천히 다가오자 그의 눈에는 더욱 공포가 짙게 배여들었다. 상대는 믿져봐야 본전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닌 것이다. 그는 공포를 억누 르며 최후의 희망을 걸고 말했다. "소인을 족치셔도 정말 알아낼 것은 단편적인 지식뿐.... 소인은 정말 대인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합니다. 원하신다면 소인이 아는 것을 모두 다 지금 말씀드 리겠습니다." "말해라." "대인의 이름이 묵향이라는 것. 그리고 엄청난.... 그러니까 현경의 경지에 든 고수니 최대한 조심하고 그냥 기척을 죽이고 잠입만 해도 대인께서 눈치채 고 나오실거라고 들었습니다. 과연 대인께서는 이렇게 나오셨구요." "그리고?" "대인께서는 아주 가까운인물들에게 해를 당하셔서 지금 기억을 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살아서 탈출하신 것은 천행이라고 그러시더군요." "그 외에?" "대인께서는 여자와 동침을.... 안하셨죠?" "그런데?" "문주께서는 대인의 상승무공의 원천이 동자공(童子功)이기에 여자와 동침을 하시면 모든 공력을 상실한다고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거라고 전하라고 하셨습 니다." "사실인가?" "어느안전이라고...." "동자공이라.... 과거의 나도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는 녀석이었던 모양이 군... 큭큭... 동자공이란 말이지.... 그 외엔?" 그러자 흑의인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사정을 하며 말했다. "더이상은 모릅니다요.... 제발..." 국광은 잠시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말했다. "돌아가라.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으나 충고는 고맙게 듣겠 다. 그리고 문주께 전해라. 본인을 그정도로 좋게 봐주셔서 고맙다고... 하지 만 사실 그따위 과거의 기억정도 없어도 그만이고 있어도 그만이야... 괜히 기억을 되찾는 것도 아니고 상대에게 내 과거를 들으면 나는 나를 해쳤는지 기억도없는 사람을 해쳐야만 해. 나는 그러기 싫어.... 나는 내가 확실히 알 고있는 것만을 행하고싶다. 그럼 잘 가거라." 그러자 흑의인은 운좋게도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간다는 생(生)에의 환희를 뼛 속깊이 느끼며 쏜살같이 도망쳤다.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국광은 느 직히 걸어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국광은 막사로 돌아온 다음 잠을 청했 지만 쉽사리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끊임없이 쓸데없는 생각만 떠올랐던 것이 다. '내 이름이 묵향(墨香)이라고? 진짜일까? 하지만 내가 가진 묵혼검(墨魂劍)이 나 묵영비(墨影匕)하고 잘 어울리는 이름이긴 하군.... 과연 나를 기습한 가 까운 친구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나의 진정한 신분은? 가족이 있을까? 그리고 부인과 자식들..... 후훗...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부인 따위는 있을 리가 없 지... 그리고 자식들도.... 동자공(童子功).... 그 더러운 무공을 익혔다 니.... 나는 평생가도 계집을 품기는 글렀군... 맞아.... 옥 대인과 청성루 (請成樓)에 갔을 때 본능적으로 계집이 가까이 오는 것이 좀 기분이 찝찝하더 라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군....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잘못하면 모든 걸 잃고.... 어쩌면 내 생명까지도.... 그리고 옥대인을 보살펴야하는 약속마저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니... 그러고보면 오늘 아주 좋은 것을 많이 얻은 운이 좋은 날이군...' 국광은 황궁무고에서 많은 비급들을 읽으면서 흥미를 느꼈던 부분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 동자공(童子功)... 이 것은 일종의 내공심법으로 그 하나만으로 는 쓸모가 없지만 다른 내공심법과 병행해서 사용했을 때 대단한 성취속도를 나타낸다. 실로 무공을 익히는 사람으로서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지만... 하지만 평생동안 여색을 가까이 할 수 없으니.... 그것이 가장 큰 단점이었 다. 일단 여자와 성합(性合)을 벌이면 그 즉시로 동자공이 파괴되기 시작하며 여태껏 동자공을 기반으로 쌓아둔 진신내공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만약 약간의 흡정술(吸精術)을 익힌 여자라면 빠져나오기 시작한 상대의 내공 을 손쉽게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실지 흡정술 계통의 각종 사악한 무공들은 그 무공의 위력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걸 상대에게 시전하 려면 가장 중요한 선제조건이 필요하다. 그건 상대보다 내공이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도리어 상대에게 자신의 공력을 완전히 흡수당할 위험이 있었 다. 하지만 상대가 동자공이 파괴되어 내공이 무너지면서 빠져나오는데 아무 리 내공이 약해도 약간의 기술만 알고있으면 손쉽게 흡수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 봤을때는 동자공을 익힌 남자고수들이 가장 좋은 먹이감이었였 다. 국광으로서도 이 사실을 황궁무고의 비급을 통해 이미 알고있었기에 흑의인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과거를 기억할 수 없기에 상대가 거짓을 말했을꺼 라는 생각이 들어도..... 감히 실험을 해볼 엄두를 못냈다. 만에하나라도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있던 모든 것을 잃게되기 때문이었 다. 최초의 전투 10일후 드디어 흑풍단은 당당히 몽고와의 국경선을 넘었다. 하지만 이틀간 계 속되는 진격에도 몽고의 병사는 만나볼 수 없었다. 대신 말이나 양을 치는 순 박한 몽고인들을 간혹 만났다. 흑풍단의 주위에는 계획대로 100개의 십인대가 물샐틈없는 정찰망을 갖춰 끊임없이 주위의 상황을 대장군에게 보고했다. 그 러다가 칠삼사 십인대에서 긴급연락이 도착했다. <전방의 진령골에는 거의 2만 정도로 추정되는 몽고군이 매복하고 있습니다. 칠삼사 십인대장 장패(張覇)> 그걸 보면서 부단장인 옥염왕(玉閻王) 마길수(馬吉壽) 상장군이 말했다. "대장군. 진령골로 진입할까요? 본 흑풍단이라면 충분히 돌파가..." "아냐. 구태여 위험을 안고 진령골로 들어갈 수 없지. 진령골은 험준한 골짜 기... 매복을 당한다면 기마대에다가 중갑주를 입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 해. 윗쪽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경공을 전개해야 하는데 그런 무거운걸 입고 속도가 나겠나? 그렇다고 갑주를 벗자니 적의 화살이 문제가 될테고..." 그러면서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어 펼치면서 말했다. "오천하(五泉河)쪽으로 나간후 이곳 진풍령(進楓嶺)쪽으로 넘지." "하지만 진풍령으로 가려면 거의 400리(120Km정도)를 돌아가야 합니다." "400리 정도 돌아간다고 며칠 손해보는 것 말고는 거의 피해가 없어. 하지만 적이 있는걸 그것도 매복한걸 뻔히 알면서 들어가서 죽을 필요는 없쟎아." "죽는게 아니지않습니까? 물론 약간의 피해는 있겠지만 그정도는 충분히..." "약간의 피해가 될지... 아니면 더욱 큰 피해가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르네. 적 도 그만큼 이쪽에 대해 잘 알테고 그만큼의 대비를 했을테니 돌아가는게 좋 아." "정 그러시다면..." "대신 본대는 보병 때문에 진격속도가 느리니까 우선은 진령골로 가는 척 하 면서 시간을 끌기로 하지. 그러면서 천인대 2개를 보내 빨리 진풍령을 장악하 는거야. 그런다음 우리가 진풍령쪽으로 꺽어지면 적은 미처 대비를 못하게 될 테지..." "묘책입니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2개 천인대의 대장들에게 주의를 단단히 주게 나. 적의 매복에 걸리지 말라고... 지금 눈앞의 소수의 적 때문에 피해를 조 금씩 입기 시작하면 나중의 진짜 운명을 건 회전(回戰)에서는 참패를 면하기 힘들어." "명심하겠습니다." 다행히도 몽고군은 진풍령에는 천명 정도의 저지대(沮止隊)만 붙여놨을 뿐 대 량의 매복군이 없었기에 흑풍단은 별 피해없이 진풍령을 넘을 수 있었다. 일 단 진풍령을 넘자 파죽지세(破竹之勢)... 엄청난 속도로 철진천이 도사리고 있는 오지(奧地)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위에서 만나는 모든 몽고부 족으로부터 말, 양 등 식량이 될만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徵發)했다. 어 느정도까지 전쟁을 끌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후방에서 보급이 된다고 하더라 도 될 수있으면 보급물자를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철진천의 주력부대와 흑풍단은 진령하(震逞河) 주변에서 만났다. 몽고 와의 국경선을 넘은 후 거의 15일이 경과한 다음이었다. 몽고는 수많은 소수 부족들이 모인 국가라고도 부르기 힘든 나라였기에 이들을 만났다는 것은 곧 이제부터가 철진천의 영토라는 걸 뜻하고 있었다. 서로가 대치한 곳은 진령하 주변의 그렇게 넓지않은 평원.... 하지만 대부대 가 기마전을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면적을 가진 대지였다. 무수히 많은 몽고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옥영진 나으리가 말했다. "생각보다 많군..." 그러자 마길수 상장군이 대답했다. "예... 얼핏봐도 10만 밑은 아니겠군요. 아무래도 우리쪽의 숫자가 적기 때문 에 처음부터 힘으로 밀어붙일 계획인 모양입니다." "맞아... 거의 11만 정도는 될거야. 이번 전투는 꽤 재미있겠군. 정찰조로부 터 연락은 없나?" "저들의 주둔지 후방 100리 정도 뒤쪽에 몽고인들의 군락이 있다는 보곱니다. 거의 주민이 5,000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꽤 큰 부족이군. 그래 특이한 점은?" "남자들이 하나도 없답니다. 아마도 모두 이곳에 투입된 모양입니다." "크크... 모두란 말이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이 전쟁뒤에는 그 마 을부터 본보기로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어야 하겠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정찰조들은 어디까지 나가있나?" "이 부근 150리 까지 나가있습니다." "그럼 내일까지 20개 정찰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적의 뒤편에 집결한 다음 적의 후미가 떨어져 나오면 기습하라고 일러라." "예." "적은 숫자를 믿고 내일 날이 밝으면 도전을 해올거야. 원래가 야전(夜戰)은 숫자가 적은쪽에서만 하는거니까... 이쪽에서는 일부 군사를 뽑아 교대로 함 성을 지르며 꼭 쳐들어가는 척을 해주면 아마 오늘밤 뜬눈으로 지새게 되겠 지. 잠을 못자면 처음에는 표가 안나지만 장시간 싸우면 당연히 피로가 빨리 오지. 내일 아침에 전면전(全面戰)이 시작될거야. 적이 야간공격을 해올 가능 성이 아주 적긴하지만 있으니 경계는 철저히 하도록!" "예." "일단 적이 내일 공격해오면.... 저곳에서 막은 다음 바로 8개의 천인대를 투 입해서 난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나머지 1개의 천인대는 이쪽으로 돌아가서 후미를 본대와 분리시키면서 공격을 하고.... 이때 또다시 뒤쪽에서 기습이 가해질거고... 철진천과의 연락이 두절된 적이 혼란한 틈을 타서 더욱 철저히 부숴버리면 될 것 같군." "묘책입니다. 그렇다면 우회하는 1개 천인대는 누굴 보내실 요량이신지?" "지금 정찰나가있는게 제칠천인대인가?" "예." "그렇다면 제팔천인대를 이용하도록 하지." "제사천인대가 아니고요? 지금 그들이 천인대들 중에서는 가장 강합니다." "아냐. 제사천인대는 적과 격전을 벌이는 가장 정면에 세워라. 그러면 아군의 피해가 좀 줄어들지도 모르지. 그리고 제사천인대장에게 사육 백인대를 가장 앞에 세우라고 지시하게." "예? 거기는 대장군이 아끼시는 국광이란 자가 대장인데 왜 가장 위험한 곳 에?..." "사람은 써먹으려고 아끼는거지 놀려두려고 아끼는게 아냐." "존명." 이런저런 작전을 논의중인데 연락병이 급히다가왔다. "대장군께 아룁니다. 칠삼이 십인대로부터의 보곱니다." 그러면서 작은 종이 조각 하나를 건넸다. 옥영진 나으리는 그걸 유심히 읽어 보더니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흥!... 이녀석들이 아주 웃기는군." "왜그러십니까?" "지금 2만의 적병이 후방에서 접근중이다." "예?" "그러니까 처음부터 철진천이 모은 군대는 13만이란 말이지. 2만이 오고있는 방향으로 보아 아무래도 진령골에서 매복했던 녀석들이 우리들이 이쪽으로 돌 아나오니까 매복을 풀고 뒤로 따라붙은 모양이야." "제법 괜찮은 작전이군요. 그 2만에 대한 대비도 해야할텐데...." "적이 두방향에서 압박해오면 이거 보통일이 아니지... 지금 어림군에게 연락 해서 5천의 병력을 후방 30리 지점의 숲에 매복하고있다가 적에게 기습을 가 하라고 일러라. 그리고.... 그리고...." "보병만 보내면 쉽사리 먹이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쪽으로 흑풍단을 잘 라서 보내는 것도 문제군요." "음.... 제오천인대를 그리 보내지. 그리고 자네가 후방을 맡아주게." "예." "그런다음 적들과 교전이 시작되면 불을 놓아 신호를 해줘. 적들이 교전을 회 피하고 우리 뒤로 기습해올지도 모르니 대비는 해둬야 예의지.." "존명!" 다음날 아침이 되자 양측은 폭넓게 진을짜고 적과 일전을 벌일 준비를 시작했 다. 몽고측은 숫자를 믿고 정공법(正攻法)을 취해왔다. 주위가 밝아지자 몽고 의 기마대는 곧장 돌격을 감행했다. 수만의 인마(人馬)가 달려나오자 그 말굽 소리는 지축을 뒤흔들 정도였다. 어림군은 옥영진 나으리의 지시대로 제일 앞줄에는 큼직한 사각방패를 가진 병졸들이... 그 뒷열은 장창(長槍)을 가진 자들이 나열해서 손잡이의 끝을 땅 에대고 창날을 기병의 위치까지 들어올려 기병의 돌입에 대비했다. 그 뒤쪽 의 궁병(弓兵)들은 모두 화살을 먹인 상태로 명령을 대기했다. 그 뒤에는 100 틀의 쇠뇌가 잔뜩 화살을 머금은 상태로 상대에게 쏘아붙일 시간만을 기다리 고 있었다. 그 쇠뇌의 뒷편에는 8천에 달하는 흑풍단이 돌격명령을 기다렸다. 원래 쇠뇌란 것은 노(弩)라고도 부르며 사람이 쏠수없을 정도로 거대한 활 몇 개를 중첩으로 붙여놓은 장치로서 일반 화살보다 좀 더 긴 것을 10개 정도 동 시에 발사하는 강력한 무기다. 그 사정거리는 활보다 길었지만 정확도는 아무 래도 좀 떨어진다. 그러나 일대일의 대결이 아닌다음에야 떼거리로 접근중인 적에게는 아무렇게나 쏘아도 맞을 확률이 컸으므로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몽고의 기병이 접근해오자 먼저 쇠뇌가 날아가기 시작했고 수많은 말들이 거 꾸러지는 장관을 연출해냈다. 그렇게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몽고의 돌격은 중지되지 않았다. 몽고병들이 더욱 가까이 접근해오자 이번에는 궁병들이 화 살을 날리기 시작했고 그에 대해서 몽고의 기병들도 달려나오며 활을 쏘아댔 다. 몽고의 기병들은 달리면서도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줄 안다. 그자들은 태 어나서 죽을때까지 말과 함께 생활하기에 기마술이 뛰어났다. 드디어 몽고병과 어림군이 격돌한 다음에야 흑풍단이 투입되었다. 흑풍단은 양옆에서 적을 몰아붙이며 폭넓게 공격해 들어갔다. 아무리 몽고병들이 수가 많고 강하다고 하지만 무술이 뛰어난 흑풍단을 순식간에 무너트릴 수는 없었 다. 일단 기병전이 벌어지자 마화는 자신의 앞에서 달려나가며 장도(長刀)를 휘두 르는 국광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몽고병들의 화살이 한번씩 날와왔지만 그는 검지판의 그 1치정도되는 좁은 면으로 튕겨내거나 장도를 비스듬히 들어 튕겨 내버렸다. 그런식으로 검을 비스듬히 눕혀 튕겨내는 기술은 힘도 적게들뿐 아 니라 다른적과의 대결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아주 효과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정도로 숙달된 검놀림을 보이려면 하루이틀로는 어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 며 마화는 착환순을 이용해서 상대의 화살을 튕겨냈다. '그럼 그렇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착완순을 안했지...' 국광의 무공은 정말 엄청났다. 국광의 일검을 받아내는 상대는 단 한명도 없 었다. 모두 다 일검에 검과 방패까지 포함해서 두토막이 나버렸다. 하지만 그 런식으로 검이나 방패를 함께 노릴때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경우 순간적으 로 보이는 상대의 빈틈에 도를 쑤셔박는 걸 보고 주변의 수하들은 놀라고있었 다. '화경이란 정말 무섭군... 나도 화경에 올라갈 수 있을까?' 모두들 주변에 달려드는 적을 베면서도 약간의 틈이라도 나면 국광의 검술을 힐끗힐끗 훔쳐봤다. 국광은 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면서 허리의 묵혼검까지 왼손에 뽑아들고는 눈앞의 적을 모두 다 베어버리며 돌아다녔다. 국광은 최대 한 넓은 면적을 돌아다니며 몽고병들을 베면서 수하들을 보호했다. 몽고병이 많은 곳은 언제나 국광이 뛰어들어 상당수를 죽여버린 다음 일단 상태가 호전 되면 또다른 위험한 곳으로 급히 이동했다. 그러다보니 가엾은 말은 아무리 국광이 경갑주만을 입었다 하더라도 이미 마갑(馬鉀)의 무게까지 있어 계속 뛰어다니자 눈에띄게 지치기 시작했다. 국광은 다시금 달려드는 몽고병 두명을 거꾸러트린 다음 그중 한명의 말위에 올라탔다. 기병전을 장시간 벌이며 지친 말을 버리고 상대의 싱싱한 말을 바 꿔 타는 것은 흑풍단의 단원으로서는 필수의 기술이다. 처음 돌격때 적의 화 살에 말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터운 마갑을 입힌데다가, 중갑주를 입었기에 말은 빨리 지쳤고 일단 말이 지치기 시작하면 예비말을 바꿔타기 위 해 본진으로 돌아갈수도 없는 노릇..... 상대의 말을 빼앗아 타는 방법이 가 장 좋다. 마화가 멍하니 잠시 국광의 몸놀림을 지켜보는데 바로 옆에서 마화를 향해 돌 진해오던 몽고병이 검을 맞고 쓰러졌다. 임충은 마화에게 돌진해오던 몽고병 을 쓰러트린 다음 정신이 딴데 가있는 마화에게 소리쳤다. "야. 너 죽고싶냐? 싸우다가 정신을 딴데 팔면 어떻해? 제기랄! 이번이 세 번 째란 말이야." 문득 정신을 차린 마화가 국광을 가르키며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봐!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말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황궁무공의 정수(精髓)가 저안에 있다구." 임충이 옆에서 달려드는 몽고병과 엉켜들어 검을 나누며 마화에게 되물었다. "황궁무공이라고?" "응. 화려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그지없이 완벽한...." "제기랄!" 임충은 욕설을 내뱉으며 상대 몽고병을 밀어붙였다. 몇번 검이 오가자 상대방 의 약점이 드러났다. 퍽! 그는 몽고병을 쓰러트린 다음 말했다. "황궁무공이 정확해? 황궁무공으로 화경에 올라간 사람은 무림 역사상 한명도 없다구. 내가 청성파(靑城派) 출신이라고 속일생각 하지마!" "아니야. 진짜라구." "헛소리 하지말고 눈앞의 상대나 잘보라구. 황실에서 저런 고수를 길렀다는 말은 들은적이 없어." "....." 마화는 입을 실룩거리며 뭐라고 대꾸를 하려고 했지만 그걸 입에서 내뱉으면 옥영진 나으리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었기에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 * * 옥영진 나으리는 전세(戰勢)를 바라보며 말했다. "놈들도 꽤 하는군....." 그러자 옆에 대기하고있는 제팔천인대장 장각(張角)이 말했다. "대장군. 진격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왜? 모두들 싸우는데... 몸이 근질근질 하나?" "예. 벌써 개전한 후 1시진 반이나 흘렀습니다. 왜 출동명령을 안내리십니 까?" "음.... 저걸 보게나..." "예?" "정말이지 황궁무공이 저렇게 아름다울 거라고는 생각해보지도 못했어." "무슨 말씀이신지?" "저기... 저자를 보라구." "아. 사육백인대장 국광을 말씀하시는군요.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있는건 사실 이지만 저런식으로 야만인들을 상대로 어기충검술(御氣充劍術)을 남발했다가 는 좀 지나면 진기가 딸려서 고생을 할겁니다.." 그러자 옥영진 나으리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생각은 달랐지만 그걸 구태여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뒤에 떨어진 옥영진 나으리가 봐도 흑색갑주에 피를 뒤집어쓰고는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장도(長刀)를 휘둘 러대는 국광의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그걸 보고 일단의 적 장수들이 국광을 없애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전사자만 더욱 늘렸을 뿐이다. '저녀석이 오지 않았다면 힘든 싸움이 되었을지도... 철진천이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모은건 사실이니까...' 이때 뒤를 바라보고있던 병사가 후방의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장군 각하. 뒤에서 불길이 치ㅅ고 있습니다." "음... 이제야 왔군... 장각!" "예." "송 장군에게 말해서 어림군의 일부를 뒤로 돌려 뒷쪽에서의 기습에 대비하라 고 이르게." "옛" 곧이어 전방의 방패, 그다음 장창, 그다음 궁병들로 메워져 근처에서 흑풍단 과 접전중인 몽고병들에서 화살을 날리고있던 어림군은 우선 뒤쪽으로 쇠뇌부 터 옮기기 시작했고 병력의 거의 반을 빼서 뒤쪽에 다시 기병에 대한 방어진 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뒤에서 어느정도가 쏟아져 나오느냔데.... 적병이 너무 많으면 자네 가 수고를 좀 해줘야겠어." "애타게 기다리던 말씀입니다." 하지만 거의 반시진이 지나도 적병은 숲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적들은 이쪽에 11만이나 되는 대군이 있는이상 그쪽에 매복한 흑풍단만 전멸시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옥영진 나으리는 난전(亂戰)의 상황을 보이고 있는 전장(戰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은 끌 수 없군.... 더 이상 기다리면 탈진해버려 아무것도 안 돼.' "장각!" "예." "2개 백인대만 남겨두고 적의 후미와 본대를 분리시켜라. 그런다음 후군을 몰 아붙여." "예." 그와동시에 장각은 이제야 내려진 전투명령에 신이나서 8개 백인대를 이끌고 전장으로 달려나갔다. 완벽한 소모전의 양상을 띄고는 있었지만 팽팽하게 진 행되던 전투가 갑자기 무너진것도 이때다. 제팔천인대가 적진을 뚫고 파죽지 세로 후군으로 접근해 들어가자 순간적으로 적들에게서 동요가 일어났다. 하 지만 거우 800기 정도의 병사였기에 그들은 그렇게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일단의 몽고병들이 제팔천인대를 저지하기위해 달려들었지만 그 진격속도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곧이어 후군과 제팔천인대와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2만 대 800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다. 800기는 그 무공의 강함덕분에 폭넓게 진을쳐 포위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적의 후군과 격렬한 전투를 시작했다. 이때 몽고병들 후방의 숲속에서 또다른 1개의 천인대가 철진천을 향해 돌격하 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갑자기 후방이 새로운 적의 병력에게 기습을 당하자 아무리 후군이 2만이라고 하지만 그 숫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돌격해 들어오면서 닥 치는 대로 베어들어갔고 후방에 위치한 중요한 장수들이 조금 지나서 먹이가 되었다. 뒤쪽에서 난리가 나자 철진천의 안위를 알 수 없는 본대의 몽고병들 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때를 이용해 흑풍단은 더욱 맹위를 떨치며 적을 밀 어붙였다. 후방의 기습으로 적이 당황하기 시작하자 모두가 사기가 올라가며 새로운 힘이 났던 것이다. 몽고의 후진은 2천기의 흑풍단의 기습으로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고 그들이 중상을 입은 철진천을 호위하여 후퇴해버리자 남겨진 본대도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때를 이용해서 흑풍단은 적을 더욱 심하게 밀어붙였고 끝내는 적 의 본대도 후퇴를 시작했다. 일단 본대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 혼란은 걷잡 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으며 이건 후퇴가 아니라 도망이라고 봐야했다. 흑 풍단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적들을 따라붙으며 처절한 추격전을 감행했다. 원래가 가장 피해가 크게 나는 것은 정면전이 아니다. 정면전을 벌여 5할 이 상의 병력을 잃는 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이때 진편이 퇴각하는 것을 상대가 따라붙으며 살육전을 전개하기에 거의 5할 이상의 피해를 적에게 입히게 되는 것이다. 도망가면서 화살을 쏘기는 어렵지만 추격하면서 화살을 쏘기는 그보다는 쉽 다. 기병끼리의 추격전에 있어서 활은 필수무기다. 몽고의 병사들은 큰 활을 사용한다. 이건 큰활이 작은 활에 비해 더 강하기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 술이 떨어지기 때문에 강력하면서도 작은 활을 만들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역시 마상에서의 사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각궁(角弓)인데 이것은 물소 의 뿔로 만든 아주 탄력성이 좋은 활이다. 탄력성이 좋은만큼 활이 크지 않아 도 멀리 화살을 날릴 수 있으니 마상(馬上)처럼 좁은 공간에서 쓰기에 더없이 좋은 활이다. 예로부터 각궁은 고려의 것을 최고로 쳤으니 중원의 기술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각궁을 만드는 실력은 동이(東夷)라 불리는 활의 민족을 당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황제 직속인 찬황흑풍단에서는 모든 단원들이 고려에 서 수입한 각궁을 사용하는데 만자루나 되는 각궁을 수입하기 위해 고려의 중 신(重臣)들에게 상당한 량의 뇌물을 줘야만 했었다. 그렇게 어렵게 구입한 각궁들이 이때 제 위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수많은 적 들이 죽었으며 노획한 말도 부지기수(不知其數;아주 많다는 말)였다. 전투가 일단락되자 그 전과를 보고받으며 옥영진 나으리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번 한번의 전투로 거의 9만의 적을 섬멸한 것이다. 뒤쪽에서 접근했던 2만의 병력도 매복한 부대의 완강한 저항을 받자 장시간 전투를 벌이다가 몽고의 본 대가 패퇴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사기가 급속도로 무너지며 끝장나버렸다. 옥 영진 나으리는 자신의 앞에 무릎꿇린 적장들을 쓱 훑어본 다음 말했다. "모두 참수(斬首)하여 효시(嚆矢;나무 등에 매달아 높이 올려둬 본보기로 삼 는 행위)하라. 그리고 장각!" "예." "네 부대가 그래도 피로가 들할테니 먼저 달려가 전방 100리 정도 거리에 있 는 마을을 점령하고 한명도 도망 못가게 잡아둬라." "예." 장각이 달려나간 후 나머지 부대들을 이끌고 전장에 흩어진 모든 몽고병 부상 자 및 포로들을 참수하고 전리품을 챙긴 다음 마을로 출발했다. 마을에 도착한 다음 옥영진 나으리는 모든 천인대장들을 불러들였다. 천인대 장들과 부단장이 모이자 옥영진 나으리가 말했다. "마을을 약탈하고 쓸모없는 노약자들은 모두 죽여버린 다음 가치가 있는 젊은 계집들이나 어린아이들은 모두 잡아들여 노예로 본국에 이송해라. 만약 계집 을 원하는 자가 있다면 가져도 좋다고 일러라." 그러자 여태까지 아무런 민폐도 없이 마을을 지키고 있던 장각이 불만을 토로 했다. "그러면 이 부족은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 아무리 야만족이라 하더라도 그 건 좀..." "자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네만... 이건 본보기로 삼는거야. 우리들에게 거 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존명." 하부르(春) 국광은 마을에 도착한 다음 주위로 흐르는 진령하(震逞河)에서 몸을 씻었다. 몸을 아끼지 않고 가장 위험한 곳만을 찾아 격전을 벌인 그는 온 몸이 피를 뒤집어 쓴 것 같았다. 그는 몸에 묻은 핏물을 조심스럽게 씻어냈다. 그런다음 갑주의 피와 마갑에 묻은 피도 깨끗이 씻어냈다. 그가 열심히 씻고있는데 마 화가 다가오더니 그의 하는 모양을 보고는 생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깨끗한걸 아주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곧이어 또다시 전쟁이 벌어질 건데 그렇게 청소할 필요 없어요. 사람의 피란 기름기가 있어서 그냥 놔둬도 녹슬지는 않는다구요." "글쎄.... 하지만 피가 덕지덕지 붙어있는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이해한다는 식으로 마화가 말했다. 어디까지나 선배의 입장에서의 충고다. "그런식으로 생각하시면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구요." "....." 국광은 열심히 씻어대더니 갑주를 대강 닦고는 다시 입었다. 그런다음 마갑을 대강 닦은 다음 말에다 씌운다음 말했다. "이게 잘하는 건지 잘 모르겠군...." "뭐가요? 씻는거요? 지금은 불필요하다고 말했잖아요." "그게 아니라 살인(殺人) 말이야."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건 살인이 아니에요. 우리가 죽이지 않는다면 그 들이 우리를 죽이러 온다구요." "글쎄...." 약간 놀리는 투로 어른스럽게 짐짓 무게를 잡으며 마화가 말했다. "왜그러세요? 살인을 해보시니까 몸이 떨리고 사람을 죽였다는 죄악감(罪惡 感)이 가시지 않나보죠? 처음엔 다 그래요. 하지만 좀 지나고 나면 그런 생각 도 없어지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러자 뜻밖에도 쓸쓸한 얼굴로 국광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나는 쾌감같은 걸 느꼈 다. 그 외엔 아무런 느낌도 없었어. 피를 보면서 피어오르는 흥분.... 비릿한 혈향(血香).... 약간의 흥분상태에서 죽이고... 또 죽였지... 그러면서도 마 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의문이 이는거야.... 왜 나는 죽이면서도 죄의식을 가지 지 않지? 내가 읽은 책으로는 죄의식을 가져야 되는데........ 쓸데없는 소리 를 했군. 자네도 좀 씻게나." 국광이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마화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죄의식이 느껴지지 않아 고민이라고? 이게 무슨 말이야.' * * * 국광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사방에 죽은 시체 가 즐비했고 곳곳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 그리고 헉헉거리는 신음소리... 말타고 지나치고 있지만 파오(몽고천막)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봐도 뻔할 정도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계집을 끌어다가 파오안으로 밀어넣기도 했고 어떤 파오에서는 병사들이 뭔가 노획물을 가지고 나오며 그 것을 말리는 그 집의 주인인 듯한 늙은이를 파오앞에서 두토막을 내는 것도 눈에 띄었다. 국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서둘러 자신의 막사쪽으로 말을 몰고있는데 저쪽에서 유난히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아! 안된다." 국광은 몽고어를 황궁무고에서 나온 다음 좀 배웠기에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힐끗 보니 병사 4명이 한 소녀를 끌고가려고 하고있었으며 그 어머니인 듯한 여자는 그걸 말리는 중이었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병사중 한명 이 귀찮다는 듯이 칼을 꺼내 그녀를 찔러버렸다. 울부짖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려는 소녀를 그들이 막무가내로 끌고는 파오안으로 밀어넣는 장면을 보면서 국광은 한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겨우 이따위 짓이나 하려고 그 지독한 혈전을 벌였는가?.... 이러면 야만인 놈들이나 중원 놈들이나 뭐가 다르게 된다는 거지?' 소녀의 우는 모습을 보면서 국광은 한없는 그리움과 같은 이상한 감정이 일어 나는 걸 느꼈다. '설마... 저 계집하고 예전에 만났을 리는 없고... 저것 비슷한 모습이 기억 에 있나?'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게된 국광이 말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흑 풍단이 아니라 어림군이었기에 자신이 명령만 한다고 될건 아니었다. 국광이 다가오자 그들은 약간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들도 국광의 갑옷부분의 숫자로 보아 국광이 백인대장이란 걸 눈치챘다. 그 들도 오랜시간 흑풍단과 함께 오다보니 자연 그들의 계급을 알아두는 것이 좋 았고 또 흑풍단의 경우 모두들 뛰어난 무공을 지닌 장교급들이었기에 자연 조 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를 나한테 줄수 없겠나?" 무슨일인지 짐작한 어림군 병졸들은 킥킥거리며 말했다. "이 애가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지만 이건 저희들이 먼저 발견한 물건이라.." "흠... 그래도 나는 저애가 마음에 드니 우리 흥정하면 어떤가? 은자 한냥씩 주지." 돈을 주겠다는 말에 그들의 귀도 약간 솔깃한다. 계집을 한번 품어봐야 별 득 도 없지만 은화는 얘기가 다르다. 거기에 지금 주변에는 널린게 계집이니 이 아이는 포기하고 다른 아이를 골라도 되는 것이다. "헤헤헤... 좋죠." 약간 비굴한 웃음을 띄는 사내들에게 은화 한냥씩을 던져줬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볼일이 없었고 그 다음에는 그놈들이 무슨짓을 하던 참견할 바가 아니었 기에 국광은 몸을 돌려 그 아이에게 몽고어로 말했다. "뭔가 부모의 유품이 될만한 것을 가지고 나오너라." 소녀가 잠시 머뭇거리자 다시 말했다. "빨리 해라. 시간이 없다." 그러자 소녀는 저쪽의 파오로 달려갔다. 국과이 그 앞에서 잠시 기다리자 나 무로 깎은 보살상(菩薩像) 한 개와 몇가지 한눈에 봐도 돈이될 것 같지 않은 자질구레한 것 몇가지를 들고 나왔다. 이미 파오안에는 병사들이 약탈해버려 돈이 될만한 기념품은 한 개도 없었던 것이다. 국광은 이 아이를 죽던살던 마 을 밖까지 데려다가 놔줄 생각으로 소녀를 말에 태운다음 아수라장인 마을을 벗어나 외곽으로 나가고 있는데 자기 수하인 흑풍단원을 만났다. 그는 국광이 꼬질꼬질한 소녀를 한명 안고 가는 걸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벌써 한명 건지셨군요. 역시 대장님이셔.... 지금 데리고 가시는걸 보니 하 녀로 부려먹으실 모양이죠? 아무리 단장님이 허락하셨다고 하지만저는 몽고 계집을 하녀로 두고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더니 꼬질꼬질한 소녀를 자세히 한번 바라보더니 말했다. "하긴... 그리 못생긴건 아니군요.... 뭐... 사람은 취향에 따라 다르게 살겠 지만...." 그러면서 저쪽으로 달려가버렸다. 국광은 그가 했던 말중에서 '단장님이 허락 했다'는 말을 다시 한번 곱씹고 있었다. '단장이 몽고계집을 하녀로 쓰는걸 허락했다면 인적도 없는 마을 외곽에 갖다 버릴 필요는 없겠지. 좀 이 아이와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만날때까지 데 리고 있다가 그사람에게 맏기는게 좋을 것 같군.' 원래 몽고란 약탈혼(掠奪婚)이 성행하는 나라다. 아무 여자나 마음에 들면 납 치해다가 데리고 산다. 그 여자가 남편이 있던 없던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 다. 그러면 그 여자는 자신을 납치해온 그 남자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것이 다. 그러다가 또다시 납치되면 이전의 남편과 아이는 잊고 다시 새로운 가정 을 위해 일한다. 이건 짐승과 같은 욕구를 가진 남자들만의 세상에서 여자들 이 살아남기 위한 한가지 체념된 적응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몽고의 여자들은 정조(貞操)관념이 없다. 누구나 자신을 원하면 같이 사는 것이다. 몽고인의 습성을 잘 아는 옥영진 나으리는 이 이유 때문에 별 말썽이 없을 걸 알고 하 녀를 들이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안그래도 사로잡힌 계집들은 모두 다 노예 로 팔 생각인데 그 도중에 하녀로 좀 쓰다가 팔아버리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동안에 뭐 물건이 닳는 것도 아니고.... 일단 마음이 정해지자 국광은 막사로 길을 잡았다. 그런데 찜찜한 냄새가 코 를 괘롭히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이게 무슨 냄새지?' 허리를 숙여 소녀의 냄새를 맡아보자 이건..... 으웩! "너 목욕한지 얼마나 됐냐?" "목욕이 뭔데요?" 몽고어로 목욕이 뭔지 모르니 중국어로 목욕이라고 했으니 모를밖에... "목욕 몰라? 음..... 몸을 씻는거" "지난 여름에 씻고..." 하기야 몽고는 추운 겨울을 나면서 두터운 남녀구분이 없는 가죽옷을 입고는 그대로 겨울을 난다. 그 가죽옷은 이불 대용(代用)도 되므로 겨울이 끝날때까 지 벗지도 않고 뒹굴정도니... 날씨가 풀릴때까지 씻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이다. 국광은 두말않고 말머리를 돌려 진령하로 갔다. 진령하에 도착한 다음 국광은 그 아이를 강물 속으로 집어던졌다. 아직 봄이라 조금 시원한 날씨에 진령하는 산골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이라 몹시 차가웠다. 갑자기 강물속으 로 떨어지자 그 아이는 기급을 했다. "아악" 허우적거리면서 일어서는 그 아이를 보고 국광이 냉정하게 말했다. "어서 씻어. 깨끗이.... 그리고 옷도 좀 빨아... 가만있자...." 안장 주머니에서 작은 비누조각을 던져주며 말했다. "이걸 써서 깨끗이 씻어. 안그러면 물속에 쳐박고 얼어죽게 만들어 주지." 눈동자를 희번뜩거리면서 국광이 말하자 소녀는 겁에 질려 옷을 벗고는 재빨 리 씻기 시작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여체가 추위에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일 단 몸을 다 씻은다음 옷까지 다 빨고는 추위에 새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 며 엉거주춤 걸어나왔다. 그런 모습을 보며 묵향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여분의 옷이 없다.. '이걸 어쩐다.... 수건도 없군...' 하는 수 없이 국광은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이는 검은 갑주를 입고 안면보호대까지 착용해 두 눈밖에 보이지 않는 국광에 대해 두려 움을 느끼고는 움찔 했지만감히 저항하지는 못했다. 국광은 어깨에 손을 올 린 상태에서 내공을 뿜어넣었다. 강대한 내력이 소녀의 몸을 타고 흐르자 소 녀의 몸에서 일고있던 떨림이 사라졌고 또 묻어있는 물기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런다음 국광은 소녀의 손에서 둘둘 만 옷가지를 받아든 다음 툭 튕기며 내 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옷가지의 물기도 순간적으로 날아가버렸다. 국광이 깨 끗이 마른 옷을 다시 소녀에게 건네주자 소녀는 마치 요술을 보는 듯 신기해 했다. 일단 소녀가 옷을 다 입고나자 국광은 이 애가 대원의 말대로 그리 못 생긴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국광은 그녀를 다시 말에 태우고 자신의 막사 로 돌아왔다. "너.. 몇살이지?" "열다섯살.." "열다섯? 그렇게 어린것도 아니군. 이름이 뭐냐?" "하부르(春)" "하부르? 좋은 이름이군. 너는 좋으나 싫으나 나하고 함께 한동안은 살아야 돼. 괜히 도망갈 생각 하지 말아라. 도망가다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 니..." 국광이 막사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이 하부르의 여분의 옷을 구하는 것이었다. 옷가지와 약간의 살림살이가 갖춰지자 그걸 하부르에게 주면서 말 했다. "요리는 할줄 알겠지?" "예." 이러쿵 저러쿵... 말이 딸리는 곳에 들어가서는 손발을 동원하여 얘기를 나누 고있는데 수하가 한명 찾아왔다. 그는 막사안을 슬며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단장님이 찾으십니다." 밖으로 나오는 국광을 보면서 약간 음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와.... 진가 녀석이 말하길래 안믿었는데... 능력이 좋으시군요. 벌써 한탕 하셨습니까?" "헛소리 하지말고 일이나 봐." 국광이 옥영진 나으리의 막사에 들어가자 옥영진 나으리가 반겨 맞이했다. "오... 이번 전투에서 자네의 도움이 컸네. 잘해줬어." "과찬이십니다." "이번에 꽤 공도 세웠고... 그래서 자네에게 뭘 줄까 생각하다가 이걸 선물하 기로 했지." 그러면서 검 한자루를 국광에게 내밀었다. 한눈에도 호화로운 검이었다. 손잡 이와 검집에 보석이 붙어있었고 검집의 문양의 아주 호화롭고도 정성스럽게 만들어져 있었다. "저는 제 검으로 만족하는데요..." "아닐쎄... 자네의 검은 보통 그냥 싸우는데는 좋겠지만 전쟁을 치르는데는 별로 좋지않지... 겨우 2척 3촌(70Cm)으로 적과 대결하는데는 무리가 많지. 이건 3척(91Cm)의 장검(長劍). 마상전을 벌이는데 도움이 될걸세. 과거 여진 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다음 황제폐하께 하사받은 청성(淸性)검인데 나한테 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그냥 놔둔 것인데 이걸 자네가 써줬으면 좋겠어. 실 지 묵혼검처럼 보검축에 들어갈만큼 좋은검도 아니고... 그냥 보통 검들보다 는 조금 더 날카롭고... 튼튼하다는 것 뿐이니까 그렇게 사양할 필요는 없 네." "알겠습니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그런데 방금 들으니 몽고계집을 얻었다면서?" "예." "여태껏 여색을 멀리하던 자네가 왜?" "사람의 생각이란 바뀌는 거니까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 * 국광으로서는 동정심으로 하부르를 데려다 놓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밤이되자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 앞섰다. 혼자서 생활할때는 별 문제 없었지만 일단 동거인(同居人)이 한명 생기고 나니 이것저것 귀찮은게 한두가지가 아니 었다. 특히나 이 상처받은 아이를 도닥거려야 하는데 여자애와 얘기를 나눈것 만도 오늘이 처음인 그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화나 기타 여자 수하들에게 맏기자니 그들이 비웃을 것 같아 그도 약간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일단 잘때가 되자 구석에 쌓아둔 짐꾸러미에서 두터운 모피(毛皮) 4장을 꺼내 어 하나는 이쪽에 하나는 저쪽에 깔아놓은 다음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저쪽에서 자거라." 그런다음 더 이상의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그는 서둘러서 자리에 누운 다음 돌아누웠다. 좀 지나자 들리는 소리로 미루어 하부르도 잠자리에 들어가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조금 더 있다가 발생했다. 지금까지는 국광이 그런대로 말상대라도 해줘 정신이 없었겠지만 일단 조용한 밤에 혼자 눕게 되 자 자신의 처지와 오늘 있었던 일들이 생각난 하부르가 낮게 흐느껴 울기 시 작한 것이다. 국광의 무공이 그정도 수준이 아니었다면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 로 낮은 흐느낌이었지만 그게 막상 들려오기 시작하자 난감함이 앞섰다. 그렇 다고 공력을 동원하여 이 소음을 막아버리고 모른척하자니 그것도 못할짓이라 참고 2각 정도를 들어줬으나 도저히 멈추지 않자 드디어 짜증이 나기 시작한 국광이 고함을 질렀다. "야! 그만 훌쩍거리지 못해?" 그러자 일순 찔끔 하는 것 같더니 잠시 지나자 조금 더 큰소리로 흐느끼기 시 작하는 것이었다. 국광은 소리만 친다고 도저히 이 난국이 해소될 수는 없다 는 걸 느꼈다. 일단 생각을 정하자 난처한 김에 국광의 행동은 더욱 빨라졌 다. 국광이 벌떡 일어나자 하부르의 흐느낌소리가 딱 멎었다. 혹시나 두들겨 맞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 때문일 것이다. 국광은 다시 생각을 바꾸어 하부 르의 곁에 누웠다. 그런다음 부드럽게 안아준 다음 등을 토닥거리며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낮의 일에 상심하지 말거라. 낮의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잖니?" 국광이 부드럽게 나오자 하부르는 국광을 껴안으며 더욱 큰 소리로 흐느꼈지 만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았다. 국광이 공력을 하부르의 체내에 주입하여 진 기의 유통을 도우면서 심신을 편안하게 해줬기 때문이다. 좀 지나자 흐느낌소 리가 잦아들더니 드디어 국광의 의도대로 잠이들어버렸다. "........" 국광의 속마음같아서는 혼혈을 짚어 완전히 잠들게 만들어버린 다음 자신의 잠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그냥 껴안 고 있다가 자신도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아침 둘이 사이좋게 껴안고 자고있는데 난데없이 마화가 들이닥쳤다. 은근히 국광에게 마음이 있었던 마화로서는 국광이 몽고계집을 껴안고 자고있 는 광경이 기분좋게 비칠 리가 없었다. "대장님!" 상쾌한 말소리와 동시에 막사의 휘장을 겉었는데 그안의 광경이 눈에 확 들어 왔다. 그러자 가시돋친 어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출동명령이 떨어졌어요." 그제서야 국광이 부시시 일어나며 말했다. "왜? 여기서 3일정도 쉰다고 하지않았나?" "북동쪽 140리(약 42Km) 지점에서 도주하는 몽고 패잔병이 발견되었답니다. 수효는 팔천! 제사,오,육 천인대에 출동명령이 내렸습니다. 제사천인대가 선 도(先導)하라는 지시고, 관지(關知) 대장(隊長)이 우리 사육백인대에게 선행 하며 본대를 인도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자 국광이 벌떡 일어서서 갑주를 입기 시작했다. 당연히 잠결에 일어난 그로서는 남자의 왕성한 아침활동이 멈추지않고 있었다. 옷안으로 불룩히 튀 어나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있는 양물(陽物)을 보고 마화가 얼굴이 벌개지며 말했다. "밖에서 기다리죠. 지시는 없습니까?" 마화의 얼굴이 벌개지든 말든 무심한 국광으로서는 그걸 모르고 지나쳤다. 국 광은 죄지은게 없으므로 당당하게 지시를 내렸다. "1각 후에 출동한다. 그동안 대강 요기를 해두라고 일러라. 일,육,칠 십인대 가 선행하며 본대를 유도하라. 그리고 멀리 가야하니까 마갑(馬鉀)은 씌우지 마라." "예." 대답을 마치자 마화는 국광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뛰어나갔다. 국광은 서둘 러 갑주를 챙겨입은 다음 옆에 서있는 하부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돌아올때까지 얌전하게 있어야 한다. 알겠지?" 그러자 하부르는 저쪽에 검대에 매인체 세워져있는 국광의 청성검을 집어주며 대답했다. "몸조심하세요." "그럼...." 국광은 하부르에게 검을 받아쥐고 나오자 수하들이 국광의 말을 가져왔다. 국 광은 말에 오르며 말했다. "자 빨리가자. 이봐! 임충!" "예." "모두들 식량은 충분히 챙겼나?" 여기서 국광이 물은 식량이란 말이나 양, 돼지, 소 등의 고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것으로 밥을 지으며 안에 찢어 넣어서 같이 끓이거나 아니면 국 등에 넣 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그냥 뜯어먹어도 좋도록 만들어놓은 고기포와 쌀, 약 간의 양념 등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말하는 것인데 그중에서 고기포 를 많이 가지고 간다. 마상에서 진군하면서 먹어도 든든하게 요기가 되기 때 문이다. "예." 잊혀졌던 무공 사육 백인대는 빠른 속도로 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140리 지점에 도착했지 만 몽고병의 흔적만을 발견했을뿐 몽고병은 벌써 내빼고 없었다. 이제부터 묵 향은 조금씩 말에 피로를 적게 주면서 이동을 시작했다. 나중에 기마전이 벌 어져도 말이 피로하면 제대로 힘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시진 정도 왔을까 전방에서 칼소리와 호령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분명히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직감한 국광은 모든 수하들을 이끌고 달려나갔다. 전방에서 선행하 는 육 십인대와의 거리는 6리(2Km정도). 적의 매복 기습을 받았다면 아마도 피해가 클지도 모른다. 그 부근에 2개 십인대가 있고 또 본대와의 중간에도 1 개 십인대가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국광이 쫓는 부대는 패잔병이라고는 하지 만 팔천의 병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죽자고 달려갔을 때 국광은 숲에 매복한 부대가 모두 보병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을 처음 보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 '말은 어디있지?' 몽고병은 말을 타고 싸운다. 아무리 매복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부는 말을 타고 퇴로 차단을 하기위해 달려나와야만 했다. 그런데도 적은 달려나와 백병 전을 벌이거나 아니면 활로 응사할뿐.... 그걸 보자마자 국광에게 짚이는 점 이 있었다. '앗차!' 화살의 사거리 조금 못미처 국광은 외쳤다. "모두들 말에서 내려!" 그와 동시에 자신도 내리면서 최대한의 경공술을 이용하여 적에게로 달려갔 다. 그러면서 임충에게 외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임충 너는 수하들을 데리고 말을 3리 밖으로 몰고가서 거기서 대기해라!" 국광의 지시를 받은 나머지 수하들도 임충이 거느리는 사육팔 십인대에게 말 들을 맏기고 경공술을 써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광에 비해 둔중한 갑주를 입은 그들의 속도는 날 수 없었다. 국광은 달려나가면서 걸리적거리는 갑주까지 벗어던지고는 죽자고 경공을 써서 앞으로 달려나갔고 그것을 뒤에서 본 수하들은 그의 경공술에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매복한 적은 천명정도.... 지금 매복에 걸린 4개의 십인대가 분전(奮戰) 중이 었지만 그들의 말은 주위에 모두 죽어있었고 모두들 말시체 주위에서 등뒤에 화살을 몇대씩 박은채로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고수들이라 고는 하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아 이미 몇 명의 시체가 보였고 또 남아서 싸 우는 자들의 몸에도 상당한 상처가 있는 것이 보였다. 국광은 적들에게 뛰어 들자 마자 자신이 가진 전력을 다해 무공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적의 숫자가 많은만큼 속전속결이 최고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전투를 빨리 종결짓 지 못한다면 저 4개 십인대의 인원들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 하는 걱정도 앞섰다. "이얍!" 국광의 검이 휘둘러질때마다 검에서 뻗어나오는 검기는 더욱 강대해지기 시작 하더니 이윽고 유형의 강기로 변해갔다. 국광의 검에서 뻗어나오는 강기는 더 욱 더 강해지기 시작했고 그 강기의 회오리에 휩쓸린 적들의 몸은 토막이 나 며 날아갔다. 죽자고 검을 휘두르며 국광은 자신이 지금 전력(全力)을 다한다 고 생각했다. '11만의 적과 싸울때도 나는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을까.... 그리고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솟아나오는 이 힘은 뭐란 말인가....' 미지의 힘이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라 온 몸의 혈도를 타고흐르는 것을 느끼며 국광은 더욱 더 초식에 공력을 실었다. 그런데.... 그런 어느 한순간.... 갑 자기 몸이 편안해지며 초식이 더욱 원활하게.... 또 진기의 유통이 더욱 원활 하게 풀림을 갑작스레 느꼈다.. 그리고 그의 청성검에서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강기가 피어나오고 있었다. '어검술인가.... 나는 이걸 지금 깨달은 것인가... 아니면 이전에 익힌 것이 내가 전력을 다하자 다시 나타난 것인가...' 빙긋이 미소지으며 국광은 생각했다. '아마 이전부터 알고있던 것이겠지...' 그러면서도 국광의 맹렬한공격은 끊이지 않았고 자신이 알고있는 황궁무학의 진수를 쏟아부어 사방으로 검강을 날리며 수많은 적들을 죽여나갔다. 피와 살 이 튀어오르고 절단된 적의 몸뚱이가 날아다녔다. 국광은 죽자고 움직이며 저 쪽에서 이제 적의 포위가 그런대로 풀렸지만 국광의 악귀같은 형상을 보고 질 려있는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네녀석들은 뒤로 물러서... 잘못하면 다친다." 국광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부상자를 부축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뒷 편에서 자기딴에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오고있는 수하들에게도 소리쳤다. "모두들 이리 오지 마! 걸리적거린다." 국광의 소리를 들은 수하들은 한편으로는 이런 미친 명령을 들을 생각이 없었 지만 그래도 대장의 명령이라 모두들 모여 진형을 짠 다음 국광이 밀리면 도 와줄 생각들이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모두 국광의 싸우는 모습을 지 켜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국광은 이제 주변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지자 더 욱 광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무장(武將)이라기 보다는 한 마리의 악귀(惡鬼)에 가까웠다.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사방을 누비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살육하는.... 국광은 있는힘껏 검을 휘두르며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내력(內力)과 싸울수록 차분해지는 마음.... 일대천의 말도안되는 싸움이지만 진다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아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국광 은 아직까지 읽기만 했을뿐 사용해보지 않은 수많은 황궁무학을 이 자리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수많은 초식들을 펼치던 중 솟아오르던 자신감도... 모 든 생각도 점점 다 사라지고 오직 눈앞의 적을 향해 검을 날릴 뿐이었다. 완 전한 무념(無念).... 국광의 수하들은 국광이 검술뿐 아니라 장법... 권법... 각법... 등등 황궁무 학을 이용해서 수많은 적들을 피떡을 만들어 나가는 걸 보고 전율을 금치 못 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청성검을 잡고 왼손으로는 권법이나 장법을 펼치며.. 양 다리로는 각법을 펼치면서 주변의 몽고병들을 죽여나가고 있었다. 국광의 행동을 차분히 뒤에서 바라보고있던 마화가 옆의 임충에게 자랑스럽게 말했 다. "봐.... 황궁무학이라고 했잖아..." 황궁무학에 대한 자랑에 속이 뒤틀린 임충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난 황궁무학은 익힌적도 없다고 했지? 하지만 대단하긴 대단하군... 어검술 에 검강까지 쓸줄이야.... 나도 황궁무학을 좀 익혀야겠어... 나는 황궁무학 이 저정도로 대단한줄은 오늘 처음 알았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황궁무학만을 고집했을때는 무림사(武林史) 에 이름난 고수 한명 배출한적 없는 황궁무학을 익히게 한다고 불만도 많았었 는데... 오늘보니 그게 아냐... 사람의 정도에 따라 유치한 것 처럼 보이던 초식도 저렇게 살인적인 초식이 된다는 걸 처음 알았어." 국광의 엄청난 초식들을유심히 바라보며 임충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대체 어떤 수련을 쌓으면 저정도의 고수가 될 수 있는거지?" 그러자 마화는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거야 알 도리가 없지. 도대체가 웃기는 대장이라니깐... 맨날 하는 말로는 왜 살인을 할까... 도덕이 어쩌구.... 웃기는 얘기만 해대면서 피만 보면 정 신을 못차리니..." 거의 2각이 지나자 일대천의 대결은 거의 종말을 고해가고있었다. 창칼을 든 용사들은 근처에만 가도 두토막이 났으며 활을 쏴도 모두 다 막아내고 간혹 운좋아 맞췄다 하더라도 옷에 맞은 후 다시 튕겨나가는 악귀에게 서서히 공포 를 느끼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지나자 그들의 일부가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 작하더니 일부가 본격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자 나머지도 따라서 일제히 도망 치기 시작했다. 몽고병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문득 이성을 차린 국광이 손에 묻은 피가 검을타고 흘러내리는 걸 보면서 잠시 멍하니 서있더니 수하들이 모 두들 자신을 빤히 지켜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잠시 망설 이다 외쳤다. "추격해서 전멸시켜!" 그러자 모두들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하지만 유일하게 한명... 마화는 달려나가지 않고 국광의 말을 끌고 창백한 표정으로 아직도 얼이빠져있는 국 광에게 다가왔다. 그런다음 자신의 말안장 뒤쪽에 묶여있던 수건을 꺼내어 국 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끔찍한 얼굴 하고 있지말고 어서 피나 닦아요." 국광은 그 수건을 받아 피를 대강 닦아낸 다음 말안장 위에 올려진 자신의 갑 주를 입기 시작했다. 갑주를 입고있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마화가 말했 다. "도대체 오늘은 왜그래요? 죽으려고 작정.... 아니지... 오늘 보니 당신을 죽 일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도 않더군요." "글쎄.... 처음엔 뭐랄까... 분노... 안타까움... 뭐 이런 감정에서 시작되 었는데 나중에 피를 너무 봐서 그런지 아무 생각도 안나더군... 보기에 흉칙 했나?" 그에 마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뭐... 그렇게 흉칙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악귀(惡鬼)같았을 뿐이니까.." 국광은 피에젖은 수건을 던지며 말했다. "악귀라.... 그럴지도 모르지.... 이 수건은 못쓰겠으니 나중에 새걸 주지." 갑주를 다 입고난 국광은 말에 오르며 마화에게 말했다. "자.. 가자." 추격전은 반 시진도 안되어 끝이났다. 매복했던 몽고병은 모두 다 죽였지만 그 뒷맛은 씁쓸했다. 국광은 추격전이 끝난 다음 다시 집결한 수하들을 둘러 보며 말했다. "완전히 글렀군. 이번 매복조는 나머지 칠천명이 살아돌아가기 위한 희생물이 야. 그런데 우리들에게 걸렸으니... 저들의 희생이 가엾게 됐군." "무슨 말씀입니까?" "저들은 우리의 목숨 보다는 우리의 말을 없애는데 더욱 신경을 썼다. 우리는 중갑주를 입었기에 말이 없다면 퇴각하는 적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 아마도 그들은 정찰조에게 들켜버린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싸움을 시작한 것이었겠지 만 어찌되었건 빨리 해치운 다음 새로운 먹이를 기다릴 생각이었겠지. 그런데 후속대가 너무 빨리 도착했고... 또 빨리 해치우지를 못해서 전체적인 작전이 어긋난 것 뿐이야. 거의 60필의 말을 잃었으니 더 이상 적의 본대(本隊)에 대 한 추격은 불가능... 그리고 선도(先導) 임무를 이행할 수도 없다. 거기에 부 상자도 많고..." 여기서 말을 멈춘 국광은 수하들을 빙 둘러본 다음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돌아가자. 마화는 10명을 이끌고 말을 잃은 수하들을 보호하여 후속하는 관 지(關知) 대장(隊長)에게 사정을 얘기한 다음 본대로 회군(回軍)해라. 그리고 말을 타고있는 사람들 중에서 30명은 나를 따라서 이동한다. 직접적인 전투는 힘들겠지만 정찰임무는 충분히 수행할 수 있겠지." 국광이 처음에는 모두 다 돌아갈 듯이 말하다가 나중에는 30여명을 이끌고 다 시 정찰활동을 하겠다는 말을 듣고 마화가 의의를 제기했다. "대장. 저도 남겠어요. 누구 다른 사람을 선임해주시면..." "네가 가라. 말(馬) 없이 회군하는 수하들을 보호할 임무도 막중한거야. 이제 그만 여기서 헤어지자. 자.. 출발!" * * * 국광은 자신들이 매복대와의 교전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입했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자신들은 관지대장의 명령을 받자마자 거의 최소한의 시간을 투입해서 출동했으니 본대와 더불어 나머지 2개 천인대까지 함께 출발했다면 그 준비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었다. 거기에 적이 발견된 140리 지점까지는 대단 한 속도로 이동했으니.... 하지만 여기서 막대한 시간을 투입한 결과 지금 거 의 본대는 국광의 사육백인대와 적으면 10리 최대한으로 잡아도 아마 40리까 지 거리를 좁혔을 것이다. 더 이상 거리가 좁혀들면 국광의 30여기(騎)로서는 참다운 정찰활동을 할 수 없게된다. 그 때문에 국광은 오랜 전투로 지친 병사 들을 독려하여 빠른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60리 정도 앞으로 추격해 나갔을 때 전방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밀려오는 것 이 멀리 보였다. 그것을 힐끗 바라보며 임충이 국광에게 말했다. "멀어서 잘 모르겠지만 행색(行色)을 보아하니 피난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피난민을 가장한 적의 분대(分隊)인지도 모르니 빨리가서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좋아. 자네는 여기 남아 퇴로를 확보하라. 나는 10여기를 거느리고 정찰을 하겠다. 만약 혼전(混戰)이 벌어지더라도 구출하기 위해 혼전속에 뛰어들지 말고 퇴로의 확보에 최선을 다해라." "예." 임충은 마화와 함께 사육 백인대에서는 가장 고참이다. 그렇기에 마화를 돌려 보낸 지금 자연스럽게 임충은 거의 부 백인대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임충은 마상에서 고개를 돌려 뒤쪽의 대원들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차임(車林)!" 그러자 뒷편에 피에 젖은 갑주를 입은 무사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의 갑옷 에는 사육구(四六九)라고 쓰여 있었다. 차임은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젊지만 뛰어난 검객이었다. "예." "네가 9명의 수하를 이끌고 대장을 따라가라." "예... 그쪽의 9명. 모두 날를 따르라." 국광이 피난행렬로 보이는 집단에 근접해 들어갔다. 모두들 최대한 상대의 기 습에 대비했지만 더욱 가깝게 접근하자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진짜 피난민들이었다. 많은 말떼와 양떼를 이끌고 그 사이사이에 모두들 마차에 짐을 가득 싫고 이 동중인 그들의 표정에는 절망감만이 있을 뿐이었다. 장정들은 거의 없고 모두 들 노인과 여자... 어린애들 뿐... 국광은 그들 중의 한 나이 지긋한 노인에 게 다가가 말했다. "어디로 가는가?" 검은 갑옷을 입은 중국인이 난데없이 몽고어로 말을 걸자 그는 놀란듯한 표정 이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곤륜하(坤輪河) 쪽으로 갑니다. 나으리." "왜?" "진령하(震逞河) 쪽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자네 부족의 이름은뭔가?" "타지크 부족입니다요. 나으리.." "타지크면... 지울부족의 한갈래가 아닌가?" 그러자 그 노인의 눈에 공포가 어리며 더듬더듬 항변했다. "아닙니다요.... 타지크는 지울... 지울 부족의..영토에서 일부 생활하긴.. 하지만 지울부족과 절친하지도 않습니다요.. 나으리." 국광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래? 내가 잘못알고있었나?" "잘못 아신 겁니다요... 나으리." "좋아.. 그건 어찌되었건 상관없어. 이쪽으로 지나가는 약 칠천기의 몽고병사 들을 만났나?" "못만났습니다요.. 나으리." "자네들은 어디서 오는 길인가?" "울란토르에서 오는 길입니다요. 나으리." "울란토르? 울란토르라면 충분히 만났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러면서 휙 피난행렬을 둘러보자 가장 눈에 확 띄는 것 중의 하나가 부족의 크기에 비해 말이 적다는 점... 그리고 남자가 너무 없다는 것이다. '아마 말과 남자들이 그녀석들에게 합류했다고 봐야겠군. 여자들의 숫자로 봤 을 때 거의 천명정도...?' "좋아. 뭐... 나완 별 상관없는 것 같으니 너희들은 최대한 빨리 이 부근을 떠나라. 이 근처에서 뭉기적거려 봐야 신상에 좋을게 없을테니까... 이봐, 차 임!" "예." "임충보고 전진하라고 해. 자 우리도 출발한다." 칠천기나 되는 병력이 움직인 대초원에 새겨진 흔적은 쉽게 없앨 수 있는게 아니다. 폭설이나 폭우가 쏟아진다면 몰라도... 타지크 부족과 서로 합쳐진 부분에서 혼동만 안하면 추격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 국광이 마상에서 건포로 식사를 때우며 죽자고 부하들을 몰아붙여 250리 (약 76Km)정도를 추격한 다음 에야 적의 후미를 포착할 수 있었다. 국광은 패잔병들과 20리(약 6Km)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비밀리에 후속하는 본대를 유도했다. 적들은 그날 100리 정 도를 더 이동한 다음 약 3000가구에 이르는 몽고마을을 만나 그곳에서 야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본대는 그날 저녘 늦게야 국광의 정찰대와 합류했다. 관지 대장은 적이 후퇴의 속도를 조금 줄인 이유가 뒤에 남겨둔 천여명의 매 복대에 대한 기대감이란 걸 눈치채고 이토록 빨리 적의 꼬리를 잡은 국광의 공로를 치하한 다음 휘하의 장수들과 전투 토의를 시작했다. 5개 백인대가 적 의 퇴로로 예상되는 지점들에 매복을 한 후 나머지 25개 백인대로 새벽을 틈 타 기습을 벌이기로 계획을 수립했다. 그중 국광이 거느린 30기는 국광의 부 탁을 받아들여 매복대에 합류하기로 했다. 당일(當日) 새벽 25개 백인대의 기습이 시작되는 것을 국광은 멀리 초원에서 말들을 눕혀놓은 상황에서 구경했다.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고 격렬 한 전투가 개시되었다. 안그래도 무술을 모르는 몽고인들을... 그것도 기습을 가했으니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그것은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찬 황흑풍단은 그렇게 패잔병과 그들을 도와준 지울 부족의 마을 한 개를 없애버 렸다. 사방으로 적들의 일부가 도망쳤지만 매복한 5개의 백인대는 그들을 놓 치지 않았다. 모든 전투가 종료되었을 때 이미 해는 중천에 떠올라 있었고 세명의 천인대장 들의 지시로 몽고병들의 부상자와 포로들을 모두 처형했다. 그리고 그들을 도 와준 마을은 젊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였다. 철저히 약탈 당했으며 곳곳에서 살인... 방화... 강간... 약탈이 자행되었다. 마을은 그야 말로 지옥의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고 수많은 시체가 뒹구는 묘지가 되었다. 국광은 휘하의 30기를 거느리고 마을에서 거리를 둔 상태로 아직도 매복한 장 소에 있었다. 국광으로서는 대송제국 최고의 정예인 이들이 이렇게까지 전투 를 잔인하게 이끌어갈줄은 생각도 못해본 사실이었다. 아무리 멀찍히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의 일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 고 또 군데군데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지 긋이 그 광경을 바라보며 옆의 임충에게 말하는 듯... 아니면 혼자말을 하는 듯 나직히 입을 열었다. "과연 전쟁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임충이 말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몽고족들은 아주 강인한 민족이라 이렇게 강하게 맛을 보 여놓지 않으면 언제 또다시 반기를 들지 모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병사도 아닌 민간인들을... 저렇게까지..." 국광의 안색을 힐끗 살피면서 임충이 화제를 돌렸다. 계속 이런 얘기를 해봐 야 시간낭비기 때문이다. "대장,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매복했던 다른 백인대들은 모두 약탈에 참가 했습니다. 우리만 이렇게 떨어져 있다구요." "음....." 국광은 잠시 생각하더니 큰소리로 부하들에게 말했다. "약탈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이 있냐?" 모두들 서로의 눈치만 멀뚱멀뚱 보더니 서로 다들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찬황흑풍단으로서는 단장의 지엄한 명령때문이지 거의 대부분의 병사들이 이 따위 돈도안되는 몽고족들의 약탈따위 하고싶은 자들은 많지 않았다. 거기에 몽고족 계집들이 미인도 아니고 추위탓에 목욕도 별로 안하는 것들을 강간해 봐야 그도 별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국광은 수하들의 표정을 차근히 훑어본 다음 말했다. "여기 계속 있어봐야 별 볼일도 없으니 관지 대장에게 통지하고 회군한다. 합 류한 다음 쉬는게 남는거겠지. 그리고 떠날 때 마화에게 살짝 일러놨으니 운 좋으면 술맛도 볼 수 있겠지. 지금까지 단장의 본대는 움직이지 않고 있나?" 술맛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모두들 기대감에 차서 군침을 삼키며 '역시 우리 대장'하는 표정으로 국광을 바라봤다. 국광의 옆에있던 임충도 미소를 띄며 국광의 질문에 대답했다. "현재까지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누구 전령을 한명 보내라. 우리는 회군한다고... 그리고 만약 있을지 도 모르는 적의 매복에 대한 대비라고 하면 그도 허락할거야." "예." "그리고 이 지옥에서 언제 떠날건지 물어보는 것도 잊지말고... 단장한테 보 고해야 하니까." "예." 전령이 달려갔다가 돌아오자 국광은 본대를 향해 출발했다. 더 이상 피비린내 가 나는 장소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추격전과는 달리 회군은 국광 이 수하들을 다그치지도 않았지만 돌아가서 오랜만에 술을 실컷 마신 후 푸근 히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연히 속도가 빨랐다. 거의 400리 정도를 이동하자 국광의 코에는 짙은 피냄새가 느껴졌다. 국광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우리가 매복 기습을 당했던 장소에 도착하려면 멀었지?" "예. 지금 400여리를 왔으니 아직도...." "그럼 이 피냄새는 뭔가? 이 근처에서 전투를 벌인 기억은 없는데?" "예? 피냄새라구요? 아무 냄새도 안나는데요." "그런가? 내가 잘못 맡았을 리는 없는데... 하여튼 좀더 속도를 내라." 국광이 수하들을 이끌고 5리 정도 나가자 그곳에는 수많은 시체와 불타다가 남은 마차... 말과 양의 시체들... 각종 짐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것을 국광 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임충이 어찌된 것인지 눈치채고 말했다. "그때 만났던 타지크 부족입니다. 관지대장의 후속대가 한 행동인 것 같습니 다. 아마 포로들과 약탈한 물건들은 먼저 몇사람 뽑아서 본대로 보냈겠죠." "....." "여기서 보셔봤자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시체들을 다 파묻을 수도 없구요... 출발하기로 하죠." "그러자..." * * * 본대는 아직도 그곳에 계속 주둔중이었다. 국광이 도착하자 마화가 뛰어나와 국광을 반기며 말했다. "모두들 무사하군요. 정작 패잔병의 본대와는 싱거운 전쟁이었던 모양이죠." 하지만 국광의 떨떠름한 표정에 옆에있던 임충이 거들었다. "몽고병들이 마을에서 야영중인 것을 새벽에 기습했으니 싱거운 싸움이었지. 그래 술은 구했어?" "말도 말아. 그 술 구한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또 마유주(馬乳酒)? 난 그놈의 마유주 냄새만 맡아도 올라올 것 같아. 어떻 게 그걸 마시고 사는지 원...." 마유주란 몽고 전통의 토속주로 말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다. 비교적 약한 술 로 이상야릇한 냄새가 나고 시큼텁텁한 맛에 도저히 중원사람이라면 맨정신에 마시기 힘든 술이다. 그걸 몽고인들은 사발로 벌컥벌컥 들이켰고 어떤 면에서 는 거의 주식(主食)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언제 맛으로 마셨냐? 취하는 기분에 마셨지. 그게 아니고 고량주야. 꽤 오랫 동안 여기 머물렀으니까 가까스로 구할 수 있었다고.. 어때?" 고량주라는 말에 임충이 꿀꺽 군침을 삼키며 힐끗 국광의 눈치를 본다. 역시 나 국광의 목젖도 올라갔다 내려가는 걸 보니 모두들 술에 굶주리기는 매한가 지인 모양이다... 중원의 술에.... 국광은 주변을 한동안 살펴보더니 말했다. "인원이 많이 준 것 같은데...?" "예... 4개 천인대가 주변을 돌며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어요. 연일 몽고계집들과 약탈품들이 쏟아져 들어온다구요.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는게 아 닌가 하는..." "잔소리 말고 나중에 만나자. 나는 먼저 단장 나으리를 만나봐야겠어." "그럼 나중에 보죠. 임충의 막사로 오세요." "알겠다." * * * 오랜시간 고생한 수하들에게도 고량주를 보낸 다음 대장급들은 임충의 막사에 모여들어 술맛은 이래야 한다고 외쳐대며 장시간의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고 치하하면서 마셔댔다. 국광은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시작된 술자리가 해가 진 후 끝이나자 임충과 함께 나가떨어진 4명의 십인대장들을 한팔에 한명씩 집어 들고 나왔다. 그런다음 술기운에 완전히 나가떨어진 마화를 먼저 옆의 막사에 던져넣으며 임충에게 투덜거렸다. "이 계집들은 술도 약하면서 왜이렇게 마셔대는거야." 그의 말에 임충도 맞장구를 치면서 말했다. "글쎄 말입니다. 계집만 아니면 그냥 같이 뒤엉켜 자도 상관없는데 원... 날 잡아 잡수 하면서 먼저 뻗어버리니... 그런데 대장!" "왜?" "빨리 안가시면 하부르한테 두들겨 맞지 않을까요?" "하부르?" 잠시 국광은 하부르가 뭔지 생각했다. 곧이어 하부르가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 과 그 애가 자신의 막사에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군. 줏어왔으면 돌봐줘야 되는건데... 나중에 얻어터지지나 않을지 걱정이군." "빨리 가보시죠." 국광은 왼팔에 쥔 사람을 막사에 집어던지며 말했다. "그래야겠지. 잘자게나. 내일 보세." 그러자 임충의 웃음을 머금은 말이 등뒤에서 들려왔다. "대장도 잘 주무십쇼. 내일 일 보시려면, 오랜만에 만났다고 너무 힘쓰시면 안됩니다요." "...." 국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막사에 도착했을 때 하부르는 자지않고 국광을 기다 리고 있었다. 국광이 도착한 다음 수하를 시켜 그의 갑주와 말만이 도착했을 뿐... 정작 사람은 밤이 되어 술냄새를 푹푹 풍기며 들어오니 얄미울만도 하 련만.... 하부르는 국광이 들어오는 걸 보고 쪼르르 달려와 국광에게 안겼다. 국광은 그런 하부르를 마주 안고 토닥거리며 말했다. "얌전히 있었냐?" "...." "밥은 제때 먹었어?" "...." "너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냐?" "..." "말을해라.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어디 얼굴좀 볼까? 얼굴이 어떤지도 잊 어버렸군. 이게 며칠만이지?" 국광이 살며시 턱을 잡고 올리자 아직 앳된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남아있었다. 자신의 후광이 있어 옆에서 괴롭히는 녀석이 있을리도 없지만 말도 통하지 않 는 늑대같은 살벌한 남자들과 같이 있는다는 사실 자체가 소녀에게는 고역이 었을지도 모른다. 국광으로서는 이 아이를 빨리 놓아서 돌려보내고 싶지만 마 화의 말대로 4개 천인대가 주변을 돌며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든다면 이 아 이를 맏길만한 마을을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국광은 한숨을 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저녘은 먹었니?" 고개를 가로 젓는걸로 봐서 국광을 기다리며 아직 안먹은 모양이다. '이미 수하들과 배터지게 음식과 술을 먹었지만 그래도 이녀석이 나를 위해 장만해놓은 음식들이니 같이 먹어야 되겠지. 가만... 더 먹어도 될까?' 몰래 배를 한번 찔러본 다음 약간의 자신감이 생기자 국광이 말했다. "자... 같이 먹자." 하부르는 쪼르르 달려가더니 몽고식으로 차려놓은 음식들을 가져왔다. 뼈채로 삶아놓은 양다리... 그리고 뭐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걸쭉한 국물이 작은 그릇에 담겨있다. 아마 여기에 고기를 찍어먹는 것이리라... 그리고 마유 주... 작은 식탁 위에는 작은 칼 두자루가 올려져 있었다. '이걸로 썰어서 먹는 모양이지? 그건 그렇고 내 위장이 버틸지 모르겠군...' 국광은 어색한 표정으로 식탁을 보면서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마음을 굳힌 다음 용감하게 식탁으로 달려들었다. '저 아이를 데리고 있는 내가 멍청한 놈이지...' 국광이 식탁에 앉자 하부르는 국광에게 칼을 건네줬다. 그런다음 자기도 국광 옆에 앉은 다음 칼을 잡았다. 몽고인들은 어떤때는 통째로... 어떤때는 대강 토막을 친 상태에서 적당히 삶 아서 먹는다. 토막이 크기에 칼은 식사에 있어 필수품이다. 서로가 칼을 가진 채로 식사를 하다보니... 이놈의 식사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종종 식사하는 장소에서 살인(殺人)이 벌어지기도 하기에 서로가 식사를 같이 했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상당한 신뢰의 표시였고 또 담력이 크다는 징표였다. 양다리는 두개... 한 개씩 집으면 딱 맞는 숫자다. 국광이 양다리를 잡고는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는 걸 보고 하부르가 살며시 미소지으며 양다리 의 드러나 뼈부분을 잡은 상태에서 자신의 소매위에 올렸다. 국광이 따라하자 칼을 잡은 상태로 칼날을 자신의 쪽으로오도록 잡은 다음 썰어서 입으로 가 져갔다. 고기가 덜익어서 핏기가 배어나오는걸 보고 국광은 잠시 망설였다. '맙소사... 설익은 고기군... 그래.. 몽고족은 이동하는 부족.. 저 큰 고깃덩 이를 푹 익힐려면 시간이 적잖게 들어가지. 그러니 당연히 겉만 대강 익혀먹 을밖에.. 그래도 한번 칼을 들었으니... 한번 죽지 두 번 죽나..' 국광은 모진 결심을 하고 본대로 고기를 썰어 입속에 쑤셔넣었다. '오... 신이시여. 이걸 먹어야만 합니까... 아마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죄를 너무 많이 지은 것같군.' 속마음이야 어떻든 국광이 맛있게 먹어대자 하부르는 좋아했다. 둘은 같이 간 단한 얘기를 나누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처음에 국 광이 고통은 한번에 당하는게 낫다는 생각에 자신앞에 놓인 마유주를 한번에 쭉 다 마셔버리자 하부르는 다시 마유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마유주를 좋아하시는군요." "그래......" '돌아가시겠군...' "천천히 드세요." 너무 안마시고 고기만 먹기도 그래서 이번에는 간간히 마유주에 입도 대면서 앞으로의 살길을 찾아 우회적으로 질문했다. "몽고에서는 고기를 언제나 삶아서만 먹냐?" "아뇨. 구워서도 먹어요." "구워? 그럼 내일은 구워먹자." "왜요? 맛이 없으세요?" "아니야. 맛있어. 아주 잘 삶았는데... 그래도 계속 삶아만 먹으면 아무리 맛 있어도 질리쟎니... 가끔은 바꿔야지." 그러자 하부르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예. 마유주 더 드세요. 많이 구해놨어요." 국광은 억지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 잘했다...." '내가 못살아... 얘를 빨리 내보내야 제명대로 살 수 있겠군...' 국광으로서는 장도(長刀)를 들고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것보다 더 지옥같 은 식사가 끝난 후 국광은 자신의 강력한 비위(脾胃)를 믿고 쑤셔넣은 반 생 고기와 마유주가 반역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부르는 오랜만에 만난 말상대를 향해 국광이 알아듣건 못알아듣건 재잘거렸다. 전체 내용의 반도 못알아 듣는 국광으로서는 점점 인내의 한계에 이르고 있었으나 이 멍청한 아가씨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국광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마음을 돌리고 구석에 놓인 검을 집어들었다. 그런다음 다시 하부르의 옆에 앉은 다음 잠자코 듣고있으면서 국 광은 요즘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청성검과 장도를 꺼내 정성껏 닦으면서 건성 으로 하부르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갑자기 검을 꺼낸 국광의 태도에 움찔 하기는 했지만 곧이어 검을 손질하기 시작했으므로 또다시 하부르의 입은 쉴 새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될 수있으면 천천히 진행하던 검의 손질까지 끝나자 국광은 자리를 편 다음 잘 준비를 했다. 그러자 하부르가 국광의 손에서 가죽을 뺏은다음 자신이 정 성껏 깔았다. 그런다음 국광을 ㄴ히고는 그 옆에 누웠다. 국광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자신을 완전한 남편이나 남편 대용품(代用品) 쯤으로 생각 하는 이 아가씨를 설득하기도 뭣했다. '에이... 될대로 되라지.' 국광은 오른손을 뻗어 하부르의 팔베개를 만들어준 다음 옆에서 속삭이는 하 부르의 말을 들으며 곧 잠이 들었다. 오랜시간 뛰어다니며 거의 잠을 자지 못 한 국광이었기에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하부르는 옆에서 속삭이다가 곧이어 국광의 편안한 숨소리와 함께 더 이상의 형식적인 대꾸도 없자 살짝 국광을 찌르며 말했다. "이봐요..." 국광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국광의 품에 기댄 다 음 잠을 청했다. 어쩔수 없이 함께하게 되었지만 그녀로서는 자기에게 꽤나 신경을 써주는 이 알 수 없는 이상한 남자가 아주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또다시 마화가 국광을 깨우러 왔다. 그녀는 다짜고짜로 막사안으로 처들어와서는 말했다. "대장." 국광은 누운채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그래?" 그러자 마화는 국광을 내려다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계속 잠만자면 어떻게 해요? 할 일이 많은데..." "할일?" "예." "어떤?" "그러니까...."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충하고 둘이서 해결해. 잠을 오랫동안 못잤더니 피곤하군." "안일어날거에요?" "야... 잠좀자자.. 지금이 도대체 몇신데..." "벌써 해떴다구요." "벌써가 아니라 해뜬지 1각도 안됐쟎아. 나중에 보자구." 일어날 생각은 안하고 국광이 가죽을 좀 더 높이 끌어올리자 마화가 다가오더 니 가죽을 획 겉었다. 그러자 저녘에 입고있던 옷을 그대로 입은 국광이 누워 있었고, 그 옆에 옷을 입은채 누워있던 하부르는 약간 겁을 먹은 눈으로 마화 를 훔쳐보며 국광을 살며시 껴안았다. 그걸 보고 설마하고 있던 마화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 그런 사이 국광이 내공을 운용해 능공섭물(能空攝物)을 이용해 마화가 쥔 가 죽을 뺏어서 다시 덮은 다음 약간 졸리는 듯한 목소리로 냉냉하게 말했다. "나중에 보자구. 쫓아내기 전에 빨리 나가." "그러죠." 국광이 또다시 하부르를 껴안고 잠이 든 사이 순순히 물러난 마화는 임충의 막사로 향했다. 임충도 뻗어서 자고있었는데 다짜고짜 마화가 막사로 쳐들어 왔다. 마화는 임충의 막사로 들어가서는 자고있는 임충을 툭툭 차면서 말했 다. "야... 빨리 일어나." "으응.... 왜그래?" "왜그래고 자시고 빨리 일어나" "끄응..." 신음소리와 함께 모포를 뒤집어쓰며 다시 잠을 청하는 임충을 보고 마화는 이 번에도 바로 모포를 뺏어들었다. 무심했던 국광과는 달리 임충은 아침을 알리 는 양물이 비록 바지안으로지만 마화 앞에 드러나자 황급히 가리면서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빨리 나가." "쳇... 꼴에 남자라고..." 그러면서 손으로 가린 부분을 발로 툭 찬다음에 말했다. "밖에서 기다릴테니 빨리 나와. 죽고싶지 않으면...." "야... 너 정말 여자냐... 아침부터 미치겠군..." 팽창한 양물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간수를 잘한 임충이 투덜거리며 나오 자 마화가 임충에게 따지듯 물었다. "야. 대장이 왜 몽고계집하고 같이 사는거지?" "그걸 몰라서 묻냐? 왜 잘자는 사람 새벽부터 깨운다음 헛소리야. 냄새나는 몽고계집하고 같이 산다면 이유야 뻔한거쟎아." "뭐... 성교?" 직설적으로 여자가 묻자 임충의 얼굴이 약간벌개지면서 더듬거렸다. "그... 그렇...겠지."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아." "왜?" "하부르하고 살기 시작한 다음부터 새벽마다 내가 깨우러 갔었는데..." 놀란 임충이 외쳤다. "너 미쳤냐?" 임충이 경악하든 말든 마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멀쩡해. 그런데.... 그때마다 둘 다 옷을 입고 있더라구. 그건 서로 성 교를 안했다는 말이쟎아. 남자가 그럴수도 있냐? 전에 보니까 양물에도 이상 이 없는 것 같던데...."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자 임충의 얼굴은 더욱 벌개졌고, 주위를 두리 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런 마화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제기랄... 도대체 누가 우리들의 대화를 들으면 이게 아침부터 웬 개망신이 냐....' "제기랄... 아침부터 헛소리 하지말고 잠이나 좀 더 자. 너야 오래전에 와서 푹 쉬어서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이라고.... 30기 만으로 벌판을 헤 맨다는게 어디 보통일인줄 알아. 대장은 거의 한숨도 못잤고... 나도 그렇다 구... 그러니 제발 잠좀 자자.." 마화는 막사로 들어가려는 임충의뒷덜미를 잡고는 버둥거리는 그를 임시로 말이 마실수 있도록 물을 받아둔 곳으로 끌고갔다. 그런다음 물통속에 얼굴을 처박았다가 뺀 다음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냐.... 그래서 난 이해가 안간단 말이야. 욕망을 채우기 위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몽고와는 식생활이 달라서 하녀로 부려먹을 수도 없고...." 임충은 물이 뚝뚝 떨어져 옷을 적시고 있는데도 소매로 쓱 눈부분만 닦은다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젠장... 들을수록 가관이군. 그래서 너가 하고싶은 말의 요점이 뭔데?"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왜 하필이면 몽고계집을..... 대장이 원한다면 여기도 여자는 많은데..." 그러자 멍한 표정으로 임충이 마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많은 여자?" "무슨소리를 하는거야. 내가 아니라니까..." 마화가 발끈하자 임충이 놀리듯 빙글거리며 말했다. "흥.. 네가 아무리 애태워봤자 너하고는 격이 다른 분이야. 냉수먹고 속차리 라구. 남이야 몽고계집을 껴안고 자던... 요나라 계집을 껴안고 자던 너하고 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럼 나는 잠이나 좀 더 자야겠다. 일 생기면 너가 알아 서 처리해." 임충이 자신의 막사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그 뒤를 보고 마화가 말했다. "야. 잘 생각만 하지말고 내 말도 좀 들어보라니까..." 임충은 자신의 막사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헛소리 하지말고 잠이나 좀 더 자. 잠이 모자라니까 정신이 헤깔리고 입에서 헛소리가 나오는거야." 약이 오른 마화는 임충이 들어간 다음 약간 펄럭이는 막사의 휘장을 보며 중 얼거렸다. "흥! 내가 말을 말아야지." * * * 국광이 느즈막히 일어나자 먼저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던 하부르는 다시 식사 를 가져왔다. "드세요." 이번에는 양다리를 통채로 구운 거였지만 사정은 전과 별로 다른게 없었다. 겉만 굽혔지 안은 똑같았던 것이다. 국광은 사력을 다해 고기를 씹어 삼키고 마유주를 들이킨 다음 일어났다. "좀 더드세요." 국광은 억지로 웃으면서, 음식을 권하는 하부르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아... 그러니까... 이거 정말 맛있기는 하지만 나는 원래 식사를 많이 안해. 그리고 점심은 수하들하고 같이 먹으니까 언제나준비할 필요없어. 심심하겠 지만 혼자 먹어라.. 응?" 맛있다는 말에 활짝 미소지으며 하부르가 말했다. "부하들하고 가깝게 지낸다는 것도 좋은거에요." "아... 지금 생각났는데 오늘 저녘도 수하들하고 약속이 있어. 술을 같이 마 시기로 했으니까 먼저 먹어라. 응?" "내일은 저녘 같이 먹는거죠?" "그럼..." 국광은 서둘러 청성검이 매여있는 검대를 찬 다음 밖으로 나왔다. 옥영진 나 으리에게 청성검을 받은 후부터 묵혼검은 깊숙히 보관해두고 이걸 애용했다. 마상전에서는 짧은 것 보다 긴게 더편리했기 때문이다. 국광은 서둘러 임충 의 막사로 갔다. 임충은 수하들과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고있다가 국광이 다 가오자 모두들 일어나 인사를 했다. 국광은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하면서 말 했다. "야.. 내가 먹을것도 좀 있냐?" 그러자 그 속사정 뻔히 안다는 식으로 흉물스런 미소를 지으며 임충이 비꼬았 다. "아뇨. 대장님 드실게 어디있습니까? 저희 먹을것도 없는데.... 거기에 대장 님은 예쁜 하부르가 만든 아침식사를 든든히 하셨을텐데..." "그게 인간이 먹을 수 있는거라면 그렇지. 잔말 말고 빨리 내놔." 그러자 수하 한명이 밥을 한공기 퍼서 국광에게 줬다. 국광은 열심히 밥과 반 찬을 집어먹으면서 앞으로 이 난국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할지 열심히 궁리를 해댔다. 하기야 열심히 먹어대면 나중에는 어떻게 이골이 나서 먹겠지만 문제 는 지금 적응을 하는 단계인 것이다. 거기에 하부르를 자기가 평생 대리고 살 것도 아닌 상황에서는 적응하려고 노력해봤자 모든게 부질 없는 짓인 것이다. 텐령 평원 대회전의 서막 본대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계집들과 아이들의 손을 긴 줄에 묶은 행렬이 지나 갔다. 부근을 약탈한 부대들은 본대에서 회전(回戰)을 통해 확보한 진령골에 이르는 비교적 안전한 보급로를 이용하기 위해 본대를 거쳐 모든 약탈물들을 본국으로 수송했다. 그 때문에 국광으로서는 보고싶지 않아도 절망적인 눈빛 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묶여서 끌려가는 장면을 봐야만 했다. 닷세가 지나자 추격전에 나섰던 3개 천인대가 돌아왔다. 그들은 돌아오는 길 에 주변에 흩어진 모든 몽고 부락들을 약탈하면서 오느라 시간이 좀 더 걸린 것이다. 그들도 수많은 몽고인들을 끌고왔으며 노획한 물자들을 수레에 가득 히 싫고서 돌아왔다. 옥영진 나으리는 일단 그것들을 모두 다 본국으로 출발 시킨 다음 천인장급 이상만 소집하여 장시간 작전회의를 시작했다. 국광으로서도 현재 사방을 돌아다니며 약탈사업(掠奪事業)에 열중인 40개 백 인대로부터 줏어들은 정보들이 있었다. 비록 부상은 당했지만 철진천이 후퇴 하여 전력(戰力)을 재정비중인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국광이 멀리 떠있는 구 름을 바라보며 이생각 저생각 하고있는데 뒤에서 마화가 천천히 다가왔다. 오 랜 휴식때문인지, 아니면 부근의 적은 모두 다 전멸시킨 안도감인지 평소에는 언제나 입고있던 갑옷을 입지 않은 그녀는,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오똑한 콧날과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화는 바람에 날리는 머 릿카락을 귀찮은 듯이 쓱 정돈하며 말했다. "무슨생각 하고 있어요?" 갑작스런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국광이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 다. "응? 뭐라고?" "무슨생각을 그렇게 멍하게 하고있냐구요." "아... 이놈의 전쟁이 언제 끝날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거야 철진천(鐵眞天)인지 동진천(銅眞天)인지 하는 양반이 언제 죽느냐에 달린게 아닐까요?" "꼭 그를 죽여야 한다면 빨리 진격해서 끝장을 내야지. 왜 여기서 이런 추악 한 짓거리를 하고있지?" "그거야 이 부근은 모두 철진천의 부족들이 거주하는 곳이니까 이들을 없애버 리면 그만큼 철진천의 입지가 약화되지 않겠어요?" "과연 그럴까.. 너무 이런식으로 하면 이 일대 부족들의 반감만 살 것 같은 데..." "그건 너무 중원식으로 생각하는 거죠." "중원식이라고?" 마화는 아직도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어린애를 타이르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 이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철저하게 약육강식(弱肉强食) 의 법칙에 따르는 종족들이에요. 본때를 보여주면 뭔가 결과가 나오게 된다구 요. 제가 듣기로는 이미 5개 부족이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전령을 보내 온 모 양이에요. 그러니까 다음 작전은 몽고족들과 함께 할 것 같아요.." "몽고족들과 함께..." "예. 이들은 한 국가를 이룬적이 없어요. 그렇기에 동족(同族)이란 개념이 없 어요. 자신들의 부족에게만 피해가 오지 않는다면 무슨 짓이라도 한다구요. 다른 부족을 없애는 걸 도와서라도 자신들에게 화(禍)가 미치지 않는걸 원해 요. 지금 단장은 그 5개 부족의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듣기로는 8 만정도가 도착할거라고 하던데요." "확실한거야?" 마화는 애교스럽게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예. 저는 아주 귀가 크다구요." 국광은 빙글 놀리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너무 귀가 크면 명대로 못사는 법이야. 예로부터 모르는게 약이라고 했거 든." 그러자 마화는 한술 더떠 어린애를 가르치듯 깔보는 듯한 목소리로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그게 아니에요. 큰 귀를 가져도 입이 무거우면 보탬이 된다구요. 뭘 모르시는군... 아는게 힘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흠.... 그럴지도.... 그럼 언제 진격을 시작할지 아나?" "사흘 후쯤에 출발할거 같아요. 몽고족들과는 툴라이라는 벌판에서 합류한다 고 그러더군요." "벌판에서?" "예. 그들의 속셈을 확실히는 알 수 없으니 기습은 막아보자는게 단장의 생각 이겠죠. 벌판에서기습이 될턱이 없고 또 기습이 아니라면 우리 흑풍단이 겨 우 몽고족들에게 치명타를 입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도 그렇군." * * * 8일 후 몽고족의 대군과 흑풍단이 합류했다. 서로가 믿을 수 없는 사이였기에 관례에 따라 5명의 부족장들은 자신의 아들들을 인질로 보내왔다. 그렇게 하 는편이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감(信賴感)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이쪽은 이쪽 대로 저쪽이 헛수작을 부리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게 되고 저쪽은 저쪽대로 이 쪽에서 인질을 보냈으니 우리를 의심하지 않을거라는 신뢰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몽고군 8만을 포함해서 이제 10만의 군세로 늘어난 정벌군은 철진천이 세력을 정돈하고 있는 마추하 부근의 텐령 평원으로 진격했다. 드넓게 펼쳐진 몽고의 대초원에서는 얄팍한 술수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서로가 기병... 기습은 거 의 불가능하다. 야습이 좋기는 하지만 아군끼리 충돌할 위험도 있으므로 순전 히 소규모의 정예만을 차출해 상대의 진지를 휘저어놓는 정도밖에는 할 수 없 다. 연합군은 드넓게 펼쳐진 텐령 평원에서 철진천의 12만 군세와 마주쳤다. 전번 의 패배 정도로는 아직 정신을 못차린 듯 몽고족들은 아직도 투지에 불타고 있었다. 사실상 전쟁이 시작된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고 서전에서 치명타 를 입긴 했지만 아직은 여력이 있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신뢰하는 철 진천이 비록 부상은 당했지만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옥영진 나으리는 당당하게 대오를 유지하고 있는 몽고병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부단장에게 말했다. "저 자식들이 아직 정신을 못차린 모양이군." "예. 그만큼 철진천이란 인물에 대한 신뢰도가 대단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사 실 전번 전투에서 투입된 주력은 거의가 철진천의 동맹 부족들이라고 봐야 하 니까요. 전번의 대패로 인해 동맹을 맺었던 부족들은 거의 다 떨어져 나가고 세 부족 정도가 그를 도와 병사를 보내준 모양입니다." "그래? 그럼 이번에 대패하면 그나마도 끝나겠군." "아마 그럴겁니다." "흠.... 이번에는 정면공격으로 하기로 하지. 사실 이런 대평원에서 따로 얄 팍한 전술을 써봐야 통할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하지만 그래도 약간은 써야합니다. 안그러면피해가 클겁니다." "바로 그거야. 피해가 커야해." "예?"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러면서 검을 뽑아 검 끝을 이용해 땅에다 쓱쓱 도형들을 그리며 설명했다. "우선 여기에 넓게 어림군을 포진시키는 거야. 그런 다음 5부족의 부족장들에 게 명령해서 어림군의 뒷편에 주둔하게 해." "하지만 저쪽에서 먼저 공격을 해올까요?" "글쎄...." "전에 저들은 수가 많기에 정면돌격을 해왔지만 어림군의 활과 쇠뇌덕분에 많 은 병사들을 잃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병력이 엇비슷한 상태...아 니 보병인 어림군을 빼면 이쪽은 9만이니까... 일부러 이쪽의 보병과 싸우지 않기 위해 선제공격 해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흠....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위해 어림군은 포진시켜야 하니까... 이렇게 하고 그 뒤에 몽고병을 놔둬. 적이 공격하면 좋고 안그러면 이쪽에서 공격하 면 되니까... 그리고 저쪽의 몽고병들이 배신하면 일단 어림군이 진형을 짜고 있는 곳까지 후퇴해서 어림군을 의지해서 싸우면 도움이 되지." "예." "적이 공격해오지 않으면 먼저 몽고병들을 어림군의 양쪽으로 출동시켜 적진 으로 돌격시켜 전투를 벌이는거야." "...." "그 뒤를 따라서 흑풍단의 5개 천인대씩이 좀 더 진격해 들어가서 적의 뒤를 치는거야. 그러면 아주 광범위한 포위망이 형성되게 되는거지. 하지만 우리는 뒤에서 치게되고 5개 부족은 정면을 감당하니까 당연히 5개 부족의 피해가 엄 청날거야. 그러면 철진천도 잡고 몽고족들끼리 서로 싸우니까 전력도 약화되 고... 일거양득(一擧兩得)이지. 이번에는 완전히 포위해서 철진천의 목을 확 실히 베어야해." "좋은 작전입니다. 하지만 전처럼 철진천이 후군을 구성해서 뒤로 빠지면 어 떻게 하죠?" "전에는 전군과 후군간의 간격이 커서 분리되어 격파당했기에 이번에는 아마 함께 행동할게 확실해. 후군이 있다면 미끼일 가능성도 있지." 다음날 아침이 되자 양군(兩軍)은 진형을 급히 짜기 시작했다. 흑풍단쪽에서 열심히 몽고군을 꼬셨지만 한번 패배를 맛본 철진천은 쉽사리 선공(先攻)을 취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쪽의 보병들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보병 은 후퇴하면 자중지란으로 전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보병에게 있어 후퇴란 말 은 용납되지 않는다. 적이 앞에 있다면 사수(死守)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기병은 다르다. 기병이란 그 속도 때문에 일부 기병이 달려나와 상대를 약올 리거나 화살을 조금 쏘는 등 도발행위를 한 다음 적이 달려나오면 재빨리 후 퇴한 다음 매복, 또는 진형을 갖추고 대기중인 보명들이 있는 장소로 유인하 는데 많이 사용된다. 그렇기에 기병에게는 후퇴라 하더라도 결코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외에 전군이 퇴각하는 경우 보병이 앞서 퇴각하고 기병은 언 제나 뒤에 남아 퇴로를 확보한다. 기병은 언제라도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잇 점이 있기에 항상 먼저... 그리고 항상 나중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몇번의 도발이 통하지 않자 옥영진 나으리는 두 번째 작전을 시작하라는 신호 를 하달했다. 그와 동시에 휘하의 전 기병들이 적진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러 자 상대도 함께 돌격해 들어오며 대규모 기병전이 벌어졌다. 일단 상대방도 이쪽이 기병들을 대량으로 사용함으로서 더 이상 보병들을 걱정할 필요성을 못느낀 것이다. 양군이 얽혀있는 상태에서 미친 지휘관이 아니라면 보병들에 게 쇠뇌를 발사하라는 명령은 할 수 없으므로.... 수많은 기병들이 드넓은 텐령 평원에서 충돌하며 최고의 장관을 연출했다. 몽 고병과 몽고병.. 또 몽고병과 흑풍단의 전투를 지그시 바라보던 옥영진 나으 리는 갑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하는 전세를 보고 경악하여 옆에 서있는 마길수 부단장에게 외쳤다. "남은 4개 백인대를 이끌고 적의 돌파를 저지해. 빨리!" 흑풍단이 교묘히 뒤로 돌며 철진천의 군단을 포위하자 위기감을 느낀 철진천 이 측면돌파를 지시했고 그에따라 몽고병들은 측면의 몽고연합군이 위치한 비 교적 약하다고 생각되는 부위에 맹공을 퍼부었다. 마길수 상장군이 예비병력 인 400명의 흑풍단을 이끌고 적의 돌파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일단 새기시작한 둑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내리듯 적의 기세를 꺽을 수 없었다. 옥영진 장군 을 비웃기나 하듯 몽고의 대병력은 거대한 포위망을 깨끗이 돌파하여 몽고병 들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로서 대회전의 첫 번째의 전투는 연합군의 판정 승... 문제는 거기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항아리 모양 적을 포위했던 옥영진 나으리의 연합군은 항아리 속의 쥐떼가 도 망침에 따라 자연히 항아리의 면적을 좁혀나오며 도망치는 후위의 쥐떼들과 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철진천이 부상을 무릎쓰고 몸소 지휘하는 몽고병들은 예상과 달리 한쪽을 돌파하자 후퇴할 생각은 안하고 일단 돌파한 부대들이 양 방향으로 나뉘며 쫓아들어오는 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자연 안과 밖이 훌떡 뒤집히며 도리어 연합군이 철진천의 대군단에 포위된 형국이 되고말았다. 일단 포위되면 그 중앙에 갖힌 쥐들은 양옆이 우군이니 칼을 놀 릴 도리가 없이 쉬어야 한다. 대신 원의 밖에있는 쥐떼들과 그를 포위한 항아 리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사실 서로가 충돌하는 면적은 같으므로 서로 가 죽자고 싸운다면 포위가 되건말건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일단 포위되면 사방이 적인 것 같아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하므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작전은 옥영진 나으리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했고 한번의 포위작전에서 궤멸이 가능할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적에게 포위되어 버리자 철진천의 무서움을 아는 몽고 연합군 내에서 제일먼저 동요가 일어나 기 시작했다. 거기에 옥영진 나으리는 흑풍단과는 떨어져 보병들과 함께 멀리 떨어져있으니 그들을 이끌 장수가 없는 연합군과 비록 부상은 당했을망정 지 휘관이 함께하는 몽고병.... 이건 처음부터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 몽고의 대병력에 포위되어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연합군의 마길 수 부단장이 휘하의 400기와 부근의 몽고 연합군을 몰아쳐서 정면의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마길수 상장군은 일단 포위망을 돌파하자마자 전 기병 대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어림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까지 후퇴하라!" "흑풍단은몽고군의 후퇴를 지원해라!" 9만의 연합군이 뒤로 나르듯 후퇴를 시작하자 12만의 몽고군이 추격전을 개시 했다. 사실 철진천의 몽고병은 12만... 숫자도 많았지만 가장 큰 잇점이 자신 하나만을 믿고 의지하는 단일한 군사집단인데 비해 9만의 연합군은 흑풍단의 위력 때문에 더욱 강한 힘을 가지고는 있으나 각기 따로 움직이기에 대규모 기병전에서 벌어지는 신속한 대응에 응하질 못했기에 이런 낭패가 발생한 것 이다. 9만의 기병대가 전속력으로 후퇴를 시작하는 걸 본 옥영진 나으리는 어림군의 진형(陣形)을 더욱 튼튼히 짜서 적의 난입(亂入)에 대비하는 한편 보병대의 양옆으로 퇴각해서 들어오는 기병들을 재편성(再編成)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윽고 흑풍단에 이어 몽고의 추격대가 들이닥치자 일제히 쇠뇌들이 발사되었고 수없이 많은 화살들이 몽고병들에게 날아갔다. 일진이 화살에 무 너지는 걸 지켜본 철진천도 더 이상 오늘은 전투를 벌일 생각이 없는지 퇴각 하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기나긴 하루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병사들은 치 열한 기동전(起動戰) 덕분에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밥을 먹을 시간 도 없어 간신히 입속에 육포나 우물거리며 칼을 휘둘러 허기를 모면했었는데 서로가 떨어지자 먼저 쌍방간에 ㅅ부터 걸고는 식사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필승(必勝)을 위한 작전(作戰) 때늦은 점심식사가 끝난 후 천인장 이상급 간부들이 모여 작전회의를 시작했 다. 첫 번 대회전에서는 철진천의 부족 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타부족의 지 원군이었기에 이정도로 뛰어난 기동력을 나타내지 못해 간단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막상 철진천의 주력부대와 부딪치고 보니 무식한 몽고놈들이라고 깔보던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다. 옥영진 나으리는 전군을 파멸에서 구 해낸 마길수 상장군에게 그점을 치하한 다음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적의 전력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니... 이것 참... 제장들의 의견은 어떻소?" 옥영진 나으리의 말에 마길수 상장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철진천은 뚜렷한 병법책을 읽은 위인도 아니고 그의 전술적(戰術的) 감각(感 覺)은 수많은 실전경험(實戰經驗)에서 이뤄진 겁니다. 거의 짐승과 같은 예리 한 감각이 있다고 봐야 할겁니다. 그러니... 속보이는 함정보다는 아주 치밀 한 함정을 준비해야 합니다. 감각은 있되 그 감각을 쓸수 없도록... 그러니까 뻔히 알고도 당하도록..." 마길수 상장군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옥영진 나으리가 물었다. "그럼 어떤 방책이 좋겠소?" 마길수 상장군은 일부러 말을 약간 늦춰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천천히 말했다. "일단은 장군과 멍군을 불러 서로 비긴셈이니... 오늘은 이만 작전을 종료하 고 야간에 흑풍단의 천인대 하나만을 동원해서 야습을 해보는건 어떨까요? 정 면승부가 아니라서 전과는 그리크지 않겠지만 동맹인 몽고병들의 사기를 올 리는데는 잇점이 있을겁니다." "흐음... 그도 그렇군." "그러면서 이 전투를 장기전(長期戰)으로 끌고나가는 척 하는겁니다." 옥영진 나으리는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척?" "예. 흑풍단의 2개 천인대 정도를 뽑아서 부근의 몽고족 마을들을 완전히 쑥 대밭을 만들어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철진천은 이쪽이 장기전으로 나가며 자 신의 주력부대(主力部隊)를 이곳에 잡아두고 휘하 부족들을... 그것도 남자들 은 거의 빠져나간 허약한 부족들을 우리들이쳐서 자신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걸로 생각하겠죠. 그리고 휘하의 부하들도 가정이 박살나니... 사기도 떨어질 겁니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뿐... 일부 병력을 뽑아내어 우리의 약탈부대를 치기위해 병력을 분산할것이고..." "아하! 그때 적을 완전히 박살낸다... 그것 꽤 괜찮은 생각이군." 그 말에 관지 장군이 말을 이었다. "대장군. 여기에 소장의 생각으로는 철진천의 동맹부족에게는 손대지 않는 것 이 좋겠습니다." "왜?" "동맹부족의 본거지를 공격하지 않으면 동맹부족들은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지 않을거고... 그러면 그만큼 철진천에 의해 단련된 병사들의 비율이 적어지는 결과가 나오게 되죠. 그러면 이번과 같이 신속한 대응능력은 떨어질겁니다." 그의 의견에 감탄했다는 듯이 옥영진 나으리가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것도 묘책이로다." 그 말에 장각 장군이 대꾸했다. "하지만 대장군. 이건 너무 비겁한 술책인데요? 무식한 몽고병들을 상대로 이 토록 비겁한 방책을 써야만 합니까?" 장각 천인대장은 비교적 정통적인 가문의 무장인지라 무엇보다 의를 중시하기 에 나온 말이다. 그는 아무리 상대가 악하다고 해도 자신은 정통적인 수법으 로 적을 상대해야만 그 공명정대함에 상대도 감탄하여 마음으로부터 무릎을 꿇는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친구다. 이에대해 노영(盧英)장군이 반론을 제기했 다. "흐흐... 소장은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몽고 오랑캐를 치는데 꼭 정공을 택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은 그쯤해두고 그래 이 부근에 있는 철진천의 부락은 조사를 했소?" 옥영진 나으리의 질문에 마길수 상장군이 답했다. "예.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한 소장이 10개 십인대를 투입하여 부근을 조사했 습니다. 몽고 부족 몇 명을 납치하여 고문도 했고... 이리저리 모든 정보를 종합해본 결과 부근에 4개 부락이 있는 걸로 밝혀졌습니다." "좋아. 그럼 각 부락에 5개 백인대씩 보내기로 하지. 그들은 그 부락들을 멸 한 다음 회군하지 말고 주변의 모든 몽고부락들을 조사하여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 좋겠군." "누구를 보내시ㄱ습니까?" "공지! 노영!" "예!" "너희들은 지금 수하들을 거느리고 출발하라! 자세한 위치는 마길수 상장군이 지시할 것이다." "예." 제 칠,십천인대장들이 막사를 나가자 그걸 지켜보던 마길수 부단장이 물었다. "오늘밤의 야습은 실행합니까?" "그렇지! ... 오늘 야습은 꼭 해야겠군. 관지!" "예." "너는 지금 본대에서 이탈하여 기회를 노리다가 밤에 기습을 감행하라." "예." "물이 있는곳까지 뒤로 80리(약 25Km) 정도를 이동해야 하니까 오늘 밤 장작 불을 여기저기 피워 본대가 후퇴한 것을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밤에 야습을 감행하면 적이 그 소란통에 우리가 빠져나갔는지 조차 알기 힘들 거야." "좋은 작전입니다." "오늘 저녘에 일정거리 후퇴하여다시 진지를 구축한다고 몽고 족장들에게도 통보해두게." "예." * * * "빌어먹을.... 이번에는 완전히 죽다가 살아난 기분이군..." 임충의 투정에 마화도 약간은 동의한다는 투로 말했다. "맞아. 이번에 보인 몽고군의 움직임은 완전히 예술이던데? 안그래요? 대장" 마화의 물음에 국광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의 용병술(用兵術)도 대단하더군. 하지만 그정도로는 흑풍단을 멸할 수는 없어. 이쪽이 무공이 강한 집단인 이상... 저쪽도 무림인들을 투입하지 않는 한... 아무리 해도 흑풍단에 타격을 주기는 힘들지... 그래도 이번 전투 로 몽고병들의 타격이 크니까 그게 문제라면 문제군." "하지만 우리 연합군에 있어서 몽고병은 원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 재들 아닙니까? 그들의 사기가 좀 떨어진다고 해서 문제될게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아. 처음부터 흑풍단만으로 전투를 벌이는 것과 저들과 함께 연 합군을 구성하는 건 아무래도 큰 차이가 있지. 아무리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라 생각이 들어도 저들 족장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게 현실이야. 둘이서 손발이 맞지 않으면 혼자해서 될일도 안되니까. 최악의 경우 족장들의 배신으 로 양쪽에서 공격을 당해 전멸할 수도 있으니까." "그도 그렇군요. 참 이제 전투도 끝났는데 하부르한테 안가봐도 돼요?" "끅..." 기껏 자기딴에는 그래도 신경써서 말해줬는데 국광이 갑자기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괴이하게 여긴 마화가 물었다. "왜그래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마화와 질린듯한 표정의 국광... 이들의 표정을 보며 재미 있어진 임충이 자신은 다 안다는 투로 국광을 놀리는 어조로말했다. "하하.... 요즘은 하부르 생각만 해도 마유주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날고기가 함께 떠오르는 모양이죠?" "아닌게 아니라 좀 그래. 요즘은 꿈에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날고기가 입속으로 뛰어드는게 보이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가장 좋은건 잠시 떨어져서 지내면 어떨까요?" "떨어져서? 말은 쉬운데 그게 좀...." "왜그러십니까? 뭐 약점이라도 잡히셨나요?" "약점?" 국광은 속으로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부르는 처음에는 흑색갑주에 안면보호대를 착용하고 싸늘한 눈만 들어낸 국광의 공포스런 분위기에 압도되어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지나자 갑주를 벗은 이면에는 문약한 서생과 같은 모습과 약간 무뚝뚝하 기도 하지만 정이 많고 여자에게 강하게 나가지 못하는.... 치열한 생존경쟁 을 뚫고나가는 몽고남자에게서 느낄 수 없는 부드러움을 곧 눈치챌 수 있었 다. 이런 약점들을 본능적으로 포착하자 그 다음부터는 하부르의 세상이었다. 수하들도 어린 하부르에게 휘둘리는 국광을 보고 매우 재미있어 하면서'남자 의 속성(屬性)'이나 '남편은 이렇게 교육(敎育)시켜야 한다' 등등 옆에서 교 육까지 시켜가며 부추키며 바람을 넣어대 지금의 국광으로서는 죽을지경이었 던 것이다. '어린 계집애 하나 데리고 살기가 이렇게 힘들줄이야....' 한숨을 푹푹 쉬고있는 국광에게 이때 아주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전령이 씨근벌떡 달려오더니 외쳤다. "관지 대장께서 출동준비를 하시랍니다." 갑작스런 전령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국광이 물었다. "왜?" "작전상 준비가 되는대로 본대에서 이탈한답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구요." 그러자 국광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듯이 빙그레 미소지으 며 말했다. "그래? 이런 공교로운 일이.... 돌에 걸려 넘어져도 동전(銅錢) 있는 곳에 얼 굴을 쳐박는군 그래. 잘됐다. 마화!" 국광의 혼잣말에 못말린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마화가 답했다. "예." "출동준비하라 지시해라. 혹시 모르니 며칠 먹을 건량도 같이 준비하라고 일 러라. 나는 막사에 다녀오겠다." 그러자 마화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하부르 한테 보고하시게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쑥스러워진 국광이 그걸 감추기 위해 화를 버럭내며 외 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말고 빨리 가봐!" "예." 국광이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하부르가 쫓아와서 국광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제 끝난거에요?" "그런대로 오늘 싸움은 끝난 것 같아." "피곤하시죠... 앉으세요. 식사 준비할까요?" 국광은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식사는 되었고 지금 출동해야 하거든... 그래서 한 며칠 못볼지도 몰 라." 국광의 말을 들은 하부르는 약간 서운한 듯 했지만 곧 기운을 차려 부산하게 움직이며 활기차게 말했다. 남편이 전장으로 떠나는데 마음편히 떠나게 해야 지 앙탈을 부리면 안된다고 죽은 엄마에게 배웠던 것이다. 하부르는 한 대접 가득히 마유주를 담아와서는 생긋이 웃으며 권했다. "지금 가더라도 식사는 하고 가야하쟎아요? 고기는 아직 준비된게 없고 마유 주라도 든든하게 드시고 가세요." 하부르의 말에 국광은 억지로 미소지으며 사양했다. "괜찮은데...." 하지만 전장으로 떠나는 남편을 든든히먹여보내야 한다고 굳게 믿고있는 하 부르로서는 자신에게 오지 않았다면 몰라도 온 이상 뒷치닥거리를 해줘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래도 좀 드세요. 초원의 밤은 춥다구요. 마유주를 든든히 마셔두면 몸도 따뜻하다구요." 생긋이 미소지으며 마유주를 한 대접 가득 담아 성의껏 권하는데야 뿌리칠 재 주가 없다. 국광이 사발을 받아들고 꿀꺽꿀꺽 모두 마셔버리자 미소를 지으며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고있던 하부르는 다시 한잔 더 따라줬다. "더 드세요. 장정(壯丁)은 많이 먹어야 해요." "이제 배부른데...." 그러면서도 국광은 한잔 더 마신 다음에야 마유주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었 다. 국광은 두잔 다 마신다음 하부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자신이 죽을 가능성은 없다고 굳게 믿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전쟁의 경 험이 없는 국광으로서는 전장으로 떠나면서 이게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간혹 들기도 했기 때문에 언제나 떠날때는 하부르에게 인사를 하고 갔다. "얌전히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착한 아이지..." "예." * * * 드넓게 펼쳐진 텐령 평원.... 하지만 말이 평원이지 완전히 평평하지는 않고 높지않은 완만한 둔덕들이 군데군데 솟아있다. 그중 한 귀퉁이에는 흑풍단 대 원들이 옷을 갈아입느라 정신이 없었고 또 한쪽... 둔덕의 윗부분에서 몇몇 흑색 갑주를 입고 저마다 큰 칼을 허리 또는 등에 진 자들이 지평선 가까운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넓게 돌아서 왔으니 상대가 눈치채지는 못했겠지?" "그렇겠죠. 하여튼 관지 대장도 기습전에는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에요." "흐흐흐... 놀라운 일이야." "뭐가요?" 그러자 국광이 비꼬는 어투로 말했다. "대(大) 찬황흑풍단이 알고보면 기습전에나 도가 튼 집단이라니..." 그러자 마화가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피... 그건 할 수 없잖아요. 소수정예의 묘(妙)를 살리려면 기습이 최고라구 요." "그건 그렇고 25리(약 8Km)정도 떨어져서 보니 정말 인마(人馬)가 개미만 하 군. 파오는 완전히 장난감 같은데?" 이때 아래쪽에서 임충이 몽고옷을 입고 헐떡거리며 달려오더니 국광과 마화에 게 옷을 한벌씩 건넸다. 그걸 무심결에 받아들면서 마화가 물었다. "이게 뭐야?" 임충은 씩 웃으며 말했다. "뭐긴 뭐야. 몽고놈들 옷이지. 이걸 입고 야습한다는 관지대장의 명이야. 그 리고 이 하얀 천을 왼팔에 감아서 아군을 표시나게 하는거지." 마화는 갑주를 주섬주섬 벗은 다음 받아든 몽고옷을 입으려다가 인상을 찡그 리며 말했다. "크.... 이게 무슨 냄새야?" 마화의 반응에 당연하는 듯이 임충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몽고애들 거의 목욕도 안하니까 당연히 옷도 뻔한거 아니겠어? 그래도 대장 과 너를 위해서 특별히 냄새가 들나는 걸로 골라가져왔다구." 그러자 성의는 생각하지도 않고 마화가 열을 내면서 따졌다. "골라 가져온게 이거냐? 이거냐구!" "할 수 없잖아. 갑자기 내려진 명령이라 옷도 300벌 정도밖에 못구했다구. 이 걸 세탁할 시간이 어디있었냐?" "그러고 보니 .... 이럴줄 알았으면 하부르 것을 한벌 얻어오는건데..." "좋은 생각이지만 본진은 벌써.... 저쪽으로 몇십리는 돌아서 가야해. 너혼자 다시 갔다올래?" "....." "잔말말고 입어. 누군 코가 없어서 이걸 그냥 입은줄 알아?" 말없이 몽고군의 진영을 바라보고있던 국광이 임충에게 말했다. "기습은 언제라고 하던가?" "예. 인시 초(寅時 初;새벽 3시)에 시작한다고 하셨습니다. 옷이 300벌 뿐이 라 천인대 안에서도 무공이 뛰어난 순서로 옷을 입고 나머지는 갑주를 지키며 이곳에 매복해있다가 기습조의 퇴각을 도우라는 지십니다. 남는 매복조는 맹 각(孟覺) 대장이 지휘할겁니다." 전쟁은 새로운 국면(局面)으로... 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철진천은 수면부족으로 핏발이 선 눈으로 연합군이 자 신을 앞에두고 밤사이에 도망쳤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그의 진노한 얼굴을 보며 주위에 늘어선 용장(勇將)들은 황송한 얼굴로 묵묵 히 그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설마하니 그들로서도 적이 일부 병력으로 야습을 감행한 다음 그 사이에 줄행랑을 놓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 여기저기 파오들이 쓰러져있는 사이로 행색이 말이아닌 부하들이 돌아다니며 시체들을 치우고 있었다. 그들 또한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지 눈이 뻘겉게 충 혈되어 있었다. 사실 그놈의 흑풍단 녀석들이 밤을 이용해 기습을 가한 후 거 의 1시진 동안이나 진 속을 누비고 다니며 휘져어댔던 것이다. 흑풍단 놈들은 비겁하게도 자신들의 표시라고도 할 수 있는 흑색 갑옷을 벗어던지고 몽고병 들이 입는 옷을 입고는 휘져어댔기에 누가 누군지 알수가 없었다. 거기에 상 대는 몽고장수 두셋이 덤벼도 힘들정도로 뛰어난 무술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때 목숨을 부지하려면 구석진 곳에 숨어서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은 무조 건 공격하고 볼일이다. 그래서 몽고병들에게 더욱 피해가 컸는지도 모른다... "오타이!" 그러자 덩치가 큰 부리부리한 눈매의 장수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답했다. "예." "1만을 줄테니 연합군을 추격해라. 나는 정리가 되는대로 본대를 이끌고 뒤따 라 가겠다." "예." "못된자식들.... 타우가!" 아직도 분이 안풀리는지 씨근거리는 철진천에게 타우가라 불린 장수는 그렇게 덩치는 크지 않았으나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가죽옷에 긴 활을 항상 휴대하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활에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앞으로 한발짝 나서며 답했다. "예." "1만을 주겠다. 오늘 저녘에 기습한 자식들을 해치우고나서 본대에 합류하라. 모두들 지금 떠나라!" "예." 오타이가 지휘하는 추격대 1만은 연합군의 퇴로를 쫓았다. 그리고 활의 명수 타우가가 이끄는 1만은 야습을 가한 흑풍단을 뒤쫓았다. 하지만 타우가가 추 격을 시작했을때는 너무 멀리 도망친 다음이었다. 그는 관지가 이끄는 천인대 를 추격하다가 다음날 그들이 이미 본대와 합류해버린 것을 알고 별 수 없이 철진천의 본대와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철진천의 본대는 대강 시체를 수습한 다음 파오를 겉은 후 오타이의 추격대를 뒤따랐다. 하지만 의외로 연합군은 그들과 가까운 거리에 다시 진을치고 있었 다. 그걸 보고 철진천도 부근에 진을 치고는 쌍방간에 대치가 시작되었다. 싸움은 서로가 맞붙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상대가 수비에 전력을 다 하고 있는곳에 공격해들어가면 오히려 막대한 피해만 보게된다. 연합군의 진 부근은 몽고기병들의 난입에 대비해 목책들이 줄지어 있었고 무엇보다 몽고병 들에게 없는 쇠뇌를 200틀이나 가지고 있다. 거기에 거의 1만에 달하는 보병 들이 있다. 그중 5000은 궁병이니 연합군의 진에 돌진해 들어가 봐야 손해만 볼 것은 뻔한 이치였다. 철진천으로서도 상대가 수비에만 전념하며 처박혀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어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일부 목소리 큰 병사들에게 욕지거리 를 가르친 다음 그들을 시켜 상대방을 욕하면서 도발했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연합군은 꿈쩍도 하지않았다. 그게 철진천으로서는 이상한 노릇이었다. 원래 가 전쟁을 오래 끄는 것은 수비하는 자들이 선택하는 전매특허다. 그 이유는 원정군은 그 필요로 하는 군수물자를 상당수 본국에서 지원받아야 하지만 수 비군은 그럴필요가 없다.요는 병참지원을 받는 거리애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 기에 원정군은 빨리 전투를 끝내야 하는 절실함을 가지고 있고 수비측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 만약에 전력이 딸릴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전술이 지연전인 것이다. 그런데 원정을 온 상대가 오히려 지연전을 펼치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노릇 이다. 거기에 연합군에는 새로이 배신자 8만이 붙었으니 사기가 충천할텐 데.... '이쪽의 양고기라도 다 떨어지기를 기다리나?' 철진천의 의문은 이틀째에 풀렸다. 거의 2000에 달하는 흑풍단이 사방을 돌아 다니며 자신의 부족민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주민들이 많 이 죽을수록 자신의 입지는 약화된다. 그로서는 이번 전쟁만이 아니라 원대한 꿈인 몽고통일을 이루려면 우선 주민들의 협조가 있어야 하고 그 수는 많아야 만 했다. 철진천은 전령으로부터 소식을 듣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옴을 주체치 못했 다. 분노(忿怒).... 송의 찬황흑풍단이라면 최고의 정예... 그 정예군사들이 전사(戰士)들이 빠져나간 틈을 타서 애들과 여자들을 학살하고 있다니... 그 건 자신이 생각해도 필승(必勝)의 전술(戰術)임이 틀림없었고... 어쩌면 자신 도 적을 향해 그런 방법을 쓸지도 몰랐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을 당하고 보니 알 수 없는 분노가 상대에 대해 치밀어오름을 어쩔 수 없었다. 철진천은 적의 앞에서 전력(戰力)이 줄어듦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휘하 부 족들을 전멸에서 지키기 위해 전력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모두들 전장에 나와있고 여자들이나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만이 남은 부족들을 중 국놈들에게서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급하다고 그들을 방치하면 자신들 의 부모와 처자를 놔둔 수하들의 자신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사기가 저하되 고... 최악의 경우 모반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도 전력을 분산시킬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타이와 타우가를 불러와라." "예." 오타이와 타우가가 도착하자 철진천은 잠시 뜸을 들이며 마음을 안정시킨 다 음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한번 더 생각해봤다. '어쩔 수 없다.' "너희들에게 각기 1만씩을 주겠다. 가서 부락들을 중국놈들의 마수(魔手)에서 구해라. 부장(副長) 2명씩을 뽑아가라. 적은 송의 최고 정예다. 될 수있다면 기습전을 전개하지 정면충돌은 하지않는 것이 좋을거다. 아직 기습당하지 않 은 부락 주변에 매복하고 있으면 적이 나타날거다." "예." "지금 떠나라." "예." 타우가와 오타이가 예(禮)를 취한 다음 파오를 떠난 후 철진천은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격전으로 내게 남은 병사는 11만 정도.... 상대는 10만... 하지 만 그중에서 1만은 보병이니 제외한다면 11만 대(對) 9만... 약간은 유리할거 라 생각했는데.... 지금 2만을 뺀다면 병력면에서 똑같아지는군. 그렇다고 조 금만 보낸다면 격파당할게 뻔하니.... 다음에는 어찌한다... 부처시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 * * 그로부터 4일 후..... 오타이의 부대가 주둔중인 부락으로 500명 규모의 적이 나타났다. 오타이는 자신이 신처럼 받드는 철진천으로부터 받은 정예부대 앞으로 적이 가까이 접 근해오기를 성질을 죽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적의 말이 걸어오는 속도가 굼뱅이처럼 느껴졌고 그로서는 인내의 한계를 느낄정도의 시간이흘러갔다. 하지만 상대는 일정거리까지 접근해오다가 갑자기 불꽃을 공중으로 쏴올리더 니 뒤돌아서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아쉽게도 흑풍단은 무림의 고수들인지라 그들이 좀 더 다가오기를 학수고대하고있는 몽고병들이 뿜어내 는 살기(殺氣)를 느낀 것이다. 만약 몽고병들이 평소처럼 사냥할때라면 이정도로 살기를 뿌리지 않는다. 살 기를 뿌리면 사냥감이 도망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정도로 오감(五 感)이 뛰어나지 않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오감을 예민하게 길러 남달리 감각 이 예민하다. 오타이는 그걸 몰랐기에 실수를 한 것이다. '저자식들이 눈치챘군.' "공격하라!" 수천에 이르는 몽고병사들이 눕혀놨던 말을 일으켜 세워 재빨리 타고는 달려 나왔다. 그리고 일부 병사들은 그대로 최대한 시위를 당겨서 활을 쏴붙였다. 이때 오타이는 군사들을 재촉하느라 저기 지평선 가까이 다른 하나의 불꽃이 올라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타이는 죽자고 부하들을 몰아붙였지만 일단 눈 치채고 도망치기 시작한 적을 쉽게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타이는 한가지에 희망을 걸고 적들을 필사적으로 추격했다. 자신들은 갑주를 입지 않 았기에 말에게 부담이 적지만 적은 두터운 갑주를 입은 자들이다. 그들은 어 떨지 몰라도 말은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죽자고 추격한다면 저쪽의 말이 먼 저 뻗을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전개하는데 갑자기 양옆에서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 다. 좌우에 매복하고있던 새로운 500명의 적이었다. 매복한 군사가 500명밖에 안되었기에 오타이의 병사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 지만 중갑주로 무장한 천기(千騎)를 쉽사리 헤치울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한 시진 가까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새로이 500기의 적이 가세했고 또 한 시 진이 지나자 또다른 500기가 가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타이의 부대는 무 공이 뛰어난 적들에게 압도당하기 시작했고 끝내 오타이는 맹렬히 칼을 놀렸 지만 갑옷에 十三(십삼)이라는 중국어가 씌여진 자의 검 끝에 두토막이 나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몽고병사의 목이 흑색갑주를 입은 무사의 검에 떨어지는 것을 묵 묵히 바라보던 한 무장이 입을 열었다. 그도 또한 흑색갑주에 흑색의 안면보 호대를 해 분노에 찬 싸늘한 눈만을 드러낸 모습이다. 다만 그의 갑주에는 十 (십)이라는 숫자 하나만 덩그러니 씌여져 있었다. "이자식아! 늦었잖아. 뭐한다고 여기 집결시키는데 2시진(4시간)이나 걸리는 거야." 그러자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안장에 앉은 흑색갑주를 입은 사내가 느글느글 하게 말했다. 그의 갑주에도 마찬가지로 七(칠)이라는 한 글자만 써져있다. "노영(盧英), 그렇게 신경질만 낼게 아니라니까... 나도 수하들의 신호를 받 고 150리(45Km) 밖에서 열심히 달려왔으니까..." "야. 겨우 150리 거리를 오는데 4시간이나 걸린다는거냐? 수하들에게 물어봐 라. 말을타고 한시간에 38리(11Km)밖에 속도를 못낸다는게 말이 되는지....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공지(孔知) 너 이자식! 바른대로 말 못해? " 독기를 품은 노영의 눈과는 달리 공지는 눈매에 웃음을 드러내며 느글느글하 게 말했다. "험험.... 몽고계집하고 뭐하고 있었다고 차마 내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 참 끝내주는 싱싱한 애를 하나 봐서말이야.. 어찌나 쫄깃쫄깃 하던지 그 짓거 리를 중단하고 올수가 있어야지...." "...." 느글거리는 공지의 태도에 질린 듯이 노영은 아무 말도 못했다. "너도 한번 고년하고 해보면 내마음 이해할걸.... 하하... 화 풀라니까... 어 찌되었던 잘 끝났잖아." "지금 적이 어느정도 병력을 우리를 토벌하기 위해 보냈는지 알지도 못하는 판에 계집질이나 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냄새나는 몽고계집하고.... 우 욱.." 노영은 일부러 짐짓 구토가 나오는 듯한 시늉을 한 다음 공지에게 말했다. "우리 둘이 서로 순치(脣齒;입술과 이빨)와 같이 서로 돕지 않는다면 어떻게 적을 상대할거야. 만약 한쪽이라도 전멸당하면 입술이 잘려나간 이빨처럼 차 가운 꼴을 당하게 된다구. 알아?" "쩝... 어찌되었던 잘 풀렸으니까 이걸로 끝내자구. 그건 그렇고 겨우 1만을 잡고 몇시간을 싸운거야. 나라면 한주먹 거리도..." "네녀석이 수하들을 늦게 데리고 와서 그렇다. 이제 됐냐? 나는 처음에 500기 만 거느리고 있는데 1만의 적이 갑자기 쏟아져 나와서 놀라서 심장이 목구멍 위로 튀어나오는줄 알았다. 다행히 살기(殺氣) 때문에 빨리 눈치채서 최악의 사태는 당하지 않았지만...."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할거야?"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해. 부상자들 돌려보내고 다시 부락들을 부수러 다녀 야지. 적도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 보내봤자 3만 안쪽일거야. 이제 만명 을 헤치웠으니 2만이 남았다고 봐야지. 이제부터는 조심하라구. 계집들과 늙 은이뿐인 허술한 부락이 아냐. 알겠어?" "알았어. 나는 이제부터 좀 더 북쪽으로 갈테니 나중에 전령을 보내라구." "나는 꾸준히 전령을 보냈잖아. 네녀석이나 제대로 해!" "하하하.... 그럼 다음에 보자." * * * 철진천은 전령의 보고를 들은 후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오타이에 이어 타우가 마저 죽다니.... 적을 너무 과소평가? 아니지... 나로 서는 그 상황에서 2만을 보낸것도 최선이었는데....' 낙심한 철진천을 보고 옆에 서있던 무장이 말했다.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된 이상... 죽기를 각오하고 마지막 한판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적의 기습에 만전을 기하라. 아마 조만간에 정면충돌이 벌어질거다." "예." 하지만 하루이틀 시간이 흘러갔지만 연합군은 본격적인 군사행동을 취해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더욱 신경을 쓰는 것은 완전히 군사적인 공백지대가 되어버린 주변의 군소부락에 대한 정벌이었다. 한달 정도가 흐르자 철진천의 인내도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이런 치사한 자식들.... 군사적인 우위에서도 아직도 힘없는 부락민들 학살 을 그치지 않다니.... 이러면 할 수없다. 카타쿠이와 테쿠진을 불러와라!" "예." 이윽고 두 무장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하자 잠시 뜸을 들이던 철진천이 파오안 의 무장들에게 말했다. "쥬베르만 남고 나머지는 나가라." "예." 철진천은 쥬베르라 불린 무장과 함께 카타쿠이와 테쿠진을 맞이했다. 카쿠타 이와 테쿠진은 뛰어난 무장들로서 지금까지 연합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병력을 운용하고있는 장수들이다. 그만큼 상황판단과 대처능력 이 뛰어나고 뛰어난 무예를 지니고 있었다. "요즘 적의 동태는 어떤가?"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적은 우리를 말려죽일 작정인 모양입니다." "흠..... 너희 둘은 이제부터 나의 적이다." 그러자 두 무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희 둘은 각자 비밀리에 흑풍단과 접촉을 해라. 그런다 음 나를 배반한다고 하는거야. 밖에서 연합군이 치고들어오면 내응(內應)을 하겠다고 전하는 거지. 왜그러냐고 이유를 물어오면 너희들의 부모와 자식들 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좌시한 철진천을 우두머리로서 받들 수 없다고 하는거 야. 무슨말인지 알겠냐?" "예. 그래서 적이 공격해 들어오면요?" "최대한 적이 공격해 들어올 날자와 시간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해. 그런다음 저들의 편인 것 처럼 가장해서.... 적을 안심하게 만들었다가 한번에 적을 헤 치우면 되겠지." 그러자 좀 회의적인 표정으로 테쿠진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요? 저희는 칸(汗)과 함께 있는데 어떻게 적을 기습한다는 겁니까? 거기다 칸을 빨리 공격하지 않는다면.... 적이 금방 눈치 챌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 이렇게 하면 되겠군. 만약 정규전으로 붙는다면... 하 기야 적들도 너희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바보들은 아니니까 너희들의 말 을 믿고 야습을 감행하지는 않을거야. 그러니까 내가 중앙에 집단을 이루 고...." 그러면서 바닥에 나무막대기로 쓱쓱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오른쪽과 왼쪽에 각기 1만씩을 독립적으로 거느리고 상대를 약간 포위하는 진형을 구축하면 되지. 7만의 중군... 좌우의 양날개에 너희들... 이런 배치를 하면 적을 기습공격하기가 좋잖아? 우리가 뒤로 밀리는 척 하면 적이 따라들어올거야. 너희들이 가만히 있는다면 자연히 포위되는 형국이 되 지. 이때 불시에 적의 양쪽을 공격해 들어가는거야." 옆에서 듣고있던 쥬베르가 철진천의 말에 토를 달았다. 그는 철무진의 오른팔 로서 뛰어난 무장이자 철무진의 오늘이 있기까지 도와준 모사(謀士)이기도 했 다. "하지만 적들에게 이쪽의 작전을 납득시켜야만 합니다. 적들을 이해시키지 않 는다면 순간적이긴 해도 칸이 후퇴하면 따라들어오지 않을겁니다." "그러니까..... 그거야! 전에 포위되어서 고생한 경험을 살려 좌우에 양날개 를 두어 쉽사리 포위되지 않는 진형을 택했다고 하면 되지. 그러면 적들도 같 은 진형을 택하든지 아니면 통상 해오던 식으로 한덩어리가 되던지... 뭐 알 아서 하겠지. 어쨋든 적의 대장은 중군에 있을테니까 중군만 격멸시키면 이긴 것이나 다름없어." 그러자 카타쿠이가 머리회전이 잘 안되는 듯 질문했다. "하지만 적들도 세덩어리가 된다면 좀 복잡해지겠는데요..." 이번 질문의 답은 쥬베르가 했다. "그때는 이렇게 하면 되지. 우리가 양날개에 1만씩이니까... 적들도 아마 배 신자들을 앞세워 1만씩을 좌우날개로 삼을거야. 그런다음 카타쿠이와 테쿠진 이 배반을 약속한 만큼 저들도 양날개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공격만 가해올테 지. 이때 너희들이 그들과 싸우는 척하고 있으면 갑자기 본진은 후퇴할거고 그때 그들은 너희들을 믿고 앞으로 나올거야. 이때를 이용해 일부는 안심하고 있는 적의 날개를, 일부는 나를 뒤쫓아 들어온 적의 뒤통수를 치는거야. 그걸 신호로 칸이 지휘하는 본대가 적을 협공하면 승리할 수 있지." 쥬베르의 설명을 듣고있던 철진천이 두 무장들에게 물었다. "이제 알겠냐?" "예." 철진천은 소리죽여 웃으며 제장들에게 말했다. "크크크크.... 역시 치사한 방법에는 치사한 방법으로 받아치는게 정석이지.. 안그러냐?" 장군 그리고 멍군! 옥영진 나으리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마길수 상장군이 불러주는 대로 지도 위에 사라진 몽고족 부락들을 표시하고 있었다. 사람이란 짐승은 원래가 나쁜 짓을 할 때 더욱 흥이나기 마련인가... 옥 나으리는 치사한 방법을 쓰기는 했 지만 요즘 줄줄이 묶여 들어오는 계집들을 보면서 신이나 있었다. 하나라도 더 많은 노약자와 계집들만 남은 부락을 초토화할수록 철진천의 세력은 약화 되는 것이고 조금 더 박살내면 아마 몽고족은 한동안 중원정벌은 꿈도못꿀 정 도로 피폐될 것이 뻔했다. 그런 그를 장각(張角)이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다가 마침내는 입을 열었다. "도대체 적은 언제 공격할겁니까?" "왜? 이것도 재미있잖아." "단장님. 이건 정도에 어긋나는 거라구요. 이제 철진천도 밑바닥을 보이기 시 작했으니 시간 끌지말고 빨리 공격하자구요." 더 이상 못참겠는지 옥영진 나으리가 허연 수염을 푸들거리며 짜증을 냈다. "시끄러 이 앵무새야. 요 근래들어 만날때마다 그 소리라니... 그거말고 좀 더 참신한 의견은 없는거야? 그건 더 전기(戰氣)가 무르익어야 한다구 내가 얼마나 말했냐? 원래가 전쟁이란 것은 정도(正道)와는 거리가 먼거야. 이기는 사람이 최고라구. 알면서도 속고... 속이고... 하는거야." 그래도 장각이 뿌루퉁한 얼굴로 서있는데 막사로 공지(孔知)가 들어왔다. 공 지를 보고 옥영진 나으리는 환한 얼굴로 맞이했다. "어서오게나. 이제 돌아 다니는 걸 보니 몸이 많이 좋아진 모양이군." 공지가 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뭐... 싸움을 하다가 화살에 맞을수도 있는거 아닌가. 그래 구멍난 어깨는 좀 괜찮은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 몽고놈이 어찌나 큰 활과 화살을 사용하는지 정말 죽 는줄 알았다니까요." "흥... 못된짓이나 골라하고 다니니까 하늘이 노해서 그런거다." 둘의 다툼을 바라보면서 옥영진 나으리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자네같은 고수가 한낱 화살에 상하다니 이해할 수 없군." "그게 아니에요. 그녀석은 강철로 된 살촉을 쓰는데다 살기와 함께 슝하는 소 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착완순으로 막았는데...." "그런데?" "세상에... 그놈의 화살이 착완순을 뚫고... 갑옷까지 뚫은다음 어깨에 박혔 다니까요. 혹시나 하는 예감에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어깨 정도로 끝나지도 않았을겁니다. 쩝... 처음부터 착완순으로 안막았다면 화살이 아예 관통해버 려 활촉을 뽑는다고 그 고생을 안해도 됐을텐데...." 그러자 옆에서 푸념을 듣고있던 장각이 대소(大笑)를 터트리며 한말 거들었 다. "하하하.... 그것참 고소하군..." "잔말 마. 그래도 나한테 활을 쏜 그녀석을 반토막 냈으니까... 복수는 한거 라구." "복수는... 내가 듣기로는 그녀석의 무예가 뛰어나서 반죽음 상태가 된 너는 힘도 못쓰고 노영(盧英)이 목을 벴다고 그러던데?" "하여튼 죽은거는 죽은거잖아. 끝이 좋으면 다 좋은거지." 느글느글한 공지의 평상시와 같은 태도에 약간 안도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스 런 표정으로 옥영진 나으리가 말했다. "그런데 자네 너무 무리하지 말게나. 소문이 쫙 퍼졌더군... 어깨에 구멍까지 뚫린 주제에 계집을 너무 밝힌다구...." "하하하... 단장님도... 오랜만에 마음놓고 쉴 때 즐겨야죠. 바쁠때야 어 디.... 흐흐...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공지의 자타가 공인하는 식성(?)에 구역질이 난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장각이 말을 받았다. "단장님 신경쓰지 마십시오. 이녀석은 원래가 잡식성이라 가리지를 않거든 요." "그 때문에 노영하고 한바탕 했었다며?" "아니.. 그자식이 그런거까지 고자질을 하다니..." "참게나.. 노영이 한 말은 아니니까.." 이때 밖에서 전령(傳令)이 뛰어오더니 옥영진 단장에게 포권하며 아뢰었다. "몽고족 한명을 사로잡았습니다. 그자의 말로는 대장군께 아뢸 사항이 있다고 그럽니다." "그래? 들여보내게나." "예." 곧이어 한명의 몽고병이 끌려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할말이 있다고?" 옥영진 나으리의 추상(秋霜)과 같은 위엄에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몽고 병 사가 답했다. "예. 저희 대장님께서 대인께 협조하겠다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약간 흥미로운 눈빛을 띄며 옥영진 나으리가 물었다. "너의 대장은 누구냐?" "예. 카타쿠이 장군이십니다." "카타쿠이? 카타쿠이가 누구지?" 옥영진 나으리의 질문에 옆에있던 마길수 상장군이 답했다. "예. 카타쿠이는 철진천의 뛰어난 맹장입니다. 전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임기 응변이 뛰어난 자죠. 정면공격에 능한 뛰어난 장수이기는 하지만 술수를 잘 못쓰는 것이 흠인 인물입니다." 옥영진 나으리는 적절한 정보를 얻어내자 다시 몽고병을 향해 질문을 시작했 다. "그래? 협조라.. 무슨 협조?" "예. 카타쿠이 장군께서는 철진천이 장군의 부락이 습격당하도록 방치한 철진 천이 더 이상 우두머리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장군의 의견에 많은 장군들이 동의하고 계십니다. 장군께서는 자신의 부모를 죽인 것 은 문제삼지 않을테니 제발 처자식을 돌려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무조건 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을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나쁜 소식은 아니군. 허나...." 옥영진 나으리는 속마음과는 달리 굳은 표정으로 이런저런 질문 차곡차곡 한 다음 병사에게 금품을 약간 주며 치하(致賀)해서 돌려보낸 다음 곧바로 회의 를 소집했다. 옥영진 나으리는 둘러앉은 천인장급 장수들에게 이제서야 흥분 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장들! 이제 때는 왔다." 그러자 지루한 기다림에 진이 빠져있던 장수들이 반색을 하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드디어 정면승부를?" "그렇다. 제장들! 날이 갈수록 저들의 세력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고 우리들 의 세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거기에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저들의 뛰어난 장수 1명이 협조를 요청해 왔다." 그러자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운 제일천인대장 곽가(郭苛)가 신중하게 말했다. "속임수가 아닐까요?" "아니야. 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보지 않은건 아니지만 그자의 처자식이 우리의 손에 있고 또 부근의 부락들이 계속적으로 약탈당해 자신들의 부모와 처자식이 유린되는데도 방관하고있는 철진천의 무능함에 많은 장수들이 회의 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 확실하다." 관지(關知)가 물었다. "그렇다면 언제 적을 칩니까?" "협조를 요청한 장수와 약간의 협의를 거칠 필요가 있다." 그러자 공지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야습을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회의를 느낀 적장들 도 항복해올 것입니다." "껄껄... 자네는 구멍난 어깨나 치료하게나. 그 몸으로 어디 검이나 들수있겠 나?" 옥영진 나으리의 놀림에 모두들 킥킥거리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색 하나 안변하 며 공지가 느긋하게 말했다. "아무리 어깨에 구멍이 나도 몽고놈들 죽이고 계집질 하는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습니다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자네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언제나 만약이라는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야습은 무리가 있어. 적들이 본진을 비워놓고 우리 들이 우리속에 들어가기를 기다린 다음 부근에 포진하여 화살을 퍼부으면 잘 못하면 치명타를 입는건 우리들일 수도 있다. 그러니 좀 더 확실한 것을 알아 보고... 우리들에게 협조할 장수들은 얼마나 되는지 빨리 파악한 다음 공격하 기로 한다." 단장의 설명에 관지가 물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행동은 어떻게 합니까?" "우선 협의가 되는대로 정면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그때 배신자들이 철진천의 후미를 공격한다면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날 것이고 그때 몰아붙이면 간 단히 승리를 취(取)할수 있을 것이다." 옥영진 나으리의 자신있는 말에 관지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대장군. 결전의 시간이 임박한 만큼 빨리 흩어진 삼, 십 천인대를 불러들여 야 할것입니다." "서두를 것 없다.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과 패잔병 토벌도 필요하니 그들을 이리로 불러들일 필요는 없겠지. 노영(盧英)에게는 계속 부락 약탈을 시키기 로 하고... 순욱(純旭)의 제삼천인대만을 몽고군 후방 200리(약 61 Km) 일대 에 넓게 포진하라 일러라." 이번에는 곽가가 의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저도 관지의 말에 찬성입니다. 아무리 퇴로 차단이 필요하다 해도 결전에서 8개 천인대만으로는 힘에 부칠지도 모릅니다. 노영만이라도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것입니다." "흐음.... 제장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옥영진 나으리의 질문에 부단장인 마길수 상장군이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결전에서는 초반의 기세가 중요합니다. 초반에 기세 를 잃는다면 어쩌면 배반을 약속한 무리들도 승세를 타서 배반의 약속을 어길 지도...." "좋아. 그럼 제십천인대는 불러들이도록 하라." "예." "자세한 것은 차후에 다시 밀사(密使)가 온 후에 결정하기로 하지." "예." 서서히 다가오는 마(魔)의 손길 "도대체가 마음에 안들어!" 신경질적인 마화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이 왔다. "뭐가?" "....." "넌 왜그렇게 불평불만이 많아?" 별일 아니라는 듯한 임충의 말에 신경질이 돋은 마화가 울컥하는 기분에 따지 기 시작했다. "그럼 불평안하게 생겼어? 지금 하는 꼴을 보라고..... 몽고놈들이 도와주지 않아도 찬황흑풍단의 힘만으로도 몽고놈들 9만 정도 죽이는건 식은 죽 먹기 야. 그런데 왜 대장군은 몽고놈들하고 손잡아서 일을 처리한다고 이렇게 시간 을 끄는거야." "그건 다 단장한테 생각이 있어서겠지." "거기에 저건 또 뭐야." 임충은 마화가 가리킨 곳을 힐끗 쳐다본 다음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긴 뭐야. 몽고계집들이지." "저런것들은 뭐하려고 잡아들이는거야. 매일매일 끌려들어오는 저 처참한 계 집들 모습만 봐도 먹은게 올라오려고 한다구. 아예 본때를 보이고 싶으면 몽 땅 다 죽여서 들판에 던져놓던지... 그것도 아니고 질질 끌고오면서.... 이 부근에 정찰나가면 길가에 지쳐서 쓰러져 죽은 애들의 시체가 한둘이 아니라 구.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거지?" "너무 신경쓰지마. 관지대장의 말로는 조만간 결판이 날거라고 그러던데..." "하지만 결판이 난다고... 철진천의 목을 벤다고 끝날 것 같지 않아." "왜? 적의 우두머리가 죽었는데... 왜 돌아가지 않겠어." "실지 우두머리만 죽일 작정이었으면 흑풍단 내에서 가장 고수 10명만 뽑아서 암살하면 된다구. 그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 우리 대장... 참내 국광이라 고? 흥! 웃겨서..." "너 오늘 왜그러냐? 신경이 보통 날카로운게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대장 이 름은 왜 들먹여." "그냥 대장.. 대장.. 하다가 얼마전에 이름을 물었더니 국광이라니까 웃겨서 그런다. 흥! 뭐가 국광이야. 그런 이름도 있어? 그런 멍청하고 무공만 강한 나으리를 앞세워 너같은 바보를 열명정도 보내면 끝날걸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학살할 필요가 있냐고." "......" '단단히 성질이 받친 모양이군. 오늘이 그날인가. 계집들은 그날이 되면 성질 이 더러워진다고 누가 그러던데....' "거기다 공지 그 파렴치한 녀석은 허구헌날 잡아온 계집들 중에서 얼굴이 그 래도 반반한 애들 골라가며 계집질을 해대는데.... 수하들이 뭐라고 생각하겠 어. 참내 얼굴 뜨거워서.... 겨우 몽고녀석이 쏘는 화살도 못피해서 어깨에 구멍이 난 주제에 낮짝이 두꺼워도 유분수지... 흥!" 드디어 이성을 상실한 마화가 상관 욕까지 해대자 임충은 얼굴색이 핼쑥해졌 다. 국광이야 오랜시간 지내보니 성질이 좋은 것을 알기에 혹시나 이런 욕설 들어봐야 눈하나 깜짝 안할 위인인 것을 알지만 공지 천인대장의 귀에 욕설이 들어갔다가는 세상 종친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너... 오늘 말조심 해야겠다. 안되겠다. 이리와." "왜그래?" "나하고 같이 순찰이라도 돌자구. 말을 타고 좀 달리면 기분이 풀릴거야."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말아!" 퍽! 임충은 짐짓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는 듯 배를 주무르며 우는 소리를 했다. "윽! 빌어먹을.... 손은 매워가지고... 아이고.... 나죽는다..." "뭘 엄살떨고있어." "이봐. 그러지 말고 저리가자. 응? 여기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라...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내입으로 내가 말하는데 뭔 참견이야." "제발... 나좀 살려주라. 정... 그렇게 눈밖에 나고싶으면 너혼자 나라구. 나 까지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려고 하지말고..." "이게 말이면 다 말인줄 알아?" 퍽! 임충은 가슴팍을 주무르면서 투덜거렸다. "아구구구..... 오늘 재수 더럽...." '이년하고 싸워봐야 나만 개망신이고 우선은 이 위기를 잘 피해나가는게 최선 의 길이지롱...' "...아니지 마화야. 그러지 말고 나한테 술이 약간 있는데... 마유주 말고... 혼자 마시려고 꽁쳐놓은 것이 조금 있으니까... 그거 마시면서 얘기하자. 응?" "술?" "그럼. 아주 향기로운 중원 토종이지. 그리 가자구. 여기서 떠들어봐야 답도 안나오니까 이럴게 아니라 한잔 쭉 하면서 얘기하면 말도 술술 잘 나오고 좋 잖아." "좋아. 가지. 가자구." '끙... 무공이 비슷하니 간단하게 제압하는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치고받 자니 나만 못된놈 되고.... 아고고... 애꿎은 귀한 술만 작살나는군....' 마화와 임충이 이름하여 낮술(?)을 마시고 있을 때 국광은 십여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몽고군의 경우 처음에는 꽤 당당한 진용을 자 랑했지만 뛰어난 일부 장수들과 2만의 병사가 사라지고 거기에 자신의 가족들 이 어찌되었는지 소식도 불투명한 지금에 이르러 기세가 많이 꺾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순찰을 얼마나 돌았을까... 국광은 미세한 인기척을 느낄 수있었다. '적인가? 아군인가? 대단한 고수다.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국광이 주위를 우연을 가장해서 한번 쓱 둘러보며 수하들의 얼굴을 살폈지만 숨은자의 기척을 눈치챈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군. 아군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이쪽에 기척을 알리는 것이 도리.... 아직까지 조용하다는 것은....? 적이 분명하겠군. 하지만 나로 서도 숨어있는 대략적인 위치만 알 수 있을뿐.... 정확한 위치를 알수없다 니.... 놀라운 녀석이다.' 국광은 상대의 기습에 대비하여 살며시 옆에있는 나뭇잎 한 장을 따서는 냄새 를 맡아보는 척 했다. 그러면서 일부러 뒤따르는 수하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나무냐?" "잘 모르겠습니다. 나무의 이름은 알아서 뭣하시게요?" "모르면 됐다." 국광은 얼렁뚱땅 답을 흘리며 상대의 위치를 잡아내기 위해 공력을 집중했다. 천라지청술(千羅知聽術)! 황궁무고에서 익힌 기술로서 미세한 소리로 상대의 위치를 잡아낼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다. 국광은 혹가다가 잠결에 이상하게도 적이 어디에 있는지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잠결이 아니라 그런지 적의 위치를 알기가 힘들어 황궁무고에서 배운 술법을 쓰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국 광 일행은 말을 몰아 점차적으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거의 10장(30M정도) 나갔을까... 어느 순간 미세한 음향이 국광의 천라지청술에 잡히면서 그 위치 가 파악되었다. "갈!" 국광은 최대한 하지만,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만 끌어올린 공력으로 나뭇잎을 쏘아보냈다. 그가 사용한 기술은 황궁무고에 있는 암기술의 하나였 는데 나뭇잎이 쏘아져 들어간 위치에서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알았나? 토끼일수도 있지.' 갑자기 국광의 외침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바위라도 부술 기세로 쏘아져 나가 자 수하들이 저마다 무기를 뽑으며 주위를 경계했다. 하지만 아무런 동정도 없자 국광의 눈치만 보며 무기를 다시 거둘것인지 망설였다. "내가 신경이 좀 날카로와져서 실수를 한 모양이다. 모두들 무기를 거둬라." "예." 국광일행이 멀어져간 다음 숲속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자는 짙은 녹의를 입었는데 정확히 심장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아니 심장 부분의 옷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하지만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심장에 난 상처는 아물어가고 있었 으며 그 괴인도 그 상처에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과연 부교주가 확실하군. 지금까지 종합해본 정보에 의하면 기억을 상실해 본교에서 익힌 모든 무공을 잊은게 분명한데.... 적엽상인(迪葉傷人)을 시전 하다니.... 적엽상인은 한낫 나뭇잎을 이끌어 사람을 살상하는 무학인 만큼 내공의 조화로운 통제가 필요한데.... 역시, 마교사상 최강의 고수라 불릴만 하군. 심장이 파열되고 전신혈맥과 단전까지도 파열된 상황에서 간신히 도망 쳤었는데 벌써 몸을 완전히 회복했다는 말인가...." 짙은 녹의를 입은 괴인은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속력으로 경공 을 전개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괴인이 수풀을 뒤적이자 그 안에는 큼지막한 새장이 있었고 안에는 10마리의 전서구 (傳書鳩)가 들어있었다. 그는 전서구의 옆에 주저앉아 작은 붓과 종이를 꺼내 어 깨알만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묵향 부교주가 살아있음이 확실함. 현재 흑풍단의 백인대장으로 근무중. 묵 혼검 대신 호화로운 검을 차고있기에 부교주의 얼굴을 모른다면 추적이 불가 능함. 적엽상인의 무공으로 속하의 심장을 관통시켰는데 그걸 기초로 추측컨 데 확실하지는 않으나 황궁의 무학을 익힌 것 같고 본교에서 익혔던 예전의 무공은 모두 잊은 것 같음. 그 내력이나 무공 내력으로 추측컨데 그의 무공은 화경(化境)정도로 추측됨. 속하의 실력으로는 묵향 부교주가 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10장 내로 들어설 수 없었음. 아마도 기억은 잃었지만 몸이 아직 예전처럼 반응하는 것 같음. 天(천)> 괴인은 이 글을 모두 암호로 작성했고 똑같은 글을 한통 더 쓴 다음 전서통에 말아서 넣은 후 밀랍으로 봉인을 했다. 괴인은 전서통들을 비둘기 두 마리를 골라 다리에 매단다음 하늘에 띄워보냈다. 괴인은 멀어져가는 비둘기들을 바 라보며 중얼거렸다. "부교주께 비밀리에 불려가 특명을 받았을때도 믿지 않았는데.... 진짜 묵향 부교주가 살아있을 줄이야..... 그는 본교가 배출한 최고의 고수.... 그의 기 억이 돌아온다면 본교에는 피구름이 덮이겠군." * * * 2일 후 비둘기 한 마리가 몽고 남부 숲에 자리잡은 커다란 장원에 날아들었 다. 그 장원은 양대인(楊大人)이라 불리고 있는 중국에서 망명하여 몽고에서 자리잡은 한 상인의 저택이다. 그는 몽고에서 수확되는 방대한 량의 고급 모 피나 말을 중원으로 수출하고 대신 중원에서는 소금이나 값싼 선철로 만든 냄 비 등속이나 주방용 칼 등 잡화류와 몽고의 귀족들이 사용하는 금은 세공품 따위, 그리고 몽고인들이 즐겨마시는 차 종류를 수입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대부분 수입하는 물품들이 중원에서는 취급도 안할 정도의 저급품(低級品)들 이다 보니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있었다. 국경을 통한 무역이니만치 몽고의 여러 부족장들이나 국경을 관장하는 관리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어 사이를 돈독하게 유지하고 있는 변경(邊境)의 실력자(實力者)이기도 했다. 변경에서 야만족들과 무역을 하다보니 장원 안에는 몽고옷을 입은 무사들이 많이 눈에 띄였다. 그중 몽고옷을 입기는 했지만 얼굴 생김새가 중원임이 확 실한 검은 수염을 짙게 기른 중년의 남자가 새로 비둘기 우리로 날아든 전서 구를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비둘기를 잡아 발목에서 전서통(傳書桶)을 풀었 다. 수수하게 생긴 전서통에는 밀랍(蜜蠟)으로 된 봉인(封印)이 붙어있는 점 으로 보아 자신이 볼 성질의 물건이 아님을 직감하고는 재빨리 양대인의 집무 실로 뛰어갔다. "양대인 나으리.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음..." 양대인은 먼저 전서통의 봉인을 살펴봤다. 전서의 봉인은 그렇게 복잡한 문양 이 있는것도 그렇다고 화려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양대인의 마음에 걸렸 다. 실지 대부분의 상행위에 사용되는 전서는 구태여 밀랍으로 봉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봉인을 뜯고 전서통을 연 다음 서신을 들여다 봤다. 편 지 내용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암호로 가득했다. 하지만 정작 양대인을 경악 시킨 것은 종이의 뒷면에 씌여진 6글자였다. 그것은 별뜻없이 써진 것 같은 '父親本家入納(부친본가입납)'이라는 글씨였다. 원래 일급(一級)이니 특급(特 級)이니 하는 말을 쓰면 오히려 우연히 전서를 입수한 상대가 더욱 호기심을 나타내기에 만약의 경우 사냥꾼이나 야생 매에게 잡혀 희생될 소지가 다분한 전서구(傳書鳩)를 이용한 통신의 경우 그럴듯한 상투어(常套語)를 써서 그 등 급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지체없이 무사에게 분부했다. "장집사를 빨리 불러라!" "예!" 나이가 지긋한 장집사라 불리는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오자 양대인은 그 전서 를 건네주며 말했다. "어서오게나. 긴급한 연락이 왔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빠른 시간내 에 필히 이것을 총타에 전해야한다. 어찌하는 것이 좋을까?" 그러자 장집사라고 불린 노인은 신중한 어조로 답했다. "국경을 통해 전서구를 날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수비군이 발견하면 활을 쏘거나 매를 날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변경지방이라 야생매도 많습죠. 직접 낙양의 분타에 보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걸려. 다른 방법은 없나?" "다른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은 역시 직접 전하는 것 뿐입니 다." "이건 최 상층부에 보내지는 특급 전서다. 낙양에 늦게 전달하면 내 목이 위 태롭단 말이다. 경공술이 뛰어난 자 5명을 뽑아서 가장 좋은 말 10필을 주어 빨리 출발시켜라. 그리고 길목에 있는 족장들과 수비대의 조장군에게도 연락 해서 편의(便宜)를 봐달라고 부탁해라." "예." 집사가 뛰어나간 후 양대인은 멀어져가는 집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이런 변방에 거의 좌천(左遷)되다 시피 와서 본타 최상층부에 직접 보내져야 함을 뜻하는 부친본가입납이 써진 전서를 받을줄이야.... 몽고에서 수집되는 모든 정보는 이곳을 통해 낙양분타로 가고... 그 다음 낙양분타에서 원하는 지역으로 보내진다. 그렇다면 이번일은 몽고에서 벌어진 일을 총타로 알리는 것인데.... 총타의 핵심세력이 신경을 쓸만큼 중대한 일이 몽고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인가? 도대체 무슨 일일까..... 맞아! 왜 그생각을 못했지? 지금 찬 황흑풍단이 철진천과 대전(對戰)중이지. 아마 그 사실을 총타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모양이군.' * *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숨막히는 마기를 내뿜으며 탁자의 끝부분에 앉은 수려하 게 생긴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마인(魔人)이 입을 열었다. "놀라운 소식이 있어서 그대들을 소집했소." 그의 피부는 은은한 자색(紫色)이 어려있어 괴기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점을 제외한다면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수려한 상당한 미남이었다. 자색을 띈 괴인 의 말에 넓은 탁자의 양쪽에 앉아있는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 는 괴인들은 은근한 마기를 뿜어낼 뿐 침묵을 지켰다. "........" "묵향 부교주가 살아있소!" 그 자색을 띈 괴인의 확정적인 말에 중인들은 경악했다. 묵향 부교주가 누군 가. 교주마저도 그에게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뛰어난 고수다. 때문에 제거했 었는데..... 하지만 북궁뇌(北宮雷) 내총관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얼굴은 경악(驚愕)과 불신(不信)에 가득차 있었다. "속하는 교주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아마 부교주와 다른 얼굴만 비슷 한 인물이 아닙니까? 아무리 환수(幻壽)가 부교주를 탈출시켰다고 해도 그건 정말 기적적인 탈출.... 환수의 시체는 발견되었고 부교주의 시체는 찾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부교주는 단전과 심장이 파열된 상황에서 무리하게 역 혈수라마공(逆血修羅魔功)을 써서 공력을 끌어올렸습니다. 그 무공은 여러분 도 알다시피 동귀어진(同歸御盡)을 위해 최후로 극한(極限)의 공력(功力)을 짜내는 역천(逆天)의 무학(武學).... 결과는 전신혈맥의 파괴로 인한 즉사(卽 死)입니다. 설혹 살아났다 하더라도 전신혈맥과 단전이 파열되어 폐인(廢人) 이 되었을텐데.... 어찌하여..." 북궁뇌 내총관의 말에 옆에서 듣고있던 혁무상 장로가 말했다. "그건 내가 대답함세. 북궁 내총관의 말에도 일리(一理)는 있소이다. 허나 모 든 정보를 종합해봤을 때 그가 부교주라는 것은 확실하오. 무영문에서 묵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처사요. 그는 누가 뭐래도 과거 본교 최강의 고수였으니, 그의 행방불명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오. 하지만 황궁에서도 그에대해 관심을 가지다니..." 모두들 혁무상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며 듣고있다가 황궁이라는 말이 나오자 큰 흥미를 나타냈다. 그 이유는 황궁은 무림의 일에 신경을 안써온 것이 피차 간의 관례(慣例)였기 때문이다. "황궁이라니오?" "금의위말이외다. 최근에 금의위에서 비밀리에 묵향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갔 소. 하지만 그 사실은 삼비대에게 포착되었소. 그래서 본인은 왜 모반에나 관 심이 많은 금의위에서 무림의 그것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묵향 부교주에대해 신경쓰는지 의문이 일어 정보를 역으로 추적했소. 그 결과 찬황흑풍단의 수장 인(首長) 옥영진 대장군의 수하중에 과거의 기억을 상실한 국광이라는 초고수 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소." "국광이라구요?" 모두들 밑도끝도 없는 혁무상 장로의 말을 듣다가 사실여부를 확인이라도 하 듯 교주를 쳐다봤다. 그러자 교주는 혁무상 장로의 말을 인정해줬다. "그렇소. 혁 장로가 알아본 바로는 국화를 광적으로 좋아한다고 해서 국광이 라 부른다더군. 지금현재 그는 몽고원정에 참석중이기에 본좌가 부교주에게 부탁해서 묵향의 얼굴을 알고있는 4명의 뛰어난 고수를 급파했소. 그중 진궁 (眞窮)이 직접 국광을 확인했는데 기억상실로 인해 본교에서 배운 무학은 모 두 잊었지만 황궁무고를 통해 거의 화경(化境)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 더군. 그대들도 알거요. 화경이 아무나 될 수는 없소. 화경이라면 거의 중원 안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이오. 얼굴 모습은 흉내낼 수 있으나 그의 무공수준까지 흉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오. 그래서 본좌가 내린 결론은 얼굴이 비슷하면서도 화경이라면 묵향 뿐이오." 능비계 부교주는 묵향에게 강기 세례를 맞았던 과거의 공포스럽던 기억을 떠 올리며 약간 몸을 떨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전에 없애야 합니다. 화경이라면 저희들에 게도 승산이 있지만 현경이라면 어렵습니다. 그것도 부교주의 경우 자신의 입 으로도 말했지만 현경의 끝에 다다라 생사경을 바라본다고 했을 정도니...." 묵향을 암습할 때 묵향의 장력을 정통으로 맏은 사람은 두명 뿐이었다. 둘 다 화경에 오른 부교주들이었으나 장인걸의 경우 귀혼강신대법(歸魂 身大法)을 익혔기에 상관없었지만 능비계의 경우 그 한방으로 호신강기가 파괴되었던 것 이다. 다행이 흑미륵마공 덕분에 혈도를 상하지는 않았지만 그 퍼런 강기덩어 리가 몰려오던 생각이 들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였다. "기억을 잃었다손 쳐도 화경임이 확실하다면 그를 제거하는데 본교의 5대 세 력을 총동원하는 것이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클클클....." 옆에서 듣고있던 장인걸 부교주가 웃음을 터트리자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능 비계 부교주가 발끈해서 말했다. "왜 웃으시오? 본인의 말이 틀렸다는 거요? 만약 잘못해서 놓친다면 그 뒷감 당을 어떻게 할거요?" "아니외다. 그대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오. 우리들은 지금 아주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잊고 있소이다." "중요한 사실?" "그렇소. 묵향 부교주는 모두들 알다시피 동자공(童子功)을 통해 눈부신 성취 를 이룬 사람이오. 그가 어떤 수행을 해서 현경에 올랐던 그건 문제가 되지 않소이다. 중요한 것은 그 내공의 기반(基盤)이 동자공이라는 사실이오. 그렇 다면....." 장인걸 부교주의 말에 교주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클클클.... 본좌도 깜빡 잊었군... 맞아. 그친구 여색을 멀리했었지. 하지만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을수도 없는 노릇이니 자네가 뒷조사를 해보게나. 동 침한 여자가 있는지..." 혁무상 장로가 공손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장인걸 부교주는 자신있게 말했다. "동자공을 연성한 것이 확실하다면 뒷처리는 간단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간단하지 않아." 교주의 회의적인 말에 의아해하며 장인걸 부교주가 물었다. "예?" "자네들은 지금 묵향이 어디에 몸담고 있는지 잊었나?" "....." "황제직속인 찬황흑풍단의 백인대장을 암살하는건 어떻게 둘러대도 황실에 대 한 모반이야. 내 말은 그가 흑풍단에 몸담고 있는 한은 헤치우기 어렵다는 것 일세." 교주의 조심스런 말에 혁무상 장로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헤... 그걸 피해갈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뭔가?" "지금 간신 엄승(嚴承)은 옥영진 대장군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습니 다. 자신을 따돌린 다음 요, 몽고와 전쟁을 일으킨 인물들 중의 한명이니까 요. 거기다 자신이 황실을 요리하자면 막강한 세력을 가졌으면서도 우직하고 융통성 없는 충신인 그가 눈의 가시겠죠. 엄승을 설득해서 옥영진을 없애는 겁니다." "옥영진을? 왜?" "옥영진을 없앤다면 옥영진의 수족들이라고 볼 수 있는 백인대장급 이상의 장 수들도 모두 처단될 것입니다." "하지만 황실에서는 그들을 없앨 정도의 고수가 없으니 그 계획은 실패할 수 밖에 없어. 옥영진이 그냥 자결(自決)해 준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아니죠. 그러니까 옥영진과 그 수족들을 없앨때 본교가 도와준다고 넌지시 떠보는 겁니다. 국광이란 고수를 이쪽에서 처치해 주고 나머지도 죽이는데 최 대한 협력하겠다고 말이죠. 꽤 향기로운 미끼니까 대어(大魚)의 관심을 끌지 않을까요?" 교주는 혁무상 장로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다소 미심쩍은 어조로 말했다. "흠.... 묘책이군... 묵향도 죽이고 황실에 연줄도 만들고.... 하지만 너무 저쪽에 일방적으로 좋은 제안이라 의심하지 않을까?" 혁무상 장로는 교주의 말이 일리있다고 여겨 곧바로 추가적인 방책을 제시했 다. "예.... 그럴수도있겠군요. 그렇다면 돈이나 토지 등을 상대가 의심하지 않 을정도로 적당량 요구하고 본교가 중원을 장악하는데 나중에 정권을 잡고나면 일조(日照)를 해주기를 원한다고 제안하면 어떨까요?" "그게 좋겠군. 묵향을 없애는 방법은 혁무상 장로가 삼비대를 동원해 묵향의 내력을 조사해서 확실히 동자공을 익혔는지 여부를 보아 결정하기로 하지. 혁 무상 장로는 묵향의 내력 조사와 더불어 엄승과의 접촉도 시도하도록!" "존명!" 텐령 평원 대회전의 결말 마교의 밀실에서 비밀회의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철진천과 옥영진이 지휘하는 대군이 몽고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판 승부를 벌였다. 현 재 송은 모든 국력을 요와의 전쟁에 쏟아붇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런때 옥영진이 거느린 정예를 물리친다면 송은 요와의 전쟁을 마치고 국력을 회복한 후가 아니면 몽고를 건드릴 수가 없다. 하지만 대 전쟁 후 국력의 회 복이 하루이틀에 될 일이 아니고 또 대전쟁 후에는 언제나 염전사상(厭戰思 想)이 판을 치기에 왠만한 시일이 흐르지 않고는 타국에 대한 침략을 생각도 못하는 것이다. 위정자(爲政者)가 침략을 하고싶다고 해서 전쟁을 무조건 할수 있는게 아니라 는 것은 역사가 말해준다. 저 고구려라는 중원의 변방에 자리한 강대한 이민 족을 정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중원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던가. 하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 지친 국민과 군대를 부추겨 반기를 들어 수나라를 건설한 양제도 자신이 무엇을 이용해 정권을 찬탈했는지 잊어먹고 다시 고구려를 건 드렸다가 아들인 문제한테 목이 날아갔다. 양제의 아들 문제 역시 자신이 어 떤 배경으로 아버지를 시해할 수 있었는지 잊어버리고 고구려를 쳤다가 나라 가 망하는 사태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중원의 역사야 알던 모르던 호전적인 몽고족도 계속적인 전쟁에는 지친다는 것을 잘 아는 철진천이기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옥영진의 목을 베어 이 전쟁 을 승리로 이끌기를 원했다. 하지만 옥영진 편에서도 이 전쟁을 져줄수는 없 었다. 무엇보다 몽고 통일을 염원하고 또 그정도의 능력이 있는 철진천을 죽 여없애 후환을 없애지 않는다면 송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내친 김에 수하들의 반발을 무릎쓰고 '더럽고 치사한' 살육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다. 그로서는 몽고인들이 앞으로 수십년은 아예 '중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공 포에 질리게 만들 심산(深山)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모든 것이 옥영진 나으리의 생각대로 진행되었다. 옥영진 나 으리는 3개의 부대로 나누어 전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덩어리로 하려고 했었는데 적이 각기 1만씩의 좌우날개를 만들어 포위당하는 것을 방비함과 동 시에 여차하면 적을 포위할 수 있는 진형을 사용할거라는 카타쿠이의 정보와 같았다. 혹시나 하고 처음에는 진형을 완전히 갖추지 않았었는데 그들이 진형 을 갖춘 것을 보고 옥영진 나으리는 황색 깃발을 흔들어 각기 1만씩의 몽고연 합군이 상대 좌우날개와 대치하도록 지시했다. 실지 몽고군 좌우 날개의 우두 머리인 카타쿠이나 테쿠진이 이쪽편인 이상 좌우날개에 대한 대비군을 보낼 필요는 없었지만 이쪽이 보내지 않으면 철진천이 의심할거 같아서 취한 조치 였다. 그리고 만의 하나 마길수 상장군의 조언대로 적의 속임수일 수도 있다 는 점에 대한 대비이기도 했다. 전쟁의 진형은 좌우 날개의 몽고군 1만씩과 중군의 몽고군 6만. 후군의 흑풍 단 9천의 당당한 진형이다. 보병들은 방어작전이 아닌 이런 광활한 평지에서 의 기동전에는 써먹을수 없으므로 본진을 지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개전(開戰)부터 전세(戰勢)는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진 행되기 시작했다. 적의 좌우날개는 어쩐 일인지 싸움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밀리기 시작했고 좌우측 날개가 밀리자 연합군의 좌우날개와 중군에게 집중공 격을 받은 몽고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그 전투를 흐뭇한 표정으 로 뒤에서 바라보고있던 옥영진 나으리가 옆에 있는 마길수 장군에게 말했다. "하하하... 자네의 우려와는 달리 아주 빨리 끝나겠군." "모든게 다 대장군의 복(福)이십니다. 허허... 언제나 무운(武運)이 함께하시 는군요." "이상태라면 흑풍단을 투입할 필요도 없겠군. 괜히 노영을 불러들였어." 약간의 질책성이 있는 옥영진 나으리의 말에 마길수 상장군이 약간 무안한 듯 웃으면서 사과했다. "허허.. 제가 너무 과민했던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시기를...." "하하하... 뭐 용서할 것 까지 있나. 자네도 잘되자고 한 말이었는데 말일 세." 이러쿵 저러쿵 희희낙낙(喜喜樂樂) 농담을 하면서 관전(觀戰)을 하는 사이 전 세(戰勢)가 일변(一變)하기 시작했다. 좌우날개가 밀리면서 중간에 노출되어 집중타를 얻어맞던 적의 중군(中軍)이 일시적으로 뒤로 후퇴를 시작했고 몽고 연합군은 그 뒤를 바짝 추격해 들어갔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때 뒤로 밀 리던 중군이 돌아서면서 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여태까지 아군이라고 믿 어의심치 않게 만든 적의 좌우 날개가 갑자기 밀고 들어간 연합군의 측면과 후면을 포위하면서 집중공격을가해왔다. 독안에 들어가버린 몽고연합군의 군 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그에따라 전사자가 속출(續出)하기 시작했다. 전세 의 변화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던 마길수 상장군이 옥영진 대장군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전투는 패색이 짙군요. 후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무리를 해 서라도 지금 결판을?" "흠.... 지금 결판을 내기로 하지. 이번 싸움에서 밀리면 우리측에 가담한 몽 고 족장놈들이 무슨짓을 할지 모르니까. 정말 철진천이라는 자는 대단하군. 한번씩 나를 놀라게 만드니 말일쎄..." "그럼 흑풍단의 총력으로 적의 좌군을 박살내버리고 그 여세를 밀어붙여 적의 중군을 포위공략하심이 어떨까요?" "그게 그런대로 좋겠군. 수하들에게 지시하라. 하지만 전투는 일부러 완만하 게 진행해서 동맹한 부족들에게 피해가 좀 크게 돌아가게 하도록. 이 전투에 서 모두들 힘을 소진해버려야 더 이상 통일하겠다고 깝죽거리는 놈이 없겠 지." "예" 마길수 상장군의 지시를 받은 흑풍단 9천기(騎)는 좌측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 다. 그런 다음 적의 좌군과 함께 치열한 기마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흑풍단 은 뛰어난 고수들로 편성된 만큼 몽고군들이 그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다만 옥 영진 나으리의 지시로 연합군에 참여한 몽고병들의 피해가 더 커지게 전투는 완만한 속도로 진행되었다. 아침에 시작된 그날의 전투는 해가질때까지 계속되었고 쌍방의 피해는 막심했 다. 연합군쪽에 흑풍단의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몽고병측은 거의 반이상의 사 상자가 나온 격렬한 전투였다. 그리고 몽고가 배출한 뛰어난 무장 철진천은 이 전투에서 누군가의 칼에 맞아 전사했으니.... 그로인해 새로운 영웅이 배 출될때까지 몽고의 통일이 50년은 뒤로 늦춰지게 된다. 혼전(混戰) 중에 철진 천이 전사하고도 전쟁은 계속됐다. 몽고에서 패배란 곧 노예로 전락됨을 의미 했기에 그들은 죽기를 무릎쓰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더 이상 싸울 여력마저 떨어진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후퇴를 시작했고 그에따 라 쫓기는 자들에 대한 처절한 사냥이 시작되었다. 추격전의 주역은 흑풍단이었다. 그들은 전력(全力)을 다해 전투를 전개하지 않았기에 연합군에 비해 더 많은 체력을 비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고통일 의 뿌리까지 뽑아버리기 위해 추격전은 밤새도록 도가 지나칠 정도로 전개되 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옥영진 나으리는 흩어진 천인대장급 이상의 고급 장수들을 소집하여 뒷마무리에 따르는 작전시시를 했다. 5개 천인대를 제외한 나머지 천인대들은 모두 다 흩어져서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필요없어진 보병대는 본진 수비를 위한 천명을 남겨두고 모두 본국으로 후퇴하라는 명령도 함께 떨어졌다. 국광은 자신의 백인부대를 이끌고 추격전에 나서기 전에 자신의 막사에 들렀 다. 그로서는 이번 작전이 아마도 몽고에서 마지막 작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작전이 끝나면 흑풍단은 본국으로 후 퇴를 시작할 것이고... 본국에 도착하면 자신에게 주어졌던 하부르는 노예로 팔려갈게 뻔했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국광의 속은 알리없는 하부르는 국광이 들어오자 반갑게 맞이했다. 전장에서 무사히 돌아온 남편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도리였기에... "무사하셨으니 다행이에요." 자신을 껴안는 하부르를 떼놓은 다음 국광은 수하에게서 얻어온 흑색 의장용 (儀裝用) 경갑주(輕鉀 ) 한벌을 하부르에게 내밀며 말했다. "빨리 이걸 입어라." "예?" "빨리 입어. 그리고 바지와 신발은 내것을 써라. 그거 입은 다음 나하고 같이 말타러 가자." "예." 엉겁결에 하부르는 갑주를 입기 시작했고, 국광이 멀리 나들이를 데리고 가겠 다는 말에 옷을 갈아입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국광은 복장을 갖춘 하부르 를 백인대에 끼워넣어 표시안나게 만든 후 출발했다. 옥영진 나으리에게 부탁 하는게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거절당했을때는 아예 하부르를 빼돌리지 못하기 때문에 국광이 서둘렀던 것이다. 안면보호대까지 착용해 두 눈만 내놓 은 하부르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옷을 보면 똑같은 번호 를 가진 사람이 둘 있다는 것을 알겠지만 국광의 부탁을 받긴 했지만 정이 많 이 든 백인대 대원들은 하부르를 놓아줄거라는 말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열심히 보호했으니 점쟁이가 아닌 바에야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광 일행은 북쪽으로 달리고 달려 마을을 찾아 헤맸다. 다른 백인대들도 국 광의 일행처럼 마을이나 패잔병을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다. 다만 국광의 일 행과는 달리 그들은 약탈과 살인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북쪽으로 4일간 달려 올라갔을 때 산에 가린 작은 마을 하나를 발견할 수 있 었다. 만일을 대비해 대부분의 수하들을 마을 주변에 포진시킨 다음 국광은 하부르와 몇몇 수하들만을 거느린 채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 마을사람은 한명도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걸 보고 마화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거 벌써 누가 다녀간거 아냐?" "아닐거야. 다녀갔다면 시체가 즐비할텐데.... 알다시피본보기로 죽이는 거 니까 묻을 필요가 없지." "그렇군." 국광은 말에서 내린 다음 파오 앞에 서서 낮지만 내공을 실어 목소리가 멀리 퍼지도록 해서 몽고어로 말했다. "모두들 나오시오. 족장을 만나서 얘기할 것이 있소." 저쪽 파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노인과 몇 명의 장정이 나왔다. "나으리...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희 부락은 작아서 식량도 없고 또 쓸만 한 처녀도 없습니다요." 국광이 뭐라 말하려는데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된다는 만류소리 등 소란 중에 한 소년이 국광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당신들이 원하는 사람은 나지 이사람들이 아니오. 나만 잡아가고 이들을 헤 치지 마시오." 15세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단단한 체격과 어딘지 모르게 기품있는 말투와 분 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국광은 그 아이에게 흥미가 감을 느끼고 아이의 생김 새를 자세히 뜯어보며 말했다. "만약 그러지 않겠다면?" 아이는 그 나이또래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하게 말했다.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사람들이오. 이들을 헤칠 필요는 없지않소?" 소년의 말을 듣고 국광은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네녀석의 힘으로 나를 막을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지는 않소. 당신들 검은악마들은 너무나 강하오.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 해도 재미로 사람을 그렇게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오. 늑대도 배가 고플때만 사냥하듯 당신들도 그 강함에 맞게 저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시오." "하하하... 재미있는 녀석을 이곳에서 만났군. 하부르." "예." 국광은 갑자기 정중한 어조로 소년에게 말했다. "용의 눈을 가진 소년이여. 나는 자네에게 한가지 부탁을 하고싶다. 물론그 부탁을 들어준다면 나도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지." 소년은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엇이오?" "저 아이는 하부르. 이번 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다. 내가 딸처럼 아끼던 아인데 사실 중국인인 내가 몽고애인 저 아이를 데리고 중원에 들어갈수는 없 다. 저아이에게도 이곳에 남는 것이 좋을거고. 저 아이를 맡아주겠나?" "부탁이란 그것 뿐이오?" "그렇다." "하지만 내가 저 아이를 당신이 떠난 후에 죽여버릴지 어떻게 믿고 나에게 맏 긴다는 거요?" "나는 너를 믿는다. 용의 눈은 아무나 가지고 싶다고 가져지는 것이 아니거 든." 둘의 대화를 듣고있던 하부르가 마침내 참지못하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두손을 꼭 쥐고 국광에게 사정했다. "나으리... 저를 버리실건가요?" 국광은 그런 하부르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타일렀다. "아니야. 다만 너를 위해 어떤 것이 가장 좋은 길인지 선택했을 뿐이다. 너는 몽고인... 몽고의 초원에서 동족들과 있어야 행복할 수 있겠지. 내 말대로 하 거라. 응?" "나으리....흐흑.." 국광은 울고있는 하부르를 이끌어 그 소년에게넘겨주며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하부르. 아무도 손도대지 않은 순결한 몸을 가지고 있으니 자네가 좋은 배필(配匹)을 얻어 짝을 지워줬으면 하네... 성격도 착하고 순박 한 아가씨야." "약속하겠소." 국광은 그 소년을 다시한번 자세히 바라본 후 떠나려고 하다가 말했다. "용의 눈을 가진 소년을 만난 기쁨의 표시로 자네에게 이걸 선물하고 싶군. 자네는 무기가 없으니 지니고 있으면 자그마한 보탬이 될걸세." 국광이 갑자기 허리에 찬 검을 풀어서 건네주자 약간 당황한 소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이걸 받을 이유가 없소." "내 작은 성의라고 봐주게. 이 검은 그렇게 좋은 검도 아니고 그냥 호신용으 로 쓰기에 적당한 그저그런 검이니 받아주게나. 그리고 나한테는 따로 좋은 검이 하나 있어." 사실 몽고에서는 철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래서 몽고에서는 검을 대단히 아끼 며 정강(精剛) 정도로만 만들어도 보검에 놓을 정도다. 역대로 중국에서는 몽 고 등 이민족에게로 무기는 물론 철의 수출을 금지하고 있었고 철로 된 솥도 좋은 철로 만들면 그걸 잘라서 무기를 만든다고 일부로 불순물이 많은 철로 만들어 수출하고 있었다. 그런 형국이니 국광이 내미는 보석이 많이 박힌 검 은 그들이 한눈에 봐도 뛰어난 보검임이 확실했기에 아무 이유도 없이 주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광이 사정하듯 말하자 소년은 망설이다가 그 검을 받았다. 소년에게 검을 건네준 다음 말했다. "몸을 잘 숨기도록 해라. 아마 한달 정도 지나면 우리들은 몽고에서 철수할거 다. 장차 몽고의 별이 될 자네를 지금 죽이지 않음은 내 상관인 옥 나으리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없으나, 나는 큰 나무가 될게 분명하다고 싹부터 자르고 싶지는 않아. 자네는 요절(夭折)하지 않는다면 몽고의 역사에 남는 영웅이 될 거야. 쓸데없는 만용(蠻勇)을 부리지 않는다면 자네를 죽일수 있는 사람은 거 의 없겠지. 그럼 훗날 인연이 있다면 볼수 있겠지. 잘있게나." 그 말을 끝으로 국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소년은 당당히 떠나가는 국광을 보고 불현 듯 그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다급히 외쳤다. "당신의 이름은 뭐요?" 국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갔다. 다만 그의 목소리만이 초원을 꿰뚫고 들려왔다. "내 이름은 국광(菊狂)... 아니지. 묵향(墨香)... 묵혼검(墨魂劍)의 주인이 다." 소년은 세월이 지나며 뛰어난 무장(武將)으로 성장했지만 국광의 우려대로 우 연히 만난, 사이가 좋지못한 부족의 식사 초대에 응했다. 사실 그들 부족의 식사 초대에 응하지 않아도 문제될 것은 없으나 '겁쟁이'라는 비난을 받고싶 지 않아 식사에 동참한 후 독이든 마유주를 마시고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또 다시 몽고의 통일은 뒤로 미루어졌다. 훗날 소년과 결혼해 네명의 자식을 낳 은 하부르는 그 장자(長子)의 이름을 테무진(鐵武眞)이라 지었다. 몽고의 통 일은 3대에 걸친 소망으로 내려오다가 송의 약체를 틈타 테무진의 손에서 마 침내 이루어 지게 된다. 마을에서 멀어지며 마화가 물어왔다. "묵향(墨香)은 또 뭐에요? 대장 이름은 국광이라고 안그랬어요?" "......" 국광으로부터 아무런 답이 없자 마화는 옆에있는 임충에게 확인을 구했다. "임충! 대장 이름이 국광 맞지?" "응" 마화는 조금 놀리는 투로 말했다. "갑자기 애한테 국광이라고 하려니까 부끄럽던 모양이죠? 없는 이름을 지어서 불러주게? 묵향이라고 하니까 지금 대장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 "앞으로 계속 묵향이라고 불러도 되요?" "안돼!" "왜요? 국광보다는 백배 나은데..." 그러자 떼를 쓰던 마화의 귀에 소리가 들려왔다. 국광은 입도 달싹이지 않는 데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고 마화는 그것이 말로만 듣던 어기전성(御氣傳聲) 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왜 안되는가 하면 그건 내 본명(本名)이기 때문이야. 과거를 모르는 만큼 만 약 나에게 적이 있다면 나는 아주 좋지못한 상황에 처할 수 있어.> 국광의 말은 아주 정당했기에 마화도 할수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도 있겠군요." 황홀(恍惚)한 정사(情事) 마지막 작전이 수행되고난 다음 1달 후가 지나자 몽고에서는 더 이상의 위험 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옥영진 나으리의 지시로 정벌군은 후퇴를 시작 했다. 몽고란 나라 자체가 별로 돈이없는 가난한 야만족들이기에 노획한 금은 보화(金銀寶貨)는 마차 세 대 분량 정도로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엄청난 량의 노예를 잡아서 그 손실을 만회했다. 이번 전쟁의 승리로 북방(北方)으로 부터의 위험은 한동안 존재하지 않을 것 이다. 그리고 동방(東方)의 늑대(狼)라 할 수 있는 요와의 전쟁도 상당히 유 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아마 조만간에 요 승리를 획득할 가능성이 컸다. 벌 써 5개의 수도 중 2개가 송의 영토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러니 이번의 대규 모 원정만 끝나고 나면 백년은 동북방에서 송을 위협할만큼 거대한 세력이 재 등장할 가능성은 없었다. 남은 고려(高麗)의 경우 강력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타국을 침입할 정도의 정복욕(征服慾)도 없는 평화로운 국가다. 이런 나라는 그냥 내버려두면 차츰 썩어가면서 저절로 붕괴될 것이 틀림 없었다. 그리고 왜(倭)의 경우 무력은 강하나 통일된 집단이 아니고 더욱이 통일이 된다손 치더라도 영토(領土)는 작지만 30만에 이르는 군사력을 갖추고 길목을 지키고 있는 강력한 고려와 일 전을 치뤄야 하기에 위협이 될것도 없었다. 서방(西方)의 경우 비단(silk) 판 매상의 정보에 따르면 수많은 나라들이 난립해 있어 송(宋)의 막강한 힘에 도 전할 정도의 배짱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주변국들의 상황이 대송(大宋) 제국(帝國)의 탄탄한 앞날을 보장해주고 있었다. 옥영진 나으리가 거느린 찬황흑풍단은 당당히 개선(凱旋)하여 수많은 보화(寶 貨)와 노예들을 황제께 바친후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아직도 요와의 전쟁 은 계속 진행중이라 크게 연회를 배풀지는 않았지만 황제폐하께서도 그의 개 선을 축하해 주셨기에 그로서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간신배가 중간에 끼어 든 이후로 황제폐하와 사이가 조금 벌어졌지만 이번의 귀중한 승전(勝戰)으로 그 사이도 가까워 질것이고 황실에서의 위치도 더욱 탄탄해질거라는 생각 때 문이었다. 개선후 옥영진 나으리는 산적(山積)한 일 때문에 정신이 없는 나날을 보냈다. 황제 폐하로부터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었으나 그건 다만 공이 큰 몇몇의 하사금이나 벼슬의 승진일뿐....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황제폐하로부터 하사받 은 보화와 노예를 적당한 액수로 팔아 그것들로 공이 있는 모든자들에게 은자 (銀資)를 나눠줘야 했기에 거의 만명에 이르는 수하(手下)들에 대한 논공행상 을 처리해야 했다. 거기에 그동안 밀린 봉록(俸祿:월급)도 지급해야 했고 전 쟁을 치룬 만큼 새로이 무기(武器)나 말(馬), 식량(食糧) 등속도 보급받아야 했다. 옥영진 나으리가 바쁜데다 나으리가 붙여놓은 혹이라 볼 수 있는 옥항도 잔인 했던 전쟁을 치르면서 제법 노숙해져 국광으로서는 간만의 평안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국광으로서는 저놈의 선머슴애 마화가 와서 떠들어대지만 않 는다면 더 이상 바랄것이 없었겠지만 그건 아마 단시간에는 바랄 수 없는 꿈 인 것 같았다. 그날도 마화의 등살에 귀를 막고 지낸 후 한시름 돌리고 있는 데 고요한 달빛을 통해 금음(琴音)이 들려왔다. 어쩌다 한번씩 금음이 들리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 음을 듣는순간 국광으로서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무어라 할 수 없는 그리운 감정이 몰려왔다. 국광은 오랜시간 이슬을 맞으며 금음을듣다가 이 음이 자신도 기억할 수 없지만 어쩐지 자신이 이 곡을 알고있다는 것을 느 꼈다. 다음 소절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소절이 기억나는 걸로 봐서 그점을 확 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금음은 벌써 5곡을 켜고있었는데 그 모든 곡들이 그에게 그런 감회를 불러일으키다 보니 국광으로서는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 을수 없었다. "아무래도 한번 가봐야겠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身形)은 어둠을 박차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국광은 금음이 울려나오는 저택까지 가면서 금을 뜯는 사람이 누군지 더욱 의 문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금음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또렷이 들리 는 점으로 미루어 머지 않은곳에서 들리는 줄 알았지만 막상 찾아가다 보니 의외로 먼곳에서 들려온다는 사실이었다. '상당한 고수로군. 기(氣)를 교묘하게 조정하여 심금(心琴)을 울리다니... 과 연 누굴까...' 넓은 저택의 후원(後園).... 아담하게 꾸며진 정원(庭園) 중간에 자그마한 정 사(靜舍)가 지어져 있다. 그 정사의 벽면에 뚫린 둥근 창문.... 열려진 창문 안에서 엷은 청의를 입은 묘령(妙齡)의 소녀(少女)가 금을 뜯고있었다. 살며 시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또 몽롱한 추억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하며 계속 금을 타고있는 모습이 국광의 눈에 들어왔다. 먼저 국광은 정사의 창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큼직한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는 주변을 철저히 살폈다. 물론 이 저택 전체를 둘러보아 아무런 위험이 없음을 조사해본 후에 자리잡은 곳이다. 정원 내부는 국광의 능력이 미치는 한도 내 에서는 그 어떤 위험도 없었다. '함정은 아닌 듯 한데.... 그럼 저 계집은 뭐지? 껍데기는 젊게 보이지만... 아마도 알맹이는 최소한 40은 넘은 무림고수가 분명한데.... 그런데도 어쩌면 저렇게 청순하고도 아릿따운 얼굴과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 는군.' 반각 정도 더 지속되던 금음은 그것으로 멈췄고 그녀는 잠자리에 들려는지 창 문을 닫은 후 잠옷을 갈아입는 모습이 불빛을 통해 창문의 음영(陰影)으로 전 달되어 왔다. 국광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기를 최대한 끌 어올려 주변을 수색했다. '역시 잡히는게 없군. 그렇다면...?' 국광은 기척도 없이 몸을 날려 정사(靜舍)에 다가갔다. 국광이 다가가는 도중 에도 주위에는 풀벌레 소리만이 들려올뿐 그 어떤 기척도 없었다. 갑자기 국광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잘 준비를 하고있던 소녀는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그녀는 황급히 일어선 후 우선 자신의 옷매 무새를 단정히 정돈을 한 다음 국광을 아래위로 주의깊게 훑어본 다음 약간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오셨죠?" "우선.... 앉으시오." 국광이 방안을 둘러보니 무기는 없었다. 대신 무기 대용으로 쓸만한 것이라면 침상 옆에있는 탁자위에 놓인 경옥(硬玉;단단한 옥, 옥에는 연옥과 경옥의 두 종류가 있다.)으로 만든 1자 정도 길이의 옥적(玉笛;옥피리)이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방안에 여자의 방답게 갖가지 아담한 장식물들이 걸려있었고 한쪽 에는 화장대도 보였다. 방안에는 달콤한 향기가 은은히 배어 있었고 아마 그 것이 방안 한쪽에 있는 작은 향로에서 조금씩 연기가 솟아오른는 것으로 보아 그 향을 소녀가 언제나 즐기는 모양이었다. '향기(香氣)도 좋고... 살기(殺氣)도 없고... 그런데 이런 야밤중에 금을 잘 타는 미모를 갖춘 여고수(女高手)라.... 하나하나를 두면 문제가 없는데 함께 섞어놓으니 좀 이상하군... 아무래도 여고수라는 점이 마음에 걸려....' 소녀는 엉거주춤 앉더니 다시 물었다. "누구신가요?"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슬며시.... 도둑에게서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 는 듯한 몸짓으로 옥적(玉笛)을 들었다. 일단 옥적을 손에 잡은 다음에는 약 간 말투가 바뀌었다. 조금의 초조함에서 느긋함으로 바뀌었다고 해야할까... "흥! 빨리 말을 안한다면 살아서 이곳을 나갈 생각을 안하는게 좋을거에요." 소녀의 가시돋친 말투와 경계심이 오히려 국광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렸다. 사 실 흑막(黑幕)이 있다면 이정도로 상대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경계할 필요가 없을테니까... "그대는 금을 누구에게서 배웠소?" 국광의 질문에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냉소뿐... "흥! 그따위 질문을 하려고 야밤에 여인의 처소에 담을 넘어왔다는 건가요?" 그러자 국광은 좀더 인상을 험악하게 굳히며 싸늘하게 내뱉았다. "다시 한번 더 질문하지. 누구에게서 배웠소?" 그러자 소녀는 조금 말투를 누그러트리며 말했다. "강아(姜娥) 사부님께..." "강아? 그대의 이름은?" "설약벽(薛若碧)이라고 해요." "설약벽? 언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군.. 기억은 안나지만.... 그런데 문 제는 그대가 뜯는 금음이 좀 이상하다는데 있소. 아무래도 과거에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또 그 곡들도 내가 아는 것 같고.... 설명을 해줄수 있소?" "글쎄요. 소녀도 당신같은 무례한 사람은 처음 보는지라 뭐라 말할수 없네 요." "그렇다면 한가지만 더... 그대가 뜯은 곡들은 많은 사람이 알고있는 곡이 오?" 국광의 질문에 소녀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오. 그 곡들을 알고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이 그 곡들을 들어봤다니 이상하군요. 당신은 어디서 그것들을 들어봤죠?" 잠시 침묵이 흘렀고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국광이 말문을 다시 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군. 사실 나는 과거를 기억할 수 없기에 그대에게 몇가지 확인해볼 것이 있어 찾아온 거였소. 그런데.... 헉!.... 이런... 무슨 농간 (弄奸)을?" 국광의 다급한 어조와 달리 설약벽은 느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이상하 게도 그녀의 얼굴에는 어조와는 달리 후회... 동정(同情)의 빛이 어려있었다. "확인하실 필요 없어요. 저기서 피어오르는 향은 천락마라향(千樂魔羅香).... 일단 흡입한 후에는 손 쓸 방법이 없는 음약(淫藥)이죠. 당신의 무공은 너무 나 강하기에.... 눈치채지 못하게 처음부터 아주 조금씩만 피어오르게 만들어 서서히 중독(中毒)시켰으니 지금에야 효과가 나오는 거에요." 국광은 치밀어오르는 욕화(慾火)를 억누르느라 얼굴이 벌겉게 달아오르며 핏 줄이 불거져나오기 시작했다. 국광은 어서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뿐이 었지만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바로 앞에 미모의 여인이 있다보 니 점차 가물거리는 이성(理性)이 욕정(欲情)을 억압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동자공(童子功)을 익혔다... 그렇다면... 보기좋게 당했군. 이제 더 이 상의.....' 이성으로 간신히 욕화를 억누르고 있는 국광을 보며 설약벽이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묵향 부교주님. 당신은 너무나 강하기에 본교로서는 당신을 없애는데 이길을 택하지 않을수 없었어요. 그렇지 않고 정면대결을 한다면 수많은 형제들이 그 대의 묵혼앞에 목숨을 잃어야 되겠죠. 교주께서 명령하셨을 때 제가 기꺼이 이 일을 떠맏은건... 어쩌면 도저히 넘볼 수 없었던 당신을 약간이나마 사모 (思慕)했었던 제가 끝처리를 하는 것이 좋을거라는 판단에서에요. 더 이상 참 지 마시고 이리 오세요. 그리고 평안한 안락을 찾으세요...." 설약벽이 두 팔을 벌리고 그를 이끌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국광은 그녀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설약벽은 노련한 경험자 답게 무식하게 파고만 드는 국 광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나갔다. 설약벽은 우왁스럽게 찢듯이 옷을 벌린 후 탐스럽게 부풀어오른 유방을 빨아대는 국광을 적당히 밀어대면서 살며시 옷을 벗었다. 그런다음 국광의 옷을 조심스레 벗겨준 다음 침상으로 이끌었 다. 국광으로서는 음욕(淫慾)에 눈이멀어 눈앞의 이 아름다운 여체(女體)를 감상할 시간도 없었으니.... 떨어지는 별 국광이 음희의 거미줄에 걸려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 옥영진 나으리의 저택 에는 불가사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옥영진 나으리가 호출하지도 않은 100여명이 넘는 방문객이 쳐들어온 것이다. 그들의 내왕을 통보받은 옥 영진 나으리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이 지금 이시간에 자기 한테 올 일이 없기때문이리라... 옥 나으리는 하인의 안내로 들어오는 방문객 중의 한명에게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ㅎ다. "자네가 여기는 왠일로 왔나?" "예? 회의를 겸해서 원정의 성공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멋지게 한턱낼테니 모 두 오라고 해서 왔는데요. 왜 그러십니까?" 갑작스레 수상한 태도로 나오는 옥영진 나으리에게 전포(戰袍)기는 하지만 한 껏 멋을 낸 마길수 상장군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백인장급 이상이 모두 다 왔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관지와 관지를 보좌할 백인장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왔습니 다. 관지는 별로 이런자리를 안좋아하기에.... 왜그러십니까?" "누가 그 말을 전하던가? 나는 그대들을 부른 적이 없는데..." "단장님 댁의 하인이라고 자청하는 자가 전해왔습니다. 저희들도 그런줄 알았 구요." "이거 큰일이군. 아무래도 모종의 흑막이 있는거 같아. 자네는 빨리 돌아가서 부대를장악하게. 나도 준비가 되는대로 갈테니까..." "예." 이때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껄껄껄... 그러실 필요 없소이다. 옥영진 대장군 나으리. 그대를 모반 혐의 로 체포하라는 어명(御命)이 계셨소이다." "뭐시라?" 어느덧 경악한 옥영진 나으리와 그 수하들을, 사방에서 앞부분에 禁(금)이란 글씨가 수놓아져있는 황의를 입은 무사들 천여명이 날아와 포위했다. 그리고 그들의 뒷편에서 親(친)이란 글씨가 써져있는 적의를 입은 사람 12명 정도와 황의를 입은 사람 3명이 함께 걸어나왔다. 방금 한 말은 그중의 한명이 내뱉 은 말이었다. 모반(謀叛)... 이 얼마나 살떨리는 단어냐... 말도안되는 모함이라도 그것에 걸려들기만 하면 삼족(三族; 친가;親家, 외가;外家, 처가;妻家 그러니까 그와 혈연이 있는 모든 자)이 살아남을 수 없다. 옥영진 나으리는 기가막혀 말도 안나올 정도로 분노가 끌어올랐으나 차분히 노화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여기 서 꿀리면 모든게 다 끝장나는 것이다. 별볼일 없는자가 이런말을 한다면 웃 어넘길수도 있지만 복장을 보아하니 이들은 모반의 냄새를 찾아 다니는 황제 의 사냥개, 금의위인 것이다. "그런 말도 안되는 말을 하는 그대는 누구요?" "소인은 이번에 금의위의 포박대 대장으로 임명된 엄사량이라고 합니다. 만약 대장군께 죄가 없다면 그건 취조하는 과정에서 밝혀지겠지만 본 금의위에서는 대장군이 모반(謀叛)을 획책(劃策)하고 있다는 확실한 물증(物證)을 잡고 있 습니다." 옥영진 나으리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이들을 불러 모은것도 그대들의 짓인가?" "그렇습니다. 뿌리를 남겨두면 안되죠. 화근의 씨앗은 뿌리채 뽑아야..." 상대의 단호한 대답에 옥영진 나으리는 허탈한 음성으로 사정했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본인의 목.. 수하들은 놔줄수 없겠나?" "그럴수 없음은 대장군께서도 잘 아실겁니다. 여봐라. 모두 다 포박하라."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자 옥영진 나으리는 지금 잡혀가든지 아니면 일단 이들 을 물리치고 후일을 도모하던지 두가지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함을 알았다. '지금 잡혀간다면 끝장... 보나마나 혹독한 고문 끝에 그냥 죽임을 당할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으으으... 나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손을 쓰게 만드는구나. 좋다. 너희들 의 목을 베고 황상께 따지리라. 나의 죄가 무엇인지.... 쳐라!" 옥영진 나으리의 판단을 기다리던 무장들도 그의 명령에 따라 검을 뽑아들었 다. 이왕에 자신들에게도 역적의 누명이 씌워진 이상 모두 함께 행동하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기에.... 사방에서 전포를 입은 흑풍단의 장수들과 금의위의 위사들간의 격돌이 벌어졌 다. 찬황흑풍단은 기병대(騎兵隊)라 원래가 마상전(馬上戰)에 익숙한 무리들 이다. 하지만 여기 모인 자들은 모두 백인장급 이상의 일당백의 용장들... 전 마(戰馬)도 없고 갑주(鉀 )도 입지 않았지만 그들의 무공은 뛰어났기에 삽시 간에 금의위의 위사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차분히 바라보던 적의(赤 衣)를 걸친 한 사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자가 입을 열 자 남자의 목소리도 아니고 여자의 목소리도 아닌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도와줘라!" 그에 답하는 적의 무사들의 목소리도 그와 비슷했다. "존명!" 이들이 달려들자 장내의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만큼 적의무사들의 무 공은 가공할정도로 뛰어났다. 아마도 이들이 지닌 이상한 목소리도 그들이 익 힌 괴이한 사공(邪功)때문인 듯 싶었다. 적의무사들이 장내로 뛰어들어 순식 간에 몇 명의 전포를 입은 무사들을 베어버리자 그 장면을 보고있던 옥영진 나으리가 뒤에 서있던 사내에게 말했다. "항아. 황상의 경호대인 친황대(親皇隊)까지 나선 것을 보면 아무래도 뒷일을 기약하기 힘들 것 같구나. 참. 국광은 어디있냐?" 그러자 옥항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할아버님. 방에 있는 것 같았는데 일이 시작되었을때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있다면 사태가 역전될수도 있었을 것을.... 아마도 그녀석의 무공이 강 하니 꾀어낸 다음 일을 벌였겠지. 그도 지금쯤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을게다. 내 검을 다오." "여기 있습니다." 옥영진 나으리는 검을 건네는 옥항의 손에서 검을 통채로 건네받지 않고 손잡 이만을 잡은 후 검을 뽑았다. 그런다음 적의를 입은 무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 다. 옥영진 나으리는 황궁이 자랑하는 3대 무공의 2가지를 익힌 인물답게 그 쏘아가는 신법또한 엄청나게 빨랐다. 적의무사가 흠칫하는 사이 그는 이미 그 의 뒤에 떨어져내렸고 그와 동시에 번쩍이는 보검을 쳐올렸다. 순식간에 1명 의 적의무사를 토막낸 다음 또 다른 먹이를 향해 쏘아갔다. 그가 두 번째 상 대를 베고 세 번째 상대에게 검을 날렸을 때 그의 검은 옆에서 튀어나온 검에 막혔다. 캉... 두 검에서 불꽃이 튀었고 상대방 검의 압력에 밀려 옥영진 나으리는 두걸음이 나 밀려난 다음 자세를 잡고 상대를 쏘아봤다. 상대는 적의의 사내들에게 명 령을 내렸던 사내로 거의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쏘는듯한 눈빛을 지닌 예쁘장하게 생긴 자였다. 그는 희고 깨끗한 피부에 시원하게 솟은 콧날, 수염 이 나지 않은 갸냘픈 턱선으로 말미암아 언뜻보기에 계집이 남장(男裝)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과 더불어 황궁오대고수(皇宮五大高手)에 끼이는 인물이 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남성을 상실한 태감(胎減)으로 뛰어난 무공에의 자질로 말 미암아 황제의 경호단인 친황대에 뽑힌 인물이다. 친황대는 100여명의 내시 (內侍)들로 구성되어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경호한다. 과거에는 무술이 뛰 어난 자들을 뽑아 경호무사로 삼기도 했으나 그들도 남자인지라 여자들만 있 는 황궁에서 황제의 잠자리 가까이까지 호위를 하다보니 문제가 심각하게 벌 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궁녀와 경호무사가 눈이맞아 애까지 가지는 사태가 벌 어지자 그들은 모두 황궁외곽 경호로 내몰고 다소 무공이 떨어지더라도 내시 들에게 무공을 가르쳐 측근경호대를 조직했다. 이게 친황대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하지만 무림의 정설대로 내시들은 근력(筋 力)이 떨어져 절정무공을 익히기가 어려워 뛰어난 실력자가 없었다. 그런데 모반에 연루되어 사형(死刑)을 언도받은 황궁의 고수(高手)가 태감이 됨으로 서 그 죄를 씻고, 50여년간 황궁내에서 무공을 연구한 다음 황궁무공 최고의 걸작인 규화보전(閨花寶典)을 만들어냄으로서 그 문제가 해결된다. 규화보전 은 전편은 내시들이 속성으로 내공을 익히는 토납법이 기록되어있고 후편은 검법이 기록되어있다. 규화보전은 세월이 지나면서 후인들이 더욱 발전시켜 황궁삼대무공(皇宮三大武功)에 들어갈 수 있을정도로 뛰어난 무공이 되었다. 하지만 보전 자체가 내시들이 발전시킨 무공이기에 그 무공을 익히는 초기단 계의 내공수련에서 급격히 차오르는 음기로 때문에 정상인은 익힐 수 없는 괴 이한 무공이 되어버렸다. 남자가 익히는 경우 급격히 차오르는 음기와 기존의 양기가 더해지는 상승효 과로 인한 욕념(慾念) 때문에 도저히 주화입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여자가 익히는 경우 기존의 음기에 초기에 차오르는 강렬한 음기가 더해져 극 음(極陰)의 상태가 되기에 도저히 몸이 버티지를 못한다. 그러나 태감(胎減) 을 당한 내시의 경우 몸속에 차오르는 강렬한 음기를 다슬릴 양기가 내제되어 있으면서도 그들이 엉켜 상쇄되며 일어나는 욕화가 일어나지 않기에 극성까지 익힐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규화보전은 아주 익히기 까다롭고 또 그 위력이 엄청나기에 100여명이 나 되는 친황대의 무사들 중 일부만 익히는 것이 허락되었다. 보통 친황대 고 수들 중 20명 정도가 보전의 무공을 익히는데 그중에서 보전이 완성된 후 극 성까지 익힌 몇 안되는 인물중의 한명이 자신의 검을 막은 해공공(海公公)이 라는 사실을 옥영진 나으리는 잘 알고있었다. 자신도 황궁 3대무공중 2가지나 익히고 있지만 오늘 한차례 검을 부딪쳐본 다음에야 해공공의 무공이 자신보 다 아쉽지만 한수위라는 사실을 느꼈다. 하지만 해공공은 거의 실전경험이 없 었고 자신은 막대한 량의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옥영진 나으리는 그점에 기대를 걸고 해공공과 감히 맞설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또 달리 선택의 여지 도 없었기에.... '저녀석은 실전경험이 적으니 무조건 선제공격과 암수를 교묘히 조화시켜 정 신을 못차리게 만들면 승리가 가능하다.' 옥영진 나으리는 슬며시 상대가 눈치못채게 내력으로 품속에 들어있던 동전 (銅錢) 몇 개를 왼손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받은 기습으로 무기를 챙기지 못했기에 암기대용으로 쓰려는 것이다. "호.... 친왕대를 맏으시고 계신 해공공께서 어찌 황상곁에 계시지 않고 여 기까지 나오셨소이까? 거기에 거의 보이지도 않던 고수들만 뽑아가지고..." "흐흐흐... 그대를 없애버리라는 황제폐하의" 해공공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해공공이 말을 하 는 순간을 노려 옥영진 나으리의 공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실지 한번이라 도 상대의 기습에 혼줄이 난 다음부터는 조금 힘이 들더라도 어떤 때라도 내 력을 유지하지만, 실전경험이 없는자들은 기습을 당해보지 않았기에 대화를 나눌때는 자연히 끌어올렸던 내력(內力)이 흩어진다. 바로 이점을 노린 한수 였다. "이얏!" 옥영진 나으리의 검은 화려한 광채를 날리며 36방위를 거의 순간적으로 찔러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 검끝에서는 막대한 검기(劍氣)가 뿌려져 나왔다. 상대 에게 들키지 않도록 순간적으로 내력을 끌어올렸기에 10성의 내력을 사용하지 는 못했지만 웅후한 옥영진 나으리의 6성 공력으로 펼쳐지는 황궁삼대무공의 하나 파황벽사검법(破荒壁邪劍法)의 위력은 엄청났다. 하지만 그 검기를 막아 내며 가까스로 뒤로물러선 해공공... 그의 옷은 6군데나 길게 찢어진 흔적이 만들어졌지만 놀랍게도 하나의 상처도 없었다. 하지만 옥영진 나으리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상대가 뒤로 빠질 것을 염두에 둔 탓인지 해공공을 향해 3개의 동전이 파공성을 흘리며 날아갔고 그 뒤를 쫓아 이번에는 자신이 할수있는한 최대한도로 공력을 끌어올리며 쏘아져 들어갔다. 옥영진 나으리는 해공공이 검으로 동전을 막는사이 두 번째 공격을 가할 작심이었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해공공은 슬쩍 옆으로 비켜서며 2개의 동전만을 피했을뿐... 나머지 하나는 그냥 몸으로 받아버렸다. '3개를 다 맞으면 충격이 오지만 겨우 하나쯤은 맞아도 상관없다는 건가?' "이야압!" 파황벽사검법의 마지막 초식 파천파지(破天破地)! 64곳을 찔러들어가며 강기 (剛氣)들이 백룡의 형상으로 사방을 덮었고 막강한 검기와 검풍이 사방으로 몰아치며 주변에 있던 황의무사들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64마리중 급속도로 뒤로 물러서고있는 해공공이 있는곳으로 날아간 것은 겨우 십여마리... 해공 공은 간단히 검들을 놀리며 그들을 튕겨버렸다. 놀랍게도 해공공이 초식을 펼 칠 때 그의 검은 이전과 달리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기충검(御氣充劍)! 놀랍게도 저자는 화경(化境)의 고수로군. 그러나 방법 이 없는건 아니지.' 옥영진 나으리는 거의 무리다 싶을 정도로 막대한 내력을 소모하는 파황벽사 검법을 써댔다. 하지만 해공공은 일부러 옥영진 나으리가 지치기를 기다리는 지 적당히 피하거나 받아칠뿐... 본격적인 공격은 가해오지 않았다. "깔깔깔... 황궁오대고수의 실력이 겨우 이건가? 웃기는군.... 깔깔깔..." 이때 놀랍게도 옥영진 나으리의 검법을 요리조리 피하며 도망다니던 해공공 의 뒤에서 갑자기 막대한 검강(劍剛)이 뿜어져 나왔다. 이번만은 해공공도 준 비하지 못했기에 검강 중의 몇 개가 해공의 등판을 때릴수 있었다. "큭!" 그 검강은 해공공의 호신강기(護身剛氣)의 벽을 뚫기는 했지만 강력한 타격 을 입히지는 못했다. 해공공은 치밀어오르는 핏덩이를 꿀꺽 삼킨다음 비웃듯 이 말했다. "오호... 마길수 대인을 잊었군... 깔깔... 언제부터 황궁오대고수들이 기습 이나 일삼는 치사한 도배(徒輩)들로 전락했지?" "갈!" 옥영진 나으리는비웃는 해공공을 향해 왼손을 들어 황궁오대무공중 하나인 파열태양장(破熱太陽掌)을 먹인 다음 본격적인 합공(合攻)을 시작했다. 오래 전에 정해졌던 황궁오대고수의 첫째 자리를 옥영진 나으리가 차지하고 있다면 두 번째는 전 금의위의 대영반이었고 세 번째가 해공공 네 번째가 마길수 상 장군이었다. 하지만 해공공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공무(公務)로 바빠 연 공(練功)을 할 시간이 없었던 반면 황상의 호위만을 전담한 친황대의 해공공 은 열심히 무공을 닦았으니 세월이 지난 다음에 벌어진 대결에서 그 실력이 월등히 차이가 나버린 것이다. 암습에 의해 상처를 입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해공공에게 치명타를 먹일수 없 었다. 20초가 경과하자 옥영진 나으리나 마길수 상장군은 해공공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관지(關知)가 여기 있었다면 저 요물(妖物)을 처치할수 있었을텐데..... 하 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관지는 연회같은 공식적인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소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 수하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있는 황궁오대고수의 말석(末席)을 차 지하는 뛰어난 무장(武將)이다. 아무리 화경의 고수라도 세명이 진법을 형성 하여 공격한다면 물리칠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도 화경에는 못미치지만 뛰어 난 고수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뿐이라 그 단순한 삼재진(三才陣)도 형성 할 수가 없으니.... 이건 하늘이 자신들을 버렸다고밖에는 생각할수 없었다. 옥영진과 마길수, 두 노장(老將)들은 수많은 전장을 누볐던 백전의 용장들이 다. 상대도 그들과 비슷한 종류의 무공을 익혔다면 아무리 화경에 올랐다 하 더라도 실전경험이 떨어지는 이상 벌써 시체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해공공이 사용하는 규화보전의 무공은 너무나도 괴이한 검법이었고 무엇보다 쾌(快)를 중시하기에 그 들고 빠지는 속도가 섬전(閃電)과도 같아 얄팍한 술수에 걸려 들지 않았다. 초수(初數)가 거듭될수록 옥영진 나으리와 마길수 상장군의 몸에는 작은 상 처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순간 얍하는 괴이한 기합소리와 함께 해 공공의 신형이 섬전처럼 움직였고 그 다음 마길수 상장군의 움직임이 중지되 었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자 그의 손에서 검이 툭하고 떨어지더니 마길수 상 장군의 육중한 몸이 뒤로 천천히 쓰러졌다. 그의 심장에는 언제 생겼는지 하 나의 구멍이 뚫려있었다. 마길수 상장군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옥영진 나으 리가 악에받쳐 외쳤다. "더럽게 빠르구나. 네녀석을 찢어죽이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그와 동시에 옥영진 나으리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몸을 사리며 공격을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완전히 동귀어진 (同歸御盡)을 각오한 필살의 공격이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무식한 공 격이 몇초 진행된 후 약간 수세에몰리던 해공공의 입에서 괴이한 기합성이 터졌다. "끼요옷!" 캉... 그와 동시에 은빛 광선이 옥영진 나으리의 몸을 떠나 왼쪽으로 빛과 같이 빠 른속도로 튀어나갔고 그 선상에 있던 금의위 무사의 몸에 연결되었다. 금의위 무사는 아닌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자신의 복부에 삐죽이 나온 검날을 쳐다보 다가 숨을 거두었다. 옥영진 나으리의 검이 부러짐과 거의 동시에 어느덧 옥 영진 나으리의 가슴에도 마길수 상장군과 같은 상처가 생겨있었다. 가슴에서 뿜어져나오는 피를 보며 옥영진 나으리는 허탈한 듯이 말했다. "허허허... 황상을 위해 내 평생을 바쳤거늘..."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숨을 거두지 않고 헛소리를 지 껄이는 옥영진 나으리의 목을 간단히 잘라버린 다음 그 수급을 들어올리며 해 공공이 말했다. "깔깔깔.... 황궁오대고수... 이름이 좋구나... 깔깔... 너희들도 빨리 항 복하거라. 더 이상 손을 쓰기도 귀찮으니.... 깔깔깔..." 그러나 해공공의 비웃는 듯한 항복권유에도 모든 일이 글렀다는걸 알면서도 찬황흑풍단의 장교(將校)들은 한명도 검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들도 무인(武 人)이었기에 이길수 없음을 알지만 구차스런 목숨을 건지려 들지는 않았다. 설혹 여기서 목숨을 건진다 하더라도 남은건 혹독한 고문뒤의 죽음이라는 당 연한 결과가 남아있다는걸 모두들 알고있는 것이다. 열락(悅樂)의 결과(結果) 관지는 마길수 상장군 이하 대부분의 백인장급 이상 고급장교들이 옥영진 나 으리의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나간후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사태에 면밀한 점 검을 하고있었다. 평상시라면 막사에 모여 술을 마시는건 거의 당연한 일과였 지만 오늘은 백인장급 이상이 없으니 만일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수습하기 힘 들다는걸 의식한 때문이다. 수하들에게는 내일 걸직하게 한잔 하자는 약속을 하며 방비태세를 점검했다. 지금 요와의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기에 요 로서도 총력전을 펼쳐 원정군이 어려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걸 잘 알고있었 다. 어쩌면 이번의 휴식과 보급을 완료한 후 다시 요와의 전선(戰線)에 투입 될지도 모른다. 거기에 오랜 전쟁으로 민심도 흉흉해지기 시작했고 그를 이용 해 어쩌면 모반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막사 앞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인물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상대는 관지도 알고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옥영진 나으리의 경호원이라 할 수 있는 무림인이었는데 뛰어난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암행, 첩보에 뛰어 난 재주가 있어 옥영진 나으리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있는 충복(忠僕)이었다. 그는 관지의 앞에 부복(俯伏)하며 긴급히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뭔가?" "대장군 관저(官邸)를 금의위의 무사들이 포위하는 것을 보고 속하는 나으리 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달려왔습니다." "뭐라고? 금의위가 왜?" "이번에 대영반이 엄승의 수족으로 교체되었기에 아무래도 흑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속히 결단을.." '대장군 정도의 인물을 무조건 체포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건 황상의 묵계(默契)가 있어야 가능한 일. 지금 군(軍)을 움직이면 대장군은 구하겠지 만 역적(逆賊)의 누명(陋名)을 면키 어렵고..... 또 외면하자니 정의가 아니 로구나... 어찌하면 좋을까...' "금의위 무사가 몇 명이나 동원되었더냐?" "천명 가량 되옵니다." "천명이라. 그렇다면 이쪽에서 도울 필요도 없다. 금의위의 실격이 뻔한 데... 그들의 실력으로는 대장군을 잡을 수 없음이지. 다만 대장군의 결단만 이 있을 뿐.... 우리는 기다리는 수밖에..." "그러하오나... 금의위와 함께 친황대의 무사 10여명이 있었사온데... 그중 한명은 친황대의 대장 해공공이 분명했습니다. 친황대까지 동원되었다면 대장 군께서 순순히 포박을 받지 않았을 때 모든 고급장교들까지 없앨수 있다는 계 산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해공공과 친황대가 분명하더냐?" "어느 안전(案前)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해공공은 황궁오대고수중의 한명. 그도 대장군과 상장군의 무위(武位)를 모 르지 않을터... 충분한 승산이 있기에 달려들었겠지. 그렇다면....?' "맹각(孟覺)!" "예. 대장." "대장군을 구출하러 간다. 이건 황명이 아니기에 출동명령을 내릴수는 없다. 자네가 자원자(自願者)를 모집하라." "옛!" "자원자들은 무장을 갖추고 연무장(練武場)에 집합하라." "옛!"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 관지는 자원자 사천여기를 이끌고 옥영진 대장군의 관저를 향해 출동했다. 사천기 정도만을 이끌고 떠난 이유는 지금 수행하려는 일 자체가 살얼음판을 달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무림인 출신으로 의를 숭상하는 자들이었고 또한 그들이 가담한다 하더라도 집안에 피해가 없는 자들만을 고 른 것이다. 관부(官部)에 인척(姻戚)을 가져 만약 역적으로 몰리면 집안이 풍 지박산 날 가능성이 있는자들은 제외할 수 밖에 없었다. 사천여기에 이르는 흑풍단이 무장을 갖추고 달리는 모습은 일대 장관을 이루 었으나 이들의 진격도 성 외곽에서 괴이한 인물들의 출현으로 막힐 수밖에 없 었다. 관지는 한눈에 흑의를 입은 상대들이 정상적인 수행을 쌓은 무사들이 아님을 알수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뭐라 형언할수 없는 마기(魔氣)가 음울 하게 배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밖에서 난리가 났는지도 모르고 황홀한 여체에 싸여 시간을 보내던 국광....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점차 정신이 들기 시작한 국광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자신도 나체였지만 옆에는 오랜 정사의 흔적을 온 몸에 지닌 설약벽이 기진(氣盡)한채 누워있었다. '내가 살아있단 말인가....???' 몸속에 기를 일주천 시켜봤으나 이상하게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공력 은 없어진것도 생긴것도 없이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동자공을 익힌게 아닌가... 아니면 이들이 나를 묵향이란 인 물로 착각한 것인가... 알수가 없군.' 국광이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있는데 이윽고 정신을 차린 설약벽이 국 광을 보고 대경해서 외쳤다. "부교주.... 당신은... 당신은.... 동자공을 익힌게 아니었나요?" 그녀는 나체인 상황에서 그건 신경쓰지 않고 침상 옆에 서있는 국광의 상태 만을 보고 다급한 표정을 떠올리는 것이 우스워 국광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 만 곧 약간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글쎄... 나는 전에 어떤 녀석에게도 말했듯이 부교주가 아닌지도 몰라. 어 쨋든 이번일로 동자공(童子功)을 익히지 않은 것은 확실하군." 국광의 말에 설약벽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수가... 당신은 부교주가 맞아요. 당신에게 금(琴)을 가르친 것은 저라 구요. 오랜시간 함께했기에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에요." 국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랬군. 금을 가르친건 당신이었어. 혹시나 했었는데....." 국광은 묵혼을 허리에 차면서 말했다. "그럼 과거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겠나?" 설약벽은 일어나 앉은 후 밑에 떨어져있는 겉옷을 줏어 입으며 말했다. "당신이 동자공도 안익혔고.... 또 이렇게 정력이 좋은줄 알았다면 진작에 안기는 건데... 아야야... 온몸이 안쑤시는 곳이 없군요...." "약탓이지 정력이 좋은건 아냐. 엄살 그만떨고 이제 대답을 해주실까...." "간단히 말해드리죠. 당신은 마교의 부교주였어요. 당신의 강함이 교주와 다 른 부교주들에게는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당신을 처치한 것이죠." "다른 부교주들?" "예. 교주, 능비계, 장인걸 부교주 모두 사마제(四魔帝)에 들어가는 극마(極 魔)의 고수들이죠. 당신이 없어진 지금 점차 교주와 장인걸 부교주의 사이가 나빠지고 있지만... 당신이 존재하는 한은 당신을 없애는데 힘을 합칠것이 분 명해요." "재미있군. 하지만 나도 그들에게 호락호락 당할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아." "과거에는 그랬죠. 하지만 본교에서 익혔던 모든 무공을 잊어버린 지금... 당신은 그들의 합공을 당할 수 없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그때는 그때고... 나는 과거에 내가 무슨일을 당했 는지 기억도 못하는 상황에서 복수를 할만큼 어리석지는 않아. 대신 상대가 나를 죽이려고 든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을 끊고 잠시 생각을 하던 국광이 말했다. "우선... 그대를 지금 죽이고 싶지는 않아. 하기야 나에게 살수를 쓰지도 않 았는데 죽일 필요도 없지. 나는 이만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데 괜찮나?" 설약벽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살려주신다니 고맙군요. 좋을대로 하세요." "좋을대로 하라고?" "예. 이 집에는 본교의 고수는 한명도 없어요. 모두들 옥영진 대장군의 집에 몰려가 있거든요. 그러니 당신을 가로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뭐라고? 거긴 왜 갔지?" "왜긴요. 옥영진 대장군을 처치하기 위해 갔죠." "이런 맙소사." 그와 동시에 국광의 신형(身形)은 창문을 뚫고 쏘아져 나갔다. 마교(魔敎)의 출현(出現) 넓은 장원.... 그지어진 모양은 검소한 듯 하면서도 웅장(雄壯)함과 장대(壯 大)함이 곳곳에 어려 오랜 영광을 지닌 무가(武家) 옥씨 가문(家門)의 위상 (位相)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오늘 저녘에 이르러 장원 근처에 거주(居 住)하는 모든 사람들은 창노한 기합성과 병장기가 부딛치는 소리... 비명성 (非命聲)에 잠을 설치며 두려움에 질려 있다. 어떤 변괴가 옥씨 가문에 도래 했음을 모두들 눈치챘지만 누구도 감히 그걸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집에 만 틀어박혀 떨고있을 뿐이다. 자신의 목숨이 두개가 아니므로... 수많은 시체들과 피로 넓은 마당은 어지럽혀져 있었고 곳곳에서 전포(戰袍; 무인들이 입는 걷옷)를 입은 무리들과 황색 복장에 禁(금)이란 글자가 수놓아 져 있는 옷을 입은 무리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격전은 거의 일방적이라 할 정도로 전포를 입은 무리들이 밀리 고 있었다. 그들의 무공이 약해서? 천만에.... 그들의 무공은 금의위의 위사 들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금의위의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전포를 입은 무사들을 몰아붙이는 십여명의 적의무사들 의 무공은 오히려 전포를 입은 무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때 흑의(黑衣)를 입은 천 명 정도의 인물들이 어디선가 날아들어 진형을 갖추었다. 순식간에 진형을 갖추는 움직임으로 이들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되어 있는지 알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옆에서 구경만 할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들의 몸에서 짙게 풍기는 사이한 마기(魔氣)는 결코 이들 이 정도(正道)의 길을 걷는 무리들이 아니라는 점과 그들의 무공이 약해서 이 난리통에 끼어들지 않음을 대변(代辯)해주고 있었다. 일단 전세가 완전히 가닥을 잡자 적의를 입은 무리들은 뒤로 빠졌다. 더 이 상 자신들이 손 쓸 필요를 못느낀다는 듯이.... 그들 중의 한명이 흑의를 입 은 준수하게 생긴 젊은이에게 다가간 다음 입을 열었다. "조금 늦었군." "예. 하지만 저희들이 손 쓸 필요는 없겠는데요. 해공공(海公公)" "깔깔깔... 그렇지만 그대들을 부른건... 뒤를 맏기기 위함이다. 아무래도 저 영감탱이의 수하들이 부근에 주둔하고 있다보니 황명으로 억눌러는 놨으나 아무래도 일부가 이쪽으로 몰려올 가능성이 있지. 그래 얼마나 거느리고 왔 나?" 흑의를 입은 젊은이는 귀에 거슬리는 높은 음조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미 소가 싹 겉혔다. 그 웃음에 감도는 공력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던 것이 다. '사파의 하늘이라 불리는 사천왕에 버금갈 공력이라니.... 황궁도 가벼이 볼 존재가 아니군.' 그는 더욱 공손한 어조로 반남반녀(半男半女)인 혐오스런 상대에게 말했다. "본교의 2개 대를 거느리고 왔습니다. 여기있는 천랑대(千狼隊)와 성 외곽에 서 대기중인 염왕대(閻王隊)입니다. 만약 흑풍단의 반도(叛徒)들이 몰려온다 면 염왕적자(閻王笛子)가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믿을 수 있소?" 적의인의 회의적(懷疑的)인 반응에 흑의인은 자신있게 말했다. "그럼요. 해공공. 만약 그의 힘으로 처치 못할 정도라면 이리로 도움을 청할 겁니다. 그러면 저기있는 천리독행(千里獨行)이 천마리의 늑대들을 이끌고 완 전히 끝장낼 겁니다. 하지만 흑풍단이 제가 가늠하고 있는 정도의 실력이라면 전체가 몰려온다고 해도 염왕적자의 손길을 피할수 없을겁니다. 죽음의 손길 을...." "놀랍군. 일개 방파에서 보유한 1대(隊)의 힘이 흑풍단을 능가하다니...."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원래 정보에 의하면 흑풍단의 힘은 본교의 2개 대 나 아니면 천마혈검대와 맞먹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장교들이 여기있고 수하 들만 남은 머리가 없는 짐승의 힘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지요. 본교가 10만 사파의 우두머리로 존재하는 것은 강력한 힘과 함께 정보, 그리고 책략이 없 이는 불가능하죠. 지금 가장 힘겨운 인물이 음희(淫嬉)의 손길에 녹아났으니 큰 문제는 없을겁니다. 안심하십시오. 해공공." 그러자 해공공은 흥미가 있다는 듯 물었다. "가장 힘겨운인물이라니? 옥 대장군 외에?" "저희는 이번 일에 옥대장군이 아닌 다른 한 인물을 척살하기 위해 공공을 도운겁니다. 그는 본교의 반도(叛徒)로서 아주 위험한 인물이죠." 해공공은 더욱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무공이 강한가?" "아마 지금은 저와 호적수(好敵手)를... 아니면 조금 앞선 정도일지도...." "깔깔깔... 놀라운 일이군. 벽안독군(碧眼毒君) 능비계(凌非癸)라면 사파의 사천왕으로 이름이 높은 그 유명한 극마(極魔)의 고수인데... 그 반도라는 인 물이 궁금하군. 누군가? 장인걸인가?" 능비계는 공손히 말했다. "아닙니다. 공공... 묵향이란 부교주죠." "묵향? 들어보지 못했는데..." "공공께서는 아마 못들으셨을 겁니다. 본교가 자랑하던 비밀무기였으니까 요." "비밀무기?" "예. 그의 무공은 지금 아마도 교주와 비등(比等)할 것입니다." "놀라운 인물이군. 이제부터 오천왕으로 고쳐야겠군." "아닙니다. 그는 음희(淫嬉)에게 제거되었을테니 사천왕이 맞죠." "교주 정도의 고수를 음희라는 고수가 처리할 수 있을까... 아마 음희라는 별호를 보니 미혼약(迷混藥)이나 뭐.. 음약(淫藥)계통을 쓰는 음란(淫亂)한 계집인 모양인데... 그정도로 절대고수(絶對高手)를?" "껄껄껄.... 그게 아닙니다. 그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죠." "약점?" "멍청하게도 동자공을 익힌겁니다. 그 때문에 본교에서 그를 처치하기는 쉬 웠지만 아마 다른 문파에서 그를 없애려 들었다면 그 사실을 모르기에 엄청난 피를 흘려야 되었겠죠." "동자공? 깔깔깔.... 그따위 무공을 익히려면 아예 태감(胎減)이 되어버리는 게 낫지." 이때 갑자기 외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쪽에서 엄청난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뭐?" 과연 동쪽 하늘에서 거의 빛과 같은 속도로 접근해오는 인물이 있었다. 몸에 서 금색 광채를 내고 있었기에 금빛 혜성이 달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걸 보고있던 해공공이 중얼거렸다. "금황신보(金皇神步)! 놀랍군. 미완성(未完成)의 경공술이 나타날 줄이 야...." "미완성이라구요?" "황궁 3대무공 외에도 많은 무공들이 황궁무고에 존재하지.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완전한 것들은 아냐. 일부 무공들은 창안한 자신들 조차도 공력이나 실력이 미천하여 미완성인 채로 버려진 것들이 많지. 하지만 그것들은 미완성 이니 만치 위력이 3대무공보다 떨어지기에 황궁의 무사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다구. 하지만 완성된다면 그 위력이 삼대무공에 비할바가 아니지. 그런데 저자는 누구지? 황궁에 저정도의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은적이 없는데..." "저자가 묵향입니다. 아무래도 음희가 실패한 모양이군요. 저자의 무공은 화 경 정도.... 어쩌면 최악의 경우.... 이봐!" 능비계는 하던 말을 얼버무리며 옆에 서있는 흑의인을 불렀다. 처음부터 진실 을 말해줘 해공공을 겁먹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예!" "한중평에게 염왕대를 이리 돌리라고 일러라." "존명!" "천랑검진(千狼劍陣)을 펼쳐라!" "존명!" 능비계의 지시에 따라 천랑검진이 펼쳐졌다. 검진을 바라보면 해공공은 놀랍 다는 듯이 말했다. "대단한 검진이군. 저정도 검진을 펼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모자랄지도..." "뭐?" "저자는 과거에 천랑검진을 익혔었습니다. 잘못해서 그의 기억이 돌아오기라 도 한다면...." 약간이나마 능비계의 얼굴에 공포가 스쳐지나가는 걸 본 해공공은 내심 경악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자는 능비계보다 약간 뛰어난 고수라야 했다. 하지 만 자신보다 조금 더 뛰어난 인물에게 저정도 공포를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 다. '아무래도 나한테 숨기는게 있군.... 저들의 무공으로 봤을 때 지금의 흑풍단 정도 무너뜨리는 건 저기있는 천랑대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고도 주리가 남을 지경이야. 그런데 또 염왕대까지 이끌고 왔다는 건....' 해공공이 의아심을 느끼고 있을 때 금빛 광채는 장원 안으로 돌진해 들어왔 다.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금빛 광채를 내는 괴인은 허리에서 검을 뽑아들 었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무작정하고 부딪쳐 들어오는 국광 을 보면서 두근거리던 능비계의 마음은 놓이기 시작했다. '천랑검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쪽에 승산이 있지.' 달려 들어올때까지만 해도 국광은 분노와 증오심으로 심장이 터져버릴 지경이 었다. 사방에 쓰러져있는 시체와 이제 30여명도 남지않은 흑풍단의 간부들... 그들 또한 많은 황의를 입은 무사들에게 둘러싸여 얼마 버틸 것 같지도 않았 다. 하지만 일단 검을 뽑고나자 그의 정신은 이 새로운 강렬한 마기를 발산하 는 패도적인 진세에 빠져들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흑풍단이나 옥영진 에 대한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앞에있는 먹이를 어떻게 공격하느냐 하 는 것 뿐.... 삽시간에 장내에는 검강(劍剛)과 검풍(劍風)의 회오리가 가득차기 시작했다. 해공공은 천랑대와묵향이라 불린 젊은이의 대결을 주의깊게 관찰했다. 그로 서도 만약의 경우 마교와 충돌할 가능성도 있었으므로 마교의 무학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것에 대해 믿지도 않는 신께 감사하는 심정이었다. '묵향이란 녀석은 완전히 황궁무공만 사용하는군. 정말이지 황궁의 잡학(雜 學)들이 저정도의 위력을 지닐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저자는 황궁삼대무 공은 익히지도 않은게 분명해. 그런데도 저정도의 위력이라니.... 거기에 대 적하는 천랑대도 대단하군. 천랑검진은 검진으로서는 졸작이라고 볼수있어. 기묘한 함정도... 어떤 볼만한 연수합격도 없어. 다만 그 진세 안의 인물들이 마음껏 자신의 힘을 쓸수있도록 돕고 한사람이 모든 압력을 받지않을 정도만 만들어주는.... 아주 자유스런 검진. 검진 자체의 위력은 별볼일 없으나... 그 검진을 펼치는 검수들의 실력은 상상 밖이군. 진세의 위력이 강하다면 그 검진이 깨지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려 파멸의 길로 접어들지만 저토록 검진 자체의 위력이 약하다면 저걸 부수는 방법은 오로지 검수 하나하나를 모 두 없애는 방법 뿐.... 쉬운일이 아닐거야.' 해공공이 감탄하는 순간에도 싸움은 계속되었다. 국광은 계속되는 대결로 작 은 상처들이 늘어가고 있었고 왠만한 강기나 어검술을 가미한 강력한 초식으 로도 이놈의 진법을 관통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이런식으로 시간을 계속 끌어봐야 좋을게 하나도 없는 것이 다. 마침내 그의 결정을 부추긴 것은 뒤쪽에 위치한 검수 5명이 공격해 들어 와 세군데에 가벼운 상처를 입힌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렇다면 할 수 없이.... 내가 아는한 가장 강한 초식으로.....' "이야압!!" 고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막강한 강기의 덩어리가 뿜어져 나갔다. 강기 의 덩어리와 부딪친 검수들은 피떡이 되어 흩어져 갔고 그들의 검들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쿠콰콰콰콰콰...... "크악!" "캑!" 거의 국광을 중심으로 반경 20장(60M정도) 정도가 박살이 나있었고 그 검강의 덩어리들은 200여명 정도의 목숨을 한줌 육편으로 만들어놨다. 그리고 300여 명 정도가 강기와 검풍의 회오리에 말려들어 중상을 입은 상태로 튕겨나갔다. 그걸 본 해공공이 눈을 부릎뜨며 경악성을 터트렸다. "파황천류도(破荒闡流刀)!" 능비계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파황천류도가 뭡니까?" "저것 또한 미완성의 무공.... 저걸 창안한 사람조차 이론상 가능하지만 실질 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인데.... 음...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인물이 군. 하지만 저자도 저걸 또 사용하기는 힘들거야. 저건 엄청난 내력을 필요로 하지. 어쩌면 지금쯤 약간의 내상을 입었을지도..." 수많은 검수들이 피떡이 되어 사라지며 검진이 파괴되는 그 순간을 이용해 국 광은 달려들었고 그의 어검술을 통한 초식에 많은 검수들이 저항도 못해보고 토막이 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뒤쪽에 쳐져있던 흑의를 입은 중년인이 외쳤 다. "백랑검진(百狼劍陣)을 펼쳐라!" 그와동시에 검수들은 뿔뿔이 모여 5개의 검진을 구성했다. 일단 검진이 또다 시 구축(構築)되자 국광에게 더 이상 손쉬운 먹이감은 없어졌다. 각 검진은 국광을 중심으로 주위를 포위한 채로 순서대로 공격하며 차륜전(車輪戰)을 펼 쳤다. 그들의 의도는 명확했다. 국광을 힘으로 제압하기는 힘드니 계속적으로 순서대로 충돌하여 힘을빼자는 수작이 분명했다. 국광은 또다시 한번 더 최후 의 초식을 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어찌되던 그건 별 문제가 되 지 않았다. 몸이 가루가 되도록 싸울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즐겁게 만들 고 있었다. "끼야압!" 고오오오오..... 쿠콰콰콰콰콰...... "크악!" "으악!" 처음에 한번 호되게 당했기에 그들은 국광의 검에서 사이한 푸른 광채가 뻗어 나오자 마자 뒤로 재빨리 피했으나 검강의 속도는 그들의 경공술을 앞질렀다. 하지만 처음보다 피해가 적은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걸 보고있는능비계 입장 에서는 즐거운 기분이 아니다. 마교 최고의 정예에 속하는 천랑대가 거의 궤 멸 직전에까지 다가간 것이다. 보다못한 해공공이 말했다. "놀랍군. 파황천류도를 연속해서 두 번이나 펼치다니.... 하지만 저자의 몸속 도 엉망일 것이고 내공도 크게 소모되었을 것은 당연.... 이 기회에 저자를 없애지 않는다면 천추의 한을 남길 것이오." "맞습니다. 공공.. 하지만 미리 알려드리는 것이 좋을거 같아 말씀드리는 데... 저자의 무공이 바뀌면 뒤돌아 보지말고 최대한 빨리 피하십시오." 해공공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공이 바뀌다니?" "저자는 전번에 치명타를 입은 후 기억을 잃어 본교의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 고 있습니다." 그러자 해공공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흠...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는군. 상승 무공이란 거기서 거기... 거의 백짓 장 한 장 차이도 안되지. 황궁의 무공을 쓰던 마교의 무공을 쓰던 별 차이는 없을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각성(覺醒)한다면 무공만이 아니라 자신이 이룩한 경 지까지 되찾을 겁니다. 그게 문제지요." "경지?" "예. 그자는 교주도 어쩔수 없었던 탈마의 고수였습니다." 경악한 해공공이 되물었다. "탈마? 현경이란 말인가?" "예. 현경이라고 할수도 있죠." "그렇다면 더더욱 살려보낼 수 없군." 이때 흑의를 입은 무사가 달려왔다. "아룁니다." "뭐냐? 염왕적자는 어디있냐?" "염왕대는 지금 흑풍단과 교전중입니다. 지휘자가 빠졌는데도 의외로 분전(奮 戰)하기 때문에 그들을 격멸하려면 두시진 정도는..." 그러자 분노한 능비계가 외쳤다. "갈! 너는 한중평에게 이곳이 더 위험하다고 그들을 패퇴시킨 후 추적하지 말 고최대한 빨리 달려오라 일러라." "존명!" 능비계는 명령을 받은 흑의인이 쏜살같이 멀어져가는 것을 보며 툴툴거렸다. "일이 재미없게 꼬이는군..... 이럴줄 알았으면 천마혈검대(天魔血劍隊)를 끌 고오는건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야 겠군." 해공공(海公公) 국광은 정신없이 진법이 깨지면서 허둥대는 검수들을 베고 있었다. 그런데 뭔 가 이상한 느낌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몸이 옆으로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크윽!" 급소는 피했다고 하지만 강렬한 타격이었다. '무슨 일이지.... 벽사제류강(壁邪帝流剛)을 뚫고 나에게 충격을 주다니... 설마...' 국광이 두리번거리자 저쪽에서 흑의를 걸친 한 인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자로군.... 엄청난 고수다.' 국광은 순간적으로 옆에서 공격해오는 4명의 검수를 토막낸 후 새로운 강적을 기다렸다. 그의 입에서는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력의 소모가 너무 심했어. 거기에 방금전 무형무음(無形無音)의 일격... 큰 피해는 없었지만 내장이 약간 울릴정도.... 과연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되려 나...' 이때 국광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있던 해공공이 능비계에게 말했다. "이보게. 나한테 양보할 수 없겠나?" "예?" "깔깔깔... 저정도의 고수는 흔하게 만날 수 없지. 이 기회에 본좌의 무공도 한번 점검해 보고.." 능비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해공공의 부탁을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 기 때문이다. "예.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검을 다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적의를 입은 무사가 검을 뽑아 해공공에게 건넸다. 해공 공은 검을 잡고는 방어자세도 없이 한발한발 국광에게 접근했다. 그걸 보고 능비계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도대체 뭘믿고 저러는거지? 황궁무학이라야 별볼일없는 수준.... 방금전의 그 뭐라더라 파황천류도는 대단했지만 본교의 무공보다 더 공력의 소모가 심 한 무식한 검법인 것 같고.... 승산이 별로 없을텐데.... 저녀석이 죽는건 별 로 아쉬울게 없는데.... 황궁과의 밀약(密約)은 누가 지키지?' 하지만 일단 하기로 나선이상 그가 뭐라고 제지할 입장이 아니었다. 해공공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황궁내의 실세중의 실세인 황제의 경호를 주임무로 하는 친황대(親皇隊)의 대장(隊長)이었기 때문이다. 친황대는 극소수의 막강 한 고수들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아마도 100명은 넘지 않을거라는 의견이 정보 를 관장하는 삼비대에서도 지배적이었다. 일단 국광과 해공공의 본격적인 대결이 펼쳐지자 능비계의 모든 걱정은 기우 (杞憂)였음이 밝혀졌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 괴물앞에 나섰겠지.' 해공공의 검법은 쾌(快)를 생명으로 하고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름만을 전부로 하지 않고 그 위력도 엄청났다. 해공공의 검은 푸르 스름한 광체를 띄고있어 막강한 내력이 그 와중에도 지속적으로 공급되고 있 음을 드러냈다. 거기에 기이할 정도로 빠른 보법... 국광이 점차 뒤로 밀리는 것을 보며 능비계가 경악했다. '세상에... 저런 무공이 황궁에 있었다니...' 그는 염치불구하고 옆에 서있는 적의(赤衣)를 입은 무사에게 공손히 물었다. "저게 무슨 무공입니까?" 그러자 그 적의를 입은 무사는 자못 거만스레 답했다. "저건 규화보전(閨花寶典)의 신공(神功)이오." 상대가 거만스레 답하는 걸 보고 능비계는 상대를 더욱 띄어주었다. 기분이 좋아지면안할말도 하는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한 무공이군요. 저렇게 막강한 무공이 있는데... 어찌하여 황궁에 그렇게 고수가 많지 않은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능비계의 질문에 그 적의를 입은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이유가 있지." "이유라니요?" "저 무공은 무상(無上)의 위력(威力)을 지니지만 신체적인 금제(禁制)가 필요 한 무공이오." "금제요? 아주 어릴때부터 익혀야 한다든지... 아니면 뭐 특이한 신체라야만 한다든지 그런건가요?" "아니오. 태감(胎減;거세한 남자를 이르는 말)만이 익힐수 있다 이거요. 저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사람은 친왕대의 고수뿐이오." "왜 그렇습니까? 아주 궁금하군요." "규화보전은 남자가 익히면 초반에 급속히 차오르는 음기로 인한 욕화 때문에 주화입마에 걸리지. 여자는 자신이 가진 음기에다 초기에 차오르는 강렬한 음 기가 더해져 그 극음의 상태를 견딘다는게 불가능하거든. 하지만 우리들 내시 의 경우 몸속에 차오르는 강렬한 음기를 다슬릴 양기가 내제되어 있으면서도 상승효과가 불러일으키는 욕화가 일어나지 않기에 오로지 내시만이 익힐 수 있다 이거지. 하지만 아주 위력이 강하기에 경호를 위해 밤이나 낮이나 황제 폐하의 측근에서 경호하는 친황대 소속의 내시들만이 규화보전을 익히는 특전 을 누리지. 이제 알겠소?" '크크... 그러면 규화보전을 익힌건 100명도 안된다는 소리군. 거기에 지금 말하는 자는 해공공의 발치에도 못미치는 무공을 지니고 있으니... 규화보전 이란 것도 별볼일은 없다고 봐야하나..' 하지만 내심과는 달리 상대를 칭찬하는 것으로 끝냈다. 어쨋든 고마운 정보였 으니까... "오호... 그렇군요. 오늘 안계(眼界)를 넓히는 기분입니다. 정말 대단한 무공 이군요." 그런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해공공과 국광의 대결은 극을 향하고 있었다. 그 들의 대결은 인간이 어느정도의 쾌를 실현할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국광이 사용하는 무공은 황궁무공의 정점(頂點)... 은은한 금빛을 내는 호신 강기 벽사제류강(壁邪帝流剛)에 황궁무공중 최고의 속도를 내는 금황신보(金 皇神步)를 이용한 각종 정통무학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에대한 해공공의 무공 은 전혀 황궁무학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사악(邪惡)하면서도 괴이(怪異)한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누군가 얼핏 보았다면 사파의 마두(魔頭)와 황궁의 신장(神將)이 대결하고 있다고 봐야할까... 하지만 이 대결도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둘의 실력은 거의 막상막하... 아 니 이성적으로는 아니지만 본능적으로는 거의 현경의 수준을 유지한 국광이 회피나 그 반사적인 움직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해공공이 황궁의 무 학을 자세히 알고있었기에 국광의 공격을 해공공은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 다. 거의 반시진여 동안 검이 오간 후 국광은 이 사실 하나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움직임이 읽혀지고 있다. 이런식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저 요괴(妖怪)에게 유리하다. 나에게 남은 공력은 많지 않아. 내상도 약간 있다. 이때는 비장(秘 藏)의 수법을.....' 해공공은 상대의 움직임이 약간씩 늦어진다는 점을 포착했다. '클클.... 공력을 비축하고 있군. 아마 조금 더 지나면 결정타를 날려오겠지. 그럼 어떻게 한다....' 국광의 최강의 공격법 파황천류도를 구경한 다음이라 해공공은 감히 방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보전에 기록된 최강의 호체기공 화령수라강기(花逞守 羅剛氣)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에따라 그의 속도도 조금 늦춰져 또다시 평행선상을 달리는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순간.... "끼얍!" 그와동시에 찬란한 금광(金光)이 뻗어나와 밤하늘을 밝혔다. 순간적으로 눈이 멀것같은 광채속으로 5가닥의 지풍이 해공공에게로 뻗어나왔다. 그 지풍중 3 가닥은 간신히 피했지만 2가닥은 해공공의 몸에 격중되고 말았다. "큭" 하지만 지풍들은 화령수라강기를 관통하지 못했다. 대신 약간의 충격만을 주 었을 뿐... 휘청하던 해공공은 순간적으로 자세를 가다듬으며 검초를 날렸다. "얍!" '이상하군' 그의 검초에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클클... 도망갈 생각을 하다니.' 곧이어 시력을 회복한 해공공의 눈에는 저 멀리 금광(金光)을 흘리며 멀어지 는 국광이 보였다. "받아랏" 그와 동시에 해공공이 가진 검이 허공을 향해 일직선으로 파공성을 내며 날아 갔다. 퍽! 국광은 뒤에서 뻗어오는 날카로운 예기(銳氣)에 사력을 다해 피했으나 검은 국광을 따라오더니 등을 관통했다. "큭!" 국광은 자신에게 박혀있는 검을 공력을 이용해 해공공이 장난치지 못하게 앞 으로 튀어나온 검날을 손으로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달려나갔다. "제기랄.... 두고보자...." '흐흐... 내 입속에서 두고보자는 말이 나올줄이야....' 하지만 국광으로서는 그 더러운 기분을 욕설을 내뱉는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해소할 수가 없었다. "쫓아랏!" 그와 동시에 흑의, 적의를 입은 자들이 섬전과 같이 국광의 뒤를 쫓기 시작했 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더 이상 옥영진 나으리의 저택에서는 죽일것이 없다 고 판단한 황의를 입은 자들이 뒤따랐다. 벌써 옥영진나으리의 저택에는 목 숨이 붙어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옥영진 나으리의 시신은 머리가 잘린채 구 석에 쓰러져 있었고 그를 받들던 백인대장급 이상의 장수들도 작전회의라는 미명하에 소환되었다가 모두들 척살되었다. 거기에 집안에 있는 모든 남녀노 소를 불문하고 하인들 심지어는 개까지도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다. 각성(覺醒) "제기랄... 언젠가 이런 일을 한번 당해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 하기야... 헉헉..... 이런 일을 두 번이나 당할 리가 없지. 내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군..... 제기랄.... 헉헉" 국광이 씨근벌떡 죽자고 도망치고 있었지만 흑의와 적의를 입은 자들의 추격 은 집요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국광을 향해 암기를 날려댔다. 벌써 국 광의 등짝에는 장거리의 적에게 공격하기에 알맞게 만들어놓은 5치(15Cm정도) 정도 길이의 묵직한 암기인 혈령전(血翎箭)이 5개나 박혀있었다. 물론 이것들 은 호신강기 때문에 피부 속으로 뚫고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옷에 덜렁거리며 붙어있어 여간 성가신게 아니었다. 원래가 암기란 쇠털처럼 가늘고 가벼운 흑모침(黑毛針)부터 혈령전처럼 크고 무거운것까지 수많은 종류가 있다. 작고 가벼운 것들은 보통 공력으로 날리며 대부분이 2장(6M정도)이상 떨어지면 맞을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한다. 하지만 혈령전처럼 무거운 것들은 공력과 힘을 이용해서 날리지만 무게가 있기에 대 단히 멀리 날아가며 장거리에서 도주하거나 돌진해오는 적들을 향해 사용한 다. 이걸 한두대 쏴봐야 피할 가능성이 크지만 뒤쫓는 모든 무리들이 쏘아대 다 보니 한두방은 맞을 수밖에 없었고 그중에서 공력이 높은녀석들이 쏘아대 는건 피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공력이 높은자가 쏘는건 호체강기를 뚫고 들 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 순간 또다시 뒤에서 파공성과 함께 무서운 예기가 느껴졌다. "누굴 바보로 아나?" 예기가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순간 국광은 뒤로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합!" 캉... 그와 동시에 검은 불꽃을 튀기며 튕겨나가 옆의 나무에 깊게 박혔다. 그걸 본 국광은 또다시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국광은 죽을 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이때 또다시 뒤에서 파공성이 들려왔다. '멈추지 말고 해결하자. 이런식으로 계속 멈추면 따라잡힌다.' 국광은 멈추지도 않고 달리면서 고개를 뒤로 살짝 돌렸다. 저 뒤에서 무식한 속도로 다가오는 검이 보였다. 적당한 시간을 재서 국광은 멈추지 않고 몸만 살짝 뒤로 돌려 묵혼을 휘둘러 쳐냈다. 캉... 불꽃을 튀기며 옆으로 떨어져 가는 검을 보며 국광은 신이나서 외쳤다. "크흐흐흐.... 나는 살아날 수 있어.... 억!" 풍덩! 뒤에서 날아오는 검에만 신경쓴다고 앞을 보지않은게 화근이었다. 하기야 어 두운 밤이라 거의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안보는 것 보다는 보는게 낫지 않은가. "어푸푸.... 이게 뭐야!" 묵향은 뱃속에 꼽힌 검을 간단히 공력을 운기해서 뽑아낸 다음 물밖으로 나왔 다. '몸사정이 말이 아니군....' 그 즉시 북명신공(北冥神功)을 운용하여 주위의 대지로부터 공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묵향의 몸은 투명한 청광(靑光)을 내며 그 밝은 빛이 쫓아오던 무 리들이 묵향의 위치를 포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묵향의 몸에서 청광(靑光) 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고 능비계가 해공공에게 물었다. "공공. 황궁무공 중에서 저런것도 있습니까?" "글쎄... 저건 처음보는 것 같군. 하기야 미완성의 무학들이 20개 정도 있 고... 또 황궁무고 안에있는 모든 무공을 내가 알수는 없잖아." "그렇군요...." 능비계는 좀 찝찝한 마음을 느끼며 묵향에게로 다가갔다. 어느덧 묵향의 몸에 서 뿜어져 나오던 청광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해 지금은 거의 미약한 빛만 내 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 아름다움과 괴기함에 모두들 질려 묵향의 주변에 모 여 포위하고 섰을뿐... 더 이상 접근하는 바보는 한명도 없었다. 능비계는 좀 찝찝한 마음을 느끼며 묵향에게로 다가갔다. 어느덧 묵향의 몸에 서 뿜어져 나오던 청광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해 지금은 거의 미약한 빛만 내 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 아름다움과 괴기함에 모두들 질려 묵향의 주변에 모 여 포위하고 섰을뿐... 더 이상 접근하는 바보는 한명도 없었다. 묵향은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눈채 눈치만 보고있는 흑, 적, 황색의 옷을 입은 무리들을 보며 말했다. "이런... 비겁한 자식들... 네녀석들이 쓴 방법은 내방법이란 말이야! 감히 내가 즐겨쓰는 방법으로 나를 기습해서 이지경을 만들다니..."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아리송한 말에 모두들 이상한 표정으로 옆사람의 얼굴 을 봤다. '저자식이 미쳤나?' 모두들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둠 때문에 가장 간단한 것을 한가지 놓쳐버렸다. 어느새 묵향의 상처는 다 나아버린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교주가 나 모르게 별의 별 종자들을 만들어 뒀었군. 크흐흐흐.... 감히 나한 테 검을 들이밀다니.... 거기에 추격대의 두목은 능비계인가..." 묵향은 무심히 조금 높게 쳐들었던 검을 아래로 내렸다. 천천히..... 그걸 본 능비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검을 왜 내렸을까... 검을 허리 아래로 내리는 것은 별로 좋은 자세는 안닌 데.... 거기에 검을 내리는 기세는 산악과 같이 무거운...' "피해랏" 그와 동시에 무형의 검풍이 일으키는 회오리에 늘어선 검수들은 충격을 받고 나뒹굴어지거나 튕겨났다. 그점을 놓칠 묵향이 아니다. "오늘이 네놈들 제삿날이다." 국광은 거의 빛과같은 속도로 튕겨져 나오며 검을 휘둘렀고 무시무시한 강기 의 회오리가 묵혼검을 통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아아... 또다시 무림에서 잊혀진 저주(詛呪)받은 검법이 회생(回生)하는 순간이었다. 무상검법(無上劍 法)이라 불리는.... '클클... 다강(多剛)을 응용한 통강(通剛)... 감히 나한테 숫자만 믿고 덤비 다니....' 자신을 통해 무식할 정도로 빠르게 다가오며 주변에 널린 수하들을 토막내며 접근해오는 묵향을 보고 능비계는 아찔함을 느꼈다. '글렀다. 각성(覺醒)해버렸구나. 탈마의 고수를 상대로 도주(逃走)는 불가능 (不可能).... 이렇게 되면 남은 길은 하나...' 순간적으로 능비계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으며 온 몸에서 적광(赤光)이 은은히 피어올랐다. 거기에 머리카락까지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악귀와 같은 형상을 갖춘 능비계는 몸속의 모든 공력을 뽑아올렸다. "적양신공(赤陽神功)!" 그와 동시에 두손을 모아 접근해오는 묵향을 향해 모든 공력을 다해 뿜어냈 다. 쿠아아아아.... 두손에서 붉은 강기의 덩어리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묵향은 그 강 기의 덩어리를 향해 곧장 달려왔다. 묵향은 강기의 덩어리를 피하는 수고를 생략하고 곧바로 1장 4절, 방(防)의 초식을 전개했고 그 엄청난 강기의 덩어 리는 묵향의 1장 안으로 뚫고 들어오지 못한채 좌우로 퍼져나가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능비계가 회피의 동작을 취하려 했을때는 이미 묵향은 그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그 순간 묵혼검은 푸른 광채를 내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가운데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끼얏!" 모두들 묵향의 검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거의 타오르는 것같은 강렬한 청광을 내기 시작한데다 능비계가 1초에 두토막이 나자 경악하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모든 흑의를 입은 자들은 사태가 어떤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는지깨달았던 것이다. '부교주의 기억이 돌아왔다...' 이것만으로도 그들은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묵향에 대한 숙청작업이 시작되 었을 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마교의 100위권 내의 모든 고수들과 주요 무력 세력들이 총 집합했던 사건을 그들은 기억했다. 그만큼의 준비를 해야만 감히 척살에 자신감을 가질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때는 다행히도 연이은 암습으로 큰 피해 없이 거함(巨艦)을 침몰(沈沒)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기억까지 되살아나 왠만한 방법으로는 그를 암습한다는 건 꿈에도 못꿀 것이 다. 거기에 여기까지 온걸보면 단 하나의 약점으로 꼽혔던 동자공(童子功)도 가짜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능비계까지 두토막이 나서 쓰러진 지금 그 들은 한가지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부교주님... 용서를..." 흑의를 입은 자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한 채로 그 말만을 내뱉었다. 오히려 칼들고 싸우는 것보다는 이쪽이 생존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 다. 갑작스런 사태의 반전에 당황한 쪽은 황궁의 무리들이었다. '이것들이 미쳤나? 죽자고 싸워도 시원치 않은 판에... 겨우 두목이 죽었다고 저야단이라니... 마교도 완전히 말뿐이었군.' 해공공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깔깔깔... 마교도 별거 아니군. 겨우 두목이 죽었다고 상대에게 목숨을 구걸 하다니.... 깔깔깔... 거기에 마교의 최고고수라는 자들이 쓰는 무공이 깔 깔... 저렇듯 무식하게도 정면충돌이나 일삼다니... 무예의 기본조차 모를줄 이야.... 깔깔.." 그 말에 묵향은 이 비남비녀(非男非女)는 누군지 궁금해졌다. 한수하는 작자 란 것은 그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는데 도대체가 듣도보도 못한 인물인 것이 수상쩍다. 거기에 귀에 거슬리는 고음(高音)의 웃음소리... '삼년전에 먹은게 올라오려고 하는군.... 징그럽게...' 묵향은 묵혼검에 쏟아붙던 공력을 회수하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묵혼검에서 는 더 이상의 광체가 나오지 않았다. "귀하께서는 누구십니까?" 뜻하지 않은 묵향의 정중한 물음에 해공공이 말했다. "본좌는 해공공이라고 하지." "아! 해공공 나으리시군요. 황궁에서 무림의 일에 관여를 하시다시 의외로군 요." 그 질문에 어리둥절해진건 해공공... '이놈이 지금 뭔소리를 하는거지? 무림이 황궁의 일에 관여를 한건데... 아 하... 이놈은 지금 마교와의 은원을 매듭짓는 자리니 순순히 떠나라는 협박인 가...' "깔깔깔.. 황궁이 무림의 일에 관여할 수도 있지. 서로들 관여를 안한다고 하 지만 예전부터 비밀리에 계속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거나 방해를 해오지 않았나?" 슬그머니 공력(功力)을 해공공을 향해 뿜어내며 묵향이 아직도 공손하게 말했 다. "그래요? 하지만 소인은 이번에는 황궁이 너무 깊게 관여해오고 있다고 생각 하는뎁쇼?" "흥! 황궁이 어떤일에 어떻게 간섭하던 네놈이 알바가 아냐. 무림인들은 황토 (皇土)위에 사는 신민(臣民)이 아니란 말인가?" "아닐수도 있죠." "네놈이 뭘믿고... 헉!" 펑! 해공공이 무형의 검풍에 휘말리며 중심을 잃는 그 짧은 시간은 묵향에게 해공 공을 헤치우기에 충분했다. 순간적으로 앞으로 튕겨져 나가며 진기를 극대로 뿜어넣은 묵혼검으로 해공공의 위에서 아래로 그어버렸다. "이런... 비겁한 놈... 암수(暗手)를 쓰다니.." 묵향은 발악적으로 외치는 해공공의 말을 비웃음으로 묵살하며 말했다. "원래 나는 비겁하다구. 이 바보야.네놈은 싸울 값어치도 없어. 나는 사람하 고만 싸운다구. 너같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요괴와는 싸우지 않아." 푸학! 해공공이 원래 이렇듯 간단히 죽을 위인은 아니었으나 이전에 묵향과의 대결 에서 자신이 한수 위라는 점을 확인하고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해 공공이 절명(絶命)하면서 두토막으로 쪼개지자 그 옆에있던 적의를 입은 자들 이 눈에 불을켜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묵향의 적수가 아니었다. 남은 11명의 적의인들은 간단히 토막이 나버렸고 그들을 없애버린 묵향은 하얗게 질려서 이쪽을 보고있는 황의를 입은 사내들을 쓱 둘러본 다음 흑의인중 한명 에게 말했다. "오랜만이군. 천리독행!" 그러자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가 답했다. "예." "네녀석은 나의 수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겠느냐? 아니면 교주의 개로서 영광스 럽게 여기서 죽겠느냐?" "헤헤헤... 본교는 예로부터 약육강식의 철칙을 지키는 곳. 소인이야 당연히 강하신 묵향 나으리를 모시겠습니다요." "좋아. 나를 척살하는데 너희들만 왔느냐?" "아닙니다. 염왕대도 함께 왔습니다." "좋아. 그럼 네게 한가지 명령을 내리겠다." "하명하십시오." "저 거슬리는 황의를 입은 놈들을 모두 죽여없애라." "존명! 나를 따르라." 100여명 남짓 남은 흑의인들은 천리독행의 뒤를 쫓듯 거의 700이 넘는 황의를 입은 사내들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한번도 충돌하지 않아 서로의 힘을 알수없 던 두 세력이 부딪친 다음 벌어진 것은 놀랍게도 거의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그만큼 마교의 정예는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옥영진 대장군 겨우 1명을, 그것도 엄승의 권력욕때문에 척살하면서 송은 너 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옥영진 대장군이 지휘하던 그 이름도 찬란하던 찬황 흑풍단의 일부가 그와 지휘관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인(魔人)들과 교전하여 괴멸(壞滅)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뿔뿔히 흩어졌고 옥대장군 집에 있던 백인대장급 이상의 고위 장수들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남은 찬황흑풍단 오천여명도 새로운 지휘관 엄량(嚴亮)의 능력이 너무 나 형편없음에 모두들 사퇴하고 초야에 묻혀버렸다. 엄량은 옥영진 나으리 처 럼 무공이나 능력, 황제에 대한 충성도에 의해 임명된 지휘관이 아닌 엄승의 친지(親知) 중 그래도 가장 뛰어난 무장이기에 임명된 것인데 그 능력이 흑풍 단원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흑풍단은 그 강력한 힘 덕분에 가장 위험한 곳만 골라서 보내진다고 봐야한다. 그런데 지휘관이 멍청 하면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어지니 그들이 초야에 묻힌 것을 탓할 수는 없으리라. 옥영진 대장군을 척살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금의위의 무사들 천명과 친황대의 무사 12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서 친황대는 대주(隊主) 이하 거의 모든 절정고수들을잃고 제기능을 상실했으며 금의위 또한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다. 이로서 황권을 수호하던 대부분의 세력들이 와해되었으니 그 결과는 곧 드러났다. 반란이라는 형태로.... 서경의 주인으로서 대송 영토의 3할을 다스리던 진천왕(眞天王). 그는 뛰어난 모사 순유(順誘)의 조언에 따라 황권(皇權)의 약화를 틈타 정서원수부(正西元 帥府)의 부수장 광해(廣海) 대장군과 모의하여 곽진(郭璡) 원수를 살해한 후 반란을 일으킨다. 송군의 주력은 모두 요와의 전쟁터에 파견되어 있었으므로 이번 원정에 각종 핑계로 한명의 병력도 보내지 않았던 정서원수부의 20만 정 병(精兵)을 막을 세력은 거의 없었다. 반란 앞에 모든 향방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니 반란세력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를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조정은 아쉬운 대로 몽고의 약체를 기회로 정북원수부의 20만을 뽑아내어 전 선(戰線)을 고착(固着)시키며 요와의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요와의 전쟁 은 곧이어 종결되었으나 진길영 원수와 이창해 원수는 눈물을 머금고 본국의 내란으로 처음에 세운 작전인 여진토벌계획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토벌은 고사하고 여진을 적당히 무마해 군사를 빼는 것이 더 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송화강 동쪽의 영토를 여진의 것으로 하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여 여진 을 만족시킨 후 회군(回軍)하여 반란세력과의 오랜 전쟁에 들어간다. 그들이 여진의 토벌을 안함으로 인해 집단전(集團戰)의 기법(技法)을 송요의 전쟁에 서 배운 아골타가 송이 반란진압에 정신을 못차리는 동안 여진을 통합하고 금 을 세우니 훗날 이들이 원에게 멸망할때까지 동북방의 호랑이로서 이름을 떨 치게 된다. - 부록 - ======================== 관군의 군사편제 ========================= * 황군(皇軍) : 황군이라 함은 황실 직속의 근위대를 말한다. 이들은 통상 의 무 복역을 위해 징발되어 일정기간 군복무를 하는 관군과는 달리 일정한 시험 을 통해 무술이 뛰어난 자들을 가려 뽑아서 만든 직업군인들이다. 상당한 액 수의 봉록(俸祿:월급)을 지급받기에 꽤 인기가 있는 직업이었다. 총 군세 10 만을 가지며 그들은 5개의 수도(中京, 東京, 西京, 南京, 北京 - 원체 땅덩어 리가 커서 황제와 황제에게 임명된 4명의 왕(王)들이 다스린다.) 방위와 황족 의 경호가 주임무였으나 황제의 특명이라면 그 일부가 반란진압 등을 위해 투 입되기도 했다. 그 전투력은 징집된 관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관군(官軍) : 대부분은 병역을 마치기 위해서 강제 징집된 사병들로 이루어 져 있다. 그들을 시험을 통해 엄선된 군관(軍官) 나으리들이 각 계급에 따라 그 수만큼의 사병들을 지휘한다. 관군은 중앙군인 어림군과 향방군으로 나뉘 며 중앙군은 통상 수도 주변과 국경에 주둔하고 있다. * 대비군(對備軍;예비군) - 각 관청에 소속되며 농한기에만 군사훈련을 받는 다. 전쟁이 벌어지면 출동하게 된다. 이들은 향방군이나 어림군의 지휘관에게 배속되어 지휘된다. * 향방군(鄕防軍;지방군) : 각 관청에 소속된 군졸들로서 지금의 경찰과 마찬 가지로 전투보다는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각 왕들이 다스리는 지방정 부(왕부:王部)의 지시를 듣게된다. 이들은 지방정부로부터 약간의 봉록을 받 는 직업군인이 다수 존재하며 다소 나이가 많아 전투에 부적격한 자들이 투입 된다. * 어림군(禦臨軍=중앙군) : 향방군과는 달리 각 장군들이 지휘하며, 순전히 전투를 위해 존재하는 군대다. 이들은 국경을 위시하여 각 지방의 중요 거점, 수도 외곽을 방위하기 위해서 주둔한다. 중앙군은 황제가 통솔하는 중앙정부 의 명령만을받으며 그 수는 112만에 달한다. 어림군 안에는 10만 정도의 직 업군인들로 이루어진 군대와 5만 정도의 외인군(용병)들도 있으며 그 전투력 은 통상의 어림군보다 강하다. 어림군은 각 지방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 지들이나 변경의 요새들에 주둔한다. 이이제이(以夷除夷 - 오랑캐로서 오랑캐 를 제압한다.)의 원칙에 따라 교묘한 외교정책으로 국경을 접한 오랑캐들을 적절히 다스려 그들이 연합하지 않고 서로 다투도록 만들어, 오랑캐들의 세력 이 강대해지는 것을 억제하고 있었다. 중앙군의 최고 계급은 원수, 대장군, 상장군, 장군의 4계급으로 구분되며 5명의 원수가 각각 20만명씩의 중앙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면 그 지역의 향방군 과 대비군(예비군 : 각 관청에 소속되며 농한기에만 군사훈련을 받는다. 전쟁 이 벌어지면 출동하게 된다.), 타 지역에서의 지원군을 통괄 지휘하게 되므로 어떤때는 100만에 가까운 군세를 1명의 원수가 지휘하기도 한다. * 그리고 더불어 명심할 점은 이 무협소설은 시대상황을 억지로 설정하여 일 부러 틀에 넣지 않았으므로 그 관제나 직위등은 모두다 역사에는 없음. 중앙군 - 육군 북동원수부(여진과 고려에 대한 대비 및 북경 외곽 수비) 북경에 기지를 둠. 정북원수부(북방의 몽고족 등 유목민족들에 대한 대비) 하남성 북쪽 낙양에 위치. 중앙원수부(직업군인과 외인부대 등 특수부대들로 이루어진 기병대로 황궁(중경) 외곽 수비 및 주력 전투군) 중경 - 섬서성(陝西省) 남쪽에 위치한 장안(長安) 정서원수부(서경 외곽 수비와 천산 북로 방향의 오랑캐 대비 ) 서경에 기지를 둠. 동남원수부(동경, 남경 외곽 수비와 남만족에 대한 대비) 해군 17개 수영, 각 수영에는 100-150척 정도의 각종 전투함 및 지원함과 1만명 정도의 수병이 있다. 각 수영은 장군들이 지휘. 주요 하천과 수로, 해로를 방어하며 각 지방에서 수도나 각 관 청, 군기지로 물자를 실어나르는 보급선들의 보호가 주임무. 평 상시에는 심심풀이로 해적 소탕도 한다. 중요 해상거점인 경우 정기적으로 전투함을 보내 순찰하지 않고 아예 요새를 건설하고 수영에서 일부 전투함을 차출하여 주둔시 켜 두기도 한다. 각 수영에는 조선소와 대장간 등이 있어 필요 한 무기나 함선을 제작하여 자체 조달한다. 그 때문에 인원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장비는 수영의 사령관이 누구냐에 따라 그 장비의 충실도에서 차이가 생긴다. (해군장교는 특별히 따로 양성되지 않고, 육군장교들 중에서 일부가 해군장교로 보내진다.) ================ 찬황흑풍단(讚皇黑風團) ====================== 단장 : 옥영진 대장군. ---> 황궁오대고수의 첫째 부단장 : 옥염왕(玉閻王) 마길수(馬吉壽) 상장군 --> 황궁오대고수의 네째 제사천인대 대장 : 관지(關知) --> 황궁오대고수의 막내. 사삼 : 맹각(孟覺) 사육 : 국광(菊狂) -> 알 수 없는 녀석. 사육삼 : 냉비화녀(冷飛花女) 마화(馬花) 검 손잡이 끝에 붙은 붉은 수실 끝 에는 비취로된 작은 꽃송이가 매달려있음. 사육칠 : 창룡객(蒼龍客) 임충(任充) 무림에서 제법 이름을 날린적도 있는 검 객 청성파(靑城派) 출신 사육이 : 정상(鄭想) --> 꽤나 전투를 좋아하는 미친녀석.. 사육구 : 차임(車林) 제일천인대장 곽가(郭苛) 제삼천인대장 순욱(純旭) 제팔천인대장 장각(張角) -> 꽤 정통적인 의리의 사나이. 제십천인대장 노영(盧英) 제칠천인대장 공지(孔知) --> 호색한.(그냥 양념으로 넣은 인물.) 칠삼사 십인대장 장패(張覇) 흑살천마진(黑殺千馬陣) 금의위(禁義委) : 수장은 대영반 --> 황궁오대고수의 둘째 엄승의 공작으로 퇴진. 황실 최대의 정보단체로 고수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주로 모반에 관계 된 죄를 처리한다. 대영반은 그 강력한 힘에 의해 황제의 최고 측근이 임 명되며 모반에 관한 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진다. 제 3 장 : 복수의 장 날개를 펴는 묵향 금의위의 위사들을 천랑대가 학살하는 모습을 보면서 묵향은 생각했다. '역시 아무래도 세력이 좀 더 있어야 해. 예전에 교주가 나한테 그랬었지. 나 는 독보강호(獨步强豪)는 가능해도 무림재패(武林制覇)는 불가능한 위인이라 고.... 나도 이럴 생각은 없지만 내가 복수하고자 하는 상대들이 거대 문파를 거느리고 있고 또 그들이 나와 단독대결을 벌여줄 가능성이 없는이상 나도 세 력을 거느려야만 해. 우선 한중평까지 끌어들인 후 계속적으로 마교의 오대세 력(五大勢力)을 본인이 흡수해 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천리독행이 묵향의 앞에 부복(俯伏)하며 말했 다. "모두 처치했습니다." "좋아. 이제 염왕적자에게로 가자." "저..." "뭔가?" "옥 대장군 관저(官邸)에 본대의 부상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거두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까?" "얼마나 있나?" "거의 500명 정도..." "그럼 수하들을 보내 그들을 수습하여.... 가만있자... 어디를 본거지로 삼는 게 좋을까?" "300리(90Km정도)떨어진 곳에 흑룡문(黑龍門)이 있습니다. 아쉬운대로 그들 을 접수하심이 어떨까요?" "좋아. 수하들을 수습하여 그곳에서 합류하기로 하지. 부상자가 그렇게 많다 면 자네가 직접 지휘하도록." "존명!" "염왕대의 위치를 아는자가 있나?" "예." 천리독행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진철(眞鐵)!" 그러자 뒤쪽에서 흑의인이 쏜살같이 날아와 부복하며 외쳤다. "옛!" 묵향은 그 진철이라 불린 흑의인에게 말했다. "너는 본좌에게 염왕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존명!" 묵향은 진철을 따라 몸을 날리며 천리독행에게 말했다. "흑룡문에서 만나자. 본좌가 도착하기 전까지 접수를 완료하도록!" "존명!" 그들이 달려간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앞쪽에서 많은 수의 흑의인들이 최대 한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훗. 저쪽에서 찾아오다니 일이 편하게 됐군." 묵향과 진철이 잠시 기다리자 주변에 흑의인들이 병장기를 뽑아든채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묵향이 말했다. "염왕적자!" 상대로부터 아무런 답이 없자 묵향은 다시 한번 더 외쳤다. "염왕적자! 네놈은 본좌가 누군지 잊었나?" 그러자 묵향 앞쪽의 흑의인들 뒤쪽에서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훗! 회음전성(回音傳聲) 따위 얄팍한 술법을 쓴다고 본좌가 네녀석의 위치를 모를 것 같은가? 네녀석은 둘중 하나만 선택해라. 본좌를 따르던지 아니면 교 주의 충실한 개로서 여기서 영광스런 죽음을 맞이하든지..." 회음전성이란 기를 이용하여 음을 굴곡시켜 동(東)에서 말한 것이 서(西)에서 들리도록 조작하는 고차원적인 기술이다. 그런데 그걸 바로 지적하자 상대의 경악스런 목소리. "헉! 기억을 되찾으셨습니까?" "물론... 천리독행은 나와 함께하기로 했다. 이제 너의 선택만이 남았다." "그는... 천리독행은 어디 있습니까?" "부상자들을 수습하러 대장군 저택에 간다더군. 참내... 마교가 아무리 썩어 도 겨우 대장군부 하나를 부수는데 천랑대 전력의 9할이 부숴지다니.... 믿어 지지가 않는 일이야." 그러자 경악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 "예?" "선택하라. 지금 죽을건지. 아니면 따를건지." 사실 묵향이 정파의 고수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들은 철혈의 세계에서 자라온 강자들...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묵향이 마교의 부교주라는 점을 들고나온 이상.... 이건 어디까지나 교내의 권력투쟁이 되는 것이다. 이 때는 좀 더 강한자 밑에 들어가는 것이 여러모로 봐서 자신들에게 낫다. 무엇 보다도 묵향이 마교가 낳은 최강의 고수라는 사실은 변할수 없는 진실이기 때 문이다. 일단 마음이 정해지자 그는 묵향앞으로 튀어나갔다. 놀랍게도 그는 목소리와는 달리 묵향의 오른쪽에서 나와 부복(俯伏)하며 외쳤다. "따르겠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절대 후회는 없습니다. 본교를 접수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겠지. 더불어 지난날의 복수도 해야할거고.... 하지만 밑의 인물들에 게 죄는 묻지 않겠다. 사실 너희들이 그때 나를 암산하는 것을 도운게 너희들 의 뜻이 아님을 본좌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무기를 들고 포위하고있던 모든 흑의인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놓고 부 복하며 외쳤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염왕적자!" "예." "모두들 대장군부로 가서 천리독행을 돕도록 하라." "존명!" 염왕대와 천랑대는 대장군부에서 부상자들을 수습하여 흑룡문으로 향했다. 그 러는 도중에 묵향은 천랑대가 괴멸적인 타격을 받은 것이 자신이 한 일이라는 것을 듣고 놀랐다. "모든 것이 내가 한 일이라고?"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묵향은 망연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제기랄.. 나는 암습을 당한 다음 국(菊)이 나를 이끌고 물속으로 들어간 것 까지 외에는 기억나지 않아. 참. 그러고 보니 그건 총타 부근에서 벌어진 일 인데... 여기는.." 그러자 천리독행이 신중하게 말했다. "속하도 자세히는 모르나 부교주께서는 암습을 당하신 후 옥대장군가 사람들 에게 구조되어기억을 잃은 채 찬황흑풍단에서 일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에 옥 대장군을 척살하는 사건에 연루되신겁니다. 부교주께서 기억을 잃으신 다음 무공이 감소된 것을 아시고 교주께서 능비계 부교주에게 천랑대와 염왕 대를 주어 부교주를 없애라는 명을 내리신거죠. 그런데 도중에 부교주께서 기 억을 되찾는 바람에 능비계 부교주가 사망했는데..... 중간의 기억을 또다시 잃으셨다니 하늘의 뜻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기억이 나시겠 죠." "크흐흐흐... 그따위 기억 없어도 상관없어. 무림인으로서 관부(官部)의 개가 되었던 것이 뭐 자랑이라고 그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겠나. 우선은 힘을 비축하여 새로운 역사를.... 피(血)의 역사(歷史)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마인 (魔人)의 도리(道理). 기왕에 잃은 수하들은 어쩔수 없는 노릇이고 남은 부상 자들만이라도 완쾌시켜 전력에 보탬이 되도록 해라." "존명!" 흑룡문은 흑도계열인 문도수 삼천 정도의 제법 큰 방파다. 묵향 일행이 그들 을 택한 것은 자신이 거느린 삼천에 가까운 식솔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그 럴듯한 보금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흑룡문도 주위에서는 알아주는 문파였 으나 마교의 정예앞에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간단한 싸움으로 항복하고 묵향의 수하가 될 것을 맹세하고 만다. 묵향으로서는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묵향은 타고난 무인(武人)이라 여태껏 수련에만 전념해 왔었는데 반란도배(叛 亂徒輩)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자니 별의별 잡일을 다 떠맏아야 했던 것이다. 식량, 의복, 무기 등이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천의 문도를 거느린 방파라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그 모든 것은 서류라는 형태로 묵향에게 돌아왔다. 묵향의 밑에 있는 천랑대나 염왕대의 경 우 무인들로 구성된 집단들... 막강한 힘은 있으나 경영에 관한 머리는 깡통 이나 다름없기에 묵향으로서는 아쉬운 대로 흑룡문주 흑수마령(黑手魔翎) 갈 파(葛把)에게 경영을 맏겼지만 백지나 다름없는 그가 옆에서 보기에도 갈파또 한 영 아니올시다 였던 것이다. 그래서 묵향은 이 중대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 해 천리독행과 염왕적자, 갈파를 불러들여 회의를 열었다. "아무래도 경영의 귀재를 영입해야겠어." "맞습니다. 모두들 검밖에 모르는 돌머리들 뿐이니...." "왜 본교가 근래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지 지금에야 알것같 더군. 혁무상 그녀석이야." "적미살소 혁무상 장로 말입니까?" "그래. 나한테도 그런 머리좋은 녀석이 하나 필요해. 어디 괜찮은 인물이 있 다면 천거를 좀 해주게. 내가 책임지고 끌고올테니까." "그럼 혁무상을 납치해오면 어떨까요?" "그건 별로 좋은 의견이 못돼. 그녀석이 자결이라도 한다면... 거기에 성심껏 협력할지도 의문이고.." "무공을 몰라도 상관없습니까?" "뭐... 무공이야 몰라도별 상관없지. 나는 무공실력을 원하는게 아니라 머리 를 원하는거야." "그렇다면 괜찮은 인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포섭하기는 힘들겁니다." "누군가?" "진량산 부근에 보면 천륜장원이 있는데 그 장원의 주인이 꽤 실력자라고 들 었습니다." "장원의 주인? 그럼 무림인인가?" "아뇨. 무림인은 아닙니다. 적당한 땅을 가지고 있고 상행위도 약간 하는데 그 장원의 주인이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들었습니다." "흠.... 그는 안돼." "예?" "무림에 뜻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놔두는게 좋아. 피의 법칙이통하는 무림에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겠지. 그거 말고 예전에 망한 단체 의 제정을 맏았다든지... 뭐 그런 인물들 중에 뛰어난 자는 없나?" "아. 한명 있습니다. 예전에 천마문(天魔門)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알력이 생 겨 쫓겨난 인물이 있습니다. 천마문이면 그런대로 흑도 계열에서도 1만의 문 도를 거느리는 큰 문파인데다 거기서 문상(文相)의 직위에 있었던 설무지(설 무지(雪無知)란 인물입니다. 이름은 호(湖)인데 익히면 익힐수록 더욱 모르는 것이 많더라고 하여 자신의 무지를 한탄하여 자를 무지(無知)라 붙인 인물입 니다." "구미(口味)가 당기는군." "그때 쫓겨난 다음 칠야산(柒倻山)에서 은거하고 있다고 그러더군요." "좋아. 그자로 하지. 내가 돌아올 동안 저놈의 흑룡문 현판은 떼버리고... 흑 룡문은 약간 정파같은 냄새가 나서 영 껄끄러우니까 아무 이름이나 적당한 걸 로 현판을 걸어놓도록!" "존명!" 이때 갈파가 말했다. "그런데... 부교주님." "왜그러나?" "소인이 깔아놓은 정보망에 걸린 건데.... 부교주님의 기억에 없기에 지금은 별 문제될 것이 없으나 나중에 기억이 돌아온 다음에...." 서론이 길어지자 짜증이난 묵향이 말했다. "무슨 일인지 서론은 빼고 결론만 말해!" "옥영진을 구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염왕대와 충돌했던 흑풍단의 일부가 반도 라고 규정되어 관군(官軍)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그들을 도와주심이 어떨는지 요." "내가 왜 그들을 도와줘야 하지?" "아마도 그들중에는 부교주님과 친했던 인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기 억이 돌아오신 다음 후회해도.." "알겠다. 그들은 지금 어디있나?" "확실하지는 않으나 관군에게 쫓기면서 지금 감숙성의 무산(巫山) 부근에 있 다고 합니다. 체계적인 정보조직이 없기에 들리는 소문만을 종합했기에 정확 한 것은 가봐야만 알것입니다." "흠...." 그러자 천리독행이 말했다. "만약 구하러 가신다면 수하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아니야. 그럴필요는 없어. 괜히 그러면 관부와 충돌이 생기니까 혼자가기로 하지. 대신 나는 바로 그리로 갈테니까 군사(軍師)를 호위할 수하들은 10명정 도 데려가기로 하지. 천리독행! 눈치빠른 놈들로 부탁하네." "존명!" 이때 갈파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부교주님의 무공으로는 별 필요없겠으나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돌아와야 하 는 일입니다. 혼자 가시겠다면 이게 필요할겁니다. 그냥 들판에 뿌리기만 하 시면 됩니다." 묵향은 그 주머니 위에 써진 글자를 읽어본 다음 언뜻 이체가 떠오르며 말했 다. "이런것도 있었군. 잘 쓰겠네." "감사합니다." * * * * * * "이런 빌어먹을... 칠야산이 이렇게 넓을줄은 생각도 못해봤군." 묵향은 벌써 10인의 호위무사를 거느린채 4일째 수색중이었다. 칠야산 곳곳을 이잡듯이 뒤져댔지만 찾으려는 인물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행방 이 묘연하다. '칠야산에 불을 지르면 숨이 막혀서 튀어나올까...?' 급기야는 짜증스러움에 이런 망상(妄想)까지 하게 될때쯤... 동쪽을 살펴보러 갔던 수하가 달려와서 묵향의 앞에 부복하며 외쳤다. "찾았습니다." "그래? 가자!" 자그마한 모옥(芼屋)... 그 모옥을 중심으로 묵향의 신호에 따라 사방에서 수 하들이 몰려들었다. 모든 수하들이 도착한 다음 묵향은 그들을외곽에 놔둔채 혼자만 모옥으로 다가갔다. 그런다음 모옥앞에 이르러 부드럽게 외쳤다. "계십니까?" "......." "계십니까? 저는 묵향이라 합니다." 아무런 답이 없자 묵향은 조심스레 다가가 문을 열어봤다. 안에는 아무도 없 었다. 대신 방안의 공기가 절대 폐가가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거기에 덧 붙여 황급히 떠난 듯 살림살이도 거의 다 있었고 일부만이 어지러이 방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몇시진 전까지 사람이 있었다. 볼일이 있어 딴곳에 갔나? 아니면 저놈의 마 기를 풍겨대는 수하놈들 때문에 겁먹고 도망가버렸나.....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군.... 쯧쯧' 묵향은 멀찍이서 기다리고 있는 수하들을 원망스레 바라보다가 생각을 돌렸 다. '일단 겁을 먹었다면 어쩔 수 없다. 편지나 남겨두고 돌아간 다음, 다음에는 혼자 와서 뒤져보는 수밖에. 강한건 좋은데 모두들 마기를 안풍기는 놈들이 없으니... 그래서 사군자는 일부러 마기없는 놈들만 넣은거였는데...' 묵향은 주인도 없지만 실례를 무릎쓰고 방안에 놓인 지필묵(紙筆墨)을 이용해 서 그럴듯한 편지를 한 장 남겨둔 다음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주변에 남으면 아마도 감시중일게 분명한 상대가 더욱 조심할 것이 염려되어 아예 모 두를 이끌고 마을로 내려가버렸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묵향은 수하들을 이끌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그런다음 모옥에서 50장(약150M) 밖에 그들을 대기시켜 둔 후 모옥으로 향했다. 모옥에 도착해보니 모옥 앞에있는 밭에서 한 남자가 곡괭이를 들고 밭을메고 있었다. 묵향은 그에게 다가갔다. 한 50살은 되었으리라... 희끗한 수염에 얼굴 곳곳 에 새겨진 세월의 상처들이 그의 경륜을 나타내는 듯 하다. 맑고 잔잔한 눈에 적당히 솟아오른 콧날... 확실히 농부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지적인 얼굴이다. 묵향은 그가 일을 마칠때까지 그냥 옆에 서서 기다렸다. 이윽고 곡괭이 소리가 멈추더니 그 농부는 묵향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도 들시겠소?" "예." 농부는 부엌에 들어가더니 손수 차를 준비해 왔다. 묵향이야 별로 차를 즐기 는 인물은 아니었기에 그런대로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정도로만 행동하며 차를 마셨다. 그런 의미에서 유백 사부는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던 것이다. 조용히 차를 마시는 묵향을 바라보며 농부는 생각했다. '알수가 없군. 차를 마시는 모양으로 보아.... 결코 교육을 잘 받은 사내는 아니다. 타고난 무골처럼 행동하지만 겉모습으로는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 으니.... 거기에 저 칙칙한 눈동자.... 결코 정도를 걷는 인물은 아닌가.... 아니야.. 계속 보니 그냥 칙칙한게 아니군. 맑지만 너무나 깊다보니 칙칙하게 느껴지는... 그렇다면..?' "손님께서는 어떻게 오셨는지요?" "이미 편지를 통해 아시겠지만 저는 설 대인을 애타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거느린 식구가 많다보니 먹여살리기도 힘들고 또 효과적으로 이들을 통 제해 나갈 인물이 절실한 실정입니다. 설 대인의 뛰어난 능력을 저와 함께 꽃 피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함께 꽃피워 뭘하자는 것입니까? 무림통일? 대문파로 키우는 것? 도대체가 알수가 없군요." "뭐가 말씀입니까?" "저도 관상(觀相)을 볼줄 압니다. 하지만 당신은 피비린내 나는 무림과는 별 로 상관이 없다고 보고.... 더구나 무림통일따위 허황된 꿈을 쫓을 인물도 아 닌 듯 한데...." "우선 저는 작은 꿈을 이루려 합니다. 나머지는 그 후에생각할 문제죠." "작은 꿈이라니요?" "사적인 저의 자그마한 복수입니다." 그러자 설 대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복수라구요? 겨우 하찮은 복수따위를 해주자고 자신의 인생을 맡 길 인물도 있을까요?" "하하하.. 그것도 상대 나름이죠. 저의 상대는 마교.... 아니지 어쩌면 무림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합니다. 그들을 부수려면 너무나도 큰 힘이 필요하 고... 그런 힘을 효과적으로 이끌 능력이 제겐 없습니다. 힘을 빌려주지 않으 시겠습니까?" 그러자 설대인은 아연한 표정으로말했다. "작은 복수가 아니군요. 어쩌면 세상을 뒤집을 일인데.... 과연 당신에게 그 런 능력이..." 그의 말에 묵향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미 마교가 가진 드러난 힘의 4할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마교의 인물. 천마(天魔)의 법칙(法則)을 잘 알기에 승산이 없는 대결은 피하는 사람 이니 저를 믿어주실수는 없을까요?" 묵향의 말이 떨어지자 설 대인은 경악했다. '드러난 힘의 4할이라고? 그러면 왠만한 문파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피로 물 들일 힘이로군. 놀라운 인물이로다. 그런데 전혀 마인처럼 보이지가 않으니 도대체 어느정도로 수련을 쌓은 인물인지 상상도 가지않는군.' 묵향은 그가 경악한 표정으로 말이없자 다소곳이 말했다. "지금 결론을 내리기 어려우시다면 며칠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한 일주일 정 도 시간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야 별수없다. 눈앞의 인물이 별볼일없는 인물도 아니었고 또 자신또한 죽는 그날까지 초야에 묻혀지낼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모사 (謀士)란 주인을 잘 만나야 그 능력을 꽃피울수 있다. 자신의 느낌으로는 그 런 인물이 눈앞에 있는 흑의인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소인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삼고초 려(三顧草廬)를 하시겠다니...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으리를 모시겠습니 다." "감사하오." "소인에게는 자식이 둘 있습니다. 둘다 멍청하지는 않으니 속하와 함께 거두 어 주실수는 없겠습니까?" "좋소. 능력있는 자는 아무리 많아도 부담이 되지 않는 것. 좋을대로 하시 오."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설무지는 신형을 날려 뒷산으로 날아갔다. 보통 인물들이 봤을때는 꽤 괜찮은 신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무공에 대한 성취는 학문에 못따라가는 모양이군. 하기야 말이좋아 팔방미인 (八方美人)이지.... 오히려 여러 가지를 조금씩 아는 자 보다는 한가지에 정 통한 자가 더욱 필요하지. 한평생을 바쳐 한가지도 이룩하기 어렵거늘... 수 십가지 재주를 모두 꽃피울수는 없지.' 조금 시간이 지나서 설무지는 두명의 자식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한명은 조금 병약해보이는 사내였고 또 한명은 그런대로 튀지도 빠지지도 않는 얼굴을 가 진 여자였다. 둘다 무공은 겉만 핥았을뿐... 진수(眞髓)를 맛보려면 애시당초 그른 인물들이었지만 묵향에게는 그런 그들이 자신에게 너무나도 필요함을 한 눈에 알수 있었다. 설무지는 둘에게 말했다. "주군(主君)이시다. 앞으로 충성을 다해 모시도록 해라." "예." "이 아이는 설민(雪旻)이라 하옵고 이 아이는 설령(雪 )이라 합니다. 예로부 터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있습니다. 실지 무림사(武林史)를 거슬러 보 면 영웅(英雄)은 목적한 바를 이룬 후 끝까지 영화(榮華)를 누렸으나 그를 도 운 모사(謀士)의 말로는 비참하게 끝난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주군을 받듦에 있어 제 생을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제 능력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보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나중에 남은 것이 죽음이라 하 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무지는 품속에서 비수(匕首)를 꺼내어 그의 머리카락과 그 아이들의 머리카 락을 조금씩 잘라 묵향의 앞에놓으며 말했다. "언젠가는 주군이 저희들의 목숨을 원할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여태껏 있어왔던 역사의 순환... 저는 그걸 지금도 거스릴 생각이 없고 앞으로도 없 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생명(生命)이니 나중에 일이 끝난후 실물(實物)을 취해가셔도 저로서는 제가 지닌바 모든 능력을 다할수만 있다면 아무런 여한 이 없다는 점을 여기서 밝힙니다. 대신에 주군께도 그만큼의 신뢰(信賴)를 부 탁드립니다." "좋소. 내가 아무리 사냥감이 없어져 배가 고파도 그대들을 삶아먹을 생각은 없지만 그대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그 뜻만은 받아들이지.... 여봐라." 묵향의 부름이 있자 50장(150M정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와 부복하며 외쳤다. "예" "일단 도착할때까지 이들의 몸에 티끌만한 상처라도 생긴다면 너희들의 목숨 으로 그 죄를 묻겠다. 이들의 경호에 최선을 다하라!" "존명." "너희들은 군사(軍士)를 모시고 돌아가라. 나는 일이 있어 따로 행동하겠다." "존명!" 묵향이 갑자기 군사(軍師)라 칭하는 것을 보고 설무지 등은 놀랐다. 사실 그 들에 대해 아는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상태에서 보자마자 그 직위를 결정해서 준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커다란 신뢰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주군께서는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흠....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오. 좀 쑥스러운 말이지만 날 아는 사람 들을 좀 데리러 가는 길인데.... 나중에 본거지에 도착해보면 자연히 알수 있 을거요. 그럼 나는 가볼테니 가는길에 몸조심 하게나." * * *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과거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찬란한 제국인 조선과 고 구려를 막기 위해 건설했다. 그런데 일단 세우고 나니 기마민족(騎馬民族)이 라 기동력이 뛰어나 방어에 곤란을 겪었었는데 그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됨 을 보고 거기에 재미를 붙여 점차 서쪽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북성(河北省)의 윗부분 동쪽 끝 바다에서 시작하여 산서성(山西省), 섬서성 (陝西省)의 북단(北端)을 지나 길쭉한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끝까지 이어져 거의 만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건설하게 된다. 티벳에 근거를 둔 서융족(西戎族)이나 여타 남만족(南蠻族)들은 기마민족이 아니었기에, 건설하는데 있어 엄청난 국고(國庫)를 낭비하는 장성을 더 이상 확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만리장성은 감숙성을 지나 청해성 윗부분 에서 끝을 낸다. 대신 청해성, 사천성(四川省), 운남성(云南省)에는 만리장성 에 비해서는 강도가 많이 떨어지는 방어선(防禦線)을 가지고 있었고 이정도로 도 그들을 물리치는데는 충분했다. 감숙성(甘肅省)의 성도(省都)이자 최고의 군사도시 난주(蘭州)로 뻗어있는 잘 발달된 관도(官道)를 따라가다가 보면 난주로의 관문이라 부를만한 무산(武 山)이 나온다. 이것은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무산(巫山)과는 달리 산이 아니 라 서부 장성에 군수물자(軍需物資)를 공급하는 보급의 통로이자 거대한 상업 도시 이름이다. 무산 방향으로 흑풍단이 이동중이라는 것은 즉 그들이 감숙성 을 지나 청해성(靑海省)의 산골에 들어박힐 생각이던지 아니면 좀 더 나아가 북방의 이민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세운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없는 청해성을 지나 티벳쪽으로 이동할 생각임을 엿볼 수 있다. 티벳은 산이 많고 지형이 험준(險峻)하기에 아마도 그들이 자그마한 요새를 건설하고 새로이 정착하기에 알맞을 것이다. 괜히 몽고같은 평야에 정착하면 목초를 하기에는 비교적 유리할지 모르지만 흑풍단이 원체 이번에 해놓은 짓 거리가 있어서 몽고인들이 잘먹고 잘살라고 가만 놔둘 가능성이 없었다. 이정 도가 관도를 따라 말을 달려오며 묵향이 생각한 전부였다. 이제 시간도 적당히 점심시간을 넘어가고 있었고 때마침 작은 촌락이 나왔기 에 묵향은 주저않고 객점을 찾아들었다. 자그마한 마을치고는 꽤 많은 식당과 여관(旅館)이 있었기에 묵향은 그중 그런대로 큼지막한 곳에 들어갔다. 묵향 도 이제는 무림 초출이 아닌만큼 객점에 들어서자마자 암암리에 신경쓰고 싶 지 않아도 모든 분위기가 느껴졌다. 비록 챙이 깊은 죽립을 쓰고있어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에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모든 분위기 가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식당은 작지않은 규모인데도 꽤 붐비고 있었고 묵향은 그중 한 자리를 차지하 고 않아 간소한 음식을 시킨다음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때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처음 들어설때부터 이 식당안에서 최고의 고수라고 생각되는 인물이 앉은 자리일 것이다. 그 때문에 묵향이 그들을 정 면으로 보는 자리에 앉았으니까... 이때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묵향의 정신을 그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한 소녀의 음성이었는데 거기있는 한 단어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오빠는 왜 흑풍단이 있는곳에 가려는거죠?" 그러자 제법 위엄을 가장한 점잖은 듯한 목소리. "그야 그들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이지. 나는 연(蓮)아가 생각하는 대로 멍청 하게 그들을 도와 싸우러 가는게 아냐. 그들에게 한가지 조언을 해주려고 할 뿐이야." 그러자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여자의 목소리는 처음것과는 달리 조금 더 차분하다는 점이 달랐다. "뭘요? 지금 그들의 진로를 보면 아마 티벳으로 갈거 같던데요?" "언니 말이 맞아요. 티벳은 산세가 험해서 숨어들기도 좋잖아요. 그렇다고 남 만쪽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면 사천성이나 운남성(云南省)쪽으로 갔을거 아니 에요?" "바로 그거야. 그게 문제라는거지." "뭐가요?" "만약 그들이 산세가 험한 청해성이나 사천성에 그냥 숨어있다면 모르겠는데 티벳으로 도망가면 오히려 더 위험하게 되지." 그러자 좀 의아해 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서요. 국외로 도망치는게 더 안전하잖아요?" "그게 아니야. 너는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고 있어. 그들이 국내에 숨는다면 이건 송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겠지?" "예." "지금 그들을 격파할 만큼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원수부(元帥府)가 있냐?" "무슨 말이에요? 오대원수부(五大元帥府)의 군사력은 최강이라구요." 그러자 거만한 목소리가 뽐내듯이 들려왔다. "쯧쯧... 평상시는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지. 지금 어림군(禦臨軍)의 군 사력은 거의 대부분 요와의 전쟁에 출동해있지. 그러니 남은 군사력은 거의 없다고 봐야돼. 지금 어림군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곳은 정북원수부와 정서원 수부 뿐인데... 정서원수부는 들리는 소문으로 남만족과의 사이도 안좋고... 또 산적토벌 등으로 병력을 뺄수 없어서 대요전쟁에도 참가안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정북원수부 뿐인데 그 20만 정예군을 빼버린다면 만약의 사태에 요 와의 전쟁이 힘들어지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할거야? 그렇다고 향방군(鄕防軍) 을 동원하자니... 그들의 힘으로는 흑풍단을 막을 수 없지. 거기에 각 군영 (軍營)에 있는 장수들이 안그래도 대부분의 병력이 요와의 전쟁에 보내진 마 당에 몇 안남은 수하들을 잃고싶겠어? 그냥 쉬쉬하며 모른척 하겠지. 하지만 그들이 티벳으로 도망치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진다구. 먼저 티벳쪽에 압력만 가하면 되는거야. 만약 그들의 목을 가져다 바치지 않으면 전쟁을 벌이겠다 고.... 그러면 티벳에서는 고수들을 모아서 그들을 토벌할거고... 오히려 국 내에 남은것만 못한 사태가 벌어진다 이말이야." 그러자 그 목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야유하는 듯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와... 오늘 오빠 너무 무리하는거 아냐?" "와... 오빠가 그런생각까지 다하고... 다시봤어요." "이녀석들이!" 아마도 남매들인 듯... 그들은 목소리를 낮춰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었지만 일 단 대화에 흥미를 느낀 묵향의 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묵향은 이들을 우연 히 만난 것이 하늘의 도움으로까지 느껴졌다. 우선 오빠라는 자의 말을 들어 보니 비교적 묵향보다는 정보에 밝은 것 같았고 또 제법 생각이 깊은 인물인 듯 했기 때문이다. '좋았어! 저녀석만 따라가면 되겠군.' 묵향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조금 차분한 여자의 음성 이 이어졌다. "그건 그렇고 아버님이 샛길로 샌걸 알면 오빨 가만두지 않을텐데 어쩔거에 요?" "괜찮아. 그래봐야 한 며칠 면벽수련(面壁修練) 밖에 더 시키겠냐?" "문제는 저희들이라구요. 참. 오빠 이렇게 하면 어떨까?" "뭐 좋은 수라도 있냐?" "이왕에 벌받는거. 오빠가 다 덮어쓰는거야." "뭐시라? 이녀석이..." 그러자 일부러 애교스럽게 치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오빠가 우리를 대신해서 고생을 해야지... 안그래, 언니? 오빠 좋 다는게 뭔데.... 난 죽어도 벽만 보고는 못살아. 그러니까 오빠... 응?" "너한테는 못당하겠군. 좋아. 내가 다 책임지지. 모든게 다 내탓이다. 에 구... 이것들을 데리고 오는게 아니었는데..." "그건 그렇고 황화루(黃華樓)에는 언제 갈거에요?" "얘는 누가 초출(初出) 아니랄까봐..." "그건 볼일 끝난 다음에 가자." 그러자 짐짓 투정하는 투로.. "에이잉.... 오빠... 난 빨리 가보고 싶단 말야. 황화루의 절경은 얼마나 소 문이 나있는데.... 무림인이라면 안가본 사람이 없다고 들었다구요." "너 말은 꼭 거기 안가면 무림인이 아니라는 투로 들린다." "안그래? 언니하고 오빠도 다 가봐놓고는.." 그러자 젊잖게 타이르는 목소리... "아냐. 거기는 경치야 좋지만 아주 비싼곳이라 무림인 보다는 고관이나 부호 의 자제들이 많이 들리는 곳이지. 여기 경치도 이 부근에서는 아주 유명하다 구. 그래서 근처에 여관이나 식당들이 많잖아. 황하(黃河)의 절경이 많은 곳 은 청해성(靑海省)이지만 감숙성도 그에 못지않은 명소들이 많지. 여기도 그 중의 하나고..." "그래도 난 이번에 청해호(靑海湖)를 보고싶다구요. 엄마도 정말..." "글쎄 나중에 보여준다고 해도 그러네... 잔말말고 밥이나 먹어. 빨리 먹고 나가야지." "흥!" 남매들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대금을 지불한 뒤 말을 타고 식당을 떠났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자신들 뒤에 검은 혹이 하나 붙어있다는 것을 깨닳 았다. 힐끗 뒤를 쳐다본 엷은 홍의를 입은 여자가 그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말 했다. "오빠.. 뒤에 쫓아오는 사람이 있어요." "알고 있다." "알고 있었어요?" "응.. 처음엔 몰랐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식당을 나선 다음부터 따라왔어." 그러자 매화문양이 수놓아져있는 옅은 청의를 입은 여자가 뒤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 "오빠. 저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말이야?" "응." 홍의를 입은 여자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허리에 찬 도(刀)라든지... 뭐 낡은 흑의를 보니까 그렇게 대단한 인물 같지 는 않은데... 아마 우리들 말을 옅들은 관부의 밀정(密偵)이 아닐까요?" "흠... 그럴지도.... 아무래도 훈련을 받은 밀정이라면 따돌리기는 힘들거야. 기회를 봐서 헤치우는게좋겠지." 그러자 청의를 입은 여자가 흥미가 있다는 듯 물었다. "언제요?" "내가 말했지. 기회를 봐서라고." "피... 저런 밀정을 없애는데는 저혼자 해도 충분하다구요." 그러자 남자가 신중하게 말했다. "아니야. 또 다른 밀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또 살인을 백주대낮에 할수도 없잖아. 인적이 드문곳에서 숲속으로 유인해서 없애야 돼." * * * 그들은 뒤따라오는 밀정을 조심해서 힐끔거리며 도란도란 작전을 짠 다음 이 윽고 행동을 개시했다. 거의 인적이 없는 상태에서 왼쪽으로 자그마한 오솔길 이 나 있는 것을 본 그들은 태연하게 그리고 말을 몰아 들어갔다. 오솔길로 들어서서 2각정도 갔을까... 이때 남자는 말의 고삐를 청의를 입은 소녀에게 건네준 다음 몸을 날려 나무 가지를 밟고는 그 탄력을 이용해서 4장(12M)정도 떨어진 큼지막한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로 다시금 몸을 날렸다. 그 모든 일을 순간적으로 해치우는 것으로 보아 그 남자는 대단히 오랜시간 고련(苦 練)을 했음을 알수 있게 해주었다. 남자가 나무위로 몸을 날린 상태에서 청의를 입은 소녀는 앞으로 나가면서 청 의 여자에게 말했다. "오빠의 신법은 정말 완벽해. 난 언제쯤 저정도 경지에 오를수 있을까.." 그러자 돌아오는건 비웃는 듯한 목소리... "꿈깨거라... 얘야.." "언니는.... 나도 언젠가는 할수 있단 말이에요. 사람을 어떻게 보고..." "후훗... 토끼 머리에 뿔날 때?" "흥! 하여튼 미워 죽겠다니까.." "여기서 기다릴까?" "응" 두 여자는 각자 말에서 내린 다음 말들을 끌어다가 도망 못가게 나뭇가지에 묶었다. 그런다음 말안장에 끼워뒀던검을 검집 채로 꺼내어 손에 들고는 조 심스레 수풀 사이에 숨어서 멀직이서 조심스레 따라오는 밀정을 기다렸다. 청의를 입은 소녀가 자신이 가진 검을 힐끗 바라보더니 나즈막히 힘없이 말했 다. "사람을 죽이는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녀의 손은 흥분때문인지 아니면 살인(殺人)이라는 미지(未知)의 행위(行爲) 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홍의 소녀는 약간 놀리는 투로 속삭였다. "오빠가 힘쓰면 너차례는 오지도 않아. 괜히 맘 조리지 마. 괜히 흥분해서 함 부로 날뛰다가 오빠한테 상처입히지 말고." "언니는? 그러는 언니도 살인은 처음이잖아." 두 여자가 이상하게도 나타나지 않는 밀정을 기다리다 지쳐 서로를 헐뜯고 있 는 사이 그녀들의 오빠도 황당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흑의를 입은 밀정은 식 당을 떠난 다음 언제나 30장(90M)거리에서 느긋하게 따라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꾀가 자신은 나무에 남아 밀정의 퇴로를 차단한 후 자신이 직접 해치우던 지 최악의 경우 합공까지 고려하여 매복을 한건데 이놈의 밀정이 어떻게 알았 는지 자신에게서 30장 거리에서 멈춰 서더니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대단한 놈이군. 고수같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추격술에 대단히 능한 놈인 모양이군. 잘못 걸렸는데... 어떻게 한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남자는 이윽고 생각을 정했는지 몸을 날려 3장쯤 아랫쪽에 위치한 가지를 밟더니 그 탄력을 이용해 몸을 날리더니 거의 10장을 날아가 재차 다른 가지를 밟고 튀어오르는 수법으로 삽시간에 흑의인의 뒤쪽에 떨어 졌다. 정말이지 놀라운 신법(身法)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뒤로 돌아서는 밀정을 향해 칼을 뽑아들었다. 챙~~ 경쾌한 쇳소리를내며 뽑힌 검은 즉시 밀정의 목줄기를 겨누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반항하지 않는 자를 도살(屠殺)할 수 없다는 얄 팍한 정파인으로서의 자부심(自負心)이었다. "칼을 뽑아랏!" "왜그러시오?" "왜그러는지는 네놈이 더 잘 알게 아니냐?" 그런데도 상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있자 다시금 말했다. "우리 뒤를 미행(尾行)한 이유가 뭐냐?" "흑풍단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소?" "바로 그거야. 가긴 가겠지만 꼬리를 달고 갈수는 없지." "내가 따라가서 안될 일이라도 있소?" "그들은 쫓기는 몸. 밀정을 달고 가면.." "나는 밀정이 아니오." "그러면 왜 미행하는 거냐?" "난 흑풍단과 꽤 인연이 있기에 그들을 도와주러 가는 길이오. 그런데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니... 그대들이 잘 아는거 같아 따라가면 될거 같아서 뒤쫓던 길이오. 사실 내가 밀정이라면 이렇게 대놓고 미행하겠소?" "하긴.. 그 말도 일리는 있군." 이때 두명의 여자들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갑자기 오빠가 나무위에 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매복한 위치에서 뛰쳐나 온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싸우고 있을거라 생각한 오빠가 검을 뽑은 상태기는 했지만 밀정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궁금해서 물었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남자는 그 말을 무시하고 밀정인 듯한 인물에게 말했다. "하지만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증표라도 있나?" "증표 같은건 없소." "그렇다면 네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 한참 생각하던 밀정인 듯한 남자가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나는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니까... 당신들이 나를 정 못믿겠다면 점혈(占穴)을 하던지 해서 함께 가면 되지 않겠소?" "흠... 그게 좋겠군. 대신 도착해서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목숨이 없어진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정도는 각오하고 있소." "좋다." 그와 동시에 남자는 몸을 날려 흑의인(黑衣人)의 혈도를 찍었다. 상대가 점혈 하란 듯이 자세를 바로하고 있었으므로 점혈은 손쉽게 이뤄졌다. 그래도 남자 는 못믿겠는지 몸을 날려 숲속으로 들어가서 말들을 끌고왔다. 그런다음 자신 의 말안장에 있던 수갑(手匣)을 꺼내서 채웠다. 그 남자는 무림을 돌아다니면 서 정파의 후기지수 답게나쁜짓을 행하는 놈들을 잡아다가 관가에 넘기기도 했다. 그렇기에 수갑 몇개를 언제나 말안장에 가지고 다녔는데 이걸 이 상황 에서 사용하게 될줄은 자신도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는 수갑을 채우면서 말했다. "이 수갑은 그냥 강철이 아니라 오철(烏鐵;검은 빛이 나는 합금의 일종으로 현철보다는 강도가 많이 떨어짐.)로 된 것이니 행여 풀 생각도 하지마라." "나도 풀 생각은 없소." 남자는 젊은 나이에 비해 강호 경험이 풍부한지 흑의인의 말안장이나 품속을 뒤져서 행여나 어떤 연락에 사용될 만한 도구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품속 에 있는 지갑에는 25냥의 은자와 엽전 40냥이 달랑 들어있었고 비수(匕首)라 고 부르기에는 좀 긴 수수한 단검(短劍) 한자루, 괴이한 문자가 써진 자그마 한 천 1장과 용(龍)이 살아있는 듯 잘 조각된 작은 옥패(玉牌)하나, 그리고 소금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리 뒤져도 아무것도 없었다. '왠만큼 무림에 자신있는 자들도 이렇게 홀가분하게해서 다니지는 않는데 하 다못해 그 흔한 표창( 槍) 하나 없다니.... 이상하군?!' 남자는 상대의 옷 소매까지 뒤적이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가진 것이 모두 이것 뿐이오?" "그건 왜 묻소?" "혹시 빨리 만나지 못한다면 꽤 멀리까지 가야하는데 근처 여관(旅館)에 짐을 맏겨놓은게 아닌가 해서 묻는거요." "짐은 이게 다요. 그리고 혹시나 무기를 가지고 있는것도 못마땅하다면 일단 그대가 보관하다가 도착해서 돌려줘도 무관(無關)하오." 혹시나 해서 검집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가 살펴보는 중에 그런 말이 나왔 으므로 그 남자로서는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할지도 모를 일을 저질렀다. 더 이상 살펴보지 않고 그냥 물러선 것이다. 만약 그가 집 속의 검이나 비수를 꺼내봤다면 상대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철(玄鐵)이란 물건은 아주 귀하고 값지기에 왠만큼 좋은 검들도 날부분을 보강(補强)하기 위해 조금씩 쓸뿐... 아예 검 전체를 현철로 하지는 않기 때 문이다. 그 대신 그는 만일을 대비해서 비수는 흑의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 신의 안장에 찔러넣었다. 일단 몸수색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이 종료되자 이제 통성명(通姓名)을 했다. "이렇게 번잡하게 해서 죄송하오. 하지만 이 일은 꽤나 기밀을 요하는 것이 고, 또 그대를 믿지 못하는 것도 있어서 초면에 실례를 한거니 용서하시오." "별로... 상관 없소이다." "저는 무림에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일진검(一鎭劍) 초우(礎雨)라 하고 이 아이들은 초연(礎蓮), 초희(礎曦)라 하오." "저는 묵향(墨香)이라 하오. 별호따위는 없으니 그냥 그렇게 부르시오." "초면에 실례인 것은 알지만 이상한 이름이군요." "하하하... 뭐...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니 성따위는 없고... 그냥 묵향이외 다. 얼마 전까지는 피치못할 사정으로 국광(菊狂)이란 웃기는 이름으로 불렸 었으니... 참. 흑풍단에서는 국광이란 이름만 알고있으니 혹시나 그대가 먼저 만난다면 그렇게 말하면 알거요." '이름이 두개라... 좀 수상한 인물이군. 아무래도 좀 더 주의해야겠어.' * * * 초희(礎曦)는 근래들어 새로이 길동무가 된 인간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왜 마음이 편치 못하냐고? 그녀의 나이도 이제 스물하고도 두 살이 되어버린 노처녀에 가까운데다 무림 초출이라 은근히 이번 기회에 근사한 남자들을 많 이 사귀고 싶었고 또 그 중에서 기회만 된다면 장래의 반려자(伴侶者) 감도 물색하고 싶었다. 원래가 둥지 안에서 고이고이 길러진 금지옥엽(金枝玉葉)이 었으니 타인들과 왕래나 교류도 거의 없었고 자신의 집안 자체가 이름난 무가 (武家)였기에 그 잘난 남자라고는 오빠 말고는 거의 접해보지 못한 가련한 신 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길동무로 꽤 재미있는 남자라는 동물 이 하나 생겼으니... "그럼 대협께선 그렇게 고수(高手)란 말이에요?" 그러자 상대의 자랑스런 대답. "그럼.. 나보다 강한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없다고 봐도 무관하지." '말도 안돼!' "그렇게 대단한 대협께선 사문(師門)이 어떻게 되세요?" "내 사문은 별로 중요한게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구. 요즘들어 그녀석들 이름 만 나와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해서 가급적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가 않아." 상대가 어물쩡 넘어가려 들자 다시 한번 더 물었다. "사문과 별로 사이가 안좋은 모양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나만 보면 죽이려고 드니까.." "파문(破門) 당하셨어요?" "아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파문은 안당했군." "당신 사부님은 누구신데요?" "유백이란 분이지. 지금 살아계신지도 모르겠어." '유백이란 이름도 처음 듣는군. 그럼 확인 해볼건 한가지 뿐이지...' "그렇다면 대협의 절기(絶技)는 뭐에요?" "음... 절기라고 한다면 무상검법(無上劍法)이 특기지." '들어본 적도 없는 허무맹랑한 검법 이름이군.' "그 외에는 어떤 무공들을 익혔어요?" "그 외에? 엄청나게 많이 익혔지." "얼마나요?" "한... 만(萬) 종류 정도 되나? 기억도 안나는군." '점점... 더...' "그렇다면 그중에서도 강한게 있을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 몇가지.." "음... 수라월강도법(修羅月剛刀法),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 소수마공 (素手魔功), 혈수마공(血手魔功), 회풍무류검법(廻風舞柳劍法), 육합검법(六 合劍法), 태청검법(太淸劍法), 태허도룡검법(太虛渡龍劍法)" '어쭈... 이거 완전히 정파와 사파의 유명한 검법이란 검법은 다 말해대는군. 기가 막혀서...' "그만... 됐어요. 저희 아버님께서 곤륜파(崑崙派)와는 아주 친분이 깊으셔서 우연한 기회에 태허도룡검법(太虛渡龍劍法)을 조금 배웠었는데... 잘 아신다 니 한번 구결(口訣)을 말해보세요." "구결? 가만있자.... 구결이 뭐더라... 허허... 잊어버렸어. 너무 많이 외우 다 보니 잊을수도 있지. 사실 중요한건 구결이 아니니까." 상대가 어물쩡 넘어가자 다시금 꼬치꼬치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럼 자신있게 구결을 외울 수 있는 무공이 있어요?" "가만있자........ 이건 아니고..... 응.... 음... 이것도 아니군.....끄 응... 글쎄... 원체 오래전 일이라 하나도 제대로 기억이 나는게 없는데..." '끄응... 저러면서 날 더러 믿으라고? 웃겨서' "그럼 대협께선 글은 좀 읽으셨어요?" "글? 천자문(千字文) 같은거 말인가?" "아뇨. 소학(小學)이나 대학(大學) 같은거 말이에요." "아주 오래전에 소학은 읽은 적이 있지. 그리고 몇권 더 읽었었는데.... 책 제목은 원체 오래전이라 기억이 안나는군. 무인(武人)으로서 이정도 읽었으면 많이 읽은거야." '아예 무식한 놈이라고 광고를 해라. 광고를 해!' 여기서 초희가 소학이나 대학이라고 물은 이유는 소학은 어릴 때 천자문(千字 文)이란 낱말책을 뗀 아동들이 처음에 접하게 되는 문장(文章)으로 된 아동용 도서가 소학(小學)이다. 소학은 쉬운 문장들을 사용했지만 그 문체가 뛰어나 아주 잘 지어진 책으로서 문장을 익히는 입문 단계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는 교과서 적인 책이라고 봐야한다. 그런데 하는 상대의 말이 그정도나 겨우 읽 었다니... 기가 막힐 수 밖에. '이자의 말이 원체 오래전... 오래전... 하는걸 보면 혹시나 반노환동(反老還 童)의 고수? 설마... 하지만... 아직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실례가 되 지 않게 재삼 확인을..' "대협" "왜?" "이~~~ 한번 해보세요." 초희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이~~ 하는 소리를 낸 후 말했다. "이~~~~" 그 말에 묵향은 그녀가 뭘 확인하려 하는지 눈치채고는 한껏 입술을 벌려 자 신의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사랑스러운 누런 이빨을 보여줬다. 자신과 같은 영감탱이 반노환동의 고수인 경우 딴건 다 젊게 보이게 만들 수 있지만 이빨 만은 어떻게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젊은 애숭이들과 확연한 차이가 드 러나는 것이고.... 그런데 묵향도 실수한 부분이 있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에... 그러니까 기억이 없을 때 자신의 이빨이 몽땅 바뀌었다는 건 아직 확인 해보지 않아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이빨이 하얗잖아. 이런 사기꾼 같으니... 그럼 그렇지... 무림인들은 원래가 자부심(自負心)과 자존심(自尊心), 아집(我執)으로 뭉쳐진 인간들... 그렇게 대단한 고수라면 우리를 닥달해서 끌고가면 갔지 오빠가 혈도를 점하 고 수갑을 채우도록 놔뒀을 리가 없지.... 근사한 남자를 만나고 싶었는데 근 사한 남자는 모두 굶어 죽었는지 한놈도 보이지 않고 거기다 이런 놈팽이하고 같이 다녀야 하다니.... 휴~~~ 내 인생이 너무 한심해...' 대화가 이런 식이었으니 이제 산통 다깨진 허풍꾼을 얌전히 대해줄 필요가 없 었다. 하지만 조금 무례하게 대해도 상대는 그런 예의에 있어 무관심한 듯이 행동했기에 같이 지내기에는 별로 무리가 없었다. 초희가 보기에 묵향이란 인 간의 얼굴은 그런대로 후하게 봐주면 매끈한 편이지만 무지무지하게 허풍이 세고... 또 거의 안하무인인 것 처럼 무공에 있어서는 거드름을 피워대는 이 놈팽이는 초희처럼 명가(名家)에서 자란 자제가 봤을때는 몇푼 되지도 않는 돈을 가지고 허름한 도(刀)를 하나 대장간에서 몇푼 주고 구해서 허리에 차고 는 무림을 돌아다니며 무식하고 가련한 무사들에게 사기나 치는 진짜 바닥인 생이 틀림이 없었다. 초반 대화에서 초연이나 초우 같은 경우 상대의 허풍에 질려버려 아예 말도 안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초희의 성격도 성격인지라 자신이 상대해주지 않 으면 완전히 외톨이로 떨어지는 상대가 불쌍해서 마음을 고쳐먹고 말상대를 해주기 시작했다. 상대가 눈에 빤히 보이는 허풍을 자기딴에는 잔머리를 굴려 서 곱배기로 쳐대는 것을 보는게 재미있어 이것저것 물어댔고 상대의 관심에 안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흥이 난 묵향이 더욱 자화자찬(自畵自讚)을 해대면 초희는 그 얄팍한 거짓말에 배꼽이 빠지게 웃어대며 재미있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자칭(自稱) 최고(最高)의 고수(高手)이자 금(琴)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는 희대(稀代)의 허풍선이를 동반한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 다. * * * 원래 묵향은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고, 또 아무도 없는 곳에 몇 달씩 박혀있 어도 외로움을 탈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이 갈 때 자기들만 얘 기하고 혼자 외톨이로 떼어놓는건 별로 유쾌하지 못하다. 그러던 차에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귀여운 얼굴을 한 초희란 묘령(妙齡)의 아가씨가 말상대를 해주니 자기가 생각해도 꽤나 유쾌한 여행이었다. 자신의 무공에 대해서나 아 니면 전에 있었던 싸움 등을 얘기해주면 이상하게 심각한 장면에서도 까르르 웃는게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웃는 모습이 귀여웠기에 참아준 것 이다. 묵향은 초우란 청년과 같이 지내면서 처음에는 애숭이라고 얕잡아 보는 경향 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나이에 비해 상당히 무림 경험이 있었 고 매사에 철저함을 좋아했다. 점혈(占穴)을 할 때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났다. 점혈 수법은 그냥 힘으로 때린다고 되는게 아니다. 상대의 혈도에 자신의 내 공을 불어넣어 일시적으로 진기(臻氣)의 유통(流通)을 방해하는 수법이다. 그 런데 문제가 있다면 그 진기가 진신내력(眞身內功)이 아닌 한 공력의 크기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정 시간이 지나면 소멸(消滅)한다는데 있다. 그리 고 상대가 대단한 고수라면 스스로 진기를 움직여 혈도를 막고있는 타인의 진 기를 소멸시키는 수법도 있다. 그렇기에 초우란 녀석은 매일 아침이 되면 묵향의 혈도를 재차 점혈 하는데 이때 세심하게도 자신의 내력(內力)을 이용해서 묵향의 혈도에 자신의 내력 (內力)이 남아있는지 확인해본 다음 내력이 남아있는 그 위치에 다시 내공을 보탠다는 사실이다. 이건 언뜻 듣기에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만에 하나 상대가 진짜 고수라고 가정했을 때 자력(自力)으로 막힌 혈도를 뚫었을 수도 있고 또 아주 드물게 특이한 무공을 익혀 혈도를 이동시킬 수도 있기 때 문이다. 그러니까 점혈을 했던 혈도와 해혈을 하는 혈도를 서로 뒤바꿔 놓으 면 다음날 자신은 점혈을 한다고 때린것인데 사실은 해혈을 한게 되는 이치 다. 그런 사소한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의에 주의를 하는 것을 보고 묵향은 그 를 다시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지나지 않아 역시 당사자는 눈치 채지도 못한채 애숭이로 평가절하(評價切下)가 된 사건이 있었으니... 희대의 허풍선이를 동반한지 4일째 되던 날 저녘, 그날도 평상시와 같이 객점 에 들었다. 오는 도중에 수소문을 한 결과 무산(武山) 남쪽의 탕창(宕昌) 쪽 으로 흑색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이동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탕창 부근을 통과하여 백수강 (白水江)을 건너 사천성(四川省)으로 들어갈 예정인 모양이었다. 일단 모두들 그런대로 실마리는 잡았기에 푸근한 기분에 마을로 들어가 먼저 여관을 잡고 몸을 대강 씻은 다음 식사와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크지는 않은 식당이었지만 몇 명이 식탁에 앉아 식사 중이었는데 그들 은 빈 탁자에 널찍 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 점소이에게 음식을 주문했다. 묵향 은 거의 잡식성이라 할 만큼 음식을 가리지 않았기에 그의 음식까지 몽땅 초 희가 점소이에게 주문을 한 다음 객점 안을 둘러봤다. 혹시나 근사한 남자가 하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였다. 초희는 조금 자아도취(自我陶醉) 증세가 있는 평가기는 했지만 뛰어난 가문(家門)을 배경으로 한 자신의 미모 (美貌)와 말솜씨라면 안보여서 그렇지 일단 멋진 남자가 보이기만 하면 자신 의 곁에 잡아둘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 식당 안에 초희가 꿈에도 그리던 멋진 남자가 그곳에 있었 던 것이다. 창가에 위치한 자리에 고상한 무늬의 청의(靑衣)를 입은 잘생긴 청년이 간소한 안주를 두고 죽엽청(竹葉淸)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앉은 옆 의자에 화려한 문양의 검집을 가진 검이 놓여있는 것을 보면 제법 형편이 좋 은 무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에 시원하게 뻗은 콧날, 검은 콧수염을 짧게 다듬은 멋쟁이였 다. 거기에 많은 수련을 쌓았는지 간혹 술병을 잡기위해 팔을 뻗을 때 드러나 는 팔목은 근육이 잘 발달해 있었다. 잠시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던 초희가 묵 향에게 살며시 말했다. "대협, 저사람 정말 멋있죠?" "누구?" "저 청의를 입은 사람 말이에요." "으음... 글쎄.... 제딴에는 있는대로 멋을 낸 바람둥이군." 그러자 초희가 새침한 표정으로 나무랐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면 어떻해요?" "글쎄... 나는 원체 사람을 못믿어서 말이야..." "그건 병이라구요. 챙피한 줄을.." 그녀의 말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 이유는 이쪽을 힐끗 바라본 그 멋쟁이 청년 이 살며시 일어나 자신들이 있는 탁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멋쟁이 청년은 탁자옆에 다가온 다음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십니까? 소생은 절검문( 劍門)의 말학(末學) 진소추(振召秋)라 합니 다. 보아하니 무림인이신것 같아서 무례를 무릎쓰고 왔습니다. 서로 통성명이 나 하시는게 어떠하올는지요?" 상대가 이렇듯 정중히 나오니 잡배(雜輩)라 해도 거절하기 힘든데, 절검문이 라면 섬서성(陝西省) 남쪽에 위치한 작기는 하지만 검의 명문인데다 거기에 혼기(婚期)가 꽉 차있는 여자 두명이 있으니 어쩌면 이자와 인연이 닿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여러 가지 정보도 얻을 겸 해서 모두들 그를 환영했다. 초우 도 그에게 마주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아, 진소추 대협이시군요. 저는 초우라 합니다. 이 아이들은 제 여동생들로 초연, 초희라 하고 저쪽에 계신분은 묵향이란 분이오." 진소추란 남자는 처음부터 묵향이 그들과는 달리 낡은 옷을 입고 있는데다 그 옷도 그렇게 고급이 아니었기에 그냥 간단히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음식을 먹기위해 손을 올렸을 때 묵색(墨色) 수갑이 손목에 채워져 있는 것을 본 다 음에는 아마 묵향이 범죄자 쯤으로 인식된 모양인지 아예 상대도 안했다. "하하.. 대협은 아니올시다. 절검문의 말학 주제에 대협이란 말을 들으면 모 두들 욕합니다. 하하..." "원.. 겸손 하시기도. 그래 진형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예, 저는 이번에 수행(修行)도 좀 쌓을겸, 눈요기도 할겸 해서 무산(巫山)쪽 으로 가는 길입니다. 무산의 절경(絶景)은 소문이 자자 하니까요." "그럼 이번이 초출이십니까?" "아닙니다. 사천쪽으로는 초행입니다." 진소추란 사람이 자신들과 거의 유사한 방향으로 가는데다 이쪽으로는 초행이 라니 처음부터 흑풍단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여러 가지 검학이나 세 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소추는 얼굴도 잘생겼지만 명문의 자 제답게 차분하고 진중(珍重)한 말투기는 했으나 성격이 호방(豪放)한데다 아 주 말을 재미있게 했고 묵향을 제외한 모두는 진소추의 매력에 빠져들며 호탕 하게 술판을 벌였다. 묵향도 술이라면 무조건 마시고 보자는 인물이었기에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았 지만 그들의 옆에서 아예 죽엽청을 독채로 가져다 놓고 퍼마시기 시작했다. 묵향은 술을 잘 마시지는 않지만 일단 마시면 뿌리를 뽑는 성격인데다 수소문 을 시작한 다음부터 한방울의 술도 마시지 못했으니 거의 술을 마시는게 아니 라 목구멍에 들이 붓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묵향은 혼자서 한 독을 깨끗하게 비운 후 담소를 나누는 그들을 뒤로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여태껏 여관을 잡으면 언제나 나란히 위치한 방을 두개를 빌려 한쪽은 초연과 초희가 사용하고 또 하나는 묵향과 초우가 썼다. 이러는 것이 돈도 절약될뿐 더러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불의(不意)의 사태에 대처하기도 편하기 때문이 다. 초우가 술자리를 파하고 거나하게 취해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묵향은 문 근처 에 자리를 잡고는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아직도 초우가 이상하게 생각하 는 점 중의 하나가 묵향이란 인물은 침대에 누워 자는 꼴을 못봤다는 것이다. 언제나 벽에 기대고 조금 졸 듯이 자거나 밤 늦게까지 운공조식(運功調息)을 하는지 명상(冥想)을 하는지 그렇게 앉아있다가 다음날일어나면 이미 일어나 있던지 아니면 명상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도 바뀐게 하나도 없군.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편히 누워서 잠을 못잘꼬...' 초우는 더 이상 생각하기도 귀찮아 쓰러지듯 침상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 다. 초우가 방에 들어온지 1시간 후 묵향은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설마 하고 있 었는데 창문쪽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리더니 약한 들릴 듯 말듯한 슈우우 우하는 바람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독(毒)인가?' 하지만 창가에서 가장 가까운 침상에 누운 초우의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가 계 속 들리는 것으로 보아 독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미혼분(迷混粉)이나 미혼향(迷混香)이겠군. 일단 약속을 해놔서 임 의로 해혈을 하기는 내 자존심이 허락을 안하고.... 뭐 되는대로 놔두자..' 하지만 공력을 거의 사용할 수 없는 관계로 1각쯤 지나자 숨이 턱에 차기 시 작했다. 그래서 묵향은 기척없이 슬며시 움직여 문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런다음 살짝 문을 열고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신 후 기척을 살폈다. 그런데 요상한 점은 상대가 금품을 털 목적이라면계집들이 묵고있는 방 보다는 이쪽 을 뒤질 것이 분명한데 아직도 들어올 생각을 안하고 있었고 설상가상(雪上加 霜)으로 문앞에서 느껴지던 기척조차 없어졌다는 것이 수상했다. '금품(金品)이 목적이 아니라면 뭐가.... 그럼 혹시 인신매매(人身賣買)하는 놈들인가? 하기야 같이 동행(同行)하던 초연이란 계집애는 잡혀가서 곤욕을 치뤄도 상관없어. 선배 대접도 안해주는 못된 계집은.... 아니지.... 그놈이 초연이만 가져간다는 보장이 없잖아. 할 수 없군... 일단 몰래 살펴 보고 초 연이만 가져가면 놔두고 초희까지 손대면 이몸이 나설 수 밖에...' 여자들이 묵는 방은 바로 옆방이었기에 찾아가는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도 않 았다. 슬며시 움직여 여자들이 있는 방문 앞에 도착한 다음 기척을 살피니 뭔 가가 방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살며시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이런 빌어먹을... 안에서 잠겼군. 할 수 없이 창문으로 갈까.... 아냐. 이 나이에 내가 창문을 넘어 돌아다니리?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 자부(自負)하 는 이몸이? 여관 문이야 별로 강하게 만든게 아니니 한 대 차면 경첩이 뽑혀 나갈거야. 차고 들어갈까... 그냥 놔둘까... 지들도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 데.... 참! 그런데 계집들이 잡혀가면 초우란 놈도 계집들 구한답시고 헤멜테 니 흑풍단을 손쉽게 만나려면 하는 수 없이 구해줘야겠군.' * * * 쾅~~~ 콰지직! 발길질 한번에 문짝은 부숴져 나갔고 그 안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술에취해 잠들어있는 여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어떤 행동을 하려는 찰나에 문짝이 떨어져 나가자 놀라서 묵향쪽을쳐다봤다. 놀랍 게도 그 남자는 절검문( 劍門)의 진소추(振召秋)라는 놈이었다. 진소추는 침 입자(侵入者)를 보고 하던 일을 중단한 후 손에 든 것을 침상 위에 놓고는 번 개같이 몸을 날려 침상 옆에 세워둔 자신의 호화로운 검을 뽑아들었다. 그걸 보며 묵향이 이죽거렸다. "이봐, 자네 친구들은 어디있어? 왜 혼자 뿐이지?" "왠놈이냐? 다치기 싫으면 꺼져라." "인신매매면 그래도 먹고 살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놈이니 봐줄테니까 해약이 나 내놓고 꺼져라." "미친놈!" 그와 동시에 진소추는 수갑을 찬 채 검도 뽑지않고 있는 묵향을 향해 몸을 날 렸다. 식은 죽 먹기의 상대로 생각하고 처음부터 과감한 공격을 퍼부었다. 일 검에 작살을 내려는 듯 공력을 끌어모아 직검단천(直劍斷天)의 기세로 내리찍 었으나 묵향은 수갑의 사슬을 이용해 간단히 검을 막으면서 즉시 왼발을 날려 낭심(囊心)을 가격했다. 놀랍도록 빠르지만 자로잰 듯한 움직임이었다. 급소 를 가격당한 격심한 통증에 진소추가 인상을 찌그리는 찰나 가격(加擊)의 반 동(反動)을 이용해 왼발을 뒤로 빼며 오른발이 사내의 낭심을 다시금 가격했 다.사내가 주춤거리며 내려앉기 직전 뒤로 돌아온 왼발로 땅을 박차고 오르 며 이 사내의 턱 아랫부분을 오른발로 차면서 뛰어오른 왼발의 힘을 교묘히 조절하며 왼발로 오른쪽 두개골을 가격했다. 챙~하는 청아한 쇳소리와 거의 동시에 퍽퍽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거의 4번 동 시에 들리면서 누구의 목소린지 처절한 비명성이 들리며 두 사내가 중심을 잃 고 쓰러졌다. 하지만 묵향은 곧이어 일어난 반면 진소추는 완전히 뻗어서 일 어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묵향은 아직도 낭심을 감싸쥐고 신음하는 진소추 에게 다가가 힘껏 오른쪽 두개골을 차버렸다. 퍽! "끄윽!" 그 다음 진소추의 움직임은 정지했다. 하지만 묵향도 공력(功力) 없이 순전히 근육만을 이용한 숙련된 몸놀림으로 상대를 제압했기에 내력(內力)을 쌓은 상 대가 그렇게 심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란 걸 잘 알았다. 그렇다고 내공 을 끌어올리기가 힘들기에 평상시처럼 점혈을 해둘수도 없었다. '이런녀석을 밧줄을 구해 묶는다고 해도 힘한번 쓰면 끊어질지도 모르는 데.... 그렇다고 초우 녀석 말(馬)에 가서 수갑을 들고 오기도 그렇고... 또 열쇠도 없잖아. 또 그사이에 도망치면 무슨 개망신이냐... 이따위 혈도 푸는 건 순식간이지만 생명(生命)의 위협(威脅)이 오는것도 아닌데 풀자니 자존심 (自尊心)이 허락하지 않고.... 에라 모르겠다. 막힌 혈도를 우회(迂廻)해서 진기(臻氣)를 모아보자. 정파놈들이야 불가능 하겠지만 나는 역혈(逆穴)의 내 공을 쌓았으니 길이 있겠지.' 진소추가 정신을 대강 수습했을 때 그가 처음 바라본 것은 자신을 비웃듯 내 려다 보고있는 묵향이란 사내였다. '제기랄, 수갑을 차고있어서 별로 주의를 안했는데....' 묵향은 진소추가 정신을 차리자 마자 미소를 짓고는 위에서 내려다 보며 부드 럽게 말했다. "오호... 이제 깨어나신 모양이군. 자네를 위해 발 바닥에 진기 좀 모아뒀지. 그렇다고 이거 점혈(占穴)을 할 정도는 안되고 조금씩 모으자니 감질나서 못 하겠더라구. 그래도 자네를 잡아둘 정도는 되니 걱정 말게나. 우선 그 귀한 뼈다구가 부러지는데... 자네에게 사전(事前)에 양해(諒解)도 구하지 않고 기 절한 상태에서 하기는 뭣 해서 말이야." 퍽! "크아악!" 설마하니 정신을 차리자마자 오른쪽 종아리뼈가 생으로 부러질지는 꿈에도 생 각하지 못한 진소추가 무참한 비명을 질렀지만 묵향은 비명이 끝나기를 기다 려 한소리 했다. "역시 무릎 밑에다 나무조각을 받쳐뒀더니 잘 부러지는군... 흐흐..좀 아픈 가? 미안허이... 공력이 모자르는게 죄지... 흐흐... 평상시 같으면 그양 서 로 편하게 혈도를 점한 후 분근착골(粉筋鑿骨)만 사용하면 술술 부는데 말이 야... 흐흐.. 자.. 이제 말해보실까? 네놈 패거리는 지금 어디있어?" 그러자 사내는 터져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크아....패거리는 없다." "뭐라구? 이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나?" 그러면서 묵향이 부러진 발을 툭툭 차자 뼛조각이 근육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사내는 지독한 통증에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비명을 질러대며 발악했 다. "크악! 날 죽여라. 악!" "패거리는 어디있어?" "으악! 모두 말할테니 제발.... 크으아악!" 진소추가 식은땀을 흘리며 애원하자 묵향은 발길질을 멈췄다. 그런다음 상대 가 정신을 어느정도 찾도록 시간여유를 준 다음 재차(再次) 부드럽게 물었다. "패거리는 어디있어?" "패거리는 없습니다. 소인 단독 범행입니다." "힘도 좋군.. 여자를 둘이나 업고 어디로 갈 생각이었냐?" "업고 가려는게 아니라......" 진소추가 머뭇거리는 걸 보고 묵향의 뇌리에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으응? 설마..." 묵향은 약간의 진기를 손 끝에 힘들게 끌어모아 상대의 단전(丹田)을 탐색했 다. "역시.... 이종(異種)의 진기(臻氣)가 들어있군. 더러운 녀석! 사내녀석이 할 짓이 없어서 채음보양(採陰補陽)이나 하다니...." 그러자 진소추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살려 주십시오, 대협." 사정하는 진소추를 향해 묵향은 의외로 부드럽게 말했다. "내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채음보양따위 수법을 써서 남의 진신내력(眞 身內力)을 갈취(喝取)해 봤자 나중에 이종의 진기를 화합(和合)시키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야. 왜 채화음적은 엄청난 숫자의 계집들을 통해 내력을 흡수할텐 데도 그 중에 초고수(超高手)가 한명도 나오지 못했겠냐? 다 이유가 있다구. 네놈의 기(氣)를 보아하니 지금은 그런대로 상관없지만 더 이상 흡수(吸收)하 면 공력 증대(增大)는 고사하고 목숨까지 내놔야 할거다. 알겠냐?"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대협." "내놔." "예?" "해약(解藥) 내놓으라구." 그자는 침상위에 놓여있는 작은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저기 떨어져 있는게 해약입니다." "저건 저 아이들에게 사용하려는 음약(淫藥) 같은게 아니고? 바른대로 말해, 안그럼 이번엔 왼쪽 팔뼈마저 부숴주겠다. 난 아주 인자한 사람이라서 목발은 짚을 수 있게 해주니 걱정마." 짐짓 인자한척 미소를 띄우며 부드럽게 말하는 묵향을 보고 이상하게도 온 몸 에 소름이 쭉쭉 끼치며 진소추가 말했다. "예. 대협... 저건 미혼약(迷混藥)의 해약(解藥) 하고 음약(淫藥)을 섞어놓은 것입죠. 그편이 일하기가 편해서요..." "그럼 음약이 들어가지 않은 해독제는 없냐?" "없습니다. 그냥 놔두시면 내일 아침쯤 되면 상쾌하게 일어날겁니다." "그래? 추호도 거짓이 없겠지?" "어느 안전(眼前)이라고 감히 제가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흐음.... 좋아. 사실이라고 믿어주지. 자네 절검문 문하라고 했는데 사실이 냐?" "아닙니다요. 소인이 어찌 그런 명문에 있겠습니까... 그냥 절검문의 이름만 팔고있습죠." 그러자 묵향은 웃음을 터트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하... 좋아... 진짜 절검문의 제자(弟子)라면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었는 데... 사파(邪派)라니 살려주지. 참...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자네 참 잘생겼 군." "감사합니다...헤헤..." "난 그게 별로 마음에 안들어." "예?!" 그와 동시에 묵향의 발이 상대의 머리로 날아왔다. 퍽! "크윽!" 묵향이 차고난 다음에도 지근지근 문지르던 발을 떼자 코뼈가 내려앉은 뭉개 진 코가 비참한 형상(形狀)으로 나타났다. 묵향은 그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한결 보기에 좋군. 그래. 이왕에 시작했으니 좀 더 손을 봐주지." 팍! "크아악!" 사내가 부러진 앞니 6개 정도를 ㅂ어내는 걸 보며 빙긋이 웃으며 부드럽게 말 했다. "아주 좋아. 이정도면 내 취향(趣向)에 딱 맞군. 앞으로 내 근처에 얼씬거리 면 수족(手足)의 뼈다귀를 몽땅 다 부숴놓고 남은 이빨도 몽땅 뽑아버릴테니 까... 빨리 챙겨서 꺼져." "예...예...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사내가 검을 허리에 차고는 벽을 짚고 헐레벌떡 사라지는 뒤모습을 미소띈 얼 굴로 바라보며 묵향이 나직히 말했다. "꽤 재미있는 밤이군.... 저따위 놈에게 속아 술을 그렇게 퍼마시고 일찍이 잠에 떨어지는 걸 보면 아직도 모두 애숭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지..." 그렇게 돼지 멱따는 비명소리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그만큼 울렸으니 사람들이 나올만도 하건만 한명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묵향이 하는 수 없이 밑에 내려 가 보니 점소이가 숨어서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묵향은 점소이의 뒷통수를 퍽 하고 때린 다음 젊잖게 말했다. "방 문짝에 경첩이 떨어져 나가고 바닥에 피가 좀 묻어있으니 빨리 올라가서 깨끗하게 원상태로 만들어 놔. 알겠냐?" "예... 예..." 점소이가 부리나케 2층으로 달려 올라가는 것을 보며 묵향이 나즈막히 혀를 차며 말했다.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군.... 그렇게 소란을 떨었는데... 아무도 콧배기도 안 비치니... 쯧쯧... 이만 올라가서 잠이나 조금 더 잘까... 아니면 명상이나 할까..." 다음날 아침 느즈막한 시간이 되어서야 남매들은 부시시 일어났다. 간밤에 무 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숙취(宿醉) 때문에 다들 늦잠을 잔 것으 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묵향도 멍청한 3류 잡배 하나 때려잡은걸 가지고 자랑 스레 말할 사람도 아니었기에 일은 그렇게 넘어갔고 모두들 세면(洗面)을 한 다음 1층에 위치한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 도착하자 초희가 식당안을 두리번 거리는 것을 본 묵향이 물었다. "왜그러냐?" "진 대협이 혹시 계신가 하고요.." "아. 그 친구라면 아침 일찍 떠났지. 너희들이 자고있을 때 일이 생겨서 먼저 가니 나중에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군." 묵향의 얼굴가죽 두꺼운 상세한 설명을 들은 초희는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말 했다. "그래요?" 식탁에 모두들 앉았는데도 점소이가 콧배기도 안비치자 묵향이 버럭 소리질렀 다. "이봐. 주문 받아라." "예. 나으리." 점소이가 묵향의 외침에 어디서 나왔는지 쏜살같이 달려와 섰는데... 그 서있 는 모양새가 뭔가에 겁을 집어먹는지 부들부들 떨고있는지라 초희가 물었다. "왜 그러니?"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나으리." "그럼 숙취에 좋은 음식 좀 있으면 내 오거라." "예." 주문을 듣자마자 점소이는 바람처럼 사라졌고 어제와는 달리 왜 저 아이의 태 도가 이상한지 당사자가 말을 안하니 모두들 제멋대로 상상할 뿐이었다. 늦은 식사를 한 다음 흑풍단이 있을듯한 위치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도중에 포고문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잠시 길을 멈췄다. <찬황흑풍단(찬황흑풍단)의 옥영진(옥영진)은 그 지휘관(指揮官)이라는 자리 를 이용해 막대한 재물(財物)을 횡령(橫領)했고 그것도 모자라 황권(皇權)을 넘보는 가증스러운 모반(謀叛)을 획책(劃策)한 바, 그 물증(物證)을 확보한 금의위에 의해 자택(自宅)에서 처형(處刑)되었다. 하지만 그의 잔당(殘黨)들 의 일부가 숨어있으니 흑색 갑주(鉀 )를 입은 무리를 보면 관(官)에 필히 연 락하라. 그 정보가 사실임이 확인되면 후사(厚賜)하겠다. 금의위 대영반 이세번> 그 글을 읽고 세상 모르는 촌민(村民)들이 한마디씩 했다. "말세로군. 저렇게 높은 양반이 어쩌자고... 쯧쯧.." "저런 녀석까지 썩어있으니 나라가 안되는 거야."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가증스러운 녀석이로군." 그걸 본 초우가 한심하다는 듯이 촌민들을 훑어 본 다음 말했다. "자 빨리 출발하자. 내일 점심때까지는 백수강을 건너야 한다구." "예." * * * 애숭이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수소문(搜所聞)해서 쫓아가는 추격술(追 擊術)이나 정보(情報)의 분석력(分析力)에서 초우는 묵향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솔직히 그에게 묶여 개처럼 끌려가는 단 하나의 이유가 좀 더 빨리 흑풍단을 찾는데는 이 방법이 좋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으니까... 초우는 일행들을 몰아서 백수강을 건너 재빨리 이동한 결과 8일 후 흑풍단에 거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초우는 마지막으로 촌민 (村民)들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본 다음 일행들에게 돌아와서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다. "그들은 저기 보이는 와우산(臥牛山)에 숨어있는게 틀림없소. 이미 일단의 관 군들이 이 근처를 기점으로 움직이고 있는데다 와우산에서 천태산(天態山)쪽 으로 이동하면 청해성(靑海省)이 나오는데 아마도 그들은 아직 온전한 병력을 보유(保有)하고 있는 정서원수부의 관할지역 중에서 비교적 병력이 적은 청해 성쪽으로 이동할 생각인 모양이오." "이 일대에 퍼진 관군(官軍)은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여태껏 촌민들이 알려준 복색(服色)이나 인원(人員)을 분석(分析)해보면 정 서원수부 관할 병력이 2만 정도... 그리고 정북원수부 소속이 3만 정도인 것 같소. 그런데 가까운 정서원수부에서 보낸 병력이 더 작은거 보면 아무래도 정서원수부에서는 흑풍단과 싸울 생각이 애시당초 없는거 같고.... 정북원수 부만 조심하면 될거 같소." "참. 그런데 그들이 와우산에 있는게 확실한가?" "그럴 가능성이 9할 이상이오. 그쪽으로 이동한 흔적은 미미하게 보이고 또 저 촌민의 말이 어제 나무하러 가면서 못 본 말발자국이 어지럽게 나있는 것 을 봤다고 하니...." "하지만 말발자국만 보고 그들이 흑풍단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걸?" "그렇긴 하오만 그 말발자국이 밤새 생긴것이니... 관군이 왜 위험을 무릎쓰 고 야행을 하겠소? 잘못해서 무공까지 강한 흑풍단에게 매복이라도 당하면 전 멸을 면치 못할텐데..." "그도 그렇군. 하지만 와우산을 넘어 다른곳에 박혔을지도 모르잖아?" "아니오. 와우산은 산세가 거칠어 이동하기 힘드는데 우회하지 않고 와우산 위로 올라간 것으로 미루어 험하긴 하지만 산길을 택해서 몰래 이동할 심산인 모양인데... 잘 갔다 하더라도 와우산 옆에 있는 우미산(牛尾山)이나 장천산 (長川山)쯤까지 밖에 못갔을거요." 여기까지 물어본 묵향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좋아좋아... 이제부터는 산길 이동이니 자네들의 도움은 필요 없 겠군. 본인도 그런대로 추적술은 자신이 있으니까... 발자국만 따라가면 될테 니... 자 이제부터는 나는 나대로 행동할테니 이 수갑이나 풀어주게나." "그건 안되오. 그대가 첩자인지 그들에게 확인해 본 다음에...." "할 수 없군." 뚝... 묵향은 손을 벌리자 썩은 밧줄처럼 간단히 수갑의 사슬이 끊겨버렸다. "그... 그대는 혈도를..." "네녀석이 잡은 혈도따위 푸는데 별로 시간도 안걸려. 자 내놔." 묵향이 손바닥을 내밀자 아연한 표정으로 초우가 물었다. "예?" "내 비수 내놓으란 말이다." 얼떨결에 내놓는 비수를 받은 후 쓱하고 비수를 꺼내는데 싸구려 검집과는 달 리 안에서 나오는 비수는 놀랍게도 묵빛 광택이 나는 것이 보통 비수가 아님 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모두들 묵향이 비수를 꺼내자 일순 긴장하여 모두들 묵향과의 거리를 재며 발 검(拔劍)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정작 놀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묵빛 비수가 갑자기 청색 화염이 올라오는 듯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억!" 비록 말로는 꺼내지 않았지만 말로만 들어오던 어검술(御劍術)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들의 마음에서 투지(鬪志)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도저히 이길 상대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묵향은 그 비수를 이용해서 썩 은 무우 자르듯 간단히 손목에 걸린 오철로 만든 수갑을 잘라낸 다음 비수를 품속에 집어넣은며 멍청한 얼굴로 그를 보고있는 세명을 휙 둘러본 다음 말했 다. "생각 같아서는 수갑을 채운 네 연놈들을 몽땅 죽여 없애고 싶지만 그래도 여 태껏 정이 든데다 빨리 흑풍단을 찾아준 성의(誠意)를 생각해 살려둔다. 만약 다음에 누구한테 내 혈도를 잡고 손목에 수갑채웠다는 말을 하기만 하면 혓바 닥을 뽑아버릴테니 자나 깨나 명심하도록." 그와 동시에 묵향의 신형은 말 위에 앉은 채로 튕겨 오르더니 무시무시한 속 도로 와우산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하나의 점이 되어가는 묵향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있던 초희가 말 했다. "저거 어검술 맞죠?"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나도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라 뭐라 말할 수가 없구 나." "무슨 경공술이 저렇게 빠르죠?" "글쎄... 태산을 몰라보고 있었구나.... 아마 여태껏 그가 떠들어댄 말이 모 두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무림은 넓구나. 아버님의 말씀이 무림에는 지 금 드러나 있는 2황 5제 4천왕이 강하다고 하지만 산골짜기에 그보다 더 강한 자들이 은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었지. 나는 말씀을 믿지 않았었는데 사실이었구나...." "하지만 오빠, 아무리 그래도 명문의 무공이 가장 강하다고 배웠었고... 또 후기지수(後期之手)들 중에서도 명문(名門)의 자제(子弟)들이 가장 강하잖아 요. 그런데 어째서 초야(草野)에 묻힌 사람이 더 강할 수가 있죠?" "당연히... 되지도 않은 무공을 숨어서 수십년 익힌다고 될게 아니지. 아버님 말씀으로는 천운(天運)을 만나 기연(奇緣)을 얻는 수도 있다고 하셨지만...." "기연이라면 어떤?"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 "말대로 기이한 인연이지. 어쩌면 우연히 은거기인(隱居奇人)을 만나 그의 제 자가 될 수도 있고... 또 기인의 무공 비급을 얻을수도 있겠지. 또 영약을 얻 을수도 있고... 그렇지만 첫째가 가장 현실성이 있고 나머지는 아냐. 보통 비 급이라면 정상적으로 기록한 경우는 없고.. 대부분이 암호(暗號)나 뭐... 말 뜻을 축약(縮約)하거나 빙빙 돌려놔서 그 오의(悟意)를 깨닫기가 무척 힘들거 든. 그렇기에 일정한 바탕이 되기 전에는 비급을 얻어도 그건 그냥 종이조각 에 불과한거야. 또 보통 사람이 영약따위 먹어봐야 보신(補身)이나 될까... 무공과는 상관없으니... 첫 번째가 가장 현실성이 있겠지." "과연 은거기인의 눈에 띄어 그에게 무공을 전수(傳受)받는게 가장 현실성이 있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강한 사람이 은거(隱居)를 할 리가 거의 없잖아요. 안그래요?" "아니야. 여태껏 무림에는 수많은 명문 거파들이 나타나고 또 사라졌지. 아마 사라진 문파들의 후손일지도 모르고... 또 일부 명문에서 파문당한 고수들도 있고, 심한 경우... 무림공적(武林共敵)으로 몰려 숨은 자도 있잖냐? 아마 묵 향이란 사람도 사문이 있다고 했으니... 어떤 명가에서 쫓겨난 반도 정도겠 지. 아마도 사문에서 쫓겨난 다음 어디 산골짜기에 숨어서 죽자고 무공을 익 혔는지도 모르고...." "글쎄요... 그의 말로는 파문은 아니라던데...?!" * * * 자그마한 산속에 세워진 정사(靜舍). 얼핏 보면 근방의 유려(流麗)한 경치(景 致)를 구경하기 위해 대갓집에서 세운 듯 제법 운치를 가진 자그마한 집이다. 그 정사의 앞쪽으로는 수려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자연 경관이 펼쳐져있었다. 하지만 문제라면 그 낭만과 운치를 간직한 정사를 감싸고 있는 기운이 예사롭 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사의 30장(90M) 밖에는 10인 정도의 인물들이 주위를 경계하며 살벌한 안광(眼光)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무 형(無形)의 기운만으로도 아무리 무공에 문외한이라도 무시무시한 고수임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극강(極强)의 기운을 뿜어내는 인물들이다. 이런식으로 자신의 기를 밖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그들이 암습 따위의 얄팍한 술수를 익힌 자들이 아닌 정면대결(正面對決)을 위해 그 무공을 익힘에 있어 정도(正道)를 걸어온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가 장 손쉬운 자리는 아마도 비무대(比武垈) 위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아마도 누군가의 호위(護衛)를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이런 무식 할 정도로 정직한 무예(武藝)를 익힌 자들을 써먹을 곳은 거의 없기 때문이 다. 그런데 누군가의 호위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극강한 기운을 뿜는다는게 문 제라면 문제라고 할까.... 하지만 더욱 큰 의문점은 그들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거의 절반에 가까 운 수는 숨이 막힐 정도의 마기(魔氣)를 내뿜는 반면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 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정파의 고수들도 지니기 어려울 정도로 정순(靜純)한 기운을 갈무리한 것을 보면 더욱 아리송해진다. 왜 이렇게 물과 불처럼 어울 릴 수 없는 자들이 한자리에서... 그것도 한채의 정사를 호위하며 눈에 불을 켜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정사 내부를 보면 대단히 소박하지만 소유주(所有主)의 품격(品格)을 나타 내는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거의 장식물이 없을 정도 로 텅 빈 실내지만 몇가지 준비된 필수품... 예를 들어 탁자라든지.. 의자 따 위 같은 것은 얼핏 보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수수하지만 자세히 감정을 해보면 뛰어난 장인의 화려한 솜씨가 돋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자그마한 탁자에는 찻잔이 놓여져 있었고 2명의 젊은이가 차를 들면서 담 소를 나누고 있었다. "껄껄... 처음에 만날때는 몰랐었는데.... 5년동안 한번씩 얘기를 나누다 보 니 어떻게 보면 우리들은 참 서로가 많은 부분이 통하는 점이 있구려." 그러자 그 청년의 앞쪽에 앉은 청년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청년 의 피부 색은 기괴하게도 자색을 띄고 있었고 은은한 마기를 자연스럽게 흘리 는 것이 아마도 촌민들이 봤다면 귀신이라도 만난 줄 알것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소? 그 사건이 있은 후 사후(事後) 처리를 위해 만난 것이 발단이 되었었는데... 시간이 그렇게 흐른지는 몰랐구려. 그리고 이번에 본교 (本敎)에서 처리하기에는 껄끄러웠던 놈들을 공적(共敵)으로 몰아 없애줘서 고맙소이다." "뭘요... 그대도 껄끄러운 애숭이들 처리에 도움을 줬으니 당연한 것이지요. 요즘 본맹(本盟)을 우습게 보는 것들을 귀교(貴敎)처럼 공개적으로 없앨수도 없으니 난처한 노릇이지요. 그렇다고 몰래 암살을 하자니... 본맹이 의심을 받을게 당연하고... 난감(難堪)했었소이다. 참. 그런데 내 보고받은 바로는 묵향이 살아있다던데..." 그러자 마기를 풍기는 젊은이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입을 열었다. "믿기 어려울테지만 사실이오." "흐음... 그때 완전히 없애버린줄 알았건만... 안타까운 일이오." "그러게 말이오. 이거 완전히 잠자는 호랑이의 수염을 뽑은 꼴이 되었으니... 딱한 노릇이외다." "악독한 놈의 손에 두 손녀가 죽은것만 해도 억울한데... 그런놈이 살아서 돌 아다닌다니.... 하여튼 전율(戰慄)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놈이오. 그놈을 이 번에는 완전히 없애버려서 후환(後患)을 제거해야 하오." "글쎄 말이오. 하지만 예전에는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을텐데... 쯧쯧..." "왜 그러시오? 일단 없애기로 한다면 믿을만한 수하(手下)를 시켜 살인(殺 人), 강간(强姦) 등을 시킨 다음 모두 그놈에게 뒤집어 씌워 무림공적(武林共 敵)으로 선포(宣布)하고 그녀석을 주살(誅殺)하면 간단할텐데?" "예전이라면 그게 통하겠지만 지금은 너무 커버렸소." "왜요? 그는 언제나 혼자서 행동할텐데.... 예전에도 그랬잖소? 그덕분에 전 에도..." 그러자 마기를 풍기는 젊은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휴... 그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오. 본좌가 멍청하게도 기억을 잃은 그녀 석을 끝장 내겠다고 천랑대와 염왕대를 보냈는데.... 그녀석들이 묵향편에 붙 어버렸소." "그럴수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결과외다. 그가 기억을 잃은 상태라면 몰라도... 기억을 찾았다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지니 말이오. 그는 아직도 본교의 인물이고... 또 그의 직위(職位)도 살아있소. 그러니 그 자신이 본교의 율법(律法)을 들고 나온다면 이것은 문파간의 투쟁이나 반도(叛徒) 처리의 문제가 아니오. 다만 교내의 권력(權力)다툼이 된다 이말이외다. 그러니 수하들은 모두들 각자 그 권력암투의 도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할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고 십중팔구 그들 은 강자(强者)의 편에 붙을 수밖에 없소이다. 본교 내의 모든 권력은 약육강 식(弱肉强食)의 율법을 따르기 때문이오. 만약에 그가 예전의 장인걸처럼 새 로운 문파라도 만든다면 오히려 간단한 일이지만 그가 본교의 부교주란 점을 계속 내세운다면 본교에서 고수들을 투입(投入) 할수 없소. 고수들을 보내봐 야 그자가 나보다 강하다는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에... 그가 그점을 내 세운다면 모두들 그의 편에 설 수밖에 없소." "흐음.... 극강을 자랑하는 마교도 여태껏 그 강함을 지탱해준 율법 때문에 곤란을 겪는 일이 생기는군요. 그럼 본좌가 나서서 그 일을 처리해야 한단 말 이오?" "그래 주실 수 있겠소? 하지만 그놈이 거느린 세력은 왠만한 문파쯤은 한시진 도 안되어 가루로 만들 정도로 강하오. 그정도 힘을 겨우 맹내(盟內)의 힘만 으로 처리하긴 힘들거외다." "흠..... 그건 본좌도 알고 있소. 어떤 뚜렷한 명목이 있어야 그 멍청이들을 설득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참! 문제는 그놈 하나니 살수를 고용하면 안되겠소?" "하지만 그정도의 고수를 처리할 만한 살수가 있겠소?" "요즘 맹위를 떨치는 살수집단(殺手集團)이 하나 있소이다. 그들에게 청부(請 負)를 해볼까 하오. 일단 공통의 적이니 그 비용은 서로 반씩 부담함이 어떻 겠소?" "좋소이다. 그런데 그 살수집단이라면?" "아마 그대의 짐작대로일거요. 요즘은 살수집단 중에서 흑월회(黑月會)의 솜 씨가 제일 좋다고 들었소." "과연.... 하지만 소문대로 그들의 실력이...." "클클...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살수들의 생명은 정보(情報)라고 봐야 하오. 개방( 幇)과 무영문(無影門)의 할망구한테 의뢰를 해놨으니 그의 겨드랑이 털 수까지 알려줄거요. 그만한 정보를 가지고도 어쩔 수 없다면.... 비밀리에 처리하긴 힘들거외다." "흠... 그렇다면 본좌도 삼비대에 연락해서 쓸만한 정보가 있으면 그대에게 넘겨주겠소. 하지만 그놈의 행태(行態)가 희한해서 아마도... 외부에서 포착 해서 암습(暗襲)하기는 힘들거외다." "행태라뇨?" "보통 느지렁거리면서 다니다가 한번씩 경공술을 써서 이동하는데... 그 속도 가 정말이지 무식할 정도로 빨라서, 완전히 몸을 드러내고 뒤쫓아도 못따라가 는데 어찌 숨어서 미행을 하겠소?" "쯧쯧... 그런 문제가 있구료." "거기다 예전에 그의 수하로 있었던 놈들의 말을 들어보면 밖에 나가면 거의 잠도 안 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본거지에 있을때는 한 서너시간은 자는 모 양이오. 그러니 그놈을 덮칠 곳은 본거지 뿐이다 이말이오." "그렇다면 참고로 알아둘 만한 그놈의 약점 같은 것은 없소?" "글쎄요... 그놈의 특기는 강기(剛氣) 종류지만 공력이 비교적 적게 드는 어 검술 종류를 더욱 좋아한다는 사실... 그렇기에 떼거리로 덤벼드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을거요. 그리고 아마도 그놈은 본교가 자랑하는 흑미륵신공(黑彌勒 身功)을 익혔을 테니 왠만한 공격으로 결정적인 타격은 줄 수 없소. 하지만 흑미륵신공 자체가 금강불괴(金剛不壞)처럼 외부에서 타격을 막는게 아니라 내부에서 충격을 분산(分散)시켜 흩어버리는 것이니... 아마도 장법이나 권법 같은 것 보다는 무기를 이용한 공격이 타격이 클거요. 하지만 흑미륵신공 자 체가 혈관(血管)과 혈도(穴道), 뼈를 무쇠처럼 단단하게 해주니... 그도 장담 은 하기 어렵소이다. 아마도 선택된 살수는 무쇠도 손쉽게 자를 수 있는 신병 이기(神兵異器)를 사용해야 할거요." * * * "그렇지... 그때 한번 보니 그놈의 무공(武功)은 상당히 특이했었소. 보통 귀 교의 무공은 강대(强大)한 공력(功力)을 바탕으로 하는 장력(掌力)이나 강기 류(剛氣類)가 주무기인데 반해 그자는 검을 이용해서... 그것도 최소한의 공 력만을 이용해서 적을 없애는 아주 실용적인 검법을 구사하는 것 같더군." "그게 가장 큰 문제라는 거외다. 보통 강한 위력에만 의존하는 놈들인 경우 떼거리로 덤비면 나중에는 공력이 고갈(枯渴)되어 제풀에 뻗게 되어있는데... 아마 그놈을 제풀에 뻗게 만들려면... 본교 세력의 절반을 잃을 각오까지 해 야 할 판이오." "그렇게까지나..." "아마 그게 맞을거외다. 그놈은 아주 실리적인 놈이라... 거기다 우리와 정면 으로 싸워야 할만한 약점 따위도 없소. 그러니 치고 빠지는 식을 계속한다면 그놈의 경공술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니... 어디포위(包圍)가 되겠소? 그냥 계속 쫓으면서 놈의 공력이 고갈되기를 기다려야 할텐데?" "흐음.. 그렇군. 그럼 예전과 같은 방법을 한번 더 써보는 것은 어떻소?" "예전과 같은 이라면?" "혹시 그놈이 아끼는 사람은 없소?" 그제서야 감잡은 상대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오.. 맞소. 그놈이 아끼는 양녀(養女)가 하나 있소. 그 아이를 인질(人質) 로..." "아니오. 인질만으로 해서는 큰 효과를 보기 힘들거요. 귀교에는 사람의 마음 을 조종하는 술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흐흐흐... 거 참 모르시는게없구려. 마령섭혼심법(魔靈攝魂沁法)이 있소이 다. 그걸 아주 교묘히 이용하면 될지도 모르겠군." "껄껄껄... 초고수에게 사용할 것도 아니고 그냥 어린 계집아이만 사술(邪術) 에 거는거니 아마 손쉬울거요. 그놈이 아이를 구한답시고 쳐들어오면 치열한 접전의 와중에 그 아이를 이용해서 암습을 하게 만든다면..... 하하하...그땐 우리가 원하는 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거요." "하지만 그놈이 들은척도 안한다면? 어쩌면 능히 그럴수도 있는 놈이니 하는 말이오." "그러면 할 수 없이 계획대로 살수를 보내는 것으로 합시다. 쓸데없이 먼저 살수를 보내어 경각심(警覺心)을 일깨울 필요는 없으니 말이오." "좋소이다." * * * "이상한 일이군." "뭐가요?" "왜 말들을 다 버리고 갔지?" "관군들이 지키고 있으니.... 저건 관군들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어.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까지 이어지던 흑풍단의 말발자국 이 없어졌다. 이건 그들이 말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경공술을 쓴거야. 그리고 저기에 쌓여있는 흑색갑주들을 봐라. 일부러 갑주까지 다 벗어렸다는 것은 이 제부터는 정면대결 보다는 도망치는 것에 더욱 주력하겠다는 뜻이지. 왜... 그렇게 작전을 바꾼거지?" "혹시 그때 만났던 묵향이란 선배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맞아요. 그 선배의 무공수준으로 보아... 잡배는 절대 아닐꺼고 어떤 단체의 수장(首長) 정도라면 그의 단체에 포섭(包攝)되었을 수도 있지요. 그러면 목 적지가 생겼으니 쓸데없는 전투를 벌이기 보다는 조용히 도망치려고 들겠죠."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조심해라. 관군들 외에도 제법 고수들이 몇 명 있는 것 같으니까." "예." 초우 일행은 마을에서 말을 다 팔아버린 후 경공술을 이용했다. 산길을 달리 는데는 말을 이용하는 것 보다 경공술을 사용하는게 더 낫기 때문이다. 때문 에 조용히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아직 무공이 떨어지는 여동생들 때문에 골치 였다. 아마도 이걸 염려한 묵향이 혼자서 앞서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속이 터 졌지만 그래도 여동생들이라 버려놓고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누이 동생들을 독촉하며 길을 재촉한 결과 묵향과 헤어진 그날 저녘때 흑풍단이 버 리고 간 말들을 호위하고 있는 관군들을 만난 것이다. 관군들의 행동이 예상 외로 빠름을 감지한 초우는 아무래도 추격의 전문가 쯤 되는 무림인들이 관군 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기에 그 누이동생들에게 주 의를 준 것이다. 이들은 밤을 무릎쓰고 3시간 정도 산길을 달리다가 더 이상 어둠 때문에 흔적 을 쫓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야숙(野宿)을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추 격을 시작했다. 추격을 시작한 후 4시간 정도 되었을까 희한한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8마리의 개(犬).... 아마도 관군에서 기르는 군견인 모양인데... 그들의 입에 거품이 물려 있었고 모두들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있었다. 아직 4마리의 개가 살아있기에 그들은 이게 어찌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들 또한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은 광기(狂氣)에 가득찬 채 사람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아마도 미친 개들한테 물렸는지 여러명의 부상자들이 있었다. 일부 병사들은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고 일부는 미친 개들을 공포어린 눈으로 죽인다고 난리 를 치고 있었다. 이때 유독 그중에 3명의 인물들이 초우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들은 각기 관 군들과는 달리 검을 가지고 있었고 이 난리통에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관군들에게 협조하는 무림인들인 모양이었다. 보통 돈이 궁한 무림인 들 중의 일부가 관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경우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다행이라면 그런 인물들 중에는 아주 뛰어난 고수는 없다는 점인데... 하지만 만의 하나라는 것도 있으니 조심은 해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저 들개들은 뭐죠?" "들개들이 아니다. 목에 끈이 묶여 있잖아. 관군들이 사용하는 군견(軍犬)이 다. 아마도 흑풍단이 어떤 약물을 길에 뿌린 모양이야." "약물을 뿌린다고 개가 미쳐요?" "그건 모르지. 이럴게 아니라 빨리 가자. 흔적 남기지 않도록 조심해라. 저 난리가 나는 걸 봐서 아마도 저들이 제일 앞서서 추격하는 놈들인 모양이니 까." "예." 초희는 순순히 대답했지만 초연은 그래도 약간의 무림 경험은 있는지라 자신 이 생각하는 우려할 만한 점을 말했다. "오빠. 그러지 말고 저들 뒤로 따라가는건 어때요? 함정이라도 있다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럼 조용히 그들을 따라간다." 과연 그 세명은 추격의 전문가들이었다. 개들이 죽어버린 후에도 그들이 앞장 서서 아주 미세한 흔적들을 더듬으며 300여명의 관군들을 인도했다. 그러면 관군들은 뒤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10장(30M)간격으로 하면서 그들 의 뒤를 따라갔다. 아마도 그 뒤에는 관군의 주력부대(主力部隊)가 따라올지 도 모른다. 초우는 일부러 그 뒤를 따라가며 그들이 묶어놓은 빨간 천을 풀어 다른 샛길쪽으로 연결해뒀다.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6개 정도만 연결한 후 다 시 돌아와 그 샛길을 즈음해서 나 있는 관군의 발자국도 모두 없애버린후 뒤 따르면서 모든 표시들을 없애버렸다. 이렇게 4시간 정도 갔을까.... 갑자기 앞에서 화살 10대가 동시에 날아와 추 격하던 무림인들 3명과 뒤따르던 군사들의 몸통에 맞았다. 그들은 그 즉시 고 꾸라졌고 모든 화살의 앞부분이 등뒤까지 튀어나온 것이 그것을 쏜 사람의 공 력(功力)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화살이 날아오자 마자 모두들 나무나 바위 등의 뒤에 숨었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그제서야 모두들 쓰러진 사람 들을 살펴보기 위해 조심조심 일어섰다. 아마도 그들의 표정으로 보아 화살을 맞은 모든 사람들은 즉사(卽死)한 모양이었다. 이때 숲속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더이상 추격하면 모두 다 죽여버릴테니 알아서 해라. 모두 다 꺼져!" 희망을 가졌었던 무림인들도 다 죽어버렸고... 상대는 얼마 전까지 관에서 최 강을 가랑하던 찬황흑풍단이다. 거기에 상대는 이쪽을 알지만 이쪽은 상대가 어디에 숨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니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명이 뒤로 도망치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며 모두들 뒤를 향해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관군들이 사라지자 초우는 이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경공술을 이용해 앞으로 쏘아가가 시체들이 있는 곳에 당도한 다음 신형을 멈추고 말했다. "저는 초씨세가의 초우란 사람입니다. 그대들이 죄도없이 쫓기는 것을 알기에 도와드리려고 먼길을 달려왔으니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의외로 상대의 답은 손쉽게 떨어졌다. "좋소. 그대의 동생들과 함께 오시오." '동생들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초우는 동생들을 불러 앞으로 나갔고 그 앞에는 10명의 전포(戰袍)를 입은 무 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각기 활을 휴대한 것으로 보아 아마 이들이 방금 활을 쏜 인물들인 모양이었다. "그대가 초우인가? 나는 임충이라고 한다네. 대장한테서 자네 얘기 들었어. 젊은 나이에도 꽤나 유능하다던데... 참. 관지 대장이 있는 곳으로 가세나." 초우는 경공술을 이용해 따라가며 임충에게 물었다. "지금 흑풍단을 이끄는 분이 관지 대장이란 분입니까?" "그렇지. 나중에 자네도 만나보면 알겠지만 대단한 분이야. 지금까지 우리들 이 버텨온 것도 그분의 덕이지." "묵향이란 선배는 여기 계십니까?" "아니. 일이 있다면서 먼저 떠났어. 제길... 예전에도 대단했지만 지금은 아 예 저 먼 하늘이더군. 그때는 꼭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었는 데..." "그렇게 대단한 분인가요?" "그렇지. 내가 이상형으로 삼는 분이라고 할까... 무공도 고강하지만 유식하 고... 또 마음씀씀이는 얼마나 인자하고 부드러운데... 예전에는 술도 자주 마셨었는데..." '인자하고 부드러워? 유식하다고? 전혀 아니던데...' "저... 그분 책은 많이 보셨나요?" "응. 관지대장의 말로는 황궁무고에 있는 책이란책은 몽땅 다 읽은 유일한 인물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단장이 예전에 그에게 뛰어난 선생들 몇 명을 붙 여줬었는데... 글공부도 아주 폭넓게 한 모양이야."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떨떠름한 얼굴로 초우가 되물었다. "그래요?" "자네도 만나 봤었다니 알거아냐? 무식한 무림인들 하고는 뭔가 분위기가 틀 리지 않던가?" "저는 안목이 짧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대장이 바빠서 그런지 나도 얼마 얘기를 못나눴거든." 3시간 정도 달려가자 흑풍단의 본대가 있었다. 모두들 나무기둥에 의지해 쉬 던지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는 무리들도 있었다. 임충은 그들을 데리고 한 인물 앞으로 다가갔다. 그 인물은 청색 전포를 입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젊은 무사였는데 오랜시간 쫓긴 탓인지 다듬지도 못한 수염이 숭숭 돋아있었다. 그리고 다부진 턱선과 피로한 듯한 안색(顔色), 시 원하게 솟은 콧날....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강인한 정신력을 드러낸 강렬한 안광(眼光)을 내뿜는 두 눈... 한마디로 패기(覇氣) 가 넘치는 뛰어난 무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예상외로 상대가 아주 뛰어난 인물임을 자각하며 초우는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인사를 하면서도 누이동생들이 이 근사한 상대를 앞에 두고 정 신을 못차리는 것을 눈치채고는 정신을 차리게 옆구리를 찔렀다. 서로간의 인 사가 끝난 후.... "초씨세가의 초우라 합니다. 직접 보니 더욱 뛰어난 분이시군요." "허허.. 과찬의 말씀을.. 그대의 말은 묵향 부교주에게 들었소." "예? 부교주라니요?" "그는 얼마 전까지 본단(本團)의 백인대장으로 있었던 대단히 뛰어난 무인이 오. 하지만 그때 그를 알게 되었을때도 화경(化境)에 준하는 무공을 소유한 인물이 겨우 백인대장 노릇이나 하는게 이상하게 생각되었었소." "방금 화경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화경이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그 이전의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소. 그러니 자신이 익혔던 모든 무공 또한 잊었었지요. 그래서 단장님 이 그를 황궁무고에 들여 무공을 익히게 한 것이었는데.... 그의 무공을 직접 몽고 전투때 봤었지만 정말 대단했었소. 그런데 이번에 어떤 계기로 기억을 되찾았다고 하더군요. 그의 본래 위치는 무림의 마교란 단체의 부교주라고 했 소. 자기가 몇가지 일을 벌이는데 날 보고 도와달라고 하더군. 사실 우리들도 갈곳이 없던 차고 해서... 그의 일에 동참(同參)하기로 했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저.. 마교란 단체를 들어보셨습니까?" "난 잘 모르오. 난 관부에서 자라나 그곳에서 무공을 익혔고... 또 들리는 소 문만으로 상대를 평가할 정도로 속좁은 인간도 아니오. 사실 내가 직접 본 묵 향이란 인물은 정파라 자처하던 인물들에 비해 뒤질게 없었기 때문이오. 그리 고 그는 지금 마교하고 좀 껄끄러운 관계인 모양이고 별로 좋지못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다음에 만나면 괜히 먼저 마교에 관계된 말을 꺼내지 마시오. 어쩌면 그대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니까..." "예?" "이번에 만나보니... 기억을 되찾은 다음 사람이 조금 변했더군요. 하지만 솔 직담백(率直淡白)한 것은 여전하기에 그를 믿기로 했소. 그의 무공은 지금 현 경(玄境)의 수준이라 했소. 그러니 그의 신경을 건드려 좋을게 없다는 말이 오." "그럴 리가...." 초우는 경악했다. 내심 묵향이 마음껏 어검술을 쓸때부터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놀라움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경이란 위치가 그냥 말로 한다고 올라가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어려운 위치기 에 기나긴 무림 역사에도 단 한명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묵향 선배도 없는데... 그럼 어디로 갑니까?" "섬서성(陝西省)에 위치한 중경(中京=지금의 서안시;西安市) 서남쪽에 태백산 (太白山)이란 산이 있는데, 그곳에 세워진 흑룡문(黑龍門)이란 문파가 있다고 했소. 그리로 오라고 했으니... 조심해서 가봐야지요." "참. 오다가 미친 개들을 봤는데... 그건 어떻게 한겁니까?" "그건 묵향 부교주가 주고 간 광견분(狂犬粉)이란 독을 사용한 것인데 그걸 땅에다 뿌려놓으면 개가 냄새를 맡는다고 킁킁거리다가 콧속으로 들어가면 콧 속의 습기에 녹으면서 발작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지요. 아마도 사람한테도 효 과는 있겠지만 사람이 어디 땅바닥에 킁킁거릴 일이 있겠소? 다만 물에 잘 녹 기 때문에 비만 오면 끝난다는 단점(短點)이 있다고 써져 있더군요." * * * 묵향은 지금 별로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누구라도 길을 갈 때 누군가 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좋은 기분이 될 리가 없을 것이다. '어찌한다... 기분도 꿀꿀한데... 재미삼아 한번 족쳐봐?' 누군가가 뒤쫓는 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흑풍단과 헤어진 다음 홍원(紅原)이 라는 도시에 들어선 다음부터다. 홍원은 사천성(四川省) 북쪽에 있는 제법 큰 상업도시로 감숙성(甘肅省)으로 들어서는 관도(官道)상에 위치한 사천성과 감 숙성간의 물류유통(物類流通)의 중심(中心)이었다. 묵향은 일부러 조금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선 다음 다시 오른쪽에 나있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런다음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그의 기다림은 별 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먹음직한 먹이감이 바로 거미줄을 향해 돌진해왔기 때문이다. 묵향은 골목안으로 뒤따라온 거지 2명의 혈도(穴道)를 재빨리 점혈 (占穴)한 다음 음흉한 미소를 띄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시작했다. "호... 개방( 幇)의 나으리들이 왜 나를 따라다니지?" 그러자 점혈당해 쓰러진 두명은 익히 상대의 무서움에 대해 들었는지라 식은 땀을 흘리며 변명해댔다. "오해십니다요.. 나으리. 저희들은 동냥을 받기위해 이리 들어온 것 뿐입니다 요." "쯧쯧... 아니야... 그건 사실이 아니야. 좋게 말로 할 때 털어놔. 응?" "사실입니다요. 저희들은 그냥 동냥을 받기위해 이리 들어온 것 뿐입니다요." "그으래에..? 난 오늘 내 평생 본것보다 더 많은 거지들을 봤다구. 그게 결코 우연(偶然)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묵향이 그들의 품속을 뒤지자 곧이어 품속에서 세밀히 그려진 묵향의 초상화 가 나왔다. 그 초상화에는 몇마디 말이 써져 있었다. < 마교(魔敎) 부교주(副敎主) 묵향(墨香) 단독행동(單獨行動)을 좋아하며 검은색의 아무 장식(裝飾)이 없고 칼날받이 조차 없는 특이한 모양의 기형검(奇形劍)을 사용함. 이 자의 무공은 화경을 넘어선 상태로 대단히 사악(邪惡)한 위험인물(危險 人物)이니 절대 충돌은 피할 것. 이 자의 위치가 발견되는 대로 총타에 최우선적으로 보고할 것.> 묵향은 그 초상화를 쓰러져있는 거지들의 눈앞에 들이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건 내 얘기 같은데... 아무래도 말로 해서는 안들을 것 같군." 묵향은 우선 놈들이 자살하지 못하도록 아혈을 제압해버린 다음 말했다. "말할 생각이 있으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라구. 먼저 뭘 해볼까... 분근착골 (粉筋鑿骨)은 별로 재미가 없고... 흠... 맞아." 한 거지의 윗도리를 벗긴 다음 때가 잔뜩 묻어있는 가슴을 부드럽게 만지면서 말했다. "아주 예쁜 갈비뼈를 가지고 있군. 이걸 하나씩 뽑으면 아주 재미있을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면서 제일 밑에 위치한 갈비뼈로 손가락을 박아넣어 갈비뼈를 쥐었다. 그 런다음 아주 천천히 힘을 가해가자 공포에 질린 눈으로 거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도 생으로 갈비뼈를 뽑겠다는데야 항복할 수밖에 없었 던 것이다. '초상화에 써진 것 보다도 더욱 사악한 놈이군. 제기랄... 잘못걸렸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그놈의 아혈만 풀어주면서 속삭이듯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가 혀를 깨물고 자살한다면 저기 남은 친구는 더욱 처참하게 당할테니 잘 생각하라구.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하나뿐이야. 홍원 분타가 어디있지? 뭐 싫다면 대답 안해도 상관없어. 여기 거지들이 아주 많은 것 같으니까 하나 하나 잡아다 주리를 틀어보면 누군가는 실토를 하겠지." "홍원 동남쪽에 보면 관제묘가 있는데... 그곳입니다요." "흠... 좋아좋아. 안내해. 길찾기는 성가시니까." 두 거지는 그 즉시 묵향이 혈도를 완전히 풀어줬으므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묵향을 처다봤다. "끌끌... 딴 생각 하지마. 전 무림을 뒤져봐도 나보다 경공술이 빠른 놈을 찾 기는 어려울테니까. 일단 도망치다 잡히면 다리뼈를 부순다음 길안내를 시킬 거야. 그것도 재미있겠지?" 사색이 된 두 거지가 묵향을 안내해서 개방의 홍원분타에 나타난 것은 1시간 후였다. 그들이 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고참 거지가 으르렁거렸다. "정보수집은 안하고 왜 돌아오냐? 헉!" 모두들 거지들을 뒤따라 들어오는 묵향을 발견하고 경악했지만 정작 묵향은 평안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와서는 그들이 굽고있는 멧돼지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흐흐흐.. 배고프던 차에 잘 되었군. 역시 나는 먹을 복이 있단 말이야." "네... 네놈은 누구냐?" "다 알고 왔으니 나를 모르는 척 할 필요는 없어. 이봐, 여기 분타주가 누구 냐?" "........" "좋게 말할 때 나와. 나도 피비린내 나는 곳에서 식사하고 싶지는 않으니 까..." 초상화에 써진대로 진짜 화경의 고수라면 여기 모여있는 10여명이 조금 넘는 수로는 그야말로 변변한 대항조차 못해보고 도살당할것이 분명하다. 개방은 30만이 넘는 인원을 가진 거대방파지만 다만 한가지 고수라고 부를만한 인물 들이 극소수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 많은 인원을 가지고도 무림의 패 권에 도전한 적이 한번도 없이 정보만을 취급하는 소식통으로 존재하는 이유 가 여기 있었다. 그리고 개개인의 무공이 뛰어나지 못하기에 고급정보를 획득 하는데도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요즘 들어서는 뛰어난 첩보능력과 잠입술을 가진 많은 고수를 거느린 무영문에 뒤지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묵향이 품속에서 시커먼 비수를 하나 꺼내 익은 부분을 잘라서 씹어먹기 시작 하는데 뒤에서 주춤주춤 한 거지가 앞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본인이 홍원분타주입니다." "흠. 그래? 쩝쩝.. 고기가 질기군... 나를 감시하라는 명령은 총타에서 내려 온 거냐?" "예." "그럼 네놈이 총타에 연락해라. 감시를 하는건 좋은데... 내 눈에 안띄게 하 라고 해." "예? 무슨 말씀이신지..." "쩝쩝... 거지들이 내 뒤를 따라다니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게 못되지. 나는 네놈들에게 동냥 줄 돈도 없다구. 감시를 하고싶으면 멀리서... 내 눈에 안띄 는 곳에서 하란 말이야. 감시를 하는 것을 두고 시비를 걸고 싶지는 않은 데... 만약 앞으로 내 눈에 띄는 개방 거지가 보이면 뼈다구를 분질러 버릴거 야. 알겠어?" "예. 예." "여기 술은 없냐? 쩝쩝.." "여기 있습니다요." 옆에 있던 거지가 술이 든 호로병을 내밀자 그 거지의 머리를 딱 소리가 나게 쥐어박으면서 말했다. "역시 멧돼지에는 술이 있어야... 빨리 따뤄. 이녀석아. 네놈이 입을 가져다 댔던 건데 거기다 나를 보고 입을 대란 말이야?" 묵향은 멧돼지 고기와 술을 배터지게 먹은 다음 관제묘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명심해. 눈에 안띄게 감시하라구. 어쨋든 오늘 잘 먹었다. 그리고 이 하고 빈대, 벼룩 같은 것 좀 잡아라. 이 더러운 놈들아." 묵향은 공력을 운용하여 몸속에 숨어든 못된 벌레들을 태워 죽여버린 다음 경 공술을 이용해 쏜살처럼 날아가 버렸다.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버린 묵향을 바라보며 한 거지가 말했다. "참 내. 더러워서... 거지것도 뺏아먹는 놈이 있군." 그러자 분타주가 말했다. "아서라. 저 경공술만 봐도 그의 무공이 어느정도인지 알겠다.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다행이야. 그건 그렇고 저렇게 위험한 인물을 왜 감시하라는 거 지?" 무서운 방문객(訪問客) 정사(正邪)의 모든 정보단체(情報團體)들이 묵향의 위치를 포착(捕捉)하기 위 해 거대한 동정호가 있는 호남성을 이잡듯이 뒤지며 난리를 치고 있을 때 묵 향은 유유히 호북성의 산길을 걷고있었다. 요즘들어 행적을 숨기느라 산길을 걷자니 산적들이 그를 귀찮게 구는게 흠이긴 했지만 잡수익(雜受益) 또한 짭 짤해서 내심(內心) 묵향으로서는 잔재미가 있었다. 지금 묵향이 찾아가고 있는 곳은 살막(殺幕)이었다. 이번에 웃지못할 소동이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묵향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설무지가 묵향이 거느린 조 직의 힘이 어느정도인지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설무지는 묵향에게 정보단체의 확보를 권했다. 하지만 묵향이 거느 린 세력의 힘을 아직 확실히 모르는 설무지는 묵향의 힘이 마교 세력의 4할 정도에 이른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어서 살막이라는 자그마한 살 수조직의 흡수를 권했던 것이다. 원래가 살수조직은 어느정도 뛰어난 정보능 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야만 먹이감을 손쉽게, 확실히 헤치울 수 있기 때문이 다. 예전의 살막이라면 대단한 단체였지만 지금은 이미 신진세력인 흑월회에 밀려 쇠퇴하는 조직인지라 설무지는 묵향의 능력을 최소한으로 잡아도 그들 정도라 면 충분히 흡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 반해 무영문이나 마교 에서는 묵향이 거느린 세력의 공포스러움을 익히 아는지라 그들의 힘으로 먹 을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단체를 꼽다 보니 사파 최고의 정보소식통인 하오문 (下午門)을 지목하게 된 것이고 여기서 서로가 엇갈린 것이다. 묵향은 별 어려움 없이 살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설무지의 말대로 대홍산(大 洪山)에 도착한 다음 그곳에 위치한 큼직한 장원(莊園)으로 갔다. 장원의 현 판(懸板)에는 큼직하게 柏芸莊(백운장)이라는 글씨가 써져있었는데 조금 낡은 것으로 보아 꽤 오랜 전통을 지닌 장원임을 알 수 있었다. 묵향은 시골장원의 문지기로는 좀 수상할 정도로 기골(氣骨)이 장대(壯大)한 인물에게 말했다. "장원 주인에게 할말이 있어 찾아왔으니 시간 좀 내 달라고 전해주게나." "뭐라고 했소?" 차림새도 별볼일 없는 주제에 다짜고짜 원주를 찾으니 장한은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이 퉁명스러운 대답을 했고 상대가 이렇게 나오자 묵향의 입에서 도 고운 말이 돌아갈 이유가 없다. "이녀석이 귀가 먹었나? 장원 주인에게 할말이 있어 찾아왔으니 시간 좀 내달 라고 전해라." "여기가 어디라고... 원주(園主)께서 너같은 놈에게 볼일 없으시니 좋은 말 할 때 꺼져." "네놈이야 말로 좋은 말 할 때 원주 불러." "이자식이..." 그와 동시에 그 거한은 그 덩치에도 불구하고 번개같이 주먹을 뻗어왔다. 거 한은 상대가 검을 차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서생냄새가 풍기기에 일부러 내력을 거의 넣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타고난 신력이 있기에 맞으면 떡이 될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맞았을 때 얘기고... 상대는 간단히 몸을 비틀어 피하면서 왼손을 번개같이 뻗어 거한의 멱줄을 쥐 었다. 거한은 처음에는 뭐 이런놈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었지만 곧이어 생각 을 바꿔야만 했다. 무시무시한 압력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은 다음 순간이었고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닭 목을 비틀 힘도 없을 것 같은 상대에게 목이 잡 힌채 공중으로 몸이 대롱대롱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고수다.' 이때 상대의 비웃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죽고싶냐?" 사실 목이 한번 우왁스런 손에 잡혀 본 사람은 다 안다. 온 몸에 소름이 끼치 면서 숨이 콱콱 막혀오면서 피어오르는 거의 본능적(本能的)인 공포(恐怖) 를... 거한은 사력을 다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상대가 자신 의 목을 잡았던 손을 놓아버렸고 그의 몸은 힘이 쭉 빠져 그대로 밑으로 떨어 져내리며 엉덩방아를 찢고 말았다. "원주한테 내가 찾아왔다고 전해라." 일단 상대가 꽤 걸직한 무공을 익힌자라는 것을 깨닳은 거한은 살며시 일어서 서는 조금 비굴(卑屈)하다 싶을 정도로 공손하게 말했다. "저... 어떤 고인(高人)께서 찾아오셨다고 전할깝쇼?" "녀석..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마교 부교주 묵향이 찾아왔다고 하면 알거 다." 마교 부교주라는 그 직함이 가지는 위력은 엄청났다. 마교란 단체가 어떤 단 체인가... 사파의 우두머리이자 그 무공의 악랄함과 강대함은 전 무림을 몇번 이나 치를 떨게 만들었지 않은가. 그곳의 부교주라니... 거한은 그 우직한 덩 치를 공기돌처럼 가볍게 바람처럼 안으로 날려 사라졌다. 그리고 곧이어 안에 서 몇 명의 장한이 나오더니 묵향을 내부로 공손히 안내했다. 묵향이 안내되어진 방은 제법 큼지막했지만 큰 탁자 하나가 덩그러너 놓여있 고 의자들이 빽빽히 들어있는 것이 아마도 회의실인 모양이었다. 묵향이 아무 의자에나 앉자 곧이어 시비(侍婢)인 듯한 여인이 예의바르게 차를 놓고 나갔 다. 하지만 정작 주인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묵향은 천천히 차 를 마시며 기다렸다. '떨떠름 하군...' 묵향은 차맛이 유난히도 떨떠름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주인의 취향 탓인가... 내 기분 탓인가...' 거의 2각(30분)이 지나서야 나타난 주인은 바퀴달린 의자에 앉은 채 한 남자 의 손에 밀려 들어왔다. 묵향은 더욱 떨떠름한 표정으로 들어온 계집을 응시 했다. 유난히도 흰 피부에 시원한 이마에 어울리는 맑고 큰 눈동자... 붉은 빛을 띈 작은 입술... 가녀린 체구를 가진 뛰어난 미인이었다. 하지만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그대가 장원의 주인이오?" "그래요." "그렇다면 살막의 주인도 되겠군. 맞소?" 그러자 여인은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맞다면?" "본좌는 말 돌리는 것은 싫어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본좌의 밑에 들어올 생각은 없소?" "......." "그대들에게도 정보조직은 있을테니 본좌의 소개는 생략하기로 하지." 잠깐 뜸을 들이던 여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갑작스런 제안이라서...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흐흐흐... 감히 본좌의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것은 아닐테지?" 묵향은 사악한 웃음과 함께.... 일부러 강렬(强烈)한 마기(魔氣)와 사악(邪 惡)한 기운(氣運)을 극도로 몸 외부로 뿜어내어 공포분위기(恐怖雰圍氣)를 조 성해가면서 협박하기 시작했다. 방안에 들어서 있던 인물들은 모두 다 안색이 창백해지며 공력을 운용해 극악(極惡)한 기운들을 몰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 기 시작했다. 그들도 꽤 오랫동안 무림을 활동했지만 이렇게 지독한 마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묵향은 거기에 한수 더 떠서 품속에서 묵영비(墨影匕)를 꺼내어 검신을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무언의 압력과 공포분위기를 더욱 농밀하 게 조성하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본좌의 실력이 어느정도 인지를 잘 알텐데... 감히 이따위 시골 문 파의 힘을 믿고 본좌의 청(請)을 거절해? 당장 관(棺)을 보아야 정신을 차릴 셈인가?" "......" "크흐흐흐... 아니면 어딘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묵향은 천천히 일어서서는 창백하게 질려있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움 직임에 따라 묵향의 몸에서는 더욱 공포스러운 살기(殺氣)와 함께 적색 기운 이 감도는 운무(雲霧)가 피어나왔고... 그의 피부색도 붉은색 광채를 내며 더 욱 기괴한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본좌가 수하들을 거느리고 오지 않았다고 베짱을 튕기는 모양인데 여기 있는 놈들정도는 본좌 혼자서도 충분히 토막을 칠 수 있어." 묵향이 갑자기 일부러 악귀(惡鬼)같은 형상(形狀)을 보지 않으려고 애써 외면 하고 있는 여인의 턱을 잡고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획 틀자 놀란 여인 의 경악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흑!" "크크크... 제법 그럴듯한 얼굴이군... 크흐흐흐...." 무시무시한 살기와 마기를 뿜으며 악귀와 같은 사내가 정욕(情欲)이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눈으로 자신의 빰을 싸늘한 예기를 뿜는 비수(匕 首)를 살짝 눕혀서 문지른다면 기분이 어떨까... 이렇게 황당한 경우를 여태 껏 한번도 당해보지 않은 여인은, 눈앞에 거의 악귀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무뢰한(無賴漢)으로 인해 까무러치기 일보직전인 상태였다. "본좌를 2각씩이나 기다리게 만들었으니 시간은 충분히 준거야. 빨리 결정을 해! 지금 죽을거냐? 아니면 본좌 밑에 들어올거냐?" 탕! 협박과 함께 음향효과(音響效果)로 인한 위협을 더하기 위해 탁자까지 일부러 큰 소리가 나게 공력을 조금만 넣어 두들긴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때 갑 자기 묵향의 코에 아스라히 지린내가 스며들었다. 아마도 여인은 너무나 놀라 서 찔끔 실례를 한 듯.... '험... 험... 내가 너무 과했나?' 묵향은 짐짓 모르는척.... 비수를 품속에 집어넣으며 자신이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가 털썩 앉으며 이왕 시작한 행위니 끝까지 뻔뻔스레 밀어붙였다. "결정을 햇!" 묵향이 좀 멀어지자 조금 정신을 차린 여인이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본막은 만약... 결과가 죽음 뿐이라도 당신의... 당신의 협박에 응할 수 없 어요." "흠.... 제법이군..." 갑자기 묵향의 몸에서 피어나오던 마기와 살기 모든 기운이 일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묵향은 느긋하게 한쪽 팔로 빰을 받치고는 탁자에 편안히 기대 앉은 자세에서 입을 열었다. "밑에 들어오지 않겠다니 어쩔 수 없지. 나도 미래 상황이 불확실 한 만큼 억 지로 강요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그대들이 내 밑에서 뼈빠지게 일해 도... 과연 영화(榮華)를 함께 할 수 있을지는 나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 이었거든. 참. 여기 오는 길에 아주 훈련이 잘된 추격자(追擊者)들을 만났었 는데... 따돌리기는 했지만 어쩌면 냄새를 맡고 이리로 올지도 모르니 딴 곳 으로 이사를 가는게 현명할거야. 나를 노리는 놈들은 원체 많아서... 그대들 이 내 청을 거절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우선 없애고 볼지도 모르니까... 그건 그렇고... 사파에서 꽤 실력있는 정보단체가 뭔지 아나?" 이제 어느정도 이성(理性)을 회복한 여인이 즉시 대답했다. "당연히 하오문(下午門)이죠." "그것은 어디에 있지?" "군산 천영루(千影樓)에 총타가 있어요." "좋았어. 나는 볼일은 다 봤으니... 이만 가보기로 하지." 묵향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다가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참. 암기(暗器)를 장치하기는 좋겠지만 그런 의자에 앉아 병신인 척 할 필요 없어. 그리고 네가 한 말이 저 방에 있는 인물의 의견이라고 생각하겠다. 막 주에게 다음에 혹시 만날 일이 있으면 대리인(代理人)을 세우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고 전해줘. 그럼.." 그와 동시에 묵향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묵향이 사라지고 난 다음 지독한 공포로 탈진을 해버린 여인이 멍하니 앉아있 는데 옆방의 문이 열리면서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당당한 체구의 남자가 걸 어나왔다. 그의 뒤로 10여명의 검수(劍手)들이 문 안으로 얼핏 보였다. 그 남 자는 천천히 걸어와 묵향이 앉았던 자리에 털썩 앉으면서 말했다. "차를 다오." "옛" "온 무림이 난리를 치기에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했더니 상상보다 더욱 뛰어 난 인물이긴 한데... 성격이 좀 괴팍한 것 같군." "동석!" 그러자 문 가에 서있던 황의를 입은 남자가 그의 앞으로 달려와 고개를 숙이 며 답했다. "예" "총타를 청하장(淸河莊)으로 옮긴다. 즉시 시행하라. 여기는 너무 알려져버렸 어." "존명!" 수하들이 준비를 위해 모두들 밖으로 나가자 그녀가 두려움을 털어내려는 듯 진저리를 치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아아... 정말 무서웠어요." "미안하다. 그런 괴상한 인물인지 모르고 너를 앞세워서..." "하지만 덕분에 알아낸 사실도 몇가지 있으니..." "수(垂)아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냐? 또다시 피튀기는 무림으로 돌 아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지금처럼 방관자(傍觀者)로서..." "그는 하오문으로 간 것 같은데... 과연 그가 하오문을 접수(接收)할 능력이 있을까요?" "글쎄... 아직 확실한 정보는 없다. 그에 대한 정보는 이상하게도 거의 없어. 어쨋든 무림맹과 마교가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악착같이 경계하는 것으로 보아 그정도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가 하오문을 접수한다면 본막의 필요성은 없어질거에요. 여태껏 그의 행적 으로 보아 모두 정면대결을 택했지 암살을 한 적은 없기때문이지요. 그러니 그가 여기 온것도 아마 정보를 원해서였을 거에요. 오라버니의 생각은 어때 요? 그의 밑에 들어가는 것과 남는 것." "뛰어난 인물이니 그 밑에 들어가서 믿질 것은 없을거야. 그리고 떠나라는 말 까지 곁들인 것을 보면 그렇게 피에 물든 마인(魔人)은 아닌 것이 확실해. 문 제는 만약 그에게 붙지 않는다면 철저히 무림에서 떠나든지 아니면 그의 파멸 (破滅)에 일조(一助)를 해야 후환(後患)이 없다는 사실이지. 아마도 내 생각 으로는 저자로 인해 혈풍(血風)이 불지도 모르겠구나." "오라버니 생각으로는 그를 암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힘없는 어조로 답했다. "아마도 내 감각이 무뎌지지 않았다면 대단히 힘들거다.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르지만... 휴...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구나." "그렇다면 그의 편에 붙어요. 하오문을 그가 접수하기 전에 그에게 가담한다 면 우리들을 좀 더 중용(重用)해 줄 거에요. 참, 그런데내 다리가 멀쩡하다 는 것 하고, 오라버니가 거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글쎄... 그런것까지 눈치챌 수 있으니 무림이 그 난리겠지. 내가 생각하기에 는 아마도...." "아마도?" "보통 내공을 쌓은 사람이라면 모두들 상대의 상태를 알고자 할 때 내력을 이 용해서 조사를 하지. 하지만 현경... 아니지 탈마라고 하는 게 옳겠지. 그가 탈마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니... 아마도 그는 손을 직접 댈 필요없이 허공을 격하고 내력을 보내어 상대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을거야. 그리고 내 위치를 알아낸 것은 아마도 내가 뿜어내는 기를 은연중에 포착한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나도 자객이기에 기를 숨기는데는 꽤 재주가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 데..." 건망증(健忘症) 묵향은 청하장(淸河莊)에서 나와 100리를 갈때까지 하오문의 총타가 있는 호 남성에 위치한 군산으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갑자기 바뀐 이 유는 한 농가를 힐끗 본 다음이었다. 때는 한낮이었고 땡볕을 피해 시원한 초 막의 마루에 오손도손 정답게 앉아있는 가족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눈이 갔던 것이다. 처음에는 뭔가 수상한 점이 없는지 거의 본능적으로 살펴본 것이었는 데 어느새 묵향은 단란한 농가의 식사장면을 뚫어지게 훔쳐보는 입장으로 바 뀌었다. 농가에는 한 농부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다. 사실 농부의 아내나 그 딸 모두 박색을 간신히 모면한 정도였지만 묵향이 바 라보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은 그 집안의 분위기였다. 그들의 속사정이야 신이 아니니 알 도리가 없었지만 우선적으로 눈에 보이는 너무나도 정겨운 식사장 면.... '나도 저런때가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이성이 돌아온 묵향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 작했다. '가만... 나한테 저런때가 있었나?' 무공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안돌리던 머리를 열심히 굴려 머나먼... 정말 머나먼 과거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있었군. 그래... 그때야. 그 아이 이름이... 맙소사! 양녀(養女) 이름까지 잊어먹었군. 그 아이는 요즘 잘 지내는지 모르겠구나. 참 예쁜 숙녀가 되어 있었는데... 지금쯤 결혼해서 애를 몇 명 낳았는지 모르 겠구만... 하나뿐인 양녀인데 까맞게 잊어버리고 있었어... 벌써 헤어진지... 몇 년째인지 기억도 안나는군. 그때 그 아이를... 표두(慓頭) 노릇을 하지 않 았다면 만나지도 못했겠지. 그때는 참 재미있었지... 방 분타주는 잘 지내는 지 모르겠군... 참.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즘 돈줄도 필요한데... 방 분타주가 거느린 낙양의 세력을 흡수한다면 꽤 보탬이 되겠군. 그리고 내친김에 부근에 있는 분타도 몇 개 꿀꺽하고 말이야. 그리고 또 ....' 먼 발치에서라도 한번 보고싶다는 생각에 묵향은 자신이 그곳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줄줄이 만들어 내면서 자신이 내린 결정을 정당화(正當化)하기 시작했 다. 그의 성격으로는 도저히 어린 계집애 하나를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가 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원래 자신이 왜 호남성(湖南省) 으로 가야 하는지는 완전히 망각한 채... * * * 묵향은 천천히 그 독특한 걸음걸이로 하남성(河南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남성은 전 무림인들이 존경을 아끼지 않는 대 사찰(寺刹) 소림사(小林寺)와 20만(萬) 거지들의 왕초가 거주하는 개봉이 있는 곳이다. 오래 전 세력다툼에 의해 10만(萬)의 거지가 떨어져 나가 남개방을 세웠지다. 하지만 남개방의 세 력이 작았기에 모든 공식행사에는 북개방의 방주가 나서고 있었다.북개방은 20만 식솔을 거느린 거대방파지만 그래도 두토막이 난 후 세력이 급속도로 쇠 퇴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섬서성의 남단에 위치한 황제가 거주하는 오래전 장안(長安)이라고도 불리었 던 중경(中京)... 중경에는 중앙원수부와 비극적인 사건으로 해체되어버린 찬 황흑풍단이 있는 곳이다. 그렇게도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중경의 동쪽으로부 터의 관문이라 볼 수 있는 낙양. 하남성의 북쪽에 위치한 낙양은 넒은 평야지 대로서 예전에 몇몇 국가의 수도가 위치한 곳이었지만 지리상 수비에 난점이 많은 도시다. 그렇기에 송대에 이르러 장안에서 머지않은 낙양에 정북원수부 를 두었으니 사실상 황제로서는 두개의 원수부를 직할(直轄)하게 되어버렸고 상대적으로 왕들보다 더욱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묵향이 가는 곳은 오래전 자신이 잠시 살았었던 정북원수부가 위치한 낙양이 었고... 군사, 상업, 교통의 중심지로 대단히 시끌벅적한 도시였다. 묵향은 일단 낙양으로 발길을 돌린 다음부터는 포목점(布木店)에 들어가 무명을 3필 사다가 너무나 잘 알려져버린 이놈의 묵혼검을 칭칭 동여매어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만든 후 상자 하나를 구해서 그 안에 집어넣고 어깨에 메고 다녔다. 평소에는 귀찮다고 변장따위 하지도 않았고 또 암습따위를 걱정하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양녀(養女)를 만나러 가는데 꼬리를 달고 갈수는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한참 길을 가다가 시장기를 느끼고 그럴듯한 식당 앞으로 갔다. 평소 대로 길바닥을 힐끗 훑어본 다음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안은 근처에 유 명한 명소인 동백산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묵향 은 다행히 자리를 하나 찾고는 그곳에 앉아서 점소이를 불러 주문을 했다. "오리탕 1그릇하고 죽엽청 2병, 그리고 신선한 소채가 있으면 좀 다오." "예." 식당 안의 대화는 요와의 전쟁얘기나 얼마전에 일어난 서경의 패주(覇主) 진 천왕(眞天王)이 오랜 전쟁과 흑풍단의 해체, 금의위의 몰락으로 인한 황권(皇 權)의 약화를 틈타 정서원수부(正西元帥府)의 부수장 광해(廣海) 대장군과 모 의하여 곽진(郭璡) 원수(元帥)를 살해한 후 반란을 일으킨 것에 집중되고 있 었다. 묵향이야 세상이 뒤집히던 말던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었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입장이었지만 나약한 백성들이야 그것이 가장 큰 관심사 였던 것이다. 한참 맛있게 오리고기를 뜯으며 죽엽청을 마시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식당 안 으로 들어왔다. 다른사람이야 그에게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만약 그를 한번 본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칼차고 다니는거 보니 무림인이군.' 하지만 조금 더 관찰력이 있다면 저런 생각도 했으리라. '남자답게 생긴데다 제법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고... 차림세가 그럴듯한 걸 보니 막되먹은 놈은 아니군.' 거기에 그 사람이 무림인이었다면 요런 생각도 했을 것이다. '제법 근사한 눈을 하고 있어. 꽤 수련을 잘 한 놈이야. 만만히 볼 상대는 아 닌 것 같은데?' 거기에 그 사람이 묵향정도의 안목을 가진 놈이라면 그런 생각들에 조런 생각 까지 보탰을 것이다. '제법 검을 잘 아는 놈이군.' 묵향은 찬찬히 상대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대한히 흥미가 당기는 상대였다. 많은 인물들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검만을 꼽는다면 자신이 아는 자 들 중에서 상위 5,000명 안에는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법 흥미를 돋구는 놈이군. 추정되는 나이에 비했을 때 놀라운 성취를 지니 고 있는 놈이야. 아직 애송이라는 게 흠이지만... 어쩌면 내 나이쯤 되면 나 를 능가할지도...?' 초고수라면 대부분 그 막강한 내공으로 육체의 노화(老化)를 억누른다. 그렇 기에 그놈이 그놈같아 보이지만... 실상 막강한 고수를 알아보기는 힘든게 아 니다. 우선 눈... 눈만 봐도 이자가 어느정도 수준에 올라섰는지 화경에 들기 전이라면 대강은 눈치챌 수있다. 현경이라면 반박귀진(反樸歸眞)의 단계라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히 숨길 수 있기에 그 내막을 알아보기는 화경보다도 더욱 힘들다. 그렇지만 화경에 들지 못한 고수들이라면 한눈에 뻔히 알수 있 는 것이다. 그의 내공조예가 어느정도인지... 일단 내공이 어느정도인지 밝혀지면 익힌바 무공이나 수련 정도에 따라 공력 의 차이가 심하기에 오차가 크긴 하지만 일정 나이에서 죽자고 쌓을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영약(靈藥)이라도 먹지 않았다면 어느정도는 나이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음식 떠먹는다고 치아(齒牙)가 약간이라도 보이면... 이건 도저히 속이기가 힘들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이빨의 상태도 개개인의 습 관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기도 하기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는 것이다. 생전 이빨관리를 안하는 일부 게으른 놈들하고 미용을 위해 죽자고 양치질을 해대 는 일부 부지런한 년들하고는 색깔이 많이 틀리니까... 이때 묵향의 눈에 힐끗 보인게 그의 검이었다. 어딘지 낯익은 검... 언젠가 한번쯤은 저 검의 주인을 봤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 애송이는 아니야. 누굴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꽤 오래전에 본 모양인데... 흔한 검은 아니야. 손잡이의 형태... 검집의 모 양... 전체적으로 봤을 때 흔한 검처럼 아주 수수하게 보이려고 노력했지 만... 저건 뛰어난 장인(匠人)이 만든 솜씨야. 조각되어 파들어간 칼자국만 봐도 알 수 있지... 저걸 어디서 봤었지?' 묵향이란 인물은 원체가 무골(武骨)이라 그림따위는 알지 못했고 알려고 노력 도 안했다. 하지만 공예품이나 특히 조각(彫刻)된 것이라면 그것을 만든 장인 의 섬세한 솜씨를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조각칼도 칼은 칼 이었고... 그는 그 칼을 사용한 상대의 솜씨를 읽는 것이었다. 상대는 음식을 시키더니 꽤 허기졌는지 술을 반주삼아 열심히 먹어대기 시작 했다. '검집만 봐서는 알기 힘들고... 검을 직접 보면 떠오를까... 그래도 안떠오른 다면 저놈의 검술을 보면 기억이 날까... 일단 저놈보고 검좀 보여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장 좋은 방법은 검을 뽑지않으면 안될 상황을 유도 하는게 최고지. 그렇다면 어떻게 시비를 걸까... 그런데 만약 아는놈의 제자 쯤 된다면 나한테 칼을 겨눈 저놈을 죽여야 하나?'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술을 마시는 사이 그 청년은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묵향은 그가 나가는 것을 보고 식탁에 돈을 던져놓고 따라서 일어 섰다. 그런다음 그 검의 주인인 애숭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궁금한 것은 참지못하는 묵향이었다. * * * 묵향이 애숭이를 따라다닌다고 정신이 팔려있는 이시간... 하남성으로 들어가 는 관도(官道)상에서는 웃지못할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10여명이나 되는 허리에 장검(長劍)을 찬 장정(壯丁)들이, 그것도 옷도 그럴듯하게 차려입고는 땅바닥을 헤메고 있었으니 기괴할 밖에... 한 여인이 12번째 행인이 설설 기어다니고 있는 꼴을 보며 칼을 차고 있는지 라 대놓고는 못하고 얼핏 비웃음을 띈 눈으로 힐끔거리며 지나가자 더 이상 참지못하고 짜증을 폭발시켰다. "오빠!" 그러자 땅바닥을 기고있는 남자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귀 안먹었으니까 조용히 말해." "도대체 지금 뭐하는 거에요?" "보면 모르냐? 흔적을 찾고 있잖아." "도대체가 추격술에 있어서는 도가 텄다고 떠들던 양반이 지금 땅바닥에서 뭐 하는 거에요? 그것도 대로(大路) 한복판에서... 여기 사람도 많이 지나다녀서 챙피해 죽겠단 말이에요. 그러고도 오빠가 전직(前職) 살수(殺手)에요?" "좀 떠들지좀 마라. 전직 살수였던 초고수의 흔적을 쫓는게 어디 쉬운 일인줄 아냐?" "그래 흔적을 찾기나 찾았어요? 오빠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거 아니에요? 여기 는 하남성으로 가는 길이라구요. 하오문으로 갔다면 호남성으로 가야지. 왜 이리 오는거에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호남성쪽으로 가다가 이상하게 위쪽으로 길을 바꿨다는 것 외에는..." "맞기나 맞는거에요?" "이녀석이... 날 뭐로보고... 아무리 쉬었다고 해도 내 눈이 그정도로 ㅆ지는 않았다구." 이때 저 앞쪽에서 땅바닥을 기고있던 장한 한명이 외쳤다. "막주님, 찾았습니다." "그래? 확실이 이쪽이 확실하군. 이리 와봐라. 내가 설명해 줄테니..." 여인이 따라가자 몇 개 나있는 발자국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는 관도상이라서... 땅이 굳어 발자국을 찾기 힘들어. 거기다 행인도 많 아서 기껏 찍힌것도 잘 지워진다구. 여태까지는 그놈이 으슥한 길을 골라왔기 때문에 발자국 따라오기도 편했는데... 그녀석이 방금 지나온 마을을 통과한 다음부터 아예 대로(大路)로 다니는 바람에 더욱 힘들어졌다." "아.. 그가 무명하고 나무상자 산걸로 추정되는 마을 말이에요?" "그래. 아마.. 나무상자 크기로 봤을 때 검을 숨겼겠지. 실지 그의 독특하게 생긴 검만 숨긴다면 쉽사리 잘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니까... 여기 발자국을 봐라. 아주 지독한 놈이야." 여인이 발자국을 열심히 쏘아보자 사내는 말을 이었다. "난 도저히 모르겠는데요?" "보통 무림인이라면 평지에서는 일정한보폭을 가지지. 그건 보법이나 신법, 경공술을 오랜시간 연마하면서 만들어지는 습성이야. 그리고 군인들도 보폭이 거의 일정하지. 하지만 이놈은 보폭이 일정하지 않아. 첫발자국에서 2척5촌이 면 다음 발자국은 언제나 반촌(1.5Cm) 정도가 불규칙 적으로 더해지던지 빼지 던지 한다구. 무지렁이 촌민들도 이놈만큼 보폭이 들쑥날쑥하지는 않아. 그만 큼 걸으면서 지속적으로 보폭에 신경을 쓰는거야. 그리고 무림인이라면 절대 로 발 뒷꿈치로 걷지 않지. 그건 발소리를 죽이려는 행위를 떠나 언제든지 몸 을 날릴 수 있는 잇점이 있기 때문인데... 이놈은 보란 듯이 뒷꿈치로 걷는다 구. 거의 촌민들과 같은 발자국이야. 여태껏 이까지 추격해온 것은 포폭이 일 정하지 않은 것만 ㅊ은 덕분인데... 이렇게 탄탄한 관도 위라면 그것도 힘드 는군... 일단은 하남성으로 간 것 같으니 계속 따라가 보자구." 묵향은 애숭이의 검술을 구경하기 위해 이럴지 저럴지 망설이며 따라다니면서 도 상대의 몸동작의 하나하나를 세심히 관찰해 나갔다. 상대의 몸 동작은 하 나하나가 절도가 있는 것이 과연 명문(名門)의 제자임이 확실하니... 묵향으 로서는 더욱 오리무중(五里霧中)이 되어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정파의 인물은 많지 않은데... 젊은 나이에 저정도의 검술실력을 쌓으려면 상당한 인물이 지도(指導)한 것이 틀림없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서 대단한 실력자.... 실력자라... 맞아! 혹시 저놈이 그 맹주라는 놈의 제자 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죽여없애는게 울분을 삭이는데 도움이 되 지? 맹주란 놈의 제자가 확실하면 먼저... 분근착골(粉筋鑿骨)을 한바탕 한 후에... 손까락과 발까락의 뼈들을 자근자근 다 부숴버린 다음... 음 또 뭐가 있지? 그래! 가죽을 벗긴 다음... 아니지 다 벗겨버리면 오래 못 사니까... 즐거움을 좀 더 지속하기 위해 먼저 한쪽 다리만 벗기자구. 그런다음 소금을 뿌리는거야. 그래... 그런식으로 느긋하게 즐기면서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 들어 주자.' 자신의 목숨이 어떤 모진놈에게 위협받고 있는줄은 꿈에도 모르고 천천히 주 위의 경치를 구경하며 걷고있는 애송이의 뒤를 묵향이 느긋하게 따라다니며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별의 별 고문방법을 다 생각하고 있었다. 실지 고문 을 시작하면 그놈의 생명이 쇠심줄 처럼 질겨서 오래 버틴다 하더라도 3일 정 도일테니... 묵향은 곧이어 닥쳐올 희열(喜悅)을 상상하면서 기다림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 * * 교주는 요즘들어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남는 시간을 사냥에 쏟아부으며 마음을 달래고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냥은 매를 이용한 사냥이 었다. 교주는 여러 종류의 잘 훈련된 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냥을 하면 사냥개 몇마리와 10여명의 경공이 빠른 고수들이 몰이꾼을 했고, 그외에 5명 의 전문적인 매 사육사가 5마리의 매를 이끌고 그를 따랐다. 5마리의 매는 두 건을 쓰고 있었지만 그 중 교주의 손위에 앉은 조금 덩치가 작은 한 마리는 두건을 쓰지 않고 있었다. 교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10마리의 매들 중에서도 특히나 두 마리의 고려에 서 수입한 송골매를 좋아했다. 그가 송골매를 좋아하는 이유는 적당히 잔인하 면서도 우아한 것에 있었다. 송골매의 비상(飛翔)은 마치 꿈처럼 더없이 완벽 했다. 그리고 먹이를 향해 다가갈때는 그 잔인한 성격으로 서두르지 않고 천 천히 달려들어 완벽하면서도 우아하게 상대의 숨통을 조이며 요리하는 것이 다. 오늘 사냥에서도 송골매들을 2번씩 사용했는데 사냥감을 향해 멋지게 비상하 여 천천히 우아하게 상대를 향해 압박을 가해가다가 나중에는 그 목숨을 발톱 을 이용해 멋지게 끊어놓는 그 장면을 보며 교주는 언제나와 같이 갈채를 보 냈다. 사실 교주 정도의 고수라면 표창 몇 개만 가지고도 단시간에 토끼를 몇 마리고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매사냥이란 번거로운 방식을 즐기는 이유 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그 멋있는 눈요기 때문이었다. 몇번 매를 날린 후 다시 수하들을 몰이하러 내 보낸다음 여러 가지 생각에 잠 겨있을 때 문득 어떤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수하(手下) 한명이 길 옆 덤불 속을 가리키고 있었다. 교주는 말을 멈추게 하고는 자신의 손 위에 앉혀있는 두건이 없는 혈전(血電)이라 부르는 새매의 발목 끈을 풀었다. "지금" 교주는 작은 음성으로 말했고 그와 동시에 끈을 잡고있던 수하 1명이 개들을 풀었다. 개들이 짖어대며 달려들자 토끼는 덤불 속에서 튀어나와 숨을 곳을 찾아 달렸 다. 그 순간 교주는 혈전을 날렸다. 날개를 세차게 퍼덕이며 매는 마치 화살 과도 같이 똑바로 제물을 향해 날아갔다. 앞쪽으로 25장(76m정도)쯤에는 잡목 숲이 펼쳐져있었다. 토끼는 엄청난 속도로 그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혈전 은땅에서 불과 몇 척쯤의 높이로 나지막히 미끄러지듯 날며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다음 순간 혈전은 제물 바로 위에 이르러 아래로 몸을 덮쳐갔다. 토 끼는 그 순간 비명을 지르며 뒷발로 몸을 세웠다가 다시 날쎄게 달아나기 시 작했다. 혈전은 실패한 것이 너무나 분한지 켁켁거리며 뒤를 쫓다가 토끼가 피신처를 향해 마지막 달음박질을 치는 순간 그의 발톱이 토끼의 목에 깊숙히 박혔다. 새매가 날개를 접었다. 마지막 토끼의 비명... 새매는 승리감에 도취 되어 교주를 오만하게 바라봤다. 교주는 다가가 말에서 내리며 미끼를 내밀었다. 순순히 혈전이 토끼의 시체를 떠나는 순간 교주는 재빨리 미끼를 감추자 매는 내뻗은 그의 장갑 낀 손 위에 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장갑에 달린 매의 발목 끈을 조이며 말했다. "참 잘했다." 이때 수하 한명이 토끼 귀의 일부를 잘라 매에게 상으로 먹였다. 너무 많이 주어 배가 부르면 말을 안듣기에 조금만 주는 것이다. 교주는 혈전이 오만하게 주위를 둘러본 후 만족스레 먹이를 먹는 것을 물끄러 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훌륭하게 죽였어. 하지만 송골매와 같은 흥분감은 없었어. 새매는 새 매일 뿐... 그 짧은 날개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죽이기 위해 태어 난 새. 두건을 쓰지 않고, 쓰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 날카로운 눈매로 오만하 게 세상을 내려다 보며... 때로는 좋은 친구가... 때로는 무서운 적이... 기 분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광폭(狂暴)한 매... 그대와 같다는 생각이 요즘들 어 자주 드는구려. 묵향 부교주... 당신을 적으로 만든 것은 어쩌면 내 일생 일대의 실수일지도 모르지...' * * * 묵향이 애송이를 따라다닌지 어언 3일... 일단 손을 쓰면 금새 죽여버릴 것이 뻔한 자신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지라 쉽사리 손을 안쓰고 내일 내 일 하면서 미뤄오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의 검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는 의외 로 빨리 다가왔다. 그날도 애송이의 뒤를 느긋하게 뒤쫓으며 각종 고문방법을 상상하면서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 애송이를 4명의 괴한이 둘러싸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들리는 괴한중 한명의 목소리... "네놈이 다섯째를 병신으로 만든 놈이냐?" 애송이는 상대를 쭉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대꾸했다. "당신들이 하남오괴(河南五怪)라면 바로 찾아오셨소." "클클클... 광오한 놈이군. 다섯째를 병신으로 만들어 놨으니 네놈도 병신이 되는 것이 정해진 도리. 네놈이 자진해서 자르겠느냐? 아니면 본좌가 손을 쓰 랴?" "하하... 나를 그렇게 물컹하게 보다니..." 그와 동시에 애송이가 검을 뽑았다. 검이 뽑혀나오자 투명한 옥빛을 띄는 보 검에서 뻗어나오는 예기(銳氣)가 사방을 뒤덮었다. 하남오괴도 상대가 예리한 보검을 뽑자 모두들 뒤로 물러서며 저마다 가진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 애송 이의 검을본 순간 묵향은 경악했다. "명옥검(明玉劍)!" 자신도 모르게 명옥검이란 말이 입속에서 새어나옴과 동시에 그의 놀람은 곧 이어 활화산 같은 분노로 폭발했다. 묵향의 신형은 거의 뇌전과 같은 기세로 쏘아져 들어갔다. 애송이는 옆에서 뭔가가 덮쳐옴을 느끼고 대비하려고 몸을 옆으로 트는 순간 16개의 혈도가 순간적으로 제압당하면서 쓰러져버렸다. 애 송이에게 혼혈이 짚히는 그 순간 떠오른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그의 사부에게 하늘위에 하늘이 있으니 언제나 조심할 것을 재삼 당부 받았었지만 설마하니 이정도로 실력차이가 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묵향이 쓰러진 애송이를 잡아서 어깨에 들쳐메고 떠나려는 것을 보고 하남오 괴중의 한명이 이의를 제기해 왔다. "잠깐만... 이놈은 우리들과 먼저 선약(先約)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방금전에 보여준 무시무시한 무공으로 하남오괴도 함부로 말을 할 수는 없었 다. 잘못 시비가 붙으면 오늘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는 거죠. 우선 저희들이 놈의 팔 하나를 자를테니... 헤헤... 그 다음에 끌고가시면 안될까요?"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묵향은 그의 제의를 모질게 거절했다. "안돼. 네놈들이 감히 본좌의 즐거움을 방해하겠다는 거냐?" 그래도 상대는 아쉬움이 남는지 다시 한번 더 사정했다. "그대의 실력이라면 저희들이 어떻게 해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희들도 그놈에게 은원(恩怨)이 있는지라..." "네놈들의 은원은 별로 중요한게 아니니까 그냥 잊거라." 그러자 그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하게 보이는 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침중하게 말했다. "그럴수는 없소. 눈앞의 먹이를 지금은 실력이 딸려서 지금은 양보할 수밖에 없지만... 그대의 사문(師門)을 밝힐 용기가 있다면 대를 이어서 오늘의 수모 (受侮)를 갚겠소." "흐음... 꼴에 밸이 있다 이거지. 좋아. 본좌는 마교의 부교주이니 죽이고 싶 은 아들이 있으면 검을 줘서 십만대산으로 보내게나. 소원대로 모두 다 목을 따 줄테니..." 비웃는 듯한 그의 말에 경악해있는 무리들을 뒤로 묵향의 신형은 애송이를 어 깨에 진 채로 조용한 장소를 찾아 사라져버렸다. 애송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때는 왠 허름한 흑의를 입은 남자가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리면서 옆에 앉아있었다. 그는 일어서려고 했지만 혈도가 제압 당해서 손까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 고 옆에 앉아있는 남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일단 은 싸워 이기려면 상대를 알아야 한다고.... 이 남자가 자신에게 암습을 가한 자라는 생각에 세심히 그를 뜯어봤는데 놀라운 것은 너무나도 젊다는 것이었 다. 애송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것을 느낀 묵향이 씩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호오... 깨어나셨구만... 그대를 이곳으로 초대를 한 이유는 이 검이 어디서 났느냐 하는 것을 물어보려는 의도에서지. 자... 좋은말로 할 때 대답을 해주 실까?" 애송이는 상대가 부드러운 말투를 쓰는데도 이상하게 소름이 끼쳐옴을 느꼈 다. '정말 재수없는 놈이군. 저놈이 나한테 암수를 쓴 놈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고 수가 한명 더 있나?' "당신이 나한테 암수를 가했소?" "그래. 본좌가 했지." 그러자 애송이는 상대의 몸을 뚫어져라 훑어봤다. 껍데기는 젊게 보이지만 이 자는 아마도 반노환동의 경지에 들어간 영감탱이 고수가 분명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부인 청혜(淸慧)도 네 연배에서는 아마도 네가 가장 검술에 대한 이 해가 빠를것이라는 칭찬을 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이기기 힘들거야.' 상대가 가만히 있자 묵향이 또다시 질문을 했다. "자... 빨리 대답을 해주실까? 본좌는 인내심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사실 애송이한테는 그것이 뭐 숨겨야 할 치부(恥部)같은 것도 아니었기에 순 순히 대답했다. "그 검은 내가 알고있는 한 무림인에게서 받은 것이오." "그래? 그 사람은 너와 어떤 관계지?" "한 10년 정도 그분에게서 검술을 배웠소." "그럼 너의 사부인가?" "아니오. 그냥 내가 마음에 든다면서 검술만 가르쳐 줬을뿐... 사부는 아니 오." "좋아. 그사람 이름이 뭐지?" "이름은 모르고 독고구패(獨孤九敗)라는 명호만 알고있소." "독고구패? 좋아. 그놈이 환사검(幻邪劍) 유백(柳伯)을 죽였나?" "에... 유백은 또 누구요?" "유백은 본좌의 사부님 이름이지. 이 검은 사부님이 애지중지 하던 검이었는 데... 이걸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단 하나... 어떤놈이 그분을 죽이고 뺏았다는 말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지. 안그래?" "...." "좋아. 그 독고구패란 놈은 어디있지?" "얼마 전에 돌아가셨소." "죽었다고? 옳아. 이제 알겠군. 그래서 이 검을 물려받았다 이거지?" "그렇소." "크흐흐흐... 그놈이 정말 죽은게 확실한가?" "못믿겠으면 관 두슈." 그와 동시에 묵향이 애송이의 혈도 몇군데를 짚었다. 그러자 애송이의 온 몸 에서는 뚜둑거리는 괴이한 음향이 터져나왔지만 식은땀을 흘려대면서 악착같 이 고통을 참고있었다. 가히 초인적인 인내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2각 정도가 지나자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비명성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묵향 은 더 이상 하면 사람잡겠다는 생각에 3각이 정도가 되자 분근착골의 수법을 해제했다. 그런다음에도 계속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들으면 상대 가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는 것이 더 기분나빴다. "어때? 온 몸이 짜릿하니 평생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겠지? 자... 좋은 말로 할 때 불어. 그놈은 지금 어디있지?" "헉헉... 돌아가셨소. 그분이 돌아가시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 오." "흐음... 진짜 죽은게 확실해?"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소." "좋아. 죽었다고 하기로 하지. 대신 내 사부를 죽여놓은 놈에게서 검을 받았 으니 네놈도 공범이야. 알겠어?" "그건 억지요." "아니야. 본좌에게는 억지가 아니지. 너도 공범이니 미안하지만 내 화풀이 상 대가 되어 주어야겠어. 가만히 있어봐라.... 분근착골은 했으니... 그다음 은... 발가락 뼈다귀를 모조리 부술 차롄가... 아니야... 뼈를 부숴나가면 그 충격에 기절이라도 하면 안되지." 그러면서 상대가 기절하지 않도록 몇군데 혈도를 때리며 상대의 정신이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애송이는 도대체가 말이 통하지 않는 이 무뢰한이 도대체 다음에는 무슨 짓거리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일말의 공포를 느끼며 자신의 사문을 들어 약간의 협박을 했다. "이보시오. 나는 명문 화산파의 제자요. 나를 이렇게 핍박한게 밝혀지면 당신 도 편안한 생활은 하기 힘들거요." "흐흐흐... 남 걱정하지 말고 네놈 걱정이나 해. 본좌는 남이 두려워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적은 없으니까.." 그러면서 애송이의 옆에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손바닥이 호미라도 되는 모양으로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땅을 잘도 파내고 있었다. 조금 묵향 이 수고를 하자 비스듬하게 경사진 작은 공터가 생겼다. 묵향은 애송이를 그 곳에 가져다 눕혔는데 머리가 아랫쪽으로 가게 했다. 실지 아무리 모진 고문 을 가해도 머리를 심장보다 낮은 위치에 두면 머리에 원활히 피가 공급되기에 아무리 기절하고 싶어도 기절이란 단어는 자신에게서 완전히 말타고 멀리멀리 떠나버리는 것이다. 상대가 하는 짓거리를 보고 애송이는 지금 뭣 때문에 이런 수고를 하고있는지 눈치챘다. '이놈이 날 아예 죽이려고 드는군.' "좋았어. 이정도면 준비는 완벽하게 갖춰진 상태고... 이제부터 본론을 시작 해야지. 원래가 분근착골은 오래 하면 온 몸의 근골(筋骨)과 신경이 망가지기 때문에 네놈에게 그걸 오래 사용하면 오히려 고통의 시간을 단축시켜 주는 결 과밖에 안된다 이말이야. 뼈를 자근자근 부수는 것은 제일 마지막에 해주지. 자 그럼 이제부터 고전적인 방법을 써봐야지." 그런다음 묵향은 상대의 허리에서 띠를 끌러낸 다음 상의를 벗겼다. 그런다음 띠를 줏어들고 공력을 주입시키자 천으로 만들어진 띠가 꼿꼿하게 일어섰다. 묵향은 그걸 채찍 대용으로 삼아 애송이의 몸을 자근자근 다져가기 시작했다. 퍽퍽퍽퍽..... 이건 고문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고문이란 것은 원래가 상대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불게 만들기 위해 육체적 또는 정식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송이의 입장에서는 그놈의 검 하나 때문에 분풀이 상대로 자신이 잡혀와서는 죽기 일보직전까지 두들겨맞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모른다. 상대가 휘두르는 띠는 그의 살가죽만을 후려 치고 있었기에 그의 상체는 이제 거의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고통을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애송이의 입에서도 더 이상 참지못하고 비명이 터져나오 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날 죽여라..." 한참을 비명성을 반주(伴奏)삼아 두들겨대다가 더 이상 하면 죽어버릴 것 같 자 묵향은 고문아닌 고문을 멈췄다. "헤헤헤... 오늘은 이쯤 하고... 그래... 소금하고 고춧가루가 어디있지? 맞 아. 거기다 놔뒀지." 주섬주섬 꾸러미에서 그것들을 꺼내더니 둘을 섞어서 애송이의 상처에 뿌렸 다. "크아아악......" 또다시 터지는 비명소리. 애송이가 비명을 질러대다가 기진맥진 해서 더 이상 비명지를 힘도 없어져서 잠잠해지자 묵향이 비웃듯 한마디 던졌다. "이걸 뿌리면 상처 소독도 되고 좋지. 걱정 마... 빨리 죽이지는 않을테니 까... 독고구패란 놈은 유백의 제자가 묵향이란 사실을 명심했어야 했어. 내 손에 걸려서 살아서 나간놈이 거의 없거든... 독고구패가 죽었으니 너라도 나 를 위해 몸으로 때워줘야지." 그러자 뻗어있던 애송이가 헐떡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끄으으으.... 묵향... 묵향이라고.... 했소?" "그렇다. 본좌가 묵향이란 나으리지." "사부의... 구패 사부의... 마지막... 제자가 묵향이라고.... 했었소." "뭐야?" '그럼 독고구패하고 환사검 유백 사부하고 동일인물이란 건가? 저놈이 내가 마지막 제자란 것을 알 리는 없을테니... 이런 실수가 있나...' "이봐... 괜찮은거야? 이런 빌어먹을! 가까운 의원이 어디에 있지?" 묵향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는 애송이를 어깨에 짊어지고는 의원을 찾아 몸을 날렸다. 일단 상대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것이란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기절했던 애 송이가 깨어난 곳은 은근한 탕약향기가 가시지 않는 한 의원의 작은 방안이었 다. 그는 일어서려고 했지만 손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겨우 그정도 맞았다고 손하나 꼼짝할 수 없다니... 나도 정말 한심한 놈이 군...'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깨어났군. 보기보다 약골이야. 움직이려고 하지 말게나. 지금 침을 놓아놨기에 움직이지 못하게 혈도를 조금 건드려놨으니..." '세상에 이 목소리는...' 애송이는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며 자신의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부르르 떨리 면서 갑자기 식은땀이 솟아나온다고 생각했다. "이제 깼으니 뭐 잠결에 뒤척일 염려는 없을테고 혈도를 풀어주지." 애송이는 자신의 몸 위로 미풍이 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손 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혈도가 풀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허공을 격하고 점혈(占穴)과 해혈(解穴)을 할 수 있는 엄청난 내공을 쌓은 무 서운 고수라는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자... 이제 깨어났으니 우리 다시 대화를 시작하기로 하지. 아 그렇게 떨지 말게나... 나도 가급적이면 말로 하고싶으니까... 자네 사부인 독고구패의 마 지막 제자가 묵향이라고 했는데... 그건 그분의 입에서 들은건가? 다시 말하 건데 거짓말이 있어서는 안돼." "그렇소. 자신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지만 마지막 제자인 묵향이 가장 강하다 고 했었소." "그럼 그 묵향이란 놈이 그렇게 강하다는 건가?" "그분의 말로는 그렇소.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했소." "좋아. 그럼 자네는 독고구패를 어디서 만났지?" "화산(華山)에서 만났소." "화산?" "본인의 사문(師門)은 화산(華山)이오. 10년 쯤 전에 본문의 옆에 한 무림인 이 자리를 잡았소. 그는 화산에 있는 동굴 중 하나를 집으로 정했는지 그곳에 침상을 마련하고 몇가지 살림도구를 장터에서 사다가 보금자리를 꾸미더니 아 예 떠날 생각을 안했소. 그래서 본문에서는 혹시나 절기를 훔쳐보러 온 첩자 인줄로 오해하고 그와 간단한 충돌을 벌였었는데 그에게서 몇가지 안좋은 일 때문에 은거를 결심했고 또 은거할 장소로 경치좋은 이곳 화산을 택했다는 말 에 어쩔 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소. 그리고 그의 검술 실력도 상상이상으 로 강했기에 다른 문파의 무공을 훔쳐배우려는 인물로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 문이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의 무공을 배웠지?" "사실 10년 전 나는 별로 무공이 강한 편이 아니었소. 그날 장터에서 무뢰배 몇 명이 젊은 소저를 희롱하는 것을 보고 혈기만 믿고 달려들었다가 두들겨 맞고있는 것을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그가 구해줬소. 그는 한번씩 마을로 내려와서 식량을 구입하는데 그날 마침 그의 눈에 띄인 것이지요. 그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가지 제의를 했소. 나한테 검술을 배워볼 생각이 없느냐 고.." "그래서?" "나는 안된다고 했소. 사실 사문에서 나를 지도하던 사형은 별로 무공이 고강 하지 못했기에 그런 고수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면 영광이겠지만... 사문을 등질수는 없었기때문이오. 그런데 상대는 사문을 바꿀 필요도 없고 나를 사부 로 여길 필요도 없다면서 자신이 만년에 이르러 깨달은 무공을 전수해준 마지 막 제자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이 죽으면 이 무공도없어진다고 했소. 그 러면서 그냥 자신의 무공이 후세에도 사용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자신의 무 공을 익히고 싶으면 장문인의 허락을 받고 나한테로 찾아오라고 했소. 그래서 나는 장문인을 찾아가 사정을 아뢰고 그의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소." "장문인이 허락을 해주던가?" "처음에는 해주지 않았소. 상대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이오. 장문인은 직접 그 를 찾아가서 대화를 나눠보고 그가 근래들어 뛰어난 무공으로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던 독고구패 선배라는 것을 알고 나에게 허락해줬소. 그래서 나는 틈틈 히 그분을 찾아가 10여년간 무공을 익혔소." "좋아. 이제 어떻게 되었는지 대강은 알겠군. 그런데 마지막 제자의 이름이 묵향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지? 그분이 얘기해줬나?" "그분은 틈틈히 나한테 검술을 가르쳐주면서 묵향이란 사람 얘기를 많이 했었 소. 아마도 묵향이 살아있어서 너를 본다면 아주 좋아할텐데... 하면서 말이 오." "검술을 가르쳤다고 했는데... 무슨 검술을 배웠나?" "무형검법(無形劍法)을 배웠소. 아주 배우기 까다로웠지만..." "무형검법? 그런 검법도 있었나?" "거의 초식이 없는 검법이오. 그분도 그것을 근래에 이르러 완성했다고 하셨 소. 초식이 아주 특이한 만큼 익히기는 까다롭지만 일단 연성하고 나면 대단 한 위력을 가지게 되오." "그럼 독고구패란 사람은 무형검법이란 것을 그 자신이 직접 창안해 낸 것이 군. 그리고 익히기도 힘들고... 너는 얼마나 배웠지?" "자질이 모자라서 그렇게 깊게까지 연성하지는 못했소." "좋았어. 그건 나중에 검을 섞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고... 이제 마음 푹 놓고 몸조리나 잘 하라구. 나중에 몸이 완쾌되면 비무를 한번 해보기로 하지. 만약 도중에 도망가다 나한테 걸리면 반쯤 죽여놓을테니 알아서 하게나." * * * 내상은 없었기에 몸은 빨리 치유되었고 애송이의 몸이 완쾌되자 묵향은 그를 밖으로 불러냈다. 애송이도 상대가 뭘 원하는 것인지 알기에 선배가 물려준 검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상대는 검집에서 검을 뽑지도 않고 느긋하게 말했 다. "자. 검을 뽑아라." 애송이는 검도 뽑지않고 그렇게 말하자 상대의 목적이 뭔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기에 일단 상대가 원하는대로 나가기로 했다. 상대와의 거리는 2 장... 검을 뽑아든 다음 상대의 출수에 대비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냥 서 있 었다. '관례에 따라 양보해주겠다는 건가?' 원래가 비무인 경우 선배는 후배에게 3초를 양보해 준다. 동년배인 경우 각자 에게 3초씩 양보한 후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상대가 일단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출수를 해보기로 했다. 그는 비웃는 듯한 기분나 쁜 상대에게 신법을 펼쳐 급속도로 접근해 들어가며 검초를 펼쳤다. "매화노방(梅花露芳)" 이것은 화산파(華山派)가 자랑하는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의 1 초로서 비무이기 때문에 그 초식의 이름을 상대가 알 수 있도록 불러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검초를 펼치자 묵향은 몸을 뒤로 틀어 몸통을 향해 날아오는 검초를 피하며 상대의 비어있는 허벅지를 향해 발을 날렸다. 애송이는 놀랍다는 듯이 옆으로 신법을 써서 이동해 그것을 피하면서 바로 상대의 발을 베어갔다. 이번에는 애송이는 초식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가 없었다. 무형검법은 상 대의 약점만을 골라 공격하는 동귀어진(同歸御盡)의 수법이 주류를 이룬 독특 한 검법이다. 초식은 없으되 기존의 초식을 응용하던지 아니면 속도를 위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상대의 몸으로 찌르거나 베어가는 수법만이 존재할 뿐... 묵향은 상대의 검이 자신의 발을 향해 곧장 베어오자 황급히 발을 후퇴시킨 다음 이제서야 검을 뽑아 발을 베어가는 상대의 손을 향해 검을 날렸다. 놀라 울 정도로 빠른 발검술(拔劍術)... 애송이는 밑으로 쳐내리던 손을 뒤로 빼면 서 상대의 검을 받았다. 챙... 상대는 검과 검이 부딪치는 그 반탄력을 이용해 뒤로 검을 빨리 회수해 다시 머리를 향해 날려왔고 애송이는 다시 자신의 검을 이용해 상대의 손목을 노리 고 검을 날렸다. 지독하게도 물고 물리는 대결... 놀랍게도 둘의 검술은 상당 한 유사점이 있었다. 조금 틀린점이 있다면 묵향의 검이 더욱 단순무식하게 움직인다는 점이었고 상대의 검은 조금 아주 조금 더 화려한 움직임을 보인다 는 것이었다. 상대는 이상하게도 내공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애송이가 가진 공력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 대가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이유가 한가지 있었는데 그건 검의 길이가 이쪽이 5치 정도 길다는 점이었다. 대신 상대의 검이 짧기에 공격해 들어오는 속도는 저쪽이 더욱 빨랐다. 상대는 그 자신의 잇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아주 다채로 운 공격을 퍼부었고 애송이는 그것을 해소해 낸다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애송이는 무림에 출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자신이 살아오면서 맹세 코 이런 이상한 검법을 구사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하나하나가 자 신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일직선적인 공격... 한초식 한초식을 넘길때마 다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순간이 생명의 위기라 처음에는 못느끼고 있었지만 나중에야 상대의 검법이 많이 눈에 익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의 검법을 자신이 아주 잘 알고있으며 놀랍게도 그런 검법을 쓰는 사람이 자신이 알기에도 저사람 외에도 두명이나 된다는 사 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었고 또 하나는 돌아가신 독고구패 선 배.... 그것을 눈치챈 다음에는 상대에 대한 경이로움이 솟아나왔다. 그의 검 을 다루는 실력은 맹세코 자신을 가르친 독고구패 선배의 아래가 아니었다. 둘은 거의 초식을 무시한 직선공격을 주로 했으므로 순식간에 수백초식이 지 나갔다. 상대는 1000여초를 주고받은 다음에 뒤로 훌쩍 3장이나 뛰어 공격권 을 벗어난 다음 천천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제법 제대로 배웠군. 하지만 고작 그정도 실력으로 무림에 돌아다닐 생각 하 지말고 문파로 돌아가서 더욱 수련을 하거라. 환사검의 제자가 별볼일 없는 무리에게 죽었다는 말은 듣고싶지 않으니까..." "당신은 누구요? 어째서 무형검법을 아는거요?" "내가 말 안했던가? 내 이름은 묵향... 마교의 부교주지. 정사는 양립할 수 없다고 떠드는 놈들이 많으니 오늘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해라. 어르신은 편안하게 돌아가셨나?" 묵향의 말을 들으면서 경이와 환희가 담겨졌던 애송이의 얼굴이 갑자기 뒤의 말을 들으면서 어두워졌다. 그걸 보고 묵향이 침중하게 말했다. "그렇지 못하셨던 모양이군." "예. 돌아가실 때 대한히 괴로워하셨어요." "그건 사마외도(邪魔外道)를 걷는 무리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宿命)이지. 산 공(散功)의 고통을 피하려면 극마에는 올라서야 하는데... 그분도 극마에는 오르지 못하셨구나. 그럼 네가 그분의 임종을 도와드렸냐?" "예? 무슨 말씀이신지?" 묵향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가 마교에서는 가는 분의 고통을 줄여드리기 위해 가장 절친했던 인물이 산공의 고통이 시작되기 전에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지. 네가 잘 몰라서 도와 드리지 못한 것이니 어쩔 수 없구나." 그 말을 끝으로 쓸쓸히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묵향을 향해 애송이가 외쳤다.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애송이와 헤어지고 난 후 묵향의 기분은 정말 정말 좋지 못했다. "제기랄..." 자신에게 문제가 생겨 기억만 잃지 않았다면 사부를 그대로 죽게 만들지 않았 을거라는 생각이 묵향을 더욱 괴롭게 했다. 현재 그의 실력이라면 별 고통없 이 사부의 내용을 없애버린 다음 북명신공을 이용해 새로운 공력으로 채워넣 어 줄 수도 있었고 어쩌면 사부가 극마의 경지에 올라 더욱 오래 살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일단 극마에 오르기만 한다면 탈마로 유도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그분이 고통받고 죽지 않도록 일격에 목을 베어드릴 수도 있었다. 자신이 옆에 없었기에... 더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만 옆에 있었기에 묵 향이 가장 존경했던 사부는 아마도 죽는 그 순간 지독한 고통을 내공이 깊은 만큼 아주 장시간 받았을 것이다. 자신도 마교에서 자라나 마교에서 생활했기 에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고 그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속만 썩인다고 벌써 지나간 일이 바뀌지도 않지... 어디가서 술이나 퍼마셔 야겠군.사부의 명복을 빌며...' 묵향은 곧장 허름한 한 술집에 들어가서 박혔고 그 마을의 술을 동을 내려고 작정한 듯이 퍼마시기 시작했다. 이런 묵향을 지켜보는 눈들이 몇 개 있었다. 그들은 묵향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멀직히서 바라보며 쑤근거리기 시작했다. "겨우 찾았는데... 아무래도 별로 기분이 안좋은 모양인데요... 어쩌죠?" "표정을 보니 아주 기분이 더러운 모양이야. 괜히 가서 말붙였다가 저자의 성 격이 소문대로라면 그 더러운 성격에 잘못하면 우리들 목이 날이갈지도..." "도대체 그 젊은 애가 뭐라고 했기에 실컷 비무를 잘 한 다음에 결과가 이모 양이 됐죠? 그놈을 잡아다가 주리를 틀어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글쎄..." 이들은 줄기차게 호북성에서부터 묵향을 뒤따라온다고 바닥을 기어댔던 인물 들이다. 그들이 묵향의 흔적을 놓친 곳은 어떤 마을이었는데 거기서부터 경공 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흔적이 없어서 망연하던 차에 그 발자국과 서로 연관이 있다고 추정되는 발자국들을 곧이어 찾아낼 수 있었다. 발자국들로 봐서 아마 도 4명인 것이 확실한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거의 2시간을 추격한 결과 그들은 별볼일 없는 무공을 믿고 민폐를 끼치는 걸로 유명한 하남오괴(河南五 怪)의 4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놈들을 잡아서 족친 결과 묵향이 한 애송이를 끌고 기막힌 속도로 어딘가로 사라졌음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걸로는 추격이 불가능하다. 할 수 없이 어떻게 할까 궁리하며 식당 에서 배를 채우고 있는데 묵향이 피투성이가 된 애송이를 의원으로 엎고가는 것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묵향은 그 애송이를 족친 다음 다시 뭔가 사정이 있 어 애송이를 치료하기 위해 마을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묵향이 계속 의원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애송이를 돌보고 있었기에 이제나 저제나 묵향과 면담을 할 기회를 노리던 중 오늘 아침에 둘이서 나오더니 몸이 완쾌된 애송 이와 눈부신 비무를 한 후 서로 뭐라고 대화를 한 후 갑자기 기분이 엉망이 되어 술집에 처박혀 버렸으니.... "하여튼 여기서 술마시기 시작했으니 한동안은 머무를 게 분명해. 일단 사정 을 알아야 말을 붙여볼 수 있으니 네 말대로 그 애송이를 잡아다가 주리를 틀 자. 아무래도 그게 제일 안전할 것 같아..." "빨리 가요." * * * 애송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요즘들어 만나는 고수들 마다 자신을 못잡아 먹어 안달이니 이거 억울해도 이만저만 억울한게 아니다. 자신도 무림의 경험 을 쌓기 위해 사문을 나설때만 해도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는데.... "으아아아아악!" "이자식아! 빨리 불어. 아까 그 검은 옷 입은 사람하고 무슨 말을 한거야?" 우루루 쫓아오더니 첫대면부터 묵향이라던 선배와의 일을 물어보는데... 사실 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묵향 선배를 해치려고 하는무리들 같 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묵향 선배와 자신은 사형제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관 계인데다가 그 선배가 자신은 마교인이기에 정파의 제자인 너와의 관계는 발 설하지 말라고 했던 주의 때문에 그로서는 그들에게 답을 해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정중하게 물어오던 상대가 점점 심사가 뒤틀리는지 표정이 굳어져가 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다짜고짜 출수를 해왔다. 괴한의 무공은 자신보다 한참 위였고 곧이어 점혈당해 쓰러진 자신에게 무지막지하게 고문부터 시작하니 이 거 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고... 힘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아무래도 맛을 덜 본 모양인데요... 입이 아주 질겨요. 오라버니... 분근착 골을 사용하는게 어떨까요?" "알겠다. 나도 그편이 빠를 것 같구나." 사내가 애송이의 혈도를 몇군데 치자 애송이의 온 몸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날 죽여라.... 날 죽여.." 살막의 무리들이 애송이로부터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은 것은 7가지 고문을 가한 후였다.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애송이로부터 대답을 듣자 살막의 인 물들은 먼저 걱정부터 앞서기 시작했다.그래서 옆의 누이에게 전음으로 속닥 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큰일이군. 저놈의 말 대로라면 사제하고 거의 비슷한 관계잖아. 이놈을 족친게 묵향의 귀에 들어가면 아주 귀찮아지겠는데... 이놈을 죽여버릴 까...?>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저놈은 우리들의 정체도 모르는데.... 그리고 저놈 의 말대로라면 묵향과 더 이상 만나게 될 가능성도 없는 것 같은데요? 그냥 아까 그 의원에 데려다 주면 어떨까요?> <흐음... 괜히 쓸데없이 살인을 할 필요는 없지. 좋아. 네 말대로 하자.> "얘들아." "예." 그 사내는 만신창이가 되어 뻗어있는 애송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이 아까 나왔던 의원에 저놈을 치료하라고 맏기고 치료비를 지불해라. 죽으면 안되니까 잘 치료하라고 부탁하고..." "옛!" 수하들이 애송이를 엎고는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사내가 투덜거렸다. "자식... 좋게 말로 할 때 들었으면 서로 좋았잖아." 애송이가 의원의 한 자그마한 방에 뻗어서 정신이 오락가락 함에도 불구하고 퇴원하자마자 또다시 엉망이 되어 실려온 탓에 열받은 의생(=의사)으로부터 갖은 핍박(逼迫)을 받으며 치료받고있는 이시간... 묵향도 정신이 거의 오락 가락하고 있었다. 물론 애송이 처럼 고문(拷問)의 후유증으로 그런 것이 아니 라 단시간에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 것이다. 벌컥 벌컥 "큭...! 좋군 좋아. 세상천지가 빙빙도는군..." 벌써부터 혀꼬부라진 소리가 나오느냐고 할 사람은 이 식당에 아무도 없었다. 묵향의 옆에는 벌써 빈병이 10개가 쌓여있었고 그 다음에는 감질난다며 아예 독째로 가져다가 마셔댄 것이다. 사실 무림인이라면 술을 이정도 마신다고 이렇게나 취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 는 웅후한 내력으로 술기운을 억누르거나 좀 더 무공이 고강한 경우 술기운을 체외로 방출해버리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마시면서 술기운을 땀과 같은 형태 로 방출할 바에는 왜 술을 돈주고 마시는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쨋든 대 부분 그런식으로 술기운을 처리하기에 무림인이 술이 취해 비틀거리는 꼴은 보기 힘들다. 묵향은 그에 비해 아예 취하자고 마셔댔기에 위의 두가지 방법 중 그 어떤것 도 취하지 않았다. 그대로 술기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형편이니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고 해도 술기운에 정신이 오락가락 할 수 밖에... 5대접의 고량주(高粱酒)를 더 마신 후 급기야는 탁자위로 쓰러져버리자 식당 주인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쯧쯧... 내 평생 이장사를 해왔지만 저렇게 죽으려고 퍼마시는 놈은 처음이 군." "헤헤... 그래도 선불 받았으니 걱정은 없잖아요." "떽! 잘못하다가 시체를 치우면 적자라구. 적자. 저놈을 들어다가 골방에 재 워줘라. 새파란 놈이 대낮부터 저렇게 퍼마시다니... 아무래도 계집문제때문 인 모양인데... 아무리 계집이 좋다고 있는대로 퍼마시고 목숨을 버리려고 들 다니... 쯧쯧..." * * * "벌써 뻗어버렸는데 어쩔거에요?" "글쎄... 세 가지 방법이 있겠지." "어떤거요?" "먼저 이틈을 이용해서 저놈을 죽여버린 다음 무림맹에 공치사를 하는거야. 그리고 두 번째는 이대로 놔두고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거고 세 번째는 들어다 가 좀 더 좋은 여관으로 옮기는 거지." "흐음... 그럼 우선 첫 번째를 시도해보고 가능성이 없을거 같으면 세 번째를 사용할까요?" "그게 좋겠군. 너가 가지고 있는 팔황장천비(八荒長天匕)를 빌려다오." "오라버니도 좋은 검이 있잖아요?" "내것이 아무리 좋아도 십대기병(十代奇兵)에 견줄 수 있겠냐? 내꺼로는 영 자신이 없어서..." "좋아요. 여기있어요. 예민한 녀석이니 부드럽게 다뤄줘요." 여인은 품속에서 1척정도 길이의 호화로운 단검을 사내에게 건넸다. 검신의 길이 7촌(21Cm), 손잡이 3촌 반(10.5Cm)의 조금 긴 이 비수는 팔황장천비라 는 근사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대의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얇고 날카로운 검신(劍身)덕분에 십대기병의 말석(末席)을 차지하고있었다. 이 비수는 그녀의 선친(先親)이 천신만고 끝에 구한 것으로 그녀의 35번째 생 일에 선물한 것이었는데 그 예리함에 반한 그녀는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녔 다. 사내는 건네받은 비수를 왼손에 감춘 후 수하들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서자 쓰러진 묵향을 일으키려고 애쓰고있는 점소이가 보였다. 그 런데 아무리 점소이가 흔들어대도 줄기차게 뻗어있던 묵향이 갑자기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바람에 뒤에 서있던 점소이가 뒤로 쓰러져 탁자에 부딪쳤고 그것을 본 살기를 품었던 무리들은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무심을 가장 해서 옆의 탁자에 우루루 앉았다. 그들을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던 묵향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 이상하군... 살기가 느껴진 것 같은데... 네놈들이냐?" 그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여 짐짓 이해 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답했다. "예? 무슨말씀이신지?" "네놈들이... 네놈들이 감히 본좌에게 살기를 품었냐 이말이다." "아.... 아니올시다. 착각을 하셨겠죠..." "그런가..." 털썩. 묵향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탁자위에 뻗어버렸다. '휴... 살기를 최대한 억눌렀는데도 이모양이니... 아무래도 내가 너무 긴장 한 모양이야. 좀 마음을 안정시키고...' "이봐. 여기 술하고 안주좀 주게나." "예." 뒤로 넘어졌던 점소이는 일단 묵향을 그대로 놔두고 주문한 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사내는 안주도 없이 술을 몇잔 들이키면서 긴장된 몸과 마음을 조 금 느슨하게 푼 다음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면서 사내는 죽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저건 통나무야. 저건 통나무야. 저건 통나무야.......' 뭔가를 죽인다는 기분을 조금이라도 가지면 끝장이었다. 저런 민감한 놈은 베 는 그 순간까지... 될 수있다면 벤 후에도 살기(殺氣)가 없어야 한다. 사내는 묵향의 등 뒤에 다가선 다음 왼손에서 살며시 비수를 아래로 내렸다. 사내는 자신이 익힌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왼손에는팔황장천비의 집을 잡고 또 손잡 이는 오른손으로 살며시 잡은 상태로 천천히 묵향의 등 뒤 가까이로 가져갔 다. 미세한 살기까지도 감지하는 인물인 만큼 엄청난 예기(銳氣)를 뿜는 팔황장천 비를 뽑은 상태로 그의 등뒤에 가져갈 수는 없었다. 최후의 순간에 뽑음과 동 시에 휘둘러야 했다. 그는 처음에는 쿵쾅거리며 움직이고 싶어하는 심장을 정 상적으로 돌리게 만드느라고 갖은 애를 썼지만 일단 먹이가 코앞에 위치하자 그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목표에 정신을 집중했다. 통나무의 심장이 위치하 고 있을거라 생각되는 부분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상대가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공력을 약간만 모으면서 근육을 조금씩 긴장시키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그가 팔황장천비를 이용해 통나무를 두토막내려는 찰나, 죽은 듯이 뻗어있던 통나무의 몸에서 강렬한 기가 방출되어 나왔다. 그와동시에 허름한 식당 안은 지독한 술냄새(酒香)로 꽉 차서 숨쉬기도 힘들지경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다음순간 통나무처럼 뻗어있던 묵향은 강렬한 기가 넘치는 살아있는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이런' 사내는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팔황장천비를 왼손에 황급히 밀어 넣었다. 사내가 숙달된 동작으로 순식간에 모든 증거를 인멸(湮滅)하고 모르 는 척 하고 있는데, 모든 술기운을 순간적으로 체외(體外)로 밀어내버린 묵향 이 언제 취해있었냐는 듯이 멀쩡한 안색으로 일어서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해..." 그러면서 수하들과 여인이 앉아있는 탁자로 다가가더니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여기서 지속적으로 살기가 느껴진단 말이야." 사실 막주는 살기를 초인적인 노력으로 감추는데 성공했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수하놈들이 상관(上官)을 지원하려고 준비를 늦추지 않은 것이 탈이 었다.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감을 느낀 여인은 아무일도 없었던 듯 방긋 이 화사하게 웃으며 먼저 선수를 쳐서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묵향 부교주님. 또다시 뵙는군요." "으응? 누구시더라?" "저... 그때 살막에서..." "아... 막주의 대리인이군.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근사한 제안이 있어서 막주님을 모시고 이리로 따라 왔어요." "막주?" 그때 사내가 묵향의 뒤에서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십니까? 홍진(洪搢)이라 합니다." "아... 안녕하시오? 묵향이라 하오. 추격술이 대단하시군요." "과찬이십니다. 제가 부교주님을 따라온 이유는 그 제안에 동의(同意)하고자 함이지요." "그런데 아까 그 살기는?" "아... 전에 부교주님의 놀라운 무예의 경지를 목격했던 수하들이 저희들의 안전을 생각해서 대비한 것이겠지요.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허허.." "좋소. 그대들이 도와준다니 정말 고맙소." "다행히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저희들과 술이나 한잔 하심이 어떠하실는지 요?" "좋지." "전에는 소개를 못드렸지만 저 아이는 제 동생인 홍청(洪淸)입니다. 무공은 보잘 것 없지만 지혜가 뛰어나 집안살림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의 살해 일보직전까지 갔었지만 이상하게 반전되어 이런식으로 화 기애애한 술판이 벌어져버렸다. 이 둘의 합체가 화(禍)가 될지 복(福)이 될지 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이것으로 두 단체의 합체는 이루어진다. * * * 모두들 축배(祝杯)를 들며 담소를 나누다가 살막의 인물들은 떠나가고 묵향 혼자 식당에 남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참 술을 마시던 묵향은 뭔가 이 상한 점을 발견했다. 사실 그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들어서면서부터 발견했 을텐데 그때는 사부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대로 마 음이 안정되자 자연히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놀랍군.' 묵향은 탁자를... 정확히 말하면 탁자의 윗부분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 다. 이미 그의 머리속에는 사부의 죽음도... 살막의 합병에 대한 기쁨도 사라 지고 없었다. 다만 머리속에 맴돌고 있는 것은 놀랍다는 감정 하나였다. 한참 을 탁자를 살펴보던 묵향은 다음에는 의자들을 살피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다른 탁자들을 살펴봤다. '정말 놀라워...' 급기야 묵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점소이를 불렀다. "이봐" "예, 나으리." "이 탁자는 어디서 구한거냐?" "예. 숲속에 사는 진팔(振八)이란 목수가 만든것입죠. 별로 볼품은 없지만 아 주 튼튼합죠." "튼튼할만도 하겠군. 그자가 사는 곳을 자세히 말해보거라." 그러면서 묵향이 5냥의 엽전을 쥐어주자 입이 함박만큼 벌어진 점소이는 나불 나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묵향은 음식값을 지불한 다음 진팔이란 목수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진팔의 집은 산 중턱쯤에 위치한 자그마한 초가(草家)였다. 초가의 앞에있는 자그마한 텃밭에는 아마도 진팔이라고 생각되는 젊은 목수가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모든 작물을 다 먹고는 새로운 소채들을 심기위해서리라... 묵향이 점점 다가가자 곡괭이가 땅을 치는 박자와 묵향의 걸음걸이가 이상하 게도 일치하기 시작했다. 목수는 묵묵히 땅만을 바라보며 곡괭이를 놀리고있 었고 묵향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묵향은 그 순간 응축(凝縮)되어 숨겨진 미세한 살기가 곡괭이 속에서 묻어나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묵향이 목수에게 다가설수록 그 살기는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묵향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품속에 숨겨두고있던 묵영비(墨影匕)의 손잡이를 더듬고 있었 다. 묵향은 땅을 바라보고있는 목수가 자신의 전신(全身)을 훑어보고있다는 기이 한 느낌을 받고있었다. 그리고 아래로 아래로 휘둘러지는 곡괭이는 자신의 온 몸을 노리고 있다는 느낌 또한 받고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죽을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묵향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다음순간 묵 향은 몸속의 모든 세포들이 지금의 상황을 즐기며 폭발적으로 반응하고 있음 을 느꼈다. 놀라운 쾌감이었다. 다음순간 묵향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목수 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묵향이 목수에게 2장(6M)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지금까지와는 달리 곡괭이가 막대한 기를 머금은 채로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그 순간 묵향은 본능적인 위 험을 감지하고 재빨리 뒤로 신형을 뺐다. 하지만 그보다도 목수의 곡괭이가 땅에 부딪친 것이 조금 빨랐다. 목수의 곡괭이가 땅에 부딪침과 동시에 놀라 운 현상이 벌어졌다. 곡괭이와 땅이 부딪침과 동시에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강 기(剛氣)의 회오리가 생성되어 그곳을 기점으로 사방으로 구형(球形)으로 퍼 져나갔다. 강력한 강기가 퍼져나옴을 느끼는 순간 묵향은 품속에서 묵영비를 꺼내어 순 간적으로 아래로 그었다. 직검단천(直劍斷天)의 기세로 떨어져내리는 그의 비 수에서는 검강의 회오리가 반월형(半月形)으로 형성되어 구형으로 퍼져나오는 상대의 강기와 부딪쳐갔다. 상호간의 강기가 부딪침과 동시에 묵향은 지금 뻗 어오는 강기의 회오리가 무식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깨닳았다. 아마도 지금 의 강기는 상대의 필생의 깨닳음을 이용하여 방대한 공력을 준비한 필살의 공 격이리라. 그는 더 이상의 헛된 공격을 포기하고 외부에는 4장 3절, 망강(網 剛;강기의 사슬)을 이용하여 보호하고 그 안에 최강의 수비식이랄 수 있는 1 장 4절 방(防)을 전개했다. 그와동시에 상대가 퍼뜨린 강기의 회오리가 묵향 을 덮쳤다. 지독한 강기의 회오리는 망강을 순식간에 허물고 들어와서는 방에까지 막강한 충격을 주어 뒤흔들었다. 곧이어 놀랍게도 여태껏 무너진 적이 없던 방까지 무너지며 묵향의 호신강기에 강력한 힘으로 부딛쳐왔다. "크윽!" '정말 대단하군...!' 묵향은 목구멍 안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꿀꺽 삼키면 서 회심의 반격을 시작했다.선수는 놓쳤지만 당하고 살 위인이 아니었기 때 문이다. 회오리가 지나감과 동시에 묵향은 4장 1절, 통강(通剛)을 4장 5절, 다강(多 剛)의 법칙을 이용해 막강한 공력(功力)을 투입하여 뿜어냈다. 묵향이 다강을 응용하여 강기를 전개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다강이란 수개에서 수백개에 이르 는 강기를 한꺼번에 뿜어내는 요령을 이르는 것으로 다강 하나로만은 어떤 위 력을 발휘할 수도 없다. 통상 절강이나 통강과 함께 응용되는 기술이이기 때 문이다. 상대방을 향해 찌르는 듯 겨눈 묵영비에서는 순식간에 수백가닥의 검강의 다 발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갔다. 이때 상대는 묵향에게 일격을 먹인 후 마무리 를 할 작정인지 튕기듯이 뒤로 후퇴중인 묵향에게 엄청난 속도로 다가서고 있 었다. 그러다보니 묵향의 공격은 상대에게 그대로 격중되었고 상대는 묵향의 공격을 일부러 찾아와서는 온몸으로 때우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상대는 묵향의 강기가 수백가닥이 뻗어옴을 보고 눈이 약간 커지더니 곧이어 곡괭이를 떨어트리며 머리를 아래로 수그리고 발을 최대한 위로 끌어올리면서 양손을 사용하여 이(二)자 형식으로 만들어 몸의 앞에 막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양 팔에서는 시퍼런 강기의 막이 퍼져나오며 그의 몸의 앞부분을 두터운 방패와 같이 막아섰다. 쾅! 거의 지축(地軸)을 울리는 듯한 괭음이 퍼져나오며 상대는 그 반탄력에 의해 뒤로 날아갔다. 상대는 뒤로 튕겨나가면서도 상대의 열손가락에서는 각기 지 강(指剛)이 뻗어나오며 묵향에게로 날아왔다. 역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기 때문이다. '얄팍하게 시간을 벌려고 드는군.' 묵향은 순간적으로 1장 4절, 방(防)을 이용하여 몸을 감싸면서 뒤로 튕겨가는 상대가 준비 할 시간여유를 주지않기 위해 쫓아들어갔다. 펑! 10개의 지강이 방에 격중되는 순간 묵향은 상대의 지강이 상상외로 강하다는 것에 놀랐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면 방이 깨지면서 다시금 호신강기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지강들이 방에 격중되면서 발생한 강력한 반탄력에 의해 뒤로 밀리면서 묵향 의 눈에는 상대방이 처음 가한 공격의 결과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상대의 구형으로 퍼져나간 강기의 회오리는 곡괭이가 부딛친 곳에서부터 반경 50장(150m)를 거의 평지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그것을 깨닳으면서 묵향은 상대의 공력이 자신보다 더욱 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향은 곧바 로 상대에게 근접전을 펼칠 생각을 포기하고 곧바로 뒤로 몸을 빼면서 상대와 의 거리를 더욱 벌리며 묵영비를 품속에 집어넣고 다급한 김에 공력을 이용해 상자와 무명을 순식간에 태워버리면서 묵혼을 꺼냈다. 묵혼의 손잡이를 양손 가득이 움켜쥐며 묵향은 다시금 필승의 기세를 북돋우기 시작했다. 또다른 한명의 현경의 고수 묵혼을 뽑아든 다음 새로운 투지를 불태우며 묵향이 목수에게 몸을 날렸다. 둘의 사이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묵향은 곧바로 어검술을 전개하며 상대의 목 을 향해 묵혼을 휘둘렀다. 하지만 상대는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 어 떤 반격도 하지않았다. 이것이 묵향이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느낀 이유였다. 이정도 공력을 투입한 어검술이라면 어떤 방어적인 행동을 했을 것이다. 피한 다든지 아니면 또다른 어떤 행동으로 대응을 하든지... 그 이유는 묵향 자신 이라 하더라도 이정도 공격을 호신강기따위를 이용해서 몸으로 때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묵혼검은 상대의 목 반촌(半寸; 1.5Cm)거리에서 멈췄다. 그러면서 묵향의 입 에서 딱딱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죽고싶소?" 그러자 목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이 오기를 기다렸지. 정말 놀랍군. 자네는 내 목을 칠 충분한 자격이 있 어. 자... 뜸들이지 말고 실행하게나." "뭐... 부탁을 들어드리는 것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이유나 알고싶 은데요." 그러면서 묵향이 묵혼검을 검집속에 집어넣고는 허리에 차자 상대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자네는 나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닌가?" "선배를 만나러 온 것은 사실이지만... 죽일 생각까지는..." "그럼 자네는 청해성(靑海省)의 살겁(殺劫)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 아니란 말 인가?" "청해성의 살겁이라뇨?" 목수는 아무말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묵향에게 말했다. "일단 이것도 인연이니... 따라오게나. 술이나 한잔 하세." 목수는 첫 번의 출수로 인해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초가의 옆쪽에 구덩이를 파자 안에서 자그마한 항아리가 하나 나왔다. 목수는 항아리를 꺼낸 다음 그 것을 들고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묵향을 이끌고 갔다. 목수는 그런대로 운치 있는 자리를 골라 묵향에게 앉기를 권한 다음 묵향과 자신의 사이에 항아리를 놓았다. 목수가 항아리를 열자 그윽한 주향(酒香)이 흘러나왔다. 항아리를 연 후 목수 가 항아리 안으로 꼭 잔을 쥐고있는 것 같은 손짓으로 술을 뜨자 놀랍게도 진 기(臻氣)로 형성된 무형의 그릇에 술이 떠져서 올라왔다. 목수는 그것을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부가 누군지 자네는 아는가?" "글쎄요..." "노부는 과거 혈마(血魔)라 불렸었네." 그제서야 어느정도 감을 잡은 묵향이 대꾸를 했다. "혈마 선배셨군요. 사파의 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강기를 사용하신다는 말을 들었었습니다." "클클클... 아닐쎄... 노부는 사파의 인물이 아니야. 노부의 사문은 전진일 세." "아... 그 정과 마의 무공을 함께 익힌다는?" "자네도 알고 있었군. 노부의 나이 180세에 더 이상 무공은 증진되지 못하고 어떤 벽에 막혔었지. 바로 현경의 벽이야. 그래서 노부는 그 벽을 부수기 위 해 주야로 무수한 노력을 했었어. 너무 과도하게 노력한 탓에 주화입마(走火 入魔)에 걸려 그 마성(魔性)이 은연중에 골수(骨髓)에까지 침투해버렸지. 노 부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것은 거의 100년 전이었네. 그때 노부가 느낀 것은 어떤 촌민의 심장을 내 오른손이 움켜쥐고 있다는 것이었지. 그리고 정말 많 은 사람이 죽어있었어. 그들의 시체를 검사해보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내가 모두 죽였다는 것을 알았지. 나는 정말 미칠것만 같았네. 그래서 사문에 돌아 가서 죄를 청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었지. 사문에 돌아가보니 그곳은 황폐하게 변해 있더군. 수많은 동문들이 백골이 되어 군데군데 쓰러져있었네. 그 흉수는 곧이어 알 수 있었지. 아무리 뼈만 남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손쓴 흔적을 찾기는 쉬웠어. 노부는 마성에 미쳐날뛰며 동문과 사부까지 모두 죽여 버린거야.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을까도 생각해봤네만... 나까지 죽어버리면 사문의 맥이 끊어지기에 그럴수도 없었지. 그래서 자그마한 문파를 하나 만들 고 그들에게 한번씩 찾아가 사문의 절학을 알려주며 여기저기를 떠돌며 참회 를 하고 있는 중이었어. 별로 인재가 들어오지 않아 이제 사문도 끝장이라는 절망을 하고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온 왕중양(王仲陽)이란 녀석이 꽤나 쓸 만해 보이더군. 아마도 전진의 미래를 다시금 넓혀갈 대들보가 될테지. 새로 운 전진에는 마의 무공을 전수하지는 않았어. 나와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안될 것 같아서... 그나저나 자네도 대단하더군. 자네와 같은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네." "과찬이십니다. 제 실력이 조금만 떨어졌다면 선배님의 그 첫 번째 일격으로 가루가 됐을텐데요..." "그건 자네의 말이 약간 틀려. 노부는 100년간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참회를 하며 한가지를 자연히 깨닫게 되었지. 100년간 땅을 파다보니 어느날 한가지 떠오르는게 있더군. 자네도 대자연에 떠도는 강렬한 기를 느껴봤나?" "예." "그래. 그렇다면 이해하기 한결 편하겠군. 나는 곡괭이에 기를 담아 그냥 대 지를 내려친 것이 아니야. 실지 그렇게 한다면 땅만 파이지 뭐 그렇게 가공할 기운이 뿜어져 나오지는 않지. 나는 나의 기를 대지의 기와 충돌시킨 거지. 그것은 극강한 두개의 기가 충돌하며 뿜어져나오는 강기의 회오리야. 노부는 그것을 깨닳은 후 이 무공을 전개했을 때살아나올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것 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네. 아마 노부도 그것에 당한다면 살아남기 힘들었 을지도 몰라." 조금 어리둥절한 묵향의 표정을 보더니 혈마는 껄껄웃더니 말했다. "자네도 오랜시간 땅을 파보면 알 수 있을걸세. 사실 대지의 기를 포착하여 그것과 충돌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지. 참. 그런데 자네는 여기 왜 왔나? 노부와 은원(恩怨)이 있는것도 아니라면 이곳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사실은 작은 식당에서 선배님이 만든 탁자를 봤죠. 그것은 어떤 연장을 사용 해서 만든 것이 아니더군요. 아주 단단한 나무를 일격에 강기(剛氣)로 잘라서 판자를 만든 후 그것으로 만든 것을 알고... 호기심에 찾아왔습니다." "껄껄... 술값이나 벌자고 만든 것 덕분에 오늘 목숨을 날릴뻔 했군. 나는 자 네가 다가오는 그 발걸음을 보고 놀랐지. 그 힘과 자신감이 넘치는 발걸음... 그 발자국 소리가 나는 고수고 너를 죽이러 왔다고 말하는 것 같더군. 노부는 내 생애 최고의 고수가 찾아온다는 것을 느꼈어. 아마 상대도 나를 괜히 찾아 온 것은 아닐테니...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내력을 모으고 준비한 후 처음의 일격을 날린거야." "그런데 선배께서는 제가 출수를 하자 곡괭이를 버리시던데... 그것은 왜..." "아. 나는 검을 쓰는 사람이 아니야. 장(掌)과 권(拳)을 주로 사용하지. 물론 사문에서 검을 배우기는 했지만 내 나이 100여세에 더 이상 검을 쓸 필요가 없더군. 그다음부터는 검을 잡아본 적이 없어."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인데... 비무를 청해도 될런지요?" "클클... 고수들의 싸움에서 그정도 초식을 교환했으면 되었지 더 이상 뭘 원 하는가? 노부는 거의 300여년을 살아왔네. 노부는 이제 더 이상 무공이고 은 원이고 뭐 이런것들에 관심이 없어. 그리고 요즘들어서는 뼈다구까지 물렁해 져서 자네의 공격을 버틸 재간이 없어. 그나저나 밭도 새로 갈아야 하고 집도 지어야하고...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군..." "다시 만나뵐 수 있을까요?" "하하하... 이리저리 떠도는 몸이라 아마 힘들걸세. 사실 이렇게 새파란 몸으 로 한곳에서 10동안 있기도 힘들어. 여기서 10년... 저기서 10년... 이렇게 살고있지. 정 만나고 싶으면 전진파에 연락을 해두게나. 운이 있다면 만날 지 도 모르지. 하지만 점점 그곳도 기틀이 잡혀가니 노부도 잘 안가거든." 한 으슥한 밀실(密室)...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들이 5명 모여앉아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고 있다. 그중 상석(上席)에 앉은 인물이 말했다. "아무래도 나름대로 또하나의 준비를 해두는게 좋겠어." "무슨 준비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강시( 屍)는 지금 몇 구나 완성되어있나?" "289구입니다." "과연 그것들만으로 가능할까?" "흐흐.. 일반강시라면 몰라도 혈교의 비법으로 제작된 천령강시(穿靈 屍)올 시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살아서 돌아가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본좌는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미흡한 것 같단 말이야..." "그러하오시면...?" "함정을 기준으로 사방 10리(3Km)에 대천악마라진(大千惡魔羅陣)을 준비하 라." 그러자 모두들 경악에 찬 표정으로 잠시 말을 잊었다. 대천악마라진은 그 진 세가 오랜 세월동안 연구되어 만들어진 다음 단 두 번 사용되었을 뿐이다. 천 마의 율법에서도 그 사용을 멸교의 위험이 있을때가 아닌 한 금지하고 있을 정도로 공포적인 마진이다. 대천악마라진이 사용된 가장 근래의 경우가 구휘 (區揮)대협의 아들 구천(區天)대협이 마교를 멸망하려 했을때였다. 그때 대천 악마라진을 거의 30리에 걸쳐 구축한 후 상대를 유인하여 끌어들여서 진세를 발동하였는데 그 사악한 마기와 요기는 마교에 몸담고있는 무리들도 처음 느 껴보았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마교와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은 그 진세안에서 대 접전을 벌였다. 사악한 마기와 요기는 양측에 두가지 상반된 작용을 했었는데 정(正)의 무공을 익힌 자들은 그 힘에 압도되어 제대로 자신 의 실력을 낼 수 없음에 반해 마교도들은 그 힘에 도움을 받아 평상시보다도 더욱 막강한 힘을 발휘... 원로원의 도움이 큰 작용을 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을 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은 다시한번 더 재고(再考)를 해보심이..." "맞습니다. 그것은 천마의 율법에서도 금지하는 사악한 진법... 너무 과하다 는 생각이..." "클클클... 대천악마라진은 그 진 자체가 가진 살상력도 엄청나지만 사악한 악마들에게 사악한 힘을 나눠주는 것이 더욱 가공할만 하지. 어둠의 자식들인 강시라면 당연히 그 힘을 더욱 극대화하여 그놈을 저세상으로 인도할 것이 분 명해. 다만 이것은 최후의 방법이다." "최후의 방법이라 하시면?" "지금 그를 해치우기 위해 2중, 3중의 그물을 준비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빠져나온다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사용해야 할 것이야. 그자는 아주 호기심 이 강해서 어물어물 넘기면 죽을지도 모르고 찾아올거야. 대신 수하들도 그것 이 함정이란 것을 알게하면 안돼지. 눈치가 너무 빠른놈이니... 조심 또 조심 하도록." "존명!" 어둠속에서 또 한 인물이 입을열었다. "그런데 이번에 잡아온 계집아이 때문에 말씀이온데... 한가지 문제가..." "무슨일인가?" "그것이... 마령섭혼심법(魔靈攝魂沁法)이 통하지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아무래도 태허무령심법(太虛無靈心法)을 익힌 것 같습니다. 그가 타인에게 알려준 심법은 모두 그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도저히 심지(心知)를 장악할 수가..." "허허허... 난 또 뭐라구.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지. 그가 이리로 올 것 이 확실하다면 어떤 고문을 가해서라도 그년의 모든 이성(理性)을 무너뜨린 다음 사술을 걸어도 되니까... 벌써부터 마음 쓸 필요는 없으니 나중에 좀 더 확실해질때까지 어디다가 가둬두게나." "존명!" * * * 묵향은 혈마(血魔)라 불리웠던 전진이 낳은 최강의 고수 장진(張賑) 도인(道 人)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눈 후 그에게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일순간의 기 억에도 없는 실수를 오랜 세월을 은둔하여 참회하며 살아온 그의 삶이 묵향에 게 새로운 어떤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묵향이란 인물은 참회하고는 아주아주 거리가 먼 인물이었기에 자신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끈기있게 행하고있는 그에게 존경심이 생겼던 것이다. 묵향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지금 자신의 양녀를 만나기 위해 낙양으로 가고 있음을 그에게 우연히 말하게 되었다. 그러자 장진 도인은 정사는 양립 하기 어려우니 그녀를 위해서 낙양에 갈 것을 포기하라는 충고를 해왔다. 해 서 묵향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흑룡문으로 돌아갔다. 그로서도 장진 도인의 말 을 거역할 만한 어떤 타당한 이유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묵향은 구흑룡문(舊黑龍門)의 정문에 들어설 때 걸려있는 현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黑龍門(흑룡문)이란 현판은 없어졌고 묵향의 지시대로 새로운 현판이 걸렸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져있었다. <天魔神敎陝西分打(천마신교섬서분타)> 묵향이 돌아오자 여태껏 처리한 서류뭉치들을 가지고 설무지가 찾아왔다. 그 는 묵향에게 그것을 전하면서 입을 열었다. "첫번째 것이 본타가 거느리고 있는 식솔들의 계급체계 및 그들에게 지급되는 봉록, 장비 등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것은 타주께서 안계신 동안 사업을 확장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고 셋째는 본타의 현재 재산상태를 기록한 것입니다." "흐음..." 묵향은 서류들을 뒤적거리다가 옆에 놓으며 물었다. "흑풍단이 도착했을텐데 그들은 어떻게 처리했소?" "예. 직접적인 것은 관지 대장에게 들으시고... 속하는 아무래도 그들은 따로 놔두는 것이 좋을 듯 하여 따로 묵을곳을 마련해주고 관지 대장과 의논하여 흑풍대라고 명명했사옵고 그 계급체계는 그에게 일임했습니다. 그들에게 지급 한 새로운 무기와 의복, 장비 등을 구입하는데..." "아아... 돈얘기는 그만하시오. 골치아프니까... 그것은 자네에게 일임하기로 했잖소?" "예." "새로 사업을 벌이다니... 그건 뭐요?" "예. 속하가 도착하고보니... 뜻밖에도 정말 엄청난 힘이라... 그들을 놀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일부를 이용하여 표국사업과 위사사업(衛士社業;지금의 보디가드와 유사함)을 벌였사옵고... 염왕적자에게 부탁하여 부근의 모든 잔 챙이들을 토벌하여 일정 금액을 상납받기 시작했사오며... 8군데의 전방과 3 군데의 기루, 5군데의 도박장을 입수했습니다." "입수하는데 문제는 없었소?" "조용히 잘 마무리 지었습니다." "수입은 괜찮소?" "워낙 중경(中京)이 가까운지라 본타의 강력한 고수들이 부상(富商)이나 고관 (高官)들을 찾아가 시범을 보이자 모두들 만족해 하며 호위를 청해왔습니다. 그들은 안전만 확실히 책임지면 돈을 아끼는 위인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표국 사업도 근처의 표국들을 힘으로 눌러 3개의 표국을 흡수하여 벌써 안정권에 들어갔사옵니다." "좋아. 좋아. 모든 것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나." "존명! 그런데...." "뭔가?" "타주님을 찾아온 자가 있사온데... 용건을 밝히기를 한사코 거부하며 지금 일주일째 여기 머물고 있사옵니다. 만나시겠습니까?" "어디서 온 자인가?" "대산에서 왔다고 하더이다." "좋아. 데리고 오라." "예." 조금 지나자 마기를 풍기는 한 인물이 들어왔다. 그는 묵향에게 부복하며 말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부교주님!" "그래. 자네는 누군가?" "교주님의 서한을 전하고자 왔습니다." 그가 주는 편지를 그를 인도하여 온 장한이 받아 설무지에게 전했고 그것을 다시 설무지가 묵향에게 전했다. 묵향은 별 흥미없다는 듯이 편지를 찬찬히 읽어본 다음에 설무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설무지는 편지를 읽은 다음 얼굴빛이 핼쑥해지며 노기(怒氣)를 터트렸다. "이 것을 따르면 아니됩니다." "왜?" "함정일 것이 뻔합니다. 이놈들은 지금 타주님의 양녀를 인질로 잡아 타주님 을 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꾐에 속으시면 안됩니다." "그래도 내가 안가면 그 아이를 죽일텐데?" "그래도 안되옵니다. 그것은 나중에 복수를 하면 그만... 지금 이들의 말을 따르면 타주님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크하하하하..." "....." "자네의 생각이 아주 내 생각에 부합(符合)되이. 사실 나도 그곳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 내가 거기 왜 간다는 말인가... 껄껄껄... 이제는 교주도 나를 웃기는군... 자네가 내 대신에 편지좀 써주게나." "예. 준비가 되었습니다. 부르시지요." "여러가지 인사말이나 뭐 그런거는 자네가 예법에 맞게 써주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거야. 만약 내 양녀를 죽인다면 나는 그것을 말리고 싶은 생각 은 없소. 사실 내가 교주를 죽인다는 것은 아주 힘드오. 교주의 무공도 무공 이려니와 그 주위에 호위하는 무리들이 많기 때문이오. 하지만 교주보다 무공 이 약한 교주의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는 죽이기가 아주 손쉽 지. 그대가 내 양녀를 죽인다면 나는 그대의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를 손쉬운 순서대로 차근차근 죽여주겠소. 그건 별로 어려운게 아니니 까... 나야 믿질것이 하나도 없으니 우리 서로 누가 많이 죽일 수 있는지 내 기 해봅시다. 이렇게 써서 이것으로 인장을 찍은 후 저놈에게 줘라." "예." 설무지가 편지를 써서 묵향이 준 옥패(玉牌)를 이용하여 인장을 찍은 후 장한 에게 건네줬다. 장한이 마기를 풍기는 인물에게 주자 답장을 받은 마인(魔人) 은 편지를 품속에 갈무리 한 후 묵향에게 예를 드리고 물러가려 했다. 이때 묵향이 그를 불렀다. "잠깐!" 상대가 돌아서자 묵향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아주 더러운 소식을 나한테 전하고 가는데... 예물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안 하나?" 그러자 상대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곧바로 오른손에 진기를 끌어올리더니 수도(手刀)의 기법을 이용하여 왼손을 내리쳤다. 그는 왼손이 떨어져나가자 몇군데 혈도를 잡아 지혈을 한 후 말했다. "더 필요하십니까?" "아닐쎄... 예물이 과하군. 무인은 한쪽 손이라도 없으면 아주 불편하기 때문 에 나는 그냥 한쪽 귀면 되었는데... 자네가 먼저 손을 써버렸으니... 대산까 지 잘가게나." 마교에서 왔던 인물이 떠나가자 묵향은 대장급(隊長級) 이상의 고수들을 불러 들였다. 그에따라 묵향이 거느린 삼대세력인 천랑대, 염왕대, 흑풍대의 대장 들과 군사(軍師)인 설무지, 그리고 묵향에 앞서 설무지를 찾아와 통합을 청한 살막(殺幕)의 막주(幕主)와 부막주(副幕主)가 참석했다. 살막은 묵향과 합치 는 이때를 이용해서 아예 그 주력을 섬서성으로 이동했고 또한 본거지는 마교 섬서분타의 서쪽에 위치한 큼지막한 장원 한 채를 조용히 꿀꺽하는 것으로 손 쉽게 해결했다. 묵향은 모인 인물들을 쭉 훑어본 다음 입을 열었다. "이제야 대강 준비가 갖추어 진 것 같군. 관지!" 그러자 얼굴을 숨기기 위해 복면을 하고있는 관지가 대답했다. "예." "우리끼리 있을때는 복면을 벗게나." 묵향은 복면 안에서 드러나는 관지의 남성다운 패기가 넘치는 눈을 잠시 바라 보더니 말했다. "혹시 불편한 것은 없나? 내 모든 것을 일러뒀으니 혹 미흡한 것이 있으면 군 사에게 말하면 들어줄거야."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묵향은 관지에게서 눈을 떼고 좌중을 둘러본 후 말했다. "지금 이곳은 인원이 너무 많이 모여있소. 구흑룡문의 아이들을 뺀다 하더라 도 육천이나 된단 말이오. 그래서 군사와 의논을 좀 해본결과 한가지 그 타계 책을 구상소. 이번 일이 끝나면 우리는 더욱 강대한 힘을 가질수 있을거요. 군사!" "예. 사실 한곳에 전력을 모아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리함도 있지만 기습을 당했을때는 오히려 불리함도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조금 분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에 병행하여 산서성의 마교세력을 흡수하려고 하는데... 어 떤분께서 힘을 써주실건지..." 그러자 염왕적자가 말했다. "속하가 염왕대를 이끌고 해결하겠소이다." "좋습니다. 그럼 낙양을 염왕적자 대장에게 맏기겠습니다. 그곳의 낙양분타 타주인 방철(방哲)과 먼저 비밀리에 연락을 하세요. 그러면 방철은 이미 본타 에 전폭적인 협조를 해주겠다고 연락을 해온만큼 손쉽게 낙양일대를 제압하실 수 있을겁니다. 낙양일대의 제압이 끝나면 염왕대와 함께 그곳에 비밀리에 분 타를 건설하고 세력을 확장하기를 바랍니다. 제 딸 설령이를 데려가시면 조금 이나마 도움이 되실겁니다. 그리고 조사한 결과 방철은 무공은 떨어지지만 아 주 관리면에서 뛰어난 인물이니 그를 잘 이용하십시오." "알겠소이다." "그리고 관지 대장!" "예." "관지대장은 흑풍대를 이끌고 태백산(太白山)에 비밀분타를 건설해 주십시오. 물론 인부와 물자는 제가 비밀리에 충분히 제공해 드릴 것입니다. 일단 건설 이 끝난 다음에는 그곳에 머물면서 세력을 키워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점차적 으로 본타의 핵심시설은 모두 다 태백의 분타로 이동될 것이고 이곳은 껍데기 만 남겨 적의 이목을 속이는데 이용될 것입니다." "홍진 막주." "예." "부막주와 함께 당분간은 이곳에서 저를 도와 일해주십시오. 대신 살막의 중 추세력은 태백의 분타로 단계적으로 이동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살막의 정보력을 낙양으로 돌려 염왕적자 대장의 낙양제압을 도와주십시오." "그러지요." "그리고 한가지! 여러분께서도 아시겠지만 본타는 마교에서 분리된 단체입니 다. 타주님께서는 본타가 마교힘의 4할에 이른다고 하셨지만 정직하게 말했을 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천리독행 대장이나 염왕적자 대장과 세밀한 대화 를 통해 결론지었습니다. 타주님께서 우리들을 이끈다면 4할의 힘을 낼수있겠 으나 타주님이 빠진상태라면 결코 4할은 커녕 2할의 힘도 낼지 의문입니다. 지금 본타의 주력이라고 볼 수 있는 천랑대와 염왕대를 합쳐놨다 하더라도 타 주님이 빠졌을때 마교의 최고정예 천마혈검대(天魔血劍隊)의 기습을 받는다면 순식간에 괴멸당할 것이 확실합니다. 그만큼 마교의 상위 무력단체와 하위 무 력단체 간의 실력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그것을 어느정도 막기위해 상위로 갈 수록 숫자를 적게 배치했지만 정면대결이 아닌 기습이라면 숫자가 적을수록 더욱 유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요. 그렇기에 어느정도 세 력을 분산시켜 둘 필요성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본타의 이름을 무 림에 알리고 새로운 고수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비무회를 개최하는 것이 좋 겠습니다." "비무회라고?" "예. 분타창설 기념 비무회 정도로 하면 되겠지요. 대신 눈이 뒤집힐 정도로 좋은 상품을 몇가지 내거는 것입니다." "좋은 의견이기는 하지만 무예에 미친놈들이 그까짓 황금따위로 모집할 수 있 을까?" "아니지요. 타주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보검 2자루, 보도 3자루를 확보해 뒀습 니다. 돈이 좀 많이 들었고 그중 몇 개는 흐흐흐... 조금 특이한 경로로 입수 했지만... 뭐... 그래도 입수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사방에 수소문해 서 뛰어난 미모(美貌)를 지닌 계집 10명을 확보했지요. 그것과 함께 본타 내 에서의 제법 괜찮은 직위, 그리고 뛰어난 마공(魔功)을 익힐 수 있는 특전 따 위를 주겠다고 한다면 정말 뛰어난 자는 어렵겠지만 그런대로 모두들 모여들 것입니다." "하지만 첩자들이 들어올수도 있는데... 그것에 대한 대비책은 뭔가?" "사실 이들은 섬서분타에서 사용할 소모품들입지요. 이 섬서분타를 지금 뜯어 고치고 있는데... 내부와 외부의 두군데로 확실하게 구분짓는 공사지요. 이번 에 받아들인 자들은 외부의 수비(守備)에 이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예의 일 부는 내부에 배치하구요. 내부와 외부 사이에는 진법으로 강력한 그물을 쳐두 면 왼만한 놈들은 얼씬도 하기 힘들지요. 그리고 요소요소에 일부 뛰어난 고 수들만 배치하여 첩자들에 대한 대비를 하고... 또 이 내부에 타주의 주력이 있는 것 처럼 꾸미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일부 고수들을 제외한 힘은 모두다 비밀분타들에 분산해버리면 최악의 경우를 당해도 궤멸당하는 경우는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들은 타주님의 주력(主力)이 이곳에 있는 줄 알고 여기만 감시할테니 세력을 따로 움직이기도 편하구요. 나중에 상대가 기습을 가해오 면 타주님 이하 고수들은 밖으로 피해나가면서 나머지 놈들을 먹이로 던져주 면.... 흐흐흐..." "별로 기분좋은 생각은 아니지만... 뭐 그런대로 방법은 괜찮군. 대신 나는 여기에 언제나 있어야 하고?" "그렇지요. 하지만 타주께서는 무공이 원체 고강하시니... 원하신다면 언제나 눈에띄지 않게 빠져나가실 수 있을것입니다. 대신 이곳에 계속 계신 것으로 해놓아야 놈들이 타주가 계신 실세(實勢)를 찾는다고 노력하지 않게 되죠. 그 리고 이곳은 그때쯤 첩자들이 우글우글 하게 될것입니다. 완전히 닫아걸고 숨 기기는 힘드니 아예 열어둔 후에 비밀리에 주의에 주의를 하는 것이 더욱 안 전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곳 이름을 아예 마교분타로 대놓고 포고한 이상 마교 내의 권력다툼이 되어버리니 교주가 직접 세력을 이끌고 오지 않는다면 마교와의 충돌의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대신?" "정파에서 기습을 가해올 가능성은 있으니 그쪽으로의 대비는 확실히 해야합 니다. 하지만 정파에서도 대놓고는 기습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들이 마교를 등 에 업고있는 한 기습을 가한다면 마교와의 정면충돌이 벌어지기 때문이지요." "좋아. 역시 군사는 아주 머리가 좋군. 만일의 경우 천랑대를 제물로 쓰기는 아까우니 나중에는 천랑대도 100여명만 남기고 모두들 철수시키게나." "예" "관지." "예." "자네 수하 중에서 4명을 차출해서 보내주게나. 군사가 호위를 두라고 하는데 나는 마기를 뿜어대는 놈들을 호위로 두지않거든. 밖으로 돌아다닐 때 너무 표시가 나기때문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기를 뿜지 않는 자들은 흑풍대 뿐 이야. 그러니 자네에게 부탁하네." "영광입니다. 속히 네명을 뽑아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묵향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마화는 뒤로 물러섰다. 그녀 자신도 명상이나 사색(思索)이야말로 초고수들에게는 오히려 수련보다도 더 큰 상승효과를 가 져온다는 것을 줏어들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때 쓸데없는 말을 걸어 방해 하면 안된다는 것 쯤은 알고있었다. 묵향이 요즘들어 죽자고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이 무의식중에 익히고 있는 귀혼강신대법(歸魂 身大法)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생각에 생각을 해봐 도 그 사악한 마공과 자신이 익히고있는 무공과의 접합은 불가능했다. 귀혼강 신대법은정통마공이라고 할 수 없는 혈교의 요술적인 힘과 마교의 파괴적인 힘이 만난 독특한 무공이었기에 불사에 가까운 신체가 주는 매력은 대단했지 만 그 자신도 비급을 훑어본 다음 불가능함을 깨닫고 익히기를 포기했던 사악 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싸웠던 수하들의 말을 종합해서 판단해본 결과 자신의 기억이 돌아오는 그 순간에 심각한 상처를 안고있다가 순식간에 그것 을 치료했다는 것은.... 또 방대한 내공을 일시에 회복했다는 것은 자신이 생 각해도 이해하기가 힘든 노릇이었다. 내공의 회복이야 북명신공을 통했다고 하더라도 상처는.... 아무리 묵향이 머리를 굴려도 귀혼강신대법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귀혼강신대법을 무의식이 아닌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살을주고 상 대의 뼈를 깎는... 아니지... 뼈를 주고 상대의 뼈를 잘라도 결코 믿지는 장 사가 아니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으니...' 묵향이 요즘들어 생각하는 것은 북명신공의 매력이 아니었다. 북명신공의 몇 가지 난해한 점은 젖혀두고라도 그것은 일단 익힐 수 있는 무공이니까... 하 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익힐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무의식중에 익히 고 있다면 그것만큼 황당한 것이 없다. '이놈의 무공은 내가 죽기 일보직전쯤 되어 정신을 잃어야만 발동되나? 하지 만 그전에 죽어버리면 끝장이잖아.... 혈마... 혈마... 혈마의 무공을 제압하 는데 그것만큼 좋은 수법이 없는데 말이야...' 묵향이 이토록 고민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자신이 혈마가 지척까지 거의 무방 비상태로 접근해오기를 기다렸다가 발사한 회심의 일격... 그것도 거의 백가 닥에 이르는 강기다발을 모두 다 격중당했으면서도 손쉽게 그 힘을 막아냈다 는 데 있었다. 상대의 방어력이 그토록 강하다면 현재 묵향이 가지고있는 어 떤 무공으로도 그를 해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없는 상대... 묵향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최고의 경지에 올라서있는 고독한 절대강자(絶對 强者)가 아니었기때문이다. * * * 자그마한 모옥안... 그 허름한 방의 한쪽 구석에 한 사내가 앉아서 명상에 잠 겨있다. 그가 입고있는 묵의는 어두운실내와 그가 풍기는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렸다. 평범한 얼굴이지만 사실 이 사내의 진면목을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평범하게 보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고 있다. 남보다 조 금 두터운 눈법을 평범하게 보이기 위해 적당량 사정없이 뽑아버렸고, 동경 (銅鏡)을 보면서 표정관리를 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었는지... 지 금은 세탁하기도 귀찮아서 묵의를 입고있지만 일단밖에 나가면 눈에띄는 색깔 의 옷은 절대입지 않았다. 그가 다른 색깔의 옷을 입으면 그것대로 또 그에게 는 자연스럽게 그 옷이 어울렸다. 하지만 눈에 띄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평 범하게... 다만 평범하게 보인다는 것이 달랐다. 오랜시간 명상을 끝낸 후 그가 눈을 뜨자 그의 앞에는 큼직한 상자가 하나 놓 여있었다. 분명히 그가 명상을 하기 전에는 없었던 것이지만 누군가가 그의 앞에 놔두고 간 것이다. 그가 누군지는 묵의인도 잘 잘고있었고, 또 그가 들 어오는 기척이나 방안에 들어와서 행한 행동까지도 모두 묵의인은 잘 알고있 었다. 대신 묵의인은 그에게 아는척을 안했을 뿐이다. 심부름꾼은 그 상자안 의 내용이 뭔지 알지도 못하니 아는척을 해봐야 입만아프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농민들의 손 보다는 조금 들 투박하고 대가집 자제들보다는 조금 더 투 박한 손으로 그 상자를 들어 무릎위에 올렸다. 고도의 내공과 검술을 익힌 그 로서는 계집아이의 손처럼 고와지는 손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묵의인은 그것 도 평범한 조금 투박한 손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의 대가가 상자를 들고있는 손이었다. 묵의인은 상자 뚜껑에 찍혀있는 봉인(封印)을 세심히 살펴 누군가가 뜯어보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묵의인 처럼 음지에서 살아가는 인물은 비밀이 유지되지 않으면 그날로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상자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책자 한권과 2척 길이의 단검 한자루, 지갑, 그리고 서신이 있었다. 묵의인은 서신을 들어 서신에 새겨진 봉인도 세심하게 확인한 다음 봉투를 열 었다. < 특급지령. 살(殺) 대상 : 마교 부교주 묵향 기한 : 6개월. 무공수위 : 탈마(脫魔)로 추측 특기 : 강기류와 어검술 등을 주로하는 검귀지만 그에게는 검이 있건 없건 큰 상관은 없다고 함. 인상착의 : 동봉한 서책(書冊)에 초상화가 있음. 주변사항 및 위치 : 동봉한 서책(書冊)에 자세히 기록. 나이 : 65세 정도로 추정. 수련한 무공 : 너무 종류가 많아 동봉한 서책에 따로 기재되어 있음. 사실 그것을 모두 익혔는지는 본좌도 확인불가. 정사황(正邪皇) 대부분의 검술을 익혔거나 알고있다고 추정됨. 특이사항 : 호신강기가 매우 강하므로 동봉한 보검을 사용할 것. 하지만 아주작은 살기, 예기(銳氣)에도 반응하므로 최후의 순간 이 아니면 뽑지않기 바람. 최근에 4명의 호위를 거느린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호위의들의 무공은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님. 구 흑풍단 소속의 무사들로 추정됨. 잠드는 시간은 불규칙적이며 2-4시간 정도 수면을 취하는 것으 로 조사됨. 동자공을 최후의 방패로 써먹었을 정도로 여색을 좋 아하지 않음. 도저히 암살이 불가능할 것 같으면 돌아와도 문책은 없을것임. 성격 : 매우 냉정, 냉혹하며 사악한 인물. 인질따위는 통하지도 않는 상대 니 주의할 것. 고아인 상태에서 평생을 검과 살아왔기에 가족은 없고 양녀가 한명 있지만 현재 그 양녀는 마교에서 인질로 잡고있음. 하지만 눈도깜짝 안했다고 함.> 편지의 위에는 묵의인을 뜻하는 버드나무 모양의 인장, 아래에는 보낸자를 뜻 하는 뱀 모양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그것을 다 본 다음 편지를 삼매진화의 절 기로 태워버리며 무의식중에 묵의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마디 뿐이었다. "휴... 괴물이군..." 묵의인은 단검을 들어서 천천히 검집에서 꺼냈다. 스르르르릉... 검집에서 나오자 마자 찬란한 보기(寶氣)를 내뿜는 것이 과연 뛰어난 보검이 었다. 그는 그것을 다시 상자에 넣은 다음 지갑을 들어 내용물을 살폈다. 지 갑 안에는 흔히 사용되는 10냥짜리 은표 몇장과 100냥짜리 은표 몇장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일어서서 한쪽 구석에 놓인 큼직한 상자안에서 보따리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보통 농민들이 즐겨입는 조금 짙은 회색의 약간 낡은 옷이 한벌 있 었는데 그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런다음 눈에띄지 않는 보따리를 하나 꺼내에 검과 몇가지 옷가지를 넣은 후 지갑과 책자는 품속에 집어넣고 방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허름한 방안이었지만 그는 정들었던 이 공간으로 다시는 돌아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번의 먹이는 한입에 삼키 기에는 너무나도 커서 아무래도 목구멍에 걸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 런다음 그는 다시한번 뭔가 자신의 몸속에 어떤 물증이 될만한 것이 없는지 세심히 살펴봤다. 책자외에는 증거가 될만한 것은 없었다. 책자는 길을 가는 도중에 완벽하게 외운 다음 없애버리면 된다. 그러고 나면 설혹 실패하더라도 상대는 그의 배후를 도저히 밝힐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모든 준비를 갖춘 다음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런다음 대장간 주인에게 돈을 쥐어주고 1주일간 대장간을 빌린다음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만들기 시작한 것은 1척정도 길이의 바늘처럼 생긴 길쭉한 쇠막대기였다. 막 대기 끝은 바늘처럼 뾰족하게 만들었고 그 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끝부분은 준비해온 현철(玄鐵)을 사용했다. 그는 뛰어난 대장장이도 아니었기 에 그가 1주일 후 완성한 조금 투박스레 생긴 쇠막대기에는 예기(銳氣)라거나 보기(寶氣) 따위의 신비로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그를 더 욱 만족스럽게 했다. 그는 그것으로 대장간에 놓여진 쇠판을 몇번 진기를 끌 어올려 찔러본 다음에 푹푹 들어가있는 쇠판의 구멍을 만족스레 살펴본 다음 품속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내어 뚜껑을 연 다음 그 속에 들어있는 걸쭉한 액 체를 세심하게 쇠막대기 끝에 바르기 시작했다. 아마 이것에 찔리면 천하에 없는 고수라도 정신을 못차릴 것이 분명했다. 책자에는 상대가 전직 살수라고 기록되어있었고 살수란 직업 자체가 죽음의 냄새를 맡는데는 거의 짐승과 같 은 감각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이 투박한 그 어 떤 예기도 느껴지지 않는 이 무기에 모든 것을 걸 생각이었다. * * * 어느날 갑자기 거리 곳곳에 나붙은 방문(訪問) 때문에 전체 무림이 술렁거리 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인력을 동원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원 전 지역에 걸쳐 곳곳에 방문이 붙어있는 것을 모든 이들이 볼 수 있었다. 그 방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으니 가칭 사마외도(邪魔外道)라고 하여 멸시받던 무사들이 모두 들 희망에 부풀기 시작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 무림 동도들에게 고함. 본 천마신교 섬서분타에서는 우수한 후진들의 영입을 위해 섬서분타 설립 기념 비무회를 신년(新年) 일월 오일에 개최하기에 많은 무림제현들의 참여 를 바람. 5위 내의 입상자에게는 보검이나 보도, 그리고 미녀와 오만냥을 지급함. 10위 내의 입상자에게는 미녀와 삼만냥을 지급함. 50위 내의 입상자에게는 미녀와 일만냥을 지급함. 100위 내의 입상자에게는 삼천냥을 지급함. 그 외에 어느정도 실력을 인정받은 모든 후진들을 위사(衛士)로서 채용할 것이며 그 지닌바 무예의 등급에 따라 봉록을 푸짐하게 지급할 예정임. 채용된 위사들은 그 무예의 등급에 어울리는 본교가 지닌 뛰어난 무공들을 수련할 기회를 가지게 되며 의복이나 기타 모든 장비들이 최고급으로 지급 될 것임. 천마신교 섬서분타 타주 배상> * * * "타주님. 비무회를 개최한다는 방문을 거의 전 중원에 배포했습니다." "전 중원에? 그정도로 본타의 인력이 남아돌지는 않을텐데?" "아... 그건 의뢰를 했습죠. 현 무림에서 숫자가 가장많은 문파 하면 개방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에게 방문을 붙여달라고 의뢰를 했습니다. 비무회 개최를 두고 개방에서 우리들에게 상관할 일이야 없으니까 의뢰는 순순히 받아들이더 군요. 돈이 좀 들었지만 뭐 직접 뛰어 다니는 것 보다야 경비가 적게들죠." "하지만 개방도 명색이 구파일방에 들어가는 명문인데, 순순히 의뢰를 받아들 였다는게 좀 찝찝하군." "흐흐... 그놈들도 이기회를 이용해서 첩자를 이곳에 침투시키기도 편할테니 허락을 했겠죠. 사실 이런식으로 받아들여봐야 고수들은 거의 모집이 안된다 는 것을 그놈들도 잘 아니까요." "그래... 몇 명이나 뽑을 생각인가?" "한 삼천 명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천이나? 돈이 많이들텐데..." "요즘들어 원체 사업이 잘되는 덕분에 그정도 여력은 있으니 걱정은 마십시 오. 중경과 그렇게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관계로 사업하기에는 그만입니다. 그리고 낙양의 본교세력도 꾸준히 흡수되고 있구요. 지금 들어오는 보고를 종 합해본 결과 의외로 낙양의 기업들이 알짜들입니다. 방타주가 아주관리를 잘 했더군요." "방타주의 실력이야 내가 그사람 밑에 있어봤으니 잘 알지. 돈벌이가 잘된다 니 다행이군. 그런데 전체적인 토목공사는 잘되어가고 있나?" "예. 지금 거의 5할정도 완성되어있습니다. 비무회를 개최할때쯤이면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근처에있는 사파계열의 문파들도 5군데나 흡수했습니다. 요 즘은 일이 너무 손쉽게 풀리는 바람에 제가 다 어리둥절 할 정도라니까요. 저 조차도 타주께서 거느린 세력들의 힘이 공포스럽게 느껴질때가 간혹 있을정도 니까요. 그런데 타주께 한가지 여쭐것이 있습니다." "뭔가?" "마교의 5대세력이라면 천마혈검대(天魔血劍隊), 수라마참대(修羅魔斬隊), 천 랑대(千狼隊), 염왕대(閻王隊), 자성만마대(紫星萬魔隊)라고 들었고 염왕적자 나 천리독행에게 물어서 대략적인 그 힘을 파악했지만 정확히 알기는 힘들더 군요. 그들의 힘이 어느정도인지 좀 자세히 알려주십시오." "흐음... 본좌도 어느정도는 줏어들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것을 종합했을 때 본좌와의 정면대결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천명으로 구성된 천랑대라면 본좌 혼자서도 처치가 가능하지. 하지만 500명으로구성된 수라마참대라면 나 를 아마 엄청 고생시킬 수 있을정도일거야. 그리고 100명으로 구성된 천마혈 검대라면 정면대결로는 본좌도 그들을 처치할 수 없어. 치고빠지는 작전을 계 속하면서 그들의 포위망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나중에는 다 죽일수 있을지 모 르겠지만..." "과연 마교의 정예라 할만하군요. 그들만으로 탈마의 고수를 헤치울 수 있다 면..." "하하하... 하지만 사실 나를 죽이려고 든다면 천마혈검대보다는 원로원을 투 입하면 더욱 손쉽지. 원로원의 영감들은 상하 실력차이가 심하지만 아마 실력 있는 자가 50여명 정도 모이면 나를 충분히 없앨 수 있을거야. 하지만 원로원 은 공격보다는 방어의 개념이고 또 교내(敎內)의 권력다툼에는 중립을 지킨다 는 점이 다르지. 교주라도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본좌도 그점을 믿고 있 는 것이고..." "허면 원로원의 고수는 몇 명입니까?" "아마 300여명 정도일걸세. 거의가 다 죽기 직전쯤 되는 노마물(老魔物)들이 니까... 숫자가 왔다갔다 하지." "원로원이 방어의 개념이라면 그들의 출동은 언제, 누가 결정합니까?" "뚜렷하게 결정하는 사람은 정해져있지 않아. 본교가 존망의 위기에 걸려있을 때 그들이 움직이지. 아무나 그냥 움직이라고 해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야. 그만큼 그들에게는 은퇴한 마물로서 노후(老後)를 편안하게 즐길 권리가 있다 구." "상대는 대단히 강하고 본타의 세력은 너무나 적으니... 가장 아쉬운 것이 뛰 어난 고수들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사실 현재의 힘만으로도 두려운 존 재가 거의 없는 상황이지만 사실 싸우고자 하는 상대들이 모두 그 몇몇 존재 에 들어가는 자들이라서..." "흐음... 그래서 본좌가 궁리를 좀 한 것이 있는데,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어떤 방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떠돌이 고수를 끌어들인다면 그자가 첩자일 가 능성은 거의 없을거 아닌가?" "그렇다고 볼 수 있습죠." "그렇다면 그런자들 중에서 뛰어난 실력을 지닌 놈들로 천명정도 뽑아서 알려 주게." "하지만 그정도 인물들이라면 수하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내기를 하면 되는거야. 비무를 해서 진자가 수하가 되기로 말이야." "헤헤... 그건 좀 사기성이 농후한 계획인 것 같은데요... 누가 탈마의 고수 와 비무를 해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흐흐흐... 만약 응하지 않는다면 응할 생각이 들때까지 따라다니면서 핍박을 하면 나중에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에서 두손들겠지."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명단을 뽑아서 드리겠습니다." "그럼 수고하게나." "예." 설무지가 물러가고 난 다음에 마화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타주님." 마화가 이런식으로 조심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묵향은 평소 처럼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그러냐?" 하지만 마화도 묵향의 퉁명스러움에 지지않고 자신이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슬슬 꺼내기 시작했다. "소문을 들으니까 이번에 위사의뢰가 들어왔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그게... 그게... 참 근사한 곳이라서" "어딘데 그러냐?" "소주라고 들어보셨어요?" "소주? 들어는 봤지. 강소성에 있잖아. 나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꽤 멋진 곳이 라고 그러더군." "그곳까지 가는 건데요. 황궁삼대미인의 한명인 진영공주가 소주까지 관광을 하면서 주변의 모든 명소를 두루 훑는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묵향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황족(皇族)이란 것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지금 전쟁으로 나라가 엉망인데... 그래 그 계집은관광이나 다닐 생각을 하고 말이야." "그래서 시국(時局)도 어수선하고 해서 위사의뢰가 들어온 모양입니다. 제가 좀 따라가도 될까요?" 이제서야 눈치를 챈 묵향. "아하! 왜이렇게 서두를 길게 빼는가 했더니 그 이유였군. 마화는 소주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모양이지?" "예. 그리고 삼대미인중의 한명의 얼굴도 한번 보고싶구요. 도대체 어떻게 생 기면 그런 칭호를 받는지 알고싶거든요. 물론 이건 질투는 아니에요." "허기야... 나도 요즘 일이 없으니 우리 같이 몰래 가볼까?" 그러자 마화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이요?" "그럼. 여기다가는 가짜를 하나 놔두면 되겠지. 실지 내가 여기있어봐야 할 일도 없으니까." * * * 대 송이 자랑하는 최고의 정예 황군(皇軍)이 100명씩이나 투입되어 호위하는 거대한 규모의 관광객을 외곽호위(外廓護衛)하는 책임을 맡은 석진(奭眞)은 마교의 정예고수... 그것도 천랑대의 고수 50명을 데리고 왔으면서도 좌불안 석(坐不安席)... 모든 것이 불안하고 힘들기만 했다. 사실 처음에는 천랑대 10명을 거느리고 느긋한 마음으로 관광이나 한다는 기분으로 맡은 일이었는 데... 그런데 그 호위대가 갑자기 그 다섯배인 50명으로 늘어났으니 산적이나 반란도배따위는 겁날것도 없는 처지였지만 오히려 10명으로 계획되었을때보다 더 불안한 것은 계획에도 없던 두 연놈이 가세한 덕분이다. "에구구구... 내 팔자야..." 오늘도 뭔가 잘못된 점은 없는지 불안하기만 한 그였다. 묵향은 끈덕지게 만류하는 설무지를 설득하느라고 자신이 아는 온갖 술수를 동원했다. 끝내 묵향이 고집을 부리자 호위 40명을 대동하는 선에서 서로가 합의를 했고 독립호위 중에서 세명은 가짜를 경호하기 위해 남고 마화와 둘이 서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묵향이나 마화도 호위들과 같은 흑색무복(黑色武服)에 장검을 차고 있었으므 로 특별히 표시가 나지 않았다. 유일하게 홍일점(紅一點)인 마화가 약간 두드 러질 뿐이었다. 묵향은 난생 처음으로 - 기억에 없는 몽고전은 제외하고 - 묵 혼검이 아닌 보통의 장검(長劍)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의 묵혼검은 분타에 남아서 그의 대리역을 하는 가짜가 착용하고 있었다. 마교 고수들의 임무가 외곽호위이니 만큼 멀찌감치에서 경계를 하고 있었기에 묵향으로서는 속뒤틀 리는 황족이란 것들을 직접 대면하지 않아서 좋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10명 정도의 고수를 파견하겠다던 당초의 통보와는 달리 거 의 50명이 넘는 고수가 외곽에 깔렸기에 황궁에서 파견된 호위담당 장수(將 帥)인 종사품(宗四品) 김진덕(金眞德) 사령(司令)도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김 사령으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언제나 이동을 할 때는 공주와 그녀의 친구 6명을 호위하는 황군 본대(本隊)는 뒤에서 가고 일단의 선행대가 앞에서 이동하면서 숙식에 따른 여러 가지 계약을 체결하고 또한 수 상한 무리가 없는지 감시하게 되는데, 마교의 무리들 중에 거의 대부분이 앞 쪽에 몰려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마교의 고수들을 이끄는 책임자는 항상 뒤에 서 따라왔지만 사실상 그는 10여명만을 직접적으로 통솔했고 나머지 40여명은 앞의 선행대를 호위하는 듯한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선행대에 그렇게 전력 (戰力)을 집중할 필요가 없으니 그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관광을 하기위한 황궁의 패거리는 매 식사때, 그리고 숙소를 정할때마다 난리 를 부렸다. 실상 그 인원이 160여명이나 되다 보니 웬만한 자그마한 식당이나 여관으로서는 턱도없는데다가, 공주에 대한 안전한 호위를 명분으로 그 큰 식 당이나 여인숙에 먼저 들어가 있던 손님들을 모두 다 내쫓았기 때문이다. 왠 만한 실력의 무림인들도 관부와 충돌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기에 모두들 떨떠 름한 표정으로 물러나는 판이니 일반 백성들이야 두말할 것 없었다. 그 모든 사람들의 협조(?)하에 식당이나 여관이 텅비게 되면 그때 황군이 그 안으로 공주일행을 모시고 들어가게 되고 그 외곽에 10여명의 마교 고수들이 깔리고 나머지는 함께 들어와서 식사를 하던지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도중에 큰 마을이 나타나면 공주일행은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허울 좋은 명목하에 관청으로 향했고 그 관청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다음날 공주일 행이 떠날때까지 진땀을 빼게되는 것이다. 그 공주일행이 흥청망청 먹고마신 비용을 황궁에서 지원해주느냐 하면 그게 아니었으므로 돈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질 리가 없으니 당연히 공주일행이 떠난 다음에 관청을 유지하기 위해 관 리들은 불쌍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족쳐 그만큼의 돈을 더 징수(徵收) 하는 것 이다. 2주일 정도는 아주 순조로운 여행이었다. 그런데 그날 점심식사를 위해 큼지 막한 식당을 하나 골랐고 그 안으로 호기있게 들어갔던 5명의 황군 장졸(將 卒)들 중의 한명이 얼마안되어 창문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곧이어 묵향 일행 이 그 안으로 들어가자 식당 바닥에 4명의 장졸(將卒)들이 뻗어있는 것이 보 였고 그들 앞쪽에는 무림인으로 보이는 한 중년인이 검을 허리에 차고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하지만 그의 그 표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마기를 뿜 어대는 인물들이 10여명이나 식당안으로 들어섰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묵향이 척 보니 식당안에는 꽤 많은 무림인들이 앉아있었다. 거의 10여명의 무림인들이 앉아있었다. 이들은 꽤 실력이 있어 보였고 그런 상태에서 눈에 차지도 않는 무술실력을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관복(官服)을 입은 무리 다섯이 들어와서 다짜고짜 나가라고 했으니 그들로서도 속이 뒤틀리는 중에 저 남자 가 화풀이를 했음에 틀림없었다. 묵향은 될 수 있으면 이 일을 좋은 방향으로 처리하고 싶었기에 즉시 말했다. "마화" "예." "조용히 처리하고 싶으니 저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돌아가라고 하라." 요즘들어 묵향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예전과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마화도 잘 알고있었다. 예전 몽고전에서 알던 묵향과는 달리 그는 귀찮은 일이나 번거로 운 것을 싫어했고 될 수있으면 말보다는 힘으로 해결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이 다. '왠 일이야?'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마화는 두말않고 묵향의 지시에 따랐 다. "예." 마화는 앞으로 나선 다음 가볍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무슨 일 때문에 여기 모이신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희는 지금 진영공주전하 일행을 호위하여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는 자 리를 비켜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자 저쪽에 있던 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그대들은 마교의 고수들이 맞나?" "그렇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마교도 타락했군. 관부에 빌붙어서 위사노릇이나 하고있다니..." 그 말을 듣자마자 묵향의 뒤쪽에 있던 고수 한명이 살기를 뿜으며 앞으로 나 서려고 했지만 그를 묵향이 말렸다. 이때 마화와 그 남자와의 대화는 계속되 었다. "왜 마교의 고수들이 황실에 붙어서 일하고 있는가?" "그거야 당연히 돈벌려고 하는 것이죠. 위사 사업은 꽤 수입이 괜찮으니까요. 방금 전에 일으킨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을테니 이쯤에서 물러 나 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우리들도 무림에서는 이름깨나 떨치는 사람들다. 그런데 다짜고짜 나가라고 한다면 말이 안되지. 사실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고...." "귀하의 존성대명을 알고싶군요." "뭐 존성대명이랄 것도 없고... 관부의 추격을 받고싶지는 않으니 알려주고 싶지 않군." 드디어 마화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슬슬 신경질이 나기 시작하는지 말 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이름을 알릴 배짱도 없으면 여기서 빨리 나가라. 지금 타주님의 명령이 있기 에 참고있음을 알아야지." 새파란 계집아이가 떠들어대자 그중에서 한 인물이 열불이 뻗쳤는지 응대해왔 다. "새파란 것이 뒤에있는 고수들을 믿고 날뛰다니..." "이것들을..." 그러면서 마화가 검의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나가려고 하자 묵향이 미소를 지 으며 그녀를 말렸다. "너보다는 고수다. 뒤로 물러서라." 마화가 뒤로 물러서자 묵향이 빙글거리며 말했다. "이런 산골짜기에 10명이나 되는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 모여있다는 것 은 좀 이상하군. 그대들은 본좌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고있는거냐?" "....." 새파랗게 보이는 젊은이가 나서서 본좌 운운 해대니 상대가 기가차서 잠시 말 문이 막혀있는 사이 묵향의 말은 이어졌다. "정파의 인물들이 확실한 것 같은데... 우리들이 마교의 인물들이라서 시비를 거는건가? 아니면 공주일행을 노리고 있는 것인가? 실상 그대들의 능력을 추 정해 보건데... 뭐 100명정도 황군쯤은 1각도 안되어 찜쪄먹겠군." "그렇게 말하는 네놈은 누구냐?" "호오... 네놈이라고? 네놈들은 본좌가 누구신지 알 자격이 없어. 방금전 우 리들을 보고 마교가 관부에 빌붙어있니 하는 말을 한 것 같은데... 우리들이 야 약간의 수입을 올리려고 이번 관광의 호위를 하고있지만, 네놈들이야 말로 진천왕(眞天王)의 개가 되어 공주일행을 납치해서 전쟁을 유리하게 전개하려 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몇 명의 얼굴이 조금 벌개졌지만 곧이어 그 색깔은 사라졌다. "꽤 눈치가 빠른 놈이군." 그와동시에 그중의 한명이 앉은자세에서 그대로 엄청난 속도로 도약해서 묵향 에게 쏘아져 들어왔다.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정도의 속도로 뛰어드는 와중 에 순간적으로 등에 차고있던 5척이나 되는 장검을 뽑아 묵향을 내리찍어왔 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는 더욱 경악해야만 했으 니 묵향은 피하지도, 그렇다고 검을 뽑아서 막지도 않고 곧바로 손을 뻗어 상 대의 검을 양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잡아버린 것이다. 상대는 용을 썼지만 그 손가락 사이에 잡혀버린 검을 뽑아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상대가 힘을 더욱 쓰자 탱...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두조각이 나고말았다. 그러자 어이없다는 듯 부러진 자신의 검을 보던 상대는 묵향에게 믿을수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 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네놈정도 실력으로 본좌의 이름을 알 자격이 없지. 여기서 사라진다면 너희 들을 추격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계속 시비를 건다면 모두 다 없애는 수밖에 없지. 사실 황실에서 받은 액수로 그대들 정도의 고수를 처치한다면 믿지는 장사거든. 어떻게 할건가?" 그러자 그들은 서로 눈치를 한번씩 보더니 갑자기 신법을 사용하여 모두들 식 당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상대의 실력으로 보건데 자신들 모두가 한꺼번에 덤 벼도 승패를 가늠하기 힘든데다가 그 뒤쪽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8명의 마 기를 뿜어대는 놈들이 버티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 다. 그들이 달아나자 마화는 아직도 상대의 공격이 주었던 그 공포스러움에서 벗 어나지 못한 듯한 표정으로 묵향에게 물었다.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도 될까요? 아주 무서운 고수들인 것 같던데..." 그러자 묵향은 아직도 정신을 잃고 뻗어있는 황군들을 힐끗 보면서 천천히 말 했다. "이번 여행에서만 공주를 지켜주면 돼. 우리들이 호위하지 않는 상태에서 저 녀석들이 공주를 납치한다면 우리는 공주를 구해주면서 더욱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사실 호위하는 것 보다는 구해주는 것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거 든. 저런 계집애 하나 감옥에서 구출하는 것쯤 문제될 것이 없지. 저놈들을 여기서 다 죽여버리면 누가 공주를 납치하겠냐? 그러니까 그놈들을 살려두는 것이 이익이지." 그런다음 묵향은 뒤에서있는 고수들에게 지시했다. "저들을 깨워라." "존명." 황군의 장졸들이 깨어나자 묵향은 그 우두머리인 장수에게 말했다. "의외에도 상당한 고수들이 공주 일행을 노리는 듯 하오. 일단은 우리들이 쫓 아버렸지만 계산을 다시해야 할 것 같군." "....?" 상대가 무슨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묵향이 좀 더 상세히 말했다. "우리들이 그대들의 외곽호위를 의뢰받았을 때 분명히 산적이나 기타 잡배들 의 공격에 대한 방비라고 들었소. 하지만 방금 그대도 한 대 맞아봐서 알겠지 만 상대는 대단히 뛰어난 고수다 이말이외다. 그들의 실력이라면 1각도 안되 어 호위군을 전멸시키고 유유히 공주전하 일행을 납치할 수 있을것이오. 우리 들은 계약과는 달리 그런 고수들에 대한 대비를 해야하니 당연히 과외로 돈을 더 받아야 겠다 이말이외다." "그대는 그들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움직인다고 보시오? 또다시 올 가능성이 있지 않다면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기에 하는 말이오." "당연히 그자들과 대화를 나눠본 결과 알수있었지요. 그 고수들은 진천왕(眞 天王)에게 고용되어 공주일행을 납치하려고 하는 것 같았소. 그러니 그들은 다시 우리들을 덮쳐올 가능성이 다분히 있고 그렇다면 그들의 실력을 보건데 이쪽에도 피해가 생길 수 있지요. 옛말에도 있듯이 지키는 자 10명이 도둑 하 나를 당하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소?" "흐음... 그대의 말에도 일리는 있소. 사실 처음 계약상에는 무림의 고수들이 공주전하를 노릴것이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수고료의 액수는 김진덕 사령께 여쭈어보고 결정하겠지만 그대들이 원하는 액수는 얼마요?" "당연히 위험부담이 높으니 금화 20냥은 더 주셔야 겠소이다." "그건... 그건 액수가 너무 많소. 금화 10냥 정도로 합시다." "18냥." "12냥." "16냥" "14냥" "15냥, 더 이상은 양보하기 힘드오." "좋소. 금화 15냥으로 합시다." "이제 액수가 정해졌으니 김 사령에게 말을 잘 전해주시고, 공주전하께서 곧 이어 오실것이니 빨리 주인에게 통보를 하시오. 그럼 나는 밖에서 호위를 하 겠소." 상대가 급히 주방(廚房) 안으로 사라지자 그제서야 묵향은 일부러 굳혀놨던 표정을 풀면서 빙그레 미소지으며 밖으로 나섰다. 공갈한번 잘쳐서 금화 15냥 의 공돈이 거저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은화 1500냥이니 은화 10냥이면 한 식 구가 한달을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액수다. 그러니 잡수익으로서는 대단한 금액인 것이다. '역시 황궁놈들은 돈이 많거든....' 사실 떠돌이 무사들이 실력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예상외로 꽤 무술실 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놈들 10명가지고는 마교의 정예인 천 랑대 4명을 당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마화의 경우는 흑풍대에서는 손꼽히는 고수지만 무공만을 죽자고 익혀댄 무공광(武功狂)들과 동년배라도 실력차가 엄청 벌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인데 겨우 30대 초반에 이르는 마화의 나이로는 수십년씩 무공을 익힌자들과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리라. * * * 묵향과 마화가 관광겸 호위로 정신이 없는 그때... 한 인물이 높직한 나무위 에서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위치한 곳은 산위에 있는 제법 큰 나무위였기에 그가 관찰하는 곳과는 거의 4리(1.2Km)나 떨어져있었 다. 하지만 그 사내는 그런것에는 구애를 받지않는 듯 그 먼 거리를 관찰함에 도 인상하나 흩트리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넓기는 했지만 허름한 집 뒷마당에 놓아둔 보따리 하나였다. 물론 그 보따리는 1시진 전에 몰래 가져다 놓은 것 이었다. 그런대로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었지만 아직까지도 집안의 사람들은 바쁜일이 있는지 뒷바당으로 나오지 않아서 그 보따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 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사내는 끈질 기게 집안의 사람이 나와 그 보따리를 가져가기를 기다렸다. 그 보따리 안의 내용물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고 그것은 꼭 그 집안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어 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는 혹시나 다른 놈이 그것을 가져가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렇게 시간을 축내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거의 오정(午正)이 다 되어가자 그는 품속에서 말린 고기포를 꺼내어 우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이곳에 보따리를 가져다 놓기 시작한 것은 그가 다섯 번째로 살인(殺人)을 저지른 때였다. 그는 끈질기게 쫓아오는 추격 자들을 따돌리며 이곳까지 도망쳐왔었는데 그때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본 것이다. 그녀는 서른살은 되어보였고 세파에 찌들은 모습으로 미인도 아니 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중년의 남자와 함께 이곳에서 고아(孤兒)들 을 돌보고 있는 모습에 그는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곳에 있는 한 주민에게 수소문을 해본결과 그녀의 나이는 고작 스물 셋.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그렇게도 늙어보였나... 사실 부자들이 고아 몇을 돌보는 것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의 과시적인 자기위 안이 될 수도 있는 하나의 오락거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도 먹고살기 힘든 지경에서 남을 돌보기는 쉬운일이 아니다. 그 부녀는 별로 윤택한 환경 도 안닌데도 고아들을 11명이나 돌보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난 다음부터 그의 발길은 자주 이곳을 찾았다. 언제나 보따리 하나를 들고서... 그는 자신의 감정이 아주 사치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들을 그가 도와 주고 있다는 사실이 밖으로 드러나면 얼마나 큰 희생을 자신이나 그들이 치룰 지도... 하지만 그는 이 행위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 위험한 행위 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식구가 늘어나고 부녀와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은 은근한 기쁨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6개월에 한번은 어김없이 이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뒷마당에 허름한 보따리 하나를 던져놓고는 그들이 가져가게 하 는 방법을 택했다. 보따리 안에는 언제나 10냥의 은화와 옷가지 등 자질구레 한 것들이 들어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그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는지는 그들 이 보따리를 발견할때의 그 기쁜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너무 많은 액수의 돈을 넣어두면 소문이 날지도 모르기에 은화 10냥이란 그가 생각한 최대한의 액수였다. 아마도 그정도 액수라면 어떤 할 일없는 부자가 적선한 정도로 생각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5년이란 세월이 지나는 사이 자 그마하던 그녀의 집도 이제는 제법 넓어졌고 고아들의 수도 60여명에 이를 정 도로 커졌다. 그리고 6개월 정도에 한번씩 보따리를 던져넣는 그의 행위도 아 직까지 변함없이 이어져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과 큰 차이점이 있었다. 은화가 아니라 금화로 바뀐 것이다. 금화 10냥이면 은화 200냥이다. 아마도 이정도 액수면 그녀는 그의 도움이 없어도 아이들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 다. 그는 이제서야 점심을 장만하기 위해 뒷마당에 놔둔 큼직한 장독들에서 몇가 지 양념과 반찬을 꺼내기 위해 나온 그녀가 장독위에 올려둔보따리를 발견하 고는 속을 살펴보며 놀람과 기쁨에 넘치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 다. 그는 조심스럽게 숨어있던 곳에서 몸을일으켰다. 이제 이곳에서 더 이상 의 볼일은 없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부근에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눈 치채고 있는 자가 없는지 세밀하게 살피며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만약 자신과 그 고아들과의 연결이 밝혀진다면 최악의 경우 그 아이들과 부녀는 살 아남기 어려울 것이고 그 자신도 상대의 그물에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 을 밝힌 상대가 자신이 소속된 방파라고한다면 그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상대가 동료라 하더라도 이런 자신의 약점을 잡는다면 아주 상황이 안좋은 방 향으로 흐를 수 있다. 하지만 이 위험한 일도 오늘로 끝이었다. 아니 끝일지 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심결에 한마디가 새어나올 수 밖에 없었으리라.... "안녕히...." * * *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민둥머리를 하고있는 땡초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곳 을 이름하야 '절(寺)'이라고 부른다. 그중 어떤 곳은 가련한 민생들을 현혹하 여 주머니를 털어 개고기나 쳐먹고 계집질이나 하는 못된 놈들이 모여있는가 하면 어떤곳은 진짜 '스님'이라고 불리어 마땅한 인물들이 사이좋게 모여 불 도(佛道)를 닦는 곳도 있다. 하면, 그 '스님'이란 양반들이 가장 많이 사는곳 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그건 지나가는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알 듯이 저 숭 산의 소실봉 중턱에 위치한 소림사(小林寺)라는 절이다. 소림사가 언제 창건 되었는지는 분분한 설들이 많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북위의 효문제때 인도에 서 온 발타선사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그 이후로 증축(增築)에 증축을 거듭하 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팔천을 헤아리는 승려들이 쥐떼마냥 바글거리고 있는 거대한 사찰로 발전해 왔다. 소림사의 경우 일반의 사찰과는 달리 불법(佛法)보다는 무술(武術)로 더 유명 한 수상한(?) 곳이다. 원래는 오랜 면벽수련(面壁修練) 따위를 하다보니 발생 하는 체력의 저하를 막기위해 간단한 육체수련이나 하던 것이 달마조사 어르 신이 역근(易筋)과 세수(洗髓)의 두 진경(眞經)을 전하면서 급속히 무공이 발 전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림(武林)의 태두(泰斗)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는 강대한 폭력집단(暴力集團)으로 변모해 왔다. 소림사는 승려라는 점을 들어 무림에 골치아픈 일이 있을때는 불법을 익힌다 는 구실로 밖으로 나오지 않다가 무림이 안정되면 겨울잠을 마친 곰마냥 곳곳 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수많은 혈겁(血劫)이 무림을 휩쓸었지 만 아직도 수많은 노고수(老高手)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에대해 일부 무림인 들이 뒤에서 욕지거리를 하기도 하지만 소림사라고 이에대해 변명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듯이 소림의 무공은 72종이나 되는 방대한 분야를 다루고 있지만 모두가 불법에 기초하여 상승무공으로 갈수록 광명정대하여 괴이악독(怪異惡毒)한 살초(殺初)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 은 전적으로 소림의 무예가 심신의 수양에 있고 살생과는 거리가 먼 것을 대 변해 주고 있다. 또 소림의 승려들도 그점을 들어 될 수있으면 골치아픈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드는 것이다. 하지만 소림사의 무예로도 사람이 죽어나갈 수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소 림사는 세칭(世稱) 속가제자도 받는데 그들의 경우 소림의 상승무공까지 익히 지는 못하지만 어느정도 무공의 맛은 보고 나올 수 있다. 그들 중에는 군관 (軍官)들도 있고 무림에서 활동하는 고수들도 있으며 타락(墮落)하여 산도적 나으리가 된 놈들도 있다. 그사람들이 광명정대한 소림의 무공을 사용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니.... 소림사의 주장이 가히 맞다고 보기도 힘들다. 소림사는 여태껏 수많은 고수들을 배출했고 그중에서 무림을 풍미했던 초고수 들도 몇몇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소림사의 이름에 어울리는 선행과 덕행을 배풀어 세인들의 찬사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소림사의 무공이 지 니는 독특한 특성이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이 사실이다. 뭔고하면 소림의 무공 은 상승의 경지로 올라갈수록 불도와 연관이 크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불심이 깊다는 말은 곧 상승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말이 되어버리고 그 때문에 소 림의 초고수들은 모두들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고승(高僧)들이었다. 소림의 무예들 중에서 가장 익히기가 난해하다는 역근, 세수의 두 진경... 그 렇기에 그것을 깨달은 고승들이 자신이 창안한 무공에 그 무공의 일부를 토막 쳐서 삽입하여 불도에 깊기 빠져들지 못한 젊은 승려들을 가르쳤다. 그러다보 니 소림의 무공은 어떤 면으로 봤을때는 퇴보에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거기에 어쩌다 한번씩 나타나는 불세출의 기재가 정말 대단한 무공을 개발했을때는 너무 패도적이라느니... 너무 잔인하다느니... 불심이 얕다느니 ... 마도(魔道)에 빠졌다느니... 하면서 그 무공을 배척했고 그러다보니 소림 의 상승무학이 실전(實戰)에서는 점차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림태두의 자리를 무당(武當)이나 서문세가에게 위협받기 에 이른 것이다. 이곳은 숭산의 중턱에 위치한 거대한 사찰, 소림사... 그 소림사의 구석진 곳 에 위치한 방장실에 다섯명의 고승(高僧)들이 모여있었다. 모두들 안광이 정 순한 것이 상당한 수준의 무예를 닦은 인물들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자그마한 다과상을 놓고 빙 둘러앉아 모두들 차를 한잔씩 들 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놀 랍게도 불법에 관한 것이 아닌 살인(殺人)에 관한 모의(謀議)였다. 40대 중반의 근엄한 얼굴의 승려가 차를 홀짝이더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덕진사형(德津師兄)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제 가 지객당(知客當)을 책임지다 보니 세상의 소문이라든지 여러 가지 소식에 빠릅니다. 여태껏 모은 정보들을 종합해보면 그의 무공수위로 봤을 때 그들만 으로는 역부족일 것입니다." 그러자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인자한 얼굴을 가진 덕혜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백팔나한(百八羅漢)과 십이금강(十二金剛)에 삽십이수좌승(三十二 首座僧)까지 포함시켜 대정사숙(大正師叔)께 드린다면 그를 없애기에 충분하 지 않을까요? 삼십이수좌승이라면 소제(小弟)가 거느린 팔대호원 최고의 정예 니까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가장 상석(上席)에 앉은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인자한 얼굴의 승려 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흐음... 덕진사제(德津師弟)의 말대로 그들의 힘은 웬만한 문파를 순식간에 허물 수 있는 강대한 힘이지만...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네만 본사의 승려 들은 썩 실전경험이 많다고 볼수가 없네... 하지만 상대는 무림에 수많은 피 바람을 불고온 장본인... 개(犬)와 늑대(狼)의 차이지... 설혹 그를 응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댓가는 엄청난 것이 될것이야." 그러자 덕호(德浩)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떻게 말이냐?" "방장사형(方長師兄)께서 금제(禁制)된 십이진경(十二眞經) 중 세가지만 해제 해주십시오. 그들에게 그것을 익히게 한다면 훨씬 더 피해가 줄어들 것입니 다." 그러자 상석에 앉은 방장사형이라 불린 그 승려는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흐음... 나도 덕호사제(德浩師弟)가 말한 그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 만... 사실 나 혼자서 결정할수 있는 사안이 아니네. 설혹 장생전(長生殿)에 서 그것이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그 위력만큼이나 익히기가 힘들지. 그것을 익히는데 도대체 몇 년이 더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네..." "그렇다면... 정 안된다고 하더라도 항정멸법신공(抗正滅法神功)만은 금제가 해제되어야 합니다." 항정멸법신공이란 말에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경악한 표정의 방장스님이 말했 다. "자네는... 자네는 그 사악한 마공(魔功)이 뭔지 알고나 입에 담는 것인가?" 상대가 경악해서 물어봄에도 덕호는 태연히 말했다. "예. 자미사조(慈嵋師祖)께서 남기신 뛰어난 무공이죠. 그 자체가 가지는 위 력도 놀라운 것이지만 그 최고의 장점은 소림무예에 극성(極性)이라는 것에 있지요. 72종 절기를 토대로 그 헛점을 교묘히 공격하여 파해하도록 만들어놓 은 것이니 그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그 자체가 지니는 뛰어난 점은 망각하고 극성이라는 이유 단 하나 때문에 본사(本寺)에서도 극비로 치부되지 않습니 까?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것만은 꼭..." 그러자 그의 왼편에 앉아있던 40대 초반정도로 보이는 평범한 얼굴의 덕진이 찬성하고 나섰다. "덕호사제의 말이 맞네. 방장사형, 소제는 거기에 최소한 파마멸혼검법(破魔 滅魂劍法)까지 금제를 풀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자 장문인은 기가막힌다는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덕진(德津) 자네까지... 그 악마의 무공까지 거론하다니 자네들에게 마가 끼 인 모양이군... 아미타불..." 장문인의 말에 장문인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덕진이 반박했다. "아미타불... 상대는 악마입니다. 그런자를 상대로 정통무공을 사용해서는도 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원래가 파마멸혼검법은 혜인사조(蕙忍師祖)께서 사마 외도(邪魔外道)를 멸하기 위해 오랜세월을 들여 완성한 본사에있는 하나뿐인 검법... 그런 무공이 사장(私藏)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자 여태까지 말이없이 왼쪽 뒤쪽에 앉아있던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날 카로운 인상의 덕수(德修)가 말했다. "덕진사형의 말씀이 틀렸습니다. 본사에는 또 달마삼검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의 반박을 덕진이 아닌 덕혜가 대답했다. "그건 자네가 틀렸네. 달마삼검법은 말이 달마삼검법이지실은 불가(佛家)와 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도가(道家)의 검법이야. 원래 본사에는 검법이 없었는 데 백옥봉이란 도사가 각원사조님의 인품을 높이 사 그가지닌 검법을 전했는 데 이것이 달마삼검법이지. 헌데 도가의 무예를 배운다는 것이 본사의 명예에 누를 끼치게 되는 것이기에 달마조사께서 창안하신 것이라고 거짓소문을 퍼트 린 것이지. 사실 달마삼검도 완전한 것이 아닐세. 1검에 3로, 2검에 3로, 3검 에 2로... 왜 3검에만 2로겠는가? 원래는 1로가 더 있었지만 너무 도가적인 것이기에 제외되었는데 전체를 물려받았던 각원사조님의 검법과 그 1로가 빠 진 후대의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생겨버렸지. 사실 달마삼검법은 자네도 익혔 겠지만 뭔가 허전한 감이 있고 또 어떤부분은 제대로 펼치기가 어려운 곳이 있지. 그것은 달마삼검법 자체가 오로지 내공만으로 펼치는 검법이 아니기때 문이야. 그렇기에 본문에 하나뿐인 검법이 파마멸혼검법이라는 말이 맞는 것 이지. 이것은 본사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서 장경각에서 본사의 일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않는 자네는 잘 몰랐을거야." "예.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일단의 말다툼이 정리가 되자 덕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에 들어 본사의 위상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재가 모자 라서도 아니고 뛰어난 무공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뛰어난 것이 있음에도 금제 를 가해 익히지 못하게 하니 당연한 결과가 아닙니까? 이번 사건도 그렇습니 다. 그가 무림을 설치고 다닌 것이 하루이틀도 아닌데 아직도 요절을 내지 못 하고 있는 것은 본사에 고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를 없애기에 적합한 무예를 익힌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까? 사실상 그와 일대일로 싸워 이길 수 있는고 수는 본사에 없습니다. 지금 은거중이신 대사숙조께서 나서신다 해도 승산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청부를 해서 암살을 할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소 편 법을 쓰더라도..." "흐음... 자네들의 의견은 잘 알겠네... 장생전을 설득하도록 노력해보지... 하지만 자네들이 말하는 무공들이 원체 문제가 있는 것들이라 허락이 떨어지 려면 시일이 약간 걸릴거야." "지금까지도 참아왔습니다. 조금 더 기다린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지요. 그리고 금제가 풀리더라도 그들이 무공을 익히려면 최소한 5년은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장생전의 사숙들이 반대하신다 하더라도 그 무공들을 익혀 야 될 필요성과 익히는 수를 방금말한 소수에 국한시킨다면 아마도 허락이 떨 어질수도 있을것입니다." "알겠네... 아미타불.... 부처님의 뜻대로 되겠지." * * * 이곳은 안휘성의 북쪽 천림산(泉淋山). 천림산은 예로부터 산수가 수려하고 곳곳에 온천이 발달한 아름다운 관광지다. 천림산 중턱에 위치한 남악산장(南 岳山莊)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여관에 공주일행이 머물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27시진 전이다. 남악산장도 이곳에 있는 거의 모든 여관이 그러하듯이 여러개 의 온천탕(溫泉湯)을 여러군데 가지고 있어 여행자들의 피로를 풀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진영공주는 며칠동안 마차를 타고오며 시달린 몸을 푸근하게 온천욕을 즐기며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푼 다음 산뜻한 남빛 옷으로 갈아입은 후 후원(後園) 에 나왔다. 공주가 묵고있는 별채는 특별한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곳으로 고 풍스런 멋을 풍기는 자그마한 건물에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후원을 가진 비 싼 숙박료를 요구하는 장소였다. 공주는 후원에 나올때까지는 아주 기분이 상쾌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재미 있는 여행이었고 그녀가 지나온 곳은 모두 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들이었다. 그녀는 절경으로 유명한 소주에 잠시 머문 다음 아직 둘러보지 못한 안휘성의 남쪽을 거쳐 명소들을 훑으며 돌아갈 예정이었다. 다음에 도착할 곳은 또 얼 마나 근사한 곳일까 하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멋진 여행이었 다. 거기에 여태껏 거쳐온 지방 관청들의 수령들의 대접은 또 얼마나 근사했 었나... 또 앞으로 도착할 관청들의 수령들은 나한테 어떤 선물들을 줄까... 이런저런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공주가 후원에 나오자 후원의 담장 가까운 곳에는 황군 몇 명이 부동자세(不 動姿勢)로 꼿꼿이 창날을 곳추세운 채 경계에 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데... 후원의 한 구석에 검정색 옷을 입은 남녀가 먼저와서는 뭐가 좋은지 쑥 덕거리고 있는 장면을 보고는 그녀의 좋았던 기분은 한순간에 엉망이 되고 말 았다. 이곳은 자신을 위한 자신만의 장소였다. 저런 천박한 것들이 더럽힐 장 소가 아닌 것이다. 그녀는 곧바로 뒤에서 따라오고있던 무장(武將)에게 냉랭 하게 외쳤다. "저들은 누구냐?" 그러자 상대는 공손하게 읍(揖)하며 답했다. "마마, 옷차림을 보아하니 위사(衛士)들이옵니다." "위사?" "예. 그러하옵니다." "황군들만 해도 충분한데 위사는 또 뭐냐?" "저들은 무림의 고수들이옵니다. 이번 마마의 여행을 호위하기 위하여 고용한 자들로서 상당한 실력을 갖춘 무리들이옵니다." "흐흥... 그럼 저자들은 호위를 하기위해 저곳에 있다는 말이냐? 무슨 호위를 하는 것들이 저렇게 웃고떠들면서 호위를 한다는 것이냐? 저것들의 태만(怠 慢)을 물어 엄히 벌주고 당장 이곳에서 내쫓아라." "예. 속마 마마의 명령을 받들겠사옵니다." 그런다음 그 무장은 뒤에 서있던 호위병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이 서있는 위치가 가까웠기에 대화를 엿들었을테니 지시할 필요도 없었다. 그와동시에 4 명의 황병(皇兵)들이 그 무뢰한 연놈들을 향해 몸을 날렸고 그것들을 후원에 서 끌고나갔다. 당연히 공주의 상쾌하지 못한 기억은 여기서 끝났고 또다시 자신만의 즐거움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번 일에 이빨을 갈게되는 아주 무서운 적을 하나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모른채... 묵향은 멀어져가는 황병들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기랄... 후원을 구경하는 게 무슨 큰 죄라고 본좌를 이렇게 업신여겨? 공 주 따위가 감히..." "참으세요, 부교주님. 상대는 공주마마라구요." "흠... 이 수모를 어떻게 갚으면... 마화! 석진(奭眞)을 불러와라." "예? 예." 무슨일을 벌일지 불안해진 마화였지만 묵향의 명을 어길수는 없었다. 그녀가 석진을 불러오자 묵향은 다짜고짜 예를 행하는 석진에게 말했다. "수하 30명을 돌려보내라." "예? 무슨 말씀이신지?" "그들을 모두 본타로 돌려보내라. 그런다음 김 사령에게는 20명은 20리(6Km) 앞에 전진배치했고 10명은 20리 뒤에 퇴로확보를 위해 배치했다고 일러라. 그 러면 그 멍청한 녀석은 갑자기 30명이 없어진 것을 문제삼지는 않겠지. 흐흐 흐... 고수 30명이 돌아간 것을 확인하면 곧바로 그놈들이 사고를 치겠지... 흐흐.." "예? 무슨말씀인지 이해는 못하겠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다시 재고(再考) 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네녀석은 본좌의 안전을 생각한다는 거 냐? 설마 네놈이 본좌의 무공실력을 얕보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자 석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그럴리가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시기를..." "잔말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그런다음 남은 수하들에는 평소와 같이 호위임 무를 행하도록 해라." "존명!" 석진이 멀어져가는 것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있는 묵향을 보며 마화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에요?" "나 없이도 소주 구경하는데는 무리가 없겠지?" "그럼 타주께서는..." "조금 지나면 본교의 무사들이 줄어든 것을 알아내고 놈들이 습격을 가해올거 다. 한 20명 정도 남겨둔다면 어느정도 승산이 있다고 멍청하게 생각하고는 아마 습격을 해오겠지. 그때 너는 내 지시에 따라 석진과 함께 바로 소주로 가서 관광이나 하다가 본타로 돌아가라. 나는 남아서 할 일이 있으니까 함께 가지는 못하겠구나..." 묵향의 기다림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상대의 움직임은 정확히 7일 후 공주 일행이 안휘성에서 강소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태을령(太乙嶺)을 지나갈 때 벌어졌다. 태을령은 오백산과 마진산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골짜기로 그 높 이가 330길( =700m)정도에 형성되어있는 군사,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로였 다. 그리고 그 도로 양옆으로는 100길(212m) 이상 높이의 절벽이 솟아있어 오 백산과 마진산에 구축되어있는 어림군 요새에 소수의 병력만 배치하면 능히 10만의 대군(大軍)을 간단히 막을 수 있는 군사적인 요충지이기도 했다. 갑자기 퓽퓽하는 파공성(破空聲)이 들리더니 선두와 후미에 다가오던 황병들 이 쓰러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적이다 하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곧이어 김 사령의 우렁찬 외침에 묻혀버렸다. "밀집대형(密集隊型)! 공주마마를 보호하라!" 그러자 수십기의 황병들이 공주의 마차 주변에 뛰어들며 안장에 매여있던 두 텁고 큰 방패를 들어 마차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말에서 내려 윗쪽의 화살을 막고있는 동료들의 아랫쪽을 방패로 막았고 또 다른이들은 그들의 아 랫쪽을 막아주었다. 순식간에 방어진형을 갖춘 것으로 보아 평소에 얼마나 피 땀어린 훈련을 받아왔는지 알 수 있는 기쾌한 몸놀림이었다. 모두들 목숨을 걸고있는 이 상황에서 마차안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김 사령은 주위에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마차안으로 공손 하게 답했다. "공주마마, 적들이 나타났사옵니다. 조금 위급한 상황이지만 너무 염려는 하 지 마시옵소서." "알아서 처리하라." "예." 상대의 공격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은 마교도 들에게였고 또 웃기게도 호 위대 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적은곳도 마교도 들이었다. 그리고 이 난투극을 벌이는 무리들 중에서 가장 무장도가 빈약한 곳이 마교도였다면 그 반대가 황 군이었다. 하지만 적들은 무장도나 숫자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처음부터 무공 은 강하지만 달랑 흑의 한벌과 무기만을 들고있는 마교의 무리들에게 공격을 집중했다. 하지만 이들은 하수(下手)들이 아닌 마교 안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 예인 천랑대 소속의 무사들인 것이다. 모두들 간단하게 화살을 막아내면서 묵 향의 명령을 끈기있게 기다리고 있었고 그 명령은 곧이어 하달되었다.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묵향은 석진에게 명령을 내렸다. "10명은 왼쪽 10명은 오른쪽을 맏아라. 석진, 너는 절벽위의 적들을 적당히 없애버린 다음 전장을 이탈하여 마화를 이끌고 소주로 직행하라." 진의를 알기힘든 수상한 상관의 명령에 석진의 표정은 이상하게 변했다. "예? 하지만..." "잔말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소주로 가서 마화한테 관광을 충분히 시켜준 다 음 본타로 돌아가라. 시행하라. 그리고 마화 너는 석진을 따라가라. 본좌가 안내해주고 싶지만 여기가 더 재미있을 거 같아서..." 의문과 불만이 가득한 기괴한 표정이었지만 석진은 묵향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존명!" 그와동시에 천랑대는 좌우측의 절벽을 위에서 쏘아대는 화살들을 쳐내며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경공술이었다. 절벽위에서 천랑대와 적들과의 교전이 시작되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금 새 눈치챈 김 사령이 다시금 명령을 내렸다. "전진! 빨리 이곳을 탈출하라." 거의 50기에 가까운 시체들을 남겨두고 질서정연한 탈출이 시작되었고 간간히 적들의 화살이 날아오기는 했지만 윗쪽에도 벌써 치열한 접전이 시작되었기에 처음과 같은 집중사격은 아니었다. "황군을 공격하다니...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그러자 김 사령의 옆에 서있던 묵향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마도 공주마마를 헤치고자 하는 무리들인 것 같습니다. 무림인들로 보이는 데 요새(要塞)에 주둔중인 어림군들은 이미 모두 죽음을 당했겠지요. 아마도 놈들의 일부가 태을령의 끝부분에서 기다릴 것입니다." "설마...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는 것이 좋겠군." "적들은 아마도 충분히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뒤쪽 출구에도 적이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방금전에 화살을 퍼부었던 적들도 아직 남아있을 것 입니다." "그렇다면 30리 앞에 나가던 위사들은?" "아마 모두들 습격을 당해 죽었다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흐음.... 진퇴양난(進退兩難)이로고..." "저에게 좋은 계책이 있습니다. 적은 다수고 이쪽은 소수이니 적을 속이기 위 해 두패로 나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좋은 의견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세력이 줄어들텐데..." "공주마마를 평복으로 갈아입힌 후에 태진령에서 기다리는 적을 돌파한 후 왼 쪽으로 탈출시킵시다. 그리고 마차에는 공주마마의 친구분을 놔두고 미끼로 쓰는겁니다. 그리고 공주마마의 친구분들도 모두 그쪽으로 가는 것이 좋겠지 요. 그들도 공주마마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을 기꺼워할 것입니다. 세력이 야 반으로 줄겠지만 우리는 적들과 정면전을 벌일 필요없이 강수(崗守)에 있 는 어림군과 합류하기만 하면 되니 그때까지 시간을 벌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 까?" "좋은 의견이요." 김 사령은 현명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 이 흑의인에게 감사를 하며 즉시 계획 을 실행했다. 그가 만약 상대의 음흉한 속마음까지 알았다면 결코 이런 방법 을 쓰지는 않았으리라... 김 사령은 원체 일이 갑자기 터져나오며 돌아가는 판이라 깊이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이런 수법은 강호에서 매우 널리 사용되는 낡아빠진 수 법이었고 처음부터 마차를 버리고 옷만 바꿔입고 탈출했다면 몰라도 한쪽은 마차를 가지고 있고 한쪽은 안가진 상태에서 두패로 갈렸으니 어느쪽이 미끼 인지는 멍청한 강호인이라도 단박에 알 수 있는 사실... 하지만 급박하게 돌 아가는 사태와 공주의 안전에 대한 병적일 정도의 조바심, 그리고 이 계획을 사용한다면 공주의 친구들(아주 지체가 높은 양반들의 자제이거나 황족)의 목 숨을 희생해야 한다는 일말의 죄책감, 특히 그놈의 죄책감이 어떤 희생을 해 서라도 이 사태를 돌파해야만 한다는 그의 강박관념에 아주 그럴듯하게 양념 으로 다가서면서 김 사령은 흑의위사가 제안한 계책(計策)을 이용하기로 마음 을 굳혔다. 김 사령은 일단 적들이 매복하고있던 장소를 벗어나 안전한 곳에 이르자 전진 을 멈추게 한 후 공주와 그녀의 친구들이 타고있는 커다란 마차에 접근해간 다음 공주에게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공주마마, 지금 아주 상황이 안좋게 돌아가고 있사옵니다." "무슨 말이냐? 대 송제국의 황군이 그깟 산적패에게 밀린다는 말이냐?" "산적패가 아니옵니다. 저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무리들이옵니다. 거기에 이곳을 마마께오서 지나실 줄 미리 알고 치밀하게 준비를 한 듯 보이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공주마마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계책을 써야하겠사옵 니다." "어떤 계책이냐?" "공주마마께오서는 승마(乘馬)를 배우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우선 평복으로 갈 아입으시고 소장(小將)이 마차를 호위하고 적의 이목(耳目)을 속이는 동안 반 대편으로 몸을 피하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그래야 할 정도로 일이 심각하다는 말이냐?" "예, 가장 가까운관청으로 간다 하더라도 100리(30Km)는 족히 되는 거리이옵 니다. 그런데 방금 경험했던 적의 규모로 보아 관청에 소속된 소수의 향방군 (鄕防軍;지방군-지금의 경찰이라고 볼 수 있음)만으로는 보탬이 아니되옵니 다. 강수(崗守)에 있는 어림군과 합류해아만 안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우 선 가장 염려되는 것은 태을령이 끝나는 지점에 적이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옵니다. 만약 적이 매복하고 있다면 소장의 계책을 써야만 하오니 준비를 하시옵소서." "알겠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공주가 마차에서 수수한 복장의 옷을 입고 마차에서 내렸 고 김 사령은 수하에게 명령하여 이미 전사(戰死)한 황병의 말을 공주에게 대 령했다. 공주가 말에 오르자 다시 전진이 시작되었다. 태을령의 끝에 다다르자 역시 예상대로 적이 기다리고있었다. 그것도 한두명 이 아닌 자그마치 300여명이나 되는 숫자였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정도의 병 력이 이곳까지 침투해 들어왔는지 알수없지만, 사실 지금 겨우 200여명의 황 군만을 거느린 상황이라서 그렇지 적들이 여태껏 투입해온 500여명 남짓한 정 예는 능히 상인들이나 여행자로 가장해서 흩어져 돌아다녀도 별로 표시가 나 지않을 정도로 적은 숫자였다. 거기에 관부와는 별 상관없이 무기를 제멋대로 들고 다니는 무림인들이 존재했기에 그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던 것이다. 적들은 그 숫자를 믿고있음인지 아예 매복도 안하고 모두들 말을 탄 상태에서 먹이가 항아리 안에서 튀어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사령은 적들이 모두 들 말을타고있는 것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그 이유는 아예 적이 매복한 상태 로 기다리고 있었다면 상대가 제아무리 경공을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이쪽은 말을 타고있으니 어느정도 따돌릴 수가 있지만 적도 말을타고 기다린다면 두 패로 나뉘어 도망친다 하더라도 적의 추격이 거셀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뾰족한 다른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으므로 처음의 계획 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돌격준비!" "어쩌시려고 이러는 거에요." "흐흐흐... 이제부터 복수의 시작이지..."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공주라구요..." "나도 알아. 그러니까내가 손을 쓰겠다는 게 아니잖아. 이제부터는 기다리기 만 하면 되는거야. 그 다음 본좌의 복수는 그놈들이 다 해주게 되어있다구. 흐흐흐..." 김 사령의 명령이 떨어지자 황군은 모두들 안장에 매달려있던 두터운 방패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 든 창을 앞으로 세워 돌격진형을 갖췄다. "돌격!" 김 사령이 앞장선 뒤로 황병들이 모두들 적을 향해 돌진해 돌진해 들어갔다. 처음의 충돌은 폭넓게 전개한 상태에서 방패와 긴 창을 가지고 충돌해 들어간 황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상대방은 거의 대부분이 검이나 도 등의 근접병 기나 활 따위를 가지고있었기에 두터운 방패와 창을 가진 황군이 훨씬 무기상 에서 유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처음의 충돌로 일부 적을 없애기는 했지만 곧이어 양쪽은 서로 섞여버렸고 곧이어 치열한 난투극(亂鬪劇)이 벌어졌다. 일단 전투가 난전(亂戰)으로 돌아서자 마상전투에서 길이가 긴 무기인 창을 가진 황군이 어느정도 유리하기는 했지만 상대는 무림인... 검이나 도를 사용 함에 있어 월등한 기량을 자랑하며 황군을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선 황병들이 치열한 기마전을 벌이며 확보한 통로를 통해 소수의 황병들이 마차를 호위하며 그 한가닥 활로(活路)를 뚫고 나갔다. 일단 공주를 태운 마 차가 전장을 이탈하자 곧이어 황군은 두패로 나뉘며 양방향으로 전장을 이탈 해 전속력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황군의 삼분의 일은 공주를 호위하고 왼쪽 으로 탈출했고 나머지는 그 반대방향으로 마차를 호위한 채 탈출했는데 그 모 양을 보고 적도 병력을 나눴다. 하지만 그 병력을 나눈 양(量)은 완전히 반대 였으니 삼분의 일은 마차를 쫓아가고 삼분의 이는 마차 없이 도망친 자들을 쫓는 것이었다. 적을 유인하기 위해 호위대의 지휘관인 김 사령도 마차를 호위하고 달려갔는 데, 상대의 다수(多數)가 반대편을 향해 미친 듯이 말을몰며 달려가는 것을 보고 아차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김 사령이 끌고온 황군은 전투가 아 닌 호위임무이기에 중무장이 아닌 경무장이었고 이런 상태로는 노련한 강호의 고수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약간은 무리였다. 의장용(儀裝 用)의 경갑주가 아닌 전투용 중갑주(重鉀 )라면 강호의 뜨네기들 쯤이야 겁 날게 없었지만 모두들 경갑주를 입고 있다 보니 믿고 의지할 것은 두터운 방 패하나 뿐이었다. 중갑주라면 문제가 없었지만 방패만 믿고 앞의 놈들과 싸우 고있을 때 다른 놈이 뒤에서 단검이나 화살에 내공을 실어 쏘아보내면 경갑주 쯤이야 없는거나 마찬가지... 이런상황이니 삼분의 일인 적이지만 빠른 시간 안에 적을 돌파할 수는 없었고 늘어만 가는 사상자들을 지켜보며 김사령으로 서는 눈앞이 캄캄할 수밖에 없었다. 공주 일행은 적을 돌파하자마자 최대한 빠른속도로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 다. 공주를 호위하는 무리들은 48명, 나머지는 미끼인 마차에 타고있는 '가짜 공주'를 호위하고는 반대편으로 이탈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잔꾀가 오히려 더 큰 화(禍)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알았다. 거의 150여명이 넘는 적들이 이쪽으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뒤 로 돌아가 김 사령이 이끄는 '미끼'와 합류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먼저 150 명이 넘는 적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공주를 호위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안게 된 종오품(宗五品) 장철(張哲) 교령 (僑令)은 어떻게 해서든 적의 추격을 뿌리쳐야 한다는 생각에 부대를 둘로 나 눌 수밖에 없었다. 공주를 조금이라도 멀리 도피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 다. 그리고 전투라고는 경험해보지 못한 무방비상태(無防備狀態)의 공주를 이 끌고 적과 격투를 벌여 돌파해 나간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했다. 그래서 생각 한 것이 20여기를 차출하여 그들이 사력을 다해 적의 진격을 막는동안 조금이 라도 멀리... 그러니까 15리(4.5Km)전방에 보이는 안진산(安進山)까지만 간 다면 그곳 산길에서 매복공격을 가하면서 점차적으로 후퇴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장 교령의 명령을 받은 오순(吳順) 교위(橋衛)가 20기의 황병들을 이끌고 적 들을 향해 말머리를 돌리며 돌격해 나갔다. 장 교령은 오 교위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끌어주기를 바라며 안진산을 향해 말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장교령은 그렇게 군생활을 오래한 편도 아니었지만 10여년이 넘는 군 생활을 통해 이번의 임무가 자신이 맏은 것 중 최악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 떻게 하면 공주를 무사히 강수에 있는 어림군 사령부에 넘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사실 그에게는 자신이 별로 없었다. '그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보자. 그러고도 안된다면 운명이겠지...' 공주의 기마술이 별로인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오 교위가 이끄는 20기가 상상외로 2각에 가까운 시간동안 분투를 해주는 덕분에 가까스로 안진산에 도 착할 수 있었다. 장 교령은 이제 겨우 27로 줄어든 수하들을 독려하여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저격하기 좋은 위치에 수하들을 한명씩 배치하면 서 달리다보니 10리(3Km)정도 달려나가자 이제 남은 수하는 17기. 위사랍시고 고용한 무림인은 활이 없었고 또 그의 옷차림으로 보아 암기주머니도 안가지 고 있기에 그에게는 처음부터 이런 산악전에 도움이 되지않는 흑의위사(黑衣 衛士)는 제외되고 있었다. 점점 더 수풀이 울창하게 우거지기 시작하여 말이 별 도움이 되지않는 순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때 장 교령에게는 근사한 꾀가 한가지 떠올랐다. 그는 달려가는 마상에서 무림인에게 물었다. "이봐. 자네 경공술은 어떤가?" "괜찮은 편이죠." "그러면 자네가 공주마마를 맏게나. 이봐 정 위사(衛司)!" 그러자 옆쪽에 달려가던 한 황병이 답했다. "예" "자네가 6기를 이끌고 남은 말들을 끌고 저쪽으로 탈출하라. 나는 공주마마를 모시고 산길을 택해 나가겠다. 최대한 빨리 도망쳐서 적들에게서 멀어지는 것 이 자네의 임무다. 해낼 수 있겠나?" "옛!" 일단 어느정도 지시를 하달한 다음 장 교령은 땀을 뻘뻘흘리며 말을 달리고있 는 공주에게 접근해 갔다. "공주마마!" "무슨 일이냐?" "황공한 질문이오나, 공주마마께옵서는 무술을 익히셨사옵니까?" "익히지 아니하였노라." 공주가 쌀쌀맞게 대답하자 장 교령은 공주가 눈치채기 힘들정도로 한숨을 푹 내쉰다음 말했다. "저기있는 흑의위사가 공주마마를 호위해 드릴 것이옵니다. 그를 따르소서. 조금 마마의 위엄에 손상되는 일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용서를 바라옵니다." 그런다음 장 교령은 수하들에게 외쳤다. "이봐, 자네들은 나를 따른다. 산악전이니 창은 필요없다. 모두들 나뭇가지를 밟고 경공술을 전개해 땅위에 흔적이 남지 않도록 주의하라.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에게 말의 고삐를 건네줘라. 자 이탈하라!" 그와동시에 모두들 말고삐를 옆사람에게 건네준 다음 장 교령을 따라 달리는 말위에서 경공을 펼쳐 산속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법 무술을 닦은 황병답게 육중한 갑옷을 입은 상태에도 불구하고 빠른 몸놀림으로 말등에서 뛰어오른 다음 가지들을 건너뛰며 장 교령의 뒤를 따랐다. 장 교령과 10명의 황병들이 말등을 박차고 경공술을 전개하자 흑의위사가 공 주에게 바짝 다가붙은 다음 "실례하옵니다."하는 단 한마디만 하더니 곧이어 공주를 안고는 말등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자신의 옥체(玉體)를 얼떨결에 외 간남자의 손에 내맏긴 꼴이 된 공주는 얼굴이 벌걷게 되었고 곧이어 자신의 몸이 하늘위로 날아오르자 앙칼진 노성(怒聲)을 터트렸다. "나를 내려놓아라!" 공주가 큰 소리로 외쳐대자 묵향은 곧바로 공주의 아혈을 제압해서 더 이상 떠들지 못하게 만든다음 묵묵히 대열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무공도 모르는 상 황에서 외간남자에게 안겼지만 챙피한 것은 둘째치고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휙휙 소리가 날 정도로 사물들이 뒤로 빠른속도로 움직이는데다 나뭇가지사이 를 날아다니자니 몸이 빠른속도로 아래위로 솟구쳤다 가라앉아대니 공주의 얼 굴이 차츰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공주는 원체 흑의위사가 자신이 느낄수도 없 을정도로 빨리 눈에 보이지도 않을정도로 빨리 격공점혈의 고난도의 수법으로 아혈을 막았기에 지금 자신의 목구멍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것조차도 인식 을 못하고있었다. 설혹 인식을 했다 하더라도 놀라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줄 알았을 것이다. 장교령은 흑의위사가 공주를 안고있는 상태에서도 상당히 안정적인 몸놀림을 구사하는 것을 보고 처음의 계획을 수정하여 더욱먼 거리까지 가지를 밟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뭇가지를 의지해 거의 2리에 가까운 거리를 가 지들을 밟고 도약하며 이동한 다음 땅위에 내려섰다. 묵향은 거의 땅위에 내려서기 직전쯤에 공주의 아혈을 같은 수법으로 표시안 나게 풀어주었다. 묵향이 땅위에 부드럽게 내려선 다음 공주를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짜악하는 경쾌한 음향이 울려퍼졌다. "감히..." 하지만 흑의위사는 뺨을 맞았는지 안맞았는지 얼굴색도 붉히지 않고 무표정하 게 그대로 서있었다. 사실 묵향으로서는 무공도 모르는 여자에게 한 대 맞았 다고 해서 뺨이 아플리도 없는데다가, 자신의 뺨을 친 공주가 오히려 손바닥 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는 꼴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터져나오려는 미소를 숨 기기에도 급급해 있었다. 무표정한 상대를 보고 더욱 약이올랐는지 공주는 노 화를 터트리며 으르렁거렸다. 사실 그 위에서 날아다니자니 엄청나게 무서웠 던 것이다. "감히 본 공주의 몸에 손을대다니...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해도 할말이 없 을 것이다." 그 꼴을 보고있는 묵향으로서는 배알이 뒤틀렸지만 그래도 할 수 없는 것이 이 계집을 잘못건드려놓으면 후환이 두려운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히 귀찮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알고있었다. '더럽게 비싸게 구는군... 하지만 조금 더 지나면 더욱 재미있어 질꺼야...' 묵향은 낮은 목소리로 점잖게 말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존경심따위는 애초에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소신이 원체 일이 다급하여 옥체에 손을 댄 것을 황송하게 생각하옵니다. 다 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공주는 지금 안그래도 급박한 판에 이 멍청한 녀석의 목을 벤다고 시간을 허 비할 수도 없는노릇이라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장 교령은 일이 일단락 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시금 출발신호를 올렸다. 하지만 공주가 무공도 모르는 상태에서 걸어가다보니 전진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 다. 그렇다고 누가 안거나 업고갈수도 없는 노릇이니 장 교령의 입안이 바짝 바짝 마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노릇이니 큰일이 었다. 장 교령은 이런식으로 가다가는 곧이어 적들에게 포착당할 것이라고 생 각하고 공주에게 다가가 공손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말을 꺼내면 펄펄 뛸게 분명하니 조금 돌려서...' "공주마마... 발이 안 아프시옵니까?" "왜 그러느냐? 나는 관찮느니라." "지금 가마도 없고 말도 없사옵니다. 그리고 먼 길을 가야하오니 저 위사의 등에 업히시는게 어떠하올는지요?" 그러자 공주의 얼굴이 벌겉게 달아오르며 눈이 희번득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장 교령은 찔끔해서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저렇게 성질을 부리다니... 저년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눈치도 못챈다는 말인가?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도 모르다니... 하는 수 없군... 운명이야...' 장 교령은 걸음을 멈추고 뒤로 약간 쳐져 흑의위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흑의위사가 다가오자 장 교령은 그에게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까 자네 무공이 꽤 높은 것 같더군." 그러자 무뚝뚝한 상대의 대답. "그렇게 높지도 않습니다." "자네의 장기는 뭔가? 혹시 암기같은 것도 다룰 수 있나?" "아뇨. 무기는 잘 다룰줄 모르고 경공술이 장기죠. 물론 아주 약하다는 것은 아니고 동료들 중에서는 제가제일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전의 전투 에서도 저를 남겨두고 모두들 돌격한것이지요. 평상시에는 경공술 덕택에 연 락원 노릇이나 하고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도망치면 쫓아올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흠... 하지만 제대로 수련을 받았다면 아무래도 무림인인 자네가 우리들 보 다는 검술이 나을걸세. 이제 남은 황병은 10명정도... 이 상태에서 적과 교전 에 들어가면 공주마마의 안전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그러니 다음에 적과 만나면 자네의 경공술은 믿을만 한 것 같으니 공주마마의 신병을 책임지 고 강수에 주둔하고 있는 어림군 사령부까지 모셔드릴 수 있겠나?" "최선을 다하죠. 하지만 저하고 같이 가려고 하실지..." "억지로라도 모시고 가게나. 그리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 만으로는 안돼. 무조 건 해내야 해." "알겠습니다. 해드리죠." "좋아. 다음에 적과 부딪치면 내가 수하들을 이끌고 최대한 시간을 끌어볼테 니 자네는 마마를 모시고 최대한 멀리 도망치게나." "휴... 알겠습니다." 정말 힘든 일을 맡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한숨을 쉬면서 묵향은 수락 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정말 날아갈듯한 즐거운 기분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 도록 하기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묵향이 이 우직한 무인의 부탁을 간단히 들어준 것은 공주를 악당(惡黨)들의 마수(魔手)로부터 보호하기위함은 절대로 아니었다. 사실 이런 버릇없는 계집 이 죽던 살던 자신이 알바 아니었고, 처음부터 이렇게 사건이 악화되도록 유 도하기 위해서 30명이나 되는 수하(手下)들을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적 이 공격해온 다음 묵향이 죽자고 공주가 포로가 되지않도록 막아야 하는 이유 는 따로 있었다. 공주는 대단히 중요한 인질이었기에 사로잡힌다면 포로로서 자유는 조금 구속되겠지만 극진한 대우를 받을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 계집을 끌고다닌다면 무사히 어림군에 인계되기 전까지 자유고 극진한 대 우고 모든 것이 없는 무지막지한 고생만이 기다리게 될 것이다. 계집 또한 한 번도 상대에게 잡혀본 적이 없으므로 잡히는 것을 겁낼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을 묵향에게 의지할 것은 분명한 사실... 이제부터는 이곳저곳을 끌고다니 면서 온갖 고생을 시키면서 - 대신 이것들이 다 공주를 위한 행동이라는 것은 생색을 내면서 - 자신은 옆에서 그 꼴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묵향 은 일부러 무공이 약한척 해둔것이다. 소림 건물들의 정문에서부터의 순서 지객당(知客當) 주지 -> 덕호(德浩) 지객당은 방문객을 접대하는 곳으로, 소림에서는 타 문파에서 비무를 신청했 을 때 받아주기에 상당한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타 문파들의 무공을 연구 분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집단으로 지객당의 당주는 뛰어난 고수를 선임하는 것이 관례다. 소림은 여성의 출입을 금하지만 일차목적은 불법의 전 파에 있으므로 지객당과 지객당에 소속된 방문객들의 불공드리는 장소인 정심 전까지는 출입이 가능하다. 정심전(精心殿) 대웅전(大雄殿) 엄청난 규모로서 일정수준 이상의 수련승들이 불공을 드리는 장소. 거의 4000명의 수용이 가능한 거대한 규모. 소림삼십육방(小林三十六房) : 소림고수들의 크고작은 36개의 무공연습실. 나한전(羅漢殿) 주지 -> 덕혜(德慧) 소림 절정고수들인 백팔나한의 거처. 그들중 가장 뛰어난 18명을 따로이 십팔 나한이라 부른다. 나한전의 가장 핵심적인 임무가 장경각의 보호다. 108나한 대진은 18나한으로 이루어진 소나한진 6개가 동시에 돌아가며 구축하는 진법 이다. 장경각(藏經閣) 주지 -> 덕수(德修) 각종 서적들을 모아놓은 도서관. 정사마의 방대한 무공서적들이 보관되어있지 만 무공서적이 차지하는 비율은 3할정도로 실상 장경각의 중요성은 저 멀리 천축에서까지도 구해왔다는 수많은 불경들에 있다. 팔대호원(八大護院) 감원(長) -> 덕진(德津) 방장실의 앞뒤로 에워싸고 있는 8개의 작은 건물을 말하며 이곳에 기거하는 고수들이 방장을 호위하게 된다. 각 건물에는 40명씩이 기거하며 이 팔대호원 에 소속된 320여명의 고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고수 32명을 두고 삽십이수 좌승(三十二首座僧)이라고 부른다. 팔대호원에 소속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소림에서는 엄청난 영광이며 그의 무공이 절정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증거가 된다. 방장실(方長室) 방장 -> 덕인대사(德仁大師) 방장의 숙박실. 전대방장 담영대사(潭影大師) -> 사망. 전전방장 공지대사(空知大師) -> 현재생존. 동배전(東配殿) -> 노승들이 모여서 불공을 드리는 장소. 참회동(懺悔洞) 주지 -> 대지(大支) 계율을 어긴 자들을 가두는 곳.한쪽 구석에 있음. 엄연히 구분짓자면 참회동 을 책임지는 곳은 장생전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어서 참 회동에 어떤 승려를 가두려고 든다면 참회동에 보내는 것은 방장의 권한이겠 지만 일단 계율원이나 참회동에 보내지면 더 이상 방장이 참견할 수 없다. 죄 인에 대한 처벌은 장생원에서 판결하며 일단 그 판결이 내려지면 방장도 그를 어떻게 도와줄 수 없는 것이다. 양심당(良心堂) 주지 -> 담량(潭良) 노승들이 보다 높은 불법을 수도하 곳. 양심당의 당주는 학식이나 깨닳음에 의해 뽑히게 되며 무공과는 무관하지만 소림 무예의 특성상 불법이 높은자가 무공이 높기에 거의 다섯손까락 안에 드는 고수가 선임되게 된다. 불법을 익 히는 곳이기에 무력세력을 가진 것이 아니고 그냥 수도하는 장소로서 동자승 몇 명을 거느리고 불법강연과 함께 양심당의 청결상태를 감독하는 정도의 가 벼운 일을 한다. 계율원(戒律院) 주지 -> 대정(大正) 소림 제자들의 규율을 감독하는 곳. 십이금강(十二金剛)이 계율원에 있는 가 장 핵심적인 무력단체며 계율을 범한 변절자의 처리를 맏는다. 십이금강의 힘 은 무시무시하며 그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변절자의 처리가 아닌 조사동 의 외곽 보호다. 계율원은 장문인 직속이 아닌 장생전 직속이다. 장생전(長生殿) 방장의 사숙이상의 노승들이 기거하는 숙박소로서 전대의 장문인들도 이곳에 묵는다. 장로원 격으로 이들 중에서 5명이 선임되어 장로원의 역할을 한다. 이들은 만장일치제로 의견을 수렴하여 방장의 독주를 막는다. 최악의 경우 방 장의 해임에 대한 의결을 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다. 원칙상으로는 방 장보다 배분이 높은 노승들은 이곳에 기거해야 하지만 대부분의경우 그들은 작은 암자나 기타 외진곳에 기거하므로 원래 정원의 2할정도만이 이곳에 묵고 있다. 장생전 소속의 노털들은 47명이 현재 생존중. 조사전(祖師殿) 선대고승들의 유골과 유품을 모아놓은 곳. 소림의 성지로서 도난등의 우려 때 문에 뛰어난 고수들을 배치한다. 조사전은 장생전 소속의 노승 7명이 번갈아 가며 지킨다. 이곳에는 십이진경 등 소림제자로서 익히는 것이 금제된 여러무 공들이 있다. 방장실(方長室) 방장 -> 덕인(德仁) 팔대호원(八大護院) 감원(長) -> 덕진(德津) 나한전(羅漢殿) 주지 -> 덕혜(德慧) 지객당(知客當) 주지 -> 덕호(德浩) 장경각(藏經閣) 주지 -> 덕수(德修) 덕혜, 덕수 덕인 탁자 덕진, 덕호 방금 윗쪽에서 대화를 나누고있는 모양. 끗발순 : 방장인 덕인(德仁),덕진(德津),덕혜(德慧),덕호(德浩),덕수(德修) 30대 중, 40대 초, 50대 중, 40대 중, 40대 후 * 방장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곳은 모두 다 그보다 동급이나 낮은 배분의 인물들이 우두머리다. 하지만 장생원 직속의 단체들은 모두 다 방장보다 배분 이 높은 인물들이 우두머리다. 소림은 타 문파와는 달리 장문인 전용으로 계 승되는 무공은 없으며 그 자신의 능력이나 수련정도에 따라 무위가 결정된다. 무조건 배분만 높다고 무공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실지 방장보다 높은 배분 을 가지고 있다면 일단은 뛰어난 무예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한다. 보통 방장 의 나이는 80세 이상이기에 그보다 많은 나이에 아직도 열반에 들지 못하고 살아남아서 젊은 외모... 펄펄 뛰는 체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는 최소한 방장 과 거의 동급 또는 그 이상의 무예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한다. * * * 12진경 - 소림무공으로서 가져서는 안되는 악랄한 초식을 가졌으며 대단히 패 도적이며 파괴적인 12가지 무공들이다. 항정멸법신공(抗正滅法神功) : 소림무예에 극성인 무공. 총 24초식이 있으며 각 초식은 12가지의 변초를 가진다. 소림무예의 헛점을 찌르도록 만들어진 수 십종류의 무예들 중에서 가히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무공으로 그 악마적인 위 력 때문에 최고의 기밀로 취급되고 있다. 무공의 천재라 불린 자미신승(慈嵋 神僧)이 남긴 4가지 무공들 중의 하나로서 소림무예에 극성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지닌 파괴력도 상상하기 힘든 무공이다. 파마멸혼검법(破魔滅魂劍法) : 혜인(蕙忍)대사의 작품으로 그는 소림에 들어 오기 전에 마교에 의해 그의 일가족이 전멸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래서 그 는 사파인에 대해 손속이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승려이며 너무나 정대한 초식 만을 앞세우는 소림무예의 한계를 깨닫고 그야말로 파격적인 무공을 그의 만 년에 창안했으니 이것이 파마멸혼검법이다. 그 악랄한 초식은.... * * * 초씨세가의 핵심인물 명단. 초씨세가는 5대세가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래 도 대단히 큰 문파이며 현재 계속 뛰어난 고수들을 배출하여 어떤면에서는 5 대세가의 말석보다도 유명한 세가이다. 하지만 아직도 5대세가의 말석을 차지 하지 못하는 이유는 초씨세가 최고의 고수라 할 수 있는 초??가 정통을 계승 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크다. 그의 무공은 대단히 뛰어나기 때문이며 그의 진정한 실력은 아직도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또 한가지 두 번째 기대주였던 초류빈이사소한 의견다툼으로 세가를 떠나 현재 현상금 사냥꾼으 로 활동중이라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초씨세가는 재수없게도 가장 뛰어난 고 수들은 모두들 세가에서 독립하여 활동하는 관계로 그 위세를 떨치기에 아주 힘든 입장이다. 초씨세가는 여타의 무공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대한 도(刀)를 전문으로 쓰 는 문파다. 이들이 거대한 도를 쓰는 이유는 막강한 내공에있다. 이들은 내공 이 뛰어나므로 현란한 도법이 아닌 아주 무식한 직선공격이 이룬다. 대 신 그 엄청난 내력덕택에 한방에 안나가떨어지는 인물이 거의 없는상태. 하지 만 살짝 무림에 나갈때는 거대한 도는 너무 눈에띄기 때문에 얄팍한 도나 검 종류같은 대개의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병장기를 휴대한다. 그 좋은예가 일진 검 초우같은 경우. 그의 호가 말해주듯이 그는 강호에서 검만을 사용했고 거 의 대부분의 상대가 1검에 나가떨어졌기에 일진검(一鎭劍)이라는 명호를 받았 다. 타 문파와의 집단전 따위가 벌어졌을때는 도를 사용하여 자신의 실력을 몽땅 발휘하지만 강호에 돌아다닐때는 다른 무기를 사용함으로 인해 자신의 실력을 있는그대로 다 발휘할 수 없다. 혈의수라(血衣修羅) 초백운(楚白雲) : 초장천(楚暲天)의 아버지이자 초씨세가 의 전대가주. 초씨세가 무공서열 2위. 115세. 오래전 무림의 다툼에 참가하여 격전 끝에 왼손을 날려버렸음.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실력을 모두발휘하기는 힘든입장임.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대단히 뛰어나며 무서운 고수로 평가받 고 있다. 현재는 모든 일은 그의 둘째아들에게 물려주고 은거중. 혈의수라라 는 별호는 왼손을 잃은 격전때 그가 입었던 백의장삼이 혈의로 변할정도로 적 과 용맹히 싸워 얻은 것이다. 무적일도(無敵一刀) 초장천(楚暲天) : 초씨세가가 낳은 최고의 고수이자 무공 의 천재로 초백운(楚白雲)의 장자(長子). 초씨세가 무공서열 1위. 어떤것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장손의 자리를 초단천 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도는 무공에 미친 미치광이. 75세. 그의 진실한 실력 을 드러낸 적이 한번도 없는 인물로 세상 사람들이 추정하기로는 화경에 근접 했던가 아니면 화경정도의 무예를 소유하지 않았을까 추정되는 고수다.(사실 은 가까스로 화경에 이른 숨은 화경의 고수) 초장천의 도법은 정말 무시무 시....^^ 군자도(君子刀) 초단천(楚團天) : 초씨세가의 가주. 초백운의 둘째아들이자 초우의 아버지. 초씨세가 무공서열 3위. 73세. 명호가 군자도로 불릴만큼 세 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하지만 역대 초씨세가의 가주들에 비했을 때 무공면에서는 오히려 조금 떨어진다는 평을 듣는 인물. 하지만 그의 행동 은 꽤나 공명정대하기에 모두들 그를 높게 평가한다. 인자하고 신념이 강한 인물.. 백의관음(白衣觀音) 주매령(朱梅令) : 백의를 즐겨입으며 인자한 성품에 사 파의 계도에 힘씀.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있지만 상대와 싸운적은 거의 없는 인물.. 초단천의 부인이자 초우의 모친. 뛰어난 무사로서 초씨세가 무공서열 12위. 69세. 옥면일랑(玉面一郞) 초풍천(楚風天) : 초백운의 셋째아들이자 초씨세가의 부 가주. 71세. 대단히 얼굴이 잘생긴 인물로서 무림인 치고는 일찍이 결혼하여 초류빈을 낳았음. 지닌바 얼굴에 비하여 무공은 조금 떨어져서 초씨세가 무공 서열 6위인 인물. 무림 초출 때 이미 이름이 나있던 고수인 왈가닥인 그의 부 인 독수랑랑(毒手郞郞) 왕운하(旺雲河 - 73세)의 눈에 띄여 완전히 코꿰어서 결혼당했음. 그의 부인 왕운하는 초씨세가 무공서열 4위. 아직도 부부싸움하 면 쌍코피 터지는 불쌍한 남편....^^ 초연 : 31세. 초희 : 28세. 둘은 자매지간이며 초연이 언니. 초희가 동생. 언니는 무공은 별로지만 시와 화에 재간이 뛰어나며 초희 언니와 달리 검술에 뛰어남.(자신 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음.^^) 이 둘은 초씨세가 가주 초단천의 딸들이고 검술에 뛰어난 오빠 일진검 초우가 있다. 이들은 장차 연적(戀敵)으로 배치할 생각. 일진검(一鎭劍) 초우(楚旴) : 초연, 초희의 오빠로서 뛰어난 도객. 34세. 초 씨세가 무공서열 58위. 당연히 초류빈보다는 그 무공의 성취도에서는 떨어진 다. 초류빈의 무공이 뛰어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니까...^^ 탈명도(脫命刀) 초류빈(楚柳濱) : 초우의 사촌형, 무식할 정도로 수련을 쌓은 고수로 한자루 도를 악마처럼 잘 다룬다. 42세. 그의 부모를 닮아 아주 잘생 겼으며 그 뛰어난 외모에도 불구하고 여색에 빠지지 않고 무공수련에 전념하 여 젊은 나이에 놀라운 성취를 이룬 인물... 젊은 나이에 비해 성취가 뛰어나 며 초씨세가의 촉망받던 신예고수. 초씨세가에서 무공서열 16위. 그가 무공에 집착하게 된 원인은 얼굴의 상처와 그 상처를 만든 인물에 대한 원한때문임. 그의 얼굴에는 왼쪽눈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른쪽 빰 위까지 이어지는 얕은 검상의 흔적이 있음.(외눈은 아님) 두 번째 무림출독 사파의 어떤 검객에게 서 받은 상처인데... 상대는 초류빈보다 몇갑절 뛰어난 고수임에도 얼굴에 긴 상처만 일부러 만들어놓고는 엄마젖이나 더 먹고 오라고 비웃으며 사라졌음. 그 때문에 사파의 인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설 정도로 싫어하며 또 그 덕분에 여색에 빠지지 않고 죽자고 무공수련만 했음.^^ 그 상대 고수의 이름 은...(누굴까^^) 이 때문에 사파에 대한 지독한 원한과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그 때문에 사람좋은 가주 한판 벌이고는 뛰쳐나갔음. 초류빈은 세상의 이목 을 속이고 2,3류 현상범이나 잡으러 다니며 사령귀조(死令鬼鳥) 임방(任放)이 라는 이름으로 활약중이다. 그는 비교적 무림을 오래 떠돌았기에 잘 알려져있 는 인물이지만 사문을 나온다음부터는 호조(虎爪;5개의긴 쇠스랑같은 칼날이 붙은 무기 -> 열혈강호에서 처음에 나오던 이단아가 사용하던 무기, 이무기 는 검의 극성인 무기다.) 평상시에는 어깨에 걸치고 다니며 싸울때만 양팔에 착용한다. 이름과 실력을 숨기고 전형적인 하수(下手)들 처럼 괭장히 껄렁하 게 해서 돌아다닌다. 설중화(雪中花) 초류향(礎柳香) : 초류빈의 여동생. 무공이 뛰어남. 초씨세가 무공서열 38위. 나이 38세. 아직 독신... 여성임에도 무림에 이름을 떨칠정도 로 무공이 뛰어나고 그 부모를 닮아 미색이 출중한 인물...(그녀의 어머니를 닮아 너무 왈가닥이라 접근하는 남자가 없음.^^ 음... 그러니까 무림동의 초 연이 성격과 비슷하려나?) 초씨세가에는 5명의 장로가 있다. 일광일살(一光一殺) 초백룡(楚白龍) : 쾌도술에 뛰어남. 초백운의 이복동생. 92세, 무공서열 5위. 만화비검(萬花飛劍) 백운지(白雲止) 초백룡 장로의 부인, 85세, 무공서열 11위. 뛰어난 여고수. 비도술(飛刀術)에 뛰어남. 귀제갈(귀제갈) 주천강(주천강)장로 : 80세, 무공서열 7위. 초백운의 처남, 초백운의 여동생 초지령은 병사했음. 뛰어난 심계의 소유자. @03장로 : 78세, 무공서열 8위. @04장로 : 72세, 무공서열 9위. @05장로 : 65세, 무공서열 10위. 초씨세가 전체식솔 1500명. 제법 큰 세가라고 볼 수 있다. --> 부탁으로 초류빈만 넣자니 허전해서리... 이사람 저사람 넣다보니... 완 전히 가족의 족보를 새로 만들었군요^^; 천영(天影) - 본명 금천비(金天飛) : 절검문 최고의 신예고수. 현재 36살의 나이로 33세까지 절검문(3장 초반에 사이비가 나왔었지만 이놈은 진짜. 절검 문은 검으로 알아주는 문파임)에 처박혀 무공만을 익힌 무공광. 그의 천재적 인 오성과 모두들 두손드는 끈기와 고집으로 젊은나이에 절검문의 비기(秘技) ??검법을 5성이나 익힌 괴물. 무림에 나온 것은 3년전이며 그때 몇가지 문제 에서 절검문주와 의견이 맞지않아 뛰쳐나왔고 파문당했다. 하지만 그것은 외 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현재 그가 하는 일은 현상금사냥꾼임. 그는 일부러 3 류에서 2류정도의 인물들만 잡으러 다녔기에 그의 실력이 드러나있지 않다. 여태껏 그의 적들은 모두 단 1검에 요절이났는데 초식따위를 사용하지도 않았 다. 과연 그의 진정한 실력은....? 초류빈과 한번씩 동업도 하는 인물로 서로 의형제를 맺고 있다. 둘은 과거 한차례의 비무로 서로의 진실한 실력을 알고 있 또 비슷한 처지기에 서로에게 의지하는 바가 있다. 적들은 묵향의 기대에 충실히 따르려는 듯, 제법 잔꾀들을 부려놨음에도 2각 (30분)도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아마도 선발대인 듯 30여명이나 되는 무리들 과 함께 우두머리인 듯 보이는 회의무사(灰衣武士)가 날렵한 경공술을 전개하 며 열심히(?) 걸어가고 있던 공주일행의 뒷편에 떨어져내렸다. 회의무사는 땅 에 내려서자 비웃는 듯한 음성으로 한마디 했다. 사실 그로서도 죽자고 쫓아 왔는데 상대가 얼마 도망가지도 않았으니 허탈했기 때문에 이죽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별의별 잔꾀를 다 부려서 추격대를 막아대더니 실지 도망쳐야 할 놈들은 느 지렁거리며 걸어가고있었다니.... 기가막혀서... 본좌를 얕보는 것도 아니 고..." 한마디 빈정거린 다음 공주에게 간단히 포권하며 말했다. "공주마마, 저희들의 손길을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보아허니 도망칠 생각 도 없으신 것 같은데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마시고 순순히 항복하시지요." 상대의 그런대로 공손한 음성을 들으면서 장 교령은 필사의 각오를 궂힌 듯 침통한 얼굴로 잠시 공주와 묵향을 바라본 다음 부하들에게 외쳤다. "적을 막아랏!" 그와동시에 10여명 남은 황군들은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들고 상대를 향해 달 려나갔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 숫자는 물론이고 실력마저 더욱 뛰어난 적을 향해 죽음을 각오하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기위해 악착 사투를 벌이 는 장면은 장엄(莊嚴)하기까지 했다. 그런 상대를 향해 적들까지도 암수를 사 용하지 않고 정정당당히 승부를 해주는 것으로 주인을 향해 목숨을 아끼지 않 는 그들에게 예(禮)를 표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 한사람 그들을 바라보며 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멍청이들... 이따위 계집을 위해 목숨을 버리다니... 쯧쯧... 하지만 이제 방해꾼들은 모두 없어졌으니 슬슬 시작해 보실까..'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난투극을 바라보며 얼이빠져있는 공주를 재빨리 나꿔 챈 다음 묵향은 경공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묵향은 상대를 완전히 따돌릴 생 각은 없었으므로 추격술에 능한 상대라면 충분히 따라올 수 있을정도로 약간 씩의 흔적을 남기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주가 도망치기 시작하자 더 이상 예의를 차릴 여유가 없어진 적들은 암기를 사용하여 간단히 싸움을 종결지은 후 추격을 재개했다. 회의무사(灰衣武士)는 상대가 펼치는 경공수준이나 그가 남기는 흔적 등으로 미루어 봤을 때 간단히 상대를 포획(捕獲)할 수 있을것으로 처음에 예상했지 만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것이 오판이라는 것을 깨닳았다. 상대는 완전히 미꾸라지처럼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 안잡히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해가지 고 어둠이 사방에 자리잡으며 그는 하는 수 없이 추격을 포기해야 했다. 상대 가 남기는 미세한 흔적을 밤에 횟불이나 밝힌다고 알수도 없을뿐더러 횟불을 가지고 가면 적은 그 불빛을 보면서 이쪽의 위치를 파악하여 더욱 도망치기가 용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묵향은 어두워진 후 공주를 풀위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다행히 적들을 어느정도 따돌린 것 같습니다. 조금 쉬시지요. 저는 요기할 만한 것을 구해오겠습니다." 묵향의 말투는 전혀 황족에게 말해야 하는 존칭이 없는 무식한 말투였지만 공 주는 이것이 묵향이 일부러 황족에 대한 존칭을 안쓴 것을 모르고 다만 무식 해서 그것을 모르는 줄로 알았다. 예로부터 모르고 한 일은 죄가 아니라 했으 니 그걸 따질수도 없었지만 그 말과 동시에 흑의위사가 어둠속으로 사라졌기 에 따질 상대도 없었다. 하지 공주에게는 그따위 존칭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산속에 혼자 버려져있다는 점이 더욱 무서웠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 수림(樹林)이 울창하게 우거져 달빛조차 들어오지 못해 자신의 손까락도 안보이는 곳에 혼자 남아있는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하다. 그토록 오랫동안 물 한모금 못마셨지만 목마름이나 배고픔따위는 공포(恐怖) 에 눌려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공주가 벌벌떨고있는 이시간... 적들은 짙은 어둠 때문에 한치앞도 잘 보이지 가 않으니 내일의 추격을 위해 요기를 하며 푸근히 쉬고있었고 묵향은...? 묵 향은 멀찌감치 경공을 전개하여 이동하여 주막에서 때늦은 저녘식사를 하고있 었다. 이 주막은 묵향이 도망쳐오면서 이미 저녘식사를 위해 봐뒀던 곳이고 공주가 있는 곳에서부터 130리(40Km)는 족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그의 경공실력으로 봤을때는 조금도 먼 거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공주에게는 먹을 것을 구한다고 했으므로 시간이야 얼마가 걸리든 큰 문제가 없는 것이 다. 묵향은 구운 오리다리를 탐스럽게 한입가득 뜯어서 질근질근 씹어 삼킨 후 술한잔을 목구멍에 흘려넣어 입가심을 하며 지금쯤 굶주림과 추위와 공포 에 벌벌떨고있을 공주생각을 하니 통쾌한 기분이 절로 일어나며 끊임없이 웃 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기 힘들었다. 아마도 저쪽자리에 앉아서 힐끔거리며 묵향을 바라보는 녀석들은 이놈이 미치지 않았나 생각중일 것이다. '한 일주일 질질 끌면서 산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면 황궁제일미(皇宮第一美)도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요염한(?) 모습이 되겠지. 흐흐흐... 굶는사람 생 각하면서 먹는 재미도 꽤 괜찮군.' 원래가 굶는사람 생각하며 먹으면 식욕(食慾)은 더욱 동하는 법. "이봐! 술한병하고 오리한마리 더 가져오너라." "예." 묵향은 점소이가 오리를 가져오자 다리를 뜯어 한입 베어물며 생각했다. '그래도 딴에는 생각해줘야 하니까 요기꺼리를 가져다 주긴 줘야하는데 뭘 가 져다 줘야하나...' 두둑히 배를 채운 후 묵향은 숲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요기꺼리를 찾 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참을 뒤지자 그럴 듯 한놈이 하나 눈에 띄었다. 토끼 라든지 뭐 그런 것은 몇마리 보긴 했지만 그녀석들은 묵향이 원한 놈이 아니 었다. 역시 이런 산골에서의 몸보신에는 길쭉한 몸매를 가진 통통한 놈이 제 격이니까... 내공이 반박귀진(返縛歸眞)의 현묘(玄妙)한 경지(境地)에 이른 묵향인지라 어둠이 내려앉은 밤사냥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예 빛이 없어 도 어느정도 볼 수 있는데 거기에 달빛까지 비치니 대낮이나 다름없었다. 묵 향은 사냥물을 읍틉欲 떠나올 때 보아뒀던 특이한 모양의 고사목(枯死木)을 찾았다. 그 고사목에서 동남쪽으로 5리만 가면 공주가 묵향이 돌아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리라. 묵향은 공주가 앉아있는 나무 위에서 한참을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정 말이지 혼자보기 아까운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 게 하는것도 예의는 아니기에 아래로 몸을 날렸다. 묵향이 위에서 떨어져 내 리자 갑자기 나타난 묵향 때문에 놀라는 듯 하던 공주는 눈에 다음순간 쌍심 지를 돋우고 달려들었다. "네녀석은 지금까지 어디갔다가 온거냐?" "어디갔다가 오다니요? 저는 분명히 요기꺼리를 찾아보겠다고 가지 않았습니 까? 이런 산속에서 먹을만 한 것을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인줄 아십니까?" "그래 가져왔느냐?" "예. 일단 좀 앉으십시오. 소인이 요리를 해 올리겠습니다." 묵향은 공주를 앉힌 다음 나무에 걸터앉은 공주 앞쪽에 구덩이를 하나 팠다. 손바닥을 이용해서 슥슥 구덩이를 하나 판 다음 구덩이 앞부분, 그러니까 나 무의 반대편에 나뭇가지 둘을 꺾어다가 세운다음 상의(上衣)를 벗어 빛이 새 어나가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런 후 구덩이 안에다가 나뭇가지를 줏어다가 집 어넣은 후 약하게 불을 지폈다. 한쪽은 나무에, 한쪽은 옷가지에 막혀 불빛은 거의 새어나오지 않았다. 묵향이 불을 피운 이유는 알맞게 요리를 할 목적도 있었지만 더욱 큰 목적은 자신이 가져온 사냥물을 공주에게 보여야 하기 때문 이었다. 묵향이 허리춤에서 사냥물을 꺼내어 불위에 올려놓자 기절할 정도로 놀란 공주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끼약! 그게 뭐냐?" "뱀이지요. 이놈을 잡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걸 지금 나보고 먹으라고 하는 것이냐?" "이거 생긴 것은 좀 징그러워도 몸에 좋습니다. 내일도 도망다니려면 아무거 라도 먹고 힘을 비축해둬야지요." "나는 되었으니 네놈이나 먹거라." 공주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아예 외면해 버리자 묵향은 조금이라도 더 냄새를 풍기기 위해 천천히 굽기 시작했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가자 주위로 구수한 고기굽는 냄새가 풍겨나가기 시작했다. "다 익었는데 조금이라도 드시지 않겠습니까?" 공주는 그럴듯한 향기에 마구 식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그것을 먹을수는 없었다. 애써 고기에서 시선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놈이나 먹거라." "그럼, 소인 혼자서 먹겠습니다." 묵향은 일부러 더 이상 공주에게 권하지 않고 뱀을 씹어먹기 시작했다. 사실 오리고기로 포식한 한 후라 별로 식욕이 일지도 않았지만 묵향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우두둑... 오도독... "쩝쩝..." 묵향은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먹으면서 열심히 공주의 반응을 살폈다. '흐흐흐... 저렇게 외면하고 있어도 이 맛있게 먹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도 않다면 사람이 아니지. 흐음... 그래 침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군... 낄낄낄... 아마 지금쯤 먹지 않겠다고 한 것을 후회하고 있겠지...' 식사를 맛있게(?) 끝낸 묵향은 한쪽에 누우며 쌀쌀하게 말했다. "이 어둠속에서는 상대가 조화경을 넘어섰거나 심안(心眼) 정도 익힌 고수가 아니면 수색할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러니 마음 푹 놓으시고 내일도 쫓길 테니 좀 쉬십시오." 그런다음 서서히 명상(瞑想)의 세계로 들어갔다. 더 이상 공주에게 할말도 없 었고 어쨋든 자신의 피를 말리는 복수는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인시(寅時;새벽 4시)가 되자 묵향은 자고있는 공주를 깨웠다. 그냥 툭 쳤을 뿐인데도 공주는 소스라치듯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 "곧 있으면 날이 밝습니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안기시겠습니 까? 아니면 업히시겠..." "닥쳐라!" 그러더니 공주는 보이지도 않는 앞을 더듬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묵 향도 말릴 생각은 없었으므로 느긋하게 뒤를 따라갔다. '자존심 세워봐야 힘만 빠지지.... 클클...' 날이 밝자 전날과 같은 상황의 전개가 이어졌다. 상대의 추격이 시작되기 전 까지 묵향은 공주혼자 힘껏 걸어다니게 만들었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일찍 깨운것이니까... 하지만 사로잡히면 안되기에 적의 추격이 시작되자 공주를 안고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정말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안잡 히는 쫓기는 사람이나 쫓는 사람이나 피를 말리는 경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공주측에서도 한번씩 뒤로 언뜻언뜻 보이는 적 때문에 간이 콩알만해질 지경 이었고 쫓는 쪽에서도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니 휴식이 고 식사고 모두 때려치우고 오직 추격만을 해대자니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날 저녘때쯤이 되자 적은 30여명에서 5명 정도로 줄어들어버렸다. 경공술이란 것은 원래가 잔재주가 통하지 않는 순수한 내공만이 동원되는 기 술이다. 짧은 거리만을 경공술을 펼친다면 내공도 중요하지만 그 경공술이 어 느정도 속도위주로 만榕沮낫쩝側 중요하다. 그리고 속도위주로 만들어졌을 수록 내공의 소모는 그에 비례해서 커진다. 하지만 이런 장거리 경주의 경우 그런 경공술을 펼칠 바보는 없다. 그 전날에도 추격을 해봐서 알지만 도망치 는 녀석의 경공술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군들과 힘을 합쳐 싸 우지 않고 공주만 안고 튄 점으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무공은 고강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니 죽자고 적을 쫓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따 라만 잡으면 저 얄미운 놈을 찢어죽일 수가 있을테니까... 추격은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하면서도 하루종일 반복되었는데 그러다보니 내력이 떨어지는 수하들은 뒤로 쳐져버리고 내력이 고강한 자들은 남은 것이 다. 하지만 추격하는 지휘자인 회의무사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쫓아가 면서 뒤로 낙오한 무리들이 충분히 따라올 수 있도록 표시를 해두었을뿐더러 자신들만의 표식으로 만리향(萬里香)을 미약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어두워져도 그 냄새를 따라서 모두들 모일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리향(萬里香)이란 어떤 한가지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상당히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여러 종류의 특수한 향을 총칭하는 것이다. 만리향은 그 향기 가 오래가면서도 향기가 짙어 멀리서도 그 향을 추격할 수 있다. 만리는 거짓 말이고 그 향내를 맏을 수 있는 독특한 내공수련을 충분히 받는다면 100리(약 30Km) 이내라면 가까스로 따라갈 수 있을정도로 지독한 향기를 뿜는다. 하지 만 훈련을 받지않은 일반인들은 거의 그 향을 느끼지못할정도로 희미한 향을 낸다. 그렇기에 갑(甲)이라는 만리향에 대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훈련을 받았다고 해서 을(乙)이라는 만리향의 향내도 맏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피를 말리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곳은 숲속이라 경공술을 펼치는데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지형이다. 거기에 상대는 이 넓은 산속만을 왔다갔다 하 면서 벗어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저놈이 산속을 벗어나기만 한다 면 이 일대 곳곳에 산재(散在)해서 기다리고 있을 고수들에게 연락을 보내어 껍질을 홀랑 벗겨버리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놈이 이 넓은 수림속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이 지겨운 추격을 계 속 해야만 하는 것이다. 달리는 사람에게 안겨서 하루종일 있어본 사람이 있을까? 아무튼 이것은 진귀 한 경험임에는 틀림없겠지만 실지 당하는 입장에서는 보통일이 아니다. 상대 가 허리 아랫쪽을 받쳐준다고 하지만 이쪽에서도 힘을써서 상대의 목이라도 끌어안아야지 그렇지 않고 그대로 있을 수 있는 강심장은 없다. 받쳐주는 상 대도 상대나름이겠지만 공주의 허리 밑에서 힘을주고 있는 자는 그녀가 이 난 리가 나고나서야 얼굴이 익은 초면의 인물이었기에 사태가 나쁜 방향으로 흘 러가면 언제 그녀를 때기치고 도망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손은 아프고 계속 누운자세니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앞으로 힘을줘야 바로되 니 뻐근해오고... 차츰 시간이 지나다보면 이건 보통 고문(拷問)이 아닌 것이 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공주로서는 불행중 다행인 점이 있었다. 그것은 첫날은 도망친 시간이 짧아 별 문제가 없었지만 둘째날부터는 하루종일 도망쳐야 했 다. 그 말은 곧 초면인 이 흑의위사의 품속에서 하루종일을 안겨서 도망다녀 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난리가 난 후에는 식량이 없어 먹은 것이 없으니 아직 그녀로서는 요의(尿意)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사실 적이 바짝 뒤쫓는 상황에서 소변보자고 내려달라고 할수도 없는 입장이니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둘째날의 치열한 추격전이 끝나고 어둠이 내려앉자 흑의위사는 또다시 식량을 구한답시고 떠났다. 거의 2시진이 지난 후에야 갑자기 나타나서는 구해온 식 량을 불에 굽기 시작했다. 거의 배가 고파 실신하기 일보직전에 이른 공주로 서는 정말 되도록이면 참고 먹을 생각이었지만 그 식량(?)을 한번 본 다음에 는 솟구치던 식욕이 쑥 들어가고 말았다. "헤헤헤... 오늘은 좀 많이 잡았습니다. 마마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하늘도 감동하셔서 이렇게 많이 보내주셨는 모양이죠. 헤헤헤..." 화롯불을 빙 둘러 7마리의 큼지막한 들쥐를 막대기에 꿰어서 조금씩 돌려 천 천히 구우면서 너스레를 떠는 묵향이었다. 그 들쥐도 묵향이 일부러 내장만 제거했을뿐 교활해 보이는 머리도, 뾰족한 꼬리도 다 붙어있는 통통한 놈들을 가죽도 안벗기고 구워대고있으니 공주의 식욕이 날 리가 없었다. 그 모양을 보고 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는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배 (腹)를 달래며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이런 산골짜기에서 저거라도 구해오는 것이 용하지.' 이건 순진한 공주의 생각이었고 저 옆에서 흥얼거리며 공주에게 들으라는 듯 이 맛있게 쩝쩝대며 쥐고기를 먹고있는 모진놈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사실 공주의 잘못이라면 저런 나아쁘은 놈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 하나였으니 까... 하늘이 빙빙 돌고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붕 떠서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 같고...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르고... 온 몸에 힘은 하나도 없고... "물... 물..." 다른 것은 몰라도 물을 안먹고 사람이 오랫동안 살수는 없다. 밥이야 한달정 도 안먹어도 살지만 물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공주의 경우 거의 24시진 (48시간)동안 물한모금 마시지 못했으니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녀를 안고 뛰는 자의 무뚝뚝한 대답... "조금만 참으십시오. 해가 지고나면 물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엄청난 시간이 남았지만 본의아니게도 묵향이 한 말은 진실 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미쳤다고 지금 물을 가져다 주냐? 좀 더 고생을 시킨 다음 가져다 주지. 자... 다음에는 뭘로 생고생을 시키지? 흐흐흐흐흐....' 공주도 물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지만 묵향을 뒤쫓아오는 무리들의 사정도 그 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자가 건량(乾糧)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지만 대나무 (竹)나 사기(砂器), 또는 가죽(皮)으로 만든 자그마한 물병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보니 제법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몇몇 고수를 제외하고 이틀에 걸친 격렬한 달리기를 견딜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묵향은 물이 졸졸 거리는 소리를 멀찌기에서 듣고는 뻔뻔스럽게도 그쪽을 피해서 도망다녔으니 그보다 무공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지는 추격자들은 여태껏 아예 물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주는 세 번째 맞이하는 야영에서 처음으로 물구경을 할 수 있었다. 흑의위 사는 먹을 것을 구해온답시고 자신을 놔두고 떠난 후 거의 두시진이 넘어 나 타난 다음 자신의 신발 한짝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 물이있으니 드시지요." 흑의위사가 신고있는 가죽신 안에 물이 들어있었다. 흑의위사는 그릇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에 가죽신을 벗어 거기에 물을 담아왔다는 답이었으니 따질수도 없었다. 평상시의 공주라면 도저히 마실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만 3일을 굶으 면 도둑질을 안할 사람이 없다고 했던가... 음식도 그렇거늘 하물며 물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녀는 냄새나는 가죽신에 담긴 물을 마시고야 말았다. 하 지만 흑의위사가 장만해온 식사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흑의위사는 가까스 로 구했다면서 30여 마리의 털이 숭숭 돋아난 큼직한 송충 을 나뭇가지에 꿰어서는 불에 구워서 공주에게 권했던 것이다. 공주는 상대가 먹는 모습을 보면 더욱 허기를 느낄것이 분명하기에 아예 돌아 누웠고 그 때문에 그녀는 묵향도 맛있는 소리를 내며 먹는척만 했지 숲속으로 불에 잘 익은 송충이들을 버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묵향이라도 그것 을 먹을정도로 비위가 좋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묵향이야 오늘도 오리탕 2그 릇에 반주(飯酒)로 고량주 1병까지 비운다음 이리 달려왔으니 먹으나 안먹으 나 별 상관이 없었지만 공주는... 다음날 아침도 변함없는 일과의 반복이었다. 쫓고 쫓기는... <그놈>만 나타나 지 않았다면 아마 묵향의 계획대로 공주를 <말려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 지만 그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묵향이 헐레벌떡 쫓아오는 적들과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도망치고 있는데 웬 껄렁하게 생긴 녀석이 앞을 가로막았다.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인물로 유약하게 보일정도로 잘 생긴 얼굴이었지만 왼쪽 눈위에서부터 시작해 오른쪽 빰 위까지 이어지는 얕은 검상덕분에 그의 얼굴 은 한층 굳건해 보였다. 그의 양쪽 어깨위에는 검에 극성인 외문병기인 1척 반(45Cm)이나 되는 길이의 호조(虎爪)가 얹혀있었다. 남루해 보이는 그의 옷 차림으로 보아 아마도 떠돌이 무사인 듯 한 인물이었지만 묵향의 앞을 경쾌한 몸놀림으로 가로막은 것으로 미루어 꽤나 한수하는 작자처럼 보였다. '이런... 매복이 있었나? 내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경공을 지닌놈은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면 어젯밤에 예상경로에 수하들을 매복시켰던지...'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빠르게... 하지만 지금은 적당한 무공으로... 묵향은 곧 그의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들며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적을 제압할 목적보다는 도망칠 목적이 강했기에 내력을 거의 사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잠시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뒤로 황급히 물러서며 외쳤다. "잠시 멈추시오. 소생은 적이 아니오. 당신들을 돕고싶어서 그러오." 묵향은 뒤쪽을 힐끗 바라본 다음 다시 몸을 날리며 말했다. "죽고싶지 않으면 딴곳으로 꺼져." 사내도 뒤에서 빠른속도로 접근해오는 거의 30여명이나 되는 무사들의 살기등 등한 모습을 보더니 묵향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려왔다. 묵향이 측정하기에 아 마도 지금 자신의 계획을 망치고있는 이 망할녀석의 무공은 상당히 뛰어났다. '재수 옴붙었군. 저놈 실력이면 저 뒤쪽에서 쫓아오는 놈들 모두를 처치할 수 있을거야. 저놈이 나를 돕겠다고 들면 곤란한데...' "도대체 왜 쫓기는 거요?" "이런... 망할... 꺼지라고 했잖아." 하지만 상대는 끈덕지게 묵향을 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 만... 이때 묵향으로서는 재수없게도 배고픔과 목마름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공주가 깨어난 것이다. 그녀는 옆에서 따라오고있는 상대를 보고 비명을 질렀 다. "끼야야악......" 그녀로서는 아마도 옆에서 따라오는 상대가 여태껏 자신을 추적해왔던 적들로 오인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젊은이가 말을 걸자 차츰 안정을 취하면서 사정 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쁜놈이 아니오. 무슨 일이오?" "본녀(本女)는 대송제국의 공주다. 저 뒤의 반도들에게 쫓기는 중인데 그대는 제국의 신민(臣民)으로서 의무를 다해 본녀를 도와라." "공주 마마라고요?" "그렇다. 본녀가 진영이다." 상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묵향을 바라봤다. 묵향은 이녀석을 떨쳐버릴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네놈은 공주마마의 말씀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발칙한 놈 같으니... 어 서 꺼져라." 하지만 상대는 뒤를 한번 힐끗 보더니 공주에게 능청스레 말했다. "마마를 구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얼마를 주실건지..." "뭐라구?" "수고료로 얼마를 주시겠습니까?" "무엄한 놈. 본녀와 흥정을 하자는 말이냐?" "돈을 주시지 않겠다면 소생은 물러가겠습니다. 그럼 평안한 여행이 되시기를 비옵니다. 안녕히 가시옵소서..." 그런다음 일부러 옆으로 천천히 이탈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공주 는 상대를 불렀다. "잠깐.... 네놈은 얼마를 원하느냐?" "더도말고 덜도말고... 황금 100냥!" "좋다. 본녀를 어림군이 주둔하고있는 곳까지 호위해준다면 지급해 주겠노 라." "알겠사옵니다." 그러더니 상대는 호조를 어깨에서 끌러 양 손에 부착했다. 호조란 것은 쇠스랑처럼 굽은 반척에서 2척 사이의 칼날 4-7개를 강철로 된 장갑처럼 생긴것에 붙여놓은 것으로 장검을 그 칼날의 사이에 끼워 부러트릴 수 있다. 거기에 여러개의 날을 가지고 있으므로 거기에 찢기면 상처를 꿰메 기도 힘들며 출혈이 심해 적에게 대단한 타격을 줄 수 있다. 거기에 양손에 하나씩을 착용함으로 인해 검을 가진 상대를 압박해 나가는데 있어 최상의 병 기로 손꼽힌다. 묘조(猫爪)라는 외문병기도 있지만 이것은 호조와는 달리 1치 에서 5치 사이 길이의 자그마한 칼날이나 송곳이 붙은 골무(바느질시 바늘을 좀 더 손쉽게 위해 손까락에 끼는 물건)처럼 생긴 것으로 각 손까락에 끼워 사용하지만 암습을 하는데나 이용되지 정면대결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 는다. 그 남자가 뒤로 돌아서서 적들에게 달려가자 묵향도 할수없이 걸음을 멈춰야 했다. 여기서 자신이 뺑소니 친다면 아마도 공주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공주를 땅에 내려줬다. 공주 는 비실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도와주겠답시고 적들에게 달려간 젊은 이를 간절한 소망을 간직한 채 바라봤다. 다행히 그 젊은이의 실력은 공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상당한 실력으로 흑의인들을 죽여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왜 이런 골짜기에서 만나게 되었는 지 아리송 했지만 어쨋건 위급할 때 자신을 도와준다는데야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않은가? 그 젊은이가 먼저 덮쳐온 흑의인들을 모두 다 죽여버리자 우두머리인 듯한 회 의인(灰衣人)이 그의 옆에 서있던 4명에게 손짓을 했다. 그 네명은 순식간에 검을 뽑아들면서 거의 수비를 무시한 채 강렬한 합격을 전개했다. 먼저 두명 이 달려가다가 젊은이의 양쪽 어깨위로 검을 쳐내렸다. 그러자 젊은이는 순간 적으로 호조로 그 양쪽의 검을 막았다. 이때 그 젊은이의 머리속에는 위험신 호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적이 일격을 날리고 후퇴할 줄 알았는데 그대로 힘을주어 위에서 아래로 힘을 주고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상대의 검을 막기위해 호조를 낀 양손에 힘을주지 않을수 없었다. 그 순간 남 은 두명은 1진의 뒤쪽으로 나타나며 검을 약간 아래에서 윗쪽으로 쓸어올리며 복부쪽으로 그어올렸다. 그들의 공격은 대단히 오랫동안 연습을 거친 듯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적이 순간적으로 1진의 공격을 막게 해준 후, 상대가 1진의 공격을 막으면 2진이 공격하는 방법을 취했다. 만약 여기서 그가 뒤로 물러서려 한다면 먼저 막았 던 2개의 검이 戮 움직임을 따라서 들어올 것이고 또 2진의 공격이 조금 뒤 쪽으로 연결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어디 한군데 베일 작정을 하지 않는다면 이 난국을 해소할 길이 없을 것처럼 보였.존뼈訣側악 일격읍. 1진품격이 읏 아래로 내려오는 덕분에 위로 뛸수도 없었다. 있다면 한 가지 뿐... 젊은이는 1진의 쳐내리는 검을 호초로 힘껏 뿌리치며 그 둘 사이 를 빠져 앞으로 달려나갔다. 위와 뒤로 움직일 수 없으니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가 더욱 기다리던 일이었다. 네명의 부하 들을 돌진시킨 후 뒤에서 일단락 되기를 기다릴 줄 알았던 회의인이 그 순간 을 노려 순식간에 위에 아래로 검을 내리그어왔다. 젊은이의 양손은 1진의 검 들을 뿌리치기 위해 양옆으로 벌어진 상태... 회의인의 일격을 온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 순간 한마디 짧은 기합성이 울리면서 사태가 역전되었다. "이얍" 그와동시에 그 젊은이의 주위로 순간적으로 강기의 회오리가 퍼져나가며 사방 에서 육박해 들어가던 검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있 던 다섯명의 무사들은 온 몸이 걸레가 되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저 무공은.... 정말 대단하군.... 한낫 떠돌이 무사가 아니야. 엄청난 수련 을 거친... 저런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거지?' 젊은이는 아찔했었던 듯 창백한 안색에 한숨을 쉬면서 공주가 있는 곳으로 달 려왔다. 그만큼 방금의 연수합격은 대단했었다. 아마도 젊은이의 무공이 저정 도로 뛰어나지만 않았다면 목숨이 10개라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공주는 그 대결이 젊은이의 일방적인 도살로 막을 내린 것을 대단히 놀라워했 다. 돈밖에 모르는 뻔뻔한 놈이었지만 그 실력하나는 그자가 청구하는 금액만 큼이나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 100냥이면 은화로 2000냥이다. 한 가 족이 아쉬운대로 400년은 먹고살 수 있을만큼 막대한 금액인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공주는 그 금액이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안들었다. 드디어 며칠동 안이나 자신을 쫓아다니던 공포스러운 적들이 모두 시체로 변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 미련한 아가씨는 아쉬운 것을 몰라 황금 100냥이 어느정도의 거금 인지 잘 알지도 못했기에 처음부터 아깝다는 생각조차 없었지만.... 창백한 안색으로 돌아오는 젊은이를 보고 흑의위사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 다. "정말 대단하군..." 그러자 젊은이는 맥풀린 표정이었지만 간단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과찬의 말씀을..." "정말 대단한 연수합격이었어. 저녀석들의 실력이 지금보다 2단계 정도만 높 았었으면 충분히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었는데...." 상대의 시큰둥한 마지막 말에 젊은이는 똥씹은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 안죽고 살아왔느냐 묻는거나 마찬가지니... 그 다음부터는 젊은이가 안내하고 흑의위사와 공주가 그의 뒤를 따르는 형식 으로 전개되었다. 자신을 사령귀조(死令鬼鳥) 임방(任放)이라 소개한 그자는 야인(野人)임에도 궁중에서 쓰이는 존대어를 잘 알고있었다. 거기에 더욱 수 상한 점은 주변의 지리를 파악하는 예리한 안목... 또 그에따른 신속한 대 응... 적의허를 찌르는 예리한 수법으로 적을 따돌리는 놀라운 재치 라든 지... 뛰어난 무공... 모든 면에서 노련한 강호인임을 알수있었다. 아무튼 이 런 시골구석에서 만날 가능성이 없는 상당히 뛰어난.... 그래서 더욱 수상한 인물이었다. 그날 저녘 공주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비록 외딴 시골 식당이라 그 아무리 좋은 요리라도 황궁의 산해진미(山海珍味)에 비할 바 못 되었지만 공주는 정말이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다는 듯이 아귀아귀 먹어댔다. 곧이어 공주의 뱃속으로 한 그릇의 오리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양에 안차는지 그녀는 두 번째의 오리탕을 주문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오리탕을 시켰을 때 임방이 그녀를 제지(制止)했다. "공주마마 더 이상은 아니되옵니다." 공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임방은 말을 이었다. "며칠 굶으신 듯 하온데... 저자처럼 무공을 익히지 않으신 이상 갑자기 음식 을 많이 드시면 몸에 해롭사옵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쉬시면서 내일을 위 해 원기를 보충하시옵소서." "알겠노라." 묵향은 또다시 자신의 계획이 어긋난 것을 깨닳았다. 돼지처럼 꾸역꾸역 처먹 고 난 후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먹은 것을 다 토하면서 난리를 치기를 기대했 었는데... '하긴... 뭐.... 복수도 이정도 했으면 되었지. 저 좋던 살집이 몇근은 빠졌 을테니까... 이제 슬슬 돌려보내고 나도 본타로 돌아갈 궁리나 해야겠군.' 임방은 원래가 공주마마의 행방불명 때문에 관부에 고용된 현상금 사냥꾼이 다. 그는 무공이 별로 강하지 못한지 거의 3류 수준의 무예를 갖춘 악당들을 사냥했다. 하지만 그의 추적술은 놀라워서 일단 그가 잡고자 마음먹은 상대를 놓쳐본 적이 없었다. 관부에서도 그점을 높이사 공주가 있을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황군과 어림군을 파견하기에 앞서 임방 외에도 5명의 추격에 능한 무 림인들을 급히 고용하여 파견한 것이다. 임방은 원래 이렇게 큰 일에는 끼어들기 싫어했지만 그래도 공주의 납치사건 이라 국가에 대한 얄팍한 충성심으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공주를 무사히 모셨 을 경우 황금 50냥이라는 말에 눈이 뒤집혀 동행들을 추월하여 그들보다 앞서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공실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 기에 공주만 일단 만나면 모든 일이 손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는 공주와 만난 다음 한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흑의위사! 공주를 모시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다. 도망 다니는 경공실력이나 그 침착함... 그리고 며칠씩 굶었다는데도 멀쩡한 태도... 모든 것을 종합해봐도 꽤나 무공을 수련한 자인 것 처럼 보이는데.... 전체적인 분 위기는 무공을 익힌 것 같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무공을 익혔다면 그자는 상당한 무예를 익힌 것이 분명했다. 그건 여태까지 임방이 경험으로잘 알고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저런 시 러배같은 놈들에게 쫓겨서 며칠씩 산속을 헤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놈들에게 쫓기고 있었고 그것을 기화로 자신이 돈을 챙기면서 상대를 도륙내는데 성공은 했지만 아무래도 저놈의 눈치가 도와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있어....' 임방은 공주가 식사를 마치자 그녀를 안내하여 방으로 안내했다. 임방은 그녀 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그 옆에 빌려둔 방으로 들어갔다. 임방은 어깨에 걸어둔 호조를 풀어서 침상 머리맡에다 올려둔 다음 벽에 기대어 쉬기 시작했다. 그로서도 오늘은 아주 힘든 하루였기 때문이다. '무공도 할 줄 모르는 계집을 호위하는건 정말 싫어. 그리고 그 망할놈은 하 나도 도와주지 않다니....' 내심 투덜거리고 있는데... 조금 지나자 흑의위사가 술병을 하나 들고서 들어 오더니 검대를 풀어 탁자위에 올려놨다. 그런다음 의자에 털썩 앉아서는 임방 에게는 예의상이라도 마시겠느냐는 말한마디 없이 혼자서 천천히 마시기 시작 했다. 그 모양을 임방이 이생각 저생각 하면서 멍하니 보고있는데 갑자기 흑 의위사가 입을 열었다. "흐흐흐... 자네는 나를 의심스런 눈으로 보고있군..."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 하지만 임방이 꿀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소리를 안하자 다시 한모금 마신 후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크... 역시 술은 좋은거야... 하지만 자네가 의심스런 눈으로 보는 것 만큼 이나 나도 자네가 의심스럽다네..." "....." "현상금 사냥꾼이라고 했지만... 사실 자네정도 실력을 가진 현상금 사냥꾼도 많지 않을거야. 현상금 사냥꾼 치고는 실력이 너무 좋아. 그리고 대단히 강호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 나는 어느정도는 자네의 신분에 대 해 감을 잡고있는데..." 임방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 다. 탁자위에 올려둔 검집에서 아무도 만지지 않았는데도 검이 쓱 뽑혀나오더 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임방쪽으로 날아왔다. '어기동검(御氣動劍)...' 임방은 대경하여 황급히 상체를 옆으로 젖히며 한손으로는 호조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그것을 쳐내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쏘아져 들어 오는 검의 속도는 놀라울만큼 빨랐다. 그리고 유연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이 미 검은 임방의 목을 꿰뚫기 직전의 위치까지 와있었던 것이다. '이럴수가... 방심했군... 내가 이렇게 죽다니...' 임방이 체념한 찰나 상대의 검은 더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임방의 목에서 반치도 안되는 거리... 임방은 상대의 검을 쳐내지 않고 의아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이런 좋은 기회를 포기해버리는 것으로 보아 상대에게 살심 (殺心)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흑의위사는 또다시 술병을 기울여 한모금 마지막 말을 마쳤다. "자... 사실대로 털어놔 보시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오늘 이 세상에 태어 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무엇을 털어놓으라는 거요?" "네녀석은 누구한테서 무공을 배웠나?" "그건.... 그건 말할 수 없소." 그러자 흑의위사는 마지막으로 한모금 마신다음 술병을 탁자위에 놓고 일어서 서 다가오며 말했다. "꼭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군..." "누가 눈물을 흘릴지는..." 그와 동시에 임방은 비쾌하게 자신의 목 앞에 정지해 있는 상대의 검을 오른 손으로 쳐내면서 동시에 왼손으로 옆에 놓여있는 호조를 잡았다. 아니 한쪽의 호조가 그의 손에 능공섭물(能空攝物)로 끌려들어와 저절로 끼워졌다. 그러면 서 오른발을 들어 족장(足掌;발바닥)에서 그 빌어먹을 녀석을 향해 장풍을 쏘 았다. 하지만 임방의 움직임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어느새 벌써 혈도를....' 임방이 쏜 강맹한 장풍을 흑의위사는 피할 값어치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몸으 로 맞았고 펑하는 소리가 났지만 그 어떤피해도 주지 못했다. 그리고 상대가 그 와중에 언제 임방의 혈도를 짚었는지, 알수도 없을정도로 빠른 순간에 벌 어진 일이었다. 흑의위사는 장풍따위 맞은적도 없다는 듯 서서히 다가오며 말 했다. "쯧쯧쯧... 쓸데없는 수고로 신발에만 구멍을 뚫어놨군. 꼭 눈물을 흘리고 싶 다면 뭐 그것도 좋겠지. 나도 고문하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는 않거든. 하지만 이건 장담할 수 있는데 나한테 고문받고 살아서 나간 녀석은 딱 한녀석 뿐이 라는 것만은 명심하게나." 그 순간 임방은 정말 재수 더럽게도 상대를 잘못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기동검술(御氣動劍術) 따위는 허공을 격하고(空) 능히(能) 물건을(物) 당길수 (攝) 있을정도의 내공조예만 지니면 가능한 기술이다. 능공섭물(能空攝物)의 기법만 죽어라고 연습하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상대가 어기동검술을 펼쳤을 때, 조금 속도가 빠른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상대의 검에 기가 응축되어 발생하는 어기충검(御氣充劍)의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호조만 가진다면 어느정도 상대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의 한수는 그의 마지 막 기대감마저 무참히 부숴버린 것이다. "그 한명은 누구요?" "내 사부가 아끼던 녀석이었지. 꽤 장래가 촉망되던 놈이었는데 그 사실을 일 찍이 알았으니까 살았지 안그러면 염라대왕(閻羅大王)도 그놈이 누군지 못알 아봤을거야. 누구한테서 무공을 배웠는지는 아주 중요해. 내가 아는사람의 제 자일지도 모르거든. 죽고나서 후회하지 말고 빨리 말하라구." 임방은 거의 포기한 듯 털어놨다. 재수없어서 사문(師門)과 원수지간일 가능 성도 있었지만 현재 가주(家主)의 인품으로 보아 원수일 가능성은 없었기에 진실을 말했다. "초씨 세가에서 배웠소." "초씨 세가라... 그렇다면 초우란 놈을 알겠군." 순간 임방은 속으로 찔끔 했지만 자신이 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가주님의 인품은 믿지만 설마 초우 그놈이 못된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허기 야 저자의 실력을 보니 못된짓을 했다면 먼저 초우가 작살이 났겠지... 이렇 게 애궂은 나를 잡고 닥달을 하지는 않겠지.' "알고 있소." "그녀석은 누구지?" "가주의 아들이지 누구겠소?" "자네는 그녀석과 어떤 관계지?" "어떤 관계는요? 그냥 초씨세가에서 무공 좀 익히다가 가주 눈밖에 나서 쫓겨 난 처지인데..." "흐흐흐... 자네의 무공으로 보아허니 겉핥기로 배운게 아니야. 거의 수십년 을 처박혀서 가전(家傳)의 비급(秘級)을 깊이있게 배운 적전제자(適傳弟子)라 구. 안그래? 아까 낮에 써먹은 1초식으로 보아허니 초우란 녀석보다도 몇등급 위더군. 적전이 아니라면 그 가주의 아들보다 자네의 무공이 강할 수는 없 지." "먼저 초우와 어떤 관계인지 말해주면 나도 말을 하겠소." "훗!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야. 전에 한번 내 일을 도와준 적이 있지. 다음에 자네가 그녀석을 만나거든 그때일을 발설하면 혓바닥을 뽑아버리겠다고 한 말 을 잊지 말라고 전하게나." "무슨 일인데 도와준 사람을 그렇게 핍박한다는 거요?" "그건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러니 이제 본론을 시작해 보자구." "내 원래 이름은 초류빈(楚柳濱)이오. 나는 초씨세가에서 자랐고 거기에서 가 전의 비전(秘傳)을 배운 것은 사실이오. 그렇지만 한가지 일에서 가주하고 의 견이 맞지않아 싸운다음 뛰쳐나왔소. 그런다음은 보시다 시피 현상금 사냥꾼 노릇이나 하고있죠." "어떤 의견이 차이가 났는데 사문을 버릴 정도인가?" "그건 말하고싶지 않소." "흐흐흐... 아마 말하는게 자네 건강에 좋을거야." "뭐.... 꼭 숨겨야 할 정도로 구린내 나는 과거도 아니니까. 그때 의견 차이는 사파(邪派)에 대한 가주의 행동이었소. 나는 사파 놈들은 예나 지금이 나 모두 찢어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소. 그놈들의 사악한 행위를 가 주는 그냥 참고있는거요. 그래서...." "웃기는 노릇이군. 사파가 자네한테 무슨짓을 잘 못했다고 모두 찢어죽여야 한다는 거지?" "그건 말하기 싫소. 내 신상에 관한 일이... 또 당탔 알 구 없소. "흐흐흐... 나는 알 권리가 있지. 나도 사파거든." 임방은 흠칫하는 표정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흑의위사를 바라봤다. 사파 의 인물이 공주를 호위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驅었고 羚컥 인곈 중에▼정도 뛰어난 고수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임방이 무슨생각 이 들었는지 안색을 궂히며 물었다. "당신은 마교의 인물이오?" "호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말 돌리지 마시오. 사파의 쓰레기들 중에 당신 정도의 무공을 지닌사람은 없 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오. 있다면 마교 뿐." "그래. 본좌는 마교의 인물이지. 뭐 마교의 인물임을 부인할 생각은 없으니 그 다음을 계속하게나." "지옥혈귀(地獄血鬼) 천진악(天進惡)은 잘 지내고 있소?" "그 녀석이야 잘 지내고 있지. 왜그러나?" 임방은 흑의위사가 '그 녀석'이라고 호칭하는 것에 경악에 물든 표정으로 안 색이 바뀌었다. 마교에는 별로 외부에 잘 알려진 인물이 없었다. 잘 알려진 수뇌부로는 막강한 무공을 지닌 사천왕이 있었고 그 다음 고수로 알려진 인물 은 고루혈마(枯 血魔) 외총관과 음희(淫嬉), 지옥혈귀(地獄血鬼) 정도였다. 그 나머지 인물들은 무림에서 거의 활동을 안하기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사 천왕같은 경우에도 정파에서 삼황오제라고 떠들어대며 8명이나 되는 화경의 고수를 보유하고있음을 자랑으로 삼아대자 심사가 뒤틀린 마교에서 이쪽은 극 마의 고수가 4명있다고 발표했고 또 그 말은 세인들을 공포에 몰아넣기에 충 분했다. 여러문파에 1명씩 있는것과 한 문파에 4명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엄 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옥혈귀라면 마교에서도 대단히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다. 그런데 그런자를 '그녀석'이라 칭할 정도라면 이자는 도대체 어느정도의 직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당... 당신은 누구요?" "자네가 내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주면 나도 말해줄지 모르지." "내 얼굴에 난 흉터를 그놈이 만들었소. 그것도 내가 무림 초출 때... 내 얼 굴이 잘생긴게 마음에 안든다면서 만들어놓은 상처요. 나는 그놈을 죽이기 위 해 죽자고 수련했소. 그런다음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겼을 때 그놈에게 도전을 해보려고 했었는데 가주가 나를 막았고... 서로 다투다가 사문을 뛰쳐나왔소. 그런다음 지옥혈귀를 찾아갔는데 순순히 비무에 응해줬소. 그에게 패한다음 사문에 돌아갈 면목도 없어 그냥 현상금 사냥꾼이나 하고있소." "꽤나 재미있는 얘기군. 지금 자네의 실력이라면 조금 더 노력한다면 지옥혈 귀를 진짜 귀신으로 만들 수 있지. 어때? 내 밑에서 일해보지 않겠나? 그러면 내가 무공을 가르쳐 주지." "당신은 마교인데... 고마운 제의기는 하지만 나는 마교에 들어가지 않겠소." "자네보고 마교도가 되라는 소리가 아니야. 지금 나는 마교놈들에게 쫓기는 처지라고 볼 수 있지. 지금 마교에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중이야. 그래 도 안되겠나?" "하지만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소." "뭐... 못믿어도 하는 수 없지. 나는 묵향이라는 사람일세. 나에대해서는 어 느정도 정보력을 갖춘 집단에게 의뢰를 해보면 금방 알수있을거야. 내가 지금 말해봐야 믿지도 않을테니 나에대해 알아보고 그런다음 믿음이 가면 찾아오게 나." "알겠소. 한번 생각해 보겠소." 묵향은 상대의 혈도를 풀어준 다음 다시 의자에 앉아 탁자위에 놓인 술병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시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일행은 어제 저녘에 만들어둔 식은 만두로 아침식사를 급 히 해결한 후 출발했다. 아직 상대를 완전히 따돌린 것이 아니기에 놈들도 흩 어져서 공주일행을 눈에 불을켜고 찾고있을 테니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 이다. 말(馬)을 구할수도 없었기에 여태껏 해오듯 흑의위사가 공주를 안고 경 공술을 펼쳐 일행은 최대한 빨리 강수(崗守)에 도착할 생각이었다. 일행은 쫓 기는 중이었기에 감히 관도(官道)로 나갈 생각은 못하고 산길로 산길로 달리 고 있는데 앞쪽에서 마차와 함께 말을 탄 5명의 인물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 다. 그들이 최대한 빨리 말을 몰아대는 것으로 보아 아주 급한 용무가 있는 듯 보였다. 묵향은 임방이 말릴사이도 없이 안고있던 공주를 내려놓은 다음 길을 가로막 아 섰다. 곧이어 공주일행에게 가까워진 마차와 그 호위들은 왠 사람이 길을 막고 서있자 급히 말을 멈췄다. "왠 놈들이냐?" 묵향은 진영공주를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분은 진영공주 전하시다. 너희들은 우리들을 강수까지 안내해 줘야겠다." "......."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곧이어 오른쪽에 있던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말했다. "전적으로 그대들을 믿을수는 없는 노릇이니 증거를 제시해 주기 바라오." 그러자 모두의 눈길이 진영공주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곧이어 벌개지더니 앙칼지게 외쳤다. "증거는 무슨 증거란 말이냐? 네녀석들은 본녀가 공주란 사실을 믿지 못하겠 다는 말이냐?" 그녀의 말을 듣고 묵향도 잠시 자신들 패거리의 꼬락서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별행동도 감수해야 하는 무림인들에게는 각 직위를 나타내는 독특 한 문양(文樣)의 명패(名牌)가 있게 마련이지만 공주를 나타내는 패(牌)가 있 다는 말은 자신도 들은바가 없다. 왜그런고 허니 황족인지 아닌지는 호위하는 인물들이 누군지 보면 모두들 아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리고 공주의 표정을 보니 자신을 증거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상대의 이목을 속인답시 고 남장(男裝)을 한 공주나 공주를 호위한다는 인물, 즉 묵향과 임방의 모양 새를 보고 황족이나 황군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공주가 벌개진 얼굴로 대들자 아예 상대는 멸시(蔑視)쪼로 나왔다. "호오... 이건 심하군. 요즘 공주마마들은 황군의 호위도 없이 바깥출입을 하 시는 모양이지?" "그러게 말이야. 시녀도 옷도 노잣돈이 떨어져서 팔아먹으셨군." "요와의 전쟁에서 그 많던 황군은 다죽은 모양이야. 저런놈들이 황군이라 면..." 이러쿵 저러쿵 한소리씩 해대자 공주의 얼굴은 벌개지다 못해 퍼래지더니 악 을 썼다. "저런 발칙한 놈들을... 본녀를 없수이 여기다니... 여봐라. 저놈들을 쳐라." 그러자 여태껏 공주의 말이라고는 귓등으로 듣던 묵향이 얼씨구나 하고 싸늘 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검을 천천히 뽑았다. 묵향이 척 보아도 상대는 정기(精 氣)를 내뿜는 것이 정파를 자처하는 무리들 처럼 보였다. 그런데다가 '저런 놈' 운운하고 있으니 공주한테 화풀이 하기는 글렀으니 새로생긴 화풀이 대상 인 저놈들을 몽땅 다 죽여버린 다음, 그 책임은 공주한테 홀딱 뒤집어 씌울 생각이었다. 사태가 돌아가는 모양을 보던 임방은 급히 앞으로 나서며 묵향을 제지한 다음 상대에게 말했다. "귀하들의 주인에게 한말씀 여쭐 수 있게 해주실 수 없겠소? 그편이 쓸데없이 검을 교환하는 것 보다 좋을거외다." "하하하... 별 미친녀석들을 다보겠군. 길앞을 막아서서 공주 운운 해대더니 이번에는...." 챙! 챙! 챙! 그와동시에 묵향의 검이 그녀석에게 날아갔다. 상대는 말을 더 이상 할 정신 도 없이 몸을 피했지만 묵향의 검은 다행히도 그에게까지 날아오지 않았다. 거의 무방비상태였던 그는 하마터면 목숨이 날아갈 뻔 했지만 간밤에 묵향에 게 혼줄이 났었던 임방이 암암리에 묵향을 주시했고 그에대한 대비를 했던 것 이다. 역시나 묵향의 검이 재빠른 속도로 검집에서 쏘아져나가는 것을 보고 임방도 오른편 호조를 검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던졌고 어기동검술에 의해 조 종되는 묵향의 검을 임방 역시 같은 수법으로 세 번에 걸쳐 막아낸 것이다. 세 번에걸쳐 호조(虎爪)에게 진로를 차단당한 검(劍)은 천천히 미끄러지듯 후퇴하여 묵향의 검집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묵향의 입에서는 싸 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녀석이 감히 본좌가 하는 일을 막는거냐?" "쓸데없이 무력을 쓸 필요는 없지않소?" 그러면서 임방은 품속에서 옥패(玉牌)를 하나 꺼내어 앞의 인물들이 볼수있게 들어보이며 말했다. "본인은 초씨세가의 탈명도(脫命刀) 초류빈(楚柳濱)이란 사람이오. 그대들의 주인을 뵙게 해주시오." 그러자 상대들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그중의한명이 마차로 달려가 낮은 목소 리로 소근거렸다. 곧이어 그자는 돌아와서 정중히 말했다. "아씨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세사람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마차쪽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노기(怒氣)를 거 두지 않은 공주, 김샜다는 표정의 묵향, 그리고 한숨놓은 표정의 초류빈이었 다. 이때 마차 문이 열리면서 얼굴을 면사(面紗)로 가린 여인과 시비(侍婢)인 듯 보이는 여인이 황급히 내리면서 일행을 향해 간단히 예를 취했다. 얼굴은 면 사로 가렸지만 날아갈 듯한 작은 학들이 수놓아져 있는 엷은색 녹의(綠衣)에 감싸져 있는 날씬한 몸매는 주인의 몸에 밴 예절교육에 따라 우아하게 움직이 고 있었다. 그녀는 크고 맑은 눈으로 아직도 들고있는 초류빈의 명패를 바라 보며 초류빈을 향해 물어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날씬한 여자들이 그러하듯 약 간 굵은 편이었지만 탁하지는 않았다. "만나서 반갑군요. 방금 초 공자께서 하신 말이 정말인가요?" "그렇소. 이분께서는 황제폐하의 총애를 받고계시는 진영공주 전하시오." 그러자 그녀는 공주를 향해 우아하게 절을 올리며 사죄 했다. "수하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인 일로..." 그녀의 공손한 태도에 공주는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본녀의 잘못도 있으니 용서하겠노라. 본녀의 일행을 강수에 있는 어림군 사 령부까지 안내해 주기 바란다. 관광 중에 적도들의 기습을 받아 황군들은 모 두들..." 여태까지의 기막힌 고생이 생각나는 듯 공주의 목소리는 후반에 들어 떨리기 시작했고 그를 눈치챈 상대방은 재빨리 공주에게 말했다. "갈길이 머옵니다. 어서 오르소서." 공주가 먼저 마차에 오르자, 그다음은 면사를 쓴 여인이 올랐고, 시녀가 탄 다음 묵향은 시녀의 옆에 앉았다. 그런다음 초류빈이 들어오려 하자 마차 안 의 공간은 넓었지만 묵향이 말했다. "자네는 위야." 씁쓸한 표정으로 마차위의 마부(馬夫) 옆자리에 초류빈이 자리를 잡고 앉는데 그의 귀에 전음이 들려왔다. <내 정체를 공주에게 알리기 싫어서 이번은 넘어가 주겠지만 한번만 더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면 죽을 줄 알아...> "그대는 누구인고?" 면사를 쓴 여인이 공손하게 공주에게 말했다. "소녀는 백운옥(白雲玉)이라 하옵니다." "급한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아니옵니다. 마마를 모셔드린 다음에 처리해도 충분하옵니다." * * * 손... 연한 자색(紫色)이 감도는 기괴한 색깔의 손이었지만 계집의 손처럼 고 왔다. 아무튼 특이한 손이었는데 그 손은 지금 종이 한 장을 들고있었다. 잠 시 지나자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제 목 : 묵향 부교주에 관한 2차 조사 보고서 기 간 : 2년 목 적 : 중간보고 투입인원 : 천마(闡魔) 1호부터 10호. 작 성 자 : 천마 1. 내 용 : 묵향 부교주 축출(逐出) 후 조사에서는 3년에 걸친 대대적인 1차 조사가 행해 졌었지만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 이번 2차 극비 재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사시 작후 1년도 안되었는데도 여태까지의 묵향 부교주에 대한 보고내용이 대단히 많이 외곡되었음이 밝혀졌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 음. 그 이유는 1차 조사는 묵향 부교주의 배후세력 내지는 사조직에 대한 일 제 조사였지만 이번 조사는 조사의 성격을 완전히 달리해 그의 모반설 등의 사실유무나 인위적인 여론조작 등에 초점을 맞춘 결과기도 하지만 삼비대를 이번 조사에서 제외시킨 후그들도 조사대상에 올려놓은 결과라고 볼 수 있 음. 一. 한영영 : 부교주와 함께 무림맹으로 향하는 도중 부교주에게 지독히 쓴 맛을 본 것에 대한 원한으로 대단히 악의에 찬 보고를 올렸었으나 부교주 독 립호위였던 사군자 중 진춘(辰椿), 옥련(玉蓮), 마식(馬殖)에 대한 심문결과 무혐의로 판명됨. 하지만 그가 했던 말 중 자신은 '교주에게만 충성을 하지 나머지에게는 아니야'라는 말은 사실이었음. 그때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 어 교주의 퇴진후 변절(變節)하겠다는 말은 아니었음이 확실함. 二. 장인걸 부교주 : 묵향 부교주에 대한 척결에서 가장 큰 득을 본 인물로 놀랍게도 본교와 암흑마교와의 통합 전에도 일부 사조직을 본교내에 침투시켜 묵향 부교주에 대한 여론을 조작했음이 밝혀졌음. 그 여론조작에 가장 큰 역 할을 한 인물은 혁무상 장로이며 그 외에도 일부 고위급 고수들이 관계된 것 같음. 그들에 대한 확실한 물증을 잡으려면 더욱 많은 시 필요함. 三. 혁무상 장로 : 삼비대의 수장이라는 지위를 이용, 그에대한 모반설 등등 최악의 경우들만을 상정하여 교주께 보고함으로 인해 묵향 부교주와의 갈등을 조성해나간 인물로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나 장인걸 부교주와 상당히 깊은 관 계인 것 같음. 정확한 물증을 잡으려면 이 안건도 시간이 필요함. 四. 마영대(魔影隊) : 묵향 부교주가 포섭한 무리들의 모임이라고 알려졌었기 에 1년여 기간동안 철저하게 조사했지만, 부교주 축출 후 있었던 대대적인 1 차 조사에서도 밝혀지지 않았듯이 허위단체인 것이 확실함. 현재 장인걸 부교주는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으로 심증은 가고있으나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포착하지 못했음. 좀 더 깊게 조사해 나가는데는 더 많 은 인력과 시간이 필요함. 극비리에 조사중이므로 더욱 시간이 많이 들어가고 있음. 거기에 삼비대가 냄새를 맡고 역공작까지 해들어오는 것 같음. 추후 사 항에 대한 지시를 조속히 해주기 바람.> 급기야 그 손은 종이를 움켜쥐었고 곧이어 종이는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감정을 억누른 침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부가 매의 먹이였다니...." 공주 일행이 마차를 몰아 달린지 2시진도 안되어 옆에서 달려가던 무사(武士) 가 마차에 가까이 다가오더니 외쳤다. "추격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자 백운옥이 냉랭히 답했다. "몇이나 되느냐?" "50여기(騎) 정도 됩니다. 앞으로 반시진 정도면 추월당할 것입니다. 지시 를..." "멈춰라. 피를 보고싶다면 그리 해주면 되지. 감히 황실을 우습게 보다니..." 그런다음 공주에게 공손히 말했다. "공주마마, 우선 저들을 응징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괜히 놔두면 무리 들이 모여서 더욱 힘들게 되오니 저들의 수가 적을 때 차례로 치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좋을대로 하거라." "예." 백운옥이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석에 앉아있던 초류빈도 함께 내린 다음 호조 를 양손에 착용하며 적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적들은 다가오기는 했지만 200장(606m)밖에서 대열을 멈춘다음 흩어지면서 마차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약간 당황한 백운옥이 외쳤다. "모두들 조심하라." 그런다음 초류빈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이상하군요... 저들은 수가 저리 많은데 2리 거리를 유지한 채 포위하다 니... 지휘자가 누군지 궁금하군요." "왜그러시오?" "아무래도 활로 공격할 것 같아요. 소녀는 저들이 정면공격을 해올것이라 예 상했었는데..." 그러자 초류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아무래도 제탓인 모양이군요. 어제 저들과 충돌하여 30여명을 베었으니 까 저놈들도 조심할 수밖에 없겠죠." "무림인들은 활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저들은 무림인이 아닌 것 같군 요." "공주마마를 노리는 것으로 보아 반란군도 일부 섞여있다고 봐야 옳을 겁니 다." 이들이 쑤군거리는 동안에 상대는 5명 정도가 한조씩으로 하여 10군데에 자리 를 잡으면서 넓은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완성되자 그 우두머리 인 듯 한 인물이 소리쳤다. "항복하라." 하지만 마차와 그 마차를 호위하고있는 5기의 무사들이 아무런 대꾸를 앉자 곧장 외쳤다. "쏴라." 그와동시에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통상적인 활의 사거리는 1000보(步) 즉, 250장(丈) 정도로 잡는다. 그보다 더 날아가지만 250장이 넘어서면 상대 군사들이 입은 갑주를 관통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내공을 쌓지 않은 인물들이 쏘았을 때 하는 말이고 무 림인이 쏘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진다. 화살(矢)에 내공을 실어 날리면 훨씬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일부 무림인들은 활 다루는 법 을 배우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활보다는 암기를 배운다. 활처럼 덩치큰 물건을 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도 힘들뿐더러 대부분이 단거리에 일대 일 대결을 할 확률이 높기에 오히려 장거리 무기인 활이 거의 쓸모없기 때문이다. 백운옥 등은활이 날아오며 내는 파공성(破空聲)을 듣고는 안색이 굳어졌다. 그 파공성은 상당한 내력이 실려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 는 반란군이 아니라 활쏘기 교육을 일정시간 받은 무림인들이었고 그 화살은 엄청난 기세로 그들을 덮쳤다. 모두들 각기 지닌 병장기를 뽑아들고는 화살을 쳐내기 시작했고 백운옥도 허 리에서 연검을 뽑아든 다음 휘두르기 시작했다. 적들은 처음 일제사격을 가한 후 의외로 상대가 잘 막아내자 그 다음부터는 발사시간을 길게잡아 시간을 끌 면서 천천히 사격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백운옥이 말했다. "저들이 화살을 아끼는 것 같은데... 준비한 화살이 많지않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곧이어 도착할 본대를 기다리는 것이겠죠.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지금 포위망을 돌파하고 도망치는게 좋겠습니다." "저쪽에 활을 날리지 않고 이쪽을 지긋이 보고있는 자가 우두머리 같은데... 같이 가시겠어요?" "영광입니다." "너희들은 마마를 호위하라. 가요!" 그와동시에 백운옥과 초류빈은 한 방향을 향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돌진해 들 어갔다. 상대와의 거리는 200장. 좀 멀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적들도 이쪽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그 두명에게 사격을 집중했다. 이때 그 우 두머리가 말안장에 매여있던 활을 꺼낸 다음 화살을 먹이고 백운옥을 지긋이 겨누더니 백운옥이 50장(150m)거리까지 접근하자 자신이 가진 공력을 최대한 실어서 화살을 날렸다. 피유유융---- 화살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일으키며 백운옥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적으로 백운옥이 연검을 이용해서 살촉을 쳐냈지만 그때서야 그 화살에 얼마나 엄청 난 내력이 들어있는지 알수있었다. 그녀의 힘을 모두 기울여서 막는다면 별것 이 아닐수도 있었지만 날아드는 여러개의 화살에 신경이 분산된 틈을 이용해 서 날아온 이 화살은 다른것보다 몇배의 내력이 실려있었고 그것을 모르고 보 통화살처럼 막은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실수다' 카앙... 가까스로 화살을 쳐내기는 했지만 화살이 지닌 내력에 밀려 백운옥의 신형이 무너지면서 뒤로 조금 밀리며 중심을 잃고는 휘청거렸고 그때 또 다른 화살 한 대가 백운옥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끼약..." 백운옥이 상처를 입는 것을 본 초류빈은 일이 이미 글렀다는 것을 직감하고 뒤로 돌아서며 비틀거리는 백운옥을 왼손으로 껴안고는 날아오는 화살 5대를 쳐낸다음 마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쳐내면서 돌아가자니 처음 돌진해 들어갈때보다 시간이 몇배는 더 걸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제기랄... 사봉(四鳳)에 들어가기에 한가닥 하는줄 알았더니...' 무시무시한 내력을 담은 장소성(長訴聲)이 들려온 것은 이때였다. "우우우우우...." 소리의 시작과 끝이 들려온 거리가 대단한 차이를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정 체불명의 고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초류빈은 백운옥의 어깨에 꼽혀있던 화살을 빼낸 후 금창약을 발라주고 있는 데 그녀가 침중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적일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저들의 표정을 보면 조금 안도하는 것 같지 않소?" 백운옥은 세심하게 금창약을 발라주고 있는 초류빈을 보며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오늘 여기서 뼈를 묻게 될지도..."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시오. 우리들에게도 마지막 희망은 있으니 까..." 이때 마차 안에 있는 공주와 시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호위무 사들이 막지 못한 화살이나 그들의 검에 튕겨나온 화살이 간혹 마차에 맞기도 했기 때문이다. 호위무사나 마부는 탈출을 대비해 말을 우선적으로 보호했기 에 마차까지 신경 쓸 형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도 마차안의 인물들이 아 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무림의 명가(名家)인 백씨세가에서 사용하는 것 이라 마차가 원체 튼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공이 실린 화살이기에 완벽 하게 막아내지는 못했으므로 마차 안쪽으로 조금씩 살촉이 튀어나올때는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이 느긋한 표정으로 주인이 없는 앞자리에 다리를 올려놓으며 편안하게 앉으려고 할 때 공주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본녀를 지킬 생각이 하나도 없지?" 묵향의 다리가 순간적으로 허공에 멈췄다가 다시 내려갔다. 사실 묵향은 이번 여행에 생긴 동반자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될 수있다면 몽땅 다 죽어 버렸으면 더 좋을거라는 생각 중이었다. 그래야 다시 공주를 들볶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 사실을 공주가 눈치 채 버린 것이다. 묵향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헤헤.. 무슨 억지 말씀을..." "어제 임방과 다투는 말을 다 들었노라. 펑 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기에 적이 쳐들어 왔나 싶어 귀를 기울이니..." "하하하... 다 농담입죠. 소인이 어찌 감히 황실을 능멸할 수가..." "그대는 대단한 고수지? 본녀도 황궁안에 갖혀 지냈지만 마교에 대해서는 황 군들간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노라. 그대가 마교의 고수라면..." 마교의 고수라는 말이 나오자 저쪽에서 어쩔 수 없이 듣고있던 시녀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여우같은 년... 줏어들은 것도 많구만...' "하하하... 마교의 잡졸일 뿐입니다. 너무 추켜세우지 마시지요." 묵향이 부인(否認)은 하고있지만 김빠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본녀를 도와준다면 여태껏 있었던 일을 모두 불문(不問)에 부칠 것이 다. 그러니 제발 도와다오." '제기랄...' "그래... 이미 눈치챘다면 할 수 없지." 갑자기 말투가 바뀌자 공주의 안색이 굳어졌다. "사실 노부(老夫)는 황실따위 별로 안중에 두지도 않는다구. 과거부터 무림과 황실은 서로 불가침의 관계였으니까... 이번 일도 푼돈이나 좀 벌려고 시작한 일이었으니 뭐... 도와는 주겠소. 하지만 이 일을 도와주는데 있어서 우선 몇 가지 조건이 있소." "무슨 조건을 말하는 것이냐?" "우선 여태껏 있었던 일가지고 황제에게 과장까지 보태서 일러바쳐 노부를 피 곤하게 하지 말 것. 그리고 수고료를 좀 줘야할 것이고... 이래뵈도 노부는 꽤 몸값이 비싸거든..." "얼마를 원하느냐?" "저 임방이란 녀석이 원한것과 같은 액수. 황금 100냥이면 충분해." "허락하겠노라." "좋았어. 거래는 성립되었군. 하지만 나중에 약속을 어길때는 아무리 깊은 황 궁구석에 숨어있다 해도 노부의 타오르는 분노를 피할 수 없을거야..." 공주는 이 시건방진 무림인이 별로 마음에 들지않는듯한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이 위기를 넘겨놔야 나중에 황군을 동원해서 능지처참(陵遲 處斬)이라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말로야 무슨 말인들 못하고 약속이야 무 슨 약속인들 못하랴,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판에... '못된녀석... 지금은 참지만... 어디 두고보자...' 조금 시간이 지나자 10명의 무림인이 새로이 등장했다. 그들은 하고있는 꼬라 지와는 달리 아주 우아한 자태로 착지(着地)함으로서 자신들의 무공수위를 뽐 내는 듯 했다. 그들은 모두 피처럼 검붉은 색의 적의(赤衣)를 입고있었다. 산 뜻한 붉은색이 아닌 피칠을 한 듯한 검붉은 색인데다가 이들의 몸에서는 기이 하게도 약간의 요기(妖氣)와 사기(邪氣)가 은근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는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이들은 아무래도 정통적인 무공을 수공한 인물 들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 중 한명이 급히 달려온 것과는 달리 느긋한 목소리로 우두머리에게 말했다. "저녀석들이 그렇게 고수란 말이오? 우리들이 나서야 할 만큼?" 그러자 놀랍게도 그 우두머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저 호조(虎爪)를 차고있는 녀석 혼자서 12대(隊)를 몰살시 킨 녀석입니다. 대인들께서 오시기 전에도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는데 힘겹 게 막아냈습죠. 저녀석 말고는 그렇게 뛰어난 고수는 없는 듯 합니다." 그러자 그 적의인은 멀찌기 보이는 초류빈을 지긋이 바라본 다음 말했다. "그렇게 실력이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한번 수하들에게 몸이나 풀어보라 고 하기로 하지..." 적의인과 우두머리가 이제 독안에 들어가버린 생쥐를 잡는 기분으로 느긋한 기분으로 쑤군거리고 있을 때 마차문이 열리더니 묵향이 어슬렁거리며 걸어나 왔다. 묵향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적의인들을 노려보고 있는 초류빈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봐.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흐음... 잘 모르겠소. 저들은 어디서 솟았는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고수들이 오." "흠... 그럼 오늘 황천갈 확률이 높다는 말이 되겠군. 내 말대로 하면 자네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생길거야. 지금 그 계책(計策)을 알려줄테니 한번 실행해 볼 의향(意向)이 있나?" 그러자 초류빈은 귀가 솔깃해져서 물었다. "무슨...?" "하하하... 아주 간단한거지. 본좌의 수하가 되겠다고 맹세한다면 자네를 도 와주겠어." 그러자 옆에서 듣고있던 백운옥이 발끈해서 역정(逆情)을 냈다. "꼭 이런때 농담을 하고싶어요?" "이런.... 본좌는 지금 농담을 하는게 아니야. 너같은 꼬맹이는 가만히 있거 라. 이건 본좌와 이녀석간의 문제야. 너희들이야 죽건살건 나하고 아무런 관 련이 없으니까..." "흐음...." 초류빈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소. 그대의 수하가 되어 드리지. 대신 조건이 있소." "뭔데?" "만약 여기있는 사람들 중한사람이라도 죽는다면 이 계약은 무효(無效)요." "그건 안돼." "왜? 자신이 없소?" "하하하... 꼬맹이가 본좌한테 감히 격장지계를 쓰려 들다니... 쯧쯧... 속아 넘어갈 사람한테 그따위 방법을 써야지. 물론 저녀석들을 다 죽일수야 있겠 지. 하지만 저 쓰레기들이 내가 저 빨간놈들을 모두 죽일때까지 버텨줄지는 아무도 장담을 못하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저놈들 보통녀석들은 아닌 것 같 으니까. 어쩌면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몰라..." 묵향이 쓰레기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수하들을 손까락으로 가리키자 백운옥 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대들었다. "감히 백씨세가의 정예무사들을 보고 쓰레기라니... 네놈의 실력이 얼마나 대 단하기에..." 챙... 연검까지 뽑아들면서 달려들려는 백운옥을 초류빈이 급히 막고있는데 묵향이 말했다. "흥... 다른건 몰라도 어깨에 구멍난 계집 10명이 덤벼도 상대해 줄수있다는 건 사실이지. 자 어떻게 할테냐? 저따위것들을 위해서 여기서 목숨을 버릴거 냐?" "좋소. 모두 다 죽여주시오. 그동안 저들은 내가 최선을 다해서 막아볼테 니..." "흐흐흐... 그럼 거래는 성립되었군." 묵향이 어슬렁거리며 앞으로 걸어나가자 초류빈이 백운옥에게 말했다. "혹시 도(刀)를 가지고 있습니까?" "없는데요..." "그럼 검이라도 하나 빌려주시오." 백운옥이 수하에게 다가가 뭐라고 쑤군거리자 그 수하가 말안장에 비끌려 매 어져 있던 참마도(斬馬刀;관운장이 쓴 언월도와 비슷하게 생긴 마상용 장도) 를 꺼내어 백운옥에게 넘겨줬다. 백운옥은 그것을 받아서 초류빈에게 보이며 물었다. "이거라도 상관 없나요?" "고맙소." 초류빈은 백운옥에게서 참마도를 받아든 다음 그 긴 손잡이를 잘라내어 보통 의 도처럼 만들었다. 그런다음 이제 필요없어진 호조를 옆에 던져버린다음 묵 직한 도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꼭 쥐었다. 역시 이렇게 위험할때는 여태껏 자 신이 배운 도법(刀法)을 써야만 했던 것이다. 그의 사문은 중병(重兵)의 으뜸 인 도(刀)로 일어선 무가(武家)이기에.... 적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저쪽에서 흑의를 입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나오자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쳐라!" 그러자 9명의 적인인들은 각기 목표를 한명씩 정한다음 앞으로 쏘아져 나갔 다. 적들이 쏘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며 묵향도 순식간에 검을 뽑아들면서 앞 으로 달려나갔다. 2리라는 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빠른 시간내에 그들간의 거 리는 좁혀들었고 묵향은 자신을 노리고 들어오는 녀석이 3척길이의 윗부분에 해골같은 모양의 쇳덩이를 붙여놓은 철봉(鐵棒)으로 자신을 향해 휘두르는 것 을 보고 검으로 그놈의 몸을 철봉과 함께 두토막으로 만들어버렸다. 동료의 몸이 두동강이 나는 것을 보고 적의인들은 경악성을 질렀다. "어검술이다. 대라혈망진(大羅血網陣)을 펼쳐랏!" 그와 동시에 이제 8명으로 줄어든 상대가 묵향을 빙 둘러쌌다. 대단히 숙련 된... 재빠른 동작이었다. 그덕분에 묵향이 두 번째 녀석을 노리고 휘두른 검 은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요절낼 수 없었다. 적의인들은 묵향을 빙 둘러싼 다음 철봉의 해골이 위로가도록 들고 서서는 주문을 외워대 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묵향의 검이 그중 한놈의 몸통을 향해 날아갔지만 상 대의 몸 앞에는 거대한 방패가 있는 것처럼 그의 몸을 건드리지 못하고 뒤로 튕겨났던 것이다. "뭐지... 이... 끈적한 기분은..." 적의인들은 일단 진세를 펼치기 시작하자 이상한 주문(呪文)을 더욱 빠르게 외워대기 시작했다. 이때 묵향의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푸른색으로 불 타오르는 것 같은 형상을 띈 검이 묵향의 손을 벗어나자마자 사방에 부딪쳐 갔지만 끝내는 상대의 진세를 뚫지는 못했다. 묵향은 5군데를 찔러댄 다음 진 세의 반탄력 때문에 튕겨져 나오는 검을 회수하면서 후회스런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제기랄... 이럴줄 알았으면 진법공부를 좀 해두는 건데..." 유백사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것이 후회스럽기는 했지만 뭐 그렇게 크게 후회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상대의 진법안에 갖힌 다음 묵향은 이게 예사로운 진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닳았던 것이다. 아직 최선을 다한 것은 아 니었지만 이기어검(以氣御劍)을 튕겨내는 것은 두 번째로 치고 무시무시한 요 기(妖氣)가 뿜어져 나오는 진법에 대해서는 들은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자.' 묵향은 쾌속하게 위로 몸을 날렸다. 이번은 최선을 다한것이었기에 적의인들 은 묵향의 움직임을 눈길로도 따라오지 못했다. 하지만 묵향은 2장 반정도 높 에서 무시무시한 힘에 튕겨져서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가 다시 튕기듯이 일어 섰다. 아래에서 엄청난 흡입력(吸入力)으로 당겨대는 것은 둘째치고 위에다가 무슨 눈에 보이지 않는 뚜껑을 해덮은 것 처럼 반탄력이 그를 튕겨냈던 것이 다. 흑의인이 안에서 몇번 요동을 치자 거의 진세가 깨어지기 일보직전까지 가는 것을 보고 뒤에 남아있던 적의인들의 우두머리는 다급히 무사들의 우두머리에 게 지시했다. "저자가 정말 대단한 고수인 모양이오. 본좌는 저녀석을 막을테니 그대는 나 머지를 처치해 주기 바라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세로 달려가서 진법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더니 외쳤다. "환형마종대법(幻形魔悰大法)을 펼칠테니 모두들 주의해라." 그러자 적의인들은 좀 더 굳어진 표정으로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흑의인과 싸우고 있는 동안 빙 둘러싸고있던 무사들이 각기 무기를 뽑아들고 는 마차를 호위하고있는 인물들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적의인의 우두머리는 주위의 다른 적의인들이 외치는 주문과는 다른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며 그의 손을 앞으로 천천히 뻗었다. 그의 손에서는 검붉은색 기류가 쏟아져 나오며 흑의인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반구(半球)안으로 들어갔 다. 곧이어 흑의인을 기준으로 반구형태의 검붉은색 반구형이 육안으로도 보 일정도가 되어버렸다. 묵향은 적의인이 한명 더 가세한 다음 쏟아져 들어온 지독한 독기(毒氣) 때문 에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아무리 현경의 고수라고 해도 이런 지독한 독 기에서 오랜시간 버티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자 자신의 생각이 조금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 지독한 독 기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힘이 천천히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 다. '이놈의 진세는 공력까지 빨아들이나? 더 이상 공력이 빠져나가기 전에 일격 을...' 묵향은 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머리위로 검을 들어올린 자세에서 자신의 공 력을 끌어모아 검강을 뿜어냈다. 수백개의 검강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진 세에 충돌했다. 적의인들은 그 충격에 버티지 못하고 2장정도 뒤로 밀려나갔 다. 그들은 자세를 바로하기 위해 천근추(千斤墜)의 신법을 사용했기에 밀려 난 그들의 발은 반척은 땅속에 박힌 상태에서 밀렸으므로 땅바닥에 깊은 흔적 을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그들은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일 단 묵향의 공세를 막아낸 적의인의 우두머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 까지 가세한 대라혈망진이 깨질뻔 한 것이다. 거기에 상대는 환형마종대법까 지 펼쳤는데 그 지독한 사망시독(死亡屍毒)에도 불구하고 혈수(血水)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아니 아예 중독증상 자체를 보이지 않고있다는 것이 그 를 더욱 놀라게 했다. 묵향이 혈의인들과 싸우고 있을 때 마차 옆에서도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 었다. 그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과거 초씨세가가 자랑했던 신예고수 초 류빈이었다. 그가 왜 도중에 행방불명이 되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소문이 난무했었지만 초씨세가에서 일언반구(一言半句) 없다보니 자연 기세가 수그러 들어버렸었다. 하지만 과거 칠룡사봉의 명단에 들어있었던 그였지만 기마무사 들의 우두머리 등 고수 10여명이 한꺼번에 무림의 도의(道義)를 무시한 채 집 단공격을 해대니 자신의 한몸 사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백운옥의 경우 뛰어난 무예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실전경험이 너무나 미숙했고 거기에 어깨에 구멍까지 뚫려있다보니 자신이 지닌바 실력의 5성도 발휘하지 못하고 5명의 기마무사들의 참마도를 피하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백씨세가 의 여고수가 이모양이니 그 수하들이야 말할바도 못된다. 일대일이라면 상대 도 안되겠지만 7명이 50명을 상대하자니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적들은 장병(長兵)인 참마도나 창(槍)을 이용하여 간접공격을 퍼부을 뿐 직접적인 난타전을 벌이지 않고있었다. 죽자고 싸워봐야 사상자만 늘어날 것이니... 자신들은 현상유지만 한 채 이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고만 있으 면 든든한 후원자인 저 혈의인들이 까만옷 입은 녀석을 없애버린 다음 깨끗한 뒷처리를 해줄것으로 믿고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초류빈의 경우도 마교의 고수... 그것도 자신의 원수 우외총관 지옥혈귀를 보고 "그녀석"이라고 부를 정도로 고위급의 고수가 이런 시골에 나타난 겉멋만 잔뜩 낸 저빨간놈들에게 질 리가 없다고 믿고는 시간을 끌고있었으니 서로간에 칼부림은 심하게 오고 갔지만 정작 다치는 사람은 거의 없는 평행선상을 달리는 대결이 벌어지고 있 었던 것이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우연히 엄청난 실력을 가진 혈의인들을 만난 것은 묵향에게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시각을 뒤집으면 구휘 이후로 아무도 올라서지 못했다는 현경의 고수와 우연히 만난 혈의인들에게도 그것은 그들이 상상도 해보지 못한 최악의 재난이었다. 마교와의 치열한 전쟁 이후에 개발 된, 초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라혈망진을 조금의 여유만 준다면 깨버릴 정도로 막강한 무공을 가진데다가, 천령강시(千逞彊屍)조차 혈수(血 水)로 만들어버린다는 환형마종대법을 펼쳤는데도 끄떡없는 괴물.... 혈의인 들의 우두머리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정도로 놀랐지만, 자신이 감정을 드러 내면 수하들이 더욱 동요할것이 분명하기에 억지로 감정을 추스리며 마지막 발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죽건살건 그건 두 번째 문제였 다. "굉뢰사멸파(宏賴邪滅破)를 쓸테니 모두들 충격에 대비해랏." 그러자 혈의인들은 그 자리에서 2장 정도씩 더 뒤로 물러서며 온 힘을 다 기 울여 주문을 외워대기 시작했다. 여기서 조금만 실수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것 이다.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수하들이 대비태세에 들어서자 왼손의 손톱을 이용하 여 오른손 손바닥에 깊은 상처를 만들었다. 깊은 상처가 만들어지자 곧이어 피가 솟구쳐 흐르기 시작했다. 혈의인은 우두머리는 상처입은 오른손을 앞으 로 들어올려 흑의인을 가리키며 자신이 가진 모든 암흑의 기운을 끌어모아 주 문을 외워대기 시작했다. "저 머나먼 역천(逆天)의 대지(大地)에서 강림(降臨)하신 암흑의 마신(魔神) 이시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신 그 강대한 힘! 위대한 파멸의 힘을 생(生)과 사(死),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둠의 계약에 따라 이 몸에 부여 하소서." 그러자 그의 오른손에서 흘러내리던 피와 함께 검은색의 어둠의 기운이 뭉쳐 지며 검붉은 덩어리가 천천히 커지기 시작했다. 혈의인들의 우두머리의 오른 손 끝부분에서 검붉은 덩어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있을 때,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흑의인의 검에서는 안개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 했고 그 안개같은 것은 급기야 혈의인들이 만든 대라혈망진과 충돌을 일으키 기 시작했다. 혈의인들의 우두머리가 봤을 때 그것은 호신(護身)을 위한 무공 인 듯 보였지만 방어적인 개념보다는 공격적인 개념이 앞서있는 무공인 듯 보 였다. 그만큼 안개와 같은 것은 강력한 힘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더 이상 흑의인의 행동에 신경을 쓸 처지가 못되었다.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분산되면 자신의 목 숨은 저 찢어죽일놈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이 굉뢰사멸파에게 먹혀버릴것이기 때문이었다. 안개같은 기운이 더욱 짙어질수록 혈의인들은 가중되는 압력에 시달려야 했고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은 땅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기며 조금씩 조금씩 미세하게 뒤로 밀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도 뒤로 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혈 의인들의 우두머리는 더 이상 굉뢰사멸파를 키우기 위해 시간을 끌다가는 무 슨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압박감을 받기 시작했다. 그도.... 그의 수하들도 거의 정체불명의 고수 한명때문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받아랏!" 검붉은 기운이 안개와 같은 기운을 뚫고 들어가며 흑의인을 향해 쏘아져 들어 갔을 때 그 흑의인도 그것을 눈치채고는 검붉은 기운을 향해 엄청난 강기의 세례를 퍼부었다. 강기다발과 검붉은 기운은 흑의인으로부터 불과 3장도 안되 는 거리에서 충돌했고 무시무시한 대폭발이 일어났다. 혈의인들의 우두머리가 만들어낸 굉뢰사멸파는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 과 함께 부딪친 강기의 덩어리 또한 그 파괴력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런 두 극강의 기운이 함께 부딪쳤으니 그 충격파는 정말이지 혈의인의 우두머리 나 묵향도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혈의인들의 우두머리는 대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피해랏"하는 말을 내ㅂ으며 뒤로 날렵한 신법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 무시무시한 폭발을 정예라고는 하지 만 당주급도 안되는 8명의 수하들과 외당당주인 자신만으로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 혈의인의 우두 머리는 뒤로 빠지고 싶었다. 그리고 살고싶었다. 하지만 그 폭발의 충격파는 그가 "피해랏"하는 말을 내뱉을 시간도 주지 않고 그들을 덮쳐버렸으니 당연 히 신법자체도 펼칠 시간조차 없었다. 9명의 혈의인들이 피떡이 되어 사방으 로 튕겨나간 것은 천지가 진동하는 대폭발음과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지독한 충격파에 사방에서 피튀기며 싸우던 기마무사들의 싸움도 어느새 중단되어버렸다. 그 엄청난 충격파의 회오리를 바라보며 백운옥이 핼쑥해진 안색으로 초류빈에 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일이 벌어진 거죠?" "글쎄..." 이때 뿌연 먼지구름 속에서 한 인영(人影)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 저속에서도 생존자가 있다니..." 모두들 아연한 표정으로 그 생존자에게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가 누구냐에 따라 결판이 날테니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자욱한 먼지를 뚫고 다 헤어져서 너덜거리는 흑 의를 걸친 인물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어슬렁거리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러 더니 그 사내는 갑자기 시커먼 피를 토하면서 투덜거렸다. "우웩!.... 제기랄.... 그놈의 독기(毒氣) 정말 대단하군..." 그 모양을 보자 추격대의 우두머리는 싸울기분이 싹 달아나버렸다. 나중에 합 류했던 10명의 혈의인들은 무림에 그렇게 잘 알려진 집단에 소속된 무리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무공이 약하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자신도 그들의 정체를 처음 들었을 때 턱이 빠지는 줄 알았을 정도였으니 까... 그런데 그자들을 모두 한꺼번에 헤치우고 투덜거리며 나오다니... 이건 정말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제기랄... 후퇴하랏!" 기마대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장면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초류빈은 저 쪽에서 투덜거리며 걸어오는 흑의인을 보고 약간 어감을 비꼬며 말했다. "뭔가 있을거라고 하더니 정말 한가닥 하던 놈들이었던 모양이죠?" 흑의인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한가닥 하기는 했지. 이봐, 옷있으면 한벌 가져다 줘." "왜요?" "이 옷은 독기에 쩔어서 자네들 근처에 가지도 못하겠어. 무슨놈의 독기가 이 렇게 강한지 옷이 완전히 삭아서 퍼석거릴 지경이니까..." 그러면서 묵향이 한쪽 옷섶을 슬며시 잡았는데 흙덩어리로 만들어놓은 것처럼 파삭거리며 바스러지는 것을 보고 초류빈이 백운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초 류빈은 여분의 옷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무언의 질문을 보낸 것이다. 그 러자 백운옥 또한 수하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또한 남자옷을 가지고 있 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수하 한명이 마차위의 짐보따리를 뒤져 옷을 가지고 다떨어진 흑의를 입고있는 자에게 걸어갔다. 묵향은 그자가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외쳤다. "잠깐... 옷만 이리 던져라. 죽고싶지 않으면..." 그는 옷을 뚤뚤 말아서 흑의인에게 던졌다. 그러자 흑의인은 모두가 보는 상 태에서도 거리낌없이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오히려 너덜거리는 속옷까지 과감하게 벗어던지는 묵향 때문에 낮뜨거워 얼굴을 돌린것은 백운옥 쪽이었 다. 백운옥이 잠시 시선을 다른방향으로 돌린사이 수하가 던져줬던 백의(白 衣)로 갈아입은 묵향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를 보고 초류빈이 물었다. "피를 토하시던데... 내상약을 드시지요?" "아니야. 내상 때문에 피를 토한게 아니야. 체내로 침투한 독기를 모아 토한 것 뿐이다. 제기랄... 왠만한 독기는 그래도 버티는데... 이번거는 좀 심하더 군. 이제 출발하기로 하지." * * * 거대한 석실(石室)... 석실의 내부는 호화롭기 그지없다. 수많은 양각(陽刻) 으로 아로새겨진 벽화(壁畵)들이 생동감 넘치게 조각되어있다. 너무나도 사실 적이라 살아서 튀어나올 것 같은 조각들... 피튀기는 지옥의 수라도(修羅圖) 가 너무나도 생동감있게 펼쳐져있어 피라도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다. 거기 에 그 방 주인의 격조(格調) 높은 취향에 어울리게 금, 은, 마노(瑪瑙), 유리 (琉璃), 홍옥(紅玉) 등 갖가지 보석으로 형형색색 단장을 했기에 그 조각들은 더욱 현실감이 나는지도 모른다.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 바닥에서 5척이나 솟아있는 단상 앞에는 5개의 금으로 만든 향로(香爐)가 설 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향로 2장 뒷편에 높직하게 설치된 태사의 위에 거만 하게 앉아있는 인물은 아지랑이 같은 향연에 가려 단상 아래에서는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마도 수하들에게 꽤나 신비한척 하는게 취미인 듯한 인물인 모양인데 그 인물이 지금 경악에 찬 노호성을 저 밑에 부복하고 있는 재수없는 수하에게 터트리고 있었다. "뭣이라고?" "진천왕을 돕기위해 파견되었던 외당당주이하 혈???대 대원 9명이 죽음을 당 했습니다. 하명(下命)을..." "도대체 흉수는 어떤놈들이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한명이라는 사실 외에는 정보가 거의...." "무어라?" "그들과 동행했었던 무사의 증언에 따르면 흑의를 입은 한명이 그들을 죽였다 고 했습니다." "그 흑의를 입은 자가 기습이나 암습을 가했나?" "정면대결이라 들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어떤놈이 정면대결로 그들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냐? 모 종의 암기라도 사용했겠지... 그렇지 않다면 놈이 화경의 고수라 해도 깊은 내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클 터... 부근의 약방이나 의원을 이잡듯이 뒤져서라 도 그놈을 찾아내라." "존명!" * * * 아늑한 방안 다과(茶菓)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건만 화기애애한 담소가 오가는 것이 아니라 숨통이 막힐듯한 분위기였다. 누가 검을 당장 뽑아든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을정도의 괴괴한 분위기.... 둘의 복색은 저마다 달랐 지만 하나의 큰 공통점이 있었다. 마기(魔氣)... 두사람은 모두 마기를 은근 히 뿜어내고 있었다. 이때 탁자의 상석에 앉은 인물이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오랜 친우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화급(火急)을 다투는 일이다." 그러면서 그는 은은한 자색(紫色)을 띄는 손을 품속에 넣어 봉서(封書)를 꺼 내어 건네주며 말했다. "그에게 전하라. 그리고 재삼 당부하지만 지금 행할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함께 동행할 수하들에게도 최후의 순간까지 목적지를 말하지 말아야 한 다. 이 방을 나선다음 그 누구도 믿지 말라.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 모르 기 때문이다." "만약 배신을 당한다면... 속하만으로는 좀..." "배신을 당한다면 서신이 적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기필코 없애버려라. 다 행히도 그에게 도착한다면 그 서신을 건네주며 그에게 말하라. 조만간에 본좌 의 성의(誠意)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 "존명!" "그대를 택한 것은 어떤 일이 닥쳐도 해낼 수 있을것이라는 것을 본좌가 믿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있어도 서신을 전하겠습니다." 따뜻한 가을햇살을 받으며 한 사내가 장작더미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 다. 군데군데 주근깨가 박혀있는 그리 잘생기지 못한 얼굴에 언제 씻었는지 땟물이 흐르는 얼굴로 헤 벌어진 입술 옆으로 침까지 흘리는 걸 보니 이제 조 는 단계를 건너뛰어 아예 꿈나라로 입문(入門)하는 모양이다. 그의 옆에는 아 직 패지 못한 통나무들이 반너머 쌓여있는 것을 보면 한참 장작을 패다가 잠 깐 휴식을 취한다고 기대 앉은 것이 탈인 모양이다. 고달픈 하인생활에 이런 기가막히게 달디단 휴식을 잠시나마 취하는게 무슨 큰일이겠냐고 모두들 생각하겠지만 지금은 문제가 달랐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의 앞에 못마땅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 끓어오르는 것을 참으며 점잖게 사내가 불렀지만 꿈나라에 한다리를 걸친 이 속편한 양반에게 그게 들릴 리가 없다. 하지만 꿈나라에 들어간 하인에게는 불행하게도 지금 그를 부르는 이양반은 평소에도 말보다는 손이 빠른 사람이 었으니... 퍽! 그 사내의 손이 매운 듯 완전히 얼굴이 반바퀴는 돌아갔지만 하인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황감한 표정으로 비굴하게 말했다. "크악... 나오셨습니까요? 나으리..." "쯧쯧쯧... 장작 겨우 그거 패놓고 잠이 오더냐? 이 밥버러지야. 빨리 그거 패놓고 부엌의 물통들에 물을 가득 부어놔라. 알겠느냐?" 말이 물통들이지 이 많은 식구가 한끼를 먹는데 들어가는 물이 작은량이 아니 었다. 평소에도 세명이 달라붙어서 묵직한 물통을 1시진은 죽자고 져날라야 하는데... 그 때문에 모두들 물운반을 싫어하기에 순번을 돌려가며 하고있었 다. 하지만 주근깨 하인같은 경우 물운반 대상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왜냐하 면 그는 이곳에 온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이란 대단히 소중한 것이기에 독같은 것을 탈수도 있으니까 믿을 수 있는 하인들에게만 이 작업을 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주근깨 하인도 하지 않아도 될일을 벌칙으로 떠 맏은 것이지만 지어놓은 죄가 있기에 반발을 할수도 없는노릇이라 그는 체념 한 듯한 구슬픈 표정으로 답했다. "예...." 하지만 놀랍게도 그 사내가 멀리 사라지자 멍청하게 보이던 그의 눈에서 번쩍 하고 빛이 났다. 하지만 그것은 나타날때도 갑작스러웠지만 곧이어 사라졌다. '흐흐흐... 물이라... 이 기회를 만드려고 일부러 자는척 했는 줄은 몰랐을 걸....' * * * "제기랄..." 이곳은 정말 마음에 안드는 곳이다. 외곽의 담장을 따라 곳곳에 수많은 고수 들이 숨어서 정말이지 지독할 정도로 보초를 서고 있다. 물론 동편에 있는 창 고들에는 곡식이나 각종 값어치 있는 물건들이 많이 들어있으니 그정도 경계 는 해야겠지... 사실 이정도 감시망이 펼쳐져 있다면 도둑 걱정은 평생가도록 안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로서는 더욱 마음에 안드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내당(內堂)과 외당(外堂)의 사이에 지독한 진법이 펼쳐져 있다는 점이다. 낮 동안의 서너시진 정도는 일부 진법이 해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일부가 정 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외길... 딱 통로 1개만 개방되는 것이다. 거기에 살 벌한 고수들 10여명이 배치되어 철저하게 출입인들을 감시한다. 도대체 내당 안에 금덩어리를 얼마나 쌓아뒀기에 저정도까지나 할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게 만드는 놈들이다. 아마 황궁이라도 이정도까지는 경계를 하지 않으리라... 그는 오늘도 산책이라는 핑계로... 아니지 이놈의 산책... '달 구경'이라는 말도 모두들 눈치챈지 오래다. 달 구경은 핑계고 그가 정연(鄭蓮)이 년하고 눈이 맞아서 쏙닥거리러 밤마다 나간다는 건 모르는 놈이 거의 없는 사실이었 으니까... 정연이는 마당이나 방청소 하는 계집인데 사실 두리뭉실하게 생긴 것이 조금 귀여운 맛은 있는지 몰라도 도저히 그의 입으로도 차마 예쁘다는 말은 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있는 하녀다. 이틀전에 이르러서야 그는 천신만 고 끝에 정연이의 입술에 가벼운... 정말이지 가벼운 뽀뽀를 할 수 있었다. 근본(根本)이 천생(賤生)이라 사내들하고 함께 부대끼며 살다 보니 닳고 닳아 가지고 왠만한 칭찬으로는 넘어오지 않아서, 정말 마음속으로 찔리는 것을 느 끼며 눈 꽉 감고 예쁘다는 칭찬을(부처님 용서하세요. 저는 그날 거짓말을 하 고야 말았답니다.) 해줘야만 했다. 그놈의 입술이 뭔지... 그날따라 왜그리도 위에서 뚫어지게 노려보는 달님에게 미안하던지... 역시 거짓말은 하면 할수 록 버릇되니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는 천천히 정연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누가 봐도 산책 하는 것처럼 점잖을 빼면서 주위를 찬찬히 훑어보며 느긋하게 걸었다. 그리고 오늘은 달도 거의 누가 씹어먹었는지 자그만해져 있었지만 뭐 며칠 더 지나고 나면 다시 언제나처럼 동그래질테니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쨋든 작 더라도 달은 떠있었고 그는 그것을 본다는 핑계로 나온것이니까... '떠그랄... 모두들 내가 왜 여기있는지 다 알고있겠지...' 그가 걸어가는 길 왼편으로는 1장 반은 됨직한 담장이 둘러져 있다. 내당과 외당 사이에는 두 개의 담이 쌓여있고 담과 담 사이에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 다. 그가 걸어가는 길의 왼편 담을 통해 으스스한 살기(殺氣)가 느껴지는 것 이 하인들 사이에 나도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그 담 주변으로는 2장 (6m) 정도의 길이 나있기에 한밤에 산책하기에 제법 그럴 듯 했다. 그가 정연 이의 입술을 훔친 곳도 담에서 2,3장 떨어져서 세워진 건물들 사이의 으슥한 장소였으니까... 계집은 일단 남이 안보는 으슥한 곳으로 유인을 한 다음 누 가 들어도 거짓말임이 확실한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꼬드겨도 간단히 넘어오 는 걸 보면 바보는 바보인 모양이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가 끝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검은 그림자 하나 가 담안에서 튀어나오며 손살같이 암흑의 대지를 가르며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그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사실 그 검은 그림자들 이 움직이는 것을 이 달밤에 볼 수 있다면 이미 하인노릇은 그만둬도 될 것이 다. 어디를 가도 칼차고 밥먹을 수 있을테니, 이놈의 힘든 하인노릇을 할 필 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눈치채지 못하고 걸어가던 그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땡땡땡... "암습이다!" "놈을 놓치지 마랏!" 곳곳에서 횃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의 앞이나 윗쪽으로 20여개의 검 은 그림자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그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대 신 그는 정연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난리가 났으니 그 눈치없는 년을 방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멍청하게 서성거리다가 잘못 걸리 면 없는죄를 뒤집어쓰고 시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달음박 질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눈앞에 다섯명의 흑의인들이 살 기를 풍기며 서있었던 것이다. "헉..." "네놈은 누구냐?" "길지(佶止)라 하옵니다요, 나으리. 짐나르는 하인이굽시요." "어디를 가는 길이냐?" "저... 달구경하러..." "뭣이?" 흑의인들 중의 한명이 언제 다가왔는지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다가온다 싶자 벌써 그의 몸은 상대의 우왁스러운 손아귀에 잡혀 공중에 대롱거리고 있었다. "이놈이 노부를 능멸하려 들어?" 이때 또다른 흑의인이 한명 나타나면서 그는 상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 다. "그는 아닙니다. 요즘들어 계집종하고 눈이맞아서 달구경하는 놈입니다. 매일 이시간에 주위를 배회하니까요. 그리고 저쪽에서부터 걸어오는 것을 제가 보 고있었습니다. 저하고 둘은 여기 남았고 나머지는 이자의 앞쪽으로 지나간 검 은 옷 입은 놈을 쫓아갔습니다." 그 보초의 보고가 거의 끝나기도 전에 5명의 흑의인들은 보초가 가르킨 방향 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 도대체 왜 갑자기 5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궁금해하는 듯한, 멍청한 표정을 하고있는 하인 한명을 뒤로 남겨 두고... * * * 아직도 잠이 들깬 목소리였지만 어딘지 초조함이 감추어진 목소리였다. "그놈은 잡았습니까?" 그러자 설무지 앞에 서있는 흑의인은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즉시 답했다. "예. 하지만 생포하지는 못했습니다. 품속에 지니고 있던 독으로 자결했습니 다." "흐음... 뒤를 캐기는 힘들겠군요. 하기야 마교 아니면 무림맹의 짓일테니... 뭐 상관은 없겠지요. 참... 그는 어찌 되었나요?" "발견 했을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즉사(卽死)였습니다." "사인(死因)은 뭐였지요?" "비수(匕首)때문이었습니다. 놈들도 독따위로는 안되는 것을 아니까 비수에 강한 미혼약(迷昏藥)과 지독한 춘약으로 알려진 대라환락분(大羅歡樂粉)을 ㅆ 은 것에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하나를 더해서 그것들을 비수에 발라 사용했습니다. 왜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겁니다." "호위들은?" "모두들 자고 있었기에 죽은자는 없습니다. 사실 그를 꼭 호위할 필요는 그들 에게 없었으니까요. 놈이 암습을 가하기 전에 수면제(睡眠劑)를 물에 섞었기 에... 아주 천천히 작용하는 것을 미량 섞었기에 즉시 반응이 나타나지않은 데다가 일단 잠든 사람들은 일어나기 어려웠고... 또 보초들은 심한 졸음이 올 정도였으니... 대응이 한박자 늦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어쨋든 그놈을 잡 아놓고 보니까 외당에서 하인노릇하던 녀석인데 온지 3개월 정도밖에 안되어 물 나를 처지는 아니었는데 낮에 졸다가 들켜서 물을 운반하라는 벌칙을 받은 모양입니다." "흐음... 어쩌면 살수를 도운 놈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 벌준 녀석부터 시작해 서 외당쪽의 의심나는 인물들을 철저히 감시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내당쪽에 우물이 완성될때까지 외당에서 들여오는 물을 철저히 조사하세요. 또다시 이 런 일이 벌어질수도 있으니까요." "예. 암습을 한 놈이 도주하는 중에 붉은색 신호탄을 하늘로 쏴 올렸습니다. 모두 세 개의 신호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푸른색과 노란색이 나는 것이 그 놈의 품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놈도 살아서 도망가기는 그른줄 알 았을테니 성공여부를 가지고 어떤 약속을 한 모양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요? 사실 하급 무사들에게는 지금 타주께서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흐음... 타주께서 건재하다고 수하들을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할수도 없는 입장이니... 중상(重傷)으로 합시다." "예?" "타주께서 중상을 당하셨다고 소문을 내세요. 그리고 태백산 비밀 분타에도 이 사실을 알리시오. 염왕적자 대장에게 될 수있다면 빨리 그를 찾아 오라고 전하세요. 그리고 믿을만한 고수 몇 명을 이쪽으로 돌리고 하위급 고수들은 100여명만 남기고 모두들 빠른 시일내에 태백산으로 보내세요. 최악의 경우 조만간에 적의 기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 "잠깐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들어오시오" 백운옥은 초류빈의 허락에 방문을 살며시 열고는 실내로 들어왔다. 묵향은 탁 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초류빈은 침상에서 일어나서 탁자쪽으로 걸어 오면서 말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백운옥이 자리에 앉자 초류빈이 궁금한 듯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예. 내일 오후면 강수에 도착할 수 있을테고... 그 다음 일정이 없으시다면 소녀를 조금 도와주실수는 없겠는지요?"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그러자 백운옥은 마음에 안든다는 듯...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묵향을 의심스 런 눈초리로 한번 쏘아본 다음 입을 열었다. "신검대협(神劍大俠)에 관계된 일이에요." 가만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묵향의 눈섭이 꿈틀했다. 하지만 묵향은 대화에 흥미가 없다는 듯 계속 술을 마셨고 초류빈이 놀라운 듯이 반문했을 뿐이다. "신검대협이요?" "예. 오래 전 서문세가에서 우연히 지도(地圖) 한 장을 입수했어요. 하지만 그걸 해독할 수 없었기에 예로부터 지식이 뛰어난 남궁세가에 의뢰를 했어요. 남궁세가는 몇 달에 걸쳐 그 지도를 해독했고 그 결론은 놀라운 것이었죠. 신 검대협의 무덤이 있는 위치..." "신검대협의 무덤이라구요? 정말입니까?" "예. 그걸 알아낸 남궁세가에서는 서문세가 모르게 그들이 그 무덤을 찾으려 고 했고 뒤늦게 눈치챈 서문세가와 암중으로 충돌이 있었죠. 그러면서 시간을 끄는 동안 그 사실이 조용히 무림에 퍼진거에요. 지금은 꽤 많은 문파들이 그 사실을 알고있어요. 신검대협이 남긴 것이라면 모든 무림인들의 유산이 아니 겠어요? 그래서 어떤 한 문파가 그걸 독점하지 못하게 막는사이 그 소문은 더 욱 퍼져버려 지금은 쓸만한 정보력이 있는 문파들은 다 알고있는 지경에 이르 러버렸죠. 마교쪽에서도 마수를 뻗쳐오는 것 같고... 어쩌면 그걸 두고 무림 사상 최악의 혈투라도 벌어질 지경이라구요." "하지만 누군가가 이간질 하려고 일부러 만들어놓은 게 아닐까요?" "아니에요. 진짜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요. 지금 거의 다 찾았는데 지독한 진법을 겹겹히 쳐놨어요. 그중에는 오래전에 사라진 것들도 있어요. 원체 방 비가 대단하다 보니 한 문파가 조용히 삼키기는 어렵게 되어버렸고, 그렇다고 딴 문파에게 그걸 양보하자니 아쉽고... 그래서 지금은 일부 문파들끼리 뭉쳐 서 서로간에 암중대결을 펼치는 중이죠." "그런말을 들은적이 없었는데..." "그거야 당연하죠. 어느정도 소문이 퍼져가던 시점에서 무림맹이 나서서 소문 을 차단했으니까요. 지금 상황은 무덤 주변은 무림맹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이 지키고 있어요. 그리고 그 외곽은 사파연맹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이 지키고 있죠. 아직은 진법 때문에 무덤에 진입하지 못한관계로 서로간에 균형이 이루 어지고 있지만 진법이 파괴되기만 한다면 그 다음은..." "엄청난 충돌이 벌어질거요." "맞아요. 그래서 아직까지 진법을 파괴하지 않고 있죠. 진랑이에게 들으니 묵 향 대협께서는 천마신교에 몸담고 계시다구요?" 이제서야 묵향은 술마시기를 중지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백운옥을 바라봤다. 보통 그냥 마교라고 부르지만 진짜 마교도 앞에서는 천마신교라고 부른다. 왜 그러냐 하면 일부 마교인들의 경우 마교도라고 불리는걸 아주 싫어하기 때문 이다. "그래서?" 퉁명스런 대답에도 불구하고 백운옥은 정중히 말했다. "한가지 궁금한점이 있어서 그럽니다. 왜 이번일에 천마신교가 아직까지 참가 하지 않고있느냐 하는거에요. 천마신교내에 세력쟁탈전이 벌어져서 외부에 신 경쓰기 어렵다는 것은 어느정도 들었지만 현경에 이른 고수가 남긴 유산... 그 유산이 걸린 싸움인데 아직까지 거기 참가안하고 있다는 것은 좀 수상한 냄새가 나서 그러죠. 그 정보를 모를리가 없는데..." "크하하하하하...." 그러자 묵향은 한바탕 광소(狂笑)를 토해낸 뒤 뉘집개가 짖었느냐는 듯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 예상외의 반응에 백운옥과 초류빈은 서로의 얼굴을 힐끗 보며 상대의 생각을 잠시 읽었다. 왜 답을 안하고 광소를 터트릴까... 시비(侍婢)의 말로는 마교 의 인물이라고 했고 또 그것을 진영공주에게 확인했으며, 혈의를 입은 인물들 을 향해 달려나가는 속도... 그리고 최초의 혈의인을 죽일 때 사용한 무공... 아무리 봐도 어검술 같이 보였지만... 그리고 낮에는 그 강기의 폭풍속에서 살아나오는 것까지 봤으니 무공도 고강함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마교 내에 서도 꽤나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마교란 원래가 거의 십중팔구 는 무공의 고하에 의해 지위가 결정되는 단체니까... 그 때문에 지금 백운옥 이 삐딱하게 상대가 나오는데도 줄곧 존대를 해오고 있는 것이고... 그런데 그런 그가 질문을 받고 광소를 터트린다면 그 이유는? 웃음을 통해 자신의 표 정과 속셈을 숨기고 그럴듯한 대답을 마련할 시간을 벌려고? 아니면 자신은 그따위것 모른다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웃지만 마시고 대답을 해보시죠?" 놀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에 냉랭한 표정으로 백운옥이 말했다. "크흐흐흐..." 묵향은 술을 입속에 털어넣은 후 입을 열었다. "별거 아냐. 너는본좌가 누군지 아느냐?" "....." "...." 백운옥과 초류빈이 서로 얼굴만 멀뚱이 바라보며 무언의 질문을 하는 것으로 보아 대답은 들어보나 마나였다. 저녀석들은 묵향이라는 이름만 달랑 알고있 을 뿐이니까... "좋아. 그렇다면... 그렇게 정보력이 좋다면 지금 마교의 내부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이번의 질문에는 자신이 있는 듯 백운옥이 입을 열었다. "천마신교는 지금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는 중이지요. 교주와 부교주 간에 쟁 탈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이어지는 비웃는 듯한 물음... "교주와 부교주라면?" "한중길 교주와 장인걸 부교주요. 그리고 얼마전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그 들간의 쟁탈전 때문에 외부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진 사이에 간도크게 섬서분 타의 타주가 반란까지 일으켰다고 그러더군요. 하지만 그 덕분에 재미있는 사 실이 밝혀졌죠. 겨우 타주급이 반란을 일으켜도 진압을 하지 못할정도로 지금 내부사정이 엉망이라는 걸 말이에요." "크하하하하하... 걸작이군. 완전히 소설을 쓰고있어..." 또다시 광소를 터트리면서 술을 따르는 걸 보면서 얼굴이 시뻘개진 백운옥이 따지듯 물었다. "모두들 다 알고있는 걸 그런식으로 얼버무린다고 누가 속을줄 알아요?" "크흐흐흐... 좋아. 뭐 그렇게 알고있다면 그게 진실이겠지. 나도 더 이상은 할말이 없군. 참. 한가지만 노부가 알려주지. 바로 그 반란일으킨 타주의 이 름은 묵향이란 녀석이야." "에엑..." 둘은 경악에 찬 눈으로 묵향을 바라보다가 잠시 정신을 차린 백운옥이 질문을 퍼부었다. "그럼 묵향 대협이....." "대협같은 소리 하지마. 협(俠)자만 들어도 몸에 두드레기가 나는 사람이라 구. 그냥 타주라고 불러." "하지만 묵향 타주님. 지금 반란중이라면 아주 일이 많으실텐데 여기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요? 총타에서 진압하러 올지도 모르고..." "그럴 걱정이 거의 없으니까 이러고 있지. 그리고 구휘의 무덤 껀은 여태 몰 랐다는 것도 있지만 노부는 남의 무덤 뒤지는 취미는 없어. 총타가 움직이지 않는건 이유야 뻔하지만 노부가 말해줄수는 없으니 총타에 가서 물어보라구. 클클클..." 아직도 방금 묵향이 던진 충격에서 못깨어난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백운옥이 말했다. "어쨋든 동행하실 생각은 있으신가요?" "뭐... 지금은 할 일도 별로 없으니까 일단 공주를 인계하고 따라가 볼까..." * * * 챙... 챙.... 갑자기 왠 칼부딪치는 소리냐구? 그야 당연히 묵향이 공주를 강수에 있는 어 림군 사령부에 인도했으니 일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또다시 복수를 하려는 공주마마의 야심찬 계획에 따라 완전무장한 어림군들이 묵향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한 소리지. 처음 거의 1만의 어림군이 주둔중인 이곳에 도착한 다음 공주는 돈달라고 따 라온 얄미운 묵향을 잡아서 주리를 틀 목적으로 사령관 임정 장군에게 명하여 수천의 완전무장한 병졸들을 풀었다. 연병장에서 대규모 패싸움이벌어졌고 연병장 앞 사열을 위해 높직히 쌓아놓은 단 위에서 공주마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묵향이 포박당한채 끌려오기를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공주의 바램과는 달리 흑의인의 무공은 정말이지 대단했고 여기저기 쓰러져 신음하는 병졸들의 수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묵향도 후환거리를 만들지 않기위해 아직까지 검을 쓰지는 않고있었지만 그의 돌주먹이나 돌다리 에 맞은 병졸들은 뼈다귀가 부러진 채로 뻗어서 못일어서고 있었다. 묵향은 더 이상 여기서 푸닥거리 해봐야 좋을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저쪽에서 구경중인 공주마마를 향해 날아올랐고 그 모습을 본 병영의 고위 장수들 10여 명이 묵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공주의 바램과는 달리 그 군관들마저 땅바닥에 길게 드러누워버렸으니 이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공주가 도망가려는 찰나... 그녀의 멱줄은 묵향 에게 잡히고 말았다. "끼약..." "흐흐흐... 감히 노부를 능멸하려고 들어? 아직도 맛을 들봤다 이거지. 그래 오늘 내가 죽나 네 년이 죽나 보여주지." 쿵! 퍽! 퍽! 손으로 패고.. 발로 밟고..차고... 오뉴월의 개패듯이 공주를 패고있는 묵향 을 아무도 방해하지 못했다. 이유는 묵향이 무공의 고수였고, 그의 손에는 공 주마마가 잡혀있으니 일단 묵향이 공주를 죽여버렸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아 직 죽이지는 않았으니... 공주는 사실상 묵향의 '인질'인 셈이었고 그렇다보 니 손쓸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주변에 널리고 널린 어림군들은 개맞듯이 맞고 있는 공주를 보며 '제발 빨리 죽어버려라.'하고 기원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 었다. 그래야 공주를 패고있는 저놈에게 공격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제발... 살려줘요... 엉엉..."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입술이 터져나가고 양쪽 눈두덩이에 퍼런 멍이 들고... 맞다가 맞다가... 공주는 도저히 이렇게 맞아 죽을수는 없다고 비장한 결심을 하고는 태도를 바꿔서 '애걸'이라는 작 전을 사용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비참한 몰골로 손이 발이되도록 싹싹 빌고있는 공주를 몇대 더 쥐어박아 준 다음 묵향은 더 이상 팰 값어치도 없다는 듯 노려보며 한마디 하는걸로 오늘 의 '구타(毆打)'를 끝마쳤다. "또다시 약속을잊어버리고 까불면 그땐 진짜 맞아 죽을 줄 알아. 황궁 아무 리 구석에 숨어있어 봐라. 노부가 찾아내지 못하나..." "예.. 예... 소녀가 잘못했어요. 용서하세요... 엉엉..." "좋아. 내력을 끌어모아서 패지는 않았으니 골병까지는 안들었을거야. 노부도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봐." 갑자기 묵향이 공주를 향해 손을 내밀자 눈물에 젖긴 했지만 의아한 표정으로 공주가 물었다. "예?" "돈내놔. 황금 100냥 준다고 했잖아." 공주는 저쪽에서 사태를 관망중인 임정 장군을 눈짓해서 불렀고 그가 묵향에 게 황금 100냥짜리 전표를 건네줬다. 묵향은 그것을 품속에 쓱 집어넣은 다음 쓰러져서 아직도 울고있는 공주를 일으켜 세운 다음 멍이든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춤을 한다음 놔주면서 말했다. "흐흐흐.. 즐거운 여행이었어. 그럼..." 묵향 일행은 유유히 강수를 벗어날 수 있었다. 1만에 가까운 병사들을 무장시 켜 보냈었지만 그곳을 뚫고 들어와서 공주를 개패듯 팼는데... 또다시 공주를 어딘가 피신시키지도 않고 보복을 감행할 멍청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다음 에는 공주를 황궁 구석에 '숨겨놓은' 다음 묵향을 때려잡을 계획을 짜고있겠 지... 묵향은 길을 떠나며 마차안에 타고있는 초류빈, 백운옥 등 여러 인물들의 무 언(無言)의 비난(非難)을 읽을 수 있었다. "왜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뇨." 묵향을 향해 혐오와 비난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 당연했다. 예로부터 말이 있 지 않은가? 여자에게 강한 남자는 변태밖에 없다구.... 그런데 세상에 백주대 낮에 여자를... 그것도 대송제국의 공주를 수많은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패듯 두들겨 패다니... 그들로서도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재빨리 우두머 리를 포획하는 묵향의 그 엄청난 무공을 존경스런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었 다. 하지만... 꼭 여자를 그렇게 쥐잡듯 패야 했을까? "정말 왜그러는 거야?" 더 이상 참지못하고 묵향이 성질을 터트렸다. 모두들 '뭔가 혐오스러운 어떤 것'을 보는 듯한 눈길로 계속 힐끔거리니 아무리 성질을 참고있으려 해도 힘 들었던 것이다. 이런 새까만 후배놈들이 감히 자신이 누구라고 저따위 눈빛으 로 보다니...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 "왜그러냐?" "꼭 그렇게 무공도 모르는 여자를 때려야..." "뭐야?" "때려야 되었느냐구요." "당연히 주제를 모르는 계집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때까지 두들겨야 지." "하지만..."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야? 우리가 지금 황군들한테 잡혀있냐?" "아뇨." "그럼 된거잖아. 왜그리 잔말이 많아." "하지만 상대는 공주라구요. 후환이..." "후환따위 두려워했다면 처음부터 건드리지도 않았어. 더 이상 까불면... 험 험..." 묵향은 황급히 뒷말을 중지했다. 사실은 '그 에비라도 죽여버리면 조용해지겠 지.'하고 말하려 했는데 갑자기 그 '에비'라는 존재가 '황제'와 동의어(同義 語)라는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뭐 나중에 황제를 죽이더라도 지금 여기서 떠들면 괜히 재수없으면 '모반(謀叛) 죄' 내지는 '황제 시해(弑害) 모의(謀 議) 죄'를 뒤집어 쓸수도 있었다. "까불면?" "갈... 네년이 노부의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질 배분이냐? 나중에 보면 알게될 거야." 급기야 약간 당황한 묵향의 입에서 상소리까지 나오자 백운옥은 입을 다물었 다. 하지만 묵향의 강렬한 살기에 눌려서... 또 상대의 지위를 생각해서 입을 다문것이지 정상적인 이해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불만은 그녀의 눈 동자에 남아있었다. 한바탕의 욕지거리까지 동반한 대화가 오갔기에 마차안은 정말 쥐죽은 듯 고 요해졌지만... 솔직히 그 조용함이 부자연스러운 침묵에 의한 것이었기에 모 두의 마음은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묵향이 옆으로 손을 뻗어 두려움에 떨고있는 백운옥의 시비(侍婢)를 다둑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놀란 모양이구나. 노부의 성질이 원래 그러니까 안심하려무나." 원래가 과거부터 묵향은 무림인들 처럼 힘있는 자들이 아니라면 꽤 부드럽게 대하는 것을 모르는(그래서 과거에 양녀까지 들였을 정도였으니까.) 초류빈이 나 백운옥의 눈이 약간 커졌다. 이 마교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릴려고 이러나 하는 생각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를 개패듯 패고... 또 어림군들 수십명의 뼈다귀를 부숴놓은 냉혈 한이 이런 말을 갑자기 한다고 해서 안심할 멍청한 여자는 한명도 없을 것이 다. 오히려 더욱 몸을 떨며 묵향의 손길을 피하는 것을 보고 묵향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뒀다. 그런다음 백운옥에게 말했다. "피리(笛)나 거문고(琴)가 있느냐?" "예." "잠시 빌려 다오." 갑자기 또 왠 변덕을 부리는건지 알수가 없었기에 조금 주저하기는 했지만 백 운옥은 마차의 뒤쪽 좌석 구석에 곱게 포장되어있던 작은 거문고를 꺼내 묵향 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묵향은 현(絃)을 군데군데 튕기며 잠시 조율(調律)을 하더니 금을 뜯기 시작 했다. 묵향의 금 솜씨는 정말이지 놀라웠다. 거의 음악에 있어 백지라고 할 수 있는 초류빈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할 나위도 없었다. 거문고의 음은 낮고 부드럽게 울리면서 마차안의 공기를 따뜻하게 덮혀주었고 모두의 기분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줬다. 백운옥은 묵향이 금을 타기 시작하자 거의 깔보는 듯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 지만... 그 표정은 곧이어 놀라움으로 바뀌었고... 또 조금 있다가 그 표정도 없어졌다. 그만큼 상대의 금음은 너무나도 부드러웠고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 었던 것이다. 거의 1각여를 흔들리는 마차안에서 그렇게 뛰어난 연주를 하던 묵향의 손이 멈춘 것은 시비의 몸이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게 되었을 때였 다. 이번에는 전과는 또 다른 어떤 존경과 감탄... 뭐 그런것들을 담은 눈으로 자 신을 모두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묵향은 짐짓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금을 백운옥에게 건네주며 퉁명스레 말했다. "이따위 거문고를 들고다니다니... 험험... 백씨세가는 그렇게도 돈이 궁한모 양이군..." 묵향은 약간 정말 약간 쑥스러운 김에 죄도없는 거문고와 백씨세가를 욕한다 음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하는 척 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자랑스런 마교도로 서 방금전 조금 외도(外道)에 가까운 행위를 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 * 백운옥이나 초류빈은 백씨세가에 도착하기 까지 거의 2주일에 가까운 여행을 함께하며 묵향이란 자신들이 처음 접해보는 마교도를 주목해서 관찰했다. 초 류빈이야 묵향에게 자신의 생을 의탁한 처지였기에 만약 주인감이 아니라면 뺑소니칠 생각이었고 백운옥은 말로만 들었지 처음보는 '사악한 마교도'를 처 음봤기 때문이었다. 어쨋든 그 둘이 대단한 호기심으로 묵향을 관찰한 결과 몇가지를 알 수 있었 다. 확실히 들은대로 마교도는 마교도였다. 어떤 관습이나 체면따위에 얽매이 지 않는 자유분방함. 거기에 무림에 통용되는 문파간의 존중따위는 아예 없었 다. 그건 함께 백씨세가로 여행을 시작한지 4일째에 주변에는 그래도 이름이 나있던 '진무문(晉武門)'이라는 정파계통의 제자 12명이 비록 면사를 썼다고 하지만 꽤나 미인인 듯한 소저와 그의 시비를 보고 옆에서 조금 농을 걸어오 며 장난을 쳤던 것을 3명의 다리를 부숴놓고 4명의 팔뼈를 부숴버린 것이다. 세상에... 그것도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망설임 없이.... 조금 뒤미쳐서 그녀 일행을 따라 그녀의 호위무사 5명이 말과 마차를 대놓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누구에게 추태를 벌인것인지 눈치챈 그들이 먼 저 슬쩍 도망쳐버리고 말았지만... 그때 묵향의 잔인했던 얼굴은 백운옥과 그 시비(侍婢)의 뇌리에 아주 오랫동안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꼴같지 않게 무림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잘해주는 편이었고 특히나 자신의 수하로서 들어온 초류빈에게는 상당한 신경을 써줬다. 그의 무공을 봐 준다든지 하면서... 그래서 하루는 백운옥이 자신보다는 자신의 시비에게 더 욱 따뜻하게 대해주는 묵향에게 조금 신경질이 남을 느끼고 한마디 한적이 있 었다. "진랑이에게 마음이 있으신거 같은데... 오늘 밤 빌려드릴까요?" 뭐... 주인이 계집종과 하룻밤 함께 잤다는 것은 정말 농담꺼리도 되지 않는 사소한 문제였기에 묵향은 가볍게 받아들였다. "아니. 필요 없다." "어떻게 보면 여자한테 약하신거 같기도 하고... 강하신 거 같기도 하고... 도저히 감이 안잡히는데... 좀 알려 주실래요?" "흠... 감히 노부의 속마음을 알아내려고 시건방지게 굴지만 않는다면 누구와 도 잘 지낼 수 있지. 그래서 너하고는 사이가 좋을수 없는거야." 그러면서 묵향은 경악한 표정의 백운옥을 뒤로하고 목욕하러 가버렸다. 백씨세까지 제법 오랜 시간 진행된 여행으로 백운옥과 초류빈, 시비, 그리고 경호무사 5명은 묵향의 괴상한 성격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 디로 말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난 공과 같은 성격이라는 결론에 모두들 아예 묵향을 건드리지 않는게 최상의 길이라는 대응책까지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묵향의 성격에 가장 빨리 적응한 것은 시비였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때부터 백씨세가에 들어가 시녀노릇을 해왔기에 눈치가 빨라 상전의 기분변화를 재빨 리 알아채는 재주를 익혔던 것이다. 마음좋은 상전이라면 상관없지만 성격이 모난 상전이라면 곧바로 따귀가 날아오는 것이다. 그런점에 미뤄보면 아예 가 식이라곤 거의 없는 묵향의 성격이 밑의 사람이 모시기에는 최고의 성격이었 다. 조금 기분이 꾸름한 것 같으면 접근을 안하면 그만이요, 조금 기분이 좋 은 것 같을때 주위를 돌아다니면 운 좋으면 금음(琴音)이라도 얻어들을 수 있 었다. 그 다음으로 적응한 무리들은 호위무사들...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니 주위에 가지만 않으면 된다는 결론. 멀찌기서 죽은 듯이 조용히 있으면 찾아와서까지 시비를 거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찾아와서까지 행패를 부리 지 않으니 무슨짓을 하든지 그냥 멀찌기서 구경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가장 묵향의 성격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인물이 백운옥일 것이다. 그녀 는 백씨세가의 금지옥엽... 여태껏 아쉬운 것 없이 자신을 떠받들던 무리들에 게 감싸여 키워진 인물이니 제멋대로인 이녀석과 도저히 한자리에서 공존할 수 없는 성격이라고 할까... 사사껀껀 간섭하며 성질 부리다 이틀전에 따귀한 대 맞은다음 정신을 차리고 요즘은 아예 묵향에 대해 신경을 끄고있었다. 마차가 제법 큼직한 장원(莊園)에 이르렀을 때 일행의 여행도 끝이났다. 예전 에 백가장(白家莊)이라 불렸으나 그 규모가 커지자 세가(世家)로 불리기에 이 른 것이다. 천명이 넘는 식구를 거느리게 된 백씨세가는 일대에서 가장 거대 한 무력단체였고 그 무력을 기반으로 각종 사업을 벌여 그 수입으로 더욱 기 반을 튼튼하게 다져오고 있었다. 사악함과 공포적인 힘의 대명사(代名詞)인 마교같은 경우도 음으로 양으로 수 많은 사업채를 거느리고 있다. 그만큼 무림과 상권(商權)은 뗄레야 뗄수가 없 는 관계다. 사람이란 동물이 흙이나 공기만 먹고 움직일 수 없기에 그건 당연 한 결과였다. 자신들의 상권을 지키려면 강력한 무력이 필요했고 또 그 무력 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러니 각 문파가 뛰어난 무 공을 가지고 있던, 그렇지 못하던 그건 문제가 될게 없었다. 문제는 자신들의 상권을 아무에게도 뺏기면 안되었고 될 수만 있다면 남의 상권을 뺏아야만 했 다. 상권이 뺏기면 그만큼의 돈이 줄어들고... 그렇다면 그들이 유지할 수 있는 무사의 수도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상권은 왜 뺏기느냐... 대부분의 경우 정당한 상거래에 의한 경쟁 때문에 뺏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상권을 놓고 문파끼리의 칼부림을 해서 서로의 구역을 뺏아나가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무 림에서는 수많은 다툼이 벌어졌고 오늘의 명가(名家)가 내일은 거지소굴로 변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점을 감안해 본다면 과거 한낫 백가장 정도로 불렸던 무리의 한귀퉁이를 차지한 작은 장원이 일천여 식솔을 거느리는 거대문파로 발전한 것은 역대 가 주(家主)들의 뛰어난 능력을 대변해 주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서오너라." 육척에 가까운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흰색의 문사(文士)차림을 한 40대 정도 로 보이는 인물이 마차에서 내리는 백운옥을 반겼다. "다녀왔어요, 아빠" "뉘시냐?" 물론 마차에서 꾸역꾸역 내리고 있는 묵향과 초류빈을 보고 한 말이었다. "이분은 초씨세가의 탈명도(脫命刀) 초류빈(楚柳濱) 소협, 그리고 저분은 묵 향 분타주에요. 이쪽은 저의 아버님이세요." "오.. 반갑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백운옥의 소개로 백씨세가의 부가주 분광창(分光槍) 백상(白橡)대협이 가볍게 포권했고 그에따라 묵향, 초류빈이 마주 포권했다. 묵향이야 이런 시골문파 따위 알바가 없었지만 그래도 정파에서는 큰 문파였는지라 초류빈이 아는척을 했다. "대명을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허.. 안으로 듭시다. 이번에 좋은 차를 구했다오." 귀하기로 이름난 용정차의 향긋한 향이 퍼져가는 가운데 주객(主客)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운옥의 전음으로 묵향이란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이라도 알게된 백상 대협으로서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자리였다. 정파로 이름높은 백씨세가의 마당안에 마교도가 들어오다니... 하지만 백상 대협은 감히 발작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상대의 실력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던 것이 다. 만만해 보인다면 곧장 병신을 만들어 내쫓겠지만... 영 만만해 보이지가 않는다. 거기에 초류빈까지 거느리고? 괜히 일을벌여 망신을 당할.. 아니 어 쩌면 목숨을 날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허허허... 이번 여행에서 혹시 여식이 실례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요?" "...." "차를 조금 더 드시겠습니까?" "..." 이쪽에서 떠들어도 묵향은 닥치고 있었고 당연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초류빈과 백운옥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맞춘다고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한쪽에서 인상쓰 고 가만히 있으니 분위기가 날 수 없었다. 이윽고 차를 다 마신 묵향이 쓱 일 어서면서 말했다. "먼저 가서 좀 ㅆ어야 겠소. 방을 좀 안내해 주시오. 그리고 노부를 찾는 사 람이 혹시 있으면 노부에게 지체없이 알려주면 고맙겠소." "... 그러지요." 묵향이 나가고 나자 백상 대협은 딸에게 질문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전음으로 말씀드린 대로에요. 우연히 만나서 왔는데... 단편적으로 제가 듣 기로는 아무래도 이번 구휘대협의 무덤에 마교가 관여한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묵향 분타주의 말로는 마교에서는 구휘대협의 무덤에 별로 신경을 쓰 는 것 같지않구요. 저 묵향 분타주의 무공 수준으로 봤을 때 마교의 아주 고 위층의 인물인 것 같기도 하니까 꽤 신빙성 있는 말 같아요." 백상 대협은 딸의 말을 시큰둥하게 듣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것이 서열 높은 자가 하는 말이라고 그게 모두 사실일 가능성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거짓말 이 더 많을수도 있지. 이때 백운옥의 말을 초류빈이 옆에서 보충했다. "아마도 그 추리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와 대화를 나눠서 알아 본 결과로는 그의 지위가 최소한 마교서열 20위 안쪽이라는 점이죠. 그리고 이번 마교에서 벌어진 섬서분타 반란의 핵심인물이라는 사실이죠. 오랫동안 같이 여행을 해 본 결과 최소한 그가 거짓을 말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연 히 진실중에 얘기하지 않은 부분도 많겠지만요." 그러자 백상 대협이 경악해서 되물었다. 마교에서 20위 안쪽이라면 그 무공은 엄청났기 때문이다. "마교 서열 20위 안쪽이라고?" "예." "그의 이름이 묵향이라고 했나?" "예." "특이한 이름인데... 아무래도 가명이 아닐까?"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행동으로 봤을 때..." "알아보면 알 수 있겠지... 거기에다 반란의 주모자라면..." "참... 이번에 아주 특이한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진영공주 전하를 납 치하려고 했던 무리들 중에서 검붉은 혈의를 입은 고수들이었는데... 그때 저 묵향 타주와 싸웠죠. 저도 그때 딴 무리들과 싸운다고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 만... 8명 정도가 묵향 타주를 빙 둘러쌌는데 무슨 진법같이 보이지도 않았고 그냥 빙 둘러싼 상태에서 이상한 주문같은거만 외우고 있더군요. 그러다가 우 두머리인 듯한 자가 그들에게 합류한 다음 손에서 검은기운을 뿜어냈는데 그 게 묵향 분타주를 감쌌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지나고 나니까 엄청난 대 폭발이 벌어졌구요. 그 안에서 묵향 분타주가 걸어나오더니 지독한 독기라고 그러더군요. 완전히 옷이 다 삭아서 떨어지는 걸 보면 과연 독하긴 독한 모양 이었습니다. 제 설명이 좀 두서없지만 혹시 이런 무공을 쓰는 인물들이 강호 에 있습니까?" "혈의, 주문, 검은기운, 독기, 대폭발이라..." "참, 그 혈의를 입은 무리들의 무기가 특이했습니다. 한 5척 정도 길이에 윗 부분에 해골 같은 형상을 붙여놓은 철봉(鐵棒)을 사용했습니다." "해골모양을 붙여놓은 봉? 그렇다면 출사봉(出邪棒)인가? 하지만 그건 혈교의 무기인데... 정말 해골 모양이 맞나?" "예.. 해골 모양이 맞습니다. 그 부근이 원체 독기가 짙어 가져오지는 못했지 만 갈갈이 찢어진 그들의 시체 사이에서 봤죠." "갈갈이 찢어진 시체?" "대폭발이 있었다고 했잖습니까? 묵향 분타주를 중심으로 엄청난 폭발이 있었 죠. 그 때문에 혈의인들은 모두 그 폭발에 휘말려서 죽었기에 온전한 시체라 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고 나니까 그 시체도 독기 때문에 흐 물거리며 녹아버렸으니까요." "흐음... 오래전에 황궁에 짓밟힌 다음 또다시 행적이 묘연하더니... 또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모양이군. 공주 전하를 납치하는 무리에 혈교가 있었다면 이 유는 하나밖에 없겠지." "뭐에요? 아빠?" "진천왕과 혈교의 합작.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구나. 혈교가 원하는 것은 무림. 진천왕이 원하는 것은 황실... 둘이 잘 어울리지. 같은 중원을 원 하지만 서로의 목적이 다르니 합작도 가능하겠지. 진천왕은 혈교의 힘을 필요 로 하고, 혈교는 난세를 이용해서 자신의 세력을 더욱 넓히고자 할것이니 까... 그리고 기존의 무림세력들도 황실을 편들지 진천왕을 편들자는 없을테 니 서로의 이득이 합치된다고 봐야지." "과거 제가 듣기로는 마교와 싸워 마교 세력의 4할을 부쉈다는 게 혈교 아닙 니까? 그덕분에 마교는 거의 30년 동안이나 세력을 보충하기 위해 엄청난 고 생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혈교가 이제 슬슬 활동을 시작한다면 전과는 다른 어떤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요? 최근의 전투에서도 마교와 거의 맞먹는다 는 찬황흑풍단이 겨우 혈교의 분타하나 부수는데 2000명이 넘게 죽고 7000명 이 넘는 사상자(死傷者)를 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면승부를 겨눈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칠지..." "글세... 하지만 그건 조금 다르지.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과 강시와 사람 이 싸우는 것은 아주 차이가 크지. 사람은 최소한 싸우다가 지치기도 하고 상 처가 생기면 그게 전력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 하지만 강시는 달 라. 강시들을 상대하려면 무공이 약한 사람은 오히려 방해만 돼. 무공이 아주 강한 사람들만, 강시를 일검에 토막을 칠 수 있는 사람들만 나서서 공격을 해 야 해. 그래야 간단히 강시를 물리치지, 어중이 떠중이 다 뭉쳐서 공격하면 그들이 도리어 방해가 되어 고수들이 필요로 하는 충분한 공간을 만들어 주지 못하기에 피해가 더욱 커지는 거야. 만약 고수들이 많은 마교가 그들을 공격 했다면 그렇게 대단한 피해를 당하지도 않았을거다. 어쨋든 마교는 거의 5000 명이나 되는 극강의 정예를 가진 문파니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힘없이 무너져버린 찬황흑풍단과 마교가 예전에는 거의 동급으로 비교 되었을까요?" "그거야 그당시 흑풍단을 이끌었던 옥영진 대장군의 능력. 그리고 강력한 호 신강기의 역할을 해내는 두터운 갑주. 우수한 장비. 그것이 그때의 찬황흑풍 단의 명성을 만들었던 것이지. 하지만 강시와 사람은 다른거니까... 물론 그 때 상대가 마교였다면... 그것도 넓은 평야에서 붙었다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 졌을거야." "그렇다면 마교란 단체는 아무도 손도 못 쓸 정도로 강하다는 말입니까?" "아니지. 마교는 혈교와 달리 강시 따위는 쓰지 않아. 그러니 정파에 밀려서 활개를 치지 못하는 거지. 사람대 사람이라면 어중이 떠중이라도 숫자가 많은 쪽이 어느정도는 유리한 법이니까. 그리고 마교와의 투쟁이 계속되면 은거했 던 기인들까지 모습을 드러내니 그렇게 마교에게 고수의 숫자에도 밀리는 것 이 아니고... 아니 그분들까지 합한다면 고수의 수는 정파가 월등하다고 봐야 하겠지. 대신 그쪽은 한덩어리로 뭉쳐진 상태고 이쪽은 숫자는 많지만 흩어진 상태. 어떤 큰 위기가 닥치지 않으면 뭉칠 생각을 안하니까 마교의 무리들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는 거야. 그리고 고인물은 썩는 이치와 같아서 정파의 세상이 된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별의별 파렴치한 놈들이 다 나오게 되니... 그게 마도의 무리들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나? 그냥 이런식으로 양분되어 서로 를 견제하는 편이 좋지." * * * 묵향은 목욕을 끝낸 다음 의자에 앉아 탁자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들고는 천천 히 마시기 시작했다. 묵향이 안내된 작은 별채는 제법 아담하게 꾸며진 조용 한 장소였다. 가구들도 그런대로 좋은 편이라 이런 예정에도 없던 객에게 주 어진 방임을 생각한다면 꽤나 백씨세가는 풍족한 살림살이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앉은 의자에서 바라다 보이는 정원은 제법 세심하게 가 꾼 화초들이 우거져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묵향은 천천히 일어서서 정원으로 내려섰다. 예로부터 정원이야 말로 살수들 이 숨어서 암살하기 딱 알맞은 장소지만 묵향의 촉수에는 그 어떤 살수의 기 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정원사가 열심히 가꾼 아담한 정원만이 묵향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묵향은 천천히 정원의 한쪽 귀퉁이에 모 여있는 국화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국화꽃은 피지 않았지만 싱 싱하면서도 흠집없는 푸르른 잎사귀가 자신은 가을에 아름다운 국화를 피울것 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묵향은 기억이 돌아온 다음에도 국화를 좋아하는 취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예 전처럼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한 살 수를 기억하게 해줬기에 예의상 다른 것들 보다는 좋아한다고 봐야할까... 국 광이 지긋이 정원의 화초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쪽에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묵향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4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의외의 장소에서 사람을 만났다는 듯 조금 놀라는 듯 하더니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는 거의 사람의 출입이 없는 곳인데... 여기에 묶게 되셨나요?" "예.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저는 백상 부가주의 안사람입니다." 그녀는 처음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힐수는 없기에 약간 돌려서 말했 고 묵향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냈다. 노가주는 이미 늙었고 그의 부인 도 거의 은퇴직전일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앞에 있는 이 중년의 부인이 백씨 세가를 이끌어가는 안주인인 모양이었다. "아.. 예. 실례를 했군요. 저는 이번에 여기 놀러온 묵향이라 합니다." "이곳의 정원은 아주 아름답지요. 그래서 저도 한번씩 마음이 갑갑할 때는 여 기에 와보곤 한답니다. 남편이 이곳에 자리를 잡아드린 걸 보면 아주 귀중한 손님이신 모양이군요." "별로 귀중한 편은 아닙니다. 바쁘실텐데... 저는 이만 물러나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으셨기를..." 묵향이 이렇게 노부인에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림에서 남자 고수는 정말 많다. 하지만 여자 고수는 많지 않은 이유는 남편과 부인이 둘다 무공에 미쳐버리면 살림은 망하게 되는게 정석적인 이치. 남편이 무공에 미치 면 부인은 내조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내조(內助)... 말이 좋아 내조지 남편은 연공실에 틀어박혀 있을때(무림인이 아닌 경우 글공부 따위 한다고 세월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 부인은 가정을 이끌어 가게 된다. 그렇기에 부인이 남편 보다 무공이 강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만약 있다면 그 여자는 정말 대단 한 사람이 아닐 수 었었다. 남편보다 몇배는 뛰어난 오성을 지니고 있는 여자 라야만 남편보다 조금 더 뛰어난 정도로 무공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살림살이를 책임지고도 약간씩의 연공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히 부지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교육을 받는다.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 이라고 하는 허울은 좋지만 실상은 적성에 안맞아도 무공을 뼈빠지게 익히던지 아니면 어디에 쓰일지 알지도 못하는 공부를 쌍코피 터지게 하든 지... 그래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하는게 목적인 불쌍한 족속들이다. 묵향 처럼... 하지만 여자는 완전히 다르다. 공부나 무공은 부차적인 것이다. 명가 의 여자들이라면 어릴때부터 그녀의 어머니가 수많은 하인들과 고용인들, 어 떤때는 노예들까지 거느리며 각종 사업을(농사도 사업이니까..) 처리해 나가 는 것을 보고 배우게 된다. 자신도 딴 집에 시집가게 되면 그 일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어릴때부터 장부작성, 정리라든지 산학(算學=算 數) 그리고 어디에서 물건을 구입하면 싸게 구입하느냐 라든지 돈을 빌릴곳 은? 또는 차용증 작성 요령 등등 실생활에 관계되는 수많은 교육을 받는 것이 다. 그녀도 어쩌면 시집을 잘간다면(?) 수백명의 하인을 관리감독하면서 집안 일을 처리해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자가 한 집안의 살림을 처리하게 되는 그 순간 즉 시집가는 그 순 간부터 그녀의 고달픈 인생이 시작된다. 그게 언제쯤 멈추게 되느냐 하면, 자 신의 며느리를 볼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완전히 집안의 경제권을 쥐고 흔든 다는 막강한 힘이 그녀에게 주어지긴 하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만 약 남편이 상인이라면 그 남편이 외부 거래의 일정부분을 처리해 주어 한결 부담이 덜해지지만 그래도 수없이 많은 물건들이 드나들기에 그것을 유지, 관 리, 감독함에 있어 일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게 된다. 그렇기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시집간 다음 과로사(過勞死)했는지는역사에 나오지 않 아도 모두들 알고있는 사실이다. 물론 첩(妾)이라든지 뭐 그런 이유로 받아들여진 여자라면 위와 같은 사항에 해당이 없다. 그런 여자들은 대부분이 화류계(花柳界)의 여인들로 남자를 성 적으로 즐겁게 해주는 언어적 기교, 안마술, 방중술(房中術)이라든지, 노래, 춤, 악기 등등 실생활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잡기들만 배운 여인들이다. 그 렇기에 그런 여인들에게 부인(婦人)이 해야 할 일을 시킨다면... 며칠 되지도 않아 야반도주할 가능성이 컸다. 이 첩이라는 것도 다 부인이 모든 경제를 책 임져 주기에 글만 읽다가... 또는 무공만 익히다가, 친구들과 놀다가, 더 이 상 할 일이 없어진 자들이 계집에 혹 해서는 끌어들이는 거였으니까 말이다. 마누라는 집안을 이끈다고 죽어나가는 줄도 모르고서... 이런 이유가 있기에 안살림을 직접 책임지게 되는 부인을 묵향은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만약 무공의 고하로만 모든 것을 생각한다면 그녀 또한 그녀의 남 편과 같은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녀는 무공이 아닌 살림을 책임지 는 것이다. 설무지 처럼 말이다. 사실 그녀가 책임지게 되는 부분들 중에 상 당부분 즉 무력하고 연관되는 부분은 설무지 같은 어떤 인물이 책임지겠지만 그래도 집안일은 부인의 소관이니 그 일이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게 공짜인력은 결코 놀릴수가 없다는 남자들만의 이론에서 만들어진 아주 편리한 노동력 착취 방법이었으니까 말이다. 머리 좋고, 일 잘하고, 아랫사람 잘 부 리도록 어릴때부터 교육 받았고... 그걸 알고도 놀릴 바보가 있겠는가? 당연 히 남편들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매일 힘들다는 내색도 못하고 중노동에 시달 릴 수밖에 없었다. 묵향은 관리라든지.. 산학 등 원체 그런쪽으로는 공부를 안해서 무식했기에 그런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우대를 해줬 다. 그렇기에 부인은 묵향으로부터 깎듯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그날 저녘 모두들 모여서 식사를 했고 묵향은 따로 자신이 묵게 된 별채에서 식사를 했다. 묵향은 혼자서 먹는것이 편하다고 빠졌다. 원래 그런 것은 객으 로서 조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낮에 묵향이 보여준 비 사교 적인 태도덕에 감히 모두들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조금 예의 에 어긋난 행동을 고맙게 생각하며 묵인했던 것이다. 모두들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자 식당에서 맛있게 요리된 음식들이 날라져 들 어왔다. 그때 차로 입술을 적시던 조연(趙蓮)은 살며시 입을 열었다. "다른 손님도 한분 더 계신 것 같던데 왜 안보이나요?" 조금 당황한 백상 대협. 그의 아내 조연은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 하 는, 또 가치있게 생각하는 거의 유일한 여자였다. 그녀는 비단 채찍 하나로 그의 집을 다스려 나가는 부드럽고 따스한 아내요, 자애로운 어머니였고, 또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운 집안의 지배자였다. "아... 그는 따로 식사를 한다고 했소." "그 별채에 묵게 하신걸 보니 꽤 중요한 손님인 것 같은데 그러면 실례지요." 그러자 백상 대협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변명했다. "그... 그 손님의 성격이 워낙 괴팍한지라 그렇게 하라고 일렀소. 부인은 너 무 신경쓰지 마시구려." "뭐가 괴팍하다는 말입니까? 저도 낮에 만나ㅂ는데 아주 친절하고 마음씨 고 운 분이시던데... 가가께서 그렇게 함부로 평가하시다니 오늘 이상하시군요." "허흠... 그게 아니라 부인... 그는 마교의 인물이요. 마교의 인물치고..." "사람을 그렇게 한꺼번에 잡아서 말하면 실례지요. 아이들도 있는데... 정파 라 자처하는 자들 중에서도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인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역으로 마교라 해도 좋은 인물들도 있겠지요. 깊이 사귀어 보지 않고 단정을 내리는 것은 안된다고 평소에도 자주 말씀하시는 가가께서 언행일치(言行一 致)를 안하시다니..." "험험... 부인 그만 하시구려. 손님도 와 계시는데..." "아, 참 초류빈 소협을 잊었군요. 그래 가내(家內) 평안 하신가요?" "예. 모두들 평안 하십니다." "요즘도 자당(慈堂;남의 어머니)께선 정정하신가요?" 초류빈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지는 듯 싶었지만 곧이어 대답했다. "예..." 초류빈의 어머니 독수랑랑(毒手郞郞) 왕운하(旺雲河)는 그 괄괄하면서도 괴팍 한 성질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초류빈의 아버지 옥면일랑(玉面一郞) 초풍천(楚風天)이 명호대로 그 잘생긴 얼굴로 무림에 초출한 것을 나꿔 채어 거의 강제로 결혼한 왈가닥이다. 초류빈의 아버지가 한번씩 눈두덩이가 퍼런 상태에서 손님들을 만나게 되다 보니 자연히 그 소문이 퍼져 나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결혼한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두 살 연하의 남편이 자기 부인에게 구타당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0년쯤 전에 초풍천은 아이들이 장성한 것을 보고 지금쯤이면 아이들 낳고 살 림한다고 바빠서 자신보다는 무공이 떨어질거라고 판단하고 최후의 반항을 시 도했다가 묵사발이 난 다음부터는 아예 반항할 엄두조차 못내고 있었다. 하지 만 이제 그녀의 나이도 당년 73세에 이르렀으니 조금 나아진 점이 있나 해서 조연은 안주인 답게 약간 빙 돌려서 물은 것이다. 하지만 초류빈의 난감해 하 는 표정을 보니 이 나이에 이르러서도 독수랑랑은 성격이 조금도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기야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으니 7년은 더 기다려 봐 야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 * * "이곳에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백씨 세가에 들어온지 7일이 되었을 때 묵향이 초류빈에게 물은 말이었다. 그 동안 묵향과 초류빈은 이곳 별채에서 그야말로 식객(食客)생활을 해오고 있었 다. 초류빈은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묵향은 여기 온 다음부터 줄곧 이 별채 에서 떠나지 않았기에 당연히 주위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주위에 자신을 적대(그는 마교도 였으니까.)할지도 모르는 인물들 틈 에서 1주일 동안 아무런 질문도 없이 명상이나 하며 지낸다는 것을 보면 묵향 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초류빈은 이제서야 질문을 하나? 하는 표정으로 묵향에게 말했다. "오늘이나 내일쯤 오대세가의 수장인 서문세가에서 사람이 온답니다. 서문세 가에서 구휘대협의 무덤 지도를 제일 먼저 입수했었으니 그들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은 당연하죠. 일단 서문세가에서 사람이 오면 그들과 의논을 한 후 백 상대협이 행동을 시작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때까지 기다리셔야 겠는데요." "뭐 기다리지. 그건 어려울게 없으니까..." "그런데 정말 지금 반란 중이시라면서 이러고 계셔도 됩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마. 급하면 어련히 연락이 오려고... 몇 명 믿는 녀석들 이 있으니 갑자기 망하지는 않을거야. 또 망하면 다시 시작하면 되지. 뭐가 걱정인가? 남아 도는데 시간인데..." 초류빈은 정원의 땅바닥 위에 돛자리 하나를 깔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젊 은 모습의 묵향을 보며 생각했다. '겉모양으로 봤을때는 정말 남아도는게 시간처럼 보이는군. 한 60년은 끄떡없 이 살 수 있을 것 처럼 보이니까... 그런데... 저자의 진짜 나이는 몇살일까? 그리고 진정한 무공의 깊이는...?' 이때 저쪽에서 시녀 한명이 다가오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아씨께서 잠시 오시라고 하십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묵향은 방금의 대화를 끝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있었으므로 그냥 갈까 하 다가 한마디 한 다음 그는 시비의 뒤를 따랐다. 시비가 안내한 곳은 화려한 거실이었고 그곳에는 백운옥 외에도 새로운 인물이 4명 더 앉아 있었다. 그중 한명이 벌떡 일어서며 먼저 인사해 왔다. "오오... 오랜만이야. 정말 반갑구만... 가출했다더니 의외로 생생 하구만." 초류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비천검(飛天劍) 혁련운(赫蓮運)은 황룡문이라는 이름없는 작은 문파의 제자였 다. 하지만 천운을 타고났음인지 과거 기연을 통해 능비영이란 선배 고인으로 부터 그 이름도 높은 청월검법의 비급을 얻어 오랜 수련 끝에 10성까지 익혔 다. 거기에 무당파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고수를 만나 안계를 넓힌 후 그의 검 술은 더욱 정진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최강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였다. 그의 나이는 43세였고 한 살 어린 초류빈과 형제의 의 를 맺고 있었다. 원래 뛰어난 명가가 아니라 그런지 조금 말이 거친게 흠이었 지만 인간성은 칠룡중에서 최고였으며 현재 황룡문의 부문주였다. "오랜만이에요, 류빈 오빠." 혁련운에 이어 20세 안팎으로 보이는 정말 아릿따운 여인이 인사를 건네왔다. 그녀의 이름은 매영인(梅瑛仁)으로 무림에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별호는 없었 지만 사봉(四鳳)의 일인이었다. 오무제(五武帝)의 유일한 여인 옥화무제 매향 옥의 손녀로서 방년 31세였다. 그 할머니의 무공수위로 짐작해 보건데 그녀의 무공도 엄청날 것이라는게 세인들의 추측이었다. "그래... 안 본 사이에 더욱 예뻐졌구나." "고마워요." 고맙다는 뻔뻔한 대답이 주저없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자신이 예쁜줄은 잘 아 는 듯... "안녕하셨습니까?" 이번에는 매향옥의 옆에 앉아있던 옥면공자(玉面公子) 능소천(綾紹天)이 정중 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무당파의 속가제자로 대단히 뛰어난 외모와 어딘가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다. 태극검법(太極劍法)의 달인으로 뛰어난 무예의 소유자 였으며 피리나 금에도 소질이 대단했고 그를 이용한 음공(音 功)에도 조예가 있는 인물이었다. "오. 반갑군. 오랜만이야. 자네하고 피리 실력을 겨눌 만한 인물이 여기 있으 니 나중에 만나 보게나." "예.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쪽은?" 그러자 능소천이 사근사근하게 옆에 서 있던 영준하게 생긴 ㅈ은이에게 말했 다. "인사하시게. 탈명도(脫命刀) 초류빈(楚柳濱) 대협이시네." "처음 뵙겠습니다. 불초 서문길(西門佶)이라 합니다." "오호... 서문 세가에서 젊은 기재가 계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젊으신 줄은 몰랐소. 만나서 반갑소." 초류빈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후기지수의 최고봉이라는 칠룡사봉의 네 분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 군요.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이녀석이... 네녀석도 중간에 문파에서 뛰쳐나가지만 않았다면 칠룡에 계속 들어가 있었을거 아냐? 네놈이 빠져나간 덕분에 내가 들어가긴 했지만... 그 래도 이나이에 칠룡에 들어있다니..." "참. 형은 언제 장가 드실겁니까? 연세를 생각하셔야죠." "네놈이나 생각해. 나는 아직도 생각없다." "왜요?" "하루라도 무공단련을 게을리하면 과거 무당파에서 그 괴인과 싸울 때, 배위 로 그자의 도(刀)가 훑고 지나가던악몽을 꾸게 된다구. 그게 얼마나 섬ㅉ한 지 너 아냐?" 초류빈은 미소하며 응대했고 다른 인물들은 처음 듣는 말인 듯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에이... 농담도... 그게 언제적 일인데?" "너같으면 생각이 안나게 생겼냐? 바로 내 뱃가죽 2촌 앞으로 그 전설의 어검 술이 통과했는데... 검강이 내 뱃가죽을 훑고 지나가는 그 느낌... 지금 생각 해도 식은땀이 바짝바짝 난다구. 그자의 도(刀)가 짧지만 않았다면 내 목숨은 그때 끝난거였어." "그래도 덕분에 형 검술솜씨 따라갈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덕분은... 제발 하루라도 편안하게 푹 자고싶을 뿐이야. 도저히 그때 생각을 하면... 아마도 평생 편안한 잠을 자기는 틀린 것 같다." "그래도 형이 빨리 장가들어야 또다른 후배가 칠룡에 들어가죠. 형 때문에 지 금 밀려있는 뛰어난 후기지수들이 몇 명인줄 알아요? 마흔 셋이나 되어가지고 아직도 칠룡에 들어있다는 건, 아마 고자..." 그러자 혁련운은 두 여자를 재빨리 훑어보며 얼굴이 벌개져서 떠들었다. "너 죽을래? 그러는 네놈은 왜 안가냐? 마흔 둘이나 되어 가지고... 피장파장 이니 헛소리 하지 말라구." "그런데 왠일로 이렇게..." "그거야 당연히 구휘대협의 무덤 때문이지. 몇가지 의논할 점도 있고 해서 모 두들 모였지. 그런데 백소저한테 얘기를 들어보니 어떤 사람하고 같이 왔다 며? 그런데 그분은 왜 안데리고 오고 너 혼자 오냐?" "예.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나중에 소개해 드리죠." "그사람의 수하가 되었다며? 뭐하는 사람이냐? 백소저는 너한테 들으라던 데..." "그것도 나중에 말해줄께요. 그런데 의논할게 뭐에요? 뭐 새로운 정보라도 들 어온게 있어요?" "조금 있으면 백상 대협이 오실거야. 그건 그때 이야기 하기로하지." 아직 백상대협은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좌중의 대화는 계속 이 어졌다. 이때 초류빈과 혁련운의 대화를 들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매영 인이 갑자기 혁련운에게 물었다. "혁 오빠! 분명 어검술이라고 했어요?" "응." "그사람 어떻게 생겼어요?" "흑의를 입은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아마도 반노환동했을 테니 나이는 모르겠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아니야. 못생긴 얼굴도 아니구. 그런대로 이목굽이가 반듯한 인물이었지. 짤막한 검은 빛깔이 나는 도(刀)를 썼지. 그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말이야. 내가 검을 뽑아들자 본척도 안하더 니 검법을 펼치니까 그제서야 검을 뽑더군. 청월검법이라면 상대해줄 값어치 가 있다는 듯이 말이야. 그때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고 꼬리를 내렸어야 했는 데, 그게 잘 되냐? 그때 막 청월검법을 10성까지 익혔던 때라 간크게도 달라 들었지. 그때 그자의 도가 갑자기 불타오르는 것 처럼 이글거리는 푸른 빛을 내더군. 그 상태로 도를 휘둘러 오는데 단 1초에 내 검과 호신강기가 박살이 났지. 정말 무시무시했어. 하지만 그의 도(刀)가 짧았기에 그 도가 이렇게(손 짓을 하며) 내 배 앞쪽을 통과했지 뭐냐. 하지만 그 어검술에서 나오는 검강 의 여력 때문에 호신강기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뱃가죽이 푹 파였지. 그때 정 말 죽는줄 알았다니까..." "설마... 그가?" "뭐? 그 괴인이 누군지 알고 있냐? 하기야 무영문이라면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게 더 적은 문파니까... 그사람이 누구냐?" 혁련운은 정말이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음성으로 말했지만 매영인은 그 정보의 정확도에 조금 자신이 없는 듯 힘없이 말했다. "나도 잘 몰라요. 사실 문파의 깊은 일까지는 잘모르니까요. 전에 할머니하 고 총관이 주고받던 대화중에서 생각나는게 있어서 말이에요." "뭔데?" "그렇게 초식을 무시하고 어검술을... 쓴다면 현경의 고수가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봐야지." "구휘 대협 다음에 나타난 현경의 고수가 한명 있어요." "뭐라구?" "마교에 1명 있었죠. 놀랍게도 탈마의 고수라고 들었어요. 탈마면 현경과 마 찬가지라고 들었으니 그도 현경급의 고수라고 봐야 하겠죠?" "그렇지. 하지만 나는 마교의 고수가 그렇게 엄청난 무공을 깨닳았다는 말을 들은적이 없는데?" "그거야 당연하죠. 아마도 성격상 문제가 좀 있는 인물이었던 모양이에요. 그 래서 그런지 10년도 전에 마교에서 제거되었으니까요. 그가 활동했던 시기로 보면 혁 오빠가 만난 괴인이 그일 가능성은 대단히 높아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혁련운이 말했다. "제거 되었다고?" "예. 예전에 얼핏 듣기로 그는 기억을 상실해서 떠돌아 다닌다고 했어요. 마 교에서 탈출할 때 엄청난 중상을 입은 모양이에요. 그래서 모든 무공을 잊은 상태에서 황궁에 포섭된 모양이었어요. 황궁무공을 다시 익혀 화경급의 실력 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를 포섭할 방책을 할머니하고 총관하고 의논하 는 걸 우연히 들었었거든요." "그 외에는?" "그것 말고는 없어요. 탈마라는 말이 들려서 잠시 엿들은 것 뿐이니까요." * * * 백상 대협과의 의논이 끝난 다음 그들은 출발 날짜를 내일로 잡고는 백상 대 협이 마련해 준 숙소에 짐을 풀었다. 사실 내일 떠날 것이니 짐을 풀것도 없 었지만 몇가지 필요한 것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로들 차를 마시며 담소 를 나누다가 능소천이 초류빈에게 물었다. "저하고 피리솜씨를 겨루게 할 사람이 있다면서요? 잠시 시간도 나는데 풍류 를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와아..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그사람도 정말 금을 잘타던데, 능소천 소협의 실력이 뛰어나시단 소문은 들었거든요. 그분과 함께 저희들의 이목을 좀 넓혀 주세요." 사실 옥면공자 능소천의 피리솜씨와 거문고 솜씨는 널리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는 시서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기에 모두들 그를 풍류공 자라고도 불렀다. 모두들 이렇게 나오자 초류빈은 그들을 묵향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마교도라고 선전을 하지는 않겠지.' "뭐... 좋겠지. 따라들 오게." 묵향은 초류빈이 떠날 때 그 상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정원 한 구석에 돗자 리를 깔고 그 위에 가부좌를 튼 채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웅성거리면서 사람들이 몰려오자 그는 천천히 일어섰고 그의 뒤쪽으 로 검대에 매달려 있는 묵혼검이 얼핏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혁련운이 중인 들과 떠들며 별채의 문을 통해 들어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자신에게 수없 이 악몽을 꾸게 만든 장본인이 여기 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모습과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그때는 낡은 흑의였는데 지금은 새옷이었다. 독 때문에 백씨 세가에 와서 새로 사입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와 똑같은... 아니 꿈에서 나타나던 얼굴보다 조금 더 젊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검이나 분위기는 똑같았다. '제기랄...' 혁련운이 갑자기 멈춰서서는 흑의인을 노려보며 식은땀만 흘리고 있자 모두들 궁금해 했다. "왜그래요?" 초류빈이 말하자 그제서야 현재 자신이 취하고 있었던 행동을 인식하며 혁련 운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황룡문의 부문주가 공포에 얼어있었다면 누구에게나 그 면목이 서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쪽 묵향 타주(舵主). 이쪽은 차례로 서문길, 혁련운, 매영인, 능소천입니 다. 모두들 칠룡사봉에 들어가는 최고의 후기지수들이죠." "만나서 반갑소. 나는 시끄러운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딴곳으로 가보겠소. 이왕 오셨으니 편히 쉬시기 바라오." 묵향이 천천히 별채의 문쪽으로 걸어가자 혁련운은 마지막 남은 용기를 다 짜 내어 다급히 묵향에게 말했다. "잠깐.. 묵향 타주." 묵향이 뒤로돌아보자 말을 이었다. "혹시 우리 구면이 아닌가요?" 묵향은 고개를 갸웃 하더니 말했다. "글세... 나는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렇다면 이건 기억이 나시나요?" 주위 사람들이 말리기도 전에 허리에서 검을 쭉 뽑더니 검초를 시전했다. 그 걸 본 다음 묵향은 아직도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말했다. "청월검법? 같기도 하군. 그런데 뭘 기억하라는 건가?" "묵향 타주는 무당파에서 청월검법을 사용하는 사람과 싸운 적이 없습니까?" 그러자 모두들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묵향과 혁련운을 둘러봤다. 묵향은 씩 미 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물었으면 간단한 걸 가지고 돌려서 말하니 뭔 소린지 알수 가 있어야지. 당연히 나는 무당파에도 한번 갔었고 그때 청월검법 사용하던 애송이에게 본때도 보여줬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 그러자 모두들 경악에 찬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혁련운이 떠듬떠듬 말했다. "비무를... 비무를 청합니다." 그러자 묵향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절한다. 나는 비무따위 안한다. 대결이라면 몰라..." "대결 이라구요?" "목숨을 걸 각오가 있나? 이 일초에? 그렇다면 검을 뽑아라. 죽여줄테니..." 혁련운의 검을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저히 상대도 안된다는 걸 잘 안다. 놈은 삼황의 한사람이었던 뇌전검황을 저세상에 보낸 인물이다. 그 건 무당파의 장문인에게 그때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혁련운은 지금 자신이 위축되어 버리면 다시는 검을 못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놈의 악몽 때문에 거의 사는 것 같지가 않은데... 여기서 더욱 위축되면 검 을 버리는 길밖에 없었다. 순간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떨림이 천천히 멎기 시작했다. 단 1초라도 자신있게 펼치고 싶었다. 그때 자신이 그렇게 믿었던 검초가 산산이 부숴지며 느꼈던 공포감... 하지만 이번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련을 했던가. 단 1초만 이라도 자신있게 저 괴물같은 상대에게 펼칠 수 있다면 이제부터 편안하게 잠 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호오... 기세가 제법이군." 혁련운이 '단 일초만...'이라는 말을 되뇌이며 자세를 잡자 묵향이 내뱉은 말 이었다. 묵향도 천천히 검을 뽑았다. 묵혼검의 그 검은 검신이 천천히 검집에서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 사건의 경과를 약간 대화를 통해 알고있었던 그들은 묵향의 싸구려 처럼 보이는 아주 빈약한 검집에서 검은색 검이 빠져나오자 그 때 들었던 혁련운의 회상이 사실이었음을 느꼈다. 단 한가지만 빼고서... 그 검은색 칼은 도가 아니고 양날이 모두 세워져 있는 검이었다. 묵향이 검을 뽑아 자세를 잡자 혁련운은 일순간 당황했다. 검을 뽑기 전에는 뭔가 만만한 구석이 없지않아 있었는데 검을 뽑은 순간 그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의 몸은 수많은 헛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 모든게 함정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너무 완벽해서 치고 들어갈 틈이 하나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원래 이론상으로는 헛초를 몇번 날려 상대의 자세를 허물고 그다음 실초로 공략하는게 좋지. 하지만 그게 통할 상대가 아니야. 단 1초라도 제대로 펼칠 수 있을지 의문이니... 처음부터 강공... 방어따윈 생각할 필요도 없어. 단 1 초만이라도 제대로 펼치자.' "이얍!" 혁련운은 오늘과 같은날을 대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다 털어서 천로(泉露)라는 보검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손에 쥐고있는검이었고 이 보검이라면 아무리 어검술이라도 한방에 검을 두토막을 내지는 못할것이라 고 생각되었다. 그의 검은 수류천월(水流天月)의 초식을 그리며 그 짧은 거리에서 강기의 다 발을 묵향에게 쏘아보내려 했다. 하지만 묵향은 이미 혁련운에게 더욱 가깝게 접근해 들어오며 곧바로 검을 그의 왼쪽 허리로 찔러넣었다. 수류천월의 초식 이 만들어지면 잠시 나타난 아주 작은 헛점... 그 헛점으로 검을 찔러온 것이 다. 이것을 막는다면 그의 초식은 와해되고 지금까지 쏟아부은 공력을 회수해 야 했기에 잘못하면 내상까지 입을 수 있었다. 혁련운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 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허리에 맞아 봐야 심하면 양패구상이다. 묵향은 상대가 초식을 거둬들일 생각을 안하자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혁련운의 완성된 검초에서 강기의 다발이 후퇴중인 묵향을 향해 날아 왔다. 순간 묵향의 검은 푸른색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고 묵향은 그 상태로 검을 휘둘러 간단히 검강들을 튕겨내 버렸다. 그런다음 또다시 상대와의 거리 를 급속도로 좁혔다.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신법이었다. 이제 간신히 1초를 끝낸 후인 혁련운에게 묵향은 너무도 빨리 다가왔고 혁련운으로 서는 검초를 펼칠 시간여유 조차 없었다. 그런가운데 묵향의 검은 혁련운의 목으로 날아왔고 혁련운은 간신히 목을 움직여 피한 후 자신의 검을 묵향을 행해 찔렀다. 이건 초식도 뭐도 아니었다. 그저 살기위한 발악이었을 뿐... 묵향은 혁련운의 검을 간단히 왼손의 두 손가락 사이에 잡은 다음 그대로 혁 련운의 복부를 차버렸다. 퍽! "우악!" 혁련운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정원 구석에 처박혔다가 일어섰다. 심한 내상 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픈건 사실이었기에 비실거리면서 걸어나왔다. 이 둘의 대결은 설명은 길었지만 정말 검초조차 펼칠 시간여유가 없을정도로 짧은 시 간안에 벌어졌다. 중인들 중에 실력이 높은 한둘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의 대결이었다. 그냥 봤을 때 혁련운이 검 초를 구사하자 묵향의 몸이 눈으로 보기도 힘들정도로 빨리 앞으로 바짝 붙었 다가 뒤로 떨어졌다가 혁련운의 검초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붙었다가 투닥 거리는 것 같더니 바로 혁련운이 한 대 맞고 정원으로 날아갔으니까... 아니 이중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백운옥 같은 경우 묵향이 다시 뒤로 빠졌다가 다시 붙는 것은 아예 보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묵향은 검을 천천히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정도 했으면 자네 실력은 대단한거야. 대부분이 검초를 펼치다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으니까 말이야. 추정되는 나이를 생각했을대 자네 실력은 대단한 편이지. 자네도 슬슬 청월검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군. 그 렇지 않고 초식에 얽매인다면 자네는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수 없어. 어때? 더 해보고 싶나?" 혁련운은 배를 쥐고는 기침을 몇번 한 다음 말했다. "콜록콜록... 아닙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께선 황궁에 계신 가요?" 묵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황궁? 황궁이라니 무슨 말이냐?" "매영인이 하는 말이 묵향 타주께서 마교에서 축출당하신 다음 황궁에 계신다 고 그러던데요. 잘못알고 있는건지 모르지만..." "어찌 위대한 마인(魔人)이 황실의 개가 될 수 있는가? 본좌는 과거에도, 현 재에도, 미래에도 마인일 뿐이다." "묵향 타주께선 기억을 되찾으신 건가요? 아니면 매영인이 잘못 알고 있는 건 가요?" "저 아이가 매영인인가?" "예." "그정도까지 알고있는걸 보니 다른 문파들보다 정보력이 그래도 나은 곳이군. 본좌는 기억을 되찾은 것이지." 중인들이 묵향의 말을 듣고 무영문의 정보력에 대해 감탄하고 있을 때 하인이 한명 들어오더니 묵향에게 말했다. "저... 묵향 타주님을 찾아온 손님이 계신데 안내해 드릴깝쇼?" "데리고 오너라." "예." 딴사람은 몰라도 초류빈은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묵향이 언제나 말하지 않 았던가... 일이 생기면 찾아올 거라고. 곧이어 낡은 흑의를 입고 장검을 찬 인물이 하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했다. 그 의 몸에서는 강렬한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대단한 수련을 거친 마교 의 인물임이 확실했다. 그는 묵향의 앞에 이르러 부복하며 외쳤다. "부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주위의 인물들의 눈이 화등잔 만해 졌다. 부교주라니? "무슨 일이냐?" "군사(軍師)께서 급히 돌아오시랍니다." "군사가? 알겠다." 묵향은 백운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본좌도 일이 생겨서 거기 따라가지 못하겠군. 하지만 본좌는 아직도 남 의 무덤을 파뒤지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아. 헤어지는 마당에 한가지 알려주 지. 그따위 무덤 파봐야 별볼일 없을거야. 구휘의 무공이 집대성 된 것이 어 느정도 위력일지는 알 수 없으나 북명신공보다는 못하겠지. 본교가 구휘의 무 덤에 손을 대지 않는 이유는 본교에 북명신공이 있기 때문이야." 그러자 중인들은 경악해서 외쳤다. "정말인가요? 북명신공이 천마신교에 있다는게..." "정말이지. 교주만이 익힐 수 있는 세가지 무공에 들어가는게 북명신공이야. 그러니 쓸데없는 일에 정력을 쏟지 말고 집에 돌아가서 수련이나 하는게 좋을 지도... 참, 자네는 본좌와 함께 갈건가?" "물론, 남아일언 중천금(男兒一言 重千金)이라 했으니 따라가야죠." "다음에 인연이 있다면 만나게 되겠지. 그럼..." 묵향은 11명의 수하들과 섬서분타에 도착했다. 물론 그 수하들 중에 초류빈이 끼여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묵향이 나타나자 설무지가 공손히 인사를 건 네며 말했다. "어서오십시오. 여행은 즐거우셨는지?" "그런대로 재미 있었지. 그런데 무슨 일인가?" "자객의 암습이 있었습니다. 물론 자객을처치하기는 했지만 타주님 대신 세 워놨던 '그림자'는 죽음을 당했죠. 대단한 실력의 자객이었습니다." "그 외의 피해는?" "없습니다. 하지만 타주님이 밖에 나가신 것은 비밀이었기에 부상당하신걸로 처리했죠. 그 때문에 적의 기습이 있을지도 몰라 애태우던 중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왔으니 상관 없겠지. 나중에 수하들에게 나의 건재한 모습도 보이 고 하면 녀석들도 긴장하기 시작할거야. 참, 마화는 도착했나?" "예." "비무대회는 잘 끝마쳤나?" "예. 실력있는 자들로 2000명 정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녀석들을 철저히 추려 내는 중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인물이 없더군요. 괜찮다 싶으면 조금 뒤가 구 린 놈이고..." "뭐 그정도는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 아닌가? "지금 비밀분타는?" "거의 공사가 끝났습니다. 타주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적의 기습을 당할 확률 이 대단히 높았었기에 100명 정도를 남겨두고 모두 그리로 이동시켰습니다. 마교쪽은 원체 보안이 잘되는 통에 거의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 정파쪽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걸 보시죠." 설무지는 묵향에게 두툼한 종이뭉치를 건네주며 말했다. "살막(殺幕) 막주 홍진(洪搢)의 보고서입니다. 지금 무림은 구휘 대협의 무덤 을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정사의 정면대결 로 까지 번질수도 있을 정돕니다. 어찌되었던 타주님 이전에 있었던 유일한 현경의 고수였으니까요. 그리고 혈교가 진천왕을 도와 슬슬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정동성 전투에서 혈교의 고수들이 등장해서 관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때 강시도 200여구 동원된 걸로 조사되었습니다." "강시 따위야 별것도 아니지. 그 외에는?" "타주님께서는 별 것 아니시겠지만 보통 사람들이나 무림의 고수가 아니라면 대단히 힘든 상대죠.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는 진천왕 밑에서 일하는 혈교의 고수는 2000명 정도... 그리고 강시는 1000여구 정도입니다. 아마 십중팔구는 더 많은 힘을 뒤로 감추고 있을겁니다. 진천왕이 송의 주력부대들이 요와의 전쟁터에 투입된 뒤를 노린 기습을 감행했기에 지금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 세를 자랑하고 있지만 아마도 그 기세는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왜?" "지금 들어오는 정보로는 2년 이내에 요와의 전쟁이 끝날 것 같기 때문이죠. 요가 고려를 정벌한다고 소모한 군대의 공백이 너무 컸는지 그렇게 힘을 발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진천왕의 진격속도로 봤을 때 2년은 너무 시간이 촉박합니다. 아무리 혈교가 뒤에서 도와주고 있다고 해도 말이죠. 거기에 혈 교가 뒤를 도와준다는 걸 알고 무림인들까지 나서서 어림군에 가담하고 있습 니다. 무림맹에서도 각 문파를 설득해서 2000명의 정예무사를 파견하기로 했 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무림이 진천왕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고 있 지 않죠. 그들이 진천왕이나 혈교의 재출현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은 구휘 대협의 무덤에 대한 욕심 때문이죠." "2000의 정예라... 그들의 전력은 어느정도인가?" "각 문파에서 대강 체면치레로 끌어모은 인물들이니 말이 정예지 그렇게 대단 한 인물들은 별로 없을겁니다. 대신 황실쪽에서는 무림의 도움을 감사하면서 그 파견무사들에게 무림인의 생리에 맞게 몸통 정도만 보호할 수 있는 약식 갑옷과 방패를 하나씩 선물했다고 하더군요." "참, 그때 떠날 때 부탁해 놨던 것은 준비해 뒀나? 문파에 소속되지 않은 뛰 어난 고수 명단을 부탁했잖나?" "아... 예. 그건 준비를 해뒀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시기 전에 만나실 분들이 계신데요." "누군가?" "총타에서 온 고수들입니다. 교주가 보냈다고 하더군요. 타주님께 편지를 직 접 전할게 있다고 했습니다. 온지 여러날 되기에 더 이상 기다리게 하는 것은 실례니까 지금 만나셔야 하겠습니다." "좋아. 들라 해라." "예." 설무지는 옆에 대기하고 있던 무사에게 지시했다. "그들을 들어오게 해라." "예." 그 무사는 밖으로 뛰어 나갔다. 잠시 후 7명의 마기를 풀풀 풍기는 인물들이 들어왔다. 그중 상당수는 묵향이 잘 아는 인물들이었다. "오랜만이군." 그러자 천도왕(天刀王) 여지고(黎志高) 수석장로가 일행을 대표해 정중히 대 답했다. "예. 안녕하셨습니까? 부교주님." "본좌야 늘 안녕하지. 그래 무슨 일인가?" "교주께서 이걸 전해 드리라 했습니다." 여지고 수석장로는 밀서를 옆에 서있는 무사에게 줬고 그 무사는 쫓아와서 묵 향에게 밀서를 정중히 바쳤다. 묵향은 수하가 전해주는 밀서를 받아들며 물었 다. "자네는 내용을 알고 있나?" "모릅니다. 무조건 전하라는 지시만 받았습니다." "흐음..." 묵향은 편지를 뜯어 쭉 읽어본 다음 황당한 표정으로 여지고 장로에게 말했 다. "교주의 뜻을 이해할 수 없군. 자네도 내용을 모른다니 이걸 한번 읽어보게 나. 자네는 이대로 행할 자신이 있는가?" 여지고 장로는 서신을 쭉 읽어본 다음 말했다. "교주님의 명령은 어떤 것이라도 지켜져야만 하지요. 부교주님께 충성을 맹세 하겠습니다." "본좌는 교주와 싸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만약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이건 제가 직접 교주 님께 받은 밀서고, 또 교주님의 마지막 명령이니까요." 여지고 수석장로는 뒤에 늘어선 인물들에게 편지를 직접 읽어볼 수 있도록 줬 다. 그들도 편지를 읽어본 다음 묵향에게 부복하며 외쳤다. "부교주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럼 여지고 장로." "예." "일단 여기 써져있는 '이번에 보내는 수하들은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니 본교 의 부교주로서 그들을 수하로 받아주기 바라오.' 하는 말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이들 외에도 조만간 본좌의 성의를 확실히 알게 해주 겠소.' 하는 제일 마지막 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 이건 무슨 말이오?" "글쎄요. 거기 서신에 씌여져 있는 대로 교주님과 묵향 부교주님간의 충돌은 그 장인걸 부교주의 공작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교주님께선 부교주님과 다시 사이좋게 지내기를 원하시는 거죠. 그리고 동시에 둘이 힘을 합쳐 장인걸을 몰아내자는 겁니다. 그 때문에 본교 내의 실력있는 고수들을 부교주님의 밑에 두려는 것이구요." 묵향은 여지고 수석장로의 말에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 다. "실력있는 고수라... 눈앞에 보이는 자네들만 해도 엄청난데 더 이상 뭘 주겠 다는 건가?" 묵향의 앞에는 수석장로 여지고를 선두로, 차석장로 사혈천신(蛇血天神) 호계 악(胡戒惡), 외총관 고루혈마(枯 血魔) 옥관패(玉冠覇), 우외총관 지옥혈귀 (地獄血鬼) 천진악(天進惡), 좌외총관 음희(淫嬉) 설약벽(薛若碧), 혈화궁 궁 주 사망혈매(死亡血梅) 나유란(羅幽蘭), 만악궁 궁주 만묘서생(萬妙書生) 진 천악(陳天岳)이 부복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수석장로를 제외하면 모두 다 마교의 주력이 아닌 분타를 관할하는 직책을 가진 인물들이거나 마교의 주 세 력과 분리된 분파 세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준다는 말은 곧 그들의 휘하 세력까지 준다는 말일 것이다. "그럼 교주는 자기는 총타 안에서 세력전을 펼칠테니 나는 외부를 맡아달라는 건가? 그도 아니면 뭔가? 총타를 제외하고 외부에 퍼져있는 일만 고수들을 나 에게 맡기는 이유가 뭐냐구?" 묵향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좌중을 훑어보며 말하자 여지고 수석장로가 황급히 답했다. "서신에 써져있듯이 지금 총타의 세력전은 이미 누가 승리할 수 있을지 누구 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장인걸은 아예 대놓고 자신의 추종세력을 총타에 집결시키고 있는 판국이구요. 그렇기에 교주께선 부교주께 서 밖에서 도와주시기를 원하는 것이죠. 지금은 누가 적인지... 또 누가 아군 인지 그것 조차도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부교주께서 교주님을 도와주 신다면 교주님은 승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여지고 수석장로의 말에 비웃는 듯한 묵향의 대답이 이어졌다. "하지만 뭘로? 교주가 나한테 준 1만 마교도들로? 그 1만의 힘이라고 해봐야 총타의 20분의 1도 안된다는걸 자네는 알고 하는 말인가? 진짜 정면전이 벌 어진다면 외부에 깔려있는 1만 마교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들이지. 돈 이나 벌어들이는데는 소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실전에는 너무나 약해. 그렇 다면 그 '성의'란 말의 해석은, 교주가 나에게 새로운 무력단체를 하나 선물 하겠다로 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나는 뭐로 교주의 말을 믿어야 하지? 그때 는 죽이려고 하더니 이번에는 장인걸과 세력다툼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하면 나는 예, 그렇습니까? 하고 도와줘야 하나? 어쩌면 장인걸과 교주가 둘이서 짜고 날 죽이려고 또다시 꽁수를 쓰고 있는건지도 모르는데? 나를 설득하기 위한 거라면 예물이 너무 적어." "그건 그렇습니다. 평화시라면... 돈벌어들이는데는 외부 분타들이 대단히 효 과적이죠. 하지만 부교주님 말씀대로 모든 전투세력은 총타에 집결해 있는게 또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교주님께서는 천랑대와 염왕대의 정예를 가지고 계 시지 않습니까? 그들만으로도 총타의 힘의 3할은 가지고 계신 것이지요." "3할이라고? 말도 안되는 말 하지 말라. 본좌가 만약 없다면 천마혈검대와 수 라마참대 만으로 하루저녘에 모두 시체로 만들 수 있을테니까..."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지만 부교주님이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교주 님은 휘하의 무력단체들을 믿지 못하기에 장인걸의 입김이 적은 세력부터 총 타로부터 차근차근 분리해서 부교주님께 넘기시는 것입니다. 본교는 약육강식 의 철칙이 지켜지는 곳. 일단 교주님께서 부교주님께로 세력이 보내지기만 한 다면 부교주님께서 그들을 장인걸의 입김에서 분리하실 것을 믿는 것이지요." "강자지존(强者之尊)의 법칙이 있으나 사실 그 법칙이란게 꼭 지켜진다는 법 은 없지. 본교 내에서도 암습이나 모략이 없는게 아니니까. 교주가 갑자기 선 심 쓴답시고 주는 세력에 첩자들이 끼어있으면 아주 곤란하지. 뭐, 어쨋든 준 다고 하니까 고맙게 받기로 하고 자네들에 대한 처리는 나중에 할테니 숙소에 돌아가 쉬게나. 그리고 여지고 장로는 좀 남아있게." 여지고 외의 인물들이 물러가자 묵향은 그를 이끌고 자그마한 회의실로 들어 갔다. 그런다음 여지고 장로의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진정한 교주의 뜻을 알고싶어." "방금 말씀드린게 전부 진실입니다. 부교주님의 축출은 장인걸의 음모였습니 다. 그걸 교주님은 알아내신 것이구요. 알면서 또다시 당할 수는 없잖습니 까?" 그러자 묵향은 살기띈 미소를 지으며 여지고에게 말했다. "자네라면 한번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상관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있을까? 그 것도 자네보다 무공도 약한..." "..." 그 말에 여지고 장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기는 참 힘들 지만 없을수도 없었다. 교주의 총애를 받아 실력이 없으면서도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멍충이들도 있는게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묵묵히 묵향의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채려고 노력중인 우직한 무인을 찬찬히 바라보던 묵향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나를 봐도 별로 알아낼 게 없을걸세. 사실 나 자신도 다음에 무슨짓 을 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한가지만 확실히 해두세나." "..." "자네는 나 한사람에게만 진정으로 충성을 맹세할 수 있나?" "..." "역시 교주가 걸림돌이지?" "부교주님이 교주 취임을 하신다면 몰라도 그렇기 전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만약 장인걸이 교주를 없애고 취임한다면? 교주를 폐하고 교주에 등극한 사 람은 많지. 그렇기에 하는 말이야. 자네의 충성은 교주란 직위를 향한 것인 가? 아니면 한영성이란 개인을 향한 것인가?" "그 두가지가 함께라고 보시는 게 좋을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분의 취임식 때 충성의 서약을 했으니까요. 물론 지금의 교주가 바뀐다면 그 충성의 대상 은 두 번째 서약을 한 부교주님을 향한 것이 될 것입니다." "좋아. 어쨋든 교주가 마음이 변치 않는 한은 자네를 죽일 필요가 없다는 말 이군. 그렇지?" "아닙니다.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명이셨습니다. 총타를 떠난 후에는 교주님 의 서신이나 그 모든 것을... 설혹 제 앞에 교주님이 직접 나타나신다 해 도... 그러니 당연히 이후의 충성의 대상은 부교주님이 되겠죠." "뭐 좀 복잡한 것 같지만 어쨋든 현재는 변절할 가능성이 없다니 되었군. 이 봐! 설무지." "예." "들어오게." 설무지가 들어오자 묵향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자네가 방금 들은 대로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네의 의견을 제시해 보게." "방금 거두어 들이신 세력은 본교의 전투세력은 아닙니다. 또 그 안에는 첩자 가 있을수도 있구요. 그렇다면 처리방법은 하나 뿐입니다. 그들을 최대한 빨 리 분산해서 숨겨버리는 거죠. 첩자가 들어있는 조직은 아마도 드러나면서 적 의 공격을 받고 괴멸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공격을 했다고 해도 그 모든 조직이 다 무너질 수는 없겠죠. 우선, 그들을 총타와 섬서분타, 양쪽의 세력에서 분리해버리는 겁니다. 나중에 모든 다툼이 끝난 다음에 그들은 필요 하기 때문에 아마 적들도 그 미약한 세력들을 자신의 세력을 분산하면서 까지 토벌하려고 들지는 않을겁니다." "좋아. 일단은 그렇게 하자. 여지고 장로!" "예." "호계악 장로에게 일러 분타의 모든 세력을 숨어들게 하라. 그들이 현재 가진 모든 재산은 처분해라. 그런다음 새로운 비밀분타를 건설하는 거야. 그 외에 외총관 휘하의 무력세력들은 모두 이곳으로 불러들여라. 아무리 별볼일 없다 해도 쓸모는 있겠지." "존명!" * * * 등에 4척이나 되는 장검을 두 자루나 짊어진 6척(181Cm) 장신의 무사가 발걸 음도 가볍게 걸어가고 있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 물로 강렬한 안광(眼光)과 더불어 강렬한 마기가 전신에서 뿜어나오고 있었 다. 그는 평상시와 같이 검붉은 핏빛이 도는 구역질이 날듯한 빛깔의 낡은 옷 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네명의 무사가 지키고 서있는 문앞에 이르러 품속에서 붉은색 옥패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하늘아래 한 사람이 있으니" 그러자 그 무사중의 한명이 말했다. "정, 사, 마를 통합하여" 그러자 그가 다시 말했다. "뱃놀이를 하리라." 마지막 말은 영 문구에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말이었지만 무사들은 그에게 절 을 하며 말했다. "인어와 함께... 안으로 드시지요. 교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암호를 묻고 답하는 것이 복잡한 이유는 양쪽이 서로를 시험하여 문답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암호는 거의 하루에 한번 이상 바뀌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상대에 대한 시험은 교주의 근처로 다가갈수록 엄중해 진다. 하지만 이런다고 암살당해 죽은 교주가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 니기에 암호의 교환은 초기에 마교 총단이 만들어진 후 내려오는 관습일 뿐 뭐 별다른 뜻은 없었다. 사실 암호라도 교환해야 뭔가 호위라도 하는듯한 기 분이 드는게 사실이 아닌가? 교주는 밀실로 들어오는 그를 보며 반겼다. 그는 문 옆에 검대를 풀어 두자루 의 검을 세워둔 후 교주의 곁에 가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어서 오게나." "무슨 하교하실 거라도?" 교주는 품속에서 밀서 두개를 꺼낸 후 그에게 주며 말했다. "자네는 본좌의 명령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지킬 자신이 있는가?" "예." "자네는 지금 곧 천마혈검대(天魔血劍隊)를 이끌고 섬서 분타로 가게." "섬서 분타라면 그 묵향 부교주가 세운...?" "그렇네." 그러자 천마혈검대의 대장 환영비마(幻影飛魔) 구양운(丘陽雲) 장로는 어이없 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천마혈검대 만으로 그를 공격하라는 말씀입니까?" 구양운 장로의 항변에도 교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 할지는 거기 있는 노란색 봉투의 밀서에 써져 있네. 자네는 일단 섬 서 분타 부근까지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그 노란색 밀서를 꺼내 읽게나. 그런 다음 그 밀서에 써진 대로 행하면 돼. 완벽한 전투준비를 챙겨서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 하게." "존명!" "자네가 출발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네. 그냥 본좌의 명으로 출 동한다고만 하게. 나머지는 본좌가 처리해 둘거야. 행선지는 절대 그 누구에 게도 노출하면 안돼. 거기에 이 작전의 승패가 달려있네." "명심하겠습니다." 교주가 비밀스런 외출을 한 후 2시진(4시간) 뒤... 제법 넓직한 밀실 안에 여 러 인물들이 커다란 탁자를 중심으로 모여 쑥덕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몸에서 짙은 마기를 풍기는 자들... 그들의 표정은 대단히 심각했다. 그들 중에서 상 석(上席)에 앉은 자가 입을 열었다. "오늘 그대들을 급히 모이라고 한 것은 몇가지 의논할게 있어서요." "아직 혁무상 장로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바쁜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소. 이제 ㄷ이 거의 완성되었으니 이제 행동을 시작 해야지 언제까지고 미적미적 미룰수는 없소." "하지만 아직 완전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분타들이 총타와 별개 로 움직이며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 이건 뭔가 교주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말인데 섣불리 덤볐다가 되려..." "크흐흐흐... 그 걱정은 하지 마시오. 몇몇 분타에 심어놓은 첩자의 보고로는 이번 권력다툼에 아주심한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해 분타를 총단으로 부터 독립시켜 잠적시킨 것이지 별다른 뜻은 없는 것 같소. 하지만 문제는 그 게 아니라 교주가 우리들의 움직임을 어느정도 눈치챘다는 것이지." "어느정도까지 눈치챘습니까?" "물론 그 단순한 교주는 이제서야 묵향을 축출한 것이 실수한 거라는 걸 눈치 챘지. 거기에 운좋게도 묵향은 교주의 측근인 능비계 부교주까지 죽여줬다 이 말이오. 이제 교주는 믿고 의지할 힘이 거의 없다는 것, 그리고 누가 적인지 아직 모호한 상태에서 최후의 도박을 시작했소." "뭡니까?" 상석에 앉은 인물은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묵향과 손을 다시 잡는 것이오." 그러자 탁자 주위에 앉은 인물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묵향은 누가 뭐래도 마교가 배출한 최강의 고수가 아닌가? 그가 교주의 손을 들어준다면 반란의 반자도 거론조차 불가능했다. "이럴수가... 그런 사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그가 본교에 돌아온다면 반란 자체는 불가능하오. 그는 무공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단순한 바보요. 그때도 그가 교주에게 그 뛰어난 무공에도 불구하고 충성을 바치는 바람에 축출한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그 목소리를 막았다. "하지만 묵향과 교주의 결합은 어려울 겁니다. 교주의 말만으로 그가 어리숙 하게 들어왔다가 무슨일을 당하려구요. 전에 한번 쓴맛을 봤으니 그것은 어려 울겁니다." 그러자 상석에 앉은 인물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교주는 화해의 선물로 분타들을 묵향에게 맏긴걸로 조사되었소. 그래서 분타 들과 연락이 끊긴 것이고... 거기에 혈화궁과 만악궁까지 선물로 줬더군. 본 좌도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낸 덕분에 막지 못했소." 하지만 그 인물은 그런 반론에도 묵향과 교주의 결합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 다. "하지만 겨우 그 세력들 해봐야 본교의 주력이 아닙니다. 그들의 전력을 몽땅 합해도 총타 전력의 20분의 1도 안되는 전력인데 겨우 그걸 가지고 교주의 말 을 신뢰하기는 힘들지요. 자성만마대(紫星萬魔隊)만 동원해도 넉넉잡고 반년 이면 중원 구석구석에 있는 분타들을 싹쓸이 할 수 있을텐데... 묵향이 생각 을 조금이라도 할 줄 안다면 그따위 조건에 응하지는 않겠지요." 그러자 상석에 앉은 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크하하하... 역시 제갈천(諸葛天) 장로는 식견이 높으시오. 물론 묵향은 그 따위 미끼를 덮썩 물 바보는 아니지요." 그러자 멸절신장(滅絶神掌) 제갈천(諸葛天) 장로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그렇다면 무슨 또다른 미끼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상석에 앉은 인물은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그것을 탁자 주위에 앉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탁자중간으로 던지며 말했다. "교주가 제시한 최후의 미끼는 바로 이거요." 상석의 인물이 던진 것은 종이였다. 그 인물의 절묘한 내공의 조절에 의해 종 이는 활짝 펴진 상태로 천천히 날아가서 정확히 탁자의 중간에 살며시 내려 앉았다. 그 내용을 눈알이 빠지게 심각하게 바라보던 제갈천 장로는 경악해서 외쳤다. "그렇다면 교주는 천마혈검대를 묵향에게 준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 둘의 결합은 성공할겁니다. 부교주님! 천마혈검대가 묵향에게 가는 걸 기필코 막아 야만 합니다." 그러자 장인걸은 광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크하하하하... 물론 막았지요. 그걸 막았으니까 이 종이가 여기 있는 거요. 구양운 장로는 그대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본좌에게 포섭된 인물이오. 그는 교주의 명령과는 달리 섬서 분타 부근까지 가겠지만 곧장 이 리 돌아올거요. 물론 그가 그쪽으로 움직이는 것도 교주의 첩자들을 속이기 위함이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교주는 구양운 장로가 배신했다는 걸 알아챌 겁니 다. 그정도 선물이면 묵향은 교주와 화해할 게 분명하니까요. 천마혈검대까지 묵향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교주보다 묵향이 거느린 전력이 월등해지기 때문에 묵향도 교주를 믿게 될테니까요.교주가 눈치채기 전에 선수를 써야 합니다." "이미 혁무상 장로가 손을 써놨소. 이제는 교주를 처치하는 일만이 남았을 뿐 이오. 그대들은 정확히 5일 뒤 교내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시오. 혁무상 장로 가 그대들을 지휘할거요. 그리고 그때쯤 교주는 영원히 안식을 취하게 될거 요." 그러자 제갈천 장로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교주를 없애는 건 좀 자제해야 할 겁니다." "왜?" "인질로 써야 할테니까요." "인질?" "교주와 그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야지만 독수마제(毒手魔帝)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독수마제 개인이야 겁날게 없지만 원로원이 움직인다면 큰일이 지요. 우선 인질들로 독수마제를 협박해서 그의 개입을 막은 후 천천히 독수 마제를 고립시켜야만 합니다. 물론 그 인질들의 생명을 철저히 보호해야만 합 니다. 하지만 그것도 독수마제의 독수(毒手)를 뽑아버린 후에는 필요 없겠지 만요... 흐흐흐..." 대단히 악랄한 계획임에 틀림없었다. 독수마제는 은퇴한 교주의 아버지. 당연 히 교주와 그 가족들의 목숨으로 독수마제를 위협한다면 그는 장인걸의 교주 찬탈을 묵인할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런다음 천천히 독수마제의 원로원에 대한 영향력을 없앤 후 은밀히 처치해 버린다면? 그런다음 교주와 그 가족들 까지 다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모두들 두발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다. "크하하하... 좋은 생각이군. 본좌도 그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소. 좋아. 일 단은 아쉬운대로 교주를 반 병신을 만드는 걸로 끝내야지. 제갈천 장로는 본 좌가 돌아올때까지 교주의 가족들을 확보해 놓게." "존명!" * * * 그로부터 5일 후... 작고 아담한 장원에 교주 일행이 도착했다. 이번 나들이 는 마교의 교주로서 해서는 안되는 짓을 하는 것이기에 그의 수하들은 많지 않았다. 초절정 고수 10명으로 이뤄진 교주 독립 호위대인 십혈룡(什血龍)과 원거리에서 교주를 호위하기 위해 특별히 선발된 혈마대(血魔隊)의 고수 100 명 중에서 30명 만을 데리고 왔을 뿐이다. 교주 일행이 장원에 도착한 다음 제일 먼저 한 일은 장원의 식솔들을 모두 제 압하여 방 하나에 굴비 엮듯 묶어가지고 처박아놓는 것이었다. 일단 주변 정 리가 끝나자 교주는 천천히 주위 경치를 구경하며 장원 안으로 들어섰고 그의 뒤에서 십혈룡들이 호위하며 따라왔다. 교주가 아담한 방에 들어가자 무사 한 명이 작은 술병과 간소한 안주 몇가지를 재빨리 가져왔다. 교주는 그걸 천천 히 마시면서 손님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교주가 1시진(2시간)정도 기다리자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다. 부드럽게 안광 을 안으로 갈무리한 30대 중반의 잘생긴 청년... 그는 현 무림맹주였다. 그 또한 교주처럼 소수의 호위들만을 거느린 채 장원에 들어섰고 이 시대가 낳은 두 거인이 작은 방에서 쑥덕거리는 동안 도저히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마교 와 정파의 절정고수들이 사이좋게 사방에 흩어져 외곽을 감시함과 동시에 서 로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오랜 만이오. 일이 잘 풀리는 모양이군요. 아주 안색이 좋으시오." "허허허... 그러는 교주야 말로... 오랜만이외다. 참. 안그래도 만나고 싶었 소. 몇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말이오." "뭔가요?" "이번에 구휘 대협의 무덤을 발견한 것 때문에 전 무림이 발칵 뒤집혔는데 왜 유독 마교만 조용하냐 이거요." "흐흐흐... 본교에는 북명신공이 있는데 왜 구태어 또다시 탐을 내겠소? 그리 고 본교 내부 사정이 그따위 무공이나 보물에 정신 팔때가 아니오." "오... 그때 묵향을 보고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 귀교에 북명신공이 있었군요. 귀하도 그 신공을 익혔소?" "익히지 못했소. 몇번 해봤는데 조금 이상하더군요. 아무래도 뭔가 고의로 틀 리게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어쨋든 전에 시도해 보다가 하마터면 주화입마 에 걸릴 뻔 한 후로는 손도 안대고 있소. 그런데 괴이하게도 묵향은 그걸 익 혔지." "귀교가 장난친게 아니라면 그럼... 그 무덤은 진짜라는 말인가? 하여튼 본좌 도 요즘 그놈의 무덤 때문에 엄청나게 바빴소. 모두들 보물에 눈이 뒤집혀서 정사간에, 또는 문파간에 혈전이 벌어질뻔한게 한두번이 아니요. 어쨋든 귀교 가 개입한게 아니라니 다행이구려... 참. 그런데 아직 만날때가 안되었는데 무슨 급한 일이길래 본좌를 불렀소?" 그러자 아연한 얼굴표정을 하고 교주가 오히려 되물었다. "뭐라구요? 본좌는 그대가 불러서 온 건데... 그대가 부르지 않았소?" "그럼 이게 어찌된 일이오?" "아차... 간계에 빠졌소." 이때 밖이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소리, 기 합소리... 교주와 맹주는 재빨리 신형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밖에서 본 것은 정말이지 경악할만한 장면이었다. 교주와 맹주를 호위 하는 직속 수하들은 대단히 뛰어난 고수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는 300여명의 혈의를 입은 무리들... 도저히 그들 은 인간같지가 않았다. 각종 병장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손이나 발이 날아가 거나 심지어 배가 찢어져 내장이 흘러내리는데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시 무시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교주는 신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천령강시... 도대체 누가 천령강시를...?" 이때 활을 든 100여명의 무사들과 그 외의 각종 무기를 가진 1천여 무사들이 주위에 내려섰다. 완벽하게 포위된 것이다. 이때 그중의 한명이 입을 열었다. 30대 초반의 준수한 얼굴을 한 그는 생긴것과 달리 음흉한 웃음을 터뜨리며 교주의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오랜만이요. 교주. 이런 장소에서 만나게 될줄은 생각도 못했겠 지요?... 크하하하" "장인걸... 이 개자식! 네놈이... 네놈이..." "교주가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어놓은 천령강시... 상상 밖으로 정말 위력이 대단한 것 같지요? 본좌가 교주에게 강시 제조법을 알려줬으니 당연히 그에따 라 만든 강시는 본좌가 부릴 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그대는 해뒀어야 했소. 거기에 강시를 만든 책임자가 본좌의 심복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지 요. 일반적인 도검으로 상처하나 입힐 수 없는 천령강시들을 토막을 낼 수 있 을정도로 호위무사들의 실력이 의외로 뛰어나다는 점은 인정하겠지만 그래도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거외다... 크하하하..." 분노에 가득찬 교주가 몸속의 진기를 서서히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그의 피부 는 밝은 자색을 띄기 시작했고 더욱 기괴한 형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옆 에 서있던 맹주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허리에서 자신의 애검 인 빙백수룡검(氷白水龍劍)을 천천히 뽑았다. 빙백수룡검은 맑고 투명할 정도 로 아름다운 2척 8촌의 검신에 양면에 1마리씩의 수룡이 음각되어있었다. 대 단히 파괴력이 강한 검으로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데, 아무리 사람을 베어도 피가 묻지 않는 특이한 검으로서 무림맹주의 신물(信物)이었다. 장인걸은 두 고수들의 행동을 지긋이 바라본 다음 느긋하게 말했다. "참... 무림맹주까지 계셨군요. 정사는 불립이라 했는데... 여기에 서 계신다 는 것 자체가 불행이지요. 흐흐흐... 어쨋든 두사람 다 여기서 빠져나갈 생각 은 버려야 할거외다. 이들 외에도 2천의 정예들이 외곽을 포위하고 있으니까 말이오. 어쨋든 그대들이 한번씩 은밀히 만나서 쑥덕거린다는 것을 본좌가 눈 치챘을때부터 그대들의 운명이 다한것이지요. 조용히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 려줄 의향이 있소이다." "이 모든게 다 네놈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냐?" 그러자 장인걸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렇소. 나도 이렇게 잘 될줄은 몰랐소이다. 혼자서 새로운 마도를 추구할거 라고 암흑마교를 세웠을 때 정말 천하가 곧 내 손안에 들어올 것 같았지요. 하지만 곧이어 현실의 벽에 부딛쳤소. 마교 내에 있을때는 잘 몰랐는데 밖에 서 마교를 부숴보려고 했더니 그게 장난이 아니더군. 본좌가 50여년을 노력해 서 만든 단체라고 해봐야 천마혈검대가 하룻저녘 휘저어놓으면 가루가 날정 도밖에 안되었으니까 말이요. 그래서 생각을 바꿔서 마교 안에서부터 시작하 려고 들어갔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더 큰벽이 기다리고 있었소. 교주도 알다 시피 묵향이란 초고수가 있더군. 그냥 놔뒀다간 정말 나한테는 국물도 남을 게 없을것 같아서 슬슬 뒷공작을 했지. 교주는 말로는 묵향을 포용하는 것처 럼 하면서 뒤로는 묵향의 재능에 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지요. 나는 그걸 조금씩 자극한 것 외에는 별로 한게 없지요. 흐흐... 당신은 멍청하게도 적당 하게 이간질을 하니까 아주 손쉽게 먹이를 덮썩 물었소. 거기에 내 조언을 듣 고 묵향을 없애기 위해 능비계를 파견한건 정말 자기 무덤을 판거나 다름 없 지요. 하하하.. 그렇지 않소? 교주나으리." 그러자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솟은 교주가 노성을 질렀다. "네놈에게 내가 아쉽게 해준 것이 없는데, 이렇게 본좌를 핍박할 수 있냐? 그 따위 교주 자리 달라고 했다면 줄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꼭 내란을 일으 켜야만 했나?" 그러자 장인걸은 음산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교주는 뭘 모르시는구려. 자고로 계집의 옷도 순순히 벗게 놔두는 것보다 강 제로 벗기는게 재미있는 법이지. 또 꼬리치는 계집보다 반항하는 계집을 강간 하는게 더욱 재미있지 않소? 거저 굴러떨어지는 교주자리는 별로 재미없는 거 요. 뺏아야만 진정한 내 자리가 되는거지." 그들간의 이죽거리는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교주와 맹주의 호위무사들은 모 두 다 천령강시들에게 죽임을 당해버렸다. 천령강시들은 남은 두 사람의 실력 을 은연중에 느꼈는지 곧장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만큼 그 두 거인의 실력은 독보적이었다. 그들은 무림에 현존하는 11명밖에 안되는 화경이나 극마의 고수들이었으니까... "뭣들 하느냐? 공격하라!" 아직도 200여구나 남은 천령강시들은 호위무사들을 전멸시킨 후 잠시 주춤거 리다가 장인걸의 불호령이 떨어진 다음에야 공격을 시작했다. 천령강시는 일반적인 강시의 약점인 속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마물이다. 거기에 이들은 어느정도 이성(理性)을 갖추고 있기에 멍청하게 움직이지도 않 는다. 눈부신 속도에 과거 익혔던 무공의 초식에 바탕을 둔 뛰어난 공격력, 거기에 강시 특유의 단단한 몸매를 자랑하는 이것들은 거의 무적에 가까운 파 괴력을 자랑한다. 그렇기에 교주는 혈교로부터 유래된 이 천령강시의 제조법 을 장인걸에게 들은 다음 묵향을 없애기 위해 특별히 제조한 것인데, 그것들 이 자신을 향해 공격해 올줄은 생각도 못해봤던 사실이었다. 일단 교주와 맹주가 손을 쓰기 시작하자 정말이지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교주의 강렬한 자전마공에 강시의 몸에 구멍이 숭숭 뚫려 갔고 맹주의 백류매 화검법에 강시들이 토막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시들은 손발따위 떨어져도 끄떡도 하지 않고 두사람을 공격했다. 심지어 두토막이나 내장을 쏟아내면서 도 손으로 기어와서 어떻게 해서라도 그 두 사람의 발이라도 움켜 잡으려고 들었다. 교주와 맹주의 무공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장인걸은 무심히 내뱉았 다. "교주는 그 누구도 극성까지 익히지 못했던 자전마공을 대성했군... 흐흐 흐... 하기야 저따위 괴이한 모양으로 돌아다닐 바보가 여태껏 없었으니까 교 주가 최초였겠지만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야. 자전마공 하나에 끝까지 매달리 다니..." 그런다음 장인걸은 옆에 서있던 무사의 활을 뺏아들었다. 그런다음 늘어서 있 는 궁수들에게 명령했다. "화살을 쏴라!" 100여명의 고수들이 화살을 교주와 맹주를 향해 날렸다. 하지만 수두룩하게 늘어서있는 천령강시들이 방해가 되어 교주나 맹주에게 까지 날아간 화살은 극소수였다. 거기에 화살이 날아오는 파공음이나 기를 포착하여 천령강시들을 방패로 써먹었기에 그들에게 도달하는 화살은 거의 없었다. 천령강시들은 그 단단한 몸통으로 교주와 맹주의 튼튼한 방패가 되어주고 있었다. 내력이 약한 자가 쏜 화살은 피부조차 뚫지 못했고 내력이 좀 강하다고 해봐야 깊숙히 박 히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천령강시들은 등뒤로 화살들을 몇대씩이나 꼽 아넣고도 맹렬한 공격을 교주와 맹주에게 가하고 있었다. 이때 장인걸은 은밀히 엄청난 무위를 자랑하고 있는 교주를 향해 조준한 다음 활을 발사했다. 교주는 막 앞쪽에서 달려들던 천령강시 한구의 머리통을 바숴 버린 다음 좌우에서 협공해 들어오는 천령강시들에게 자전강기(紫電剛氣)를 퍼붓고 있었다. 이때 옆에있던 천령강시의 등쪽으로 화살이 한 대 날아온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는 천령강시의 몸이 방패가 되어줄것으로 믿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또다른 강시를 공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 도 그 화살은 천령강시를 관통한 다음 교주의 복부 깊숙히 박혔다. "허억!" 교주는 곧이어 자전강기에 두토막이 난 천령강시가 쓰러지는 뒤쪽으로 활을 든채 빙그레 미소짓고 있는 장인걸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개자식!" 교주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장인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제 방패막이가 없어진 교주에게 화살이 집중되기 시작했고 궁수들의 뒤쪽에 서있 던 또다른 고수들이 교주에게 달려들었다. 화경이나 극마는 거의 동일한, 인간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물 론 현경이나 생사경이 있지만 그 두 경지는 인간의 몸으로 올라갈 수 없는 지 고한 경지다. 그렇기에 그 경지에 올라서면 환골탈태를 하며 막대한 내공을 버티기 위해 몸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어쨋든 화경에 올라선 고수들끼리 일대 일로 대결한다면 뭔가 비겁한 수를 쓰지 않고서는 양패구상하기 딱 좋다. 그 둘의 실력차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화경내에서도 각기 배운 무공에 의 한 파괴력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 화경 내의 상하능력차도 있다. 갓 화경 에 올라선 자와 이제 현경에 올라가려고 깝죽거리는 인간들과의 능력차는 대 단한 것이다. 맹주와 교주의 경우 둘 다 현경에 아주 근접한 인물들이었고 장인걸은 연륜과 실력에서 아무래도 그들보다 한수 아래였다. 만약 그가 묵향처럼 현경에 올라 섰다면 애궂은 수하들을 작살내지 않고 그들을 직접 없애버렸을 것이다. 하지 만 장인걸은 자신의 실력과 교주의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상 대는 극마급의 고수 2명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이 몸소 나서봐야 끝내는 당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키운 거의 4천에 가까운 정예를 끌고온 것 이다. 거기에 자신의 수하들은 모두 다 귀혼강신대법(歸魂 身大法)을 익힌 불사의 신체를 가진 자들이 아닌가? 아무리 교주와 맹주가 극강의 고수라 해 도 그들 모두를 다 죽이려면 내공이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걸 염두에 둔 작전이었다. 이제 천령강시가 거의 죽임을 당하자 본격적으로 천명이 두사람을 죽이기 위 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도살로 치닫고 있는 것은 참으 로 의외의 사실이었다. 특히 장인걸의 수하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히고 있 는 것은 부상당한 교주였다. 맹주의 백류매화검법은 정말이지 현란하게 검강 을 토해내며 상대를 도륙했지만 그들은 곧이어 몸이 들어붙으며 일어섰다. 하 지만 교주의 무공은 극양의 자전마공. 교주의 손이 번쩍일때마다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고, 장인걸의 수하들은 상처부위가 완전히 익어버렸기에 재 생이 되지 않았다. 장인걸은 틈을 보아가며 교주와 맹주에게 화살을 하나씩 날리고 있었다. 수하 들의 몸통이야 구멍이 나건 나지않건 상관하지 않았다. 겨우 그정도 상처는 가뿐하게 재생된다는 걸 그 자신도 잘 알고있는 것이다. 교주와 맹주는 이미 두세발의 화살을 몸에 꼽고도 정말이지 인간이라고 믿어 지지 않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수많은 사람들이 시체가 되 어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덮쳐오는 숫자는 더욱 늘어나 있었다. 장 인걸이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수하들을 더 투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 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서서히 무너지고 있 었다. 아무리 그들이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강력한 고수 4천명과 극마의 고수 1명을 상대로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크흐흐흐... 이제 정신이 드시는 모양이군... 그래 몸이 어떠시오? 교주 나 으리." 온 몸이 피로 물든 인물... 그의 몸은 약하지만 아직도 자색(紫色)을 띄고 있 었다. 하지만 그의 몸 여기저기에 크고작은 상처가 생겨 있었다. 아마도 딴에 는 치료를 해준 듯 몸의 여기저기에 붕대가 감겨있었다. 그리고 그의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하게 비파골을 굵직한 쇠사슬로 뚫어놨고 하나밖에 남지않은 손 과 발에는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만년한철로 묶여져 있었다. 한중길은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지만 그때부터 철창 밖에 있는 인물의 말을 알아듣는지 모르 는지 팔목이 날아가 뭉텅한 살덩어리에 피에젖은 붕대가 감겨있는 자신의 오 른팔을 이제 하나밖에 남지않은 눈으로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 왼팔마저 잘라드릴까 하다가 식생활에 지장이 있으실 것 같아 본좌가 크게 인심을 써서 놔뒀소. 혈맥이 가닥가닥 끊겨서 아마도 20년쯤 죽어라 수 련하면 3할 정도 내공을 회복하실 수 있을거외다. 아예 내공을 없애버렸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러면 교주의 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육체가 사그라들게 뻔 하기에, 본좌가 어떻게 무림을 집어삼키는지 그 수단을 구경하라고 살려 드렸 소. 물론 그 이유로 하나 남은 눈도 뽑아버리려다가 봐준거요. 흐흐... 또 내 공이 전폐되지는 않았으니 운 좋으면 내게 복수할수도 있을거요. 크하하 하..." 그런다음 장인걸은 옆에 묶여있는 참혹한 모습의 맹주를 지긋이 바라봤다. 격 투중에 왼쪽 다리가 날아가고 없었으며 크고작은 수많은 상처를 감싸맨 덕분 에 거의 전신에 붕대가 돌돌 말려있었다. 그 또한 교주처럼 비파골에 사슬이 꿰뚫고 지나가 있었으며 남은 손발이 묶여있었다. 하지만 맹주는 교주와 달리 자신의 잃어버린 왼쪽 발을 볼 눈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맹주가 쓰러진 다음 장인걸이 뽑아버렸기 때문이다. 장인걸은 그 두 거물의 꼬락서니를 찬찬히 감상한 다음 옆 감방(監房)으로 발 길을 돌렸다. 옆쪽에 연결된 세칸의 감방에는 교주의 가족들이 잡혀 들어와 있었다. 모두들 처절한 투쟁을 했었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들도 또한 교 주처럼 만년한철로 된 사슬에 묶여 벽에 매달려 있었다. 사슬의 길이는 최대 7척 길이로 벽 뒤에 장치를 해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이쪽 사람의 지시에 의해 강철로 된 벽 뒤에있는 인물이 그 작업을 했 다. 이 감옥은 마교내에서도 최고의 중죄인들을 위해 설계한 감방들로 침상따 위는 존재하지 않고 여기서 죽을때까지 벽에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이때 옥문의 저쪽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장인걸은 감방 안 에 들어가 있는 수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수하들은 감방안에 있는 모 든 죄수들의 목에 비수를 일제히 들이댔다. 이때 저쪽에서 40대 중반의 중후 한 인상을 풍기는 인물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감방 안의 풍경을 흘끗 바라보 며 장인거의 앞에 이르렀다. 그러자 장인걸은 정중이 포권하며 그를 맞이했 다. "어서 오십시오. 태상 교주님." 그러자 태상교주는 장인걸을 무표정한 얼굴로 쏘아보며 물었다. "본좌를 이리로 부른 이유는?" "예. 이미 속하가 교주의 직위를 인수했습니다. 더구나 한중길 전 교주는 저 기 잡혀있는 무림맹주와 모종의 밀월관계에 있었기에 속하는 어쩔 수 없이 본 교의 장래를 위해 그를 처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점 헤아려 주시기를..." 그러자 태상교주는 처참한 몰골의 맹주를 지그시 바라본 후 장인걸에게 말했 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저 아이들까지 잡아들일 필요가 있었나?"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부모의 죄는 그 자식들도 져야 하는 법. 속하 는 본교의 율법에 따른 것 뿐입니다. 태상교주께서도 그 점을 잘 아시지 않습 니까?" "좋아. 저들의 처리는 어떻게 할건가?" "속하도 애써서 생포한 저들을 꼭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며칠 전만해도 존경했던 상관이요, 또 그의 가족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 건 속하가 교주가 되는데 원로원의 방해공작이 없어야 한다는 가정이 앞서야 하지만요." 그러자 태상교주는 갖잖다는 미소를 피워올리며 장인걸에게 말했다. "그대는 인질로 본좌를 협박하는 건가?" 장인걸은 태상교주의 안색을 살피며 더욱 정중하게 답했다. 어쨋든 지금은 아 직 그의 기반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다. 지금 충돌해서 좋을건 하나도 없었다. 태상교주는 거의 교주와 맞먹는 고수였다. 수하들을 총동원해서 태상교주를 없앨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를 원로원이 용서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지금은 원로원에 대한 태상교주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 이다. "아닙니다. 속하가 어찌 태상교주님을 협박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본교의 죄인일 뿐. 그들의 처리 방법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지요. 어쩌 면 저들을 모두 풀어줄수도 있지요. 사실 교주의 경우 지금 근골이 뒤틀리고, 혈맥이 끊겨 거의 폐인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또 교주의 자식들은 저도 그 아 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사랑을 주고받았던 사이가 아니겠습니 까? 속하도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저들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알겠네. 저들도 마교인이기에 앞서 본좌의 식솔들이니 그대가 약간의 인정을 베풀기를 바라네. 내 원로원에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게 말을 해 놓겠네." "감사합니다. 태상교주님." 태상교주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키며 감옥을 나서야만 했다. 자신이 지금 장인걸의 폭주를 막지 못한다면 저 아이들의 목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이어진 마교의 역사상 권력을 찬탈당한 전대교주의 가족들이 살아남은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원로원 을 동원한다면? 장인걸은 없앨 수 있을지 모르나 저 아이들의 목숨도 함께 끊 어질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살아남을 가망이 없었다. 태상교주는 장인걸을 없애는 대신 그냥 놔두는 것을 택했다. 그 이유는 지금 원로원과 장인걸이 싸 움질을 벌인다면 마교가 입는 그 피해는 수십년을 두고도 보충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그의 가족의 목숨은 절단난 것이지만 마교의 맥이 여기서 끊길수는 없었다. 혁무상 장로의 말에 따르면 무림의 정세도 대단히 불안정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래전에 마교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었던 혈교도 부활하는 이마 당에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하 고 있었기에 태상교주는 섣불리 손을 쓸수가 없었다. 장인걸의 인정아래 가족 들의 목숨을 맏기고 돌아서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 * * 장인걸은 그날 밤 자신의 방 옆에 딸려있는 비밀스런 밀실에 들아가서 벽에 쭉 세워놓은 세자루의 보검들을 만족스레 바라봤다. 세자루 다 무림인이라면 꿈속에서도 그리는 10대 기병(奇兵)이었다. 기병 서열 2위에 올라가 있는 화 룡도(火龍刀). 붉은색의 검신은 강한 불의 기운을 지니며 능력이 미치지 않는 자가 건드리면 타죽는다고 전해지는 3척 길이의 신도(神刀). 과거 사사천림 (死邪天林)의 림주가 지니고 있었으나 마교가 사사천림을 멸망시키고 입수한 후 입수했다. 검법을 익힌 작 도를 들면 아무리 좋은 도(刀)라도 강한 위력을 낼 수 없기에 역대 교주들은 그 강력한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잘 사용하지 않 았다. 한중길은 권법에 능했기에 검법을 익힌 아들에게 수라마검을 넘겨주고 대신 이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거의 사용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이 검을 계 속 가지고 있었다면 장인걸은 좀 더 큰 대가를 치뤄야만 교주를 없앨 수 있었 을 것이다. 감옥에 갖혀버린 소교주가 가지고 있던 수라마검(修羅魔劍). 아수라(阿修羅) 의 힘을 가져 그 힘을 제어하지못하는 자가 가지면 검의 마기에 홀려 혈귀 (血鬼)가 된다고 전해지는 마검으로, 검붉은 색의 검신에서는 강렬한 마기가 느껴진다. 전통적인 마교의 교주가 지니는 신물(信物)이었다. 이제 폐인이 되어버린 무림맹주가 가지고 있던 빙백수룡검(氷白水龍劍). 맑고 투명할 정도로 아름다운 2척 8촌의 검신에 양면에 1마리씩의 수룡이 음각되어 있다. 대단히 파괴력이 강한 검으로 싸늘한 한기가 느껴진다. 아무리 사람을 베어도 피가 묻지 않는 특이한 검으로 무림맹주의 신물(信物)이었다. 이 세 자루의 기병 중두 자루는 일파를 대표하는 신물. 장인걸에게는 이제 자신의 것이 된거나 다름없는 마교의 신물보다 무림맹의 신물인 빙백수룡검이 더욱 가치있게 생각되었다. 무극검황 옥청학 맹주의 목숨과 맹주의 신물로서 협박을 하면 무림맹은 마교에 많은 것을 양보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될 것이다. 장인걸은 빙백수룡검을 슬며시 쓰다듬으며 옥청학의 아들 옥진호 (玉振湖)가 다음 맹주가 되기를 빌었다. 옥진호는 화경에는 올라서지 못했지 만 대단히 뛰어난 검객으로 백류매화검법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거기에 옥청학의 아들이라는 든든한 뒷배경이 있으니 잘만 하면 그가 차기 맹주가 될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흐흐흐... 이때 밖에서 음산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죄인을 끌고 왔습니다." "잠시 기다려라." 장인걸은 밀실 밖으로 나간 후 기관장치를 돌리는 장치인 아수라의 목을 원위 치로 돌렸다. 그러자 책장이 빙글 돌아가며 밀실로 들어가는 통로는 사라졌 다. 그런 후 그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들어오라." 문이 열리며 두명의 무사가 한중길의 손녀 한영영을 끌고 들어왔다. 군데군데 검붉은 피가 묻은 옷을 입은 그녀는 이미 혈도가 막혔는지 한올의 내공조차 끌어올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가 봐라." "옛!" 무사들이 나간 후 장인걸은 원한이 가득한 한영영의 턱을 들어올려 얼굴을 지 긋이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퇘! 더러운 자식!" "역시 계집은 반항하는 맛이 있어야지. 크하하하..." 장인걸은 발버둥 치는 한영영을 간단히 들어쥐고는 침상으로 갔다. 그러자 한 영영은 발악을 하며 외쳤다. "더러운 자식! 내 몸에 손만 대봐. 혀를 깨물고 자살할테다..." 그러자 장인걸은 버둥거리는 한영영을 찍어누른 후 유방을 주물럭거리며 이죽 거렸다. "흐흐흐... 혀를 깨물면 혀만 잘리지 죽긴 왜 죽어. 자 혀를 깨물어 보거라. 본좌는 피를 보면서 성합을 하는걸 즐기니까... 크하하하... 하지만 네년이 혀를 깨물면 네 아비와 어미의 목도 함께 날아갈 거라는 것도 생각해 둬야 할 걸? 어때? 아직도 깨물고 싶은 생각이 있나?" 무림은 무림맹주 무극검황 옥청학의 갑작스런 실종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를 호위했던 30명이 넘는 뛰어난 무공을 지닌 무사들까지 함께 사라졌기에 구구 한 억측과 유언비어가 나도는 가운데 정파는 서서히 분열하기 시작했다. 맹주 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무림맹은 청성(靑城), 점창(點蒼), 무당 (武當), 아미(峨嵋), 소림(小林), 곤륜(崑崙), 종남(終南), 화산(華山), 공 동(空洞)의 구파와 개방( 幇), 또 남궁세가(南宮世家), 악양세가(岳陽世 家), 서문세가(西門世家), 종리세가(鍾里世家), 제갈세가(諸葛世家)의 오대 세가가 연합한 단체인 만큼 그들은 맹주의 실종과 함께 자파에서 맹주직을 차 지하기 위한 치열한 암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아미, 소림의 경우 승려들로 이루어 졌기에 맹주직을 차지할 생각이 없었고 무당과 곤륜은 도인들로 이루어 졌기에 권력과는 상관이 없었다. 또 개방의 경우 거지떼로 이뤄졌기에 거지의 특권인 무소유, 무욕에 상반되기에 맹주직을 노릴 가능성은 없었다. 악양세가의 경우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는 있 었지만 의가(醫家)였기에 무림의 장악에는 별로 뜻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15개의 거대세력 중 6개의 세력을 뺀 9개의 문파가 문제였다. 그들은 각파의 장문인 내지는 뛰어난 고수들을 앞세워 맹주직을 노렸다. 하지 만 사실상 맹주가 될만한 인물은 몇사람 되지 않았다. 우선 옥청학의 아들 옥 진호를 들 수 있다. 그의 아버지가 맹주였기에 맹에서 가장 탄탄한 기반을 잡 고있는 인물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옥청학은 맹주이 자 공동파의 전대 장문인이었으며 그의 아들 옥진호에게 공동파 장문인의 직 위를 넘겨주고 맹주에 취임했었다. 하지만 옥진호 장문인의 무공은 그의 경쟁 자들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게 흠이었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인물이 서문세가의 가주 수라도제(修羅刀帝) 서문길제 (西門吉制)였다. 가전의 뇌전도법을 10성이상 성취한 유일한 인물로 120세에 이르는 화경의 고수였다. 서문세가의 힘이 오대세가의 수위에 오르는 만큼 서 문길제가 맹주로 등극할 확률은 지극히 높았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인물은 옥화무제(玉花武帝) 매향옥(梅香玉)이었다. 사 실 그녀는 구파일방에도, 오대세가에도 들지 못하는 여인이었지만 무림 최고 의 정보단체 무영문을 운영하는 여걸인 만큼 무림맹의 정보력에 지대한 공헌 을 하고 있는게 현실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공헌도를 내세워 맹주직위 를 노린다면 딱히 무림맹에서 거절하기 힘들다는게 세인들의 평이었다. 그 외에 무당파의 태극검제(太極劍帝)와 곤륜파의 곤륜무제(崑崙武帝)라는 거 목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200세에 가까운 노고수들로 화경에 이른 인물들 이었다. 물론 그들이 맹주의 직위를 노린다면 다른 인물들보다 우선권이 높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둘은 세상의 명리를 따지지 않는 도인들에다가 은거를 선 언한지 수십년이 지난 인물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직접 나설 가능성은 거 의 없었다. 또 맹주의 선출에 무림맹 자체의 이권도 있었다. 만약 무림맹은 뇌전검황이 비명횡사하지 않았다면 그를 무조건 맹주로 세웠을 것이다. 제자수 200여명 정도의 제령문 같은 작은 문파에서 그렇듯 고강한 무예를 지닌 인물이 나온게 놀라울 정도였지만 사실상 칠룡사봉에 뇌전검황의 대제자도 아닌 서진(徐眞) 이라는 제자가 들어간 것만 봐도 제령문의 저력을 옅볼 수 있었다. 거기에 뇌 전검황의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었기에 다른 인물들의 반발도 없을테지 만 사실 무림맹에서 그의 죽음을 아쉬워 하는 이유는 딴데 있었다. 뇌전검황 은 유일하게도 삼황오제에 들어가는 초절정 고수들 중 가장 기반이 약한 인물 이었던 것이다. 문도수 겨우 200여명. 그렇다면 기존무림맹의 골격이 바뀔수 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각 파에서 맹주가 나오면 그 맹주는 약 2-3천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들어가 모든 중요 직책들에 그의 심복들을 집어넣게 된다. 하지만 뇌전검황은 그럴만한 인재를 보유하지 못했기에 그를 맹주에 세 운다 하더라도 공동파는 계속적으로 무림맹의 요직을 독점... 장기적으로 무 림을 주무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뇌전검황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렸고 공동파가 내세울 유일한 인물은 옥진호 장문인 뿐이었다. 만약 맹주선출이 시작되면 옥진호 장문인이 맹주가 될 확률은 거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무림맹에서는 맹주의 행방불명 사실을 공포하고, 어딘가에 맹주가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점을 들어 차기맹 주를 선출하지 않고 옥진호 장문인을 맹주대리로 앉히고 맹주를 찾아내는 작 업을 우선시 하려고 공작을 펼치는 중이었다. 거기에다 무림맹이 맹주의 실종으로 난리가 나버려 제기능을 상실하자 급기야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여태껏 무림맹의 중제로 충돌하지 못하고 있던 남궁세 가와 서문세가가 구휘대협의 무덤을 기화로 정면충돌했던 것이다. 거기에 엎 친데 덮친격으로 사파의 다섯 개 방파와 정파의 7개 방파까지 무덤을 빌미로 충돌을 벌여 이제 사태는 거의 구휘대협의 무덤을 중심으로 정과 사, 사와 사, 또 정과 정의 본격적인 격돌이 시작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추악하게도 무공비급과 보물을 놓고 싸움질을 하고있는 것이 다. 거기에 세상은 진천왕의 반란으로 인해 그를 진압하려는 황제와 반란을 일으 킨 왕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소란스러웠다. 한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귀주 성과 사천성에는 전쟁통에 수백만이 넘는 피난민으로 난리가 나 있었다. 그덕 분에 대사마 진길영 원수와 이창해 원수는 서둘러 요를 정벌한 후 요 정벌에 커다란 도움을 준 여진의 족장들과 회담을 하여 송화강 동쪽을 여진의 영토로 인정하는 대단히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처음에는 여진까지 싸 그리 정벌해 더 이상 화근거리가 존재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지만 본국에 내전이 터졌는데 한가로이 야만족들 정벌한다고 대군(大軍)을 변방에 놔둘수 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 계략이 송화강 동쪽을 여진에게 주는 것이었다. 일부 러 그들은 각 족장들과 송이 여진에 공여하는 송화강 동쪽의 영토를 여러등분 하여 그 토막들의 경계선을 불분명하게 하고 두명, 혹은 세명의 족장들에게 중복하여 같은 영토를 줌으로 해서 여진족들끼리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도록 머리를 써버렸다. 그리고 그 전과에 따라 대송 황제가 내리는 벼슬도 함께 내 렸는데... 일부러 작은 부족의 족장에게 높은 벼슬을, 또 큰 부족의 족장에게 낮은 벼슬을 내렸다. 거기에 한술 더떠서 어떤 큰 부족은 부족장 보다 그 수 하 용사가 더 높은 벼슬을 받은 곳도 있을 정도였다. 일단 여진에 대한 논공행상이 끝난 후 대송의 주둔군이 철수하고 나자 진길영 원수와 이창해 원수의 계략대로 여진족 내에서 지독한 내전이 벌어졌다. 하지 만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 내전은 아골타라는 뛰어난 젊은 족장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게 된다. 그는 카막투이 부족의 일개 젊은 족장이었지만 요 정벌에 서 송의 군대와 함께 싸우며 집단전의 기법을 배우게 되었고, 거기에 사방에 서 지독한 부족간의 갈등이 생긴점을 이용해 각종 모략과 술수를 동원하여 빠 른 시간안에 여진족을 통합해버렸던 것이다. 제 4장 : 통합의 장 무림은 무림맹주 무극검황 옥청학의 갑작스런 실종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를 호위했던 30명이 넘는 뛰어난 무공을 지닌 무사들까지 함께 사라졌기에 구구 한 억측과 유언비어가 나도는 가운데 정파는 서서히 분열하기 시작했다. 맹주 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무림맹은 청성(靑城), 점창(點蒼), 무당 (武當), 아미(峨嵋), 소림(小林), 곤륜(崑崙), 종남(終南), 화산(華山), 공 동(空洞)의 구파와 개방( 幇), 또 남궁세가(南宮世家), 악양세가(岳陽世 家), 서문세가(西門世家), 종리세가(鍾里世家), 제갈세가(諸葛世家)의 오대 세가가 연합한 단체인 만큼 그들은 맹주의 실종과 함께 자파에서 맹주직을 차 지하기 위한 치열한 암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아미, 소림의 경우 승려들로 이루어 졌기에 맹주직을 차지할 생각이 없었고 무당과 곤륜은 도인들로 이루어 졌기에 권력과는 상관이 없었다. 또 개방의 경우 거지떼로 이뤄졌기에 거지의 특권인 무소유, 무욕에 상반되기에 맹주직을 노릴 가능성은 없었다. 악양세가의 경우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는 있 었지만 의가(醫家)였기에 무림의 장악에는 별로 뜻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15개의 거대세력 중 6개의 세력을 뺀 9개의 문파가 문제였다. 그들은 각파의 장문인 내지는 뛰어난 고수들을 앞세워 맹주직을 노렸다. 하지 만 사실상 맹주가 될만한 인물은 몇사람 되지 않았다. 우선 옥청학의 아들 옥 진호를 들 수 있다. 그의 아버지가 맹주였기에 맹에서 가장 탄탄한 기반을 잡 고있는 인물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옥청학은 맹주이 자 공동파의 전대 장문인이었으며 그의 아들 옥진호에게 공동파 장문인의 직 위를 넘겨주고 맹주에 취임했었다. 하지만 옥진호 장문인의 무공은 그의 경쟁 자들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게 흠이었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인물이 서문세가의 가주 수라도제(修羅刀帝) 서문길제 (西門吉制)였다. 가전의 뇌전도법을 10성이상 성취한 유일한 인물로 120세에 이르는 화경의 고수였다. 서문세가의 힘이 오대세가의 수위에 오르는 만큼 서 문길제가 맹주로 등극할 확률은 지극히 높았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인물은 옥화무제(玉花武帝) 매향옥(梅香玉)이었다. 사 실 그녀는 구파일방에도, 오대세가에도 들지 못하는 여인이었지만 무림 최고 의 정보단체 무영문을 운영하는 여걸인 만큼 무림맹의 정보력에 지대한 공헌 을 하고 있는게 현실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공헌도를 내세워 맹주직위 를 노린다면 딱히 무림맹에서 거절하기 힘들다는게 세인들의 평이었다. 그 외에 무당파의 태극검제(太極劍帝)와 곤륜파의 곤륜무제(崑崙武帝)라는 거 목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200세에 가까운 노고수들로 화경에 이른 인물들 이었다. 물론 그들이 맹주의 직위를 노린다면 다른 인물들보다 우선권이 높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둘은 세상의 명리를 따지지 않는 도인들에다가 은거를 선 언한지 수십년이 지난 인물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직접 나설 가능성은 거 의 없었다. 또 맹주의 선출에 무림맹 자체의 이권도 있었다. 만약 무림맹은 뇌전검황이 비명횡사하지 않았다면 그를 무조건 맹주로 세웠을 것이다. 제자수 200여명 정도의 제령문 같은 작은 문파에서 그렇듯 고강한 무예를 지닌 인물이 나온게 놀라울 정도였지만 사실상 칠룡사봉에 뇌전검황의 대제자도 아닌 서진(徐眞) 이라는 제자가 들어간 것만 봐도 제령문의 저력을 옅볼 수 있었다. 거기에 뇌 전검황의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었기에 다른 인물들의 반발도 없을테지 만 사실 무림맹에서 그의 죽음을 아쉬워 하는 이유는 딴데 있었다. 뇌전검황 은 유일하게도 삼황오제에 들어가는 초절정 고수들 중 가장 기반이 약한 인물 이었던 것이다. 문도수 겨우 200여명. 그렇다면 기존무림맹의 골격이 바뀔수 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각 파에서 맹주가 나오면 그 맹주는 약 2-3천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들어가 모든 중요 직책들에 그의 심복들을 집어넣게 된다. 하지만 뇌전검황은 그럴만한 인재를 보유하지 못했기에 그를 맹주에 세 운다 하더라도 공동파는 계속적으로 무림맹의 요직을 독점... 장기적으로 무 림을 주무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뇌전검황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렸고 공동파가 내세울 유일한 인물은 옥진호 장문인 뿐이었다. 만약 맹주선출이 시작되면 옥진호 장문인이 맹주가 될 확률은 거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무림맹에서는 맹주의 행방불명 사실을 공포하고, 어딘가에 맹주가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점을 들어 차기맹 주를 선출하지 않고 옥진호 장문인을 맹주대리로 앉히고 맹주를 찾아내는 작 업을 우선시 하려고 공작을 펼치는 중이었다. 거기에다 무림맹이 맹주의 실종으로 난리가 나버려 제기능을 상실하자 급기야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여태껏 무림맹의 중제로 충돌하지 못하고 있던 남궁세 가와 서문세가가 구휘대협의 무덤을 기화로 정면충돌했던 것이다. 거기에 엎 친데 덮친격으로 사파의 다섯 개 방파와 정파의 7개 방파까지 무덤을 빌미로 충돌을 벌여 이제 사태는 거의 구휘대협의 무덤을 중심으로 정과 사, 사와 사, 또 정과 정의 본격적인 격돌이 시작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추악하게도 무공비급과 보물을 놓고 싸움질을 하고있는 것이 다. 거기에 세상은 진천왕의 반란으로 인해 그를 진압하려는 황제와 반란을 일으 킨 왕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소란스러웠다. 한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귀주 성과 사천성에는 전쟁통에 수백만이 넘는 피난민으로 난리가 나 있었다. 그덕 분에 대사마 진길영 원수와 이창해 원수는 서둘러 요를 정벌한 후 요 정벌에 커다란 도움을 준 여진의 족장들과 회담을 하여 송화강 동쪽을 여진의 영토로 인정하는 대단히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처음에는 여진까지 싸 그리 정벌해 더 이상 화근거리가 존재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지만 본국에 내전이 터졌는데 한가로이 야만족들 정벌한다고 대군(大軍)을 변방에 놔둘수 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 계략이 송화강 동쪽을 여진에게 주는 것이었다. 일부 러 그들은 각 족장들과 송이 여진에 공여하는 송화강 동쪽의 영토를 여러등분 하여 그 토막들의 경계선을 불분명하게 하고 두명, 혹은 세명의 족장들에게 중복하여 같은 영토를 줌으로 해서 여진족들끼리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도록 머리를 써버렸다. 그리고 그 전과에 따라 대송 황제가 내리는 벼슬도 함께 내 렸는데... 일부러 작은 부족의 족장에게 높은 벼슬을, 또 큰 부족의 족장에게 낮은 벼슬을 내렸다. 거기에 한술 더떠서 어떤 큰 부족은 부족장 보다 그 수 하 용사가 더 높은 벼슬을 받은 곳도 있을 정도였다. 일단 여진에 대한 논공행상이 끝난 후 대송의 주둔군이 철수하고 나자 진길영 원수와 이창해 원수의 계략대로 여진족 내에서 지독한 내전이 벌어졌다. 하지 만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 내전은 아골타라는 뛰어난 젊은 족장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게 된다. 그는 카막투이 부족의 일개 젊은 족장이었지만 요 정벌에 서 송의 군대와 함께 싸우며 집단전의 기법을 배우게 되었고, 거기에 사방에 서 지독한 부족간의 갈등이 생긴점을 이용해 각종 모략과 술수를 동원하여 빠 른 시간안에 여진족을 통합해버렸던 것이다. 길지(佶止)는 오늘도 정연(鄭蓮)이 년하고 만나기 위해 '달 구경'을 하러 나 왔다. 사실 오늘 달은 떠있지도 않았지만 군데군데 밝혀진 외등(外燈)에 비춰 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도 그의 달구경 행각에 대해 아무도 의심조차 하지 않 았다. 사실 그가 이놈의 '달 구경'을 명분으로 정연이 년하고 밤마다 놀아나 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전에 타주 암살미수사건 덕분에 몇몇 살기를 풍기는 마인들을 보고 혼줄이 났 을만도 하건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정연이란 하녀와 산책을 즐겼다. 아무튼 하인, 하녀들의 경우 독방은 주어지지 않고 적게는 4 명에서 많게는 2-30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방에서 집단생활을 하는지라 오붓 한 공간이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것도 나이가 젊을수록 큰방에 왕창 때려넣는 것이다.결혼을 한 하인, 하녀들의 경우 한 방에서 지내게 배려하지 만 총각, 처녀들의 경우 그정도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는게 이 장원 주인의 신념인지 집단생활은 변하지 않고있었다. 사실 집단생활을 하게되면 하녀들의 경우 훨씬 더 정조를 지킴에 있어 유리하 다. 많은 여자들이 있는 곳에 침입해서 강간할만큼 간큰자도 없을뿐더러 만약 그게 되려면 그 많은 여자들을 모두 다 비명도 못지르게 제압해야 한다는 선 제조건이 지켜져야 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12명의 젊은 하녀들이 자는 방에 6 명의 하인들이 침입했다가 비명소리에 출동한 무사들에게 그 하인놈들이 반죽 음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지 않는가? 12명을 동시에 제압하는 것은 그만큼 힘 든 일이었다. 하지만 정조를 지키는데 유리함은 있었지만 배우자를 만드는데 있어 가장 불리한게 또 집단생활이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남자들은 남자들 끼리... 하는 일이 다르다 보니 낮에는 도저히 만날 가능성이 없다. 그렇다면 밤에라도 오붓하게 만나 대화로서 정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그럴 공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정연이는 아주 운이 좋게도 길지라는 성실한 남편감이 생겼고 또 그들 은 밤마다 달구경을 하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에 내놓기도 힘든 외모 때문에 '이러다가 결혼도 못해보고 죽는게 아닌가' 하고 가졌던 정연이의 불 안감은 매일 계속되는 달구경에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놈의 목석같은 길지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혼인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 둘의 달구경 행각은 거의 5개월이 가까워 오고 있었던 것이다. 길지가 정연이를 좀 더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가벼운 입맞춤은 이제 제법 농도짙은 입맞춤으로 바뀌어 있었고 길지의 손은 어느결에 정연이의 말 캉하면서도 탄탄한 유방을 주무르고 있었다. 야밤에 으슥한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서로에 대한 달콤한 애무를 멀찍이서 보고있던 김석(金奭)은 입맛을 다 시며 옆에있던 동료 장경(張莖)에게 속삭였다. "오늘은 뭔가 할것같지 않냐?" 그러자 김석과 같이 검은 옷으로 잘 위장하고 낮게 엎드려있던 장경은 저쪽 풍경은 볼 가치도 없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시큰둥한 어조로 속삭였 다. "뭘? 저러다가 또 그냥 돌아가겠지. 병신같은 녀석... 완전히 밥이 다 익었는 데다가 뜸까지 다 들었는데 거기에 또 시간을 끈단 말이야. 저러고 앉아있다 가 죽쒀서 개주지...." 김석은 두 하인들의 하는 짓거리를 보다가 또다시 낮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할거 같은데?" "저 병신같은 녀석은 오늘도 못할거야. 한달 전부터 저 하녀 유방을 주물러대 기 시작했는데 아직까지 더 이상 진도가 안나는거 보면 오늘도 글렀어." "그래도..." "아. 글세 보초나 제대로 서. 저 년놈들 하는거 보려면 반년은 더 있어야 할걸?" "흐흐흐... 그래도 보초서면서 유일한 낙이 저거 구경하는거 아니겠냐? 저것 들은 우리가 보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만... 그덕분에 여기서 보초서려면 얼마나 경쟁이 심한데? 네놈도 그거 혹시나 구경할 수 있을까 해서 이리 온거 잖아." "어쨋든 오늘도 아닐걸?" "아냐. 어쩌면 오늘 할지도 몰라." "나는 저것들이 안한다는데 10냥 걸지." "나는 한다에..." "10냥 벌었군. 흐흐흐..." 김석과 장경은 이곳 외당과 내당의 사이에 있는 12곳에 투입된 24명의 보초들 중의 한 조였다. 5개월 쯤 전부터 시작된 하인과 하녀의 달구경은 이곳에 보 초를 서고있는 자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그놈의 사내녀석이 어지간히 숫기가 없는지 마냥 진도 느려터져서는 구경하는 사람 복장에 열불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은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만 만났고 꽤 으슥한 곳이기는 했지만 그게 또 제8조가 초보서는 부근이었기에 고것들이 하는 행동이 자세히 보였다. 거기에 보초서는 인물들은 마교에서 뼈가 굵은 우수한 고수들이 아니던가? 그정도 어 두움은 그들의 안력으로 봤을 때 아무런 장벽이 되지 못했고, 행여 바람까지 잘 만나면 그 둘이 속삭이는 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그 때문에 초기에 그 둘이 언제 할건지에(뭘?) 대한 내기가 오고갔다. 그런데 사내녀석이 미적 거리는 통에 얼마 안있다가 사고(?)친다는 쪽에 걸었던 자들은 모두 다 피같 은 돈을 날려야만 했다. 이윽고 거의 2각(30분) 정도 지난 후 두 연놈들의 하는 짓거리를 감상중이던 김석이 장경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장경이 바라보니 그 둘이 자리를 옮기 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따라 하는 짓거리가 이상했다. 앞으로 한 한시 진(2시간) 정도는 더 쑥덕거려야 정상인데 벌써 일어서다니? 진짜 오늘 하려 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때 그 둘은 조금 더 이동하더니 좀 더 구석진 곳으로 이동한다. 그쪽에는 뒤쪽으로는 아예 벽으로 막혀있고 앞쪽에는 물건이 야트막하게 쌓여 이들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저것들이 오늘따라 뭔가 하려나? 제길... 10냥 잃었군. 이렇게 된거 구경이 라도...' 그 사내녀석이 여자를 끌고 간 곳은 이번에 물건을 다 꺼내서 비어버린 창고 였다. 물건이 없으니 문을 닫아놓지도 않았으니 둘이 숨어들어가기에는 아주 좋았다. 거기에 아늑한 둘만의 공간일테니... 그 둘은 이제 별빛마저 비치지 않자 자그마한 등에 불을 붙여들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환기가 잘 되어야만 저장할 수 있는 물품들을 넣어두기에 제법 넓직하게 뚫려있는 창 문에 자리를 잡았다. 창문은 창호지를 발라놓은 것이 있었지만 속에 물건이 없으니 그 창문마저 다 열어놔서 안에서 하는 짓거리를 보는데는 아무런 지장 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사내녀석이 계집을 꼭 껴안으 며 주저앉아버리자 둘의 대가리 윗부분만 보일 뿐 뭔 짓꺼리를 하는지 알 재 주가 없다. 오늘은 그런대로 풍향이 좋아서 소근거리는 말소리가 들리긴 하지 만 무슨소린지도 명확하지도 않았다. 보초를 서던 둘이 군침을 꿀꺽 삼키면서 청각에 온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한 다. 이것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0냥의 돈이 주인을 뒤바꾸는 불행한 사 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계집이 살며시 일어섰다. 옆에 있는 등불의 약 한 불빛 때문에 계집의 표정까지 다 보일정도... 이때 놀랍게도 계집은 천천 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옷!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둘이서만 볼수도 없는 노릇... 하여튼 저 연놈들 의 행동에 걸린 내깃돈이 엄청난 액수였기에 그 둘의 행동은 모든 보초들의 공통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김석은 살며시 신호를 보내 주위에 있던 동료들 에게도 관음(觀淫)의 즐거움을 선물했다. 살짝 보낸 신호였지만 주위에 퍼져 있던 녀석들은 모두 다 모였는지 곧이어 김석의 주위에는 8명 정도의 동료들 이 더 늘어나 있었다. 모두들 입을 헤 벌리고는 얼굴은 별로였지만 통통한 몸 매에 봉긋한, 탄력이 있을 것 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유방이 드러나는 광경을 군침을 삼키며 정신없이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곳에 보초들이 집중되면서 벌어진 틈을 이용해서 유유히 진법을 돌파 중인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의도대로 보초들은 한곳에 집중된 듯 주위에 인기 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능력으로 조용히 돌파할 수도 있겠지만 사 실 보초들만 지킨다면 손쉽게 통과가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진법이었다. 그는 진법에 있어서는 완전히 깡통과 다름없었기에 아주 서서히 돌파해 들어갈 수 밖에 없었고 잘못하다가는 보초들에게 들킬 우려도 많았다. 보초들이 매복하 는 장소들이 진법이 돌파가능한 생문(生門)의 위치일 것이라는 것은 진법의 왕초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생문은 보초들이 막고있으니 그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속이고 들어간다?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죽이고 들어가면? 상 대의 실력을 봤을 때 아마 대단히 힘들 것이다. 전에 들어왔다가 돌아가신 자객도 그게 불가능함을 알고 수면제를 풀어서 모 두들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헤매게 만든 후 들어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똑같은 수법이 두 번 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는 이곳의 주인이 중상을 입은 줄 알고 이 호기를 놓칠수는 없어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뚫고 들어가려 고 했었다. 하지만 그가 시도하기도 전에 위에서 비밀리에 '아무래도 뭔가 수 상한 점이 많으니 좀더 사태를 관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실 그가 그정도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면 그의 적들이 아직까지 조용할 리가 없었다. 그는 조 금 더 지난 후 이곳 주인이 단지 조금 장기간 외출을 했을뿐, 멀쩡하다는 걸 알아냈고 이제서야 자신의 계획을 조심스레 실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외당에는 대단히 많은 수의 첩자들이 활동하는게 분명했다. 이번 비무대회를 통해 2000여명을 선발하자마자 그에게 곧바로 진법의 침투경로가 자세히 그려 진 지도가 살며시 도착했을 정도니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는 진법을 통과하여 내당으로 들어선 후 파해법이 담겨진 종이를 완전히 찢 어 입속에 넣은 후 꼭꼭 씹어 가루를 만든 다음에 꿀꺽 삼켜버렸다. 자신이 통과해 온 백영환혼진(魄影還混陣)은 살상용 진법이 아닌 환영을 통해 외당에 서 내당으로 들어가는 것만을 저지하는 진법이다. 대신 내당에서 외당으로 통 과하는 것은 아예 진법이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그냥 가면 되도록 설계되어있 다. 철저히 외부에서 침입은 힘들게, 내부에서 외부로의 진출은 쉽게 된 아주 강력한 고수들을 내부에 많이 보유한 곳만이 설치할 수 있는 진법이었다. 그가 어두운 곳에 몸을 감춘 후 보초들이 제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얼핏 느껴 졌다. 이곳으로 통과하기 위해 무려 5개월을 공을들인 계집이다. 그의 최면술 에 걸려 그와 정사(情事)를 벌이는 줄 착각하고 학학대다가 아마 지금쯤은 탈 진해서 뻗은다음 내일 아침까지 잠들어 있을게 뻔했다. 보초들도 이제 정사를 나누는 계집의 간드러진 신음소리가 멈추니 입맛을 다시며 다시 제자리로 돌 아가서 또다시 보초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게 분명했다. 그는 조용히 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분타주의 방이 어딘지는 대단히 알아내 기 힘들었다. 내당에 들어있는 하인들은 대단히 믿을 수 있는 인물들만 뽑혀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입을 통해 살며시 내당 내부의 사정이 퍼 져나갔고 거의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되고 있었다. 거기에 상대는 현경의 고수 다 보니 다른 일부 귀찮은 목표물들처럼 방을 옮기지도 않았다. 하여튼 대단 한 자신감이었다. 그덕분에 지금 명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 그정도 약점도 안드러내면 죽일 방법이 없지...' 그는 살며시 건물의 마루쪽으로 다가갔다. 건물이 가까워지면서 그는 더더욱 자신의 기척에 신경을 썼다. 최소한의 기만을 끌어올려야 했기에 그의 행동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은잠술을 극도로 사용하여 소리라고는 정말 낙엽떨어지 는 소리 정도도 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는 마루 아래, 즉 두짝의 신발이 놓 여있는 섬돌 뒤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런 다음에는 서서히 귀식대법 (鬼息大法)까지 운용하기 시작해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일반적인 경우 기환술 따위를 이용해서 몸체를 아예 땅속에 숨기는 방법도 사 용할 수 있지만 괜히 그런 내공이 많이 사용되는 고급 기술을 써먹으면 오히 려 뛰어난 고수에게는 발견될 확률이 높았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최대 한 기척을 없애는 것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그가 가사상태로 들어가기 직전 최후로 한 일은 허리에 꼽아뒀던 비장(秘藏) 의 쇠꼬챙이를 손잡이를 꼭 쥐고서 자신의 배위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고 목표물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 * * "타주님. 의뢰하신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호오... 수고하셨소. 어디 봅시다." "화경에 이르는 일부 고수들을 제외하고는 그 우열을 가리기가 아주 어려워서 2500명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이것이 그 명단과 그들의 상세한 내력입니다." 묵향은 설무지가 건네준 서류뭉치들을 뒤적이며 말했다. "흐음... 일단 무림에 그 실력으로 인해 드러난 인물들의 경우 첩자일 가능성 이 없어서 좋지. 문제는 이놈들을 어떻게 포섭하느냐 하는것이로구만." "그렇죠. 그래도 그들의 경우 어떤 뚜렷한 파에 귀속되지 않은 걸출한 인물들 이니 먼저 잡는사람이 임자라고 봐야겠죠." "그런데 여기 가장 첫 번째에 올려진 이녀석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난가?" "불계불황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렇습니다. 삼황 오제 사천왕을 모르십니 까? 그는 누가 뭐라해도 삼황(三皇)의 수위를 차지하는 괴물인지라..." "사천왕하고 두명의 황(皇)은 잘 알지. 한사람은 내가 죽였고... 한놈은 내가 필히 죽여야 될 놈이니까. 그 외에는 잘 몰라. 그런것에 신경을 쓴적이 없으 니까... 그런데 그런 고수가 왜 이토록 세력이 없는가?" "그거야 그자가 천성적으로 도당(徒黨)을 형성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죠. 남을 부리는 것도 싫어하지만 남에게 귀속당하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불계? 이녀석은 파계승인가?" "예. 그건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공공(空空) 대사라면 현 무림의 전 대 장문인이었던 공지(空知) 대사의 사형이지요. 그는 소림의 대부분의 무예 에 통달한 소림이 자랑하던 기재였는데... 너무 무공에 힘을 기울이다가 주화 입마를 당하는 바람에 마기가 뇌수에 뻗어 완전히 돌아버렸죠." 그러자 묵향은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미쳤다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닌가?" "헤헤... 그것도 완전히 미쳐야 되는데 아주 조금... 적당히 미쳐버려서 인간 성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으니 더 큰일이죠. 음탕, 호색한데다 탐욕이 목구멍까 지 차서 지금은 소림에서도 아예 자사(自寺)에서 배출한 고수라는 것을 숨기 기에 급급할 정도니까요." "그럼 더 이상 먹칠하기 전에 없애버리면 될텐데... 왜그렇게 신경을 쓰나?" "그게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그렇죠. 타주께서도 어떤면에서 보면 그와 비슷한 입장이 아니십니까?" "흐음... 그렇군. 그럼 이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지?"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 "산속에 토룡문(土龍門=지렁이)이라는 문파를 하나 세워놓고는 수하 백여명을 거느리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쾌락 속에 파묻혀 살고있죠. 말은 문파인데 깡패소굴이나 다름없이, 별의 별 불법적인 사업들을 벌여 주변에서 금전을 훑 어 들여 그 비용을 조달하는 모양입니다. 거기에 반반한 계집들을 납치까지 하는데도 누구도 못건드리는 것은 그놈의 무공이 원체 강한지라..." "도대체 어느정도인가?" "모두들 그를 삼황의 우두머리로 취급할 정도입죠. 하는 짓과는 달리 아직도 불문의 정통무공을 기억하고 사용하는 것을 보면 아예 미치지는 않은 것이 확 실하죠. 역근신공(易筋神功)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흐음... 구미가 당기는 인물이군. 그런데 두 번째로 기록된 만통음제(萬通音 帝)는 또 뭔가? 오제에 들어가는 인물인가?" "예. 어쩌다 한번씩 나타나는 신비한 척 하는 인물인데 하는 짓은 공명정대한 데 성질이 더럽고 손속이 잔인해서 정사의 중간에 놓이는 인물입니다. 이자도 아마 뚜렷한 단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음공(音功)의 고수지요." "이놈도 탐이나는군. 이놈의 위치를 확실히 파악하도록!" "존명!" 묵향은 그 서류뭉치들을 뒤적이다가 갑자기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녀석 명호가 걸작이군. 비사비협(非邪非俠)이라..." "명호에 비해서 아주 뛰어난 인물입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뭔가?" "중원인이 아닙니다." "새외무림의 인물인가?" "예. 한번씩 무공자랑을 한다고 중원에 나오기는 하는데 요즘은 어디로 숨었 는지 잠잠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써져있는 인물들 중에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인물은 몇 명인가?" "800여명 정도죠. 대부분이 떠돌이 고수들입니다." "그렇다면... 으음... 실력이 어중간한 녀석들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녀석들 에게 맏기기로 하지." "믿을 수 있습니까?" "어느정도는 믿을 수 있어. 만약 그자들 중에서 첩자가 있었다면 아마 그들은 이리 오지도 못했을거야. 그러니 그녀석들의 영입은 여지고 수석장로에게 맏 기기로 하고 여지고 장로에게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배반에 철저히 대비하라 고 지시하게." "존명!" "사실 그녀석들을 확실히 믿기는 좀 어려우니까... 아예 외부에 일거리를 줘 서 보내버리는 편이 좋을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밤도 깊었는데 이만 가보게. 내일 마저 얘기하기로 하지." "예." "참. 홍진 막주에게 연락해서 포섭할자들의 위치를 더욱 세밀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하도록. 겨우 800명 정도만 위치를 알아서야 뭘 하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묵향은 설무지가 나간 후 방의 중앙에 좌정하고 앉아 명상에 들어갔다. 이제 서서히 꼬리가 잡히기 시작한 대지의 기를 포착하는 작업을 시도때도없이 하 고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하면 깨닳음을 얻을 수 있을것만 같았기에 그는 요즘들어 1각 정도의 잠조차 자지않고 있었다. * * * 다음날 새벽이 되자 그는 누군가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세한 대지의 진동... 그는 조금씩 자신의 육체가 깨어나도 록 만들었다. 하지만 너무 많이 깨어나면 안된다. 아주 조금만... 약간씩의 움직임 정도만 가능할 정도로... 그런다음 그는 배위에 올려놨던 쇠꼬챙이를 천천히 위로 들어올렸다. 곧이어 다리 두 개가 보였다. 물론 상대는 마루에 걸터앉아 편안한 자세로 가죽신을 신고있었다. 지금! 푹! 그의 쇠꼬챙이는 곧장 마룻장을 뚫고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반응이 있었다. 사람의 육체를 뚫고 들어가는 그 미세한 감각이... 사람의 몸은 금강불괴(金剛不壞)니 호신강기(護身剛氣)니 하면서 수련할수록 무지막지한 방어력을 가진다. 특히나 공력이 높은 고수일수록 그 보호의 벽은 두터워서 왠만한 보검으로도 깊은 상처를 입히는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자신의 몸을 보호할때의 얘기고 아무런 대비도 없이 진기의 유통이 막 혀있을때는 보통의 살이요 가죽이었고 또한 뼈다구다. 절대로 강철과 같은 강 도(强度)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묵향은 아침에 일어나서 신발신다가 엉덩이에 구멍이 뚫리는 황당한 경우를 처음 당했다. 육체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 몸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응한 덕 분에 깊은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그래도 두치(6Cm) 깊이의 구멍이 뚫린 것이 다. 상처는 별것도 아니었다. 묵향이 본능적으로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사이, 마루 아래에서 엄청난 예기를 뿜어내는 2척 길이의 보검을 들고 검은 복면을 한 인물이 뒤로 물러서는 묵향을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묵향은 일단은 상대의 하는 짓거리가 꽤나 재미있었기에 천천히 죽일 생각으 로 그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손 치 더라도 이미 물건너간 사실이었다. 이제 묵향은 놈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그 대가는 아주 작은 상처 하나일 뿐이었다. 묵향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맨손과 상대의 짧은 보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튕겼다. 묵향은 일부러 그를 한껏 밀어붙여 서로간의 간격을 벌였다. 상대는 튕겨나서 거의 1장 반 정도 뒤로 밀린 다음에 다시 중심을 잡고는 검을 겨누며 아직도 상대를 죽일수 있 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못 버리고 묵향의 빈틈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놈은 현경의 고수를 상대로 이제 본격적으로 정면대결을 하려고 드는 것이다. 간이 큰건지... 자신의 실력을 믿는건지... "크흐흐흐... 제법 간뎅이가 큰 놈이군. 그리고 실력도 대단하고... 본좌의 이목을 속이고 엉덩이에 구멍을 뚫다니, 그대의 실력을 높이 사 편히 저세상 에 가게 만들어 주지." 묵향은 급할게 없다는 듯 이제서야 천천히 묵혼검을 뽑아들었다. 어떤 무공으 로 저놈을 토막을 칠까 궁리를 하면서... 하지만 그는 곧이어 뭔가 자신의 몸 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신이 핑핑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묵향이 말했다. "도대체 뭐냐? 독은 아닌 것 같은데?" "당연히 독이 아니죠. 만독불침인 현경의 고수에게 독을 쓰는놈이 있겠소? 독 한 몽혼약( 昏藥)에 춘약(春藥)도 좀 섞었고... 산공분(散功粉)도 좀 석었죠. 어때요? 뿅 가는 기분 아니오?" 묵향은 핑핑도는 정신에 억지로 정신을 차려 또박또박 말했다. "흐흐흐... 내 몸에 약기운이 퍼질때까지 기다리고 있었군. 누가 올지도 모르 는 이 상황에 자네의 그 배포는 인정해 주지. 하지만 실력도 그정도 되는지 궁금하군..." 마룻바닥이 부숴지고 초반의 격돌로 그렇게 큰 소리가 났는데도 눈치채지 못 할정도로 미련한 인물은 이곳에 남아있지 않았다. 묵향의 개인 호위들과 분타 에 남아있던 천랑대의 고수들이 달려왔고 그들은 곧이어 묵향의 앞에 검을 들 고 서있는 흑의복면인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무기를 뽑아들고 그 복 면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곧이어 그들의 움직임은 묵향의 목소리에 제지(制 止)되었다. "멈춰라... 본좌를 찾아온... 손님이다." 흑의복면인은 의외로 묵향이 직접 손을 쓰려고 들자 약간은 놀라움이 앞섰다. 상대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것인지, 몸의 상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 게 직접 손을 쓰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기회는 있지.' "흥! 아마 지금쯤 정신이 없으실텐데 무리하는거아니요?" 하지만 복면인의 속셈은 말과 달리 조금 비꼬는 듯한 어조에서 확실히 드러났 다. 여기서 탈출은 불가능. 그렇다면 목표물이라도 확실히 죽여야 할텐데 딴 사람이 끼어들면 그것도 불가능하니 슬슬 긁어서 상대가 직접 손쓰기를 바라 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의 실력을... 한번 보고싶어." 묵향이 검을 천천히 위로 끌어올렸다. 급속도로 공력이 흩어지고 있는건 저따 위 살수를 상대하는데는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놈의 몽혼약과 춘 약... 온 몸의 혈관이 계집을 찾아 불타오르고 있었고 점점 더 의식이 흐릿해 져 가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묵향 자신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묵향은 그대로 상대를 향해 몸을 날리며 직접 공격을 시도했다. 묵향의 눈에 는 상대가 두 개가 되었다 네 개가 되었다 하는 것이 상대와의 거리조차 잡기 어려웠다. 곧이어 상대의 검이 여러개가 되어 자신을 향해 덮쳐왔다. 평상시 라면 문제될 거리도 없었지만 묵향은 그것들 중에서 어느것이 진짜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묵향은 그대로 몸속의 공력을 모아 터뜨리며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강력한 반월형의 푸른 검강이 형성되어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상대는 공격해 들어오다가 그 강력한 공격에 놀라 혼신의 공력을 쏟아부어 방어에 들어갔다. 펑! 네다섯 걸음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아직은 견딜만 한지 상대는 입 주위로 피 를 흘리면서도 재공격을 시도했다. 묵향은 처음에 그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내 며 압도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묵향이 그놈의 약기운 덕분에 마지막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려다 잠시 주춤한 사이 흑의복면인은 미세한 기회를 포 착하고 검을 묵향의 심장에 틀어박는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묵향에게서 뿜 어나온 반탄강기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의 엄청난 기운... 펑! 흑의복면인은 그 강대한 기운에 튕겨서 2장여를 쭉 밀린다음 벽에 부딪친 다 음 피를 토하면서 뻗어버렸다. 묵향은 이제 두 번째로 자신의 심장에 박힌 검 을 잠시 바라봤다. 모든게 자신의 자만심 탓이니 누굴 탓할수도 없었다. 그렇 기에 묵향이 천천히 쓰러지면서 내뱉은 말은 이거였다. "제길... 약기운 정말 쎄군... 아주 뿅가는데..." 묵향이 쓰러지고 나자 무모한 묵향의 행동에 대해 내심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수하들은 인근에 유명하다는 의생을 부르러 가는 패거리, 뻗어버린 살수의 몸 속에서 자살용 독약을 꺼낸 후 감옥에 집어넣는 패거리, 또 쓰러진 묵향을 방 안으로 조심스레 옮기는 패거리, 하여튼 순식간에 발생한 일로 북적대기 시작 했다. * * *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발 뒤쪽에 있는 여인의 부드러운 목소리. "뭔가요?" "장인걸이 교주가 되는데 성공한 모양입니다." "설마... 한영성 교주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데... 그리고 그는 결 코 장인걸 보다 하수가 아니잖아요?" "그야 그렇죠. 문제의 발단은 아무래도 무림맹주의 실종과 관계가 있는 것 같 습니다. 마교쪽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무림맹주 옥청학까지 지하 감옥에 갖혀있다고 하던데요?" 그러자 발 안쪽의 여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입을 열었다. "흐음... 그렇다면 교주는 맹주를 비밀리에 만나기 위해 마교를 벗어났다가 기습당했다는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주가 장인걸에게 당할 가능 성은 처음부터 거의 없었으니까요." "일이 아주 재미있게 되어가는군요. 하지만 그래도 장인걸이 교주가 되기에는 세력기반이 약한데..." "정보로는 교주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독수마제의 간섭을 물리치는데 성공 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이후로는 장인걸과 독수마제간의 대립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사료(思料)됩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겠죠. 그렇다면 묵향쪽은 어떤가요? 그도 이렇게 좋은 기회 를 버릴 인물은 아닐텐데..." "글세요. 그쪽에도 어쩌면 교주가 바뀐 정보가 들어갔을지도 모르는데 첩자들 의 보고에 의하면 이상할만큼 조용하답니다. 만약 묵향쪽에서 장인걸을 공격 한다면 아직 장인걸이 자신의 입지를 견고하게 자리잡기 전인 지금이 최적의 시기인데 말이죠." 그러자 발 속의 여인은 좀 더 오랜시간 생각에 잠긴 후 답했다. "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가 없군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본녀에게 조속히 연락해 주세요." "예. 그러면 소인 물러가겠습니다." "참. 영인이는 돌아왔나요?" "예. 맹주의 실종으로 회합이 취소되었기에 3일 전에 돌아오신걸로 들었습니 다. 그런데 돌아오시자 마자 곧바로 연공관으로 가신걸로 알고있습니다." "그럼 총관이 직접 가서 그 아이를 좀 데려오시겠어요? 긴히 할 얘기가 있다 고 전하세요." "예." 잠시후 매영인이 들어왔다. 매영인은 4봉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외모를 지 니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 장난기가 있는 것 같은 발랄한 표정을 지니 고 있었다. 그녀는 얼마전 구휘대협의 무덤에 얽힌 각 문파간의 갈등 해소를 위해 마련한 회합에 참여하기 위해 문을 나섰었지만 돌연한 맹주의 실종으로 회합이 취소되었기에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자 마자 연공관에 처박힌 이유는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을정도로 엄청난 차원의 고수를 이번 여행의 도 중에 만났었기에 그에 자극받았기 때문이다. 7룡 중에서 아마도 최강의 무공을 지니고 있을거라 추측되는 황룡문의 부문주 비천검 혁련운. 그의 무공은 정말이지 철부지 매영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43세란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검강을 자유로이 구사 하다니... 하지만 그런 그를 간단히 패대기 치던 묵향이란 인물... 고차원적인 경공과 초식의 절묘한 조화. 묵향이란 인물의 말마따나 '자신에게 걸리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그냥 간다'고 하지 않았나? 무시무시한 무공에 또 그 에 걸맞는 비뚤어진 것 같으면서도 외모와는 달리 패기가 넘치는 성격. 그때 그 마교의 부문주는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다. 그녀는 그 두 고수의 비무를 보고 뭔가 자신의 내면 속에서 불타오르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고 그 렇기에 여태까지와는 달리 할머니의 강압이 아닌 자율적으로 연공관에 들어간 것이다. 그녀는 총관이 위치했던 밖이 아닌 발 안쪽으로 들어왔다. 발 안에는 묘령의 아릿따운 청순한 미모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할머니." "오냐. 어서 오너라." "다녀온 다음 직접 인사 못드려서 죄송해요. 뭔가 할게 있어서 연공관으로 바 로 갔거든요." "총관에게 들었다. 이리 와서 앉거라." "예." 그 두 조손(祖孫)이 한자리에 앉았지만 얼핏 보아서는 도무지 그 둘의 나이차 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매영인도 제법 높아가는 내력으로 인해 31살의 나이와 는 달리 발랄한 20살 정도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면 그녀의 할머니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화경에 든 여인, 그 고차원적인 내공 으로 인해 20대 중반 정도의 청순한 미모를 과시하고 있으니 둘은 할머니와 손녀가 아닌 자매로 보일 지경이었다. "오늘 너를 부른 것은 한가지 상의할 일이 었어서다." "뭔데 그러세요?" "너...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러니까 결혼하고 싶다든지 뭐 그런식의 마음에 품고있는 상대가 있느냐 하는 거야." 그러자 매영인의 안색이 약간 붉은색이 되긴 했지만 그건 숨겨놓은 남자가 있 어서가 아니라 할머니가 이런식으로 노골적으로 남자의 유무를 물어보기는 이 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매영인은 천하에서 정보력으로 치면 두 번째가면 서럽다는 무영문의 금지옥엽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어렸을때부터 떠받들여 키 워져 남자보기를 돌같이(?) 여기며 자기 잘난맛에 여태껏 살아왔는데 그녀의 마음에 찰만큼 그럴듯한 상대가 있을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그 대부 분이 무영문 소속의 무사들) 그녀에게 남성미를 뽐내기 보다는 아부와 존경만 을 보내니 그녀의 마음에 새겨질 만한 인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아뇨. 아직 없습니다." "내가 지금 물어보는 것은 너를 내가 원하는 어떤 남자와 결혼시킬까 하고 생 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건 아주 중요한 거야. 만약 네 마음속에 이 미 다른 남자가 자리잡고 있다면 결혼 후의 네 생은 아주 비참해지기 때문이 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다시 잘 생각해 보렴." 그러자 옥영인은 조금 놀란, 비난하는 듯한 눈초리로 할머니에게 따졌다. "할머니께서 원하는 어떤 남자라니요? 그러면 저에게 정략결혼(政略結婚)이라 도 시키실 생각이에요?" 그러자 옥화무제(玉花武帝)의 청순한 얼굴은 잠시 슬픔에 물드는 것 같았지만 곧이어 원상태로 돌아갔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무림의 대세를 무영문이 잡 기 위해서는 아무리 아끼는 손녀라 해도 정략결혼의 재물로 써야 하는 것이 다. 또 결혼 상대들도 사실 말이 정략결혼이라서 그렇지 어디하나 손색이 있 는 인물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들의 뛰어남은 자신이 사랑하는 무영문의 첩보 력이 보증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녀로서는 그걸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라면 매영인의 선택인데... 그녀가 반려자로 삼고싶은 어떤 인물 이 이미 있다면 이것은 안되는 것이다. 옥화무제 자신도 여인이었기에 이미 상대를 마음속에 품고있으면서 다른 남자와 살아야 한다는게 얼마나 큰 고통 인지 잘 알기에 손녀에게 그점을 꼬치꼬치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 어떻게 보면 정략결혼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상대는 대단히 뛰어 난 인물들이다. 하지만 문제는 네게 이미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지 하는 거야. 만약 있다면 나는 이 계획을 포기해야만 하지. 그건 계획보다도 네 행복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이기에 네게 이 렇게 물어보는 거란다." 할머니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야 할말이 있을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뚜렷이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것도 아니었고... "저... 아직은 없어요. 없는 것 같아요." 옥화무제는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냐. 그렇다면 잘 됐구나. 뭐 상대가 괜찮은 남자라면 살면서 정이들고 사 랑이 싹트는 것이니까 이제 네 선택만 남았구나.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러더니 옥화무제는 한쪽으로 가서 몇장의 종이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네게 권하고 싶은 남자는 이 둘이다. 둘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라." 옥화무제가 매영인 앞에 펼쳐놓은 두장의 그림. 그건 아주 정밀하게 그려진 초상화였다. 개개인의 특징이 아주 자세히 그려진 것으로 둘 다 얼굴만이 아 닌 서있는 자세 그대로 전신(全身)을 세밀하게 그려놓은 것이었다. 매영인은 두장의 그림이 자신의 앞에 놓였을 때 잠시 숨을 죽였다. 둘 다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놀라게 했던 그림에 그려져 있는 상대는... "이사람은 누구에요?" "너는 잘 모르겠지만 묵향이란 인물이다. 추정되는 나이는 70세 정도. 하지만 그는 무림에서 두 번째로 기록되는 현경의 고수. 그렇기에 겨우 70세란 나이 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지.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란다. 영인이의 남편감으 로 빠지지 않는 인물이야. 다만 성격이 좀 거칠다는거지만... 뭐 살다보면 어 떻게 바뀔지 누가 알겠냐? 수하들의 정보로는 그는 수양딸이 한명있고 또 그 와 과거 동거생활 비슷한걸 했던 여인도 한명 있었다. 낙양분타에서 그가 근 무할때인데... 그게 밝혀진 것은 그가 무당파와 약간의 충돌을 일으켰고 그걸 파고들다 보니까 새어나온 정보니까 아주우연히 알게된 것이지. 그 모녀와의 생활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꽤나 정이 많은 인물인 것 같아. 그 수양딸을 위해 교주와의 충돌을 무릎쓰고, 수양딸이 제자로 있는 대력도패(大力刀覇) 진양 (振揚)이 이끄는 천지문과의 화해를 주선한 인물이지. 아마 그때가 '부교주 묵향'이란 이름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사건이었을 거야." "그렇지만 마교의 인물이잖아요." 그러자 옥화무제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말은 마교지만 지금 그는 마교와 싸우고 있다. 또 그가 지금 거느리고 있는 수하들도 엄청난 숫자지. 해체된 찬황흑풍단의 세력까지 흡수했을 정도로 뛰 어난 인물이야. 현재 무림에서 그 만큼 무공이 뛰어난 인물은 없고, 또 그는 현 무림에서 10손까락 안에 들어가는 강력한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단다. 본문 이 무림에서 더욱 커나가기 위해서 아주 필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지만 그가 마교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잖아요. 아무리 마교와 싸우고 있다고 해도... 그게 소문이 나면..." "그건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란다. 사실상 그가 주로 익힌 것은 마공이 아니 니까. 그가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고 또 강대한 세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 도 마교와 직접적으로 싸우기에는 아무래도 좀 역부족이지. 그래서 그도 정신 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이번 정략결혼을 거절하지는 못할거야. 그가 너를 매 개체로 본문과 손을 잡게 된다면... 본문은 어쩌면 무림에서 최고, 최강의 세 력으로 탈바꿈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겠느냐?" "예." "그리고 이 사람은 너도 잘 알다시피 서문세가의 벽력도객(霹靂刀客) 서문길 (西門佶) 공자다. 현재 나이 29세. 너보다 두 살 어리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 니지. 그는 현재 가문의 비전(秘傳)인 뇌전도법을 5성 이상 익힌 대단히 뛰어 난 청년이야. 그리고 그가 태어난 서문세가는 현재 5대세가의 으뜸이지. 8천 에 이르는 식솔을 거느리고 있으며 아마 다음 맹주는 수라도제(修羅刀帝) 서 문길제(西門吉制)가 될 확률이 높단다. 현 무림 최고의 명가라 볼 수가 있지. 서문세가와 맺어져도 본문은 더욱 강대한 세력을 지닐 수 있게 될거야. 본문 은 이제야 겨우 4000의 식솔을 거느린 그럴듯한 방파로 성장했단다. 암살따위 나 하던지, 기방, 도박장, 전당포, 밀수 등 온갖 불법적인 사업으로돈을 벌 어들이던 하류문파로서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었지만 우리 무영문은 그 과거 를 딛고 일어서 이제 정부에서 허가받은 국경무역과 전방, 표국 등 각종 떳떳 한 사업채와 수많은 상권을 가지고 어엿하게 돈을 벌어들이고 있지. 오히려 지금에 들어서는 정보의 거래로서 들어오는 돈보다 그 정보를 기반으로 한 각 종 상거래가 더욱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이만큼 본문이 성장해온 것도 시기를 잘 읽고, 또 그 시기를 이용했기 때문이지. 그러니 영인이 네가 이 할 머니를 좀 도와주지 않겠느냐? 어려운게 결코 아니란다. 그 둘중 하나만 선택 해서 결혼하면 된단다. 둘 다 남주기 아까울만큼 대단한 인물들이 아니냐?" * * * 등에 4척이나 되는 장검을 네 자루나 짊어진 6척(181Cm) 장신의 무사가 장인 걸의 앞에 당당히 서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 물로 강렬한 안광(眼光)과 더불어 강렬한 마기가 전신에서 뿜어나오고 있었 다. 그는 평상시와 같이 검붉은 핏빛이 도는 구역질이 날듯한 빛깔의 낡은 옷 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기에 이미 말라붙은 군데군데 묻은 피는 묻었는 지 안묻었는지 별로 표시도 나지 않았다. 그 피들중 일부는 자신의 피이기도 했다. 표시는 나지 않지만 그도 또한 몇군데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꿋 꿋하게 마지막 보고를 위해 서 있는 것이다. 그는 평상시에는 두자루나 한자 루 정도의 장검만을 휴대하지만 직접적인 전투에 나설때는 네자루의 장검을 사용했다. 마교 최강의 무력단체인 천마혈검대를 책임지고 있는 이인물은 마 교에서도 흔치않은 검의 고수였고, 또한 어기동검술의 대가였기 때문에 다수 의 검을 휴대했다. "이제 더 이상 교주께 불복하는 놈들은 본교 내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흠... 수고했네. 제갈천 장로는 어디있나?" 그러자 구양운 장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어쨋든 멸절신장 제갈천은 마교서열 8위의 인물이었지만 장인걸이 거느린 반란세력으로 봤을때는 서열 2 위의 고수였다. 물론 마교서열 6위의 혁무상 장로가 있었지만 그는 아무래도 그 두뇌를 높이사 높은 서열을 받은 것이지 무공은 아무래도 좀 떨어졌다. 그 렇기에 장인걸로서는 그의 안부가 대단히 중요했던 것이다. "황노각 대호법에게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중상을 입혔기에 속하가 손 쉽게 마무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흠... 어쨋든 자네혼자 돌아온 것은 정말 유감이군. 황노각(黃老角) 대호법 은 어떻게 했나?" "수급을 잘라왔는데 보시겠습니까?" "아닐세.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하여 본좌에게 반역하는 놈들은 어떻게 되는지 모범을 보이게나." "예." "어쨋든 벅찬 상대였을텐데 잘 해줬네." "과찬이십니다. 묵향 부교주와 합류를 시도했던 호법원과 혈마대의 잔존세 력, 한중길 교주 직속의 천살대, 지살대, 인살대는 아무리 본교에서 최 정예 였다고 하지만 그래도 모두 없애는데 성공했습니다. 그중 40여명은 비록 중상 자 들이긴 하지만 잡아다가 지하감옥에 넣어 뒀습니다." "참. 피해는 어떤가?" "환영대는 전멸, 천마혈검대는 전사 32명, 중상자 43명, 나머지는 모두 경상 입니다. 그 외에 지원해주신 수라마참대 100명도 태반이 전사했습니다. 나머 지는 한달정도 치료하고 쉬면 괜찮아 질겁니다. 마지막 한녀석까지 저항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결과없습니다." 의외로 피해가 크다는 것을 느끼고 장인걸의 안색이 살짝 찌푸려졌다. 장인 걸이 권력을 차지하자 호법원의 수장이었던 마교서열 7위, 흑풍마령 황노각이 주축이 되어 이번 내전(內戰) 중 살아남은 호법원의 고수 200여명과 교주직속 원거리 호위대인 혈마대의 잔존세력 50여명, 그 외에 교주직속 무력단체 천살 대, 지살대, 인살대의 초절정고수 50여명을 이끌고 묵향 부교주의 세력에 합 류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불행스럽게도 장인걸이 그 사실을 포착했고 자신의 오른 팔이라 할 수 있는 교내 서열 7위 제갈천 장로와 서열 10위 구양운 장로에게 수라마참대 100명까지 증원해주며 급파했다. 아직 교내의 기반이 안정되지 못 한 관계로 더 이상의 수하들을 보내지 못한 것이 한스럽긴 했지만 장인걸은 나름대로 그들만으로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제갈천 장로는 무영대 (無影隊)라 불리는 30여명의 초절정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구양운 장로는 천마혈검대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손쉬운 싸움은 되지 않더라도 그리 큰 피해 는 없을거라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제갈천 장로는 아예 돌아오 지도 못했고 무영대는 전멸. 그렇기에 그 모든 경과를 구양운 장로가 보고하 고 있는 것이다. "피해가 그럴게나 크다니... 과연 교주 직속의 무력단체로군. 사실상 한중길 교주가 항상 그들을 데리고 있었다면 본좌는 반역을 꿈도 못꿨을 텐데... 하 여튼 자네가 본좌를 도와줬기에 이번에 용단을 내릴 수 있었다네. 정말 자네 에게는 감사하게 생각한다네." "과찬이십니다. 속하는 마도천하(魔道天下)를 이룩하는데 가장 최선의 길을 택한 것 뿐입니다." "그만 돌아가서 치료부터 받게." "예." 미세한 혈향(血香)을 풍기며 서있던 환영비마(幻影飛魔) 구양운(丘陽雲)장로 가 자리를 뜨자 장인걸은 호화로운 태사의에 푸근히 몸을 가라앉히며 밖에 대 고 말했다. "차(茶)를 가져 오너라." "예." 아름다운 시비가 들어와 태사의 옆에 마련된 자그마한 탁자 위에 차를 올려 놓고는 살며시 인사한 후 나갔다. 장인걸은 천천히 차를 마시며 깊은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이제 나에게 반역하는 놈들은 원로원 뿐이군. 이제 독수마제를 어떻게 없애 야 할까...' 이때 밖에서 음산한 마기를 뿌리는 인물이 들어선 후 예를 올리며 말했다. "교주를 뵙습니다." "무슨 일인가?" "혁무상 장로가 뵙기를 청합니다." "들라 하라." "예." 그가 나간 후 혁무상 장로가 들어왔다. 그는 이번 모반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교내의 정보를 완전히 장악하여 장인걸을 도운 1등공신이었다. 혁무 상 장로는 예를 올린 후 장인걸에게 서류뭉치를 건네준 후 태사의 앞에 정중 한 자세로 서서는 입을 열었다. "이번에 작성한 본교의 재편성 계획입니다. 빨리 시행하셔서 하루라도 빨리 세력을 다지는 것이 유리할 것입니다." "이번 모반에서 너무나 많은 고수들을 잃은 것은 참으로 유감일세." "어쩔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자네가 보기에 어느정도 세력감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솔직히 말해보게."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설명을 올릴까요?" "묵향 부교주가 있을 때부터!" "예. 묵향 부교주가 본교에 있을때가 본교의 최고 전성기라 볼 수 있습니다. 한중길 교주 조차도 그를 놀려두지 않고 적절히 잘 써먹었을 정도니까요. 그 혼자만으로도 천마혈검대와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왠만한 일은 그 혼자만 투입해도 모든게 끝이났었죠. 그가 본교를 빠져나감으로 해서 본교 는 1할(10%)의 힘을 상실했다고 보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 후 본교는 묵 향 부교주를 없애기 위해 투입했던 능비계 부교주와 천랑대, 염왕대를 잃었습 니다. 그들만 해도 2할 5푼(25%)은 넘어가는 힘이죠. 거기에 이번 내전으로 한영성 교주와 그가 이끌던 모든 세력을 없애야만 했습니다. 이들을 합한다면 2할(20%)은 넘어가는 전력입니다. 거기에 그들을 없앤다고 교주께서 상실한 전력이 있습니다. 그게 1할(10%)은 됩니다. 물론 이번에 소모하신 강시는 다 시 만들 수 있으니 예외로 하구 말이지요. 그러니 그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지 금 남은 전력은 3할 5푼(35%)쯤? 그정도로 생각됩니다. 물론 여기에서 한중길 교주가 묵향에게 선물한 분타들의 세력은 뺏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하수들과 대결하는데나 쓸만할까... 거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혁무상 장로의 솔직한 답변에 장인걸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얻은 자린데... 또 얼마나 원했던 자린데... 이제 빈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이다. "흐음... 정말 그때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전력이 많이도 깎였구만... 겨우 이 자리를 차지한다고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했어... 겨우 그걸로 무림통일을 생각할수나 있을는지..."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어떻게?" "우선 태상교주만 잘 처리해서 원로원의 힘을 얻는다면 3할(30%)의 힘을 얻 으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리 한다면 교주께선 6할 5푼(65%)의 힘을, 묵향 부교주는 3할(30%)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됩니다. 충분히 묵향 부교주를 제압하 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묵향 부교주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죽도 밥도 안돼죠. 교주께선 묵향 부교주를 핍박했던 그 모든 과거의 일을 한중길 교주 단독행동 으로 덮어씌운 후 묵향 부교주와 손을 잡으셔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와 완전 히 합치시면 안되구요, 그를 이용해서 무림맹을 없애야만 합니다. 아마도 묵 향 부교주는 정파와의 싸움중에 사망할 확률이 높죠. 그가 탈마의 고수라도, 또 그가 현재 지닌 힘이 현재 무림에서 다섯손까락 안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또 정파에서 묵향 부교주를 없앤다면 그만큼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 야만 할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무림은 교주님의 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가 그렇게 움직여 줄까?" 장인걸의 회의적인 반응에 혁무상은 단정적으로 답했다. "움직이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알겠네. 우선 본교의 남은 세력을 재편성하는 동안 그대는 묵향 부교주를 무림맹과 함께 소멸시킬 계획을 세워보게나." "존명!" "참. 그 외에 감옥에 갖힌 자들은 어찌되었나?" "지금 열심히 설득 중입니다. 그들이 교주님께로 전향한다면 대단한 힘이 될 것이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알겠네. 수고하게나." 혁무상 장로가 정중히 예를 올린 후 나가자 장인걸은 시비를 불렀다. 시비는 재빨리 다가와 그의 앞에서 다소곳이 허리를 숙이고 하명을 기다렸다. 장인걸 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 미성년가 독서불가 요건에 의한 자체 심의삭제.^_____^>>----- 현재 마교의 지하감옥에는 거의 500여명이 넘는 고수들이 투옥되어 있었다. 언제나 권력을 찬탈했을 때 그에 거부하는 세력은 있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 는 것이었지만... 한명이라도 고수가 아쉬운 때라서 속마음 같아서는 몽땅 목 을 잘라 전시해버렸으면 속이 풀리겠지만 어쩔 수 없이 전향시키기 위해 회유 와 설득을 거듭하고 있었다. 호법원의 경우 호법원의 수장인 황노각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놓쳐버렸기에 세력을 동원하여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외의 마교서열 18위 묵인겁마(墨刃劫魔) 초진걸(楚眞杰)이나 19위 은편패왕(銀片覇 王) 여문기(呂文起)같은 경우 중상을 입긴 했지만 내전중 포획하는데 성공했 던 것이다. 아마도 장인걸이 잡아들이는데 가장 고생했던 인물들 중의 하나가 수라혈신 (修羅血神) 북궁뇌(北宮雷) 내총관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중길 교주가 대단히 신임했던 서열 9위의 고수였고 또 그만큼 잡아들이는데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 야만 했었다. 그리고 수라마참대를 이끌던 인도(人屠) 동방뇌무(東方雷武)의 경우 장인걸에게 가장먼저 포획된 인물이었는데 그가 만약 수라마참대를 동원 하여 저항했다면 아마 장인걸은 승리를 거뒀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껍데기도 못건질것이 분명했기에 가장먼저 미혼약을 동원하여 포획한 후 수라마참대를 장악했던 것이다. 장인걸로서는 높은 서열에 있는 인물들 중 상당수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마교란 본래 약육강식의 세계. 지금 태상교주가 존재하기에 그들이 그 나마 의리를 찾고 있지만 아마도 태상교주가 사라진다면 그들은 무조건 장인 걸에게 충성을 다할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묵향이란 변수가 있긴 했지만... 장인걸은 하체를 좀 더 앞으로 들이밀며 태사의에 좀 더 깊숙히 몸을 묻으면 서 생각에 잠겼다. 하체로부터 강렬한 쾌감이 전해져 오고 있었지만 그의 생 각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하체를 시비에게 맏긴 채 편안하게 쾌감 을 즐기며 생각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한중길 교주는 너무 꿈이 없는 인물이었어. 마교 최고 전성기의 전력으로 무림통일을 할 생각은 안하고 쓸데없이 혈교니 뭐니 하면서 그런것들을 제압 할 생각만 하다니... 거기에 무림맹주와 밀월관계까지... 마교는 마교일 뿐. 그런 일은 정파놈들한테 맏겨도 충분했는데 말이야... 마교의 본업은 피의 역 사를 창조하는 것. 그때 내가 교주였다면 중원의 반은 차지했을거야. 멍청한 녀석... 어쨋든 그 때문에 불만을 품은 여러 고수들을 회유할 수 있었지만... 피해가 너무 컸어. 그 멍청한 한중길 교주의 입김이 그렇게도 강했던가... 어 쨋든 이제 곧 있으면 재편성이 끝나게 될거야. 그렇다면... 슬슬 혁무상 녀석 을 십분 이용하여 천천히 중원을 장악해 나가야지. 지금은 송과 요가, 또 황 제와 진천왕이 다투는 난세가 아니던가? 잘만 한다면 무림통일 만이 아니라 황제 자리도 꿈이 아니지. 흐흐흐흐... 혁무상 녀석은 그 시각을 무림에만 국 한시키고 있지만 왜 무림인이 황제가 될 수 없단 말인가? 이런 난세는 영웅을 만드는 것. 천운이 나와 함께하고 있음이지... 참. 혁무상 저녀석은 너무 똑 똑해... 위험한 놈이지.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구. 절대로 놈에게 실권을 줘선 안돼. 아주 조심조심해서 이용해먹다가 나중에는 흐흐흐흐...' * *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장인걸을 교주로 옹립한 천마신교는 전격적인 세력 재편 성을 완료한다. 어쨋든 상층부 고수들의 대량 사망 내지는 투옥으로 마교내의 서열이 대폭적으로 수정되었고 또 그로인해 각 단체의 축소 내지는 통폐합이 불가피해졌다. 장인걸은 9명의 장로였던 장로원을 5명으로 줄인 후 교주 직속 의 호법원이 그 덕분에 한중길 교주편을 들어 전멸한 덕분에 새로이 재편성하 고 절정고수 50명, 고수 1000명을 주어 서열 5위로 그 서열이 급상승한 흑수 천마(黑手千魔) 여진(呂震)에게 맏긴다. 그외에 이번에 피해가 없었던 자성만 마대를 4000명으로 줄여 서열 6위로 뛰어오른 무영신마(無影身魔) 장영길(張 影吉)에게 맏겼고 과거 자성만마대의 수장이었던 삼면인마 소무면을 서열 4위 로서 이제 400명으로 축소된 수라마참대를 지휘하게 했다. 제갈천 장로의 사망으로 일약 서열 2위로 뛰어오른 환영비마 구양운 장로는 장로원의 수장으로서 약간의 인력이 보충되어 80명이 된 천마혈검대를 계속 맏았다. 그리고 장인걸 교주의 교주 독립호위대로 초절정고수 10명, 원거리 호위대 수마대(守魔隊)는 절정고수 50명으로, 그 외에 교주 직속으로 사사혈 시마대 1000명을 존속시킨 후 서열 17위로 떠오른 학살인도(虐殺人屠) 박용 (朴龍)에게 맏겼다. 어쨋든 그런대로 아쉬운대로 모두에게 만족할만한 개편이긴 했지만 약간 불 만족스런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혁무상이었다. 제갈천이 죽었기에 자신 이 이번 반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을 들어 2인자의 직위로 오르지 않을 까 생각했었지만 그 자리는 구양운 장로에게 뺏겼고, 거기에 자신이 가진 삼 비대(三秘隊)는 이비대(二秘隊)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반론을 제기 할 수 없었던 것이 이번 내전에서 엄청난 고수를 잃었기에 삼비대 중 유일한 전투집단이라 할 수 있는 비마대(秘魔隊)를 해산하여 각 집단의 전력강화에 사용한다는데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쨋든 이번 개편으로 장인걸의 의도대로 혁무상의 세력은 상당히 약화되었 다. 비마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지로는 10명에 이르는 초절정 고수와 40명에 이르는 절정고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몽땅 털렸으니 당연 히 세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주 세력이 이탈해버린 혈화궁의 경우 마화단으로 그 지위가 하락했다. 첩보, 암살 등 각종 임무를 수행하던 외부지단이 떨어져 나가고 총 단에 남아있던 마교내 고수들에게 성과 향락을 제공함으로서하층 고수들의 불만을 해소시켜주던 자들만 남게 되었으니 그건 당연한 조처였다. 마화단의 단주로 서열 458위 흑미요요(黑眉夭姚) 진란(辰蘭)이 선택되었고 그녀들의 주 임무는 별볼일 없는 성적 노리개 생활이었다. 또 구 만악궁의 총단에 남아있던 잔존세력으로 만마단(萬魔團)이 새로이 재 편되었다. 이들 또한 외부지단의 이탈로 어쩔수 없이 새로이 돈줄을 개척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과거 만악궁 시절 수입의 2할(20%)밖에 차지하지 못하던 소작농들로부터 거둬들이던 수입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9할(90%)을 넘어서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만마단이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총단에 소작농들에 게 대여한 토지의 대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마단의 단장은 서열 347위 마뇌자(魔腦子) 전길(田佶)이 뽑혔다. 이로서 고수의 숫자 총 7천이 넘 는 거대한 전투력을 과시하는 장인걸이 거느린 천마신교는 새로운 미래를 개 척해 나가기 시작하게 된다. * * * 가을 햇살이 따사로운 광채를 뿌리고 있고 주위의 수목들은 저마다 붉은색, 노란색 등등 가지각색의 색깔로 예쁘게 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질 수 없다는 듯 저마다 화초들도 예쁜 꽃들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이때, 잘 가 꿔진 화단을 둘러보며 한 젊은이가 걸어가고 있다. 대개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주위의 화초들을 보는 듯 마는 듯 즐기며 걸어갔지만 그도 나름대로 가을이란 계절을 느끼고 있었다. 아름다운 비단으로 곱게 만들어놓은 청의자락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이 청년 은 서문세가가 자랑하는 차세대의 고수, 벽력도객(霹靂刀客) 서문길(西門佶) 이다. 그의 허리에 차여진 폭넓은 도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서문세가는 정통적 인 도의 명가였다. 그는 이제 29세란 젊은 나이에 뇌전도법을 5성이나 성취한 기재로서 그의 실력은 무림 초출에 포악하기로 이름높았던 하남광마(河南狂 魔) 여춘길이란 악당을 베어버렸기 때문에 벽력도객이란 명호를 얻었다. 여춘길은 광마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로 미치광이 짓거리를 하는 나아쁜 놈 이었지만 그의 무공이 원체 높아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사실 여춘길 은 광마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진짜 미친놈은 아니었고 또 멍청한 바보도 아니 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가 자기를 없애기 위해 오면 줄행랑을 쳤다가 그 가 찾다가 찾다가 지쳐 포기하면 겨울잠을 마친 곰마냥 어슬렁거리며 다시 나 타나 자신보다 하수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남의 불행 은 곧 나의 행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도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 실수를 했는데, 그것이 서문길이란 애송 이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늘상 있어왔던 일처럼 공 명심이나 영웅심에 머리가 반쯤 돌아버린 애송이가 악을 퇴치하겠답시고 찾아 온 것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상대했다가 머리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때 그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 여춘길이 상대를 깔보지만 않았다면 최소한 양패 구상이라도 가능했었겠지만 '꾸르르르...' 하는 낮은 뇌성(雷聲)을 흘리며 상 대의 도(刀)가 날아오는 것을 느꼈을때는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쨋든 여춘길이라는 공갈, 협박, 살인, 강도, 강간 등 무수한 악행을 저질 러오던 희대(稀代)의 악당을 없애며 그는 화려하게 등장했고 곧이어 무림 최 고의 신랑감들의 집단이라는 '칠룡'에 들 수 있었다. 칠룡에 들어가자면 아주 조건이 까다롭다. 첫째, 못생겨도 용서하지만 사봉과는 달리 무조건 남자여야 했다. 둘째, 미혼이어야 했고 홀아비도 안된다. 그렇기에 결혼한 인물들이 빠 져나가면서 새로 참신한 인물들로 물갈이가 되는 것이다. 셋째 결혼할 수 있 는 몸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뛰어난 소림의 후기지수라도 승려나, 도 사(道士)의 경우 미혼(未婚)이라도 그 미혼을 영원히 지켜야 하기에 칠룡에는 들지 못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뛰어난 무공실력, 다섯 번째는 그 가문과 혈 통이었다. 그렇기에 비사비협(非邪非俠) 모용명(慕容鳴)이나 비천검(飛天劍) 혁련운(赫蓮運)의 경우 원체 무공이 높아 끼인 것이지 사실상 다섯 번째 조건 을 엄밀히 따진다면 들어오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칠룡중 에서 최강의 무예실력을 자랑하는 인물들로 손꼽히고 있었다. 이번에 무림맹에서 벌어진 회합에 가는 길에 백씨세가에서 모였던 모든 젊은 이들은 단 한명을 빼고는 회합이 취소된 다음 자파에 돌아가 모두 연공실로 직행했다는 기이한 행동을 벌였는데 그도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연공실에 들 이박혀 있다가 가주인 서문길제(西門吉制)의 부름을 받고 가는 중이었다. 들 리는 후문으로는 그때 연공실로 직행하지 않은 인물은 혁련운 뿐이었다고 하 며 그는 황룡문에 도착하는 그길로 자기 방에 들어가 늘어지게 며칠동안이나 잤다나... 어쨋다나... 아무튼 서문길은 아버님의 호출 덕분에 무공수련을 포기하고 우선 며칠동안 씻지도 않았기에 목욕하면서 때도 좀 밀고, 뿌숭뿌숭하게 돋아난 수염도 깨끗 이 밀어버렸다. 그런다음 오랜만에 땀에 절어 냄새나는 속옷도 뽀송뽀송한 새 걸로 갈아입은 후 산뜻한 청의로 갈아 입고서는 부친의 처소로 부랴부랴 걸음 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준비하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들인 것 같다는 걱정을 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그의 부친은 딴건 다 좋은데 말보다 행 동이 앞서는게 흠이라고 할까나... 재수없으면 혹하나 생기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닌 것이다. 늦게 결혼한데다가 거기에 뒤늦게 얻은 아들이었지만 부친의 지론에 따르면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아들이라도 매를 아끼면 인간이 안된다 나? 하여튼 그 이론을 착실히 이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버님, 소자(小子) 대령했습니다." "들어오너라." "예." 방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무서운 아버지는 호피가죽을 깔고 앉아서는 그의 애 도인 묵룡도(墨龍刀)를 비단 천으로 닦고 있었다. 서문길은 조심스레 부친의 정면 1장(3m)앞에 앉았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정작 아들을 불러놓고는 일언반 구도 없이 계속 도를 열심히 광내고 있었다. 슥슥슥... 슥슥... 서문길은 무릎을 꿇고 앉아 이제나 저제나 질문이 날아올까 천천히 기다렸지 만 그의 아버지는 조용히 애도에 광택내기 바빴다. 조용히 기다리던 서문길의 인내심은 무려 4각(1시간)이 흐른 다음에 완전히 고갈되고 말았다. 그는 내심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것을 억누르며 약간 노성(怒聲)이 가미된 어조 로 말했다. "아버님.부르셨으면 말씀을 하셔야 할거 아닙니까?" "으음..." 그제서야 서문길제는 도를 집에 꼽아넣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실은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불렀다." "..." "네 나이 이제 스물 아홉이 아니더냐? 좀 이르기는 하다만 결혼에 대해 어떻 게 생각을 하느냐?" "저어... 지금 물어보시는 건 제 의견을 반영하실 생각이 있으신 것인지... 아니면 그냥 형식적으로 물어보시는 것인지..." 그러자 서문길제는 빙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물론 형식적인 것이지. 아직 새파란 네 의견이 감히 이 집안일에 끼어들수 있다고 보느냐?" 풀이죽은 서문길의 말대꾸... "그럼 의논 하실것도 없는데 왜 부르셨습니까?" "험... 그래도 일단 가문의 절차상 '의논'은 해야 하는 것이지. 그래 결혼하 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자 아직 나이도 어리고... 또 수련도 끝나지 않았사온데 어찌 지금 결혼 을 하겠습니까? 수련이 끝나고 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문길은 서로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혼약(婚約)을 한 참한 색시감이 있었다. 그녀는 종리세가(鍾里世家)의 금지옥엽인 종리옥란(鍾里玉 蘭)이었다. 그녀는 올해 28살이었고 그녀가 12살이 되었을 때 서문길제가 종 리세가에 방문했을 때 그 깜찍한 미모와 뛰어난 재주를 보고 며느리감으로 점 찍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종리영우에게 넌지시 말했고 종리영우도 찬성하 여 나중에 장성(長成)하면 혼인시키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오대세가 중에 최 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게 서문세가라면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문파가 종리세가였다. 서문세가나 종리세가는 둘 다 도의 명가들이었고 그렇기에 그 들의 말을 빌리면 '겉멋만 잔뜩 든 검을 쓰는 놈들'보다는 그들끼리 잘 통하 는지도 몰랐다. 서문길은 부친이 말하는 상대가 종리옥란인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 단 부친이 질문을 했으니 그는 가장 모범적인 답안으로 대답을 할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흐음... 길아." "예. 아버님." "너는 무영문의 '매영인'이란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 하지만 저는 이미 옥란 소저하고 혼약이..." "흐음... 선약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은 없지. 그 약속은 그렇게 중요한게 아 니다. 사실 아주 어릴 때 그아이를 한번 보고 서로간에 구두로 약속한 것이 지, 정식으로 매파가 오간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네가 옥란이하고 한번 만난 후 네 취향이 아니라고 한마디 넌지시 하면 자연스레 넘어가는 문제지. 네 대 답을 듣고 옥란이라는 아이가 충격받고 몸져눕던 어쨋든 그건 결혼이라는 가 문의 중대사에 큰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종리세가나 무영문이 본가에 어느정 도 보탬이 되느냐 하는 것이야. 그리고 아울러서 며느리감의 됨됨이도 중요한 것이고. 어제 무영문에서 매파(媒婆)를 보내왔다. 혹시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구." 자신이 직접 가서 거절의 의사를 밝혀야 한다니... 서문길은 '솔직히 소저는 내 취향이 아니오.'하는 말을 듣고는 까무러치는 여자를 상상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할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서문길이 물 었다. 뒷수습이 어려울 때 아버지라는 편리한 울타리가 있지 않던가? "아버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슬쩍 팔밀이를 하는 아들놈을 가소롭다는 듯이 보면서 서문길제가 대답했다. "네 어머니와도 상의를 해봤고... 또 가신(家臣)들과도 상의를 해봤지만 서 로간에 일장일단이 있다보니 의견 통합이 잘 안되더구나. 종리세가야 패도적 인 도법을 자랑하는, 어떤 면에서는 본가와 비슷한 문파다. 문도수가 6천에 이르는 명문이지. 본가와 힘을 합친다면 두려울게 없을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다 이말이야. 그리고 또 패도 종리영우는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기와 의형제 를 맺은 관계가 아니더냐? 제갈세가까지 보탬이 된다면 그 힘은 대단한거지. 그에 비해 무영문은 문도수 4천정도... 옥화무제가 있지만 사실 무영문의 무 공은 종리세가와 비교한다면 그렇게 대단한게 못된다. 옥화무제라는 뛰어난 인물이 태어남으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한것이지. 하지만 무영문은 정보단체인 만큼 양(陽)으로는 보탬이 안되어도 음(陰)으로는 아주 보탬이 되지. 그래서 여러 가지로 의논이 분분한거야. 네 생각은 어떠냐? 네가 데리고 살 여자니까 너의 의견도 조금은 들어보고 싶어 부른 것이다." '으음... 파혼선언을 하고 새로운 여자를 잡아 정략결혼을...? 으윽... 전에 만나보니 매영인이란 소저도 그런대로 괜찮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 정략결혼 이란 것이... 거기다가 약속이 중요한게 아니라니... 그래놓고는 약속파기를 나보고 그 패도 어르신 한테 직접가서 하라고? 나를 죽이려고 들텐데..?' "아버님께서는 예전부터 약속의 중요성을 논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전의 약속이라도 그걸 하찮은 이유로 깰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옥란 소저가 무슨 신체나 정신상 문제가 있는것도 아니구요." "그렇다면 너는 옥란에게 아무런 불만이 없다는 거냐?" 그러자 서문길은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답할 수밖에 없었다. '얘기가 왜 이렇게 돌아오는 거야?'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죠." "흐음... 그렇다면 조만간 날을 잡아 함께 종리세가를 방문하자꾸나. 일단 옥란이를 한번 보고 하자가 있다면 말하거라. 곧장 매영인으로 바꿔줄테니. 알겠느냐?" 그러자 서문길은 좀 시큰둥한 어조로 답했다. 오간 대화는 논리가 정연한 것 같았는데...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이 약간 들었기 때문이다. "예." "이만 가보거라." "그럼. 소자 물러가겠습니다." 고집센 아들이 나가고 나자 서문길제는 밖에 대고 외쳤다. "차를 가져 오너라." "예." 시비 한명이 다소곳이 차를 놓고 나가자 서문길제는 천천히 찻잔을 들고 다 향을 음미하며 빙긋이 미소지었다. '클클클... 이번에도 당했지. 옥란이하고 혼약을 시킨다고 하면 저놈이 자신 의 마음에 드는 상대와 결혼하겠다고 전처럼 길길이 뛸 것 같기에 매영인이를 슬쩍 동원한 것 뿐이야. 제 꾀에 제가 속아 넘어갔지.' "휴우... 하나뿐인 아들놈이 머리가 커가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듣는지... 아들놈을 꼬신다고 별의별 잔머리를 다 굴려야 하다니... 에구 내 팔자야." 원래가 서문길제와 종리영우는 그렇게 절친한 사이는아니다. 어릴때부터 맺 어진 서문길과 종리옥란과의 혼약도 다분히 정략결혼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서문길제는 아들에게 넌지시 오래전에 혼약을 한 참한 색시감이 있으니 딴데 다가 한눈팔지 말라고 말했고 서문길은 그에대해 어렸을때의 혼약은 지킬 필 요없다고 반박하면서 자기 마음에 드는 색시감을 자기가 강호에 나가 직접 구 하겠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서문길은 스물 여섯이라는 명문의 자제 들 치고는 대단히 젊은 나이에 강호초출을 했고 그때 벅찬상대하고 싸워 간신 히 이긴 후 정신차리고 연공실로 다시 들어갔던 것이다. 덕분에 칠룡의 서열 에 들긴 했지만... 그래서 서문길제는 종리옥란과의 혼약문제에 이번에 매파가 들어온 매영인을 끼워넣은 것이다. 둘 다 정략결혼이지만 하나는 예전의 약속이요, 하나는 이 번에 들어온 청혼이다. 하지만 이번에 들어온게 좀 더 정략적인 냄새를 풍기 니까 말만 잘 하면 새 것 보다는 과거 것을 택하게 되는게 사람의 심리. 서문 길제는 일부러 처음에 오랜시간 뜸을 들여 기다리도록 해서 아들의 심기를 흔 들어놓은 후 교묘한 화술로 딴 여자는 끼워넣지 않고 그 약속을 위반하는 것 에 대한 도의적인 것에대한 반발을 느끼도록 유도하면서 둘중 하나를 택하도 록 만들었으니 서문길이 자신의 처지는 잊고 얼떨결에 종리옥란을 택한 것이 다. 원래 그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데... * * * "실패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중원 최고의 정보집단과 혼약을 맺자는 제의를 양쪽에서 다 거절했다는 건가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서문길제의 경우 아들에게 이미 약혼자가 있 다면서 정중히 거절을 해오더군요. 그거야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래도 서문길이 정략결혼이 싫어 뛰쳐나갔던 걸 생각하면 조금 의외의 결과라 할 수 있죠. 종리옥란과는 달리 아가씨께서는 사봉에 들어가는 최고의 신부감인데 말이죠. 그리고 백씨세가에서 서로 만나기까지 했었구요. 조금 이해가 가지않 는 행동이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요. 결혼이란 것이 상대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거니까... 그렇다면 묵향은?" "그쪽은 더 지독한 대접이었죠. 본인은 만날 수조차 없었고, 군사인 설무지 라는 인물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청혼을 설무지가 정중히 거절하더군요. 지 금은 혼사따위 논할때가 아니라면서 말이죠." "만날 수도 없었다면, 설마... 그의 신변에 이상이 있는게 아닐까요?" "아닐겁니다. 보고에 의하면 전 중원에 퍼져있던 마교의 분타들이 지하로 잠 적했습니다. 또 섬서분타에서 벌이고 있던 위사사업이나 표국, 전장, 기루 등 에 파견나가있던 모든 고수들이 섬서분타로 돌아갔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보 면 지금 마교의 모든 전투세력들은 두곳으로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지요. 하나는 총단이고 또 하나는 섬서분타입니다. 조만간에 둘간에 전면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만약 둘간의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누가 승리하게 될까요?" "그건 지금 알 수 없다고 봅니다. 전체적인 전력은 총단쪽이 높지만 섬서분 타는 묵향이 있습니다. 그 혼자의 힘은 왠만한 문파급과 맞먹습니다. 그가 이 번에 어느정도 활약을 하느냐에 따라 승자가 결정되겠죠. 아마도 장인걸은 묵 향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막는데 최선을 다할것으로 사료됩니다." "좀 더 정확한 결론은 불가능한가요?" "유감스럽게도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총단은 얼마전에야 내분으로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예전부터 정보를 빼내기가 아주 힘들었던 곳이죠. 이번에 장인걸이 집권한 후 마교를 완벽히 장악한 후에는 약간씩 흘러들어오 던 정보조차 완전히 막혔습니다. 또 섬서분타의 경우 이번에 무사모집을 대대 적으로 하기에 꽤 기대를 했었는데... 10명이나 첩자를 넣었지만 모두들 외곽 에서 허드렛일이나 할 뿐 안에서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조차 알 수 없었습니 다. 양쪽 다 첩보건 암살이건 최악의 조건일 정도로 대비가 철저하기 때문이 죠." "섬서분타 내부의 규모는?" "정보에 따르면 약 4천명이 기거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진 것으로 알고있습 니다." "4천명이라... 그렇다면 식량 소모가 대단하겠군요. 그렇죠?" "예. 엄청난 량의 식량이 안으로 반입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식량 반입 에 투입되는 호위병들의 무공이 대단히 뛰어나기 때문에 그쪽에 수작을 부릴 수는 없을겁니다. 그 외에 방대한 량의 병장기들도 매입하고 있죠. 근처에 중 경(=장안)이 있으니 뭐 구입이야 순조로운 것으로 수하들에게 보고받았습니다." "섬서분타의 자금사정은?" "보고된내용으로는 그렇게 풍족한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교도들이 원래 가족들을 거느리고 높은 봉록을 받는자들이 아니니 그걸로도 충분하겠죠. 총 단도 마찬가집니다. 전면전을 벌이기에 앞서 분타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 지 하로 숨긴걸 보면 둘 다 몇 년은 외부 지원없이 싸울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아... 방금 4천명 규모의 시설이라고 했죠?" "예." "그러면 숫자가 좀 안맞는 것 같은데...?" "예?" "천랑대와 염왕대를 흡수했으니 약 3천명.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흑풍단이 적게 잡아도 3천명. 그렇다면 6천명의 식솔이 되지 않나요?" "흐음... 예. 그렇지요." "총관은 섬서분타 내부로 유입되는 식량, 건초(乾草), 의류, 병장기의 량을 좀 더 정확히 조사해 보세요. 특히 식량 등 인원파악에 도움이되는 확실한 물 품 말고 의류라든지 신발 따위의 소모량에 중점을 맞춰요. 만약 위장이라면 그런쪽이 의외로 허술할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일부의 세력이 섬서분타가 아닌 딴곳에 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게 진짜 섬서분타의 주력일지도..." "알겠습니다." * * * 음산한 마기를 뿜어대고 있는 흑의인은 그 주변에 모여든 여러 흑의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 2, 3대는 진령문을 포위 쥐새끼 한 마리도 도망가지 못하게 해라." 그러자 두명의 흑의인이 그에 답했다. "존명!" "제 1대는 정면을 맡는다. 상대의 이목을 최대한 그쪽으로 집중시켜라." "존명!" "제 4대는 하인들이 거주하는 곳을 맡아라. 최대한 많은 인질을 재빨리 확보 하여 끌고 나오라." "존명!" "제 5대는 본좌와 함께 행동한다." "존명!" "될 수있다면 살상은 최대한 억제하라. 이따위 문파 잡아먹어 봐야 별것도 아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이곳은 곧 포기할거니까... 알겠느냐?" "존명!" "자... 행동을 시작하라." 흑의인들이 저마다 수하들을 거느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령문에서는 "적이다!" 하는 비명성과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곳곳에 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령문(振逞門)은 정파계열의 문파로서 주변의 평이 좋았고 그 문주인 막충 (莫忠)이 정인검(正仁劍)이란 명호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광명정대한 인물 이었다. 그는 살아가면서 원수진 일도 없었고 또 원수질만한 일도 한 적이 없 었다. 그렇게 사람좋은 인물이다 보니 진령문을 그의 대에 확대하지는 못했지 만 주위 많은 문파들의 지지를 받는 위치에는 올라설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날밤의 기습은 정말이지 막충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막충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근에서 꽤나 명성을 날리고 있는 자신의 문파를 공격해 들어온 하룻강아지들을 응징하기 위해 재빨리 옆에 놓인 검을 줏어들고 뛰쳐나갔다. 그는 지금 자신이 속옷차림으로 그나마 상의는 입지도 않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을 시간도 아까와 재 빨리 맨발로 뛰어나간 후 정문쪽에 위치한 담을 뛰어넘어 들어온 200여명의 흑의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챙챙챙... 검을 일단 섞어본 후 막충은 상대방의 실력에 정말이지 놀랐다. 마기를 풀풀 풍기는 것으로 보아 어디 소속인지는 대강 감이 잡혔고, 또 만약 그의 예상이 맞다면 상대의 실력이 이정도로 뛰어나다는게 이해가 갔다. 하지만 마교가 이 런 시골구석까지 와서 자신의 문파를 핍박할 이유가 없었다. 어제 아침에 마 교에서 그들이 노리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의 뜻에 동참하라는 서 신을 가지고 온 놈이 있긴 했다. 물론 그는 정도를 걷는 무인으로서 그것을 거절했다.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 빨리 손을 써올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200여명의 흑의인들에 대해 진령문에서 동원된 무사의 수는 거의 2000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담을 등지고 아주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었기에 포위를 할 수가 없으니 그 숫자는 말짱 헛거였다. 오히려 많은 숫자로 인해 서로가 방해가 되어 뒤에 있는 자들은 푹 쉬고 있었으니 까... 이때 나지막 하지만 음성이었지만 충분한 내력을 담아 싸우는 와중에도 들려 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멈춰라. 막충! 인질들의 목숨이 소중하다 생각한다면 검을 버려라." 순간적으로 막충이 뒤돌아봤을 때 뒤쪽에는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 또 하인, 하녀들, 각 무사들 중 진령문 내에 살림을 차리고 있는 아녀자들과 자식들이 쭈루미 무릎꿇고 앉아있었고 그 주위에는 거의 400여명의 흑의인들이 검을 뽑 아들고 서 있었다. "빨리 검을 버려라. 본좌가 본보기를 보여야만 무기를 버리겠는가?" 그러더니 옆에 있던 흑의인에게 말했다. "10명만 무작위로 끌고 나와 베어버렷!" "존명!" 그와 동시에 흑의인들 중 10명이 재빨리 움직이더니 자신의 손에 잡히는 가 까운 사람을 하나씩 잡아서는 일렬로 쭉 세웠다. 그런다음 그들의 검이 싸늘 한 광채를 뿌리며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 "멈추시오! 항복 하리다." 막충 또한 이따위 무리들과 타협을 하거나, 항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겨우 200여명을 잡고 2000여명이 모여 한명도 죽이지를 못 했는데... 거기다 상대는 본격적으로 살수를 쓰지 않았기에 상대의 월등한 실 력에도 부상자는 꽤 많았지만 죽은자는 없는 것을 보아 상대방은 처음부터 인 질로 승부를 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만약 여기서 그가 거 절한다면? 저 마교도들은 그야말로 진짜 손을 쓰기 시작해서 피바다를 만들 게 분명했다. 저놈들이 한다고 했으면 분명히 해낸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주 지 않는가... 200명도 어떻게 하지 못했는데 600명이라면 분명히 해내고도 주 리가 남을 것이다. 그리고 또 밖에는 얼마나 많은 숫자가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지 알수도 없지 않는가? 진령문의 문주 정인검 막충이 검을 버리자 그의 문도들도 하나하나 억울함과 원통함이 가득한 얼굴로 무기를 땅에 버리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대관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대들과 원수진일이 없 거늘 이래도 되는 거요?" "잘 생각해 보시게나. 오늘... 아니군. 지금이 인시(寅時) 초(새벽 3시)니까 어제군. 어제 아침에 본좌는 그대에게 본교에서 움직일만한 거점이 되어줄 것 을 정중히 부탁했지. 자네는 거절했고... 그래서 발생한 결과지." "마교에서 정파를 건드리면 주위의 문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우두머리는 싱긋이 웃으며 품속에서 편지 몇 장을 꺼내면서 말했다. "이걸 말하는 모양이군. 물론 이걸 가지고 가던 녀석들은 모두 다 본좌가 잡 아뒀네.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이제 한동안은 같은 길을 걸을 사람들끼리 처음부터 나쁜 인상을 가지고 시작할 수는 없지 않겠나? 어쨋든 자네의 연락을 받고 이쪽으로 뛰어올 문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게 좋겠 지." 그러자 막충의 얼굴에서 절망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원하는게 뭐요?" "진령문은 이제부터 본교가 어떤 일을 하기위한 보급기지 역할을 하게 될거 요. 물론 그 일이 끝나고 나면 조용히 물러나 드리겠소. 또 이곳을 본교가 장 악하고 있다는 것이 외부로 알려진다면 이곳은 곧장 전쟁터가 될거요.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철수하면 그만이지만 아마 그날로 진령문은 문을 닫게 될거요. 아시겠소?" "외부에 알려지면 왜 우리가 피해를 입는다는 거요? 그대들이 피해를 입겠 지."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적은 정파가 아니오." 그러자 막충의 의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마교가 정파와 안싸우면 누구와 싸워?' "본타는 본교 총단과 투쟁을 벌이고 있소. 이곳 진령문은 총단 공격의 보급 기지가 될거요." 그러자 막충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크하하하... 말도 안돼는 말 하지 마시오. 마교끼리의 싸움이라니..." 그러자 흑의인의 우두머리는 얼굴을 굳히며 답했다. "믿건 안믿건 그대의 자유. 하지만 본좌는 그대에게 경고를 했고 그 경고를 어겨 벌어지는 모든 책임은 그대에게 있소." 우두머리는 주위를 보며 외쳤다. "병장기를 한곳에 모으고 인질들을 한곳에 가둔다음 철저히 감시해라. 그리 고 동쪽에 있는 수련장 건물에 저자들을 수용한 후 감시하라." "존명!" "막충! 자네는 이리 오게." 막충이 상대가 무슨 짓을 하려는 생각에 이러나 하면서도 수하들에게 주눅든 모습을 보이지 않게 주의하며 당당히 걸어왔다. "왜 그러시오?" "한 문파의 문주라면 그래도 약간은 나은 대접을 해야지. 또 그대가 할 일도 하나 있고..." "무슨..?" "주위에 얼굴이 잘 알려진 인물 2명을 뽑게. 본좌가 마기가 안풍기는 녀석 2 명을 붙여줄테니 이제부터 진령문 밖에 나가 주위의 민가들을 돌며 안심시키 러 다녀야지. 물론 자네가 직접 돌아다닐 필요는 없을테고... 오히려 자네가 돌아다니면 의심을 살지도 모르니 자네의 수하들을 보내자는 거야. 알겠나?" "알겠소." "두명에게 주위를 다니면서 오늘밤 기습이 있었지만 물리쳤다고 안심하고 자 라고 선전하라고 말하게." "알겠소." 막충이 흑의인들에게 끌려가고 있던 문도들 중에서 두명을 불러 이제부터 해 야할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흑의인의 우두머리도 마기가 비교적 들풍기는 녀 석 둘을 차출했다. 그런다음 상관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은 그들은 진령문 밖으로 진령문의 안전함을 선전하기 위해 밖으로 뛰어 나갔다. 우두머리는 이제 모든 지시를 다 해놨는지 느긋하게 마루에 걸터 앉더니 수 하에게 술을 찾아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조금 지나 수하 한명이 주방에서 찾아낸 술과 약간의 안주를 가지고 오자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자네도 이리 오게. 오늘 밤 속쓰리는 일도 많을텐데... 한잔 하게나." "마시기 싫소." 그러자 일부러 염왕적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레 말했다. "벌써부터 본좌의 명을 거절할건가? 안돼겠군. 몇 명 잡아다가 목을..." 그러자 재빨리 막충은 상대의 앞에 앉아서는 술을 자신의 잔에 따른 다음 목 구멍 안으로 털어넣었다. '제기랄...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똥씹은 얼굴로 억지로 술을 털어넣는 모습을 보며 염왕적자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는 본좌가 오늘 그대 문파 사람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 다는 걸 아나?" "....." "사실 지금 내가 끌고온 수하들은 본좌 휘하에 있는 수하들의 반이야. 나머 지 반은 군사가 어디에 쓴다고 빌려갔지만... 그렇지만 그 반만해도 이정도 시골문파따위 2각이면 시체의 산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네. 하지만 군사가 쓸데없이 피를보지 말라고 부탁을 했기에 노부도 조심한거지. 왜그런고 하니 후속부대의 지휘관이 이런일에는 좀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거든..." "누군데 그러시오?" "조금 지나면 알게 될거야. 아마 본타에서 그대에게 신세지는 것도 몇 년 되 지 않을거야. 과연 얼마나 신세지게 될지 아직은 알수가 없어. 하지만 이것 하나는 그대에게 약속하겠네. 그대와 그대의 문파에는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노력함세. 대신 그대도 이 비밀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조심해 주게나." 서로 가벼운 말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한 반시진 정도 흘렀을까? 흑의인들의 우두머리가 세병째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 미세한 진동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왔군." 그러자 막충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온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일각여가 지난 후에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 흑의인들이 정문을 열었고 그걸 통 해서 천여명의 기병들이 달려 들어왔다. 그들은 마을 외곽에서 미리 준비해온 두터운 헝겁으로 말발굽을 몇겹으로 감싸놨기에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 이다. 먼저 들어온 거대한 흑마(黑馬)에서 두터운 갑주(甲胄)를 걸친 인물이 뛰어내렸다. 그런다음 우두머리에게 다가오며 정중히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셨습니까? 염왕적자(閻王笛子) 대장." "어서 오시지요, 관지공(公). 일이 벌써 끝나버려 미안하군요. 이쪽은 신세 지게 될 진령문의 정인검 막충이외다." 막충은 똥씹은 얼굴로 중무장을 갖춘 인물에게 간단하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이정도 중무장을 갖춘 인물이 수하들을 천여명이나 끌고 들어오는 걸 보니 아 마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인 모양인게 확실했다. 그러면 재수없으면 정말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수가 생기는 것이다. "관지라 하오. 잘 부탁하오." 한중평이 관지에게 관지공이라고 높여주는 것은 그의 무공 고하를 떠나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나긴 했지만 관직에 머물렀던 뛰어난 장군이었기 때 문이다. 찬황흑풍단의 천인장이라면 장군계급이었다. "대단히 빨리 끝내셨군요." "겨우 이따위 시골문파, 염왕대 100명만 해도 쑥밭으로 만들 수 있지요. 그 래 오는길에 문제는 없었나요?" "흔적이 눈에띄지 않게 이리저리 돌아온다고 늦었습니다." 그러면서 관지가 염왕적자를 향해 조금 꺼림직한 시선을 보내자 염왕적자는 곧이어 눈치채고는 막충을 자신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를 딴 사람이 들어서 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막충이 멀어져 가는 것 을 보며 관지가 입을 열었다. "타주의 몸도 안좋은 이때 움직이는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군요." "타주는 본교 최고의 고수지요. 상대는 타주의 몸상태를 모르니 죽지만 않았 다면 무슨짓을 해도 상관이 없지요. 언제나 보이는 적보다는 안보이는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 그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된다 이말입 니다. 참, 그런데 나머지는?" "분산해서 이동했으니까 조금 지나면 모두들 도착할 겁니다." "자자... 그럼 수하들이 도착할때까지 술이나 한잔 하지요. 여기 괜찮은 술 이 좀 있더군요." "예." 어둠이 걷히고 동이틀때쯤 되자 관지가 거느리는 흑풍대 4천여명이 도착을 완료했다. 흑풍대는 묵향과 합류하는 시점에서 말과 갑주 등 모든 장비들을 버렸었다. 하지만 흑풍대의 구성원들은 개개인의 무공은 마교의 인물들보다 훨씬 떨어졌지만 기마전에 능한 인물들이었고 또한 군인들이었었기에집단전 에 능했다. 그렇기에 설무지는 그들에게 뛰어난 준마(駿馬)와 군용으로 납품 되던 두터운 전투용 중갑주, 그 외에 두터운 방패 등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모 두 다 장만해 주었다. 거기에 어느정도 시일이 지나 관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과거 이탈했던 흑풍단의 인원들까지 가세해 4천명으로 증강되어 있었다. 그렇 기에 지금에 이르러 넓은 평지에서의 전투력은 염왕대와 막상막하의 수준에까 지 와 있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관지는 염왕적자에게 입을 열었다. 그는 이제 갑주를 벗 고 평상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언제 떠나실 겁니까?" "오늘 밤 해가 지면 출발 할거에요. 또 한곳의 문파를 부숴야 하거든요. 밤 에만 움직이자니 죽을 노릇이군요." "아무리 마교와 전쟁을 한다고 해도 이런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파를 부숴도 상관 없을까요?" "관지공은 아직 무림을 잘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무림은 철저하게 약육강식이 지켜지는 곳이지요. 아무리 정이니 협이니 해대도 힘없으면 말짱 헛거지요. 과연 정파라 자처하는 무리들이 협이란 걸 지키는지는 아무도 모르 는 사실이지요. 사실 본좌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본 정파란 것들 중에서도 쓰 레기들을 많이 봐왔고 또 사파나 마교라 불리는 인물들 중에서도 협의 정신을 지키는 인물들을 봤지요. 물론 노부가 그렇다는 말은 절대 아니구요. 문제는 정이냐 사냐 그런게 아니라 지금 관지공처럼 협을 지키고자 하는, 또는 생각 하는 마음을 가지느냐 하는 거지요. 관지공은 군에서 오래 있어 봤으니 잘 알 겁니다. 적군을 대할 때 어떤 행위를 하나요?" 순간 관지에게는 이민족들을 해치웠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별로 유쾌 하지는 않은 기억. 야만족들이라는 단 하나만으로 살인, 강간, 폭행, 약탈을 자행했었지 않은가... 가깝게는 몽고전에서부터 멀게는 자신이 처음 흑풍단에 입단했을 때 있었던 투르판 원정까지.... "....." "군대란 아주 재미있는 단체지요. 같은편은 목숨을 바쳐 보호하고 반대편은 살인, 강간, 폭행, 약탈을 해도 오히려 높은 공로를 세웠다고 녹봉과 벼슬을 올려주며 칭찬하지 않나요? 무림도 같은 거지요. 협이니 뭐니 따질 필요가 없 어요.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곳이지요. 물론 이 문파는 우리의 적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이들의 문주는 우리와 행동을 같이할 것을 거절했고, 그 렇다면 이들은 우리의 행동에 지장을 주는 적이 되는거지요. 적을 무참히 없 애버렸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어느정도 이해는 되는군요." "지금 우리들의 행동은 기밀이 아주 중요합니다. 진령문은 이제 총단을 점령 하는데 있어 보급기지로서 아주 소중히 쓰일 곳이지요. 또 필요한 병력을 숨 겨두기도 그만인 곳이고... 왜 우리가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런 시골문파를 박 살냈겠나요? 그러니 내일부터는 관지공이 이곳을 책임져야 하는데... 그때 사 소한 인정을 보인답시고 물컹하게 대했다가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이런 작은 문파는 본교가 보이지 않게 살며시 지원 해주면 급속히 다시 힘을 회복하게 되겠지요. 그러니 이들에게 인정을 배푸는 것은 총단을 박살낸 후에 해도 상관없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며칠 후면 관지공은 아마도 또 이동하게 될겁니다. 군사께 들었는지 모르지 만 이번 길 개척은 노부가 거느린 염왕대가 맡았지요. 노부가 부수고 들어가 면 관지공이 뒷수습을 하는 식으로... 300리(91Km) 단위로 하나씩 문파를 부 숴 나갈겁니다. 여기서 대산까지는 삼천리길... 앞으로도 9개의 문파를 더 부 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아마 흑풍대의 뒤로 본타의 주력이 따라올겁니 다. 그런다음 비밀리에 총단 부근에서 집결하여 혈전을 벌이게 될테지요. 또 길 개척이 끝날 때 쯤에는 그분의 상처도 회복될테니 승산이 있는 싸움이 될 겁니다. 그때까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좀 보이더라도 참으세요." 그날 이후 막충은 인질들 때문에 할수없이 협조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 정말 문파간의 싸움도 이정도로 규모가 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닳을 수 있었다. 보 통 문파간의 싸움은 상권 등의 잇권을 놓고 다투는 것으로 상대방을 멸망시키 기 위한 전면전 보다는 각 지역을 놓고 제한적인 싸움을 하게 된다. 많이 동 원되어야 천여명, 보통이 500여명도 안되는 무사들이 검이나 창 등 개인이 휴 대할 수 있는 병장기들로 무장하여 하루정도 투닥거리고 나면 싸움이 끝나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마교도들에게 점령당한 후 진령문의 창고에는 어디 전쟁에라도 쓸건 지 몸통정도를 가릴 수 있는 약식 갑옷과 활, 화살, 쇠뇌, 창, 투석기, 방패 등 별의별 물자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진령문에 주둔중인 흑풍대라 불 리는 마교의 집단은 개개인의 무공은 흑의인들보다는 약한 듯 보였지만 그 무 장에 있어 아무래도 정규전을 교육받은 것 같은 특이한 인물들로 보였다. 무 림인들이 잘 다루지 않는 마상용 무기를 아주 능숙히 다룰뿐아니라 쇠뇌나 투 석기 등을 수리, 정비하는데 옆에서 구경해봐도 아주 많이 다뤄봤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관지라는 우두머리가 떠난 후 진령문은 관석(關析)이란 자가 300여명의무리 를 이끌고 주둔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각종 무기와 식량 등속이 진령문을 통 해 어디론가 흘러간다는 걸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 만 그쪽에서 아마도 피바람이 불어오리라... * * * "어서 오십시오, 천도왕(天刀王) 수석장로님." 여지고 수석장로가 들어오자 방금 기별을 받았는지 설무지 군사가 뛰어나오 며 반가이 맞이했다. 아무리 설무지가 군사라는 직위에 있지만, 수석장로와 차석장로의 지위는 군사라는 직위보다 낮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만이외다. 군사."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사혈천신(蛇血天神) 장로님은?" "그는 부교주님이 명하신 포섭자 명단을 들고 고루혈마, 지옥혈귀와 함께 돌 아다니고 있소. 몇 명 포섭했다는 보고를 들었소." "그러면 각 분타에서 쓸만한 무사를 뽑는 임무는 누가 맡고 있습니까?" "음희와 사망혈매가 하고 있소. 사망혈매는 혈화궁 출신이니 정보에 뛰어나 아마 제대로 된 선발을 기대할 수 있을거요." "몇명정도 뽑으실건지요?" "3천명 정도로 하라고 지시해 놨소. 어쨋든 장인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자들만 추려뽑았지만 그 안에도 끼어든건 어쩔 수가 없소. 주의할 수 밖에..." "홍진 막주가 이미 거처를 마련해 뒀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쪽으로 이동시켜 주십시오. 또 한가지 좀 주의해 주실게 있는데..." "뭔가?" "우외총관은 이쪽으로 절대 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여지고 장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으응? 꼭 그래야 하는 이유라도?" "그와 원수를 졌다고 주장하고 있는 초류빈이라는 자가 그분의 수하로 들어 와 있습니다. 잘못하면 칼부림이 날수도..." "알겠네. 외총관에게 주의를 주지." "허허... 수하들을 믿을 수 없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들이 확실히 첩자가 아니라는 보장만 있다면 그래도 쓸곳은 아주 많은데 말입니다." "그래도 새로이 정비된 조직에서 만묘서생이 보내오기 시작한 돈은 엄청난 액수가 아니오?"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죠. 참, 부교주님께서 찾으셨습니다." "부교주님의 상처는?" "거의 치료된 상황이긴 하지만... 호승심만 앞세울뿐, 너무 자신의 안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시니 천도왕 수석장로께서 말씀좀 잘 해주십시오. 수석장 로님 외에는 그분께 직언을 올릴만한 인물이 그분의 과거 흑풍단 시절의 친구 들 뿐이라..." "알겠네. 지금 어디 계신가?" "후원에 계십니다. 참,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아마도 도움이 될겁니다." 천도왕 여지고 수석장로가 흰 도포자락을 날리며 후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들 어섰을 때 묵향은 후원에 핀 꽃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서있는 마화는 묵향의 시커먼 등판을 향해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서오게나." "안녕하셨습니까?" 이렇게 격식을 따지지 않는 강자의 밑에 있을 때는 편리한 점이 많이 있다. 마교에서는 교주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할 때 무기를 꼭 풀어놓아야 하지만 이 정도 무공 차이가 나는 경우 그 법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또 상대도 막강 한 자만심으로 그걸 따지지 않기도 했고... 또 원체 예절방면으로는 무지한 인물이기에 다소 격식에 어긋나도 그걸 보아넘겨 주는 것이다. 그것 또한 그 런것에 무지한것도 있지만 그걸 포용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리라. 묵향은 언제나와 같이 묵혼검을 비스듬이 등뒤로 차고 깨끗이 세탁한 흑색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그 흑색옷의 사이로 가슴을 칭칭 감고있는 하얀 붕대 (繃帶)가 드러나 보인다는 점이 평상시와 조금 다른 복장이라고 할까... 묵향 은 여지고 장로를 이끌고 마루로 올라서며 말했다. "반가운 친구가 왔는데, 차를... 아니, 술을 좀 가져와라." 그러자 마화의 눈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가기 시작했다. "몸도 안좋으시면서 무슨 술이에요? 차를 드세요. 수석장로님도 차를 드실거죠?" 살기와도 같은 무형의 압력을 느끼며 여지고 장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식의 수하로부터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본 마교의 고수는 없었다. 여지고 장로는 마화가 수하지만 묵향을 어느정도 깊게 생각하고 있음을 느끼 며 어떤 면에서는 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교란 공포와 광기에 의해 유지되는 단체... 도대체가 수하들로부터 공포를 통한 존경은 받을 수 있을지 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은 받는다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화가 차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묵향이 입을 열었다. "제길... 상처는 거의 다 나았는데 저 야단이야." "그래도 노부는 부교주님이 부럽소이다." 그러자 묵향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말로만... 침대에서 눈을 뜬 다음 저녀석의 잔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줄 아 나? 거기에다 중간중간에 대답을 해야하는 질문을 던져대니 청각을 마비시킬 수도 없고... 으윽... 호위를 좀 바꿔달라고 관지한테 부탁하던지 해야지 원... 요즘은 저놈의 잔소리 때문에 죽을 지경이야. 마누라도 아닌게 잔소리 만 늘어가지고... 요즘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구. 거기다 본좌가 더 신경질 나는건 마화의 행태를 좌우의 모든 놈들이 부추기고 있다는 거야. 직접 말하 면 될걸 가지고 왜 마화가 잔소리를 하도록 옆에서 충동질하냐 이말이지... 제길..." 여지고 장로는 묵향의 푸념을 들으며 살며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과 연 묵향의 성질머리를 알고있는 인물들 중에 그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강 심장인 사람이 본교에 존재할까? 이번 암습에 대해 직접 말은 못하겠고 속에 서 열불이 끓기는 끓으니 대신 마화를 충동질 하며 응원한 것이겠지. 그런면 에서 성질이 괄괄하고 화통한 여걸인 마화는 묵향과 합류한 마인들에게 아주 유명했고 꽤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인이었다. 원래가 이런 잔소리는 부인이 해야만 하지만 부인이 없으니 어쩔수가 없는 노릇이 아닌가? 거기에 묵향은 마화의 말은 웬만하면 참고 견뎌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침공 작전은 어찌 되고 있소?" "지금까지 4개의 문파를 비밀리에 복속시겼습니다. 오랜만의 일거리라서 그 런지 한중평이 완전히 신이난 모양이더군요. 또 그에게 잘 어울리는 일거리기 도 했구요." "관지는?" "그런대로 잘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잘 되었군. 흑풍대는 기병대니까 평지에서는 대단히 큰 전력이 될 수 있소. 거기에 집단전을 교육받은 것은 흑풍대 뿐이잖소? 총단을 공격하는데 있어 큰 힘이 되어줄 것이오." 묵향은 품속에 손을 넣어 편지를 꺼내며 말했다. "이 편지를 한번 읽어보시겠소?" "......." "그대가 읽어보기에는 어떻소?" "군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물론 이간책이라고 하지. 장인걸이 잔머리를 굴려 어부지리를 취할 생각이 확실해." "그럼 저에게 원하시는 답은 뭡니까? 저는 이런쪽으로는 잘 모릅니다. 그냥 단순한 무인일 뿐..." 이때 마화가 돌아왔고 그녀를 뒤따라 시비가 두잔의 차를 공손히 놓고 돌아 갔다. 여지고 수석장로는 찻잔의 뚜껑을 열고는 향기를 감상(感想)하면서 한 잔 음미해 본 후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용정차로군요. 대단히 잘 끓인... 부교주님의 취향이 날로..." "무슨 소리야? 용정차는 또 뭐고... 차는 그냥 대강 마시면 되지 뭔 잔소리 가 그렇게 많아. 자네도 마화를 닮아가나? 원..." 묵향은 퉁명스레 한소리 한 후 차를 한모금 입속으로 밀어넣은 후 그대로 꿀 꺼덕 삼켜버렸다. 이런 무식한 인물이 마시기에는 너무 좋은 차였던 것이다. 그런 그를 마화가 뒤쪽에서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또한 좀 무식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대로 내려오는 장군가의 여식이다. 오랜 군무덕분 에 그놈의 예절이 많이 희석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본은 남아있는 것이다. 쌍심지를 돋우고 있는 마화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여지고 장로는 마화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나? 부교주님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러네." "알겠습니다." 마화가 자리를 뜨고 나자 여지고 장로는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흐흐흐... 차 말고... 혹시 이거 드시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와 동시에 여지고 장로의 품속에서 나오는 술은 독하디 독하기로 소문난 백일취(百日醉). 원래 술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그 은은한 국화향이 감도는 독 한 술은 한약재까지 일부 들어가 있어 마시고 나면 뱃속까지 찌르르르 울리는 게 특징이다. 여지고 장로가 술병을 꺼내자마자 묵향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곧장 찻잔속의 용정차를 화원에다가 부어버린 다음 곧바로 잔을 들이밀었다. 음흉한 미소와 함께... "흐흐흐... 역시 수석장로는 본좌의 마음을 잘 아시는구려." "뭘요. 저는 심부름꾼 정도밖에 안됩니다. 원래는 군사가 준비한 거니까요. 군사가 좋아하실거라면서 드리라고 하던데요?" "역시... 노부가 수하들은 아주 제대로 얻었지. 크... 저엉말 좋은 술이군." "그런데 부교주님." "왜그러나?" "앞으로는 좀 몸을 생각해 주십시오. 온몸에 춘약과 산공분, 거기에 몽혼약 까지 중독이 된 상태에서 적을 상대하려 드시다니... 부교주님께 의지하고 있 는 저희들을 생각하신다면 적어도 그런 행동은 하시는게 아니죠." "자네같으면 조금 힘들겠지만 이길 수 있을거 같은데 포기하겠나?" "......." "포기 하겠냐구." "속하야 포기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저한테야 딸린 식구가 없습니다. 부교주 님께는 수천명이 널려있는 상태구요." "알겠네. 앞으로는 주의하지. 하지만... 그때 일을 후회하는 건 절대 아니야. 아주 재미난 대결이었다구." "그 자객으로부터 알아내신거는? 듣기로는 생포하셨다고..." "아... 그녀석 지금 지하감옥에 떡이되어 뻗어있지. 좀 살살다루라고 했는데 수하놈들이 영 말을 안듣는단 말이야. 그건 그렇고 한잔 더 줘." "예. 너무 급하게 드시지 마십시오." * * *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대주(隊主)의 손에 작은 전서구에 다는 종이쪽지가 들 려있는 것을 보고 장지가 물었다. "이번 임무는 뭡니까?" "뭐 별 임무는 아닌 것 같군. 패진문(覇晉門)에서 요즘 용병을 모으고 있는 데 그들을 도와주라는 지시야." "패진문이라고요? 패진문은 별로 대단한 문파도 아닌데 거기를 왜?" "우리가 의문을 제기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내 생 각에는 패진문하고 싸우고 있는 천마문(天魔門)을 약화시키는 게 목적인 모양 이야." "천마문이라면 8천의 문도를 거느리는 대 문파인데 그들과 싸운다구요?" "과거에는 강대했지만 오래전에 있었던 권력다툼으로 쓸만한 상층부 인물들 이 대거 물갈이 되어버려 요즘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은 모양이야. 하지만 이 번에 새로 권력을 확실히 잡은 호진이란 인물이 대단히 뛰어난 인물인 모양이 더군. 그자가 천마문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날뛰는 모양인데 우리는 거기 가서 천마문의 전력을 약화시키기만 하면 되는거야." "흐음... 떡잎부터 자르자는 말이군요." "그런 셈이지." "그럼 수하들에게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알겠네. 내일 출발할테니까 천천히 차근차근 준비하라 이르게." "예." 패력검(覇力劍) 막야(幕惹)는 맹호대(猛虎隊)라 불리는 강력한 용병대의 대 장이다. 사실 그도 과거에는 공동문의 뛰어난 후기지수로서 존경과 찬탄을 받 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용병이라는 이런 말도 안되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배경은 따로 있다. 무림에는 수많은 용병대가 있었고 용병들도 있었다. 용병(傭兵)이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일해주고 돈받아먹고 사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 기에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용병의 경우 인간시장 같은 곳을 통해 자신을 원하 는 일자리를 찾거나 어딘가에서 난리가 났다면 그쪽으로 가서 자신을 써주지 않을건지 타진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용병대는 다르다. 우두머리를 중심으 로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씩 뭉쳐다니며 일거리를 찾아 다니는 것이다. 물론 자신들을 다 고용하지 못할때는 일정 수만 고용되기도 한다. 이때 잇점 은 만약 유명한 용병대의 경우 꽤나 높은 값을 받을 수 있고 또 용병대의 대 장들의 경우 대단히 뛰어난 무공을 지닌 인물들이 많았기에 그 수하들이 살아 남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맹호대는 꽤나 이름난 실력있는 용병대였다. 그 수는 2 백여명으로 이루어 졌지만 개개인의 실력은 대단했고 또 별볼일 없는 무공을 지닌 자를 받아주지도 않는 뼈대 있는 용병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용병대 가 공동문이 만든 것이란 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이들은 과거에는 공 동문을 위협하는 다른 문파와 또 다른 문파가 대결을 벌였을 때 공동문에서 상대를 겉으로 도울수는 없는 노릇이니 파견하는 일종의 지원병 같은 역할을 해냈었다. 하지만 지금 공동문에서 무림맹을 차지한 이래 그때부터는 공동문 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 무림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어쨋든 천마문 같 은 사파계열의 문파가 팽창하는 것은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각 무림의 거대 명가들의 경우 이런 이름난 용병대를 소유하고 있거나 끈이 닿아 있었다. 과거 사천성에서 일어났던 문파중에 태원문(太元門)이 있었다. 태원문은 원래가 뛰어난 상인으로서 넓은 상권을 차지하고 있던 혁련의 아들 혁소가 세운 문파였다. 혁소는 소림외가의 인물로 소림에서 무공을 익힌 후 소림을 등에 엎고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빠른 세력팽창에 놀란 몇몇 문파에서 그들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사령방이란 작은 문파를 전폭적으 로 지원해주겠다며 꼬셔 정면대결을 붙였다. 이때 사령방은 약체인 전력을 보 충하기 위해 용병을 대대적으로 사용했고 그때 그 문파들의 비밀 용병대들이 가담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때의 대규모 결전을 끝으로 태원문은 엄 청난 피해를 입었고 보유하고 있던 고수들의 8할을 잃은 후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용병대 중에서 크지는 않지만 강력한 고수들을 다수 보유한 곳들은 아마도 어떤 문파와 줄이 닿아 있을것이라는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어 떤 용병대가 어떤 문파와 관계있는 것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또 다수의 문파 가 이 방법을 쓸 정도로 용병대의 활용은 대단한 성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2주일 후 맹호대는 패진문에 도착했다. 맹호대의 대원들이 짐을 풀 고 숙소를 배정받고 있는 동안 패력검 막야는 패진문의 문주와 함께 제반사항 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어서오게. 뭐 필요한게 있다면 말해주게나." "별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께서 문주를 도와드리라고 특별히 당부를 하 셔서 도와드리는 것이지요. 저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그분께서 해결해 주시니 문주께서는 그런 작은 일에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총관에게 지시해서 신선한 고기와 술을 좀 보내주겠네. 오느라 수고했을테니 그걸로 피로나 좀 푸시게나." "감사합니다." "이리 앉게." "예." "전황은 어떻습니까?" "어떻고 말고가 있겠나? 원체 천마문이 강대한 문파다 보니 어려움이 많을 뿐이지. 며칠 후에는 대영산 부근에 천마문이 구축해놓은 분타를 공격할 예정 이지. 그때 좀 도와주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분타의 전력은 어느정도인가요?" "1500여명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걸로 알고있네. 그들도 반수 정도는용병이야." "이쪽은?" "그대들 외에 파황대(破荒隊)와 본문의 현무대를 보낼 생각이네. 나머지 상 세한 작전지시는 갈조에게 듣게나." "알겠습니다." 여기서 현무단(玄武團)은 천마문과의 전쟁이 시작된 후에 급조된 단체로서 패진문의 뛰어난 고수인 갈조(葛鳥)가 그 대장이었다. 현무단은 단장과 부단 장 2명을 제외하고 전원 용병으로 구성된 단체로 파황대나 맹호대같은 용병대 들도 원칙상 현무단에 포함되었고 또 현무단 단장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 다. 그로부터 삼일 후 패진문은 천마문의 분타를 공격하기 위해 무사들을 출동시 켰다. 말은 패진문이 가진 세 개의 단 중 하나인 주작단. 하지만 주작단은 모 두 다 용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 주작단 중에서도 주력은 맹호대와 파황대였다. 파황대도 맹호대와 같이 어떤 문파와 뒷줄을 대고 있었고, 200여 명으로 구성된 용병대였는데 무림맹에서 슬며시 요청한 덕분에 맹호대와 함께 파견된 단체였다. 새벽에 기습으로 시작된 전투는 강력한 고수들을 거느린 맹호대와 파황대가 상대의 후방을 포위, 공격함으로서 대단히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적들 도 그냥 항복한 것이 아니라 죽자고 저항했기에 주작단의 피해 또한 컸다. 그 날 저녘때 즘에서야 상대가 분타를 포기하고 도주하면서 전투가 일단락 되었 고 주작단의 단주는 이번에 얻은 승리에 대단히 만족한 듯 했다. 이 분타를 차지함으로서 분타 부근 30리내의 천마문 세력을 쫓아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 다. 모두들 천마문의 분타를 격멸한 후 희희낙낙하고 있을 때 전령이 도착했다. 그 전령은 특급서신을 지참하고 있었고 그는 곧이어 현무단장 갈조에게 그 서 신을 전달했다. 갈조는 그 서신을 읽고나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 만 휘하의 대장들을 집합시켰다. "무슨 일입니까?" 파황대 대장 공륜의 질문에 갈조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본문으로 모두 다 회군하라는 지시야." 그러자 공륜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이곳은 아주 중요한 위치입니다. 여기를 포기한다면 천마문을 공격하기에 아주 힘들..." "누가 그걸 모르나? 이번 일에 마교가 개입했으니 곧 돌아오라는 문주님의 지시일세." "마교라구요?" "그렇네. 마교에서 문주에게 자신들의 일에 동참하라는 서신을 오늘 아침에 보냈어. 지금 곧 돌아가야 겠네. 무슨짓을 할지 모르는 놈들이니까..." "그럼 거절한 겁니까?" "아닐세. 아직 거절하지는 않았어. 우리들이 모두 돌아간 후 거절할 모양이 야. 그동안 시간을 끌어야 할 것 아닌가?" "이곳은 마교 총단에서 근 1500여 리(455Km)나 떨어져 있는 외지입니다. 그 런데 왜?" "난들 알겠나? 어쨋든 천마문이나 마교 모두 사파니까 천마문에서 마교에 지 원을 요청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천마문은 마교의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왜 겨우 늑대를 물리치는데 호랑이를 불러들여 호위병을 삼겠습니까? 여기 같 은 경우도 천마문이 총력을 다하지 못할 뿐, 그들이 총력을 다한다면 곧이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요." "글세... 이론상으로는 자네의 의견이 맞는데 뭔가 또다른 일이 있을지도 모 르지. 빨리 수하들에게 지시하게. 회군한다고." "알겠습니다." * * * "놈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놈은 뭐라던가?" "패진문 문주의 말로는 그런 사안을 자신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으니 장 로급들과 의논하기 위해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했습니다." "흐흐흐... 그렇게 시간을 달라고 해놓고는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말이군." "예. 아주 치졸한 놈입니다." "좋아. 먼저 지금 돌아오는 그놈들부터 박살낸다. 이쪽에서 힘을 보여주면 그 능구렁이의 생각이 조금 바뀌지 않겠나?" "하지만 놈들을 완전히 전멸시켜 할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비밀이 누설될지 도..."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냐? 단 한놈도 살아서 도망치지 못하게 해야한다." "존명!" 마교도들은 정파의 인물들과 달리 특이한 마기(魔氣)라는걸 풍기기에 매복공 격이 매우 힘들다. 아무리 잘 숨어있어도 그 기운이 풍겨나오는 걸 막기 힘들 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교는 매복보다는 기습을 선호한다. 멀찌감치에 집결 해 있으면서 상대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다고 최고로 빨리 적에게 접근해 가서 박살내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하면 마기를 걱정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마교도들이 멀찌감치에서 감시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현무단이 그들 주위 에 나타났다. 낮의 격전(激戰)으로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긴급 회군지시 때문 에 그날 밤에 출발하여 이동해왔기에 모두들 피로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전 쟁을 마치고 곧바로 그날 저녘에 이동할 것이라고는상대가 생각하지 못할것 이라는 생각에 한 결심이었지만, 오히려 마교가 그걸 알아내버렸기에 자기 무 덤을 판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염왕적자는 거의 천오백명에 육박하는 상대방을 지긋이 바라봤다. 이제 어슴 푸레하게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고 그 여명아래 피곤에 찌든, 밤새 행군해온 목표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 뒤에는 부상자들이 절뚝거리며 따라오고 있 었고, 가장 뒤에는 우마차를 이용해서 중상자들이 실려오고 있었다. 염왕적자의 손짓에 따라 400여명의 흑의인들이 상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 다. 남은 200명은 사방에 퍼져서 도망치는 녀석들을 도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 다. 수하들이 모두 달려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염왕적자도 적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교시절에는 고수들이 직접 하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뛰는 경우는 없 었지만, 지금은 한명이라도 무사가 필요한 때… 자신이 나서서 싸우면 한명이 라도 부상자가 적을수 있기에 그는 요즘 들어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곧이어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요란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는 핏빛 여명 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아침노을이 붉게 물드는 그때 대지또한 피로서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강력한 용병단들의 경우 그들끼리 뭉쳐서 꽤나 강한 저항을 해왔다. 하지만 그들 사이로 백인장급 실력의 뛰어난 마인들이 파고들 면서 칼부림을 일으키자 그들의 진세도 뭉개지기 시작했다. 맹호대주(猛虎隊主) 패력검(覇力劍) 막야(幕惹)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거의 500여명의 흑의괴한들… 그들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받은 파황대는 지금 거의 전멸한 상태였고 파황대를 뭉갠 흑의인들은 이제 맹호대 로 달려들고 있었다. 온 몸에 짙은 마기를 풍기는 인물들… 그들이 어디서 왔 는지는 알아보지 않아도 뻔하다. 저정도 마기를 뿜을 정도로 수련한 인물들은 마교 외에는 키울만한 단체가 없었다. 또 그 마교에서도 저정도 고수들이라면 아마도 윗줄에 놓이는 실력자들일 것이다. 옆에서 부대주(副隊主) 장지가 부하들을 다그치는 모습을 보면서 막야의 머 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의문 뿐이었다. 이런 시골문파들간의 격전에 왜 마교의 정예가 가담했느냐 하는 것, 만약 천마문을 돕기위해 파견한 고수들이라면 너 무 실력이 뛰어났다. 왠만한 고수들 천여명 보내서 지원해줘도 패진문이 이길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사실 처음 벌어진 싸움 자체가 천마문의 멸망이 아닌 세력감소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왜 마교가 이렇듯 천마문을 전폭적으로 지 원하는 것인가? 왜? 막야는 부하들에게 호령하고 있는 장지에게 전음을 날렸다. <아무래도 여기서 살아돌아갈 확률은 없다. 우리는 지금 수하들의 진세속에 있기에 밖에서 이쪽을 보기는 어려울거야. 귀식대법을 사용하게. 자네만이라 도 살아서 돌아가야지. 돌아가면 맹주께 이번 일을 잘 보고해주기 바라네. 알 겠나?> 막야는 장지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잠깐 준 다음 그대로 자신 의 검으로 장지의 몸을 꿰뚫었다. 매우 치명적인 상처처럼 보이게, 아주 상처 가 깊긴 하지만 출혈도 적게 주요 혈도를 비켜서 베는 그의 솜씨는 정말 대단 했다. 장지는 방금 한 대주의 말로 자신을 베는 이유를 알았기에 그대로 귀식 대법을 시전하며 쓰러졌다. "한놈이라도 더 죽여랏!" 막야는 부하들을 이끌고 죽자고 저항했지만 한 흑의인이 단신으로 30여명의 수하들을 베면서 접근해 들어왔고 곧이어 그의 검에 목이 잘리고 말았다. 막 야를 베어버린 상대는 곧장 악귀처럼 사방으로 검을 날려갔다. 피를 흠뻑 덮 어써서 흑의가 이제는 검붉은 색으로 바뀐 이들은 거의 악귀와같이 사람을 죽 이고, 또 죽여나가고 있었다. "부상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마지막 한녀석의 목이 잘려나가는 걸 보고있던 염왕적자의 뒤에서 그의 수하 가 물었다. 염왕적자나 그나 둘다 피로 목욕하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몰라서 묻냐? 이 멍청아." "예? 그럼 죽이라는 말씀?" "부상자들 데려다가 어디다 쓸거냐? 모두 죽여버렷!" "존명!" 피의 축제는 해가 완전히 떠오른 후에는 끝이나버렸고, 천여명이 넘는 시체 가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염왕적자는 이제 검에묻은 피를 시체의 옷깃에 닦으 며 검집에 넣고있는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죽은척 하고있는 놈이 있는지 철저히 확인하라. 한놈도 살아있어서는 안돼!" 염왕적자와 그의 졸개들이 이름하야 확인사살이라는 귀찮은 작업까지 마치고 난 그곳은 이제 시체냄새를 맡은 까마귀들과 까치들이 모여들여 오랜만에 배 터지게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염왕적자가 새들에게 푸짐하게 모이를 나 눠준 그날 저녘에 패진문은 봉문을 선었했고, 천마문주에게 손이 발이되도록 빌고 푸짐한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어버렸다. 모든 사람들은 왜 천마문의 분타를 박살낸 패진문이 오히려 저자세로 나가는 지 궁금해했지만 그건 당사자인 패진문주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 었고 소문만 무성하다가 살살 그 소문마저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 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온 맹호대 부대주 장지의 보고로 무림맹은 그 진실을 어느정도는 알게 되었지만 확실한 정보를 알아내기가 힘들기에 패진문 주위에 첩자들을 배치하여 감시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여기를 뭉개라." 갑작스런 묵향의 말에 수하들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묵향이 묵혼검 을 뽑아 가리킨 지도상의 한 점. 모두들 경악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약간은 정신을 차린 천리독행이 말했다. "저… 거기는 태정문(太政門)입니다. 그들을 치신다면 무림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특히나 태정문주 한과는 청성파의 제자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 심이……." 그말에 묵향이 피식 웃으면서 설무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군사가 설명하게나." "예. 이번에 태정문을 치는 이유는 총단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입니다. 지 금 총단에서 새로이 교주로 등극한 장인걸은 본타와 제휴를 맺기를 소망해 왔 습니다. 그래서 부교주께서는 그들의 청을 수락하셨죠." 그 말에 수하들이 쑤근거리기 시작하자 묵향이 탁자를 가볍게 탁 치면서 말 했다. "할말이 있더라도 다 듣고난 다음에 질문하라." "장인걸의 말은 이렇습니다. 부교주님을 핍박했던 한중길 교주나 무림맹주 옥청학은 자신이 처치했으니 이제 손을 잡고 무림일통을 하는게 어떻느냐구 요. 더 이상 원수진 인물도 없는데 왜 마인들끼리 피를 흘려야 하느냐? 만약 그렇게 우리끼리 싸운다면 혈교와 정파 좋은일만 시키는게 아니냐? 만약 함께 무림일통을 한다면 양자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눠 이 중원을 나눠먹자는게 그 요지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천리독행이 말했다. "부교주께서는 장인걸과 손을 잡으실 생각이십니까?" "아닐쎄. 손을 잡는 척 할뿐이지. 무림맹과 한판 하는 척할거야. 그러기 위 해 선택된 문파가 태정문이지. 우리가 태정문을 박살내고 또 정파와 싸움을 시작하면 이쪽에서도 장인걸에게 할말이 생기지. 우리는 계약대로 했는데 왜 너희들은 가만히 있느냐? 그러면 장인걸도 손을 쓰기 시작할거야. 물론 본교 의 분타들은 모두 내가 흡수했으니만큼 장인걸이 외부에 투입할 세력은 알짜 들이겠지. 그렇게 된다면 총타를 치는게 더욱 쉬워지지 않겠나?" "흐음… 좋은 계책이십니다. 하지만 일단 무림맹과 전쟁이 붙고나면 전력을 빼기도 만만지 않을 것입니다. 마교 단일의 힘으로도 힘든 일인데… 믿지도 못할 두 연합세력이 정파와 싸움을 시작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무리는 있지. 하지만 자네는 한가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군. 그들과 전 쟁이 붙은 후 총단을 치기위해 전력을 뺀다. 어디서 뺀다는 것이지?" "그야 무림맹과의 전쟁터죠." "그 전쟁터는 어딘가?" "그… 그거야 중요한 요충지나… 점령한 문파…" "아니지. 우리는 그곳을 점령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네. 박살낼 뿐이지. 사실 우리가 지킬 곳은 없어. 우리들이 지금 대화하고 있는 이곳도 허울만 좋게 만 들어놓은 미끼일 뿐이고 말이야. 또 우리들 중에서 가족을 가진 자들이 있나? 우리에게는 놈들이 자르고싶어도 자를 뿌리가 없지. 물론 이 상태로 오래갈수 는 없어. 우리의 뒤를 이을 새로운 고수들을 키우지 않고있다는 것은 매우 위 험한 일이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덕분에 생기는 잇점도 있다 이거야. 부평 초처럼 떠돌면서 놈들의 문파를 박살낸다. 물론 그러는 도중에 여기도 공격당 하겠지. 하지만 때가 될 때까지는 이곳을 지킬거야. 그러다가 기회가 왔을 때 본타는 총력을 다 기울여 총단을 박살낸다. 물론 여기는 쑥대밭이 되건 말건 그건 상관없는 일이고… 알겠나?" "예." "천리독행!" "예." "본좌는 그대에게 이번 일을 맡기고자 하는데 그대의 의향은?" 묵향의 질문에 천리독행이 자신감있게 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수하들은 얼마나 끌고갈까요?" "천랑대의 2개 백인대를 주겠다. 그정도면 충분하겠는가?" 천랑대는 과거 10개 백인대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묵향과의 충돌로 4개 백인대 가 소멸한 지금 6개 백인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2개 백인대라면 현 천랑대 전력의 삼분지 일을 준다는 말이었다. "옛!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상대를 괴멸시키지 못해도 상관없지만 우리쪽의 사망자는 단 한명도 없어야 한다. 또 괴멸시킬 수 있다고 해도 괴멸시키지 마라. 왜냐하면 그들이 소문을 퍼뜨려야 하기 때문이야. 알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떠나라." "존명!" 천리독행 철영이 예를 올린 후 나가자 묵향은 수석장로를 호명했다. "여지고 수석장로!" "예." "그대에게도 천랑대 2개 백인대를 줄테니 대맹문(大猛門)을 격파해 주겠소?" "예. 지금 떠날까요?" "그러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여지고 장로가 예를 올린후 곧장 밖으로 나간 후 묵향은 설무지를 불렀다. "군사!" "예." "천랑대의 전 세력이 떠나도 본타의 수비에 문제는 없겠소?" "예. 충분합니다. 아마도 적은 한동안은 본타에서 수작을 부린줄은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애궂은 마교에 대한 감시만 강화되겠지요." "홍진 막주!" "예." "본타의 주력들이 거의 자리를 비우고 있는 만큼 가장 큰 변수라고 할 수 있 는 혈교에 대한 정보수집에 좀 더 힘을 써주시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본좌는 남은 천랑대 2개 백인대를 거느리고 등룡문(登龍門)에 다녀올 테니 그리 알도록. 아마 열흘 정도 걸리지 않을까 생각중이니 나머지 사소한 일은 군사가 알아서 하게." "존명." 그로부터 4일후 묵향은 저 멀리 등룡문이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서있었다. 경 공술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호위무사들을 떨어뜨려 놨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 다. 이번 전투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한 문파를 학살하러 가는 것이었기에 마 교의 물을 먹지 않은 인물들에게서 반발이 나올 것은 뻔하기에 섬서분타에 떼 놓고 온것이다. 묵향이 서있는 산 꼭대기의 저편에서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고 점점 해가 낮아지면서 서편의 붉은 핏빛이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듣던 것 보다는 제법 큰 문파군." 그러자 묵향의 옆에 시립해있던 흑의무사가 답했다. "예. 검을 쓸 수 있는 자가 팔백여명은 되니까요. 하지만 그들 중에는 쓸만한 인물은 극소수입니다. 대부분이 가족이거나 하인 또는 고용인들이지요. 지금 시작할까요? 어두워지기 전에 끝날것입니다." "아니. 밤에 시작하기로 하지. 그래도 기습하러 왔는데 밝을때 쳐들어가서야 되겠나? 밤에 해야지 아녀자들이 숨은걸 우리쪽에서 모른척 하면서 지나쳐 줄 수도 있잖아. 낮에 하면 도망갈 틈이나 있겠나? 모두들 잠시 쉬었다가 밤에 기습하라고 일러라. 대신 살기(殺氣)를 버리고 숨은자들은 그냥 모른척 해주 라고 해." "존명!" 흑의인이 재빨리 신형을 날려 사라진 후에 묵향은 느긋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서편의 지는 해를 바라보며 품속에서 술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사실 자신 이 이런 작은 문파를 부수기 위해 올 필요도 없었고, 그냥 천랑대 1개 백인대 만 보내면 손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온 이유는 오랜만에 바깥구경을 하고싶어서였고, 그 이유에 가장 올바른 답은 마화라는 '잔소리 꾼'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였다. 감히 부하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거침없이 직언(直言)할 수 있는 수하가 있 다는 것이 나쁜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어떤면에서는 좋은 일이었 다. 수하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는 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묵향처럼 높은위치에 그것도 철혈을 사랑하는 마교도들의 우두머리인 경우 수 하들의 불만사항을 듣기는 힘들었다. 묵향의 경우 그 불만사항이 마화나 수석 장로, 군사에 의해 자신에게 잘 전달되고 있었고 그중에 마화의 경우 전달통 로의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군사나 수석장로도 꺼내기 어려운 말 을 마화는 호위이기에 앞서 '안주인' 비슷한 위치에서 떠들어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묵향은 눈을 새파랗게 뜨고는 잔소리를 퍼붓는 마화의 얼굴을 얼핏 떠올리면 서 피식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내 무덤을 내가 파고있는 건지도 모르지. 처음에는 들어줄만 했는데 요즘은 점점 심해지니까 듣고있기 피곤해……." 묵향은 저 밑에 보이는 등룡문 내의 건물들 사이로 뛰어 다니는 아이들과 한 참 일하고있는 남녀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살육하면서까지 복수를 해야만 하는 것 일까? 저렇게 죽은 놈들의 복수는 누가 해주지? 또 오늘은 몇 명이나 죽여야 하나? 그냥 몽땅 다 때려치우고 산에 들어가서 검술이나 더 익힐까? 그리고 혈마 선배도 한번 만나보고싶은데…….' 이리저리 묵향이 생각하고 있을 때 해는 완전히 저버렸고 어둠이 밀려들기 시 작했다. 묵향이 마지막 술을 입속에 털어 넣고 있는데 등룡문쪽에서 요란한 종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시작된 모양이군.' 그와 동시에 묵향의 신형은 등룡문 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횟불들이 밝혀진 가운데 검붉은 피가 뿌려지자 그게 피인지 그냥 검은 물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얼마나 되는지 알수도 없는 흑의인들의 기습에 등룡문의 무 사들은 저항도 거의 못해보고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벌어지는 칼부 림을 보며 여자들은 아이들을 끌고 사방에 숨기 시작했고 개중에는 채 숨지도 못하고 사로잡혀 넓직한 연무장 중간에 끌려나왔다. 또 일부 무사들은 사태가 완전히 글러버린 것을 깨닫고 어두운 저편을 향해 죽자고 도망치는 인물들도 있었다. "이게 다냐?" 묵향이 사로잡혀와 연무장 중간에 앉아있는 100여명의 남녀노소들을 보며 말 하자 그 옆에서 따라오던 흑의인이 재빨리 답했다. "옛. 어떻게 처리할까요?" "흐음… 갈길도바쁘니까 모두 다 죽여버려라." 묵향은 일부러 멀리서도 그 소리가 들리도록 조금 큰 소리로 대답해줬고 흑의 인도 마기를 풀풀 풍기면서 그 명령을 즉시 이행했다. "존명! 모두 참해랏!" 명령이 떨어지자 흑의인들 몇 명이 뛰어들어 무차별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 고 잠시 후에 그곳에는 이미 사람이라고 부르기 힘든 시체들만이 널려있었다. 이때 밤하늘을 헤치고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울려퍼졌고 흑의인들은 당황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때 흑의인 한명이 묵향에게 외쳤다. "급한 일인 듯 합니다. 여기 숨은 자들도 많을텐데 빨리 하명을!" "제길……! 흔적이 남아도 할수없지. 돌아가자. 불을 질러라." "존명!" 그들은 주변에 보이는 횟불들을 방안으로 날리며 밤하늘의 어둠 속으로 사라 져갔다. 방안은 아직 수색을 안했기에, 방안에는 이불을 뒤집어쓴 여자나 아 이들이 숨어있을 것이고 아마도 불은 그들이 다 끌것이 분명했다. 묵향일행은 남은 등룡문의 잔당들을 꼭 죽일 필요는 없었기에 한바탕 연극을 한 후 재빨 리 등룡문에서 빠져나갔다. * * * 세상은 안그래도 진천왕(眞天王)의 반란으로 인한 내전으로 민심이 흉흉한 판 에, 진천왕과 함께 또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 혈교(血敎)가 무림을 놀라게 하 고있었다. 거기에 때맞춰 발견된 구휘대협의 무덤에 얽혀 지금 그 권리를 놓 고 암중다툼이 치열해지고 있는데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무림맹주까지 실종 되다 보니 무덤에 얽힌 갖가지 사건의 중제가 어려워 지금 무덤을 두고 대규 모 혈전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다가 이번에는 마교의 행 위로 짐작되는, 정파에 소속된 문파 세 개가 묵사발이 났으니……. "흉수는 알아냈나요?" 발 뒷편에서 들려오는 고운 목소리에 중년인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게… 흉수가 너무 분명하기에 문제입니다." "흉수가 너무 분명하다? 무슨 말인가요?" "이번에 의문의 혈겁을 당한 세 개 문파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 모두 똑같습니 다. 200명 정도의 흑의괴한들, 이상하리만큼 강한 무공, 혈겁을 당한 문파는 셋 다 정도 계열의 문파, 흑의괴한들은 모두 마기를 풍기를 음산한 분위기의 인물들……. 생존자들의 증언은 세 문파 모두 똑같습니다. 이런 증언이면 의 심할 것도 없이 마교의 소행이지요." "……." "하지만 너무 마교 냄새가 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세곳 다 생존자가 있 다는 것도 문제구요. 마교에서 손을 쓴다면 몽땅 다 죽여버렸을게 뻔한데… 아무리 밤이었다고 하지만 한둘도 아니고 생존자가 너무 많습니다." "생존자의 수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자 거의 다라고 보시면 될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덤 비지 않은자들하고, 미처 숨지 못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살았습니다. 하다못해 실내 수색도 안했다는 것은 좀……." "그러면 누구일 것 같나요?" "속하의 생각으로는 혈교의 소행일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마교와 정파간에 싸 움을 붙이는 거죠. 만약 정마간의 대전쟁이 벌어진다면 정파는 현재 관부에 파견했던 무사들까지 불러들이는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혈교와 혈 교의 지원을 받는 진천왕에게는 더없는 호재로 작용할 것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군요. 혈교쪽에 좀 더 조사를 해봐요. 하지만 의외로 마교일 수도 있으니 마교쪽에 대한 조사도 병행해서 하세요." "존명!" "그건 그렇고 전에 말한 것은 조사가 끝났나요? 섬서분타의 소모품 사용현황 말이에요." "예. 내부로 들어가는 식량 및 의복 등 모든 소모량이 6천여명의 고수가 사용 하기에 적절한 양임이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뭔가요?" "흑풍단에 관계된 소모품의 사용량은 이상합니다." "자세하게 설명해봐요." "무림인이라면 기름이 거의 필요 없죠. 자신의 무기는 언제나 세심하게 손질 해서 깨끗하게 유지하니까요. 하지만 흑풍단이라면 갑옷을 사용할게 분명하고 전에 받은 보고에도 수량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량의 중갑주를 구입해갔 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갑주들에 칠하려면 기름이 꽤 많이 들어갈텐 데, 기름의 소모가 거의 없습니다. 또 말도 거의 구입하지 않았고, 더불어 말 먹이의 반입도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가지는 분명하군요. 흑풍단은 섬서분타에 없어요. 그렇다면 어디 에 있을까요? 그걸 조사해 봐요." "존명!" "그리고… 묵향 부교주와 비밀 면담을 주선해 주세요." "비밀… 면담을 말입니까?" "예. 그가 원하는 장소, 시간에." "그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자의 성격은 뱀과 같이 잔인하고 교활하며 또 성질대로 행동하기에 매우 위험합니다. 그가 문주님의 도움따위 필요없다고 결정한다면 바로 그 순간 문주님의 생명은 보장할 수가……."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서문길제 가주에게도 비밀 면담을 주선하세요. 당 금 무림에서 최강의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가장 큰 문파는 그 두곳입니 다. 그러니 둘중 한곳이라도 우리편으로 만들어 두는게 좋을 것 같아요." "무림맹은 어떻게?" "옥청학 맹주가 사라진 지금 무림맹은 사상누각(沙上樓閣)과 마찬가지… 뚜렷 한 구심점이 나타나지 않는 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 그쪽은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 또 마교는 너무 신뢰성이 떨어지는 단체라서 싫고… 무슨 말인지 알 겠어요?" "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 * * "그녀석을 끌고와." "옛!" 잠시 후 흑의인 몇 명은 거의 만신창이가 된 한 인물을 끌고왔다. 얼마나 고 문을 당했는지 온 몸이 엉망진창이기는 했지만 묵향의 엄명으로 혈도는 다치 지 않았기에 정양만 잘 한다면 무공을 회복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초췌 한 얼굴을 하고있는 남자가 묵향의 앞에 놓이자 묵향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 했다. "자… 자네가 잡혀온지도 꽤 된거같은데 나한테 뭐 할말있나?" 하지만 그 남자는 증오에 불타는 시선을 묵향에게 던지며 짤막하게 답했다. "없다. 죽여라." "그렇게 죽고싶나? 아무리 무인의 삶이 죽음과 가깝다고 해도 일부러 죽으려 고 노력할 필요는 없지. 내가 아직까지 자네를 살려두는 이유는 단 하나. 자 네의 실력이 아깝기 때문이야. 몸에 구멍이 나긴 했지만 꽤나 재미있었지. 나 를 그정도까지 재미있게 한 인물은 요 근래들어 거의 없었거든? 자네는 기회 가 한번 더 온다면 그때도 치밀한 계획을 세워 암습할 수 있나?" "뿌드득! 당연하지. 기회가 한번 더 있다면 그때가 네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그 말에 주위에 서있는 흑의인들이 꿈틀 했지만 묵향의 제지로 움직이지는 못 했다. "좋아. 기회를 한번 더 주겠다. 대신 조건이 몇가지 있다. 첫째, 나를 죽이기 전까지는 자네의 배후와 연락하는 걸 금한다. 둘째, 나를 죽이지 못하는 한은 내가 시키는 일을 몇가지는 해줘야 하겠지? 밥값은 해야 할테니까……. 셋째, 나를 암살하는데 무슨 짓을 다 해도 상관없지만 내 수하들을 죽이는 것은 안 된다. 동의하나?" 잠시 생각하던 그 남자는 피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의 목숨을 담보로 나를 포섭하려는 거요?" "그렇지. 나는 강자를 좋아한다네. 뒤에서 못된 짓이나 꾸미는 놈은 별로 좋 아하지 않지만 무인의 그 단순함을 나는 사랑하지. 나는 일단 조건을 말했어. 자네는 곰곰히 생각해보고 일주일 후에 답해주기 바라네. 데리고 가라." "존명!" * * * 섬서성 남단 화음현에 위치하고 있는 화산(華山)은 그 뛰어난 절경으로 유명 한 곳이다. 또 화산은 그 수려한 경치를 보고 모여든 도인(道人)들이 창건한 화산파(華山派)가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화산파는 정도의 가장 큰 문파들인 구파일방 5대세가에 들어가지만 도인들의 수련장인 만큼 무림사에 깊게 개입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굵직한 사건들이 터질때마다 솔선수범하여 도왔 기에 소림사 처럼 따돌림을 받고있지는 않았다. 소림의 땡중들이야 살계(殺 戒)를 범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굵직한 사건, 즉 피해가 클만한 사건이 터지면 잘도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어쨋든 저 멀리 그 유명한 화산이 바라다 보이는 경치좋고, 전망좋은 곳에 화 진루(華瑨樓)라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음식점이 있다. 화산에서는 너무 멀 리 떨어져있기에 관광객을 유치하기도 그렇고 또 음식솜씨가 좋은것도 아니었 기에 그렇게 손님이 많은편도 아닌 이 음식점에 색다른 손님들이 모습을 드러 냈다. "자리 있나?"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말을 걸어오는 푸른 옷을 입을 무사의 질문에 점소이 의 눈이 그 무사의 눈과 왼쪽 허리에 꼽혀있는 호화로운 검을 재빨리 훔쳐본 것은 당연했다. 이곳은 화산파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고 또 부 근에는 길상표국(吉祥慓局)이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감히 어중이 떠중이가 돌 아다니며 시비를 걸지는 않는 곳이다. 거기다가 이곳 루주는 길상표국의 국주 와 꽤나 친분이 돈독하기에 왠만한 불량배가 와서 사건을 일으키면 포졸보다 는 표사를 불러들이는 것이 일이 더 빠를뿐더러 조용히 해결되었다. 점소이가 그들의 복장과 무장을 재빨리 훔쳐본 것은 당연했다. 상대의 직위하 든지 금전상태를 짐작해 볼 수 있고, 또 상대의 실력을 낮은 안목이나마 평가 를 해두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썩 고수인 것 처럼 보이 지도 않았지만 옷은 제법 괜찮은 천으로 만든 것이었고, 검집도 썩 괜찮은 걸 로 보아 나중에 돈을 받는데 있어 무리는 없을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점소 이의 눈은 무사들에 대한 관찰보다는 그 무사들과 함께 온 묘령의 아름다운 소저들을 훔쳐보기 위해 재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들은 정말 가만히 있어 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뻤던 것이다. 하지만 점소이는 철저한 직업정신으로 자신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는 소저들로부터 간신히 시선을 거두며 재빨리 말 했다. "이리 오십시오, 나으리들." 일단 점소이는 손님들을 재빨리 조용하면서도 경치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무 림인들의 대부분은 되로 받으면 말로 주려는 성질이 강한 인물들이기에 친절 을 베풀면 운 좋으면 수고료가, 불친절을 베풀면 바로 주먹이 날아온다는 걸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에한번 맞아보고 뼈속까지 찌르르 울리는 그 감명깊은 교훈을 잊지않고 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섯명의 손님들은 점소이가 권한 자리에 모두 앉지 않았다. 점소이가 권한 자리에는 두명의 여자만이 앉았고, 나머지 무사 두명과 시녀인 듯한 여 자 한명은 딴 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그걸 보면 여자들의 신분이 매우 높은것 처럼 생각이 되었기에 점소이는 더욱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했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그 말에 약간 어려보이는 소저가 대답했다. "술과 간단한 안주 몇가지를 가져와요." 상큼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점소이는 재빨리 대답 하고는 주방으로 갔다. 이 이색적인 손님들은 2각(30분)이나 기다려서야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을 만 날 수 있었다. 짙은 눈섭에 강인해 보이는 인상, 하지만 전체적으로 근육이 많이 붙지않은 호리호리한 체형이기에 무술을 익힌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지 만 허리에 검은색의 짧은 검을 비스듬이 차고있는 인물이 네명의 수하들을 거 느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걸어들어와 음식점 안을 슬쩍 둘러보더니 곧장 그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점소이에게 말했다. "야." "예?" "술잔 하나 더 가져와." 네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들어온 것으로 보아 이녀석도 약간은 위험인물이라고 판단한 점소이는 재빨리 잔을 가져다가 건네면서 말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요? 나으리." "술이나 한병 더 가져와." "예." 아무 말 없이 여자들이 마시던 술병을 집어들고는 잔에 가득 채워서 한잔 마 시고는 또다시 술잔에 술을 채우고 있는 걸 보면서, 상대의 무례함에 바짝 약 이오른 약간 젊게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통성명이라도 하는게 예의가 아닌가요?" 그 말에 남자는 여자를 쏘아보며 냉냉하게 말했다. 그 소녀도 질 수 없다는 듯 마주 그 남자를 노려본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때 그의 안광 깊숙이 감추어 져있던 폭발적인 기운이 잠시 드러나자 상대방은 순간적으로 얼어버렸다. "나도 상대가 누군지 알고, 그쪽도 나를 알텐데 궂이 그런게 필요할까?" 그 남자는 소녀가 완전히 쫄아버리자 피식 미소지은 후, 이번에는 그 옆에 앉 아있는 여자를 향해 무심한 듯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본좌를 보자고 한 용건은?" 그 말에 상대는 한숨을 약하게 내쉬면서 말했다. "듣던 것 보다 더 무례하군요. 그래도 약간의 예의는 필요한게 아닐까요?" "그따위것 필요없어. 용건이나 말해. 만나자 마자 검을 뽑지 않은 것으로 나 는 할만큼 예의를 다했으니까……." "당신은 언제나 그런식인가요?" "언제나는 아니지." 그 남자는 두 여인을 노려보듯 쭉 훑어본 다음 조금 어려보이는 여인이 공포 를 필사적으로 참고있는 걸 보고는 무심한 듯 말했다. "저 아이는 이 자리에 끼일 자격이 없으니 저쪽에 가서 앉으라고 해." 그러자 그 여인은 이제서야 동행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여태까지 그녀의 모 든 신경은 그 남자에게 가있었기에 그 여자에게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 것 이다. 그녀는 따뜻한 눈길로 소녀를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저기 가있거라." 그러자 소녀는 불안한 시선을 남자쪽에 한번 던지더니 마지못한 듯 일어섰지 만 무사들이 앉아있는 탁자로 걸어가는 그녀의 움직임이 꽤나 경쾌한 것으로 보아 여기 앉아있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저 아이의 인상은 어떤가요?" "글세……." "묵향 부교주도 이제 결혼을 생각해 보시는게 어때요? 어느정도 기반도 잡았 고, 또 무공도 천하제일이 아닌가요?" "훗… 비밀회담이란게 중매를 말하는 거였나? 무영문의 옥화무제(玉花武帝)도 요즘 매우 할 일이 없어진 것 같군." 묵향의 말에 옥화무제의 심기가 잠깐 뒤틀렸다. 왜냐하면 상대는 자신이 옥화 무제의 대리인이 아닌 옥화무제 당사자라는 걸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묵향 의 나이가 많이 봐줘서 70세 정도라면 자신의 나이는 그 두배에 달하는 140여 세에가 아닌가? 대선배의 입장을 봐서 존대어를 쓸만도 하련만 툭툭 반발짓거 리를 던져대고 있으니 슬며시 약이오른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그걸 꾹꾹 눌러 서 참았다. 무림이 아무리 연배가 중요하다 해도 그건 실력이 받쳐질때의 말 이었다. 현경의 고수를 상대로 신경질 내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었다. "뭐… 겸사겸사 해서지요. 저 아이는 당금 무림의 칠룡사봉에 들어가는 매영인 이라는 아이지요. 제 손녀랍니다. 서른 하나면 아직 꽃다운 나이가 아닌가요?" "본좌는 결혼따위 생각해본 일이 없으니 그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 그 외에는 무슨 말은 하고싶소?" "본문과 손을 잡고싶은 마음은 없나요? 무영문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 최고 의 정보단체, 그쪽은 무력은 다섯손까락 안에 들어가겠지만 정보력은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구요. 어때요?"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야. 하지만 본좌는 이런 말을 들은적이 있지. 옥화무제는 뱀처럼 지혜롭고 여우처럼 약싹바르다고… 본좌는 지금 혼자서도 해낼 수 있지. 그런데 왜 밖에있던 우환덩어리를 안으로 끌어들여서 더욱 일 을 꼬아놓겠나?" 그러자 졸지에 우환덩어리가 되어버린 인물이 반박했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당금 무림은 매우 얽히고 섥히고 한치앞도 보기 힘든 구조지요. 진천왕의 반란, 혈교의 등장, 마교 교주의 교체, 무림맹주의 실종, 구휘대협 무덤의 발견, 요 근래 일어나고 있는 갑작스런 혈겁. 눈앞에 놓여진 많은 함정들을 피해가려면 우수한 정보력이 있는게 좋지요." "갑작스런 혈겁?" 궁금증을 약간 드러내고 있는 묵향의 질문에 매향옥이 피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산서성과 사천성에 있던 정도계열의 문파 셋이 무너졌죠." 매향옥은 묵향의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태정문(太政門), 대맹문(大猛門), 등룡문(登龍門)이 거의 동시에 무너졌어 요. 흉수는 마교로 짐작되죠. 직접 일을 벌리셨을테니 잘 알고 계실텐데 왜 물으세요?" 순간적으로 묵향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그는 거의 무표정한 표정을 잘 짓기에 그건 거의 표시가 나지도 않았다. 묵향은 자신의 실수를 느끼고는 일부러 살 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본좌는 모르는 일이야. 아마도 장인걸의 장난이겠지." "아니지요. 장인걸은 얼마전에 교주직에 올랐지만 지금 마교의 힘은 매우 약 화된 상태에요. 그런때에 정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정도로 바보가 아니지 요. 혈교도들이 뿜어내는 요기와 마교도가 뿜어내는 마기는 얼핏 비슷하기에 혈교쪽도 이미 조사를 완료했어요. 혈교의 소행도 아니더군요. 그렇다면 범인 은 하나 뿐이죠. 부교주는 지금 짐짓 섬서분타에 모든 세력을 집결해놓은 것 처럼 꾸며놓고는 알맹이 세력들은 모두 다 밖에 슬며시 꺼내놨으니 빈집 털려 봐야 아쉬울 것도 없을테고… 어때요? 본문의 정보력이?" 살포시 미소지으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옥화무제를 마주 바라보며 묵향은 순간적으로 상대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생각을 슬며시 희 석시키며 말했다. "그 정보력이란 게 사람을 이리저리 찔러보고 그 반응을 보고 얻어내는 것이 라면 그쪽의 정보력도 그리 대단한 것 같지는 않군." "상대에 따라 다른거죠. 이쪽의 실력을 잠깐 보여드렸는데… 생각이 있으신가 요? 본문과 손을 잡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그 정보들을 마교와 무림맹에 고액 의 돈을 받고 팔아버릴 거에요. 그렇게 되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실 텐데… 어때요?" "크흐흐흐… 겨우 그따위 협박으로 본좌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아닐테고, 또 다른 비장의 술책이 있소? 그렇지 않다면 그따위 입을 나불거려 자기 무덤 을 깊게깊게 파고있을 정도로 바보로는 보이지 않는데?" 그 말과 동시에 음식점 내의 모든 인물들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신경을 건드리는 음산한 느낌이 묵향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살기(殺氣)라는 걸 알고있는 사람은 긴장한 채 검집에 손을 가져가는 무림인들 뿐이었지만 말 이다. 하지만 그 강맹한 살기를 한몸에 받고있는 여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만약 그걸듯한 패를 꺼내지 못한다면 내일 태 양이 뜨는걸 보는 건 두 번째치고 오늘 태양이 지는걸 볼수도 없을 것이 분명 했다. "호호호… 자신의 마음을 매우 직선적으로 드러내시는군요." 그녀는 다음 말을 어기전성(御氣傳聲)으로 보내왔다. <본문의 정보가 틀리지 않다면 아마도 귀하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정보들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을거에요. 한가지 자그마한 예를 들어드리죠. 지 금 귀하가 꾸미고 있는 일을 거의 대부분 파악하고 있죠. 바로 마교 기습작전 의 전모를 말이에요. 300리 거리로 문파를 비밀리에 잡아먹는다고 고생하셨겠 지만 본문의 이목을 속이기는 어렵죠. 내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총관이 여태껏 섬서분타에 대해 조사한 모든 자료를 무림맹, 마교, 혈교, 황궁에 넘길 거에 요. 호호호… 그렇게 눈을 부라리니 무섭군요. 자… 내가 하고싶은 제안은 이 거에요. 귀하가 마교를 삼키는 걸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겠어요. 지금 전체적인 세력은 마교가 섬서분타보다 더 강하다는 걸 잘 알고계시겠죠? 그러면 승패는 정보력이 아닐까요? 대신 귀하가 이쪽에 해줄일은 그렇게 어려운게 아니에요. 본문이 좀 더 세력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 뿐이니까……. 어때요?> 잠시 생각해보던 묵향이 살기를 거둬들이며 느긋하게 말했다. "본좌가 어떻게 당신들을 믿을 수 있을까?" "저 아이를 인질로 드리죠. 어때요?" "하! 인질이라… 저 아이가 당신의 손녀라는 걸 어떻게 내가 믿을 수 있지? 또 문파간의 격돌에서 인질따위 별로 중요한게 아니라는 건 나도, 그대도모 르는게 아닐텐데? 손녀쯤이야 죽으면 다시 하나 더 낳으면 그만이니까……." "누가 마교도 아니랄까봐 인명을 천시하는 그 습관은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나는 저 아이를 아주 사랑해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거에요." "좋아. 한번 믿어보기로 하지. 하지만 한가지! 본좌가 교주의 자리를 차지했 을 때, 그대가 약속을 잘 이행했다면 본좌는 그리 싼 보상을 주지는 않을거야." 묵향의 말은 약속이 이행되었을 때 신경써줄 정도로 나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 이니 만약 배신한다면 그 후환은 미루어 짐작해 보라는 협박이었다. "명심 하죠. 영인이는 지금 데려가시겠어요?" "흐음… 어떻게 할까?" 묵향이 잠시 궁리하는 사이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섰다. 면사(面紗)로 얼굴을 가린 묘령의 세 여인과 그들의 시녀로 보이는 여인 세명, 그리고 무사 8명이 저마다 각각의 무기를 들고는 음식점 안으로 슬며시 들어선 것이다. 그들이 점소이의 안내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우루루 앉았다. 면사 여인 셋은 그 자리 에 앉았지만 나머지는 모두 딴 자리에 앉았기에 그 주종관계를 간단히 알아볼 수 있었다. 묵향은 그들이 자리에 앉는 걸 보면서 어기전성으로 말했다. <저건 무슨 뜻이지?> <예?> <갑자기 이런 변두리 음식점에 고수라고 부를만한 녀석 셋이 나타난 건 무슨 뜻이냐고 묻는거야.> "호호호… 의심도 많으셔라. 저들하고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또 당 신을 기습하는데 겨우 저따위 애들 가지고 가능했다면 왜 모두들 고심을 했겠 어요? 우연히 음식을 먹자고 들렀겠죠. 이곳이 화산파로 들어가는 통로들 중 하나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겠죠?" "글세… 나는 우연이란걸 여태껏 믿지않고 살아왔으니까 말이야." 말을 하면서 무의식중에 묵혼검의 손잡이를 쓰다듬고 있는걸 보면서 옥화무제 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설마 여기서 저들을 죽이려는 생각은 아니겠죠?" "필요하다면!" 묵향이 한마디 내뱉은 다음 술잔을 들어올려 쭉 마신다음 그 잔을 옆에 놔두 고 차가 들어있던 잔을 들어올려 차를 바닥에다 쫙 뿌려버린 다음 이제 빈잔 이 되어버린 그 찻잔에 술을 따랐다. 만약에 제법 실력있는 무림인이라면 그 런 무식한 방법보다는 내공을 이용해서 찻잔속의 차를 날려버리겠지만 상대는 이상하게도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작은 잔은 감질나서 못마시겠군. 꿀꺽!" 옥화무제는 묵향의 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 었다. "당신의 무공이라면 간단히 찻물을 날려버릴텐데 왜 바닥에 그걸 붓죠?" "본좌는 무공을 쓸데없이 쓰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유가 되었나?" 무림인이란 존재는 항시 생명이 왔다갔다는 삶을 살아가기에 상대의 움직임에 매우 예민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갑자기 바닥에 찻물을 쏟아붓는 걸 모두들 모를 리가 없었다. 혹시 독극물 종류를 바닥에 뿌려뒀다가 슬며서 떠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잔에 술을 따뤄먹는 걸 보고 모두들 다시 저마다 떠들어대기 시작했지만 면사를 한 여인중 하나가 이쪽 탁자쪽을 계속 바라보 고 있다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옥화무제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일행의 눈길을 뒤로 받으며 정중하게 옥화무제에게 포권을 하면서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옥화무제 선배님이 아니신가요?" 그 말에 옥화무제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사람을 잘못봤군요. 저는 그런사람 아니에요." "실례했습니다." 면사여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일행에게 돌아가려다가 그 옆자리에 앉아있는 매 영인을 보게되었다. 반가운 김에 아는척을 하려다가 방금 전 옥화무제가 자신 을 모른척 했다는 것이 떠올랐고 뭔가 사연이 있다고 짐작한 그녀는 슬며시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매영인이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본 후 일어서서 물었다. 매영인은 옆의 시녀하고 몇마디 말을 하느라 할머니와 그녀 사이에 오간 말을 거의 듣지 못했기에 약간의 실수를 하고 말았던것이다. "혹시… 소소(素昭)언니 아니에요?" 소소는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아는체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으…응, 영인이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언니.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응, 친구들하고 화산에 가다가 들렀어. 그런데 너는?" "손님하고 만날 일이 있어서요. 친구들 소개나 시켜줘요." 매영인이 그쪽 탁자로 걸어가서 인사를 나누며 떠들어대는 걸 보면서 옥화무 제가 그보란 듯이 말했다. "봐요, 내가 불러들인게 아니라니까요." "그렇다고 해두기로 하지. 나도 쓸데없는 살생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말이야." 묵향이 갑자기 일어서자 옥화무제가 말했다. "돌아갈건가요?" 그 말에 묵향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약간 언성을 높여서 말했다. 비밀 이야기 도 아닌데 목소리 낮출 필요가 있나? "더이상 할말이 있나?" "저 아이는 언제 데려갈 거죠? 아니면 내가 그리로 보내 줄까요?" 그 말에 묵향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저런 멍청한 애를 데려다가 어디다가 쓰려고? 윗사람의 의도도 제대로 파악 하지 못하는 멍청한……." "그렇게 멍청한 애는 아니에요. 인질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구요." "말을 하다보니 이상하군. 왜 저 아이를 인질로 주지 못해서 안달인 거지?" "서로간의 신뢰를 위해서죠. 나도 인질을 주는 편이 당신이 나를 더 믿어줄거 라고 생각하며 안심하게 되잖아요." "말은 되는 것 같은데… 꼭 찝어내기는 좀 그렇지만 약간 이상하군." "이상할 거 없어요. 지금 데려가요." "싫어. 돌아가자!" 묵향의 수하들이 쭉 일어서는 걸 보면서 옥화무제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을 쟁취해낸 것 같은 승리자의 미소를 말이다. 그런다음 매영인에게 서둘러 말했다. "빨리 돌아가자." "예? 할머니 잠시만요. 아직 얘기가 다 안끝났……." 그 말에 옥화무제는 재빨리 전음으로 말했다. <빨리 돌아가자. 저사람 생각 바뀌기 전에.> 어벙한 표정으로 매영인이 밖으로 끌려나갔다. 옥화무제는 따라나오며 인사를 건네는 후배들을 간단한 손짓으로 답례를 한 후 재빨리 돌아가는데 한 2리는 왔을까? 이미 그들의 앞에는 언제 따라왔는지 묵향이 무심한 표정으로 서있었 다. "무슨 일인가요?" "이봐. 생각이 바뀌었어." 묵향은 상대의 미소와 서둘러 떠나는 모양새를 보고는 이것도 계략인 것으로 판단했다. 천하제일의 정보단체니 자신의 성격은 거의 파악해 놨을테고 권하 면 마다하는 성질을 이용해 감히 인질도 안주고 자신의 신뢰감을 받아내려고 잔머리를 굴리다니……. 거기다가 현경의 고수 앞에서 전음을 쓰면 그걸 못들 을 줄 알았나? 어기전성의 경우 순전히 기로 의사를 통하기에 옅들을 수 없지 만 전음은 음성을 기로 실어나르는 거였기에 충분히 가능했다. "예?" "아무래도 그 아이를 인질로 잡아야겠어." '인질'이란 말이 나오자 매영인의 안색이 파래졌다. 이때 매영인은 할머니가 저쪽에서 이 무례한 인물과 쑥덕거린 결과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올 필요도 없는데도 함께 화산 구경이나 하자고 꼬셔오지 않았던가? 이게 다 인 질로 써먹기 위해서였다니……. 배신감에 파랗게 질리다 못해 눈물까지 찔끔 나왔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반항은 생각도 못하고 애처러운 시선으로 할머 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시선을 옥화무제는 매정하게도 외면해 버렸다. 인질이란 말이 나오자 주위의 호위무사들이 검을 뽑아들었지만 곧 그들의 행 동은 옥화무제에게 제지되었고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그들은 묵향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옥화무제는 매영인의 말고삐를 순순히 묵향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인질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잘 아시겠죠? 그럼 영인이를 부탁해요." 살짝 옆으로 지나가는 옥화무제의 표정이 미소를 짓고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묵향은 또다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계집이라서 표정이 저리 잘 바뀌는 건가? 도대체가 알수가 없군. 옥영인이 탄 말의 고삐를 쥐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수하들을 기다리면서 묵향은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 * * 인질이란건 상대를 제압하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특히나 상대 와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또 그 상대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큰 인물일수록 인질로서의 가치는 상승한다. 하지만 인질을… 그것도 공식적인 인질을 잡을 때는 매우 귀찮은 문제가 많이추가된다. 절대 인질이 죽어서는 안된다는 사 실이다. 만약 갑(甲)이 을(乙)의 자식 병(炳)을 인질로 잡았는데 그 병(炳)이 죽었다면 그게 병이나서 죽었건(자연사), 단식투쟁을 하다가 죽었건(자살), 갑(甲)이 성질나서 죽였건(타살유형 1), 을이 보낸 자객이 죽였건(타살유형 2), 제 3자가 갑과 을이 치고박으라고 자객을 보내 죽였건(타살유형 3)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인질을 보호하지 못한 갑으로서는 입이 열 개가 있 어도 변명할 수 없는 공개적인 개망신이었고, 을로서는 갑을 공격할 최고의 대의명분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인질을 잡았을때는, 그 것도 공식적인 인질을 잡았을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인질을 잡은 게 최악의 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완전히 체념을 했는지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말 위에 앉아있는 소녀를 힐 끗 바라보며 묵향은 인질을 어디에다가 모셔둘까(?) 생각중이었다. 정말이지 공식적인 인질이라면 자신의 딸보다도 소중하게 모셔야만 했다. 정기적으로 의생을 불러 건강관리도 시켜줘야 하고, 운동부족에 안걸리게 정기적으로 운 동도 시켜야 하고……. "이봐." "……." "야! 귀먹었냐?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 할거 아냐?" "저… 말인가요?" "그래. 너 혹시 도망칠 생각이 있냐? 그것부터 확인해 보자구. 솔직하게 말 해. 그래야 나도 뒷처리를 어떻게 할까 궁리해 보지." 그 말에 소녀는 우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론 도망칠 수 없죠. 나는 당신과 할머니 간의 약속의 증표잖아요. 내가 도 망치면 그 약속도 깨진다는거 잘 알아요." "좋아.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소저군. 마화!" "예." "시비(侍婢)도 데려오지 않았으니 분타에 돌아갈때까지는 너가 책임져라." "예. 그런데… 영인 소저의 무장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놔둬. 자신을 지킬 무기가 하나쯤은 있는것도 좋겠지." "예." 묵향일행이 중촌(中村)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여관에 자리를 잡았 다. 방 둘, 하나는 매영인과 마화, 나머지 하나에는 모두가 다 들어가는 배치 였다. 모두들 식사를 마치고는 한방에 쉬고있을 때 매영인은 자신도 모르게 이들의 성격이나 상하관계, 또 출신내력 등을 따져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수 하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묵향이란 인물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천하의 대마두로서 그 마교라는 속성에 따라 수하들을 공포로서 억누르고 있는 살인 귀여야 했다. 하지만 그때 백씨세가에서 봤을때도 그리 살인귀로 보이지는 않았었지만, 공 포적인 위압감과 매우 어울리기 힘든 강한 위화감(違和感)이 느껴졌었다. 하 지만 오늘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농담도 조금씩 하면서 수하들과 술잔을 나 누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수도 없었는데……. "그때 대장님은 정말 대단했었다구요." 묵향이 얼떨떨 해서 대답했다. 기억도 없는데 궁지렁거리니 별 수 있나. 하지 만 그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기에 이런 자리를 즐겼다. "내가 뭘?" "하부르하고 참 잘 어울리셨었는데……. 몽고 애긴 했지만 참 예뻤죠." 그 말에 임충이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까 만나고 싶군. 몽고원정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심했어. 그렇게 지독하게 학살을 해댄건 몽고원정이 처음이었으니까……." 임충의 말에 차임이 찬성했다. "맞아. 나도 그때 흑풍단에 들어간걸 후회했지. 하지만 덕분에 대장을 만났잖아." "하지만 흑풍단 해체때 너무 많은 좋은 사람들이 죽었어." 정상이 말하자 그 뒷말을 이은 마화. "흥! 하지만 그… 공지 녀석은 잘죽었어. 그런 놈은 벌써 그렇게 죽어야 마땅 했다구." "공지 대장 대단했지. 아무리 계집에 굶주렸다지만 몽고계집들을, 큭큭……." "대장은 무슨 얼어죽을… 아무나 보면 덮치는 그런 놈은 대장소리 들을 자격 도 없어. 변태같은 자식!" "그래도 그사람 무술은 대단했잖아. 특히 참마도(斬馬刀) 쓰는 솜씨가 일품이 었지." 술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어보고야 매영인은 그들이 역모에 걸려 풍지박살 이 난 찬황흑풍단 소속의 무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얼핏 할머니에게 듣 기로 묵향은 기억을 상실했을 때 흑풍단에서 일했다고 했으니 그건 당연한 건 지도……. 인질로 잡힌 오후부터 계속된 정신적인 긴장으로 인해 매영인은 매우 피곤했 지만 술자리는 끝이 날줄을 몰랐다. 약간의 풍이 가미된 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저 넷은 몽고병쯤은 파리잡듯 때려잡는 괴물같은 고수였고, 묵향은 몽고 병 만명쯤은 개미를 짓밟듯 순식간에 없애버릴 수 있는 진짜 괴물이었다. 하 지만 어느덧 잡다한 얘기가 화기애애하게 오가는 그 소음이 오히려 매영인의 긴장을 풀면서 자장가가 되어 약간씩 끄덕끄덕 졸 무렵 갑자기 터져나온 여자 의 음성으로 매영인의 잠은 달아나 버렸다. "얏! 닥치고 옆방으로 안갈래?" "그래도……." "저 아이 피곤해서 조는거 안보여? 이 멍청아. 대장도 빨리 가요. 상을 뒤집 어 엎어버리기 전에." "제길 알았다구." 묵향은 수긍하고 옆방으로 건너갔지만 임충은 그냥은 절대로 못간다는 듯 한 마디 던졌다. "너… 그 성깔 못고치면 아무도 안데려간다." 퍽! "아구구… 몽고들판의 전우 엉덩이를 차다니. 너는 여자도 아냐." "죽어랏!" "히익!" 마화가 성질나서 달려들자 임충은 재빨리 술병을 들고 옆방으로 도망쳤다. 남 자들을 모두 쫓아내버린 다음에 마화는 침상으로 다가온 다음 부드럽게 말했 다. "피곤하지. 편히 쉬어." 마화는 매영인을 이끌어 침상에 눕혀주고 이불을 끌어올려주며 말했다. "피곤했으면 빨리 말을 하지. 술자리는 옆방에서 벌여도 되는데……." "괜찮아요. 오히려 술자리를 보고 안심이 되던데요. 그런데 어떻게 저런 무서 운 사람을 그렇게 대할 수가 있죠?" 그 말에 마화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답했다. "이래 뵈도 내가 좀 둔하거든. 처음 만났을 때 대장은 저렇지 않았어. 정말 누구나 한눈에 반할정도로 멋있는 무인이었지." 마화는 눈빛이 더욱 따뜻해지며 말을 이었다. "고강한 무공을 지녔지만, 약자를 사랑하고 보호할 줄 아는 진짜 사나이였다 구. 우리 다섯은 그때 잘 어울려 다니며 술도 많이 마셨지. 그런데 다음에 대 장을 만났을때는 사람이 많이 바뀌어 있었지만 나는 멍청하게도 예전에 했던 대로 그를 대했어. 하지만 그가 별로 싫어하지는 않더라구. 그래서 그냥 그렇 게 지내고있는거야. 사실 그렇잖아? 계급이 위로 올라갈수록 힘과 권력은 강 해지겠지만 외로운… 읍!" 마화는 그대로 픽 쓰러져버렸다. 매영인이 놀라서 쓰러지는 그녀를 잡았다. 매영인 또한 무공이 약하지 않았기에 간단하게 일이 어떻게 된건지 알 수 있 었다. 마화는 혈도가 제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때 방안에 슬며시 사람이 나 타났다. 낮에 봤었던 그 면사여인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니?" "소소 언니?" "응. 그런데 선배님은 어디 가시고?" "그런데 언니는 어떻게 여기에…?" "선배님의 행동이나 이들의 행동이 이상해서 일행과 헤어져 뒤따라 온거야. 어떻게 된 일이니?" "저… 말할 수 없어요. 그냥 빨리 여기서 나가요. 안그러면 큰일나요." "어떻게 된 일이냐? 나는 도저히 알 수 없구나. 선배님이 계셨으니 납치된 것 은 아닐테고, 설마… 인질?" 그 말에 매영인이 슬픈듯한 안색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천하의 무영문이 손녀까지 줘가면서 손잡고 싶은 대상이 있을 리가?" "언니, 제발 빨리 돌아가요. 그가 눈치채면 언니도 봉변을 당한다구요. 그리 고 오늘 있었던 일은 제발 비밀로……." 매영인이 말은 끊은 이유는 소소라고 불린 면사여인이 갑자기 픽 쓰러졌기 때 문이었다. "언니!" 잠시 시간이 지나자 문을 열고 묵향이 들어왔다. 그는 쓰러져있는 면사여인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생쥐가 한 마리 있었군. 낮에 너가 만났던 사람이지?" 매영인은 그 섬뜩한 눈초리에 정직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본 후 묵향이 천천히 검을 뽑는걸 보고는 매영인이 너무 놀란 나머지 크게 소 리치지도 못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무슨짓을 하려는 거죠?" "보면 몰라. 본좌도 무영문과 본타의 합작이 외부에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 다는 말이지. 그게 알려지면 무영문이 본타를 돕기는 매우 힘들어질 것은 뻔 하니까 말이야." 그 말에 매영인이 쓰러진 면사여인과 묵향 사이를 몸으로 막으면서 외쳤다. "안돼요. 언니를 죽이면 안돼요. 풀어주는게 어려우면 함께 데려가요. 나도 말동무가 필요하다구요. 제발……." 잠시 생각해보던 묵향이 싸늘하게 말했다. "저런 계집 도망치는 것 까지 감시할 정도로 나는 한가하지 못해. 비켯!" 묵향에게서 풍겨나오는 상당히 공포스러운 기운을 느꼈지만 매영인은 필사적 으로 떨리는 몸을 참고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식당에서 잠시 봤던 그 공포스 런 기운이 이제 묵향의 온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니 감히 무력을 동원해 상대 를 막아볼 생각은 물론, 자신이 무공을 익혔다는 것 조차도 망각하고 있었다. "그럴수는 없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제가 도망 못가게 막을게요. 예?" "좋아. 하지만 단 한번이라도 탈출이나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한다면 곧장 죽 여버릴테니까 명심해." "예." 묵향은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밖으로 나가버렸고 어느결에 해혈을시켰는 지 쓰러져있던 마화가 부시시 일어섰다. "으응? 내가… 왜?" 그러다가 마화는 방 가운데쯤에서 쓰러져있는 왠 여인을 끌어안고 흐느끼고 있는 매영인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그 여자는 누구지?" "제가 아는 언니에요. 저를 구해주러 들어왔다가 그만……." 그러자 화들짝 놀란 마화가 상대에게 다가가서 맥을 짚어본 다음 안도하며 말 했다. "뭐야? 나는 죽은줄 알았는데, 살아있잖아. 괜찮아. 그냥 혈도만 제압된 거 야. 대장이 그랬어?" "예." "조금 비켜, 엇차!" 마화는 쓰러진 여인을 안고는 침상에 눕혀주고는 매영인도 끌어다가 그 옆에 눕게 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편히 쉬어. 저 여자덕분에 내 편안한 잠자리는 날아가 버렸군. 옆방에 가서 술이나 마실까……." 그러면서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매영인에게 말했다. "나도 근래에 알았는데 대장은 밖에 나오면 거의 안자거든. 내 말은 도망은 생각도 말라는 거야. 오히려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니까 말이야. 나중에 일 어나면 그녀한테 전해. 아마 모든 일은 1년 안에 끝날거야. 그때까지 얌전히 있으라고 말이야." "저… 그러면 1년이 지나고 나면 동맹은 깨지는 건가요?" 그 말에 마화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안심시켰다. "깨진다고 널 죽이지는 않을거야. 1년 후에는 너가 무영문으로 돌아갈 수 있 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그럼 잘자." 마화는 방을 나와서는 옆방에서 술판을 또다시 벌이고 있는 남자들 사이에 끼 어들었다. "어라? 너 감시당번 아니었냐?" "도망칠 생각도 안하는데 감시가 필요해? 또 도망쳐 봤자지. 그건 그렇고 대 장. 그 여자는 어떻게 할겁니까?" 묵향은 술잔을 비운 다음 마화에게 말을 하면서 임충에게 빈잔을 내밀었고 임 충은 거기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기는? 말동무가 하나 필요하다고 하니까 데리고 가야지. 몇 년 갇 혀 있으려면 친한 말동무가 하나 있는게 좋겠지." "하지만 그러면 납치가 된다구요." "상관없어. 살인보다는 낫겠지. 꿀꺽꿀꺽" 큼지막한 잔으로 마시고있는 묵향을 바라보며 마화는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죽는 것 보다야 살아있는게 나을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면사여인은일찍이 잠에서 깨어났다. 한참 단꿈을 꾸고있는데 매영인이 깨웠기 때문이다. "아응… 조금만 더 자자… 응? 여기는?" "쉿!" "영인이구나. 내가 여기서 지금 뭘?"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나는지 다급하게 물어보는 면사여인에게 조용히 하라는 행동을 취해보이며 매영인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기 시작했다. "조용히좀 해요. 이제 글렀어요, 언니. 언니는 나하고 같이 가야 돼." "어디를?" "마교의 섬서분타요." "마교… 읍……." 놀라서 면사여인의 목소리가 커지자 매영인은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잠시 기척을 살핀 후 다시 속삭이기 시작했다. "쉿! 제가 가려던 곳이 거기니까요. 만약 언니가 같이 간다면 1년쯤 후에는 풀어줄거에요. 그때쯤 되면 잡아둘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그전에 도망 을 치거나 어떤 표식을 하려고 한다면 언니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어요." 그 말에 면사여인은 자신의 공력을 잠시 운기해본 후 자신있게 말했다. "내공도 그대로인데 내가 도망 못칠 줄 아니? 아무리 악양세가 출신이지만 나 도 꽤 무공이 강하다구. 내공만 있다면 도망치는 건 문제도 아니야." 그 말에 매영인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어제 언니의 혈도를 짚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악양소소도 할말이 없어졌다. 혈도가 어떻게 제압당한지도 모르게 그 냥 정신을 잃었으니 그 흉수를 알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글쎄……." "엄청난 고수에요. 당금 무림에서 다섯 손까락 안에 들어가는 세력을 가진 인 물이고, 천하 제일의 고수죠." "흥! 천하제일? 말도 안되는……." 면사여인이 말도 안된다는 듯 말하자 매영인은 황급히 상대의 입을 막으며 속 삭였다. "좀 조용히 해요. 그는 지금 중원에 1명 뿐인 현경의 고수라구요." 매영인에게 입이 막혀 소리는 못냈지만 상대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현 경이라고? "20년 전에 뇌전검황 노선배님을 죽인 사람이라면 이해를 하겠어요? 그가 어 제 말했다구요. 도망치기만 하면 무조건 죽여버리겠다구요. 같이 가서 1년만 있으면 되요. 그러니까 딴생각 하지 말아요." "내가 거짓말 하는거 봤어요? 좀 믿으라니까요." 그러자 그 면사여인은 곰곰히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너 거짓말 많이 했잖아. 동정호에서도 했고… 으음… 또 본가에 들러서도 했 고… 또…." "기억력도 좋아, 하여튼…….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농담이라니까요. 이건 실 제상황이라구요." 여자들이 쏙닥거리는데 문이 활짝 열리더니 마화가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깼으면 준비하고 밖으로 나와. 식사한 다음에 출발해야 하니까." 묵향은 납치한 인물이 눈에 띄지 않게 마차까지 1대 장만해 오라고 임충에게 지시해서 모두들 마차에 타고는 섬서분타를 향해 출발했다. 동맹의 묵계에 의 해 절대적으로 믿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손녀를 살려두고 싶다면 무영문이 여 러 가지 정보전을 대신해서 펼쳐줄 것이었다. 사실 무영문의 최고 수뇌부는 벌써부터 중원지도를 앞에두고 쑥덕공론을 시작 하고 있었다. 화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만들어져 있는 무영문의 비 밀분타에는 상황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벌써부터 수뇌부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옥화무제가 도착함과 동시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꼭 작은 아씨를 그런 무뢰배한테 인질로 맏기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문주님이시라면 충분히 아씨를 안맏기고도……." "호호호… 일부러 준거에요." "예? 일부러 라니요?" "영인이도 그리 멍청한 아이가 아니니 인질로 받아들여서 애지중지 보살피다 보면 그 아이의 장점들을 볼 수 있을 것이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 히 정이 싹트게 될테고… 그래서 만약 그게 결혼으로만 이어진다면 본문은 다 섯손까락 안에 들어가는 무력을 지닌 단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지요. 사실 그 것 때문에 그 설무지라는 구렁이가 혼사문제를 가로막은 거겠지만……. 혼사 를 거절했으니 이런식으로라도 밀어붙어야죠." "오오… 그것도 대단히 좋은 계책입니다. 당연히 서열상 사위가 장모의 말을 어느정도는 들을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또 두 문파가 혈연으로 맺어진다면 그만큼 좋은일도 없구요. 그런데 서문세가에 가신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쪽도 제안에 응했어요. 이제 말들은 어느정도 갖춰진 셈이니 그들을 잘 다 루기만 한다면 본문의 판도는 몇 곱절이 늘어나게 될 거에요. 문제는 장인걸 의 처리인데… 장인걸이 별로 반항도 못하고 묵향의 손에 떨어진다면 묵향을 저지할 단체는 하나도 없게 된다는 게 문제에요. 장인걸을 거의 무림공적(武 林共敵)으로 만들어 그 세력을 소모시키면서, 묵향 또한 정파에게 어느정도 전 력이 손실되도록 힘써야 해요. 그런 다음 그 둘을 붙여 또다시 대판 싸운다면 묵향이 나중에 교주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정도 의 세력으로 축소되겠죠." "지당하신 생각이십니다." "그 정파의 선봉은 서문세가를 시켜야 해요. 서문세가는 지금 욱일승천(旭日 昇天)의 기세를 타고 있어요. 뛰어난 가주와 그 후계자를 가진 강대한 문파 죠. 그들과 마교가 마주친다면 서문세가 또한 어느정도 힘을 상실하게 될거에 요. 지금 때는 난세에요. 이곳 저곳을 들쑤시고 이간질을 해 최소한 50년 이상 은 그 누구도 무림통일을 꿈도 못꾸게 해야 합니다." "존명!" "정파의 세 개 문파를 박살낸 것은 마교에서 행한 짓으로 확정지어 선전하세요." "존명!" "섬서분타에서도 별 신경쓰지 않고 전멸시킨 용병대들 중에 무림맹과 연줄이 닿아있는 맹호대에 생존자가 있으니 이 또한 하늘이 우리를 돕는 거에요. 비 밀리에 무림맹에 섬서분타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흘리세요. 섬서분타와 무림 맹이 충돌을 일으키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섬서분타가 마교 를 차지할 때 쯤에는 무림맹이 섬서분타를 향해 전면공세를 할 수 있도록 공 작을 하세요. 그래야만 섬서분타의 세력이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막을 수가 있 어요. 그의 세력이 너무 커지면 그 누구도 그를 제어할 수 없을 겁니다." "존명!" 이때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한 중년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문주님. 수도에서 온 전갈에 의하면 황제가 죽었다는……." 그 말에 옥화무제는 놀랍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말인가요?" "모든 정보를 종합 분석한 결과 사실인 것 같습니다. 사실 요 근래 2년 넘게 병치레를 하고 있었고 거의 40여년을 집권하셨으니 죽을때도 되었죠.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황제의 붕어(崩御) 사실이 지금 비밀로 된 이유중의 하나가 진천왕과의 내전에도 있지만 후사문제 때문이죠. 황제는 후계자로 이 제 13살인 오황야(五皇也) 지(智)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위로 전 황후의 아들들이 4명이나 있으니 아마 그들을 모두 처치한 후에 붕어 사실을 발표할 모양입니다. 지금 전선에 나가있는 2명의 황자들을 불러들였고 아직 미확인된 정보지만 도성내에 남아있던 삼황야(三皇也)와 사황야(四皇也)는 벌써죽임을 ……" "놀라운 정보군요." "예. 그 다음 대국(大局)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건지?" "만약 황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면 그들이 승리할 확률은 어느정도 되나 요? 오히려 거기서 분란이 벌어진다면 진천왕이 승리할 확률이 더 올라가는게 아닐까요?" "예. 아직 정벌에 나간 군대가 회군을 하지 못했으니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진천왕과의 전선에서 군사를 뺄테죠. 그렇다면 매우 진천왕에게 유리하게 돌 아갈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방관하게 된다면 근래에 황후로 책봉된 엄귀비나 간신 엄승의 세상이 될것입니다. 과연 그들이 잘 해나갈지 그것도 의문이죠." "원정군은 언제 돌아오나요? 지금 거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모양이니까 최소한 2개월 정도 걸릴것으로 사료됩니다." "2개월이라……. 너무나 긴 시간이군요." "예. 사천성 남쪽에서 시작된 전쟁이 지금은 사천성 북쪽까지 밀렸으니 잘못 하면 천도라도 해야할 지경이죠. 하기야 각 성(省)에는 지금 지원병을 모집한 다고 난리고, 향방군까지 대량으로 동원되는 실정이니 이런식으로 간다면 가 을의 추수가 문제가 되겠죠." "그건 그렇군요. 하지만 어쨋든 진천왕이 승리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문제 는 진천왕이 아니라 그를 지원중인 혈교에요. 진천왕이 황제가 된다면 당연히 무림은 혈교가 장악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이 사실을 무림 맹에 알리고 최대한 정파가 진천왕과의 전쟁에 지원을 해줄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가야만 합니다." "존명!" "그리고… 총관!" "예." "그대가 생각하기에는 일황야 정(晶))과 이황야 진(璡) 중에서 누가 낫다고 생각하나요?" "그야 당연히 이황야가 낫죠. 이황야는 멍청한 편은 아니지만 주색(酒色)을 매우 좋아합니다. 또 성격도 과격한 편이구요. 일국의 황제감은 아니죠. 그에 비하면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의 일황야가 황제 감이기는 하지만 그가 황제가 된다면 세상이 너무 안정되어버려 본문이 돈벌이하기는 별로 좋지 못합니다." "호호홋… 좋아요. 그럼 이황야를 빼돌리세요. 일황야는 엄승의 손아귀에 들 어가서 죽도록 놔두세요. 괜히 일황야가 살아있다면 황위쟁탈전밖에 안벌어지 니까 엄승이 죽이게 하는 겁니다. 그런 후 이황야는 회군해 오는 정벌군 사령 관 진길영 원수에게 인계하세요. 그러면 정예군을 가진 이황야는 곧이어 진천 왕을 토벌할 수 있을테고 또 우리에게 신세를 진 이황야는 본문의 성장에 많 은 도움을 줄테죠." "존명!" * * *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두 여자들은 묵향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별로 대화하 는 걸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자는지, 깨어있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는 팔짱을 끼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숨막히는 것 같은 이 부자연 스런 분위기 때문에 두 여자들은 처음에는 닥치고 있었지만 매영인이 나중에 더 이상 참지못하고 소소에게 소근거렸고 소소가 맞장구치며 소근거렸지만 묵 향이 딱히 반응을 보인건 아니었기에 두 여인이 소근거린는 가운데 여행은 종 착역에 다다랐다. 매영인과 소소가 섬서분타에 도착해본 다음 느낀 것은 의외로 실력있는 고수 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딱히 마교도 같지도 않 았다. 그냥 불량배들 잡아다가 훈련시켜놓은 정도? 그정도로 그들에게는 마교 로서의 기본적인 향기가 없었던 것이다. 묵향 일행이 들어서는 것을 보며, 수문(守門) 무사들은 말위에 타고있는 네명 을 보고 곧장 그 마차에 타고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 그들은 재빨리 문 을 연 다음 마차가 지나갈때까지 인사를 했다. 그녀들이 마차의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봐도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 하인들과 무사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왠만한 문파에서 보는 것과 같은, 여태껏 그녀들이 상상해오던 마교적 인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마교라고 해서 좀더 살벌한 뭔가를 상상해왔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차는 계속 달려들어가 두 번째 문에 도착했고 그 문을 지키는 무사들은 그 래도 좀 실력이 나아보였다. 움직임이 꽤 절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을 통과하면서 그녀들은 뭔가 진법이 주위에 쳐져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확 실한 것은 알 수 없었다. 뭔가 약간의 반감(反感)이 느껴진다고 할까? 미세한 살기나 예기(銳氣) 조차 없는걸로 보아 살상을 위한 진법은 아니었지만 어쨋 든 진이 쳐져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세 번째 문에 다다르면서 그녀들은 이곳이 마교라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 었다. 세 번째 문을 지키는 무사는 정말이지 몸에서 풀풀 마기를 풍기고 있었 으니까 말이다. 묵향 일행이 통과하자 세 번째 문은 곧장 닫혔고 그녀들은 묵 향을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주위를 돌아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모두 들 대단한 고수들이었다. "여기가 섬서분타인가요?" 하지만 매영인의 물음에 묵향은 대답하지 않고 마화를 불렀다. "마화." "예?" "이 아이들을 숙소에 안내해라." 묵향은 지시를 끝낸 후 천천히 萬惡殿(만악전) 쪽으로 군사를 만나러 걸어가 기 시작했고, 뭔가 말을 걸었기에 손해본 것 같은 기분을 가지게 된 매영인과 소소를 마화가 안내하여 그녀들이 머물만한 처소로 갔다. "이 방과 저방을 써." 제법 괜찮은 방이었다. 넓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녀들의 마음을 안정 시켜 줬다. "좀 있다가 시녀 두명을 골라 줄테니까 그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면 되고, 식 사는 시녀를 시켜 식당에서 가져다가 여기서 먹어. 여기있는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마. 저 사람들도 너희들에게 신경쓰지 않을거니까. 그리고 모두들 무기 는 다 가지고 있을테니 만일에 위급한 일이 닥치면 알아서 해결해. 솔직히 대 장이 하는 걸 보니까 너희들 목숨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인질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다니." "원래 그런 사람이야. 사실 무영문과 싸우게 되더라도 별 신경 안쓸 사람이거 든. 서로가 수준이 비슷해야 인질이 소중한 법이지, 격차가 심할때는 그게 아 니지. 언제든지 한판해도 좋은데 왜 인질을 소중히 여기겠어? 그러니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라는 말이지. 또, 너희들은 저쪽 담 밖으로 나가면 안돼. 그걸 넘어간 후에 발생할 모든 사태는 너희들이 책임져야할거야." "하지만 저 담을 넘어가도 섬서분타 안이잖아요." "아니. 섬서분타라 하면 저 담 안을 말하는 거야. 나는 설명해 줬으니까 나중 에 딴소리 하지마. 나는 이만 바빠서……." 매영인과 악양소소는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손쉽게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 었다. 그녀들을 괴롭히는 인물들도 없었고, 또 모두들 그녀들에게 친절했다. 먼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섬서분타의 내벽 내에서만 생활해야 한다는 점만 지킨다면, 그녀들에게는 매우 폭넓은 자유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녀들이 한번 씩 산책할 만한 매우 아름다운 꽃밭도 몇군데 있었기에 그것이 그녀들의 마인 들에 대한 선입관을 약간 고쳐주는데 일조를 했다. 마인들도 사람인만큼 아마 도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호(嗜好)는 같은 모양이었다. 그중 한 꽃밭에는 국화만 심어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녀들은 아직 피지 않은 국화밭에 서있는 묵향을 한번씩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따스한 표정 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마화도……. "저 마화라는 여자, 부교주와 어떤 사이일까요?" "글쎄… 여기와서 느낀 분위기로는 안주인정도? 하지만 대화라든지 뭐 그런걸 들어보면 결혼은 하지 않은 모양이던데?" "맞을거에요. 할머니도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꽤 어울 리는 한쌍이네요. 하지만 군부와 무림은 별로 어울리는 관계가 아닌데……." 이때 문쪽에서 흑의무사 한명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더니 묵향의 앞쪽에 부 복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묵향은 그를 따라 달려갔 고, 마화도 그를 따라가려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약간 멈칫거리다가 건물 한쪽 구석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녀들을 발견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마화는 그녀들을 향해 걸어와서는 방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때? 지내볼만해?" "예." "그런데, 다음부터는 이렇게 숨어서 보지마. 아예 당당하게 눈에 띄는 곳에서 바라보던지… 부교주는 숨어서 자신을 관찰하는걸 아주 싫어하거든. 이번같은 경우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는 알고도 그냥 모른체 해줬겠지. 너 희들은 그의 수하가 아니니까 말이야. 하지만 이게 반복되면 아무리 너희들이 라도 무사하지 못할지도 몰라." "알겠어요. 조심할께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응. 부교주의 딸이 돌아왔어." "딸이라구요? 부교주가 결혼을 했었어요?" "아니. 양녀(養女)야. 그녀는 지금까지 마교의 뇌옥에 갖혀있었는데, 이번에 마교하고 모종의 교섭을 진행하면서 풀려난거지." "부교주의 양녀라면 대단한 고수겠네요." 그 말에 마화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 사실 그녀는 오래전에 부교주하고 헤어졌었거든. 부교주는 그녀가 무림에 몸담기를 원하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무림인이 되어있 더라고 하더군. 낙양에 있는 천지문의 제자야. 사실 무공도 그리 대단하지 않고……." "그럼 같이 가서 만나보시지 그래요?" 그녀들의 말에 마화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갈까 하다가 그만 뒀어. 오랜만에 부녀간에 만나는건데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잖아. 또 끼어들 이유도 없고……." "어서오시오. 소저." 묵향의 퉁명스런 인사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당당하게 서있었다. 꽤나 고급옷 을 입고있는 것을 보면 장인걸이 꽤나 선물의 포장(?)에 신경을 쓴 모양이었 다. 하지만 오랫동안 뇌옥에 갖혀있었던 탓에 창백한 안색에,어렸을때의 밝 고 약간은 토실토실했던 소녀의 영상을 기억하고 있는 묵향은 가슴이 약간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소연은 지친듯한 표정이었고, 사실 먼 마교 총타에서 이곳까지 오느라고 많이 피곤한것도 사실이었다. 갑자기 뇌옥에서 꺼내서는 목욕에다가 좋은 옷으로 단장까지 시킨 후, 잡혀 들어갈 때 압수당했었던 무기류도 돌려받았다. 그녀 는 '마교'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를 모를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지만, 사실 천지 문과 불가침 조약까지 맺었던 마교가 자신을 납치해왔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교는 단일세력으로는 최강의 방파였기에 도움의 손길 따위는 기대할수도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이용해먹고는 더 이 상 쓸모없어지면 죽임을 당할게 뻔했다. 그것도 자신이 어디에 이용되는지도 알 수 없다는게 더욱 그녀로서는 황당했지만 말이다. 어쨋든 그녀는 이곳에 왔고,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한 무사들은 총타로 돌아갔 다. 그 다음에 그녀가 만난게 바로 이사람이었다. 매우 젊고 강인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만난듯도 하다는 게 좀 이상했다. 하지만 마인들 중에서 이렇듯 젊은 사람을 자신이 알고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착각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는 천마신교 섬서분타지요. 우선 여기서 하루동안 머무신 후 내일 천지 문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안내해 드려라." 묵향의 사무적인 말투에, 묵향의 뒤에 서있던 수하가 재빨리 답하며 그녀를 데리고 처소로 걸어갔다. 묵향은 이제 완숙미(完熟美)를 뿜어내는 30살이 넘 어버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과거 티없이 밝고 귀여웠던 그녀를 회상 했다. 세월이란 것은 너무나도 빨리 흘러가는 것인 모양이다. "나도 늙었나? 이렇게 감상적이 되다니 말이야……." 묵향은 소연이가 돌아오자 마자 혹시 뭔가 수상한 짓이라도 당했는지 철저히 조사했다. 자신의 내공을 뿜어넣어 소연이의 몸속 구석구석을 살폈고, 혹시나 심령이 제압당했다든지 뭐 그런 짓에 걸렸을까봐 특히나 철저히 조사했기에 그 조사작업은 거의 1시진이나 걸렸다. 물론 그것은 그녀가 잠든 후에 행한 일이었기에 그녀는 그걸 알지 못했다. 다행히도 장인걸이 뒷꽁무니로 헛짓거 리는 안했다는 걸 알아낸 후 묵향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다음날 수하들에게 일러 그녀를 천지문으로 돌려보냈다.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생각도 없었고, 이 제 그 나이가 되었으니 죽든 살든 그건 사실 묵향과는 별로 상관도 없었기 때 문이다. 대신 그녀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 아니기를 염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예. 묵향 부교주는 양녀를 인수받은 다음날 그녀를 곧장 천지문으로 돌려보 냈습니다." "흐음… 의외로군. 본좌는 그가 데리고 있으면서 보호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 장인걸의 말에 옆에 서있던 혁무상이 말했다. "그만큼 그의 딸을 아낀다는 말이겠지요.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그래 둬야 적들의 이목을 속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또 그 둘은 사는 세계가 다 르기에 대놓고 보호할수도 없으니까요. 그녀를 심문해봤을때도 묵향이란 이름 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걸 보면 최후의 최후에나 그녀를 써먹을 수 있을까, 섣불리 써먹지는 못합니다. 전 교주는 그녀를 너무 빨리 써먹었기에 낭패를 당한 것이죠." "좋아. 그건 그렇고 무영신마(無影身魔)는 출발했나?" "예. 자성만마대를 이끌고 2시진(4시간) 전에 출발했습니다." "정보공작은?" "충분히 하고있습니다. 섬서분타가 본교의 무림재패를 이루는데 있어 그 핵심 세력이라고 충분히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무영신마 장영길(張影吉) 장로에게 도 자신들이 섬서분타의 핵심세력임을 기회가 나는데로 은밀히 선전해 두라고 지시해 뒀습니다. 그리고 자성만마대는 지금부터 섬서천마대(陝西闡魔隊)로 이름을 바꾸고, 앞으로 그들에게 가는 모든 전문(傳聞)에는 섬서분타에서 보 내는 것임을 적도록 지시해 뒀습니다. 그런 식으로 모략을 해대면 아마도 섬 서분타와 조만간에 정면전이 붙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크크크… 괜찮은 생각이군." "예. 지금 묵향 부교주는 정파와의 전쟁에 천랑대를 투입중인 것이 밝혀졌습 니다. 시체들에 나있는 각종 상흔으로 봤을 때 천랑대의 무사들임이 확실합니 다. 또 첩자가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각 분타로부터 약간씩의 고수들을 뽑아 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외에도 이리저리 긁어모은 고수들도 꽤 되는 것 으로 보입니다. 그 모든 증거를 종합해볼 때 묵향 부교주는 우리들의 의도대 로 진짜 정파와 한판 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좋아. 수고 했네. 이제 그만 가보게나." "예." * * * 묵향은 소연이 타고있는 마차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오랜시간 그쪽 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쓸데없는 감상 에 빠져있는 자신을 일깨웠다.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나 다시는 볼수 없을지도 몰랐고, 또 그 아이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양녀라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마 인의 입장에서 보면 쓸데없는 감정의 낭비일 뿐이었다. 마화는 그가 천천히 걸어서 국화밭으로 향하는 걸 멀찍이서 본 후 그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매우 감정이 절제된 이별, 자신이 양부라는 것을 밝히지 도 않았지만 제법 오랜시간 묵향과 함께 지낸 마화로서는 그의 마음이 매우 불안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수있었다. 이런때 묵향은 자신에게 상대가 말을 걸 어오는 걸 매우 싫어한다. 하지만 옆에 아무도 없는 것 보다는 마화가 그냥 옆에서 조용히 있어주는 걸 묵향이 더 좋아한다는 걸 알기에 마화는 그를 따 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국화밭을 바라보며 서있는 묵향을 마화는 끈기있게 바라보고 있었 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신의 품속에서 술병을 하나 꺼내어 묵향에게 건넸다. 묵향은 뒤에서 툭 치는 걸 보고 뒤로 시선을 돌렸을 때, 마화가 술병을 들고 있는 걸 보고는 아무말 없이 그 술병을 받아들고 내용물을 비우기 시작했다. 묵향이 매우 좋아하는 천일취(千日醉)였다. 물론 아무리 술한병 마셨다고 그 취기가 천일이나 갈까마는 천일취는 정말 무지하게 독한 술이었기에 원래이름 이었던 국일주(菊溢酒)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모두들 천일취라고 불렀다. 마지막 한방울을 목구멍 속으로 털어넣은 후 묵향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마 화에게 물었다. "더 없냐?" "없어요. 이제 궁상 그만떨고 들어가세요. 오랜만에 양녀를 봤고, 또 그녀가 무사한걸 알았잖아요. 그러면 된거 아닌가요? 이제 서른살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녀를 대장이 걱정해줄 이유는 없잖아요." "그건 그래. 이미 둥지에서 떠난… 하지만 이 경우는 내가 먼저 둥지를 떠난 것이기에 조금 아쉬움이 남는군. 임충은 어디있지?" "숙소에 있을겁니다." "좋아. 그럼 그녀석과 한잔 하기로 하지." 묵향의 쓸쓸한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바라보던 마화는 품속에서 병 을 하나 더 꺼낸 후 곧장 자그마한 입속에 들이부었다. 몇모금 꿀꺽거린 후 그녀는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천일취는 묵향같은 괴물이나 좋아하는 술이지 보통의 여자보다 체력이 조금 좋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인 그녀에게는 너무 독 했던 것이다. 지독한 술냄새와 그 지독한 술기운때문인지, 천일취가 뿜어내는 아련한 국화향기 속에서 그녀는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녀는 눈물을 살짝 닦 으며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묵향에게 하는 말인지 애매한 말을 살짝 내 뱉었다. "바보……" 며칠 후 매영인과 악양소소는 이제 막 잠이 들려는 순간 인기척을 느끼고 소 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문을 벌컥 열리면서 시커먼 옷 을 입은 사람이 검을 차고는 들어왔으니 그녀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하 지만 뛰어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마화였고, 그걸 알고 그 둘은 저으기 안심 했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짜증스러움을 듬뿍 내포한 말에 온 정신이 뒤죽박죽 얽히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까지 준비 안하고 뭐하고 있는거야?" "예?" "야행(夜行) 준비하라는 지시 못들었어? 그리고 짐은 꾸렸어? 이런… 짐을 하 나도 안꾸려놨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마화는 다짜고짜 그녀들이 이곳에 와서 장만한 몇가지 되지도 않는 옷가지 등 을 품속에서 꺼낸 시커먼 보자기 위에 쌓으면서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정확히 1시진 후에 모두들 섬서분타에서 떠날거야. 그런데 왜 준비를 하나도 안한거야?" "예? 떠나다뇨?" 아직도 멍한 그녀들의 표정을 보며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마화의 얼굴 이 뭔가를 떠올린 듯 갑자기 시뻘겉게 달아오르며 맹렬한 분노를 뿜어내기 시 작했다. 하지만 마화는 더 이상 말을 하지않고 짐을 재빨리 챙긴 후 그녀들에 게 차갑게 말했다. "야행복(夜行服)은?" "……" "하기야, 야행복을 지급해줬을 리가 없지. 잔말말고 따라와." 아닌게 아니라 그녀들이 밖에 나왔을 때 평상시와 상당히 다른 어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소리없이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대부분 인기척이 나지않게 하지만 재빠른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 흑색 야행복을 입고 있었다. 마화는 그녀들을 데리고 일단 창고쪽으로 간 다음 두벌의 야행복을 받은 후 근처에 늘어서 있는 건물들 중 하나에 무턱대고 걸어가더니, 방문을 확 열어 본 후 아무도 없자 야행복을 그녀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갈아입어. 그리고 이 보자기에 너희들이 입던 옷을 넣 어가지고 와." 싸늘한 냉기를 풀풀 날리는 사무적인 어조…… 그녀들이 여태껏 보지못했던 마화의 또다른 일면이었다. 그녀들은 감히 저항하거나, 이의를 제기해보지도 못한 채 안으로 들어가서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주머니에 보면 두건이 있을거야. 두건도 써." 두 개의 눈구멍이 뚫려있는 두건까지 쓰자 그녀들은 이제 주위를 바쁘게 돌아 다니고 있는 무사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 후 마화는 그녀들의 옷차림 새를 찬찬히 훑어본 후 말했다. "이동하면서 아무 얘기도 하지 마. 그리고 보따리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의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뒤만 따라와야 해. 알겠어?" "예." "가자." 마화가 그녀들을 이끌고 간 곳은 입구가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는 한 건물의 지하였다. 그 건물은 지금 전형적인 야행복이라 할 수 있는 흑의복면을 한 인 물들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빨리빨리 나가. 이봐, 다음 조 들어오라고 해." 아닌밤중에 계속되는 해괴한 사건으로 반쯤 얼이 빠져버린 매영인과 악양소소 가 자신들의 자리를 재빨리 찾아 이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7평(坪)정도 될까 하는 좁은 지하실에서 이리저리 걸리적거리자 한 흑의복면인이 짜증을 부렸다. "야, 거기 두놈. 좀 빠릿빠릿하게 못움직여? 빨리빨리. 다음!" 그의 지시에따라 지하실 한쪽 구석에 뚫려있는 지름 3척(91Cm)정도의 동굴속 으로 재빨리 사람들이 기어 들어갔다. 이윽고 마화도 그 동굴속으로 들어갔고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노릇인지 알 지 못하고 마화의 등만 따라다니던 두 여자들도 그녀의 뒤를 따라 동굴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겨우 동굴의 높이가 3척이 될동말동했기에 일어서서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녀들은 열심히 기어서 마화의 뒤를 쫓았지만 이놈의 동굴은 도대체가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앞에서 "사사사삭"하는 옷이 땅에 긁히는 소리가 들리니까 사람이 있는 줄 아는 것이지 동굴 속은 칠흙과 같이 어두웠 고, 고개를 조금만 들면 동굴 천장이 머리 위에 닿였다. 영문도 모르고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 어두운 공간을 기어가자니 그녀들 은 서서히 공포심이 마음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한참 기어갈 때 갑자기 저 어둠 속에서 칼이라도 튀어나오는 것 아닐까? 또는 귀신이라도 튀어나오는게 아닌가 하는 망상까지 들었지만 그것도 차츰 시간이 지나자 다른 것으로 대체 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예로 단련된 육체라고 하지만 2각(30분)정도 전력을 다해 기고 나니 까 삭신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었는지 손바닥, 발바닥 아픈 것은 물 론이요, 무릎도 까졌는지 쓰라리고 아파왔다. 하지만 가장 지독한 통증을 호 소해 오는 곳은 허리였다. 원래가 사람은 기어 다니는 동물이 아니었기 때문 이다. 그 상태로 1각정도 더 기고나자 숨이 턱 끝에 차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눈앞에 별이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야, 앞에녀석! 빨리 안기어?" "벌써 숨이 턱 끝에 닿다니, 도대체 수련 안하고 뭐한거야? 어디의 누구야?"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빨리 안기어? 뒤로 층층히 밀리잖아!" 앞에 가던 그녀들이 꿈지럭거리자 뒤에서 지독한 욕설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들은 마화의 지시도 있었기에 감히 대꾸는 못하고 지독한 육체적 고통을 참아내며 죽자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공의 고수라고 하지만 대부분 의 경우 무예의 수련을 하다보면 쓰이는 근육만 계속 쓰게 마련이다. 그렇기 에 그녀들이 평생 이렇게 오랜시간, 장거리를 기어다닐 일이 없었기에 쉽사리 지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뒤에서 줄기차게 따라오는 녀석들을 보면 아무래 도 평상시에 이런 암굴을 기어 다니는 훈련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쨋든 그녀들이 정말 죽을힘을 다해 장장 1시진을 기어가서야 동굴은 끝이났 다. 원래 동굴의 중간중간에 작은 방들이 붙어있어, 혹시나 모를 외부로부터 의 침입자를 막을 수 있게 되어있고, 또 그곳에서 동굴의 외부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강철문들이 달려있었다. 하지만 동굴 속이 무지무지하게 어두웠다 는 이유도 있었지만 딴곳에 신경쓸 정신이 없을 정도로 지쳤기에 그녀들은 그 런 것을 눈치도 못채고 그냥 동굴을 통과했다. 가까스로 동굴을 빠져나오자 그곳에는 수많은 흑의복면인들이 득실거리고 있 었다. 어느정도 복면인들이 모이자 그곳에 있던 한 흑의복면인이 나직히 말했다. "제6대, 인원 이상없나?" "예." "출발." 흑의복면인의 질문에 답했던 또다른 흑의복면인이 약 100명은 되어보이는 무 리를 이끌고 조용히 출발했다. "제 7대, 정렬하라." 한 흑의복면인이 그 말을 하자 마화가 재빨리 그녀들을 이끌고 정렬한 인물들 속으로 들어가서 섰다. "응?" 두 번째로 흑의복면인들의 수를 세고있는 흑의복면을 보면서, 흑의복면인 한 명이 말했다. "왜 그러나?" "그게, 이상하게 두사람이 더 많습니다." "뭐야?" 그와 동시에 그는 살기를 피워올리며 나직히 외쳤다. "모두들 복면 벗어. 첩자가 있다." 그 말에 재빨리 마화가 복면을 벗은 후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제가 두명 데리고 왔어요. 미리 말씀 못드려서 죄송합니다." "…… 좋아. 출발!" 흑의복면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출발 명령을 내렸다. 마화가 신분을 증명하는데야 그가 꼬치꼬치 따지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기때문이었다. 흑의복면인들의 무공은 대단히 뛰어났다. 사실 그들은 더욱 빨리 목적지에 갈 수도 있었지만 마화 등 무공이 약한 인물들이 많이 섞여있었기에 적당히 쉬면 서 천천히 이동했다. 그 때문에 제7대는 제법 일찌감치 떠났음에도 새벽이 다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요새(要塞)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성(城)이라 고 하기에는 좀 작았고, 요새라고 하기에는 약간 컸다. 하지만 흑의복면인들 과 함께 요새 안으로 들어간 후 그녀들은 그 첫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아채는데 별로 시간이 들지 않았다. 이건 거의 성의 규모였기 때문이다. 처음 에 그걸 느끼지 못한 것은 절벽 안에 동굴을 파서 구축해놓은 부분이 교묘하 게 위장되어 있어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3장(9m)은 되어보이는 높은 담장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 뚫려있는 문은 2 중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둘 다 강철로 되어있었다. 또 벽에는 줄 기가 가느다란 덩굴식물들이 우거져 있어 외부에서 그것을 잡고 성벽을 오르 기는 어려웠고, 또 그 식물들에 의해 멀직이서 보면 요새가 있는지 알아채기 힘들었다. 그녀들은 마화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조용히 이동하고 있었기에 입을 열지는 못했다. 마화 또한 그 녀들에게 말을 한마디도 걸지 않고 묵묵히 일행들을 따라서 이동했다. 마화는 그녀들을 자그마한 방으로 안내해준 후 급히 요새 깊숙한 곳으로 걸어 갔다. 이제 더 이상 감추고 자시고 할것도 없었기에 그녀는 복면을 벗에 품속 에 집어넣은 후 조금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갑자기 거의 천여명에 달하는 식구가 새로이 늘어났기에 복도는 흑의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마화는 암흑대전(暗黑大殿)이란 현판이 붙어있는 방까지 걸어간 후 그 앞에 서있는 무사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군사를 뵙게 해줘요."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 흑의무사는 평소와는 달리 약간 싸늘한 표정을 짓고있는 마화를 알아보고 는 정중하게 말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 조금 있다가 밖으로 나오더니 말했다. "들어오시랍니다." 마화의 표정은 방안으로 들어가면서 더욱 싸늘하게 바뀌었다. 아니, 들어가면 서 바뀌었다는 것 보다는 군사를 보고나서 그렇게 바뀌었다는 것이 정확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갑자기 마화가 냉기를 펄펄 날리면서 다짜고짜 말하자 설무지는 약간 당황해 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인질로 잡고있던 아이들을 그곳에 남겨두려고 했잖아요?" "그건…… 설마, 자네가 데려온 것은 아니겠지?" 설무지의 어색한 대응을 보고 더욱 확신을 굳힌 마화는 그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데려 왔어요. 왜요? 뭐 잘못되었나요? 그 아이들을 그 위험한 곳에 일부러 놔두고는 정파가 기습했을 때 죽인 후 그걸 이용해서 뭔가 꾸밀 생각이었죠?" 마화의 예리한 추리에 설무지는 김빠지는 듯한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얼버 무렸다. "하하…… 억측이 너무 심하군, 마화." "억측이 아니에요. 만약 그 아이들을 죽일게 아니라면 왜 거기에 놔두려고 했 죠? 조만간에 쑥대밭이 될게 뻔한데……" "흐음…… 기왕에 데려왔으니 하녀 한명을 붙여주기로 하지. 나는 일이 많아 서 바쁘니까 이만……"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 말아요. 제 생각이 맞죠? 도대체 어떻게 그럴수가 있죠? 그녀들은 공식적인 인질이잖아요. 인질을 받았을 때 그녀들을 보호해 준다는 무언의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요?" 그녀가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자, 설무지는 작은 한숨을 쉰 후 마음의 준비 를 갖추고는 차근차근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알고있네." "그러면 어떻게 된 일인가요? 부교주님의 허락이 내려진 일인가요?" "물론. 그분의 허락이 있었으니까 일을 시작했지." 그 말에 경악한 마화. 그녀는 묵향이란 인물을 믿고 있었기에 충격이 조금 컸 다. "어떻게 그럴수가……" "무림이란 곳은 먹고 먹히는 곳이야. 철저한 약육강식이 판치는 세상이지. 부 교주의 적들은 너무나 강한자들 뿐이고, 그들을 없애려면……" "하지만 그 아이들은 그렇게 강하지도 않잖아요. 또 그 아이들의 배후도 그렇 게 강대한 문파는 아니잖아요?" "물론 무력은 약하지. 하지만 무영문은 정보력이, 또 악양세가는 정보력도, 무력도 약하지만 오랜세월 인술(仁術)을 베풀어 왔기에 대단히 높은 신망(信 望)을 받고있어. 만약 그녀들이 우리들의 인질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악양세 가도, 무영문도 정파로부터 의심의 눈길을 받게 되겠지. 그만큼 그들의 입지 가 약화된다는 말이야. 또 우리는 그녀들을 지키려고 최대한 노력했지만 분타 가 무너지는 통에 그녀들의 보호는 어쩔 수 없었다. 죄는 그녀들을 죽인 정파 에 있다. 뭐 이런식으로 밀고나가면 잘하면 정파 안에서 자중지란(自中之亂) 도 가능했지. 그래서 부교주도 허락한 것이고……" 설무지는 한참 말을 하다가 마화의 눈속 저 깊은곳에서 흘러나오는 비난을 감 지하고는 말을 중단했다. 설무지는 마화의 저 자부심 높은 무인의 눈을 바라 보면서 자신의 말을 이해못하는 마화가 답답하게도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순수한 무인의 눈을 언제까지고 가져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 * * "큰일 났습니다." 그 말에 묵향은 천리독행에게 퉁명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뭐냐?" "그게…… 그녀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들?" "예. 악양세가와 무영문의……" "도망쳤나? 도대체 감시를 어떻게 했기에 도망친단 말이냐? 보초(步哨)들은 뭐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그게 보초들은 밖으로 나간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고 딱 잡아떼는 판이라서 그게…… 그리고 밖으로 나간 그 어떤 흔적도 없구요." 천리독행은 묵향이 소중한 인질들의 실종에 대단한 짜증을 낼 줄 알고 조심스 럽게 변명을 섞어 말했지만, 의외로 묵향은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운좋게 도망쳤다면 된거지. 그냥 놔둬라. 어차피 소모품으로나 쓸 생각 이었으니, 없어도 상관없지. 그래, 철수작업은 순조롭게 끝마쳤나?" "예. 모두들 조용히 떠났습니다." "몇명이나 남았나?" "천랑대 제3대, 100명입니다." "만약에 정면 공격을 받는다면 자네 인솔하에 충분히 탈출은 가능하겠지?" 묵향이 더 이상 그일에 대해 거론하지 않고, 또 자신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을 물어보는 것을 알고 천리독행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이런식으로 수하가 해내고도 주리가 남는 일을 물어보는 것은 더 이상 앞에 있었던 과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는 말이었기에 천리독행은 속으로 저으기 안심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대와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튀는건데 화경의 고수가 온다해도 겁 안납니다." "좋아. 이제 무대 준비가 거의 끝났으니, 배우들만 불러들이면 되겠군. 하하 하하하" "흐흐흐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빨리 그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한참 웃음을 터뜨리고 있던 묵향이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고는 말했다. "자네는 아직도 나를 벨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물론 이 말을 여태껏 대화하고 있던 천리독행에게 한게 아니었으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렇기에 대답또한 들리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에 답하는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왠만한 사람이 알아내기는 힘들었다. "물론입니다. 제가 당신의 수하가 되는 조건중에 하나였으니까요." 이 대답을 하는 인물은 과거 묵향을 거의 죽일뻔 했었던 살수 흑월야사(黑月 夜死) 전룡(全龍)이었다. "자네에게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묵향의 말에 약간의 궁금증을 나타내는 예의 그 목소리. "무슨 부탁이신가요?" "앞으로 3개월동안만 내 딸을 부탁하네." "예?" "딸말일세. 얼마전에 왔을 때 봤을텐데? 내가 정파의 제자였기에 아는 척을 안했지만 말이야. 바로 그 아이가 내 딸이라네." "그녀가 딸이었습니까?" "내 양녀지. 물론 딸아이가 죽는다 해도 자네에게 책임은 없네. 자네는 자네 의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게나. 대신 자네가 막을 수 없 는 상대가 나타난다면 그 아이를 보호할 생각 하지말고, 그냥 지켜본 후 배후 인물만 나에게 알려주게. 그것 때문에 은잠술에 뛰어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 니까 말이야. 해줄 수 있겠나?" "정말 양녀가 죽어도 상관없습니까?" "상관 없네. 그 아이의 무공은 형편없어. 만약 무리하게 보호한다고 날뛰다가 자네가 죽어버린다면, 딸아이의 목숨은 그걸로 끝장이지. 또 나는 그 배후조 차 알 수 없어진다네. 그 아이를 대놓고 보호할 수 없으니, 복수는 해줘야 할 거 아닌가?" "정말 냉정한 분이시군요." "별로 냉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내가 여태껏 살아온 삶이 그랬는데 없던 정이 하늘에서 떨어지겠나? 어쨋든, 부탁을 들어주겠나?" "예. 그럼 3개월 후에 뵙겠습니다." 그 이후에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묵향이나 천리독행에게는 뭔가 가 이동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물론 묵향과 천리독행의 차이는 묵향은 그 기 척이 느껴지기도 전에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천리독행은 상대가 움직인 지금에야 눈치챘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군대(軍隊)란 무리들은 한없이 특이한 무리들이다. 강한 상대 앞에서는 순한 양떼와 같이 겁이 많고, 약한 상대 앞에서는 굶주린 늑대와도 같이 포악하다. 상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만, 그 상관의 위엄이 손상되었을 때는 가 차없이 상관을 베어버리기도 한다. 원래가 외적(外敵)을 막기위해 그들을 키 우지만, 오히려 그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을 때는 외적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로 둔갑하는 것이 바로 군대인 것이다. 하지만 그 군대라는 것들이 아무리 폭도(暴徒)로 화했다고 해도 그들을 이끄 는 사람은 꼭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쨋든 대규모의 무리가 효과적으로 움직이 기 위해서는 그들을 통제하기 위한 인물은 필수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기 때문 이다. 그렇기에 예나 지금이나 군대라는 이 양면성을 가진 무리들을 효과적으 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가장 윗부분의 계급 몇 명만을 족치면 그 무리가 전체 적으로 통제된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진리였다. 하지만 대송제국은 지금 그 진리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대송제국은 그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진 대가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군사력을 보유해야만 했다. 무려 112만에 달하는 어림군(禦臨軍;중앙군)을 유 지해야만 했고, 각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200만에 달하는 향방군(鄕防 軍;지방군=경찰과 같은 역할)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을때 를 대비해 겨울철의 농한기(農閑期)에 600만이 넘어가는 대비군(對備軍;예비 군)을 소집하여 무예를 가르쳐야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거져되는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112만의 어림군 병졸들이 굶지 않게 밥만 줘도 거기에 소모되는 액수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되는 것이 다. 그런데 이렇게 막대한 거금을 들여 키운 이 군대라는 것이 지금은 대송제 국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대송제국이 요를 정벌하기 위해 투입한 군사력은 무려 103만 대군(大軍). 물 론 이중에서 실질적인 주력 전투군은 35만과 향방군 15만이었다. 하지만 이 50만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려 50만이 넘는 대비군이 차출되어 보급선 을 유지하기 위해 피땀을 흘리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이번 전쟁을 도와준 고 려와 여진, 정안국에다가 어떤 형식으로든 약간의 사례는 해야 하는 것이었기 에 송으로서는 몇 년에 걸쳐 비축해둔 금,은을 탕진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재물(財物) 따위가 아니었다. 엄청난 군사력이 국외로 원정나 간 틈을 이용해 진천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거기에다가 엎친데 겹친 격으로 이 중요한 때에 황제폐하까지 갑자기 붕어(崩御)하다 보 니 대송제국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를 이용해서 권력의 전면 (前面)에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호화로운 넓은 방의 윗쪽에 마련된 의자는 그 방의 덩치에 어울릴 정도로 크 면서도 호화로웠다. 그리고 그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 역시 그 넓은 의자에 어 울릴 정도로 비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살이 뒤룩뒤룩 찐 인물은 그 살덩어리에 묻혀서 얼굴의 윤곽을 많이 상실했지만, 아직도 제법 준수한 생김 새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살이 찌기 전에는 대단한 미남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팔(八)자 수염을 슬슬 쓰다듬으며 작고 교활한 눈을 반짝이면 서 말했다. "어떻게 되었느냐?" 그 돼지같은 인물의 옆에 서있는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재빨리 귀속 말로 주인의 물음에 답했다. 그 사내의 말이 시작되었을 때 활짝 웃던 그 돼 지는 갑자기 수하의 멱살을 그러쥐면서 외쳤다. "다시 한번 말해봐라." "예…… 이황야가 갑자기 실종되었습니다. 지금 백방으로 수색하는 중이온데 ……" "이런 머저리 같은 것들!" 퍽! "쿠엑!" 그 돼지는 육중한 몸을 일으켜 쓰러진 수하의 멱살을 그러쥐고 일으켜 세우면 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짙은 살기를 띄고 있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찾아내라. 10일의 시간을 주겠다. 만약 그때까지 이 황야의 목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네녀석의 목이 대신 잘릴 것이다." 살벌한 상관의 말에 수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이제 졸지에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어버린 수하는 촌각이 아까운 듯 재빨리 밖으로 튀어나갔다. 하지만 그는 그 바쁜 와중에도 주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준비절차로서 문 옆에 풀어놓은 자신의 장검을 회수하는 것을 잊지는 않 았다. 돼지는 멀어져가는 수하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꽉 쥔 주먹을 바라봤다. 무 의식중에 그의 꽉쥔 주먹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방법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 이번 계획은 거의 10여년 전에 수립된 것이었다. 자신의 여동생이 황제 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서 급상승하기 시작한 부귀(富貴)와 권세(權勢). 하 지만 여인에 대한 남자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바보 멍청이는 없다. 그 만큼 이성간의 사랑은 빨리 불타 오르지만 빨리 식는 것이 정석이었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의 여동생은 황제의 총애를 지속시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거 듭했고 15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황제의 총애를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들어 황제는 새로운 여자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정말 60세가 넘은 늙어빠진 노인네가 노망이 났는지 이제 갓 15세도 되지 않은 예쁜 궁녀(宮女) 에게 푹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때 돼지는 이제 자신이 오래전에 계획한 일을 실행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닳았다. 그 궁녀의 오라비 또는 동생이 자신을 대 신해 황제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엎고 젊잖치 못한 짓들을 벌일 것은 분명한 일 이었다. 그리고 그것에는 당연히 연적인 돼지의 여동생을 숙청하는 것도 끼어 있을 것은 뻔했다. 돼지 또한 과거에 그런 짓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돼지는 궁녀쪽에서 손을 쓰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돼지가 황제 를 죽이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거금을 들여 구입한 강력한 정력제를 황제께 바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해결되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일일(一 日) 사용량을 조금 과하게 아뢴 것 외에는 그에게 죄가 없었다. 덕분에 황제 는 총애하는 궁녀의 방에서 복상사(腹上死)를 하게 되는 행운을 얻었지만 말 이다. 일단 황제의 승하와 동시에 돼지는 민첩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이것을 위해 그는 무리하게 자신의 심복을 금의위의 대영반에 올려놨었고, 황제의 오른팔 이라고 할 수 있던 옥영진 대장군을 처치했었던 것이다. 그가 옥영진 대장군 을 처치하고 나자 그의 권세에 경악한 수많은 인물들이 돼지에게 머리를 조아 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심복들을 중요한 관직에 올리기도 하고, 또 자신의 파벌을 굳건하게 구축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돼지는 황제를 죽인 후 자신이 구축해놓은 파벌을 움직여 뒷마무리를 시 작했다. 최대한 빠른 시간내에 자신의 동생이 낳은 오황야를 황위에 올려놔야 만 했던 것이다. 뛰어난 황제의 재목(材木)이었던 일황야, 그리고 준수한 얼 굴의 삼황야,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사황야가 그런 이유로 돼지의 심 복들의 손에 이승을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황야가 살아서 도망친 것이다. 돼지는 자신의 주먹에서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지고(至高)한 자리는 진천왕처럼 한낫 무력에 의지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 지. 모략과 술수…… 그리고 약간의 행운만 함께 한다면…… 흐흐흐……" 한참 밤하늘을 쳐다보며 히죽거리던 돼지는 갑자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거의 혼자말 처럼 말했지만, 돼지의 말에 답하는 목소리는 있었다. 뭔가 음산 한 듯한 목소리였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예." "이유는?" "상대보다 더욱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모략이나 술수을 쓰는 것 보다 단순히 무력에 의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흠. 그렇다면 노부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나?" "엄승 대인의 경우는 모략과 술수를 쓰시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 직까지는 대인의 가장 큰 적이 누구인지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군부(軍部)의 꽉 막힌 노장(老將)들이나, 중신 (重臣)들은 이미 힘을 잃었어. 군부의 영감들은 진천왕과 싸운다고 딴곳에 한 눈 팔 시간적 여유가 없지. 그리고 알량한 지식에 의존해 권세나 탐하는 영감 들은 갑작스런 황제의 붕어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지. 그런데 본좌에게 이제 적이라고 부를 만한 자가 남아있다는 말인가?" "엄승 대인께서 잘 생각해 보시면 아실겁니다." 한참을 궁리하던 엄승이 답했다. "진길영 원수?" 엄승의 물음에 예의 음산한 목소리는 약간은 핀잔을 주듯 웃음소리를 흘리며 답했다. "크흐흐흐…… 진길영 원수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만리(萬里)길 밖에 있습니다. 그가 돌아올 때 쯤이면 모든 일은 끝난 후겠지요." "그렇다면 진천왕?" "진천왕 또한 정북원수부의 이태진(李太眞) 원수에게 걸려 한눈 팔 시간이 없 습니다." "그렇다면…… 흐음…… 그럼 설마 진성왕(眞誠王)이?" 엄승의 말에 예의 그 목소리는 또다시 음산한 웃음소리를 곁들이며 들려왔다. "흐흐흐흐…… 예. 진성왕 또한 숨겨진 적들 중의 한명이지요. 진성왕이 뭔가 흑막을 숨기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동남원수부의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진성왕 또한 동남원수부를 슬쩍 장악하고는 권좌(權座)를 노리고 있겠죠. 하지만 진짜 강한 적은 진성왕 따위 가 아닙니다." "끄응…… 그렇다면?"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무림에는 혈교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의 힘을 대인께서 얕보고 계실지도 모르시겠지만, 과거 혈교의 분타 하나를 부수는데 흑풍단 전력의 반이 무너졌습니다." 엄승은 신음성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흑풍단이 막대한 타격을 입었을 때, 그 사건은 대외적으로 기밀에 속했기에 엄승은 아직 모르고 있었 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민족들을 억누르고, 반역세력을 억누르고 있던 최강의 힘을 자랑하던 흑풍단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우선 이민 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엄승 정도의 지위에 있는 인물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그런 것을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승 자신이 그당시 힘을 상실해버린 흑풍단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엄승이 흑풍단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품기 시작한 것은 몽고원정 후부터였기에 그전에 흑풍단의 힘이 어떠했었는지 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그정도나 강한가?" "예. 하지만 다행히도 혈교는 있는대로의 힘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정파(正派)들을 견제해야만 하기 때문이죠. 현 무림에서 최강의 세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정파니까 말입니다. 물론 정파가 그렇게 강대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떤 구심점 없이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대한 적이 나타났을때는 얘기가 다르죠." "좋은 지적이군. 그렇다면 혈교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그건 아닙니다. 자신들의 힘을 밖에 드러내기는 힘들겠지만 상대편의 중요한 인물들 몇 명을 암살하려고 들지도 모릅니다. 혈교는 사이한 술법을 잘 쓰고, 또 대단한 고수들도 많이 거느리고 있습니다." 엄승은 "암살"이라는 말에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자신의 저택에도 많 은 사병(私兵)들이 있었지만 지금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인물이 이 집을 제집 드나들 듯 하고 있었지만 눈치채는 녀석은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었 다. 이때 엄승의 표정을 보고 상대도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의 신변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본교의 고수 20명이 물샐틈 없는 경 비를 하고 있으니까요." "험험…… 그런가?" "예." "이제 숨어있는 적은 다 말했나?" "아닙니다. 그 외에 정파에서도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뛰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수많은 정파의 문파들 중에서도 그런 야심을 가질만큼 강대한 문파는 몇 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또 정파들은 지금 그런것에까지 신경을 쓸 만큼 한가하지는 않습니다. 본교에서 그들이 황궁에까지 신경을 돌리지 못하 게 공작 중이니까 말입니다." 그 말에 엄승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대인께서도 지켜주셔야 합니다. 무림의 일에는 당분간은 절대로 간섭하지 말아 주십시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파에서는 대인 을 없애기 위해 궁리를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일단 한동안은 정파에서 황궁 쪽에 신경을 쓰지 않아야만 합니다. 무림과 황궁은 불가침의 영역이니 어지간 한 일이 있지 않고서는 정파에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줄 것입니다." "알겠네. 그건 지켜주지." "감사합니다. 대인." "참,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왔나?" "예. 교주님의 전갈을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지금 본교에서는 정파 무림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곳 저곳에서 무림인들이 칼부림을 할것이 니 좀 규모가 지나치다 싶으시더라도 진천왕의 반란 진압을 핑계로 묵인해 달 라고 하셨습니다. 또 정파 또한 본교와 싸운다고 황궁쪽에 신경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알겠네. 내 그렇게 하지. 교주에게 나중에 노부가 권세를 잡은 후 결코 섭섭 하지 않게 대우하겠다고 전해주게." "감사합니다. 대인.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음산한 목소리가 작별인사를 해오자 엄승는 또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름달의 휘황한 광채 아래 드러나 있는 화려한 정원은 주인의 시선을 끌어잡 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시선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엄승는 그따위 것에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저 조카를 황위에 올려야 해. 그런 후…… 흐흐흐…… 내가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에게 반대할 만한 모든 세력을 없애 는게 우선이지. 우선은 군부(軍部)를 장악하고, 그 다음은 무림을…… 흐흐흐 ……' 엄승의 그 투실투실한 뺨이 달빛에 희게 빛나고 있었다. * * * 알 수 없는 미래 옥로조상풍수림 (玉露洞傷機構林) 무산무협 기소삼(重山基岐휈誘森) 강간파랑겸천용(江間波浪춽天酒) 새상풍운접 지음(基ヒ風雲接地陰) 총국양개타일루(業菊雨開他 ? 深) 고주일계고원심(孤命-繫故토,7,) 한의처처 최도척(索依歲鹿催71尺) 백제성고급모침(き帝城高?暮貼) (옥 같은 이슬 맞아 단풍 숲 시드니 무산 무협 에는 가을 기운 쓸쓸하다. 강물의 파도 하늘로 용솟음치고 변방 위의 바람,구름 땅을 덮어 음산하다. 국화 더미 두 차례 피어 나니 지난날이 눈물겹고 외로운 배 한결같이 매어 둔 것은 고향 생각 때문이라. 겨을 옷 만드는 곳마다가위,자바삐 놀리고 백제성 저 높이 저녁 다듬이 소리 급하다. ) 아련한 금음(率音)을 타고 쓸쓸한 노래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진 다. 기을의 흥취(秋興)7라는 제목의 이 시는 당나라의 대 시인 두보 의 걸작 중 하나다. 하지만 두보는 그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 고,젊었을 때부터 전쟁에 쫓겨 타지로 타지로 방황하다가 객사(容烈 한 불우한 시인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노래들 중에는 고향을 그리는 서글픈 내용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노래를 끝낸 매영인은 금(率)에서 살며시 손을 떼며 가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상심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 사이 에서 살짝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시를 지은 두보의 심정이 자신과 같았뜰쳤 두보는 전쟁통에 쫓겨 이리저리 떠돌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나마도 없는 것이다. 새장 안에 갇힌 새. 어쩌떤 이것은 어려운 때에 태어난 여자들의 숙명 인지도몰랐다. 1년만 지나면 돌려보내 준다고 하지만 그걸 믿기는 힘들었다. 처음 마교도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인질이 되었을 때는 1년 내에 돌아갈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 또한 '여자 이기 전에 '무림인'이었기 때문이 었다. "왜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 에요, 언니 " "너 또 집 생각이 나는 모양이구나. 마화 언니가 1년 후에는 돌려보내 준다고 했잖아. 건년은 금방 지나간단다. 조금만 참아라." 악양소소는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매영인을 살며시 끌어안으며 토닥 거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매영인의 마음을 잡기 힘들었다. "언니는 그 말을 믿어요? 이곳에 온 후에도 언니는 그 말을 믿느냐구 요. 척 봐도 곧 뚜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지잖아요. 마 교와 정파 사이 에 전쟁이 벌어 진다떤 우리가 과연 이들에게 무슨 필 요가 있을까요? 또 필요가 있다고 해도 그건 필히 우리 가문에 해가 되는 것일 게 분명한데." "그렇게 나쁜 방향으로만 생각하지 마. 최악의 경우에는·" 악양소소는 허리에 매여 있는 검 손잡이를 살며시,하지만 나중에 는 꼭 그러쥐었다. "너는 무영문의 자랑스러운 제자잖니? 인내 심을 가시고 기다려." 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똑똑. .. "들어오세요." 할 수 있는 한 예의 에 어긋나지 않게 악양소소가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거의 생기(生쏜)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신들의 미래 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상태라면 자신들의 앞날 이 너무나도 뻔하기 때물이었다. 문이 열리면서 마화가 웃음띤 얼굴 로 들어왔다. "요즘 바빠서 자주 찾아오지 못하는구나. 미안해." "괜찮아요, 언니." 마화는 급격하게 생기를 잃어 가는 매영인의 얼굴을 측은한 듯이 바라봤다. 마화 또한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대 해 상당히 고심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마화도 짐작할 수 없었다. 예전엔,그러니까무 림인들, 정확하게 말하면 마교도들의 생리에 대해 잘 몰랐을 때는 분 명하게 말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그녀는 서서히 그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마화는 일부러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 "잘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고마워요, 언니 ." "그건 그렇고,오랜만에 만났으니 같이 술이나 한잔 할까?" "예." 그녀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근심을 날려 버리기 위해 일부러 쾌활한 척 담소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그들은 한결같이 밝은 미래와 또 과거의 즐거웠던 시간들을 재잘거렸지만, 현실을 직시한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리라. 마화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 화기애애한 술자리에서도 매영인과 악양소소는 허리에 차고 있는 검집을 풀지 않았다. * * * 한편 그들과 마찬가지 처지에 놓인 여인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진영 공주. 과거 묵향을 혼내 주려다가 오히려 혼찌검이 났던 장본인 이다. "여봐라,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그녀의 채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그녀를 호위해 왔던 무장 은고개만 푹 숙인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냐? 아니면 골육 상쟁(骨肉相爭)이라도 벌어진 것이냐?" "그렇지 않다면 왜 본녀가 이 별궁에 구금된 것이며,또 별궁을 포위 하고 있는 저 군사들은 또 무엇이냐?속 시원히 대답을 해 보거라." 공주가 계속 채근하자무장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2황야께서 모반을 꾀하셨다 하더이다. 폐하께서 승하하시자마자 역심을 품고 1황야와 3황야,4황야를 암살하셨는데, 엄승 대감께서 이를 포착하시고 보호하시어 5황야만 은 생명을 부지하신 줄로 아옵니다. " 무장의 말에 공주는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사력을 다해 옆에 놓인 탁자에 몸을 의지하며 억지로나마 의연한 척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짙은 회의訓裵疑)가 드러나 있었다 "둘째 오라버니께서 모반을?" 공주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무장은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고 자 책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하는수 없이 말을 이었다. "예,그 때문에 지금 2황야를 지지하는 반역도의 무리들을 응징하기 위해 엄승 대감께서 각 장군들에게 격문(格文)을 돌리고 계십니다. " "설마, 그럴 리가‥‥‥‥ 둘째 오라버니는 절대 모반 같은 것을 꾀할 분이 아니야. 네가 잘못 안 것이 아니냐?' "아니옵니다,공주 마마 가중스럽게도 2황야는 모반에 실패하자자 취를 감추었사온데 , 아마도 ‥‥‥‥ 무장이 잠시 말을 끊자 공주는 그 뒷말을 채근했다. "아마도?" "아마도 2황야를 따르는 군부의 장군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옵니다. " "그렇다면 곧 토벌 당하시겠구나 ‥‥‥‥" 공주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무장은 그녀의 말에 정직하게 답했다. "아니옵니다,공주 마마. 지금 전 군사력은 진천왕의 반란에 투입되 어 있사옵니다. 그런 형편이기에 토벌군을 곧 편성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옵니다. 오히려 잘못하면 2황야의 반란이 성공할지도 모르옵니 다. 그 때문에 엄승 대감께서는 각 장군들에게 2황야 토벌의 격문을 보내고, 각지에서 추가로 군사를 모집하고 계십니다만, 어쩌면 천도 를 해야 할지도‥‥‥‥ 무장의 말에 공주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천도? 천도라고 했느냐?사태가 그 정도로 위증하단 말이냐?" "예." 마지못한 무장의 대답에 공주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 심란한 마음 을 진정시키기 위해 밤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신의 마음속과는 너무 도 다르게 아름답게 빛나는 밤 하늘. 이렇게 마음이 어지러을 때는하 . 늘도 함께 찌푸려 줄 듯도 하건만, 하늘은 인간 세상을 굽어보며 그 유치한 짓거리들은 자신의 구경거리도 안 된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 가고 있었다. 진영 공주는 한껏 밤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밤 하늘이 그 해괴한 무림의 고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누 구와도 타협하지 않으며,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 마교의 고 수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일행에게 위협이 닥칠 때마다 유유히 헤쳐 나갔던 그의 모습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제 일 마지막에 개맞듯이 맞은 것까지도‥‥‥ "괘씸한‥‥‥‥" 그녀의 중얼거림에 무사는 재빨리 귀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 "아무것도 아니다 물러가거라." . "예, 마마." 물러가는 무장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공주는 창문을 통해 궁 을 포위한 병사들을 살폈다. 그녀는 지금 사태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 고 있는지 병사들의 표정을 바라보고 유추해 보았다. 병사들은 외부 의 침입자로부터 그녀를 지키기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외부로 도망 가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 봐도 이번 일이 어떻게 돌 아가는 것인지 알수 있었다. "그때는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편했고, 또 돌아갈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구나 어쩌면 이다지도 의지할 만한 인물이 없을까?" 공주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한탄에 답하는 자신감 넘치는목소리가 있었다. "하하하, 이 세상에 널린 것이 대송의 백성들인데, 왜 사람이 없다고 탓하시옵니까?' 그 목소리는 남자답지 않게 맑고 청아했다. 하지만 공주는 외간 남 자가자신의 처소에 잠입했다는 것에 놀라우선 몸을 사렸다. 곧 정신 을 차린 그녀는 창 밖을 훑어봤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제법 컸기에 밖을 지키고 있는 군졸들이 눈치챘을까 하는 우려감 때문이었다. "누구냐?" 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정체 불명의 괴한은그 목 소리에 답하듯 재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야행(야행을을 하는 주제에 눈 에 잘 뛰는 밝은 청의 를 입은 준수한 사내였다 .사내는 천천히 공주의 앞에 부복했다. "공주마마를 죄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상대의 준수한 외모나 복장, 그리고 깍듯한 예의를 보고 그가 도저 히 악한으로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공주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상대 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소인은 수황련의 우호법 왕길이라 하옵니다." 왕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푸른 옥으로 세밀하게 용의 무늬를 아로새긴 자그마한 패를 품속에서 꺼냈다 수라는 웅혼한 필 치의 글자가 가운데 쓰인 아름다운 물건이었는데, 그는 것을 공주 가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부복한 채 자신의 머리맡에 양손으로 바쳤다. 그패를 잠시 바라본 공주는 황궁 내에서 비밀리에 구전하는 수황련으 표식과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 재차 물었다. "수황련이라 했느냐?" "예." 깊숙이 부복하는 왕길을 바라보며 공주는 사내의 말을 믿어야 하 나,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엇다. 수황련은 황가를 지 키는 비밀 수호 단체로써 태조께서 창건하셨다고 알려져 있었 다. 하지만 여태껏 수황련의활동은 미미했고, 그나마 1백 년쯤 전부 터는 아예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왕련의 무사가 지금, 그것도 자시느이 앞에 모습 을 드러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아무리 패가 있다고 해도 그것 어느 정도 그 모양에 대해 주워 들은 것만 있다면 누구든지 모조품을 만들 수 있고 , 또 수황련이 모습을 감춘 후1백 년동안 그 누구도 그패를 구경하지 못했다. "공주 마마께서 속하를 의심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옵니다. 수황련 은 황가를 지키기 위해 존속하는 단체.요 근래에는 태평세월이었기 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사오나, 작금의 정세를 판단해 보건대. 속하들은 도저히 이 사태를 묵과할 수 없다고 중지를 모았사옵니다." "그렇다면 우선 그대에게 본녀가 한 가지 묻겠다." "예." "본녀는 구중궁궐 에 갇혀 있는 처지. 현 상황이 어찌 돌아 가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대가 속 시원히 답해 보라." 공주의 질문에 왈길은 잠시의 지체도 하지 않고 답했다.여기서 망 설이거나 하는 기색을 보이면 공주가 자신을 의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예, 먼저 간신 업승이 자신의 혈족을 황위에 올릴 욕심으로 대부분 의 황자전하들을 암살했사옵니다. 이때 속하들도 포착하지 못 한 제3의 세력이 2황야 전하를 탈출시켰사온데. 그로 인해 혈족간의 쟁투가 벌어지려 하옵니다." 왕길의 입에서 혹시나 하고 추리하던 줄거리가 그대로 튀어 나오자 정작 놀란 것은 공주였다. "그........ 그대의 말이 사실인가?" "추호도 거짓이 없나이다. 태조 폐하의 뜻은 대송의 번영과 황 실의 융성. 속하들은 더 이상 현실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 고 행동을 개시 하였사옵니다." 공주는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왕길의 등짝을 얄미운 듯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의 노기를 머금은 눈에서는 곧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 다. 왕길이 이렇듯 정곡을 찔러 말하지 않아도, 공주는 현재 돌아가는 궁내의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충'이럴 것이 다' 하고 생각하는 것과 상대의 입에서 확실한 답을 듣는 것은 엄청 난 차이가 있다. 아마도 호위 무장에게서 대력적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공주는 상대 앞에서 못난 꼴을 보였을지도 몰랐다. 공주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형게간이 골 육 상쟁은 언제나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지만, 그 와중에 자신이 끼여있다는 점이 운이 없을 뿐이었다. 공주는 온 정신을 쏟아 마음을 바로잡으며 현실을 직시하려고 노력 했다. 그것만이 자신이 더욱 비참한 지경으로 떨어짖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예, 2황야께서는 아마도 엄승과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이때 그분께서 마음 편히 싸우시려면 엄승의 수중에 인질이 없어야 하옵니다. 다른 분들께옵서도 허락하셨사오니 마마께서 도........" 왕길은 의도적으로 뒷말을 살짝 흐리게 말했다. 오리혀 그편이 더 욱 상대에게 호소력이 클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고, 대충 말해도 못 알 아들을 만큼 멍청한 공주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본녀가 갈 곳은?" "예, 정석대로라면 2황야 전하께로 모셔야 하겠으나, 지금 전하의 행 방이 묘연하시기에 행적이 밝혀질 때까지는 저희들이 모셔야만 하겠 사옵니다. 시간이 별로 없사옵니다. 서둘러 주기시를......." "잠시 기다리거라." 공주는 돌아서며 습관적으로 궁녀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 는 재빨리 자신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소리를 억눌렀다. 이런 일일수록 비밀은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다. 그녀는 궁녀를 부르는 대신 자신이 직접 짐을 꾸렀다. 하지만 그녀 혼자 가야 하는 만큼 그 분량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공주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패물들 중에서 몇몇 아끼던 것들만을 챙겨 넣었다. 왕길은 그녀가 자그마한 주머니 속에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몇 가지 물건들을 서둘러 집어 넣는 모습을 조심스레 바라보닥 천천히 몸 을 일으켜 창 밖을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왕길이 속한 단체는 실패를 용서치 않는 강대한 단체. 그렇기에 왕길은 더욱 조심스로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성공하기 위햐여........ 어두운 밖을 관찰하기 위해 왕길은 기를 끌어모아 시력을 돋우 었고, 그이 눈동자에서는 잠시자만 은근한 마기가 살짝 풍겨 나왔다. 왕길은 눈에 저편에서 자신의 신호를 기다리는 수하들의 모습이 어 렴풋이 보였다. 몇몇 황족들의 실종은 당연히 엄승 나으리에 의해 비밀리에 처리되 었다. 그따위 사실을 발표해 봐야 자신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궁이란 곳 자체가 존귀하신 분들이 사는 곳이기에 그 비 밀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는 중신들이라도" 황후 마마께서는 폐하의 승하 이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슬퍼하시어 만나 뵐 수 없다."는 한마디면 해결 되었다. 그 말을 떠들어 대는 놈들이 엄승의 수하들이었기에 의심을 품는 인물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감히 그것을 확인하려고 모험 을 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지체 높은 집안의 안주인을 외간 남자가 만나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일국의 황족이 싫다는데도 만나려도 드 는 간 큰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든 고관 대작들은 저마다 어느 쪽에 가담하는 편이 좋을지 궁리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 황위를 찬탈하다시피 한 엄승 나으리는 재빨리 자신이 수중에 넣은 암행 감찰 기관인 금위위를 십분 활용해 서 반대 세력 축출에 전력을 기울이는 형편이었기에 딴 곳에 한눈 팔 정신은 더욱 없었다. 그 때문에 평소에는 어느 정도 필요에 의해 정보 수집 활동을 하던 무림이라는, 고도의 무예를 쌓은 위험 인물들이 모 여 있는 집단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틈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기습에기습 모종의 기습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회의가 한창 진행되는 중 뛰어 들어온 흑의인이 급보를 전했다. "홍진막주에게서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섬서 분타를 향해 무 림인으로 보이는 여섯 개 집단, 6천여 명이 이동중이랍니다. 상대방 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접근중이며, 그 선발대 2천이 빠르면 일주일 후 , 늦어도 10일 후에는 도착할 것이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하 명해 주십시오!" 보고를 들은 상관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속마음은 들끓기 시작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무슨 일이란 말인가?상대가 행동을 개 시한 이상,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흑의인의 말이 끝나자 긴탁자의 끝에 앉아 있던 묵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군사의 생각은?" 설무지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원래 계획대로 한다면 섬서 분타를 버려야 옳겠습지요. 어디까지 나 섬서 분타는 미끼였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상대의 움직임이 너무 빠를니다. 그 집단이 정파의 정예라면 섬서 분타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너무 빨리 섬서 분타가 무너진다면 장인걸이 눈치채겠지요." 묵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어찌자는 것이지?" "지원대를 파견해야 합니다. 충분한 시간 동안 섬서 분타를 지켜낼 수 있는‥‥‥ 총타 공격은 늦어도 15일 후에는 시작됩니다. 공격이 시 작되기 전까지 섬서 분타의 알맹이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눈 치채지 못하게 해야만 합니다. " 군사의 말을 듣고 있던 만묘 서생 진천악(진천악)이 수염을 쓰다듬 으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진천악은 과거 마교 수입의 5할 이상 을 거둬 들이던 만악궁을 책임졌을 정도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 다. 그리고 교주 명령에 의해 묵향의 세력에 합류하면서 서열 10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다. "그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량의 전력(전력)을 투입해야 하고, 정작 총타를 공격할 때 그 전력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원래 계 획대로 섬서 분타는 버리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흥, 그 말도 옳군." 묵향의 어정정한 대답에 설무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무지가 막 뭔가 말하려 할 때 다혈질인 천리 독행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 소리에는 노기가 섞여 있었다. "지금은 섬서 분타를 버릴 때가 아닙니다. 섬서 분타가 무너진다면 수하들의 사기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습니다. 마교가 1천 년의 역사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총단이 무너진 적 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천리 독행의 말에 만묘서생이 반박했다. "그거야 총단이 천험의 요새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섬서 분타는 요새도 뭣도 아닙니다 그냥 날파리들을 물러들이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지 않습니까? 접근중인 무림인이야 보나마나 장인걸의 꽝에 속 아 버린 멍청한 정파녀석들이겠죠. 아마도 정파 놈들은 장인결의 꾕에 자극받아 엄선한 정예를투입했 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큰일을 앞두고 구태여 백도의 정예와 드잡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총타의 전력은 엄청납니다. 전력을 분 산해서는 죽도 밥도 안 됨니다. " 만묘 서생의 말을 듣고 있던 고루 혈마 옥관패(옥관패)가 절충안을 내놨다. "꼭 그들과 정면 충돌을 벌일 필요는 없겠지만,놈들에게 너무 손쉽 게 무너지는 것도 좋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본교 분타들의 고수들 이라면 상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최소한 1천여 명은 족히 모을 수 있 을 겁니다. 그들을투입하는 것이‥‥‥" 하지만 옥관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무지가 반박했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들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장인걸의 끄나풀이 섞여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전 마교 분타들 에 금족령을 내려놨는데,그걸 풀 수는 없습니다. 정파에서 정예를 투 입했다고 해도 그늘들은 맹주도 없는 상태에서 모인,우두머리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하죠. 그들을 막기 위해 분타의 힘까지 빌린다면, 장 인걸은 우리들의 주력(주력)이 어디에 있는지 의심할 것이 분명합니 다. " 한참 벌어지는 수하들의 말다툼을 조용히 듣고 있던 묵향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들은 말다툼을 중지하고 묵향을 바라봤다. 어쨌거나 최후의 결정은 우두머리가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 * * 섬서 분타로부터 1백 리(약47킬로미테 정도 떨어진 허름한 관제묘, 바로 이곳이 섬서 분타를 괴멸시키기 위해 투입된 정파의 수뇌부들 이 집결 장소로 잡은 곳이었다. 이들은 장인 걸측에서 퍼뜨린 거짓 정 보에 속아서 집결하게 된 몇몇 정파에서 차출된 정예 무사들이었다. 다섯 개 문파에서 파견된 이들은 각각 그들의 문파를 출발하여 비밀 리에 이동해 이곳에서 합류한 것이다. "이 정보는 정확한가요?" 밝은 빛깔의 청의(청의)를 입은 여인이 너무 자세하게 그려져 있기 에 오히려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듯 지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여인 의 말에 황의(황의)를 입은 사내가 반박했다 "하하하, 이(이) 소저는 본파의 능력을 너무 얕보시는 듯합니다. 이 지도는본파에서 매우 고생하여 입수한 것이오." "하지만 이건 너무 자세한 것 아닌가요?아무리 정보 능력이 우수하 다 해도, 이 정도로 정확한 지도와 자료라면‥‥‥‥함정일 가능성도 생 각할수 있죠." 이 소저의 말에 청의(청의)를 입은 사내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만으로 함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죠. 이 지도를 잘 보면 알 수 있지만, 외부는 이상하리만큼 상세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내 부는 자세한 것 같지만 필요한 것은 다 빠져 있다, 이 말이오. 그리고 내부와 외부를 차단하는 이 진세에 대한 자료를 보면, 살상용 진법이 아니고 사람을 현혹시켜 내부로 들어가는 것만을 막는다고 되어 있소. 살상용 진법이 아닌 만큼 공격해 들어가는 우리들에게 매우 유리한 것 같이 보이는 게 사실이오. 하지만 그 말은 안에서 밖으로 공격해 나을 때도 진세가 걸리적거리지 않아서 매우 빠른 공격이 가능하다 는 뜻이기도 하죠. 그런 진세를 사용하는 경우는 내가 알기로 단 한 가지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소. 안에 엄청난 힘이 감춰져 있을 때!즉 내부의 고수들이 언제든지 밖으로 돌격해 나가는 데는 최적의 진법 이라고 할 수 있소." 청의를 입은 사내가 좌중을 훑어보며 말을 끊자,또 다른 청의의 사 내가 독촉했다. "그렇다면?" "여기 자료를 보면 외부에 거의 4천에 가까운 수비 무사와 하인, 하 녀들이 거주하고 있소. 또 곳곳에 서 있는 망루(망루) 덕분에 기습하 기도 까다롭죠. 여기저기 보루(보루 .화살따위를 쏠 수 있는작은 요새) 의 세밀한 구조를 따져 보면, 이건 흡사 무림의 문파가 아닌 병영을 그려 놓은 것 같소. 이걸 보면 느끼는 것 없소? 이 각각의 보루들은 상호 협조하여 어떤 방향에서 적이 쳐 들어오더라도 화살이나 쇠뇌를 날릴 수 있소. 그 말은‥‥‥‥" 청의를 입은 남자의 말을 한참 듣고 있던 이 소저가 뭔가 깨달았다 는 듯 탄성을 올리며 그 말을 이었다. "아! 외곽을 지키는 무사들 가운데는 고수가 거의 없다는 말이 되겠 군요." "바로 그거요, 이 소저. 이 자료들은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소. 정작 중요한 내부는 자세하게 안 나와 있으니까 말이오. 하지만 잘만 이용 한다면 상대의 외곽 방어선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 런데 문제는 외곽 방어선을 돌파한 후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 는 내부에 어느 정도 수준의 무사들이 대기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요. 여기 있는 자료에 의하면 마교의 정예라고 되어 있소. 정예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수준이죠? 이 자료를 입수하신 언소협?" 언 소협이라고불린 황의를 입은 인물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정예라고만 한다면 상당히 애매한 표현이죠. 마교가 자랑하는자성 만마대가 포진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 염왕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소." "만약에 염왕대가 있다면 이 공격은 너무 무모해요. 염왕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수라 도제 어르신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이 소저의 말에 모두 수긍하는 눈치 였다. 염왕대는 2천여 고수들로 이루어진 마교의 최고 정예로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보다 윗 줄에 놓이는 전력(전력)을 지닌 단체들도 있지만 무림에 공공연히 돌 아다니며 마교의 강대한 힘을 과시한 것은 염왕대까지가 한계였다. 그렇기에 여기에 모인 이들도 염왕대를 최악의 상황으로 잡고 있는 것이다. 너무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 같자 청의를 입은 인물이 주의를 환기 시키려고 애썼다. "자자, 신중하게 생각해 봅시다. 본인은 염왕대가 이곳에 있을 가능 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염왕대를 거느리는 염왕 적자 한 중평은 마교 서열 8위의 뛰어난 고수죠. 그런 인물이 이런 분타에 얽 매여 있을 리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서열 9위의 삼면.인마가 여 기 있을 가능성도 거의 없구요. 있다면 자성 만마대의 일개 지단정도가 고작이겠죠.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소?" "본인도 육 소협과 같은 의견이오.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생각 하오. 이 일대 모든 마교의 혈겁이 바로 이곳 섬서 분타를 기지로 해서 벌어지고 있소. 하지만 혈겁을 당한 곳은 모두 다 작은 군소 방 파들뿐이토. 그 말은 이곳에 그렇게 강한 전력이 없다는 증거라고 본 인은 생각하고 있소. 아마 있다고 한다면 자성 만마대 1천여 명 정도 일 것이라는 게 가장 신빙성 있은 추측이 아닐까요?" 청의를 입은 사내의 말에 백의를 입은 준수한 얼굴의 사내가 고개 를끄덕였다. "본인의 의견도 장소협과 같소." 상당수가 자신의 의견에 찬성하는 듯하자, 육 소협은 좌중을 훑어 본후 말했다. "간단하게 탐색전(탐색전)을 벌여 봅시다. 상대의 대응을 보고 결정 하는 게 좋겠소. 적의 힘이 생각 외로 강하면 재빨리 후퇴하여 수라 도제 어르신과 합류하기로 하죠." 널찍하게 발이 쳐 있는 실내. 그 덕분에 발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발 뒤편에 어렴풋이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부복한 채 공손히 뭔가를 아뢰고 있는 사내. 발 속에 앉아 있는 사람의 반응은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뭐라고요?" 발 속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가면서,짜증을 더해 가자 사내는 식은땀을 흘렸다. 발 뒤편의 여인은 매우무서운 사람이 었기 때문이다 "예, 그것이‥‥‥‥ 젊은 것들이 공명심(공명심)에 눈이 멀어 가지고." "아이고, 머리야‥‥‥‥" 발 뒤쪽에서는한동안아무런 기척이 없더니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묵향이 그곳에 없는 것은 분명하겠죠?"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사내는 머리를 더욱 조아리며 공손하게 대답 했다. "옛!지금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는 파악하기 힘들지만,대략 세 군데 정도로 압축됩니다. 그에게 연락을 보낼까요?" "아니, 연락을 보낼 필요는 없어요. 묵향이 섬서 분타에 없다는 것이 그나마 그 녀석들에게 다행스런 일이군요."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건지 하명해 주십시오." "지금본문에 여력(여력)이 좀 있나요,?" "에‥‥‥‥그러니까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3할은 지금 군부 의 동향을 감시하는 중이고 1할은 묵향을, 1할은 장인걸,3할은 혈교, 남은 1할이 무림의 대략적인 정보를 모으고 있죠. 그 덕분에 이번 일 을 알아내는 게 늦었습니다. " "여력이 거의 만다‥‥‥ 그렇다면, 그냥 되는 대로 놔 두세요. 그런 꼬맹이들 몇 죽는다고 해서 본문에 영향이 미치는 것은 없으니까 말 이죠. 장인걸이 하는 짓에 장단을 맞춰서 무림맹을 자극하고 서문 세 가의 세력을 소모시킬 생각이었는데‥‥‥ 멍청한 놈들! 마교가 요즘 원체 조용하다 보니 실력도 없는 것들까지 마교를 우습게 보는 게 문제예요. 수라 도제와 .합류해야 할 놈들이, 그의 의견은 들어 보지도 않고 앞서 가서는 섬서 분타를 공격하려고 하다니‥‥‥‥ 그런 놈들은 죽어도 싸요!그건 그렇고 수라 도제는?" "예,수라 도제는 서문 세가의 정예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무림맹 및 9 파 1방,그리고 나머지 4대 세가에서 파견한 주력 3천과 합류하여 비 밀리에 이동중입니다. 물론 수라 도제가 이번 정사 대전(정사대전)에 서 대승을 거두기를 무림맹은 원하지 않습죠. 그 때문에 뛰어난 고수 들의 수는 많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수라 도제는 젊은 것들을 기다리다가 그들이 앞서 갔다는 것을 눈 치채고 뒤늦게 이동을 시작했기에, 섬서 분타에는 15일쯤 후에 도착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 "15일 후라‥‥‥ 그때가 기대되는군요. 묵향이 과연 어떤 식으로 대 처할지 말이에요. 참!요즘 혈교의 동태는 어떤가요?" "무림맹에서는 초기에 파견한 2천여 명의 정예 무사 외에도 3천여 명을 추가로 파견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지휘자는 공동파의 장문인 옥진호지요. 옥진호는 이번 혈교와의 전투를 무림 맹주에 즉위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는 모양입니다. 그 때문에 각 문파에서 뛰어난 고수들을 지원받아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있는 것이죠. 벌써 3백이 넘는 강시를 없애 버렸고,6백여 명의 혈교도들을 주살(주살)했다고 합니다. " 총관은 이 보고를 듣고 상관이 혹시나 짜증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안에서 들려 온반응은 정반대였다. "호오,그 녀석도 꽤 의욕적으로 덤비기 시작했군요. 그런 식으로 좀 더 공을 쌓는다면,맹주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죠,호호호." 발 뒤편에서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려 오자,사내는 미간을 약간 찌 푸리며 반박했다. "그렇게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분명 섬서 분타는 젊은 것들이 만만 히 볼 상대는 아닙니다. 하지만 정보에 의하면 그곳은 주력이 빠져 나 간 빛 좋은 개살구고, 덕분에 수라 도제는 정사 대전의 초반을 압승으 로 장식하며 명성을 높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옥진호 또한 지금 상태로 나간다면 차곡차곡 공을 쌓게 되겠죠. 어느 쪽도 문주님께는 불리한 전개입니다. " "걱정하지 말아요. 섬서 분타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테니 까 말이에요. 총관이 생각하듯 마교라는 단체는 그렇게 물컹하지 않 아요. 그건 그렇고 다음 수(수)는 어떤 게 좋을까? 호호호." * * * "어떻게 하시겠어요.?" 음희 설약벽(설약벽)의 물음에도 상대는 곧장 대답을 하지 않고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음희는 상대가 입 을 열기를 천천히 기다렸다. 지옥 혈귀! 이 무서운 명호의 주인공은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마교의 검도 고수(검도고수) 철진악(철 진악)이었다 천진악은 오랜 옛날부터 그녀의 상관이었고, 지금도 그 러했기에 그녀는 끈기 있게 그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이다. 1각(15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냉막해 보이는 그의 입술을 뚫고 얕은 한숨과 함께 억양이 없는 무뚝뚝한 말이 흘러나왔다. "매복 기습을 하기로 하지. 지금 타에 있는 정예는 처음부터 주둔하 던 염왕대 1개 대(대)와 우리가 데려온 2개 대뿐이다 그 인원으로 방 어만 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야." "소녀가 이끌까요?' 음희의 제안에 천진악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본좌가 하기로 하지. 그대는 상황을 잘 살피고 있다가 안에서 치고 나오도록!" 지옥 혈귀 천진악과 음희 설약벽은 과거 마교가 분열되기 전에도 정파 문도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실력 있는 고수들이다. 하 지만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고수고 또 그들에게 3백 명의 염왕대가 있다고 하지만, 수라 도제가 거느린 6천에 달하는 적을 지금의 인원 으로 완전히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이 염왕대 2개 대와 함 께 파견되어 온 것은 섬서 분타가 무너지는 시간을 좀더 늦추기 위함 이었지 적의 섬멸은 바라지도 않았다. "자네는 여기에서 음희를 돕도록." 천진악의 지시를 받은 제13대주 곽철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옛." 염왕대 제13대주 곽철은 제5대주 염상(염란)과 제9대주 왕정왕7방 을 이끌고 나가는 천진악의 믿음직스러운 등판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곽철은 한 시진(2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지휘하던 섬서 분타를 향해 6천의 적이 이동중이라는사실때문에 심한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는 우두머리가 아니었다.자신과 동급 의 인물 둘과 상관 둘이 한 시진 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좀더 홀가분한 마음으로싸울수 있게 된 것이다. 정사 대전 정사 대전의 서막은 정파의 선발대 2천이 섬서 분타를 기습한 것으 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기습이 아니었다. 상대방은 그들 이 올 걸 알고 준비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진하랏." 군데군데 찢어진 청의를 입은 젊은이가 검을 휘두르며 수하들을 독 려했지만,그에 응하는자는 거의 없었다. 매우 교묘하게 위치를 선정 하여 어떤 곳에서 적이 침입해 오더라도 화살이나 연노(연노)를 발사 할 수 있게 구축된 보루들 때문이었다. 연노에 장착되는 화살은 길이가 짧고 가늘기 때문에 강노(강노)처 럼 사정 거리가 길지도, 또 파괴력이 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수의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 탓에 침입자들은 거의 움직 이기가 힘들 정도로 화살 세례를 받고 있었다. 폭포처럼 퍼부어 대는 화살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 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기습 전에 수집한 정보로 모두 널찍한 나무 방패를 하나씩 구해 둔 덕분이었다. 무림인들은 원래 이 렇게 커다란 방패를 가지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간밤에 각자 나무를 잘라서둘러 만든 것이 이렇듯 도움이 되고 있었다. 급조(급조)한 방패라서 방어력은 현저히 떨어졌지만, 뛰어난 무공 을 지니고 있는 그들에게는 그 정도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각자가 들 고 있는 방패에는 적게는 한두 개, 많게는 수십 개씩의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와 같은 형상이었다. 청의를 입은 젊은이 장 소협의 독려에 힘입어 수하들은 수십 개의 화살이 박힌 방패를 의지하여 천천히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 고 장 소협이 거느린 선발대를 뒤따라 각각의 젊은이들이 거느리는 무사들이 속속 진격했다. "적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모두 힘을 내라! 이보게 육 소협!자네는 오른편 보루를!그리고 이 소저는 왼편 보루를 맡아 주시오. 자,돌격 하라." 공격자들은 각 문파의 젊은 기재들인 만큼 왕성한 혈기로 밀어 붙 이며 전투를 점차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쏟아지는 화살 덕 분에 뛰어난 고수가 아닌 자들은 운신하기도 힘이 들었지만 그들은 지속적으로 적을 압박해 들어갔다. 공격자들은 각 보루에서 엄청난 화살비가쏟아지는 것에 대해 오히 려 마음을 놓고 있었다. 마교란 원래 힘을 숭상하는 단순 무식한 단체 였다. 교묘한 진세나 모략을 잘 모르는 단체. 그렇기에 그들에게 강력 한 힘을 지닌 조직이 있다면 초반부터 그들을 투입해 왔을 것이 분명 했다. 그럼으로서 쓸데없는 피해를 줄이고,또 적에게는 더 큰 피해를 입히려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격이 시작되고 나서 거의 2각(37분)이 지나도록 상대는 각 각의 보루를 중심으로 완강한 저항을 하고.있을 뿐, 강력한 고수들을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서서히 밀어 붙이던 공격자 들은 이제는 아예 총력을 기울여 돌진해 들어갔다. 백도의 젊은이들 이 맹렬히 공격해 들어가자 두텁게 보이던 각 보루의 문짝이 파괴되 고 곳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비처럼 쏟 아지던 화살의 양도 점차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쩝,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이제 어떻게 하지?) 공격해 들어오는 상대방의 방패에다가 일부러 화살을 쏘던 황의를 입은 인물이 전음(전음)으로 역시 옆에서 화살을 날리고 있는 동료에 게 물었다. 이곳 섬서 분타의 외곽 방어대는 청, 황, 백,흑색의 네 가 지 색상의 옷을 입었다. 각 색깔에 따라 방어하는 방위(방위)가 달랐 기에 유사시에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또 자신들이 맡은 영역에 서 이탈하는 것을 파악하기 쉬웠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기회를 봐서 슬쩍 후퇴해야지. 그건 그 렇고 왜 이 지경이 되도록 위쪽에서는 지시가 없는 거지?) (그러게 말일세. 설마 여기서 죽으라는 것은 아닐 테지?) 그는 자신들을 이곳 섬서 분타에 밀정으로 박아놓고는 이 위급한 때에 아무런 연락도 없는 얄미운 상관에 대해 욕지거리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이때 옆에서 동료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말을 건네 왔기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봐,저 녀석 좀보라구!) 동료가 가리키는 곳에는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품은 듯 은근슬쩍 힘에 밀리는 척 후퇴하는 놈이 있었다. 그 황의인은 세 백도인의 공격 을 여유 있게 막아 내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뒤로뒤로 물러서는 중이었다. (저놈은 어디에서 들어온 놈이지?) (제길!알 게 뭐야. 지금 남 걱정하게 생겼어?지시가 아직도 없는 걸 보면 적당히 패잔병에 섞여서 이동하라는 말이겠지 뭐. 자,빨리 후퇴 하세. 어쨌든 여기서 살아 남아야 마교놈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지 알 거 아닌가?) 황의인이 화살을 하나씩 날리면서 슬슬 엉덩이를 뒤로 빼기 시작했 을 때,그들은 갑자기 전세(전세)가 뒤집히는 경이적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상대의 주력이 섬서 분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후에야 천진악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원래 이런 식으로 머리를 써야하는 전술을 마교 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건 상대보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 에 있을 때 일이었다. 천진악의 명령에 따라 2백여 명의 혹의 인들이 장검을 뽑아 들고는 안으로 기어들려고 발악을 하는 백도인들의 됫통수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곧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리면서 지독한 살 육전이 벌어졌다. 마침내 정파의 젊은 공격 자들이 우려하던 일,즉 마 교 쪽에서 강력한 고수들을 투입해 왔던 것이다. 이제 공격 자들은 자신들이 보루들을 점령해 나가면서 항아리와 같 은 형상으로 개척해 놓은 통로 속에 갇히고 말았다. 앞은 진세, 좌우 는 상대방의 보루, 뒤에는 악귀와도 갚은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 화 살이 간간이 쏟아지는 가운데 벌어진 육박전은 처절했다. 공격자들 은 자신들의 뒤통수를 향해 들이닥치는 상대의 공격 때문에 처음의 계획대로 후퇴를 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죽자고 발악하는 것뿐 이었다. 거의 2각에 걸친 접전이 벌어진 후에 음희 설약벽이 거느리는 염왕 대 제13대가 가세했다. 그들은 백도인들에게는 장벽이었던 진세를 매우 간단하게 헤치고 밖으로 돌격해 나왔다. 완전히 포위되어 사기 는 땅에 떨어졌고,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발악을 하던 백도인들의 힘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물론 이들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상대방이 거느린 고수의 수가 3백 여 명 정도뿐이라는 것이었다. 힘을 뭉쳐 한곳을 뚫고 나간다면, 일부 는 살아서 도망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미 두 번에 걸쳐 앞뒤로 기습을 당한 초들의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눈에 그 실낱 같은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의 대부분이 이런 대규모 살상극에 익숙하지 않은 애 송이들이라는 것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지휘 체계 를 유지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거나 우왕좌왕하며 발악을 하다가 죽어 갈 뿐이었다.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모든 게 문주님의 예상대로 되었습니다. " 허겁지겁 총관이 달려 들어오며 외치자, 실내의 화초들을 섬세한 손길로 매만지고 있던 옥화 무제 매향옥은 살짝 미간에 주름살을 지 었다. 하지만 평소에 무게 있는 행동을 하던 총관이 저렇게 허둥대는 것을 보면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의 점잖치 못한 행동에 주의를 주지는 않고 천천히 발 뒤편에 가 앉으면서 약간 짜증 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 "뭐가 말인가요?' 옥화 무제가 자리에 앉자 총관은 재빨리 용건을 말했다. "문주님의 예상대로 정파의 선발대는 전멸했습니다!그 소식을 접한 수라 도제는 진격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 예상 외의 정보였다. 옥화 무제는 묵향이 없는 섬서 분타를 접수하 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리고 상당한 피해를 보리라고 예측했다. 이런 식 으로 초전부터 섬서 분타 쪽이 압승을 거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 "전멸?섬서 분타의 피해는?' "첩자의 보고에 의하면,사상자가 5백여 명 정도라고‥‥‥ "사상자가 5백뿐이라고?본녀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예상을 한 적은 없어요. 최소한 그 배는 넘는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묵향은 도대체 섬서 분타에 어느 정도의 전력을 놔 두고 간 거죠?" "예,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천진악과 설약벽, 그리고 3백여 명의 흑의 고수들이 접전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 "음‥‥‥‥그게 묵향이 섬서 분타에 남겨 둔 전력의 전부라고 해도,그 로서는 상당히 무리를 한 게 분명하군요. 천진악과설약벽. 그리고 그 흑의 고수들은 아마도 천랑대일 가능성은 별로 없고, 염왕대일 가능 성이 크겠죠?' "속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첩자에게 그 부분을 더욱 자세히 알아 보라고 지시할까요?' "아니,그럴 필요는 없어요. 염왕대만 해도 본녀로서는 상상 이상이 니까 말이에요. 묵향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그렇게 큰 전력을 뺀다면 이제 벌어질 총단 공격에 커다란 틈이 생길지도 모 르는데‥‥‥‥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 때문에 옥화 무제가 약간은 짜증스럽게 말하자,총관은 자신의 추측을 조심스레 설명했다. "아마도 그 정도 전력은 없어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이 아닐까요?' "글쎄요‥‥‥‥ 섬서 분타가 정사 대전의 초전에서 능력 이상의 대승을 거두자,그 에 충격을 받은 정파는 두 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만반의 대 비를 했다. 섬서 분타가 웬만한 무림의 분타들과 달리 의외로 강력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각종 방어 장비들이 현지의 대장간에서 관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제작되어 정파에 납 품되었다 방어 장비라고 해 봐야 철판을 덧댄 대형 방패라든지, 얄팍한 갑옷 따위가 전부였지 만, 이것은 일반적으로 무림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만큼 정 파에서는 수천의 정예 무사가 모여 있음이 확실 하다고 생각되는 마교의 전진 기지 섬서 분타를 우선적으로 초토화 시키는 것이 이번 정사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열쇠라고 굳게 믿고 있 었다. 정파에서 자신들의 계획대로 섬서 분타 쪽에 막대한 전력을 투입하 자 신이 난 쪽은 마교 총단의 수뇌부들이었다. 이제 어부지리(어부지 리)를 남에게 뺏기지 않도록 준비만 하고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 문이다. "상황은 대단히 고무적 입니다, 교주님 ." 마교 총단의 대 회의실 중간에 놓인 탁자에는 세세하게 그려진 중 원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지도 위에는 빽빽하게 뭔가가 꼽혀 있었 다 혁무상 장로는 길쭉한 지휘봉을 들고 신이 나서 지도의 이곳저곳 을 가리키며 떠들어 댔다. "정사 대전의 초반을 압승으로 장식한 섬서 분타를 없애기 위해 정 파의 각 문파들은 숨겨 뒀던 정예 무사들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비영 대의 최신 정보에 따르면 무당(무당), 화산(화산), 당문(당문), 종남(종 남)에서 5백여 명의 정예를 추가로 차출하여 파견했습니다. 그들의 전진 속도가 엄청난 것으로 볼 때 6일 후에는 수라 도제의 주력과 합 류할 것입니다. " "좋아,자네는 이번 회전에서 묵향과 정파가 공멸(공멸)할 수 있도록 최선을다해 보게나." "예, 지금 각지에서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이간책들을 동원하고 있 습니다. 정파는 섬서 분타를 본교에서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 건설한 교두보(교두보)라고 굳게 믿고 있죠. 게다가 묵향이 초전을 대승으로 장식했으니, 그곳에 본교의 중원 침략을 위한 정예가 주둔중이라는 것을 공포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라 일은 더욱 쉽게 풀리고 있습니 다. 다만 한 가지‥‥‥‥ "뭔가?' "예, 구휘의 무덤에 꼬인 날파리들은 이번 정사 대전에서 빠졌다는 게 홈이지요. 그들은 지금 구휘의 무덤을 두고 심각한 대결 구도를 취 하고 있기에 정사 대전 쪽으로 신경쓸 겨를이 없는 모양입니다. " "크크크, 괜찮아. 송사리 몇 마리쯤 빠져 나갔다 해도 대어(대청.)만 놓치지 않으면 상관없지. 이제 중원이 눈앞에 다가온고 있군. 지금이 중요한 때야. 이 기회를 헛되이 넘기면 두고두고후회하게 되겠지. 자 네의 의견은 어떤가?' "예, 지당하신 생각이십니다. 속하의 얕은 생각으로는 이때를 이용 해서 본교의 고수들을 선동하여 마교 천하를 이룩하기 위한 성전(성 전)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무림 통일은 본교 무사들의 꿈이니 만 큼,현 상황이 얼마나 본교에 유리한지를 잘 설명한다면 원로원도 지 지해 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본교 내부의 의견을 하나로 통일하여 내부로는 더욱 단합을 굳건히 하고, 외부로는 본교가 중원을 제패할 수 있는 주춧돌 을 놓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현재 중립을 지키는 세력들을 충동질하 여 묵향을 더욱 압박하면서,그에 응하지 않는 단체들은 없애 버려야 하지요. 물론 이것은 묵향이 한 짓이라는 충분한 증거 또한 남겨 두어 야 할 것입니다. " "좋은 생각이야. 그대들의 의견은 어떤가?' 장인걸의 말에 수하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속하들도 같은 의견입니다!" 어느 정도 소란이 가라앉자 혁무상은 말을 이었다 '교내의 여론이 일치되면 우선적으로 몇몇 원로원의 노 고수들을 교 외로 내보내야 합니다. " "응? 원로원은 왜 ?' "물론 독수 마제를 고립시키기 위해서죠. 본교의 모든 이목이 무림 통일 쪽으로 기운 상태에서 혈수라(혈수라)와 지령 마객(지령마객)에 게 각각 임무를 주어 교외로 보내는 겁니다. 본교 최대의 숙원을 이루 려는 성전이 선언된 마당에 원로원 전체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 수 몇 명만을 쓰겠다는 데, 독수 마제도 반대할 수는 없겠죠. 그들이 가버린 후 홀로 남은 독수 마제를‥‥‥‥ 크흐흐흐흐." 혁무상은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흐리며 음흥한 웃음을 터뜨렸다. 물 론 그의 말뜻을 못 알아들을 멍청이는 없었기에 이곳에 모인 고수들 도 저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장인걸을 실질적인 힘의 중심으로 마도 천하의 꿈을 이를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들떠 있는 수하들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장인걸은 찬찬히 살펴봤다. 구양 운,소무면, 여진,장영길,진란‥‥ 핵심 고수들의 표정을 훑어 가던 그의 시선은 혁무상의 얼굴에서 멈췄다. 혁무상은 자신의 생각대로 모든 일이 되어 가자 매우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교주에게 칭찬을 받은 데다가 동료 고수들도 자신의 의견을 지지했기에,더욱 기분이 좋을 것이다. 현재 혁무상은 그만큼 장인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그 래서 그런지 장인걸의 얼굴은 다른 수하들처럼 함박꽃 같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지만, 혁무상을 향한 그의 시선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투와 계책 수천 구도 넘는 시신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붉은 놀 덕분에 대자연조차도 그들의 주검에 피눈물을 흘려 주는 듯 보일 정도였다. 황혼을 타고 시체를 배불리 업아 먹은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등지로 날아가는 것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내. 저녁놀의 빛을 받아서 그런지 사내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벌어 진 이틀간에 걸친 격전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오늘이 그 날이군." 검붉은 피가 엉켜 붙어 산뜻하던 청의가 여기저기 찢어진 흑의가 다 되어 있었지만,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믿음직스러운 사내 의 넓은 등을 보며 웃음 짓던 음희는 시선을 돌려 멀리 포진한 정파의 본거지를 바라보며 그의 혼자말에 대꾸했다. "예, 오늘이죠." 하지만 그녀가 애써 생기 있게 보이려 해도 전신에서 퍼져 나토는 피로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사내는 잠시 할말을 잊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음희와 세 명의 수하 무사들을 자랑스러운 듯 바라봤다. 모두 몰 골이 말이 아니었지만,사내의 눈에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늠름 하고 또 가장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 노부조차도 수라 도제를 상대로 이토록 오랫동안 분전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으니 말이다. " "수라 도제 쪽에서도 피해를 줄이려고 애쓰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 이죠." 수라 도제는 선발대 역할을 한 젊은이들 덕분에 상대방에 대해 상 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수라 도제가 알기에 그 젊은이도 개개인 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난 젊은이들이었지만 순식간에 전멸하고 말았 다. 그것은 섬서 분타에 상당한 수준을 갖춘 마교의 정예가 주둔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구사 일생으로 살아 도망친 몇몇 젊은이들 에게 받아 낸 진술과 섬서 분타에 첩자를 파견해 둔 문파들에게서 입 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필승을 얻기 위해 수라도제는 철저한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방패와 갑옷 등 상대의 화살에 서 무사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비들을 완전히 갖추었을 때는 이미 4 일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주야로 작업했지만 겨우 몇 안 되는 대 장간들을 이용해서 2천여 개의 방패와 갑옷을 만들어야 했으니,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사이 수라 도제는 섬서 분타에 집 결되어 있는 마교 세력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대비했다. 이 제 눈앞에 있는 먹이를 최소한의 대가만 지불하고 포식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노회(노회)한 수라 도제는 섬서 분타 전투에서 결코 서두르지 않았 다. 그로서는 확실한 승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선 설서 분 타 외곽을 1천 5백여 고수들로 넓게 포위하고 3천 명의 고수를 집중 투입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처음 젊은 아이들처럼 너무 깊숙 이 들어갔다가 오히려 포위당하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착실하게 퇴로를 유지하면서 한 개씩 한 개씩 보루들을 침몰시켜 나 갔다. 그 때문에 분타의 의당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라는 시간이 필요했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별로 시간 에 쫓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언제 마교 총타에서 구원병이 도 착할지,그것만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잘못하면 마교의 지원 부대에 게 역으로 포위당해서 괴멸당할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라 도제가 천천히 압박해 들어온 덕분에 천진악은 자신에게 부여 받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임무를 완수해 낸 지금 수천에 이르는 의당을 지키던 호위 무사들이 모두 죽거나 항복했으며 염왕대 고수 40여 명이 전사했고, 거의 대부분이 약간씩 부상을 입었다는 것은 천 진악에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총단을 공격하기 전까지 섬서 분 타가 함락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완수해 낸 뒤의 희열만이 있을뿐, 천진악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둠이 내리는 밤 하늘을 올려다봤 다. 이런 밤에 전서구 따위는 날릴 수 없다. 섬서 분타에서 묵향의 세 력이 패퇴했다는 사실을 첩자가 총단에 보고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내일 점심때쯤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악전 고 투하며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철수하자?'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딱딱한 음성에 음희 이하 세 명의 대주 들은 재빨리 응답했다. "옛 ?' 세 명의 대주들은 각기 자신의 수하들을 인솔하기 위해 그들이 포 진하고 있는 구역으로 몸을 날렸다. 1각도 채 지나지 않아 염왕대의 무사들은 훈련받은 대로 비밀 통로를 이용해 섬서 분타에서 탈출하 기 시작했다. "교주님." "아니,지금 들어가시면 안 된다니 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급한 혁무상장로의 목소리와 그를 말리는 호위 무사들의 목소리 에 장인걸은 잠에서 깼다. 그의 옆에는 한중길 전 교주의 손녀인 한영 영이 거의 벌거벗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장인걸은 이불을 끌어다가 그녀의 몸을 덮어 주고 천천히 일어나 문을 열며 약간은 짜증스런 목 소리로물었다. "뭔가?' 혁무상은 교주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급하게 말했다. "몇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기에 늦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찾아뵈 었습니다. " 혁무상이 이렇듯 허등대는 일은 매우 드물었으므로,교주는 불호령 을 내리려다가 노기를 억눌렀다. "말해 보라." 혁무상은 교주의 심기가 어떻든 또렷한 어조로 자신이 온 목적,즉 이비대를 통해 수집한 정보 중에서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다 는 것을 설명했다. 섬서 분타는 거의 3천여 리(약 1천 2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기에 정보가 도착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데다,또 그 것을 취합해서 뭔가 알아내는 데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기에 혁 무상은 이렇듯 늦은 시간에 교주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예,섬서 분타 건인데 말입니다. 섬서 분타에는 천랑대와 염왕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투력은 교주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 다. 섬서 분타는 근본적으로 내당과 의당으로 나뉘어 있고, 그 둘의 경계점은 백영 환흔진(백영 환흔진)이죠. 백영 환혼진(백영환혼진)의 장점은 내부의 강력한 세력을 즉시 외부 로 투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묵향 쪽에 서 주력의 투입을 꺼리고 있습니다. 겨우 수라 도제 따위가 며칠씩이 나 공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서 분타의 전력은 약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거의 대등한,또는 우세한 전투를 펼쳐야 정상이죠. 자신의 모든 힘을 투입한다면,수라 도제까지 포함하여 겨우 5천여 고수들쯤은 하루 저녁에 끝장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묵향이 방 어만하면서 전면전을 망설이고 있느냐하는 거죠." 어느 정도 교주의 흥미를 끄는 주제였기에, 그의 어조는 전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음,자네의 의문이 당연하군. 왜 그럴까? 자네의 생각을 말해 보게." "예,그에 대해서 몇 가지 추리를 해 볼수 있습니다. " "뭔가?' "어떤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가정을 하나 세울 수 있습니다. 전면 전을 벌인다면 피해가 너무 크니까 상대의 마음이 헤이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치는 것이죠." "좋아. 그럴 듯하군. 그리고?' '또 하나는 주력이 섬서 분타에 없기에 물리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주력이 없다?' "예, 어딘가에 주력이 빠져 나가 있다고 볼 수 있죠. 천랑대와 염왕 대,둘을 합해 봐야 3천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모두 무공이 뛰어나니 기척도 없이 움직이기 딱 알맞은 숫자죠." 이제 교주는 짜증스러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혁무상의 말에 귀를 기 울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표는?' "첫째로 꼽을 수 있는 목표는 정파의 후방을 기습하여 재빨리 전투 를 완결짓는 겁니다. 무림맹은 지금 여러 곳에 고수들을 투입했기에 거의 빈 집이나 마찬가지죠. 그 정도 전력을 투입한다면 간단히 승리 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정파가 어떤 한 사람을 구심점으로 두고 움직인다면 매우 효과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능성 있는 추리는 정파의 핵심 문파 몇 군데를 기습하 여 괴멸시키려 한다는 것이죠. 본거지를 공격당한 각 문파의 고수들 은 자연적으로 수라 도제의 전력에서 이탈할 것이고, 결국은 수라 도 제가 이끄는 서문 세가만 남을 겁니다. 또 정예가 다 빠져 나간 서문 세가를 공격하여 괴멸시키려 할 가능 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라 도제는 과연 섬서 분타를 계속 공 격할까요?아니면 서문 세가의 정예들만을 이끌고 서문 세가로 달려 갈까요?' 장인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는 있는 추리야. 어떤 식이 되든 수라 도제는 당황할 것이고, 묵향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후퇴하는 정파의 뒤를 치겠지." '그렇게 된다면 묵향은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도 수라 도제를 격파 할수 있을 겁니다. 저희로서는 별로 탐탁치 않은 전개입니다. " "좋아.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걸로 끝인가?' "아닙니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그것을 아뢰기 위해서 찾아뵌 겁니다. " "뭔가?' "어찌 면 일부 수하들만을 놔두고 총타를 기습하려고 할지도‥‥‥‥ 혁무상의 말에 장인걸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첫 번째 의견에 비해 두 번째 의견은 현실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장인걸은 혁 무상이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너무 가능성이 희박한 말을 하자 돌연 짜증이 솟구쳤다. 하지만 상대는 혁무상 장로였다. 나중에는 없애 버 려야 할 테지만 지금은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는 짜증을 억누 르며 자신이 할수 있는 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마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되네. 묵향이 정파와 전투 를 벌인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어. 아무리 그가 방어만 하고 있 다고 하지만 본거지를 놔 두고 총타를 치기 위해 주력을 빼돌렸을 가 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네, 섬서 분타는 묵향의 본거지. 섬서 분타 를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잃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나? 자네의 그 비약적인 상상력은 좋지만,그렇게 최악의 상황으로 몰 고가는 비생산적인 상상까지 할 필요는 없네, 여태껏 그 어떤 문파들 이 본거지를 비워 두고 싸웠나? 또 섬서 분타와 총타와의 거리는 거의 3천 리.만약 묵향의 세력이 이동을 시작했다면 자네가 거느리는 이비대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지, 대충 싸우는 것도 아니고 총단을 공격하는데 만반의 준비가 없 을 리는 없겠지.그렇다면 여러 가지 장비와 무기들을 지녔을테고,그 런 무리가 3천이나 3천 리를 이동하는데 흔적을 남기지 않을 리가 있 을까?" 교주의 말에 혁무상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사실 묵향에게 기 습 공격을 당한다면 자신의 책임이 매우 클 것이었기 때문이다. 묵향 의 대부대가 3천 리를 이동해 왔는데도 눈치를 못 챘다면,그것은 이 비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 만 혁무상은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추궁당하더라도 대를 위해서 총 단이 기습당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끈질기게 말했다. "그래도혹시 모르니 어느 정도 대비는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좋아.자네의 그 성실함에 답하기 위해서,내 신경쓰기로 함세.아침 에 날이 밝으면 소무면 장로와 여진(여진)장로에게 본좌가 보자고 하 더라고 전해 주게." 혁무상은 교주가 자신의 생각을 망상쯤으로 치부해 버리자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그렇지만 교주가 묵향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경계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했기에 그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 자신이 생각해도 총단이 기습당할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아무 리 마교의 정보력이 멸어진다고는 하지만,이비대는 정파 최강이라는 는 무 영문에는 뒤질지 몰라도 개방보다는 앞선다고 혁무상은 자부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교주님. 미천한 속하의 말에 신경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안녕 히 주무십시오." "자네도 잘 자게나." 교주는 혁무상을 돌려보내고 한영영의 옆에 누워 그녀를 슬며시 끌 어안았다. 이제 그와의 생활에 익숙해진 탓인지 한영영은 잠결에도 익숙한 몸짓으로 그의 품에 안겨 왔다. 부드러운 여체를 느끼며 장인 걸의 언짢았던 마음은 약간 풀어졌다. 그리고 곧 그는 깊은 수면의 세 계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의 수면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총타 공격 마교의 총타가 있는 곳은 대산(대산)이었다. 십만 대산(십만대산)이 라고도 불릴 정도로 수많은 봉우리를 가진 대산은 매우 험악한 산세 를 자랑한다. 그 산세에 의지하여 대산 깊은 곳에 마교가 똬리를 튼 후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마교는 대산 곳곳에 수많은 함정과 기관, 진세를 설치했고, 중요한 교통로에는 요새들을 건설했다. .오늘에 이 르러서 십만 대산은 그야말로 난공 불락의 요새가 되어 있었다. 수많 은 명문 정파들이 한번씩은 자신의 집구석을 털려 보았지만 마교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는데,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난공 불락의 요새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는 무리가 있었 다. 혹의를 입고 오른쪽 어깨와 왼쪽 발에 자그마한 흰색 천을 붙인 무리들이었다. 각자가지고 있는 검(검)은 그을음을 묻혀서 빛이 전혀 반사되지 않았다. 그들은 개개인이 대단히 뛰어난 무공을 지닌 듯 그 움직임은 매우 재빨랐고, 그들의 행동을 눈치챈 몇몇 보초들은 거의 순간적으로 목 숨을 내주어야 했다. 그들이 통로를 개척하자 그들보다 무공이 조금 떨어지는 무리가 그 뒤를 이어 이동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는 도저히 무림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수 천의 무리가 뒤따랐다. 중후한 갑주를 걸치고, 달빛에라도 반사되어 빛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각자 혹색의 펑퍼짐한 옷을 갑주 위에 입고 있 었다. 그들은 갑주의 무게 때문인지 경공술을 쓰는 대신 거대한 말을 타고 있었는데, 말발굽에는 두꺼운 천을 덧대어 발굽 소리가 거의 들 리지 않았다. "술을 ‥‥‥ 드셔도 괜찮겠습니까?" 설무지의 조심스런 물음에 묵향은 입에 대고 있던 술병을 내려 놓 으며 씩 웃었다. "바야흐로 오랫동안준비해 왔던 복수가 이루어지려는 순간인데,축 배(축배)가 빠질 수는 없지. 장인걸 녀석, 뒤통수 얻어 맞은 걸 깨달으 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그 녀석도 나를 함정에 밀어 넣을 때 이런 생각을 했을까?흐흐흐‥‥‥‥" 묵향이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 있을 때 산봉우리 쪽에서 빨간 불빛 이 세 번 반짝이고 사라졌다 웬만해서는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희미했지만 묵향도 설무지도 그 불빛을 놓치지 않았다. 설무지는 바 위 위에 앉아 뭐가 좋은지 흔자 지득거리는 묵향을 향해 공손하게 말 했다. "세 번째 목표인 마천령(마천령)을 점령했다는 보고입니다. 아직까 지도 조용한 걸 보면 천리 독행 장로님이 상당히 분투하고 계신 모양 입니다. " "수석 장로는 어디로 갔나?" "예,차석 장로님과 함께 천랑대 제5대를 거느리고 총타 반대쪽으로 가셨습니다. 잘하면 그분께서 가장 큰 공을 세우실 수 있을 겁니다. " "도주로를 차단하러 갔군." "예." "하지만 쓸데없는 일이야. 도망치려고 하는 극마에 오른 고수를 그 정도 인원으로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수하들도 분투하고 있는 데, 이제 슬슬 본좌도 가 봐야겠군. 자네는 여기 있게나. 전체적인 대 국(대국)을 바라보며 인원을 움직일 인물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묵향의 말에 설무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부교주님 ." 묵향이 앞으로 달려가자 주위에 서 있던 10여 명의 흑의인들이 그 의 뒤를 좇았다. 이들은 묵향의 호위들로 천랑대에서 뽑은 정예였다. * * * "무슨 일이냐?" 요란스레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경악한 장인걸은 잠자리를 박차고 나와 부서질 듯 문을 열고는 호위 무사를 향해 외쳤다. 장인결의 문 앞에 서 있던 호위 무사는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옛,제1급 비상 신호음입니다. 교내에 적이 침입한 모양입니다. " "적이라고? 제길!어떤 미친 녀석이 감히 1천 년 동한 한 번도 외인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 이곳을 넘본단 말아냐? 지금 당장 혁무상 장로 를불러라." "옛 ?" 급히 답한 호위 무사는 재빨리 혁무상장로의 거처로 뛰어갔다. 호위 무사가 달려나간 후 반 각도 지나지 않아 엄청난 마기를 뿜어 내는 인물이 장인걸 앞에 나타났다. 교주 독립 호위대의 대장인 마혈 검귀 왕천이었다. 왕천은 도착과 동시에 3교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독립 호위 대원들을 불러 모았고,교주의 원거리 호위대인 수마대에 특급 경계령을 내렸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학살 인도 박용 이 거느리는 교주 직속의 무력 단체인 사사혈시마대에도 전령을 보냈다. 교내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천마 혈검대가 교내에 없으니, 두 번째 전투력을 지닌 수라 마참대는 아마도 소무면 장로의 지휘 아래 적이 침입한 곳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 번째 전투력을 지닌 사사 혈시 마대를 불러 들여 교주가 기거하는 천마 대전을 호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장인걸이 팔장을 끼고 묵묵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도 사 태는 매우 급박하게 움직였다. 박용이 끌고온 사사혈시마대가 천마 대전의 외곽에 포진했고, 흑수천마 여진이 거느리는호법원의 고수들 이 재빨리 장인걸의 가족들을 천마 대전으로 모아 들였다. 장인걸은 두 명의 처와 열두 명의 첩을 거느렸고,서른 명에 가까운 자식들과 손자,손녀들이 있었다. 그들을 빠른 시간 내에 끌어 모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호법원의 고수들은 눈깜짝할 사이 에 그 일을 완수해 냈다. 그러는사이 장인걸에게 전령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적의 주력은 북쪽에서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현재 6진부터 3 진까지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진입중입니다. 속하가 달려올 때 삼면 인마 장로께서 수라 마참대를 직접 거느리고 그곳으로 직행하고 계 셨습니다. " 전령은 혁무상 장로에게 몇 가지 지시를 받고 전장으로 다시 달려 갔다. 첫 번째 전령의 보고를 들은 장인걸은 내일 아침이 되면 이번 습격을 잘 막아 낸 소무면 장로에게 보검을 한 자루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무면 장로가 거느린 수라 마참대라면 상대를 충분히 격 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채 반각도 지나지 않아두 번째 전령이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북동쪽71서 자성 만마대와 적이 충돌했습니다 " 혁무상은 신중한 태도로 전령의 보고를 들으며 머리를 회전시켰다. "놈들이 양동 작전(양동작전)을 펼치는 것이군." "놈들의 수는?" "옛! 대략 7천 정도입니다. " "뭣이,7천? 이런 험준한 요새를 향해 7천이나 투입했다는 말이냐? 정파놈들이 아무리 대가리가 굳은 놈들이라고 해도, 변변한 방어 장 비도 없이 그 정도 인원을 이런 험준한 곳에 투입할 정도로 멍청하지 는 않을 텐데‥‥‥‥" 무림인들은 원래가 갑주나 방패 따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둘의 사용 방법이나 효능을 몰라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걸리적 거 리기 때문이었다. 또 그런 것을 가지고 이동한다면 관군이 가만히 있 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무림인들의 표준 장비는 장식용으로 인정되는 검(검)이나 도(도) 정도가 한계였다. 창을 사용하는 인물들은 보통 서너 토막 친 칼을 가지고 다니다가 적이 나타났을 때만 연결해서 사용했다. 아무리 무림의 일을 관이 묵인해 준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무림인인 척하고 중무장을 한 군대가 침입해 올 가능성이 있 는 한무림인은 절대로 전투용 중장비를휴대할 수 없었다. 전령은 곧 혁무상의 의문에 답했다. "무영 신마 장로께서는 상대가 아무래도 무림인이기보다는 군대(군 대)인 것 같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올지 하명해 주 십시오." "군대 ?" "옛! 강노(강노)와 강궁(강궁)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매우 치밀한 움 직임을 보입니다. 거대한 마상용 장도(장도)에 중갑주를 입은 것으로 보아 무림인은 아닌 듯 생각됩니다. " 한밤의 기습이었기에 상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기는 힘들 었다. 하지만 무림인들과 관군들은 그 싸우는 방식에서 상당한 차이 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군대는 기계 장치를 이용해 수 개에서 수십 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장치인 노(노)라든지, 투석기, 충차(충차 . 성문을 부수는 데 애용됨) 등 의 효과적인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했고, 개개인의 무술 실력보다는 집단적인 힘을 강조했다. 그 때문에 각종 진법(진법)이나 병법(병법) 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전체적인 틀보다는 개개인의 두술 실력을 중시 했다. 칠성 검진 따위의 각종 진세가 발전하기도 했지만,군대의 진법 과는 달리 개개인의 무술 실력에 따른 융통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상 대방이 혼자서만 움직인다면 몰라도 수백, 아니 수천 명이 이동하면 서 전투를 한다면 서로의 차이점을 분간해 내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 었다. 상대는 수천 명이었고, 또 그들이 집단적으로 공격해 오는 모양새 를 보고 무영 신마는 곧 그들이 군인들이라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전령의 보고를 들은 장인걸은 의문에 빠져 들었다. "군대가 왜‥‥‥?" 장인걸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혁무상은 재빨리 혓바닥을 놀렸다. "이 알을 ‥‥ 너는곧장 원로원에 보고하라.본교의 사활이 걸린문 제다. " "옛 !" 전령이 원로원으로 달려가는 것을 볼 겨를도 없이 혁무상은 짙은 수염을 길러설지 퇴폐적인 인상을 지닌,50대 초반의 인물에게 고개 를 돌렸다. "박용 대주는 사사 혈시 마대 5백 명 정도를 거느리고 가서 무영 신 마 장로를 도와주시오. 상대가 관군이라면 귀혼 강신 대법을 익힌 사 사 혈시 마대가 더 효과적일 것이오." "알겠습니다. " * * * 갑작스런 기습으로 마교 총타가 갈팡질팡하는 동안 마교의 중심부 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진격해 들어가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을 막 아서는 인물들이라고 해 봐야 총타 외곽 호위 무사들 정도로,그 실력 이 많이 떨어졌기에 이들을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기습해서 들어오는 무리들은 다름 아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솥밥을 먹던,호위 무사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정예들. 어디에 기관 장치가 있고,또 어디가 매복하기 좋은지를 환히 알고 있었다. 또 외팍 호위 무사들이 경계를 위해 주둔한 위치까지도. 그렇기에 외곽 호위진은 매우 빠른 시간 안에 무너져 버렸고, 침입 자를 포착한 것은 적이 중심부에 근접해 들어왔을 때였다. 서둘러 출 동한다고 했지만, 소무면 장로의 수라 마참대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 하기도 전에 적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칼부림이 벌어지고, 맹렬한 육박전이 시작되었다. 소무면 장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상대가 정파의 무공이 아닌 마교의,그 것도 상승의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소무면 장로는 제발 자신의 짐작이 틀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짐작은 점점 현실로 나타났다. 저쪽에서 자신도 익히 잘 아는 인물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색 옷을 입은,적당히 마른 체구 의 인물. 격전이 벌어지는 사이를 느긋하게 걸어왔지만,그를 막는자 는 없었다. 어쩌다 병장기나 강기의 파편이 그쪽으로 날아갔지만 그의 몸에 어 떤 피해도 줄 수 없었다. 오히려 검을 날렸던 사람들의 무기가 뭔가에 막힌 듯 튕겨 나가며 자세가 허물어졌고, 여태껏 싸우던 상대방에게 목숨을 날렸다. "부,부교주님 ." 경악감에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소무면 장로의 입술사이로 새 어 나왔다. 하지만 그에 답하는 목소리는 소무면 장로를 놀리는 듯 부 드러웠다. "오랜만이군, 소무면 장로." "어떻게, 어떻게‥‥‥‥" 도저히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기에 소 무면 장로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아군일 때는 매우 든든하지 만,그 반대로 적일 때는 최악의 상대. 마교 1천 년 역사를 통틀어 최 강의 고수가 자신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소무면 장로가 검을 뽑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서 있자 묵 향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본좌는 본교의 율법을 바로 세우려고 왔다. 자네는 본교의 율법을 수호해야 할 아홉 명의 장로 중 하나. 선택은 자네에게 달려 있네. 어 떻게 할 텐가?" 소무면 장로는 재빨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묵향을 바라봤다. 소무면 장로와 눈이 마주치면서 묵향은 그가 더 이상 자신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은 죽음을 각오 한 눈빛이었다. "기어이 피를 볼 생각인가?" 묵향은 상대가 먼저 손을 써 오기를 기다렸지만,소무면 장로는 검 을 뽑는 대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율법을 바로 세운다 하시면 어떤 뜻입니까?" 소무면 장로의 말에 묵향은 나지 막하지만 힘있게 답했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비열하게 암습을 해서 본좌를 해치고,또 교주 를 해친 인물을 척살하고자 한다. " "그 다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그것은 엄연한 개인적인 복수. 개인 적인 복수를 가지고 율법을 운운하실 수는 없습니다. 복수 후에는 어 쩌실 겁니까?" "강자지존(강자지존)!" 묵향의 대답은 단 한마디. 하지만 그 짧은 한마디는 많은 뜻을 내포 하고 있었다. 소무면 장로의 머릿속에는 마교에서 자라면서 뿌리 깊이 박힌 하나 의 이상이 있었다. 바로 그것은 힘,순수한 힘에 대한 열정이었다. 마 교에서 가장 인망이 높은 소무면 장로가 장인걸의 독주를 제지하지 않았던 것도, 마교의 이상에 전대 교주였던 한중길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한중길 교주가 소무면이 지닌 이상에 맞 게 행동했다면,마교는 일찌감치 그 강대한 무력으로 마도 천하를 이 룩하기 위한 어떤 행동에 들어갔어야 했다. 묵향은 다른 의미에서 소무면 장로의 이상에 맞지 않았다. 묵향은 힘을 추구하기는 하되,오로지 개인적인 힘에 국한시켰다. 사람이 발 휘하는 힘은 하나 더하기 하나를 했을 때 열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 던가?그런데도 묵향은 집단의 힘을 등한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수련 에만 빠져 들며,마교가 추구하는 힘의 율법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묵향이 지금 '강자지존'을 들고나왔다 그말은 곧 마교라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뜻. 그가 교주가 된다면 더 이상 마교 내의 반목은 있을 수 없었고, 또 그를 중심으로 마교도들은 빠른 시간 안에 단합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단합된 힘을 이용하며 마도 천하를 이룩할 가능성이 최소한 장인걸보다는 높았다. 그는 강했기 때문이다. "전투를 중지하랏!" 웅후한 음성으로 외친 소무면 장로의 몸은 마치 힘이 다해 버린 듯 천천히 아래로 무너졌다. 소무면 장로는 무릎을 꿇고 검을 뽑아 무릎 앞쪽 땅 속 깊이 박아 넣었다. 그는 검 손잡이를 잡은 채 포권하는 듯 한 형상으로 정중하게 말했다. "속하,본교의 장로로서 율법을 바로 세우지 못한 죄,처분을 기다립 니다. " 깊은 공력이 내재된 소무면 장로의 음성은 벼락치듯 아수라장을 관 통했고,곧 싸움을 멈췄다. 수라 마참대 소속의 고수들은 그들의 대주 인 삼면 인마 소추및 장로의 행색을 보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재 빨리 눈치챘다. 자신들의 우두머리는 더 이상싸움을 원하지 않는 것 이다. 그들은 약간 허탈한 표정 이 었지만 묵묵히 소무면 장로와 같은 행동 을 했다. 상대가 검으로 친다면 조용히 죽어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었다. 하지만 묵향이 거느린 고수들은 재빨리 무릎 꿇은 그들의 옆을 지나쳐 들어갔다. 처음부터 묵향이 노린 목표물은 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 상자들을 돌보라. 그들은 이렇듯 헛되이 피를 흘리도록 키워지지 는 않았다. 그들은 장차 본교를 위해 더욱 값진 피를 흘릴 수 있을 것 이다. " 묵향은 소무면 장로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빨리 돌아서서 수하들을 뒤따랐다. 묵향이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소무면 장로의 숙여진 고개 는 들릴 줄을 몰랐다. "소무면 장로께서 개선하시는 모양입니다. " 멀리서 엄청난 마기를 피워 올리는 고수들이 달려 올라왔다. 그것 을 보고수마대의 고수하나가 내뱉은 말이었다. * * * 닭들이 모인 곳에 오리 한 마리가 있다면 금세 알아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묵향이나 장인걸 둘다 마교의 중추적 인물들 이었고 그들의 수하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이 정파라면 그 풍기는 기운이나 무공 따위를 보고 적이라는 것을 곧 알아챘겠지만 엄청난 경공술을 발휘하며 돌진해 오는 인물들은 틀림없는 마교의 무공을 썼고 또 막강한 마기를 뿜어 냈다. 소무면 장로가 거느린 수라 마참대의 고수들은 천랑대의 무사들보 다 한 끗발 높은 실력을 가졌다. 그 때문에 천랑 대원들이 뿜어 내는 마기는 약간 미약하겠지만, 그래도 수라 마참대와 구분하기 힘들 만 큼 엇비슷했다. 따라서 상대가 적이라는 것을 알아채기는 너무나 힘 들었다. 천랑대가 접근해 올 때 박용은 5백여 명의 사사 혈시 마대 대원들을 거느리고 자성 만마대를 지원하기 위해 출발하고 있었다. 개선해서 도착한다고 생각하던 무리와 이제 전장으로 떠나는 무리는 한순간 섞일 수밖에 없었고,바로그때 칼부림이 시작되었다. 수십 명에 이르는 사사 혈시 마대 대원들이 기습 공격을 받고 허무 하게 머리통이 깨져서 뒹굴 때에야 장인걸 쪽에서는 그들이 아군이 아니라 적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사사 혈시 마대 5백여 명과 천랑대 8 백여 명은 치열한 난타전을 벌였다. "뭣들 하는 짓이냐?" 정말이지 고막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 때문에 몇몇 무공이 약한 시비들이 기절해 버렸을 정도였지만, 이곳 에는 그 정도에 타격을 받을 만큼 나약한 인물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괴성 속에 내재된 막강한 마기에 모두 움찔 했고,혼전으로 치달으려 던 싸움이 일순 멈춘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한쪽에서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10 여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이건 뭣 하는 짓이야?겨우 집안싸움 때문에 본좌를 부른 것이냐?" 사내는 매서운표정으로 장인걸을 쏘아보며 외쳤다. 하지만 장인걸 은 사내에게 고개를 돌릴 정신이 없었다. 저 멀리서 히죽 웃고 있는 흑의 사내를 쏘아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좌의 말이 말같이 안 들리는가,교주?" "예?예,태상교주님." 장인걸은 시간을 끌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도 그의 머릿속은 너무나 혼란스러웠 고,조금이라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험험, 원로원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변절자를 처리해 달라는 부탁 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 "본교의 율법에 따라 원로원은 본교의 흥망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일에도 참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테지?' 이때 혁무상 장로가 재빨리 끼여들었다. "예,그러니까 원로원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지요. 태상 교주님,본교 내의 권력 다툼에서 원로원이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속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묵향 부교주측에서 군대를 동원했다면 말이 다르 지 않겠습니까?본교의 일에 외부 세력을 개입시키는 자는 율법에도 나와 있듯 참형(신형)에 해당합니다. " "어디에 군대가 있다는 말이냐? 본좌의 눈에 외인(외인)은 보이지 않는데?' "맹호령(맹호령) 쪽에서 약 7천의 군세를 무영 신마 장로가 막고 있 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외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저 녀석의 말이 사실이냐?' 태상교주의 말에 묵향은 슬쩍 비웃음을 흘렸다. "반쯤은." "네놈은 외세를 개입시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냐?' "아니,군대를 끌어 들였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지. 내 수하들의 상당 수는 해체된 찬황 혹풍단의 무사들이니까 말이오. 그건 그렇고, 태상 교주는 빠지지오. 이건 장인걸과 본좌사이의 일이니." 묵향의 반말 짓거리에 분노를 터뜨린 것은 태상 교주가 아닌 그를 수행하여 함께 온 두 노인들이었다. "닥쳐라, 은퇴하셨다고는 하지만 네녀석이 얕잡아 볼 정도로 태상 교주님의 권세가 낮지는 않다. " 하지만 그들의 노성은 태상 교주에 의해 가로막혔다. "조용해야 할 것은 자네들이야. 본교의 율법은 바로 힘 저 아이의 무공이 본좌보다 강하니,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찬황 흑풍단은 이미 해체되어 버린 단체 그들을 흡수했다면 외세를 개입시킨 것은 아니지. 원로원은 중립을 선언하겠으니 둘이서 잘 해결해 보게나." 태상 교주는 마치 그곳에서 지독한 악취가 품기기나 하는 듯 서둘 러 떠나 버렸다. 이제 방해자는 없어졌지만 장인걸의 수하들과 묵향의 수하들은 서 로 병장기를 들고 상대를 노려볼 뿐 본격적인 행동을 시작하지는 않 았다. 이때 묵향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수하들을 쓸데없이 희생 시키느니 1대1 대결이 좋지 않겠소?" 묵향과의 거리는 10장(30미터). 이 정도 거리에서는 암습 따위는 할 수도 없었다. 서로간의 거리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장인걸은 묵 향이 더 이상 접근하지 않자 한숨을 푹 쉬면서 어기 전성(어기전성)으 로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의 여지를 남겨 두기 위해서 였다. (대결할 필요도 없이 본좌가 졌네. 사실 자네가 이렇듯 빨리 손을 써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지. 나는 율법에 따라 은퇴하겠네. 패자에 게 더 이상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겠나?) 묵향은 장인걸의 말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손쉽게 발을 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본좌를 건드린 이상 저세상에 가서 휴식을 취하라구." 그와 동시에 묵향의 몸이 날아올랐다. 장인걸은 천마 혈검대도 없는 상황에서 묵향과 정면 대결을 벌인다 는 것이 자살 행위라는 것을 알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것은 다만 말 뿐, 이 상황을 넘기기만 한다면 구양운 장로와 합류하여 다음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다. 마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인물에게 더 이상 위해를가 하지 않았기에, '은퇴 선언 은 장인걸이 택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하 지만 묵향은 자신을 놓아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모양이니 장인 걸로서는 또 다른 방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쳐랏!" "우와아아아아아." 장인결의 명령에 따라 마교의 고수들이 묵향을 공격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들은 장인걸이 묵향을 상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사투를 벌 이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묵향은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 오는 고수들을 베면서 장인걸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장인걸은 묵 향과 정면으로 검을 섞으려고 들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는 달 려오는 묵향을 향해 최대한 공력을 끌어 모아 흑살 마장(흑살마장)을 한방 날린 후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강자의 자리 거대한 연무장(연무장)에는 높은 단상이 마련되었고, 그 중간에 호 화로운 호피 의자를 놓았다. 단상 앞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무릎을 꿇 고 앉아 있는데,그 중 일부는 튼튼한 강철 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 외 에 부 상자들은 그들의 뒤에 앉아 있었고, 무릎 꿇고 앉을 수 없을 정 도로 중상을 당한 인물들은 제일 뒤쪽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포위하듯 또 다른고수들이 무장을 한 채 양옆에 도열해 있었다. 묵향은 검은 비단에 황금빛 용과 은빛 호랑이가 싸우는 형상이 수 놓인 호화로운 옷을 입고 천천히 걸어나와 단상 위의 호피 의자에 앉 았다. 이 호화로운 옷은 마교의 교주가 즉위식을 할 때 단 한 번 입는 옷으로, 식이 끝나면 불살라져 그 짧은 생명을 마쳤다. 이 값비싼 옷 을 태우는 것은,마교의 교주가 되기 위해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며 피를 흘렸지만 이제 더 이상의 혼란은 없기를 바라는,상징적 의미를 지닌 행위 였다. "삼면 인마 장로,!" 소무면 장로는 부름을 듣고 천천히 일어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대는 본좌를 도와 마도 천하의 길을 함께 할 것으로 믿네. 검을 가져오라." 수하 하나가 소무면 장로가 평소에 애용하던 검, 즉 그가 장로로 즉 위하면서 교주에게서 받았던 검을 가져와 묵향에게 바쳤다. 예로부 터 마교에서는 교주의 신물(신물)인 수라 마검(수라마검)만은 못하지 만 그에 준할 정도로 대단히 뛰어난 검 아홉 자루를 선택하여 장로의 신물로 삼았다. 그것은 교주가 즉위할 때,또는 새로운 장로가 임명될 때마다 다시 받게 된다 새로운 교주가 즉위할 때가 되면 장로들은 자신이 가진 검을 반납했고, 그 검은 즉위식 때 다시 지급되었다. 이때 해로운 교 주에게서 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장로에서 해임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소무면 장로는 새로운 교주에게서 검을 받아 들어 그것을 소중히 허리에 찼다 묵향은 그 모습을 잔잔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자네에게는 예전과 같이 수라 마참대를 맡기겠네." "감읍할 따름입니다. " ' 묵향은 정중히 허리를 굽히는 소무면 장로에게서 시선을 돌려 무영 신마를 바라봤다. 무영 신마는 장인걸이 집권한 후 두각을 나타내어 자성 만마대의 대주가 된 신진 고수였다. 무영 신마는 개인적인 무공 의 성취에 있어서는 조금 떨어졌지만 병서를 많이 읽은,마교 고수로 서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이번에 벌어진 집단 전투에서 상당 한 전과를 올렸다. 물론 그 때문에 묵향 쪽에서는 고생을 단단히 했지 만 말이다. 무영 신마는 장인걸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기 직전까지 외곽호위 무사들과 자성 만마대를 통솔하여 흑풍대와 혈전을 벌였다. 자성 만 마대 개개인의 무공은 흑풍대보다 훨씬 윗줄이었지만, 흑풍대는 각 종 공격 및 방어 장비를 충분히 갖춘 상태였기에 간신히 수평을 이를 수 있었다. 좀더 오랜 시간 전투가 계속되었다면 인원과 개개인의 무공이 월등 히 우세한 무영 신마 쪽의 승리로 결판이 났겠지만,현실은 그렇지 못 했다. 치열한사투 끝에 어느 정도우위를 차지했을 때 장인걸이 탈출 했다는 보고를 접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전투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수하들을 이끌어 재빨리 전장을 이탈했다. 무릇 정예라는 칭호를 받을 가치가 있는 무리는 그 진격과 후퇴 ,특히 후퇴할 때의 속도가 엄청나다. 관지는 상대가 총공 세를 취할 듯 진을 전개하다가 어느 순간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 일순 당황했다. 그들이 후퇴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관지는 재빨리 묵 향에게 전령을 보냈다. 묵향은 무영 신마가 거느린 자성 만마대를 포획하기 위해 재빨리 천랑대를 파견했고, 힘들게 그들을 찾아냈다. 만약 자성 만마대보다 윗줄에 놓이는 천람대를 파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사히 장인걸 과 합류했을지도 몰랐다. 묵향은 씁쓸하게 웃으며 무영 신마를 바라봤다. 장인걸의 탈출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앞에 포박되어 있는 무영 신마였 던 것이다. 자성 만마대를 잡기 위해 묵향은 천랑대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장인걸을 추격하는 포위망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 던 것이다. 그사이로 장인걸은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무영 신마는 묵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말 한마디에 자신의 목숨 과 어쩌면 수하들의 목숨까지도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장인걸 교주를 향한 의리는 충분히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좋아. 관지와 천리 독행이 자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자네 덕분에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말이야." "어쩔 수 없었습니다. " 묵향은 빙긋이 웃더니 그에게도 검을 건넸다. 묵향은 정통 마공을 익힌 인물들은 대부분 받아들였다. 혁무상 장 로만 빼고. 그는 오마 분시(오마분시)당하는 것으로 긴 생애를 마쳤다. 장인걸이 탈출에 성공했기에 사사 혈시 마대를 비롯한 장인걸이 키 운 고수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그리고 장인결의 혈족들 또한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다. 혈족을 살려 두지 않는 것이 마교의 불문율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새로운 교주의 탄생으로 인해 부와 권력이 상승한 인물들도 있었지만,목숨을 바친 자또한 수없이 많았다. * * * 쭈글쭈글한 피부,하나뿐인 정한 눈동자. 어디를 봐도 이제 죽을 날 이 가까운 초로의 노인이었다 이렇듯 한눈에 보기만 해도 아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인물의 비파골에는 청직한 쇠사슬이 꿰어 있 었고,하나뿐인 다리에도 굵직한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허약해 뵈는 노인을 꼭 이렇게나 학대를 할 필요가 있을까?하지만 그의 지나온 삶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조심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고 이구 동성으로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중원 최강의 문파 인 마교의 전 교주였기 때문이다. 묵향은 한때 태산과 같이 거대하고 태양처럼 강한존재로 우러러봤 던 한 무인의 비참한 말로에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하지만 묵 향은 일부러 더욱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랜만이구려,교주." 교주는 환골 탈태(환골탈태) 했을 정도로 엄청난 수련을 쌓은 육체 를 지니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내공이 상실되면서 급속하게 노화가 진행되었다. 교주는 하나뿐인 눈을 반쯤 감고 있다가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시선을 돌렸다. "쿨룩쿨룩,자네로군. 이꼴이 된 나를 보니 꽤 기분이 삼삼할 거야. 안 그런가?" 묵향은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그렇지는 않소,교주 한때는 당신을 찢어 죽이고 싶기도 했지만 말 이오." "크흐흐흐,쿨룩쿨룩!자네는 언제나 정직했지. 그런 자네를 믿었어 야 했지만,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네 쿨룩, 왜냐하면 나 자신이 거짓 투성이였기에 상대방도 거짓 투성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남을 언 제나 속이는자는 남을 절대로 믿지 못하지,쿨룩." 묵향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교주가 지금 하는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오. 내가 알고 있던 교주는 배신의 그 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정직했소." "크흐흐,쿨럭쿨럭!그래서 자네는 좀더 배워야 하는 거야. 인간이란 것들은 간사하고 거짓을 좋아하지.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을 것 같으 면 배신을 밥먹듯하는 거야. 지금의 내 꼴을 보면 알지 않나?" "최소한 내가 보기에 교주는 그렇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 교주의 자리를 나에게 물려 주려고까지 했으면서 나를 경계했느냐는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 았을 텐데‥‥‥‥" 그 말에 교주는 피식 웃었다. "그걸 이해 못 하다니, 멍청한 친구군. 쿨룩! 나는 처음부터 자네나 장인걸에게 교주 자리를 물려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어. 자네나 그 녀석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었을 뿐이지. 자네는 처음부터 교주가 될 욕심이 없었지만,쿨룩쿨룩! 장인걸 녀 석은 교활하게도 나를 멋지게 속였지. 카악!그놈이 교주 자리를 욕심 낸다는 사실을 본좌가 미리 알았다면 이 자리에 묶여 있을 놈은 장인 걸이었을 거야. 대답이 되었나?" "어느 정도는." "이제 궁금증이 풀렸다면 나에게 안식을 주게나. 그리고 저 친구에 게도." 교주는 사슬에 묶인 왼팔을 슬쩍 들어 자신 못지 않게 참혹한 모습 으로 묶여 있는 노인을 가리켰다. "더 이상 삶을 연장한다는 것은 나나, 저 친구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야." "교주는 살고 싶지 않소?그 전의 내공을 되살려 줄 수도 있소. 물론 신체적인 문제는 알아서 해결해야 하겠지만 팔이나 눈, 다리가 없는 무사들도 알다시피 매우 많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교주에 게 달린 것이겠지요." 교주는 허옇게 변해 가는 머리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아니, 다 필요 없네. 백수의 왕 호랑이는 호랑이의 삶을 살아야 행 복한 거야. 나에게 더 이상 구차한 삶을 강요하지는 말아주게나." "장인걸은 죽지 않고 도망쳤소. 복수를 하고 싶지 않소?' 교주는 다시 한 번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건 자네에게 떠넘기기로 하지. 나를 교활하다고 생각하지는 말게 나. 이 정도 세상을 살다보면 생겨나는 지혜니까 말이야, 쿨룩쿨룩. 이제 말하기도 힘들군. 마지막은 자네의 손으로 해 주겠나?" "잘 가시오, 교주." "자네도 잘 있게나." 교주의 죽음은 순간적이면서도 평온한 것이었다. 묵혼검은 주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얼기설기 얽혀 있는 쇠사슬과 함께 교주의 머리를 깨끗하게 몸통에서 분리시켜 버렸다. 묵향은 묵흔검을 검집에 집어 넣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연히 한쪽 구석에 떨어진 머리를 바라봤다. 잠시 후 묵향은 더욱 딱딱해진 음성 으로 뒤에 서 있는 수하들에게 명했다 "율법대로 교주에 대한 예를 다하여 성대히 장사지 내도록," "존명." "그리고 저분에게도 안식을 드려라. 한때 정도 무림의 주인이셨던 분 이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처리하도록." "존명." 묵향이 돌아서서 세 발자국도 걷기 전에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제자리 찾기 당황,당혹, 황당. 그 어떤 단어로도 지금 수라 도제의 마음을 표현 하기는 힘들었다. 만반의 준비를 다하여 총공격을 가하고 보니 상대 는 이미 오래 전에 도망치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당황하기는 질문을 받은 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연히 가주인 수라 도제보다는 책임감의 무게를 덜 느꼈기에 그들은 어느정도 정 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말라붙은 검붉은 피가 군데군데 묻었지만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옅은 청의를 입은,50대 중반쯤 되는 인물의 대답은 왜나 빨리 튀어나왔다. "적의 간계에 걸린 것 같습니다. 가주님, 빨리 결정을 내리십시오. 놈들에게 역으로 포위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 수라 도제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혹의를 걸친,날카로운 인상의 나 이든 무사에게 소리쳤다. "자네는 파마대(파마대)를 이끌고 반경 1백 리(약 40킬로미터) 이내를 철저히 수색하라." "존명!" "그리고 자네는 파사대(파사대)를 이끌고 반경 3백 리까지 철저히 수 색하라." "존명" 각기 2백여 명의 무사들로 이루어진 파사대와 파마대는 파요대(파 요대)와 함께 서문 세가 최고의 정예였다. 사악한 마교의 무리들이 이 곳에 어떤 함정을 마련해 놓고 외곽으로 빠졌다가 다시 외곽에서부 터 압박해 들어온다면 상당한 타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네는 각 문파들에게 적의 습격에 대비하라고 전해 주게." "예." "놈들이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했을 줄이야‥‥‥‥" 자책 어린 가주의 혼자말에 나이든 노신(노신)들은 몸둘 바를 몰랐 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놈들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허 무하게 당하는 것만은 절대로 막아야 했다. 수라 도제의 명령으로 그들은 적의 외습에 철저하게 대비했다. 그 리고 내부에 있을 함정, 예를 들면 독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 내부로 진입했던 모든 무사들을 재빨리 철수시키고 몇몇 뛰어난 고수들을 보내어 샅샅이 수색을 시작했다. 모두 독에 대비하기 위해 즉시 운기 요상(운기요상)까지 해 봤지만 독 따위는 없다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그리고 곧 독 따 위를 살포하기 위한 그 어떤 기관 장치도 없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안 으로부터의 우환거리는 없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외 곽을 정찰하기 위해 나갔던 파마대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마교도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 수라 도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들의 속셈은 뭐지?더욱 아리송하군." "혹시 이곳 섬서 분타의 전투는 뭔가 또 다른 큰일을 벌이기 위한 미 끼가 아니었을까요?' "미끼?그럴지도 모르지. 자네는 개방에 연락을 보내게나 혹시나 맹 (맹)이 공격당했을 수도 있고,어쩌면‥‥‥‥" 서문길제는 말을 여기서 끊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기는 했지만, 차마 그것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굳어진 서문길제의 표정을 보고 노신들은 노가주가 무슨 말 을 하려 했는지 눈치채고는 얼굴이 핼쑥하게 질려 버렸다. 화경의 경 지에 이른 노가주가 저렇듯 굳어진 표정을 짓게 만들 만한 일은 몇 가 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본가에 빨리 전서구를 띄워라." 한 노신의 우렁찬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문길제는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놈들이 본가에 노부가 없는 틈을 노린 것이었다면, 마교도의 씨를 말려 줄 테다. "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가주님." "너무 오랜 시간 떠나 있었다. 첫 목표는 달성되었으니 돌아가기로 하지. 각 문파에 연락해라. 노부는 떠나겠다고." "알겠습니다, 가주님 ." 수라 도제 서문길제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들이 마교 와 같은 강대한 단일 집단이어서 본가를 수비할 만한 충분한 세력이 남아 있다면,결코 그는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가 만약 서문 세가의 가주가 아니라 그저 높은 지위를 차지하 고 있는 노신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서문 세가의 가주였고,또 서문 세가의 거의 모든 정예를 끌고 전장에 나왔 기에 빈 집을 털릴 걱정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서문길제는 나중에야 마교 내의 권력 다툼에 대한 정보를 주워 들 었고, 또 그때 섬서 분타에 수백 명 정도의 고수를 투입한 것도 대단 히 무리한 행위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땅을 치며 통곡하 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그때 서문길제가 마교의 형편을 알고 있었다면 섬서 쪽에 퍼져 있 는 모든 마교 세력은 완전히 근절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무 영문의 할망구는 일부러 알려 주지 않았고,모든 기회가 지나가 버린 후에야 그것을 넌지시 알려 주어 서문길제의 속만 벅벅 긁어 왔던 것 이다. "정보력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 알겠어요?호호호호." 하고 비 웃으면서 말이다. * * * 누렇게 변색되어 가는 덩굴의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매영인은 나지 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뛰어난 무공,무영문의 금지 옥엽이라는 튼 튼한 배경,무공으로 다져진 날씬한 몸매,그리고 할머니에게서 물려 받은 아름다운 얼굴. 모든 무공을 익히는 소녀들의 목표이자,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인 4 봉에 들어 있는 그녀가 한숨을 내쉴 이유는 전혀 없을 듯이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휴우우." 그녀의 방은 마화의 지시로 시녀들이 정성을 쏟아 단장을 했기에 째나 예쁘게 꾸며지기는 했지만,조금도 그녀의 마음을 달래 줄 수 없 었다.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이 벌써 보름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높은 무공을 익혀 심신이 튼튼하지 못했다면,또 악 양소소와 마화라는 대화 상대가 없었다면 벌써 미쳐 버렸을 정도로 답답한 시간이었다. "왜 그렇게 한숨을 쉬니?" "요즘 들어서 뭔가 더 이상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뭐가?" "갑자기 방에 가둬 두고,또 하녀가 음식을 가져오거나 어쩌다가 한 번씩 마화 언니가 들어을 때 힐끗 보면 문 앞을 무사들이 감시하고 있 고‥‥‥‥ 이 모든 게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잖아요?혹시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저들을 보세요." 매영인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여러 명의 무사들을 가리켰다. "예전에는 경비를 서는 무사들이 도저히 경비 무사라고 생각되지 않 을 정도로 엄청난, 뭔가 모를 숨막히는 기운을 강렬하게 뿜어 댔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그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요?저는 그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요." "괜찮아.괜찮아. 다 좋아질거야.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응?" 소소가 매영인의 어깨를 토박이면서 위로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동시에 그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험 상궂은 마인이 서 있었다. 마인이라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방금 전 경비 무사에 빗대어 표현했던 엄청난 마기를 뿜는 고수였기 때문 이다. 악양소소는 상대의 막강한 마기에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끼며 억지 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그녀는 간신히 냉정을 유지하며,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상대의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고갯짓 을 했다. "따라와라." 상대의 으스스한 등판을 보며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그들은 별별 생각을 다했다. '이제 드디어 처형되는 것은 아닐까? 아닐 거야. 그럴 거라면 무기를 그냥 휴대하게 놔 뒀으려고, 아니면 마화 언니가 불러서?아니지,그 언니라면 자신이 찾아오지 저런 무례한 인물을 보내지는 않았을 테 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들은 어느 새 널찍한 방에 도착했다. 그 방에는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매서운 눈 초리의 사내가 커다란 탁자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거기 에 앉아라." 사내의 말에는 상상하기 힘든 위압감이 있었다. 그들은 감히 찍소리 도 못하고 의자에 앉았다. 숨막힐 듯한 괴이한 기운. 자신들을 안내했 던 인물도 엄청난 마기를뿜었지만 저 인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너희들의 이름이 매영인과 악양소소가 맞나?" 조용히 앉아 있던 사내가 갑자기 입을 열었기에 잔뜩 긴장한 매영 인은 하마터면 검을 뽑으며 일어설 뻔했다 하지만 그녀보다는 그래 도 연륜과 침착성이 앞서는 소소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직하게 답 했다. "예." "흠......." 사내는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들을 잠시 노려봤다. 사내 의 눈이 훑고 지나가자 그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느꼈다. "너무 마른 것 같은데? 원래 이런 거야, 아니면 밥을 제대로 주지 않 은 거야?" "원래 날씬한 거예요." 자신의 몸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자 매영인이 발끈해서 답했다. 공포심을 그녀의 자부심 섞인 분노가 눌러 버렸던 것이다. 그녀의 당 돌한 태도에 사내는 역시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잠시 쏘아보 더니 이죽거렸다. "그래?그런대로 물품의 상태는 괜찮은 것 같군. 왕각!' "옛 ! 대주." 뒤에서 답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비로소 밥을 안 준 게 아니냐 는 질문의 대상이 자신들이 아니라 뒤에 서 있는 왕각이란 인물이었 음을 알았다. "확실하게 돌려주고, 인수증(인수증)을 받아오도록." '인수증?웬 인수증?'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사이도 없이 그녀들은 왕각이란 사내에게 이끌려 마차에 올라탔고, 목적지가 어딘지 묻지도 못한 채 10일간이 나 끌려 다녀야만 했다. 정춘각(정춘각)이라는 음식점에 닿았을 때 왕 각은 매영인과 악양소소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문이 열 리더니 옥화 무제가 들어섰다. 매영인은 할머니를 보고는 갑자기 눈 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느꼈다. "할머니!" "오냐,오냐. 고생이 심했지?" 매영인의 언니뻘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옥화 무제는 매영인을 부드 럽게 안으며 토닥거렸다. 이때 왕각이 품 속에서 종이 쪽지를 꺼내며 조손 상봉의 분위기를 망쳐 버렸다. "상봉의 기쁨은 나중으로 미루고, 여기 서명부터 해 주시죠." 왕각의 손에는 '매영인 및 악양소소를 무사히 돌려 받았음을 증명 합니다' 하는 글자가 또렷하게 쓰인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손 녀를 품에서 떼어 놓고는 종이 조각을 받아들었다. "자네, 일 처리를 아주 철저하게 하는군." "감사합니다. " 하지만 왕각의 얼굴은 전혀 감사를 느끼는 표정이 아니었다. "자네 직책이 뭔가?" "그건 밝히기 곤란합니다. 이해해 주시기를." 자신이 염왕대의 제12대 소속 무사라고 말한다면, 영리한 옥화 무 제는 그 한마디에서 염왕대의 위치를 파악해 낼 수도 있었다. 또 현 마교의 상황까지도 잘하면 눈치챌 가능성이 있었기에 왕각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대답을 거절했다. 하지만 옥화 무제는 왕각이 그런 식으 로 거절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서명한 종이를 건네 주었다. "여기 있네. 손녀를 무사히 넘겨 줘서 고맙다고 교주에게 전하게나." 교주라는 말에 왕각의 눈썹이 꿈틀했다. 총단에서 매우 조용히 일 어났고, 또 수습된 일을 벌써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중원 무림 최고의 정보 조직 무영문의 수뇌답다고 그는 내심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교주님께서 만나 뵙기를 청한다고 전하라 하셨 습니다. " "좋아. 한 달 후,그곳에서 " 왕각은 '그곳' 이 어디를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더 이상 물어 보 지는 않았다. 자신은 다만 그렇게 전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교주가 알 아서 할 것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정중히 포권하는 왕각의 몸가짐에는 정과 마를 떠나서 위대한 무인 에 대한 경외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가는 것과 또는 것 묵향의 세력 재편성은 놀랍도록 빨랐다. 물론 그 모든 게 설무지가 해치운 것이었지만 말이다. 뇌옥에 갇혀 있던 많은 고수들은 묵향이 교주가 되면서 복권되었다. 그들은 장인걸이 어떻게 해서든 회유하 려고 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들이었기 에 그들의 합류는 묵향으로서 는 뜻하지 않았던 횡재였다. 묵향은 5대 무력 세력을 통솔하는 막중한 자리인 내총관에 동방 뇌 무를, 그리고 외부 분타를 통솔하는 외총관에는 소무면을 임명했다. 그리고 9대 장로에는 천도왕 여지고,수라 혈신 북궁뇌, 천리 독행 철 영,고루 혈마 옥관패, 염왕 적자 한중평,삼면 인마 소무면,지옥 혈귀 천진악,홍진,관지,무영 신마 장영길을 각각 임명했다. 차석 장로였던 사혈 천신 호계악은 대호법으로 임명하고,초진걸과 여문기를 붙여 절정 고수 2백여 명을 통솔하게 했다. 또 천리 독행에 게는 고르고 고른 2백 명의 고수를 주어 새롭게 혈랑대(혈랑대)를 만 든 후 그 대주에 임명했다. 혈랑대는 장인걸이 가진 유일한 무력 단체 인 천마 혈검대를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루 혈마 옥관패는 수라 마참대를, 염왕 적자 한중평에게는 천랑 대를, 섬서 분타 대전(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천진악에게는 염왕대 를,그리고 뛰어난 지략으로 묵향을 상당히 애 먹였던 무영 신마 장영 길에게는그 지휘력을 높이 사서 자성 만마대를 맡겼다. 설무지는 전체적인 세력을 재편성하면서 내적인 단결에도 힘을 쏟 았지만, 원래 마교라는 단체가 강자지존의 법칙이 확실하게 통하는 곳이었기에 그의 노력은 별 필요 없는 것이었다. 모두 묵향을 존경하 며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 몰라라 하는 묵향에게 원망 어린 시선을 보내며 설무지 가 천마 신교의 세력 재편에 정신 없을 때,그는 홀로 조용히 총타를 떠났다. 무영문의 문주 옥화 무제와 약속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교내의 모든 크고 작은 일은 군사 설무지에 의해 입안(입안)되었고, 수석 장로 여지고를 통해 실행되었다. 여지고는 총단의 일은 내총관 동방 뇌무를,외부의 일은 외총관 소무면을 통해 지시했다. 내총관은 5대 무력 세력을 통솔할 수 있는 지위였고,외총관은 모든 분타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들의 직속에는 그 어떤 무력 세력도 없었기에 실세라고는 보기 힘든 위치였다. 묵향은 무공 은 뛰어나지만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아직 확인되지 않은 그들을 한 직으로 돌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도와 거사를 행했던 사혈 천신 호계악,천리 독행,고 루 혈마, 염왕 적자, 지옥 혈귀에게는 각기 독립적인 세력을 주어 그 들에 대한자신의 신뢰감을 표시했다. 묵향은 교주가 된 후 원칙적으로 교주가 지니고 있던 막대한 권한 의 상당 부분을 수하들에게 이양해 버렸다. 그 덕분에 교주의 명령을 중계하는 역할이었던 내총관의 권력은 많이 축소되었고, 대신 장로 원의 힘이 급속히 부상했다. 마교는 원칙적으로 아홉 명의 장로를 거 느렸고, 그들은 대부분 독립적인 세력을 거느렸다. 그렇기에 마교의 장로가 되려면 교주의 신임이 두터워야 했다. 묵향은 일부러 장로원의 권한을 크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해 놓 으면 자신이 없어도 아홉 명의 장로가 모여 설무지나 내총관, 외총관 의 견제를 받으며 마교를 이끌어 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그런 식으로 잘 돌아가기만 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충분한 자유 시간을 가 질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묵향에게 상당히 좋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 다. 그렇기에 묵향은 흘가분하게 총타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 고 일부러 호위 따위도 거느리지 않았다. 호위란 것은 자신과 같은 상 상을 초월한고수에게 있어서 불필요한 것이었다. 천천히 말을 몰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묵향은, 말안장에 검이랑 천으로 둘둘 말아 놓은 막대기 같은 것이 꽃혀 있었지만 평범한 체형 덕에 영락없이 할 짓 없는 서생처럼 보였다. 마화가 억지로 입혀 놓은 밝은 빛깔의 청의가 그의 섬세한 하얀 피부와 굵직한 선을 지닌 얼굴 에 잘 어울렸다. 말안장에 매달아 뒀던 술병을 풀어 입을 축이던 묵향은 약간은 쓸 쓸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술병을 안장에 달아 준 인물도 마화였 고, 그 안에 독한 천일취를 넣은 장본인도 마화였다. 불현듯 그녀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묵향은 곧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잔소리가 너무 심해." "어서 옵쇼!" 점소이가 반갑게 맞이했지만 묵향은 일언 반구도 없이 점소이를 밀 치고는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 있는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순간 옆 탁 자에 앉아 있던 사내들의 손이 검을 움켜쥐려고 움찔거렸지만,곧 청 의를 입은 사내가 자신들의 문주가 기다리던 손님이라는 사실을 알 고는 모르는 척 딴전을 피웠다. "오랜만이군요." "우선은 교주가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그런데 만나자고 한 용건은 뭐죠?" 옥화 무제는 짐짓 흥미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반짝이 고 있었다. 도대체가 이 단순한 인물이,너무나 단순하고 무식하게 생 각하는 바람에 오히려 파악이 불가능한 사내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수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대답은 하지 않고 품 속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 재빠른 동 작으로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챠릉! 순간적으로 옆 탁자에 앉아 있던 네 사내들의 검이 반쯤 뽑혔다가, 묵향의 손에 쥐어져 있는 물건이 무기류가 아닌 것을 알고는 황급히 다시 들어갔다. 원래가 이런 무인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은 의식적으로 천천히 이루어진다. 언제, 어느 순간에 서로 암습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건 뭔가요?" "여태껏 본좌에게 협조해 준 데 대해 자그마한 성의를 보이는 것이 지. 그야말로 작은 성의니까 너무 적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받아." 옥화 무제가 그의 손에서 받아 쥔 종이는 전표(전표),그것도 상당히 신용도가 놀은 대륙 전장(대륙전장)에서 발행한 무려 금화 5백 냥 짜 리 전표였다 금화와 은화의 비율은 20대 1이니 이것은 은화 1만 냥이었고, 일가 족의 1년 생환비가 은화 다섯 냥 정도라면 2천 가구(가구)의 1년 생활 비 였다. 이때는 일가족이 보통 아홉 명 정도의 대가족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무려 1만 8천 명의 1년 생활비 였다. 물론 풍족하게 쓸 수 는 없이 그저 대충 먹고 입는 데 들어가는 돈이었지만 말이다. "자그마한 성의는 아닌 것 같은데요?하지만 마교의 교주라면 좀더 근사한 것을 준비했으리라 기대했는데‥‥‥‥" 그녀가 파장되게 아쉬운 표정을 짓자,묵향은 씁쓸히 웃더니 딱딱 하게 말했다. "과욕은 화(복)를 부르지." "나중에 재앙을 받더라도 욕심은 내 보고 싶은데요" 옥화 무제는 일부러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도대체가 1백 40여 세에 이른 할머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자태였다. "후회하지 않을까?" "절대로 후회는 하지 않아요." "좋아. 말안장에 매여 있으니까 가져가라구. 딴 건 건드리지 말고 말 이야." "본녀는 도둑질을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주니까 받는 거지요." "좋을 대로. 그건 그렇고 장인걸은 어디에 있지?" 묵향의 질문에 옥화 무제는 일부러 방글방글 웃으며 시선을 돌려 창 밖의 화산을 바라보며 딴전을 피웠다 "본좌의 힘으로 찾으라는 건가?" "영인이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는 정보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 닌가요?' "할말 없게 만드는군 그럼 다음에 보자구." 묵향이 일어서자 옥화무제도 따라 일어서며 그의 뒤를 쫓았다. "왜 쫓아오는 거지?더 이상볼일은 없을 텐데?" 옥화무제는 생글거리며 답했다. "선물을 받지 못했잖아요." * * * 묵향이 이렇듯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그곳에서 3천여 리 떨어진 어두운 밀실 안에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적에서 동지로 변화 를 도모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호오, 이번에 큰 고생을 치루셨다구요." "허허헛!뭐 그까짓 것이 고생이겠소?본좌에게는 아직 몇 곳의 비밀 분타가 남아 있고,또 천마 혈검대가 있는 이상 재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외다. " 그는 상대가 호탕한 말로 얼버무리고 있지만 재기라는 것이 너무나 도 어련다는사실을잘알았다. 그자신이 저 '웬수' 같은마교라는 단체 덕분에 너무나 오랫동안 음지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만큼 쉽지는 않을 거요. 적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지요. 안 그렇소이까?' "하지만 희망은 있소." "어떤 희망말이오?' "흐흐흐, 그것은 본좌가 마인이라는 것이지요. 묵향만 없어진다면 다시 교주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본좌에게 굴러 들어오게 되어 있소."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은?" "타로 그것이오. 그 녀석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 버린다 면 만사는 본좌의 뜻대로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죽일 수 있는 상대가 있고,그렇지 못한 상대가 있소. 또 죽일 수 없는 상대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배경 이 너무 튼튼한 인물이라든지,아니면 그를 죽인 것이 들통났을 때 너 무나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든지,또는 너무 강해서 죽인다는 것이 불가능한 자도 있소. 본좌도 그를 없애려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지만, 마지막으로 내 린 결론은 그를 죽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 아수 혈교(아수혈교)는 오래 전 묵향이란 인물과 단 한 번 충돌한 후,그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데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그 결과 그 정 체 불명의 인물이 마교의 부교주 묵향으로 밝혀졌고,또 그의 무공 수 위까지 파악하고는 아예 응징을 포기해야만 했다. 마교라는 벽은 혈교가 힘을 떨치는 데 막대한 지장을 주는 걸림돌 이 되려고 작정을 한 듯 보였고,또 그것을 하늘이 도와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상대도,또 상대의 배경도 혈교로서는 간단히 무너 뜨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혈교 교주가 자신 없는 듯 말했는 데,장인걸은 상대의 말을 가볍게 가로막았다. "아아, 이론과 실제는 다르지요. 물론 물리적인 힘만으로 그를 상대 한다면 그대의 말이 맞소. 하지만 계책을 쓴다면 다르지요. 그대도 강 자고 본좌도 마찬가지요. 본좌가 가만히 궁리를 해 보니 강자에게는 독특한 성질이 하나 있더라 이거지요. 뭔지 아시겠소?" "글쎄요." "타로 자부심이란 것이외다. 자신의 적이 중원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에게는 커다란 허점이 생기는 것이지요. 만약자신이 그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모른다면,그는 자신 의 호위에 만전을 기할 것이고 또 행동에 조심에 조심을 하겠지만,그 는 그렇지 않소. 그건 본좌가 같은 방법을 이용해서 한중길을 해치웠 기 때문에 자신할수 있소이다. " "어떤 계책이라도?' "오래 전부터 본좌가 그놈을 해치우기 위해 준비해 둔 것이 있소. 물 론 계획을 세우고 준비 작업을 시작한 것은 한중길 교주였지 만,본좌 가 그를 없애 버린 후에 보강 작업을 해 왔지요. 그 작업에는 본좌가 가장 신임하는 수하들만을 투입했고,2개월 전 에 모든 것이 완성되었소. 그 함정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던 장인(장 인)들은 모두 다 무덤 속에서 잠들어 있으니 비밀이 밖으로 샜을 가능 성은 아예 없소. 이제 그 함정을 어떻게 사용하느냐하는 것만 남았을 뿐이오." "흐흐흐,그대가 이렇듯 본좌를 믿고 비밀을 털어 놓으니,본좌도 한 가지 알려 드리리다. 그를 죽일 수는 없겠지만 없애 버릴 수는 있소." "없애다니요. 그게 죽인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오?서로간에 말장 난은 하지 맙시다. " "본좌의 말은 그야말로 없애 버린다는 말이요. 본교에는 대단히 강 한 술법들이 많이 전해 내려온다는 사실을 알 것이오. 그 중에서 특히 강한 술법이 있소. 그걸 사용하면 죽일 수는 없지만 없앨 수는 있소." "호오, 없앤다구요?" "그렇소. 말 그대로 없애는 거요. 진세를 발동시키기가 어려워서 그 렇지, 진세만 발동되면 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오. 본교에서는 그걸 묵령 시분술(묵령시 분술)이라고 부르지오. 그야말로 시체조차 분해되어 찾을 수가 없는 최고의 술법이오." "호오 그런 게 있단 말이오?' "하지만 그걸 사용하는 데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소. 진법을 가동시 키는 데 약 반 각(8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거지요. 그 시간을 벌어 줄 자신이 있소?" "반 각 정도라면 충분하오.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겨우 반 각 쯤이야, 하하하하." * * * "정말 아름답군요. 멀리서는 몇 번 욕지만 이렇듯 자세히 보기는 이 번이 처음이에요." 옥화 무제는 어린애가 새로운 장난감을 보듯 두 눈을 반짝이며, 맑 고투명한 검신에 새겨진 수룡을 바라보았다. "문주님,그 따위 검 한자루에 감탄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 "호호홋! 그 따위 검 한 자루가 아니에요. 이건 무림 맹주의 신물인 빙백 수룡검(빙 백수룡검). 이게 본녀의 손에 들어온 이상,무림 맹주를 향해 남들보다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고 보는 게 옳겠죠. 총관은 그렇 게 생각하지 않나요?' "물론 문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낱 껍질뿐인 무 림맹의 맹주자리를 노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우리에게는 2황야가 있고, 또 그는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본문의 총력을 기울여 그를 도와 준다면 나중에 크나큰 보상을 받을 수 있습 니다. 진길영 원수가 정벌군을 이끌고 돌아온 후에는 너무 늦다 이 말 씀입니다. " "진길영 원수는 대요 전쟁에서 쉽게 발을 벨 수 없어요. 요가 거의 멸망한 지금 그 엄청난 땅덩어리가 전리품으로 남았어요. 그걸 탐욕 스런 여진족과 미련한 정안국 국왕,그리고 고려국 왕에게 적당히 배 분해 줘야 할 것이 아닌가요?여기서 배분이 잘못되면 곧장 아귀다툼 이 벌어질 것이 확실한데." "그래도‥‥‥‥ "그래도가 아니에요. 진길영 원수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2개월 이내 로는 돌아오지 못해요. 즉 두 달 동안 2황야를 주무를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 동안 2황야를 주무르면서, 그를 우리 쪽 의 입맛에 맞도록 길들이는 것이 중요하겠죠." "참,문주님. 중요한 보고가 있습니다. " "뭔가요?' "장인걸이 문주님과 제휴를 원하고 있습니다. "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어보겠군요. 그와 제휴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어디에 있다고." "있습니다. 여기 이것을 읽어 보십시오." 총관이 품 속에서 꺼내어 두 손으로 바친 종이는 천천히 날아 발 안 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 속에 서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원하는 것이 뭐죠?묵향의 신상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려 준 다고 해도 묵향을 죽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모 르지는 않을 텐데요?" "하지만 조건이 근사하지 않습니까? 죽이는 방법이야 장인걸이 생 각해 낼 문제고,그 대신 본문에서 얻게 되는 것은 1천 냥의 금화와 실종되었던 진영 공주의 행방입니다. " "흠, 역시 진영 공주는 장인결의 손아귀에 있었던 모양이군요. 좋아 요. 묵향의 세력이 더욱 커지는 것은 본녀가 원하는 게 아니죠. 장인 걸과 묵향이 피 터지게 싸울수록 본녀에게는 유리하니까 말이에요. 그러다가 혹 장인걸이 그를 암살하는 데 성공이라도 한다면 막대한 희생을 치른 후의 장인걸을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즉시 시 행하세요." "존명." 사라진 탈마의 고수 묵향의 여행은 그야말로 한동안의 휴식이었다. 그럴듯한 장소가 있 으면 남들이 한번씩은 해 보는 낚시도 했고,아름다운 산이나 색다른 구경거리가 있다면 한가롭게 관광을 하는 시골 서생처럼 그곳을 찾 아갔다. 또 맛깔스러운 요리가 있다면 일부러 시켜서 먹기도 했다 장인걸이란 거대한 적을,그것도 자신보다 월등하게 장대한 세력을 지닌 적을 제압하는 것은 단순한 무공 대결과는 달리 묵향을 상당히 피곤하게 만들었다. 상대를 기만하고,모략하고,놈의 속임수에 속는 척도 해야 하고, 그러면서 뒤꽁무니로는 놈을 향한 함정을 준비하 고‥‥‥‥ 묵향이 이번에 이렇듯 손쉬운 승리-거의 세 시진(7시간)에 걸친 사 투를 통한 것이었지만-를손에 쥘 수 있었던 것도 천마 혈검대가 총단 에 없었던 덕분이었다. 천마 혈검대가 총단에 남아 있었다면 더욱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을 것이다. 천마 혈검대는 장인걸이 지닌 세력 중 유일하게 묵향을 붙잡아둘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녔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 동안 해온 일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혹사였 기에, 묵향은 한가하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피곤해진 마음에 산 뜻한 휴식을 제공했다. 모략이나 술수를 모르는 순수한 무인이었던 묵향으로는 요 근래 1년여가 매우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한가하게 떠돌던 묵향은 어떤 식당에 앉아 그곳 특산물인 황사(양 사)로 만든 탕에 곁들여 죽엽청을 비우다가 험상궂은 다섯 명의 무림 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적이나 시장했던 듯 오리당과 오리구이 다섯 마리를 시켜 정신없이 들이키고는 재빨리 식당을 빠져 나갔다. 그리 고 묵향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묵향이 이들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그들이 나눈 대화에 상당한 흥 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한 이야기라고는 식당 안에서 음 식을 달라고 한 것과 대금이 얼마냐고 물은 것이 전부였지 만,묵향의 귀에는 또 다른 음성도 들려 왔다. 물론 이것은 전음으로 나눈 대화였 기에 식당에 앉아 있던 다른사람들은 들을수 없는 내용이었다. (대형 , 그게 사실일까요?) (물론이지,네녀석은 내가 한 번이라도 허튼소리 하는 것 봤냐?) (하지만 구휘 대협의 무덤은‥‥‥‥) (그러니까 그게 혈교놈들이 만들어 놓은 함정이라니까, 진짜는 따 로 있어. 원래 구휘 대협은 재물을 많이 모은 사람은 아니었지. 그런 그가 재물을 잔뜩 모아 놓은 거대한 무덤을 건축 했겠냐?) (그건 그렇지만‥‥‥‥) (그의 무덤에는 그의 죽음과 함께 자취를 감춘 무림에서 사라진 10 대 기병의 최고라는 흑묵검(흑묵검)과 북명 신공이 있을 뿐이라구.) 여기까지 들은 묵향은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북명 신공은 자신의 손에 있었다. 한중길 교주에게서 장인걸에게로, 그리고 이제 총타의 주인이 된 자신의 손으로 넘어온 것이다. 하지만 험상궂은 사내의 다 음 말을 들은 후에는 더 이상쓴웃음을 지을 수 없었다. (북명 신공이라구요?) (그렇지. 북명 신공은 두 권이야. 하나는 구휘 대협이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아들 구천 대협에게 맡겼지만, 또 한 권은 언제나 품 속에 지 니고 있었지. 아마 그것은 흑묵검과 함께 있지 않을까?) "한 권이 더 있다구?" 묵향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순간 놈들은 음식값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가 말을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말들은 덩치도 좋았고 다리도 길 고 쭉 뻗은 것이 대단히 뛰어난 명마들이었기에 묵향이 재미삼아 구 입해서 끌고 다니는 말과는 속도와 지구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다 묵향은 반 시진도 안 되어 그 차이를 느끼고는, 필요한 짐들을 재빨 리 말안장에서 꺼내어 대충 품 속에 넣은 후 경공술을 펼쳐 운아가기 시작했다. 시간도 많았고,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면 검 따위는 필요 없 지만 두 번째 북명신공만큼은 한번 읽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교주에게서 강탈하다시피 얻어내서 읽어 본 북명 신공은 묵향의 무공 성취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그렇기에 묵향으로서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만사를 제쳐 두고 그들을 뒤따랐을 텐데, 지금은 다행히 시간까지 꽤 많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묵향은 상대가 또 다른 북명 신공을 찾아낼 때까지 조용히 뒤따라 가다가 조용히 말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물론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간단하게 물리력을 행사할 예정이었다. 묵향은 상대가 그것을 찾아 내는 것이 관심사였을 뿐,그들에게서 그걸 어떻게 얻어 내느냐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쫓아오는데요?) (흐흐흐,놈의 저 나약한 몸매로 봐선 무영문의 정보가 영 미덥지 않 더니만,진짜일 줄이야. 놈이 추격을 시작했으니 더욱 조심해라 언행 에 신경을 쓰고,특히 우리끼리 주고받는 말은 어기 전성이 아니면 안 돼. 알겠나?) (옛!흑마 대주님.) 그들은 묵향이 뒤따르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삼광(삼광)에 들러 이것저것을 조사했다. 그리고는 뭔가 단서를 찾아 낸 것처럼 태 행산(태행산)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두툼한 책자한 권과 오래된 듯 너 덜거리는 양피지 한 장에 의지해서 길을 갔다. 물론 이 둘은 다 대어 를 낚기 위해 고심해서 제작한 미끼 였다. 묵향은 놈들의 뒤를무려 10일이나 끈기 있게 따라가 철우산(철우 산)에 도착했다. 과연 철우산은 구휘 같은 인물이 만년에 무공을 연마 하고 생을 마감할 생각을 했을 법한,너무나도 아름다운 산이었다. 산 세가 너무 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완만하지도 않은 데다가,군 데군데 기암 괴석이 드러나 있어 보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그들을 천천히 따라가면서 묵향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미약하지만 군데군데에서 마기(마기)와 사기(사기)가 느껴졌던 것이 다. 하지만 묵향은 발걸음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자신을 제압할 만한 고수가 존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도 않았고, 최악의 경우 혈마 와 같은 엄청난 인물이 있다고 해도 그와 정면 대결이 아니라면 도망 치는 것은 손쉬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이리저리 모습을 숨기며 앞서가는 인물들의 뒤를 따르던 묵향이 이제 아예 대놓고 천천히 다가오자 숨어 있던 무리들은 묵향 이 그들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다. "휘이 이 익 !' 긴 휘파람 소리가 심후한 내공을 싣고 울려 퍼지자 곧 묵향 좌우의 땅 속에서 암습자들이 튀어 나왔다. 묵향은 자신의 바로 옆에서 엄청 난 속도로 튀어나오는 녀석에게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일장을 먹 였다. 하지만 손을 통해 전해지는 그 반탄력은 상당히 강력한 것이었 다. 쓸 만한 실력을 쌓은 암습자 정도로 생각하고 날린 일장이었지만, 웬만한 사람은 즉사했을 텐데도 나자빠졌던 상대는 비실거리며 일어 섰다. "크아아아." "쿠르르륵." "이런,강시들이었군. 그런데 무슨 강시들이 이렇게 빠른 거야?들은 것하고는 좀 다른데?" 저마다 괴성을 지르며 이제 본격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강시들은 묵향이 익히 알고 있던 혈교가 만들어 낸 걸작품이 아니었다. 혈교의 강시 제조법이 장인걸 패거리에게 전해진 후 더욱 연구를 거쳐 개발 된 천령 강시였다. 이지력을 완전히 상실한 강시와 달리 이 녀석은 충 분히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강시처럼 피리 소리 따위로 조종 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예전의 한중길 교주는 묵향을 제거하기 위해 보통의 강시보다 훨씬 속도가 빠르고,더욱 강인한 천령 강시를 3천 구나 제작해 두었다. 그 들 상당수는 장인걸이 한중길 교주를 없애는 과정에 투입되어 소모 되었다 그러나 그 소모분을 장인걸이 적절하게 채워 놓았기에 이곳 에는 3천 2백 구의 천령 강시 대부대가존재했다. 묵향은 처음 한방 맞았던 천령 강시가 비실거리며 일어서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검을 뽑았다. 놈들이 자신을 상대하 기 위해 어느 정도 전력을 감춰 뒀는지 모르니,자신의 장기인 검술로 상대하는 편이 공력의 소모를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슈걱! 공력의 소모가 큰 검강 종류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어검술만 을 이용해서 묵향은 천령 강시 대군을 상대했다. 검 푸른빛으로 이글 거리는 묵후검이 가르고 지나갈 때마다 어김없이 무쇠보다도 단단하 다고 알려진 천령 강시의 몸은 토막이 났고, 검붉은 약재에 전, 죽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천령 강시를 제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의 8할이 독 종류였기에 그 피가 튄 묵향의 옷에는 곧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만독 불침(만독불침)을 자랑하는 그의 신체에는 타격을 줄수 없었다. 검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뽑아 내기에 그 어떤 고급 검술보다도 공 력의 소모가 작은 어검술만을 사용했으므로 한꺼번에 많은 수의 천 령 강시들을 토막칠 수는 없었지만 묵향은 한 번에 하나나 둘, 어떤 때는 셋씩 착실하게 강시들을 분해해 나갔다. 극마에 이른 고수였던 흑마 대제 한중길이나 무림 맹주였던 화경의 고수 무극 검황 옥청학까지 어느 정도 궁지에 몰아넣은 천령 강시였 지만, 탈마의 고수인 묵향에게는 그 어떤 해도 주지 못하는 듯 보였 다. 그 때문인지 4백여 구의 천령 강시가 분해되어 버리자 당황한 듯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대천악 마나진(대천악 마나진)을 펼쳐랏!" 대천악 마나진. 마교의 1천 년 역사에서 단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 았던 전설적인 진세가 서서히 발동되었다. 온 사방에서 마기가 짙게 깔리며 천령 강시는 더욱 힘을 얻은 듯 미쳐 날뛰었다. 원래가 대천 악마 나진은 마기와 요기를 지닌 인물에게는 더욱 힘 을 보태어 주고,그렇지 못한 인물들은 그 힘에 압도되어 평상시 힘의 반도 내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 진세를 이용하여 천하 제일문이 멸문 당했을 때,그 강대한 힘에 놀란 마교의 고위급 고수들에 의해 오히려 사용이 제한되었을 정도로 지독한 진세 였다. 천령 강시들이 대천 악마 나진의 그 강력한 진세 속에서 미쳐 날뛰 기 시작했을 때 그와 비슷한 현상이 묵향의 몸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혈관을 격동시키는 힘의 이동. 묵향은 자신의 피가 끓어 오르는 듯 하며 온몸에서 힘이 펄펄 솟는 것을 느꼈다. 마의 극한을 뛰어넘었기 에 도저히 마인으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묵향 역시 마인이었기에 대 천 악마 나진에서 힘을 얻어 내고 있었다. 이것으로 묵향의 내공 근원 이 정인지 마인지는 자연스레 유추해 볼수 있을 것이다. 대천 악마 나진이 펼치지고 난 후 묵향은 더욱 강맹한 어검술을 구 사하며 천령 강시들을 베어 갔고, 이제 천령 강시의 수가 수백 구 정 도로줄어들었다. 장인걸은 입술이 바싹말라 왔다. 후퇴할 것인가?아니면 천마 혈검대를 투입할 것인가? 자신이 믿었던 함정은 묵향에게는 그 어떤 타격도 줄 수 없음이 드 러나 버렸다. 과거 화경이나 극마에 이른 한중길이나 옥청학도,끝마 무리는 자신이 했지만 그래도 천령 강시 덕에 꽤 많은 힘을 기기에 혹 시나 하는 기대를 했는데,그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고 있었다. 3천 구 가 넘는 천령 강시를 반조각 내고도 묵향은 아무런 피로감도 보이지 않았다. 한중길이나 옥청학은 이때쯤 헥헥대며 제대로 실력을 발휘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자신은 있는 거요?" 상대는 장인걸이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는 듯 장인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들의 선조가 제작한 최 고의 강시인 천령 강시가 저렇게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에는 엄청 나게 충격을 받았다. "물론이오. 하지만 반 각(8분)이 필요하오." "그렇다면 빨리 준비하시오. 저놈이 천령 강시를 몽땅 조각 내 버리 기 전에." 핏빛과 같은 적포를 입고 있는 인물은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의 수 하들도 묵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령 강시들처럼 묵 향을 향해 돌진하는 대신 상당한 거 리를 두고 포진한 상태 였다. 그들은 모두 해골 모양이 새겨진 긴 지팡이를 들고 중얼중얼 주문 을 외웠다. 그들이 모두 같은 주문을 외우지는 않았다. 혈교 교주를 따라 도열한 이들 3백여 명의 혈교 고수들 중 1백여 명만 교주와 비슷 한 유의 주문을 외웠고, 나머지 2백여 명은 목표물이 도망치지 못하 도록 옭아매는 주문을 외웠다. 묵향은 이제 약 5백여 구밖에 남지 않은 천령 강시를 상대로 싸우다 가 과거에 상당히 자신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어떤 느낌 을 받았다. 뭔가 끈적한 것에 갇힌 느낌, 아차하는 순간 주위를 둘러 봤을 때는 이미 예전에 자신을 꽤나 고생하게 만들었던 해괴한 해골 모양 지팡이를 든 놈들 3백여 명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더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는 것을 경 험으로 깨달았던 묵향은 처음부터 강공으로 나갔다. 엄청난 검기가 사방으로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그의 검기는 대천악 마나진의 도움 으로 더욱 막강해 졌으나,요기를 뿜어 대는 혈교의 마술도 그 힘을 배 가했다. 그리고 예전에는 겨우 아홉 명이 자신을 향해 술법을 시전했 지만,지금은 스물두 배나 많은 인원이 묵향을 향해 대라 혈망진(대라 혈강진)을 펼치고 있었다. 퍽적! 사방으로 뿜어 나가는 검강의 압력이 더욱 거세지자 혈의를 입은 인물들의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겨우반각. 반 각을 버티 는 게 이렇게 힘들었다 묵향이 첫 번째로 혈의 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강기를 사방으로 뿜어 댔을 때,그 한방에 수백의 천령 강시들이 토막 토막 잘려 파괴되는 것을 본 그들은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주문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 하는 짓거리를 보다가 정신이 흐트러지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시간이 가기만을 죽자고 기다리면 시간은 더욱 안 간다. 대라 혈망 진은 상대의 진기를 뺏는 효과도 가졌지만, 대천악 마나진 안에 들어 와 있는 묵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힘이 난다는 듯 괴력을 발휘했 기에 혈의 인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혈교의 무리들은 마기와는 관계 없이 요기를 띄고 있었기에 그 진세의 영향을 받아 힘을 낭비하지는 않았지만,그렇다고 그들의 능력이 배가된 것 또한 아니었다. 어쨌든 아무리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도,또는 아무리 시간이 늦게 지 나가기를 바란다 해도 시간은 일정하게 지나갈 뿐이다. 혈교의 교주,그리고 그와 함께 주문을 외워 대던 1백 명의 혈교 고 수들이 어느순간 손을 쭉 뻗자 암혹의 기운이 묵향의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여태껏 전력을 다해 술법에 정신을 쏟던 2백여 명 이 자신들의 할 일이 가까스로 끝난 것을 느끼고 허물어졌다 그들은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내뿜으면서 자신들을 그렇게 괴롭혔던 장본인 이 분해되는 장면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야말로 혈교가 최고, 최강의 주문으로 생각하는 묵령 시분술의 위력에 의해 그놈의 시체까지도 갈가리 분해되어 공기 중에 흩어지 는 장면을 꼭 봐야지만오늘 밤잠을 편히 잘 수 있을 것이었다. 검은 기운은 곧 사라졌지만 묵향의 몸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혈의 인들의 믿음대로 묵향은 시체마저도 분해되어 버린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그를 이곳에서 '없앤 것만은 확실했다. 모두 지독한 공력 소모와 오랜 시간의 정신 집중으로 몸을 가누기 도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다. 혈교의 교주는 부하들보다는 훨씬 더 우 월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과시하는 듯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었지 만, 그의 얼굴에서도 땀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그 역 시 엄청나게 지쳤음은 당연했다. 장인걸이 혈교의 교주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과연,없앤다는 것이 바로 이런 말이었구려." "...'. 장인걸은 묵향이 입었던 검은 옷과 땅바닥에 뒹구는 묵혼검을 지그 시 쏘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묵령 시분술이라. 정말 대단한 술법이었소." 이때 묵혼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줄에 매달려 끌려오듯 천천 히 날아올라 장인결의 손에 들어왔다. 장인걸은 묵혼검을 차근차근 훑어 봤다 자신이 사용하는 검에 비해 매우짧았다. 하지만 거무튀튀 한 묵광을 발하는 검신은 매우 깨끗했고, 또 날카로워 보였다. "좋은 검 이군." 그와 동시에 장인걸의 손에 들려 있는 묵혼검이 허공을 갈랐다. 슉! 장인걸이 노획 물품을 감상하는 줄 알고 마음을 놓고 있던 혈교 교 주는 그 한 번의 기습 공격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우두머리의 곤경을 본 혈교의 고수들이 장인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들은 곧이어 나 타난 천마 혈검대에 가로막혔다.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혈 교의 고수들은 장인걸과 그가 거느린 천마 혈검대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모두 너무나도 지쳐 있었던 것이다. 장인걸은 묵흔검의 짧은 검신 덕분에 죽음은 면한 채 신음하고 있 는 혈교 교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더니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묵혼검을 내려 놓았다. "역시 이 검은 묵향에게나 어울릴까 본좌의 손에는 맞지 않는구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그대에게 고통을 오랜 시간 선사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오. 이제 곧 편안하게 해 주겠소. 잠시만 기다리시구 려,흐흐흐." 장인걸은 신음하고 있는 혈교 교주의 곁에 서서 공력을 있는 대로 오른손에 끌어 올렸다. "대단한 술법이기는 했지만,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술법이었소. 잘 가시오." 그리고 장인결의 손은 아래로 내려갔다. 퍽! 혈교 교주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대송 제국의 숨막히는 격변기. 그때를 즈음하여 진천왕의 세력은 확실하게 꺾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를 뒤에서 지원하던 혈교가 3 백여 명의 고급 고수들과 교주를 잃은 후 복수의 이빨을 갈며 지하로 잠적해 버렸기 때문이다. 제5부 묵향, 환타지 세계로 가다. 새로운 시작 쿵... 순간적으로 지상 위 2장(6m)거리에 검은색 원반이 생기더니 그곳에서 한 물 체가 떨어졌다. 약간 불그스름한 황색을 띄는 덩어리였다. 하지만 그 덩어리 는 땅바닥에 처박힌 다음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 덩어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완전히 벌거벗은 사내는 맨손격투라도 불사하겠다는 듯 먹이를 노리 는 맹호(猛虎)처럼 살기띈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이어 멍한 얼굴로 중 얼거렸다. 주) 시간과 차원, 또 공간을 거슬러가면서 뭔가 물품이 이동한다는 것은 본 편과는 상관없기에 외전쓰는 중에 그 생각을 했었는데(나중에 곤란해지니까) 바꾸기 귀찮아서 놔뒀던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 뜯어고치면서 이것도 고칩니 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묵향(墨香)은 자신의 몸이 지독한 어둠의 폭풍속으로 떨어져 내리던 기억을 상기하며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산과 골짜기 뿐... 아무런 위험은 느껴지지 않았다. 묵향은 천천히 끓어올렸던 기를 다시 가라앉히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제기랄... 중원 어디쯤인지 알아야 돌아가지. 순간적으로 하늘을 날아간건 가... 이해가 안가는군. 거기다 옷은 어디간거야? 또 내 검과 비수는? 제길 돌아버리겠네... 어쨋든 일단은 민가를 찾아서 옷부터 구하고, 여기가 어딘지 나 알아본 다음 돌아갈 궁리를 해야겠어.]" 묵향은 길도없는 숲속을 경공술을 전개해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옷 을 홀랑 벗고 경공술을 펼치는 것은 생애 최초의 경험이었다. 이윽고 삼림지 대(森林地帶)가 나타나자 묵향은 곧바로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삼림지대의 경우 나무 밑으로 달려가기 보다는 나무 윗쪽의 가지들을 밟고 가는게 덜 귀 찮기에 묵향은 그 방법을 애용했다. 거의 2시진 정도 달렸을까... 하지만 아직도 삼림은 끝도없이 펼쳐져 있었고 배가 고파진 묵향은 달리기를 멈추고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뭐라도 잡아 먹어야 해. 그리고 가죽이라도 벗겨서 입으면 그래도 좀 낫겠 지.]' 이리저리 둘러보던 묵향의 눈(目)에... 아니 눈이라기 보다는 기(氣)에 무언 가 생물이 포착되었다. 묵향은 그쪽으로 재빨리 몸을 날렸다. "[큭! 뭐 저렇게 생긴게 있지?]" 묵향이 바라보기에 그놈은 정말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거의 10척 (303Cm)의 장신에 부리부리한 눈알... 털은 없었지만 초록색이 나는 징그러운 가죽... 거기에 기괴하게도 사람처럼 두 발로 걷고있었고 한쪽 손에는 거대한 돌도끼를 들고있었다. 거기에 가죽으로 대강 아랫도리를 가린 것을 보면 꽤나 지능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놈은 묵향을 바라보더니 뭐라고 떠들어댔다. "크르르르... 호비트인가... 크르르르... 배고픈데 잘됐군..." 물론 이 말은 그 괴물 족속들간에 내려오는 고유의 언어였기에 묵향으로서는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묵향은 곧바 로 그 퍼런놈의 행동으로 그놈의 뜻을 알수있었기 때문이다. 퍼런놈 묵향을 향해 거대한 돌도끼로 위협하며 다가왔다. '[이게 말로만 듣던 영물(靈物)인 모양이군. 아직 년수가 들차서 말은 못하 는 모양이지? 평생 영약, 영물은 먹어본 적도 없었는데... 크크크... 말년에 이게 왠 횡재(橫財)냐.. 거기에 잘 말려놓은 가죽 옷까지 입고있군...]' 묵향은 그놈의 심장이 있을거라 예상되는 지점을 향해 곧바로 지풍(指風)을 날렸다. 역시 그놈은 덩치만 크고 동작은 굼뜬 모양인지 그대로 지풍에 격중 되었고 퍽 하고 푸른색 피가 튀면서 몸에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묵향은 그놈 의 상처가 빠른속도로... 정말 눈에 느껴질 정도로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가는 것을 보고는 정말 놀랐다. '[공격력은 별볼일 없는 영물이라서 그런지 상처회복 속도는 끝내주는군. 그 렇다면 이건 한번 받아봐라.]' 곧이어 묵향의 공격이 시작됐다. 묵향은 그대로 손을 횡으로 쫙 그었고 그의 손에서는 퍼런 강기가 반월형으로 상대에게 날아갔다. 상대는 그대로 몸통이 두토막이 나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곧이어 아물어버렸다. 정말이지 신경질 날 정도로 재생력이 좋았다. 이때 묵향의 머리에는 전에 장인걸의 부하들과 싸우던 기억이 떠올랐다. 장 인걸의 수하녀석들도 괴이한 마공을 익혀 칼로는 잘 죽지도 않았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순간 묵향의 손에서는 다시금 강기가 뿜어져 나갔고 그 목표는 놈의 목이었다. 묵향은 상대의 목이 강기에 베어지는 순간 몸을 허공에 띄워 올려 왼발 뒷발꿈치로 상대의 머리를 깨부숴버렸다. 퍼런녀석의 목은 재생해 서 붙을 시간도 없이 타격을 받다보니 반쯤 터져나간 상태로 몸에서 이탈해 2 장 반쯤 떨어진 나무에 맞은 다음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목을 잃은 그 퍼 런녀석은 서서히 앞으로 쓰러졌다. 놀랍게도 쓰러진 퍼런녀석의 목에서는 녹색의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묵향은 제일 먼저 놈의 엉성한 가죽옷을 벗겼다. 막상 벗겨놓고 보니 너무 컸 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가죽 옷을 죽 찢어서는 대강 몸에 두른 후 이제 그녀석을 발로 뒤집어 앞부분이 드 러나게 만들었다. "[루루루.... 내단... 내단....]" 묵향의 손이 푸른빛을 띄며 놈의 배를 쭉 훑어내리자 곧장 피가 튀며 배가 갈라졌다. 퍼런놈은 죽었는데도 계속 재생을 하는 바람에 내단찾는 일이 늦어 지기는 했지만 묵향의 내단에 대한 집념을 포기시키지는 못했다. 묵향은 상당 한 시간을 들여 퍼런놈의 뱃속을 샅샅이 뒤집어보고야 이놈에게는 내단이 없 다는 사실을알 수 있었다. "[제기랄... 내단이 없다니... 아직 어려서 그런가... 할 수 없지. 이럴줄 알았으면 후배들을 위해서 좀 더 살게 놔두는건데. 이왕 죽였으니 배고픈데 요기나 하는 수밖에... 예로부터 영물은 내단이 아닌 고기를 먹어도 힘이 솟 는다고 하지 않던가? 흐흐흐]" 묵향은 주위에서 나뭇가지들을 모아서는 손가락 끝에 양강(陽强)의 기를 끌 어올렸다. 곧이어 손가락은 시뻘걷게 달아오르며 열기를 뿜어대기 시작했고 그걸로 묵향은 불을 지폈다. 불을 지핀 후 저쪽에 꿈들거리는 그놈의 팔을 가 져다가 굽기 시작했다. 재생력이 좋아서 그런지 잘 익지 않았지만 그건 큰 문 제가 되지 않았다. 보통 고기들 보다 조금 익는 속도가 느리다는 것 뿐... 뭐 딴건 별다른 게 없었으니까. 묵향은 맛은 별로였지만 배를 두둑하게 채운다음 남은 고기를 싸들고 다시 경공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몇날 며칠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뭐 일직선으 로 계속 달리다 보면 사람이 살던 흔적이 나올테니까... 해가 지기 직전쯤에 묵향은 삼림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고 들풀이 우거진 초 원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가다가 완전히 어두워진 다음발길을 멈췄다. "[제기랄... 인적(人跡)이 안보이는군... 오늘은 이쯤에서 쉬고 내일 또 달 리기로 하지.]" 탈마의 경지에 이르른 고수가 식량까지 장만된 상황에서 모닥불을 피울 리는 없다. 모닥불따위 피워봐야 그 불빛을 보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 밖에 더 모 이겠는가. 묵향은 벌렁 드러누워 가져온 고기를 씹으며 밤하늘을 쳐다봤다. 공기도 맑고... 촉촉한 습기를 안고있는 시원한 밤바람도 불어오고... 별들도 많고... 달들도 밝고... "헉!" 묵향은 벌떡 일어나서 하늘을 바라봤다. 눈까지 비볐는데도 변함이 없었다. 이번에는 꼬집어도 보고... "으윽... 제기랄 꿈은 아닌데... 달이 두 개가 될 수가 없잖아. 그런데 저건 뭐지?" 하지만 묵향이 아무리 부인을 해도 하늘위에 떠있는 달들... 하나는 중원에 서 보던 달만하고 또 하나는 그것보다 조금 작았다. 그 달들의 숫자는 변함이 없었다. 원래가 꿈이라면 저쪽에 보이는 조그만 달은 없어져야 되는데 말이 다. * * * 묵향이 떨어진 곳에서 대단히 멀리 떨어진 곳에 면적은 제법 넓었지만 그 국 토의 70%이상이 산이라서 별로 경제사정이 좋지 못한 크라레스 제국이 있었 다. 원래 크라레스 제국은 지금보다 두배쯤 더 넓은 크기에 비옥한 크로나사 평야를 가지고 있었던 매우 풍요롭고도 아름다운,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였다. 이웃에 있는 코린트 제국과 동맹하여 그 둘은 그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던 강대한 아르곤 제국을 견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곤 제국의 황제가 갑자기 광신도가 되어버렸는지 크로노스교를 국교로 선포하며 일어난 내전으로 인해 아르곤이 정신없는 사이 코린트는 크라레스 제국을기습했고 그 비옥했던 크로나사 평야를 차지해 버렸다. 그전에도 코린트가 군사적으로는 어느정도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기습까지 당하고 보니 크라레스 제국은 완전히 박살날 수밖에 없었고 곧이어 국가가 멸망하는 사태라도 막아보자는 일념으로 바운스고르 5세는 비옥한 크 로나사를 영구히 포기하겠다는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또 코린트로서도 남은 쓸모없는 대지를 차지한다고 장기적인 전쟁을 벌이기에는 너무 군사력의 소모가 크다는 점을 알고 그 조약에 찬성했다. 비옥한 영토를 차지함으로 인해 풍족해진 코린트는 30년도 지나지 않아 내전으로 전력이 약 화된 아르곤을 제치고 세계 최강의 대국으로 공인되게 되었다. 현재 크라레스 제국의 수도는 크로돈. 과거에는 여름궁전이 위치하고 있던 황제의 여름 휴양지였지만 지금은 수도가 되어 있었다. 작은 별장처럼 지어진 아름다운 궁전의 한 방에는 지금 수려하게 생긴 36세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가 식사중이었다. 그의 몸은 상당히 건장했고 꽤나 근육질이었다. 또 그 근육이 거져 다져진게 아님을 인식시키듯 그의 허리에는 매우 호화로운 바스타드 소 드가 매달려있었다. 하지만 그 젊은이의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도저히 왕궁에서 먹는 음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각종 야채와 돼지고기 약간을 넣고 푹푹 끓인 야채스프, 검은 호밀빵, 우유, 그리고 그 젊은이의 앞에 놓인 접시에 수북히 담긴 여러 가지 야채를 듬뿍 넣고, 쇠고기 조금을 넣고는 볶은 야채볶음이 전부였다. 그가 한참 맛있게 식사를 하고있는 모습을 한 인물이 별로 기분좋지 못한 얼 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50세는 넘어보이고 아직 60은 안되어 보이는 인물로 마법사들의 공식복장인 로브(robe)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인 듯 했 다. 그는 그 젊은이가 식사를 끝내고 나서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걸 보면 서 조용하지만 뭔가 감정이 억눌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폐하. 제국의 안위는 폐하의 건강에 있습니다. 제발 좀 기름진 식사를 하십 시오. 왠만큼 사는 백성들도 이정도는... 아니지 이것보다는 더 잘 먹습니 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토지에르 경. 이 산골로 쫓겨난 후 대 제국 코린트에 복수한답시고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있는데 어찌 백성들이 이정도 식사라도 할 수 있단 말이오? 또 이정도 식사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나 혼자서 잘먹고 잘살자고 이 자 리에 있는게 아니지 않소?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도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한 다고 항상 말씀하셨소. 또 그걸 실천 하셨구요. 내가 아버님의 말씀대로 실천 했다고 해서 내 건강이 나빠진게 또 뭐가있소?" "그래도 폐하께서는 모든 백성들의 희망이십니다. 좀 더 몸을 생각하셔야 죠." "자자... 그일은 그만 두시구려. 내가 한끼 잘 먹을 돈을 절약하면 백성 수 십명이 한끼 요기할 돈이 되는 거요. 나는 쓸데없이낭비를 하고싶지 않소.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오?" 그러자 토지에르 경은 안색을 침중히 하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코린트에서 사신을 보낸다고 합니다. 아마도 국경 부근의 산적과 몬스터 토 벌을 위해 군사력을 쓰라는 말이겠지요. 그러면서 그녀석들은 군사력을 쓰지 도 않고..." 그러자 젊은 황제는 늙은 신하를 따뜻한 어조로 위로했다. "그만두게나. 뭐 그런일을 한두번 당해보나? 아버님이 그놈들의 간계에 빠지 셔서, 그게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자살까지 하셨지. 내가 제위에 오른 게 8살때였으니... 흐음... 벌써 28년 전에 있었던 일이군... 그때 이후로 그 놈들은 본국이 힘을 기르지 못하게 갖은 방법을 동원해오지 않았나? 산적과 몬스터 토벌이야 군사훈련도 되니 뭐 일석이조지." * * * 묵향은 토끼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나 사슴 비슷하게 생겼는데 뿔은 염소처럼 붙어있는 것들을 간혹 사냥하면서 4일을 달리고야 사람이 만들어놓은 도로(道 路)를 볼 수 있었다. 그길을 따라 올라 한시진(2시간) 정도 달려가니 언덕위 에 통나무로 만들어놓은 색다른 모습의 집이 한채 지어져 있었다. 집이 색다 른건 두 번째 치고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 하나만 보고 사람이 살고있 을 거란 생각에 묵향은 그 집을 향해 달려갔다. 똑똑... 그러자 안에서 13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가 문을 빼꼼이 열고는 밖을 바라 봤다. 그런데 문앞에 괴상한 가죽쪼가리를 걸치고 있는 묵향의 행색을 보고는 놀라서 물었다. "와... 몬스터를 만났어요? 옷이 왜그래요?" '[이런..]' 묵향으로서는 가장 큰 한가지 문제점에 봉착한 순간이었다. 꼬마애의 생김새 가 자신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한번도 본일이 없는 갈색 머리카락에 푸 른 눈... 어찌보면 요괴라고 생각이 들만큼 깜찍하게 생겼다. 그덕분에 하마 터면 주먹을 날릴 뻔 했지만... 뭐 생각해보면 달이 두 개인데, 사람이 갈색 머리에 파랑눈이 아니라 파랑머리에 갈색눈알이라도 이상할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참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꼬마애가 떠드 는 소리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단은 얘는 인간인 것 같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수가 있나?]' 난감해하는 묵향 앞에 한 여자가 나왔다. 아마도 묵향이 가만히 있자 어머니 를 데려온 모양이다. 그녀는 묵향으로서는 본적이 없는 색다른 옷을 입고 있 었다. 통이 넓고 긴 치마에 천으로 만든 이상하게 생긴걸 그 옷위에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하게 생긴것에는 허연 가루가 묻어있었는데... 묵향이 보기에는 밀가루가 아닌가 싶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가죽을 대강 둘둘 말아서 몸을 가리 고 있는 이상한 남자를 보고 꼬마애와 같은 갈색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그 여인은 조심스럽게 질문을던졌다. 지금 집에는 남자가 없었기에 이 눈앞 의 이상한 남자가 광기라도 부리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세요?" "[저 혹시... 제기랄... 이런다고 알아듣나?]" 색다른 묵향의 말에 여인도 놀란 듯 했다. 그 여인은 재빨리 아이를 자신의 뒤로 숨기면서 말했다. "뭘 원하는 거죠?" 원래 언어란 그 부근에는 다 통용되는 말이다. 인간의 말이 서로 다르면 의 사 소통이 안되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의 언어가 색다르다면 이 부근 전체의 언어는 모두 다 이런 언어를 사용할 가능성이 컸다. 만약에 이곳 이 국경이라면 또 모르지만... 하지만 묵향은 여태껏 지나왔던 곳을 되돌아가 서 반대편으로 갈 생각은 포기했다. 왜냐하면 여기는 달이 두 개였으니까... 그 말은 곧 이곳은 아무리 돌아다녀도 중원이 나올 가능성은 없다는 말과 같 지 않은가. 우선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니까 그들과 대화를 할수있도 록 실력을 닦는게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과제였다. "[저... 여기서 지내면서 말좀 배울수 없겠소?]" "엄마. 저사람 뭐라고 하는거에요?" "모르겠구나. 오크나 고블린도 아닌데 이상한 말을 하네..." 모녀가 의심스런 눈빛으로 묵향을 바라보며 쑤근거리고 있을 때 묵향은 말로 해서는 도저히 안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묵향 먼저 상대에 게 그 사람의 옷을 가리켜 본 다음 자신의 가죽옷을 가리켰다. '제발 좀 눈치채라!' 몇번 더 손짓을 해대자 여인은 그 남자가 옷을 원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여인은 자신의 남편이 입던 옷 중에서 제일 낡은 걸 사내에게 가져다 줬다. 묵향은 그걸 받아서는 집 뒤로 돌아가서 입었다. 좀 크긴 했지만 어쩔 수 있나? 이나마 있는게 어딘데... 묵향은 옷을 입고나서는 주변을 휙 둘러본 다음 저쪽에 패다가 놔둔 장작더미가 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모 녀의 의심스런 눈빛을 뒤로하고 묵향은 묵묵히 도끼로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그래.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는거야.]" 갑자기 묵향이 장작을 패기 시작하자 의아해 했지만 이 행동으로 그녀들도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강도나 도둑은 아닌거 같고... 그럼 옷을 얻어 입었으니 그 댓가로 장작을 패는건가? 어쨋든 말이 안통하니 두고 볼 수 밖에. 하지만 묵향이 이궁리 저궁리 하면서 천천히 장작을 패는동안 꼬마애가 묵향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걸 보고 묵향이 꼬마애한테 물었다. 당연히 말이 안통하니 손짓발짓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묵향은 자신이 쥐고있는 도끼를 손까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뭐냐?]" 꼬마애는 한동안 묵향이 의도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끝내는 뭘 원하는 지 알 수 있었다. "도끼" "[엑스(ax)?]" "예. 도끼요." "그럼 이건?" 쌓아둔 장작을 가르키며 물었다. "장작!" "[파이어푸드(firefood)?]" 조금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그 꼬마애를 데리고 다니며 이 근처에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물어대기 시작했고 열심히 머리속에 그 생소한 언어를 기억하려 고 애썼다. 몇 달 지나서 어느정도 말이 통하게 된 후에는 펜과 종이를 구해 다가 거기에 기록을 하며 외웠지만 처음에는 무조건 머리속에 쑤셔넣는 도리 밖엔 없었던 것이다. 어쨋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묵향은 언어를 죽 자고 익혔고 서서히 그 결과는 드러났다. 어쨋든 저녘때가 되어서야 돌아오는 그집 주인과 남자아이를 보고 묵향은 그 가 사냥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다 큼직한 활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슴 처럼 생긴 것 한 마리를 등에 이고 돌아왔던 것이다. 사냥꾼은 아내에게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정체모를 인물이(가죽만 대강 몸에 감고있는)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는게 약간은 못마땅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말도 못하는 데다가 꼬라지로 보아허니 뭔가 지독한 일을 당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쨋든 옷한벌 얻어입었다고 장작을 패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걸 보면 나쁜놈 같 지는 않아서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고 나자 사냥꾼은 상 대에 대한 선입관이 많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냥꾼이나 그의 아내가 조 심스러워 하는 것을 익히 눈치챈 묵향이 잠은 일부러 근처 숲에서 잤고 아침 에나 돌아와서는 여러 가지 일을 거들어주면서 말을 배웠던 것이다. 묵향은 정말 열심히 글을 익혔다. 밤에 잠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말을 배우 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일단 의사가 통해야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 인지 알수가 있을테니까... 그리고 틈틈히 사냥도 했는데 그 이유는 장작도 해주고 여러 가지 잡일도 도와줬지만 그냥 얻어먹고 있을수만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묵향에게는 반시진 정도의 사냥이야 별로 시간이 아까울 것 도 없었고 살수생활을 거쳤던 고수에게 있어서 토끼나 사슴정도 추격하는 것 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밥값을 해주는 덕에 그집 사람들 도 묵향이 말을 배우는 것을 잘 도와줬기에 빠른 시간안에 말을 배울 수 있었 다. * * * 쓸쓸한 표정으로 걷고있는 젊은 황제에게 한 남자가 걸어왔다. 그의 나이는 40대 초반정도로 단단한 근육질의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크라레스 제국의 근위대 대장인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였다. "어서 오시게 론가르트 경." "폐하... 상심하지 마십시오."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코린트에 공녀를 200명이나 또 바쳐야 하는 데... 내 백성들을..."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 매년 있어온 일이 아닙니까? 그걸 없애려면 최대한 빨리 국력을 회복하여 코린트에 맞먹는 힘을 길러야만 하지요. 그렇게 사소한 데까지 신경을 쓰시면 몸이 못견디십니다. 폐하." 그러자 젊은 황제는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공녀는 차출해 놨소?" "예. 폐하. 일주일 후에 코린트로떠날 것입니다." "가는길을 철저히 호위하여 코린트 녀석들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하게." 이 말을 한 이유는 10여년쯤 전에 산적을 가장하여 코린트 정규군이 공녀들 를 빼돌린 후 공녀를 보내지 않았다고 억지트집을 잡았던 일이 있었다. 그때 200명의 공녀를 또다시 차출해서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그 후로 크라레스 제 국에서는 공녀나 공물의 호위에 대단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소신이 직접 기사 100명을 이끌고 갈것이니 심려하지 마십 시오. 폐하." "그럼 부탁하겠네." * * * 2달정도가 지난다음에야 묵향은 이곳이 '트루비아'라는 작은 왕국이었고 여 기서는 각 지방을 '귀족'이라 불리는 '영주'들이 다스린다는 것과 트루비아는 코린트라는 대 제국의 작은 속국이라는 사실, 또 이웃인 '토리아' 왕국과 사 이가 안좋다는 것 등 자잘한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몬 스터'라 불리우는 괴물들이 많다는 것과 그것들은 지능이 사람보다야 떨어지 지만 그런대로 뛰어나고 패거리로 행동하며 산적질도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 다. 거기에 사람을 잡아서 먹기도 한다는 것도... 그래서 몬스터는 조심해야 한다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은 몬스터를 먹지 않는다는 거였다. 묵향은 그 사실을 돼지 비슷하게 생겼지만 짤막한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또 '취익... 취익...'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맛깔스럽게 생긴 녀석을 잡아 다가, 가져다 주고 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물론 구역질 난다는 표정의 그 녀들을 - 낮에는 남자들은 사냥을 나가버리니까 여자들만 남아있다. - 뒤로하 고 오크를 가져다 버린다는 말로 따돌린 다음 숲속에서 구워 먹어버렸지 만.... 쩝쩝... 역시 중화인들의 식성은 대단해... 두다리 달린놈으로는 사람 을, 네다리 달린놈으로는 책상과 걸상을 제외하고는 다 먹을 수 있다는 그 막 강한 식성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꽤나 말이 잘 통하게 된 '타리아 블레어'란 꼬마애는 느긋하게 도끼 질을 하고있는 묵향과 꽤나 가까워졌다. 오빠나 아빠와는 달리 별로 힘도 안 들이고 슬슬 하는데도 나무들이 쩍쩍 토막이 나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라보 며 타리아가 물었다. "'다크'는 용병(傭兵)이에요?" 타리아는 '묵향'이란 발음을할 수가 없었기에처음에는 그냥 '아저씨'라고 불렀었다. 그래서 묵향도 이곳에서 생활하자면 뭔가 이름이 하나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이름인 '묵향'과 뜻이 약간은 비슷한 '다크 (dark)'라는 가명을 지었던 것이다. "용병이 뭔데?" "왜... 있잖아요. 돈받고 고용되어 싸움질하는..." "아... 그게 용병이냐? 아니야. 나는 용병이 아니야." "그럼 뭐에요?" "나는 그러니까 [마교]의 [부교주]지." "마키오? 마키오가 뭐에요?" "하하.. 뭐 그런게 있어. 그런데 지금은 길을 잃어버려서 먹고 살길이 막막 하단다. 그리고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고." 묵향은 짐짓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그의 눈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또 자 신이 여태껏 살아왔던 그 친근했던 삶을 그리워하는 눈빛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걸 보고는 타리아가 약간 궁리를 하더니 대책을 떠들어댔다. "그럼 용병길드에 가서 알아보지 그러세요?" "용병길드?" "예. 용병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모두들 길드를 조직하거 든요. 길드(=조합)라는 조직을 만듦으로서 길드에서는 용병을 원하는 사람과 또 일없는 용병들을 연결해 주죠. 길드 사무소는 큰 마을에는 다 있어요. 그 리고 여러 가지 세상 돌아가는 걸 줏어듣는데도 빠르구요. 그러면 아마 돌아 가는 방법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호오... 이거 좋은 소식을 알게되었군.' "그런데 여자애가 그런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용병은 남자들이나 하는거 잖아." "고리타분하게 무슨 말이에요? 여자 용병도 있다구요. 그리고 사실은 오빠가 용병을 하려고 했었거든요. 세상구경 하겠다구요. 그러다가 가출한 뒤 얼마 가지도 못하고 아빠한테 잡혀서 죽도록 맞았지만..." "하하하하... 알만하다. 알만해..." 황궁의 한쪽 구석... 그러니까 마법사들이 기거하는 곳에서 뭔가 빛이 번쩍 하더니 곧이어 황성(皇城)이 흔들거릴 정도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곧이어 그쪽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부상당한채 비틀거리며 걸어나 오는 마법사들을 재빨리 부축하고는 치료를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신전에서 축복을 내린 포션이라고 불리는 성수(聖水)가 매우 효력이 있는 치료약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포션은 가격은 비쌌지만 상처 치료에는 효과가 그만이었던 것이다. 한 노 마법사의 상처에 수련마법사(修練魔法師;mage)가 포션을 바르고 있는 데 젊은 황제가 나타나서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토지에르 경. 무슨 일인가?" 그러자 노 마법사는 황당함과 죄송함이 적절히 섞인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실험이 실패했습니다." "흐음... 벌써 실패가 5번째군... 과연 엑스시온을 새로이 만든다는게 그렇 게 어려운 건가?" "예. 하지만 성공할 수는 있습니다. 실물을 만들다가 사고가 난게 아니라 자 그마한 실험용 엑스시온을 만들다가 폭발했으니 이정도로 끝난 것이지요. 어 쨋든 점점 더 많은 자료가 쌓이고 있습니다. 아마 조만간에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휴우... 대마법사(wizard) 안피로스의 던젼(일종의 마법연구를 위한 비밀 실험실)을 발견했을 때 짐은 모든게 끝난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군..." 그러자 그 마법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피로스의 던젼에서는 그가 과거에 만들었던 엑스시온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었고 만년(晩年)에 생각했던 엑스시온에 대한 자료만 있었습니다. 그도 그 걸 이론으로만 만들었을 뿐... 실제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연 구는 거의 90%이상 진척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신도 그걸 만들어볼 생각 을 감히 할 수 있었던 것이구요.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 오. 폐하." "알겠소. 경만 믿겠소. 그걸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 를 줄 수만 있다면... 10년, 아니 50년이라도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겠소." 뼈빠지게 노력하는 신하에 대한 깊은 신뢰를 황제의 눈에서 읽은 노마법사는 새로이 충성심을 다지며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할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 * * 다크는 '토미 블레어'라는 사냥꾼 집에서 장장 2년이라는 세월을 소모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을 배우는 것이었고... 또 길가다가 미친놈 취급 안 당하려면 그래도 이들의 관습이나 생활습관 따위도 알아야만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블레어 씨가 '알란' 마을에 사냥을 통해 얻은 가죽이나 말리거나 소금 에 절인 고기, 버섯, 약초 따위를 팔려고 마을에 갈 때 그와 동행하면서 이들 의 생활상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다크도 자신이 사냥한 것들의 가죽이 나 이빨, 뿔 등 돈되는 것들을 함께 팔아 약간씩 돈을 모았다. 여기서는 돈의 최하단위가 타라. 100타라가 모여 1실버라는 10g 무게의 은화가 된다. 그리고 50실버가 모여 10g의 무게를 가진 1골드라는 금화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너 무 많은 동전을 가지고 다니지 않을 수 있도록 편의를 주기 위해 10타라, 25 타라, 50타라짜리 동전이 있었고 5실버, 10실버, 25실버짜리 은화도 있었다. 그리고 5, 10, 25골드짜리 금화도.... 다크가 최초로 구입한 것은 옷이었다. 토미 블레어씨의 낡은 옷은 좀 컸기에 먼저 자신의 체구에 맞는 옷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돈이 그렇게 많지 못했 기에 보통 사람들이 그냥 평범하게 입는 바지와 셔츠, 그리고 속옷을 구입했 다. 그리고 망토 도... 망토야 중원에서도 권문세가의 자제들이나 멋내기 좋 아하는 녀석들이 입는 것을 보긴 봤지만 여기서는 좀 더 실용적으로 사용되었 다. 망토는 아주 두터웠고 여행자들의 경우 이걸 담요 대용으로 썼던 것이다. 다크는 블레어 가족이 사는 부근에서 언제나 노숙을 하고있었기에 여러모로 편리할 것 같아서 망토를 하나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구입한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정보였다. 즉 잡화점에서 35실버 16타라나 되는 돈을 주고 지 도와 여행자를 위한 안내책자를 구입했던 것이다. 다크는 그때서야 지금 자신이 사는 곳에서 아무리 동서남북 어느쪽으로 죽자 고 달려도 중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닳을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나 했었는데 그 최후의 가능성마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다크 는 포기하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고심했다. 하지만 더 이 상 조그만 마을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으로는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없 다는 것을 알고 그 길드란 것들이 존재한다는 좀 더 큰 마을로 떠날 결심을 굳혔다. 2년간 함께한 정이 그래도 좀 들었던 블레어 가족을 떠나 다크는 지도상의 좀 더 큰 마을을 찾아 떠났다. 그의 첫 목적지는 이 지방 영주인 누구더라 하 여튼 복잡한 이름을 가진 녀석이었는데... 그자의 성(城)이 있는 곳이었다. 주머니 안에는 12골드 8실버 62타라나 되는 돈이 들어있었고 뭐 이거라도 다 떨어지면 노상강도(路上强盜) 짓이라도 하면 되니까 처음부터 돈따위는 걱정 도 안했다. 다크가 길을 가면서 느낀 것은 대단히 짐승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 하는 몬스터라는 것들도 그렇고 또 늑대나 여우 뭐 그런것들... 토끼나 사슴 등 수많은 동물들이 버글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며칠에 한번씩 맛깔스런 개고 기를 - 늑대도 개니까 - 먹을 수 있었지만... 그날 저녘도 개고기를... 아니 지 늑대구이를 먹고있었다. 블레어 가족과 살면서 늑대의 발이나 송곳니 같은 것은 꽤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있었기에 - 도대체 왜 이런걸 장신구로 쓰는 미친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 필요한 부분은 잘라내거나 뽑아내고 굽고있었 다. 그런다음 이걸 잘 익혀서 뒷다리부터 뜯어먹고 있는데 늑대떼가 나타났 다. 그날은 달은 하나밖에 안떠있었지만 보름달이었기에 제법 주위가 환 했다. 그런데 저쪽에 늑대들 사이에 괴상하게 생긴 늑대가 한 마리 있었다. 그걸 늑 대에 포함시켜야 될지 감이 잡히지는 않지만 머리는 늑대같이 생겼지만 몸통 과 사지(四肢)에는 수북한 털로 뒤덮인 녀석이었는데 얼핏 봐도 8척(240Cm)은 되어보이는 장신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크는 늑대 뒷다리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건 도대체 또 뭐야. 하여튼 여기에는 별의 별것이 다 있군.]" 천천히 놈이 접근해 오는 것을 보면서도 다크는 빙그레 미소만 지으며 늑대다 리를 쥐고 뜯을 뿐... 다른 행동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하는짓이 같잖았으니 까... 상대는 순식간에 다크를 덮쳐왔다. 이정도로 빠를줄은 미처 예상을 못했기에 잠시동안의 주도권을 쥔 그녀석은 열심히 공격을 해댔다. 정말이지 놀라운 속 도에, 또 놀라운 힘이 느껴졌다. 이때 순간적으로 빛이 번쩍인다 싶을 때 묵 향의 손에서는 퍼런 강기가 날아가 상대의 몸에 깊은 상처를 냈다. 하지만 그 놈의 살은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고 계속적으로 놀라운 공격을 퍼부어댔다. "[제기랄... 정말 여기는 재생력 좋은 놈들이 많군. 그럼 이거나 먹어랏!]" 다크는 순간적으로 왼손에 들고있던 늑대다리를 옆으로 던져버리고 장풍(掌 風)을 발사했다. 물론 장풍을 넓게 확대시킨 것이 아니라 좁은 공간으로 한정 시킨 것이었기에 그 위력은 더욱 강했다. 늑대같기도 하고 인간같기도 한 놈 의 몸에 적중되자 그녀석의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뒤로 튕겨졌다. 하 지만 그녀석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섰다. 물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가진 채로 말이다. 정말이지 놀라운 생명력이었다. 하지만 그녀석은 일어나자 마자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저히 자신이 상 대가 안될 정도로 강자였기에... "[멍청한 녀석! 그렇게 도망갈거면 처음부터 뭐하려고 덤벼... 괜히 아까운 다리만 한짝 버렸잖아.]" 저런 괴물이 대도시 부근에도 나타난다는 것은 치안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영주라는 녀석이 산다는 '불케인' 마을까지는 이제 하루거리밖에 안 남았는데... 그런 대도시 주변까지 저런놈이 나타나다니... 아마도 이곳은 상 당히 치안이 엉망이던지 아니면 인구가 적은지도 몰랐다. 다크는 중원에 있을때도 그래왔지만 정말 필요할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경공 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 급할것도 없는데 죽자고 경공술을 전개할 필요를 못느끼기 때문이다. 오늘 도착하지 못하면 내일 도착하면 되는 것이고... 그 것이 다 그놈의 탈마에 이르러 500년에 이르는 생명을 보장받고 난 다음에 생 긴 습성이 아닌가 싶다. 다음날 아침에도 어제 먹다남은 늑대고기를 소금에 찍어 먹는 것으로 식사를 해결한 다음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말이 천천히지 보통 사람들이 빨리 걷는 것과 거의 비슷한 속도였다. "흐읍..." 상쾌한 아침공기였다. 그리고 이곳에 온 다음에 느낀 점도 그렇다. 여기는 대단히 대자연의 기가 풍부한 곳이었다. 정말이지 이상할 정도로 강력했다. 다크 자신이 탈마(脫魔)에 이르러 있어 빠른 시간내에 소모한 기가 보충된다 고 하지만 여기서는 왠만한 무공을 사용해 가지고는 거의 자신이 무공을 사용 했었는지도 못느낄 정도로 빠른속도로 기가 보충된다는 걸 느꼈던 것이다. '[이런 곳이라면 아마도 무공을 익히기가 더욱 쉽겠지. 내공을 쌓는게 그만 큼 빠를테니까... 그렇다면 이곳의 고수들은 어떤 무공을 사용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 사이 어느덧 제법 넓은 하천이 나타났고 그위 에는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다리가 놓여있었다. 그 다리위로 걷고 있는데 앞쪽에 왠 여자가 다리 옆에 서있던 나무 뒤에서 나오면서 말을 걸었 다. 황금색 머리카락에 푸른눈의 제법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긴 것과는 달리 2척정도 길이의 날카로워 보이는 검을 뽑아들고 서있었다. "이봐. 지금 어디가는 거야?" "불케인 시(市)에..." "이 다리를 건너려면 통행료가 있다는거 몰라?" "얼마냐?" "10실버..." "10실버라고? 엄청나게 비싸군. 못주겠다면?" 그 아가씨는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헤엄쳐서 건너야지." "하하하... 이거 재미있는 [소저]군. 헤엄쳐야 한다... 이거지?" 그와 동시에 다크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금발의 아가씨는 놀라서 찌르려고 했지만 다크의 속도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었다. 재빨리 상대가 검을 잡은 손을 왼손으로 잡고 그녀의 목을 오른손으로 거머쥔 다음 위로 들어올렸 다. 목을 잡힌 상태에서 위로 대롱거리기 시작한 여강도(女强盜)는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지만 다크는 못들은 척 말을 건넸다. "내가 솜씨를 보여줬으니 구경료를 내야지." "저.. 돈 없어요. 오죽하면 강도질을...?" "하하... 그건 네 사정이지. 나야 알바 아니고... 어디보자..." 상대는 멱줄을 잡힌 상태라 반항할 엄두도 못내고 있으니 몸수색은 아주 간 단하게 이뤄졌다. 허리에 있는 돈주머니를 꺼내보니 그래도 잔돈 얼마정도는 들어있었다. 그걸 대강 들여다 본 다음 다크가 즐겁다는 듯 말했다. "히야... 이거 15실버는 되겠군. 감히 돈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다니..." 다크는 그걸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은 다음 그녀의 2척 길이의 검과 그녀의 품속에서 꺼낸 작은 단검 2자루도 뺐았다. "제법 돈이 되겠군. 하지만 이거 가지고는 모자라." "뭐가요?" "구경료... 눈요기를 했으니 돈을 줘야할거 아냐? 할 수 없군. 벗어! 그거라 도 팔아야지." 그 여자의 망토 와 외투까지 뺏은 다음 그녀의 손수건을 찢어 끈을 만든다음 팔을 묶기 시작했다. 여자는 감히 반항은 못하지만 그래도 입은 항의하라고 달려있다는 듯 떠들어댔다. "뭐하는 거에요?" "조금 지나보면 알게 돼!" 그런다음 여강도의 몸을 번쩍 들어올리자 그녀의 경악한 목소리... "도대체 뭐하는 거에요?" "아직도 구경료가 안돼. 나머지는 몸으로 대신해 줘야겠다." "끼야약...." 첨벙... 다크는 다리 위에서 강으로 곧장 그 여자를 집어던져버렸다. 다리는 안묶었 으니 수영실력이 좋다면 운좋으면 살수도 있겠지... 하지만 수영실력이 모자 라서 익사(溺死)하더라도 자신의 책임은 절대 아니라는게 다크의 생각이었다. 평소에 수영연습을 안한놈... 아니 년이군. 어쨋든 그자의 죄지... 첨벙거리 면서 차가운 물속에서 다리를 바둥거려 가까스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동작을 되풀이하는 그 여강도를 바라보며 다크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꼴 좋군. 이걸로 구경료는 됐어." "어푸.. 이자식... 죽여버릴꺼야...." 다크는 그녀의 키득거리며 악에받친 욕설을 뒤로하고 그녀에게 뺏은 것들을 챙겨들고 불케인 시로 향했다. * * * "폐하!" 젊은 황제는 허둥지둥 들어오는 신하를 느긋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약간은 의 아함을 띈 얼굴로 질문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오?" "아주 긴급을 요하는 정보를 획득했습니다." "뭔가요?" "연구를 하면서 전에 획득했던 드래곤 하트만으로는 모자랐는데... 그 드래 곤 하트를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제 황제의 표정에 더욱 의아함과 궁금함이 짙어졌다. "어떻게... 드래곤 하트는 도저히 돈으로 살수도 없을 정도로 비싼데... 전 에도 어딘가의 던젼에서 루빈스키 폰 크로아 경이 구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게 또 어딘가의 던젼에라도 있다는?" "아닙니다. 지금 코린트 제국에 있는 지혜의 여신 아데나를 모시는 드로아 대신전에서 보유중인 드래곤 하트를 어떤 일로 트루비아에 잠시 빌려준다고 합니다. 이걸 가로채야만 합니다." 그러자 젊은 황제의 얼굴에 근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트루비아는 별볼일 없 는 코린트의 작은 속국이었지만 코린트의 정규기사단이라면 얘기가 다른 것이 다. "흐음... 드래곤 하트라면 경비가 엄중할텐데... 그 가치가 가치인 만큼..." "안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드로아 대신전이 위치한 국가는 대제국 코린트. 누가 감히 그걸 건드릴 생각을 하겠습니까? 입수한 정보로는 트루비아의 국경 선까지는 코린트 제국에서 파견된 기사들이 호위하며 그중 소드 그래듀에이트 (sword graduate)는 한명이라고 합니다." "흐음... 소드 그래듀에이트가 있다면 타이탄(titan)도... 이쪽에서도 타이 탄 몇대 동원하는 거야 문제가 없지만 타이탄이 동원되었다면 어떤 국가가 그 걸 훔쳤다는 걸 알고 철저히 추격해 올텐데... 안돼. 타이탄을 동원한다면 코 린트가 눈치챌거야." "예.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어쨋든 코린트에는 타이탄이 400여대나 있으니 까요. 하지만 트루비아는 다르죠. 코린트 측 경비대는 트루비아와의 국경선까 지만 호위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트루비아에서 경비를 하죠. 정보로는 기사 한명, 그도 소드 그래듀에이트지만 타이탄은 없는 자라고 들었습니다. 대신 기사들 50명으로 호위한다고..." 그러자 젊은 황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음... 타이탄이 없다면 해볼만 하겠군. 대신 꼭 배후에 국가가 개입되었 다는 것을 숨겨야만 해. 알겠나?" "예." "백성들과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행동을 허락하겠소. 하지만 꼭 성공해야만 하오." "예. 폐하!" 불케인 시 불케인 시는 역시 영주가 사는 지방도시인 만큼 수많은 인간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다크가 불케인 시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숙식을 해결할 곳을 잡는 일이었다. 일단 이곳에 얼마나 오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또 전과는 달리 사람의 이목이 많은 곳이라서 나무위에서 잘수도 없었다. 다크가 적당히 물어서 찾아간 곳은 식당과 여관을 함께 하는 '흰토끼 여관(inn)'이었다. 그 건물은 4층이나 되었는데 중원에서는 2층 이상의 건물이 거의 없는데 반해서 이곳은 거의 대부분의 집이 몇층씩이나 올라가 있었다. 다크가 문을 턱 열고 들어가자 살찐 흰토끼마냥 덩치가 대단한, 살이 투실투 실 찐 여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음. 역시 이름이 주인과 잘 어울리는군...' 감탄을 하며 바라보는 다크에게 그녀가 물었다. "묵으실 거에요?" 다크가 고개를 조금 까딱 하자 그녀가 말했다. "말은 있어요?" 다크가 고개를 좌우로 젓자 그녀는 또 말했다. "지금 식사, 목욕, 수면? 어떤걸 원해요?" "식사." 그런다음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자 그녀가 말했다. "뭘 드실건데요?" "그런대로 맛이 괜찮으면 아무거나..." "그럼 술은?" "맥주" 다크는 느긋하게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맥주는 다크가 블레어 가족과 지 내면서부터 한번씩 마시기 시작한 술이었는데 쌉쓰름 했지만 차게한 맥주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맛이 있었다. 다크는 음식을 먹으면서 맥주를 조금씩 마셨 다. 맛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고여기서 말하는 요리들의 이름이 뭔지 잘 알지도 못하는 다크로서는 설혹 맛이 수상한게 나왔다고 하더라도 뭐라 할말 은 없었을 것이다. 다크가 2년간 지내온 곳은 사냥꾼 가족이 살던 시골구석의 외딴 집이었다. 그들이 음식을 만들어 먹어봐야 얼마나 많은 가짓수로 만들어 먹었겠는가? 그냥 푸딩 몇종류하고 야채를 이용한 몇가지 요리, 고기는 삶거 나 굽거나 튀기거나... 그 외에 과자 몇종류 하고 빵 외에는 먹어본게 거의 없었다. 다크가 먹고있는 테이블 옆쪽에 또다른 손님들이 앉았다. 이들은 이미 묵은 지 조금 된 듯 2층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다음 여러 가 지 주문을 했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맥주를 시켜놓고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일행은 7명이나 되었고 그중에 2명은 여자였다. 한명은 날렵하게 차려입고 2척 반 정도 길이의 얄팍한 검을 차고있었고 또 한명은 여러 가지 복잡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특이한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외의 남자 다섯 은 모두들 그냥 여행자들이 흔히 입는 옷들을 입고 있었지만 무장은 각기 달 랐다. 어떤자는 얄팍한 2척(60Cm)정도 길이의 검을, 어떤자는 3척정도, 어떤 자는 무려 5척(150Cm)에 달하면서도 두툼한 검신을 가지는 너무나 무거워 보 여서 사용할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검을 가진 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검을 딴 사람들처럼 차고있지는 않았고 탁자옆에 세워둔 상태였다. "샤헨으로 가는데 꼭 그쪽으로 둘러가야 해?" "이런... 미디아는 이쪽으로는 안와본 모양이군. 물론 브루툰 쪽으로 가면 빠르지. 하지만 그쪽 숲에는 드래곤이 산다구. 성질 더러운 그린 드래곤이... 그래서 접근 금지구역이야." "으응..." 이 세계 최강의 생명체는 드래곤이다. 그들의 힘은 도시 하나를 완전히 파괴 하는데 1시간도 안걸릴 정도로 강력하다. 하지만 500살이 넘어서서 성체가 된 드래곤의 경우 안먹어도 살수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살생을 하지는 않지만 자 신의 구역을 침범하면 그 관례를 깨고 침입자를 디저트로 먹는 경우도 있었 다. 그렇기에 누구도 드래곤의 영역에 침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크로서는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또 이런말은 여기서 처음 들어보니 구미가 당길 수 밖에... 거기에 척 보아도 꽤나 노련한 맛이 풍기는 것이 여기저기를 많이 떠 돌아 다닌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면 아는것도 많을것이다. 다크는 식사를 중단하고 일어서서 옆좌석으로 걸어가서는 정중히 인사를 건 네며 말했다. 샤헨이라면 트루비아의 수도였고 아무리 작은 왕국의 수도라도 일단 왕이 사는 곳이니까 여러 가지 정보를 얻기에는 그곳이 좋을 듯 했기때 문이다. "실례합니다. 샤헨으로 가십니까?" "예. 왜 그러시는지?" "저도 샤헨으로 가는 길인데... 동행할 수 없을까 해서 말이죠." 그들은 다크를 아래위로 찬찬히 살폈다. 아마도 다크가 과연 도움이 될사람 인지, 아니면 짐이 될 사람인지 가늠해보는 것이리라... 다크는 7일간의 여행 을 거쳐 이쪽으로 왔지만 여행을 시작할 때 정든 블레어 가족이 여행용 옷을 새로 장만해 줬기에 옷만으로봤을때는 완전히 신출내기처럼 보였다. 거기다 다크가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니... 그리고 허리에 차고있는 얄팍한 검. 그건 다크가 여강도로부터 구경료라는 정당한(?) 댓가로 받은 것이었지만 아무튼 그 모양으로 봤을 때 이들로서는 좀 어리숙해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로 서는 어쩌면 짐이 될지도 모를 상대를 데리고 가야할까, 말까 상당히 고심하 는 것이다. 그중 한명이 다크를 지그시 보더니 말했다. "검을 쓸줄 아십니까?" "그런대로..." 그러자 그중 두터운 검을 가진 인물이 약간은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샤벨(shabel)을 가지고 여행을 하기는 상당히 힘들텐데요... 그걸로 어떻게 몬스터를 상대하려고 그러시오?" 그러자 다크는 슬쩍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걸로도 충분하죠. 당신들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거니까 같이 가면서 길 만 알려주면 되오." 그러자 상대 남자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다크를 세심히 살표보더니 말했 다. "뭐... 샤헨까지는 그렇게 어려운 길도 아니니 같이 가기로 하지요. 나는 팔 시온 엘마리노라고 하오. 이제 서른 넷이 되지요. 앞으로 잘 부탁하오." "나는 다크라고 불러주시오. 나이는.... 이제 스물... 다섯이지요." 다크는 나이를 말하면서 잠시 고심을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내 나이 일흔 이 넘었소.' 한다면 상대는 분명히 '아, 그렇소? 우리는 미친놈하고는 같이 안가니까 혼자 가쇼.'라고 할게 뻔하니 상대가 자신을 봤을 때 정말 최대한으 로 볼 수 있을정도만으로 나이를 끌어올려서 말했다. 너무 젊어도 골치아프기 때문이다. 괜히 잡일만 하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스물 다섯? 도저히 그정도까지는 안되어 보이는데... 꽤 동안(童顔)이군. 자 이쪽은 미네리아 로안스에르 사제님. 대지의 여신 케레스(ceres)를 섬기는 사제시지. 도저히 서른 다섯 살로 보이지 않지만 사실이야." 자신의 소개를 팔시온이 해주자 대단한 미모를 갖춘 여인이 방긋 미소를 지 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리고 이쪽은 미카엘 드 로체스터. 무예 수업을 한다고 돌아 다니는 사람 이지." 자신의 소개를 해주자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우람한 덩치에 두툼한 근육질의 신체를 소유한 짧은 콧수염을 기른 상당한 미남이 인사를 건네왔다. "미카엘이라고 부르게." 어쨋든 이런식으로 첫인사가 건네졌다. 미네리아는 신을 받드는 사제이기에 모두의 존경을 받는 듯 했고... 나머지 팔시온, 미카엘, 미디아, 가스톤은 거 의 나이들이 비슷했기에 서로에게 말을 놓으며 대화를 했다. 그 외에 지미와 라빈은 갓 스물을 넘긴 정도의 애송이들이었기에 그들에게 존대를 해주고 있 었다. 그렇기에 묵향이 대강 생각해서 말한 자신의 나이 스물 다섯 살은 그 두 그 룹의 중간에 위치하며 한쪽에서는 존대어를 받고, 또 한쪽에는 존대어를 해줘 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안그러면 그런 건방진 놈을 파티(party;패거리)에 받 아주지 않을것이기때문이었다. 서로간에 탐색적인 질문과 답변이 오고가면서 다크가 알아낸 사실은 몇가지 되지 않았다. 사실 방금 만난 인물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시시콜콜 물어볼 수 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다크가 그 두툼한 검을 가진 '팔시온 엘마리노'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에게 말했다. "그 검을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남자는 별 생각없이 옆에 세워져 있는 검을 들어서 다크에게 건네 줬다. 다크는 그 검을 잡는 순간 놀랐다. 그가 검을 놓자 떨어지는 검을 그 주인인 팔시온이 재빨리 잡은 다음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마력검(魔力劍;magical power sword)이라는 걸 눈치챘군. 놀라운 안목이 야." 그러자 다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마력검이 뭐지요?" 그러자 경악한 팔시온의 되물음. "설마? 마력검이 뭔지 몰라서 묻는건가?" 다크가 고개를 까딱거리자 상대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아마도 시골 에서 올라온 촌놈이라서 그런 상식적인 것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다크에게 자세히 설명을 시작했다. "아마도 시골에서 갓 올라온 모양인데 내가 차근차근 설명해 주지. 마법을 쓸 수 있는 검을 보고 마법검(magic sword)라고 부르고 그 마법검에는 두가지 가 있지. 마력검, 봉인검(seal sword)인야. 그 둘은 좀 차이가 있어. 마력검 은 검의 외부에 새겨진 주문외의 마법은 쓸 수 없지. 또 마법을 쓰려면 마나 도 많이 필요로 하고 말이야. 그에 비해 봉인검은 상당히 다르지. 주문따위 안새겨져 있다고 하더라도 물의 하급정령 운디네(undine)가 봉인되어 있다면 운디네가 쓸 수 있는 모든 하급의 정령마법을 다 쓸수있지. 또 정령마법 자체 가 마나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그것도 대단한 효과가 있고..." 그러자 다크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마나(mana)란게 뭐지요?" 그러자 주변의 인물들이 모두들 딱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고 그중 '가 스톤 기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검사로는 도저히 보기 어려운 갸냘픈 체 구의 남자가 도저히 다크의 무식함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참견했다. "마나도 모른단 말인가? 마나란 세상의 근원적인 힘이지. 마나는 보이지는 않지만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란 말일세. 그렇기에 마나가 있음으로 해 서 세상이 생명으로 넘칠 수 있는 것이구...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 몸속에 마나를 가지고 있지. 하지만 저 마력검이나 봉인검은 마법을 사용하게 해주지 만 일반인으로 봤을때는 엄청난 마나를 사용자에게서 뺏기 때문에 문제가 되 는 것이지. 능숙한 검사는 많은 마나를 몸속에 축적하고 있고 또 마법사는 자 신의 몸을 매개체로,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주변의 마나를 흡수해서 사용할 수 있지. 또 그걸 다 소모한다 하더라도 대기에 떠도는 마나를 빠른속도로 흡 수하기에 어느정도 마나를 상실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지만 일반인이라면 다르 지. 잘못하면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마나까지 뺏겨 죽을수도 있다네." '아... 기(氣)를 보고 마나라고 하는군. 이제서야 저놈의 검을 잡았을 때 내 력이 빠져나간 이유를 알겠군.' "흐음. 이제서야 이해를 하겠군요. 자세히 설명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런데... 정령이란게 뭡니까?" 그러자 가스톤이 말했다. "아니, 세상에 정령도 모른단 말인가?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정령 술사의 눈에는 보인다고 하더군. 물을 관장하는 정령, 불을 관장하는 정령... 뭐 하여튼 여러 종류가 있지. 어쨋든 내가 눈으로 보여줄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런게 있다고만 알고 있게." 그제서야 다크는 팔시온이 가지고 있는 검을 다시 받아들었다. 아주 미약한 기가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일단 내력이 빠져나가는 이유를 알아냈는데 더 이 상의 미지의 물건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이정도 쯤의 내공이야 별 문제될 꺼리도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차려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다섯자의 길이에 두께만도 4치(12Cm)가 넘어가는 검의 무게치고는 너무 가벼웠다. "이건 특별한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진 검인 모양이죠? 아주 가볍군요." 그러자 팔시온은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건 마법이 걸려있기에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지. 일부 검에는 경량화(輕量 化)의 마법을 걸지만... 사실 검의 무게를 줄여봐야 파괴력만 떨어지지. 검의 무게가 줄어들면 아마도 적의 공격으로 검이 부서지는 경우는 줄일 수 있겠지 만 제 위력이 나오겠나? 검의 무게도 공격에는 한몫을 하는데 말이야. 이 검 은 파워업(power up)마법이 자동마법으로 걸려있어. 그래서 아주 가볍게 느껴 지지만 힘이 평소의 두배정도 강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을거야. 왼손으로 딴 물체를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지." 다크는 왼손으로 탁자위에 올려져있는 맥주잔을 한번 들어본 다음 팔시온이 한 말을 대강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자동마법이란게 뭡니까?" "하하... 자동마법은 지금 그 검처럼 사용자가 쥐자마자 마법이 실행되는 것 을 보고 자동마법이라고 부르지. 실지 그 검은 엄청나게 무거워서 마법 없이 들고다니려면 상당한 힘이 드는데... 그 검을 들때마다 '파워 업!' 하면서 주 문을 외울 필요는 없을거 아닌가? 그 반대로 마법을 사용할때는 자신이 사용 할 마법의 이름을 외쳐야만 발동하는게 수동마법이지." 다크가 대강은 이해를 했는지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걸 본 팔시온이 덧붙여서 말했다. "마법을 쓸 수 있기에 들고 다니기도 좋고... 사용하기도 좋지만... 별로 좋 은 마력검이 아니라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수가 몇 개 안된다는게 흠이지. 한번 그 검을 들고 'fire blade(화염 칼날)'라고 외쳐보게나." 다크는 속는셈 치고 따라했다. "파이어 브레이드!"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다크의 손에 쥐어진 팔시온의 검이 엄청난 열 기를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화염의 칼날이라고 할 만 했다. '양강(陽剛)의 무학을 익히지도 않고 단지 기만을 주고도이런 효과를 볼 수 있다니... 놀랍군.' "저... 이거 멈추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그러자 팔시온은 멋적은 듯 싱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냥 검을 손에서 잠시만이라도 놓으면 되지. 그런 세심한 부분까지는 신경 을 안써놓은 검이라서..." 다크가 검을 손에서 놨지만 달아오른 칼날은 간단하게 식지 않았고 나무로 된 마룻바닥을 태우기 시작했다. 뭉클뭉클 연기가 조금씩 올라왔지만... 딴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작 검주인이나 여관 주인이 신경을 안 쓰고 있는데...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그 외에 간단한 방어마법 두개와 공격마법 하나가 더있지." 그러자 저쪽에서 가스톤이 다시 말했다. "다크, 그건 실험을 안해보시는게 좋겠네. 팔미온이야 마법을 배웠기에 저정 도의 마나 소모는 문제가 아니지만 자네 같은 경우 마나가 뭔지도 모르는 사 람이니까 더 이상 마나를 검에게 뺏기면 잘못하면 어쩌면 수명이 줄어들지도 몰라." 하지만 다크는 그 말을 못들은 척 말했다. "그래도 모처럼 알게되었으니 한번 실험을 해보고 싶군요. 이번에는 뭐라고 하면 되죠?" "화살같은 걸 막아주는 포스 실드(force shield;물리력 방어막)하고 마법을 막아주는 매직 실드(magic shield;마법 방어막)가 있어." 주 : force shield를 물리력 방어막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포스 실드는 마법 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법을 막으려면 magic shield를 쳐야 한다. 둘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는 마법으로 3사이클의 바리어가 있지만 팔시온의 마법 검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몇가지 마법은 모두 1사이클에 속하는 마법들이다. 이 셋의 방어력은 똑 같다. "흐음..." 다크는 바닥에 꼽혀있던 검을 다시 꺼낸 다음 참시 시간을 끌다가 외쳤다. "포스 실드!" 그와 동시에 짧은 화살 하나가 보이지 않는 막에 튕기며 떨어졌다. 그와 동 시에 다크는 싱긋웃으며 말했다. "제법 효과가 있군요. 그럼 공격마법은 뭐죠?" 튕겨나가는 화살을 보고 잠시 멍해졌던 팔시온은 다음 말을 이었다. "공격할 대상을 향해 검끝을 향하고... 화이어 볼(fire boll;화구;火球)" 이때 두 번째 화살이 포스 실드를 향해 날아왔지만 역시 뚫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검 끝은 창문밖을 향했고 다크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파이어 볼!" 검끝에서 둥근형태의 불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어떤 지점을 향해 날아갔다. 그곳에는 다크를 향해 화살을 날린 사내가 세 번째 화살을 석궁에 장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더 이상 쓸모없는 화살을 장전 한다고 허비되 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보고 경악한 그가 나무 아래로 뛰어내리자 마자 나무에는 불덩어리가 격중되었고 곧이어 나무는 화염에 감싸 졌다. 아래로 급히 뛰어내린... 아마도 너무 급하게 뛰어내렸기에 떨어지는 것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는지 다리를 절뚝거리는 사내가 인상을 구기겨 달아 나는모습이 잠시 보였다. "하하... 정말 대단한 위력이군요." 여태까지의 상황을 지켜보던 일행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다크를 쏘아보기 시 작했다. 다크는 이들의 의문에 가득찬 시선을 받으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이들의 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보통사람이라면 이 정도로 마나를 왕창 써먹었다면 지금쯤 축 늘어져야 정상인데... 이자는 그렇 지가 않았다. 거기에다가 상대가 공격할 타이밍까지 잡아가며 포스 실드를 동 작시키지 않았던가? 팔시온이 가진 마력검은 겨우 1싸이클에 들어가는 마법이 기에 그 실드가 미치는 공간은 아주 작다. 즉 1인용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두 발이나 되는 화살이 다 실드에 맞고 튕겨나갔다면 그 공격은 이 '다크'라고 자신을 소개한 수상스러워 보이는 자를 노린것이라는 확증(確證)이 되는 것이 다. 드디어 저쪽에서 의심스런 눈길을 던지고 있던 흰색의 헐렁한 옷에 검은색의 각종 문양이 다채롭게 수놓아져 있는 옷을 입고있는 '미네리아 로안스에르'라 고 자신을 소개했던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는 여자가 입을 열었다. "방금 그 화살... 당신을 노린거죠?"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실드를 펼치자 마자 날아왔으니... 하지만 나는 시골에서 방금 전에 올라왔고... 별로 원한을 살 사람이..." 다크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말을 하는 도중에 자신에게 원한을 품음직한 사람이 한명 있다는 것이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자는 '여자'였는데...? 하지만 다크의 설명을 들은 그자들은 창문으로부터 다크에게 가려졌던 한 인 물에 주목했다. 즉 그자와 창문 사이에 다크가 위치했으니까 아무래도 가장 기초적인 지식인 '마나'도 모르는 인물보다는 '미카엘'이라 불린 그쪽이 더 원한을 살 일을 많이 했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리라... 미카엘 드 로체스터라는 남자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무예 수업자 (PALADIN)로서 3척 반 정도 길이의 롱 소드(long sword)를 가지고 있었다. 두툼한 근육질의 신체를 소유한 미남자로서 짧은 멋진 콧수염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외모에 신경을 쓰는 인물인 모양이었다. 다크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미카엘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나한테 그런 시선 보내지 말라구. 나한테 원한 품은 인물들이 워낙 많아서 누군지 감도 안잡히니까..." "흠... 아무래도 미카엘에게 날아가던 화살들이 다크가 뿜은 실드에 막혔다 는게 더 신빙성(信憑性)이 있는 추리겠군요. 어쨋든 운도 좋다니까..." 이런저런 말로 쑤근거리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문이 덜컥 열리며 두툼한 갑옷을 걸친 3명의 인물들이 들어섰다. 그들의 갑옷은 통짜로 된 철판으로 된 것이었지만 움직이기 편하게 상체만을 가리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에 달린 롱 소드를 철그럭거리면서 걸어 들어와서는 술집 주인에게 물었다. "여기서 파이어 볼을 날린 놈이 누구야?" "본인이 날렸습니다만..." 옆에서 듣고있던 다크가 간단히 시인을 하자 그들은 다크에게 다가왔다. "감히 도시 한복판에서 파이어 볼을 날리다니. 자네 제정신인가?" "안그러면 내가 먼저 죽을텐데... 날리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러면서 옆에 떨어져있던 두 대의 화살을 그들에게 보여줬다. "나무 위에 숨은 녀석이 이걸 날리는데... 그럼 반격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 까? 여기 술집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증인이라구요." 그러자 그들은 다크의 말을 확인하겠다는 듯 술집주인을 쳐다봤고 술집 주인 은 그 말을 확인해 줬다. "저분들이 술마시는데 밖에서 화살이 날라왔습죠." 그러자 다크를 추궁하던 무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크에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가지 한복판에서 파이어 볼을 날리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러자 다크는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그게 그정도로 무식하게 큰 불덩어리가 날아갈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 요." 그러자 그 무사는 다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놔." "예?" "시의 재산인 가로수(街路樹)를 태웠으니 배상금을 내야 할거아냐?"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5골드. 저 숲에서 나무를 하나 파다가 여기다 심으려면 그정도 임금은 줘야 되지. 다행히 다른 피해는 없으니 5골드만 내면 되는줄 알라구." 사실 숲에서 나무 하나 파다가 심는데 5골드나 되는 돈이 들어갈 리는 없었 다. 하지만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시에 소속된 수비대원 (GUARD)들이었고 이들과 시비가 붙어봐야 좋을거 하나 없기 때문이다. 뭐 남 는 돈으로 그들이 술을 퍼마시든... 계집과 하룻밤을 즐기던... 자신들의 돈 이 뺏기는게 아닌 바에야 참견할필요가없었던 것이다. 다크는 더 이상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5골드를 상 대에게 건네줬다. 그들은 그걸 받은다음 휘파람을 불면서 우루루 나가버렸다. 방금 여기서 돈을 뺏았으니 그들의 얼굴가죽이 아무리 두껍다고 해도 여기서 곧장 술을 마실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 다크는 팔시온에게 물었다. "여기 옷가지나 칼같은거 중고로 사는 집은 없나요?" "그건 왜 물으시오?" "팔것이 조금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 풀어놔 보시오. 일단 여기서 팔릴만한 것도 있을 수 있으니 까 말이오." 그러더니 술집에 앉아있는 손님들을 향해 외쳤다. "이보시오. 이 친구가 방금 돈을 뺏겨서 여비를 장만하려고 물건을 염가에 판매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혹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좀 구입해 보십시오." 술집에 앉아있던 인물들이 호기심을 포함해서 모여들자 다크는 들어오면서 여강도로부터 관람료로 거둬들인 것들을 꺼내놨다. 그가 꺼내놓은 것은 외투 나 망토, 작은 단검 등 여행에 꽤나 필수적인 품목들이었기에 몽땅 다 순식간 에 팔려버렸다. 다크가 부른 가격이 상당히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일행은 출발했다. 어제 차림과 같은 다크를 제외하고 모 두들 옷차림이 많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골이나 어둑한 산골에만 들어 가면 바로 산적은 고사하고 몬스터들이 설치는 곳에서 간단한 옷차림에 돈주 머니 하나 들고 여행할 골빈 놈들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모두들 말을 가지고 있었고 가장 가볍게 무장한 사람이 미네리아였다. 미네리아는 35세였지만 외모상으로는 25세 이상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대 단한 미모를 지닌 사제로서 안에 가죽갑옷을 입고 위에 그 독특한 흰색의 바 탕에 검은 문양을 새긴 정식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2척길이의 얄팍한 검을 차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녀의 검술실력은 형편없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눈에 확 띄는 이상한 옷을 겉에 입고있는 이유는 대지의 여신 케레스를 모시 는 사제들은 공격마법을 거의 몰랐고 대부분 치료마법계통을 익히기 때문에 상대가 해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었다. 미네리아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인물이 미디아 가드너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내부에는 체인메일(chain mail;사슬갑옷)을 입고 그 위에 가죽갑옷을 입고있었다. 말 안장의 왼쪽에는 자그마한 금속방패가 매 여져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활과 화살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2척 반 정도 길이 의 내로우 소드(narrow sword)라 불리는 가벼운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 외에 가죽갑옷 위에는 8개의 투척용 작은 단검이 줄줄이 꼽혀 있었다. 듣기로 는 그녀의 단검 투척솜씨는 대단하다고 한다. 하여튼 여자가 다루기 알맞은 작고 가벼운 무기들을 줄줄이 휴대하고 있었고 자신의 꼴사나운 모습을 큼직 한 망토로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미디아보다 더 엄청난 무장을 갖춘 인물들이 있었으니 가스톤을 제외 한 모든 남자들이 완전한 중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상체만이기는 하 지만 투터운 강철갑옷(half plate armor), 두터운 강철 방패, 3척 이상 길이 의 검, 심지어 무예 수업자라는 미카엘, 라빈 엘느와, 지미 도니에 들의 경우 한 대 맞으면 아침까지 일어나지 못한다는 공포의 대명사 모닝 스타(철퇴;鐵 槌;mace, Moning star)까지 안장에 매달고 있었다. 미카엘이나 라빈, 지미의 경우 셋다 무예 수업자들이지만 30대 초반의 미카 엘에 비해 라빈이나 지미는 20살 정도의 애송이들이었다. 라빈과 지미는 엠페 른 왕국에 있는 카로사 아카데미 기사학부를 수료한 동기이자 친구들로 현재 함께 여행을 하면서 무예수업을 한다고 했다. 아마도 기사(KNIGHT)들은 철퇴 를 정식메뉴로 배워야 하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흉칙하게 생긴 철퇴를 안장에 하나씩 매달고 있는 걸 보면... 이들이 모두 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시장(馬市場)에서 15골드나 주고 말을 사서 합류한 다크 - 그가 그 돈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 면 어딘가에서 슬쩍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모두들 처음부터 그가 꽤 많은 돈 을 가지고 있었는줄로만 알고있었다. - 이렇게 8명으로 일행은 늘어났다. 그 들이 천천히 말을 몰아 성문쪽으로 향하는데 뒤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갈라지는 것이 흘낏 보였다. 그것을 눈치채자 마자 팔시온이 무리를 이끌어 길 옆으로 일행을 인도했고 잠시 뒤 거의 50기(騎)가 넘는 기마병들이 번쩍거리는 갑주(鉀 )를 자랑하며 한손에는 랜서(손잡이 앞부분이 둥그런 찌르기 전용의 장창)를 잡고 보무도 당당히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크도 이정도 장관을 보게 될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자세히 그들을 봤다. 갑옷부터가 중원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송 나라의 관군들은 완전히 옷처럼 생긴 갑옷을 입지 않았지만 여기는 완전히 달 랐다. 빈틈 없이 은백색의 철로 감싼 그들 사이로 흑색의 갑주를 입은 한 명 이 보였다. 그들을 보면서 팔시온이 말했다. "이야... 안드레이 남작(男爵;BARON)의 행차시군. 저분도 소드 그래듀에이 트(graduate)지만... 아들까지 그래듀에이트의 시험에 통과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명문이야." "흐음... 소드 그래듀에이트가 무슨 말입니까?" "뭐? 자네는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전쟁의 신 아레스(ares)를 모시는 신전 에서는 각자가 가진 실력을 평가해 주지. 그런다음 마나를 움직일 수 있는 고 수들에게 '그래듀에이트(graduate;자격을 얻은 사람)'의 칭호를 주지. 검을 쓴다면 소드 그래듀에이트, 맨손 격투술이라면 그래플(grapple) 그래듀에이트 가 되는거지. 만약 정말이지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마스터(master;지 배자,대가)의 칭호를 받을 수도 있어." 그러자 팔시온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다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어디에서 살았나? 그런 기초적인 상식도 모른다 니..." "트레보크 산맥 주변의 사냥꾼...." "트레보크 산맥에서 줄곧 살았다면 아무것도 모를만도 하지." 그러면서 저쪽 지평선에 아스라히 보이는 높은 산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 다. 트보레크 산맥 부근의 일부도 안드레이 남작의 봉토였지만 사실 봉토라고 부를수도 없었다. 안드레이 남작 자신이 그 근처에는 가지도 않을뿐더러, 지 독하게 험악해서 사냥꾼들이나 간혹 들어갈까... 거기다가 드래곤들이 우글거 리니 감히 주변에 사람이 얼씬도 못하는 곳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 산골짜 기 얘기를 꺼내니 정말 세상물정이라고는 거의 백치쯤 되는 사람으로 해석하 고 팔시온은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아레스의 신전에서 그래듀에이트의 자격을 얻는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 야. 또 그래듀에이트라면 거의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들을 다 가지고 있지. 대 단히 강한 인물들이야. 저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코린트 제국의 경우도 그래듀에이트의 자격을 받은 인물은 1000명이 채 안되지. 우리들이 살고있는 트루비아 왕국처럼 작은 나라는 34명 정도의 그래듀에이트밖에 없어. 방금 지 나간 대열에서도 단 한명만이 그래듀에이트였다구. 이들은 엄청난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지. 그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래듀에이트라면 백작과 같은 등 급에 놓기도 하고... 또 일부 국가들은 공작의 위에 올려놓는 국가까지 있을 정도라네. 그만큼 허울좋은 작위따위 보다 강력한 실력이 우선시된다 이말이 야. 다크 자네도 무술을 배우는 입장이니 열심히 해보게나. 그러다 보면 언젠 가 그래듀에이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저기있는 저친구들도 그래듀에이 트가 되기위해 노력하고 있는게 아니겠나?" "그래듀에이트란게 그렇게 대단한 실력인가요?" "예를들자면 방금 지나간 50명이나 되는 기사들 중에서 한명만이 그래듀에이 트지. 하지만 그 그레듀에이트 혼자서 나머지 49명의 기사들을 순식간에 모두 없앨 수 있다면 이해할 수 있겠나?" '제기랄... 이해가 안가는군. 그래듀에이트가 엄청난 실력인 것 처럼 말하더 니... 나혼자서도 50명 쯤이야 하루아침 해장거리도 안되지...' 말을 달려가는 도중에도 팔시온의 설명은 멈추지 않았다. 그도 이 산골 구석 에서 갓 올라온 아이가 헛되이 목숨을 날리는 것을 보고싶지는 않았던 것이 다. "저기... 가스톤이 보이지?" "예." "가스톤은 마법사지. 3싸이클 정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정도로 꽤 수준 급 마법사라네. 하지만 지금 입고있는 차림을 보라구. 저게 마법사의 복장인 지... 옷만 봐서는 검사들과 차이가 하나도 없지. 하지만 가스톤은 옷속에 마 법매개물을 숨겨두고 있는 진짜 마법사지. 거기다가 검이라고는 거의 쓸줄도 모르는.... 그렇다면 가스톤은 왜 저렇게 무거운 차림을 하고 있겠나?" 다크가 고개를 좌우로 젓자 그가 말을 이었다. "마법사라는 걸 숨기는 거야. 내가 만약 적이라도 기습의 첫째 목표는 마법 사로 잡을거야. 마법사는 회피동작은 느리지만 그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엄청 난 위력을 발휘하거든. 아무리 무식한 오우거(ogre)라도 그점은 알고있다구.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자신들끼리의 공식집회를 제외하고 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기지. 가스톤의 경우 견습마법사(見習魔法師;MAGIC USER)는 벗어났고 아직 도 수련마법사(修練魔法師;MAGE)지. 아마도 운이 좋아서 5싸이클 급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정도의 수준에 들어간다면 그때서야 마법사 길드로부터 마법사 (魔法師;MAGICAIAN)로 인정을 받게 되지. 하지만 지금 되어가는 상황을 본다 면 7싸이클 이상의 주문을 행한다는 대마법사(大魔法師;WIZARD)라고 불릴 가 능성은 정말 눈꼽만큼도 없어." 잠시 뜸을 들이더니 팔시온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가스톤은 조금 늦게 마법을 배웠고 아직 별 볼일 없는 마법사라는 거지. 하지만 나중에 몬스터와 싸울 때 그를 본다면 별 볼일 없다는 말이 쑥 들어가지. 그만큼 마법사의 위력은 대단해. 아군쪽에 있 다면 대단한 보탬이 되지만 적이라면 아주 위험한... 그것이 마법사지. 그렇 기에 자네도 명심할 것은 어떤 싸움이 벌어진다면 상대방 마법사가 누군지를 빨리 알아내는게 가장 중요하지. 그런다음 마법사를 저세상으로 보내고 격투 를 시작하는거야. 그 원칙을 지키지 않고 상대가 마법을 쓰기 시작하면 아주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구." "명심하죠." 다크는 팔시온에게서 정말이지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얻어들을 수 있었다. 이 시대, 이 세계에 대한 수많은 지식들... 하다못해 시 외곽에만 나가도 몬 스터들이 출몰하기에 모든 도시들은 두터운 성벽으로 외곽을 감싸고 있었고 힘없는 주민들은 여행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고 보는게 옳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노예제도를 사용하고 있었고 농노(農奴)제도를 토착 화하고 있었다. 농노제도 하에서는 영주의 한마디는 곧 법이었다. 이런 지독하게 폐쇄적인 사회였지만 젊은이들은 단 하나의 꿈을 가지고 무예 를 닦았다. 사실 체계적인 수업 없이 무턱대고 노력만 한다고 익혀지는게 무 술이 아니지만 그래도 운이 좋다면 변방의 수비대 정도로 출세할 수는 있었 다. 더욱 운이 좋다면 어떤 도시의 수비대원이 될 수도... 전공(戰功)만 잘세 운다면 수입도 괜찮을 수 있었다. 몬스터는 버글거리고 있었고 변경에서는 평 화시라도 몬스터와의 전쟁으로 하루해가 뜨고지는 판이었다. 운이 좋다면... 정말 운이 좋다면 우수한 동료나 상관을 만나 제법 족보에 있는 무술을 배울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실력대로 조금 더 승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돈으로 자신의 아들을 아카데미에 보내 기사나 혹은 학자, 혹은 마법사로 키울수도 있었다. 물론 그 아들녀석이 잘해준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야 하지만.... 그런식으로 말한다면 장사쪽으로 진출한 자들이 더욱 유리할수도 있었다. 하 지만 뛰어난 상인을 아버지로 둔 뛰어난 기사들은 의외로 수가 적었다. 아마 도 자라나는 환경때문이리라...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자손대대 무가(武家)인 집안이 더욱 유리했고 또 사실상 거의 대부분 뛰어난 기사들이 각 명문에서 탄생했다. 거기에 무가의 경우 남들보다 더욱 유리한 점이 있었다. 가전(家 傳)의 무술이 그것이다. 뛰어난 기사들을 계속 배출한 집안은 예외없이 막강 한 가전무예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코린트 왕국이 자랑하는 소드 마스터(SWORD MASTER) 키에 리 발렌시아드 공(公)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은 모두 다 그래듀에이트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고 아마도 키에리 공이 가장 아낀다는 셋째아들은 다음 세대의 소드 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컸다. 아직은 미숙하다고 하지만 그 셋째아들의 실력을 국왕조차도 아낀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뛰어난 무가의 사병(私兵)으로 들어가도 좋은 무술을 교육받을 수 있다. 자신 개인의 군대니 더욱 강하게 가전의 무공 일부를 가르치는 거야 당연하니까... 이렇듯 비참한 지경에 처해있는 농민... 아니 농노들의 경우 가장 신분상승 이 확실한 방법인 무예수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단계부터 차곡차곡... 성문 수비병이라도 좋았다. 언젠가 자신의 아들은 진짜 수비병이 될지도 몰랐 고 손자는 뛰어난 무가의 사병이라도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런식으로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기사를바라보고 노력하다 보면 이름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때는 외곽 수비대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수도 있 었다.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으며 길을 가다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고 일 행은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을 준비했다. 가스톤은 의외로 상당히 부지런한 인 물처럼 보였지만 그는 특히 먹는것에 더욱 부지런했고 또 그만큼 신경을 쓰는 인물이었다. 그는 점심은 여관에서 구입한 빵과 햄 등으로 해결했지만 이제 야영을 시작하자 곧바로 모닥불에 냄비를 올리면서 식사준비를 시작했다. 그러자 다크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가스톤과 오랜시간 함께 생활했기에 그 런것에 익숙한 듯 팔시온은 조금 떨어진 개울에서 물을 길어왔고 미네리아나 미디아는 요리하는 것을 도왔고 미카엘, 라빈, 지미는 이곳저곳을 뒤지며 땔 감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크도 눈치를 살피고는 주변을 돌면서 땔감을 줏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자 모닥불 주위에는 충분한 땔감이 쌓였고 맛있는 스프 냄새가 사방에 퍼져가기 시작했다. 그때쯤 되어 모든 준비를 갖춘 인물들이 모닥불 주위로 모여들었고 그들은 미네리아가 돌리는 스프그릇을 받아들고는 시장에서 충분히 구입한 빵과 햄, 소시지 등을 돌리며 만족스런 식사를 시작 했다. 식사를 하면서 가스톤이 팔시온에게 물었다. "야영을 하면서 보초를 세울 필요가 있을까?" "여기는 시가 가까워서 별 필요는 없을겁야. 하지만 중부대로에서 벗어나는 모래부터는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야겠지." "그 근처에서 가장 무서운 몬스터라면 어떤게 있나?" 그러자 팔시온이 음식을 우물거리며 자신의 짐 보따리를 뒤지더니 책한권을 꺼냈다. 그런다음 잠시 뒤지더니 말했다. "뭐 별로 대단한 건 없어. 위어울프(werewolf;늑대인간) 정도군. 원래가 겉 모양도 사람이고 또 사람과 같이 살다가 보름달만 보면 발작을 하는 놈들이 니... 도시 주변에도 자주 나타나는 모양이지." * * * 세명의 남녀가 밤이라서 아주 잘 보이고 있는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아주 부드럽고도 긴 금발머리를 가진 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옆사람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 여자의 귀는 조금 특이하게 생겼다. 사람의 귀라고 보기에는 너무 컸고 윗쪽이뾰족했기 때문이다. "네가 말한 녀석이 저들 중에 있는게 확실하냐?" "예." "그럼.. 어떻게 생긴 녀석이야?" "보통 그냥 여행자 옷을 입었어요. 검은색 망토에 갑옷은 없었구요. 그리 고... 응... 얼굴은 20대 초반정도로 아주 젊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저 멀리 보이는 불꽃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쏘아봤다. 아무리 대강 잡아도 거의 500미터는 넘어 보였기에 사람의 얼굴은 거의 좁쌀 알 보다 작았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던 여자는 확정적으로 말했다. "알겠다. 저기 보이는군." "지금 공격할건가요?" "아니... 나중에 잠들기 시작하면.... 그런데 저 남자가 그렇게 실력이 뛰어 나다는 게 사실이겠지?" "예. 검술은 잘 모르겠지만 격투술은 대단하던데요... 거의 손도못쓰고 칼뺏 기고... 돈뺏기고... 옷뺏기고... 익사할뻔 했다구요."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가 덧붙였다. "저녀석 마법도 쓸줄 안다구요. 피하지도 않고 화살을 막은걸 보면 무슨 방 어마법을 쓴 것 같았고... 또 곧바로 내쪽으로 파이어 볼이 날아왔다니까요. 정말 그때 죽는줄 알았어요." "흥... 겨우 파이어 볼 가지구... 좋아 저놈은 내가 처리해 주지. 자 배고프 니까 식사부터 하자구..." * * * 첫 번째 화살은 어두운 밤하늘에서 갑자기 날아왔다. 저녘때부터 감도는 희 미한 살기(殺氣) 때문에 어느정도 대비를 하고있었기에 다크는 간단히 그 화 살을 포착할 수 있었고 곧바로 허리에 매여있던 샤벨이 날아갔다. 쾅... 놀라운 일이다. 화살과 검이 부딪치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챙? 아니면 화살 잘리는 소리 음... 싹둑 정도 되려나... 하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소리가 울려퍼진 것이다. 화살 속에 폭탄이라도 집어 넣어뒀는지 화살은 강렬한 힘으 로 폭발했고 아무 생각없이 샤벨을 거기 가져다 댄 다크가 가장 큰 피해를 입 었다. 물론 호신강기(護身剛氣) 덕분에 큰 부상은 면했지만 그래도 타격이 없 었던 것은 아니었다. 앞부분의 옷이 폭발의 충격으로 찢어발겨졌을 정도였으 니까... 그 폭발음과 동시에 가스톤이 외쳤다. "마법입니다. 모두들 조심하세요." 그런다음 그는 중얼중얼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그의 뒤 에서 미네리아도 함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때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마법을 띈 화살을 막기위해 노력했다. 무예 수업자들은 방패를 꺼내어 들었고 미디아도 얄팍한 방패로 마법사들의 앞을 가렸다. 그들은 자신 의 몸이야 어찌되었든 우선적으로 마법사를 보호하는데 총력을 다하고 있었 다. 또 다른 화살들이 몇발 날아왔지만 이번 것들은 폭발은 일으키지 않았다. 다 찢어진 옷을 보면서 망연히 서있는 다크를 보고 팔시온이 물었다. "몸은 괜찮아?" "아... 괜찮아요. 그런데 방금 그게 마법입니까?" "그렇지. 나도 자세히는 잘 모르겠지만 마법사들 중에 궁술(弓術)을 배운 자 들을 위해 화살의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전해지는 몇가지 마법이 있다고 언젠 가 들은 것 같아." "그러니까 상대는 마법사면서 궁수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강한 마법사는 아니야. 어이... 이봐.." 그와 동시에 다크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때 앞에서 또다른 화살이 날아왔 다. '알고도 당할 바보는 없지. 무상검법(無上劍法) 1장4절 방(防)!' 다크의 앞쪽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둥그런 막이 형성되었고 그 화살은 방에 격중된 다음 강렬한 열기를 뿜으며 폭발했다. 하지만 방을 뚫지는 못했다. 다 크는 마법이 방을 뚫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더욱 빠른 속도로 경공술을 사용 해서 접근해 갔다. 드디어 나무 옆에 몸을 반쯤 감추고 화살을 날리는 상대가 보였다. '한놈... 두놈... 세놈...' 그중에 화살을 활에 먹인 상태에서 중얼거리고 있는 여자가 한명 있었다. 그 와 동시에 다크의 몸은 그쪽으로 날아갔다. 여자는 다크가 자신을 향해 접근 해 오는 것을 보며 주문을 완성할 시간도 없이 곧장 화살을 날렸고 그 화살은 허무하게도 샤벨에 막혀버렸다. 그와동시에 날아드는 다크의 주먹... 퍽... "꺅!" '그다음 우아하게 몸을 선회하여 저녀석...' 팍... "윽!" '나머지... 응..? 어딘가 본 여자같은데...' 퍽! "악!" 다크는 한 대씩 맞고 기절해버린 두명의 여자와 한명의 남자를 보고 가소롭 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이녀석 체격이 나하고 비슷하군.'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타버린 옷을 벗어버리고 그 남자의 옷을 벗겨서 입었 다. "뭐 쓸만하군. 옷을 태웠으니 보상을 해야지." 옷을 다 입은 다음 세명의 손과 발을 꽁꽁 묶고난 다음 그들을 깨웠다. 툭툭.. "이봐?" 그들이 깨어나자마자 다크의 심문(審問)이 시작되었다. "방금 공격한 이유가 뭐야?" 하지만 상대로부터 답은 없었다. "좋게 말로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그런거야?" 퍽! 그와동시에 옆에 거의 벌거벗다시피 하고 묶여있던 남자가 정통으로 배를 차 인다음 고꾸라졌다. "말로할 때 들으라구. 왜 습격했지?" 그러자 저쪽에 있던 금발여자가 매서운 눈매로 다크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녀석이 더 잘알거 아냐? 불케인 시의 도둑길드 회원을 건드렸고... 또 도 둑길드에는 신고도 안하고 도둑질을 했지? 그러고도 네녀석이 무사할줄 알았 냐?" 그러자 다크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야 처음부터 무사할줄 알았고 또 지금도 무사하잖아. 가만있어봐라.... 일단은 그냥 놔두고 가고싶다마는 그랬다가는 또 따라올테고... 어떻게 하 지?" 조금 궁리를 하던 다크는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지 곧장 달려들어서 그 두 여 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끼약... 뭐하는거야? 이 파렴치한 놈." "이 치한..." 저마다 한소리씩 했지만 남자의 힘을... 그것도 무술 고수의 힘을 당해낼 여 자는 없었고 그들의 속옷을 제외하고 홀딱 벗겨버린 다크는 그녀들의 짐보따 리들을 몽땅 다 압수한 다음 뒤에 매여져 있던 말 세 필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그야말로 압수 아니 약탈이라고 하는게 맞을까? 어쨋든 압수했다. "두고보자 이 나쁜 놈!" "죽여버릴거야..." "흐흐흐... 좋으실 대로... 다음에 또 봅시다." 이제 다크는 휘파람을 불며 새로생긴 말 세 필에 짐을 싣고는 일행에게 돌아 가버렸고 짐은 물론 옷까지 다 뺏긴 - 거기다가 앞부분이 타버린 옷까지 몽땅 다 가져가 버렸다. - 두 여자와 한 남자는 이빨을 갈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 다. 남자라면 몰라도 여자가 속옷만 입고 돌아다닐수는 없었고 또 무기는 물 론 말, 식량, 돈까지 다 뺏겼으니 추격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다크가 말 세필을 끌고오는 걸 보고 모두 들 궁금해 하며 물었다. "그건 왠 말이야?" "까불기에 몽땅 다 뺏아왔죠. 옷이고 식량이고 말이고... 다 뺏겼으니 꼼짝 없이 다시 불케인 시로 돌아가야 할 겁니다. 아... 알고보니 저한테 원한이 있는 녀석들이더군요."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마법을 걸어놓은 화살까지 날아오나요?" "뭐 별짓 안했다구요. 불케인 시로 들어가는데 웬 여도적이 돈달라기에 잡아 서..." "수비대에 넘겼나?" "아뇨. 돈뺏고, 옷뺏고, 무기도 뺏은다음 손만 묶어서 강에다가 던져버렸죠. 그래도 인간적으로 손만 묶었으니까 익사는 안했다구요. 그때 가게에서 팔았 던게 그 도둑물건이니까..." "꺄하하하.." 기발한 대응책에 모두들 배꼽을 잡았지만... 뭐 그래도 도둑길드의 회원을 건드리는 것은 별로 장수(長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팔시온은 먼저 그점을 상기하며 걱정을 해줬다. "그래도 상대가 도둑길드의 회원이라면 조금 귀찮아질텐데..." "상관없어요. 방금 그녀석들도 도둑길드 회원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도 몽땅 다 뺏아왔죠."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미디아가 다크에게 조언을 했다. "그건 현명한 방법이 아니군. 나도 어렸을때는 도둑길드에서 일한적이 있지. 단검 던지기도 그때 배운거고... 도둑들은 상당히 하급 인생이니 만큼 자존심 이 강해. 그래서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살리기 위해 더 강한 사람하고 다시 올거야. 그땐 아주 귀찮아지게 되지." "뭐 괜찮을거에요. 꽤 멀리 도망치면 찾기도 어려워질거고 기껏찾아서 복수 따위 한다고 해도 막대한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아마도 포기하겠죠." "그렇다면 좋을텐데...." 다크는 하늘위에 박쥐같은 날개에 목과 꼬리가 길쭉한 이상하게 생긴 거대한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팔시온에게 물었다. "우와... 저게 뭐죠?" 팔시온이 하늘을 자세히 보며 말했다. "으음... 아마 길이가 15미터쯤 되는 거 보니 야생 와이번이야. 흔히들 비룡 (飛龍)이라고도 부르지. 여기서 봤을때는 작게 보이지만 다 자란녀석이네... 저걸 길들여서 용기사단에서 사용하지. 입에서 화염을 뿜기 때문에 대단히 위 험한 녀석들이라구. 야생의 와이번은 아주 흉폭한 녀석들이야. 가축이나 사람 도 공격하지." "용기사단에서 사용한다구요?" "응. 저녀석을 타고 날아 다니는 기사를 특별히 용기사(dragon knight)라고 부르는데... 사실 기사급이 비룡을 타면 정말 당할자가 거의 없지. 모두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어쨋든 요즘은 저거로 정찰하는데나 긴급한 서신을 전한다든지 뭐 그런데 사용하지." "길들이기는 쉽나요? 저위에 타고 하늘을 날면 기분 좋을거 같은데..." "하하하... 아주 성질이 지독한 놈들이지. 새끼때부터 길들여야 해. 안그러 면 길들이는게 거의 불가능하지. 길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길들인 비룡의 가 격은 아주 비싸다구. 아마 10,000골드쯤 할거야." "10,000골드라구요? 그럼 황금으로 100Kg이나 된다는 말이에요?" "응. 원체 가격이 비싸니까 저 남부최강이라 불리우는 마케론 제국의 적룡기 사단(赤龍騎士團)도 와이번이 500마리정도 밖에 없지. 어쨋든 꽤 무섭기도 하 지만 편리하기도 한 존재야. 참... 자네 돈이 좀 있으면 샤헨에서 좋은 갑옷 (armor)을 살 수 있을거야." "갑옷이요?" "갑옷하면 와이번의 갑옷을 가공해서 만든게 좋지. 샤헨에는 저 마도왕국 알 카사스로부터 '마법의 불'로 와이번의 비늘을 녹여 만든 각종 갑옷이 수입되 지. 아주 가볍고 튼튼하다구. 물론 와이번이 아니라 드래곤의 비늘을 녹여 만 든것이 훨씬 좋지만... 너무 비싸고... 뭐 와이번만으로도 충분히 가볍고 탄 탄하다구. 딴 나라는 마법이 안되니까 와이번 비늘로 비늘갑옷(scale armor) 밖에 못만들지만 알카사스는 마법으로 녹여서 꼭 쇠로 만들 듯이 여러 가지 갑옷을 생산하지. 사슬갑옷(chain armor), 통짜갑옷(flate armor)... 뭐 없 는게 없어. 그걸로 만든 방패도 판다니까...." "방패도 와이번 비늘로 만들어요?" "응. 저기 미디아 양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방패가 와이번 비늘을 마법으로 녹혀서 만든거지. 아주 가볍고 튼튼하다구." "상당히 귀한걸 가지고 다니는군요." "미디아 양은 근래에 우리 파티에 합류한 용병이지. 나이를 말하지 않지만 아무리 적게봐도 30살은 되었을거야. 여자로서... 그것도 용병으로 그정도 오 랜시간 살아왔다면 자신을 지키는 몇가지 비장의 술수는 간직하고 있다구 봐 야지. 참. 좋은거 하나 알려주지." "뭔데요?" "저 장갑 보이지?" 그러면서 팔시온은 미디아가 끼고있는 스파이크가 박힌 검은 장갑을 가리켰 다. "예." "저게 과거 마도시대에 대량생산되었던 여자용 장갑 '다크네'야. 가볍고 질 긴 회색늑대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자주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 "여자용 치고는 조금 무작스러운 모양을 하고있군요. 윗부분에 스파이크(강 철 못)도 몇 개 박혀있고..." "하지만 정작 무서운건 그게 아냐. 저건 아까도 말했지. 마도시대에 만들어 진 물건이라고... PUG(Power Up Gloves)라고도 불리던 건데... '파워 업 (power up)'하고 주문을 외우면 두배까지 힘을 뽑을 수 있지. 다 쓰고나서 '파워 다운(power down)' 하면 원상태로 돌아가고... 아주 편리하지 않나? 잠시만 사용한다면 정말 유용한 물건이지. 사실 물건따위는 잠시만 들어도 되 는 경우가 많거든. 활을 쏠때도 그렇고... 다크 너도 생각해 보라구. 싸움이 붙게 될때 상대가 여자라면 여자의 힘을 어느정도로 대강 예상하고 싸우게 되 지. 더군다나 도중에 몇번 검을 섞어봤으면 그건 예상이 아니라 확신이 되지. 이때 검을 섞는 그 찰나 힘을 높인다면..? 마법을 사용하는 시간이 아주 짧으 니 마나의 소모는 크지 않지... 하지만 상대는 예상못한 일격을 맞고 저세상 가는거야. 이런 비장의 물건들을 몇가지 가지고 있기에 용병이나 모험가들은 아주 싸우기 피곤한 족속들이야." "그런 마법을 띈 물건들이 많아요?" "저 과거 마도시대때 만들어진게 거의 대부분이지. 그때는 무슨 생각을 했는 지 마법을 지닌 물건들을 대량으로 만들었었지. 방금 설명한 '다크네', '힘의 반지', '불의 반지', 각종 마법무기들 등등... 종류도 엄청나게 많지. 하지만 마도시대는 오래가지 못했어. 처음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마법을 지닌 물건들은 마법을 사용할때마다 사용자의 마나를 너무많이 뺏았고... 나중에는 저주받은 물건이라고 사용을 회피했지. 사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흡수하는 마나는 보통사람이 견디기에는 좀 무리가 있으니까 말일세. 그때가 아마 마법사들처럼 마법을 죽자고 익히지 않아도 마법을사용할 수 있게해주 는 물건 하나만 가지고 마법을 쓸 수 있는 방법이 갓 개발된 마법의 중흥기였 을 때지. 그래놓으니까 나중에 그 피해가 밝혀진 다음에 사용자가 급감하고 생산이 중지되었지." 팔시온과 다크가 쑤근거리며 천천히 말을 달려 여기까지 왔을때였다. 먼곳에 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다크는 이들보다 훨씬 오래전에 이걸 눈치채고 있었지만 모른척 했던 것이다. 뭐 자신에게 해가되는 것도 아니고 구해줘봐야 별로 득도 없고... 돈이야 불케인시에서 충분히 장만 (?)했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고.... 하지만 그들은 거의 실력이 엇비슷한지 그 토록 다크가 시간을 많이 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치고박고 하고있었던 것 이다. 그 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가스톤이었다. 사실 마법사들은 그 파괴력은 엄청나지만 주문을 외울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에 절대로 앞에 나설 수 없었다. 상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눈치챔과 동시에 곧바로 사망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보게 팔시온. 앞에 누군가 싸우고 있어." 다크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그 미세한 소리에 반응하지 못하고있던 팔시온 이 청력을 집중했고(다크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팔시온도 1싸이클 정도의 마법 은 가능했기에 소리를 조금 크게 들리게 만드는 마법을 이용했다.) 곧이어 가 스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눈치채고는 곧장 말을 달려갔다. 그리고 나머지 일행도 그 뒤를 따랐고... 가장 뒤에 다크가 마지못해 따라갔다. 일행이 현장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거의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었다. 사방에 시체들과 주인잃은 말들이 널려있었고 그들을 죽였다고 짐작되는 회색갑옷에 청색 망토를 두른 인물들이 여기저기 쓰러져있는 몇몇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 는 백색갑옷을 인물들을 확실하게 저세상에 보내주고 있었다. "이런 나쁜 녀석들..." 다크가 봤을 때 회색갑옷을 입은 상대는 제법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부상자가 그중 태반이라고 해도 12명... 조금이라도 안목이 뛰어난 사 람이라면, 아래 쓰러져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실력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있는 회색의 수는 20명, 백색의 수는 무려 50명이 넘었다. 그렇다면? 여기 남은 12명은 아래 죽어있는 20명에 비해 운이좋은 몇놈을 제 외하고는 더욱 실력이 뛰어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것이다. 12명은 새로운 적의 존재를 눈치채자 부상자들 까지도 몸을 일으켜 말에 올 라타고 중간에 세워져있는 마차를 호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팔시온 등 여러 인물들이 그들을 향해 돌격해 들어갈때쯤에는 그들은 굳건한 방어태세를 갖춘 상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공격해 들어갔을까? 다크는 그게 궁금했지만 사 실은 쓰러져 죽은자들의 갑옷에 그 해답이 있었다. 은백색의 고급스런 갑 옷... 이 갑옷은 지금 다크 일행의 목적지인 샤헨을 수도로 삼고있는트루비 아의 정예, 라칸 기사단의 복장이었던 것이다. 트루비아 땅에서 트루비아의 기사단을 죽였다면 당연히 그놈들이 적일 것은 당연한 사실... 아마도 저 마 차안에는 저들이 노린 목표물이 들어있을 것이다. 거의 50미터도 넘는 뒤쪽에 마법사인 가스톤과 미네리아가 남고 나머지 5명 이 상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다크까지 합한다면 6명이 12명을 상대해야 하지만 그 12명의 반이 약간씩이라도 다친 부상자임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꿀 리는 대결도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상대는 오랜 결전으로 지쳐있었고 뒤에는 막강한 화력을 가진 마법사 가스톤이 있는 것이다. 가스톤이 품속에서 수정으로 만들어진 짧막한 막대기(stick)를 꺼내어 들고 는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우는 사이 나머지는 상대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때 뒤쪽에서 주문을 외우고있는 가스톤을 보고 회색갑옷 중의 한명이 외쳤 다. "마법사다!" 적도 노련하게 병력을 재배치했다. 7명이 돌진해 들어오는 5명을 막는사이 나머지 5명이 마법사를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그 다섯 명의 동료들 뒤를 따라 접근해오던 다크에게 가로막혔다. 상대는겨우 한명이 기에 놈들은 간단하게 처치할 요량으로 덤볐고 그들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 고 다크가 뒤미처 검을 뽑았지만 오히려 다크의 검은 상대의 검 두자루를 튕 겨냈고 그중 한명을 두토막으로 만들어 버렸다. 뒤이어 다크는 말에서 몸을 날려 당황하는 상대에게 뛰어올랐고 또다른 한명 의 목이 몸통에서 그의 검과 함게 떨어져 나갔다. 다크의 현란한 움직임을 본 회색갑옷은 경악에 찬 비명성을 질렀다. "그래듀에이트다.." 이상하게도 놈들은 그렇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저쪽에서 팔시온을 압도하며 느긋하게공격을 퍼붓던 회색갑옷 한명이 여태까지와는 달리 한방에 팔시온의 검을 날리고 쫙 검을 휘둘렀다. 팔시온이 가까스로 피하기는 했지만 갑옷의 앞부분이 길게 찢어졌고 또 너무 몸을 뒤로 뺀 덕분에 낙마하여 떨어졌다. 그 회색갑옷은 상대가 말에서 떨어지자 상대의 상처가 어느정도인지 확인할 여유 도 없이 곧장 다크 쪽으로 말을 몰아 달려왔다. 그리고 회색갑옷 한명이 이쪽 으로 달려오는 것을 본 아직까지 살아남은 세명 중 두명은 다크에게 또다른 한명은 가스톤을 향해 말을 달렸다. 이때 가스톤이 "파이어 볼"하는 외침과 함께 불덩어리를 던졌고 그를 향해 달려가던 녀석은 말과함께 통구이가 되어 버렸다. 불기운이 다크에게까지 은근한 열기를 전달할 때 즈음에 다크는 남은 둘을 헤치웠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조금 실력이 괜찮아 보이는 녀석과 일대일 로 대면할 수 있었다. 상대는 거의 1.8미터 길이에 이르는 마상용 장검(馬上用 長劍)인 바스터 소 드를 휘두르며 자신감있게 다크에게 달려들었다. 말과 말이 가까워지는 그 순 간 상대는 그 엄청난 장검의 힘을 십분 이용해 다크를 내려찍어왔다. 이때 다 크는 상대의 검날에 푸르스름한 검기가 형성되어 있는걸 볼 수 있었다. 다크 는 검을 들어 상대의 검을 간단히 막음과 동시에 말 안장의 한쪽 발 디딤대에 얹혀있는 왼발을 지지대로 이용해서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상대의 머리를 향해 오른발을 날렸다. 챙... 퍽... 두가지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고 상대의 머리에 한방 먹인 다크는 왼쪽 발 에 힘을 가해 아예 말안장에서 벗어나 땅에 내려섰고 상대는 머리가 터지면서 낙마(落馬)하여 반대편에 쓰러져버렸다. '싱거운 싸움이군...' 다크는 남은 적들을 없애기 위해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때 팔시온 일행도 남은 6명... 그것도 부상자 2명을 포함한 6명이었기에 간 단히 세명을 헤치우고 남은 세명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원래 팔시온 일행은 잘 몰랐지만 회색갑옷들의 실력은 꽤 좋은자들이었지만 눈앞에서 자신들의 대 장이 왠 갑옷도 안입은 여행자에게 간단히 머리가 터지는 것을 보고 사기가 갑자기 극도로 떨어졌다. 그들의 대장은 용맹한 기사였으며 아레스의 신전에 서 그래듀에이트의 자격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그 대장을 저리 간단히 발차기로 저세상에 보냈다면 검을 쓰는척 하고는 있어도 권법을 통해 그래듀 에이트의 자격을 받은 인물임이 확실했다. 그런자의 수하들이 여기를 덮쳤으 니... 사기는 순간적으로 땅에 떨어졌고... 그들이 순간적으로 기운을 잃었 을 때 그들의 일부가 팔시온 일행의 검에 목숨을 날린 것이다. 이때 마차의 문이 열리고 검정색으로 물들인 멋진 가죽갑옷을 입은 흰 수염 을 멋지게 기른 중년인이 말에서 내려왔다. 그는 사방에서 싸우고 있는 주변 을 오만스레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크크... 가소로운 것들...." 그런다음 그는 중얼거리며 주문을외우기 시작했다. 그는 마법사였던 것이 다. 그걸 눈치채고 가스톤이 회색갑옷을 입은 녀석에게 발사하려고 준비한 라 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번개 화살)를 흑색가죽갑옷을 입은 인물에게 날 렸다. 회색갑옷을 입은 인물들이 동료들과 얽혀서 싸우는 도중이었기에 파괴 력이 큰 마법을 외우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트닝 볼트가 그렇게 위 력이 약한 마법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작은 부위에 위력이 집중되는 만큼 오히려 그 파괴력에서는 파이어 볼 보다 앞서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간단히 매직 실드(마법방어막)의 주문으로 막아낸 다음 계속 주문을 중얼거렸다. 아마도 저정도 긴 주문이라면 따끈따끈한 1싸이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최소한 2싸이클... 최악의 경우 4싸이클까지도... 흑색가죽갑옷 을 입은 인물은 처음에는 간단히 마법을 막아내며 주문을 계속 외웠지만 그의 표정은 곧이어 굳어졌다. 그는 자신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검을들고 달려오는 다크를 봤던 것이다. 이정도 속도라면 주문을 완성하기도 전에 칼을 맞을것이 확실했다. 마차안에서 듣기로는 아무래도 저쪽에 그래듀에이트급이 있는 모 양... 달려오는속도로 봤을 때 이 자일 가능성이 최고... 그렇다면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다크의 검이 상대의 목을 향해 휘둘러지기 직전, 흑색갑옷을 입은 인물은 "워프(공간도약)!"라고 외쳤고 그가 끼고있는 반지가 순간적으로 밝은 빛을 뿜더니 그의 몸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의 몸이 사라지는 거의 그 순간 다 크의 검이 그 빈 공간을 갈랐다. 다크가 멍하니 갑자기 사람이 없어져버린 공 간을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팔시온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다크가 멍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자 이미 남은 상대방을 모두헤치운 팔시 온이 자신이 입고있는 갑옷의 길게 찢어진 부분을 한참 들여다 보다가 다크에 게 미소를 띄며 말했다. "자네 공간도약 마법을 처음 본 모양이군. 그녀석 마법사면서 마법반지를 끼 고 있었어. 저녀석 정도 실력이면 거의 필요 없겠지만... 마법사같은 경우 혼 자 외부에 활동하는 경우 목숨이 아까운 녀석이라면 그만큼 방비를 하기 마련 이지." "그런데... 어떻게 저게 마법반지라는 걸 알았지요?" "그야 당연하지. 공간도약은 4싸이클 마법이야. 여러명을 함께 운반한다면 그건 5싸이클에 들어가지. 그런데4싸이클의 마법을 순간적으로 시동어(始動 語)만 외워 행한다면... 그건 마력반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지. 그때 반지에서 빛나던거 자네도 봤잖아. 그건 그렇고 자네 정말 대단한 실력이더군... 아마 우리들 중에서 최고겠어." "하하하.. 운이 좋았을 뿐이죠." 어디까지나 지금까지는 속셈을 숨기고 겸손한척 하는 다크였다. 이번의 싸움에서 가벼운 부상을 당한 지미와 라빈, 팔시온을 가스톤과 미네 리아가 치료마법으로 치료하고있는 동안 미카엘은 마차에 다가가서 문을 열었 다. 혹시나 무슨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다면 왕실에 신고할 생각이었던 것이 다. 하지만 마차에는 웬 멍청하게 앉아있는 아름다운 소녀만 한명 있을뿐... 아무것도 없었다. 미카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 소녀를 데리고 마차에서 나왔다. "뭔가 있어요?" 미디아의 물음에 미카엘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방금 도망쳤던 마법사 녀석이 가지고 튄 모양이야. 우리도 빨리 여기를 벗어나자구. 재수없으면 죄를 뒤집어 쓸수도 있고... 안그러면 성(城) 에가서 모든 상황을 증언하고 심문(審問) 당한다고 며칠이나 뺏길지 몰라." * * * "스승님 성공했습니다." 제자의 말을 들은 노 마법사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이제 폐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오... 그래. 수고했다." "저... 그런데... 카로사 경이..." "뭐?" "카로사 경이 죽었습니다." "그럴 리가. 정보에 의하면 알렉스 시드미안의 실력은 그렇게 뛰어난 것은 아닌데..." "예. 물론 알렉스는 간단히 처치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쫓아온 인물 들이 있었습니다. 그쪽의 기사는 대단한 실력이었습니다. 카로사 경을 간단히 해치운 후 달려들었으니까요." "흐음... 문제군. 어쩌면 원체 중요한 물건이니 만큼 코린트에서 멀찍이서 보호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어쨋거나 증거는?" "하나도 남기지 않았지만 어쨋든 처음계획과는 많이 틀어져버렸습니다. 알렉 스 시드미안의 시체를 일부러 감춰 그가 내통한 것처럼 꾸미려고 했는데... 외려 이쪽에 그래듀에이트가 있다는 걸 광고한거나 다름없게 되어버렸으니까 요. 면목없습니다. 스승님." "어쨋든 돌아가는 사태를 주시하다 보면 놈들이 어느정도까지 눈치챘는지 알 수 있겠지. 어쨋건 수고했다. 들어가서 쉬어라." "예. 스승님." 제자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노 마법사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차기 시작했 다. "안피로스의 엑스시온의 실험에 성공한 것은 5개월 전... 이제 프로토타입이 겨우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복수를 향한 시작단계인데 뛰어난 기사를... 그 것도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를 잃다니... 신이시여, 불쌍한 저희 백성들과 인자 하신 황제를 버리시는 겁니까? 제발 신이시여..." * * * 소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열 다섯에서 열 여섯정도로 보이는 나이에, 허 리까지 오는 아름다운 금발, 겁에질린 듯한 커다란 갈색의 눈동자, 오똑한 콧 날, 붉은 입술의 눈에 확 뛰는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얼굴에 붙어있는 그 모든게 적당히 어울려 꽤 미인에 들어가는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아마도 조금 더 크면 대단한 미인으로 성장하리라... 키는 160Cm정도로 작았지만 가녀린 몸매로 인해 청순미와 가련미까지 보태어 보는이를 가슴설레게 하고있었다. 거기에 약간 멍청한 듯한 눈빛에 의한 백치 미까지... 왜 멍청한 듯 하냐고? 그건 팔시온 패거리가 그 소녀를 구출한 다 음 곧이어 알게된 사실이었다. 그 소녀는 기억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 지만 이게 치열한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모습 을 본 충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마법에 의한 기억의 봉인(封印)때 문이라는 점이 달랐다. 아마도 그 범인은 그 멋진 검은가죽갑옷을 입은 마법사 녀석일 것이다. 그녀 의 옷이 보통 상류층의 여성들이 흔히 입는 나들이 옷임을 감안한다면... 그 녀의 신분을 정확히 잡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신 트루비아 가 자랑하는 라칸기사단 50여명이 호위할 정도의 인물... 어쩌면 그 여자를 호위한 것이 아닌 그녀가 가지고있던 어떤 물건을 호위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그정도 물건 운반을 위임받았을 정도의 여자라면...? 아마도 조 금만 수소문을 해본다면 금방 알수있을 것이다. 하지만 뭐 며칠만 지나고 나면 트루비아에 소문이 쫙 퍼질테니 그때까지 가 만히 기다려 보는게 가장 속편한 방법이었다. 괜히 그녀의 정체를 알아본답시 고 돌아다니다가는 재수없으면 그 회색갑옷 입은 녀석들에게 포착당할 수도있 고 어쩌면 불필요한 오해를 받아 고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가만히 어디 처 박혀서 그냥 체력이나 보충하며 소문이 흘러들어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욱 안전했다. 일단 미디아는 그녀의 눈에 띄는 옷부터 갈아입혀버렸다. 소녀에게 입힌 옷 은 다크가 여자 도둑들에게 강탈해온 옷가지들이었는데... 조금 크긴 했지만 그런대로 보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미디아가 입던 옷은 그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에게 너무 컸기에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떠오른게 다크의 노획물 중에 여자옷이 있다는 것이었고, 그 해결책은 그런대로 괜찮은 결과를 그들에게 보여줬다. 일단 아무 마을에나 도착할때까지는 맞지않는 옷이라도 할 수 없었다. 말(馬)이야 남아돌았기에 그녀를 태우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기억상실 때문에 말(言語)도 제대로 못하는 그녀이기에 말(馬)이라고 제대로 탈 리가 없었다. 어색하게 말에 타고있는, 아니 말등에 얹혀있다고 보는게 옳 은 그녀가 떨어지지 않게 모두들 조심해서 천천히 말을 몰았기에 이틀이 걸려 서야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쯤에는 모두들 편의상 그녀를 "라라"라고 불렀다. 일단 강아지도 이름이 있어야 부를 수 있으니 뭐 그 이름이 그 멍청한 여자아이에게 어울리고 안 어 울리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쨋든 새로운 식구 라라를 모두들 따스하게 대했다. 그 피튀기는 장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고 더군다나 여자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여기에 예외가 있었으니 그녀석이 다크였다. 모두의 눈에도 뚜렷이 느껴지도록 다크는 라라를 짐짝취급을 하고있었다. 정말이지 아무 쓸모도 없는 아이였으니까... 다크가 대놓고 라라를 못살게 굴었다든지... 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예 말을 걸지도 않았을뿐더러 라라의 질문이라면 아예 무시를 해버리거나 아니면 그 질문만을 답해줄뿐 다크가 말을 거는적은 한번도 없었다. 팔시온이나 미디 아 같은 경우 위태하게 말을타는 그녀가 아래로 드리워진 나뭇가지따위를 피 하지 못할까봐 앞서가며 잡아주기도 했지만 다크는 아예 신경을 끄고있었다.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기에 미디아가 다크에게 발끈해서 도대체 왜 그러느냐는 질문을 한적이 있었다. 그때 다크의 대답...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애를 데리고 다니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사실 다크가 이 애숭이들과 함께 다니는 이유는 그들이 최소한 전투와 관련 된 사항을 제외한 모든 것에서 자신보다는 이 세상에대한 지식이 넓다는 점이 었다. 그가 트루비아의 수도 샤헨으로 가는 것도 샤헨에 있는 왕립학술기관인 샤헨 아카데미에 있는 쟁쟁한 마법사들에게 도대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뭔 지, 또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이 존재하는 것인지 물어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 다. 사실 샤헨 아카데미같은 많은 왕립 학술기관들이 존재해서 수많은 학자, 마법사, 마도사(백마술 외에 또 다른 마술을 함께 익힌자들을정통파와 구분 해서 마도사라고 부른다.), 기사 등 국가에 필요한 소중한 인재들을 키운다는 사실을 이들을 통해서 알수있었을 정도였으니 도움이 된다고 할 수밖에... 하 지만 일행의 속도나 떨어뜨리고 있고,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멍청한 계집애따 위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색을 밝히지 않는 다크에게는 혐오의 대상외에는 아 무것도 아니었다. 샤헨 2주일간의 여행 끝에 팔시온 일행은 트루비아의 수도 샤헨에 도착할 수 있었 다. 모두들 저마다의 계획이 있었기에 여관은 한곳을 정했지만 일단 짐을 풀 고난 다음 모두들 뿔뿔이 자신의 볼일을 보러 흩어졌다. 용병인 미디아는 용병길드에 매력적인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보러 갔다. 그리 고 무예 수업자들은 미카엘을 임시 두목으로 삼아 샤헨에 있는 검투(劍鬪) 수 련장과 경기장을 둘러보러 갔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빠른시간 안에 많은 경험을 쌓은 다음 어떤 기사단에 소속되는 것이 소원인 인물들이었으니까... 미네리아는 샤헨의 동쪽에 위치한 대지의 여신을 모시는 신전에 놀러갔다. 그 리고 남은 네명 즉, 가스톤, 팔시온, 다크, 라라는 저마다의 볼일을 해결하기 위해 샤헨 아카데미로 갔다. 샤헨 아카데미는 왕립 학술기관이었기에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 지만 가스톤은 아카데미에 근무하는 사람을 알고있었기에 간단히 해결될 수 있었다. 가스톤은 연락을 받고 달려온 머리가 벗겨진 살집이 좋은 중년 마법 사를 향해 반갑게 미소지으며 인사를 나눴다. "이야... 칼, 형편이 좋은모양이군. 살이 더 찐거 같아." "이녀석.. 독설(毒舌)은 하나도 안변했구나. 그래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냐니. 친구가 반가워서 모처럼 시간을 내서 찾아왔는데... 섭섭하 군." "헛소리 하지마. 네녀석이 언제 그런거 따졌냐? 궁한일이 있을때만 찾아왔 지." 그러자 가스톤은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배 부분을 바라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헤헤헤... 이거 내 속이 그렇게 훤이 들여다 보이나... 어쨋든 몇가지 알아 볼게 있어서... 라라.. 이리 와봐라." 라라가 다가오자 가스톤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기억을 봉인 당한거 같은데...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어서 데리고 왔어. 그리고 저기있는 다크는 공간이동 마법에 대해서 잘아는 마법사 좀 소개해줘. 몇가지 알아볼 게 있다고 하니까..." "뭐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군. 따라오게.." "만약에... 이렇게 생긴 여러 도형이 겹치는 중간쯤에 서있다가 번쩍 한 다 음 어딘가에 떨어져 내렸는데... 말도 안통하고... 모든 것이 자신이 알고있 던 세계와 완전히 다르다면 그건 어떻게 된 일인가요?" "흐음... 아마도 차원이동의 마법일걸세." "차원(dimension)이라구요?" "그렇네. 차원이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지. 각 차원은 아무리 무한대 의 거리와 시간을 투자해도 만날 수 없는 별개의 공간이지. 바로 코앞에 있다 하더라도 그건 완전히 별개의 세계야. 이건 아직까지 마법사들 간에도 이론으 로 그것이 확실히 가능하고 또 실제로도 몇번 성공한 사례가 있지." "그러니까 요점은 그 차원을 달리해서 이동하는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자네가 대강 그려준 걸 보니... 마법진(魔法陣)이군. 이걸 통 한다면 대단히 강력한마법이라도 실행이 가능하지. 마법사는 그 진세를 발동 만 하면 될 뿐... 나머지는 마법진이 주위의 마나를 흡수하여 자동적으로 돌 아가게 되는 거니까 말일세..." "그렇다면 A라고 하는 차원에서 B라는 차원으로 이동을 했다고 가정한다 면... 그 역으로 B에서 A로 돌아갈 수 있나요?" "그건 어려울거야. 왜그러냐 하면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기에 그중에 자신이 원하는 차원이 어딘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점이지. 그걸 모르고서 차원이동 을 한다면 A로 돌아가는게 아니라 C라는 다른 차원으로 갈수도 있지. 오히려 그 가능성이 더욱 크고..." "그렇다면 다른 차원으로 가기는 쉽지만 어떤 특정차원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다는 겁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어쨋든 차원이동의 마법은 존재하기는 하는거군요." "그렇지. 하지만 옛날 마법이 극도로 발전했었던 마도시대 말기에 차원이동 의 마법이 만들어 졌었다고 들었고 또 그때 실험이 행해졌었네. 하지만 아무 도 돌아온 사람은 없으니... 뭐 결론이 나오지 않는거야." "그렇다면 지금 그 마법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없네. 마도시대는 거의 1000년도 전에 가장 마법이 흥성했던 시대를 이르는 말이야.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하지만... 어딘가에 기록으로라도 남아있을수 있잖아요." "흠... 저 과거 많은 마법사들이 건설했던 던젼이 조금씩이나마 발굴되고 있 지만... 글세... 아직까지 그런 마법이 발견되었다는 학술보고는 없었다네. 지금... 이거 자네얘기 하고있는건가?" "그건 왜 묻는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아주 중요한 자료지. 다른 차원에서 이리로 생명체가... 그 것도 사람이 날아왔으니 획기적인 발견이 아니겠나?" "예. 그렇죠. 실은 저하고 아주 친한 친구가 그런식으로 어딘가로 날아가 버 리는걸 제가 봤거든요. 그것도 어떤 마법사하고 싸울때였는데... 그 마법사가 그 도형이 있는쪽으로 친구를 유인한 다음에 그런짓을 했다구요." 그러자... 여태껏 다크를 상대했던 늙은 마법사는 김빠진 표정으로 바뀌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난 또... 자네가 차원이동쪽으로 말을 이끌어와서 혹시나... 했지. 그건 아 마 그 마법사가 자네 친구를 당해낼 수 없으니 공간이동 시켜버린 걸거야. 짧 은 거리라면 며칠... 먼거리라면 몇 달 기다리면 그 친구 멀쩡한 모습으로 자 네 앞에 나타날걸세... 이만 가보게나. 괜히 시간만 낭비했군... 쯧쯧..." 다크가 투덜거리는 노마법사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가스톤, 팔시온, 라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라는 더 이상 멍청한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 다. 아마도 마법이 풀린 모양이었다. "마법이 풀린 모양이군요." 그러자 라라가 다크의 퉁명스런 물음에 고운 목소리로 답해왔다. "예. 저는 '라라'가 아니고 '라나 슈바이텐베르크'에요. 그리고 드로아 대신 전에서 지혜의 여신 아데나를 모시는 수련생이구요. 잡혔을 때도와주셔서 감 사드려요." "슈바이.... 뭐라고?" 다크의 말에 그녀는 약간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슈바이텐베르크요. 저 아저씨는 머리가 별로 안좋은 모양이야." 다크가 울컥해서는 한소리 하려는데 팔시온이 다크에게 말했다. "역시... 그놈들의 목표는 라나가 아니였어. 라나가 가지고 가던 작은 상자 였지. 트루비아 왕실 마법사 다리아 경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드로아 대신전에 보관중이었던 그 상자를 샤헨의 왕궁으로 가져오던 도중 기습을 받고 물건을 뺏긴거지." "그 속에 들어있는게 뭡니까?" "놀라지 말게. '드래곤 하트'야." 하지만 다크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뭔 헛소리 하냐는 듯한 얼굴로 팔시온 을 쳐다본 것이다. 그제서야 팔시온은 자신의 실책을 깨닳았다. 다크는 검술 실력은 엄청나지만 마법쪽으로는 아예 무식하다는 것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아... 그러니까 드래곤 하트라는 건... 드래곤의 목뼈와 척추뼈가 만나는 지점에 불룩 튀어나온 부분인데... 그곳에 드래곤의 마나가 집중적으로 모이 지. 사실 드래곤이 죽어버리면 그 안에 남는 것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사람이 라면 평생가도 모을수 없는... 엄청난 마나가 들어있다구. 그 부분의 색깔이 붉기 때문에 드래곤의 심장이라고 부르는데... 아마 그 부분의 뼛조각을 어떤 모양으로 가공한 덩어리가 그 작은 상자안에 들어있었던 모양이야." '아하... [내단] 같은 거군.' 다크는 감을 잡았다. 드래곤이 어떻게 생긴 영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말이었고... 그런 영험한 놈의 내단이라면 대단한 내공증진의 효력이 있을지도... 하지만 다크는 자신이 지 금 필요한 것은 중원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따위 내단 따위가 아니라는 생각 이 들었다. 사실 자신과 같은 경지까지 무공을 닦았다면 쓸데없는 영약 따위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닳음'이 더욱 중요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처음에는 놀랍다는... 그다음은 탐욕(貪慾)의... 그다음 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니 무욕(無慾)으로.. 마지막에는 무관심으로 변해 가는 다크의 얼굴표정을 재미있다는 얼굴로 보고있던 라나가 말했다. 그녀는 지혜의 여신을 섬기는 만큼 눈치가 빨랐고 잔머리 굴리는게 보통 수준이 아니 었던 것이다. "정말 얼굴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네요. 한사람의 얼굴표정이 그렇게 순식간 에 마구 변하는건 처음봤어요." 다크는 과도할 정도로 쾌활한 라나의 얼굴을 힐끗 본 다음 냉랭하게 말했다. "팔시온.. 저 쓸모없는 계집애는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거죠?" '쓸모없는 계집애'란 말에 발끈 하는 라나를 바라보며 팔시온이 말했다. "흠... 이제 기억도 돌아왔으니 드로아 대신전으로 돌려보내야지." "아뇨. 저도 같이 갈래요. 드래곤의 심장을 찾으러 갈거 아니에요?" 그러자 다크가 냉랭하게 받아쳤다. "드래곤의 심장따위 찾아서 뭐에 쓰려구. 전에 팔시온이 그와이번 갑옷을 어디서 만든다고 했어요?" "알카사스" "예. 거기. 알카사스로 가보지 않을래요?" "알카사스는 왜?" "당연히 제가 필요로 하는게 마법이니까 그렇죠. 마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가 거기라면서요. 가스톤도 마법사니까 거기 같이가면 뭔가 배울것도 있을거 아 니에요?" 팔시온은 시큰둥한 얼굴이었지만 마법사인 가스톤은 다크의 유혹에 조금 마 음이 움직였다. 그 모양을 본 라나가 다시 팔시온을 꼬시기 시작했다. "빨리 쫓아가지 않으면 그 마법사를 완전히 놓칠거에요. 생각해 보라구요. 드래곤의 심장을 찾아다 주면 엄청난 상금을 지급해 줄거에요." 라나의 유혹에 팔시온과 가스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 래가지 못했다. 진짜 그걸 되찾을 수 있다면 엄청난 포상금을 받을 수 있으리 라... 하지만 회색갑옷들과 검을 섞어본 팔시온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다크'가 아니었다면 자신들도 백색갑옷을 입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쯤 짐승들 밥이 되어있을테니까... 팔시온은 다크를 쳐다봤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고... 다크 같은 든든한 실력자가 있다면 해볼만 하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다크는 전혀 이번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다는게 확실했다. 그점을 확인하자 팔시온은 약간은 풀이죽 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안되겠어. 그놈들 엄청나게 강해. 내가 봤을 때 그들 중에 그래듀 에이트도 한명 있었어. 그때 죽을뻔 했다구. 역시 그래듀에이트급에는 그래듀 에이트급이 상대해야 수지가 맞지. 트루비아의 정예 라칸 기사단원 50여명을 겨우 30명 정도로 기습한 놈들이야. 우리들이 겨우 그따위 포상금 탄다고 설 쳤다가는 목숨이나 잃기 딱 좋지." "그래듀에이트급이 있었다구요? 맞아... 그때 라칸 기사단을 인솔하신 분은 알렉스 시드미언 경이셨지요. 그분은 그래듀에이트셨는데.... 그렇다면 그분 을 죽인 그래듀에이트가 있었을텐데... 당신들은 어떻게 저를 구하셨죠?" "운이 좋았을 뿐이야. 꼬맹이도 이제 돌아가거라. 우리들 중에서 목숨걸고 싸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가스톤, 팔시온.. 여관으로 돌아가죠." 여관에서... 다크는 침대위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고 팔시온은 다크에게 검술좀 가르쳐 달라고 조르다가 통하지 않자 밑에서 혼자서 간단한 수련을 하고있었다. 그리 고 가스톤은 다크가 앉은 맞은편 침대에 드러누워 옆에 놔둔 땅콩을 집어먹으 며 뭔지는 모르겠지만 두꺼운 책을 읽고있었다. 아직 다른 일행들은 오지 않았기에 방안은 조용했다. 여관의 방은 큰 편이었 고 3명이 묶을 수 있는 방에 무예 수행자 패거리가 투숙했고 여자들을 위해서 도 3인실을, 그리고 나머지 3인실을 빌려 가스톤과 팔시온, 다크가 묶고 있었 다. 이때 계단이 쿵쾅거리며 엄청 덩치큰 인물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책을 읽고있던 가스톤이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미카엘이 돌아온 줄 알았던것이다. "하여튼... 무예 수행한다는 녀석들은 예의도 모르는지 일부러 사나운척 쿵 쾅거리며 남의 이목을 끈다니까... 부끄러운줄을 알아야지." 이때 문이 덜컥 열리며 왠 낮선 인물이 들어왔다. 흔히 볼 수 있는 플레이트 아머(철판을 두들겨 만든 갑옷)를 입은 엄청난 덩치를 가진 인물이었는데 갈 색의 눈매가 싸늘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인물이었다. 그를 보고 가스톤이 의문을 표시했다. "무슨 일이시오?" 그때 그 의문의 방문객은 뒤를 보더니 말했다. "이사람들이 맞냐?" 그러자 그 남자의 뒤에서 작은 여자애의 머리가 튀어나오며 말했다. "예. 맞아요." 라나였다. 라나의 확인을 받은 그 남자는 가스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며 정중히 말했다. 그 남자가 가스톤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을때 가스톤은 상대의 덩치와 은근히 흘러나오는 마나에 질려버렸다. 그리고 그 남자의 뒤에 는 그에 못지않은 덩치를 한 젊은 기사가 한명 더 있었다. 아무리 팔시온이나 미카엘 같은 덩치큰 놈들 사이에 끼어있다고 해도 낮선 덩치큰 인물들 사이에 있다면... 그것도 정신적으로 의존할만한 팔시온 같은 우군도 없을 때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별로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때 조금은 소심한 가스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면 파티에서 가장 검술실력이 뛰어난 인물이 저쪽 침대에 앉아있다는 것 뿐... "라나를 구해주셨다구요." "예. 하지만 뭐 우연히 지나다가..." "라나에게 도난당한 물건이 뭔지는 들으셨겠지요?" "예." "그렇다면 그게 사악한 마법사의 손에 들어가면 얼마나 위험한지도 잘 아시 겠군요." "어느정도는..." "그렇다면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예? 저희들은 그냥 여행자들입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할수는 없어요. 목숨이 몇 개나 되는것도 아니고... 팔시온의 말로는 상대방에 그래듀에이트 급의 인물도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건 그들의 뒤에는 어떤 국가가 후 원한다고 봐야 하잖소? 우리들의 실력으로는 말도 안되는 일이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계속 말을 건네오자 난감해진 가스톤은 실례인줄 알지만 잠시 상대의 말을 중단시켰다. "잠깐만요. 저는 파티의 리더가 아닙니다. 팔시온을 부를테니까 그와 의논하 세요." 그런다음 창가로 가서는 뒷뜰에서 혼자서 용을쓰고 있는 팔시온을 향해 외쳤 다. "야. 팔시온. 빨리 이리 와봐. 급한 일이야." 조금 지나자 쿵쾅거리며 땀에 젖은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팔시온이 올라왔 다. 역시 근육질은 근육질들 끼리 있어야 균형이 잡혀보인다. "이사람들은 누구야?" 그러자 가스톤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도 몰랐으니까..) 팔시온에게 말했 다. "너가 리더니까 알아서 해." 그러자 그 덩치큰 사내가 팔시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신이 리던가요? 드래곤 하트를 찾으려고 하는데 좀 도와줄 수 없겠소? 사 례는 충분히 하겠소." "아마도 가스톤이 말했을텐데요. 상대편에는 그래듀에이트가 몇 명인가 있습 니다. 사실 뒷구멍으로 하는 일이니 그정도 실력자가 많지는 않겠지만... 적 어도 한명 이상은 된다고 봐야겠죠. 저희 파티가 어떤 구성원으로 되어있는지 라나에게 못들으셨나요? 무예 수행자 3명, 수련마법사 1명, 신관 1명, 용병 1 명, 모험가 2명...(팔시온은 다크를 모험가에 넣었음.) 더군다나 지금 샤헨에 도착한 상태니 다음 여행에는 몇 명이나 따라나설지 아무도 모른다 이말이죠. 이 전력으로 아직 정체는 모르지만 그 강한 놈들과 싸우란 말입니까?" "왜 내가 이런부탁을 여행자인 여러분께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가겠지만... 나는 여러분의 실력을 믿기 때문이오.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듀에이트가 끼어있을게 확실한 적들로부터 저 라나를 구해냈소. 왜 그래듀에 이트가 끼어있을 거라고 확신하느냐 하면... 그 마차의 호위대를 지휘한 인물 이 알렉스 시드미언... 제 동생이기 때문이오. 그녀석은 2년 전에 그래듀에이 트의 자격을 얻은 뛰어난 기사였소. 하여튼 호위대원들 시체 주위에는 32명의 회색갑옷을 입은 자들의 시체가 널려있었소. 그중에 마법 때문에 죽은자도 있더군. 그리고 어떤자는 머리가 터져서 죽은자도 있었고... 어떤자는 갑옷과 함께 몸통이 두토막이 난 사람도 있었소. 정말 대단한 실력의 검사가 당신들 중에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 나는 트란 근위기사단의 그라드 시드미언이라고 하오. 사실상 놈들이 어느정도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기에 비밀을 지키기 위해 나만 올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지원해 줘도 안되겠나? 그리고 저기있는 스미온 엘시란도 젊긴 하지만 뛰어난 기사야." '트란 근위기사단'이란 말이 나오자 가스톤과 팔시온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 다. 각 국가들 마다 유명한 기사단 외에 근위기사단을 가지고 있다. 근위기사 단이라면 그 국가 최고의 엘리트들만을 엄선해서 모집한 기사집단이다. 그렇 기에 그 구성원은 모두 다 그래듀에이트급... 여기 조그마한 왕국인 트루비아 의 경우에도 총 2000여명의 기사들 중 34명만이 그래듀에이트의 자격시험에 통과했다. 또 그 귀한 그레듀에트들 중에서 '트란 근위기사단'의 멤버로 뽑히 는 영예를 받은 기사는 단 4명. 그중 한명을 보고있으니 놀랄 수밖에... "에?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죠... 하지만 사실 국가에서 개입하실 생각이 라면 기사단에서 사람을 뽑아다가 직접 하셔도 될텐데 왜..." "후후... 지금 드래곤 하트를 도난당한 것을 극비에 부치고 있기에 정규 기 사단을 동원하여 난리를 칠수는 없지. 놈들이 눈치를 채는 것은 두 번째로 치 고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네. 코린트 제국에서 드래곤 하트의 도난사 실을 안다면 얼마나 심한 댓가를 치뤄야 할지... 또 도독놈들도 머리가 있다 면 트루비아의 기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최대한 신경쓸거야. 나는 근위기 사인 만큼 각종 행사에 많이 참가해서 얼굴이 너무 알려져 버렸어. 그래서 직 접적으로 돌아다니기는 힘드니... 당신들이 앞장서서 수소문을 하고 내가 그 뒤를 받치겠다는 것이지. 또 당신들쪽에 모험가가 두명이나 있으니 추격에는 훨씬 유리할 것이 아닌가?" "흐음..." 팔시온은 오랜시간 궁리를 해야만 했다. 뒤에서 이들이 받쳐준다면 위험도도 많이 떨어진다. 거기에 성공한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아주 그럴 듯한 제안임에는 틀림 없었다. 하지만.... "저 혼자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일행이 다 모였을 때 같이 의논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흐음... 좋아. 그럼 내일 오겠소." "아닙니다. 내일은 너무 늦어요. 결론이 나면 오늘 저녘에라도 떠나야 하거 든요." "알겠소. 그럼 그때..." 이때 가스톤이 문을 나서려는 그라드 시드미안 경에게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여기서 잠시 쉬시는게 어떻겠습니까? 괜히 그런 차림으로 다니 셔 봐야 눈에만 띌 뿐이죠." "딴은 그렇군."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술하고 안주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가스톤은 곧 음식을 장만하러 밑으로 내려갔고 모두들 예전에 있었던 추억담 을 늘어놓는 가운데 시드미안경은 남은 두명의 '모험가'를 찬찬히 훑어봤다. 팔시온은 모험가 답게 장대한 체구와 우람한 근육질... 거기다 40킬로그람은 족히 되어보이는 호화로운 바스터 소드(burst sword)를 지니고 있었다. 바스 터 소드는 파괴검이란 말에 어울리는 마상용(馬上用) 장검으로 보통 말안장에 매놓고는 기마전에서 사용하는게 정석이었다. 그런데 이자는 그외의 다른 검 을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것 하나뿐임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팔시온이 란 이름의 모험가는 바스터 소드만을 전적으로 사용하는 대단한 힘과 기술의 소유주임이확실했다. 그리고 또 한사람. 저쪽 구석에 앉아있는 다크라 불리운 자. 팔시온과는 달 리 근육질의 몸매가 아니었으며 허리에는 얄팍한 여성용 검 샤벨을 차고 있었 다. 검의 모양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로 봤을때는 마법사처럼 보이지만 방금전 에 이 파티에는 마법사가 1명 뿐이라고 했고, 눈앞에 있는 가스톤이라는 사람 이 마법사임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힘보다는 속도위주의 검법을 구사하는 인물인가? 하지만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거대한 몬스터와도 상대해야 하는 모 험가 생활에서 저런 파괴력이 형편없는 검을 사용하는 걸 보면 저 검의 파괴 력이 아마 상상 이상인지도... '그렇다면 저 검은 마법검 같은 건가...' 마법검이라면 일단 설명이 된다. 마법을 쓸 수 있고 또 대단히 강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쨋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떠벌이는 가운데 술과 안주를 가스톤이 가지고 왔고 방안은 좀 더 소란스러워 지기 시 작했다. 보통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은 많은 모험을 한 팔시온과 시드미안 경이었고 나머지는 듣는 입장이었다. 웃고 떠들면서 모험담을 주고받는 가운데 시간은 점차 흘러갔고 이윽고 창밖 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 계단이 쿵쾅거리며 소란스런 소음을 내며 사람들이 올 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지나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엄청난 덩치를 자랑 하는 미카엘이 그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어럽쇼? 우리가 나간 다음에 비겁하게 술파티를 벌이다니..." 미카엘은 가스톤이 들고있던 잔을 뺏아서 한잔 가득 부은 다음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런다음 잘 말린다음 알맞게 구워놓은 고기포를 입속에 집어넣고는 질정거리며 화통하게 말했다. "이봐. 좋은 기회를 잡았어. 역시 여기는 수도라서 그런지 매주 일요일에는 경기장에서 대회가 열린다고 하더군. 트롤이나 뭐 그런걸 혼자서 때려잡으면 아주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그러던데... 돈도 다 떨어져가는데 아주 좋은 기 회잖아. 그리고 한달 후에는 샤헨 아카데미에서 무투회(武鬪會)가 벌어진다고 하더군. 우승자는 상금이 자그마치 1천 골드라구. 그리고 매 경기당 승리수당 이 10골드야. 본선경기는 50골드고, 물론 상처입으면 치료는 신전에서 공짜로 해주고... 어때? 팔시온, 한 몫 잡을 아주 좋은 기회잖아?" "괜찮군. 하지만 만만찬은 실력자들이 다 모일텐데?" "우승이야 못해도 상관없지. 아무리 못벌어도 200골드는 벌 수 있을거야. 물 론 재수없어서 1회전에 그래듀에이트하고 붙으면 가능성 없지만... 그래도 여 기는 양심적으로 그레듀에이트는 무조건 본선에 올려준다고 되어 있더라구. 그때 그 망할놈의 기다스 아카데미 무투회에서는 예선 1회전에 그래듀에이트 하고 붙어서 떡이난걸 생각하면... 으... 이갈린다.. 꿀꺽꿀꺽.." 생각만 해도 열이 뻗친다는 듯 또다시 한잔을 목구멍 속에 쏟아부은 다음 그 는 말을 이었다. "세상에 그래듀에이트 자격을 가진 기사를 예선전에 싸우게 만드는 속셈은 뭐야? 이길게 당연한데... 그리고 그 알프레드 미트리에란 녀석도 그래! 아무 리 돈이 궁해도 그렇지, 그정도 실력의 기사가 할짓이 없어 겨우 무투회 따위 에 나오다니... 못된녀석.." 미카엘이 한참 과거를 회상하다가 열이 뻗쳐 성질을 부리고 있을 때 미디아 가 들어왔다. 그녀는 난데없이 왠 술파티냐는 듯 휙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모두들 왠일이야? 방안에서 술파티를 하다니. 참. 아무래도 헤어져야 할 것 같아. 용병길드에 가봤더니 안테로스 공국(公國)에서 용병을 모집한다던데... 혹시 같이 갈사람 없어? 보수는 아주 후하다구. 월급은 한달에 10골드, 실력 만 좋다면 한달에 30골드. 물론 숙식은 그쪽에서 해결해 주고 말이야. 혹시 같이 갈사람 없어?" 미디아까지 도착하자 팔시온이 입을 열었다. "이제 대충 다 모였으니 여러분들과 몇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 미디아는 자 리가 없으니 저쪽 침대 위에 앉아. 뭔가 하면 우리들에게 한가지 일거리가 떨 어졌다 이거야. 며칠전에 만났던 그 패거리들을 추격하여 어떤 물건을 회수해 오는 일이지." 팔시온은 아직 참가할 일행이 정해진 상태가 아니기에 일부러 '어떤 물건'이 라는 표현을 썼다. 혹시 참가 안한 사람이 소문을 퍼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 다. "며칠전 만났던 그 패거리라면 그... 그래듀에이트와 마법사가 끼어있던 그 들 말이야? 팔시온 제정신이야? 그때는 다만 운이 좋았던 거였다구." "맞아. 그녀석들이 우리를 얕보지 않았다면 몇 명 죽거나 부상당했을게 뻔 해. 특히 그 마법사의 실력은 대단한 것 같던데..." "아. 그건 염려할 필요가 없어. 그래듀에이트급의 뛰어난 기사 한명이 우리 를 도와주기로 했어. 여기 온 분이 우리들과 계약을 청하기 위해 온 분이시 지. 보수는 상당히 괜찮아. 경비는 저쪽에서 부담할 것이고 또 그 물건을 안 전하게 회수해 오면 그에따른 충분한 보수도 준다고 했어. 자... 각자 생각해 보고 빠질 사람 있으면 지금 빠지라구. 일단 갈 사람이 정해지면 그다음부터 출발에 대해 의논을 좀 해야하니까..." 그러자 미디아가 의의를 제기했다. 한사람 안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직 미네리아 사제님이 안왔잖아? 어쨋든 뛰어난 사제가 한명 있 는게 좋지 않을까? 상대가 만만하지 않으니까 부상자도 많이 생길텐데..." "미네리아 사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사실 사제야 어디서든지 구할 수 있 고 또 안되면 신전에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도 있지. 그리고 미네리아 사제 같 은 경우 치료마법밖에 못하잖아. 자, 각자 참가할 건지 빨리 말해줘." "나는 참가 하겠어. 얼마나 괜찮은 동료가 있을지 알지도 못하는 전쟁터에 가는 것 보다는 이미 실력을 확인한 동료가 좋겠지. 그리고 보수도 괜찮은 것 같고... 안그러면 팔시온이 권하지 않을테니까..." "나도 하겠어." "나도..." "우리들도 하겠어요." "자네는?" 지미와 라빈이 답하자 마지막으로 팔시온은 다크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저 여자애만 빠진다면 의의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조그만게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한군데도 없으니까..." 그러자 팔시온이 시드미안 경을 바라봤다. 시드미안 경은 라나를 쳐다보더니 싱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 아이는 처음부터 돌려보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됐습니까?" "지금 돌려 보내세요." "이봐. 스미온, 돌려보내게." "예." 그러자 라나는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안돼요. 나 같이 갈래요.. 가게 해줘요.. 엉엉... 놔요. 데려가 줘요. 나없 이 잘되나 두고보자..." 시드미안 경의 뒤쪽에 앉아있던 덩치 큰 사내가 라나를 끌고나갔다. 라나는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소한 4배 이상의 무게를 지닌 인물이 잡아 끄는데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가? 발버둥을 치고, 떼를 쓰 면서 라나가 끌려나가고 나자 모두들 한숨을 쉬었다. 이런 모험여행, 특히나 기사급 인물들이 지원해 주는 만큼 꽤나 안전하면서도 또 역으로 그런 인물들 이 참가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이라면 누구나가 꿈꾸는 멋진 모험이 된 다. 그런 여행에 꿈많은 소녀가 참가하려고 발버둥을 치는거야 당연한 것이었 다. 하지만 인정에 이끌리면 안되지... 짐이 될게 뻔한데... 라나가 끌려 나가고 난 다음에 모두는 그들과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 오늘 저 녘에 출발하기로 합의했다. 시드미안 경은 팔시온 일행에게 모든 준비를 마치 고 성문밖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나가다가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치료를 위한 신관은 내가 해결해 드릴테니 성밖에서 만납시다. 그럼..." * * * 모두가 준비를 마친 후 새로운 모험을 향해 활기차게 말을 몰아 성밖으로 달 려나갔다. 성문 밖의 나무 아래 어두컴컴한 부분에 그들은 모두 모여서 시드미안 경 일 행을 기다렸다. 밤인데다가 달빛까지 나무에 가려서 그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 지도 않았다. 조금 기다리자 급히 말을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4명이 모습 을 나타냈다. 2명의 여행복 안에 가죽갑옷을 입은 새로운 인물들이 끼어 있었 지만 나머지 2명은 익히 알고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시드미안 경 일 행이었다. 시드미안 경은 일단 이동을 시작하라고 지시한 다음 이동하면서 새로 합류한 팔시온 일행을 새로운 동료들에게 소개했다. 팔시온 일행의 소개가 끝나자 이 번에는 팔시온 일행에게 새로 합류한 인물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안토니 크로와입니다. 5싸이클 마법까지 익힌 마법사죠." 그러자 너무 학자풍으로 생겨 가죽갑옷이 안어울리는 40살은 충분히넘어보 이는 인물이 인사를 해왔다. "안토니 크로와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저쪽은 로니에 칸타로와 사제십니다. 샤이하드를 모시는 신관이시 죠." 그러자 엄청나게 잘생긴 30대 중반 정도의 금발의 미남이 미소를 지으며 인 사를 건네왔다. 그는 미네리아와는 달리 허리에 바스타드 소드를 차고 있었 다. 어쨋든 전번 여행의 동료였던 미네리아 로안스에르 사제나 그 말괄량이 라나 슈바이텐베르크 등 하여튼 만나는 사제들은 모두 다 멋진 미남, 미녀인 것이 특이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작은 비밀이 있다. 신을 모시는 사제들은 '신께서 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는 믿음하에 각종 미(美)에 관계된 신성마법들을 개발했고 그러다 보니 각종마법에 의해 그들의 얼굴과 몸매가 개조(?)되어 눈 에 확 띄는 미남, 미녀가 된 것이지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여자 신관들의 경우 못된 녀석들에게 '강간'당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그렇기 에 여자 신관들은 믿음직한 모험가 패거리(party)가 있을때만 함께 여행했다. 시드미안 경의 소개에 팔시온이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에도 샤이하드를 모시는 신전이 있는모양이죠, 시드미안 경? 저는 아 르곤 제국에만 신전이 있는줄 알았는데..." 그러자 칸타로와 사제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다른 나라에 포교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크로노스교를 금하고 있기에 포교는 참 힘들지요. 그 때문에 보통 봉변을 당 하지 않기 위해 타국에 나갈 때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신관복을 가지고 다닙 니다." "예." 그러자 옆에서 말을 달리던 지미가 팔시온에게 물었다. "샤이하드라는 신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설명좀 해줘요." "'크로노스교(敎)'의 경전 '니트라'에는 샤이하드 외의 신을 섬기지 못하게 하지. 대단히 폐쇄적인 종교로 이방신을 섬기는 자와는 한자리에서 식사조차 못하게 규정짓고 있어. 그러니 타 신을 섬기는 신전, 신도들은 말할것도 없고 악마나 암흑신들과 관계를 맺는 흑마법사나 마나의 힘을 이용하는 백마법사, 정령을 부리는 정령술사까지 전부 다 이교도로서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했 지. 그렇기에 아르곤 제국은 마법사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국가가 된거야. 샤 이하드를 섬기는 '크로노스교'가 아르곤 제국에서 국교(國敎)로 선포되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어. 그렇기에 다른 나라들에서는 마법사들 이 주축이 되어 크로노스교가 자국에 들어오는 것을 엄중히 막고있지." 주) 여기서 흑마술은 신성마법과 유사한 갈래랍니다. 흑마법은 마신이나 악 마를 섬기며 그 힘을 얻지만 신성마법은 여러 종류의 신을 믿음으로 인해 그 기도로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죠. 마신이나 악마는 파괴와 가장 밀접하기에 신성마법과 달리 대단히 파괴적인 힘을 그 신도들에게 부여합니다. 요컨대 흑 마법이나 신성마법은 그 대상에 대한 신앙심(信仰心)이 핵심 포인트죠. 아르곤 제국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기에 크로노스교도 여기에는 거 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두들 팔시온과 지미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묵묵히 갔다. "백마술은 악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그리고 정령술도..." "누가 아닌걸 모르냐? 하지만 고위사제들이 그걸 확대 해석하는 바람에 거기 에 들어간 거지. 오직 샤이하드만이 제어해야 할 대자연의 원동력인 마나를 한낫 인간이 부리는 것은 샤이하드에 대한 모독이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마 나를 부릴 권세를 얻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아르곤 제국에서는 그게 정설이야. 그래서 아르곤 제국에서는 백마법이나 흑마법이나 정령마법까지 그것을 익힌 자들은 모두 다 악한 마신을 섬기는 자로 몰아서 모두 한꺼번에 처리한거지. 대신 기사는 좀 달라. 검을 오랜시간 수련하다 보 면 자연스레 몸속의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되니까... 그들까지 없앨수는 없잖 아. 그래서 그들은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들을 샤이하드의 은총을 받았다 고 생각하지." "그렇다면 전쟁이 벌어지면 타국의 마법사들 때문에 고생하게 될텐데요? 아 무리 기사단이 강하다고 해도..." "흠..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지. 그 나라의 전 국민은 샤이하드 를 받들고 있어. 그 말은 그들의 군대도 샤이하드를 받든다는 말이 되지. 하 여튼 전 국민이 샤이하드를 열광적으로 받드니까 말이야. 전쟁이 터지면 광신 도(狂信徒)들 처럼 무서운 미친놈들이 또 어디있는데... 험험.." 그러다가 팔시온은 자신의 말이 조금 헛나왔다는 걸 느끼고 헛기침을 좀 하 면서 칸타로와 사제를 힐끗 본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아르곤에서는 신앙심을 꽤 중요시하니까, 신성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의 수 가 많아. 어쨋든 기사들 중에서도 사제가 많으니까 말이야. 아르곤의 기사들 중에서 신성마법을 쓸 줄 아는 자들은 기사라고 안부르고 성기사라고 부른다 고 하더군." 기사들이 신성마법을 쓴다는데 놀라 지미가 감탄사를 터트리며 말했다. "와... 기사가 신성마법까지 쓴다면? 정말 대단하겠군요." "물론 신성마법의 특성상 흑마법이나 백마법 처럼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지 못하지만 그 방어력이나 치유력에 있어서는 흑마법이나 백마법보다 월등하게 뛰어나지. 아무리 흑마법이나 백마법의 파괴력이 뛰어나다 해도 상대에게 피 해를 못입히면 모두 소용없는 거야. 그래서 모두들 성기사를 두려워 하는 거 고... 또 성기사는 자신의 몸 곳곳에 신성마법을 걸어놓지. 근력증가의 마법 이나 뭐 반사신경이 빨라지는 마법 등등... 그게 신앙심이 유지되는 한은 평 생토록 유지되니까 얼마나 근사해..." "우와... 정말 대단하군요." 그러자 그옆에서 듣고있던 라빈이 경탄에 어린 눈빛으로 칸타로와 사제를 바 라보며 물었다. "칸타로와 사제께서도 신성마법을 쓸 줄 아세요?" 칸타로와 사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떤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라도 사제급이 되려면 신성마법을 쓸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 다. "우와... 그러면 저한테도 근력증가 마법같은거 걸어주실 수 없어요?" 그러자 칸타로와 사제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걸어주는 신성마법의 효과는 오래가지 못해요. 오래가봐야 2-30 분 정도... 그렇기에 신성마법을 걸려면 자신의 몸에 걸어 그 신앙심을 흡수 하도록 만들죠. 그러면 신앙심이 유지되는 한은 그 신성마법은 영원히 지속되 니까 말이에요. 그렇지 않고 타인에게 거는 경우는 전투를 벌이기 직전인 경 우나, 전투중인 경우죠." 그러자 라빈이 약간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사라질 힘 이라면 얻어봤자 쓸모도 없는게 아닌가... "그러면 칸타로와 사제님도 그 마법을 몸에 걸어놓으셨어요?" 그러자 칸타로와 사제는 약간 부끄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답해줬다. "예. 저도 근력증가의 마법이나 뭐 그런걸 걸어놨죠. 사실 저는 전문적인 검 투(劍鬪)훈련 같은 것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제 몸을 지키려면 마법을 이용해서 몸을 상향조종하는 방법밖에 없었죠. 그덕분에 바스타드 소드를 쓸 수 있는 것이구요. 저같이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신성마법에 의 해 바스타드 소드를 다룰 수 있는데 성기사처럼 검투교육을 받은 사람은 과연 어떻겠어요? 또 성기사들에게는 검술에 관련된 신성마법도 전해져 내려온다고 하더군요. 어쨋든 제가 알기로는 성기사의 능력은 전쟁의 신전에서 말하는 그 래듀에이트급 이상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객관적인 기준이 없잖아요." "전에 발트란 공국에서 온 사신 일행중에 그래듀에이트급 기사 한명이 있었다 고 하는데 그와 성기사가 비무를 한적이 있었죠. 그때 비무는 성기사의 압승 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저의 조국인 아르곤 제국을 근방의 모든 국가 들이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샤이하드의 힘은 대단히 위대하답니다." 그러자 라빈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성기사의 수는 얼마나 되요?" "제가 알기로는 3000명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옆에있던 지미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성기사가 3000명이나 된다구요?" "예." "그럼 성기사 중에서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되요?" "잘 모르겠지만 샤이하드의 축복으로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성기사는 아마 한 3-400명 정도 되는걸로 들었습니다." 그러자 지미는 약간 김이빠지는 걸 느꼈다. 그렇다면 진짜 실력자는 3-400명 뿐이라는 말이 아닌가? 왠만큼 큰 국가들의 경우 그래듀에이트급 기사 300명 정도는 보유하고 있었다. "에이.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그래듀에이트급 기사와 비무했던 성기사는 직위가 낮 은 사람이었어요. 사실 마나를 다스릴 권능을 부여받은 성기사가 그런 하찮은 타국 기사와 비무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 말에 다크를제외하고 모두들 놀라움을 느꼈다. 마나도 다스릴줄 모르는 성기사가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를 이기다니... 물론 신 성마법의 덕분이겠지만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놀라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쨋든 그들은 계속 길을 달려갔다. 물론 무작정 달려가는 것은 아니다. 보통 팔시온이 주축이 되어 무예 수행자들이 정보를 모은답시고 동분서주 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크나 그 외 딴사람들은 별로 할 일이 없었고 그래서 심심한 김에 다크는 가스톤 기빈에게서 마법을배웠 다. 다크는 처음에는 마나를 체외에서 정신을 집중하며 외운 주문을 통해 움직인 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몸속의 마나를 꺼내어 외부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몸을 매개체로 체외에 존재하는 대자연의 근원인 마나를 응축하여 움직인다? 어떤 면에서 보면 북명신공(北冥神功)하고 비슷한 이치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따위 마나를 설혹 체외에서 어떤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손 치더라도 이놈의 주문은 또 뭔가?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 들을 중얼중얼 그것도 정해진 몸동작에 따라 손발을움직여야 하다니... '옘병... 이러고 앉아있다가 먼저 칼맞아 죽겠다.' 다크의 생각은 과히 틀리지 않았다. 그전에 만났던 흑색갑옷을 입은 멋쟁이 마법사도 주문외우다가 칼 날아오는 것 보고 뺑소니 치지 않았던가? 그래서 마법사란 직업은 아주 처량한 것이다. 그날도 다른 사람들은 이리저리 모두 다 상대를 찾는답시고 뿔뿔이 흩어지고 난 다음 가스톤과 다크만 남아서 길을 가던 도중 쉬면서 화이어 볼의 순서를 연습하다가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고 이렇게." 그러면서 가스톤 기빈은 다시 한번 더 설명했다. "화염 마법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화이어 볼'인데 먼저 손을 이렇게 공 을 쥐듯이 한 자세에서 시작하는 거야. 그런다음 주문을 외우면서 손을 천천 히 들어올린 다음 머리 위 높게까지 올린다. 이때쯤 되면 주문은 거의 다 끝 나가고 점점 불덩어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구. 이제 마지막 주문을 외우면 서 오른손을 뒤로 천천히 빼는거야. 물론 주문의 속도에 맞춰서 말이지. 주문 을 빨리 외우면 빨리, 천천히 외우면 몸동작도 천천히... 알겠나? 그런다음 오른손이 뒤로 완전히 빠진 후에 주문이 끝나면 시동어인 화이어볼을 외치면 서 그 공을 원하는 표적을 향해 던지는 거지. 알겠어?" "대강 알겠어요. 다시 한번 더 시범을..." "자 잘 보라구." 그런다음 가스톤은 마법을 구사하기 전에 일단 동작에 맞춰 손을 뭔가를 쥐듯 앞에 끌어모으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몸속에 타오르는 불의 기운이여, 만물을 불사르는 뜨거운 화염이여..." 어쩌구 저쩌구 고대 마법어인 룬어의 주문이 진행될수록 가스톤의 손은 천천 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의 양 손바닥 사이에서는 작은 불덩어리가 커나 가기 시작했다. 또 다크는 가스톤이 주문을 외워감에 따라 가스톤의 주위에 하나의 큰 기의 흐름이 생겨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기의 흐름을 통해 방 대한 힘이 가스톤의 양 손바닥 사이에 강력한 기가 집중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이어 작은 불덩어리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화이어 볼!" 가스톤이 시동어를 외침과 동시에 그의 오른쪽 손바닥에서는 거대한 불꽃덩어 리가 확 피어올랐고 가스톤은 그걸 아무곳에나 던져버렸다. 원래 이래서는 안 되지만 적이 없으니 할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이제 알겠나?" "그러니까 그냥 주문을 외우다 보면 마나가모인다는 말입니까?" "아니야. 주문만 외워서는 안되지. 정신을 집중해서 그 주문의 틀에 맞춰 마 나를 모아야만 해. 그런다음 계속 주문을 외우면서 주위에 만들어지는 마나의 흐름을 함께 통제해야만 하지. 주문이란 주위의 마나를 흡수하여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는 도구일 뿐이지. 그 미세한 흐름 하나하나는 시전자가 직접 통제를 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주문을 외우다가 마나가 폭주하면서 잘못하 면 사망하는 수가 있다구. 너는 잘 모르겠지만 주문을 외우면 주위의 마나가 모여들어 그 마나의 흐름이 도너스처럼 둥근 원통형을 형성하며 빠른속도로 흐르기 시작하지. 이때 마나의 흐름을 더욱 가속시키면서 원통의 안으로는 압 축하고 또 원통의 밖으로는 마나를 계속 흡수해야 해. 이건 아주 어려운 작업 이지. 이때 마나의 흐름이 그 원통을 벗어나기 시작하면 안되는 거야. 만약 벗어난다면 주문은 폭주하기 시작하고 그러면 바로 대폭발로 이어진다구. 주 문이 잘되어 만약 성공한다면 그 원통을 통해 마나를 압축하여 일직선 또는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게 되지. 그런다음 마지막 시동어를 통해 그 압축된 마 나를 불꽃으로 형상화 시키는 것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글쎄요... 이해가 안가는데요..." "제길... 원래 차근차근 처음부터 설명을 해야하는데... 좋아. 처음부터 시작 하자. 혹시 이 세상을 이루는 네가지 원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냐?" "없어요." "이 세상을 형성하는 네가지 원소는 불, 물, 바람, 땅이지. 이것을 사대원소 라 부르고 그 각각을 관장하는 정령을 사대정령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도 잡 다한 정령들이 있지만 사대정령이 가지는 힘이 가장 크므로 보통 정령마법같 은 경우 그것들을 부린다고 하더군. 참, 무슨말을 하려다가 이리 왔더라? 그 래! 그런식으로 마법도 몸속에 내재된 각 원소를 이용하는 것이지. 정령의 힘 따위 필요없이 마법은 자신의 몸속의 기운을 통제하여 끌어내는 거야. 물론 그때 사용되는 엄청난 량의 마나는 무사들과 달리 자신의 몸속에 있는 마나가 아닌 체외에서 떠도는 마나를 이용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런다음 시동어 를 외치는 것이 바로 그 응축된 마나와 시전자가 원하는 마법의 염원(念願)을 뒤섞는 작업이지. 그게 성공하면 불덩어리가 되던지, 물덩어리가 되던지 하는 거야. 알겠어?" "흐음... 그렇다면 일단 마법이란 것은 몸 주위에 거대한 원반형의 마나 덩어 리를 가속하는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군요." "그렇지. 하지만 그 마나의 덩어리를 가속하는 작업을 인간의 힘으로 혼자 할 수는 없어. 그걸 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진게 주문이지.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걸 통제한다는게 불가능하거든. 물론 고위 마법사로 올 라갈수록 그 주문을 오랫동안 써본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빠른속도로 주문을 외무면서 또는 그 주문을 생략하기도 하지만... 그 마나의 흐름을 유지, 가 속, 압축, 혼합, 발사의 과정은 변함이 없지. 이게 바로 백마법이야." "백마법? 그럼 흑마법도 있어요? 아니면 회색마법이나.." "흑마법은 있지. 흑마법은 자신이 직접 마나를 통제하는게 아닌 악마에게 영 혼을 팔아 그 악마와의 계약에 의해 힘을 받아 행하는 마법인데... 으음... 그 계약을 한 악마의 등급에 따라 그 위력이 완전히 달라진다고나 할까... 하 여튼 별로 좋은 의미의 마법은 아니야. 흑마법 써서 잘된 인간은 한명도 못봤 으니까. 그리고 흑마법외에 정령마법이 있지." "정령이란게 뭐에요?" "정령이란 이 세상을 유지하는 각각의 어떤 원소를 다스리는 자를 말하는건 데... 그 정령에도 등급이 있지. 정령, 상위정령, 정령왕. 이렇게 세가지 등 급이 있는 정령도 있고 어떤 정령은 정령왕이 존재하지 않던지, 아니면 아예 상위정령조차 존재하지 않는 정령도 천지야. 정령왕의 힘은 대단하지. 그 정 령을 이용해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게 정령마법이야. 정령마법에는 세가 지가 있어. 하나는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 계약도 안한채 그 정령의 이름으로 그 힘을 빌려쓰는 마법이 있어. 하지만 그 정령과 사람은 계약을 맺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매개물은 필요한 마법이지. 그러니까 어떤 책, 반지, 검 따위 말이야. 그걸 매개체로 시전자는 자신이 모은 마나를 계약된 정령에게 건네주 고 정령은 자신의 힘을 빌려주어 정령마법을 구사하는 술법이지." "백마법이랑 비슷하군요." "응. 하지만 나머지는 완전히 달라. 두번째는 정령과 계약을 맺은 후 그 정령 을 직접 소환하지 않고 그 정령의 주특기인 마법만을 구사하는 방법이야. 이 건 마나를 응집시키거나 하는 따위의 행위는 필요없고 그 정령과의 약속된 약 속어만 떠들면 되니까 아주 편하지. 거기에다가 마나의 응집이나 뭐 그런게 보이지 않기에 아주 조심해야 한다구." "대단하군요. 그렇다면 그냥 약속어만 떠들면 펑펑 마법이 날아간다는 말인가 요?"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그 정령이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니까 그들의 힘을 이 세상에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힘을 시전자가 포기해야만 해. 그러니까 그것도 많이쓰면 피곤하기는 매한가지지." "그렇다면 마지막은?" "마지막은 계약을 맺은 정령을 소환하여 그를 부리는 거야. 정령의 힘을 효과 적으로 사용하면 대단히 강하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지. 하지만 정령마법은 정령과의 친화력을 가진 인물만이 가능하니까 왠만한 사람들은 익힐 수조차 없는게 단점이지. 하지만 이것도 정령의 힘을 현세에 나타내기 위한 통로역할 을 시전자가 해줘야 하기에 강력한 힘을 쓸수록 피곤하기는 매한가지지." "마법은 그거 뿐이에요?" "아니 큰 갈래로 본다면 하나 더 있지. 마지막 것이 신성마법인데 신을 섬기 면서 그 신이 축복으로 내린 힘을 사용하는 거지. 자신의 몸이 매개체가 되어 신성마법을 돌리게 되는 거야. 하지만 이것도 흑마법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 을 통해 신의 힘이 들락려야 하기 때문에그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육체가 갖 추어 져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어. 완전히 거저인 것 같은 이 힘도 많이 쓰 면 쓸수록 지치기는 매한가지야." "큰갈래라면 작은 갈래도 있어요?" "그럼. 부적마법(符籍魔法)이라든지 마법진(魔法陣)을 이용한 마법이라든 지... 수많은 종류가 있지." "그럼 제가 익힐 수 있는 마법은 백마법 뿐이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혹시 나중에 악마녀석과 계약할수도 있으니까 흑, 백마법은 누구나 익힐 수 있는 선제조건은 갖추어 졌다고 볼 수 있겠지." "방금 설명한 것들 중에서 제일 이해가 안가는게 섞는 부분있잖아요? 응축된 기와 자신의 염원을 섞는거... 그건데.." "당연히 이해가 안가겠지. 화이어 볼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마나 가 있어. 그 이상의 마나만 공급해 준다면 그 마법을 구동시킬 수 있게 되지. 몇가지 요령만 터득하면 자신의 염원과 응축된 마나의 덩어리를 혼합하는 것 은 어려운게 아니야. 하지만 여기서 실패한다면 정말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만..." "그럼 그 염원과 마나가 섞이는 것을 어떻게 좀 느끼게 해줄래요?" "그건 어려운게 아니야. 자... 조용히 눈을 감고 감각을 집중해 봐." 그러면서 가스톤은 다크의 뒤에 서서는 손목을 잡은 후 주문을 외워가기 시작 했다. 그러자 다크와 가스톤을 중심으로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걸 다크 는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가스톤은 주문을 외우면서 다크의 손목을 잡고는 다크가 형식에 맞는 움직임을 취할 수 있게끔 이리저리 움직였고 드디어 주문 이 완전히 다 끝났다. "어때 뭔가 느껴지는게 있나?" "아주 뜨거운 어떤 게 느껴지는데요?" "당연하지. 자네 바로 손 앞에 마나의 덩어리가 위치하고 있어. 이제 시동어 를 외울거야. 화이어 볼!" 그와 동시에 가스톤의 염원의 덩어리가 꼭 가스톤이 꼭 잡고있는 다크의 손목 부분을 통해 다크에게로 전달되었고 그것은 곧이어 다크의 손을 통과해서 마 나의 덩어리와 합쳐졌다. 그와 동시에 다크의 오른손 위에서 확 하고 불덩어 리가 생겨났다. 그러자 가스톤은 다크의 손을 앞으로 당기듯 하면서 불덩어리 를 던졌고 그 덩어리는 앞에 있던 땅바닥에 맞으면서 폭발을 일으켰다. "이해하겠나?" "뭔가 제 손을 통과해서 나갔는데..." "그게 불의 염원을 담은 덩어리지. 그 둘이 합쳐져서 하나의 마법을 만든거 야." "흐음... 이거였나? 아니 이거였나?" 한참 다크가 이궁리 저궁리 해대더니 가스톤에게 말했다. "이제 어느정도 이해가 가네요." "사실 염원이란 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야. 이렇게 되어 주세요. 하는 거니까. 가장 중요한 건 필요한 만큼의 마나를 응축시키는 거라구." "그럼 최고주문은 몇싸이클 까지 있어요?" "잘은 모르겠는데 내가 듣기로는 9싸이클 까지 있다고 하더군. 뭐 9싸이클 정 도 되면 도시하나를 묵사발을 낼수있다나? 그러던데 나도 잘 모르겠어. 어쨋 든 그정도까지 배운다는건 불가능해. 마법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 즉 1,2싸이 클을 사용할 수 있는 인물들을 견습맙법사, 3,4싸이클은 수련마법사, 5,6싸이 클은 마법사, 7싸이클 이상은 대마법사라고 하는데 대마법사는 전 세계를 통 털어도 몇 명 되지 않을정도로 마법은 어려운 거야. 어때? 지금부터 룬어를 좀 배워볼래?" "그럼 그 전에 화이어 볼 시범 한번만 더 보여줘요." "뭐 그건 어려운게 아니지." 다크는 또다시 가스톤이 기나긴 주문을 외워 화이어볼을 날리는 것을 유심히 지켜봤다. 아니 그의 행동을 유심히 봤다는게 아니라 그의 주위에서 흐르는 마나의 흐름을 지켜봤다는 말이다. 복잡한 것 같지만 단순한 흐름을 가지는 마나의 흐름... 다크는 슬며시 북명신공을 응용하여 주위의 기를 끌어들어 하 나의 원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뭐 이까지는 힘들게 없었다. 그런다음 원통 내에서의 가속... 이때 가속하면서 그 원통의 겉부분으로는 기를 흡수하여 그 원통의 중앙부분으로 압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정도 량의 기를 가속가 속하면서 압축해야 하는지 알수가 없으니 죽자고 가속해낸 다음 기를 압축시 키기 시작했다. 이제 제법 압축되었다고 생각되자 다크는 그 강력한 힘을 가 진 기의 덩어리를 오른손쪽으로 유도하며 동시에 손을 앞으로 쭉 뻗어놓은 상 황에서 몸속에 있는 가스톤이 지적해준 불의 기운을 담은 염원을 가져다가 둘 을 합쳤다. 퍽 작지도 않은 소리가 나면서 손바닥 앞쪽에 진홍색으로 불타는 축구공 크기의 불덩어리가 만들어졌다. 갑자기 그게 만들어지자 옆에서 지켜보던 가스톤은 놀라서 기절하기 일보직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이어 다크는 그 불덩어리 를 기를 이용해서 앞으로 날려버렸다. 쿠왕!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가스톤의 화이어 볼의 수십배는 되어 보이는 불의 힘! 아무래도 가속과 압축을 너무 과도하게 한 모양이었다. 다크 가 처음 성공한 마법을 통해 이 마법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구동하게 되는 것 인지를 다시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있을 때 이제서야 이성을 회복한 가스톤이 놀랍다는 듯이 떠듬떠듬 물어왔다. "자네 마법을 할 줄 아나?" "예. 방금 할 수 있게 된거 보셨잖아요?" "그럼 그게 지금 배우고 한거란 말이야?" "그렇죠." "자네 천재인가? 난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군." "별로 어려운게 아니던데요? 자, 봐요." 이번에 다크는 호승심에 입각하여 원반을 두 개를 만든 다음 맹렬히 회전시키 기 시작했다. 그런다음 압축된 기를 전처럼 한군데로 합치지 않고 길쭉한 상 태로 둘을 합쳐 기를 손가락 끝쪽으로 보낸 다음 거기서 불의 기운과 합치게 만들었다. 그러자 역시나 예상대로 붉은 화염막대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 가는 것이다. 이건 전번 1싸이클을 날릴때보다 더 시간이 적게 들었다. 물론 이건 요령이 붙어서 단축된 시간이었다. 꽈꽈꽝! "봤죠? 방금건 2싸이클이었다구요. 이제 3싸이클에 도전해볼까?" 전에 가스톤이 몇번 마법을 사용하는 모양은 봤으므로 그 원반들이 어떤 형식 으로 교차하는 모양을 이룬다는 것은 알고 있다. 물론 3싸이클 까지였지만... 하지만 지금 여기는 없지만 5싸이클을 구사하는 진짜 마법사도 한명 더 있으 니까 그것도 알아내는데 별로 어려울게 없을 것이다. 급속도로 가속, 압축, 혼합, 발사! 쾅! 지축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시뻘겉게 솟아오르는 불덩어리... "어때요? 3싸이클 주문의 위력이 맞죠?" 다크가 쏘아대는 화이어 볼을 보면서 경악감에 입을 딱 벌리고 있던 가스톤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돼! 저게 3싸이클이라고? 5싸이클이라도 저정도 파괴력은 없겠다." "으윽! 너무 기를 많이 압축했나? 어쨋든 아주 재미있군요. 원리만 이해하면 아주 간단한거에요. 흡수, 가속, 압축, 혼합, 발사라..." "자네는 보면볼수록 이해를 못하겠군. 아무것도 모르다가 가르쳐 주기만 하면 사람을 놀라게 만드니... 참. 시간이 많이 흘렀어. 빨리 가자구. 합류할 장소 에 가서 나머지 설명을 더 해주지." "그러죠." 일행들은 가스톤과 다크가 둘이서 뭐가 좋은지 쑥덕거리며 떨어지지 않는걸 보고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뭐 그렇게 대소롭지 않게 생각했다. 마법이란게 하루아침에 배워지는 것도 아니고... 또 그들로서는 복잡한 마법주문인 룬어 나 기타 그런것에 대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실드란 것은 말이야 마법을 막는 매직 실드와 화살같은걸 막는 포스 실드가 있지. 하지만 그 둘을 한꺼번에 막지는 못한다 이말이지. 그걸 한꺼번에 막으 려면 바리어를 쳐야 하거든. 바리어는 3싸이클부터 사용하는 마법인데 4,5,6 싸이클 이상이라도 그냥 바리어지. 대신 그 방어하는 면적이 늘어나고 방어하 는 강도는 변함이 없어. 그건 실드도 마찬가지지만... 주문은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했으니 뭐... 넘어가고 그건..." 저녘식사를 끝낸 다음에도 저쪽에 둘이 누워서는 쑥덕거리는 걸 보면서 시드 미안 경이 팔시온에게 물었다. "저 둘은 사제지간인가?" "아닙니다. 이번 길에 만난 동료지요. 시드미안 경." "보통 마법을 딴사람에게는 잘 가르쳐 주지 않는게 상식인데... 저 가스톤이 란 사람은 꽤나 열심히 가르치는군." "글쎄요. 뭣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크한테는 죽도록 붙어서 가르치는군요. 내가 전에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을때는 며칠 가르치더니 그만둬놓고..." 사실 그때 가스톤은 팔시온을 며칠 가르쳤지만 며칠 지난 다음 자신의 가르치 는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포기했던 것이다. 가르쳤을 때 배우는 상대가 잘 이해하면 가르치는 사람도 엄청 재미있는 것이 상식이니까... "그런데 저 다크란 사람은 왜 데리고 다니는 건가? 이번 추격을 하는데 아무 런 보탬이 안되고 있잖아? 물론 가스톤이라면 수련마법사니까 싸우는데 필요 하겠지만..." 그러자 팔시온이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직 적과 만나지 않아서 모르시는 거죠. 다크의 검술실력은 저희 파티에서 최고라구요. 전에 그래듀에이트급 기사까지 헤치우는 걸 봤을 정도니까요. 그 기사가 누군가 하면 경의 동생분을 죽인 기사였죠." 시드미안 경은 새삼스레 다크를 바라본 다음 말했다. "그렇게 대단한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검술실력이 뛰어나단 말이 오?" "거짓말 같지만 진짭니다." * * * "스승님" "뭐냐?" "좋은걸 발견했습니다. 혹시 흥미가 있으실 것 같아서 우선 몇권 가져왔는데 요." 그러면서 내미는 책 세권... 토지에르 경은 그 책을 받아서 쭉 훑어봤다. 마 법책들이었다. 그것도 6싸이클 급의.... 토지에르 경은 놀라움에 가득찬 어조 로 제자에게 물었다. "이걸 어디서 구했느냐?" "전부터 우리가 사용해오던 거점 중 한곳이 마법사의 집이란걸 뒤늦게 알았습 니다. 그 밑에있는 던젼에서 발견했죠. 그거 말고도 거의 천권에 달하는 책들 과 마법을 실험하는 장비들이 있습니다. 그중 쓸만한 거는 다 가져왔으니 한 번 보시죠." "오오... 정말 잘했다. 이건 대단한 발견이야. 국가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 시는 폐하께 최고의 선물이 되겠어." "그중에서 마법 도구(tool)도 몇 개 있더군요. 바로 이것들입니다." 그는 제자가 꺼내놓은 검 한자루와 반지 두 개, 또 수정구슬 하나를 바라보며 만족스런 신음소리를 흘렸다. "흐음... 대단해. 빨리 사람들을 보내서 그것들을 왕궁으로 옮겨라. 아니지 우선 내가 그리 가봐야겠다. 빨리 안내하거라." "예." * * * 일행은 1주일동안 추격을 했는데도 상대의 꼬리가 지나간 길은 어느정도 윤곽 을 잡을 수 있었지만 정작 상대의 꼬리조차 구경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가스 톤만이 아니라 안토니 크로와까지 섞여서 다크가 열띈 토론을 하고있는데 팔 시온이 급히 들어왔다. "발견 했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마을 외곽에 세워진 집인데 거기에 적들의 본거지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자 재빨리 시드미안 경이 일어며 외쳤다. "그럼 빨리 가보자." 그들은 재빨리 말을 타고 팔시온이 찾아낸 상대방의 본거지를 향해 달려갔다. "상대의 수효는 얼마 정돈가?" "그게 잘 모르겠지만... 어쨋든 좀 수상한 곳이라고 주민들이 그러더군요. 그 검은가죽갑옷을 입은 녀석을 봤다는 사람도 그놈이 그곳이 어딘지 묻더라고 하구요." "그 집이 규모가 큰가요? 만약 성처럼 지어놨다면 이 인원가지고 힘들지 도..." "그렇게 큰 집은 아니랍니다. 옛날 마법사가 살던 집이라고 그러던데..." 일행이 도착할때쯤에는 이미 날이 저물었지만 달빛을 이용해 보니 과연 집은 그렇게 큰 집이 아니었다. 2층의 벽돌로 지은 건물이었고 뒤쪽의 마굿간에는 말도 몇필 매어져 있는 것이 분명히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 었다. 하지만 그 집은 꽤 넓은 공터에 지어져 있었기에 그쪽으로 들키지 않고 접근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 것처럼 보였다. 일행이 도착하자 저택이 잘 보이 는 숲쪽에 지미와 라빈이 기다리고 있었다. 팔시온은 일행을 둘러본 후 급히 물었다. "미디아는?" "반대편을 둘러본다고 가셨어요. 지금쯤 올때가 넘었는데..." "뭐 조금 있으면 오겠지. 보초는?" "정문에 한명, 마굿간 쪽에 한명 있어요." "흠... 여기서 저택까지는 500m는 족히 되겠는데? 이거 활가지고는 힘들겠군. 어떻게 한다? 이봐요, 안토니. 마법으로 어떻게 안될까요?" "흐음... 마법으로 안되는 건 아니지만 혹시 저쪽에도 마법사나 혹은 기사가 있다면 마나의 움직임을 눈치챌텐데..." "제길. 정면돌파 외에는 방법이 없군. 안그런가요, 시드미안 경?"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내가 스미온을 데리고 정문을 맡지." "그러면 우리들은 후문을 맏지요. 그러니까 그 시간은 이걸로..." 팔시온은 품속에서 작은 모래시계 2개를 꺼낸 다음에 말했다. "이건 10분 단위로 모래가 떨어지죠. 10분 후에 합시다." "알겠소." 모두들 와글와글 하고 있었지만 다크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왜냐 하면 그 건물안에서는 강력한 기를 지닌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건물 안에 10명 정도의 인물들이 들어있었지만 쓸만한 실력을 가진자 는 한명도 없다는 말이나 같았다. ㅆㅆㅆ! 미카엘, 지미, 라빈은 각자 말안장에 매어진 활을 가지고는 상대를 향해 발사 했다. 이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상대에게 활을 날린다면 그 정확도를 기대하기 는 상당히 힘들다. 거기다 밤이라서 상대도 잘 안보였고... 거기에 상대가 맨 몸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갑옷을 입었다면 큰 타격을 과연 줄 수 있을지 의문이 가는 것이다. 어쨋든 그들은 활을 날렸고 상대는 어느정도 피해를 입었는지는 모르지만 쓰러졌다. 그걸 확인한 다음 그들은 살며시 전진해 들어갔다. 푸르륵거리는 말들을 달래며 마굿간 옆에 있는 문에 접근한 팔시온은 시드미 안 경 일행도 반대편 문에 접근해 왔기를 빌면서 곧장 문을 열고는 안으로 뛰 어 들어갔다. 갑자기 검을 든 인물들이 들이닥치자 넓직한 탁자에 앉아 야식을 먹고있던 덩 치큰 녀석들이 각자 옆에 세워둔, 혹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고 반항하려고 했지만 그 반수 정도는 검을 채 뽑아보지도 못하고 팔시온의 거대한 검에 두 토막이 되어버렸다. 이때 2층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더니 남은 5명 정도가 검과 방패를 들고 나타났다. 하지만 이쪽이 숫자도 원체 많았지만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들도 많아 간단히 살해되고 말았다. 마지막 두명을 간단히 헤치워버린 시드미안 경은 두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2층을 검사하기 위해 뛰어 올라갔고 지미나 라빈은 1층 내의 여러 방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보게 안토니 이리좀 와보게나." 시드미안 경이 안토니를 부르자 무슨 일인가 하고 팔시온과 가스톤까지 2층으 로 올라갔다. "여기 문이 잠겨있는데 도저히 열리지가 않는군." "어디 좀 보게 비켜 주십시오." 안토니는 이리저리 문을 검사해보더니 확정적으로 말했다. "마법을 걸어놨습니다. 직접적으로 문짝에 마법을 걸어놓은 것 같지는 않 고... 아무래도 문지기 부적을 걸어놓은 모양인데요?" "문지기 부적? 열수는 있나?"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문짝에 마법을 걸어놨으면 그 문을 마법이 직접 방어하지만 부적은 다르죠. 어떤 약속어를 말하기 전에는 문이 안열리게만 막 아주니까요. 그냥 문을 때려 부수면 되죠. 하지만 이런 부적은 비싸니까 되도 록이면 살살 부숴주세요. 회수해서 써먹게..." "알겠네." 시드미안 경은 곧장 검을 꺼내서는 경첩부분을 잘라내 버린 다음 문을 열었 다. 그러자 문 뒤쪽에 부적이 붙어있는게 보였다. 아마도 이 부적은 단순한 도둑 방지용이거나 아니면 부하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붙 여놓은 모양이었다. 시드미안 경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 방안에는 거의 가구도 별로 없었고 창문에 부적한장 붙어있는 것과 책상 위에 부적 몇장이 놓여있는거 외에는 별것도 없 었다. 시드미안 경이 서랍을 뒤져 나가는 동안 팔시온은 휴지통을 뒤지기 시 작했고 나머지는 이곳저곳에 뭔가 있나 해서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때, 스미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시드미안 경을 불렀다. "시드미안 경, 이것좀 보시지요."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어 있을 때 그곳 의자에는 멍청한 표정으로 예 쁜 여자애가 한명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꼬마아이는 모두다 알고있던 라나 슈바이텐베르크였다.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거지?" 라나의 몸을 살펴보던 안토니가 곧장 답했다. "마법에 의해 정신이 제압당해 있군요." 팔시온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또? 그 마법을 풀수는 없습니까?"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 십시오." 안토니 크로와가 라나의 머리위에 손을 올리고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중 얼 거리기 시작하자 손바닥에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깨어나라!"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뜬 라나가 사방을 둘러보더니 곧이어 눈에익은 얼굴들 이 잔뜩 모여있는 것을 보고 쑥스러운 듯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 그냥 이리저리 물어보며 따라오다가 또 그사람한테 잡혔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안나요." "당연하겠지. 저 애를 어떻게 돌려보내지?" 시드미안 경의 한탄이 좀 섞인 질문에 팔시온이 곧 대답했다. "돌려보내도 또 따라오려고 들텐데요. 거기다 누구에게 이 아이를 호위시켜 보낼 겁니까? 지금 한사람이 아쉬운데... 어쩔 수 없어요. 그냥 데리고 갑시 다. 그건 그렇고 너 배는 안 고프냐?" "배고파요." "안토니씨, 죄송하지만 저 아이좀 데리고 가서 뭘 좀 먹어주십시오. 밑에 식 당이 있고 그녀석들이 끓여놓은 야식도 있더군요." "그러지요." 안토니 크로와가 라나를 데리고 계단 밑으로 내려가자마자 시드미안 경이 팔 시온을 붙잡고 말했다. "저 아이를 데리고 갈수는 없소. 이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주 위험하다구."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시드미안 경. 그렇지만 지금은 돌려보낼 방법도 없구요. 또 돌려보내는 방법을 그 아이 앞에서 쑤근거리면 그 애도 주의하게 될텐데 그때는 잡아서 돌려보내기도 힘들어지죠. 일단 국경 경비대나 신전같 은 신뢰할 수 있는 단체를 만나면 꽁꽁 묶어놓고는 그들에게 부탁하고 떠나도 괜찮죠. 그렇지만 또 따라온다고 하다가 잡힐수도 있으니... 제길.." 한참 생각하던 팔시온이 덧붙여 말했다. "할 수 없군요. 우선은 추적에 큰 도움이 되지않고 있는 다크에게 맏기기로 하죠. 검술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니 별 문제야 없겠죠." * * * "뭐... 뭐야?" "뭘 그리 ㄸ은 표정인가? 자네는 따로 할 일도 없잖아?" "날보고 저 '애물단지'를 데리고 다니란 말인가요?" 그러자 저쪽에서 식사중이던 애물단지가 다크를 향해 눈꼬리를 쳐올리며 악을 썼다. "뭐에요? 이리저리 얘기를 들으니 아저씨도 짐이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요? 같이 좀 있으면 어때서 그래요?" "뭐야? 말 다했냐? 어른들 얘기에 끼어들고있어...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애 가." "그러는 아저씨나 예절이란 걸 배워 보라구요. 예절 교육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못받은 촌놈 주제에.." "뭐라고? 이런 싸가지 없는 년이... " "이봐 제발 좀 참으라고... 꼬마애한테 왜그래?" 급기야는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라나에게 다가 가던 다크를 팔시온이 밖으로끌고 나갔고 다크도 저런 꼬맹이와 일순간이지 만 아웅거렸다는게 자존심이 약간은 상해 그냥 마지못해 끌려나가는 척 해줬 다. "나는 절대 못해요.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를..." "그래도 귀엽게 생겼잖아?" "그러면 팔시온이 데리고 다니지 그래요? 나는 애나 보자고 따라온게 아니란 말이에요." "돌겠군... 그럼 누구한테 맏긴단 말인가?" "가스톤한테 맏겨요. 그쪽도 일안하기는 마찬가지잖아요." "그도 그렇군. 하지만 가스톤은 원체가 수련마법사라서... 누군가를 지켜준다 는게 좀 벅찬 노릇이지. 대신 자네가그들을 멀찍이서 지켜준다고 약속한다 면..." "약속한다면?" "가스톤에게 맏기기로 하지." 그러자 다크가 씨익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좋아요. 절대로 죽지는 않게 해주죠." 이때 집 구석구석을 살펴본 가스톤이 다가와서 말했다. "이 집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어요." "밑에 내려가 봤어요?" 그러자 가스톤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탐지마법에 따르면 이 집 지하에 넓직한 공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입구를 찾 지 못해서 한동안 고생을 했었는데 드디어 찾았어요. 조금 들어가 봤는데 아 주 깊어요. 어쩌면 그냥 지하실이 아니라 던젼이 있을지도 몰라요." 던젼이란 말이 나오자 무예 수업자들이나 안토니 크로와가 지대한 관심을 나 타냈다. 던젼이란 것은 마법사의 작업실을 말하는 것으로 그 마법사가 뛰어날 수록 던젼의 규모는 컸고 그 마법사가 생전에 모아놓은 여러 가지 귀중한 것 들이 있을 수 있었다. 보물이라든지 마법도구... 또는 마법책자 등등 어쩌면 돈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을 구할수도 있었다. "혹시 밑에 누군가가 있는건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교묘하게 위장되어 찾기가 아주 힘든 위치 에 있었죠. 그리고 딱히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은 없어요." "그럴까? 하지만 그 검은가죽갑옷 입은 녀석도 마법사니까 이 밑에 뭐가 있는 지 알고 있었을거 아냐?" "어쩌면 그는 확인해보지도 않았는지 모르죠. 이 집 지하에 뭐가 있는지... 아니면 이 밑의 구멍을 뒤진다고 시간낭비를 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르구요. 드래곤 하트를 훔쳐갈 정도라면 그들은 인간의 힘 능력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작정인게 틀림없죠.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그정도로 높은 수준의 마법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 그가 보통 마법사가 차지하고 앉아있던 지하 실을 뒤지는 수고를 할까요?" "흠... 일리가 있는데? 하지만... 그 검은 갑옷입은 마법사가 언제 이리 올지 모르는데 우리들이 아래로 내려가서는..." 시드미안 경이 고민에 잠기자 급히 팔시온이 말했다. "그럼 저희들이 밑을 탐색하는 동안 시드미안경께서는 여기 계십시오. 스미온 까지 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렇게까지 말하자 시드미안 경은 승락했다. "괜찮은 생각이군." "꺅! 지금부터 던젼을 탐험하는 거에요?" 라나가 좋아서 팔짝팔짝 뛰며 비명을 질렀다. 던젼 탐색... 이 얼마나 근사한 소리냐... 음.... "너는 안돼!" 묵향이 말하자 라나가 반박했다. "뭐에요? 왜 안돼요? 나도 들어갈 자유가 있다구요." "위험해." "흥! 그러는 아저씨나 몸조심 하라구요. 나는 아데나님을 모시는 수련생. 신 의 축복과 함께한다구요." "헛소리 하지마. 이 꼬맹아." "꼬맹이라니 말 다했어요? 나도 조금 더 있으면 늘씬하게 커진다구요. 별볼일 없는 검객 주제에 누구보고..." "뭐야? 지 주제를 파악해야지." "아저씨 도움따위 필요 없다구요. 그리고 나를 보호해 주는 건 가스톤 아저씨 지 당신같은 멍청이가 아니란 말이에요." "으이그... 이걸 그냥..." 급기야 다크의 주먹이 날아가려는 찰나 팔시온이 그를 제지했다. "자네가 참게나. 너 꼭 내려가고 싶냐?" "예." "으휴... 할 수 없지. 너는 꼭 내 옆에 붙어있어야 한다. 알겠냐?" 그러자 라나가 방긋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 그러자 다크가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저 꼬맹이가 가면 난 안가겠어요." 그러자 가스톤이 재빨리 대답했다. "좋을대로 하게. 별로 어려운 것은 없을거야. 만약 자네가 필요하면 부르지." 팔시온은 못마땅한 시선을 애써 그녀에게서 돌리며 말했다. "그럼 내려가 보기로 하죠. 지미 식량은?" "지금 우리가 가져온게 일주일치 정도 있어요. 지금 가져오죠." "말에 실려있는 짐들을 모두 가져오게. 그리고 횟불도 많이 만들어. 안은 엄 청나게 깜깜하니까..." "그럼 저도 가죠." "저도 도화드릴께요." 팔시온의 말에 라빈하고 라나까지 신이나서 밖으로 달려갔다. 일단 던젼을 탐 색하려면 시간이 어느정도 걸릴지 잘 모르니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 것이 다. 마법사의 던젼은 그냥 마법사 한사람이 땅굴 야트막하게 파놓은거라고 생 각했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안된다는게정설이었다. 들리는 전설이나 옛 이야 기에 따르면 마법사는 자신이 부릴 수 있는 하급 마물이나 마법을 통해 던젼 을 구축하기에 그 규모는 엄청난 크기였기 때문이다. "자 이제 내려가자구." 지하실의 문을 열고 롱 소드와 방패를 든 미카엘을 선두로 무예 수업자 패거 리가 앞장섰고 그 뒤를 마법사 두사람과 라나가 따라갔다. 그 다음은 팔시온 이 후방을 호위하며 들어갔다. 동굴 속은 완전히 암흑의 세계였다. 거기에 모두들 옛 전설속에 나오는 무시 무시한 던젼을 생각하고 '대략 던젼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뭔가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천천히 발밑을 확인하면서 걸어 갔고 그러다 보니 10m를 전진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한참 밑으로 내려가던 지미가 투덜거렸다. "제길... 뭐가 이렇게 깊어?" 그러자 가스톤이 말했다. "원래 던젼은 다 그래. 오히려 깊으면 깊을수록 좋은거라구. 하지만 지금 아 주 조심해서 내려왔기에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렇지 별로 깊이 내려오지도 못 했어. 아마 지하 5m정도 내려왔으려나?" "그런데 왜... 힉!" "뭐냐?" "앞에 발을 디디자 마자 푹 꺼졌어요. 앞발에 별로 힘을 안주면서 확인해서 갔기에망정이지 안그랬으면 빠졌을 거라구요." 약간 뒤따르면서 방패를 앞세워 걷고있던 미카엘이 밑을 툭툭 쳐보자 흙들이 와르르 쏟아져서 아래로 떨어졌다. "함정이군." "어디 통로가 있는지 한번 때려봐." "이쪽 벽 가쪽으로 길이 있습니다." 지미가 왼쪽 벽쪽에 붙어있는 폭 40Cm정도의 공간을 찾아내고는 말했다. "자네가 한번 가봐. 아니. 내가 가는게 낫겠군." 미카엘은 방패로 자신의 몸에서 중요한 부분을 세심히 가리면서 앞으로 나갔 다. 그러면서 옆쪽에 만들어져 있는 함정의 폭이 어느정도인지 확인하는 작업 도 잊지 않았다. 또 이런식으로 다리를 굽히고 걸어가는 편이 언제 이 발판이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곧장 다리를 뻗으면서 뛰어 오르면 될테니까 말이다. "함정의 끝이야. 다리는 안전해. 가면서도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안났으니 까... 함정의 폭은 5m정도... 한명씩 조심해서 건너와." 먼저 무예 수련자 패거리가 한명씩 다리를 건너갔고 그들은 방패를 이용해서 앞에서 날아올지도 모르는 뭔가를 방어하며다리를 건널 동료들을 보호했다. 모두들 무예 수련자 패거리의 보호 아래 손쉽게 다리를 건넌 후 앞으로 2m정 도 갔을까 앞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퍽! "이봐! 무슨 일이야?" 팔시온의 물음에 미카엘의 간단한 대답. "제길... 저쪽 어두운 쪽에서 화살이 날아왔어." "뭐 화살이야 보통이지. 방패로 잘 가리라구. 어쩌면 마물이 나올지도 모르니 까..." "마물이라고는 보이지도 않는데? 아 막다른 골목이다." 조금 더 걸어가자 구멍이 몇 개 뚫려있는 벽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아마도 그 구멍에서 화살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벽의 오른편에 폭 2m정도의 문 이 달려 있었다. 문을 잡고 흔들어보던 미카엘이 말했다. "이거 문이 안열리는데?" "뭐야? 뒤로 좀 물러 서봐." 주섬주섬 살펴보던 가스톤이 말했다. "이거 마법이 걸린 문이야." 그러자 지미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마법이요? 그럼 어떻게 열어요?" "뭐 별로 어려울건 없지. 여길 파라구. 문으로만 안들어가면 되지." 그러면서 가스톤은 문 옆의 벽을 가리켰다. "어딘가에 이 문에 마나를 공급해주고 있는 마법진이 있을거야. 그걸 찾아서 부숴버리면 간단하게 열리겠지만 어느세월에 그걸 찾겠나? 또 그게 문 뒤에 있을 가능성이 제일 큰데... 어쨋든 옆의 벽을 뚫고 들어가는게 빠르지." "저... 연장이 없는데요? 조금 기다리실래요? 가서 곡괭이하고 삽가지고 올께 요." "에잉? 그도 그렇군. 비켜봐. 아니지. 참 저 구멍앞을 방패로 막고있어. 혹시 벽을 부수면 그 충격으로 저기서 또다시 화살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주춤주춤 라빈과 지미가 벽쪽으로 다가가서는 방패로 구멍을 가리자 가스톤은 안토니에게 히죽이 말했다. "힘좀 써보시죠." "그럴까? 모두들 조심하게...." 안토니 크로와는 룬어로 된 복잡한 주문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가스톤하고는 레벨이 틀린만큼 그 주문을 외우는 속도는 더욱 빨랐다. "오브젝트 리머테이션(object limitation;목표 제한)" "화이어... 볼!" 꽝! 엄청난 불덩어리가 날아가서 벽에 작렬했고 그 벽에는 엄청나게 큰 구멍이 뚫 렸다. 하지만 그 불꽃은 벽만을 완전히 박살냈을뿐 그 불꽃이 안으로도 들어 가지 않았고 옆으로도 새지 않았다. 그걸 본 가스톤이 박수를 치면서 외쳤다. "우와...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딴 인물들은 한방에 벽이 묵사발나는 걸 보고 그 파괴력에 놀랐다. "엄청나군요." "물론 4싸이클의 마나를 집어넣은 화이어 볼이니까 그렇지. 하지만 이렇게 좁 은 공간에서 오브젝트 리머테이션을 걸어놓지 않으면 좌우로 뿜어나오는 열기 에 모두들 통구이가 되기 딱 좋지. 그리고 안으로 불길이 들어가면 귀중한게 불타버릴지도 모르니까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목표제한을 확실히 해놓고 마법 을 써야 한다네." 일단 구멍이 뚫리자 미카엘이 구멍안에 횟불을 집어넣고는 안쪽을 세심히 살 펴본 다음 지미와 라빈과 함께 들어갔다. 그들만이 방패를 가지고있었기에 불시의 기습에 강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디아도 방패는 가지고 있었지만 위험 한 장소에 여자를 먼저 집어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그들이 긴장하며 주 위를 살펴본 후 김빠진 음성으로 말했다.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자 모두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마법사가 오랜시간 뭔 짓거리를 하 고있었는지 곰팡이 냄새가 나는 여러권의 서적들이 쌓여 있었고 몇가지 용도 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한쪽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저쪽에 가스톤이 이미 말 한 문에 마나를 공급하는 큼직한 마법진이 하나 있었다. 일단 어느정도 안전해지자 가스톤은 가스톤이 주문을 외운다음 시동어를 외쳤 다. "문라이트(moonlight)!" 그러자 조그마한 원구가 하나 가스톤의 손에서 튀어나오더니 보름달 정도 밝 기의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있던 지미가 투덜거렸다. "좀 더 빨리 꺼냈으면 이놈의 횟불은 안만들어도 좋았잖아요." "이봐. 이거 만드는 마나는 거져 생기는 줄 알아? 나도 꽤 신경쓰면서 만들어 낸 빛이라구. 자. 나중에 쓸지도 모르니까 모두들 횟불 끄고 뭔가 쓸만한거 있는지 뒤져봐." 가스톤의 말에 모두들 이리저리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보물은 없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이때 지미가 말했다. "여기 책장 뒤로 문이 하나 있는데요?" "그럼 한번 열어보게." "어? 이건 그냥 열리네... 열리는데요?" "그럼 몇사람 밑으로 내려가 보게나." 그러면서 가스톤과 알렉스는 이책 저책 뒤져본다고 정신이 없었다. 혹시나 자 기가 모르는 어떤 마법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속에서... 무예수행자들과 팔시온, 그리고 라나는 잔뜩 부푼 기대감 속에 밑으로 내려갔 다. 하지만 그들은 한참 지나서 올라오더니 투덜거렸다. "밑에는 그냥 넓은 공간만 하나 있을 뿐이라구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밑으로 어느정도 내려갔나?" "한 20미터 정도?" 마법서들을 읽어보던 가스톤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역시 짐작이 맞았군요. 상당한 마법사가 여기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건 꽤나 차원이 높은 마법섭니다. 아무래도 여기 있는 마법서들의 일부는 6싸이 클 정도까지도 올라가는 것 같은데요?" 그러자 안토니 크로와도 가스톤의 말에 찬성했다. "맞아. 대단한 마법사가 살고 있었던 곳이야. 아무래도 연락해서 이 책들을 성으로 운반하라고 해야 겠군. 돈으로 액수를 따지기 힘들만큼 상당한 재산이 니까..." 마법사들끼리 두런두런 대단한 성과라고 떠들어대자 열받은 지미가 외쳤다. "아니.. 겨우 이 따위가 던젼입니까?" "이게 던젼이지. 그럼 자네는 뭘 바랬나?" "그래도 마법사의 던젼이라고 해서... 엄청난 규모에 마수들도 돌아다니고, 또 수많은 기기묘묘한 함정... 뭐 그런걸 생각했었죠." "쯧쯧... 그건 전설에서나 나오는 엉터리야. 마법사 한사람이 던젼 하나를 파 는데 무슨 힘으로 그렇게 엄청난 규모로 만든다는 건가? 마법서적을 수집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각 마법사는 자신이 장기로 연구하는 마법들이 있기 마련 이고 여기 모여있는 천여권의 책이라면 정말 엄청나게 많은 책이야. 그리고 깊숙하게 동굴 하나 파서 거기에 넓은 공간을 만들어 마법 실험실 하나 만들 어 놓고... 그럼 끝이지. 뭘 더 바라나? 여기저기 잘 뒤져보면 몇가지 건질지 도 몰라. 한번 뒤져 보게." 그러자 모두들 신이 나서는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시간이 지난 후 그들 은 아무리 털어도 책이나 쓸모없는 고물들 뿐이라느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렇 지만 그 고물들과 책들은 마법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꽤나 가치가 있는 것이었 다. 그렇기에 그 다음날 아침 일찍 통신비둘기를 날려 책을 왕성으로 옮길 사 람들을 부른 다음 그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드미안 경 일행이 던젼을 발견한 그 다음날 저녘, 어둠속에서 거의 느껴지 지 않을정도의 희미한 빛이 나더니 세명의 인물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중 한 사람은 검은색 가죽갑옷을 입고 흑색 망토를 날리고 있는 상당한 미남자였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60세는 되어보이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그 남자도 검은 가죽으로 만든 갑옷과 검은색 망토를 입고있었는데 그도 그 옆의 젊은 이처럼 근육이 별로 발달하지 않은 학자처럼 생긴 것으로 보아 그의 직업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또 한명은 당당한 체구의 30대 중반의 젊은이로 그도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차고 있는 검은 노인이나 옆의 젊은이의 가 벼운 샤벨(shabel)이 아니라 길이 1미터, 폭 16센티, 무게가 40킬로 이상은 나가 보이는 브로드 소드(broad sword;광검;廣劍)였다. "이곳이냐?" "예. 스승님." 노 마법사는 거의 1Km이상 떨어져있는 작은 2층집을 가리키며 제자에게 물었 다. "그런데 저기에 보이는게 목적지가 아니냐? 그런데 왜 이렇게 멀리에?" "부하 녀석들 중에 쓸만한 무사가 없기에 조금 조심하는 것 뿐입니다. 스승 님." 노마법사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눈길로 제자를 바라봤다. 그는 자 신의 제자가 그만큼 신중해진 것이 대견스러웠던 것이다. "좋아. 제법 많이 늘었구나. 그렇다면 저기의 지하에 다론, 네가 가져온 그 책들이 있었다는 말이냐?" "예. 스승님. 그중에서 스승님이 흥미있어 하실만한 것 세권만 가져온 것이지 요. 그 외에도 그 던젼에는 천권이 넘는 책들이 쌓여있습니다. 그리고 가져다 드린 그 마법도구들도 모두 그 던젼에 있던 것들이구요." 스승은 제자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며칠 후에는 사람들이 뒷따라 올테니 그들을 이용해서 그걸 본국으로 옮기면 되겠구나." "하지만 스승님께서 이렇게 직접 가보실 필요는 없을텐데 무리 하시는 건 아 니십니까?" "클클... 무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좀 빠져나가 있다고 해서 이번에 진행 되는 일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참. 스승님." "왜그러느냐?" "전에 심부름할만한 똑똑한 아이를 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주괜찮은 아이를 하나 구해 놨습니다. 거기에 잠자리에서는 스승님 회춘(回春)하시는데 보탬까 지 되니 일거 양득이죠." "누군데 그러느냐?" "지혜의 여신 아데나를 모시는 드로아 대신전의 수련생입니다. 척 보시면 마 음에 드실겁니다. 아주 예쁘고 귀여운데다가 머리도 잘돌아가거든요. 하하 하." "클클... 다론 네가 왠일이냐? 내 생각을 다 해주고..." "존경하는 스승님께 그런 간단한 것 하나 못해드리겠습니까? 마음 쓰시지 마 십시오. 어서 가시지요. 으응?" 다론이라 불린 그 청년은 집으로 가려다 말고 갑자기 멈춰섰다. 그러자 그것 에 의문을 느낀 스승이 말했다. "왜그러느냐?" "저... 보초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좀..." "혹시 네가 없다고 들어가서 모두들 자는 것은 아니고?" "보초를 철저히 서라고 지시해 놨습니다. 그리고 제가 시도때도없이 들락거리 기 때문에 보초를 안서는 간큰 짓거리를 할 부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침입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보자..." 그 노인은 가만가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런다음 시동어를 외쳤다. "뷰 마나 포스(view mana force)!"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그 노인의 눈에는 이 주변에 어떤 것이 마나를 띄고있는지 그 마나의 양에따라 특이한 영상이 되어 잠시 비쳤다. 마 나를 크게 가지고 있는 것은 빨간색으로, 마나를 가장 적게 가진 것은 보라색 으로... 일종의 적외선 안경을 끼고 사물을 보는것과 비슷한 영상이 잠시 그 노인의 눈에 비쳤고 그것으로 노인은 상대의 수와 힘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노인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고민이 생겨났다. "으음..." "왜그러십니까? 스승님." "네놈은 도대체 뭘 조사한 거냐? 얼마전에 들은 보고로는 위험한 추격자는 없 다고 하더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작스런 스승의 질책에 다론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옹색하게 대답했 다. "예? 저는 세심히 조사해 봤습니다. 혹시나 하고 조사해봤지만 코린트 제국에 서는 드래곤 하트가 없어졌는지도 모르고 있었구요. 그러니까 트루비아에서 추격대를 보냈다고 해도 뛰어난 기사는 아닐겁니다. 이번에 드래곤 하트를 훔 친 후에 트루비아 기사들 중 그래듀에이트급은 특별히 따로 동태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33명으로 줄어든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들 중에서 자리를 이탈 하고 있는사람은 단 5명. 그중 3명은 몬스터 토벌을 위해 변방에서 싸우고 있고... 또 하나는 사이가 나쁜 이웃나라 토리아 왕국과의 국경선을 순시한다 고 갔고 또 한명은 발트라 공국에 사신으로 간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러니 별볼일 없는 인물이라고...윽!" 그의 말이 끊긴 것은 갑자기 스승이 그의 정강이를 들고 찼기 때문이다. "전에 드래곤 하트를 훔쳐올 때 네녀석에게 검을 날렸다던 그 수상한 기사도 조사해 봤냐?" "예. 쭉 조사해봤지만... 아무래도 코린트에서 보낸 인물은 아닌 모양이었습 니다. 안그랬다면 코린트가 아직까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죠. 있다면 트루 비아의 기사인데... 방금 말씀드렸다 시피 그래듀에이트급은... 아윽!" 이제는 아예 있는 힘껏 정강이를 들고차버린 후 그 고통에 어쩔줄 모르는 제 자를 내려다보며 스승이 말했다. "멍청한 녀석! 그렇게 말했는데도 겉으로 드러난 것만 신경쓰다니..." 제자에게 일단 화풀이를 끝낸 스승은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이드 마나 포스(hide mama force;마나의 힘을 숨겨라!)!" 일단 주문에 의해 이쪽에서 일어나는 마나의 움직임을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 게 차단한 후 스승이 제자녀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잘 들어. 네놈도 뷰 마나 포스의 주문을 알고 있을테니 저 안을 봐라. 얼마 나 호화찬란한 인물들이 들어있는지 보란 말이다." 그러자 그 젊은이도 스승처럼 주문을 외워서 한번 내부를 살펴본 다음 얼이빠 진 표정이 되었다. "저 안에는 뛰어난 인물이 4명 있다. 둘은 그래듀에이트급에 조금 못미치는 인물이지만 나머지 둘은 그래듀에이트급을 오래전에 초월해버린 뛰어난 인물 들이지. 그중 하나는 정말이지 나도 저렇게 선명한 붉은빛을 띄는 인물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을 못하겠는데... 어쩌면 말로만 듣던 마스터급인지도 모른다. 저정도로 강력한 마나를 몸속에 가지고 있다니... 그리고 남색의 인물 둘... 하나는 조금 더 짙은 남색인 걸로 봐서 마법사다. 저정도 떼거리가 안에 있는 데 그들이 그냥 놀러왔다고 생각하냐?" 마법사는 몸안에 마나를 축적하는 것이 아닌 주위의 마나를 움직이는 하나의 통로 역할을 하는 존재기에 사물이 가진 마나의 양을 보여주는 뷰 마나 포스 라는 마법에는 마나가 많지 않은 것, 즉 남색으로 보인다. 그 외의 무생물인 마나가 없는, 또는 거의 없는 것들은 보라색으로 보인다. 여기서 팔시온의 경 우 마법과 검술을 함께 사용하기에 그의 몸은 마법사처럼 일종의 통로로서 발 전되어 마법사의 특징이 함께 나타나므로 오히려 평범한 사람에 가까운 색깔 로 내려갔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거론되지 않은 것이지 그의 검술실력은 미카 엘과 거의 유사한 수준이었다. 스승의 힐책에 제자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떠듬떠듬 말했다. "저... 저도 그게 어떻게 된건지..." 그러자 노 마법사는 제자에게서 눈을 떼고 무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칼리오!" "예." "혹시 문제가 벌어질지 모르니 자네가 앞에서 나를 좀 지켜주게." "예." 칼리오라 불린 무사가 앞에 브로드 소드를 빼들고 앞에 서자 그 노인은 주문 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의 주변에는 넓은 마법진이 하나 만들어졌 다. 이런식으로 주문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이동 마법진은 위에서 사람이 뛰고 구른다고 지워지는게 아니다. 또 마법진을 만들면 그것을 만드는 시간은 조금 많이 들이만 직접 공간이동 마법주문을 외울때와는 달리 그 시동어를 외치기 전까지 마법진 자체가 가지는 마나로 저절로 유지된다는 장점을 안고 있었다. 그 노인은그마법진을 통해 이동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과 자신이 데리고 온 두명을 명확히 지정해 놓은 후 그다음에 또다른 주문을 외우기 시작해서 두가지 마법을 그 무사의 무구(武具)에 걸었다. 그러자 무사의 브로드 소드는 옅은 무지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그의 갑옷역시 그런 빛을 띄었다. 일단 앞에서 지키는 기사에게 방어마법을 걸어준 후 노마법사는 또다시 주문 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만일을 대비한 모두를 위한 주문이었다. "매직 파워풀 실드(magic powerful shield;강력한 마법 방어막)" 매직 파워풀 실드는 마법 방어막 중에서도 최상급에 들어가는 마법이었다. 그 런데 그런 것 까지 치는 걸 본 제자가 약간은 놀란 듯이 물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만약을 대비해서다. 방어마법은 확실히 걸어놨으니 이제 저 집과 함께 저 안 에있는 놈들을 박살낸 후에 탈출한다. 너는 최고로 강한 공격마법 주문을 외 워라." "예." 그의 제자가 나름대로 자신이 익힌 최강의 주문을 외우고 있을 때 노 마법사 도 또한 흑마술 최강의 주문을 외우기 위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을 살린다는 명제하여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 자신의 국가가 예전처럼 위대해진다면 자신의 영혼이 어떤 댓가를 치르던 그건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계약을 맺은 악마는 어둠의 마왕 크로네티오... 악마 라는 존재들은 보통의 신들과 달리 상하관계가 뚜렷하다. 그렇기에 강대한 악 마를 불러내어 계약을 맺을수록 흑마술의 파괴력이나, 또 사용할 수 있는 흑 마법의 가짓수는 늘어난다. 대신 한가지 결점이 있다면 상대가 자신이 계약한 악마보다 더 뛰어난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경우 자신의 공격이 별 소용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지만어둠의 마왕은 악마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마신... 그는 악마의 힘을 믿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마법주문을 외우기 시작했 다. 누가 뭐래도 상대는 마스터급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을 때 그 집의 문이 열리면서 다크가 걸어나왔 다. 다크는 뭔가 멀찍이서 기가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고는 무슨일인가 싶어서 나온 것이었다. 사실 기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면 다크도 동태만 살펴보며 그냥 있었을텐데... 그 기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는게 더 큰 문제였다. 중 원에 있을때도 느낀거지만 위험한 인물일수록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데는 일가 견이 있는 법. 그 때문에 산책삼아 밖으로 나와본 것이었다. 어쨋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신이 가진 모든 실력을 동원하여 주문을 다 외 운 제자는 자신들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있는 어떤 인물이 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녀석과의 거리는 400미터정도... 그는 주문의 힘을 유지하면서 스 승을 살짝 쳐다봤다. 스승도 방금 전에 주문을 완성해놓은 후, 그제서야 다가 오는 인물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네가 저녀석에게 주문을 날려라." 흑마법은 온 정신을 집중하여 마나를 끌어모으는 작업이 선행되는게 아니기에 스승의 표정은 주문을 외우기 전과 같았다. 하지만 흑마법은 그 마법을 펼치 면서 엄청난 힘이 들어간다. 어쨋든 마법이란게 위력이 강할수록 힘이 많이 소모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 힘이 언제 투입되느냐의 미소한 차이만 존재 할 뿐... 어쨋든 제자는 스승의 말대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자를 향해 자신이 모아 놓은 힘을 개방하며 시동어를 외쳤다. "익스플로우젼(explosion;폭발)!"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는 붉은 빛의 파동이 상대를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 시에 상대는 그들쪽으로 몸을 튕기듯 날아오르며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고 그 검에서는 푸르스름한 선들이 뻗어나왔다. 그걸 보면 상대는 확실한 소드 마스 터... 검술의 극한을 깨닳은 자. 검에서 뿜어나오는 무형의 기운을 유형의 기 운으로 승화시킨 자.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이었다. 꽈꽝! 두 개의 기운이 맞부ㄷ치며 엄청난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노 마법 사는 그 엄청난 폭발속을 뚫고 튀어나오고 있는 상대를 보고 전율을 느꼈다. 5싸이클급 최강의 파괴주문으로도 놈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한 것이다. 그걸 알아채자 노 마법사는 그 인간같지도 않은 놈을 향해 곧장 흑마법의 힘을 개 방했다. "프레임 오브 루인(flame of ruin;파멸의 불꽃)"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는 어둠의 기운이 앞에서 달려들어오고 있는 상대를 향해 뿜어졌다. 그와 동시에 일어난 무시무시한 대폭발... 거의 150미터도 안 되는 지근거리에서 대폭발이 벌어졌지만 그 폭발의 화염은 마법사 일행을 덮 치지 못했다. 노마법사가 노파심에 혹시나 하고 걸어뒀던 매직 파워풀 실드에 막혀 그 암흑의 기운이 들어오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노마법사는 그걸 감 상할 시간여유도 없었다. 재빨리 적이 죽었는지 확인할 여유도, 시간도 없이 곧장 공간이동을 위해 설치한 마법진을 움직이는 시동어를 외쳤다. 이제 자신 이 할 수 있는 짓은 다 했으므로 재빨리 탈출하는 것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만약 놈이 살아있다면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었다. "이동!" 곧이어 그들은 약간의 빛을 살짝 뿜더니 곧장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시드미안 경 일행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마 내일이나 모래쯤 이곳에서 발견한 마법책들을 회수해 갈사람들이 올 것이다. 그들에게 이것들 을 준 후 또다시 추격에 나서면 되는데... 또 어떤 위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시간이 있을 때 최대한 휴식을 취하는게 최고였다. 이때 갑자기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고 붉은 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며 대낮처 럼 실내를 밝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시드미안 경과 팔시온이 자리에서 뛰 어 일어서며 옆에 놔뒀던 검이나 허리에 차고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 순간 일어난 두 번째의 폭발... 순식간에 폭풍이 일어나며 한쪽 벽면에 위치한 유리창들이 다 박살나버렸고 일부 약한 벽까지 폭발하듯 무너져버렸다. 그걸 보고 놀란 라나는 비명을 지 르며 기절해서 넘어졌고 시드미안 경이나 팔시온, 미카엘, 스미온은 검을 뽑 아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남은 지미와 라빈, 미디아는 마법사들을 보호했고 마법사들은 즉시 공격마법 주문을, 또 로니에 사제는 신성마법 중에 서 방어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밖으로 뛰어나온 일행들은 한 800미터는 떨어진 지점에 엄청난 구덩이가 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글세요. 일단 가보기로 하죠." 모두들 최대한 몸을 사리면서 그쪽으로 서서히 접근해 들어갔다. 엄청나게 큰 구덩이에는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을 뿐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그 들이 그쪽에 다가갔을 때 거대한 구덩이 옆에 다 찢어진 옷을 입고 심한 상처 를 입은채 뻗어있는 다크를 볼 수 있었다. 팔시온은 즉시 다크에게 다가가 흔 들어봤다. "이봐, 다크..." 하지만 다크의 움직임은 없었다. 팔시온은 다크의 경동맥(頸動脈;목에 있는 머리로 혈액을 공급하는 동맥)에 손을 대본 후 말했다. "아직 살아있습니다. 이봐, 미카엘, 스미온, 둘다 근처를 좀 수색해봐. 뭔가 이상한 놈들이 있는지." "알겠어." 미카엘과 스미온이 검을 들고 어둠속으로 사라지자 팔시온은 다크를 안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팔시온과 시드미안 경이 도착했을 때 남은 일행들은 아직도 긴장을 풀지 않고 공격 및 방어준비를 갖추고는 기다리고 있었다. 팔시온은 그들 중 로니 에 사제를 보고 외쳤다. 역시 치료에 있어서는 신관을 따라갈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크가 다쳤습니다. 빨리 치료좀 해주세요." 로니에 사제는 급히 팔시온 쪽으로 다가왔고 나머지 인물들은 아직도 주위를 향해 의심스런 눈초리를 던지고 있을 때 마법사들은 서로 의논을 약간 하더니 둘다 웅얼거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조금 일찍 주문을 완성한 안토니가 외쳤다. "뷰 매직 포스!" 그 상태로 안토니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자신도 주문을 완성한 가스톤 도 시동어를 외쳤다. "뷰 마나 포스!" 둘은 한참 주위를 살펴보더니 안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위에 보이는 마법의 기운은 없어." "저쪽과 저쪽에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혹시 밖에 나간 사람 있어?" 가스톤의 물음에 대한 팔시온의 대답. "미카엘하고 스미온이 수색중이야. 그 둘 뿐이라면 놈들은 공격후에 재빨리 도망간 모양이군. 쥐새끼같은 놈들..." 팔시온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로니에 칸타로와 사제의 손에서 는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는 그 손을 다크의 몸에 올리고는 치 료를 시작했다. * * * 노 마법사는 일단 안정권 밖으로 벗어났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다. 파멸의 불꽃 까지 날려야 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를 만날줄은 생각도 못해보고 있었다. 노 마법사가 뭔가 생각에 열중한 듯 거의 무의식적인 걸음걸이로 왕궁의 한쪽 구 석에 있는 이동마법진에서 걸어서 자신이 기거하는 쪽으로 걸어가자 그 뒤를 따라오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그놈이 죽었을까요?" 하지만 아직도 정신 못차리는 그의 스승. 제자는 좀 더 큰 소리로 물었다. "스승님, 그놈은 죽었을까요?" "으응? 아마도 죽었을거다. 비록 내 실력이 모자라서 '파멸의 불꽃'이 완전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정도 위력이라면 지아무리 마스터급이라도 아마 살아남기 힘들지도 모르지. 어쨋든 며칠 후에 놈들이 있는 곳을 다시 한번 살 펴보고 와라." "예." "대지의 기억에 물어서 놈들의 정확한 신상을 파악해야 한다. 어쩌면 그녀석 은 코린트가 가진 세명의 소드 마스터들 중 한명일거야. 본국이 중흥의 깃발 을 올리는데 최고의 장애물이다. 철저히 조사해서 나한테 돌아오는 즉시 보고 해라. 알겠냐?" "예." 제자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는 걸 멍하니 보면서 스승은 중얼거렸다. "코린트가 이번 일을 눈치채지 말아야 할텐데... 만약에 그놈이 코린트에서 보낸 자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나... 미래를 관장하는 신이시여... 제발 크라레스를 버리지 말고 지켜주십시오..." * * * 방에서 로니에 사제 땀을 훔치며 나오는 걸 보고는 팔시온이 급히 물었다. "어떻습니까?" "흐음... 샤이하드님의 가호로 위험한 지경은 넘은 것 같아요. 어쨋든 상당히 심한 상처를 입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그런 대폭발이 벌어진거죠?"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마법사들에게로 돌아갔다. 일부 화학약품들을 넣어 폭발을 일으킬수도 있지만 사실상 이 세계는 마법이 너무 발달하는 통에 과학의 발전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과학은 일종의 마법의 시녀라고 할까? 과 거 화약이란 물질이 개발되기도 했지만 마법사가 한방 날리는 것보다도 파괴 력이 떨어지니 자연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아무리 과학적 기술 로 뛰어난 병기를 만들어 냈다손 치더라도 무적의 병기 타이탄에 비교하면 형 편없었기에, 이 시대의 과학은 최강의 마법병기 타이탄의 파괴력에 가려 빛을 잃고 있었다. 어쨋든 의문은 제기된 상태고 가스톤은 아직 별볼일 없는 수련 마법사라서 일행의 의문을 해결해줄 수 없었기에 그도 또한 자신보다 더 뛰어 난 마법사를 처다볼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안토니가 약간은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험... 내가 보기로 이번에 사용된 마법은 두가지에요. 하나는 익스플로우젼, 또 하나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폭발과 함께 느껴진 암흑의 기운... 흑마법 입니다." "흑마법이라구요?" 흑마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또 그걸 익힌 자들은 모두 악당이라 는게 정설이었다. 이게 왜 정설로 굳어졌나 하면 옛날 용사 이야기에도 있지 않은가? 용사가 무찌르는 대상은 사악한 흑마법사, 못된 드래곤, 마신 등이었 다. 하지만 드래곤이나 마신을 악역으로 만들어 놓으면 영 주인공이 이길 가 능성이 없어지게 되므로 주로 즐겨 사용되는 악당 캐릭터로 등장하는 인물이 마신에게 영혼을 팔아 막강한 힘을 손에 넣은 사악한 흑마법사였다. 그렇기에 그게 사실이라면 전설이 아닌 실지로 사악한 흑마법사와 전쟁을 벌이는 용사 가 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이따위 생각을 하면서 눈빛이 초롱초롱해져서 지미와 라빈이 묻자 안토니가 심드렁 하게 말했다. "그래. 흑마법이야. 그것도 대단한 수준의... 어쩌면 그 엄청난 위력을 봤을 때 대마도사일지도... 800미터에서 일어난 폭발의 여력에 집이 반쯤 박살났을 정도니까 말이지. 어쨋든 상대는 두명 이상이에요. 마법에 의한 폭발은 두 번 있었죠. 익스플로우젼은 5싸이클급의 파괴마법이니까 아마도 적은 둘다 최소 한 마법사 또는 마도사 클라스라고 봐야겠지요." 순수 백마술만을 쓰는 사람은 마법사, 그 외의 흑마법, 정령마법 등 두 가지 를 함께 익힌 자들을 마도사라고 부른다. "어쨋든 자세한 것은 날이 밝는데로 녀석들이 있었던 곳을 찾아가서 대지의 기억에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요. 이만 밤도 늦었으니 쉬고 내일 좀 더 정보 가 모이면 의논을 해보기로 하지요."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일행들은 모두 모여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어쨋든 상대 방에 엄청난 실력의 마도사가 있는 이상 마음편히 추격하기는 애시당초 그른 노릇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쨋든 상대방의 힘이 상상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 안토니, 뭔 가 알아낸게 있으면 좀 말해주게." 시드미안 경이 말하자 안토니 크로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팔시온과 함께 쭉 둘러보고는 놈들의 발자국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어떤 자들인지 알아보기 위해 리멤버런스 오브 더 어스(remembrance of the earth;대지의 기억)란 마법으로 그 위에 서있었던 인물들이 어떤 자들인지 조 사했습니다. 그때 공격한 인물들은 세명이더군요. 그들을 한번 보시겠습니 까?" "그러지. 보여주게." 안토니 크로와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미지(image)!" 그러자 안토니의 머리에 들어있던 기억이 자그마한 영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 고 곧이어 그들의 앞에는 자그마한 사람의 모습 세 개가 나타났다. "바로 이들입니다. 대지에 기억된 그들의 능력을 측정해 보면 이쪽의 중무장 을 한 무사는 그래듀에이트급입니다. 그리고 저쪽에 있는 둘은 마법사죠. 보 나마나 저 노인이 어제 흑마술을 구사한 마도사라고 생각됩니다." "흐음..." "혹시 이중에서 알고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러자 팔시온이 곧장 대답했다. "저기있는 젊은 마법사는 그때 라나를 납치했던 녀석이에요. 그녀석이 틀림 없어요.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인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4에서 5싸이클 정도? 어쨋든 가스톤보다는 훨씬 윗줄의 마법사였으니까 말입니다." 팔시온의 말을 안토니가 약간 수정해서 말했다. "5싸이클이 맞을 겁니다. 어제 첫 번째 폭발을 일으킨 마법은 5싸이클 주문인 '익스플로우젼'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젊은쪽이 5싸이클급 마법사, 저 노인 이최소한 6싸이클급의 마도사일겁니다." 6싸이클이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들 약간 찔끔 했다. 전 세계를 통털어도 6싸 이클급의 마법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보통 어떤 나라에 가도 6싸이클급의 마법사들이 궁정제1마법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주 강대한 마법을 자랑하는 코린트나 마도왕국 알카사스 등 몇몇 나라만이 7싸이클급의 대마법사를 가지고 있었고 전세계를 통털어 7싸이클은 5명도 되지 않았다. 그 만큼 마법이란 것은 배우기가 힘들었고 보통 사람이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뼈빠지게 평생을 수련하면 올라갈 수 있는 경지로 6싸이클을 꼽고있을 정도였 다. 그런데 적이 6싸이클의 마법을 구사하는 놈이라니... 모두들 침묵에 빠지자 시드미안 경이 살며시 말문을 열었다. "안토니의 추측이 정확하다면 그들은 또 한명의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를 보유 하고 있다는 말이군. 이렇게 되면 전에 죽은 녀석까지 그래듀에이트 두명, 마 도사 1명, 마법사 한명인가? 어쨋든 이번 여행을 하면서 그래듀에이트급을 많 이도 보는군. 요즘은 그래듀에이트급을 키우는 학교라도 있는 모양이지? 제기 랄! 국가급의 단체가 후원하지 않는 한그정도 고급인재를 가질수는 없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갑작스런 미디아의 말에 시드미안 경이 움찔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미디아 양? 기사 둘을 국가가 아닌 단체에서 모으기 는 하늘에 별따기 보다 어려워요." "그렇다면 지금 저희 파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팔시온이나 미카엘 같은 경 우 거의 그래듀에이트급은 안되기지만 그에 가까운 능력정도는 되죠." 그러자 시드미안 경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미디아 양. 말하는 도중에 가로막아서 미안하지만 그래듀에이트급과 그에 근 접한 것과는 천지 차이요. 내가 정확히 설명을 해주겠소. 진짜 그래듀에이트 자격을 통과한 인물이라면 팔시온과 미카엘 같은 사람 다섯명이 한꺼번에 덤 벼도 적수가 될 수 없소. 그만큼 서로간의 실력차는 상당한거요." 사실 미디아의 경우 그 귀한 그래듀에이트급에 들어가는 인물들이 싸우는 모 습을 실질적으로 본 적은 없었다. 전에 그런 인물과 다크가 싸우기는 했지만 워낙 순간적으로 상대가 허무하게 부숴져버린 관계로 그 실력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좋아요. 그럼 그래듀에이트급은 안되지만 그에 준하는 실력이 두명, 그리고 수련기사 두명, 그리고 수련마법사 1명, 그리고..." 시드미안 경은 미소를 지으며 다음말을 자신이 이어줬다. "거기에 여자 용병 1명. 그정도 전력을 지닌 파티(party;동아리)는 아주 많아 요." "아니에요. 시드미안 경께서는 여기에 빠져있다고 한사람을 빼ㅆ어요." "아. 참. 다크 말인가? 모험가 1명 더 보탠다고 해서... 하기야 그의 실력은 좀 수상한 점이 많아. 그래듀에이트급을 처치했다면 최소한 그 이상은 된다는 말이겠지. 어제 일어났던 그 폭발에서도 살아남았고... 어쨋든 모든 것은 다 크가 정신을 차린다음에야 알 수 있겠군." 시드미안 경이 약간 더듬거리자 미디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반격했다. "그렇죠? 어쨋든 다크의 실력은 최소한 그래듀에이트... 그정도 실력자를 보 유한 파티는 거의 없을걸요?" 하지만 시드미안 경에게는 아직도 반격의 여지는 있었다. "흐음... 그렇게 볼수도 있겠군. 하지만 다크처럼 어쩌다 한명이라면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놈들은 벌써 50여명의 병사들과 그래듀에이트급 두명에 궁 정마도사급 1명을 가지고 있어. 그 외에 또 얼마나 더 가지고 있는지는 알수 가 없지. 어쨋든 대단히 힘든 모험이 될 수밖에 없을거야. 어쨋든 지금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상대의 힘은 거의 국가에서 후원하는 정도 수준이 지. 당신들은 이 상태에서도 같이 모험을 할건가?" 모두들 서로간의 눈치를 조금씩 보는 것 같았지만 곧이어 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설혹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정도 모험은 평생가도 한번 하 기힘들 정도일 것이다. 어쩌면 악당인 흑마술사를 헤치운 용사 파티로서 살아 있는 전설이 될지도 모르는데... 모두들 계속 추격에 가담할 뜻을 밝히자 시드미안은 팔시온에게 물었다. 팔시 온이 안토니를 따라나간 이유는 안토니의 보호도 있었지만 흔적의 발견이란 목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다 참가하겠다니, 정말 고맙소. 그건 그렇고 팔시온, 뭔가 알아낸 것이 있나요?" "예. 가까스로 희미한 흔적을 찾아냈어요. 그 흑색갑옷을 입은 놈을 얼핏 봤 다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리고 그 회색갑옷을 입은 패거리도... 갈로시아 방 향에서 오더라고 하더군요. "좋아. 그럼 성에서 병사들이 오면 여기 일을 맡기고 떠나기로 하지. 로니에 사제님. 그때까지 다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지요." 그 후에 집중적으로 행해진 치료마법 덕분에 다크는 몇시간 후에는 깨어날 수 있었다. 다크는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깨어났다. 사실 아무리 중원천지 에서도 그정도 파괴력이 있는 무공에 격중되어 본적이 거의 없었기에 첫 번째 익스프로우젼을 간단히 파괴한 후 뛰어들어가다가 상대의 흑마법을 뒤늦게 눈 치챘고 그걸 호신강기와 거의 본능적으로 펼쳐진 무상검법의 방, 망강 정도로 때웠기에 제대로 된 방어가 힘들었었다. 그 때문에 큰 상처를 입은 것이었지 만... 일단 자신이 깨어나자 사방에서 모두들 원숭이 구경하듯 바라보고 있는 걸 보 고는 먼저 짜증이 밀려왔다. 얼마나 할짓이 없으면 누워있는 사람 주위에 쭉 늘어서 있겠는가 말이다. "으으응... 쭉 둘러서서 뭐하는 짓이야?" "아.. 이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군. 어쨋든 큰일 날뻔 했네. 이제 깨어났으니 어제 상황을 좀 설명해 주지 않겠나?" 일순간 다크는 망설였다. 자신의 강대한 힘을 딴 인물들에게 알리고 싶은 생 각은 없었다. 거기에 저들이 물어보는 걸 보니 어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고있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고... 또 자신이 상대를 얕잡아보고 사소한 실수를 해서 상대의 공격을 그대로 맞았다고 실토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을 하 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크는 알짜배기는 빼고 그냥 두리뭉실하게 설명을 하기 로 했다. "어떻게 된거냐 하면... 어제 밖에 산책을 하는데 조금 앞쪽에서 대폭발이 일 어났지. 그 다음에는 기억에 없어." 그런 후 다크는 돌아누워버렸고 그 외의 잔줄기는 각자가 상상해서 메꿀 수밖 에 없었다. 일행이 만들어낸 줄거리는 이렇다. 다크가 산책을 나갔다. 그래서 쭉 가는 방향에 어쩌면 상대방이 공격준비를 하기위해 모여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자 마법을 날렸 다. 하지만 운 좋게? 으음... 이 다음부터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정도 마 법을 구사했다면 그걸 명중시킬 실력도 가지고 있을텐데... 그래서 모두들 좀 더 닥달하자 답이 나왔다. 다크 왈(曰)... "첫 번째는 막았고 두 번째는 맞았다. 그런다음 이모양이지. 더 묻지마. 귀찮 다구." 그렇다면 첫 번째 날아온 익스프로우젼은 간신히 막았고 아마 근처에서 폭발 하는 그 충격 때문에 두 번째 마법은 실수로 조준이 빗나가서 그 앞에 맞았 다. 그래서 저모양이 되었다.흐음... 말이 되는군... 만약 이게 줄거리라고 가정한다면 다크는 익스프로우젼을 막았다는 말이 된 다. 그렇다면 '5싸이클급의 마법을 막았다면 어느정도 실력이어야 할까?'하는 의문이 일어나게 된다. 일행의 의문은 당연했고 그 답은 안토니가 내려줬다. "익스프로우젼을 막았다면 아마도... 시드미안 경과 동급 정도라고 생각하면 맞을걸... 그래듀에이트급은 상회한다고 봐야지." 어쨋든 모두들 그러려니 하고는 출발준비를 하고있다가 다음날 점심때쯤 병사 들을 이끌고 도착한 기사에게 마법책을 성으로 옮기는 작업을지시한 후 출발 할 수 있었다. * * * 성내였기에 마법사들의 정장인 로브를 입은 토지에르 경은 거대한 건물 안으 로 들어섰다. 어쨋든 사라진 드래곤 하트를 찾겠답시고 오고있는 놈들이 무시 못할 정도로 강한 전력을 갖춘 놈들이라는 것이 예상을 벗어났을 뿐...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잘 되어가고 있었기에 그의 기분은 별로 나쁘지만은 않았 다. 건물 안에는 수많은 기술자들이 매달려서 작업한다고 매우 바빴고 일부 기술 자들은 엑스시온을 완성한다고 달라붙어서는 마무리 작업이 한참이었다. 토지 에르 경은 그 기술자들 중의 한명에게 다가가서는 말을 건넸다. "어떻게 되어가나?" 그러자 상대는 한참 바쁘게 일하느라 자신의 뒤에 누가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 다가 뒤를 돌아본 후 재빨리 일어서서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오십시오. 토지에르 경. 일은 순조롭게 되어 갑시다." "엑스시온들 안에 드래곤 하트는 아직 넣지 않았나?" "예. 내일 봉인작업이 시작될 겁니다." "지금 전 세계에 남아있는 드래곤 하트는 몇 개 되지도 않으니까 아주 조심해 서 다루게." 토지에르의 말에 상대는 아주 공손하게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프로이에 경께서 그걸 정확한 크기로 잘라 주셨습니다." "몇개나 만들어졌나?" "예. 다행이 이번에 가져온 드래곤 하트는 많은 마나를 간직하고 있기에 9개 를 만들 수 있었지요. 조금남았는데 가져가시겠습니까?" "나중에 내 방에 보내주게." "예. 다행히도 모두 다 준비되었으니 더 이상 드래곤 하트를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흠... 그럼 전에 가지고 있던 것 까지 12개군." "예." "그럼 내일 봉인작업을 구경하러 오지." "안녕히 가십시오. 토지에르 경." 토지에르는 천천히 건물의 문으로 걸어가며 흥겨운 듯 괴소를 흘리기 시작했 다. "흐흐흐... 대마법사 안피로스의 던젼을 발굴한 것은 정말이지 큰 수확이었 어. 그가 만년(晩年)에 개발한 '엑스시온'.... 이것만 완성되면 이 엑스시온 을 심장으로 12대의 블루 나이트(blue knight;청기사)가 움직일 수 있게 된 다. 그러면 폐하와 모든 국민들의 소망인 코린트놈들에게 복수하는 것도 꿈은 아니지. 흐흐흐..." 그가 지나가고 있는 통로의 좌우에는 한쪽에 6대씩... 12대의 높이 6m정도의 거대한 강철로 만든 사람모양의 형상들이 서 있었고 그것들에는 수많은 기술 자들이 달라붙어서 여러 가지 손질을 한다고 여념이 없었다. * * * 갈로시아로 가는 길에 모두들 약간은 들뜬듯한 표정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자 마음속에 사악한 악마의 앞잡이인 무서운 마도사와의 영웅적인 전투를 그리느라 제각기 바빴기 때문이다. 극악무도한 흑마법사와의 멋있는 대결... 몇몇 경험있는 인물들은 그 마도사와 싸우려면 어느정도 힘들 지를 고심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질 것은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멋진 일격에 최후, 최강의 주문을 외우다가 채 외우지도 못하고 쓰러지는 마도사... 그러면서 '으윽! 세계가 조금 있으면 내 손안에 있을 뻔 했는데...' 어쩌구 하는 상투적인 말도 내뱉지 않을까? 원래 악당들은 다 그 러니까... 원래 이따위 영웅 이야기들이 순진한 청년들을 버려놓는 결과가 되기도 하지 만... 뭐 어쨋든 여태껏 있어왔던 수많은 영웅들의 대부분이 청년들이었던 이 유는 아마도 죽을동 살동 모르고 덤비다가 요행이 운이 좋아서 성공했기 때문 이 아닐까? 하지만 그 한명의 영웅이 만들어지기 위해 같은 목표를 세웠던 얼 마나 많은 파티들이 도중에 허무하게 전멸했는지까지 말해주는 전설은 없었 다. 사실 그것까지 알려주면 거기 도전할 골빈 놈들은 없을게 뻔하기에 그 부 분은 전해 내려오면서 심의삭제를 가한 것이었다. 사실 강력한 조직을 갖춘 악당을 없애는데 극소수로 이뤄진 파티로 승리하려면 그 가능성은 소숫점 이 하로 떨어진다. 개개인의 실력에도 약간은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대략 성공 률을 냉정히 따져보면 최고로 보면 1%에서 작게 보면 0.00000000000001%정도 되려나? 어쨋든 막상 부딪치면 '정의가 승리한다.'하는 말도 안되는 믿음을 가지고 있 는 일행들은 빨리 놈들을 찾을 수 있기만을 간절히 빌고 있었다. 사실 빨리 만나면 누가 먼저 저세상 갈지는 거의 정해진 수순이었지만... 딴 인물들은 달콤한 꿈을 꾸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다크가 조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중원으로 돌아가는 것.... 사실상 묵향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그것 뿐이었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낮선 이곳에서 살다가 뼈를 묻기는 싫었다. 벌 써 이곳에 온지도 2년이 넘었고, 세월이 약이라고 자신과 피터지게 싸웠던 인 물들의 얼굴을 보면 아마 반가움에 끌어안고 뽀뽀라도 하고싶어질 거라는 생 각까지도 하고있는 판이었던 것이다. 자신과 같이 치사한... 아니군 격조높게... 비열한 장인걸, 배신자 한중평, 거기에 함께 동조해서 까불어댄 옥청학, 이 알수도 없는 세계로 보낸 얼굴도 모르는 못된 놈들... 그들 중에서 과거 자신의 가장 큰 원수였던 한중평이나 옥청학은 장인걸에 의해 제거되었고, 또 장인걸은 서로가 교주자리를 놓고 다 투고 있을 뿐 그렇게 직접적으로 원수진 일은 없다고... 아니지, 장인걸 녀석 이 배후조종을 했으니 가장 못된놈은 장인걸인데... 어쨋든 세월이 지날수록 기분 나빴던 일은 서서히 잊혀지고 과거 살아왔고, 싸우고, 죽였던 고향에 대 한 그리움만이 가중되고 있을 뿐이었다. 오죽하면 장인걸이 보고싶겠냐구.... 어쨋든 모두들 각자의 생각으로 바빠서 대화도 없이 길을 가는데 갑자기 분위 기를 깨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미카엘'이라 불리는 망나니 무예 수련자로서 아마도 나이가 있는 만큼 꿈에서 빨리 깼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이때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미카엘이 소리치자 팔시온이 시큰둥한 어조로 답 했다. "뭐냐?" 하지만 상대가 어떻게 나오던 간에 신경쓰지 않고 미카엘이 약간 겁먹은 어조 로 말했다. "상대방의 배후에는 어쩌면 국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드미안 경이 말했 지?" "그랬지." "그렇다면 어쩌면... 놈들이 타이탄(titan)을 동원한다면 어쩔거야?" 그러자 다크를 제외한 모두의 안색이 하얗게 바뀌어 버렸다. 아무도 그까지는 생각을 못해봤던 것이다. 사실 놈이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시대 최 강의 마법병기 타이탄을 안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타이탄이이 세상에 만들어진 후부터 마법사는 일거에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았던가? 팔시온은 시드미안 경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에 대한 대비책은 있습니까?" 시드미안 경은 모두에게 안심하라는 듯 자신감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 타이탄인 '쿠마'가 있지.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러자 마법사 둘을 제외한 모두는 사방을 기웃거리면서 말했다. "어? 타이탄이 어디있어요? 있다면 벌써 봤을텐데..." 그러자 시드미안 경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타이탄은 들고다닐 필요가 없어. 자신과 관계를 맺은 주인이 부르면 공간의 틈새에 숨어있다가 이쪽 공간으로 이동해 온다네. 쿠마는 바로 옆에 있지만 서로간의 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쿠마의 모습을 볼수가 없을 뿐, 내가 소환하 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좋아. 동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불러주지." 그와 동시에 한쪽 공간이 갈라지면서 거대한 덩치의 금속 인간이 튀어나왔다. 그 타이탄은 길이 3m는 됨직한 거대한 검을 들고있었고 한쪽 손에는 엄청나게 큰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 방패에는 트란 근위기사단을 뜻한는 쌍두사자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고 타이탄의 곳곳에도 여러가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정말 엄청나게 크군요..." 거의 5미터 크기의 금속인형... 두터운 갑주를 걸친 무사의 형상을 한 타이탄 은 사람을 압도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이게 뭐죠?" 다크의 질문에 팔시온이 타이탄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대답해줬다. "이 시대 최강의 마법병기(魔法兵器) 타이탄(titan)이야. 나도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구." "병기라면... 그럼 저게 움직인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세상에..." 다크는 새삼스레 그 거대한 강철로 된 거인을 쳐다봤다. 저게 움직인다면 정 말 대단하리라... 시드미안 경은 모두가 얼이빠져서 타이탄을 보고 있을 때 차분히 설명을 시작 했다. "저녀석이 쿠마야. 트루비아에 있는 8대 뿐인 타이탄들 중의 한 대지. 이제 안심이 되나?" 그러자 팔시온이 시드미안경을 향해 약간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상대가 더 많은 타이탄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되나요?" "그때는 내가 막고있는 동안에 도망치는 길밖에 도리가 없지. 아무리 인간이 강하다고 해도 타이탄에는 상대가 안되니까... 어쨋든 타이탄을 부술 수 있는 건 타이탄 뿐이니까 말이야. 이제 돌아가라." 시드미안 경이 말한 다음에 곧이어 타이탄은 공간이 갈라지며 그 모습을 감추 고 말았다. "아마도 쿠마 한 대만 해도 충분할 거야. 보통 어지간한 국가도 400대 이상의 타이탄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 국가 자체라면 몰라도 그들이 후원하는 단체에 타이탄을 여러대나 줄 수 있을까? 10대도 안가지고 있는 나 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자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일행은 또다시 보이지 않는 적을 찾아 출발했다. 어쨋든 이 최강의 파티에는 타이탄까지 있으니 허무하게 전멸당하지는 않을거 라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다. 다크는 안토니 크로와에게 도대체 저 타이탄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안토니, 저 타이탄이란 건 어떻게 움직이는 거에요?" "마법으로 움직이지." "마법으로요?" "응. 과거 마법시대에 번창했던 마법중에 고렘(golem)을 만드는 많은 방법들 이 연구되었지. 참 고렘이란 건 사람형상을 하고 움직이기는 하지만 나무나 돌따위로 만들어진 거야. 나무, 돌, 철 등 뭐든지 고렘을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있어." 도대체가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의 다크... 사실 혈교와의 전쟁에서 시체에 특 별한 처리를 가해 만들어낸 강시( 屍)는 봤지만 쇠나 돌덩어리가 걸어 다니 는 건 본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그냥 돌이나 쇳덩어리가 사람처럼 움직인다는 말이에요?" "응" "그렇다면 그게 왜 움직여요? 돌이 움직이는 건 본적도 없는데..." "일종의 부적마법 같은거지. 과거 초기에 고렘을 움직이던 동력은 부적이었 어. 하지만 나무나 돌덩어리같은 경우 부적을 넣기 쉽지만 쇳덩어리 안에 부 적을 집어넣기는 힘들거든. 그래서 마법사들은 철의 고렘을 만들려고 강철덩 어리의 사람 형상에 넣기 위해, 주문과 강력한 마법을 새겨넣은 '가고레'라는 걸 만들어냈지. 가고레는 고렘의 주인이 보내오는 마나를 증폭하여 그걸 강철 골렘의 곳곳으로 보내 엄청난 힘과속도를 낼 수 있게 해줬지." "대단하군요." "흠... 마법의 힘은 대단한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움직이는 심장이 가고 레로 바뀌었지만 골렘을 움직이는 명령체계는 변함이 없었어. 자신을 만든... 또는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한 시전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는 데 크류이오라는 대마법사가 시전자가 외부에서 조종하는 것 보다는 내부에 들어가서 조종하는 편이 훨씬 시전자에게 안전하다는 점을 생각해 냈지. 사실 마법사는 기사에 비해 너무나도 형편없는 격투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생각해 낸 방법이었지만 말이야." "그래서요?" "그래서는... 그래서 만들어진, 사람이 안에 탑승할 수 있게 만들어진 고렘을 고렘이라 부르지 않고 타이탄(titan)이라고 불렀지. 그 크기는 보통 5미터 정 도... 더 크게 만들수도 있지만 사실 덩치가 커지면 가고레에서 만들어내는 마력(魔力)만으로는 속도가 너무 느려져서 쓸모없어진다구. 타이탄은 겉에는 대마법주문(對魔法呪文)을 새겨놨고 그 주문은 타이탄의 마력에 의해 발동되 기에 왠만한 공격마법에는 끄떡도 없어. 오로지 타이탄에는 타이탄으로... 이 게 정석이지. 그때는 타이탄의 속도가 느렸기에 그래듀에이트급의 무술실력을 가진 인물이라면 어느정도 대적할 수도 있었지만... 그정도 경지에 올라간 인 물들은 거의 없었으니까..." "흐음..." "하지만 지크로라는 대마법사가 또다시 그걸 변화시켰지. 타이탄은 내부에 타 고있는 사람의 지시에 의해, 그 사람의 능력에 맞는 힘을 구사하지. 타이탄의 심장인 가고레에 힘을 공급하는 건 누구도 아닌 거기에 타고있는 마법사니까. 하지만 주문을 외워야만 마나를 움직일 수 있는 마법사보다 직접적으로 마나 를 제어하여 빠른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급 기사가 타는게 더 효 과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낸게 그사람이야. 그 실험은 성공적이었지. 하지만 공급하는 마나의 량에 있어서 마법사보다 형편없는 탑승자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고레를 뜯어고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더욱더 복잡한 수많 은 기법들이 동원되었고 그렇게 탄생한게 엑스시온이야." "엑스시온?" "응. 엑스시온은 탑승자인 기사가 보내주는 순수한 마나를 수십배로 증폭시켜 그것을 마법의 힘으로 바꾼 후 그 힘으로 타이탄을 움직이지. 거기에 그래듀 에이트급 기사가 마나를 움직이는 것은 거의 순간적이니 만큼, 타이탄은 대단 한 속도를 지니게 되었어. 그 다음부터는 타이탄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타이 탄밖에 없게 되어버렸지. 기사가 타고있는 타이탄을 부술 수 있는 것은 같은 기사가 탑승한 타이탄 뿐이었으니까... 지금 전 세계에는 타이탄이 오천대 정 도 남아있지." "오천대나? 저런 괴물이?" "응. 사실은 더 많은 타이탄이 만들어졌지만 도중에 파괴된 것들도 많으니 까... 현재 기록상으로는 그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아." "그렇다면... 뛰어난 기사가 타고있다면 그 타이탄이 다른 타이탄 보다 더 세 다는 말인가요? 그 기사의 기... 아니 마나에 의해 움직이니까..." 안토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 타이탄을 움직이는 건 기사니까 기사의 능력이 뛰어날수록 타이탄 도 엄청난 힘을 내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동급의 기사가 타고있을때는 더 좋은 타이탄에 타고있는 사람이 이기지." "그럼, 타이탄에도 등급이 있어요?" "그럼. 타이탄을 만든... 그러니까 타이탄의 핵심인 엑스시온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타이탄의 힘이 결정되지. 강력한 엑스시온은 같은 량의 마나라 도 더욱 많은 마력으로 증폭해내거든. 하지만 그렇게 큰 힘의 차이는 없는 편이야. 그러니까 보통 타이탄이 100의 힘을 낸다면 아주 좋은 타이탄이라도 120정도의 힘을 내지. 하지만 진짜 유명한 타이탄은 달라. 역사상 유명했던 위대한 마법사들이 만든 타이탄은 그 성능 자체가 다르지. 그것들은 보통 150 이상의 힘을 내는 걸로 알려져 있어." "그럼 한배 반 이상이나 강하단 말인가요?" "응. 안피로스라는 대마법사(wizard)가 만든 에프리온이나 헬 프로네, 코타스 라는 대마법사가 만든 다크 나이트(dark knight;흑기사) 등등 위대했던 대마 법사들이제작한 것들이지." "여태껏 많은 타이탄들이 만들어졌을텐데... 어떻게 트루비아에는 8대 밖에 없어요? 좀 더 많이 만들면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도 편리할텐데..." 안토니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타이탄을 1대 만드는데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지. 타이탄은 사실 엑스시온이 란 심장만 들어가지 않는다면 거대한 강철로 만든 인형과 같아. 인형은 어떻 게 움직이지?" 갑자기 안토니가 이상한 질문을 했으니 다크는 버벅거렸다. "그... 글쎄요. 저는 남자라서 인형은..." "아..참. 말도 안되는 질문을했군. 그럼 예를들어 나무를 깎아 갑옷을 입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있는 인형을 만든다고 하자. 그냥 나무를 깎아 사람을 통 째로 만들면 그 인형이 움직이냐?" 아직도 이해를 못한 다크의 대답. "아니죠. 인형이 왜 움직여요?" "이런... 질문이 잘못되었군. 나무를 파서 그렇게 만든 다음 너가 인형의 손 을 잡고 위로 올렸을 때 그 인형의 손이 올라가느냐 이걸 물은거야." "글쎄요." "물론 그냥 파놓은 나무인형이라면 손이 부숴지지 그 손이 외부에서 힘을 가 한다고 움직이지 않지. 하지만 그 인형의 손이 움직일 수 있도록 관절을 만들 어 놨다면?" 이제서야 어느정도 감을 잡은 다크는 간단히 답했다. "그 관절이 허용하는 각도안에서는 움직이겠죠." "바로 그거야. 강철로 하나의 인형을 만들면서 어떤 각도로든 움직일 수 있 도록 관절을 만들어놓은 것. 그게 타이탄의 뼈대지. 그 위에 두꺼운 장갑을 입히면 타이탄의 겉부분은 완성되는거야. 하지만 사람의 움직임과 같은 움직 임을 내려면 수많은 관절이 들어가게 되지. 한두사람의 작업으로 만들 수 있 는게 아니라구. 일단 타이탄의 외형이 완성되면 내부에 그 심장이 될 엑스시 온을 집어넣지. 그러면 타이탄이 완성되는데... 사실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타이탄이 제대로 된 힘을 못내. 엑스시온에서 나오는 막강한 마력을 효과적으 로 타이탄의 말단부분까지 전달해줄 '크로네'라는 마법을 빨리 전달해주는 물 질을 넣어줘야 하지. 그 크로네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싸." "그렇군요." "그리고 거기에서 끝나는게 아니야. 마법사들이 숨어서 어떤 마법공격을 가 해온다면 덩치 큰 타이탄은 아주 좋은 목표물이 되지. 그러니까 대마법주문을 타이탄의 전신에 새기지." "하지만 시드미안 경의타이탄에서는 그런 복잡한 주문은 못봤는데요?" "물론 못봤겠지. 일단 타이탄의 표면에 그 주문을 새겨놓은 다음 그 위에 마 법을 막는데 가장 효과적인 금속으로 알려진 미스릴을 입히는 거야. 미스릴도 엄청나게 비싸지. 그 미스릴 위에 또다시 페인트를 칠하면 이제 타이탄이 완 성되는거야. 이제 타이탄의 외부는 설명했고... 그 타이탄의 심장이 될 엑스 시온 말인데... 엑스시온을 만드는 건 엄청나게 어려워. 엑스시온이 정상적으 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거의 대마법사 정도가 투입되어야 겨우 만들 수 있다 구. 그리고그 안에 들어가는 재료는 또 얼마나 비싼데... 타이탄 한 대 만드 는데 들어가는 돈은 거의 왠만한 국가의 1년 예산에 필적하는 거금이라구. 하 기야 예전에 만들어진 일부 타이탄들 같은 경우 비용절감을 위해 미스릴 처리 를 하지 않은것도 있지만..." "미스릴을 빼도 상관없는거 아니에요?" "강력한 마법사나 마법진을 만나지 않는다면 상관없지. 5m가 넘는 강철덩어 리의 외부에 미스릴을 입히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그 돈을 절 약하는 것만 해도 엄청나지. 참... 그러고 보니 미스릴 처리를 하지 않은 타 이탄중에서 아주 유명한게 있는데..." "뭔데요?" "그 에프리온을 만든 안피로스라는 대마법사가 만년에 만든 3대의 타이탄이 있지. 안피로스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헬 프로네'들에는 미스릴 처리를 하지 않았어. 그냥 대마법주문이 새겨진 그 문양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뭐 그것들은 외형이야 어쨋든 안피로스가 만들었기에 강력한 마력을 내는 엑 스시온이 탑재되어있지. 미스릴 처리가 안된 만큼 딴것들 보다 더 가볍고... 그래서 더 빠른... 그러니까 재빠른 몸놀림을 좋아하는 기사가 타기에 이상적 으로 설계되었다고도 하지. 하지만 전해지는 또다른 말로는 그때 안피로스가 속해있던 크루마 제국이 전쟁중이라 미스릴 입힐 돈이 없어서였다고도 해. 어 쨋든 일단 그 심장인 엑스시온이 가동되기만 하면, 엑스시온은 자신의 몸에 부착된 모든 걸 자신의 신체 일부분으로 기억하게 되고 그게 부숴지면 자동적 으로 복구하려고 들지. 그 말은 그 위에 나중에 미스릴을 입힌다 하더라도 그 녀석은 그걸 자신의 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그렇게 되면 한번 싸 울때마다 충격으로 미스릴이 조금씩 벗겨지는데... 무슨 돈으로 계속 미스릴 을 입힐거야? 그래서 그 셋은 아예 미스릴 처리가 되어있지 않기에 아주 알아 보기 쉽지." "그럼 미스릴 처리 안된 타이탄은 그 세대 뿐인가요?" "무슨... 엄청나게 많아. 특히나 돈이 많이 절약되니까 미스릴 처리 안한 타 이탄이 전 세계 타이탄의 반수 이상이야. 좀 심한 타이탄은 크로네도 거의 안 넣든지 아니면 아예 안넣는데... 그래서 대부분이 별로 유명한 타이탄은 없 어. 그런 타이탄들은 대부분이 제작비를 절약하기 위해 크기도 조금 작고 말 이야... 하지만 강력한 타이탄과 싸우기 전에는 그걸 막을게 사실상 없으니 뭐 상관없지. 크로네를 안넣고... 미스릴 처리 안하고... 기준출력의 반도 못 내는 엑스시온을 가진 타이탄이라도 순식간에 성벽을 허물 수 있다구. 그런 타이탄의 강한 점 때문에 말도안되는 싸구려 타이탄들이 생산되는 거지." 갈로시아 갈로시아는 인구 5만명 명도가 모여있는 상당히 흥청거리는 트루비아의 상업 도시였다. 이웃나라인 탄벤스 공국에서 들어오는 수입물품이 대부분 갈로시아 를 통과하기에 더욱 흥청거리게 된 국경무역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탄벤스 공국(共國)은 투루비아의 2.5배에 달하는 면적을 가진 트루비아 보다 는 월등하게 강한 국가였지만 그 정치체계의 최고 우두머리를 공왕(共王)이 맡고 있었다. 국왕처럼 강력한 힘이 집중된 존재가 아닌 공왕, 말그대로 세습 되지 않는 투표에 의해(전 국민이 참여하는 것은 아니고 일부 귀족들이 참여 하는) 선출되는 인물이 왕이 되기에 그의 권력은 전제왕정보다는 아무래도 떨 어질 수밖에 없었고 공왕의 권력이 상당부분 제한되기에 이웃나라와는 잘 지 내려고 노력하는 상당히 평화로운 국가로 행세하고 있었다. 아무리 호전적인 공왕이 등극한다 해도 귀족들의 반대 때문에 이웃나라 침공은 불가능했던 것 이다. 시드미안 경의 설명으로는 탄벤스 공국에는 거의 72명의 그래듀에이트급 기 사가 있었고 또 30명의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를 보유하고 있는 발키리아 기사 단이 있었으며 기사들 중 최고의 엘리트 10명으로 구성된 발칸 근위기사단이 존재했다. 근위기사의 무서움은 역시 타이탄에 있다. 탄벤스 공국이 가지고 있는 19대의 타이탄 중에서 10대는 발칸 근위기사단에, 나머지 9대가 발키리 아 기사단에 있었다. 그리고 타이탄들 중에서 강력한 것들은 모두 다 근위기 사단이 보유하게 된다. 타이탄이란 궁극의 마법병기는 그 안에 탑승한 인물의 실력에 비례하는 힘을 발휘하기에 이 배치는 당연한 것이었고, 모든 국가들이 이런식의 배치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근위기사단의 멤버로 뽑힌다는 것은 정말이지 자랑스럽고도 명예스러운 것이다. 최고들 중의 최고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단서는 찾았나?" 가스톤의 지나가는 듯한 물음에 추종자들을 이끌고 당당히 식당 안으로 들어 와 가스톤의 앞자리에 앉던 미카엘은 씁쓸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급사에 게 외쳤다. "맥주 셋!" "왜? 점심은 안먹을거야?" 가스톤의 질문에 미카엘이 엄청 더운듯한 행동과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 다. "뭐... 나중에 먹지. 지금은 시원한 맥주 생각밖에 없어. 어쨋든 열심히 수 소문 했는데...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물어보면 뭔가 나올줄 알았더니..." "뭐, 팔시온이나 시드미안 경에게 기대를 해봐야지. 미디아한테는 기대도 안 하지만... 그 둘은 뭔가 건질지도..." "미디아는?" "라나를 데리고 용병길드에 갔어." 그러자 좌우를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다크는?" "왜그런지 모르지만 방안에 처박혀서 머리를 싸매고 생각하고 있어. 우리들 과 만나기 전에 애인한테 차였는지, 아니면 무슨 큰 사고라도 당했는지... 별 로 좋은 기분은 아닌 것 같더군." "그친구 정도의 실력에, 외모도 아예 엉망은 아니잖아. 새로운 여자를 찾는 건 별로 어려울 것도 아닐텐데... 사내녀석이 쪼잔하기는... 꿀꺽.." 이렇게 넷이서 궁시렁거리면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외곽을 둘러보겠다고 나 간 시드미안 경이 부하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이 피곤한 안색으로 들어서 는 걸 보며 미카엘이 급사를 향해 외쳤다. "맥주 셋 더!" "뭐 좀 찾았습니까?" 시드미안 경도 미카엘처럼 수확이 없었는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맥주를 들이 켰다. "혹시 이리 안온거 아닐까요?" 스미온이 조심스레 추측하자 나머지 일행들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수긍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도중에 딴 길로 들어왔을 수도 있겠지." "그럼 어떻게 하죠?" "할 수 있나? 모두들 돌아오는 대로 왔던길을 되돌아가면서 흔적을 찾는 수 밖에..." "30여명의 기사에 큼직한 마차 한 대면... 사람들 눈에 잘 띌텐데..." "뭐 어쨋든 팔시온이 올때까지 술이나 마시기로 하지요. 그런 후에 모두들 피곤하니까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합시다." 시드미안 경의 제안에 모두들 찬성하며 맥주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우와!..." "간만의 휴식이군..." 한참 맥주를 마시던 시드미안 경이 갑자기 생각났는지 말했다. "참, 미디아는?" "라나가 심심해 하니까 그애 데리고 용병길드에 갔어요." "다크는?" "방안에 처박혀서 궁상떨고 있어요." "그럼 다크도 불러서 신나게 마시지." "안마신답니다. 사실 여기 와서 다크가 술마시는거는 식사때 반주로 맥주 한 잔 정도 마시는 것 말고는 본적도 없으니까요." "뭐, 싫다는 사람 억지로 먹일수는 없지. 자 오늘 찐하게 한잔 해보세." 모두들 왁자지껄 밑에서 얘기를 나누면서 술파티를 벌이고 있으때 다크는 머 리를 감싸안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길...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지? 샤헨에서도 약간의 방법은 있다고 하 는 것 같기도 하던데... 오래전에 그 방법이 실전되었다면 돌아갈 방법은 아 예 없는거나 다름없잖아. 도대체... 어떻게...?" 다크는 다크 다름대로 중원에 돌아갈방법을 궁리하느라 정신없는 그시간... 아래층에서는 모두들 통쾌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마침 팔시온이 돌아왔다. "어떻게 되었나?" "발견 했어요. 이쪽이 아니라 말테리아 산맥을 타고 그쪽 산길을 따라 갈로 시아 근방으로 내려와서 수도쪽으로 이동한 모양입니다. 그쪽으로 가보니까 산길을 타고 이동하는 회색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봤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럼 빨리 그쪽.... 아니지. 오늘은 여기서 푹 쉬기로 하지. 내일부터는 아 무래도 산길을 통한 강행군이 될 것 같은데..." "그러지요. 그러고 보니 오랜만의 휴식이군요. 이봐! 여기 맥주 큰거로 한 잔!" * * * "스승님. 다녀왔습니다." "그래. 결과는?" 검은가죽갑옷을 입은 젊은 마법사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예. 바로 이녀석들입니다." 검은가죽갑옷을 입은 마법사는 중얼중얼 마법을 외운 후 시동어를 외쳤다. "이미지!" 그러자 사람의 영상들이 여러개 나타났다. 그 청년은 그 하나하나를 지적하 면서 말했다. "여기있는 이 검은색 옷을 입은 무사가 파티의 지도자인 모양입니다. 가장 많은 마나를 보유하고 있죠. 아무래도 마스터급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리 고 이자는 그에는 못미치지만 그래듀에이트를 상회하는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그리고 이자는 검은 엄청나게 큰 걸 가지고 다니지만 그렇게 위험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나의 양이 보잘 것 없었어요. 그리고 이 둘은 마법사인데... 이자는 5싸이클급, 이자는 3싸이클 급입니다. 그리고 이자들 셋은 무사로서 꽤나 수련을 쌓긴 했지만 그래듀에이트에는 못미칩니다. 또 이 둘은 그보다도 못한... 아마도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인물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쪽에 있는 잘생긴 인물은 그 생김새로 보아 아무래도 신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제가 스승님께 말한 그 장난감이죠." 그러면서 그 젊은 마법사는 예쁜 얼굴의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스 승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스터라... 정말 대단한 놈이군. 그래, 그녀석에 대한 자료는 조사해봤느 냐?" "예. 그런데..." "그런데?" "도대체 데이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코린트 제국에도 없었고... 트루비 아에도... 전쟁의 신전에도 가서 물어봤지만 등록된 12명의 마스터들 중에서 그렇게 생긴 인물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대부분 그정도 실력이 있다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또 인정받기 위해 전쟁의 신전에 들리는게 정상인데 말이 죠." "흐으음... 그렇다면 코린트쪽에 좀 더 깊게 조사해 보거라. 혹시 사냥개(암 살자를 말함)로 쓰기위해 비밀리에 키운 놈인지..." "알겠습니다. 좀 더 깊게 조사해 보겠습니다. 저... 스승님. 그건 그렇고 크 로마스 경께서 뵙기를 청하는데요?" "내가 불렀으니 들어오라고 해라." "예." 제자인 다론이 나간 후 잠시 시간이 지나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굳건한 체 구의 무사가 들어왔다. 이곳은 본거지라서 그런지 갑옷은 입지 않았지만 바스 타드 소드는 차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노 마법사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어서 오게나." "안녕하셨습니까? 토지에르 경." "그래. 내 부탁이 있어 그대를 불렀지." "무슨 일입니까?" "제자녀석을 보내 이번에 드래곤 하트를 훔친 것을 조사하는 녀석들의 인상 착의를 알아오라고 불렀네. 혹시 이 사람들이 기억에 있나?" 그러더니 노 마법사는 주문을 외웠다. 물론 이미지 주문이었지만 그 주문을 다 외우는 시간은 제자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았다. "이미지!" 그러자 당당한 모습의 기사 한명과 검은색 옷을 입은 마법사 같이 보이는 인 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염을 덮수룩하게 기른 무인 영상을 노려보던 그의 얼굴이 약간 찌푸려지더니 곧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이녀석은 그라드 시드미안이군요. 나머지 하나는 마법사 같은데... 모르겠 습니다." "흐음... 그라드 시드미안이라고?" "예." "저자의 실력은?" "거의 저와 동급이라고 보시면 될겁니다. 과거에 무예 수련중에 한번 만난적 이 있거든요." "그렇다면 저자도 근위기사일 확률이 높겠군." "확실할겁니다. 저같은 경우에도 우리나라 처럼 큰 나라에서 근위기사인데 트루비아는 아주 작은 나라죠. 아마 트루비아에서 1,2위를 다투는 기사일 겁 니다." "좋아. 그럼 옆에있는 놈에 대해서는 아예 기억이 없나?" "예. 생김새로 봤을때는 마법사 처럼 보입니다만?" 토지에르 경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마법사가 아니라 마스터야. 소드 마스터." "예? 하지만 트루비아에는 소드 마스터가 없는데요?" "그래서 지금 그놈의 정체를 파악한다고 난리가 난 상태라네. 일단은 놈의 배후를 캐야 할테니까... 하지만 도대체가 어느나라 소속인지 그것조차 알 방 법이 없어." "큰일이군요. 혹시나 코린트의..." "나도 그게 걱정이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으니까 더욱 이상하단 말이야. 코린트에 있는 세명의 소드 마스터... 키에리 발렌시아드는 자네도 이미 얼굴 을 알고 있을거고... 나머지 까뮤 드 로체스터도 아니고... 나머지 하나는 여 자니까 상관없고... 도대체가 알수가 없단 말이지. 그래서 한번 실험을 해볼 까 생각하네." "실험... 이라구요?" "그렇네. 기회를 봐서 타이탄으로 그놈들을 한번 공격해 주게. 그라드 시드 미안이 근위기사라면 타이탄이 있을거고... 또 한 대의 타이탄이 있다면 그놈 의 뒤에는 어떤 국가가 있다고 봐야지. 만약 아니라면 그놈은 엄청난 수련을 막 끝내고 세상에 나온 철부지가 되는거지. 어떤가?" 크로마스는 한참 생각하고 있더니 말했다. "너무 위험부담이 큽니다. 놈이 타이탄을 가지고 있다면 몇대를 가지고 가더 라도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스승님이신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님이 라도 계신다면 모르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멀찍이서 돌격하는 척 하다가 그놈들이 타이탄을 불러내는 걸 보고 두 대가 나타나면 도망치면 되지. 싸울 필요도 없어. 그정도도 못하겠나?" "그자가 가진 타이탄이 성능이 좋다면 꽁지빠지게 도망쳐봐야 최소한 한 대 는 잡혀서 박살날겁니다. 그리고 놈이 재수없어서 헬 프로네라도 가지고 있다 면 세대 이상이 탈출조차 못하고 부숴질 겁니다. 헬 프로네는 안그래도 가볍 고 우수한 타이탄인데... 거기에 마스터들이 타니까 정말 엄청난 속도를 낸단 말입니다." "흐음... 하지만 그럴 걱정은 없을거야. 그놈은헬 프로네를 가지고 있지 않 을거야. 헬 프로네를 가지고 있는 인물은 내가 모두 다 알고있어. 어쨋든 헬 프로네의 주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세계 최강의 대열에 들어가는 인물이니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지. 코린트의 키에리 발렌시아드, 크루마의 미네르바 켄타우리, 타이렌의 엘빈 코타리스... 지금 헬 프로네의 주인들이지. 미네르 바는 여자니까 빼고... 키에리는 자네도 얼굴을 알테니 빼고... 그럼 이제 남 은 사람은 그래플 마스터 엘빈 코타리스 뿐이지. 하지만 나와 내 제자녀석이 함께 본 그놈은 그래플 마스터가 아니었어. 소드 마스터였지.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스러운 검강... 그렇다면 이제 답은 나왔다고 봐야지. 그놈은 헬 프로네는 절대 가지고 있지 않아."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자네의 임무는 우선 위협행동을 해서 놈들이 타이탄을 불러내도록 유도하는 거야. 그런다음 놈들이 타이탄을 불러내는 그 숫자를 보고 마스터가 타이탄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그러니까 타이탄이 두 대라면 죽자고 도망쳐야 하지." "만약 타이탄이 한 대만 나온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그 마스터가 타 이탄을 가지지 못한 인물이라면?" 토지에르는 살기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기회에 죽여버려야지. 또 시드미안이 가지고 있는 타이탄도 뺐고 말이 야. 설혹 타이탄이 박살난 상태에서 노획한다 하더라도 거기서 회수할 수 있 는 귀금속의 양은 정말 엄청나지. 해낼 수 있겠나?" "타이탄을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스펙터(specter;유령) 기사단에 연락해 뒀네. 4대의 로메로면 되겠나?" 스펙터 기사단은 유령이라는 그 뜻에 어울리게 외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기사단이었다. 과거 코린트의 습격을 받았을 때 아예 대세가 기울어버린 걸 직감한 황제가 96대의 타이탄 및 기사, 12명의 마법사를 왕자와 함께 국외로 도피시켰다. 국가가 망하더라도 그정도 전력이라면 어느정도 회생이 가능할거 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나중에 평화회담을 통해 땅은 뺐겼지만 국가는 망 하지 않았고 황제는 그 도피시킨 세력을 비밀리에 회수하여 스텍터 기사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크라레스 제국이 타국에 알려지기에는 타이탄 96대라 는 숫자가 빠졌기에 28대의 타이탄밖에 없는 약소국이었고, 기사도 일부러 전 사한 것으로 위장했고, 또 새로이 자라난그래듀에이트는 전쟁의 신전에 등록 을 안했기에 등록된 그래듀에이트의 수는 73명 뿐이었다. "그정도면... 정찰임무는 되겠죠." "알겠네. 모든 문장 및 표식을 지우라고 지시해뒀으니 내일 인수해서 떠나 게." "알겠습니다." 허리에 찬 바스타드 소드를 철거럭 거리면서 방을 나서는 미온지에 폰 크로 마스를 보면서 노 마법사는 미소를 지었다. 속마음 같아서는 이번기회를 청기 사의 시험무대로 썼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직 청기사는 완성되지 않았다. 2달 정도만 더 지나면 먼저 3대가 완성될 것이고 그 뒤4개월이 지나고 나면 나머지 9대의 청기사가 완성된다. 그러면 이제껏 소중히 다뤄져 왔던 근위 타 이탄은 카프록시아에서 청기사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 반년만 더 지나면... 우리는 코린트에 복수할 만한 힘을 얻을 수 있게 될거야. 대마법사 안피로스가 설계한 엑스시온... 다른 엑스시온들과 달 리, 드래곤 하트를 이용해 더욱 힘을 극대화 해놓은 최강의 심장. 흐흐흐... 반년이 지나면 전 세계는 경악하게 될거야. 다른 타이탄들 보다 3배나 많은 마력(魔力)을 뿜어내는 엑스시온을 심장으로 가진 6미터의 거인청기사를...' 토지에르 경이 한참 혼자서 기분내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똑..똑... "무슨 일이냐?" "안티노스 경께서 상의하실 일이 있다고 잠시 뵙기를 청합니다." "드시라고 해라." "예." 잠시 후 중후한 덩치를 지닌 50대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러자 전과는 달리 노 마법사가 재빨리 그를 영접하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안티노스 경. 이봐 차를 가져오너라." "예." "무슨 일이십니까? 안티노스 경." 그의 눈앞에 있는 이 거구의 사내는 국내외의 모든 정보를 관장하는 위치에 있는 폐하의 심복인 지그발트 폰 안티노스였다. 요즘 들어서 눈에띄게 흰머리 가 늘어가고 있는 이 근육질의 노인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대단히 뛰어 난 기사였다. "흐음... 자네의 의견을 듣고자 왔네." "예." "아르곤 제국에서 이번에 마도왕국 알카사스로부터 또 엑스시온 10개를 주문 했어. 여태껏 그들이 사들인 것은 30개 정도인데... 과연 그걸 가지고 그들이 타이탄을 만들 수 있을까?" "흐음... 만들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대마법방어주문 처리는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요? 그게 중요한데..." "첩자들의 보고로는 타이탄에 사용하는 방어마법주문이 기록된 책자를 비싼 대가를 치르고 알카사스에서 수입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 책만 가지고 타이 탄의 방어마법진이 발동할까?" "발동합니다." "뭐?" "마법진은 그 책자에 그려진 대로 그대로만 조각해 넣으면 됩니다. 그걸 가 동시키는 것은 엑스시온에서 공급되는 마력이지요. 엑스시온이 수입된다면 마 법사는 한명도 없어도 상관 없습니다." "큰일이군...." "저..." "뭔가?" "아르곤에서 수입한 엑스시온의 성능은 어느정도인가요?" "카로텔에서 생산한 최상품. 그 출력은 통상의 1.24배라고 보고받았네." "통상의 1.24배라고요? 역시 그놈들 돈이 많으니까..." "아마 그걸로 제대로 된 타이탄을 만들기만 한다면 본국의 카프록시아급에 맞먹겠지." "그럼 여태껏 수입한 30개가 모두 다 1.24배짜린가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보고 받았네. 아마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액수의 돈을 지불했겠지." "으음... 하지만 그쪽에는 마나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기사는 많지 않지 않 습니까?" "폐하께서도 거기에 희망을 걸고 계시지. 놈들은 너무 신성마법에 의존하고 있어. 그따위 것 타이탄을 구동하는데는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데 말일세..." "그럼 그 30대가 타이탄이 된다면 이제 아르곤에는 몇대나 되는 타이탄이 존 재하게 되는 겁니까?" "아마도 320대 정도... 전에 있었던 토프라크 전쟁에서 타이탄 12대가 파괴 되었다고 들었네. 처음 엑스시온을 수입할때는 파괴된 타이탄에 넣어서 그걸 살리려고 하는 줄 알았지. 그런데 계속 수입하는 거야. 그래서 과연 그걸 가 지고 타이탄을 만들 수 있는지 자네에게 물어보려고 왔지. 만약 이번 엑스시 온들로 타이탄들이 완성된다면 아르곤에는 마나를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성기 사가 타이탄을 보유하게 될 것 같아." "으음... 어쨋든 큰 문제로군요. 하기야 그놈의 아르곤 백성들은 원체 신앙 으로 뭉쳐 열심히 일하기에 남아 도는게 돈이니... 본국은 겨우 청기사 12대 를 만든다고 온 국력을 퍼부어 20년을 노력했는데..." "약소국의 비운이지... 어쨋든 청기사들만 완성된다면 본국의 타이탄도 136 대가 되지. 타국의 눈치 안보고 풍요로운 스바시에 제국을 병합할 수 있게 된 다 이말이야. 자네가 좀 더 힘을 써주게." "감사합니다. 안티노스 경." * * * '오늘은 휴식이다.'하는 안도감에 모두들 술에 취해서는 이제 술이 술을 먹 는 단계를 지나 술이 사람을 먹는 단계에 근접해가고 있었다. 이번 파티가 결 성된 후 추격을 해오며 상당한 마법사의 던젼을 발견하기도 했고... 또 놈들 이 어느쪽으로 도망쳤는지 그 흔적을 놓치지 않고 계속 따라왔다. 거기에 상 대와 몇번 대적까지 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어쨋든 기분이 좋을 수밖 에... 그렇게 이들이 술을 마시는동안 8명이 우루루 2층계단으로 중무장을 한 채 올라가는 것을 무심히 흘리고 말았다. 그들의 복장은 약간 특이했다. 딴 복장은 보통 사람들과 차이가 없었지만 적 당히 넓은 망토는 몸속에 무기들을 숨기기 편하게 되어있었고 가죽장화도 거 의 무릎 가까이까지 올라오기에 단검따위를 숨기기에 용이했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그게 아니라 장화의 밑창에 있었다. 일반 신발들이 밑창을 단단한 가죽을 덧댄다든지, 또는 철판이나 구리판 까지 달아서 신발이 닳는 것을 방 지하는데 반해서 이들의 장화 밑은 무두질도 안한 생가죽을 털이 아래쪽으로 내려오도록 붙여놨다. 그렇기에 땅과 접촉하는 부분에 짐승의 털이 끼임으로 인해 발걸음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어쨋든 모종의 전문직 종사자에게 매 우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주문제작된 것이었다. "이봐, 이 방이 맞아?" "예." 덩치큰 인물의 말에 옆의 그보다는 조금 덩치가 작은 남자가 대답했다. 그러 자 그자는 살며시 단검을 뽑아들면서 일행들에게 지시했다. 그러자 일행인 인 물들도 일제히 무기를 소라나지 않게 뽑아들었다. 일행들의 준비가 갖춰지자 그자는 살며시 문을 열었고, 곧장 방안에서 머리를 싸안고 고민에 빠져있는 남자의 뒷통수를 볼 수 있었다. "꼼짝마라!" 일제히 검을 겨눈 채 상대방의 무장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무장이라 고 해봐야 허리에 찬 60Cm길이의 가벼운 샤벨이 전부였지만... 어쨋든 검을 뺏은 후 튼튼한 쇠심줄을 꼬아만든 줄로 손을 꽁꽁 묶었다. 그런 후에야 조금 안심이 되는지 각자 무기를 품속에 감춘다음 그중의 한명이 말했다. "좋게 말할 때 따라와." 하지만 그 상대는 오히려 빙긋이 미소지으며 적반하장 격으로 말했다. "좋다. 안내해라." 상대의 태도가 조금 눈에 거슬렸지만 이렇게 협조적으로 나오는데야 딴말을 할 수 있나. 그자의 뒤에 선 인물만이 단검으로 여차하면 찌를 태세를 갖추고 는 그자를 안내하여(?) 자신들의 소굴로 돌아갔다. "앉아!" 다크가 의자에 앉자 곧이어 한명이 가죽끈을 가져와서는 더욱 튼튼하게 의자 에 꽁꽁 묶었다. 묶는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한 인물이 방안으로 들어왔 다. 그 인물은 모자를 푹 눌러써서 거의 눈만 가까스로 나올 뿐... 이마나 귀 까지 모자에 덮여있었다. 하지만 그 미모나 몸의 굴곡으로봤을 때 숫컷이 아 닌 암컷이라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방안의 정경을 쭉 훑어본 다음 다크를 이쪽으로 끌고왔던 그 덩치큰 남자의 옆에 가서 말했다. "실력좋네... 그정도만 말해줬는데 간단히 잡아오는 걸 보면..." "흐흐흐... 내 실력놓은 거 이제 알았냐? 전에 망신 당한게 있다면서... 지 금 갚을거야?" "당연히." "좋아. 어떻게 해줄까? 아예 반쯤 죽도록 두들겨 패줘? 손을 아예 못쓰게 만 들어 줘?" 남자의 끔찍한 말에 그녀는 빙긋이 살기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먼저 죽도록 팬 다음, 아예 병신을 만들어 버려." "크흐흐흐... 알겠어. 얘들아 들었냐?" "예." 방안에 남아있던 10여명의 부하들은 일제히 몽둥이를 줏어들었다. 아까부터 이들은 저쪽에 앉아서 오만한 미소를 짓고있는 놈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 명령이 내려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입장이었다. 이들이 몽둥이를 들고 접근하려 할 때 갑자기 의자에 묶여있던 다크가 힘한 번 쓰자 손발에 묶여있던 가죽끈이나 쇠심줄로 만든 줄이 ㅆ은 새끼줄 끊어지 듯 힘없이 끊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느껴지는 엄청난 위압감... "네녀석들이 감히 [본좌]에게 뭘 하겠다고? 죽고싶어서 작정을 했군." 다크는 싸늘하게 미소를 짓더니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사라졌다. 쿵 퍽 퍽! 으악! 악! 으엑! 이건 애시당초 게임이 안되는 한판 승부였다. 심하게 배에 두들겨 맞고는 열 심히 팬케ㅇ을 만들고 있는 놈들부터 시작해서 기절해서 인사불성인 놈들까 지... 10여명이 한꺼번에 모두들 바닥에 쭉 엎드린 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 다. 다크는 일단 옆에 떨어져있는 샤벨의 검대를 집어 허리에 찬 후 싱긋이 미소지으며 저쪽에서 엎드린 채 다행이 팬케ㅇ은 아직 만들지 않고 기침만 콜 록콜록하고있는 우람한 덩치를 가진 놈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리며 말했다. "야? 너가 이놈들 두목이냐?" "예? 예." "네놈들 실력에 맞는 사람을 건드려야 할거 아냐?" 퍼퍽! 우엑! 그대로 복부에 직격탄 두발을 맞은 거한은 그대로 침몰하여 드디어 부하들과 함께 사이좋게 팬케ㅇ을 만들기 시작했다. 쿵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아니지, 가죽끈을 끊었을때부터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느낀 후에 곧장 도망치려고 했지만 뭔가 끈적한 것에 잡 힌 듯 도망도 못치고얼어있다가 한 대 맞고는 뻗어있던 그 모자를 깊숙히 눌 러쓴 여자도 어김없이 다크의 손에 멱살이 잡혀 몸을 일으켜야 했다. "흐음... 반반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것 같은 기분 이 드는데, 너 혹시 나하고 어디에서 만난적이 있지?" 그러자 그 여자는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고개를 열심히 좌우로 저으며 열심 히 부인(否認)했다. "아니요. 이번이 맹세코 처음이에요." "콩알만한 기집애가 감히... 안그래도 요즘 기집애 하면 이갈리는데 너 잘 만났다." 퍽! "꺄억!.... 우엑!" 그녀도 어김없이 두목의 옆에서 팬케ㅇ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정도 타격을 배에 맞고 뱃속에 든 물건을 게워올리지 않는다면 아마 인간이 아니던지 아니 면 그 전날부터 금식기도를 하던 인물일 것이다. 아직도 잡혀온데(?) 대한 분이 안풀렸는지... 다크는 팬케ㅇ을 만들고 있는 녀석들의 머리를 지근지근 밟아서 팬케ㅇ 위에 얼굴도장까지 확실하게 찍어댔 다. 과연 그게 잡혀온데 대한 분풀이인지... 아니면 요즘 한참 받고있는 스트 레스를 요행이 운좋게(?) 만난 이자들에게 풀고있는지 그게 좀 모호하긴 했지 만 이건 전적으로 힘도 없는 주제에 강자를 초대(?)한 놈들의 잘못이었다. * * * 얼굴과 옷에 오물이 잔뜩 묻은 놈들을 향해 다크가 의자에 푸근히 앉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일어서." 목소리는 매우 작았지만 모두들 재빨리 일어섰다. 방금전에 꾸물거린 여자 동료가 아예 기절할 정도로 두들겨 맞는 걸 친히 목격한 그들에게 선택의 여 지는 없었다. "앞으로 누워." "뒤로 누워." 이거 한번 해본사람은 다 안다. 정신없이 섰다 이리누웠다 저리누웠다를 한 한시간 정도 반복하면 이틀전에 먹은 것까지 속이 울렁거려 나 토해내게 되어 있다. 그걸 지긋이 감상하면서 다크는 요 며칠동안 여행하면서 쌓인 스트레스 를 열심히 풀고 있었다. 이게 웬 횡재냐 하면서 말이다. 모두의 몸이 땀과 오물로 뒤범벅이 되었을 때 쯤 되어 다크가 천천히 일어서 면서 말했다. "야. 두목!" "옛! 헥헥.." "운동이 좀 되는 것 같냐?" "옛! 헥헥헥...." "그럼 이렇게 너희들의 몸을 생각해서 운동 씩이나 시켜주신 이몸께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할거 아냐? 응?" 퍽! "꾸엑!" 비명을 지르기는 했지만 두목은 재빨리 자세를 다시 안정시킨 후 자신의 주 머니를 털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다크에게 내밀었다. 여전히 가쁜숨을 몰아 쉬고 있었지만... "헥헥... 약소하지만 헥헥... 감사의 뜻으로...헥헥헥.." "뭐야? 겨우 50골드도 안되겠는데? 이녀석이 나하고 장난하는 거야? 내가 너 희들 몸을 생각해서 무려 3시간이나 황금같은 시간을 쪼개서 놀아줬는데..." 그러자 두목은 재빨리 부하들 있는 곳으로 튀어가서는 모두의 주머니를 털기 시작했다. 아무리 돈이 들더라도 저 떠그랄 손님을 빨리 보내는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헥헥... 약소하지만 정말 헥헥헥... 이게 몽땅 다입니다. 헥헥헥... 제발 용서해 주세요. 헥헥헥.." "흐음... 아까보다는 그래도 낫군. 야." "예? 헥헥헥.." "그런데 나는 왜 이리 데리고 온거냐? 설마 달밤에 체조시켜 달라고 초빙한 것은 아닐테고..." "죄송합니다. 헥헥헥..사람을 잘못보고...헥헥헥.. 제발, 용서해 주세요... 헥헥헥.." "정말이야? 아닌 것 같던데... 야! 모자. 이리와봐." 모자를 깊이 눌러쓴 여자가 재빨리 앞에 와서 섰다. 상대는 여자라고 봐주는 그런인물이 아니었다. 여기와서 여자라고 꾸물거리던 애들이 얼마나 무자비하 게 두들겨 맞았던가? 아주 더러운 성격을 가진 망나니였고 자신의 힘이 상대 에게 주는 공포를 매우 잘 알고, 또 그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었다. "옛! 헥헥헥.." "그럼 너가 날 불렀냐?" "아뇨. 헥헥헥.. 저는 초면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어요. 헥헥헥.. 절대 만난 일이 없습니다. 헥헥헥.." "그럼 그 모자를 벗어." 모자를 재빨리 벗자 커다란 귀가 드러났다. 금발에 오똑한 코... 붉은 입 술... 커다란 눈동자... 귀가 좀 큰게 흠이었지만 상당한 미인이었다. "응? 그 커다란 귀는 본적이 있는 것 같은데?" "예? 헥헥헥..엘프는 모두 커다란 귀를 가지고 있다구요. 헥헥헥.. 저는 하 프 엘프기 때문에 헥헥헥..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귀가 클 뿐... 헥헥헥.. 엘프는 아주 많아요. 헥헥헥.. 착각하셨겠죠. 헥헥헥.." "흐음... 그럴지도 모르지. 좋아. 이번은 넘어가 주겠다. 만약 다음에도 귀 큰 엘프인가 하는게 걸리면 그때부터는 표시나게 이마에다가 낙인을 찍어놓던 지 해야겠어."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상대의말을 들은 그 하프 엘프는 온 몸에 소름이 끼 치는 걸 느꼈다. "좋아. 오늘은 사례비도 받았고 이만 돌아가기로 하지. 오랜만에 즐거웠다. 그럼 또 다음에 만날 수 있기를... 흐흐흐..." 다크는 통쾌한 웃음을 터드리며 돌아가 버렸고 다음날 시 외곽 경비병들은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떡이된 엘프 여자가 우울한 얼굴로 시를 떠나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47명의 마법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여튼 5싸이클을 구 사해 마법사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들은 여기 다 모여 있었기에 그 중에는 토 지에르 경이라는 그 궁정 제1마법사와 그의 제자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높이 2.1m의 모서리가 둥근 육면체를 보고 있었다. 가로 1.2미터, 세로 80센티, 높 이 2.1미터의 이 물건은 보통의 타이탄에 사용되는 엑스시온 보다는 조금 더 큰 것이었다. 그 엑스시온의 외부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마법주문이 빽빽하게 써져있었으며 그 윗부분에는 마법주문 대신 여러개의 마법진들이 복수로 교차 되어있었다. "오오... 이게 청기사의 심장입니까? 정말이지 크군요." 그러자 그 노 마법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보통의 엑스시온 보다는 좀 크지. 자네들을 여기 모두 부른 것은 이제부터 저기에 새겨진 주문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야. 물론 저녀석이 깨어나면 통 상출력의 세배나 되는 마력을 발휘하는 만큼 그 작업에 필요한 마력도 엄청나 지." "도대체 어느정도 마력이 필요한데 저희들을 다 부르셨습니까?" "9200만 기간트라." "9200만 기간트라라구요? 그건 보통의 엑스시온을 만드는데 필요한 마력의 3 배가 넘는 양입니다." "물론 얻는게 크면 대가도 큰 법이니 어쩔 수 없지않나? 저게 돌아가기만 하 면 우리의 노력은 보상받을 수 있는거지. 안그런가? 자... 이제 모두들 마법 진에 각자의 위치를 알려줄테니 거기 서게.이제부터 마법진을 돌려 저 엄청 난 거인을 깨워야지... 흐흐흐..." 곧이어 그들은 토지에르의 지시에 의해 거대한 마법진의 곳곳에 위치한 후 주문을 외워 마법진을 돌리기 시작했고 거기서 발생되어 나온 엄청난 마법의 힘이 마법진의 중앙에 놓아둔 엑스시온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엑 스시온은 한낫 죽어있는 금속덩어리에서 생명을 가진 물질로 재탄생하기 시작 하고 있었다. 3시간이 지난 후 토지에르 경의 지시에 의해 마법진의 구동이 멈추자 사방에 서 탈진할 정도로 힘을 쏟아낸 마법사들이 픽픽 쓰러져서는 비오듯 땀을 흘리 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1대의 엑스시온이 완성된 것이다. 토 지에르 경도 피곤에 쩔은 지친 모습이기는 했지만 완성 일보직전에 있는 엑스 시온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지금 가사상태(假死狀態)에 놓여있는 저 엑스시온은 청기사의 몸체가 완성된 후, 그 속에 정확하게 자리가 잡힌다음에야 잠을 깨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곧 이어 엑스시온은 자신에게 주어진 육체를 인식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그게 다 끝나고 나면 이제 완벽한 최강의 병기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모든 마법사들이 힘을 다 뽑아내고는 지쳐서 비실거리고 있을 때 허름한 작 업복을 입은 인물이 토지에르 경에게 다가온 다음 조심스레 질문을 했다. "저... 토지에르 경. 엑스시온이 완성되었으면 청기사에 탑재해도 상관 없겠 습니까?" "프로토타입(prototype;시작품. 원형) 청기사의 외형은 어느정도 완성되어 있나?" "이제 미스릴 입히는 작업이 남았을 뿐입니다. 그전에 엑스시온을 넣어야만 하기 때문에..." "알겠네. 지금부터 시작하게." "예." 그 작업복 입은자의 지시로 여러명의 작업인원들이 달라붙어서는 도르레를 이용하여 엑스시온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엑스시온은 천천히 공중에 매 달린 채로 프로토타입이 위치한 지점까지 이동했고 곧이어 작업인원들이 달라 붙어 청기사의 머리 윗부분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맞는지 알아보기 위 해 붙였지만 머리 부분을 해체해야만 엑스시온이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었 다. 머리 윗부분과 어깨부분 일부까지 해체하고 나자 그 안에는 거대한 사각형의 공간이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저쪽에서 도르레에 큼직한 쇠로된 용광로가 이 동해 왔다. "천천히 부어, 야 이새끼야. 천천히 하란 말이야. 이게 얼마짜린줄 알아? 한 방울도 밖으로 나가지 않게..." 그 사각형 안에 검붉은색의 쇳물같은 형상을 하고 흘러들어가는 것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10배나 비싸다는 최고로 비싼 금속 크로네다. 크로네를 어느 정도 채운 후 그 구멍 안으로 엑스시온이 천천히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엑스시온은 크로네에 완전히 둘러싸이게 되었고 튼튼하게 청기사와 접합 하게 되었다. 모든 작업이 다 끝나고 나자 일부 기술자들이 달라붙어 위로 튀어나온 크로 네들을 말끔하게 깎아내기 시작했다. 엑스시온의 윗부분... 그 복잡한 마법진 들이 그려진 이 부분에 기사가 탑승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나중에 청소 및 유지관리가 편하게 끝손질을 깨끗하게 했다. "지금 빨리 조립을 끝내. 빨리 움직여 이새끼들아. 그 의자도 제자리에 붙 여.... 야 너 죽을래? 계집 다루듯 살살 다루란 말이야." 입이 거친 지휘자의 지시자에 따라 기술자들은 재빨리 움직였고 엑스시온의 윗부분에 프로토타입을 지급받게 된 최고의 기사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의 체 형에 맞는 의자를 부착시켰다. 그리고 그 윗쪽으로 청기사의 거대한 강철머리 가 내려져서는 고정되기 시작했다. 기술자들이 모두들 작업에 여념이 없는 동안 지친 마법사들은 모두들 쉬기 위해서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오늘과 같은 작업을 앞으로 11번이나 더해야 하는 것이다. 이정도 힘을 뺐으니 만큼 다음 작업은 일주일 후에나 있을 예정 이었다. 그들이 떠나고 난 다음 멋진 근위기사복 차림의 기사가 작업장 안으 로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그의 붉은색과 금색을 합해놓은 근위기사복은 정말 멋있었고 그의 허리에는 배틀 소드가 걸려 있었다. 그 남자답게 잘생긴... 검은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30대 초반의 기사가 들어서자 욕설을 퍼부으며 지 시하고 있던 그 기술자들의 우두머리가 깎듯이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론가르트 경. 이런 누추한 곳에는 무슨 일로..." "아니.. 신경쓰지 말고 일을 하게. 나는 내 귀염둥이를 보러 왔네. 참. 자네 에게 한가지 물어볼게 있는데..." "예?" "저 아이는 언제 완성되나?" "방금 엑스시온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미스릴을 입힐거고... 그게 다 식은 후... 그러니까 3일 후에 청색 페인트를 칠하게 되죠. 그런다음 장갑판 들을 조립한 후 엑스시온을 깨우게 됩니다. 엑스시온이 자신의 육체를 완전히 인식하는데는 거의 두달의 시간이 걸리죠.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엑스시온은 처음이니까 어느정도 시간이 걸릴지는 누구도 모르고 있습니다." "알겠네. 으음... 정말이지 멋진 녀석이야..." * * * 다음날 아침 시드미안 경 일행은 또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오랜만의 휴식으 로 모두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몇사람만 빼고... 라 나는 신관인 주제에 술에대한 유혹을 참지 못하고 - 사실 15살짜리한테 먹인 놈이 더 나쁘지만 - 약한 칵테일 몇잔으로 시작해서 맥주까지 몇잔 마시고는 아직도 띵한 표정이었고 라나에게 술을 먹인 장본인인 미디아도 술이 들깼는 지 얼굴이 부석부석했다. 막강 주량을 자랑하던 팔시온과 미카엘은 아직도 멍 한 표정이었고 가스톤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강인한 정신력 덕분에 겉 으로만 멀쩡했지 입에서는 아직도 술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상태가 그런대로 좋은 인물은 높은 무예의 경지 덕분에 술기운을 제압해버린 시드미안과 상관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못마신 스미온과 안토니, 그리고 오랜만에 스트레스를 몽땅 풀고 기분좋게 잠든 다크 뿐이었다. "야 너 괜찮냐?" 입에서 술냄새를 풍기며 팔시온이 말하자 꺼실한 수염을 하고있던 미카엘이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르며 투덜거렸다. "말도 마라... 골이 깨지는 것 같다." 이들의 하는 짓거리를 보고있던 가스톤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작작 마시라니까..." 그러자 미카엘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가스톤도 남의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입에서 술냄새 난다구. 또 술마시는 게절제가 되냐? 오랜만의 술파티인데... 죽기 직전까지 마셔야지. 그건 그렇 고 팔시온." "왜?" "점심 먹을 만한 곳은 있냐?" "있어. 조금 늦은 점심이 되긴 하겠지만 작은 마을이 있더라. 거기서 얻어먹 지 뭐. 안주면 거기서 해먹어도 되고." "설마... 그정도까지 인심이 안좋으려고.." 그들이 마을에 도착한 것은 팔시온의 말 대로 점심시간도 한참 지나서였다. 그곳에서 인심 좋은 시골여자를 만나 일행은 배불리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 었다. 물론 돈을 지불하기는 했지만... 빵을 억지로 씹어 삼키고는 뜨끈한 돼지고기가 들어간 야채스프를 들이키고 난 후 모두들 그런대로 얼굴 표정이 그런대로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때 음식 을 날라준 시골여자가 집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미카엘이 투덜거렸다. "제길... 조금 더 얼큰하게 끓였으면 더 좋았을건데..." 그러자 미디아가 곧장 반박했다. "이런 산골짜기에서 고춧가루 구하기가 어디 쉬운줄 알아? 여기서는 재배가 잘 안되니까 귀한거야." "하기야..." 미카엘은 미디아의 말에 수긍하면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병을 하나 꺼 내서는 그 가루를 스프에 조금 뿌렸다. 그 독특한 향기.... 후추(pepper)였 다. "이봐, 나도 좀 줘." 팔시온이 말했지만 미카엘의 작은 후추병은 재빨리 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 갔다. "헛소리 하지마. 이게 얼마나 비싼건데..." 미카엘이 질색을 하는 이유도 있었다. 고추는 왠만한 기후 조건에서도 재배 가 되지만 후추는 열대지방에서만 재배된다. 하지만 인구는 대부분이 열대지 방 보다는 온대지방에 더 많았고 또 강대한 제국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타이렌 왕국의 경우 생산지와 소비지의 불일치를 이용해서 후추를 독점함으로 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 타이렌이라는 망할놈의 국가가 존재함으 로 인해 후추가격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쌌던 것이다. 그래도 요즘은 좀 가격이 많이 내린 편이지만 예전에는 거의 동일한 무게의 황금과 맞바꿔질 정도로 비쌌던 때도 있었다. 어쨋든 돼지고기의 그 독특한 냄새를 없애는 데 는 후추만한 것도 없었고, 멧돼지 같이 맛은 있지만 냄새가 더 고약한 놈은 후추가 필수였다. "제길... 겨우 후추가지고 정말 그럴래?" "후루룩... 내것을 내가 안주겠다는데 왜 그리 잔소리가 많아. 꼽으면 너도 가지고다니라구." 미카엘이 약을 올리자 팔시온이 미카엘을 덮쳤고 곧이어 둘은 겨우 후추병 하나를 놔두고 드잡이질을 시작했다. 그들이 티걱거리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하는 짓거리를 한참 보고있던 그들 중 한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꽤나 유쾌한 패거리군." 그의 말에 뒤에 서있던 인물들 중의 한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시작할까요?" "아니야... 나중에 하지. 여기는 지형이 안좋아서 타이탄을 사용하기는 별로 야. 이 산맥을 통과한 후에 하기로 하자." "너무 늦지 않을까요?" "아니야. 이런 산길에서 저놈들이 도망치면 잡기도 어려워. 일단 평지로 나 가면 그때 타이탄을 불러내서 시작하기로 하지." "예." "또 놈들 중에 마스터급이 있다고 하니까... 어쨋든 만약에 그놈이 타이탄이 없다면 무슨일이 있더라도 이 기회에 죽여버려야 한다. 그렇기에 산속이라면 추격 자체가 불가능해. 그러니까 지시가 있을때까지 멀찍이서 추격만 하기로 하자." "알겠습니다." * * * 프로토타입 청기사의 거대한 몸체가 들수많은 쇠사슬에연결되어 들리기 시 작했다. 청기사의 몸체에는 구석구석에 대마법주문들이 기록되어 특이한 아름 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천천히 올려 이새끼들아..." 청기사의 거대한 몸이 완전히 들려진 후 청기사는 천천히 눕혀졌고 그 위에 기술자들이 달라붙어서는 청기사의 몸체 위에 미스릴을 녹인 액체를 부어서 두껍게 코팅을 시작했다. 한쪽이 모두 다 끝나면 약간씩 청기사의 몸을 돌리 면서 그 작업은 계속되었다. 청기사의 몸체 전체에 미스릴을 입히는 작업은 무려 이틀에 걸쳐 계속되었다. 청기사의 본체가완성되자 이제는 페인트공들이 달라붙어서는 매끄럽게 조금 짙은 푸른색 페인트를 세심하게 칠하기 시작했으며 그 작업도 저녘때에 이르 러는 끝났다. 이제 청기사를 만드는 공정은 끝에 다다라 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청기사의 조립이 시작되었다. 손, 발, 요부(腰部;허리), 흉부(胸部;가슴), 견부(肩部;어깨)에 마련되어 있던 요철부위에 이미 미스릴 을 입힌 후 페인트까지 세심히 칠해서 준비해 뒀던 1차장갑이 부착되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 작업과 함께 청기사의 흉부 2차장갑이 부착되었다. 그리고는 그게떨어지지 않도록 확실하게 처리했다. 그런 후에야 이제 가장 두꺼운 타 이탄의 갑옷인 2차장갑과 흉부 3차장갑을 입히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보통의 타이탄은 흉부라도 조금 두껍기는 하지만 2차장갑을 붙이는 것으로 끝내지만 청기사는 3차장갑까지 입혔던 것이다. 그날 저녘 늦게서야 그들은 모든 장갑판들을 청기사에 부착시키는데 성공했 고 그때 궁정 제1마법사 토지에르 경이 등장했다. 그는 청기사의 왼손에는 거 대한 방패가, 오른손에는 3.6m에 이르는 엄청난 장검이 장착된 다음, 청기사 의 위로 올라갔다. 청기사의 머리는 뒤로 제껴진 상태였기에 토지에르 경은 손쉽게 청기사의 조종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청기사 위에 놓여진 좌 석에는 앉지 않고 그냥 선 채로 손을 앞으로 뻗고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그대 위대한 힘을 간직하고 있는 자여, 그대에게 새로운 몸이 주어졌으 니 이제 잠에서 깨어, 이 세상을 오만하게 굽어보며 그 위대한 힘을 자랑하여 보라." 그와 동시에 엑스시온에 희미하지만 영롱한 빛이 뿜어나오기 시작했고 토지 에르 경은 재빨리 프로토타입 청기사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두부를 원상복귀시키고 청기사 주변에 있는 모든 철 구조물을 치워라." "예. 야. 모두들 빨리 움직여라. 이봐. 그 사다리 빨리 치워. 머리에 감긴 사슬 천천히 내려 이새끼들아. 살살... 그렇지." 청기사의 머리가 닫힌 후 쇠사슬까지 완전히 제거되자 토지에르 경이 기술자 들의 우두머리에게 말했다. "자네 밑에사람 부리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군. 나는 완전히 조립이 끝나려면 내일 점심때가 넘어서야 가능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는 상급자의 칭찬에 입이 귀있는 곳 까지 찢어졌다. "감사합니다. 토지에르 경." 토지에르 경은 품속에서 제법 묵직해 보이는 가죽주머니를 그 남자에게 건네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모두들 함께 술이라도 한잔 하게나. 청기사의 프로토타 입이 완성된 데 대한 폐하의 기쁨의 표시라 생각하고 오늘은 모두들 코가 삐 뚤어지게 마셔보게." "감사합니다. 토지에르 경." * * * 평지에서는 그런대로 따라왔지만 험난한 산길을 통과하게 되자 라나가 드디 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런 여행을 감당할 만큼 체력이 따라와 주지 못했던 것이다. "팔시온... 발아파요. 좀 쉬었다가 가요." 험한 산길이 되어놔서 말을 탈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짐만 적당히 실은 후 끌 고 다녀야 하는데 조금만 걸으면 '발아파요'였고 약간만 강행군을 하면 얼굴 색이 하얘지면서 뒤로 넘어갔다. 그야말로 체력에 있어서는 완전 꽝이었던 것 이다. 그렇다 보니 이 짐덩어리로 인해 시간은 더욱 지체되고 있었고 모두들 곱지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거기다 약간만 험한 일을 시키면 연약한 여자가 어쩌구 해대면서 반항하고... 심지어는설걷이조 차 안하려고 드니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말이다. "제길... 그때 꽁꽁 묶어서 병사들 편에 보내버리는 건데..." 시드미안의 투덜거림에 팔시온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기에 제가 보내자고 했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중간에 도망쳐서 또 따라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아." "어쨋건 이왕에 데리고 왔으니 일단 이 산맥을 넘어야지요. 놈들의 흔적으로 봤을때는 아무래도 토리아 왕국쪽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토리아와는 사이가 안좋기에 좀 조심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흐음... 토리아의 국경요새를 거치지 않고 들어가는 길은 없나?" "몇군데 있습니다. 사실 그 많은 곳을 다 지킨다는 건 무리니까요. 요새들이 건설된 곳은 많은 군사들이 통과할 만한 넓직한 산길들이죠. 좀 길은 험하더 라도 돌아가면 길은 많습니다." "좋아. 제일 안전한 곳으로 부탁하네." "하지만 라나가 따라올 수 있을지..." 그러면서 둘은 저 뒤에서 말등에서 위태위태하게 중심을 잡고있는 소녀를 쳐 다봤다. 이렇게 험한 산길에서까지 말에 타야만 하는 짐덩어리라니... * * * 미온지에 폰 크로마스는 자신이 데리고 온 수련마법사가 그런대로 넓직한 곳 이 나오자 그곳에다 책을 보면서 마법진을 그리는 걸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마법사라고 불리는 인물들은 지금 모두들 청기사 제작에 참여하고 있 었기에 그나마 4싸이클급이라도 할당받은게 다행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보통 마법사들과 함께 다녔던 과거로 미루어 봤을 때 하는 짓이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다 끝났습니다. 크로마스 경." 큼직한 마법진의 중간에다가 수정구슬을 놓은 후에 주문을 외워 마법진을 가 동시킨다음 수련마법사가 크로마스에게 알렸다. 크로마스는 수정구슬에 다가 가서는 말했다. "토지에르 경!" 그러자 수정구슬에 노마법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예정시간 보다 좀 늦었군." 크로마스는 특별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관계로 연락을 위해 수련마법사를 할 당받았고 언제나 연락시간은 저녘 9시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산길이다 보니 넓직한 공터를 찾기 힘들어서 오늘은 약간 늦은 것이다. "예. 그런데 혹시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까?" "있네. 이건 트루비아에서 나온 정보인데... 시드미안이 트루비아 국왕에게 보낸 전갈에 따르면 지금 그와 함께 행동하는 인물들은 단순한 모험 파티야. 그들의 신상기록에 따르면 무예 수련자 3명, 여자 용병 1명, 3싸이클의 수련 마법사 1명, 모험가 2명이라고 하며 신관 1명과 5싸이클 마법사 1명, 기사 1 명을 데리고 시드미안이 합류한다고 되어있더군. 지금까지는 코린트에서 사람 을 파견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더군. 정보에 따르면 그 후에 국왕이 타이탄 쿠 마 사용 허가서를 시드미안에게 보낸 모양이야. 그걸 보면 아마도 타이탄은 쿠마 1대 뿐인 것 같으니 잘 해보게." "알겠습니다. 힘이 나는 것 같군요. 하하하..." 일단 통신을 끝내고 나서 수련마법사가 마법진을 지우고 있는 사이 기사들은 모여서 공격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일단 놈들의 이동속도는 형편없으니까 자네는 뒤에서 자네는 오른쪽, 자네 는 왼쪽, 나는 앞으로 간다. 공격시간은 2일 후 놈들이 평원에 나간 후다. 공 격개시 시간은 오전 10시. 놈들로부터 10킬로 밖에서 쿠마를 불러내어 탑승한 후 돌격해 들어간다. 알겠나?" "예." "사방에서 포위하며 압박해 들어가야 하니까 시간을 철저히 지켜야만 한다." "예." "일단 지금까지의 정보로는 놈들의 타이탄은 1대다. 하지만 그 정보가 틀릴 수도 있으니 두 대의 타이탄이 나타나면 무조건 후퇴한다. 알겠나?" "예." "먼저 세대는 쿠마를 공격하고 자네는 검은색 옷을 입은 검사가 있으니 그놈 을 공격해라. 딴놈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우선 그놈부터 죽이고 난 후 다른놈들을 죽여라. 모두 다 죽이고 난 후 우리와 합류해서 함께 쿠마를 요리 하기로 하지." "명심하겠습니다." * * * 근 14일을 소비해서야 시드미안 경 일행은 산맥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토리아 왕국에 들어서게 되었으므로 대단히 조심해서 이동해야만 했다. 산맥을 사이에 둔 토리아 왕국은 트루비아 왕국보다는 덩치가 훨씬 더 큰 왕국이었다. 하지만 그 둘의 사이에는 거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기에 토리아에서는 트루비아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아주 어려웠다. 또 트루비아도 토리아의 이런 약점을 이용해 약소국임에도 불구하고 빡세게 나갔으므로 사이 가 아주 안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토리아 왕국인데... 혹시, 토리아에서 꾸민 짓이 아닐까요?" "흠...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앞으로 행동 조심하게. 트루비아 사람이란게 들키면 무슨 봉변을 당할 지 모르니까." 팔시온의 말에 시드미안 경은 침착하게 대꾸한 후 일행을 지휘해 계속 이동 을 시작했다. 시드미안 경은 보통 남자들이 그러하듯 콧수염만 짧게 길렀지만 여행을 시작하면서 한번도 면도를 안했기에 수염이 덮수룩하게 자라 만약 자 신을 예전에 만났던 인물이라도 얼핏 보면 알아보기 힘든 형상을 하고 있었 다. 평지에 도착한 후 이틀째가 되자 시드미안 경은 팔시온에게 물었다. "언제쯤 인가가 나올까?" "국경 근처 마을은 경비가 삼엄하기 때문에 돌아왔으니까 아마도 한 3일정도 더 가야 할겁니다." "삼일이라... 어?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야?" 아주 약한 쿵쿵거리는 소리와 미세한 땅의 진동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라뇨? 아무것도..." 하지만 시드미안 경의 말과 동시에 안토니 크로와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 다. 하지만 시드미안 경은 안토니의 주문이 끝나기를 기다려줄 입장이 아니었 다. 이런 땅을 울리는 진동음은 타이탄 외에는 내지 못한다. 그것도 한두대가 아니었다. 입으로 외치지는 않았지만 시드미안 경의 마음과 연결된 타이탄 쿠마가 공간 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시드미안 경은 쿠마의 머리통이 위로 들리는 것을 보면서 안토니에게 외쳤다. "모두들 조심해. 이거 타이탄이 한두대가 아니야." 그런다음 쿠마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후 윗쪽에 마련된 좌석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위로 올려졌던 머리가 다시 아래로 내려왔고 좌석의 앞쪽으로 밀려있 던 철 구조물이 시드미안 경의 몸쪽으로 바짝 붙으면서 안전벨트 역할을 했 다. 시드미안 경은 쿠마의 머리에 뚫려있는 여러개의 구멍들로 밖을 바라봤 다. 역시 자신의 위치가 5미터나 높아진 만큼 더 멀리까지 보였다. "으음..." 시드미안 경은 사방에서 달려오고 있는 네 대의 타이탄을 보면서 신음을 흘 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사들은 일제히 자신이 알고있는 최고의 공격마법을 외우기 시작했고 로 니에 사제는 각 무사들의 검에 마법을 걸어준 후 그 다음부터는 샤이하드의 축복을 내리기 시작했다. 축복을 받으면 어느정도 두려운 마음이 가라앉고 방 어력이 상승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타이탄의 한방에 맞았을 때 그게 과연 효과 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명의 신관 라나는 사방에서 달려오는 거대한 타이탄을 보고는 완전히 두려움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고 난리였지만 그녀는 신관이었기에 샤이하드의 축복이 아예 통하지 않았다. 샤이하드는 다 른 신을 받드는 자에게는 힘을 내려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드미안은 사방에서 네 대가 달려오며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을 보고 경악해 서 중얼거렸다. "로메로급이 네 대나... 하지만 로메로 급은 토리아 왕국에는 없을텐데?" 로메로급 타이탄은 마도왕국 알카사스에서 총 242대나 생산된 대단히 우수한 타이탄이다. 알카사스에서 생산해서 과거에는 주력 타이탄으로 사용했었지만 그게 노리에급으로 대체되면서 모두 다 외국에 수출해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거의 상당수의 국가들이 약간씩 가지고 있었다. 로메로에 미스릴은 상당히 얇 게 입혔지만 입히기는 입혔다. 그리고 높이 4.6미터인 작은 체구에 출력이 1.0배 짜리나 되는 엑스시온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높이도 표준보다 조 금 낮고 뼈대도 쓸데없이 두껍게 만들지 않아 아주 가벼운 타이탄이었다. 그 렇다 보니 스피드가 아주 빨라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타이탄들 중의 하나였 다. 거기에 여러나라에서 약간씩 가지고 있는 매우 널리 알려진 타이탄이었기 에 모든 표식이나 문장을 다 지워버린 상대의 타이탄만 보고는 어느나라에서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기가 매우 힘들다는 잇점도 안고 있었다. "최악이군.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선수를 치기로 하지." 드디어 쿠마가 빠른 속도로 한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다른 쪽에서 달려오 던 두 대가 쿠마쪽으로 달려갔고 남은 한 대는 일행들이 모여있는 쪽을 향해 계속 달려왔다. 타이탄들이 가까워지자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 했다. 쿵... 쿵... "흠... 저녀석은 내꺼라 이거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다크가 검을 뽑아들며 뛰어나갔다. 쾅! 쿠마가 검을 내리찍자 로메로는 재빨리 방패로 막았다. 하지만 상대의 무게 가 더욱 무거웠고 또 출력도 좋았다. 거기에 쿠마의 안에 타고 있는 인물은 훨씬 자기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쿠마와 맞부딪친 로메로에 타고 있던 기사는 방패에 힘을 주어 밀치기 보다는 상대가 내리찍는 힘을 이용해 뒤로 빠졌다. 먼지를 흩날리며 뒤로 거대한 로메로가 후퇴하는 걸 보면서 쿠마가 검을 휘 두르며 압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상대는 방패로 재주껏 막기만 할 뿐 반격을 하지 않았다. 이때 쿠마는 양옆에서 두 대의 로메로가 뛰어들어오는 것을 보 고는 뒤로 힘껏 도약했다. 쿵! 쿠마는 거의 15미터 높이로 도약해서 20미터 정도 뒤로 빠져버렸고 뒤로 재 빨리 빠지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로메로 한 대가 휘두른 검이 처음에 쿠마 와 대결하고 있던 로메로의 방패에 직격했다. 쾅! "제길. 저자식은 왜 저렇게 눈치가 느려?" 미온지에 폰 크로마스는 멍청한 부하가 적의 움직임에 속아서는 동료를 공격 하는 걸 보고 기가찰 뿐이었다. 거기에 새로이 자신의 종이 된 로슈토르의 힘 이나 무게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로슈토르의 육 중한 체구를 앞으로 움직이며 외쳤다. "시드미안! 네녀석이 3개월만 늦게 왔어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내 귀염둥이 의 첫 번째 재물로 만들 수 있었는데... 운 좋은 줄 알아라." 상대가 돌진해 들어오자 쿠마는 곧장 거대한 방패를 들어 상대를 가격했다. 그러자 상대도 함께 방패로 맞받아쳤다. 쾅! 무게가 가벼운 상대의 몸이 휘청하는 찰나 쿠마는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옆 에는 또다른 로메로가 검을 휘둘러 오고 있었다. "제길.." 챙! 쿠마는 셋을 상대로 싸우면서 힘겨운 싸움을 전개해 나갔다. 하다못해 둘만 되도 어느정도 이길 가능성이 있을텐데... 거기에 공격을 리드해 나가는 로메 로 한 대의 검술실력은 상당했다. 칼리안은 정말 이렇게 황당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콰콰쾅! 타이탄에 타고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얄팍한 검 한자루 들고 있는 검객의 검 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일때마다 그는 방패로 막기 바빴고 방패에서는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적의 공격력은 엄청나다. 방패가 이미 15%의 손상을 입었다. 반격을 하지 않고 계속 방어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타이탄은 원래가 마법에 의해 만들어진 고렘이란 생명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마물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자아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직접적으로 의사표현 도 가능했다. "제길 알고 있어." 칼리안은 자신의 로메로급 타이탄인 그로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고 민하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놈이 나왔지?' 이때 그의 눈앞이 벌개지면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꽈광! 저쪽에 있는 마법사 중 한명이 제법 강력한 마법을 날린 것이 분명했다. 하 지만... 저따위 약한 마법으로는 대마법주문의 벽을 뚫고 자신의 종에게 상처 를 입힐 수 없었다. 7싸이클 급 이상의 마법이라면 몰라도... <위험하다.> "앗차!" 그가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앞에 있던 놈이 또다시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엄청 난 강기세례를 퍼부었고 그걸 그로스가 직접 움직여 방패로 막은 것이다. "정말 대단해... 하하하... 이정도 엄청난 놈들이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거나 먹어랏!" 또다시 검에서 뿜어져 나가는 퍼런 강기의다발... 하지만 이번 것은 상대도 막기가 약간 난해했다. 왜냐하면 다크가 그 장기인 경공술을 이용해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며 타이탄의 등뒤에서 퍼부었기 때문이다. 순간 그로스는 등을 약간 구부렸다. 그리고 머리 부분도 자신이 숙일 수 있 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구부렸다. 꽝! 다크의 강기세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엄청나게 강한 강철 외피를 뚫고 들 어오지는 못했다. 그와 동시에 그로스가 몸을 뒤로 틀면서 검을 아래로 찍어 내렸다. 펑! 검이 흙속으로 깊게 뚫고 들어갔지만 토막난 시체는 없었다.이미 다크는 옆 으로 비켜선 후 위로 몸을 날린 것이다. 그런 후 약간 흐트러진 상대의 자세 를 알아보고는 그로스의 머리에 강기다발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로스는 재빨 리 방패로 그걸 막았고... 펑! 모든 공격이 통하지 않자 다크는 재빨리 뒤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상대가 그대로 도망치도록 놔둘 정도로 킬리안도 멍청하지는 않았다. 쿵 쿵 쿵 타이탄은 그 엄청난 덩치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그 검객을 향해 돌진해 갔다. 하지만 그 자는 이상하게도 팔시온 일행들로부터 500미터 정도 떨어졌 을까.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상대가 다가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리기 시작했 다. 쿠마는 계속적인 경고를 주인에게 보내고 있었다. <스커트(치마처럼 여러개의 강철판을 붙여 다리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갑판)가 잘려나갔다. 그리고 흉부(가슴부분) 2차장갑도 파괴되었다. 더 이 상 상대와 싸우는 것은 위험하다.> "헛소리 하지말고 싸움에 집중해!" 시드미안 경은 쿠마에게 소리치며 또다시 공격을 퍼붓는 상대의 검을 방패로 밀어내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놈들은 치고빠지는 작전을 계속하며 약간씩 의 타격을 지속적으로 쿠마에게 가하고 있었다. 일대 일이라면 겁날게 없는 놈들이지만... 치고빠지기만을 계속하니 시드미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상처수복에 마나를 보내지 마라." <왜?> "모험을 하겠다." 그와 동시에 쿠마가 그대로 검을 일(一)자로 가로그었다. 그와 동시에 엄청 난 검기가 뿜어져 나오며 상대 로메로들을 덮쳤다. 그들은 재빨리 방패로 검 기를 막았다. 시야가 자신의 방패에 잠시지만 막힌 것이다. 왜냐하면 머리부 분과 가슴부분이 타이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에 그쪽을 우선시 해서 막기 때문이고 또 쿠마의 검기가 때린곳도 상대의 머리쪽이었기 때문이다. 쿠마는 검기를 뿌림과 동시에 재빨리 움직여 시야가 가려진 오른쪽 로메로의 다리를 베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쿠마가 시드미안의 명령을 거부 했다. <위험하다.> 쿠마가 시드미안의 마나를 흡수하며 재빨리 방패로 막자마자 엄청난 진동이 전해졌다. 쿵! <상대가 검기를 사용했다.> "놀랍군. 보통 실력으로는 타이탄에 타고 검기를 구사할 수 없을텐데... 타 이탄에 타고 검기를 뿌리려면 보통때의 마나보다 4배정도가 더 드니까... 저 기 있는 녀석도 엄청난 놈이었군. 제길..." 시드미안은 쿠마를 재빨리 뒤로 후퇴시키며 투덜거렸다. 이때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고 그 소리에 무심결에 뒤로 고개를 돌린 시드미안의 시야에는 뿌연 연 기같은게 로메로 한 대를 덮치는게 보였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던 다크는 자신을 향해 검을 들고 달려드는 타이탄 그로스를 보며 슬쩍 미소를 지으면서 외쳤다. "죽어랏!" 그러면서 검을 그대로 땅에 박아넣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쿠콰콰콰콰... 다크의 기와 대지의 기가 충돌하며무시무시한 기운이 터져나왔다. 칼리안은 공격하고자 했으나 그로스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주인의 생명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로스가 방패로 앞을 막음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강기의 폭풍이 그들 을 덮쳤다. 순식간에 방패가 박살나버렸고 외부 장갑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 다. <2차장갑 파괴, 1차장갑 파괴, 본체에 12%의 손상을 입었다. 이제부터 상처 수복에 들어간다.> "크윽!" 칼리안은 자신의 몸속에서 방대한 마나가 유출되기 시작하는 걸 보고 신음성 을 터뜨렸다. "그만... 상처수복은 필요없다." <너와 엑스시온을 보호하기 위해서 최소한 1차장갑 만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로스는 자신의 주인인 칼리안의 말을 무시하고 상처수복에 전력을 기울이 고 있었다. 이정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 때는 재빨리 타이탄에서 탑승자가 내려야 한다. 안그러면 최악의 경우 타이탄까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칼리안은 움직이지 못했다. 엄청난 마나가 빠져나감으로 인해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상대의 움직임이 거의 멈추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당한 량의 기가 느껴지는 걸 보고 다크는 그대로상대를 향해 강기를 퍼부었다. 쿠쾅! 타이탄의 내부는 주물로 만들어진 본체와 강철판으로 된 1차장갑, 또 그 위 에 더욱 두터운 강철판으로 된 2차장갑이 있다. 그 말은 곧 가장 외부의 2차 장갑은 깨부수기 어렵지만 1차는 그래도 2차보다는 쉽고, 가장 내부인 주물 (鑄物)로 된 본체는 1차 장갑보다 훨씬 약하다는 말이 된다. 그 본체에 강기 가 격중되자 본체부분이 퍽퍽 파이기 시작했다. <이번 공격으로 장갑이 더욱 얇아졌다. 이제 같은곳을 동일한 힘으로 두 번 더 직격당하면 엑스시온이 파괴된다.> 그로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쾅하는 굉음과 함께 또다시 진동이 느껴졌다. <적의 공격력이 수복력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더욱 많은 마나가 필요하다.> "......" 하지만 더 이상 칼리안의 대답은 없었다. 엄청난 마나의 손실로 이미 기절해 버린 것이다. 곧이어 다크는 상대방에게서 더 이상 괴이한 마력이 느껴지지 않음을 느꼈 다. 그로스는 자신의 주인 칼리안의 마나를 더 이상 뽑아내면 죽을 것이라는 걸 알고 엑스시온에 저장된 마력을 상처수복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엑 스시온이 엑스시온으로서 동작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마력(魔力)이 있어야만 한다. 그게 본체를 수복하기 위해 소모되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엑스 시온은 폭주를 시작했고 곧이어 그 생명력을 잃고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린 것 이다. 그 엄청난 광경을 보며 넋을 잃었는지 모두들 움직임이 잠시 중지되었다. 하 지만 곧이어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나게 큰 검이 다크에게 날아왔고 다 크는 재빨리 그걸 피했다. 그 틈을 이용해서 로메로 한 대가 재빨리 다가오더니 파괴되어 쓰러져있는 로메로를 들고는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고 나머지 두 대의 로메로들도 그 뒤 를 따라 엄청난 속도로 도망쳐버렸다. 다크는 상대의 뒤를 추격해볼까 했지만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공포와 긴장으로 굳었던 몸을 풀고있는 걸 보고는 아예 추격을 포기해버렸다. 사실 그정도 강기세례를 퍼붓는다고 그의 공력도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봐, 다친 사람 없나?" 시드미안이 재빨리 쿠마에서 뛰어내리며 일행들에게 다가갔고 일행들은 서로 를 두리번거리더니 말했다.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군요." "저 아이 빼고..." 팔시온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옮긴 인물들은 거품을 물고 쓰러져있는 라나를 볼 수 있었다. "흐음... 별건 아니군. 아마도 공포 때문에 기절한 것 같아. 미디아 양이 라 나의 간호좀 해주겠소? 나는 저녀석의 상처가 너무 심해서 치료를 도와야겠는 데..." 모두들 시드미안 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쿠마가 느지렁 느지렁 걸어다니 며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들을 줏고 있었다. 미디아가 담요를 펴서 라나를 눕힌 후 햇볕이 비치는 방향에 말을 끌어다가 햇빛을 가리고, 수건에 물을 적셔 닦아주고... 그러고 있을 때 안토니 크로와 는 치료마법으로 라나의 원기를 북돋아 주고 있었고 나머지는 식사준비를 한 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들 식사준비를 하는 사이 쿠마는 위에 탑승한 시드미안의 마나를 흡수하 며 자신의 몸에 떨어져 나갔던 조각들을 붙이고 있었다. 스커드의 잘린 부분 을 들고는 그 부분에 딱 맞붙이고 재생해서 매끈하게 연결하고... 또 찢겨지 고 떨어져 나갔던 가슴부분 2차장갑판 조각도... 어쨋든 격투를 통해 놈들이 치고빠지면서 타격을 가했기에 큰 상처는 없었지만 2차장갑이 거의 너덜너덜 해 진것만은 사실이었기에 그 복구에 어느정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대로 쿠마를 공간 저편으로 보내버리면 나중에 복구는 되겠지만 그 시 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릴것이 분명하기에 이렇게 해서 복구를 하는 것이다. 일단 쿠마의 복구를 완료한 시드미안은 천천히 쿠마를 몰고와서 상대가 다크 에게 던졌던 그 검을 잡고는 완전히 가루가 날때까지 박살을 내버렸다. 화풀 이라도 하듯이 검을 부수고 있는 쿠마의 위에 탑승한 시드미안을 향해 미카엘 이 물었다. "화풀이 하시는 중입니까?" 그러자 시드미안이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잘 봤네. 화풀이 하는 중이지. 타이탄의 검은 단 하나야. 처음 엑스시온이 동작하면서 몸에 부착했던 검 한자루. 이걸 내가 가루로 만들어버리면 놈이 나중에 이걸 찾으러 와서는 신경질 머리 끝까지 오르겠지. 어차피 나중에 복 구가 되겠지만 검 한자루 복구하려면 들어가는 마나가 꽤 되거든." "어쨋든 모두 끝났으니까 이리 와서 식사나 하시죠." * * * "작전은 완전히 실패입니다." 미온지에 폰 크로마스의 보고를 들은 토지에르 경은 약간 놀란 듯이 말했다. "놈이 타이탄을 가지고 있었나?" "아닙니다." "그렇다면?" "검하나만 달랑 들고 타이탄 한 대를 완전히 박살을 내 버렸습니다. 가지고 왔으니까 나중에 한번 보시죠. 타이탄은 완전히 죽어버렸고 타고있던 기사는 너무 많은 마나의 상실로 5개월은 정양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흐음... 세상에! 로메로 정도 되는 타이탄을 겨우 검한자루 들고 박살낼 만 한 실력자는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도 마스터급이 강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정도나 될줄은 꿈에도 몰랐습니 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강하더군요." "그렇다면 그자를 없애려면 어느정도 숫자의 타이탄이 필요할까?" "글세요. 그 엄청난 기술을 연속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테니까 10대 정도 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사람 하나 죽이자고 로메로를 10대나 소모한다는 말인가? 그거 말고 딴 방 법을 생각해 봐야지..." "저... 토지에르 경." "왜그러나?" "저는 검만을 써왔기에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만... 상대가 정말 강할 때 힘으로 그를 제압하기는 힘듭니다. 속임수를 쓴다든지 아니면 인질이 나 뭐 딴걸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꼭적과 싸우는데 꼭 검에는 검으로 대결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흐음... 하지만 타이탄을 박살내고, 그 엄청난 파멸의 불꽃을 맞고도 살아 난 놈인데... 어떻게? 그렇다면? 아! 그 방법이 있었군.... 흐흐흐..." 노 마법사의 눈이 점점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그는 곧 큰 소리로 그의 제 자를 불렀다. "다론!" 그러자 조금 지나서 그의 제자가 달려왔다. "예." "나하고 갈데가 있다. 자네도 함께 가겠나? 우리의 가장 강력한 적이 사라지 는 순간을 구경해보는 것도 좋지 않나?" "예. 가겠습니다." * * * 일행들의 여행은 토리아 제국에서 사실상 끝났다. 토리아 제국의 수도가 있 는 갈라파인 평야. 거기서 그 회색옷을 입은 기사들의 흔적은 끝이 나 있었 다. 일행들은 모두들 흩어져서 사방을 돌아다니며 '혹시 회색 갑주를 입은 기 사들과 검은색 가죽갑옷을 입은 젊은이가 함께 가는걸 못봤느냐?'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3일정도가 지난 후에도 그런 자들을 봤다는 인물들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 은 더욱 범위를 넓히며 알아보고 있었고 그 와중에 다크는 잠깐 수도의 마법 사 길드에 들러 혹시나 차원,시간,공간을 함께 거슬러서 이동할 수 있는 방법 이 있는지 물어보러 갔지만 이곳에서도 뾰족한 방법을 제시받지는 못했다. 그 런 후에는 그냥 여관에 박혀있기도 하고 때로는 거리를 산책하러 돌아다니기 도 했다. 팔자좋게도... 하지만 그가 여관에 안있고 거리를 배회하는 진짜 이 유는 따로 있었다. 콩알만한 계집애 하나가 정말이지 꼴보기 싫어서였다. "저기 있군요." "예. 바로 저놈입니다." "좋아. 너는 공간이동 마법을 준비해라. 내가 저놈에게 저주를 걸기로 하 지." "예." 그의 제자가 세명이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동 마법을 외우고 있을 때 노 마법 사는 왼손에 끼고있던 반지를 향해 중얼거렸다. 저주의 주문처럼 장기간 지속 되는 마법인 경우 언제나 마법의 매개물이 필요하다. 그 매개물을 명확히 정 하지 않았을때는 시전자 자신이 되지만 이번 대상의 경우 상당히 위험한 인물 이기에 매개물을 자신의 반지로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마법의 매개물은 상당 한 강도를 가지는게 좋다. 그래야 실수로 그게 부숴져 마법이 풀릴 가능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석종류는 아주 각광받는 여러 가지 마법 의 매개물이었다. ".....이 반지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되어라." 6싸이클에 들어가는 마도사인 그가 제법 시간을 들여 외워놓은 주문은 저 주... 그 저주들 중에서도 꽤나 고위급에 들어가는 저주였다. 이 저주는 걸린 놈들이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자살할 확률이 99%에 이를정도로 뛰어난 위력 을 자랑한다. 왜냐하면 자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않고 몸만 깨끗하게 바꿔 버리기에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버린 자신을 용납할 수 있을까? 비통한 나날을 며칠정도 보내다가 절망하여 그대로 자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걸 쓰기만 하면 저 황당할 정도로 강한 놈도 자살의 충동 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잘못 저주에 걸려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한 놈이 될 수도 있는데...(싫어하던 대상이 드래곤이라면...) 이때 는 살기위해서 죽자고 도망다녀야 하는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가 상대가 뭐가 될지도 모르는 불명확한 저주라는 방법을 택했느냐 하면 그 상대를 죽일 방법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제자가 모든 주문을 다 외운 후 고개를 까딱거려 신호를 하자 노마법 사는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놈을 향해 시동어를 외쳤다. "디스라이크(dislike)!" 노 마법사가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반지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리고 그와 동시에 저쪽에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던 다크의 몸에서도 빛이 났 다. 다크는 자신의 몸에서 빛이 나오는 걸 느낌과 동시에 기가 느껴지는 곳으 로 몸을 날렸다. 방금 전에는 막대한 기는 느껴졌지만, 그 어떤 살기도 느껴 지지 않았기에 모른척 했던 것인데 그게 지금 엄청나게 후회스러웠다. 막대한 속도로 다크가 뛰어오는 걸 본 다론은 재빨리 시동어를 외쳤다. "워프!" 그들은 겨우 1-2초 정도 주문이 발동되는 시간이 그렇게 느리게 느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대와의 거리가 순간적으로 좁혀지는 그때 갑자기 상대 의 속도가 눈에띄게 느려지는 것이 보였고 그 순간 그들은 공간 저편으로 사 라져버렸다. 적당히 땅위에 그려놓은 마법진이 갑자기 엷은 빛을 띄기 시작하더니 세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간이동 마법은 대단히 위험한 마법이다. 이동위치는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지만 만약 그 높이 설정에 실패하면 곧바로 땅바닥이나 나무 에 끼여서 사망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대부분 공간이동을 할 때는 반대편에 높이설정을 해주는 마법진을 그려두던지 아니면 아예 끼일 위험성이 없는 하늘 위로 워프해서 거기서 비행주문을 외우는 것이 통상적인 방법이었 다. 어쨋든 토지에르 일행은 워프에 성공해서 나타났고 토지에르는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걸 본 크로마스가 말했다. "성공한 것 같습니까? 저는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아무래도 성공한 것 같네. 자네도 그걸 봤겠지? 놈의 속도가 나중에 급속도 로 느려지기 시작하는걸 말일세." "예." "그 밝은 빛 때문에 뭐로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이건 확실해. 놈은 지금 상태보다 훨씬 더 약해졌어. 그건 우리쪽으로 돌진해오던 속도가 눈에띄 게 줄어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일단은 성공 했으니 이제 돌아가세... 다 론!" "예. 스승님." "돌아갈 준비를 해라." "예." 다론은 커다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왕궁에 있는 거대한 이 동 마법진을 향해 장거리 워프를 하기 위해서는 쓸데없이 마나를 움직이고 주 문외운다고 시간을 소모하는 것 보다는 초대형 마법진이 최고였다. 대강 그려 놓으면 나중에 바람한번 불고나면 그 흔적은 사라질 것이고, 또 마법진이 발 견되었다 하더라도 주문을 알지 못한다면 어디로 갔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야 말로 이동에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쓱쓱 제자가 마법진을 그리는 걸 보면서 토지에르가 크로마스에게 말했다. "우리 나라에도 저런 이동 마법진 체계를 만들어야겠어. 좀 힘은 많이 들겠지 만..." "돈이 많이 들텐데요. 지금 전 국토에 이동마법진을 깔아놓은 국가는 마도왕 국 알카사스 뿐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나중에 전쟁이 시작되면 간이 마법진이라도 만들어 둬야 만일의 사태 가 일어났을 때 대비가 되지. 저 옛날 코린트가 습격해왔을때도 이동마법진만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거야."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론이 노 마법사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다 끝났습니다. 스승님." 그들은 마법진의 중앙으로 걸어가서 위치했고 곧이어 다론의 주문에 의해 마 법진이 발동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사물이 뿌옅게 흐려지면서 곧이어 시커 멓게 바뀌었다. 그 순간 토지에르경은 자신의 손까락에 끼고있던 그 반지를 벗어서 던져버렸다. 공간과 공간의 틈속에 던져진 이 반지는 무슨 수단과 방 법을 써도 찾기는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토지에르 경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 * *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것도 이상했고, 온 몸에 힘이 없는것도 이상했다. 그리고 허리에 걸린 그 얄팍한 샤벨이 이렇게 무겁다는 것도 이상했다. 하여튼 아까 몸에서 빛이 난 이후로 모든 것이 이상할 뿐이었다. 이때 문득 다크는 자신의 소매가 손목이 아닌 저 밑에까지 내려와 있다는 걸 느꼈다. 손을 들어보자 자그마한 손이 소매속에 가려있는게 보였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잘 맞던 옷이었는데... 문득 이상함을 느낀 다크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봤다. 확실히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느낌뿐인 것 같기도 하고. 몸위로 손이 지나가는 감각이 오는걸 보면 몸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이때 문득 그의 손에 뭉클하고 큼직한 살덩어리가 만져졌다. 그와 함께 다크는 경악해서 여관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 달려가 는 거지 아무리 꽁지빠지게 힘을 써도 속도는 나지 않았다. 온 몸에서 기라고 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70년을 수련해서 모았던 기가 일순간에 사라진 것 이다. 곧이어 숨이 턱에 차기 시작했고 몸 곳곳에서 산소를 원하는 아우성소 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헉... 헉... 헉..." 지금 여관에 남아있는 사람은 마법사들과 라나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이라면 지금 왜 자신읨 몸이 이렇게 바뀌었는지 알려줄지도 몰랐다. 쿵! 갑자기 라나가 문을 박살낼 듯 열고 들어와서는 숨을 헐떡거리는 걸 보고 가 스톤은 놀라서 말했다. "왜그러니? 놈들을 봤냐?" "헉헉헉...헉..."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있는 라나를 보다가 가스톤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 다. 라나가 다크의 옷에 다크의 검을 차고 있었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봐요. 가스톤... 갑자기 산책하다가 내 몸이 이상해진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좀 해줘요." "산책하다가 무슨 일을 당했는데?" "그때 봤던 그 마법사 놈들을 만났는데 이상한 주문을 외웠고 내몸이 이렇게 변하는 사이 도망가버렸다구요." "크하하하하..." 대강 일의 전말을 알아챈 가스톤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무슨 저주같은 걸받은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라나로 되다니... "왜그래요?" 다크가 약간 언성을 높이자 가스톤은 두말하지 않고 저쪽에 있는 거울을 가리 키면서 말했다. "직접 봐봐. 내가 백번 말해봐야 소용없으니까 직접 보라구." "꺅!" 그와 동시에 다크가 쓰러져버렸다. 그러자 가스톤은 가벼운 다크의 몸을 안아 들고는 침대에 눕힌 다음 중얼거렸다. "놀라운 저주야. 육체가 완전히 바뀌었어. 아무리 정신이 강하다 해도 그 충 격을 버틸 수는 없었겠지.... 일이 더럽게 되어가는데..." 저녘때가 되자 수색작업에 나갔던 일행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가스톤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크는?" "지금 자고 있어요. 아마 충격이 컸겠죠." "흐음... 지금 다크의 실력은 어느정도인가?" 그러자 가스톤은 시드미안의 질문에 침중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라나보다는 낫겠죠. 그러니까 지금 어떤 상태인가 하면 검술의 궁극을 강의만 받아서 이론상으로는 완전히 터득하고 있는 어린 여자애와 같다고 보 시면 될겁니다." 그러자 시드미안은 로니에 사제를 향해 물었다. "그 저주를 풀수는 없었습니까?" 로니에사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이미 도착하자마자 자고 있는 다크를 향해 축복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저주를 풀수있다고 배운 모든 신 성마법을 다 실행해보고 내려온 길이었던 것이다. "대단히 고위급의 저주인 모양입니다. 제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니까... 어디 신전에라도 가서 문의를 해보시는게 좋겠더군요." 그러자 저쪽에 앉아있던 스미온이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저... 안토니씨, 다크는 이제 완전히 여자가 된건가요? 아니면 얼굴과 체형 만?" 그러자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띄며 안토니가 대답했다. "아... 그게 궁금한 모양이군. 지금 다크는 완전히 여자야. 원래 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꾸는 트란스포메이션(transformation;변형) 같은 경우 겉모습은 완 전히 바꿀 수 있지만 타고난 성(性)이 바뀔수는 없지. 그러니까 남자가 어떤 여자의 모습으로 트란스포메이션 한다면 겉모습은 그 여자와 같게 되겠지만 성기는 남자의 것이야. 물론 유방이 붙을수도 없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아... 예..." "다른 종으로 바뀐다 해도 그건 변함이 없어. 개구리로 바뀐다 해도 수캐구리 가 되고 닭이면 수탉이 되는거야. 하지만 저주는 다르지. 완전히 성은 물 론... 무엇으로든 바뀐단 말이야. 대신 트란스포메이션이나 마찬가지로 무생 물로는 바뀌지 않아. 즉, 저주를 걸면 사람이 개구라나 뱀 등으로는 바뀔 수 있어도 의자나 탁자로는 바뀔 수 없어. 하지만 완벽한 변환에 있어 저주가 가 장 무서운 거야. 성별까지 완전히 바뀐단 말일세. 대신 저주도 조금 문제가 있는데 이번에 일어난 일처럼 상대가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구. 다크가 갑자기 개구리가 될 수도 있었고, 말, 소, 고브린, 오크, 트롤, 오우거, 늑대 등 뭐든지 될 수가 있었지.알겠나?" "헤... 재미있군요. 그 저주란 거 배우기 어려운 건가요?" "저주의 주문은 대표적인 흑마법이지. 흑마술을 익히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 지. 악마를 불러내기가 힘들지만 일단 불러내기만 한다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 지. 그놈에게 영혼만 팔면 되니까 한번 생각 있으면 시도해 보게나." "에엑! 싫다구요." 이때 다크는 침대에 멍청하게 앉아있었다. 잠시 기절했다가 그게 잠으로 연결 되었지만... 사람이 낮잠을 몇시간이나 계속 잘수는 없었기에 잠에서 깬 것이 다. 나중에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쨋든 이렇게 형편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다크는 여자로 바뀌면 서 자신이 평생 이룩한 모든 것을 잃었다. 70년 동안 쌓았던 그 막강했던 내 공과 환골탈태를 거치면서 다져진 육신을.... 다크는 허리에 찬 샤벨을 천천히 뽑았다. 여자용 검 샤벨... 처음 이곳에서 여행을 떠났을 때 여강도로부터 빼앗은 검... 처음 뺏아서 쓸때는 종이장보다 도 가볍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한손으로 들기도 어려울 정도로 묵직한 무 게가 전해져 왔다. 지금의 육체로는 3킬로그램도 너무나도 무거웠던 것이다. "과연 나는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런 나약한 몸으로... 지금은 나한 몸 지킬 힘도 없어... 흑흑..."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정 말이지 다크로서는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이때 미디아가 방안으로 들어오려 고 문을 열었다가 다크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는 살며시 방문을 닫고는 사라 졌다. '실컷 울면 기분이 좀 가라앉을거야.' * * *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 두사람의 닮은꼴은 만나기 싫어도 만날 수밖에 없었 다. "아악... 도대체 저 애는 누구에요? 어쩜 저렇게 나하고 닮을수가 있죠?" 앉아서 일행들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식탁으로 다가오는 다크를 보고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라나... 하지만 곧이어 그녀의 앞에는 그녀와 똑같이 생긴 여자 아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헐렁한 옷을 입고는 생긴것에 어울리지 않는 검을 차고는 털썩 앉으면서 말했다. "닥쳐. 사람 처음보냐?"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가스톤?" 그러자 가스톤이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되긴? 다크가 마법에 걸린 모습이지." "그런데 어떻게 마법에 걸리면 내 모습하고 똑 같은 거에요?" "그러니까... 그게..." 가스톤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어쨋든 저주를 받고는 저모양이 되었으니 다 크가 저모습이 된 것은 결코 좋은 뜻은 아니었다. 축복을 받고 저렇게 바뀌었 다면 몰라도... 하여튼 뱀이나 개구리... 또는 지독한 병이 든 사람 따위가 되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긴 했지만... 하여튼 라나에게 곧이곧대로 사정을 말 해줄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하긴... 다크는 평상시에도 라나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귀찮게 생각했 고, 또 막대해 왔으니까... 저게 최악의 저주가 될지도... 어쩌면 함께 있으 니까 더 싫어했는지도 모르지. 나도 저 라나란 애는 별로인데...' "어쨋든 밥먹고 나서 다크의 몸에 맞는 옷을 좀 사야겠어. 저렇게 큰 옷을 입 고 다닐수는 없잖아. 안그래? 미디아." "알았어요. 내가 데리고 가서 옷을 사입히죠." 미디아와 함께 걷고있는 다크를 모든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엄청나게 큰 헐렁한 옷에 허리에는 검까지 차고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얼굴은 예쁘지만 반쯤 미친 여자앤줄 알았던 것이다. "뭘 찾으십니까?" 상인특유의 느글거리는 미소를 피워올리며 옷가게 주인이 말했다. "저 아이한테 맞는 옷." 그러자 다크가 예쁜 눈동자를 날카롭게 만들며 첨가했다. "남자옷!" 미디아는 다크를 잠시 바라봤다. 아무리 알맹이는 그래도 껍데기는 귀여운 여 자아인데 남자옷을 입혀도 될까? 하는 걱정과 또 다크에게 여자옷을 입히는게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서 미디아는 막무가내로 말했다. "어떤게 저애한테 맞는 여.자.옷이죠?" 그러자 주인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소녀를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저기 있는 옷들이에요." 미디아는그것들 중에서 예쁜거 한벌을 들고는 반항하는 다크를 끌고 옷갈아 입는 곳으로 갔다. 계속 다크가 옷을 벗지 않으려고 반항하자 미디아가 다크 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계속 반항하면 기절시킨 다음에 벗긴다." 그러자 다크의 저항이 멈췄다. 사실 지금 자신의 힘으로는 반항이나 조금 할 수 있을까 용병으로서 다져진 미디아와 격투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분노를 머금은 눈으로 쏘아보는 다크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미디아는 재미있는 듯 미 소를 지어보이며 다크의 옷을 모두 다 벗겨버렸고, 속옷부터 착실하게 입히기 시작했다. 어쨋든 이래서 힘이 없는자는 서럽다니까... 예쁜 치마와 브라우스를 걸친 다크를 데리고 나오는 미디아의 손에는 여섯벌 의 각종 옷들과 여자용 속옷들이 들어있었다. 어쨋든 여행을 하다보면 세탁을 하기도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속옷은 여러벌이 있어야 했다. 미디아는 옷 집에서 나오면서 이전에 다크가 입었던 옷들은 모두 다 쓰레기통에다가 집어 넣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크를 끌고 나왔다. "제길... 두고보자." 분한 듯이 다크가 그 커다란 눈으로 쏘아보며 말하자 미디아가 웃음을 터뜨리 며 말했다. "호호호... 두고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은 하나도 없더라. 어쨋든 거기 보면 여자용 여행복도 두벌 넣었으니까 돌아가서 그걸로 갈아입고 한번 비무 라도 해볼래? 자신의 실력을 알고있는 것도 중요하니까 말이야." "좋아." 둘은 서둘러서 여관으로 돌아간 다음 준비를 갖췄다. 미디아는 먼저 뒷뜰에 나가서 다크가 나오기를 기다렸고 곧이어 간편한 여행복으로 갈아입은 다크가 나왔다. 무릎 위까지 오는 가죽 반바지와 그 위에 무릎 약간 아래까지 오는 스커트를 입어 그 가죽반바지를 가리는 것이 보통 여자용 여행복의 하의였다. 왜 스커트만 입는게 아니라 그 안에 반바지가 들어가냐 하면 말을 타는데 맨 살로 탔다가 잘못하면 가죽(?) 벗겨지는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쨋든 그 상태로 내려와서는 다크는 일단 샤벨을 쭉 뽑았다. 그걸 보고 미디 아도 내로우 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런다음 둘은 즉시 공격을 시작했다. 처음 에 미디아는 겨우 저 체구로... 하는 마음으로 처음에는 큰 공격을 했지만 다 크가 살짝 피하면서 반격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큰 상처를 입을 뻔 했다. 몸이 야 엉망이라도 예전의 그 엄청났던 기술은 남아있는 것이다. 그걸 느낌과 동시에 미디아는 예전에 자기가 검을 처음 배우던 때 사용했던 무식한 검법... 즉 '마구 휘두르기'검법을 사용했다. 저런 한수 하는 자들은 보통 카운터를 노리기 마련... 어쨋든 힘은 형편없지만 기술이 엄청난 자를 상대하는 최고의 방법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마구잡이로 사방으로 쉴새없이 들어오는 공격에 다크는 계속 뒤로 밀렸다. 반 격을 하려고 해도 재빨리 상대의 빈틈으로 찔러넣을 근력도 없었다. 상대가 큰 기술을 써서 빈틈이 크다면 어느정도 가능성이라도 있는데 얄팍한 기술로 연속공격을 퍼부어대니 그걸 막는것만 해도 벅찼고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비무는 5분 정도 더 지속되다가 다크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검을 떨어뜨리 는 것으로 끝났고 다크는 신경질 머리끝까지 올라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버렸 다. 자신이 생각해도 겨우 자신의 몸이 그것밖에 안된다는 것에 절망감밖에 남지 않았으리라... 지금 이상태라면 복수는 커녕 지금의 라나처럼 짐밖에 안 되는 처지였다. 다크는 미디아에게 박살난 후 가스톤과 마법에 대해 쑥덕거리면서 본격적으로 고대에 개발된 마법을 위한 언어인 룬 언어 학습에 들어갔다. 어쩌면 이놈의 저주란 걸 자신이 마법을 익혀 부술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에서 였다. 하지 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었다. 전에 썼던 마법은 다크가 천재라서 가 능했었던게 아니라 북명신공의 도움으로 만든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룬 언어 단어나 몇 개 외울 수 있었을까 하나도 보탬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한 두세시간 시험삼아 열심히 해보던 다크는 그것마저 때려치우고 말았다. 점심때가 되자 그들은 식사하러 식당에 갔고 조금 지나자 급사인 여자아이가 주문받은음식을 가져와서 각자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첫 번째 왔을때는 음 식만 놓고간 후 두 번째는 반주로 시킨 술을 가져왔는데 그것들을 쭉 나눠주 다가 말했다. "이... 갈렛슈는 누가 시킨 거에요?" "내가..." 그 대답을 한 사람을 급사는 기가막혀서 바라봤다. 예쁜 옷을 입고있는 아직 솜털도 못벗은게 확실한 예쁜 계집아이가 그 독한 술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갈렛슈는 토리아에서 생산되는 과실주를 증류한 술로서 알콜 순도가 50%에 달 하는 지독하게 강한 술이다. 어른도 그걸 한병을 못마시는데... 새파란 계집 아이가... "너 몇살이니?" "충분히 나이 먹었으니까 줘." 그러면서 다크는 주위를 둘러보며 원군을 청했다. 그러자 지금현재 다크의 정 신상태를 충분히 감안하고 있는 미디아가 곧장 말했다. "그거 이리 줘." 그러자 그 여자는 미디아에게 술과 잔 1개를 건네준 다음 물러섰다. 그런다음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저쪽 테이블에서 과연 그 꼬마애가 술을 마실것인지 주의깊게 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거 두잔도 못마셔서 인사불성이 될게 확실 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귀찮은 여자가 물러나자 다크는 미디아에게서 술과 잔을 건네받은 후 한 잔 가득 따르기 시작했다. 보통 이 갈렛슈는 큰 잔의 아랫쪽에 얄팍하게 따른 후 조금씩 마시는게 정석인데 그걸 잔 가득히 채우는 걸 보고 미디아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거 억수로 독한 술이야. 그렇게 잔뜩 따르면 안돼!" 다크는 예쁜 얼굴에 단호한 표정을 띄며 말했다. "상관 없어." 그러더니 다크는 그걸 그대로 한모금 꿀꺽 마신 후 잔을 내려놓으며 심하게 기침을 했다. 정말 엄청 독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크는 거기서 지지 않고 또 다시 음주에 도전했고 마침내는 그걸 다 뱃속에 집어넣는데 성공했다. 어차피 그래봐야 한잔이었지만... 귀여운 여자애가 백주대낮에 그 독한 술을 오기로 들이키기 시작하는 걸 보고 식당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그쪽 테이블로 집중 되기 시작했다. '과연 저 한병을 다 마실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 한잔을 깨끗이 비운 후에 다크의 얼굴은 빨갛게 변했다. 일부러 취하자고 마시는 술이니 점잔빼면서 마신것도 아니었고 또 원체 독한 술이라서 그런지 그 술기운을 정신은 모르겠지만 몸이 견뎌내지를 못했다. 두 번째 잔을 마시 기 위해 헛손질을 해대던 다크는 조금 지나서 그대로 오믈렛이 담겨있는 접시 에 얼굴을 박으며 골아떨어져 버렸다. 그걸 본 미디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급히 다크의 얼굴을 오믈렛 접시에서 들어낸 후 얼굴을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 아서는 방으로 안고 올라갔다. 혹시나 저 술을 몽땅 다 마시는 괴력을 발휘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어린 표 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신의 앞에 놓여진 음식을 들기 시작했고 그 꼬마애를 비웃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방에서 내려온 미디아는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런 미디아를 보면서 시드미안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다크는?" "괜찮아요. 그냥 술에 취해 골아떨어진 것 뿐이에요. 침대에 눕혀놓고 내려왔 어요. 아무래도 그 일이 엄청난 충격이었던 모양이에요." 그러자 지미가 미디아의 말에 찬성했다. "당연하죠. 만약 제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아마 미쳐버릴거에요. 내가... 저 런 덩치작은 꼬마애로..." 그러자 모두들 지미와 라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확실히 기사가 되기위해 수련 의 길을 걷고있는 지미의 근육질인 거대한 체구와 근육이라고는 거의 붙어있 지 않은 날씬한 라나의 체구는 좋은 대조가 되었다. 가스톤이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했다. "설마 그렇다고 미치기 까지 하겠어?" "아니에요. 가스톤같은 경우 이해를 못하시겠죠. 마법사니까... 마법이란 것 은 정신력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지 체력이나 근력과는 상관없죠. 하지만 저희들 같은 무사는 다르다구요. 제 체격이 라나처럼 된다면 저는 제 가 가진 갑옷부터 검까지 모두 다 새로 바꿔야 되요. 그걸 휘두를 체력이 없 기 때문이죠. 믿어지지 않는다면 라나 이거 한번 들어볼래?" 그러면서 자신의 허리에 차고있던 롱 소드를 뽑아서 라나에게 건네줬다. 롱 소드는 원래가 한팔로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검이다. 그렇지만 그 길이는 1미터, 폭 5센티, 무게가 자그마치 8킬로그램이 나가는 것이다. 하지 만 롱 소드보다 더한 검도 있는데... 무사들이 한팔로 버틸수 있는 최대무게 를 가정해서 만들어진 배틀 소드(battle sword)가 있다. 이건 무게가 13킬로 그램이 나간다. 아무튼 25킬로그램 정도 나가는 바스타드 소드를 한팔로 휘두 르는 괴물도 있으니 뭐 그에비하면 배틀 소드는 꽤나 무사들 팔의 근력을 생 각해서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 여자가 휘두를 수 있느냐 하면 그게 아니다. 당당한 덩치의 여자용병인 미디아의 경우에도 검은 6킬로그램짜리 내로우 소드(narrow sword;협검;狹劍), 방패는 엄청난 돈을 주고 와이번 비늘로 만든 걸 착용하지 않는가? 거기에다 한술 더떠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다크네라는 마법장갑 까지 끼고 있을 정도니... 그 검을 받아든 라나의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고 무게를 어떻게든 버티려고 용을쓰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다크의 충격을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다 바뀌어버린 것에 대한 충격... 어떤 생리적인 변화는 두 번째로 치고 자신의 단련된 육체가 일순간에 쓸모없는 육체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모두들 동료의 불행에 침울해있자 팔시온이 그걸 없애버리려는 듯이 입을 열 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실 겁니까? 꽤 찾아봤는데도 답이 없는데요. 아무래도 놈들은 의도적으로 여기서 흔적을 지운 것 같은데..." 팔시온의 말에 안토니가 한가지의 의견을 내놓았다. "신전에 알아보면 어떨까요? 지혜의 여신 아데나를 모시는 신전에서 신탁을 들어보면 어느정도 참고가 되지 않을까요?" "글쎄... 어쨋든 그 방법밖에는 없군. 여기 아데나를 모시는 신전이 어디에 있나?" "잠깐 기다려 보세요. 이봐요." 팔시온이 부르자 멧돼지 처럼 생긴 우람한 덩치의 주인이 다가오며 그 생김 새에 어울리지 않게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더 필요하신게 있습니까?" "맥주 두잔 더 주시구... 여기 근처에 아데나를 모시는 신전이 있습니까?" "아. 별로 멀지 않습니다. 그 신전은 수도 내에 있죠." 주인은 맥주 가지러 가버렸고 일행들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주어졌다. 그 들이 아직도 이 근처를 배회하는 이유는 이곳이 사이가 좋지않은 토리아기 때 문이다. 또 다른 작은 도시들에 들어갈때는 문제가 될게 없지만 수도로 들어 가려면 아무래도 성문에서 신원조사가 좀 더 확실할게 뻔하다. "그냥 돌아가면 어떨까요? 샤헨에 가도 아데나 신전은 있잖아요." "안돼. 그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어쨋든 수도에 들어가서 신탁을 받아야 해. 어쩔 수 없이 많이 알려진 우리 일행은 안될테니 팔시온 자네가 좀 해주 겠나?" "저도 국적이 트루비아기 때문에 좀... 참. 미카엘 자네가 가지." "좋아. 자네가 가기 싫다는데 뭐..." "참. 그리고 다크하고 라나도 데려가. 라나야! 너도 여기 아데나 신전을 한 번 구경하고 싶지 않냐?" "예. 좋아요." "그럼, 미디아. 아까는 다크 때문에 외출했지만 지금 보니까 라나도 옷이 별 로 좋지 않은거 같은데 라나옷도 한벌 좀 사주겠나? 그냥 여행하는데는 상관 없지만, 아무래도 신전에 갈건데 신경을 좀 써야지." "그러죠. 가자! 라나." 라나는 좋다고 미디아를 따라나섰고 그들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 던 시드미안이 말했다. "신탁을 받은 후에는 또다시 어디로 여행을 떠나야 할지도 몰라. 그러니 라 나를 여기 떼놓고 가자구." 시드미안의 제안에 팔시온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럴수 있으면 좋겠지만... 하지만 또 따라오다가 그놈들에게 잡히면 누가 책임을 질겁니까?" "아예 못따라오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그러자 안토니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방법이 과격해도 상관없을까요?" "상관없어!" "그럼 기억을 봉인시켜 버리죠. 저는 아직 실력이 모자라서 일부 기억만 봉 인시킬 수는 없습니다. 전체 기억을 봉인해야만 하는데... 그러면 그 아이가 기억이 봉인된 동안 누가 돌봐줄건가요?" "그래! 그방법이 있었군. 기억을 봉인해버린 다음에 아데나 신전에 맏겨버리 면 되겠지. 그럼 그들이 알아서 해줄거야. 물론 한 1년동안은 기억을 되찾아 주지 말라고 부탁도 하면서 말이지." "그게 좋겠군요. 그런데 다크는?" "다크는 당연히 저주 건 놈이 지금 어디있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데리고 가야 지. 그리고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도 물어봐야 할거고... 어쩌면 거기있는 고위사제들은 그걸 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다음날 아침이 되자 미카엘과 그 추종자들, 안토니, 라나, 다크는 토리아의 수도인 크로멜로 향했다. 크로멜은 그들 일행이 묵고있는 작은 지레온 이란 마을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었기에 그날 저녘때면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들이 수도로 떠나기로 합의되자 여러 가지 시골에서는 구하기 힘든 잡다한 것들을 사오라는 빽빽한 글자가 채워진 종이쪽지하고 돈까지 일행들로부터 건네 받았 다. "어디로 가는거에요?" "크로멜로." "그런데 쟤는 왜 데리고 가는거죠?" 다크가 저쪽에서 안토니와 떠들고 있는 라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야 아데나 신전으로 가는 길이니까 인사도 시킬겸 해서 데리고 가는 거 지." 점심때가 가까워졌을 때 그들은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 가려면 약간의 문제가 있다. 시드미안이 국경을 벗어나면서 다크에게 만들어 준 트루비아의 신분 증명서를 이곳 적국에서는 쓸수가 없었기에 전에 다크는 마법사 길드에 갈때는 성벽을 넘어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그정도 힘을 쓸 재주도 없었고 또 그걸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다크는 여자가 되었기에 그 신 분증명서에 써져있는 최소한의 유사점도 찾아볼 수 없는 몰골이 되어있었다. 어쨋든 미카엘은 트루비아 태생이 아닌 자신이나 지미, 라빈은 그대로 신분 증명서를 제시했고 안토니 크로와는 팔시온의 신분 증명서를 써먹었다. 모험 가로서 일자리를 찾으러 왔다는... 그리고 귀여운 두 여자애들은 쌍둥이 자매 로서 숲속에서 만난 하프엘프 고아들이며 그냥 여행에 데리고 다닌다고 소개 했다. 아름다운 금발과 미모 그리고 작은 체구를 보고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신 분이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그들을 통과시켰다. 반쪽짜리 엘프니까 꼭 그 귀의 모양이 엘프를 닮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거기다 예쁘고 갸냘프게 생겼으니 그 말이 사실이겠지 하고 그냥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아데나 신전에 가는데 내가 왜 따라가야 하는 거에요?" "그야 거기도 신전이니까 혹시 저주를 풀 수 있을까 해서지." "그러자고 가는 인원 치고는 너무 많은데요?" "물건도 살게 많고... 또 안토니도 여기 볼일이 있어서 왔고, 라나는 여기 신전을 방문하기 위해서 왔어. 모두들 이유가 있다구. 그러니 따지지 마" 그들이 아데나의 신전에 도착해서 신탁을 받기를 원한다는 전갈을 넣고 한참 기다리자 아름다운 여자 신관이 걸어오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신탁을 받고 싶으시다구요?" "예." "어떤 신탁을?" "신탁을 받고 싶은 것은 세가집니다. 첫째는 사라진 드래곤 하트가 어디로 갔는지. 둘째는 저 아이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물론 시술자를 족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저 아이에게 저주를 건 녀석의 행방이죠." 저주라는 말이 나오자 그 신관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미카엘이 가리킨 방향 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엄청난 덩치의 사내들 틈에 쌍둥이처럼 닮은 여자아이 둘이서있었다. 그 둘을 신관이 찬찬히 살펴보자 곧이어 둘의 차이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한명은 쉴새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색다른 것들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한명은 그냥 무표정하게 가만히 서있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걸 알아챈 다음 그녀는 미카엘에게 불쌍하다는 듯이 말했다. "가엾게도 예쁜 아인데... 눈이 보이지 않는 저주를 받았나요?" 미카엘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럼 벙어리가 되었나요?" 또다시 고개를 가로 젓는 걸 본 여신관은 매우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어떤 저주를 받았나요?" "원래 일행이었던 남자인데 여자애가 됐어요." "예?" 그 신관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간신히 말했다. "모습을 보니 저주라고 할 수도 없겠군요. 어쨋든 600골드." "에? 600골드라니 무슨?" "신탁을 의뢰하셨으니 돈을 주셔야죠. 한건당 200골드에요." "저... 그럼 한가지만 좀 묻겠는데요. 아데나를 모시는 신전은 외국의 딴 신 전들과 연결되어 있나요?" "그건 당연하죠. 외국의 모든 신전들과 연결되어 있죠. 어쨋든 같은 아데나 여신님을 모시고 있으니까요." "그럼 코린트의 드로아 대신전과도 연결되어 있습니까?" "예. 코린트에 있는 드로아 대신전은 아데나 신전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엄청난 규모의 대신전이지요. 그러니 당연히 그쪽과 연락을 안할 수는 없지 요." 그 여사제가 말하자 미카엘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드래곤 하트를 찾는 일은 트루비아 왕실에서 부탁한 겁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드래곤 하트는 코린트에 있는 드로아 대신전에 있던 것을 트루비아 왕실에서 잠시 빌렸던 것이구요. 어쨋든 드래곤 하트가 트루비아 국내에서 없 어졌으니... 트루비아 왕실이 발벗고나서서 그걸 찾고 있는 겁니다. 저희들 이 그 일을 위탁받았는데 그걸 훔쳐간 놈들을 추격하는 중에 일행이 저주를 받는 불상사가 벌어진 거구요. 저기 두리번거리는 저 애가 드로아 대신전에 있었던 견습사제지요. 그러니 공짜로 안될까요?" "저... 그건 제 마음대로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대사제님과 의논을 해 봐야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한참이 지나자 그 사제는 기품있게 보이는 중년여인과 함께왔다. 나이가 꽤 들어보였지만 정말이지 대단한 미녀였다. 미카엘은 그녀가 대사제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무예 수련자 미카엘이라고 합니다." "오... 당신들이 드로아 대신전에서 일을 의뢰받은 사람들인가요?" "예." "드로아 대신전에서 들은 말로는 시드미안 경이 그 책임자라고 하던데..." "그는 얼굴이 너무 알려져서... 적국의 수도로 들어올 수가 없어서 제가 부 하들과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동료의 저주도 풀 수 있다면 더 좋겠구요." "잠깐 저주에 걸린 사람을 볼 수 있을까요?" "다크! 이리 와봐." 맵시있는 여성용 여행복 차림을 한 아름다운 소녀가 그들에게 걸어오는 걸 보고 그녀는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라나... 군요." 미카엘이 히죽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예. 아시는 모양이죠?" "물론 잘 알고있어요. 1년전에 드로아 대신전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봤었 죠. 그런데 어쩌다가?" "모르겠습니다. 저주를 받았는데... 어떤 저주를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 다." "흐음..." 그 대사제는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다크의 머리위에 손을 올리고는 축복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저주의 극성은 축복이었기에 왠만한 싸구려 저주의 경우 축복 한방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복이 끝난 후에도 다크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꽤 고위급 저주에 걸리신 것 같군요. 이런때는 그 시전자가 아니라면 풀 수 없을겁니다. 안되면 그 시전자를 죽이던지, 또는 그 매개물을 찾아야겠죠. 어 쨋든 다크씨의 모습을 보니 드로아 대신전에서 부탁받은 일이란걸 바로 알겠 어요." "저기 라나도 데려왔는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예." "라나! 두리번거리 말고 이리와라." 라나는 재빨리 달려오더니 오랜만에 만난 그 여인에게 처음에는 공손히 인사 를 했다. 하지만 몇분 지나지도 않아 그 여인에게 수다를 떤다고 정신이 없었 다. 한 한시간 정도 여정을 떠들어대는 걸 참으며 듣고있던 안토니가 더 이상 은 시간을 지체하며 참을 수 없었는지 조용히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 다. 그동안 라나는 원체 자신의 수다에 자신이 도취되어 외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주문을 다 외운 안토니가 미카엘 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미카엘이 라나가 도망치지 못하게 꽉 잡았고 그와 동시에 안토니는 재빨리 라나의 머리위에 손을 올리고는 시동어를 외쳤다. "리멤버란스 실(remembrance seal;기억봉인)!" 그와 동시에 안토니의 손이 약한 빛을 뿜었고 또릿하던 라나의 눈동자가 멍 청하게 풀려버렸다. 이걸 보고있던 대사제는 놀라서 외쳤다. "당신들 무슨짓을 하는 겁니까?" 그 말에 안토니는 죄송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사제님도 이 아이가 얼마나 말썽꾸러기인지 아실겁니다. 처음 떠날 때 이 아이를 돌려보내고 떠났는데도 무턱대고 따라오다가 나쁜놈들에게 사로잡혀 있는걸 구출하기도 했죠. 그냥 돌려보낸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기에 기억봉인 을 한겁니다. 저애가 얼마나 말썽을 피웠으면 동료 하나가 저주를 받아서 저 모양이 되었겠습니까? 일단 이 아이를 이상태로 1년만 좀 데리고 계셔주실 수 는 없을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한적으로 기억을 봉인할 수 있는 사람에 게 데리고 가서 드래곤 하트와 우리 파티에 관계된 것들만 모두 없애시던지 요. 적들은 지금 타이탄까지 동원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파티에서 한 명도 안죽었다는게 신기할 정도라구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능력도 없는 라 나를 보호해 줄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대사제께서 우리들의 조치를 이해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가만히 듣고있던 대사제는 그제서야 얼굴 표정을 풀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 아이를 떼놓는데 기억봉인이라는 방법 외에는 길이 없다 면... 대신 나중에 저는 저 아이를 드로아 대신전으로 보내서 좀더 제한적인 기억봉인을 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안그러면 라나가 너무 불쌍하니까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어쨋든 신탁을 받으려면 시간이 좀 많이 걸리는데... 따로 볼일이 있으시면 보고 나중에 오세요." 대신관의 말에 일행은 돌아다니며 부탁받은 물건들을사러다녔다. 또 안토니 는 상처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는 약물인 포션이라든지, 여러 가지 약초, 각 종 광석(鑛石)을 가루낸 것 등을 사러다녔고 나머지 일행들은 옷, 양말, 식 량, 양념류 등 살게 정말 많았다. 하기야 여태껏 여행해 오면서 될 수 있으면 현지조달을 하면서 그런대로 왔지만 대부분이 물가가 비싼 시골지방이었기에 여행에 꼭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대도시에는 각종 물품이 대량으로 공급되므로 아주 저렴한 가격 에 많은 량을 살 수 있었다. 특히나 세련된 디자인의 옷이나 양말 또는 여행 용의 말린 고기포 따위는 시골에서 구하기 힘들다. 특히나 마법에 관계된 물 품이라면 더욱 시골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덩치큰 장정들이 떼거리로 돌아다니며 눈에 힘을주고 거의 협박하다시피 흥 정을 하니 물건도 꽤나 싸게 구입할 수 있었지만... 다만 그들도 한가지 부탁 을 수행함에 있어 문제가 있었다. 뭔고 허니 미디아가 자신은 이까지 오기 귀 찮다고 하며 부탁한 속옷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여자 옷가게 앞에서 30분 정도 서성거리다가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안 에 들어갈 수 없음을 느끼고 다크에게 통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다크도 껍데 기는 어떤지 모르지만 남자였기에 그리로 들어가기를 완강히 거절했기 때문이 다. "제발 좀 들어가서 사주라. 응?" "내가 왜 여자옷을 사러 들어가야 하죠?" "제길! 너도 지금은 여자잖아. 너는 속옷 필요없냐? 너꺼 사는김에 같이 사 면 되잖아." "내껀 미디아가 그때 다섯 벌이나 구입해 줬어요. 더 이상 필요 없다구요." "그럼 그때 왜 자기것은 안사고 네꺼만 사준거냐?" "모르지요. 자기 말로는 그쪽은 디자인이 마음에 안든다고 그러던데... 너무 촌스럽다나 어쨋다나..." "그래도 어쨋든 이까지 왔으니 사기는 사야 할거 아냐?" "그거야 미카엘 사정이죠. 내가 부탁받은건 아니니까..." "제길... 이럴 줄 알았다면 물건을 먼저 사고난 후에 라나의 기억을 봉인하 는건데... 좋아. 여기 써진거 가서 사오면..." "사오면?" "앞으로 설걷이 하지 않아도 된다. 어때?" 미카엘의 미소띈 얼굴을 다크가 예쁜 눈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말도 안돼! 나는 그냥 설걷이 하고 말래." 다크가 끝까지 저항하자 미카엘은 전술을 바꿔 다크의 약점을 찌르기 시작했 다. "좋아. 정그렇게 나오면 나는 너와 완전히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 어.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팔시온과 가스톤을 설득해서 이번 모험 에서 손떼게 만들거야. 그럼 너는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할걸? 어여쁜 여자애 로. 자, 어떻게 할거야?" "제길... 좋아. 대신 설걷이하고... 식사당번까지 빼줘. 좋아요?" "그래 좋다." "쪽지하고 돈내놔요." 그렇게 해서 다크는 진열장에 아름다운 여자옷들을 전시해 놓은 여자옷 전문 점에 혼자 들어가게 되었다. "어서오세요. 어머! 정말 예쁜 아가씨네... 뭘 찾아요?" 상점 안에는 여자들만 13명 정도 우글거리며 여러 가지 물건들을 둘러보고 점원들과 흥정하고 있었다. 다크는 쪽팔림을 무릎쓰고 인사를 건네오는 여자 에게 쪽지를 건네며 말했다. "이거 주세요." "으응? 이거 꽤 고급 속옷인데... 조금만 기다려요." 잠시 후 여자는 속옷들을 가져오며 말했다. "거기 써진 것 들이에요. 그런데 써진 치수 대로라면 아가씨한테는 너무 클 건데...?" "심부름이에요." "아, 예. 12골드 34실버에요." 다크는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는 그걸 들고 나왔다. 그런 다음 상점에 들어가 기 전에 놔뒀던 짐들이 몽땅 없어진 걸 보고 두리번 거리자, 그것들이 지미와 라빈의 짐더미 속에 함께 들어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짐 내놔." 사실 다크는 별로 짐을 잘 지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여자로 변한 후에 는 남자들이 일부러 자신에게 짐을 안주는 것을 느끼고 오기로 자청해서 지고 다녔던 것이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무거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고있었다. "너는 그거만 들어. 괜히 힘없는 여자애 부려먹는다고 딴사람들이 욕할거 아 냐?" "제길..." 미카엘 일행이 낑낑거리며 짐을 가져와서는 아데나 신전에 맏겨뒀던 말들에 짐을 싣고 난 후 신탁 내용을 듣기위해 신전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물음이 사라진 드래곤 하트의 행방이라고 하셨죠?" "예." "신탁에 따르면 푸른색 괴물이라고 하더군요. 두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답이 없데요. 그냥 통상적인 저주를 푸는 방법뿐... 세 번째 물음이 저 아이에게 저주를 건 마법사의 행방이죠?" "예." "거대한 건물에 있다는 군요. 그 건물이 뭔지는 모르겠어요. 큰 기둥들이 세 워진걸 보면... 이게 신전인지도... 어쨋든 사제의 말을 토대로 그 둘을 그림 으로 그렸어요. 그러니 그걸 보시면 참고가 좀 되실지도..." 미카엘은 달랑 두장의 그림만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두 그 림 다 그냥 대강 그려진 것이었기에 뭐가뭔지 알아보기가 매우 어려웠다. 한 장의 그림은 정말 괴물이었다. 거대한 머리통만 봐가지고는 뭔지 알수가 있 나? "떠그랄... 이게 뭐야?" 같이 그림을 들여다 보다가 지미도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요..." "색깔이 푸르죽죽한걸 보면 트롤인가?" 옆에서 함께보던 라빈의 참견. "하지만 트롤은 뿔이 없잖아요." 그러자 지미가 대꾸했다. "뭐 모르지. 트롤의 변종인지... 아니면 뿔이 세개일 수 있어?" 둘의 의견을 듣고있던 미카엘이 투덜거렸다. "이거 네발로 걷는지 두발로 걷는지 몸통도 그려야 할거 아냐? 제길... 머리 통만 대강 그려놓고는 이게 뭔줄 알고 찾으라는 거야?" 그러자 지미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딴그림도 그래요?" "이게 그 딴그림이다." 그 그림에는 넓직한 홀 중간에 마법진 같이 보이는 것이 몇 개인가 그려져 있고 크고 높은 기둥들이 그려져 있는 이상한 그림이었다. 이게 그냥 넓은 건 물인지... 아니면 신전의 일부인지 알기도 힘들었다. "이거만 봐서는 알수가 없겠는데요." "제길... 이래서 처음부터 저 신탁이란걸 믿지 않았어." "원래 신탁이란게 이래요?" "신탁 자체가 이상한 약먹고 오랜시간 아데나 여신에게 바치는 춤이랍시고 광란의 춤을 추면서 본 어떤 환각을 말(言)이나 그림으로 표시한거니 환각제 먹고 지랄하는 미친년들하고 뭐가 달라." "말이 그렇게 되나요?" "어쨋든 필요한건 다 구입했으니 돌아가자." "휴우.. 또 한 대 더 만들었군." 한 마법사가 토지에르 경의 푸념에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는 넓직한 걸물의 한 귀퉁이에 쌓여있는 엑스시온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엑스시온 한 대 만드는데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과연 저 많은 것들 을 다 만들수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폐하의 칙명(勅命)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완성해 야 하는거야. 그건 그렇고 자네들은 수고했으니 이만 들어가서 쉬게나. 또 일 주일 후에는 중노동을 해야지." 마법사들은 감히 궁정제1마법사 토지에르의 앞에서 투덜거리지는 못하고 모 두들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토지에르 경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마법진의 중심으로 걸어가서 이번에 생명 을 불어넣은 엑스시온을 쓰다듬으며 뿌듯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확실히 왕 국 내의 전 마법사를 동원해야만 하나의 엑스시온을 만들 수 있다면 문제가 있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 타이탄을 못만드는 것은 돈이 없어서, 또는 타이 탄을 만들 재료가 부족해서... 그러고 보니 그말이 그말이군. 뭐 어쨋든 이런 이유들이었다. 확실히 자금의 문제는 타이탄의 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몸통이야 쇠니까 별 문제가 없지만 크로네나 미스릴 같은 경우 엄청난 액수의 돈을 들여야 구입할 수 있었다. 또 엑스시온을 만드려면 상당한 량의 금과 은, 백금, 크로네가 필요했고 또 엑스시온의 힘의 핵을 만드는데는 루비(홍옥)가 필요했다. 물론 이때 루비가 완벽한 덩어리일 필요는 없다는 점 때문에(가루가 된 상태라도 상관없고 많기 만 하면 된다.) 어느정도 돈이 적게 들지만... 청기사의 엑스시온은 달랐다. 엑스시온의 크기가 더욱 커짐으로 인해 더 많은 귀금속들이 들어갔는데다가 루비와 함께 다른 엑스시온에는 들어가지 않는 드래곤 하트까지 집어넣었던 것이다. 안피로스가 최후에 개발해낸 엑스시온 제조법에 따르면 엑스시온 내에 홍옥 과 함께 드래곤 하트를 일정량 넣으면 더욱 막강한 증폭력을 가진다는 것이었 다. 안피로스의 마지막 작품은 헬 프로네의 엑스시온을 더욱 발전시킨 형태의 것이었다. 아쉽게도 그의 던젼에는 그가 마지막에 연구하던 여러 가지 물건들 과 자료들이 발견되었을 뿐... 과거 크루마 제국 궁정 제1마법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만들었던 타이탄들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었다. 만약 그게 있었다면 아마도 청기사가 아닌 위험도가 훨씬 떨어지는 헬 프로네에 미스릴을 입힌 것 이 만들어졌을 것이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이 청기사는 여태껏 안피로스 조차 드래곤 하트를 구하지 못해 이론상으로 설계한 작품일 뿐... 실질적인 테스트를 거친 작품은 아니었 다. 그 때문에 프로토타입 엑스시온을 만들기 위한 연구가 거의 10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시험용 소형엑스시온에 마력을 불어넣다가 폭발사고도 몇번 있었 다. 하지만 토지에르 경은 그때마다 그의 뛰어난 실력으로 대형사고로 이어지 지 않게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또 안피로스의 이론을 실제로 만들어 내는데도 성공했던 것이다. 그 첫 번째 수확물이 저 구석에 서서 얕은 잠을 자고 있었다. 아직 완성품이 나오지 않아 알수는 없지만 그 출력은 2.5배 내지 3.5배 사이일 것이라는 추 측이 지배적이었다. 사실 헬 프로네급이 2.2배였으니까 그보다 더 발전된 엑 스시온은 그보다 더 뛰어나야 하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보통보다 좀 더 큰 엑스시온을 위해 청기사 설계진들은 6.1m의 거구를 만들어 냈던 것이 다. 과연 프로토타입의 엑스시온이 어느정도 출력을 내줄지는 신만이 아는 사 실이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튼 저 프로토타입 청기사 가 깨어난 후에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시간은 60일도 남지 않았다. 토지에르가 여태까지의 고생을 회상하며 감회어린표정으로 앉아있는데 제자 녀석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저... 놈들의 동태를 감시하라고 보낸 첩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오오... 그래? 어떻게 되었느냐?" "여관을 착실하게 감시했지만 더 이상 그런 검은색 옷을 입은 검객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자살하거나 파티를 떠난 모양입니다." 그러자 토지에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피어올리며 말했다. "호오... 너도 오늘 일한다고 피곤할텐데 그런거 알려준다고 뛰어와줘서 고 맙구나. 이제 들어가서 푹 쉬거라." "예. 스승님. 스승님께서도 좀 쉬십시오. 이만 가보겠습니다." * * *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탁은 도저히 도움이 되지 않는데..." 미카엘은 파티를 이끌어가고 있는 리더격 존재들인 시드미안 경, 팔시온, 안 토니와 맥주를 마시며 앞으로의 향방에 대해 의논을 시작했다. 하지만 얄궂은 그림 한 장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도움이 안된다고 할 수는 없소. 이 그림을 보면 확실히 괴물이오. 하지만 이 세상에 뿔달린 짐승만 한번 생각해 보면 뭔가 답이 나올수도 있 지." 시드미안 경의 말에 안토니가 덧붙였다. "푸른색에 뿔달린 짐승이라... 거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면 가장 유력한 녀석이 있기는 있죠." "누군데요?" "블루 드래곤. 나도 본적이 없어서 뿔이 몇 개나 달렸는지, 아니면 안달렸는 지 모르겠지만... 어쨋건 드래곤의 색상 중에는 블루도 있어요." "드... 드... 드래곤이라구요? 저는 이렇게 빨리 죽고싶은 생각은 없어요. 안토니도 좀 더 오래살고 싶으면 딴걸 생각 해보라구요. 우리가 가기만 하면 불문곡직 아작아작 씹어서 디저트로 먹어버릴텐데..." 미카엘의 엄살에 시드미안 경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꼭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지. 어쨋든 드래곤을 방문하려면 좀 더 강력한 동 료가 있는게 좋겠지. 일단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알카사스로 가자. 거기서 할 일이 있으니까." "마도왕국 알카사스에는 왜요?" "그야 다크의 저주를 그쪽에서는 혹시 풀수있을까 알아보려고... 만약 안된 다고 해도 어떤 저주에 걸렸는지는 알 수 있을거 아냐? 그럼 누가 알아? 그런 저주가 아주 독특한 거라면 범인을 잡아낼 수 있을지..." "그럼 제가 일행들에게 연락하죠." 팔시온이 위로 뛰어올라가는데 위에서 미디아가 약간은 창백한 얼굴로 뛰어 내려오면서 급히 말했다. "혹시 다크 못봤어?" "어? 미디아 하고 같이 안있었어? 아까 저녘식사때 술 실컷 마시고 뻗어서 너가 데리고 올라갔잖아." "그런데... 자기전에 샤워한 다음 보니까 없잖아." "이런 제기랄... 콩알만한게 되게 말썽을 부리는군." "아저씨, 포도주 한병 주세요." 예쁜 여자애가 약간은 술에 취한 것 같은 어조로 말하자 상점 주인이 물었 다. "설마 너가마시려고?" 그러자 그 여자애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듯 순진하게 미소지으며 완강하게 부인했다. "설마요. 아빠 심부름이에요." "그래, 착한 아이구나. 여기있다. 5실버 22타라다." 그 여자애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지불을 한 후 상점에서 나오자 마 자 병을 따고는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크아... 달콤하고 쌉쓰름 한게 죽여주는데..." 그녀는 비실비실 걸어가서는 사람이 별로 안 다니는 골목길 옆에 놓여있는 작은 상자에 걸터앉아서는 계속 마셔대기 시작했고 한 반병쯤 마신 후에는거 의 맛이 간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때 그 길 앞을 지나가던 패거리들 중 하나가 혹시 골목길 안에서 키스라도 하는 장면을 훔쳐볼 수 있으까 살짝 보다가 그 안에서 술취한 예쁜 여자애를 발견하고는 일행에게 손짓을 했다. "저것봐!" "이야... 꽤 예쁜데...?" "관둬라. 어린애잖아." "어린애는? 저정도면 다 큰거라구." 그중 한녀석이 소녀에게 다가가서는 슬쩍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봐, 맛있니?" "그러어엄... 아아주 아아주 조오오아." 완전히 혀꼬부라진 소리가 돌아오는 걸 듣고 그녀석의 눈에 음침한 빛이 어 리기 시작했다. '봉잡았다' 하면서... "더 좋은거 있는데 같이 가자." "더 조오은 거어? 가레이슈?" "그래, 갈렛슈도 있지. 응? 같이 안갈래? 흐흐흐..." 그러자 옆에있는 놈의 말. "이봐, 여기서 헤치우지 어디로 가자는 거야?" "이런 예쁜애를 이런곳에서 먹는다는건... 거기다 완전히 맛이 갔는데... 좀 더 분위기 좋은데서 즐긴 후 노예상한테 팔아버리자구. 아마 못받아도 2000골 드는 받을 수 있을거야. 거기다 칼까지 차고있는데? 여행객인 모양이야. 뒷탈 도 없을거고..." "하긴..." 그들은 슬쩍 소녀의 허리에서 검집을 벗겨서는 무장해제를 시키고 나서 인사 불성인 상태의 그녀를 부축하듯 끌어안고는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 다. * * * "저기 맞아?" "예. 술취한 금발머리 여자애를 부축해서 데리고 가더라고 하던데요?" 미카엘의 말에 기가 찬다는 듯 지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미카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그쪽으로 뛰어가며 말했다. "이런 나쁜 새끼들... 모두 죽여버리겠어." 안에서 불빛이 새나오는반쯤 부숴진 폐가의 문짝을 단숨에 박살내고 미카엘 이 뛰어들었을 때 이미 세놈의 남자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여자애의 옷을 다 벗겨놓고는 누가 먼저 할 것인지(뭘?) 한참 제비를 뽑느라 정신이 없는 때 였다. "이런 못된놈들... 죽엇!" 퍽 퍽 퍽! 우람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미카엘은 많이 봐줘야 이제 갓 스무살이나 되었을 까 하는 젊은 남자 셋을 그야말로 개패듯이 패기 시작했고 뒤따라 들어온 지 미도 그놈들을 지근지근 밟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젊은이들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 화풀이를 다끝낸 지미와 미카엘이 씨근덕거리면서 인사 불성인 다크의 나신(裸身) 위에 그녀의 옷을 덮어주고 있을 때 들이닥친 라빈 의 분풀이 상대도 되어줘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크가 갑자기 없어져버린 덕분 에 시드미안 경 일행은 모두들 밖으로 뛰어나가 '금발머리의 예쁜 여자애 못 봤어요? 키는 이만한데...' 하면서 밤거리를 여태껏 뛰어다녔던 것이다. 여태 껏 마음 조렸던 것 까지 합쳐서 한참 라빈이 이미 기절해버린 세녀석들에게 스트레스를 풀고 있을때 헐레벌떡 뛰어온 미디아도 실내의 정경을 보고는 어 떻게 된 일인지 금방 눈치를 때릴 수 있었다. "야. 모두들 밖으로 나가. 그리고 지미 너!" "예?" "내가 나갈때까지 저녀석들 정신차리게 만들어 놔. 다크 옷입히고 나가서 아 예 죽여버릴테니까." 여태껏 보지못했던 분노에 찬 미디아의 표정에 질린 지미가 얼른 대답했다. "알았어요." "아...앙.... 벌써 아침이야?" 비실비실 기지개를 켜며 잠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목욕탕으로 걸어 들어가는 소녀를 보고 지미와 라빈은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의 그 사 건... 그걸 통해서 지미와 라빈은 미디아를 다시 보게 되었다. 도대체 그렇게 무자비하게 사람을 팰 수 있다니... 여자가 그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때 처음 깨닳았던 것이다. 미디아는 정말 죽기 일보직전까지 그녀석들을 두들 겨 팬 다음 다크를 안고 이리왔는데, 정작 정조를 상실할 위험에 처했었던 당 사자는 그 사건의 전모를 알지도 못하는 얼굴이니 웃길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침은 마도왕국 알카사스로 떠나는 준비에 바빠 모두들 이리저리 짐을 챙기고 물건을 구입한다고 바빴다. 그런다음 떠나려고 할 때는 이미 다크는 또다시 술에 골아떨어진 다음이었다.지미가 완전히 인사불성의 상태가 되어 버린 여자애를 안고 나오자 팔시온이 그럴줄 알았다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디서 찾았냐?" "뒷뜰에서요. 포도주 한병을 다 마신 모양이던데요? 빈병이 굴러 다니는 걸 보니..." "제기랄... 이녀석은 라나보다 더하군." "그래도 라나보다는 나아요. 최소한 시끄럽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어쩌죠? 완전히 뻗어버렸는데..." 잠시 방법을 궁리하던 팔시온이 단호하게 외쳤다. "말등에 묶어버려. 어차피 점심때쯤 되면 깨겠지. 으휴... 술취한 계집애는 정말 대책이 없구만..." * * * "으윽! 이건 뭐야?" 꽁꽁 묶여있던 여자애가 떠들어대기 시작하자 팔시온이 못말리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깼군..." 그러더니 그 여자애쪽으로 자신의 말을 몰고가서는 말했다. "한숨 더 자지 그래?" "이 자세로 잠이 오겠어?" "그것도 그렇군." 팔시온은 서둘러서 끈을 풀어줬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에요?" "아... 너가 잠든 사이에 이동중이야. 그래서 할 수 없이 말등에 묶어놓은 거 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갸냘픈 여자애를...나도 이정도까지는 안했는데..." "너가 여자냐?" "...." 한참 말이 없던 다크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가는 거에요?" "마도왕국 알카사스. 거기서 할 일이 있어." 이때 뒤쪽에서 미카엘이 팔시온에게 말했다. "야... 마을은 멀었냐? 가까운데 마을이 없으면 여기서 밥먹고 가자." "저기 고개만 넘으면 마을이니까 조금만 참아." 과연 고개를 넘고나니 작은 마을이 나타났고 그들은 곧이어 작은 식당 하나 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당당히 식당안으로 들어서서 자리를 차지 한 후 주문을 해대기 시작했다. "오무라이스, 야채스프, 그리고 갈랏슈 큰걸로 한컵 가득!" 급사인 16살 정도 먹어보이는 남자애가 다크를 살짝 훔쳐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그 주문내용을 듣고는 놀라서 말했다. "그거... 그거 너... 너가 마실거야?" "빨리 가져와." "너... 너는... 너무 어려서... 안돼! 내가 주... 주인 아저씨한테 혼난다 구." "이런 꼬맹이까지 나를 몰캉하게 봐?" 고운 목소리기는 했지만 약간 언성을 높이며 말한 후,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다크를 보고 시드미안 경이 제일 먼저 지금의 사태를 눈치챘다. 강 렬한 살기를 읽음과 동시에 시드미안의 몸은 튕기듯 움직였고 다크의 샤벨이 매끄러운 발검동작에 이어져 소년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가까스로 손으로 잡 을 수 있었다. 만약 다크의 힘이 조금만 더 셌다면 막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 다. 방금전에 날아오던 그 칼날을 생각하며 급사소년이 바짝 얼어있는 것을 알고 시드미안 경은 그 소년을 툭툭 쳐서 정신이 좀 나게 만든 후 말했다. "갈랏슈 큰거 한잔... 가득 따뤄서 빨리 가져와. 죽고싶지 않으면..." 소년은 방금 일어났던 그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소녀를 힐끔 거리며 주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윽고 식사가 날라져 오자 다크는 그걸 약간씩 먹어치운 후 반주로 한컵을 몽땅 기침을 해대며 목구멍 속으로 집어넣었고 일행이 식사를 마칠때쯤 되어 서는 완전히 뻗어있었다. 다크가 픽 쓰러지자 시드미안이 그제서야 일행들에 게 말했다. "다크의 칼은 지미 너가 보관해. 아무래도 지금 저 정신상태로는 너무 위험 한 물건이야. 사실 도움도 되지 않고..." "그러죠." "이제 식사 끝났으면 또 이동하자." 시드미안의 말이 떨어지자 지미는 다크의 몸에서 검집을 풀어낸 후 어깨에 지고가서는 말등에 묶기 시작했다. 식당 앞에서 예쁜 여자애를 말등에 묶기 시작하자 길가던 사람들이 쭉 늘어 서서는 의심스런 눈길을 지미에게 보내며 쑤근거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인신매매가 어쩌구 하는 걸 듣고는 지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 했다. '제길... 쫄따구인게 죄지. 나 그렇게 나쁜놈 아니란 말이에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자기가 가만히 생각해 봐도 인신매매범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행동을 하고있다는 것이 억울할 뿐이었다. "제길..." 이때 저쪽에서 무장한 경비병 두명이 다가오더니 말했다. "당신들 통행증 좀 봅시다." "예?" "이 애는 왜 묶는거요?" "일행이 술취해서 완전히 뻗어버렸으니 묶죠. 인신매매범 아니라니까요? 자 봐요." 통행증에 모험가 일행으로 알카사스에 무투회 참석차 간다는 인증이 붙은 국 경 통행증을 보고는 그 경비병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생이 많으시겠수. 술 못먹게 좀 두들겨 패버려요. 어디 콩알만한게 벌써 부터..." "휴... 팰 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차마 때릴데가 없는데..." 시드미안 일행이 알카사스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달 후였다. 중간에 약간 씩의 말썽이 있었지만 요즘들어 다크의 히스테리는 뭐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 기고 있었기에 일행들로서는 큰 문제가 될게 없었다. 미리 샤벨은 빼앗아버렸 기에 다크의작고 연약한 주먹으로 맞아봐야 아플것도 없었고 잘못맞으면 눈 탱이 부근에 퍼렇게 멍이나 들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있었다. 또 행패의 거의 대부분이 술주정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요 근래 한달동안 다크는 완전히 자포자기 해서 술에 쩔어서 살고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행들 이 이런 다크의 행패를 참고 있는것도 사실 잡고 두들겨 패려고 해도 잘못하 면 뼈다귀 부러질까봐 때리지도 못하는 것이지 결코 힘이 밀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히야... 여기가 마도왕국 알카사스로군요." 앞에 펼쳐진 특이한 경치를 보며 지미가 감탄사를 터뜨리자 팔시온이 그보란 듯이 말했다. "어때? 국경을 넘어오고 나니까 완전히 풍경이 다르지?" 색다른 경치에 조금 경험이 떨어지는 일행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걸 보고 미카엘이 약간 짜증섞인 소리로 말했다. "이봐! 두리번 거리면서 촌놈티 내지말고 빨리 가자." 그들이 목적지로 잡은 곳은 알카사스 제국 서쪽에 위치한 대도시 미네온이었 다. 미네온은 예로부터 엑스시온의 생산으로 유명한 도시였지만 요즘은 카로 텔이 더 유명하다. 그 이유는 알카사스의 국왕이 출력 1.25이상의 출력을 지 니는 엑스시온의 수출을 금지하면서 그 통제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1.20이 상의 엑스시온은 카로텔에서만 생산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카로텔 하면 강력한 엑스시온을 생산하는 도시로 소문이 났고 나머지 도시들 은 그 명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국경을 통과한 후 2일을 소비해 도착한 알카사스의 국경도시 그렉시 아는 거대한 마법진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는데 사방에 수많은 마법진같이 생긴 형상들이 보인다는 것 자체가 마도왕국 다운 도시였다. "아주 재미있는 구조로 되어있네. 무슨 성벽을 꼭 마법진처럼 만들어놨어 요?" 라빈의 말에 팔시온이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마법진처럼 만든게 아니라 마법진이야. 성 외곽에 과거에는 방어마법진이 구축되어 있어서 왠만한 공격마법으로는 알카사스의 도시를 공격할 수 없었 지. 하기야 옛날에는 방어마법진이 꽤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타 이탄의 등장으로 별로 쓸모없어졌어. 대신 곳곳에 있는 마법진들은 방어가 아 닌 실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다시 보수되어 그 나름대로 아주 뛰어난 기능들을 시민들에게 베풀고 있지." "뛰어난 효용이라구요?" "그럼. 저쪽 시 외곽에 엄청나게 거대한 마법진들을 만들어 그쪽에 끌어들인 물을 덮인 후 그 뜨거운 물을 도시에 공급하지. 그 때문에 알카사스의 대부분 의 도시에 있는 상수도관은 온수와 냉수의 두가지 관으로 되어있어. 트루비아 의 경우 샤헨 등 몇몇 대도시에나 상수도가 설치되어 차가운 물이 공급되지만 여기 알카사스는 아무리 작은 도시라도 상수도 시설이 되어있지. 물론 뜨거운 물까지 나오는 상수도가 말이야. 또 방어마법진은 온도조절 마법진으로 바뀌 어 알카사스의 도시들은 겨울에도 꽃이 필 수 있을정도로 따뜻해." "이야..." 그들이 마도왕국 알카사스로 들어가는 그렉시아 시 외곽에 도착하자 경비병 두명이 그들을 가로막은 후 질문을 던졌다. "통행증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시드미안은 토리아 국경을 넘어오며 발급받은 신분 증명서를 그들에게 건네 줬다. "으음... 미네온 아카데미에서 열리는 무투회에 참가하시러 오셨군요. 무투 회 참가하러 많은 파티들이 오고있죠. 어쨋든 꽤 특이한 파티시군요. 무예 수 행자 6명, 노예 1명, 모험가 1명, 마법사 둘에 신관 1명. 여기 기록되지 않아 서 그런데 어떤 신을 섬기시나요?" 그러자 팔시온이 재빨리 말했다. 알카사스는 크로노스교를 무자비하게 탄압 하고 있었으며 샤이하드를 받들고 있다는게 드러나면 무조건 사형이었다. "전쟁의 신 아레스를 섬기는 사제시죠." 여행 중이기에 신관의 옷이 아닌 가죽갑옷만을 입고 있다는 점을 악용해 팔 시온이 시치미 뚝 떼고 말하자 상대는 존경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신관'을 바라본 후 정중하게 말했다. "아... 그러십니까? 여기 통행증 있습니다. 미네온 아카데미에서 열리는 무 투회는 거의 대부분이 마법사들이 참가하기에 기사들은 거의 안오시는 편이거 든요. 그런데 무투회는 한달후에 열리는데 좀 빨리 오셨군요. 그런데 저 노예 는?" 그러면서 말안장에 꽁꽁 묶여있는 예쁜 여자애를 가리켰다. "예. 토리아에서 구입했죠. 노예 매매 증서도 보여드릴까요?" 그러면서 시드미안은 뻔뻔하게도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있지도 않은 서류를 찾는 척 했다. 술에 취한 엘프는 말도 안되기에 이번에는 다크를 노예로 둘러 댄 것이다. "아닙니다. 그걸 보여주실 필요까지는 없구요. 여기 알카사스는 사람을 노예 로 부리지는 않습니다. 노예로 쓴다면 엘프나 드워프, 수인족(獸人族) 같은거 죠. 하지만 저 아이는 사람인데... 그러니까 여기 알카사스에 있을때는 저렇 게 묶어놓지 마세요. 보기에 안좋으니까..." "하지만 그러다가 도망치면 당신이 책임져 줄겁니까? 어제도 도망치려고 해 서 아예 술을 잔뜩 먹인 후에 이렇게 묶어놨는데...." "예. 어쨋든 여기서는 사람을 노예로 쓰는 곳이 아니니까 좀 눈에띄지 않게 해주십시오. 어쨋든 무투회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공간이동 문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쪽에 파란색 건물 보이시죠? 저기에 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팔시온이 모두를 인도해서 파란색 건물로 다가가자 지미가 궁금한 듯 물어왔 다. "공간이동 문이 뭐에요?" "알카사스는 마도왕국이란 명성에 어울리게 각 도시를 잇는 이동마법진이 건 설되어 있지. 그래서 왕국의 끝에서 끝으로 이동한는데 1분도 안걸린다구." 그들이 그 건물에 도착하자 한쪽에는 '입구', 한쪽에는 '출구'라고 써져있었 고 입구라고 써진 곳 앞에서 탁자를 하나 놔두고 앉아있던 사람이 물어왔다. "어디로 가시나요?" "미네온으로 갑니다." 그 사람은 탁자위에 올려놓은 두꺼운 책을 꺼내서 이리저리 뒤적거리더니 옆 에서 푸른색 종이를 한 장 꺼내서 기록을 하면서 말했다. "으음... 11명하고 말 11마리. 사람은 30실버, 말은 40실버에요. 그러니까 모두 770실버입니다." "여기 있소. 15골드 20실버." "감사합니다. 여기있는 표를 가져가셔서 나중에 보여주세요." 그러면서 그사람은 '그렉시아, 사람11, 말11, 770실버'라고 써진 파란 종이 를 건네줬다. 일단 돈계산이 끝난 후 팔시온은 팔시온은 입구라는 글자가 써 진 곳으로 말을 끌고 갔고 모두들 따라서 들어갔다. 그 안은 거대한 공간으로 100명 정도는 너끈히 서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모두가 그 안으로 들어오자 팔시온이 외쳤다. "미네온, 이동!" 그와 동시에 주변이 뿌옅게 흐려지다가 암흑속에 묻히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또다시 뿌옅게 흐려졌다가는 다시 원래대로 그 마법진 안이었다. "어떻게 된거에요?" "미네온에 왔다. 자, 나가자구." 문 입구에는 여러명의 무장한 경비병들이 서있다가 밖으로 나오는 팔시온 일 행에게 말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렉시아에서요. 통행증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용권도..." 팔시온이 내미는 서류와 전번 그렉시아에서 받았던 파란 표를 본 후 경비원 이 말했다. "모두들 토리아에서 오셨군요. 그런데... 이 아이는 왜 통행증이 없죠?" "그쪽에서도 내가 말했지만 노예한테 무슨 통행증이 있다는 말이오? 안그래 도 도망치려고 한 벌로 꽁꽁 묶어놨는데..." "흐음... 노예라구요?" 경비병은 말등에 꽁꽁 묶여있는 다크의 아름다운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이 찬찬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통과!" 모두들 건물 안은 사실 바뀐게 하나도 없었기에 모두들 반신반의하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자 완전히 풍경이 바뀌어 있는 걸 보고는 놀랬다. 국경 부근의 작 은 도시였는데 여기는 완전히 번화한 대도시였던 것이다. "정말 신기하네요." "이래서 마도왕국이란 칭호가 붙은거지. 마법을 실생활에 적절히 이용해서 대단히 사람이 살기에 쾌적하게 만들어놨어. 여기서는 사시사철 따뜻한 물이 나온다구." "정말이요?" "그럼. 수도꼭지에서..." "수도꼭지가 뭔데요?" "이런 무식한... 나중에 설명해줄테니까 길거리에서 이러지 말고 가자." 알카사스의 햇살은매우 부드러웠고 따스했다. 팔시온의 설명으로는 이곳의 온도는 언제나 따스한 봄... 모두가 마법진의 위력이라는게 조금 꺼림직했지 만 사람이 살고, 생활하기에 최고의 조건임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런 데 이것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조금 다를 뿐... 그들은 길을 가는 도중에 특이한 복장을 하고 돌아 다니는 경비원(guard)들 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경비원들은 보통 두명씩 짝을 지어 다녔는데 허리에는 롱 소드나 내로우 소드를 차고 있었다. 그들을 멀찍이서 보면서 팔시온이 설 명했다. "알카사스는 풍요로운 국가야. 그렇기에 그만큼 치안이 아주 좋지. 아마 소 매치기 걱정 안해도 되는 국가는 알카사스와 아르곤 뿐이겠지. 물론 아르곤은 잡히기만 하면 샤이하드의 율법에 따라 도둑질한 팔을 자르니까 소매치기가 성행하기 힘든 거지만..."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거죠?" "물론 여관을 잡으러 가는거지. 일단 여관을 잡은 다음 갈데가 있어." "어디 여관 아는곳 있어요?" "물론... 없지. 나도 여기는 처음이니까. 저기 여관이 그럴듯해 보이는데 들 어가자구." 그들은 "수정 지팡이 여관"에 우루루 들어갔다. 물론 그 여관의 1층은 보통 여관들이 그러하듯 식당이었다. 여행객이 들이닥치자 주인인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나오며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방이 있소?" "예. 하지만... 저 아가씨는?" 그러면서 주인인 여자가 가리킨 곳에는 지미가 말등에 엎어져서 꽁꽁 묶여있 는 다크를 풀어주고 있었다. "예. 도중에 몸이 아프고 열이 심해서... 그래서 말등에서 안떨어지게 묶어 놓은 거죠. 방 있어요?" "예. 방은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다 묵을 방은 없는데요... 방이 세 개 뿐 이라... 요즘 무투회가 벌어질 때가 다 되어가니까 타지의 손님들이 많이 오 시거든요."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방 세 개면 충분하지. 어떻게 구성을 맞춰 잠자 든 그건 우리들 책임이고 말이오. 말들이 지쳤으니 콩을 듬뿍 섞어서 여물을 부탁하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식사를..." "예. 네리! 말들을 마굿간에 넣어라. 손님들은 저를 따라 오시죠." 그 여자는 앞서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 후 2층에 방 1개, 3층에 방 두 개를 보여주며 알아서 들어가라고 한 후 내려갔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 다4인용 방이라는데 있었다. "그럼 2층의 방은 미디아양과 다크가 쓰고, 3층 첫 번째 방에는 팔시온, 미 카엘, 지미, 라빈, 가스톤이... 그리고 남은 방에는 나하고 스미온, 안토니, 로니에 씨가 쓰면 되겠군." 그러자 미카엘이 투덜거렸다. "이건 불공평해. 누군 4인용 방을 둘이 쓰고... 누군 4인용 방에 다섯이 낑 겨 자란 말이에요? 그래봐야 땅바닥에 잘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 그 사람에게 미한하다구요. 좀 다른방법을 생각해 봐요." "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나중에 방이 비면 바닥에서 잤던 사람은 독 방을 쓰는 행운을 차지하게 해주지. 어때?" "그건 별로 좋은 의견이 아니에요." "그럼 어쩌자는 말이야?" 그러자 스미온이 절충안을 제안했다. "그럼 제비를 뽑아서 하나를 여자들 방에다 집어넣으면 어떨까요? 그러면 침 대수와 인원수가 딱 맞잖아요." 이때 미카엘이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없이 지미나 라빈을 넣기로 하지. 녀석들 어려서 무슨짓을 하지는 못할테니..." 그러자 지미가 펄쩍 뛰었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술에 취해 곤드레가 되어서 는 맨날 술주정이나 하는 계집애와 같이 있고싶은 사람이 있을까? "싫어요. 다크하고 같이 있기는 싫다니까..." "그건 저도 싫어요. 뒷치닥거리 할게 뻔한데..." 미카엘이 주먹을 지미의 눈앞에 들어보이며 험상궂은 얼굴로 말했다. "너희들이 지금 싫고 좋고 따질 위치냐? 좋게 말로 할 때 들을래? 아니면 몇 대 맞고 들을래?" "좋아요... 누가 싫다고 했나요? 헤헤... 제비뽑기 할래?" 역시 눈앞의 주먹에는 약해지는 것이 인간인가... 지미의 말에 라빈이 말했 다. "야... 그냥 둘이서 같이 들어가자. 서로 번갈아가며 치닥거리 하면 편하잖 아." "좋아." "야. 다크 데리고 따라 와." 지미는 쓰러져있는 다크를 어깨위에 짐짝처럼 들고는 따라서 2층으로 올라가 기 시작했다. "이방이에요. 나머지 손님들은 저를 따라서 3층으로 올라오세요." 나머지 일행들은 3층으로 올라가고 지미와 라빈, 미디아와 다크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제법 넓었고 창문이 커서 꽤나 실내가 밝았다. 좌우로 2층침 대 두 개가 놓여있는 걸 보면서 지미와 라빈은 오른쪽의 침대들을 점령했고 여자들은 왼쪽을 차지하게 되었다. 미디아는 일단 방에 들어오자마자 목욕부터하겠다고 목욕탕으로 들어갔고 피끓는 두 젊은이는 앞으로 들려올 오묘한 음향(?)을 감상할 준비를 하고있었 다. 곧이어 쩔그렁하는 소리도 들리고 뭔가 가벼운게 떨어지는 듯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건 옷벗는 소리같은데?" "아마 조금 지나면 물소리가 들리겠지." 하지만 곧이어 들린 소리는 그소리가 아니었다. "아악! 어떻게 하면 물이 나오는 거야? 물은 어디있는 거지?" 덜컹 살짝 방문을 열고는 미디아가 머리만 꺼낸 상태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어떻게 하면 물이 나오는 거야? 팔시온좀 데려와." "예." 팔시온이 막 라빈과 함께 들어섰을 때 다크가 갑자기 상체를 침대 밖으로 기 울이더니 곧바로 토하기 시작했다. "우웨... 웩... 웩!" 그런다음 속이 편해지자 다시 침대에 눕는 걸 보고 팔시온이 고개를 절래절 래 흔들며 투덜거렸다. "정말... 누가 데리고 살지 걱정된다. 걱정돼." 그런 팔시온을 보고 미디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팔시온, 이거 물 어떻게 하면 나오는거야? 여기 목욕탕이라고 해놓고 물이 없어." "이런 멍청하기는... 철로 만든 휘어진 것들이 벽에 붙어있는게 보이지?" "응." "그 위에보면 십자모양이 붙어있지?" "응." "그걸 오른쪽으로 돌리면 물이 나오고 왼쪽으로 돌리면 안나오게 되어있어. 하기야 대도시에 가본적이 없으니 수도꼭지도 모르지." "그래. 난 변두리 전쟁터만 쫓아다녔다. 보태준거 있어?" "빨리 씻고 아래로 내려와. 밥먹고 미네온 마법사 길드에 갈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다크 정신좀 차리게 만들어. 알았어?" 팔시온은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가버렸고 이제 둘만 남은 지미와 라빈에 게는 웬수덩어리가 토해놓은 오물을 뒷처리하는 임무가 남아있었다. "으이그..." "휴... 냄새 한번 고약하네. 토하려면 마시지를 말지..." "뭐 다크가 토한게 한두번이야? 제기랄... 기집애 뒷치닥거리 하자고 따라나 선 여행이 아니었는데..." 둘은 투덜거리면서 깨끗이 바닥청소를 끝낸 후 다크의 예쁜 입술까지 닦아주 고 나자 미디아가 물에젖은 머리카락을 닦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그녀를 보고 지미가 서둘러서 말했다. 빨리 내빼지 않으면 또다시 무슨 일을 해야할지 모 르니까... "우리들은 샤워하기 전에 밑에 내려가서 수련좀 할테니까 그때까지 다크좀 부탁드려요." "알았어." 두 남자가 나가고 난 후 미디아는 문을 잠그고 나서 다크의 옷을 벗기기 시 작했다.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인데... 도대체 더 이상 방법이 없을까? 이래 가지고 는 몸만 더 상하지..." * * *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참 시키고 안마까지 해줘서 이제 어느정도 정신을 차 린 다크가 미디아에게 끌려 식당으로 들어섰다. 예전에 미디아가 사줬던 예쁜 옷이 그런대로 잘 어울렸지만 그새 밥도 거의 안먹고 술타령한다고 살이 더 빠졌는지 그옷도 약간 헐렁했다. 살이 빠져서 눈이 퀭한 미녀를 보면서 팔시 온이 이죽거렸다. "정말 맨정신인 모습 보기 힘들다. 에휴..." "그래서? 보태준거 있어?" 두눈 똑바로 뜨고 대드는 여자애를 보면서 팔시온이 기가차다는 듯 말했다. "어쭈? 이젠 아예 맞먹자고 드는군. 뭐먹을래?" "갈렛슈!" "여기는 갈렛슈 없어. 또 미성년자는 음주 금지라구. 밥이나 먹어. 또 어디 가볼데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럼 맥주라도 줘." 그러자 팔시온이 최대한 무서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위협했다. "밥이나 먹어! 안그러면 입에다가퍼넣어 줄테다." "제기랄!" 대강 몇숫까락 먹고는 재빨리 옆자리의 지미 앞에 놓여있던 맥주를 나꿔채서 입으로 가져가는 다크를 양옆에 있는 인물들이 제지했다. "술은 안된다고 했잖아. 정말 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냐?" "그래, 때려라 때려! 누가 겁낼 줄 아냐?" 성질난 김에 손을 높이 들었던 팔시온... 하지만 도저히 때리지 못하고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저주에 걸려 자포자기가 된 동료... 그전의 자신만만했 던 그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지금의 저 갸냘픈 몸을 차마 때릴수가 없었던 것 이다. '제길... 오우거라도 ㄷ다면 편하겠다. 그건 마음껏 팰수라도 있을테니...' "으이그..." 한바탕 한 후 다크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팔시온이 지미에게 말했다. "따라가서 술 못마시게 막아. 전처럼 어디 가서 아버지 심부름이라고 사가지 고 또 마셔대면 골치아파." "예." 점심 식사 후 시드미안 경 일행은 미네온 마법사 길드를 향해 길을 나섰다. 미네온 마법사 길드는 제법 높지막한 탑같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 높이는 8층 이었다. 그런데 그 마법사 길드 건물의 옆에는 거대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 었다. 라빈이 호기심에 그 건물 안을 들여다 보더니 놀라서 지미를 불렀다. "지미!" "왜?" "이리와봐" 지미도 그 안을 살짝 들여다 보고는 감탄성을 터뜨렸다. "우와!" 모두들 호기심에서 그 안을 보자 거대한 공장같은 건물이었는데 6대의 타이 탄이 줄지어 서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타이탄을 만든다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타이탄을 만드는 공장이군. 저 타이탄은 쿠마보다 훨씬 작은 거 같은데?" 이때 뒤에서 근엄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작을지도 모르지. 저건 '크로메'라는 타이탄으로 높이가 4미터밖에 안되니 까 말이다." 그들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근엄하게 생긴 노 마법사가 마법사의 정식복장 인 로브를 입고 서 있었다. "저건 트미란 국가연합에서 주문한 타이탄이야. 몬스터 토벌을 위해 주문한 거지." "몬스터 토벌에도 타이탄을 써요?" "그럼. 대신 저 타이탄은 대타이탄전투를 생각하지 않고 만들었기 때문에 출 력은 형편없지만 원체 가벼워서 제법 빠르지. 저거 가지고 오우거(ogre) 사냥 을 하면 꽤 재미있을지도 몰라..." 여기까지 노 마법사는 지미에게 말한 후 당당한 덩치를 가지고 있으면서 리 더처럼 꽤나 실력이 있어 보이는 시드미안에게 말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오? 일반인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아... 그게... 마법사 길드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우연히 안을 들여다 보게 된 겁니다." "마법사 길드에는 무슨 일로?" "다크! 이리 와봐." 여자애의 양쪽 어깨를 그 큰 팔로 잡고는 그 노마법사를 향해 밀어보이며 팔 시온이 말했다. "이 아이가 저주에 걸렸죠. 혹시 고칠 수 있을까요?" "흐음... 저주라고? 저주에 걸린지는 얼마나 되었나?" "한달정도 되었죠." "한달이나? 으음... 어디 보자.." 이리저리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다크를 살펴보던 그 마법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디스라이크군." "디스라이크요?" "그렇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어떤 것이 되도록 만드는 주문이지. 그런데 왜 이런 예쁜 여자애가 된거지?" "그야 그 여자애를 다크가 끔찍이도 싫어했으니까요. 정말 감당못할 애였거 든요." "그래도 이렇게 젊고 예쁜 애가 되었으면 다행 아닌가? 꼭 원상태로 돌아가 야만 하나?" "저... 사실 다크는 남자라서 생활하기가 좀... 그리고 원래 아주 뛰어난 무 사였는데, 이 근육가지고 어디 힘이 나오겠어요?" "그건 그렇구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군. 디스라이크는 상당히 고위급 저주라서 시전자나 풀 수 있을까... 대안으로 트랜스포메이션을 걸어준다 해 도 그건 최대 30일 정도밖에 효과가 없는데다가 여자몸에 근육을 아무리 붙여 줘봐야 그게 그거거든. 아무리 마법이 전능하다고 하지만 저정도 이상은 안 돼." 그러면서 노 마법사는 꽤 근육질의 몸매를 가지고 있는 미디아를 가르켰다. "그러면 과거 지녔던 마나라도 회복할 수 없을까요?" "흐음... 그건 힘들지. 육체는 그대로고 마나만 되돌리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아." "그럼, 아예 방법이 없는 겁니까?" "그렇다네. 저주라는 것은 매우 완벽하게 몸을 바꿔주지. 트랜스포메이션은 안그렇지만... 저 아이는 이제 아이도 낳을 수 있어. 그러니 딴생각 말고 그 냥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고 적응하는게 최선의 방법이겠지. 저 몸을 가지고는 복수의 꿈도 꾸지 않는게 좋을거야. 그정도 고위급 흑마법을 구사하는 마도사 라면 대단한 인물일테니까..." "그럼 그정도 흑마법을 구사할만한 인물들의 명단을 혹시 알 수 있을까요?" "복수라도 대신해주게?" "예." "자네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그런 명단은 없어. 나도 과거 흑마법에 대해 연구를 좀 해본적이 있어서 약간 알 뿐... 사실 흑마법사들은 악마와 거래를 하는 사악한 자들이기에 대놓고 '나는 흑마법을 배웠다'하고 떠벌이지는 않는 다 이말일세. 그러니 지금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흑마법사들이 존재하는지는 알수가 없지." "어쨋든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이 인사를 하고는 돌아가려고 하는데 노 마법사가 급히 말했다. "다크라고 했나? 이리 잠깐만 와보게." 다크가 다가가자 그 노마법사는 약간은 불쌍한 듯한 눈빛을 띄며 말을 이었 다. "흑마법사를 상대해야 하는 경우 저주란 주문에 꽤나 자주 걸리게 되지. 아 무리 능력있는 마법사라도 저주의 손길을 벗어나기는 힘들지. 미리 저주를 막 기위해 매직 실드나 바리어라도 치고 있었다면 모르지만... 어쨋든 디스라이 크에 걸려 아직도 자살을 하지 않은 걸 보면 자네도 꽤나 정신력이 대단한 인 물인 것 같아서 하는 말야. 자네는 지금 육체만이 엉망일 뿐... 자네가 쌓았 던 그 높은 무술에 대한 기억은 보존하고 있지?" 그 노마법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크가 성질난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죠.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어떤 사람이라도 한번 갔던 길을 또 가기는 쉬운 법이야. 노력을 한다면 과 거와 같은 힘을 발휘하기는 힘들겠지만 그와 비슷한 경지까지는 몇 년 걸리지 않아 이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노력한번 안해보고 포기하기에는 이르 지 않을까?" "다시 한번 더... 해보라구요?" "그렇네. 저주를 건 마도사를 잡는다 하더라도 저주에서 벗어나기 힘들지도 몰라. 무턱대고 언젠가 저주가 풀릴때를 기다리기 보다는 지금 현재의 몸이라 도 최대한 단련을 해보게. 그러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지." 노 마법사의 친절한 조언은 꽤나 다크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여태껏 자신 을 지탱해 왔던 것은 끈기와 집념이 아니었던가? 그게 아니었다면 어떻게 현 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올라설 수 있었겠는가? 다크는 무의식중에 중원에서 인사하던 방식 즉, 양손을 포개 쥐고 포권배례를 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도움말씀 감사합니다." 이 특이한 인사법에 노 마법사는 약간 어리둥절 해졌지만 그래도 그 상대의 말속에서 깊은 감사의 감정을 읽었기에 따뜻하게 배웅을 해줬다. 그 다음부터 보여준 다크의 태도는 모두의 경악을 사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대로 여관에 돌아간 다음 현문(玄門=道家)의 태허무령심법(太虛無靈心法)을 운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속마음 같아서는 속성인 마교의 내공심법을 사용 하고 싶었지만 자신처럼 조급한 마음상태로 마교의 심법을 썼다가는 언제 주 화입마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또 주화입마에 걸리면 지금 이상태로는 곧바로 죽음이었다.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이상한 자세로 앉아 눈을반쯤 감 고 내공수련을 하고있는 다크의 모습을 그들은 약간 특이하게 생각했다. 이들 도 명상을 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고도로 발달된 내공수련이란 것은 없었 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나가 충만한 곳에서 지속적인 수련만 해도 자연스레 기가 돌면서 어느정도 성취를 얻게 되는데, 거기에 기초적인 토납법 정도만 익혀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런 육체의 수련을 선(先)으로 내공의 수련을 후 (後)로 보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따위 갸냘픈 육체로 내공만 수련하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무리가 있었다. 내공만 가지고 모든게 되는건 아니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크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3일간 시간을 준 후 시드미안은 다크에게 말했다.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데 너도 갈거냐? 아니면 여기서 계속 수련하면서 우리 들을 기다릴래?" "같이 가죠." "내일 아침에 출발할테니까 준비해." 다음날 아침 일행은 전과 같이 공간이동 문으로 갔다. 그곳에서 사용료를 준 다음 그레이시온 산맥 부근에 있는 제법 큰 상업도시 고헨으로 향했다. 그들 이 밖으로 걸어나오자 전과 마찬가지로 경비병들이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었 다. 각 도시에는 도시 나름대로 경비병들을 고용하고는 도시내의 치안을 관리 했기에 떠날때는 별로 어렵지 않지만 그 안으로 들어갈때는 이와같이 복잡한 절차가 기다리는 것이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미네온에서요. 통행증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용권도..." 팔시온이 내미는 서류와 미네온에서 받은 파란 표를 본 후 경비원이 말했다. "모두들 토리아에서 오셨군요. 그런데 방문 목적에는 무투회 참가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는 무슨 일로?" "아... 여기 그레이시온 산맥에 몬스터들이 많다고 해서요. 그거 좀 사냥하 면서 무투회 준비도 할겸 해서 말이지요." "오... 몬스터를 잡아주신다면 저희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죠. 그런데 이 아이는 왜 통행증이 없죠?" "그쪽에서도 내가 말했지만 노예한테 무슨 통행증이 있다는 말이오?" "흐음... 노예라구요?" 경비병은 다크의 아름다운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찬찬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하지만 인간인데?" "인간처럼 보이지만 하프 엘프요." "아. 하프 엘프(사람과 엘프 사이에 태어난 아이). 귀가 사람같아서 깜빡 속 았군요. 많이 사냥하시길 빌겠습니다.참. 그런데 그레이시온 동쪽에 있는 카 마가스 지대에는 가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성질 더러운 드래곤이 살고있으니 까요." "예.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통과!" * * * 그들이 찾아가고 있는 블루 드래곤은 썬더 드래곤이라고도 부르는 푸른색이 나는 드래곤으로 뇌전의 정령을 다스리며 다른 드래곤 과는 달리 브레스를 사 용할 수는 없지만 그 뿔에서 엄청난 뇌전(雷電)을 뿜어낸다. 다른 드래곤들의 브레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속에 축적된 뇌전의기운을 토해내는 것으로 마법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타이탄의 대마법주문이 무용지물이었으므로 정면 승부는 매우 힘든 상대가 이 드래곤이었다. 어쨋든 드래곤이 세계에 정확히 몇마라나 살고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누 가 그 무서운 드래곤의 레어까지 가서 인구... 아니군 용구조사를 하러 다닐 것인가? 그렇기에 한번씩 말썽을 부린 녀석들의 명단만이 나돌고 있을 뿐이었 다. 그렇기에 드래곤이 어디어디에 산다고 해서 찾아갔다가 살아돌아오기 힘 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포악한 놈의 명단을 들고 찾아갔으니 애시 당초 살아돌아올 생각을 말아야지. 어쨋든 시드미안 일행의 사정도 그와 비슷했다. 현재 알카사스와 코발트 제 국의 국경선 역할을 하는 그레이시온 산맥에 블루 드래곤 1마리가 살고 있다 는 말이었다. 그것도 되게 포악한 놈이... 그야말로 대화 몇마디 나누러 목숨 걸고 찾아가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과거 드래곤은 뭔가 일이 있어 동면을 한다고 헛소문이 퍼진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소란하던 녀석이 몇백년간 조용하니 그런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었 다. 하지만 그 소문은 그야말로 헛소문이었다. 사람괴롭히기도 심드렁해진 드래곤이 그냥 레어에서 낮잠이나 퍼자면서 기나긴 시간을 때우고 있었던 것 인데 그걸 동면이라고 착각하다니... 만약 드래곤이 주기적으로 동면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 취약한 동면기간 중에 아마도 이 세상의 모든 드래곤들은 시체가 되어 드래곤 통구이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었기에 그걸 노리고 부스레기라도 얻으러 갔 던 모험가들이 되려 통구이가 되어버렸지만... 일행은 고헨에서 그레이시온 산맥쪽으로 가기 전에 고헨 시 당국으로부터 여 행증명서를 새로이 발급받았다. 여행목적은 '몬스터 사냥'이었고 여행 취지는 '무투회 예행 연습'이었다. 어쨋든 그들은 그걸 가지고 그레이시온 산맥을 향 해 이동했고 고헨시가 꽤나 그레이시온 산맥 부근에 위치한 도시였기에 3일만 에 그레이시온 산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블루 드래곤 키아드리아스? 몇살짜리에요?" "여기 써져 있기로는 아마도 4000살 정도 되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봐요." "여기 있네." 시드미안 경이 건네준 종이에는 별로 상세하지도 않은 기록이 써져 있었다. 이름 : 키아드리아스 서식지 : 그레이시온산맥 동편. 종명 : 블루 드래곤 주식 : 마나.(별식으로 인간도 먹음) 특징 : 매우 흉폭하므로 그의 서식지에 출입을 금함. 들어가서 살아돌아온 사람이 거의 전무(全無)함. 약 4000살 정도로 추측. 쭉 읽어보던 미카엘이 말했다. "이거 얼마나 줬어요?" "정보료 50실버." "도둑놈들... 겨우 저따위 기록으로 50실버라니! 저... 시드미안 경." "왜그러나?" "대화를 나누려면 뭔가 뇌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드래곤은 원래 까마귀처 럼 반짝이는 걸 좋아한다고 하니까 금이라든지..." "금을 한 1톤 정도 가져가도 그녀석 덩치로 봤을때는 얼마 되지도 않을텐 데... 또 그정도 돈도 없고." "그럼 그놈이 수틀리면 어쩝니까?" "어쩌기는 죽어라고 도망쳐야지." 언뜻 듣기에는 대단히 리더로서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건 사실이었고 또 그 방법이 최고였다. * * * <내 앞에 서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희미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나는 그대와 주종의 맹약을 맺고자 하는 사람이다. 나는 뛰어난 기사다. 그 렇기에 그대에게 실망을 안겨주지는 않을거야." <좋다. 비교하며 주인을 고를 입장도 아니니 그대의 청을 수락한다. 이제부 터 그대와 나는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고렘의 맹약에 따라 주종이 되었다. 내 이름은 페가수스. 그대의 이름은?> "나는 현재 왕국 제일의 기사이며 근위대장.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다. 너의 머리를 들어라." 그러자 거대한 청기사의 머리가 열렸고 프로이엔은 그 안에 재빨리 뛰어 들 어갔다. 그리고 머리가 닫힌 후 천천히 시험작동을 하면서 프로이엔은 자신에 게 주어진 이 청기사가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뼈속깊이까 지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는 발이 대지를 쿵쾅거리며 밟을 때 마다... * * * 왕국의 고위층에 소속된 인물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수가 많지는 않았다. 이번에 테스트하는 타이탄은 너무나도 강했고... 그렇기 에 극비리에 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높은 좌석에 앉은 호화로운 복장을 한 오만한 표정의 인물이 냉랭하게 "시작 해라."하고 말하자 곧이어 두 대의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대는 현재 의 근위 타이탄인 카프록시아, 또 한 대는 미래의 근위 타이탄인 이번에 최초 로 생산된 프로토타입 청기사였다. 당당한 모습의 카프록시아를 창문틈으로 바라보고 있는 프로이엔의 귀에 말 소리가 들려왔다. <저녀석을 해치우면 되는 것인가?> "그렇지. 그러면서 네가 가진 모든 힘을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과시하는게 목적이야." 카프록시아급 타이탄 겔리오네스가 폐하의 명에 따라 준비를 갖추며 방패와 검을 들어올려 준비자세를 갖추는 걸 보며 페가수스가 프로이엔에게 말했다. <좋아.> 그와 동시에 청기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기사는 그 엄청나게 크고 무거 운 덩치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속도로 다가가서는 재빨리 검을 쳐내렸다. 또 그걸 본 겔리오네스도 당할 수만은 없다는 듯 재빨리 방패로 막았다. 쾅! 그와 동시에 청기사는 검을 그대로 아래로 밀어붙이며 왼손의 방패로 상대를 그대로 가격했다. 쿠앙! 강력한 충격에 비실비실 뒤로 밀리는 겔리오네스를 보면서 청기사는 그대로 검을 강력하게 휘둘렀다. 겔리오네스가 방패로 막았지만 두 번의 칼질에 방패 는 거의 박살이 나버렸고 세번째 칼질은 방패를 박살내며 그대로 겔리오네스 의 몸통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걸 보고 관중석에서는 경악에 찬 신음성들이 터져나왔다. 전쟁터가 아닌 이상 저렇게 할 필요는 없었고 또 저렇게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둘 다 왕국 을 지탱하는 최고의 힘인데... 겔리오네스는 가까스로 뒤로 물러섰고 그와동시에 겔리오네스의 앞부분을 휩 쓸고 지나간 청기사의 검에 의해 흉부의 2차장갑이 잘려서 예리하게 길게 째 진 상처를 만들어버렸다. 이때 갑자기 청기사의 머리가 들리더니 프로이엔이 뛰어내리며 외쳤다. "이봐! 괜찮아?" 그러자 겔리오네스의 머리가 들리며 또다른 기사가 말했다. "괜찮아. 하지만 아까건 정말 위험했다구. 좀 살살해. 무게도 꽤 차이가 나 지만 힘도 엄청나게 차이가 난단 말이야." 그 말을 듣고 프로이엔은 천천히 관중석 앞으로 걸어가서 말했다. "폐하. 강력한 타이탄을 하사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방금전의 테스 트만으로 두 타이탄의 힘의 차이를 느끼셨을 겁니다. 소신도 아직 너무나 강 력한 청기사의 조종에 미숙한 부분이 남아 있사오니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 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그 압도적인 청기사의 힘에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있던 젊은 황제는 부드럽게 말했다. "허락 하노라." * * * "문제가 있습니다. 토지에르 경."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론가르트를 보며 토지에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 고 정중히 말했다. "무슨 문제인가요?" "페가수스가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늘 비무도 저는 그냥 마나만 공급해 주고 있었을 뿐... 아니 뺏기고 있었다고 보는게 옳겠군요. 싸움은 완전히 페 가수스 혼자서 다 했습니다." 토지에르 경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흐음... 역시 우려한 일이 발생하고 있군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엑스시온이 강한 만큼 청기사도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있죠. 그만 큼 자존심과 자아가 강하다는 말입니다. 왠만한 타이탄만 되어도 처음에 기사 가 자신의 몸을 조종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지게 되죠. 아직 청기사는 길이 들지 않은 상태입 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친구가... 동반자가 되어 청기사를 길들여 보십시 오. 사실 청기사의 이목을 미스릴로 막지 않았다면 왕국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그대도 청기사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자신을 얕잡아 보는 듯한 말을 하자 자존심이 상한 프로이엔의 눈이 약간 꿈 틀 했다. 하지만 토지에르는 그걸 짐짓 모른체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그건 지금 주인을 마음대로 고르고 있는 유일한 타이탄인 헬 프로네가 입증 해주고 있죠. 헬 프로네의 주인들은 모두가 마스터 급입니다. 아마 청기사에 미스릴을 입히지 않았다면 그 심사기준은 헬 프로네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약 하지는 않을거에요.우리는 그만큼 콧대높은 미인을 길들이고자 하는 겁니다. 그건 당신의 실력과 정성에 달려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히야... 어쨋든 파티 내에 실력자들이 많다는 건 정말 좋군요." 그날 하루종일 산길을 강행군 한 후 해가 저물자 모두들 노숙준비를 했고, 이때 지미가 스프를 끓이면서 내뱉은 말에 라빈도 동의한다는 듯이 말했다. "맞아요. 미카엘하고 셋이서 다닐때는 감히 이런 산골짜기에서 식사준비는 꿈도 못꿨는데..." 그러자 미카엘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말했다. "야. 그렇다고 내가 너희들을 굶기기를 했냐? 왜 투정이 심해?" "언제 이런 산골짜기에 들어갔을때 따뜻한 식사한끼 한 적 있어요? 모두 그 놈의 말라빠진 고기포... 아니면 비스킷, 딱딱한 빵쪼가리... 뭐 그랬지." 사실 이렇게 깊은 산골짜기까지 들어와서 해가 질때쯤 시작되는 저녘식사는 무조건 고기포나 비스킷 같은 거로 정해져 있다. 그 이유는 요리를 하면 그 불빛을 보고 몬스터들이 달려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파티에는 뛰어난 인물 들도 꽤 많았고 거기에 타이탄 쿠마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처량하게 고기포 나 우물거릴 수 있는가? "그건 그렇고 내일이면 키아드리아스의 서식지로 들어가게 되는데... 혹 시..." 라빈의 말을 팔시온이 가볍게 받아넘기며 말했다. "괜찮아. 죽기밖에 더하겠어? 자... 식사나 하자구." 오랜만의 산악 행군으로 일행들은 모두 피곤에 지쳐 밥맛도 별로 없는 상태 였지만 어쨋건 내일도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조건 먹어둬야 했다. 모두들 들어 가지도 잘 않는 음식을 꾸역꾸역 먹어치운 후 잠자리에 들었다. 다크는 그 몸 으로 험한 산길을 걸어서 그런지 식사후에 곧장 골아떨어져버렸다. 첫 번째 불침번을 자원해서 맡은 로니에 사제는 모두들 잠든 모습을 지켜본 후 편안하게 잠들어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잠시 바라봤다. 그런 후 모포 아랫 쪽을 들어냈다. 그러자 그녀의 예쁘고 날씬한 다리가 나타났다. 하지만 양말 부분을 본 로니에 사제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물집과 피가 살짝 배어나 온게 보였기 때문이다. 로니에 사제는 서둘러 양말을 벗겨내고 물집 투성이가 된 발을 꺼내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정도가 되면 엄청나게 고통스러웠 을게 뻔한데도 아프다는 소리 하나 안하고 따라왔다는게 놀라운 사실이었다. 다크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로니에 사제는 이미 다크의 발이 엉망진 창일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전에 라나도 산길을 한번 간 후에 이랬었기 때문이다. 물론 라나의 경우 이상태가 되기 전에 죽는소리를 해대며 일찍이 가스톤에게서 치료를 받고 뻗은척 하면서 말에 실려갔지만... 어쨋든 로니에 사제는 성스러운 치료마법을 동원해서 다크의 발을 깨끗하게 치료한 후 다시 양말을 신기고는 모포를 원상태로 돌려놨다. 그런 후 이번에 는 파티의 모든 구성원에게 샤이하드의 축복을 내렸다. 이렇게 축복을 내려놓 으면 근육통이 사라지고 내일 아침 편안하게 잠에서 깰테니까... 그는 신관으 로서 뒤에서 조용히 구성원들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모든 작업을 끝낸 후 로니에 사제는 충실하게 불침번을 서기 시작했다. 로니에 사제는 두 번째 불침번인 가스톤을 깨운 후 잠이 들었고 가스톤 또한 어김없이 다크의 발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양말이 엉망인데도 발바닥이 매 끈한 것을 본 가스톤은 이미 로니에 사제가 치료를 해줬다는 걸 눈치채고는 원상태로 모포를 잘 덮어줬다. 어쨋든 다크의 모습을 보면 과거 자신이 존경 한 뛰어난 실력의 선배가 저주에 걸려 오크가 된 후 절망감에 자살했던 쓰라 린 기억이 떠올랐다. 그 선배는 오크가 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자살했지만 다크는 마음을 다시 잡고 또다시 수련을 시작하는 걸 보고 가스톤은 마음속 깊이 존경어린 찬사를 보냈었다. 어쨋든 이번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 이다. 세 번째 불침번을 서게 된 지미는 뭔가 부스럭 하는 소리에 놀라서 약간씩 졸다가 벌떡 일어섰다. 자세히 보니 뭔가 어둠속에서 번쩍이는 게 있었다. 그 걸 보고는 놀라서 시드미안을 깨웠다. "뭐야?" "일어나봐요. 뭔가 있어요." 시드미안은 벌떡 일어서서 주위를 살펴본 후 말했다. "트롤이다. 한 30마리는 될 것 같은데... 모두들 깨워." "이봐요. 트롤이에요." 지미의 말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일어서기 시작했고 각자 준비를 갖추기 시작 했다. "무조건 머리를 날려버려." 트롤(troll)은 묵향이 이 세계에 처음와서 싸운 괴물로 그 치유력이 비정상 적일 정도로 좋아서 딴곳을 공격해봐야 씨도 안먹힌다. 그렇기에 최고로 좋은 방법이 머리를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트롤들과 인간들 간의 대규모 접전이 시 작되었다. 힘이 약한 마법사나 신관들은 말(馬)과 다크를 보호하며 안쪽에서 지원을, 검객들은 밖에서 격투를 벌이며 치열한 전투를 시작했다. 트롤이 휘두르는 거대한 돌도끼를 방패로 막으며 각자 있는 실력을 다해 상 대의 목을 노렸고 그들에게 보호받고 있는 마법사들은 놈들을 향해 마법을 날 렸다. 이들이 겨우 트롤 30마리를 가지고 시간을 끈데는 다크가 전투불능이라 는 이유가 컸다. 트롤 30마리쯤이야 다크 정도의 실력자라면 얼마 걸리지도 않겠지만 보통사람들이 봤을때는 거의 목숨걸어야 하는 상대인 것이다. 어쨋 든 이들의 리더인 시드미안은 그 근위기사라는 명성에 걸맞게 현란한 움직임 을 보이며 거의 반수에 가까운 트롤들의 목을 잘랐고 나머지는 동료들이 합심 해서 물리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키아드리아스의 영토 안으로 들 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거의 바뀐 것은 없었다. 한번씩 몬스터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정도 몬스터에게 당할정도로 약한 파티가 아니었던 것이 다. 한참 험한 산길을 꾀를 부려대는 말을 억지로 끌면서 팔시온이 앞서갔고 그 뒤에서 스미온이 다크것까지 두필을 끌고 따라왔다. 사실은 자기 말의 안 장에 다크말의 고삐를 매서 끌고있는 것이었지만... 그 뒤로 줄줄이 가쁜 숨 을 몰아쉬며 한참 전진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드미안이 팔시온에게 외쳤다. "이봐. 잠시 쉬어가세." "예? 좀 더 가는게..." "저기 좀 보게. 더 가서 될일인지." 시드미안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얼굴이 창백해진 다크가 땀을 있는대로 흘리 며 주저앉아 있었다. 그걸 보고는 팔시온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확실히 같은 육체라도 그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이렇게 바뀌는군요. 라나라 면 죽는소리를 하면서 더 이상은 못간다고 떼를 써댔을텐데... 저지경이 되도 록 아무소리 안하고 따라오고 있었다니..." "인내심이 대단한 녀석이야. 지금의 육체로는 조금만 험한곳을 걸어도 죽을 지경일텐데... 아마 저상태로 조금만 더가면 곧바로 인사불성이 될걸?" "으휴... 그래도 계집애라면 칭얼대는 맛이 있어야지... 저렇게 다부져서야 누가 데리고 살겠어요?" "하하하... 자네가 걱정 안해줘도 나중에는 데려갈 사람이 줄을 설거야." 이때 미카엘이 시드미안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도대체 키아드리아스는 어디 있는거죠?" "모르지... 뭐." "계속 안나타나면 어떻게 할거에요?" "어떻게 하기는?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어까지 찾아가야지." "돌았군요." "돌지 않았어. 그 방법 뿐이지. 그럼 어쩔거야?" 모두들 투덜거리며 어쨋든 또다시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카산드리어스는 그 레이시온 산맥의 동쪽에 위치한 카마가스 지역에 산다고 하니까 그 일대를배 회하다 보면 뭔가 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될 수 있으면 좋은길을 택 해가며 말을 끌고갔다. 그런식으로 한 며칠 걸어가다 보니까 그들의 발아래에는 넓은 구릉지대 같은 판판한 곳이 나타났다. 곳곳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돌무더기들이 있 다는 걸 제외하고는 별로 의심스러운 곳도 아니었다. "어째 기분이 좀 으시시 한데요?" "그러게 말이야. 돌무더기들이 꽤 많군. 적게 잡아도 1000개는 되겠어." "저 구릉지대 중간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요?" "으응? 그렇네. 건물같기도 하고 안토니 저게뭐지?" 안토니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워대더니 시동어를 외쳤다. "클레어보이언스(clairvoyance;천리안)!" 그 상태로 안토니는 구릉지대의 구석구석을 훑어본 다음 말했다. "돌무더기들이 괭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작은 집이 한채 있어 요. 사람이 사는 듯 작은 밭도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가보자." 일행은 산위에서 내려오며 구릉지대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에 쌓여있는 돌무 더기가 별로 기분좋지는 않았지만 뭐 그게 걸어다니면서 공격해올 가능성은 없으니 차분하게 중간에 있는 집으로 걸어갔다. 똑... 똑! 꽤 낡은 집이었긴 하지만 그래도 본바탕이 튼튼한 돌로 만들어진 집이라서 아직도 버티고 있는 모양이었다. 똑똑... "이거 뭐야? 사람이 안사는거 아니에요?" "설마... 저기 작은 밭이 있는데 사람이 안살 리가 있나?" 똑똑...똑똑... 한 20분 정도 문을 두들기고 있는 걸 보고있던 미카엘이 투덜거렸다. "사람이 안사는 거라니까요. 그냥 들어 갑시다." "글쎄... 밭이 있는 걸 보면 외출한 모양인데 들어갈 수야 있나. 이 근처에 서 그냥 기다리기로 하지." "으유... 속터져. 여기까지 와서 기사흉내를 내야만 하겠어요?" "나는 트루비아의 자랑스런 기사라네. 그것도 근위기사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받은 사람이지. 아무리 어려운 곳이라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지. 자... 야 영할 준비나 하게." 시드미안의 말에 모두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숲쪽으로 미카엘, 지미, 라빈, 팔시온이 나무를 줏으러 갔고 미디아가 음식만들 준비를 했다. 그리고 시드미 안과 스미온은 주위를 둘러보러 갔고 마법사들은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불상 사를 대비해 대지의 기억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일단 주인이 누군지는 알아야 실례가 없을테니까... 지미와 라빈이 먼저 돌아온 다음에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디아는 여자 였지만 영 음식솜씨가 형편없는 관계로 지미와 라빈이 음식준비를 도맏고 있 었다. 돌덩이 몇 개를 놓고는 그 위에 솥을 올려놓고, 밑에다가는 모닥불을 지핀다. 우물물은 이미 미디아가 길러놨으니 그 물을 펄펄 끓여서는 대강 가 지고 있는거 다 집어넣고 밀가루 좀 풀어서 잘 저어 걸죽하게 만든다고 지미 가 휘휘 젓고있는 동안 라빈은 또 다른 모닥불에 프라이펜을 올려놓고 밀가루 를 반죽해가지고는 적당히 간을 맞춰 팬케이크를(한국말로 밀가루 부친개 비 스무리) 부쳐대기 시작했다. 보통때는 빵을 덮여서 스프하고 함께 먹는데 며칠동안 산속을 헤메다 보니 빵은 다 먹어버렸고 이제부터 건조식품을 대강 끓여서 먹기 시작하는 단계에 온 것이다. 이들이 한참 음식을 만든다고 부산을 떨고있을 때 팔시온과 미카엘이 좀 더 많은 량의 나무를 가져왔고 딴 방향으로 정찰나갔던 시드미안과 스미온 역시 땔감들을 한아름 가지고 왔다. 시드미안은 한쪽에 땔감들을 놔두며 안토니에 게 물었다. "수상한점은 없는거 같던데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저 역시 수상한 건 못느꼈습니다. 이집 주인은 엘프더군요." 안토니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나자 잘 생긴 엘프 남성의 영상이 만들어 졌다. 약간 낡은듯한 망토와 고풍스러운 검이 아주 잘 어울리는 엘프였다. "바로 이사람이 집주인인 모양입니다. 대지의 기억에 따르면 아마 오늘 아침 까지는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러면 좀 지나면 날도 저물테니 돌아오겠군. 지미, 식사는 멀었냐?" "이제 다 됐어요. 자... 둘러들 앉으세요." 그러자 시드미안이 저쪽구석에서 심법을 펼치고 있던 다크에게 외쳤다. "다크! 밥 먹어라! 밥!" 요즘 들어서 다크는 시간만 나면 태허무령심법을 통해 내공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원체 단련이란 단어라고는 모르던 육체가 되어놔서 그런지 거의 일주 일 이상 내공을 운용해봤지만 거의 기가 모이지 않고 있었다. 일단 기가 모이 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쉬운데 처음에 기가 지나다닐 통로를 개척하고 정 말 실낱같은 기를 끌어모아 하나의 자그마한 덩어리로 형성해 나가는 것은 엄 청나게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좀 지나서 심법을 마치고 끼어앉아서는 지미가 내미는 스프와 팬케익 덩어리 를 잡는 다크를 보며 시드미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조금 진전은 보이냐?" 그 말에 다크는 씁쓰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언젠가는 되겠지요." 식사를 마친 후 설걷이는 도움을 거의 주지 못한 미디아와 다크가 헤치우고 쉬려고 할 때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드미안은 미카엘에게 외쳤다. "텐트를 쳐!" "뭐라구요? 집이 옆에 있는데 텐트를 왜 쳐요. 집으로 들어가자구요. 나중에 집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하면 되겠죠." 가만히 생각해보던 시드미안이 말했다. "그도 그렇군. 혹시 잠기지는 않았나?" 문을 슬쩍 밀자 문은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쉽게 열렸다. "자... 안으로 들어가자. 팔시온, 미카엘, 가스톤, 지미, 라빈은 말에서 짐 을 꺼내서 집안에 넣고 나머지는 집안에 들어가서 불좀 피워. 스미온, 안토니 자네들은 나좀 따라오게." 기사들의 신조가 '숙녀(lady)를 위하여'가 되다보니 여자들은 일단 비를 피 할 수 있는 집안으로 집어넣고 남자들은 비를 맞으며 각자에게 할당된 일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단모두들 일을 끝낸 후 집안으로 들어온 다음 집안 이 외부에는 낡고 허름했는데 반해 내부 치장은 아주 고풍스럽고도 멋있게 잘 지어진데 놀랐다. 거기에 갖가지 아름다운 금, 은 세공품들이 장식되어 있었 고 매우 아름다운 여자의 그림도 몇점인가 걸려 있었다. "우와... 정말 대단하네... 도대체 그 엘프는 이런 멋진 장식을 이런 시골집 에 해서 뭐하려고 하는거지?" "뭐, 각자 취향이 있는거니까... 꽤 고급스런 취향을 지닌 엘프인 모양이 군." "이야... 저 활좀 봐요. 정말 멋있는데..." 그러면서 한번 만져보려고 하자 가스톤이 제지했다. "될 수 있으면 만지지 말고 감상만 해. 엘프는 대단히 뛰어난 마법사들이야. 누가 알아? 딴사람이 못만지게 저주라도 걸어놨는지..." "저주쯤이야 걸려봐야..." 그러다가 지미는 저쪽 구석에서 일찌감치 또다시 수련을 시작한 다크를 보면 서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저꼬라지가 되면 절단이지...' 한참 지난 후 비에 흠뻑 젖은 시드미안들이 돌아왔다. 또 근처에 뭐를 하러 갔었는지 모르지만 장작은 한아름씩 안고 있었다. "적당히 말려가며 태우면 되겠지. 그건 그렇고... 아직도 주인은 안돌아왔 나?" "예." "어디서 비라도 피하는 모양인데... 어쨋든 오늘은 이대로 쉬고..." 집안을 두리번거리면서 다음말을 이었다. "따뜻한 보금자리를 빌리는 것만 해도 고마운 거니까 집안 물건에는 손대지 않도록 주의하게. 화낼지도 모르니까." "아무것도 안만졌다구요." 그집 주인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 돌아왔다. 일단 집안이니까 모두들 안심 하고 푹 자고있는데 문이 슬쩍 열리면서 그 남자가 들어왔다.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시드미안이 재빨리 검을 잡고 일어서는 순간 어제 안토니가 보여줬던 그 영상과 같은 엘프가 약간은 놀라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를 보고 시드미안은 재빨리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저녘 갑자기 비가오는 바람에 실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시기를..." 그러자 엘프는 빙그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제 저녘 추웠는데 이불이라도 좀 가져다가 쓰시지..." "그럴수야 있습니까? 허락없이 지붕을 빌린것만 해도 죄송한데... 이봐! 일 어나. 빨리 일어나." 시드미안이 깨워대자 모두들 뿌시시 일어나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집주인이 왔어. 인사해야지." "안녕하십니까? 허락없이 집에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모두들 서로 인사가 시작되자 지미가 시드미안에게 저쪽에서 아침 일찍 일어 나 수련중인 다크를 가리키며 조용히 속삭였다. "다크는 어떻게 할까요?" "자기가 수련할 때 몸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으니까 옆에 가서 말을 해. 못듣 는거 같으면 좀 더 큰 소리로 말하고." 약간 시간이 지나자 다크도 그들쪽으로 걸어왔고 모두들 인사를 나눌 수 있 었다. "저도 인간세상을 조금 떠돌아 다녀 봤는데 모험자분들 치고는 꽤나 예의에 밝으시군요." "아닙니다. 과찬의 말씀을..."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이 일대는 공포스러운 블루 드래곤 키아드리아 스의 영토인데... 혹시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용 살해자)라도 되고 싶으시오?" '카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엘프가 약간 농담조로 말하자 시드미안이 미 소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야 꿈만 많은 몽상가들이 하는 소리고... 혹시 그를 만나면 물어볼 말이 있어서요." "드래곤에게 물어본다고요? 당신 제정신이오? 물어보기 전에 뱃속에 들어갈 게 뻔한데..." "그래도 목숨을 걸고라도 물어봐야 할게 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나도 젊었을때는 제법 세상을 여기저기 돌아 다녀서 약간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소." "그럼... 혹시 블루 드래곤에 뿔이 달려 있습니까?" 무슨 엄청난거나 물어볼 줄 기대했는지 한참 흥미를 보이던 카렐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당연히 있죠. 드래곤 중에 뿔없는 드래곤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 그거 알아 보려고 목숨을 거셨소?" "그건 아니구요. 블루 드래곤의 뿔은 몇 개인가요?" "나야 여기서 살면서 몇번 키아드리아스를 봤는데 내가 봤을 때 분명히 하나 였소. 이렇게 이마 중간에 길게 하나가 솟아있죠." 그 말을 들은 시드미안은 실망한 듯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그럼 블루 드래곤도 아니군..."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그럼 혹시 이렇게 생긴 짐승이 있는지 아십니까?" 카렐은 주의깊게 신탁에서 받았던 그림을 보더니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푸른색이 나면서 이렇게 생긴 짐승은 없소. 색깔을 무시한다 고 해도 마찬가지지. 내가 여행하면서 듣기로 레드 드래곤이 뿔이 세 개라고 하지만 이런식으로는 생기지 않았소. 이건 아예 무슨 투구나 마신의 머리모양 같군요." "투구나 마신이라구요? 하지만 투구는... 아닐거고... 마신이라면... 이보게 안토니, 마신중에서 이렇게 생긴 마신이 있을까?" "마신들이야 원체 숫자가 많으니까 그 생김새들을 기억할 수는 없죠. 하지만 꽤 모양이 다양하니까 어쩌면 이렇게 생긴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아. 그럼 다시 돌아가서 이제부터 마신에 대해 연구를 해보면 되겠군. 도 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데 그러시나요? 그대를 보아하니 꽤 수련을 쌓은 분 같은 데... 그냥 모험가나 할 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말입니다." "예. 저희들은 드래곤 하트를 훔쳐간 놈들을 추격하는 중인데 드래곤 하트의 행방을 물으니까 이런 종이가 달랑 신탁으로 나왔죠. 그리고 그놈들 중에는 뛰어난 흑마법사까지 있거든요. 그걸 보면 아무래도 이 그림이 마신일 가능성 이 크겠군요." "드래곤 하트라... 정말이지 인간들이 가지기에는 너무 위험한 물건이군요." "예. 드래곤의 마나가 집중된 것이니 만큼 그게 나쁜 목적에 사용된다면 큰 일이지요." 한참 같이 얘기를 나누던 카렐은 저쪽에서또다시 내공수련을 하고있는 다크 를 보면서 말했다. "저 아이도 동료인가요? 동료치고는 너무 어리군요..." "아주 뛰어난 동료였습니다. 디스라이크라는 저주에 걸려서 저모양이 되었지 만요. 실의에 빠져 한달정도 술독에 빠져있다가 요즘들어 다시 수련을 시작했 죠. 어쨋든 대단한 정신력을 갖춘 검객이죠." "후후... 디스라이크에 걸린 것 치고는 꽤나 특이한 모습이군요. 그건 그렇 고 대단한 젊은이군요. 저렇게 자연스레 마나를 다스릴 줄 알다니..." "마나를 다스린다구요?" "그럼 그대는 그걸 못느꼈단 말이요? 아주 미약한 량이지만 스스로의 통제에 의해 움직이고 있어요. 그러면서 외부에서 마나를 조금씩 흡수하여 그 덩어리 를 키우고 있지요. 어쨋든 대단한 기술입니다. 나는 여태껏 저런 방식으로 수 련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그 말에 시드미안의 얼굴에는 약간은 씁쓰레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크에 대 해 그렇게 잘 아는게 약간은 마음에 걸렸지만 상대는 정령을 부리는 엘프니까 어쩌면 마나의 움직임에 특별히 민감할수도 있기에 시드미안은 별 생각없이 말했다. "그러실만도 하실지도... 저주를 받기 전에는 타이탄도 박살냈던 엄청난 실 력의 소유자였으니까요. 아마 전쟁의 신전에 등록은 되지 않았겠지만 그때 그 는 아마 마스터의 경지에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지요." "어쨋든 서론이 길었던 것 같은데 여기 먹을것도 좀 있으니까 식사라도 같이 하시겠소? 과일이나 채소 뿐이지만..." "아닙니다. 지금 동료들이 준비하고 있으니 같이 드시지요. 밖으로 나가시 죠. 아마 지금쯤 준비가 다 끝났을 겁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내것도 가져올테니..." 모두들 죽 둘러앉아 카렐이 가져온 생과일이나 과일절임을 그들이 끓인 스프 나 팬케ㅇ과 함께 먹으며 얘기를 나눴다. 그 와중에 카렐은 여자답지 않게 퍼 질고 앉아서는 무표정하게 음식들을 씹고있는 다크를 보며 말을 건넸다. "그대는 누구에게 검을 배웠나요?" "스승들에게서요." "스승들이라고요? 그러면 당신의 스승들도 당신만큼 검을 다룰 줄 압니까?" "아니요." "흐음... 당신은 어느나라 사람입니까?"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에요. [송]이라고 불리는 아주아주 먼 곳에서 왔지 요." "송? 들어본 적이 없는데?" "당연히 들어본 적이 없겠죠. 여기와는 차원도, 시간도, 공간도 다른 곳이니 까." 카렐은 경악하며 다시금 다크를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예. 그렇게 봐봐야 별로 차이도 못느낄거에요. 그놈의 저주 때문에 겉모양 이 바뀌었으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예전의 수준까지 올라갈거라고 생 각합니까?" "10년 이내. 어쩌면 그보다 더 당겨질지도... 어쨋든 여기는 내가 살던 곳보 다 기... 아니 마나가 더욱 충만한 곳이니까..." "그렇다면 겨우 10년만에 마스터의 경지까지 오를 자신이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의 그 쓸모없는 육체에서?" "내 계산 정확하다면요. 사실 그보다 더욱 앞당길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 정 신상태로는 그건 목숨을 건 도박이라서 실행을 못하고 최대한 안전한 방법을 택하고 있을 뿐이에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거든요." "놀랍군요. 그토록 빠른 시간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니..." "그건 내가 한번 지나왔던 길이니까 그렇지요. 그건 그렇고 당신의진정한 정체는 무엇입니까?" 다크는 그 커다란 눈으로 상대의 눈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내 눈과 천천히 다져져 가는 감각... 그리고 느낌은 당신이 절대 평범한 인 물이 아니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어요. 엄청난 경지까지 검을 이해한 사람이라 고 말하고 있지요. 안그런가요?" 하지만 카렐은 그 미소를 아직까지 지우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느낌은 종종 틀릴 수도 있지요." 그러면서 그는 허리에 찬 고풍스런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녀석은 내가 오래전 세상을 떠돌 때 사용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걸 써본적은 거의 없어요. 그때 배웠던 검술도 거의 다 잊어버렸구요." 미소띈 카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다크는 다시 스프를 먹기 시작하며 말 했다. "검이란 것은 배우기도 어렵지만 잊어버리기는 더 힘들지요. 나도 배웠던 수 많은 검술들을 완전히 잊어버리는데 40년 정도가 걸렸으니까요."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일행들은 모두 음식 먹기를 멈추고 다크의 예쁜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중에는 먹던게 목에 걸렸는지 기침을 심하게 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이는 놀라서 입속에 있던 음식이 튀어나가기 도 했다. 그런 와중에 카렐은 좀 더 짙은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대가 저주에 걸리기 전에 만났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다크도 방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 또한..." "그대의 나이는 몇살이오?" "72살. 그대는?" "420살이고 해두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대단히 오래 사셨군요." "원래 엘프의 수명은 500년 정도니까 그렇게 길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런데 왜 내가 여기와서 만난 그 어떤 인물보다 강한 무예를 소유하고 있 으면서 이곳에서 숨어지내고 있죠?" 그러자카렐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는 결코 숨어지내는게 아니에요. 다만 추악한 인간들 근처에서 살고싶지 않을 뿐... 그 더러운 욕망과 추악한 심성을 그만큼 뼈저리게 느꼈으면 되었 지 더 이상 내가 인간세상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겠지요. 또 엘프에게 자연과 함께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결코 은둔이 아닙니다. 이 세상 거의 모든 엘프가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지내는게 좋으시다니 다행이군요. 내가 알고있던 어떤 선배도 그렇 게 세상을 떠돌며 사는 사람이 있었죠. 그의 경우는과거 저질렀던 어떤 실수 에 대한 사죄같은 거였지만... 어쨋건 내가 아는 강자들은 이상하게 세상과 떨어져서 살기를 더 좋아하는군요." "그도 당신 만큼이나 강했나요?" 다크의 눈이 회상에 잠기듯 약간 몽롱해지며 살짝 미소를 띄고 말했다. "나보다도 더 강했었죠. 단 한번 잠시 스쳐가듯 만났었지만 그에게서 꽤나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지요.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카렐은 그런 다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러면 나중에 당신이 잊었던 무예를 되찾았을 때 나와 한번 비무를 해주겠 습니까?" "예.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그러자 카렐은 빙긋이 미소지으면서 자신의 손까락에 끼워져있던 아름다운 푸른 보석이 박힌 반지를 빼내어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내가 오래전에 했던 여행에서 얻었던 거죠. 원래가 나한테 별로 맞지 않는 반지였는데... 나중에 힘을 되찾으면 이게 필요도 없겠지만... 지금은 당신을 지켜줄겁니다. 사양말고 받아요." 은근히 권하는 통에 다크는 할 수 없이 그 반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크 는 카렐의 굵은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그 반지가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워진 후 잠시 빛을 내더니 곧이어 자신의 손가락에 딱 맞게 줄어드는 것을 보고 이게 마법반지라는 걸 알았다. "그녀석의 이름은 아쿠아 룰러(AQUA RULER;물의 지배자). 그녀석을 잘 못 사 용하면 그대의 목숨이 사라질 수 있지만... 그대가 그런 사악한 인물이 아니 라고 믿고 주는 것이니 그 반지를 사용해야만 할 때는 꼭 세 번 생각해서 사 용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그대의 힘으로는 그걸 사용할 수 없어요. 그러니 그 냥 끼고만 있다면 나머지는 그녀석이 알아서 해 줄겁니다." 아쿠아 룰러라는 말이 나오자 그말이 뜻하는 걸 알고있는 몇 명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것은 무한한 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걸 모르는 다크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럼 제 힘을 찾을 때까지만 빌릴께요. 내 힘을 되찾았을 때 그때는 이걸 돌려드리겠어요. 사실 그때쯤 되면 이건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요." 다크의 말을 들은 카렐은 미소하며 말했다. "내가 주인을 꽤 잘 찾아준 것 같군. 그럼 그때 되돌려 받기로 하지요." 그들은 사실 그곳에 더 이상 있을 이유도 없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 기에기억에 남을만한 아침식사를 끝낸 후 카렐과 작별을 하고 서둘러서 산을 내려가야만 했다. 카렐과의 대화에서 아무래도 마신일 가능성이 높아진 이상 마법에 대한 연구가 잘 되어있는 알카사스에서 그에대한 단서를 뒤져볼 생각 이었던 것이다. 어쨋든 재빨리 돌아가기 위해 점심은 건조식량으로 때우면서 길을 채촉한 다 음 밤이되어 모닥불을 피우고 식사를 끝낸 후 쭉 둘러앉아서 곧바로 다크가 받은 반지에 대해 얘기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의 시발점은 시드미 안이 끊었다. "다크." "왜요?" "카렐이 엄청난 실력의 검객인 건 어떻게 알았지? 나도 눈치채지 못했는 데..." "그야 당연하죠. 엄청나게 높은 경지까지 올라가면 자신이 가진 기를 몸속 깊이 숨겨서 밖으로 드러내지 않죠. 그냥 보면 평범하게 보여요. 나도 오랜시 간 수련을 하며 쌓은 경험에 의한 것일뿐... 꼭 뭐라고 찝어서 말할 수는 없 군요." 그러자 팔시온이 말했다. "아까 그말 정말이야? 72살이라는거." "정말이에요." "이야... 그렇다면 여기있는 사람들 중에서 최고 고령자가 가장 어리게 보이 는 소녀로군... 그건 그렇고 이렇게되면 내가 말을 높여 불러야 할까요? 다 크 어르신?" 그러자 다크가 낮게 웃으면서 말했다. "킥킥... 그따위 소리하지 말고 같이 놓자. 그렇게 덩치 큰 인물이 나한테 높임말을 쓰면 다들 미쳤다고 생각할거야. 아니면 나를 귀족쯤으로 생각하겠 지. 하여튼 그 둘 다 내가 원하는 건 아니야." "그도 그렇네. 하기야 엘프들은 100살이 다되어 가지고 세상에 나오면서 20 살 정도의 외모를 가지니까... 그들이 모험가들과 파티가 되었을 때 모험가들 이 엘프보고 존댓말 쓰는거 본적이 없으니 뭐 그렇게 하지. 또 갑자기존댓말 쓰자니까 거북하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72살의 나이에 20대 중반 정도의 외모를 가질 수 있 었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이해가 안가는데..." "그야 내가 예전에 살았던 곳에서는 [화경]이란 단계에 들어가면 체내에 쌓 인 그 엄청난 마나로 육체를 완전히 바꿔 젊은 육체로 새로 바꿀 수 있지. 화 경이 검강을 뿜어낼 수 있는 단계니까 아마 이쪽의 마스터하고 같은 무예수준 일거야. 혹시 마스터라고 불리는 사람을 본적 있어?" 그러자 모두들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스터란 존재는 이 세상에 12명 정도가 생존해 있을 뿐인 정말이지 지고무상의 존재였기에 그들과 만날 가능성은 평 생 길거리를 가다가 1만 골드를 줏을 확률보다 낮았다. 모두가 고개를 가로젓 는 걸 보면서 다크가 말했다. "아마 그들도 나처럼 젊은 육체를 가지고 있을거야. 또 몸속에 쌓인 마나의 양이 많다면... 그러니까 지금 시드미안 정도의 량만 있다면 어느정도 기술만 배우면 노화를 막을 수 있어. 노화를 억누르는 것은 마나만 많다면 결코 어려 운게 아니니까..." 그러자 솔깃해진 시드미안이 말했다. "그 기술 나한테 좀 가르쳐 줘." 다크는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봐야 겉모습 뿐이야. 근골의 노화는 똑같이 진행되니까... 말짱 헛거 야. 대신 너희들이 말하는 마스터 부터는 다르지. 그때 완전히 새로 몸이 재 구성되는 [환골탈태]라는 걸 경험하게 되는데... 그걸 여기 말로는 잘 모르겠 어. 그걸 거치면 어거지로 노화를 억누르는게 아닌 진짜로 몸이 젊어진다 고... 여기서는 여러 가지 마나를 이용한 기법들이 발달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들 정도 경지까지 올라갔다면 그따위 기법은 필요없이 저절로 몸이 젊어지 게 되어있어." 미카엘이 그말을 듣고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나는 마스터라면 엄청나게 늙은 인물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닐줄이야... 앞으로는 젊어보이는 사람들 한테도 조심해야겠어." "그건 그렇고 다크 너, 그 아쿠아 룰러가 뭐하는 반지인줄 알고 있는거냐?" 시드미안의 물음에 다크가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보면서 지미가 말했다. "우리들한테도 말해줘요. 우리들도 그게 뭐하는 건지 잘 모르니까." 그러자 시드미안이 쭉 주위를 둘러본 후 말했다. "내가 설명하기는 좀 그러니까 전문가인 안토니가 좀 설명해주게. "예. 그러니까 아쿠아 룰러는 물의 지배자. 물을 지배하는 강력한 마력반지 죠. 전설에 따르면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naiad)의 힘이 봉인되어 있다고 전 해지는 봉인 반집니다. 그 힘을 모두 끌어내면 폭우를 부를 수 있다고 전해지 는 엄청난 물건입니다." 안토니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빈이 말했다. "그런데 정령왕이 봉인되어 있다면 이 세상에 물은 없어야 되잖아요. 또 홍 수도... 비도 없어야 하는데 왜?" "아... 그건 라빈 네가 잘 못 알고있는거야. 말이 봉인이지 사실은 봉인이 아니거든. 이세상에정령을 봉인할 수 있는 물건은 없어. 그냥 정령과 계약 을 맺을 수 있을 뿐이지. 저 아쿠아 룰러를 통해 나이아드는 자신의 힘을 원 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계약을 맺었을 뿐이지. 그러니까 결론은 저 아쿠아 룰 러가 곧 나이아드고 나이아드가 곧 아쿠아 룰러가 되는거야. 언제라도 아쿠아 룰러를 매개체로 나이아드를 불러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아마도 카렐이 한 말은 아쿠아 룰러 자신이 파괴되지 않도록, 또는 그걸 가진자를 어느정도 수 준까지는 지켜줘야 하는 계약도 있는 모양이지. 그러니까 저걸 가지고만 있어 도 어느정도 힘이 되어줄 거라고 하는 거지." 지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아쿠아 룰러가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아무렴. 과거 저걸 이용해서 도시 하나가 완전히 물속에 잠긴 일이 있었지. 하지만 그 후로 거의 300년간 이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는데... 설 마... 카렐이 그 사건의 주인공은 아니겠지?" 안토니가 농담삼아 뒷얘기를 하자 가만히 듣고있던 미디아가 말했다. "어쩌면 그 나쁜놈을 카렐이 죽이고 그걸 뺐았는지도 모르죠. 카렐이 말했잖 아요. 나쁜일에 쓰면 목숨이 날아간다고..." 그들의 말이 언제 끝날지 모르게 계속 이어지자 시드미안이 손을 저으면서 일행의 대화를 끝마쳤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어쨋든 그만 자자. 내일도 또 엄청나게 걸어야 하니 까..." 제6부 다크, 나아이드의 힘을 얻다. 마도사에 관한 정보 한참 서류를 뒤적거리며 읽고있던 토지에르는 문이 열리며 제자가 들어오는 걸 보고 말했다. "어떻게 되었냐?" "죄송하지만 한발 늦었습니다. 이미 떠났습니다. 한 며칠 몬스터 사냥한다고 통행증을 발급받아서는 고헨으로 떠났습니다. 만약 그들이 한 말이 사실이라 면 그레이시온 산맥에 있는 몬스터를 잡으러 갔겠지만... 거짓말일 수도 있습 니다." "좋아. 그렇다면 그레이시온 산맥을 넘으면 뭐가 있지?" 갑작스런 질문에 제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예. 산맥을 넘으면 코발트 제국이 나오죠." "흐음... 그놈들이 코발트에는 왜 갔을까? 코발트에는 딱히 이렇다할 뭔가도 없는데... 아니야... 그놈들이 코발트에 갈 가능성은 없어. 어딘지 모르겠지 만 중간에 딴곳으로 샜을 가능성이 크지. 그래, 뒷처리는 어떻게 해놨냐?" "일단은 미네온과 고헨에 첩자들을 남겨뒀습니다. 추격을 할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외려 너무 적극성을 띄었다가는 놈들에게 역추적 당할 수도 있기에 그냥 뒀습니다." "잘했다." "참. 미네온에 있던 녀석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코린트 기사 4명하고 마법사 1명이 그쪽에 도착했답니다. 목적은 무투회 관람 및 관광이라는데요?" 코린트라는 말이 나오자 노마법사의 표정이 굳어지며 그의 심정을 대신하듯 약간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놈들의 신상은 파악했냐?" "예. 신상파악은 의외로 쉬웠습니다. 마법사는 길레트 지오네. 기사들은 크 로돈 안티네스, 토리오 지르네인, 리나 인트레인, 지단틴 카메오. 모두들 철 십자 기사단의 그래듀에이트 들입니다. 전쟁의 신전에 가서 그들이 맞는지 확 인까지 끝냈습니다." 제자의 말에 토지에르는 머리를 지긋이 누르며 신음성을 터뜨렸다. "으음... 드디어 올것이 왔군."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도 드로아 대신전에서 추격이 지지부진하니까 황궁 에 보고를 올린 모양입니다." "큰일이군. 어쨋든 모든 일을 알카사스에서 벌일 수밖에 없군. 그쪽에서 사 건을 만들어 코린트의 이목을 그쪽으로 집중시켜 놓고는 시간을 버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어. 아직도 나머지 청기사들이 모두 깨어나는데 1달 정도의 시간 이 더 필요해. 우선은 첩자들에게 그놈들의 동행을 철저히 감시하라고 일러 라. 대신 꼬리 안잡히게 조심하라고 하고..." "스승님. 철십자 기사단이라면 가장 좋아봐야 카로사나 로메로급 타이탄을 쓰는데... 그놈들을 몽땅 다 없애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없애버린다고? 그렇다면 알카사스 내에서 타이탄 전쟁을 벌이자는 말이냐? 네놈은 정신이 있는거냐 없는거냐? 마도왕국에서 그딴짓을 하다가 잘못하면 공간이동을 역추적 당해서 이쪽의 정체가 노출될 수도 있는데..." 그러자 제자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제 3국을 통해서 기사들을 투입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뭔가 눈치챘 을지도 모르는 그놈의 시드미안 이라는 놈의 일행까지 몽땅 다 잡아들이는 겁 니다. 아마 이쪽에서 로메로 10대 정도 동원하면 간단하게 해결될겁니다. 승 리하면 5대의 타이탄이 거저 생기는 거구요. 어떻습니까?" "하지만 안전하게 해치우는데 로메로를 10대나 동원해야 한다는게 마음에 안 들어. 어쨋든 궁리는 한번 해보자. 어이구... 그놈의 소드 마스터를 헤치워서 한시름 놓았나 했더니.... 만약 그놈들이 시드미안과 접촉한다면... 그러니까 그놈들도 드래곤 하트를 추격해 왔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손을 써야겠지 만... 지금은 놔두는게 좋겠다. 진짜 관광이나 하러 온 놈들인지도 모르니 까..." "알겠습니다." * * * * * 시드미안 경 일행은 또다시 미네온으로 돌아왔다. 그런 후 이번에는 시드미 안의 지시로 '수정 지팡이 여관'이 아닌 '유리 구슬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지미와 라빈이 다크와 함께 있고싶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따른 시드미 안의 배려였다. 하지만 지미와 라빈의 생각은 이번에도 또 그의 생각과 달랐 다. 조용하고 끈질긴 그러면서 군소리 안하고 어려운 일을 해나가는 다크에게 그 둘은 슬슬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자아가 남자면 어때? 저렇게 예쁜데... 암... 그렇고 말고... 자고로 미인에게는 모든게 용서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2인용 방 있어요?" "예." "오... 잘되었군. 그럼 4인용이나 5인용 방은요?" "4인용 방은 있습니다." "그럼 4인용 방 둘하고 2인용 하나 주세요." "2인용이면 더블(double)? 트윈(twin)?" "트윈!" 주문을 자세히 듣고있던 지미가 화가나서 말했다. "잠깐... 그럼 수가 모자르잖아요? 한명은 땅바닥에서 자란 말이에요?" 그러자 시드미안이 능청스레 말했다. "방을 4개나 빌려서 전력을 분산시킬 필요는 없잖아. 번갈아가며 바닥에서 자기로 하지. 이번에는 다크 때문에 잔심부름 할 일도 없으니 오히려 잘되었 잖아? 안그래?" 일단 일행은 짐을 풀고난 후 식사를 마치고 마법사 길드로향했다. 또다시 거기에 문의할 사항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법사 길드 1층 접객실에 앉아있던 여자가 물어오자 팔시온은 재빨리 대답 했다. "흑마법에 대해 문의할게 있어서 왔는데요. 잘 아시는 분이 계시면 좀 주선 해 주십시오." "흑마법이라...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 여자는 한참 두툼한 책을 뒤적거리더니 말했다. "원래가 흑마법을 연구하시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본격적으로 흑마법 에 뛰어드는 사람은 흑마법사뿐이죠. 그러니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군요. 6층 에 있는 2호실에 들어가세요. 문에 '2'라고 써져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그런다음 일행은 계단이 있는 곳으로... 아니 계단이 있을법한 곳으로 걸어 갔다. 하지만 이리저리 기웃거렸지만 계단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는 일행이 돌아 다니는 걸 처음에는 이상한 눈길로 쳐다봤지만 곧이어 그들이 찾 는게 '계단'이란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래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호호호... 여기는 계단이 없어요. 6층으로 가시려면 저기있는 마법진에 서 서 '고매하고도 아름다우신 세레네님이시여, 제발 우매한 저희들을 6층으로 보내주십시오.'하고 말하면 되죠." 그러자 모두들 자신들의 무식함에 얼굴이 벌개져서는 그 마법진 위에 섰고 팔시온도 뻘개지려는 얼굴색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이따위 이동마법진은 신기 할것도 없다는 듯한 노련한 것 같은 인상을 일부러 풍기며 재빨리 시동어를 외쳤다. "고매하고도 아름다우신 세레네님이시여, 제발 우매한 저희들을 6층으로 보 내주십시오." 주문을 외운 후 5초정도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그들의 시야가 흐려졌다가 밝 아졌고 그 여자가 앉아있던 테이블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왔군. 아주 편한데?" "이런... 이것도 몰라서 계단찾는다고 돌아다니다니... 이런 개망신이.." "뭐 나중에라도 알았잖아? 자, 빨리 가자." "2자가 적힌 문이라... 음... 저기있네." 똑똑.. "들어오시오." 그들이 문을 열자 거기에는 전에 한번 그들과 대화를 나눴던 그 근엄한 마법 사 할아버지가 앉아있었다. "어? 당신들은?" "어? 여기 계셨군요. 그때는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 노 마법사는 일행의 뒤에 서있는, 전에 봤을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정 도로 살아있는 눈빛을 한 아름다운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노 마법사는 그쪽으 로 다가가서는 그 소녀를 가볍게 들어올려 빰에 뽀뽀를 하면서 말했다. "이야... 놀랍게 변했구나. 정말 예쁜 아이가... 쪽!" "아니, 이 변태 영감이 뭐하는 짓이얏!" 퍽! "으윽! 성질은 하나도 여자로 안변했군. 여자아이라면 다소곳한 맛이 있어.. 윽!" 또다시 노인의 정강이를 들고찬 후 씨근거리는 소녀를 뒤로하고 노마법사는 아픈곳을 문지르며 시드미안에게 물었다. "아야야야...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로 왔나?" "아... 예. 혹시 이렇게 생긴 마신이 있나요?" "어디보자... 으음... 이렇게 생긴 건 없고 이거 비슷하게 생긴 건 있지." "비슷하게라도 생긴게 있으면 좀 말씀을...." 노마법사는 벽면에 놓인 서가에 꼽힌 수많은 책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그 중 한권을 꺼내서는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책을 내밀면서 말했 다. "바로 이녀석이지. 크로네티오." 그가 펼쳐놓은 페이지에는 신탁에서 받은 그림과 조금 다르긴 했지만 세 개 의 뿔을 가진 대가리를 어깨위에 얹고있는 무시무시한 악마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 둘이 더 있지. 어쨋건 뿔 셋을 가지는 악마들은 많지만 그 세 개가 이런식으로 교차하는 모양을 가지는 건 이 셋의 악마들 뿐이야. 크로네티오, 지르누, 크로돈..." "저희들은 악흑마법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아는 편이 아니라서 그러는데 요... 만약 어떤 사악한 마법사가 흑마법을 쓰려고 한다면 이 셋중 누구를 택 할까요?" "흐음... 물론 택한다면 될 수 있다면 강한 마신을 택하는게 좋지. 저 셋의 순위는 크로네티오, 지르누, 크로돈 순이야. 흑마법은 신성마법과는 약간 다 르지. 신들의 순위는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아. 그러니까 어떤 신을 믿던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더 강한 신성마법을 쓸 수 있고 또 상대도 거기 에 타격을 받게 된다네. 하지만 흑마법은 다르지. 흑마술사끼리 싸우는 경우 가 거의 없기에 자네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는 거의 100종류의 마신들 이 있지. 또 고대에 발견된 마신들은 몇백이나 되는지 알수도 없어. 아마 내 예상으로는 한 500은 넘을거라고 생각되네만... 그 마신들은 매우 순위가 정 확하게 정해져있지. 그 순위에 따라 하급마신의 힘으로 아무리 강력한 흑마법 을 쓰더라도 상위마신과 계약을 맺은 사람에게 타격을 주기는 어렵지. 심지어 그 어떤영향도 못주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 그래서 흑마술을 배우려면 최대한 강한 마신과 계약을 맺는게 유리하다고 봐야지. 그래야 더 강한 흑마 술을 쓸 수 있고 또 마법의 가짓수도 많으니까..." "그렇다면 마왕 크로네티오라는 말입니까?" "그렇네. 흑마술은 딴건 모르지만 처음에 마신과 계약을 맺기가 힘들지. 강 한 마신을 불러내야지만 계약을 맺을게 아닌가? 마법사 자신의 실력이 딸려서 는 강한 마신을 불러낼 수 없어. 아마 크로네티오를 불러내려면 6싸이클이나 그 이상의 실력이 있어야 가능할걸세." "오호... 그렇다면... 여기는 마법사 길드니까 혹시 각 국가에 소속된 마법 사의 명단이나 이미지를 얻을 수 있을까요? 6싸이클 이상만..." 그 말에 노마법사는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전쟁의 신전과 달리 마법사 길드는 각 국가체계로 돌아가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알카사스의 마법사들 뿐이야. 딴나라의 마법사가 몇 명인지는 알 수가 없지. 또 각 국가의 5싸이클 이상 마법사의 명단과 수는 모든 나라에서 국가기밀이라네. 알게나?" "하지만 저희들은 저희를 공격했던 그 마도사 녀석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힘으로 봤을 때 6싸이클 이상이라고 생각되는데... 안될까요? 이 미지만 보면 그놈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건 어느 누구에게 부탁해도 안될거야. 타이탄의 수와 그것을 조종하는 그 래듀에이트의 수가 외부에 드러나는 그 국가의 힘이라면 마법사의 수는 그 국 가의 감춰진 힘이라네. 마법사 개개인의 힘은 어마어마하고 또 그들이 뭉친다 면 왠만한 국가하나 박살내는 건 손쉬운 일이지. 공격력은 대단하지만 방어력 은 별볼일 없는 마법사의 명단이 유출된다면 적국은 당장에 그들을 암살할테 고 그러면 그 나라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끝장이지. 알겠나?" 이때 한참 듣고있던 다크가 그들의 말에 끼어들었다. "이봐요. 아까 하위 마신의 흑마법으로는 상위 마신과 계약맺은 자에게 타격 을 줄 수 없다고 했죠?" "으응?" 일순 한참 대화를 하던 중이었기에 잠시 다크의 말을 못알아들었던 그 노마 법사가 잠시 시간을 지체하며 그 말뜻을 이해한 후 말했다. "그랬지." "그렇다면 만약 상위의 마신과 계약을 맺으면 하위의 마신에게 걸린 저주는 무효가 되는 건가요?" "아마 그럴거야." "그렇다면 크로네티오보다 더강한 마왕에는 뭐가 있죠?" "크로네티오는 대단히 강한 마왕이야. 그보다 더 강한 마왕은 거의 없어. 비 슈누, 시라에뉴, 바크로니아, 도니티에... 이 넷 뿐이지." "그럼 그놈들 중 하나를 좀 불러줘요. 불러줄 수 있죠?" "뭐? 너 지금 제정신이냐?" 상대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듯한 노마법사의 눈길을 받으면서도 그 소녀는 꿋꿋하게 말했다. "예. 제정신이에요." "하지만 그놈과 계약을 맺으려고 하기에는 너는 터무니 없이 약해. 계약을 맺기도 전에 몸이 붕괴된다구. 계약을 맺으려면 엄청난 마나가 필요한데..." "대신 그녀석에게 부탁하면 되지요. 계약을 맺고 그 후에 마나를 가져가면 안되겠느냐고... 내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따위 마나정도는 얼마 든지 줄 수 있어요." "완전히 돌았군. 꼭 너는 그 마왕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몸이 원상태 가 되고싶냐? 흑마술사가 되면 점점 마성이 자라나기 시작해서 계약을 맺은 후 30년, 길게는 50년도 안되어 너의 혼이 마왕놈에게 완전히 먹혀버리는데 도?" "먹힌...다구요?" "그럼. 먹히지. 그런다음 피에 굶주린 광기를 부리던지 아니면 죽던지 둘중 하나가 되지. 어때? 그래도 악마와 계약하고 싶냐?" "흐음...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겠는데...?" "생각하고 자시고 할것도 없어. 앞으로 창창한 미래가 펼쳐진 소녀가 할 소 리가 아니라구. 수련이나 해. 시간이 지나면 어느정도 힘을 되찾을 거 아냐?" "그게 좋겠군요." 어느정도 둘의 의견이 일치되는 듯 하자 시드미안이 노마법사를 향해 말했 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인데 식사시간도 다 되었으니 같이 식사 나 하러 가시죠. 전에 조언해주신 데 대한 고마움도 표시할 겸..." "뭐... 그러지. 하여튼 자네들 처럼 특이한 파티는 보다보다 처음이니까... 그런데 왜 그 그림의 대상을 찾는건가?" "이번에 드로아 대신전에서 드래곤 하트가 없어졌습니다. 그것의 행방을 물 으니까 그게 나오더군요." "드래곤 하트라고?" "예." "정말이지 무서운 물건이 없어졌군. 드래곤 하트라면 엄청난 힘을 낼 수 있 지... 어쨋든 내려가세. 나도 출출 하군..." "예." 모두들 조르르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자 그 노마법사가 외쳤다. "1층으로!" 그와 동시에 1층으로 일행은 이동되었다. 마법진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팔시 온이 궁금한 듯 노마법사에게 물었다. "어? 주문이 다른데요? 저 여자는 '고매하고도 아름다우신 세레네님이시여, 제발 우매한 저희들을 6층으로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하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노마법사의 얼굴이 벌개지더니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자에 게 쫓아가서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세레네, 너 또 손님들한테 장난쳤구나. 그러지 말라고 얼마나 얘기했냐?" 그러자 그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는데 간혹 어깨 가 떨리는 것이 우는것인지 소리죽여 웃고있는 것인지 분간하기힘들었다. 어 쨋든 노 마법사의 행동을 보고 자신이 완전히 농락당했다는 걸 알아챈 팔시온 의 얼굴이 시뻘개졌지만 노마법사가 대신 길길이 뛰고 있으니 참을 수밖에 도 리가 없었다. 아마도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하고 있겠지만... 노마법사는 일행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며 사과했다. "미안하군. 애는 참 좋은데, 장난기가 좀 지나쳐서 말이야. 어쨋든 애교로 봐주시길 부탁하네." "괜찮습니다." 팔시온은 그렇게 말했지만 뒤에서 누군가가 킥킥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을수 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 말에 속아서 그렇게 기나긴 '주문'을 외웠다 는게 분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시키들... 즈거들도 속았으면서 대표해서 주문을 외운 나만 비웃다니... 나 쁜놈들...' * * * "제기랄..." 생각만 해도 분하다는 듯 팔시온이 욕설을 입에 올리자 시드미안이 그걸 보 고 미소띈 얼굴로 말했다. "참게나. 장난이라고 했잖아." "아니... 성질 안나게 생겼어요? 생각만 해도 열불이... 어?" 똑똑..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여관 주인이 들어오며 말했다. "저...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이리로 모실까요? 아니면 밑에서 만나시겠습 니까?"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일까 생각 하면서 시드미안이 말했다. "밑에서 만나죠." 시드미안과 팔시온, 미카엘, 안토니가 1층에 내려가자 테이블에 앉아서 담소 를 나누던 인물들 중의 한명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시드미안 일행 으로서는 초면인 인물들이었다. 장대한 체구의 사내 3명과 꽤나 단련을 했는 지 근육질인 여자 1명 또 마법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 1명. "무슨 일이신가요?" "당신이 그라드 시드미안인가?" 방금 손을 들었던 그 마법사 분위기를 풍기는 60세 정도의 인물이 다짜고짜 반말 짓거리로 나왔지만 일단 상대의 신분을 모르는 이상 같이 맞받아 칠수는 없었기에 시드미안은 공손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만...?" 그러자 상대는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코린트 제국 궁정마법사 길레트 지오네다. 그리고 이쪽은 내 일을 도 와주기 위해 파견된 철십자 기사단의 크로돈 안티네스, 토리오 지르네인, 리 나 인트레인, 지단틴 카메오라고 하지. 황제 폐하께서는 이번에 사라진 그 물 건에 대해 매우 심려하고 계신다. 그게 도난 당한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난걸로 아는데 조사는 어떻게 되었나?" 코린트 제국이라면 세계 최강의 대국이었고 시드미안은 코린트의 변방에 위 치한 작은 속국이었다. 시드미안의 실력으로 봤을때는 여기있는 기사들 중 자 신보다 위에 있는 자가 없었고, 또 시드미안의 직책이 근위기사라고 하지만 일반 기사단의 이들에게 뻣뻣하게 나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거짓보고 를 올려서 트루비아를 중상모략이라도 하면 그날로 트루비아는 지도에서 사라 지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약소국은 서러운 것이고... "조사는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일반적인 도적 정도로 생각했지만 의외로 놈들의 배후세력이 두터운 것 같은..." 그러자 지오네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말을 돌리지 말고 바로 해라." "이번 추격때 로메로 4대가 기습을 가해오는 통에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6싸이클과 5싸이클 급의 마법사도 만났구요. 또 그 외에 저희들이 신 상을 파악한 그래듀에이트만 2명입니다. 거의 국가급의 후원이 없다면 이건 불가능하죠." "그래서?" "하지만그들의 흔적은 토리아 왕국에서 끝났고 저희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 며 흔적을 찾고 있지만... 사실상 추격은 매우 어렵습니다." "알겠다. 그대가 여태껏 트루비아 국왕에게 보고한 서류를 읽어봤다. 놈들의 규모나 그 배후세력을 캐는데는 더 큰 힘이 필요함을 알고 그대의 국왕이 황 제폐하께 그것이 없어진 것에 대한 사죄를 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래서 우리 들이 온 것이지. 나중에 그것을 찾더라도 그게 없어진 것에 대한 책임을 트루 비아에서는 져야 할 것이다. 알겠는가?" "예." "이제부터 지휘는 내가한다. 그대는우리들이 보고받지 못한 최근의 내용이 있다면 그 보고를 해라." "어디까지 보고를 받으셨는지?" "신탁을 받고난 후 조사를 하겠다는 것 까지." "그럼 보고 드릴 것도 없군요. 신탁은 여기 있습니다. 저희들도 백방으로 알 아봤지만 도저히 단서가 없습니다." 상대의 고압적인 태도에 배알이 뒤틀린 시드미안이 드래곤을 찾아 별짓을 다 했다는 보고는 생략한 채 품속에서 곧장 두장의 그림을 꺼내어 그들에게 넘겨 줬다. 지휘를 하겠다는데 말리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안그래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역시나 상대도 그 그림을 보고는 심각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테 이블 위에 펴놓은 두장의 그림을 쏘아보던 그 인물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게 뭐라고 생각하나?" "알수가 없으니 수소문을 한게 아닙니까?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도저히 알수 가..." "흐음... 이렇게 특이하게 생긴 짐승은 없어. 거기에 푸른색이라니... 그리 고 또 이 거대한 신전같은 것은 또 뭐야? 알 수가 없군. 참. 그런데 보고받기 로는 그대가 새로이 고용한 인물들이 있다면서? 그들은 믿을 만 한 인물들인 가?" "현재까지는 믿을 만 했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모험가 2명에 용병 1명, 겨우 3싸이클급 수련마법사 1명, 무 예 수련자 3명이라고? 거기에다 그 둘은 아직 아카데미 졸업한지 2년도 안되 는 햇병아리들... 자네 정신이 있는건가? 이런 중차대한 일에 그따위 무리들 을 이끌고 다녔다가는 목숨이 10개라도 모자라." 그 말을 들은 미카엘과 팔시온이 성질나서 한소리 하려는 걸 시드미안과 안 토니가 살짝 말렸다. 또 시드미안은 팔시온의 팔을 살짝 뒤로 밀고는 미카엘 의 앞을 살짝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직까지는 꽤 믿음직한 동료였습니다. 또 일도 꽤나 열심히 해 주었구요. 여기 당사자들도 두명이나 있는데 조금 심하신..." 하지만 지오네는 시드미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언성을 높이며 시드미안을 질책했다. "닥쳐라. 네녀석이 나한테 말대답을 할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곧장 팔시온이 미카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희들이 믿음직 스럽지 못하다면 죄송합니다. 이만 헤어지는게 좋겠군요. 안그래도 요즘 추격에 도움이 못되어 죄송하던 참입니다. 안그래도 곧 있으면 여기서 무투회도 열리고 해서 저희들도 이쯤에서 헤어질까 하는 중이었습니 다." 그 말을 끝으로 팔시온은 분노에 부들부들 떨고있는 미카엘을 붙잡고는 2층 으로 올라가버렸다. "흥! 꼴에 자존심은 있는 놈들이군. 자네들은 여기 앉게. 그리고 보고받은 신관은?" "로니에 사제님은 밖에 나갔습니다. 구입할 것이 있다구요." "음... 곧 있으면 본국에서 2명의 마법사와 1명의 신관, 또 추가로 4명의 기 사가 타이탄을 가지고 올거야. 폐하께서는 이 기회에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못된 놈들을 강력히 응징하고 세계의 질서를 다시금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 다.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여기가 알카사스라는 것은 중요한게 아니야. 세계의 평화와 균형을 헤치고 자 하는 무리가 있다면 이곳 알카사스를 전쟁터로 만들어서라도 응징을 해야 한다고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후 나에게 전권을 위임한다고 칙명을 내리셨지. 트루비아에서도 1명의 기사를 더 보내오겠다고 말했다. 물론 타이 탄을 가지고 말이야. 이렇게 되면 이미 정규급 타이탄만 10대니까 반란도배들 의 세력이 왠만한 국가급이라도 박살낼 수 있겠지. 흐흐흐흐..." * * * "제기랄... 개새끼들..." 성질을 터뜨리는 미카엘을 위로하며 팔시온이 말했다. "이봐. 참아. 저새끼들 나름대로 찾아보라고 하면 되잖아. 사실 나는 다크가 그모양이 된 다음부터 이번 일이 좀 찝찝 했다네. 여기서 빠질 수 있는 기회 가 생겼는데 뭐..." "어쨋거나 열받잖아. 그자식 말투하며 느글거리는 표정하며... 제길... 다크 가 원상태기만 했으면 반쯤 죽여달라고 부탁하는건데..." "어쨋든 짐 꾸리자구. 나도 저자식들 얼굴 보기는 싫으니까 여관을 옮기는게 좋겠지. 참. 그러고 보니 이렇게 되면 이번 여행은 끝나는 건데... 자네는 어 디로 갈건가?" 별로 대답을 기대하는 것 같지도 않은 팔시온의 물음에 미카엘이 자신감 있 게 대답했다. "어디로 가기는? 자네는 모르겠지만 나는 할 일이 이미 정해져 있다구." 거기에 약간 궁금함을 표시하는 팔시온... "뭔데? 좋은 일이면 나도 같이하자." "별로 좋은 일은 아니야. 기집애 꽁무니 따라 다니는 일이니까." "정말? 나도 그런데... 나는 다크하고 같이갈거야. 어쨋든 한동안은 보호가 필요하니까..." "이 자식이, 내가 먼저생각한 일을?" "하하하... 너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나?" "아무렴. 어쨋든 이번 모험 때문에 신세 망친 유일한 인물이잖아. 그리고 누 가 알아? 아부 잘하면 괜찮은 무술이라도 가르쳐 줄지... 10년이면 마스터의 대열에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호언하는 인물인데... 또 아쿠아..읍..." 팔시온이 미카엘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으며 말했다. "쉿! 그런소리 하지마.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간다고... 그건 그렇고 재빨리 여기서 떠나자. 저런 녀석들 하고 한지붕 아래에서 도저히 못있겠어. 자네가 로니에 사제님한테 말해주겠나? 더불어 지미하고 라빈에게도..." "그래. 자네가 그럼 여자들을 맏으라구." * * * "어서오게나. 프로이엔." "안녕하셨습니까? 토지에르 경." "여기 앉게. 몇가지 의논할 일도 있고 해서 자네를 불렀네." "예." "자 한잔 받게나." 토지에르는 병을 들어 상대의 잔에 가득히 포도주를 따뤄줬다. 이곳 크라레 스에서는 포도주만이 생산된다. 나머지 술은 황제의 칙명에 의해 거의 대부분 생산중지 되었고 외국에 수출하기 위한 토속주 몇가지만이 생산되고 있었다. 이것은 안그래도 경지 면적이 작은 탓에 조금이나마 생산되는 곡물을 쓸데없 이 술만드는데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금 있으면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각하께서 돌아오실거야." 그 말에 프로이엔은 기절할 듯이 놀라 하마터면 입속에 들어있던 포도주를 토지에르를 향해 뿜을 뻔 했지만 간신히 그걸 막는데 성공한 후 재빨리 목구 멍 속에 밀어놓고 말했다. "옛? 정말이신가요?" "정말이네. 자네도 정말 오랜만의 스승과의 만남이지?" "예. 30년쯤 전인가? 그때 선황 폐하의 죽음을 막지 못한 가책에 시달리시며 본국을 떠나셨으니까요. 저는 그분과 그때 만나 검술 수업을 받다가 10년 전 에 헤어졌었죠." "정확히 28년이지. 폐하께서 8살때였으니까... 어쨋든 제국 최고의 무사가 겨우 로메로 1대만 가지고 나가셔서 고생도 참 많이 하셨겠지만... 그분이 계 셨기에 지금 우리가 조금이나마 복수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이지." "예. 스승님께서 던젼들을 발굴하시지 않으셨다면 청기사나 청기사에 들어갈 그 많은 돈을 조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저도 그때 따라다니며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죠... 그때가 그립군요. 참! 그런데 언제 돌아오시나 요?"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두 주일 정도 후일거야."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빠른건 아닐세. 아마 두 주일 후에는 청기사의 실전 테스트를 할거야. 그것 때문에 폐하께서 공작각하를 불러들이신 거니까." 감격어린 표정으로 프로이엔이 말했다. "드디어... 청기사를?" "그렇네. 정보로는 시드미안과 코린트에서 보낸 사냥개들이 합류했어. 잘되 어봐야 로메로나 카로사겠지만... 참 시드미안의 안토로스가 있었지. 어쨋든 그 5대를 완전히 박살내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전력은 로메로 10대. 한 대라 도 도망치면 끝장이니까 이쪽에서 좀 과하게 투입하는 수밖에... 하지만 청기 사라면 다르지. 두 대만 동원해도 그놈들 쯤이야 몽땅 다 시체로 만들 수 있 어. 그리고 로메로 한 대 정도 함께 보내서 남은 잔당들 처리를 맏기면 간단 히 끝나겠지." "하지만 꼭 청기사를 투입해야만 할까요? 잘못하면 기밀이..." "어쩌면 기밀이 누출될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네... 그놈 들이 청기사의 존재를 안다 해도 변하는건 거의 없어. 청기사가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타이탄이란걸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 * *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동료들이 오는데 당연히 마중을 가야지. 오늘 아침에 연락을 해 본 결과 모 두들 출발 준비를 갖췄다고 하더군." 시드미안과 스미온, 그리고 안토니는 코린트에서 파견된 무리들을 따라 이유 도 거의 듣지 못하고 시 외곽으로 나왔다. 로니에 사제는 시드미안은 마음에 들었지만 이들과 합류하는 인물들이 코린트 제국의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 일 부러 그들과의 합류를 거절하고 팔시온 일행에 합류해 버렸다. 괜히 그쪽에 따라갔다가 자신의 종파가 들키기라도 하면...(신성마법을 쓰기만 하면 들킬 게 뻔했지만) 곧바로 자신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기 때 문이다. 일단 약속위치에 도착한 코린트 궁정마법사 지오네는 해를 잠시 쳐다본 후 말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군." 그렇게 말한 다음 대강대강 마법진을 땅바닥에다 그리면서 말했다. "이미 미네온 마법사 길드에다가는 여기서 100기간트라급의 공간이동 마법이 있을테니 그리 알라고 통보해 놨네. 그놈들은 좌우간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는 너무 민감한게 탈이라니까... 딴 나라에서는 아무리 한쪽 구석에서 강력한 마법을 써대도 알지 못하는데 귀신같이 포착해 내거든..." 이때 그 마법사가 그린 마법진에서 빛이 약하게 뿜어져 나오더니 8명의 인물 들이 말에 탄 채로 나타났다. 그들 중 한명이 시드미안에게 아는체 하며 인사 를 건네왔다. "시드미안 경. 오랜만입니다." "오. 도미니크 아닌가? 자네가 파견되어 왔나?" "예. 시드미안 경을 도와드리라는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 도미니크의 말을 들은 시드미안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 분부는 분명 국왕폐하로부터 내려졌겠지만... 국왕폐하도 그 망할 코린트의 황제에게 압력 을 받았을 것이다. 이로서 트루비아에 남은 안토로스급 타이탄은 겨우 2대. 근위기사단 인원의 반이 국외에 나와있다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코린트 패거리들도 서로 인사를 주고받더니 곧장 지오네가 말했다. "이제 모두들 다 모였으니 행동을 시작하기로 하지. 상대방에 흑마법사가 있 는 것으로 미루어 이 해괴한 그림의 주인이 마신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본국의 마법사 길드에서 조사중이다. 하지만 이게 드래곤과 상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는 의견도 나왔어. 청색하면 블루 드래곤... 원래 블루 드래곤의 뿔은 하나 지. 하지만 그 블루 드래곤 중에 변종이 나왔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또 드래 곤 중의 한 마리가 해괴한 모양의 키메라(chimera;접목 등에 의해 만든 마법 생물로 여러 종의 특성을 함께 가진다.)를 만들었을 가능성 또한 배체하기는 힘들다. 또 그 흑마법사 녀석이 키메라를 만들었을 수도 있지. 어쨋든 여러 가지로추측이 가능하다." "그럼 어떻게?" "우선 미테오 자네는 코네리와 함께 알카사스 내에 있는 키메라에 관한 권위 자를 찾아라. 그런 다음 그에게 그 그림을 물어보고, 또 키메라를 연구하는 인물들의 명단을 입수하라. 그자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러자 그 40대의 마법사는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항한다면요? 저희들만으로는 좀..." "좋아. 갈로네 자네가 도와주게." 그 말에 기사 한명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그럼 우리는 멀리 가서 딴 블루 드래곤을 찾을 필요 없이 그레이시온 산맥 에 산다는 놈을 만나러 가기로 하지. 그놈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거야." 그러자 시드미안은 정색을 하며 외쳤다. "너무 위험합니다. 블루 드래곤은.." "조용히 하게. 내가 물어보기 전에는 닥치고 있으라구... 알겠나?" 도대체 4000살 정도나 퍼먹은 드래곤을 만나러 가다니... 자신도 그때는 무 슨 정신에 그곳을 헤매고 다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친짓 처럼 느껴졌다. 거기에... 그걸 말할 수가 없으니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드미안은 상대에게 공손하게 대답하는 것으로 대화를 끝냈다. "예." "드래곤 따위야 큰 도마뱀하고 다를게 뭐가 있나? 존경하는 척 사탕발림을 해서 물어보면 멍청한 것들이니까 대답을 해줄거야. 그녀석은 과거에는 광룡 (狂龍)이란 칭호를 받았던 놈이지만... 한 200년 조용했으니까 요즘은 성질이 많이 죽었겠지. 빨리 가세나." 그렇게 말한 후 지오네는 품속에서 두터운 책을 꺼내들었다. 그 책에는 각국 에서 워프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워프에 방해가 되 는 나무나 풀 따위가 자라지 않는 넓은, 뭔가와 부딪칠 가능성이 없는 그런 지점들의 좌표가 써져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면서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 작했다. 보통 이동주문에 사용하는 마법진에 비해 엄청나게 복잡했다. 그 이 유는 지오네는 6싸이클급의 강력한 마법사였기에 그 목적지의 지도를 보고 지 표 높이를 대강 참고해서 낙하지점을 정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편에 마법진이 있다면 이쪽의 마력이 약해 질 때 반대편 마법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지금은 그나마도 안되기에 안 전한 이동을 위해 매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일단 마법진이 다 그려지자 지오네는 말에 올라타더니 품속에서 작은 수정지 팡이를 꺼내서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일단 마법진이 거의 발동되기 일보 직전쯤 되었을 때 지오네는 말을 몰아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며 주위에 대고 말했다. 그의 말이 마법진을 밟았지만 일단 발동되기 시작한 마법진의 글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마법진 안으로 들어와라" 모두들 자신의 말에 탄 채로 마법진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시동어를 외치기 전에 일행에게 주의를 줬다. "강물 위로 워프할 것이다. 워프가 완료된 후에 갑자기 물속에 빠진다고 당 황하지 마라. 알겠나? 워프!" 그와 동시에 그들의 몸은 뿌연 빛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일단 지오네 일행이 워프한 후 남은 세명은 그 마법진을 지워버린 후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라진 후 한 30분쯤 지나자 그들을 멀찌감치서 감시하고 있던 인물 이 그들이 있던 위치로 와서 대지의 기억을 물어봤고, 그 얼굴들을 자세히 기 억했다. 그런후 마법진을 그리고 그 위에 수정구슬 하나를 놓고는 또다른 주 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 작은 수정구슬에는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 다. "무슨 일이냐?" "추격자 일행이 오늘 아침에 이리로 이동해온 것을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여 기서 8명의 워프해온 인물들과 합류했습니다. 이제부터 대지의 기억에 나타난 영상을 전송하겠습니다." 그는 수정구슬 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수정 구슬은 약간 아련한 빛을 내뿜었다. 아마도 그때 수신받고 있는 인물의 수정 구슬에는 방금 자신이 대지의 기억에 물어서 알아낸 인물들의 정확한 영상이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 또 그는 멀리서 관찰한 자신이 본 모든 광경까지 전송 한 후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놈들은 추격을 피하기 위해 공간이동 문을 사용하지 않고 곧바로 워프를 한 것 같다. 그러니 괜히 큰 주문을 써서 위치를 발각당하지 말고 그 세놈의 감 시나 잘해라." "옛!" "그런데 전송된 영상에는 시드미안과 함께 다니던 많은 인물들이 빠진 것 같 은데?" "예. 그들은 딴 여관으로 옮겼습니다. 리엔이 감시하고 있지만 그쪽은 그 후 로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알겠다. 세놈의 감시를 잘하기 바란다." 그와 동시에 수정구 안의 인물은 사라져버렸다. * * * 여기는 화장실... 변기에 한 소녀가 앉아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제길... 이제는 아주 화장실에 들어오면 자동적으로 치마를 올리면서 주저 앉게 되는군. 으윽! 빌.어.먹.을.!" 갑자기 화장실 안에서 '빌어먹을'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자 밖에 앉아서 얘 기를 나누고 있던 인물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장실에서 저런 소리를 지를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소변보러 들어가더니 저녀석, 왜 저래?" 미카엘의 말에 지미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바퀴벌레라도 본거 아닐까요?" "설마... 좀 징그럽게 생기기는 했지만... 저녀석 자아는 남자라구. 바퀴벌 레 보고 욕설퍼붓는 남자는 없어. 뭐... 어쨋든 그건 그렇고 얼마나 받았냐?" 미카엘의 물음에 팔시온이 말했다. "응. 시드미안이 미안하다고 하면서 일행당 월급 25골드로 계산해서 450골드 를 줬어. 나머지 잔돈은 술이나 한잔 하면서 기분 풀라고 하더군." "로니에 사제님은 어떻게 한다고 하던데?" "우리들과 한동안은 함께 여행하고 싶다고 하시더군. 그런데 앞으로 뭘하 지?" "뭘하기는... 일단 여기 왔으니 무투회에 참가한 후 다음 계획을 의논해 보 자. 참. 전에 미디아가 어딘가에서 용병 모집도 한다면서? 거기서 싸우면서 돈 좀 버는것도 좋지. 단련도 되고..." "아직도 용병을 모집할까?" 그러자 미디아가 대답했다. "나중에 내가 시간내서 용병길드에 가서 알아보지." * * * "이야! 저거 예쁘다. 그지?" "...." "저것 봐! 저렇게 멋있게 세공된 검은 처음이야..." "..." "잠깐 저것좀 보고가자. 와이번 비늘을 녹여만든 방패야. 알카사스에 와야만 진품을... 그것도 최고로 멋있게 세공된 진품을 볼 수 있거든. 저 선(線)좀 봐. 얼마나 아름답니?" "...."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기묘한 두 여자를 힐끗거리면서 지나갔다. 한 여자는 30세 정도는 되어보였고, 키가 거의 175센티는 되어보이는데다가 누가봐도 검 사라는 검 알 수 있게 우람한 근육질의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또 동행인 여 자는 이제 잘봐줘야 16세? 그정도의 어린 소녀에 근육이라고는 없는 날씬한 몸매, 키는 잘되어봐야 160Cm정도에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사 람들의 이목을 끄는 이유는 그 둘의 신체적 불균형이 아니라 이색적인 물건들 을 보며 야단법썩을 떠는 여자는 우람한 근육질의 나이든 여자요, 한창 호기 심이 왕성할 듯한 어린 소녀는 오히려 그따위 것 흥미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 정으로 따라다닌다는데 있었다. "제기랄... 용병길드에 같이 가자고 왔잖아. 그런데 시장통에는 왜 들어와서 그래?" "흐음... 여자의 즐거움을 모르는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구..." 그러자 발끈한 다크가 말했다. "명심해둬. 나는 여자가 아니라구."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뭐라고 대답하는지. 그건 그렇고 하나 사줄게 있어서 데리고 온거야." "사줄거?" "응. 우리 모두가 의논했지. 조금 더가면 있어." 미디아가 다크를 끌고 간곳은 그렇게 크지 않은 작은 상점이었다. 그들이 들 어서자 주인인 듯한 나이든 남자가 인사를 걸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뭘 찾으십니까?" 사근사근한 주인의 말에 미디아가 말했다. "근력 증가의 마법이 걸린 물건을 찾아요. 어떤게 있죠?" 그러자 주인은 미디아의 여자라고 보기 믿어지지 않는 근육질을 쳐다보며 말 했다. 이정도 근육을 가지고도 근력증가를 찾다니... "손님께서 쓰실 겁니까?" "이 아이가." 그러자 주인은 대강 상대의 신분에 대해 감을 잡았다. 예쁜 여자아이... 또 그 아이를 따라 다니는 제법 실력있어 보이는 여자검객... 그렇다면 오늘 손 님은 여행중인 어느 부자집 딸래미라는 말이 되는데... 그럼 흐흐흐... "요즘 대부분 파괴력이 강한 물건.. 즉, 화염의 반지라든지 뭐 그런게 아주 인기를 끌고있는데 손님들은 조금 다르군요. 오히려 나약한 여자들이 이용하 기에는 화염의 반지나 뇌전의 반지같은 게 좋을텐데요. 그편이 상대에게 피해 를 더 줄 수 있고.... 치한 방지용으로 아주 좋은 뇌전의 반지가 있습니다. 한방으로 그냥 나가떨어지죠. 제가 아주 싸게 드리겠습니다.. 헤헤헤..." "잔소리 하지말고 있어요? 없어요?" "아... 예... 물론 물건은 있습니다. 이쪽으로..." 주인은 반지 세 개와 장갑 두 개를 보여주며 말했다. "바로 이녀석들이죠. 이것들은 모두 다 파워 업 마법이 처리된 것들이죠. 모 두 다 뛰어난 마법처리가 된 마력도구들입니다. 아마 써보시면 마음에 드실 겁니다. 헤헤헤... 장갑은 조금 작아보여도 아주 신축성 좋은 오크 가죽으로 만들어놨기에 매우 부드럽고 착용감이 좋죠. 왠만한 손크기가 아니라면 누구 라도 낄 수 있습니다." "이중에 어떤게 마나가 제일 적게들어가죠?" "뭐 차이가 별로 없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장갑쪽이 마나가 적게 들어가죠. 대신 장갑들이 힘은 좀 떨어집니다. 아무래도 고명한 마법사 분들은 대부분 품위있는 반지를 만드시는 걸 선호하시거든요." "그럼 이거 가격은 얼마에요?" "예. 그 장갑은 500골드죠. 매우 저렴한 가격입니다. 헤헤.." "그럼 이 반지는요?" "600골드입니다. 거기 박힌 사파이어는 진짜거든요. 보석가격도 생각해 주셔 야죠. 헤헤..." "그럼 이 장갑은요?" "예. 그쪽은 손까락 부분이 없는 만큼 가격이 약간 쌉니다. 450골드죠. 하지 만 겨울철에 쓰시기에는 좀... 추우실 겁니다." 주인의 말에 미디아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너무 비싸요. 좀 더 싸게 해줘요. 내 다크네도 300골드에 샀었는데..." "에이. 손님. 다크네 같은 것과 이걸 비교하지 마십시오. 저희 알카사스 최 신 모델들은 더욱 작은 마나를 흡수해 더 강한 힘을 냅니다.그러지 말고..." "그럼 시험을 한번 해보면 알 수 있겠지." 미디아는 다크네를 벗은 후 그 450골드짜리 장갑을 끼고는 주문을 외웠다. "파워 업"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검을 뽑아들고는 검 손잡이의 끝부분만 잡고 버티며 다크네와 힘의 차이를 가늠해보면서 더불어 마나의 소모에 따른 피로도를 정 밀하게 재기 시작했다. 설마 이정도까지 본격적인 실험을 하는 손님이 있을거 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한 주인은 약간 창백해진 안색으로 목소리를 낮추며 말 했다. "헤헤... 그렇게 실험을 꼭 해보실 것 까지야... 제가 크게 인심쓰고 330골 드까지 해드리죠." "흐음... 꼭 장사치들은 다 이렇다니까... 내 다크네와 별 차이도 없는 것 같은데 150골드나 더 받아 퍼먹겠다고? 미네온 마법사 길드에서 이 가게가 그 런대로 양심적이라고 해서 찾아왔더니, 타지 사람이라고 바가지를 덮어씌우려 고 들어? 내 소개한 그놈의 마법사 영감탱이 수염을 몽땅 뽑아줄테닷!" 신경질 머리끝까지 오른 듯 열받은 표정으로 씨근거리며 미디아가 쫓아나가 려고 하자 주인은 울상을 지으며 다급하게 미디아를 붙잡으며 사정했다. "그렇게 하시면 저는여기서 장사를 할 수 없습니다. 제발 좀 봐주세요. 제 가 잘못했습니다. 250골드에 드릴테니 제발..." "200골드!" "손님. 원가가 250골드입니다. 아무리 깎으셔도 그건 좀..." "그래? 그럼 팔 필요없어. 나는 그 마법사 영감탱이 수염만 뽑아주는 걸로 만족하겠어. 나쁜놈 같으니라구..." "제에발.... 좋아요, 좋아! 200골드에 가져 가십시오. 200골드에 드리겠습 니다. 손님. 거기가서 난리치면 저는 오늘 중으로 통구이가 된단 말입니다. 제발..." 계산을 끝내고 상점을 나서며, 소녀는 자신에게 새로이 생긴 손까락 부분이 없는 장갑을 끼면서 말했다. "그런데 누구한테 저 가게를 소개받은 거야?" "히히히... 소개받기는 누가 소개받아. 그냥 윽박지른거지. 여기서 파는 모 든 마법물건들은 거의 마법사 길드에서 흘러들어오게 되어있고, 또 이곳 알카 사스에서 마법사의 위치는 대단히 높아. 그러니 주인이 지레 겁목고 다 실토 한 거지. 어때? 덕분에 250골드나 깎았잖아." "그건 그렇군." "마법장갑은 무조건 쓰기전에 파워 업, 다쓴 후에는 파워 다운이라고 주문을 외워줘야 해. 마력에 의해 유지되기에 장갑이 빗물에 젖거나 뭐 그래도 손질 해주지 않아도 좋고, 또 장갑의 수명도 아주 길지. 너는 지금 힘이 너무 없으 니까 꼭 그걸 끼고 있는게 좋아. 값도 싸지만 손가락 부분이 없으니까 검을 쓰거나 식사를 할 때 안벗어도 좋을거야." "꽤 좋은 장갑이군. 가죽도 부드럽고... 이거 오크 가죽이라고 했던가?" "그럼. 가죽 중에서 최고로 신축성 좋고 부드러운 가죽은 오크지. 다만 가공 하기가 힘들어서 많지 않지만..." * * * 풍덩! 갑자기 공간이 열리며 사람들이 말에 탄채로 강물속에 떨어져 내렸다. 갑자 기 물에 떨어지자 놀란 말들이 아우성을 잠시 쳤지만 미리 주의를 받았던 사 람들은 말들을 재빨리 진정시키고 강가로 말을 몰아갔다. "경치 좋군." 지오네의 말에 옆에서 말을 타고가던 기사가 째빨리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디쯤에 그 드래곤이 사는지 알 수가..?" "카마가스 지대를 자신의 영토로 삼고 있다고 하니까... 뭐 그리 가보면 알 수 있겠지. 그건 그렇고 자네들은 타이탄의 추가무장을 준비했나?" 지오네의 말에 뒤쪽에 있던 기사가 재빨리 대답했다. "예. 모두들 창 3자루와 철퇴나 전투도끼를 준비했습니다." "흠... 좋아 좋아. 어쩌면 조만간에 적들과 전면전을 벌일지도 모른다. 그러 니 최대한 준비가 잘 갖춰진게 좋겠지." "지오네 경" 옆에서 말을 다고가던 토리오의 물음에 지오네가 답했다. "왜그러나?" "꼭 드래곤에게 물어보러 가야 할까요? 사실 드래곤은 사람들의 일에 간섭을 안해왔는데..." 그러자 지오네는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마 드래곤과 관계없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지. 하지만 관련이 없다는 보장 도 없기에 한번은 만나러 가야 해. 그리고 만약 진짜로 적의 배우에 어떤 국 가가 있다면 우리들이 이리 온 것을 이미 알아채고 감시를 한다고 북적거릴 것이다." "그렇다면 미테오 경 일행이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갈로네가 호위를 해 주고 있지만... 여태까지 보여준 놈들의 전력으로 미루어 볼 때 갈로네 혼자 만으로는..." 그러자 지오네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떠나오기 전에 이미 미네온에는 10명의 첩자들이 깔렸다. 그리고 지오 르네 백작님께서 마법사 5명과 은십자 기사단원 20명을 거느리고 일찌감치 잠 입해서 활동 중이시지. 우리는 그냥 이리저리 들쑤시면서 놈들이 나타나게 만 드는 미끼야. 그놈들이 나타나서 백작님에게 포착되면 그다음은 끝장이지. 또 우리들이 이동한 후에 놈들이 방심하고 미테오 일행을 추격한다면 그것도 또 우리들에게 걸리게 되어있어. 놈들은 폐하께서 이번 사태를 얼마나 심각해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지. 감히 본국의 드래곤 하트를 훔쳐가다니... 그 놈들에게 남은 건 멸망이라는 단어 뿐이야... 흐하하하..." "하하하... 놈들은 그럼 자기꾀에 속아서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겠군요." "그럼그럼... 겨우 그따위 신탁쪼가리 하나 가지고 어떻게 찾겠나? 머리를 써야지..." * * * "어때?" "이 근처에는 별로 좋은 일자리가 없어. 있어봐야 몬스터 사냥? 참내 월급 8 골드라니... 실력좋으면 12골드... 하기야 여기 같은 경우 꽤나 군사력이 좋 아서 대형 몬스터들은 타이탄으로 사냥해버리니 일거리가 없을 수밖에..." "그럼 마도왕국을 떠나서 딴곳으로 가면 되지." "아무래도 그래야 될 것 같아. 그건 그렇고 눈요기나 좀더 하고 가자. 응? 저런 진품을 볼 기회는 좀처럼 없다구. 나는 언제 돈모아서 저런거 하나 장만 하지?" 그 다음부터 미디아는 다크를 무작정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40킬로도 안나 가는 다크니 슬쩍 끌기만 해도 질질질 끌려가게 되어 있는 것이고, 다크는 취 미에도 없는 시장바닥 구경을 또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이야... 저 롱 소드 좀 봐. 저 호화로운 장식... 검의 날 부분에는 미스릴 을 입혀놨어. 그리고 검신(檢身)에는 은으로 상감(象嵌;금속 등의 표면에 무 늬를 파고 그 속에 금, 은을 채워넣어 멋을 내는 기법)을 했어. 멋과 위어울 프(werewolf;늑대인간) 같이 부정스런 놈들과 싸우는데는 필요한 실용성까지 같이 추구했다구. 얼마나 멋있어?" "헛소리 하지말고 빨리 돌아가자." 질질질... "이야... 저 방패... 정말 예술품이야... 표면에 대마법주문까지 새겨놨잖 아. 아마 4내지 5싸이클 공격마법까지는 막아줄거야. 대마법주문을 저렇게 새 겨놓으니까 뭔가 꽤 멋있게 보이지 않냐? 정말 정말 마음에 들어... 저 가격 표 말고는..." "미디아, 그런데 저건 뭐냐? 이상하게 생겼네." 미디아는 다크가 가리키는 쪽을 보더니 말했다. "아... 저거 묘인족(猫人族)이야. 사람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머리위에 뾰족 한 귀, 그리고 길고 부드러운 털이 박힌 꼬리... 꼭 고양이 같이 생겼잖아. 알카사스에서는 사람을 노예로 쓰지 않는 대신 저런 수인족(獸人族)이나 엘프 같은걸 노예로 부리지." 철창에는 세 마리(명?)의 묘인족이 들어있었는데 그 앞에는 각자의 가격이 붙어있었다. 135골드, 148골드, 164골드... 가장 가격이 비싼 녀석은 부드러 운 은빛 머리카락과 커다란 눈동자를 가진 꽤 미인인 묘인족 소녀였다. 다크 는 그녀의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위로 솟아올라 있는 뾰족한 귀를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꽤 재미있게 생겼네... 저것들은 수명이 어때?" "사람하고 조금 다르지. 묘인족의 경우 80년 정도는 살아. 하지만 인간과 다 른점이 있다면 좀 더 빨리 자라지. 저아이 정도면 9살정도? 묘인족은 10살 정 도면 다 크니까... 대신 좀 더 늦게 늙지. 40세 정도가 지나야 노화가 나타나 기 시작하니까... 하여튼 젊음이 대단히 긴 종족이야. 저것들도 목걸이를 걸 어놨으니까 상관없지만... 꽤나 야생에서는 흉폭한 것들이지." "흐음... 그렇게위험하게 안보이는데?" "지금은 당연히 그렇지. 혹시 위어울프 본적있어?" "그 보름달만 되면 사람이었다가 늑대로 변하면서 발작한다는 놈들?" "응. 저러다가 변신하면 그런식이라고 생각하면 돼. 키도 커지고 기다란 손 톱, 발톱이 솟아나오지. 또 엄청난 근육도... 하지만 위어울프처럼 아예 이성 을 상실하지는 않지. 대신 피에대한 야성의 광기는 살아난다구. 그래서 저기 보이는 목걸이를 채워놓는 이유가 변신방지용이야. 변신 방지를 위한 매우 강 력한 마법이 걸려있거든." 다크가 큰 눈망울을 굴리며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흐음... 꽤나 재미있는 족속들이군. 수인족은 묘인족 뿐이야?" "아니. 종류가 꽤 많아. 묘인족(猫人族), 호인족(虎人族), 견인족(犬人族), 조인족(鳥人族) 등 꽤 종류가 많지. 그중에서도 조인족이나 견인족은 꽤 인기 가 좋기에 매우 비싸지. 조인족은 아주 아름답거든. 날개를 펴면 천사처럼 보 이는데다가 얼굴도 미남 미녀고 말이야. 꽤나 변태들의 사랑을 받기에 가격이 아주 비싸. 잡히지도 잘 않고 말이야... 하지만 견인족은 그와는 다른 이유에 서 가격이 비싸지. 견인족은 잘 기르면 매우 충성심이 깊어서 목숨을 걸고 주 인을 지키지. 그래서 견인족을 호위병으로 쓰는 사람이 많아. 하지만 저런 고 양이과 놈들은 충성심이라고는 개털도 없는 것들이라서 그냥 즐기는데나 쓸 까... 쓸데가 없다니까. 그건 그렇고 딴데로 가자. 아직도 볼거 많아." 질질질... 어쨋든 미디아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다크가 여관에 도착한 것은 거 의 저녘식사때가 다 되어서 였다. 그들은 거기서 식사를 맛있게 끝낸 후 다크 와 로니에 사제는 각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일행들은 무투회 참가 를 위한 훈련을 한답시고 뒷뜰에서 격투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챙--- 퍽! 퍽!---- 챙---- 한동안 검과 검, 검과 방패, 방패와 방패가 부딪치는 격투소리가 울려오더니 갑자기 그 소리가 중단되었고 곧이어 팔시온이 위로 쫓아올라와서 말했다. "시드미안 경이 우리들에게 몇가지 시킬 일이 있다고 밖으로 나오라고 사람 을 보내왔어. 지금 그 싸가지 없는 자식들하고 같이 있는데, 그 때문에 조용 히 만나서 얘기하자고... 그러니까 준비해. 아마 거기서 부탁받고 곧장 떠나 게 될지도 몰라." "알았어." 팔시온 일행은 여행준비를 단단히 갖춘 후 미네온 시 외곽으로 나갔다. 미네 온 시 외곽에 있는 한적한 곳에서 만나야 하는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 꼴보기 싫은 녀석들의 눈길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꽤나 타당성 있는 주문이니 모두들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 코린트 녀석들은 시드미안보다 윗줄의 인물이었고 팔시온 일행이 이번 일에 개입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저기군." 약속장소에 이미 시드미안은 나와 있었다. 어두운 밤이라서 잘 보이지는 않 았지만 어두컴컴한 나무 밑에 있는 말탄 세사람은 분명히 보였다. 아마도 시 드미안, 안토니, 스미온이리라... 모두들 반갑게 시드미안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시드미 안이... 아니지 시드미안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검을 빼들었고 그 옆의 인물 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무 위에서 5명의 인물들까지 함께 뛰어내리며 공격을 퍼부었다. 시드미안으로 착각했던 그 인물의 발검(拔劍) 실력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단 숨에 팔시온의 목에 검을 들이댐과 동시에 가스톤의 복부에다가는 왼팔을 거 의 손목이 들어갈 정도로 깊쑥히 박아넣었다. "윽!" 쿠당! 그 외의 두 명의 인물들도 곧장 미카엘과 로니에 사제의 목에 칼을 들이댔고 나머지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5명은 넓직히 포위한 채 일행의 퇴로를 차단했 다. 순식간에 완전히 제압당한 것이다. 그걸로보면 이 인물들은 대단히 훈련 을 많이 받은 자들인 것처럼 보였다. "무기를 버려라. 안그러면 이놈들의 목숨은 없어!" "제길..." 복부에 한 대 맞고는 그 충격으로 낙마해서 기절한 가스톤을 제외하고 나머 지 인물들은 각자의 손에 쥐고있던 검을 땅바닥에 던졌다. 챙그렁... 챙... "좋아... 이제 한명씩 말에서 내려라. 천천히..." 모두들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그의 말에 따라 말 밑으로 내려 오자 시드미안으로 착각했던 그자가 외쳤다. "가스팔!" 그러자 가스팔이라고 불린 인물이 나무뒤쪽에서 나오며 외쳤다. "슬립(sleep)!" 그와 동시에 팔시온 일행은 그대로 땅바닥에 줄줄이 쓰러졌다. 두명만 빼 고... 하나는 로니에 사제였고 또 한명은 어린 소녀였다. "응? 이것들은 자지 않는데 어떻게 할까요?" 칼빼들고 주위에 서있던 놈들 중의 한명이 공손하게 묻자 말탄 인물 중의 하 나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기절 시켜." 퍽! * * * "아이고... 머리야. 여기는 어디야?" "쉿! 조용히 해." 컴컴한 빛이라고는 한줄기도 안들어오는 곳에서 미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다크가 입을 다물자 곧이어 벽의 저 멀리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팔시온의 비명 소리. "으아아악! 모른다고 했잖아. 이 빌어먹을 놈들아." 팔시온이 악을 쓰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퍽! 팍! "으윽" "순순히 말할 때 들어. 시드미안은 어디로 갔지?" "이게 말로 하는거야? 그 코린트 놈들이 와서는 우리들을 해고했다구. 그 다 음에 일어난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 그러자 여태까지와는 다른 또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족쳐봐. 진짜인지."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들을 들으며 다크가 속삭였다. "여기가 어디야?" "몰라. 그자식들한테 잡혀온 것 같아. 지금 4명이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있 어. 아마 쟤들 다음에는 우리를 족칠거야.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걸 불라고 야 단이니 참..." 이때 갑자기 문이 덜컹 열리면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와 함께 두 사람이 들어왔다. "모두들 나와." "예?" "빨리 나왓." 다크와 미디아, 지미, 라빈이 자신들도 고문을 당할것으로 생각하면서 나왔 을 때, 그들은 옆에 줄줄이 있는 고문실로 포로들을 데려가지 않고 또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닥쳐." 퍽! "윽" 지미의 물음에 돌아온건 발길질이었고 손이 꽁꽁 묶인 상태였기에 반항도 불 가능했다. 일단 무의미하게 맞기는 싫었으므로 모두들 묵묵히 끌려갔다. 모두 들 줄줄이 끌려간 곳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커다란 방이었다.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 빨리" 퍽... 네명이 그 안에 쭈그리고 앉아있자 곧이어 문이 다시 열리며 팔시온, 미카 엘, 가스톤, 로니에 사제가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엉망진창이 되어 끌려 들 어왔다. 그들도 곧이어 마법진 중간에 앉혀졌다. 그들이 모두 다 마법진 안에 들어가자 한명이 이들에게서 압수한 각종 물품들을 마법진 안에다가 수북히 놔뒀다. 팔시온의 검, 미디아나 다크의 장갑, 또 말안장에 들어있던 각종 물 건들.. 등등 그런대로 가치가 있을만 한건 여기 다 모았다. 그런후 마법진 밖 에 서있던 40대 정도의 남자가 주문을 중얼중얼 외우더니 외쳤다. "워프!" 그와 동시에 주위가 뿌얘지더니 곧이어 새로운 장소에 그들은 도착했고 그곳 에도 역시 5명 정도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한명이 말했다. "저정도 고문을 당했는데도 실토하지 않아서 본국소환이라니... 참 내..." "어쩔 수 없잖아. 빨리 실토를 받아내야 다음 행동을 할 수 있으니까. 자, 한시가 급하니까 빨리 보내자구." 그 말을 듣는 것을 끝으로 일행은 또다시 워프 당해야만 했다. 이런식으로 5 번의 워프를 거친 후에야 일행은 꽤 낯이 익은 인물을 볼 수 있었다. 그 인물 은 10년 정도 헤어진 친구를 다시만났을때처럼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호오... 이거 반가운 얼굴들이군. 꽤나 애를 먹이더니 이번에는 아주 간단 히 잡혀오는군 그래. 모두들 끌고 가. 참, 저애는 남겨놓고..." "예." 모두들 줄줄이 끌려간 후 손이 뒤로 묶인 소녀 혼자만 남게 되자 그녀석은 그녀의 턱을 잡고는 들어올려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해보는 모험여행은 재미있었냐? 이제부터 너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펼 쳐질거야." 그런다음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더니 외쳤다. "리멤버란스 실(remembrance seal;기억봉인)!" 하지만 아직도 또록또록한 눈빛의, 이녀석이 지금 뭐하는 건지 탐색하는 듯 한 소녀의 눈길을 받자 그녀석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왜 마법이 걸리지 않는거지? 좋아. 다시 한번 더!" 그는 또다시 주문을 외웠고 시동어를 외쳤다. "리멤버란스 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자 소녀의 몸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딘가 에 자신의 마법을 방해하는 어떤 마법도구가 있을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이 리저리 저리 둘러보다가(손이 뒤로 묶여있었기에 반지를 못봤다.) 혹시나 소 녀의 목에 목걸이같은게 걸려있지 않나 본다고 옷을 들치자 곧장 소녀의 발이 놈의 정강이를 강타했다. "뭐하는거야? 이 변태 자식!" "아구구구... 방금 전에 스승님께 차였던 곳을 또 차다니... 으윽! 용서할 수 없다." 짝! 한껏 손을 들어 그대로 있는 힘껏 소녀의 뺨을 때렸다. 소녀는 그대로 날아 가더니 저쪽 구석의 벽에 머리를 처박고는 기절해버렸고, 그는 잔인한 미소를 떠올리면서 기절해서 나자빠진 소녀를 들어올려 어깨에 짊어지며 말했다. "뭐 어쨋건 상관없어. 너는 스승님께 보내는 내 선물이니까 말이야... 흐흐 흐..." 똑똑... "무슨 일이냐?"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제자가 금빛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는 여자인지 뭔지 뒷 통수만 보이니 알수가 없었다... 어쨋든 그의 제자가 사람을 하나 어깨에 이 고 들어왔다. "저 스승님." "왜 그러느냐?" "이 아이가 스승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이라고?" "예. 전에 한번 말씀 하셨잖아요. 심부름 할 똑똑한 아이가 하나 필요하다 고..." "아... 전에 말했던 그 드로아 대신전의 수련생이군." "예." 그러면서 스승 앞에 놓인 의자에 기절해버린 소녀를 앉히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법이 안걸립니다. 기억봉인을 하려고 했는데... 두 번이나 걸었는데도 효과가 없더군요." "흐음... 기억봉인은 5싸이클의 마법이니까 왠만한 방법으로는 막기 힘든 데.... 어디 보자..." 일단 노마법사는 소녀의 브라우스 단추를 풀어 혹시 마법을 막아주는 목걸이 따위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런다음 손을... "으응? 이 반지는..." 노 마법사는 양손을 묶고있던 줄을 풀고 좀 더 자세히 반지를 바라봤다. 어디 서나 볼 수 있는 단순한 모양의 매끈한 금반지였다. 위에 청색의 자그마한 보 석이 박힌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눈에 거슬리는게 없는.... "이건 마법반지 같지는 않은데...? 딴걸 찾아봐라." 소녀의 몸을 한참 뒤지다가 나중에는 나오지 않자 완전히 다 벗겨봤지만 그 어떤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반지 외에는 없는데요? 그건 그렇고 어떻습니까? 이정도면 괜찮죠?" 스승은 소녀의 나신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떡끄떡 하며 말했다. "흐음... 스타일은 괜찮군. 너무 어린게 탈이지만..." 이러고 있는데 그 소녀가 서서히 정신이 드는지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뒷통 수를 어루만지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뒷통수야... 제기랄... 그 자식 어디있어? 어?" 바로 앞에 '그 자식'이 눈에 띄자마자 그대로 발을 들어올려 상대의 낭심에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퍽! "으갹!" 소녀는 낭심을 거머쥐고는 주저앉아 신음성을 토하고 있는 '그 자식'의 턱에 매우 깨끗한 자세로 발 뒷꿈치를 직격시켰다. 멋진 돌려차기... 퍽! "윽!" 그 다음 '그 자식'은 완전히 뻗어서는 일어서지 못했다. "못된 녀석!" 퍽! 기절한 제자의 뒷통수를 한번 더 차주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소녀를 보면서 노 마법사는 매우 놀라고 있었다. 저런 깨끗한 몸놀림은 도저히 신을 받드는 무녀(巫女)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있다면 격투술을 정식으로 배운 그 래플(grapple) 뿐... "너는 누구냐?" "그러는 너는 누구냐?" 둘은 한동안 서로의 눈을 째려보며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노 마법사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런 모습으로 인상 써봤자 무섭지도 않군. 어쨋든 매우 특이한 아이구나. 우선 옷부터 입거라." 그제서야 그 소녀는 자신이 완전히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소녀의 반응은 그 노마법사를 조금 더 놀라게 했다. 옷을 벗고있다는 걸 알았 음에도 소녀는 놀라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얼굴색 하나 안변했던 것이다. 그 말에도 소녀의 경계태세는 하나도 풀리지 않았고 소녀는 상대를 노려보며 옷가지를 쥐고는 천천히 뒤로 후퇴해서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대강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우 한 동작 동작간의 시간을 충분히 두면서 상대를 관찰하며 입는 것이었다. 재빨리 팬티를 걸치고... 슬쩍 눈치를 보고... 가죽바지를 입고 슬쩍 눈치를 보고... 브래지어를 걸치면서는 아예 째려보면서 걸치고... 그런 모습은 이게 천진난만한 소녀인지닳고 닳은 창녀인지, 전사인지 노마법사로서 알수가 없 게 만들고 있었다. "공격하지 않을테니 긴장을 풀고 입거라." 하지만 그 말에 속지 않는다는 듯 그 행동은 계속 연결되었고 소녀는 일단 옷 을 다 입고나자 3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서면서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나? 나는 토지에르라고 하지. 너는?" "다크. 그냥 다크라고 부르면 돼. 왜 나를 이리 잡아왔지? 그리고 저놈은 또 뭐야?" 노 마법사는 아직도 기절한 채 깨어나지 못하는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제자녀석이지. 아직도 배워야 할게 너무나도 많은 놈이야. 과연 내가 그 시간이 될 때까지 저녀석을 얼마나 가르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놈이지. 그건 그렇고 너는 아데나를 섬기는 무녀면서 어디서 격투술을 배운거지?" "나는 라나가 아니야. 제기랄!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군. 처음 봤을 때 어쩐지 얼굴이 익다고 생각했어. 네놈이 나한테 이상한 저주를 건 놈이구나. 그렇 지?" 노마법사는 자신이 기절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로 경악하고 말았다. 저런 소 리를 하는 걸 보니 바로 이 소녀가... "너... 너가... 그 소드... 소드 마스터?" 경악한 노 마법사의떨리는 목소리에 소녀가 차가운 응대를 했다. "그래! 내가 소드 마스터다. 이 빌어먹을 놈아. 빨리 이 저주를 풀어. 안그러 면 가장 비참하게 네놈을 죽여줄테다." "하...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성질이 폭발한 다크가 노마법사에게 달려들었고 노마법사는 간단 한 주문을 외울 시간도 없이 상대의 손발이 날아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소녀 가 3미터 정도로 접근해 있었던 이유를 그제서야 토지에르는 알 수 있었다. 방어와 공격을 충분히 생각한 거리였던 것이다. 퍽! 팍! 소녀의 갸냘픈 손에 맞는건 별로 안아팠지만 발차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마법 사라는 존재는 원래가 마법을 쓰는 사람이지 격투술의 전문가가 아니다. 그렇 기에 체력도 약한 노인이 노련한 격투기술을 알고있는 소녀를 만났으니 이건 애시당초 상대가 안되는 싸움이었다. 소녀는 그대로 노마법사의 정강이를 찬 다음 자세가 휘청하는 순간을 노려 복부에 발차기를 날렸고, 곧이어 연속 발 차기를 한번 더 날린 후 뛰어오르며 노 마법사의 턱을 강타했다. 노마법사는 정신없이 맞으면서 소녀의 뒤쪽으로 자신의 애제자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모 습을 얼핏 볼 수 있었다. 퍽! "정말 성질한번 대단한 기집애군요." 뒷통수를 얻어맞고 또다시 기절해버린 소녀를 보면서 제자가 말하자, 아픈 턱 을 주무르며 토지에르가 말했다. "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이 아이는 그 이번에 잡아온 애들과 같이 있었냐?" "예." "정말 놀랍구나. 그런데 어떻게 그 소드 마스터가 이런 소녀가 되었지? 설마 하니 너가 나한테 준다고 했던 그 아이를 그렇게 싫어했단 말이냐?" 제자는 겸연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기야 완전히 소녀의 몸으로 바뀌었으니 기억만 봉인한다면 심부름꾼으로 써도 되겠지. 하지만 기억봉인이 왜 안걸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 반지 때문 인 것 같은데... 이상하구나. 보통 마법반지라면 주문이 새겨져 있을텐데..." "아마 이아이를 처음 잡았던 녀석들도 그 때문에 반지를 그냥 놔뒀을겁니다." 노마법사는 기절한 소녀의 손을 잡고는 반지를 뽑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반지는 뽑히지 않았다. "이상하군. 왜 반지가 안뽑히지? 너무 꼭 끼였나? 저기 있는 올리브유 가져와 라." "예." 하지만 올리브유를 바른 채 뽑으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요지부동... 살과완 전히 합체가 되어버린 듯 뽑히지 않았다. "손까락을 잘라버릴까요?" 제자의 말에 토지에르는 뭔가 생각에 잠긴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어딘가의 책에서 언뜻 본것도 같은데...? 일단 저 아이가 깨어나기 전에 손발을 좀 묶어놔. 도저히 몸싸움으로는 우리가 상대가 안되니까 말이다." "예." 제자가 한창 소녀를 꽁꽁 묶고있을 때 토지에르는 마법도구에 관해 기록된 책 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제자가 소녀를 꽁꽁 묶은 후 의자에 다시 얌전히 앉 혀놨을 때쯤 되어서야 토지에르는 자신이 찾던 해답을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왜그러십니까? 스승님." "설마?" 그러면서 토지에르는 자신의 책에 그려진 그림과 소녀가 끼고있는 푸른색의 반지를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그림과 소녀가 끼고있는 푸른색의 반지는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토지에르는 책을 옆에 놔두고 소녀의 손을 들어 반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며 중얼거렸다. "아쿠아... 룰러..." 그 말을 들은 제자가 놀라서 반문했다. "아쿠아 룰러라고 하셨습니까? 물의 지배자, 정령왕 나이아드의 힘을 봉인한 최강의 마법도구..."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이야. 아니 사실 인 것 같다. 어쩌면 아닌지도 모르지. 하지만 5싸이클급 마법을 무위로 돌리는 힘은 막강한 힘을 지닌 마법도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지. 그런데 한가지. 주인의 손까락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이것은 곧 주인을 선택한다는 말. 주인을 선택하는 이성을 지닌 마법도구 는 이 세상에 다섯 개 밖에는 없어." 스승의 말에 제자는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멍청하게 그 어디서든지 볼 수 있 는 평범한 모양을 한 푸른색 보석반지를 바라봤다. 그 어디에도 그렇게 강대 한 힘이 감춰진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까락을 잘라버리면 우리것이 되지 않을까요? 저게 손에 들어온다면 엄청난 힘이 되어줄 겁니다." 제자의 말에 토지에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저게 아쿠아 룰러라는 걸 알았을 때 벌써 손 까락을 잘랐을거다. 또 주인을 죽여야만 한다면 벌써 죽여버렸겠지. 하지만 그건 안돼. 저 반지는 벌써 저 아이를 선택해버렸어. 저 아이를 죽인다면 나 와 우리나라는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의 분노를 받게 된다." "나이아드의 분노라구요?" 제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하자 스승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해줬다. "저 책에 써져있더구나. 나이아드의 분노를 받는다구. 아마 홍수가 나든지 뭐 그렇게 되겠지. 또 저런 물건은 주인을 선택하는 것! 주인을 죽이고 뺏는다고 나이아드가 힘을 주지는 않아. 자의로 양도받는다면 몰라도... 보통 정령과는 달리 이성(理性)을 지닌 정령왕이니까..." "그럼 이일을 어쩌면 좋죠?" "저 아이를 설득해서... 나이아드의 힘을 우리것으로 만들어야지. 하지만 저 주를 걸어서 벌써 원한이 거의 골수까지 쌓인 상태인데... 쯧쯧..." "이상하군... 저건 뭐지?" 노 마법사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던 기사들 중의 한명이 말했다. "그냥 돌무더기 같습니다. 지오네 경." "멍청하기는... 내가 그걸 몰라서 자네한테 묻나? 왜 저런 돌무더기가 저기 저렇게 많은지를 물은거야." "글쎄요..." "할 수 없군...." 그런 후 지오네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더니 시동어를 외쳤다. "뷰 매직 포스!" 시동어를 외친 후 지오네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궁리를 하더니 말했다. "만일을 대비해서 타이탄을 두 대만 꺼내라. 저기서 희미하지만 마법의 기운 이 느껴진다." "예." 그와 동시에 공간이 열리면서 거대한 타이탄 두 대가 나타났다. 그 둘은 검은 허리에 있는 철 구조물에 끼워진 상태로 - 대부분의 타이탄은 검집을 쓰지 않 고 그냥 검을 꼽아놓을 수 있는 갈고리 비슷한 철 구조물만 가진다. - 방패가 끼워진 손에는 창 세자루를 들고, 또 오른손에는 철퇴를 들고 나타났다. 그들 이 나타나자 각 타이탄의 주인들은 그 타이탄에 탑승했다. "자... 이제 내려가기로 하지." 이때 뒤에서 잠자코 있던 시드미안이 말했다. "저... 지오네 경. 여기는 전에 와본 곳입니다. 이곳에는 카렐이라는 엘프가 살고있습니다. 저 구릉지대 중앙에 있는 돌집에서 살고있지요." 그 말에 지오네가 시드미안을 잠시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 보고는 하지 않았잖나?" "예. 사실 그에게서 알아낸 건 아무런 보탬이 안되는 정보였기에 생략했습니 다." "무엇을 알아냈나?" "블루 드래곤의 뿔이 하나라는 사실과 신탁의 그림은 본적도 없다는 것입니 다." "흐음..." 한참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하던 지오네가 문득 말했다. "혹시 그녀석이 키아드리아스가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겁니다. 매우 친절했고... 또 대단한 검술실력을 가진 인물이 었기 때문입니다." "검술? 검술이라... 그렇다면 드레곤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일단 가보자." 타이탄 두 대의 경호를 받으며 구릉지대 안으로 들어서자 과연 시드미안의 말 대로 그 중앙쯤에 낡은 석조건물 한채가 서있었다. "너희 둘은 이 근처에 수상한 점이 없는지 살펴라. 또 너희 둘은 땔감이나 모 아와. 타이탄에 탄 녀석들은 주위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마라. 나머지는 같이 들어가 보자." 지오네는 건물 안에 들어가 본 후 엄청나게 놀랐다. 그도 전에 시드미안 일행 이 이 집의 묘한 불일치를 느끼고 놀랐던 것과 같이 허름한 겉과는 달리 매우 호화로운 내부구조에 놀랐던 것이다. 집안을 장식하는 금은 세공품들... 매우 뛰어난 화가가 그린 그림들... "대단하군..." 함께 들어간 기사녀석들은 이리저리 주인도 없는 집안을 뒤지며 값나가는 물 건들을 챙기기 바빴고 지오네는 지오네 대로 일이 있어 부하들의 움직임을 눈 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뷰 매직 포스 주문을 이용해서 알아본 결과 여기 있는 금붙이들 중 몇 개가 뛰어난 마법도구였던 것이다. 그 마법도구들 의 가치를 가늠해 본다고 지오네가 정신이 빠져있을 때 드디어 사건은 벌어졌 다. "지오네 경!" "무슨 일이냐?" "스톤고렘입니다." "뭐?" 그가 붙잡고 감상하던 마력검을 거의 던지다시피 하고 뛰어나갔을 때 밖에서 는 여섯 대의 타이탄들이 각자 무기를 휘두르며 수백의 스톤고렘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여기 있는 물건을 건드리는 것... 그것이 저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열쇄였단 말인가?" 지오네는 건물 안으로 재빨리 뛰어들어가 안에 보물을 보고 탐욕에 사로잡힌 기사들을 불러모았다. "스톤고렘이다. 건물 수색은 미루고 빨리 나와랏!" 그와 동시에안에서 튀어나오는 인물들... 주머니 여기저기에는 이미 이 집에 서 약탈한 비싼 금은세공품들이 들어있었지만 지오네는 그들을 볼 정신이 없 었다. 자신이 만지다가 떨어뜨렸던 그 마법검을 제자리에 원위치 시키고 있었 던 것이다. 그 사이에 수하들은 밖으로 뛰어나갔고 각자 타이탄을 불러내서 싸움을 벌였다. 타이탄 9대.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전력이다. 하지만 그 엄청난 위력의 타이탄 들로도 거의 1000개에 달하는 스톤고렘과의 싸움은 벅찰 수밖에 없었다. 그냥 고렘이 박살이 나서 없어진다면 그들의 싸움도 별어려움이 없었겠지만 한방 치면 돌덩어리가 되어 뭉개졌다가도 곧이어 다시 스톤고렘으로 뭉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타이탄의 철퇴나 전투도끼가 한번씩 휘둘러질때마다 3미터 정도 크기의 스톤 고렘 두세개씩이 박살이 났지만 그건 곧이어 새로이 재생되었고 이 끝없는 싸 움이 계속되었다. 지오네나 그가 데리고 온 신관도 정신없이 마법을 날려댔지 만 힘만 빠질뿐... 박살났던 스톤고렘들은 다시금 재생되었기에 나중에는 그 것마저 포기하고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들 려왔다. "멈춰라." 그러자 스톤고렘들은 공격을 멈추고 뒤로 점점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스톤고렘들 사이로 멋지게 등장했다. 바로 카렐이었다. 카렐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시드미안은 쿠마에서 내렸고 시드미안이 내리는 것을 보고 시드미안의 부하인 도미니크도 함께 뛰어내렸다. 곧이어 쿠마는 공 간 사이로 사라졌고 시드미안은 카렐의 앞에 나가서 공손하게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카렐. 전과는 달리 갑자기 여기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카렐은 시드미안을 냉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대도 탐욕에 눈이 먼 인간이었나?" "예? 저는 이 부근에 땔감을 줏은 죄 밖에는..." 시드미안이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카렐은 그 눈길을 딴곳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여기는 내 집이다. 너희들 같은 도둑놈들이 올 장소가 아니야. 좋게 말로 할 때 주머니 속에 넣었던 것들을 놔두고 꺼져라." 조금 엘프답지 않은 쌍스러운 말이었지만 일반적인 엘프와는 달리 전사의 기 운을 풍기는 그의 입에서 나오자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때 저 쪽에서 지오네가 말했다.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인가요?" "그렇다." "당신이 키아드리아스 십니까?" 그러자 카렐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말했다. "나는 엘프 카렐이다." 그러자 지오네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키아드리아스가 아니라면 별로 겁날것도 없지요. 아마도 7싸이클급 정도의 마법을 익혔다고 까부는 모양인데... 우리들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 은 아니오. 이봐, 저 자식을 죽엿!" 그와 동시에 한 대의 타이탄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 타 이탄은 그 커다란 철퇴를 들어 카렐을 떡을 만들 심산으로 내리 찍었지만 이 미 카렐은 몸을 날린 후였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카렐이 재 빨리 몸을 위로 몸을 날린 후에 그의 고색창연한 검이 뽑혔고 그 검에서는 곧 이어 엄청난 열기를 동반한 강기 세례가 바로 코앞에 있는 타이탄의 머리에 퍼부어졌다. 쿠쾅!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이미 주인을 잃은 타이탄이 동작을 멈춰버렸고 순간적으 로 일어난 이 경악할 만한 일에 모두들 입이 쩍 벌어진 채 멍청하게 서 있었 다. 이때 순간적으로 멍해진 그들의 시야에 황금빛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걸 보고 지오네는 경악해서 외쳤다. "골든 나이트(golden knight;금빛의 기사)? 저건 이 세상에 단 한대밖에 만 들어진 적이 없는데... 어떻게 저자가? 저녀석을 공격해! 타이탄에 못타게 막 앗!" 지오네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기사들은 정신을 차렸고 6대의 타이탄은 골든 나이트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도미니크도 지오네의 명령에 따라 자 신의 타이탄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시드미안은 도미니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빨리 타이탄을 숨겨. 전설의 골든 나이트다. 우리 모두가 덤벼도 승산이라고 는 하나도 없어!" 그와 동시에 도미니크의 타이탄은 공간의 저편으로 슬며시 사라지기 시작했 다. 이때 카렐은 이미 골든 나이트에 들어간 후였고, 그는 머리가 닫히는 걸 기다리지도 않고 골든 나이트를 조종하여 앞에서 달려오는 타이탄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기운이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검강...!" 각 타이탄에서 비명성이 터져나왔지만 그 어마어마한 푸른색의 강기는 순간적 으로 지상 4미터 지점을 흐르며 아직 공간 저편으로 완전히 도피하지 못한 도 미니크의 타이탄까지 합쳐서 8대의 타이탄을 덮쳤다. 곧이어 타이탄들이 가슴부분이 완전히 잘려져 나가 엑스시온이 파괴된 채 고 철이 되어 쓰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의 절반이상 공간 저편으로 이동해있 던 도미니크의 타이탄만은 요행히 생명은 건진채로 완전히 저쪽 공간으로의 이동에 성공했다. 쿵! 쿵!... 각 타이탄들의 손이 방패 채로 잘려진 채 떨어졌고 곧이어 가슴부분이 절단난 채 하체부분과 분리되어 떨어져 땅에 처박혔다. 이때 골든 나이트가 쿵쿵거리 며 다가오더니 주저하지 않고 잘려진채 뒹굴고 있는 상대 타이탄들의 목부분 을 잘랐다. 그와 동시에 타이탄의 목이 잘린채 떨어졌고 그 안에 들어있던 사 람이 두토막이 된 채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 잔인한 광경을 보면서 타이탄 내에 타고있던 인물들은 자신이 지금 갖혀있는 타이탄의 머리를 들어올리려고 용을 써댔지만 운이좋게 열기 쉽게 자빠져 있던 타이탄에 탑승한 두명을 제외 하고 나머지는 그 엄청나게 무거운 쇳덩이를 들어올리지 못한 채 모두 탈출도 못해보고 시체가 되어야 했다.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타이탄들의 머리를 떼어내고 있는 골든 나이트를 향해 길레트 지오네와 사제는 미친 듯이 마법을 날렸지만 상대에게는 그 어떤 타격 도 줄 수 없었다. 골든 나이트는 타이탄에 탄 셋을 완전히 죽인 후 탈출한 두 명에게 뛰어갔고 공포감에 우왕좌왕 하는 그 둘중 하나는 발로 밟고 또 하나 는 검으로 찍어버렸다. 순간적으로 몸이 두토막이 나서 좌우로 갈라지는 기 사... 천천히 골든 나이트는 이제서야 지오네를 향해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골든 나이트의 다리가 들리자 그 밑에는 사람이 있었던 흔적... 즉, 뼛가루와 피와 살이 흙에 범벅이 되어 납작해져 있었다. 쿵... 쿵... "으아아악..." 이제 그 둘은 거의 광란상태에 접어들어 주문이고 뭐고 외울 생각도 못하고 있었고 그 둘은 곧이어 골든 나이트가 한번 검을 휘두르자 허리 윗쪽으로 두 토막이 난 채 쓰러져버렸다. 시드미안과 도미니크를 제외하고 모든 인물들을 다 죽여버리고 나자 골든 나 이트의 머리가 뒤로 들려졌고 싸늘한 표정을 짓고있는 카렐이 나타났다. 카렐 은 곧장 밑으로 뛰어내렸고 곧이어 그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했던 골든 나이 트는 이제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공간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때 스톤고 렘들은 고철조각들을 치우면서 정리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카렐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시선을 시드미안에게 옮기며 말했다. "내가 자네들을 살려주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유일하게 인정한 인간의 동 료라는 사실 하나다. 알겠나?" 살기를 띄고있는 카렐의 또다른 모습을 보면서 시드미안은 식은땀을 흘렸다. 타이탄 7대가 거의 저항도 못해보고 박살이 났다. 예전의 그 인자했던 모습에 서 도저히 고수의 면모를 찾아볼 수 없었기에 다크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오늘의 카렐에게서는 그게 너무나도 짙게 느껴졌다. 무시무시하게 강한 자... 시드미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말했다.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뭐... 그대가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으니까... 이제 돌아가게나. 될 수 있 다면 이번같은 탐욕에 찬 무리는 데려오지 않기를 바라네. 알겠나?" "예. 도미니크, 가자." 자신들의 말을 타고는 재빨리 구릉지대를 벗어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카렐이 무표정하게 보고있는데 이때 그의 뒤에서 여자의 부드러우면서도 고운 목소리 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골든 나이트를 보니까 200년 전, 당신이 나를 죽이겠다고 찾아왔던 때의 일이 생각나는군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음에도카렐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점점 작아지는 시드 미안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이 뒤에서 그의 강인한 몸을 살며 시 끌어안자 그는 더 이상 무표정하지 않았다. 천천히 그의 표정은 밝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신은 너무나 강해요. 내가 이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 하지만 저는 언젠가 당신이 제 곁을 떠날 것 같아 언제나 불안하답니다." 그러자 카렐은 빙그레 미소지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살짝 입맞춘 후 말했다. "200년 전, 당신을 만난 후부터 당신은 나의 전부요,내 생명이 다할때까지 당신과 함께 기나긴 생을 함께하고 싶다오. 쓸데없이 불안해 하지 마시오, 키 아드리아스. 나는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할거니까..." * * * "도대체 골든 나이트(golden knight)가 뭡니까? 저는 저런 금빛나는 타이탄 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적도 없어요." 죽자고 도망치다가 어둑해져서야 행군을 정지하고 말을 쉬게 하면서, 동시에 사람도 쉬게 되었다. 카렐이 있는 곳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지금에야 정 신을 차린 듯 고기포를 우물거리면서 도미니크가 시드미안에게 물어왔던 것이 다. 그 말을 듣고 시드미안은 오래전에 들었던 전설을 떠올리며 말했다. "나도 자세한 건 잘 몰라. 오래전 인간들이 타이탄을 실전에 도입해서 전쟁을 벌이던 그때... 사람들은 말했지. 타이탄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진 것은 유일하게 인간 뿐이라고... 그도 그럴것이 엘프는 마법은 좋아했지만 금속에 대한 제련술(製鍊術)은 떨어졌고, 드워프는 금속 제련술은 최고지만 마법을 할 줄 몰랐지. 나머지 딴 종족들은 기술이 떨어져서 사람을 노예로 잡아다가 부리는 판이니 더 이상 거론할 것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그 말에 엘프와 드워프는 발끈했지. 그래서 그 두 종족이 연합해서 타이탄을 제작하기로 합의 를 봤어. 드워프는 타이탄의 제작을... 엘프는 엑스시온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맡았지. 그래서 단 1대의 타이탄이 완성되었지. 금을 좋아하는 드워프의 취향대로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타이탄이... 물론 그걸 1대 만든 후에는 인간들만 만들 수 있는게 아냐! 하고 말한 후 이들은 헤어져 버렸지만... 어 쨋든 그당시 최강의 타이탄은 바로 그 골든 나이트 뿐이었지." "그 당시 최강이라면 지금은 아니라는 말입니까?" "너도 생각을 해봐라. 엑스시온에 생명을 부여하는 마력은 엄청난 량이지. 그 런데 왜 헬 프로네는 그런 엄청난 노력과 돈을 들여 2.2나되는 출력을 지니도 록 만들었으면서 그것에 미스릴을 안입혀서 주인을 찾아 떠돌게 만들었겠나?" "글쎄요." "그 이유는 저 골든 나이트에 있지. 골든 나이트는 미스릴 대신 금을 입혔거 든. 그 때문에 최강의 기사가 아니면 아예 받아주지도 않아. 그런 골든 나이 트를 대적해 보겠다고 만든 헬 프로네에 미스릴을 입힐 바보가 있을까? 미스 릴만 입히면 왠만한 놈은 다 주인이 될 수 있는데..." "그렇다면 헬 프로네는 골든 나이트에 대적하기 위해 만든 타이탄이라는 말입 니까?" "글쎄... 내가 듣기로는 그래.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저 골든 나이트의 성능은 헬 프로네에 뒤지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어쨋든 거의 인간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알려진게 거의 없는 타이탄이지." "아이구... 머리야... 비겁하게뒷통수를치다니... 이자식 어디있어?" 벌떡 일어서며 소녀가 외치자, 생긴 것과는 달리 거친 아가리를 가진 소녀를 보면서 옆에서 시중을 들고있던 한 소녀가 멍하니 바라봤다. 그 소녀의 옆에 는 물이 든 세숫대야가 하나 있었고 벌떡 일어난 덕분에 저쯤에 떨어진 물수 건으로 보아 그 시녀는 아무래도 주둥이가 험한 소녀를 간호하고 있었던 듯... "넌 뭐야?" 퉁명스런 소녀의 말에 시녀는 다소곳이 말했다. "저는... 주인님께 주어진 하녀입니다. 세린이라고 불러주세요." "하녀...라고?" 그러면서 소녀가 주위를 둘러봤을 때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잘 꾸며진 방 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로 봤을 때 여기가 감옥안이 아닌 것은 확실 했는데... 어쨋든 사로잡힌 사람 치고는 대우가 너무 좋았다. "이자식들이 이번에는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거야?"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리면서 다크가 침대 아래로 내려오자 세린이 말했다. "저.. 주인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옷을 가져 오겠습니다." "옷?" 그제서야 다크는 자신의 몸을 둘러보고는 부드러운 잠옷차림이라는 걸 알았 다. "너가 이걸 입혔냐?" "예. 주인님."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잠옷따위 입어본 적이 없으니까 다시는 입히지 마." "하지만 잠옷을 입고 주무시면 편안하잖아요. 주인님." "편안같은 소리 하고있네... 그러다가 집에 불이라도 나면 잠옷바람으로 뛰 어나가라는 말이냐? 그건 그렇고... 너는 묘인족이냐?" 세린의 아름다운 금빛 머리털 위로 귀엽게 솟아있는 금빛의 뽀송한 털이 돋 아있는 작고 뾰족한 귀를 보면서 소녀가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면 서 말했다. "예. 주인님." "그러면 너는 노예냐? 하기야 말끝마다 주인님, 주인님 해대는거 보니까..." "예. 보통 궁중에서는 하녀들을 수인족으로 쓰거든요. 여기는 별로 부유하지 않아서 수인족 노예가 많지 않습니다만..." "그러면 너는 몇살이냐?" 소녀가 이제 18살 정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세린을 보면서 궁금한 듯 묻자 세 린은 곧 대답했다. "이제 25살입니다. 주인님." "25살이라... 별로 많은 나이는 아니군. '주인님'이라... 호호호... 별로 듣기에 나쁜 단어는 아니군. 그건 그렇고 빨리 옷이나 내놔." 주) 마스터(master)의 뜻은 지배자, 주인이다. 그렇기에 노예가 주인을 부를 때도 마스터(주인님)고 최고 실력의 무사... 즉 검기와 마나의 지배자라는 뜻 의 마스터도 어떤 면에서는 그 뜻을 확장한 것이다. 또 제자가 스승에게도 마 스터라고 부르지만 여기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스승이라는 단어를, 또 노예가 부를때는 주인님으로 구분했고 무술의 경지에만 '마스터'라는 단어를 썼다. 하지만 이것들을 영어로 하면 모두 다 마스터라는 단어가 되어버린다. 지금 한 말은 마스터라는 말로 이해하면 된다. 다크가 말한 주인님이란 말은 마스 터라는 말... 즉 무술의 마스터를 말하는 것이다. 세린이 재빨리 가서는 옷을 가져왔다. 길고 넓은 치마가 달려있는 꽤 아름답 게 보이기는 했지만 소녀가 봤을때는 매우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옷이었다. "그거 말고 내가 이리 끌려왔을 때 입었던 옷 내놔." "옷은 이런것들 말고는 없습니다. 주인님." "뭐야?" 소녀가 세린을 밀치고는 그녀가 옷을 꺼내던 작은 옷장을 뒤져보니 과연 그 런 스타일의 옷 5벌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리고 밑에는 작은 보석이 달 린 목걸이까지... "어쭈? 이건 또 뭐야? 내가 정부(情婦)라고 착각하는 거야? 미친 자식들... 이거 말고 딴 옷 가져와. 그래... 그 여행복이라는 거로. 나한테 맞는 남자옷 이면 더욱 좋고..." "주인님, 그런 옷은 없어요. 또 그런걸 가져다 드리면 저를 가만두지 않겠다 고 했습니다. 제발 절 구해주세요... 예? 주인님." 두 손 모아서 정작 죄도 없는 하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통사정을 하 는데야 이길 재간이 없었다. "제기랄... 두고보자." 성질 난김에 입으려고 했지만 생각과는 달리 도저히 입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소녀를 보고는 세린이 한숨을 살짝 쉬면서 옆에서 입는 것을 도와줬다. 소녀 가 옷을 다 입고 나자 세린이부드럽게 말했다.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좋아. 일단 먹어야 힘을 쓸테니까..." "...?" * * * "자네들은 용병이라고 들었네. 또 그전에 일하던 사람한테서 해고 당했다 고?" "그런데요?" "우리 밑에서 일할 생각은 없나?" 상대의 말에 팔시온이 갖잖은 말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쁜 일을 꾸미는 사람 밑에서 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에 화를 낼 줄 알았지만 상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악당들 보고 악당이 라고 하면 화를 내는게정석인데... 오히려 상대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나쁜 사람일수도 있지. 아무것도 모르는 자네들이 보기에 우리는 나 쁜놈들이지.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세. 자네들은 여기가 어딘줄 아는가?" "모릅니다. 잡혀와서 몇번이나 공간이동 당했다는 건 알고있지만..." "여기는 크라레스 제국이지." "크라레스... 그... 코린트를 침공했다가 오히려 역습당해서 멸망 직전까지 갔다는 그 크라레스 왕국 말입니까?" "흥! 그건 다 코린트가 지어낸 말이야. 그당시 코린트와 크라레스는 동맹 중 이었지. 힘을 합쳐서 그당시 최강의 대국이었던 아르곤 제국을 막자는 의미에 서 말이야... 하지만 아르곤이 내전상태일 때 코린트가 기습을 가했지. 만약 우리쪽이 기습을 가했다면 코린트와 우리나라의 군사력은 거의 6:4정도로 이 쪽이 뒤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거야. 또 비등한것도 아니고 뒤지는 군사력을 가지고 싸움 거는 미친놈들도 있던가? 어쨋든 그놈들 은 자국 타이탄 300여대 외에도 동맹국 타이탄 50여대의 도움까지 받으며 우 리의 국토를 유린했다네. 기습을 당한 놈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동맹국들로 부터 군사력을 원조받는단 말인가? 자네들은 그놈들이 퍼뜨린 헛소문을 믿는 건가?" "하지만 모두들 크라레스 제국이 코린트에 기습을 가했다고 알고있는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자네들이 믿건 믿지않건... 내가 하는 말은 정말이야. 그놈들은 기습을 가 해서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했고, 국토를 뺏아갔지. 그런 후 우리가 자신들에 게 복수라고는 할 수 없도록 힘을 제한했고... 심지어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타이탄 수까지 제한한단 말일세. 그덕분에 우리는 대외적으로 봤을때는 코린 트와의 전쟁이후로 타이탄을 단 한 대도 생산 못했지. 그리고 해마다 엄청난 량의 조공을 바쳐야 했고... 또 200명씩 공녀까지 바쳐야 해. 국민들을 노예 로 바쳐야만 하는 우리들의 심정을 자네들은 알 수 있나? 말은 세계의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그놈들이 하는 짓은 짐승만도 못하다 이말일세. 참, 자네들은 어느나라 사람들인가?" 그 말에 팔시온이 대답했다. "저는 콜로니아 왕국, 가스톤은 트루비아 왕국, 지미와 라빈은 엠페론 왕국, 미카엘은 크루마 제국, 미디아는 제논 왕국 태생이죠." "매우 다국적이군. 좋아. 트루비아가 예를 들기 좋겠군. 이번에 우리가 훔쳐 온 드래곤 하트 때문에 아마 트루비아는 혹독한 댓가를 치뤄야 하겠지. 그놈 의 코린트 황제인 아그립파 4세가 결정을 내리는 그날 기분이 좋다면 사과 몇 마디 받는 걸로 넘어가 주겠지만... 그날 별로 기분이 안좋다면 트루비아는 멸망당할 수도 있겠지. 어쨋든 모든건 그놈 마음이니까 말이야." "설마... 멸망까지..." "자네들도 조금 지나보면 알거야. 자네들도 트루비아에서 왔으니까 그곳이 작은 속국으로 꽤나 평화를 사랑하는 조용한 나라라는 걸 알고 있겠지. 하지 만 그들을 멸망시킨다면 우선 아그립파 4세가 말하겠지. '트루비아는 악에 물 들어 마신을 부활시켜 세계를 정복할 욕심으로 본국의 드래곤 하트를 훔쳤다. 용맹하고도 정의로운 우리의 우방들이여, 저 악에 물든 왕국을 응징하라!' 그 러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글쎄요..." "아마 각국에서 보낸 타이탄 300대 정도가 트루비아를 휩쓸면서 완전히 박살 을 내버릴거야. 그게 여태까지 코린트가 해오던 짓거리니까..." "설마... 그정도까지..." "설마가 아니라네. 아마 그 해답은 1달도 안되어 나타날거야. 아마 트루비아 는 멸망할 거라는게 내 생각이라네..." 그러자 분노한 가스톤이 외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나라가 멸망할 걸 뻔히 알면서도 드래곤 하트를 훔쳤 단 말이오?" "그건 어쩔 수 없었다네. 코린트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나서야 했어. 사실 지금 우리의 힘으로는 코린트의 적이 될 수 없지. 앞으로도 더 많 은 희생을 치뤄야만 가능한 일이라네. 하지만 나는 그 댓가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해낼 생각이야. 왜냐하면 이 세계는 코린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이 세계는 우리 모두의 것이야. 왜일부 인간들이 전 세계를 주물러야만 하나?"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거 아닐까요? 강대국의 횡포는 언제나 있어왔고 또 크라레스 왕국이 더 커진다면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는 것은 똑같을텐데... 그런식으로 얼버무릴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는 절대 그렇지 않아. 당해본자만이 억압받는 서러움을 아는 법, 그렇 기에 코린트도 한번 당해봐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와 뜻을 합하는 나 라들이 많아야 하지. 사실 우리만으로 코린트를 이긴다는 사실은 불가능에 가 깝지. 또 설혹 그걸 우리가 해낸다면 그건 또다른 코린트의 탄생일지도 몰라. 가장 좋은건 여러 나라가 대등한 입장에서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거라네. 지 금 그것에 대해서 비밀리에 접촉중인 나라들이 있지. 그건 그렇고 우리가 지 금 하는 일은 세계의 중심인 코린트로 봤을때는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매 우 악한 행위일 수 있고, 또 우리가 중간에 진다면 우리는 세계의 평화를 위 협한 악당으로 후세에 기억될거야. 하지만 우리가 코린트를 이긴다면 역사는 악으로부터 세계를 구해낸 영웅으로 기억해 줄테지... 어떻게 후세에 남느냐 는 우리가 하기에 달린 거겠지만... 나는 이 일에 자네들이 참여해 주기를 바 란다네." "하지만 저희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아무런 힘이 안될겁니다." "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네. 자네들이 직접 도와달라는 건 아니야. 여 기 없는 자네들 동료가 우리 일에 협력하도록 도와주기만 해도 매우 큰 도움 이 될거야." "다크 말입니까? 하지만 다크는 저주에 걸려서 아무런 힘도 안되는데요?" "휴우... 그건 너무 잘 알고있네. 저주를 건 사람이 다름아닌 나니까 말일 세." "예?" 모두들 저주를 건 마법사의 얼굴을 몰랐었기에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토 지에르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그때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소드 마스터 때문에 대단히 애를 먹고 있었지. 어쩌면 코린트가 기른 사냥개일 수도 있었고, 또 자네들은 시드미안 을 도와 우리의 뒤를 추격중이었기에 나로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네. 물 론 그가 약간 어리숙하게 보인 점이 있었기에... 그러니까 첫 번째 그와 만났 을 때 파멸의 불꽃을 먹이면서 알았지. 그는 마법에 대한 실전경험이 떨어지 는 것 같았어.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간단히 흑마법에 정통으로 노출될 리 가 없었거든? 그래서 마법사와는 거의 싸워본적이 없다고 결론 짓고는 저주를 걸 결심을 하게 되었지. 자네들은 저주가 주는 공포는 알겠지만 저주를 상대 에게 거는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모를거야. 저주를 상대에게 걸기는 매우 힘들 다네... 우선 거리가 너무 멀어도 안되고, 또 상대가 마법 보호막을 펼쳐도 안되지. 하다못해 겨우 1싸이클짜리 매직실드도 못뚫는다네. 또 축복이 깃든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어도 저주에 걸리지 않지. 하지만 상대가 마법에 무지 하다면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고 저주를 걸었고, 그 결과는 자네들도 아는 대로야." 마법사였지만 흑마법에는 매우 무지한 입장인 가스톤이 그 말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저주에 걸려 자살했던 자신의 선배는 뭐란 말인가? 그는 자 신의 실력을 믿고 방심하다가 당했다는 말 아닌가? 가스톤은 믿어지지 않는다 는 듯이 말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저주를 걸기가 그렇게 어렵다는게?" "그렇네. 일단 저주에 걸리고 난 후에는 축복을 더블로 받은 물건을 몸에 지 니고 있어도 소용 없지만, 걸리기 전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다르지. 그건 흑마 법에 대해 조금만 연구를 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있는 사실이야. 만약 저주 걸기가 그렇게 쉽다면 이세상에 있는 소드 마스터들 중에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어야 하겠지. 마스터를 상대로 할 때 거리에 대한 제한 은 아주 성가시다네... 그래듀에이트만 되어도 마나의 움직임에 대단히 민감 한데... 마스터라면 왠만한 고급마법은 아예 쓸 생각을 말아야지. 주문도 다 못외우고 곧장 머리와 몸통이 분리될 가능성이 더 크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다크가 협조한다고 하면 저주를 풀어주실 겁니까? 만약 저주를 풀 어준다는 확답만 있다면 그녀는 아니, 그는 협조할겁니다." 그 말에 토지에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의 저주를 푼다는 건 불가능해." "예? 저주를 거셨다면 푸는것도 가능할 것 아닙니까?" "아니, 나는 위험한 놈을 처치했다는 확신이 들자 바로 저주의 매개물이었던 반지를 공간이동을 하면서 공간의 저편에 버려버렸거든. 다른 공간을 떠돌고 있는 그걸 되찾아올 방법은 없다네." "흐음... 그 사실을 안다면 다크는 협조는 고사하고 당신을 죽이려고 들겠군 요." "글쎄말이야.그때는 그게 최선의 해결책이었는데... 으음... 설마 마스터급 의 실력자가 아직도 주인을 가지고 있지 않을줄이야 생각도 못해봤지. 그런데 그는 누군가? 진짜 주인이 없나? 또 누구에게 그런 엄청난 검술을 배웠나?" "그만... 좀 천천히 질문하세요. 저희도 확실히는 잘 모릅니다. 그는 이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뭐?" "그냥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엘프인 카렐과 얘기하는 걸 옆에서 들었는데 차원 과 시간과 공간이 다른 어떤곳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나이는 72세라고 했고..." "뭐? 이계의 인물에 72세? 말도안돼!" "다크는 말이 된다고 하던데요. 영감님은 마스터를 본적이 있습니까?" "있지. 키에리 발렌시아드란 영감탱이를 본적이 있어." "그가 마스터가 되고 나니까 용모가 어떻게 변하던가요?" 그러자 토지에르는 잠시 주저주저 하더니 풀이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마스터가 된 이후에는 본적이 없다네. 마지막 그의 용 모에 대한 데이터는 48세로 끝이지. 그는 마스터의 영광을 차지한 후 공식석 상에는 나타난 적이 없었어. 지금 94세니까 모두들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정 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야." "다크의 얘기로는 그게 아니랍니다." "뭐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면 엄청나게 축적된 마나로 인해 자동적으로 육체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젊어진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마나가 육체에 쌓이면 몸이 버티지를 못하니까 방대한 마나를 몸속에 담아둘 수 있도록 몸이 재구성되는 것이겠지요. 아.. 이건 제생각이 아니라 시드미안 의 생각입니다. 나중에 시드미안이 그러더군요. 그렇게 바뀌는 건 그 상태로 는 마나를 더 이상 저장할 수 없으니까 육체가 바뀌는게 아닐까 하고 말이 죠." "그렇다면 마스터는 매우 젊다는 말인가?" "일단, 다크의 의견으로는 그렇습니다." "뭐, 그건 조금 지나보면 알 수 있네.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께서 28년만 에 돌아오시니까... 그분도 요 근래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셨으니 그분의 모 습이 모든걸 증명해 줄테지... 어쨋든 아까 하던말 계속 해보게." "예. 다크와 카렐의 말로는 저주 걸리기 전 둘의 실력은 거의 비슷한 정도라 고 하더군요. 둘이 죽이 척척 맞아가지고는 쑤근거리면서 나중에 힘을 되찾으 면 비무까지 하자고 약속까지 하는걸 우리 모두가 들었다구요. 그러면서 카렐 이 힘을 되찾은 후에는 필요도 없겠지만 그전까지는 이게 도와줄거라면서 아 쿠아 룰러를 다크에게 줬구요." 아쿠아 룰러를 줬다는 말에 놀라서 토지에르가 말했다. "세상에... 자네들 그 카렐이란 인물을 어디서 만났나?" "그야... 그레이온 산맥에 있는 카마가스 지대에서 만났지요." "그럼 자네들이 고헨 시에서 행방불명 되었을 때 그레이온 산맥으로 갔다는 말인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희들은 고헨에 가서 거기서 블루 드래곤 키아드 리아스를 만나러 카마가스 지대로 갔지요." "드래곤을 만나러 카마가스에 가보니까 카렐이라는 엘프가 살고 있더라, 이 거지?" "그렇죠." "그럼 자네들은 이렇게는 생각 안해봤나? 그 엘프는 블루 드래곤 키아드리아 스가 트랜스포메이션 한 존재고, 자네들의 행동을 찬찬히 관찰하면서 이것들 을 아침 식사로 할까... 말까 궁리하고 있다는?" "에이... 설마요?" "설마가 아닐세. 파괴만을 일삼는 뇌전이나 불의 정령을 엘프는 싫어해. 그 렇기에 엘프는 대지, 물, 바람의 정령과 가까운 존재들인 그린, 실버, 골드 드래곤과는 친하게 지내지만 블루나 레드드래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 그 때문에 엘프는 그 두 드래곤의 레어 주변에는 살지 않아. 그런데 거기서 엘프 를 봤다면 그건 드래곤 자신이었을거야. 참, 그건 그렇고 다크가 그렇게 강했 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 블루 드래곤 키아드리아스와 거의 비등한 힘을 지녔었다니..." "한방에 타이탄까지 박살을 낸 인물인데... 뭐 그정도 실력은 가지고 있겠 죠. 어쩌면 한방에 드래곤까지 골로 보낼지 누가 알아요?" "설마... 아니야. 그런 자가 타이탄을 타고 있다면 정말 한방에 드래곤까지 작살을 낼지도 모르지... 어쨋든 강력한 우군을 놓쳐버렸군." "그건 그렇고 다크는 어디 있습니까? 만나 보지도 못했는데..." "감시하기 편한곳에 가둬뒀지. 감옥같은 곳은 아니야. 왕궁 한쪽의 방에 머 무르게 했지. 그리고 감시역으로 하녀하고 그래듀에이트 한명을 붙여뒀으니 말썽은 부리지 못할거야. 어쨋든 그전에 얼마나 대단했든지 간에 저주에 걸리 며 그 대상의 몸으로 완전히 바뀌면서 몸속에 쌓인 마나고 뭐고 몽땅 상실하 게 되어있지. 저주의 무서움은 바로 그거니까... 기억은 그대로면서 몸만 딴 것으로 바꿔버려 상대를 절망감에 빠지게 만드는 것... 뛰어난 인물일수록 그 현실을 견디기는 힘들것이고 나중에는 자살 외에는 답이 안나오지. 그런데 그 녀석은 생생하게 잘도 살아있더군. 만나보니 이빨을 갈면서 나를 아주 죽이려 고 들던데?" 그 말에 팔시온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마 마법사님 같은 경우 상대하기 힘드셨을 겁니다. 힘이 약하다 뿐이지 기술은 매우 뛰어나거든요. 말씀 하셨다 시피 기억은 온전하니까 말이죠. 저 희들도 몇대 맞을 정도니까요... 어쨋든 그녀석도 처음에는 거의 자포자기 해 서 술에찌들어 살더니 우연히 만난 마법사 한분이 그냥 단순히 격려 몇마디 하니까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수련을 시작하더군요. 저희도 겨우 그런 말에 정신차리고 다시 재기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흐음... 그건 그렇고 그녀석이 우리 일을 도와줄까?" "아마 단념하시는게 좋을겁니다. 오히려 회방이나 안놓으면 다행이죠." * * * 호화로운 장식이 되어있는 넓직한 저택... 이 집은 꽤나 높은 마법사 나으리 가 가지고 있던 여름별장이었지만 지금은 피치못할 사정으로 인해 주인이 아 닌 객(客)이 쓰고 있었다. "뭐야? 놓쳤다고?"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 코앞까지 추격해 들어갔을 때 공간이동 해버렸기 에..." "그놈들의 본거지에는 사람을 보냈나?" "예. 매키니 경이 갔지만 그곳도 역시 빈집이었다고 합니다. 놈들은 모두 공 간이동용 마법반지를 휴대하고 있기 때문에 잡는게 매우 힘듭니다." "바보같은 놈들... 미네온 마법사 길드에 압력을 넣어 통신마법의 발신처를 겨우 알아냈는데... 쓰레기 같은 녀석들... 물러가라." "예. 백작 각하." 백작이라 불린 당당한 체구에 멋진 콧수염을 달고있는 이 40대 초반의 무사 는 꽤나 호화로운 복장을 걸치고있었고 허리에 매달린 호화로운 바스타드 소 드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는 보고를 올린 부하녀석을 물리치고 난 후 창가에 가서는 아름다운 꽃들이 핀 정원을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지오네에게서 온 연락은?" 그러자 심기가 불편한 상관을 조심스런 눈길로 살피고 있던 인물들 중에서 아마도 마법사 정도로 보이는 날씬한 여자가 재빨리 말했다.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백작각하." "이놈이나 저놈이나 도움이 되는놈은 하나도 없군. 머저리 같은 것들... 본 국에서 타이탄을 21대나 끌고오면 뭐하느냔 말이다. 상대가 없는데..." "백작 각하," "뭐냐?" "키메라를 조사하러 갔던 미테오로부터 연락이 있었습니다. 그런 특이한 형 상의 키메라를 제작한 사람은 없다는 보고입니다. 키메라 자체가 각 생물을 조합해서 만드는 마법생물인 만큼 서로간의 짜집기는 가능해도 완전히 새로운 어떤 생명체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합니다." "좋아. 키메라 쪽은 기대도 안했다. 미테오를 불러들여라." "예." "그리고 마법사 길드에 압력을 가해 공간이동이나 특히 통신마법의 발신처를 알아내어 두더쥐들을 사냥해 보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백작 각하." "어서 오게나. 시드미안..." "네녀석은?" 시드미안이 도미니크와 함께 여관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 방안에는 이미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 3명 더 있었다. 그들은 시드미안이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데 아무런 보탬이 안되기에 고헨에 남겨놓고 간 안토니와 스미온을 결박해 놓고 는 칼까지 목에 들이댄 상태였다. 거기에다가 이미 방안에다가 넓직한 마법진 까지 그려놓은 걸 보면 꽤나 오래전에 도착해서 준비하며 기다린 모양이었다. "서툰짓은 하지말게. 설마 고헨시 안에서 타이탄 전쟁을 벌일 생각은 아니겠 지? 그러면 죄없는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된다구. 또 동료들의 목숨이 아깝다면 그런 행동을 자제해야 할거야... 그리고 팔시온인가 하는 녀석의 패거리들도 우리가 가둬뒀지. 꽤나 애를 먹이더니 막상 실행을 하니까 아주 손쉽게 잡혀 들어오더군." 시드미안은 이미 이 방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꽤나 대단한 인물들이 몇 명 더 있는 것을 알았지만 지오네처럼 코린트에서 파견나온 기사인줄 알았기에 별로 주의를 주지 않았던 것이 분했다. 시드미안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네놈은 어떤 나라의 기사단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고작 하는 짓이..." 그러자상대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 시작햇!" 그러자 상대의 뒤에 서있던 마법사가 곧장 시동어를 외쳤다. "슬립(sleep!)" * * * "주인님, 과자 드실래요?" "뭐?" 소녀는 한소리 하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가 순수한 표정의 상대를 보고는 과 자를 받아 입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런 다음 창문 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 을 감상하고 있는데 뒤에서 조심스런 말이 들려왔다. "날씨가 좋은데 밖에 안나가세요?" "그 구두를 신고 말이냐?" "예. 얼마나 예쁜데요. 요즘 유행하는 최신 패션이라니까요. 저거 한컬레에 3 골드는 하는데도 물건이 없어서 못판데요." "뒷굽이 그렇게 뾰족한 거는 너나 신어라. 빌어먹을 녀석들... 신고 달리기도 힘들게 만들어놓은 걸 준 거 보면 속셈이 빤히 보인다... 그건 그렇고 내가 부탁한 신발은 구했냐?" "주인님, 그런거 구해다 드리면 저는.. 저는...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흑 흑..." 가련한 모습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사정하는 세린을 차마 보지 못하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면서 소녀가 중얼거렸다. "[제기랄... 오냐. 그래 나는 놔두고 하녀만 족치면 된다 그거지? 나중에 두 고보자. 신발 없다고 도망 못칠 나도 아니고...]" "그런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어제도 밤새도록 안주무시고 앉아 계셨잖아요. 그렇게 잠도 안주무시면 몸에 해로워요. 주인님." 그 말을 듣고 소녀는 세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따스한 눈길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수있으니까... [운공조식때 아쿠아 룰 러가 나에게 대자연의 기를 나눠 주고있어. 많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감히 끌어모을 엄두도 안나는 양을... 나는 그걸로 천천히 내공을 쌓고 있지. 그 덕분에 시간은 더욱 단축될거야. 어쩌면 1년... 어쩌면 6개월 이내에 가능 할지도 몰라. 그때가 되면... 그때가 되면...]" 일부러 다크는 뒤의 말을 중국어로 떠들었다. 상대가 알아둬서 좋을 게 없었 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다가 마지막 말을 하면서 방그레 미소짓는 언제나 무표정했던 주인을 바라보면서 세린도 마주 미소를 지어 보냈다. 꼭 말이 통해야만 한다는 법도 없었으니까... "그러지 마시고 밖에 나가서 산책이나 좀 하세요. 제가 준비해 드릴께요. 안 에만 계시면 몸에 해로워요. 주인님." "좋아. 밖에 나가자. 알아 볼것도 있고..." "예. 주인님." 세린은 밖에 뛰어나가 몇가지 준비를 해가지고는 다시 돌아와서 소녀가 신발 신는 것을 도왔다. 그녀로서는 이 소녀가 5번째의 주인이었지만 그 성격이 들 쑥날쑥 해서 어떤때는 여태껏 모셨던 주인들 중에서 최고로 힘든 대상인 것도 같았고, 어떤때는 최고로 다루기 쉬운 주인이 될 때도 있었다. 이제 이 새로 운 주인과 지낸지도 1주일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그녀는 이 까다로운 주인을 다루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 나가고 있었다. 원래가 묘인족은 눈치하나는 대단 히 빠른 종족이었으니까... '어쨋든 가련한 표정과 눈물에 이상하게 약하단 말씀이야... 딴 주인들은 안 그랬는데...' 소녀가 뒷굽이 5Cm는 족히 되는 예쁜 구두를 신고는 약간은 위태로운 걸음걸 이로 세린과 함께 방을 나서자 언제나 방앞에 지키고 있던 무사 한명이 20m정 도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기 시작했다. "저쪽으로 올라가자." "예? 그쪽은 경사가 심해서 힘드실 텐데요. 주인님." "상관없어." 둘은 약간 높은 언덕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곧이어 언덕 위에 만들어진 큰 인공구조물을 볼 수 있었다. 탑같기도 하고... 하지만 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단조로운 모양... 그냥 밑에 넓은 발판을 만들고 그 위에 한 8미터 정도 되는 바위를 사각지게 잘라 만든 비석 같기도 했다. 한쪽에 글자들이 써져있 는 걸 보면... "이건 뭐지?" "예. 현충탑(顯忠塔)이에요. 30년쯤 전에 일어났던 대 전쟁에서 패한 후 그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을 기리는 탑이지요." "웃기는군. 이따위것 만들어도 그사람들이 살아 돌아오지도 못하고, 또 전쟁 후라면 먹고 살기도 힘들텐데... 이런걸 만들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한바퀴 빙 돌면서 탑을 보니 탑 아랫쪽에는 돌로 만든 무사와 백성들의 형상 이 서 있었고 그 중앙에는 커다란 타이탄의 형상도 있었다. 일단 빙 둘러가며 구경을 한 후에 위로 더 올라가려고 하는데, 더 이상 길이 없었기에 풀밭 위 로 걸어가자니 부드러운 흙 때문에 푹푹 구두 뒷굽이 빠져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제기랄..." 투덜거리며 아예 구두를 벗어서 들고는 언덕 위로 올라가는 소녀에게 한마디 할 듯 하던 세린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따라 올 라갔다. "그렇게 높지는 않군." 별로 높지는 않았지만 언덕 위에서 바라보니 다크의 의도대로 주변의 경치를 명확히 볼 수 있었다. 군데군데 솟아있는 아름다운 건물들... 또 여기저기 모 여있는 군사들... "잠깐만 기다리세요. 주인님." 세린은 준비해 온 넓직한 천을 나무덕분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바닥에 깔고난 후 말했다. "여기 앉으세요. 주인님." 소녀가 그 위에 앉는 걸 보면서 주위를 둘러보며 세린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 다. "참 경치가 좋죠? 날씨도 좋고..." "저기 보이는 건 뭐지?" "예. 저건 경계 초소에요. 주인님." "이 성에는 수비하는 병사들이 많냐?" "예. 아무래도 왕궁이니까 수비병들이 많죠. 주인님. 저쪽에 보이는 아름다운 건물이 콜렌 기사단 본부에요. 또 저기 보이는 푸른색의 자그마한 건물이 스 바스 근위기사단 건물이구요. 저기 보이는 건 경비병들 막사지요. 건물이 좀 아름답지 못하지만 과거 여기는 황제폐하의 여름별장이었는데 왕궁으로 바뀐 탓에 건물을 갑자기 만들려니 어쩔 수 없잖아요?" 소녀는 흥미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린의 설명을 듣고 있었지만 그건 저쪽에 서 감시하고 있는 기사녀석을 속이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머리속은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4-5개 월 정도 죽자고 공력을 쌓으면 이녀석들이 말하는 그래듀에이트 정도는 상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탈출해야 하나? 아니면 좀 더 기다렸다가 힘의 10%라도 되찾은 후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크는 사신의 손발을 내려다 봤다. 도대체 라나란 년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알수는 없지만 지독하게, 정말이지 이럴수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단련이라고는 안된 육체... 만약 여기서 환골탈태를 한다 해도 예전의 힘을 그대로 되찾는 건 불가능했다. 내공이란 것도 중요하지만 내공은 어디까 지나 뒤에서 받쳐주는 힘! 진짜 힘은 근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가는 팔다리로 환골탈태 한다고 근육이 덕지덕지 붙는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크 는 아마 잘 되면 과거의 30%정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하는 중이었다. "[그래 까짓거 3성이면 어때? 그정도라도 장인걸 정도는 반쯤 죽여놓을 수 있 어. 천천히 하자... 조급하게 굴지 말고...]" * * * 토지에르는 제자가 환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는 걸 알았다. "어떻게 되었느냐?" "예. 방금 크로마스 경이 시드미안과 또 한명의 기사를 포획하고 돌아오셨습 니다." "흐흐흐...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나. 고헨으로 한번 갔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고헨으로 파견해 봤더니 대어를 낚았어." 토지에르는 팔시온 일행과 상담한 후 그들이 고헨 근방에 산다는 블루 드레곤 을 만났다는 걸 알고, 사실 이들이 키아드리아스를 엘프 카렐로 착각했으니만 큼 그들의 말을 건방진 코린트 놈들이 믿지 않고 또다시 그리 간게 아닐까 생 각했던 것이다. 사실 나타나자 마자 공간이동 마법으로 사라졌으니 어디로 갔 는지 알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 코린트 녀석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예. 크로마스 경의 말로는 코린트 놈들이 오기 전에 그들을 재빨리 포획한 후 고헨을 탈출하셨다고 합니다. 어쩌면 지금쯤 시드미안을 찾는다고 고헨을 뒤지고 있겠지요." "그래? 시드미안을 잡아온 경로는 철저히 은폐했느냐?" "예. 거기 거주하던 모든 첩자들은 그 즉시 거점을 옮겼습니다. 또 알카사스 에서활동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기에 알카사스 내에 투입했던 첩자 20명도 모 두 본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대신 1명은 코린트 녀석들을 감시하기 위해 놔 뒀습니다. 연락은 전서구로 코발트에 잠입한 첩자에게 보내고, 또 거기서 마 법으로 이쪽으로 연락하라고 지시해 뒀습니다." "잘 했다. 딴 건 다좋은데... 알카사스는 마법사들이 활동하기에 너무 위험하 단 말이야... 3싸이클 급 이상의 마법만 되어도 위치를 잡아내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해놨기에 그렇게 잘 알아내는지 이해를 할 수 없어. 그건 그렇고 시드미안에 대한 심문은?" "프로이에 경께서 직접 하시기로 했습니다. 정신계 계통의 마법을 쓴다면 곧 실토하겠지요." 토지에르는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좋아..." "그런데 스승님." "왜그러느냐?" "알카사스에서 첩자들을 모두 후퇴시켜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놈들이 단서 를 찾아낸다면..." "그럴 가능성이 없다. 팔시온 녀석들에게 물어본 결과 그들이 알아낸 사실은 거의 전무하다. 겨우 그정도 단서를 가지고 이쪽을 찾아낼 수는 없다는 말이 지. 괜히 얼쩡거리다가는 오히려 꼬리를 밟힐 수 있으니까 고헨에 남은 녀석 도 탈출시켜라. 대신, 공간이동이 아닌 정식 통로로." "예. 스승님." 한참 포옴을 잡으면서 그림을 감상중이었던 - 자신이 순수 무골이 아닌 예술 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 - 백작을 부르는 외침이 있었다. "백작 각하!" 마법사 한명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그를 찾자 백작은 별로 곱지 못한 눈으로 그를 째려보며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이런식으로 허둥 대는 걸 그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발..발렌시아드 공작 전하로 부터의 통신입니다. 각하를 찾으십니다." "공작 전하께서?" 그 말을 내뱉으며 백작은 통신마법진을 그려놓은 방을 향해 재빨리 뛰어갔다. 키에리 발렌시아드 공작은 그가 단 1초라도 기다리게 만들 수 없는 지고(至 高)한 위치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허둥대던 부하를 험한 눈 초리로 쳐다봤던 그도 역시 허겁지겁 달려가 수정구슬 앞에 서자, 수정 구슬 에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가 느긋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 화면 을 향해 백작은 최대한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정중히 절을 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공작 전하." "그래. 일은 어찌되어 가나?" 냉랭한 공작의 말에 백작은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의 무능을 책(責)하기 위해 통신을 했는지도...? "예. 단서가 너무 작아서 추적작업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또 블루 드레곤에게 몇가지를 알아보겠다고 간 지오네로 부터도 연락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드래곤이 드래곤 하트를 훔쳐갔을 리는 없으니..."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 백작의 변명을 도중에 끊으며 수정구슬 속의 인물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좋아. 힘들다 이거군. 이번 작전은 당분간 중지한다." "예? 그럼 그 도둑들은..." "사실 나도 그 보고서들을 읽어봤지만 그정도 증거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시드미안의 보고로는 놈들이 로메로급 타이탄을 사용했다고 한다. 로메로를 가지고 있는 나라만 거의 50개국이다. 그런데 그 나라들을 모두 다 철저히 뒤 지지 않고 어떻게 찾나? 나중에 기다려 보면 놈들의 마각이 드러나겠지. 그냥 창고에 넣어두려고 훔쳐간 것은 아닐테니까, 그때를 기다리기로 하지. 그리고 로메로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에 첩자들을 파견해서 감시하고말이야. 하지만 이상태로 계속 시간만 끌고 있다면 황제폐하의 권위가 실추된다. 그러니 자네 는 트루비아를 멸망시켜라." 공작의 냉랭한 말에 백작은 조금은 정신이 없는 듯 반문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대 코린트 제국의 드래곤 하트를 훔쳐갔는데도 아직까지도 범인을 잡지 못했 다는 것은 본국의 명성이 실추되고, 또 황제폐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것 이지. 우선은 트루비아를 그 범인으로 만들어 죄를 묻는다. 그런 후 차근차근 놈들을 추적해 나가 멸망시킨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하지만 트루비아도 피해 당사국인데... 그들을 공격할만한 명분이..." 그러자 수정구슬 안의 젊은이는 싸늘한 눈초리로 백작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 했다. "멍청한 녀석! 왜 명분이 없어? 이번에 드래곤 하트를 훔친 것은 트루비아의 국왕이 사악한 마왕의 꼬임에 넘어가 마신을 부활시키려고 한 것이다. 어쨋든 본국에서는 그렇게 발표할 것이다. 본국의 발표가 있은 후 자네는 자네가 가 진 전력과 동맹국에서 차출한 약 50대의 타이탄, 그리고 코린트 남부에 주둔 중인 제12, 13보병 사단을 거느리고 본보기로 트루비아를 철저히 파괴해라. 코린트의 뜻을 거슬리면 어떻게 되는지 그놈들에게 보여주란 말이다. 알겠 나?" "명심하겠습니다. 공작 전하." "동맹국의 타이탄들은 앞으로 1달 후에 소환될 것이다. 그때까지 자네는 지렌 시에 도착하여 그들과 합류, 트루비아를 정복하라. 그대에게 전권을 위임하겠 다." "감사합니다. 공작 전하." 타국의 정복대 사령관이 되는 것. 그것도 승리가 확실한 정복이라면 그건 대 단한 특혜였다. 정복한 국가로부터는 엄청난 노획물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고 물론 그것의 상당량을 황제폐하께 바쳐야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떨어지 는게 없는건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막대한 수의 노예도 잡아들일 수 있었다. 또 이번 정복을 잘 마무리 지으면 자신의 위치는 더욱 올라가게 될 것이다. 그런 기회를 자신에게 배푼어 준 것을 생각하며 백작은 수정구슬에 비취고있 는 젊은이를 향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충성을 다하겠다고 생각하며 말하는 것이다. * * * 어두컴컴한 지하감옥 속... 빛이라고는 천장 부근에 있는 작은 환기창을 통해 조금밖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기에 전체적으로 실내는 어두웠다. 꾀제제한 몰 골의 시드미안이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는 도미니크를 향해 물었다. 이때 도미 니크는 수갑을 이용해서 벽에 표시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오늘로서 몇일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여기 들어온지는 7일째입니다." "7일이라... 벌써 그렇게 되었나?" "예. 그놈들은 왜 우리를 그냥 가둬만 둘까요?" "그냥 가둬둔건 아니지. 아마도 정신계 마법을 써서 알아낼 건 다 알아냈을거 야." "예?" "쿠마가 사라졌다. 아마 자네의 티론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그녀석과 계약을 해약한 기억은 없으니, 아마도 뭔가에 홀렸을 때 상대의 지시에 따라 쿠마를 놔줬을 거라는 건 뻔한 사실이지. 제길 국왕전하께서 하사해주신 타이탄을 이 렇게 무력하게 뺏기다니... 정말이지 나는 기사로서의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 야."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놈들은 인질로 협박했고... 또 상대도 손쉽게 제 압할 수 있는 만만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또 어떻게 해야할까 궁리중일 때 그놈들은 비겁하게 마법으로..." "도미니크." "예?" "변명을 하자면 한이 없는 거라네. 다만 결과만이 중요한거야. 나는 전하께서 나에게 주신 타이탄을 보호하지 못했고, 또 내가 맡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 다. 그 중간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 내가 이 감옥속에 갖혀있다는게 중요할 뿐이지..." "그런데 왜 녀석들은 우리를 여기다가 가둬뒀을까요? 더 이상 우리에게서 알 아낼 것도, 빼앗을 것도 없을텐데..." "모르지, 아마 회유라도 하려는 생각인지도... 자네나 나는 그래듀에이트고 또 안토니는 마법사니까 말이야." 시드미안 일행이 감옥 속에 처박혀 있을 때 다크는 또다시 세린과 함께 현충 탑이 있던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한번만 간다면 뭔가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었기에 한번씩 날씨 좋은 날에는 세린과 함께 놀러가는 장소가 되어버렸고, 몇번 올라간 후에 세린은 아예 음식까지 싸들고 따라와서 점심을 언덕 위에서 먹는 일이 잦아졌다. 거기에다가 다크는 일부러 매일 따라 다니는 호위무사에게 함께 식사를 하자 고 권했고 조금씩 친분을 쌓아가는 중이었다. 이런식으로 시간이 서서히 지나 면 이 자의 조심성도 천천히 풀려갈 것이라는 걸 노린 작전이었다. "사과 드실래요, 주인님?" "응. 그리고 포도주도 줘. 실바르 경도 포도주 1잔 하실래요?" 그 말에 앞에 앉아서 함께 샌드위치를 먹고있던 기사가 약간 고개를 끄덕였 다.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서 공손한 어조로실바르를 대하는 주인을 보면서 세린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간혹 던지고 있었다. 이제 이 주인과 함께 산 지도 2주일... 성질이 뭐같은데다가 입은 거의 시궁창 수준을 방불케 한다는 것을 잘 알고있는데 기사를 향해 생글거리며 공손히 말하다니... 으욱... 저 런 내숭~~ "실바르 경은 참 건장하시군요." 부럽다는 듯한 예쁜 소녀의 눈길을 받으며 실바르의 안색이 약간 붉어졌다. '육체가 바뀔바에야 저런 몸매가 좋았을텐데...'하는 뜻이었지만 정작 여자에 게 그런 눈길을 받는 남자의 입장에서는 다르다. '혹시 이 아가씨가 나한테 마음이 있나? 저런 뜨거운 눈길로 보게... 흐흐흐...' 하는게 정상이 아닐까?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하하" 궁정 제1마법사인 토지에르로부터 철처히 신변 보호와 탈출 방지를 명령받은 실바르로서는 '겨우 저따위 소녀쯤이야...'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상관의 명령이 있었기에 철저히 감시와 보호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근래들어 그는 소녀의 하는 행동을 보고 '겨우 저따위 소녀쯤이 야...'하던 첫 번째 생각을 재확인 할 수밖에 없었고 점차 감시의 눈길이옅 어지고 있었다. 이들이 한참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와이번이 아래로 급강하 (急降下)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봄과 동시에 실바르는 재빨리 일 어서서 검을 뽑아들며 대비했다. 하지만 그 와이번은 야생이 아니었고 위에는 30대 초반정도로 보이는 무사가 한명 타고있는 걸로 보아 정찰대 소속이거나 콜렌 기사단 소속인지도... 하지만 그 기사의 얼굴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얼 굴이었기에 실바르는 긴장하며 상대의 행동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와이번은 그들의 머리 위 10미터 정도 높이를 통과하며 밑으로 내려가 버 렸고 실바르는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그 뒤를 따라 쫓아갔다. 순간적 으로 그가 몸을 날리자 거의 한순간에 그의 몸이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실바르가 밑으로 쫓아 내려갔을 때 와이번은 현충탑 부근에 내려섰 고 그 위에 타고있던 기사는 현충탑 앞에 서서는 우울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 보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그 말에 기사는 천천히 뒤로 몸을 돌렸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용모에 다부진 체구, 허리에 늘어뜨린 바스타드 소드. 실바르는 상대의 날카로운 눈 매를 쏘아보며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는 자네는 누군가?" "나는 콜렌 기사단 소속, 드미트리 실바르다. 그대는?" 그 말에 상대는 우울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스바스의 루빈스키 폰 크로아라고 한다네. 젊은이." 그 말에 실바르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그의 머리속은 지금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루빈스키 공작은 지금 60세가 넘은 인물이었다. 정 확하게 말하면 63세. 그런데 이렇게 젊은 인물이 그를 자처하고 있다면 미친 놈이던지 아니면 진짜일지도... "신분을 증명하실 물건을 가지고 계신지요." 그러자 상대는 자신의 호화로운 검을 쑥 뽑아들며 말했다. "이녀석의 이름은 크로마타. 황제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검이다.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할까?" 그것을 보고 실바르는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몰라뵈어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자네가 몰라보는 것도 당연하지. 28년만에 돌아왔으니까... 응? 저기있는 인 물들은 자네의 동행들인가?"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싸늘한 눈빛을 던지며 서있는 소녀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묘인족 1명이 있었다. "예. 전하." "나는 폐하를 만나뵈러 갈테니 자네는 자네 볼일을 보게나. 재미난 시간을 방 해했다고 그렇게 눈을 부라릴 필요 없다고 여자친구에게 전해주게. 자네 여자 친구는 미인이기는 하지만 꽤나 성깔이 있어보이는군. 그럼 다음에 보세." 그 말과 함께 그는 와이번의 등에 올라탔고 와이번은 급속히 날아오르더니 황 궁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버렸다. * * * 제국 최고의 기사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이 돌아오면서 크라레스 제국의 지 도부는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니 서서히 정복 사업을 벌이기 시작해야 할 시점에 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크라레스 제국 의 최고 지도부는 크로아 공작의 도착과 더불어 작전회의를 시작했다. 정장을 입은 장교 1명이 찰흙으로 정교히 만들어진 지형들 위에 놓여진 깃발 들을 지휘봉으로 가리키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에는 지금 황제로부터 전 권을 위임받은 크로아 공작을 비롯하여 크라레스 제국 최고급 장성들은 모두 다 모여있었기에 그 장교는 꽤나 긴장하고있었다. "본국의 영토는 지금말토리오 산맥 깊숙이까지 파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상 풍요로운 크로나사 평야를 상실한 후 본국의 거의 전 영토가 말토리오 산맥 속에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렇기에 과거에는 말토리오 산맥에 가로막혀 있던 스바시에 왕국이 지금에 이르러는 바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형태가 되 어버렸습니다. 먼저 풍요로운 상업국가 스바시에 왕국을 병합하고, 그 다음 옆에있는 칠레아 왕국을 병합하여 국력을 키우는게 최선의 과제라고 생각됩니 다." "흐음... 시바시에 왕국의 군사력은?" "예. 총 57대의 타이탄과 127명의 그래듀에이트가 주축인 3개 기사단, 그리고 7개 보병사단, 2개 기병 여단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의 병력의 50%를 국경선 에 투입중이며 그로발 근위기사단과 네시 기사단은 수도 근처에 배치하고 있 습니다." "그들은 4개 보병사단과 티노 기사단을 최전선에 배치하여 국경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리상으로 봤을 때 전방에서 전쟁이 벌어진 후 3일 내로 1개 기병 여단이, 나머지 1개도 6일 내로는 가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나머 지 보병사단들 중 1개는 치레아 왕국과의 국경선에, 2개는 수도 부근에 포진 중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제 2차전은 2개 보병사단과 근위기사단, 네시 기 사단과의 전투가 될 것입니다." "좋아. 상대방이 어느정도 시간안에 후방의 타이탄들을 투입할 수있을것이라 고 생각되나?" "예. 스바시에 왕국은 전통적으로 마법보다는 기사가 더 강한 나라기에 마법 사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정보상으로는 7명을 넘지 않을것이라는 예 상입니다. 그렇기에 전쟁이 터짐과 동시에 이쪽으로 워프해온다 하더라도 자 신들의 전체 전력을 보내기는 힘들겁니다. 초반에 이쪽에서 기선을 제압해버 린다면 가망없는 전투에 타이탄을 소모하기 보다는 두 번째 전투를 위해 타이 탄을 아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장교의 설명을 쭉 듣고있던 크로아 공작이 말했다. "이번 작전에 본국에서 투입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은?" "예. 현재 타국에 알려지기로는 본국 보유 타이탄은 28대로 되어있습니다. 그 렇기에 될 수만 있다면 그정도 병력만을 사용해야 합니다. 또 유령기사단과 청기사들은 모두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코린트의 침공을 대비해 남겨둬야만 합니다." "음... 타이탄의 성능으로만 생각하면 이쪽이 위야. 10대의 카프록시아를 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질이 좀 떨어지는 타이탄이라도 57대나 가지고 있다는 건 좀 마음에 걸리는군. 또 그들과의 전쟁에 최고 실력의 기사 들을 투입할수도 없을테고..." "그렇습니다. 전하. 또 이번 정복에서 우리의 전력이 노출되어서도 안되죠. 그러면서 코린트가 보기에 이번 정복이 꽤나 타당성있게 보여야만 합니다. 만 약 그렇지 않다면... 코린트는 우리를 의심할테고... 최악의 경우..." "좋아. 그렇다면 마법사들 외에는 답이 안나오는데 몇 명이나 동원 가능한 가?" "예. 마법사 클라스만 25명입니다." "25명이라... 빠듯한 숫자로군." 공작의 푸념에 토지에르가 옆에서 참견을 했다. "전하, 남은 27명의 마법사들을 이용해서 다른 작전을 쓸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청기사에 탑승시킬 기사들을 모두 카프록시아로 돌리는 겁니다. 사실 청기사 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론가르트 이외의 인물에게는 지급하지 않았습니 다. 그러니..." "무슨 문제인가?" "예. 주인을 인정하지 않는 못된 버릇이 있지요. 왠만한 실력자가 아닌 한은 비교 평가되어 또다시 그 주인으로 인정받기 힘듭니다. 그러니까 론가르트를 제외하고 나머지 근위기사들을 모두 이번 전쟁에 투입할 수 있습니다. 또 론 가르트가 타던 카프록시아는 전하께서 사용하셔도 되구요. 그런 후 혹시나 코 린트가 이번 전쟁에 개입한다면 모두들 계약을 해제하여 그걸 딴 기사에게 넘 기고 본국으로 돌아와 청기사와 계약을 맺으면 됩니다. 하지만... 코린트가 우리를 얕보고 보낼 1차 원정대는 막을 수 있겠지만 아무리 청기사를 사용한 다 하더라도 더 이상은 막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작전에서 우리의 힘 을 최대한 숨겨야만 합니다. 만약 코린트는 우리가 약간이라도 위험해 보인다 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국가를 없앤다는 명목하에 개입해올 것입니다." "좋아. 근위기사들을 이번 전쟁에 투입할 수 있다면 28대가 아니라 20대 정도 만 투입해도 충분해. 안티노스, 자네는 우선 코린트의 고관들에게 뇌물을 전 달하고 이번 전쟁을 묵인해 줄 것을 요청하게. 또 코린트 황제에게도 적절한 뇌물이 필요하겠지." "예. 전하." "이번 전쟁에서 우리는 국력을 완전히 다 쥐어짜서 전쟁을 벌이는 것 처럼 보 여야만 한다. 사실 이번 전쟁으로 우리에게 50여대의 타이탄이 새로 생긴다 하더라도 코린트에는 거의 영향이 없지. 코린트가 우리를 얕보게 만들어야 한 다는 점을 명심하고 작전을 진행시켜라. 코린트와의 국경 수비대를 제외하고 전 병력을 동원한다. 그 병력배치는 그대들에게 맡긴다. 대신 이번 전쟁을 최 대한 타이탄끼리의 전쟁으로 끌고 나가야 해. 25명의 마법사와 콜렌 기사단을 적절히 배치해 최대한 보병들을 보호하라." "예. 전하!" 그들은 한동안 작전회의를 한답시고 떠들어댄 후 모두들 자신이 맡은 일을 처 리하기 위해 돌아갔고, 회의실에는 공작과 토지에르만이남았다. "그 말이 정말이었군요. 전하." "뭐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몸이 재구성되며 젊어진다고 그러던데..." 그 말에 공작은 약간 놀라면서 말했다. "그걸 어디서 들었나? 나도 경험해 보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인데..." 그 말에 토지에르는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좀 특이한 인물이 하나 있어서 그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래? 어쨋든 별로 좋은 건 아니야. 내가 이렇게 젊어졌다는 말은 곧 키에리 발렌시아드란 그 악마도 젊어졌다는 말이 되니까..." 말을 하면서 공작은 천천히 창문쪽으로 걸어갔고 그 마지막 말은 왕궁의 정원 을 바라보며 했다. 이때 공작의 시야에 낮익은 인물들이 들어왔다. 귀여운 소 녀 두명과 기사 한명. 그중 한명은 묘인족인 걸로 봤을 때 또다른 소녀는 노 예까지 거느릴 정도로 지체높은 인물의 딸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아직 절망적인 상황은 아닌 모양이군. 그렇게 공녀들을 많이 헌 납했는데도 아직도 저렇게 예쁜 애가 남아있는 걸 보면...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구의 딸인가?" "예?" 토지에르는 공작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서 창문으로 갔고 곧 이어 진상을 알 수있었다. "저 아이는 포로입니다. 전하." "포로라고? 그런데 무슨 포로가 노예에다가 호위병까지... 그전에 만나보니까 호위는 그래듀에이트로 보이던데, 본국에 그래듀에이트가 그렇게 남아 돌았 나?" "아닙니다. 매우 중요한 포로거든요. 공작 전하. 아쿠아 룰러의 주인입니다." "아쿠아 룰러? 그 나이아드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예." "믿을 수 없군. 겨우 저런 힘없는 소녀가 지닐 물건이 아닌데... 또 아쿠아 룰러가 겨우 저런 소녀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할 리도 없고..." 그말에 토지에르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저 아이도 마스터였습니다." "정말인가?" "예. 마법사와 싸운 경험이 없었기에 제가 건 저주에 걸려 저렇게 된 것이지 요. 만약 그가 마법에 대한 경험만 좀 있었다면 당한건 제쪽이었을 겁니다. 처음에 강공으로 나갔을 때 로메로 1대를 검한자루 가지고 박살낸 자니까요." 그 말에 공작의 눈이 더욱 커지며 창밖의 소녀를 주시했다. "하지만 아쿠아 룰러의 주인에게 저주를 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텐데..." "예. 아쿠아 룰러를 가지기 전의 일이었지요. 아쿠아 룰러는 저 그레이시온 산맥의 주인 키아드리아스에게 선물받은 겁니다." "놀라운 인물이군." "예. 차차 설득해서 우리편으로 만드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호위를 붙여놔야 하죠. 현재의 육체는 어떻든 간에 과거에 엄청난 경지까지 올라갔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감시자로 그래듀에이트를 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좀 더 열심히 회유해 보게나. 아쿠아 룰러의 주인이 우리편이 된다면 매우 든든할테니까." "예. 전하." * * * 세린은 요즘들어서 인간 여자의 강인하고 무서움에 대해 새로이 깨닫고 있었 다. 많이 자봐야 하루 1-2시간의 수면, 돌아온 후에는 뒷구멍으로 욕을 하면 서도 직접 만났을때는 미소띈 귀여운 얼굴로 드미트리 실바르를 대하는 것, 그러면서도 이궁리 저궁리 하면서 탈출 방법을 생각하는 걸 보면 과연 인간의 여자는 묘인족과 달리 매우 무서운 존재들인 모양이었다. 한 2주일 돌아다니고 나자 요즘은 그 높은 구두를 신고도 제법 맵시있는 걸음 걸이를 유지하고 있는 주인을 보면서 세린은 존경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 예뻐라... 저거 정말 예쁘지 않니, 세린?" 그날은 다크가외곽 정찰을 나온 날이었다. 이왕 내친김에 시내까지 들어가서 상점들을 둘러보다가 마침 여성복 점 앞에 걸려있는 무릎정도 오는 짧은 치마 에 예쁜 브라우스를 보고는 일부러 과장되게 예쁘다고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 는 중이었다. "그러네요. 주인님." "저거 정말 예쁘다... 입어봤으면 좋을텐데..." 이런식으로 그 앞에서 30분 정도 주절거리고 있으니 아무리 눈치없는 실바르 라도 상대가 의도하는걸 모를 수가 없었다. 사달라는 거나 마찬가지 였으니 까... "저... 저런 옷은 평민들이나 입지 다크양 처럼 고귀한분이 입기에는..." "호호호... 아니에요. 저도 그렇게 고귀한 편도 아니구요. 정말 예쁘네요." 돈은 몽땅 다 뺏겼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거추장스런 옷을 입고 도망자체 는 불가능. 도망치기 전에 치마 아랫부분을 잘라낼까 하는 궁리까지 하는 판 에 저렇게 토끼기 좋은 간편한 복장이 있는데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고, 저 멍청한 녀석은 이정도까지 눈치를 주고있는데 아직 사줄 생각을 안하고 있으 니 다크는 될 수 있으면 옷에 욕심이 생긴 평범한 여자애처럼 행동하는 중이 었다. "정말 저 옷을 입고 싶으십니까?" "예." 그 말에 실바르는 아무 생각없이 그녀들을 이끌고 상점 안으로 들어갔고 옷뿐 만 아니라 뒷굽이 짧은 구두까지 사주고 말았다.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나중에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도 안해보고 말이다. 어쨋든 실바르는 옷과 구두를 다크에게 선물했고 다크는 1주일 정도 뒤에 그 것을 입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실바르는 기껏 사줬는데도 그 옷이나 구두 를 입지 않는 걸 보고 조금 섭섭했겠지만, 그걸 입고 돌아다니다가 실바르보 다 좀 더 머리회전이 빠른놈이 본다면 뺏길게 뻔하기에 다크는 애지중지 그 옷과 구두를 구석에 숨겨뒀던 것이다. "오늘은 좀 이상하네..." "예, 왜그러세요, 주인님?" "평상시보다 무사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 "예? 저렇게 많은데요?" 세린의 말은 사실이었다. 평상시보다 더 많은 수비병들이 쫙 깔려있었던 것이 다. 하지만 다크의 말은 그게 아니었다. 수비병들의 숫자는 늘어났지만 뛰어 난 실력의 기사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평상시보다 수 비병들의 질은 떨어지고 양은 늘어났다고 봐야 할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궁금하시면 제가 알아보고 올게요." "그래라." 세린은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한 1시간쯤 후에 돌아와서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구요. 콜렌 기사단하고 근위기사단 건물이 텅 비었 다고 하던데요? 여기저기 하녀들하고 하인들한테 물어봤으니까 아마 정확할거 에요. 어디 훈련나갔는지도 모르죠." "그래?" 별 표정없이 대답했지만 다크는 이제 기회는 왔다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 다. 그날 저녘에도 세실은 야행성 동물 특유의 몸짓으로 조용히 주인의 방문을 살 짝 열고 들어갔다. 어쩌면 자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침대 위에 이상한 자 세로 앉아있을테지만... 만약 자고 있다면 이불을 정돈해줘야 하고, 또 토지 에르에게 지시받은 대로 주인에 대한 감시도 해야 했다. 자질구레한 걸 보고 할 필요는 없었지만 만약 도망친다면 그걸 막던지 아니면 빨리 그 사실을 보 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그러면 죽지 않을만큼 두들겨 맞을테니까... 그녀가 살짝 들어갔을 때 주인은 침대 위에 없었다. 순간 세실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내일 당해야 할 몽둥이 찜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주인님!" 그녀는 주인이 혹시나 화장실에라도 갔나 싶어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려고 했 을 때 몸이 뜨끔 하더니 곧장 정신을 잃어버렸다. 세린의 혈도를 찍어서 잠들게 만들어버린 후 다크는 곧장 옷을 갈아입었다. 세린은 인간이 아니었기에 혈도가 인간과는 약간 달랐지만 그 혈도를 파악할 만한 시간은 충분하고도 주리가 남을 정도로 주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 다크 는 일부러 세린은 안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면서 그녀의 몸속으로 내공을 흘려넣어 이미 혈도 파악을 끝내놓은 상태였기에 일은 손쉽게 진행되었던 것 이다. "여기 온지도 거의 1개월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나에게 힘이 없는줄 착각하다 니... 호호호..." 자신의 방은 4층이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곧장 경신술을 사용하 여 왼쪽 아랫층에 있는 발코니로, 그 다음은 오른쪽 2층에 있는 발코니로 그 다음은 잔디 위로 매끄럽게 떨어져 내렸다. 그 다음부터는 될 수 있다면 보초 들의 눈을 피해서 이동해야 했기에 다크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지고 또 느려 질 수밖에 없었다. "으음... 저쪽이군." 다크는 여태껏 꼼꼼히 그려놨던 지도를 보면서 별들을 보고 방향을 잡아가며 도망치고 있었다. 우선은 시내로 들어가기 보다는 산속으로 도망치는게 최고. 하지만 시내쪽으로 도망친 것 같은 흔적은 만들어 둬야했기에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샥! 앞으로 나가려다가 저쪽에서 보초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고 다크는 재빨 리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보초를 해치울 수는 없었다. 보초는 거의 2시간 단위로 교대를 했고 이 보초를 해치우면 2시간 이내에 자신의 탈출 사실이 발 각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뒤쪽에서도 보초들의 발걸음소리가 다가오는 걸 듣 고 다크는 재빨리 옆에있는 나무로 몸을 날렸고 그 나무 가지를 밟고 위로 올 라간 후 옆 건물의 조금 튀어나온 발코니 같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밑에 4명의 보초들이 만나서 잠시 쑤근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어 어떻게 할 까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창문이 조금 열려있는게 보였다. 다크는 더 이상 생 각할 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지독하게 어두웠다. 바로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 다시 뒤로 돌아서서 나가려고 할 때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응? 들켰나?" 어둠 속 저편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다크는 바짝 긴장했다. 이왕 이렇게 되 었다면 상대를 헤치우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쪽에서 희미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아무래도 느낌상 거리는 3미터 저쪽... 제길... 어두워서 하나도 안보이네. 달려들어가면서 그대로 목을 부숴버려야 해.' <그대는 누구인가?> 깡! "아얏!" 재빨리 도약해서 상대를 가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손은 강철을 때린 것 처럼 얼얼했고 발 밑바닥은 허전했다. "끼약!" 퍽! 그래도 비명소리를 크게 안질러서 다행이지 안그랬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밑바닥으로 떨어진 충격에 한동안 정신이 없다가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라는 걸 다시금 상기하고는 얼떨결에 떨어져서 발목이 삐었는지 우릿하게 전해져 오는 통증에 비명이 터져나올 뻔 한 걸 참으며 다크가 살며시 말했다. "네녀석은 누구냐?" <나? 나는 쿠마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나의 옛 주인과 함께 있던 자로군.> "쿠마라고? 그 타이탄?" <그렇다.> "시드미안은 어디있지?" <나와 계약을 해제하고 떠났다. 아무래도 그는 정신이 제압당한 것 같았지만 나는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럼 시드미안도 여기 있다는 말이군." <그대는 과거 만났을 때 보다 엄청난 진보를 했군. 하기야 내가 그대를 처음 봤을때는 그대가 드래곤인줄 착각했을 정도였으니까... 현재 그대의 마나는 아직 보잘 것 없다. 하지만 그대의 발전속도로 미루어 봤을 때 조만간에 그대 는 엄청난 힘을 다시금 얻게 되겠지. 고렘의 맹약을 맺기위한 첫째 조건은 마 나를 다룰 수 있는 자. 그대의 마나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대는 그걸 효율 적으로 다룰 줄 알기에 첫째 조건은 충족된다. 그대는 나와 계약을 원하는 가?> "타이탄이 한 대 있다면 좋긴 하겠지만, 넌 시드미안의 것이잖아. 사양하겠 어." <나는 시드미안의 것이 아니다. 시드미안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계약을 해제 했으니까... 지금 현재 나의 주인은 없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은가?> "내 대답은 똑같아. 그런데 여기를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지?" <그건 나도 모른다. 나는 주인을 통해 모든 걸 보고 느낀다. 주인이 없는 지 금 나는 내 앞 5미터 정도를 겨우 볼 수 있을 뿐이다.> "어쨋든 보탬이 안되는 놈이군. 좋아. 다음에 보자구." <나중에 그대의 종으로 선택될 타이탄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제기랄... 이 건물에는 창문도 없나? 아예 눈앞이 하나도 안보이네..." 더듬거리면서 한참 다크가 걸어가자 또다시 다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희미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이번에도 굵직한 저음의 무게있는 목소리... 보나마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타 이탄일 것이다. "제길... 여기는 타이탄을 쌓아둔 창고인 모양이군." <그대는 누구인가?>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히 해. 그런데 여기 출구가 어디야? 전부 컴컴해서 어 디가 어딘지 알수가 있어야지." <지금 나의 능력으로는 그정도까지는 알 수 없다. 그대와 같은 마나를 부릴 능력을 갖춘 자를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니까... 사실 그대의 능력은 매우 실망스럽지만 어쩔 수 없군. 하지만 그대는 마나를 부릴 수 있기에 계약의 최 소 조건은 갖춰져 있다. 그대는 나와 계약을 맺고 싶은가?>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내 이름은 안드로메다.> "안드로메다? 아무도 주인이 없었다고?" <그렇다.> "호오... 그럼 그녀석들의 타이탄인 모양이군. 좋아. 계약을 맺자구. 어떻게 하면 되지?" <그대가 수락을 했으니 이제부터 그대와 나는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고렘의 맹 약에 따라 주종이 되었다. 내 이름은 안드로메다. 그대의 이름은?> "나는 다크.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면 되는거야?" <내 몸에 탑승하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주지.> "좋아. 그런데 어두워서 보이지가 않아." <그건 걱정하지 마라.> 곧이어 거대한 손이 다크의 몸을 잡고는 위로 살며시 들어올렸고 곧이어 그녀 를 내려놨다. <거기 있는 의자에 앉으면 된다.> 다크가 더듬더듬 찾아서 의자가 있는걸 찾아낸 다음 그 위에 앉자 곧이어 기 긱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고 앞으로 쳐져있던 금속조각이 튀어나와 그녀의 몸 을 완전히 감쌌다. 그런다음 거대한 안드로메다의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 했다. 쿵쾅거리는 걸음에 다크는 재빨리 소리쳤다. "이 멍청아. 너무 시끄럽잖아. 내려줘. 걸어서 도망치는게 잡힐 확률이 적겠 다." 그 말에 안드로메다가 곧이어 멈췄고 조금 지나자 손으로 다크를 잡아서는 아 랫쪽에 내려놨다. 몸이 땅에 내려서자 또다시 더듬거리면서 걸어가는 다크를 향해 안드로메다가 말했다. <나는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 "참. 그러고 보니 쿠마는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다가 부르면 나타나던데... 너도 공간의 저편에 갈 수 있냐?" <좋아.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지.> 그 다음은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또다른 청기사들도 서있었지만 이미 주인이 있는 상대를 부를 필요가 없었기에 잠자코 있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다크가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왔을때는 시간이 꽤 많이 흐른 후였 다. '제길.. 이런식이면 시가지 쪽으로 도망친 흔적을 만들수도 없잖아. 할수없 다. 빨리 도망치자.'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크는 최대한 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 * * "소녀가 도망쳤습니다." "뭣이? 그럼 네녀석은 뭐하고 있었나?" 토지에르의 질책에 실바르는 얼굴색이 벌개지며 황망히 답했다. "그것이 밤에 살짝 도망쳤기 때문에..." "그렇다면 세린은?" "방안에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데... 이상하게 깨어나지 않습니다." 그 말에 옆에서 듣고있던 공작이 말했다. "데리고 와라." "예." 조금 지나자 묘인족 소녀가 들려왔다. 그녀는 완전히 인사불성이었다. 정신을 잃고있는 상대의 몸을 이리저리 눌러보던 공작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흐음... 대단하군." "무슨 일입니까? 마법으로 잠을 재운것도 아니고..." 공작이 살펴보는 사이 마법을 써봤던 토지에르가 궁금한 듯이 묻자 공작이 감 탄했다는 듯 말했다. "대단한 기술이야. 몸속에 마나가 흐르는 통로를 막았어. 그러니 이상이 생길 수밖에..." 그 말에 옆에 서있던 기사들 중의 한명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몸속에 자연스레 흘러야 하는 마나의 통로를 막는 기술도 있습니까?" "글쎄... 타인의 몸속에 자신의 마나를 끼워넣어 상대의 마나 흐름을 방해하 는 기법도 있을 수 있겠지. 어쨋든 대단한 기술이야. 이걸 그 소녀가 했다는 말인가?" "예." "정말 자네가 말한대로 마스터였던 모양이군. 그것도 매우 독특한 기술을 많 이 알고있는... 추격대는?" "예. 군견(軍犬)들을 이끌고 수색중입니다." 이때 세린이 깨어나자 토지에르는 재빨리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일이냐?" 깨어나자 마자 사방에 서있는 높은 양반들 때문에 주눅이 든 표정이었지만 세 린은 솔직히 말했다. "어제 주인님 방에 들어가자마자 등뒤가 따끔하면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토지 에르 나으리." 그 말에 토지에르는 약간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상하군. 하녀를 제압했다 하더라도 제가 준 옷이나 신발은 도망치기에 별 로 좋지 못할텐데... 도대체 어떻게 도망쳤지?" 그 말에 공작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긴 치마야 자르면 그만이고, 신발이야 벗고 담요로 돌돌 말고있으면 그만인 데 뭐 그런게 궁금한가? 추격대에 그래듀에이트 4명을 추가로 파견해라." "예." 이때 세린이 말했다. "저... 주인님께는 행동하기 좋은 옷하고 구두가 있습니다. 그렇게 안해 도..." "뭐? 네년은 그걸 감시하지 않고 도대체 뭐한거냐?" "저... 그게 실바르 나으리께서 선물하신 거였기 때문에..." 그 말에 토지에르는 괜히 돈쓰고 궁지에 몰린 실바르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쏘 아보면서 말했다. "네녀석은 그녀를 감시하고, 보호하라고 붙여놨지. 그런데 도망치기 쉬운옷까 지 사주면서 도망치는 걸 도와줘?" "예? 죄송합니다. 토지에르 경. 괭장히 예쁜 옷이었고... 그걸 사달라고 조르 는 바람에... 아무 생각없이... 죄송합니다." "네 녀석도 빨리 달려나가 그 소녀를 잡아왓! 못잡으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말아." "옛!" 이때 당황한 표정의 인물이 들어서며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가는 실바르와 거 의 충돌할번 했다. 하지만 용케 실바르가 옆으로 피해 나갔기에 어느정도 정 신을 차린 후 다급하게 외쳤다. "토지에르 경.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예. 청기사가 1대 없어졌습니다. 그게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그 게..." 토지에르는 단정적으로 공작에게 말했다. "그녑니다." "뭐?" "그녀가 훔쳐간게 틀림 없습니다." "설마... 그래도 방금전 하녀의 몸속에 들어간 마나의 분량으로 봤을 때... 그렇게 대단한 실력은..." "그야 그렇죠. 실력은 별볼일 없지만 타이탄과 계약을 맺는데 마나의 분량은 상관없습니다.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죠. 사실상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는 자라면 대단한 실력의 인물, 몸속에 방대한 마나를 가지고 있을거라 는 가정하에서 생겨난 조건이기에..." "그렇다면 더 큰일이군. 유령기사단의 그래듀에이트 10명을 투입해라. 제 길... 이제 막 전쟁이 시작되려는 판에 이게 무슨 꼴이얏!" "헉... 헉.... 헉...." 다크는 죽자고 달리다가 이제 더 이상 달릴 기운도 없어서 나무 아래에 퍼질 고 앉았다. 그놈의 타이탄을 때린 오른손은 뼈까지 몇 개 부러졌는지 손등 위 로 뼛조각이 불룩 솟아올라 있었고 엄청난 통증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멋모르고 자신의 위치가 2층이란 것도 모르고 뛰어든 결과로 타이탄을 가격한 후 아랫쪽으로 떨어지면서 삐어버린 오른쪽 발목은 너무 혹사를 시켜서 그런 지 퉁퉁 부어올라서 욱신거리다 못해 이제 무감각해지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 고 있었다. 몇군데 혈도를 제압해서 통증만을 억제해놓은 상태에서 밤새껏 달 렸으니 몸에 이상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밤새껏 달려오면서 옷은 나뭇가지에 걸려 군데군데 찢어져서 걸레가 된 상태 였고, 또 이리저리 자빠져서는 흙투성이에다가 피부도 여기저기 찢겨서 아직 도 피가 흘러내리는 곳이 있을 정도였다. 밤에 산길을 달렸으니 이정도 댓가 야 별로 큰것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지금쯤 그놈들도 자신의 탈출 사실을 알아내고는 추격을 시작할테니 그것이 문제였다. 이때 저쪽에서 와이번이 한 마리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와이번이라면 거의 기사단에서 정찰, 이동용으로 쓰는 괴물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다크는 좀 더 으슥한 곳으로 몸을 끼워넣었다. 그런 다음 오른 손의 부러진 뼈조각들 을 대강 맞추기 시작했다. 지독한 통증을 참으며 손가락을 앞으로 당겼다가 어느정도 제위치를 확인해가며 다시 밀어넣는 동작... 부러진 뼛조각 두 개를 맞춘 후에는 지독한 통증으로 온 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든 준 비를 마친 후 다크는 이제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위에 떠도는 와이번을 잠시 바라보다가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30분 정도 지나서 깨어난 다크는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기조식을 해서 그런지 다리나 손에서 통증은 그렇게 심하게 전해오지 않았다. 원래가 운기조 식을 하면 치유력이 대단히 높아지기에 30분 정도 운기조식을 했다면 고수의 경우 다리 삔거 정도는 치유되는게 정상이었지만, 사실 고수가 다리를 삘리도 없었고, 또 다크의 내공으로는 고수 축에도 못들어가는게 현실이었다. 4시간 정도 죽으라고 달려가자 작은 오솔길이 나왔다. 이 길을 따라서 갈것인 가, 아니면 산길로 들어갈 것인가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도합 5명. 그들의 모양새를 잠시 바라보던 다크는 그 들이 아무래도 여행객 내지는 모험가 정도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도망쳐온 곳은 왕궁이었으니까 추격자들은 군인들일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었 다. "이보세요." 군데군데 찢어진 옷을 입은 소녀를 보고 그들은 잠시 놀란 것 같았지만 곧이 어 그녀가 뛰어온 방향을 향해 세명이 검을 뽑아들고 경계태세를 갖줬다. 이 런곳에 소녀가 이꼴로 뛰어왔다면 아마도 저쪽에서 몬스터라도 따라오는줄 알 았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그중에서 제법인자하게 생긴 30대 중반의 남자가 물어왔다. "혹시 물이나 먹을 거라도 가지고 계시면 조금 주실래요?" "여기 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소녀는 기갈이라도 들린 것 처럼 작은 휴대용 물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 신 후 말했다. "토지에르라고 들어 보셨어요? 마법사인데..." 소녀의 말에 그중 좀 갸냘퍼 보이는 인물이 말했다. "토지에르라면 여기 크라레스 왕국의 궁정마법사님을 말하는 건가요?" "예. 그 토지에르... 그 인면수심의 나쁜 놈이 우리 엄마를 겁탈하고 아빠를 죽이고... 거기다가.... 흑흑..." "설마..." "설마가 아니에요. 저쪽에서 토지에르의 부하들이 쫓아오고 있다구요. 아마 날 잡으면 가만두지 않을거에요." 흐느끼는 척 하면서 다크는 자신의 거짓말 솜씨에 도취되어가고 있는 중이었 고 그 여행객 일행은 설마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그래도 저꼴이 된 채 도망 치는 소녀를 보고는 마음에 갈피를 못잡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그중 한명이 말했다. "꼭 토지에르 경일리는 없겠지요. 아마도 토지에르 경을 사칭하고 못된짓을 하는 놈일지도..." "저를 도와주실 필요는 없어요. 상대는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구요. 괜히 도와 주시려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실수도... 어쨋든 물하고 식량이라도 좀 주실래 요? 친척집까지 도망치려면..." "친척집은 더 위험할겁니다. 다른곳으로 도망치세요. 어쨋든 여기 물하고 식 량은 좀 나눠드리죠.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정도만 해도 저에게 큰 도움을 주신겁니다. 그럼 안녕히..." 소녀는 물하고 식량을 등에 지고는 산길로 믿을 수 없을만큼 빠른 속도로 달 려가버렸다. 그걸 잠시 바라보던 검객 중의 한명이 중얼거렸다. "정말 빠르군... 그런데 저 말 진짜일까요?" "글쎄... 그건 모르지." "저 아이를 도와주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글쎄... 저 아이의 말이 진짜인지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데... 또 진짜라면 우리들만의 힘으로 저 아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상대는 궁정 마법사야. 그냥 혼자서 도망치게 내버려 두는게 낫지." 그중 젊은쪽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뭔가 한마디 더 하려다가 포기했다. 사 실 그들의 힘으로 궁정마법사를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 다. 그들은 1시간도 못되어 반대편에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3명의 험악한 인상 의 남자들에게 제지당했다. 그들은 제법 호화로운 복장을 하고있었고 허리에 는 모두들 롱소드나 바스타드 소드를 차고 있었는데 그중 앞에 서있던 덩치 좋은 인물이 그들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혹시 금발머리 소녀 한명을 못봤소? 키는 이만하고 아주 예쁘고, 삐쩍 말랐는데..." "그런 아이를 한명 보기는 했소. 그런데 무슨 일이시오?" 그중 좀 더 험악한 인상을 하고있는 얼굴에 흉터까지 가진 사내가 중간에 끼 어들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알 것 없고 어디로 갔소?" 그들의 하는 짓거리에 모두들 '이놈들이 토지에르 경의 이름을 사칭하고 못된 짓을 하는 놈들이군.'하고 단정을 지은 후 말했다. "저쪽길로 쭉 달려갔소." "만난지는 얼마나 되었소?" "한 3시간 정도 되었소. 그 아이를 본게 드미트리안 고개에서였으니까 말이 오." "고맙소. 가자!" 그들은 그 덩치에도 놀라운 속도로 달려가버렸다. "젠장... 더럽게 빠르군." 동료의 말에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아마 리더인 듯이 보이던 인물이 말했다. "진짜 그래듀에이트다. 그런데 왜 그들이 소녀를? 소녀가 한 말이 진짜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진짜 그 토지에르 경이?" "아마 그럴지도..." "원래 마법사란 것들이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이잖아. 아... 미안하군. 자네는 빼고..." 이들이 다시 크라레스 왕궁의 수도 크로돈으로 천천히 걸어 가면서 토지에르 라는 악당을 씹기 시작했다. 나쁜놈... 못된놈... 그 엄마도 모자라서 딸까 지? 하면서 말이다. 이때 하늘 위에 떠있던 와이번 한 마리가 그들을 보고는 아래로 쏜살같이 급하강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약간 긴장했지만 그 와이번의 위에 사람이 타고있는 걸 보고는 경계를 풀고 상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와이번은 길위에 착륙했고 그 위에 타고있던 인물이 재빨리 그들에게 뛰어오며 말했다. "자네들은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정식 갑주를 걸친 것으로 보아 기사단 소속의 기사인 모양이었다. "코린트 제국에서 오는 길입니다." "혹시 오는 길에 금발머리의 예쁘장한 소녀 한명 못봤나?" "그런데 왜 찾으십니까? 방금 전에도 그걸 묻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던 데..." "지금 크라레스 전역에는 그 아이를 잡으려고 야단이지. 현상금 100골드까지 걸려있단 말일세. 그 못된 년은 얼마전까지 토지에르 경의 하녀로 일하고 있 었는데... 국왕전하께서 토지에르 경에게 하사하신 물건을 들고 도망쳤다 이 거야. 사실 그렇게 비싼거는 아니지만... 전하께 하사받은 물건이 도난당했으 니 일이 크게 벌어진거지." 크라레스는 과거 제국으로 불렸지만 30년전 코린트와의 전쟁이후로 왕국으로 전락했다. 타국에서는 크라레스를 왕국으로 불렀고, 또 사신들도 국왕으로 불 렀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있던 크라레스의 신하들은 그들끼리 는 제국, 황제 폐하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쨋든 용기사(드래곤 나이 트)는 친절하게도 제법 자세하게 그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해줬다. 그 말에 여행객 일행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짜 토지 에르 경이 사고(?)를 쳤다면 자신의 잘못을 수습하기 위해 그래듀에이트까지 동원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하지만 뭔가 들고 도망쳤기에 추격하는데 그래듀 에이트가 동원되었다면 말이 되지. "지금부터 1시간쯤 전에 만났습니다. 알기에느 고개를 넘은 후에요. 우리들에 게 토지에르경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인간인지 한참 떠들어대면서 자신의 엄마 를 강간하고... 흠흠... 그러더니 우리들에게 물하고 식량을 조금 얻어서는 오른편 산속으로 도망쳤죠." 그 기사가 와이번을 타고 날아오르는 걸 보면서 그들은 또다시 쑤근거렸다. "그 아이가 못된 년이었군." "역시 도와주지 않기를 잘했어." 아무리 상대보다 3시간 정도 빨리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그냥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군견들을 앞세워 쫓아오는 무리들과 그래듀에이트가 총 15명이 나 동원되어 곳곳을 누비고 있는데 잡히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거기다가 정찰나간 드래곤 나이트로부터 다크의 수법이 드러나면서 이쪽은 매우 정중하 게 다크를 도둑으로 몰면서 수소문을 했고 그러다 보니 목격자들의 확실한 진 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죽자고 도망다니던 다크는 그날 저녘때쯤에는 군견들을 이끌고 있는 패거리들에게 포착당했고, 다크는 곧이어 군견의 목걸이를 잡고있는 병사들을 헤치며, 무시무시안 눈으로 쏘아보면서 최대한 살기를 억누른채 자신에게 다 가오는 드미트리 실바르를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드미트리 실바르는 성질 나 있는 상태에서 빙그레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네오 자 그것까지도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대로 소녀의 뺨을 향해 손바닥을 날렸다. 꽤 재빠른 손놀림이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성이 약간이나마 남 아있었기에 그 힘이 너무 세게 들어가지 않게 조절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 녀는 재빨리 머리를 뒤로 빼서 그 손을 피했다. 부하들과 동료들 앞에서 헛손 질까지 하게 된 드미트리 실바르는 이제 완전히 이성을 상실하고야 말았다. 짝! 짝! "끼약!" "곱게 잘 대해줬더니 도망을 쳐? 거기다가 날 깔보는 그 태도는 뭐야?" 퍽! 아직도 윗사람들에게 들볶인 화가 안풀렸는지 뺨을 맞고는 쓰러진채 일어서려 는 소녀의 배를 들고차버렸고, 소녀는 그에따라 한 2미터쯤 날아가더니 나무 에 처박혔다. 씨근거리면서 그쪽으로 다시 가려는 실바르를 뒤에서 말리는 사 람이 있었다. "그만두게. 더 이상 때리면 죽어버릴거야. 일단 임무는 완수했으니 돌아가자 구." 다크가 축 늘어진 채 장기간의 외출을 끝내고 돌아온 것은 그날 저녘무렵이었 다. 군데군데 찢어진 옷을 입고 기절해있는 소녀를 안고 들어오는 드미트리 실바르를 보면서 토지에르의 미소를 지으며 환영했다. "자네 보기보다 능력있군. 예상보다 빨리 잡아왔어." 하지만 다크를 받아들고 그녀의 몸을 살피던 토지에르의 눈꼬리가 점점 올라 가기 시작했다. "네녀석은 이 아이를 어떻게 한거냐?" "예?" "얼굴위의 멍... 입술 안은 완전히 다 터졌고... 갈비뼈가 두 개는 부러졌군. 그리고 손등에도 뼈가 두어개 부러졌고... 내장은 멀쩡한가? 참 내... 도대체 얼마나 분풀이를 한거지?" "저어.... 그게..." "나쁜녀석! 이런 아이를 때릴데가 어디있다고 이렇게 두들겨 패?" "저... 딱 세 대밖에..." "닥치고 나가." "옛!" 기사들이 허겁지겁 열받은 상전을 피해서 밖으로 나가는 걸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공작이 말했다. "이 아이로군." "예. 아쿠아 룰러 때문에 마법이 통하지가 않으니 공작 전하께서 잠시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공작은 축 늘어진 소녀에게 다가가서 마나를 그녀의 몸속에 집어넣고는 몸의 상태를 살펴나가기 시작했고, 곧이어 소녀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상이 있다." "예?" "내장이 터졌어. 빨리 치료마법을 사용하게." "예." 하지만 치료마법은 아쿠아 룰러에게 막혀버려 아무런 효과를 주지 못했고, 그 때문에 신관까지 불러와서 축복까지 해봤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가 죽는다면...?" "아마 그 피의 댓가를 우리가 지불해야만 할겁니다." "도대체 방법이 없나?" "아쿠아 룰러가 모든 마법을 다 무(無)로 돌리고 있습니다. 아마 엄청나게 강 력한 마법이라면 아쿠아 룰러의 방어막을 뚫을 수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강력한 치료마법은 없습니다. 공격마법이라면 몰라도..." "큰일이군..." 한 30분 정도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가 공작이 말했다. "아쿠아 룰러는 어느정도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예." "그러면 아쿠아 룰러에게 부탁해 보게. 자네가 선택한 주인을 살리는 일이니 제발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한번 해보겠습니다." 토지에르는 아쿠아 룰러에게 마나와 정신을 집중시키며 말했다. "아쿠아 룰러여. 그대가 이 주인을 살리고 싶다면 내 말에 응답을 하라. 우리 는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대가 그걸 방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죽었을때 그 핏값은 우리가 아닌 그대가 져야한다. 만약 핏값을 그대가 지불할 생각이 아니라면 내가 그대의 주인에게 사용할 치료마 법을 방해하지 말라. 알겠는가?" 그 말이 끝나고 나자 아무런 특징도 없는 푸른보석이 박힌 작은 금반지는 옅 은 마법의 오라(aura)를 한번 뿜더니 그 빛은 곧이어 사라졌다. 그 영롱했던 빛을 함께 본 공작이 빛이 사그라들고 나자 재빨리 말했다. "이제 치료마법을 써보게." "예." 그 다음에 사용한 치료마법은 그대로 소녀의 몸속으로 전달되었다. 부러졌던 뼈가 제자리를 찾아가서 붙었고 내상도 치료되었는지 창백하던 안색도 다시금 약간 발그리 해졌다. 그리고 광대뼈 부근에 나있던 시퍼런 멍자국들도 없어졌 고 손발의 군데군데 나있던 긁힌 자국들도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아으으응..." 잠에서 깨어나서는 한참 기지개를 펴던 소녀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두리 번 거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그녀의 옆에는 언제나와 같이 세린이 서 있었다. 세린의 몸 군데군데 멍이 좀 들어있다는게 다크가 떠나기 전과 달랐을 뿐... 모든게 이전과 똑같았다. 그 리고 몸에 잠옷이 입혀져 있는 것하고... 다크는 언제나 잠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거나, 아니면 내일 입을 새옷을 입고 그 대로 잠이 든다. 잠꼬대를 하지않고 두세시간 동안 거의 죽은 듯이 잠이 들기 에 옷은 하나도 구겨지지 않았다. 어쨋든 다크는 정신이 들자마자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고 또 만져봤다. 그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삐어서 퉁퉁 부어올라있던 오른발도 마찬가지 였다. "기술도 좋군. 벌써 치료를 다 한건가? 세린, 옷을... 으응? 이건 뭐야?" 다크는 세린의 손과 발에 나있는 멍자국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다음 그녀의 손을 살며시 만지면서 말했다. "나 때문에 맞은 거구나. 많이 아팠지?" "주인님... 엉엉..." 다크는 울음을 터뜨린 세린을 살며시 안아줬다. 몸에까지 상처가 있다면 아플 것이므로 아주살며시 안아줬다. "개자식들...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두들겨 패?" "주인님... 도망가지 마세요... 엉엉... 나 죽는줄 알았다구요... 엉엉..." 울고있는 세린을 토닥거리며 다크는 아예 탈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탈출하면 어떤 꼴이 되는지 이번에 확실히 느 꼈으니까... 그날부터 다크는 또다시 언제나와 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이제는 아예 바깥출 입은 하지않고 하루 두 번의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다 운기조식 에 집어넣는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다크가 운기조식을 할 때면 아쿠아 룰러는 고수들이 봤을때는 미약한 량이지 만 다크로서는 감히 꿈도 꾸기 어려울 정도의 내공을 전해줬었다. 다크는 그 걸 처음 아쿠아 룰러를 끼고 운기조식을 할 때 느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 쿠아 룰러로부터 들어오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기를 외부로부터 끌어들이고 있었다. 다크가 현재 하고있는 수련법은 현문의 정통심법인 태허무령심법. 거 기에다가 북명신공을 약간 혼합하여 대자연의 기를 끌어들여 급속도로 내공을 증진하는 중이었다. 이제 아예 탈출을 포기한 만큼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운기조식에 쏟고있었고 이런 식이라면 6개월 이내에 환골탈태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환골탈 태에 들어갈 정도의 내공만 쌓인다면... 그 다음은 북명신공을 본격적으로 사 용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금 힘을 되찾는다면 이놈의 나라를 묵사발을 내준 후 당당히 떠나주겠다. 그것이 다크의 새로운 계획이었다. "그녀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 다크가 잡혀온지 3일 후 토지에르에게 호출된 실바르는 상관의 질문에 재빨리 대답했다. "예. 아예 탈출은 포기했는지 방안에만 있었습니다. 세린의말로는 하루종일 침대 위에 앉아있는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운동을 좀 하는게 건강에 좋을텐데... 어쨋든 세린을 두들겨 팬건 잘 한 것 같아. 아마도 다음에 도망칠때는 세린을 함께 데리고 가든지 아니면 아 예 도망을 포기하겠지. 지금까지 조사해본 그녀의 성격은 그렇게 차가운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나는 내일부터 시작될 전쟁 때문에 자 리를 비워야 하니 철저히 감시하도록!" "옛.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좋아. 어쨋든 한동안은 시간이 없으니 오늘은 그녀를 좀 만나봐야겠군." "지금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러세나. 안내하게." "옛" 토지에르가 다크의 방에 들어갔을 때 다크는 침대 위에 책상다리(유식한 말로 가부좌)를 하고 앉아있었다. 사람이 들어서는데도 아는척도 안하고 눈을 지그 시 감고있자 토지에르는 헛기침을 했다. "험.. 험..." 하지만 아직도 반응이 없자 세린을 쳐다봤고 세린이 재빨리 다크의 옆에 가서 는 다크를 불렀다. 이때 다크가 자신이 이렇게 앉아있을 때 절대 몸을 건드리 지 말라고 한 말은 잊지 않고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자 다크는 천천히 눈을 떳고 눈앞에 웬수같은 마법사가 서있는게 보였다. "무슨 일이냐?" "허허허... 우선 손님에게 자리라도 권하는게 예의가 아닐까?" "아무데나 앉아." 차가운 다크의 대꾸에도 토지에르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화장대 앞에 있는 의 자를 가져다가 다크의 앞에 놓고는 앉았다. "실은 한가지 돌려받을게 있어서 왔지." "뭘?" "청기사를 돌려다오. 너가 가져간거 다 안다." "청기사? 처음들어보는데... 그런 사람 만난적도 없으니 돌아가라구. 성질 건 드리지 말고..." "청기사는 사람이 아니야. 자네가 훔쳐간 타이탄 이름이지. 도망치던 그날 타 이탄 한 대를 훔쳐간게 자네가 맞지? 그건 아주 비싼거니까 돌려줘." 잠시 생각하던 다크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다는 듯 외쳤다. "타이탄...? 맞아! 까맞게 잊고 있었군. 제길... 그때 그녀석을 불러냈다면 그렇게 두들겨 맞지는 않았을텐데..." "어떻게 청기사의 주인이 되었는지는 묻지 않을테니 돌려주게나. 그거 한 대 를 만드는데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지. 또 코린트에 대적하려면 그녀석은 꼭 필요해." "못주겠다면?" 상대의 심통어린 대답에도 토지에르는 미소를 잃지않고 말했다. "자네가 줄때까지 자네를 핍박하는 수밖에 없지. 아쿠아 룰러 때문에 마법은 안걸리지만 물리적인 힘은 통하니까 말이야. 어때, 죽도록 두들겨 맞고 싶나? 아니면 순순히 말로 할 때 돌려 주겠나?" 토지에르가 한 말은 꽤나 잔인한 것인데도 미소를 짓고 말하니 뭔가 느낌이 조금은 달랐다. 하지만 그 위협에 다크는 눈도 깜짝 안했다. "꽤 유치한 협박을 하는군. 겨우 그따위 고통이 겁이날 줄 아나? 나는 지금까 지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고 이 자리에 와있어. 지옥과 같은 고통들도 수도없 이 맛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도, 또 쓰디쓴 배신도... 그따위 고통들에 비하면 몽둥이 찜질 쯤이야 별것도 아니지. 좋아. 그렇게 원한다면 지금 그녀석을 불러내 볼까? 그런다음 내가 탄 청기사란 녀석을 박살내보라 구. 그런다음 나한테서 그걸 뺏아가는거야. 어때? 이 왕궁에서 타이탄들로 전 쟁을 벌이면 아주 재미있겠지?" 장난스레 말하는 다크의 말에 토지에르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법이 통 하지가 않는 상대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마법이라도 통한다면 시드미안 때처럼 정신마법을 걸어 의도대로 조종하면 되는데... 진짜 청기사를 불러내 서 타이탄 전쟁을 벌인다면 왕궁이 초토화될수도 있었다. 어쨋든 주인이 저렇 듯 뻑뻑하게 나온다면 무슨 수로 계약을 해제할 것인가? 계약을 해제하려면 주인이 계약 해지를 선언해야 하는데... 드디어 토지에르의 얼굴에서 가식적인 미소가 사라져버렸다. "으윽! 제길... 잘들어. 청기사 한 대에 들어간 돈은 순수하게 귀금속만 따져 서 황금 6톤(60만 골드)이 넘게 들어갔어. 그리고 엑스시온을 살리기 위해 들 어간 마력은 무려 9200만 기간트라... 마도왕국 알카사스에서 그정도 마력을 넣어달라고하면 황금 9.2톤은 줘야 한다구. 알겠나? 우리나라의 전 마법사들 이 마법진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겨우 엑스시온 안에 9200만 기간트라를 흘려 넣었어. 그런 다음 모두들 탈진해서 일주일동안 휴식을 취해야 했다구. 거기 들어간 인건비와 연구개발비... 그리고 그 드래.... 으윽! 또 딴것까지 합하 면 도저히 돈으로 환산할수조차 없는 물건인데 그걸 날로 삼키려고 들다 니..." 황금이 톤단위로 막 나오자 그 엄청난 액수에 약간 찔끔했지만 그래도 다크는 비웃듯이 말했다. "네녀석이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다크의 말에 약간 찔끔한 토지에르가 생각을 바꿔서 숨을 좀 돌린다음 부드러 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정 그렇게 나온다면 그걸 너가 가지는 대신 우리 일을 도와다오." "무슨 일?" "코린트에 복수하는 일. 코린트의 멸망을 도와준다면 청기사를 너에게 줄수도 있다." "흐음... 일개 국가를 멸망시키는 일을 도와주는 댓가치고는 너무 싸. 내 저 주를 풀어주든지 아니면 나를 내 고향에 돌려보내 준다면 도와주지." 토지에르는 잠시동안 깊이 생각한 다음 약간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내 솔직이 얘기하지. 자네의 저주를 풀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해. 사실 자네에 게 저주를 건 매개물을 공간이동을 하면서 공간의 저편에 버렸거든. 그걸 찾 아올 방법이 없으니 저주를 풀수도 없지." "뭐야? 이 미친..." "아... 그렇게 신경질 내지 말라구. 또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자네를 돌려보 내는 것. 자네가 다른 차원과 공간과 시간에서 왔다는 것은 팔시온 녀석들에 게 들었네. 어쩌면 오래전에 사라졌던 마법들 중에서 뒤져본다면 그걸 찾아낼 수도 있을거야. 물론 자네가 살았던 곳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섬기는 어둠의 마왕, 크로네티오의 힘이 미치지 않을테니 저주는 자연스럽게 풀리겠지. 어떤 가? 자네가 우리의 일에 협조한다면 나는 자네가 자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 "제길... 좋아. 선택의 여지가 없군. 어차피 지금 나한테는 필요도 없으니 청 기사를 돌려줄까?" 그 말에 토지에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우리들간의 약속의 증표로서 자네가 받아주게. 어차피 우리들에게도 청기사 는 지금 필요없어. 만약 몇 년 내로 청기사를 써야만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때는 코린트에게 우리들이 반대로 멸망당할 때일 테니까... 또 자네도 나중 에 힘을 되찾는다면 타이탄이 필요할거야. 방금 전에도 뭔가 수련을 하는 것 같던데... 어쨋든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타이탄이 1대 정도는 있어야 할테 니까..." 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 * * * 다음날 토지에르는 공작 전하를 모시고 스바스 근위기사단의 핵심멤버들과 함 께 이제 전쟁이 벌어지게 될 스바시에 왕국과의 국경 부근으로 워프했다. 스바시에 왕국은 크라레스 제국과 말토리오 산맥을 경계선으로 하고 있었기에 지형상의 잇점이 크게 작용하여 별로 전쟁에 대한 걱정을 안하고 살았던 곳이 다. 하지만 크라레스 왕국이 거의 대부분의 비옥한 영토를 코린트에게 빼앗기 면서 그 주 영토를 말토리오 산맥 안으로 잡고있는 지금 그 지형적 잇점은 없 어져버린지 오래였다. 또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크라레스 왕국은 감히 코 린트로 밀고 들어가지는 못하니까 스바시에 왕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게 문제였다. 하지만 한가지 스바시에 왕국의 궁정을 안심시키고 있던 점은 크라레스는 거 의 몰락하여 이제 겨우 타이탄 28대에다가 영토가 거의 산맥속에 위치한 관계 로 척박한 토지덕분에 몇가지 광산자원을 제외한다면 더 이상 타이탄을 생산 할 여력이 없었다. 거기에다가 복수를 염려한 코린트가 과거 거의 30년동안 크라레스가 더 이상 타이탄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해왔고, 무거운 조 공(租貢)을 부과하여 크라레스가 더 이상 일어날 가능성을 없애왔다. 그렇기에 스바시에 왕국은 마법사의 부족으로 어쩌다가 한 대씩 알카사스에서 수입해오는 타이탄들 만으로도 충분히 크라레스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거의 없었지만 127명의 그래듀에이트와 57대의 타이탄을 보 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바다를 이용한 무역과 풍요로운 넓은 대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크라레스와의 격차를 벌여줄테니 나중에는 역으로 코린트와 연합하든지, 아니면 단독으로라도 그 산적소굴같은 곳을 박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 토지에르는 공작 전하를 모시고 스바스 근위기사단의 핵심멤버들 과 함께 이제 전쟁이 벌어지게 될 스바시에 왕국과의 국경 부근으로 워프했 다. 스바시에 왕국은 크라레스 제국과 말토리오 산맥을 경계선으로 하고 있었기에 지형상의 잇점이 크게 작용하여 별로 전쟁에 대한 걱정을 안하고 살았던 곳이 다. 하지만 크라레스 왕국이 거의 대부분의 비옥한 영토를 코린트에게 빼앗기 면서 그 주 영토를 말토리오 산맥 안으로 잡고있는 지금 그 지형적 잇점은 없 어져버린지 오래였다. 또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크라레스 왕국은 감히 코 린트로 밀고 들어가지는 못하니까 스바시에 왕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게 문제였다. 하지만 한가지 스바시에 왕국의 궁정을 안심시키고 있던 점은 크라레스는 거 의 몰락하여 이제 겨우 타이탄 28대에다가 영토가 거의 산맥속에 위치한 관계 로 척박한 토지덕분에 몇가지 광산자원을 제외한다면 더 이상 타이탄을 생산 할 여력이 없었다. 거기에다가 복수를 염려한 코린트가 과거 거의 30년동안 크라레스가 더 이상 타이탄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해왔고, 무거운 조 공(租貢)을 부과하여 크라레스가 더 이상 일어날 가능성을 없애왔다. 그렇기에 스바시에 왕국은 마법사의 부족으로 어쩌다가 한 대씩 알카사스에서 수입해오는 타이탄들 만으로도 충분히 크라레스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거의 없었지만 127명의 그래듀에이트와 57대의 타이탄을 보 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바다를 이용한 무역과 풍요로운 넓은 대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크라레스와의 격차를 벌여줄테니 나중에는 역으로 코린트와 연합하든지, 아니면 단독으로라도 그 산적소굴같은 곳을 박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시바시에 왕국과의 국경선은 말토리오 산맥 안으로 조금 들어온 곳이었기에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상대가 위에서 아래로 밀고 내려오게 되므로 그 지형상 의 불리함을 없애기 위해 스바시에의 정예군은 주요 도로와 산위에 대대(1백 명)또는 연대(1천명)규모의 주둔이 가능한 작은 요새들을 구축하고 있었고 대 체적으로 주력부대는 조금 뒤쪽에 포진하고 있었다. "저기가 스바시에 왕국이군." 지평선 저쪽까지 펼쳐져있는 넓은 대지를 산꼭대기에서 새벽의 여명을 이용해 바라보며 공작이 말하자 그 옆에서 토지에르가 거들었다. "예, 전하. 전하께서는 이쪽으로는 안와보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제법 쓸만한 나라지요. 저정도 국력에 마법사가 별로 없다는 것은 신의 도움이옵니다." "좋아. 크로이델 장군." 그러자 그들의 뒤에 서있던 50세가 넘어보이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인물이 답했다. "옛!" "이번 작전을 그대가 짰으니 모든 군의 지휘권은 그대에게 주겠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지도를 가져와라." 그러자 뒤쪽에 서있던 장교들 중의 한명이 재빨리 큰 종이뭉치를 꺼내어 그걸 활짝 편 다음 그들의 앞에 대령했다. 그걸 보면서 공작은 지휘봉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의 작전대로 주 전투는 라딘 대로인 만큼 라딘 요새의 재빠른 점령에 있 다. 라딘 요새 외에는 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 없는만큼 그 외의 요새들 점령은 보병들만으로 해결하고, 라딘 요새는 여단급(5천명)이 주둔하는 대요 새인 만큼 타이탄으로 공격한다. 적은 우리가 공격을 시작하면 아마 곧이어 타이탄을 투입해 올 것이다. 그때 카프록시아를 총출동시켜 그들과 함께 타이 탄 전투를 벌인다. 이때 라딘 요새를 공격하던 타이탄도 가세해야만 할테니 요새전투는 조금 벅찬 싸움이 될지도... 어쨋든 오늘 라딘 요새 공격은 적 타 이탄을 유인 격멸하기 위한 미끼다. 적은 타이탄 부대가 괴멸당한 걸 알면 후 방에 남은 기사단들과 합류하기 위해 후퇴할 것이다. 그들의 위치를 빨리 포 착, 섬멸해야만 한다. 오늘 전투에서 적의 전방부대를 완전히 섬멸하지 못한 다면 최악의 경우 앞뒤로 적을 상대해야만 한다. 제군들의 분투를 바란다." "옛!" "크로이델 장군." "옛" "그대가 해야할 일은 기사단에 적절한 지원을 요청하면서 앞에서 타이탄이 쓸 고지나가면 효과적으로 뒷처리를 해주게." "옛!" "타 요새들에는 타이탄을 배치하지는 못하지만 남은 그래듀에이트나 마법사는 빌려줄 수 있다. 만약 상대 요새를 점령하기 힘들면 지체없이 기사단에 지원 을 요청하라. 겨우 스바시에를 점령하면서 정예 병사들을 잃을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최악의 난전이 예상되는 곳에는 용병대를 투입하도록." "옛!" "나는 카프록시아를 타고 싸워야하니까 병력지휘는 크로이델 장군이, 마법사 들을 이용한 후방지원은 토지에르 자네가 맡아주게. 자... 시작하자!" "옛!" "자자.. 야, 미카엘. 이자식 닥치고 작전지위나 듣고있어!" 이제 더 이상 소란스러운 인물이 없어지자 날카로운 표정의 연대장이 대대장 들을 향해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연대가 공격할 곳은 라딘 요새다. 우리가 돌격해 들어가서 통로를 개 척하고 뒤에서 정규군 1개 사단이 따라올테니 무슨일이 있어도 진입통로를 개 척해야만 해." 그러자 백부장들의 야유소리가 들려왔다. "우... 천부장은 라딘요새가 어떤곳인지 알고나 그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 안 에 여단급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구요. 거기에다가 대단히 강한 외벽, 또 쇠 뇌들도 많이 갖춰져있는데 그리 돌진해 들어가는 건 죽으려고..." "이봐... 닥치고 내 설명이나 들엇! 우리가 돌격해 들어가기 전에 콜렌 기사 단의 타이탄 9대가 먼저 돌격해서 요새를 반쯤 박살낼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 하지만 중요한건 상대 타이탄이 나타나면 그들은 그쪽으로 이동해야 하 니까 그 뒤부터는 순전히 우리 능력으로 돌파해 들어가야 한다. 알겠나?" "그러면 적 기사단의 출동이 늦어지면 우리는 거의 싸울 필요도 없겠군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놈들이 타이탄들이 외벽을 부수기도 전에 올수도 있다. 그때는 재빨리 후퇴하여 타이탄들끼리의 전투가 끝날때까 지 기다린다." "예? 그대로 돌격이 아니고요?" "상부의 지시는 그렇다. 이번 전투는 최전방의 적 타이탄의 격멸이지 요새따 위 점령이 아니다. 그걸 잊지 말도록. 또 타이탄들끼리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면 이런 요새쯤이야 타이탄으로 금방 박살낼 수 있다." 그 말에 팔시온이 대꾸했다. "그렇다면 상부에서는 이번 타이탄 전투에 승리할 확신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다.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병력은크라레스 전력의 90%에 이른다. 수도 를 방어해야할 근위기사단까지 총 출동했다는 말이지. 그러니 타이탄 전투에 서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대들은 야음(夜陰)을 이용해서 부하들을 이 끌고 요새에서 1킬로 전방까지 돌진해 들어가 거기에서 대기하다가 타이탄들 이 통로를 개척하면 그때 돌격을 시작한다. 질문은?" "부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하면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연대에서 치료가 불가능할정도로 환자가 많으면 뒤로 돌려야지. 후방 의 보병사단쪽으로 돌려라. 사제들과 의사들로 이루어진 구호반이 정규사단과 함께 있을 것이다. 또?" 확실히 대규모 정규전은 모두들 처음이라서 준비는 확실하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서 연대장은 마지막 말을 뱉았다. "질문없으면 이동을 시작해!" 이곳 전쟁에 투입한 크라레스의 타이탄은 19대. 카프록시아 10대와 푸치니 9 대였다. 푸치니는 출력이 0.7밖에 안되는 만큼 요새공격이나 보병지원을 할 수밖에 없었고 대 타이탄 전쟁은 근위기사단의 카프록시아가 전담하기로 했 다. 그 외에 콜렌 기사단이 보유중이었던 미가엘 4대와 루시퍼 5대는 일부러 전시용으로 코린트 근방에 배치하여 그들을 경계하는 척 했다. 사실 모든 타 이탄을 이곳 전쟁터로 돌린다면 코린트가 여유부대가 있지않을까 의심할 가능 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쨋든 막대한 뇌물을 코린트의 상층부에 헌납하고 이번 침략전쟁을 묵인해줄 것을 허가받았기에 이들은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또 이번 전쟁이 끝난 후에 는 노획물들 중의 상당량을 또다시 뇌물로 헌납해야 코린트가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놈들을 응징하겠답시고 참전하는 걸 막을 수 있겠지만 그건 전쟁 이 끝난 후의 일이고 우선은 묵인해주겠다는 대답을 들은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할 지경이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전방에 포진하고있는 팔시온 일행은 그들의 옆으로 9대의 타이탄들이 한손의 방패로 몸을 가리며 또 한손에는 철퇴나 도끼를 휘두르며 돌진해 들어가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그날 새벽에 도착한 공작 일행은 간단한 작전회의을 끝내고 근위 기사단에 소 속된 그래듀에이트 전원이 자신들의 카프록시아를 불러내서 탑승하고 있을 때 이미 콜렌 기사단의 푸치니들은 적의 요새를 향해 오른손에는 거대한 철퇴를 들고 왼손에는 넓직한 방패로 상대의 화살이나 대 타이탄용 쇠뇌를 막으면서 돌진해 들어갔던 것이다. 화살이야 막고 자시고 할것도 없었지만 거대한 기계 장치로 4미터 길이의 거대한 창을 날리는 대 타이탄용 쇠뇌의 위력은 엄청나 기에 잘 못막으면 타이탄에 큰 피해를 입을수도 있었다. 요새에 도착한 푸치니들은 각자가 가진 거대한 철퇴나 도끼로 요새의 벽을 허 물고 문을 박살냈다. 그리고 달려드는 인간들을 철퇴나 도끼로 찍어 가루로 만들었다. 이때쯤 되어 크로이델 장군이 지휘하는 국경에 집중된 크라레스의 3개사단 병력의 보병들이 밀고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들과 함께 카프록시아 10 대가 함께 이동했다. 어쨋든 결전병기(決戰兵器)는 타이탄이었지만 전 영토를 타이탄으로 막을수는 없었기에 보병은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카프록시아 들은 보병들을 호위하며 주 공격로인 라딘 요새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던 것 이다. 팔시온은 거대한 덩치의 타이탄들이 거대한 철퇴나 도끼를 휘두르며 그 굳건 한 라딘 요새의 외벽을 허물고있는 걸 보면서 돌격명령을 내린 후 자신도 부 하들을 따라 달려가다가 저쪽에서 피어오르는 먼지를 보면서 그대로 굳어버리 고 말았다. 그 엄청난 먼지를 피우는 것들의 정체는 상대의 거대한 기병사단 같은게 아니라 타이탄들이었다. 요 근래들어 시드미안과 여행을 시작하면서 겨우 타이탄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었던 팔시온으로서는 거의 30대의 타 이탄들이 이쪽으로 돌진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야... 엄청 많은데? 이거 후퇴해야 하는거 아냐?" 옆에 있던 미디아가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을 정도로 거의 시속 100킬 로에 가까운 속도로 돌진해 들어오는 적 타이탄들은 엄청난 위압감을 그들에 게 심어주고 있었다. 이때 그들의 뒤쪽에서 10대의 푸르고 붉은색을 얼룩덜룩 칠해놓은 거의 어깨 까지 높이가 5미터는 넘어보이는 거대한 타이탄들이 돌진해오는 상대 타이탄 들을 향해 달려갔고 요새를 허물고있던 9대의 타이탄들도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이시대가 낳은 최강의 마법병기 타이탄은 서로 엉 켜 패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팔시온은 옆에서 멍하니 격전장을 바라보고있는 미카엘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 고 눈길은 격전장에 두면서 말했다. "정말 박진감 넘치는군. 하지만 갑옷입은 보병들이 싸우는거랑 별로 다를건 없는데?" "그러게 말이야. 저런... 나쁜시키. 옆에있는 타이탄과 싸우는 적의 등을 찌 르다니... 비겁한 놈." "원래 싸움이란게 다 그렇지. 이야... 그건 그렇고 저 타이탄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타이탄을 타고도 저렇게 화려한 검술을 구사할 수 있다니... 봐. 수준차이 나잖아. 근위기사단이라는 거 뻘겉고 푸른 타이탄 정말 엄청나 군. 대단한 실력의 그래듀에이트들이 타고있는 모양이야." 그들의 시야를 잡고있는 크라레스의 근위타이탄은 상대의 검을 방패로 밀어냈 고 무게에서 밀리는 상대가 약간 비틀하는 사이 재빨리 왼쪽으로 도약하며 한 칼에 상대 타이탄의 몸을 두토막 내버렸다. "이야... 멋지군. 저놈의 허리는 몇도까지 돌아가는거야? 방금 봤어? 거의 180도 넘게 돌아갔잖아. 그러면서 옆에서 동료하고 싸우고있던 타이탄까지 한 방에 둘을..." "아무리 그래도 비겁한 짓이야... 등을 친거잖아." "정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실력은 엄청나군. 벌써 8대째잖아. 정말 실력차이 나는군. 아예 상대가 안되는데?" 이들의 태도를 보고있던 미디아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쯧쯧... 야! 용병으로 고용되었으면 돈값을 해야할거 아냐? 그래도 모두들 실력을 계산해서 백부장으로 고용되었으면 부하들을 이끌고 죽자고 싸워야 지." 그 말에 팔시온이 시선을 미디아에게로 돌리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누구하고 죽자고 싸워?" "저기...." 미디아의 말은 채 끝나지 못했다. 믿었던 기사단의 타이탄들이 허무하게 묵사 발이 나버리자 요새에 남은 패잔병들은 완전히 전의를 잃고 항복하기 시작했 던 것이다. "제길... 이번 전쟁은 너무 싱겁잖아. 나는 아직 칼한번 못 휘둘러봤는데..." "싱거운게 아냐. 전쟁도 이정도면 할만 한거지." 마지막 상대의 타이탄이 그 멋진 실력을 보이던 근위타이탄의 검놀림에 쓰러 지는 걸 보면서 팔시온이 말했다. "자... 이제 눈요기 할것도 없으니까 일을 시작해 볼까? 야! 이녀석들아. 포 로들은 저쪽에 모아. 그리고 혹시 숨어있는 놈이나 죽은척 하고있는 놈 있는 지 찾아내. 미카엘 너는 부하들 데리고 저쪽으로 가서 나머지 잔당들을 소탕 해. 그리고 미디아와 가스톤은 요새 안을 맡아. 우리 용병대가 정규군 놈들에 게 뒤지지 않다는 걸 보여주자구. 빨리 움직엿!" 지미와 라빈도 십부장으로서자신에게 배당된 용병들을 데리고 신이나서 처음 겪는 일방적인 완승을 거두고 있는 전쟁터를 누비고 있는 걸 보면서 미디아가 팔시온에게 말했다. "저녀석들 신났군." "그럼. 승자쪽에서 하는 전쟁은 언제나 신나지. 패자쪽은 암울하겠지만..." "그건 그렇고 다크는 어떻게 지낼까?" "뭐... 잘 지내겠지. 이번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좀 만나게 해달라고 토지에 르 영감에게 부탁해볼까?" 이때 그들의 뒤쪽에서 으르렁거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네녀석들... 부하들은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백부장이란 놈들은 지금 여기서 뭐하는거얏! 빨리 안움직이면 껍질을 벗겨줄테닷!" "히익!" 어느새 다가와서 으름짱을 놓는 험악한 인상의 천부장을 보면서 팔시온과 미 디아는 요새를 향해 달려갔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사옵니다. 공작 전하." "무슨 일이냐?" "첩자가 보내온 영상이 있는데, 보시겠사옵니까?" 상대가 고개를 약간 끄덕거리자 그는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그와 함께 타이 탄들이 대규모전쟁을 벌이는 자그마한 영상이 나타났다. "이번 트루비아와 스바시에의 전쟁 장면이옵니다. 트루비아가 꽤 많은 뇌물을 넣어 본국이 중립을 지켜준다는 약속을 받아내고는 시작한 전쟁이라서 그들이 이길줄은 알았지만... 이건 너무..." 그러자 그 젊은이는 영상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저건 카프록시아군." "예, 공작 전하." "아무리 시멘텍이 28대라고 해도 카프록시아로 무장한 근위기사단의 적이 될 수는 없지. 크라레스가 지금은 약소국이라고 하지만 과거 대제국의 칭호를 받 았던 나라다. 그 대제국 시절 근위기사단의 힘이 고스란히 남아있기에 크라레 스의 경우 콜렌 기사단의 힘은 형편없지만 근위기사단만은 세계에서도 손까락 에 꼽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그런 상대의 힘을 모르고 숫자만을 의식해서 자 신들이 가진 모든 기사단을 한곳에 모아두지않고 둘로 분리시켜둔게 최고의 잘못이야. 어차피 그런 배치였다면 박살나는게 정석이지. 그래, 지금 크라레 스에서 스바시에 침공에 동원한 병력은?" "예. 4개 보병사단, 1개 용병여단, 2개 기병여단, 콜렌 기사단의 타이탄 9대 를 제외한 총력, 마지막으로 근위기사단이옵니다." "본국과의 국경선에 배치한 병력은?" "예. 1개 보병사단과 콜렌기사단의 타이탄 9대이옵니다. 지금 본국과의 국경 선에 배치된 크라레스의 병력은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간 것으로 아옵니다. 하 지만 겨우 그 병력으로 비상경계를 해봐야..." "흐음... 좋아. 어쨌거나 지금 크라레스는 영토 확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군. 어쨋든 혹시나 모르니까 첩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놈들 의 부대가 있는지 그걸 세밀히 살피라고 이르라." "예. 공작 전하." "그리고 저기서 카프록시아를 타고 싸우는 녀석은 누구인가? 상당한 실력인 데..." 그러자 그는 젊은이가 가리킨 타이탄을 보면서 말했다. "그 카프록시아의 방패에 그려진 문장을 보면,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라는 인 물이옵니다. 현재 스바스 근위기사단장이며 지금 나이 43세. 크라레스 최고의 검객이옵니다." "흐음... 대단해. 방어와 공격이 매우 매끄러워. 아직 젊은데도 저정도라면 더욱 열심히 노력한다면 뭔가 이룩해낼지도 모르겠군. 저런 소국에서 가지고 있을만한 인물이 아닌데... 하지만 근위기사단 단장이라면 포섭하기는 힘들겠 군." "아마 그럴 것이옵니다, 공작 전하. 뛰어난 실력 덕분에 크라레스 국왕의 총 애를 받는 무사라고 들었사옵니다." "쩝... 아쉽군. 어쨋건 이번 전쟁을 통해 크라레스가 가진 힘을 전부 다 파악 해내도록!" "예. 공작 전하!" * * * "예? 이걸 가져다 주라구요?" 실바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상관인 40세는 되어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무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가르킨 방향에는 여자용 여행복들과 굽이 낮은 구두 등 도망치기 좋은 옷가지들과 마법장갑, 거기에다 가 여성용 검인 샤벨까지 1자루 있으니 이건 이거입고 빨리 도망치라는 말과 같지 않나? "황제 폐하의 명이시네." "아무리 폐하의 명이시라고 하지만... 그때 도망쳤을 때 다시 잡아온다고 얼 마나 고생했는줄 아십니까? 무려 15명의 그래듀에이트가 동원되었고 용기사 10명에, 수도경비사단까지 동원되어서 근처를 이잡듯이 뒤져서 겨우 잡았다구 요. 그것도 그녀의 몸냄새가 배인 옷가지가 없었다면 잡지도 못했을겁니다. 수소문해서 행인들이 이리갔다. 해서 가보니 처음은 맞았지만 두 번째는 틀리 고, 세 번째도 틀리더니 네 번째는 맞고... 어찌나 기막히게 도망다니는지 군 견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죠. 그런데 도망칠 장비를 충실히 갖춰서 준다면... 저는 또다시 그런일을 한번 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말에 상대는 씁슬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 요녀(妖女)가 무슨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폐하께서는 그녀에게 남 작의 작위를 내리셨다. 그녀가 작위가 높다 해도 사실상 힘은 없지만... 어쨋 든 그녀는 이제 포로가 아니야. 남작이라고 해봐야 그래듀에이트보다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폐하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게나. 무슨 일 을 당할지 모르니까... 또 공작 전하나 토지에르 경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지 않는가? 그녀에 관한 신상은 비밀이라서 도대체 어떤 배경이나,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수없지만... 윗사람들이 하는 일이니 자네도 잘 처 신하리라 믿네." "남작의 칭호를 주셨다구요?" "그렇네. 이제부터는 다크 크라이드 남작이지. 남작따위 작위야 별것도 아니 지만... 그래도 폐하의 총애를 받고있다는 것은 엄청난거야. 또 세린도 그녀 에게 하사된 물품중에 하나니까 그렇게 알고 있게. 앞으로 자네가 할 일은 그 녀의 감시가 아니라 보호야. 아마도 그녀의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자네 의 가죽을 홀랑 벗기려는 사람이 꽤 될테니까 조심하게나. 알겠나?" 상관의 말에 실바르는 힘없이 대답했다. "예." 어쨋든 실바르로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신경질 난김 에 그렇게 신나게 두들겨 팼었는데... 쩝... 여자가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나의 미래는 괜찮을까? 그 요녀가 폐하의 침실에서 폐 하의 품에 안겨서는 간드러지는 비음을 섞어 '폐하아~~ 실바르란 나쁜 녀석의 목을 부탁해용~'할지 누가 아느냔 말이다. 예로부터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이고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성이 라는 말이 있듯 그 싹수가 보이기 시작하는 미녀를 의식하며 실바르가 지어놓 은 죄가 있으니 전전긍긍하는 동안 스바시에 왕국과 크라레스 왕국과의 첫 번 째 격전은 크라레스의 압승으로 끝이나버렸다. 파괴된 상대 타이탄의 머리를 열고는 탈진해서 기절해버린 기사들을 체포하 고, 파괴된 타이탄들을 본국으로 옮기는 동안 크라레스에서 투입한 4만 5천명 의 보병과 1만의 기병들은 콜렌 기사단의 도움을 받으며 기사단의 전멸로 후 퇴중인 스바시에의 4만명의 보병들을 포위하여 괴멸시켜버렸다. 사실 말이 괴 멸이지 2시간도 싸우지 않고 모두들 항복해버렸으니 싱거운 싸움이었지만 어 쨋든 이로서 스바시에 왕국의 최전선을 지키던 병력은 깨끗하게 청소된 셈이 었다. "이번 전투는 본국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적은 대단히 강력 한 힘을 가진 기사단들을 보유중이니만큼 방심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노획한 물자의 일부를 코린트에 보내면서 코린트를 좀 더 다독거릴 필요가 있습니다. 또 그러면서 최전방에 배치했던 미가엘 4대를 왕궁에 배치하는게 좋겠습니 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공작의 회의적인 물음에 한 장교가 자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예. 이번 1차전에서 9대의 타이탄을 코린트 국경에 배치함으로서 우리는 90% 의 힘을 스바시에로 돌렸다는 걸 그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도 약간은 못믿는다는 것도 함께 보여줬죠. 하지만 일단 이번 기습전이 끝난 후에도 지금과 같은 병력배치를 한다면 코린트가 의심할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배치로는 왕궁이 텅텅 빈 상태가 되니까 말이지요. 스바시에 가 몇대의 타이탄을 이용해 왕궁을 기습한다면 손도못쓰고 당해야 하는 배치 입니다. 그러니 코린트에게 뇌물을 주면서 전방의 병력을 왕궁으로 뺀다면 그 들은, 우리가 왕궁 방어를 위해 타이탄을 빼야 하기에 그들에게 잘보이기 위 해 추가로 더욱 많은 뇌물을 제공하는줄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스바시 에가 진짜 기습을 가해온다면 우리는 유령기사단을 투입할 수밖에 없고, 그러 면 끝장입니다. 코린트의 첩자가 쫙 깔려있을 테니까요." "좋아. 그 계획을 곧장 시작하라." "예, 전하." "그건 그렇고, 포로들은 어떻게 처리했나?" "임시 수용소를 건설하고 모두들 가뒀습니다. 그래듀에이트와 마법사들은 따 로 수감중입니다. 곧이어 있을 2차전에서 승리하고 국왕을 잡은 후 설득하면 그들은 우리의 동지로서 써먹을 수 있을겁니다. 정 안된다면 정신계 마법을 좀 쓰면 되겠지요." 지휘관들이 그날의 전쟁을 끝내고 작전회의를 밤늦게 하는 동안 장병들은 적 국에서의 기념할만한 하룻밤을 조용히 보내고 있었다. "이제 일이 끝나셨습니까?" 피곤한 안색으로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로니에 사제를 보면서 팔시온이 말했 다. "간단하게 전투가 끝나는 것 같았지만 예상외로 부상자들은 많더군요. 사실 거의가 적국 병사들이었지만..." "그럼 적국 병사들도 치료하셨단 말입니까?" "당연히 해야지요. 일부 신들을 모시는 신관들은 적군의 병사들을 치료하지 않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만약 상대가 치료를 받을가치가 없다 면 샤이하드께서 저에게 치료의 권능을 나눠주지 않으시겠지요. 제가 치료의 주문을 외웠을 때 상대가 치료된다면 저는 치료를 해야만 한답니다. 거대한 신의 뜻을 한낫 인간이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전에 만났던 신관과는 완전히 틀린 말씀을 하시는군요. 대지의 여신을 섬기 는 사제들의 경우 누구나 치료를 하지만 전쟁의 신전에서 일하는 사제들은 적 들은 절대로 치료를 하지 않거든요. 그들의 말로는 적들을 치료할 필요가 있 느냐는 것이었지요." 그 말에 로니에 사제는 피곤한 듯한 얼굴에 씁쓰레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 다. "샤이하드께서는 다른 어떤 신들 보다도 배타적인 신이시죠. 다른 신을 받드 는 자들이라든지, 또는 악한 자들에게는 치료의 권능을 베풀지 않으십니다. 제가 아무리 상대를 살리려고 해도 치료의 주문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렇기에 우리들 샤이하드를 받드는 신도들은 상대가 아무리 악한 자라고 해 도 먼저 치료의 주문을 외웁니다. 그 다음은 샤이하드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요. 그를 낫게 하시든지 아니면 상태가 더욱 중하게 하시든 그건 샤이하드의 뜻입니다.우리는 샤이하드께 거저받은 재능을 거저 베풀 뿐... 그 이상의 선 택은 모두 샤이하드께 맏겨야만 하지요." "매우 실리적인 말씀이군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는... 하지만 살릴 수 있는데도 손을 쓰지않는 자들보다는 사제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행할뿐... 다른 의견은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로니에 사제는 무릎을 꿇고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로니에 사제는 매일 두시간씩 기도를 했고, 일주일에 한번은 4시간씩 기도를 했다. 팔시온 일행은 그가 아무리 바빠도 그걸 빼먹는 걸 보지 못했다. 하루는 그게 궁금해서 팔시온이 로니에 사제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사제님께서는 꽤나 능력이 계신데, 지금 바빠 죽겠는데 꼭 그렇게 기도를 해서 시간을 까먹어야 만 하느냐고... 그러자 로니에 사제는 '인간의 일로 신과 약속된 시간을 뺄수 는 없지요. 그것은 샤이하드보다 인간의 일을 더 사랑한다는 말... 그런자에 게 샤이하드께서는 은총을 베푸시지 않습니다. 무슨일이 있어도 샤이하드께 약속드린 일은 해야만 하고, 또 그걸 지켜나가야만 한답니다.' 하는 말로 답 했었다. 팔시온이 밖으로 나오는 걸 보면서 미디아가 물었다. "로니에 사제님은?" "기도 중이셔." "아... 오늘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어쨋든 우리들 중에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사실 다칠 끈덕지도 없었지. 여기 기사단 엄청 세더군. 이쪽은 19대밖에 안 되는데 저쪽에서 30대 정도가 달려오는거 보고 끝장이구나 생각했었는데... 아주 간단하게 상대방을 박살내버렸으니까 말이야. 딴건 모르겠지만 그 붉은 색과 푸른색을 함께 칠해놓은 그 덩치큰 타이탄에 타고있는 기사들은 정말 1 류였어." "들리는 소문으로는 근위기사단이래. 카프록시아라든가? 크라레스의 수호신이 라고 하더군." "카프록시아... 근사한 이름이야. 어쨋든 일은 다 끝났는데 패거리를 불러들 여서 한잔 해야지. 내일부터는 적의 수도로 진격해 들어가니까 한 며칠동안은 전쟁이 없을거라고 뱁새 눈 영감이 그러더군." "오늘 해본 전쟁은 여태껏 해본 어떤 전쟁보다도 산뜻하게 끝나는 것 같아. 사실 내가 겪어본 전쟁들은 변방에서 산적토벌이나 몬스터 토벌이 다였는데 말이야. 정말 오늘 싸우는 거 보면서 정규전이 얼마나 틀리는지 알겠더라. 4 만의 적군이면 그거 다 물리치는데 몇날 며칠을 피터지게 싸워야 할텐데... 순식간에 끝나버리잖아. 타이탄이 들어가서 휘젓는 가운데 마법사들이 마법 몇방 날리니까 깨끗이 손들더라 이거지."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얘들 모르러 가자. 술은 이미 내가 구해놨어." "어? 주인님, 안색이 왜그러세요? 몸이 안좋으세요?" 세린의 걱정스런 물음에도 주인은 창백한 안색으로 묵묵부답이니 속이 더 터 질 수밖에... "왜그러세요? 몸이 편찮으시면 의사를 불러올까요? 어디가 아프세요?" 하지만 악착스럽게 입을 꽉 다물고있는 주인을 바라보다 못한 세린은 의사를 불러왔고 다크는 의사의 진찰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진찰을 받는동안 다크의 지시로 문밖에서 기다리게 된 세린은 주인의 안위를 초조하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돌보고 있는데도 큰 병이 걸렸다면 토지 에르라는 짐승의 지시하에 또다시 몽둥이찜질을.... 의사가 허탈한 표정으로 나오는 걸 보고 세린은 더욱 궁금증이 치밀어올라 결 과를 재빨리 물어볼 수밖에 없었고 그 옆에서 실바르도 자신의 목이 걸려있기 에 무심할 수 없었다. "주인님은 어떠세요? 큰 병이 걸리신거는 아니에요?" "에잉... 별거 아니다. 겨우 초경(初經)이 시작된거 가지고... 그 난리를 떨 다니... 도대체 저 아이의 어머니는 누구길래 그런 간단한것도 교육을 안시켰 단 말이야? 그리고 약간의 생리통이 있는 모양인데 약은 나중에 와서 받아다 가 먹여라." 띵한 표정으로 바뀐 세린의 물음. "예? 생리...통이라구요?" "생긴걸 보니 영양상태가 부실해서 생리가 약간 늦게 온 모양인데... 쯧쯧... 좀 더 잘 먹여야 살이찌지 그렇게 비쩍 말라서야... 나는 가볼테니 알아서 해." "예." 세린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주인은 시뻘개진 안색으로 화장대를 노려보고 있 었다. "주인님. 겨우 생리통 가지고..." "겨우 생리통? 제길... 내가 왜 이런 한심한 꼴을 당해야 해. 거기다가 생리 라는 것은 또 뭐고? 왜 내가 한달주기로 이따위 치욕스런 꼴을 당해야만 하 지? 제기랄.." 그와 동시에 침대옆에 놓여있던 꽃병을 들어다가는 화장대에 던져버렸고 화장 대의 거울과 함께 그것은 박살이 나버렸다. "네년도 나갓! 꼴도 보기싫어. 으드드득!" 무슨 이유때문인지 신경질 머리 끝까지 난 주인을 피해 세린은 밖으로 튀어나 갈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생리하는거야 당연한 거였는데... * * * "용기사들의 보고로는 적들의 병력이 나리오네 시를 중심으로 집결중이라고 합니다. 그들도 수도에서 전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리오네 시는 수도에서 15킬로쯤 떨어진 곳으로 크라레스의 주력부대가 적 수도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꼭 통과해야 할 교통의 요지였다. "집결중인 적 병력의 규모는?" 크로이델 장군의 질문에 그 장교는 재빨리 답했다. "예. 치레아 국경선에 주둔중이었던 1개 보병사단, 또 2개 기병여단, 1개 용 병여단, 2개 수도경비사단, 근위기사단, 네시 기사단입니다. 각지에서 용병들 을 계속 모집중이며 그들은 지속적으로 나리오네 시로 보내지고 있습니다." "끝내 한판의 도박을 할 생각인 모양이군." 공작의 빈정거림에 장교는 황급히 답하며 말했다. "예. 전하. 그런데 이상한 것이... 나리오네 시에 치레아 왕국의 크라얀 기사 단의 깃발이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크로이델 장군 옆에 앉아있던 인물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 을 나타냈다. 그 노장군은 쥬리앙 아그리오스 장군으로 현재 콜렌 기사단 단 장이었다. "크라얀 기사단의? 흐음... 치레아가 스바시에를 돕기위해 기사단을 파견했을 수도 있겠지요. 스바시에가 먹힌 다음에는 자기들 차례라는 걸 알테니까 말입 니다. 또 스바시에는 꽤 오랜시간 치레아와 잘 지내왔으니 원군을 보냈을 가 능성은 매우 큽니다. 만약 보냈다면 어느정도 규모일 것 같은가?" "옛, 아마도 크메룬급으로 5대에서 10대 정도일 것입니다. 본국이 현재 투입 중인 타이탄 수가 고작 19대인 점을 생각한다면 그것도 꽤나 많은 숫자지요. 또 치레아의 총 타이탄 수가 23대인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반수정도의 타이 탄을 지원해줄 리는 없을거라는 추측입니다." "크라얀 기사단이 가진 타이탄 총수는?" "예. 크메룬 15대입니다. 크메룬은 본국의 푸치니급과 거의 같지만 높이가 조 금 낮은만큼 기동력은 조금 더 좋을것이라는 추측입니다." "그럼 모두 합치면 꽤되겠군. 근위기사단이 7대, 네시 기사단이 22대, 거기에 10대라면... 호오... 39대나 되는군." "하지만 그중 반수이상이 정규타이탄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죠." "이봐, 장군들!" 공작의 말에 장군들은 일제히 답했다. "옛." "전쟁 벌어지기 직전에 본국에 남은 타이탄 9대를 이쪽으로 워프해오면 위험 할까? 놈들은 그 많은 숫자를 믿고 본국의 왕궁을 기습하는 짓을 할까? 어떨 까? 만약 그들이 기습을 가해온다면 왕궁은 적 공격대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 말에 즉각 크로이델 장군이 대답했다. "본국의 남은 병력까지 다 쓰실 생각이시라면... 오히려 그런식으로 곡예를 부리는 편이 코린트의 의심을 들 받을테니 그 방법을 쓰는게 좋겠사옵니다. 전하. 먼저 마법진을 이용해서 전쟁 직전에 이쪽으로 워프해서 불러들여 싸우 다가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근위기사단을 수도로 돌려보내면 되겠지요. 39:28 의 싸움이면 훨씬 빨리 전쟁이 끝날 것이옵니다. 타이탄끼리의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불러들였던 9대의 타이탄은 코린트와의 국경선으로, 카프록시아 5대는 왕궁으로 워프시키면 코린트는 우리의 작전에 꽤나 감명을 받겠지요. 전 국력 을 한곳에 모아 일전을 벌이고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 전술에 말이옵니다. 사 실 그 전술은 30년 전에 코린트가 본국을 상대로 써먹었던 거니까 그들로서도 느낌이 새로울것이옵니다." "그리고 남은 적의 보병은 남은 타이탄들로 박살을 내고?" "예, 전하." "좋아. 대신 놈들이 왕궁을 기습할때를 대비해서 근위기사들은 토지에르의 신 호가 올 때 만사를 제쳐놓고 전장에서 이탈하여 이동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직 행, 워프해야 한다. 단 이때 폐하께도 연락을 드려서 왕궁이 텅빌때를 대비해 서 어딘가 피신해 계시라고 하면 되겠군. 아마 적의 기습이 포착된 후 10분내 로 워프가 가능할테니 10분만 버티시면 돼. 폐하께서도 그래듀에이트시니 뭐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야. 어쨋든간에 코린트 놈들이 개입하지만 않는 다면 걱정거리는 없지." * * * 어제는 다크가 원체 히스테리를 부리는 바람에 전달해주지 못하고, 실바르는 세린에게서 다크의 심리가 꽤 안정되어 있다는 보고를 들은 후에야 행동을 개 시했다. 어차피 탈출사건때문에 피차간에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으니 그때 나타났다면 아마도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은 그도 예상하기 힘들었었기 때문이 었지만 어쨋든 그의 판단은 어느정도 정확한 것이었다. 똑..똑... 그러자 재빨리 세린이 문을 열고 나오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으리." "네 주인에게 전할게 있다." "예. 나으리." 세린은 쪼르르 주인에게 달려가서 그녀에게 말했다. "주인님. 실바르 경이 뵙자고 하십니다. 전해드릴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들어오라고 해." "예. 주인님." 조금 지나자 세린의 안내로 실바르가 들어왔고,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있 는 이방 주인을 보면서 뭐라고 하면서 대화를 시작할까 한참 망설였다. "폐하께서 그대에게 전해주라고 한 물품들을 가지고 왔소. 가지고 와라." 그러자 밖에서 노예들이 차곡차곡 정돈해놓은 물품들을 가지고 들었다. 각종 옷가지나 여행물품들 그리고 작은 검이었다. "그리고 세린도 그대의 것이오. 폐하의 하사품이니까 그대가 알아서..." 실바르가 말을 끊은 것은 상대가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 물품들 중에서 검과 장갑 한벌을 꺼내서는 검은 허리에 차고, 천천히 장갑을 끼고있었기 때 문이다. 도대체 무슨짓을 하려고? 상대가 장갑을 다 끼고난 후 '파워 업'이라 고 중얼거리는 걸 들었을 때, 실바르의 손도 이미 무의식중에 예의에 어긋나 지 않을정도로 자신의 검손잡이 최대한 가까이 슬며시 다가가고 있었다. 왠만 한 여자들이 이따위 짓을 해도 긴장따위를 할리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몸 은 자신의 의지와 달리 그 소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에... 그러니까 세린은 폐하께서..." 슉! 갑자기 상대의 검이 허공을 날았고 자기 쪽으로는 날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의식중에 잔뜩 긴장하고있던 실바르의 손이 순간적으로 검을 거의 반쯤 뽑 았다가 황급히 다시 집어넣었다. 이때 툭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세린의 목걸 이였다. 자신의 목으로 거의 스치듯이 지나간 칼 때문에 세린의 표정은 창백 하게 질려있었고, 실바르는 상대의 날카로운 일검을 보고 폐하가 이 소녀를 아끼는 이유가 단순히 뜨거운 잠자리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또 자 신의 몸이 왜그렇게 뜨겁게 반응했는지도... 그녀는 엄청난 숙련도를 지닌 검 객이었던 것이다. "나쁘지 않군." 다크는 과거와 달리 자신의 몸속에서 들끓고있는 힘을 느끼며 조용히 중얼거 렸다. 자신의 내공이 상승한 만큼 마법장갑은 현재 풀파워를 내면서도 그녀에 게 거의 무리를 주지않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충분히 내 몸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다크는 천천히 샤벨을 검집에 넣으면서 '파워 다운'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후 실바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 할말이 더 있어요, 실바르 경?" 여러 가지 생각이 뒤얽혀서 멍한 표정으로 있던 실바르는 그제서야 깜짝 놀라 서는 황급히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실바르가 밖으로 나갈 때 뒤에서 나지막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이제 자유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일을 못한다고 두들겨 맞을 이유도 없고, 또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다. 야성이란 것은 야성으로서 존재할 때 아 름다운 것. 길들여진 야성은 보는 이에게 슬픔을 자아낼 뿐이지."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딸깍 하고 실바르가 문닫는 소리가 들려왔고, 또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세린이 주인의 앞에 꿇어앉아서는 징징거렸다. "주인님. 저 버리지 말아주세요... 더 열심히 일할께요. 예? 주인님... 엉 엉... 다시는 게으름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할테니 제발 버리지 마세요." 자신의 다리를 끌어안고 울고있는 세린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주인이 말했다. "너는 너무 길들여져 버렸구나. 나는 너에게 자유를 선물하려 했는데... 그게 너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웠느냐?... 너를 버리지 않을테니 그만 울거라." 그 후로 며칠간은 평온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밥먹고 수련… 수련… 다크로 봤을때는 수련이었지만 세린이 봤을때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대로 앉아있으니 건강 버리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안그래도 의사에게 잘먹이라고 당부를 받았 었는데……. "좀 더 드세요." 얼마 먹지 않고 포크를 놓는 걸 보면서 세린이 말했지만, 다크는 더 이상 먹 을 생각이 없는 듯 심드렁하게 맞받았다. "이제 ㄷ어. 배가 너무 부르면 수련에 방해가 돼. 이정도가 딱 맞아. 포도주 나 한컵 다오." 세린은 붉은 포도주를 반잔 정도 따뤄서 주인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산책이라도 좀 하세요. 안그러면 건강에 안좋아요. 운동을 안하시니까 식욕 이 없죠." "괜찮아. 한시가 급한데……." "산책좀 하세요." "괜찮아." "그래도 산책좀 하세요. 날씨 참 좋아요." 끈덕지게 세린이 졸라대자 다크가 울컥해서 말했다. "너 계속 귀찮게 하면 팔아버린다……. 어?" 사실 한시가 급한 이때에, 밥먹는 시간도 아까운데 계속 옆에서 종알거니 열 받지 않을 수 있나? 갑자기 세린의 표정이 겁에 질리며, 우울한 듯, 비난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자 찔끔한 다크는 황급히 말했다. "그래. 산책 가자구. 가면 될거 아냐?"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는 아무 신발이나 신고있는 주인을 보며 세린은 이 새로 운 주인의 습성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강자에게 약하고 약 자에게 강한게 정석이었지만, 이렇게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인물이 있을까? 토지에르같은 무서운 사람에게는 막나가면서 자신같은 노예의 마음은 신경써 주다니……. 어쨋든 특이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세린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세린이 서둘러 주인과 함께 밖으로 나왔을 때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실 바르도 어슬렁거리며 뒷따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호위해야 하는 이 특이한 소 녀에게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며 말이다. 그들이 천천히 걸어나왔을 때 성(城) 내는 이상하게도 시끌벅적했다. 모두들 모여서 소란스럽게 떠든다는 말이 아니라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평상시보 다 더 많은 병사들이 보이고 있었고 성 한쪽구석에 설치된 거대한 마법진들에 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또다른 마법진의 중간에 큼 직한 수정구슬을 올려놓고 뭐라고 떠들어대는 인물도 보였다. 어쨋든 무슨 일 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도대체무슨 일이지? 뭔가 소란스럽군." "글세요. 주인님. 저희들은 도저히……." "하기야 너가 알 리가 없겠지. 오랜만에 나왔으니 꽃구경이나 하러 갈까? 여 기 혹시 [국화]… 으음… 그러니까 이렇게 생긴 꽃이 피는 곳을 알고있냐?" 그러면서 다크는 국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꽃잎은 여러개인데… 이렇게 뭉쳐있어. 그리고 잎파리는 이렇게 생겼지. 가을에 피는데……." 대강 다크가 작대기로 꽃을 그리며 특징을 설명하자 세린이 단번에 알아보며 말했다. "아아… 국화(chrysanthemum)로군요. 후원에 심어져 있습니다. 국화는 성실, 청순, 고귀함을 뜻하기에 정원에서 매우 인기있는 화초지요. 후원의 뜰에서 키운 다음 가을에 꽃이 필때가 되면 모두 파내서 왕궁 앞의 주정원(主庭園)에 아름다운 모양을 이루도록 옮겨심습니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후원에 가 보시면 보실 수 있을겁니다. 주인님." "그럼 그리로 가자." "예." 다크는 후원으로 걸어가며 세린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후원에 넓은 꽃밭 을 만들어 여러종류의 화초를 가꾸면서 그것들의 꽃이 필때가 되면 왕궁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마련된 주정원에 모양좋게 옮겨심는 행위… 그런 쓸데없는 행위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게 다크의 생각이었다. "쓸데없이 파서 이리저리 옮길 필요가 있을까? 괜히 그래봐야 힘만 드는데… …." "어쩔 수 없습니다. 주인님. 여기는 왕궁인걸요. 사신들이 이곳 주정원을 통 과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이지요. 만약 주정원에 꽃이 피어있지 않다면 타국(他國)의 비웃음을 사게 됩니다. 물론 겨울에는 상관없 지만……." "쓸데없는 노동력의 낭비야. 그냥 그대로 피어있는 것을 보고 즐기면 그만이 지……. 저렇게 말이다." 다크가 가리킨 곳을 보던 세린이 생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건 나무라서 옮기기 힘드니까 그렇죠." "저건 무슨 꽃이지? 아주 화려한 꽃이군." 화려한 꽃들이 달린 나무들을 보면서 세린이 말했다. "예. 장미(rose)라고 합니다. 짙은 붉은색의 장미는 정절과 열렬한 사랑을 뜻 하기에 기사들이 선호하는 꽃이지요. 또 요즘은 품종도 많이 개량되어 거의 겨울 빼고는 장미꽃을 볼수가 있거든요. 참 색깔들이 많죠? 붉은색, 노랑색, 분홍색, 흰색이 있지만 여기서는 흰색은 심지 않아요. 코린트 제국의 국화(國 花)가 백장미거든요. 우리나라는 코린트 제국과 사이가 별로 안좋기때문이라 고 그러더군요." "흐음……." "봄이되면 주정원은 참 아름다워요. 아마 겨울에 삭막했기에 더욱 아름다운지 도 모르지만요. 그때가 되면 크라레스 왕국의 국화(國花)인 히아신스로 주정 원이 아름답게 단장되지요. 또 꽃말도 근사하잖아요. 기쁨과 승리……." 아름다운 봄의 정원을 회상하는 듯, 꿈을 꾸는 듯 몽롱한 눈빛을 한채 말하는 세린을 보면서 다크는 피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꽃말이란 건 또 뭐냐?" 그 말에 세린은 별 이상한 사람도다 보겠다는 듯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꽃말도 모르세요? 각 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요. 기쁨, 용기, 승리, 슬픔 같은거요." 그 말에 다크는 별 할짓없는 놈들 다보겠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꽃은 그냥 꽃으로서 아름다울 뿐, 뭐하려고 쓸데없이 따로 뜻을 지어서 붙이 는지……." "아주 낭만적이잖아요. 탄생화도 정해져 있는걸요? 주인님은 생일이 언제에 요? 모르시면 제가 아르켜 드릴께요." "몰라." "예?" "나는 고아라서 몰라." 다크의 무심한 말에 세린이 오히려 당황해서 사죄했다. "죄송해요. 주인님. 그만……." "상관없다. 부모 얼굴따위 상상해본 기억도 없고…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아. 나는 여태껏 그런 생각 해볼 여유가 없었으니까……." 이윽고 국화밭에 도착한 다크가 그윽한 눈빛으로 국화를 바라보고 있는걸 보 면서 세린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직 꽃도 피지 않았는데……. 혹시 무슨 추억이라도 있으세요?" 그 말에 다크는 싱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사실 국화따위에 무슨 추억이 있겠냐? 내 삶을 돌이켜보면 검(劍)과 피(血) 밖에 없었는데, 저 국화도 과거 나를 구해줬던 멍청한 부하녀석 때문에 좋아 하게 되었을 뿐이야. "그 부하분이 국화를 좋아하셨나요?" "아니. 그녀석 이름이 국화였어. 물론 진짜 이름은 나도 모르겠고 그냥 부르 기 편해서 국화라고 불렀었지." "크리센더멈(국화)이라…. 괴상한 이름이네요…." "글쎄……." "저쪽으로 가시지요, 주인님. 여기는 가을에 피는 화초들만 심어져 있거든요. 아직 꽃이 피지 않아서 볼게 없어요. 여름에 꽃이 피는 것들은 지금 주정원에 옮겨심었지만, 후원 저쪽에 보면 그래도 많이 남아있어요. 또 의자도 있구요. 햇볕이 따가우니까 그리로 가시지요." 세린이 안내한 후원의 한구석에는 원추리, 참나리, 작약, 해바라기, 다알리 아, 백일초, 접시꽃, 봉선화, 칸나, 아마릴리스, 글라디올러스, 붓꽃, 천일홍 등 수많은 화초들이 꽃을 달고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물론 그것 들 중에는 원추리처럼 이미 꽃이 지고있는 것도 있었고 칸나처럼 한창 그 절 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참 아름답죠? 언제나 후원의 세곳은 꽃을 뽑아서 옮겨심지 않고 그냥 놔두거 든요. 그래서 왕궁안의 사람들은 그 세곳을 각각 봄, 여름, 가을의 정원이라 고부르지요. 이제 두어달 지나고 나면 여기 있는 꽃들은 모두 질거고 그때쯤 에는 가을의 정원에서 꽃이 피기 시작하지요." 세린은 조르르 달려가서 먼저 넓직한 천조각을 꺼내서는 벤치 위에다 편 다음 거기에 주인을 앉게 한 다음 말했다. "그 검 걸리적거리지 않으세요? 옆에다 풀어놓으세요. 여기는 왕궁이라 그걸 사용할 일이 없다구요. 왜 꼭 그걸 가지고 다니세요? 무거울텐데……." 그 말에 다크가 피식 웃고는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습관이야. 검을 가지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지. 특히나 지금처럼 힘이 별로 없을때는 말이야. 너희들도 검을 쓰냐? 아……. 내 말은 야생에서 말이야." "아닙니다. 저희들은 원래 아주 깊은 산속에 사는 종족입니다. 물론 저는 여 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자랐기에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숲에서 살다가 잡혀온 동족에게 들어보면 긴 손톱이나 발톱으로 싸운다고……." 그 말에 다크가 고개를 갸웃 하면서 말했다. "너는 손톱이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어?" "저희는 손톱이……. 어머나." 둘다 야간 놀란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던 매끌한 세린의 손가락 끝에서 뾰족한 손톱이 1Cm정도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마법의 목걸이를 걸어 밖 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어있지만 세린의 목걸이는 다크가 잘라버렸기 때문에 손톱은 자연스레 밖으로 튀어나왔고 그걸 처음 본 당사자인 세린도 놀라고 말 았다. 다크는 신기하다는 듯 손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신기하네. 흠……! 고양이도 손톱은 손가락 속에 감춰져있으니까 그런 원리인가? 하지만 겨우 이거가지고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겠어? 말도 안되지. 대신 날카롭고 뾰족하니까 이쑤시게나 포크 대용으로는 쓸 수 있겠 군." "이쑤시게나 포크라니요?" 주인의 말에 발끈해서 세린이 말했지만 그 항의는 다크에 의해 간단히 묵살되 었다. "쉿! 조용히." 이때 저쪽에서 한 남자애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아마도 14살쯤 되어보였다. 다크하고 키는 거의 비슷했지만 여자로서의 성장기가 거의 끝나가고있는 다크 에 비해 남자로서 2차 성장기를 막 시작한 소년은 몇 년 지나지 않아 180센티 가 넘는 키를 지니게 될 것이다. 어쨋든 제법 단정한 옷차림에 가녀린 선을 지닌 미소년이었지만 혈색이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좋게 말하면 학자 풍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나약해 보인다고 해야할까? 그걸 보고 세린은 황급히 손톱을 집어넣고 그 소년에게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소년이 그걸 막으면서 말 했다. "손님이 먼저 있었네. 나는 아리아스라고 해. 여기는 내또래의 애들은 없는줄 알았는데……. 너는 누구…?" "나는 다크." "응. 다크구나. 좀 앉아도 되겠니?" "안돼!" 의외의 거부에 소년은 안색이 벌겉게 바뀌더니 엉거주춤 선채로 말했다. "오늘 궁이 시끌시끌하지? 오전중에는 지하실에 들어가있으라고 해서 도망쳐 나왔어. 나는 그런 꽉 막힌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너는?" "저애한테 끌려나왔지." 노예한테 끌려나왔다는 말에 소년은 농담으로 알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풋… 그런데 그 검은 너거니?" "응." "여자들은 검을 잘 배우지 않는데… 너는 좀 특이하구나." "글쎄?" "혹시 너 무녀 아니니?" 다크가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보면서 소년이 말했다. "나는 너가 무녀인줄 알았어. 너무 예쁜데다가 전쟁의 신전에서는 무녀들에게 도 검을 가르치거든. 여기는 참 아름다운 곳이지?" "……." "책보다가 질리면 여기에 자주 나와. 가업을 이어갈 형이 있으니까 부모님도 나한테는 검술을 익혀라, 뭘 해라, 하는 주문을 안해서 나로서야 잘된 일이지 만 말이야." "얘기 할거 아직도 많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도중에 자신의 말을 잘라버리며 말하는 소녀에게 소년 은 질려버렸다. "어… 아니…." "얘기 끝났으면 가봐. 나는 너하고 놀 시간 없으니까." 소년은 불그락 푸르락해져서는 재빨리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마 엄청나게 황 당스럽고 무안했으리라……. 그 아리아스라던 소년이 멀어지자 다크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별 할짓없는 녀석 다보겠네. 그건 그렇고 포도주 가져왔냐? 한잔만 다오." "예." 주인에게 포도주를 한잔 따뤄서 건네주며 세린이 조심스레 말했다. "방금 보신 분 인상이 어떠세요?" "아까 말했잖아. 아마 귀족의 방탕한… 아니군. 멍청한 아들녀석 정도 되겠 지." "반쯤은 정확하네요. 그분은 아리아스 폰 그래지에트 왕자 전하시거든요." "아까 그놈이 왕자라고?" "예." "이 나라도 망하기 일보직전이군. 저런 쑥맥이가 왕자라니……." "퍽 마음이 고운 분이시죠. 그분의 형이신 엘리안 왕자전하와 달리 마음이 여 리세요. 하지만 형이 원체 뛰어나시기에 오히려 마음 편하게 사실 수 있는거 죠.안그랬으면 저분도 벌써부터 국왕이 되기위한 수업을 받으셔야 될 테니까 요." "국왕의 나이도 별로 안들어 보이던데 도대체 아들이 몇 명이나 있는거야?" "두분이십니다. 엘리안 왕자 전하께서는 지금 아카데미에서 기사수업을 받고 계시지요." "그럼 몇살에 결혼한거지?" "국왕께서는 독자셨기 때문에 결혼을 일찍 하셨지요. 18살에 결혼하셨으니까 왕자가 두분 계시다 해도 놀라운게 아니지요. 딴곳은 모르겠지만 크라레스에 서는 보통 17살부터 20살 사이에 결혼합니다." "흐음… 보통 사람들은 결혼을 아주 빨리하는군." 그도 그럴것이 다크가 살아왔던 무림(武林)이란 곳은 보통 30세가 넘어서 결 혼을 한다. 왜냐하면 젊을 때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준의 무예를 익히자니까 당연 여자를 가까이 할 수 없었고, 그건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림의 명가 라면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에 결혼하는 일도 흔했다. 자신들의 노화쯤이야 주안술(珠顔術)로 충분히 숨길 수 있었고, 도중에 칼맞아 죽지 않는다면 5-60 년은 함께 살면서 아들, 딸 낳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 보통사람이라뇨?" "아무것도 아니야. 포도주 한잔 더줘." "과음은 몸에 해롭습니다. 주인님. 그거 말고 우유를 드릴까요?" "정말, 말 안듣는 하녀군. 그러면 물이나 줘." 그 말에 세린이 바구니를 뒤적뒤적 하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깜빡 잊고 물을 안가져왔어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곧 가져오겠 습니다." "일부러 물한잔 가지러 갈 필요는 없어. 가만 있어봐라… 이게 물의 지배자니 까 물달라고 하면 줄까?" 다크는 반지를 향해 말했고 세린은 그 주인의 행동을 보면서 지금 그 정신상 태를 의심하고 있었다. 반지보고 물달란다고 주나? "이봐, 물좀 줘."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다크는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물컵을 대고 말해야 물을 주지. 멍청하게…." 이번에는 반지 밑에 들고있던 포도주잔을 대고 말했다. "물…!" 이번에도 반응이 없자 다크는 또다시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카렐의 말로는 지금은 쓸수없다고 했으니 힘을 되찾으면 쓸수있다는 말. 그렇다면 이것도 기 를 이용해서 다루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럼 당연히 사용방법은 정해지게 된 다. 다크는 기를 반지쪽으로 뿜어넣으며 외쳤다. "물!" 그와 동시에 반지에서 물이 왕창 뿜어나오더니 포도주잔을 꽉 채우고 넘쳐서 옷을 다 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반지에서 물이 쏟아지자 여태껏 소녀의 행동 을 보고 반쯤 돌아버린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던 세린이 경악해서 거의 굳어버린 표정이었고, 멀찌감치에서 이 행동을 바라보고있던 실바르도 놀라기 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너무 과했나? 꿀꺽… 어쨋든 휴대용 물통이군." 흘러넘친 물이 옷을 적시던 말던 다크는 잔속에 든 물을 마셔버렸고, 그걸 세 린이 보면서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어머나, 갑자기 왠 물이…. 치마가 다 젖었네. 감기드시겠어요. 빨리 돌아가 요." 나리오네 시가 위치한 나리오네 평야에 양국의 주력부대들이 속속들이 모여들 기 시작했다. 양쪽 다 이번 전쟁에 국가의 사활을 걸고있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양군은 모두 다 필사적이었다. 스바시에의 보병 4만과 기병 1만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정면에 크라레스의 3만 보명과 기병 5천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양국의 군대들은 2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렇듯 서로간의 거리를 충분히 두는 이유는 조만간에 시작될 타이탄들끼리의 전투를 위해서였다. 아침이 되자 양군의 군세가 대치하고있는 상황에서 스바시에의 중갑보병(重鉀 步兵;havy footman)이 천천히 전진을 시작했다. 중갑보병은 두터운 갑주(甲 胄)와 묵직한 방패, 그리고 비교적 짧은 미들 소드(middle sword)을 허리에 차고, 3미터길이의 창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묵직한 무게 덕분에 기동력은 뛰 어나지 못하지만 그 파괴력이나 방어력이 뛰어나기에 정면접근전에 투입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들의 뒷편에서는 역시 중갑기병(重鉀騎兵;havy trooper) 이 천천히 따라오기 시작했고 양쪽에는 경갑보병(輕鉀步兵;light footman)과 용병대가 전진을 시작했고,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trooper)도 천천히 그 뒤를 후속하기 시작했다. 중갑보병은 막강한 힘은 있지만 기동력이 뛰어나지 못하기에 가장 앞의 중심 공격선에 두고 그 뒤를 역시 파괴력은 뛰어나지만 통상의 기병보다는 기동력 이 떨어지는 중갑기병을 배치한 후, 중갑보병이 적의 보병과 충돌한 후에 중 갑기병을 투입하는 전술은 매우 교과서적인 것이다. 기병은 속도는 뛰어나지 만 잘 준비된 보병을 공격하기 위해 돌격했다가는 창이나 활에 절단나기 쉽 다. 그렇기에 먼저 보병을 밀어넣어 상대의 진형을 흩트린 후에 기병을 밀어 넣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기동력이 뛰어난 경우 외려 포위당할 위험성도 존재하므로 기 동력이 뛰어나기에 상황대처능력이 좋은 경갑보병이나 기병은 좌우 측면을 감 당함으로서 효과적인 적의 움직임에 대비하게 만든다. 위와같은 방식은 가장 교과서적인 전투방법이었지만 교과서적인 만큼 그 위력또한 대단하다. 그야 당연히 그 위력을 공인받고 있으니까 교과서적인 공격법으로 너나 나나 다 알 고있는 것이다. 또 이런 넓은 평야지대에서의 전투에서는 이 진형이 가지는 강점은 극대화되고 약점은 최소화된다. 상대방의군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공작의 눈섭이 꿈틀거 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군……. 타이탄 수는 저쪽이 월등한데 왜 타이탄을 꺼내지 않는거지?" 그러자 공작의 뒤쪽에 서있던 노장군 한명이 즉각 답했다. "예. 전하. 통상 타이탄들이 나서는 것이 정석인데… 저들이 뭔가 또다른 계 책이라도 꾸미는게?" "그래듀에이트들은 모두 어디있나?" "예. 명령대로 모두 이동 마법진 주위에서 대기중이옵니다. 하지만 아직도 황 궁에 적이 침투했다는 보고는 없사옵니다." "젠장. 토지에르." "예. 전하." "저녀석들이 이동마법진으로 한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건 몇 명정도일까?" "예. 마법사들이 좀 있으니까 아마도 100명까지는 가능할것이옵니다. 대신 그 들을 전부 투입한다면 그쪽으로 한번에 보내는 건 가능하겠지만… 마법사들이 그곳으로 함께 이동해갔다 하더라도 그들이 새로이 마법진을 만들어야 하니까 돌아오려면 최소한 30분이상의 시간이 걸리옵니다. 100명정도를 이동시킨다면 그정도 쉬어야 다시 한번 더 마법을 쓸수있을테니까요." "100명이라. 만약 40명 내외로 잡는다면?" "20분정도 될것이옵니다." "예상되는 적의 타이탄은 36대정도… 최대로 잡아도 한 40대? 우리들이 가진 타이탄은 9대는 황궁에, 19대는 여기있다. 문제는 모든걸 무시하고 공격했을 때 놈들이 20대의 타이탄을 황궁으로 보낸다면? 최악의 경우 너죽고 나죽자고 40대 모두 다 보낼 수도 있고……. 이대로 총력전으로 끌고들어간다면 본국의 타격이 너무 커. 타이탄은 수리가 가능하지만 죽은 병사는 살릴 수 없지. 언 데드라도 만들면 모르겠지만, 그러면 곧장 악마의 집단으로 찍혀서 멸망당할 뿐이야." "전하. 우선 카프록시아 몇대를 투입해보고 상대의 반응을 살펴보심이 어떻겠 습니까?" "흐음… 그방법 외에는 없겠군. 크로마스!" 그러자 뒤쪽에 서있던 기사중의 한명이 재빨리 다가오며 답했다. 그는 다크 사냥에 참가했다가 된통 혼이났었던 미온지에 폰 크로마스였다. "옛, 전하." "근위 기사단의 타이탄을 출동시켜라. 만약 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적의 중 갑보병(重鉀步兵)을 먼저 괴멸시켜라." "옛!" 곧이어 크로마스가 인솔하는 9대의 근위 타이탄들이 왼손에는 거대한 방패를, 오른손에는 7미터는 되어보이는 거대한 창을 들고는 적진을 향해 달려나갔다. 카프록시아들이 적진으로 달려감과 동시에 적진 저편에서 공간을 열고 20여대 의 타이탄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고 즉각 그들은 카프록시아를 향해 저마다의 무기를 휘두르며 뛰어왔다. 상대의 타이탄 20여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공작은 재빨리 외쳤다. "콜렌 기사단을 출동시켜라." 그와 동시에 마법진 주위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던 기사들이 즉시 자신의 타이 탄을 불러낸 다음 적진을 향해 뛰어갔다. 이미 전장은 적 타이탄과 이쪽 타이 탄이 얽히는 접전 중이었기에 그들은 창은 포기하고 근접전용 무기인 도끼나 철퇴를들고 뛰어갔다. 처음 돌격을 시작한 카프록시아들은 상대 타이탄들이 달려나오자 그 거대한 창을 상대방에게 맹렬한 기세로 던진 후 곧장 허리에 꼽혀있는 검을 뽑아들고 격투를 시작했다. 카르록시아가 가진 그 강대한 힘으로 던져진 창의 위력은 엄청났고 방패로 제대로 막지 못한 상대 타이탄 4대가 방패가 꿰뚫리면서 본 체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들이 2차 장갑에 꼽힌 창을 뽑아내고 상처수복 을 하는 사이 이미 선두에 나선 타이탄들끼리의 격전은 시작되었다. 공작은 푸치니 9대가 나타난 후 곧이어 저쪽에서 거의 20대에 가까운 새로운 타이탄들이 공간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공 작의 뒤에서는 공간을 열고 카프록시아 한 대가 모습을 나타냈고 공작은 자신 의 타이탄에 뛰어오르며 외쳤다. "놈들의 타이탄은 모두 이곳에 있다. 황궁의 타이탄들도 모두 불러들여라." "옛!" 토지에르는 공작의 명령에 답한 후 공작이 탑승한 카프록시아가 전장으로 달 려가는 모습을 보지도 않고, 곧장 뒤쪽에 마법진 앞에 서있는 마법사를 향해 외쳤다. "황궁에 대기중인 타이탄들을 불러들여랏!" 그 마법사는 수정구슬을 향해 열심히 뭐라고 떠들었고 잠시 후 황궁에서 출격 준비중이었던 9명의 기사들이 희미한 빛을 내며 이동용 마법진에 모습을 드러 냈다. 그들은 워프에 성공하자 즉시 자신들의 타이탄들을 불러낸 다음 저마다 철퇴나 도끼를 하나씩 잡고는 전장으로 달려가버렸다. 바야하로 거의 40대에 가까운 타이탄과 28대의 타이탄이 얽히고 ㅅ히는 대접전을 시작했다. 바로 이때 3대의 타이탄이 갑자기 크라레스 군의 뒤쪽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방패에 그려져 있는 거대한 뱀의 문장이 그들이 소속된 국가를 나타내 주고 있었다. "크악!" "아악!" 갑자기 나타난 세대의 치레아 왕국의 크라얀 기사단의 크메룬급 타이탄 세대 는 곧장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창을 이용하여 개미처럼 모여있는 상대방 의 군대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붙어있는 작은 창문을 노리고 화살을 날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타이탄의 그 작은 헛점을 노 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공작이 거느리는 28대의 타이탄들은 숫적으로 우세한 상대 타이탄들과의 싸움 에서 몸을 뺄수가 없었고 그덕분에 놈들은 더욱 신이나서 설쳐댔다. 거대한 창을 휘저으며 중갑보병들을 짓뭉개고 있는 타이탄을 바라보고 토지에르는 마 법을 외우기 시작했고 그 옆에있는 마법사 5명도 함께 마법을 외우기 시작했 다. 타이탄을 파괴하려면 7싸이클급의 마법이 필요하지만 옆에있는 마법사들 이 외운 5싸이클급 마법 5방에 자신의 6싸이클 마법 1방을 합치면 약간의 가 능성도 있었다. 그들이 중얼중얼 마법을 외우고 있는 걸 처음에는 적 타이탄들도 무시했다. 왜냐하면 타이탄이 마법따위로 타격을 입을 수 없다는 걸 자신들이 더 잘 알 고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6명의 마법사들을 중심으로 넘치고있는 마나의 기운은 이들이 보통실력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줬고 곧장 세대의 타이탄들 중의 한 대가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이때 가까스로 마법을 완성한 마법사 한명이 익스플로우젼을 날렸다. 익스플 로우젼이라면 5싸이클에서는 최강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주문, 하지만 대폭발 의 화염을 뚫고 타이탄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한 충격에 약간 주춤하 긴 했지만 타이탄은 그정도는 어린애 장난이라는 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불길 때문에 외부의 페인트는 완전히 타서 없어졌지만 미스릴을 입 히지 않은 크메룬의 몸체에 새겨진 대마법주문(對魔法呪文)이 드러나서 특이 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자신의 마법에도 끄떡없이 달려오는 타이탄에 그 마법사의 눈이 공포에 물드 려는 그때 주문을 완성한 남은 네명이 모두 익스플로우젼을 거의 근사(近似) 한 시간차이로 타이탄에 퍼부었다. 연속되는 강력한 마법공격의 충격으로 타 이탄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그때 토지에르의 입에서 강렬한 마나의 울림 을 담고있는 시동어가 터져나왔다. "딥 스웜프(deep swamp;깊은 늪)" 그와 동시에 타이탄이 서있던 굳건한 대지는 물렁물렁해졌고 그 엄청난 무게 를 이기지 못하고 밑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대지를 물컹하게 만드는 스웜프 주문은 보통 2-30센티 정도의 지표면을 질척하게 만들어 상대의 기동력을 떨 어뜨리는 데 사용한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타이탄의 경우 밑에 뭔 가 밟히는 부분이 있기만 해도 뛰어오르기에 최소한 5-6미터의 깊이로 그 스 웜프 주문을 사용해야 했고 토지에르는 6싸이클급에 해당하는 그 한방을 날린 후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것에 기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미소를 짓는 그 찰나 옆에있던 마법사가 그를 재빨리 붙잡고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또 저마다의 마법사들이 제각기 주문을 외우고 있었 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남은 두 대의 타이탄들이 이 무시못할 위력을 내 고있는 마법사들을 없애기 위해 달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이라 면 간단한 이동마법도 못외우고 몸이 두토막날 것은 당연한 이치, 하지만 그 들은 달려서는 도저히 저 괴물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있기에 필사적으로 공간이동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때 엄청난 소리를 내며 대기를 가르고 날아온 거대한 검이 토지에르 일행쪽 으로 달려오던 타이탄의 목 아랫부분, 엑스시온이 위치한 부분을 꿰뚫어버렸 다. 물론 그 타이탄은 뭔가가 날아온다고 느끼고 대비를 하려고 했지만 미처 그가 적절한 대비를 하기도 전에 검에 꿰인 것이었다. 그 타이탄이 서서히 쓰러지는 찰나 붉은색과 푸른색의 페인트가 칠해져있는 거대한 카프록시아가 나타났다. 카프록시아는 이미 검을 던져버렸기에 방패만 들고있었고 상대는 무장을 갖추고 있으니 누가 위험한지는 뻔한 사실이었다. 상대 타이탄인 크메룬은 덩치도 3.7미터로 카프록시아 보다 훨씬 작고, 또 출 력도 0.7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무장을 갖추고 있다는 잇점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걸 알기에 재빨리 쓰러진 동료의 옆으로 이동하면서 카프록시아가 자 신의 칼을 회수하지 못하게 막았다. 크메룬이 창으로 찌르는 것을 두 번 다 카프록시아가 방패로 가볍게 막아내자 크메룬에 탄 기사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상대 타이탄은 카프록시아. 크라레스의 근위타이탄이며 높이 5.2미터, 출력 1.3이나 되는 강자다. 지금 검이 없을 때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1:1에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크메룬은 자신의 창을 강력한 힘으로 다시 한번 더 찔렀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카프록시아가 방패로 튕겨냈다. 이까지는 크메룬이 예상한 대로 였다. 크메룬은 재빨리 파고들면서 왼손에 든 방패로 옆으로 비껴가있는 카프 록시아의 방패 왼쪽부분을 강하게 때렸고 상대의 방패는 이제 그 몸을 벗어나 밖으로 튕겨나갔다. 그때쯤 되었을 때 크메룬은 이미 오른손의 방패를 버리고 검을 뽑으면서 카프록시아를 베려고 하고 있었다. 이때 카프록시아의 오른손이 크메룬의 방패를 들고있는 왼손을 꽉 잡아왔고 그와 동시에 크메룬은 카프록시아에 밀려 거의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나뒹굴어 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크메룬에 탑승한 기사는 정신이 없는 상태였지만 카프록시아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와서는 무릎관절에 붙어있 는 거대한 강철뿔로 크메룬의 복부 장갑을 찢어버렸다. 그런다음 양 팔꿈치에 붙어있는 강철뿔로 크메룬의 양쪽 어깨를 찍은다음 철판이 우개져서 팔이 잘 못 움직이는 상대의 허리에 달려있는 검을 슬며시 뽑은 후 곧장 가슴부분에 박아넣어버렸고, 그와 동시에 크메룬의 움직임이 정지되어버렸다. 카프록시아는 두명의 상대를 간단히 처치한 후 첫 번째 재물에게 다가가 자신 의 검을 회수하고 있는데 땅이 불룩히 솟아오르면서 땅속에 함몰되었던 크메 룬이 튀어나왔다. 크메룬은 저급타이탄이었기에 연이어지는 익스플로우젼의 공격에 거의 대마법방어진이 파괴되기 직전까지 갔었다. 만약 토지에르가 6싸 이클급의 파괴주문을 썼다면 아마도 고철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당황한 김에 정규급 타이탄의 방어력을 상상해버린 토지에르는 그걸 파묻어버렸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땅이 굳어지자 튀어나온 것이었다. 흙투성이가 되어 엉망진창인 상대를 바라보며 카프록시아는 이제 검이 있기에 저따위 타이탄쯤 겁날것도 없다는 듯이 여유있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으로 튀어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눈앞에 엄청난 강적을 맞이한 크메룬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하고있었다. 상대 타이탄으로부터 뻗어나오는 강대한 마 나의 기운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카프록시아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먼지가 피어올랐고 순식간에 크 메룬의 코앞으로 접근한 카프록시아는 그 거대한 방패로 상대를 두들겼다. 막 강한 타격을 입은 상대의 방패가 위로 튕겨오르는 순간 카프록시아의 검은 크 메룬의 가슴 속 깊이 들어간 다음이었다. 곧이어 크메룬의 거대한 덩치가 아 래로 무너져버렸다. 뒤에서 튀어나왔던 타이탄들을 몽땅 다 처치한 카프록시아는 급히 이탈했던 전장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평원에서는 수많은 타이탄들이 얽혀서 각종 무기 로 상대를 두들겨대고 있었던 것이다. * * * "왜 이렇게 밖이 소란스러운 거지?" 소녀의 말에 세린이 방긋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예. 언제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스바시에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대요. 오늘 원정군 사령관이신 크로아 공작전하께서 돌아오시기에 개선축제(凱旋祝祭)가 열린답니다. 주인님." "그럼 토지에르도 돌아오겠군." "예? 토지에르 나리는 벌써 돌아오셨는데요? 일주일 전에 뵈었어요. 괭장히 바쁜 것 같으시기도 하고… 피곤한 것 같은 표정으로 걸어가시는 걸 ㅂ는데 요." 사실상 일주일 전의 대회전에서 스바시에 왕국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공작이 지금에서야 돌아온 이유는 잔당들의 처리 등 점령지에서 할 일 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지에르는 스바시에에서 노획한 고철 타이탄들 을 수거해다가 새로운 타이탄들을 제작해야 했기에 급히 돌아온 것이다. "흐음……." "축제 구경 안하실래요? 오늘 있을 개선축제는 정말 화려할거라고 하더라구 요. 그리고 또 준비한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요? 빨리 가요." "나는 시끌벅적한 건 별로 안좋아하니까 너 혼자 가거라." "에이… 주인니임. 그러지 마시고 구경 가요. 예?" "싫다니까 그러네. 그건 그렇고 목욕물이나 받아놓고 가." 단호한 주인의 태도에 풀이죽은 세린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다크가 목욕을 끝내고 밖에 나왔을 때 세린은 아직 방에 남아있었다. "아직 안갔냐?" "할건 하고 가야죠. 엎드리세요." 올리브유를 손에 바른 후 다크의 근육을 부드럽고도 세심하게 맛사지해줬다. 그런 후 세린은 주인에게 새로운 옷가지를 가져다 주고는 옆방으로 갔다. 다크는 세린이 이제 밖에 나갔으니 수련이나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부좌 를 틀고 앉았지만 옆방에서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 다. 아주 들으라는 듯 세린이 크게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아…… 축제구경 하면 좋을텐데, 왜 구경을 안하시겠다고 그러셔? 뼈빠지게 일해주는 노예를 위해서 구경좀 시켜주면 어때서?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건 너무하는 거야. 주인을 놔두고노예가 밖으로 돌아다닐 수 없다는 걸 잘 알텐 데… 혼자서 구경하라고 하는건 나보고 구경하지 말라는 거나 똑같잖아. 만약 내가 자리를 뜬게 발각되면 토지에르 나리에게 죽도록 맞을게 뻔한데……." 세린이 이렇듯 빡세게 나갈 수 있는 건 노예의 혼자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숙녀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약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대놓고 말하는 것 도 아니고 혼자말인 경우는 어떤소리를 떠들어도,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걸 참고 들어야만 했다. 그래야 '귀부인'이나 '숙녀'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다크도 세린이 한번씩 그러는 걸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그것이 이곳 귀족층에서 해야할 덕목중에 들어간다는 걸 알고 얄미운 노릇이었지만, 그녀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얌전한 숙녀가 되 려면 그 잔소리를 참아 줘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치명적인 논리상 의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다크가 숙녀였던가? "으으윽! 도저히 못참겠다! 세린!" 그러자 옆방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 "너 계속 떠들면 가죽을 벗겨버린다. 알겠어?" 그러자 경악한 세린이 뛰어들어왔다. "어머어머… 세상에… 그런 말은 숙녀로서 도저히 입에 못담으실 천박한 말투 라구요. 제발 그 상스러운 말투좀 고치세요. 그리고 숙녀는 절대로 노예의 혼 자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죠." 세린은 당연하다는 듯 반박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미소 뿐이었다. "나는 여자가 아니야. 그렇기에 숙녀도 아니야. 또 숙녀가 되고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정말 너… 죽고싶냐? 응?" 도저히 어린 소녀라고는 볼 수 없는 매서운 살기를 뿜어내며 살며시 한손으로 세린의 목 윗부분을 잡고는 슬슬 쓰다듬자 세린은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그 기세로 봤을때는 목이 비틀리던지 아니면 졸릴 가능성이……. "……." "이게 귀엽다고 봐주고 있었더니 정말 죽고싶어? 다시는 내앞에서 숙녀니 여 자니 하는 말 하지마. 나는 그 말을 제일 싫어하니까, 알겠지?" 다크의 말에 세린이 겁에 질려서 떠듬떠듬 대답했다. "예… 예." "이만 가봐." 부리나케 옆방으로 도망치는 세린을 바라본 후 다크는 이제야 말로 수련을 하 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자신으로서는 가장 열받는게 여자가 된 것인데 그걸 들고 떠들어대다니……. 내 수련이 조금만 얕았어도 아마 진짜 가죽을 벗겨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가 다크의 생각은 조금 더 발전했다. '전에 팔려고 내놓은 묘인족 소녀는 분명히 꼬리가 있었다. 하지만 세린의 꼬 리는 보이지 않았다. 꼬리는 어디갔을까? 허리에 돌돌 말고있나? 아니면 저 긴 치마안에서 축 늘어져있나? 꼬리에 돋아난 것하고 귀에 돋아난걸 보면 꽤 뽀송뽀송한 부드러운 털이던데 몸에도 그런 털이 있을까? 털이 있다면 가죽을 벗겨놓으면 따뜻할지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거야? 수련 수련……' 태허무령심법의 구결에 따라 천천히 기를 돌리자 몸의 감각은 더욱 예민해지 기 시작했다. 이제 더욱 깊이 수련에 들어가면 정신이 집중되면서 외부의 자 극에서 차단되겠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상황에서는 매우 예민해지게 된다. 하지만 이때 그녀의 예민해진 귀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또 짜고있군. 무시하고 수련을……. 으윽! 제기랄 못참겠다. 공력이 얕 으니 귀를 틀어막을수도 없고… 저년을 죽여버리던지 팔아버리던지 해야지 원 …….' 씨근거리며 다크는 옆방으로 쫓아갔지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처량하게 훌쩍 거리고 있는 세린에게 튀어나간 말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또 울고있구나. 너 계속 울어대면 팔아버린다." 부드러운 말로 팔아버린다고 하자 세린의 물기어린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 다. 이 주인은 맨날 할말이 궁색해지면 팔아버린다고 위협하는데 실지 말뿐이 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엉? 웃어? 주인의 말이 같잖게 들리냐? 이게 아직도 맛을 다 못본 모양이군 ……. 에휴… 그래, 네 마음 내가 알지. 너도 참 성질 더러운 주인 만나서 고 생이 많지?" 다크는 세린을 토닥여주면서 말했다. "그만 울고 같이 구경이나가자. [아이고… 내 팔자야.]" 다크가 세린과 함께 밖에 나오자 언제나와 같이 실바르도 멀찌감치에서 따라 오기 시작했다. 왕궁의 모양이 약간 달라져 있었다. 궁이야 변한게 없었지만 궁으로 들어오는 정문 주위에는 좌우에 다섯대씩 10대의 거대한 덩치의 타이 탄들이 서있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을 화려하게 칠했으며 방패와 그 두터워보 이는 갑옷 여기저기에는 여러 가지 문장들이 그려져 있었다. "와… 주인님, 정말 멋지죠? 저게 타이탄이에요." 언제 울었느냐는 듯 한껏 들떠있는 세린을 씁쓰레하게 바라보며 다크가 시큰 둥하게 대꾸했다. "나도 알아."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고 여자들은 저마다 작은 바구니를 들고있었다. 그 바구니 안에는 꽃잎이 들어있었는데 아마도 저거 딴다고 산골 짜기를 꽤나 돌아다녔을 것임이 분명했다. 세린에게 이끌려 한참 이리저리 돌 아다니다가 보니 이윽고 개선군(凱旋軍)들이 당당하게 도로를 가로질러 행진 해 들어왔고 사방에 있는 여자들이 바구니의 꽃잎을 그들에게 뿌렸다. 주민들 의 환호에 맞춰 갑주를 걸친 군인들은 더욱 자신들의 전공을 자랑하듯 흉폭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행진해 들어왔다. 이번 전쟁에 자신들이 없었다면 승리할 수 없었다는 듯……. 전쟁에 투입되었던 군대의 대부분은 점령지나 국경으로 보내졌고 개선행진에 동원된 병사는 5천도 되지 않았다. 특히나 점령지의 불순분자들, 즉 게릴라들 과 험한 지형에서 싸울때는 중장갑을 지닌 군대는 필요가 없었기에 개선행진 에 동원된 병사들은 대부분 중갑주를 착용한 병사들이었다. 중갑기병, 중갑보 병이 지나가고 나자 마지막으로 제각각의 무장을 갖춘 용병대가 지나갔다. 다 크는 혹시나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용병대를 쭉 훑어봤지만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팔시온 일행은 어디로 간걸까? 토지에르의 말로는 용병대에 들어있다 고 했었는데… 아직 점령지에 남아있나? 나중에 토지에르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옆에서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이봐요 아가씨." "예?" 다크가 상대를 바라보자 상대는 김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어린애잖아. 눈이 삐었나? 아무리 뒷모습이었지만 내가 착각을 하다 니……." 다크는 투덜거리고 있는 상대를 찬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상대는 여행자들 이 흔히 입는 복장을 하고있었다. 망토 안에는 잘 손질된 반들반들한 가죽갑 옷이 보였고 허리에는 제법 근사해 보이는 롱소드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다크 의 시선을 잡고있는 것은 상대의 제법 잘생긴 외모와 황금색 머리카락이 아니 었다. 호색한을 가장하고있는 저 눈동자 뒤에서 느껴지고 있는 강렬한 느낌. 고수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그 힘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봐. 그런 눈으로 보지마. 나는 어린애는 안 건드린다구. 너 혹시 누나 없 냐? 너 얼굴만 봐도 네 누나는 보증수표일텐데……." "없어요." "쳇! 좋다 말았군. 가만…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지. 오! 저쪽에 괜찮은 아가 씨가 있군. 꼬마야, 만나서 반가웠다. 안녕!" 다크는 사람들을 헤치면서 멀어지고 있는 상대의 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렇 듯 상당한 실력을 갖췄을 것으로 짐작되는 인물들이 한번씩 보이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꽤나 대단한 나라인지도……. "주인님. 왜 그러세요?" 세린이 옆에서 말을 걸었기에 다크는 상념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깨어날 수 있었다. "구경 다했으면 돌아가자." "흑흑흑…… 주인님. 저좀 살려주세요. 제발~~~~" "닥쳐! 누가 너보고 죽으래?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금 죽으라고 하시는 거나 마찬가지 잖아요." "군소리 하지마. 나는 안간다고 했으면 안가." "주인님이 무도회 안가시면 토지에르 나리가 이번에는 진짜 제 가죽을 벗기실 거라니까요." "너는 내꺼니까 그 영감이 그럴 권리가 없으니까 안심해." "하지만 토지에르 나리는 주인님의 상관이시잖아요. 주인님이야 괜찮다고 해 도 저는……. 엉엉. 내일 죽을게 당연해." "이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수련좀 하자. 수련! 빨리 밖으로 안나갈래? 정말 팔려 봐야 정신을 차릴래? 토지에르만 무섭고 나는 안무섭냐? 이게 정말 가죽 이 벗겨지도록 두들겨 맞고 싶어서……." 다크가 말을 멈춘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앙탈할 힘도 없는지 뒤돌아서서는 울 면서 옆방으로 건너가는 세린의 뒷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사실 무도회 참석권 은 귀족급에게는 모두 다 주어지는 것이고 거기 참석하던 말던 그건 자기 마 음이었지만, 문제는 이게 황제가 연 대규모 승전축하 무도회였고 또 그런 비 중있는 무도회에 꼭 가야되는지 아니면 안가도 되는지를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세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만약 꼭 가야만 하는 거라면, 거기 불 참한 다크야 잘 몰라서 안갔다고 치고 그녀를 보내지 않은 모든 책임은 자신 에게 쏟아질 것은 당연한 일. "엉엉…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래도 죽기는 싫다구요. 엉엉…" "제길… 그래! 가주지! 가주고 말테닷!" 이런식으로 출발하다 보니 다크가 무도회장으로 떠난 건 무도회가 시작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던 것은 당연하다. 다크는 건성으로 세린에게 설명을 좀 듣 기는 했지만 춤(dance)이라고는 춤자도 몰랐기에 그냥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 만 기록해 두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들어가는 거야 체크를 하겠지만 설마 나 가는 시간까지 체크할까? 또 나가는 시간까지 체크한다고 해도 그 도중에 누 구하고 뭐했는지까지 기록하는 놈이 있을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한두명 초대하는 것도 아니고……. 다크는 무도회장으로 다가가면서 중원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매우 특이한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크가 무림에 있을때도 금(琴;거문고)이나 적(笛;피 리)같은 경우 꽤 다뤄봤었기에 이 특이한 악기에 약간의 흥미가 동하는 것은 당연했다. 소리만 들어봤을 때악기의 종류가 다양한 것도 같았고, 듣기에도 좋았기에 어떤 악기인지, 또는 악기들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천천히 정원을 가로질러 정문 가까이 다가가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얼굴 색이 약간 붉어지고 있었다. "으아흥… 으으으으흥…… 으으응…… 아아앙……" 아주 낮으면서도 간드러지는 듯한 신음소리… 이 소리가 뭔소린지는 뻔한 노 릇이니 얼굴색이 조금 바뀐 것이다. 그 소리들은 다크가 걸어가는 길의 좌우 에 펼쳐진 정원의 여기저기에서 아주 낮게 들려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무 들을 2미터 정도 높이의 미로처럼 만들어놓은 이 괴상하게 생긴 정원의 용도 를 십분 활용하는 인물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도회장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는 높은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 가로수에서 2미터 정도 떨어져서 양 쪽에 이 미로같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 그 정원 바닥은 폭신한 잔디 까지 심어져 있으니 일벌이기에는 매우 적합한 장소였으리라. 세린도 다크의 뒤를 따르면서 귀를 쫑긋거리는 걸 봐서 그녀의 귀에도 이 자극적인 소리가 들리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고양이는 후각보다는 청각과 시각이 뛰어난 동물 들이니까 그것은 당연한지도 몰랐다. 다크는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기에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걸어가고있는데 길 옆의 가로수 위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면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휘유우우~~ 어디를 가시나요? 아가씨?" 다크는 약간 당황해서 나무위를 쳐다봤다. 그 말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그녀는 나무위에 사람이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이정도로 기척을 숨길 수 있다 면……? "에잉? 어린애잖아. 어? 낮이 좀 익은 것 같은데 구면이었나?" 그 남자가 나무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려다크의 앞에 섰다. 공식적인 무도회 라도 여기서는 검을 휴대할 수 있는지 허리에는 낮에 봤던 그 근사해 보이는 롱소드가 매달려 있었다. "글세요?" "아… 참! 낮에 거리에서 봤었는데, 깜빡 했군. 그런데 보통 부모들은 15세 정도 되어야 무도회에 보내줄텐데, 너희 부모는 아주 개방적인 성격을 지니신 분들인 모양이군. 어라? 그런데 어떻게 보호자도 없이 혼자왔냐?" "여기 있잖아요." 다크가 가리키는 뒤에 서있는 묘인족을 보면서 사내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묘인족쯤이야 보호자가 될 수 없지. 세상이 어떤세상인데……. 동행이 없으 면 함께 들어가자. 나도 일이 있어서 늦게 왔더니 괜찮은 여자는 딴놈들이 다 꼬셔버린 다음이라서 말이야. 그냥 돌아갈까 말까 궁리중이었다구." 사내는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자 가실까요? 아가씨?" '놀고있네! 뭐 딱히 저런데 가서 할짓도 없으니 같이 가 볼까?' 사내와 함께 두 개의 문 중에서 처음 들어가는 손님들을 위한 문으로 들어가 자 세린은 문에서 대기하고있던 사람에게 초대장을 줬고 그 사내 또한 건넸 다. 정원에 바람쇠기(?)위해 나가는 남녀들을 위한 문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만 그쪽에는 급사가 없었다. 이곳으로 들어가며 급사에게 초대장을 줘야만 방 명록에 이름이 기입되고 누가 출석했는지 체크가 되는 것이다. 다크와 그 사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옆에 서있던 남자가 그 초대장을 보면서 소리쳤다. "다크 크라이드 남작 각하와 코린트 제국의 까미유 크로데인 백작 각하이십니 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그 두 남녀에게, 특히 그 남자에게 머물 렀다가 사라졌다. 약간의 증오와 두려움이 얽힌 시선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들은 애써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서로 떠들어대기도 하고 춤을 추기 도 하고있었다. "별로 시선이 곱지 않지?" "좀 그러네요." "이래서 크라레스는 별로 오고싶지 않은 곳이었는데… 참, 그런데 너 고아냐?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그건 왜 묻죠?" "남작 영애(令愛;딸)라고 부르지 않고 남작이라고 불렀잖아. 그렇다면 결론은 무남독녀에 고아 뿐이지." 그 말에 다크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질문은 좀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미소를 지으며 말했기에 사내는 처음에는 그 뜻을 못알아들었다. 사내는 한참 생각을 해보더니 갑자기 얼굴이 벌개져서 말했다. 이제서야 그의 궁금증을 채 우기 위한 질문이 뜻하는 바를 깨닳았던 것이다. "아… 미안 미안, 의문점이 생기면 앞뒷 생각을 못한다니까. 미안하다. 안좋 은 일을 물어서… 어린 나이에 충격이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소녀의 안색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 었다. "그래가지고서야 매우 둔감하다는 말을 듣지 않아요?" 그 말에 사내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한가지에 미치다보면 딴데는 둔감해질 수밖에 없지." "뭐에 미쳐요?" "검(劍)……. 한쪽으로 천재소리를 듣다보면 다른쪽으로는 완전 멍충이 소리 를 듣는게 정상이니까. 이러지 말고 저기 앉자." 세린은 이런곳에 들어올 자격이 못되기에 하인들이 대기하는 장소로 갔고, 그 들은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재빨 리 가서는 음료수하고 과자 몇 개를 접시에 담아서 가져왔다. 그들이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있는 단발머리 여자가 다가와서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앉으면서 말ㅎ다. "역시 까미유는 재주도 좋군요. 어디서 이런 예쁜 아가씨를 만났죠?" "이쪽은지레느… 지레느 카브리에 양이야. 이쪽은 다크… 크라이드." "예. 반가워요." "예. 저도……." 잠시 얘기를 하면서 이 두 남녀는 이번에 코린트 제국에서 크라레스 제국의 승리를 축하하며 보낸 사절단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코린트는 크라 레스가 전후에 어떤식으로 행동할 것인지, 또 크라레스 궁정의 분위기는 어떤 지, 이번 전쟁을 눈감아준 댓가로 어느정도의 진상품을 바칠 것인지 등등 궁 금한 점도 많았고, 또 압력을 가할것도 많았기에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었다. 만약 크라레스에서 겨우 작은 땅덩이 하나 집어먹었다고 반코린트 기운이라도 팽배해진다면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박살을 내버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한 30여분 정도 대화를 나누다가 이만 돌아가겠다고 일어서는 다크를 향해 인 사를 건넨 후, 다크가 문을 나서는 것을 보며 재빨리 지레느가 까미유에게 질 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저 꼬맹이는 누구야? 도대체 정체가 뭐야?" "글쎄… 나도 오늘낮에 거리에서 만났을 뿐이니까 잘 몰라." "그런데 너 취향은 저런 어린애는 아니잖아. 이상하게 풍기는 분위기는 어린 애 같지 않았지만… 엘프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저 애는 앨프도 아닌 것 같던 데 시간을 꽤나 할애하면서 정성을 쏟는거 보면 뭐 캥기는 게 있지?" 그 말에 까미유는 살며시 목소리를 더 낮춰서 말했다. "이상한 점이 있기는 해. 묘한 분위기가 풍긴단 말이야. 상당히 성숙한 분위 기 같기도 하고… 또 겉모양과 달리 연약함은 보이지 않아. 슬며시 여자답지 않은 강인함이 풍긴단 말이야. 어쩌면 상당한 수준의 검객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말이야. 내 눈이 삔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역시나 하는 미소를 띄면서 지레느가 말했다. "검객이 아니라 정령술사야." "정령술사?" "응. 너가 그 애하고 들어올때부터 저 애 한테서 정령의 냄새가 나서 주의를 기울였지. 정령술사만이 정령술사를 알아볼 수 있잖아. 어쨋든 꽤나 강한 정 령술사인 것 같았어. 정령의 냄새가 상당히 강렬했거든." "어느정도인데?" "글세… 그게 알기 어렵다니까. 뭔가 강력한 정령의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기 는 하는데 그게 어떤 정령인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어." "불과 바람의 정령은 아니라는 말인가? 너가 부릴 수 있는건 불과 바람의 정 령잖아. 흠… 이럴줄 알았으면 지레인도 데려오는건데 잘 못했군." 지레인 자매는 타고난 정령술사들이었다. 언니인 지레인은 대지와 물의 정령 을, 동생인 지레느는 불과 바람의 정령을 부릴 수 있었다. 지레느의 경우 불 의 하급정령 살로스, 중급정령 살라만더 그리고 바람의 하급정령 실피드를 부 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둘이 모인다면 전기를 뺀다면 모든 종류의 정령을 부릴 수 있었다. "언니를? 언니는 대지와 물의 정령을 부릴 수 있으니까 도움이 될지도 모르 지. 하지만 언니가 부리던 정령의 냄새는 내가 다 안다구. 그 아이에게서 나 던 정령의 냄새는 대지의 하급정령 노움(gnome)이나 물의 하급정령 운디네 (undine), 중급정령 닉스(nix)도 아니었어. 정령술사는 한번 맡은 정령의 냄 새는 절대 잊지 않으니까 이건 신뢰성 있는 말이라구." "그럼 뭐야? 전기의 정령을 부린다는 말인가?" "그 외에는 답이 없지. 설마 하급정령은 부리지 않고 중급정령, 또는 정령왕 만 부린다면 몰라도… 하지만 그건 말이 안돼. 중급을 부른다면 하급은 언제 든 부를 수 있다는 말이 되니까 말이야." "그래서 저런 당당한 분위기가 나오는 건가? 불의 정령이나 마찬가지로 전기 는 완전히 파괴적인 정령이니까 말이야." "전기의 정령을 다룰줄 아는 정령술사는 많지 않아. 전기의 정령은 꽤나 친해 지기 어려운 존재들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일단 친해지면 상당한 득이 있어. 상대하기 매우 까다롭거든. 불의 정령을 검에 씌워봐야 화이어 블레이드(fire blade;화염 칼날)정도의 효과밖에 얻을 수 없지만 전기는 다르지. 검이나 강 철방패로 막으면 전기가 타고 들어오니까 말이야. 드래곤 본(용뼈다귀)이나 목검(木劍), 또는 나무방패를 쓰지 않는 한은 충격을 막기 힘들어. 아니면 처 음부터 메직 실드로 감싸고 싸우던지." "그래서 고아인데도 대접이 좋은 모양이군. 납치할까? 쓸데도 많을텐데……." 그 말에 당황한 지레느가 숨을 죽이며 반박했다. "미쳤어? 그러다가 발각되면 아주 곤란해." "큭큭… 농담이야." "그런데 저 아이 좀 이상한 점은 있어." "어떤?" "보통 정령술사가 단 한종류의 정령만 다루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대부분이 두가지 이상의 정령을 다루지. 상극(相剋)의 정령만 피한다면 정령을 다룰 수 있거든. 불과 물, 불과 대지의 정령은 완전히 상극이지. 그 조합만 피한다면 어느정도 가능성은 있지.그렇게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정령들이니까 말이 야. 그말은 저 아이가 최소한 1종류 이상의 다른 정령도 부릴 줄 알아야 하는 데 그걸 못부린다는데 있어." "그럼 어떻게 되는건데?" "그 말은 한종류의 정령에 매우 친화력이 크다는 말하고 같지." "……." "멍청한 표정 짓지마. 그토록 하나에 대한 친화력이 크다면 어쩌면 오랜시간 수련한다면 정령왕의 힘까지도 쓸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야." "정… 정령왕의 힘이라고?" "응. 전기의 정령왕 카르스타의 힘. 사실 정령왕을 소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 고 그 힘의 약간을 빌려쓸수있다는 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나지. 거의 7 싸이클급 전격의 힘을 낼수있으니까 말이야." "……." 7싸이클이란 말에 상대의 안색이 약간 굳어지는 걸 보며 지레느가 미소짓고는 말했다. "잘 키우면 대단한 재목(材木)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안될 가능성도 많지 만……." "……." "……." 한동안 말이 없다가 까미유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납치하자." "미쳤어?" "쉿! 7싸이클급이라면 엄청난 거라구. 거기다 고아라니까 잘만 달래면 코린트 를 위해 충성을 다 바칠걸? 밑져봐야 본전인데……." 그 말에 지레느도 약간은 솔깃한 듯 중얼거렸다. "글쎄… 그럴까?" * * * 다음날부터 까미유는 다크의 행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알수가 없었다. 의례적인 방문을 가장해서 귀족들 집에 들러 말을 빙빙 돌려가며 수소문을 해봐도 다크 크라이드라는 소녀는 없 었고, 더욱 황당한 사실은 크라이드 남작가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 들 그와 소녀가 함께 나타난 것을 보고 둘다 코린트의 귀족인줄 알았다고 말 하는데야 할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죽자고 수소문을 해본결과 이곳 크라레스 귀족층의 정보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크류넨 자작부인으로부터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 크류넨 자작 부인은 거의 세시간이나 별 재미도 없는 연애얘기와 스캔들을 떠들어댄 다음 마지막으로 제법 큰 스캔들이나 되는 듯 목소리를 낮춰가며 말했다. "호호호… 국왕전하께는 여색을 별로 안밝히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요즘 떠도는 소문을 들으니 그게 아니지 뭐겠어요." 목소리를 낮춰가며 말을 했기에 뭔가 큰 건수라도 챙기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 다. 까미유가 신경질나서 일어설까말까 망설이동안 크류넨 자작부인의 목소리 는 계속 이어졌다. "글세 국왕전하께서 요즘 사랑에 빠지셨다고 그러지 뭐에요. 벌써 소문이 파 다하게 퍼졌는데… 놀라지 마세요. 상대가 15살짜리 소녀라고 하잖아요? 긴 금발에 대단한 미인이라고 하더군요." 15살에 긴 금발, 미인이라는 말에 까미유는 자신의 성급했던 판단을 뒤로 미 루면서 약간 흥미를 나타냈다. "대단한 스캔들이군요." "글세말이에요. 얼마나 빠지셨는지 그 아이를 남작에 봉하셨다고 하더라구요. 하기야 왕비전하께 들키는게 약간 걱정이 되셨는지 비밀리에 봉하시기는 하셨 지만 그래도 그걸 기사단에는 발표를 하셨으니 이건 공식적인 작위죠. 왕비전 하께서 아신다면 얼마나 원통해 하시겠어요?" "놀랍군요. 하기야 국왕전하는 한창 혈기왕성하실때가 아닙니까? 그래, 그 소 녀의 이름은 뭐라고 하던가요?" "크라이드 남작이라고 들었어요. 이름은 모르겠구요.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 예 궁에서 기거하게 하신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하마터면 까미유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갈뻔 했다. 궁안에 처박아놨 으니 아무리 찾아도 없을게 뻔한 노릇이었고 또 납치도 매우 어려워진다. 국 왕의 애첩이라면 납치하기도 매우 성가실게 뻔했다. 적당히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한 30분정도 더 크류넨 자작부인과 떠들어댄 후 까미유는 사신 일행이 묶고있는 관사(館舍)로 돌아갔다. 아무리 막강한 배경을 지니는 까미유라도 왕궁안을 돌아다니며 수소문 할 수 는 없었다. 또 그런거 수소문 하러 다녔다간 그녀가 사라진 후 첫 번째 용의 자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소녀와 그녀 노예의 초상화를 그려가지고는 첩자 둘을 풀어 그녀들의 위치 파악을 명 령했다. 하지만 장소가 원체 왕궁 안이다 보니 수색작업은 매우 힘들었다. 코린트에서 파견한 사신 일행이 떠나기 이틀전 그날도 까미유는 여자를 꼬시 기 위해 거리를 나섰다. 자신의 뛰어난 용모와 분위기 덕분에 꼬시면 안넘어 오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 이곳은 코린트에 대해 별로 감정이 좋지못한 나라 였기에 자신이 코린트 사람이라는 것만 잘 숨기면 나머지 사항은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것이다. 보통 한 여자 꼬시는데 짧게는 30분, 길게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소모되기는 하지만 그는 구태어 귀부인을 꼬시기 보다는 평민들을 꼬 시기를 즐겼다. 그쪽이 훨씬 가식이 없었고 뒷맛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까미유가 사냥감이 없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산뜻한 모자를 쓴 분홍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눈에 띄었다. 전체적인 옷의 스타일을 보면 하녀같기도 했지만 까미유에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녀라도 얼굴만 예쁘고 몸매만 좋으면 되지 평생 대리고 살게 아닌 바에야 머리속에 들어있는 것과 그녀의 출신따위는 필요없는 것이다. 까미유는 쭉 쫓아가다가 상대의 얼굴을 보고는 약간 눈에 익은 얼굴임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꼬셨던 아가씨들 중의 하난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쪽 에서도 이쪽의 얼굴을 봤는데도 아는척을 안하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모양이 다. 이래저래 생각을 하면서 그녀를 따라가다 보니 그녀는 대장간에 서가지고 는 주인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왔던 짤막한 검을 그 주 인에게 넘기면서 몇가지 설명을 더 하는게 보였다. 그런 후 돌아가지 않고 계 속 서있는 걸 보면 어떤 주문한 사항이 완성될때까지 그곳에 서있을 것이란 계산이 단번에 나온다. 사실상 무료하게 서있다 보면 옆에서 말을 걸면 거절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게 완성되기까지 기다리자면 심심하기 때문이다. 까미유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는 그녀가 있는 쪽으로 갔다. "저… 말씀좀 묻겠습니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그녀가 자신쪽으로 얼굴을 돌렸을 때 까미유는 상대의 얼굴이 뭔가 이상하다 고 생각했다. 뭔가 발란스가 맞지않는 얼굴… 잠시 생각하던 까미유는 곧이어 그녀의 귀가 없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귀가 없다면… 그 귀는 저 모자안 에 있을 것은 당연한 일. 귀가 없는 동물은 없으니까 간단하게 추리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수인족(獸人族)이란 해답이 나온다. 그래서 얼굴이 낮이 익었 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묘인족이나 견인족, 조인족 등은 척 보면 그게 묘인족 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종(種)이 틀려서 그런지 자세히 보면 조금씩 틀리지만 서로 비슷비슷하게 생겼기에 알아보기 힘들다는 난점이 있었다. 흑 인종이 흑인종들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백인종이 흑인종들 중에서 어떤 한 흑 인을 알아보기는 매우 힘든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그건 수인족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쪽이 인간이라는 것은 빨리 알아보겠지 만 누가 누군지 알아보는데는 시간이 좀 걸리는 것이다. 하지만 노예들의 경 우 원체 인간들과 섞여살면서 인간들의 얼굴을 많이 보기에 인간들이 수인족 을 보는것과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그들은 수많은 인간들의 얼굴을 보아왔기 에 그 모양을 구분할줄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까미유가 잠시 생각을 한다고 멍하니 있는 사이 상대도 이쪽을 보면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생각났다는 듯 말 했다. "저… 혹시 무도회에 주인님과 함께 들어가신 나리가 아니십니까?" "오, 너였구나. 그래 다크 크라이드 남작은 잘 계시냐?" 까미유는 혹시나 노예가 혼동한것일 수도 있기에 그 주인 이름을 분명히 밝혀 확인작업을 했다. 만약 여기서 노예가 '실례했습니다. 어쩌구' 한다면 그냥 돌아설 생각이었는데 노예의 대답은 그의 질문에 흡족한 것이었다. "예. 나리."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냐?" "주인님 심부름 왔습니다. 검 손잡이를 바꿔달라고 하셔서요." "너희 주인은 검도 쓰시냐?" "예." "손잡이를 어떻게 바꿔달라고 했는데?" "손잡이가 너무 짧다고 하시면서 손잡이를 30Cm로 해달라고 하셔서요." "손잡이를 그렇게 길게? 검이 꽤 무거운 것인 모양이지? 롱 소드냐?" "아니요. 샤벨입니다." 노예가 가리킨 곳을 보니 과연 검신이 60센티 정도 되는 샤벨의 손잡이를 떼 내고 대장장이가 30센티나 되는 손잡이를 붙이고 있었다. 60센티 검에 양손검 에나 붙일만한 손잡이를 붙이고 있는 걸 보고 까미유는 기가 막혀서 말했다. "저렇게 하면 검이 모양이 안나는데 그걸 너희 주인은 알고 시킨거냐?" "예. 정확히 그렇게 명령하셨어요. 30센티짜리 손잡이를 붙여오라구요. 대신 칼날받이는 없애버리라고 하시더군요. 왜그런지는 모르지만……." "참. 너희 주인은 어디서 사시냐?" "왕궁에요." "한번 찾아뵈도 상관없겠는지 물어봐 다오." "예. 하지만 제가 물어봐도 소용없을 겁니다. 주인님 찾아오는 손님은 본적이 없거든요. 참 토지에르 나리는 한번씩 들리시지만요." "왕실 마법사 토지에르 경 말이냐?" "예." "그럼 너희 주인은 토지에르 경의……." 까미유는 뒷말을 못이어서 조금 버벅거렸다. 잘못하면 정부(情婦)라는 말이 나갈뻔 했지만 그건 자신이 생각해도 답이 아니었다. 토지에르의 정부에게 어 떻게 작위가 수여되겠는가? 또 왕궁에서 살고……. "그냥 친구세요. 어쩌다가 한번씩 찾아오시구, 또 주인님을 많이 생각해주시 는 분이죠." '그렇다면 어찌된 일이지? 아무도 안찾아온다면 왕의 첩은 아니잖아. 그렇다 면 설마 왕의 숨겨놓은 자식? 설마… 그것도 아니면 실력 때문에? 그것도 설 마지. 겨우 14살짜리 꼬마계집애를 보고 뭐가 답답해서 벌써부터 작위까지 주 면서…….' 까미유는 도통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잠시 까미유가 궁리하는 동안 검은 완성 되었고 노예는 대장간에 값을 지불하고는 전에 붙어있던 손잡이와 검을 받아 들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까미유는 따라가면서 몇가지 말을 주고받았 다. 일단 어느쪽으로 가는지 감시를 해두면 편하기 때문이다. 한참 감시를 해본 결과 그녀는 왕궁이 아닌 왕궁 옆쪽에 있는 건물로 검을 들 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또다른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왕궁 바로옆의 건 물이었기에 경비가 매우 삼엄한 축에 들어가는 곳이다. 그 말은 매우 소중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는 말, 그렇다면 저 아이의 정체는? 왕궁으로 곧장 들어 가지 않은 걸 보면 후궁은 아니었고 정부? 숨겨놓은 딸? 미래를 보고 투자? 그것도 아니면 어떤 총애하던 인물의 자식? 이때 총애하던 인물은 귀족은 아 니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평민에게 왕이 신세질 이유가 없으니 더욱 아리송 해진다. "제길… 어쨋든 위치는 대강 알아냈으니 납치하고 보는거야." 왕궁에 대한 괴한들의 습격은 한밤중에 이루어졌다. 단 세명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인물들이었고, 그런만큼 기척을 숨기고 매끄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다가 이들로서는 다행인 것이 크라레스에서 보유하고 있는 그래듀에이트의 2/3가 모두 점령지에 가있다는 점과 목표물이 왕궁 안이아닌 왕궁에 부속된 건물에 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그곳은 경비병들의 감시가 소홀할 것이다. 며칠간에 걸친 첩자들의 감시를 통해 목표물의 방까지 알고있었기에 그들은 지체치 않고 3층에 위치한 그 방을 향해 뛰어올랐다. 발코니들이 줄줄이 연결 되어있기에 그들이 3층까지 올라가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 지만 그들이 그 방으로 뛰어들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건 그 목표물이 잠자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벌써부터 알 고있었던 듯 얄팍한 샤벨을 뽑아들고는 저항했다. 여기서 그들은 두 번째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검술실력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 다. 간단하게 생각하고 뛰어들었던 첫 번째 사내의 목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면 서 그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매끄러운 검놀림. 어린 계집애라 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기술과 그 속도에 그들은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각기 무기를 뽑아들고는 그녀를 최대한 빨리 제압하려고 했다. 두 번째 사내 가 휘두르는 검을 재빨리 막아내면서 뒤로 물러섰던 상대는 튕기듯 앞으로 나 오면서 예리한 각도로 세 번째 사내를 공격했다. 정신없이 세 번째 사내가 막 는 동안 두 번째 사내가 그녀를 향해 돌진해가려고 하자 또다시 재빨리 뒤로 빠져서는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어쨋든 기술은 엄청나지만 힘과 무게에서 매우 떨어지기에 상대는 자신의 속 도와 기술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공격 및 방어법을 택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상대는 이쪽을 죽여도 되지만 이쪽은 저쪽을 죽이지 못하니 그게 더 큰일이었 다. 이런식이라면 상대를 제압하기는 매우 힘들어진다. 어쨋든 잡아가려는 쪽과 잡혀가지 않으려는 쪽이 맞붙었으니 결코 조용할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챙챙거리는 소리가 몇번 들리지도 않아서 거의 문을 부 수듯이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본 순간 그들은 세 번째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 을 깨닳았다. 그 세 번째 문제점은 뛰어든 그 사내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결코 만만한 기사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해줬기 때문이었다. 겨우 짧은 그 시간에 이리 뛰어든걸 보면 이자는 아주 근처에 있었을 거라는 것을 예측하게 해줬 다. 그 말은 이 남자가 여자애의 호위병이라는 말이었고, 호위병으로 그래듀 에이트 급을 세워둘 정도라면 이 여자애의 신분은? 어쨋건 세 번째 문제점을 깨닳는 순간 그들은 창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내리며 탈출을 시도했고, 나중 에 뛰어든 사내는 검을 뽑아들고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추격해왔다. 다크는 거의 박살난 창문을 통해 씁쓰레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바라봤다. 오늘 있었던 일은 매우 급박했다. 운기조식 중에 낌새가 수상함을 포착하고 재빨리 운기조식을 마치기는 했지만, 상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였다면 운기조 식을 채 풀기도 전에 제압당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경황이 없다보니 마법장갑 은 착용도 못하고 적들과 싸우는 사태를 빚었을까. 마법장갑만 끼고있었다면 모두 다 죽일수도 있었겠지만, 장갑이 없는 그녀로서는 하나 죽인것만 해도 천행이었다. 그것도 며칠전에 손잡이를 양손용으로 개조를 한 덕분에 크게 힘 에서 밀리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다음부터는 장갑을 벗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장갑을 끼고 있을 때 실 바르가 돌아왔다. 아무리 그래듀에이트라도 야밤에 혼자 놈들을 추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자신이 호위해야 하는 사람에게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 다친곳은 없나요?" "덕분에." "방을 옮기시죠. 창문이 깨져서 여기서 주무시지는 못합니다." 그런 후 사건이 끝난 후에야 들어와서 여기저기 물건을 정돈중인 세린을 보며 말했다. "세린, 빨리 아씨를 모셔라." "예,나리." "그자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예. 모두들 도망쳤습니다. 야밤에 수색은 불가능하니 내일 아침에 수색을 시 작할겁니다." * * * "어떻게 되었나?" 까미유의 질문에 검은 복장을 한 두 인물들은 고개를 푹 숙인채로 말했다. "실패했습니다." "실패 원인은?" "예. 세 가지가 문제였습니다." "세 가지? 뭔가?" "첫번째는 우리가 그 방에 도착했을 때 벌써 싸울 준비를 하고있었다는 겁니 다. 상대는 대단히 예민한 감각을 지닌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옆에서 듣고있던 지레느가 참견했다. "정령을 다룬다면 정령에게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거나 문제가 있을 때 신호를 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어요. 그러니 그건 앞으로 조심해야 할 사항이군요." "두번째는 목표물의 검술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2호를 단칼에 목을 잘 랐으니까요." 그 말에 까미유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단칼에? 그 아이의 힘으로 그건 대단히 무리일텐데……." "사실입니다. 대단한 기술의 소유주였습니다. 그리고 저 상처도 그녀에게 당 한 겁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아주 예리한 긴 상처가 나있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 만 아마도 그것 때문에 꽤나 피를 많이 흘렸을 법한 상처였다. 그들은 그 상 처를 실바르를 따돌린 후 포션으로 치료하고는 줄기차게 도망쳐서 까미유에게 보고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개인 경호병이 한명 붙어있습니다." "경호병 한명가지고……." "그 경호병의 실력이 거의 그래듀에이트급이었습니다." "그래듀에이트라고?" "예. 그자는 가죽갑옷을 입고있었는데 거기에 콜렌 기사단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자는 잠시 추격하다가 아무래도 여자쪽이 걱정되는지 그냥 돌 아갔기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점점 더 놀라게 만드는 아가씨군. 마법같은건 쓰던가?" "예? 마법을 쓰는건 못봤습니다. 순수한 검술이었습니다." "역시… 내 느낌이 정확했나?" 까미유가 중얼거리자 그 말을 듣고는 지레느가 말했다. "마법사와 달리 정령술사 중에는 검을 쓰는 사람도 많아요. 정령마법에 깊숙 히 빠져들지 않고 그냥 정령만 부리면서 검을 쓰는 사람도 있으니까 단순하게 생각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검술만으로 이들을 그토록 고생시켰다는 걸 보면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군요." "생각보다 더 거물인 것 같은데? 언젠가는 납치를 해와야겠어. 흐흐흐…" * * * 끼기기기기긱~~~! 오랫동안 열리지 않던 철문이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열리자 그 공간을 타고 빛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그리 강한 빛도 아니었지만 오랜시간 어두운 공 간에서 생활한 그들에게 그 빛은 너무나 강렬했다. "모두들 나왓!" 오랜시간 지하감옥에 갖혀있던 시드미안 일행은 갑작스런 상대의 행동에 어리 둥절 해졌다. 장시간 감옥안에 가둬두고는 모른척 할 때는 언제고, 모두들 밖 으로 끄집어 내기에 혹시 고문이라도 가하려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끌려 간 곳은 놀랍게도 목욕탕이었다. 목욕탕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발사는 그들의 길게 자란 머리와 수염을 깨끗하게 다듬어주고는 나갔고 그 다음은 목욕이라 는 코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깨끗하게 씻어. 옷은 여기 있으니까 씻은 후 이옷으로 갈아입도록!" 정말 오랜만에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서 그들은 저마다 머리를 굴린다고 바 쁠 수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감옥에서 꺼내서는 목욕에 깨끗한 옷을 입힐까? "혹시 처형하려는 게 아닐까요? 죽이기 전에는 왠만한 소원도 들어준다던데… …." "기분나쁜 소리 하지마!" 시드미안은 스미온의 말을 묵살했지만 아무래도 속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 다. 사실 빼앗아갈 것은 다 빼앗았으니 이제 놈들이 자신들을 죽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시드미안은 죽기 전에 가족들의 얼굴이라도 한번 볼수있 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자신의 부인과 겨우 다섯 살밖에 안된 예쁜 딸을 말이다. 어쨋거나 그들이 몸을 다 씻고난 후 옷을 새걸로 갈아입고나자 곧장 식당으로 안내되었고 제법 먹을만한 음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기라고는 감옥에 갖 혀 있으면서 먹은 기억도 없었기에 그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마지막 만찬을 즐 길 수밖에 없었다. 감시병은 몇 명 되지도 않았지만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팔찌가 채워진 지금 도망치려고 해도 그 무장한 감시병들을 헤치울 자신은 없 었다.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없는 판에 어떻게 도망친다는 말인가?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안내된 곳은 제법 넓직한 회의실이었다. 왜 상대 가 이런곳으로 자신들을 끌고왔는지는 알수 없지만 모두들 의아함을 느끼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놈들이 왜 여기에 데려 왔을까요?" "안토니는 혹시 집히는게 없소?" "글세요. 시드미안 경. 어쩌면 여기서 최후 심문을 한 후 처형하려는 건지도 ……." 이때 문이 열리면서 마법사 한명과 기사 한명이 들어왔다. 그 기사는 그들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바로 그들을 잡아온 프로이엔이었기 때문이다. 그 마법 사는 그들을 미소띈 얼굴로 쭉 훑어본 후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반갑군요. 모두들……. 여러분들은 여기가 어딘지 매우 궁금할 것입니다. 여 기는 크라레스 제국이지요. 본국은 가증스러운 코린트 제국을 무찌르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러는 중간과정에서 여러분들이 잡혀온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원래는 여러분들을 처형해버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사건이 하나 터지면서 여러분들이 우리들에게 협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어 회유를 해볼까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놀고 있군." "닥쳐라. 우리가 어떻게 네놈에게 협조한다는 거냐?" "왜 협조를 못한다는 것입니까? 당신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협조하는 길 외에 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협조하신다면 압수했던 안토로스들도 돌려드리겠습 니다. 돌아갈 곳도 없는 지금, 저희들과 함께 반코린트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국왕과 국민들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헛소리 하지마라. 그게 어떻게 국왕 전하와 국민들의 뜻에 따른다는 거냐? 트루비아 왕국은 코린트의 속국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다. 어찌 코린트를 배신하는 것이 전하와 국민들의 뜻과 부합하는게 되겠는가?" 그 말에 마법사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현재 트루비아 왕국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멸망했죠. 코 린트는 트루비아를 마신의 꾀임에 속아넘어가서 사악한 짓을 저지르는 부도덕 한 국가로 선포했죠. 코린트의 타이탄 20여대와 2개 보병사단, 그리고 코린트 를 지지하는 동맹국들에서 보낸 타이탄 50여대가 트루비아를 완전히 폐허로 만든 것이 일주일 전입니다." "거… 거짓말 하지마라." "이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트루비아의 국왕과 귀족 30여명은 코린트로 끌려가 황제가 보는 앞에서 '피의 광장'에서 참수(斬首)되었지요. 또 왕족들이나 귀 족들 중에서 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경들의 가족들은……." 마법사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그들을 훑어봤고 모두들 긴장했다. 만약 저 빌어 먹을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의 가족 또한 노예신세를 면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상대는 약간 긴장한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빙긋 미소를 지은 후 말을 이었다. "모두 다 노예… 신세는 면했죠. 모두들 프로이엔이 납치해왔으니까요. 그 가 족들이 트루비아가 멸망하는 순간을 봤으니 나중에 만나보고 확인해보세요. 트루비아의 국왕은 그 왕자를 대피시키는데 성공했더군요. 트루비아가 가진 6 대의 타이탄과 12명의 기사, 3명의 마법사에게 왕자의 도피를 부탁했습니다. 덕분에 트루비아는 반항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박살났지만 말이에요. 코린트는 지금 그들을 추격해서 죽이기 위해 광분하고 있지만 아직 잡지 못했죠. 또 잡 기도 좀 어려운게 코린트 국내도 아니고 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에 군 대를 대놓고 투입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죠." "우선 가족들을 만나보고 싶소." "좋습니다. 일단 가족들과 상의를 해보세요. 그런 후에 의논을 다시 해보기로 하죠. 참, 나중에 가족을 확인하신 후에 프로이엔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해주 시는게 좋겠군요. 저친구 납치한다고 꽤나 고생했으니까……." 다크가 정신을 차렸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캄캄했 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어두움. 하지만 이정도에 공포를 느낄 다크 는 아니었다. 이때 뭔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아직 변성기에 들어가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같기도 하고 조금 분간이 안가는 목소 리기는 했다. "도망가… 그가 오기전에 도망가." '그? 그가 누구야? 왜 도망쳐야 하지?' 어쨋든 도망치기는 싫었지만 이런 어두운 공간에서 싸움을 한다는 자체는 무 리였다. 뭐가 보여야 싸우지. 또 자신의 감각은 아직 완벽한 수준까지 발달하 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사방에 빛이라고는 들어 오지 않기에 도망치거나 숨을 장소도 찾을 수 없었다. 또 이런 어두운 공간에 서 나를 찾아낼 수 있는 놈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어둠 저편에 서 굵직한 저음이면서도 쉰듯한, 너무나 음침하고 사악해서 듣기에 거북한 소 리가 들려왔다. "네 발전속도는 정말이지 놀랍군. 크흐흐……." 어두운 공간 때문에 놈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힘과 위압감, 존재감 이 자신이 어둠 저편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크는사실 상대의 엄청난 위압감 때문에 공개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게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 이었지만 그녀는 일단 검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왼쪽 허리로 손을 가져갔지만 잡히는게 없었다. 그녀는 당황해서 무의식중에 허리를 힐끗 봤다. 여태껏 못느낀 거였는데 사방은 어둠에 싸여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몸은 선 명하게 보였다. 자신이 입은 옷도, 허리에는 그냥 허리띠만이 있을 뿐, 검은 채워져있지 않았다. 자신의 비무장을 눈으로까지 확인한 그녀는 투덜거리면서 맨손으로라도 상대해 주겠다는 듯이 자세를 갖추며 외졌다. "네놈은 누구냐?" "나? 크흐흐흐흐… 네년은 지금 알 자격이 없어." "네년이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 찢어 죽여주겠다." "크하하하… 자아는 남자이되, 육체에 동화되어 점점 자아를 상실하고 있는 바보같은 년이 감히 이 고귀하신 나에게 저항할 힘이 있을까?" 그 말에 다크는 분노해서 외쳤다. "닥쳐랏!" "좋아. 말로는 안통할 것 같으니 우선 네년의 기를 좀 죽여놓고 대화를 시작 하는게 좋겠군. 크흐흐… 너의 그 보잘 것 없는 힘을 느끼고 나에게 굴복하 라. 아쿠아 소드(aqua sword)!" 그와 동시에 다크는 엄청난 무언가가 날아오는 것을 느끼고 최대한 빨리 몸을 숙였지만 그 것은 위로 지나가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의 일부를 쑹당 잘라놓고 는 통과했다. '검인가? 아니면 마법인가?' 하지만 한가한 생각 하고있을 틈은 없었다. 상대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고 다크는 자신이 여태껏 쌓아올린 모든 기를 끌어올리며 저항했다. "안돼! 그녀를 제발 놔둬요. 그녀는 아직 힘도 없단 말이에요." 어디선가 둘의 싸움을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기분나쁜 목소리의 주인 공은 하나도 멈추고 싶은 생각이 없는모양인지 또다시 주문을 외웠다. "아쿠아 에로우(aqua arrow)!" 뭔가 위험을 감지하고 다크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면서 보호했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엄청난 충격에 나뒹굴어졌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그녀의 얄팍 한 호신진기를 돌파하고 대여섯 군데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크흐흐흐… 좋아. 그정도는 견뎌줘야 말이 되지." 그렇게 광기를 부리면서 그놈은 다크를 무자비하게 공격해댔다. 어둠속에서 날아오는 그 무언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놈의 무기는 다양했다. 다크가 자신 이 가진 모든 진기를 끌어올려형성한 호신강기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내상 을 입힐 정도로 둔중한 파괴력을 가진 것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옷과 함께 왼 쪽 팔을 통째로 숭당짤라버릴 정도의 날카로운 것까지 매우 다양했다. 피를 토하면서 뒹굴고있는 다크를 공격하면서도 그놈은 광기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크하하하… 나에게 복종하라. 네 몸과 마음은 내것! 나의 종이 되어라. 크하 하하…"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고 내장이 으깨지고 몸이 찢어지는 가운데에도 다크는 정신을 잃지 않고 놈을 공격할 방법을 궁리했다. 자신의 몸은 잘 보였기에 손 발이 잘려나가며 피가 튀는 것을 보는 것은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거기 에다가 잘려나간 후 쏟아져 들어오는 지독한 고통… 그녀는 놈을 정말 갈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없었다. 순간 절망감이… 이제 끝장이 라는 절망감이 그녀를 엄습해왔지만 그녀는 그 생각을 간신히 떨쳐버리고 그 절망감을 상대에 대한 증오로 바꿨다.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해도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온다면… 그 기회를 이용해서 적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육체가 박살나면서 지독한 통증이 그녀를 덮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강인한 인 내력으로 그걸 참고 견뎌냈다. 예의 이상한 목소리는 그들간의 일방적인 싸움 을 말리려고 앵앵거렸지만 그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광기에 찬 공격을 받아냈을까……. 지독한 고통으로 정신마저 희미해져 가는데 공격이 멈추며 예의 그 목소리가 비웃는 듯 지껄여댔다. "지독한 년. 우선 오늘은 인사차 왔으니까 이쯤 해두지. 다음에는 널 꼭 취할 것이다. 크하하하……." "헉!"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머리맡에는 세린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주인에게 서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는 식은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다크는 몽롱한 시선으 로 헐떡거리다가 약간 제정신이 들자 힘빠진 음성으로 물었다. "여기는……?" "왕궁 안입니다. 주인님. 몸이 편찮으십니까? 의사를 불러 올까요?" "아니! ㄷ어. 악몽을 꾼 모양이군." "열은 없으신 것 같은데… 땀을 너무 흘리셔서, 간단하게 목욕이라도 하고 다 시 주무세요. 땀에 옷이 완전히 젖었으니 새로 옷도 갈아입으시구요." "정말… 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인 꿈이군. 흐유……." 다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사람은잠을 자지 않을 수 없다. 다크같이 내공을 수련한 고수의 경우 그 수 면 시간을 정상인보다 월등하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이지 완전히 자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 남자의 육체를 가지고 현경의 경지를 쌓았을때도 잠 은 잘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 수면시간이 매우 짧았기에 남들이 눈치채지 못 한 것일 뿐……. 4-5일에 한번씩 2각(30분)정도만 자면 버틸 수 있는 사람을 누가 자는지 안자는지 확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다크의 몸은 여기서 말하는 마스터, 즉 화경(化境)의 경지에도 올라서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그렇기에 매일 몇시간이라도 수면은 필요했고 악몽을 꿨던 다음날도 수련을 하다가 새벽이 되었을 때 쯤 아무 생각없이 잠 자리에 들었다. 다크는 또다시 자신이 어두운 공간속에 서있다는 것을 알고 몸서리 쳐지는 두 려움을 느꼈다.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정말 울부짖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자신의 연륜과 체면 때문에 울부짖지는 못 했다. 하지만 이게 꿈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누가 그랬더라? 꿈일때는 빰을 꼬집어보면 알수있다고. 꿈이라면 안 아플거라고 생각하며 다크는 자신 의 뺨을 힘껏 비틀었다. "윽!"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이건 꿈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또 그녀에게 예 의 그 앵앵거리는 도움도 안되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가. 너는 아직 상대가 안돼. 그와 싸우면 안돼." 오히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다크는 버럭 성을 내며 외쳤다. "닥쳐. 어디로 도망친단 말이야? 도망칠 곳이나 알려주고 그딴 소리를 해야 지." 하지만 다크는 어쨋든 그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쉬운일이 아니었 다. 이제 잠시후면 또다시 만나기 싫은 주인공이 등장할 것이다. 그 전에 여 기를 벗어나야 한다. 역시 다크의 예상대로 기분나쁜 목소리의 주인공은 곧이어 나타났다. "크흐흐흐… 어때? 나의 종복이 되기로 결심했나? 하루나 시간을 줬잖아." "빌어먹을! 네놈은 누구냐?" "노예가 주인을 알 필요는 없지. 네년은 나에게 충성하기만 하면 돼. 더 이상 알 필요는 없는거야." "거절한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제발 그녀를 놔둬요. 부탁드려요." 소녀의 앵앵거리는 목소리는 양쪽 모두에게 묵살되었다. 누구도 그녀의 목소 리에 신경쓰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녀는 계속 싸우지 말 것을 부탁하고 떠들어 댔지만 양쪽다 그 목소리를 듣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아직 맛을 들본 모양이군. 크하하하… 주인에게 반항하는 노예가 어떻게 되 는지 아르켜 주마. 죽어라. 으하하하……." 또다시 어둠속에서 날아오는 무자비한 공격.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어떤 식 으로 나올지 예상을 하고있었기에 처음의 몇번은 피할 수 있었고, 그 다음 이 어진 2번의 공격은 호신강기로 튕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전날 과 마찬가지였다. 살이 찢어지고 다리가 잘려 나갔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 증오를 느끼면서다크는 자신의 몸이 박살나는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다. 똑…똑… 곧이어 예쁘장한 묘인족이 문을 살짝 열고는 귀여운 귀를 쫑긋거리며 나타났 다. "주인은 계시냐?" 그 말에 그녀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예. 지금 수련 중이십니다.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시드미안 일행이라고 하면 알거야."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이어 묘인족 소녀는 다시 나와서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시드미안 일행은 자신의 눈을 믿기 어렵다는 듯 놀라운 표정으로 다크를 바라봤다. 그녀는 상 당히 많이 변해있었다. 그 모습은 과거 한달동안 술에 쩔어있을때의 모습보다 더 비참했다. 홀쭉하게 야윈 너무나 창백한 얼굴. 앙상한 손을 보고 그들은 너무나 가엾어서 하마터면 껴안을 뻔 했지만 상대가 누군지 떠올리며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여기 생활이 별로 좋지 못한거야?" 그 말에 다크는 피로한 듯한 퀭한 눈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생활은 괜찮아. 악몽 때문에 잠을 잘 못자서 그래." "악몽? 아무리 악몽을 꾼다고 이렇게까지……." "나도 놀라는 중이다. 내가 이렇게 나약했었는지 하면서 말이야. 그건 그렇고 어쩐 일이야? 너희들도 잡혀온거야?" 그 말에 시드미안은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휴……. 처음에는 잡혀왔었지. 그런데 조금 있다가 사정이 바뀌었지. 내 조 국 트루비아가 코린트에게 멸망했기 때문이야. 그 얄미운 토지에르 개자식이 우리들을 불러 말하더군. 자네들의 조국은 멸망했으니 우리와 손잡고 코린트 를 무찌르자. 제길! 그자식 때문에 트루비아가 멸망한거나 마찬가지야. 그놈 들이 드래곤 하트만 훔쳐가지 않았다면 트루비아는 멸망할 이유가 없었다구. 그 원인을 제공한 놈이 뻔뻔스레 그런 말을 하다니. 제기랄! 하지만 나는 그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어. 안그러면 트루비아의 재건은 꿈도 꿀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들과 손잡고 곧장 우리는 국외로 탈출한 왕자님 일행을 안전하게 이리로 모셔와야만 했다구. 그 때문에 너한테 바로 연락하지 못하고 떠나서 미안해. 4일 전에야 겨우 도착했어." "그래도 일이 잘 되었다니 다행이군." 다크가 모두를 쭉 둘러보며 피로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하자 딴사람들도 그 녀에게 미소로서 답해왔다. 하지만 그녀를 쭉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고있던 안 토니가 궁금한 듯 물었다. "아까 악몽때문이라고 했나?" "응." "도대체 어느정도나 악몽을 꾸면 사람이 이렇게 마를 수 있는거야? 좀 자세히 설명을 해봐. 악몽 한두번 꾼다고 해서 사람이 이렇게 마를수는 없어." "한두번? 한달 정도 악몽만 꿔봐. 매일 몸이 잘리고 피가 터지면서 지독한 고 통과 두려움에 떨어보라구." "한달이나?" "그래도 약간씩 놈에게 버티는 시간이 늘어나는 거나 있으니까 아직까지 버티 고 있지 안그랬으면 벌써 자살했을거야. 처음에는 완전히 꺼먼 상황에서 일방 적으로 터졌는데 지금은 조금씩 밝아지고 있어. 어제 꿈에는 놈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이상하네. 매일 같은 꿈이라 이거지. 토지에르에게 이 말을 해봤 어?" "아니. 그놈도 바쁜 것 같고… 또 그렇게 악몽이 계속될거라고는 생각도 안했 으니까 말 안했지. 사실 그리 대단한 악몽도 아니었고……." 그 말에 옆에있던 세린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노예가 주 인과 주인의 친구들과 대화하는데 끼어들수는 없었지만 그녀또한 자신의 주인 이 말라죽는건 볼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의에 어긋나는 걸 알면서도 참견한 것 이다. "대단한 악몽이 아니라니요. 주인님. 매일 시트가 흠뻑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시면서 그게 대단한게 아니면 도대체 어떤게 대단한 건가요?" "조용히 해." "어쩌면 토지에르가 건 저주의 부작용인지도 모르니까 토지에르에게 가보자." 그런 후 안토니는 시드미안에게 말했다. "저는 다크하고 토지에르한테 가겠습니다. 경께선 일행들과 먼저 돌아가십시 오." "알겠네." 토지에르도 안토니와 함께 들어서는 다크의 몰골을 보고 놀랐다. 그 놀라움은 곧이어 세린을 향한 분노로 드러났다. "세린 이년을 당장……."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는 토지에르를 향해 다크가 싸늘하게 외쳤다. "그 아이 탓이 아니야." "이정도나 되면 보고를 했어야지." 토지에르의 반박에 다크가 비웃듯이 말했다. "세린은 황제가 준 내 노예야. 네것은 아닌걸로 아는데?" "그건… 그렇지만." 그들이 쓸데없는 걸로 신경전을 벌이자 안토니가 그들을 떼어놓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참견했다. "자자… 일단 앉아서 대화를 하시죠. 토지에르경. 혹시 경께서 건 저주에 부 작용같은 건 없습니까? 악몽 같은……." "악몽? 디스라이크 걸려서 악몽 꾼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처 음에 걸려서야 악몽을 꿀수도 있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서 꾸는 경우는 글세… …. "매일 악몽을 꾼답니다. 그것도 거의 한달정도나 계속……." 그 말에 토지에르는 다크를 보면서 물었다. "도대체 어떤 악몽인데? 줄거리가 똑같은거야? 아니면 틀린거야?" 그 말에 될 수있으면 꿈의 내용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다크가 대답 했다. "똑같은 줄거리에 겁먹을 바보도 있냐? 처음 시작하면 어둠속에서 어떤 놈이 공격을 해. 공격 방법은 아주 다양하고 매일 바뀌지. 또 그놈이 말하는 내용 도 약간씩은 틀려. 하지만 정말 진짜로 그놈과 싸우는 것은 꿈이야. 그 고통 이나 소리… 내가 죽기 직전쯤 되어 공격이 멈추는데 그러고 나면 잠에서 깨 지. 하지만 잠에서 깨고나면 방금 전에 직접 당한 것 처럼 생생하게 떠오르 지." 다크는 토지에르를 보며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아직까지 안미친게 이상할 정도야." "기억은 있어? 그러니까 전에 당했던 것이라든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상의해 봤자잖아." "아니. 기억은 있어. 어제 당한 일이나 놈에대한 공포 등등 자기전에 먹었던 쥬스까지 기억나지. 이상하게도 내 몸은 잘 보이니까 말이야. 몸이 두토막 나 서 자기전에 마셨던 쥬스가 흘러나오는 걸 보는 기분은 정말 으이그……. 하 지만 이상하게도 놈에게 결국은 죽을거라는 생각은 들지않아. 안그래도 당할 거면 속편하게 죽은 다음 일어나면 되는데… 도저히 날아오는 마법에 내 목을 들이대서 순식간에 끝낼 생각은 죽어도 안나. 어쨋든 놈을 이길려고 아둥바둥 하다가 비참하게 죽을 뿐이지." "하! 거참! 그래, 상대가 뭐라고 하던가?" "맨날 하는 말이야 똑같지. 내 노예가 될거냐? 내가 싫어 하고 대답하면 그놈 이 음흉하게 웃으면서 말하지. 아직 맛을 들봤군. 죽어봐라. 그런다음 난 묵 사발 나다가 잠에서 깨지." "상대의 무기는 뭔가? 검? 창? 아니면 마법?" "마법." "어떤 마법인지 기억하나?" "어두워서 뭐가 날아오는지는 몰라. 팔 다리가 아주 멋지게 피를 뿜으며 떨어 지는 걸 보면 칼날같은것도 날아오는 모양이야. 며칠 전에는 목도 떨어져봤는 데 아주 기분 더럽더군." "그렇다면 혹시 주문같은 건 들리지 않았나?" "주문이야 당연히 들렸지. 그러니까 그놈이 마법을 쓰는지 알지. 아쿠아 에로 우, 아쿠아 소드, 아쿠아 헤머 뭐 그정도야. 하지만 주문한번 외웠을 때 날아 오는 숫자나 위력은 매번 바뀌더군. 아쿠아 헤머는 보통 한 대 맞으면 호신강 기를 찢어놓고도 내장을 묵사발을 내지. 정말 뼛속까지 그 고통이 울리더군. 혹시 그런 마법 알아?" 그 물음에 토지에르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신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정령마법이야. 그것도 물의 정령을 이용한." 그 말에 다크가 씁쓸한 표정으로 아쿠아 룰러를 가르키며 말했다. "그러면 범인은 이녀석이야?" "그런지도… 아니, 그럴 거야." "하지만 이걸 사용한 후 한동안은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그리고 이놈은 나를 주인으로 택했다고 했잖아." 그 말에 토지에르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그건 아쿠아 룰러가 너를 주인으로 택했다는 거지. 정령왕 드라이어드가 너 를 아쿠아 룰러의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말은 아니야. 지금 너는 드라이어드의 시험을 거치는 중이야. 그 시험에 통과한다면 주인으로 인정해 주겠지만… 글 세, 실패한다면 죽음이나 아니면 드라이어드의 노예가 되겠지." "제길… 이따위 반지 필요 없어." 다크는 반지를 뽑으려고 했지만 반지는 뽑히지 않았다. 아예 살하고 완전히 붙어버렸는지 찰싹 붙어서 떨어질 생각조차 안했던 것이다. "잘라야겠군." "자른다고?" "응. 손가락을 한번 잘라보고 잘리면 다행이고, 만약 안잘린다면 손목이나 팔 목을 잘라야지." 다크는 잠시 손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좋아. 아직은 견딜만 하니까 좀 더 버텨보고 나중에 도저히 안되면 자르기로 하지." 칠흑의 공간. 쓰러져있던 그녀가 서서히 눈을 뜨자 또다시 앵앵거리는 목소리 가 들려왔다. "빨리 도망쳐. 너를 죽일거야." "너는 누구냐?" "나? 난 아쿠아 룰러, 약속의 증거야." "약속의 증거같은 소리 하고있네. 그럼 그놈은 누구야?" "약속의 지키는 자. 드라이아드지. 그가 오기전에 빨리 도망쳐." "제기랄. 도망칠곳도 없다니까 계속 도망치라고 해. 뭐 무기가 될만한거 없 어? 저자식은 너무 강해." "그런거 없어. 하지만 있어. 있으면서도 없는거야." "무슨 대답이 그따위야. 네녀석은 지금 어디서 떠드는거야?" "네 왼손에……." 다크가 왼손을 오른손으로 잡아보니 거기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가 너냐?" "응. 빨리 도망쳐." 이때 또다시 음산한 목소리가 언제나와 같이 들려왔다. "크흐흐흐… 어때? 생각은 해봤나? 버틸수록 너만 손해야. 매일같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여태껏 버틴놈은 너가 처음이다. 그 끈기는 인정해 주지. 하 지만 네년의 실력으로 나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해. 너도 나의 노예가 되어 라." "헛소리 하고 앉아있네." "그러면 죽어봐라. 크하하하…. 아쿠아 소드!" 그와 동시에 다크는 최대한 빨리 앞으로 튀어나갔다. 퍽 하면서 호신강기를 강타하는 뭔가가 있었지만 이놈을 만난지도 한달.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하 는 수련은 엄청난 효과가 있어서 그의 내력은 엄청나게 증가해있었다. 문제는 이쪽이 강해질수록 저쪽의 공격도 더 강해진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처음에 는 아쿠아 소드도 1개 정도가 날아왔지만 요즘 들어서는 5-6개가 한꺼번에 날 아왔다. 그 파괴력과 날카로움은 거의 검기에 맞먹었다. 일정시간은 호신강기로 버틸 수 있었기에 막는 즉시 놈에게 뛰어들면서 놈에 게 주먹을 선사할 생각으로 뛰어든 것이다. 요즘들어서 놈의 모습은 희미하게 나마 보이고 있었다. 또 감각도 그만큼 증가했기에 놈의 위치파악에 있어 실 패란 있을수 없었다. 놈은 다크가 뛰어들어오자 곧이어 그 의도를 파악하고 외쳤다. "아쿠아 실드!(aqua shield!;물의 방패)" 상대의 목을 향해 주먹을 내뻗는 순간 다크의 손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물줄기에 막히면서 산산히 찢겨져나갔다. 다크는 자신의 손이 가루가 되면서 피가 뿜어져나가는 모습을 맨정신으로 보기는 정말 어려웠다. "크아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뒤로 재빨리 물러서는 다크를 보면서 드라이아드는 킬킬거 리며 비웃었다. "도망치는 재주는 비상하군.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돼! 아쿠아 헤머!" 다크는 옆으로 재빨리 피했다. 하지만 옆구리에 그대로 엄청난 충격이 쏟아져 들어왔다. 호신강기가 박살나고 갈비뼈 몇대가 부러져나가고, 내장이 박살났 는지 입속에서 피냄새가 올라왔다. "크왁!" 이제 거의 전투력을 상실해버린 다크를 드라이아드는 아쿠아 룰러가 앵앵거리 는 소리를 반주삼아 차근차근 뭉개나갔다. 다리가 잘려나가고 팔이 뭉개졌다. 그녀의 봉긋하던 가슴도 아쿠아 헤머 한방에 잘 다져진 고깃덩이가 되어버렸 다. 그놈은 비명을 질러대는 그녀를 학대하는 것이 즐거운지 천천히 자근자근 박살냈고 제일 마지막으로 목을 잘라버린 다음 그 목을 들고 비웃듯이 말했 다. "다음에는 좀 더 그럴듯한 대답을 해봐. 크흐흐흐" 다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세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지만 그런것에 신경쓸 정도로 다크가 처한 상황이 좋은게 아니었다. "쥬스." 세린이 재빨리 과일 쥬스를 가져다 주자 그걸 천천히 다 마신 후 컵을 세린에 게 넘겨줬다. 어쨋든 또 작살나기는 했지만 최초로 공격을 해봤다는게 별로 기분이 나쁘지 는 않았다. 다크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자세히 살펴봤다. 악몽을 꾸기 시작 한 후부터는 완전히 틀어박혀 수련만 했기에 그녀의 피부는 햇볕을 받지 못해 완벽할 정도로 하얀색이었다. 이 하얀 손이 찢겨지며 가루가 되어 흩날리던 영상이 잠시 떠올랐지만 이런 일 한두번 당해보는게 아니니 요즘들어서는 별 로 감흥도 안났다. 하지만 남의 손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는 기분과 자신의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는 기분은 완전히 달랐다. 정말 그 고통에 미치고 만 싶었지만 그녀의 굵은 신경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딴 계집애들 같았으면 바로 기절해서 고통받지 않았을텐데… 신경이 굵다는 게 별로 좋은것도 아니군. 어쨋든 무기도 없이 그런 괴물과 싸운다는 것은 자 살행위야. 놈은 너무나 강해. 하지만 나도 강해. 놈이 무기만 안쓴다면 이길 수 있어. 그런데 그놈은 무기를 안쓸리가 없지. 비겁한 자식! 그러면 내가 무 기를 쓰는 수밖에 없는데 뭐로 싸우지? 자기전에 검을 안고 자봤지만 효과가 없고… 아쿠아 룰러는 있지만 아쿠아 룰러의 힘은 드라이아드의 힘. 과연 드 라이아드와 싸울 때 아쿠아룰러를 쓸 수있을까?' "제길! 알게뭐야. 아니지. 한번 실험을!" 다크는 아쿠아 룰러가 끼워진 왼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막대한 기를 집어넣었 다. 그러면서 외쳤다. "아쿠아 에로우!" 그와동시에 뭔가가 앞으로 뻗어나가며 곧장 벽에 구멍을 하나 뚫어버렸다. 다 크는 잠시 놀랐지만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대로 쫓아가서는 구멍을 확 인했다. 역시 예상대로 구멍은 물에 젖어 축축했다. 엄청난 속도의 물이 지닌 파괴력. 벽을 뚫을 정도라면 사람의 육신이야 구멍내는게 별로 어렵지 않으리 라. "그래. 오늘 저녁에 보자. 개자식! 한번 써보고 안되면 더 내공을 쌓아 검기 나 강기로 상대해 주겠다.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거야. 크하하하!" 세린은 핏발이 선 눈으로 미친 듯이 웃고있는 주인을 걱정스런 안색으로 바라 보며 말했다. "누굴 찢어죽이실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목욕이나 하시죠. 땀에 흠뻑 젖는 옷을 입고 계시면 건강에 안좋습니다. 주인님." 다크가 목욕을 끝내고 나왔을 때 방에는 토지에르와 실바르가 와있었다. 토지 에르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호 살짝 시선 을 돌렸고, 실바르는 얼굴색이 급속도로 뻘개지면서 뒤로 돌아서버렸다. "왠일이야? 새벽같이 찾아오고……." "이봐… 옷이나 입고 얘기하자구." "으응? 그렇군. 세린!" "예." 다크는 세린이 건네준 옷을 입고는 침대 위에 앉으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토지에르는 이제 옷을 다 입은 다크를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정상인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세린이 아무래도 주인님이 이상하다고 해서 왔지.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고 말이야. 누군가를 찢어죽이겠다고 외치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웃더라나?" "푸훗! 그래서? 내가 미쳤다면 고쳐주겠다는 말이야?" "아니. 최소한 토굴에 가둬둘수는 있겠지." "눈물나게 고맙군. 별일 없으니까 이제 돌아가." "이거 섭섭하군. 그래도 모처럼 찾아온 손님인데 차대접은 해야 하는거 아닌 가?" "웃기는 소리 하지말고 돌아가. 나는 한시가 급하니까." "평상시와 하는 꼴이 마찬가지 인걸 보면 확실히 미치지는 않은 모양이군." 토지에르가 이죽거리자 갑자기 신경질 난 다크가 외쳤다. "뭐얏! 내가 매일 당하는걸 너도 한번 당해봐라. 이 빌어먹을 영감탱아. 아쿠 아 에로우!" 그와 동시에 다크의 왼손에서 엄청난 속도로 뭔가가 튀어나왔고 실바르는 황 급히 토지에르의 앞을 막으며 검을 뽑아들었지만 그 검은 채 다 뽑히기도 전 에 날아오던 것과 부딪쳤고 챙!하는 큰 소리를 내며 부러져버렸다. 그리고 이 어지는 충격으로 비실비실 뒤로 밀리면서 뒤에 앉아있던 토지에르와 함께 자 빠지고 말았다. 두 남자가 뻗어있는 걸 보면서 다크는 잔인한 미소를 피워올리며 말했다. "흥! 그정도는 별것도 아냐. 이제 진짜를 먹여주지. 아쿠아 헤머!" "쿠엑!" 거대한 물줄기는 비실비실 일어서던 실바르의 복부에 정통으로 명중했고 실바 르는 자빠지면서 그 위에 뻗어있던 토지에르를 뭉개고 지나갔다. 실바르는 이 제 문 가까운 위치에 뻗어있었고, 이제 엄폐물이 사라져버린 토지에르는 통과 한 실바르의 몸무게를 떠올리며 뻗어있었다. "너도 맞아봐랏! 아쿠아 헤머!" "우왁!" 몸통에 정통으로 한 대맞고 쭉 뻗어있는 토지에르를 보면서 다크는 비웃음띈 어조로 말했다. "단 세 방에 뻗어버리다니… 멍청한 자식들. 이봐. 실바르!" "콜록콜록! 예." "저녀석 데리가 나가서 치료좀 해줘. 갈비뼈 두세대는 확실히 부러졌을테니까 ……." "그러죠." 두 남자가 물에 흠뻑 젖어서는 비실거리며 나가고 나자 세린은 황급히 빈 물 통과 걸레를 가져다가 갑자기 홍수가 나버린 바닥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 * * 스바시에 왕국은 요즘들어 새로운 장을 열고있었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그에 소속된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처형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당했다. 또 어 제까지 귀족의 부인으로서, 또는 딸로서 떵떵거리면서 살던 여자들은 하루아 침에 경매장에 서서 매매되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있었다. 물론 자살한 여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자살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체념하고 받아들였 다. 왜냐하면 초기에 기회있을 때 자살하지 못하고 일단 사로잡힌 경우 그녀 들이 자살할 수 없도록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막았기 때문이다. 왜 이들이 자 살을 막느냐 하면 그녀들은 매우 예쁜데다가 교양과 예절이 몸에 배어 있기에 매우 고가에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처음 울컥하는 기분에 자살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람이란 것은 적응력이 매우 뛰어난 동물이다. 그렇기에 한 한두달 지나고 보면 체념하고 자신에게 새로이 다가온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어쨋든 남자의 경우 성인은 처형, 어린애는 노예가 되고 여자는 모두 다 노예 로 팔린다. 돈안되는 할멈들은처형해버리지만 말이다. 그렇게 스바시에의 귀 족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를 크라레스의 귀족들이 차지하고 들어왔다. 크라레 스는 이번 전쟁이 끝난 후 곧장 왕국에서 제국으로 칭호를 변경하고 황제 즉 위식을 가졌다. 그러면서 그때 이번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인물들에게 전공을 포상하는 형식으로 영지가 하사되었던 것이다. 국유지의 경우 황실 재산이었고, 황제가 직접 그걸 관리하지는 못하니 그 대 리인으로 파견하는게 지방 영주들이다. 그렇기에 영주들이 황제로부터 하사받 은 영지는 그 땅을 받은게 아닌 땅을관리할 권한만을 부여받은 것이기에 자 의로 매매나 증여를 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작위와 함께 관리권이 장자(長子) 에게 상속될 뿐이다. 보통 지방 영주들은 황제로부터 받은 영지를 관리하고 그 땅에서 생산되는 산 물의 30%를 바쳤다. 관리권을 위임 받았으니 관리한 결과를 황제께 올리는 것 은 당연했다. 그리고 지방영주들에게 따로 수입이 없으니 농노들에게서 황제 에게 올리는 것보다 더 많은 량을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것 또한 당연한 결과 였다. 그래야 성도 수리할것이고 사병(私兵)들도 거느릴것이고, 딸 시집보낼 지참금도 있어야 하고… 뭐 그런 돈이 장만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주, 매우, 진짜로 양심적인 지방영주들의 경우 사유지(私有地)와 마찬가지로 50%정도의 세금을 거두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60% 정도를 거둬들이며, 일부는 정말이지 농노들이 안죽을 정도만 남겨두고 싹쓸 이를 해가는 빌어먹을 놈들도 있는게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국유지에 배속된 농노들의 경우 영주가 바뀌고 안바뀌고에 신경을 쓰는게 아니라, 새로 바뀐 영주가 얼마나 세금을 거둬들일 것이냐에 더욱 신 경을 쓰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영주들의 경우 황제로부 터 최고 50%를 초과하는 세금을 거둬들인다면 영지를 몰수하겠다는 통고를 받 고 왔기에 농노들의 환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황제는 지방영주들에게 서 25%의 소득만 바칠 것을 허가했기에 어느정도 영주들도 그 제안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사유지의 세금은 45%로서 5% 인하를 발표했고, 자유무역지대는 세금을 40% 에서 30%로 인하하면서 무역을 더욱 장려했다. 거기에다가 부자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임으로서 그 부족분을 메꿔버렸기에 사실 크라레스 황제로 서는 별로 손해본 것도 없었다. 또 전쟁이 끝난 후 들끓게 마련인 산적들과 반크라레스 잔당들, 또 몬스터들 을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했기에 크라레스쪽으로 급속도로 민 심이 기울기 시작했다. 일단 잘살게 해준다는데야 군말이 있을 수 없기 때문 이다. 또 추가로 세 개의 항구를 자유무역항으로 발표했고 이번에 새로이 가 지게 된 해군력을 동원하여 해적을 대대적으로 소탕하면서 무역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점령지에 대한 정책이 거의 20년에 걸쳐 계획된 것이었기에 모든 일 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소모되는 대량의 자 금은 귀족들로부터 몰수한 재산과 거상(巨商)이나 대규모 지주들, 또 정부와 결탁하고 매점매석(買占賣惜)을 행한 악질상인들을 숙청하면서 간단히 해결되 었다. "크유… 오늘도 이렇게 끝나는군." 투덜거리면서 다가오는 팔시온을 보고는 미카엘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술 마실래?" "응." 팔시온은 미카엘이 건네주는 술병을 통째로 들고 맛있게 마신 후 다시 그 병 을 미카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오히려 전쟁보다 이게 더 어렵군." 그 말에 앞쪽에 앉아있던 미디아가 말했다. "투덜거리지 마. 원래 용병들이 싸우는 전쟁이란게 이런거야.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적들. 사방에서 기습을 당해 죽어 넘어지는 전우들. 처음부터 말도 안 될정도로 편한 전쟁을 해서 그런말이 나오는 거지." "그래! 너 잘났다." 투덜거리는 팔시온을 향해 미디아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잘난게 아냐. 그래도 콜렌 기사단에서 그래듀에이트 두명이 지원왔잖아. 뭐 타이탄은 없지만 그사람들 정말 잘싸우더라. 딴데 가봐. 그래듀에이트 구경이 나 할 수 있을줄 알아? 그사람들이야 이런 싸움이 장난이겠지만 우리들로서는 목숨 걸어야 하는 거라구." 그녀의 말에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건 맞는 것 같아. 토지에르란 마법사, 제법 사람 쓸줄을 안다니까." "참. 너 소문 들었냐?" 그녀의 말에 미카엘이 어리둥절 해서 물었다. "무슨 소문?" "이번 토벌전 끝나고 난 다음 치레아 국경으로 배치된다고 하던데… 진짜인지 모르겠어." "국경에? 국경선에 용병대가 배치될 리가 없잖아. 국경선은 정규 사단들이 있 는데……." "아니, 그럴지도 몰라. 만약에 치레아와 전쟁을 한다면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말에 팔시온은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치레아는 약한 나라지만, 그 뒤에는 아르곤 제국이 있는데 침공할 수 있을 까?" "그건 모르지. 그런데 지미하고 라빈 이녀석들은 어디갔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미디아가 말하자 팔시온이 대답해 줬다. 지미나 라빈은 10부장으로서 팔시온의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 낮의 싸움에서 라빈이 부상당했거든. 그래서 지미는 거기 가있을거야." "자식! 조심좀 안하고." 투덜거리는 미카엘을 향해 팔시온이 약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요즘 그녀석들 실력이 많이 나아졌던데 뭐." 그 말에 미카엘도 마주 미소지으며 말했다. 처음 봤을때는 어리숙한 멍충이들 이었느데 요즘 들어서는 제법 전사(戰士)티가 나고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이야." 미디아는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쨋건 여기처럼 용병을 쉴틈없이 써먹는 곳은 처음이야. 여기 일 끝나면 저 리가라. 저기 일 끝나면 그리가라. 대신 한곳에 용병대들을 대량으로 투입하 고, 정규 기사단에서 지원까지 해주고 만약 안되면 타이탄까지 지원해서 목표 한 곳은 완전히 뿌리를 뽑아버리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해." "여기도 차츰 정이 들어가잖아? 꽤 살기 좋은 고장이야. 대 전쟁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인심도 나쁘지 않고… 또 용병대에 대해 사람들이 삐딱한 시선을 보내지도 않고 말이야." 팔시온의 말을 듣고는 미카엘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용병대에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게 아니라 이걸 보고 사람들이 안심하는 거 야." 미카엘이 가리킨 것은 자신의 갑옷 위에 새겨진 삼두(三頭)의 드래곤 문장이 었다. 머리 셋달린 드래곤은 트루비아 제국을 나타내는 문장이었다. 드래곤을 문장으로 쓰는 나라는 많았다. 금색 드래곤, 은색 드래곤, 녹색 드래곤 등등 하지만 대가리를 셋이나 잘 붙이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게 메두사나 뭐 그런 전설에 나오는 악룡들의 생김새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말 되네." "용병대 치고 이렇게 군기가 센 곳은 처음 봤으니까 말이야. 거의 정규군 취 급이잖아. 한번씩 함께 작전하는 정규군 경장보병대들하고 무슨 차이가 있어?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렇게 군기를 강하게 하는게 아무래도 용병대를 정규군에 통합할 생각인지도 모른다는 거야." 미카엘의 말에 팔시온은 약간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용병대를 정규군에? 그러면 너는 좋겠군." 그 말에 미카엘이 인상을 찌그리면서 말했다. "왜?" "너는 그래도 용병대 보다는 정규군이 어울리잖아. 단번에 기사가 될지도 모 르는데……." "야야… 기사가 될 생각이었으면 벌써 되었을거야. 아무나 한명 받들기만 하 면 되는게 기사인데 뭐. 나는 한군데 너무 얽매이는 것은 싫어." "그래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이거 끝나면 치레아 국경선으로 진짜 갈까?" "그건 아무도 몰라.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닌 것 같아. 왜냐하면 이번에 점 령한 점령지도 엄청나게 넓은데 여기도 제대로 안정시키지 않고 또 전쟁을 벌 일 가능성이 없잖아. 안그래?" "그것도 말 되네." 그들의 말을 한참 듣고있던 미디아가 중얼거렸다. "다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 특이한 애였는데." "애는? 70살 먹은 애도 있냐? 나… 큭큭… 처음에 다크가 여자가 된 생각이 한번씩 떠오르면 돌아버리겠다니까……." "하하하… 나도 엄청 놀랐으니까 말이야. 이번 작전 끝나면 모두 휴가내서 다 크 구경이나 갈까?" "그러지." "찬성!" 다크는 천천히 일어서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오늘은 평상시와 약간 달 랐다. 완전히 어두운 것이 아니라 어슴푸레하게지만 사방이 보였다. "그가 오기전에 도망쳐!" "닥ㅊ! 흐흐흐… 오늘은 나도 준비가 좀 되어있단 말이야. 이 개자식 포옴잡 지 말고 빨리 나와." 그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희미한 음영이 나타나면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크크크크… 오늘은 힘이 넘치는군. 그래 내 노예가 되겠느냐?" "놀고있네. 이거나 먹어랏, 아쿠아 소드!" "아쿠아 바리어(aqua barrier)!" 그러자 그 희미한 음영 주위로 어떤 둥근 벽같은게 생겨났고 날아갔던 아쿠아 소드는 그것에 부딪치면서 소멸해버렸다. "크흐흐흐… 겨우 얄팍한거 몇가지 배워가지고 감히 이 위대하신 나에게 반항 하려 들다니… 아쿠아 헤머!" 그 말과 함께 앞쪽으로 수십개의 거대한 물줄기가 튀어나왔다. "아쿠아 실드!" 퍽! 거대한 물줄기 중 하나가 맹렬히 회전하는 물의 방패에 박히면서 산산히 분해 되어버렸다. 간단하게 아쿠아 실드가 그 무작스럽던 아쿠아 헤머를 막아내자 다크는 자신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할수있어. 개자식! 아쿠아 헤머!" 세 개의 거대한 물줄기가 날아갔지만 상대의 방어벽을 뚫지는 못했다. "크크크… 겨우 그따위 것도 공격이라고 하다니… 이게 진짜 아쿠아 헤머다. 받아랏!" 상대의 물줄기는 점점 더 빨라졌고, 그에따라 그 파괴력도 점점 더 강해져갔 다. 그렇기에 아쿠아 실드에 더욱 내공을 많이 넣어야만 그놈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내공의 량에따라 그 회전속도가 결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다크는 내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내공을 넣어야만 발휘되기에 방대한 내공이 소모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좋아… 좋아… 이제 슬슬 기운이 딸리기 시작하는 모양이군. 너는 그정도면 많이 버틴거야. 아쿠아 실드!" 그러자 그 희미한 놈의 주위에 5개의 물의 방패가 형성되었다. "크크크… 아쿠아 실드는 상대의 공격을 막기만 할 수 있는게 아냐. 어디 한 번 막아보시지. 죽어랏!" 그와 동시에 그의 주위에 떠있던 5개의 물의 방패가 톱니가 맹렬히 회전하면 서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문제는 그 다섯이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 니라 세 개는 일직선으로 날아왔지만 두 개는 거의 타원을 이루면서 다크의 양쪽 옆구리로 날아왔다는 것이다. "제기랄!" 최대한 그것들이 가까워졌을 때 다크는 위로 뛰어올랐다. 다크는 공중에 뜬 상태에서 날아오는 회전하는 비교적 속도가 느린 원반의 정 중앙을 때리자 그 것 곧이어 구멍이 뚫렸지만 그것은 파괴되지 않았다. 오히려 곧이어 뒤에서 다가오는 속도빠른 물줄기에 부딛치면서 간단하게 손목이 잘려나갔다. "크윽!" "그 아쿠아 실드는 방어무기가 아닌 공격무기야. 그 무엇이라도 잘라내지. 강 철도 잘라내는 물의 위력을 맛보거라. 크흐흐흐… 아쿠아 에로우!" 수십개의 물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며 다크는 절망감을 느꼈다. 내공도 거의 고갈되어 방어하기도 벅찼다. 그녀는 간신히 아쿠아 실드를 불러내어 막으면 서 그걸 곧장 그놈에게 날렸지만 아쿠아 실드마저 놈의 방어벽에 부딪치면서 소멸되어버렸다. "하루 사이에 제법 쓸만해 졌다고 나를 깔보면 곤란하지… 크흐흐흐… 네년은 죽었다 깨도 나만큼의 힘을 가질 수 없어. 자 이제 나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 는 거야. 으하하하하! 아쿠아 헤머!" "크허억!" 무심결에 다크는 땀에 흠뻑 젖어있는 자신의 목을 만졌다. 멋지게 목이 잘리 며 잘려서 튕겨나간 머리가 땅바닥에 데구르르 구르는 그 느낌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목을 잘라 죽여봤지만 잘려진 목에 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특별했다. 붕 나르면서 천천히 쓰러지는 자 신의 육체가 보이고, 뒹굴뒹굴 구르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땅바닥을 보는것 도, 또 딱딱한 땅바닥이 자신의 얼굴 여기저기에 닿는 느낌도… 도저히 두 번 다시 당해보기 싫은 기분인 것은 사실이었다. "쥬스나 좀 다오." "예. 주인님." 세린이 가져오는 주스를 바라보며 다크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 상태로는 승 부는 뻔했다. 맨날 몇 컵은 될것같은 땀을 흘려대니 체력도 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승리는 불가능. 잠을 안자는 한이 있더라도 며칠 수련을 해 서 그놈을 죽이던지, 아니면 포기하고 놈의 노예가 되든지. "아예 포기해버릴까……. 너무 힘들군." 자신의 주인이 힘없이 말하는 것을 세린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름답지 만 생긴것에 안어울리게 매우 사납고, 자신감 넘치는 주인이었는데 무엇이 그 녀를 이렇게까지 변하게 하는지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세린." "예?" "일주일 정도 수련할 만한 장소를토지에르에게 물어봐라. 조건은 위가 뚫려 있어 햇볕과 달빛이 그대로 들어와야 해. 그리고 사방이 뻥 뚫려있지만 위험 은 없어야 하고, 일주일간 나는 완전히 잠을 자게 될거야. 그동안 내가 충분 히 안전할 수 있을만한 장소가 있는지 물어봐라. 지금 가보거라." "예. 주인님." 세린이 달려가고 난 후 그녀는 작고 예쁜 반지를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공짜는 받는게 아니었는데……." "여긴가?" 다크는 토지에르가 안내해준 왕궁의 꼭대기에 있는 방어탑 위에 서있었다. 이 곳은 적의 동정을 살피고 또 공격하도록 되어있기에 전망은 그만이었다. "그래. 여기 말고는 너가 말한 모든 조건에 충족되는 곳은 없어. 여기는 성에 서 제일 높은곳. 좀 좁아서 그렇지 별로 이목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또 사 방에 병사들이 있으니 안전하고, 원한다면 바로 밑에 그래듀에이트 10명을 배 치해 두지."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실바르만 밑에 배치해 둬. 사람이 너무 많으면 오히 려 이상하니까 말이야. 7일이야. 7일동안만 보호를 부탁해." "그정도야 어려운게 아니지." "몸은 괜찮아? 갈비뼈가 두어대 부러졌을텐데……." 편의를 잘 봐주는 덕분에 어제의 행동에 약간 미안해진 다크가 쑥스러운 듯 말했지만 토지에르는 그녀의 사과를 간단히 받아넘겼다. "흐흐… 그정도도 치료 못한다면 궁정 마도사는 때려치워야지. 수련 잘하게 나." 토지에르가 내려가고 난 다음 다크는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 태양이 조금 떠 올라 제법 더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좀 더 지나면 가을이었지만 아직도 한 낮에는 매우 더웠다. "내 선택이 옳았기를……." 다크는 중얼거리면서 탑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녀가 시도하려는 것은 마교의 정통심법, 그것도 최고 속성으로 내공을 쌓을 수 있다는, 마교에 몸담은 초심자들에 가르치는 천마구령심법(穿魔究逞心法)이었다. 속성이지만 주화입마의 위험성이 최고로 높았고, 잘못하면 마성이 머리속에 침투해 마인 이 될 가능성 또한 지극히 높았다. 하지만 항복하느니 둘다 죽자는 성향이 매 우 강한 다크로서는 이 방법을 택했다. "개자식 두고보자." 서서히 내공을 역으로 돌리자 온 몸에서 통증이 솟아나왔다. 하지만 이것도 계속하면 통증은 곧이어 사라진다. 만약 통증이 매우 강했다면 누가 이 심법 을 쓰면서 주화입마에 걸릴 것인가? 통증은 오히려 잡념을 없애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인데……. 문제는 조금 더 있다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심신이 노곤해 지면서 잡념이 계속 떠오르는 것이다. 거기서 아차 실수하면 그걸로 끝이었 다. 다크는 여기에다가 북명신공까지 함께 혼합할 생각으로 여기에 올라온 것이 다. 태양의 막강한 양기(陽氣)와 달의 강력한 음기(陰氣), 또 새벽녘에 태양 은 지고, 달은 떠오르기 전에 가장 강한 대 우주의 기운, 그리고 사방에 퍼져 있는 대자연의 기운까지 몽땅 다 흡수해서 몸이 박살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끝장을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맹렬한 속도로 내공이 역전하기 시작하면서 온 몸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크라레스 왕국이 스바시에 왕국을 평정한 후 비약적인 국토면적의 증가로 인 해 편의상 과거 크라레스 왕국의 땅은 크라레스 지구(地區)로, 스바시에 왕국 쪽은 스바시에 지구(地區)로 불렀다. 현재 스바시에 지구의 총독으로 루빈스 키 폰 크로아 공작이 콜렌 기사단의 절반과 유령기사단의 절반을 거느리고 파 견되어 있었다. 또 이번에 들어온 고철타이탄들을 이용하여 차세대 신형 타이 탄인 테세우스급을 생산 중이었다. 테세우스급은 엑스시온을 카프록시아의 것 을 이용하였기에 카프록시아와 동급이었지만 크기를 조금 더 작게 만들었기에 그 기동성은 카프록시아보다 뛰어났다. 왜 매우 잘 만들어졌다고 소문이 나있는 카프록시아를 포기하고 새로이 테세 우스를 만들기 시작했냐 하면 카프록시아는 너무 잘 알려져버렸기에 대놓고 쓸수없지만 새로운 타이탄을 만들어버리면(껍대기만) 그 배후가 들통날 우려 가 현저히 감소하기 때문이다. 사용목적이 그렇기에 테세우스는 생산되는 족 족 유령기사단으로 보내질 예정 있었고 그에 준하는 양의 저급 타이탄이 유령 기사단에서 콜렌 기사단으로 보내지게 되어 있었다. 그 많은 타이탄을 노획했 는데도 타이탄 수가 늘지 않았다면 말이 안되니까 말이다. 그 때문에 타이탄 생산의 관리감독과 또 카프록시아의 엑스시온 설계도를 가 지고 그거 만든다고 정신이 없는 토지에르를 황제가 급한 볼일이 있다고 부른 건 다크가 운공조식에 들어간 후 삼일째 되던 날이었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폐하?" 황제의 주변에는 12명의 기사들이 쭉 서있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유령기사단 소속의 노장들이었다. 황제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토지에르가 들어 오자 그를 보며 말했다. "그대는 이 기운을 느끼겠소? 아니, 당연히 느끼고 있겠지?" "어떤 기운 말씀이옵니까?" "황궁의 윗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강대하고 사악한 미지의 기운을 못느낀다 는 말이오? 이미 사람을 보내 봤는데 실바르 경이 지키고 있으면서 그대의 명 이라고 아무도 못올라가게 막고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대를 불렀소." "아… 예. 폐하. 다크 경이 수련하는 것이옵니다. 한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러니까 4일 정도 남았사옵니다." "도대체 무슨 수련을 하는데 저렇게 무지막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는 말이 오? 또 이런식이라면 타국의 첩자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모를 수가 있나? 어쨋든 처음에는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더니 지금에 이르러서 이 지독한 기운 은 마치… 마치… 마신(魔神)이라도 불러낸 것 같은데 말이오." "……." "경은 마법을 쓰던지 뭘 하든지 해서 저놈의 기운이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막으시오. 코린트에서 이걸 가지고 시비를 걸면 감당할 수 없으니까……." "예. 폐하." 토지에르가 부랴부랴 탑꼭대기로 올라가 봤을 때 다크는 아직도 가부좌를 틀 고 앉은 자세였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공중으로 거의 30센티는 떠있었다. 그 리고 도저히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공포스러운, 무지막지한 기운 을 뿜어내고 있었다. 토지에르는 서둘러 마법진을 그려 그놈의 기운이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막 았다. 일단 마법진을 다 완성시킨 후 그는 나가려다가 말고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있는 그녀를 다시 한번 힐끗 쳐다봤다. 자신이 알고, 또 배운 것은 마법 뿐이었다. 사람의 몸을 매개체로 하여 주위의 마나를 다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마법이다. 하지만 마법과 마나의 운용에 있어 정반대의 길 을 걷는 게 있다면 육체 단련을 통해 마나를 몸속에 쌓아 인간 이상의 속도와 힘을 뿜어내는 무술(武術)이었다. 무술을 계속적으로 수련하여 엄청난 량의 마나를 몸에 쌓으면 마스터의 경지 에 이르게 된다. 토지에르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공작을 보며 느꼈던 그 힘을 이제는 눈앞의 이 소녀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몸을 우 주에다가 비유하는 자들도 간혹 있지만 이 소녀를 볼때마다 그는 인간의 한계 를 모르는 그 무한함을 깨닫게 되었다. 마법사로서는 가질 수 없는 그 강인한 육체와 호전성(好戰性), 또 자신의 육체를 다스리고 보완해 나가는 각자 나름 대로 발전시켜 놓은 기법. 마법은 수많은 백마법 흑마법 정령마법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만약 백 마법이라면 그 수련방법은 거의 정해지게 된다. 주문 자체가 변할 수 없는 것 이기에 수련이란것도 자신의 집중력이나 기억력 따위를 향상시키는 여러 수련 들로 이루어지게 되고, 또 나중에는 마법의 반복사용에 따른 나름대로의 마나 통제의 기법들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큰 틀에 완전히 짜맞 춘, 그러니까 약간 간소화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무술은 그게 아 니었다. 어떻게 저렇게 가느다란 팔다리로 저런 엄청난 기운을 뿜어낸단 말인 가? 또 저렇게 앉아서 수련하는 사람은 토지에르가 봤을 때 그녀가 최초였다. 모름지기 무사란 각자 선호하는 무기를 들고 뼈빠지게 수련하는 길이 최고가 아니었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다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더욱 거세지 면서 그 기운에 밀려 안그래도 조금씩 찢어지기 시작하고 있던 옷이 산산조각 으로 찢겨 나갔다. 그러자 그 안에서 드러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얀 육체. 도저히 3일동안 햇볕아래 노출되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보통 소녀들을 잡아 다가 햇볕아래 저런 자세로 놔둔다면 반쯤 피부가 익어버릴게 뻔한데… 거기 다가 때는 늦여름이 아니었던가? 이제 좀 더 있으면 가을이긴 했지만 아직도 한낮에는 매우 더웠다. 그런데도 노출되어 있던 손, 얼굴의 피부색과 지금 드 러난 하얀 속살과 색깔이 같다면 여태껏 받은 햇볕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설마… 그걸 흡수했을까?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햇볕을 흡수하는 마법진만도 꽤나 고난도의 마법진인데 한낫 인간의 몸으로……." 더 이상 붙어앉아서 생각하기도 머리아프기에 토지에르는 아래로 내려갔다. 안그래도 할 일이 태산처럼 많은데 여기서 허비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길에 실바르에게 다크의 옷 한벌을 준비하고 있으라고 일러놓고 말 이다. 전신에 요기(妖氣)가 넘치는 아름다운 소녀. 긴 금발을 아무렇게나 묶고있었 고 옷도 평범한 여행복 같은 간소한 것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미모를 가리 기는 힘들었다. 매우 성숙한 듯 하면서도 앳된 상반됨을 함께 가진 이 소녀는 약간은 멍청한 표정으로 넓은 호수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분명히 그 실바르라는 멍청하게 생긴 녀석의 안내를 받아 시중을 받고는 잠자리에 든 것 같았는데 어느결에 여기 서있는 자신이 믿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는 어디지? 눈에 보이는 놈이 하나라도 있어야 잡고 물어보지." 투덜거리다가 자신의 손바닥을 잠시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자 신에게 딴건 몰라도 무시무시한 힘이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무공 구결들……. 떠오르는 것 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안되어 보였다. 실바르라고 불린 그놈 의 힘을 가늠해봤을 때 도저히 상상도 하기 힘들정도의 실력차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차차 시간이 지나면 모든게 해결되겠지. 내가 누군지… 또 이 빌어먹을 곳 이 어디인지.]" 이때 호수 중앙의 물이 솟구쳐 오르더니 곧 그 물덩어리는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몇초 지나지 않아 그것은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 남자는 소녀를 찬찬히 살펴본 다음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며칠 잠안자고 수련중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도대체 무슨 수련을 어떻게 했기 에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지?" 하지만 소녀는 그 남자의 놀라움 따위는 상관않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이봐. 여기는… 어디?" 소녀는 딸리는 언어실력으로 가까스로 상대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말이 안통 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골똘히 생각하면 간간히 단어들이 떠올 라주기에 뭐 대화하는데 무리는 없었다. 대화가 안통하면 상대가 답답하지 자 신이 답답할 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그대의 꿈속이야. 나는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 반지의 주인이 제대로 된 인간인지 판단하여 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지. 제대로된 인간 이라면 맹약을 지켜줄 것이고 내 마음에 안들면 그놈은 내 노예가 될 수밖에 없게 되어있지. 하지만 일단 그대의 힘은 합격선… 아니 그 이상이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능력은 있으되 힘이 너무 없어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고 있었 는데 말이야." "빌어먹을! 무슨 소리! 짧게… 말 해!" 욕 한마디에 보태서 단어 다섯 개만으로 명확한 의지를 전달하는 소녀를 바라 보면서 나이아드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 했다. "으응? 전에는 이렇게 말을 잘 못하지 않았는데… 너무 속성으로 수련하다가 부작용이라도 걸렸나?" "여기 어디?" "꿈속!" "[하. 꿈이라면 별 상관 안해도 나중에 깨겠군. 그럼 어디가서 잠이라도 자야 겠다. 꿈속에서 잠을 자면 또 어떤꿈을 꾸게 되지?]" 소녀가 자신은 본척도 안하고 나무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서는 쭉 드러눕는걸 보면서 나이아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정령왕 생활 수천년에 이런놈은 보다보다 처음이었다. 이녀석에 준하는 뻔뻔이가 하나 예전에 있었 지만 그놈은 그럴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놈이었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드와 맹약이 맺어져 있는 프레임 스파우터(FLAME SPOUTER;화염을 내뿜는 자)의 주 인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봐. 네녀석의 힘은 통과수준이지만, 또 다른 시험이 남아있단 말이다. 과 연 제대로 된 정신상태를 가진 놈인지 두 번째 시험을 거쳐야 해. 그 시험에 까지 통과한다면 너는 아쿠아 룰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 "사악한 자는 아쿠아 룰러의 주인이 될 수 없어. 이봐, 듣고 있는거야?" "……." "이런 빌어먹을 자식! 내 말을 들으란 말이다." 들은척도 안하는 상대에게 열받은 나이아드가 분노에 찬 노성을 터뜨렸고, 그 와 동시에 나이아드가 서있던 호수의 표면이 약간 출렁이다가 그 호수 물의 일부가 소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소녀의 손이 잘 달구어놓은 쇳덩 이처럼 진한 선홍색을 띄면서 그것을 막자 곧이어 그건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곧장 튕기듯이 일어선 그녀는 나이아드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 한 언어로 떠들어대더니 미친 듯이 웃었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나는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할 만큼 사람이 좋지 못 해. 꺄하하하]" "미쳤군." "미쳤군… 무슨 뜻? 뭐? 미쳐? [탄마지(彈魔指)]!" 그와 동시에 그녀의 열 손가락에서 열줄기 지풍(指風)이 뿜어져 나오며 나이 아드를 향해 날아갔다. 그걸 나이아드가 간단히 막아내는 걸 보면서 소녀는 사악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네놈 실력도 상당한 것 같은데 같이 몸이나 풀어보자. 오호호홋!]" 그녀는 자신의 내력을 천천히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단전에 쌓인 강대한 마 (魔)의 기운. 마의 극한, 즉 극마(極魔)의 힘이 뻗어나오자 소녀의 몸은 더욱 사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온 전신이 벌겉게 달아올랐고 눈동자마저 핏기가 올라와 완전히 아수라의 형상을 띄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무공구결은 많지는 않았다. 삼분의 일 정도는 매우 패도적인 무공이었고 나머지 삼분의 이 정도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패도적 이지 못한 무공이 훨씬 더 깊이있는 것들이었지만 그녀로서는 지금 자잘한 초 식따위를 기억하고 응용해야 하는 그런 무공들 보다는 막대한 내공은 소모되 지만 엄청난 위력을 지니는 무공이 더 쓰기 편했다. 내공이야 사발로 퍼줘도 남을정도로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꺄하하하… 묵룡혼원공(墨龍混元功) 파(破)!]" 그녀의 손에서 수십줄기의 강기다발이 나이아드를 향해 날아갔을때에야 나이 아드는 뭔가 매우,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닳았다. 재빨리 아쿠아 바 리어와 실드를 함께 쳤지만 그중 몇 개는 그 벽을 뚫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저 사악한 기운은 또 뭐란 말인가? 자신의 몸에 난 상처부분이 꼭 호수에 돌던져진 식으로 순식간에 사라졌긴 했 지만 나이아드는 매우 자존심이 상했다. "감히 인간 따위가! 죽어랏!" 나이아드는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 꿈속에서 사라져버리자 낭패한 표정으로 하 늘 위를 향해 외쳤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어떻게 보면 미친듯한 행동이었지만 놀랍게도 그에 답하는 목소리는 있었다. "그녀는 너무 무리하게 마나를 흡수하다가 사고가 났어요. 예전에 몸속에 가 지고 있던 정갈한 마나와 새로이 생성, 흡수된 사악한 마나가 충돌했거든요. 그러면서 그녀의 몸속에 축적된 엄청난 량의 마나들이 제멋대로 체내를 돌기 시작했죠. 그러던 중에 사악하면서도 강렬한 마나의 일부가 골수에 자리를 잡 아버렸어요. 그녀는 폭주하기시작하는 마나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진정시켜보 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어요. 그 덕분에 골수에 자리잡은 사악한 기운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제가 중간에서 그 사악한 기운이 골수를 장악하는 것을 막지 않다면 아마 미쳐버렸을지도……. 하지만 제 능력으로는 막는 것 만으로 도 벅차기에, 그 기운을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덕분에 지금 기억은 잊어버 린 상태지만… 만약 그녀의 심정에 뭔가 변화가 생겨 제가 간신히 막고있는 그게 자극을 받는다면 폭주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폭주한다면?" "엄청난 악마가한명 탄생하겠죠. 그걸 막아야만 합니다. 그녀의 정신은 지금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火山)과 같아요." "막을 방법이나 있냐?" "저는 그녀의 몸에 붙어있는 상태니 그녀에게 간섭할 수 있습니다. 나이아드 님께서 힘을 좀 빌려주신다면 조금씩이나마 그 사악한 마나를 없앨 수 있을겁 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1달 이내로 그 사악한 기운을 골수에서 완전 히 몰아낼 수 있을거에요." "그 방법 외에는 없겠군. 아무리 내 힘이 강대하다 하나 나 자신의 의지로 정 령계가 아닌 인간계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많지 않다. 어제 싸워본 결과 거의 비슷한… 아니군. 그녀의 파워가 월등했어. 실전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 이 무작정 힘에만 의존해서 덤빈 덕분에 그나마 평수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실전경험이 갖춰진다면 나도 벅찬 상대다. 꿈의 세계(夢界)가 아닌 인간계에 서 부딪쳤다면 큰일날뻔 했지. 안그랬으면 점점 감각을 되찾아가는 그녀에게 서 도망칠 방법이 없었을테니까. 내가 밀리기 시작했을 때 여기서 쫓아내버렸 으니까 다행이었지만, 잘못하면 정령계로 강제소환 당할뻔 했어. 도대체가 인 간이 그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는게 믿어지지가 않는단 말이야. 초상급 악마에 게 혼을 판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힘을 빌려주는 것도 아닌데……." (주:정령에게 있어 인간계에서 죽음이란 없다. 다만 강제소환만이 있을 뿐. 왜냐하면 정령의 전체가 인간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 일부만이 나타나, 또는 소환되어 그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령술사의 도움을 받지않고 자 의로 인간계에서 낼 수 있는 힘은 겨우 1% 정도다.) 나이아드의 투덜거림에 앳된 목소리는 조금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가만히만 놔뒀으면 6개월 이내에 그정도 경지까지, 아니 그 이상의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었어요. 재미있다고 그녀를 매일 못살게 군 것은 나이 아드님이 아니신가요?" 그 말에 나이아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흠… 내가 이렇게 될줄 알았나? 심심하기에 제법 발악하는 꼴이 재미있어서 좀 가지고 놀았더니…… 쯧쯧……. 어쨋든 마나는 얼마 없는 주제에 싸우는 감각 하나는 끝내줬지. 정말 괴롭히는 재미가 나는 상대였단 말이야." "그렇다고 피골이 상접할때까지 매일매일 괴롭혀요?" "닥쳐. 겨우 반지의 정령 주제에 이 위대하신 정령왕께 대들다니… 명심해! 네녀석은 맹약에 따라 내 힘의 일부를 빌려 쓸 수 있을뿐, 나는 너가 아니고 너 또한 내가 아니야. 네놈이 위대하신 나와 동급이 될 수 없단 말이다. 당장 이라도 내가 힘을 차단하면 소멸하는 주제에… 알겠냐?" "명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이아드님." "알았으면 됐다. 가봐." "으하아앙…" 일어서서 기지개를 펴는 주인을 바라보며 세린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제 수련을 끝낸 후 주인이 좀 이상한 것 같기는 했지만 어쨋거나 푸근히 자고 일 어나는 주인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목욕물 받아놨습니다. 주인님. 씻고 식사를 드시지요." "목욕물? 목욕… 목욕… 응." 그제서야 알아듣고 소녀는 세린의 안내를 받아 목욕탕으로 향했다. 꿈속에서 어떤 빌어먹을 녀석하고 만나 잠에서 깨기 직전까지 아귀다툼을 벌였었는데 끝장을 못본 것이 영 찝찝했다. 처음에는 좀 밀렸지만 나중에는 슬슬 요령을 터득해 가면서 밀어붙이기 시작, 완전히 끝장을 낼 수도 있었는데……. "[제길! 검이 있었다면 완전히 박살낼 수 있었는데…….]" 소녀가 목욕을 하는 것을 세린이 도와준 후 그녀를 깨끗이 닦아주고, 옷까지 입혀줬다. 그런 후 자그마한 검을 그녀에게 건네줬다. 세린은 그녀가 이 검과 장갑을 몸에서 떨어뜨린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녀 는 장갑은 본척도 안하고 검만 허리에 찼다. "저… 주인님, 장갑은?" 소녀는 대꾸를 하려다가 말이 갑자기 떠오르지 않자 고개만 가로 저은 후 밖 으로 나갔고 그 뒤를 세린이 재빨리 따라갔다. 어쨋거나 시중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밖으로 걸어나오자 언제나와 같이 실바르가 뒷따라왔다. 실바르를 흘 끗 본 소녀는 실바르에게 다가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그래서 실바르는 무 슨 일인가 해서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는 실바르가 다가오자 실바르의 큼직 한 롱소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검… 줘!" "예? 예에……." 자신의 검을 잠시 구경하자는 말인줄 알고 실바르는 검을 살짝 뽑아서 건네줬 다. 얼마전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버지에게 선물받았던 검은 다크와 토지 에르간의 다툼에 걸려, 그때 다크가 날린 물줄기에 박살나버렸기에 그로서는 큰마음 먹고 거금 20골드를 주고 구입한 검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것도……." 소녀가 가리키는 것은 검대였다. 무슨 남의 검을 구경하는데 검대(劍帶)까지 벗어달라고 하나 싶었지만 일단 실바르는 그것도 벗어줬다. 그러자 상대는 자 신의 얄팍한 검을 실바르에게 건네준 후, 실바르의 검대를 허리에 차고는 그 검대에 실바르의 롱소드를 묶었다. 그걸 보는 실바르의 속이 뒤집히지 않을 수 있나? "이봐요. 그건 제 검입니다." 소녀는 실바르의 항의는 들은척도 안하고 실바르에게 건네줬던 자신의 얄팍한 검을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그거… 가져." 그런 후 소녀는 긴 검을 땅바닥에 질질 끌면서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열 받은 실바르는 소녀의 뒤에 바짝 붙어 소녀를 잡아먹을 듯이 악을 쓰기 시작 했다. "아니. 그건 내검이야. 얼마전에도 내것을 하나 박살냈으면 됐지. 그걸 꼭 빼 앗아야겠어? 엉?" 아무리 폐하의 총애를 받는 여자라 해도 이건 너무 심한 처사였고, 또 겨우 남작 작위가지고 그래듀에이트인 자신을 이렇게 깔볼수는 없었기에 이번 기회 에 맛을 좀 보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뒤로 획 돌아섰고 곧장 실바르 의 목을 잡아왔다. 실바르는 그걸 보고재빨리 피하려고 했지만 그 손이 뻗어 오는 속도는 정말 놀랄정도였다. "컥!" "죽고… 싶어?" 무표정한 소녀의 말 한마디였다. 사실 소녀의 손은 크지 않았기에 실바르의 목 전체를 잡을수는 없었고 기도(氣道)부분만을 틀어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정말 기도를 뜯어내고도 주리가 남을 것처럼 느껴졌고, 실바르는 슬슬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엄청난 살기(殺氣)… 그리고 딱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매우 사악하면서도 강력한 기운이 소녀의 몸에서 느껴졌다. 그걸 느 끼는 순간 실바르는 자신이 그 이름높은 그래듀에이트의 시험을 통과한 무사 라는 것 마저도 잊어버렸다. "컥… 가… 가지세요. 컥컥…… 가져요." 잠시 소녀는 그 가지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본 후 손을 풀어주고 뒤로 돌아서 서 가버렸다. 실바르는 벌겉게 손도장이 찍혀있는 자신의 목줄기 앞쪽을 주무 르며 투덜거렸다. "제길, 가져라 가져. 더러워서……. 그런데 이 검을 어떻게 쓰라는거야? 또 한자루 사야겠군. 제길! 이번달은 완전히 적자군." * * * "대단히 화려한 축제군." 스바시에 지구(地區) 총독,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의 말에 옆에 서있던 부 관이 공손하게 답했다. "예. 총독 전하. 프로트 시의 가을맞이 축제는 매우 화려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이 가을맞이 축제는 스바시에 왕국 남단에 위치한 프로트 항구에서 매년 벌어 지는 최고로 성대한 행사였다. 올해는 전쟁으로 인해 중단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전쟁은 매우 빨리 끝났고, 경이적인 속도로 크라레스 제국이 점령지 를 안정화 시켰기에 축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시작되었다. 공작은 화려한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를 바라보며 역시 스바지에 지구(地區)가 크라레스 지구보다 훨씬 더 풍요롭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화려 한 행렬, 넘치는 사람, 수많은 상품들을 쌓아둔 상점들이 있었고, 거리의 시 민들에게는 그 물건을 살 수 있는 돈이 있었다. 미래의 영광을 바라며 전쟁준 비만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온 크라레스와는 천지차이가 나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공작의 눈에 꽤 이채로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 매우 아름답군.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한 화려한 수레에 아름다운 처녀 라. 꽤 권세있는 가문의 자식인가? 으응? 하지만 왠만한 가문들을 몽땅 싹쓸 이해서 노예시장으로 보낸걸로 아는데……?" 그 말에 옆에 서있던 부관이 상세하게 설명했다. "권세있었던 가문의 여식이 맞사옵니다. 저 소녀는 며칠전에 경매에 나갔던 아이죠. 그걸 이번에 새로 당선된 시장(市長)이 구입했사옵니다." "흐음… 새로 당선된 놈이 처음에 하는 짓거리가 여색에 대한 탐익이라니… 이 축제 끝나고 난 후 그녀석을 처형해랏!" 그 말에 부관이 황급히 말했다. "총독 전하, 그게 아니옵니다. 저 소녀는 제물(祭物)이지요. 이 축제가 끝난 후아마 살아남기 힘들 것이옵니다." "제물?" "예. 전하. 예로부터 프로트 항은 치레아나 아르곤과의 무역이 성행해온 항구 도시이옵니다. 하지만 바다는 가을부터 약간씩 거칠어지기 시작해서 겨울에는 매우 파고가 높아 항해에 문제가 많지요. 그래서 프로트에서는 가을맞이 축제 를 열어 제물을 장만하여 해룡에게 바치고 대신 안전한 항해를 비는 것이옵니 다." "참내… 도마뱀에게 제물를 바친다고 태풍이 불던 바다가 잠잠해 진다던가?" "예. 놀랍게도 제물을 바친해는 꽤 날씨가 좋다고 하옵니다. 이게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어쨋든 크라세 섬에 살고있는 실버드래곤 쥬브로에타가 힘 을 좀 써주는 모양이옵니다." "실버드래곤 쥬브로에타?" "예. 여기서 동남편으로 120Km정도 가면 있는 무인도인데, 평상시에는 출입금 지구역이지요. 1년에 단 한번 제물을 실은 배가 그 섬에 갑니다. 그런 후 예 쁘게 단장한 처녀를 거기다가 버려놓고 옵니다. 가을맞이 축제의 정점이 바로 그 제물을 실은 배를 배웅하는 것이지요." "쥬브로에타는 몇 년정도 된 드래곤인가?" "예. 자세히는 모르지만 거의 3000년 정도 살아온 드래곤이라고 들었사옵니 다." "실버 드래곤이 3천년이나 묵었으면 날씨정도 제어하는 것은 힘든일도 아니겠 지. 세계에서 제일 거대하고 강력한 드래곤은 역시 레드보다는 바다의 제왕, 실버 드래곤이니까 말이야. 실버 드레곤의 힘을 겨우 노예 하나로 얻을 수 있 다면 매우 가격이 싸군." "그렇습죠." "실버 드래곤이 3천년이나 묵었으면 날씨정도 제어하는 것은 심심풀이 정도겠 지. 세계에서 제일 거대하고 강력한 드래곤은 역시 레드보다는 바다의 제왕, 실버 드래곤이니까 말이야. 실버 드레곤의 힘을 겨우 노예 하나로 1년간 얻을 수 있다면 매우 싼 가격이군." "그렇습죠." 이 둘의 말에 약간은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가 가미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실버 드래곤의 파워를 노예 한명 즉, 비싸봐야 150골드 남짓한 가격을 주고 1년간 얻어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저렴한 가격이었다. 날씨를 조절하는 마법은 매우 상위급의 마법이었고, 또그것을 적절하게 콘트롤하여 상선의 항 해에 유리하게 진행시킨다면 최소 6싸이클 이상의 마법사가 붙어앉아 1년동안 꼬박 날씨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바다처럼 매우 넓 은 지역에 그 마력을 미치게 하려면 이건 6싸이클급 가지고는 턱도없었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아무리 노예라고 하지만 인간을 뇌물로 바쳐야 한다는게 크라레스 태생인 그들에게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세계 최강의 생명체라고 해도 실속은 도마뱀이 아닌가? 그런 도마뱀에게 여인을 향 락의 미끼로 제공해야만 하다니……. 크라레스는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30년 전의 전쟁 이후 농노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노예들을 없애왔고, 또 농노들까지도 단계적으로 해방시켜 왔 다. 노예가 없어진다는 말은 세금을 내야하는 시민들이 증가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농노들이 해방된다는 말은 곧 국유지가 감소한다는 말이었다. 사실 국유지가 넓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황제의 힘이 거대한 것 처럼 보이지 만 실속은 달랐다. 그 중간에 끼어있는 기생충같은 귀족들의 힘만 비대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황제와 농노들의 사이에 위치해서, 농노들을 쥐어짜 온갖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기생충들 말이다. 그렇기에 귀족에게 하사했던 영지들을 단계적으로 회수하고, 농노들에게 일정 량의 토지를 주어 해방함으로서 세입을 확장할 수 있었다. 크라레스의 세금은 평균 60%정도였지만(물론 흉작일때는 세금을 낮춰줘야 하니까.), 그 세금은 귀족들이 일정량을 삼키지 못하고 몽땅 다 국가의 수입으로 들어왔기에 그나 마 크라레스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노예들이 거의 없는(대신 수인 족은 계속 노예로 썼다.) 나라에서 살다보니 부관이나 공작이나 인간이라면 '고용인'의 개념은 있었지만, 인간인 '노예'를 완전히 '가축'처럼 보는 것은 좀 힘들었던 것이다. 특히나 공작의 경우 오랫동안 외국을 떠돌며 여행을 해 왔기에 노예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는지도 몰랐다.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변방에 가면 오랜만에 만난 대상이 '인간'이라는 것이 반가울 뿐 이지, 그 상대의 출신성분은 중요한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쨋든 이 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뒤쪽에서 기사 한명이 헐레벌떡 달려오 더니 재빨리 공작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급히 황궁으로 귀환하시라는 폐하의 칙명이옵니다. 전하." "무슨 일인가?" "잘 모르겠사옵니다. 매우 급한 일이라고만 들었사옵니다." "알겠다." 공작은 안내하는 기사의 뒤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성질같아서는 최고 속 도로 달리고 싶지만 만약 이런 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인다면 어디에 숨어있는지 모를 타국의 첩자들에게 발견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기사의 뒤를 따라 이동용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성질을 죽이며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옵니까, 폐하?" 공작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이리로 오기 전 보았던 광경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의 일부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아직도 곳곳에서 부상자들을 실어내는 장면, 또 사방에 거대한 타이탄의 발자국들이 찍혀있는 것을 보면 타이탄까지 동원해서 시가전(市街戰)을 벌인 것이 분명했 다. "적의 기습이라도?" "아닐세." "예? 그렇다면?" 황제는 한숨을 내쉬면서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 다크 크라이드 경이 미쳐버렸어." "에? 미치다니 무슨 말씀?" "간신히 그 아비규환을 탈출한 실바르의 말에 따르면 시내를 구경하던 중에 패싸움이 벌어졌는데, 그걸 보더니 갑자기 미쳐버렸다고 하더군. 검을 빼들고 있는대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고, 나중에 그녀를 말리기 위해 출동한 병사들 까지……. 그녀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급히 타이탄 3대를 출동시켰는데 타이탄들과 싸우면서 그 일대를 쑥대밭을 만들다가 도망쳤어." 타이탄들과 싸우다가 도망쳤다는 말에 공작의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가……." "그 때문에 자네를불렀네. 부하들을 많이 줄수는 없어. 두어명 데리고 가서 그녀를 사로잡도록! 만약 생포가 불가능하면 죽여도 상관없네. 대신 청기사는 꼭 회수해 오도록!" "세상에… 그녀가 청기사까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 가지고는 있지만 쓰지는 않고있어. 사실 그녀는 타이탄을 다룰 줄 모 르니까 청기사를 불러낼 이유도 없겠지. 어쩌면 타이탄을 소유하고 있는지 조 차 모르고있을거야. 하지만 보통 실력이 아닌만큼 유령 기사단에서 로메로를 가져가게. 그리고 자네는 만일을 대비해서 청기사를 가져가는게 좋을거야. 그 녀의 실력은 엄청나다네. 어쩌면 마스터급일지도…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마스터 급이라고요? 하기야 타이탄과 맨몸으로 싸웠다면 그것 외에는 답이 없지만…… 그때 그녀와 싸웠던 인물들의 증언을 들어보고 떠나도 되겠습니 까?" "좋을대로 하게. 대신 그녀는 무슨일이 있더라도 처치 해야해."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공작은 유령기사단 소속의 그래듀에이트 두명과 5싸이클급 마법사 1명을 데리 고 추격작업을 시작했다. 그녀가 도망친 방향은 동남쪽, 그러니까 그길로 쭉 갈수만 있다면아마도 치레아가 있을 것이고, 그 다음은 아르곤 제국에 도착 하게 된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북쪽의 코린트로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었 다. 만약 그리로 도망쳤다면 추격작업이 매우 곤란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말을 타고 갈수는 없사옵니다. 전하." "할 수 없군. 이보게 아베인!" 그 말에 뒤쪽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던 경무장을 한 중년 사내가 공손히 대답 했다. "예. 전하." "연락을 해서 비룡 2마리만 지원해 달라고 해. 그리고 말을 가지고 돌아갈 사 람한명도 데리고 오라고 해. 알겠나?" "예. 전하." 아베인이라 불린 마법사가 통신을 하는 동안 공작은 주위를 쭉 살피기 시작했 다. 그러다가 나무 아랫쪽을 가리키면서 따라온 기사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좀 쉬다가 갔군." 공작의 말에 옆에 서있던 바스타드 소드와 가죽갑옷으로 무장한 기사 한명이 곧장 대답했다. "여태까지의 발자국으로 봤을 때 대단한 속도임이 틀림없는 것 같사옵니다. 거의 발자국 간격이 5미터를 넘어서고 있사옵니다." "그야 당연하겠지. 우리가 쫓는게 평범한 소녀가 아니니까 말이지. 그녀를 발 견하면 즉시 자네들은 타이탄을 불러야 할거야. 자네들의 실력으로는 턱도없 을 정도로 강한 상대니까……." "그정도나……." 부하들의 반응에 공작은 갑자기 타이탄을 타고 다크와 싸웠다는 기사의 증언 이 떠올랐다. "그녀가 가진 검에서 엄청난 불덩어리들이 튀어나왔사옵니다. 그것도 한두개 도 아니고 수십개나……. 하지만 우리들은 방패로 그걸 막아냈사옵니다. 방패 의 파손이 심했지만 우리는 그녀를 포위했지요.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더욱 사악하고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사옵니다. 아무래도 마나를 더 욱 집중하는 것 같았지요. 그래서 우리들이 그녀가 힘을 못 모으게 재빨리 검 으로 공격했지만 그걸 피하면서 그녀는 계속 우리들을 공격했사옵니다. 저희 들은 그때 공격은 커녕 방어하기에도 벅찼사옵니다. 그녀는 한동안 공격을 해 대다가 나중에는 지쳤는지 도망쳐버렸사옵니다. 저희들은 타이탄의 손상정도 가 꽤 심했고, 또 뒤쫓는다 해도 그녀를 죽일 자신이 없었기에 추격을 포기했 사옵니다. 타이탄의 상처를 보시겠사옵니까?" 그 기사가 불러낸 루시퍼의 방패는 거의 너덜너덜한 수준이었고, 방패로 가리 기 힘든 하체부위의 손상도 꽤 심했다. "이게 순전히 검만 가지고 만든 상처인가?" "예. 전하. 검에서 나온 불덩어리들의 위력은 대단했사옵니다. 방패가 푹푹 파였으니까 말이지요. 도대체 그게 뭣이옵니까? 엄청난 위력에, 매우 사악한 기운을 뿜고있던데, 설마… 그게 검강이옵니까?" 기사의 물음에 공작은 직접 검을 뽑아들고는 강기를 뿜어냈다. "그 모양이 이렇던가?" 검강의 목표는 타이탄의 발이었다. 두 상처를 비교해보기 위해서였다. 검강이 날아가는 것을 본 기사는 즉각 말했다. "예. 비슷하긴 하옵니다만 매우 사악한 기운을 뿜고 있다는게 달랐사옵니다. 그리고 한 개가 아니고 수십개를 한꺼번에 날렸사옵니다." 공작은 타이탄의 발에 파여있는 자국을 비교해보며 말했다. "강기 종류가 맞는 모양이군." 그때 공작은 한번에 수십개의 강기다발이라는 기사의 증언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었다. 사실 자신도 그정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때의 기억을 정리하 며 공작은 부하들에게 확정적으로 말했다. "거의 나와 동급, 어쩌면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니 매우 조 심해야만 한다. 알겠나?"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베인!" "예. 전하." "우리는 먼저 출발하겠다. 자네는 일단 말을 인계하고 비룡에 탑승한 후 저쪽 에 보이는 산꼭대기에서 만나기로 하지." "예, 전하." 공작은 아베인에게 말한 후 말에서 필요한 짐들을 꺼내 등에 지면서 말했다. "그정도 실력자와 만날 때 갑옷은 아무런 도움도 안된다. 모두들 몸을 가볍게 하기위해 벗어버리게." 공작 일행은 무거운 갑옷이나 기타 방호구들을 다 벗어버린 후 가벼운 옷차림 으로 각자 필요한 짐들만을 가지고 발자국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상대는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자신의 흔적을 지우거나 최소화할 생각조차 않하고 있었기에 추격 작업은 비교적 쉬웠다. 하지만 상대의 도주속도가 매우 빠른 만큼 그또한 별로 도움이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한참 달려가다가 갑자기 멈춰섰다. 크라레스의 수도를 휘저어놓고 도 망치기 시작한지 이틀째의 일이었다. 물론 도중에 개울물을 마시고, 토끼따위 를 잡아서 드시기도 했기에 그녀는 매우 생생한 상태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 지 이런 생각이 안들었는데 갑자기 그녀의 뇌리를 때리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 다. "[가만… 내가 지금 왜 도망치는 거지?]" 일단 곰곰히 생각해보니, 약간씩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은 묵향이었고 위대한 마교의 전사였다. 묵향이란 이름도 처음에는 2044호로 불 리다가 동료들이 언제나 묵의(墨衣)를 즐겨입는 그에게 애칭을 붙인 것이었는 데, 그게 어느덧 자신의 이름이 되어있었다. "[맞아. 내 이름은 묵향이었지. 그리고 나는 살수(殺手)였어. 그렇다면 나는 지금 목표물을 죽이고 탈출하던 중이었나?]" 한참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며칠 전에 보도듣도 못한 이상한 괴물들이 셋이나 튀어나와 싸우다가 공력이 점차 고갈되는 것을 느끼고 탈출 하지 않았던가? 무려 1시진(2시간)동안 맹공격을 퍼부었었는데 그 괴물들은 끄떡도 없었다. 도대체 그런 괴물들을 쓰는 무림의 방파(幇派)가 있었던가? "[참! 그때 죽인 놈들의 모습도 그때는 잘 몰랐는데 아주 수상했어. 푸른눈, 갈색눈, 노랑머리, 빨강머리, 갈색! 에이, 골치아파! 그놈들은 저 멀리 서쪽 에서 산다는 색목인(色目人)들일까? 그도 아니면……. 흑! 맞아. 그러고보니 아무 생각없이 그 괴물들과 싸우는데 본교의 무공을 사용하고말았어. 큰일이 구나. 흔적이 남겠는데… 돌아가서 아예 끝장을 내버려? 하지만 그렇게 해봐 야 흔적만 더욱 남길 뿐이지. 잘못하면 아무리 내가 1급 살수라도 놈들에게 잡힐지도 모르니까. 그건 그렇고 교주가 그 괴물들을 죽이라고 했었나? 그런 기억도 없는데? 그렇다면 그놈들 하고는 왜 싸웠지? 그냥 갑자기 화가나고 그 래서… 일순간 내정신이 아니었어. 살수의 생명은 냉정, 침착, 정확인데 말이 야. 에? 그건 그렇고 여기는 어디쯤이야! 대산으로 돌아가려면 어디로 가야하 지? 일단 아무 곳이나 찾아 들어가서 여기가 어딘지나 알아보고 행동해야 겠 군.]" 그녀는 한참 횡설수설하다가 휙 하고 몸을 날렸다. 대신 이제부터 그녀의 움 직임은 전문적인 살수의 수업을 받은 그 행동이었다. 거의 흔적조차 없는… …. 갑자기 공작 일행은 난감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갑자기 흔적이 없어진 것이다. 흔적이 끊어진 곳을 기준으로 주위 100미터를 이잡듯이 뒤졌지만 그 어디에도 흔적은 없었다. "난감하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공작 전하." "일단 아베인과 합류하자. 마법이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마시고 제가 그를 데려오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전하께서는 여기서 쉬시는 것이……." "상대가 약하다면 그게 되겠지만, 잘못하면 놈에게 역으로 공격당해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모두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다." "소신이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가시지요." 그들은 아베인이 기다리는 장소로 갔고, 벌써부터 비룡(와이번)을 타고 도착 해 있던 그를 데리고 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지독한 숲속을 달려가야 했기에 가장 무공이 높은 공작이 아베인을 안고 뛰었다. 그덕분에 아베인은 완전히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수풀이 짙게 우거진아랫 쪽으로 달려갈 수 없었기에 공작일행은 거의 나뭇가지를 밟고는 도약하며 전 진했기에 거기 안겨있는 아베인으로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을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완전히 눈을 꽉 감고 제발 빨리 그 장소에 도착하기를 빌기 시작했 다. "이게 마지막 그녀의 흔적이다. 여기서 서서 잠시 있었어. 두 개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힌 걸 보면…… 어쩌면 여기서 숨이라도 좀 고른후에 다시 출발했는 지도 모르지. 그런데 문제는 여기 흔적이 끊겼다는데 있다. 상대를 추격할 방 법이 있나?" "일단 대지의 기억에 물어보겠사옵니다." 아베인이 주문을 중얼거리고 나자 날씬한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생긴것과 는 도저히 안어울리는 롱소드를 허리에 차서 검집이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 다. 그녀는 땅에 서서는 난감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듯 입 이 우물거리기도 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나?" "예. 대지의 기억에는 어떤 영상만이 기억될 뿐, 소리는 기억되지 않사옵니 다. 대신 독순술(讀脣術)을 이용해 상대의 말을 짐작할 수 있는데… 소신도 독순술을 좀 배웠사오나 아뢰옵기 송구하옵니다만,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 옵니다." "참, 토지에르에게 듣기로 그녀는 여기 사람이 아니랬으니 그쪽말을 쓸수도 있다. 그렇다면 난감하군. 이럴줄 알았으면 견인족이라도 키우는건데……." 이때 아베인은 또다른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뛰어난 간단한 마법을 외우 고 있었다. "뷰 마나 포스!" 뷰 마나 포스를 유지한 상태에서 그는 더욱 시야를 넓게 하기 위해 비행마법 까지 외웠다. 하나의 마법을 유지한 상태에서 또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고난도의 수법이다. 하지만 그는 5싸이클까지 익혀 마법사의 칭호를 받 은 인물이었기에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다. 그의 몸이 점점 더 위로 올라가 기 시작했고, 곧이어 거의 지상 20미터 상공까지 올라갔을 때 외쳤다. "저기에 있습니다. 엄청난 량의 마나입니다." 아베인이 내려오자 마자 공작은 그의 몸을 끌어잡고는 몸을 날렸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날씬한 소녀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여태껏 기 척을 숨기면서 이동해 왔지만 생리적인 욕구를 슬쩍 없앨 방법은 없었다. 그 녀는 투덜거리면서 나무 앞에 서서는 치마를 내리기 시작했고 치마를 약간 내 린 후 소변을 보기위한 준비작업으로 거시기(?)를 잡으려고 했다. 물론 그걸 잡아야 조준사격을 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아니 거의 본능적인 일처리 순서였다. 그런데 그게 황당하게도 잡히지 않았다. '이런 변이 있나?' 여태껏 눈길도 주지 않았기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선을 밑으로 내리 니 자신의 몸과, 옷차림이 매우 이상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거시기 대신……. "크아아아아아악!" 공작일행이 도착했을 때 다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검을 뽑아들고 사방을 닥 치는대로 초토화 시키고 있었다. 사실 다크가 그때 완전히 미쳐버렸기에 그녀 자신의 힘을 감추지 않았고, 그 덕분에 아베인의 마법에 포착된 것이었다. 어 쨋든 공작 일행이 보기에 그녀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충혈된 눈은 이제 완 전히 광기(狂氣)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한참 목적없이 아무거나 때려부수고 있던 다크의 광기어린 눈과 슬쩍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공작일행의 눈이 어느 순간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속 도로 다크가 공작일행에게 뛰어들었고,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챈 공 작 또한 검을 뽑아들고 그녀를 제지하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 둘이 무시무시 한 대결을 벌이고 있을 때 남은 두 기사는 자신의 타이탄들을 불러냈다. 어쨋든 목표물은 찾았고, 이제 헤치우는 것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날 죽여 주슈'하고 그냥 목을 가져다가 바치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그 작업 은 매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쿠엑!" 무시무시한 붉은 강기의 회오리에 밀려 나무에 처박혔던 공작이 피를 토해냈 다. 그때, 다크는 공작이 피를 토해대는 꼴을 본 다음 그에게 좀 더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선행(?)은 채 이 루어지지 못하고 타이탄들에게 막혔다. 곧이어 타이탄 둘이 소녀하나를 쥐잡 듯 때려잡기 위해 검으로 찍어대기 시작했고, 날렵한 소녀의 몸놀림 덕분에 땅바닥에 구멍만 뚫어대기 시작했다. 소녀는 간혹 피하다가 한번씩 엄청난 붉 은색이 나는 뭔가를 뿜어냈는데 그것덕분에 방패가 푹푹 파이는 걸 보면 보통 위력은 아니었다. 그들은 더욱 방어에 치중하며 소녀를 때려잡으려고 들었고, 곧이어 몸을 추스린 공작 또한 검을 휘둘러대며 그 격투에 가세했다. 지독하게 강한 상대였기에 고작 5싸이클급 마법사인 아베인은 끼어들 엄두도 못내고 멀찌감치 뒤로 물러서버렸다. 삼대 일의 대결이었지만 한 4시간 정도 지나자 그 결과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소녀는 힘이 빠져서 헥헥대기 시작했고 남은 셋은 아직까지는 끄떡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타이탄을 동원하 지 못했다면아마도 남자 셋이 먼저 골로 갔을 확률이 높았지만 그들은 두 대 나 되는 타이탄을 동원한 매우 치사한 방법으로 소녀를 압박해 들어갔고, 타 이탄들은 역시 돈값을 해줬다. 캉! 거대한 타이탄의 장검에 부딪쳐 소녀의 검은 박살이 나버렸다. 그리고 소녀는 한참 날아가서는 굵직한 나무에 처박히면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휴우……. 정말 지독하게 강하군. 우웨엑!" 피를 토하고있는 공작에게 아베인은 재빨리 다가가서 치료마법을 구사하기 시 작했다. 공작은 잠시 응급치료를 받은 후 아베인으로부터 포션(치료용 성수; 聖水)을 받아서 몇모금 마셨다. 내상을 치료하는데는 포션을 아예 마셔버리는 편이 빠르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입 주변으로 피를 흘리며 축 뻗어있는 피투성이가 된 소녀의 곁으로 다가가 기사 한명이 검을 높이들어 목을 베려는 찰나 그를 제지했다. "그만 둬!" "예? 지금 죽여 버리심이?" "이 팔찌를 채워라. 이건 마나의 응집을 방해하는 강력한 마법이 걸려있으니 더 이상 난동을 부리지는 못하겠지." 기사 둘은 곧 공작에게서 팔찌를 받아 그녀에게 채우고 등에 진 배낭에서 끈 을 꺼내 그녀를 꽁꽁 묶기 시작했다. 좀 심하다 싶을정도로 꽁꽁 묶고있을 때 숲 한구석에서 왠 젊은이가 걸어나왔다. 매우 아름답게 생겼는데다가 타는듯 한 붉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르고 있었기에 몸매의 굴곡이 조금만 있었다면 여 자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의 젊은이였다. 그는 야유회라도 나가는 듯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지금 이 산골짜기에서 저런 인물이 튀어나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공작은 상대를 힐끗 쳐다본 다음 표정이 약간 굳어졌지만 그래도 정중하게 인 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시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아… 약간의 불상사가 벌어져서 말이죠. 소란스러웠다면 죄송합니다." 마스터의 경지에까지 들어간 공작이 저자세로 나가며 상대를 대하자 두명의 기사는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공작의 눈치를 보며 그냥 하던 일을 계속했다. "보통일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이렇게 주위가 황폐하게 된 걸 보면……." 그러면서 그 젊은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거의 반경 250미터 이상이 묵사발이 나있었다. "마법이라도 썼습니까? 아니군, 거대한 발자국들이 흩어져 있는걸 보니 타이 탄을 동원했군요." "죄송합니다. 휴식에 방해가 되었다면 사죄 드리겠습니다. 저 소녀를 여기서 간신히 따라잡았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저 소녀 한명을 잡기위해 이 난리를 피웠다는 말입니까?" "예." "흐음……." 그 남자는 기절해있는 소녀를 매우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고 몇마디 중얼거 리는 걸 보면 마법도 쓰는 모양이었다. "드래곤은 아니군요. 그런데 어떻게 겨우 인간이 저렇게 엄청난 마나를……." 그러면서 그는 공작을 힐끗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당신도 엄청나군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엄청나다니… 우연 인가요?" 그 말에 공작은 속으로 찔끔 하면서 재빨리 대답했다. "우연입니다. 위대한 분께서 여기 계시는지 알지 못했기에 여기서 일을 벌인 겁니다. 만약 알았다면 딴 곳에서……." "좋아요. 그렇게 이해하도록 하죠. 그건 그렇고 저런 몸으로 데려가다가는 아 마 돌아가는 도중에 죽을게 뻔하니 제가 조금 치료를 해드리죠." "그렇게 신경써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그 남자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거의 300년만에 보는 사람인데 그냥 보낼 수는 없죠. 약간의 치료 정도는 뭐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그 남자는 곧장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우더니 첫 번째 목표물로 공작을 잡았 다. 공작은 자신의 몸으로 날아오는 은은한 광선을 보면서 검의 손잡이를 쥐 고싶어 용을 쓰는 오른팔을 억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했다. 여기서 검을 뽑아봐야 그야말로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에 공작의 이성이 그것을 억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곧이어 공작은 소녀와의 싸움에서 얻었던 내상과 작은 상처들이 깨끗이 치료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놀라운 수준의 마법이었다. 그 남자는 공작 과 그 부하들을 간단히 치료한 후 마지막으로 소녀를 향해 치료의 광선을 날 렸다. 하지만 그 광선은 소녀의 몸을 덮어싸는 순간 소멸되어버렸다. 그걸 보 고 그 젊은이는 약간 놀라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에게 다가가서는 이리저 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소녀의 팔에 채워진 팔찌는 착용자의 마나의 응집만을 방해하는 것으로 외부 에서 가해지는 마나의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막을 정도의 물건은 아니었다. 그 남자의 눈길은 소녀의 손목에서 떠나 소녀의 목, 귀로 이동했지만 거기서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놀라울 정도의 미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정말이지 장 식을 안하는 소녀였다. 마지막으로 그 남자의 눈이 머문 곳은 소녀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 그 반지를 잠시 바라보던 남자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흐음……. 저 반지는 이 소녀의 것이 확실한가요?" "예." "그렇다면 이 소녀를 당신들이 데리고 갈수는 없습니다. 아쿠아 룰러는 드래 곤과 정령왕과의 약속의 증표. 그것이 사악한 인간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 는 것은 모든 드래곤의 사명이죠. 심심풀이 삼아 만들었다고는 해도 인간이 가지기에는 너무나도 강력한 힘이니까요. 그대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내가 알았기에 그냥 둘수는 없군요. 이 소녀를 내가 데려가도 될 까요?" 말은 공손하게 묻는 듯 했지만 만약 거절한다면 죽이고라도 데려갈것이 뻔하 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정도로 공작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공작은 억지 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위대한 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고맙습니다." 그 남자는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소녀를 가볍게 안아들었을 때 공작은 다급히 말했다. "그 팔찌는 저희들 것이니 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돌려드려야지요. 가져 가십시오." 그 말에 공작의 부하 한명이 재빨리 다가가서 주머니에서 열쇄를 꺼내 팔찌를 회수했다. 모든 일이 끝나자 그 남자는 소녀를 안고 나타났을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수풀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저… 공작전하. 저 소녀가 미쳤다고 말해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는지……." 부하의 말에 공작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꼴에 드레곤이니 어떻게 하겠지. 아마 그걸 눈치챈 후에는 고생좀 해야할걸? 하하하… 제기랄! 돌아가자." "으으응… 여기는?" "오, 이제 정신이 드시는 모양이군요." "아으윽!" 소녀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왜그런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골이 빠개지는 것 같이 아파왔기 때문이다. "저런저런… 아직 움직이지 마세요. 치료를 했지만, 아직 몸이 완쾌된 것은 아닙니다. 좀 더 안정을 취하세요." 그제서야 소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왠 아름답게 생긴 사람 - 그게 남자인 지 여자인지 헤깔리니까 - 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는거죠? 그래! 맞아, 나는 왕궁에 있었는데? 세린은 어디있죠?" "세린? 잘 모르겠군요. 세린이 누구죠?" "세린? 세린… 글세요. 잘 모르겠어요. 누군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아요." 생각을 시작하자 머리가 더욱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소녀는 머리를 감싸쥐면 서 말했다. "방금 왕궁이라고 했는데 왕족이신가요?" "아니요. 왕족은 아니고 그냥 거기서 살아요. 아니, 살았던 것 같아요. 잘 모 르겠어요." 소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어 이게 방금 자면서 꿈을 꾼건지, 아니면 이전에 자신이 그런 일을 겪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관 성 없이 완전히 헝클어져서 생각만 해도 혼란스러웠고, 머리도 지독하게 아프 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겁니다. 조금 더 자세요." 이불을 다시 소녀의 목 위까지 덮어주며 다독거려준 다음, 그는 잠의 요정 다 스트맨(dustman)을 불러내어 그녀를 잠들게 만들었다. 그녀가 잠든 후 그는 다스트맨인 '시시'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돌려보냈다. 정령과는 달리 요정 은 주종관계를 허락하지 않는다. 요정은 매우 자유롭게 행동하고 얽매이기를 싫어하기에 이렇게 친구가 될 수는 있지만 종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요정은 친구가 된다고 해서 안심하고 사귀기도 힘들었다. 요정은 매 우 장난기가 많아 그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가 매우 힘들다. 예를들어 사람의 요정 님프(nymph)의 경우를 봐도, 원수끼리 사랑하게도 만들고 삼각관계, 사 각관계를 만들어놓고는 키득거리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잠의 요정 다스트맨을 봤을때도 꼭 지금 자고싶을때는 도리어 잠이 안오다가 정작 깨있 어야 할 때는 잠이 쏟아지는 것도 이놈들의 악취미 때문인 것이다. 어쨋든 그녀가 잠들고 나자 드래곤은 아쿠아 룰러를 불러냈다. 원래가 아쿠아 룰러를 만든자 역시 드래곤이었기에 그가 부르자 반지의 정령은 곧장 튀어나 왔다. 뿌옅게 형상을 이루기 시작하다가 곧이어 귀여운 어린 소녀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정령은 드래곤에게 절을 한 후 방긋이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 넸다. 반지의 정령은 자신을 불러낸 이 남자와 이미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비해 모습은 바뀌었지만 그에게서 풍겨나오는 은근한 기운은 골드 드 래곤의 것이었다. 그것도 웜(2000-5000살 사이)급의 막강한……. "안녕하셨습니까? 아르티어스님." 정령의 귀여운 모습을 보면서 아르티어스도 활짝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구나." "예. 거의 600년 만이네요." "그렇구나. 그때 너를 처음 만났을때는 지크리트와 함께였지. 인간이었지만 정말 멋진 녀석이었는데 말이야." "예. 그분은 제가 섬겨본 인간들 중에서 손꼽히는 강자셨으니까요. 그리고 마 음씨가 참 좋으셨죠. 그 때문에 빨리 돌아가셨지만……."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가 비열한 수법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걸 알고 내가 복수를 했었으니까 말이야." "아르티어스님께서는 옛날에는 인간세상에 자주 나가신걸로 아는데 여기는… 레어(용의 둥지)네요?" 정령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약간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더이상 인간세상에는 나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카렐 을 섬기고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카렐이 죽었나?" "아닙니다. 카렐님은 대단히 강하신 분이시죠. 카렐님은 키아드리아스님과 함 께 계십니다. 카렐님은 지금도 매우 건강하세요. 카렐님이 다크님께 저를 선 물하셨죠. 카렐님께서는 프레임 스파우터(FLAME SPOUTER;화염을 내뿜는 자) 를 더 좋아하시기에 저는 별로 도움이 안되었거든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카렐이 인정한 인간이 저렇게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말인가? 강하기는 하지만, 강하다는 것이 다가 아닌데……. 특히나 나이아드는 주인의 심성을 꼼꼼히 체크하기로 유명한 녀석인데, 나이아드는 설마 저 아이와 맹약을 따를 생각인가?" 그 말에 반지의 정령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따르실 수밖에 없을거에요. 저렇게 만든분이 나이아드님이시니까……." "뭐?" "오랜만에 괜찮은 인간을 만났다고 신이나서는 밤마다 들들 볶더니 저렇게 되 어 버렸거든요." "설마……. 겨우 그정도 스트레스 받았다고 미쳐버린다면, 네 주인이 될 자격 자체가 없잖느냐?" "아뇨. 제가 만들어진 후 수많은 주인들을 만났지만 인간들 중에서는 가장 강 하다고 생각해요." "설마……. 지크리트보다도 강하다는 말이냐? 그렇게 안보이는데?" "예. 지금은 아니죠. 하지만 곧이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이 아드님께 들볶이자 그래듀에이트도 안되던 상황에서 겨우 7일만에 마스터의 경지까지 올라가버렸을 정도니까요." 아르티어스는 경악했다. "뭐? 겨우 7일만에?" "예. 저도 그런 인간은 처음 봤거든요. 그때 너무 빨리 마나를 키운다고 무리 를 하더니 저렇게 되었어요. 아마 부작용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그렇게 단시간에 마나를 몸에 쌓을 수는 없다. 또 방 법도 없고……. 드래곤도 그렇게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인간 따위가……." "하지만 그건 사실입니다. 아르티어스님. 카렐님의 말씀으로는 과거에 엄청난 경지까지… 아마도 카렐님과 대등한 경지까지 올라간 무사였던 모양입니다. 디스라이크라는 저주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원래 저사람은 남자였습니다. 그 것도 70살 정도의……." "놀라운일이군. 그래, 어쩌면 검사니까 그게 가능했는지도 모르지. 마법사라 면 죽었다 깨도 불가능했을 일을 말이야. 도대체가 검사란 것들은 우리 드래 곤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 말이야." "예. 이번주인은 좀 이해하기 힘든게 많기는 해요. 어쨋든 부작용을 점차 없 애나가면서 그녀는 지금 잊혀졌던 기억들이 조금씩 단편적으로 되살아나는데, 그 때문에 이번에 사건이 벌어졌죠. 갑자기 자신이 여자가 되어있는 충격을 받고 완전히 돌아버렸거든요. 그래서 그녀의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기 전까지 제가 기억을막았어요. 과거를 생각하면 두통을 일으킨다든지 하면서 말이 죠."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매우 흥미롭게 반응했다. "호오… 그럼 과거는 완전히 백지상태라는 건가?" "예. 하지만 그것도 1달정도만요. 1달만 지나면 부작용을 완전히 없앨 수 있 습니다. 그때까지 그녀를 아르티어스님께서 도와주실수 없을까요?" "헤헤헤… 뭐 좋지. 오랜만에 보는 인간인데…….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저 아이를 어떻게 할까?" 헤벌쭉 미소짓는 아르티어스를 정령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가 변 덕을 부리면 겨우 반지의 정령인 자신의 힘으로 그를 막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살며시 눈을 뜬 소녀가 약간 두려운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일 어서는 것을 아르티어스는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보고있었다. 이곳은 레어 안 이었다. 아르티어스의 레어는 드워프들에게 부탁해서 건설했기에 매우 거대하 면서도 아름다웠다. 레어의 입구나 통로는 폭 2미터, 높이 4미터로 만들어져 있었고 통로를 따라 20미터쯤 들어오면 거대한 지하공동(地下空洞)이 나타난 다. 이 지하공동이 드래곤인 상태에서 낮잠자기 위해 만들어놓은 곳이지만 사 실 드래곤들도 자신들의 덩치가 너무 큰걸 잘 알고, 또 그 때문에 매우 불편 한것도 잘 안다. 그렇기에 보통은 자그마한 생물로 트랜스포메이션해서 생활 한다. 그편이 훨씬 공간을 잘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래곤 같은 매우 고등한 정신력을 가진 생물은 다른 생물로 트랜스포메이션 했다고 해도 그 적응에 그 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사실 인간이나 엘프 등 일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들은 모두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육체가 엄청난 변화를 겪었을 때 그걸 효율적으로 다시금 통제하기 위 해서는 시전자의 정신적 능력에 따라 그 차이는 매우 크지만 어쨋든 적응에 매우 시간이 걸리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래곤의 경우 최강의 정신력을 가진 생명체기에 새로운 몸으로 바꿨 을 때 그 적응에는 며칠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또 그게 이미 전에 한번 통제를 해봤던 생물이라면 그 적응에 필요한 시간은 거의 필요없는 수준까지 떨어지게 된다. 어쨋든 드래곤의 정신력은 거의 신에 육박할 정도였고, 그 기 억력은 수천년 전에 있었던 일을 몇분 전에 있었던 일처럼 정확히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어쨋든 아르티어스의 레어는 드래곤인 채로 있을정도의 거대한 공동에 곁가지 로 또다른 통로가 있고 그 통로에는 작은 방들이 10개정도 연결되어 있다. 그 방들에는 아르티어스의 마법서적이나 그가 모아놓은 보물 등 기타 잡동사니들 이 보관되어 있었다. 지금 소녀와 아르티어스가 있는 방도 그 방들 중의 하나였다. 매우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고풍스럽게 만들어놓은 방이었고, 방 한쪽 구석에는 마법에 의해 불이 피어오르는 벽난로가 있어 방안은 매우 따뜻했다. 그리고천정에는 매우 밝은 빛을 뿜어내는 원반이 붙어있었는데 그 때문에 방 전체는 아주 작은 글 자라도 읽을 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전에는 지독한 두통 때문에 딴것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던 소녀가 이제 좀 나 아지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걸 보면서 아르티어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 다. "이제 깨어났군요. 몸은 좀 괜찮아졌나요?" "예." 소녀가 몸을 일으키는 걸 슬며시 바라보면서 아르티어스는 약간은 당황하면 서, 한편으로는 흥미있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소녀가 몸을 일으키자 소녀의 위에 덮여있던 이불이 아래로 살짝 벗겨졌고, 아직 여물지 않은 작은 유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옷은 침대 옆에 있습니다. 깨끗한 침대에 그런 더러운 옷을 입힌 채로 눕힐 수는 없었으니까요." 아르티어스는 소녀를 치료한 후 그녀가 입을 옷을 사기위해 마을까지 왔다갔 다 했던 자신의 노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원래가 드래곤에게는 성(性) 이란게 없었지만, 옷을 입는다든지 뭐 여러 가지 편의상 여자보다는 남자인 쪽이 편했기에 아르티어스는 남자의 모습으로 트랜스포메이션을 하고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가지고 있는 옷들도 모두 남자용이었고, 그렇기에 소녀에게 자신의 옷을 입힐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옷의 싸이즈가 소녀에게 맞았다면 옷을 사러가는 수고를 생략하기 위해 아마도 자신의 옷을 입혔을테지만……. 아르티어스는 소녀가 자신의 말을 듣고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것이 고, 그에따른 당연한 반응을 보이기를 기대했지만 소녀는 그러지 않았다. 원 래가 "여자가 나체를 타인에게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행위다."라는 것도 오랜 교육을 통해 주입어되지는 것인데, 그 기억자체가 없는 사람에게 그걸 바라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소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서는 옆에 놓인 옷을 주섬주섬 입었는데, 그 옷들을 다 입고난 후 그녀는 뭔가 허전한 감정을 느꼈다. 꼭 뭔가 빠진 절차가 있는 것같기도 하고,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 그런 감정이었다. 소녀가 잠시 멍하니 서있자 아르티어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요?" 아르티어스의 말에 소녀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배가 고픈가? "예. 배고파요." "준비해둔게 있는데 같이 먹기로 하죠." 아르티어스는 그녀를 옆방으로 데려갔다. 그 방안에는 구수한 입맛을 돋구는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아르티어스는 몇가지 요리를 가 져다가 식탁 중간에 올렸다. 우선은 고기가 좀 들어있는 야채스프, 그리고 식 탁위의 큰 은접시 위에는 알맞은 불로 잘 익힌 오크 통구이가 올려졌다. "자… 식기 전에 들어요." 소녀는 막 먹으려고 하다가 어떻게 먹는 것인지 잠시 궁리한 후 아르티어스가 먹는 방법을 흉내내어 먹기 시작했다. 야채스프는 옆에 놓인 숫가락으로, 그 리고 오크는 그대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한쪽손을 뜯어내서는 통째로 씹어먹 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그녀의 기억이 어느정도 남아있는지 시험해보려고 흉칙 한 음식까지 제공했다. 그러고 내린 결론은 그녀의 기억은 거의 없는거나 다 름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저히 인간 소녀가 오크 손을 뜯어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소개를 안했군요. 내 이름은 아르티어스라고 합니 다." "저는 다크에요." "다크? 여자 이름으로는 좀 이상하군요. 그건 그렇고 이제 몸도 다 나은 것 같은데 어디 갈곳이라도 있나요?" 다크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머리를 감싸쥐면서 말했다. 갈곳에 대한 생각이떠 오르지 않았기에 과거를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그와 동시에 지독한 두통이 시 작되었기 때문이다. "아… 아뇨. 없는 것 같아요." "그럼 갈곳이 생각날때까지 나하고 같이 지내는 것은 어때요? 사실 나는 인간 은 아니지만 지내기는 뭐 어려움이 없을겁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그럼?" "예. 드래곤이죠. 골드 드래곤." "드래곤? 드래곤이 뭐에요?" '하기야 오크가 뭔지도 모르고 먹고있는 판에, 드래곤이 뭔지 모르는 거야 당 연하지.' "설명하기는 좀 힘드니까 그냥 드래곤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이렇게 해서 드래곤 한 마리와 소녀의 기묘한 동거생활이 시작되었다. 제7부 드래곤의 아들 다크의 변신, 사랑스런(?) 여자 되기 아르티어스는 소녀와 처음 생활하면서 무지막지한 고생을 해야만 했다. 도대 체가 자신의 신체기관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소녀는 처음 봤던 것이다. 그야 당연한 것이 그런 것은 거의 7살도 되지않아 모든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 분명했지만 소녀의 현재 뇌는 자신의 몸을 콘트롤 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소변을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처음부터 가르쳐야만 했다. 아르티어스는 처음에는 위대한 골드 드래곤인 자신이 왜 인간따위에게 이런 봉사를 해야하는지 억울해 하기도 했지만 한 3일 정도 지나고 나자 그런생각 은 완전히 없어졌다. 소녀는 매우 총명했고, 마치 스펀지(sponge)처럼 아르티 어스가 가르치는 것을 흡수했다. 또 가르친 대로 이제 제법 애교도 떨기 시작 했고, 예쁘게 미소도 잘 지었다. 그리고 무섭게 굴면 울기도 잘 울었고……. 역시 여자의 모든 감정은 학습에 의해 배워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총명한 다크를 가르치는 것이 아르티어스의 무료했던 생활에 빛을 던져주기 시작했고, 아르티어스는 그것이 주는 잔잔한 재미에 빠져들고 있었다. 음식물을 요리(料理)해서 먹는 동물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무식한 오우거같은 경우 사냥물을 날로먹지만, 지능이 제법 높은 오크나 고블린은 대강 불에 끄 슬려서 먹는다. 엘프의 경우 채식을 하기 때문에 별로 요리가 발달되어 있지 않았고, 드워프는 덩치에 비했을 때 매우 많이 먹기는 했지만,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고 그렇다보니 음식의 가짓수는 많지 않았다. 오직 모든 몬스터들 에게 호비트라고 불리는 족속인 인간들은 겨우 10분 남짓되는 식사를 위해 과 도하게 많은 요리시간을 투입해서 수많은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소녀에게 요리를 가르쳤다. 아쿠아 룰러의 얘기로는 과거 남자 였는지 모르지만 디스라이크에 걸려 여자가 되어버린 이상 그것을 해제할 방 법은 없었다. 디스라이크는 제약사항이 많아 걸리기도 어렵지만 풀기는 더욱 어려운 저주받은 마법이다. 그러니 평생 여자로 살아갈 바에는 이 기회에 요 리라도 좀 배워두는게 낫지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과거 거의 600여년간 인간세상을 떠돌면서 방랑을 했고, 인간세 상에 대한 이해도도 깊었다. 원래가 드래곤은 성(性)이 정해져 있지 않는 양 성체(兩性體)기에 남자로든, 여자로든 트랜스포메이션이 된다. 그렇기에 놀랍 게도 겨우 엘프따위에게 사랑에게 빠져버린 키아드리아스의 경우 여자모양을 하고있지만 대부분의 드래곤은 어떤 특이한 형상에 구애받지 않고 트랜스포메 이션을 했다. 아르티어스도 또한 수많은 형상으로 대륙을 떠돌았었다. 결혼생활 10년만에 지겨워서 야밤도주하긴 했지만 금발의 미녀가 되어 쟈므렌이라는 젊고 멋진 백작과 살아보기도 했고, 또 긴 흑발을 휘날리는 멋진 마법사로도, 또 우람한 근육질의 전사로서도, 또 오크가 되어 무자비한 산적질도 통쾌하게 했었다. 보통 드래곤들은 보통 3000살쯤 되면자가수정(自家受精)을 하거나 또는 마음 에 드는 다른 드래곤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기도 한다. 드래곤은 양성체(兩 性體)였기에 자신이 직접 만든 정자와 난자를 수정시켜 자식을 만드는 자가수 정도 가능했던 것이다. 보통 드래곤은 일생을 통해 단 1마리의 새끼를 낳았는 데, 드래곤의 유전자는 인간 따위의 유전자 처럼 불완전하지 않았기에 근친교 배를 넘어서서 자가수정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보통 드래곤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그 시기를 거의 방랑에 집어넣었기에 자 식을 낳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4,000여세에 이른 지금 저쪽 구석에서 밀가 루 반죽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소녀에게 거의 자식에게와 같은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나중에 저 아이가 떠나면 아이를 하나 낳아봐야겠군. 그 성질 더럽던 키아드 리아스가 한낫 엘프따위에게 빠져서 산다는 말을 듣고 놀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도 재미는 있을 것 같아. 저 아이하고 겨우 일주일 정도 같이 생활 했는데 그전의 생활을 회상해보면 너무 쓸쓸하거든.' "다 됐어요." 벽난로 옆에 준비된 오븐속에 밀가루 반죽을 집어넣은 후 소녀는 자랑스레 말 했다. "또 소금으로 간맞추는거 잊지는 않았겠지요?" "잊지 않았어요." 자랑스레 말하는 소녀에게 아르티어스는 따뜻한 미소를 보내면서 말했다. "빵이 만들어지면 어떻게 할건데요?" "응… 야채스프를 끓였으니까, 버터하고 치즈, 그리고 어제만든 사과잼도 있 죠. 그렇게 모두 꺼내놓고 먹으면 맛있을거에요." "좋아요. 요리는 끝이 중요하니까, 빵 타지않게 조심하세요." "예." 조금 지나자 다크가 맛있는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알맞게 익은 빵과 버터, 잼 따위를 가져다가 식탁에 가지런히 올려놓는 것을 보면서 아르티어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맛을 보니 매우 잘 만들어놓은 빵이었다. 아르티어스는 활짝 미소하며 소녀를 향해 아낌없이 칭찬을 던졌다. "아주 맛있군요. 잘 했어요. 그럼 오늘 저녁부터는 바느질을 배워보기로 하 죠." "바느질이요?" "예. 나중에 결혼하고 나면 꼭 해야 할거에요. 아주 고난도의 작업이랍니다." 확실히 식사가 끝난 후 시작된 바느질 강좌는 매우 어려웠다. 고난도의 손재 주를 요구하는 것으로 조금만 방심하면 손가락에 구멍이 송송 뚫린다는 추가 적인 위험요소까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는 매우 섬세한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고 몇시간 지나지 않아 아르티어스는 오랜시간 구석에 처박아뒀던 바느질감들을 모두 처치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조각보 만드는 요령이나 손 수건에 수놓는 방법등을 추가로 가르치다가 날이 저물고 말았다. 아르티어스는 잠자리에 든 소녀의 아름다운 이마에 키스를 해주며 잘자라고 인사를 했다. 자신이 지금 뭔짓거리를 하고있는지 자신도 모르겠지만, 어쨋든 그놈의 기억만 안돌아온다면 저 소녀는 이대로 평범한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여태껏 아르티어스는 그녀를 가르치면서 그녀의 영리함과 또 섬세한 손재주, 집중력, 기억력, 재빠른 몸놀림에 놀라고 있었 다. 하루가 다르게 그녀의 몸놀림은 부드럽고 재빨라지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정신이 육체의 지배를 거의 완료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과연 이대로 좋을까?" 아르티어스는 거의 한숨섞인 어조로 자문해 보았다. 이제 3주일이 지나면 반 지의 정령이 약속한 대로 그녀의 기억이 돌아오겠지만 지금 자신에게 배운 것 들도 유지될 것이다. 그녀의 그 유연한 몸놀림으로 봤을 때, 또 그녀의 몸속 에 쌓여있는 경악감을 자아낼 만한 강력한 마나를 봤을 때 그녀가 평범한 여 자로서의 일생을 살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 자로서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가사(家事)따위 쓸일도 없을거고, 또 자신이 검 술따위 가르쳐 줘봐야 드래곤인 자신에게 배운 것보다는 그녀가 과거 익혔던 것이 더 나을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에게 마법이나 가르쳐 주는 것이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녀의 미래는 언제나 피를 동반할테니까 말이다. 드래곤과 마법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자연스런 연관성을 가진다. 최고, 최강의 생명체라 할 수 있는 드래곤은 그 강인한 정신력으로 강대한 마법을 구사했 고, 그들만의 독특한 용언마법(龍言魔法)까지 개발해냈다. 체외의 마나를 제 어하는 것이 아닌 체내에 쌓인 방대한 마나를 직접 통제하여 사용하는 용언마 법은 트랜스포메이션한 상태에서는 쓸 수 없었지만, 본체인 상태에서는 무적 의 위력을 자랑했다. 거기에 자신이 노력만 한다면 100년도 안되어 궁극의 마 법까지 깨우칠 지능과 정신력이 있었고, 거의 무한에 가까운 생명까지 주어져 있었다. 또 그들은 두터운 금속성의 외피와 금속성의 뼈를 가지고 있었기에 나약한 헤즐링(500살 이하의 어린 드래곤) 시기를 벗어나면 거의 무적에 가까 웠다. "끄응… 어떻게 할까?" 아르티어스는 앉아있던 푹신한 의자에서 일어서서는 조금 서성이다가 약간의 결심을 하고 다크가 잠들어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혼자서 결정을 내릴수는 없 었기 때문이다. "부르셨습니까? 아르티어스님." "그래, 부작용을 없애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냐?" "예. 예정대로 3주정도 후에 그녀는 완치될 것입니다." "흐음… 그러니까… 에잉! 너하고는 상의할 수가 없으니 나이아드를 불러와." 아르티어스는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망설였다. 사실 반지의 정령은 아무 런 힘이 없었기에 그녀와 상의해서 뭔가 결론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건 나이아 드에 의해 곧장 부도수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의 말에 반지의 정령은 약 간 놀라운 표정으로 다시 반문했다. "예?" "나이아드에게 내가 할말이 있다고 전하라구." "알겠습니다. 아르티어스님." 정령은 다소곳이 인사를 건넨 후 사라졌다. 만약 아르티어스가 물을 관장하는 실버 드레곤이었다면나이아드를 곧장 불러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었지 만, 그는 바람을 관장하는 골드 드레곤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나이아드의 상 판떼기를 구경하려면 반지의 정령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5가지 드레곤은 5 대정령 각각과의 친화력만을 가진채 태어나기에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 다. 곧이어 소녀의 왼손에 끼워져 있던 아쿠아 룰러가 엷은 빛을 내면서 물을 뿜 어냈고 그 물은 자신은 물이 아니라고 굳게 주장하듯 침대 위를 흐르면서도 시트를 적시지 않고 흘렀다. 그 물은 곧장 아랫쪽으로 떨어져 흐른 후거기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불변의 진리를 비웃고 싶은 듯 뭉 쳐서 거대한 덩어리를 형성하며 위로 솟기 시작하더니 곧장 그것은 사람의 형 상으로 바뀌어버렸다. 그 사람의 형상은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가슴이 푹 파인 도발적인 복장 에 터질듯한 유방의 윗부분이 그 옷을 뚫고 삐져나오려고 용을 쓰고 있었다. 아름다운 보라색 머릿카락을 날리며 매우 섹시하게 윙크를 한 후, 미소를 지 으며 나이아드는 말했다. 놀라울 정도로 선정적(煽情的)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아르티어스." 아르티어스는 간드러지는 듯한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는, 어이없는 듯 그녀를 바라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역시……. 그런데 그건 뭔가? 그새 취미가 바뀌었나?" "왜요? 내 몸매가 멋지지 않아요?" "황당한 짓거리 하지말고 옛날 모습으로 하자구. 정령왕의 모습으로는 너무 안어울려." "그럼 이건 어때요?" 여자의 얼굴부분이 순간적으로 물덩어리로 변하더니 다음 순간에는 금발의 매 우 청초하면서도 아름다운 지적인 얼굴의 여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옷 차림은 바뀌지 않았고 몸매도 변함이 없었기에 그 도발적인 몸매와 얼굴은 도 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장난치냐?" "흠……. 여체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놈이군." 도저히 그런 얼굴을 가진 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고 생각되지 않는 대사를 외친 후 나이아드의 옷과 육체는 얼굴은 놔둔채 또한번 변신을 시도했다. 신 체의 일부분이 물로 되었다가 다시 육체로 바뀌는 것이 뭔가 변신괴물같은 인 상을 주어 기괴함을 나타냈지만 그 변화에 걸리는 시간은 정말 순간적이라는 말이 무색할정도로 빨랐다. 이번에는 작은 유방에 쫙 빠진 몸매, 상의는 좀 점잔해졌지만 허벅지까지 잘 려있는 치마는 그녀의 늘씬한 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번에는 어때?" "에휴……. 그래도 좀 낫군. 남자로는 안되는거냐?" "뭐? 그럼 취미가 그쪽이라고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 대사를 진짜 인간 남자에게 말했다면, 청초하면서도 아름다움 여자에게 그 따위 말을 들은 그 남자는 자살하고 싶었겠지만 아르티어스는 아니었다. 드래 곤인 자신은 남자도 여자도 될 수있는 몸. 상대가 여자건 남자건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시간끌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말자구. 나는 숫컷이 아니야. 드래 곤이라구. 저 아이는 어쩔거야?" 순진해 보이는 눈길을 깊이 잠들어있는 소녀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돌리며 나 이아드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왜? 내 장난감에 흥미가 있어? 하지만 이건 나도 양보 못해. 거의 1000년만 에 보는 진짜라구. 카렐도 괜찮긴 했지만 그녀석은 나보다는 프레임 스파우더 를 더 좋아했지. 못된녀석! 내가 이프리드를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그녀석 만 불러내다니." 이프리드는 프레임 스파우더에 계약되어있는 불꽃의 정령왕이다. 정령왕들은 자아가 있는 만큼 서로 좋아하는 상대와 싫어하는 상대가 있었다. 그중 특히 나 서로간에 꼴도 보기 싫어하는 상대가 이프리드와 나이아드였다. 불과 물의 관계니 그건 당연한지도 몰랐지만, 그 때문에 두 정령왕을 한꺼번에 불러내어 계약을 이행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보를 좀 해주면 안될까? 나는 저 아이의 기억을 봉인하고 여자로서의 평범 한 삶을 살아가게 해주고 싶어." "그건 안돼. 너는 저 아이의 진짜 성질을 몰라서 그렇지, 그 호전성, 임기응 변력, 재빠른 몸놀림, 뛰어난 기술, 응용력! 가히 천재적인 검사야. 내가 왜 그런 멋진 녀석을 포기해야만 해?" "저 아이를 포기한다면 아쿠아 룰러에게 정말 멋진 주인을 찾아주지. 너도 저 런 나약하게 생긴 아이보다 진취적이고, 영리하며, 야망있고, 터프하고, 잘생 기고, 멋진 놈을 더 좋아잖아. 안그래?" "흐음… 아냐. 그 말에 넘어갈 수 없어. 저 아이도 괜찮아. 내가 데리고 놀기 에는 딱 좋은거 같아. 성질도 제법 괄괄한 편이고, 야망이 없는게 좀 걸리지 만 뭐 그것도 좋잖아? 나를 꼬실 생각은 하지마. 나는 너보다 몇만년은 더 살 아온 정령왕이야. 이 멍청한 드래곤아." 아르티어스의 제안에 나이아드는 약간 솔깃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마지 막 말은 비웃음을 한껏 머금고있었다. 비꼬며 나이아드가 말하자 아르티어스 는 열받아서 외쳤다. "이런 제기랄! 그렇다면 내가 저놈의 아쿠아 룰러를 봉인 해버릴테다." 그 말에 나이아드는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렸다. "할수 있으면 해봐라.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아니지, 아무리 네가 에인션트급 에 다가서고있는 절정기의 힘을 지닌 드래곤이라도 봉인은 어려울걸? 아쿠아 룰러를 만든 자는 저 위대했던 에인션트 드래곤 아키므로네였으니까 말이야. 네 마법력이 그를 능가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제길! 그럼 맹약을 해지해버리면 되겠지. 그럼 아쿠아 룰러도 그냥 반지가 될테고, 네놈도 다시는 세상에 못나올테니까." 그 말에 나이아드는 말도 안된다는 듯 비웃었다. "내가 그 맹약을 지키고 싶은 한은 맹약이 깨질 수 없어. 한번씩 세상에 나오 는 것도 꽤 재미있는데 내가 왜 맹약을 무위로 돌리겠어? 안그래? 이 멍청한 드래곤아." "크아악! 제길!" 나이아드는 분노에 몸을 떠는 아르티어스를 통쾌한 듯이 보고있다가 곧장 물 로 바뀌더니 침실 바닥을 물바다로 만들면서 사라져버렸다. 나이아드로부터 놀림까지 당한 아르티어스는 꽤나 열받아서 다크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딸이 나이아드 따위가 가지고 놀 수 있 을정도로 허약한 아이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르티어스가 다크에게 가르치기 시작한 마법은 정상적인 마법은 결코 아니었다. 겨우 3주 일 동안 무슨 제대로 된 마법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마나의 개념과 그 통 제력의 기본만을 가르치는데도 3주일은 모자랐다. 그만큼 자신의 체외에 흩어 진 마나를 끌어모아 활용하는 것은 매우 고차원적인 집중력을 필요로 했고, 또 그것을 효과적으로 끌어들어 통제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작업이었다. 그렇기에 이 음흉한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다크에게 용언마법을 가르쳤다. 용 언마법은 일반마법과 달리 체외가 아닌 체내의 마나를 사용한다. 그 말은 곧 마나를 끌어모아 통제하는 그 귀찮은 작업이 없어져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용언마법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드래곤에 게는 드래곤 하트라는 마나가 집중되는 작은 기관이 있었고, 마나를 압축하고 가속하는 일을 이 드래곤 하트를 이용해 행함으로서 드래곤은 용언마법을 사 용했지만 인간에게는 드래곤 하트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크의 체내에는 용언마법을 사용하기에 충분한 방대한 마나가 쌓여있 었기에 아르티어스는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인간의 단전이라 불리는 마나가 모이는 기관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런 후 일주일이란 시간을 투입하여 아 르티어스는 용언마법을 인간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해 내는데 성공했다. 물 론 그 1주일이란 기간동안 다크는 밥하고 빨래하고 바느질도 하고, 과일을 따 다가 잼도 만들고 하여튼 수많은 가사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어김없이 밤마 다 시작되는 아르티어스 교수의 마법강좌를 꼭 들어야만 했다. "火球!" 주문을 외치자마자 순식간에 소녀의 손에서 날아가 바윗덩어리에 작렬하는 불 덩어리를 보며 아르티어스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으헤헤헤… 총명한 녀석 같으니…….' "잘했어요. 잘했어요. 정말 재능이 있군요."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제대로 했을 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잘 못하면 눈물을 찔끔거릴 정도로 혹독하게 야단을 쳤지만 말이다. 어쨋든 아르티어스 는 용언마법 외에도 아쿠아 룰러의 사용법 또한 가르쳤다. "아쿠아 룰러는 뛰어난 일종의 마력 증폭장치에요. 계약에 의해 너가 아쿠아 룰러에게 준 마나의 몇배 위력에 해당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장 치죠. 복잡한 중간과정이 있지만 사실 그건 사용자가 알 필요가 없어요. 그냥 사용법을 익혀 사용할 줄만 알면 될 뿐." 아르티어스는 반지의 정의를 내린 후 그 사용법을 가르쳤다. "아쿠아 룰러는 두가지 효용이 있어요. 하나는 직접사용이고 하나는 간접사용 이죠. 직접 사용은 그때 말해준 마나를 쏟아부으며 행하는 공격 및 방어마법 이에요. 또 간접사용은 조금 달라요. 이건 나이아드의 허락하에 사용할 수 있 는데, 나이아드가 상당부분 개입함으로서 소용되는 마나에 비해 매우 폭넓고 도 방대한 위력을 끼치죠. 구름을 불러모으거나 폭우를 쏟아지게 할 수 있어 요. 그것도 매우 광범위하게 말이에요. 왠만한 나라 하나를 자연재해로 알거 지로 만드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는 말이죠. 알겠어요?" "예." 다크는 스펀지처럼 아르티어스의 지식을 흡수해들였고 그런 그녀의 총명함을 아르티어스는 더욱 사랑했다. 어쨋든 뛰어난 스승에 뛰어난 제자였던 것이다. 어느덧 바쁜가운데 3주일이 후딱 지나가버렸다. 아르티어스는 그날도 일찍 일 어나서 식사준비를 하고있는 귀여운 소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 었지만 뭔가 평소와 약간 다르다는 걸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 다. 아침에 소녀가 언제나 해주던 모닝 키스가 빠졌던 것이다. 아르티어스의 딸은 그와 생활한지 1주일만에 붙인 버릇대로 상냥하고 귀여운 얼굴로 다가와 자신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며 잘잤느냐고 인사를 해줬어야 정상인데, 그 냥 말로만 인사를 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도 처음에는 그걸 그냥 무심결에 넘겼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뭔 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드래곤의 그 뛰어난 기억력으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과 어제 아침에 있었던 일을 비교해봤다. 아르티어스의 머리 속에는 두 대의 영사기가 돌아가듯 화면들이 겹쳐지며 비교되었고 곧이어 아 르티어스는 그걸 깨닳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오늘이 그가 영원히 오지 않았 으면 하고 바랬던 그날이라는 것도……. 아르티어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녀에게 말했다. "기억은 돌아왔나요?" 소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정직하게 말했다. "예." "난 다크가 전에 뭘 했었고, 또 어떤 사람인지는 신경쓰지 않아요. 또 다크를 잡고싶은 생각또한 없습니다. 드래곤이란 원래 강한만큼 고독해야 하는 존재 니까요." "꼭 강하다와 고독하다가 연관성이 높아야만 하나요?" "내가 4000년 정도 살아오면서 느끼기로는 그랬습니다. 강자는 약자를 친구로 받아들일 아량이 있을지 모르지만, 약자가 강자를 열등감 없이 순수하게 친구 로 받아들일 배짱을 가지기는 힘들지요. 그정도 배짱이 있다면 그는 이미 약 자가 아니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이 꼭 딸처럼 생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를 부모로 생각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 말에 소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을 보고 아르티어스 는 절망했다. "역시……." "딸은 어렵지만 아들은 안될까요?" 소녀의 의외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매우 감동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 라봤다. 여태껏 단조로웠던 그의 생애에서 4000년을 살아오면서 느낀 감동보 다 이 짧았던 한달간의 감동이 더 진했던 게 사실이었다. 아르티어스는 갸냘 픈,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있는 그 소녀를 살며시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내 아들아……." 다크는 아르티어스에게 배우기 시작한 마법이란 것에 꽤나 흥미가 있었고, 또 자신만큼이나 강한자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만족했기에 기억을 되 찾았다고 밖으로 떠돌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의부와 차원이동에 대해 폭넓은 의논을 했었다. 하지만 드래곤인 아르티어스에게도 그에대한 답을 얻 을수는 없었다. 아르티어스가 기억을 되찾은 다크에게 별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씀씀이가 꽤나 마음에 들었기에 다크는 그를 매우 좋아 했다. 그 넓은 중원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의지할 만한 존재"를 그녀는 여기서 찾았기 때문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기억을 되찾은 그날 저녁 늦게까지 잠들지 않고있는 다 크에게 잠의 요정 시시를 보내어 잠들게 만들었다. 그런 후 아르티어스는 또 한번 나이아드를 불러냈다. 한가지 부탁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아드는 이번에는 우람한 근육질의 2.3미터나 되는 거구를 지닌 남자가 되어 나타났 다. "무슨 일이냐?" "한가지 부탁이 있어서 불렀다." "무슨 부탁?" "1년만 우리들에게 시간을 다오. 그 다음은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 겠다." 아르티어스의 조심스런 말에 나이아드는 비웃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훗! 아쿠아 룰러에게 들으니 용언마법과 아쿠아 룰러의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더군. 겨우 그따위 얄팍한 재주로 나에게 거역할 수 있다면 오산일 텐데?" "그건 중요한게 아니다. 나는 내 아들에게 다만 1년만이라도 평화로웠던 기억 을 간직하게 해주고 싶다." "훗! 평화로운 기억이라고? 1년따위 내 계획이 1년 미뤄지는 거지만 마지막 부탁인데 뭐, 그정도는 들어줘야겠지." "왜 너는 저 아이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거지? 또 계획이란 것은 뭐냐?" "전에도 말했잖아. 여러모로 실험해 봤지만 꽤 쓸만하다고. 나는 저 아이를 조종해서 인간의 수를 좀 줄일 생각이야. 지금 인간의 숫자는 너무 많거든. 지금 수의 1/100정도가 딱 좋겠지." "미쳤군." "나는 절대 미치지 않았어. 이건 벌써 대지의 정령왕 카르스타와 얘기를 끝낸 거야. 그녀석도 인간들이 돌아다니면서 그와 내가 이룩해놓은 것들을 파괴하 고 있는게 마음에 별로 안들던 참이었거든. 물론 나머지 세녀석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 이번 계획에 찬성하지 않은거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지. 내가 저 아이를 지배하고, 또 힘을 준다면 그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지. 그리고 대지의 정령왕도 힘을 빌려준다고 했고 말이야." "다… 닥쳐랏! 그렇게 방대한 살육을 다른 드래곤이나 엘프들이 놔둘성 싶 나?" "드래곤? 흥! 저 아이의 마스터에 이르는 능력과 정령왕 둘의 힘, 그리고 멍 청한 네놈은 몰랐겠지만 저 아이가 거느리고 있는 타이탄까지 합쳐진다면 드 래곤 따위는 상대가 안돼." 의외의 반격에 아르티어스는 멈칫하며 말했다. "그… 그렇다면 카렐은?" "카렐은 대단하지. 그랜드 마스터급인 그녀석의 힘에다가 엘프들이 만든 최고 의 걸작 골든 나이트와 이프리트의 힘이 보태진다면……. 하지만 이건 몰랐을 걸? 저 아이가 가진 타이탄은 골든 나이트와 쌍벽을 이루지. 또 저 아이의 모 자르는 능력은 정령왕 둘이 보태줄거고. 그렇다면 아무리 카렐이라도 힘든건 마찬가지야." 아르티어스는 나이아드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카렐이 가진 타이탄의 위력은 자신도 잘 알고있었다. 카렐이 자신의 타이탄에 탄 상태라면 거의 에인션트 드래곤을 제외하고는 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저 아이 가 그와 대등한 타이탄을 가지고 있다니… 저 아이의 신분이 뭐기에? 하지만 지금 그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나이아드는 이번에야 말로 꼭두각시 하나를 만 들어 인간들을 멸종시키려고 드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살인이 반복된다면 저 갸냘픈 아이의 섬세한 영혼은 반복되는 살인에 짓눌려 황폐해질 것이고 결국 은……. 일단 아르티어스는 후퇴해서 시간을 벌기로 했다. 1년이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나을테니까. "좋아. 네녀석이 무슨 계획을 세우던 간에 그건 내가 상관할 수 없지. 다만 1 년의 시간은?" "잘생각했어. 원래가 드래곤은 다른 하등 생물의 일에 관여하는 걸 별로 좋아 하지 않지. 흐흐흐 자네도 우리들 정령과 같이 조화와 균형을 소중히 여기게 나. 단순히 인간편만 든다고 될게 아니야. 자연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수는 좀 줄어들어야 해. 그게 균형도 맞고, 조화로운 거야. 물론 1년은 주지. 겨우 1 년으로 뭐가 되겠느냐 만은… 흐흐흐흐흐……." 나이아드는 얄미운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수련은 오후에 하면 안될까요? 실은 어제 저녁에 하려고 했는데, 잠들어버리 는 바람에 못한게 있거든요." 소녀는 약간 쑥쓰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다크는 처음부터 이런 표 정을 짓는 것을 몰랐지만, 이 1달동안 아르티어스 옹에 의해 실시된 감정표현 교육은 매우 훌륭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귀여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크가 의자(義子)가 된 이후 아 르티어스는 그녀에 대한 말투를 하대로 바꿨다. "그럼 그럼. 마음대로 하거라. 1년이란 시간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냐?" "1년이요?" "흠흠…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야." 다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일단은 방문을 잠궜다. 그런 후 차곡차곡 옷을 벗어버린 후 알몸으로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제 마 지막 관문에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운기조식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다크의 몸은 떠오르기 시작했고 온 몸에서 엄청난 열과 광채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기(氣)의 회오리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며 주위를 맴돌기 시작 했다. 이제 바야흐로 현경으로 들어가는 두 번째의 환골탈태가 시작된 것이 다. 두터운 마법책을 펴놓고는 다크가 익히기에 쓸만한 마법이 없을까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느껴진 광폭할만큼 거대한 마나의 존재에 경악할 정도로 놀랐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히 그 기운은 아들의 방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에 그는 서둘러서 그쪽 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방문을 열수는 없었다. 안에서 잠겨있었기 때문이 다. 아르티어스는 잠시 이놈의 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갈등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점심때는 수련을 한다는 말이었고, 또 안에서 잠겨있 다면 자신이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뭐, 다 큰 자식이니 사생활의 자유가 있을 수 있겠지." 애써 자위하며 그는 스스로 뱉은 말에 스스로 안도하며 다시금 마법책을 읽어 보기 위해 돌아갔다. 다크의 피부는 점점 더 열기가 높아짐에따라 쭉쭉 금이가고 찢어지기 시작했 고 밖에 분리된 껍질은 곧장 시커멓게 타들어가버렸다. 시커멓게 타들어간 피 부의 갈라진 틈 사이로 기괴할 정도로 밝은 빛과 열이 계속 뿜어져 나오며 아 직 이 작업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그 갈라 진 금의 폭이 조금 더 넓어지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시커멓게 타버린 그 껍질이 오그라들며 넓어지는 듯이 느껴졌지만, 사실 그 시커먼 부분은 더 이 상 오그라들고 자시고 할것도 없을정도로 재가 되어 있었기에 이 현상은 진짜 로 육체가 외부로 약간씩 팽창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것 은 조금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멈췄다. 화경이나, 현경, 생사경으로 들어갈때마다 1번씩의 환골탈태를 거치며 기를 저장하는 단전을 키우게 된다. 물론 이때 육체도 재구성되며 싱싱한 젊은 육 체로 돌아가지만 가장 확실하게 바뀌는 부분이 단전이다. 각 환골탈태때마다 단전의 용량은 1.5배씩 증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크의 경우 일반적 으로 무공을 익힌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점이 있는데, 그건 다크가 육체적으로 매우 어린 상태에서 환골탈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전번의 환골탈태에서도 급격히 키가 조금 커졌었고, 또 이번에도 커지게 된것이다. 어쨋든 파란만장한 환골탈태는 거의 3시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 시간동안 다크는 매번 환골탈태시에 느껴보는 것이지만 그 지독한 열기를 견디느라고 진이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환골탈태가 끝났다고 "이제 해방이다" 하고 모든 걸 끝낼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그놈의 환골탈태를 한다고 소모한 기를 보 충해야 하고, 또 더욱 많은 기를 쌓을 수 있도록 확장된 그녀의 단전에 기를 모으기 시작해야만 했다. 그녀는 북명신공을 응용하여 사방에서 방대한 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때 문에 자신의 마나가 갑자기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에 놀란 아르티어스 어르신 이 레어 밖으로 급히 피신한 것을 깊은 무아의 세계에 들어간 그녀는 알수 없 었고, 또 알았다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아는 한 아르티어 스는 매우 강한 생명체였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레어 밖에서 죽치고 있다가 안에서 걸어나오는 아들을 보고 자 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안에 그녀는 너무나 많이 변해있었다. 우선 한눈에 보기에도 그렇게도 잘 맞던 옷이 조금 껑충해진 것이 그새 키가 좀 자란 것 같았다. 또 그 짧은 시간동안에 키만 좀 커진게 아니라 좀 더 성 숙해진 뭔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좀 더 예뻐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정 도의 미세한 차이점은 아르티어스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가장 큰 변화 가 그 짧은 시간동안에 있었다. 그게 뭔가하면 드래곤이었던 자신이니까 맞받 아 줄 수 있었을 정도로 강렬한 마나를 지니고 있음을 대변해 주던 그 맑은 눈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그 엄청난 마나의 흔적을 깨끗이 숨겨버렸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가급적 놀라움을 밖으로 표 현하지 않으려고 억제하면서 그 때문에 약간 굳어버린 얼굴로 말했다. "이제 끝났냐?" "예." "새 옷을 사와야겠구나. 시장할테니 먼저 밥부터 지어라. 나는 그동안에 옷을 사올테니까." "그럴께요." 아름답게 살포시 미소지으며 말했는데,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얼굴에서 여태껏 보지 못했던 뭔가 보이지 않는 강한 자신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 는 이제서야 성(性)을 제외하고 자신이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았던 것이다. 다크에게서 이상한 자신감이 보이기 시작한 그때부터 아르티어스 옹의 사랑스 럽던 아들은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머리속에 뭐가 들어갔는지 가사일에는 도 무지 발전을 보이지 않았고, 또 마법 수련도 지지부진했다. 뭐 그렇게 실수를 많이 했다든가 그런건 아니었지만 도저히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없었다. 거기 에 마법은 과거 2주일동안 1싸이클 마법의 절반 이상을 마스터하고 2싸이클급 마법도 몇 개 배워낸 그 엄청난 진도가 1주일을 꼬박 핏대를 세워가며 가르쳤 는데 1싸이클을 마스터 하기는커녕 겨우 1싸이클급 마법을 4개도 못가르쳤다. 그러니 아무리 아르티어스 옹의 머리가 노화 때문에 돌이되었다 해도 뭔가 이 상함을 눈치챘을 것인데, 그의 머리는 돌하고는 거리가 매우 멀지 않은가? 당 연히 아르티어스는 그걸 재빨리 눈치챘고, 그 이유를 유추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그 사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다크가 자신의 말을 잘 않듣기 시작한 시발점은 기억의 회복이었다. 기억이 돌아왔던 그날 아르티어 스는 나이아드와 흥정을 할 생각에 정신이 없었기에 다크의 마법공부를 대강 하고 치웠었다. 또 아들을 얻은 기쁨에 그날 약간씩 생긴 다크의 실수는 뭐, 새로이 기억을 되찾아서 좀 혼란스러울수도 있지 하고 그냥 너그러이 참고 넘 겼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이 한순간에 어떻게 이렇게나 바뀔 수가 있을까? 그토록 자신의 말을 잘듣던 사랑스럽던 소녀는 사라지고 고집세고, 지독하게 도 주관이 강하고, 흥미있는 것 외에는 아예 거들떠도 안보는 고집불통의 검 객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여태껏 배운것이야 잊지않고 잘했지만,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게 문제였다. 가르치다가 실수해서 잘 못한다고 꾸짖으면 무사는 그 따위것 안배워도 상관없다고 반박하는데야 아르티어스 옹으로서도 할말이 없 었다. 마법도 꼭 마나의 응용이나 뭐 그런 부분은 자신이 알고있는 무술과 관련지어 생각하고 파악해 가려고 머리를 굴려대니 수업 진도는 지지부진한 편이었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아르티어스 옹은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참아야만 했다. 생 각같아서는 엎어놓고 말안듣는 그녀의 엉덩짝이라도 기분 풀릴때까지 패놓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 왜냐고? 사랑스런 소녀를 패는게 너무 가슴 아파서 못한게 아니라 힘에 밀려서 못했다. 아르티어스는 그걸 시도했다가 자 신이 트랜스포메이션한 육체를 가지고는 망나니같은 아들녀석의 한주먹거리밖 에 안된다는 것을 눈탱이의 색깔이 퍼렇게 변질된 다음에야 깨닳았던 것이다. 정말이지 인간이면서, 그것도 계집애인 주제에 아들녀석은 무지막지하게 강했 던 것이다. "아구구구……. 내 팔자야. 내 사랑스럽던 아들은 어디로 갔지? 에휴~~~~~" 저 뼛속깊은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한숨을 뿜어낸 아르티어스는 지금의 사태 에 대해 궁리를 해야만 했다. 다크의 엉덩짝을 패기위해 틀어쥐려다가 도리어 다크에게 한 대맞고 나자빠질때부터 아버지로서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진거 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권위를 보여야 해. 그녀석과 나와의 힘의 차이를 보여주고 존경심을 얻어내야만 해. 저 빌어먹을 년을 통제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하지만… 그 래도 안돼면?" 아르티어스는 조금 더 궁리한 다음 내뱉듯이 말했다. "뱃속에 꿀꺽해버린 다음, 모든걸 없었던 일로 하면 되지." 아르티어스가 작심을 하고 그녀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아르티어스가 만 들어 놓으라던 조각보는 손도대지 않고 뭔가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아버지, 혹시 검 있어요?" "아빠라고 부르라니까, 아니면 엄마라고 부르던지. 아버지는 너무 거리감이 느껴져서 싫어. 알겠냐?" "그게 그래도……." 다크는 난처해서 말했다. 눈딱 감고 아빠라고 부를수도 있겠지만 70여년을 살 아온 그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좋아. 어떤 검을 원하는데? 우리 아들이 원하는데 하나 장만해 줘야지." "그러니까 길이는 70센티미터 정도, 손잡이는 20센티미터 정도, 양날검이어야 하고 검신은 완만하게 휘어지게 만들면 되요." "흠…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 하지만 새로 만들기는 귀찮으니 내가 가지 고 있는 검들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 가지면 안될까?" "검이 있어요?" "그럼. 한 10자루 정도 있지. 내가 과거 인간세상을 떠돌 때 수집해놓은 건데 나쁜건 아냐. 그중 한자루는 내 친구녀석이 선물한 것인데 아주 괜찮은 마법 검이지." "드래곤이… 친구도 있어요?" "드래곤은 친구가 없는 줄 아냐? 그녀석은 여행도중에 만난 레드 드래곤 '브 로마네스'라는 녀석인데 콧대높기로 이름높은 레드치고는 쓸만한 놈이었지. 그녀석과 나는 헤어지면서 기념으로 서로가 직접 검을 한자루씩 만들어 교환 했는데 제법 쓸만하더라 이거지." "한번 봐요." '짜식! 검 하니까 눈빛이 달라지는군.' 하고 생각하며 아르티어스는 그녀를 자신의 보물창고로 인도했다. 아르티어스가 문을 열자 한쪽 벽에는 검이나 활 창 등 무기류와 방패, 갑옷 등이 걸려있었고 그 반대쪽에는 금은보화가 쌓여 서 거의 방의 절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이 수집품들을 자랑스레 바라봤다. 이 금들의 1/3은 드 워프들을 협박해서 뺏은 것이었고, 1/3은 인간세상을 떠돌 때 갖가지 일을 해 서 벌어들인 것이었고, 또 1/3은 장난삼아 몇몇 나라의 국왕들을 드래곤인 상 태로 찾아가서 그 자신의 거대하면서도 위압적인 자랑스런 몸매를 구경시켜주 고 얻은(?) 것들이었다. 사실 드래곤인 자신에게 이따위 보석이나 금은따위는 별로 필요한게 아니었지 만 그래도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그러하듯 그 반짝거리는 영롱한 광채가 보기 좋아서 끌어모아놓은 것이었다. 왠만한 사람들은 이 보물의 산을 쳐다보기만 해도 다리의 힘이 빠져 주저앉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아들녀석은 그렇지 않았 다. 엄청나게 쌓여서 영롱한 광채를 뿜어내는 보석따위는 본체만체하고 곧장 검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들녀석이 검을 고르는데 들어간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냥 쭉 훑어보더니 곧장 한 개를 선택했다. 과거 아르티어스가 여자 마법사로 활동하던 시절 멋 으로 차고다녔던 여성용의 격투검 샤벨(shabel)이었다. "이게 좋겠어요." 그 샤벨은 보통의 샤벨들이 그러하듯 검신의 길이 60센티, 폭 3센티 정도의 매우 짧지만 예리하고 카로운 여성용의 검이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멋으로 차고다녔었기 때문에 마법검도 아니었고, 그렇게 대단한 검도 아닌 그냥 금은 따위로 모양을 냈고 손잡이에 붉은 보석까지 붙어있는 정말 겉멋뿐인 검이었 기에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선택을 반대했다. "그건 아무런 위력도 없는 검이야. 내가 왕년에 멋으로 좀 차고 다녔던 건데 그런걸 차고다닐 수야 없지. 방금 내가 말했던 브로마네스가 선물했던 검은 이거야. 얼마나 근사하냐?" 그러면서 아르티어스 옹은 요즘들어 회의가 좀 일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소녀를 향해 벽에 높직하게 걸려있던 1.5미터가 넘는 호화롭게 장식된 바스터 소드를 손수 꺼내들고는 그녀에게 권했다. 확실히 드래곤이 마법으로 검신을 직접 만들었고, 그것에 아르티어스 옹의 협박에 굴복한 드워프들이 손잡이와 검집을 만들어 붙였기에 너무나도 화려하면서도 완벽한 검이었다. 아르티어스 가 내부를 보여주기 위해 검신을 조금 밖으로 꺼내자 검신에 새겨진 수없이 많은 기하학적인 주문과 레드 드레곤의 뼈다귀(뼈와 드래곤의 외피는 같은 성 분이다.)만이 가지는 찬란한 붉은 색깔이 그 검을 더욱 멋있게 해주고 있었 다. "어때? 이정도면 최고의 예술품이지? 그런 쓸모없는 검보다야 이게 낫지. 이 건 마나만 주입해 주면 5싸이클급까지 화염마법을 사용할 수 있거든. 내가 과 거 이 검을 들고 대륙을 돌아다닐 때 정말 끝내줬었단다. 어때? 구미가 댕기 지 않냐?" "전혀. 그렇게 큰걸 귀찮게 어떻게 들고다녀요? 이정도 크기가 딱 맞아요." 양보할 줄 모르는 소녀의 말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성을 벌컥 내며 말했다. "이런 제기랄! 그런 쇠붙이로 만든건 약해 빠져서 못쓴다니까. 좋다. 그럼 조 금만 시간을 다오. 내가 하나 만들어 줄테니." "검 한자루를 어느세월에 만들겠어요? 이정도면 충분해요." 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그리며 말했다. "에잉. 그게 아니라니까. 마법으로 검을 만드는 건 금새 끝나지. 지금 검을 만들건데 너도 한번 볼테냐?" "그러죠." 이 음흉하신 아르티어스 나으리는 이제 바야흐로 본체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당연히 드레곤 본을 이용한 검을 만드려면 그 뼈의 성분을 몸에서 뽑아내기 위해 드래곤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작업을 망나니 아들녀석 앞에서 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아 들녀석과 위대하신 아버님 사이의 힘의 차이를 확실하게 느끼게 해줄 생각이 었던 것이다. 드넓은 공동에서 아르티어스가 주문을 외치자마자 그의 몸은 빛이나기 시작했 고 그 빛의 덩어리는 폭발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약 5분도 지나지 않아 그 빛이 사라질때쯤 되었을 때, 그 드넓은 지하공동 안은 거대한 황금빛 드래곤 1마리에 의해 태반 이상이 꽉 차버렸다. "정말 더럽게 크네." <진짜 크지? 어때? 이 엄청난 '아빠'의 힘을 이제는 느끼겠냐?> 일단 드레곤으로 돌아가면 말을 할 수 없다. 당연히 구강구조가 틀리니 말이 되나? 대신 텔레파시를 이용해 의사를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아르티어 스는 일부러 아빠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계속 아빠라고 주입교육을 시키면 '아버지'가 '아빠'로 바뀔지도 모르고, 저런 귀여운 녀석의 입에서는 '아빠' 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것이 훨씬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자부심과는 달리 다크는 그리 크게 위압감을 느끼는 것 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사실 엄청난 기가 느껴지는게 사실이기는 했다. 하지 만 상대의 덩치 또한 매우 컸기에 그 덩치로 재빠른 몸놀림은 힘들 것이고, 맞붙는다 해도 자신이 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특히나 이런 좁은 곳에서 저 런 덩치로 변신한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검은 안만들어요?" <으응? 네녀석은 아빠의 이 위용에 대해 뭔가 감탄사조차 터뜨릴줄 모르냐?> 그 말에 소녀는 호들갑스럽게 과장된 그러나 전혀 표정상으로는 감흥을 받지 못한 감탄사를 터뜨려줬다. "우와! 대단해요. 정말이지 엄청나요. 최고에요. 이정도면 됐어요?" 아르티어스는 속으로 매우 못마땅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기도 그랬다. 사실 이놈의 레어는 드워프들을 협박해서 만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자신이 아주 젊을 때 제작한 것이었기에 이제 노룡이 다되어가는 시점에서 봤을때는 좀 비 좁은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 이런 대공동이야 할짓없는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을 보낼때 드래곤인 상태에서 잠자기 알맞지 활동자체는 불가능했다. 한 두어달 정도 잠으로 때워버리면 계절이 바뀐다. 대공동은 그렇게 시간떼우는 데는 최고였던 것이다. 좀 비좁더라도 이 대공동은 아르티어스 자신의 남은 생이 끝날때까지 그 목적을 다할 수 있으리라. 아르티어스 옹께서 정신을 집중하여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그의 몸속에서 뼈다귀 성분이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그 거대한 몸집을 생각 해 본다면 겨우 검하나 만들정도의 드래곤 본을 뽑아내는 것은 표시도 나지않 는 작업이었다. 아르티어스의 몸 여기저기에서 미세한 증기와 같은 형태로 뿜 어져 나온 그것은 하나로 뭉쳐 밝은 금광(金光)을 내며 점차 검의 형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검집이나 손잡이따위는 생략한 완전히 검신(檢身)뿐이 었지만 말이다. 한 30분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자 그것은 완전히 완성되었다. 그것은 골드 드래곤 특유의 뼈색깔인 밝은 황금색을 띄었다. 그리고 그 검신 의 위에는 아르티어스가 아들을 위한 써비스로 새겨놓은 수많은 마법주문들이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검날을 완성한 후 아르티어스의 몸은 전과같이 빛을 뿜으며 이번에는 작아지 기 시작했고, 곧이어 다크가 잘 알고있던 인간형태로 돌아왔다. 아르티어스는 바닥에 떨어져있는 검신을 주워들고는 찬찬히 살펴본다음 만족스레 미소를 지 었다. 꽤 오랜만에 써보는 마법이었지만 매우 훌륭하게 아들녀석이 주문한 대 로의 검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좋아, 좋아. 이정도면 아주 괜찮군. 이제 아무 드워프 마을에나 가서 검집하 고 손잡이만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면 되겠지." "그거 다 만드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데요?" "그녀석들 손재주가 좋으니까 내일이면 완성될거다." "검집하고 손잡이는 그냥 수수하게 해줘요. 괜히 보석따위 덕지덕지 붙이지 말고……." "왜? 사랑하는 아들에게 선물하는 검인데 그정도는 해줄수 있다구. 저 방에 쌓여있던 금은보화를 못봤냐? 검집하고 손잡이쯤 만들어 준다고 해도 별로 비 싸지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거라." 아르티어스는 처음에는 땡전한푼 안든다고 설명을 하려다가, 그래도 명색이 드래곤인데 체면이 있지. 드래곤의 거대한 위압적인 몸매와 힘을 이용해 은연 중에 협박을 해서 드워프들에게 무료봉사를 시키는 것도 모자라, 그 재료까지 드워프 자비부담을 시킬 예정이라는 건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완성품만 넘겨 주면 되는데, 골치아프게 중간과정까지 상세하게 설명을 해줄 필요는 없기때 문이다. "좋아요. 하지만 될 수 있으면 수수하게 해줘야 해요. 그리고 칼막이는 필요 없구요. 알았죠?" "흐흐흐… 아빠라고 불러준다면 원하는 그대로 해주마." 다크는 할 수 없이 자존심을 꾹꾹눌러 죽이고 대답을 해줘야 했다. 그녀는 잘 난체하기 좋아하는 드래곤이 아니었기에 눈에 확 띄는 검은 별로 좋아하지 않 았다. 비싼 검을 차고있어 봤자 그것에 눈독들이는 놈들에 의해 쓸데없는 사 건도 많이 일어날 것이고, 무엇보다 남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니까 말이다. "…아빠." "우헤헤헤… 좋아좋아. 이 아빠는 드워프들에게 부탁하고 오마." '그래! 하나씩 하나씩 고쳐나가는 거야. 흐헤헤헤…….' 매우 기분이 좋아진 아르티어스 옹께서는 황금빛 나는 검신을 가지고 비행마 법을 써서 부탁할 상대를 찾아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가버렸다. 드워프는 키도 작고 못생긴 볼품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신께서는 그들에게 겉모습이 모자라는 만큼 금속 또는 보석 세공에 대한 위대한 재능을 선물하셨 다. 그렇기에 세상에 이름난 검이나 갑옷, 보석 세공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드 워프들의 작품이었다. 특히나 드워프의 경우 찬란한 빛깔이 영원히 간직되는 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영원불멸의 금속인 황금을 매우 좋아했고 철을 가장 혐오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작품들 중에는 철로 만든 것은 거의 없었다. 드워프는 좀 더 좋은 재료를 얻기 위해서 고달픈 광석채굴작업도 마다하지 않 는 타고난 장인(匠人)들이었기에, 드워프의 마을들은 대부분의 경우 외따로 떨어진 산간벽지에 건설되어 있다. 일부 개방적인 드워프의 경우 인간들의 마 을까지 들어가 금은방을 경영하거나, 희귀한 귀금속이나 보석류를 찾기위해 떠도는 무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외진곳에서 정착해서 살았다. 외진곳일수록 포악한 몬스터들이 많이 돌아다니지만 생긴것과 달리 호전적(好 戰的)인 드워프들에게 그런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고된 광산노동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체력과 덩치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힘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명의 드워프들이 자기 키만한 도끼를 휘두르 며 용맹하게 달려들면 왠만한 몬스터들은 꼬리를 감추고 달아나기 마련이었 다. 하지만 드워프도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증오하는 몬스터가 있었으니……. <흐헤헤헤… 작은 일 한가지를 해줘야 겠다. 너희들에게는 매우 쉬운 일이야. 설마 거절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한적하기만 하던 작은 드워프 마을의 촌장은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의 앞에 거대한 황금빛 찬란한 드래곤이 먹음직한 먹이를 눈앞에 두고 어떻게 먹을까 감상하는 듯한 눈빛으로 보고있으니 식은땀이 안 날 수 없었다. "예… 예! 당연히 해드려야 합지요. 어떤 일이신지?" 촌장의 앞으로 드래곤의 거대한 손이 다가오더니 뭔가를 촌장 앞에 떨어뜨렸 다. 얼핏 보기에 황금 막대기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땅바닥에 툭 떨어지는 게 아니라 떨어지던 여력을 이용하여 거의 절반쯤 땅속으로 파고들어가버렸 다. 촌장은 땅에 반쯤 박혀있는 그걸 뽑아본 다음에야 그것이 절대로 황금 따 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건 그 귀하디 귀한 골드 드레곤의 뼈로 만든 검신이었던 것이다. 드래곤은 언제나 사멸하기 직전 주문을 외워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을 대지의 여신 케레스(ceres)에게 되돌려버린다. 그렇기에 여태껏 수많은 드래곤이 노화(老化)에 의해 자연사(自然死) 했음에도 그 껍질은 커녕 뼈다구 도 구하기 힘든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드래곤의 뼈와 가죽을 손에 얻 기 위해서는 드래곤이 주문을 외울 시간을 주지 말아야 했고, 그 방법은 직접 사냥해서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쨋든 황금빛 드래곤이 떨어뜨린 그 검신은, 저 먼 서방땅에서 사용한다고 들었던 약간 휘어진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역시나 황금빛 드래곤이 직접 제작한 것인 만큼, 그 황금빛이 나는 아름다운 검신은 미세한 삐뚤림도 없이 완벽하게 곧았고 완만한 곡선은 약간의 들쑥날쑥함도 없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예술품이었다. "검집과 손잡이를 만들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내일까지.> 그 말에 드워프 촌장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항변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시간을 조금 더 주십시오.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닥쳐랏! 내일까지다. 단 황금이나 보석을 사용하면 안된다.> 순간 촌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황금이나 보석은 드래곤이 매우 좋아하는 품목인데 그것들을 사용하지 말라니.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수수한 형태를 원한다면 시간이 많이 들어가지 않기에 그래도 조금의 희망은 있었다. 그렇기 에 촌장은 점점 자신의 명줄이 좀 더 길어지는 것같은 고무적인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조건을 말하겠다. 일단 검집은 수수한 모양이어야 한다. 절대로 황금이 나 보석을 붙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칼날받이도 필요없다. 검집과 손잡이만 있으면 돼. 그리고 손잡이의 길이는 20센티정도로 양손용으로 해라. 더불어 그에 어울리는 수수한 모양의 검대(劍帶)도 만들어야 한다. 알겠느냐? 기간은 내일 까지다.> 드래곤에 대한 반항은 불가능. 그러니 할 수 없이 촌장은 그걸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어쨋든 승낙을 해야지만 내일까지라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 가 어딘데……. "예." <내일 검을 찾으러 오마. 만약 그게 아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모두 이 세 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으하하하…….> 황금빛 드래곤은 호쾌한 웃음소리를 남기며 유유히 날아올랐다. 그 엄청난 덩 치가 날아오르면서 강풍이 일어나 드워프들이 날려가지 않으려고 용을 쓰는 모습을 비웃기나 하듯 천천히 떠올랐다. 드래곤은 일정높이까지 올라간 후 그 거대한 날개를 몇차례 퍼덕이더니 사라져버렸고 이제 그 자리에 남은 촌장은 이 빌어먹을 의뢰를 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제공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저 금빛나는 사악한 괴물의 헤즐링(500살 이내의 새끼 드래곤)이 범인일 것이 다. "제기랄! 이봐! 들었지? 빨리 모여. 서두르자구." 곧이어 계속되는 촌장의 지시로 드워프 마을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수고료를 땡전한푼 않내는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위협하는 빌어먹을 의뢰자를 위해 그 들은 젖먹던 힘까지 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참 물건을 만들고 있는 드워프들에게 이 빌어먹을 의뢰를 한 드래곤이 누군 지 생각할 틈은 없었다. 그거 생각하느라고 낭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산맥에는 드래곤이 살고 있지 않다고 전해져왔다. 아주 오랜 옛날 그 러니까 한 2000년쯤 전에는 성질 고약한 골드 드래곤 1마리가 살았다고 전설 에 전해지지만, 그녀석은 죽었는지 아니면 이곳을 떠났는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워프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 아버지 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 전설에 따르면 그 탐욕스런 골드 드래곤 은 매우 보석과 황금을 좋아해서 산맥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날아가 각국 의 국왕들을 협박해서 보석류를 긁어모았다고 한다. 그 드래곤의 사악함에 치를 떨던 인간들 중에서 매우 용맹한 자들이 그 악독 한 괴물을 없애기 위해 용사 파티를 구성하여 드래곤 슬레이어의 영광을 얻기 위해 떠났지만, 사실 돌아온 용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2000년쯤 전에 그 드래곤은 돌연히 자취를 감춰버렸고, 인간들 세상에서는 아마도 마지막에 출발했던 용사 파티나 또는 어떤 이름모를 용사들이 그 사악한 드래곤을 죽였 을 것이라고 굳게 믿기 시작했다. 그 추측은 음유시인들을 자극해 "가상적인" 용사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많 은 음유시인들이 많은 노래를 지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노래는 안젤리아나 라는 여류 음유시인이 지은 것이었다. 그것은 용맹한 용사 "아르티어스"가 매 우 강력한 동료들을 모아 사악한 골드 드래곤과 싸워 그놈을 죽이는 내용인 "아르티어스 애가(哀歌)"라는 것이었다. 그 노래는 아르티어스가 자신이 드래 곤 슬레이어임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르티어스는 결국 기지를 동원하여 드래곤을 죽이는데성공하지만 그의 약혼녀를 비롯한 동료 8 명이 그때 모두 골드 드래곤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르티어스도 지독한 부상을 당했기에 친구와 연인을 잃은 그는 혼자만 영웅이 되는 행위를 도저히 양심상 할 수 없었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이름을 감춘다는 것이었다. 이 노래는 매우 앞뒤가 잘 맞았고 설득력이 있었다. 거기다가 곡조도 매우 아름답고, 단조로 왔기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전설을 뛰어넘어 역 사책에까지 나오는 정설로 굳어져있었다. 그렇기에 드워프들은 아마도 저 드래곤이 그 사악한 드래곤의 자식이거나 아 니면 죽어버린 그의 레어를 차지하고 들어온 또다른 골드 드래곤일 것이라고 만 얼핏 추측했다. 방금봤던 그 파렴치한 드래곤이 그 옛날 자신의 조상들을 고생시킨 그 나쁜녀석이란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로는 그 여류시인 안젤리아나가 아르티어스가 변신한 모습이라는 사실은 죽었 다 깨도 짐작조차 못할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어쨋든 드워프들은 죽자고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이 가진 있는 기술 없는 기술 다 동원하여 검을 완성했지만, 일단 다 만들어놓고보니 갑자기 겁이 덜컥 났 다. 만들때는 최고의 열과 성을 다해 예술성을 부여한다고 난리를 쳤었는데, 다 만들고 나서 생각해보니 전혀 드래곤이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끝장이군." "드가체프, 아무래도 이거 마음에 들까 몰라." 내 생각도 그렇다네. 아무래도 애들과 여자들은 대피시켜야겠어. 일단 몇몇은 남아야겠지. 그 미친 드래곤의 분풀이를 받아줘야 할테니까 말이야." "내 생각도 그래." 촌장은 자신의 친구 드가체프와 눈앞에 놓여있는 완성품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의 주문이 "수수한 모양"이었기에 그런쪽으로만 만 들다 보니 너무 수수한 모양이 되어버려 아무리 생각해도 드래곤의 그 번쩍번 쩍 빛나는 것을 선호하는 천박한 안목에 맞을는지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드가체프 자네가 무리를 이끌고 떠나게. 아무래도 자네 외에는 다 음 촌장이 될만한 드워프가 없으니 어쩔 수 없군." 드가체프는 남아서 정들었던 이 마을과 또, 가장 절친했던 친구와 함께 생을 마치고 싶었지만 친구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을 뿌리치기는 힘들었다. 드가체 프는 일단의 드워프들을 데리고 떠나면서 촌장의 손을 굳게 잡고는 말했다. "3일 후에 와보지. 그때쯤 되면 결판이 나지 않았겠나. 자네 부인과 아들 걱 정은 말게나." "고맙네." 촌장은 착찹한 표정으로 일행들이 마을을 등지고 떠나는 모습을, 드래곤의 분 노를 맨몸으로 때워야 할 불쌍한 희생물들과 함께 전송했다. 그런후 2시간쯤 지나서 황금빛 찬란한 드래곤이 나타났다. <완성했느냐?> "예. 여기 있습니다.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촌장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드래곤에게 양손으로 바쳤다. 드래곤은 그 거대 한 손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한 동작을 취해 드워프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확실히 자신의 주문대로 수수하게 만들어진 검집이고 손잡이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을정도로 단순했기에 드래곤은 혹시나 아들이 이걸 싫어하면 어쩔까 하는 불안감이 앞섰다. 만약 자신에게 이따위 물건을 드워프 들이 바쳤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몽땅 다 저녁식사거리로 삼았겠지만 아들 의 취향은 알 수 없으니 지금 다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을 억눌렀다. 일단 물 어보고 와서 분풀이를 해도 늦지 않으니까 말이다. <아들녀석에게 줘보고 결과를 알려주겠다.> "예." <아들의 마음에 안들면 오늘이 네녀석들 제삿날인줄 알아라. 크흐흐흐> 아름다운 아르티어스 옹께서는 신들의 졸작이라고 생각하는 못생긴 드워프 녀 석에게 일침을 가한 후 자신의 몸을 천천히 띄워올렸다. 당연히 금속질인 그 거대한 몸집을 날개 하나만으로 띄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강렬한 마 나의 폭풍을 일으키며 서서히 날아올랐다. 자신의 몸을 마나를 이용하여 가볍 게 만들며 날아올랐기에 그 거대한 덩치가 하늘로 올라가면서도 그렇게 거센 바람이 몰아치지는 않았다. 물론 허약한 담이 무너지고 밑에 서있던 드워프 몇 명이 중심을 잃고 뒹굴기는 했지만 그건 그녀석들 사정이었다. 일단 몸이 조금 높은 곳까지 떠오르자 그는 그 거대한 날개를 이용해 쏜살같이 레어로 날라갔다. 아르티어스 옹께서 검을 들고 애지중지하는 아들에게 도착했을 때 그녀는 치 마를 입은채로 가부좌를 틀고앉아 명상에 잠겨있었다. 치마입고 가부좌 틀고 앉아있으면 어떤 꼴이 되는지는 누구나 다 상상할 수 있다. 그걸 보고 아르티 어스는 이 말괄량이에게 유익한 조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다큰 애가 앉아있는 자세가 그게 뭐냐? 도대체 그러는 처녀를 누가 데려간다구……. 으이그." "걱정 말아요. 시집갈 생각은 없으니까. 그거 다 된거에요?" "응." 아르티어스로부터 검을 빼앗듯이 받아든 소녀의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오… 이 멋진 세공기술. 정말 단조로운 옅은 청색이 나는 금속질의 검집과 그 손잡이였지만 오직 드워프만이 가지고 있는 그 섬세한 세공기술은 소박한 듯 보였지만 소녀의 눈에는 너무나 화려했다. 가히 이건 검집이 아니라 아예 예 술 작품이었던 것이다. 소녀가 그걸 받아들고 고개를 숙인채로 아무 말이 없 자, 조금 오해한 아르티어스 옹께서는 주먹을 불끈 쥐며 울분에 찬 어조로 외 쳤다. "그래, 내 그 마음 안다. 마음에 안드는구나. 그렇지? 내 이 빌어먹을 드워프 녀석들을!" 소녀는 고개를 들고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황홀한 듯한 눈빛으로 말 했다. "아니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정말 이렇게 아름다운 검을 받아도 될 지 모르겠어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녀의 말에 아르티어스 옹의 기분은 저 밑바닥에서 꼭 대기로 순식간에 순간이동했다. 갑자기 마음이 매우 흡족해진 아르티어스는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말했다. "아냐. 아냐.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정도 선물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하하 하" "정말 고마워요." 정말이지 모처럼 맞이하는 오붓하고 정감넘치는 부자간의 따뜻한 분위기였다. 그날 아르티어스 옹께서는 매우 기뻤고, 그 덕분에 결과를 두고 가슴졸이던 드워프들은 그 망할 드래곤으로부터 수고료를 받지않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 다. 죽음이라는 수고료를 말이다. "제발 내 말좀 들어라. 여자의 행복은 그게 아니라는데 그러는구나." 어제의 그 따뜻한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 처럼 다음날 아침에 또다시 부자 (父子)는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행복따위 필요 없어요. 나는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고, 또 예 전에 했던 그 빌어먹을 토지에르란 마법사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일을 도와주면 내가살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구요." "하지만… 외로운 이 아빠를 위해서 1년, 아니 1달이라도 시간을 떼줄수는 없 겠냐?" "안돼요. 아버지는 언제나 볼 수 있고, 그게 의심이 가시면 같이 가면 되잖아 요. 이제 더 이상 쓸모도 없는 마법따위 배운다고 허송세월 하기 싫어요. 또 밥하고 빨래하기도 싫구요. 나는 저주 때문에 이 빌어먹을 모습이 되어있지만 분명히 남자고 또 무사(武士)라구요." "이런 빌어먹을! 여자는 여자 다워야지 검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냐? 너는 도 대체 왜 그렇게 이 아빠 말을 안듣는거냐?"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해요? 나는 여자가 아니라구요." "으윽! 이런 못된 것!" 분노를 억눌러왔던 아르티어스 옹은 이제 완전히 이성을 잃고 버릇없는 아들 의 왼쪽 뺨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이 날아갔다. 물론 그의 이성은 사랑 하는 소녀의 뺨에서 짝!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오면 가슴아픈 죄책감과 함께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그의 이성이 돌아오게 만든 소리는 예정과는 조금 달랐 다. 퍽! 쿠당탕! "아구구구… 이젠 아들놈이 아예 마음놓고 아빠를 패는군." 아르티어스는 정말 인정사정없이 왼쪽뺨에 작렬한 그녀의 펀치를 느꼈다. 아 들놈은 그가 느끼기에도 매우 뛰어난 무사였기에, 충분히 힘을 뺄 시간적 여 유가 있었음에도 이토록 심하게 팬 것에 대해 그는 투덜거린 것이다. 볼쌍사 납게 한쪽 구석에 처박혀서는 시뻘겉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하는 왼쪽 뺨을 주 무르고 있는 "아빠"를 부축해서 일으키며 소녀는 매우 죄송하다는 듯한 말투 로 사과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전혀 죄송하다는 얼굴이 아니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의도적으로 뒷말을 흐리게 말했다. 처음에 아르티어스의 손을 막고 반 사적으로 오른손이 뻗어나간 것은 정말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하지만 일단 손이 날아가는 도중에 그녀는 충분히 그 오른손을 되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도 하나도 힘을 빼지않고 처음의 힘에다가 조금 힘을 더 보태어 그대로 "아 빠"의 왼쪽뺨을 사정없이 때린 것은 정말이지 말이 안통하는 멍청한 드래곤에 대한 징계의 의미였다. "에휴… 그래 너하고 싸워봐야 뭐가 남겠냐. 떠나고 싶으면 떠나거라. 하지만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나는 너와 지낸 이 짧은 순간에 대한 기억을 아마 죽을때까지 잊지 못할거야. 얘야, 그것은 나에게는 정말 행복한 시간들이었단 다. 하지만 그게 너에게는 불행한 시간이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네가 행 복하기를 바라니까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체념한 듯한 말에 다크는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사실 아르티 어스가 그녀에게 강요해온 "여성적인 것들"이 결코 그녀를 괴롭히기 위한 의 도적인 행위가 아님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억이 없을때는 자 신을 그렇게나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그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해주기 위해 안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 마법을 암기했고, 열과 성을 다해 가사일을 익혔었다. 또 굳어진 얼굴근육을 열심히 연마하여 아빠가 주문하는 여성스런 표정을 짓기위해 노력했고, 아빠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법 들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기억이 돌아오고 나자 자신이 여태껏 살아왔던 그 남성으로서의 기억과 뼈속까지 심어진 그 자부심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방해하기 시작했 다. 아르티어스에게 그녀가 아침에 잘잤느냐는 인사와 함께 뽀뽀를 해주면 아 주 좋아할 것이고, 하다못해 그를 아빠라고만 불러줘도 그가 매우 기뻐할 것 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런 "여성스런 행위"를 그녀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이유도 그에게 설명을 해줬다. 자신의 과거를……. 그런데 도 이 빌어먹을 드래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열불이 치민 그녀는 이왕에 나간 손이니 아예 그냥 힘을 조금, 아주 조금만 더 보태서 힘 껏 두들겨버린 것이다. "제발 내 처지도 이해해 달라구요!"하는 마음을 담고 서 말이다. 하지만 아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아르티어스의 진심어린 말을 듣고 그녀는 더 이상 냉정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다크는 자신도 모르게 아르티어스 옹의 가르침에 따라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 를 꼭 껴안아버렸다. 아르티어스의 덩치는 그리 큰 편도 아니었고, 또 우람한 근육질도 아니었지만 다크보다는 훨씬 큰 편이었기에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녀 를 마주 꼭 껴안아주자 그녀의 몸은 포근히 감싸졌다. 그와함께 다크는 매우 편안하고 안락한 의지할만한 그 어떤 존재를 느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떠 오르는 자신에게 당황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었던 그녀로서는 겨우 이런 가벼운 포옹에 이토록 큰 만족감을 얻었다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었고, 또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크가 새로이 솟아나는 이놈의 감정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줄도 모르 고 아르티어스는 아들을 꼭 껴안고 오른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 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모는 아무리 귀여웠던 자식이라도 그들이 품속에서 떠나고자 할 때는 놔줘 야 하지. 끝까지 놔주지 않는다면 그건 자식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아닌, 자 신의 만족감을 위한 것일 뿐이야. 그건 서로를 해칠 뿐이거든. 너는 이제 떠 나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아들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마 나는 너를 절대 로 잊지 못할거야." "평생 안볼것처럼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렇군. 다음에 찾아가 보지. 크라레스 왕국이라고 했냐?" "예. 거기서 다크 크라이드 남작을 찾으시면 되요." "허허허… 출세도 빠르군. 이제 떠나거라. 만남의 시간은 길수록 좋지만… 이 별의 시간은 짧을수록 좋은거야." 차분해지려고 애쓰는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될 수있으면 부드럽게 말하는 아 르티어스의 말에 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의지를 배반하고 뭔가 목구 멍에 꽉 찬듯한 괴상한 음성을 내고 있었다. "예. 꼭 찾아 뵐께요." "몸 건강하거라." "예." 자신을 여자로 개조하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노망난 드래곤으로부터 떨어져서 매우 기분이 유쾌해야만할텐데도 그와 헤어진 다크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 다. 그렇기에 뭔가 가슴에 얽매여 오는 고통을 뿌리치기 위해 그녀는 전력으 로 질주했고 그녀가 어느정도 마음을 바로잡았을때쯤에는 완전히 경치가 변해 있었다. 그 높은 산은 끝나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다크는 이제 마음을 좀 안정시키고서는 주위의 경치를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 가기 시작했다. 마을이라도 나오면 거기서 수소문을 하여 크라레스 왕국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한참 걷다보니 작은 마을이 나타났고, 다크는 문득 시장 함을 느꼈다. 그렇게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때되면 찾아 먹는 편이 건 강에 좋았기에 마을 한쪽 구석에 있는 식당쪽으로 발길을 돌리다가 불현 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런, 돈을 안가져왔잖아." 헤어지는 데만 급급해서는 달랑 허리에 검한자루 차고 드래곤의 레어를 출발 했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머리 좋은 드래곤씨나 다크나 둘 다 헤어진다 는 그 사실에 약간 감정이 싱숭생숭해진 관계로 정작 필요한 것은 하나도 챙 기지도, 챙겨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지. 몇끼 굶는다고 죽는건 아니니까." 다크는 투덜거리며 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크라레스의 수도를 향해 걸어가 기 시작했다. * * * * * 다크가 투덜거리며 크라레스의 수도로 돌아가기 시작한 그날로부터 3개월 후 팔시온은 사단장의 명령을 받고 사단 사령부로 호출당했다. 팔시온은 갑작스 런 사단장의 호출에 기분이 영 찜찜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짐 을 정리하고 타지로 부임할 준비를 하고 오라는 지시였기 때문이다. 팔시온은 겨우 100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대대장이다. 그 말은 만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사단장이 직접 호출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뜻이 되어버리 는 것이다. 그리고 겨우 부하의 전출에 왜 사단장이 끼어들어야 할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단장이 팔시온에게 원하는 일이 있다면 팔시온이 배속되어 있는 연대장에게 통고하면 되는데 왜 직접 불렀을까? 어쨋든 명령이 내려왔기 에 팔시온은 그의 대대를 부대대장에게 맡기고 짐을 꾸린 후 이른 봄의 추위 를 막기위해 중무장한 갑옷 위에 두터운 망토를 두른 후 사단 사령부로 출발 했다. 팔시온은 대기실에서 익히 자신이 알고있던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미카 엘, 가스톤, 미디아, 지미, 라빈, 로니에 사제를 말이다. 그들 역시 팔시온과 마찬가지로 정규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3개월 전 크라레스가 가지고 있던 5개 용병사단 중에서 3개가 정규군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용병생활을 좋아하 는 사람들은 모두 남은 2개 용병사단에 배속되었고, 정규군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만 정규사단으로 편입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팔시온 일행의 경우 그걸 원하지 않았지만 정규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크라레스의 수도 크로돈에서 직접 그래듀에이트 한명이 내려와서는 그들을 협 박했던 것이다. 크라레스와 도난당한 드래곤 하트에 얽힌 속사정을 알고있는 그들이었기에 크라레스측 입장에서는 그들을 놔줄 수 없었다. 정규사단에 편 입되느냐, 아니면 막강한 그래듀에이트급 기사와 싸우다 장렬히 죽느냐(거절 하면 곧장 죽일거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말했기에) 둘중 하나의 선택에서 그들 은 어쩔 수 없이 정규사단에 편입되는 것을 택했다. 만약 상대가 약간이라도 만만했다면 반발을 할수도 있었겠지만 크로돈에서 파견되어 나온 인물은 팔시 온 일행으로 봤을때는 너무 강했던 것이다. 팔시온까지 오는 걸 보고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김에 서로의 안부를 묻기 시작 했다. 크로돈에서 왔던 그 망할 기사는 서로간에 작당을 할 수 없도록 사단장 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그들을 같은 사단에 놔두긴 했지만 각 대대단위에 뿔뿔 이 흩어놨기에 거의 만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야… 미카엘, 번쩍거리는 정규군용 갑옷이 잘 어울리는군. 모두들 오랜만 이야. 로니에 사제님도 오랜만입니다." "망할! 누가 입고싶어서 입었냐? 안그러면 죽인다고 협박하니까 입었지. 도망 이라도 치면 기사단을 동원해서라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데 할 수 있어? 자기 도 굴복한 주제에 왜 비꼬아?" "비꼬는게 아니야. 당당한 몸매에 잘 어울려서 하는 소리지." 미카엘과 팔시온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있던 미디아가 팔시온에게 말했다. "너도 사단장 호출받고 온거야?" "응. 그럼 모두 다 호출받은거야?" "그래. 혹시 함정이 아닐까? 우리를 다 죽이려고……." "설마. 하지만 준비는 해야할거야. 나도 좀 찜찜해서 무장은 잘 하고왔지. 그 러고 보니 모두들 중무장 아닌 놈은 하나도 없군. 하여튼 눈치 하나는……." "눈치 하나로 사는게 용병인데, 그 재주라도 없었다면 벌써 땅속에 묻혔겠 지." "이봐, 가스톤 뭔가 이상한 점은 없어?" 그 말에 가스톤은 약간 침울한 어조로 대답했다. "있어. 너가 오기 전에 마법으로 알아봤어. 사단장하고 지금 대화하고 있는 두명, 하나는 그래듀에이트고 하나는 마법사야. 아마 5싸이클 정도 될걸? 치 레아와의 전쟁에 가지 않은 덕분에 한가한 시간에 수련을 혼자서 좀 하긴 했 지만, 그래도 저정도면 힘들어." 이때 문이 열리면서 부관(副官)이 나와서는 그들에게 말했다. "들어오시랍니다. 모두 다." 가스톤은 공격마법 하나를 외워놓고 들어갔고 나머지는 모두들 들어가면서 검 집에서 검이 제대로 잘 빠지는지 확인을 하거나 아니면 평상시 걸어다닐 때 검이 임의로 빠지지 않게 걸어놓은 가죽끈을 풀고는 들어갔다.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게 말이다. 그들이 그 안에 들어갔을 때 제법 장대한 체구를 가진 무사가 자신의 소개를 했다. "안녕하시오? 나는 드미트리 실바르요. 콜렌 기사단에 있었소. 그리고 이쪽은 같은 소속의 그라시에 마리온양이오. 마법사지요." 그런식으로 인사를 건네온 기사는 서로간의 인사가 끝나자 사단장에게 자리를 비켜줄 것을 부탁했다. 사단장이 나가고 나자 실바르는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그대들은 스바시에 주둔 8사단에서 전출되어 이번에 새로 부임하신 치레아 총독 전하의 제2친위기사단에 배속되게 될거요." "친위기사단이라구요? 하지만 저희들은 용병 출신입니다. 어떻게 친위기사단 에?" "위에서 결정한 거요. 의문을 가질 필요 없이 그대로 행동하기만 하면 되오. 짐은 모두 가져왔겠지요? 곧 출발합시다. 가면서 얘기하기로 하죠." "예? 가면서라뇨? 함께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됐소. 자, 나갑시다." 드미트리 실바르는 꽤 숙련된 행동으로 그들을 지휘해서 사단 사령부를 출발 했다. 사단 사령부 내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면 이리저리 어떤 놈이 줏어들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에 그는 서둘러 출발한 후에 길을 가면서 그들에게 어 떻게 돌아가는 노릇인지 설명을 해줬다. "나도 이번에 창설될 제2친위기사단에 배속되게 되었소. 앞으로 잘 부탁하 오." "저희들이 부탁드려야죠. 저희들의 상관이 되실게 확실한데……."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소. 이번 일은 매우 기밀이 요구되어야 하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단 2대만이 만들어진 카프로니아급 타이탄 도로니아와 가계약을 맺 은 후 운반하는 중이니까요. 솔직히 나는 타이탄을 조종할 줄 모르오. 카프로 니아급은 두명의 총독을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된 녀석이오. 그러니 도중에서 사고가 일어나도 타이탄의 보호를 받을 수는 없다는 말이오. 알겠소?" "예." 드미트리 실바르의 얘기에 따르면 팔시온 일행이 배속되어 있는 제8경갑보병 사단과 제9경갑보병사단이 스바시에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 치레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본국에 3개 보병사단만을 남겨두고 거의 5개 보병사단, 3 개 기병사단, 그리고 40여대의 타이탄이 동원되었기에 개전 후 일주일도 안되 어 치레아 왕국은 두손들고 말았던 것이다. 실바르는 콜렌 기사단에 소속되어 직접 치레아 전쟁에 참전했기에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을 해줬다. 치레아 왕국과의 전쟁에는 이번에 새로이 대폭적으로 보강된 콜렌 기사단만 동원되었다. 스바시에 왕국과의 전쟁에서 막대한 수의 고철 타이탄을 노획한 크라레스 제국은 그것을 살리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스바시에에서 노획된 타 이탄들은 거의가 정규급(출력 1.0) 이하의 출력을 지니는 약한 타이탄들이었 기에 그것들은 모두 완전분해되어 새로이 "테세우스"급 타이탄으로 재생산되 었다. 테세우스는 근위타이탄인 카프록시아에 사용되던 엑스시온(출력 1.3)에 겉 장갑만을 바꾸어 만든 것으로 모두 다 유령기사단에 납품되어 국적불명의 용도로 쓸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카프록시아의 외장갑옷 의 형태를 완전히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프록시아의 설계도는 30년 전의 전쟁에서 황궁이 파괴되는 수난 속에서도 지켜졌기에 카프록시아의 엑스시온을 생산하는 것은 어려운게 아니었다. 테세 우스급은 노획한 물자로 짐작했을 때 총 42대가 생산될 예정이었고 1대씩 생 산되면서 유령기사단에서 가지고 있던 저급타이탄들이 2대씩 콜렌기사단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 발표하기에는 미가엘이나 루시퍼, 푸치니같은 저급타이탄들로 재생산될 것이라는 발표였기에 타국의 눈을 속이는 것은 어렵 지 않았다. 타이탄이란게 자기 보수기능이 있어 원래가 처음 생산된 모양이나 50년쯤 지난 모양이나 차이가 하나도 없기에 이런 속임수를 쓸 수 있었던 것 이지만 말이다. 어쨋든 새로이 보급된 대량의 타이탄으로 증강된 콜렌 기사단은 40여대의 타 이탄을 끌고 가서, 스바시에와 크라레스간의 전쟁에 타이탄을 10여대 보태줬 다가 몽땅 상실한 덕분에 군사력이 매우 약화된 치레아를 단숨에 으깨버렸다. 물론 치레아 후방에 버티고 있던 저 광신도들의 천국 아르곤 제국에서 갖은 외교적 압력을 가했지만 크라레스는 그걸 묵살해버렸다. 그 때문에 지금 크라 레스에서는 아르곤과 한판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소문이 조용히 퍼지고 있는 중이었다. 팔시온 일행은 드미트리 실바르를 통해서 크라레스가 영토를 대폭 확장한 만 큼 상당히 많은 군사편제를 재편하고 있다는 것도 줏어들을 수 있었다. 크라 레스 정규 기사단의 가장 큰 변화는 콜렌 기사단이었다. 이번에 추가로 생산 된(실바르는 그렇게 설명했지만 사실은 유령기사단에서 보내진) 것을 합쳐 17 대가 된 정규급 타이탄 미가엘(출력 1.0)을 반으로 나눠서 10대는 스바시에 총독이 지휘하는 제1친위기사단에, 7대는 치레아 총독의 제2친위기사단에 배 치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각 친위기사단을 지휘할 총독을 위해 특별히 총독 의 취향에 맞춰 주문제작된 타이탄이 카프로니아급이었다. 두명의 총독은 모두 다 매우 뛰어난 검술실력을 자랑했기에 방어력보다는 공 격력을 더 선호했고, 그렇기에 출력이 좋으면서도 가벼운 타이탄을 원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카프로니아급 타이탄은 테세우스급에 들어갈 엑스시온 둘을 빼내어 장착했다. 그 때문에 테세우스는 40대만이 생산 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만큼의 희생은 감수해도 될 정도로 그들을 조종할 기 사들의 능력은 대단했다. 카프로니아는 외형상으로는 카프록시아와 같았지만 군살이 많이 빠진 날렵한 형태를 가졌다. 물론 그것은 속도를 높이기 위해 무 게를 줄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서 크라레스는 외형상 4개기사단, 총 91대의 타이탄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이건 현실적으로 가진 숫자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 이유는 유령기사단 때문이었다. 유령기사단은 이번에 새로 보급된 40대의 신형 타이탄 테세우스 와 로메로 22대, 미가엘 7대를 보유해 총 69대를 가지고 있는 크라레스 최강 의 기사단이었다. 또 근위기사단에 배속된 8대의 청기사도 빠져있었다. 그렇 기에 실지 크라레스가 보유한 전력은 5개 기사단, 총수 174대의 타이탄을 보 유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아직 일이 밀려 헤체작업에 들어가지 못한 치레아에서 노획한 로메로 8대와 크메룬 5대까지 합한다면 앞으로 테세우스가 7대는 더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대제국 코린트를 박살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코린트의 전력은 너 무나도 강력했다. 사실 지금 크라레스나 다른 모든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코 린트의 전력(戰力) 자료는 10년전의 것이었다. 30년 전 전쟁에서 승리한 코린 트는 그 막대한 부와, 노획한 타이탄을 이용해서 흑기사 30대를 제작했고, 그 들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 황제전용으로 그 귀하디 귀한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 진 타이탄 백기사를 완성했다. 이들의 신형타이탄 생산 계획이 완료된 것이 그러니까 10년 전이었다. 만약 이 10년동안 코린트가 그 어떤 타이탄도 생산하지 않았다고 해도 상대하 기 벅찰정도로 강한 상대인데, 만약 그들이 뭔가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면 영 원히 그들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렇기에 크라레스의 왕실에서 도 첩보망을 이용해서 코린트의 타이탄 생산계획이 있는지 조사했지만 아직까 지는 알아낸 것이 없었다. 만약 생산 계획이 있다면 최고의 기밀을 요하는 것, 그러니까 흑기사가 아닌 또다른 더욱 강력한 타이탄이 있다는 말과 같으 리라. 때는 봄.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이었다. 그들의 여행로는 이제 크라레스 제국 에 병합된 영토들이었기에 도중에 산적패를 한번 만났을 분, 조직적인 어떤 습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것도 다 타이탄 수송이라는 것이 밖에 드러나지 않 았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어쨋든 드미트리 실바르가 거느린 일행은 8일에 걸친 강행군으로 크라레스 제국, 치레아 지구의 도톤 시에 위치한 총독 관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총독관저는 과거 치레아 왕국의 왕궁이었기에 매우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그리고 관저 안에는 역대 왕들의 초상화는 다 치워버렸지만 왕비 들의 초상화 따위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남겨뒀기에 아주 보기에 좋았다. 팔 시온 일행은 관저 안으로 들어서면서 왕궁 건물이 손상이 하나도 없다는 것 과, 자그마한 예술품이라도 그대로 놓여있는 것을 보고 꽤나 감명을 받았다. 통제가 안되는 군대라면 산적떼나 같아서 왕궁안은 철저히 약탈,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바로 이 왕궁을 점령한 크라레스 군대의 군기가 얼 마나 엄격한지를 대변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실바르는 총독관저에 도착한 후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오는 묘인족 소녀를 향해 마주 인사해준 후 대화를 나눴다. 그걸 보고 팔시온 일행은 약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 묘인족 소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약간 눈에 익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묘인족들은 대부분 원체 미모가 뛰어나 오히려 모두 비슷비슷해 보였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서 봤었는지 유추해 내기는 더 힘들었다. "총독 전하를 뵐 수 있을까?" "예. 실바르경. 그리고 일행들도 함께 들어가시죠.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묘인족 소녀의 "공작 전하"란 말에 주눅이 들어버린 팔시온 일행은 어색한 걸음걸이로 실바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작이면 왕자하고 동급에 놓이는 엄청난 직위다. 아무리 돈없고 힘없는 공작이라도 그 작위가 가지는 힘은 엄 청나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점령지에 우선적으로 배치된 공작이라면 아마도 제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실세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거기다가 공작 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타이탄에, 타이탄이 포함된 친위기사단까지 준다면 그 에대한 황제의 믿음이 보통 크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팔시온 일행은 로니에르 공작이 기다리는 방에 들어간 후 모두 다 멍청한 표 정이 되어버렸다. 놀랍게도 로니에르 공작은 그들이 다 알고있는 사람이었다. 과거 헤어졌을 때 보다는 더욱 성숙한 분위기에 키도 좀 더 커진듯한 소녀가 창밖을 보고있다가 그들이 들어서자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무릎이 살짝 가려지는 짧은 스커트에 허리에는 푸른 광택이 나는 검 을 차고는 그들을 향해 활짝 미소짓는 소녀를 보고 그들은 잠시 할말을 잊었 다. 하지만 이때 실바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드리는 것을 보고 그들도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일어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딱딱한 인사는 생략하기로 하지." "정말 오랜만이…옵니다. 전하." "혓바닥이 잘 굴러가지도 않으면서 말도 안되는 헛소리 하지말고 그냥 말해. 그런식으로 하면 잘 못알아듣겠어. 익숙하지 않은 말투라서 말이야. 그건 그 렇고 실바르." "예. 전하." "그녀석은 가져왔나?" "예. 전하." "좋아. 그럼 지하실로 가지. 너희들은 여행도 힘들었을텐데 먼저 목욕이나하 고 쉬어. 일 끝나면 곧장 찾아갈께." 소녀가 스커트 자락을 나풀거리며 실바르와 함께 나가버리자 팔시온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미카엘을 향해 말했다. "다크가 언제 공작 나으리가 되어버렸지?" 그 말에 미카엘도 조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만약… 힘을 되찾았다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헤어진지 1년도 채 안 되었는데 그게 가능할까?" 총독관저는 과거 치레아 왕국의 왕궁이었기에, 치레아 왕실의 근위타이탄을 보관하던 넓은 지하공간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텅 비어있었지만 다크는 거기 에 자신의 청기사를 보관해둘 생각이었다. 지하실에 도착한 다크 로니에르 공 작은 자신의 타이탄 안드로메다를 불러냈다. 곧이어 공간을 열고 위압적인 거 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청색을 칠해놓은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색 타이 탄에는 크라레스 황실 근위대의 문장 외에도 황금색 드래곤의 문장이 추가로 그려져 있었다. 그 황금색 드래곤의 문장은 다크가 황제로부터 로니에르라는 성(姓)과 작위를 하사받을때 선택한 로니에르가(家)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로 불렀는가?> "잠시 너와 맹약을 해지하고 싶어." <거절한다.> 설마 저 덩치가 거절할줄은 생각도 못해봤기에 다크는 다시 한번 더 물을 수 밖에 없었다. 타이탄에 해당되는 골렘의 맹약은 1:1이었다. 이녀석이 맹약 해 지를 찬성하지 않는다면 다른 타이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뭐?" <과거 너를 처음 만났을때는 정말 실망스러웠지만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었기 에 어쩔 수 없이 너를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너를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을 봤고, 지금의 너에 필적하는 인물은 한명도 없다는 걸 잘 안 다. 그런데 내가 왜 너를 포기하겠는가?> "대책이 없는 놈이군. 하지만 너는 너무 눈에 띄어서 사용할 수가 없어. 그 렇기에 황제가 보내준 딴녀석을 쓰려고 해. 대신 나중에 전쟁이 벌어지면 너 를 꼭 쓸거야. 하지만 나도 그전에 타이탄을 어떻게 부리는줄 배워야 할거 아 냐?" <그런 이유라면 허락하겠다. 하지만 맹약을 완전히 취소하지는 않겠다. 나는 너의 종이다. 그 사실은 너가 죽을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너가 다시 부 를때까지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겠다. 맹약이 완전히 취소되지는 않았기에 너와 나는 아주 가는 맹약의 실에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통해 너의 생 과 사를 확인할 것이며 너가 죽는다면 그때부터 새로운 주인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동의하는가?> "동의해." <좋다. 내가 안식을 취하는 동안 너는 타이탄을 다루는 기법을 배워라. 앞으 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주인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청기사는 공간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다크도 이런식으로 될줄 알았다면 구태어 청기사를 보관해둘 넓은 장소를 찾는다고 고생할 필요 조차 없었을 것이기에 약간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일단 청기사가 사라지고 나자 다크는 실바르를 향해 말했다. "그녀석을 불러." "예. 전하." 그와 동시에 청기사 옆의 공간을 열고는 거대한 청색과 붉은색을 칠한 타이 탄이 나타났다. 이 타이탄에는 제2친위기사단을 나타내는 검은 드래곤의 문장 과 그 문장의 중간에 써진 흰색의 "Ⅱ"라는 숫자. 또 로니에르 가문을 나타내 는 황금 드래곤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카프로니아는 크라레스가 보유한 최고의 검객들을 위해 제작된 것인만큼 처 음부터 단가를 줄이기 위해 아예 미스릴을 입히지 않았다. 미스릴을 입히지 않아도 그들은 이정도 타이탄에게 주종관계를 거절당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카프로니아는 페인트 밑으로 대마법주문(對魔 法呪文)의 형상이 울퉁불퉁하게 드러나 있었다. 물론 카프로니아가 거대하다 고 하지만 방금 봤던 청기사가 원체 크고 뚱뚱했기 때문에 둘은 자연스럽게 비교되었기에 어떻게 보면 연약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 카프로니아급 타이탄 은 다크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기에 현재 다크가 차고있는 검처럼 유연한 곡 선을 가진 검 한자루가 검집에 들어간 채로 허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방 패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다만 스워드 스톱퍼(sword stopper;손 목 위에 장착하는 강철구조물. 검을 막을 수 있는 것으로 아주 소형화된 방패 와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만이 양손의 손목에 달려있었다. 그녀석이 나타나자 실바르는 재빨리 수송을 위해 맺었던 가계약을 취소했다. 타이탄과 사람이 대화를 하면 맹약으로 맺어진 인물만이 그 타이탄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옆에서 봤을때는 실바르 혼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보였다. 실바르가 맹약취소를 선언한 후 다크는 카프로니아를 향해 말했다. "이봐." <나를 불렀는가?> "너 말고 또 누가있어?" <그대에게는 안드로메다가 있지 않은가? 너는 그의 주인이고 또 그는 나와 비교가 안될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쓸 수 없지. 쓸 수 없는 타이탄은 없는거나 마찬가지야. 그 때문에 그녀석과 맹약을 거의 반이상 해지해놓은 거고. 그러니 나와 맹약을 맺지 않 겠는가? 나는 타이탄의 조종술도 익혀야 하고, 나중에 안드로메다를 쓸 수 있 을때까지 다른 타이탄이 필요하다." <정말인가? 하지만 겨우 나 따위와…….> "정말이야. 너는 황제가 나에게 직접 선물한 녀석이거든." <나에게 있어서 황제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는 어마어마하게 강하다. 그 대는 숨기고 있지만 그대로부터 풍겨나오는 강렬한 마나의 기운을 나는 느낄 수 있다. 나라도 괜찮다면 맹약을 수락하겠다. 후회하지는 않겠지?> "후회는 안한다." <좋다. 이제부터 그대와 나는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고렘의 맹약에 따라 주종 이 되었다. 내 이름은 도로니아. 그대의 이름은?> "다크. 다크 로니에르. 지금은 필요없으니 일단 공간 저편에 들어가있어." 그 말과 동시에 카프로니아는 사라졌고 그 거대한 덩치들이 이 지하실을 꽉 채웠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좋아. 일이 잘되었군. 이제 친구들을 만나러 가볼까?" "이야… 내 생전에 왕궁에서 목욕할 수 있을거라고는 상상도 못해봤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나체로 걸어나오는 팔시온 을 보면서 미카엘이 말했다. "이게 무슨 왕궁이냐? 왕궁 이었지. 그 둘은 천지차이라구." 그렇게 이죽거리는 미카엘은 팔시온보다 먼저 목욕을 마쳤고 편안한 옷을 입 은 채 푹신한 의자에 앉아 길게 기른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었다. 그당시 에는 남자들, 특히 귀족들인 경우 머리를 길게 길렀으므로 귀족물을 좀 먹은 미카엘은 그의 탐스러운 금발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끈으로 묶어 두고 있었고, ㅆ을때마다 귀찮다고 떠들어대지만 아직까지 자르지 않고있는 걸 보면 그 금발에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좀 차이나면 어때? 왕이 살던 곳이라는 사실이 중요한거야. 정말 으리으리 하더군. 세상에… 수도꼭지 봤냐? 은(銀)이었어. 저거 하나만 뜯어다가 팔아 도 제법 돈이… 으악!" 팔시온이 비명을 지른 이유는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소녀가 들어왔기 때문이 다. 아무리 나이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렇고, 또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렇다. 입고있던 먼지가 뿌옅에 뒤집어쓴 옷은 목욕하면서 빨아버린 후 알몸으로 목 욕탕에서 나와 미카엘과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가 튀어들어왔으니 당황 안하면 남자가 아니다. "저녀석 왜 저래?" 팔시온은 후다닥 목욕탕 안으로 뛰어들어갔고, 그 모습을 보면서 다크는 어 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알수없다는 표정을 보며 미카엘이 투덜거렸다. "네 모습을 보고 생각좀 해봐라. 누가 여자 앞에서 알몸 보이고 당황 안하겠 냐?" 그러자 다크의 뻔뻔한 대답. "상관없어. 나는 원래 남자잖아." "도대체가 말이 안통하는군." "그건 그렇고 요즘 지내기가 꽤 좋은 모양이네. 예전에 비해 꽤나 취향이 고 급스러워졌어." 못보던 멋지게 세공된 목걸이나, 반지. 그리고 옷은 헐렁하고 편한 형태지만 꽤나 고급 천을 사용했고, 거기에 우아한 무늬가 매우 꼼꼼하게 수놓아져 있 었다. 그걸 한눈에 알아보며 다크가 말하자 미카엘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원래 내가 고귀하신 혈통 하니겠냐? 나의 이 섬세하고도 격조높은 취향을 요즘들어 조금씩 살려 나가고 있지. 제법 월급은 풍족하게 나오니까 말이야." "살기가 괜찮다니 다행이군." "잠깐만 기다려. 딴 사람들도 불러올께." "그래. 좀 있으면 세린이 차와 먹을 걸 좀 가져올거야." 미카엘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목욕탕 안에서 다급한 팔시온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야. 내 옷이나 좀 가져다 주고 나가." "직접 가져다 입어." "너 죽을래?" 미카엘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팔시온의 짐을 뒤져 비교적 깨 끗한 옷 몇가지를 찾아서 건네준 다음 밖으로 나갔다. "이게 무슨 왕궁이냐? 왕궁 이었지. 그 둘은 천지차이라구. 왕이 살지않는 건 물이 왕궁일 수가 있냐? 그냥 호화 저택일 뿐이지." 그렇게 이죽거리는 미카엘은 팔시온보다 먼저 목욕을 마쳤고 편안한 옷을 입 은 채 푹신한 의자에 앉아 길게 기른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었다. 그당시 에는 남자들, 특히 귀족들인 경우 머리를 길게 길렀으므로 귀족물을 좀 먹은 미카엘은 그의 탐스러운 금발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끈으로 묶어 두고 있었고, 싸울때마다 귀찮다고 떠들어대지만 아직까지 자르지 않고있는 걸 보면 그 금발에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좀 차이나면 어때? 왕이 살았던 곳이라는 사실이 중요한거야. 정말 으리으리 하더군. 세상에… 수도꼭지 봤냐? 은(銀)이었어. 저거 하나만 뜯어다가 팔아 도 제법 돈이… 으악!" 팔시온이 비명을 지른 이유는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소녀가 들어왔기 때문이 다. 아무리 나이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렇고, 또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렇다. 여태껏 입고있던 먼지가 뿌옅에 뒤집어쓴 옷은 목욕하면서 빨아버린 후 알몸 으로 목욕탕에서 나와 미카엘과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가 튀어들어 왔으니 당황 안하면 남자가 아니다. "저녀석 왜 저래?" 얼굴이 벌개진 팔시온은 후다닥 목욕탕 안으로 뛰어들어갔고, 그 모습을 보면 서 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알수없다는 표정을 보며 미카엘이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네 모습을 보고 생각좀 해봐라. 누가 여자 앞에서 알몸 보이고 당황 안하겠 냐?" 그러자 다크의 황당한 대답. "상관없어. 나는 원래 남자잖아." "도대체가 말이 안통하는군." "그건 그렇고 요즘 지내기가 꽤 좋은 모양이네. 예전에 비해 꽤나 취향이 고 급스러워졌어." 못보던 멋지게 세공된 목걸이나, 반지. 그리고 옷은 헐렁하고 편한 형태지만 상당히 고급 천을 사용했고, 거기에 우아한 무늬가 매우 꼼꼼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걸 한눈에 알아보며 다크가 말하자 미카엘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원래 내가 고귀하신 혈통 아니겠냐? 나의 이 섬세하고도 격조높은 취향을 요 즘들어 조금씩 살려 나가고 있지. 대대장이라서 제법 월급은 풍족하게 나오니 까 말이야." "살기가 괜찮다니 다행이군." "잠깐만 기다려. 딴 사람들도 불러올께." "그래. 좀 있으면 세린이 차와 먹을 걸 좀 가져올거야." 미카엘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목욕탕 안에서 다급한 팔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내 옷이나 좀 가져다 주고 나가." "직접 가져다 입어." "너 죽을래?" 미카엘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팔시온의 짐을 뒤져 비교적 깨 끗한 옷가지를 찾아서 건네준 다음 밖으로 나갔다. 모두들 오랜만에 만났으니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팔시온 일행은 세린 이 차와 과자, 그리고 포도주를 가져와서 테이블에 정돈하는 모습을 보고 그 녀의 모습이 눈에 익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몇 달 전 모두들 휴가를 내어 다크를 만나러 갔을 때, 다크는 왕궁을 떠났다고 알려준 하녀가 그녀였던 것 이다. 그들은 차를 일찌감치 마셔 없앤 후 과자를 안주삼아 브랜디(포도주를 증류하 여 40%로 도수를 올린 강도높은 술)를 마시며 대화를 진행했다. 다크는 별로 자신의 신상내력이나 추억을 주저리 주저리 말하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대부분 의 대화는 팔시온 일행이 진행했다. 자신들이 어떻게 정규군에 편입되었는지, 또 이번에 참전한 스바시에에서 있었던 전투 경험담 등 할말은 무지하게 많았 기 때문이다. "그때 말이야. 타이탄이란 것들이 싸우는 걸 볼 수 있었어. 정말 엄청나더군. 특히 푸른색과 붉은색을 칠해놓은 그 타이탄 이름이 에……." 팔시온이 약간 버벅거리자 미디아가 옆에서 살짝 참견했다. "카프록시아." "응. 그 카프록시아. 정말 엄청나더군. 상대방 타이탄들을 완전히 박살을 내 는데 모두들 검술 실력이 정말 대단했어. 어떻게 그 덩치에 그렇게 자연스럽 게 움직이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가. 특히 그것들 중 하나는 정말 대단했지. 한번에 두세대의 적을 베던데… 타이탄에 안타고 있어도 힘든 동작인데 정말 대단하더군. 단연 돋보였어." 그 말에 다크는 싱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이야. 나도 왕궁에서 들었는데 그때 활약이 대단했 다고 하더군. 직접 만나봤는데 멋진 눈을 가지고 있었지. 성실한 노력형이라 고 할까?" "공작 나으리라구? 작위야 어쨋든 간에 정말 화려한 검술실력이었어. 너는 이 해할 수 없을 지 모르겠지만 내 생전 그렇게 엄청난 검술은 한번도……." "그거야 당연하지. 그양반 소드 마스터거든." "정말이야?" "응." "어쩐지… 엄청나더라니. 그래듀에이트도 저 먼 산인데, 거기 타고있던 사람 은 아예 하늘이었군. 제길! 꼭 노력하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풍겼었 는데, 말짱 망상이었다니……." "망상은 아니었을걸? 얘기 들으니까 첩자들을 의식해서 일부러 실력을 숨기고 싸웠으니까 말이야." "그래? 그럼 마스터의 실력은 아니었군. 그럼 열심히 노력하면 잘하면 가능성 이 있을수도……." 그 말과 동시에 미카엘과 미디아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이죽거렸다. "꿈 깨!" "나도 꿈좀 꾸자. 이상은 넓고 크게. 몰라?" "이런 말도 있지. 이루지 못할 이상은 이상(理想)이 아니라 망상(妄想)이다. 그런 말 못들어봤냐?" "제길. 친구라는 놈들이……. 그건 그렇고 스커트가 잘 어울리네. 이제는 아 주 여자다워졌는걸?" 팔시온의 약간은 장난기 있는 칭찬에 다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 로 대꾸했다. "아? 이거? 보통때는 그냥 편하게 바지 입는데, 요즘 생리 때문에 치마를 입 는거야." 그 말에 몇 명은 얼굴이 완전히 굳어버렸고 주량이 약한 관계로 포도주를 마 시고 있던 지미는 갑자기 "쿡! 으읍, 푸~~~~"하면서 앞자리에 앉아있던 미디 아에게 붉은 액체를 뿜어버렸다. 그런 후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갑작스런 상 대방의 애매한 반응에 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뭐가 이상해? 기저귀 차고 바지입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치마를 입는 거라구. 뭐 잘못되었어?" 다크의 자신은 하나도 이상할게 없다는 듯한 반문에 오히려 기가 더 막혀버린 미카엘은 좀 숨을 고른 후 말했다. "그러는 말 하는게 이상하다는 거야. 진짜 여자는 절대 그런 말 입에 못담지. 도대체 여자로서의 자각이 없는 녀석이야 너는."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남자야. 그런데, 여자는 이런 말 하면 안되는 거였 냐?" "그럼. 너는 도대체 예전에 남자였을 때 여자에 대해 호기심도 없었냐?" "호기심? 무술 익히느라 바빠서 여자라고는 사귀어 본적도 없었다. 바빠 죽겠 는데 그건 당연한거 아냐? 또, 생리라는 것은 여자가 성장하면 모두 다 한다 면서? 그런데 그걸 말하는게 왜 잘못된거야? 모두들 다 아는 사실인데… 이상 한 녀석들이군." 이렇게 당당하게 반론을 펼치는데야 오히려 이쪽이 주눅이 들수밖에. "에… 음. 도저히 나는 설명 못하겠으니까 나중에 미디아하고 상의를 해보던 지, 아니면 세린한테 물어봐. 사람 당황하게 만들지 말고." "뭐, 그러지." 일단 대화가 일단락 되자 팔시온은 서둘러 또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런데 총독부 건물 앞에 그려져 있는 웃기는 그림은 뭐야?" "무슨 그림?" "아주 웃기게 생긴 황금색 드래곤 말이야." "아… 그거? 내 가문의 문장(文狀)이지." "세상에! 그게 문장이라고? 문장이라면 좀 더 멋지게 만들수도 있었을 텐데, 드래곤은 드래곤이지만 꼭 입을 쫙 벌리고 있는 꼴이 뭐냐… 그, 오리가 꽥꽥 거리는 모습하고 비슷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야 당연하지. 원래가 잔소리꾼 골드 드래곤이거든. 깃발에 그려진 모양이 꼭 잔소리 하는 것 처럼 생겼잖아. 적당히 설명해줬는데 그 화가(畵家)가 아 주 내 마음에 쏙 들게 잘 그렸더군." "잔소리꾼? 그거 어감이 꼭 실존하는 드래곤처럼 들리는데, 설마?" "응. 실존하는 드래곤이야. 내 의부지. 엄청난 잔소리꾼 영감이야. 나중에 찾 아오면 소개해 줄께." "맙소사." 즐거운 만남의 시간도 잠시, 그 다음날부터 팔시온 일행은 매우 바빠지기 시 작했다. 사실 다크가 이들을 불러들인 것도 일을 시킬만한 믿을수 있는 사람 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점령지였기에 아직도 반란군이 날뛰고 있었고, 점령지 주민들도 점령군을 의심스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 금은 저렇게 점잔빼고 있지만, 언제 짐승으로 돌변할지는 아무도 모르지.'하 는 의심스런 시선이었다. 원래 군대란 것이 조금만 통제가 늦춰지면 완전무장 한 떼강도가 되는 것은 익히 잘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걸 시민탓 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스톤은 마법사였고, 마법사 치고 돌머리는 하나도 없었기에 며칠 지나지 않 아 치레아의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금 징수부서에 배치되었다. 가스톤은 그 덕분에 불쌍하게도 매일넘쳐나가는 빽빽히 숫자들이 기록된 서류더미에 파묻 히고 말았다. 실바르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별로 없다는 점을 높이사서 치레아 귀족들의 색출 및 포획을 담당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 귀족들의 대부분 은 치레아 병합시에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린지 오래였고, 가까스로 도피에 성 공한 자들은 대부분이 이미 국외로 탈출해버렸지만 그래도 실바르는 많은 사 람들을 잡아들였다. 아직도 국경의 삼엄한 감시망 덕분에 도피하지 못한 귀족 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물들과, 악덕상 인 등 돈많은 인물들을 족치는데는 돈을 별로 밝히지 않는 융통성 없고 고지 식한 실바르가 최고 적임이었다. 로니에 사제는 치료술사 몇사람을 붙여줘서 전쟁후에 필연적으로 생기게 되는 고아나 질병, 부상자 치료 등 기타 여러 가지 사항을 처리하게끔 했다. 치레 아는 아르곤과 국경을 접하는 곳인 만큼 샤이하드라는 신에 대해 비교적 관대 한 나라였다. 물론 이곳에서도 법으로 샤이하드를 믿는 것은 금하고 있었지 만, 다른 나라들 보다는 비교적 탄압의 강도도 약했고, 시민들도 샤이하드를 받드는 신관이라고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로니에 사제 가 활동하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또 로니에 사제는 빈민들의 치료 등과 같은 실속없는 일을 "품위없는 일"이라 칭하며 무시하는 겉멋만 잔뜩 든 다른 신을 모시는 사제나, 마법사들과 달리 매우 열성적으로 일했기에 그에게 잘 맞는 일이었다. 그 외의 남은 인물들은 다크가 직접 검술을 가르쳤다. 다크가 그들에게 가르 친 검술은 크라레스 기사들이 익히게 되는 화려한 검술인 비류검(飛流劍)이었 지만 일부분을 다크가 고친 것이었다. 비류검은그때 루빈스키 공작이 보여준 것과 같은 매우 빠르면서도 화려한 검형(劍形;form)들로 이루어진 검술이었 다. 물론 다크는 비류검을 겨우 삼일 배우고 모든 것을 파악해버렸지만 그녀의 제 자들은 1달이 흘러가도 제대로 소화를 해내지 못했다. 다크는 매우 바빴기에 일주일에 한번 정도만 직접 몇시간 정도 지도를 해주었고, 평일에는 제2친위 기사단 소속의 그래듀에이트들이 그들을 가르쳤다. 또 다크는 바쁜 와중에도 꼭 하루 한시간 정도씩은 시간을 내어 타이탄 조종법을 배웠다. 물론 한시간 정도 이론으로 배운 후 곧장 다음날부터 한명씩 돌아가면서 타이탄에 탑승한 채로 비무를 했다. 그녀의 발전속도는 친위기사단의 기사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겨우 3일도 안되어 평수를 이루기 시작했고 일주일이 지난 후에는 친위 기사단 내에는 상대할만한 자가 없어 그 다음부터는 다대일로 격투를 벌 였다. 팔시온 일행이 총독부에 근무하게 된지도 거의 3주일이 흐른 어느날. "무슨 일이냐?" 검은 색의 바지와 검은색의 상의, 그리고 이제 화사한 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봄이었지만 아직 날이 그렇게 따뜻하지는 않았기에 그 상의의 위에는 우아한 디자인의 얇은 검은색 코트가 입혀져 있었다. 코트의 위에는 총독을 표시하는 문장과 오른쪽 가슴에는 "Ⅱ"자가 써진 포악하게 생긴 검은색 드래곤 문장이 그려져 있었고, 왼쪽의 옷깃에는 예의 그 웃기게 생긴 황금색 드래곤 문장만 이 단촐하게 붙어있었다. 그녀가 입고있는 옷들은 모두 제2친위기사단의 정식 복장이었다. 그녀는 한달의 몇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이 단순한 장식의 군복을 즐겨 입었다. 움직이기도 편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이기도 했기 때 문이다. 하지만 그 투박한 생김새의 옷조차도 그녀의 미모를 가리기는 힘들었다. 누가 봐도 미소년의 경지를 넘어 미녀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자임이 확실히 드러나 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점심식사를 마친 후 따뜻한 햇볕이 들 어오는 발코니에서 루빈스키 공작이 선물로 보내온 스바시에의 특산물 중 하 나인 "레드 드레곤"이라는 브랜디를 마시고 있었다. 오후의 한가로운 한때를 방해한 젊은이도 그녀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틀린점은 총독의 문장 은 없었고, 골드 드래곤의 문장 대신 붉은색으로 수놓아진 아름다운어떤 꽃 의 문장을 달고있었다. "몇가지 아뢸 상황이 있어서 뵙기를 청했사옵니다. 전하." "뭐냐?" "저… 이것을." 다크는 실바르가 건네준 서류를 쭉 훑어본 후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경은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가?" "솔직히… 눈감아 주고 싶사옵니다." "호오. 눈감아 주고 싶다? 귀족 도피 방조죄(傍助罪)는 매우 크다. 경의 목을 걸고라도 놓아주고 싶은가?" '네까짓게……' 하는 듯한 냉소적인 미소와 그 눈을 보자 울컥하는 성질에 실 바르의 입에서는 생각도 못한 말이 튀어나갔다. "예. 그 때문에 전하께 직접 보고드리는 것이옵니다." "나는 경이 좀 더 똑똑한 놈인줄 알았는데……." "죄송하옵니다. 전하." "그들을 풀어줄수는 없다. 아무리 그들이 뼈대도 없는 잔챙이 신흥귀족이고, 또 민심을 많이 얻고있는 훌륭한 인물들이라 해도 그들은 치레아의 귀족이다. 또 무가(武家)가 아니기에 회유할 명분도 없다. 경이 그 보고서를 이리 가져 오기도 전에 경이 불순한 마음을 먹고있다고 보고해온 자가 있었다. 이제 경 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대가 바라고 있는 것을 말해보라." 단순한 실바르는 아마 이때 그가 태어나서 최고로 빨리 머리가 회전한 때였을 것이다. 그들을 살리고자 하면 자신이 죽고, 또 자신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들 이 안전할지에 대한 보장은 없었다. 또 그들이 죽는다 해도 이미 고자질한 놈 이 있는 한은 자신이 안전할 수 없었다. 이래저래 걸리는 것 투성이였고, 빠 져나갈 길은 없었다. 빠져나갈 방법은 단 하나 과거 죽일뻔한 자신의 이 아름 다운 상관이 이해해주면 되는 것이었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초리로 봤을 때 그것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실바르는 한 1분정도 생각하는 듯 했다가 자신의 검대를 풀었다. 검대에 잘 묶여있는 롱 소드는 그의 세 번째 애검이었다. 그 첫 번째와 두 번째 검이 모 두 눈앞의 상관에 의해 사라졌고, 세 번째 검은 아예 마음을 비우고 거리에서 대강 쓸만한거 하나 장만해서 허리에 걸었던 것이다. 마음에 들던 검일수록 없어지면 쓰라린 마음만 더해지기 때문에 선택한 수수한 검이었다. 실바르는 검대를 롱소드에 돌돌 말아서는 소녀에게 두손으로 바치며 풀이죽은 어조로 말했다. 속으로는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제 목을 드리겠사옵니다. 대신 주제넘은 부탁인 것을 아옵니다만 그들은 살 려주시옵소서. 그정도 처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옵니다." "좋다. 하지만 지금 판결을 내리지는 않겠다. 오후의 즐거운 이 시간에 부하 의 사형선고를 내려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내려가서 기다려 라. 2시간 후에 부를 것이다. 참, 그들은 어디있지?" "카르토 마을에 구금되어 있사옵니다." "일가족 모두 다 잡았나?" "예. 전하." "그들을 숨겨준 농민은?" "그들도 잡아놨사옵니다." "좋아. 내려가 보도록." "예. 전하." 실바르는 이제 비무장인 상태에서 풀이죽은 모습으로 공작의 방을 나섰다. 그 에게 이런 빌어먹을 일이 생긴 이유는 이렇다. 우연히 정보방에 이미 국외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던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자작이 걸려든 것이다. 카 르토 자작은 전공을 높이 세운것도 아니었지만 꽤나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물 로 사리사욕 없이 열심히 일했다. 그의 부친은 크라레스 병합 후 처형대 위에 서 고인이 되셔버린 지크란 반 리에 백작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둘째 아들이었기에 물려받을 영지도 없었고, 작위도 허울뿐인 자작의 칭 호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관부에 들어가 소 신껏 일했다. 물론 처음에는 모두들 열심히 일하는 그를 좋게 봤지만 점점 더 그의 관직이 올라가면서 껄그러운 대상이 되어갔다. 왜냐하면 뇌물이 통하지 않는 인물의 직위가 낮을때는 돈 안줘도 열심히 일해주고, 편의를 봐주니 좋 지만 높아진다면 비합법적인 행위를 좋아하는 인물들은 아무래도 껄그러워지 게 마련이 아닌가? 그 때문에 귀족들은 단합하여 이 귀족의 이단아를 관부에서 추방해버리는 데 합의했고 그들은 성공했다. 국왕에게 상소하여 카르토라는 제법 넓직한 마을 을 영지로 주어 그리로 보내버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일약 정계의 중심 에서 물러나 한가로운 농장관리인이 되셔버렸고, 그에게 남은 것은 카르토라 는 마을과 마을 외곽에 위치한 성(城)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은 카르토 요 새(要塞), 그리고 카르토라는 성(姓) 뿐이었다. 이제 한창 일할 나이인 45살에 강제로 은퇴 당했지만 그는 직접 자그마한 농 장을 경영했고, 영지의 농노들에게 40%라는 아주 낮은 세금을 징수했다. 세금 을 낮췄으니 수입이 감소했지만 그렇다고 국왕에게 바칠 정도는 충분히 넘는 액수였기에 국왕에게 관례대로 영지에서 거둬들인 소득의 30%를 바치고, 나머 지로 사병들의 월급도 주고 여러 가지 자잘한 일도 처리했다. 자신이 경영하 는 농장에서 거둬들이는 것으로도 일가족과 그의 사병 300명의 식사는 해결되 었다. 그리고 그는 이리저리 무도회다 뭐다하며 돌아다니며 가산을 탕진하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자신에게 떨어지는 10%만으로도 아주 풍족하게 살 수 있었 다. 그는 자신이 쓰고도 남는 돈으로 영지 내의 주민들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 다. 다리도 만들고, 비만오면 진탕길로 바뀌던 도로위에 자갈도 깔았다. 또 농노들을 위해 작은 사설 병원까지 마련해서는 아직 실력이 떨어지는 마법학 교를 갓 졸업한 젊은 치료술사를 초빙했다. 풍년일때는 세금을 좀 많이 거뒀 지만 가뭄일때는 대폭적으로 세금을 낮췄고, 그것도 안될때에는 자신이 농노 들에게 식량을 무상으로 지원해줬다. 그리고 주변의 영세농민들에게 낮은 이 자로 돈을 빌려주는 등 이런식으로 농노들과 부근의 자립 영세농민들에게 착 실하게 민심을 획득해 뒀다. 그 덕분에 갑자기 치레아가 크라레스에 병합된 후 곧이어 국경이 막혀버리자 그는 구차하게 도망치기를 포기하고 죽어도 조 국에서 죽겠다는 생각으로 아직 그 마을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실바르 또한 단순한 무인이었지만, 그래도 머리가 아예 돌은 아니었기에 착실 하게 자작 가족을 추격해 들어가면서 그에 대한 정보들을 모아들였고, 솔직히 처형해버리기 매우 아까운 인물이라는 점을 깨닳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 을 살려주는 것을 간청하러 총독부에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작 가족을 살려주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무언 중에 가해오는 다크의 압력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울컥 그런 소리를 내뱉었 던 것이다. 지금은 후회하고 있었지만 - 그때 내정신이었나 하고 - 이왕 지나 간 일을 구차하게 다시 공작에게 찾아가서 사정할 위인은 아니었다. 2시간 후 다크가 아래로 내려갔을때에는 제2친위기사단 소속의 무사들이 그녀 의 명령에 따라 모두 집합해 있었다. 거의 50여명의 무사들이 모여있는 가운 데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옆쪽에 서서 대기하 고 있던 장교 한명이 외쳤다. "일동(一同) 착석!"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휘하에 있는 현재 병사들 수는 거 의 3개 사단의 보병과 1개 여단급의 기병, 그리고 제2친위기사단과 파병나온 콜렌 기사단원 40명이었다. 물론 콜렌기사단원들 중 20명은 그들의 타이탄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제2친위기사단 소속 의 무사들 뿐이었다. 나머지 장병들이 반란군 토벌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던 지 아니면 사창가에 모여 창녀들과 노닥거리고 있던지 이들의 관심사항은 아 니었다. 그들은 지금 상당히 뛰어난 치레아의 귀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 을 건 실바르의 군사재판을 참관(參觀)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모두들 자리에 앉자 다크는 천천히, 매우 냉정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제군들! 드미트리 실바르 경은 치레아의 귀족 일가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놨다. 이봐! 그를 데려와라." 그러자 장교 한명이 비무장 상태의 실바르를 인도해서 총독 옆에 놓인 자리에 앉혔다. "이제부터 제군들에게 실바르경이 조사한 결과 보고서와 실바르 경을 탄핵한 보고서를 함께 보여주겠다. 20분간 시간을 줄테니 그동안 충분히 읽어보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공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2명의 장교가(팔시온과 미디아였다.) 서류의 필 사본(筆寫本)을 이곳에 모여있는 제2친위기사단 소속 무사들에게 나눠주기 시 작했다. 그 서류들에는 실바르가 제출한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자작을 옹호 하는 의견과 그들을 무조건 전례에 따라 처리해야 하며 아울러 그들을 옹호하 는 실바르 경도 반란죄를 첨가하여 처리해야 한다는 보고서가 함께 들어있었 다. 20분 정도가 지난 후 다크 로니에르 총독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냉막한 표정으 로 천천히 한자한자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이제부터 제군들의 결정을 들어보겠다. 실바르 경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주기 바란다." 그와 동시에 여러명이 손을 들었다. 그것을 차가운 눈빛으로 쭉 훑어본 다음 총독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 수를 기록해 두도록!" "예. 전하. 25명이옵니다." "좋다. 실바르 경을 처형하고 숨겨뒀던 그 귀족들도 아울러 그들의 죄에 따른 당연한 응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주기 바란다." 이번에 손을 든 사람은 22명이었다. 물론 이중에는 실바르 경과의 친분, 그리 고 다크와 자신의 어중간한 관계를 생각해서 뚜렸한 자신들의 의견을 밝히지 못한 지미와 라빈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미와 라빈은 다크가 뜻하는 바를 알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자신들이 의견을 내놔도 다크의 뜻에 반대할 수도 있었 기에 그냥 조용히 손을 들지 않았던 것이다. 다크는 손을 들었던 인물들을 쭉 훑어본 다음 말했다. "아직까지 정확한 자신의 주관을 제시하지 못한 바보같은 녀석들은 일어서 라." 그와 동시에 3명이 일어섰다. "네녀석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도 자신들이 듣고 느껴오고, 본(見) 결과를 믿지 않는가? 모두들 밖에 나가서 대연병장을 100바퀴쯤 돌면서 나는 왜 그렇게 멍청한지 생각해봐." 그 셋은 얼굴을 약간씩 붉히며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난 후 다크는 천천히 말했다. "이제부터 자신들의 진솔한 의견을 듣겠다. 자네!" "에. 전하." "실바르 경과 그가 감싼 가족들을 죽여야 한다고 했는데, 왜 그런지 자네의 의견을 밝혀주기 바라네." 지적당한 제법 잘생긴 무사는 열성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예. 전하. 우선 보고서에 따르면 실바르 경은 카르토 자작을 살려주기 위해 사건을 은폐한 혐의가 있사옵니다. 그 것은 국법에서 금하는 귀족 도피 방조 죄에 해당하옵니다. 그리고 실바르 경은 거기서 더 나아가 카르토 자작 가족 을 살려주기 위해 그들의 옳은 행실을 과장되이 표현한 문서까지 만들어 전하 의 이목을 기만(欺瞞)하려는 죄 또한 지었사옵니다. 이는 처형해야 마땅하옵 니다." "좋다. 자네. 실바르 경을 살려줘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러자 이번에 지명당한 장교도 자신의 지명에 약간 당황한 듯 했지만 그 표 정을 억누르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실바르 경의 의견은 정당하옵니다. 사실 본국은 치레아를 점령한지 오래되지 않았사옵니다. 그런데 치레아 국민들이 매우 존경하는 인물을 처형하고 또 그 를 제대로 평가한 본국의 실바르 경까지 처형한다는 것은 민심을 잃는 행위이 옵니다. 다시 한번 더 생각해 주시옵소서." "둘의 의견에 덧붙이고자 하는 의견이 있는 사람은 말해보라." 다크는 또렷이 말했지만 아무도 말하지는 않았다. 이번 재판의 모든 결정권이 총독에게 있는 만큼 꼭 지명된 사람 외에는 또다른 헛소리를 첨가할 의향이 없는 것 또한 사람의 심리였다. 잘되어봐야 제대로 된 의견을 말했다는 칭찬 받을 뿐이었고, 잘 못 풀릴때는 그놈의 말 한마디에 감옥에 들어가서 인생 망 치는 사태도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아무런 의견이 없자 다크는 천천히, 침착하게 말했다. "더이상의 의견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면 이제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를 들여보내라." "예, 전하." 그와 동시에 노년티가 팍팍나는 남자가 등장했다. 사실 그는 이렇게 늙는 인 물은 아니었지만 요 몇주간의 지독한 사태가 그를 더욱 폭삭 늙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대가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인가?" 사실 카르토는 눈앞에 서있는 잘봐줘야 17세 정도의 소녀가 그렇게 엄청난 권 력이 있을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대충 대답했다. "예." "자, 그렇다면 이제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를 재판하기로 한다. 그는 관부에 재직시에 자신의 높은 직위를 이용해서 법대로 행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수많 은 귀족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또 그는 직위를 박탈당한 후에도 정신을 못차 리고 농노들을 위해 거의 40%라는 저렴한 세금을 징수했다. 그리고 마을로 들 어서는 다리를 새로 만들었고, 또 도로를 포장했다. 그 외에도 무상으로 농노 들에게 먹을 것을 지원해준다든지, 또 농민들에게 매우 싼 이자로 대량의 식 량을 빌려준 것 따위의 추가적인 죄목도 있다. 그 외에 이자의 파렴치한 죄목 이 더 있는가?" 사실 다크의 말은 파렴치가 아닌 사항을 쭉 나열한 것이었기에 그 누구도 군 소리를 할 입장은 아니었다. 또 진짜 파렴치한 죄목을 뒤집어 쒸울만한 증거 도 없었기에 모두들 조용히 앉아있었다. "피고(被告)는 방금 말한 모든 사실이 진실임을 인정하는가?" "그렇소. 내가 한 행위가 잘못이라면 죄의 댓가를 받겠소." "좋다. 더 이상의 반론도 없고 피고 또한 죄를 인정했기에, 그에게 그에 적합 한 응분의 댓가를 주고자 한다." 다크는 앞에 앉아있는 인물들을 쭉 노려본 후 천천히 말했다. "나는 이자에게 새로이 백작이란 칭호를 내리고, 총독부의 요직에 앉히고자 한다. 의의 있는 사람?" 모두들 서로의 눈치만 보고 가만히 앉아있자 다크는 또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자작. 그대를 이제부터 크라레스 제국의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백작으로 임명한다. 이는 이미 황제폐하께 본인이 직접 문의하여 폐하의 허락이 떨어진 사항이니 경들도 그렇게 알고 있도록. 또 그대는 영지 를 직접 다스릴만한 시간이 없을테니, 대신 맡아 다스릴 만한 인물을 구할 시 간 7일을 주겠다. 그 안에 구한 후 나에게 보고하도록. 알겠나?"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판국인지 애매해진 카르토 자작은 거의 무의식중에 나직하게 대답했다. "예." "좋아. 가스톤에게 가서 경의 영지와 작위에 관계된 서류를 받으면 된다. 그 리고… 실바르!" "예. 전하." "전하"라는 실바르의 외침에 카르토 자작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오만한 인 상을 가진 소녀의 신분을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도 황녀(皇女) 정도 될 것이리라. "네녀석의 이번 판단은 매우 정확했다. 세린!" 그러자 문을 열고 세린이 쫓아 들어와 다크에게 매우 호화로운 검을 건네주고 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이 호화로운 검은 다크가 세린에게 구입해 오라고 시 킨 것이었다. 다크는 그 검을 실바르에게 내밀며 말했다. "경은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 나는 경이 폐하를 위해 일하는 그 충성된 마음 을 높이 사서 이 선물을 하고자 한다. 받으라." 다크는 사실 이리저리 줏어들은 결과 실바르의 검 두 개를 박살낸 원흉이 자 신임을 잘 알기에 미안한 감정이 앞서서 이번 쇼의 주역으로 그를 선택한 것 이었다. 폐하가 원하는 바가 뭔지 이 멍청한 무인들에게 명확하게 인지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이번의 군사재판을 연 것이었다. 갑자기 정말 멋진 검을 자신에게 내미는 총독을 보고 매우 혼란스러워져버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수 없게된 실바르는 그냥 멍청한 표정을 한 채 기계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 검을 받았다. 다크는 실바르에게 검을 건네준 후 싸늘한 표정으로 쭉 나열해서 앉아있는 흑 색군복을 입은 무사들에게 외쳤다. "들어라. 이 멍청한 녀석들아. 폐하께서는 인재를 원하신다. 네녀석들은 그것 하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나? 그 인재가 어느나라 사람이건, 또 귀족 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적국의 귀족이라고 해서 당연히 처형해야 한다는 돌대가리들이 있다는 것에 본인은 매우 가슴이 아프다. 더이 상 그대들에게 질책은 하지 않겠다. 그대들은 제2친위기사단의 엘리트들이다. 나의 말을 밑거름 삼아 폐하께서 원하시는 바를 알아서 해결해 주기 바란다. 알겠나?" "예, 전하." 다크는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가버렸고, 이제 주눅든 표정의 무사들만 남 아서 쑤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명씩 또는 무리를 지어 자신들의 근무 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체포한 후 매우 동정적으로 대해주던 실바르가 호출당해 돌아간 직후,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자작 또한 총독부에 강제로 끌려왔다. 다크가 두시간 이란 여유를 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카르토 자작이 도착해야 그때부터 연 극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카르토 자작은 이미 1시간쯤 전에 도착했고 여태껏 총독부 부속건물에 위치한 지하감옥에 갖혀 있었다. 그러다가 재판을 한다고 이리로 끌려올 때 이제 끝장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아마도 총독부 건물 앞에서 목매달릴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왔지만 갑자기 백 작으로 승격되었고, 자신의 모든 재산도 온전하게 유지되었다. 이 모든게 갑 자기 일어난 사건이었기에 한바탕 꿈을 꾼것처럼 머리속이 뒤죽박죽이라 그 냉막한 표정을 가진 소녀가 사라진 다음에도 멍청한 표정으로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실바르가 이제서야 어느정도 상황을 대충 안굴러가는 머리로 정리한 후 이제 카르토 백작이 된 남자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잘 되셨군요. 모든게 공작 전하께서 상황을 잘 판단하신 덕분입니다. 일단 제가 가스톤 경에게 안내해 드릴테니 그곳에서 서류를 수령하신 후 돌아가셔 서 가족들을 안심시켜 주십시오. 이리 따라오세요." "예. 감사합니다. 실바르 경. 그런데 아까 그분은 누구십니까? 그 소녀 말입 니다." 카르토 백작의 말에 실바르는 무의식에 새로 생긴 자신의 애검 손잡이를 꽉 쥐며 미소띈 얼굴로 말했다. "치레아 총독이신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전하시죠. 크라레스 최고의 검객이 십니다." 실바르의 군사재판이 있은지도 이제 10일이 경과했을 때 총독부는 수많은 인 부들이 득실거리며 새로이 단장을 한다고 난리였다. 총독부 정면의 주정원(主 庭園)에 아름다운 꽃이 핀 화초들이 심어졌고 도로도 깨끗하게 청소되었다. 그리고 총독부 내부의 각 방들도 청소를 하고 사방에 낀 먼지들을 제거하는 대청소작업을 한다고 하녀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봄이 되면 겨울의 어둠침침했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대청소를 하는 것 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건 조금 달랐다. 왜냐하면 약간의 국경에서의 소란 을 빌미로 아르곤 제국에서 사신이 올것이라는 통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 신 일행은 먼저 치레아 총독부를 거쳐 스바시에 총독부, 그리고 황제를 알현 한 후 코린트로 갈 예정이었다. 이 말은 크라레스의 가장 중요한 부서들을 모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이쪽의 약점을 알아보겠다는 의도가 숨어있을 것은 당 연한 일이다. "사신 일행은?" "예. 내일 총독부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발레리 경이 보고했사옵니다." "내일이라……. 대단한 강행군이군." "예. 그러하옵니다. 전하." "모든 준비가 그 전에 끝날 수있게 잘 준비하게." "예. 전하." "참, 로니에 사제는 도착했나?" "내일 아침에는 도착할 수 있다고 연락한걸로 아옵니다." "좋아. 이만 가보게나." 친위기사단 복장의 무사는 이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런다음 뒤로 돌아서는 50살은 되어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무사의 옷에는 놀랍게도 그 웃기게 생긴 황금 드래곤의 문장과 함께 총독을 뜻하는 문장도 함께 붙어있었다. 아르곤 제국에서 사신을 파견한 것은 명목상은 국경을 침입해 들어온 크라레 스 황제에게 그 위법성을 따진다는 것이었다. 치레아 지구와 아르곤 제국의 국경선이 되는 말토리오 산맥의 끝자락. 이 부분에 이르러 말토리오 산맥의 그 험악함은 매우 완화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길이 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렇기에 치레아나 스바시에는 과거부터 항구를 발전시켜 해상무역을 해온 것이 었다. 그런데 이 말토리오 산맥에 살고있는 오크들은 몬스터 치고는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 치레아에서 토벌군을 파견하면 아르곤으로 도망치고, 아르곤에서 토벌군을 파견하면 치레아로 도망쳤다. 그렇다 보니 토벌은 아무런 성과도 없 었다. 과거 치레아 왕국시절 아르곤과 협정을 맺어 대대적인 토벌을 벌인적도 있었지만, 이때는 몬스터들이 말토리오 산맥을 타고 크라레스 방향으로 도망 치는 바람에 실패했던 것이다. 일이 이렇다 보니 무식하거나 또는 외고집적 성격이 짙었던 오우거나 트롤들 은 진작에 말토리오 산맥 하단부에서 토벌당해버렸지만, 생긴것과 달리 꾀가 많은 오크들은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번성을 누리고 있었다. 토 벌작전이 거의 먹혀들지 않았기에 치레아나 아르곤은 아예 토벌을 거의 포기 하고 해상무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실정이었다. 이런때 다크가 치레아에 부임했으니 당연히 여태껏 남아있던 오크들에 대한 토벌작전이 감행되었다. 오크들 외에도 치레아 반란군 놈들이 과거 오크들이 하는 짓을 본받아 국경을 왔다갔다 하면서 못된짓을 꾸미고 있었기에 그 양쪽 을 모두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크는 토벌에 1개 사단과 제2친위기사단을 몽땅 털어넣었다. 단기전으로 끝 장을 낼 생각이었기에 타이탄까지 동원된 이 강도높은 토벌에 오크들은 슬쩍 인간들이 쳐들어오는 방향을 가늠해보고는 아르곤으로 대피했다. 하지만 이번 토벌군은 과거와 달리 아르곤 국경 안까지 들어와서 오크들을 학살, 완전히 씨를 말려버렸다. 아르곤은 오크들이 말살당하는게 반가운 사실이었고, 또 상대가 자신들의 영 토 안까지 들어와서 전쟁을 일으킨 것을 더욱 반겼다. 왜냐하면 이로서 새롭 게 일어서기 시작한 크라레스측과의 외교협상에서 매우 우위에 설 수 있는 명 목이 제공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아르곤은 철저한 비밀유지를 한 채 사신들을 파견했다. 물론 상대방이 준비할 시간을 적게주고 또 상대방의 준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사신 파견에 대한 문서는 사신이 국경을 통과할때쯤 되 어 전달되었고 다크는 이 난데없는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데 3일의 여유 밖에 없었다. 총독부에서 뒤늦게 붙여준 경갑기병 100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6필의 말이 끄 는 호화로운 마차와 아르곤의 경갑 호위기병 50기(騎)가 도착했다. 말들도 지 쳐있고 가볍게 무장한 무사들의 갑옷에 먼지가 뿌옅게 앉아있는 것을 보면 이 들이 얼마나 강행군을 해서 도착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차가 서자 그 안에서 약간 창백한 안색의 사제복장을 한 인물 세명이 내렸 고 그들의 뒤따라 3명의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호위하며 뒤따랐다. 이 세명의 무사들은 특이하게도 한명도 검을 차고있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허리에는 금 박을 입힌 신성문자들이 빽빽히 아로새겨진 20센티미터 길이의 짧은 막대기가 하나씩 달려있었다. 바로 이 것이 성기사(聖騎士)의 상징인 오러 소드(aura sword)였다. 신성한 샤이하드의 권능(權能)을 표시하는 이 검은 성기사가 잡아야지만 그 신성한 위력을 낼 수 있으며, 검보다도 예리한 그 강력한 공격력과 왠만한 마 법은 막아내는 강력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오러 소드가 뿜어 내는 그 영롱한 푸른 불꽃을 보며, 자신의 신앙심의 깊음을 자랑했고 또, 그 에따라 그 불꽃의 강도가 더욱 강해지도록 열성적으로 샤이하드를 섬겼다. 오 러 소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의 강도는 바로 각자가 지닌 신성력의 척도였 기 때문이다. 어쨋든 그들은 총독부 안으로 안내되면서 방을 배정받았다. 총독부는 과거 치 레아 왕궁이었기에 총독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호화로웠다. 사제들을 안내 하던 무사는 방까지 안내해준 후 공손하게 말했다. "총독 전하께서는 저녁식사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식사시 간은 6시 정각입니다." 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 "알겠소." "그럼 편히 쉬십시오." 무사는 제법 궁중예절이 몸에 익은 듯 매끄럽게 인사를 건넨 후 물러갔다. 사 신 일행은 일단 땀과 먼지로 더렵혀진 몸을 깨끗하게 씻은 후 편안한 옷을 입 고 한 자리에 다시 모였다. "예상외로 대단한 인물인 모양입니다. 대신관님." 그 말에 아직 20대 초반 정도로밖에 안보이는 아주 수려한 얼굴을 가진 젊은 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의 외모는 그 강력한 신성력에 의해 미화되 어 있는 것일 뿐, 지금 그의 나이는 62살이었고 아르곤 안에서도 상당한 고위 직에 있는 인물이었다. "호오… 야스퍼 형제도 그렇게 생각했나? 직접 그 인물을 만나보기 전에 단정 하기는 힘들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겠더군.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품이라 해도 적국의 왕비들을 그린 초상화들을 복도에 걸어놓은 걸 보면 대단한 배짱이 있 는 인물임은 확실한 것 같더군." "하지만 대신관님. 호위무사들이나 여태껏 슬쩍 관찰해본 이곳 주둔군의 경우 그렇게 군기가 강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특히 호위무사들의 경우 잡담 에다가, 밤에 경계서는 군사들이 졸기까지……." 그 말에 앞에 오러 소드를 차고있는 성기사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모네타 형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건 군(軍)을 잘 모르셔서 그런 생각을 하셨겠지만, 이리로 오는 도중에 저는 호위하는 병사들이 아니라 시민들을 봤습니다. 시민들은 약간은 불안한 듯 한 표정이었지만 딱딱하게 굳 어있지는 않았고, 병사들을 봐도 겁에질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병사들이 매우 잘 통제되어 이번 전쟁에서 민중들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말이 되지요. 그리고 이곳 왕궁도 아주 자잘한 것까지 피해가 없이 멀쩡하다는 말 은 약탈당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전투중에도 군사들이 제대로 통제될 수 있게끔 군기가 대단히 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보에 의하면 치레아 침 공전에 동원된 용병사단은 2개정도입니다. 용병들이 그정도로 통제된다면 정 규군은 보나마나지요." "흐음. 골지 형제가 아주 좋은 것을 지적했군. 아마 그 말 대로일거야. 예상 외로 치레아 총독은 상당한 인물인 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 말일세. 그리고 오 는 길에 여러 시민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니 세금도 많이 내렸고, 전쟁 전보 다도 물가는 더욱 안정되었다고 하더군. 이런식으로 오래 지속되면 크라레스 는 상당히 강력한 국가로 자라게 될걸? 어쨋든 이렇게 성장 가능성이 큰 나라 가 본국의 옆에 있다는 것은 별로 좋은 것은 아니지." 치레아의 총독은 익히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전쟁의 신전에 등록된 그 래듀에이트도 아니었고 여태껏 크라레스의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인물도 아니 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쿵 하고 떨어진 존재였던 것이다. 스바시 에 총독인 루빈스키 공작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그래도 30여년쯤 전에 크라 레스 국왕의 절친한 친구였고 또 뛰어난 무사였었다. 지금 갑자기 높은 자리 에 등용된다 하더라도 약간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크 폰 로니 에르 공작의 경우, 전쟁이 치레아의 승리로 끝난 후 갑자기 등용되어 공작의 칭호가 주어지면서 총독으로 등장한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각국의 첩자들이 그에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날뛰었지만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있다면 치 레아가 예상외로 잘 다스려지고 있다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번 아르곤 사신단은 베일에 싸인 두명의 총독들을 직접 만나보고 그들에 대한 평가를 하고자 하는 목적이 들어가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렇기 에 약속된 저녁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남은 시간을 사신단의 핵심 인물들은 의논에 의논을 거듭하면서 그 인물에 대해 토론했다. 그러다 보니 대략적으로 "이런 인물일 것이다"라는 가상적인 인물상까지 만들어버리게 되어버렸고 진 짜 그와 식사를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대충은 맞았다는 것에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웃기지도 않은 골드 드래곤의 문장을 가슴에 단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은 대 략 50세는 되어보였다. 이제 서서히 탈색되기 시작하는 금발 아래로 드러나 있는 넓은 이마에 깊게 새겨진 굵은 주름살은 자신의 연륜을 자랑하는 듯 했 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서 은연중에 나타나는 황궁예절을 본다면 황궁과도 꽤 나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자라나오며 황궁예절을 일정기간 몸에 베일정도로 교육받았음이 틀림없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약간 실례였지만 사제들은 상대 의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신성주문을 살짝 사용했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공작 은 전쟁의 신전에 등록되지 않은 그래듀에이트였기 때문이다.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제가 치레아 총독인 다크 폰 그래지 에트… 에… 로니에르입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사신들은 무심결에 습관적으로 공작이 "그래지에트"라고 했다가 얼버무리는 그 성을 듣고 이 공작의 배경을 얼핏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지에트라면 지금 크라레스 황족의 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래지에트"라는 숨겨 진 성을 통해서 그가 황족이고, 또 여태껏 역사의 전면으로 나올 수 없었던 이유가 뭔가 황실의 스켄들(scandal)때문일 것임은 자연스레 짐작해볼 수 있 었다. 크라레스의 황족인 그래지에트 가문은 과거 뛰어난 무가(武家)였고 그 혈통이 계승되는 탓인지 탁월한 무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현재 크라레스의 황제인 "프랑크 폰 그래지에트"도 그래듀에이트일 정도니까 말이다. 그러니만큼 스켄 들을 통해 생산된 자식이라 해도 그 혈통 계승이 안될리는 없었던 모양이었 다. 혈통이 계승되지 않았다면 그게 사생아가 될 리는 없을테니까……. "그래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하기는 그렇게 빨리 오셨으면 구경할 시간도 거의 없으셨겠군요." "폐하께서는 크라레스 군대가 국경을 침범한 것을 매우 언짢게 생각하고 계십 니다. 폐하께서 저에게 그 사실을 따지고, 또 이제 새로이 국경을 접하게 된 만큼 몇가지 조정할 사항도 있고… 그 모든 것을 빨리 처리할 것을 명하셨기 에 저희들은 빨리 올 수밖에 없었지요. 저도 갑작스레 분부를 받은 일이라… 통고를 늦게 드려서 죄송합니다." "허허허… 일을 하시다 보면 그러실수도 있지요. 모든 것을 윗사람들이 결정 했는데 그것을 행하는 아랫사람에게 죄가 있을 수 있나요? 그건 그렇고 자 차 린 것은 별로 없지만 드십시오." 사신들의 입장에서도 그날 저녁식사는 꽤 만족스런 것이었다. 바다에 연한 국 가다 보니 담백한 해산물을 사용한 요리가 많았고, 그중 상당수는 아르곤 식 으로 요리된 것들이었기에 그들로서는 별로 부담없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 다. 사제들에게 샤이하드의 경전에서 곡물(穀物)로 만든 술은 금하지만 포도 주는 유일하게 예외였기에 식사 중에 모두들 약간씩 포도주를 마셨고, 식사가 끝난 후에 간단한 안주거리와 함께 브랜디를 마실때쯤에는 분위기가 매우 부 드러워져 있었다. 브랜디는 알콜 성분이 40%정도로 매우 높지만 이것도 포도 주를 증류한 것이었기에 넓은 의미에서 포도주에 포함시켰다. "이번에 본국이 귀국의 영토를 침범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크들 이 워낙 영악해서 토벌을 하기만 하면 귀국 영토로 도망치니 그들을 격멸하려 면 그것외에는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그 말에 대신관도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통보를 하여 사전에 양해를 구했 어야지요. 갑자기 1개 사단급의 병력과 10여대의 타이탄이 국경지대를 넘어왔 으니 그 일대 주민들이 피난을 가고 난리가 났었으니까요. 통보를 해줬다면 이쪽에서도 대비를 하고, 또 일부 병력을 파견하여 국경에서 그들을 격멸할수 도 있었을게 아닙니까?" 물론 대신관의 말은 약간 어폐가 있었다. 그 전 치레아 왕국이 존재할 때에도 그런걸 몰라서 토벌을 못했겠는가? 오크는 보석이나 귀금속 따위, 또 각종 장 신구를 먹을 수 있을정도로 위장이 튼튼하지 못하다. 그 말은 오크에게는 식 량 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오크들이 산적질을 하면서 그 모든 것을 털어갔던 이유는 일부 못된 상인녀석들이 오크들이 강탈한 것을 식량과 바꿔줬기 때문이었다. 이 상인들로서는 이게 엄청난 이득이 남는 장사 였기에 토벌에 대한 소문이나 기타 병력 이동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면 오크들 에게 고자질을 했고 오크들은 그것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니 양쪽에서 협동해 서 공격하는 것은 이론상 좋긴 하지만 기밀유지는 2배이상 어려웠기에 결과적 으로는 말도 안되는 착상이었다. 하지만 일단 국경을 허락없이 침범했고, 또 크라레스 보다는 아르곤이 더 강 대국이었기에 그걸 대놓고 따질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대화는 이런식으로 진 행될 수밖에 없었다. "허허… 대신관님.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 통보된 작전이 원 체 시일이 빡빡하다 보니 귀국에 통보하는 것을 깜빡한 것이지요. 이번 작전 은 1개 사단의 경장보병과 제2친위기사단을 전부 동원했습니다. 아마 오크 토 벌전 중에서 최고로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준비할 것 도 많았구요. 어쨋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허허… 어쨋든 결과가 좋으니 잘 된 것이지요. 그래 오크는 몇 마리나 잡으 셨습니까?" "예. 대략 15,000 마리 정도 잡았습니다. 크라레스 지구에서도 콜렌 기사단을 동원해서 위에서 아래로 훑었으니까 이제 산맥에 살아남은 오크는 없다고 보 시면 되겠지요." "하하… 다행이군요. 이제 모든 산으로부터의 위협이 없어졌으니 산길을 통한 무역도 재개되지 않겠습니까?" "예. 그렇지요." "하지만 교역이 증가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에따라 밀수출입(密輸出 入)도 성행할테니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예. 국경의 경비를 철저히 하면 잘 될겁니다. 사제님. 그건 그렇고 브랜디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치레아에서 생산되는 브랜디는 매우 맛이 좋지요." 로니에르 공작은 민감한 사안에 이르자 그 다음에는 무슨말이 나올줄 대강 짐 작하고는 살짝 대화를 딴 방향으로 돌렸다. 하지만, 사제는 노골적으로 그걸 무시한 채 그 문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예, 고맙습니다. 아주 맛이 좋군요. 에… 국경의 경비만 철저히 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지요. 국경에다가 아무리 병력을 많이 배치한다고 해도 그 모든걸 단속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그들을 따라 범죄자들이 밀입국할수도 있는 노릇 이고 말입니다." "예."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 말토리오 산맥에는 무역로 세곳이 있지요. 이 세 곳을 제외한 모든 통로를 폐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역로는 좀더 통행이 편 리하게 포장을 해야 하구요. 본국에서는 그 사이에 6곳의 마을을 건설하고 몇 몇 교통의 요지에 요새를 건설한 후 산적들로부터 통행인들을 보호함과 동시 에 밀무역을 근절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귀국은 어떠신지?" "그야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요. 그런데 사제님. 저는 이곳 치레아를 관리 하기 위해 파견되었을 뿐, 국경문제에 대한 권한은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요 즘 해상 통행로에는……." 공작이 약간 더듬거리며 또다시 대화를 회피하려고 했지만 사제는 아주 집요 했다. 여기서 승기를 잡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치레아 국경문제에 치레아 총독이 권한이 없다면 누가 있겠습니까? 공작 전 하에게 그정도의 권한이 있기에 본국의 국경을 침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귀국이 하기 힘들다면 통로의 경비는 우리쪽에서 해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도로를 포장하는 것의 반은 귀국이 부담해야 하겠지요?" 로니에르 공작은 지금 자신에게 말하고있는 사제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보 고 있었다. 이게 사제인지 상인인지, 아니면 고도의 협잡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사실 이놈의 국경문제에 대해서는 대화하지 않게 되기를 빌고있 었다. 그는 엄청난 권한과 권력을 가진 "진짜" 공작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런데 이쪽에서 주춤거리는 걸 이용해서 이제 아예 대놓고 국경의 노른자위를 빼먹으려고 들고있는 사제를 향해 만약 자신이 진짜 공작이었다면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었을 것이다. 으이그……. "에… 당연히 본국 국경내의 도로에는 본국이 치안을 책임져야 하겠지요. 어 떻게 그런 힘든 일을 귀국에게만 맡길 수 있겠습니까? 허허허… 본국의 일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에 대해서는 폐하께서도 심려를 기울이고 계 십니다." 어쨋든 국경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꽤 오랜시간 토론이 오고갔지만 사실 상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국 아르곤과의 국경선이 되는 산맥의 도로를 잘 포장해둔다는 것은 크라레스로서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 도로가 상업용으 로만 이용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도로 위로는 당연히 군대도 이동할 수 있었고, 그 속도는 비포장 도로에 비해 월등히 빠를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어쨋든 대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쪽은 아르곤이었다. 왜 냐하면 감히 약소국 따위가 자국의 영토를 침범해 들어왔었다는 약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쪽 다 표정은 온화하게 미소를 띄고, 말투 또한 부드러웠 지만 둘의 입장은 달랐다. 한쪽은 완전히 칼만 안든 강도였고, 한쪽은 강도에 게 작은 것 하나라도 뺏기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한동안의 두뇌싸움. 성격이 대단히 단순한 "진짜" 다크로서는 아마 단 5분도 참지 못했을 위선과 거짓이 난무하는 대화는 드디어 끝이났다. 사실 샤이하드 의 경전에 거짓말을 하는 것은 엄금하고 있지만 사실을 숨기고 건너뛰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렇기에 아르곤에서 파견된 사제들은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교묘하게 현실을 숨기거나 또는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 대화를 함으로서 상대를 기만하는, 아주 고차원적인 화술을 구사했다. 그덕분에 표면상으로는 화기애애한 대화였지만 그게 끝나고난 후 사신들이 자 신의 숙소로 돌아가자 "가짜" 다크 로니에르 공작 나으리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피로를 삭히면서 아침일찍 모든 일을 맏겨놓고 사라져버린 "진짜"를 저 주하기 시작한 것을 탓할 수는 없으리라. "히야… 날씨 참 좋군." 다크가총독관저에서 아예 떠난 이유는 자신에게는 하등의 보탬도 되지않는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고 질린 탓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뷰 마나 포스" 따위의 주문 정도야 자신이 익힌 "하이드 마나 포스(hide mana force)"의 주문으로 숨기고 있을 수 있었지만 신의 힘을 빌린다는 신성마법까 지 속일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사신단의 우두머리 가 대신관이라는 매우 고위급 사제였기에 그의 신성력은 대단할것이고, 자칫 하면 정체를 발각당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말을 한마리 가져다가 타고는 그냥 아무 방향으로나 달려가 고 있었다. 몸에 잘 맞는 남자옷 위에 약간 헐렁한 양털로 짠 스웨터를 입어 자신의 상체에 생기는 굴곡을 감추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눈치챌 수 있는 미 소녀임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에 여자가 한 두명도 아니었고……. 그녀는 그위에 좀 두꺼워보이는 양털로 짠 망토를 두르 고 있었는데 사실 별 필요는 없었지만 세린이 막무가내로 입혀준 담요 대용품 이었다. 따라오겠다고 떠들어대는 몇 명의 친위기사들을 물리치고 아직 수련기사인 지 미와 라빈만을 데리고 출발했다. 수하들을 이끌고 한가로이 말을 달리며 그녀 는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빌어먹을 토지에르 자식. 내가 자기를 도와주면 금방이라도 중원으로 돌려보 내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말짱 거짓말인 것 같아. 그놈을 계속 믿고 있어야 하나? 아니면 나대로 길을 찾아야 하나?' 심각한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계속 크라레스에 죽치고 있는 이유도 한사람이 방법을 찾는 것 보다는 여러명이, 그것도 황제의 칙명 하에 많은 사람들이 덤벼들어찾는 것이 빠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 지만 다크도 한가지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지금 위치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은거하지 않고 인간 세상에 나와있는 단 하나 뿐인 존재였다. 황제로서는 그런 엄청난 실력자를 자신의 주위에 계속 두고싶어하지, 떠나보 내고 싶어하지는 않을거였다. 거기다가 다크라는 고수를 제어하기 위한 미끼 까지도 확실히 알고있는데 떠나보내고 싶겠는가? 어쨋든 다크는 처음에 총독관저를 떠날때부터 기왕에 나온거 여행을 할 생각 이었다. 그 때문에 수행원으로 아직 배울게 많은 지미와 라빈을 선택한 것이 었다. 또 크라레스에서 보내온 관리들이 알아서 모든 일을 행하고 있었기에 괜히 총독관저에 붙어앉아 있어봐야 별 필요도 없었다. 원래가 크라레스 황제 등도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다크의 그 매력은 그 무서운 전투력에 있는 것이지 관리능력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 사실을 다크도 잘 알고있었기에 그 녀는 전쟁이 터졌을때만 도와주면 된다는 생각으로 아예 이번에 "가짜"도 도 착한 김에 장시간 여행이나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세린에게 모종 의 뒷처리 방법까지 지시해놓고 나왔으니, 오랜만에 되찾은 자유로 기분이 꽤 좋았다. 부하들을 이끌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말을 달리다가 다크는 이번에 아르곤과 크라레스 제국간에 생긴 문제의 시발점이 되는 말토리오 산맥을 관통해서 아 르곤을 한번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크가 이끄는 군대는 아 르곤 안까지 들어가긴 했지만 관광하러 간 것이 아니라 오크 토벌을 위해 돌 진해 들어간 것이었기에 그렇게 깊게 들어가지도 못했고, 또 구경이나 할 정 도로 한가하지도 못했었다. 다크는 현경의 경지에 들어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내공을 몸속에 갈무리하여 드 러나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이 방법은 무사들에게는 통하는 방법이었 다. 하지만 마법사는 몸속에 들어있는 마나의 양을 측정하는 마법을 사용하기 에 이 방법은 효과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힘을 되찾고 크라레스 에 돌아왔을때부터 하이드 마나 포스라는 주문으로 자신의 강대한 마나를 마 법으로 포착할 수 없도록 감췄다. 뷰 마나 포스는 3싸이클급의 주문이었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 게 해주는 하이드 마나 포스 주문은 1싸이클급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 둘의 차이점은 뷰 마나 포스는 단시간만 사용하면서 주위를 관찰하고 끝낼 수 있는 반면, 하이드 마나 포스는 필요할때까지 몇시간이라도 그 주문을 지속시켜야 했다. 그래서 하이드 마나 포스를 몇시간이나 계속 사용하려면 그 마나를 지 속적으로 끌어모은다고 완전히 탈진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다크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것 따위의 행위를 안해도 마나를 자유자재 로 끌어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신경을 써서 소량씩 마나를 끌어 모은 다는 것은 꽤 성가신 작업이었는데 그걸 아주 간편하게 해주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노망난(?) 아르티어스 옹에게서 배운 용언마법(龍言魔法)이었 다. 드래곤은 원래가 자신의 몸속에 쌓여있는 방대한 마나를 효과적으로 이용 하는 특이한 방식의 마법에 익숙한 생명체다. 용언마법으로 이런 지속적인 효 과를 내는 주문을 사용하면 시술자인 드래곤은 마법의 유지에 더 이상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마나를 이용하는 것이니 일단 발동만 시켜놓으면 드래 곤의 몸속에서 마나가 고갈될때까지 알아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겨우 1 싸이클짜리 마법 돌린다고 드래곤의 그 엄청난 마나가 고갈될 리는 없었고 그 건 다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다크는 아르티어스와 헤어진 후부터 줄 곧 이 마법을 몸에 걸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다크 일행이 느긋하게 경치를 즐기면서 천천히 말을 몰아 말토리오 산맥 말단 에 있는 세 개의 통로중의 하나인 크로세인 통로 부근에 위치한 크란스 마을 에 도착한 것은 총독관저에서 떠난지 4일 후였다. 4일이 지난 후에도 총독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쪽에서는 난리가 났겠지만 내일쯤 되면 그 소란 도 중지될 예정이었다. 세린에게 자신이 떠난 후 5일째가 되면 "오랫동안 여 행을 할 생각이니 그리 알도록!" 하고 써진 편지를 이번에 새로이 배속되어 온 "가짜" 공작이자 제2친위기사단 단장, 그리고 부총독(副總督)인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에게 전달할 예정이었다.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은 유령기사단에서 잔뼈가 굵어온 매우 뛰어난 검객으 로 유령기사단의 창립 멤버들이 모두 그러하듯 이미 오래전에 전사(戰死)처리 된 인물이었다. 그당시 그는 20대 초반이었지만 매우 뛰어난 검술실력을 인정 받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무사였다. 하지만 크로나사 평야를 뺏기고 국가가 1/3로 축소되는 그 망할 전쟁에서 패배한 후 전력 노출을 숨긴다는 명목하게 그는 살아있는 시체가 되셔버렸고, 그때부터 역사의 전면(前面)에 나서기는 글러버렸다. 그러다가 이번에 가짜들을 보내는 작업에서 무인들 치고는 매우 잘 돌아가는 머리와 관리능력이 뛰어난 점을 인정받아 그에게 지급된 유령기사단의 미가엘 급 타이탄 1대와 함께 다크의 보좌역으로 보내졌다. 그 때문에 제2친위기사단 은 미가엘 8대로 더욱 전력이 증강되었다. 생각외로 다크가 총독 일을 잘 해주고 있긴 했지만 그는 원래가 이 세계 사람 이 아니었기에 기왕에 보내는 가짜라면 일처리에 여러 가지로 도움도 될 수 있는 인물이 낫겠다 싶어 선정한 인물이 카슬레이 백작이기에 그는 유령기사 단 랭킹 10위안에 들어가는 검술실력과 그에 걸맞는 뛰어난 머리를 갖춘 인물 이었다. 하지만 원체 뛰어난 인물인데다가 그에게 주어진 부총독이라는 직위 를 생각해보면 혹시나 다크 총독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는다고 생각하면 어 쩌나 하는 의견이 약간은 있었다. 어떻게 돌려 생각한다면 황제가 자신을 감 시하고 또 권력을 줄이기 위해 보낸 사람이라고 오해할수도 있었기 때문이었 다. 어쨋든 그런 오해가 터져나온다면 부총독이란 직책은 없애버리기로 그들끼리 합의를 본 후 카슬레이 백작을 보냈는데, 예상외로 다크는 그 결정에 대환영 이었다. 오히려 몇가지 우려되는 사항에 대해 주의까지 듣고온 카슬레이 백작 이 당황할 정도로 다크는 그를 반겨 맞이했고, 대폭적인 권력이양을 해줬다. 몇가지 중요한 서류를 제외하고는 모두 카슬레이 백작 독단으로 처리해도 된 다는 전폭적인 신뢰의 뜻이 담긴 명령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아마도 카슬레 이 백작은 그 명령의 저의가 골치아픈 모든 일을 다 떠넘기고 도망치겠다는 것이었는 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뭐… 로니에 사제까지 불러다 줬으니 잘 해 내겠지. 공식적인 포교활동은 아 니지만 그래도 아르곤의 사제가 크라레스에서 꽤 중요한 일을 하고있다는 사 실을 안다면 그 사신녀석들도 어느정도는 누그러들게 될테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어느 여관에서 자고 갈까?' "도대체 언제 돌아가실 겁니까?" 지미는 매우 걱정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크에게 말했다. 지미와 라빈은여 행을 떠날 때 다크에게 주의받은 대로 "공작 전하"라는 명칭과 궁중언어를 여 행이 끝날때까지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다크"라고 이름을 말하기도 껄끄러워 서 언제나 호칭은 생략한채 말했다. "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시면 안됩니다. 아직 점령지가 안정되지 않아서 할 일 도 많은데……." "상관없다. 여태까지 여행하면서 너는 뭘봤냐? 이정도면 안정된거지. 또 안정 되지 않았다고 해도 거기 남아서 일하는 놈들은 그걸 가만히 놔둘 만큼 멍청 한 놈들이 아니야. 그건 그렇고 오늘은 이 말을에서 자고 가자." "예." 둘은 다크의 확정적인 말에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했고 그녀는 그들의 태도에 만족스레 미소를 지으며 눈에띄는 세군데의 여관중에서 제일 가까운 곳으로 말을 몰았다. 일단 여관에 도착한 후 종업원의 방이 없다 는 말에 두 번째 여관으로 갔고, 일행은 세 번째 여관에서도 허탕을 치고는 이제 큰길 가에서 벗어나 구석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여관을 뒤지기 시작했 다. 40일쯤 전에 있었던 대규모 오크 토벌전이 성공을 거두면서 말토리오 산 맥의 통행이 가능해졌고, 그 때문에 산맥을 넘기위해 모여든 상인들과 짐꾼들 로 마을의 여관은 만원이었다. 아마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마을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덕분에 더 욱 번창하고 그러면서 여관이나 술집도 많이 생기겠지만, 아직은 공급이 수요 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제 겨우 40일 전에 통행로가 뚫렸는 데 어떻게 40일만에 건물들을 짓겠는가? 하지만 치레아 북부에서 아르곤 남북 부로 이동하는데는, 치레아 남쪽으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아르곤 남부의 항구 로 이동, 그런후 또다시 북쪽으로 거의 "U"자 형태의 여행을 하는 것 보다는 산맥을 관통하는 것이 시간이 훨씬 절약된 것은 누구나 다 알고있었다. 그렇 기에 상인들이나 짐꾼들은 아직 숙박업소가 다 준비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쪽 길을 택했고 결과는, 방값의 폭등과 그에따른 여관 주인들의 즐거운 비명 소리를 낳게 된 것이다. 아마 지금 몇군데 뼈대가 올라가고 있는 큼지막한 건 물들이 모두 완성되고 나면 그들의 이 호경기도 끝장이 나겠지만 지금만큼은 매우 즐거우리라. "이봐. 여기 방 있냐?" 여관 주인들이 배가 부른 탓인지 아예 호객꾼마저 없었기에 거의 한시간을 뒤 져 다크 일행이 찾아간 구석진 여관에는 다행히도 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방이 하나밖에 없는데요?" "상관없다. 가자." 다크가 그 허름한 여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지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 로 말했다. 정말 지독하게 낡은 여관이라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무너진다 해 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이 으스스한 곳으로 들어가겠다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그녀의 지위는 이 나라에서 가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 지 않는가? "전… 여기 들어가실 겁니까?" "왜? 밖에서 자는 것 보다는 나을텐데? 빨리 정리하고 밥먹으러 가자구." "에휴… 어쩌면 밖에서 자는게 더 안전할지도 모르죠." 둘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할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보통 여관은 식당까지 함께 하지만 이런 허름한 여관에 제대로된 식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그들은 방에다가 짐을 풀어놓고는 찬물에 대강 먼지를 씻어낸 후 길 가에 있는 좀 큰 여관에 딸린 식당으로 갔다. "어서 오십쇼." 점원인 사내가 그들을 반겨 맞이했다. 식당겸 술집인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로 벅실거리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술마시면서 도박판을 벌이는 사내들부터 시작 해서 비싼 술마시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패거리, 또 간혹 그들에게 곱지못 한 시선을 한번씩 던지며 얌전히 밥먹는 패거리……. 하여튼 수많은 사람들로 식당은 들끓고 있었다. 아마도 이정도로 장사가 잘된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식당 주인은 또다른 식당 하나를 더 세울정도의 돈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아무거나 사람이 먹을만한거 삼인분으로 좀 가져와. 그리고 시원한 맥주 두 잔하고 포도주도 한병." 그럼 오크나 오우거가 먹는것도 여기서 판단 말인가? 어쨋든 주문이 좀 특이 했지만 점원은 군소리 안하고 물러섰다. 별의 별 손님들이 다 있다보니 이런 특이한 인물들도 있었고, 그걸 다 상대하려고 들었다간 시비붙기 쉽상이었기 때문이다. "예." 조금 지나서 가져온 음식은 시골 구석에 있는 여관 치고는 꽤 괜찮았다. 안그 래도 모두들 시장하던 참이라 열심히 먹고있는데 그들의 옆에 있는 술마시던 패거리들 중의 한명이 언성을 높이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내 말을 못믿겠다는 거야? 몇 달 안본 사이에 간이 많이 커졌군. 제 길! 잘들어. 이 멍충아. 이 브리지만 어르신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방 금 한 말은 사실이라구. 말토리오 산맥에 골드 드래곤이 산다니까." "흥. 그걸 어떻게 알았냐? 아무도 모르는데, 너희 일행만 봤다면 말이 안되잖 아." "그야 우리 일행은 산속 깊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으니까 볼 수 있었지." "일?" "흐흐… 왜? 일 하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글쎄……." "우리는 금도 캘겸 해서 산맥을 뒤지고있었지. 하지만 금이란게 잘 보이는 물 건이냐? 금찾기는 부업이고 산적질이 주업이지. 흐흐…… 그러다가 화전민(火 田民)의 오두막을 봤는데 그 딸래미가 참 예쁘더란 말이지…… 크크……." "그래서?" "그래서는… 열심히 그년과 즐기고 있었는데 우리들 머리위로 골드 드래곤이 날아가더라 이말이야." "그년과? 혼자서?" "큭큭큭…… 혼자일 리가 없잖아." "히히히… 거기 어디야? 이몸도 한번……." "이봐. 좀 닥치고 술이나 퍼마셔. 시끄러워서 밥을 먹을수가 있어야지." "뭐야?" 뾰족한 목소리로 폭언을 퍼붓는 예쁜 여자애를 보고 그놈들은 일단 군침부터 삼키면서 상대의 날씬한 몸매를 음흉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것 참 맛있게 생겼군… 하면서 말이다. "닥치라는 말 안들려?" 소녀는 일행인 두 등빨좋은 남자들이 벙 찐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이 천천히 일어선 후 여태껏 헛소리를 하고있던 거의 하마만한 덩치를 가진 남자에게 겁 도없이 다가왔다. "헤헤헤… 고것 맛있게 생겼는데……. 어때? 우리 같이 한번…… 억!" ㅉ! 소녀는 그대로 그 덩치의 뺨이 휙 돌아갈 정도로 매서운 일격을 가했다. 그걸 보면서 지미와 라빈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이제 고인이 되셔버릴 저 사내 에게 명복을 빌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건들릴 사람을 건드렸어야지. 하지만 꽤 큰 소리가 울려퍼졌음에도 덩치는 고개만이 조금 돌아갔을 뿐 별 타격이 없었는지 다시 소녀를 음흉한 눈초리로 쏘아보며 느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 다. "헤헤… 손맛이 제법인걸. 그럼 아랫도리 맛은 어떤지 한번 구경해볼까? 흐흐 흐" 그자가 일어서서 소녀에게 다가가자 그의 일행들인 패거리는 키득거리며 그놈 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 돌연한 사태에 지미와 라빈은 멍청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겨우 저정도 잡배를 어떻게 못하다니. 이럴수가? 이때 소녀는 아직도 멍하니 앉아있는 두명의 일행을 힐끗 바라본 후 힘없는 여자로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을 시작했다. "끼약! 저사람이 날 때릴려고 해요. 살려줘~~~" 소녀는 재빨리 그 두 남자들의 뒤로 숨어버렸고, 술집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 된 가운데 지미와 라빈은 소녀가 자신들의 뒤로 숨는 걸 보면서 사태가 어떻 게 돌아가는지 대강 짐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놈의 남자라는 자존 심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생각할 여유도 거의 없이 자신들을 향해 주먹을 날려오는 덩치와 싸우기 시작했다. "풋! 제법 믿는 구석이 있어서 까불었다 이거지. 먼저 이놈들을 죽여놓은 후 네년을 손봐주마. 죽어랏." "헛소리." 먼저 상대가 무기를 들지 않았기에 지미와 라빈은 본격적인 주먹다짐을 시작 했고 그들의 숙련된 몸놀림에 덩치가 밀리자 이제 덩치의 패거리까지 함께 가 세하여 패싸움이 벌어졌다. "죽엇!" 쿵! 퍽! 와당탕! 퍽! 퍽! 식당이란 한정된 공간에서 싸움이 벌어지다 보니 이리저리 피해를 입는 사람 들이 속출했고 그들 중에서 덩치좋은 인물들은 자신의 그 작은(?) 피해를 참 아줄 관용이라는 단어는 모르는지 모두들 패싸움에 동참했다. 몇분 지나지 않 아 식당안은 거의 50여명이 집단 난투극을 벌이는 장소가 되어버렸고, 이제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는 점점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없는 패싸움장 에서 이제 자신의 눈앞에 있는 놈은 모두 적이었다. "지미녀석 동작이 굼뜨기는 빨리 피해." 꿀꺽꿀꺽… "그래. 라빈 잘한다! 쳐라 쳐! 죽여버렷!" 이 패싸움의 발단을 제공한 소녀는 한쪽 구석에 앉아서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신이나서 응원하며 구경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가장 재미있는게 싸움구경하고 이웃집 불구경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신바람이 날수밖에……. "아그그그그극! 저 악마!" 지미는 침대위에 거의 천사같은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보며 이빨을 갈면서 외쳤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있지? "참아. 참으라구." "내가 참게 생겼냐? 아이구…… 온 몸이 안아픈데가 없네. 넌 괜찮냐?" "괜찮을 리가 없잖아." 라빈은 털푸덕 방바닥에 주저앉더니 곧장 드러누웠다. 서있을 힘은커녕 손가 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무려 3시간동안이나 패싸움을 벌였으니 팔팔하 다면 그놈이 비정상일 것이다. 원래가 패싸움이란 것은 시비를 걸고 치고박기 시작한 후 사람들이 몰려들어 혼란스러울 때 재빨리 내빼는 것이 요령이었다. 그런데 이 순진한, 직설적으 로 말하면 멍청한 녀석들은 나중에 사람들이 지쳐서 더 이상 싸우는 것을 포 기할때까지 치고박았으니 그 넘치는 체력은 찬탄을 받을 만 했지만, 그게 결 코 잘한짓은 아니었다. 원래가 패싸움이란게 그렇게 크게까지 잘 번지지 않지만, 이 마을은 얼마전까 지만 해도 오크들 때문에 하루에도 몇번씩 소란스러웠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대규모 오크 토벌이 완료된 지금 마을의 젊은이들은 넘쳐나가는 에너지를 딱 히 해소할 길이 없어 온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으니 당연히 그들은 오랜만 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기회를 버리지 않았고, 패싸움의 절정기에는 거의 300여명이 모여들어 식당 밖 대로에서까지 치고박았던 것이다. 또 패싸움을 말려야 하는 이 마을 수비대원들까지 무료한 김에 이 싸움에 가담해서 주먹다 짐을 해댔으니 그 싸움규모가 가히 상상하기 힘든 지경까지 들어간 것은 당연 했다. "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꺄하하하……" 어제 저녁 잠들기 전까지는 그래도 봐줄만하던 지미와 라빈의 얼굴은 아침이 되자 그야말로 대단했다. 멍의 색깔은 그야말로 최고의 절정기를 나타내는 검 푸른색을 뽐내고 있었고, 두들겨 맞은곳은 퉁퉁 부어올라 그야말로 이게 사람 의 얼굴인지 몬스터의 얼굴인지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웃지 말아요. 이게 다 누구때문인데?" 가급적이면 지미는 라빈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는 다크에게 항의했다. 그들끼리도 서로의 얼굴을 보고 배를 잡고 웃었 었는데, 이번일을 일으킨 당사자가 이 얼굴을 보고 안웃으면 아마 천사의 탈 을 뒤집어 쓴 - 겉모양은 아름다우니까 - "악마"가 아니리라. "전… 다크님께서도 마법을 익히셨는데 혹시 치료마법은 배우지 않으셨습니 까?" "꺄하하하호호호호… 난 그런거 몰라." "제길 할 수 없군. 이 얼굴로 어떻게 밖에 나가지, 안그래 라빈? 풋후후후… …" 지미는 라빈에게 말을 하다말고, 그의 얼굴을 보면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누 르기 바빴다. 우선적으로 자신의 처참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떡이 된 라빈 의 얼굴만 보이니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한쪽눈이 퍼런데다가 얼 굴 반쪽은 퉁퉁부어오른 지금의 라빈의 얼굴에서 과거 그 준수하던 얼굴을 떠 올린다는 것은 정말 무리가 있는 주문이었다. "웃지마. 제길. 아야야… 이제는 이쪽 이빨까지 흔들거리네. 너는 이빨 괜찮 냐?" "말도 마라. 앞니 하나 부러졌어." 지미가 이빨이 빠져나가 찬바람이 드나드는 검은 구멍을 보여주자 라빈도 급 기야 참고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푸헤헤헤……" "기껏 보여줬더니 친구를 비웃어? 못된녀석." "헤헤…… 야. 밥먹으러 가자. 더 이상 죽치고 있어봐야 답도 안나온다." "가시죠." 지미와 라빈은 식당에 가는 길에 잡화점에 들러 1골드를 주고 포션(聖水) 두 병을 구입했다. 원래가 아르곤 제국의 주력 수출품 중 하나가 이 "샤이하드의 숨결"이라는 포션이었는데, 보통 포션보다는 가격이 반밖에 안될 정도로 저렴 하다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었다. 대신 포션에 기록된 대로 "주의사항"을 읽 어보고 자신이 거기에 해당된다면 샤이하드의 은총은 바랄 수 없기에 모두들 그 주의사항만은 꼭 읽어보고 구입했다. 사실 주의사항이란 것도 별것이 없었다. < 주의사항 1. 샤이하드 외의 타 신을 믿는자에게는 효과가 없습니다. (무신론자는 상관없음) 2. 마음이 사악한자에게 효과가 없습니다. 3. 효과를 보지 못하셨다고 해도 절대 환불을 해드리지 않습니다. 4. 유사품에 주의하세요. > 그런데 이 샤이하드의 숨결의 가장 큰 논란이 되는 문제점이 2번 사항이었는 데 누가 사악하고 사악하지 않은지 알 재주가 없었기에, 일부 악덕상인들이 성수가 아닌 그냥 물을 넣어 팔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효과없다고 따지면 "당신의 속마음이 사악하기 때문이다."라고 우기면 어쩔건가? 그 때문 에 생겨난 조항이 4번 조항이었다. 일부 돈없는 여행객들의 경우 이 샤이하드 의 숨결을 사서 가지고 다녔지만 경험있는 여행객들은 절대로 샤이하드의 숨 결을 구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만큼 가짜가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쨋든 여기는 아르곤과의 국경에 위치한 도시였기에 그들은 가짜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전제하에 샤이하드의 숨결을 구입한 후 일부는 얼굴에 바르고 일부는 입을 헹궜다. 이 상태로서는 입속이 다 터져서 밥도 못먹을 지 경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곳에서 파는 샤이하드의 숨결이 가짜는 아닌 모양인지 둘의 얼굴 모양 새가 확실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부러져나간 이빨이야 어떻게 할 수 없 었지만 흔들리던 이빨은 단단히 고정되었다. 어제 저녁밥을 먹었던 식당은 완 전히 박살나서 내부수리 중인지 문을 열지 않았기에 일행은 그 옆에있는 여관 의 식당으로 갔다. 될 수있으면 자극성 없는 음식을 시켜서 먹는 일행의 주위로 왔다갔다 하는 손님들 중 남자들의 태반이 얼굴이 떡이되어 있는 걸 보면 과연 어제의 집단 난투극에 참가자가 많기는 많았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제 왜그랬습니까?" "뭘?" "몰라서 물어요? 충분히 혼자서 헤치우고도… 아니지, 그놈들 뿐 아니라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떼거리로 덤벼도 이길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소름끼치는 연극을?" "그야 물론 재미있으니까 그랬지. 너희들은 재미 없었니? 나는 아주 재미있었 는데……." "으으으윽! 악마!" "내가 악마인거 이제 알았냐? 식사 다했으면 나가자. 오늘도 또 유쾌한 하루 가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시간 죽일 필요는 없겠지." 대 아르곤 제국의 서부에 위치한 거대도시 트로이데. 트로이데는 아르곤 제국 이 가진 5개의 수도(首都) 중 하나였다. 아르곤은 대제국이란 칭호가 어울릴 정도로 거대한 국가였기에 전 국토를 5개로 나눈 후 4명의 법왕(法王)이 각기 하나씩을 다스리고 남은 하나를 현재 교황(敎皇)인 고도5세가 직접 다스렸다. 트로이데는 아르곤의 서부에 위치한 안지오 지역의 수도였고 그에따라 이 트 로이데는 아르곤 서부의 종교, 교통, 상업, 문화, 군사, 정치의 중심지였다. 트로이데의 주민수는 무려 45만에 달했고, 트로이데 일대에는 2개 기사단과 3 개 사단이 주둔했다. 그야말로 트로이데의 규모는 이제 신흥제국인 크라레스 의 수도 크로돈에 비해 비교가 안될정도였던 것이다. "정말 대단하군. 하지만 [중원]의 도시들에 비하면 별건 아냐." 여기저기 이색적인 석상(石像) 등 종교적인 각종 예술품들이 보였고, 가옥의 구조도 크라레스가 돌이나 나무를 사용하는데 반해 여기서는 벽돌을 애용하는 것 같았다. 곳곳에는 색유리로 특이한 그림들을 그려놓은 거대한 창문을 가진 건물들도 보였다. 그 건물들의 규모는 대단히 거대했고 수백명이라도 들어가 서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커보였다. 하여튼 크라레스에 비해 여기 아르곤의 도시들은 아주 호화롭다는 특징을 가 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도시들의 경우 하나이상의 거대한 분수대를 포함한 공 원이 있었고, 색유리로 모양을 낸 창문을 단 큰 건물이 하나이상씩은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는 날개달린 사람이나, 아름다운 여인, 또는 남자들을 흰 대리 석으로 조각해놓은 조각상들이 놓여있었다. 이 모든걸 본다면 엄청나게 호화 로운 도시고, 또 부유함에 틀림없어 보이는데도 사람들의 복장은 매우 수수했 다. 어떻게 보면 옷 같은 것에 신경쓸 돈으로 도시를 단장하는 것 같다는 생 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아름다운 도시야. 아르곤의 도시들은 모두 깨끗하고 아름답군." "그렇네요." 소녀의 말에 마지못해 대꾸하는 지미와 라딘의 얼굴에는 그새 수많은 상처들 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망할 상관이 가는 곳곳마다 말썽을 불러 일으 켜대니 지미와 라빈의 몸이 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여행해오는 동안 거의 4일에 한번씩 패싸움을 해야 했고, 이틀에 한번이상 결투를 해야만 했다. 여행이 시작된 후 겪은 그 수많은 칼부림 속에서 아직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기적같이 느껴지는 지미와 라빈이었지만, 사실 그 둘은 절대 죽을 수는 없는 환경이었기에 살아있는 것이다. 언제나 다크가 시비를 건 상대는 그들과 비슷한 실력이거나 다수인 경우 한수 처지는 인물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도둑도 없고, 시비거는 사람도 없고, 약간의 다툼만 벌 어지면 수비대원들이 칼들고 뛰어오니 별로 재미없다는게 좀 단점이긴 하지만 ……." "그건 그래요." 그러면서 히죽이 미소짓는 지미. 변방에서는 몰랐지만 이런 도시같은 경우 다 크가 아무리 시비를 붙여 싸움이 나도 어디서 뛰어오는지 수비대원들이 뛰어 와서 싸움을 말렸다. 그 때문에 지미와 라빈은 꾀가 생겨서는 크라레스에서는 인적없는 곳만 찾아서 다녔었지만, 아르곤 안 깊숙히 들어온 다음부터 치안이 좋은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해왔다. 이때 저 앞쪽에 세워져있는 마차 옆에 선 젊은이가 자신을 홀린 듯이 멍청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다크는 재빨리 느끼고 빙그레 미소지으며 라빈에게 조용 히 말했다. "이봐, 라빈. 저 앞에 서있는 저녀석 보기에 어때?" 갑작스런 상관의 질문에 라빈은 그 상대를 자세히 쳐다본 후 상대에게서 느낀 점을 솔직히 말했다. "예? 제법 옷차림이 그럴듯해 보이는데요. 여태껏 저정도로 옷을 잘 입은 사 람이 별로 없었던 걸 보면 꽤 높은 집안의 자제인 것 같습니다. 롱소드를 차 고있는데다, 팔의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걸 보면 꽤 검술도 연마를 한것처 럼 보이구요." "꺄하하하…" 라빈이 얘기를 하는 동안 그들이 타고있던 말은 계속 앞으로 전진했기에 그 젊은이와의 거리는 매우 가까워져 있었다. 이때 다크가 의도적으로 크게 웃으 면서 젊은이보고 들으라는 듯 그 젊은이를 힐끔거리며 약간 큰소리로 말했다. "그건 실례잖아요. 라빈. 아무리 상대가 실력이 없어보이더라도 겉멋만 잔뜩 든 멍충이라니……" 그 젊은이의 안색은 순간 창백해지는 듯 하더니 시뻘개졌다. 눈앞의 이 아름 다운 소녀가 말하는 그 "겉멋만 잔뜩 든 멍충이"가 누군지 재빨리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런 무례한 녀석!" "아…… 아니…… 제가 뭐라고……" 이 능구렁이같은 상관의 속임수에 넘어간걸 재빨리 깨닳은 라빈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다크는 일부러 라빈에게 말을 걸었고 라빈이 한참 말하게 놔둔 후 상대의 가까이에 접근해서는 상대가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을 떠들어댔 으니, 결과는 당연했다. 정말 보기드문 미녀를 보고 가슴이 콩닥콩닥하고 있 던 그 젊은이는 자신이 어떤 무뢰배에게 숙녀앞에서 매우 심한 모욕을 당했다 고 생각하고는 재빨리 다음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 젊은이는 오른쪽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들고는 라빈의 얼굴에다가 냅다 던지면서 외쳤다. "무례한 녀석! 숙녀분 앞에서 나를 모욕하다니…… 결투를 신청한다. 말에서 내렷!" "아…… 그게…… 그게 아니고……." "라빈, 저런 애송이따위 한주먹거리도 안된다면서요. 빨리 처리하고 가요. 예?" 살살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하지만 상대가 들으라는 듯 적당히 큰소리로 얘기 하는 소녀와 "안됐군. 한두번 당해보냐? 알아서 조심해야지."하는 듯한 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지미를 의식하며 라빈은 할 수 없이 말에서 내렸다. 일단 기사는 상대가 결투를 신청하는 절차로 던진 장갑에 맞았으면 그건 피할 수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정의와 함께하시는 신께서 누가 옳은지를 결정지어 주 시게 되는 것이 정확한 순서였다. "제기랄. 정말 싸우기 싫은데……" 어제 결투에 찔린 허벅지 때문에 라빈은 약간 다리를 절면서 상대 앞에 다가 가 정중히 말했다. "제가 졌다고 치고 이 결투를 끝낼수는 없을까요?" 그 말에 상대는 이제 완전히 무시까지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안색이 새파래지 며 분노를 억누른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닥치고 검을 뽑아라. 샤이하드께서 정의의 편에 선 자가 누군지 밝혀 주시리 라." 라빈은 투덜거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롱 소드를 뽑아들었다. 라빈의 롱 소 드는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기에, 몇몇 전쟁터와 요 근래에 자주 겪은 결투덕 분에 칼날이 많이 상해있었다. "무슨 일이니? 피러스!" 막 결투를 시작하려던 두 사람의 움직임은 다급하게 들려온 이 고음의 음성의 주인에 의해 멈춰졌다. "왜 검을 뽑아들고 있는거냐?" 재빨리 건물에서 뛰어나오는 여인은 젊은이와 같은 엷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지고 있었다. "누…… 누나." "무슨 일니야? 응? 이런 곳에서 결투를 하려는 거냐? 저…… 제 동생이 무슨 실례를 저질렀는지?" 그 여인의 말에 라빈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일부러 다리를 더욱 심하게 절 룩거리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말했다. "약간의 오해가 있었을 뿐입니다. 저희 일행이 워낙 장난을 좋아해서 동생분 이 오해를 하셔서 말이죠." "오해라고? 네녀석은 분명히 나를 모욕……" "가만히 있거라. 피러스. 다리까지 부자유스러운 분인데, 네가 또 오해한 모 양이구나. 또 저렇게 정중하신 분인데 너를 모욕했을 리가 없잖아?" 그녀는 동생을 향해 따끔하게 말한 후 라빈에게로 얼굴을 돌여 공손하게 말했 다. "저… 무사님. 대단히 죄송한 부탁이지만 결투는 없었던 걸로 해주시겠습니 까?" "저야 말로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름다우신 레이디." "헛소리 하지마. 네녀석과는 무슨일이 있어도……" "피러스! 결투를 금한다는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잖니? 말 안들으면 아버지한 테 일러줄거야." 그 말에 피러스라 불린 그 젊은이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걸 보고는 더 이상의 볼일은 끝났다고 생각한 다크는 지미에게 눈짓을 하면서 말을 앞으로 몰았다. 속으로는 "오늘도 잘하면 한판 하는거 구경할 수 있었는데" 하고 생 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잠깐만 기다리세요." 다크와 지미, 그리고 라빈은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뒤를 돌아봤다. "혹시 여행객들이시라면, 저희 집에서 묶고 가시지 않겠습니까? 아버님께서는 과거 여러곳을 여행하셨었고, 또 여행담 같은걸 좋아하시기에 잠시 시간을 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갈길이 바빠서……" 다크는 그렇게 말하고 계속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지미가 그녀의 말(馬) 꼬 리를 붙잡고는 가지 못하게 잡은 후 재빨리 말했다. 운 좋으면 오늘 저녁은 맛있는 식사와 조용한 잠자리가 보장되는 것이다. 전번에 갔었던 도시 같은 경우 패싸움을 벌이다가 몽땅 잡혀 감옥속에서 밤을 새웠었는데, 지미는 이 도시에서까지 그런 경험을 하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이 도시는 처음이라 생소한점이 많았는 데 부탁드립니다. 저희들은 크라레스의 견습기사(見習騎士)들로서 저는 지미 도니에라고 하고, 이쪽은 다크 크라이드, 저쪽은 라빈 엘느와라고 합니다." "호호호…… 예, 크라레스 분들이셨군요. 이쪽은 제 동생 피러스 도우러, 저 는 앤 도우러입니다. 집이 약간 먼데 따라오세요. 피러스 가자." 피러스는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누나를 쏘아봤지만, 곧 다크쪽으로 시선을 한 번 던진 후 마음을 고쳐잡고는 집을 향해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남매가 안내한 곳은 약간 시외에 있는 제법 큰 2층 저택이었다. 저택의 가장 인 미켈 도우러씨는 5년 전에 은퇴한 상인이었다. 그는 젊었을때 여기저기를 많이 떠돌아 다니다가 뒤늦게 기반을 잡은 덕분에 느즈막히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우러씨는 결혼 후 세명의 자식이 성장할 때 까지 상인노릇을 하다 가 그들이 성장하자 즉시 은퇴한 후 또다시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는 여행광이 었다. 일행이 도착한 후 도우러씨에게 안내되었을 때, 도우러씨는 4명의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앤은 아버지에게 새로온 손님들을 소개했다. "아버지, 크라레스에서 오신 여행객들이에요. 지미 도니에씨, 다크 크라이드 양, 그리고 라빈 엘느와씨세요." 앤의 소개를 시작으로 서로간에 인사가 오고갔다. 가장인 미켈 도우러, 그리 고 하루 전에 도착해서 신세를 지고있던 모험가들인 스펜 안트리아, 아더 존 슨, 그리고 그들과 함께 모험여행 중이었던 베티 도니안이란 사제였다. 이곳 아르곤 제국 자체가 샤이하드 외의 신을 부정하는 만큼 베티란 신관은 신관복 을 입지 않고 여행복을 입고있었다. 베티를 제외한 모두가 20대 후반에서 30 대 정도의 인물들인 걸로 미루어 꽤나 수준있는 모험파티인 모양이었다. "자자…… 모두들 앉으시지요. 오랜만에 집안이 북적거리는군요." "감사합니다." 도우러씨가 원체 손님들을 반기는 탓인지 응접실에는 큰 테이블과 의자들이 많았기에 많은 수였지만 그 의자의 반도 채우기는 힘들었다. 모두들 쭉 둘러 앉자 남자들의 시선은 엄청나게 눈에 확 뛰는 미녀인 다크에게 집중되었다. 베티야 원래가 신관이었기에 그녀가 미인인 것은 모두들 당연하게 여겼다. 사 실 신관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신성마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결코 찬탄의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다크는 그것도 아닌데도 베티에 버금갈정 도의 미모를 지니고 있었으니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남자들의 시선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베티까지도 다크를 유심히 바 라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정중하게 질문했다. "혹시 마법사이신가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제님." "은근하게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기에 물어보는 겁니다. 아마도 하이드 마나 포스의 주문을 사용하고 계신 모양이죠? 하지만 그런식으로 해서는 마법의 기 운이 뿜어져 나오기에 신관들에게 발각당할 수 있답니다. 물론 여행객이라서 사형까지 당할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귀찮은 일을 당하실 수는 있죠." "그런가요?" 다크는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하이드 메직 포스(hide magic force)에 해 당하는 용언마법을 나직하게 외웠다. "隱魔力!" 그 순간 다크에게서 나오던 마법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베티는 약간 놀랍다는 어조로 말했다. "아주 능숙한 마법사셨군요. 두세가지의 마법을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다면 대단한 거라고 들었는데 말이에요." 베티가 이렇게 단정짓는 것도 당연했다. 원래가 신성마법은 신성력, 즉 얼마 나 신을 믿느냐에 좌우되는 것이었고 또 그 신성마법은 그녀의 아름다움이 유 지되듯 한번 발동시키면 신에대한 믿음이 유지되는 한은 그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신경쓰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마법은 다르다. 마법은 원칙적으로 정신력으로 마나를 다뤄 이뤄지는 산물. 그렇기에 두가지 마법을 동시에 쓸 수 있다는 것은 양쪽에 신경을 쓸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대단히 뛰어 난 마법사들의 경우 5가지 이상의 마법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다고도 하지만, 대부분의 수련마법사들의 경우 한두가지 마법으로도 허덕거리는게 정석인지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어쨋든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그 옆에 앉아 있던 스펜이 다크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어디로 여행을 하시는 길이신가요? 혹시 정해진 목적지가 없다면 저희들과 함께 모험을 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원래가 아르곤이란 곳에서 마법사를 구 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곳이라서 말이죠. 지금 저희들 같은 경우 직접 여행을 할 일행이 세 명 더 있습니다. 두 명은 지금 사전(事前) 조 사차 먼저 떠났구요. 저희들은 남은 한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모험여행치고는 인원이 너무 많군요. 지금 계신분만 해도 셋, 그리고 또 셋, 거기에 저희들까지 합하면 아홉명인데 그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할까요?" "아마도 그 인원가지고도 힘들겁니다. 어쩌면 여기서 몇 명 더 들어올지도 모 르죠." "좋아요. 목적이 마음에 들면 참가하죠." 그 말에 스펜이 조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을 사냥할 생각입니다." "드… 드래곤이라구요?" 경악한 지미와 라빈의 외침에 스펜은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는 "쉿!" 하고 주 의를 주면서 말을 이었다. "이건 모험을 할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린 드래곤 한 마리가 살고있는 곳을 알아냈죠. 나이는 아직 1000살도 안된 녀석입니다. 모두들 알고 계시죠? 1000살짜리 드래곤 찾아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드래곤 중에서 가장 약한 그린 드래곤이니 만큼 헤치우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겁니다. 브레스도 거의 쓸 줄 모르는 어린 녀석인지라 보물을 별로 많이 모아두지는 못했겠지만, 모두에 게 충분히 돌아갈 정도는 있을겁니다. 만약 보물이 없다해도 활약한 정도에 따라 아쉽지 않게 대우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드래곤의 사체(死體)는 저희들 이 가질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 말에 지미가 약간은 탐탁치 않은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사체는 엄청난 가치가 있는데, 그쪽에서 다 가진다는 건 좀 그렇군요."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 일행에는 타이탄 세 대가 있습니다. 그쪽에는 몇대가 있죠?" "……" "저희들이 드래곤을 공격할 때 당신들은 옆에서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겨 우 옆에서 조금 도와주는 정도만으로도 평생 쓰고도 남을정도의 돈이 생기는 겁니다. 별로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이견(異見)이 있으신가 요?" "없습니다." 지미가 풀이죽은 어조로 말하자 스펜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 살짝 미소지은 후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드래곤이 사는 곳이 이곳, 아르곤이라는 겁니다. 드래곤 을 처치한 후 그 사체를 국외로 반출하는 것은 미켈 도우러씨가 책임지게 되 겠지만 사실 드래곤의 덩치가 보통 큰게 아니므로 매우 힘든 작업이 될겁니 다." "그걸 어디로 반출하는 겁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그건 그때가서 알려드리기로 하고…… 일단 저 희 일행에 6싸이클급 마법사가 한명 있습니다. 다크양은 어느정도 실력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작전을 세우려면 필요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다크는 잠시 생각했다. 아르티어스에게서 배운 용언마법은 거의가 1싸이클과 2싸이클급이었다. 하지만 과거 가스톤과 안토니에게서 몇가지 공격마법을 5싸 이클까지 익혔었다. 물론 해봐야 배운게 화이어 볼 계통하고 뭐 그런 몇가지 안되는 것들이었지만 사실 들통날것도 아니니 그걸 대놓고 알려줄 필요는 없 었다. "5싸이클까지 익혔어요. 물론 공격마법만……" 그 말에 놀랍다는 듯 모두들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 갓 10대 후반의 여자아이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거기에다가 그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공격마법들이라니…… "보기보다는 조금 과격하시군요. 허허……. 그럼 자네들은 어느정도 실력인 가? 실전경험은 좀 있나?" "저희는 둘 다 수련기사입니다. 크라레스가 스바시에를 침공할때도 용병대에 참가해서 싸웠으니 실전경험은 충분할겁니다." 지미의 말에 아더가 약간 비꼬는 듯한 어조로 참견했다. "호오…… 그 전쟁에 참가했었나? 정말 인상깊은 전쟁이었지. 그렇게 후다닥 끝내기도 참 어려운데 말이야." 아더의 말은 그렇게 빨리 끝난, 즉 타이탄들이 주축으로 싸운 전쟁이었으니 실전에 직접 참가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지미는 약간 첨가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전쟁이 끝난 후 반군 토벌한다고 한 6개월 돌아다녔죠." "좋아. 그럼 3일 후에 일행이 도착하는 대로 출발하기로 하세. 그동안 우리들 도 준비할게 많고말이야. 자네들도 혹시 필요한게 있으면 말해보게. 준비해 주겠네." "별로 필요한건 없어요. 참, 사제님. 일행이 다리에 부상이 좀 있는데 치료해 주실 수 없을까요?" "호호호…… 그건 별로 어렵지 않죠." "뭐야? 그런사람 모른다고? 이녀석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분명히 아들놈 이 여기서 산다고 했다구. 네녀석 상관 데려와." 아르티어스 옹께서는 한 몇 달 레어안에 틀어박혀서 무료함을 달래느라 이리 뒹굴 저리뒹굴 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도저히 아들과 함께 지냈던 단란했던 그 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지금 생활이 무료한 만큼 그때의 기억은 더욱 새록새록 그의 신경을 자극해, 드디어는 참지 못하고 크라레스 왕궁으로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놈의 호위병들은 도대체가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들을 뿐, 정상적인 대답을 해주는 인간은한명도 없었다. 당연히 그럴것이 지금 아 르티어스의 생김새는 갓 20대 초반의 정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미남자인데, 그가 아들을 찾는다면 갓난아기란 말밖에 더 되나? 왕궁이 탁아소가 아닌 바 에야 이런 말을 하는놈이 미친놈인 것은 분명한 사실. "그래서? 내 아들이 여기 없다는 말이냐?" "당신 아들은 탁아소에 가서 찾아보시구려. 아니면 고아원이나……" "이런 빌어먹을 녀석들이! 죽어랏! 화구(火球)!" 그와 동시에 엄청난 불덩어리가 아르티어스의 손바닥에서 날아갔고 여태껏 이 죽거리고 있던 병사 둘은 순간적으로 구수한 향기를 풍기는 통구이가 되셔버 렸다. 갑자기 왕궁 정면에서 마법을 사용해 근위병을 죽이는 사태가 벌어지자 사방 에서 병사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혈압이 꽤나 상승한 아르티어스 옹의 눈에는 그게 개미떼 정도로밖에 안보이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을 향해 곧장 손을 일(一)자로 가로 저으며 주문을 외웠다. "風劍!"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 뻗어나온 바람의 검날이 퍼져나가며 수십명의 몸통 을 상하로 분리시켰다. 원래가 골드 드래곤은 바람의 정력력을 가진 존재인 만큼 그의 바람에 관계된 마법은 더욱 가공스러웠다. "크하하하…… 내 아들이 어디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럼 다 죽어버려랏!" 이때 왕궁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세명의 무사가 다가와서는 끔찍한 모 습으로 죽어있는 시체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린 후 아르티어스를 향해 차 가운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누군데, 크라레스 왕성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거요?" "나? 아르티어스라고 하지. 네녀석도 물론 내 아들이 어디있는지 모르겠지?" "당신 아들이 어디있는지 우리가 알수 있소? 보아허니 당신 아들은 이제 갓난 아기가 분명한데 왕궁에 와서 찾을 필요가 무에 있겠소? 그래, 겨우 그것 때 문에 병사들을 학살했다는 말이오?" "갓난아기가 아냐! 이제 17살 정도 됐다구. 그리고 저놈들을 죽인 것은 감히 이 아르티어스 님에게 반항한 죄야. 그래 네놈들도 반항해 볼텐가?" 기사들은 처음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 젊은 마법사를 쳐다봤다. 기사를 상대로 마법사가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 그런데도 기사를, 그것도 세명이나 앞에 두고 저 오만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었다. 제일 앞에 서있던 기사는 그점 때문에 섣불리 손을 못쓰고 있었다. "저는 왕실 근위기사단 소속 기사 알프레드 그루지에라고 합니다. 우선 귀하 의 아들이 이곳에 있는게 정확한지, 또 귀하의 정체는 무엇인지 알려주십시 오. 그래야 피차간에 실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상대의 정중한 말에 아르티어스는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렸다. "흥! 내가 몇번이나 말했나? 내 아들 이름은 다크 크라이드 남작이야. 그리고 내 이름은 아르티어스고…… 더 이상 알려줄 필요는 없다. 만약 2시간 안에 내 아들을 여기로 데려오지 않는다면 저따위 싸구려 왕궁은 통째로 날려버리 겠다." "저…… 혹시 드래곤이십니까?" 알프레드의 혹시나 하는 조심스런 물음에 아르티어스는 픽 비웃음을 터뜨린 후 말했다. "그래." "저…… 그렇다면 사라진 아드님은 헤즐링?" "아니다. 인간이다. 내 양자(養子)야."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 이후로 2시간 동안 크라레스 왕성은 어느 구석에 박혀있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 하나를 찾는다고 난리가 났다. 다크 크라이드라는 남자를 찾기위해 아래 로는 왕궁에 고용된 하급관리들로부터 시작해서 수도 근위사단의 병사들부터 장교들, 그리고 고관대작들까지 철저히 알아봤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 때문에 크라레스 왕실 근위기사단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서 유령기사단까 지 포함하여 왕궁 근처에 타이탄을 가진 기사들을 끌어모으며 난데없는 드래 곤과의 일전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전방에 나가있던 콜렌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속속 공간이동해오고 있었고 아르티어스에게 눈치채이지 않도 록 비밀리에 각 타이탄들에게 대(對) 드래곤 전투를 위해 창(槍)들이 지급되 고 있었다. "폐하! 큰일났사옵니다."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는 근위기사단장을 보고 젊은 황제는 약간 짜증섞인 어 조로 말했다. "무슨 일인가?" 자신이 생각해도 궁중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지금 하고있다는 것을 알고 있 었지만, 기사단장은 지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난데없이 드래곤 한 마리가 나타나 말도 안되는 시비를 걸고 있사온데…… 속히 피신을 하시는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말도 안되는 시비라니?" "예. 다크 크라이드라는 자기 아들이 이곳 왕궁에 있을텐데 내놓으라는 것이 옵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그런 인물은 찾을수가……" 황제는 잠시 생각을 해본 후 짚이는 이름이 있었기에 다시 확인했다. "다크 크라이드라고 했나?" "예." "이상하군. 그건 로니에르 공작의 옛날 이름인데? 분명히 아들이라고 했나?" "그러하옵니다." "그 드래곤에게 아들인지 딸인지 다시 한번 알아보거라. 아니, 내가 직접 가 겠다. 만약을 대비해서 유령기사단의 타이탄 사용허가를 내리겠다. 준비하라 이르도록!" "예. 폐하. 하지만 폐하께서 직접 드래곤을 만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옵니 다. 다시한번 생각을……" "에잉… 자네는 시키는 대로 해. 나도 그래듀에이트! 상대가 아무리 드래곤이 라도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아. 알겠나?" "예. 폐하." 아르티어스는 새로이 나타난 젊은이의 근사한 옷차림을 보고, 또 그 젊은이가 나타나자 사방의 병사들이 바짝 긴장해서 더욱 호위에 만전을 기하려고 노력 하는 걸 보고 그의 신분을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젊은이는 아르티어스 옹에게서 약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선 다음 침착하게 말했다. "그대가 드래곤입니까?" 아르티어스는 완전히 신분을 드러내고 있는 자신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 하게 말하는 상대를 보고 약간 흥미로운 표정을 잠시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 었다. "그렇다. 이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내 아들은 어디있지?" "저는 다크 크라이드라는 이름은 분명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입니다. 그렇기에 그대가 찾는 아들은 아마 딴곳에 있는게 아닌가 생각됩 니다. 제가 알기로 다크 크라이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녀 단 한사람 뿐 이기 때문입니다." "호오…… 바로 찾아왔군. 바로 그 아이야. 내 아들이란 여자애가 말이야." 아르티어스가 한 말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여자애가 아들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드래곤이 그렇다는데야 그 누구도 감히 반론을 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내 아들은 어디있지? 아빠가 왔으면 당연히 모습을 나타내야 정상 아닌가?" "그녀는 지금 여기에 없습니다. 치레아 총독으로 파견되어 있습니다. 이름도 다크 로니에르로 바뀌었죠." "흐음…… 알만하군. 그 때문에 아는 녀석이 없었군. 인간들은 왜 계급이 올 라가면서 성(姓)이 계속 바뀌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어쨋건 성급히 손을 쓴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자네가 이 나라의 왕인가?" "예." 아르티어스는 젊은 황제를 흥미롭다는 듯이 잠시 바라보더니 물었다. "자네, 결혼은 했나?" "예. 그런데 그건 왜?" "딸을 가진 부모는…… 험험! 아… 아닐세. 잠시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야. 과연 그 아이의 윗사람이 될만한 자격은 있는 것 같군." 아르티어스가 손을 앞으로 뻗고 "空間移動"이라고 용언마법 주문을 외우자 곧 이어 그의 손바닥에 희미한 빛이 일어났고, 곧이어 그 빛이 사라졌을 때 그의 손바닥 위에는 1.5미터가 넘는 호화롭게 장식된 바스터 소드가 놓여져 있었 다. 이것은 과거 아르티어스가 레드 드래곤에게서 선물받은 검이었고, 보물창 고 벽에 높직하게 걸려있었던 것인데 그걸 이쪽으로 공간이동 시켜온 것이었 다. 물론 자신이 딴 곳으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물건만을 공간이동시켜 이쪽으 로 가져오는 것은 엄청난 기억력이 요구된다. 그 물건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 이 시술자가 알고있는 그 장소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딴 곳에 있는 사람같이 움직이는 물체인 경우 계속 좌표가 바뀌기에 강제로 공간이동 시켜 데려온다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물건이라면 드래곤의 그 엄청난 기억력 으로 봤을 때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검을 젊은 황제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이 검은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가 만든 마력검(魔力劍)이다. 물론 드래곤 이 만든 만큼 불필요한 마나의 소모는 없지. 이걸 사용하면 이 검신에 수놓아 져 있는 5싸이클급까지의 화염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네. 이 검을 받게나. 쓸 데없이 소란을 일으킨 것에 대한 본인의 미안함에 대한 사과의 표시라고 생각 하고 받아주게." 황제는 아르티어스가 검을 자신에게 내미는 걸 보고 엄청나게 놀랬다. 원래가 드래곤이란 족속들이 그 광포한 성질과 엄청난 힘을 기반으로 자존심 높기로 견줄자가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이건 실수였어. 없었던 일로 하자구."라 고 말한다고 해도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 자존심 높은 드래 곤이 인간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멋진 보검까지 주면서……. 하지만 그런 드래곤이 이런 환상적인 보검(寶劍)까지 주면서 뒷수습을 하는 것은 당연히 다크 로니에르 공작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잘 아는 황제는 정중히 그 사과의 뜻으로 건네주는 검을 받았다. 그래야만 자 신이 상대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 사실 황제가 그 검을 보고 욕심이 안생겼다면 그것은 완전히 거짓말이리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있었던 일은 서로간의 오해로 빚어진 불 상사였던 만큼, 없었던 일로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하하하…… 자네 말귀를 잘 알아듣는군. 어쨋든 이걸로 일단락 되었고…… 치레아는 어디로 가면 되지?" "직접 찾아가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마법사를 한명 붙여드리겠습니다. 그와 함께 가시면 될겁니다." "신경써줘서 고맙네." "천만에요. 제가 아끼는 부하의 아버지신데, 당연히 그정도는 해드려야 도리 지요. 하하하…" 늙은 마법사의 안내로 아르티어스는 곧장 치레아 총독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제의 칙명으로 아르티어스를 데려온 마법사는 당연히 궁정 제1마법사인 토 지에르였다. 상대가 그 이름도 공포스러운 존재인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황제 에게 슬며시 귀뜸받고 토지에르는 그에게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대했다. 토지에르는 다크라는 인물과 만나게 된 것은 정말이지 위대하신 신의 뜻이라 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만큼이나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무술실력은 뛰 어났다. 처음에 그 안좋은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마디 사탕발림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지 않은가? 거기에다가 이번에는 다크의 의부(義 父)라고 주장하는 드래곤까지 나타났으니 그녀의 이용가치는 더욱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드래곤과 인간이 친분을 맺기는 정말이지 어려웠다. 모험가 등으로 트랜스포 메이션하여 인간세상을 돌아다니던 드래곤이 인간과 친해져 그를 도와준다는 영웅전설은 각 나라마다 하나 정도씩 가지고 있을 정도로 흔했지만, 사실 드 래곤이 인간을 도와준 적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드래곤은 근본적으로 다른 종족들의 일에 드래곤으로 현신하여 참견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거기 에다가 드래곤은 원래가 타 종족보다 자신들이 월등하게 우월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타 종족들을 벌레보듯 한다는데도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트랜스포 메이션하여 사귄 인간이라 해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들은 그 상태에서 인간 들을 사귀면서, 벌레들의 삶을 현실감 있게 체험하며 즐기는 정도로만 생각했 기에 실질적인 교류(交流)는 사실상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정도밖에 안되지만 드래곤 이 인간을 도와준 적은 있었다. 그리고 그때 드러난 드래곤의 파괴력은 무시 무시했었다. 그들은 간단하게 도시를 파괴하고, 거대한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만큼이나 엄청난 존재인 드래곤…… 그 드래곤이 언제 사귀었는지 다크를 찾고있는 것이다. 그럼 잘 하면 다크를 이용해 이 드래곤을 크라레스 제국에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토지에르는 가급적 아르티어스라는 이 드래곤이 크라레스란 국가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토지에르와 아르티어스는 근래에 건설한 치레아 총독부 구석에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이동마법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동마법진은 스바시에에서 모든 타이탄을 한곳에 집중하여 전투를 하는 것이 엄청난 효과가 있었음을 실감한 후 요즘들어 크라레스 제국 곳곳에 건설한, 또는 건설중인 이동마법진들 중의 하나였다. "저쪽입니다. 아르티어스님." 아르티어스는 멀찍이 보이는 거대한 건물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 의 아들이 이런 근사한 곳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 매우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 다. "호오, 제법 괜찮은 곳이군." "예. 과거 치레아 왕궁이었습니다만, 병합 후 치레아 총독관저로 쓰고있습니 다." 이때 이들이 이리로 온다는 긴급지시를 받은 무사 한명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 왔다. 금발을 조금 길게 기른 젊은이였는데, 꽤나 무술을 익힌 듯 그렇게 달 렸음에도 불구하고 호흡한점 흐트러짐 없이 재빨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토지에르 경. 오신다는 연락을 방금 받았습니다." "공작 전하께선 어디에 계시나? 멀리서 아버님이 찾아오셨다고 전했겠지?" 토지에르의 물음에 기사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저…… 그게 말입니다. 토지에르 경. 지금 전하께서는 여기에 안계십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예. 전하께선 모든 것을 부총독 각하께 일임하신 후, 반달쯤 전에 여행을 떠 나셨습니다." 그 말에 토지에르의 안색이 핼쑥하게 바뀌면서 따져 묻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총독 전하께서 여행을 떠나셨는데 어떻게 왕궁에는 보고 하지 않았지?" "저…… 그게, 잠시 여행을 떠났다 올테니, 폐하께는 알리지 말라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오실 줄 알았는데…… 조금씩 기다리다 보니 벌써 반달이……" "이런 빌어먹을! 부총독은 어디있나?" "따라오십시오. 토지에르 경. 이쪽입니다." 토지에르는 아르티어스와 함께 그 기사의 뒤를 따라가면서 물었다. "호위는 데려가셨나?" "예. 기사 두명이 따라갔습니다. 토지에르 경." "기사? 그래듀에이트인가?" "아닙니다." "뭐야? 그럼 너희들은 공작 전하께서 호위도 변변치않은 것들을 데리고 여행 을 하시겠다는데 반대도 안했다는 것이냐? 응?" 토지에르가 죄도없는 기사를 닥달하는 것을 보며, 아르티어스가 토지에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자신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사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해두게나. 그녀석이 한번 결정했을때는 그 누구도 뒤집을 수 없다네. 정 말 고집이 보통 쎈게 아니거든. 응? 그런데 저건 뭔가? 드래곤을 저렇게 재미 있게 그려놓은 것은 처음보는군." 아르티어스가 자신을 위로하는 말에 저으기 안심이 되고있던 토지에르의 얼굴 색은 완전히 핼쑥하게 바뀌어버렸다. '저걸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니…… 큰 일 났다.' 토지에르는 아르티어스가 가리키고 있는 총독부 건물 앞에 그려진 거대한 그 림이 뭔지 잘 알고있었다. 그건 로니에르 공작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었다. 처음에 다크 공작이 그걸 문장으로 선택했을 때 별 괴상한 취향도 다 있다고 그는 생각했었다. 드래곤은 꽤나 문장에 자주 쓰이는 단골손님이었지만, 저렇 듯 악취미하게 그리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크의 아버지라는 저 드래곤을 알고난 후 저 문장을 보는 순간, 토지에르는 그 문장이 뜻하는 바를 얼핏 짐작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정말이지 기절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지 만 기절할 시간 여유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잘 둘러쳐서 말해서 아르티어 스가 자신이 한 짐작과 같은 걸 생각하게 해서는 안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 "저건 총독 전하의 문장(文狀)입니다. 로니에르라는 성을 황제폐하께 하사받 으시면서 선택하셨다고 하더군요. 총독전하께서는 저 문장이 매우 마음에 드 시는지 화가(畵家)를 여러명 불러들여 총독부 건물 앞에 저렇게 크게 그려놓 으셨지요." 토지에르가 뭔가 변명거리를 생각해내기도 전에 눈치없는 기사는 진실을 말하 고야 말았고, 그 설명을 들은 아르티어스의 얼굴은 그야말로 똥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저 그림이 나타내는 게 뭔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노무 자식이! 애비 얼굴에 똥칠을 하다니!" 토지에르는 아르티어스의 반응으로 그가 골드 드래곤이며, 저 문장이 아르티 어스를 비꼬아놓은 것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최악의 상황이었 다. 아르티어스가 성질이라도 부리는 날에는 저 문장만 박살나는 것이 아니라 문장 뒤에 있는 총독부 건물이 통째로 날아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렇기에 토지에르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한가지 잔꾀를 생각해내고는 뻔뻔스럽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저 고정하십시오. 아르티어스님. 무슨 일이십니까?" "끄응…… 그게…… 그러니까…… 에…… 먼길을 아들녀석 보려고 찾아왔는데 만나지 못해서 신경질나서 그러네. 신경쓰지 말게나." 아르티어스 옹께서는 당연히 자신이 화가난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아들녀석 이 자신이 제발 여자다워지라고 잔소리 좀 한걸 가지고 이렇듯 치졸하게 복수 를 한 것을 떠벌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이녀석들은 자신이 골드 드래곤 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는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는 궁색한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도록 유도한 토지에르는 아르티어스가 자신이 의도한 대로 화를 억누르는 것을 보 며 속으로 한숨을 쉰 후 또다시 능청스레 말했다. "예. 저희도 그점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기에 사전에 알려드리지 못한점 죄송 하게 생각합니다." 토지에르 일행이 기사에게 안내되어 총독 집무실로 안내되었을 때 그곳에 앉 아있던 50세는 되어보이는 노기사(老騎士)가 재빨리 일어서며 인사를 건네왔 다. 그또한 이번 방문객이 어떤 인물들인지 벌써 본국으로부터 보고를 받았 고, 또 토지에르 궁정 제1마법사가 동석하고 있으니 자연히 조심스러워 질 수 밖에 없었다. "어서오십시오. 저는 부총독인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입니다. 카알이라고 불 러주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카슬레이 백작은 정중하게 푹신한 의자를 권했지만 아르티어스의 눈길은 카슬 레이의 옷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 황금색 드래곤의 문장이 백작의 가슴에 큼직하니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걸 보기만 해도 아르티 어스 옹의 머리속에는, 평소에 아들놈이 문장을 가슴에 그려붙인 옷을 입고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있는게 상상하지 않으려고 해도 떠올랐고 정말 피가 머리 꼭대기까지 솟는 것 같았다. '이놈의 시키를……!' "앉으시지요. 차를 내 오도록 이르겠습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아르티어스 옹. "으응? 응." 아르티어스와 토지에르가 착석을 하자 카슬레이는 정중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 했다. "공작 전하께선 어디로 가셨는지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여러 가지로 수소문 해본 결과 아르곤 제국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벌써 일주일 전쯤에 아르곤으 로 가신 걸 알고 친위기사단 소속 그래듀에이트 3명과 마법사 1명을 급파했습 니다. 그러니 크게 걱정하실 것은 없으실 겁니다." "아냐, 여기서 무턱대고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도 아들녀석을 찾으러 그 아르곤이란 곳에 가봐야겠어." "그러시다면 조금 있으면 파견대로부터 연락이 올겁니다. 하루에 두 번씩 정 기적으로 연락을 해오니까요. 그들과 공간이동 해서 합류하시면 혼자 가시는 것 보다 한결 공작전하를 찾기가 수월하실 겁니다." "흐음…… 나도 그편이 좋을 것 같군." 아르티어스의 말에 토지에르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직접 모셔드려야 하겠지만, 본국에 처리 해야 할 일이 태산이라서 말입니다." "상관없네. 난 혼자 다니는 걸 더 좋아하니까 말이야." 3일이 지나고 나자 새로운 인물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패거리를 이 끌고 온 사람은 샤트란 페르라는 별로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고 꽤나 근육질인 여자 무사였는데, 그녀는 새로운 동료들을 소개했다. 페르는 키가 170센티는 되어 보였는데 생머리를 길게 기른 늘씬하면서도 탄탄한 근육질의 여자였다. 페르와 함께 온 두명의 무사들은 흑발인 페르와는 달리 모두 금발을 가지고 있는 무사들이었는데 탄탄한 근육과 손바닥에 생겨있는 굳은살이 그들이 어느 정도 수련을 쌓은 무사들인지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분은 파시르에요. 그리고 이분은 죠 네르만. 두분 다 그래듀에이트시죠." 매서운 눈매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평범한 얼굴을 한 파시르, 그의 얼굴 왼쪽 뺨에는 깊은 검상(劍傷)이 있어 평범한 그의 얼굴을 조금이나마 강렬하게 만 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죠 네르만은 파시르보다는 조금 더 키가 커서 거의 1.9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덩치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얼굴 생김새는 짙은 턱수 염을 제외하고는 매우 평범했다. 하지만 그의 눈매는 파시르와는 달리 매우 부드러웠고 활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파시르는 페르의 소개에 간단히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자신이 할 일은 다했 다는 듯 서있었다. 꽤나 무뚝뚝한 성격의 소유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네르 만은 달랐다. 자신이 소개되자 유쾌하게 미소 지으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같이 일하게 되서 반갑습니다. 우와! 그런데 저 예쁜 아가씨는 누구야? 이봐, 혹시 애인 있어?" 한 대 먹여줄까 하다가 다크가 참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는 투덜거렸 다. "이봐, 예쁘다고 뻐기지 말고 데이트 한번 하자구. 나 이래뵈도 정말 괜찮은 남자라니까." 그 말에 더 이상 참지못하고 스펜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보게, 그런 말은 나중에 하게나. 자자, 일단 이것으로서 모든 인원이 갖춰 졌군요. 전에도 말했지만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타이탄은 세대입니다. 저희쪽 에 1대 있고, 파시르씨와 네르만씨가 각각 1대씩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걸 기초로 작전을 짜게 될 것입니다. 그 외에 거의 정규급의 기사가 4명, 수련기사 2명, 마법사 2명, 신관 1분이 파티를 이루게 됩니다. 이정도면 충분 히 드래곤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또 드래곤 자체가 1000살도 안된 녀석이기 에 우리쪽의 피해도 그렇게 크지 않을거라고 확신합니다. 혹시 질문이 있으십 니까?" 용병이 타이탄을 소유하기는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자신이 실력만 있다면 전 장(戰場)에서 주인을 잃은 타이탄을 슬쩍 할수도 있었기에 몇몇 이름난 용병 들의 경우 타이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이 둘도 그런 경우로서 둘 다 가장 널리 퍼져있던 타이탄인 로메로급 타이탄을 가지고 있었다. 타이탄이 란 것 자체가 유지 보수비가 들어가지 않다 보니 일단 슬쩍 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자신의 것만 되기만 하면 정말 유용한 무기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잡을 그 드래곤은 어디에 살고있나요?" 네르만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지금껏 설명하고 있던 스펜이 슬쩍 미소로 얼버 무리며 말했다. "지금은 그걸 말할 수 없습니다. 괜히 정보가 새나가면 최악의 경우 드래곤의 사체를 아르곤 당국에 뺏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드래곤을 잡는데 필요한 모든 준비는 도우러씨가 해줄 것입니다. 출발은 내일입니다. 그러니 혹시 필 요한 물품이 있으시면 준비하세요. 이상입니다." 축 늘어져 있던 지미가 하품을 하며 있는대로 크게 기지개를 켠 다음, 괜히 무게를 잡고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다크에게 투덜거렸다. "정말 드래곤 잡으러 갈거에요?" "그럼. 안잡으러 갈 이유가 없잖아. 드래곤이라는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도 한 번 봐야겠고…… 도무지 아르티어스만 봐서는 드래곤이 별로 강하다는게 실감 이 가지 않으니까 말이야." "에? 아르티어스가 누굽니까?" "뭐…… 그런 사람이 있어." 다크가 슬쩍 얼버무리자 지미는 또다시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하고 계십니까? 혹시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응." "그게 뭡니까?" 지미의 질문에 다크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창밖을 계속 응시하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이상하지 않냐? 자신들은 타이탄을 한 대만 가지고 있을 뿐이고 나 머지 두 대는 용병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크의 말에 지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답했다. "별로 이상할 것은 없는데요? 사실 이름난 용병단이라고 해도 타이탄을 1대 이상 가지고 있는 곳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용병단들이 서로 합 친다면……" "내 말은 그 말이 아니야. 내가 봤을 때 스펜이나 아더는 대단한 실력의 검객 들이야. 그들의 실력을 가늠해 봤을 때 그녀석들이 타이탄을 가지고 있지 않 다는게 더 이상하다 이거지.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 "예? 그들의 실력이 그렇게 강한가요?" "흐유…… 너희들을 잡고 얘기하고 있는 내가 멍청하지. 어쨋든 휴식이나 충 분히 취해 둬라. 내일부터는 조금 재미 있어 질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스펜이 지휘하는 파티는 다음날 아침 일찍 여행을 떠났다. 5필의 말에 짐을 잔뜩 싣고 출발하는 일행들은 모두가 가벼운 금속제내지는 가죽 갑옷을 입고, 그 위에 두터운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이런 옷차림은 매우 흔한 여행용 복장 이었는데, 일행들 중에서 유일하게 갑옷을 걸치지 않은 사람은 다크 뿐이었 다. 모두들 그녀가 숙련된 마법사쯤으로 보고있었기에 다크가 갑옷을 입지 않 은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은 위장용으로 허리에 칼 까지 차고있었으니까 말이다. 파티는 꽤나 길을 서둘렀음에도 드래곤이 산다는 곳을 향해 거의 1달에 가까 운 여행을 해야만 했다. 드래곤은 아르곤 제국의 북쪽, 그러니까 9개의 작은 국가들이 모여 형성된 랜트 국가연합과의 국경에서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그랜디아' 산맥의 서북쪽 경사면에 살고있었다. 그곳은 확실히 그린 드래곤 이 매력을 느낄 정도로 지독하게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었다. "우와! 여기 숲은 정말 끝내주는군. 벌목을 하면 돈좀 벌겠는데?" 10킬로 밖에 펼쳐져있는 광활한 숲을 바라보며 네르만이 호들갑스럽게 말하자 스펜이 점잖은 어조로 대꾸했다. "그랜디아 산맥은 아주 넓으니까……. 여기에 살고있는 드래곤이 조사된 바에 따르면 5마리나 되지. 아마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린 세 마리, 골드 한 마리, 레드 한 마리가 살고있어. 드래곤들은 주변이 시끄러운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특히나 그린 드래곤의 경우 자신이 사는 주변의 숲이 파괴되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 아마도 그 때문에 엘프하고 죽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런 형편이니 여기 벌목하러 올 바보같은 놈들이 있을 턱이 없잖아. 벌목한다고 깝죽거리다가 드래곤한테 걸리면 곧장 사망이라구." 스펜의 말이 끝나자 아더가 참견을 했다. "참, 드래곤들이 많이 사니까 당연히 이 산맥에 대한 몬스터 토벌은 생각도 못했을거야. 드래곤은 원래가 주위가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니까 말이야. 그덕 분에 여기에는 몬스터들이 엄청나게 우글거린다고 하니까 모두들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오늘 저녁부터는 교대로 불침번을 서야 해." "자자, 아더의 말 들었지?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고 내일부터 숲으로 들어 간다. 숲 밖이니까 몬스터가 습격할 리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아무래도 오늘부 터 불침번을 서기로 하지. 오늘은 일찍 밥먹고 푹 쉰 후 내일 아침 일찍 출발 하기로 하지." 스펜의 말에 모두들 야영할 준비를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ㅆ은 나뭇가지를 줏어오기도 하고 물통에서 물을 꺼내 스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바쁘게 야영준비를 하고있는 동안 다크는 멀찍이 서서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 는 그랜디아 산맥을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계절은 본격적으로 가을에 접어들었기에 산맥은 울긋불긋 황홀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나 무를 사랑하는 그린 드래곤이 세심하게 보살핀 숲이었기에 다른 숲보다는 훨 씬 나무들이 컸고 생동감이 있었다. "쟤 왜저러냐?" 멍청히 서서는 산맥의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다크를 가리키며 네르 만이 그 옆에서 장작이 될만한 걸 줏고있는 라빈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걸 라 빈이라고 알 수는 없었다. 사실 다크 정도의 고수는 엄청나게 먼 거리까지도 정밀하게 볼 수 있을정도로 시각이 좋았기에 그들이 보는 산맥의 아름다움과 그녀가 보고있는 것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한번도 그런 엄청난 시각을 지녀본 적이 없었기에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예를들어 시력 2.0과 0.5를 가진 두 사람이 10미터 밖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 같다고 해야할까? "글세요." "풋! 가을이라…… 여자들은 가을을 타게 마련이지." "가을을 탄타구요?" "똑같은 여자라도 가을에 꼬시기가 더 쉽다는 말이야. 평상시보다 더 감정적 이 되거든. 그건 그렇고 다 줏었으면 돌아가자." 다음날 숲에 일행들이 들어갔지만 몬스터는 만날 수 없었다. 어쩌다가 몬스터 랍시고 보이는 고블린이나 트롤이 몇마리 있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으르렁거 리면서 싸우러 오는게 아니라 그쪽에서 황급히 피해버리는 것이 수상쩍었다. 하지만 이쪽이 원체 정예들만 모여있는 판이라 그런것에 신경쓰는 사람들은 한명도 없었다. 일주일동안 산속으로 들어간 후에야 그들은 먼저 정찰나가있던 패거리들을 만 날 수 있었다. 처음에 들은것과 달리 그곳에는 세명의 인물들이 후속해서 따 라온 파티를 반겨주었다. 그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검고 긴 생머리를 허리까지 기르고 갈색의 아름다운 눈을 가진 마리나 지오그네라는 여자 마법 사였다. 20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와는 달리 다크처럼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상당히 노련한 어떤 느낌을 풍기는 특이한 여자였다. 그리고 40대 중반 정도의 노련해 보이는 타론 스메르라는 기사. 스펜이나 아더가 그 에게 상당히 조심스런 말투로 말하는 걸로 보아 아마도 파티의 실질적인 지도 자인 모양이었다. 그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정도까지 기른 순해보이는 얼굴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명은 놀랍게도 드워프였다. 원래가 드워 프란 종족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지만 이 지크레아 화이어헤머라는 웃기는 이름의 드워프또한 하나도 다를게 없었다. 겨우 150센티가 될동말동한 짤막한 키.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 자기 키만한 거대한 양날 달린 전투도끼를 등에 질머지고는 텁수룩한 수염이 가득 솟은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샤트란은 어디있습니까?" "아, 그녀는 정찰나갔네. 저녁때쯤에는 돌아올거야. 그건 그렇고 생각한 것 보다는 인원이 많군." 스펜의 물음에 타론은 다크 등 새로이 들어온 사람들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예. 예정외로 저 세사람이 끼어들었죠. 저 소녀는 마법사, 그리고 저 둘은 수련기사입니다." "마법사라고? 저런 풋내기 마법사를 어디에다가 쓰려고?" "5싸이클급 공격마법을 익혔답니다. 그녀의 실력은 베티님이 확인해 주셨구 요." 스펜의 말에 타론은 싱그시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떡끄떡 했다. "좋아. 자네하고 아더는 그 드래곤이 사는곳에 한번 가보는게 좋겠지? 나하고 함께 가세. 나머지는 여기서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하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스펜, 타론, 아더는 일행에게 내일 있을 드래곤 사냥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할 것을 지시한 후 드래곤의 래어로 향했다. 목표물인 드래곤의 래어는 파 티가 모여있는 곳에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들은 레어가 한눈 에 보이는 숲속에 가만히 숨어서 기척을 숨기고는 주위의 경치를 바라봤다. 30미터 정도 높이의 절벽 아래에 위치한 드래곤이 살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작은 동굴. 잘해봐야 높이 7미터가 될까말까한 음침한 구멍 주위로는 짙은 이끼가 덮여있었고 절벽에는 수많은 덩굴식물들이 뿌리를 내려 멀리서 보면 절벽이 있는지조차 알기 힘들정도였다. 수많은 식물들이 우거진 덕분에 생긴 습기찬 음지에는 푸른 이끼들이 짙게 돋아나 있었지만, 동굴의 바닥에는 그 속에 뭔가가 살고있다는 것을 알려주듯 이끼나 식물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곳에 사는 녀석을 알아냈습니까? 정말 대단하군요." "그야말로 우연히 알아낸거지. 보통 드래곤들은 마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존재 를 숨기지만 이녀석은 어려서 아직 숨기지 못하고 있었기에 잡힌거야. 사실 트랜스포메이션해서 다른 생명체로 변신했다고 하더라도 드래곤 자체가 지닌 그 엄청난 마나의 힘은 마법으로 숨기지 않는 한 숨길 수는 없는거지." 스팬은 동굴 앞에 펼쳐진 지금 100미터는 될까싶은 공간을 바라봤다. 아마도 동굴 앞에 이렇듯 넓은 공터가 있는 이유는 드래곤이 날아오르기 위한 충분한 공간이 필요해서 만들어놓은 것이겠지만, 드래곤 사냥꾼들에게도 이 공간은 매우 유용할 수 밖에 없었다. 타이탄이란 거구들이 움직이려면 이정도의 공간 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싸우실 겁니까?" "당연하잖나? 드래곤이 트랜스포메이션한 상태에서 죽이면 아무것도 얻지 못 해. 본체로 현신한 후에 죽여야만 하니까 우선 미끼가 필요한거야. 적당히 강 한…… 하지만 그녀석들이 잘해낼 수 있을까?" "잘 해낼겁니다. 우선 동굴 저 앞에서 그 녀석들보고 드래곤을 순차적으로 공 격하게 만들어 독이오른 드래곤이 현신하도록 만들어야 하죠. 참, 그런데 화 이어헤머는 왜 데려오셨습니까?" "아! 그녀석도 쓸데가 있어서 데려온거야. 드래곤 킬러(Dragon Killer;드래 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지는 무기의 총칭)를 그놈이 만들었거든. 그래서 그 것의 위력을 직접 보고싶다고 해서 데려왔지. 또 드래곤 사체의 분해 등 뒷처 리도 그녀석이 책임지게 될거야." 둘간에 오고가는 대화를 묵묵히 들으면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아더가 도저히 못참겠다는 듯 타론에게 궁금한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샤트란은 어디있습니까? 여기 오면 그녀를 볼 수 있을줄 알았는데… …" "큭큭…… 그녀한테 푹 빠진 표를 너무 내진 말게나. 그녀는 절벽 위에 있네. 그녀는 절벽 위에서 아래로 공격할 예정이야. 일단 드래곤 녀석이 도망치지 못하게 막아야 하니까 말이야." "참, 그렇군요." 잘 보이지도 않는 절벽위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아더를 보며 싱긋 미소짓던 스 팬은 타론에게 슬며시 말했다. "드래곤이 정확이 몇살입니까?" "마리나의 말로는 아마 800살 정도일거라고 하더군. 궁정마법사니까 그녀의 추측이 거의 정확할거야." "800살이라…… 과연 미끼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스팬의 말에 타론이 음흉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살아남을 사람은 없다고 보는게 정확할걸세. 만약 살아남은 놈이 있다고 해 도 내가 죽일거니까 말이야. 어쨋거나 비밀은 지켜야지. 흐흐흐……" "하… 하지만 대장! 그건 기사도에 어긋납니다. 어떻게 동료를……" 스팬의 반박에 타론은 그것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스팬도 타론도 이름높은 기사. 전쟁의 신전에 그래듀에이트로 등록되어있는 영예로운 기사들이었고 기사란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정의를 수호해야하는 존재였기 때 문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타론은 부하의 항의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번 작전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조국의 미래가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드래곤 한 마리의 가치는 그정도로 엄청났다. "동료가 아니야. 소모품이지……. 그렇게 생각하는게 좋을거야. 드래곤을 적 당히 화나게 만들어 현신하게 만들정도로 강해야 하지만, 드래곤이 생명의 위 협을 느끼고 도망치지는 않을 정도로 약한 존재. 그리고 그들은 그 성난 드래 곤의 브래스를 정면으로 맞아야 하니 살아남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어. 그 때문에 미끼역을 우리가 하지 않고 외부인을 끌어들인 거야. 드래곤이 그들 모두를 없애버려 우리의 손이 더러워지지 않게 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 지." 여기까지 스팬에게 말한 타론은 시선을 하늘로 돌리면서 누구에 말한다고 딱 히 말할 수 없는 어조로 뭔가를 깊이 생각하듯 중얼거렸다. "기사도(騎士道)…… 정말 좋은 거야. 모든 기사가 기사도에 어긋나지 않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지. 하지만 자네들도 내 나이쯤 되면 알거야. 이상과 현 실이 잘 맞아 떨어진다면 좋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이상 과 똑같은 행동을 할 수는 없는거야. 가능한한 이상에 가까운 행동을 할 수 있기를 염원할 뿐……" 파티의 핵심인물들이 모두 정찰을 핑계로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남은 패거 리는 식사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파티의 위치는 드래곤의 레어에서 10킬로미 터나 떨어져 있었기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단, 이때 식 사준비에 사용할 나무는 모두 폭풍우 따위 덕분에 떨어져 죽어있는 나뭇가지 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린 드래곤은 레어 주위의 숲에 마법을 걸어 침입자가 살아있는 나뭇가지를 꺾으면 경보음이 전해지게 만들어 둔다는 전설이 전해지 기 때문이었다. 숲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들을 줏어서 불을 피워 스프를 끓이고 빵 을 덮히고, 또 베이컨 조각을 프라이팬에 굽고 한다고 숲속에는 구수한 향기 가 감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일단 나뭇가지들을 줏어서 불 곁에 날라준 무리 들은 별로 할 일도 없었기에 식사 당번인 베티 사제가 스프를 ㄲ이는 모습이 나 라빈이 베이컨 굽는 모습을 느긋한, 그러면서도 무언가 만족스러운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화이어헤머는 그들과 동참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앉아서, 이번에 합류 한 일행이 날라온 짐들 사이에서 자신이 주문해놓은 무기들을 조립하고 있었 다. 그것은 특수제작된 커다란 석궁이었는데 이건 루네아 왕국의 저격수들이 사용하는 대단히 강력한 것이었다. 이 강력한 석궁에서 발사되는 작은 화살의 위력은 엄청나게 강해서 상대가 그래듀에이트라 해도 십여명이 모여 숨어있다 가 발사하면 저세상에 보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덕분에 루네아 왕국은 필레 도르 산맥에 위치한 작은 산악국가였지만 산맥이 제공하는 천연의 엄폐물과 강력한 석궁덕택에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작은 호랑이같은 존재였다. 어쨋든 루네아 왕국에 거금을 주고 구입한 후, 그것을 자신이 직접 뒷손질까 지 해서 더욱 강력하게 된 석궁들을 조립하며 화이어헤머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실 이런 강력한 무기를 주려면 사용자에게 그 이전부터 사격연습이 라도 좀 시켜두는게 좋겠지만, 상대는 드래곤이니 아무리 사격실력이 형편없 다고 해도 맞지 않을 리는 없었다. 원체 덩치가 크니까 말이다. 석궁 다섯자루를 완전히 조립한 후 또다른 짐꾸러미를 풀어 특수하게 제작된 화살을 꺼냈다. 그 화살은 다른 곳에서 보던 것과 거의 비슷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화살을 만드는데 사용된 재료는 완전히 달랐다. 뻣뻣한 독수리의 깃털 이 붙어있는 화살대는 나무가 아닌 강철이었고, 화살촉은 짙은 초록색 광택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드래곤의 비늘은 너무나도 강력한 금속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그 드래곤을 잡기위한 무기들도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야만 했 다. 화이어헤머는 화살 하나하나를 들어 이상이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고는 작은 휴대용 통속에 담았다. 이 화살 하나하나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도 드래곤을 잡는데는 무리가 있다. 드래곤의 크기로 봤을 때 화 살 하나 꼽혀봐야 바늘에 찔리는 것 이상의 타격을 주기는 힘든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쏘기 직전에 마법을 걸거나 독을 바르는 것이지만 말이다. 화이어헤머는 석궁 조립과 손질을 다 끝낸 후 그것들을 나무 옆에 세워둔 후 일행 한명 한명을 유심히 살펴봤다. 드워프는 저 오랜 옛날부터 드래곤이란 생물과 투쟁을 벌여왔었다. 광폭한 드래곤들로부터 보석들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이었지만, 사실 드워프의 힘으로 그 강대한 생명체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 능했다. 어느정도 자신들도 자존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사실 드래곤에게는 그게 먹혀들어가지도 않았다. '과연 이녀석들이 드래곤을 잡을 수 있을까?' 아무리 1000살도 안된 드래곤이라고 해도, 또 드래곤 중에서 가장 약한 그린 이라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한방에 타이탄을 짓이기고 도시를 간단히 파괴하는…… 유심히 일행 한명 한명을 바라보던 화이어헤머의 눈길이 다크라고 불린 아름 다운 소녀에게 멈춰졌을 때, 그는 놀라운 사실에 눈이 화등잔만큼 커질 수밖 에 없었다. 처음 소개받았을 때 자신을 냉담한 눈으로 힐끗 보고는 멀어지던 그 소녀를 보고 화이어헤머는 그녀가 자존심 있는 마법사니까 하고 생각했었 다. 거의 엘프를 연상케하는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나이에 비했을 때 엄청난 마법까지 익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저런 어린 나 이에 5싸이클급 공격마법을 구사한다면 딴곳에 신경 쓸 겨를 없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죽자고 마법만 익혔을 거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그녀의 무장에는 신 경도 안썼었다. 그녀가 가진 검이 거의 눈속임 정도의 용도밖에 안될 것이라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싸구려 검을 본다는 것은 타고난 장인(匠人)인 드워프에게는 고통이었다. 그 때문에 얼핏 봤을 때 검푸른 투박한 모양의 칼집을 보고는 아예 신경을 껐었 다. 하지만 화이어헤머는 지금 나무에 편안히 기대어 앉아서는 어딘가를 보고 있는 그녀의 허리에 매달린 검집을 자세히 봤을 때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검 집의 그 검푸른색은 페인트나 도료를 칠한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드워프가 매우 아끼는 아름다운 금속들 중의 하나인 '크발티에'가 내는 광택 이요, 색깔이었던 것이다. 그 검집을 쳐다보는 동안 어느덧 화이어헤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녀에 게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단조롭고 수수하지만 그 우아한 품격…… 화 이어헤머는 그 검이 절대로 인간이 만들었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저정도의 예술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자신과 같은 드워프 뿐이었다. 그것도 대단히 뛰어난 실력을 지닌 드워프가 만든 것이리라. "무슨 일이지?" 자신의 몸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못생긴 애늙은이처럼 생긴 드워프를 향해 소 녀는 차갑게 물었지만 화이어헤머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품인가? 가까이서 차근차근 보니 검집, 손잡이, 심지어 는 검대(劍帶)에 사용되는 자그마한 쇳조각에서까지도 모두 드워프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야?" 다시 물어보는 소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화이어헤머는 소녀를 지긋이 바라봤 다. 아름다운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소녀를 말이다. 화이 어헤머는 이 소녀가 과연 이렇게 멋진 예술품의 주인이 될만한 자격이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의 감각과 경험으로 봤을 때 그 소녀는 검의 주 인이 될 자격이 없었다. "이 검은 어디서 난거냐?" 화이어헤머의 질문을 듣고서야 다크는 아르티어스가 이 검집을 드워프에게 주 문하여 만들었다는게 생각났다. 드워프들의 안목이 대단히 높은것에 감탄하며 다크는 솔직히 대답해줬다. "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은 거야." 그 말에 화이어헤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화이어헤머는 다시 자기자리 로 돌아가며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이 말은 꼭 하고싶었던 것 이다. "딸을 사랑하는 건지, 돈이 많은 건지 알수가 없군. 검이 아깝다, 아까워… …" ************ 아무리 화이어헤머가 혼잣말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해도 그걸 못들을 다크가 아니었기에 한소리 하려다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파티는 뭔가 조 금 이상하기에 가급적이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두고보자.' 그날 저녁식사를 배불리 먹은 일행들은 불침번 1명만을 남겨두고 모두 일찍이 잠자리에 들어갔다. 내일은 10킬로에 달하는 산악행군을 해야하고 드래곤을 사냥해야 하는 험난한 하루가 될 것이다. 몇몇 자기 콘트롤이 뛰어난 인물들 은 일찍이 잠들었고 지미나 라빈같은 풋내기는 잠이 안와서 쿵쾅거리는 심장 을 달래며 나무틈으로 간간히 빛을 뿌리는 별들을 세고 있었다. 일행들은 1시간씩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섰는데, 새벽녘에 불침번을 선 인물들 중의 하나가 용병인 네르만이었다. 네르만은 아더가 단지 툭 쳤을 뿐인데도 재빨리 옆에 놓인 검을 잡았지만, 곧이어 자신을 깨운 상대가 누군지 깨닫고 는 검을 놓았다. 평상시에는 우스갯소리나 해대던 멍청해 보이는 인물이었지 만 어쩌다 한번씩 오랜 용병생활을 한 표시가 나곤 하는 것이다. 네르만은 검 대를 허리에 차면서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이상한 점은 있었어?" "아니. 몬스터고 뭐고 한 마리도 안보여. 이정도 깊은 산속이면 야행성 몬스 터가 한 마리 정도는 보여야 하는데…… 드래곤의 영역이라서 그런가?" 네르만은 지금껏 모포대용으로 쓰고있던 두터운 망토를 집어들어 어깨에 걸치 면서 말했다. "뭐 안보인다니 잘됐군. 이만 자게나. 참, 나 다음에는 누구지?" "타론이야." "알았어. 잘 자게." 네르만은 천천히 조금 걷다가, 잠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굳어진 몸을 풀 었다. 몸 여기저기서 뚜둑거리는 아우성소리가 들려왔다. 자고 일어나면 언제 나 이런식으로 몸을 풀어왔었기에 네르만은 이게 뼈부러지는 소리는 결코 아 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이제 더 이상의 뚜둑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을정도로 이리저리 몸을 뒤튼 후 그는 자신의 몸이 완전히 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네르만은 천천히 모닥불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초가을이었 지만 이런 고산지역에 오면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네르만은 모닥불 안에 나 뭇 가지 서너개를 던져넣은 후 시간이 가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네르만이 모닥불 옆의 따뜻한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그로부터 50분 정도가 지 난 다음이었다. 네르만은 모닥불 속에 나뭇가지 몇 개를 집어넣은 후 천천히 일어섰다. 천천히 일어서는 네르만의 눈동자는 평소의 그 유쾌한 장난기를 찾 을래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냉냉하게 굳어있었다. 네르만은 일어서기 전에 동료들 중에 혹시나 잠에서 깬 사람이 없는지 유심히 기척을 살폈었기에, 조 심조심 움직이기만 한다면 동료들이 깰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네르만은 조심조심 걸어서 동료들이 빙 둘러가며 잠들어있는 모닥불에서 떨어 지기 시작했다. 모닥불에서 한 20미터쯤 떨어진 그는 품속에서 단검(短劍)을 꺼내어 조용히 모닥불의 불빛에 의지해서 작은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구덩 이가 완성된 후 그는 품속에서 지름 1Cm정도의 작은 수정구슬을 꺼내어 속에 집어넣었다. 그런다음 다시 그 구덩이를 덮은 후 낙엽을 흩어놓아 표시가 나 지 않도록 만들었다. '좋았어! 이걸로 이 지긋지긋한 여행도 서서히 끝이 나가는군. 며칠 후면 나 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있을거야. 흐흐흐흐……' 이건 물론 네르만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이상한 행동을 눈 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는 인물이 있는지는 네르만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 었다. "정말 대단한 곳이군. 정말 아름다워! 과연 드래곤이 살만한 곳이야. 와! 저 절벽 좀 봐!" 유쾌하게 떠들고 있는 네르만을 보며 아더는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조용히 좀 해. 거의 다왔어. 드래곤이 듣겠다." 하지만 아더의 말에도 네르만의 입은 다물리지 않았다. "이봐. 저 동굴을 좀 보라구. 겨우 저 안에 드래곤이 들어갈 수나 있는거야? 높이가 겨우 7미터도 안되겠는데? 안에 오우거들이 떼거지로 사는거 아닐까?" "제발 좀 닥쳐! 드래곤이 현신한 채로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몇 개나 되겠 냐? 대개는 변신해서 생활하지." 나지막하게 도란거리면서 걷다보니 동굴에서 거의 1킬로 근처까지 접근했다. 이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스팬은 걸어가던 걸 멈추고 일행을 불러들였다. "자 모두들 좀 모여봐. 작전을 일러줄테니까……" 일행들이 자신의 가까이에 모이자 스팬은 대강 그려놓은 지도를 펼쳐보이며 말했다. "저 동굴 속에 드래곤이 살고 있다. 지금 샤트란의 타이탄은 절벽 위에 있어. 그리고 타론과 마리나는 절벽위에서 석궁과 마법공격을 하기 위해 가있지. 드 래곤을 도발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인 1조는 지미, 라빈, 다크가 한다. 1조가 해야 할 일은 동굴속에 화이어 볼이라도 쑤셔넣어서 드래곤을 화나게 만드는 거야. 그리고 이쪽의 힘을 적당히 과시해서 드래곤이 본체로 현신하게 만들어 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구. 현신하지 않은 드래곤은 죽여봐야 개값도 못받 아. 알겠어? 현신하기 전까지는 적당히 위협사격을 해서 약을 올리라구." 1조로 지명받은 인물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스팬은 말을 이었다. "1조의 공격으로 드래곤이 현신하면 그 다음 공격은 2조! 즉, 우리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파시르와 네르만이 해야 해. 너희들은 각기 타이탄을 몰고 달려나가 드래곤을 공격해라. 드래곤이 날아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3조가 절벽 위에서 대기중이야. 그리고 베티 사제님은 뒤쪽에서 부상자를 좀 치료해 주시구요. 4조는 나와 아더가 맡는다. 우리 둘은 석궁사격실력이 뛰어나니까 뒤에 쳐져서 좋은 위치를 잡고 놈의 눈 등 연약한 부분을 노릴거야. 화이어헤 머는 드래곤의 사체를 분해하는 일을 맡기기 위해 불렀으니 사냥에 참가하지 는 않는다. 자…… 질문있나?" 스팬의 말에 다크가 그의 짙은 녹색눈을 자신의 갈색눈으로 탐색하듯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타이탄 두 대와 석궁 공격으로 잡을 수 있는거야?" 다크의 질문에 스팬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에 자신 감이 그렇게 많다고는 볼 수 없었다. "충분할거야. 어쨋든 놈은 800살 정도의 나약한 그린 드래곤이야. 또 절벽 위 에 배치된 3조에서 지원사격이 날아갈거야. 타이탄이 던지는 투창의 위력은 대단하지. 2대 1이 아니라 3대 1이야. 승산은 충분하다구. 자… 행동개시!" "저…… 진짜 이걸로 놈을 헤치울 수 있을까요?" 지미는 아침에 화이어헤머로부터 지급받은 석궁을 들어보이며 다크에게 물었 다. 하지만 그건 다크도 모르는 사실. 단 1번이라도 드래곤이란 생물과 싸워 봤어야 대답을 해주지. "몰라. 효과가 있기만을 빌어. 이번 일은 좀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해.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게 사실이거든. 호호호……" 다크 일행은 숲이 끝나는 지점인 동굴에서 거의 100미터 전방까지 접근해 들 어갔다. 여차하면 숲속으로 도망치려면 가급적 숲에서 벗어날수는 없는 노릇 이었으니까 말이다. 지미와 라빈이 두터운 나무 뒤에 숨어서 석궁을 장전하는 동안 다크는 오래전에 가스톤으로부터 배운대로 화이어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단은 3싸이클급으로 마나를 원반식으로 끌어 모은 후 외쳤다. "화이어 볼!"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발사된 큼직한 불덩어리가 휙 날아가서는 동굴 속 으로 들어갔다. 100미터나 떨어진 원거리에서 발사해서 그런지 동굴에 이를때 쯤 되어서는 화이어 볼의 위력이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그때문인지 동굴 속 에 불덩어리가 들어갔는데도 아무런 반응은 없었다. 드래곤의 무반응에 약간 신경질난 다크는 또다시 마나를 끌어모으면서 이번에는 좀 더 강력한 걸 준비 하기 시작했다.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드래곤이 현신하기 전에 통구이가 되셔버린다고 해도 다크로서는 아무런 아쉬 운 점이 없었기에 다크는 오기로 마나를 있는대로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녀 의 주변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5개의 마나의 흐름이 만들어졌고 그 흐 름들은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화이어 볼!" 그녀의 손에서는 처음 날아갔던 불덩어리는 아예 반딧불 정도로 느껴질 정도 로 엄청난 불덩어리가 생겼다. 다크는 그 불덩어리와 동굴 속을 잠시 힐끗 쳐 다 본 후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동굴 속으로 던져버렸다. "죽어버렷!" 화이어 볼이 동굴 쪽으로 날아가자 갑자기 동굴 속에서 오우거 한 마리가 밖 으로 튀어나왔다. 그런다음 재빨리 마법을 외워 마법의 장벽을 만들었고 그 장벽에 화이어 볼이 격중되었다. 쾅! 엄청난 화염이 점차 흩어졌을 때는 약간은 놀라운 표정을 짓고있는 거의 4미 터의 키에 우람한 근육질…… 지독하게 못생긴 얼굴을 가진 오우거만 남아있 었다. 한쪽손에는 1.5미터는 되어보이는 바스터 소드를 들고있는 그녀석은 오 우거였다. 하지만 그 오우거는 놀랍게도 사람의 음성과 미슷한, 하지만 좀 굵 직하면서도 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엄청난 화이어 볼이군. 그런데 너희들은 뭔데 나의 보금자리에 화이어 볼을 던지는 거냐? 목숨이 아깝다면 돌아가라." 하지만 오우거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다크는 라빈에게 말 했다. 검은 지미가 조금 실력이 나았지만 활은 라빈쪽이 약간 나았기 때문이 다. "저녀석 다리에 한방 날려." 퓽------- 확실히 엄청나게 강한 석궁이라 그런지 100미터의 거리를 거의 순간에 가로지 른 후 오우거의 다리 깊숙이 박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관통해버렸다. 그 엄 청난 석궁의 위력에 오우거도 약간은 놀란 것 같았다. 오우거는 자신의 살을 관통한 후 10미터쯤 뒤쪽에 있는 절벽에 거의 1/3쯤 박혀들어가 있는 화살쪽 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석궁의 위력이 의외로 강하다는데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오우거는 아직까지도 인간들을 깔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법의 원조하 면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다. 자신이 조금 마법 수련에 게을렀다는 것은 인 정하지만 그래도 겨우 저정도 마법사 하나 헤치우지 못할 이유는 없었고 활이 나 창따위 가진 전사 몇 명이 부록으로 딸려있다 해도 그건 상황 변화에 아무 런 보탬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박혀있는 화살을 뽑아내어 그것을 본 후에 그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 다. 오우거는 화살촉이 자신과 같은 그린 드래곤의 뼈로 제작된 것을 알고는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의 목적이 뭔지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녀석들은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드…… 드래곤 킬러. 네놈들은 드래곤 슬레이어였나? 쓰레기 같은 것들! 죽 어랏! 地轟波(지굉파)!" 확실히 대지의 기운을 지닌다는 그린 드래곤 답게 그 오우거의 첫 번째 공격 은 대지의 마법이었다. 땅이 꼭 파도가 몰려오는 듯 파동을 일으키며 급속도 로 다크 일행에게 접근해 갔다. 서로간의 거리가 100미터나 떨어져 있었기에 피하기에 충분한 시간 여유는 있었다. 지미와 라빈은 대지가 꿈틀꿈틀 파동을 일으키며 자신들에게 접근해 오자 놀라서 양옆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다크도 왼쪽으로 피했다. 다크는 방금 자신들이 있던 그 주변의 나무들이 뿌리부터 산산조각이 나서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마법의 위력이란 것이 꽤나 대단하다 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따위 것에 감탄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다크는 마법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자 재빨리 정신을 집중해서 마나를 집중시킨 후 외 쳤다. "화이어 볼!" 또다시 5싸이클급의 거대한 화염덩어리가 오우거를 향해 날아갔다. 오우거는 이번에도 그걸 피하지 않았고 그대로 맞았다. 이번에도 오우거 가까이까지 날 아간 거대한 화염 덩어리는 마법의 벽에 막혀 흩어져버렸다. 오우거는 5싸이 클급 화이어 볼 치고는 엄청난 위력인 것을 보고 약간은 놀랍다는 듯이 말했 다. "제법이군. 하지만 그정도로는 드래곤 슬레이어 놀이를 꿈꿔서는 안되지. 雷 (뇌)!" 그와 동시에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의 스무 차례에 걸친 날벼락이 떨어져 내렸지만 숲의 나무들만 작살냈을 뿐, 별 효과는 없었 다. 사람보다 더 큰 나무라는 존재들이 벼락에 먼저 맞아줬기 때문이었다. 하 지만 나무에 맞고 양옆으로 튀어 대지를 흐르는 번개와 불타서 쓰러지는 나무 들은 다크에게는 별로였는지 몰라도 지미와 라빈의 생명을 위협하기에는 충분 했다. 지미와 라빈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꼴을 보면서 드래곤은 이런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을 향해 현신할 필요성도 못느끼는 듯 여러 가지 마법으로 이 보잘 것 없는 '간 큰 벌레'들을 공격했다. 다크 또한 틈틈히 자신이 알고있는 마법을 오우거에게 쏴봤지만 상대의 바리 어를 깨지 못하는 걸 알고는 약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검을 쓴다면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여기서는 원체 지켜보는 눈들이 많기에 마법만을 써야 했다. 화 염과 뇌격을 몇방 날렸지만 그녀가 지닌 마법은 원체 날림으로 배운 것들이라 위력은 형편 없었다. 5싸이클급 화이어 볼은 구사할 줄 알면서도 5싸이클 마 법 중에서 최강의 위력을 낸다는 익스플로우젼(explosion)같은 마법은 모르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의 마법은 보기에는 거창했지만 위력은 별로였던 것이다. "제기랄!" 상대의 마법을 민첩한 몸놀림으로 또다시 피한 후 다크는 아쿠아 룰러를 사용 하기로 작정했다. 아쿠아 룰러로 만들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수계의 정령마법. 가능성은 있을 것 같았다. "아쿠아 에로우!" 거의 20여개에 이르는 엄청난 물의 화살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자 오 우거는 혼비백산 하기 시작했다. 석궁에서 발사하는 화살보다도 더 강력한 위 력의 물화살. 이건 수계마법들 중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정령마 법은 마법 보다는 물리력에 의한 피해가 더욱 큰 마법. 서로간의 거리가 거의 100미터에 이르는데도 그 물줄기의 위력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고 거의 순식간 에 오우거 쪽으로 날아들었다. 다크가 아직 물화살들의 방향조종이 미숙했기 에 오우거에게 격중된 것은 불과 5개 정도였지만 그 위력은 엄청났다. 바리어 가 간신히 깨지지 않고 유지된 후 자신의 뒤 절벽에 숭숭 구멍이 뚤려있는 걸 보고 오우거는 중얼거렸다. "강철도 뚫어버리는 물화살. 최상급 물의 정령마법? 정말이지 나를 놀라게 하 는군. 너는 나에게 도전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오우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이 녹색 광택에 휩싸이면서 순식간에 커지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지미와 라빈은 재빨리 나무를 헤치며 뒤로 달아 나기 시작했다. 오우거인 상태에서도 이놈의 석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 는데, 본체로 현신한 후에는 안봐도 뻔하기 때문이었다. 조금 뒤늦게 다크도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명의 마법사와 두명의 수련기사가 오우거… 아니 드래곤을 향해 용을 쓰는 것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4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녀들은 마법사인 마리나와 기사인 샤트란이었다. 마리나는 재빨리 움직이며 화이어 볼을 날리 고 있는 다크를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아이 마검사(魔劍士)였어. 저 놀라운 움직임을 봐. 바리어나 실드를 치는 게 아니고 회피동작으로 마법을 피하다니…… 보통 마법사들은 체력이 모자라 서 절대 저렇게는 못하지. 남자 애들이 저 여자아이에게 꽤 조심스럽게 대하 기에 왜그런가 했더니 저 아이들 중에서는 최고의 실력인 것 같아." 샤트란도 검사에 못지않은 움직임으로 재빨리 마법공격을 피하면서 마주 마법 을 날리고 있는 다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마법이 너무 단조로운 것 같네요. 썬더(thunder), 화이어 볼, 윈드 에로우(wind arrow). 위력은 꽤 괜찮은 것 같지만…… 모두 초보적 인 마법들 뿐이잖아요?" 샤트란의 말에 마리나는 시선은 싸움판에 고정시켜 둔 채 답했다. "맞아. 확실히 수준은 5싸이클급이지만, 저런 초보 주문으로는 제대로 된 위 력을 내기 힘들지. 설마 상급 주문을 안배운 것은 아니겠지?" "글세요." 이때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태껏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있던 소녀가 뭔가 주문을 외우면서 손을 뻗치자 순간적으로 햇빛을 받아 빛나는 수 십가닥의 무언가가 드래곤쪽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속도 에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겠지만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뛰어난 무 사인 샤트란은 그걸 볼 수 있었다. "저게 뭐죠?" "글세…… 수계(水系) 공격마법 같기도 하고…… 이 거리에서는 잘 모르겠는 걸?" 하지만 그녀들의 한가한 말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드래곤이 갑자기 녹 색광채를 뿜어내며 본체로 변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아래에서 싸우고 있던 사람들은 숲속으로 도망쳐버렸고,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들에 가 려서 그녀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때 도망치는 지미, 라빈, 다크의 좌우로 그들과 반대방향을 향해 수풀을 헤 치며 마주 달려나오는 거대한 물체들이 있었다. 숲속 저 뒤쪽에 숨어있던 거 대한 타이탄 두 대는 1조가 목표를 달성하자 엄청난 속도로 창 3자루를 쥐고, 허리에는 검을 찬 채 돌격해 들어갔다. 그들은 이정도 새끼 드래곤이라면 충 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가까이 접근해 들어가서 빨리 끝장을 내버 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드래곤은 타이탄들이 접근해 오는 것을 본 순간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가소로운 것들. 계획이 겨우 이거였단 말이냐? 겨우 저 고철덩어리 두 개로 뭘 할 수 있다고……' 드래곤은 인간들의 얕은 잔꾀를 비웃으며 변신중에 깊이 숨을 들이마시기 시 작했다. 타이탄 두 대가 드래곤을 향해 창을 던진 그 순간 드래곤은 본체로 돌아가 있었고 순식간에 몸속에 쌓인 대지의 기운을 토해냈다. 드래곤의 몸 속 깊이 쌓여있던 대지의 기운은 드래곤의 폐속에 들어있던 공기와 섞여 짙은 녹색을 띄는 가스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드래곤의 거대하게 벌어진 입을 통해 토해졌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던 창은 녹색의 가스를 통과하던 도중 녹아서 사라져버 렸다. 정말이지 지독할 정도로 강한 부식력을 가진 가스였다. 그런데 그 가스 는 창을 녹이는 것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흘러가 곧장 타이탄들에 게로 날아갔고 두 대의 타이탄은 그 녹색의 가스를 피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두 대는 드래곤을 잡을 목적으로 너무 가까이 접근해 들어갔었기에 그 브래스를 완전히 피하기는 힘들었다. 타이탄의 외피 가 가스에 녹아들어갔지만 타이탄들은 머리 뒤쪽에 방패를 대고 탑승자를 보 호한 채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이탄의 외부 부식도는 엄청 나서 타이탄은 그걸 수복하기 위해 기사의 마나를 대량으로 흡수해대기 시작 했다. 이때 파시르는 자신의 몸을 망토로 가린 채 타이탄에서 탈출했다. 그가 타이 탄에서 탈출하자 다크는 그의 몸에 아쿠아 바리어를 쳐줬기에 물에 잘 녹는 그 가스의 위협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파시르의 타이탄은 도망 치는 그의 뒤에서 반쯤 녹아버린 쓸모없는 고철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파시르는 자신의 생명을 우선시했고, 타이탄을 한낫 마음에 들던 도구 정도로 생각했기에 목숨을 건졌다면 네르만은 완전히 그와 반대의 경우였다. 그는 타 이탄 1대가 어느정도 가치를 가지고 있는줄 잘 알고있었고, 그렇기에 그걸 포 기할 수 없었다. 타이탄이란 것은 정말 엄청난 재산적 가치가 있기에 그걸 저 따위 브레스에 맞고 녹아 없어지게 만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몸속에 축적되어 있던 마나는 고갈되었고 그가 기절하자마자 타이탄도 그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주인과 함께 생명을 끝마쳤다. "살려줘서 고맙다. 예상 밖으로 대단한 마법사였군." 파시르는 자신이 살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눈앞에 서있는 소녀덕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베티라는 사제는 브레스에 죽어버렸는지, 아니면 도망쳤는지 부상자 치료를 위해 그녀가 대기해야 하는 장소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저 절벽 윗쪽에 있는 마법사가 자신을 구출했을 거라는 생각보다는 이 소녀가 했 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천만에. 죽기에는 아까운 인물인 것 같아서 도와줬을 뿐이야." 다크는 넓은 면적에 걸쳐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방어장벽인 아쿠아 바 리어를 쳐서 드래곤이 뿜어내는 가스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덕분에 그녀의 마 법장벽 안에 들어와있는 파시르, 지미, 라빈은 멀쩡했지만 나머지의 생사는 알길이 없었다. 다크는 한번씩 장벽의 윗부분에 구멍을 뚫어 아직도 가스가 날아다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파시르가 무뚝 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도 브래스를 토하고 있나?" "글세…… 거의 멈춘 것 같은데?" "일단 브레스가 멈췄으면 일행에 합류하자. 절벽 밑은 전멸했다고 해도 절벽 위로 올라간 녀석들은 괜찮을거야." 파시르의 말을 듣고 모두 그게 좋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크의 생각 은 달랐다. 다크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일단 숨어서 지켜보기로 하지. 뭔가 좀 이상한 점이 있으니까." 다크가 반지로 흘러들던 기를 차단하자 거대하게 회전하고 있던 물의 장벽은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그 지독한 부식성 가스가 숲을 덮쳤지만 놀랍게도 숲 은 깨끗했다. 물론 밑에 쌓여있던 낙엽 등 나무의 죽은 부분이나 돌 등은 완 전히 녹아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녹아서 부드러 운 흙 속으로 흘러든 지금 숲의 나무들은 더욱 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확실히 대지의 기운을 가진다는 그린 드래곤이란 것은 대지에서 태어나는 숲 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존재인 모양이었다. 드래곤은 그 놀라운 가스를 전력으로 토해낸 후 잠시 숨을 고른 후 반쯤 녹은 채 쓰러져 있는 타이탄의 잔해를 보며 승리의 기쁨을 토해냈다. "캬오오오오오오오-----------" 드래곤 로어(Dragon Roar). 드래곤의 포효소리는 모든 생명체에게 두려움을 안겨준다. 드래곤의 포효소리 한번에 아예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식은땀 만 삐질거리는게 거의 모든 생명체의 공통사항이었고, 또 오히려 이 소리를 듣고도 움직이는 놈이 비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정상적인 놈들 세명이 드 래곤의 자화자찬이 아니꼽다는 듯 수풀을 헤치며 나타났다. 그 타이탄들은 파시르가 가지고 있던 로메로 보다 월등하게 덩치가 컸다. 과 거 시드미안이 몰던 안토로스보다 더 덩치가 큰 것 같았다. 세대의 타이탄들 중 1대는 정말 덩치가 컸는데 어깨까지의 높이가 5.5미터, 머리위의 뿔까지 합한다면 6미터가 넘는 거대한 타이탄이었다. 사실 뿔이야 가져다 붙이면 그 만이기에 타이탄의 높이는 어깨높이를 말하는 것이 표준이었지만 말이 그렇다 는 말이다. 어쨋든 그 타이탄들은 모두 사각형의 방패를 가지고 있었는데 방 패에는 우아한 유니콘(머리에 1개의 긴 뿔이 달려있고 날개가 달린 말처럼 생 긴 전설상의 동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 여러 색상으로 채색된 타이탄의 본체에는 갖가지 문장들이 그려져 있었다. 세 대의 타이탄이 나타나자 승리의 기쁨에 넘쳐있던 드래곤은 상당히 놀랐다. 2대의 타이탄 뿐인 줄 알고 자신의 몸속에 쌓여있던 모든 대지의 기운을 토해 낸 지금 드래곤은 마법 외에 딱히 그것들을 상대할 무기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래가 나이가 많이 든 드래곤의 경우 나누어 쓴다면 3번에서 5 번까지도 브레스를 뿜을수 있지만 이 드래곤은 나이가 많지 않았기에 그의 몸 속에 쌓인 대지의 기운으로는 전력을 기울인다면 1회 정도의 브레스를 뿜을 정도밖에 안되었던 것이다. 만약 적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껴써서 두 세번까지 뿜을수도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신나게 뿌려댄게 화근이었다. 세 대의 타이탄이 드래곤을 향해 돌격해 들어가는 것을 숲속에 숨어있던 일행 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다크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뭔가 이상한 녀석들이라고 말이야. 역시 그놈들이 가진 것은 타이탄 1대가 아니었어." 지미와 라빈의 경우 다크의 말에, 자신들이 성난 드래곤의 브래스까지 소모해 주는 소모품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놀란 표정이 곧이어 성난 표 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파시르는 다크의 말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표정을 풀 지 않았다. 파시르는 지금 자신의 타이탄이 소모품으로 쓰였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릴 정도로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파시르는 달려가서 거대한 드래곤을 향해 창을 던지는 육중한 타이탄의 뒷모습을 보면서 얼이 빠진 듯 중얼거렸 다. "순백(純白)의 유니콘…… 저 저주 받은 문장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다니… …" 드래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매우 위험한 처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드래곤은 지체없이 용언마법을 타이탄들을 향해 날렸다. 그러자 세대의 타이 탄들 중 좌우의 것들은 양옆으로 피하면서 드래곤을 압박하는 형식으로 움직 였고 중간에 남은 덩치가 조금 더 큰 타이탄은 이정도 마법쯤이야 볼것도 없 다는 듯 피하지도 않고 방패로 막았다. 7싸이클급에 해당하는 강력한 용언마 법이 불러일으킨 화염이었지만 방패의 표면에 입힌 페인트만을 태울 수 있었 을 뿐…… 곧이어 화염이 걷히면서 방패는 겉으로 드러난 미스릴이 뿜어내는 옅은 금빛으로 번쩍거렸다. 이것만 봐도 어중이 떠중이 타이탄은 아니라는 말 이었다. 타이탄들의 대마법주문은 타이탄의 등급에 따라 수준이 다르다. 엑스시온의 등급이 높을수록 마법에 대한 내성도 증가하고, 또 타고있는 기사의 등급에 따라서도 그게 증가할 수 있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상대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것을 눈치채자마자 마나의 힘으로 그의 육중한 몸체를 공중으로 띄워올리기 시작했다. 역시 위험부담이 큰 상대인 만큼 완전히 포위당하기 전에 날아올라 서 공중에서 공격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드래곤은 하늘을 날 수 있지 만 타이탄은 날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날기위해 드래곤이 그 거대한 날개를 폈을 때 절벽위에서 날아온 거의 6싸이클급에 해당하는 마법공격과 거대한 투창공격이 시작되었다. 물론 마법 정도야 드래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었지만 그 거대한 창이 드래곤의 날개 를 꿰뚫었을때는 얘기가 달랐다. 창촉을 드래곤 뼈로 만든 묵직하고도 거대한 강철창은 순식간에 드래곤의 바리어를 찢고 들어와 드래곤의 그 거대한 날개 에 깊숙히 박혀들었다. 잠깐사이에 드래곤의 왼쪽날개에는 절벽 위에서 날아 온 두 개의 창이 박히면서 그 거대한 금속성의 날개가 본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두토막이 나버렸다. 드래곤은 곧이어 엄청난 먼지를 일으키며 땅바닥 에 추락했고 그 옆에는 짙은 녹색이 나는 거대한 금속성의 날개가 떨어져 있 었다. 이제 드래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면서 드래곤 은 처절한 육탄공격을 시작했다. 드래곤의 몸은 강력한 금속성. 그렇기에 드 래곤은 재빨리 뱀과같이 머리를 뒤쪽으로 꼬았다가 포위, 접근해오는 왼쪽 타 이탄을 향해 머리를 날렸다. 드래곤의 긴 목 덕분에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상 대 타이탄에게 다가들었다. 타이탄은 재빨리 드래곤의 아가리를 향해 방패로 막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타이탄이 가지고 있는 검의 몸체는 짙은 녹색을 띄고 있었다. 이 드래곤을 잡 기 위해 거금을 투자해서 만든 세자루의 드래곤 킬러들 중의 하나. 그 검은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만큼 가벼웠으므로 길이가 4미터나 되었다. 그 검을 보고 드래곤이 재빨리 머리를 뒤로 뺏지만 드래곤이 가진 두 개의 작은 뿔들 중에서 하나가 검과 부딪치며 어이없게도 두토막이 나며 떨어져 나갔다. 정말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준비가 잘 된 강한 놈들이었다. 이때 오른쪽에 있던 타이탄이 드래곤의 정신이 왼쪽의 동료에게 팔려있는 틈을 이용해서 재빨리 창을 던졌다. 역시나 이 창도 창촉은 드래곤의 뼈로 만든 드래곤 킬러. 드래곤은 몸속 깊이 뚫고 들어온 창이 전해주는 아픔에 분노했다. "크아아아아-------" 평소에 벌레보듯 해온 인간이…… 그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감히 자신에 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지독한 고통을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드래곤은 분노 에 가득차 오른쪽에 있는 타이탄을 향해 그 거대한 채찍과 같은 꼬리를 내려 쳤다. 드래곤의 꼬리가 날아오자 그 망할 타이탄은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오르 며 자세가 허물어진 드래곤을 향해 또 하나의 창을 던졌다. 그리고 다른 타이 탄들도 드래곤을 향해 창을 던져왔다. 엄청난 고통에 신음하며 드래곤은 끓어 오르는 분노에 점점 더 이성을 잃어갔다. 사실 이 어린 드래곤이 이성이 있다면 이동마법을 통해 재빨리 도망치는게 최 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엄청난 드래곤의 덩치로 봤을 때 이동마법을 시 전하려면 엄청난 마나가 필요했고, 드래곤은 그 마나가 모일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인내심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우선 눈앞에 보이는 저놈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을 뿐이었다. 순간, 드래곤의 그 거대한 덩치가 대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이 놀라운 움직 임을 만든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앞발에 비해 놀랍도록 큰 뒷다리들이었다. 드래곤은 재빨리 뛰어오르며 오른쪽에 있는, 자신의 자존심인 뿔을 잘라버린 타이탄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설마 저 덩치가 저정도로 재빠른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던 타이 탄은 고작 방패로 앞을 막을 시간여유 밖에 없었다. 아무리 방패로 막았다고 해도 드래곤의 덩치는 어마어마했고 그 덩치에 밀리 면서 오른쪽의 타이탄은 붕 떠오르더니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드래곤은 재 빨리 뻗어있는 타이탄에게 다가가 그 육중한 다리를 들어올려 타이탄을 짓밟 은 채 동료를 구출하려 하는 두 대의 타이탄을 노려보며 견제했다. 덩치큰 타 이탄이 드래곤이 피하기를 바라면서 창을 던졌지만 드래곤이 한눈을 팔고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 창은 드래곤의 공격주문과 부딪쳤고 창촉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박살나며 튕겨나갔다. "크아아아아아아---" 드래곤은 한차례 부르짖은 후 대지의 기운을 발에 끌어모았다. 그와 동시에 타이탄을 짓밟고 있던 발은 짙은 녹색으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재 빨리 그 발을 들어올린 후 내려찍어 타이탄을 떡으로 만들어놓으려는 순간, 절벽 위에서 여태껏 지원사격을 해주던 타이탄이 방패를 놔둔 채 양손으로 창 을 꽉 쥐고는 뛰어내렸다. 절벽 높이가 50미터가 넘었기에 타이탄은 엄청난 도약을 해서 그 거대한 창을 드래곤의 등 깊숙이 찔러넣는데 성공했다. 거기 에다가 그 86톤이 넘는 거대한 강철 덩어리가 무시무시한 덩치로 드래곤의 등 에 부딪쳤으니 드래곤이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해도 충격을 안받을 수 없었 다. 드래곤이 충격을 받고 앞으로 쓰러지는 그 순간, 덩치가 조금 작은 타이 탄은 이때가 기회라는 듯 재빨리 창을 던졌다. 그리고 덩치가 큰 타이탄은 검 을 뽑아들고는 과감하게 타이탄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일어서려고 버둥거리던 드래곤은 순간적으로 검이 자신의 목 부위를 훑고 지 나간 후 서서히 그 긴 목이 앞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목이 일정각 도 이상 아래로 쳐졌을 때 잘려진 목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쿵---- 거대한 드래곤이 쓰러지고 나자 4대의 타이탄들의 머리가 뒤로 들리면서 사람 들이 나타났다. 가장 큰 타이탄에 타고있던 인물은 타론이었다. 타론은 엄청 난 드래곤의 사체를 질렸다는 듯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가로저으며 말 했다. "스팬! 아더하고 함께 레어 안을 조사해라." "옛!" 스팬은 아직도 드래곤의 발아래 깔렸던 그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 더를 재촉하여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곧이어 그들이 타고있던 타이탄 들은 공간 뒷편으로 사라졌다. 타론은 타이탄에서 뛰어올라 쓰러져 있는 드래 곤 위에 올라서는 드래곤의 그 거대한 비늘을 만져보며 중얼거렸다. "휴…… 이 거대한 녀석을 우리가 잡았단 말이지? 폐하께서 기뻐하시겠군. 그 런데 예상외로 재빠른 몸놀림이었어. 이 큰 덩치가 그렇게도 엄청난 속도를 낸다는 것이 놀랍군." 이때 타론의 옆에 옅은 갈색머리카락을 짧게 기른 예쁜 여자가 뛰어내렸다. 바로 드래곤의 등을 창으로 찍었던 샤트란이었다. 그녀는 황금으로 멋을 낸 검은 갑옷을 입고있었다. 그것은 와이번의 비늘로 만들어진 최고급품이었기에 상당히 두툼해 보이기는 했지만 매우 가벼웠다. "드래곤이라고 해서 엄청나게 힘들 줄 알았는데 별로군요. 대장." 타론은 피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잘해줬다. 몸은 괜찮냐?" 샤트란은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떨어지던 충격에 몸이 좀 욱신거리고, 군데군데 멍이 좀 들었지만 ……" "다행이군. 원체 드래곤이란 생명체에 대한 자료가 부족했으니까 말이야. 놈 이 그정도로 재빠를줄은 예상도 못했으니까 일어난 일이었지." "그래도 잡긴 잡았잖아요? 그것도 별로 피해도 없이……" "마리나의 추측에 의하면 이녀석의 나이는 800살 정도. 기척도 제대로 숨기지 못하니까 마법도 그렇게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다. 1000살도 안된 드래곤이라 면 브래스는 잘 뿜으면 1번, 나눠서 2번정도? 그렇다면 답은 나오지. 자살공 격조만 희생시킨다면 이 드래곤은 누구라도 잡을 수 있었어. 이녀석만을 보고 전체 드래곤의 힘을 추측한다는 것은 드래곤에 대한 실례야. 아더가 당할뻔 한것만 봐도 이 어린 드래곤이 이정도인데, 다 자란놈들은 어떻겠나? 너무 자 만해서는 안돼. 알겠나?" "예. 대장. 하지만 사실 이렇게 나약한 드래곤이라면 저희들이 나설 필요는 없었잖아요? 엘프란 기사단 정도만 동원했어도, 약간의 피해는 있었겠지만 그 래도……" 샤트란의 말에 타론은 마치 철부지 애를 보는 듯한 조롱기 어린 눈으로 지그 시 그녀를 쳐다봤다. 그 눈길에 그녀가 발끈하려는 찰나 그가 말했다. "이런 어린 드래곤은 있는곳을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한다면 잡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걸 본국까지 가져가는 것은 어렵지. 그것 때문에 너희가 투입된 것 이다. 그리고 너희들을 보해하라고 나를 보내신 거지. 그렇지 않다면 본국 최 고의 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안티고네를 왜 끌고 왔겠나? 이번 작전은 안티고 네의 실전 테스트기도 하다. 알겠나?" 그녀는 타론에게 약간은 풀이죽은 어조로 대답했다. 사실 에프리온을 지급받 은 자신들과 타론같은 최신형 타이탄, 안티고네를 지급받은 인물들은 엄청난 등급차이가 있었다. 안티고네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거대한 크루마 제국의 수많은 기사들 중 최고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 대장."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절벽 위에 홀로 남아있던 마리나가 더 이상의 위 험은 없다고 판단하고 에이비에이션(aviation;비행마법)의 주문을 사용하여 곧장 내려왔다. 그녀는 내려오자 마자 동굴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샤트란과 타론을 슬쩍 바라본 후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마법사였기에 드래곤이 소장하고 있는 마법서적에 대단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 는 타론과 잠시 잡담할 시간도 아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동굴 속으로 들어가 는 그녀에게 타론은 한마디 안 할 수 없었다. "빨리 나와.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구. 마법책은 나중에 궁에 돌아가서 천천 히 연구해. 알겠어?" 일행은 드래곤과 타이탄들의 격전이 벌어지자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그 장대한 싸움을 구경했다. 약간의 볼거리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 어린 드래곤은 드래곤 이란 이름값도 제대로 못한채 고깃덩이가 되어버렸다. 정말 싱거운 싸움이라 고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여태껏 열심히 구경하고 있던 다크가 드래곤이 쓰러져버리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색 유니콘이 저주받은 문장이라니 무슨 말이야?" 파시르는 그 질문을 받고는 작은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약간 두려움과 원망, 절망 등 여러 가지 색채를 띄고 있었다. "나는 옛날 론드바르 제국의 기사였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기억이 나지. 론 드바르 최후의 날. 화염이 충천하던 왕궁…… 비명을 지르며 뛰어가던 시민들 …… 나는 그렇게도 나에게 힘이 없다는 것이 원망스러웠던 때는 없었다. 시 민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파괴하던 그 문장. 하얀 유니콘의 문장을 절대로 잊 을 수 없었어." 파시르의 중얼거리는 말만으로는 도대체가 유니콘을 문장으로 쓰는 곳이 어딘 지 알수가 없었기에 분위기가 좀 그렇기는 했지만, 지미는 호기심을 참지 못 하고 말했다. "유니콘을 문장으로 쓰는 나라가 어딘데요?" 갑작스런 지미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린 파시르는 쓴웃음을 잠시 머 금은 후 내뱉듯이 말했다. "레니아 근위기사단의 문장이다. 저 강대한 크루마 제국의……" "레니아 근위 기사단이라구요? 그렇다면 방금 보였던 타이탄들은 근위 타이탄 이란 말입니까?" 놀라서 묻는 지미의 얼굴을 힐끗 쳐다 본 후 파시르는 다시 드래곤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세 대는 카마리에야. 들리는 소문으로는 출력이 1.5나 되는 괴물이라고 하더 군. 그런데…… 방금 드래곤의 머리를 날려버린 그 거대한 타이탄은 잘 모르 겠어.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인가?" 원체 과묵했기에 잘 몰랐지만 슬쩍 드러나는 파시르의 유식함에 감탄했다는 듯이 라빈이 말했다. "타이탄에 대해 아주 잘 아시는군요. 나중에 시간 있을때 좀 가르쳐 주세요." 라빈의 말에 파시르는 살짝 미소지었다. "사실 너는 그걸 외울 필요가 없어. 나같이 타이탄을 조종한다면…… 아니군 그녀석은 죽어버렸으니 이제는 나도 외울 필요는 없어졌군. 원래 타이탄을 조 종하는 사람은 강한 타이탄의 목록과 유명한 기사단의 문장은 외워두는게 장 수하는데 보탬이 되지. 특히 나같은 용병들 한테는 말이야. 그것 하나 가지고 목숨이 왔다갔다 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한테 타이탄이 없다면 애기는 달라 져. 무조건 타이탄이 나타나기만 하면 도망치는게 최고지." "안에는 보석은 거의 없고, 마법도구가 좀 있고 책 뿐입니다. 대장." "마리나는?" "마리나 경은 지금 마법책을 보신다고 정신이 없던데요?" 스펜의 보고를 듣고 잠시 생각하던 타론이 말했다. "아더, 스펜! 너희들은 타이탄을 불러내어 저 시체에서 비늘을 떼어내라." "예!" 아더와 스팬이 다시 자신의 타이탄들을 불러낸 후 탑승하고 있을 때 숲속에서 두사람이… 아니, 한 사람과 한 드워프가 말들을 끌고 나타났다. 화이어헤머 는 쓰러져있는 드래곤을 보면서 만면에 미소를 짓고는 드래곤쪽으로 달려갔 다. 하지만 한 사람, 즉 베티 도니안 사제는 타론에게로 다가간 후 드래곤 쪽 으로 시선을 돌려 그 큰 덩치를 보며 놀랍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제 끝난겁니까?" "예." "엄청나게 큰데 정말 빨리 끝내셨군요. 과연 레디아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으 신 분이십니다." "과찬이십니다. 드래곤이 어린데다가 경험도 없었던 덕분이죠." "부상자는 없습니까?" 사제의 아름다운 얼굴을 힐끗 바라봤지만 곧이어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시선을 드래곤쪽으로 돌리면서 타론이 말했다. "이정도 싸움에 부상자가 생길 수는 없죠." "정말 다행이네요. 그런데……" 좌우를 쭉 둘러보면서 베티 사제가 말했다. 베티 사제의 시선은 이제 멀리 떨 어진 곳에 반쯤 녹은 채로 쓰러져있는 두 대의 타이탄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동료분들은……?" "아마 모두들 죽었을겁니다." 기사였기에 약간의 죄책감을 머금은 그의 어조를 듣고 베티 사제는 살짝 무릎 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그녀의 눈에는 살 짝 눈물이 어려있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몇 주 정도였지만 함 께 여행한 동료들의 죽음이 슬펐던 것이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시여, 오늘 흉악한 몬스터와 싸우다가 죽은 아름다운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바른 길로 안내해 주시기를 비옵니다.……" 죽은 자에 대해 생각해주는 인물은 베티 사제 한사람 뿐이었다. 마법사는 드 래곤의 마법서적에, 그리고 나머지는 드래곤의 사체에 관심을 쏟을 뿐이었다. 만약 그들이 보통의 파티들 처럼 우정으로 맺어져 있었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 에 생존자가 있는지 숲속을 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숲속을 뒤지는 귀 찮은 작업을 생략했고 또 살아있다면 자신의 몫을 챙기기 위해 튀어나왔을 것 이지만 숲속에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두들 당연히 '미끼' 로 쓴 동료들이 모두 죽었다고 간단하게 결론 짓고는 재빨리 다음 작업으로 넘어갔다. 화이어헤머의 지시하에 드래곤은 천천히 분해되기 시작했다. 화이어헤머가 끌 고온 말에 실린 짐 속에는 금속으로 된 용기들이 여러개 있었는데, 그 속에는 드래곤의 살과 피가 통마다 가득 담겨졌다. 드래곤의 피와 살은 마법을 통해 만들어지는 합성생물인 키메라의 귀중한 재료가 되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의 피와 살은 잘 썩지 않기에 그들로서는 이것을 재빨리 본국으로 보낼 필요성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부패에 강한 드래곤의 피와 살이라고 해도 1달 정도 밖에 버티지 못하기에 이것은 조만간에 마리나가 동굴에서 나오면 공간이동 시켜 본국으로 수송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의 뼈가 아무리 가볍다고 하 지만 이 많은 드래곤의 뼈와 비늘은 도저히 공간이동 마법 따위로 수송할 만 큼 만만한 량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수송로를 철저히 연구해 놓은 후 사냥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의 시체분해 작업은 식사 때문에 멈췄다. 아무리 일을 하려고 해도 배가 고프면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였다. 그렇기에 베티 사제가 요리 를 시작하자 아더와 스팬이 드래곤과 싸운다고 쓰러지거나 반쯤 타버린 나무 들을 적당히 잘라서 가져왔다. 그걸 가지고 베티 사제는 샤트란이 말에서 가 져온 요리도구와 식료품을 이용해서 요리를 시작했다. 큼직한 휴대용 냄비에 서 스프가 끓기 시작하고, 소금에 절여놓은 돼지고기가 익기 시작하자 그 냄 새는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지기 시작했다. 꼬르르르륵…… 막상 배가 고픈줄도 모르다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하면 참기 힘들다. 지미의 배에서 밥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하자 다크는 지미에게로 시선을 힐끗 돌렸다. 지미는 주책맞은 배 덕분에 얼굴색이 약간 빨개졌지만 이건 어 쩔 수 없었다. 그걸 보고 다크가 얕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지미, 라빈." "예?" "너희들은 석궁 가지고 가서 뭐 아무거나 좀 잡아다가 요리해라. 그리고 파시 르는 저녀석들 좀 도와주고." "같이…… 안가실 겁니까? 잘못하면 서로 길이 어긋난다구요." "괜찮아. 1시간쯤 후에 너희들을 따라가겠다. 나는 여기서 조금 더 감시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상당히 높은 계급차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이 둘을 파시르는 번갈아 쳐다 봤다. 이제 더 이상 눈치볼 곳이 없었기에 공손하게 말하는 지미, 그리고 대 놓고 하대를 하는 다크. 누가 봐도 동료라기 보다는 주종이었다. 파시르는 이 상하게 생각은 했지만 오랜 용병생활의 습성상 상대가 말해주지 않는데 구태 어 물어보지는 않았다. 알아서 좋은게 있고 몰라서 득되는 것도 있기 때문이 었다. 1시간쯤 타론 패거리를 감시하던 다크는 더 이상 별 문제는 생기지 않을것이 라고 짐작하고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크는 자신들을 드 래곤이 뿜어내는 그 녹색가스의 희생물로 써먹은 저녀석들에게 꽤나 감정이 있었지만 아직은 복수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드래곤과의 싸 움에서 자신의 타이탄과 함께 생명을 끝마친 네르만이 여기까지 오면서 뭔가 흔적을 남기는 모습을 본것만 20번은 족히 되었다. 다크는 네르만이 첫 번째 숨기는 것을 우연히 보고 그를 꾸준히 감시했었지만, 그녀가 못본것도 있었을 것이다. 다크는 네르만이 흔적을 남기면서 오기를 기다렸던 그들이 누군지 궁 금했고, 그것 때문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나타나 지 않았기에 다크는 오늘 저녁때쯤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일행과 합류 하기 위해 그들의 발자국을 쫓기 시작했다. 과거 살수생활을 했었던 경험에 의해 다크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일행들을 찾 기 시작했다. 1시간쯤 지났으니 사냥을 한 후에 가죽을 벗기고, 불을 피워 고 기를 익혀놓고도 남음이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사냥감을 30분 이내에 사냥해 야 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동료들을 추격해 들어가던 다크는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발자국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인지 일행의 발자국 그러니까 지미, 라빈, 파시르가 남긴 발자국에 누군 지 모르는 또다른 네 번째 인물의 발자국이 찍혀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다크가 그것을 조금 뒤늦게 눈치챈 것은 모두들 신는 신발들의 바닥이 똑같았 기 때문이었다. 보통 여행에 흔히 사용되는 신발은 두터운 가죽을 4-5겹으로 깔아서 만든 것들이었다. 아주 귀족들이 신는 신발들의 경우 거기에 모양을 낸 후 뒷굽을 붙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신는 신발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또 대단히 장거리 여행을 도보로 하는 경우 신발 바닥에 얇은 철판이나 구리 판을 덧대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그 밑에 말굽에 붙이는 편자까지 박기도 하지만 일행들의 경우는 모두 말을 타고왔기에 철판을 댄 신발은 아니었다. 새로 끼어든 발자국의 크기로 봤을때는 남자, 그것도 6척 반(190Cm)는 됨직한 거구의 사내였다. 그리고 발까락 부위에 무게가 걸린 것으로 봤을 때 무예를 수련한 인물이었다. 언제든지 자신의 몸을 날릴 수 있도록 준비된 무사…… 보폭이 매우 일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발에 밟힌 풀이 꺽여있는 각도나 발자국에 남아있는 수분 등으로 추측하건데 지나간 시간은 3각(45분) 정도? 또 일행이 지나갔음직한 시간도 그때쯤인 것을 보면 뒤에서 몰래 따라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일행의 발자국에 그 어떤 반응도 없는 것을 보면 그들은 추격당한다는 사실 자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지미와 라빈 만이라면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시르는 얘기가 다르 다. 용병중에서도 그래듀에이트급이 아닌가? 그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다크는 재빨리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속도로 일행을 찾기 시작했다. 다크는 그로부터 10분도 되지 않아 일행을 찾아냈다. 일행들은 자신들의 위험 도 눈치채지 못하고 느긋하게 뭔가를 불에 굽고있었다. 그러다가 저쪽에서 다 크가 땅을 밟지도 않고 풀 위를 밟으면서(초상비;草上飛의 경신술) 엄청난 속 도로 다가오자 놀란 눈으로 멍하니 쳐다봤다. 다크는 자신을 거의 귀신보듯 얼이빠져 바라보고 있는 세명을 무시한 채 어둠침침한 숲속을 향해 외쳤다. "거기 숨어있는 녀석! 빨리 튀어 나왓!" 그 말에 일행들은 더욱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미쳤나? 하고 생각했겠지 만 숲속에서 진짜 사람이 그 방향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데는 할말이 없었다. 걸어나온 사람은 도대체가 이런 숲속에서 만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인 물이었다. 물론 검을 차고는 있었지만, 갑옷따위는 아예 입지도 않았고 간편 한 여행복 차림을 하고 있는 30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는 약간 붉은색이 도는 머리카락을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그 머리카락을 슬쩍 뒤 로 넘기면서 걸어왔다. 다시 말해서 그녀석은 한 몇시간 산책나온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이 깊은 산속에서 나타났다는 말이었다. 그 남자는 살짝 살기를 내뿜고 있는 소녀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느긋하 게 입을 열었다. 그는 풀위를 달려오는 소녀의 그 놀라운 기술과 자신의 위치 를 단번에 포착해내는 것을 보고도 별로 위축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눈은 호 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누군가요?" 하지만 소녀는 그를 향해 싸늘한 눈길만을 던질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 때쯤 정신을 수습한 다크의 동료들이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지만 그 남자 의 말에 동작을 멈췄다. "가만히 있으세요. 지금 저는 살인을 하고싶지 않습니다." 여태껏 기척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크의 그 놀라운 기술을 보고도 위축되지 않음을 보고 일행은 그가 뭔가 단단히 믿는 것이 있다고 생 각했다. 그래서 일단은 실력행사라는 단순무식한 수단은 최후에 하는게 좋겠 다고 생각하고는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검쪽으로 가져갔던 손을 원상복귀시켰 다. 지금은 검을 꺼내는 일 말고도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지미는 일단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자마자 불에 굽고있던 고기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 고 라빈은 또 한 마리 더 잡아놓은 토끼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는 좀 더 크 고 귀는 작은 '티칸'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일행 중에서 가장 실력이 뒤떨어지는 두 사내가 일단 싸우지 말자 는 간접적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할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 이 말은 자신의 갑작스런 등장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위협을 주지 못했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눈앞의 소녀를 그만큼 믿는다는 말이었고, 또 사실 그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제 이름은 제임스. 코린트의 기사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말했는데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소녀를 흥미있게 지켜본 후 그 는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지금 위에서 드래곤의 사체를 분해하고 있는 녀석들과 동행인가 요?" "방금 전까지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소녀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향해 하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직위, 또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을 빨리 떠나십시오. 조만간에 이곳은 전쟁터가 될테니까요." "썩은 시체를 찾아 모이는 까마귀들의?" "독수리들의!" 까마귀에서 독수리로 등급을 올리려고 용을 쓰는 그의 대꾸를 듣고 소녀는 피 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독수리도 덩치만 조금 더 클 뿐, 썩은 시체를 향해 모여드는 것은 마찬가지 지. 나는 조금 더 있다가 갈테니까 참견하지 말도록." 소녀가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이제 두 번째 장만한 티칸까지 굽기 시작하는 불 가에 앉았다. 그것을 보고 그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뭔가 구실을 붙 여서라도 좀 더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 상대였기 때문이다. "참견하지 않을테니 고기 좀 나눠줄 수 있겠습니까? 저도 배가 고프군요." "고기는 충분하니까 거기 앉아." 제임스가 앉은 후 조금 지나서 일행은 우선 익혀진 티칸부터 적당히 썰어서 뜯어먹기 시작했다. 모두들 배가 고파 음식에 정신이 팔린 탓도 있었지만 이 미지의 방문객 때문에 껄끄러워 대화는 거의 오고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제임 스라는 인물은 열심히 먹으면서도 소녀에게 계속 시선을 보내며 열심히 관찰 하고 있었다. 나이는 어려 보였지만 도대체가 말도 안될 정도의 엄청난 실력. 겨우 16살이 될까말까 해 보이는 소녀가 그래듀에이트들 중에서도 높은 수련 을 쌓은 인물들만이 가능한 풀을 밟고 달리는 고도의 기술을 사용하고, 또 자 신의 위치를 손쉽게 포착해 냈다는 것은 도대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 었다. 제임스는 음식도 씹으랴, 소녀도 힐끔거리랴, 생각도 하랴 너무나도 바빴다. 일단 소녀의 옷차림으로 봤을때는 마법사 같기도 했다. 또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 신관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신성력을 이 용한 근력증가 따위의 신성마법을 쓴다 해도 풀위를 뛰어다닌 다는 것에는 무 리가 있었다. 또 마법사라고 가정한다면 풀위를 뛰어 다니는 성가신 방법보다 는 비행마법을 사용해서 날아왔을 것이다. 또 마법사라면 자신의 몸속에 축적 된 마나의 기운을 읽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감히 이렇게 뻑세게 나올 수는 없 을 것이다. 소녀는 단순한 모양의 검을 착용하고 있었으며 셔츠에 스웨터 정도의 간편한 옷차림. 짙은 갈색의 바지. 신발은 낮은 뒷굽이 붙어있는 매우 고급 여성용 구두였다. '귀족일까? 아니면 왕족? 아니면……? 뭐가 또 남아있지? 축적된 마나의 기운 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검은 그냥 모양으로 차고 다는게 확실 한것도 같은 데…… 도대체가 알 수가 없군.' 제임스가 의문에 가득찬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적당히 고기를 뜯어먹은 소 녀는 손수건을 꺼내 손을 쓱쓱 닦으면서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네르만이 남겨놓은 표식을 따라 왔나?" 제임스는 그녀의 어조에서 퉁명스러움이 사라지자 꽤 맑고 고운 음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 말의 뜻이 머리속에서 이해되자 일순 당황했지만 그걸 억누르면서 조용히 말했다. "잘 아시는군요." "너 혼자는 아닌 것 같은데? 몇 명이나 왔지?" 제임스는 빙긋이 미소지었다. '역시 이 아이도 코린트가 가지는 이름의 위력을 알기는 아는 모양이군.' 사실 코린트라면 지금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제국. 한 명의 기사만을 드래 곤 사체 강탈작전에 투입했을 리는 없었다. 드래곤 사체가 싸구려도 아니었 고, 또 그 무게도 엄청났다. 그걸 가져가려면 엄청난 인력이 필요한 것이다. "쓸만한 부하 몇 명을 데려왔습니다." "언제 공격할거지?" "예정대로라면 내일 아침에요. 아침밥 먹고나서 식후 운동겸 한판 할까 생각 중이죠." 제임스의 대답에 소녀는 피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하지만 자신감이 지나치면 만용(蠻勇)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제 부하들과 저의 실력을 믿을 뿐이죠. 제 부하들은 그렇게 약하지 않거든요." 제임스를 향해 뭐라고 말 할 듯 하던 다크는 갑자기 하늘을 쳐다 봤다. 그리 고 제임스도 그 뒤를 따랐고, 다크와 제임스가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하늘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일행들도 무슨 일인가 해서 하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원체 짙게 우거진 풀숲이라서 거대한 나무들에 가려 별빛도 거의 보기 힘들었다. 이때 나무 가지를 뚫고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인물이 한명 있었다. 정통적인 마법사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꽤나 자신과 자신의 일행들의 실력 또는 그 뒷배경에 자신이 있는 인물인 모양이었다. 감히 아르곤에서 마 법사의 정식복장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새로이 나타난 마법사는 거의 60세는 되어 보이는 쭈그렁한 얼굴을 가진 남자 였다. 그는 땅에 발을 내려놓자 마자 제임스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를 보고 제임스는 약간 못마땅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냐? 아직 집결 시간이 안되었을텐데?" 마법사 영감은 쉰듯한 껄끄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의외의 사건이 벌어져서 대장을 찾았습니다. 새로운 적이 나타났습니다. 어 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신지?" "적의 규모는?" "일단 합류하셔서 작전을 토론하시는 편이……" 제임스는 다크 일행을 힐끗 바라본 후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저들은 상관 없으니까 말하라." 제임스는 여기에 조금 더 있으면서 상대에 대해 탐색도 하고 싶었고, 또 상대 에게 약간의 정보를 누설해본 후 그에따른 반응도 살펴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르곤의 성기사단입니다. 대략 100여명 정도로 추정되며 타이탄의 수는 알 수 없습니다." "100명? 그런데 아르곤에서는 어떻게 냄새를 맡았지? 알 수가 없군." 노마법사의 보고를 듣고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임스을 향해 소녀는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들도 알고 왔는데, 또 다른 첩자가 하나 더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 지."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군요. 그럼 그 첩자는 누구죠? 당신인가요?" 약간 농담조로 제임스가 말하자 다크는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해 줬다. "나 일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왜?" "만약 당신의 자신감이 겨우 성기사 100명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내일 아침에 뜨는 해를 보실 수 없을거니까요. 저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해서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킬 정도로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을대로 생각 해. 그런데 언제 싸울건지는 나한테 가르쳐 줘야 해." "왜 그러시나요?" "그거야 가장 좋은 볼거리는 남의 집 불구경하고 싸움 구경이라고 하잖아? 당 연한거지." 소녀의 대답에 제임스는 황당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레이디. 하지만 지금 모여드는 독수리떼의 숫자가 숫자인 만큼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을텐데요?" "그건 걱정해줄 필요 없어. 까마귀떼가 좀 모여봐야 별 수 있어? 그리고 레이 디란 소리 빼! 나는 그 말만 들으면 그 소리를 내뱉은 놈의 목을 비틀어버리 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나니까 말이야." "아주 과격하시군요. 레……" 제임스는 하던말을 황급히 스톱한 후 노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부하들을 적당하게 회피(回避)시켜라. 그들을 저 위대하신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과 부딪치게 만들어. 그런 후 결과를 두고 보기로 하지." 제임스는 일부러 타론 일행을 '위대하신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이라고 부르며 비꼬았다. 제임스는 약간 늦게 도착해서 시작부분은 못봤지만 타이탄들이 드 래곤을 때려잡는 모습은 조금 봤기에 그정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라고 부르기도 아깝다는 점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노마법사는 제임스의 지시를 듣고는 마법의 힘을 이용해 재빨리 몸을 띄워 올 렸고, 곧이어 나뭇가지 저 윗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모든 사람들이 꿈에서도 그리는 영광스러운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칭호를 획 득한 인물들. 그들은 열심히 작업하여 드래곤의 피와 살의 일부, 그리고 드래 곤의 레어에서 발견한 모든 물품들을 그날 저녁때 본국으로 마법을 이용해 이 동시켰다. 그리고 철야작업을 감행하여 드래곤의 뼈와 비늘을 거의 다 해체해 서 드래곤 사체의 옆에 쌓아두고 있었다. 이제 드래곤에게 남은 것은 저 시뻘 건 고깃 덩어리 뿐…… 타론은 밤샘작업으로 인해 핏발이 선 눈으로 스팬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우러 씨는 언제 온다고 하던가?" "약속 대로라면 오늘 점심때쯤 도착할 겁니다. 대장." "마리나는?" "본국에 보내지 않은 마법책을 잡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마법사들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 한 권을 슬쩍 해서는 감춰둘 생각을 한 걸 보면 말입니다. 불러다 드릴까요?" "불러올 필요까지는 없고, 마리나에게 지금 당장 여기 좌표를 본국에 확실하 게 알리라고 해. 만약의 경우 지원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도우러가 늦게 온다면 어차피 오늘 밤도 여기서 지내야 한다. 한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 어질수록 위험도도 증가하지. 또 산맥을 넘어서, 랜트 국가연합까지 가려면 100킬로미터의 거리. 도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타이탄 4 대면 꽤 쓸만한 전력이긴 하지만 이곳 아르곤에서는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 없어. 본국에서 지원군이 도착할때까지 시간이나 끄는 정도지. 이번 일을 성 공하려면 본국과의 연계가 매우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마리나 경께 전하겠습니다." 스팬은 동굴 안에서 마법책을 읽고있는 마리나에게 달려갔다. 그런 부하의 뒷 모습을 보면서 타론이 중얼거렸다. "과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훗! 안티고네를 가지고 온 주제에 이런 나약한 생각을 하다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내야지!" 이제 드래곤의 해체작업은 완전히 끝이났고, 모두들 곧이어 도착할 도우러 일 행을 기다리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도 아르곤의 성기사단은 싸움을 걸지 않았다. 별로 재미 없다고 생각하며 소녀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싸우지 않는 거지?" 혼잣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목소리가 컸기에 그것은 일행들에게 다 들렸다. 하지만 그 대답을 해준 것은 제임스였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뭐가?" 소녀의 물음에 제임스는 그녀의 오빠라도 되는 양 제법 자상하게 설명해줬다. 제임스는 시간을 들여 소녀를 줄곧 관찰해본 결과 어느정도는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아르곤 제국 내에 있는 최대의 산악지대죠. 여기 살고있는 드래곤만 해도 4마리 이상입니다. 그 넷은 매우 포악하기에 잘 알려져 있는 녀석들이고 알려지지 않은 드래곤들도 많을겁니다. 그런 드래곤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곳 에서 타이탄을 가지고 대규모 전투를 벌여 보십시오. 어떻게 될건지…… 드래 곤의 사체를 포획하기는 커녕 목숨까지 위태롭게 됩니다. 드래곤은 동료가 죽 었다는 것에는 별로 신경을 안쓰지만, 주위가 소란스러운 것은 못참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일단 이 산맥을 벗어난 후에 전투를 벌이던지, 아니면 교섭을 할테죠." "그런데 왜 너희들은 드래곤이 죽은 다음날 아침에 공격할 생각을 했지? 드래 곤이 참견할지도 모르는데?" "그건 당연한 겁니다. 아르곤 인들은 산맥을 벗어난 후에도 아르곤 땅이 이어 지기에 기다릴 수 있는 것이지만, 저희들은 다릅니다. 저희들은 사람이 없는 여기에서 후딱 한판 하고 끝내야 했거든요. 사람들이 여기서 뭔가 일이 벌어 졌다는 것을 눈치채면 곤란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계획도 물건너 간 것 같 군요. 지금은 레디아 기사단과 아르곤의 성당기사단(聖堂騎士團)을 함께 상대 해야 하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죠. 격투가 오래 지속되면 드래곤이 참견 할 가능성이 아주 커집니다. 그러면 일이 더 꼬이게 되죠. 지금은 그냥 두고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이제 좀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겨있는 소녀를 보며, 제임 스는 이 소녀를 계속 데리고 다닐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제임스가 시간을 들여 소녀를 관찰해본 결과 내린 결론은 '마법사'였 다. 그것도 상당한 실력을 갖춘 마법사였다. 마법사나 정령사, 신관은 자신의 몸속에 마나를 축적하지 않고, 체외의 마나를 이용하기에 검객인 자신이 알아 보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그렇기에 제임스는 숨어있는 자신의 부하들과 연락 병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마법사에게 소녀의 정체에 대해 슬쩍 물어봤다. 노마 법사는 상관의 명령에 흔히들 쓰는 수법인 뷰 마나 포스의 주문과 뷰 매직 포 스의 주문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 두가지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대단히 뛰어난 무사가 된다면 자신의 기척을 숨길 수 있다. 즉 체외로 은근슬 쩍 새나가는 마나의 기운을 아예 차단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뷰 마나 포스의 주문을 사용하면, 이 주문은 몸속에 쌓인 마나의 절대량을 보여주는 주문이기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가 있다고 해도 알아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밖으로 새나가는 마나를 단지 차단하는 것 뿐이지 몸속에 쌓여있는 마 나를 체외 어딘가에 이동시켜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양은 평범했다. 뷰 마나 포스라는 마법이 소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풀위를 걸어다닐 수는 없으니 마나 를 숨긴다는 말이되고, 그 말은 곧 소녀가 하이드 마나 포스라는 마법을 사용 할 줄 안다는 말과 같았다. 그렇다면 하이드 마나 포스가 뿜어내는 마법의 기 운이라도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뷰 매직 포스를 사용해도 마법의 기운은 읽 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법의 기운도 함께 숨겼다는 대답이 된다. 즉, 소녀는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고도 정신력이 남아도는 뛰어난 마법사라는 말 이었다. 교활하게도 비행주문을 사용해서 '풀위를 걸어다닐 수 있는 척' 하는 연극을 하는 바람에 제임스를 상당히 혼란스럽게 만들기는 했지만 일단 소녀는 마법 사라는 게 이렇게 해서 드러났다. 일단 소녀가 마법사라는 사실이 드러난 이 상, 소녀가 설혹 마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모습을 젊게 변화시킨 할망구쯤 되 는 엄청 나이 많은 대마법사라고 해도 제임스의 적은 될 수 없었다. 오랜시간 함께 지내본 결과 두 수련기사쯤 되어보이는 청년들이 그녀에게 깍듯이 대하 는 걸로 봤을 때, 또 그녀가 인간이라고 부르기에 벅찰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 를 가진 점을 봤을 때 아무래도 저 모습은 마법을 사용해서 만들어진 모습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마법을 꽤나 사용할 줄 알면서도 기사가 얼 마나 무서운줄 모르는 신분이 꽤나 높은 철부지 소녀든지……. 제임스는 국왕께 충성하고, 정의를 숭상하고, 또 레이디를 존중해야 하는 기 사였기에 대충 그녀에 대해 파악했다고 해서 막 대할 수는 없었다. 또 그녀가 마법사라면 아르곤이란 광신도 집단과는 아예 상관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 었기에 소녀를 제법 존중해주는 척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슬슬 제임스는 소녀와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생겼다. 그것은 이 소녀 일행 이 자신에게 적이나 아군이냐를 분명히 알아내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소녀에게서 두 걸음 정도의 거리로 슬쩍 다가 서면서 말했다. "레…… 에…… 당신도 드래곤 사체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있다면?" "경쟁자는 적을수록 좋으니까 여기서 끝장을 보는게 좋겠죠." 약간 농담조로 제임스는 말했다. 그러자 소녀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 다. "겨우 그 실력으로?" "……" 황당한 표정으로 제임스가 서있자 소녀는 또다시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죽어버린 드래곤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그 말에 제임스는 어느정도 마음을 놓았다. 약간 철부지인 이 소녀가 제법 마 음에 들었던 제임스로서는 그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조금 망설여지던 참이 었기 때문이다. 소녀의 목적이 드래곤의 사체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데리고 다 니면서 구경시켜 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제임스는 어느정도 쾌활한 음성으 로 말했다. "그러면 살아있는 드래곤에게는 관심이 있으십니까? 여기 꽤 이름난 포악한 드래곤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니까 소원을 풀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겁니다. 저 기 연기가 피어 오르는 화산(火山)이 보이시죠? 저기에 성질 더러운 레드 드 래곤이 한 마리 살고 있죠." 그 말에 소녀는 흥미를 나타내며 물었다. "레드? 가장 강하다는 드래곤 말이야?" 호기심이 짙게 배여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제임스는 호기심 왕성한 자 신의 귀여운 조카가 생각났다. 표정이 약간 비슷한 점도 있는 것 처럼 느껴졌 기 때문이다. "가장 강한 드래곤은 실버입니다. 레드는 육상에 돌아 다니는 드래곤들 중에 서 최고로 강하죠." "한번 봤으면 좋겠군." "이번 일이 끝나면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면회신청까지 할 필요는 없고 그냥 슬쩍 숨어서 구경하는 정도는 어려운게 아닙니다." 이때 노마법사가 다시 비행마법으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노 마법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손에는 기절한 남자가 한명 쥐어져 있었다. 노마법사는 땅바닥에 착지한 후 그 남자를 땅바닥에 던져버린 후 제임스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꽉 쉬어버린 것 같은 목소리는 듣기에 매우 껄 끄러웠다. "성기사단 뒷편에 또다른 패거리가 나타났습니다. 당나귀 100여 마리, 그리고 말 30마리 정도를 가진 20여명의 상인들입니다. 아마도 드래곤의 뼈와 비늘을 운반하기 위한 사람들로 보입니다. 성기사단이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길을 열어주는 것까지 보고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녀석은 드래곤 슬레이 어 일행같은데 숲속을 헤메고 있길래 정보라도 좀 획득할 수 있을까 해서 잡 아왔습니다."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고? 일단 깨워라." 노마법사가 주문을 외워 상대에게 걸어놨던 마법을 풀어주자 엎어져 있던 그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작은 키, 떡 벌어진 어깨와 두 툼한 근육들, 애늙은이 같은 주름진 얼굴에 짙은 수염. 드워프였다. "여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바라보던 드워프의 시선은 곧이어 뒤쪽에 서있던 소녀에서 멈췄고, 곧이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검으로 이동했다. "살아 있었군. 그런데 이 사람들은 뭐야?" 제임스는 왼손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드워프의 멱살을 쥐고는 간단히 일으켜 세웠다. 아니, 들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정말 상당한 완력이었다. 왼손만으 로 드워프의 다리가 땅에 닿지 않을정도로 잡아 올렸으니까 말이다. 그런다음 제임스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왜 숲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는지 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 상대가 위압적으로 나오자 드워프는 자신이 왜 숲에 들어가 있었는지 말해줘 도 상관은 없었지만 약간 오기가 치솟아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고 제임스는 조금 더 짙게 미소지으며 오른손으로 드워프의 왼손 손가락을 잡은 후 살짝 힘을 줬다. 뚝! "크흑!" 드워프는 발광하기 시작했지만 제임스는 마치 바위 덩어리라도 되는 듯 끄떡 도 없었다. 오히려 고통과 두려움에 발광하는 드워프를 잡고 자근자근 다지기 시작했다. 그의 오른손은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듯, 그 손에 잡힌 드워프 의 신체는 곧장 힘없이 꺽여버렸다. 바둥거리며 자신을 향해 발길질을 하던 드워프의 두 다리를 꺽어버린 후 제임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도 말하고 싶지 않나요?" "말…… 말 하겠다. 검을, 검을 찾고 있었다. 검을……" "검이라고요?" "다크…… 다크가 가진 검은 우리 드,드워프의 걸작. 다크는 죽었다고 해도 검은, 검은 안녹고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 걸, 그 걸 찾고 있었 다." "드워프의 걸작이라고요?" 두려움과 고통의 광기에 가득 차있는 드워프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던 제임스. 그는 소녀가 가진 검쪽으로 흥미로운 시선을 돌렸다. 꽤 잔인한 고문 모습에 소녀의 주위에 서있던 세 남자들의 안색은 창백하게 굳어있었지만, 소녀는 태 연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녀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제 임스는 소녀도 자신과 비슷한 부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 듯 솟아났다. 순수하게 강함만을 추구하는 광기(狂氣). 자신의 힘을 잘 알고, 또 그 힘을 어떻게 행사해야 할지를 잘 아는 인물. 하지만 제임스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소녀의 눈이 너무나도 투명하고 맑았기 때문이었다. 제임스는 군데군데 뼈가 부러진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반쯤 미쳐있는 드워프 를 노마법사에게 던지면서 말했다. "치료해줘라."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용 살해자) 일행은 숲속에 뭔가를 찾을게 있 다고 들어간 화이어헤머가 돌아오지 않았지만, 예정대로 출발했다. 겨우 드워 프 하나 때문에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이번 임무는 중요했기 때문이다. 작은 비늘이나 뼈는 당나귀에 싣는데 문제가 없었고, 큰 뼈나 비늘은 타이탄을 사 용해서 토막을 쳐놨기에 당나귀에 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도우러 일행이 도착한 다음날 새벽에 출발했다. 거의 4일에 걸친 강행 군 끝에 그들은 그랜디아 산맥을 넘어 아르곤 내륙의 거대한 항구도시 '아르 네이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르네이아는 거대한 수송선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운하(運河)가 있었기에, 이곳에서 배편으로 랜트 국가연합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또 산맥을 넘자마자 가장 가까운 도시로 들어온 이유들 중에서, 도시 안에서 타이탄 전쟁을 걸 미친놈들은 없을 것이라는 속 셈도 있었다. 타론은 일단 아르네이아 시에 도착하자마자 눈에띌 정도로 긴장감을 풀기 시 작했다. 이제 거의 이번 작전은 성공 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었다. 도우러 씨가 임대해놓은 창고 안에서 푸대자루 안에 넣어진 채 운반되 어 온 드래곤의 뼈는 타인의 눈을 속이기 위해 큰 나무상자 안에 옮겨 담아졌 다. 그리고 그것들은 재빨리 이미 도우러 씨가 수배해 놓은 화물선으로 운반 되었다. 부두 근처의 창고에서 나무 상자들이 꺼내어져 화물선으로 운반되고 있는 광 경을 이제 조금은 느긋해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타론. 그때 타론의 뒤쪽 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대장!" 타론이 뒤를 돌아보자 스팬이 눈짓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타론의 시선이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갔고, 곧이어 타론의 안색이 굳어지기 시작 했다. 거의 10여명에 달하는 성기사들이 그들쪽으로 접근해오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타론은 상대의 허리에 달려있는 짧은 막대기 같은 물체, 즉 오러 소드(Aura Sword)를 보고 그들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타론은 슬쩍 자신의 검이 있 는 곳으로 손을 돌려 평소에 검이 뽑히지 않게 해주는 끈을 풀어버렸다. 타론 의 움직임을 보고 모두들 검을 약간씩 뽑아놓거나 아니면 타론처럼 끈을 풀었 다. 가까이 접근해온 성기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먼저 인사를 건넸고, 타 론 일행도 일단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형제들…… 그 이름도 드높은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기 지휘자가 누구신가요?" 타론이 굳은 표정으로 살짝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접니다." "예. 저희들은 형제들이 본국의 영토 안에서 드래곤을 잡은 것을 잘 알고 있 습니다. 하지만 이런식으로 떠나시면 국제관례상 말이 안되지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엄연히 본국에서 취득하신 것이니까 드래곤 뼈의 80%에 대한 권리는 국제 관 례상 본국에 있습니다. 물론 슬쩍 도망가셨다면 모르겠지만 우리들이 알게된 마당에 그걸 부인하지는 못하시겠죠? 물론 형제들이 드래곤을 잡으신다고 많 은 고생을 하신 것은 이해를 합니다. 20%만 가지고도 형제들은 이제부터 평생 을 쓰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부(富)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또 그와 함께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20% 정 도만 해도 형제들의 고생에 대한 충분한 대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타론은 이 칼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완전히 날강도 같은 성기사를 노려봤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타론은 눈빛을 누그러 뜨리면서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80%는 너무 많습니다. 조금 양보해 주십시오. 국제관례상 던젼 발굴 등을 했을 때 80%의 세금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드래곤을 잡기 위해 2대의 타이탄이 파괴되었고, 6명의 동료를 잃었습니다. 또 드래곤 본(Bone)을 운반하기 위해 수십명의 인력이 동원되었죠. 그들에게 도 뭔가 돌아갈 몫이 있어야 합니다. 그점을 좀 이해해 주십시오." "하지만 세금을 감면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교님 이상 의 고위급 사제나 황제 폐하께서만 결정하실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까……" 이러쿵 저러쿵 말이 오가는 동안에 200여개에 이르는 나무 상자들은 화물선에 모두 운반되었다. 저쪽에서 도우러씨가 살짝 손짓으로 모든 화물이 적재되었 음을 알려주자 타론은 눈짓으로 응답했다. 그 후 타론이 검을 뽑은 것과 도우 러씨가 화물선에 출발 신호를 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타론은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고 엄청난 스피드로 여태껏 입씨름을 하고있던 그 얄미운 성기사 녀석 을 두토막 내버렸다. 그리고 타론의 움직임과 동시에 검을 뽑아든 3명의 부하 들도 성기사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8명의 목숨이 날아간 후에야 성기사들은 자신들의 검을 뽑을 수 있었고, 곧이 어 그들이 허리에서 뽑아든 막대기에서는 투명한 청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며 검과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샤이하드의 권능을 상징하는 오러 소드. 왠만한 공격마법은 막아낼 수 있고, 싸구려 검따위는 단번에 두토막을 낸다. 그런 신 성한 무기를 상대가 뽑아들자 어느정도 균형을 맞출 수 있었지만, 상대는 크 루마 제국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인 근위기사단이었다. 아무리 아르곤에서 샤이하드의 권능을 자랑하며 성기사의 무서움을 자랑하고, 타국의 기사를 멸 시했다 하더라도 정말 뛰어난 타국 기사와는 한번도 싸워본 적이 없었기에 톱 클라스의 기사들이 가지는 그 강인한 힘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싫 어도 맞붙게 되었으니 결과는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화물선이 때맞춰 불어오는 바람에 팽팽하게 돛을 팽창시키며 부두를 떠나고 있을 때, 성기사들과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의 격전은 최고조를 달렸 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한명씩 한명씩 기사들의 검날 아래서 목숨이 끊어져 가고 있었다. 아무리 신성력에 의존해서 근력증가따위를 시켰다 하더라도, 또 오러 소드라는 엄청난 신성마법 병기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검술에 대한 높은 깨닳음이 떨어지는 그들은 근위기사단의 상대가 되기는 힘 들었던 것이다. 타론은 피묻은 검을 쓱 닦아서 검집에 집어넣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본국에 증원을 요청해라." 타론의 명령에 마리나는 장거리 통신용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리나가 통신을 하는 것을 힐끗 보면서 타론은 스팬에게 말했다. "너희 셋은 지금부터 도우러씨를 보호하고, 또 그가 하는 일을 도와라. 그리 고 마리나와 베티 사제님을 부탁한다." "하지만 대장, 드래곤 본을 보호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멍청한 녀석들! 너희들이 가져온 타이탄은 카마리에다. 그걸 꺼내서 크루마 제국의 근위군이 아르곤에 들어와서 무력을 행사했다는 걸 광고하고 싶냐? 내 가 가진 녀석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데다가, 드래곤과 싸우면서 외장 페인트까 지 다 날아가서 문장 등의 표식이 하나도 없다. 이제 올 타이탄들도 모두 표 식이 없는 녀석들이다. 너희들이 끼어들면 오히려 일만 더 복잡해져. 목숨을 걸고 도우러씨를 도와라. 알겠나?" "옛, 대장" "도우러씨. 뒷일을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뒷일은 마음 놓으십시오." 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한쪽 공간에서 뿌연 빛을 뿜으며 6명의 인 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가벼운 갑옷을 입거나 아니면 아예 갑옷 따위 를 생략한 인물들이었지만 하나같이 대단히 좋은 고급 검을 차고있었다. 그들 이 나타나자 타론은 재빨리 그들에게 다가가서는 그중에서 옅은 금발 머리를 가진 청년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루엔 공작 전하. 안녕하셨사옵니까?" 그 말에 청년, 즉 루엔 공작은 살짝 고개를 까딱 하는 것으로 인사를 받은 후 말했다. "본국에 지원을 청할 정도로 사태가 안좋은가?" "예. 전하. 완전히 들통난 상태이옵니다. 그래서 2단계 작전을 실행중이옵니 다. 일단 놈들의 이목을 딴곳으로 집중시켜야 하기에……" 루엔 공작은 더 이상 들을것도 없다는 듯 냉랭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쓸모없는 녀석! 그것 하나 기밀 유지를 못하다니…… 가자!" 루엔 공작 일행은 강을 따라 내려가고 있는 화물선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 다. 아르곤의 영토 내에서 이 화물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려야 할지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성기사단이 화물선을 추격중입니다. 그리고 화물선 주위로 엄청난 실력의 기 사들이 호위중입니다. 증원을 요청한 모양입니다." 껄끄러운 노마법사의 목소리에 살짝 인상을 찡그리던 제임스는 슬쩍 입을 열 었다. "증원이라고? 그럼 호위무사의 수는?" "일곱 명입니다." "일곱? 하! 겨우 그걸로 호위를 하겠다고?" "겨우 일곱이 아닙니다. 마스터급이 한 명 끼어있습니다. 대단히 조심해야 합 니다." "마스터급이라고?" "예. 뷰 마나 포스를 통해 얻은 정보입니다." 노마법사의 말에 제임스는 히죽이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마스터라…… 재미있겠군. 일단 눈치채지 못하게 계속 추격하도록!" "예." 제임스와 마법사가 한쪽 구석에서 서로 쑤근거리는 것을 슬쩍 곁눈질로 보면 서 지미가 말했다. "더이상은 위험합니다. 지금 각국에서 타이탄들과 기사들을 투입하는 중인 것 같은데……" 지미가 또다시 설득을 하려고 들자 다크는 그의 말을 도중에 가로막았다. "그런 말 하지 말랬지? 오늘도 봐! 돈주고도 못하는 구경을 했잖아? 성기사라 는 것들 제법이던데? 그 오러 소드란 것도 대단히 멋있었어. 성기사라는 녀석 들이 오러 소드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법 강력해 보이더군. 밤에 구경했으면 정말 멋있었을텐데…… 안그래, 파시르?" 파시르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소녀에게 대답했다. "응." 보통 여자들은 피튀기는 싸움. 방금 전과 같이 확실히 상대를 보내기 위해 거 의 베는 것이 아니라 두토막을 치는 잔인한 광경을 보면 먹은 것을 다 토해내 던지 기절을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이 소녀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격전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이런 눈동자를 가진 여자를 보려면 용병단 외에는 없을 거라고 파시르는 생각했지만, 소녀의 나이 로 봤을 때 도대체가 솜씨있는 용병이 될 시간여유가 없으니 이해 할 수가 없 었던 것이다. "이봐! 파시르." "왜?" "타이탄도 부숴졌는데, 이 일 끝나고 나면 뭐할거야?" "용병이나 또 시작해야지. 별 수 있어? 남들처럼 대단한 가문이 있는 것도 아 니고…… 또 누구한테 억매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전번처럼 운 좋으 면 타이탄 하나 전장에서 줏을지도 모르지." "그러지 말고 내 밑에서 일해보지 그래. 충분한 자유시간, 높은 보수, 거기에 다가 타이탄도 한 대 줄테니까 말이야." 소녀의 천진난만해 보이는 -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 얼굴을 보면서 파시르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타이탄이란게 그렇게 아무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만이라도 고맙군." "교섭이 결렬되었습니다. 단장님." 단장은 은빛 찬란한 성기사의 정식 갑옷을 입고 보고를 올리는 부하에게서 시 선을 돌려 항구를 떠난 후 더욱 속력을 내고있는 화물선을 바라봤다.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나?" "모두들 샤이하드님의 품속으로 돌아갔습니다. 몇몇 시신의 상태를 봤을 때 아마도 기습을 당한 것 처럼 보였습니다." "흠…… 비열한 녀석들! 어쩔 수 없이 싸워야 겠군. 20%만 가져도 충분할텐데 과욕을 부리다니…… 저녀석들이 먼저 도발했으니 끝을 봐야겠지." "하지만 단장님. 저희 기사단에 주어진 임무는……" "알고 있다. 하지만 먼저 놈들의 실력을 한번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단장은 화물선과 그 화물선을 보호하듯 포진하여 움직이는 기사들을 잠시 노 려본 다음 출동지시를 내렸다.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라." 단장의 지시와 함께 거대한 타이탄들이 속속 공간을 열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크로티아르 성당기사단은 아르곤의 외곽에 주둔중인 여섯 개의 성당기사단들 중 하나였다. 이 다섯 개의 성당기사단은 출력 0.62의 구형타이탄인 헤지곤을 주력으로 가지고 있었다. 물론 0.84의 출력을 지닌 타비곤도 있었지만 고위급 성기사에게만 주어졌다. 크로티아르 성당기사단은 총 30대의 타이탄을 가지고 있었으며, 헤지곤 24대, 타비곤 6대, 그리고 성기사 200여명으로 구성된 강력 한 기사단이었다. 이번 드래곤 본 탈취작전에 동원된 기사단은 총 네 개로서 크로티아르, 크로 미아, 카쟈르, 타리아 성당기사단이었다. 그중 수도에서 지원차 달려오고 있 는 타리아 성당기사단은 1.2의 고르곤과 1.12의 라르곤 30대를 장비한 최강급 에 들어가는 성당기사단이었다. 하지만 타리아 성당기사단을 제외하고도 지금 거의 90여대의 타이탄이 동원된 만큼 타리아 기사단이 투입되기도 전에 드래 곤 본의 탈취는 끝나지 않을까 하고 모두들 추측하고 있었다. 단장은 타이탄에 올라타며 외쳤다. "화물선을 격침시켜라. 격침되었다손 치더라도 나중에 화물은 건지면 된다. 적들이 강한 것 같으면 시간을 끌어라. 두 개의 성당기사단이 세 시간 내로 도착할 것이다. 형제들이여! 드래곤 본을 교단에 바치자! 샤이하드의 가호(加 護)가 함께 하기를!" 그러자 성기사들도 각자 오러 소드를 뽑아들고 외쳤다. "샤이하드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돌격!" "드디어 시작인가?" 소녀의 무감정한 말에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를 표시했다. "시작할때도 되었죠." 제임스는 시선은 앞으로 고정해 둔 채 그의 뒤에 서있는 마법사 영감에게 지 시했다. "일단 부하들을 불러들여라." "예. 하지만…… 지금 시작하실 겁니까?" "아니, 당연히 지금은 아니지. 저녀석들이 포위망을 돌파해서 랜트 연방으로 간다면, 전쟁은 랜트 연방에서 하는게 더 좋아. 하지만 아르곤이 이긴다면 어 쩔 수 없이 여기서 싸우는 수밖에. 타이밍이 중요하니까 그녀석들 보고 합류 하라고 해라." "예." 노 마법사는 재빨리 비행마법을 사용해서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제임스는 노 마법사가 어디로 날아가는지 그런것에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계속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 사용하는 타이탄에 고정되어 있었다. 제임스는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이 사용하는 거대한 신형타이탄을 눈여겨 본 결과 몇가지 사실 을 재빨리 알아챌 수 있었다. 놀랍도록 거대한 덩치. 하지만 그 엄청난 덩치 를 가지고도 저렇듯 재빠른 움직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엄청난 출력의 엑스시 온을 장착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제임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크루마에서 정말 대단한 걸 만들어 냈군. 만약 드래곤 잡는 모습을 보지 못 했다면, 저녀석들이 크루마 소속이란 사실도 몰랐을테고…… 저렇게 엄청난 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을거야. 휴…… 덩치를 보니까 100톤은 확실하게 넘겠는데? 아마 역사상 최고로 큰 타이탄이겠군. 앞으로 어떻게 될 지 기대되는데? 흐흐흐" 크로티아르 성당기사단이 자랑하는 30대의 타이탄들. 평소 그들의 적은 오우 거 같은 초대형 몬스터들이었다. 그들과 상대할때는 무적의 위력을 자랑했었 지만 오늘은 달랐다. 성당기사단의 타이탄들이 돌격해 들어갔을 때 상대는 보 도 듣도 못한 거대한 타이탄 7대를 꺼냈다. 족히 100톤 이상은 나가보이는 엄 청난 거구의 타이탄들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스피드로 성당기사단을 공격해 왔다. "화물선을 파괴해랏!" 성당기사단 단장은 부하들에게 소리쳤지만, 그건 통하지 않았다. 운하(運河) 기 때문에 깊이는 제법 깊은지 몰라도 폭은 그렇게 넓지 않다. 고작 1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폭. 그렇기에 타이탄이야 무거워서 못 건너가더라도 성기 사들이라면 충분히 건너가고도 주리가 남는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타이탄 들을 이쪽 타이탄들이 막아줬을때의 말이었고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푸캉! 육중한 덩치에 비했을 때 놀라운 속도로 돌진해 들어온 정체불명의 타이탄은 그 거대한 방패로 성기사단의 타이탄을 밀어붙였다. 성기사단이 가진 타이탄 들과 상대 타이탄의 무게비는 거의 두배. 서로가 방패만 한번 부딪쳐도 성기 사단의 타이탄들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고, 형편없이 뒤로 밀려났다. 심지어 일부 타이탄은 방패에 가격당하자마자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곤두박 질 치는 형편이었다. 단 한번의 검놀림에 상대 타이탄의 방패와 팔, 방패와 몸통, 또는 검과 몸통 을 동시에 잘라버리는 괴물을 무슨 수로 상대할 수 있겠는가? 성당기사단의 타이탄들은 순식간에 고철덩어리가 되어 나뒹굴기 시작했다. 앞쪽의 다섯대가 주로 성기사단의 타이탄들을 상대하고 있었다면 뒤쪽에 쳐져있던 두 대의 타 이탄은 화물선을 향해 뛰어드는 성기사들을 상대했다. 그 거대한 덩치에 어울 리지 않게 검기(劍氣)를 한번씩 뿜어낼 때마다 수십명의 성기사들의 몸통이 토막났다. 타이탄을 사용해서 뿜어내는 검기는 보통 그래듀에이트가 뿜어내는 검기는 어린애 장난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강력하다. 그런 검기를 아무리 강력 한 신성병기라고 하지만 오러 소드따위로 막아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상대가 안되는 싸움. 성당기사단 단장은 10분도 안되는 전투를 벌인 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10분동안에 성당기사단원의 절반이 죽었고 타 이탄은 전멸이었다. 그리고 성기사단 단장마저도 자신의 타이탄과 함께 생명 을 마쳤다. "샤이하드시여. 사악한 무리에게 어찌하여 저리도 강한 힘을 주셨나이까!" 성기사들은 울분을 토하며, 부상자들을 부축한 채 전장을 이탈할 수밖에 없었 다. 원래가 성기사들의 경우 신성마법과 오러 소드라는 엄청난 위력의 신성병 기 덕분에 꽤 많은 득을 봤었다. 하지만 타이탄끼리의 전면전에서는 오로지 마나만이 필요할뿐…… 신성마법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타이탄을 만든 사람은 신관이 아니라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기준(1.0) 이하의 출력을 내는 타이탄을, 그것도 간신히 그래듀에이트 정도쯤 되는 마나를 지닌 인물들이 조종해서 상대의 최고급 타이탄을 조종하는 톱 클라스의 마나를 지 닌 인물들과 싸웠으니 그 해답은 간단한 것이었다. 너절하게 널려있는 성당기사단 소속의 타이탄들을 바라보며 타론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 드래곤을 잡을때 다 타서 없어져버렸던 외장 페인트가 재생된 덕분에 은백색과 적색, 금색으로 산뜻하게 도장되어 있는 자 신의 안티고네를 슬쩍 바라봤다. 물론 기본색상 외부에 덧칠했던 문장(紋章) 은 재생되지 않았기에 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는 안티고네를 처음 지급 받았을 때, 조종석에 앉아 그녀석이 뿜어내는 엄청난 파워에 전율을 느꼈었 다. 무려 2.2의 출력을 가지는 엑스시온. 헬 프로네의 엑스시온 제작기법을 발굴해 내어 최강의 전투용 타이탄으로 제작한 것이 바로 이 안티고네였다. 타론은 110톤이 넘는 거대한 타이탄들이 공간을 열고 사라지는 것을 보며 어 쩌면 이번 임무는 아주 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르곤이 동원가능 한 성당기사단은 아마도 11개 중에서 5개 정도…… 하지만 피해가 커지면 아 르곤은 어쩔 수 없이 이 먹음직한 먹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이 탄의 수는 아무리 적어도 200대는 유지해야 타국이 깔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 르곤의 이웃나라는 그 광포한 코린트 제국이다. 만약 아르곤이 만만하게 보인 다면 그날로 아르곤은 지도상에서 사라질 가능성도 있었다. 이때 타론의 뒤쪽에서 루엔 공작이 비웃듯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제국 아르곤의 힘이 겨우 이것밖에 안되나? 겨우 이따위 적 때문에 내가 와야 했다니. 안티고네의 실전 테스트 치고는 너무 싱겁군 그래. 자, 랜트 연 방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랜트 연방에서 랜티르 강을 거쳐 바다로 나가면 임무는 끝이다. 가자." 루엔 공작의 지시대로 근위 기사들은 화물선을 호위하듯 대형을 갖추며 운하 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빠른 시간안에 성당기사단이 괴멸당하자 제임스는 심각하게 증원병 파견요청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끌고온 병력도 왠만한 나라 하나쯤 박 살내는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는 전력이었지만, 상대방 타이탄에 대한 자료가 전무(全無)한 상태에서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제임스는 슬쩍 다크 일행에게 서 떨어진 채로 목소리를 낮춰 노 마법사에게 말했다. "증원을 요청해라." "증원을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이정도 병력으로도 상대를 겁낸다고 잘못 하면 공작 전하께 질책 당하실 우려가 있습니다." "질책을 당해도 내가 당한다. 일단 숫자는 맞아야 싸울거 아냐?" "그러시다면……" 노 마법사는 통신용 마법진 따위는 그릴 필요도 없다는 듯 곧장 품속에서 주 먹만한 수정구슬을 꺼내어 제임스 앞에 내밀었다. 곧이어 노마법사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수정구슬 안에 사람이 한명 나타났다. 그는 제임스를 알아보 고는 정중하게 인사한 후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 "아버님은 어디 계시냐?" <공작 전하께서는 폐하와 담소를 나누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형을 불러 줘." <후작 각하께서는 근위대 연습훈련차 밖에 나가계십니다.> "제길. 그렇다면 근위대 녀석 아무나 바꿔!" <잠시 기다리십시오.> 약 10분 정도 기다리자 수정구슬 안에 또다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 사 람은 화려한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화염을 토하는 붉은 색의 드래곤이 그려 진 문장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 드래곤의 몸통에는 'Ⅱ'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 "오, 자네군. 증원이 필요해. 상대방에 강력한 타이탄이 일곱 대나 있다. 거 의 흑기사급을 상회하는 파워, 그리고 100톤이 넘는 거구를 가진 괴물이야. 그리고 마스터급까지 1명 있으니까 아무래도……" 제임스의 말에 상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정말이십니까?> "이녀석이! 속고만 살았나? 내가 이 시점에서 농담이나 하고 있을줄 알아?" <알겠습니다. 공작 전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쪽의 좌표를 알려주십시오.> "저녀석들은 지금 계속 이동중이야. 빨리 보내 달라고 전해." <예. 하지만 한 시간 이내로 증원이 도착하지 않으면 증원군 파견은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알겠어." "왜 증원군은 아직도 소식이 없는거야?" 상관의 말에 부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도착했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카쟈르 성당기사단에서도 왜 공격을 시작하지 않는지 계속 전령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부하의 말에 크로미아 성당기사단 단장인 레가르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크로미아 성당기사단은 예정시간보다 거의 2시간이나 빨리 도착했지만, 크로 미아 기사단을 기다린 것은 묵사발이 나버린 크로티아르 성당기사단의 생존자 들이었다. 10분도 안되는 짧은 순간에 거의 괴멸당했다는 것은, 상대가 최소 한 크로티아르 기사단의 몇 배 이상 강하다는 소리였다. 상대의 발목을 잡아 지연작전을 펴기로 되어있던 크로티아르 성당기사단이 허무하게 거의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지금, 구닥다리 타이탄들을 끌어모아 만든 성당기사단 두 개로 공격해봐야 결과는 뻔했다. 크로티아르 성당기사단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놈들은 그야말로 최고 정예였다. '보나 마나 어떤 망할 국가의 근위기사단 놈들이겠지. 도대체 저렇게 간 큰 짓을 하는 놈들이 누굴까? 코린트? 크루마? 그것도 아니면 알카사스? 모두 다 수상하니 짐작을 할 수가 있어야지. 저정도 괴물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그 셋 중의 하나일게 뻔한데……. 휴--- 어쨋든 타리아 성당기사단이 도착해야 싸우던지 말던지 하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레가르는 2개 기사단 60대의 타이탄이라고 해도, 상대를 정면공격해서 승리할 자신은 없었다. 만약 패한다면 60여대의 타이탄이 고철 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본국 타이탄의 거의 1/3에 가까운 타이탄이 사라짐을 뜻하는 것이다. 만약 타국간의 힘의 균형따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조건 놈 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는게 맞겠지만, 잘못해서 이 싸움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 었을 경우 더욱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레가르는 한숨을 푹 쉰 후 부관에 게 말했다. "카쟈르에 전령을 보내라. 타리아가 도착할때까지 놈들을 일정 거리에서 계속 추적한다. 절대로 상대와 정면충돌을 벌이지 말라고 전해라. 그리고 트라팔 시에 전령을 보내 해군을 출동시키라고 일러라. 놈들이 랜트 연방을 통과해서 바다로 나가면 바로 격침시켜 버리라고 해." "옛!"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순간 2명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 들이라도 가는 듯한 가벼운 옷차림을 한 두명이 나타나자 제임스는 실망스러 운 어조로 말했다. "에게? 아무리 숫자를 맞춰달라고 했지만 겨우 두 명이야?" 하지만 그의 눈은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겨우 두명의 증원이었지만, 둘 다 코란 근위기사단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최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황 금색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는 멋진 청년은 제임스의 둘도 없는 친구였고, 또 검과 여자에 있어서는 라이벌이었다. "둘도 많은거지. 그래 어떤 놈들인데 천하의 제임스 후작 나으리가 증원을 요 청하게 만들었지?" 노랑머리의 말에 제임스는 한숨을 푹 쉬면서 처량한 어조로 말했다. "휴--- 말도 마라. 크루마에서 신형 타이탄을 만든 모양인데, 정말 대단해. 파워가 거의 '붉은 귀염둥이' 수준이야." "설마 그놈들 헬 프로네의 엑스시온을?" "그 '설마'가 맞을거야. 크루마에서 제작된 2.0을 초과하는 엑스시온은 그것 뿐이니까 말이야." "그럼 2.2잖아? 흑기사 가지고는 힘들겠군." "당연하지. 거기다가 마스터급이 한 명 있어. 미네리아는 아닌 것 같고, 아마 지크리트 루엔 공작인 모양이야." 제임스의 말에 노랑머리는 이제서야 어느정도 상대가 가진 힘에대해 짐작이 간다는 듯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흐음…… 어려운 상대군." 그걸 보고 제임스는 피식 미소를 지으면서 유쾌하게 말했다. "네녀석한테 심각한 것은 어울리지 않아. 자, 가자. 요 근래에 사귄 녀석들을 소개해 줄께. 상당히 괜찮은 아이들이야." "좋지. 누군지 궁금한데? 여자야?" "응. 아직 정체를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주 독특한 아가씨야." "야, 너 마흔이 넘어가지고도 여자를 밝히냐?" 드디어 제임스의 나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도대체가 그의 젊고 팽팽한 피 부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나이였지만 말이다. "헛소리 하지마. 네놈은?" "그래도 네녀석 보다는 낫지. 아무렴 낫고 말고." "내가 먼저 찝어놨으니까 군침 흘리지 마." "호…… 아직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군. 네가 웬일이냐? 너, 속전속결이 원칙 이었잖아? 흐흐흐…… 하지만 미안하게도 먼저 드시는 사람이 임자야. 네녀석 이 그동안 눈독을 너무 많이 넣어놔서 식중독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기는 하지 만……" 노랑머리는 슬쩍 머리카락을 정돈 한 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런 후 순 진한 듯한, 어떻게 보면 노련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과연 어떤 미녀가 기다리 고 있을지 기대되는 표정으로 걸어갔다. 제임스의 여자를 고르는 취향은 매우 까다로왔기에 사뭇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복장점검은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기위함이 아닌, 여건만 허락한다면 유혹하 려는 의미가 더 강했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제임스와 증원군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미 노랑머리가 얼굴을 알고있는 근위군 소속 기사들이 한곳에 모여 웅성거리 고 있다가 노랑머리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또 한쪽에 모여있 던 인물들은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에게 약간 의심스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우선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것 것은 그래듀에이트급의 기사 한 명. 왼쪽 뺨에 나있는 깊은 검상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있는 두 명의 기사들. 아직 햇병아리 수준이었다. 그 두 기사들은 자기 키만한 도끼를 등에 지고있 는 드워프하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헉!" 노랑머리는 재빨리 몸을 숨기며, 제임스를 끌어당겼다. 그런 다음 낮은 목소 리였지만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해서 저 애가 여기 있는거지?" 그 말에 어리둥절해진 제임스. "무슨 말이야?" "왜, 전에 말했잖아. 엄청난 정령사가 될만한 소질이 있는 애를 발견했다고… …" "아하. 그 크라레스에서 납치하려다가 실패했다던 그 여자애?" "응. 바로 그 애야.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호…… 이거 재미있게 되어 가는군. 그럼 이번 작전 끝나고 난 후 잡아서 돌 아가면 되는건가? 그래!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저 아이의 그 독특한 분위기, 그래! 정령사였어……" "그럼 뭔줄 알았는데?" "마법사. 마법도 좀 하는 모양이던데? 뷰 마나 포스라든지 그런거에 포착되지 않는걸 보면?" "이런이런…… 그래서 정령사를 친구로 하나 둬야지. 정령을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감출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정령의 힘은 마법과는 조금 달라서 마법 으로는 알아낼 수 없어. 대신 정령사는 귀신같이 알아내더군. 뭐 정령에는 독 특한 냄새가 난다나? 정령사라는 것들은 모두 개코를 달고있는지 원……" "빨리 나가자. 이러고 있으면 의심한다구." 제임스와 노랑머리는 슬쩍 앞으로 나가서 시선을 저 멀리 운하를 따라 내려가 고 있는 화물선에 고정시키고 있는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노랑머리는 잠시 헛 기침을 해서 소녀의 시선을 자신 쪽으로 돌린 후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안녕? 꼬마 아가씨. 여기서 또 만나는군." 짐짓 너스레를 떨며 수작을 걸어오는 노랑머리를 향해 소녀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내 이름은 다크야." "이름은 벌써 알고 있답니다. 다크 크라이드 남작. 그런데 아르곤까지는 어쩐 일로 왔지?" 노랑머리의 말에 소녀는 의아한 듯 물었다. "응? 너는 누군데 내 이름을 아는거지?" "쯧쯧…… 겉모습과 달리 기억력이 별로 좋지 못하시군. 전에 크라레스에서 만났잖아? 무도회에도 같이 갔고 말이야. 이름이라면 몰라도 내 얼굴도 기억 하지 못한다니 섭섭하군." 그 말에 소녀는 약간 생각하는 눈치더니 곧장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 기억났다. 그 호색한이었군.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지?" 그 말에 가슴속이 뜨끔해진 까미유의 안색이 약간 일그러졌다. 자신을 기억해 낸 것은 좋은데 하필이면 그런 세부적인 사항까지 기억할 것은 또 뭐야? 소녀 의 말을 옆에서 듣고는 제임스가 억지로 웃음을 참고있는 것을 까미유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힐끗 봤다. 까미유는 '네녀석도 마찬가지면서 날 비웃어?'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수야 없었다. 어쨋든 시간이 얼마 지나지는 않았지만, 그때 봤을때보다 소녀는 더욱 성숙해 보였고 키도 좀 더 자란 것 같았다. 잘 하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거기에 초칠 수는 없는 노릇. 까미유는 젊잖은 어조로 여자들이 좋아하던 부드럽고도 우울한 듯한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멍청하고 힘없는 동료가 도움을 요청해서 말이야.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 로?" "여행중이야." 화물선은 거의 시속 10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기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증 원군과 합류한다고 꽤 많은 시간을 지체했었기에, 한곳에서 계속 잡담을 나눌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랜트 연방과의 국경선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조 만간에 어떤 형식으로든 결판이 날것이라고 생각하며,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제임스가 말했다. "자, 자, 잡담은 가면서 하자구. 너무 멀어지면 제때 싸우기 힘들어." 코란 근위기사단의 정규멤버 일곱 명이 한꺼번에 파견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강했고, 또 근위기사단이 직접 투입될만큼 중요한 일도 거의 없었다. 근위기사단이 출동했던 가장 가까운 기록은 30년 전 크라레스 제국과 의 전면전때 뿐이었다. 물론 그 전에는 코란 근위기사단도 자주 출동했었다. 하지만 국력이 강성해지고, 또 45년전 강력한 흑기사가 근위타이탄으로 대체 된 후 코란 근위기사단은 타국에 파견될 일이 거의 없어져버렸다. 거기다가 30년 전 크라레스의 영토 80%를 뺏고 더욱 국력이 증강된 후, 아예 세계 최강 의 대열에 올라서버린 지금 코린트의 신경을 건드리는 국가는 아예 없었다. 그렇기에 까미유 백작은 승리는 아예 기정사실화 시킨 후, 그 다음 일을 궁리 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 소녀를 코린트로 끌고가지?' 하는 것이었는 데, 일단은 정석대로 회유책을 써본 후 먹혀들어가지 않으면 강제납치가 좋을 듯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소녀가 마법과 정령술을 함께쓰는 마도사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마법사는 주문을 외울 시간이 필요했지만 정령술사는 정령과 의 친화력을 중시할 뿐 주문따위를 외우지 않기에 언제 마법이 날아올지 예측 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령술사는 마법사와 같은 무시무 시한 파워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위험하니까 회유따위는 생략하고, 납치를 먼저 한 후에 회유하기로 하지. 저 얘쁜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아깝거든. 흐흐흐……' 아무리 화물선이 시속 10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고 하 지만,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이 출발한 무역도시 아르네이아 시가 랜트 연방과 의 국경선에서 30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못한 것을 감안한다면 국경 에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처음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을 쫓던 크로티아르 성당기사단은 도착이 늦어지고 있는 크로미아, 카쟈르, 타리아 성당기사단을 기다리지 못하고 정면충돌, 괴 멸당해버렸다. 그덕분에 상대방의 전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성과 를 거뒀지만 1개 기사단이 소멸당한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1시간쯤 늦게 도착한 크로미아, 카쟈르 성당기사단은 자신들 만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 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중앙에서 파견된 최 정예인 타리아 성당기사단을 기다 렸다. 하지만 10분, 20분이 한 시간이 되고 두 시간이 되어 이제 랜트 연방 과의 국경선은 코앞에 다가왔고 크로미아와 카쟈르의 기사단장들은 모여서 대 책 회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손을 써야 하는게 정석이었지만 잘못되면 덤으 로 2개 성당기사단이 전멸당할지도 모르니…… "아무래도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소." "하지만, 10분 뒤에는 놈들이 국경을 통과합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랜트 연방에서 결전을 벌여야 하는데, 그건 힘듭니다. 랜트 연방은 본국의 오랜 동 맹국인데다가……" "그러니 잘 되었지 않소? 랜드 연방에도 지원을 부탁하면 우리들의 청을 거절 하지는 못할거요. 하지만 랜트 연방의 기사단들도 우리들 만큼이나 도움이 안 될거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오." "맞습니다. 상대는 최고 정예. 어설픈 타이탄으로 덤벼봐야 피해만 커질 뿐이 죠. 하지만 타리아 성당기사단으로부터 연락이 완전히 두 절된 상태라서……" "그럼 본국과의 연락은? 나는 서둘러 떠난다고 전체 성기사단을 모두 끌고 오 지도 못했소. 먼저 가장 뛰어난 성기사들만 엄선하여 최고 속도로 달려왔으니 까, 나머지는 두 시간쯤 뒤에나 도착하겠지. 그쪽에는 통신의 권능(權能-신으 로부터 받은 능력)을 가진 사제가 지금 있소?" "있습니다. 하지만 본국에서는 계속 똑같은 지시입니다. '적당 거리에서 적을 추격하라. 절대 교전은 하지 말 것.' 뭐 이런 말이죠." "그렇다면 국경을 통과해서 적들을 계속 추격할 것인지 물어봤소?" "예. 물어 봤습니다." "결과는?" "랜트 연방에 대한 국경 침입은 절대 불가라는 지시입니다. 그리고 랜트 연방 과의 공동작전도 불가하다고 하더군요." "빌어먹을!…… 험험…… 미안하오. 아로지에 형제. 말이 잠시 헛 나왔소." "괜찮습니다. 도대체 교단의 뜻이 뭔지 알수가 없군요." "성기사단이 추격을 중단했습니다." 마법사의 껄끄러운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제임스는 그걸 알 수 있었다. 증강된 1개 성기사단, 혹은 2개 성기사단 정도의 병력이 화물선을 계속 추격했지만 국경선에서 멈춘 것이다. "이제 시작할 때인가?" "한 시간 쯤 더 기다렸다가 하자구. 국경선 부근에서 맞붙으면 재수없으면 저 녀석들 좋은 일 시켜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적어도 놈들 시야에서는 벗어 난게 좋겠지." "좋아. 그런데 탈취한 후에 수송은 어떻게 하지?" "간단하지. 일단 화물선을 근처 항구에 가져간 다음 각 화물마다 코린트 황실 문장을 찍어서 운반하면 그 내용물을 보자고 들 정도로 간 큰 놈은 없을거야. 우리들이 호위하면서 육로로 옮기면 되지. 어린 그린 드래곤이니까 대형 짐마 차 일곱 대면 충분히 실어 나를 수 있을거야." 랜트 연방과의 국경선을 통과한 후 화물선을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국경을 통과할때까지 계속 뒤따라온 성기사단 덕분에 신경이 약간 날카로와졌 던 레디아 근위 기사단 소속 기사들은 다섯 시간이 넘도록 상대가 나타나지 않자 조금씩 긴장감이 풀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안나타 난다는 것도 꽤나 스트레는 주는 것. "놈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하는 것에 모두들 생각 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드래곤의 뼈를 수송하는 화물선이라는 엄청난 먹이감 이 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놈들이 이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고민은 오래지 않아 끝이났다. 드디어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화염을 토하는 레드 드래곤이 그려진 문장을 자랑하면서 말이다. "공작 전하! 코란 근위기사단이옵니다." "코린트도 냄새를 맡았었나? 그런데 저 뻘건색을 칠해놓은 재수없게 생긴 타 이탄은 뭐야?" "흑기사와 함께 나타난 것을 보면 코린트의 신형 타이탄인 모양이옵니다." "오랜만에 근사한 싸움을 해볼 수 있겠군. 코란 근위기사단이라는 이름이 부 끄럽지 않은 놈들이길 바란다. 흐흐흐…… 모두들 전투준비!" 부하들이 타이탄에 탑승하자 공작은 첫 번째 지시를 내렸다. "집단대형! 돌격하랏!" 공작의 명령에 따라 일곱 대의 안티고네는 서로간의 거리를 바짝 좁힌 채 상 대를 향해 육중한 체구를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공작은 약간 꺼림직한 붉은색 을 칠해놓은 상대방 타이탄이 방패를 가지지 않고 소드 스톱퍼만을 붙여놓은 것을 보아 집단전을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간파해 내고는 내린 명령이었던 것이다. 크루마쪽에서 일곱 대의 타이탄이 뭉쳐서 돌진해 왔다면, 코린트 쪽은 다섯 대의 흑기사는 뭉쳐서 중앙을 맡고 두 대의 적기사는 좌우 날개로서 상대를 치는 방법을 택했다. 곧이어 두 기사단이 맞붙자 서로간의 파워차이는 확실 하게 드러났다. 안티고네의 엄청난 무게, 또 그 무게를 활용한 강력한 파워에 흑기사들이 몸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섯대의 안티고네가 다섯대 의 흑기사를 상대로 약간 우위에 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면, 적기사를 맞아 싸운 두 대의 안티고네는 약간 사정이 달랐다. 공작이 직접 몰고있는 적기사 는 거의 대등할 정도의 격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다른 적기사를 맡고있던 타론 은 연신 뭇매를 맞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안티고네의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는 파워와 내구력, 그리고 10톤이나 되는 거대한 방패덕분에 상대방의 예리한 공격을 어느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리고 물리는 난타전을 벌이는 동안 흑기사들이 안티고네에게 밀려서 후퇴하 기 시작함에 따라 두 대의 안티고네는 주 전장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렇 게 되자 주위에 걸리적 거릴 타이탄이 없어져서 광대한 공간을 확보한 적기사 들이 그 엄청난 스피드를 십분 활용하기 시작했다. 적기사가 안티고네에 비해 훨씬 가벼웠기에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적기사를 막기는 점차 어려워지 기 시작했다. 적기사는 재빨리 안티고네를 내려쳤고 안티고네는 그걸 방패로 막은 후 재빨 리 오른손의 검으로 상대를 후려쳤다. 하지만 적기사는 벌써 거기에 없었다. 일격 이탈 전법. 내려친 후 상대가 튕겨내는 그 힘을 역이용하여 재빨리 벗어 난다. 그 후 옆으로 약간 이동하여 또다시 헛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노리 고 공격하는 것이다. 각 타이탄들은 자신들을 조종하는 인물들이 최고 클라스의 기사들이라는 것을 자랑하듯 마나를 있는대로 낭비하고 있었다. 검에는 기가 응축되어 약간 푸르 스름한 광채를 내고 있었고, 그 검을 가로막는 방패에도 푸르스름한 광채가 배여 있었다. 그냥 강철로 만든 방패였다면 그 검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지 도 모르지만 방패도 기를 응축하고 있었기에 그걸 막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 던 것이다. 적기사를 탄 두 명의 기사들이 제법 반응이 괜찮은 적을 만나 신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그들이 데려온 부하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흑기사도 안티고 네도 둘 다 집단전 전용 타이탄이다. 두터운 방패, 묵직한 몸무게, 강력한 파 워로 서로 난타전을 벌이는 타이탄들이라는 말이었다. 이때는 강력한 파워와 무게가 무거운 쪽이 유리하다. 특히나 안티고네 같은 경우 거의 30년에 걸쳐 흑기사를 상대하기 위해 연구 제작된 타이탄이었다. 동급의 기사가 탑승했을 때 흑기사로 안티고네를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크루마의 정예 레디아 근위기사단과 코린트의 정예 코란 근위기사단이 박터지 게 싸우고 있을 그무렵. 얼마 전 크로미아 성당기사단 단장 레가르가 해군 지 원을 요청했던 아르곤의 항구도시 트라팔 시(市)에서도 대규모 타이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천사의 문양이 그려진 타이탄들과 하얀 유니콘이 그려진 타이탄들이 트라팔 시에서 맞붙은 것이다. "제기랄! 증원은?" 스펜은 악을 썼지만 사실 증원 따위가 올지 안올지 그건 알 수 없었다. 당당 한 덩치를 가지는 라르곤에 타고 있는 성기사들은 성기사들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클라스의 인물들이었기에 겨우 세대의 카마리에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 대들이 아니었다. "카마리에가 나왔으니 이제 완전히 들통난거나 다름없는데, 왜 증원을 안보내 는거야? 제기랄! 위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이 놈이나 저 놈이나 그 년이나…… 다 죽어버려랏!" 스팬 등은 베티 사제, 마리나와 함께 도우러씨를 도와 아르곤 남부의 항구도 시 트라팔 시로 왔다. 도우러씨는 드래곤 본을 화물선에 실어 떠나보낸 후, 창고에서 큼직한 짐마차 일곱 대를 끌고 나왔다. 그의 말로는 트라팔 시에서 선적하여 타국에 수출할 물건이라고 했는데 그것의 호위를 부탁한다는 것이었 다. 스팬 일행은 타론의 지시도 있었기에 도우러씨의 짐마차를 호위해서 트라 팔 시까지 왔다. 트라팔 시까지의 거리는 잘 포장된 육로로 70Km. 늦어도 세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부담없는 기분으로 따라왔던 것이다. 하 지만 짐이 대충 실어졌을 때 아르곤의 성당기사단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이어 진 타이탄 전투. 아르곤의 타이탄들이 비교적 성능이 떨어지는 저급 타이탄임 을 감안한다면 상대는 아르곤의 정예 성당기사단이었다. 세 대의 카마리에는 정말 엄청난 투혼을 발휘하여 상대와 대치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타이탄이 상대보다는 뛰어나고, 또 근위기사단의 정규 멤버라고 해도 그 숫자의 열세를 만회하기는 힘들었다. 상대 또한 정예였고, 정규급 이 상의 타이탄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펜과 아더, 그리고 샤트란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싸웠다. 하지만 순식간에 먼저 샤트란의 타이탄이 파괴되었고, 다음에는 아더의 타이탄이 쓰러졌다. 스 펜의 타이탄 죠르아는 거듭되는 경고를 주인에게 보내고 있었다. <방패 55% 손상, 1차 장갑 12% 손상. 손상률이 복구율을 초과한지 오래다. 후 퇴하는 것이 좋겠다.> "닥ㅊ! 누가 몰라서 싸우는 줄 알아? 쓸데 없는 곳을 복구할 생각 하지 마. 시간을 끌어야 해." 죠르아는 그 거대한 방패를 들어 상대의 검을 막으면서 한편으로는 열심히 검 을 휘둘렀다. 하지만 곧이어 등뒤에서 묵직한 충격과 함께 거대한 검이 몸통 깊숙히 박혔다. 죠르아는 재빨리 뒤로 돌면서 비겁한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둘 렀다. 하지만 그 자리에 놈은 없었다. 그리고 뒤로 정신을 판 것을 기회라고 생각한 여태껏 죠르아와 격전을 벌이던 세 대의 타이탄이 재빨리 기습을 가해 왔다. 그리고 죠르아는 그 거대한 덩치가 서서히 아래로 무너졌다. 이때 화물선 위에 희뿌연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희뿌연 빛은 곧이어 사 라졌고 바로 그 자리에는 거의 20여명에 달하는 무사들이 서 있었다. "제길!" 타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피빛, 즉 검붉은 기분나쁜 색으로 도장해놓은 코린트의 신형 타이탄. 처음에 방패를 들고 있지 않았을 때 대충 눈치챘지만, 이정도로 대단할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대충 눈어림으로 봤을 때 흑기사하 고 무게가 비슷한 것 같았는데, 그 파워는 흑기사는 따라오지도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거기다가 그 속에 어떤 재수 없는 놈이 타고 있는지, 도대체 인간 이라고 보기 힘든 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투캉--- 타론이 내려찍은 길이 3미터가 조금 넘는 그린 드래곤의 뼈로 만든 드래곤 킬 러를 상대는 가볍게 소드 스톱퍼로 막으면서 검을 내려찍어왔다. 놀랄만치 재 빠른 움직임. 사력을 다해 방패로 막자, 그 방패에서 주어지는 충격까지 이용 해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려 도망치는 얄미운 놈. 거기에다가 엄청난 속도와 도 약력이 있다보니 상대의 공격 속도는 정말이지 눈으로 따라잡기도 힘들 정도 였다. 벌써 타론의 안티고네는 방패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곳곳의 1차 장갑에 흠 집이 파여져 있었다. 타론이 이정도나 버티고 있었던 것도 강력한 드래곤 본 으로 만들어진 드래곤 킬러 덕분이었다. 안티고네의 기본 무장으로 채택된 강 철검이었다면 벌써 두토막이 났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상대의 실력은 대 단했다. 또 타론이 살아있을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상대가 타론이 제법 발 악을 하자 그걸 즐기면서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즐기고 있었던 덕도 있 었다. 흑기사들은 안티고네에게 상당히 밀리고는 있었지만, 어느정도는 버텨 주고 있었고, 한쪽의 루엔 공작이 조종하는 안티고네는 적기사와 거의 대등한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타론의 안티고네만이 곤죽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마나를 충분히 실은 중후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그 음성의 주인은 루엔 공작이었다. "퇴각하랏!" 루엔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안티고네들은 흑기사들에게 맹공을 가해 거리를 벌렸다. 그런 후 재빨리 뒤로 돌아서서는 타론이 상대하는 적기사쪽으 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적기사는 일순간 앞과 뒤에서 적을 상대해야 하는 난 감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자 뒤로 조금 물러서며 곧장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 다. 그와 동시에 시퍼런 강기(剛氣)가 달려드는 안티고네들에게로 폭사되어 날아갔다. 하지만 안티고네들은 재빨리 뛰어올라 피했다. 하지만 안티고네를 추격하던 흑기사들은 안티고네의 그 거대한 덩치에 가려 상관이 쏘아날린 강 기를 포착하는 시간이 조금 늦었다. 그덕분에 그들은 지척에서 도망치던 안티 고네들이 뛰어오른 후에야 앞에서 대기를 관통하며 무서운 속도로 접근중인 시퍼런 강기다발 발견했고, 그야말로 기겁을 해서는 회피동작을 취했다. 흑기사들이 일순간 추격을 늦춘 사이 안티고네들은 급속도로 적기사와의 거리 를 좁혔다. 적기사는 일단 포위당하는 것은 면하기 위해 재빨리 뒤로 후퇴했 다. 아무리 적기사를 타고 있는 마스터급의 검객이라고 해도, 저런 거대한 덩 치들에게 포위당하면 옴치고 뛸 공간이 제약당하고 그 다음은 죽음이었기 때 문이다. 적기사가 뒤로 재빨리 물러난 틈을 이용해서 안티고네들은 황급히 후퇴를 시 작했다. 110톤이 넘는 거대한 덩치의 안티고네들이 거의 시속 100Km에 달하는 속도로 달려가자 지축이 흔들거리고, 땅바닥이 푹푹 파이면서 먼지가 솟아올 랐다. 이때 부하들과는 달리 가장 뒤에 쳐져서 적기사와 상대하고 있던 루엔 공작은 자신의 마나를 있는대로 끌어모아 무시무시한 공격을 상대방에게 퍼부 었다. 여태껏 안티고네가 지니는 두터운 장갑과 방패를 이용해서 줄곧 방어만 해오 던 루엔 공작의 공격에 상대가 찔끔 한 사이 안티고네는 살짝 이동해서 화물 선과 자신의 안티고네 사이에 적기사를 위치시켰다. 그런 후 안티고네는 1.5 톤이나 되는 그 거대한 검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아래로 힘껏 내려치며 시퍼런 강기를 뿜어냈다. 적기사는 그 기동력을 십분 이용해서 재빨리 옆으로 피했 다. 강기 다발을 맞받아 칠수도 있는 노릇이었지만, 그렇게 힘빠지는 바보짓 을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엔 공작이 노린 것은 적기사가 아니 었다. 타이탄의 검에서 발사된 마스터만이 형성시킬 수 있는 유형의 검기, 즉 검강 덩어리는 루엔 공작의 의도대로 화물선을 직격했고, 화물선은 강기와의 충돌로 주위에 솟아오른 엄청난 물보라와 함께 두토막이 되어 침몰해버렸다. 화물선이 박살나는 광경을 보며 코린트의 타이탄들은 흠칫 하며 동작을 잠시 지만 멈췄다. 그 사이에 루엔 공작은 재빨리 안티고네를 조종하여 이 난장판 을 벗어나 버렸다. 공간이동 해온 인물들 중에서 한명이 슬쩍 앞으로 나서서는 난간을 짚고 화물 선의 아랫쪽을 바라봤다. 난간을 꽉 잡은 손은 투명하다고 부를만큼 한점의 티끌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녔는데도 그녀의 허리에는 고풍스런 아름답 게 세공된 롱 소드가 매달려 있었다. 허리까지 기른 갈색의 아름다운 머리카 락을 그 섬세한 손으로 슬쩍 쓰다듬어 뒤로 넘긴 후 다시금 난간을 살짝 잡아 몸을 기대면서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 싸늘한 어조로 외쳤 다. "멈춰랏!" 약간 앙칼진 듯 들린 그녀의 말을 성기사단이 들을 이유가 없었지만, 성기사 단은 동작을 멈췄다. 보통의 성기사들은 모르겠지만 타이탄에 탑승한,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성기사들은 상대의 음성에 실린 그 강렬한 마나의 기운을 읽었 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우뚝 서버린 성당기사단의 타이탄들을 오만하게 둘러본 후, 위엄어린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아르곤의 영토. 하지만 본국의 근위기사단을 공격한 이유를 듣고싶 다. 본국은 '도우러'라는 상인에게 의뢰해서 아르곤 특산의 양탄자, 금은 세 공품, 도자기 등 황실물품을 수입했고 그 호위를 저 세 명의 근위기사들에게 맏겼다. 그대들은 저 화물에 찍혀있는 크루마 황실의 문장이 보이지 않는가? 저건 황제 폐하께 바쳐질 물건이다. 그런데 그걸 운반하는 것을 저지하는 이 유가 무엇인가? 또, 모든 국가가 다 아는 레디아 근위기사단의 타이탄인 카마 리에를 세 대나 파괴한 이유는? 만약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나, 미네 르바의 이름을 걸고 그대들을 응징하겠다." 갑작스런 미네르바와 거의 20여명에 달하는 기사들의 출현에 성당기사단 단장 지넨은 상당한 혼란을 느꼈다. 그녀가 한 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국제적 관례상 합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첩자의 보고를 토대로 확신할 수 없는 사항을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곧장 화물선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고, 레 디아 근위기사단임이 확실한 상대를 셋이나 해치웠다. 물론 나중에 심문할 목 적으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타이탄은 확실하게 저세상에 간 상태였다. 만약 상대가 별볼일 없다면 우선적으로 헤치워 입을 막아버린 후 뒷수습을 할 방법도 있겠지만 상대는 미네르바. 저 유명한 헬 프로네의 주인들 중의 한명 이었다. 그녀가 왔다는 것은 그녀의 뒤쪽에 서있는 자들 또한 근위기사들이라 는 말. 그들과 싸워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 크루마 황제의 인장이 찍힌 화물을 수색하자는 말을 확실한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는 할 수 없었 다. 첩자의 보고에도 화물은 배를 이용하여 랜트 연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빼돌릴 예정이고, 자신들은 또다른 화물을 가지고 마차로 이곳으로 온다고 하 지 않았던가? 하지만 위에서는 이쪽이 '진짜'일 것이라고 보고 주력인 타리아 기사단을 비밀리에 이리로 돌린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이쪽이 진짜가 아닌 '미끼'라면? 그걸 모르고 이쪽에서 강경 하게 나간다면, 일단 미네리아는 후퇴해서 화물을 검사할 수 있게 해줄 것이 다. 여기는 아르곤의 영토니까 말이다. 그렇게 해서 크루마 제국 황제의 인장 을 무시하고 봉인을 뜯어낸 후 화물을 검사했을 때 만약 아니라면 어떻게 될 까? 국제적인 망신이었고, 최악의 경우 전쟁까지도……. 지넨은 자신의 타이탄의 머리를 들어올린 후 상체를 드러내고는 정중하게 미 네르바 공작에게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미네르바 공작 전하. 아무래도 서로간에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 희들은 상부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크루마의 정예인 것 처럼 위장하여 본국의 보물들을 가지고 달아나는 중이라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이 배는 곧장 출항할 듯 했기에, 너무 시간이 없어 바로 수색, 체포를 명했고 귀국의 근위기사들이 곧장 타이탄을 꺼내 공격해왔습니다. 저희들은 처음부터 무력을 사용할 의도 가 없었습니다. 저들이 먼저 타이탄을 꺼내 공격을 해왔기에 부득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물론 지넨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도중에 말하지 않고 건너띈 부분은 많았 지만 말이다. 아무튼 샤이하드를 받드는 크로노스 교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상대가 숙이고 들어오자 미네르바도 어느정도 수그러 들 수밖에 없었다. 성기사는 신을 받드는 사제. 보통의 무사들과 동급에 놓을 수는 없었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들의 문장을 보니, 아르곤의 정예인 타리아 성당 기사단임이 분 명한데 왜 수도 근처가 아닌 이런 변방에 있는 거지요? 겨우 해적들 정도라면 변방에 4개의 성당기사단들 중 하나만 동원해도 충분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내가 잘못 알고 있는것인가요?" "공작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본국에는 지금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들이닥쳐 그곳에 2개 기사단이 동원되었기에 이번 임무는 어쩔 수 없이 저희 들이 해야 했습니다." "좋아요. 그건 그렇다고 하고, 타리아 기사단 정도라면 타이탄 몇대만 꺼내어 서로 대치하면서 서로간에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을거 아닌가요? 그런데 왜 본국의, 그것도 황제 폐하께서 아끼시는 근위기사단의 기사들을 다치게 만들 었나요? 합당한 이유를 들려줘요." 지넨은 여자라고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광포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는 미 네르바의 눈길을 받으며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상대가 카마리에를 꺼냈을 때 그걸 짐작했어야 하는데…… 도둑질을 하면서 내가 훔쳐갔다 하고 광고하지 않듯, 누구나 다 알고있는 크루마의 근위 타이탄을 끌고 대담하게 드래곤 사냥을 한 후 꿀꺽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넨의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희쪽에서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양해를 바랍니다. 저 타이탄에 탄 기사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물론 타이탄을 고물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사 과와 함께 변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여기서 '변상'은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타이탄 한 대의 가 격이 술 한 병 정도의 가격이라면 몰라도…… "좋아요. 그쪽이 오해였다니,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외교적 경로를 통해 교 황(敎皇) 폐하께 엄중히 항의할 생각이에요." "예. 그건 지당하신 의견입니다." "좋아요. 저것들을 실어라." "옛, 공작 전하!" 미네르바의 명령에 기사 몇 명이 배에서 하선한 후 각자의 타이탄(카마리에) 을 불러낸 후 엄청난 마나의 소모로 기절한 기사들을 꺼냈다. 그런 후 검을 뽑아들고는 솜씨있게 고철이 된 카마리에를 토막내기 시작했다. 그래야 화물 선에 싣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미네리아는 부하들이 토막난 카마리에의 잔해들을 화물선에 적재하는 것을 건 성으로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곳으로 크루마의 화물이 이동하 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번 작전을 위해 도우러를 고용해, 일단 황실 소모품들을 구입하고, 그걸 상자에 담았다. 그런 후 그린 드래곤의 뼈 또한 상자에 담았다. 그걸 바꿔치기 한 곳은 창고였고 창고에서 화물선에 곧장 적재된 화물은 황실 소모품이 들어있던 상자들이었다. 왜 미끼 에 황실 소모품을 썼느냐 하면, 이걸 샀다는 것에 대한 정보가 상인들을 통해 널리 퍼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르곤은 당황할 것이고, 일단 아르곤 영토 내에서 소수의 정규 군으로 전쟁을 벌일수는 없었기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어쨋든 그건 성공했고 저기 있는 멍청한 성기사 녀석은 완전히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국의 황실 소 모품을 뒤진다는 것은 자살행위였기 때문이다. "출항!" 미네르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배를 항구에 묶어두 고 있던 밧줄들이 풀려 나갔고, 화물선이지만 상당히 날씬하게 생긴 크루마 황실 전속 화물선은 서서히 항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 화물선은 보통 연 안 화물선이 노예들의 노동력으로 움직이는 갤리선(노를 저어 움직이는 배)이 아닌 외해에서도 활동 가능한 거대한 돗들로 움직이는 배였다. 미네르바는 이 제 더 이상 육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나오자 생각을 정리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똑똑…… "예." 맑고 청아한 음성이 방문객을 반겼다. 미네르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선실 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오랜 여행에 지쳐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 커다란 눈망울로 방문객을 잠시 바라본 후, 그제서야 상대 가 누군지 생각이 난 듯 황급히 일어나서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공작 전하를 뵈옵니……컥---!" 미네르바의 검이 언제 뽑혀 나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 아름다운 여인이 인사를 하는 그 짧은 순간 미네르바의 검은 검집을 벗어났고, 곧이어 그 검은 여인의 몸속에 들어가 있었다. 오른쪽 어깨 깊숙히 검이 꼽힌 여인은 고통에 부들부들 떨면서 가련한 음성으로 말했다. "왜…… 왜……?" 눈물에 젖은 가련한 여인의 눈을 노려보면서도 미네르바의 눈은 여전히 냉랭 했다. 미네르바는 얼음장 같은 어조로 말했다. "베티 도니안 사제. 너는 아르테미스 신을 섬기는 사제라고 했지? 그렇다면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해라. 샤이하드란 신은 없다. 크로노스 교는 사이비(似 而非) 종교다. 오직 신은 아르테미스 뿐이다. 따라 햇!" 하지만 베티는 그 말을 곧장 따라하지 않았다. 베티의 눈에 갈등이 어리기 시 작했다. 구차한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순교자(殉敎者)가 될 것인가? 하지 만 그녀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달의 여신을 섬겨야 할 아르테미스 신의 사제라면 응당 미네리아의 말을 따라 했겠지만, 그것을 순간이나마 망설 였다는 자체가 그녀는 아르테미스의 사제가 아니라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의 검은 곧장 옆으로 쭉 그어졌고 곧이어 베티의 몸은 두토막이 난 채 쓰러져버렸다. 미네르바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버린 후 검집에 천천히 검 을 꽂아 넣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생각 대로였어." 일단 이렇게 해서 크루마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그린 드래곤의 뼈를 세금 한 푼 안내고 꿀꺽 해버리는데 성공했다. 물론 차후에 침몰한 화물선에서 나온 잘 포장된 물에 젖은 카페트나 각종 금은 세공품 따위를 보고 아르곤은 크루 마가 그걸 털도 안뽑고 꿀꺽 했다는 것을 알고 광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아르곤과 크루마는 인접한 국가도 아니었고, 서로의 국력은 거의 동등한 상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들의 기사단 한 개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기에 크루마로서 맨입으로 사건을 무마할 수는 없 었다. 크루마는 아르곤을 무마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카마리에에 들어가는 엑스시 온 30개를 5년 내에 아르곤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1.5라는 고출력 엑스시온을 판매하는 나라는 없었기에, 아르곤은 그 제 의를 받아들였다. 그들도 이번의 전투를 통해 신앙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 이 있다는 것을 깨닳았기 때문이다. 아르곤이 자랑하는 성당기사단의 타이탄 은 너무 구형이었고, 아르곤의 미래를 위해서는 신형의 고출력 타이탄이 많이 있어야만 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아르곤은 대대적으로 타이탄을 신형으로 교 체하기 시작했다. "추격 중지!" 제임스의 외침에 안티고네를 추격하여 달려가던 흑기사들이 멈춰섰다. 제임스 는 상대방의 저 강력한 타이탄들 중 한 대라도 박살내서 본국으로 끌고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잠시 갈등했었다. 비록 파괴된 엑스시온일 망정 그걸 들고 가면 코린트 제국이 자랑하는 대마법사 그라세리안 코타스가 저 신형 타이탄 의 비밀을 하나하나 밝혀낼 수 있을 것이었다. 엑스시온에 새겨지는 각종 주 문은 더없이 중요한 자료들 중의 하나니까 말이다. 물론 그걸 보자고 멀쩡하 게 살아있는 타이탄을 죽여서 분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가 좋아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제임스에게는 적국 신형 타이탄의 포획이 아닌, 드래곤 본 의 포획이라는 명령이 먼저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우선적으로 침몰한 화물선에서 드래곤 본을 꺼낸 후 본국으로 수송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우선 이었다. "끌어 올려라." 제임스의 지시를 받은 흑기사 한 대가 방패와 검을 놔둔 채 운하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며 흑기사는 물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물론 타이탄은 육중한 무게 덕분에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물속을 걸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타이탄의 조종석은 방수가 되는 구조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종자가 물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순간까지는 상관없었다. 보통 사람이 죽자고 물속에 서 호흡을 멈춘다면 3분정도밖에 못 버티지만, 그래듀에이트급에 이르는 무술 의 고수는 3분이 아니라 10분 이상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 약 8분 정도가 지 나고 나자 흑기사는 화물이 들어있는 상자 몇 개를 가지고 나왔다. "흐흐흐흐…… 이제 드래곤 본은 본국의 것이군." 제임스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흑기사가 내려놓은 상자 몇 개를 지켜봤다. 이윽고 부하 한명이 검을 꺼내서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을 잔뜩 기대감 어 린 표정으로 들여다 본 제임스의 얼굴을 똥색으로 바뀌어버렸다. "이게…… 이게 뭐야?" 그 속에는 물에 잔뜩 젖은 지푸라기 등으로 조심스럽게 감싸진 도자기 몇 개 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다른 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자 신의 타이탄을 공간 저편으로 보내버린 까미유가 다가오더니 상자속을 훑어본 후 말했다. "화물선은 내륙 항해용 중형(中形) 선박이야. 150톤의 화물은 실을 수 있는 놈이었지. 드래곤 본은 지아무리 무거워 봐야 대형마차 7대로 옮길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 그 배 안에는 드래곤 본 외에도 많은 화물들이 들어있다는 말 이야. 배를 아예 꺼내서 보는게 빠를거야." "자네 말도 일리는 있군. 이봐! 죠드!" 그러자 뒤에서 껄끄러운 노마법사의 목소리다 대답했다. "예. 후작 각하." "저 화물선을 꺼낼 수 있나?" "화물선을 꺼내기는 힘듭니다. 화물선의 전체 무게는 300톤이 넘어갑니다. 설 혹 그게 두토막이 나있다고 해도 제 능력으로는 들어올리기가 힘듭니다. 저와 동급의 마법사가 두명 더 있다면 양방향에서 물을 막고 토네이도(Tornado)를 사용해 물을 퍼낼수 있겠지만, 그 모든 마법이 6싸이클급 마법사 한사람이 한 군데씩 맏아도 벅찬 작업이죠. 코타스 공작 전하라면 모르겠지만……" "하기야…… 운하를 막고 물을 뺀다는게 누구 말대로 쉬운 거라면 마법사가 이 세상을 지배했겠지. 어떻게 한다?" 제임스는 생각에 잠긴 채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의문에 까미유는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곧장 답했다. 마법으로 안된다면 물리적인 힘으로 해 결하면 되니까 말이다. "끌어 당가면 되지. 밧줄 하나 구해다가 토막난 선체를 묶은 후 타이탄들로 그 줄을 당기는 거야. 간단하게 들어낼 수 있지." 노마법사는 까미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임스의 지시를 기다리지도 않고 비행마법을 사용해서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런후 노마법사는 거의 해질 무렵 이 되어서야 마차 한 대를 끌고 돌아왔다. 노마법사가 돌아왔을때는 모든 일 행들이 운하 옆 한 군데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일단 이렇게 늦어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일은 다음날에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다음날 침몰된 화물선을 끌어올렸을 때 아무리 뒤져도 드래곤 본은 커 녕, 와이번 뼛조가리도 하나 안나왔다. 그제서야 자신들이 완전히 상대방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제임스는 신경질 머리 끝까지 올라 기껏 끌어올린 화 물선을 운하속에 쳐넣어버렸다. "젠장할! 지원까지 받고도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가야 하다니…… 으윽! 아버 지 얼굴을 어떻게 보지?" 뒷일을 상상하며 새파랗게 질려있는 제임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툭툭 두들기며 까미유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공작 전하께서 신경질 나봐야 별 수 있었냐? 한번씩 실수 할 때마다 외출 금지된 상태의 수련이었잖아? 뭐, 매번 실수할때마다 일 주일씩 그 기간이 늘었으니까, 아마 이번에는 다섯 주일 수련이겠지. 나야 자네가 부 럽다네. 모든 코린트의 젊은이가 꿈에도 그리는 공작 전하와의 비무도 매일 하고 말이야. 이번 수련이 끝나면 또다시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겠군." 하지만 그것은 말이 좋아 비무였고, 그야말로 개맞듯 매일 두들겨 맞아야 했 다. 수준이 비슷해야 비무가 되는 것이고, 또 서로간에 양보를 어느정도 해줘 야 비무가 될 것이 아닌가? 까미유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짐짓 위로하는 척 하면서 제임스를 놀리고 있었던 것이다. 까미유의 말에 제임스의 안색이 더욱 핼쑥해졌다. 생각하기도 싫은 비무장면 이 기억났던 것이다. 무려 다섯 주일 동안이나 화풀이 대상이 되어 주어야 하 는 것이다. 다섯 주일…… 35일…… 840시간…… 5만 400분…… "제기랄! 그게 부러우면 네녀석이 대신햇!" 제임스의 말에 까미유는 짐짓 몸서리쳐진다는 듯한 행동을 과장해서 나타내며 느글느글하게 말했다. "무슨 그런 끔찍한 악담을…… 자네니까 그걸 견디지, 보통 사람이면 일주일 도 못 버티고 자살할걸? 더군다나 나는 자네도 알다시피 아주 섬세한 사람이 라구. 그건 그렇고 자네한테 만회할 기회가 있지." 그 말에 제임스는 솔깃해서 물었다. "뭔데?" 까미유는 턱으로 슬쩍 운하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아서 나른한 듯 하품을 하 고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저 애는 대단한 실력자야. 정령술에 있어 꽤나 높은 실력과 함께 가능성까지 가진 아이지. 또 상당한 실력의 검술까지 익히고 있어. 저 아이를 납치해 간 다면 인재를 아끼시는 공작 전하께서 꽤나 흡족하게 생각 하실걸? 그런 후 공 작의 기분이 좋을 때, 이번 사건에 대해 말하고 크루마의 처분에 대해 말씀 드리는 것이 자네 장수에 도움이 되겠지. 어때?" 하지만 제임스는 까미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상 다크의 마법이라고 는 풀위를 걸어다닌 것 외에는 본게 없으니 당연했다. 비행마법을 이용해서 몸을 가볍게 한 후 풀위를 걸어 다니는 척 하는 거야 별로 고난도의 기술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못믿겠다는 듯이 제임스가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그정도로 대단해?" "정말이라니까. 지네느의 말로는 잘만 교육시키면 정령왕의 힘까지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정령왕이라고? 그럼 마법으로 치면 어느정도야?" "놀라지 마. 무려 7싸이클이야. 그것도 정령마법의 특성상 주문없이 7싸이클 이라구. 100만 기간트라급의 위력이지. 물론 지금은 그정도가 아니지만 말이 야." "좋아. 한번 해보자구." 까미유와 제임스는 머리를 맞대고는 소녀를 어떻게 유괴(?)할 것인지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물론 뒷통수 한 대 때린 후 기절시켜서 운반하는 것이 가 장 쉬운 방법이었지만, 납치만 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코린트 제국의 정령사 로서 포섭할 것이기에 어린 소녀에게 그런 무식한 방법을 동원할 수는 없었 다. 첫인상이 좋아야 그 다음 일도 부드럽게 진행될 것이 아닌가? 한참 의논을 한 후 그들은 일단은 미끼를 동원해서 제발로 찾아들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입을 맞췄다. 만약 말을 안듣는다면 마법으로 잠재우던 지, 그도 안된다면 최후에는 무력(武力)을 동원하기로 했다. 또 상대가 정령 사기에 시동어를 외울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하므로 그들은 천천히 소녀를 향해 함께 걸어갔다. 일단 소녀를 꾀기로 한 제임스는 소녀의 앞에서 말을 걸고 까 미유는 슬쩍 소녀의 뒤쪽에 위치했다. 협상 결렬과 동시에 주문이고 뭐고 외 울 시간여유를 주지 않고 기절시킬 생각으로 말이다. "다크?" "왜?" "혹시 코린트 제국에 가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전에 보니까 드래곤에 꽤 흥미 가 있으신 모양이던데, 코린트에도 드래곤은 많이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열 마리 정도 살고있죠. 아마도 더 많은 드래곤이 살고 있을겁 니다. 또 마법사시니까 마법에도 꽤 흥미가 계실겁니다. 저희 코린트에는 자 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대마법사 그라세리안 코타스 공작께서 살고 계십니다. 그분께 마법을 배우실 수 있는 영광된 자리를 주선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또 코린트에는 아주 경치좋은 곳도 많고 볼 거리도 많습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 을 자랑하는 강대한 제국이기 때문이죠. 또 오는길에 보니까 술도 즐기시는 모양이시던데 코린트 특산의 '칼레온'은 독하면서도 그윽하고 깊은 향기를 지 녀 많은 사랑을 받는 술입니다. 절대 코린트를 여행하신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떻습니까?" 제법 며칠 함께 여행하면서 상대의 취향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제임스 의 말은 꽤나 다크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드래곤, 마법, 술. 거기다가 새로운 볼거리. 다크가 어느정도 제임스의 말에 흥미를 가지는 듯한 눈치를 보이자 제임스는 더욱 신이나서 떠들었다. "…… 거기에다가 황도(皇都)인 코린티아 시가지(市街地) 주위를 흐르는 도나 우강에서 잡히는 민물고기 요리는 매우 유명합니다. 송어, 잉어, 매기 등을 주로 이용하는데 특히 송어요리는 모든 여행객들이 즐기는 최고급 요리지요. 거기에 크로나사 지방에서 생산되는 백포도주까지 곁들이면 정말 입에서 살살 녹습니다." 제임스는 교활하게도 배 인양작업이 다 끝난 후라서, 이제 점심때가 다 되어 가는 점까지 이용해서 음식 얘기로 말을 마쳤다. 안그래도 배가 슬슬 고파오 는 형편에 맛있는 음식 얘기까지 들으면 솔깃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 가? "흐음…… 하지만 코린트는 너무 멀잖아?" "아닙니다. 가져갈 화물도 없으니 바로 마법진을 그려서 공간이동을 하면 됩 니다. 시간도 얼마 안걸리죠. 점심식사는 백포도주로 찐 맛있는 송어찜을 드 실 수 있을겁니다. 그리고 식후에는 코린티아 시내에 있는 많은 볼거리들을 구경하실 수도 있을 거구요." 바로 갈 수 있다는 것에 적잖이 마음이 움직인 소녀는 옆에서 지미나 라빈이 제지하기도 전에 승낙 하고야 말았다. "좋아. 코린트에 가기로 하지." 소녀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지미와 라빈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말했다. "안됩니다." 그리고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화이어헤머도 한마디 덧붙였다. "나도 그 악의 제국에 갈 생각은 없소." 화이어헤머는 반쯤은 포로나 다름없는 형편이었기에 스리슬쩍 벗어날 방도만 궁리하는 중이었는데 만약 코린트로 간다면 재수 없으면 사형까지 당할 가능 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을 쭉 훑어본 후, 마지막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파시르까지 슬쩍 바라본 후 딱딱한 어조로 말 했다. "내가 간다고 했으면 가는 거야." 소녀의 말에 화이어헤머는 하마터면 욕설을 퍼부을 뻔했다. 이런 멍청하고, 지잘난 맛에 살고있는 어린 계집하고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의 저주였다. 자신은 거의 포로나 다름없으니 거기 가면 재수없으면 사형당할 가능성이 다 분했고, 저들이 소녀를 왜 데려가려고 하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 녀 외의 인물들도 거기에 가서 환영받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저 코린트 일당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저 두명이 꽤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녀 한 명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화이어헤머의 의견은 묵살되었고, 소녀가 한번 결론을 짓자 반대하던 두 수련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파시르야 처음부터 조용했으니 어쨋거나 싫던 좋던 코린트 행은 결정되고 말았다. 제임스가 손짓을 하자 노마법사는 재빨리 거대한 이동용 마법진을 그리기 시 작했다. 물론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낸 후 병속에 들어있던 하얀 가루를 조금 뿌리면서 마법진을 그리는 마법을 사용한 것이었 다. 이런식으로 마법진을 그리면 바람 한 번 불고나면 마법진이 완전히 없어 지므로 추격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들의 행방을 알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했기 에 상당히 마법사들 간에 애용되는 방법이었다. 마법진이 완성된 후 그들은 모두 마법진 위에 올라섰고 곧이어 뿌연 광채를 흘리면서 사라져버렸다. 일행이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한 그곳에 하루쯤 지난 후 또다시 손님들이 찾아 들었다. 손님들의 숫자는 여섯 명. 그들 중에는 익히 잘 알고있던 미카엘, 팔 시온이 포함되어 있었고 또 한명 아르티어스 어르신도 끼어 있었다. 선두에 서서 여기저기를 관찰하고 있는 기사는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나이 에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기른 노련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뒤늦게 일행에 합류한 아르티어스에게 공손 하게 말했다. 상대는 황제폐하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있는 토지에르 공의 친 필 서한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거기에다가 그가 여태껏 함께 여행하면서 보통실력이 넘는 대단한 마법사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 했기에 절대로 경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흔적이 끊겼습니다." 아르티어스는 팔짱을 낀 채 지면에 여기저기 수놓아져 있는 타이탄의 거대한 발자국들을 모며 말했다. "이건 또 뭐야? 여기서 뭔가 크게 한바탕 한 모양이군." 지면에 패여있는 거대한 타이탄의 발자국들을 주의깊게 살펴본 후 그 기사는 재빨리 말했다. "예. 상당수의 타이탄이 여기서 싸웠습니다. 원체 발자국이 어지러워 몇대나 동원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세 종류의 타이탄이 싸웠습니다. 두 종류는 코린트 제국의 것이고 한 종류는 크루마 제국의 것입니다." 기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약간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호…… 자네 안목이 대단하군. 마법도 쓰지 않고 어떻게 알았나?" 아르티어스의 질문에 기사는 여기저기 찍힌 거대한 발자국들을 손짓해서 가리 켜 보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마법을 쓴다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만, 저 발자국은 분명히 코린트 에서 사용하는 타이탄들의 발 모양입니다. 또 저 발자국들을 유심하게 살피면 각 타이탄들이 사용한 검법의 검형(劍形;form)을 알 수 있죠. 저 발자국으로 보건대 코린트 정규 기사단에서 교육하는 코린티아 검법입니다. 코린티아 검 법은 코린트의 삼대 무가(武家)라고 할 수 있는 발렌시아드가, 로체스터가, 크로데인가의 검법을 합쳐서 만든 것이죠. 또 이 발자국들의 깊이 등을 봤을 때 타이탄들의 무게는 거의 100톤이 약간 넘는 정도. 그렇다면 결론은 코린트의 근위 타이탄인 흑기사입니다. 또 저쪽 에 찍힌 발자국은 100톤 내외 정도 무게로 추측되는데 흑기사는 아닙니다. 왜 냐하면 발자국 모양이 코린트 타이탄의 모양이 아닌데다가 흑기사 보다 조금 더 가볍습니다. 이 두 대는 다른 흑기사들과 실력차이가 상당합니다. 한쪽은 정통적인 발렌시아드가의 검법을, 한쪽은 크로데인가의 검법을 사용하고 있 죠. 모두들 자신의 실력을 십분 발휘한 덕분에 그들의 검법이 완전히 드러나 있는 겁니다. 그만큼 그들의 상대가 강했다는 말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상대가 되는 타이탄은 발자국 모양은 상당히 특이해서 국적을 알아볼 수 없지 만 그 무게는 110톤 정도. 대단히 무거운 타이탄입니다. 이쪽은 크루마 기사 단이 사용하는 크루지에 검법을 사용했습니다만 저쪽에 발자국이 찍혀있는 한 대는 정말 대단한 실력입니다. 크루마쪽의 검법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그렇게 깊게 조사하지 못했기에 어느 가문의 검법인지 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호…… 발자국만으로도 그정도 많은걸 알아내다니 대단하군. 그래 그들이 어 디로 갔는지는 알 수 있나?" "크루마의 타이탄들은 저쪽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남은 코린트의 인물들 과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서는 이쪽에서 공간이동을 하신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구요. 아마도 코린트로 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젠장! 거의 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더니…… 코린트쪽은 좌표를 모르니까 공 간이동을 할 수가 없잖아!" 아르티어스가 투덜거리자 그의 뒷편에 서있던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날카로 운 인상의 마법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르티어스는 마법으로 자신의 모든 기척을 숨기고 있었기에 마법사는 상대가 드래곤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자신보다는 훨씬 윗줄의 마법사라는 것을 아르티어스가 한번씩 보여주는 마법 으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코린트쪽은 철저하게 조사가 되어있습니다. 코린트의 워프 좌표도는 여기 있 습니다." 그러면서 마법사는 품속에서 두툼한 책자를 하나 꺼내서는 아르티어스에게 건 넸다. 아르티어스는 그걸 받아들고는 뒤적뒤적 대충 훑어본 후 말했다. "자네는 어디로 공간이동 하는게 좋을 것 같나?" "일단 상대는 흑기사를 사용하는 근위기사단입니다. 그렇다면 코린트의 수도 인 코린티아시(市)로 갔겠죠. 코린티아시 가깝게 워프하면 발각될 수 있으니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워프하면 눈치채기 어려울 겁니다. 거기다가 도나우강 이 근처로 흐르니까 그러니까 이쯤에 워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마법사가 책자 위에 가리킨 곳은 코린티아 시에서 50킬로미터쯤 떨 어진 도나우 강 위였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정식 궁정 마법사 복장을 한 인물은 화려한 거대한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방 안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다. 하 지만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법사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방의 한쪽 구석 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곧이어 마법사는 환한 햇빛 때문에 눈을 찌푸리 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문은 발코니로 연결되는 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발코니 는 거대한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대단히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넓 은 발코니 위에는 넓직한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고 네 명의 젊은이들이 간편한 복장을 하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법사는 약간 의 시간이 지나 자신의 눈이 빛에 적응이 되자 곧장 발코니를 가로질러갔다. 마법사는 그 사람들 중에서 한 인물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그 인물은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겨우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대공 전하. 후작 각하의 중간 보고가 있었사옵니다." 대공 전하라 불린 그 인물은 자신의 탐스러운 긴 금발 머리를 살짝 뒤로 넘기 면서 말했다. "보고 하라." "예." 마법사는 즉시 자신이 가져온 큼직한 수정구(水晶球)를 테이블 위에 올린 후 주문을 외웠고 곧이어 수정구 안에는 은백색, 적색 그리고 금색이 화려하게 칠해진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각하의 보고로는 이것이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이라고 하옵니다. 무게는 거의 110톤 정도이옵고 헬 프로네의 엑스시온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될 정도로 엄청난 파워를 지니고 있다고 하옵니다." "헬 프로네 인가?……" 대공이라 불린 자의 중얼거림에 그의 앞에 앉아있던 한 인물이 말했다. "크루마라면 헬 프로네의 엑스시온 쯤이야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 그래서 전 투의 결과는?" "예. 상대 타이탄 일곱 대와 본국의 흑기사 다섯대, 적기사 두 대의 격투 결 과 적들은 도주했다고 하옵니다. 상대방에 루엔 공작으로 추측되는 마스터급 의 검객이 있었던 관계로 적 타이탄의 포획은 불가능했었다고 하옵니다. 대신 그들이 운반중인 화물선은 포획했으니, 인양 후 드래곤 본의 분량을 알아본 후 차후에 보고하시겠다고 하셨사옵니다." "좋아. 잘 되었군. 좋은 소식이야. 자네는 가보게나." "옛! 대공 전하." 마법사가 문을 열고 사라지자 대공이라 불린 젊은이는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 었다. "감히 크루마 놈들이 본국에 도전할 생각을 품고 있는 모양이군. 까뮤 자네는 어떻게 하는게 좋겠나?" 그 말에 역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까뮤라는 젊은이는 피식 미소를 지으 며 대꾸했다. 바로 이 젊은이가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으로서 외부에 알려지 기로는 코린트의 세명뿐인 마스터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나중에는 키에리, 자네의 뜻대로 할텐데 왜 물어보나?" 이죽거리는 까뮤의 말에 키에리 발렌시아드 대공은 당치도 않다는 듯 대꾸했 다. 왜냐하면 이 네명. 현재 코린트를 이끌어 나가는 네 개의 기둥인 이들은 젊었을 때 모두 함께 무예수업을 하며 친분을 쌓은 오랜 친우들이었기 때문이 다. "무슨 당치않은 말을 하는거야? 내가 자네들의 뜻을 어기고 독선적으로 행동 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나? 자, 모두들 의견을 말해보게." "흠, 나는 가급적이면 녀석들이 커지기 전에 박살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 어차피 녀석들이 드래곤 본을 획득하기 위해 무리수까지 쓰는 것을 보면 신형 타이탄은 몇대 없을거야. 있다고 해봐야 열 대 안팎. 그것들이 흑기사보다 강 하다고는 해도 30대나 되는 흑기사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겠지. 어차피 드래 곤 본은 우리가 뺏었으니 녀석들은 신형 타이탄 생산에 들어가는 자금을 마련 하는데 상당한 압박을 받을 게 분명해. 본국이 이정도나 되는 흑기사를 마련 하는데는 크라레스 제국 침략이 커다란 공헌을 했지 않았나? 크라레스 침략때 겨우 다섯 대도 안되던 흑기사가 이제는 30대나 될 정도니까 말이야. 그러고 도 돈이 남아서 백기사를 만들었고 말이지. 또 이번에 만든 적기사의 경우 전 대륙에서 적을 찾기 힘든 타이탄이잖아? 지금 공격한다면 별 피해 없이 녀석 들을 멸망시킬 수 있을거야." 까뮤의 옆에 앉아서 그의 말을 듣고있던 상큼한 인상의 여자가 까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흑발을 길게 기른 30대 초반의 여자였 는데 그렇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한 위엄이 느껴지는 특이한 여 성이었다. "까뮤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나는 전쟁은 반대야. 사신을 파견하든지 해서 천천히 외교적으로 압력을 가해서 그들이 가진 헬 프로네의 엑스시온 설계도 를 뺏고, 더 이상 그것을 생산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내기만 하면 돼. 그 들은 힘에서 밀리니까 어쩔 수 없이 이쪽의 제안에 따르리라고 생각해." 하지만 까뮤는 그 여자의 의견이 마음에 안드는 듯 곧장 대꾸해왔다. "리사. 무슨 말을 하는거야? 그런식으로 설계도 한 장 뺏고 군비증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따위 얻어내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거지? 설계도 따위 얼 만든지 복사본을 만들 수 있다구."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부인. 그녀는 크로데인 가를 대표하는 검객이었지만 사 실 그녀는 크로데인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크로데인 가문에서 검술 수업을 쌓았고, 코린트에서 여자로서는 유일하게 마스터의 위 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제 고인이 되어버린 쟈크 드 크로데 인 후작이었는데, 전통적인 검가에서 태어나 갖은 구박을 받으며 마법사의 길 을 택한 그는 겨우 5싸이클 정도밖에 안되는 마법사였지만, 뛰어난 실력의 음 유시인이었기에 그의 구애의 노래 한방에 이성을 상실한 그녀는 그와 결혼했 다. 그덕분에 크로데인 가문은 중간에 맥이 단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코린트 삼대 무가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인 까미유 드 크로데인이 그녀의 바램대로 우수한 검객으로 자라나 주었기에 크로데인 가문의 앞날은 상당히 밝았다. "상대는 드래곤 본을 획득하지 못한 이상, 또 우리가 드래곤 본을 확보한 이 상 적이 될 수는 없어. 그 드래곤 본으로 적기사급 엑스시온을 만들어 새로운 전쟁용 타이탄을 새로이 생산한다면 그들도 더 이상 무리한 군비확장의 꿈은 버릴거야. 이봐, 그라세리안. 사실상 새로운 획기적인 핵(核)이 개발되지 않 고서는 현재로서 출력 2.3이 최고잖아? 우리는 그걸 개발해 냈고 말이야. 그 런데 왜 타국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거지?" 리사의 말에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20대 초반 정도로밖에 안되어 보이는 미녀 가 말했다. 하지만 그 미녀의 목소리는 매우 굵직했다. 왜냐하면 그는 미녀가 아니라 황당할정도로 아름다운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엘프 만큼이나 잘생긴 미남이었는데, 엘프는 아니었다. 바로 그가 그라세리안 코타스로서 코린트 제국 최고의 대마법사였다.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 "리사의 말이 맞아. 루비를 핵으로 삼았을 때 엑스시온 출력의 한계는 2.3이 야. 더 이상 출력을 내려고 했다가는 엑스시온의 출력이 대단히 불안정해지기 시작해서 곧이어 폭주하기 시작, 대폭발로 이어지지. 핑크 다이아몬드도 써봤 는데, 그건 효과가 괜찮더군. 하지만 그것도 2.5 이상은 무리였어. 핑크 다이 아몬드는 구하기가 어려우니까 엄청난 량을 집어넣어야 하는 엑스시온의 핵으 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 지금 본국의 엑스시온 제작기술은 그 어떤 나라보 다 앞서있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그들이 2.2짜리 엑스시온을 생산 한다고 하지만, 그건 헬 프로네의 설계도 대로 만든 것 뿐이야. 설계도만 뺏 는다면 그들은 더 이상 그걸 생산할 능력이 없을거야. 그정도 실력자도 없을 거고 말이야. 그래서 나도 쓸모없는 전쟁은 반대야. 될 수 있다면 평화스럽게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보네. 드래곤 본을 판 돈으로 출력 2.3짜리 신형 전투 용 타이탄을 한 30대 정도 더 만들 수 있을테니 더 이상 크루마가 본국을 넘 볼 수는 없을거야." 그라세리안의 말을 다 듣고난 후 키에리가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의견도 그럴 듯 하군. 하지만 크루마에는 두명의 대마법사가 있어. 둘 다 엘프지. 과거 엘프들이 모여 골든 나이트를 만든 것을 모르나? 엘프들 은 그 나름대로 대단한 기술이 있어. 그 엘프들이 우글거리는 곳이 크루마지. 아마도 크루마는 엘프들의 힘을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한번 맛을 보이는 편 이 좋지 않을까?" 키에리의 말에 리사가 반박했다. "충분히 무력을 쓰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데, 왜 꼭 무력을 쓰려고 하지? 설혹 그들이 대폭적으로 군비증강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그렇게 약하 지 않아. 왜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거야? 너도 벌써 피냄새에 찌들어버렸 니?" 리사의 말투가 점차적으로 고음이 되어가기 시작하자 키에리는 이쯤에서 회의 를 마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지들끼리 싸워봐야 좋을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자자……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치기로 하지. 나중에 아들녀석이 돌아온 후 에 다시 의논해 보자구. 그때쯤이면 모두들 생각이 정리되었을테니까 말이 야." "좋아." 그라세리안은 동료들이 발코니를 떠나는 것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 세명의 자신이 좋아하는 동료들은 거의 60년 전에 자신의 둥지(레어) 근처에 서 만났다. 처음에는 왠 간 큰 놈들인가 싶어서 그냥 가지고 놀다가 간식(?) 으로 삼을 예정이었었는데,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발랄한 패기에 어느덧 마음 이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라세리안은 발코니 옆의 난간에 기 대에 쏟아지는 밝은 햇살에 빛나고 있는 코린티아 시가지를 바라보며 빙긋 미 소지었다. "나의 짧은 유희(遊 )의 결과 치고는 제법 근사하군. 처음의 그 순수한 열정 과 발랄한 패기는 어디로 갔을까? 인간이란 동물들은 짧은 시간 동안에 너무 나도 많이 변하는군. 탐욕……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나도 이제 내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런데, 응?" 그라세리안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시가지의 한쪽 구석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희미하지만 용언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짧은 유희를 즐기는 녀석인가? 저녀석은 좀 더 나은 결과를 얻으면 좋을텐데 말이야. 큭큭큭……" 소녀는 우아한 모습으로 냅킨(napkin)으로 입술을 닦은 후 옆에 인 백포도주 잔을 들어 입가심을 했다. 소녀의 생김새 자체가 원체 아름다운데다가 행동 하나 하나가 꽤나 우아했기에 모두들 실소를 머음을 수밖에 없었다. "으음…… 아주 맛있는 점심식사였어. 나는 원래 소식주의자(小食主意者)인데 …… 오늘은 조금 과식을 했군." 소녀의 말에 일행은 물론이고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범위에 있는 사람들 은 모두들 현기증이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었다. 저렇게 뻔뻔스레 내숭을 떨다니. 왠만한 대식가인 남자라도 두 마리면 식사끝이었는데 송어 찜 두 마 리, 송어 구이 한 마리, 메기 찜 한 마리, 메기 구이 한 마리에 디저트로 수 플레를 세 개나 퍼먹은 후 반주로 백포도주 한 병 반을 마셨다. 도대체가 그 많은 음식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불가사의한 일이었지만 그걸 모두 먹는 걸 보고있는 사람들의 뱃속이 다 느글거릴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할까? 그런데도 그걸 다 먹은후에 한다는 말이 조금 과식했다니, 말이 되느냔 말이 다. "저…… 이제 식사는 끝내신 모양인데, 어디로 가실 건가요?" "볼거리를 보여준다고 했잖아? 당연히 그걸 보러 가야지." "예. 저희 나라는 살기가 매우 좋은 곳이죠. 따라 오십시오. 그리고 너희들은 저녀석을 데리고 돌아가라." 제임스가 턱으로 슬쩍 가리킨 인물은 드워프였다. 드워프는 매우 쓸모있는 존 재였기에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그냥 놔둘리는 없었다. 아마 여기서 끌려간다 면 죽을때까지 노예로서 피땀흘려 일하면서 각종 장신구나 무기들을 생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있는 화이어헤머는 자신을 도와줄 가능성이 그래도 조금이라도 있는 소녀를 향해 절망적인 구원의 시선을 보냈다. 화이어헤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녀에게 시선을 보낸 것이었는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소녀는 즉시 응답을 해줬다. "잠깐, 제임스." "왜 그러십니까?" "저녀석은 내 동료야. 그를 데려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 물론 제임스는 그녀의 말을 안들어도 별 상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마음을 바꿨다. 우선 소녀를 꼬드긴 다음 나중에 드워프를 압수해도 되는 일이었고, 또 소녀의 직위가 올라간다면 소녀의 노예로서 드워프 한 마 리 정도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녀도 여자니까 드워프가 만든 아름다운 장신 구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예.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너희들은 돌아가 봐라. 그리고 아버님께는 내가 직접 보고할테니까 그렇게 전해라." "옛!" 제임스와 까미유는 마법사 영감만 남겨두고 부하들을 모두 성안으로 돌려보낸 후 다크 일행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코린트는 매우 부유하고 강력한 대국이었 기에 볼거리는 엄청나게 많았다. 거대한 신전들, 또 수많은 동상들, 또 분수 대들 등등…… 그 대부분의 것들이 영웅들의 모습을멋있게 새긴 동상이 하나 이상 씩은 있었다. 아르곤의 동상들이 종교적인 것, 즉 사제들이라든지, 유명 한 성인들 혹은 천사들을 조각하고 그린 것이라면 코린트는 신전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예술품들이 영웅들을 그리고 조각한 것이었다. 그 외에 이곳 수도 코린티아 시는 외곽에서 봤을 때 마도왕국 알카사스의 도 시들을 연상시킬 정도로 거대한 마법진으로 얽혀있는 특이한 아름다움을 지닌 도시었다. 물론 마법진의 목적은 알카사스와 같이 방어와 실생활의 편의를 위 한 것이었지만 대마법사 그라세리안 코타스가 직접 설계한 것인 만큼 방어력 은 세계의 각 도시를 감싸는 방어마법진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것이었다. 들리 는 말로는 9싸이클급 공격마법까지 방어가 가능할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사실 타이탄의 발달로 적대국의 도시를 마법으로 파괴하는 행동은 중지되었 다. 왜냐하면 마법으로 도시를 파괴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렇게 해서 그 도시를 뺏는다고 해도 아무런 득이 없기 때문이었다. 7싸이클급 이상의 광범 위 공격마법으로 상대국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 봐야 남는 것은 살아남은 시 민들의 원성밖에 없었다. 그리고 타국이 시민들을 향해 비인도적인 공격을 가 했다고 간섭해올 여지도 있었다. 또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그 일대의 생산력 을 고스란히 뺏는 것은 타이탄들로 도시 외곽에서 간단하게 한판하는 것으로 도 충분히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요즘들어서 도시를 방어마법진으 로 감싸는 것에 막대한 재화(財貨)를 낭비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수도나 몇몇 중요한 도시들의 경우 방어마법진으로 감싸는데, 그 이유는 수도 가 박살나버리면 타이탄의 전력이 아무리 강해도 말짱 헛거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이 영웅의 전당입니다." 그날 저녁 마지막으로 그들이 안내한 곳은 코린트의 영웅의 전당이었다. 제법 국력이 강한 나라들의 경우 일반인이 관람할 수 없는 명예의 전당(여기에 이 름이 오르면 근위대에 소속된 것과 같다.)을 대신해서,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는 '영웅의 전당'을 지었다. 영웅의 전당에는 그 나라의 건국영웅부터 시작 해서 가장 최근에 사망한 영웅들까지 수많은 영웅들의 실물크기의 대리석 조 각상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고, 그들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명예의 전당과 달리 그 영웅들에는 기사나 마법사 외에도 역대 황제들과 황비들, 시 인, 정치가 등도 있었다. 하지만 영웅의 전당에는 현재의 황제, 황비를 제외 하고는 절대로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놔두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인간이 황제 폐하와 같은 등급에 놓인다는 것은 거의 모반에 해당될 정도의 커다란 죄였기 때문이었다. "코린트의 역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코린트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제임스와 까미유는 영웅의 전당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그 인물들의 업적에 대 해 설명해줬다. 그러다 보니 밤이 서서히 깊어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영웅의 전당을 떠나 여관을 찾아 이동했다. 제임스가 선택한 여관은 엄청나게 호화로 운 여관이었다. 물론 제임스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그의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 다. 그의 아버지는 대공이란 칭호를 받은 사람이었고, 그 자신은 후작인 것이 다. 어렸을때부터 온갖 수련으로 육체를 혹사시켰지만, 그것은 수련이었을 뿐 실생활은 호화롭기 그지 없었다. 30명의 고용인과 300여명의 노예, 그리고 영 지에 있는 5만명이 넘는 농노(農奴)들이 있는데 그 생활이 호화롭지 않을 수 가 없었다.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내일은 저희들이 아침에 볼일이 있으니까 점심 식사때 뵙기로 하죠." 제임스는 소녀에게 인사를 건넨 후 그녀의 방에서 나와서는 아래로 내려와 노 마법사를 불렀다. "죠드!" "예. 후작 각하." "나는 까미유와 함께 궁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점심때쯤 돌아올거다. 그동안 여기를 부탁한다. 무슨 일이 있다면 연락하도록!"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이제 일은 거의 80%쯤 성공한거나 다름없었기에 궁으로 돌아가는 제임스, 까 미유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퍽! 쿠당. 처음에 키에리 발렌시아드 대공은 새로운 인재를 구해왔다는 보고를 듣고는 매우 유쾌한 기분으로 보고를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번째 보고가 이어지 자 키에리 나으리는 마스터라는 그 이름값을 해보고 싶다는 듯 느긋하게 앉아 있던 자리에서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나서 자신이 사랑하는 셋째 아들의 뺨 을 사정없이 날려버렸다.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 의 빠름이었다. 한 대 맞고는 거의 3미터는 날아가서 책장에 처박힌 후 뻗어 버린 아들을 향해 살기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키에리는 으르렁거렸다. "다시 한번 더 말해봐!" 한방에 기절해버렸는지 미동도 하지 못하고 있는 제임스를 대신해서 옆에 서 있던 까미유가 재빨리 대답했다. 굳건하게 서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다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겨우 드래곤 본 탈취 실패에 이정도로 이성을 잃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고, 또 키에리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살기는 정말 자신들을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드,드래곤 본의 포획은 실패했사옵니다. 대공 전하. 최신형 타이탄 일곱 대 에 호위되고 있던 선박은 격침했지만, 인양해본 결과 그 안에 드래곤 본은 없 었사옵니다. 도중에 어딘가로 빼돌린 것…… 같사옵니다." 도중에 까미유의 말이 멈춘 것은 키에리가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기 때문이었 다. 한참 까미유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키에리는 멱살을 꽉 쥐고있던 손에 힘 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신의 동료이자 명문인 크로데인 가문의 자식을 두들겨 팰수는 없었던 것이다. 속마음 같으면 이 둘을 갈아죽여도 시 원치 않겠지만, 사실 가짜미끼에 현혹되어 따라간 것은 제임스이지 까미유가 아니었다. 까미유는 마지막 순간에 지원을 하기 위해나갔을 뿐 죄가 없었다. 그것까지 생각이 들자 키에리 나으리는 까미유의 멱살을 풀어준 후 성질이 풀 릴때까지 사랑하는 셋째 아들을 지근지근 밟았다. 퍽! 퍽! 퍽! "멍청한 자식들! 겨우 그런 것에 속다니." 한참 제임스를 지근지근 밟던 키에리는 이제 적당히 화가 풀리자 밖에 대고 외쳤다. "우즈크를 불러와라!" 그러자 방 밖에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옛!" 곧이어 마법사 복장을 한 60은 되어 보이는 노련해 보이는 마법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우즈크는 발렌시아드 가문의 주치의(主治醫)이자 발렌시아드공국 의 궁정마법사였다. 발렌시아드 공국은 코린트 외곽에 있는 커다란 국가였고 발렌시아드 기사단이라는 왠만한 국가급의 전력을 까지 가지고 있는 국가였기 에 궁정마법사까지 몇 명 있었다. 키에리는 자신의 공국에 있는 것 보다는 이 곳 황궁의 한쪽 구석에 지어져있는 자신의 궁전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했 다. 자신의 영지는 지금 둘째 아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키에리는 방안에 들어와서 자신에게 인사를 올린 후 구석에 처박혀 있는 제임 스를 향해 안ㄷ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있는 우즈크를 보자 씁쓸한 미소를 지 으며 말했다. "저녀석을 좀 치료해 주게." "예. 대공 전하." 우즈크는 매우 치료마법에 정통한 마법사인 듯 마법을 걸고 포션을 쓰고 하자 곧이어 제임스는 깨어났다. 제임스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키에리는 우즈크를 향해 말했다. "나중에 치료를 좀 더 해주게나. 지금은 이녀석들과 의논을 좀 할게 있으니까 자리좀 피해 주겠나?" "예. 대공 전하. 그럼 말씀 나누소서." 제임스가 비틀비틀 일어서서는 까미유의 옆에 서자 키에리는 한숨을 푹 쉬면 서 평상시와 같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미 그의 화는다 풀린 상태였 다. 키에리는 엄청나게 다혈질인 인물이었는데, 그 자신도 화가 나면 절대로 참으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의 성질을 건드린 인물은 언제나 피를 보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가 마음껏 자신의 아들을 두들겨 팬 것도 마법사가 주위에 대 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정도로는 패지 못했을 것이다. "좀 더 경험있는 놈들을 보냈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 처리한 것 같군. 이제 몸은 좀 괜찮냐?" '아직도 뼈마디가 쑤신다고 대답하면, 수련이 모자른다면서 더 두들겨 팰거면 서 왜 물어요?' 하는 말이 거의 목구멍 끝까지 나왔지만 제임스는 그 말을 다 시 안으로 밀어넣는데 성공했다. 이것도 몇번 자신의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고 얻은 소중한 지식이요 경험이었다. 제임스는 억지로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예. 괜찮습니다. 아버님." "좋아. 데려온 애가 정령술사라고 했느냐?" "예. 상당한 실력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정령술사인 지레느가 보장했으니까 요. 하지만 그녀가 관계하고 있는 정령은 아마도 뇌전의 정령일 것이라고 추 정만 하고 있을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녀의 실력을 확실히 알아보려면 좀 더 뛰어난 정령술사를 데려가야 합니다." "뇌전의 정령을 다스리는 정령술사라……. 뇌전을 다스리는 정령술사가…… 으음. 그렇군. 코타스가 뇌전의 정령을 다스릴 줄 아니까 그에게 부탁해 보거 라. 하지만 그가 바쁘다고 하면 딴 정령술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해라. 나는 마법사쪽으로는 잘 모르겠으니까 말이다." "예. 아버님."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예. 아버님." "예. 대공 전하." 까미유는 방문이 닫히자 마자 휘청거리며 주저앉는 제임스를 부축해서 우즈크 가 있는 곳으로 갔다. 키에리 같은 엄청난 고수가 화풀이를 해댔으니 몸이 멀 쩡할 리가 없었는데, 우즈크에게 간단한 치료만을 받고 서있을 수 있었던 것 은 초인적인 정신력 덕분이었다. * * * "어서 오거라. 오랜만이구나."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가 그들을 반겼다. 까미유나 제임스는 이 남 자를 볼때마다 도저히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놀랍게도 이 간편하면 서도 아름다운 복장을 하고있는 마법사는 60년쯤 전에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들과 만났고 그때와 변함없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인 간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운 외모를 말이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하옵니다. 그라세리안 공작 전하." "자, 이리 앉거라. 이봐, 차를 내오거라." 그의 말에 답하는 하녀의 목소리가 곱게 들려왔다. "예." 하녀에게 지시한 후 그라세리안은 자신의 친우들의 아들들을 정감어린 눈빛으 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딱딱하게 궁정용 언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나는 너희 아버지와 어 머니들과 오랜 시간 우정을 지켜왔다. 나에게는 너희들이 아들이나 다름 없 지. 알겠냐?" "예." "그래, 무슨 일이냐? 네녀석들이 나한테 인사차 찾아왔을 리는 없을테고 또 뭔가 부탁하려고 찾아왔지?" 정곡을 찌르는 그라세리안의 말에 두 젊은이(?)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직 도 그들은 나이만 많이 먹었을뿐, 그들의 생애 대부분을 무술수련에 보낸 덕 분에 비교적 때가 들 묻은 순진한 청년들인 것이다. "저…… 공작 전하. 저희들이 이번에 매우 유능한, 그러니까 아직은 아니지만 상당히 장래가 촉망되는 정령술사를 한 명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추측 뿐이라서 정확하게 감정을 해줄 정령술사가 필요합니다." "정령술사라…… 정령술사는 매우 귀하지. 그래 어떤 정령들을 부리는 것을 봤느냐?" 그 말에 일순간 제임스는 주춤했다. 왜냐하면 소녀가 정령마법을 사용하는 것 을 본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저…… 한번도 보지는 못했습니다." "정령을 부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정령술사라는 것을 알았지?" 그 말에 옆에 앉아서 잠자코 있던 까미유가 대신 대답했다. "예. 전번 여행에서 지레느가 알려줬었습니다. 그 소녀에게서 정령의 냄새가 난다구요. 하지만 자신이 부리는 불과 바람도 아니고 지레인이 부리는 대지와 물의 정령도 아니랍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뇌전의 정령 뿐이죠." 그 말에 그라세리안은 꽤 흥미가 있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뇌전의 정령을 다스리는 아이는 극히 드문데……. 그리고 뇌전의 정령 하나 와만 친화력이 있다면 교육시켜볼 가치가 있긴 하지. 그래 그 소녀는 어디에 있느냐?" "'수정궁(水晶宮)'이라는 고급 여관에 투숙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임스의 답변에 그라세리안은 아차 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수정궁?" "예. 아그리파 대로변에 있는 고급여관 말입니다." 물론 그 '수정궁'이라는 여관을 그라세리안은 알고있었다. 그것 때문에 이렇 게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드래곤이 성룡의 단계를 넘어서서 그야말로 생의 전성기에 들어서면 다른 드래곤의 용언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걸 이용 해서 상대 드래곤의 위치를 잡아내니까 말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용언마 법으로 자신의 기척을 숨기고 있는 다른 드래곤을 어떻게 찾아가겠는가? 드래 곤들 끼리도 친분을 맺고 수다도 떨고 할 수 있는 것도 다 상대 드래곤의 위 치를 파악해 낼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라세리안은 그 능력 덕분에 지금 이곳 코린티아 시에 자신 외에 또 다른 드래곤이 한 마리 놀러와 있다는 것과 그 드래곤이 아마도 '수정궁' 근 처에서 놀고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있었다. 그렇다면 이 멍청한 녀석들이 뛰어난 정령술사랍시고 모셔온 아이는 드래곤. 그것도 자신과 같이 뇌전의 정 령을 다스릴 줄 아는 블루 드래곤일 가능성이 컸다. 그라세리안은 표정을 약간 굳히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혹시 그 아이에게 뭐 원수질만한 일을 한 것은 아니겠지?" "예.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쓸만하다고 판정되면 그다음은 납치 를 해서……" 그라세리안은 그 뒷말은 들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예전에도 몇몇 뛰어 난 마법사나 정령술사가 될만한 재목을 납치해다가 키운 적이 있으니까 말이 다. 뛰어난 친화력을 지닌 엘프도 납치해다가 써봤지만 드래곤은……. "안ㄷ!" "예?" "그 아이를 납치하거나 회유하는 것은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그냥 여기 구경 이나 시켜주고 돌려보내거라." "저…… 하지만 전하께서 그 아이를 보신것도 아니잖습니까? 왜 그 아이가 쓸 모없을 것이라고 단정을 내리십니까? 상당히 실력이 있어 보이던데요? 전하께 서 감정을 좀 해주시던지, 아니면 다른 정령술사를 좀 소개해 주십시오." 그라세리안은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아이가 드래곤이기 때 문에 안된다고 답한다면, 그에따른 합당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하 지만 그걸 말하다 보면 잘못하면 자신의 정체도 탄로날 우려가 있었다. 아무 리 마법사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 마법사보다 더 강한 존재인 드래곤의 정체 를 단번에 원거리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좋다. 내가 직접 만나보기로 하지. 안내하거라." "예. 전하." * * * 드넓은 도나우 강 위에 엷은 빛이 살짝 뿜어져 나왔다가 사라지는 그 순간 여 섯 필의 말들과 그 위에 타고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공간이동의 종착역이 마법진이라면 상관 없지만, 마법진이 아닌 곳으로 워프할때는 보통의 경우 강 위를 자주 애용한다. 그 이유는 워프가 종료된 후에 높직한 곳에서 떨어졌을 때, 사람은 상관없지만 말에게 피해가 없기 때문이었다. 풍덩! 풍덩! 다섯 필의 말과 사람이 한덩어리가 되어 도나우 강 속으로 다이빙을 했지만 유일하게 한필의 말과 그 위에 탄 사람은 물속으로 처박는 대신 우아하게 공 중에 떠있었다. 모두들 허겁지겁 놀란 말들을 달래어 강변으로 헤엄을 쳐 나 오는 사이 공중에 떠있던 말과 사람은 유유히 날아 강변에 사뿐히 내려앉았 다. 사실 아르티어스 정도의 엄청난 마법능력을 가진 경우 동료들까지 모두 다 하 늘을 날아내려 우아하게 착륙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 지 않았다. 괜히 힘들게 그런 걸 해줄 필요성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르티어스는 강변에서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지평선 쪽을 바라보며 잠시 고 민하고 있었다. 그때 물에빠졌다가 튀어나온 생쥐꼴을 하고는 올라온 기사 한 명이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좀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흐음…… 이상하군. 코린티아에 있는게 맞을까?" "예. 거의 정확할 것입니다. 상대가 코린트의 근위대니까 말입니다." 상대의 말을 듣고 아르티어스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 드래곤이란 것을 이 멍청한 놈들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고, 또 자신이 드래곤이기에 용언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아들의 경우 엄청난 마나를 가진 인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법으로도 지평선 저 너머에 있는 코린티아쪽에 서 그정도 엄청난 마나를 지닌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 못한 녀석들 은 제법 있었지만 엄청난 기억력을 지닌 드래곤인 그가 아들과 다른 녀석들을 혼동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마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기척을 숨기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지금 코린티아 시 쪽에서 느껴지는 용언의 힘은 두 곳이나 되었 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 둘 중 하나는 드래곤이고 하나는 아들일 가능성이 컸다. 아들녀석에게 그가 가르쳐 준 것은 용언마법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둘 중에서 좀 더 미약한 용언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상대가 아들 일 가능성이 높다고 마음을 굳히며 말했다. "빨리 가자. 자세한 것은 코린티아 시에 가서 알아보기로 하지." "예." * * * 코린티아 시내를 관통하는 드넓은 도로인 아그리파 대로(大路). 돌과 시멘트 로 잘 포장된, 마차 네 대가 한꺼번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이 도로는 코린티아시의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된 도로였다. 또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대로를 뮤리엘 대로라고 불렀는데, 그 두 대로의 이 름은 그 대로들이 건설되었을 때의 황제, 황후의 이름이었다. 아그리파 대로변에 위치한 거대한 여관 수정궁(水晶宮). 수정궁 정도 수준의 여관은 이 넓은 코린티아 시에서도 열 개 정도 뿐일 정도로 대단히 호화로운 여관이었다. 그 수정궁의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젊은이들. 이들이 여관 안으 로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는 것은 결코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들 중의 한명, 즉 흑발을 길게 기른 상관이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라세리안은 수정궁 안에서 뿜어나오는 용언의 힘을 느꼈고, 자신의 짐작이 정확했음을 확인했다. 이 젊은 녀석들이 잡아온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 드래곤 이었다. 용언의 힘이 그렇게 강하지 못한 것을 보면 나이가 많은 드래곤 같지 는 않았다. 아마도 갓 드래곤이 되어서는 세상구경을 하러 다니는 철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드래곤에게 자신이 뭐라고 충고를 해야 할까? 여기는 내 영역이니까 꺼지라고? 그건 사실이 아니었고, 또 다른 드래곤의 유희를 방해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라세리안은 잠시지만 갈등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라세리안으로서도 다른 해결책은 없었다. 만약 코린트쪽에서 그 드래곤을 인간인줄 알고 협박 같은걸 하다가 잘못하면 수도가 묵사발이 날 수도 있었 다. 젊은 드래곤은 아직 경험이 미숙해서 감정의 조절이 약했고, 또 어떤 경 우에는 유희 도중에 그 유희에 휩쓸려서는 이게 진짜 자신의 삶인 것 처럼 착 각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그는 막아야만 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거라." "예. 공작 전하." 그라세리안은 까미유와 제임스를 밖에서 기다리게 한 후 소녀가 투숙하고 있 는 방 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와!" 그라세리안은 망설임 없이 곧장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소녀 혼자 서서 거리를 내다 보고 있었다. 탐스러운 긴 금발, 크고 아름다운 눈, 인간으로서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저정도의 미모를 지닌 여자들을 볼 수 있는 곳은 신전 뿐이었다. 즉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공적인 아 름다움이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그라세리안은 찬찬히 소녀를 바라보는 사이, 한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꼈 다. 소녀에게서 풍겨나오는 희미한 정령의 냄새…… 정령과 단 한번이라도 관 계를 맺게 된다면 그 냄새가 몸에 배여버린다. 그런데 그 냄새는 절대로 뇌전 의 정령이 아니었다. 그 냄새는 바로 물의 정령. 그것도 정령왕 나이아드의 것이었다. 그라세리안은 오랜 시간을 살아온 드래곤이었기에, 자신이 불러내 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정령왕급의 냄새를 모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급정령인 운디네나 상급정령인 닉스의 냄새는 하나도 나지 않 고 정령왕의 냄새만 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어린 드래곤은 절대로 정령왕급을 불러낼 수 있을정도로 친화력이 좋지 못하다. 우선은 하급정령, 그 다음은 상급정령. 나중에 웜급(3000살 이상)을 넘어서야 간신히 불러낼 수 있는게 정령왕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미약한 용언의 힘밖에 발휘할 수 없는 젊은 드래곤이 정령왕의 냄새를 풍길 수 있을까? 그라세리안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지 못하도록 마법으로 결계부터 쳤다. 그런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이름은 뭔가?" "나? 나는 다크, 너는?" "그것 말고 진짜 이름을 말하는 거야. 내 이름은 '카드리안'이다. 네 이름 은?" "다크, 다크 크라이드." "장난치지 말고 진짜 이름을 말해. 나도 내 이름을 말했잖나?" 살짝 신경질을 내고있는 카드리안을 다크는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카드 리안도 마법으로 자신의 모든 마나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있었기에 다크로서는 상대에 대해 알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다크는 카드리안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 펴보고 있었다. 뇌전을 다스리는 광폭(狂暴)한 블루 드래곤 특유의 그 순수한 광기에 젖은 눈동자를 말이다. 소녀는 천천히 걸어가서 침대 위에 놓여있던 검을 집어들고는 허리에 차면서 말했다. "엄청난 눈빛을 가지고 있지만…… 너는 인간은 아닌 것 같아. 사람이 제정신 으로 그런 눈빛을 가지고 있기는 힘들지. 너는 누구지?" 카드리안은 소녀의 행동을 보고 있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 다. "그렇다면 너는 진짜 인간이란 말이냐? 어떻게 신께서 드래곤에게만 허락한 용언의 힘을 알고있지?" 소녀는 피식 미소지으면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마법을 해제해버렸다. 이 미 그녀는 이 정체불명의 마법사가 들어오면서 외부와 단절되었다는 것을 눈 치챘기에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용언의 힘을 해제하면 서 소녀는 이죽거렸다. 소녀는 상대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드래곤에게만 허락 한 용언의 힘'이란 말에서 드래곤이란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 말인가? 이정도는 별로 어려운게 아니지." 용언의 힘이 해제되면서 카드리안은 소녀의 단전에 모인 엄청난, 인간 따위가 모을 수 없는 그야말로 엄청난 마나의 덩어리를 포착할 수 있었다. 지금 코린 트 최고의 검객이라던 키에리 보다도 더 많은 량의 마나. 몸속에 저정도의 마 나를 축적한다는 것은 절대로 그녀가 마법사 따위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갑자기 나한테 찾아와서 시비를 거는 걸 보니까 별로 좋은 뜻으로 방문한 것 은 아닌 모양인데, 나도 그걸 마다하는 사람은 아니야. 언젠가는 드래곤이란 것과 한번 싸워보고 싶었어." 그 말을 끝으로 소녀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금빛 찬란한 검신을 보며 그 검 신이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그것도 드래곤 자신이 공들여 만든 최상품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소녀가 뽑아든 검은 마력검(魔力劍)이었고, 그 에따라 복잡한 주문이 황금빛 찬란한 검신에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검신에 새겨진 주문이었다. 보통의 경우 마력검 종류는 봉인검(封 印劍) 계열보다 훨씬 효율이 안좋기에 진짜 마법에 필요한 마나의 다섯 배에 서 열 배 이상 까지도 소모한다. 그렇기에 고급 주문을 검신에 새기는 멍충이 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소녀의 검에 새겨진 주문은 8싸이클급 주문들 중에 서도 대인공격 주문으로는 최강이라는 헬 화이어(hell fire). 7싸이클 이상의 주문들은 대부분이 광범위 마법이기에 전체적으로 봤을때는 파괴력이 떨어진 다. 그걸 유추해 본다면 저 다크 프레임이 발동된다면 거의 9싸이클급 마법을 직격당하는 정도의 피해를 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검이 좋다고 해도 그걸 사용할 수 없다면 위협이 될 수는 없는 노릇. 보통 인간들이라면 저 주문을 발동시키지도 못하고 마나의 고갈로 사망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카드리안은 소녀의 몸속에 쌓여있는 마나의 양과 헬 화이어에 사용되는 마나의 양을 살짝 따져봤다. 충분히 두세번의 헬 화이 어를 쓰고도 남을 정도의 마나였기에 카드리안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 금 자신의 몸으로는 5싸이클급 용언마법이 한계였다. 본체로 돌아가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소녀가 마력검의 마법을 발동시키는 그 순간 자신이 소멸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본체로 현신한다면 이곳 코린티아 시 는 박살이 날 것이다. 또 공간이동 마법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그 마법에 의해 이 일대가 완전히 박살이 날 것이다. 헬 화이어의 위력은 그야말로 자그마한 성(城) 하나쯤은 통째로 박살낼 수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카드리안은 무턱대고 한판 하자고 하는 소녀를 향해 다급히 말했다. "잠깐, 여기는 시가지야. 여기서 싸운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구. 어디 조 용한 곳으로 가는 게 어때?" 카드리안으로서야 인간이 얼마나 죽던 별 문제는 없었고, 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 코린티아 시가 이정도로 커진 것은 자신의 노력에 의한 성과였기에, 쓸데없는 일로 잿더미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재미로 만 들어 놓은 모래탑이라도 그게 자신이 만든 것이라면, 무너지는 것을 본다는 것은 약간은 가슴아픈 일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직접 재미삼아 때려 부순다 면 몰라도……. 그 말을 끝으로 소녀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금빛 찬란한 검신을 보며 그 검 신이 골드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그것도 드래곤 자신이 공들여 만든 최상 품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소녀가 뽑아든 검은 마력검(魔力劍)이었 고, 그에따라 복잡한 주문이 황금빛 찬란한 검신에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검신에 새겨진 주문이었다. 보통의 경우 마력검 종류는 봉 인검(封印劍) 계열보다 훨씬 효율이 안좋기에 진짜 마법에 필요한 마나의 다 섯 배에서 열 배 이상 까지도 소모한다. 그렇기에 고급 주문을 검신에 새기는 멍충이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소녀의 검에 새겨진 주문은 8싸이클급 주문 들 중에서도 대인공격 주문으로는 최강이라는 헬 화이어(Hell Fire). 이정도 주문을 새겨놓고, 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면 이건 드래곤의 작품이었 다. 감히 인간 따위가 8싸이클 마법을 알고있을 가능성도 거의 없었지만, 그 렇게 효율 나쁜 마력검을 8싸이클로 만들었다면 사용할 사람은 아예 없기 때 문이었다. 8싸이클 최강의 대인(對人) 공격주문 헬 화이어. 이것은 사실상 작은 목표물 을 공격하는 최강의 마법주문이었다. 왜냐하면 7싸이클 이상의 주문들은 대부 분이 광범위 마법이기에 전체적으로 봤을때는 파괴력이 떨어진다. 그걸 유추 해 본다면 저 검신에 새겨진 헬 화이어라는 마법이 발동된다면 거의 9싸이클 급 마법을 직격당하는 정도의 피해를 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 리 검이 좋다고 해도 그걸 사용할 수 없다면 위협이 될 수는 없는 노릇. 보통 인간들이라면 저 주문을 발동시키지도 못하고 마나의 고갈로 사망할 것이 분 명했다. 그렇기에 카드리안은 소녀의 몸속에 쌓여있는 마나의 양과 헬 화이어 에 사용되는 마나의 양을 살짝 따져봤다. 충분히 두세번의 헬 화이어를 쓰고 도 남을 정도의 마나였기에 카드리안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의 몸으로는 5싸이클급 용언마법이 한계였다. 본체로 돌아가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소녀가 마력검의 마법을 발동시키는 그 순간 자신이 소멸할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 헬 화이어는 강력한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본체로 현신한다면 이곳 코린티아 시는 박살이 날 것이다. 또 공간이동 마법 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그 마법에 의해 이 일대가 완전히 박살이 날 것이다. 헬 화이어의 위력은 그야말로 자그마한 성(城) 하나쯤은 통째로 박살낼 수 있 을 정도니까 말이다. 카드리안은 무턱대고 한판 하자고 하는 소녀를 향해 다급히 말했다. "잠깐, 여기는 시가지야. 여기서 싸운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구. 어디 조 용한 곳으로 가는 게 어때?" 카드리안으로서야 인간이 얼마나 죽던 별 문제는 없었고, 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 코린티아 시가 이정도로 커진 것은 자신의 노력에 의한 성과였기에, 쓸데없는 일로 잿더미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재미로 만 들어 놓은 모래탑이라도 그게 자신이 만든 것이라면, 무너지는 것을 본다는 것은 약간은 가슴아픈 일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직접 재미삼아 때려 부순다 면 몰라도……. 상대가 살짝 숙이고 들어오자 다크는 슬쩍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왜냐하면 상대가 드래곤이라고 하지만 인간으로 모습을 바꾼 상태에서는 별로 힘도 못 쓴다는 것을 아르티어스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체로 변신하 기 전에 한칼에 끝장낼 수 있는데, 뭐하려고 장소를 바꾼다고 난리를 피울 필 요가 있을까? "왜? 까짓거 몇 명 죽는다고 별 문제될 것은 없잖아?" 소녀의 말에 카드리안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너 정말 인간이 맞냐? 여기서 너와 내가 싸운다면 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는데?" "그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지. 몇 명 죽어봐야 별 문제될 것도 없고 말이야." "흐음…… 그래도 이곳은 내가 몇십년이란 시간을 들여서 만든, 내가 아끼는 작품들이 많은 곳이야. 될 수 있다면 딴곳에서 싸우기로 하지. 어때? 너도 쓸 데없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 잠시 상대의 의도를 짐작해 보기 위해 다크는 카드리안의 눈을 쏘아봤다. 하 지만 카드리안의 눈에 떠올라 있는 것은 교활함이 아닌, 드래곤 만이 지닌 자 신감과 광포함이었다. 장소를 옮기는 데 있어서 그 어떤 속임수 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슬쩍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좋아. 자리를 옮기기로 하지. 어디가 좋을까?" 블루 드래곤 카드리안과 다크가 싸울 장소를 의논하는 그때, 아르티어스 일행 은 다크를 찾기 위해 코린티아 시로 접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코린트 제국 중신(重臣)들은 드래곤 본을 입수한 관계로 몇 년 내에 비약적으로 군사 력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는 크루마를 멸망시킬 모의(謀議)를 하고 있었다. 그 리고 이곳 크루마에서는? 크루마 또한 코린트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루엔 공작을 대장으로 하는 타 이탄 부대가 코린트의 근위기사단과 맞붙었다는 것은 일찍이 보고되었다. 양 측이 총력전이었기에 상대가 누군지는 거의 눈치챘을 것이 뻔했다. 자신이 가 진 필승의 기술들을 숨겨놓고 싸울 정도로 한가한 싸움이 될 수는 없었기 때 문이다. 그렇기에 아마도 코린트도 이쪽의 정체를 대강은 파악하고 크루마를 박살내기 위한 계획을 짜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때는 상대보다 빨리 먼저 뒷 통수를 치는 사람이 이기는 법. 하지만 크루마로서는 자신들보다 월등한 강대 국인 코린트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코린트와 일 대 일로 싸우는 것도 힘든 판에 코린트의 동맹국들까지도 계산에 넣어 둬 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홀의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거대한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탁자의 좌우 에는 열 두명의 신하들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탁자의 끝에는 다른 신하들 이 앉은 좌석보다 조금 더 높은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50세는 족히 넘어보이는 흰 수염을 멋지게 기른 당당한 체구의 인물이 앉아있었다. 바로 이 인물이 현재 크루마의 63대 황제인 알카파이네 드 크루마였다. "그린레이크 경. 어느정도 의견이 모아졌다면 마법사들을 대신해서 의견을 말 해보라." 황제의 말에 왼쪽에 앉아있던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황제에게 가깝게 앉아있 던 아름다운 용모의 엘프가 입을 열었다.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거의 30대 중반도 안되어 보이는 이 엘프의 이름은 티란 드 그린레이크. 이 엘프가 크루 마에 둘 뿐인 대마법사들 중의 하나였다. 원래가 엘프는 평화를 사랑하는 조 용한 민족들이었다. 하지만 그린레이크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인간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호전적인 인간의 성격에 많이 물이 든 상태였다. "저희들의 소견으로는 우선 마법으로 코린트의 중요도시들을 파괴한 후, 본격 적인 전쟁으로 돌입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가장 파괴력이 좋은 도시 공 격용 마법은 유성소환이온데, 그것을 사용했을 때 유성이 지구까지 도착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게 큰 단점이옵니다." 이때 황제의 오른쪽에 앉아있던 노기사(老騎士)가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유성 소환은 절대로 아니되옵니다.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이옵니다. 될 수 있다면 힘없는 백성들에게 전쟁의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만 하옵니다." 황제는 노기사를 힐끗 보더니 그린레이크를 향해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음…… 전쟁에 기사도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소. 문제는 본국이 국제 협약 에서 금지한 유성소환 마법을 사용했을 때, 잘 못하면 국제적으로 고립될 우 려가 있다는 것이오. 그래, 유성 소환을 했을 때 필요로 하는 시간은?" 하지만 황제의 얼굴은 절대로 수만톤짜리 유성이 한 도시에 낙하하여 그 때문 에 도시가 파괴되고 수많은 죄도없는 시민들이 죽어나갈 것이라는 가책감 따 위에 얽매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승리할 수만 있다면 수 만, 아니 수 백만의 무고한 시민들을 목매달아도 상관없었지만 그로인해 타국의 지탄을 받는다면 끝장이었다. 코린트와 전쟁을 벌여 살아남으려면 타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 한 달이옵니다. 폐하." "한달이라…… 지금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판국에 한달은 너무 길지 않 소?" "예. 하지만 도시 파괴에는 유성 소환 마법이 최고이옵니다.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렇지 왠만한 방어마법 따위로 막을 수 있는 마법이 아니기 때 문이옵니다. 유성 소환 외에 몇가지 도시 공격용 마법을 병행하여 사용한다면 코린트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첩자들을 풀어서 그들의 방어마법진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 함께 병행된다면 더욱 큰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금지된 마법인 만큼 효과야 확실할 것 같지만…… 한 달이나 시간이 걸린다 는 것이 좀 아쉽군. 하지만 상대가 그걸 눈치채고 방어하지는 않을까?" "아마 유성소환 마법이 실행된 직후에 곧바로 방어체계에 들어갈 것이옵니다. 8싸이클급 마법을 사용한다면 눈치챌 것이 당연하옵니다. 하지만 유성소환 마 법을 방어하기는 힘들 것이옵니다. 본국의 전 마법사들을 모아서 마법진들을 발동한다면 코린트의 42개 중요도시에 유성 하나씩을 안겨줄 수 있사옵니다. 42개 도시를 모두 방어한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그 말을 듣고 노기사는 얼굴을 벌걷게 상기시켰다. 하지만 황제의 앞에서 욕 지거리를 내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속만 탈 수밖에 없었다. 지금 크루 마의 중요한 기사들은 모두 다 드래곤 본을 획득하기 위한 일명 '초록 도마 뱀'작전에 투입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갑자기 긴급 소집된 회의에서 기사 들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마법사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42개 도시라…… 하지만 그 마법을 발동시킨 후에 모든 마법사들이 탈진되어 며칠은 쉬어야 할텐데, 그동안에 적들이 행동을 취한다면?" "코린트 본국의 병력은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사옵니다. 처음부터 강공으로 밀 어붙여 코린트의 동맹국들이 군사파견을 주저하도록 유도해야만 하옵니다. 하 루 정도만 쉬어도 상당수의 마법사들은 기력을 회복할 수 있사오니, 그 후에 는 다른 마법공격으로 적들의 후방을 교란하면 되옵니다." "좋소. 하지만 유성소환은 조금 더 있다가 결정하기로 합시다." "예. 폐하." 이번에 황제는 자신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노기사를 향해 말했다. "튜블란 경." 그 말에 아직도 기사도에 어긋나는 그린레이크의 말에 노기를 억누르느라 벌 건 혈색을 유지하고 있는 위풍당당하게 생긴 노기사(老騎士)가 정중한 어조로 답했다. "예, 폐하." "경의 의견은 어떻소?" "예. 마법사들로만 따진다면 본국이 결코 코린트에 밀리지 않겠지만, 군사력 으로 본다면 코린트는 힘든 상대이옵니다. 모든 군비증강 계획이 완료된 후에 나 그들과 맞설 수 있는 만큼, 될 수 있다면 시간을 벌면서 동맹국들을 끌어 들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줄 아옵니다. 이번에 받은 보고로는 안티고네의 실전 테스트는 완벽했으며, 흑기사를 상대로 줄곧 우위에 선 전투를 벌였다고 들었사옵니다.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끄려면 안티고네가 최소한 30대는 있어 야 하옵니다." "하지만 곧장 전쟁이 시작된다면 그건 불가능한 주문이란 것을 그대도 알고 있잖소?" "예. 폐하. 또 이번 전투에서 코린트의 신형 타이탄이 등장했사옵니다. 붉은 색의 페인트를 칠한 100톤 내외의 거대한 타이탄이온데 안티고네를 상회하는 파워를 지닌 것으로 추측되옵니다. 그게 전투용이 아닌 결투용으로 제작된 것 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전쟁이 시작되면 본국의 후방에 침투하여 게릴라전을 벌일 확률이 높사옵니다. 그점 또한 대비해야만 하옵니다. 이미 첩자들을 대 량으로 코린트에 투입했사옵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공간이동 마법을 통 해 기사들을 한곳에 집중 운용하여, 국지적이긴 하지만 군사력의 우위를 노린 다면 그렇게 밀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그 작전을 실행하려면 마법 사들의 지원이 필요하옵니다." "좋소. 그린레이크 경. 기사단에 마법사들의 파견이 가능하오?" "가능하옵니다. 폐하. 유성소환 마법을 위한 마법진을 발동시키려면 많은 마 법사가 필요하지만, 그 일이 끝난 후라면 마법사를 각 기사단에 지원해주는 것은 가능하옵니다." "좋아. 르미란 경." 그 말에 왼편의 세명의 마법사 다음에 앉아있는 인물이 즉시 대답했다. "예. 폐하." 르미란은 외교 등 국제적인 일을 맡아 처리하는 관료로서 뛰어난 외교수완을 지닌 늙은이였다. 그는 주름진 얼굴 사이에 위치한 눈동자를 빛내며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경은 비밀리에 동맹국들에게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알리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낼 수 있도록 노력하시오." "예. 폐하." "경이 생각하기로는 몇 나라나 지원해 줄 것으로 생각하오?" "폐하, 소신의 솔직한 의견으로는 상대가 코린트라는 것이 알려지면 다섯 나 라도 힘들 것이옵니다. 우선 적이 누군지 비밀리에 숨긴 후 큰 무도회 같은 걸 열어서 각국의 왕자나 공주 등을 초청하여 인질로 잡는다면 마지못해 응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초전에 코린트에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면 인질만으로 도 그들을 제어하기는 힘들 것이옵니다." "우선 무도회를 대대적으로 여는 것이 좋겠군. 동맹국의 중요 인물들의 자제 들을 거의 대부분 초대하고 말이야." "예, 폐하." 이렇듯 크루마에서도 강대국 코린트와 어차피 싸우게 된 이상 무슨 짓을 해서 라도 승리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각종 모략과 술수를 짜내고 있었다. * * * "잠깐!" 모두들 바쁘게 코린티아 시로 이동하던 중, 갑작스레 아르티어스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갑작스럽게 기척이 사라졌다." 아르티어스는 '용언의 힘'이라는 말 대신 일행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척'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여태껏 코린티아 시에서 느껴지던 두 개의 용 언의 힘은 서로 만나더니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용언의 힘을 쓸 줄 아는 자들 이 갑작스레 죽음을 당했을 가능성은 없으니 그 둘이 함께 공간이동 했을 가 능성이 매우 컸다. "일단 위치를 찾아봐야 겠으니 너희들은 잠시 기다려라." "예." 아르티어스는 두 눈을 감은 채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길고 긴 룬 어로 이루어진 주문이 읊어지는 동안 그의 주위로는 방대한 량의 마나가 집중 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아르티어스가 주문을 외우며 마나를 끌어모으기 시작하자 그를 수행하고 있던 마법사의 눈에 일순간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가 사용하는 주문은 7싸이클급은 됨직한 고도의 마법이었기 때문이 었다. 엄청난 마나의 집중에 경악을 넘어 공포심까지 느꼈던 그 마법사는 곧 이어 존경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젊디 젊은 아르티어스를 바라봤다. 자신의 생전에 이렇듯 강력한 대마법사를 직접 볼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고, 또 전 대륙을 통털어도 다섯 명이 안된다는 대마법사들 중의 한 명이 자신들의 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헛되이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지나가고 마법을 이용해서 검색하는 거리가 넓 어질수록 아르티어스는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들의 능력을 믿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드래곤이었다. '잘 못 되면……?' 마법을 사용하는 도중에도 계속 잡념이 일어나자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드래곤 이라는 존재. 즉 무지막지한 정신력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이 정도 고급 마법을 사용하게 되면 거의 모든 지적 생명체들은 정신력이 모자라 허덕이게 된다. 그런데 드래곤인 자신은 그러고도 정신력이 남아서 잡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안좋은 방향으로…….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거 기서 상상을 멈췄다. 그 뒷부분의 해답을 꺼내놓기가 겁이났던 것이다. 거의 10분은 지났을까? 엄청난 마나의 폭풍을 일으키던 아르티어스는 감고 있 던 눈을 갑자기 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주위에 들끓고 있던 마나의 움직임 또한 한꺼번에 흩어져버렸다. 아르티어스는 사라진 이들이 어디로 갔 는지 알아냈지만, 일단 동족에 관계된 일이었기에 자신들을 안내해 온 일행들 을 그 장소로 데려가는데 망설여졌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예? 어디로……?" 여태껏 그를 안내했던 기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 기도 전에 아르티어스의 주위에 순간적으로 마법진이 나타나더니 그와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기사는 이제 당황을 넘어서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아르 티어스가 사라져버린 지점을 응시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질문을 받은 마법사 역시 멍청한 표정으로 힘없이 대답했다. "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공간이동 주문을 사용했습니다. 어떻게 인간 이 그렇게 빨리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가는 군요." 마법사의 대답에 지휘자인 기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단독행동을 한 아르티어스를 향해 원망이 서린 한숨이었다. "휴--- 공간이동을 했다면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군. 이봐. 모두들 휴식 을 취해. 일단 여기서 대기한다." * * * "경치가 좋은 곳이군." 자신에게 등을 완전히 돌린채 주변의 경치를 감상중인 소녀를 어이없는 눈으 로 보고있던 카드리안은 쌀쌀한 어조로 답했다. "우리는 이곳에 경치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야." "아…… 실례, 깜빡 했군. 그래 어떻게 싸울텐가? 마법? 검?" 소녀의 말에 카드리안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마법이지. 흐흐흐흐……" 그와 동시에 카드리안의 몸은 밝은 청색 광채에 쌓이면서 엄청난 크기로 증가 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웜급의 드래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강대한 마나의 폭풍이 주위를 휩쓸기 시작했다. 카드리안은 인간인 상태로도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상대에게 엄청나게 강력한 마력검이 있었고 또 그의 무술실력이 엄청났기에 그런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조금 귀찮기는 했 지만 드래곤으로 변신한 후 이 무례하기 그지없는 계집애를 재빨리 없애버리 고 왕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때 카드리안이 예상하지 못했던 한가지 문제점이 발생했다. 공간이 열리면 서 날렵하게 생긴 타이탄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카드리안은 오랜 세월 코린트 에서 타이탄의 생산에 관여해왔기에 그것이 카프록시아와 매우 유사하게 생겼 지만 카프록시아와는 달리 매우 날씬하게 생겼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어 깨높이는 5.2미터 정도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지만 매우 날씬 한 것으로 보아 80톤도 나가지 않을 것 처럼 보였다. 방패도 없이 그저 검만을 가진 공격용 타이탄. 그것을 보고 카드리안은 그 타이탄이 적기사 처럼 아예 방어따위는 생각도 안하고 만들어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걸 몰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 소녀는 검술에 매우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타이탄의 본체에 새겨져 있는 검은 드래곤의 몸통에 'Ⅱ'라는 숫자. 이걸 보 면서 카드리안은 이 문장이 상당부분 자국이 자랑하는 코란 근위기사단의 문 장을 모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란 근위기사단의 문장과 이 문장의 차이는 드래곤의 색상이 적색과 흑색이라는 것, 그리고 불을 뿜고 있느냐 그렇지 않 느냐는 차이점. 그 둘을 제외하고는 모양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다크가 자신의 타이탄을 끌어내어 탑승했을 정도의 매우 짧은 시간, 그 시간 동안에 카드리안 또한 드래곤으로의 변신을 끝마친 상태였다. 정말이지 거대 한 푸른색의 금속성 광택이 나는 아름다운 몸체. 그 거대한 날개를 접은 채, 키드리안은 이마에 단 하나만 삐죽하게 솟아있는 거대한 뿔 양쪽 아래에 붙어 있는 눈을 이용해서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다크가 불러낸 타이탄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타이탄은 그렇게 강해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정격출력인 1.0은 상 회하는 엑스시온이 탑재되어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그정도 출력의 싸구려 타 이탄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카드리안은 뇌전의 기운을 천천히 끌어모으면서 상대방을 향해 의사(意思)를 보냈다. 드래곤인 상태에서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라레스에서 왔나?> "그건 몰라도 돼. 안그래도 눈에 띌 것 같아서 타이탄을 한번도 써먹지 못했 는데 잘 되었군. 어디 맛좀 봐라." 상대방 타이탄 속에서 이죽거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타 이탄은 천천히 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얼핏 생각하기에 매우 멋이 있는 장면 이었지만 그걸 보면서 카드리안은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이탄은 매우 무거웠기에 가급적이면 가볍게 만드려고 노력중이었다. 물론 필요한 부분은 충분한 두께와 무게를 줄 필요가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에까지 무게를 줄 필요는 없었다. 몸체가 완전히 철로 만들어져 있는 타이탄에게 있어서 검 집은 정말이지 쓸모없는 것이었다. 물론 상대방의 앞에서 폼을 잡으며 검을 천천히 뽑는 것은 아주 멋있게 보이고, 또 검을 호화롭게 장식한 검집에 넣어 두는 것은 매우 모양이 나는게 사실이었지만 검집이란 것은 너무나도 무거웠 다. 최소한 1톤의 무게는 들여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겉멋만 잔뜩 든 녀석, 죽어랏!> 그와 동시에 카드리안의 이마에 솟아있던 그 거대한 뿔에 스파크가 번쩍이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엄청난 뇌전의 기운이 타이탄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이 뇌전의 기운은 당연히 카드리안의 전력을 다한 공격은 아니었다. 그냥 건 방진 인간에게 "이 위대하신 본인의 힘은 이정도니까 알아서 기어라"하는 경 고의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뇌 전의 기운을 보고도 타이탄은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마나를 이용한 방어막을 쳐버렸다. 겨우 그따위 뇌전의 기운은 피할 값어치도 없다는 듯이……. 뇌전의 기운이 방어막에 밀리면서 옆으로 굴곡되어 뿜어져 흘러나갔지만 비교 적 방어막의 강도가 낮았던 밑부분이 깨지면서 곧이어 그곳으로 엄청난 뇌전 의 기운이 흘러들어갔다. 하지만 전기란 것의 성질이, 전기가 통하기 쉬운 방 향으로 흘러가는 것이었기에 그 뇌전의 기운은 타이탄의 윗쪽으로 흐른 것이 아니라 대지를 향해 곧장 흘러버렸기에 다크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 다. 하지만 타이탄의 발에서 대지로 엄청난 량의 뇌전이 흘러나갔기에 그 부 분의 강철이 벌겉게 달아오르다 못해 녹아버렸다. 물론 카드리안의 공격은 몇 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걸쳐 벌어진 것이었고, 그 공격이 끝나자 마자 타이탄은 자신의 주인의 마나를 흡수하여 곧장 다리를 수리해버렸다. 의외로 강력한 공격을 퍼부은 상대에 대해 "썩어도 준치"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는 다크에 비했을 때, 카드리안은 아무리 자신이 봐주면서 살살 공격했다고 해도 그정도 공격이 상대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는 것에 매우 열 받기 시작했다. <훗…… 그래. 믿는게 있으니까 까불었겠지. 이제는 죽어봐랏!> 카드리안은 이번에는 상대를 끝장낼 생각으로 있는대로 뇌전의 기운을 끌어올 리기 시작했기에, 카드리안의 머리쪽에는 뇌전이 포화상태에 이르도록 집중되 기 시작했고 그의 머리부분의 곳곳에서 번쩍번쩍하는 스파크가 쉴새없이 일어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순간 폭발적으로 뇌전의 기운이 뿜어져 나 갔다. 다크는 드래곤의 힘이 어느정도로 강한지 알아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어리석게도 그 막강한 브레스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자신이 지닌 모든 공력을 쏟아부어 방어벽을 형성하면서 뇌전의 기운을 정면으로 받아낸 것이다. 타이 탄이 뿜어낸 거대한 방어막을 뚫고 들어오려는 뇌전의 기운은 먼저번 공격과 는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 때문에 다크 또한 방어막에 자신이 가 진 공력을 있는대로 집어넣고 있었고, 카드리안 또한 브레스에 뇌전의 기운을 있는대로 쑤셔넣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나무와 돌들이 무지막지한 전류의 흐름에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 거나 불에 타버리면서 방어막이 형성된 타이탄 주변으로 반월형의 거대한 도 랑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한 1분정도 뇌전의 기운을 뿜어냈을까? 카드리안은 전력을 다한 브레스를 막 아낸 상대를 향해 감탄어린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웜급에 올라선 나의 브레스에 견디다니 대단하군. 아마도 타이탄이 좀 더 좋 은 것이었다면 마나의 소모가 그렇게 많지 않았겠지만…… 인간으로서 이정도 버틴것만 해도 대단한거야. 나는 너희 인간들의 시간으로 3000년이 넘는 시간 을 살았지만 그대 정도로 강한 인간은 보지를 못했다. 어때? 지금이라도 용서 를 빈다면 살려줄 용의는 있다.> 드래곤의 풀파워 브레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다. 처음의 공격이 가 졌던 강도만을 생각하고 '저따위 도마뱀 쯤이야……' 하고 생각하고는 정면으 로 브레스를 받아낸 다크는 지금 후회막심한 심정이었다. 한낫 미물(微物)의 힘이 그렇게 강할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덕분에 그녀는 브레스 를 막아낸다고 엄청난 공력을 소모했다. 물론 그걸 다시 채워넣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걸 기다려줄 상대가 아니었기에 어떻게 할까 궁리중인 그녀에게 '도로니아'가 보내오는 경고성이 들려왔다. <너의 마나는 방금 전 무리한 방어로 인해 거의 바닥에 가까운 상태다. 될 수 있다면 상대의 의견을 들는게 좋을 것이다. 너는 지금 휴식이 필요하다.> 원래가 시키면 더욱 안하는 다크의 성질을 모르는 도로니아의 조언 덕분에 그 녀는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 기분 내키는 대로 정해버렸다. "닥쳐. 네 녀석은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돼. 겨우 이따위 공력소모는 나 한테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 후 건방을 떨고있는 드래곤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충분한 마나가 실려있었기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드래곤의 귀에는 거의 우레 소리처 럼 잘 들렸다. "네녀석이나 용서를 빌어랏!" <훗! 죽고싶은 모양이군. 소원이라면…… 죽어랏!>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뇌전의 기운이 대기를 가르고 다크에게로 뿜어져 나 갔다. 하지만 다크는 이번에도 그걸 피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나는 거의 고갈 된 상태, 그리고 상대는 아직도 생생했기에 피하면서 싸운다면 그 공력의 소 모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이번에는 뇌전의 기운을 막는 것을 포기하고 흡수하기로 작정했다. 무공서적에도 써져있듯 '천지(天地)간에 가장 강한 힘은 뇌(雷)의 기운(氣 運)'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북명신공을 통해 대자연의 기(氣)를 흡수할 줄 아 는데, 대자연의 기들 중에서 한 가지인 뇌의 기운을 흡수하지 못할 이유는 어 디에도 없었다. 문제는 그 기운이 좀 강하다는 것 외에는……. 다크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도로니아의 엑스시온은 역으로 움직이기 시작했 다. 평상시에는 증폭이지만, 이번에는 역으로 외부의 강력한 기를 타이탄의 외부에서 흡수하여 엑스시온을 통해 증폭이 아닌 축소했고, 그걸 곧장 엑스시 온 위에 앉아있는 다크에게 전달했다. 밑에서 뿜어져 나오는 뇌전의 기운이 곧이어 다크를 감싸기 시작했다. 다크는 온 몸이 찌릿찌릿한 이 뇌전의 기운 을 필사적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크으으으으으……" 지독한 고통 때문에 그녀의 악 다문 입에서는 피가 조금씩 배여 나오기 시작 했다. 도로니아의 엑스시온은 그 와중에도 다크의 마나를 일정량씩 뺏아서 무지막지 한 전기의 흐름에 의해 손상된 부위를 복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역작용까지 해냈다. 카프로니아는 그 모태가 되는 타국의 근위타이탄들 중에서도 상당한 걸작이라는 카프록시아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즉, 출력 1.3이나 되는 강력 한 엑스시온이 있었기에 이러한 작업이 가능했던 것이다. 도로니아의 엑스시 온은 4천만 기간트라에 이르는 강력한 마법에 의해 만들어져 있었기에, 외부 에서 뿜어져 들어오는 지독한 뇌전의 기운을 견뎌냈던 것이다. 두 번째의 풀파워 브레스를 뿜어낸 카드리안은 아직도 상대가 살아있다는 것 에 놀랐다. 그리고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량이 자신과 싸우기 전보다도 더욱 많다는 것에 거듭 놀랐다. 원래가 마나란 것이 싸우면 싸울수록 소모되 는 것이 정상인데, 상대는 이번 브레스를 자신의 마나로 흡수해버린 것이 분 명했기 때문이다. 타이탄 도로니아는 카드리안의 공격이 끝나고 나서 잠시 후까지 가만히 서있 다가 이윽고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니아가 움직이는 데 따라 서 도로니아에 씌워져 있는 장갑판들이 흔들리며 그 사이사이에 미세한 전기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주인이 뇌전의 힘이 주축인 마나를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좋아. 이제 마나도 모였고……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 는 일만 남았군. 호호홋!"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낄낄거리는 그녀의 이빨 주위로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는 것을 그녀 자신도 아직까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검을 위로 치켜들며 도로니아가 전투태세에 들어가자, 카드리안은 바짝 긴장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풀파워 브레스가 두 번이나 무위로 끝난 것이다. 이제 한번 정도 더 브레스를 쓸 수 있었지만 그걸 쓴다고 해도 상대에게 탁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마법을 쓰자니 상대는 왠만한 마법은 통 하지도 않는 마법병기 타이탄에 타고있는데 그게 통할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직접 타이탄을 만들어 봤기에, 타이탄의 대마법 방어주문이 얼마나 효 과적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레스도 막아내는 저정도 인물이라면 단일 표적에 대해 최고로 강력하다는 금지된 마법인 헬 화이어를 쓴다고 해도 끄떡도 없을게 뻔했다. 원래가 타이탄의 대마법주문은 주인의 마나를 흡수하 여 발동하게 되기에, 주인의 능력에 따라 그 방어력이 상당한 차이가 났다. 카프록시아 같은 근위타이탄의 경우 7싸이클급의 마법은 왠만한 기사가 타고 있어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보통 근위기사급이라면 8싸이클급 정도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놈은? 9싸이클로도 힘들었다. 천천히 검을 들어올리며 공격준비를 하는 상대를 보며 카드리안은 헬 화이어 를 날릴 준비를 했다. '먼저 헬 화이어 세 방을 날린 후 그 다음 놈의 행동을 보고 더 날리기로 하 지.' 본체로 돌아간 카드리안에게 헬 화이어쯤 용언마법으로 순식간에 날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일단은 한 방 정도로는 놈이 꿈쩍도 안할테니까 그 는 물량공세를 취할 작정을 하기 시작했다. 헬 화이어를 이곳에서 열번정도 쓴다면 주위가 완전히 묵사발이 되겠지만, 일단은 자신의 생명이 더 소중했 다. 이렇듯 작정을 하고 대치하는 중에 카드리안은 용 한 마리가 자신의 주위에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슬쩍 보니까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아름다운 아 가씨가 거의 1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드래곤과 타이탄의 말도 안되는 싸 움이 벌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구경할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 드래곤은 카드리안의 이웃에 사는 레드 드래곤이었는데 아마도 밖이 소란스러우니까 무 슨 일인가 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바닥에 깔고는 느긋 하게 앉아서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헛된 꿈을 꾸는 인간이 떡이되는 것을 구 경하려고 마음먹은 그 이웃집 드래곤을 향해 카드리안은 다급하게 의지를 보 냈다. <이봐, 빨리 여기서 피해. 조금 있으면 이 주변은 완전히 폐허가 될거야. 저 녀석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아마도 헬 화이어를 열 번정도 연속으로 써야할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 말에 '이웃'은 놀라서 눈이 둥그래지더니 재빨리 마법으로 방어벽을 치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에게 헬 화이어가 직격탄으로 날아온다면 이따위 방어벽 으로는 막을 수 없지만 헬 화이어는 모두 다 저 타이탄을 향해 날아갈거고 자 신은 여기서 구경좀 하다가 도저히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드래곤으로 현신하 면 된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 말에 '이웃'은 놀라서 눈이 둥그래지더니 재빨리 마법으로 방어벽을 치기 시작했다. 놀란김에 그 붉은 머리의 아가씨는 용언마법으로 간단한 방어벽을 친 후, 이제 조금 시간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해서 결 국은 막강한 방어벽을 형성하고야 말았다. 인간인 상태로 트랜스포메이션 했 다고 하더라도 드래곤이 지닌 그 강인한 정신력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9싸이 클급 까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이때는 기다란 주문을 외워야한다는 불리함을 안고 있었지만 말이다. 일단 마법을 이용한 두터운 방어벽을 형성하고 나자 그 붉은 머리의 아가씨는 느긋하게 앉아서 싸움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정이 여의치 않아지면 드 래곤으로 현신하면 된다는 그 뒷배경 덕분에 생긴 느긋함이었지만……. 타이탄은 자신의 주위에 깊게 파여있는 반월형 도랑을 간단하게 건너뛴 다음 어떻게 공격을 감행할지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드리안 역시 용언마 법을 날릴 준비를 한 채 상대가 먼저 움직여 주기를 기다렸다. 일단 몸이 움 직이기 시작한 상태 즉, 동(動)의 상태로 들어서면 적의 앞에서 만반의 대비 를 하고 기다리는 정(靜)의 상태보다 상대의 공격에 대한 회피가 조금 더 힘 들다는 것은 뻔한 이치다. 그렇기에 이 둘은 만반의 공격준비 및 방어준비를 한 채 상대가 먼저 움직여 주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때 카드리안의 뿔에서 또다시 전기 스파크가 번쩍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이제 남은 최후의 브레스를 쓸 생각인 모양이었다. 블루 드래곤은 드래곤 중 에서는 유일하게 입이 아닌 이마에 길게 솟아있는 하나뿐인 뿔을 통해 브레스 를 뿜는다. 그덕분에 블루 드래곤은 브레스를 쓰고있는 중에도 용언마법이나 기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입을 따로 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에 카드리안은 바짝 긴장한 채 이 인간같지도 않은 인간을 향해 자신이 가진 힘을 있는대로 뿜어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덩치를 자 랑하는 블루 드래곤의 앞에서 검을 겨누고 있는 타이탄의 몸체 곳곳에서도 역 시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다크 역시 자신의 마나를 최대한 끌어모은채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둘이 대치하고 있는 쪽 거의 100미터쯤 상공에서 흰 빛이 번쩍이더 니 아르티어스가 튀어나왔다. 그는 자신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기도 전에 비행 마법을 시전하여 곧장 아래로 내려왔다.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푸른색 드래곤 과 타이탄 사이에 위치한 후 외쳤다. "이봐, 싸움은 그만두라구. 한식구끼리 싸울 필요가 있나? 응?" 카드리안은 아직도 브레스를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는 준비를 한채 대꾸했다. 상대는 만난적은 없었지만 느껴지는 존재감만으로도 거의 에인션트급에 다다 른 골드 드래곤이었기에 그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한 식구라니요? 저녀석은 드래곤이 아니라 인간이라구요.> "대신 내 양자(養子)이기도 하지. 나이가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자네가 참게 나." 카드리안은 슬쩍 허공에 떠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눈길을 준 후, 다시금 시 선을 타이탄쪽으로 돌리며 천천히 머리쪽에 몰려있는 뇌전의 기운을 몸통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그에따라 머리쪽에서 푸직거리며 방전되던 전기의 기운 은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드리안은 상대를 향해 완전히 무방 비 상태로 전환한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상대를 향해 주의를 하며 언제든 지 용언마법을 연속으로 날릴 준비는 하고 있었다. 카드리안은 그런대로 아르티어스의 말을 들어줬지만, 그놈의 방탕한 아들녀석 은 듣지 않았다. 타이탄 속에서 들려온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좀 있으면 끝나니까 기다려요. 드래곤 슬레이어를 여기서는 아주 높게 쳐주 는 모양이던데, '드래곤 슬레이어의 아버지'라고 하면 좋지 않아요?" "뭐? 당장 그 고철덩어리에서 못내려? 내가 드래곤인데, 내 종족을 죽인 아들 을 두란 말이냐?" 그러자 들려오는 퉁명스런 목소리. "종족은 아니잖아요? 아버지는 금색이지만, 저녀석은 푸른색인데?" "하지만 같은 드래곤이잖아. 잔말 말고 못내려?" "제길! 좋다 말았네……" 이제 공력도 회복되었겠다, 또 상대의 능력이 어느정도인지 대강 감을 잡았겠 다, 신나게 한판 벌이는 일만이 남았는데 그걸 방해받았기에 다크는 투덜거리 면서 타이탄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투덜거리기만 했을 뿐 다크는 아르티어 스가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이 있었기에 그의 말을 거역하기는 힘들었다. 일단 소녀가 타이탄에서 뛰어내리고, 그 타이탄이 공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후에야 카드리안은 마음을 놓았다. 정말 잘못하면 오늘로 생의 종지부를 찍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위험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이탄이 없다면 아무리 인간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한숨 돌린 후 오늘 처음 만난 골드 드래곤을 향해 정중하게 물었다. 자신보다 훨씬 연장자였기에 그정도 대접은 해주는게 용들 간의 예의였기 때문이다. <저는 카드리안이라고 합니다. 현명하신 골드 일족의 후예시여.> "아, 그런가? 나는 아르티어스라고 한다네." <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말토리오 산맥의 지배자시여. 그런데, 요즘 은 유희를 거의 안 즐기신다고 들었는데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내 나이쯤 되면 이해 할 걸세. 요즘은 그냥 조용하게 지내고 있었지. 저 아이 때문에 나왔어. 왠만한 동족쯤은 상대가 안되는데…… 저녀석은 꼭 드래곤과 한판 하고싶어 했거든. 그래도 자네가 상대였기에 망정이지 안그랬 으면 '드래곤 슬레이어의 아버지'로 역사책에 기록되는 걸 막을 수 없을 뻔 했다네. 그렇게 되면 골드 일족의 개망신이지……. 그런데 저기 있는 아가씨 는 또 누군가?" 아르티어스는 거의 1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장소에 망토를 펴놓고 다소곳이 앉아있는 붉은머리카락의 아가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에 카드리안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그쪽에 앉아 있던 레드 드래곤은 벌써부터 마법을 사용해 서 이쪽의 대화를 ㅇ듣고 있었는지 재빨리 날아와서 아르티어스에게 사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바미레이드라고 합니다. 아르티어스님." 그녀의 이름을 통해 아르티어스는 그녀가 레드 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레드 일족의 첫 이름자는 'B'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흠, 레드 일족은 참 만나기 힘든데…… 아무튼 반갑군. 소개하지, 저기 있는 녀석은 내 양아들인 다크야. 인간들의 성은 자주 바뀌니까 외울 필요는 없겠 지만 지금은 로니에르라고 하더군." "성이 자주 바뀐다면 귀족인가요?" "공작이라고 하더군." 그 말에 제법 궁정생활을 오래했기에 그쪽으로는 지식이 많은 카드리안이 끼 어들어 그녀에게 설명했다. <저 아이 정도의 실력이면 그랜드 마스터 정도 될거야. 마스터급은 훨씬 상회 하니까 말이지. 그정도라면 어떤 나라에 가도 공작 소리를 들을 수 있지.> 바미레이드는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아르티어스는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후 아들에게로 시선을 돌린 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 다. 아들은 과거 자신과 있을때와는 달리 요즘은 너무나도 자신감에 넘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기야 드래곤과도 상대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그 엄청난 능력에 따른 패기와 자신감이 밖으로 은근히 노출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표정은 그렇다 치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꼭 번개라도 맞은 것 모양 사 방으로 삐죽이 서올라 있었고, 그녀는 솟아오른 머리카락을 제자리로 돌리려 고 애쓰고 있었지만 잘 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을때마다 미세한 스파크가 튀어오르고 있었다. "정말 오래간만이구나. 으갸갸갸갹!"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는데 그녀의 몸쪽에서 엄청난 전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 고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기에, 갑자기 감전된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 는 아르티어스를 보고 다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왜그러세요?" "아그그……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왜 몸에서 전기가 흘러나오지?" "글세요…… 저 드래곤이 뿜어내는 전기를 흡수해서 그런가?" "전기? 맞아. 블루 일족은 전기의 힘을 사용하지. 그걸 흡수했다는 말이냐? 드래곤의 브레스는 흡수할 만큼 만만하지가 않은데…… 그녀석이 도와 준 건 가?" "그 녀석이라뇨?" "으음…… 나이아드 말이다. 그건 그렇고……" 아르티어스는 다시 카드리안에게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본체인 상태로 있었기에 아르티어스는 한참 윗쪽으로 고개를 꺾어야만 했고,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봐. 카드리안." "예?" "내가 인간인 상태인데 자네 계속 드래곤으로 있을건가? 목이 아프잖아." <아…… 실례했습니다.> 카드리안은 곧이어 여태껏 인간세상에서 생활해왔던 길다란 검은 머리의 미청 년으로 변신했다. 이렇게 놔두고 보니 셋 다 머리카락의 색상은 조금씩 달랐 지만 모두들 미남미녀다 보니 어떻게 보면 꼭 형제자매들이 모인 것 같은 느 낌마저도 들었다. 특히나 아르티어스는 타는듯한 붉은 머리카락이었고, 바미 레이드는 그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 짙은 검붉은 머리카락이었기에 정말 남매 처럼 보였다. "아르티어스 어르신." "왜 그러나?" "저 아이의 검을 직접 만들어 주셨습니까?"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아주 멋있지 않던가? 꽤 신경써서 만들어 줬지." "그 얘기가 아니라구요. 저 검에 새겨진 주문은 헬 화이어. 거기에다가 저 아 이는 그 주문을 발동시킬 정도의 능력이 있어요. 인간이 가지고 있기에는 너 무 위험한 물건입니다." 카드리안의 불만에 가득찬 말에 아르티어스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물론 8싸 이클급 마법을 쓸수 있는 마력검은 매우 위험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아르티어스가 미소를 지은 것은 카드리안이 아직도 다크가 그것보다 더 위험 한 물건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준 물건은 그렇게 위험하지 않아. 사실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들 녀석에게 시동어도 안가르쳐 줬거든. 저녀석은 저 검이 그냥 모양만 잔뜩 내 놓은 튼튼하고 멋진 검 정도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고있지." "시동어를 안가르쳐 주셨다구요?" "응. 하지만 그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아. 저녀석의 반지는 '아쿠아 룰러' 니까 말일세. 그걸 사용하면 헬 화이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설마…… 그것까지 저 아이에게 주신 것은?" "내가 준 것은 아니야. 카렐이라고…… 그 키아드리아스하고 같이 살고있는 엘프가 준 것이지." "카렐이라고요? 그 검에 미친 엘프가 설마…… 진짜 미친 것 아닙니까? 그런 물건을 인간에게 주다니……." "미친 것 같지는 않더군. 그런데 왜 여기서 싸우기 시작했나?" 아르티어스의 말에 카드리안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아드님이 저한테 시비를 거는 바람에……" 하지만 사실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아르티어스는 아들 보다는 카드리안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티어스의 눈에는 아직도 다크가 사랑스런 소녀였을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좀 더 오랜시간 살아온 자네가 참았어야지, 원…… 어린애가 시비 건다고 싸 울 것은 또 뭔가? 뭐 다행히 잘 끝나기는 했지만……. 그건 그렇고 여기서 이 럴게 아니라 어디 딴곳에 가서 얘기를 나누기로 하지." "예. 코린티아 시로 가죠. 거기에 좋은 장소들이 많습니다." "그러세나." 제8부 제1차 제국 전쟁 차례 알카사스 원로 회의 드래곤 하트의 위력 뚱뚱이와 뻔뻔이 불쌍한 신의 실패작 전쟁의 시작 미란 국가 연합 사라진 그라세이란 드 코타스 공작 다크 폰 로니에르 파견군 사령관 살라만더 기사단 무서운 쥐새끼들의 침입 철없는 드래곤 아빠 수정궁 이동 마법의 비밀 청기사 안드로메다의 첫 전투 금지된 최악의 마법 예측할 수 없는 전쟁 살인 기계 안드로메다 일방적인 전투 예상 밖의 승리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의 추적 미네르바와 다크의 신경전 전설의 타이탄 헬 프로네 다가오는 최강의 대결 <부록> 제국의 기사단과 타이탄 알카사스 원로 회의 마도 왕국 알카사스는 개국(開國)이래 줄곧 중립 노선을 걸어온 거의 유일한 국가였다. 그 덕분에 전쟁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국가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알카사스가 여태껏 중립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이 막강한 국사력 덕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만큼 알카사스의 군사력은 막강했고, 그 뒤를 받치는 마법사들의 힘 또한 세계 최강이었다. 타이탄까지는 사용하지 않더라도 웬만한 국가쯤은 마법사들만으로도 간단하게 멸망시킬 수 있는 저력이 이들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다. 개국 이래 역대 왕들과 중신(重臣)들은 이 말을 착실히 실행해 왔고 지금에 이르러서 알카사스는 4대 강국에 들어갈 정도의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알카사스는 여전히 중립국이었다. 알카사스의 왕궁 지하 4층에 마련된 비밀 회의실. 이곳은 강철과 벽돌로 이루어진 매우 튼튼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방의 외곽에는 다섯 겹의 마법 방어막까지 쳐져 있어서 사실상 이 안에 거주하는 한 타살 당할 염려는 거의 없었다. 크루마와 코린트의 움직임이 수상하오. 아무래도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데 그대들의 의견은 어떻소? 원탁을 중심을 놓여진 다섯 개의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들 중 한명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워낙 조용한 곳이라 그 노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보에 따르면 양국(兩國) 모두 마법사들을 비밀리에 소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은둔하여 마법 실험에 몰두하던 고위급 마법사들까지 움직이는 것으로 봤을 때 의장(議長)님의 생각이 거의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원탁 한쪽에 앉아 있던 노인이 재빨리 상대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노인의 말이 끝났음에도 오랜 시간 그의 말을 받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생각에 잠겨 왕국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모인 다섯 명의 노인들, 이들이 바로 알카사스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개국 초에 형성된 원로원(元老院)은 필요에 의해 왕권을 능가하는 최고의 권력 기관으로 성장해 왔다.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원로원의 멤버는 최고의 마법사들만이 될 수 있었고, 또 종신직인 탓에 모두들 거의 100세에 이른 노인들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들은 아직까지 어떤 파격적인 일을 행한 적은 거의 없었다. 좋게 말하면 보수적이었고, 나쁘게 보면 구태의연(舊態依然)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런 인물들이 최강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알카사스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대로 마법만을 추구하는 국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쁜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마법사들이란 원래 지능이 우수해야만 될 수 있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한 노인이 오랜 침묵을 깨며 찌푸린 얼굴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국왕은? 아직 국왕은 모르고 있습니다. 국왕이 처리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죠. 흐음 그거야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소. 일단 전쟁이 벌어진다면 최악의 경우 금지된 마법이 사용될 수도 있소. 이번에 전쟁을 벌이려는 국가들은 그 정도 능력을 지닌 마법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오. 물론 우리들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이고, 또 수출용 타이탄의 생산 대수도 좀 늘려 놓을 필요가 있소. 아무래도 전쟁이 벌어진다면 타이탄의 수요는 증가할 테니 말이오. 타이탄의 생산량은 어느 정도나 늘리는 게 좋을까요? 그대의 생각은? 50% 정도 더 생산해 두면 될 듯합니다. 그 외에 마법 무기들도 좀 더 만들구요. 이번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왕국 내에서 수십 년 동안 처리하지 못했던 모든 재고품들을 없앨 수 있을 겁니다.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코린트와 크루마에 사자를 보내 판매 교섭을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면 그들도 교섭에 응해 올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오. 그리고 코린트와 크루마의 동향을 면밀히 감시하여 실제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본국에 피해가 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오. 여기가지 말한 후 그 노인은 한쪽에 앉아 있는 다른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라지에르 경. 예. 본국의 마법 방어막은? 예. 현재는 생산 에너지의 50% 정도를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도록 돌리고 있습니다만, 만일의 경우 전량을 방어벽으로 돌리도록 지시해 두었습니다. 좋소. 하지만 그 두 국가들이 전쟁을 확대시켜 나간다면 본국도 위험할 가능성이 있소. 이번에 전쟁을 벌이는 국가들은 그만큼 강대한 제국들이기 때문이오. 그대들의 의견은 어떻소? 내 생각은 이렇소이다. 본국의 기사단은 모두 네 개, 상당한 전력이지요. 하지만 기사단은 이곳에 조금, 저곳에 조금씩 분산되어 있는게 사실이오. 우선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요충 재대에는 중장 기병 사단(重裝騎兵師團)을 집어 넣고, 몇몇 중요한 곳에 기사단 전력을 집중 시켜 두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오. 본국은 타국과 달리 공간 이동망이 월등히 발달되어 있으니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 전력을 집중 투입할 수 있소. 그러니까 , 기사단이 주둔할 곳은 최강의 마법 방어막이 쳐져 있는 5대 도시가 좋겠지요. 찬성이오. 찬성입니다. 몇몇 노인들이 찬성의 뜻을 밝혔지만 의장(議長)이라 불린 노인은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한다면 국왕 직속 기사단들까지 우리들이 통제해야만 하지 않소? 근위 기사단이야 모두들 수도에 집중되어 있으니 상관없겠지만, 레디 이글(Red Eagle : 붉은 독수리) 기사단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여덟 개 도시에 분산되어 있는데, 그들을 한 곳으로 끌어 모은다는 것은 .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오. 국왕이 정면으로 거부 의사를 밝혀온다면 . 국법에도 정해져 있지만, 위급시에는 왕권보다는 원로원이 우선합니다. 내가 그걸 모르는게 아니오. 그렇게 된다면 국왕파와 정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 특히 혈기 넘치는 젊은 기사들의 대부분은 국왕파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오. 여기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국론을 분열시키는 결과밖에 낳지 않는다 이 말이오. 물론 그들 대부분이 그래듀에이트가 아니기에 지금은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훗날 그들이 그래듀에이트로 성장했을 때는 문제가 될 수 있소. 그러니 그 문제에 대해선 내가 국왕과 의논해서 조용히 처리하도록 할 테니까 그대들은 관여하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대신 원로원 지곳의 2개 기사단은 회의가 끝난 후 곧장 이동 배치하는 것이 좋겠지요. 드래곤 하트의 위력 흠 그게 아니야. 자네는 인간들의 일에 너무 간섭을 하고 있네. 예? 내가 레어에만 처박혀 있는 것 같지만, 다른 드래곤들과도 간혹 연락을 하고 있지. 이번 일만 봐도 그래. 까딱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하지 않았나? 왜 인간들에게 그런 강력한 괴물을 만드는 방법 따위를 가르쳐 주고 있나? 그 말에 카드리안은 약간 난처한 듯 미소로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게 재미있어서라고 할까요? 하지만 현재의 타이탄 제조 기술로는 인간이 아무리 잘나 봐야 우리 드래곤들과 상대하기 힘듭니다. 물론 지금은 힘들겠지. 하지만 세월이 조금 더 지나면 더욱 강력한 것을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아르티어스의 말에 카드리안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엑스시온의 핵에 사용하는 것은 루비죠. 제가 연구해 본 결과 루비로 낼 수 있는 출력의 한계는 2.3입니다. 저는 이번에 그걸 완성해서 적기사 라는 타이탄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출력을 루비로 내려고 했다가는 곧장 출력이 폭주해서 폭발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마도 루비가 가지는 강도(■度)의 한계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루비보다 더 강한 보석도 있지 않은가? 예, 물론 있죠. 핑크 다이아몬드 제가 실험해 본 결과로는 그것으로도 2.5 정도밖에는 낼 수 없었습니다. 또 붉은색 다이아몬드는 아주 희귀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타이탄이라면 고작 한 대 만들기조차 힘들 겁니다. 그렇기에 타이탄 성능 향상은 아마도 더 이상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카드리안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잠시 말문을 닫았던 아르티어스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자네 , 드래곤 하트로도 실험을 해봤나? 드래곤 , 하트 라고요? 그 둘은 잠시 벙어리가 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붉은 머리털을 가진 아가씨가 이 광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젊은 드래곤은 둘의 대화가 가진 의미를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최강의 드래곤으로 꼽는, 레드 드래곤의 일족인 바미레이드는 인간 따위가 아무리 강해져 봐야 그들 일족의 적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카드리안 아저씨. 겨우 인간 따위가 아무리 강해져 봐야 브레스 한 방이면 끝장이잖아요? 하지만 바미레이드의 천진난만한 의견에 대해 카드리안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인간세상에 있으면서 그들을 남몰래 비웃으며 언제나 품어 왔던 우월감. 그러니까 카드리안에게는 인간들 시계(視界)의 좁음과 편견, 고정 관념을 비웃으며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우월감이 타이탄을 단 한 대도 만들어 보지 않은 한 늙은 드래곤에 의해 처참할 정도로 찢겨져 버린 것이다. 그 자신도 인간들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어느덧 타성에 젖어서 엑스시온은 무조건 붉은색 보석 으로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드리안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금속, 마법의 불이 아니면 녹이지 못하고,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최고로 귀한 물건, 즉 드래곤 본(Dragon Bone)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붉은색을 띠는 드래곤 하트는 엄청난 마나의 집약체이기에, 드래곤 하트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키드리안은 그것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랜 세월 타이탄을 연구해 왔던 그가 어렴풋이나마 그 위력을 짐작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실험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괴물이 만들어질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그것을 사용한다면 아마도 최소한 2.5의 벽은 깰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더욱 발전한다면 우리 드래곤은 더 이상 최강의 생명체가 될 수 없을지도 . 아르트어스는 상대가 순순히 수긍하고 들어오자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레드 드래곤이었다면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박박 우기려고 들었을 테니까. 내가 우려하는 점이 바로 그거라네. 인간은 건드려서는 안 될 영역을 건드리고 있어. 원래가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동물이 마나의 강대한 힘을 깨닫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네. 아르티어스 님. 그렇게 너무 비약해서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마법 능력이라는 것은 드래곤에 비해 너무 형편없고, 또 드래곤 하트를 사용해서 엑스시온을 만든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설혹 인간들 중에 엄청나게 뛰어난 마법사가 태어나 드래곤 하트를 이용해서 엑스시온을 만들어 냈다고 해도 대량 생산은 불가능하죠. 또 대량 생산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걸 이용해서 드래곤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기사는 몇 명 되지도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확률이 낮은 가정(假定)인지 아시겠죠?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 할지라도 그만큼의 위험성은 존재하는 거야. 불가능해 보였던 많은 것들을 인간들은 해냈어. 설혹 인간들이 해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네 같은 드래곤들이 인간들에게 자신이 연구한 성과를 알려 준다면 그것 또한 같은 결과가 아니겠나? 나는 자네가 인간들의 역사에 너무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거의 80년 이상 인간 세상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의 변화와 탐욕을 지켜봤던 카드리안은 굳이 아르티어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이미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순순히 대답했다. :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래가 인간 세상에서 마법사 노릇을 한 것, 그리고 코린트를 최강의 제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 그 모두가 몇몇 인간들을 좋아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것에 대해서도 회의적(懷疑的)이 되어 가는군요. 사실 아르티어스 님이 말씀하지 않더라도 슬슬 정리하고 레어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잘 생각했네.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의 손에 맡기는 것이 제일 좋은 거야. 험험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아르티어스 님도 저 아이를 위해 인간 세상의 일에 간섭하실 생각이 아니십니까? 카드리안이 슬쩍 가리킨 것은 물론 절벽 아래를 따분한 듯 내려다 보고 있는 다크였다. 그렇지 않아. 저 녀석이 나한테 그런 걸 부탁할 리도 없고 말이지. 그리고 아버지한테 그런 걸 부탁할 정도로 저 아이가 힘이 없지는 않거든. 실은 너무 부탁 을 안 해서 문제지. 참, 저 녀석을 너무 기다리게 했구먼. 이만 돌아가세나. 카드리안은 레어 입구 있는 쪽까지 따라 나오며 말했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한동안은 저 아이를 따라다녀 볼까? 사실 레어 안은 너무 심심하거든 그 말에 카드리안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그 고독이란 병 때문에 모두들 인간 세상에 나가고 싶어하는 거겠죠. 아들과 함께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고맙네. 뚱뚱이와 뻔뻔이 넓은 호반이 펼쳐진 아름다운 대지. 100년 전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어떤 귀족이 그에 어울리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성을 그곳에 지어 놓았다. 그 귀족의 가문은 몰락해 버렸지만 아름다운 고성(古城)은 아직도 남아서 사람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성이 위치한 장소는 전략적인 요충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만을 연출해 내기 위해 지어 놓은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그 고성은 오랜만에 손님들로 들끓고 있었다. 수십명의 기사들, 그것도 그냥 기사들이 아닌 그래듀에이트들로서 자신의 타이탄을 하사받은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고성의 곳곳에 숨어서 외각을 경비하고 있었고,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고성의 한구석에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허허허 , 그렇지만 그것은 너무 과한 조건이외다. 흔히 외교 사절들이 그렇듯 닳고 닳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뻔뻔한, 그러면서도 구렁이 담 넘어 가듯 넘어가려고 하지만 그를 상대하는 사람도 그에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본국(本國)에서 총력을 다해 귀국(貴國)을 지원해 주는데 겨우 지로테 강(江 : river) 이남(以南)만을 약속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크로나사 평야 전체를 원합니다. 오랜 옛날부터 크로나사 평야는 우리들 크라레스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그것을 코린트가 빼앗아 갔으니, 만약 코린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크로나사 평야에 대한 우선권을 본국에서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허허, 하지만 크로나사 평야는 비옥하면서도 대단히 넓은 대지외다. 그 반정도만 가져도 귀국은 엄청난 국력의 증가를 가져올 텐데, 귀국에서 본국에 대해 지원해 줄 수 있는 병력과 비교할 때 크로나사 전체를 원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욕심이오. 귀국이 보유하고 있는 타이탄은 겨우 스물여덟 대, 그걸 모두 본국에 지원해 줄 수는 없을 거고 최대한 많이 지원해준다고 해도 스무 대의 타이탄이 고작일거요. 그런데 겨우 스무 대를 지원해주면서 크로나사 전체를 원한다는 것은 . 뻔뻔이의 말은 여기서 막혔다. 왜냐하면 크라레스에서 파견된 사절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말을 중단하자 크라레스에서 파견되어 온 뚱뚱한 체구의 인물은 느긋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귀하가 한 가지 생각 못하고 있는게 있습니다. 본국은 치레아와 스바시에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80대의 타이탄을 노획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이 고철인 상태에서 노획된 것이지만 그것을 재료로 지금 현재 20대 정도의 타이탄을 생산해 냈습니다. 또 조만간에 그 수는 더욱 불어날 것입니다. 본국의 전력을 겨우 28대의 타이탄으로 과소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정곡을 찔린 뻔뻔이는 약간 헛기침을 하면서 분위기를 살짝 돌리려고 했다. 험험 , 미안하오 그 사실을 잠시 잊어 먹었군. 하지만 본국과 코린트와의 전쟁이 시작되면 뛰어난 타이탄이 아니면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오. 귀국에서 노획했다는 타이탄들은 잘 되어 봐야 가까스로 정규급에 들어가는 타이탄들 , 그런 타이탄들을 흑기사를 가지고 있는 코린트와의 정규전에서 쓸 수는 없다는 말이외다. 물론 귀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카프록시아는 대단히 뛰어난 타이탄이오. 그러나 카르록시아는 겨우 10대밖에 되지 않잖소? 그렇다고 근위 타이탄들을 전부 본국에 지원해 줄 리는 없을 테고 ? 뻔뻔이의 말이 끝나자 뚱뚱이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물론 카프록시아는 본국의 얼굴이니 내줄 수는 없지요. 하지만 카프록시아와 같은 설계로 생산된 테세우스가 있습니다. 지금 테세우스는 28대가 생산되었고, 조만간 12대가 추가 생산될 예정입니다. 폐하께서는 그 모든 테세우스들을 귀국에 파견할 계획이십니다. 뚱뚱이의 말에 뻔뻔이는 살짝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응? 본국의 첩보부에서 들은 말과는 틀리군요. 귀국에서는 그것들로 미가엘이나 루시퍼를 생산한다고 . 그것은 차세대 타이탄 생산 계획을 숨기기 위해 본국에서 퍼뜨린 거짓 정보입니다. 카프록시아 급 타이탄을 40대나 생산한다면 누구라도 본국을 경계할 것이 분명하지요. 본국은 기사의 수가 적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미가엘이나 루시퍼로 재생산한다면 그것을 탈 기사가 없습니다. 본국의 실정에 가장 적합한 방법은 소수의 고성능 타이탄을 생산해서 몇 명 되지 않는 뛰어난 기사들에게 배분하는 것뿐이지요. 뚱둥이의 말에 뻔뻔이는 마치 큰 은혜나 받는다는 듯 과장되게 감사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엄청난 지원이라면 그 대가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벌써부터 최소한의 양보만으로도 그것들을 얻어 낼 궁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오호, 이번 전쟁에 그토록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다니, 폐하께서 그걸 아신다면 기뻐하실 거외다. 하지만 파견군 사령관은 누구로 할 예정이오? 폐하께서는 귀국에서 뛰어난 기사들을 보내 주시기를 바라십니다. 상대의 능청스런 요구에도 뚱뚱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것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근위 기사단이나 친위 기사단 소속을 제외한 본국의 모든 뛰어난 기사들을 투입할 것입니다. 사령관은 제2친위 기사단 단장,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전하가 되실 겁니다. 호, 얘기는 들었습니다. 상당한 수완을 지니신 분이라구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귀국에서 파견군 사령관으로 스바시에 전투에서 뛰어난 무위를 보인 근위 기사단 단장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 경을 보내 주실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 뛰어난 기사들이 모여야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상대의 코란 근위 기사단은 강하기 때문이죠. 안 그렇소? 뻔뻔이의 말에 뚱뚱이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스바시에 전투에서 가장 큰 공훈을 세운 사람은 지금 스바시에 총독인 루빈스키 공작이다. 하지만 루빈스키 공작이 프로이엔의 타이탄을 타고 싸웠었기 때문에 지금 외국에는 프로이엔의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터저 나온 웃음을 슬쩍 얼버무리며 상대에게 말했다. 하하하 그것은 잘못 알고 계신 거지요. 그 타이탄에 타고 계셨던 분이 루빈스키 공작 전하시니까요. 폐하의 만류로 아직 시험을 치르지는 않으셨지만 언제라도 마스터의 칭호를 획득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마스터 라고 했소? 하지만 귀국에 마스터는 한 명도 없는 것으로 . 예. 폐하께서 본국의 전력 노출을 염려하셔서 취한 조치였죠. 귀국과 마찬가지로 본국에서도 이번 전쟁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물론 본국에서 파견하는 모든 타이탄들은 귀국의 국가 문장을 달게 될 겁니다. 최대한 본국에서 귀국을 돕는다는 것을 숨겨야 하니까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본국은 코린트에게 간단하게 멸망 당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 점은 충분히 이해하오. 이해를 하셨다면 크로나사 평원 전체를? 흐음 , 그건 폐하와 상의를 해봐야 . 귀국에서 크로나사를 줄 수 없다면 본국도 귀국을 지원해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귀하를 믿고 드리는 말이지만, 본국에는 과거 트루비아의 모든 타이탄들이 망명해 와 있습니다. 물론 파로인 급 4대야 쓸모가 없겠지만, 안토로스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기사단 단장은 그라드 시드미안이라는 대단히 뛰어난 기사가 아닙니까? 물론 전쟁이 끝난 후에 트루비아가 독립할 수 있도록 귀국에서 도와 주셔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그 말에 뻔뻔이는 맹렬하게 두뇌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고성능 타이탄 44대. 웬만한 나라 10개를 합한다고 해도 구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외상이라면 황소라도 잡아먹는다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말로는 무슨 말을 못 하겠는가? 허허허, 좋소이다. 귀국에서 그 정도로 성심껏 본국을 도와 주신다고 하는데, 그정도 대가는 드려야 하겠지요. 하하하. 뚱뚱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기사에게 눈짓을 했다. 그것을 눈치 챈 기사는 재빨리 뚱뚱이에게 서류를 건네 줬다. 뚱뚱이는 미리 작성된 2부의 서류 중에서 하나를 뻔뻔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귀국의 언질을 못 믿는 것은 아니나, 일단 국가간의 중대사이니 만큼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죠? 자신 앞에 놓여진 서류가 전승했을 때 크로나사 평원을 양도한다 는 것임을 직감한 뻔뻔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잠시 망설였지만 뻔뻔이에게는 이 서류에 서명하지 않고 벗어날 명분이 없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서류가 나오지 않았다면, 뻔뻔이는 이러쿵저러쿵 변명을 늘어 놓으며 시간을 끌다가 헤어질 작정이었던 것이다. 뻔뻔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서류에 서명한 후 뚱뚱이에게 자신이 서명한 서류를 넘겨 줬고 곧이어 뚱뚱이가 서명한 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뻔뻔이는 뚱뚱이가 건네준 서류에도 서명한 후 씁쓰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기사에게 서류를 건네 줬다. 기사가 서류를 조심스레 접어서 품속에 넣는 광경을 보지도 않고 뻔뻔이는 뚱뚱이를 향해 약간 일그러진 표정으로 슬쩍 비꼬았다. 준비성이 좋으시군. 그 말에 뚱뚱이는 두터운 살집 위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각하께서 제 의견에 찬성하지 않으셨다면 휴지 조각이 될 종이였을 뿐이죠. 그렇다면 군대의 파견은 언제? 전쟁이 시작된 후 저희들이 기다렸다가 코린트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리고 혹시 필요하다면 본국이 들통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사단을 파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저희들이 기사단을 파견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우선 본국(本國)이 쑥대밭이 될 것이 뻔하니까요.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시겠지요? 뚱뚱이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전쟁이 시작된 후에 면밀하게 이해득실을 따져 승산이 있어야 참전하겠다는 속셈이 감추어져 있음을 눈치 채지도 못할 정도로 바보스러운 뻔뻔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뻔뻔이는 상대의 말을 인정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코린트의 정보망은 대단히 치밀했고, 또 흑기사들의 위력은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알겠소. 귀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폐하께 자세히 아뢰겠소.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부탁 드리겠소. 물론이지요. 가레신 후작 각하. 능청스레 미소를 짓고 있는 뚱뚱이를 보며 가레신 후작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자신이 당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국(大國)의 체면상 말을 뒤집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물 건너간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멍청한 놈들이나 하는 짓. 가레신 후작은 맹렬히 머리를 회전시킨 후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뭔가 돌파구가 될 만한 것을 생각해 냈기 때문이다. 귀국이 본국에 그렇게나 성심 성의껏 협조를 아끼지 않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외다. 그런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 해야 할까? 으음. 가레신 후작은 짐짓 뭔가를 궁리하는 척하다가 이윽고 생각났다는 듯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지. 귀국의 기사단은 아무래도 본국의 기사단보다 약하지 않소? 가레신 후작이 밑도 끝도 없이 말을 시작하자 뚱뚱이는 저 노회한 너구리가 또 무슨 수작을? 하는 생각을 하며 긴장했지만, 상대의 말을 반박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요. 상대가 자신이 놓은 덫에 걸려들자 가레신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시작했다. 본국의 기사단이 귀국보다 강한 것은 뛰어난 선생들을 많이 보유한 아카데미 덕분이죠. 본래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검술을 익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니 당연한 것 아니겠소? 코린트의 그 강대한 기사단들도 따지고 보면 우수한 아테데미들이 코린트 내에 여럿 있기 때문이죠. 엘프리안에 있는 엘프리안 아카데미는 마법으로도 유명하지만 뛰어난 드래듀에이트들을 많이 양성한 기사 학부를 가지고 있소이다. 어떻소? 귀국의 태자(太子)는 무술에 꽤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본국에서 수련시킬 생각은 없소? 폐하께서는 귀국이 그토록 본국의 일에 도움을 주는 것을 아시고 본인이 떠날 때 태자를 엘프리안 아카데미 기사 학부에서 뛰어난 기사로 키워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하고 말씀하셨소이다. 물론 가레신 후작이 마지막에 한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엘프리안 아카데미는 절대로 타국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철저하게 폐쇄적인 학교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만큼 엘프리안 아카데미의 기사 학부에는 뛰어난 기사들이 많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말대로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크루마를 이끌어 가는 기둥으로 성장했다. 그런 전통과 실력이 있는 학교에 타국인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뻔했다. 인질. 하지만 뚱뚱이는 그 제안을 거절할 찬스를 놓쳐 버린 상태였다. 상대가 폐하 를 등에 엎고서 말을 했을 때 뚱둥이는 더 이상 할 말이 궁색해 지고 말았다. 사실 대국(大國)의 황제가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을 쓴다는 말인가? 황제 폐하 운운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임이 확실했지만 그 말은 황제가 했다고 하는 데야 함부로 그 말은 거짓말이야 하고 반박할 수는 없었다. 뚱뚱이는 식은땀을 딲으며 마지못해 미소를 지은 채 주절거렸다. 너무나도 크신 은혜라 감히 따르기에는 . 가레신 후작은 그 일격에 상대가 쩔쩔매는 것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는 가증스럽게도 근엄한 표정을 짓고는 상대방에게 마치 큰 은혜나 베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오. 귀국에서 본국에 해주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성의 일 뿐이죠. 엘프리안 아카데미에서 신입생을 받는 것은 겨울이외다. 그때 3개월에 걸친 실력 테스트가 행해지고, 각자에 맞는 교육이 시작됩니다. 저희로서도 든든한 우방이 생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안 그렇소이까? 그, 그렇죠. 뚱뚱이와 뻔뻔이의 대결이 끝난 후, 뚱뚱이가 축 처진 몰골로 퇴장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가 마지막에 맞은 카운터 펀치의 위력이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뚱뚱이는 황제 폐하의 진노 덕분에 목이 날아갈 가능성이 다분히 있음에도 서둘러 크라레스로 돌아갔다. 그런 후 황제 폐하께 자신의 실수를 아뢰었고, 곧이어 대책 회의가 열렸다. 그건 절대로 불가능하옵니다, 폐하. 황태자 전하는 다음 세대의 크라레스를 이끌어 가실 분이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전하를 파견하는 것은 아니 되옵니다. 그 때문에 코린트에도 가짜를 파견한 것이 아니옵니까? 60세는 족히 되어 보이는 황실 시종장(侍從長)의 말이 끝나자, 토지에르 경도 고개를 주걱거리며 말했다. 시종장의 말이 맞사옵니다. 아무리 아카데미에서 무술을 배우게 된다고 하더라도 인질이 될 가능성이 다분한 이상 황태자 전하를 보낼 수는 없사옵니다. 이때 두툼한 뱃가죽을 자랑하는 아티노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꼭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사옵니다, 전하. 코린트는 언젠가는 전쟁을 해야 하는 상대지만, 크루마와는 지금부터 착실하게 신뢰 관계를 쌓아 가야만 하옵니다. 코린트에는 무도회 정도만을 개최하는 공식적인 자리였기에 가짜를 보내도 들킬 염려가 없사오나, 크루마에서는 장시간 교육을 받고 또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어야 하기에 우리 쪽에서 가짜를 파견했다는 것이 드러날 가능성도 있사옵니다. 모두들 안티노스가 지적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그발트 폰 안티노스는 국내외의 모든 정보를 담당하는 정보국장이었기 때문이다. 휘하에 수많은 첩자들을 거느리고 조그만한 실마리라도 있으면 그것을 핵으로 이것저것 갖다 붙여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인물. 그렇기에 그가 가짜임이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것이다. 흠, 시종장. 예, 폐하. 만약 황태자를 파견한다면 최대한 붙일 수 있는 호위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예. 국제 관례상 본국의 국력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전하께서 타국을 방문하실 경우 공식적으로 1명의 마법사와 5명의 기사, 20명의 호위병을 대동하실 수 있사옵니다. 그리고 4명의 시녀, 8명의 하인, 30명의 짐꾼을 거느리실 수 있습니다. 시종장은 법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국제 관례상 통용되고 있는 호위의 수를 설명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방문하는 경우에는 이런 국제 관례를 따질 필요가 없었지만, 황태자가 갈 곳은 크루마 제국이었고 크루마는 4대 강국(四大■國)에 들어가는 강대국이었기에 국제 관례를 철저히 따질 필요가 있었다. 흠, 그 모두를 기사로 채운다고 해도 턱도 없는 전력이군. 약간은 허탈한 듯한 황제의 말에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거기다가 전하께옵서는 친선 사절로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아카데미에 입학하시기 위해 가시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실 필요가 있사옵니다. 황태자 전하계서 크루마에 가고 오실때에는 호위를 붙일 수 잇지만, 아카데미에 계신 동안은 그 정도의 호위 조차 상주시킬 수 없사옵니다. 아카데미에서 전하께 배정해 주는 방의 수와 규모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아마도 호위 기사 2명 내외, 시녀 2명, 하인 4명 정도가 최대치일 것이옵니다. 그대의 말이 옳겠지. 하지만 그 모두를 그래듀에이트로 채워 넣는다고 해도 크루마의 군사력을 생각해 볼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그렇다면 경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폐하, 그러니까 . 젊은 황제의 질문에 입을 연 인물은 목소리는 들렸지만 그곳의 탁자에 앉아 잇는 사람은 아니었다. 회의가 벌어지고 있는 밀실의 중앙에는 넓은 원형 탁자가 있었는데, 그 탁자에는 모두 일곱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의자에는 다섯 명만이 앉아 있었고 두 개는 공석 이었다. 공석인 탁자 위에는 지름이 50㎝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수정 구슬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수정 구슬 안에 비춰지고 잇는 스바시에 총독 루빈스키 공작이 입을 연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 두 명의 시종만을 붙여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오히려 이쪽에서 호위를 붙이지 않는 편이 황태자 전하께 유리할 것이옵니다. 경들고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 폐하. 호위가 유능할수록 감시는 오히려 더욱 강화될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리고 만약 상대가 나쁜 마음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즉시 손을 써 오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호위 무사가 없으니 언제라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자만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때 비밀리에 파견한 기사나 마법사를 통해 전하를 구출하실 수 있겠지요. 아마도 그 편이 훨씬 더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이옵니다. 짐도 그렇게 생각하노라. 황태자는 길일(吉日)을 택하여 크루마에 보내도록. 하지만 크루마가 본국을 얕잡아보지 않도록 황태자의 통행을 호위하는 무사들은 최고의 정예들로 배치하라. 예, 폐하. 오래지 않아 전쟁이 벌어진다. 모두들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국외로 수련 여행을 떠난 기사들을 즉시 소환하도록! 코린트의 황궁 피의 궁전(Blood Plalace) 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 홀에는 대규모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우아한 옷들을 입은 처녀들과 최대한 늠름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청년들. 수백 명에 이르는 남녀들로 연회장은 붐비고 있었지만, 황궁의 중앙 홀이 원체 넓다 보니 거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중앙 홀의 한쪽에는 백여명으로 이루어진 악단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금은과 각종 보석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천장과 벽은 금은 세공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드워프들의 작품답게 호화찬란했다. 바닥은 아름다운 문양이 수놓인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어찌나 잘 다음었는지 흡사 거울 같아서 얼굴이 비칠 지경이었다. 거기에다가 대리석의 곳곳에 각종 보석으로 모자이크를 만들어 놓았다. 마법사들을 동원하여 수백, 수천의 보석 알갱이들을 정확한 위치에 집어 넣은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야 말로 코린트가 가진 엄청난 부(富)를 과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바닥 모자이크에 사용된 보석은 비싸지 않은 마노, 홍옥, 청옥, 갖가지 색의 수정 따위였지만 중앙 홀의 엄청난 넓이를 생각한다면 거기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홀이 너무 넑은데다가 모자이크의 규모가 매우 커 바닥 위에서 대충 봤을 때는 뭐가 그려져 있는지 알기 힘들었지만, 2층이나 3층 현관에서 내려다 보면 전쟁의 신이자 코린트가 그들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받들고 있는 아레스(Ares)의 비호 아래 코린트 군대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 그려져 있는 전쟁의 주무대는 그 땅을 획득함으로써 코린트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크로나사 평야였다. 참혹한 전쟁터가 그려져 있는 홀에서 무슨 파티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자이크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바닥 바로 위에 서서는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물며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으니, 그 위에 서서 파티를 즐기는 인물들에게 있어서 이 홀은 단순히 엄청나게 호화롭게 아름다운 장소로만 보였을 뿐이다. 더구나 홀에서 무도회를 즐기고 있는 남녀의 대부분은 코린트 시민이 아닌 타국에서 참석한 귀족, 혹은 왕족들이었기에 이곳에 그려진 그림이나 모자이크가 그려진 배경 따위를 알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곳에 있는 청년들의 상당수는 상당한 미모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는 로닌그레이 황녀의 남편감 후보로서 초청된 인물들이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코린트 황실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기에 각국의 왕실에서 황녀를 획득(?)하기 위해 앞다투어 그 초청에 응해 왕자들을 파견했다. 또 수많은 왕자들이 참석하는 연회인 만큼 그들을 사냥하기 위해 각국에서 온 공주들도 많이 있었다. 또 코린트의 귀족들도 타국의 왕자나 공주를 사귀기 위해 참석하기도 했다.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연회장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3층 현관에서 그들을 재미있다는 듯이 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짧은 콧수염을 가진 상당한 멋쟁이였는데 그는 보통의 귀족들이 그러하듯 탐스러운 금발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무대가 제법 격을 갖춰 가는 것 같군 그래. 초청에 불응한 국가는? 뒤편에 서 있던 화려한 복장의 젊은이가 재빨리 대답했다. 없사옵니다, 대공 전하. 오히려 로닌그레이 전하께 선택되지 않은 왕자나 귀족들을 사윗감으로 삼기 위해 각국에서 공주들까지 파견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추가된 인원을 위한 준비에 힘이 들 지경이옵니다.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하긴 그래. 저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참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누가 크라레스의 왕자이지? 청년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 바로 저쪽에서 춤을 추고 있는 건장한 젊은이옵니다.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 청년이 가리키는 곳에는 젊고 잘생긴 젊은이가 어떤 아름다운 여인과 춤을 추고 있었다. 키에리 발렌시아드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크라레스의 왕자가, 본국이 크라레스와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전쟁의 홀(Hall of War) 에서 계집들과 춤을 춘다. 크흐흐흐. 매우 재미있지 않나? 예! 발렌시아드 대공은 반쯤 농담 삼아 미소를 흘리며 말했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청년 무관은 굳은 얼굴에 긴장을 지우지 않고 즉시 답했다. 그런 부하를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본 다음 발레시아드는 다시 시선을 크라레스의 왕자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제법 잘생겼군. 하지만 아직 풋내기야. 그런데 그레지에트 왕과는 별로 닮지 않았는데? 예, 전하. 그 때문에 그의 신분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했사옵니다만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사옵니다. 부계보다는 모계 쪽에 가까운 얼굴을 지닌 것으로 조사되었사온데, 나이에 비해 상당한 실력을 갖춘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아마도 크라레스 왕가 자체가 뛰어난 무사들의 혈통을 지닌 만큼, 나중에는 제법 괜찮은 기사가 될지도 모르지요. 그 말에 대공은 비웃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저 녀석의 호위들은 어디에 있나? 예. 3-22호 숙소에 묵고 있습니다. 금십자 기사단 소속의 기사 몇 명이 감시중인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크루마와 전쟁을 벌이려면 후방이 튼튼해야 한다. 크라레스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으려면 철저히 대비를 해야겠지. 알파레인 경에게 명하여 그래듀에이트를 몇 명 더 파견하여 동태를 감시하라 일러라. 예, 전하. 공작은 청년 무관에게 명령을 전달한 후 이제 더 이상 볼일은 없다는 듯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려한 복장의 청년은 자신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명의 무관 중 한 명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청년의 지시를 받은 무관은 즉각 금십자 기사 단장 프레드 알파레인 후작에게 대공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달려갔다. 불쌍한 신의 실패작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소녀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니서 말했다.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나와 봤지. 또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구경해 보고 싶기도 했고 .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일단은 부하 녀석들을 데려와야 하니까요. 부하? 예. 견습 기사 두 명인데 코린티아에 있어요. 견습 기사라고? 그런 녀석들 데리고 있어 봐야 별 도움도 안 되고 성가시기만 할 텐데? 좀 실력 있는 녀석들을 데리고 오지 않고 말이야.. 크로돈에 가 보니까 꽤 쓸 만한 녀석들이 많던데 . 크로돈이라구요? 거기에는 왜 갔어요? 당연히 네 녀석이 거기 있는 줄 알고 갔지. 그 다음은 치레아로 갔고 거기서 . 이때 다크는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슬쩍 바뀌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분노. 자신이 아르티어스에게 뭐 잘못한 것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이윽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이 장난쳐 놓은 것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헤헤. 치레아 총독부 건물이 꽤 근사하게 생겼죠? 물론 코린티아에 있는 피의 궁전보다는 못하지만 말이에요. 저것 봐요. 얼마나 큰지 여기서도 보이네요. 말 돌리지마! 아르티어스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다크는 아르티어스가 아예 말을 꺼낼 시간을 주지 않고 선수를 쳐 버렸다. 말 돌리는 게 아니라니까요? 붉은색의 장엄한 궁전이잖아요? 그럼 나중에 나는 금빛 나는 궁전을 하나 지을까요? 아름다운 호반 주변에 지은 다음 아르티어스 궁이라고 이름 지으면 좋을 것 같요? 글쎄 그렇겠지. 그런 다음 궁전 기사단은 모두 다 금빛 나는 옷을 입혀 놓고 골드 드래곤 기사단이라고 이름 붙이는 거예요. 그렇다면 타이탄도 모두 금 도금을 해야겠네요. 안그래요? 다크가 자신이 듣기에 좋은 말만 골라서 하고 있다는 것을 아르티어스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게 싫지는 않았기에 은연중에 그도 그녀가 말하는 것에 따라 이것저것 상상을 하기 시작하며 대답했다. 음 , 글쎄다. 그러는 게 짝이 맞겠지. 타이탄의 모양도 골드 드래곤처럼 멋지게 만드는 거예요. 하지만 거기에 금을 입히려면 돈이 많이 들 테니까 한, 10대만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골드 드래곤이라는 게 원래 강한데다가 지혜를 상징할 정도니까 문과 무를 함께 지닌 상징이잖아요.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나중에 궁전을 짓는다면 저 따위 붉은색보다는 이왕이면 금색이 좋을 것 같아요. 저 녀석들이 붉은색을 칠해 놓은 것은 레드 드래곤이 최강이라고 생각하고 만든 모양이지만, 사실 레드 일족은 힘만 세고 머리는 텅 빈 녀석들이잖아요? 골드가 최고죠. 안그래요? 슬쩍 레드 드래곤 이야기를 끼워 넣자 평소에 무식한 그 녀석들 하고 감정이 많던 아르티어스는 열을 올려가며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지혜 하면 골드 드래곤 아니겠느냐? 무식한 레드 일족 따위는 상대도 안 되지. 그런 무식한 놈들을 만든 것은 신께서 실수하신 거야. 멍청한 놈들! 또 원래가 금이란 것이 영원을 상징하는 신의 선물 아니겠느냐? 영원한 제국을 뜻하는 말이 될 수도 있지. 왕궁을 짓는다면 금색을 입히는게 최고야. 그렇죠?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다크는 지혜롭기는커녕 단순하기 그지 없는 이 골드 드래곤을 어떻게 요리해 나가는 것이 좋을 지 대충 감을 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크와 아르티어스는 수정궁이라는 여관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 물어서 찾아갔다. 둘 다 이곳 코린티아에 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지리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기예요. 호, 꽤 근사한 곳이군. 둘은 안으로 들어간 다음 일행들이 있는 방으로 갔다. 문앞에 도착하자 경비를 서고 있던 무사 두 명이 그들에게 조심스런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일행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응. 모두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들어가십시오. 무사들 중의 한 명이 문까지 열어 주며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동료에게 말했다. 소녀와 함께 온 녀석은 또 누구지? 여기는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자네는 빨리 죠드 경에게 열락해. 알았어. 그의 지시를 받은 무사가 죠드라는 마법사를 찾기 위해 달려간 사이에 남은 한 명은 문에 살짝 귀를 대면서 내부의 동정을 엿보기 시작했다. 다크와 아르티어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지미와 라빈이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그분은? 응. 내 의부(義父)야. 그건 그렇고 인원이 좀 모라라는 것 같은데? 아, 예. 파시르하고 드워프는 잔뜩 먹고는 방에서 자고 있어요. 둘다 신경이 굵기가 이루 말할 수 없더군요. 그 녀석들 깨워서 데려와. 예. 지미가 그들을 깨우러 들어간 후, 다크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소녀가 아르티어스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아르티어스는 그 속셈 뻔히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답했다. 왜 그러냐? 너는 꼭 무슨 부탁할 게 있을 때만 그렇게 부르잖니? 꽤 성가신 놈이 있어서 그러는데 우리들을 아주 먼 곳으로 이동시켜 주실 수 있어요? 예? 부탁 드려요. 성가신 놈이라니? 아르티어스는 수상쩍다는 듯 의심이 가득한 눈동자를 소녀에게 던지면서 말했다. 네 실력에 그런 녀석이 있다면 살려 뒀을 리가 만무하고, 또 상대가 그러고도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글쎄요. 아마도 저를 좋아하는 모양인데, 여기 온 것도 그 녀석이 꼬드겨서 온 것이거든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흑심을 드러낸 것도 아니고, 또 나를 좋아한다는 데 없애 버릴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부탁드려요. 흐흐흐, 하기야 좋다고 따라다니는 놈을 어떻게 손봐 주기도 좀 그렇지? 그럼 어디로 가고 싶으냐? 글쎄요. 경치 좋고 조금 색다른 곳이면 좋겠는데, 어디 아는 곳 없어요? 흠, 예전에 내가 여행했던 곳이 있는데 거기는 어떨까? 좋아요. 소녀는 아직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방안에서 걸어나오는 두 사람을 아르티어스에게 소개했다. 이좋은 파시르라는 용병이고, 저쪽은 뭐라더라? 어쨌든 드워프에요. 말도 안 되는 소개에 화이어헤머는 발끈해서 외쳤다. 뭐야? 나는 엄연히 지크레아 화이어헤머라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근사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어쨌든 드원프 라는 요상한 이름이 아니란 말이야. 화내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드래곤의 입장에서 드워프란 존재는 심심할 때 간식거리 내지는 가끔 일이나 부려먹는 노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존재가 감히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향해 짜증스런 어조를 내뱉자 아르티어스는 슬쩍 노기를 담은 눈을 드워프에게 돌리며 중얼거렸다. 감히 신의 실패작인 드워프 주제에 내 아들한테 대들다니, 그렇게도 죽고 싶으냐? 딱 벌어진 어깨를 도전적으로 내밀고 수염을 푸들거리며 화를 내던 화이어헤머는 신의 실패작 이라는 어디서 많이 들어 봤던 표현을 사용하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향해 분노에 찬 눈길을 던졌다. 서로의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화이어헤머는 상대의 눈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는 순수한 난폭함, 광기, 분노 따위를 읽을 수 있었다. 만약 사람이 저런 눈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정신이 바로 박힌 인물일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저 정도 눈을 가지기 전에 미쳐 버렸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화이어헤머는 저런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가증스런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들조차도 자신들의 뛰어난 손재주를 인정하는데, 자신들을 종종 노예처럼 부려먹으면서도 탁월한 능력만큼은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 자들. 게다가신의 실패작이라는 모멸스런 표현으로 비웃는 놈들. 그놈들은 바로 . 당신은 드 드 . 처음의 호전적인 태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완전히 고양이 앞의 쥐같이 무력해진 화이어헤머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중얼거림조차 길지 않았다. 머리 속을 울리며 어떤 목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더 이상 말하면 죽여버릴 테다. 내 정체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있어. 알았어?> 사람들은 화이어헤머가 당신은 드, 드 하고 말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위아래로 맹렬히 흔들어 대자 수상한 듯한 시선을 보냈다. 잠이 덜 깨서 헛것을 봤나? 하면서 . 다크는 방안 공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빨리 가자구요. 그러자꾸나. 아르티어스는 몇 마디 주문을 외우다가 말고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잠시 잊고 있었는데 너를 만나겠다고 나를 따라온 녀석들이 있는데 만나 볼 테냐? 따라오다니요? 왕이 보낸 녀석들이지. 아마도 눈치를 보아하니 그쪽에서도 너를 필요로 하는 것 같던데? 흠, 벌써 일을 벌이려고 그러나? 이상하네, 아직 때가 아닐 텐데, 어쨌든 그리로 가죠. 어디로 갈 건지는 그 녀석들과 만나서 무슨 일인지 알아본 후에 결정하기로 해요. 알겠다.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곧이어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역시 아르티어스는 드래곤 답게 이동용 마법진 따위는 사용하지도 않고 곧장 이동 마법을 시전했던 것이다. 전쟁의 시작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하. 좋아.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탁자에 빙 둘러 앉아 있던 인물들이 재빨리 일어서며 인사했다. 그녀가 가볍게 답례를 한 후 자리에 앉자 그들도 앉으며 저마다 인사를 건네 왔다. 작전 성공을 축하 드리옵니다, 전하. 고맙소. 그녀는 앉아 있는 스무 명 남짓한 인물들을 천천히 둘러본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경들, 갑작스런 회의에 참석하느라 시간을 내줘서 고맙소. 내가 경들을 소집한 이유는 이거요. 카드렛 경! 그러자 한쪽에 앉아 있던 30대 초반의 남자가 일어서서 그녀의 호명에 답한 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예, 전하.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어제 선전 포고를 하기 위한 사절이 코린트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선전 포고는 물론 15일 후 그들이 코린티아의 수도에 도착한 다음 코린티아 황궁에 전달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전면전이 시작될 것입니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코린트의 기사단들이 속속 국경 주위에 배치되고 있어 폐하께서는 전쟁을 하루라도 뒤로 미루기 위해 선전 포고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신 겁니다. 상대도 이쪽에서 선전 포고를 위한 정식 사절단이 파견되었다는 것을 사절단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대국(大國)으로서의 예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습니다. 덕분에 15일의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 15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본국의 흥망이 걸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공작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실 의향이시옵니까? 일단은 황궁에서 내려지는 결정에 따라야 하겠지. 하지만 본국의 관례상 전시의 모든 작전권은 총사령관에게 있는 만큼 본인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겠기에 경들을 소환한 것이야. 미네르바는 앉아 있는 인물들을 차근차근 훑어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경들도 알고 있다시피 코린트가 본국을 침공해 들어오기 위해서는 미란 국가 연합을 통과해야 한다. 그 때문에 코린트도 섣불리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이동 마법을 이용해서 소수의 기사단만을 투입한다고 전쟁을 끝낼 수는 없다. 정규군을 격멸하는 데는 기사단이 최고겠지만, 점령지를 확보, 관리하는 데는 군대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문제는 코린트가 투입할 연합군 병력의 규모와 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본국과의 전쟁에 투입되느냐 하는 것이지. 그 말에 공작 옆쪽에 앉아 있던 장년의 사내가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미란 국가 연합은 예로부터 본국과 코린트 사이에서 힘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오니 당연히 코린트는 미란을 짓밟지 않고서는 그들을 통과하기 힘들 것이옵니다. 그 점도 생각해 두는 것이 어떠하올는지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쪽에서 그에 대한 반론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미란 국가 연합은 도저히 코린트를 막을 수 없소. 만약 코린트를 막으려고 든다면 자국이 전쟁터가 되어야 할 텐데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코린트의 군대를 막을 필요가 그들에게 있겠소? 막을 힘이 있다면 가능하겠죠. 본국이 병력을 지원해 준다면 . 장년의 사내는 그의 말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첨부해서 반박했다. 하지만 그는 뒷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크루마의 군사력을 지원해 준다고 해도 코린트를 막는 데는 역부족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본국의 기사단은 본국을 지키기에도 벅찬 형국인데 타국을 지원해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오. 아마도 코린트는 현재 군사력으로 봤을 때 최소한 20개 보병 사단, 5개 기병 사단, 200여 대가 넘는 타이탄을 투입해 올 거요. 물론 자국 방어 및 치안 안정을 위해 충분한 양의 기사단을 제외한다고 해도 말이오. 그 외에 코린트와 동맹을 맺은 국가에서 파견할 군대까지 감안한다면 . 하지만 경의 생각은 좀 지나친 감도 있소. 왜 꼭 코린트가 전면전으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이쪽에서 군사력을 증가시키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형식의 무력 시위 정도로 끝날 수도 있소. 무력 시위? 하! 코린트는 유감스럽게도 본국에서 드래곤 한 마리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의 드래곤 본을 삼킨 것을 알고 있소. 그들이 본국의 군사력이 엄청나게 확대되기를 참고 기다려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나라도 그 정도 무력 시위 좀 한다고, 아니 참 그 무력 시위의 결과로 상대국에서 더 이상 무력 팽창은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각서를 쓴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외다. 두 사람이 열을 올리기 시작하자 한쪽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어 보이며 열기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자, 자, 너무 열을 올리지 마십시오. 현재 코린트의 군대가 이동하는 것을 파악해 본 결과에 따르면 결코 무력 시위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5개 사단 병력은 타렌 왕국과의 접경에 있는 쟈므 시에 서서히 집결중입니다. 그리고 군대가 이동할 수 있도록 미란 국가 연합과 물밑 접촉을 시도중이죠. 그리고 본국을 둘러싸고 있는 3개의 제국, 5개의 왕국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 코린트는 본국을 멸망시킬 의사가 충분히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 전력을 투입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겠지요. 지금까지의 정보로 봤을 때 코린트는 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자신하고 있는 만큼, 한번에 전 병력을 투입해서 끝장을 낼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식으로 전쟁을 벌인다면 코린트로서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국 주변의 국가들을 이리저리 쑤셔 대고, 또 본국의 동맹국들을 괴롭혀서 이탈하게 만든 다음 본국을 고립시키는 작전을 선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본국이 완전히 고립되고 난 후에 시작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의 말에 미네르바의 옆에 앉아 있는 지크리트 루엔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머리가 있는 놈들이라면 당연히 그 방법을 쓸 테지.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현재로도 서로가 병력을 동원한다면 10:6 정도로 본국이 밀리는데, 거기다가 동맹군까지 가세한다면 10:5도 되지 않소. 그런데도 코린트가 정석으로 동행해 줄까? 좋은 지적이십니다. 현재까지 첩자들을 통해 들어오고 있는 정보로는 완전 고립 정책을 우선 시행하면서 천천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기습전으로 나온다면 기사단을 후송해야 하는 군대가 어딘가에 대량으로 집결해야 함에도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쟈므 시에 집결중인 5개 사단도 아직까지 국경을 통과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코린트의 동맹국인 타렌 왕국에서 아직 허가가 떨어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물론 타렌 왕국의 군함들이 렌트 항에 속속 집결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면 곧이어 타렌의 국왕이 코린트의 5개 사단을 수송해 주겠다고 허가할 것 같지만 말입나다. 흠. 코린트에 바다가 없다는 것이 이런 때는 무척 다행이군. 바다를 통한 이동을 하려면 일일이 타국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그 과정에서 정보가 누설된다 이 말씀이야, 그렇지 않소? 그 덕분에 바다 쪽은 거의 걱정하지 않고 있는 것 아니겠소? 하지만 타렌 왕국이 병력을 수송해 주려고 든다면 그 대비는 충분한가요? 예. 마틸다 장국이 정예 해군을 배당받아 지키고 있습니다. 마법사들까지 지원받았으니 아마도 무난하게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으음 이 상태로 코린트가 시간을 끌어만 준다면 더 이상 좋을 것이 없을 텐데 말이오. 하지만 두 달 이상은 힘들 것이오. 겨우 두 달 동안 신형 타이탄을 생산해 봐야 몇 대나 만들 수 있겠소? 잘 하면 2차 증강분까지는 인도될지도 모르죠. 2차분의 타이탄은 자금 문제상 엑스시온만 아직 제작하지 못하고 있지 않소? 뼈대와 장갑판은 모두 제작된 상태니가 신께서 도우셔서 드래곤 본만 빨리 팔아치울 수 있다면 가능성은 있소. 하지만 그 정도 황금을 가진 국가는 거의 없습니다. 또 드래곤 본은 엄청난 고가의 물건이지만, 그걸 가공하는 것도 매우 힘드는 일이죠. 웬만한 국가들의 경우 드래곤 본 가공은 생각하지도 못 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생각해 보나마나 알카사스에 판매하게 되겠지. 하지만 알카사스에 대량의 드래곤 본이 유입되고, 또 엑스시온을 제작하기 위한 재료들이 대량으로 이곳으로 운반된다면 그걸 누치 채지 못할 바보는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야. 알카사스와 본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사이도 아니고 말이지. 이때 여태껏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미네르바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드래곤 본은 이동 마법진을 통해 알카사스로 운반될 것이니 경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문제는 엑스시온의 재료들을 어떤 경로로 가지고 오느냐 하는 것이겠지. 재료들 중에서 가벼운 것들이나 소량 사용되는 것들은 모두 다 이동 마법진을 통해 본국으로 전송될 것이야. 하지만 타이탄 생산에 대량으로 사용되는 미스릴이나 크로네, 황금, 은 따위의 금속성 물질들은 그 부피는 제쳐놓더라도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지. 하지만 모두 비밀리에 따로 운반될 테니 그대들은 걱정하지 말라. 예, 전하.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리 텐데 . 그러자 미네르바의 옆쪽에 앉아 있던 지크리트 루엔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타이탄 몇 대 정도 제작할 수 있는 분량은 우선적으로 마법진을 통해 전송받았다. 나머지는 천천히 공급받게 될 거야. 그리고 금이나 은이라면 귀족 가문이나 부자들을 통해서도 충분한 징발이 가능하니 수급에 약간 차질이 생기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네. 그 말씀을 들으니 안심이 되옵니다, 전하. 일단 어느 정도 토론이 오고 간 후 미네르바는 좌주이을 둘러보며 조용한 어조로, 하지만 힘주어 말했다. 일단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2차 증강 작업을 완료해야만 해. 이건 칙명(勅命 : 황제의 명령)으로서 들어라.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경들은 각자의 군대를 확실히 장악하여 경고망동을 삼가도록 하라. 그리고 타이탄을 보유한 기사들은 이동 마법진이 갖춰져 있는 5대 도시에 모두 배치될 것이다. 그리고 마법사들을 철저히 보호하라. 존명! 미란 국가 연합 미란 국가 연함은 다섯 개의 왕국들이 모여 이루어진 국가다. 서쪽으로는 강대국 코린트 제국, 동쪽으로는 강대국 크루마 제국의 사이에 끼여 있는 다섯 개의 왕국들. 이드리이 어느 한쪽, 또는 몇 개씩 양쪽의 강대국들에 흡수, 통합되지 않고 살아 남은 이유는 그 두 강대국 사이에서 완충 지대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크루마 코린트가 그 오랜 시간 국경을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충동하지 않은 이유가 이 완충 지대 덕분이었다. 완충지대가 없었다면 아마도 오래 전에 크라레스와 코린트처럼 대규모 전쟁이 터졌을 게 분명했다. 이 작은 다섯 개의 왕국들은 일단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 남아야 했고, 그렇게 살아남는 길은 오직 중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로가 뭉치는 방법뿐이었다. 그 때문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 국가 연합 이다. 미란 국가 연합은 다섯 개의 국가를 다섯 명의 왕들이 통치한다. 그리고 5년 주기로 국가 연합의 의장(議長)을 선출하여 그가 국가 연합을 이끌어 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의장은 연임이 가능했다. 그래서 통상의 경우 한 번 의장으로 추대된 후 큰 과실이 없다면 종신토록 의장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 관례였다. 의장은 다섯 명의 왕들 중 가장 능력이 높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이 선정되었다. 하지만 이 톡특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미란 국가 연합의 의장이 가진 힘은 다른 왕들보다 조금 더 발언권이 강하다는 정도뿐이었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별 말성 없이 유지되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의장의 힘이 약하다는 것이 유리하게 받아들여졌지만 전시에는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크라레스가 멸망했을 때,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30여 년쯤 전에 전시에는 모든 권력을 의장에게 집중시킨다는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었다. 미란 국가 연합은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어서 불리한 점도 많았지만 유리한 점 역시 많았다. 두 강대국의 사이에서 중개 무역만 해도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더욱이 코린트의 경우는 바다를 가지지 못한 내륙 국가였기에 모든 물자는 육로, 또는 운하를 통해 운송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란 국가 연합의 5개 국, 토란, 가므, 쟈렌, 스므에, 알렌 왕국 중에서 현재 미란을 이끌어 가고 잇는 것은 가므 왕국의 국왕 지크프리트데 가므 3세였다. 가므 왕국의 수도는 마로니카라는 아름다운 호반 도시였다. 그곳에 단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호수 옆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규모의 왕궁을 아마 죽을 때까지 기억하게 되리라. 미란 국가 연합 자체가 무역을 통해서 모두들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에 각각의 왕궁들의 규모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장엄하고 호화 찬란했기 때문이다. 성내의 수많은 문들에는 최소한 두 명 이상의 근위병들이 붉은색과 금은색의 수실을 사용한 호화로운 복작으로 창을 든 채 경비를 서고 있었고, 복도를 쭉 따라가면 좌우 양쪽에 아름다운 그림이나 조각물들이 빈틈없이 배치되어 자신들의 부를 한껏 자랑하는 듯했다. 수많은 방들과 복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처음 와 보는 사람이라면 안내자 없이는 당장이라도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또한 이곳에는 5개 국에서 엄선한 기사들로 이루어진 의장 직속의 라이오네 기사단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각국에서 네 명씩, 제1기사를 제외한 랭킹 2위부터 5위까지의 기사들이 모인 집합체가 라이오네 기사단이었다. 겨우 20대만이 생산된 근위 타이탄 라이온을 지급받게 되는 이들 라이오네 기사단은 사실상 근위 기사단이나 마찬가지였고 대우 또한 그러했다. 대개의 국가들의 경우 타이탄을 전쟁도구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지만 이곳 미란 국가 연합은 조금 달랐다. 50년 전에 한참 이름을 떨치던 매우 고명한 조각가였던 리카르도 파바네가 외장 장갑을 설계했다고 전해지는 라이온은 전쟁에 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외형을 치장하기 위해 금과 은, 그리고 보석까지 사용된 라이온의 모습은 거의 예술품에 가까웠다. 미란 국가 연합의 의장을 만나러 가게 되면 거대한 접견실 좌우에 그날 비번인 여덟 명의 기사들이 놔두고 간 여덟 대의 라이온을 볼 수 있다. 이게 자신들이 돈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욕하는 인물들도 있었고, 접견실 좌우에 그 거대한 쇳덩어리를 세워 둬서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유치한 술수라고 욕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외형과 강력한 존재감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대부분이라는 것이 모두들 미란 국가 연합의 국민들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지름3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원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원형 탁자 위에는 토란, 가므, 쟈렌, 스므에, 알렌 왕국을 합해 놓은 길쭉한 형태의 미란 국가 연합이 상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종이 위에 그린 것이 아니라 탁자에 파놓은 형태였기에 그렇게 정밀하지는 못했다. 이 원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다석명은 현재 미란 국가 연합을 이끌어 가는 왕들이었다. 그들은 중요하고 긴박한 일이 벌어졌을 때는 이렇듯 서로가 같은 위치임을 상징하는 원탁에 둘러앉아 회의를 벌이곤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의장. 이제 단안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말에 의장이라 불린 사내, 즉 가므 왕국의 국왕 지그프리트 데 가므 3세는 주위를 천천히 돌아본 후 힘주어 말했다. 본국은 여태껏 모든 결정을 다수결로서 집행해 왔소. 그렇기에 지금 본국이 처한 상황을 먼저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럼, 자네가 정리를 좀 해주겠나? 다수결을 하기 쉽도록. 예. 첫째, 코린트와의 동맹입니다. 그리고 둘째, 코린트를 막기 위해 크루마와 동맹을 맺는 것이죠. 셋째가 있다면 좋겠지만 . 어느 정도 명료하게 정리가 되자 가므 3세는 입을 열었다. 좋아. 자네들도 알다시피 첫째 안건을 선택한다면 크루마는 멸망할 수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본국은 거대한 코린트 제국의 내부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지. 아마도 몇 년 지나지 않아 본국은 코린트에 흡수될 것이네. 코린트가 동맹국을 집어삼킬 수 있을까요? 그리고 동맹을 맺을 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본국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정서를 받아 낸다면 어떻겠습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국가간의 일에서 약정서 따위는 휴지 조각에 불과해. 약정서를 지키게 위협할 만한 힘이 본국에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무의미한 일이지. 얼마 전에 코린트 연방에 소속된 작은 왕국, 트루비아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자네들은 느낀 점이 없었나? 지금 현 시점에서 코린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나라는 하나도 없어. 그렇다고 크루마와 손을 잡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코린트는 곧장 본국에 대군을 투입해 올 것입니다. 크루마의 황제에게 그것을 타진중이야. 만약 서로 동맹을 맺게 된다면 어느 정도 군사력을 지원해 줄 수 있는지 말일세. 본국의 군사력은 겨우 10개 보병 사단, 4개 기병 여단이다. 거기에 4개 용병사단까지 합해 봐야 코린트를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수준이지. 하지만 만약 크루마 쪽에서 그에 준하는 병력을 파견해 준다면 일단 전쟁 억지는 될 수 있을 듯도 해. 만약 전쟁 억지에 실패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된다면 본국은 두 강대국의 전쟁터가 될 겁니다. 아무리 본국이 정격 출력 이상의 타이탄 123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사단의 질이나 수에도 도저히 . 그렇다고 므루마가 멸망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겠나? 코린트의 손을 들어 준다고 하더라도 코린트는 본국에 동맹군 파병을 요청해올 테지. 우리는 그걸 거절할 입장이 못 돼. 크루마가 무너진 후에 그걸 빌미로 시비를 걸어 올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동맹군 파병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크루마가 선제 공격을 가해 올 수도 있어.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어쨌든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비껴갈 수 있는 길은 없다네. 알겠나? 쟈렌의 왕이 의장의 말에 한숨을 쉬며 푸념을 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군요. 어떻게 해서든지 두 국가의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알카사스에 중재를 요청해 보시지 그러십니까? 그것도 해봤다네. 하지만 알카사스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대량의 군수 물자를 팔아먹을 궁리만 하고 있어. 30년 전의 크로나사 대전 이후 그만한 대규모 전쟁이 없었다는 게 그들로서도 문제겠지. 하지만 본국의 경우만 해도 알카사스에서 타이탄을 전량 들여왔지 않습니까? 로메로, 로리에, 타이거, 라이온. 모두 다 알카사스에 의로해서 제작 또는 구입한 것들인데요. 그것들을 장만한다고 본국에서 알카사스에 준 금(gold)은 막대한 양입니다. 어쩔 수 없지. 모두들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일세. 오늘 저녁에 크루마에서 전권 대사(全權大使)가 오기로 되어 있네. 자네들도 동석할 텐가? 일단 그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제 서서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입니다. 밝은 적색이 주를 이루는 비단 제복에 금색 수실을 이용해 멋을 더한 화려한 복장. 거기에다가 금과 은, 그리고 보석이 박혀 있는 보검까지 허리에 찬 것이 라이오네 기사단의 정식 복장이었다. 만약 이런 복장을 하고 시내를 돌아다닌다면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될 듯도 하겠지만, 왕궁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왕궁의 문을 지키는 경비 무사들조차도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풍요로운 미란 국가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왕궁의 아침은 7시부터 시작된다. 7시, 경비무사들의 교대식이 벌어지고 있을 때 궁녀들은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고, 정확히 8시가 되면 각 식당에서 무사들이 모여 식사를 시작한다. 물론 왕족들이나 지체가 높은 양반들은 침실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때 식사가 각 방에 배달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 그날 대기했었던 2개 조의 라이오네 기사단 기사들이 국왕의 접견실 좌우에 네 대씩의 타이탄들을 정렬시키는 것도 7시 정도다. 타이탄을 반납한 기사들은 이틀간 자유 시간을 얻게 되고 자유 시간을 즐긴 기사들은 앞으로 사흘간의 근무를 시작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5일 중에 3일을 일하게 되는 이 순번이 언제 정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모두들 예전부터 그래 왔다는 말로 넘어가는 걸 보면 매우 오래된 전통임에는 틀림 없었다. 지미 크로스비는 성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근무의 마지막 날은 야간 근무를 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밤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오늘 아침, 부족한 잠을 만회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서 기사단 제복을 벗은 후 옷장에서 새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옷을 벗어서 정해진 곳에 놔두면 하녀가 와서 세탁을 한 후 다림질까지 깨끗하게 해서 옷장 안에 넣어 두게 된다. 그는 보통 시민들이 즐겨 입는 옷을 입은 후 짧은 단검을 옷 속에 감춘 후 서둘러서 밖으로 나갔다. 이곳 미란 국가 연합은 코린트와 크루마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만큼, 많은 양의 화물 외에도 수많은 여행자들이 거쳐 가는 교통의 요충지요, 관광지였다. 오래 전부터 미란 국가 연합의 국왕들은 여행객들이 뿌리고 지나가는 돈의 액수가 상당하는 것에 착안하여 일찍부터 수많은 관광 도시를 개발해 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요양이나 관광을 위해 이곳을 방문하는 인구가 날로 증가 추세에 있었다. 미란 국가 연합에서는 관광지의 평화로움을 한껏 조성하기 위해 가급적 무장을 한 채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또 엄청난 돈 덕분에 막대한 군사력까지 보유하고 있으므로 몬스터라든지 산 도적 따위는 애당초 말살시켜 버려 매우 평화로웠다. 간혹 여행객들이 자신들의 무장 때문에 국경 경비 대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우호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신의 검 따위를 모포 같은 것으로 돌돌 말아서 등에 지고 다니지 않는다면 아예 국경 통과가 되지 않는다는 데야 그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지미 크로스비는 서둘러 말을 몰아 목적지로 달려갔다. 그가 달려가는 길은 대부분의 주요 도로가 그렇듯 시멘트와 돌을 이용해 잘 포장되어 있었다. 한 시간 반쯤을 달려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일부러 말에서 내려 포장되지 않은 흙길로 말을 걷게 하면서 조용히 끌고 갔다. 빠진 것은 없지? 예, 아씨. 그 질문 벌써 세 번째라구요. 가만히 좀 기다리십시오. 앉아서 기다리기가 지루했던지 그늘진 곳에 세워져 있는 작지만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에서 예쁘게 차려 입은 소녀가 문을 열고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자 재빨리 반대편 문이 열리며 늙은 하녀가 우산을 들고 달려나왔다. 모자를 쓰고 나가셔야죠. 이런 더위에 햇빗을 받으면 주근깨가 생긴다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습니까? 그리고 이 장갑도 끼세요. 늙은 하녀가 억지로 모자를 씌우고 장갑을 끼우자 그녀는 답답한지 벗으려고 들며 말했다. 안 그래도 더운데 답답해. 하지만 하녀는 그녀를 제지하면서 엄격하게 말했다. 답답해도 숙녀가 괴시려면 참으셔야죠. 마님도 제 속을 어지간히 썩이시더니만 . 일단 결혼하시고 나면 안 하셔도 되니까, 제발 결혼 전까지는 하시라니까요. 하지만 . 그녀의 말은 무시무시한 하녀의 눈초리에 의해 쑥 들어가고 말았다. 알았어, 알았어. 할게, 하면 될 거 아냐. 소녀가 투덜거리면서 모자와 장갑을 제대로 끼지 하녀는 소녀가 보지 못하도록 살며시 웃으면서 우산을 건넸다. 우산도 쓰세요. 알았어. 미리 일러둘 말은 아무리 크로스비 도련님이 좋더라도 12시까지는 집으로 돌아가셔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도련님을 전심 식사에 초대하시든 그렇지 않든 그건 아씨 마음대로 하실 수 있지만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점심은 좀 늦게 먹어도 상관없잖아? 안 됩니다.. 응, 그런데 좀 늦는 것 같네? 말 돌리지 마세요. 분명히 아셨어요? 응, 알았다니까. 짜증스런, 그러면서도 초조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는 소녀는 길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쯤 요란한 말 발굽 소리가 들릴 때도 되었는데 하면서. 이때 그녀들의 등 뒤쪽에서 살며시 접근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우선 뒤쪽에 있는 하녀의 입을 막은 후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렸다. 하녀는 엄청나게 놀라기는 했지만 접근중인 이방인에 대해 소녀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크로스비라는 악동이 기어다닐 때부터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장난기를 익히 짐작할 수 있었고, 또 저 정도쯤은 젊은이들 간에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의에 포함시켜 주는 아량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우왁! 끼아아악! 엄청 놀랐던 소녀는 괴성을 질렀던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알자, 주먹으로 상대의 가슴을 가볍게 때리며 칭얼거렸다. 아악! 미워 죽겠어. 왜 이제 오는 거예요? 교대식 끝나자마자 쉬지 않고 달려오는 길이야. 많이 기다렸어? 응. 오랜만에 산책이나 하러 갈까? 요즘 꽃들이 많이 피어서 경치가 좋거든. 예. 크로스비는 소녀의 보폭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그의 옆에서 사이 좋게 걸어가며 정답게 대화를 나우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숙녀와 함께 걸을 때는 팔짱을 낀다든지, 손을 잡는 것 등은 허락되지 않았다. 지미 크로스비는 소녀와 즐거운 한때를 보낸 후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저어 , 내일 약속은 지킬 수 없겠어. 내일부터 한동안 비상대기에 들어가야 하거든. 소녀는 지미와 함께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런 말을 듣고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빠하고 오빠 친구들이 얘기하는 것을 언뜻 듣기는 했지만, 혹시 전쟁이 벌어지는 거예요? 아니! 아니, 저어 아직은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어. 일단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일부터 비상 경계령이 내려진다는 사실뿐이야. 그럼 한동안 만나지 못하겠네요. 응. 혹시 저하고 다시 못 만나고 전쟁터에 가실 수도 있다는 건가요? 소녀는 아직가지도 전쟁을 벌일 상대국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예전에도 몇 번인가 미란 연합의 기사단이 전쟁중인 동맹국을 돕기 위해 약간의 기사들을 파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근래 100년이 넘도록 평화를 지켜 온 미란 국가 연합이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미란 국가 연합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국가였다. 그녀는 단지 지미가 어쩌면 동맥국에 파견되어 전쟁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될지도 몰라. 그럼 , 그럼 이걸 저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가져가세요. 몸조심 하셔야 되요. 소녀는 지신의 목에 감겨 있던 스카프를 풀어 남자에게 건넸다. 지미는 소녀의 스카프를 소중하게 받아서 품속에 집어 넣은 후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알았어. 그럼 이제 가 볼게. 잘 있어. 예, 안녕히 . 지미 크로스비는 약혼녀의 집에서 관례상 한계점에 가까운 시간에 서둘러서 나왔다. 원래 숙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해가 지기 전에 나와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소녀도, 지미도 이게 서로간의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사라진 그라세리만 드 코타스 공작 순간 밫이 번쩍하면서 여섯 명의 사람이 나타나자 모두들 처음에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하지만 그들 중에 낯익은 인물들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달려가 인사를 시작했다. 안녕하셨사옵니까? 전하. 한눈에 봐도 엄청난 수련을 했음이 분명한 40대 중반쯤의 무사가 전하라고 부르자 파시르는 길게 나 있는 검상(劍傷)이 꿈틀했다. 아직까지도 자신에게 아무런 언질이 없었지만 전하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소녀가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호오, 자네들이 여기는 어쩐 일인가? 다크의 말에 그 기사는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예. 폐하께서 찾으시는지라 이렇게 달려왔사옵니다. 흠. 나는 벌써부터 일을 벌일 정도로 멍청한 녀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 다크의 혼잣말에 그 무사는 약간 멍청해진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몰라도 돼. 그냥 혼잣말일 뿐이다. 우선은 으음, 저기 식당에 가서 식사부터 하기로 하지. 예? 전하, 한시가 급한 때이옵니다. 닥치고 따라와. 소녀가 앞서가자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팔시온을 선두로 일행들은 그녀를 따라 식당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와 꽤 오랜 시간 동행하며 그 습성을 잘 파악하고 있던 팔시온, 미카엘, 지미, 라딘이 앞장섰고 그 뒤를 나머지 인물들이 마지 못해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화이어헤머는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닥친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지를 생각하며 슬금슬금 뒤로 처지고 있었다. 예로부터 드래곤과 드워프는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아니 드워프는 드래곤에게 악랄할 정도로 착취만 당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앞에서 걸어가던 아르티어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도망 칠 생각을 한다면 네 녀석 가죽을 통째로 벗겨 놓겠다. 어쨌든간에 다크와 아르티어스는 꽤나 죽이 잘 맞는 부자(父子)였다. 끄응 . 일행들과 달리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화이어헤머의 발걸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웠다. 이것저것 음식이 배달되어 나오자 다크는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원래 그녀 정도의 고수는 음식물의 양을 따지지 않는 법. 많은 양의 음식물이 들어오면 기를 이용해 음식물의 일부를 위의 한쪽 구석에 뭉쳐 놨다가 천천히 시간 날 때마다 소화시킬 수 있는 재간이 있었기에 이론상 하루 한 끼만 먹어도 충분했다. 물론 최악의 경우 며칠 더 굶어도 상관은 없었다. 그래서? 이유는 잘 모르겠 습니다. 오늘 저기 아르티어스 님이 떠나신 후에 본국과 통신 마법을 시도했었는데, 그때 로니에르 님을 빠른 시간 내에 찾아서 귀환하라는 지시가 있었 습니다. 무사는 식당 안에 사람이 원체 많아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도 있었기에 그녀에 대한 말투와 칭호를 변경했다. 하지만 상관을 그런 식으로 부르게 된 것이 좀 어색했는지 말투가 약간 이상하게 변했다. 흠, 이유는 잘 모른다 이거지? 그런데 이런 중요한 때에 기사를 두 명이나 이곳에 보내다니, 자네는 누구의 지시를 받고 이리 온 거야? 옛, 저희들이 투입된 것은 로니에르 님께서 행방 불명이 되신 것을 그분께서 아셨기 때문이죠. 저희들은 처음에는 순수한 호위의 입장에서 투입된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아르티어스 님께서 합류하셨고, 또 오늘 아침에 새로운 지시가 내려졌지만 말입니다. 알겠다. 일단 돌아가기로 하지. 하지만 별 볼일 없는 일일 때는 각오해 두라구.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못마땅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뭐야? 여행은 이제 끝이야? 다크는 눈치 없는 드래곤을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격식을 차려 대답했다. 예. 여행은 예전에도 실컷 하셨다면서요? 그런데 왜 또 여행 타령이에요? 그래도 아들하고 오붓하게 둘이서 여행하고 싶었는데 . 나중에 실컷 같이 여행해 드릴게요. 그러면 됐죠? 이만 가자. 일단 음식비를 지불한 후 그들은 한적한 도로로 나왔고, 마법사는 재빨리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열한 명에 말이 여섯 마리나 끼여 있는 엄청난 인원을 장거리 마법으로 이동시키려면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하면서도 정밀한 마법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마법사가 책을 힐끗힐끗 바라보면서 장시간 공들여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것을 도와 줄 생각도 하지 않고 다크와 정겹게 얘기를 나눴다. 남은 일행들이 기다리다가 지쳐서 하품을 하기 시작할 때쯤 그 거대한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마법사는 일단 마법진을 발동시킨 후 이마의 땀을 소매로 훔치고 나서 다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법진이 완성되었사옵니다. 전하, 빨리 이쪽으로. 말과 사람들이 모두 마법진 위에 올라섰을 때 마법사는 시동어를 외쳤다. 공간이동! 이상한 일이군.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은 보고를 올리고 있는 죠드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엄청나게 귀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 코타스 전하께서는 그 소녀의 방에 들어간 후에 그녀와 함께 행방 불명. 그리고 소녀는 어떤 수상한 놈과 갑자기 함께 돌아와서 일행들이 묵고 있는 방안에 들어간 후 모두 행방 불명. 이게 말이 되냐? 하지만 보고를 올리고 있는 무사는 식은땀만 흘릴 뿐 감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니 추리조차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군. 코타스 공작 전하라면 7싸이클 급의 대마법사시다. 물론 마법사가 검사를 상대로 싸워 이길 수는 없지. 하지만 코타스 공작 전하는 정령 마법까지 통달하고 계시는 분이야. 그분이 뇌전의 정령왕인 카르스타까지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본국에서도 최고 상층부의 인물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분은 매우 위급할 때가 아니면 정령 마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셨어. 그런 공작 전하를 누군가가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도 힘들어. 그렇지요. 마법의 탑에서는 뭐라고 하더냐? 거기에도 당연히 물어 봤겠지? 예.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동 마법진을 사용해서 이동한 경우는 그 통보를 각 마법사 길드에서 접수합니다. 그러므로 수도 내에 있는 다섯 개의 마법사 길드 모두 정보가 취합되어 정리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영구 이동 마법진은 숫자도 적고, 모두 군사적 목적만으로 이용되는 실정이기에 수도 내의 모든 마법사들은 이동 마법진을 그리거나 단거리의 경우 이동 마법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게 하루에도 수십 건이기에 그 중에서 찾아내기는 . 정보가 모일 때까지는 기다리지 말고 마법의 탑에 가서 오늘 통보되지 않은 공간 이동의 시간 기록과 그 추정 마력을 즉시 알아 와라. 그리고 다섯 개의 마법사 길드에 사람을 보내 여태까지 보고된 모든 이동 마법 신고서를 복사해 와라. 서둘럿! 옛, 각하. 마법사 죠드가 지시를 받은 후 사라지자, 제임스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까미유 드 크로데인 백작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자네는 기사들을 지휘해서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를 흔적을 조사해 주게. 마법사도 몇 명 데려가고. 그러지. 켄벨! 까미유까지 나간 후 이제 혼자 방안에 남아서 지시를 기다리던 바법사 켄벨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예, 각하. 너는 바로 마법의 탑에 가서 혹시 이동 마법 외의 강력한 마법 사용이 포착된 것이 있는지 알아봐라. 그리고 있다면 그곳에 가서 철저히 조사해. 우선적으로 공격계 마법이다. 수도 내에서 그 정도 마법을 사용하는 놈이 있을 턱이 없을 테니 조사하기는 쉬울 거야. 그리고 혹시 다르게 포착된 마력이나, 마나의 움직임 따위가 있었는지 그것도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예, 각하. 다크 폰 로니에르 파견군 사령관 위대한 대마법사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가 갑작스럽게 행방 불명이 되자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을 주축으로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물론 아직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이었기에 그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인원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위쪽의 높은 분들께는 아직 보고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나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 공작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어딘가 조용한 장소에서 차라도 마시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고, 만약 사실이 그러하다면 엄청난 망신이므로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들이 찾고 있는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 아니 블루 드래곤 카드리안은 이미 싫증이 나 버린 인간 생활에서 탈피하여 오랜만에 본체로 돌아간 상태로 자신의 레어에 틀어 박혀 낮잠을 즐기고 있었으니 수색조들이 애당초 그를 찾을 가능성은 없었다. 또 제임스가 쫒고 있는 두 번째의 인물, 즉 다크라고 이름을 밝혔던 소녀는 지금 코린티아 시에서 멀찍이 떨어진 크라레스의 수도 크로돈에 와 있었다. 로니에르 총독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만약 이곳이 코린트나 크루마 같은 거대한 강대국이었다면 팡파레까지 울리며 입장을 하셨겠지만 로니에르 공장은 조용히 수행원만을 거느리고 입궁했다. 사실 입궁이라고 해 봐야 황실 한쪽 구석에 있는 마법진에서 순식간에 튀어나와 황궁 쪽으로 걸음을 옮긴 것이 다였다. 그리고 그녀와 그 일행이 튀어나오는 것을 본 인물들이 허겁지겁 황궁으로 달려가 보고를 올리는 것이 환영의 전부였다. 안녕하셨사옵니까? 전하. 로니에르 공작이 황실 내전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안에서 나오던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는 로니에르 공작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인사를 건네왔다.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인물이 시기도 적절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토지에르 경, 잘 있었나? 예. 덕분에. 소녀는 다짜고짜 토지에르의 멱살을 그러쥐고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끌어당긴 후에 조용히, 하지만 위압적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오붓하게 여행을 즐기고 있던 나를 소환한 이유는? 내가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라도 했다는 거냐? 토지에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말했다. 성격은 하나도 안 변했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저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전쟁이 임박한 관계로 그 때문에 찾은 것이옵니다. 전쟁이라고? 내가 알기로는 지금 전쟁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은데? 예. 그런데 지금 시기가 꽤 적절하기에 . 로니에르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멱살을 풀어 주고는 구겨진 상대의 옷을 슬쩍 펴 주면서 다정스럽게 말했다. 호오, 상당히 재미난 일이 생길 모양이군. 좋아, 기대해 보지. 다정스런 목소리였지만 제일 뒤에 내뱉은 말은 상당히 어감이 야릇했고, 만약 기대에 어긋난다면 반쯤 죽여 놓을 수도 있다는 경고로 들렸다. 하지만 토지에르는 그 정도에 다리를 후들거릴 정도로 배짱이 약한 인물은 아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기대하셔도 될 것이옵니다. 제가 판단하기로 전하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패전할 것이 확실할 정도로 끝내 주는 전쟁터입지요. 그건 그렇고, 지금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저쪽으로. 내전 앞에 다다르자 소녀는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의문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파시르와 화아어헤머를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그리고 아버지도 여기서 기다리세요. 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경비병들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호화로운 문을 밀치고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들어가는 것을 본 후 파시르는 지미와 라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 서 있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만만하게 보이는 인물이 이 둘이었고, 또 오랜 여행을 함께 했었기에 가장 친숙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 전하 는 누구야? 황녀인가? 지미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뇨. 아직까지 말씀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다크 포 로니에르 공작 전하시죠.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저기 아르티어스 님을 제외하고는 그분의 친위 기사단 소속입니다. 이제 아무래도 한식구가 될 것 같은데, 정식으로 소개를 드리죠. 저는 제2친위 기사단 소속 수련 기사 지미 도니에, 저 녀석은 라빈 엘느와. 그리고 저쪽 둘도 같은 수련기사 미카엘 드 로체스터, 팔시온 엘마리노. 그리고 . 지미는 서 있는 모든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파시르에게 소개했다. 서로가 인사를 끝내자 지미는 대충 필요한 부분을 덧붙였다. 제2친위대 기사단은 공작 전하의 개인 기사단이에요. 공작 전하까지 포함한다면 기사 열세 명, 여덟 대의 타이탄, 그리고 다섯 명의 수련 기사, 세 명의 마법사로 구성되어 있죠. 모두들 좋으신 분들이에요. 저희 기사단에 입단하시게 된 걸 우선 축하 드려요. 으응 고맙구나. 파시르는 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왠지 속은 것 같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정규 기사단이는 단어가 아닌 개인 기사단 이라는 말에 약간은 당기는 부분이 있었다. 오래도록 용병 생활을 해온 기사가 정규 기사단에 들어가 적응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개인 기사단이라면 정규 기사단보다는 좀더 많은 자유가 있었고, 또 기강도 느슨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경의 얼굴을 잊어 먹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네. 별 말씀을 , 폐하. 그리 좀 앉지. 예, 폐하. 지도를 가져와라. 옛, 폐하. 곧이어 시종이 큼직한 두루마리를 가져오자 황제는 그것을 다크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후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는 이곳 지리에 별로 익숙하지 않으니까, 지도를 보면서 설명을 듣는 게 이해하기 편할 거야. 아마도 곧 코린트와 크루마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것 같아. 두 나라 모두 강대한 제국들이야. 원로들과 토론해 본 결과 우리들이 힘을 키워 코린트와 대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들과의 전쟁에 편승한다면 코린트에 복수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네. 상당히 멀리 떨어진 국가들이군요. 그렇지.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크루마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어. 크루마는 전쟁이 끝난 후 그 대가로 크로나사 평야를 우리에게 돌려주기로 합의했지. 크로나사를 제외한 과거 코린트의 땅만을 집어 삼킨다 하더라도 크루마는 아마도 전쟁 후 에는 최대의 대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 병력은 어느 정도나 파견하실 생각이십니까? 응, 원래는 파병을 하지 않고 눈치를 좀 보다가 크루마에게 승리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참전할 생각이었지. 하지만 대실들과 의논해 본 결과 만약 이번에도 코린트가 승리한다면 크루마까지 삼켜 초거대 제국이 되어 버린 그들을 도저히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참전하려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참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졌지. 저쪽에서도 우리들이 보병이나 기병 따위를 파견해 주길 원하는 게 아니야. 그런 것을 이동시켰다가는 당장에 코린트가 눈치 채게 될 테니까 말이야. 자네에게는 유령 기사단 소속의 테세우스와 로메로만을 주겠다. 나머지 타이탄들이 외부에 너무 알려져 있는 탓에 줄 수가 없어. 테세우스 40대, 로메로 22대, 그리고 경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타이탄 청기사를 사용해야 할 거야. 카프로니아는 이미 본국에서 총독 전용으로 제작한 것이라는 걸 타국도 알고 있다고 봐야 해. 자네가 그걸 가지고 치레아에서 연습하고 있는 장면을 상대방 첩자들이 포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니까 말일세. 그렇다고 보는 게 좋겠죠. 자네의 타이탄은 현재 총독 대행직을 수행하고 있는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에게 인계하도록 하게나. 타국에서 봤을 때 본국의 타이탄이 단 한 대라도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발각된다면 본국은 파멸이야. 알겠나? 예. 나중에 장군들의 브리핑을 받아 보면 알겠지만 상대국의 타이탄은 대단히 강력하다. 코린트가 자랑하는 근위 타이탄은 흑기사. 혹기사 자체의 성능도 대단하지만 가장 큰 위협은 그 수에 있지. 강력한 근위 타이탄을 30대나 제작해서 가지고 있는 나라는 코린트뿐이야. 그리고 기사들의 질적인 수준 또한 대단히 뛰어나다. 그 점을 언제나 명심하게. 생각 같아서는 청기를 몇 대 더 붙여 주고 싶지만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코린트와의 충돌을 생각한다면 청기사를 뺄 수가 없어. 뭐, 그렇게 안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언제 크루마로 가면 됩니까? 경도 시간을 가지고 처리할 일이 있을 테니 5일 후로 하세. 그때 경에게 유령 기사단을 주기로 하지. 저 폐하, 혹시 로메로나 뭐 그 정도 등급의 타이탄을 한 대 얻을 수 없을까요? 왜 그러는가? 타이탄을 한 대 주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줘야 하거든요. 원래는 제 카프로니아를 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카슬레이 백작에게 줘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되겠지. 자네 것은 카슬레이에게 주고 카슬레이가 가지고 있는 미가엘을 그 친구에게 주게. 그러면 되지 않겠나? 미가엘이 좀 무겁긴 해도 출력은 로메로와 같으니까 말일세. 예, 폐하. 참, 그리고 그쪽으로 출발하기 전에 토지에르 경을 만나고 가게. 파견대 사령관이 될 자네하고 몇 가지 의논해야 할 사항이 있을 거야. 예, 폐하. 다크는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온 후 그녀의 수하들이나 아르티어스에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한 후 토지에르를 다시 찾았다. 안녕하 . 그녀를 보고는 황급히 인사를 하는 토지에르의 말을 막으며 다크는 느긋하게 말했다. 인사는 조금 전에도 했으니 생략하고 넘어가기로 하지. 나를 부른 이유는? 예, 전하. 그러니까 이번에 크루마로 파견되는 병력의 규모는 이미 폐하께 전해들으신 걸로 아옵니다. 청기사 1대, 카프록시아Ⅱ40대, 로메로 23대, 총 타이탄 64대입지요. 그리고 전하를 포함하여 64명의 기사가 투입될 예정이옵니다. 문제는 이들이 본국의 기사라는 사실이 절대로 밖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옵니다. 그 때문에 모든 타이탄들의 외장 도색도 다시 해야 하고, 문장도 다시 그려 넣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치레아로 가시기 전에 청기사를 반납해 주셔야 하옵니다. 테세우스는 모든 재원이 카프록시아와 거의 동일하다. 원래는 카프록시아를 생산하고 싶었지만 타국이 알아챌 우려가 있으므로 카프록시아의 엑스시온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겉 장갑만 딴 사람이 알아볼 수 없도록 모양을 바꿔 놨을 뿐 실질적으로는 카프록시아와 똑같기에 타이탄 생산공들 사이에서는 테세우스를 카프록시아Ⅱ 라고도 불렀다. 그런 의미의 연장선사아에서 총독 전용의 타이탄인 카프로니아는 카프록시아Ⅲ라고 불린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치레아로 가기 전에 병기창에 가서 반납하겠다. 그 다음은? 카프록시아Ⅱ의 남은 여덟 대는 나중에 보내 드리겠사옵니다. 아마도 20일쯤 걸릴 것이옵니다. 아직 생산중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사옵니다. 아직 생산되지 않았다는 데야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시드미안이라는 사람을 잘 아실 것이옵니다. 그도 이 전쟁의 참전을 원하고 있사옵니다. 허락해 주실는지? 시드미안만 참전하겠다는 것인가? 아니옵니다. 외인 기사단 전체지요. 흠, 외인 기사단이라면 들은 적이 있지. 트루비아에서 망명해 왔다는 왕자 일행들. 하지만 왕자까지 데리고 가면 시시콜콜 잔소리가 많아서 사양하겠어. 만약 그들이 싸우기를 원하다면 타이탄을 소유한 기사만 보내 달라고 해. 아, 참. 여유가 있다면 마법사도 보내 주든지 . 예,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그리고, 크루마에 파견되는 타이탄의 색상을 정해 주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단일색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청색, 흑색, 적색 등등 뭐든지 상관은 없사옵니다. 그리고 . 토지에르는 자신의 품속에서 몇 가지 문장이 그려진 종이를 꺼내 든 후 말했다. 타이탄에 문장이 있을 수는 없사옵니다. 여기 그려진 쌍두의 그린 드래곤은 크루마 제국의 국가 문장이고, 도 여기 그려진 백합은 크루마의 국화(國花), 그리고 이게 크루마로부터 할당받은 기사단 문장. 자세히 보실 것 없사옵니다. 살라만더니까요. 살라만더? 살라만더가 뭐야? 살라만더는 불의 상급 정령이옵니다. 원래가 불이란 것은 파괴를 상징하는 것이니까 원래 기사단에서는 잘 쓰지 않는 문장인데,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그쪽에서 지정해 준 문장이겠죠. 그리고 원래는 탑승하는 기사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 그리고 에이 , 하여튼 원래는 정식적으로 타이탄에 수많은 문장이 붙어 있어야 하옵니다. 그만! 자네가 알아서 대충 그려 넣도록! 타이탄 껍데기에 그림 잘 그려 놨다고 잘 싸우는 것은 절대 아니니까 그런 자질구레한 것은 알아서 처리해.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자네 얼굴은 보기 싫으니까, 그런 간단한 일은 누구를 시켜서 전하면 될 거 아냐? 상관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전하. 그럼, 더 이상 볼일이 없다면 나는 가 보겠어. 참, 전하. 왜? 그 아르티어스라는 분도 전쟁터에 함께 가실 겁니까? 그곳은 경치가 좋은 곳이 많으니 함께 시간을 내서 관광을 하시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옵니다. 아마도 . 그건 자네가 신경 쓸 일이 못 되니까 신경 쓰지 말게나. 쿵하고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며 토지에르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보내어 통보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제일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시키지 못한 것이다. 드래곤이 자신들의 편에 서 주기만 한다면 , 결코 코린트 따위는 무서운 적이 될 수 없었다. 다크는 우선 자신에게 할당된 방에서 뜨끈한 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면서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그런 후 치레아에서 긴급 수송되어 도착해 있는 그녀의 옷을 옷과 함께 도착한 세린의 시중을 받으며 입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괴롭히는 녀석은 없었어? 아뇨, 주인님. 이곳에 비해 치레아는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에요. 훨씬 따뜻하고 .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황제는 여기서 계속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치레아나 스바시에의 왕궁이 여기보다는 훨씬 더 호화로운데 말이야. 검을 다오. 예, 주인님. 그녀는 세린이 건네는 검을 허리에 찬 후 밖으로 나왔다. 더 이상 일행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넓직한 방에서 모두들 목욕을 했는지 뽀송한 얼굴로 새옷을 입고 있었다. 화이어헤머는 맞는 옷이 없자 대충 자신에게 맞을 것 같은 어린아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체형과 어울리질 않아 거북한 부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모두들 말쑥하군. 이제부터 치레아로 가기로 하지. 아버지도 함께 가세요. 거기서 한 이틀 머물고 다시 돌아올 거예요. 뭐? 갔다가 올 거라면 뭐 하려고 그 먼 곳에 가겠다는 거야? 예. 좀 할 일이 있어서요. 파시르 자네도 함께 갈 거지? 그러죠. 말 타고 갈 거냐? 아뇨. 마법진으로 곧장 그리로 갈 거예요. 아들의 말은 들은 아르티어스는 히죽 미소 지으며 화이어헤머에게 말했다. 자네도 갈 거지? 그 말에 화이어헤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아래위로 휙휙 소리가 나게 흔들며 답했다. 물론이죠, 헤헤. 치레아로 돌아간 다크는 일단 자신의 타이탄 도로니아와의 계약을 종료시켰다. 도로니아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주인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음 순번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안드로메다 때문이지 모르지만 순순히 계약 종료에 찬성했다. 그리고 다크는 자신을 대신해서 총독 노릇을 하고 있던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에게 도로니아를 인계했다. 카슬레이 백작은 자신의 타이탄 밀레토레와 계약을 종료한 후 월등히 뛰어난 타이탄 도로니아와 계약을 맺고는 엄청나게 기뻐했다. 뛰어난 연주자들이 보다 더 좋은 악기를 원하듯 기사들도 더욱 뛰어난 타이탄을 원하기 때문이다. 자네는 저 타이탄을 가지게. 내가 약속했던 녀석이야. 하, 하지만 저런 걸 받아도 될지 . 아니야. 내가 그냥 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자네를 제2친위대의 대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이곳에 있으면서 검술도 수련하면 좋지 않나? 떠돌이 용병 기사가 되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좋을 거야. 감사합니다, 공작 전하. 이 은혜 잊지 않고 충성을 . 이봐, 그 말이 좀 틀렸어. 자네가 한동안 충성을 바칠 상대는 내가 아니라 저쪽에서 헤벌쭉거리고 있는 카슬레이 백작이야. 저 녀석이 한동안 여기 총독이 될 거거든. 예? 나는 내일 이곳을 떠날 거야. 몇 가지 일이 있어서 말이지. 자네는 빨리 저 녀석과 계약을 맺은 후 우정을 쌓아 나가는 것이 좋겠지. 한 두어 달 후에 만났을 때는 저 녀석과 좀더 친숙해져 있기를 바라네. 예. 아, 알겠습니다. 그럼. 파시르는 대충 인사를 한 후 갑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타이탄을 향해 달려갔다. 파시르도 이런 식으로 타이탄을 주는 것이 어느 정도 파격적인 대우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용병 기사로 떠돌이 생활을 하기 전에 그 또한 부푼 꿈과 높은 이상을 가지고 정규 기사단에 소속되어 수련을 쌓아 가던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크라레스가 아무리 요 근래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기로는 총 106명의 그레듀에이트에 타이탄 97대, 그것도 정규급이상의 출력을 가진 타이탄은 29대뿐이 약소국이었다. 물론 나중에 국력을 더 키워 나간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 봤을 때는 형편없는 전력을 소유한 국가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규급 출력을 가진 타이탄을 자신에게 줬으니 엄청나게 감동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파시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사실상 크라레스의 전력은 치레아와 스바시에를 병합한 후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다. 그 두 곳에서 포로로 잡은 거의 180여 명이나 되는 그래듀 에이트들에 대한 세뇌 작업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고, 노획한 타이탄들을 이용해서 50여 대의 신형 타이탄이 대량 생산되었다. 그것도 출력 1.3인 녀석들만. 현재 크라레스의 전력은 새로 포섭된 기사를 포함한다면 기사 총원 450여 명, 그리고 타이탄 178대였다. 전력을 숨기고 있는 유령 기사단이 보유한 전력이 정규급 타이탄 80대인 것을 안다면 그 누구도 크라레스가 약소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라마더 기사단 희뿌연 빛이 사라지는 순간, 거대한 영구 마법진 앞에 나열해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마법진 위에는 크라레스에서 오기로 되어 있는 동맹군 선발대 30여 명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마법사나 되는 듯 두터운 로브(robe)를 걸치고 있었는데 워낙 깊게 눌러쓴 탓에 얼굴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나타나자 기다리던 사람들은 일순 흠칫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욱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는지 그들 중의 한명이 달려 들어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동맹군 여러분들. 그 사람은 우글우글 서 있는 사람들 모두가 로브 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어서 대충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광범위하게 인사를 건넸다. 상대가 인사를 건네 오자 그들 중의 한 명이 약간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4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믿음직스러운 장년의 사내였는데 바로 그가 크루마 파견대 부대장(副隊長) 발칸 폰 크로아 백작이었다.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을 배출한 크로아 가문은 크라레스에서 대단한 명문이었다. 그렇기에 그 명문의 일족 답게 크로아 백작의 답례는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동맹군을 파견하기 전에 크라레스 지휘부는 파견군 사령관을 선정함에 있어 가장 골머리를 앓던 부분이 이거였다. 다크는 실력에 있어서는 나무랄 곳이 없었지만 귀족층이 익혀야 할 필수 과목이라 할 수 있는 궁중 예절은 완전히 빵점이었고, 말투 또한 거칠며, 더군다나 너무 어려 보이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이 가짜 였다. 가짜는 될 수 있는 한 말투나 예절 등 모든 것을 확실히 마스터한 인물을 세우고 그들 뒤에서 다크가 조종하는 것으로 결론 지었다. 서로간의 인사가 끝난 후, 크로아 백ㅈ작은 자신의 일행들이 묵을 숙소를 마련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좀더 상층부의 인사와 만나기를 청소했다. 그러는 과장에서 다크는 크로아 백작만이 들을 수 있도록 음성을 전달하는 고도의 기술인 어기전성(禦氣傳聲)을 통해 지시를 내렸고, 크로아 백작은 지시를 따라서 격식에 맞게 상대를 향해 전달했다. 거의 10여 명 이상이 모여 앉은 널찍한 테이블 위에는 넓은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를 이리저리 가리키며 작전 설명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현재 저희들이 구상하고 있는 작전입니다. 공작 전하. 물론 이들은 대 크루마 제국의 높은 직위에 있는 무사들이었기에 로니에르 공작을 향해 극존칭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크루마에 비했을 때 크라레스는 형편없는 소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크라레스가 파견해 주기로 약속한 전력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실지 그들의 타이탄을 직접 검사해 본 것도 아니었고, 또한 그들이 잠담한 대로 강력한 타이탄이라고 하더라도 크루마보다는 훨씬 약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상황이 바뀌기 전까지 전하의 기사단은 미란 국가 연합에 배치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죄송하지만 이번에 가지고 오신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기 쉽게 설명 드리면, 제가 가지고 있는 본국의 최신형 1.5짜리 한 대, 1.3짜리 40대 그리고 1.0짜리 23대라고 생각하면 과히 틀리지 않을 겁니다. 오늘은 절반만 왔고, 내일 나머지가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3차분은 1.3짜리 8대는 15일 후에나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오, 11.3이면 대단하군요. 그게 크라레스의 차세대 주력 타이탄입니까? 예. 대단하군요. 크라레스가 코린트에게 짓밟혔을 때 저희는 이제 크라레스가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다고 판단했었는데, 그 정도의 저력을 가지고 계시다니 놀랐습니다. 오래지 않아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실 날이 오겠군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크라레스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대국이 아니었습니까? 이번 코린트 대전만 잘 마무리 지어진다면 크로나사 평야를 되찾으시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코린트를 반드시 이겨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최신형 타이탄을 이렇게 대량으로 보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우선 드리고 싶습니다. 자, 그럼 일단 여기를 좀 봐 주십시오. 지도의 한 지점씩을 짚으며 그는 말했다. 지금 현재 첩자들이 보내 오는 적 기사단 및 군대의 위치입니다. 아무래도 상대는 본국을 점령한 후, 미란 국가 연합이 그 중간을 막고 있어 여러모로 곤란한 점이 많이 생기기에 미란 국가 연합까지 점령해 버릴 것 같습니다. 우선은 본국이 매우 강성하기에 미란과 본국을 한번에 상대하는 것보다는 미란을 자신들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겠지만, 결국에는 미란도 코린트의 점령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란 쪽에서도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은밀히 본국과 행동을 함께 하겠다며 동맹군 파병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저희들은 미란 국가 연합에 대군을 파병하여 그곳에서 코린트를 막을 계획입니다. 미란 국가 연합의 전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10개 보병 사단, 4개 기병 여단, 4개 용병사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이탄 123대. 모두 다 정규급 이상의 출력입니다. 하지만 코린트를 상대함에 있어 그렇게 대단한 전력이라고 하기는 어렵죠. 코린트에서 크루마로 들어오려면 수십 개의 길이 있지만 많은 군대가 이동하기 위한 길은 세 개 정도로 압축 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맡아서 방어해 주십사 하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그는 세 개의 길들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상셋한 설명을 시작했다. 최신형 타이탄 미노바를 다량 보유한 코린트의 주력 금십자 기사단이 이동, 집결중인 이곳 중앙은 본국의 제네리아 기사단과 근위 기사단의 일부가 막을 것입니다. 그리고 측면에 집결중인 은십자 기사단의 정면에는 본국의 정예 지발틴 기사단이 위치하게 됩니다. 공작 전하의 기사단이 막아야 할 곳은 이곳이죠. 코린트는 아직까지 철십자나 동십자 기사단을 움직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린트는 낙승을 예상하는 만큼 근위대의 움직임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엘프란 기사단과 근위 기사단의 일부는 투입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의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예. 코린트의 남쪽에 서서히 집결중인 코린트의 동맹군들입니다. 현재까지 집결된 군세는 7개 보병 사단, 33개 기병 여단급입니다. 아직까지 동맹국이 지원해 준 타이탄의 수는 확실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적으면 50대, 많으면 100대 정도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 이상 일 수도 있지만 정보국의 분석으로는 100대를 상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답니다. 물론 최악의 경우 100대가 넘는 적 타이탄과 교전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 수십 대의 타이탄을 증원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그것들도 본국의 기사단은 아니고 동맹군들입니다. 강력한 코린트의 중앙군들은 저희가 막아낼 테니 코린트의 동맹군들은 다섯 개 동맹군 중에서 최대의 전력을 이끌고 오신 전하ㅏ께서 동맹군 전체를 인솔해 막아 주시면 좋겠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정작 미란의 기사단은 어디에 투입되는 겁니까? 예. 미란 국가 연합의 기사단들은 원래 자국의 여토니까 지리에 밝은 것은 당연하겠죠. 저희들이 막는 길 이외의 길로 이동을 시작하면 그들이 막을 겁니다. 그리고 본국에서는 기사단 외에 8개 보병 사단과 4개 기병 여단을 파병할 예정입니다. 저희들의 계획은 상대가 철십자와 동십자 기사단을 투입하기 전에 금십자와 은십자 기사단을 괴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코린트의 전력을 각개 격파(各個擊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 그게 어렵다면 전쟁은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 이리 오실 때 여분의 병력을 가지고 오지 않으신 걸로 아는데 ,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정찰대로 쓸 드래듀에이트 20명 정도, 그리고 마법사 열 명 정도를 지원해 주십시오. 그 정도로 충분하겠습니까? 토지를 지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상대의 군대를 막는 것뿐인데 더 이상의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면 언제 출발하실 생각이신지? 내일 후발대가 도착하는 대로 출발하죠. 혹시 이동용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 하루가 급한데 그 정도는 해 드려야겠지요. 그리고 내일 말씀하신 20여명의 기사와 열 명의 마법사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다크가 거느리고 있는 유령 기사단 크루마 파견대의 나머지 병력이 도착했고, 크루마 기사단 단원들에게 감사를 표시한 후 마법진을 통해 곧장 미란 국가 연합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알렌 왕국으로 향했다. 알렌 왕국은 미란 국가 연합의 모든 국가가 그러하듯 매우 부유한 상업 국가였다. 또한 알렌 왕국은 동쪽으로는 스므에와 산악 국가 스완 왕국, 북쪽으로는 쟈렌, 서쪽으로는 코린트 제국, 남쪽으로는 아르곤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엄청난 교통의 요지였다. 뛰어난 외교 전략이 없었다면 일찍이 어느 한쪽에 병합되고 말았겠지만 알렌 왕국은 미란 국가 연합이 탄생하기 전부터 매우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불행한 사태를 미리 방지할 수 있었다. 이런 약소극의 경우 뛰어난 외교적 센스만 있다면 이렇듯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 남게 되는 것은 물론 활발한 상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만 실수를 하게 된다면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동 마법을 통해 먼저 알렌 왕국의 국경 부근 도시에 도착한 마법사가 남은 일행들이 도착하기 쉽도록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장거리 이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나 먼 이동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 이동 거리보다 이동 인원이 더 문제였다. 거의 100명에 가까운 사람을 움직여야 했기에 그만큼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려면 대단히 넓은 공터가 필요했던 것이다. 거대한 마법지니을 통해 파견대가 도착했을 때 수백 명의 인파들이 그들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한쪽에서는 50여 명은 족히 되는 악사들이 모여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넓은 광장 위에 그려진 마법진 위에 모습을 드러낸 맹방의 전우들을 위해 수십 명의 소녀들이 바구니에서 꽃잎을 꺼내 부려 댔다. 서민들이야 로브 자락으로 몸을 숨긴 약간은 수상해 보이는 인물들을 향해 열렬한 환호를 보냈지만, 군대라는 조직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습을 드러낸 맹방의 전우들을 보며 미간에 주름살을 긋고 있었다. 마법사나 여행자도 아닌 주제에 두터운 로브로 몸을 완전히 감싸고, 사람들 앞에서도 로브의 모자를 벗지 않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또한 명문의 기사들이라면 으레 로브에 가문을 표시하는 문잔이라든지, 소속 부대를 나타내는 문장 등등 각종 문장들을 붙여 놓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것들을 붙여놓으면 외형적인 멋도 있었지만, 사실 이 시대에는 그런 문장들이 출신 성분과 지위를 나타내므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실수하지 않게 하는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만약 적지 어느 곳에서 비밀 임무를 후행하는 중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동맹군을 환영하는 환영식장이었고,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공식적인 복장을 해야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인물들이 문장을 살펴보기 위해 이들을 자세히 바라보면 오른쪽 가슴 윗부분에 자그마한 문장이 마지못해 하나 붙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타 오르는 듯한 붉은 도마뱀 문장. 그것은 바로 불의 상급 정령 살라만더를 상징하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문장을 가진 기사단이 크루마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동맹군을 파견하다고 생색은 있는 대로 다 내고는 급히 서둘러서 편성한 엉터리 기사단을 보내 왔다는 말과 같았다. 모두들 서둘러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여기 지휘관이 누구신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상대의 정중한 말에 크로아 백작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접니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함께 대화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도 먼저 저희들이 주둔하게 될 곳을 안내해 주십시오. 주변 지형 정찰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아 예, 매우 듬직한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기사단 주둔지는 반나절 정도만 말을 타고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30킬로만 더 나가면 중앙 기사단 제8전대가 주둔중이죠. 그리고 거기서 50킬로 앞이 국경이고 말입니다. 참, 그 전에 저하고 상의할 일이 있으니까 따라오세요. 이봐, 자네는 기사님들 이동하실 수 있도록 발리 준비를 해주게.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관의 지시가 그러하니 서둘러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원래는 오늘 이곳에서 성대한 환영 무도회를 열고 다음 날 주둔지로 출발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상대는 정식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저는 이곳 도시를 책임지고 있는 시장 로베르 카지마트라고 합니다. 혹시 술을 하십니까? 아니오. 카지마트 시장은 술병과 술잔을 꺼내서는 한 잔 따른 후 서둘러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식으로 끓어오르는 노기(怒氣)를 가라앉힌 후에 그는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명문 귀족도 아니고,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 처지에서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당신에게 따지고자 하는 것은 이겁니다. 말씀하시죠. 예, 그럼 말씀 드리죠. 저도 예전에 군대에서 근무를 해봤던 사람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크루마 제국의 기사단 문장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귀하가 달고 있는 문장은 제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문장입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아무리 당신들의 전쟁이 아니라고 그렇게 급조한 기사단을 보낼 수 있습니까? 그것도 겨우 백명도 안 되는 인원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건 동맹국인 알렌 왕국을 모욕하는 처사가 분명합니다. 카지마트 시장의 분노는 어느 정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원래가 정상적인 기사단이라면 열 대의 타이탄을 보유했을 때 최소한 열다섯 명 정도의 그래듀에이트를 가진다. 그리고 아직 그래듀에이트가 되지 못한 기사나 수련 기사 열다섯 명 정도가 포함된다. 이런 수준의 두터운 기사츠아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그 열 대의 타이탄은 최적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타이탄을 몰고 있는 기사가 은퇴를 하거나 사망했을 때 재빨리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각종 정찰등을 통해 타이탄을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통상의 개념으로 봤을 때 90명 남짓한 동맹군 기사단이 보유했을 타이탄의 수는 많아 봐야 30대 정도가 고작이었다. 알렌 왕국의 접경 지역에는 이미 10만에 가까운 대군과 수십 대가 넘는 타이탄이 집결중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보는 없습니다. 수많은 여행객이나 상인들이 소문을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겨우 30여 대의 타이탄 , 엠프 기사단 8전대하고 합류해 봐야 45대도 채울 수 없는 상황에서 감히 상대방을 막아낼 수 있다고 여기에 온 겁니까? 이런 식이라면 아예 코린트에 두 손을 드는 편이 시민들을 위해 훨씬 더 좋을 겁니다. 이번 전쟁은 귀국 때문에 벌어지는 것인데, 어떻게 이렇 수가 있습니까? 상대의 말에 크로와 백작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가 이번 전쟁은 코린트와 크루마 사이의 갈등에 의해 벌어지는 전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재수없게 중간에 끼인 것이 미란 국가 연합인데, 미란이 크루마의 손을 들어 준 이상 크루마는 전력을 다해서 미란을 도와줘야만 했다. 만약 미란이 뚫린다면 그 다음은 곧장 크루마니까 미란의 군세가 아직 튼튼할 때 협동 작전을 벌이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었다. 시장님은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오해? 무슨 오해를 한단 말이오? 제가 가지고 온 기사단은 본국에서도 최정예급입니다. 그리고 64대의 타이탄들의 성능도 상당히 좋은 편이고요. 64대라고 하셨습니까? 예. 정찰대로 30명을 데려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수십 명의 기사들이 또 도착할 겁니다. 저희들은 선발대일 뿐이지요. 아마도 크루마에서 지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들과 동행이 아니니까 따로 숙소를 할당해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겁니다. 참, 나중에 우리들과 같은 문장을 달고 있는 녀석들이 도착한다면 주둔지에 빨리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천천히 말을 타고 주둔지로 향하면서 크로아 백작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본 후 낮은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일이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거의 혼잣말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백작과 같은 복장에 로브의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옆에서 말을 몰던 인물이 그걸 들었는지 느긋한 어조로 답해 왔다. 왜? 아가 그 영감한테 불려 가더니,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그러나? 예. 여기 일반 시민들이 모두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코린트 쪽에서 병력을 끌어 모으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식의 무력 시위가 계속된다면 시민들이 동요하게 되죠. 아마도 코린트는 급히 전쟁을 치를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건 시간이 말해 줄 테지. 칸테로마 드 지오르네 후작(侯爵). 은십자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었던 뛰어난 무장이자, 공포스러운 마왕과 결탁하여 악의 힘을 불러 일으키려 했던 사악한 왕국 트루비아의 정복자. 트루비아 전쟁에서 은십자 기사단 파견대와 동맥국 군사력으로 아무런 잡음 없이 잘 이끌어 악의 왕국과의 전쟁을 대승리로 이끌어 낸 덕(悳)이 많은 장군. 그리고 그것을 인정받아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진했고, 또 그때의 공훈으로 이번 코린트 동맹군 사령관으로 추대된 인물이었다. 카돈 왕국의 크란켄 데 지그무스 후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오, 어서 오시지요, 후작 각하. 송구합니다. 지오르네 후작 각하. 그만 앉으시지요. 트루비아 전쟁 후 처음 뵙는 군요. 먼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하하, 뭐 수고랄 것이 있겠습니까? 코린트 제국의 적은 우리 카돈 왕국의 적이기도 하니까요. 정예 기사 13명과 8대의 타이탄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미약한 힘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미약한 힘이라니요. 트루비아 전쟁 때보다 거의 두배의 규모를 가지고 오셨는데, 자 자, 앉으세요. 밖에 누구 있느냐? 옛! 카돈 왕국에서 도착하신 기사 분들을 숙소로 정중하게 안내해 드리고, 불편하지 않도록 특별히 잘 보살펴 드려라. 옛! 각하. 혹시 포도주를 좋아하십니까? 아, 예. 지오르네 후작은 우아한 동작으로 두 개의 잔에 포도주를 따른 후 한 잔은 지그무스 후작에게 건네고, 하나는 자신이 들었다. 천천히 향을 즐기며 한 모금 마신 후 지오르네 후작은 말했다. 바지오 지방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우리 코린트의 보배라고 할 수 있지요. 로베르 7세 폐하 시절에 생산된 것으로 어렵게 구했습니다. 로베르 7세 폐하 시절에 생산된 것으로 어렵게 구했습니다. 로베르 7세 폐하가 통치하시던 때는 신께서도 코린트를 축복했는지 매년 풍년이 들었었죠. 그때 생산된 포도주의 맛과 향은 그야말로 최고라고 할 수 있죠. 은근히 자신의 교양을 과시하는 지오르네 후작의 성의를 봐서 지그무스 후작은 포도주를 간단하게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지금은 포도주의 맛이나 향 따위를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너무도 궁금한 의문이 한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잇습니다. 예. 기탄없이 말씀하시지요. 예. 오다가 봤는데 대로의 좌우에 늘어서 있는 그 많은 타이탄들. 족히 80대는 넘어 보이는 , 정말 위압적인 장관이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이쪽의 전력이 너무 노출될 우려가 있지 않겠습니까? 상대의 말에 지오르네 후작은 자신감이 넘치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난 도 뭐라고요. 그래 그것들을 보시고 느낌이 어땠습니까? 예. 솔직히 다리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타이탄을 한꺼번에 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타이탄 전시회라도 하는 듯 각양 각색의 타이탄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예.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지요. 각하가 거느리고 오신 타이탄도 숙소 앞쪽에 도열해 놓으십시오. 오래 전부터 코린트와 크루마는 잘 지내 왔었지만, 요즘 들어 흑마법을 장려하고,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마법 생물 키메라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등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악의 제국이 너무 강하기에 누구도 선뜻 그들에게 정의가 뭔지 가르쳐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용단(勇斷)에 의해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크루마에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줘야 한다는 칙명을 내리셨습니다. 지금 악의 제국 크루마는 사악한 꾀로 미란 국가 연합을 꾀어 자신들의 동지로 삼은 모양인데, 서둘러서 전쟁을 벌인다면 미란과도 사워야 한다 이겁니다. 우리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미란에게 충분히 이식시켜 준다면 그들은 사악한 제국을 버리고 다시 정의의 길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제 계획이? 후작 각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여러 전쟁터를 전전했던 본관도 이리로 오는 길에 수십 대가 넘는 타이탄들이 깔려 있는 것을 보고 다리에 힘이 빠졌을 정도니, 아직까지 전쟁다운 전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그들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될 것입니다. 정의의 길을 외면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지, 악의 길로 들어서면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되는지 먼저 가르쳐 준 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려고 하시는 후작 각하와 아그립파 4세 폐하의 덕(悳)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하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본관은 폐하와 미천한 종일 뿐, 저에게 무슨 덕이 있겠습니까? 하하, 겸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저희는 이렇게 덕이 많으신 사령관을 모시게 되어 절로 힘이 솟는 듯하군요. 언제라도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카돈 왕국의 모든 기사들은 정의를 위해 언제라도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오. 카돈 왕국과 지그무스 후작 각하의 도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지오르네 후작의 계획은 상당 부분 적중하고 있었다. 10만이 넘는 병력이 알렌 왕국과의 국경선에 포진하고, 또 백여 대의 타이탄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을 보고 저쟁이 곧 시작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인들은 없었다. 더군다나 코린트의 군세가 알렌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므 왕국과 토란 왕국 앞에 대규모로 집결중이었기에 곧이어 전쟁을 예감한 약삭빠른 상인들은 주저없이 미란 국가 연합을 등지고 딴 곳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또 우직하게 미란 국가 연합을 떠나지 않은 상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할 일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미란은 코린트와 크루마 사이에서 중개 무역을 주로 해왔는데, 코린트 및 코린트 연합군에 의해 국경선이 완전히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코린트와 크루마 사이를 왕래하던 상인들은 미란을 통과하는 대신 훨씬 더 안전한 아르곤 제국과 산악국인 오실롯 왕국을 경유하는 루트를 통해 물건을 옮기기 시작하였고, 시민들의 불남도 차츰 쌓여 가고 있었다. 다행히 시민들의 불만이 완전히 폭발하지 않은 것은 아직까지 일부 상인들이 코린트-아르곤-알렌-크루마라는 무역 루트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거대한 적인 코린트와의 전쟁이 임박한 상태였고, 무역로가 막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어디 보자 . 품속에서 꺼낸 얄팍한 마법책을 보며 배운 대로 이리 긋고, 저리 그으며 열심히 마법지니을 그렸다. 본국의 마법사들이 원체 바쁜 관계로 마법사를 단 한 명도 데려오지 못한 덕분에 그녀는 마법진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거느리고 있는 파견대 내에는 10여 명의 마법사들이 있기에 그들에게 부탁하면 되지만, 기밀 유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직접 그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그야말로 마법에 통달한 인물도 한 마리 있었지만 그 양반은 잔소리가 많아서 편안하게 부탁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 수 차례 통신용 마법진을 만드는 법을 세밀하게 배눴다. 그래서 그걸 완성하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휴 , 다 끝났군. 이제 수정구를 놔야지. 그런데 그걸 어디다가 뒀더라. 이리저리 찾은 끝에 발견해 낸 지름 30센티는 족히 될 듯한 수정구를 마법진의 중앙에 올려 놓자 나머지는 간단하게 마무리되었다. 마법책을 보며 알아보기도 힘든 룬어라는 망할놈의 언어를 대충 흥얼거리며 마나를 법칙에 따라 유도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별로 안녕하지 못하다. 까만 토끼(토지에르)는 어디 있나? 예. 까만 토끼는 두 번째 귀염둥이(카프록시아Ⅱ)를 돌봐 주기에 바쁘죠. 우선 좋은 소식부터 전해 드리겠습니다. 까만 토끼는 5일 이내로 소포를 보낼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호오, 제법이군. 15일은 필요하다더니만 대단히 열심히 일한 모양이야. 예.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혹시 잘 모르실 수도 있기에 보고 드립니다. 알렌 왕국을 점령하기 위한 코린트의 우익 공격대는 바실리 시에 집결중입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 예. 그런데 규모가 문제지요. 현재까지 파악된 것은 15개 보병 사단, 8개 기병 사단, 126대의 타이탄입니다. 126대? 확실한가? 예. 확실합니다. 만약 따로 놔뒀다면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바실리 시가지에 보라는 듯이 쭉 세워놨기에 덧셈만 할 줄 안다면 누구나 그 숫자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망할 녀석들. 절대로 100대는 넘어가지 않을 거라더니. 예? 저희는 절대 그런 보고를 드린 기억이 없는데요? 너희들 말고. 타이탄 성능에 대해서는 파악된 것이 있나? 예. 유명한 타이탄들이 떼거지로 모여 있기에 파악하는 데 별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좀 위안이 되는 것은 코린트 동맹국의 근위 타이탄은 몇 대 없다는 것이죠. 대부분이 각국의 중앙 기사단 소속 타이탄들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정규 출력입니다. 1.2를 상회하는 타이탄은 정확히 9대입니다. 대단한 정예 부대군. 예. 하지만 동맹 연합군이므로 체계적인 작전 수행 능력은 떨어질 것이 당연하니 잘 해 보시라는 까만 토끼의 전언이십니다. 놀고 있군. 그렇게 쉬워 보이면 자기가 직접 와서 해보라고 해. 예.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쁜 소식 하나 더. 현재 집결중인 코린트의 군사력이 워낙 엄청나서 모든 국가들은 코린트가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코린트에 병력 파병을 망설이고 있던 많은 국가들이 이 기회에 아그립파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병력 파병을 서두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많은 병력이 바실리 시에 집결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나븐 소식은 그게 다냐? 예. 박쥐(첩자 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조만간에 더욱 정확한 보고가 들어올 것입니다. 알겠다. 그런데 3일에 한 번씩 연락을 하는 것은 정보가 너무 늦어. 하루에 한 번으로 하지. 예, 좋을 대로 하십시오. 좋아. 그럼 수고하도록! 옛! 소녀는 상대방의 모습이 수정 구슬에서 사라지자 발긑으로 슬쩍 마법진을 지워 버린 후 수정 구슬도 한쪽에 숨기며 중얼거렸다. 흐음. 크루마 녀석들,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 주지도 않다니. 그러고도 동맹국이라고 떠들어? 이것들을 당장 달려가서 그냥 . 투덜거리는 소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슬그머니 몸을 숨기는 인물. 그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다수의 일행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나? 예. 예상이 맞았습니다. 그 소녀는 마법사더군요. 크라레스와 통신을 했는데, 마법진을 그리는 모습이 조금 엉성한 걸 보면 고위급의 마법사는 아닌 듯했습니다. 통신의 내용은? 예. 5일 후에 뭔가가 도착한답니다. 대화의 맥락으로 봤을 때 까만 토끼 라는 인물이 보내주는 두 번째 귀엽둥이 라고 했습니다. 까만 토끼? 그리고 두 번째 귀엽둥이라. 그게 뭔지는 5일 후면 알 수 있겠지. 그 외의 내용은? 현재 코린트 동맹군의 병력 상황 입니다. 그런데 정말 타이탄이 126대나 집결하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보병과 기병을 합쳐서 23만이나 되는 대군에, 그 외에도 계속 집결중이랍니다. 정말인가? 예. 방금 전에 들었습니다. 15개 보병 사단에 8개 기병 사단, 그외에도 계속 집결중 정확합니다. 알겠다. 기사단 사령부에 문의해 보지. 만약 그 정도 규모라면 현재 이곳에 집결중인 군대로는 역부족이겠는데, 어떻게 한다 이봐, 스칼! 본대에 연락을 취해라.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옛! 스칼이라고 불린 마법사가 열심히 마법진을 그리는 모습을 힐끗 보며 그 우두머리가 말했다. 정찰대로부터 보고는? 아직 변동이 없다는 보고입니다. 아무래도 미란 국내에서만 정찰 활동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 몇 개 조는 코린트 안으로 들어가라고 할까요? 그것도 괜찮겠지. 3개 조만 코린트 안으로 투입해. 나머지 6개조는 위치를 조금씩 수정해서 구멍이 생기지 않게 조심하도록 지시해. 예. 정기 연락 시간에 통신을 시도하겠습니다. 이때 마법진을 그려서 사령부를 부르던 마법사가 외쳤다. 남작님, 사령부가 나왔습니다. 마법진 위의 수정 구슬에는 음침한 표정의 마법사가 나타났고, 그 마법사는 수정 구슬 가까이에 위치한 인물들을 이미 알고 있는 듯 곧장 인사를 건네 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바지오 남작님. 현재까지 바실리 시에 집결한 적의 병력 상황을 알고 싶다. 예. 적 타이탄 99대, 15개 보병 사단, 8개 기병 사단입니다. 적의 병력이 많기는 하지만 타이탄의 수는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니 선전을 바란다는 사령관 각하의 명령이십니다. 뭐? 126대가 아니고 99대라고? 바지오 남작이라고 불렸던 우두머리의 말에 마법사는 약간 당황한 음성을 내뱉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야? 이 자식 너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예. 실은 사령관 각하의 함구령이 있었습니다. 지금 바실리 시에 집결중인 병력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숫자입니다. 만약 그 숫자가 정확히 동맹군 측에 전달된다면 최악의 경우 동맹군 측에서 전투를 포기할 가능성까지 있기에 그들의 사기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126대가 정확한 거로군. 병력의 추가 지원은 없나? 예. 스므에에 주둔중인 엘프란 기사단 5전대와 가므 주둔의 제4전대를 2일 내로 그쪽으로 돌릴 예정입니다. 총전력은 로메로-H형 22대입니다. 통상 가벼운 무게와 재빠른 몸놀림으로 유명한 타이탄 로메로. 하지만 로메로에는 두 가지 형이 있다. 통상 로메로는 로메로-L(Light)형을 말하는 것이지만, L형은 재빠른 움직임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무게가 너무 가벼워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알카사스에서는 본국에서만 사용할 목적으로 좀더 중장갑 형태의 H(Heavy)형 50대가 생산되어 배치되었다. 30년 전부터는 파괴력이나 출력에서 로메로보다 더 뛰어난 로리에급이 생산되어 실전 배치되면서 H형도 전량 타국에 판매되었는데, 243대의 L형이 생산되었던 것에 미루어 보면 H형은 매우 적은 숫자만이 생산되었던 셈이다. 그 때문에 그냥 로메로라고 하면 L형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동맹군은? 더 이상의 증원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기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구멍이 뚫리는군.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통신을 끊습니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통신을 자재해 주십시오. 상대의 전력이 워낙 크다 보니 사령부의 통신이 폭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분투를 빕니다. 마법사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우두머리는 지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려운 전투가 될 것 같군. 증원될 것까지 합하면 엠프의 로메로 36대, 크라레스의 타이탄 64대, 그리고 후방에 포진중인 동맹 4개국의 타이탄 32대. 총 132대의 타이탄. 하지만 대부분의 동맹국들이 첫선을 보이지도 않은 신형 타이탄을 집어넣든지, 아니면 아예 수많은 국가들이 사용하는 로메로나 노리에가 고작이야. 물론 그 녀석들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수는 있지. 드러내고 본국을 지원해 줬다가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코린트의 노여움을 사게 될 테니까. 크라레스를 포함한 5개국이 본국의 편을 들어 준 것만 해도 엄청난 성과인 것이야. 그것도 인질을 잡은 채 반 어거지로 얻어 낸 것이 겨우 이 정도라니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말일세. 코린트라는 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계속 집결중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타이탄을 도원하려는 것이지? 우두머리의 푸념을 뒤로하고 소녀는 아르티어스의 숙소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동맹국들조차 못 믿어서 첩보전을 벌이는 쪼잔한 놈들이 어떻게 큰 일을 할 수 있겠어. 바보 같은 놈들. 모두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자리에 앉으시지요. 모두들 대충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 크로아 백작은 장중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이곳 알렌 왕국에 투입된 타이탄은 엄청난 수입니다. 엠프 기사단 6전대가 거느린 로메로 14대, 뮬러 후작의 노리에 4대, 로메로 8대, 무터 백작의 로메로 8대, 칸텔 백작의 로메로 7대, 작센 백작의 노리에 1대, 로메로 4대. 그리고 제가 가지고 온 신형 41대와 로메로 23대. 총 110대 중에서 알카사스에서 생산된 것이 69대나 되는군요. 그렇다면 크루마의 동맹군은 알카사스인가요? 어느 정도 농이 섞인 어조에 모두들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타이탄이 알카사스의 수출용 타이탄인 것은 모두들 자신의 소속 국가가 어디인지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현재 최신 정보로는 정면에 99대의 타이탄이 집결중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곳에 집결된 엽한군의 타이탄도 모두 정규 출력 이상이므로 현재까지로는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통일된 지휘체계가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번에 경들을 모신 이유는 연합군의 지휘자를 선임하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의견이 있는 분이 계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뮬러 후작이 주위를 슬쩍 둘러본 후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크루마에서 이곳으로 오기 전 귀국에서 투입한 전력을 듣고 솔직히 조금 노랐었습니다. 64대의 타이탄을, 그것도 귀국에 별로 타이탄이 많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렇듯 많은 타이탄을 투입한 것은 대단한 모험이겠죠. 본관은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서 군을 지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귀국에서는 이번 전쟁에 흥망의 도박을 거신 모양인데, 타이탄 투입 규모로 봤을 때 그 지휘관 또한 그에 걸맞은 인물을 보냈을 거라고 본관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본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한 쪽에서 지휘를 하는 것이 별 무리가 없겠지요.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부족한 능력이지만 제가 그 자리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부관, 지도를 가져와라. 부관이 큼직한 지도를 펴쳐 놓은 후 밖으로 나가자 크로아 백작은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적의 병력은 계속 증원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조만간에 우리들의 전력을 훨씬 상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뮬러 후작께서는 동맹 4개국의 기사단을 모두 거느리고 이곳에 주둔해 주십시오. 혹시나 퇴로가 막힌다든지, 아니면 적이 너무 강대하다면 아르곤이나 오실롯 왕국으로 후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크라이슨 백작. 예. 귀하가 거느리고 잇는 6전대는 이곳에 주둔해 주십시오. 만약 엠프 기사단에서 증원이 있더라도 모두 여기에 배치해야 합니다. 혹시 퇴로 차단 등 악조건을 당한다면 쟈렌 왕국으로 넘어가서 그곳에 주둔중인 7전대와 합류해도 좋고, 만약 여의치 않다면 뮬러 후작님의 기사단, 오른쪽은 6전단이, 이렇게 세곳에서 적의 동태를 파악하여 대처해 가는 것이 가장 유연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공작 전하, 만약 상대가 현재의 전력에 머무른다면 이것은 대단히 좋은 작전일 것입니다. 하지만 적의 전력이 이쪽을 훨씬 상회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각개격파 당하기 쉬운 배치입니다. 오히려 한 곳에 뭉쳐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후작 각하의 말씀도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단일국가의 군대가 아닙니다. 동맹국이죠. 이런 상태에서, 또한 저들이 언제 침공해 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 곳에 뭉쳐있다가는 잘못하면 서로간의 갈등만 심화되어 자멸할 수도 있습니다. 놈들처럼 사기가 충천하는 상황이라면 몰라도 적의 군사력에 대해 심한 압박감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말썽의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그 점도 생각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서로간의 간격은 50킬로. 30분이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모두들 가능한 수의 기사와 마법사들을 정찰대로 내보내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게 좋을 것 같군요. 무서운 쥐새끼들의 침입 국경 근처가 내려다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다섯 명의 인원들이 지도를 펴 놓고는 여기 저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여행자처럼 담요 대신으로 쓸 수 있을 만큼 두터운 로브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국경은 이미 폐쇄된 지 며칠이 지났으므로 여행자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저곳인가? 예, 저곳이 국경이옵니다, 전하. 국경이라고 해봐야 다른 곳과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잘 포장된 도로 근처에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알렌 왕국의 검문소와 코린트 제국 검문소는 100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었고 두 곳 모두 서너 명 남짓의 인원만 서성거리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양국을 관통하는 이곳 주도로(主道路)는 하루에도 수천 명의 상인과 여행객들이 통과했기에 불법한 물건 따위가 반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십 명의 경비병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국경이 폐쇄되어 더 이상 통행인이 없어지자 경비원의 수를 줄인 것이다. 국경치고는 너무 인적이 없는 것 같군. 녀석들의 최전선 기지는 어디지? 옛, 이곳에서 2킬로 정도 더 들어간 곳에 위치한 카라엔 요새이옵니다. 코린트는 이곳 국경 검문소보다는 카라엔 요새에서 검문을 한다고 여기 적혀 있사옵니다. 주둔 병력은 1개 여단 정도이옵니다. 카라엔 요새라. 그건 그렇고 정말 잘 포장된 도로군. 옛, 도로의 넓이만 봐도 열 명의 중장 보병이 횡대로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이옵니다. 이렇게 넗은 포장 도로는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아마도 기사단 병력의 90% 이상은 이곳 크라무스 대로를 따라 이동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맞는 말이다. 놈들의 병력이 많은 만큼 잔재주 부리지 말고 힘으로 밀어붙여 준다면 서로가 편하겠는데 말이야. 안그런가? 옛, 전하. 좀더 깊숙하게 들어가 보자. 예? 하지만 너무 위험하옵니다. 전하. 상관없어. 말은 여기다 세워 놓고 가기로 하지. 믹, 자네가 여길 지키도록. 예, 전하. 믹이라고 불린 사내는 다섯 필의 말을 돌보기 위해 남았고 나머지 넷은 국경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이 달려가는 속도는 도저히 인간들이 낼 수 잇는 속도가 아니었다. 거의 시속 100킬로는 될 것 같은 엄청난 속도. 그들은 도로 위를 달리지 않고 국경 경비대를 피해서 국경을 넘었다. 저곳이 카라엔 요새이옵니다. 상당한 규모로군. 옛, 전하. 이걸 쓰시지요. 부하가 건네는 길쭉한 원통형의 막대기를 보며 다크는 물었다. 어? 이게 뭔가? 예? 이걸 한 번도 보신 적이 없사옵니까? 망원경이라고 하는 것이옵니다. 멀리 잇는 것을 보는 데는 그만이지요. 어떻게 해서 초점을 맞추면 되옵니다. 부하는 슬쩍 원통의 길이를 늘였다 줄였다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고, 다크는 부하가 가르쳐 주는 대로 늘였다 줄였다 하는 도중에 선명하게 보이는 위치를 잡을 수 있었다. 오, 대단하군. 아주 잘 보이는데. 이런 물건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어. 흔히 사용되는 물건은 아니옵니다. 매우 고가의 물건인데다가 구하기도 쉽지 않지요. 각국의 군대나 첩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걸로 아옵니다. 그래. 요새가 대단히 큰 규모로군. 하지만 군기가 그렇게 엄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보초병들끼리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승리의 여신은 자기들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럴 만도 하겠죠.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잘 모르겠는데?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아니, 놈들이 집결중이라는 바실리 시에도 한번 가 보기로 하지. 얼마나 호화찬란하게 있는지 구격은 해주는 게 예의 아니겠어? 전하, 아니 되옵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 부하는 아차 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상관의 검술 실력은 최고 중의 최고.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녀가 다칠 확률은 적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뭐야? 일이 잘못되면 내가 어떻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네놈은 그곳에 나를 능가하는 실력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부하는 일단 말문이 막힐 수 밖에 없었다. 검술 실력 하나만으로 공작에 추대된 인물. 말로만 듣던 소드 마스터. 하지만 자신들이 직접 상관이 검 쓰는 것을 존 적도 없었고, 더군다나 아무리 자세히 봐도 뛰어난 검객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런 강인한 힘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봤을 때는 입만 거친 예쁘장한 계집아이에 불과했기에 도대체 신뢰성이 가지 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전하. 하지만 놈들의 기습을 당할 수도 있고, 마법사를 만날 수도 있사옵니다. 마법사의 기습 공격은 위험한 것이옵니다, 전하. 헛소리 말고 가자. 소녀가 먼저 달려가기 시작하자 부하들도 마지못해 그녀의 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툭! 자그마한 돌멩이가 지신의 주위에 떨어지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내는 돌이 날아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물론 자신의 동료가 살짝 몸을 숨기고 있었다. 동료는 손짓으로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었기에 그도 서둘러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네 명의 사람이 있었다. 워낙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장이나 인원 평성 따위는 보이지도 않지만 저렇게 달려가는 것을 보면 모두 기사들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마법사를 향해 속삭였다. 본대에 연락해라. 박쥐가 들어왔다고 말이야. 그 말은 들은 마법사가 적을 보기 위해 시선을 들었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랜 수련을 거친 기사의 시력은 마법사 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뷰 마나 포스의 주문을 사용해서 상대를 파악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상부에 보고를 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인원은 네명. 모두 기기사. 검은색 로브를 걸치고 있다. 지금 모두 바실리 시로 곧장 달려가고 있다. 달리는 속도로 봤을 때 아마 30분 후에는 도착하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저놈들도 되게 멍청하군. 정찰을 하겠다는 놈들이 저렇게 백주 대낮에 달려가는 것은 정찰대 노릇을 하면서 처음 보겠군. 멍청한 . 하지만 그의 말은 여기서 끝났다. 왜냐하면 바로 그 네 놈이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 들 중의 한 명은 정말 바른 속도로 달리고 있어, 남은 세 명과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들킨 건가? 이렇게 먼 거리에서? 제길! 사내는 재빨리 자신의 품속에서 원통형 막대기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그런 다음 막대기 아래쪽에 붙어 있는 작은 구조물을 힘껏 당겼다. 그러자 곧장 푸수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펑하는 울림과 함께 신호탄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구조물을 당기면 그 히므로 심지가 점화되는 방식이었기에 빨리 발사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지만 이 신호탄은 밤에 비해 낮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사내는 주위에 퍼져있는 다른 정찰 매복조가 그것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날린 것이지만 동료들이 밝은 대낮에 그걸 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신호탄을 쏜 후 사내는 검을 뽑아 들었다. 상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먼저 자신의 동료가 상대를 저지하기 위해 뛰어들었지만 순식간에 금빛 같은 것이 번쩍이며 뛰어들었던 동료의 허리가 토막 나서 나뒹구는 것이 보였다. 상대는 정말 엄청난 실력을 가진 검객이었다. 잘 하면 대어(大魚)를 잡는 공훈을 세울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상대는 벌써 자신을 향해 육박해 오고 있었다. 컥! 안 보여 . 두 번째 사내가 쓰러졌을 때, 마법사는 한참 동안 주문을 외워 대고 있었다. 멈춰! 하지만 마법사는 주문을 계속 외웠다. 그러자 상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툭 . 마법사의 목이 떨어져 나가자 거의 완성 직전에 있던 주문은 파괴되어 집중되었던 마나는 대기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다크는 금빛이 찬란한 검을 천천히 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겠군. 이런 놈들이 있다는 것은 바실리 시가 멀지 않다는 말인가? 그때서야 뒤늦게 도착한 부하들은 이리저리 시체를 살펴보고 있는 상관을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바라봤다. 소드 마스터, 그게 엄청난 실력을 가진 검객들만이 가지는 호칭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달려가는 속도도 무시무시했지만, 단칼에 상대를 죽이는 무서운 검술. 이제부터는 조심해서 가야겠다. 저 녀석이 통신 마법을 쓴답시고 마나를 집중시키지 않았다면 눈치 채지 못할 뻔했다. 나중에 돌아간 후에 우리 쪽 정찰대 놈들에게도 너무 성급하게 마법을 쓰지 말라고 전해라. 옛, 전하. 다크 일행은 시체를 철저하게 뒤지고 나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두 시간 후, 이곳에는 다섯 명의 방문객이 도착했다. 그들은 천천히 시체들을 살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단한 실력이군. 검을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모두들 당했어. 하지만 대장님, 정찰 나오는 기사들은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게 정석입니다. 아니야. 놈은 진짜다. 아마 네 놈인 것 같군, 그렇지 않나?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중 한 명의 발자국은 비교적 작은데, 아마 여자인 것 같습요. 그래 잘 봤다. 여자야. 사령부에 긴급 통신을 넣어라. 쥐새끼 네 마리가 잠입했다고 말이야. 옛! 마법사는 목이 날아간 시체를 치우고 거기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 앞에 앉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신호탄이군. 으음. 이 위치에서 신호탄을 쏜다면 밤에나 보일까? 저쪽에 있는 정찰조가 알아보기는 힘들었겠는데? 예 이때 저 아래쪽으로 내려갔던 두 명이 올라왔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뭐야? 정확한가? 예. 발자국의 간격을 봤을 때 상당한 속도로 달린 것이 확실합니다. 거의 전력 질주에 가까운 보폭입니다. 그런데 보폭의 거리로 봤을 때 그래듀에이트, 그것도 상위급에 랭크되는 실력자들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보폭, 검수, 모든 게 놈들의 실력을 말해 주고 있어. 그런데 내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저 먼 거리에서 어떻게 이쪽으로 갑자기 방향을 바꿔 달려왔지? 글쎄요. 설마 눈치 챈 것은 아닐까요? 이봐, 자네는 저 먼 거리에서 정신없이 달리면서 이쪽에 어떤 놈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나? 아뇨. 하지만 여기 숨어 있던 녀석들이 혹시 실수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실수로 검에서 빛이 반사되었다든지, 예, 어떤 물체에 반사된 빛을 놈들이 우연히 봤을 수도 있죠. 음. 가능성은 낮지만 그럴 수도 있겠군. 이때 마법사가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백작님, 사령부가 연결되었습니다. 혹시 더 전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 말에 우두머리인 듯 보이는 사내는 수정 구슬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수정 구슬에 비쳐지고 있는 상대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쥐새끼는 남자 셋, 여자 한 명. 모두들 대단히 뛰어난 실력을 지닌 놈들이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은 특히 대단한 실력인 것 같아. 혹시 딴 정찰조에서 들어온 연락은 없나? 없습니다, 백작님. 놈들은 그 실력으로 봤을 때 타이탄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사단의 투입을 원한다고 후작 각하께 전하도록! 에,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여기 76정찰조 매복 위치에서 바실리 시 쪽에 직선 거리상에 몇 개의 정찰조가 배치되어 있지? 열두 개입니다. 좋아. 그 열두개 정찰조가 매복한 곳을 향해 기사단을 보내라고 말씀 드려라. 빨리. 옛! 자, 우리도 움직이기로 하지. 시체들의 몸을 수색한 후 다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소녀를 향해 엘터는 재차 말했다. 더 이상은 위험하옵니다, 공작 전하. 뭐가 그렇게 위험하다는 것이지? 오는 도중에 벌써 일곱 개 정찰조에 걸렸습니다. 모두 다 죽였다고 하지만 곧 우리들의 행적이 밝혀질 것이옵니다. 더 이상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옵니다.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주시옵소서. 자네들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하나? 예. 무두 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돌아가기로 하자. 엘터 자네가 귀로를 생각해 봐. 예, 여기서 남쪽으로 3킬로 정도 내려간 후 동쪽으로 돌아서 귀환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3킬로 정도 내려갈 정신이 있을까? 지금까지의 경우로 봤을 때 거의 1킬로 단위로 1개조씩 숨어 있는 것 같은데? 이제부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상대를 보자마자 그렇게 죽이지 마시구요. 좋아. 하지만 그건 놈들이 이쪽을 눈치 못 챘을 때에 한해서야. 가자구. 이제 백작 일행은 사령부 쪽에다 달려와 합류한 인원들까지 모두 35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처음에 전멸당한 제76정찰조에서 직선으로 거리에 있는 각 매복조에 다섯 명씩의 기사들을 투입했는데, 그들이 모두 뭉쳐 버린 것이다. 귀관께서도 놈들을 보지 못했습니까? 예. 저희들이 연락을 받고 왔을 때는 이미 늦었더군요.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단일 국가 소속도 아니고, 이렇게 모두들 쉬시다가 달려와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희도 황망중에 명령을 받고 출발하는 바람에 마법사를 데려오지도 못했고, 그래서 이들의 시체를 보면서 어떻게 행동을 할까 망설이던 중입니다. 잘 되었군요. 저와 함께 행동하시면 될 겁니다. 일단은 쥐새끼들을 잡아야지요. 백작은 서둘러 무리들을 이끌고 놈을 향해 달려갔다. 물론 모인 인원들을 통솔할 권한 따위가 백작에게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듯 수십 개 국이 약간씩 병력을 보내 주어 구성된 엽합군 체계에서는 일단 지휘자가 있어야 했고, 정식으로 놈들을 추격해야 하는 명령을 받은 것은 백작 일행이었다. 나머지는 백작을 도와 주기 위해 파견된 형식이었기에 지휘권을 놓고 군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작 일행은 처음에는 토끼사냥하는 기분으로 따라다니다가 추격이 계속되면서 점차로 마음이 바뀌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솜씨야. 이 친구는 쓰러져 있는 모양새를 보니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갔구먼. 저기 있는 마법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작님, 추격을 계속해야 할까요? 이게 제일 마지막 포진하고 있던 정찰조였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놈들이 도망 친 방향을 추정해 보면 아르곤 쪽입니다. 시체를 보니 죽은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시체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을 정도지요. 이런 상태에서 추격을 포기한다면 남들의 비웃음거리밖에 안 됩니다. 못 잡더라도 추격은 계속해야 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전력으로 뜁시다. 20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기사들의 발걸음 속도로 봤을 때 거의 30킬로 앞에서 도망 치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나마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전력으로 달려도 거리를 줄일 수 있을 지 없을지 모르는 그런 상대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죽은 시체를 봤을 때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거의 4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추격을 해서 겨우 네 명을 잡지 못했다면 자신들의 명예뿐 아니라 자신들의 조국에까지 먹칠을 할 여지가 있었다. 그들이 추격을 단념한 곳은 아르곤 제국과의 국경선이었다. 놈들이 만약 알렌 왕국으로 도망 쳤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시비거리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상대는 아르곤으로 도망 쳐 버렸다. 분명 알렌 쪽, 아마도 크루마 지원군쪽의 정찰대라고 짐작은 되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었다. 살라만더 기사단, 정식으로 말한다면 크라레스 유령 기사단 크루마 파견대 내에서는 은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둘씩, 혹은 셋씩 모여 쑤군거리면서 퍼져 나가는 소문. 그건 딴 사람들에게는 별로 해당사항이 없을지 모르지만 살라만더 기사단 소속의 대원들에게는 대단한 낭보(朗報)였다. 글쎄말이야. 세상에, 나는 달리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는데 그 먼 거리에서 놈들을 포착하고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시더니 단칼에 끝장을 내 버리더군. 정말이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렇게 해서 죽인 놈들의 정찰조만 해도 열다섯 개는 될걸? 기사 20명에 마법사 열다섯 명이야. 놈들의 품속을 뒤져서 가져온 지도가 몇 장인지 아그리오스 백작님께 물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잖아.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소문대로 그렇게 검술이 대단해? 내 생전에 그렇게 빠른 검술은 구경도 해본 적이 없어. 한 칼에 한 씩, 정말 정확하더군. 소드 마스터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가 했었는데, 눈으로 보니까 정말 끝내 주더군. 저런 분이 우리 사령관이시니까 아마 승리는 보장된 거나 다름없지 않겠어? 타이탄 자체가 뛰어난 무사가 탈수록 괴력을 발휘하는 무기였고, 또 타이탄을 상대할 무기는 타이탄뿐이었기에 이 시대의 전쟁은 타이탄의 숫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각국이 아무리 많은 타이탄을 끌어 모은다고 하더라도 수백 대 정도가 고작이었기에 전략과 전술이 그렇게 발전하지 못한다는 단점 또한 있었다. 기사단이 나간다면 그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과 마법사로 구성된 정찰조가 쫙 깔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기습을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지기에 몇몇 예외의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전쟁은 타이탄 대 타이탄의 육박전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철 없는 드래곤 아빠 린넨 백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게. 옛! 새로이 보충된 16명의 인원은 보초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셨습니까? 공작 전하. 그 말에 소녀는 고개만 까딱 하며 인사를 대신했고, 곧이어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크로아 백작이 입을 열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고. 보고받은 인원보다 훨씬 많이 오셨군. 예. 힘든 전쟁터로 이렇게 달려와 주니 마음이 든든하군. 크루마 쪽에서는 연합군의 사기 저하를 염려해서 적들의 전력이 현재 120대 정도라고 속이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분명 어려운 전쟁이 될 것 같으니 모두들 힘을 내 주게나. 그런데 그쪽은 잘 모르는 얼굴인 것 같은데? 예, 공작 전하. 이쪽은 과거 코린트에 멸망당한 트루비아의 기사단이옵니다. 이번 전쟁에 참전해 주시겠다고 하셔서 이렇게 함께 왔습니다. 오오, 어려운 결정을 내려 주셔서 감사하오. 그래, 왕자 전하께서는 평안하신지? 옛, 공작 전하. 자, 이리로 오기 전에 몇 가지 상황을 들었겠지만 오는 도중에 시간이 경과되다 보니 다시 정확한 정보를 듣고 싶겠지. 오늘 오전에 본국과 연락을 취한 결과를 말해 주게. 크로와 백작의 말에 소녀는 입을 열었다. 예. 3일 전 엠프 기사단에서 로메로-H형 22대가 추가되어 이쪽은 132대로 증강되었습니다. 그때 적은 140대로 증원되어 있었고, 그때부터 상대의 전력이 이쪽을 앞서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16대의 타이탄이 증원되었다고 하지만 상대는 다시 176대로 다시 증원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본국에서 정보 집계에 하루 정도가 소모되는 것으로 봤을 때 지금 적은 180대를 넘는 탄이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180대 . 신음 소리 같은 음성이 여기저기서 터저 나왓다. 이때 그라드 시드미안이 주위를 환기시키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쩐지 이곳 전선이 더 위험한 듯 보이는군요. 제가 알기로 코린트의 병력은 모두 세 곳에 집결중인데 그 중 최대 집결지가 바실리 시라고 알고 있사옵니다. 코린트는 지취 체계를 혼란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모든 동맹군 병력을 이곳 바실리 시에 집결시키고 있사옵니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많은 병력이 모일 것이고, 제 예상으로는 250대에서 300대 정도가 모일 것이 분명합니다. 과거 겨우 8대의 타이탄을 가진 트루비아를 정복하기 위해 은십자 기사단 소속 타이탄 20대와 동맹국 타이탄 50대를 동원한 놈들이지요. 그런 그들이 수백 대의 타이탄을 가진 크루마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라면 최대한 많은 동맹군을 동원할 것은 분명하옵니다. 경의 말이 옳은 것 같군. 자, 먼 길을 왔을 텐데 숙소에 가서 모두들 좀 쉬게나. 본국을 통해서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즉시 알려 주겠네. 옛, 전하. 수정 구슬을 통해 들려 오던 말소리가 잠잠해지자 바지오 남작이 입을 열었다. 크라레스의 전력이 정말 놀랍군. 그때 까만 토끼 라는 녀석이 보내 준다고 했던 두 번째 귀엽둥이 는 역시 타이탄이었어. 아마 린넨 백작이 이끌고 온 여덟 명이 가지고 있는 타이탄이겠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에 합류한 그라드 시드미안이라는 녀석! 상당히 날카로운데? 아마도 자신의 조국이 코린트에게 멸망 당했어기에 그 녀석들에 대한 조사를 많이 했었던 모양이야. 그가 말한 250대 이상이 모일 거라는 말도 지금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숫자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저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오늘 알아낸 것을 상부에 보고해. 그리고 그 여자 마법사, 아름이 뭐라고 했지? 예? 글쎄요. 그 여자 마법사 이름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들 그냥 마법사라고만 부르니까요. 그렇던가? 그 마법사 방에도 도청 장치를 할 수는 없나? 번번이 숭어 들려니가 매우 성가시잖아.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그 마법사가 어느 날 심술이라도 부려 방안 조사라도 하는 날에는 도청 장치를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로니에르 공작의 방이야 여 마법사가 임의로 조사할 수가 없기에 설치했습니다만은. 사실 그 방에 설치한 것만으로도 중요한 정보는 모두 다 얻을 수 있었잖습니까? 몇 번 실험을 해 봤었지만 통신 마법으로 주고받은 말과 공작에게 보고한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럼, 마법사의 방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것은 포기하기로 하지. 바지오 남작은 밖으로 나가다가 슬쩍 해를 바라보며 대충 시간을 가늠한 후 말했다. 1시간 후에는 정기 연락 시간이잖아? 예, 남작님. 혹시 정찰조로부터 특이한 보고가 올라오면 재빨리 나한테 전해 줘. 예. 스칼의 대답을 뒤로 들으며 바지오 남작이 밖으로 나왔을 때 눈부시게 아름다운 두 사람이 자신의 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바로 여 마법사와 그녀에 준할 정도로 아름답게 생긴 남자였다. 제발 좀 그만 하세요. 아버지하고 놀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시면 화이어헤머하고 노시라구요. 어떻게 그런 말을 아버지한테 할 수 있니? 그 따위 신의 실패작하고 . 좋아요. 그럼 지금 해야 할 일만 끝내고 나서 놀아 드리죠. 진작에 그랬어야지. 그래 얼마나 기다리면 되겠느냐? 한두 시간 정도? 그렇게 오래? 싫으시면 말구요. 좋아, 좋아. 뭐 내가 싫다고 했느냐? 그건 그렇고 이거 한번 안 해 볼래? 그게 뭔데요? 호기심을 보이는 아들에게 아르티어스는 주머니 속에 감춰 두고 있던 자그마한 물건을 꺼내 들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쨘! 자, 봐라. 얼마나 예쁜 귀고리냐? 너한테 특별히 잘 어울리도록 주문 생산한 것이지. 주문 생산이오? 응. 화이어헤머 그 녀석을 협 , 아니, 그 녀석한테 부탁한 거야. 어때 예쁘지? 설마, 그딴 거 말들라고 매일매일 화이어헤머를 괴롭히는 것은 아닐 테죠? 요 며칠 제법 바쁜 듯 돌아다니더니 이걸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아르티어스는 속으로 찔금했지만 열심히 부인했다. 아니, 절대로 그 녀석을 괴롭힌 적은 없어. 그래도 명색이 드 아니, 약자를 괴롭히면 안 되잖아요. 하늘에 맹세코 절대 그놈을 괴롭힌 적 없다니까. 내 말이 거짓말이면 마늘 하늘에 날벼락이 머리 위로 떨어질 거야. 그 녀석이 알아서 너한테 어울릴 거라면서 만들어 준 거야. 자, 한번 걸어 보라구. 원래가 드래곤이란 것이 지상 최강의 생명체. 설혹 날벼락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아르티어스의 방어막을 뚫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는 배짱 좋게도 신의 이름을 팔아 가며 거짓말을 해대는 것이다. 에이, 그따ㅟ 것은 섫다니까 그래요? 잘 어울릴 텐데 왜 그러냐? 그러지 말고 해보라니까. 두 남녀가 사라질 때까지 뒤를 멍하니 지켜보던 바지오 남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도대체 저 남자 나이가 그렇게 많은가? 설마,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둘 다 마법사겠군.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은 신학과 마법밖에 없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신관일 수도 있겠군. 맞아, 통신 마법 따위를 사용하는 건 모두 저 여자잖아? 그 아버지란 사람은 아직까지 한 번도 중요한 자리에 나서지 않는 걸 보면 신관이 틀림없어. 아마 전투가 벌어지면 그때쯤 나서서 축복을 하며 돌아다니겠지. 나중에 전투가 벌어지면 잊지 말고 꼭 축복을 받아야겠군. 수정궁 이동 마법의 비밀 도대체 말이 되느냐?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으로부터 호출 당한 죠드는 상관의 호된 질책을 들었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이번 사건이 원체 모호했기 때문이다. 기껏 잡아 왔다가 사라진 소녀와 그 일행은 놔두더라도 코타스 공작 전하께서 실종되신 지 벌써 10일이나 경과되었다. 그런데도 알 수 없다는 변명이나 늘어놓고 있는 것이냐?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 자료? 무슨 자료 말이냐? 이 따위 쓰레기를 자료라고 가져온 거냐? 제임스는 죠드가 밤새 낑낑거리며 작성한 서류들을 내팽개치며 으르렁 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 그 계집과 공작 전하를 말이다. 이제 곧 크루마와 전쟁이 벌어질 거다. 이런 중요한 때, 코타스 공작 전하께서 실종되신다면 이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겠느냐? 안 되면 시체라도 찾아 와. 똑똑! 무슨 일이냐? 제임스의 짜증스런 목소리에 찔끔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듯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실 무척 화가 난 상태인 상관의 주변을 얼쩡거리다가는 자칫 불똥이 퇼 수도 있었기에 알아서 몸을 사려야 했지만, 이걸 전해 주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예, 크로데인 백작님으로부터 통신이 들어와 있습니다. 알겠다. 죠드, 너도 함께 가자. 예. 후작 각하. 죠드는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젊은 후작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그는 대단히 유능한 후작의 친구가 어떤 단서라도 발견해 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그래, 그쪽은 어떻게 되었나? 꽤 재미있는 사실이 몇 가지 발견되었기에 연락을 하는 거야. 까미유의 말에 제임스는 얼굴이 환해지며 물었다. 좋은 소식이야? 그건 자네가 들어서 판단해 봐. 우선, 그 소녀하고 일행을 봤다는 사람들을 발견했지. 뭐야? 어디서? 코린티아 시 외곽에서. 식당 주인에게서 확인가지 받았지. 거기서 식사를 한 후 떠났다고 하더군. 어디로? 글쎄. 마법진을 썼기에 어딘지는 확실히 알 수 없어. 죠드가 말 안하던가? 마법의 탑에서 알려 주는 자료만 가지고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 방법이 없지. 마력이 발생한 대략적인 위치와 그 추정 마력, 그리고 그게 포착된 시간만 기록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어쨌든 마법의 탑에 알아본 바로는 400만 기간트라 급의 이동 마법이야. 이 근처에 수소문을 해봤더니 그 소녀의 일행은 꽤나 대부대가 되어 있더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소녀 외에 열명. 꽤나 떼거리로 숫자가 늘어나 있기에 그 패거리인지는 확실하지 않아. 엄청난 미인인 소녀 한 명, 그리고 드워프 하나, 그리고 죠드에게서 들은 대로 키 175센티 정도의 머리를 아주 길게 기른 눈에 확 띌 정도의 미남자 한 명. 이셋이 끼어 있었다는 것은 확인했어. 그들 외에 덩치 좋은 검객 여섯 명과 좀 호리호리한 남자 한명. 그렇게 해서 열한 명이지. 도대체 어디에서 다섯 명이나 되는 놈들이 숨어 있다기 끼어든 거지? 글쎄 , 그럼 놈들은 어디로 갔다는 거야? 그걸 잘 모르겠어. 이들이 남겨 놓고 간 마법진도 발견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너무 지난 관계로 희미해져 별로 안 되더군. 마법의 탑에 알아본 결과 사람 열한 명과 말 여섯 필을 400만 기간트라 급 마력으로는 그렇게 초장거리 이동을 시키기는 힘들다는 보고만 받았지. 무게에 따라 상당히 오차가 날 수도 있지만 이동 거리를 대략 추정한다면 11,000에서 12,000킬로 정도? 최대한 길게 잡는다면 13,000까지도 될 거라고 하더군. 까미유의 말에 제임스는 대충 지도와 축척(縮尺)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외쳤다. 12,000킬로라면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12,000킬로? 그렇다면 우리 나라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충분히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거리잖아. 그렇다고 봐야지. 하지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곳은 몇 나라 되지 않아. 북쪽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나라가 없고, 동쪽의 아르곤, 남쪽의 크라레스, 그리고 서쪽에는 , 으음, 그쪽은 좀 많군. 꼭 국경을 넘었을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잖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 뭔데? 정밀 조사를 실시해 본 결과 그녀 일행이 묵었던 수정궁의 방에는 두 곳 어디에서도 숯가루나 뭐 그런 그와 비슷한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어.: 야외에 그리는 마법진은 바람이나 비 같은 것 때문에 금방 사라지므로 대충 아무거나 가지고 그리지만, 실내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작대기 같은 것을 이용해 그리는 것은 불가능 하고, 연필이나 물감 따위를 사용해 그렸다가는 누군가 씻어 내지 않는 한 행적이 노출 될 우려가 있었다. 그렇기에 보통 실내의 마법진은 밀가루나 숯가루 등을 이용해서 그리게 된다. 그러면 마법이 발동되는 순간에 움직이게 되는 마나의 기류에 의해 마법진은 지워지게 되어 흔적을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마법진을 그렸다는 숯가루 등의 증거물은 여전히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는 마법진을 사용하지 않고 공간 이동을 했다는 거야? 그렇다고 봐야지. 마법의 탑에 기록된 자료를 살펴보면 처음 공작 전하께서 실종되실 때, 그때 발생한 마력은 50만 기간트라. 그걸 마법진 없이 돌렸다는 것은 6싸이클 급 마법사가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고 봐야 해. 50만으로 두 명이면 마찬가지로 거의 국경 가까이까지 날아 갈 수 있지. 두 번째 발생한 마력은 1.000 기간트라. 그 방안에 들어있던 사람의 수를 생각해 본다면 상당히 근거리 이동이야. 제임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흐음. 앞 뒤가 대충 맞는 것 같은데? 그렇지. 그녀는 공작 전하와 초장거리 이동을 해서 어딘가로 갔어. 그런 후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돌아왔지. 그때는 어떤 미남과 함께 왔지만 말이야. 그런 후 단거리 이동으로 코린티아 시외로 나왔고 식사 후 초장거리 마법을 펼쳤어. 그런데 마법의 탑 자료에 상당히 재미난 사실이 있더군. 일부러 흥미를 자아내는 듯한 까미유의 말에 제임스는 짐짓 흥미를 보인다는 듯이 질문을 했다. 자신의 친구에게서 빠른 대답을 들으려면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줘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떤? 바로 제일 마지막 이동의 시발점이 된 식당이 있는 곳. 그 근처에서 엄청난 마법이 사용되었어. 어떤 종류의 마법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의 850만 기간트라 급 마법. 그리고 곧이어 24만 기간트라 급 마법.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일부러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까미유의 화법에 짜증이 난 제임스는 투덜거렸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속 시원하게 설명해 봐. 앞의 850만 기간트라 급 마법이 뭔지는 잘 몰라.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지. 두번에 걸쳐 연속으로 사용된 걸 보면 한 사람이 썼을 가능성이 매우 커. 그리고 그 사람이 두 번째 마법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면 대충 앞뒤가 맞지. 24만 기간트라로 한 명이면 공작 전하가 이동한 곳과 거의 비슷한 거리까지, 아니면 바로 그곳에 이동이 가능해. 850만 기간트라 급을 곧바로 사용했다면 그는 7싸이클 급 마법사지. 그 마법사는 그곳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돌아왔어. 소녀만 데리고 말이야. 그 다음은 자네가 아는 대로지. 그런데 몇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도 많아. 어떤? 그 정도 마법사가 있는데도 식당 근처에 그려진 마법진은 400만 기간트라 급치고는 엄청나게 컸어. 마법사들의 의견으로는 낮은 싸이클의 마법사들은 안전을 위해서 그렇게 과도하게 크게 그린다고 하더군. 그 말은 거기서 마법진을 발동시킨 녀석은 고위급이 아니라는 이야기야. 그렇다면 고위급은 그 정도 마법도 쓸 수 없는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오지. 호오. 마력을 거의 다 소모했다는거야? 그렇다면 . 그래. 아마도 그 녀석이 공작 전하와 싸웠을 수도 있을 거야. 이 풍경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그 말과 동시에 까미유의 모습은 수정 구슬에서 사라지고 황폐한 벌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 벌판은 원래부터 황폐한 것이 아니라 뭔가 거대한 마법 실험이라도 한 것처럼 파헤쳐져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수정 구슬에는 까미유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그게 뭐야? 그 마법사 녀석이 소녀와 수정궁에 나타나기 전, 그러니까 공작 전하께서 소녀와 없어진 시간은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았어. 그렇다면 돌아올 때도 이동 마법을 썼다는 결론이잖아? 그래서 그 시간에 800킬로 내외의 거리에서 50만 기간트라 급의 마법이 있었는지 조사하니까 한 곳 있더군. 그쪽으로 찾아가서 발견한 풍경이야. 어때? 근사하지? 글쎄. 대단한 마법 실험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인데? 완전히 엉망이잖아. 그렇지? 내가 데로온 마법사들의 의견으로는 전기, 그러니까 엄청난 규모의 뇌전에 의해 이렇게 된 것 같다고 그러던데? 그렇다면 공작 전하가 저곳에서 싸웃셨다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크지. 그리고 이 일대에는 타이탄의 발자국도 있어. 7싸이클 급 마법사와 타이탄 한 대. 이 정도라면 아무리 공작 전하라도 힘들었을 거야. 그럼 그 나쁜 연놈들이 그곳에서 공작 전하를 협공해서 시해(弑害)한 후 뻔뻔하게도 이쪽으로 왔다가 다시 어딘가로 갔다는 거야? 제임스의 단순 무식한 추리에 까미유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저렇게 단순하기는. 당장 그렇게 단정 짓기는 힘들어. 왜냐하면 진짜 싸움을 벌일 생각이었다면 모든 무사들을 그쪽으로 데리고 가지, 왜 소녀와 그 마법사만 갔을까? 그리고 공작 전하께서는 왜 그 소녀와 단둘이서 그 먼 곳에 가셨지? 그리고 소녀와 우리가 처음 만난 시점에도 문제가 있어. 소녀가 공작 전하를 시해할 예정이었다면 코린티아 시가지를 어슬렁거리고 있어야지 그 먼 아르곤에는 왜 있었을까? 그리고 싸운 흔적을 보면 타이탄은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고, 또 뇌전 이외의 다른 마법이 사용된 흔적도 없어. 그렇다면 놈들은 코타스 공작님을 어떤 방식으로 해칠 수 있었지? 글쎄. 제임스가 이리저리 궁리를 하는 듯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보며, 까미유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다. 모든 것은 그 소녀를 찾아내야 알 수 있어. 그, 그럼 어떻게 하지? 쯧쯧, 머리하고는 . 어떻게 그 머리로 무술을 익혔나? 내가 처음에 그 소녀를 발견한 곳이 어디라고 했지? 제임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기억이 났던 것이다. 그야 . 그래, 크라레스라고 했지. 맞았어. 나는 지금부터 크라레스로 갈 거야. 혹시 뭐 따로 전달할 사항은 없나? 아니, 아직까지는 없어. 그럼 나중에 또 연락하지. 잠깐! 누구하고 같이 갈 거야? 오스카하고 같이 갈 거야. 그리고 마법사는 리카와 스타키를 데려가지. 나머지는 돌려보낼 거야. 겨우 그들만 가지고 될까? 기사를 몇 명 더 데려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봐, 오스카하고 나만 빠져도 벌써 제3근위대에 공석이 두 개나 생긴다구. 페트릭까지 데려가면 아마도 너희 아버지가 눈치 채실걸? 둘만 해도 충분할 거야. 그리고 페트릭 그 녀석은 너무 귀족 냄새가 나서 들통나기 쉬워. 그럼 다음에 연락할게. 그 말을 끝으로 수정 구슬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기랄, 까미유! 어쩔 수 없지. 원래 크라레스는 별 볼일 없는 국가니까, 적기사 두 대만 해도 충분할지도 . 죠드! 예, 후작 각하. 일단 수색을 위해 파견했던 모든 기사와 마법사들을 소환해라. 근위대에 더 이상 빈자리를 놔두기는 힘들어. 언제 근위대 파견이 결정될지도 알 수 없고. 옛! 후작 각하. 그리고 까미유로부터 확실한 보고가 들어오기 전까지 코타스 공작 전하께서는 적기사 제작에 너무 몰두하신 나머지 피곤이 쌓여 잠시 휴양을 취하러 가셨다고 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후작 각하. 까미유가 잘 해 주어야 할 텐데 . 제임스는 최악의 상황, 즉 코타스 공작이 사망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공작의 사망 소식이 발표된다면, 그것도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코린트 군대의 사기(士氣)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진짜 코타스 공작이 사망했다면 그것은 전쟁이 끝난 후에 발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철저한 피의 복수를 하려면 상대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지금 조용히 자료를 모아 두어야 했다. 청기사 안드로메다의 첫 전투 로니에르 공작이 사령관으로 추대된 후에 그가 있는 살라만더 기사단은 알렌 왕국 방어군의 주력(主力)이 되었다. 중앙에 주둔한 살라만더 기사단을 보조하는 우익은 엠페른 기사단, 좌익은 연합 기사단이었다. 이렇듯 세 개의 기사단이 각기 떨어져서 주둔하다 보니 살라만더 기사단에는 다섯 명의 마법사들이 추가로 증원되었다. 그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각 기사단, 그리고 각 기사단에서 파견한 정찰조로부터 지속적인 통신망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모든 정보를 살라만더 기사단에서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연합군의 식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살라만더에서 파견하는 기사단은 1이라는 숫자를, 엠페른은 2, 연합 기사단은 3이라는 숫자를 앞에 붙여 호칭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01이라면 살라만더 기사단 소속 제1정찰대라는 말과 같은 뜻이 되었다. 이렇듯 세 개의 기사단에서 파견하는 정찰대의 수는 연일 20개를 넘어서고 있었고, 그들로부터 적의 동태에 관한 정보가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다크가 정찰 활동이라는 미명 아래 직접 상대의 진영에 들어가 거의 30명이 넘는 기사들을 학살하고 돌아온 후 이틀째부터 상대의 활동이 왕성해지기 시작했다. 106매복조에서 적 발견. 다섯 명으로 추정. 아마도 정찰조인 듯합니다. 204조에서 적 발견. 다섯 명 정도가 국경 통과! 빨리 대책을 지시해주십시오. 206조에서 적 발견. 세 명이 국경을 넘었답니다. 306조에서 적 다섯 명 발견. 국경 통과중이랍니다. 대책을 지시해주십시오 네 개의 통신용 마법진을 그려 놓고는 각기 한 명씩의 마법사가 붙어 앉아 있었다. 이들은 하루2교대로 근무중이었는데 쉴 틈 없이 상황을 외치기 시작했다. 지금 깔려 있는 정찰ㅈ조가 스무 개 정도인 것을 감안한다면 딴 정찰조들도 적을 발견하고 통신을 보내오고 있을게 분명했다. 다만 그것을 수신할 마법사가 없어서 연결이 안 되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한꺼번에 많은 정찰조들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마도 상대가 계획적으로 한꺼번에 투입한 것이 분명했기에 통신실을 지휘하고 잇는 바지오 남작은 일수 남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각 정찰조에 전달, 교전을 최대한 피하고 적을 감시하라. 그리고 자네는 이 사실을 사령관께 전하도록. 빨리. 예. 곧이어 사령관인 크로아 백작과 마법사 소녀가 함께 들어왔다. 백작은 통신실에 들어서면서 외쳤다. 예비 기사들을 출동시켜라. 그리고 각 기사단에서 타이탄을 소유한 기사들로 열 명씩 엄호 부대를 구성하여 파견하라고 전하라. 옛! 크로아 백작의 지시를 받는 즉시 린넨 백작이 아홉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재빨리 국경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도든 기사단들은 국경에서 거의 80에서 100킬로쯤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후속 부대가 국경에 도착하는 데는 거의 한 시간 정도가 경과되어 버렸다. 그 동안 마법사들을 거느린 상대의 정찰조들은 이쪽의 정찰조들을 찾아내어 각기 교전을 벌렸고, 지원대가 도착할 때쯤에는 10여 명이 사망하고 20여 명 이상이 중상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도착했을 때는 상대가 이미 재빨리 후퇴한 되였기에 뒷수습만 하다가 돌아온 린넨 백작은 곧장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놈들의 공격은 계획된 것이었사옵니다. 뷰 마나 포스의 주문으로 이쪽의 정찰대 위치를 파악,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 온 것이옵니다. 부상자들의 증언이나, 시체에 난 검상을 살펴봤을 때 상대방은 모두들 그래듀에이트 급들로 추정되옵니다. 자네가 달려갔을 때는 놈들은 이미 철수한 후였나? 예, 전하. 흐음, 보고에 의하면 다른 기사단에서 보낸 증원대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더군. 놈들은 아마도 조만간 전투를 개시할 생각일 거야. 그전에 이쪽의 정찰조부터 손을 봐 두겠다는 계획이겠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시온지? 일단 전방의 모든 정찰조들을 조금씩 후퇴시켜라. 그리고 각 기사단에 통보해서 각 정찰조는 다섯 명 이상의 규모를 유지하도록 전하라. 바실리 시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이 본대다. 그리고 오늘 가장 피해가 컸던 것도 본대다. 여덟 명 사망, 여섯 명 중상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당분간 증원이 있을 때까지는 크루마 쪽에 정찰을 맡길 수 없다. 크루마 본국에 더 많은 기사와 마법사 증원을 요청해 놨으니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살라만더 기사단에서 본격적인 정찰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적 기사들과의 교전 가능성이 큰 만큼 마법사를 지원받을 필요 없이 기사들만 투입하기로 하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했다간 잘못되면 치명적인 전력 감소의 요인이 될 수도 있사옵니다. 여기까지는 자신있게 말한 크로아 백작은 소녀 쪽을 힐끗 봤다. 그러자 소녀는 일부러 눈을 부릅떠 보였고, 백작은 마지못해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통신을 위해 저 아이를 데려가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한 린넨 백작이었지만, 상관의 황소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기에 마지못한 대답을 했다. 예, 전하. 20명이 넘는 인원이 말을 타고 사라지는 것을 보며 바지오 남작은 고개를 갸웃 했다. 정석대로라면 좌우에 포진하고 있는 다른 기사단의 인원을 보충받는 한이 있더라도 타이탄을 소유한 기사들을 투입하는 것은 금기(禁忌)였다. 만약 타이탄을 소유한 기사를 몇 명씩 분산시켜 배치했다가 순간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적의 병력적 우위에 의해 죽거나 부상을 당하면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런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저들은 여분의 기사를 단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들을 투입했다가 놈들이 타이탄을 투입해 오면 어쩌려고 . 저 멀리 국경선이 보이는 위치에 포진하고 있는 것은 이제 정찰조들이 아니라 살라만더 기사단의 네 개 조였다. 정찰조들은 살라만더 기사단 10킬로 정도에 배치되어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에만 크루마에서 지원받은 기사의 절반 이사을 잃었기에 어쩔 수 없이 취해진 행동인 것같이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놈들은 왜 안 오는 거야? 제발 좀 참으십시오, 전하. 너무 위험하옵니다. 린넨 백작은 애가 타서 외쳤다. 원래 그와 소녀는 네 개의 정찰조 뒤에서 지원을 해줘야 정상이었지만, 사실 네 개의 정찰조는 그들의 훨씬 뒤쪽에 포지하고 있었다. 뭘 참아. 나는 충분히 참고 있어. 더 이상 참으면 먼저 화병으로 죽을 거 같아. 이봐 린넨. 예, 전하. 나중에 전투가 벌어지면 말이지. 자네가 책임지고 할 일이 있어. 뭣이옵니까, 전하. 목숨을 다 바쳐 . 아, 목숨을 바칠 필요까지는 없고, 저 크루마에서 파견되어 온 녀석들을 모두 다 죽여라. 예? 그건 무슨 말씀? 절대로 증거를 남겨서는 안 돼. 아마도 코린트와 전투가 벌어진다면 내 타이탄을 써야 할 거야. 그렇게 된다면 크루마 쪽에서도 청기사의 존재를 알 위험이 있지. 내가 왜 타국 기사단들을 멀리 분산시켜 놨다고 생각하나? 다 그것 때문이야. 크루마에서 파견되어 나온 그 바지오라는 녀석은 코린트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둔 상황에서도 사령관실을 도청하고, 본국 기사단을 감시한다고 열을 올리고 있지. 크루마도 이 전쟁이 끝나고 난 뒤를 생각하고 있는거야.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그들을 없애겠습니다, 전하. 자네 혼자서는 힘들 것 같으면 몇 명 더 써라. 그래도 괜찮겠사옵니까? 몇 명 정도야 상관없지. 빨리 해치우고 합류한다면 말이야. 그 점 주지시켜 놓겠사옵니다. 제가 . 쉿! 밤손님이 찾아왔다. 그녀의 말대로 먼 곳으로부터 다섯 명의 그림자가 맹렬한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상대는 마법을 이요해서 이쪽에 매복하고 있는 사람이 두 명뿐이라는 것을 알고 망설이지 않고 접근해 왔다. 저쪽에 한 패거리가 더 있어. 자식들, 오늘 아침에 한바탕 휘저어 놨으니 밤에 배치되는 정찰조에는 정규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단단히 한 건 올리려고 드는군. 타이탄을 꺼낼까요? 아니, 놈들도 아직 안 꺼내고 있는데 벌써부터 그럴 필요는 없겠지. 봐! 녀석들 국경을 서둘러 넘어오는 꼴이 정말 멋지군. 소녀는 피식 비웃으며 점점 거리를 좁혀 오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다가 앞으로 손을 쓱 뻗으며 외쳤다. 아쿠아 애로우(Aqua Arrow)! 그러자 수십 개의 가느다란 물줄기가 상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뭔가 앞쪽에서 급속히 날아오자 그들은 재빨리 회피 이동을 했다. 그 중에는 뛰어오르는 사람도 있었고 좌로, 우로, 뛰어오르는 인물도 있었지만 엎드리는 인물은 없었다. 일단 기사들의 싸움은 검을 통한 것이었고, 검을 쓰기 위해서는 거리를 좁히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기에 날아오는 것을 피하면서 더욱 거리를 좁힌 후 적의 궁수(弓 ), 또는 마법사를 베어 버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그 무언가는 도대체 뭔지 파악하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거리를 좁혀 왔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다섯 명이 땅바닥에 일제히 쓰러진 것은 바로 다음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공간이 열리며 다섯 대의 타이탄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이 죽은 이상 계약이 종료되었기에 새로운 주인을 찾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겨우 두 명으로 알고 달려들었던 동료들이 일제히 쓰러져 버리자 뒤에 포진하고 있던 십여 명의 적들은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다는 듯 타이탄을 꺼냈다. 일단 적을 없애는 것이 우선 과제였고, 그 다음은 저 주인 없는 타이탄들을 수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놈들이 타이탄을 꺼냈습니다. 나도 눈 있어.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다구. 자, 이제 본격적으로 한바탕 해볼까? 그녀의 뒤에서 공간이 열리며 거대한 타이탄이 튀어나왔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을 칠한 타이탄의 방패와 오른쪽 흉갑(胸甲 : 가슴부분 장갑판)에는 쿠루마를 뜻하는 쌍두의 그린 드래곤이, 그리고 왼쪽 흉갑에는 불타는 듯한 붉은 도마뱀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 더 이상의 문장이 그려져 있지 않은 이 타이탄은 누가 봐도 일부러 문장을 그리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자네는 여기서 기다려. 달려오던 상대들은 어둠 속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순 찔금한 듯 보였지만, 자신들의 수를 믿는지 곧장 돌격해 들어왔다. 왼쪽 손목에 부착된 거대한 방패로 앞을 가리고 오른손에는 검을 든 채 달려오는 거대한 타이탄이 십여 대에 이르다 보니 그 굉음이 지축을 울릴 지경이었다. 자, 처음 해보는 실전(實戰)이니까 멋있게 장식하자구. 드디어 청기사라고 불리는 타이탄이 처음 적을 맞이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6.1미터나 되는 거대한 높이, 그리고 그 높이에 걸맞게 로메로 두 대에 맞먹는 145톤이나 되는 육중한 체구. 방패와 검까지 더하면 160톤. 이 세계에서 최고로 육중한 타이탄이었다. 하지만 청기사는 그 거대한 몸체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푹푹 들어가고 있었다. 양쪽 모두 최고 속도로 접근하다 보니 쌍방간의 거리는 급속도로 좁혀 들어갔다. 쾅! 서로간의 거리가 제로가 되는 순간 청기사는 12톤이나 되는 그 거대한 방패를 휘둘렀고 그 거대한 방패와 충돌한 상대방 타이탄의 왼손이 방패 채로 부서져 나가며 뒤로 튕겨나갔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들려 있던 3톤짜리 거대한 검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휘둘러졌다. 쿠직! 쾅! 청기사의 오른쪽으로 접근했던 적 타이탄의 검이 부서져 나가는 순간 그대로 머리통이 함께 떨어져 나갔고, 그 뒤를 따라오던 타이탄은 방패로 간신히 청기사의 검을 멈추게 하는 데 성공했다. 모두들 조심하랏! 상대의 힘이 보통이 아니야. 왼팔이 부러져 나간 녀석을 포함해서 살아 남은 아홉 대의 타이탄에 타고 있는 기사들은 뒤편의 넓은 공간을 이용해 흩어지며 저마다 외쳤다. 흩어져서 뒤편의 넓은 공간을 적절히 활용하며 포위 공격하는 방식, 이때의 공격은 대부분 일격을 가하고 이탈하는 방식이 애용된다. 이것은 가볍고 재빠른 타이탄이 무겁고 둔중한 움직임을 보이는 타이탄을 상대하기는 최적의 기법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도 이 괴물 같은 타이탄에는 통하지 않았다. 제일 먼저 일격 이탈 전법을 구사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타이탄은 상대방의 육중한 방패에 두들겨 맞고는 중심까지 잃으며 쭉 밀려났다. 검은색 타이탄은 첫 번째 공격자를 방패로 두들겨패며 밀어 버린 후 자신의 공격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놈을 향해 곧장 검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녀석은 기겁을 하며 재빨리 방패로 막았다. 엄청난 굉음이 터져나와 고막이 얼얼한 상태에서 자신의 타이탄이 뒤로 조금 밀리기는 했지만 상대의 검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검은색 타이탄의 검은 그의 방패를 미끄러지며 옆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오른편에서 아직도 12톤짜리 철판에 부딪친, 그것도 그 뒤를 받쳐 주는 145톤의 무게까지 합쳐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동료를 순식간에 베어 버렸다. 퍅! 베어져 나간 철갑 조각들이 흩어지는 가운데 그 타이탄은 서서히 무릎을 꿇고 있었고, 악마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검은 타이탄은 또다른 먹이를 찾아 도약했다. 거대한 덩치가 대지를 박차고 오르자 엄청난 흙먼지가 뿜어져 올라왔고 순간 대지가 푹 파였지만 어두운 밤이었기에 그것을 본 인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 다음 순간 검은색 타이탄은 앞에 있는 타이탄을 방패로 후려치고는 상대의 방어벽이 허물어진 틈을 타서 오른손 팔꿈치에 붙은 스파이크를 상대 타이탄의 머리 깊숙이 쑤셔 넣었다. 탑승자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사망했고 그 거대한 스파이크는 탑승자를 관통한 것도 부족해 탑승자의 아래에 위치한 엑스시온까지 뚫어 버렸다. 이윽고 상대 타이탄은 서서히 무릎을 꿇으며 침몰해 버렸다. 이때 검은색 타이탄의 뒤쪽에 위치한 적 타이탄은 상대의 등이 빈 호기(好機)를 놓치지 않고 등을 찔러 왔다. 그 순간 검은색 타이탄의 허리가 왼쪽으로 거의 108도가 넘게 급속도로 회전했다. 상대가 찔러 넣은 검은 그 거대한 방패에 막혀 튕겨 버렸고, 곧이어 검은색 타이탄의 거대한 검이 그대로 무방비 상태에 빠진 타이탄의 허리를 갈라놓았다. 이쯤 되자 제일 처음의 충돌로 왼팔이 날아가 버린 타이탄이 슬금슬금 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검은색 타이탄은 다섯 번째 먹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상대 녀석은 재빨리 뒤로 후퇴했지만 덮쳐 드는 거대한 타이탄의 이동 속도가 훨씬 빨랐다. 쾅! 방패와 방패가 충돌하며 거대한 굉음이 울렸고 곧이어 자세가 허물어진 틈을 타고 검은색 타이탄의 검이 그대로 상대의 흉갑을 뚫고 들어가 버렸다. 다섯 대의 타이탄이 어이없이 허물어지자 살아 남은 다섯 대는 재빨리 뒤로 돌아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타이탄의 수거보다도 자신들 목숨의 안전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검은색 타이탄의 검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시퍼런 색의 빛은 순식간 대기를 관통했고, 곧이어 다아나던 다섯 대의 타이탄은 상체 부분이 토막 나며 굉음을 울리고 쓰러졌다. 다크는 자신의 청기사를 돌려보낸 후 어둠 속 저편에서 걸어오는 린넨 백작에게 외쳤다. 마법사는? 예, 두 명 다 처치했사옵니다. 마지막에 쓰신 그 기술 때문에 제 타이탄을 꺼내지 못하게 막으신 것이옵니까? 그래, 제법 쓸 만하지? 쓸 만한 정도가 아니옵니다. 그런데 왜 처음부터 그 기술을 쓰지 않으시고 . 뛰어올라서 피해 버리면 그만이잖아. 그리고 한 번에 모두 다 없애 버리면 재미가 없기도 하고. 부하들을 불러 모아서 이 고철 덩어리들을 회수해라. 하루 저녁에 열다섯 대를 노획했군. 이 정도면 돈벌이가 엄청난데? 가만있자, 그건 그렇고, 이걸 회수해서 어떻게 하지? 만약 그냥 가져가면 크루마 놈들한테 뺏길 거고 , 옳지, 그러면 되겠군. 쓱싹쓱싹, 통신용 마법진을 그리기는 했는데 막상 주문을 외우려고 하다 보니 뭔가가 빠진 것 같았다. 앗차! 수정 구슬. 그걸 놔두고 왔군. 그렇다면 어쩐다? 이봐, 자네 수정으로 된 거 아무 거나 가진 것 없나? 예? 수정 , 말이옵니까? 수정이라면 이것도 되옵니까? 이건 자수정(紫水晶)인데요. 그러면서 린넨 백작은 자신의 검집을 가리켰다. 그 검집에는 큼직한 자수적이 두개 붙어 있었다. 검집이나 손잡이를 보석으로 장식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치레아와 스바시에를 점령하기 전의 크라레스는 매우 가난한 국가였기에 황제가 기사들에게 하사하는 보검에는 모두 다 자수정 같은 싼 보석을 박아 넣었다. 자수정? 그놈도 수정은 수정이니까, 한번 시도를 해보기로 하지. 빨리 줘. 린넨 백작이 품속에서 꺼낸 단검을 이용해서 자수정 하나를 뽑아 건네자 다크는 그걸 마법진 위에 올려놓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곧 자수정의 보라색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피곤한 듯한 모습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잘 보이지 않는데, 죄송하지만 관등 성명을 말씀해 주십시오.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이기는 했지만 약간의 짜증을 내포한 상대의 목소리는 또렸했다.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크루마 파견군 사령관이다. 잘 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다크가 짜증스럽다는 듯 말을 하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상대는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몰라뵈어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런데 어떻게 통신 상태가 . 잔말 말고 들어. 이곳 좌표를 알려 주겠다. 즉시 이곳으로 타이탄을 가지지 않은 그래듀에이트 다섯 명과 마법사 한 명을 보내라. 이쪽에서 대응 마법진을 그릴 테니 안전에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야. 그런 후 그녀는 품속에서 책으 꺼내어 좌표를 불러 준 후, 평탄한 대지를 골라 책자에 그려진 대로 널찍한 마법진을 그렸다. 상대쪽에서는 이 마법진을 목표로 공간 이동을 시키면 되기에 훨씬 안전성이 높아지게 된다. 다크가 마법진을 다 그린 후 10여분 정도 기다리자 뿌연 빛이 번쩍이더니 여섯 명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곧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엄청나게 높은 상관을 알아보고는 즉시 인사를 했다. 다크는 대충 인사에 답한 후 즉시 본론으로 넘어갔다. 저쪽에 다섯 대의 타이탄이 보이지? 예, 전하. 각자 저 타이탄들과 계약을 맺어라. 그런 후 각 타이탄들에게 저쪽에 널려 있는 고철 덩어리 한 대씩을 가지고 공간 저편에서 기다리게 해라. 그런 다음 자네. 예, 전하. 여기서 본국으로 저 다섯 명과 함께 돌아갈 수 있겠지? 예, 전하. 좋아. 빨리빨리 해. 저 열 대의 타이탄을 가지고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 그리고 린넨 경. 자네는 급히 부하들을 불러들여라. 남은 다섯 대는 사령부로 가져가야지. 그래야 다른 시사단의 사기도 오를 거고 말이야. 그렇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전하. 그럼 저는 부하들을 부르러 가겠사옵니다. 크라레스에서 왔던 기사들이 열 대의 타이탄을 수거해 돌아갔을 때쯤 린넨 백작이 사방에 퍼져 있던 기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는 이끌고 온 부하들을 동원해서 자국 최고의 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청기사의 발자국과 상대방 타이탄들의 발자국을 눈에 보이는 대로 지워 버렸다. 물론 너무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지워 버린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므로 이끌고 온 부하 20명에게 각기 자신들의 타이탄을 꺼내게 한 후 그 위에서 기동 연습을 행함으로써 누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아예 알아볼 수 없도록 모든 발자국을 짓뭉개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알렌 왕국에서 벌어진 코린트 연합군과 크루마 연합군의 첫 전투는 크루마 연합군 쪽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전투는 이곳 알렌 왕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가므와 토란 왕국에서도 벌어졌고, 그 다음날 집계된 쌍방의 타이탄 손실은 간단한 접촉이라고 하기에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약간 파손된 것은 제외하고 완전히 파괴된 타이탄만 헤아려도 크루마 파견 기사단 18개, 엠페른 기사단 9기, 코린트 15기, 코린트 연합 15기를 기록했을 정도의 치열한 전투였다. 하지만 자국군의 사기 양양을 위해 자신들의 피해는 축소하고 상대의 피해는 과대하게 선전했기에 정확하게 누가 누구의 타이탄을 얼마나 부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코린트는 35기의 적 타이탄을 파괴했다고 주장했고, 크루마는 40기의 적 타이탄을 고철로 만들었다고 선전했다. 그런데 전투는 국경 부근에서 벌어졌고, 전투 후 쌍방은 상대의 타이탄들을 견제하며 파괴된 타이탄 및 시체나 부상자들을 수거했기에 정확한 적의 손실을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알렌 왕국 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루마 연합군 쪽이 대승을 거둔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승전을 축하하오, 린넨 백작! 각본에 따라 린넨 백작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사령관에게 승전 보고를 올렸고 사령관은 그의 공적을 치하했다. 국경을 침범해 온 적의 기사 15명과 마법사 둘을 타이탄 다섯 대와 함께 몰살시키다니 정말 대단한 전과요. 송구하옵니다, 공작 전하. 이쪽이 타이탄 21기를 동원했기에 국지적인 병력 우세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승리였사옵니다. 속하보다는 공작 전하께서 어제 밤 놈들이 도발해 올 것을 미리 파악한 그 심원하신 안목이 적중한 것이옵니다. 너무 겸손하게 말할 필요는 없소. 그건 그렇고 바지오 남작. 예. 첫 승리를 통한 노획물인 만큼 분배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원래는 전과에 따라 이쪽에서 노획물을 모두 다 가지는 것이 상례이긴 하지만, 첫 승리인 만큼 모든 동맹 기사단에 1대씩 나눠주어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소? 이곳에 있는 크루마 동맹국이 다섯 나라니까 노획한 다섯 대의 타이탄을 한 대씩 나눠 가지는 게 좋겠다는 말이었다. 공작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자 바지오는 지금 나눠 가지는 문제보다 전과에 따라 모두 가진다는 말에 신경이 더 쓰였다. 만약 그런 식으로 분배된다면 이후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다음 이쪽 전선에서 크루마로 돌아갈 몫은 한 대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크루마의 타이탄이 단 한 대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바지오 남작이 잠시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생각에 빠졌던 사이, 각 동맹국들은 공작의 안을 받아들여 버리고 말았다. 그들로서야 전과에 따라 나누든, 아니면 비율 분배제, 그러니까 고정된 어떤 비율을 정하여 전과에 상관없이 그 비율대로 나누면서 자신들도 한 다리 걸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적 타이탄은 지금도 엄청난 숫자였고, 중요한 것은 지금 타이탄 한 대가 공짜로 생긴다는 데 있었으니까. 금지된 최악의 마법 알렌 왕국 주둔군들이 노획한 타이탄 분배 문제로 인해 단 한 대, 아니 타이탄의 일부도 나눠 받지 못한 엠페른 기사단과 크루마 쪽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있을 무렵 코린트의 상층부는 아예 뒤집혀 있었다. 그 일의 발단은 아침 일찍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이 친우이자 코린트 최고의 권력자로고 할 수 있는 키에리 발렌시아드를 찾아오면서 시작되었다. 큰일이 났더군. 진짜 큰일이 난 듯 허둥대는 까뮤를 향해 키에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큰일? 겨우 국지전에서 패배한 것 말인가? 연합국 놈들, 자기들 전투가 아니라고 형편없는 타이탄과 기사들을 보내 준 모양이야. 기습을 하기 위해 투입된 두명의 마법사와 타이탄 열다섯 대가 행방 불명인 것을 보면 말이야. 처음부터 그놈들에게 대단한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좀 심하군.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네. 우리들의 힘만 동원해도 크루마가 멸망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게 아닐세. 마법의 탑에서 긴급 전문이 도착했네. 거기서는 즉시 보고서를 올린 모양인데, 도중에 갈 길을 못 찾고 갈팡질팡하다가 나한테 올라온 모양이야. 마법의 탑? 거기서 무슨 긴급 전문을 보낸단 말인가? 놈들이 금지된 마법을 사용했어. 마법의 탑에서 어제 밤, 그러니가 양국 군대가 충돌했을 바로 그때 크루마에서 사용한 모양이더군. 무려 4억 기간트라급 마법이 거의 10회에 걸쳐 사용되었다고 여기 적혀 있네. 4억 기간트라? 억 단위면 9싸이클 급 마법이잖아? 하지만 크루마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걸쳐 9싸이클 급 마법사는 한 명도 . 그게 아니라 마법진을 쓴 거야. 마법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정확한 것은 좀더 조사해 봐야 하겠지만 유성 소환 마법(Meteor Strike)인 것 같다고 하더군. 유성 소환? 그렇다면 도착은 언제? 한 달 후. 한 달? 그렇다면 시간은 충분하니까 빨리 대응을 해야 할 거 아냐? 당장 그라세리안을 불러.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는 그가 잘 알고 있을 거야. 그 말에 로체스터는 약간은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자네한테 오기 전에 그라세리안에게 갔었네. 원래 마법의 탑은 그의 관할인데 왜 그 보고서가 나한테 올라왔는지 물어 보려고 말이야. 찾아가 보니까 그는 없더군. 집사의 말로는 10여 일 전부터 행방 불명이래. 자네 아들하고 함께 나간 후에 돌아오지 앟았다고 하더군. 뭐야? 나는 그런 보고는 받은 적이 없는데? 이봐! 밖에 아무도 없느냐? 예, 공작 전하. 제임스를 불러와라. 만사를 제쳐놓고 빨리 오라고 해. 옛, 전하.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제임스가 달려 들어왔다. 그는 어제 밤 있었던 전투에 대한 모든 계확을 추진했고, 또 통신 마법을 통해 어느 정도 깊이까지는 직접 지휘도 했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후에 자세한 보고까지 들어야 했었기에 그는 늦게 잠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곤하게 자고 있는 그를 아버지가 신경질 팍팍 난 어조로 찾는다는 하인의 보고였으니 옷만 대충 걸쳐 입고 달려온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버님. 그라세리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예? 예, 저 , 그게 말이죠. 빨리 대답햇! 그건, 지금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라세리안 집의 집사는 너하고 함께 나간 후부터 행방 불명이라고 했다던데 그건 어찌된 일이냐? 예, 그게 , 매우 얘기가 복잡해서 말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임스는 밖으로 달려나갔다가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 그것은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 공작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작성된 보고서였는데, 제임스는 이것을 언제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달해야 할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자신의 방에 놔두고 있었다. 여기 보고서가 있습니다. 아들이 건넨 서류 뭉치를 읽어 보며 천천히 표정이 굳어 가던 키에리는 이윽고 그것을 까뮤에게 넘고주고는 아들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그라세리안이 죽었다는 거야? 아니면 납치되었다는 거야? 죽었다는 말이 나오자 가뮤의 서류 읽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ㅏ. 예, 아직 정확히 알아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까미유가 오스카와 함께 추격하고 있습니다. 오스카까지 데려갔느냐? 예, 그리고 마법사는 리카와 스타키를. 그 정도 클래스의 인물들이 움직이는데, 나한테는 한 마디 보고도 없었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하지만 워낙 사건이 사건인 만큼 확실한 것이 밝혀진 후에 보고서를 올리려고 했습니다. 잘 한다. 저런 놈을 아들이라고 높은 자리에 올려놓은 내가 잘못이지. 오늘부터 네 녀석의 모든 직위와 권한을 해제한다. 아버님! 이런 중요한 일을 그따위로 처리한 것을 보면 . 내가 사람을 잘 못 봤어. 너는 즉시 까미유과 합류해서 그라세리안 공작을 찾아라. 시체라도 찾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마. 알겠느냐? 예. 즉시 떠나라. 예. 제임스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선 후 키에리는 근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큰일이군. 그라세리안 없이 유성 소환을 방어해 낼 수 있을까? 글쎄. 어쨌거나 시도는 한번 해봐야겠지.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설마 그가 진짜로 죽었을까? 그건 아닐 거야. 7싸이클 마법을 구사하고, 더군다나 뇌전의 정령왕을 부릴 정도로 정령 마법에도 통달한 친구야. 그런 그를 처치할 수 잇는 사람이 있을까? 마법을 이용해서 육신의 노화(老化)까지도 억제하는 인간 같지도 않은 녀석을 말이야. 하지만 그래서 더욱 그런 그를 납치할 수는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납치보다는 죽이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울 거야. 그건 그렇지만, 뭔가 방법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살아만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만약 우리들의 친구 그라세리안이 죽었다면 그의 죽음에 관여한 모든 국가는 강아지 한 마리 남김 없이 모두 다 죽여 버릴 거야. 까뮤는 키에리의 증오에 넘친 마지막 말을 듣고 온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키에리는 그라세리안이 부재중이었기에 그라세리안의 밑에 있던 마법사를 불러들였다. 그 마법사는 6싸이클의 마스터였지만, 언제나 그라세리안 같은 인물과 함께했던 키에리의 눈으로 봤을 때는 별 볼일 없는 3류 마법사처럼 보인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키에리는 급작스럽게 불려 와서 당황한 표정을 감추기에 여념이 없는 노 마법사를 영 미덥지 못한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영감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없다는 데야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자네도 별로 시간이 없을 테고, 나도 그건 마찬가지야. 쓸데 없는 말은 빼고, 단도 직업적으로 얘기하지. 자네도 보고를 받았을 테니 잘 알겠지만 놈들이 유성 소환 같은 금지된 마법을 썼다. 그라세리안이 없는 지금 자네가 가장 뒤어난 마법사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응 방법이 없을까? 예, 공작 전하. 지금 최선의 방법은 한 달 후에 있을 유성 소환에 대비하여 최대한 강력한 방어 마법진을 구축하는 것이옵니다. 그래, 막아낼 가능성은? 수도를 포함한 5대 도시의 마법 방어 체계는 코타스 공작 전하께서 직접 설계하셨사옵니다. 그렇기에 그곳들은 문제가 없을 것이옵니다. 문제는 나머지 도시들이옵니다. 마법의 탑에서 조사된 바로는 10여 회에 걸쳐 마법이 사용되었기에 나머지 다섯 도시들이 어디냐 하는 것이 문제이옵니다. 그거야 당연히 상업, 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들 순으로 꼽아보면 되겠지. 예. 하지만 5대 도시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상업이 번창해 있다고 하더라도 전술상 군사 요충지가 아니기에 병력이 주둔하지 않사옵니다. 흐음, 자네가 하는 말은 잘 알겠네. 그렇다면 상업 도시를 지킬 것이냐, 군사 도시를 지킬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군. 예, 그만큼 한 달이란 시간은 너무 짧사옵니다. 좋아. 한 가지만 묻지. 예. 만약 지금부터 준비했을 때 유성 공격을 막아낼 수은 있나? 노 마법사는 미간을 찡그리며 이것저것 생각해 보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유성 공격은 모든 공격 마법 중에서 최강의 위력을 발휘한다. 작은 유성 하나만 떨어져도 웬만한 도시쯤은 완전히 가루가 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렇게 강한 마법인데도 왜 유성 소환이 잘 사용되지 않았을까? 우선 9싸이클 급 마법이기에 마법진을 사용한다고 해도 최소한 6싸이클 급 이상의 인물들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법진을 주도해 나갈 유성 소환 마법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는 인물이 한 명은 있어야 했다. 하지만 6내지 7싸이클 급 인물이 9싸이클 급에 해당하는 마법을 이론상으로 완벽하게 알고 있기는 힘들기에 실패 위험률도 매우 높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꺼려지는 요소로서, 사실 이것 때문에 유성 공격 마법이 잘 사용되지 않고 있었는데, 마법을 시행한 후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이었다. 예에,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시면 될 것이옵니다. 우선 거대한 방어 마법진을 건설해야 하옵고, 또 그 방어 마법진에 마력을 공급하는 초대형 마법진도 여러 개씩 건설해야 하옵니다. 5대 도시의 경우 평상시에는 방어 마법진으로 가던 마력의 일부를 실생활에 사용하고 있사오니, 그걸 방어 쪽으로 돌리는 작업은 매우 간단하옵니다. 그런데 딴 도시들의 경우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옵니다. 그렇다면 그걸 잘 알면서 왜 그라세리안은 딴 도시들에 방어 마법진을 건설하지 않았을까? 수십만이 생활하는 도시 하나를 방어 마법진으로 싸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드옵니다. 또 그 마법진의 핵을 구동시키려면 최소한 6싸이클 급 마법사 다섯 명은 필요합니다. 수백 년에 한 번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마법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로는 엄청난 물적, 인적 자원이 필요하기에 가장 중요한 도시들만 보호하고 나머지는 포기하는 것이 정석이옵니다. 흠, 알카사스도 그런가? 알카사스는 조금 다르옵니다. 그곳은 엄청난 수의 마법사를 보유한 국가, 그렇기에 30여 개 의 도시가 방어막으로 보호되고 있사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늘어나고 있기는 하오나, 단시간 내에 만드는 것은 그들도 하지 못하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공격 가능한 도시의 시민들을 대피시켜야 하옵니다. 대피라 . 좋아, 자네 생각이 옳아. 시님들을 일단 대피시켜라. 그리고 크루마의 도시 10개를 골라서 똑 같은 유성 공격을 퍼부어라. 물론 마법 방어막이 갖춰진 도시는 공격할 필요가 없다. 없는 도시로 골라서 10개를 박살내 버려. 이때 노 마법사와 키에리의 대화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까뮤가 끼어들었다. 키에리가 이성보다는 너무 감정적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보게, 키에리. 왜 그러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해야 해. 그래야만 딴 나라들이 본국을 업신여기지 않아. 자네 말이 맞기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한달이라는 시간이면 아마도 전쟁의 결과가 대충 나온 후일 거야. 그런 상황에서 유성이 도시에 떨어진다 이 말일세. 나는 말로만 들었지만, 유성 소환 마법은 우주 저 어딘가에 모여 있는 유성을 끌어 모아서 목표로 하는 고시에 낙하시키는 것으로 웬만한 도시는 흔적도 없이 박살난다고 하더군. 전쟁이 거의 끝나 가는 시점에서 점령한 도시를 가루로 만들 셈인가?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까뮤의 말을 들은 키에리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한 달이 라는 시간을 자신이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 보니 자네 말도 옳군. 아예, 보복을 하고 싶으면 전쟁이 끝난 후에 유성 공격을 감행한 그 망할놈의 엘프들을 몽땅 잡아서 노예로 팔아 버리든지, 아니면 죽여 버리든지 하면 끝날 일 아닌가? 번창하는 도시 하나 하나에서 수입으로 거둬들일 수 있는 막대한 황금은 전쟁이 끝난 후 본국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거야. 그런 도시들을 파괴한다는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군. 물론 놈들이야 우리들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그런 짓을 하는 것이겠지만 말일세. 흐흐, 최후의 발악이라는 건가? 그렇게 이해하는 편이 옳겠지. 좋아, 자네 말이 맞아. 전쟁이 거의 끝날 때쯤에야 유성이 떨어질 거라면 그따위 공격은 안 하는 게 좋지. 대신 크루마에 있는 마법사들과 엘프들을 어떻게 처리하든지 상관 말게. 그건 인정해 주겠지? 물론이네. 원래가 엘프라는 나약한 족속들은 노예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종족일 뿐이야. 역시 통하는 데가 있단 말이야. 하하하. 이때 둘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노 마법사가 끼여들었다. 저 , 그렇다면 공작 전하. 유성 소환은 어떻게 하올지? 그 계획은 취소한다. 자네는 적 유성 공격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하게. 옛, 전하. 이때 밖에서 묵직하면서도 예의 바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전하. 필립 드 알카파인 후작께서 만나 뵙기를 청하옵니다. 들라고 해라. 예. 키에리는 새로운 손님이 있었기에 노 마법사와의 대화를 빨리 종결하려고 했다. 자네는 빨리 가서 일 보게. 우선 주민들부터 대피시키고. 만약 방어 마법진이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으면, 모든 주민을 딴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도 한 방책이겠지. 방어 마법진 건설에 들어갈 자금을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데 쓰는 거야. 소용도 없을 방어 마법진이나 만든다고 시가능ㄹ 보내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좋을 것 같군.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그럼 소신 물러가겠사옵니다. 노 마법사가 물러가고 나자 이번에는 장대한 체구의 무사가 들어왔다. 높은 직위에 오르면서부터 운동을 안 해서 그런지 요즘 들어 배가 꽤 많이 나와 있었지만, 밖으로 드러난 신체가 매우 건장한 것을 봤을 때 한창 때는 상당한 수련을 거친 것처럼 보였다. 공작 전하를 뵈옵니다. 어서 오게나, 알카파인 후작. 그래, 무슨 일인가?: 예. 다름이 아니오라, 알카사스에서 무기를 구매하는 것 때문에 상의 드릴 일이 있어서 왔사옵니다. 무기 구매? 옛, 전하. 타이탄과 마법 장비들이옵니다. 전쟁중이라고 가격을 높게 부르는 것도 아니고, 꽤 적절한 가격이기에 혹시 군부에서 필요하다면 구매를 할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조건은? 대금의 1/10은 현금 인도, 나머지는 20년 분할 상환이옵니다. 20년 분할 상환이라. 상당히 좋은 조건이군. 그렇사옵니다. 또 크루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막대한 노획 물자가 들어올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게 된다면 타이탄 대금을 지불하는데도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아옵니다. 좋아. 그 녀석들 타이탄은 얼마나 가지고 있다고 하던가? 각종 타이탄 100여 대를 보유중이라고 하옵니다. 그 가운데 정규 출력 이상은 50대이옵니다. 모두 다 구입하도록 하게. 언제쯤 가져올 수 있나? 예. 일단 서로간에 계약서를 주고 받은 후, 타이탄을 지급받을 100명의 기사들을 뽑아 알카사스로 가서 가져와야 하옵니다. 적어도 3일은 잡아야 할 것이옵니다. 최대한 빨리 구매할 수 있도록 하게. 옛, 전하. 참, 마법 장비들도 좋은 걸로 조금 구입해 두는 것이 좋겠지. 전쟁이 끝나고 나면 논공 행상(論功行賞)이 시작될 것인데, 그때 무훈(武勳)이 뛰어난 자들에게 그것을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시면 모두들 좋아할 테니까 말이야. 옛, 전하. 알카파인 후작이 거구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걸음걸이로 물러나자 키에리는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미소를 지으며 까뮤에게 말했다. 알카사스에서 타이탄이 도착하면 곧장 전면전을 벌이면 되겠군. 3일 후에 말인가? 전 군에 전령을 보내게. 3일 후에 전쟁을 시작한다고 말이야. 서로간에 선전 포고장은 주고받았으니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잘 되어야 할 텐데 말이야. 그건 걱정하지 말게. 참, 가므 왕국, 그러니까 금십자 기사단이 있는 곳 정면에 크루마의 대군이 집결중이라는 정보야.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발틴 기사단, 크루마 근위대가 주둔중인 모양이더군. 물론 근위대야 일부만 왔겠지만 하얀 유니콘 문장을 달고 있는 기사를 몇 명 봤다는 첩자의 보고가 들어와 있어. 그렇게 된다면 가므에는 원래 있던 라이오네와 엠페른 기사단을 비롯해서 네 개 기사단이 모두 다 모여 있다고 봐야지. 그런 상대를 금십자가 기사단 하나만으로 사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자네가 그곳에 가 주겠나? 아니며 리사를 보낼까? 현재 코린트의 근위대, 코란 근위 기사단의 사령관은 키에리였지만 총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져서 관리되고 있었다. 흑기사 15기로 편성된 제1근위 기사단은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 흑기사 15기로 편성된 제2근위 기사단은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이, 나머지 적기사 5기로 편성된 제3근위대는 얼마 전 지휘권 박탈을 당한 키에리의 아들 제임스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 중 최고의 정예는 제임스와 까미유, 두명의 소드 마스터를 보유한 제3근위 기사단이엇지만 현재 최강의 타이탄이라고 볼 수 있는 적기사가 집단전 전용 타이탄이 아닌 관계로 따로 관리되고 있었다. 타이탄이란 것이 물론 1:1 대결일 때는 가볍고, 빠르고, 출력이 좋은 것이 유리했지만 집단적으로 치고 받을 때는 얘기가 약간 달라진다. 사방에서 얽혀 싸우는 관계로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지기에 격투에 넓은 공간이 필요한 스피드형 타이탄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환경이 되는 것이다. 적기사는 처음부터 더 이상 코린트를 대적할 적은 없다는 오만한 가정 하에서 제작되었다. 방패 없이 두자루의 검만으로 무장한 검붉은 색의 타이탄은 비밀 작전시 벌어질지도 모를 소규모 격투전에 유리하도록 제작되었다. 물론 2.3이나 되는 고출력의 엑스시온이 개발되어 있으므로 나중에는 흑기사들을 지휘할 지휘관 용으로 좀더 거대한 체구를 지닌 중장갑형도 만들 수 있겠지만, 최고의 타이탄 제작자라고 할 수 있는 코타스 공작이 부재중인 지금 그런 것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어쨌든 키에리의 말은 제1, 또는 제2근위 기사단을 흑기사 15기와 함께 파병할 생각이 있음을 까뮤에게 비친 것이다. 내가 가기로 하지. 자네가 가 준다면 나야 좋지. 하지만 명심해. 미란 국가 연합의 기사단도 결코 만만하지는 않아. 특히 20기의 라이온으로 구성된 라이오네 근위 기사단은 꽤나 정평이 있는 기사단이지. 그리고 크루마의 근위 기사단은 과거, 로드바르 제국과의 전쟁에서 그 무위를 떨치지 않았나? 하나같이 만만한 녀석들은 아니지. 가므에는 모두 다 합쳐서 170여 대의 타이탄이 집결해 있네. 만약 자네 혼자서 힘들 것 같다면 지체없이 연락해 주게. 리사도 보내 줄 테니까. 까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키에리에게 말했다. 자신은 누가 뭐래도 마스터라고 불리는 강자였다. 그렇게 강한 자신의 안전을 이렇듯 걱정하는 인물은 키에리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네답지 않게 그런 소심한 말을 하는가? 나 혼자서도 충분해. 그렇지 않아. 만약 미네르바라도 거기에 와 있을 때는 자네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어. 까뮤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네르바는 아마 자국을 지키기에도 버거 울걸? 예전에 우리가 크라레스를 상대로 써먹었던 방법을 또 쓸지 모르니까 강력한 기사들은 모두 다 크루마에 남아 있을 거야. 참, 놈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의미에서 제3근위대를 놈들의 수도 엘프리안에 투입해서 반쯤 박살을 내는 게 어떨까? 그러면 가므에 파견 나가 있던 근위대도 모두 엘프리안으로 소환되겠지. 그 생각도 좋긴 한데, 제3기사단은 지금 공석이 너무 많아. 그라세리안의 실종을 추격한다고 세 명이 빠져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리사를 보내기로 하지. 흑기사 열다섯 대면 놈들도 혼비백산할걸? 좋은 생각이야. 리사한테 말해 두겠네. 까뮤는 약간 짓궃은 미소를 지으며 키에리에게 말했다. 이번 기회에 자네도 한번 나가서 몸 좀 풀어 보지 그래?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 하지만 키에리는 별로 감흥이 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자신 같은 높은 경지에 이른 인물이 그런 난잡한 싸움에 끼여든다는 것이 탐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별로 할 일이 없으면 가 보기로 하지. 별 볼일도 없는 녀석들과 싸우는 것은 내 타이탄에게 미안한 일이니까 말이야. 그건 내가 알어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므 쪽 전선을 자네에게 부탁하네. 걱정하지 말게. 수십 개의 타이탄 목을 잘라서 자네에게 보내 주지. 그럼 가 보겠네. 다음 날 출발할 준비를 하기 위해 까뮤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제3근위 기사단의 주력은 모든 국가가 공포심을 가질 정도로 막강한 타이탄인 흑기사 15기를 가진 뛰어난 기사 열다섯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서포트(support)하기 위해 열 명의 기사와 세 명의 마법사가 배치된다. 합계 스물여덟 명의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그들이 전장에 갈 때는 시중 들 하인이나 하녀들을 보통 두세 명씩 데려간다. 모두 합하면 최소한 60명이 넘어가는 대부대가 되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는 까뮤를 보며 키에리는 왠지 뭔가 찜찜함을 떨쳐 버리기 힘들었다. 이번 크루마와의 전쟁에서는 너무나 많은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코린트 최고의 대 마법사-원래는 정령 마법도 구사하므로 대 마도사가 정확하지만 정령 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신변 안정상 비밀이기에 마법사라고 부름-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 공작의 돌연한 실종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에게는 그가 정령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 비밀로 되어 있지만, 순간적으로 마법의 힘을 뿜어낼 수 있는 정령 마법의 마스터인 그가 갑작스럽게 적에게 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키에리는 천천히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네가 왜 지금 떠났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군. 요즘 들어 갈등을 하고 있다는 것은 눈치 챘었지만, 꼭 지금 떠났어야 했나? 최고의 기사 세 명을 시켜 찾게 했으니 그라세리안이 행방 불명된 이유를 곧 알 수 있게 되겠지만, 키에리는 차라리 그가 납치되었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그가 자의로 은퇴나 은둔 같은 것을 했다면 다시는 그를 만날 가능성이 없었다. 그만큼 그라세리안은 키에리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그 녀석들이 잘 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무튼 이번 전쟁은 시작부터 너무 찜찜해. 밖에 누구 있느냐? 옛, 공작 전하. 너는 이 전문을 즉시 알렌 전선에 파견되어 있는 지오르네 후작에게 전해라. 키에리가 건네주는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기습하기 위해 투입되었다가 행방 불명된 15기의 타이탄이 격투한 흔적을 정밀 추적할 것. 크루마의 발표대로 국지적 병력 우세 때문인지 정확히 알아볼 것. 약간의 이상이라도 있으면 즉시 보고할 것. 또 전쟁이 벌어진 후 적이 동원한 타이탄의 종류를 파악하여 즉시 보고할 것.>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전문을 거네 받은 장교가 서둘러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키에리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15기의 타이탄이 행방 불명. 처음에는 알렌 왕국과의 전선에 투입되고 있는 타이탄이 289기나 되었기에 별로 주의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키에리는 그것을 생각해 보면 볼수록 찜찜했던 것이다. 크루마의 발표로는 5기의 타이탄이 국경을 침범해 들어온 것을 격파했다고 했다. 물론 겨우 5기의 타이탄이 국경을 침범해 들어온 것을 격파했다고 했다. 물론 겨우 5기만 투입되었다면 전력의 손실 없이 괴멸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투입된 것은 무려 열다섯 대나 되는 타이탄이었고, 그것을 아무런 피해 없이 괴멸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첩자들의 보고로는 신상 파악이 불가능한 놈들로 구성되어 있는 살라만더 기사단이라 . 살라만더 기사단은 크루마 제국과 론드바드 제국간에 벌어졌던 첫번째 대회전에서 상대국의 기습을 받아 소멸한 크루마의 기사단 이름이었다. 그 사건이 벌어진 이후 크루마에서는 살라만더 라는 이름이 재수 없다고 생각하여 같은 이름을 붙인 기사단은 절대 만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그 이름을 붙인 기사단을 다시 만들었을 가능성은 있었다. 신형 타이탄을 보급받아 새롭게 편성된 기사단에 과거 재수 없었던 명칭을 다시 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키에리가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의문이 있었다. 새롭게 편성된 강력한 기사단을 마주하고 있는 적들 중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보유한 금십자 기사단 쪽으로 돌렸어야지, 왜 하필 알렌 왕국 쪽으로 보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니야. 쿠루마의 새로운 기사단일 가능성은 없어. 모두들 두터운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가문의 문장도 붙이지 않는 놈들. 기사단 문장도 로브에만 붙어 있을 뿐, 제복 따위를 입지도 않은 놈들. 그렇다면 대답은 몇 가지 되지 않지. 첫째는 용병이고, 둘째는 본국의 이목을 속이고 크루마를 도와 주는 놈들이야. 첩자의 보고로는 백여 명 정도라고 하니까 절대로 용병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 어떤 용병대도 그렇게 많은 수의 기사들을 보유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코린트 몰래 크루마를 도와 주는 국가들이었다. 한 번씩 드러나는 개개인의 얼굴들을 전쟁의 신전에서 확인한 상태였고, 벌써 도움을 주는 네 개의 나라를 알아낸 상태였다. 아무리 슬쩍 변장을 하더라도 일단 전쟁의 신전에 등록된 그래듀에이트라면 그 데이터만 가지고도 웬만한 신상을 파악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라만더 기사단의 경우는 그게 되지 않았다. 여러 명의 얼굴을 가지고 알아봤지만 놀랍게도 그 누구도 전쟁의 신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이 그래듀에이트급이라던데, 60명이 넘는 인원을 전쟁의 신전에 등록시키지 않다니.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군. 그렇게 해서라도 본국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들다니. 설마 타이렌 제국인가? 타이렌 제국은 세 명의 헬 프로네의 주인공들 중의 한 명인 그래플 마스터 엘빈 코타리스를 배출한 저 남쪽의 강력한 국가였다. 타이렌 제국은 머나먼 서쪽 대륙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국가였는데, 그때 서방에서 맨손 격투기를 수입해 들였다. 놀랍게도 맨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익힌 그들은 타이탄들 중에서도 특이하게도 맨손 격투용으로 제작된 가이사르Ⅱ 를 생산해 냈었다. 물론 그렇게 많이 생산된 것은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형태가 코린트 쪽에 알려졌을 때는 도대체 가이사르를 조종하는 기사들을 어떤 방식으로 상대 타이탄을 해치우는지, 또는 상대 타이탄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내는지를 놓고 정보부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었던 것이다. 맞아. 그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봐야 하겠지. 지금은 증거가 없지만,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 녀석들도 타이탄을 꺼내 놓을 수밖에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금방 정체가 드러날 거야. 300대에 가까운 타이탄이 그곳에 있으니 놈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에측할 수 없는 전쟁 긴급 전문이 도착했사옵니다. 매우 당황한 듯 허둥대는 젊은 마법사를 행해 지도를 들여다 보던 미네르바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약간 짜증스런 어조로 말했다. 뭔데 그러느냐? 본국이, 본국이 기습을 당했사옵니다. 그 말에 경악한 것은 미네르바도 마찬가지였다. 뭣이? 언제? 젊은 마법사는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미네르바의 강렬한 눈빛에 주눅이 들었지만, 그래도 힘을 내어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격투중이라고는 하옵니다. 적은 흑기사 열다섯 대와 붉으색 타이탄 두 대이옵니다. 루엔 공작 전하께서 근위대를 이끌고 격전중이라는 보고이옵니다. 아직 전투중이라면, 희망은 있었다. 그리고 적의 타이탄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도 충분한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코란 근위 기사단 전체를 동원해서 기습을 가해왔다면 어쩌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알겠다.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마법진을 부탁한다. 옛, 전하. 그런데 몇 분이 가실 것인지 알려 주십시오. 다섯 명이다. 빨리 준비하라. 옛, 전하. 미네르바는 자신이 거느리고 온 제2레디아 근위 기사단 소속의 무사들 중에서 네 명을 긴급히 불러들인 후 마법진이 열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중얼거렸다. 제1근위대는 이번에 실전 배치된 안티고네 15기로 이루어져 있으니 밀리지는 않겠지만, 과연 잘 막아낼지 . 이윽고 급히 마법진을 만들고 있던 마법사가 외쳤다. 마법진을 완성되었사옵니다. 전하, 빨리 마법진에 오르십시오. 미네르바와 그 일행이 마법진에 올라서자마자 마법사는 시동어를 외쳤고, 그들은 곧장 크루마의 수도 엘프리안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녀 일행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투는 끝나 있었다. 흑기사를 이끌고 온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은 상대방 타이탄이 자신들의 흑기사 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사실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원래 이런 기습 공격은 상대방의 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목표를 휘저은 다음 재빨리 탈츨하는 것게 모미가 있다. 그렇기에 이곳에 도착한 즉시 상대 기사단을 제압하고, 대충 황궁을 박살 낸 후 그들이 격투를 하는 동안 마법사가 그려 놓은 마법진으로 달려가서 재빨리 후퇴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렇데 상대방은 막강한 타이탄을 앞세워 저항해 왔고, 수도 부근에 주둔중이었던 엘프란 기사단의 일부까지 달려왔다. 물론 엘프란 기사단은 저급 타이탄이 주력인 매우 약한 기사단이었지만, 강력한 근위 기사단을 보조하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단 돌진하여 맞붙은 상황에서 리사는 자신보다 약간 낮은 실력을 가진 루엔 공작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타이탄을 가진 덕에 자신과 용호상박의 대결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적기사 두 대가 더 있었기에 약간은 우세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점점 더 흐르자 리사는 이번 기습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녀는 재빨리 탈출할 생각부터 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기에 엘프란 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후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피해는? 미네르바는 도착과 동시에 루엔 공작을 호출했다. 미네르바가 레디아 기사단 총 단장이자 총 사령관이라면, 루엔 공작은 레디아 기사단 부총 단장이자 수도 경비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엔 공작은 상관의 질문에 산뜻한 답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즉시 대답했다. 예, 안티고네 몇 대에 가벼운 검상(劍傷)을 입은 정도 입니다. 그리고 황국 벽이 대여섯 군데 무너졌고, 구멍이 난 곳도 . 이리저리 자세하게 답을 해오자, 미네르바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루엔 공작의 말을 가로질렀다. 이번에 온 붉은색 타이탄은 예전에 보고받았던 그것들이던가? 예. 초록 도마뱀 작전 때 봤던 코린트의 신형 타이탄이었습니다. 두 대만 왔던가? 예. 하지만, 전과는 달리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놈들을 엘프란 기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붙잡아 둘 수 있었습니다. 미네르바는 타이탄 발자국이 군데군데 찍혀서 황폐해진 황궁 정원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원의 중앙에 있던 분수대는 전투의 와중에 완전히 박살 났고, 한창 아름다움을 뽐내던 꽃들도 엄청난 무게를 지닌 타이탄의 발 아래 완전히 가루가 되어 있었다. 흐음, 그렇다면 전에 그 빨간색 타이탄을 몰았던 녀석들은 딴 놈들이라는 말이 되는 군. 놈들은 최신형 타이탄을 개발하기는 했지만 몇 대 만들지 못한 거야. 아마도 네 대 정도에서 여섯 대 정도가 고작일거야. 안 그런가? 예, 정확한 추측일 것입니다. 빨간색 타이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재빠른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지만 전쟁용은 아니었습니다. 90통에서 100톤 정도로 꽤나 중장갑이긴 했지만 방패 없이 검만 하나나 두 개를 가진 것으로 봤을 때, 이번 기습 작전 같이 어떤 특수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 아마도 그게 맞을 거야.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자네와 대결했다는 인물이 그 빨간색 타이탄을 몰았을 테니까 말이야. 실제 그랬다면 전세가 조금 바뀌었을 수도 있었겠지? 그럴 필요도 없이 초록 도마뱀 작전 때 만났던 그 두녀석이 빨간 색 타이탄에 타고 있었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겁니다. 그 둘 다 저와 거의 동급의 실력으로 보였으니까요. 루엔의 말에 미네르바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루엔은 자신보다 한 단계 낮은 실력이긴 했지만 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인가? 정말이지 코린트의 기사층은 너무나도 두텁구나.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뭘 말이냐? 아마 다음에 온다면 이번 실패를 밑거름 삼아 흑기사단 전체가 다 몰려올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제1기사단만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좀더 증원을 해주십시오. 하지만 그렇다고 전선에서 제2기사단을 뺄 수는 없어. 중앙 부분을 두텁게 해뒀다가 개전과 동시에 금십자 기사단을 돌파하여 괴멸시킨 후 은십자 기사단을 협공해서 박살 내야 한다. 루엔은 미네르바의 말투에서 풍기는 미묘한 분위기를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 미네르바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나도 알아. 좌익이 약하지. 하지만 좌익에 모여 있는 적의 부대는 모두 다 코린트의 기사단이 아니라 코린트의 동맹국의 기사단들이다. 그들이 본국의 좌익 부대를 괴멸시켰을 때쯤이면 이미 금십자 기사단이 박살 난 후일 테고, 또 은십자 기사단도 위험한 상황일 테지. 은십자와 금십자 기사단이 무너지고 나면 그 동맹국 기사단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 미네르바는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듯 싱글싱글 미소를 지으며 루엔에게 질문을 했다. 루엔은 검술 실력이 뛰어난 훌륭한 기사였지만, 아직도 국가간에 벌어지는 치열한 전략과 음모 따위는 거의 모르는 순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코린트의 편을 들어 악착같이 우리들을 공격할까? 아니면 자국으로 돌아갈까? 루엔은 미네르바가 말하는 것이 뭔지 대충 깨닫고는 비난하는 듯한 어조로 씹듯이 말했다. 대단한 작전입나다. 단장님. 미네르바는 부하의 비난을 간단하게 묵살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 사실 이 작전에도 몇 가지 문제는 있어.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금십자 기사단을 얼마나 빨리 괴멸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우리의 동맹국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코린트 동맹국으로 편성된 우익 부대의 공격을 막아내느냐 하는 거야. 자신을 가지고 노는 듯한 미네르바의 말투에 약간 신경이 거슬린 루엔은 당당하게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약간은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있죠. 뭔데? 자국의 기사단이 전멸하게 된다면, 동맹국들은 우리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겁니다. 가장 위험한 곳에 자신들의 파견군을 위치시켜서 소모품으로 썼다고 말이죠. 그렇게 되면 전쟁이 끝난 후에 얼마나 심한 비난을 받게 될지 예측하기 흠듭니다. 하지만 루엔 공작의 반격을 들은 미네르바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자네는 딴 것은 다 좋은데 생각을 조금 더 넓게 가져야 해. 예? 동맹국에서 본국에 책임을 물을 때쯤에는 전세가 우리 쪽으로 완전히 기운 다음일 거야. 그렇게 된다면 동맹국 녀석들이 우리들을 비난하려 들까?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파견한 타이탄들까지 상실해서 국력이 더욱 약해진 상태지. 그러 때 우리까지 무너지고 나면 자신들에게 남는 것은 멸망뿐이야. 최선을 다해 우리를 돕는 것밖에 그들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없어. 그 녀석들 아마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짜내서 우리들을 도울 거야. 하긴 돕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삼관없어. 우리들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동맹국들이 생길 테니까 말이야. 그건 좀 너무 . 아닐세. 기사도에 입각한 고정적인 사고는 국가간에는 통하지 않아. 기사들끼리의 결전에서 비겁한 수는 용서되지 않지만, 국가간에는 용서된다네. 물론 승리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지만 말이야. 알겠습니다, 단장님. 자네의 경험이 나보다 얕아서 그런 것이니 마음에 둘 필요는 없네. 자네도 입너 전쟁을 통해 보다 성숙해졌으면 좋겠군. 예, 단장님. 미네르바가 수도의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 전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놀라운 보고가 있었다. 정확한 보고냐? 예, 공작 전하. 두 번, 세 번 확인한 것이옵니다. 왜 엘프리안을 기습한 흑기사가 반쪽밖에 안 되나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군. 놈들도 금십자 기사단의 정면에 본국이 주력을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야.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녀석들이 우리를 고립시키고, 동맹국을 모은다고 시간을 질질 끌어 준 덕분에 본국은 2차 군비 증강까지 완료한 사태니까 말이야. 안 그런가? 예. 소신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전하. 카마리에와 안티고네가 대량 생산된 만큼, 제네리아 기사단의 골고디아의 수는 늘어나게 되어 있어. 놈들은 전쟁이 터진 후에야 자신들이 본국의 타이탄 수를 파악함에 있어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날이 기대되옵니다. 참, 전하. 알카사스에서 무기를 구매하는 것 말이옵니다. 그런데? 알카사스에서 어제 정식 통보가 왔사옵니다. 뭐라고 하던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타이탄 재고량 전부를 코린트에 판매한다고 했사옵니다. 뭣이? 알카사스는 이번 전쟁에서 코린트가 승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량을 한쪽 국가에만 판매하다니. 그래 몇 대나 팔았다고 하던가? 100대이옵니다. 그 중 48대는 노리에(1.02) 급이고, 나머지는 선더린(0.87) 급이라고 들었사옵니다. 노리에급? 노리에 급을 우리가 사자고 했을 때 재고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런데 소인이 뒤로 알아본 결과로는 얼마 전에야 모두 코린트에 판매되었고, 물품은 내일쯤 인도된다고 했사옵니다. 내일? 그렇다면 아마도 모래쯤 전쟁이 시작되겠구나. 문제는 그게 어디로 가느냐 하는 건데 . 코린트도 이쪽 병력 배치에 상당한 수준의 정보를 획득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소인의 예상으로는 거의 전량 중앙에 배치될 가능성이 크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된다면 여태껏 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중앙에서의 병력 우세가 물거품이 된다는 거지. 그렇다면 전하, 지금 신형 타이탄으로 전력을 한껏 증강되어 있는 지칼틴 기사단을 중앙에 배치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제네리아 기사단에는 골고디아 100대만 줘서 토란에 배치하고 말이옵니다. 중앙에 전력을 최대한 증강시켜서 위쪽으로 치고 올라가 금십자와 은십자 두 기사단과 함께 쟈므 시에 집결중인 적의 군대까지 한꺼번에 괴멸시키려면 아무래도 그 방법밖에 없겠지. 지발틴 기사단에 연락을 넣어라. 오늘 밤에 제네리아 기사단과 위치를 바구라고 말이야. 옛, 전하. 코린트와 크루마. 이 양국이 전쟁을 벌이기 직전 크루마는 2차 군비 증강을 가까스로 완료했다. 결과적으로 크루마의 최신형 타이탄인 안티고네는 23기로 늘어나 있었고, 출력 1.5나 되는 카마리에는 50기로 증강되었다. 그렇게 하여 그날 밤, 급히 카마리에를 지급받게 되어 카마리에 46기, 골고디아 50기를 갖춘 지발틴 기사단은 제네리아 기사단을 대신하여 가므 왕국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제네리아 기사단도 골고디아 100대를 가지고 토란 왕국에 투입되어 은십자 기사단과 언 정도 맞설 수 있는 전력(戰力)을 갖추게 되었다. 또 그날 밤, 미네르바의 강력한 요청 에 의해 엠페른 기사단의 토란 왕국 주둔군이었던 제6전대와 쟈렌 주둔의 7전대는 가므 왕국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양국은 어느 정도 무대를 갖췄다. 좌익을 희생해서라도 중앙을 보강하여, 적 중앙의 금십자 기사단 및 좌익의 은십자 기사단을 우선적으로 괴멸시켜 승리의 토대를 삼겠다는 미네르바의 계략.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약점이었던 중앙을 구입해 온 타이탄 100대로 보강하여 숫자로 밀어붙이려는 코린트의 계략. 미네르바의 계략이 어느 정도 모험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면, 코린트 쪽은 세계 최강의 관록을 자랑하는 만큼 충분한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하여 전반적으로 열세한 적을 천천히 밀어붙이는 정석에 가까운 작전을 쓰고 있었다. 양국 모두 이번 전쟁의 승패는 중앙의 전투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중앙 쪽에 쏟아 부은 병력의 규모는 모든 국가들의 입을 딱 벌이질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우선 각각 10만 이상씩 쏟아 부은 병력은 두 번째로 하고, 크루마와 미란 국가 연합의 연합군이 보유한 타이탄이 203대였고, 코린트가 중앙에 두툼하게 배치한 타이탄이 215대였다. 물론 ttn자는 코린트가 약간 우세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크루마 쪽이 단연 우수했다. 1,2이상의 출력을 가진 강력한 타이탄을 보유량도 크루마 쪽이 월등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코린트 쪽에 배치된 100대의 타이탄을 조종하는 기사들이 타이탄에 탑승한 채 훈련을 그렇게 오래 받지 못했기에 타이탄 조종에 있어 상당히 미숙하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다크는 미네르바로부터 도착한 전문을 통해 그날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부터 전문이 없다고 하더라도 대기에 가득 찬 살기(殺氣)만으로도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임을 예감 할 수 있었다. 그날 새벽, 모든 살라만더 기사단 단원들이 무장을 갖추고 도열한 가운데 크로아 백작과 다크, 아르티어스, 그리고 린넨 백작이 밖으로 나오자 모두들 자세를 꼿꼿이 했다. 크라레스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첫 전쟁이니 만큼 모든 기사들의 긴장감이 눈에 보일 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열해 있는 모든 기사들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는 것 같자, 바지오 남작은 이들의 실전 경험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전쟁이라고는 치러 본 적도 없는 병사들이 적진 앞에 섰을 때와 같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기사들. 그런 긴장감이 서서히 전염되고 있는 듯 바지오 남작이 거느리고 있는 기사들까지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바지오 남작, 정찰대는 몇 명이나 보냈지요? 예? 저, 마법사가 오늘은 정찰을 할 필요는 없다고 전달했기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타이탄을 서포트해야 하는 정찰대가 먼저 공격을 당한다면서, 쓸데없는 희생은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정찰대는 보내지 않은 것이군요. 예. 지금이라도 보낼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바로 이 순간, 소녀가 기사들이 도열해 있는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경들, 조국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경들은 이 머나먼 타국 땅에 왔다. 이 전쟁에서 경들이 피를 흘려야 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 전쟁의 승패가 조국에 안겨 줄 파장은 엄청나다. 아름다운 크로나사 평야를 경들은 기억하는가? 물론 본관은 그곳에 가 보지 못했기에 잘 알지 못하지만, 경들 중에는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크로나사 평원이 본국에 귀속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이번 전쟁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영달만이 아닌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는 국민들을 생각하라.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것을 잊어라. 중압감에 사로잡히면 자신이 가진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경들은 혹독한 훈력을 통해 이 자리에 섰을 것이ㅏㄷ. 자, 모두들 눈을 감고 예전에 받았던 지독하게 혹독했던 훈련을 기억하라. 그때 그 훈련장이 경들의 앞에 펼쳐져 있다. 경들은 이번 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끝낼 수 있겠나? 소녀의 말에, 모든 기사들은 투지를 불태우며 외쳤다. 옛, 공작 전하. 공작 전하라는 외침이 터저나오자 바지오 남작 및 그의 부하들은 놀란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바지오는 지금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소녀가 공작이라면 저기 서 있는 공작은 또 뭐지? 다만 한 가지, 바지오 남작의 머리 속에 떠오르고 있는 단어는 당했다 라는 것이었다. 바지오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을 때 뭔가 걸리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바로 뒤에는 린넨 백작이 서있었다. 어디 몸이 안 좋나요? 바지오 남작. 바지오는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본색을 드러낸다는 것이 더 이상 감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멍청하게도 가장 정찰 활동이 왕성해야 하는 이때 공작의 부탁을 듣고 단 한 명도 정찰을 내보내지 않고 있었다. 상대가 정찰 활동을 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 몸이 안 좋으신 모양인데 좀 쉬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아, 아니오. 나는 괜찮습니다. 바지오 남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부인하자 린넨 백작은 음흉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백작의 부하들도 검을 뽑아 들었다. 바지오 남작의 손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검이 있는 곳을 더듬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기사급인 자신과 타이탄을 조종할 권리를 부여받게 되는 그레듀에이트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실력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바지오 남작 자신도 알고 있었다. 아니 당신은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소. 살인 기계 안드로메다 점령지를 관리하는 데는 기사단보다 숫자가 많은 국대가 더욱 요긴하게 쓰인다. 그렇기에 지오르네 후작은 전투가 끝난 다음을 우해서 군대에게 현 위치를 지킬 것을 지시한 후, 처음부터 압도적으로 많은 타이탄을 보유한 기사단을 전장에 투입했다. 며칠 전 15기가 행발 불명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의 휘하에는 300대에 가까운 타이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타이탄은 이쪽으로 반 정도에 불과했기에 그에게는 작전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매우 넓었다. 지오르네 후작이 여러 나라에서 파견된 기사들과 의논하여 선택한 작전은 타이탄 전투에 있어서는 매우 상투적인 전법이었다. 적과 아군의 병력이 비슷하거나, 또는 전력이 비슷하다면 승리를 위해 별의별 작전을 짜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 이런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병력을 나누어 별동대로 하여금 퇴로를 차단하게 하고, 정면에 밀어붙이는 포위 작전이 최고였다. 그런데 적은 포위 당하는 것을 꺼린 탓인지 세 개의 부대로 꽤 거리를 두고 포진한 상태였기에, 지오르네 후작도 자신의 부대를 세 개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지그무스 후작은 타이탄 50대를 이끌고 우측으로 폭넓게 돌아 30여 대 정도로 추측되는 상대의 좌익이 아르곤으로 도망 치지 못하게 압박한다. 그리고 크발리에 공작이 이끄는 타이탄 50대는 좌측으로 폭넓게 돌아 36대로 편성된 적의 우익 부대인 엠페른 기사단이 쟈렌 왕국으로 도망 치지 못하도록 압박하며 공격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130여 대로 이루어진 본대를 이끌고 적의 본대를 제압한다. 적의 본대가 보유한 타이탄은 기사의 수를 따져 봤을 때 최대한으로 잡아도 60대를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로안스엘 공작이 이끄는 별동대 50대는 놈들이 도망 치지 못하도록 뒤에서 압박한다. 지오르네 후작이 세운 작전은 여러 기사들과 의논에 의논을 거듭한 결과 확정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포위 공격이었다. 이렇게 단순한 작전이 세워진 이유는 간단했다. 뚜렷하게 작전을 담당할 참모가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모두들 한 가지씩 작전을 떠들어 댔으므로, 그 중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작전을 선택하게 된 결과, 가장 무난하고 또 흔히 쓰이는 작전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별동대는 새벽 네 시에 마법진을 통하여 적의 후방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그때를 즈음하여 후작 휘하에 있던 모든 정찰조들이 일제히 상대의 정찰조들과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둔하고 있는 적의 군대는 아예 건드리지 않았기에, 미란 국가 연합의 알렌 주둔군 보초들 중에는 저 멀리서 아련히 들려 오는 검 부딪치는 소리를 들은 사람도 있었다. 이윽고 먼동이 틀 때쯤, 코린트 연합군은 조용하게 진격을 사작했다. 엄청난 수의 대군(大軍)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고, 마법사와 기사들로 이루어진 300명 남짓한 인원이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었기에 그렇게 소란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300여 명의 인원으로 멸망시키지 못하는 나라가 몇 개 되지 않을 정도로 괴력을 낼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타이탄 덕분이었다. 그 300여 명의 인원은 바실리 시 외곽에서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이동을 시작했다. 두 개의 작은 부대들은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돌아갔고, 이들에 의해 적의 좌우익에 포진하고 있는 기사단이 밀려서 중앙으로 몰려들 것이다. 두 개의 부대가 분리된 후, 본대는 천천히 이동을 시작하여 국경 가까이까지 접근했다. 그런 후 잠시 동안 기다렸다. 네 방향에서 적을 압박하여 중앙으로 몰아넣어 섬멸하려면 시간이 정확히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 부대라도 시간을 어긴다면 불행하게도 각개 격파 당할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지오르네 후작은 자신이 보유한 타이탄이 원체 많았기에 그런 걱정까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입니다, 후작 각하. 마법사의 말에 후작은 마시다가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킨 후, 잔디 위에 펴 놓은 모포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군. 아침에 차를 꼭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 놔서 말일세. 후작의 말에 마법사는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죄했다. 향긋한 차를 마신다는 것은 귀족들이 누리는 매우 사치스러운 습관이었다. 물론 서민들을 위해서도 여러 종류의 차가 공급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향이나 맛이 훨씬 떨어지는 하급품들이었다. 향긋한 차를 마시는 행위, 그 행위가 매우 고상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기에 귀족들은 싫어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셔야 했고,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값비싼 차를 구입한다고 막대한 돈을 낭비하고 있었다. 물론 지오르네 후작도 부하들에게 자신의 취향이 얼마나 고상한지 과시하기 위해 차를 마셨을 뿐, 남들이 보지 않을 때는 포도주를 마셨다. 아닙니다, 후작 각하. 각하의 고상하신 취미 생활을 방해하게 된 것이 송구할 따름입니다. 전쟁 때문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나? 자, 경들. 이제 토끼 사냥이나 하러 갈까요? 지오르네 후작의 농담에 모두들 미소를 지으면서 말에 올랐다. 또한 후작의 지시를 받은 몇 명은 타이탄을 꺼내어 경계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찰조의 보고에 따른면 이 일대는 완전히 자신들의 정찰조가 제압한 상황이었기에 타이탄을 꺼내어 호위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행위였다. 세 시간 정도 달려 들어가자 가장 선두에 위치한 기사가 말을 멈추며 손;을 들었다. 그의행동에 맞춰 모두 말을 세웠고, 선두의 기사는 뒤쪽으로 달려오며 지오르네 후작에게 보고했다. 적들이 보입니다. 뭐? 진형은? 이미 우리가 올 줄 알았는지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준비성이 좋은 놈들이군. 좋아, 내려가자. 후작의 부대가 언덕에서 달려 내려가 적의 진형 앞에 자리를 잡았다. 후작의 부대는 타이탄 전투를 벌이기에 최적의 거리인 2킬로 정도 거리를 두고 진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재빨리 통신용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고, 후작의 지시를 받은 기사 한 명이 흰 깃발을 들고 상대편 진영을 향해 말을 달려 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상대를 기습하지 않는 한, 정규전을 그것도 기사단들끼리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의례적으로 행해지는 몇 가지 행동들이 있었다. 기사라는 지위 자체가 기사도를 숭상하는 무리들이었기에, 될 수 있다면 전투도 기사도의 원리에 입각하여 행해야 했다. 그 중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먼저 도착한 쪽에서 상대가 진형을 갖추기 전에 공격을 시작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는 이쪽에서 기다려 준 것을 치하하고, 자신들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서 전투를 하러 왔음을 전하기 위해 전령을 보내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전투를 하게 된 목적을 밝히고 상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후퇴하든지 아니면 항복하라고 . 물론 그 자리에서 항복하는 경우도 간혹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전투를 선택하게 된다. 전투를 하려고 할 때, 상대는 전령이 들고 간 흰 깃발을 상대쪽에서 잘 보이도록 높이 들어 그 깃대를 꺾은 후 땅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이것이 바로 쌍방가나에 교섭이 결렬되었다는 신호가 되고 곧바로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이때 전령의 목을 벤다든가 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적 진형을 만원경으로 바라보던 기사가 후작에게 말했다. 교섭이 결렬되었습니다. 상대방이 타이탄을 꺼내고 있습니다. 기사의 보고를 들은 후작은 항복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자, 모두들 전투 준비! 타이탄을 꺼내라. 적들의 타이탄은 뭐지? 후작의 물음에 기사는 망원경을 이용해서 적진을 다시금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기사의 시력은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게 좋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자세히 관찰하기에는 기사들의 시력으로도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 모두들 시커먼 색을 칠해 놨는데, 예, 저 뒤편에 있는 것은 로메로입니다. 그리고 저건 가만있자 , 안토로스 같은데요? 부하의 말에, 후작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 이리 줘 봐. 후작은 부하의 손을 뺏듯이 망원경을 받아 들고는 상대편 진영을 쏘아봤다. 부하의 말은 사실이었다. 후작의 눈으로 봐도 안토로스가 분명했다. 안토로스는 과거 14기밖에 생산되지 않았지만 매우 뛰어난 타이탄들 중의 하나였다. 지금도 몇 대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가 세 나라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고, 또 그 세나라는 매우 잘 알려진 나라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안토로스가 맞군. 시뻘건 도마뱀의 문장, 그 반대편에 붙어 있는 쌍두 사자의 문양, 틀림없는 트란 근위 기사단의 문장이야. 예? 트란 근위 기사단이면 멸망한 트루비아의 기사단 아닙니까? 그렇지. 트루비아 전쟁에서 적 타이탄을 구경도 하지 못했었는데 여기에 와 있었군. 예. 아마도 크루마에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 앞쪽에 도열해 있는 타이탄은 모두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아니, 나도 처음 보는 타이탄이야. 상당히 육중해 보이는데, 50대 정도나 모여 있으니 상대하기 힘들 것 같군. 60대 정도로 생각했는데 저 녀석들 예상 외로 타이탄을 많이 가지고 있군. 또 성능도 상당히 우수한 것 같고 . 그래도 이쪽이 50대 정도는 많습니다, 각하. 숫자야 그렇지. 하지만 성능은 어떨지 모르지. 기사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던 후작은 뒤에서 통신을 시도하고 있는 마법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딴 부대로부터의 연락은? 후작의 질문에 한 마법사가 재빨리 답했다. 예. 지그무스 후작 각하로부터의 연락입니다. 현재 적 기사단과 대치중. 적 기사단의 타이탄 수는 숨겨 놓은 것이 없다면 로메로 27기, 노리에 5기. 합해서 32기라는 보고입니다. 모두들 검은색을 칠했고, 붉은색으로 뱀의 문장을 그려 놨다고 합니다. 알겠다. 여덟 시 정각에 작전을 시작하라고 전해라. 그 전까지는 대충 상대방과 비슷한 수의 타이탄만 꺼내 적이 안심하게 하는 것 잊지 말라고 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딴 곳에서는 연락이 없나? 이번에는 옆에 앉아 있던 마법사가 말했다. 크발리에 공작 전하로부터의 연락입니다. 산드라 요새에 접근, 대치중이라고 합니다. 요새에 가려 있어서 상대 타이탄의 수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쪽에도 여덟 시에 공격하라고 전해. 예, 각하. 그 마법사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또 다른 마법사도 급히 보고를 올렸다. 타이탄은 마법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기에 기사단들끼리 타이탄을 앞세워 전투를 할 때 마법사는 이런 식으로 기사들을 보조했던 것이다. 로안스엘 공작 전하로부터의 연락입니다. 현재 퇴로 장악 완료. 상대의 정찰조 3개를 포착, 격멸했다고 합니다. 조금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니까 적들이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막으라고 전하라. 예, 각하. 일단 휘하 부대와 연락이 끝나자, 후작은 또다른 마법사를 향해 외쳤다. 본국을 불러라. 그 마법사는 열심히 주문을 외워 댄 후 후작을 향해 말했다. 각하, 본국이 나왔습니다. 후작이 수정 구슬 앞으로 다가가자 수정구 안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마법사는 후작을 알아보고 공손히 절을 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후작 각하. 그래. 자네도 안녕한가? 에.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께 전해라. 현재 적 타이탄과 대치중이다. 살라만더 기사단이 가지고 있는 타이탄은 로메로 20대 정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신형 타이탄 50대 정도다. 그리고 그들 속에 트루비아의 기사단도 보인다. 상대 타이탄의 모습을 전송하겠다. 여기까지 말한 후작은 마법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봐. 기억을 전송할 준비를 해주게. 예, 각하. 마법사는 수정 구슬 위에 손을 얹고 주문을 몇 마디 외운 후 후작에게 말했다. 구슬에 손을 대시고 전송할 타이타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예, 됐습니다, 각. 전송이 끄타났습니다. 후작은 다시금 시선을 수정 구슬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방금 보낸 검은색 타이탄에 대해 조사해서 발렌시아드 공작 전하께 전해라. 알겠습니다, 각하. 무훈을 빕니다. 고맙군. 이제 모든 것이 다 갖춰졌다고 생각한 후작은 기사들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자, 여덟 시가 다 되어 간다. 모두들 준비하도록. 이때 한 기사가 후작을 향해 말했다. 각하께서도 싸우실 겁니까? 아니, 나는 여기서 지휘를 하기로 하지. 자네가 직접 전방 지휘를 해주겠나? 영광입니다, 각하. 쌍방의 군대는 타이탄들을 꺼내어 전투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선두에 서 있는 타이탄들은 모두 보조 무장으로 창을 한 자루씩 가지고 있었다. 일단 상대와 격투에 들어가기 전에 그걸 던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뒷열에 있는 타이탄들은 각자 취향에 따라 거대한 철퇴나 도끼를 쥐고 있었다. 타이탄의 손이 두 개밖에 없다 보니 무기를 추가로 가지고 가는 것에는 한도가 있었다. 타이탄들끼리의 전투에서도 보병들끼리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육중하고 두터운 장갑을 가진것들이 선두에 서게 된다. 선두에 서서 상대방과 격전에 들어갈 타이탄들은 뒤로는 아군이, 앞으로는 적군이 몰려들어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매우 좁기에 강력한 장갑으로 몸을 보호하며 죽자고 검을 휘둘러야 했다. 하지만 양쪽 측면이나 뒤에 위치하는 타이탄들은 가볍고 기동력이 빠른 것이 사용되었다. 이들의 경우는 움직이는 데 충분한 공간이 있었기에, 단순하게 방패와 장갑만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지 않아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방도 크고 몸집이 좋은 신형을 중앙에 배치하고 로메로를 좌우 측면에 배치했다. 예법에 따라 상대방의 진형이 다 갖춰질 때까지 기다린 후작은, 모든 준비를 갖췄다고 생각되자 우렁차게 외쳤다. 전원, 돌격 준비! 이때, 후작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갑자기 적들 타이탄의 뒤쪽에서 거대한 것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몸통은 앞쪽에 도열해 있는 타이탄들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세 개의 뿔이 나 있는 거대한 머리통과 가슴 위쪽은 앞을 막아서고 있는 많은 타이탄들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보였다. 그 말은 앞에 서 있는 타이탄보다 최소한 1미터는 크다는 말이었다. 저, 저건 또 뭐야? 후작의 당황한 태도에 마법진 앞에 앉아 있던 마법사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예? 뭐 말입니까? 각하. 저 뒤에 서 있는 타이탄 말이야. 예? 뒤에 말입니까? 원래 마법사의 시력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한 보통 사람들이나 다를 바가 없었기에, 마법사는 후작의 옆에 놓여 있던 망원경을 집어 들고 나서야 후작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큰 타이탄입니다. 백기사와 거의 비슷한 크기겠는데요? 마법사의ㅣ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후작이 지시했다. 맞아, 바로 저 녀석이다. 본국에 지급으로 다시 연락을 넣어라. 옛, 각하. 이때 상대방 타이탄들이 돌격해 왔기에 코린트 동맹군의 타이탄들도 후작의 명령 없이 상대방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원래 전투는 기세(氣勢)싸움. 기세로 대응해야 했기에 적이 돌진해 들어오는데도 가만히 서서 기다리다가는 먼저 주눅이 들기 때문에 취해지는 행동이었다. 부하들이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며 후작은 재빨리 마법사에게 외쳤다. 로안스엘 공작에게 급전을 보내라. 퇴로 차단 명령을 철회하겠다. 지금 즉시 별동대를 이끌고 이리로 달려오라고 전해라. 로안스엘 공작과의 마법 통신을 담당하고 있던 마법사는 즉시 지시를 전달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했다. 각하, 그렇게 되면 포위망에 구멍이 생기게 됩니다. 포위망이 구멍이 나건, 무너지건 상관없다. 문제는 저 큰 타이탄이야. 아마 저 녀석이 대공 전하께서 찾고 계시던 녀석일 거야. 그건 그렇고, 아직도 본국에 연락이 되지 않았나? 후작의 투덜거림에 본국을 향해 통신 마법을 실행하고 있던 마법사가 재빨리 답했다. 예, 이제 연락이 되었습니다, 각하. 에잇, 비켜라. 이보게. 다급한 후작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수정 구슬 안에 비춰져 보이는 늙은 마법사는 느긋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후작 각하. 최대한 빨리 이 타이탄에 대해 조사해 봐라.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덩치가 크다. 백기사와 맞먹는 것 같은데 이놈이 대공 전하께서 찾고 계시던 타이탄인 것 같다. 허둥대는 후작을 향해 노 마법사는 역시 느긋한 어조로 답했다. 예, 확인해 보겠습니다. 빨리 모습을 전송해 주십시오. 상대 마법사의 주문에 후작은 자신이 하는 것보다는 통신을 담당하는 마법사가 직접 하는 것이 더욱 안정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본국과의 마법진을 연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망원경을 보고 자네가 직접 전송해. 옛, 각하. 자네는 이제부터 저 타이탄이 움직이는 모습을 모두 다 전송해라. 딴 일은 안 해도 좋아. 저 타이탄만 주시해라. 알겠나? 예, 각하. 마법사가 망원경을 들고 상대 타이탄을 주시하며 그 영상을 본국으로 전송하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후작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별동대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마법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마법사는 지금 통신 마법진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뒤쪽의 풀숲을 화염 마법으로 불태운 후 그 위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로안스엘 공작과는 연락이 되었나? 마법진을 그리고 있던 마법사는 즉시 후작을 향해 답했다. 예. 지시를 전달했습니다, 각하. 언제 도착한다고 하던가? 여러 개의 퇴로에 산개해 있는 기사들을 소집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들이 모이는 대로 곧 마법진을 통해 이쪽으로 오실 것입니다, 각하. 아마 10분 정도 걸리실 거라는 보고입니다. 마법사의 대답에 후작은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는 전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10분이라. 늦지 말아야 할 텐데 .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안드로메다의 투덜거림에 다크는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답했다. 좀 기다려 봐. <나는 기다리는 게 싫어. 나는 내 힘을 과시하고 싶어. 그렇게 마나를 막아 놓지 말고 개방해라.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기다리라고 했지. <모두들 잘 싸우고 있어. 이렇게 나가면 내 먹이가 줄어들 뿐이야. 나는 하나라도 더 죽이고 싶다. 너는 그것을 도울 힘이 충분히 있어. 사람의 몸 속에서 흐르는 그 따스한 것. 그 따스함을 다시 한 번 더 느끼고 싶어. 나에게 힘을 줘.> 으아아악! 제발 좀 닥치지 못해? 네 녀석 말을 듣고 있으면 옛날의 악몽이 다시 떠오른단 말이야. 나는 무인일 뿐 절대로 살인귀는 아니야. 아니, 살인귀는 안 되도록 노력해 왔다구. 그런데 자꾸 옆에서 부추키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이 망할 살인귀 놈아. 다크는 지금 전장으로 달려 들어갈 것이냐 마느냐를 가지고 한참 고심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타이탄이 한 번 피맛을 보더니 거기에서 무한한 매력을 찾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피에 젖은 광기를 지닌 마교라는 단체에서 자라온 그였기에, 다크 또한 살인이라는 것에 대해 무덤덤한 상태였다. 일부 고수들의 경우 살인을 미학으로까지 발전시켜 그것에서 쾌락을 찾는 진짜 미치광이들도 있었지만 다크는 예전부터 그것을 의식적으로 회피해 오고 있었다. 피, 피, 피 . 하지만 피에 굶주려 헐떡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련한 과거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다크가 매우 특수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크가 고심하고 있는 부분을 거침없이 직설적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타이탄이 하고 있는 생각을 자신도 지금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은 그걸 억제해 왔고, 또 그것을 표현하는 것 자체를 꺼려했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피에 굶주려 헐떡이는 소리를 듣다 보니까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또 무슨 해괴할 일일까? <흐흐 , 그걸 살인 이라고 하는 거냐? 그래, 살인이라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것인 줄은 몰랐어. 너도 그걸 즐기고 있었잖아. 그런데 왜 지금 와서 부인하는 거야?> 제길! 전번의 도로니아가 더 좋았어. 이 살인마 녀석아. <도로니아 따위와 나를 비교하려 들지 마라. 그런 형편없는 것과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모욕이야. 도로니아를 가지고서 그 때 한 것과 같이 멋지게 살인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를 소유하고 있는 한 너는 무적이야. 수많은 사람들과 타이탄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일 수 있어.> 제기랄. 겨우 몇 명 죽이고 나서 이렇게 들뜨는 놈은 처음 보겠네. 처음부터 살인을 위한 병기로 제작되었기에 그런 건가? 그래, 나도 살인을 휘해서 키워졌 , 크아악! 나는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구. 다크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안드로메다는 매우 집요한 데가 있었다. <아니야, 너도 좋아하잖아. 너와 나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내 성격이 싫다고 했지만, 처음 제작된 타이탄은 첫 번째로 만난 주인의 성격을 가장 많이 닮게 되어 있어. 나는 너의 거울이나 다름없어. 너는 지금 달려나가서 나를 이용해 저젓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지? 그렇지?> 달려나가서 죽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가도 네 녀석의 이죽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면 그럴 마음이 없어진다. <너는 지금 참고 있지만, 사실은 피가 끓고 있잖아. 안 그래? 뜨끈한 피의 감촉. 금속성의 내 몸의 말단을 통해 전해지는 간단한 감각인데도 이렇듯 나를 흥분시키는데, 너는 다욱 섬세한 감각 기관들이 있잖아. 너를 통해 느껴지는 저 뜨끈한 피의 향기, 너는 그것을 맡으면서 흥분하고 있다구. 너는 오래 전부터 피에 굶주려 있어. 부인하려고 하지 마. 자 나를 움직이라구. 그런 후 죽이는 거야. 흐흐흐흐 .> 일방적인 전투 으그그그 . 미치겠군. 피에 굶주려 헐떡거리는 네 녀석이 싫어서라도 전투를 하지 않겠다. <그럴 수가. 너도 지금 흥분하고 있잖아. 나는 느낄 수 있어. 너와 나는 함께 연결되어 있으니까. 인간들의 마음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싫은 척하는 거지? 너도 살인귀잖아.> 다크는 정말 미치고 싶었다. 만약 이게 사람이 옆에서 떠들어 대는 거라면 청각을 막아 버리면 된다. 하지만 이놈의 미치광이 타이탄은 자신의 마음 에 직접 대화를 걸어오기 때문에 그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다크가 지금 가장 곤란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자신은 그렇다고 생가하지 않는데, 이놈이 워낙 너도 그렇잖아 하는 식으로 물고 늘어진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보니 슬며시 진짜 그럴까? 하는 의구심마저 싹트고 있었다. 다크가 망할놈의 타이탄 덕분에 예정에 없던 마음의 시험 을 받고 있는 동안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기사들의 전체적인 실력은 유령 기사단이 뛰어났다. 더군다나 타이탄마저도 상대방에 비해 월등하게 우수했다. 48대나 되는 테세우스를 중심으로 그들은 상대를 압박해 나가며 우세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호 200대가 넘는 거대한 타이탄이 치열한 격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월등한 실력을 지닌 인물이 없는 탓에 파괴되어 쓰러지는 타이탄은 의외로 적었다. 살라만더 기사단의 경우 중앙에 포진하고 있는 기사들의 기량과 타이탄이 월등했다. 그래서 전투가 전개되자 중앙이 적을 향해 점점 압박해 들어가면서 돌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좌우 측면을 받치고 있는 로메로들은 상대방에 비해 그렇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 자리를 방어하는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상대방의 지휘관은 뒤에서 쉬고 있는 타이탄들을 좌우 측면으로 돌려 상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전세가 이렇게 흘러가자 다크는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적의 포위망이 완전하게 갖춰지게 되면 수적으로 훨씬 불리한 이쪽이 나중에는 괴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 다음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런 후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을 때 이제부터 쾌락이 시작된다고 느꼈는지 안드로메다는 듣기 껄끄러운 음성으로 음침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걸 들으며 다크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에구구. 내가 전생에 죄를 너무 많이 지었던 모양이지. 이런 미친놈이 걸린 걸 보면. 에라 모르겠다. 그래, 가자구. 그와 동시에 기본 전투 중량 160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타이탄이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검은 색의 거대한 타이탄의 모습만을 주시하고 있던 마법사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저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에 후작은 전장의 뒤쪽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엄청나게 큰 타이탄이 진짜 움직이고 있었다. 여태까지 6미터가 넘어 가는 거대한 타이탄은 전 세계를 다 뒤져도 오직 한 대가 제작되었을 뿐이다. 코린트의 황제용 타이탄 백기사(Knight of Chrome)는 6.5미터나 되는 거대한 타이탄이었지만 드래곤 본과 와이번 본만으로 제작되었기에 실질적인 무게는 54톤밖에 나가지 않았다. 백기사는 막대한 코린트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제작된 의장용(儀仗用) 타이탄의 성격이 짙었기에 몇 번인가 있었던 근위대의 대규모 기동 연습에서만 모습을 나타냈을 뿐, 실전에 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상 타이탄이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그 옛날에는 수많은 형태와 크기를 가진 시험용 타이탄들이 제작되었다. 아직 확실하게 최고의 파워를 낼 수 있는 크기나 형태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7미터가 넘어 가는 초대형 타이탄도 제작되었었고, 초소형 타이탄도 만들어졌었다. 그리고 무게를 최소화시켜 기동력에 중점을 둔 타이탄도 만들었지만 그 어떤 것도 그렇게 뛰어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당시 처음 개발되었던 엑스시온은 지금으로하면 0.1도 출력하지 못했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육중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힘을 못 쓰고 비실거렸을 것이 당연했다. 그렇듯 수많은 실험작들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엑스시온의 성능도 끊임없이 향상되었고, 또 기동 연습이나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타이탄의 크기와 무게는 점차 고정화되기 시작했다. 일단 국가간에 전투가 벌어진다면 수십 대가 넘는 타이탄들이 집단 전투를 벌이게 되었기에, 집단 전투에서 최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형태로 고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확립된 것이 출력 1.0의 엑스시온이 탑재된 경우 80톤 정도의 무게가 가장 효율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각국에서는 출력 대 무게의 비율이 0.0125에 비교적 비슷하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게의 비율을 완전히 무시한 듯한 거대한 타이탄이, 그것도 이런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과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타이탄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후작의 입은 쩍 벌어졌다. 후작의 예상과 달리 그 놈의 속도는 엄청났던 것이다. 놀라운 속도로 도약한 후 포위하기 위해 뒤로 돌아온 코린트의 타이탄을 거대한 방패로 후려쳤다. 엄청난 충격에 중심이고 뭐고 다 잃어버린 타이탄이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순간 상대의 거대한 검은 흉갑(胸甲)을 꿰뚫고 있었다. 탑승한 기사가 앉아있을 것이 확실한 바로 그 위치였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당황한 후작을 향해 마법사는 호기심어린 시선을 계속 유지한 채 답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의 꿈이 바로 타이탄 제작자가 되어 이름을 날리는 것이었다. 지상 최강의 생명체가 신이 만든 드래곤이라면, 인간들이 만든 최강의 병기는 타이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타이탄 앞에서는 거의 모든 마법이 무력(無力)했다. 그렇기에 그 마법사 또한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그러하듯 타이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저 타이탄은 놀랍게도 강철로 제작된 것이 분명합니다. 단 한 번 방패를 휘두른 것만으로 이쪽의 방패가 튕겨 나갔습니다. 만약 드래곤 본과 같은 가벼운 금속으로 만들었다면 저렇게 엄청난 파워를 낼 수 없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그래, 바로 저 녀석이야. 놈들이 숨겨 두고 있는 비밀 무기가 바로 저녀석이야. 그렇다면 크루마의 근위 기사단이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빨리 본국에 알아봐. 마법사는 아르곤 지역에서 포착된 적이 있었던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이 그 녀석인지 본국에 문의했다. 하지만 본국에서 답신하고 있던 마법사는 자료를 뒤져 대략적인 형태를 전송해 줬는데,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은 무게가 대략 110톤 정도 나가는 것으로 추정되며 양 옆으로 두 개의 뿔이 길게 솟아오른 머리 모양을 지닌 육중한 타이탄이었다. 그리고 크루마의 타이탄들이 흔히 그렇듯 사각형의 방패를 들고 있었다. 아닙니다, 각하. 아르곤에서 접촉했었던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이지? 이봐, 로안스엘 공작은 아직도 멀었나? 빨리 이곳으로 오라고 지시했라, 빨리. 이성을 잃어 가고 있는 후작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후작이 허둥대고 있는 그 사이에도 뒤쪽으로 돌아왔던 운 없는 타이탄이 여섯 대째 그 거대한 타이탄의 밥이 되고 있었다. 검과 방패를 가진 대결을 할 때는 방어의 주축이 되는 상대의 방패를 무력화시키는 작업이 우선이었다. 검을 사용한 웬만한 공격은 방패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통 방패로 상대의 방패를 후려치며 중심으로 무너뜨린 후 검으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저 거대한 타이탄은 육중한 무게 덕분인지 그런 전술을 힘들이지 않고 간단히 해내고 있었다. 동료들이 너무 쉽게 피의 제물이 되어 버리자 뒤로 돌아 적을 포위하려던 연합군의 타이탄들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가면 자신도 죽을 것이 뻔하기에 망설이는 사이 옆쪽으로 돌아온 동료 타이탄의 수는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모이자 그들은 다시 힘을 얻었다. 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쪽은 수가 월등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그들은 적군의 후방을 지키고 있는 그 거대한 타이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으하하하, 바로 이거야, 이거. 이 느낌이야. 흐흐흐 .> 으아아 , 소름 끼치니까 제발 그만해. 닥치라구. 그러는 와중에도 최고의 궁합을 가진 최악의 콤비는 상대의 검을 흘리거나 막아내며, 죽이고 또 죽이고 있었다. 원칙에 맞게 상대와 싸움을 했다면 다크가 지닌 고도의 검술로 적을 간단히 제압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강대한 힘과 피 맛을 알아 버린 안드로메다는 다크의 지배를 거부하고 있었다. 다크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스파이크로 찍고, 검으로 베고 찌르면서 거기에 감질나게 살짝살짝 묻어 나오는 적의 피. 그 끈적함이 안드로메다를 더욱 흥분시키고 있었다. <크하하하, 죽어라! 죽어.> 아주 신이 났구먼. 이제는 아주 자기 혼자 멋대로 움직이고 있어. 야, 이 빌어먹을 타이탄아. 내 말을 들으란 말이얏! 수십 대의 적이 포위 공격을 했지만 이 거대한 타이탄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렇게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얼마나 재빠른지 공격을 한 순간, 이미 상대는 그 자리를 벗어난 뒤였다. 그러면서도 그 타이탄은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닥치는 대로 자르고, 베고, 두들기고 있었다. 쿵! 무작스런 힘과 무게로 거대한 방패를 휘두르자, 그 방패에 두들겨 맞은 상대 타이탄은 아예 뒤로 퉁겨져 날아갔다. 80톤에 이르는 육중한 타이탄은 아예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80톤에 이르는 육중한 타이탄이, 단 한 번의 충격으로 튕겨 나갈 정도라면 그 방패를 막는 팔이 무사하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철로 된 외피와 달리 내부에 있는 타이탄의 몸은 주철이다. 그렇기에 강렬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나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수십 대의 타이탄이 겨우 한 대의 적을 상대로 고철이 되어 나뒹굴고 있을 때쯤, 후작이 그렇게 기다리고 있던 로안스엘 공작이 거느린 별동대가 마법진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로안스엘 공작도 처음에는 작전을 무시하고 갑작스럽게 자신을 호출한 후작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후작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린 순간,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수십 대의 타이탄이 엉켜 붙어 싸우는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뒤쪽에 그야말로 일방적인 도살극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타이탄들보다 거의 1미터는 확실히 더 커보이는 시커먼 타이탄이 지축을 울리며 날뛰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박살나고 있는 상대가 자기편이라는 것이었다. 저 괴물을 죽여라, 빨리. 핏발 선 후작의 눈을 바라보며 로안스엘 공작은 중얼거렸다. 저런 괴물은 정말 자신 없는데요. 그렇다면 어쩔 건가? 저놈 한 대가 무서워서 후퇴하자는 것인가? 상대는 단 한 대다. 자네가 거느리고 있는 것은 오십 대고. 빨리 해라. 아직 수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 녀석을 없애야 해. 알겠습니다. 해보죠. 자, 모두들 돌격 준비. 창을 준비해라. 로안스엘 공작은 부하들을 이끌고 전장의 뒤편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달려가는 그 순간에도 다섯 대의 타이탄이 그 괴물에게 쓰러지는 것을 모격해야 했다. 자, 모두들 거리를 두고 접근해라. 그리고 켈빈, 자네에게 열 대의 타이탄을 줄 테니 놈들의 후미가 저놈을 도와 주기 위해 달려오지 못하게 막아라. 예, 공작 전하. 자, 모두들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창으로 공격하라. 놈의 덩치로 봤을 때 접근전은 매우 불리하다. 로안스엘 공작의 지휘에 따라 고전(苦戰) 중인, 아니 학살을 당하는 중이던 포위 공격대는 뒤로 물러서며 한숨 돌릴 여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공작의 지시에 따라 놈은 저 멀리 뒤편으로부터 분리, 포위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서 로안스엘 공작의 의도를 파악하고 큰 타이탄을 돕기위해 뒤로 빠진 적 타이탄도 있었지만 켈빈이 지휘하는 저지대(沮止隊)에 막혀 버렸다. 일단 상대를 분리시키는 작업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다시 다섯 대의 타이탄이 고철이 되어 뒹굴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로안스엘 공작은 상대를 후미에 멀찍이 고립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독립된 명령 체계에 의한 일사불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괴물 같은 상대의 힘 앞에서는 그런 공격도 오래가지 못했다. 무작정 한쪽 방향으로 돌진해 들어오며 방패와 검을 휘두른다. 그렇게 되면 이쪽에서는 뒤로 빠지고, 적 타이탄의 뒤쪽에 있던 아군이 상대의 등을 공격해야만 하는데 , 그런데 놈의 속도가 원체 빠르다 보니 뒤로 빠지던 아군은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한 채 고철이 되어 뒹굴어야 했고, 뒤에서 덮치던 아군은 헛되이 허공만 찔러야 했다. 몇몇 타이탄은 창을 던지기도 했지만 그 정도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괴물 같은 타이탄의 두꺼운 외장 장갑만을 가까스로 둟을 수 있었을 뿐, 치명타를 가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상대는 동료들을 계속 죽이고 있었다. 그 괴물 같은 힘으로 .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 발렌시아드 공작은 중년의 장군 두 명과 널찍한 지도를 앞에 두고 토론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예상 외로 가므 쪽에서 밀리고 있었기에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었다. 서둘러 지원한 100대와 제1근위대를 보내 줬는데도 미네르바가 지휘하는 적의 주력은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물론 숫자에서는 코린트가 조금 우세했지만 타이탄의 질에서는 상대가 월등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전투가 벌어진 후에 까뮤의 요청에 의해 제2근위대까지 파견된 후였다. 그리고 잠시 전세가 코린트 쪽으로 돌아서는 듯 보였지만, 놈들도 엘프리안에 주둔중이었던 레디아 근위대의 남은 병력을 모두 투입했기에 점차 뒤로 밀리는 실정이었다. 코린트 최강의 코란 근위 기사단이 보유한 흑기사 30대와 두 명의 소드 마스터를 투입하고도 전세가 밀리고 있었기에 키에리는 긴급히 장군들을 소환했고, 이렇듯 대책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위급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자신을 찾으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냐? 이변이 일어났사옵니다. 다급한 어조나 표정과는 달리, 마법사의 입에서 답답한 소리만 흘러나오자 화가 치민 공작이 으르렁거렸다. 무슨 이변? 빨리 말해라. 예. 알렌 방면으로 침공해 들어간 지오르네 후작이 고정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마법사의 말에 키에리는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뭐라고? 설마 , 놈들의 주력은 지금 가므에 있는데? 그건 무슨 말이냐? 이게 적 타이탄의 모습이옵니다. 디스플레이 이미지(display image)!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자 방금 전에 그 마법사가 전송받았던 기억이 영상으로 드러났다. 검은색 타이탄들과 가지각색의 코린트 동맹군 타이탄들이 엉켜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뒤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방적인 학살극. 원체 거대한 타이탄이 주도하고 있었기에 마법사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키에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뒤쪽으로 가 있었다. 그 거대한 타이탄의 움직임은 매우 간단했다. 빠른 돌격, 방패로 후려치기, 그런 후 찌르거나 베기. 물론 중간 중간에 검으로 찌르기 귀찮았는지 무릎에 붙은 거대한 스파이크를 이용해 찍어 올리거나, 또는 팔목 관절에 붙은 스파이크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거구가 움직이는 모습ㅇ이 신기에 달한 춤을 추듯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이쪽 타이탄은 걸레가 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나는 저렇게까지 기본기에 충실하게 익히고, 또 써먹는 놈은 처음 봤어. 키에리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저, 대공 전하.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지 하명해 주시옵소서.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 자네는 어떻게 봤나? 키에리의 말에 여태껏 그와 함께 작전을 짜고 있던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장군이 즉각 대답했다. 대단한 실력인 것 같사옵니다. 동작이 매우 단순하면서도 위력적인 것으로 보이옵니다. 그래. 그렇지? 허구한날 검술을 익히면서도, 더 뛰어난 검술만 찾는 멍청이들에게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움직임이야. 저게 바로 기본기라는 거야. 막고, 두들기고, 베고, 차고 , 누구나 다 아는 동작이지. 또 간단한 동작이고. 자네도 저런 동작을 수도 없이 해봤을 걸? 예, 전하. 요즘도 저런 동작을 훈련하나? 예? 저것은 오래 전에 끝냈고, 지금은 로체스터 가의 고급 검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상대의 답변에 키에리는 짓궃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왜 고급 검법을 배우고 있나? 그렇다면 저런 것은 요즘, 하지도 않고 있다는 말이겠군. 그렇사옵니다, 전하. 고급 검법으로 넘어가야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지 않습니까? 자네는 저 녀석을 상대로 싸운다면 어떻게 하겠나? 예? 글쎄요, 워낙 힘에서 밀리니까, 거리를 좀 두고 공격을 . 그래 맞아. 저 녀석의 움직임이 대단하기는 해. 하지만 고급 검술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서 봐야 한다. 저런 놈을 상대하는 데는 저 녀석들만 가지고는 무리가 있겠군. 2근위대는 가므에 지원을 나가 버렸고 , 어떻게 한다? 참, 3근위대에 남은 놈들이 있나? 예, 페트릭과 크리스틴이 대기중이옵니다. 그 녀석들을 보내라. 그러면 되겠지. 저 녀석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녀석은 상대를 잘못 골랐어. 녀석이 싸우는 모습을 자네들도 잘 기억해 두게. 예전에 익혔던 기본기만으로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낼 수 있는지 말이야. 저 녀석의 노력과 근성에 찬사를 보내고 싶군. 그건 그렇고, 하던 얘기나 마저 하지. 키에리는 영상을 보는 것 하나만으로 적의 약점을 간단하게 알아챘다. 상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타이탄의 장점들을 극대화시켜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검술을 익혔는지는 모르지만 상대의 그 끈기와 노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익힌 검술은 전장에서는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엄청난 고수와의 1대1 대결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고수들에게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상태에서도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그것도 엄청난 위력을 가진 기술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페트릭과 크리스틴이 마법진을 이용해 전장에 도착했을 때, 전세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단 한 대에게 수십 대의 타이탄이 파괴되어 나뒹굴고 있었고, 로안스엘 공작이 이끄는 공격조는 공작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태였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두려움이 전체 기사단에 서서히 파급되기 시작하여 상대를 저지하고 있던 포위망 자체가 붕괴도기 직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도착과 동시에 자신들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후작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타이탄을 꺼냈다. 후작은 새로운 증원에 갑자기 힘이 나기 시작하는지 웅장한 목소리로 기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코란 근위대에서 지원하러 오셨다. 모두에게 힘을 내라고 전해라. 저 괴물 같은 놈만 처치하고 나면 승리할 수 잇다. 모두 전의를 잃지 마라! 크리스틴과페트릭은 그런 후작을 한ㅅㅁ하다는 듯 쳐다본 후 자신들의 붉은 타이탄에 탑승했다. 웬만한 나라에서는 검술이 높으면 곧 작위도 상승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경우 아버지 대에서 검술이 뛰어나 공작의 칭호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아들이 뛰어난 검술을 유지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코린트 같은 거대한 제국일수록 그런 식으로 귀족의 칭호를 남발했다가는 귀족의 수가 너무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국가에 공을 세운 경우에만 작위가 상승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검술이 아무리 대단해도 높은 작위를 인정해 주지 않고 있었다. 작위를 가진 귀족들의 경우는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세수(稅收)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귀족들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유리했다. 물론 검술만 제대로 하면 받게 되는 작위의 최하 계급은 기사(Knight)다. 그렇지만 기사는 그 아들에게 세습되지 않는다. 세습되는 최하 계급의 작위는 남작(Baron)부터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코린트의 경우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검술이 뛰어나서 높은 직위를 가진 인물이 있지만 작위가 낮은 경우가 있었다. 크린스틴과 페트릭의 경우가 그러했다. 둘 다 발렌시아드 가문이나 로체스터 가문에서 검술을 사사 받았기에 발렌시아드 대공이 인정했을 정도로 엄청난 검술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경우 평민의 아이들이었다. 그렇기에 두 다 기사 칭호를 검술 시험을 통해 자신들의 힘으로 확보해야만 했다. 아마도 이번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다면 남작으로 승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실적을 통해 올라오는 기사라는 작위, 그 작위는 무한하게 높은 자리일 수도 있었다. 페트릭과 크리스틴은 상대쪽으로 다가서며 외쳤다. 모두들 물러서라. 강압적인 명령이었지만 모두들 이런 시건방진 하고 따질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주춤주춤 뒤로 내빼고 있었다. 누가 자기들 대신 죽어주겠다는 데야 절대로 반대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덩치가 대단한데? 거의 백기사와 맞먹겠어. 크리스틴의 말에 자신의 타이탄 로마니아가 묵직한 음성으로 답해왔다. <저기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엑스시온의 파워는 나보다 훨씬 높은 것 같다.> 그 말에 크리스틴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코타스 공작 전하께서는 너 이상 강력한 타이탄은 아직까지 태어난 적이 없다고 하셨어. 자, 이제 한번 놈의 실력을 테스트해 볼까? 그동안 너는 상대의 파워를 측정하라구.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걱정 마. 가자. 상대편 타이탄도 이쪽에서 공격 준비를 갖추기를 기다려 주는 것인지 조용히 서 있었다. 적기사는 양손에 검을 단단히 쥐고는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적기사가 엄청난 속도로 도약했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그 거대한 방패로 후려쳐 왔다. 똑같은 패턴인데? 크리스틴은 상대의 틀에 박힌 공격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놈의 공격 패턴은 똑같다면 그 다음 보나마나였다. 순간 붉은 타이탄과 검은 타이탄의 대결을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들 입을 쩍 벌어졌다. 검은 타이탄의 거대한 방패는 헛되이 공간을 갈랐을 뿐이었고 적기사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면서도 기계처럼 정확한 동작이었다. 순간적으로 상대가 어디 있는지 놓쳐 버린 안드로메다, 그 순간 적기사는 재빨리 상대방 타이탄 뒤쪽으로 도약하며 있는 힘껏 검을 아래로 내리찍듯 휘둘렀다. 캉! 그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거대한 타이탄의 뿔 세 개 중 두개가 잘려 나갔고, 양쪽 어깨의 견갑(肩甲) 일부도 잘려 나갔다. 물론 견갑은 아래쪽에서부터 맹렬한 속도로 재생되었고, 잘려진 뿔도 천천히 재생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헤헤헤, 역시 덩치뿐이야. 놈은 숙련되어 있을 뿐이지, 검술은 별볼일 없는 것 같아. 이봐, 그 순간 저 녀석의 파워를 측정해 봤어? <믿을 수 없지만 엑스시온 출력이 3.0을 넘어서는 것 같다. 그리고 저 타이탄, 기사와 타이탄이 별로 공조가 되지 않는 것 같아. 그 둘의 합쳐진 힘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타이탄과 공조도 못 하다니, 정말 형편없는 녀석 아니야? <그렇지 않다. 우리를 만든 코타스는 적기사의 프로토타입을 보고 가장 큰 문제점 하나를 발견했지.> 응? 우리 대장이 몰고 있는 녀석 말이야? <그렇다. 드라쿤은 우리들보다 훨씬 자아가 강하다. 만약 제임스 같은 뛰어난 기사가 아니었다면 드라쿤은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았겠지.> 호오, 그럼 두 번째부터는 자아를 좀 약화시켰다는 말이겠군. 그렇다면 놈의 자아도 강하다는 말이 되나? <우리들의 자아도 강한데, 우리보다 더 월등한 엑스시온이라면 그 자아를 통제하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기사와의 공조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잘된 일이군.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자. <크아아아, 내 뿔이 잘렸다. 내 자존심인 뿔이 두 개나 잘렸어. 그동안 네 녀석은 뭐 했냐?> 하긴 뭘 해? 여태껏 네놈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고 있었잖아. 뿔까지 잘려 나가고 보니까 제정신이 드냐? <크아아악! 저 자식 죽여 버릴 꺼야.> 그 순간 안드로메다의 또다시 자기 마음대로 돌격해 들어갔다. 다크의 몸에서 거의 무한대라고 볼 수 있는 마나를 흡수하고 있는 만큼 그 속도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하지만 청기사가 달려들어 방패로 후려치는 순간, 상대는 훨씬 뒤쪽으로 도약해서 도망 친 후였고, 방패가 힘에 밀려 몸 밖으로 약간 벗어난 그 틈을 노리고 상대의 검이 쑤시고 들어왔다. 물론 서로간의 거리가 있었기에 검이 완전히 박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대기를 가르며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 들어왔다. 쾅!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는 뭔가는 1차 장갑을 꿰뚫고, 2차 장갑을 반쯤 박살 낸 상태에서 멈췄다. 그 정도 피해에서 끝난 것도 모두 청기사의 장갑판이 덩치에 어울릴 정도로 무지하게 두꺼웠기에 얻어낸 행운이었다. <그게 뭐였지?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빠른 공격이 있을 수 있나?> 멍청한 녀석! 저건 검기(劍氣)라고 하는 기술이야. 검을 통해 응축된 마나를 뿜어 내는 기술이지. 피 냄새로 굳어진 네 녀석의 돌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걸? 쾅! 그 순간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배부(背部 : 등 쪽)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등 쪽에 서 있던 붉은색 타이탄이 똑같은 기술로 공격해 온 것이다. 그로부터 몇 분 동안 안드로메다는 놈들을 박살내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때마다 상대의 공격에 치명상을 간신히 면할 정도의 막심한 피해를 입엇을 뿐, 놈들의 장갑판에 가벼운 흠집 하나 만들 수 없엇다. 붉은 기사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대단했던 것이다. 자, 이제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느끼겠지? 지금부터는 내 명령에 따라. 이 멍청아. <다, 닥쳐라. 내가 질 것 같으냐?> 방금 전 공격에 꽤 심하게 당한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당하면 네 녀석 목숨도 위태로울 거야. 안 그래? 죽을 거면 빨리 죽어 버려. 그래야 나도 본국으로 가서 도로니아와 다시 사이 좋게 계약을 맺을 수 있지. 나는 말 잘 듣는 놈이 좋더라. <웃기지 마라.> 또다시 단순 무식하게 이어지는 공격. 만약 상대가 도망 칠 충분한 공간이 없었다면, 아마 진작에 적기사들은 저 분노에 불타는 안드로메다의 검에 두 조각이 났을 것이었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혼자 본대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싸우다 보니 상대의 움직임을 저지할 만한 방해물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순간 다크는 엄청난 기의 흐름을 느꼈다. 타이탄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라면 자신이 뿜어 내는 검강과 거의 엇비슷한 위력을 낼 정도였는데, 그렇다면 바로 이것은? 다크는 그 기의 흐름이 날아오는 직선 거리에 자신이 앉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도로니아를 조종했듯이 재빨리 안드로메다를 움직였다. 여태껏 다크가 안드로메다를 가만히 놔두고 있어서 그렇지, 조종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움직일 수 있었다. 불협 화음이 계속 되는 한 원활한 움직임은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저놈들 정말 한가닥 하는 놈들이야. 검강을 쓰다니 . 청기사가 약간 움직이는 그 순간 청기사가 원래 있었던 그곳을 관통하는 엄청난 빛무리가 있었다. 안드로메다는 자신의 몸이 움직이고 나서야 다크의 시각을 통해 옆으로 흘러가는 빛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안드로메다는 아직 느끼고 있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둘 다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검강? 검강이 뭔데?> 바로 저 빛을 말하는 것이 검강인가? 하고 생각하며 안드로메다가 물어 왔다. 검강도 모르는 애송이가 나한테 반항하다니. 이게 바로 검강이다. 그 순간 청기사의 검이 안드로메다의 의지와 상관없이 휘둘러졌고, 그 검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대기를 관통하며 덮쳐 오는 빛무리에 상대방 타이탄은 기겁을 하며 회피했다. 그들은 이쪽 타이탄이 그 어떤 고급 검술도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방심한 상태였는데, 자신들이 여태껏 사용했었던 검술에 바탕을 둔 검강보다도 더욱 강력한 것이 밀려들자 혼비백산했던 것이다. 안드로메다가 자신의 몸을 관통한 그 엄청난 마나의 흐름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주인 의 음성이 들려 왔다. 제발 아무 것도 모르면 좀 닥치고 내 말을 들어. 네 녀석은 내가 너를 타게 되었기에 무적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야. 내가 타는 모든 타이탄은 무적이야. 알겠어? 도로니아보다 형편없는 타이탄을 타고 있었어도 너 따위는 1분도 지나지 않아 고철로 만들 수 있다구. 다크의 투덜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다크의 의지대로 청기사는 상대편 적기사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속도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르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청기사의 검은 엄청난 빛을 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상대편 적기사는 재빨리 회피하며 청기사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청기사의 검은 진로를 가로막은 적기사의 검을 두 토막 내며 밑으로 미끄러졌고 곧 1차 장갑판을 가르며 밑으로 훑어내렸다. 뒤로 재빨리 회피를 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몸이 두 조각 나는 것은 면했지만, 그래도 흉부의 1차 장갑이 날아가고 2차 장갑의 반 이상 깊이까지 들어온 매우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청기사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뒤로 후퇴하는 적기사가 채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에 상대는 아래로 휘둘러졌던 검을 즉각 위로 쳐 올리며 순간 엄청난 빛을 뿜어 냈다. 그와 함께 붉은색 타이탄은 두 토막이 나 버렸다. 그 다음부터 안드로메다는 자신이 닥치고 주인의 명령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위치로 떨어져 내렸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강하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의 주인은 자신보다 월등하게 강했다. 냉철했고, 정확했으며 검을 휘두르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두 번째의 붉은 타이탄이 간단하게 두 조각으로 잘린 후, 청기사는 멈추지 않고 적 타이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처음에 로니에르 공작이 탑승하고 있던 청기사가 상대방의 붉은색 타이탄에게 밀리기 시작햇을 때 모두들 당황했었지만, 순식간에 공작은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엄청난 기술로 상대방을 제압했다. 그리고 밀집해 있는 상대 타이탄들을 베기 시작하자 새로운 힘을 얻은 그의 부하들도 맹렬히 도망 치는 적을 뒤쫓아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코린트와 크루마의 전쟁에 참여했던 크라레스 기사단의 첫 번째 승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대승을 축하드리옵니다, 공작 전하. 다크가 타이탄에서 내릴 때 크로아 백작과 린넨 백작이 달려와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부하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넘기며 땅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한 후 말했다. 둘 다 오랜 격전에 피곤하겠지만, 테세우스 20기씩을 끌고 가서 아직도 양쪽 날개를 담당하고 있는 기사단을 도와 줘라. 벌써 다 죽었버렸다면 별 문제겠지만, 살아 있다면 도와 줘야 하겠지. 옛, 전하. 두 명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부하들을 끌어 모아 양쪽의 격전지로 달려갔다. 마법사가 없기에 격전지까지 달려가야만 했는데, 그러자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니 어쩌면 그 안에 동맹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전멸 당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뭐, 죽은 놈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다크는 부하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린 후, 곧이어 다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다 그린 후, 곧이어 다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다 그린 후 상대방 마법사가 흘리고 간 수정 구슬을 마법진의 중앙에 놓고 일어서며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자신의 타이탄이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야, 너 아직도 안 돌아갔냐? 너 이제 볼일 끝났어. 더 이상 피 맛 보기 힘들다구. 알았어? 다크가 저놈의 타이탄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툴툴거리자, 그녀의 머리 속에 타이탄 특유의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이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기다리고 있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 어쭈? 언제는 돌아가라는 말을 들어야 돌아갔냐? 그녀의 이죽거림에도 불구하고 안드로메다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주인이 타고 있지 않을 때 타이탄의 움직임은 그렇게 빠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며 안드로메다는 말했다. <당신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때 안드로메다 뒤쪽의 공간이 열리며 그 거대한 덩치를 삼켜 버렸다. 별 싱거운 놈을 다 보겠군. 언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었나? 다크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곧이어 한번씩 보이던 낯익은 마법사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시옵니까? 공작 전하. 첩자들에게 받은 보고로는 오늘 아침부터 격전이 시작되었다고 하던데, 전황은 어떻사옵니까?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거 보면 모르냐? 여기에 타이탄 200대 정도가 나뒹굴고 있으니까 까만 토끼보고 알아서 가져가라고 해. 상대의 이죽거리는 말에 마법사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약간 토라진 듯한 모습이 보기에 귀여웠지만 그녀의 실력과 지위를 잘 알고 있는 마법사는 감히 그것을 표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단 그녀의 말은 승전 보고였기에 반갑게 말했다. 벌써 전투가 끝났사옵니까? 승전 소식을 폐하께서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그렇게 좋아할 것은 못 되지. 로메로 열 두 대하고 테세우스 네 대가 박살 났으니까 말이야. 일곱 명 전사. 나머지는 모두들 뻗어 있으니까 한 몇 달 몸조리 잘 하면 일어나겠지. 예. 피해 상황은 까만 토끼에게 전하겠사옵니다. 그래. 다른 곳의 전황은 어떻다고 하던가? 그쪽만 전투의 결과가 나왔고, 다른 곳은 아직도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격전중이옵니다. 미네르바 공작이 이끄는 가므 방면 기사단들은 조금씩 진격중인 것으로 보고 받았사오나 전황이 그렇게 유리한 것 같지는 않았사옵니다. 바로 그곳에서 코란 근위 기사단과 레디아 근위 기사단이 맞붙었다고 보고를 받았으니까요. 어떻게 되었든지, 특별한 문제가 생기면 빨리 보고를 해주도록. 그리고 이쪽의 좌표를 일러줄 테니 마법사 몇 명 좀 보내 줘. 불행한 사고에 의해 크루마에서 파견되었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모두 전사(戰死)해 버렸거든. 덕분에 휘하 기사단들과 통신도 안 되는 형편이야. 약간 비꼬는 듯한 그녀의 어투에 어떻게 사건이 진행중인 것인지 대충 감을 잡은 마법사는 그녀의 말에 동조하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아, 매우 불행한 사고였군요. 즉시 조치해 드리겠사옵니다. 통신이 끝난 후 그녀는 여기저기 앉아서 쉬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서 말했다. 가만히 있지 말고, 전장에 남아 있는 청기사의 흔적을 없애라.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옛! 전하. 그들은 각자의 타이탄을 꺼낸 후 청기사를 남겨 놓은 큼직하면서도 깊숙한 발자국들을 찾아 짓이기기 시작했다. 예상 밖의 승리 뭣이라고? 전멸?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무리 여러 나라에서 끌어 모은 손발이 잘 안 맞는 기사단이라고 해도, 자그마치 300대의 타이탄이다. 그런데 어떻게 전멸을 당할 수 있지? 더군다나 3근위대의 엘리트들을 두 명이나 지원해 줬었는데. 황송하옵니다, 전하. 그 검은색의 초대형 타이탄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 알렌 방면의 패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사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그렇다면 페트릭과 크리스틴이 놈을 막지 못했다는 말이냐? 예, 전하. 유감스럽게도 그렇사옵니다. 그럴 수가 , 그렇다면 그때 전송되어 온 전투 자료가 있는가? 예, 있사옵니다. 마법사는 알렌 방면 기사단이 붕괴되기 직전에 보내 왔던 전투를 회상하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머리가 대단히 우수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디스플레이 이미지! 곧이어 검은색 타이탄과 붉은색 타이탄들이 싸우는 모습이 나타났다. 초반에는 붉은색 타이탄들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전투가 전개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 이럴 수가 . 저놈은 마스터 급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처음에는 저 기술을 쓰지 않고 힘들여서 한 대씩 부숴 나갔지? 이해할 수가 없군. 전투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키에리가 중얼거리고 있자, 마법사는 재빨리 주의를 환기시켰다. 바실리 시에 집결했던 모든 동맹 기사단은 단 한 번의 전투로 괴멸 당했사옵니다. 놈들은 중앙에서 승리를 거둔 후 좌우에서 압박해 들어오고 있던 동맹군의 좌우익을 간단히 제압했사옵니다. 이렇게 된 이상 가므에서 결전을 벌이고 있는 중앙 부대가 위험하옵니다. 아마도 곧이어 적의 좌익 부대가 아군 중앙 부대의 측면이나 후미를 공격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빨리 결정을 내려 주시옵소서.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사옵니다. 일단 전 군을 쟈크렌 요새 부근으로 후퇴시키심이 어떠하올는지요? 놈들의 좌익 부대에게 퇴로를 차단 당하기 전에 전 군을 후퇴시켜야 하옵니다. 그런 후 동쪽 최강의 요새 쟈크렌을 중심으로 놈들을 막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될 것 같사옵니다. 구스타프 백작의 의견은 잘못되었사옵니다. 그런 식으로 급속히 후퇴시칸다면 기사단은 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군대는 적에게 포착되어 괴멸 당할 우려가 있사옵니다. 그것보다는 적의 좌익 부대를 막기 위한 기사단을 급파하는 것이 옳을 것이옵니다. 본국에는 아직도 두 개의 기사단이 남아 있지 않사옵니까? 그건 틀립니다, 후작 각하. 300대의 타이탄을 전멸시킨 엄청난 괴력을 가진 기사단을 어떻게 철십자나 동십자 기사단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저 괴력을 자랑하는 적 기사 단장을 제압할 수 있는 기사는 두 기사단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놈을 해치울 수 있는 기사를 따로 파견하면 되지 않나? 왜 그걸 생각하지 못하는 거지?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나 크로데인 백작님을 파견하면 저 녀석을 충분히 없앨 수 있단 말일세. 하지만 그분들은 중요한 일로 타국에서 작전중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분들을 돌릴 수 있단 말입니까? 자, 자, 조용히들 하게나. 상대 기사단이 중앙을 덮친다면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소? 예. 일단 놈들도 대격전을 벌인 후이니 만큼 휴식과 재편성을 필요로 하옵니다. 그런 후 마법진을 이용해 투입한다면 시간은 매우 절약될 것이니, 아마도 24시간? 그렇다면 내일쯤 퇴로를 차단하고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예, 공작 전하. 물론 적 마법사들의 능력이 따라 줄 때를 가정한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후속 부대를 투입시키기에도 빠듯한 시간이 아닌가? 예, 공작 전하. 그리고 전방 부대들을 후퇴시키기에는 턱없는 부족한 시간이구요. 어쩔 수 없지. 철십자 기사단을 끌어 모아라. 철십자 기사단을 그곳에 투입하기로 하자. 하지만 전하, 그 괴물 같은 기사 단장을 없애기 위해서는 . 그건 내가 직접 가겠다. 코린트는 적의 좌익 부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수많은 첩자들을 파견했고, 아직 크루마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앙과 우익 부대는 전방만을 아니라 후방에까지도 정찰조를 파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뒤통수를 얻어맞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모두가 관심을 쏟고 있던 크루마 동맹의 좌익 부대는 현지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남의 전쟁이야 어찌되든 다크가 거느린 살라만더 기사단은 전쟁 외에도 할일이 많았기 대문이다. 바로 300여 대에 달하는 노획 타이탄의 처리 문제가 그것이었다. 이들은 노획한 타이탄 중에서 아직 살아 잇는 것을 계약을 맺어서 운반했고, 죽어 버린 타이탄은 또다른 타이탄을 이용해 공간으로 사라지게 만든 후 기사들을 공간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운반시켰다. 그리고 첫 번째 전투에서 살아 남은 엠페른 기사단과 연합 기사단의 생존 타이탄들은 모두 다 살라만더 기사단의 50킬로 후방에 위치시켜 퇴로를 확보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들도 그 결정에는 찬성이었다. 그들은 우선 자신들과 격전을 벌이다가 파괴된 노획 타이탄을 챙겨 본국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나중에 적의 힘에 밀려 중앙 쪽으로 후퇴하다가 중앙에서 지원 나온 타이탄들과 협동하여 적을 무찌르긴 했지만, 30여 대 정도로 50여 대의 적을 막을 막다 보니 모두들 피해가 막심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제대로 된 전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휴식과 재편성이 꼭 필요한 상태였다. 여기는 살라만더 기사단입니다. 마법사가 자신의 수정 구슬에 모습을 나타낸 처음 보는 인물에게 말했다. 통신용 마법진의 경우 서로간의 접속 신호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어야 했기에, 딴 사람의 도청은 거의 불가능했고 또, 접속 신호를 모르는 다른 인물이 무작위로 신호를 알아맞혀 끼여들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처음 보는 인물이 수정구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이 수정구의 접속 신호를 알고 있는 사람, 즉 동맹국의 어떤 인물인 것이 확실했다. 여기는 살라만더 기사단 임시 마법사 본부입니다. 불렀으면 답을 해주십시오. 사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 예. 저는 살라만더 기사단에 파견나온 마법사입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당신은 내가 모르는 사람인데? 아, 예. 오늘 오전에 있었던 격전으로 인해, 후방 기지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때 크루마에서 파견 나왔던 모든 마법사가 전사했습니다. 그렇기에 공작 전하께서는 또다시 크루마에 인력 지원을 할 수는 없다고 결정하시고 본국에서 마법사 및 기사의 지원을 요청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이곳에 도착한 후에 마법 통신망이 재구축되었습니다. 모두 전사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파견 나왔던 대부분의 기사들마저도 전쟁 직전에 벌어졌던 정찰대끼리의 치열한 교전에서 모두 전사했습니다. 그러니까 크루마에서 파견된 분들은 지금 아무도 없다고 보면 될 겁니다. 그, 그렇다면 전투는 어떻게 되었나요? 연락이 워낙 오래도록 불통이 되어 있었기에 우리들은 귀 기사단이 전멸 당한 줄 알았습니다. 전투는 승리했습니다. 그 말에 상대방 마법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승리? 승리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적 타이탄 거의 300여 대가 파괴되었고, 이쪽은 50여 대가 파괴되었습니다. 특히 적 기사단의 우회 공격조를 끝까지 막아 줬던 엠페른 기사단 쪽의 피해가 큽니다. 이럴 수가 . 곧 미네르바 공작 전하께 이 승전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승전을 축하 드립니다. 그럼, 이만. 전멸을 당하더라도 오랜 시간만 버텨 주면 다행이라고 생각되던 지점에서 승전 보고가 나오자 미네르바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예상과 달리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진격조차 불가능해진 중앙 전선에서 적을 돌파하기 위해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제장(諸將)들, 기쁜 소식이 도착했소. 서쪽으로 나가는 길이 열렸소. 아직 전선을 유지하면 다행으로 생각했던 알렌 방어군이 대승을 거뒀다는 보고요. 알렌 방어군이라면 동맹 연합군이 아니옵니까? 설마 그들이 . 매우 강력한 기사단과 기사들을 보내 준다고 하더니, 진짜 그들이 해낸 것 같소. 한 노 장군이 지도 앞에 나서서 손가락으로 위치를 짚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빨리 이쪽으로 진격해서 적의 측면을 압박하라고 지시하십옵소서. 그렇게 된다면 지금 이곳에서의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옵니다. 코린트의 정예를 완전히 궤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옵니까? 미네르바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또다른 노 장군이 나서서 앞의 인물이 짚은 지점보다 훨씬 더 왼쪽 부분을 짚으며 말했다. 그것보다는 뒤로 깊숙이 진격해서 아직 준비 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동쪽의 관문 쟈크렌 요새를 점령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옵니다. 본국에서 이곳 정면을 돌파한다면 적이 다음 전선을 유지하기에 쟈크렌 요새만큼 좋은 곳은 없사옵니다. 대 타이탄 공격 무기를 대량으로 보유한 거대 요새일 뿐 아니라 북쪽으로는 웜 급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의 둥지가 있고, 남쪽으로는 웜 급 그린 드래곤 그라시안의 둥지가 있사옵니다. 두 드래곤 영토의 경계점에 교묘하게 세운 요새이므로 포위 공격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또 그곳에서 너무 장시간 접전을 벌이면 두 드래곤의 분노를 살 수도 있사옵니다. 그리고 이 일대는 여덟 마리의 드래곤들이 집단 서식하는 곳이므로 그곳을 피해 우회하려면 너무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옵니다. 전략상 최고의 요충지라 할 수 있지요. 적들의 대비가 아직 갖춰지지 않았을 지금이 그곳을 공격하는 데 적기이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 중년의 장군이 나서서 그의 의견을 지지했다. 로젠나르 자작님의 의견이 옳사옵니다. 쟈크렌 요새가 점령된다면 적의 보급로는 드래곤들의 둥지를 우회해야 하므로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퇴로 확보 및 보급로의 유지가 힘든 적들은 자연히 후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미네르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로젠나르 자작의 의견이 가장 좋은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뒤쪽에 서 있는 미녀를 보며 말했다. 마리나. 미네르바의 부름에 뒤쪽에 조용히 서 있던 아름다운 여자가 얌전을 배며 다소곳이 답했다. 매우 젊어 보였지만 실은 60세가 넘은 6싸이클 급 궁정 마법사였다. 예, 공작 전하. 알렌 방어군에게 지시해라. 쟈크렌 요새 부근에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좌표를 알려 주고 즉각 투입하라고 일러라. 예, 전하. 그렇게 이르기는 하겠지만 도착 지점에 수신 마법진이 없다면 실력이 낮은 크라레스의 마법사들로서는 대규모의 기사단을 공간 이동시키기 힘들 것이옵니다. 마법사에게 들으니 후방을 몇 대의 적 타이탄에게 기습 당한 탓에 본국에서 지원해 준 마법사들을 모두 잃었다고 하옵니다. 지금 자국에서 마법사를 몇 명 데려다가 통신망을 새로이 구축한 모양이던데, 그들의 실력으로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옵니다. 미네르바는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며 다른 가능성을 찾기 위해 지도를 쳐다보며 말했다. 맞아, 그걸 생각하지 못했군. 음, 어디 보자. 쟈크렌 요새 부근에는 강이나 호수 같은 공간 이동에 적당한 곳이 없군. 예, 전하. 그렇다면 수고스럽지만 자네가 해주지 않겠나? 기사 몇 명를 붙여 줄 테니 그곳으로 먼저 가서 수신 마법진을 설치하고 그들을 불러들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전하.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의 추적 뭐 알아낸 것 있어? 왕궁 앞을 기웃거린 게 며칠인데 도저히 알 수가 없잖아. 그녀 비슷하게 생긴 소녀도 못 봤다구. 제임스가 투덜거리는데도 불구하고 까미유는 느긋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거야. 한 번씩 그녀의 하녀가 심부름하러 나오거든. 이때 오스카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말했다. 미친 녀석. 전에도 그녀를 납 , 아니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숱한 고생 끝에 겨우 왕궁에 있는 것을 알아냈는데, 기사도 아닌 경비 무사 따위가 어떻게 알겠어? 까미유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오스카가 헝클어진 노랑 머리카락을 긁적이다가 크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으아아암. 그래도 한번 물어 볼 수는 있잖아요. 그들은 이곳에 도착한 후 까미유의 의견대로 왕궁 정면에 위치한 여관의 제일 높은 층을 차지하고 앉아 교대로 감시하며 기다렸다. 마법사인 리카의 도움으로 까미유의 기억 속에 있던 그녀와 시녀인 묘인족 소녀, 그리고 그녀의 호위 무사의 인상 착의를 모두 알아낸 후 밤낮으로 창문에 붙어 앉아 같은 얼굴의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린 게 며칠째. 좁은 방안에서 갇혀 있다 보니, 이제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제기랄.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며칠만 더 기다리면 나올지도 몰라. 전에도 한 번씩은 그녀의 물건을 장만하러 세린이라는 묘인족 소녀가 나왔었거든. 하지만 까미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스카는 방을 나서며 투덜거렸다.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죽어도 못 하겠어요. 으아악! 스트레스 쌓여. 밤새도록 정문을 감시하느라 아침에서야 잠이 들었던 오스카가 아직도 잠에서 덜 깬 후줄근한 모습으로 정문 경비 무사에게 털레털레 걸어가는 것을 보며 까미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래 봐야 헛수고라니까. 그녀는 이곳 왕하고 뭔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게 분명해.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니까, 그 녀석 고집은 . 제임스도 까이뮤의 말에 동조했다. 사실 그렇게 간단하게 일이 풀릴 거였다면 뭐 하려고 이곳에 틀어박혀 며칠씩이나 밤을 새며 감시를 했겠는가? 관둬. 아무 것도 모르는 경비 무사한테 욕이나 한마디 듣고 열 받아 씩씩거리며 돌아오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임스의 말대로 오스카가 씩씩거리며 올라왔다. 뻔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제임스와 까미유가 그를 바라봤지만, 오스카는 열 받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거봐요. 물어 보자고 했잖아요. 그 녀석에게 다크 크라이드라는 남작을 모르냐고 물었죠. 나이는 16세 정도 되는 금발에 아름다운 소녀라고 말했더니, 곧장 무슨 관계냐고 묻더군요. 나는 오빠라고 답해 줬죠. 그랬더니 그놈 이상하게 덜덜 떨면서 바로 가르쳐 주던데요. 그 말에 까미유와 제임스는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뭐라고? :그녀는 지금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전하가 되었고, 또 치레아의 총독 나리가 되셨기에 지금 치레아에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녀석 왜 갑자기 그렇게 덜덜 떨면서 말했는지 이해가 안 되네 . 물론 경비 무사가 덜덜 떤 이유는 그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제공한 당사자가 매우 오래 전에 이곳을 방문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무시무시한 마법으로 다수의 경비 무사들을 통구이로 만들어 버렸고, 나중에 그 뒷수습을 하기 위해 황제에게 보검을 선물했었다. 황제조차도 고개를 조아린 인물이 그녀의 아빠 라고 찾아와서 휘저어 놨으니, 이번에는 오빠 라는 인물이 찾아와서 왕궁을 아예 박살 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그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그녀의 매우 비밀스런 이름은 경비 무사들에게 자세하게 일러졌고, 찾아오는 인물에게 죽고 싶지 않다면 빨리 가르쳐 주라는 지시가지 덜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지시가 있었을 정도로 그녀의 옛날 이름을 알고 있는 외부인은 정말 극소수였다. 그들은 즉시 마법진을 통해 치레아로 날아갔다. 물론 치레아의 총독부가 위치한 도톤 시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강 위로 공간이동 했다. 모두들 생쥐 같은 몰골로 헤엄쳐 나오기는 했지만 일단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도착할 수는 있었다. 그런 다음 그들이 똬리를 튼 곳은 전과 마찬가지로 총독부 관저가 잘 보이는 여관의 가장 위층이었다. "이번에도 물어 보면 안 될까요? 그게 훨씬 더 빠를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짐을 풀면서 투덜거린 오스카의 말은 곧장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에 제일 먼저 뱉은 오스카가 경비무사에게 가야 했지만. 그러나 세 시간 정도 지나서 오스카는 싱글거리며 돌아왔다. 그곳에 찾아간 덕분에 매우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던 것이다. 왜 그렇게 그녀의 옛날 이름만 말하면 뻣뻣하던 사람들이 상세하게 가르쳐주고, 모든 것이 즉각 해결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느냐?" "예. 아주 쉽던데요. 가서 말했더니 곧장 이곳 총독 대리를 만나게 해주더라구요. 그 사람 말이 그녀는 지금 여기에 없고 크루마로 갔다고 하던데요? 아마 한 두 달 있으면 돌아올 거라면서 그때 찾아오시면 꼭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귀빈 숙소에 묵으시겠느냐고 정중하게 요청하는 걸 거절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죠. 모두들 아주 친절하더군요." 싱글거리면서 말하는 오스카를 보면서 제임스와 까미유는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갑자기 공작이 되어 권력의 전면에 나선 것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녀의 옛날 이름을 한 번 말했다고 해서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총독 대리라는 높은 위치의 인물이 즉각 만나주는 것도 이상했던 것이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어. 그건 그렇고 크루마에는 왜 간 거지? 그녀가 크루마에 갈 이유가 있나?" 제임스의 말에 까미유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글세. 알 수 없지. 그냥 가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이번에도 크루마 황실에 들어가서 크라레스에서 오신 다크 크라이드 남작, 또는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전하를 아십니까? 그렇게 물으라는 거야? 너 지금 제정신이냐?" 하지만 여태껏 자신의 말대로 모든 것이 풀리고 있는 것에 기분이 우쭐해진 오스카는 당당하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여태까지 그 이름 두 개만 대면 무조건 무사 통과였는데, 그쪽도 그럴지 모르잖아요. 자, 어쨌건 확률의 문제라니까요. 지금까지는 적중률 100%였잖습니까? 물론 다음에 실패한다면 67%로 떨어지겠지만 말이지요." "으이그. 그래, 네 녀석 소원대로 한번 해봐라." 이 단순 무식한 패거리들은 진짜 성질대로 그렇게 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자신들의 예언이 거의 적중되었다는 데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제임스 일행은 일단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그날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기사를 만났다. 그 기사가 물어 오자 오스카는 다소 버벅거리며 답했다. "예, 저, 그러니까 크라레스에서 ." 그런데 어느 정도 자신의 구미에 맞는 답이 나오자, 기사는 다짜고짜 오스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떠들기 시작했다. 상대는 한눈에 척 봐도 마법사 두 명과 기사 세 명이었다. 그런데다가 크라레스에서 왔다고 하니 복장은 약간 틀린 것 같았지만 살라만더 기사단에 네 번째로 파견되어 온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오, 크라레스에서 파견 오신 동맹국 기사 여러분이시군요. 3진이 도착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또 오셨군요. 그런데 황실 마법진의 좌표를 알려 드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리로 안 오시고?" '예리한 곳을 찌르는군' 하고 생각하며 오스카는 얼렁뚱땅 넘겼다. "헤헤 , 뭐 그럴 수도 있죠. 저희들은 볼일이 좀 있었기에 그쪽에 들렀다가 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다크 크라이드 남작, 또는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전하를 아십니까?" 오스카의 말에 상대 기사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파견군 사령관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진짜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 알다 뿐이겠습니까? 처음 그분께서 도착하셨을 때 제가 안내해 드렸었는데요. 귀국의 전폭적인 지지에 황제 폐하께서도 만족해 하고 계십니다. 언제 출발하시겠습니까? 지금 한창 코린트와 전쟁중이니까 빠른 것이 좋겠죠?" 오스카는 속으로 벌써 전쟁이 시작되었나? 하고 생각했지만 태연한척 겉으로 나타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렇죠." "그럼 즉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로니에르 공작 전하는 알렌 왕국의 국경 부근에 위치한 도시 카지마트 시 외곽에 계십니다. 카지마트 시에 반영구적으로 만들어 놓은 수신 마법진을 통해 급행해야하는 모든 물자와 인원이 공급되고 있죠. 그곳에 도착하신 후 카지마트 시장의 안내를 받으시면 공작 전하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제임스 일행은 거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세운 계획이었다. 그런데 워낙 전시(戰時)가 되다 보니 모두들 대충 자신의 상식선에 맞는 대답만 해주면 동료인 줄 착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기에 제임스 일행 자신들도 믿기 힘들 정도로 모든 일이 간단하게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크라레스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 하나만으로도 거의 무조건 통과에 가까운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쪽에서 병력을 파병한다는 것이 1급 비밀에 해당하는 극비였기에 가능한 사실이었다. 크라레스에서는 여태까지 3차에 걸쳐 35명, 31명, 16명을 보내 왔다. 그러니 또다시 다섯 명을 보내 오지 말라는 법은 없었던 것이다. 마리나 지오그네가 미네르바 켄타로아 공작의 특명을 받고 알렌 전선에 도착했을 때, 한 가지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것은 크라레스 쪽에서 파견되어 온 살라만더 기사단 단장이 자신들의 의도에 만만하게 응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작 전하. 마리나가 따지고 들자 크로아 백작은 콧수염을 비비 꼬며 난처한 듯 답했다. 원래 자신에게는 아무런 지휘권이 없는데 자신한테 따지고 드니 한편으로 열 받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난처하기도 했던 것이다. 저, 그게 말이외다. 이번 격전을 빨리 끝낸다고 총력전을 벌인 결과, 승리는 했지만 곧 움직일 수 있는 처지는 안 된다 그 말이오. 타이탄들도 많이 상했고, 그렇기에 복구되려면 시간이 필요하오. 또 기사들도 많이 지쳤고. 그건 사실인 것 같군요. 격전을 치러 냈으니 모두들 피곤한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곤한 기사들이 모두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마법진을 통해 파괴된 타이탄들을 크라레스로 운반하고 있는 것을 봤는데, 전리품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반출해도 되는 것입니까? 원칙상으로 따진다면 크루마에는 전리품에 대한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철이 된 타이탄이라도 그 가치는 엄청나게 비쌌다. 타이탄 한 대에 들어가는 귀금속의 양을 황금으로 따진다면, 등급에 따라 차이가 심하기는 했지만, 거의 6~8톤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나가 슬쩍 따지면서 통하기만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질문에 공작은 쉽게 걸려 들지 않았다. 노회하게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답하는 수준을 넘어서 오히려 역습으로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의 전과에 따라 타이탄을 나눠 가졌을 뿐이오. 그대들이 도와 준 것이 뭐요? 초전에 적 정찰대의 움직임을 저지하지도 못하고 전멸 당한 기사들을 말하는 것이오? 아니면 그 때문에 후방 기습을 당해 건물이 박살 나며 몽땅 깔려 죽은 마법사들을 말하는 거요? 귀국에서 이번 전투에 도움을 준 것은 하나도 없었소. 마법사들이 몽땅 죽어 버린 덕택에 휘하 기사단들과 연락이 되지 않아 엄청난 고생만 했었소. 마리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건 , 마법사들을 보호하지 못한 귀국의 책임이 아닌가요? 그렇게 책임을 덮어 씌우지 마시오. 만약 귀국의 정찰대가 놈들의 움직임을 제때 파악만 했었어도 그렇듯 어이없는 기습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요. 상대가 논리 정연하게 따지자, 마리나는 슬쩍 후퇴하여 다시금 처음에 토론했던 논제로 돌아갔다. 좋아요. 지금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사소한 전리품 때문에 공작 전하와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적 타이탄 대 부대를 괴멸시킨 이 여세를 몰아 쟈크렌 요새를 점령해야만 해요. 지금처럼 좋은 시기는 없습니다. 하지만 공작의 대답은 여전히 시큰둥한 것이었다. 그렇게 점령하고 싶으면 귀국 기사단을 동원해서 해보시오. 본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분명한 것은 부하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한 다음 움직이기 시작할 거요. 그렇게 된다면 바실리 시에 집결해 있던 적의 대부대가 도망 친 후일 겁니다. 그리고 놈들도 이쪽 방면에 새로운 기사단을 배치할 것이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면 될 일. 그때쯤 되면 내 부하들도 휴식을 취하고, 새롭게 재편성된 후일 거요. 또 바실리 시에 집결했던 녀석들은 코린트의 군대가 아니라 코린트 동맹국에서 보낸 군대니까 코린트가 질 것 같다고 생각되면 자국으로 돌아가겠지. 본인은 쓸데 없이 살육을 하고 싶지는 않소.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자 슬그머니 화가 난 마리나는 이제 강압적인 방법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크라레스 따위의 작은 약소국 공작이 크루마 같은 강대국의 황실 마법사에게 이따위로 대꾸를 한다는 것 자체가 평상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귀국에서 이렇듯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저는 이 사실을 미네르바 공작 전하께 보고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귀국에 어떤 불이익이 돌아가게 될지 생각해 보셨나요? 하지만 그녀의 강압적인 위협에도 공작은 코방귀를 뀌며 답했다. 흥! 생각해 봤소. 귀국의 정보국에서 본관에게 적 타이탄 수가 몇대라고 알려 줬었소? 300대라고 알려 줬소? 아니면 170여대 정도로 서로 비슷한 전력이니까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며 열심히 싸우라고 알려 줬소? 두 배에 이르는 적들과 사투를 벌여 승리를 얻은 것 하나만으로도 본국은 귀국에 최대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런데 거짓말이나 해대며 본국을 우롱했던 귀국에서 협조, 비협조를 운운할 위치인가요? 마리나는 공작의 말에 일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공작의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의 계획은 원래 동맹국의 부대를 이곳에 배치해 시간만 대충 끌어 주기를 바랐기에 더 이상의 증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이곳에 증원할 부대까지 모두 중앙에 배치해서 중앙을 뚫고 나가면서 적의 주력을 격멸할 계획이었는데 오히려 그렇게 증언해 좋은 중앙 부대는 진격도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전멸당할 것이 확실했던 부대는 승리를 거뒀으니 . . 마니나의 말문이 막힌 상태에서도 공작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귀국에서 그렇듯 우리를 이용해 먹고 버리려고 했기에, 본국 또한 귀국에 대한 태도를 달리할까 궁리중이오. 지금이라도 우리가 코린트의 편을 든다면 코린트는 아마도 미란 국가 연합과 귀국 영토의 전체를 차지하는 대신 크로나사 평야를 우리에게 돌려줄지도 모르지. 코린트로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꿈에도 그리는 바다를 얻게 되는 것은 물론 영토도 더욱 넓어지게 될 것이며 본국으로서는 여태까지의 숙원이었던 크로나사를 되찾는 것이니 양국이 다 만족할 수 있지 않겠소? 공작의 기막힌 공격에 마리나는 화를 낼 입장도 아니었다. 공작의 말은 그녀가 생각해 봐도 모두 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또 약소국의 공작 주제에 뭘 믿고 큰소리를 치고 있는지 이해할 수도 있었다. 사실 지금 전선에서 양국의 힘은 거의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300여 대의 적 타이탄을 전멸시킨 기적을 낳은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주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자가 결정날 가능성까지 있을 정도였다. 어, 어떻게 동맹국의 입장에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공작 전하. 당황한 어조로 마리나가 따지고 들자 공작은 퉁명스레 답했다. 처음부터 불이익 어쩌구 하면서 본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당신이오. 마리나는 속으로 이를 갈며 마지못해 사과해싿. 그것은 , 그것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는 받아드리겠소. 그러나 귀국의 요구는 받아들이지 못하겠소. 살라만더 기사단은 내가 원할 때까지 이곳에 주둔하게 될 거요. 귀하와 귀국의 태도로 미루어 봤을 때, 우리가 피를 쏟으며 싸워 준다고 하더라도 크로나사 평야를 돌려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오. 본관은 이번 전쟁에서 우리의 전력을 최대한 유지해 두는 것이 미래를 위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고, 또 그렇게 실행할 생각이오. 그러니 그렇게 알기 바라오. 나가 보시오. 본관도 할 일이 매우 많소. 완벽한 축객령(逐客令)이었다. 서류 더미로 시선을 돌려버리는 공작의 뒤통수를 노려봤지만 더 이상 자신에게 남은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라레스에서 대부대를 이끌고 파견 나온 공작은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을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공작을 향해 약간의 경고성 협박을 한 것이 오히려 더욱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마리나는 공작의 방을 나서기는 했지만,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듀에이트 180명, 기사 215명, 수련 기사 53명, 신관 12명, 마법사 34명, 수련 마법사 68명으로 이루어진 철십자 기사단은 카로사 9기, 로메로 26기, 크라메 52기, 메지오네 13기로 이루어져 타이탄 총 수 100기를 보유하고 있는 코린트의 중앙 기사단 중 세 번째로 강력한 힘을 지닌 기사단이었다. 물론 과거 마법사 길레트 지오네가 크라메 8기를 이끌고 나가 행방 불명되었기에 지금은 92기로 전력이 다소 감소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코린트는 국토가 넚은 만큼, 그에 비례하여 국경선도 길었다. 그래서 매우 방대한 군사력을 국경선에 고정적으로 배치해야만 했다. 또 영토내의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드래곤이 사는 지역의 주변에는 특히 군대가 주둔하고 있을 필요성이 있었다. 그 이유는 몬스터 때문이었다. 드래곤은 웬만큼 시끄럽지 않다면 자신의 영토 내의 침입자를 눈감아 주는 경향이 있었기에 몬스터들이 떼거리로 살고 있다. 이 몬스터들은 돌아다니면서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다가, 군대가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추격해 오면 드래곤의 영토로 도망 치는 것이다. 드래곤은 자신의 영토 안에서 전쟁을 벌이는 등 시그러운 행위를 하는 것은 참지 못했기에 드래곤의 영토 안에서의 몬스터 토벌은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드래곤이 사는 영토 부근에 군대를 주둔시켜 그들이 민가에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린트에서는 강력한 몬스터들이 출몰하거나, 또는 타국과 마주하고 있는 변방의 국경선에는 동십자 기사단을 배치했다. 동십자 기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111기의 메지오네는 출력이 0.7밖에 되지 않았기에 대 타이탄 전투를 수행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오우거(Ogre) 같은 대형 몬스터를 사냥하는 데는 그만이었다. 그리고 군의 전략상 요충지에는 철십자 기사단이 주둔하게 된다. 그들은 코린트의 국경선을 열 토막으로 분할해 그 안에 열 곳의 요새를 건설하여 주둔하면서 각자가 맡은 구역을 침범하는 타국의 군대를 일차적으로 막아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막아내고 있을 때 10개 주요 도시에 주둔하는 은십자 기사단이 일차적으로 소환되고, 만약 그들로 부족하다면 수도인 코린티아 시의 외곽에 주둔하는 금십자 기사단이 투입된다. 물론 상대가 이번처럼 강적인 경우에는 수도 내에 주둔하는 근위대까지 투입되게 되지만 근위대까지 필요로 할 정도로 강력한 적은 거의 없었다. 여태껏 철십자 기사단의 각 분대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이 맡은 구역을 이탈하지 않았었다. 국경선을 지키는 핵심 부대가 철십자 기사단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모두 다 코린티아 시로 집결되었다. 560명의 기사, 마법사, 수련 기사, 수련 마법사, 신관으로 구성된 그들은 자신들의 하인이나 하녀들까지 합쳐서 1,500명에 이르는 대 부대를 이루고 있었다. 모든 준비는 다 끝났사옵니다. 지금 가시겠사옵니까? 부하의 물음에 키에리는 마시던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느긋한 어조로 답했다. 아니, 조금 더 기다리기로 하지. 놈들의 행동에 대해 계속 보고가 들어오고 있는데 . 그게 좀 이상하단 말이야.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아. 키에리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부하는 키에리의 말에 대답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잠시 궁리했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다행히 오래가지 않았다. 키에리가 다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왜 살라만더 기사단은 움직일 준비를 하지 않는 거지? 놈들이 움직이기만 하면 철십자 기사단을 알렌 쪽으로 투입하여 가므에 모인 놈들의 주력을 협공으로 묵사발 내놓고 쟈크렌 요새는 나중에 탈환하면 되는데 말이야. 그러시다면 그 타이밍을 노리고 계시는 것이옵니까? 그렇지. 그런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어. 놈들은 이상하게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이렇게 되면 전쟁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데 말이야. 알렌에 모인 놈들,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영 찜찜하구먼. 이때 밖에서 한 장교가 들어오며 말했다. 발렌시야드 기사단이 도착했사옵니다, 공작 전하. 장교의 말에 구겨져 있던 키에리의 안색이 환해졌다. 언제나 키에리의 영지인 발렌시아드 공국을 떠나지 않던 발렌시아드 기사단의 도착은 키에리에게 많은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현재 시점에서 만약 적의 살라만더 기사단이 수도를 기습한다면 키에리가 이곳에 꼭 있어야만 상대할 정도로 철십자 기사단의 전투력은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겨우 열 대에 불과했지만 미노바-P(Powerful)형을 보유한 발렌시아드 기사단은 키에리가 오랜 세월 공들여 키워온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도착한 지금, 발렌시아드 기사단과 철십자 기사단을 뭉친다면 웬만한 기사단의 공격쯤은 어느 정도 버텨낼 수 있으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발렌시아드 기사단은 코린트로부터 반즘 독립된 발렌시아드 공국이라는 국가의 기사단이다. 물론 영지를 하사한 것도 황제였고, 또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타이탄을 공급해 준 것도 황제였다. 하지만 공작의 영지가 공국(公國)이라는 형태로 완전히 분리되었을 경우, 별개의 국가와 거의 비슷한 취급을 받게 된다. 키에리가 발렌시아드 공국을 영지로 하사받은 후 황제로부터 기사단의 창립 허가를 받아 냈을 때, 키에리의 오랜 친구였던 그라세리안 코타스는 코린트의 주력 타이탄 미노바를 조금 더 향상시킨 미노바-P형을 제공했다. 엑스시온은 미노바보다 훨씬 강력한 1.5를 붙였고, 외장 장갑도 매우 호화롭게 제작했다. 발렌시아드 기사단은 전투만을 담당해야 하는 일반 기사단과 달리 키에리의 친위 기사단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부 벼대나 2차 장갑까지는 미노바의 것을 그대로 붙였지만, 가장 외곽에 붙는 1차 장갑의 모양에 신경을 많이 써 준 것이다. 겉모양이 꽤나 화려해 도저히 미노바라고 생각되지 않는 타이탄의 외부 장갑에는 푸른색 늑대의 문장이 붙어 있었다. 로젠은? 예. 후작 각하께서는 조금 있다가 오신다는 연락이옵니다. 장교의 말에 키에리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드디어 도착했군. 빨리 오라고 전하게. 옛, 전하. 장교가 밖으로 나간 후 부하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공작을 향해 말했다. 전하, 발렌시아드 기사단까지 투입하실 생각이시옵니까? 그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크루마 놈들에게 푸른 늑대의 문장을 드러낼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부하의 말에 키에리는 퉁명스레 답했다. 안 될 이유는 없지 않겠나? 하지만 전장의 병사들이 동요할까 두렵사옵니다. 이제 더 이상 본국의 고급 타이탄은 바닥이 났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사옵니까? 발렌시아드 기사단은 창단 이래 20여 년간 단 한 번도 발렌시아드 공국을 떠난 적이 없었는데 . 키에리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쯧쯧. 내가 그걸 만든 것은 휘하에 두고 폼이나 재기 위한 것이 아닐세. 유사시에 써먹기 위해 그들을 훈련시킨 것이지. 그 녀석들을 아직 전쟁터에 투입시키지 않은 것은, 그들을 써먹을 만큼 강력한 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야. 모두들 내가 오랜 시간 공들여 키운 기사단들이니 딴 녀석들보다는 그래도 믿을 수 있는 놈들이지. 그렇다면 그들을 부른 것은 철십자 기사단의 부족한 파워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옵니까? 그렇다네. 미네르바와 다크의 신경전 제임스 일행은 일단 알렌 왕국의 변방 도시 카지마트 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들은 마법진에서 모습을 나타내자마자 수십 명의 주민들에게 둘러싸여 환영을 받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이들이 오는 소식을 접한 카지마트 시에서는 환영 행사에 동원할 시민들을 급히 끌어모았다. 시민들은 급히 모인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역시 급히 장만한 꽃잎을 동맹군(?)에게 뿌리며 환영했다. 다행히 동맹군이 몇 명 되지 않았기에 얼마 모으지 못한 꽃잎으로도 성대하게 환영식을 끝마칠 수 있었다. 동맹군에 대한 카지마트 시의 환영이 예전에 1진이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열렬했던 것은 당연했다. 토란, 가므, 알렌, 세 왕국에서 전쟁이 벌어졌지만 적군을 상대로 승리를 얻어낸 것은 오직 알렌 방면의 동맹군뿐이었다. 토란과 가므의 전투는 기사단들끼리의 대격전으로 시작하였으나 서로가 월등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기 힘들어지자 각종 전술을 동원하여 우회 기동을 실시, 곳곳에서 산발적인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방과 후방에서 계속되는 격전으로 인해 민가들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고, 아울러 수많은 시민들이 후방으로 피난하는 소동까지 벌이고 있었다. 다른 나라들이 모두 이런 상황인데오 유독 알렌 왕국만이 전화(戰禍)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해 보였던 동맹군이 국경에서 적을 막아낸 덕분이었다. 제임스 일행은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민들에게 떠밀려 강당에 마련된 회식의 주빈이 되어야 했고, 간단하게 벌어진 환영 무도회에서 춤까지 춰야만 했다. 물론 정복 따위는 착용하지도 않은 약식 무도회였다. 그런 후 시장 일행은 전선을 향해 떠나가는 이 혈맹의 동지들에게 안내자와 함께 좋은 말까지 장만해 주며 성대한 전송을 해줬다. 나 원 참,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오스카가 제임스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그걸 어느 순간에 안내자가 들었는지 순박한 미소를 듬뿍 지으며 답했다. 이게 다 기사님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입죠. 처음 이곳에 도착하신 분들은 시장님께 차가운 대접을 받았었는데, 그분들이 승전을 거두자 생각이 바뀐 거죠. 제임스는 경악했지만 억지로 표정을 누르며 말했다. 그렇다면 코린트의 군대를 잘 막아내고 있는 모양이군요. 막아내는 정도가 아닙죠. 기사 분들은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오늘 아침 대회전에서 동맹군이 대승리를 거뒀다지 뭡니까? 상인들에게 듣자 하니 코린트의 군대가 엄청난 숫자였다고 하던데,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지요. 이제 보니 그때 붉은 도마뱀을 그려놓은 로브를 입은 분들하고는 소속이 다르신 모양입죠? 제임스는 일부러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정도로 답을 대신했다. 잘못 말을 했다가는 들통 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 로브 차림의 분들은 조금 전방에 주둔하고 계시고, 여러분들처럼 옷을 입고 계신 분들은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계신데요. 그 로브를 입고 있는 분들에게 데려다 주게나. 일단 그곳에서 신고를 한 다음 소속지 배정을 받아야 하니까. 능청스레 답하는 까미유에게 안내인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이쪽으로 돌아오시겠구먼요. 저쪽에 보이는 저기, 연기 나는 곳 있잖습니까? 나중에 인사가 끝난 다음 저기로 가시면 될 겁니다요. 고맙네. 뭘요. 기사님들이 도와주시는 덕분에 저희들이 평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건뎁쇼. 제임스 일행은 붉은색 도마뱀 문장이 그려진 로브를 입고 있다는 기사단에 가까워진 것을 알고 안내인을 돌려보냈다. 물론 안내인이 자신들을 의심히지 않게끔 자신들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아 미안하다는 둥의 말로 넘겼고, 아이들 선물이나 사 주라며 기필코 돈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는 안내인에게 약간의 돈가지 쥐어 줬다. 안내인이 매우 친절하고, 용맹스러운 우방의 기사들이라고 생각하며 희희낙락하여 돌아가는 것을 살핀 후 그들은 곧 안전할 듯한 곳으로 숨어 들어가 본국과의 연락부터 시도했다. 아무래도 본국의 패전 소식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예, 여기는 , 아니, 리카님 아니십니까? 상대방 마법사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자 리카는 대충 답한 후 재빨리 용건을 말했다. 응, 현재 전황을 알려 줘. 재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소식을 알고 싶어하신다. 수정구에 나타난 마법사는 리카 뒤에 서 있는 발렌시아드 후작을 알아보고는 곧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후작 각하. 인사는 됐고, 빨리 소식이나 전해 주게. 예, 각하. 즉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현재 토란과 가므 왕국으로 침공해 들어간 군대는 적의 강력한 저지를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루 동안에 토란과 가므 양쪽에서 140여 대의 타이탄이 파괴되었고, 300여 명이 넘는 기사들이 전사했습니다. 현재 제1, 2근위대가 가므전선에 파견되어 적을 막고 있는데, 전황은 상당히 좋지 못한 편입니다. 세상에, 흑기사들이 전부 다 투입되었다는 말이야? 예, 그렇습니다. 현재 가므 방면의 총 지휘는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 하고 계십니다. 크루마도 그곳 전선에 레디아 근위 기사단을 투입하여 응전하는 중입니다. 그곳은 대충 알겠고, 알렌 방면으로 침공해 들어간 군대는? 예, 유감스럽게도 그곳 전선에서 대패했습니다. 현재 철십자 기사단과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소집되어 알렌 방면으로 투입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 바실리 시에 집결했던 보병과 기병 사단 일부는 가므 방면으로 돌려졌고, 나머지는 쟈크렌 요새로 후퇴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파견군 사령관 지오르네 후작은? 전사하셨습니다. 정말 최악이군. 그렇습니다, 각하. 하지만 곧 호전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첩십자 기사단과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거느리고 가실 분은 발렌 시아드 대공 전하시니까요. 세상에, 아버님이 직접 가실 정도로 사태가 위중한가? 예상 외로 상대의 군사력이 강력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나서신 이상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알겠네. 제임스는 리카에게 통신을 끊으라고 지시한 후 다음 행동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까미유의 말에 제임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버님은 코타스 전하의 시신이라도 찾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잖아. 우선, 그녀를 찾아야지. 일단은 저 붉은 도마뱀 기사단을 감시해 보자. 그런데 하필이면 기사단이야. 전시에는 감시하기 제일 어려운 게 기사단인데. 어쩔 수 없지. 이제부터 조심해야 해. 전시니까 아마도 저 일대에는 정찰조들이 쫙 깔린데다가, 마법 트랩(trap)들도 엄청나게 깔려 있을 거야. 모두들 조심하면 별일 없을 거야.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바로 그날 밤, 정찰이나 경계를 맡은 인물들과 당직을 서는 마법사들 외에는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한낮에 있었던 전투는 모두의 진을 배 놓기에 족할 정도로 대격전이었다. 그날 밤 당직을 서고 있던 여자 마법사는 수정 구슬이 환하게 빛이 나는 것을 느끼며 가벼운 졸음에서 깨어났다. 여기는 살라만더 기사단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수정 구슬에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갈색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아름다운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수정으로 깍아 만든 조각상처럼 차가웠다. 귀국의 공작 전하를 바꿔 주세요. 정말 대단한 미인이라고 생각하며 여자 마법사는 약간 주눅이 드는 심정으로 말했다. 귀하의 소속과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께서는 취침중이시니 내일 아침 일어나시면 곧장 전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마법사의 정중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투덜 거리며 억지를 부렸다. 지금 좀 전해 줬으면 좋겠군요. 내 이름은 미네르바 켄타로아. 지금이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때인데, 취침을 하고 있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요. 미네르바 켄타로아라면 군대에 관계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본 사람이다. 그만큼 그녀의 실력과 직위는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 마법사는 자신의 언동에 좀더 조심하며 말했다. 켄타로아 공작 전하셨군요. 사령관 전하께 실례라는 것을 잘 알지만,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취침을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연락이 왔었다고 전해 드리겟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조심스런 말에도 불구하고 미네르바는 화부터 벌컥냈다. 도대체, 언제부터 크라레스 공작 따위의 간덩이가 그렇게 커졌지? 겨우 오합지졸 타이탄 300대 정도 파괴한 것 가지고 기고만장하다니. 기다려라, 내가 그쪽으로 직접 가겠다. 망할 녀석들! 미네르바는 그것이 결코 위협용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잠시 후 여 마법사에게 증명해 줬다. 살라만더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숙소 앞이 번쩍하더니 네 명의 기사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갑자기 사람들이 나타나자 숙소 주변 사방에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알람(alarm)마법에 의한 경고음이 울려 퍼졌고, 숙소 안에서 대충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당황하여 허둥지둥 튀어 나왓다. 그리고 외곽 경비를 서기 위해 파견된 기사들은 벌써 자신의 타이탄을 꺼내 들고 침입자들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난리를 부리고 있는 상대 기사들은 본 체 만 체하고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허둥지둥 당직실에서 쫓아나온 여 마법사의 멱살을 그러쥐며 미네르바는 으르롱거렸다. 방금 통신을 받았던 계집이 바로 너지? 빨리 그 망할 공작 녀석에게 안내해. 미네르바는 너무나 분노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녀 일행을 제지하기 위해 달려나온 기사들이 포진한 상황을 재빨리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그녀를 포위한 상황이었지만, 기사들의 수는 그녀가 마법사에게 안내를 받아 가고 있는 방향의 반대쪽에 더 많이 있었다.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반대편 쪽에 위치한 건물 주위에 기사들이 집중 배치되고 있었다. 쾅! 미네르바는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수고를 생략하고, 발로 곧장 문을 차 버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침대에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있을 줄 알았던 공작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책상 위에 앉아서 열심히 서류들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쓰고 있는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미네르바는 그 모습에 노기가 한풀 꺾여 처음보다는 차분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가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인가? 그렇습니다. 모습을 보아하니 켄타로아 공작 전하이신 모양이군요. 그쪽에 앉으시지요. 보시다시피 처리해야 할 서류가 많아서 말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미네르바는 자신을 향해 얼핏 시선을 돌렸을 뿐, 또다시 서류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공작을 향해 분노가 치밀어오름을 느꼈다. 감히 크라레스 같은 약소국의 공작 따위가 이렇게 무례하게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못 기다리겠다. 도대체 기사단을 진격시키지 못하겠다는 이유가 뭔지 들어 보기로 하지. 빨리 말해. 공작 전하가 보기에 그렇게 대단한 이유는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쪽도 나름대로 열심히 귀국을 돕는 입장이니 그렇게 시시콜콜 따지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뭣이! 미네르바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며, 무의식중에 손이 검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검을 뽑지 못하고 있었다. 한 가닥 남아 있는 이성이 그것을 제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루마 최악의 적인 코린트를 앞에 두고 자중지란은 절대 금물이었다. 이게 그대들을 도와 주는 국가에 대한 예의인가요? 지금 본인은 이대로 군대를 철수할까 말까 매우 궁리중에 있소. 첫 전투의 피해도 대단했고, 소기의 목적하던 막대한 양의 전리품도 얻었소. 여기 쌓여 있는 것이 피해 보고서요. 그리고 저기 쌓여 있는 것이 전리품 목록이지. 또 저쪽에 쌓여 있는 것은 포상자들의 명단 및 보고서요. 또 저것은 금일 소모된 무기 목록이고, 저건 추가 지급 요청서들이오. 오늘 단 한번의 전투로 최소한 이틀 밤을 새워야 할 정도로 많은 서류가 쌓였단 말이오. 공작의 빈정대는 듯한 말투에 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미네르바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만약 공작이 미네르바의 부하였다면, 아니 최소한 동맹국의 지휘관이 아닌 동맹국의 기사쯤만 되었다고 해도 벌써 두 토막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서류나 정리하겠다고 여기서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 지금이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때인지도 모르는데? 멍청한 네놈 때문에 벌써 코린트의 철십자 기사단은 집합을 완료한 상태야. 또다시 이곳에서 헛되이 대규모 전투를 되풀이하고 싶나? 열받아서 외치는 미네르바에게 공작은 퉁명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오. 그럼 누가 알지? 네 녀석의 기사단이 쟈크렌 요새를 점령하는 것은 둘째치고, 적 중앙 부대를 측면 공격만 해줬어도 오늘 대승을 거둘 수 있었어. 네 녀석 때문에 얼마 전까지도 토란과 가므 왕국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고 수많은 기사들이 죽었다.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거야? 그것 또한 내가 알 바 아니오. 내 책임이 아니니까. 이 순간, 미네르바의 몸 속에 있던 뭔가가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정말 뱃속까지 썩은 놈이군. 그 순간 그녀의 허리에 달려 있던 고색창연한 보검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뽑혔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아래로 내리쳐 저 얄미운 공작의 몸통을 분리시키지 못했다. 아직 그녀의 이성이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목에 검날의 싸늘한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 어느새? 미네르바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뒤에는 누구도 있지 않다고 자신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실지로는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누군가가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검을 집어 넣어. 미네르바의 뒤에서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차갑게 들려 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거역하기 힘들 정도의 힘이 담겨 있었다. 스르릉 소리가 나도록 천천히 검을 다시 검집에 넣은 미네르바의 이성은 어느샌가 맑아져 있었고, 그때쯤에야 누군가가 뒤에 서 있다는 가벼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상대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놀라울 정도의 고수였다. 미네르바는 몸을 천천히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도저히 검을 쓸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 가녀린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미네르바는 우선 상대가 취하고 있는 자세가 상당히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검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방비 상태 같지도 않았다. 허점이 많은 것도 같았고 완벽한 수비 자세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감히 모험을 걸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흥분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바로 등뒤까지 접근해 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이어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이한 빛을 뿜고 있는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특이하게도 황금빛이 나는 얄팍한 검. 웬만큼 아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라면 묵직한 검을 선호한다. 이미 마나를 이용해 검을 다루기 시작하면, 검의 무게는 그렇게 큰 장애 요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처럼 얄팍한 검보다 훨씬 파괴력이 좋은 묵직한 긴 검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 미네르바는 상대의 검신에 새겨진 수많은 기하학적 주문을 볼 수 있었다. 모양 좋으라고 검에 저렇듯 엄청나게 많은 미세한 주문을 새기는 인물은 절대 없었다. 저것은 아마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새겨 놓은 주문이리라. 하지만 저렇듯 좁은 면적에 엄청나게 작은 글자로 수없이 많은 주문을 빽빽이 새겨 놓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걸 모두 다 새겨 넣기란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 황금색의 검. 검의 재료가 될 수 있는 황금색이 나는 금속은 의외로 숫자가 적다. 황금 같은 무른 금속으로는 당연히 검을 만들 수 없다. 그리고 일부 황금색이 나지만 잘 부서지는 금속도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황금색이 나면서도 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고 질긴 금속은 오직 미스릴과 골드 드래곤의 뼈뿐이었다. 물론 둘 다 엄청나게 가격이 바쌌고, 또 가공하기도 힘들었다. 저렇듯 희귀한 금속으로 만든 마법검의 소유자라면 결코 평범한 인물일 가능성은 없었다. 너는 , 누구지? 아마도 네가 이 밤중에 찾으러 온 사람이겠지. 싸늘한 소녀의 말에 미네르바에게는 언뜻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소녀는 들고 있던 황금빛의 검을 검집에 넣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봐, 발칸. 포도주나 주게. 혹시 브렌드가 있다면 더 좋겠고. 밤늦게 찾아온 손님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그녀의 말에 발칸 폰 크로아 백작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옛, 공작 전하. 거기에 앉아. 그래 뭘 따지려고 온 거지? 미네르바는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상대가 권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네가 진짜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이야? 내가 한 말에 대답부터 해. 묻는 것은 나야. 그리고 대답하는 것은 너고. 미네르바는 나이도 얼마 먹지 않은 계집 애가 자신에게 꼬박꼬박 반말 짓거리를 하자 슬그머니 화가 났지만 일단 참고 입을 열었다. 나이로 보나, 또 국력으로 보나 자신 쪽이 한 수 위였지만 현재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것은 자신이었다. 왜 진격을 않느냐 하는 거지. 지금이 절호의 기회잖아. 절호의 기회겠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나가면 본국의 피해가 너무 켜져. 나는 내가 맡은 기사단을 최대한 보존한 상태로 본국에 돌아가서, 지금쯤 황궁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을 그 빌어먹을 황제에게 돌려줘야 한다구. 이제 이해가 됐어? 빌어먹을 황제 라는 말이 나오자 미네르바는 슬쩍 자신 앞에 포도주 잔을 놓고 있는 발칸이라고 불린 사내를 훔쳐봤다. 하지만 그 사내는 으레 그렇거니 하는 생각인지 아무런 동요 없이 두 여자 앞에 잔을 놨다. 그런 다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또다시 서류 더미에 묻혀 버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거지? 그냥 이 자리에 눌러앉아 있겠다는 것은 설마 아닐 테지? 물론 아니지. 그 다음 일은 재편성과 휴식이 끝난 후에 생각하기로 하겠어. 그동안 그쪽에서는 피를 좀 흘리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되겠지. 이런 망할! 그렇게 되면 본국에서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게 될지 생각해 봤어? 오늘 하루만 해도 박살 난 타이탄이 80대를 넘었어. 내일은 또 얼마나 많은 타이탄이 박살 나고, 또 기사들이 죽을지 상상할 수도 없다구. 그건 그쪽 사정이지 우리 쪽 사정이 아니야. 처음에 하는 것을 보니까 그쪽은 여기서 대충 시간만 끌어 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안 그래? 나도 돌머리가 아니니까 속일 생각은 하지 마. 상대가 자신의 약점을 들고 나오자 미네르바는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랬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나는 처음 당신의 부탁대로 지금 대충 시간만을 끌어 주고 있어. 뭐 잘못되었어? 그건 . 아, 이쪽에도 머리 잘 굴러가는 인물들이 많으니가 변명은 하지 마. 너는 우익군을 상대와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맞췄지. 그리고 중앙군은 최대한 보강했고 말이야. 그러면서 이쪽은 엄청난 열세인데도 증원하지 않고 그냥 놔둔 것은 이쪽이 시간을 끄는 동안 중앙에 돌파하여 적의 좌익군을 협공, 전멸시키겠다는 의도 아니겠어? 그동안 우리는 적의 우익군이 우리를 돌파하고 중앙군을 노리는 것을 막아 주기만 해도 작전 성공이었잖아. 그렇게 되면 코린트 군의 주축인 주력이 무너진 이상 코린트의 동맹군은 자연적으로 와해되 거고 말이야. 매우 좋은 작전이지. 나는 그것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어. 나는 겨우 그 정도로 그쪽에서 배신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속이 좁지도 않아. 실력도 없는 것들을 동맹군이랍시고 우대하는 짓은 나도 못 하겠으니까 그쪽도 그건 당연할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우선 이쪽의 실력을 그대들에게 먼저 보여 줬어. 우리 쪽에서는 그따위 얄팍한 적들에게 농락당할 사람들이 아닌 진짜들을 보내어 그대들에게 진심으로 협조하고 있다고 말이지. 이제 그대가 나한테 자네들의 힘을 보여줄 차례야. 병력은 거의 엇비슷하니까 잘 해낼 것이라고 믿어. 그, 그런 . 설마 그것도 못 해내고 괴멸 당할 크루마라면 대 크라레스 제국 동맹국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봐야겠지. 알겠어? 조만간에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지. 상대의 말에 미네르바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태껏 자신은 크라레스가 과거 코린트와의 전쟁에서 완전히 힘을 잃은 약소국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크라레스가 자신들을 도와 주는 것 또한 능력도 없는 것들이 달콤한 환상에 젖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적당히 이용한 후 버리려고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일이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작고 나약하다고 생각했던 크라레스에게 대국인 크루마가 시험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한다면 크루마는 멸망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 전설의 타이탄 헬 프로네 다음 날 아침부터 재개된 가므 방면의 전투는 지독할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크루마는 코린트 중앙 기사단을 돌파하기 위해 모든 힘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미네르바로서는 지금 알렌 왕국에서 쉬고 있는 살라만더 기사단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새벽부터 벌어진 전투에서 별 성과가 없자, 미네르바는 미란 국가 연합에 압력을 가해 알렌 재편성을 끝마친 엠페른 기사단과 연합 기사단을 곧장 가므 쪽으로 끌어들였다.. 첫날 있었던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결과 그 둘을 합쳐도 36대밖에 안 되는 타이탄이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그들에게 동원 가능한 기사단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겨우 36대의 타이탄이었지만, 그들이 새로이 증원되자 크루마 연합군은 놀라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가므 왕국 전투에서만 상호간에 파괴된 타이탄이 거의 120대에 달하는 상태였다. 물론 타이탄의 질에서 월등한 크루마 쪽의 피해가 훨씬 작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거의 50대가 넘는 타이탄이 박살 났던 것이다. 그런데 코린트 쪽은 그 피해가 보충되지 않았지만, 크루마는 36대를 새롭게 수혈(輸血)받았으니 상호간의 힘의 균형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전세가 급격히 밀리기 시작하자 코린트로서도 그냥 방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수도에 끌어 모은 철십자 기사단을 선뜻 가므 전선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알렌 왕국에는 강력한 위력을 선보인 정체 불명의 살라만더 기사단이라는 적이 남아 있었다. 이 기사단이 어딘가로 투입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한 수도를 비워 둘 수는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코린트로서는 최후의 카드를 쓸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래도 가므 쪽부터 손봐 나가는 것이 순서인 것 같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버님. 네가 이곳을 책임 져라. 수도 방어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라. 옛. 한쪽에 떨어져서 힘을 키우고 있는 살라만더 기사단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도록 해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즉시 연락해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책임 질 수 있겠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보거라. 나는 가므 침공군에 합류할 생각이다. 천천히 문을 나서는 키에리를 바라보며 로젠은 물었다. 제임스와 까미유를 부를까요? 아마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아니, 그놈들까지 부를 필요는 없을 거야. 도 그 녀석들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아들에게 당부의말을 한 후 키에리는 옆에 대기하고 있는 마법사 죠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죠드. 예, 공작 전하. 지금 곧 가므의 전쟁터로 천 명 정도 되는 인원에 해당하는 무게를 공간 이동시킬 수 있겠나? 옛, 공작 전하. 곧 준비하도록 하겠사옵니다. 드디어 철십자 기사단을 투입하는 것이옵니까? 죠드의 말에 키에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나만 나갈 것이다. 현재 놈들의 살라만더 기사단이 움직이지 않는 한 철십자 기사단도 수도 방어를 위해 움직일 수 없다. 알겠사옵니다. 공작 전하. 푸캉! 팡! 쿵! 수백 대에 이르는 거대한 타이탄들이 집단전을 벌이고 있다. 거의 비슷한 동급의 기사가 엇비슷한 성능의 타이탄을 타고 싸운다면 승부가 좀처럼 빨리 끝나지 않는다. 아무리 상대를 치고 때리고 해도 거대한 방패로 막으면 그만. 서로간에 실컷 상대의 방패만 두들기면서 힘을 빼는 것이다. 코린트가 코란 근위 기사단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면 크루마 쪽은 레디아 근위 기사단과 라이오네 근위 기사단을 주축으로 한다. 코린트가 보유한 흑기사의 성능이 엄청나기는 했지만 크루마의 안티고네 또한 만만치 않다. 오히려 안티고네는 흑기사의 성능을 앞서고 있었다. 문제는 안티고네의 수가 흑기사보다 적다는 것이었는데, 크루마 쪽에서는 그 약점을 성능이 약간 떨어지는 에프리온과 새로운 주력 타이탄 카마리에의 숫자로 보충하고 있었다. 코린트는 숫자가, 크루마는 성능이 앞선 형태로 전선은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 평형도 무너지고 있었다. 쾅! 제길, 햄리쉬! 저 슬레이어 마크를 단 녀석을 막아. 빨리! 상대를 줄기차게 막고 있던 시커먼 타이탄이 무릎을 꿇어 버리자 리사는 재빨리 외쳤다. 자신 또한 한가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런 난전 속에서도 지휘자의 시각은 넓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상대는 그녀의 방심을 사양하지 않고 거대한 검을 날려 왔다. 그녀가 가까스로 방패를 이용해서 막자 쾅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흑기사가 충격에 흔들거렸다. 괴물 같은 타이탄 . 이쪽보다 훨신 뛰어난 파워에 더욱 육중한 덩치. 루엔 따위에게 이렇게 밀리다니, 정말 한심하군. 지크리트 루엔 공작과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 두 사람은 모두 마스터였고 타이탄 전투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1:1의 대결을 치르고 있었다. 아무리 집단 전술 기동에 따라 충돌한다고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각 타이탄들기리의 격투는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둘의 격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 저 멀리에는 양군의 사령관인 미네르바 켄타로아 공작과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갑자기 자신이 드래곤 슬레이어임을 표시하는, 킬러 마크를 붙인 타이탄 한 대가 흑기사를 해치우고 돌파해 들어왔다. 리사는 그것을 보고 햄리쉬를 그쪽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햄리쉬 또한 그 괴물 같은 덩치를 지닌 또다른 안티고네에게 막혀 어쩌질 못하고 있었다. 그 드래곤 슬레이어 마크를 단 녀석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흑기사를 가까스로 처치한 후 밀집된 흑기사들의 진형을 파고들며 리사를 협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루엔을 상대로 약간 우세한 공격을 퍼붓고 있던 리사는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가 기사들끼리의 접전에서는 1:1의 대결을 원칙으로 했지만, 서로 국가 존망을 건 싸움인 만큼 그따위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2:1 심지어 3:1까지의 격투도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리사는 둘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며 자신을 도와 줄 만한 동룍가 없는 지 살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미네르바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까뮤도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네르바가 워낙 뛰어난 검객인데다가 그녀가 가진 타이탄 또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수 위인 미네르바와 헬 프로네를 상대로 로체스터가 저토록이나 분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곳이 장애물이 많은 전장의 한복판인 덕분이었다. 제기랄. 하다못해 내 아들만 여기 있었어도 . 리사와 루엔의 검과 방패는 둘 다 푸르스름하고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것들기리 부딪칠 때마다 불꽃을 튕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시작해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다가, 갑자기 상대가 거의 40여 대의 증원까지 받아 힘차게 밀어 붙이자 균형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상대방은 성능도 우세한데다가 그 숫자 또한 밀리지 않는 타이탄을 보유하게 되었고, 그 전력을 이용해 끈질기게 밀어 붙이고 있었다. 리사의 타이탄은 양쪽의 협공을 받아 점점 더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흑기사의 두터운 장갑도 계속되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한도가 있었다. 어느 순간 리사가 루엔의 검을 방패로 막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 옆에 있던 킬러 마크를 붙인 타이탄이 얼마 되지 않는 좁은 틈을 비집고 검을 쑤셔 넣었다. 다행히 그 검은 2차 장갑을 뚫긴 했지만 그렇게 깊이 들어오지는 못하고 멈췄다. 흑기사가 반사적으로 몸을 살짝 뒤틀자 상대의 검이 쩡하는 소리를 내며 두 조각이 나 버렸다. 상대의 검이 바로 지척까지 뚫고 들어온 것을 알고 반사적인 행동을 한 리사와, 또 자신의 본체에까지 검이 박혀 들어와 잠시 마나의 흐름에 장애를 받은 타이탄. 이들이 순간적으로 방심 상태에 빠진 그때, 루엔 공작의 검이 아예 흑기사의 방패를 뚫고 들어왔다. 루엔의 검은 마나를 충분하게 간직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방금 전의 그 킬러 마크를 그린 타이탄의 검처럼 얕게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검은 순식간에 리사의 복부와 흑기사의 엑스시온에 치명적인 검상을 남긴 후 사라졌다. 쿵! 리사가 애용하던 흑기사가 쓰러졌을 때, 그녀의 가물거리는 시선에는 뭔가가 하늘 위에서 빛을 뿜으며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이 미네르바의 헬 프로네와 똑같이 생격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숨이 멈췄을 때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타이탄에 탑승한 채 공간 이동을 해온 키에리 발렌시아드는 자신의 타이탄이 안전을 휘해 지상에서 20미터즘의 높이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전황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 그 순간에 이곳 가므 침공군은 거의 붕괴 직전의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키에리의 헬 프로네는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밑에서 격투중이던 흑기사의 어깨를 밟고는 그대로 다시 도약했다. 그러면서 그 흑기사와 격투를 벌이고 있던 거대한 타이탄의 머리를 사정없이 발로 차 버렸다. 상대편 타이탄은 머리가 완전히 으깨진 채 뒤로 붕 떴다가 당에 처박혔다. 그리고 그제야 땅에 착지한 헬 프로네의 검은 희미한 빛을 뿜어 내는 것이 아니라 거의 불타 오를 듯한 빛을 뿜어 내기 시작했다. 불을 뿜어 내는 드래곤이 그려진 헬 프로네. 이것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다른 한 대의 헬 프로네가 모습을 드러내자 밀리고 있던 코린트 기사단의 사기는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코린트 전군(全軍)의 최고 사령관이자 최고의 검객이 타이탄을 이글고 직접 나타났는데 사기가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헬 프로네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두 대의 카마리에를 방패 채 두 토막 낸 후 리사를 해치우고 또다른 먹잇감을 찾고 있었던 루엔 공작과 드레곤 슬레이어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타이탄이 부러짐 검을 버리며 재빨리 뒤로 빠진 후 리사의 타이탄이 남긴 검을 줍는 순간, 루엔 공작과 키에리의 대결은 시작되었다. 안 돼! 미네르바는 자신이 아끼던 부하가 상대해야 하는 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경고를 보내며 자신이 키에리를 상대하려 했다. 하지만 까뮤는 그녀가 그쪽으로 달려가게 놔두지 않았다. 몇 시간에 걸쳐 자신을 이토록 고생시킨 상대를 순순히 놔줄 수가 없었다. 까뮤가 사력을 다해 미네르바를 잡고 있는 그때, 루엔은 상대 타이탄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상대는 왼팔의 소드 스토퍼로 루엔의 검을 막는 그 순간 검으로 루엔이 타고 있는 타이탄의 오른손을 가격했다. 불꽃이 튀며 안티고네의 오른팔이 검을 쥔 채 떨어져 나갔다. 오른손까지 날아가 전투 불능이 된 루엔은 재빨리 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검을 집어 든 드래곤 슬레이어가 루엔 대신 헬 프로네를 막아 섰다. 하지만 헬 프로네는 루엔을 향해 달려가는 그 여세를 죽이지 않고 바로 그 이글거리는 검으로 드래곤 슬레이어의 방패를 후려쳤다. 루엔 정도의 마스터 급이라면 마나를 방패나 검에 밀어 넣어 그 강도를 올리는 기법을 알고 있지만 그 이외의 인물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검은 순식간에 드래곤 슬레이어 문장이 붙은 안티고네를 방패 채 관통하고 지나갔다. 헬 프로네가 루엔의 뒤를 쫓아 도약하기 시작했을 때, 드래곤 슬레이어의 타이탄은 천천히 상체의 윗부분이 떨어져 땅에 곤두박질쳤고, 곧이어 하체도 땅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게 완료되었을 때쯤에는 루엔이 타고 있던 타이탄은 등뒤에서부터 상대의 검에 맞아 자바지고 있었다. 루엔! 미네르바는 자신이 아끼던 부하의 이름을 외쳤지만스러진 타이탄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투구에서부터 시작해서 곧장 아래로 내려찍었으니 루엔 공작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미네르바는 격렬한 공격을 가해 까뮤의 타이탄을 밀어붙였다. 그런 후 순식간에 여섯 대의 타이탄을 파괴한 키에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가오는 최강의 대결 피해는? 미네르바는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부하에게 말했다. 예. 전하. 라이오네 근위 기사단 전멸, 엠페른 기사단 24기 상실, 제2레디아 근위 기사단 전멸. 루엔 공작 전하께서도 전사하셨음이 확인 되었사옵니다. 제1레디아 근위 기사단 안티고네 7기 상실, 지발틴 기사단 . 미네르바는 노 장군의 보고를 들으며 악몽 같았던 오늘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 들었던 많은 타이탄들. 그리고 그들을 무자비하게 베어 가던 그 무시무시한 . 그만! 아~끝장이군. 겨우 키에리 단 한 명이 가세했을 뿐인데 이 모양이라니. 그날 하루. 오전 내내 전력을 자랑하던 크루마 연합군은 놀랍게도 상대방의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이 타이탄을 타고 직접 전장에 나타나는 바람에 최악의 상태로 곤두박질쳤다. 키에리는 그 놀라운 검술로 눈에 띄는 대로 크루마 연합군의 근위 타이탄들을 파괴해 나갔다. 미네르바는 그 악마를 막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아니 그 이상으로까지 발휘해 봤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조종하는 헬 프로네의 왼손이 떨어져 나가고 생명까지 위태롭게 되자 그녀를 구하기 위해 부근의 실력 있는 기사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더 많은 피해만 자초했다. 이 상태라면 본국의 엘프란 기사단을 끌어들인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사옵니다. 키에리 같은 검객을 상대할 자는 최소한 근위 기사급은 되어야 하옵니다. 하지만 그를 없애기 위해 수많은 기사들이 협공했지만, 결과는 . 결과는 알고 있다. 나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으니까. 오늘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지. 나를 살리기 위해 많은 유능한 기사들만 잃었구나. 너무 자책하지 마시옵소서, 전하. 오늘의 전투로 키에리를 상대할 사람이 없는 한,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밝혀졌사옵니다. 차라리 본국으로 후퇴하여 마법을 이용하는 것이 확률이 더 높을 것이옵니다. 만약 대비하여 마리아 방어선에 대 타이탄용 공격진을 설치중이옵니다. 그곳으로 후퇴하는 것이 어떠하올지 . 노 장군은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만약 여기서 후퇴한다면 후퇴가 아니라 패주로 전락, 적의 추격을 받아 최악의 경우 전멸의 가능성 마저도 있었다. 후퇴하면 더 비참해질 뿐이야. 우리가 본국으로 후퇴한다면 몇 남지 않았지만 우선 미란의 기사단이 등을 돌리게 될 거야. 그리고 나머지 동맹국들도 등을 돌리겠지. 그 녀석들이야 모두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또 하나 . 미네르바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 망할 계집에게 주눅이 들어 별로 대꾸도 못 하고 쫓겨온 그날의 일을 부하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 말을 하다가 중단하자 부하는 예의상이라도 질문을 던져 왔다. 무엇이옵니까? 미네르바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놈들은 이 한밤중에 야간 전투를 벌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마법사들을 동원해 빛을 뿜는 마법을 사방에 펼쳐 대낮같이 해 놓고 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이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바에야 낮에 그렇게 설쳤으면 밤에는 쉬어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러면서 놈들은 내일 있을 총 공세를 준비히고 있을 것이다. 내일 새벽까지 키에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크루마는 미란 국가 연합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네르바는 어제 밤 일을 곰곰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검집이나 손잡이는 수수했지만 내용물은 정말 고급인 특이한 검을 착용하고 있던 소녀. 키도 작았고, 아직가지 앳된 티가 가시지 않는 걸 보면 절대로 어떤 마멉이나 그런 걸 이용해서 노화를 억제하고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이 미네르바보다 더 뛰어난 검술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자꾸 막고 있었다. 미네르바도 예전에 경험했지만 중년에 이르러 마스터의 경지에 경지에 들어가면 갑자기 몸이 젊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건 한참 젊을 때로 돌아간다는 의미였지, 아예 성장기 때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게 문제야. 그녀가 과연 놈을 막을 수 있을까? 아니, 못 막더라도 상관없지. 지금 타이탄 60대가 얼만데 . 이윽고 뭔가 생각을 정리한 둣 미네르바는 노 장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살라만더 기사단으로 갈 테니까 준비해 줘. 그녀의 말에 노 장군은 즉각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노 장군 또한 그녀가 어제 밤 살라만더 기사단의 로니에르 공작을 찾아가 둘 사이에 뭔가 협정을 맺었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그것에 대해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관인 그에게 여분의 기사단이 놀고 있는 것에 대한 해명을 그녀는 해줄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전하. 로니에르 공작은 어디에 있나요? 예, 따라오십시오. 마중 나온 기사의 안내에 따라 미네르바 일행이 사라지자, 그곳에서 기사와 함께 공작 일행을 마중 나왔던 당직 마법사는 재빨리 알람 마법을 다시 시전했다. 이런 식의 마법 트랩을 빈틈없이 설치해야만 첩자나 적의 기습으로 안전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미네르바 일행이 안내된 곳은 어제 마법사와 함께 갔던 방향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똑똑. 무슨 일이냐? 예, 공작 전하. 미네르바 공작 전하께서 오셨사옵니다. 들어오라고 해. 옛, 전하. 안으로 드시죠. 그리고 마법사 분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따뜻한 차라도 한잔 하시죠. 기사의 말은 공작 한 사람만을 초청을 의미하고 있었다. 마리나는 미네르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미네르바는 거의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자신의 지사를 전달했다. 마리나는 상대의 친절에 감사한다는 등의 상투적인 말을 내뱉으며 마지못해 기사를 따라갔고, 미네르바는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미네르바가 봤을 때 공작의 방은 매우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깨끗해서 여자로서 필요한 물품이 거의 없다는 데 있었다. 한쪽에는 술병이 몇 개의 컵과 함께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그녀의 검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다른 구석에 귀찮은 물건을 쌓아 놓듯 아무렇게나 놔둔 보석류가 몇 가지 있었다. 미네르바 또한 여자였기에 자연히 그쪽으로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소녀에게 잘 어울리는 색상의 보석들로 만들어진 예쁜 귀고리며, 반지, 목걸이, 팔지, 빗 등등이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미네르바가 보기에도 웬만한 사람은 구입하기도 힘들 정도의 정교한 진품들이었다. 이 정도 대단한 세공품들은 드워프가 공들여 만든 것이 아니면 구하기 힘들었다. 인간 세상에 나와 장삿속에 물든 드워프는 도저히 만들기 어려운 대단한 작품들이었다. 이것들 모두 아르티어스가 잡아먹겠다는 협박과 함께 군침을 흘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화이어헤머가 꽁지 빠지게 만들어 바친 것이라는 것을 그녀가 알 리는 없었지만 미네르바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소녀의 격조 높으면서도 고아한 취향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완전히 헛다리짚은 거였지만. 정말 아름답군. 드워프가 만든 물건인 모양이지? 마음에 들면 하나 가져. 상대방으로터 의외의 말이 튀어나오자 미네르바는 약간 당황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거기에 모여 있는 세공품들은 예술품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날 것들이기 때문이다. 뭐? 준다면 고맙게 받기로 하지. 하지만 하나 골라 주지 않겠어? 주인이 좋아하는 것을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모두 다 마음에 안 드니까 아무 거나 골라. ? 대화가 이상하게 헛도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미네르바는 화제를 다른 걸로 바꿨다. 일단 처음 만나자마자 도와 달라고 하기에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말이다. 그때 보니까 저 검(劍)은 상당히 특이하더군. 혹시, 드래곤 본으로 만든 건가? 일단 검 얘기가 나오자 다크는 자신의 검을 가져와 살짝 뽑아 보이며 은근히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닌 애검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을 여기 와서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지? 그걸 알아본 사람은 여태껏 없었는데 . 정말 대단한 작품이지. 그때는 대충 봤을 뿐이었기에 미네르바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야말로 웬만한 국가의 왕도 가지기 힘든 보검이었다. 일부러 눈에 잘 안 띄게 하려고 미세한 무늬를 넣은 것 같은 검집과 손잡이. 손잡이는 쥐기에 좋고, 또 잘 안 미끄러지도록 매우 세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도 살짝 모습을 드러낸 주문이 빽빽이 새겨진 황금빛 찬연한 검신. 정말 대단하군.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것을 누가 만들었지? 두 개를 만든 제작자가 달라. 손잡이와 검집은 드워프가 만들었고, 검신은 아버지가 직접 만들었지. 정말 대단한 장인(匠 )이신 모양이군. 별로 그렇지도 않아. 잔소리꾼일 뿐이지. 그건 그렇고 내 검이나 보자고 온 것은 아닐테고, 무슨 일이지? 그대들의 실력을 아직까지 입증하지 못한 것 같던데? 술 한잔 하겠어? 좋아. 이거 루빈스키가 보내 준 건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군. 나는 아주 좋아하는 술인데. 미네르바가 슬쩍 보니까 갈색의 액체가 들어 있는 병에는 레드 드래곤 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었다. 레드 드래곤이라면 애주가 사이에는 꽤 알려져 있는 스바시에 특산의 브랜디였다. 미네르바는 잔을 받아 든 후 살작 한 모금 마셨다. 그쪽의 시험에 내가 별로 성실한 답안을 제출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알리러 왔어. 오늘 전장에서 코린트 최고의 검객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가 갑자기 나타났지. 그 덕분에 지금 크루마 연합군은 완전히 붕괴 직전이야. 귀에 익은 이름이 나오자 다크는 머리 속을 정리하며 생각하려고 애썼다.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꽤 여러 번 들어서 그런지 아주 귀에 익은 이름이야. 키에리를 모른다면 검객이 아니지. 세 대의 헬 프로네 중 한 대의 주인이자, 코린트 최고, 아니 어쩌면 세계 최고의 검객일 거야. 오늘 싸워 보니까 정말 그 칭호가 아깝지 않은 사람이더군. 미네르바의 말에 다크는 코웃음을 쳤다. 세계 최고라고? 쯧쯧. 그런 명칭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야. 내가 알고 있는 녀석도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던데, 그런 표현은 쓰지 않았어. 그 사람이 누구지? 카렐. 잘 모르겠군.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야.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는 뛰어난 실력의 무사들은 참 많으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그자를 상대할 기사가 없는 한 이번 전쟁은 절망적이지. 솔직하게 말한다면 오늘 입은 피해가 워낙 컸기에 도와 달라고 찾아왔어. 만약 당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크루마 본국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어. 아마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크루마는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코린트에서 크로나사 평야를 되찾을 가능성은 아예 꿈도 꾸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코린트는 점점 더 강해질 테니까. 흠, 굼도 구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황제가 별로 기뻐할 소식은 아니군. 자, 어떻게 할 거야? 도와 줄 거야, 말 거야? 짐짓 생각하는 척하던 다크는 고개를 그덕이면서 말했다. 좋아, 도와 주기로 하지. 대신 스웨인 지방가지 우리에게 줘야 할거야. 패퇴하는 쪽을 돕는다는 것도 우리한테는 매우 큰 모험이니까 말이지. 위험률이 큰 만큼 그에 따른 대가도 비례해야 하는 법이지. 그 말에 미네르바는 발끈 했다. 크로나사에 스웨인까지 가진다면 지금 코린트 면적의 거의 반을 가지겠다는 건가? 그건 욕심이 지나친 것 같은데 . 나는 오히려 그쪽 욕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데? 멸망에서 승전으로 뒤바뀌고, 거기에다가 코린트 영토의 반을 차지하게 되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더 가지겠다는 것인가? 한참 생각하던 미네르바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좋아, 승낙하겠어. 미네르바의 허락이 힘겹게 떨어지자, 다크는 곧바로 서랍을 열어 두 장의 서류를 꺼내 들고 미네르바 앞에 내밀며 쾌활한 음성으로 말했다. 좋았어. 그렇다면 여기에 서명하라구. 아마도 다시 한 번 더 찾아오게 될 것 같아서 크로아보고 만들어 두라고 했었지. 철두철미하군. 물론이지. 미네르바가 서류에 서명한 후 밖으로 나왔을 때 두개의 달 중 하나는 이미 하늘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코린트에서 야간에 무리하게 전투를 벌이지 않은 것은 어두운 밤에 상호간에 분별이 힘들다는 것 등의 얄팍한 이유가 아니었다. 코린트 군 최고 사령관인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과 오늘 낮까지 크루마 침공군 사령관이었던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에게 전쟁을 하는 것 보다도 더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먼 길을 가기 전에 포도주 한 잔 하고 가는 것이 좋겠지. 키에리는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이 생전 좋아하던 포도주를 한 잔 가득 부어 조심스럽게 관 위에 올려놓은 후 다른 두 개의 잔에도 가득 부었다. 그런 후 이제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친구에게 잔을 건넨 후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절친했던 우리들의 친구를 위해서 건배! 까뮤는 포도주 잔을 완전히 비운 후 그 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으르렁거렸다. 자네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도 그녀는 죽지 않았을 거야. 까뮤의 질책에 키에리는 고개를 숙이며 침울한 어조로 답했다. 미안하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망설이지만 않았어도 . 나는 자네들만으로도 크루마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네. 내 착각 덕분에 친구만 한 명 잃었군. 그리고 수많은 부하들도 . 까뮤는 포도주 잔을 하나 더 가져다가 자신의 잔에 붓고, 또 키에리의 잔에도 부어 주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뭔가 오래 전을 회상하는 듯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 기억 나나? 리사와 처음 만났을대 말일세. 그 한 마디에 키에리는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그때를 생각하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훗, 당연하지. 그렇게 성질이 괄괄한 아가씨는 처음 봤었으니까 말이야. 그런 건 괄괄하다고 하는 것보다, 대범하다고 하는 거야. 지독한 말괄량이였지. 그 성격 덕분에 재미나게 돌아다녔었잖아? 그래, 그랬어. 그 당시 그녀의 검술 실력은 자네와 비슷했었지. 우리들이 모험 여행을 떠났을 때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말이야. 키에리는 까뮤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이해한다는 듯 잠시 그를 따듯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 당시 리사는 정말 대단한 검객이었다. 그녀의 스승이었던 크로데인 후작이 그녀의 천재성을 격찬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녀의 검술 실력이 다른 친구들과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출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아이 낳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검술만을 수련했었다면 크루마와의 전투는 처음부터 크게 양상이 달랐을 것이다. 아주 든든한 친구였었지. 그래. 처음 세상에 나가서는 드래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나는 그녀를 말리느라 정말 죽을 지경이었는데, 네 녀석은 그녀를 옆에서 부추겼지? 하지만 덕분에 깊은 산속에 은거해서 미련하게 마법 실험이나 하고 있던 친구를 한 명 더 구했잖아. 그건 그래. 가뮤는 관을 세심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알고 있었나? 뭘? 나는 리사를 정말 사랑했었다네. 까뮤의 말에 키에리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키득거렸다. 대강은 눈치채고 있었지. 사실 나도 조금은 마음이 있었거든. 그래서 자네가 아예 고백을 하지 못 하도록 막고 있었지. 킬킬킬 . 키에리가 오랜만에 속마음을 털어놓자 까뮤는 픽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이 말을 리사가 결혼하던 날 키에리가 고백이랍시고 했다면 아마 칼을 빼 들고 달려들었겠지만 지금은 많은 세월이 흐른 후였기에 그들에게는 그때 일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 둘이서 견제하고 있는 사이에 딴 놈에게 뺐겼군. 나는 너만 견제하고 있었지. 사실 그라세리안은 여자에게는 별로 흥미가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런 말괄량이가 겨우 사랑 노래 한 방에 이성을 상실하고 경쟁 상대로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비리비리한 녀석에게 결혼 승낙을 할 줄이야, 꿈에라도 생각을 했었겠나? 참,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자 죽었을까? 아마도 .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리사의 자리에 그녀의 아들을 앉힐 작정이야. 아마 저승에 있는 그녀도 기뻐하겠지. 그런데 그라세리안의 자리는 누구에게 물려주지? 왜 그녀석은 대를 잇지 않는 거야. 아마 불능이었는지도 모르지. 킬킬 . 글쎄. 그들은 전쟁 따위는 잠시 잊고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과의 추억을 얘기하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러는 것이 고인(故 )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 공작도 죽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들은 한 번 더 고인이 좋아했던 술을 앞에 두고 밤을 지새울 것이다. 그것이 그들 나르대로 정해져 있던 고인을 전송하는 방법이었다. 추억과 술잔을 나누는 가운데 머나먼 변방의 밤은 점점 더 깊어 가고 있었다. <『묵향9 외전 다크 레이디』에서 계속> 제9부 크로나사 전기(戰記) 차례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의 상대 환타지 영웅의 대결 나는 약속을 지켰다 여러 제국들이 얽히는 힘의 시대 이제 우리 적은 코린트가 아니야 드래곤 아빠의 걱정 키에리 공작의 운명 내 친구의 원수 이상한 유령의 도시에 가다 후작을 호위하는 공작 평화협정 훨씬 인간적인 무림 죽는 그 순간까지 기사이고 싶다 닭대가리 사령관 꿈을 이루어 가는 것 뚱뚱이의 패배 영구적인 동맹 조약 유령 기사단의 출현 모두가 다 옳은 일은 아니었어 괘씸한 놈들 헤즐링은 아닐 거야 검술을 배운 드래곤 황무지 위에 썩은 시체들 전쟁과 창녀의 관계 바람과 같은 여자 <설정집> 마법과 타이탄 그리고 타이탄 전후 제국들의 체제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의 상대 다음 날 새벽, 크루마 동맹군 사령부에서는 몇몇 고급 장교들이 마법진 주위에서 웅성거리며 알렌 방면에서 오래도록 쉬고 있던 동맹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마법진 위에서 잠시 밝은 빛이 나타났다 사라지더니 벽여 명에 가까운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라만더 기사단이었다. 그들은 알렌 왕국에서 전투를 끝낸 후 척후로 쓰기 위해 수십 명의 기사들과 또 그들을 보조할 마법사들과 신관들을 추구하였으므로 처음 크루마에 파견된 인원보다 훨씬 더 늘어나 있었다. 소수의 의장대(儀仗隊)가 검을 빼어 들고 인사를 보내는 가운데, 두툼한 로브로 전신을 가린 동맹군들은 자신의 숙소를 향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기 전에 대충 식사는 해 두었지만, 진지 전체를 이동하는 것이었기에 서둘러 짐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보통 기사단들처럼 하인이나 하녀 따위를 거느리고 있다면 그들만 짐을 들고 숙소로 이동하면 되었겠지만, 이들의 경우는 아무도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기사단 단장인 공작마저도 하인이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켄타로아 공작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사 단장께서는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스칼을 따라서 짐을 푸시기 바랍니다. 의장대를 이끌고 온 기사는 동맹군 일행을 향해 누구라고 꼭 짚어서 말하지 못하고 대충 이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이 기사단의 단장인지 행색만 보아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고, 또 미네르바로부터도 살라만더 기사단 단장 로니에르 공작의 생김새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의 말이 끝나자 네 사람이 앞으로 쓱 나섰다. 기사는 순간 당황했지만, 전투를 앞둔 작전 회의에 참모들을 대동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에 그들을 모두 안내하여 기다리고 있는 작전 회의실로 향했다. 작전 회의실에는 수많은 기사들과 수련 기사, 마법사, 수련 마법사들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지도 위에는 양군의 주둔 상황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도처에 깔려 있는 거의 100개가 넘는 정찰조들의 위치가 작은 깃발로 세심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미네르바는 작전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는 네 명의 기사들 중에서 자신이 밤새 기다려 왔던 인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자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갔다. 마중 나가지 못해서 미안해. 새벽녘부터 벌써 정찰조들간의 전투가 시작되는 바람에 매우 바빴어. 이제 조만간 타이탄들이 투입되겠지. 그건 정해진 순서이고. 뭐 달라진 것은 없어? 그들을 안내해 온 기사는 로브의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네 명의 동맹국 기사들 중에서 가장 키가 작은 인물이 대답을 했다는 것에, 그리고 그 인물의 목소리가 대단히 맑고 곱다는 것에 매우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라레스에서 파견되어 온 공작도 미네르바와 같은 여성, 그것도 대단히 젊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없어. 어제의 전투에서 녀석들이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한 탓에 오늘 전투는 아마도 정면 대결로 이어질 공산이 커. 사실 키에리가 코란 근위 기사단을 이끌고 앞장을 선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흐음. 코란 근위 기사단이 가진 타이탄이 아마도 흑기사, 맞아? 당연하지. 코란 근위 기사단의 타이탄이 흑기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이틀에 걸친 전투에서 우리는 흑기사 열두 대를 파괴했지. 하지만 그 대가로 내 오른팔이었던 루엔을 잃었고, 또 에프리온 여덟 대와 안티고네 열여섯 대를 잃었어. 이제는 키에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놈들의 근위대를 막는 것조차 벅찬 상황이야. 상당히 상황이 안 좋군. 말대로야. 하지만 네가 키에리를 막아 낼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 볼 수는 있어. 네 기사단으로 그 녀석을 상대해 줘. 미네르바의 말에 다크는 어두운 로브 안에서 사악하게 미소를 지었다. 협상 과정에서 스웨인 지방을 뺏어 낸 것도, 또 오늘 미네르바와 만났을 때의 일도 어제 밤 토지에르와 충분히 상의가 되었던 것이다. 미네르바의 말이 토지에르가 예측한 것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크로서는 꽤나 재미가 있었다. 다크는 어제 밤 토지에르가 당부한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키에리만 막는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미네르바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힘들겠지만 , 어제처럼 치욕스런 패배는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지. 남은 안티고네와 카마리에를 상당수 그쪽으로 돌리면 어떻게 해 볼 수는 있을 거야. 좋아, 주문이 그렇다면 승부가 날 때까지 키에리를 막아 주지. 네가 약속한 것에 비하면 조건이 너무 작은 것 같은데, 그 외의 주문은? 상대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미네르바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더 이상의 주문은 없어. 혹시 힘이 남는다고 생각한다면 놈들의 후방이나 좀 교란시켜 줘. 살라만더 기사단에 로메로가 몇 대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그것들은 키에리와의 전투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될 테니 모두 후방 교란 쪽으로 돌리면 되겠지. 하지만 미네르바의 말에 다크는 살짝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로메로는 한 대도 없어. 뭐? 나는 있다고 들었는데? 정보가 잘못 되었나? 아니야, 물론 있긴 있었지. 하지만 모두 본국으로 보냈어. 그쪽에서 필요하다고 해서 말이야. 지금 내가 가진 타이탄은 45대가 전부야. 대신 로메로 11대 분량만큼의 후방 교란은 약속하기로 하지. 좋을 대로 해. 하지만, 이건 꼭 명심해 둬. 키에리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 말이야. 명심하지. 나는 그가 소문대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기를 빌고 있으니까 말이야. 다크는 뒤로 돌아서서 작전 회의실을 나가며 말을 이었다. 녀석들이 타이탄을 투입하면 알려 줘. 상관이 밖으로 나가자 남은 세 명도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작전 회의실을 나서는 네 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네르바가 중얼거렸다. 과연 그를 막아 줄 수 있을까? 하기야 타이탄을 45대나 거느리고 있으니 내가 까뮤를 해치울 때가지 시간을 끌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악마를 두 시간 정도만 잡아 주면 된다구. 그러면 총력을 다해 놈들을 밀어붙일 테니까. 이때 통신을 담당하던 마법사들의 우두머리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전방을 중심으로 정찰조들간의 전투가 격화되고 있습니다. 적의 증원군 포착, 이쪽도 증원을 원하고 있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거대한 지도를 들여다 보고 있던 노(老) 장군 한 명이 외쳤다. 바로 이 노 장군이 작전 담당관, 줄여서 작전관이었다. 이 시대의 모든 전투는 타이탄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렇기에 사령관인 기사는 대부분의 경우 오너(the Owner of the Titan : 타이탄의 주인)였고, 자신의 타이탄을 타고 전투에 나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령관이 없는 상황에서 남은 부대를 지휘할 인물이 따로 한 명 더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작전 담당관은 타이탄들을 지원하는 모든 부대들의 전술 기동에 대한 권한을 가진 인물이었는데, 후방에서 작전 지휘를 담당하게 되므로 기사가 임명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각 기사단에 통보하라. 모든 기사 및 수련 기사 투입. 대기중인 각 사단들은 대 타이탄 전투 2급 대비 상태 유지. 명령에 따라 수많은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이용해 즉각 하부 부대로 지시를 전달했고, 모두들 좌우에서 외치는 대로 그 상황을 거대한 지도에 표시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지금 전방에는 타이탄이 아닌 보다 원시적인 무기들로 무장한 기사들에 의해 피 튀기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원래 타이탄들끼리의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타이탄을 지급 받지 못한 그래듀에이트들이 주축이 된 정찰조들끼리의 격투는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 정찰조를 쓸어 버리고 전장을 장악하면 상대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통신을 담당하던 한 마법사가 외쳤다. 제342정찰조에서 적 타이탄 포착! 그 말이 떨어지자 작전 담당관이 외쳤다. 각 기사단의 모든 오너, 전투 대기 상태 돌입! 후방의 각 사단에 통보. 대 타이탄 전투 1급 대비 상태 유지. 적들의 퇴로 차단에 주의하라. 미네르바는 작전 담당관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간 후 자신의 타이탄을 꺼냈다. 어제 밤, 떨어져 나간 왼팔을 수거해 붙여 놨기에 공간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헬 프로네는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로 인해 군데군데 페인트들이 벗겨져 나간 탓에 몇몇 문장들은 형체도 알아 보기 힘들 정도로 지워져 있었다. 후훗. 너도 주인을 잘못 만난 탓에 팔이 떨어져 나가는 고생을 하는 구나. 자조 어린 미네르바의 말에 타이탄 크라이넨이 묵직한 음성으로 답했다. <상대는 크로테아의 주인이다. 태어난 후 서로 처음 만났는데 그 정도 피해가 없다면 말이 안 되지. 아쉬운 것은 크로테아의 주인이 너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뿐. 오늘도 크로테아와 싸워야 하나? 네 실력으로는 무리일 텐데?> 묵직한 음성에 미네르바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크라이넨은 다소 깔보는 듯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 안에 감춰진, 주인을 향한 걱정을 못 알아차릴 정도로 눈치 없는 그녀도 아니었다. 크라이넨은 무뚝뚝했고, 또 예의 타이탄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탁한 음성으로 자주 투덜거리지만,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그녀는 녀석의 본심을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신경을 거스르는 건방진 말투에 속상한 적도 많았지만 세월이 흘러 녀석의 본심을 이해한 후, 그녀는 크라이넨이 자신의 약한 부분을 허세로 메우려고 드는 사람처럼 생각되어 내심 귀엽게까지 느끼고 있었다. 아니, 오늘은 그 녀석과 나 대신 싸워 줄 사람이 있어. 자, 머리를 열어. 크라이넨은 머리를 위로 꺾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나의 첫 번째 주인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태어난 후 아버지는 주인을 찾아 떠나라고 했고, 오랜 시간 찾아 헤매다가 내가 처음 택한 인물이었지. 나는 그의 실력보다는 곧고 바른 마음씨에 끌려서 주인으로 삼았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가 빨리 죽자 될 수 있다면 강자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나는 주인이 빨리 죽는 것을 원하지는 않아. 내 기대에 부응해 줄 수 있겠지?> 미네르바는 차분히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전 주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처음 듣는군. 첫 번째 주인은 누구였지? <크로멜, 크로멜 반 엘렉시아.> 크로멜 반 엘렉시아라면 미네르바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크라이넨은 그가 실력이 별로 없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는 헬 프로네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로서 이름이 나 있었다. 오죽하면 백여 년 전의 인물을, 그것도 타국 사람을 미네르바가 기억하고 있었겠는가. 지금이야 헬 프로네의 주인이 누군지 알기 위해 모든 국가가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찾지만, 과거에는 달랐었다. 일반적으로 타이탄의 명성은 그 제작 국가와 제작자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 어느 국가에서 누가 근위용으로 타이탄을 새로 설계하여 제작했다는 정보가 새어 나오면 모두들 그 타이탄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게 된다. 근위용으로 제작되는 타이탄의 경우 그것을 사용하게 될 주인들도 그 국가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었지만, 타이탄 자체도 근위용(近衛用) 으로 제작되는 경우는 국력을 총 동원하여 제작한 최고급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근위 타이탄의 경우 그 제작 국가의 국력도 한몫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원래 강대한 국가에서만 강력한 타이탄을 만들 수 있는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 프로네는 근위 타이탄도 아니었고, 처음 제작되면서 그 존재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크루마 제1궁정 마법사였던 안피로스가 자신의 흥미에 맞춰 제작한 녀석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헬 프로네는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을 지닌 주인들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으므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제작자의 이름도 모두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추적한 결과 밝혀 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근위 타이탄의 명성이 갑작스레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헬프로네의 명성은 이처럼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세월을 거급하며 이룩된 것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요 근래 50년도 채 안 된다. 바로 이 50년 전쯤에서야 헬 프로네의 성능과 그 소유주들의 실력이 완전히 공인(公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헬 프로네의 주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실력자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니까 말이다. 미네르바는 크로멜이 한창인 나이에 권력의 암투에 휘말려 자신의 측근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크라이넨을 위장했다. 슬펐겠구나. 크라이넨은 미네르바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자신은 절대로 인간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는 듯 더욱 무뚝뚝하게 말했다. <누가 인간 따위가 죽었다고 슬퍼했겠나? 나는 그런 추상적인 감정을 알지 못해.> 하지만 미네르바는 아마 이 녀석이 인간이었다면, 얼굴이 약간 빨개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혼자 키득거렸다. 보면 볼수록 귀여운 녀석이란 말이야 하고 생각하며 미네르바는 전방을 주시했다. 미네르바는 잘 몰랐지만, 이 크라이넨의 성격이 좋은 것은 첫 번째 주인의 영향이 아주 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타이탄은 처음 태어났을 때 슬픔이나 기쁨 따위의 추상적인 감정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주인을 선택해서 오랜 시간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런 감정들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세 살 버릇 여든가지 가듯, 타이탄도 그 첫 주인으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라면 그렇게, 정의감이 투철하다면 또 그렇게, 아주 지독한 악당이라면 또 악한으로 . 그렇지만 갓 생산된 타이탄이 아니라면 주인을 여러 명씩 맞이하면서 각자에게 약간씩 간섭을 받아 차츰 원만한 성격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걸 생각한다면 크로멜은 겉으로는 당당한 척해도 속마음은 아주 여린 인물이었던 것 같다. 바로 이때, 크라이넨이 미네르바에게 경고를 보내 왔다. 통상의 타이탄에 비해 헬 프로네들의 경우 미스릴을 입히지 않아 시각의 폭이 매우 넓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엄청난 녀석이 다가오고 있다.> 미네르바는 타이탄의 허리를 돌려 뒤에 뭐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곳에는 생전 보지도 못한 엄청나게 큰 검은색 타이탄이 지축을 울리는 굉음을 내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에, 저게 크라레스가 만들었다는 신형 근위 타이탄인가? 엄청나게 크구나. <덩치만 큰 게 아니다.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엑스시온이 탑재되어 있다.> 어느 정도지? 전에 루엔이 봤다는 2.3정도인가? <아니 3.01정도다.> 숙련된 고수일수록 상대방의 능력을 더욱 잘 알아 보듯 타이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다가 헬 프로네의 경우 미스릴까지 입히지 않았기에 자체적인 시각이 매우 넓어 미스릴을 입힌 타이탄보다 훨씬 더 정밀한 측정이 가능했다. 이것만 봐도 탑승할 기사들을 위해 입혀 놓은 미스릴이란 것이 타이탄에게는 얼마나 귀찮은 족쇄가 되는지 알 수 있다. 청기사는 처음부터 워낙 급하게 만들어진 탓에 성능이 완벽하게 같지는 않았다. 만약 똑 같은 재질의 드래곤 하트를 썼다면 차이 없이 동일한 성능을 냈을 테지만, 처음 제작한 네 대와 뒤에 제작한 여덟 대의 출력은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앞의 것이 정확히 2.9972정도이고, 뒤에 제작한 것은 3.0124로 조금 뛰어났다. 그것은 토지에르의 작전에 의해 탈취한 드래곤 하트의 재질이 앞에 것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세상에 . 3.01이라고? 크라레스는 코린트에 복수하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한 거지? 믿어지지가 않는군.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얻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어 . 정말이지 무서운 국가야. 저런 괴물을 숨겨 두고 있었으니가 키에리를 해치울 수 있다고 호언장담 했겠지. <저 녀석이 크로테아와 싸울 것인가?> 응. 미네르바가 경악을 하건 말건, 그 거대한 타이탄은 대지를 쿵쿵 울리며 다가오더니 헬 프로네 옆에 섰다. 거대한 뿔 세 개가 돋아 있는 전체적인 모습은 안 그래도 위압적인 거대한 흑색 타이탄을 더욱 위압적인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그렇데 특이한 것은 뿔 세 개 중의 두개는 윗부분이 파랗게 칠해져 있고, 방패나 전체적인 외장 장갑도 군데군데 색이 벗겨져 파란색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네르바는 어느 정도 놀라움이 가라앉자 상대를 향해 말했다. 왜 혼자 왔지.? 나머지는 아직도 준비중인가? 하지만 상대는 언제나 그랬듯이 감정이 별로 섞이지 않은 건조한 말투로 답해 왔다. 키에리를 상대하는 데는 나 혼자서도 충분해. 나머지는 지금 공간이동 준비를 하고 있지. 네 타이탄을 보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키에리는 타이탄 성능이 좀 좋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이번에 싸워 보니 확실히 알겠더군. 그랜드 마스터만이 완성할 수 있는 검술을 키에리는 갖추고 있었더. 그랜드 마스터 앞에서 타이탄의 성능이 얼마나 좋으냐는 거의 무의미해. 검이 빛나는 그 순간, 아무리 강한 장갑판이라도 잘려져 나가거든. 괜히 배짱 부리지 말고 부하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게 좋을 거야. 그러나 미네르바의 친절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것은 퉁명스런 대답이었다. 아니, 사양하겠어. 제기랄, 좋을 대로 해라. 하지만 이건 명심해! 꼭 그를 막아 내야 한다는 것 말이야. 아, 그건 당연히 지켜 주지. 나는 내가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은 꼭 지는 사람이야. 그리고 너의 부탁대로 후방을 휘저을 로메로 11대 분의 역할을 할 여덟 대의 타이탄은 남겨 뒀어. 아마 전투가 시작된 후 조금 지나서 코린트 군의 후방으로 공간 이동을 할 거야. 그러면서 다크의 타이탄 안드로메다는 손목에 부착되어 있는 거대한 방패를 땅바닥에 덜어뜨렸다. 12톤이나 되는 거대한 방패가 땅바닥과 부딪치며 엄청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미네르바는 또다시 힐끗 다크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방패를 버리는 거지? 필요 없으니까. 전에 한 번 써 봤는데,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더군. 오히려 수준 있는 상대를 만나면 방해만 되지. 상대의 말에 미네르바는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한 번밖에 방패를 써 본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타이탄 조종을 배웠지? 어,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도로니아 는 네가 가지고 있는 녀석처럼 소드 스토퍼만 달려 있었지. 나는 방패는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 이 녀석이 자기 마음대로 붙인 거였어. 후, 이상한 녀석이군. 그렇게 육중한 타이탄을 조종하면서, 왜 방패를 쓰지 않는 거지? 집단적으로 얽힐 때는 방패가 있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되는데. 글쎄 . 이것도 다 사연이 있다구. 이 녀석은 내가 얼떨결에 선택했었는데, 도대체가 나중에 계약 해지를 해 주지 않아서 말씀이야. 안그랬다면 도로니아를 끌고 왔겠지. 사실 나한테는 오히려 도로니아가 더 맞는 것 같아. 말도 잘 듣고 . 이때 전방의 전령이 뒤쪽 사령부에서 보내 오는 수신호( 信號)를 보고 붉은 깃발을 흔들며 외쳤다. 적이 타이탄을 투입했습니다! 전령의 말을 듣지 못한 기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붉은 깃발만을 보고 일제히 앞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 덕분에 미네르바는 다크가 나중에 중얼거렸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가므 왕국에서는 세 번째 타이탄 전투가 벌어졌다. 환타지 영웅의 대결 놈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알 수 없어? 제임스의 채근에 리카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모두들 새벽에 한꺼번에 공간 이동해 버렸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일찍 일어나서 식사 준비를 한다고 난리를 치기에 뭔가 일이 일어날 줄은 알았지만, 몽땅 공간 이동할 줄은 저도, 스타키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제임스는 난처해 하는 리카에게서 시선을 돌려 큼직한 마법진 두 개를 살펴보고 있는 스타키를 보고 말했다. 뭐 좀 알아 낸 것이 있나? 예. 저기 있는 마법진은 초 장거리 이동용입니다. 저쪽에 씌어진 문자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봤을 때 아마도 저건 크라레스로 이동하기 위한 것 같습니다. 만든 지 꽤 된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본국에 뭔가 보내기 위해 만든 거겠죠. 그리고 여기 있는 게 오늘 아침에 만든 겁니다. 장거리 이동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닙니다. 그리고 저쪽에 쓰여진 문자로 봤을 때 북쪽으로 이동한 게 분명합니다. 제임스는 스타키의 추리를 듣고 나서 옆에 서 있는 까미유를 향해 말했다. 북쪽? 혹시 가므가 아닐까? 하지만 까미유도 분명하게 확신할 수는 없었기에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녀를 이렇게 추격할 필요가 있을까? 모두들 로브를 깊숙하게 눌러써서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잖아. 며칠 동안 잠복해서 감시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어. 대상을 두세 명으로 압축하기는 했지만 마법 트랩들이 원체 많이 널려 있는데다가, 감시가 삼엄해서 숨어들 수도 없었잖아. 내 생각에는 지금은 돌아갔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 그녀를 다시 추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또 그녀를 추격한 덕분에 크루마를 도와 준 국가들 중에 크라레스도 끼어 있다는 의외의 소득도 얻었고 말이지. 너는 아버지의 성격을 잘 몰라서 그래. 한 번 뱉은 말은 꼭 실천하시고야 말지. 우리가 만약 수색을 포기하고 돌아간다면 죽이려고 드실걸?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계속 추격하는 수밖에. 일단 스타키의 말대로 가므 왕국에 가 보자. 뭔가 단서가 있겠지.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하자 까미유는 리카를 향해 말했다. 이봐, 리카. 예, 백작 님. 본국에 통신해서 가므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의 좌표를 알려 달라고 해. 그곳으로 이동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지. 참, 그리고 제임스. 왜? 크라레스의 기사단도 침투를 못하고 기회만 봤었는데, 크루마 군의 최대 집결지라고 할 수 있는 가므 왕국에서는 접근이 더 어렵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지. 여러 나라의 군대가 모이다 보면, 상대방 기사들의 얼굴을 잘 모르게 되니가 침투의 여지는 더 커질 수도 있어. 일단 본국에 연락해서 위치를 파악한 후, 시내로 가서 살라만더 기사단인 척하면서 탐색을 해 보는 거야. 어때? 흐음, 그게 좋을 것 같군. 이봐, 리카. 빨리 본국에 연락해 봐. 예, 백작 님. 그날 아침,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신호로 양군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물론 태양을 등지는 크루마 기사단에 비해 그것을 마주 보는 코린트의 기사단이 약간 불리했다. 하지만 서로의 대치가 완전한 동서는 아니었으므로 정면으로 해를 마주 보는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그래듀에이트에 이르는 고수들에게 있어 태양 빛을 마주 보는 것쯤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태양 빛을 어느 정도 가려주는 신성 마법에 의한 도움까지 있었기에 두 시간 가량은 태양이 내뿜는 강렬한 빛 때문에 지장을 받을 염려는 없었다. 양군은 근위 기사단을 중심으로 격돌했다. 그리고 그 근위 기사단의 가장 선두에는 양군(兩軍) 모두 최고의 검술을 지닌 인물들이 앞장 서고 있었다.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은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는 엄청난 수의 타이탄 앞에서 우뚝 솟아 보이는 거대한 검은색 타이탄을 볼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 땅을 디딜 때마다 땅이 푹푹 패이며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키에리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 엄청난 덩치의 타이탄을 보며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게 없다는 것이 저 큰 덩치를 보니까 느껴지는군. 안 그래? 주인의 말에 크로테아는 묵직한 저음으로 답했다. 크로테아의 경우 예전의 주인들이 누구였는지 모르지만 꽤나 입이 거친 타이탄들 중의 하나였다. <맞아. 네 녀석도 안목이 제법이군. 적기사를 봤을 때 정말 놀랐었는데, 저 타이탄의 엑스시온은 그보다 더 출력이 커. 아마도 내 느낌이 틀리지 않는다면 3.01정도일 거야.> 하! 3.01이라고? 정말 대단하군. 그라세리안은 절대로 2.5이상의 타이탄은 만들어질 수가 없다고 했었는데, 저걸 만든 놈은 도대체 누구야? 키에리가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양군은 급속도로 간격을 좁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크로테아의 검에서 푸른색 빛줄기가 검은색 타이탄을 향해 날아갔고 그 검은 타이탄의 검이 타오르듯 엄청난 광채를 뿜어 낸 것은 거의 동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검은색 타이탄은 크로테아가 뿜어 낸 빛줄기를 간단하게, 타오르듯 빛을 발하는 검을 이용하여 허공으로 튕겨 낸 후 그대로 올랐다. 아니 엄청난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을 정도로 먼 도약 거리를 생각한다면 뛰어 오른 게 아니라 날아 올랐다고 보는 게 옳았다. 파칭! 검은색 타이탄이 헬 프로네를 향해 뛰어드는 순간, 검과 검이 부딪치며 엄청난 소리를 냈다. 특이한 점은 양족의 검 모두 타오르듯 엄청난 빛을 뿜어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쪽이 부딪침과 동시에 크로테아는 엄청난 충격으로 뒤로 밀리고 말았다. 거의 90톤이나 되는 헬 프로네가 긴 자국을 내며 뒤로 밀려난 것은 순전히 상대방의 무게가 훨씬 더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냥 휘두르는 검을 막았다고 해도 충격이 컸을 텐데, 그 무게를 온전히 다 실어 도약해 오는 상대의 검을 막았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검은색 타이탄은 방패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헬 프로네보다 거의 60톤이나 더 무거웠던 것이다. <제기랄! 엄청난 압력이야. 저렇게 무지막지한 무게가 실린 검은 처음이다.> 크로테아가 투덜거리자 키에리도 주저업시 맞장구를 쳤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정말 아찔하군. 육중하게 생겼으면서도 원체 먼 거리를 뛰어 오르는 것을 보고 혹시 적기사처럼 중공 장갑(中空裝甲)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그게 아니야. 저거 완전히 통짜 쇠라구. 그런데도 어떻게 저런 속도를 낼 수 있는 거지? 적기사는 두터운 방패가 없다는 약점에서 생기는 방어력 저하를 우려하여 어깨와 등 부분에 아예 방패 역할을 할 수 있는 장갑판을 붙여 놓았다. 2차 장갑판 위에 방패 역할을 하도록 거리를 띄어 놓고 3차 장갑판을 붙여 놓은 것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상체에 상당히 두터운 중장갑이 걸쳐 있어 100톤이 넘는 타이탄처럼 보이지만 실지 무게는 95톤 정도였다. 물론 그렇게 해 놓은 이유는 적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충격 흡수에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적기사가 각종 비밀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만큼, 여러 상황의 전투에 고루 사용할 수 있도록 코타스 공작이 고안한 최신 기술이었다. 그 덕분에 적기사는 일 대 일 뿐만 아니라 다 대 일의 집단전에서도 상당한 위력을 낼 수 있는 꽤나 다목적 타이탄이 될 수 있었다. <처음에 말했잖아, 이 멍청어. 저 녀석의 엑스시온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출력이 높다고. 최소한 이쪽보다 50톤은 더 나가는 것 같다. 검을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위험해.> 서로간에 말을 주고 받으면서도 격투는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탐색전의 형식을 빌려 몇 번 검을 교환했지만, 서로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엄청난 실력이군. 저런 놈을 상대하라고 페트릭과 크리스틴을 보냈으니, 가서 죽으라고 한 것과 똑같았지. 제기랄! <젠장!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이쪽이 속도에서 조금 우세하다고 해도, 저쪽은 무게가 월등하게 무거워. 그리고 덩치에 어울리게 키도 크고, 검의 길이도 길다.> 그 정도는 벌써 파악하고 있어. 도대체가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키에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기술을 총 동원하여 상대를 공격했다. 하지만 적과의 실력의 거의 대등한 상태. 오히려 속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서 유리한 적에게 은근히 밀리는 기색가지 보이고 있었다. 실컷 칼부림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검이 부딪쳤을 때는 중심을 앓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이제 전장의 모든 타이탄들은 전투를 멈추고 있었다. 엄청난 두 고수끼리의 격전이 전장의 한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둘의 대결은 사실상 이번 전투의 승패를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약 검은색 타이탄이 승리를 거둔다면 총사령관을 잃은 코린트의 패배로 끝날 것이고, 키에리가 승리를 거둔다면 두 명의 마스터를 상대할 수 없는 크루마의 패배로 끝날 것이다. 호호홋! 쓸 만한 녀석이군. 제법인데? 자신의 공격을 재빨리 피해 내는 적을 보면서 느낀 다크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안드로메다는 그녀의 그런 장난 같은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참견 안 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고 있을 수가 없다. 네가 전력을 다했다면 벌써 저 녀석을 박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 시간을 끄는 거지?> 멍청하기는, 이게 바로 재미라는 거야. 카렐 외에는 상대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제법 쓸 만한 상대가 다시 나타났잖아. 그냥 죽여 버리기는 솔직히 좀 아까운 놈이군. <원래 격투라는 것은 승자와 패자가 나뉘게 되어 있다.> 그건 나도 알아! 캉! 또다시 양쪽의 검이 굉음을 토해 내며 부딪치자 이번에도 헬 프로네는 형편없이 뒤로 밀려 나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은색 타이탄이 도약을 했다. 하지만 최후의 일격을 가해 대결을 끝장 내기 위한 도약이 아니라 뒤로 도약을 한 게 문제였다. 머리 좀 들어. 다크의 말에 안드로메다는 기가 차다는 듯 되물었다. <뭐? 지금은 전투중이다.> 상관없으니까 들어. 내 말 안 들을 거야? 마지못해 안드로메다의 머리가 뒤로 확 젖혀졌다. 이윽고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터운 로브의 모자가 깊숙이 눌려져 있어 즉시 얼굴을 알아 보기는 힘들었지만, 곧이어 모자를 뒤로 젖히자 그녀의 청순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키에리 또한 상대가 자신을 향해 도약해 끝장 낼 생각을 하지 않고 타이탄 머리를 드는 것을 본 후, 자기 타이탄의 머리를 열어 젖혔다. 키에리는 모습을 드러낸 상대가 의외로 어린 소녀라는 것에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바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나는 대제국 코린트의 총 사령관이자 근위대 대장,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공작이다. 키에리가 힘있는 목소리로 묻자, 뒤이어 예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다크 폰 로니에르라고 하지. 다크 폰 로니에르? 가만 있자 , 크라레스에서 갑자기 등장한 총독 이름이군. 그대는 크라레스에서 왔는가? 키에리의 말에 다크는 놀랍다는 듯 대꾸했다. 기억력이 대단하군. 나 같으면 기억도 못 할 텐데 . 크라레스에 당신 같은 인재를 키워 낼 만한 능력이 남아 있었는가? 그리고 그런 타이탄을 제작해 낼 저력(底力)도. 상대의 말에 다크는 생긋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크라레스 따위가 나를 키워 낼 수는 없지. 나는 다만 약속 때문에 도와 주고 있을 뿐이야. 도와 줄 뿐이라고? 그대 같은 인재가 우리 코린트를 도와 준다면, 크라레스 국왕이 약속한 것의 열 배는 더 줄 수 있다. 어떤가? 그대가 몸 담기에 크라레스는 너무 작은 나라가 아닌가? 이번에도 다크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작다면 크게 만들면 되겠지. 대단한 자신감, 게다가 실력가지 있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살라만더 기사단은 그대 휘하의 기사단인가? 그 말에 다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번 전투를 위해 황제가 잠시 빌려 줬을 뿐, 나는 치레아 총독일 뿐이야. 오래 전부터 퍼져 나오던 의문이 사실이었군. 아무리 계산해도 노획한 타이탄 수가 맞지 않았기에, 치밀하게 조사를 했었는데도 용하게 그걸 숨기고 있었군. 그거야 내가 한 게 아니니 잘 모르겠군. 자, 이쯤 했으면 그대의 궁금증도 풀렸을 테고, 이제 슬슬 다시 싸워 볼까? 저 많은 관중들이 승부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잖아. 청기사의 머리통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 그 거대한 덩치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모든 대결이 그러하듯 키에리와 다크의 대결도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키에리는 그랜드 마스터인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기술을 사용하여 상대를 공격했고, 또 방어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보다는 상대가 조금 더 뛰어난 고수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엑스시온의 출력 차이에서 오는 단순한 파워 부족이 아니라, 검객으로서의 기술이 상대보다 떨어진다는 것은 자부심 강한 키에리에게 감당하기 힘든 굴욕감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어깨에는 국가의 존망이라는 커다란 짐이 지워져 있었다. 바로 그 짐이 키에리로 하여금 패할 가능성이 높은 격투라는 것에 개의치 않고 능력 이상의 실력을 뿜어 내게 만들고 있었다. 퓨캉! 생사의 갈림길에서 거대한 검이 가로지르는 것을 크로테아가 소드스토퍼로 간신히 막은 것은 좋았는데, 그 엄청난 무게에 밀려 한순간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중심을 잃고 순간적인 무방비 상태에 빠졌을 때, 상대의 발이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는 크로테아의 오른발을 가격했다. 크로테아는 이제 완전히 중심을 잃고 굉음을 울리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청기사의 육중하면서도 거대한 검이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는 크로테아의 몸통을 노리고 수직으로 날아왔다. 키에리는 나뒹굴어진 그 충격에 몇 군데 멍이 들었지만, 그것 때문에 고통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크로테아의 검보다 1.5배는 크고 두배는 두터운 것 같은 검이 쏜살같이 거리를 줄여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에리는 반사적으로 크로테아를 움직여 뒤로 굴렀다. 하지만 상대의 검이 미치는 범위는 키에리의 예상보다 더욱 넓었다. 상대의 공격 권을 채 벗어나기도 전, 키에리는 허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불로 지진 듯 뿜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지를 뻔했다. 상대의 검이 크로테아의 왼팔을 거쳐 2차 장갑과 1차 장갑을 관통한 것도 모자라서 본체를 뚫고는 키에리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간 것이다. 키에리는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장 났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상태에서 몇 바퀴 더 구른 후 재빨리 몸을 일으켰을 때 어느 결에 상대 또한 자신을 향해 다가와서는 높이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키에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탈피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가 따위를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그의 몸은 거의 본능에 가깝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크로테아가 자신의 공격 권에서 벗어나는 순간까지도 웬일인지 검은색 타이탄은 검을 든 채 동작을 멈추고 있었다.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수인 키에리가 탈출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상대가 언제 다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키에리는 상대의 공격 권을 벗어난 후 방어 자세를 취했다. 바로 이대, 키에리의 눈에 거추장스러운 크루마 타이탄을 베어 버리며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시뻘건 색의 타이탄 세 대가 보였다. 다크와의 격투에 정신이 팔려서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지만 적기사들은 그 검은 타이탄과의 거리를 맹렬한 속도로 줄여 오고 있었다. 아마도 검은색 타이탄이 키에리에게 마지막 일격을 먹이지 않은 것은 그 붉은색 타이탄들의 존재를 눈치 챘기 때문인 듯 느껴졌다. 큭큭큭 , 나도 아직 죽을 때는 아닌 모양이군. 키에리가 자조 어린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붉은색 타이탄들은 이미 도착해서 검은색 타이탄을 향해 검을 날리고 있었다. 다짜고짜 달려든 것처럼 보였지만 붉은색 타이탄 두 대는 검은색 타이탄의 좌우로 뛰어들며 양쪽에서 검을 날렸고, 또 다른 한 대는 엄청난 높이로 도약하여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꽂았다. 하지만 거대한 검은색 타이탄은 도저히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를 이용해 위로 도약 했다. 두 개의 검이 자신이 있던 공간을 훑는 그 순간 검은색 타이탄의 몸은 이미 허공에 있었고, 자신을 행해 날아오고 있는 붉은 타이탄을 걷어차 버렸다. 굉음을 토해 내며 흉갑 부위를 걷어차인 붉은색 타이탄은 위쪽으로 날아가서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로 이때 두 대의 붉은색 타이탄은 헬 프로네의 좌우에 자리를 잡았다. 빨리 피하세요, 아버지. 여기는 저희가 어떻게 막아 볼게요. 제임스의 외침에 키에리는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깊은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출혈로 인해 지금 그는 점차 의힉이 꺼져 가고 있었지만 마지막 남은 강력한 의지의 힘으로 겨우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었다. 쿨럭 , 헛소리. 너희들이나 피해라. 도, 도저히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야. 제임스는 뒤어 나뒹굴었던 타이탄이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그쪽을 향해 말했다. 오스카, 아버님을 부탁한다. 예. 대장! 오스카가 헬 프로네를 향해 걸어가는 그때 제임스와 까미유는 적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부상을 당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키에리가 전역(戰域)에서 이탈할 때까지 저 괴물을 잡아 둬야 했다. 마나를 끌어 모으자 붉은색 타이탄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검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한 검은 가슴을, 한 검으로는 머리 부분을 보호하며 상대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검은색 타이탄은 그 거대한 검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고 있었고, 어느 순간 타오르듯 광채를 뿜어 내던 그 거대한 검은빛을 감추어 버렸다. 그리고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대들을 뒤로한 채 크루마 군의 진영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 다크는 한가로이 앉아서 자신이 즐기는 술인 레드 드래곤 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잔이 비면 옆에 서 있는 기사가 재빨리 채워 넣는 동작을 반복했다. 이때, 미네르바가 땀에 후줄근하게 젖은 채 씩씩거리며 달려왔다. 그녀는 한가롭게 술을 마시고 있는 다크를 보자 더욱 열불이 치솟는지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다크를 향해 겨누면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왜 키에리를 살려 보낸 거지? 중간에 불청객들이 끼여들었다고 하지만 너는 충분히 그럴 실력이 있었어. 추격전에 참가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키에리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 아냐? 그때의 상황은 미네르바가 따질 만도 했다. 다크의 실력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그 이름만으로도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 주고 오금이 저리도록 만드는 키에리와의 격투를 시종 유리하게 전개해 나간 것은 물론, 드디어는 헬 프로네의 왼쪽 깊숙이 검상을 만들었다. 당연히 미네르바는 그 정도 검상이라면 장갑판은 물론이고 본체를 거쳐 그 안에 타고 있던 키에리에게까지 검상을 입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단 한 번만 더 검을 들이대면 키에리의 목숨은 끝장이었던 것이다. 제국의 전쟁이 시작된 이래 승패를 좌우할 가장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때 세 대의 붉은색 타이탄이 나타났고, 황당하게도 다크는 그들과의 전투를 포기해 버렸다. 그랜드 마스터인 총 사령관이 중상을 입는 치명적인 상황을 기점으로 코린트 기사단은 전장에서 후퇴를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가 후퇴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미네르바는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할 수 없었다. 붉은색 타이탄들과 흑기사를 중심으로 크루마 군의 추격을 저지하는 상태에서 벌어진 매우 질서 있는 후퇴였기 때문이다. 원래 전과가 가장 극대화되는 시점은 정면 대결이 아닌 후퇴하는 적에 대한 추격전이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는 강력한 방어진을 형성하면서 후퇴하는 적들을 향해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다가 상대의 붉은색 타이탄 두 대한테 걸려서 목숨까지 잃을 뻔한 후 열이 뻗쳐서 돌아온 것이다. 다크는 레드 드래곤 을 다시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면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검을 내려놔. 죽고 싶지 않다면 . 미네르바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기치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그 순진해 보이는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힘과 광기가 그녀의 눈동자를 거쳐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황급히 검을 집어넣었다. 상대는 키에리도 당할 수 없었던 검의 고수. 타이탄이라도 가져다가 기습 공격을 하지 않고서는 없앨 가능성이 없었다. 미네르바가 검을 집어 넣은 후에야 상대의 눈동자는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크는 다시 잔을 입에 가져가 한 모금 마신 후 약간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후, 나는 약속을 지켰다. 너는 분명히 상대를 밀어붙일 때까지 키에리를 막아만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 또한 약속했었지. 키에리를 막아 주겠다고 말이야. 틀렸나? 그건 그렇지만 . 그래서 나는 막아 줬어. 나로서 할 일은 다 한 거야. 키에리를 죽이든 살리든 그건 약속의 내용에는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 그렇게 억지 부리지 마. 그 녀석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야. 앞으로 세울 모든 작전에 키에리의 전투력이 포함되어야 하니까. 그게 얼마나 큰 위협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다크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자, 자 그 녀석을 내가 살려 주고 싶어서 살려 준 것은 아니었어. 너도 봤겠지만 격전의 와중에 그 시뻘건 놈들만 끼여들지 않았다면 아마 죽일 수 있었겠지. 너도 상대해 봤다면 그 녀석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텐데? 미네르바는 자신의 앞을 막아 선 두 대의 적색 타이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상대방의 가공할 실력도 . 그때 미네르바는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것이다. 그건 알아. 둘 다 마스터 급, 그리고 한 명의 거의 마스터에 근접한 인물이었지. 그런 패거리들을 뚫고 들어가서 키에리를 죽이라는 것은 나한테 조금 무리한 부탁이 아닐까? 물론 상대의 말을 믿을 정도로 미네르바는 순진하지 않았다. 미네르바는 잠시 상대의 눈을 찬찬히 쏘아봤다. 맑고 투명한 눈, 도저히 무시무시한 무술을 익혔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진해 보이는 눈이었다. 일단 상대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후퇴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동맹국끼리 괜한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건 내가 잘못했어. 사과하지. 그 사과는 받아들이지. 오늘은 정말 멋진 날이었어. 키에리를 위해 건배. 다시 술을 입 속에 털어 넣고 있는 소녀를 보며 미네르바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서둘러 말했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나는 이만 가 볼 데가 있어서 말이야. 어디를 가는데? 문제의 붉은색 타이탄들이 왜 우리 쪽 진영에서 튀어나왔는지 알아 봐야지. 총총히 사라지는 미네르바의 뒷모습을 보며, 다크는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수확도 함께 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꿀꺽! 다크가 빈 잔을 내려놓자 옆에 서 있던 기사는 다시 잔을 채워 넣었다. 그런 기사를 지그시 바라보며 다크가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전하. 이번 전쟁의 끝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소신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모를지도 모르지. 술수가 이렇듯 판을 치니 뒷수를 읽기가 참 힘드니까 . 통신 마법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옛, 전하. 잠시 후, 그 기사는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려 왔다. 그는 자신의 상관이 천천히 일어서서 술이라고는 전혀 한 방울도 마신 것 같지 않은 걸음으로 막사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소녀가 이 자리에 앉아서 마신 술은 거의 한 병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오, 까만 토끼. 웬일인가? 자네가 통신에 다 나오고 말이야. 토지에르는 싹싹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 전하. 일은 어떻게 되셨사옵니까? 뭐 어떻게 되기는 , 키에리는 지금쯤 상처 입은 야수가 되어 있을 테니 조심하는 게 좋겠지. 승리하셨군요. 당연히. 축하 드리옵니다, 전하. 축하할 필요는 없어. 원래 그런 녀석은 죽여 버려야 개운한데 말이야. 까만 토끼의 부탁도 있고 해서 우선은 살려 두었지. 잘 하셨사옵니다. 제가 드린 부탁을 잊어 버리지 않으셨군요. 토지에르는 미소를 띠고 말했지만 다크의 대꾸는 의외로 퉁명스러웠다. 뭐, 마지막 순간에 운이 좋아서 떠오른 것뿐이야. 잠시 멈칫했더니 코린트의 신형 타이탄들이 달려들어서 녀석을 구출해 갔지. 그건 그렇고, 전황은? 예, 크로아 공작 전하께서는 전선을 돌파하고 맹 진격중이십니다. 전황은 매우 순조롭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녀석들한테는 지금 마스터가 세 명에 키에리까지 있어. 그런데 키에리를 살려 뒀으니 루빈스키의 목숨이 위태롭지 않을까? 토지에르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돌아오신다면. 호, 그런 계획이었군. 예,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빨리 회군하시옵소서. 알겠다. 여러 제국들이 얽히는 힘의 시대 전 세계는 의외의 사태에 경악했다. 처음부터 크루마가 코린트와의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가정이 놀랍게도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놀랐던 것은 정작 크루마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크루마는 동맹국들을 향해 이길 수 있다느니, 어쩌느니 하며 막대한 전리품을 약속하는 감언이설로 그들을 꼬드긴 것일 뿐, 사실 처음부터 승리를 거둘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아예 없었던 것이다. 크루마의 수뇌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코린트의 선발 공격대를 막아 낸 후, 지루한 장기전으로 몰고 가다가 휴전 협정을 맺을 생각이었다. 코린트가 미란 국가 연합 전선에서 벌어지는 지루한 전쟁 때문에 진이 빠져서 서둘러 휴전 협정에 서명만 해 준다면 크루마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휴전이 가능하려면 먼저 사력을 다해서 1차 공격대를 막아 내든지, 아니면 그들을 격퇴해야만 했다. 물론 크루마로서도 엄청난 희색을 치를 것은 분명했다. 코린트의 근위 기사단과 금십자, 은십자 기사단을 막는 데 막대한 희생을 치르지 않느다면 오히려 그게 사기(詐欺)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런 후, 코린트가 전쟁에 지칠 때쯤, 혹의 의외의 피해에 경악해서 이번 전쟁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권력 투쟁의 암투에서 밀려 버린다면, 그때부터 슬쩍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휴전으로 몰고 가면 일은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제1차 전쟁에서 뜻밖의 승리를 거뒀다는 데 있었다. 그것도 크루마가 생각하지 못했던 대승을 거둔 것이다. 코린트의 기사단들은 막심한 피해를 뒤로한 채 전선에서 후퇴하여 쟈크렌 요새로 향했고, 이에 비해 이동 속도가 떨어지는 군대들은 쿠루마 기사단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코린트 기사단의 패퇴가 던지는 의미는 이런 단순한 엄청난 것이었다. 이제 코린트는 더 이상 무적이 아니었고, 전선에서의 패퇴에 대한 대가로 잘못하면 쟈코니아 지방의 일부를 잃을 가능성마저 안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예정에 없던 탐욕이 슬며시 발생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막아내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코린트 땅의 일부라도 최소한 뺏으려고 들게 되는 것이다. 코린트는 편의상 쟈코니아, 코린토비아, 스웨인, 크로나사라는 거대한 네 개의 지구로 나누어져 관리되고 있었다. 그 네 땅의 경계는 강이거나 산맥이었기에 국경선으로 삼기에도 그만이었다. 그런 이유로 크루마로서는 그 네 개의 땅덩어리 중에서 최소한 크루마에 가장 가깝게 위치하고 있는 쟈코니아 평원만이라도 차지하려고 드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문제는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 미란 국가 연합이었다. 미란 국가 연합이 양 대국의 전쟁에서 쿠루마의 손을 들어 준 이유도 지금의 현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었을 뿐, 절대로 양국의 균형이 파괴되기를 원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국의 균형이 파괴된다면 그 사이에 위치한 미란 국가 연합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손을 떼는 것에 저도 찬성입니다. 지크프리트 데 가므 3세는 원탁에 둘러 앉은 왕들을 쭉 둘러본 후 예상대로라는 듯 말했다. 모두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본인 또한 더 이상 크루마를 도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오. 문제는 크루마가 본국에서 발을 배는 것을 용납해 주느냐 하는 것인데 . 용납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번 전쟁에서 본국의 피해는 막심합니다. 주 전장이 되어 버린 가므는 거대한 타이탄들이 뛰어 다닌 탓에 이미 엉망진창이 된 상태이고, 또 전화에 휩쓸린 국민들의 피해도 엄청납니다. 그 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본국 기사단이 너무나 약화되었다는 것이죠. 라이오네 기사단이 전멸 당했고, 또 중앙 기사단은 보유 타이탄의 반 이상을 상실했습니다. 이제는 전후 복구 사업에 총력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 이런 현실을 크루마에 인지 시켜야만 합니다. 그건 자네 말이 맞아. 양 대국의 전쟁에 끼여서 싸웠으니 그 정도 피해는 당연하겠지. 어쩔 수 없이 알카사스에서 타이탄을 대량으로 구입해야겠군. 노획한 타이탄 중에서 저희들 몫으로 떨어진 것들과, 고물이 된 본국 타이탄들을 해체한다면 라이온 20대와 타이거 30대 정도는 구입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알카사스에 주문을 하긴 했는데, 현금 인도 조건을 요구하더군요. 물론 그들도 이번 전쟁이 예상외로 풀려 가기 시작하자 매우 당황해 하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큰일이야. 만약 일이 잘못되어 크루마가 쟈코니아 지방을 차지하고 앉아 버린다면 우리들로서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는 거지. 크루마가 원정에서 패배한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의장, 동맹 협약을 좀더 철저히 해 두고, 지금이라도 크루마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것도 좋겠군. 동맹국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지. 자네가 힘 좀 써 주겠나? 예, 좋은 소식을 가져 올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좋아, 부탁하겠네. 하지만 크루마가 본국에 마수를 뻗칠 우려도 있으니 그 대비책 또한 생각해야 하네. 아르곤과 동맹을 맺는 것은 어떨까? 아르곤은 곤란합니다. 원래 아르곤은 동맹을 맺는 조건에 자국의 크로노스 교를 포교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꼭 집어넣습니다. 그 때문에 아르곤과 동맹을 맺었던 세 개의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종교를 악용하여 고의적으로 마법사들과 기사들의 반목을 부추겨 내전이 발생하게 한 후 수습해 준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투입, 결국은 그들을 모조리 흡수해 버렸습니다. 그런 전례가 있는 만큼 아르곤과의 동맹은 절대 불가합니다. 그렇다면 크라레스는 어떨까? 이번 전쟁에서 예상 외의 힘을 발휘한 크라레스와 외교적으로 가까워진다면 큰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크라레스도 가까운 동맹국이 없으니 내심 다른 국가와의 동맹을 원하고 있는지도 몰라. 이 기회에 그들이 본국과 동맹을 받아들인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마도, 이번 전쟁에서 크라레스는 잃었던 크로나사 평원을 되찾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본국에 매우 큰 도움 큰 도움을 줄 수 있겠죠. 아무튼 이제 전 세계를 코린트 혼자서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바야흐로 한동안은 여러 제국들이 얽히는 힘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겠죠. 이런 상황을 잘 극복하려면 뛰어난 우방이 많을수록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부로는 힘을 키워야 할 때죠. 창백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공작. 대제국 코린트가 자랑하던 최고의 검객이었지만 지금은 출혈 과다로 인해 의식까지 잃은 채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이 위대한 검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깊은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다행히 멈춰 있었다. 상대방 타이탄의 검이 조금만 더 깊이 들어왔다면 아마도 허리가 두 토막이 나지 앟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깊은 검상이었다. 상처 위에 놓여 있던 노 마법사의 빛나던 손에서 천천히 빛이 사라지자 초조한 안색으로 기다리고 있던 제임스는 재빨리 노 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까지 상대의 정신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말을 걸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님은 어떠시냐? 예,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하지만 치료가 좀 늦었기 때문에 회복하시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아무튼 정말 놀라우신 체력입니다. 만약 보통 기사였다면 생명을 건지기 힘들었을 겁니다. 상대의 말에 제임스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수고했네. 아닙니다. 저로서는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강렬한 치료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인지, 노 마법사의 얼굴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는 거의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전장을 이탈하기 위해 무리하게 마나를 끌어올렸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안전한 지역으로 탈출했을 때는 그야말로 생명이 경각에 이른 상태였었다. 이제 딴 사람에게 맡기고 좀 쉬게나. 너무 피곤해 보이는군. 예. 제임스는 문 밖으로 나서는 노 마법사에게서 시선을 돌려 까미유를 봤다. 가미유는 방금 전에 들었던 믿어지지 않는 소식 때문인지 멍하니 창 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사 드 크로데인, 자신의 어머니이자 마스터인 검객의 죽음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천천히 까미유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거렸다. 아까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서 제대로 위로를 못 해 줬군. 정말 안됐네. 까미유는 창 밖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하지만 자네 어머님의 시신은 지금 코린티아 시로 운반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믿어지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겠지. 죽은 사람을 되살릴 방법은 없다네. 아무리 마법이란 것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 아니지. 나도 되살릴 방법이 있다는 것쯤은 알아. 까미유의 말에 제임스는 깜짝 놀란 듯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게. 고인은 보내 드리는 것이 예의야. 흑마법에 의존해서 고인을 붙잡는 것은 오히려 그분을 더욱 욕되게 하는 짓이지. 제기랄! 자네 어머님인 후작 부인의 복수는 아버님께서 하셨다고 했으니 아마도 편안하게 천국으로 가셨을 거야. 그렇ㄱ 믿어야 하겠지. 자네한테 부탁이 하나 있네. 뭔가? 제임스가 부드럽게 묻자, 까미유는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잠시만이라도 나를 좀 혼자 있게 해 줄 수 없겠나? 지금은 혼자 있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임스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네. 제임스는 까미유에게 물러서면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키에리를 바라봤다. 지금 잣니의 아버지가 저 꼴이 되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는 현실도 믿어지지 않는데, 까미유는 아마 한층 더할 것이 분명했다. 제임스는 천천히 방을 나서서 작전실로 쓰이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작전실은 지방 영주가 사용하던 요새(要塞)였기에 제법 넓었다. 각곳에는 영주의 사병들이 배치되어 길 안내를 하고 있었고, 많은 수의 마법사와 기사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주력 기사단은 쟈크렌 요새로 후퇴했지만 전장에서 상당히 이탈해 있는 이곳에 일부가 남아서 생존한 기사들을 구출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이 자리잡은 요새는 전술상 별로 중요한 요충지도 아니었기에 한동안은 크루마 쪽에서 신경을 쓰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녀석들이 뿔뿔이 후퇴하는 코린트의 군대를 사냥하고 있는 그 시간을 이용하여 살아있는 기사나 마법사들을 최대한 구출해 내야 했다. 제임스가 작전실로 들어서자 한 마법사가 그를 향해 재빨리 다가와서 말했다. 최신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각하. 뭔가? 예, 놈들이 파괴된 타이탄에서 끌어 모은 본국 오너들이 약40여 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 외에 포로로 사로잡은 기사들이나 마법사들까지 합하면 백여 명이 넘고요. 부하의 말에 제임스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답했다. 전과가 대단하군. 그래 처리는? 일단 지금은 여력이 없으니까 가둬 뒀다가 나중에 엘프리안으로 보내 세뇌를 한다고 하더군요. 세뇌 라는 말에 경악한 제임스가 거의 부르짖듯 말했다. 세뇌라고? 그건 국제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사악한 짓이야. 국제법은 코린트, 크루마, 알카사스, 타이렌 제국의 대표자들이 모여 오랜 시간 협의하여 제작한 법규였다. 그렇기에 국제법은 약소국의 권익을 보호하는 법이 아닌, 강대국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편협하고 일방적인 악법이었다. 물론 몇몇 나라만이 모여 쑤군거려서 만든 것이었기에 꼭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약소국에서 그걸 어겼을 경우 주위의 강대국이 그 나라를 침략하는 데 매우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예, 그렇죠. 하지만 크루마로서야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백 여 명에 이르는 기사나 마법사들을 단번에 키워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일반적으로 한 반 년 정도만 공을 들이면 세뇌가 가능한데 녀석들이 그걸 포기하겠습니까? 그것도 오너 급이 40여 명인데, 그야말로 굴러 들어온 떡이나 마찬가질 테죠. 옛, 후작 각하.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쪽으로 와서 보십시오. 뭔데 그러나? 마법사는 넓게 펼쳐져 있는 지도로 제임스를 안내했다. 지도 위에는 깃발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는데, 그 대부분에는 크루마 군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외로이 포위된 형국으로 남아 있는 붉은색 깃발이 버티고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제1근위대를 중심으로 탈출에 성공한 기사들을 호위하여 쟈크렌 요새에서 재편성에 들어가고 있었고, 이곳에 남은 것은 제2근위대의 일부와 제3근위대였다. 물론 이들 모두를 제3근위 대장인 제임스가 지휘하고 있었기에 제3근위대를 뜻하는 붉은색 깃발만이 남아 있는 것 이었다. 뭔가? 지도상으로는 별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 제임스의 질문에 마법사는 제임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저 아래쪽을 가르키며 말했다. 크라레스가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전에 침공을 개시한 모양인데, 이쪽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중요한 때였기에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지금에야 알려 오신 겁니다. 제임스는 착찹한 표정으로 말했다. 규모는? 3개 기사단, 약 100여 대입니다. 침공 군의 좌, 우측에는 검은색 타이탄들로 이루어진 유령 문장을 붙이 기사단, 그리고 중앙에는 근위 기사단, 후방에는 콜렌 기사단이 뒤롤 받치는 형식입니다. 각 기사단들간의 거리는 30킬로, 침공 군 총 규모는 3개 기사단, 2개 중장 보병사단, 4개 경장 보병 사단, 2개 기병 사단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규모는 아니군. 예, 그런데 문제는 본국 동십자 기사단 제5분대를 십 분도 안 되는 시간에 궤멸시키고 돌파했다는 것이죠. 상당한 정예 부대를 보낸 모양인데, 지금 현 시점에서는 그들을 저지할 만큼 강력한 기사단을 지원하기 어렵습니다. 크로나사의 중앙 도시인 크라레인 시에 동십자 기사단과 지방 수비대가 집결중이지만 과연 그들을 막아 낼 수 있을지 . 로체스터 공작 전하로부터의 지시는? 예, 약소국의 가벼운 도발 따위는 신경 쓰실 필요 없으니 맡은 바 임무를 빨리 처리하고 합류하시라는 전갈이셨습니다. 이 순간 제임스의 머리 속은 혼란스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번 전쟁의 모든 것에 크라레스 가 걸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크 크라이드 아니, 다크 로니에르라는 그 소녀도 . 순간 그 소녀가 크라레스에서 파견된 기사단 사령관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 지급(至急)으로 로체스터 공작 전하를 불러라. 예? 빨리 해. 하지만 , 여기서 통신 마법을 쓰면 잘못해서 포착 당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저쪽에서 걸어 온 것을 받는 형식이었기에 상관 없었습니다만, 이쪽에서 저쪽을 부른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정기 연락 시간까지 기다리심이 어떻겠습니까? 정기 연락 시간이 언제지? 50분 남았습니다. 한 시간 단위로 연락을 취하고 있기에 . 사분한 걸음걸이로 막사 안으로 들어서는 소녀를 미네르바는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걸음걸이를 보니 별로 마시지는 않은 모양이군.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었는데 잘 왔어. 무슨 일인데? 우리 쪽에서 튀어나온 빨간색 타이탄 . 본국에 연락해 알아 봤더니 크라레스에서 너를 추격해 온 녀석들이더군. 나를 추격해 왔다고? 응. 그 녀석들 뻔뻔스럽게도 살라만더 기사 단원인 척하면서 모든걸 넘겼던 모양이야. 크라레스와 본국의 동맹은 1급 비밀이었기에 모두들 대충 조사하고 넘겼었던 모양인데 . 그 녀석들이 코린트에 보고했을 가능성이 커. 코린트 녀석들에게 조금이라도 여력이 남아 있다면 크라레스는 끝장이야. 본국이 끝장이 난다는 말을 하는데도 다크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상대의 평온한 얼굴이 미네르바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아, 그 얘기였군. 나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왔지. 무슨? 나는 지금 본국으로 돌아가야 해. 작별 인사를 하러 왔지. 잠깐, 코린트가 만약 크라레스가 이쪽을 도와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쪽으로 신경 쓰지 못하게 여기서 전투를 크게 벌이면 돼. 돌아가서 본국을 지킬 필요는 없다구. 지키는 게 아니라 싸우러 가는 거야. 이미 본국의 기사단이 크로나사 평원을 가로질러 진격중이거든. 잠깐, 코린트라는 적을 앞에 두고 두 패로 나뉘어서 작전을 벌이겠다는 것이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각개 격파 당할 위험이 있어. 아무리 이번에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코린트의 저력은 엄청나다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해. 그건 너희들 사정이겠지. 내가 있는 한 본국이 패할 리는 없다고 생각해. 그래지에트 황제는 지금 국가 총 동원령을 내렸어. 그런 상황에서 공작이나 되는 내가 빠질 수는 없지. 그렇지 않아? 상대가 도저히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자 미네르바는 깊숙이 숨겨 두고 있던 최후의 카드를 꺼내 놨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어쩔 수 없군. 크라레스의 황태자가 우리 나라에 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미네르바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아직도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도대체 별 감흥 없이 대꾸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미네르바는 좀더 강도 깊게, 상대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직접적으로 말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서는, 크라레스의 황태자 전하가 몸 성하게 본국에 돌아가기를 바라나? 하지만 다크는 시큰둥한 어조로 답했다. 뭐, 황태자가 크루마에서 객사(客死)하더라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상대의 말에 오히려 미네르바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상관없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뭐, 황제한테는 아들이 하나 더 있으니까 대를 잇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설혹 둘 다 죽는다고 하더라도, 황제 노릇을 할 사람은 아마 수십 명쯤 줄을 서 있을 거야. 원래 황제 노릇이라는 게 아무나 앉혀 놓으면 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이제 대답이 되었나? 얼굴 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던 미네르바는 드디어 분노를 터뜨렸다. 제기랄! 너는 기사가 아니야. 너 따위는 기사가 될 자격도 없어. 호호호, 물론이지. 나는 처음부터 기사 따위가 될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문제는 그런 말을 하는 너도 기사가 될 자격이 없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럼 잘 있으라구. 건투를 빌겠어. 이제 우리의 적은 코린트가 아니야 초조하게 5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제임스는 이윽고 마법 통신이 개통되자 재빨리 마법사를 밀어내며 말했다.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예? 공작 전하 전하께서는 코린티아에 가셨습니다, 각하. 코린티아에는 왜?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 혹시 전하실 말씀이라도 계십니까? 언제 돌아오시나?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조만간에 돌아오실 것입니다. 참, 공작 전하로부터의 전언이 있습니다. 새로운 지시가 있을 때까지 합류할 생각은 하지 말고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라는 전갈이셨습니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 근위대 병력의 태반이 이 구석진 곳에 빠져 있으라고? 도대체 공작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참, 나중에 공작 전하께서 돌아 오시면 나하고 꼭 통신을 할 수 있게 해 주게. 그리고 크라레스에서 밀고 올라오는 기사단을 얕보지 마시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각하.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제임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통신권을 마법사에게 넘긴 후 돌아섰다. 제임스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며 로체스터 공작의 의도가 무엇인지 유추해 보기 시작했다. 이렇듯 중요한 시기에 전방 사령관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은 크루마의 대군을 막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렇다고 수도와 통신 회선을 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궁금해 죽겠군. 제기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 제임스는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짜증 어린 말을 내뱉은 후 키에리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키에리는 아직도 창백한 안색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방에 있어야 할 까미유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제임스의 질문을 받은 사병(私兵)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까미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쪽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급히 방문을 열자, 그곳에서 우울한 얼굴로 포도주를 한 잔 가득 부어 마시고 있는 까미유가 보였다. 술 마시는 중이었나? 나도 한 잔 주게. 까미유는 말없이 잔 하나를 꺼내 가득 부은 후 건넸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뭐, 자네가 걱정하듯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야. 어머니가 그렇게 짧은 생을 사셨던 것도 아니고 .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겉모습이 젊어서 나도 잊어 버리고 있었는데 매우 장수하셨더군. 그런데 허겁지겁 방 문을 연 이유는? 내가 자살이라도 할까 봐서? 그렇게 생각하긴 했었지만 상대가 먼저 물어 오자, 제임스는 시치미를 떼고 딴말을 시작했다. 아니, 자네하고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뭔데? 크라레스가 침공해 들어왔어. 타이탄 약 100여 대로 이루어진 3개 기사단. 그리고 그 뒤를 받치는 군대는 2개 중장 보병 사단, 4개 경장 보병 사단, 2개 기병 사단 규모라고 하더군. 어때? 놀라운 소식이 아닌가? 자네가 그렇게 뛰어 들어올 정도로 놀라운 소식은 아닌 것 같군. 크라레스가 크루마를 도와 줬을 때부터 이번 전쟁에 끼여들 것은 정해져 있었어. 다만 본격적으로 마수를 드러내는 시기가 언제일지가 불분명했을 뿐이지. 그건 그렇군. 하지만 생각 외로 크라레스가 엄청나다는 거지. 자네는 그 생각을 못 했나? 우리가 추격해 온 그 소녀 말이야. 그 소녀가 왜? 엄청난 검기를 뿌리던 그 검은색 타이탄에 타고 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버님조차도 당해 내지 못한 상대. 기동 연습을 하며 우리 둘이서 아버지를 상대했을 때, 분명히 우리들은 아버지 한 사람을 당해 낼 수 없었어. 그런데 그런 상대가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적인 우리를 두고 그냥 돌아가 버렸지. 그 거대한 타이탄이 뿜어 내는 강렬한 투기(鬪氣) 앞에서 심장이 쪼그라들 정도였는데 말이야. 다행히 그 투기가 사라졌을 때 나는 안도감에 힘이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런 상대가 우리를 놔두고 왜 돌아갔을까? 그놈 속마음을 내가 알 게 뭐야. 자, 생각을 해 봐. 아버지까지 쓰러뜨릴 정도의 실력자라면 상대방 기사단 단장 내지는 총 사령관이라면 그게 맞겠지. 크루마의 사령관은 미네르바. 나중에 우리한테 걸려서 혼쭐이 났었잖아? 미네르바가 헬 프로네의 주인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구. 그렇다면 그 검은색 타이탄은? 그게 만약 크라레스의 신형이라면 설명이 되지. 우리가 추격하면서 알아 낸 바로는 소녀는 치레아 총독이자, 파견군 사령관이었어. 그렇다면 그 타이탄에 타고 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까미유도 어렴풋하게 그런 생각을 했지만, 가냘픈 소녀의 모습을 떠올릴며 애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성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감정상으로 그녀를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ㅇ은 것인지도 몰랐다. 설마 . 설마가 아니야. 검은색 타이탄에 타고 있던 사람이 그 소녀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될 수 있지. 우리들이 그녀에게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또 적기사를 이미 아르곤에서 봤기에 그 안에 우리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겠지. 우리들이 나섰을 때, 그녀는 우리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 아무리 그래도 그 외모에 . 그게 아니라니까.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아르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마스터인 나를 앞에 두고도 비웃는 듯한 어조로 겨우 그 실력으로? 하고 말한 것.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확신하고 있어. 그녀는 검객이었어. 그것도 엄청나게 강한. 이리저리 맞춰 보면 검객인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외모는 . 마지막까지 부인해 봤지만 까미유는 어느새 그녀가 범인일 것이라는 이성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다가 제임스는 마지막으로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외모야 마법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 만약 그녀의 외모가 약간 나이 든 우락부락한 남자였다면 처음부터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했을거야. 안 그래? 그거야 , 그렇지. 별로 달가운 것도 아니고 속까지 쓰린 일이지만 크라레스에서 그녀 같은 고수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야. 그녀를 어떻게 해치우느냐에 따라 제국의 미래가 바뀔 거야. 그건 그렇고 이제는 아버님도 위험한 고비는 넘긴 상태고 . 원래는 건강이 회복되면 쟈크렌 요새로 이동해서 본대와 합류할 예정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는 우리들이 이곳에 남아 있기를 바라셔.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에는 여기는 별로 안전하지 못하다는 거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나도 자네 의견에 동감이야. 공작 전하의 지시가 그렇다면 일단 지켜야 하겠지. 녀석들도 우선 굵직한 영지들과 잔여 병력들을 소탕한 후에는 아마도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겠지. 좀더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아. 그런데 근위대 병력만 해도 거의 100여 명인데 자리를 잡을 만한 곳이 있을까? 지금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는 코린티아로 가신 모양인데, 곧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하니까 돌아오시는 대로 보고를 드리고 전투에 불필요한 인원은 돌려보내야겠지. 그때를 위해서 남아야 하는 인원을 자네가 한번 뽑아 봐. 그리고 우리들이 머물 만한 장소도 알아 보고 말이야. 까미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자네는 옛날부터 내가 편히 쉬는 꼴을 못 봤으니까 . 자네니까 부탁하는 거야. 영광으로 알라구. 까미유는 이제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생겼기에 술잔을 놓고 밖으로 나갔다. 제임스는 방을 나서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착찹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버지가 죽은 것도 아니고 중상을 입었을 뿐인데도 자신의 마음이 이런데, 전사한 경우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거리를 만들어 제임스가 딴 생각을 못 하게 도와 주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다크와 그 일행이 크라레스 제국의 수도 크로돈에 도착했을 때, 토지에르가 몇몇 중신9重臣)들과 함께 일행을 마중 나와 있었다. 토지에르는 다크의 모습이 나타나자 재빨리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 왔다. 어서 오시옵소서, 공작 전하. 먼 길에 수고 많으셨사옵니다. 그런 자네도. 개선 사령관을 영접하는데 너무 소홀한 것 같아 송구하옵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자네가 요즘 들어서 매우 바밨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처음에 왔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조사해 봤나? 예, 당연히. 20여 명의 마법사들을 풀어서 조사하는 중이옵니다. 만약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면 기필코 찾아 낼 테니 안심하시옵소서. 토지에르의 말에 다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잊지 않고 있었다니 고맙군. 그건 그렇고 코린트 전선은 어떻게 되어 가나? 예, 순조롭게 진격중이옵니다. 하지만 곳곳의 지방 영주들이 사병들을 거느리고 저항하는 바람에 기대만큼 진격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못한 편이옵니다. 아마도 문제가 없다면 6일 후에는 크라레인 시에 도착하게 될 것이옵니다. 오랜 시간 고생이 많으셨으니 한 며칠 쉬시고 크라레인 공방전에 참석하시면 될 것이옵니다. 알겠다. 자네는 아버지와 내 일행들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게. 폐하는 어디에 계시나? 예, 중앙 홀에 계시옵니다. 다크가 중앙 홀에 들어설 때 황제는 몇몇 중신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반겨 맞이했다. 다크는 황제에게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그의 뒤에 서 있는 장교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검이 눈에 익은 것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자 자, 어서 오게나. 그 엄청난 무훈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네. 짐의 휘하에 키에리를 패배 시킬 무인이 있다는 것은 정말 신의 도움인 것이야. 소임을 다한 것뿐이죠. 그런데 저 검은? 다크는 처음부터 궁중 언어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다소 무례하거나 예법에 어긋난 말투라도 그녀에 한해서 황제는 묵인으 해 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겨우 신하의 말투 때문에 마음 상할 정도로 쪼잔한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아, 저건 경의 아버님이 짐에게 선물로 준 것이지. 대단한 명검이지 않나? 그런 것 같군요, 폐하. 그런데 혹시 아버지가 뭔가 실례되는 행동이라도 한 것은 없습니까? 여기에 들렀다고 하던데 . 다크의 말에 황제는 약간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부인했다. 아르티어스가 황제에게 검까지 선물한 이유는 소란을 피운 사실을 절대로 아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입막음용 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우둔한 황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일은 없었네. 전시가 아니라면 무도회라도 열고, 거창한 열병식을 하며 경을 환영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좀 힘들군. 이해해 주게나.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점령지를 넓혀 가는데 코린트의 저항이 워낙 거세다 보니 병력이 많이 들어가는구먼. 아마도 일주일 후에는 제2진을 투입해야 할 것 같아. 치레아, 스바시에, 크라레스 각 지구에 1개 보병 사단씩만 남겨 놓고 모든 병력을 집어넣어야 하겠지. 다행히 말토리오 산맥에 출몰하던 모든 오크들을 경이 전멸 시켜 둔 덕분에 병력을 빼는 데는 별로 무리가 없더군. 벌써 국경선 부근에 모든 병력을 집결 시키고 있는 중이야. 국지전에도 타이탄을 넣는 것은 어떻사옵니까? 안 그래도 그렇게 하고 있네, 각 사단에 콜렌 기사단에서 저급 타이탄 두 대씩을 지원해 주고 있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방 영주들을 진압하는 것만도 벅찰 거야. 덕분에 콜렌 기사단의 전력은 지금 절반으로 줄어 있다네. 코린트가 힘을 못쓰는 형국인데도 힘이 드는 이유야. 모든것이 잘 될 것이옵니다, 폐하. 그래야 하겠지. 그나저나 오랜만에 경하고 식사나 할까? 좋사옵니다. 그런데 오늘도 돼지고기를 넣은 야채 수프인가요? 상대의 말에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경은 그게 별로 구미에 안 맞는가 보군.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소인은 별로 음식을 가리지 않습니다. 역시 황제의 점심 식사는 다크의 예상대로였다. 개선 장군을 맞이한 매우 경사스러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절약 정신은 변함이 없었고, 다크는 그런 황제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황제가 그렇게 투박한 음식을 즐기는 것이 구두쇠여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크는 황제와 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나누며 적당한 시간을 함께 하다가 물러나왔다. 아르티어스가 있는 곳으로 갈까 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토지에르가 있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토지에르는 집무실에 있지 않고 타이탄 제조창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발길을 돌려 그곳으로 갔다. 크라레스의 타이탄 제조창은 예전부터 외부 사람이 잘 모르도록 매우 비밀리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30년 전 전쟁 이후로 코린트가 크라레스의 타이탄 생산을 엄금하고 있었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타이탄의 거대한 덩치를 생각했을 때 제조창은 당연히 아주 크면서도 모두들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건물이어야 했다. 그리고 웬만큼 많은 사람이나 화물이 들락거려도 이상하지 않은 곳, 그렇게 생각한다면 선택의 폭은 몇 가지로 줄어든다. 크라레스의 타이탄 제조창은 크루마의 신전 양식(神殿樣式)에 가깝게 지어 놓았고, 또 건물 밖에 포진하고 있는 경비병들은 모두 신관(神官)의 복장과 무장을 하고 있었다. 다크가 거대한 신전 건물에 다가서자, 그녀를 알아 본 신관이 인사를 건네 왔다. 얼룩덜룩한 형태의 복잡한 무늬를 집어넣고, 그 사이사이에 물고기라든지 해일, 폭풍을 형상화한 것 등등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복장. 이 신전은 바다의 신 넵튠(NEPTUNE)의 신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이 이 신전을 말토리오 산맥 속에 지어 놨다는 것이다. 당연히 거의 모든 넵튠 신전은 해안가에 지어져 있었다. 그래야 그 신을 필요로 하는 어부라든지, 아니면 바다와 연관된 일을 하는 무역 상인 등이 참배를 하기에 좋다. 물론 크라레스에서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산골짜기에는 넵튠을 신봉하는 인물들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신전을 지어 놓은 것이다. 만약 진짜 넵튠 신도가 참배를 하겠답시고 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으니까. 거대한 신전 안으로 들어서면 완전히 경관이 바뀌게 된다. 거대한 공장. 타이탄의 작은 부품 하나하나는 여기저기 다른 곳에서 제작되고 이곳으로 운반되어 와서 다시 조립된 다음 그 안에 크로네를 채워 넣고, 미스릴을 입히는 것이다.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기 덕분에 후덥지근한 공기가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와중에서도 한쪽 귀퉁이에서 마법사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막 틀에서 뽑혀 나온 엑스시온을 앞에 두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토지에르는 다른 마법사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경비병의 안내를 받으며 제조창 안으로 들어서는 소녀를 보고는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이시옵니까? 전하. 이제부터는 정식으로 싸워야 하니까 타이탄의 도장(塗裝)을 새로 하는 게 좋을 거라고 황제께서 말씀하셔서 말이야. 그나저나 아주 바쁜 것 같군. 여기저기 뼈대를 입히고 있는 이십여 대의 타이탄들을 바라보며 다크가 감탄한 듯이 말하자, 토지에르는 맥이 빠진다는 듯 대꾸했다. 예. 노획한 타이탄이 거의 200여 대가 넘게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옵니다. 하지만 저것들이 실전에 배치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지 . 이번에도 테세우스를 생산할 계획인가? 예. 이제 대제국으로서의 위풍을 세워 나가려면 카프록시아를 생산하는 것이 더 좋겠지만, 카르록시아는 외장에 꽤 신경을 쓴 녀석이므로 짧은 시간 동안 대량 생산하는 데는 힘이 좀 들지요. 그보다는 단순한 외형을 하고 있는 테세우스 쪽이 생산 시간이 적게 드니 어쩔 수 없사옵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이때 그녀의 뒤쪽 공간을 열고 엄청나게 거대한 청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장을 새로 칠하는 작업은 언제 끝나게 되지? 다크의 질문에 토지에르는 저쪽에 도열해 있는 테세우스 여덟 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들에는 여러 명이 달라붙어서 새롭게 페인트 칠을 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입혀지는 테세우스의 생상은 카르록시아와 같은 붉은색과 푸른색이었다. 이번 전투로 인해서 모두들 엉망진창이니까 한 3일쯤 후에나 칠하게 될 것이옵니다. 토지에르는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청기사를 세심히 살펴보며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저기에 검상을 입었던 흔적이 보이는군요. 거의 무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타이탄이 이 모양이니 테세우스들의 표면이 그렇게 많이 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 뭐, 걱정하지 말게나. 더 이상 페인트를 새로 칠해야 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을 거야. 그건 그렇고 치레아로 가려고 하는데, 보내 줄 수 있나? 바쁘면 아버지한테 부탁하고. 치레아와 스바시에에는 영구 이동 마법진을 건설했사옵니다. 그걸 이용하면 마법사의 도움이 없이도 이동이 가능하지요. 경비병들에게 물어 보면 공간 이동문을 가르쳐 줄 것이옵니다. 좋아, 6일 후에 보기로 하지. 예, 전하. 다크가 단출한 일행들을 거느리고 치레아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녀가 온다는 것을 보고 받은 부 총독이 마중 나와 있었다. 부 총독은 여태껏 있었던 일들에 관한 상황을 보고를 하려고 했지만, 다크는 대충 필요한 것만 몇 가지 물어 본 후 회의를 끝냈다. 겨우 6일의 휴가밖에 없는 상태에서 영양가 없는 보고를 장시간 들어 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 총독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지금 이곳 치레아는 겨우 1개 경장 보병 사단과 친위 기사단이 보유한 전력이 전투력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약소한 병력으로 막아야만 하는 상대는 거대한 아르곤 제국이었다. 자네가 대충 알아서 대처하도록 해.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까만 토, 아니 토지에르에게 보고하면 될 거야. 지금 전 병력을 코린트 전선에 쏟아 붓고 있어. 당연히 본국 방위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 둘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지. 그래도 . 아, 더 이상 필요 없는 얘기는 때려 치우자구. 떠든다고 없는 병력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니가 말이야. 이제 회의를 끝내기로 하지.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부 총독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밖에 기사 몇 명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모두들 전하께 뭔가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더군요. 부 총독의 말을 듣고 다크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으며 말했다. 좋아, 들여보내라고 해. 부 총독이 나간 후 파시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약간의 긴장 때문인지 평상시에도 별로 표정이 없던 얼굴이 더욱 굳어져 있었다. 파시르는 들어서자마자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문 옆에 풀어 놓은 후 다가와서 필요 이상으로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그래, 무슨 일인가? 예, 전하께서 저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 염치없는 부탁이오나 친위 기사단을 은퇴하고 싶사옵니다. 뭐? 갑자기 왜? 아무리 대제국 코린트와 대적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크라레스가 손잡은 국가는 크루마. 제 조국의 원수이옵니다. 그 원수와 손잡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전하께 말씀 드리는 것이옵니다. 다크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경은 영원한 동맹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나? 예? 아마도 크루마와의 동맹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깨질 거야. 그리고 적어도 10년 이내로 전쟁에 들어가게 되겠지. 내기를 해도 좋아. 차라리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만약 지금 여기서 나간다면 크루마를 상대로 복수할 기회를 잡는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거야. 진정이시옵니까? 물론이지. 자네는 그동안 검술이나 좀더 닦고 있으라고. 아마도 그때쯤이면 지금보다 더 좋은 타이탄을 지급 받게 될지도 모르지. 드래곤 사냥 때도 보지 않았나?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은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을 말이야. 그것들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더 좋은 것을 많이 만들 수밖에 없어. 자, 열심히 해 보게. 괜히 딴 생각 하지 말고. 예, 전히. 파시르가 어느정도 수긍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간 후, 이번에는 몇 명의 인물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미카엘, 팔시온, 미디아, 가스톤. 이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다크는 미소를 지으며 환영했다. 어서 와. 오랫동안 고생들이 많았지? 반갑게 맞이하는 다크를 보며 미카엘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아 , 정말 죽을 지경이었지. 콜렌 기사단이 빠져 나간 다음부터 그 공백을 메운다고 매우 바빠졌거든. 모두들 앉아. 다크는 그들에게 자리를 권한 다음 밖을 향해 외쳤다. 세린! 차를 내와라. 그리고 술도.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다크의 외침에 답해 왔다. 예. 하지만 술이라는 말이 나오자 팔시온이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대낮부터 술은 . 됐어. 왜? 너희들 술 좋아하잖아.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은 시원하 맥주지. 내낮부터 너처럼 그 독한 브랜디를 마시는 사람은 없다구. 그럴까? 이봐! 세린, 브랜디 한 병하고 맥주 좀 가져와. 예. 안 그래도 나중에 찾아갈 건데, 뭐 하려고 이렇게 급하게 왔어? 실은 또 딴 곳으로 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렇게 찾아왔지. 우리는 도저히 여기서 하는 일이 적성에 안 맞아. 기왕이면 전쟁터에 좀 데려가 달라구. 모험가 생활을 하다가 한 곳에 박혀 있으려니 몸이 근질거려서 죽을 지경이야. 팔시온이 함께 온 인물들을 대신해 말을 했고 덧붙여 미디아가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코린트와의 전쟁에. 꼭 참전해 보고 싶어. 하지만 나하고 같이 다녀 봐야 싸울 일은 거의 없을 텐데? 나는 유령 기사단에 합류할 거니까 말이야. 흥분을 맛보고 싶다면 콜렌 기사단 쪽이 좋지 않을까? 그쪽이 반군 토벌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훨신 나을 거야. 그러자 저마다 모두들 한마디씩 떠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 곳에는 전쟁이 끝난 후에라도 갈 수 있잖아. 우리는 지금 타이탄들끼리 치고 받는 것을 구경하고 싶다구. 그래, 나도 흑기사라는 녀석 한번 구경해 보고 싶었어. 하지만 너희들어게는 너무 위험해. 어쩔 수 없이 정찰조에 배속되게 되는데, 재수 없으면 상대방 그래듀에이트와 싸울 가능성도 있지. 그런 것은 상관없어. 사나이는 말이지, 검을 잡고 죽는 것이 소원 . 으갸갹! 미카엘이 과장된 폼을 잡으며 말하자 미디아는 얄밉다는 듯 미카엘의 살덩어리를 잔득 틀어쥐고 비틀어 버린 후 투덜거렸다. 야, 사나이만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냐? 이 멍청아. 그리고 저 가스톤은 남자지만 검을 잡고 싸울 수는 없잖아. 그리고 다크, 우리들은 죽어도 상관없어. 다만 전사들 답게 역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에 참여하고 싶은 거야.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함께 가기로 하지. 끼야호, 빨리 준비를 해야겠군. 언제 출발하지? 6일 후, 크라레인 시 공방전에 참가하게 될 거야. 좋아, 기대가 되는군. 흐흐흐 . 다크가 오랜 만에 주어진 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 미네르바의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그 주된 원인을 제공한 제임스 패거리 덕분이었다. 기사단들끼리 대규모 접전을 통해 광대한 영토를 점령할 수 있었지만 그게 아직 완전히 뺏은 것이 아니었다. 기사단을 섬멸한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영토에 주둔중인 군대를 격파하는 일이다. 만약 단시간 내에 그 일을 해 내지 못하면 그 군대는 퇴각을 완료하든지 아니면 산 속에 숨어서 게릴라가 되는 것이다. 또 지방 영주들도 토벌해야 한다. 지방 영주들은 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자신들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휘하의 사병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봉건제에 의해 농노들을 통치하는 방식은 새로운 점령지를 확보했을 때 대단히 유용하게 사용된다.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처럼 자신의 군주를 정한 사람들이나 영지를 하사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다. 이 시대의 경우 한 국가에 소속 되어 있다는 의식은 거의 없었다. 농노들의 경우 자신들의 주인이 바뀔 뿐이었고, 자유 무역 지대에 있는 상인들이나 평민들의 경우 세금을 납부할 대상이 바뀌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용병(傭兵)들의 경우도 자신들의 주인이 돈을 낼 수 없을 것 같거나, 아니면 돈을 지급하지 못하면 부담 없이 떠나 버린다. 그런 다음 새로운 주인을 위한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오직 국왕이나 황제를 위해 충성의 서약을 했던 지방 영주나 귀족, 또는 기사들만이 굽히지 않고 저항하게 되는데 이들의 저항을 재빨리 뿌리 뽑는 것이 점령지의 안정을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아울러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 후에 발생하게 되는 게릴라성 산적들 또한 토벌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미네르바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점령지를 완전하게 통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항 세력 안에 타이탄을 지닌 오너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3~6대의 타이탄을 거느린 것으로 추정되는 적은, 상당수의 기사들이나 마법사를 포함한 소규모 기사단이라고 봐야 했다. 그들은 지방 영주들로부터 적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크루마 군대를 괴롭히고 있었고 소탕을 위해 파견 나오는 타이탄 한두 대 정도는 간단히 박살 내 버렸다. 제8경장 보병 사단으로부터 제536보병 연대의 패잔병들과 합류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사옵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거기 파견 나가 있던 쿠로닌 남작은? 쿠로닌 남작 이하 두 명의 기사는 전사한 것이 확실하옵니다.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쿠로닌 남작은 타이탄을 꺼내 들고 달려들었지만 상대방의 붉은색 타이탄에 목숨을 잃었다고 . 쾅! 얼마나 세게 내려쳤는지 탁자가 나뭇조각을 흩날리며 박살 난 채 내려앉았다. 제기랄! 이게 지금 몇 대째야? 후방 각지에서 타이탄 전투가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사옵니다. 아무래도 상대는 최정예 기사들을 남겨 둔 모양이옵니다. 흑기사를 봤다는 패잔병까지 있을 정도이옵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 것도 안 돼. 그렇다고 전방의 타이탄을 뺄 수는 없다. 쟈크렌 요새에는 적의 주력 부대가 남아 있어. 만약 이쪽에서 병력을 뺀다면 놈들이 역으로 치고 나올 가능성마저 있다. 하지만 그들을 계속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옵니다, 전하.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마법사들에게 일러서 통신 채널을 한두개 정도 더 만들라고 해. 그 채널은 놈들을 발견했을 때만 써야 하고, 그러면 제때 보고를 받을 수 있겠지. 그런 후 오너 10여 명을 대기 시켜 둬라. 언제든지 투입이 가능하게 말이야. 전하, 오너들의 등급은 어느 정도로 하는 것이 좋겠사옵니까? 놈들도 근위대를 넣었으니 이쪽도 최소한 카마리에는 되어야 하겠지. 예, 곧 조취를 취해 놓겠사옵니다. 제길, 이럴 땐 루엔이 살아 있었다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루엔 자네에게 가르칠 것이 너무나도 많았었는데, 그걸 다 배우지도 못하고 그렇게 빨리 가 버리다니 . 미네르바는 무술을 익히는 일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가사(家事)라는 것에 시간을 빼앗기게 되고, 또 아이를 낳기라도 한다면 거의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무술을 중단해야 하는 힘든 사태가 벌어진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결혼을 포기했던 것이다. 자식을 낳아 보지 못했던 미네르바였기에, 지산의 대를 이을 루엔 공작을 자식처럼 아껴 온 것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바쁠 때 자신보다 먼저 가 버린 루엔의 존재가 그리운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참, 스펜과 아더, 샤트란은 치료가 끝났나? 예, 지금 거의 치료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때 아르곤 성기사단과의 전투에서 탈진했을 뿐,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좋아. 타론이 죽은 지금, 그 녀석들은 유일한 드래곤 슬레이어들이야. 3차분으로 생산되는 안티고네를 그 아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지급하도록 해라. 예, 전하. 코린트의 주력 부대가 살아 있는 한, 이쪽도 대비를 소홀히 해서는 곤란해. 그린레이크 공작에게 연락해서 이번에 노획한 코린트의 타이탄을 해체해 모두 다 에프리온으로 생산하라고 전해. 에프리온은 대마법사 안피로스가 크루마 제국 근위 타이탄으로 생산했던 것으로서 헬 프로네를 제외한다면 그의 설계작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타이탄이었다. 즉 1.5의 출력을 가지는 카마리에와 비교 했을 때 전투 중량이 5톤 정도 늘었다고 하지만, 출력은 0.2나 상승했기에 전체적인 파워는 훨씬 더 뛰어난 타이탄이었다. 예? 하지만 전하, 그건 본국의 주력 타이탄인 골고디아와 비교해 너무 등급 차이가 나옵니다. 그리고 에프리온으로 만든다면 두 배 이상의 시간이 들어가니까, 계획대로 차세대 주력 타이탄인 카마리에를 . 그게 아니야. 경은 이번에 코린트와 전투를 하고도 느끼지 못했나? 코린트의 기사들은 강하다. 한 등급 떨어지는 타이탄으로도 본국의 기사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단 말이야. 기사들의 검술 실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니까 타이탄의 질이라도 올려 놔야 균형이 맞는단 말이다. 알겠나? 예, 전하. 그리고 폐하께 드린 요청은 어떻게 되었나? 예, 전하의 요청은 기각되었사옵니다. 모처럼 얻은 점령지를 포기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정이셨사옵니다. 제기랄, 지금의 승리에 만족하고 코린트와는 화해를 해 버려야 해. 점령지로서 유지도 안 되는 이 따위 땅덩어리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야? 또 우리의 적은 이제 코린트가 아니야.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 크라레스다. 크라레스에 그녀가 있는 한 머지 않아 크라레스는 코린트 이상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거야.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강대해지기 전, 그러니까 기사단이 그녀의 힘을 받쳐 주지 못하는 지금, 무슨 일이 있더라도 크라레스를 멸망 시켜야 해. 그런데 본국의 그 머저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 빌어먹을 자식들! 드래곤 아빠의 걱정 하지만 미네르바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적은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크라레스 제국을 최강의 대국으로 만들겠다든지, 아니면 이곳에서 최고의 고수가 되겠다든지, 또는 자신의 왕국을 세우겠다든지 하는 야무진 꿈을 꾸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자신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황제와 마법사 토지에르를 위해 약간의 도움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바다(Sea)라는거예요? 자신의 영지 안에 있는 바다 라는 것을 보기 위해 아르티어스와 함께 나오기는 했지만, 사실 그녀는 지금까지 영지 안에 바다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아르티어스는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오잉? 바다라는 것을 처음 보냐? 흐음 , 그냥 언뜻 보기에는 황하 나 장강(양자강) , 동정호 와 별로 다를게 없네요?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도 그렇고 . 그런데 물빛이 정말 푸르다는 것은 다르군요. 뭐? 황후아? 에잉, 너는 딴 건 다 좋은데 왜 한 번씩 혓바닥 돌아가기 힘든 발음을 해대는 거야? 다크는 서둘러 말에서 내린 후, 바닷가로 걸어가서 그 새파란 물을 손바닥으로 떠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녀의 안색은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으엑! 에잇 짜. 무슨 물맛이 이렇죠? 아주 맑아 보이는데 . 원래 바다라는 것이 짜지. 그렇기에 이걸 가둔 다음 수분을 증발시켜서 소금을 만들 수 있는 것이고. 소금을 만든다는 말에 다크는 그제서야 이 Set라는 것이 바다 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은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은 없었지만, 바다가 뭔지, 또 중원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아! 바로 그거였구나. 우리 고향에도 바다가 있었어요.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거기서도 소금을 만든다고 들었어요. 허어 , 역시 생명의 고향은 바다로군. 그건 그렇고 오늘은 어디 쓸만한 식당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좀 먹어 볼까? 바다에서 금방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로 만든 요리와 육지에 아무 곳에서나 맛볼 수 있는 소금에 저린 해산물은 완전히 맛이 다르지. 자, 빨리 가자구나. 그들은 해안가를 따라서 죽 걸었지만 세린은 왠지 무서운 이 아르티어스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말을 몰았다. 아무래도 세린은 묘인족이다 보니 사람에 비해 본능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그리고 지금, 꽤나 능숙하게 말을 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녀는 이게 말을 처음 타는 것이었다. 고양이 특유의 평형 감각을 동원하여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속도를 좀더 내는 경우에는 말에서 떨어질 것만 같아 갈기를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원래 자연 속에 살고 있는 묘인족은 거의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였지만, 그녀처럼 사육(?)된 경우에는 경우가 달랐다. 저리로 가자. 그렇게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꽤 풍족해 보이는 어촌 마을 이었다. 수십 척의 작은 어선들이 항구 내에 정박해 있었다. 고래 같은 큰 고기를 잡는 대형 어선들의 경우 한 번에 며칠, 또는 몇 달씩 바다를 떠돌기도 하지만, 작은 어선들이야 새벽 일찍 나가서 그물을 거둬들인 후 돌아와서 어민 조합(漁民組閤)에 생선을 넘긴 후 또다시 출항하여 그물을 치고 돌아오는 것이다. 어촌 마을에 이르자 해초 썩는 냄새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상큼한 것 같기도 한 바다 냄새가 짙게 풍겨오기 시작했다. 어촌의 여인들이 생선을 장만해 소금에 절인 후 말리는 장면이 여기저기 눈에 띄기 시작했다. 또한 생선 외에도 각종 해초들을 말리고 있는 풍경도 보였다. 이런 식으로 말려놔야 내륙으로 운반해도 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황제나 국왕 정도, 또는 일부 귀족들의 경우에야 마법사들을 부려서 싱싱한 해물을 마법진으로 운반하여 먹기도 하지만,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그런 혜택이 돌아갈 가능성은 없었다. 물론 알카사스 같은 마법이 고도로 발달한 부유한 국가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알카사스는 일반인들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된 영구 마법진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각종 물자들이 국가의 구석구석까지 보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알카사스를 제외한 다른 국가는 생산과 소비에 따른 공간과 시간의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저기가 좋겠구나. 식당도 제법 크고 말이야. 발코니에서 식사를 하면 풍경도 잘 보이겠는데? 예, 그리로 가죠. 다크와 아르티어스, 그리고 세린이 식당으로 들어서자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잠시 대화를 멈추었다. 첫 번째 원인은 세 인물의 아름다움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다크가 검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식당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발코니 쪽으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자리가 다 차 있었기 때문에 돌아 나와서 창가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자리를 잡은 후 조금 지나자 점원으로 보이는 소년이 다가와 메뉴 판을 건네며 물었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주문은 아버지가 하세요. 헤헤, 좋지. 이봐, 생굴하고 바다 가재 수프, 농어 찜, 해물 파스타드 . 아르티어스가 음식을 잔뜩 시켜대자 주문을 받아 쓰고 있는 점원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좋아, 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저 , 손님. 방금 말씀하신 정도라면 여섯 분이 포식하실 수 있는 양인뎁쇼? 아, 상관없으니까 가져와. 그리고 작은 접시 세 개도 함께 줘. 덜어서 조금씩 먹을 거니까. 알겠습니다, 손님. 아주 한가로운 것 같군요. 여기저기 드나드는 어선들도 그렇고 아주 평화로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 오늘은 맑고 파도도 잔잔하니까 그런 말을 한다마는, 폭풍이 불 대는 정말 무섭지. 특히 그런 때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다고 봐야겠지. 그 때문에 뱃사람들은 미신을 많이 믿는단다. 물론 내가 생각했을 때는 다 부질 없는 짓들이지만 . 그런가요? 벌써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기에 모두 앞에 놓여지는 음식을 자신의 작은 접식에 담아 입에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시킨 음식의 양이 엄청나기는 엄청난지, 가장 먼저 세린이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포크를 놓았고, 그 다음 다크가 질렸다는 덧한 표정으로 포크를 놓았다. 먹는 거야 더 먹을 수 있지만, 해산물을 많이 먹어 보지 못한 다크로서는 이 비릿한 해산물만 계속 먹는 것이 곤욕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끝까지 먹고 또 먹고 있었다. 도대체 그게 뱃속에 다 들어가요? 아, 그건 걱정 말거라. 네가 먹을 줄을 몰라서 그런 거야. 음식이란 것은 원래가 천천히 꼭꼭 씹어서 이것저것 조금씩만 먹는 거란다. 농어 찜 같은 경우에도 그렇게 잔뜩 먹을 필요는 없지. 농어의 맛만 즐기면 되는 거야. 내가 먹고 남은 것은 강아지나 고양이 먹이로 쓰든 말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음식을 먹으면 벌을 받아요. 누구한테? 그 , 글쎄요. 혹시 누가 알아요?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라도 떨어질지? 헷! 그딴 거는 겁나지도 않는다. 이제 대충 먹었으면 일어나자. 그러죠. 금화로 계산을 끝낸 후 천천히 말이 있는 곳으로 가는 아르티어스의 등판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던 다크는 히죽 미소를 지은 후 외쳤다. 뇌!(雷!) 그와 동시에 마른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은 아르티어스 어르신을 향해 직격했지만, 아르티어스의 주위에서 뭔가 벽에라도 막힌 듯 퍼지면서 땅바닥으로 스며들어 버렸다. 아르티어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슬며시 말 위로 올라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가자. 헤헤헤 . 아르티어스는 쑥스럽게 웃고 있는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들을 향해 빙긋이 미소를 보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오래 전에 가르쳐 줬던 용언 마법을 아직까지 잘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을 그렇게 순간적으로 써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매우 흐뭇해 하는 중이었다. 한참 바닷가로 말을 몰고 가던 아르티어스는 문득 다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에 카드리안을 만나봤으니 대충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드래곤이란 것은 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정령력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지. 그것 때문에 실버 레드 블루 골드 그린 그래곤은 다섯 정령력 즉, 물 불 뇌전 바람 대지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이란다. 카드리안의 뇌전의 기운에 맞서 보고 나서 느낀 점이 있었겠지? 글쎄요, 정말 덩치에 어울릴 정도로 강력하다는 정도만 . 흐음, 하지만 카드리안의 힘도 제대로 된 것은 아니지. 에인션트 급의 드래곤들은 그보다 월등하게 강하다. 카드리안은 아직 에인션트가 되려면 엄청난 세월을 기다려야 하거든. 노룡이 된다고 해서 덩치가 더 커진다든지 뭐 그런 것은 아니야. 웜 급에 다다른 후 드래곤의 성장은 멈추기 때문이지. 대신 육체가 차지하는 부분이 점점 더 줄어들어가는 거야. 나중에는 그러니까, 완전히 몸 전체가 정령력과 마나, 그리고 너희들이 말하는 드래곤 본만으로 재구성된다고 봐야겠지. 드래곤 본만이라면, 그렇다면 에인션트 급에 도달한 드래곤은 드래곤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거대한 타이탄처럼 알맹이가 변한다는 말인가요? 대충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거다. 육신이 소멸하기에 더욱 엄청난 힘을 낼 수 있는 것이고 하지만 드래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정령력의 원천인 정령왕보다 강하다는 것은 아니란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지금 네가 끼고 있는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의 아쿠아 쿨러. 그것 때문에 언젠가는 너에게 크나 큰 시련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걱정스러운 아르티어스의 표정과는 달리 다크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시련이요? 헤헤, 그 따위 것은 겁나지 않아요. 전에 꿈 속에서 시달린 것 때문에 그러시는 모양인데, 사실 그때 제가 모든 힘을 발휘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녀석 꽁지 빠지게 도망쳐 버렸거든요. 아르티어스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약간 쑥스러운 듯 말하는 아들을 바라보다가 그 시선을 바다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정령왕은 무서운 존재란다. 그들의 힘은 드래곤을 훨씬 앞서 거의 신에 필적할 정도지. 하지만, 그들에게도 단점은 있어. 바로 그것 때문에 나이아드는 지금쯤 고심하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단점이요? 정령왕이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들의 세계와는 다른 곳이다. 정령계라고 불리는 다른 차원의 세계지. 거기서 그들은 최강의 존재들이지만, 인간계로 나온다면 자신들의 힘을 10분의 1도 발휘하지 못한단다. 그렇기에 나이아드 혼자만이라면 나도 걱정하지 않겠지만, 그녀석이 대지의 정령왕 다오(Dao)와 힘을 합쳤다는 것이 문제지. 정령왕 둘이 힘을 합했을 때 어느 정도 능력을 발휘할지는 나도 모르기 때문에 걱정이 되는 거야. 그런데, 아버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꼭 있나요? 그때 이후로 나이아드 녀석이 잠잠한 걸 보면 나는 이미 시험에 통과한 것 아닌가요? 아르티어스는 다시금 시선을 아들에게로 돌렸다. 그는 몇 번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아들에게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하지만 미래의 일까지 말해서 아들에게 걱정을 안겨 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그것을 참았다.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엉뚱한 걱정을 한 모양이구나. 앞으로도 잘 되겠지.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 너에게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언제나 마음에 새겨 둬야 할 것이 있다. 네 종족에 대한 믿음을 잊지 마라. 네가 보기에 아주 나쁜 놈들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크게 봤을 때 그들도 자기 나름대로 뭔가를 위해 노력하는 녀석들이야. 그들을 이해하거라. 너 또한 딴 사람들이 봤을 때, 그렇게 좋게 인식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전번 전쟁을 치뤘던 코린트의 경우 너를 아주 지독한 악당이고 살육자쯤으로 여기고 있겠지. 반대로 크라레스에서 너는 영웅이고 말이다. 언제나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반대되는 입장이란 것이 있단다. 알겠느냐? 다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예, 알겠어요. 자, 이제 그만 돌아가자. 바다 바람을 너무 많이 맞는 것도 몸에 썩 좋은 것은 아니야. 바람에 소금기가 있거든. 키에리 공작의 운명 황혼이 저물어 가는 붉은 들판. 아무리 붉은 황혼 빛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들판은 너무나도 붉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혼이 저무는 들판에는 수백 구가 넘는 시체들이 말의 시체와 함께 널려 있었고, 그들에게서 를러나오는 피는 그야말로 작은 시내를 이룰 정도였다. 그 붉은 핏물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인지 대지의 색깔도 붉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뒤처리는 끝났나? 가미유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마법사는 멀찌감치 둘러본 후 답했다. 옛, 백작 각하. 대충 끝난 것 같습니다. 상대의 말이 끝나자 까미유는 싫지 않은 듯 쑥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아, 각하라는 존칭은 나중에 후작이 된 후에나 붙여 주게. 죄송합니다, 백작 님. 죄송할 필요까지야 있겠나? 하하하. 까미유는 이제 더 이상 타이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거대한 고철 덩어리를 찬찬히 바라봤다. 몇 십 분 전에 자신의 적기사에게 파괸된 크루마의 타이탄. 그것은 겉에 미스릴을 입히지 않았기에 , 울퉁불퉁한 대 마법 주님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바로 크루마의 걸작 중의 하나인 골고디아였다. 아직까지도 최신형 타이탄이 배치되지 않고 있는 걸 보면 크루마 녀석들은 우리들의 존재가 별로 성가시지 않은 모양이지? 이제 놈들도 슬슬 대비를 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벌써 곳곳에서 파괴한 타이탄이 열 대를 넘어서고 있으니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모두들 빨리 모이라고 해. 옛. 마법사가 공중으로 신호탄을 쏘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불꽃이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돌아왔다. 까미유는 모여든 자신의 부하들을 차근차근 훑어봤다. 여섯 명의 기사들과 마법사 한 명, 자신이 거느린 소규모 부대의 전부였다. 물론 여기서 세 명은 그래듀에이트였고, 마법사는 5싸이클 급에 해당하는 매우 뛰어난 이니물이었다. 사실 이 정도만 있어도 어지간한 상대방 진영을 치고 빠지는 데는 충분한 병력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부상 당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이런 소규모 부대에서는 한 명이 아쉬운 것이다. 이 근처의 반군 토벌을 위해 적들의 1개 기병 연대(1,000명)가 파견되었다는 정보를 접하고 까미유는 부하들과 함께 이곳에 매복했다가 기습을 가한 것이었다. 반수 이상의 적 기병들이 도주했지만 상대방 타이탄을 파괴한 만큼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까미유는 다시 한 번 쓰러져 있는 골고디아를 아쉬운 듯한 눈길로 바라봤다. 저걸 가져가면 꽤나 도움을 될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 고철 타이탄 따위나 본국으로 옮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또 다른 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까미유는 모여 있는 부하들을 향해 만족스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들 무사한 것 같군. 자 빨리 여기를 벗어나자. 예, 대장(隊長)! 까미유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법사는 이미 그려 놨던 마법진 옆으로 다가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 마법진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그려 놨던 것이었다. 혹시나 적의 병력이 너무 강하다면 대충 싸우다가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마법진을 그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지 마법사는 빠른 시간 내에 이미 공간 이동 마법을 완성했고 곧이어 동료들을 마법진 위로 올라오게 한 후 이동을 시작했다. 잠시 뿌연 빛이 번쩍인 후 까미유 일행은 목표지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방금 전 전투를 벌였던 곳에서 30킬로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법진 위였다. 그곳에 도착하자 마자 마법사는 통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본진이 나왔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백작 님. 그래, 자네도 잘 있었나? 뭐 별다른 사항은 없나? 예, 쟈코니아 이동 좌료 3045345, 1012456 지점에 적의 연대 병력의 통과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곳의 적을 격멸한 후 흔적을 지우고 본대와 합류하라는 후작 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상대 마법사의 말은 까미유에게 기대 어린 표정이 떠오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제 드디어 작전 개시인가? 예, 백작 님. 여기저기 들쑤셔 놓은 덕분에 카라엔 요새의 방비는 상당히 약화된 상황입니다. 내일 저녁, 작전이 실행됩니다. 알겠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참, 발렌시아드 공작 전하께선 좀 어떠시냐? 돌연한 까미유의 질문에 마법사는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예? 예 , 저 어제 밤 서거(逝去)하셨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마법진 주위에 둘러서 있던 모든 사람들은 놀라움과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뭣이? 그게 정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시신은? 일단 전쟁이 끝난 후까지 가매장(假埋葬)해 뒀다가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코린티아 시로 옮기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알겠다. 까미유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마법사에게 말했다. 본진으로 돌아가자. 예? 하지만, 임무는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지금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께서 서거하셨다는데 그 따위 거나 하게 생겼어? 하지만 . 닥치고 빨리 이동용 마법진이나 만들어. 까미유의 역정 어린 말에 마법사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예, 백작 님. 느닷없이 나타난 까미유를 보고 제임스는 그가 급히 나타날 줄 이미 짐작이나 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앉게. 의자를 권하며 제임스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여러 개의 잔들 중에서 하나를 꺼내 브랜디를 한 잔 가득 부었다. 물론 자신의 앞에는 반쯤 마시다가 남은 잔이 놓여 있었다. 까미유는 미소를 짓는 제임스의 표정과 잔에 가득 부어져 있는 짙은 호박색 액체를 번갈아 발보다가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언제 돌아가셨나? 아마도 새벽 두 시 정도 . 그럼 자네는 거기 없었나? 아니, 옆에서 도와 드렸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장례식도 주관했었는걸. 제임스의 말이 상당히 특이했기에 까미유는 다시금 물었다. 도와 드려? 뭘? 임종을.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까미유는 더듬거리며 외쳤다. 설마 , 자살이란 말인가? 왜? 멍청한 표정을 짓는 까미유를 바라보며 제임스는 해죽이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제임스는 슬쩍 일어나 까미유의 옆에 앉은 다음 귓속말로 속삭였다. 살아 계셔. 뭐? 경악한 듯 외치는 까미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제임스는 다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살아 계셔. 뭐? 경악한 듯 외치는 까미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제임스는 다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쉿! 누가 듣는다구. 살아 계시지만 대외적으로는 돌아가신 거야. 그렇다면 적들을 속이기 위해서? 제임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속삭였다. 아니, 한심스럽게도 아군들을 속이기 위해서지. 멍청한 황제 폐하께서 칙명을 내리셨어. 아버지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고자 하니 수도로 최대한 빨리 귀환하라는 것이었네. 물론 벌이 뭔지는 짐작하겠지? 참수형(斬首刑)인가? 물론이지.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 아버지의 구명 운동을 휘해 수도로 달려가셨지만 실패하셨어. 내 목숨을 살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고 하시더군. 그렇다면 그로체스 공장 그 자식이! 제발 목소리 좀 낮춰.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이제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충 눈치를 챈 까미유를 향해 제임스는 조심스럽게 핀잔을 준 후 다시 나지막한 소리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녀석 말고 또 누가 있겠나? 너구리같이 밥맛 떨어지는 녀석이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정권을 잡아 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구는 거겠지. 그래서? 대공 전하께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따르셨다는 거야? 적이 얼마나 강했었는지 자네도 잘 알잖아. 그리고 로체스터 전하도. 상대방의 전력으로 미뤄 봤을 때 주력 부대가 살아서 후퇴한 것만도 아레스(ARES : 전쟁의 신)께서 도운 것이었어. 누가 그걸 모르나? 하지만 칙명이 내려왔어. 일단 폐하께서 말씀하신 이상 그것이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도 우리들이 기사인 이상 지켜져야 해. 그 때문에 아버지께서 수도로 귄환하시겠다는 걸 만류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네는 아나? 로체스터 전하께서 만류하신 덕분에 떠나실 결심을 하신 거야. 까미유는 주위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 주위를 다시 한 번 빙 둘러본 후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렇다면 시체는? 잘못 처리하면 들킬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 아버지께서는 어제 밤 자결하신 것으로 했어.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신 것으로 되었지. 영예로운 전사자로 처리되었기에 나한테까지 화가 미치지 않은 거야. 로체스터 전하께서 힘을 쓰신 덕분이었지만 . 그런 분의 시체를 확인하겠다고 여기까지 날아올 정도로 간 큰 놈은 없어. 그리고 죄인도 아니고 영예로운 전사자의 시체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장례식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멋지게 할 필요가 있었거든. 그래서 밖에 나가서 아버지하고 체형이 비슷한 녀석을 하나 죽였지. 마법으로 얼굴 모양을 비슷하게 변형시킨 후 장례식에 써먹었기에 부하들도 눈치 채지는 못했어. 몇 달 정도 지난 후 이장(移葬)하기 위해 파내면 다 썩어서 알아 볼 수 없을 테니까 뭐, 뒤탈도 없을 거야. 그렇다면 그 마법사 녀석의 입을 막아 두는 것이 좋겠군. 까미유가 살기 띤 어조로 나지막이 말하자 제임스는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후후 , 걱정 마. 아버지와 함께 갔으니까 말이야. 아직도 치료 마법을 좀더 받으셔야 하니 잘 되었지 뭐. 누군데? 누구기는 죠드지. 원래 처음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한 사람은 메니테스였는데, 아버지로서는 죠드 쪽이 더 좋았던 모양인지 의식이 깨신 후에는 죠드로 바구라고 지시하쎴지. 물론 메니테스는 아버님이 자살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 그러니까 별 걱정은 없을 거야. 호위 기사는? 아버지께서 거절하셨어. 죄인에게 무슨 호위가 필요하겠느냐고. 기사의 맹세를 저버린 자신은 더 이상 기사가 아니라고 하셨지. 기사로서 자격도 없는 자신이 호위를 받는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조용히 떠나셨지. 제기랄! 적들이 코린트를 집어 삼키려고 설치는 이때, 권력 투쟁이나 하고 있다니! 멍청한 자식들! 열이 받아서 소리를 지르는 까미유를 바라보며 술잔을 들고 쭉 들이킨 제임스는 다시 잔을 한 잔을 더 따르면서 말했다. 누가 아니래나? 자네도 술이나 한잔 하게. 나도 지금 기분이 더럽구먼. 그런 의미에서 한잔 더 해야겠어. 그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위대한 무인을 위해서 건배. 까미유가 술잔을 높이 들고 외치자 제임스도 그것에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자네 말 한 번 멋지게 하는구. 그래, 건배! 그날 밤 늦게까지 두 사람의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기사인 이상 기사의 맹세(Oath of the Knight) 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현실을 탈피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들을 더욱 취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큰일났습니다. 마법사가 뛰어 들어왔을 때 제임스와 까미유는 이미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그들 주위에 굴러다니고 있는 수많은 빈 병들만이 힘겹게 마신 술의 양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제임스가 먼저 아직도 술에서 덜 깬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부스스한 긴 머리카락이 시선을 가렸기에 그는 거친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젖혔다. 무슨 일이냐? 아직도 약간 꼬부라진 음성으로 말하는 제임스를 보고 마법사는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레토 경께서 전하하셨습니다. 순간 제임스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 레토가? 어떻게 된 일이냐? 예, 예정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되지 않아 정찰을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긴 막대기에 거꾸로 매달린 시체들을 발견했답니다. 거꾸로 매달아 놨다고? 예, 각하. 레토 경과 함께 갔었던 기사들과 마법사였습니다. 정찰조의 보고로는 시체들은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그 밑에는 목이 없는 레토 경의 시체가 있었답니다. 주위에는 수많은 타이탄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열 대 이상이 동원된 것 같았답니다. 타이탄의 종류는? 예, 놈들의 신형 한 대하고 나머지는 카마리에였답니다. 고작 흑기사 한 대. 정말 딱 좋은 먹이였겠군, 제기랄. 마법사는 품 속에 종이 쪽지를 꺼내어 제임스에게 건넸다. 제임스는 아직도 숙취가 풀리지 않은 손으로 받아 천천히 펴며 물었다. 뭔가? 레토 경의 시체 곁에 떨어져 있었다고 하옵니다. 제임스는 쪽지를 펴다가 말고, 마법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정찰 나간 녀석들에게 흔적은 깨끗하게 지우라고 지시해 뒀겠지? 예, 일곱 군데의 이동 마법진을 거쳐서 이동해 왔습니다. 물론 숯을 사용했기에 흔적을 발견 당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제임스는 쪽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좋아. 허 ,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니가 알아서 거지라고? 빌어먹을 자식들! 제임스는 종이를 꾸겨서 집어던지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출동할 수 있도록 모두들 준비해 두라고 해. 예? 레토 경계서 전사하셨는데, 움직이실 겁니까? 오늘 놈들도 공을 세우고 기분이 좋을 텐데, 이런 때 뒤통수를 치는 게 더 좋아.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내 친구의 원수 똑똑. 무슨 일이냐? 피곤한 잠을 깬 미네르바가 짜증스런 목소리를 내자,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여 왔다. 공작 전하, 긴급 통신이 도착했사옵니다. 긴급 통신? 무슨 내용인지 말해 봐라. 부하는 한층 더 조심스럽게, 하지만 긴박함을 숨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예. 30분 전, 돌프렌 요새에 수감 중이던 전쟁 포로들이 탈출했사옵니다. 뭣이? 그게 사실이냐? 예, 전하. 아마도 소수의 공격대가 침투해 들어와서 구출해 간 모양이온데, 어디로 도망 쳤는지 현재로서는 추축 불가능이라고 하옵니다. 제기랄, 잘들 노는군. 우리 쪽 피해는 어떻지? 예. 강력한 공격 마법에 의해 요새 일부가 파괴되었고, 사상자(死傷者)는 삼백여 명 정도가 발생했다고 보고 받았사옵니다. 일단 대기중인 기사들을 파견했사옵니다만, 후속 조치에 대해 하명해 주십시오. 하지만 미네르바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 쓰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후속 조치? 후속 조치 따위가 필요할 리가 없잖아? 놈들은 보나마나 죽자고 내뺐을 게 뻔하고, 아마 흔적을 따라가면 쟈크렌 요새로 이어져 있겠지. 쓸데없이 그런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만 잠이나 자게나. 예, 전하. 발자국 소리가 점차 문 앞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미네르바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또 한 번 코린트 놈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포로들을 좀 더 빨리 본국으로 보내 버리는 거였는데 , 제기랄! 미네르바는 천장을 바라보며 투덜 거렸다. 요새 사령관으로 임명된 쥬크노 남작은 모든 비밀 통로를 발견해 냈고, 그곳에 대해 철저하게 방비를 하겠다고 보고했었어. 그렇다면 그때 발견되지 않은 비밀 통로가 있었을까?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돌프렌 요새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철저하게 심문했었고, 고위급 장교들가지 족쳤는데 새로운 통로가 남아 있었을까? 아에, 제기랄, 잠이나 자자. 없었다면 하수도라도 기었겠지 .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며 미네르바가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을 때, 거기서부터 엄청난 거리에 떨어져 있는 어떤 남자 또한 게릴라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제기랄, 이놈의 게릴라는 끝도 없군. 이래서야 진격은커녕 보급로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 진격 속도를 줄이더라도 차근차근 확실하게 뿌리를 뽑아 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어. 그렇지 않나? 질문을 받은 마법사는 상대를 향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전하. 그렇다면 지시를 내려라. 이번에 새로이 투입되어 진격중인 사단들에게 명령해서 한 마을 한 마을 철저하게 색출하여 격멸하라고 전해. 그리고 각 사단 콜렌 기사단의 타이탄을 두 대씩 지원해 줘라. 그리고 기사 네 명씩하고 . 옛, 전하. 크로나사가 엄청나게 크긴 크군. 본국에서 동원중인 군사력으로는 현상 유지도 하기 힘들 정도로 넓어. 영토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면 이런 땅덩어리 위에 기사단을 주둔시키는 것은 무의미해.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번에 올라온 보고로는 제16경장 보병 사단에 파견 나가 있던 오너가 게릴라를 토벌하던 중에 철십자 기사단의 마크가 붙은 크라메(0.85)를 한 대 파괴했다고 들었사옵니다. 아마도 놈들이 본격적인 게릴라전으로 응수해 오는 것이 아닐까요?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만 하옵니다. 크라레스의 기사들은 거의 30여 년간 크로나사 평원을 되찾기 위해 피땀 어린 훈련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그들 대다수는 그래듀에디트 시험에 응시할 자격조차 박탈 당한 채 역사의 전면(前麵)에 나서지도 못하고 오로지 수련만을 받았다. 그에 비해 다른 국가의 기사들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여 각종 이권에 개입하여 다툼을 벌이고, 자주 화려한 무도회에 참석하는 등 시간 낭비를 일삼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코린트의 기사들이 강하다고 하지만 크라레스의 기사들보다는 실력과 정신력에서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놈들에게만 신경을 쓰기 힘든 처지야. 어떻게 한다? 놈들의 주력 부대가 크루마에 묶여 있는 이때를 최대한 이용해야 하는데 말이야. 하지만 군사력이 턱없이 부족해. 이런 때 전방에서 타이탄을 더 이상 빼낸다는 것은 자살 행위야. 근위대를 쓰면 어떨가요? 청기사 한 대 정도 꺼내는 거야 별일은 아니겠지만 , 그래도 폐하께서 허락을 하실까? 아마도 허락하실 것이옵니다. 만약 그게 어렵다면 지금 수도에서 대기중인 유령 기사단 분대를 쓸 수도 있사옵니다. 원래는 크라레인 공방전 때 합류할 예정이었사오니 토벌 작전에 투입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옵니다. 몇 대나 되지? 테세우스 여덟 대이옵니다. 테세우스 여덟 대라 . 좋아. 그 중 네 대만 쓰기로 하지. 네 대는 수도에 주둔하면서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하고, 적들의 타이탄이 나타났을 때 파견 나간 타이탄이 그놈을 잡고 시간을 끄는 동안 그쪽으로 곧장 합류 시켜 놈을 때려잡는 것으로 하자. 좋은 생각이시옵니다, 전하. 그리고 폐하께 허락을 받아, 만일을 대비해서 근위 기사 한 명도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대기하라고 하면 되겠지. 옛, 전하. 이제 대충 정리가 끝났군. 자네도 눈 좀 붙이게. 이거 매일매일 이래서야 몸이 버텨 내지 못하겠군. 예, 전하. 그래도 초전(初戰)부터 기대만틈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것에 희망을 걸어야 하겠죠. 그럼, 안녕히 주무시옵소서. 자네도 잘 자게나. 마법사가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가자 크로아 공작은 방 한쪽에 놓여 있는 낡은 침대 위에 거의 쓰러지듯 누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이렇듯 영토를 점령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완벽하게 점령된 땅, 즉 자신들의 영토인 경우 문제가 없었지만 타이탄 전투를 통해 갓 상대의 주력 부대만 몰아 낸 점령지는 엄청나게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 전쟁이 치레아나 스바시에 점령처럼 빠른 시간 내에 수도를 점령하고 국왕이나 황제를 처형해 버렸다면, 구심점을 잃어 버린 게릴라의 활동은 비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서로가 변방의 땅덩어리를 두고 벌이는 국지전일 뿐이었기에 각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영주들은 끝까지 저항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모든 나라가 이런 문제 때문에 아르곤 제국을 겁내고 있었다. 만약 코린트가 아르곤을 점령한다는 가정을 세운다면 그건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아르곤 성 기사단의 타이탄 전력은 그렇게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영토를 점령한 후에는 어떻게 될까? 지방 영주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 국민들로 이루어진 광신도들과 타이탄이 없는 성 기사들을 상대로 싸워야만 했다. 그야말로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을 학살하고 나서야 그 영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병력과 기사들이 그 드넓은 아르곤의 대지에 퍼져서 싸워야 할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 때문에 아무도 아르곤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군사력이 약한 아르곤에게 침략을 당할 걱정도 할 필요 없으니 더 잘 된 것이었지만. 수고했다. 맡은 바 소임을 다했을 뿐이옵니다, 전하. 자네들이 훌륭하게 해 낸 일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도 많이 올라갔어. 잘 해 주었다. 이리 앉거라. 로체스터 공작은 다시 밖을 향해 외쳤다. 포도주를 좀 가져오너라. 예. 로체스터 공작이 기거하고 있는 방은 흔히 성주들의 방이 그러하듯 요새 내의 탑 꼬대기에 있었다. 6층에 이르는 탑을 통과해 들어오려면 층층이 배치되어 있는 경비병들을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취해지는 조치였다. 그 때문에 로체스터 공작이 머무는 방의 창문을 통해 웅장한 쟈코니아 산맥의 장관을 숨김없이 살펴볼 수 있었다. 어때? 경치가 대단히 좋지? 사방이 쓸모 없는 산들인데도 이렇듯 눈을 즐겁게 해 주니, 그렇게 쓸모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 그리고 만약 이 산맥이 없었다면 크루마 군은 쟈코니아 전체를 삼켰겠지. 그렇군요. 키에리가 떠난 것은 정말 유감스런 일이야. 이제 남은 본국의 마스터는 너희들과 나뿐이구나. 하기야 세월이 더 흐른다면 몇 명이 더 탄생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너무 늦어. 예. 하녀가 포도주와 잔들을 놓고 절을 한 후 물러가자, 공작은 세 개의 잔에 포도주를 따라 권한 후 입을 열었다. 자, 들게나. 예. 그건 그렇고 통신상이라서 길게 말을 못 했다만, 그때 부탁한 것은 뭐냐? 왜 크라레스 침공군에 대해 조심하라는 것이지? 그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형편이지만 . 예, 그때 아버님을 쓰러뜨린 검객은 크라레스에서 파견 나온 인물이었사옵니다. 더군다나 크라레스는 엄청난 위력의 타이탄까지 생산해 냈고요. 로체스터 공작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 크라레스였었나? 그렇다면 크로아 공작인가? 크로아 공작이라니요? 두 젊은이가 무슨 말인가 하여 되묻자 로체스터는 회상에 잠긴 표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잊어 버렸지만, 크라레스의 크로아 가문은 정말 대단한 무가(武家)였었지. 그때 그 크로아 공작의 목을 벤 것이 나였으니까 말이야. 자신이 타고 있던 카프록시아가 파괴되어 밖으로 끌려 나왔을 때도 당당함을 잃지 않던 뛰어난 인물이었다. 크로아 공작과 몇몇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끝까지 막아 낸 덕분에 크라레스 황제가 도망 칠 수 있었지. 아마도 그의 아들이나 손자들 중에서 걸출한 녀석이 나올 수도 있었겠지. 이대 까미유가 공작이 잠시 말을 멈춘 틈을 이용해서 끼여들었다. 처음 자신들이 의도했던 방향에서 대화가 어긋나고 있었던 것이다. 험험, 저, 말씀중에 죄송합니다만 크로아가 아닌데요? 로니에르라고 하옵니다, 전하. 로니에르? 그런 가문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가만 , 요 근래에 치레아에 부임했다는 총독의 성이 로니에르였던 것 같군. 로체스터 공작이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자 제임스가 곧장 대꾸를 했다. 예, 바로 그 인물이옵니다.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크라레스에 그런 뛰어난 무가가 또 하나 있었던가? 그런 모양이옵니다. 제가 코타스 공작 전하 실종 사건 때문에 뒷조사를 하다가 알아 낸 이름이니까 말이옵니다. 그놈이 코타스의 실종과 관계가 있다고? 예. 그렇다면 그 녀석은 어느새 내 친구를 두 명을 없앴다고 봐야겠군. 키에리를 죽일 실력이라면 코타스도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예, 그런데 로니에르 공작은 수상한 구석이 많사옵니다. 그 용모도 그렇고, 그 실력도 그렇고, 또 그렇게 강력한 실력을 가진 인물이 요 근래에 갑자기 등장했다는 것도 그렇고, 또한 그녀가 가지고 있는 타이탄도 수상하고 . 제임스의 말에 로체스터는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그녀라고? 여자라는 말이냐? 예, 많이 봐 줘야 열여덟살 정도로 보이는 가녀린 소녀죠. 로체스터 공작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부인했다. 그건 말도 안 돼. 무술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젊어질 수 있다고는 하지만 어려질 수는 없어. 마법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요? 어려지는 마법 같은 것 . 그건 아닐 거야. 마법사나 신관이 아닌 이상 마법을 계속 유지하기는 힘들어. 또 자신이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가녀린 소녀의 몸을 가진다는 것은 미친 짓이야. 검의 파워는 근력과 무게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네가 가녀리다고 하는 걸 보니 대충 어떤 몸매인지 짐작이 가는데, 그런 몸매로는 절대로 정상적인 파워를 낼 수 없어. 수련을 거치다 보면 자연히 근육은 적당하게 붙게 되는 것이고, 또 자신이 익힌 무술에 알맞은 몸체를 만들어 가게 되는 것이지. 그럴까요? 까미유. 예, 전하. 너는 그 로니에르라는 인물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라.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 가문에서 가장 뛰어났던 검객은 누구인지,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는지, 뭐 그런 것들을 말이야. 알겠느냐? 옛, 전하. 까미유를 향해 로체스터 공작이 지시를 끝내자 제임스가 공작을 향해 물었다. 그렇다면 크라레스 쪽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전하. 그렇게 강한 상대가 크라레스에 있다면 그냥 놔두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괜히 싸워 봐야 남는 것도 없어. 본국의 동맹군 타이탄 300여 대를 전멸 시킨 살라만더 기사단을 거느린 나라라면, 싸워 봤자 결과는 뻔해. 그냥 게릴라전으로 몰고 가는 것이 좋을 거야. 기사는 강하지만 군사력은 약하니까 그 점을 철저히 이용하면 되겠지. 예, 전하. 이상한 유령의 도시에 가다 여기 맞아요? 아들의 앙칼진 말에 아르티어스는 당황해 하며 주춤주춤 말했다. 그, 글쎄다. 책으로 봤을 때는 분명히 여기가 맞는데? 아니, 내가 잘못 왔나? 또다시 이리저리 책을 뒤져 봤지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크 일행은 정확하게 약속된 시간에 크라레인 시 외곽에 도착했다. 아르티어스가 안내한 것이었기에 사람 열 명, 드워프 하나, 말 열 필, 그리고 당나귀 한 마리는 공중에 나타나서 매우 우아한 모습으로 착지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엄청난 숫자의 대군(大軍)이 집결해 있지 않았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크라레인 시에는 크로나사 평원 수비군의 주력 부대가 방어를 위해 집결해 있어야 했고, 또 그에 대치해서 크라레스의 주력 부대도 공격을 위해 집결을 완료하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군대는커녕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거, 여기가 크로나사 평원이 맞기나 한 거예요? 그것조차 의심스럽네. 못 믿겠다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을 보고 아르티어스는 발끈해서 말했다. 여긴 크로나사가 맞아! 아무리 이 책이 잘못 되었다고 해도 그렇지, 내가 그 넓은 크로나사 땅덩어리를 찾지 못해 엉뚱한 곳으로 데려왔을 것 같아? 글쎄요. 그럴 수도 있죠. 아들 녀석이 이죽거리자 열 받은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주절주절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절대로 그럴 리 없어. 이거야 원, 아들 녀석이 아버지를 못 믿다니. 이런 비극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야? 아무리 세상의 모든 도덕과 윤리가 무너져도 그렇지 . 마침내는 별소리가 다 나올 것 같자 다크는 발칵 화를 내면서 미리 기를 꺾었다. 말장난 하지 말아요. 아버지가 실수한 걸 가지고 도덕과 윤리까지 따질 이유는 뭐가 있어요? 이런 젠장! 내 기억까지 잘못 되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공간 이동을 해서 도착하자마자 다투기 시작하는 것을 뒤에서 멍청히 보고 있던 기사 한 명이 아프티어스가 머리를 감싸쥐느라 잠시 말다툼이 끊어진 틈을 이용해서 끼여들었다. 그는 저 멀리 아주 자그마하게 보이는 커다란 도시 쪽을 가리키며 머뭇머뭇 말했다. 저, 공작 전하. 혹시 저기 있는 도시가 크라레인 시가 아닐까요? 일단 기사가 편을 들고 나서자 아르티어스는 금세 힘을 얻어 아들에게 우기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여기 지도에 따르면 저쯤에 도시가 있다고. 저게 크라레인 시가 맞을 거야. 하지만 다크는 여전히 코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저게 도시예요? 눈 있으면 똑바로 봐요. 도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흥청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곳이 도시라구요. 그리고 한눈에 척 보면 몰라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잖아요? 건물 안이고 밖이고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짜증 난다는 듯 대꾸했다. 그도 이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둘이서 아웅다웅 떠들어 대자 그들을 수행해서 따라온 일행들은 어안이벙벙해진 표정으로 저 멀리 보이는 도시를 다시 한 번 훑어봤다. 자신들의 시력으로는 도저히 저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말이지. 너희들이 온다는 것을 알고 다 도망 친 것은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크로나사 평원 위에 위치하고 있는 최대의 도시가 크라레인 시인데 그걸 버리고 완전히 빈 도시를 만들어요? 그럼 돌림병으로 모두 죽었다든가 . 쳇! 그럼 시체를 먹으려고 까마귀나 뭐 그런 것들이 돌아다녀야 하잖아요. 으음 제기랄, 나도 모르겠다. 한번 가서 알아 보자구. 좋아요, 가자구요. 두 사람은 일행의 앞에 서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을 몰아 그들의 말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유령 도시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도시가 점차 가까워지자 그들을 뒤따르던 기사 한 명이 그 뒤를 따라오던 두 명의 기사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들은 재빨리 말에 채찍질을 가해 속도를 내면서 앞으로 달려갔다. 그들에게는 공작 일행을 호위해야 하는 임무가 있는 만큼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적의 매복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다크 일행이 도시에 완전히 다가섰을 때쯤이었다. 앞서간 두 명의 기사가 다시 말을 몰아 돌아와서 보고를 올렸다. 말들은 갑작스럽게 막대한 운동을 해서 그런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말 아무도 없사옵니다, 전하. 사람은커녕 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도시는 처음 봤사옵니다. 그들의 보고를 듣고 다크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봐, 그건 벌써 알고 있었어. 이 도시 이름이 뭔지는 알아 봤어? 예? 그건 아직 ,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물어 보지요.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군. 자, 가스톤을 제외하고 모두 흩어져서 이 망할 놈의 도시 이름을 빨리 알아 봐. 빨리. 옛! 기사들이 말을 몰아 사방으로 흩어지자 팔시온과 미카엘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 미디아도 그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왠지 으스스하군. 유령 도시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인데? 팔시온은 미디아가 조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일부러 두려운 듯 사방을 둘러보는 척했다. 그러자 미디아도 재빨리 그 시선을 따라가며 투덜거렸다. 그런 말 하지 마. 소름 끼치잖아. 일단 미디아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팔시온은 일부러 괴기스런 표정을 지으며 미디아를 놀리기 시작했다. 흐헤헤, 누가 알아? 좀비(Zombi)라도 떼거리로 나올지. 저 거리만 돌아가면 아마 수십 구의 좀비들이 식칼이나 도끼를 들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좀비라면 흑마법에 의해 걸어 다니는 시체를 말한다. 이런 유령 도시에는 충분히 나옴직한 그런 괴물이었다. 팔시온의 말에 미카엘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필요 이상으로 침착하게 말했다. 설마, 거기 있을 리가 없어. 맞아, 그렇지?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 미디아가 재빨리 동의를 구해 오자 미카엘은 미디아의 뒤쪽을 손으로 쭉 가리키며 큰소리로 외쳤다. 바로 저기 있잖아. 꺄악! 기겁을 하는 미디아를 보며 둘은 낄길거렸다. 흐헤헤헤헤, 전장을 돌아다녔다는 용병이 좀비를 겁내다니. 자격 미달이야. 그들의 장난기에 잔뜩 열이 받은 미디아는 어느새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분노 때문에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검을 뽑아 들며 악악거렸다. 으으 , 나를 가지고 놀다니. 거기 서! 죽여 버릴 거야. 두 사람은 역전의 용사들답게 재빨리 말을 몰아 그녀의 공격 권에서 벗어나며 뒤를 쫓아 달려오는 미디아를 향해 계속 이죽거렸다. 헤헤 이봐, 참아. 참으라고! 일행이 모두 흩어지고 나자 다크는 뒤에 따라오고 있던 가스톤에게 말했다. 통신 준비를 해 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 봐야겠어. 응. 가스톤은 말에서 내린 후 안장에서 커다란 수정 구슬을 꺼내 통신용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진은 완성되었다. 제법 숙련된 솜씨로 일하고 있는 가스톤을 바라보며 다크와 아르티어스는 말에서 내려 통신이 개통되기를 기다렸다. 예, 여기는 유령 기사단 사령부입니다. 이쪽은 로니에르 공작 전하의 유령 기사단 분대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공작 전하를 바꾸겠습니다. 가스톤이 그렇게 말한 후 자리를 피하자 다크가 쓱 하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봐, 크라레인 시 침공 작전은 어떻게 되었나? 예? 안녕하시옵니까? 전하. 아, 그래. 침공 작전은 어떻게 되었어? 크라레인 시에 모이기나 한 거야? 나는 누군가가 지금 크라레인 시라고 주장하고 있는 곳에 와 있는데 도대체 아군은 고사하고 적군도 보이지 않아. 아, 예. 적군은 크라레인 시를 완전히 포기한 것으로 판단되옵니다. 크라레인 시의 모든 시민들은 오래 전에 철수한 상태고, 크라레인 수비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한 것이 어제이옵니다. 그럼 아군은? 크라레인 시로 맹 진격을 하다가 적들이 도시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고 지금은 주위의 게릴라들을 토벌하며 천천히 진격하는 중이옵니다. 적 주력 부대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 한 계속 그런 식의 소규모 전투가 되풀이 될 가능성이 크옵니다. 모든 첩보망을 동원하여 코린트 주력 부대의 집결지를 알아 보고 있는 중이오니 조만간 답이 나올 것 같사옵니다. 하지만 다크는 수정 구슬을 바라보며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작전이 그렇게 바뀌었으면서 나한테 연락을 해야 할 것 아냐? 하지만 전하께옵서는 3일 전부터 행방 불명이셨지 않사옵니까? 토지에르 경께 연락을 드렸사온데, 혹시 연락을 못 받으셨사옵니까? 뭐 하러 만나. 청기사만 가져오면 되는데. 그래, 알았어. 이만 귾자구. 전하, 잠시만 . 지금 첩보부의 예측에 의하면 17일 후 크라레인 시에 유성이 떨어질 확률 85퍼센트이옵니다. 그 때문에 코린트에서는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대피시킨 것 같사옵니다. 하지만 일단 그곳에서 전투를 벌일 결심이었는지 그 일대로 병력이 집결중이었는데 또다시 이틀 전 갑자기 모든 병력이 그곳을 떠났사옵니다. 전하께옵서도 그곳에 오랜 시간 머무시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할 것이옵니다. 다크는 아르티어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버지, 유성이 떨어진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유성이라면 저 밤 하늘에서 번쩍거리면서 길게 지나가는 그걸 말하는 거 맞아요? 대충 그 말하고 비슷하지. 그럼, 그게 여기 떨어진다는 것은 무슨 소리예요? 그냥 유성은 밤하늘에 휙 하고 지나가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 휙 하고 지나간 것이 덩어리가 크면 땅바닥까지 도착할 수 있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아르티어스는 주위를 휙 둘러본 후 말했다. 방어 마법진도 제대로 안 갖춰져 있는 이 정도 도시라면 아마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없어져 버릴 거다. 유성이 떨어지면 그 위력이 엄청나거든. 설마, 아무리 위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도시 하나가 통째로 없어져요? 이 도시가 얼마나 큰데 . 피식 비웃는 아들을 보자, 아르티어스는 주위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몇 개를 주워 들고는 그 중 한 개를 건네 주며 말했다. 너 이 돌을 가지고 저기 있는 집에다가 힘껏 던져 봐라. 자, 여기 있다. 다크는 돌멩이를 바라보며 아르티어스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진담이세요? 진짜야. 저 집에 구멍이 날 텐 데요? 그러라고 던지는 거야 이윽고 그녀의 손을 벗어난 돌멩이는 가공할 속도로 날아가더니 벽에 큼지막한 구멍을 뚫고 들어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떠냐? 네 손에서 날아간 돌멩이도 저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저 하늘 위에서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바위의 경우 그 파괴력은 보나마나지. 한 방에 도시 하나 정도 부수는 것은 일도 아니야. 한 방에 도시 하나라면 정말 대단하네요. 그런데 왜 이렇게 도시들이 번창하죠? 그런 거 몇 방으로 도시들을 완전히 박살 내고 쳐들어간다면 남아날 도시들이 없을 텐데. 그렇지 않아. 인간들의 싸움도 동물들의 영역 싸움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동물들이 영역을 두고 싸우는 것은 자기 새끼들을 풍족하게 먹이기 위해 사냥할 만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서지. 인간들이 벌이는 싸움도 보다 많은 자원과 돈을 확보하기 위해서야. 만약 너라면 이런 도시를 온전한 상태에서 뺏을 수 있는 방법을 쓰겠느냐? 아니면 사람도 건물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서 점령하겠느냐? 당연히 멀쩡한 상태에서 뺏으려고 하겠죠. 그렇지? 그래서 안 쓰는 거야. 그리고 유성 소환의 경우 시간도 많이 거리고 말이지. 마법을 쓴 후 30일쯤 후에나 날아오니까 아마 전쟁이 모두 끝난 다음에야 떨어지겠지 그러니까 누군가가 유성 소환을 썼다는 말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와 싸우게 되었다는 말이겠지. 흐음 ,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아는 상대와 싸우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죠. 그건 그럿고 여기가 크라레인 시라는 것은 알았으니까 슬슬 이동해서 본진과 합류하는 것이 좋겠죠? 아마도 뒤쪽으로 가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후작을 호위하는 공작 크루마 제국과 코린트 제국 사이에는 지루한 소모전이 반복되고 있었다. 양쪽 모두 간간이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대규모 격전으로 연결되지는 않고 있었다. 대부분의 전투가 쟉센 평원을 평정하려는 크루마 군과 그 저항군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소모전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린트 제국의 경우. 키에리가 생존해 있을 때의 군부(軍部)는 매우 강력한 힘을 자랑했었다. 키에리를 기점으로 까뮤, 리사, 그라세리안이 뭉쳐 코린트의 모든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이 권력을 잡은 후부터 코린트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그라세리안의 능력으로 타국에 비해 뒤쳐져 있던 마법을 부흥시켰고, 막강한 타이탄들을 대량 생산했다. 그리고 그 힘을 밑바탕으로 하여 크라레스 제국 영토의 대두분을 빼앗았다. 그리하여 세계 최강의 대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집권 기간은 너무 길었다. 모두들 90세에 달하는 나이에 이르도록 50여 년 가깝게 정권을 쥐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에 불만을 품은 인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른 제국들처럼 이들이 늙어서 은퇴할 가능성이라도 보였다면 이들도 이렇듯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살아서 정권을 잡을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그라세리안이 행방 불명되었고, 리사는 전사했으며, 키에리는 크루마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중상을 입었다. 최고 권력자들의 대부분이 갑자기 사라졌기에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황제를 설득하여 키에리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키에리의 경우 아들이 셋이나 되었고 그들은 각가 뛰어난 실력에다가 키에리라는 배경을 힘입어 매우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첫째는 발렌시아드 기사단 단장, 둘째는 제1근위대 기사, 셋째는 제3근위대 대장. 키에리를 처형한다면 그 아들들까지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타국과 전쟁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마지막 남은 실력자 까뮤와 협상을 하기에 이른다. 전사로 발표하기로 하고 자살하는 것으로. 그 제의는 받아들여졌고 키에리는 권력의 전면(前麵)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처음부터 승리를 자신하며 전쟁을 주장해 왔던 군부는 패전의 영향으로 입지가 약화되었고, 현 황제의 먼 친척뻘 되는 그로체스 공작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자신이 쥐게 된 권력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제일 먼저 행한 일은 크루마 제국과의 휴전이었다. 만약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승리를 거두게 되거나 또는 패전을 하게 된다면 좋을 게 없었다. 특히 전세를 뒤집어 승리를 거둔다면 군부의 입지는 다시 강화될 것이 확실했기에 그것만은 막을 필요가 있었다. 휴전 이라고? 아연한 표정으로 되묻는 까뮤에게 깔금한 복장의 젊은 무인은 다소곳이 답했다. 그 무인의 복장은 매우 화려했는데 오른쪽 가슴 위 부분에 푸른 늑대의 문장이 붙어 있었다. 예. 로체스터는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허허, 크루마 따위에게 영토를 뺏긴 채 휴전을 하려 한단 말이지. 이건 폐하의 뜻이신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키에리가 들으면 땅을 치겠군. 로젠 너는 수도에 있었으면서도 그걸 막을 수 없었느냐? 로젠은 분하다는 듯 답했다. 불가능 했습니다. 아저씨도 잘 아시겠지만 그로체스는 폐하의 인척(姻戚).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크라레스 기사단의 움직임을 쫓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구요. 그 녀석의 움직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칙명이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허허허, 기가 차서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그래, 휴전의 조건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길, 여기서 조금 더 밀어붙이면 크루마를 자신들의 영토 안으로 몰아넣고 전쟁을 끝낼 수 있어. 지금 녀석들은 후방의 보급로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야. 그런데, 그런데 . 로젠은 분해서 말도 잘 잇지 못하는 로체스터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그로체스 공작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휴전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겠죠. 자신의 권력이 커지기 위해서는 먼저 폐하께 신뢰를 더욱 받아 내야 합니다. 그 방법 중에 하나로 선택한 것이 휴전일 뿐입니다. 그런 후 자신이 사령관이 되든지 해서 쟉센 평원을 되찾는다면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계획이겠죠. 정말 치졸해서 말이 안 나오는군. 언제 떠날 거냐? 아마도 내일 떠날 것입니다. 단지 저는 호위를 위해 따라왔을 뿐이니까요. 흐음, 도중에 암살해 버릴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해서 그 책임을 크루마에 뒤집어씌운다면 . 힘들구나. 만약 네가 호위로 따라오지만 않았어도 호위를 포함해서 모두 다 죽여 버렸을 텐데. 로젠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그 녀석은 그걸 잘 알고 저를 보냈을 겁니다. 아버님이 전사하셨기에 이번에 저는 대공(大公)의 작위와 발렌시아드 공국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런 제가 고작 후작을 호위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로젠은 멀리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델리피어 후작의 낯짝을 봐도 두 토막을 내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명을 내리신 이상 저는 따라야만 합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기사인 이상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지. 로젠은 시선을 다시 로체스터 쪽으로 돌려,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나지막하지만 힘있게 말했다. 아저씨께서 제 목숨을 거둬 주실 수는 없을까요? 델리피어 후작 녀석과 함께 . 로체스터 공작은 그의 눈을 자세히 바라본 후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 먼 길 잘 다녀오거라. 겨우 그 따위 일로 친구의 아들을 죽일 수는 없지. 평화 협정 흰 깃발을 든 기사 한 명이 앞장선 가운데, 다섯 명의 기사들이 한 대의 마차를 호위하며 크루마 군 진영을 향해 달려갔다. 한참을 달려가자 수풀 속에서 기사 두 명이 달려 나와 그들의 길을 가로막았지만 그들은 적대감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곧장 멈춰 섰다. 무슨 일입니까? 앞을 가로막은 기사는 흰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 있는 기사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흰 깃발을 든 기사의 뒤에 서 있는 기사들을 향해 주의의 시선을 거두지는 않은 상태였다. 푸른 늑대의 문장, 그 기사의 문장은 익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키에리가 공들여서 키운, 근위대를 제외한다면 코린트 최고의 정예라 할 수 있는 발렌시아드 기사단 문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기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발렌시아드 기사단 내에서도 오너가 아닌 기사들도 있었고, 또 마법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갑옷조차 입지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말 위에 앉아 있는 기사의 호화로운 복장 위에는 기사 단장(騎士團長)임을 표시하는 자그마한 금빛 표식이 붙어 있었기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코린트의 평화 사절입니다. 양국의 평화 협상을 책임 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에게로 안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크루마의 두 기사는 잠시 뭔가 쑤군쑤군 의논을 하더니 곧 한 명이 숲 속으로 몸을 감췄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그들을 향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본대에 연락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숲 속으로 사라졌던 기사가 다시 나타나 정중하게 말했다. 미네르바 전하께서 면담을 허락하셨습니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쪽의 정찰조들이 나와서 길 안내를 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말에 백기를 들고 있는 기사는 정중하게 답했다. 예, 고맙습니다. 미네르바를 만나기 위해 파견된 델리피어 후작은 거의 세 시간이 넘도록 마차 안에서 시달려야 했다. 미네르바는 적의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기사단을 포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네르바의 본진에 도착하자 크루마 쪽에서 다섯 명의 기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크루마 군의 병사 한 명이 다가가 마차 문을 열자 그 안에서 멋진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가 거만한 표정으로 천천히 내렸다. 그 사내는 꽤나 풍족한 귀족 집안에서 자란 듯 옷의 단추들은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붉은색의 큼직한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차고 있는 검 또한 금은과 보석으로 도배가 되어 있어서 과연 이게 실전용(實戰用)인지 의심스러워 보였다. 크루마 쪽에서는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기사 때문에 사절로 온 인물의 직위에 대해 도착하기 직전까지 의논이 분분했었다. 발렌시아드 기사단 단장이 호위를 맡을 만한 인물이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키에리는 상처의 악화로 인해 전사했다는 것이 첩보망에 걸렸으므로 그를 제외한다면 남은 인물은 로체스터 공작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총 사령관이었기에 이런 위험한 곳에 직접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게 로체스터 공작을 제외한다면 키에리를 대신하여 대공의 작위를 물려받은 그가 호위할 인물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중 나왔던 크루마 기사 중에서 가장 앞에 서 있던 중년의 기사는 마차에서 내리는 인물을 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환영의 미소로 대충 눈가림하며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미네르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두들 말에서 내려 미네르바가 기다리고 있는 작은 농가로 들어가려고 할 때 문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사신 일행의 앞을 가로막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무기를 맡겨 주십시오. 로젠은 비무장인 상태로 이런 곳을 어슬렁거릴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 말을 기회로 뒤로 처졌다. 또 이번 협상에서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델리피어 후작이었다. 자신이 옆에 있든지 없든지, 델리피어 후작은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윗사람과 의논한 각본대로 밀어붙일 것이 뻔했기에 괜히 따라 들어가서 상대방의 눈요깃감이 되어 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로젠은 뒤로 처지자 세명의 기사도 그를 따라 뒤로 빠졌고, 결국 델리피어 후작을 따라 무기를 맡기고 들어간 기사는 두 명뿐이었다. 어서 오시오. 먼 길에 수고하셨습니다. 미네르바가 반가이 맞이하는 가운데 델리피어 후작은 자리에 앉았다. 델리피어 후작이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며 미네르바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저런 겉만 번지르르한 얼뜨기가 나타난 것이 의외였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불리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는 본국에서 이동용 마법진을 이용하여 신속히 불러들인 외교 담당관을 왼편에 앉혀 둔 상태에서 매우 기분 좋게 델리피어 후작을 맞이했다. 하지막 막상 협상이 진행되자 미네르바는 그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을 뿐, 협상은 미네르바의 왼편에 앉아 있는 날씬한 체구의 중년 사내에 의해 이루어졌다. 미네르바는 만일의 경우 상대 쪽에서 로체스터 공작이 나타났을 때를 대비하여 자리를 지켰을 뿐, 자신이 직접 델리피어 후작 따위와 상대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리를 뜨는 대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택했다. 그녀는 강대한 크루마의 힘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협상은 지루하도록 느리게 진행되었다. 서로 상대로부터 최대한 많은 양보를 얻어 내려는 반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사실 시간만 날아갔을 뿐 대화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마도 델리피어 후작은 이런 지루한 협상은 처음이지 그 인내심의 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 슬슬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요 근래 30여 년간 코린트는 강압적인 외교만을 했을 뿐 이런 지루한 협상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쟈코니아 산맥을 기준으로 양국을 나눕시다. 본국은 쟉센 평원을 획득하기 위해 엄청난 피를 흘렸소. 그렇기에 절대로 그 땅을 포기할 수는 없소. 똑 같은 얘기가 벌써 몇 바퀴 돈 상태였기에 일단 그 뒤로 넘어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델리피어 후작은 크게 인심이나 쓰듯 말했다. 물론 쟉센 평원은 처음부터 돌려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하지만, 이걸 따지고 들면 다른 부분을 크루마에 양보할 필요가 없었기에 델리피어 후작은 그걸 계속 물고 늘어졌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인심을 쓰는 척해야 했다. 귀국에서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요. 좋소. 일단 이쪽에서는 쟉센 평원을 잃은 것이니 그건 어쩔 수 없다고 하고, 휴전이 선포되고 나면 쟉센 평원에 남아 있는 본국의 귀족들 이하 전쟁 포로들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줘야 하오. 델리피어 후작의 제안은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그건 당연하지요. 휴전 선포와 동시에 길을 터줄 것이오. 조국을 위해 피땀 흘려 싸우고 있는 그런 인물들을 본국에서 학살한다면 후세에까지 욕을 듣게 되죠. 그건 인도적인 차원에서 당연히 해 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지금 크루마 군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그 귀족들이 거느리고 있는 게릴라들이었다. 상대가 그들을 데려가겠다는데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모자란 판에 죽인다면 욕을 듣는다고 말하고 있는 이 외교 담당관도 꽤나 얼굴 가죽이 두꺼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면 어느 정도 해결은 난 듯싶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델리피어 후작의 눈초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지요, 가레신 후작? 하지만 상대의 표정이 어떻건 이미 신경 쓰지 않고 완전히 회담의 기선을 제압한 가레신 후작이었다. 귀국이 침공해 들어와서 잿더미로 만든 미란 국가 연합에 대한 피해 보상금이죠. 만약 본국과 귀국만이 얼렁뚱땅 휴전을 맺고 넘어간다면 본국의 혈맹이라고 할 수 있는 미란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니겠소? 그리고 귀국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 다섯 동맹국들에게도 어느 정도 손해 배상은 해 줘야 합니다. 순간 델리피어 후작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현재 이 일대에 포진하고 있는 군사력의 균형은 당연히 코린트 쪽이 우세했다. 그런데도 저 따위 소리를 하다니, 정말 협상을 제대로 할 생각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덕분에 델리피어 후작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기 시작했다. 귀국은 본국과의 전쟁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지 않았소? 그것을 가지고도 모자란다는 말이오? 정 그대들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전쟁 쪽으로 계속 밀고 나갈 수밖에 없소. 델리피어 후작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가레신 후작은 눈도 깜짝 안했다. 그는 오히려 미소를 지어 보이며 능글맞게 말했다. 호오, 그것은 본국에서 더 원하는 바요. 이미 본국으로부터 새로운 사단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고, 용병 사단 여섯 개도 편성을 마쳤소. 그리고 귀국이 이번에 입은 피해는 막대한 정도를 넘어섰지 않소? 본국이 쟈코니아 산맥을 넘어 쟈코니아 지방 전체를 병합하려고 해도 막을 힘이 없을 텐데? 가레신 후작의 말은 반은 진실이었고, 반은 거짓말과 협박 이었다. 물론 새로운 사단들이 속속 쟉센 평원으로 이동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들이 몽땅 다 게릴라들에게 발목이 잡혀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있고말고. 더 나아가 쟉센 평원까지도 탈환할 정도의 여력은 남아 있다 이 말이오. 하지만 두 나라가 이런 식으로 싸워 봐야 남는게 뭐가 있소? 이번 전쟁을 벌이느라 양국 다 막대한 재화를 낭비했고, 또 뛰어난 병사들과 기사들을 잃었소. 그러고도 더 싸우고 싶다는 거요? 필요하다면 싸워야지요. 자,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시겠소? 가레신 후작의 최후 통첩과도 같은 말에도 불구하고 델리피어 후작은 우직스럽게 대답했다. 대코린트 제국이 크루마 따위에게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너무 심하게 기우는 협상을 하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분의 명성이 올라가기는커녕 오히려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배상금은 단 한 푼도 줄 수 없소. 만약 이쪽에서 배상금을 줘야 한다면 그쪽에서는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 대가를 본국에 지불해야 하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 회의는 결렬된 것으로 합시다. 잘 가시오. 상대가 뜻밖으로 단호하게 나오자 델리피어 후작은 당황했다. 이 틈을 이용해 여태껏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미네르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온 전략을 함께 구사하는 것이 외교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짐짓 나무라는 듯한 어조로 가레신 후작을 향해 말했다. 가레신 후작,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게 너무한 것이 아닌가? 델리피어 후작도 황제로부터 명령을 받고 왔을 텐데, 그를 그렇게 핍박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지. 서로간에 휴전을 하여, 전쟁 난민을 줄이고 또 쌍방간의 피해를 줄이자는 좋은 목적에서 온 것이 아닌가? 그녀의 참견에 델리피어 후작은 그녀의 속셈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고마워했다. 그는 이 길고 지루한 협상 덕분에 정신적으로 너무나 큰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미네르바 전하. 서로간에 될 수 있는 한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좋소,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귀국에서 본국에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 대신, 그쪽도 유성이 떨어진 데 대한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 없소. 어떻소?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 대신, 유성 공격의 목표 도시들을 알려 주십시오. 당연하지요. 물론 그것은 협정서에 서명이 된 후에 알려 줄 것이오. 이의는 없지요? 예. 평화 협정을 맺은 후, 유성 공격 목표 도시의 목록을 받아 들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가는 델리피어 후작의 뒷모습을 보며 미네르바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표정이 가관이군, 그렇지 않나? 그렇사옵니다, 공작 전하. 왜 저런 얼뜨기를 보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렇사옵니다, 전하. 크라레스에서 왔던 그 돼지 같은 녀석은 정말 상대하기 힘들었었는데, 그 녀석에 비하면 저런 녀석은 어린애나 다름없지요. 헤헤 . 좋았어! 이제야 그 지긋지긋한 게릴라로부터 해방이군. 조금 지나면 이 쟉센 평원도 확실한 본국의 영토가 되어 줄 거야. 그건 그렇고, 미란 국가 연합에다가 황금 몇 톤 정도는 보내 줘야 하겠지? 가장 큰 피해를 본 국가니까 말이야.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전하. 자네가 가서 가므 의장을 잘 다독거려 주라구. 염려 놓으시옵소서, 전하. 저놈들은 지금 우리를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착각해 우리와는 휴전을 맺고, 아마도 크라레스를 뭉갠 후 이쪽으로 다시 군사력을 돌릴 계획인 모양인데 , 그게 잘 될지 궁금하군. 오호호 . 훨씬 인간적인 무림 저기서 쉬다 가자. 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구나. 멀리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나자 그곳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아르티어스가 말했다. 그 말에 다크는 즉시 찬성의 의사를 표시했다. 예, 그러죠. 먼저 정찰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전하. 기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묻자 다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상관없어. 저런 말을 볼 게 뭐가 있다고 정찰을 해? 그냥 가자. 옛, 전하. 그들은 유령 도시를 떠나 온 후 계속 일직선으로 남하(南下)하고 있었다. 만약 길을 따라 계속 내려왔다면 마을들을 많이 거쳤겠지만 관광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길이건 아니건 가리지 않고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주력 부대와 합류할 것을 예상하고 노숙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므로 아르티어스의 불만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천히 말을 몰아 마을에 들어섰다. 낯선 외부인을 향해 경계의 시선을 보내는 마을 사람들이 보였지만, 모두들 두터운 갑옷대신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 눈길에 두려움까지는 배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마을 중심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커다란 나무 기둥이 세워져 있고, 거기에 목이 매달리 시체 몇 구가 걸려 있었다. 고문을 당했는지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는 그 시체들은 족히 여덟구는 넘어 보였다. 중앙 광장 부근에 보이는 주점 앞에 말을 매어 놓은 후 그들은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명의 사람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낯선 사람들이 들어서자 잠시 대화를 멈추고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크 일행은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주문을 받기 위해 재빨리 다가왔다. 여행자라고 보기에는 복장이 너무 좋았기에 소년은 주저하듯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어 왔다. 어서 오십시오. 주문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아버지, 뭐 드실래요? 가만있자 . 우선 시원한 맥주 한 잔. 그리고 닭찜, 비프 커틀렛하고 스튜. 뭐 우선은 이 정도만 하지. 아르티어스의 말이 끝나자 다크는 재빨리 뒤를 이어 주문했다. 시원한 맥주 한 잔. 그리고 아무 거나 좀 맛있는 걸로 가져와. 화려한 미모를 지닌 소녀가 말도 안 되는 주문을 끝내자, 나머지 사람들도 제각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식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태양이 작열하는 무더운 날씨에 오랜 시간 길에서 시달린 탓인지 모두들 시원한 맥주를 주문했고 소년은 재빨리 맥주가 가득 들어 있는 잔들을 쟁반에 담아 나르기 시작했다. 일행들이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풀며 기다리고 있는 동안 먹음직스럽게 요리된 음식들이 배달되었다. 모두들 배가 고팠던지 아무 말도 없이 음식을 입 속에 쑤셔 넣고 있었다. 팔시온과 화이어헤머는 타고난 대식가임을 자랑하듯 맥주를 한 잔씩 더 주문했다. 소년은 재빨리 맥주 두 잔을 더 가져왔다. 팔시온은 잔을 받아 들며 소년에게 물었다. 저기 걸려 잇는 시체들은 뭐냐? 예? 손님들은 전쟁이 벌어진 것도 모르세요? 그건 알고 있지. 그런데 저기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무술을 익힌 사람들 같지는 않아서 하는 말이야. 팔시온의 물음에 소년은 두려움에 질린 듯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예, 협력하지 않는다며 죽인 거예요. 누가? 누구는요? 여기 영주 님이죠. 아마 머지않아 크라레스의 군대가 들이닥칠 거라며 영주 님은 병사들을 모으고 있어요. 그리고 식량도요. 하지만 아직 추수할 때가 멀었기에 대부분 식량이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반항했다가 저렇게 . 소년의 눈에 슬쩍 눈물이 고이는 것으로 보아 평소 잘 알던 사람들인 것이 분명했다. 요즘 전쟁이 벌어진 다음부터 영주 님은 더 포악해지셨어요. 전에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냥 매달아 놓고 채찍으로 때리는 정도였었는데 . 정말, 대단히 나쁜 녀석이군. 그렇다면 여기는 그 녀석의 영지라는 말이야? 이런 마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영지였고 다른 하나는 영지가 아닌 평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영지인 마을은 농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농노는 평민이 아닌 그 영지에 부속된 노예들이었고, 영주는 황제에게 경작권과 함께 농노들의 생사 여탈권을 부여 받아 마음 내키는 대로 다스릴 수 있었다. 농노들의 미래는 순전히 어떤 영주를 만나게 되느냐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팔시온의 물음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이 대답했다. 예. 쳇, 아무리 자신에게 소속된 노예들이라고 해도, 저렇게 죽이고 착취하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야. 하지만 소년은 다소 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팔시온을 바라봤을 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은근하게 슬쩍 떠보는 영주의 앞잡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음식을 우물거리며 그런 소년의 표정을 바라보던 미타엘이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팔시온. 이런 영주가 있으면 저런 영주도 있는 거야. 노예를 어떻게 부리든, 또 어떻게 대하든 그 녀석들의 자유라고. 그, 그거야 그렇지만 . 당황한 어조로 팔시온이 대답하자, 소년은 그들을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빨리 드시고 가세요. 언제 영주 님의 사병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거든요. 영주 님의 사병들이 낯선 사람들이라고 시비를 걸어 올 수 있어요. 얼마 전 영주 님 밑으로 한스하고 그 패거리들은 아주 거친 사람들이에요. 술만 마시면 마을 사람들한테 시비를 걸거든요. 알아서 조심하는 게 좋죠. 그럼 많이 드세요. 인사를 건네고 뒤로 돌아서는 소년을 향해 여태껏 아무 말 없이 음식을 삼키고 있던 다크가 말을 건넸다. 이봐, 꼬마. 소년은 꼬마 라고 자신을 부르는 자기 또래의 계집아이를 기가 차다는 듯 돌아봤다. 하지만 상대는 손님 이었고 자신은 점원 이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신경질이 났지만 언제부턴가 몸에 밴 상술 덕분에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소년의 머리가 따지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아래로 숙여지며 자신을 모르게 주절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 여기 레드 드래곤 있느냐? 없습니다, 손님. 여기는 작은 마을이라서 드래곤 같은 게 있을 리가 없거든요. 그러지 마시고 숲 속이나 산맥을 뒤지시는 편이 . 그 말에 뒤쪽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던 남자가 폭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야, 스테판. 레드 드래곤은 술 이름이야. 큰 도시에 가면 있지. 그 말에 스테판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소년은 그게 진짜 드래곤을 말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 사내는 당황해 낯빛이 붉어진 스테판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그런 허무맹랑한 주문을 한 소녀를 향해 말했다. 그는 소녀의 복장이 검은색 일색이긴 했지만 꽤나 고급스러웠고, 여기저기 그림도 그려져 있었기에 아마도 귀족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며 말투를 흐트리지 않고 정중하게 대했다. 좀 풍족한 마을이라면 있었겠지만, 이 마을에는 레드 드래곤 같은 고급 술은 없습니다. 꽤 독한 술을 좋아하는 모양인데 이 마을 특산물인 디지드를 한잔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후회는 하지 않을 겁니다. 상대가 추천을 하자 다크는 스테판에게 주문을 정정하며 말했다. 이봐 스테판, 그거 한 병 가져와. 스테판은 속으로 투덜투덜하며 디지드를 한 병 가져다 줬다. 대충 밀주(密酒) 같은 것이라서 그런지 포장은 아예 되어 있지 않았고, 짙은 갈색의 액체가 포도주 병 안에 담겨 있을 뿐이었다. 소녀는 여태껏 물이 있던 잔을 비워 버린 후 그 안에 디지드를 한 잔 가득 붓고는 꿀꺽꿀꺽 삼켰다. 그리고 잔을 다 비운 후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후, 이거 정말 괜찮은데? 뒷맛만 좀더 개선한다면 레드 드래곤보다 더 좋을 거야. 진짜야? 그녀의 술 취향을 잘 아는 팔시온은 병을 슬쩍 집어서 이미 비어 있던 자신의 물 컵에 조금 따른 후 꿀꺽꿀꺽 마셨다. 후와, 정말 대단하군. 아예 뱃속까지 찌릿찌릿하군.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리는 팔시온을 뒤로하고 소녀는 술병을 잡고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지. 다크는 밖으로 나가려다 뒤를 돌아보며 덩치 큰 사내에게 말했다. 린넨. 예. 저거 한 열 병만 사 둬. 나중에 루빈스키한테도 한 병 선물하고 싶으니까. 예. 소녀가 제법 괜찮아 보이는 검을 차고 있는 덩치 좋은 중년 남자에게 명령하면서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을 보고 술집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것뿐, 잠시 지나자 술집 안은 다시금 자신들의 얘기로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했다. 전쟁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함부로 죽여도 괜찮은 것일까? 말을 몰아 시체 근처를 지나치면서 다크는 린넨 백작에게 물었다. 하지만 심각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린넨 백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전하, 국가간의 전쟁에서 이런 일은 매우 흔한 것이옵니다. 흔하다고? 예, 전쟁이란 것이 상대의 주력 부대를 격멸했다고 해서 종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각 지방의 영주들은 영주들대로 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땅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죠. 전에 치레아나 스바시에 전쟁처럼 재빨리 왕가를 끝장 내 버리면 이런 무의미한 전쟁으로 연결되지 않사오나, 코린트는 아직도 황제가 건재하지 않사옵니까? 황제를 몰아내든지, 아니면 점령지의 영주들을 모두 다 없애 버리지 않는 한 이런 비극은 끝나지 않습니다. 전에 이 땅을 크라레스로부터 빼앗아 낸 코린트 제국도 휴전 협전을 맺어지기 전가지는 각 지방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지방 영주들 때문에 상당히 고생을 했었죠. 그 덕분에 빨리 휴전이 이루어진 것이지만 말이옵니다. 특이하군. 전쟁에서 벌서 졌는데 , 그리고 이런 식으로 싸워도 아무런 득이 없는데 왜 계속 싸우려고 드는 것이지? 각 지방의 영주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 이란 고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옵니다. 황제가 항복하지 않는 한, 영주들은 끝까지 황제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울 의무가 있는 것이옵니다. 일부 영주들은 새로운 점령군에 대해 충성의 서약 을 하고 전향하는 경우도 있사오나, 그런 식의 배신자는 이쪽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없지요. 한 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는 것. 이러나 저러나 그들에게도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인가? 다크는 손에 들고 있는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화끈한 액체를 몇 모금 삼킨 후 하늘을 바라봤다. 새파란 하늘, 중원(中原)의 하늘도 이런 색이었다. 하지만 중원, 그것도 무림에서 자라 왔던 그는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충성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끝까지 저항하는 녀석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강요하는 그들의 의식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뻗어 나가던 강대한 문파라고 하더라도 그 총단이 무너지고 나면 나머지 지단들의 경우 뿔뿔이 살길을 찾아 헤매게 된다. 또 총단의 힘이 약해지거나 그 지역에서의 힘을 상실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무림이란 곳은 충성심이 아닌 힘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 힘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충성도, 우정도, 사랑도, 정(情)도 무의미했다. 무림이 훨씬 더 인간적인 것일까? 아니며 여기가 더 인간적인 것일까? 슬쩍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서 물어 봤지만 그 어디서도 답은 들려 오지 않았다. 물론 옆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물어 본 것일 뿐. 다크는 천천히 말 머리를 돌려 저 멀리 지평선 가까이 큰 성이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의 돌연한 행동에 당황한 린넨 백작이 그녀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말했다. 어디로 가시는 것이옵니까? 전하, 아군은 그쪽이 아니라 . 알고 있다. 저기 영주 녀석에게 몇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서 그래. 죽는 그 순간까지 기사이고 싶다 한 3킬로 정도 말을 달려가다가 갈림길 안으로 들어서자 숲 속에서 우악스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정지! 모두들 그쪽을 바라보자 20여 명의 사내들이 숨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가운데 반 정도는 활시위를 당겨 일행을 겨누고 있었고 나머지 반 정도는 검이나 철퇴, 전투 도끼, 전투 망치 등 제 각각의 무기들을 들고 접근해 왔다. 그들 중에서 왼쪽 뺨에 흉터가 있는 인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두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사람만이 철로 만들어진 갑옷으로 상체를 가리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가 이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일행을 주의 깊게 훑어봤다. 흠없이 깨끗한 복장에, 상당히 고급 옷들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옷 여기저기에 몇몇 문장들까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결코 하찮은 신분의 평민들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인지 먼저 그는 정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디로 가는 길이십니까? 성으로! 뜻밖에도 가장 앞장서서 가던 예쁜 여자 애가 말을 받았기에 그는 이제 소녀를 훔쳐볼 필요도 없이 아예 대놓고 엉큼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성에 가시는 용무를 여쭤 볼 수 있을까요? 성주를 만나러 왔다. 성주 님을 만나러 오셨군요. 그럼 통행증을 보여 주십시오. 통행증 따위는 없어. 소녀의 말이 끝나자 그 사내는 아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헤? 웃기는 계집이군. 통행증도 없이 그리로 가겠다고? 흐흐흐 좋아, 데려가 주지. 이봐, 저것들을 체포해. 저 계집을 제외하고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덩치 큰 사내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모두 번뜩거리는 시선으로 무기를 겨눈 채 천천히 다가왔다. 그 순간 다크가 시선을 돌려 린넨 백작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저 녀석만 살려 놓고 나머지는 해치워라. 그 말과 동시에 린넨 백작과 그의 부하 세 명이 말 등에서 몸을 날렸다. 그들은 언제 검을 뽑았는지도 모를 정도의 빠른 속도로 움직였는데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인물들 네 명의 목이 떨어진 것도 언제였는지 알기 힘들 정도였다. 팔시온과 미카엘, 그리고 미디아가 상대를 향해 말을 달려 접근했을 때쯤에는 우두머리를 제외하고 선두에 진출해 있던 인물들의 목이 모두 벌써 날아간 후였다.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인물들이 화살을 날렸지만 그래듀에이트 중에서도 상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린넨 백작 일행은 그것들을 검으로 막아 내며 돌진해 들어가 간단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쳇! 검 한번 못 휘둘러 봤군. 팔시온이 투덜대고 있을 때, 린넨 백작은 이미 숲 속으로 숨어든 적들까지 끝장 내고 돌아와서 다크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모두 해치웠사옵니다, 전하. 좋아. 그녀는 아예 사색이 되어 벌벌 떨고 있는 사내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성에는 얼마나 많은 병력이 있지? 오, 오백 명 가량 있습니다. 성주는 지금 성에 있냐? 예. 더 이상 물어 볼 것이 없다는 듯 다크는 성을 행해 말 머리를 돌렸다. 린넨 백작은 서둘러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이 자는 어떻게 할까요? 죽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던지는 소녀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불쌍한 사내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이렇듯 갑작스레 돌변한 그녀의 얼음장 같은 태도에 린넨 일행을 제외한 사람들은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평상시 그녀의 행동이 다소 차가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필요한 살생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 다크 일행이 도착한 성 주위에는 깊은 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아직 적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내려와 있었지만,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닫혀진 성문 앞쪽에 서 있던 세명의 경비병들이 도끼 날이 붙어 있는 기다란 창인 할버트를 가지고 그들을 향해 겨누었고, 또 다른 한 명이 그들 족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 사내는 할버트 대신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정지, 용건을 말하십시오. 성주를 만나러 왔다. 통행증을 보여 주십시오. 그런 거 없어. 미친놈들이군. 말에서 내려! 체포하겠다. 아래쪽을 향해 경계를 펴고 있던 성문 위쪽의 병사 네 명은 재빨리 화살을 장전하여 밑에 있는 무리를 향해 겨누었다. 그것을 본 다크는 슬쩍 오른손을 들어 막강한 마나를 뿜어 냈다. 정확히 여덟 줄기의 시퍼런 빛이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간 그 순간, 여덟 명의 병사들은 모두 미간에 구멍이 난 채 쓰러져 버렸다. 일단 병사들을 해치운 그녀는 이번에는 기를 응축하지 않고 앞쪽을 향해 다시 마나를 뿜어 냈다. 쾅! 엄청난 흙먼지를 일으키며 성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도저히 한 사람이 해 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아르티어스는 방금 그녀가 사용한 것이 도대체 무슨 마법인지 궁리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인물들은 그저 입을 딱 벌어진 채 구경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린넨 백작을 향해 말했다. 성주 녀석을 내 앞으로 데려와.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린넨 백작 이하 세 명의 기사들은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 구멍 난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다크는 린넨 일행의 행동을 바라보는 대신 시선을 먼 하늘 위로 던지며 뭔가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아르티어스가 천천히 다가서면 말했다. 왜 그러냐? 무슨 일이야?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성주에게 물어 볼 말이 있어서요. 성주에게 물어 볼 말이 좀 있다고 사람들을 이렇게 죽여? 너는 저 안에서 들여 오는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무사들의 목숨은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 그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겠죠. 그들은 오늘 자신들보다 강한 자들을 만났기에 죽은 것., 그들 또한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을 텐데요? 그야 그렇지만 , 그렇다고 슬데없이 사람들을 이렇게 죽일 수는 없는 것이야. 그들 중에는 착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쁜 사람도 있지. 왜 그것을 생각하지 않느냐? 아버지, 저는 선악 따위를 생각하며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어요. 그러면? 제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졌을 뿐. 지금 저는 성주를 만나 물어 볼 것이 있어요.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에요. 그렇다면 좀더 좋은 방법도 있었을 것 아니냐? 위협을 한다든지 .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방법은 번거로워요. 화이어헤머는 부녀간에 오가는 대화를 훔쳐 들으면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드래곤은 정말 자신이 알고 있는 최악의 생명체였다. 하지만 둘의 대화를 들어 보면 오히려 그 망할 드래곤 보다 저 예쁘장한 인간이 더 잔인한 것처럼 느껴졌다. 다크는 자신을 징그러운 괴물 보듯 힐끔거리고 있는 화이어헤머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를 향해 말했다. 이봐, 드워프. 갑자기 자신을 향해 말을 하자 화들짝 놀란 화이어헤머가 급히 대답했다. 예, 예? 무슨 일이십니까? 드워프들도 국가를 세우나? 아뇨, 드워프는 그냥 마을 단위로 모여 살 뿐이지요. 국가를 세우지는 않아요. 드워프들도 서로간에 죽이고, 싸우고, 증오하고 그러겠지? 뜬금 없는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 하긴 했지만, 화이어헤머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드워프들은 그렇게 큰 무리를 형성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서로간에 충돌이 일어날 일은 거의 없죠. 그리고 우리들은 원하는 목표가 분명해서 그것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웬만한 것은 별로 따지지 않죠. 보다 나은 예술품을 만드는 것,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까지 알릴 만한 최고의 물건을 만드는 것이 불과 대장간의 신 헤파이투스(Hephaestus)를 섬기는 우리들의 꿈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네가 꿈꾸고 있는 그 일을 못 하게 막는다면? 다크의 말에 화이어헤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석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놈과 사생 결단을 내야죠. 화이어헤머가 이 망할 드래곤과 함께 다니고 있는 이유도 자신의 창작욕을 절대로 감퇴 시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강제적(?)으로 더욱 왕성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을 정도니까. 드워프는 최고의 예술품을 만들려고만 할 뿐, 그것에 대한 소유욕은 없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만들기 좋아하는 드워프와, 소유욕으로 뭉친 드래곤과 어쩌면 너무 잘 어울리는 관계인지도 몰랐다. 쯧, 나와 매우 비슷한 놈이군. 그 말이 끝나자 화이어헤머는 마치 지독한 욕이나 들은 듯 발끈해서 물었다. 어째서요? 나도 방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막는 놈들을 없앴을 뿐이야. 안그래? 그, 그거야 .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나는 아주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또 일부러 남이 잘 되는 것에 심술이 나서 방해하는 사람도 아니야. 내가 하려는 일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잘 지낼 수 있다구. 나를 그렇게 괴물 보듯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알겠어? 꼭 꼬집어서퓨 뭐가 잘못 되었는지 말하기 힘들었기에 화이어헤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이때 안으로 들어갔던 린넨 백작이 웬 사내의 멱살을 그러쥔 채 돌아왔다. 아직도 성 안에서는 요란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고, 린넨 백작의 옷 여기저기에는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다크는 최선을 다해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중인 그 사내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이 성의 성주인가? 이곳 영지를 뜻하는 문장인지 웬 이름 모를 꽃이 그려진 화려한 복장에 머리를 어깨 위까지 길게 기른 영리하게 생긴 그 남자는,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네 오는 소녀의 신분이 무엇인지 궁리하며 간단히 대답했다. 그렇다. 자네는 이번 전쟁이 승산이 있다고 보는가? 사내는 매우 자신있게 대답했다. 물론, 황제 폐하의 군대는 승리할 것이다. 언제? 자네가 죽은 후에? 언제가 되건 상관없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을 이유는 없다. 재미있는 대답이군. 자네는 목숨이 중요하지 않나? 또 가족의 목숨도? 물론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명령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나는 폐하로부터 이 성과 영지를 하사 받았고, 이것을 관리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폐하의 군대가 오기 전까지 이곳을 방어할 책임 또한 포함된다. 그대가 강력한 기사들을 이끌고 와서 비열하게도 기습 공격을 가했기에 책임을 완수할 수 없었다는 것이 원통할 따름이다. 그대는 왜 황제의 명령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황제가 그렇게 무서운 인물인가? 아니면 황제에게 볼모라도 잡혀 있나? 코린트 황제는 이 따위 땅덩어리는 벌써 포기한 것 같은데 왜 그토록 헛되이 반항을 하나? 영지의 주민들까지 괴롭히면서 말이야. 하하하! 기사도를 숭상하는 기사에게 그 따위 질문을 하다니, 그 대답은 그대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다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대답했다. 글쎄. 나는 기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사내는 말 위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소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비웃듯 말했다. 기사가 아니라고? 어떻게 기사가 아닌 인물이 아, 황족인가? 철부지 황족이라면 잘 모를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내가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어라. 황제의 검(Sword)인 기사는 죽는 그 순간까지 기사도를 지켜야만 한다. 기사도를 저버린 행동을 했을 때 그는 이미 기사이기를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사도의 기본은 주군에 대한 충성, 숙녀에 대한 존경, 그리고 마지막이 약자에 대한 관용이다.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기사이고 싶다. 재미있는 말이군. 그렇다면 그대는 자신이 세 번째를 어기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 영지의 주민을 꽤나 악랄하게 착취하는 모양이던데. 소녀의 말에 사내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런 적 없다. 농노 따위를 사람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좋아. 그렇게도 모두가 기사도를 숭상한다면, 그래서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이 세계에는 새로 만들어지는 국가는 없는가? 그리고 반역으로 인해 황제가 바뀌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나? 그 말에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후, 그대는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은 모양이군. 주군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인물이 기사다. 만약 그것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변절자나 반역자, 또는 왕이 되겠지. 다크도 역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그 대답은 마음에 드는군. 역시 이 세계도 똑 같은 것인가?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똑 같은 것이었어. 한때나마 이 세계가 무척 특이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지. 이봐, 린넨. 옛, 전하. 린넨이 전하라고 말하자, 그 사내는 자신이 대충 짐작한 것이 맞다는 것에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자네도 저 녀석이 한 말이 옳다고 생각하나? 제일 마지막 말은 그런 대로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찬성하기는 조금 힘들군요. 나머지는 모두 제가 알고 있는 그대로이옵니다, 전하.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글쎄다. 인간 세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대충 그 세계를 떠돌면서 배운 것들을 꽤나 함축성 있게 요약해서 설명한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팔시온은 어떻게 생각해? 글쎄. 나는 그런 것을 깊게 생각 안 해 봐서 잘 모르겠지만, 대충 맞는 말인 것 같은데? 팔시온이 주절주절 말하자 미디아가 비웃듯 말했다. 뭐가 대충 맞는 말이야? 정답이라고 정답, 이 멍청아.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툴리지만, 맞는 말인 것 같아. 그럼 미카엘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다크가 물어 오자 미카엘은 목에 힘을 잔뜩 주고는 뻐기듯 말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그러셨지. 주군에 대한 충성은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고 말이야. 그 외에는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시더군.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라. 나는 뜨거운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기사도라고 생각해. 충성, 관용, 복종 , 모두 다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드는 단어들 아니야? 귀부인에 대한 숭상은 으음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어. 으아아, 왜 우리 패거리에는 귀부인이 없는거야? 혼자 분위기 잡고 떠들어 대자 미디아가 투덜거렸다. 이봐, 다크. 저놈이 한 말은 그냥 지나가던 오크가 한마디 했다고 생각하고 못 들은 걸로 하라구. 들어서 도움이 되는 말은 하나도 없으니까. 다크는 미디아의 말을 충실히 이행하려는 것인지 미카엘 쪽에는 아예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기사도를 지키지 못한다면 변절자나 반역자, 또는 왕이 된다고 생각하는 놈이 있다는 것도 꽤나 재미있군. 좋아, 목숨은 살려 주지. 린넨, 돌아가자. 오히려 사내는 소녀가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돌아간다는 것에 뭔가 배신을 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와서 자신의 기반을 풍비박산 만들었으면 다른 후속 조치가 취해져야만 했다. 이, 이봐. 여기는 어쩌고 그냥 간다는 거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서 온 것 아니야? 이봐, 린넨. 저 녀석에게 뭐라고 한 거야? 나는 방금 말했던 그놈의 기사도라는 것이 뭔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전쟁에 매달리고 있는 멍청한 놈에게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었어. 자네의 대답은 꽤 만족스러웠어. 이제 내 볼일 다 봤으니 자네는 이제부터 자네 볼일을 보도록 하라구. 이런 제기랄! 그 따위 일이었다면 그냥 와서 물어 보면 되잖아. 내 부하들을 이렇게 학살하지 말고. 하지만 다크는 뻗어 있는 경비병들의 시체를 가리키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는 여기서 분명히 저놈들에게 말했지. 성주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지만 그걸 결사적으로 막으려고 하더군. 그래서 저렇게 만들었지. 아마 나머지도 자네를 만나지 못하게 막아서 저렇게 되었을 거야. 이제 대답이 되었나? 돌아서서 가려는 다크를 향해 그는 악을 쓰듯 외쳤다. 이름을 밝혀라. 오늘의 굴욕, 자손 대대로 복수해 줄 테다! 후후훗, 내 이름은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크라레스 제국 치레아 지구의 총독이며 코린트 침공군 부 사령관. 아무나 잡고 물어 보면 잘 가르쳐 줄 거야. 자네의 복수를 기대해 보기로 하지. 닭대가리 사령관 크로나사 지방과 코린토비아 지방은 드넓은 황무지와 산들에 의해 나누어진다. 이곳은 몬스터들이 살기 좋은 넓은 황야임에도 불구하고, 30여 년 전에 크라레스 제국과 코린트 제국의 국경선이 위치한 관계로 양국의 막대한 군사력이 주둔함으로써 몬스터들이 살아가기에는 별로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 후 코린트가 크로나사 지방을 점령한 후에는 이곳에 몬스터가 정착하지 못하도록 여러 곳에 요새를 건설하고 상당한 군사력을 주둔시켜 두었다. 미투랑 성은 그때 건설된 요새들 중의 하나였다. 사단 급 병력이 주둔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성으로서 산 위를 깎아 내고 건설된 미투랑 성은 대단히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투랑 성에는 겨우 1개 연대 정도가 주둔했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군인과 기사, 그리고 마법사들과 그들의 하인이나 노예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총사령관이 된 로체스터 공작의 결정에 의해 크로나사 지방에 대한 탈환은 크루마 정복 후로 미루어졌었다. 그런 까닭에 코린트의 주력 부대는 모두 다 크루마 전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크루마의 휴전 조약이 체결된 후 이곳 요새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정세의 변화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 각하. 성주가 직접 행하는 환영 인사에도 불구하고 구레나룻을 멋지게 기른 인물은 오만한 표정으로 대충 답례를 한 후 말했다. 그래, 현재 크라레스 방면에 투입 가능한 군사력은 얼마나 되지? 상대가 아무리 검을 차고 있고, 후작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비대한 몸매로 봤을 때 절대로 고도의 검술을 익힌 기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귀족으로서 필수적인 검술을 조금 익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만 가지고서는 행세를 하기 힘든 것이다. 이 후작이란 양반의 경우 검술 실력에서 우러나는 자신감보다는, 황제와 인척인 그로체스 공작의 아끼는 부하였기에 이렇듯 거만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뒤 배경을 잘 알고 있는 성주는 신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 결전을 회피하시고 모든 병력을 후퇴시키셨기에 거의 모든 병력이 남아 있다고 보시면 될 것이옵니다. 병력 및 주둔지 상황은 따로 보고서를 마련해 뒀습니다. 그리고 크로나사 방면에서 반격을 펼치기로 했던 동십자 기사단은 모두 이곳에 집결해 있습니다. 후작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기사단의 전 대장들은 나중에 따로 만나 보기로 하지. 아마 며칠 내로 쟈크렌 요새에서 기사들이 올 거다. 그들의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조심하게. 예, 후작 각하. 그런데 기사들이라고 하시면 어떤? 그로체스 공작 전하께서 폐하께 상소하여 얻어 낸 은십자 기사단의 일부다. 은십자 기사단장 투르넨 후작이 도착하면 나에게 안내하도록 하게. 예, 각하. 자, 내 방으로 안내해 주게. 옛. 자신의 방으로 안내된 후작은 성주가 준비해 놓은 각종 서류들을 꼼곰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실 무술 실력을 제외한다면 후작의 능력은 대단히 탁월했다. 모든 검술을 익히는 무리들은 작위를 받은 후 군부에서 일하게 되며, 또 더욱 뛰어난 검술들을 익히기 위해 발렌시아드, 로체스터, 크로데인 가문에 문하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기에 키에리와 그 친구들이 움켜쥔 권력에 대한 비판 세력을 모으기는 매우 힘이 들었다. 최고의 검술 실력을 지닌 인물들은 모두 다 세 가문과 어떤 형식으로든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로체스 공작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할 인물들을 문관들에게서 찾았다. 고급 검술을 익히지 못한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나 평민들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들은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소외된 인물들이었으므로 아주 손쉽게 그로체스 공작을 중심으로 뭉쳤다. 그들로서는 권력이라는 꿀이 담긴 벌통을 차지하는 길은 그것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똑똑 투르넨 후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후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큼직한 문이 위병들에 의해 열렸고,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당당한 체구의 사내가 실내로 들어섰다. 그 사내는 잠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후작을 바라본 후 슬쩍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것은 결코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보내는 인사는 아니었다. 오랜만이외다, 다리엔 후작. 마중 나가지 못해 미안하외다. 이리 앉으시지요. 이봐라, 차를 내오너라. 투르넨 후작이 자리에 앉자 다리엔 후작은 일부러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이렇듯 빨리 와 주셔서 고맙소이다. 그래, 몇 명이나 거느리고 오셨소이까? 일단 선발대만 거느리고 왔소. 하지만 내일 2진, 그 다음 날 3진이 도착할 예정이오. 모두 다 도착하면 내 휘하 기사단의 반이 될 것이오. 이곳에 오기 전에 로체스터 전하께 약간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 일을 어떻게 벌이려고 하는 것이오? 상대의 무례한 어투에 약간 자존심이 상한 다리엔.후작은 품 속으로 손을 푹 집어넣었다. 순간 그것을 보고 있던 투르넨 후작의 눈썹이 약간 꿈틀했고, 동시에 그의 손은 본능적으로 검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투르넨 후작의 쏘아 내는 듯한 눈빛은 상대가 이상한 걸 꺼낸 다면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두 토막 내버리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투르넨 후작을 의식하며 다리엔 후작은 약간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이렇듯 갑작스레 행동한 것은 분명 실수였기 때문이다. 집어넣을 때와는 달리 다리엔 후작의 손은 천천히 품 속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 손에는 봉인된 편지가 한 장 들려 있었다. 그게 뭐요? 자, 읽어 보면 알 거외다. 투르넨 후작은 편지를 받아서 먼저 봉인부터 살펴봤다. 봉인은 비밀스런 편지를 보낼 때 사용하는 것으로, 밀랍으로 봉투의 닫히는 부분을 막고 그 위에 인장(印章)을 찍어 놓은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경우 인장은 그 가문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 반지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 인장의 모양이 황실의 것임을 알아 본 투르넨 후작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봉인을 뜯고 내용물을 자세히 읽어 본 투르넨 후작은 다시 편지를 다리엔 후작에게 건네 주며 퉁명스레 말했다. 어이가 없군. 전장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그대가 사령관이라니 . 뭐 그것이 칙명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오? 내 작전은 간단하오. 타이탄이라는 병기가 개발되기 이전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군대를 이동시키고 포진시키는 수많은 기법들이 발전했었소. 그리고 그것은 마법사나 강력한 무술을 지닌 소수의 기사들에 의해 더욱 복잡하게 발전했었지. 하지만 타이탄 이후에는 어떻소? 타이탄의 수가 별로 많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또 타이탄은 타이탄 외에는 상대할 적이 없다는 현실 때문에 결국 전쟁이 타이탄들 끼리의 격투로 결말 지어졌소. 그렇다 보니 전략이나 전술 따위는 써먹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지.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의 요점이 뭐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타이탄이 등장한 후에는 닭대가리들이 전략이나 전술을 세워 놨다고 하더라도 타이탄 부대만 강하다면 승리가 가능하다는 말이오. 무인들을 깔아뭉개는 듯한 말에 자존심이 상한 투르넨 후작이 역으로 꼬집었다. 지금 당신 자신이 닭대가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오? 분명 은십자 기사단의 반이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 적을 상대하겠다는 것은, 강력한 타이탄 전력을 이용해 적과 싸우겠다는 말이니까 투르넨 후작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하하하, 그대도 정말 만만찮은 사람이군. 나는 기사단을 본격적으로 투입해서 대규모 타이탄 전투를 벌일 생각은 없소. 지금 그로체스 전하께 필요한 것은 시간과 승리요. 그렇기에 너무 갑작스럽게 승리를 거둬 버리면 곤란하지. 크루마를 없애기에 충분한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시간을 끌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오. 내 말 이해하겠소? 이해 못 하겠소. 나는 예전부터 전쟁은 속전 속결이 최고라고 배워왔소. 이해 못 한다면 어쩔 수 없소. 어쨌건 지휘권은 나에게 있고 당신은 내 지휘에 따라 움직여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이건 이해하겠소? 나는 당신 같은 닭대가리가 아니니가 그 정도는 이 편지를 봤을 때 벌써 이해하고 있었소. 그럼 일이 있을 때 부르시오. 당당한 체구를 꿈틀거리며 밖으로 사라지는 무인을 보며 다리엔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투르넨 후작이 거대한 기사단을 호령하던 인물이니 만큼 자신의 밑에 둘 만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리엔 후작은 책상으로 돌아가서 털썩 주저않은 후 그 위에 놓여있던 서류 가운데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이곳에 와서 읽은 보고서들 중에서 매우 흥미 있게 읽은 몇 안 되는 서류들 중의 하나였다. 크로사나 전투 집행 명령서 라고 제목을 붙인 서류는 마법사 라진느가 총 사령관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에 의해 작성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거기에 기록된 전투 방식은 철저한 게릴라전이었다. 상대방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진 속도를 둔화시키고, 적이 산발적인 공격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기사들을 분산하여 압력을 가한다. 그러면서 뛰어난 기사 몇 명으로 이루어진 특수 부대를 이용해 그들을 각개 격파하는 것이 요점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시간을 끄는 데 있어서 매우 뛰어난 전략이었다. 그리고 가랑비에 옷 젖는 식으로 상대는 자신들의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사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사령관인 자신도 바로 전술로 적과 싸우기 위해 준비를 했었기 때문에 이 전술이 가지는 이점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철십자 기사단으로부터 올라온 보고서에 따르면, 두 차례 타이탄을 내보냈지만 적 기사를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격파 당했다고 되어있었다. 하지만 다리엔 후작은 그 보고서가 그렇게 신경 쓸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등급이 낮은 철십자 기사단의 타이탄 한 대를 적 타이탄 두세 대가 협공했다면 당연히 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더 강력한 기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때문에 은십자 기사단의 정예들을 부탁한 것이 아니었던가. 꿈을 이루어 가는 것 공작 전하. 무슨 일이냐? 수염을 기른 노 장군과 작전을 의논하고 있던 크로아 공작은 막사 밖에 서 있는 마법사를 향해 대답했다. 마법사는 공손하게 크로아 공작을 향해 말했다. 예, 전방 정찰조로부터의 보고이옵니다.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옵서 오신다고 하옵니다. 그 순간 크로아 공작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지금 그에게는 가히 1개 기사단 급 이상의 위력을 지니고 있는 구원병이 고착했다는 말처럼 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 그래? 지금 어디 있느냐? 아마 저녁쯤에는 도착하실 것이옵니다. 잘 되었군.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어. 연락이 안 돼 고심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이때 앞에 앉아 있던 노 장군이 조심스레 말했다. 전하, 호위병들을 보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거야. 별로 그런 것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지. 대신 오늘 저녁은 좀 맛있는 걸로 준비하라고 일러라. 예, 전하. 대답을 마친 마법사가 물러가자, 크로아 공작은 노 장군을 향해 급히 말했다. 그녀가 도착했으니까 병력을 좀더 빼자. 예? 하지만 더 이상 빼면 위험할지도 . 하지만 공작은 그 따위 것은 상관없다는 듯 지도를 짚으면서 말했다. 상관없어. 다섯 개만 더 빼는 거야. 그것들을 이 일대에 투입한다면 보급 사정이 훨씬 좋아지겠지. 그녀 혼자만 해도 그 정도는 충분히 채워진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은 최강의 마법사, 더 이상 뭐가 필요한가? 안 그래? 예. 지시대로 따르겠사옵니다, 전하. 다크 일행이 크로아 공작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크로아 공작은 휘하의 기사들 및 장군들과 함께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나. 먼 길에 수고가 많았네. 수고랄 거야 있나? 멀찍이 떨어진 덕분에 꽤 재미있는 여행이 되었는걸. 덕분에 많이 배웠고 말이야. 참, 내 아버지야, 인사해. 크로아 공작은 다크의 뒤편에 서 있는 대단한 미남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예, 폐하로부터 말씀은 들었습니다. 많은 도움 부탁 드립니다. 뭐, 도움이랄 거야 있나? 아들 녀석 혼자서도 잘 하던데 . 오는 길에 자네에게 줄 선물도 준비해 왔지. 린넨! 다크로부터 호명을 받자 린넨 백작은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말 안장에 넣어 두었던 술병들 가운데 하나를 꺼내 다크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 크로아 공작에게 건네 줬다. 오는 길에 구한 건데, 아주 쓸 만해. 자네한테도 마시게 해 주고 싶더군. 디지드라는 술이야. 크로아 공작은 아무런 상표도 없는 그 술병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디지드를 만드는 마을이 있던가? 어? 디지드를 알고 있었어? 그 녀석들은 자기 마을 특산이라고 하던데 . 예전에는 여러 곳에서 생산했었지. 디지드는 고구마와 몇몇 약초를 섞어서 만드는데, 코린트가 지배하게 된 후에는 그 녀석들의 입맛에 안 맞는다며 포도주나 브랜디만 만들게 했지. 술이란 것은 판로가 없으면 생산을 중지하게 되어 있는 거야.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 생산 비법은 자연히 사라지는 것이고. 아무튼 정말 고마워. 아주 마음에 드는 선물이야. 자, 들어가서 이 녀석을 같이 마셔 볼까? 그날 저녁 식사에는 아르티어스와 다크만이 초대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머지 인물들의 경우 두 명의 공작이 참석하는 자리에 함께 할 정도의 위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다크와 함께 크로아 공작의 숙소에 초대를 받았기에 내심 꽤나 기대를 하고 있었다. 공작, 그것도 크라레스 제국의 실세인 공작 두 명이 모이는 자리라면 과연 어떤 메뉴가 등장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병수 두 명이 큼직한 솥을 하나 놓고 간 후, 크로아 공작이 손수 그 내용물을 접시에 담아 각자에게 나눠 주기 시작했을 때, 아르티어스의 환상은 깨지고 말았다. 이, 이게 뭐야? 정체 불명의 음식, 대충 걸쭉한 수프처럼 생겼는데 도대체 내용물이 뭔지조차 알기 힘들었다. 허연 색이 나는 것을 보면 밀가루도 들어간 것 같았고, 군데군데 채소도 보였지만 얼마나 삶았는지 본래 모양을 하고 있는 채소가 없어 도무지 어떤 게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예? 뭐긴 뭐예요? 저녁밥이지. 아르티어스가 퉁명스레 대답하는 아들 녀석의 얼굴과 무럭무럭 김이 나고 있는 정체 불명의 음식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자, 크로아 공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음식이 형편없어서 죄송합니다, 아르티어스 님. 하지만 지금 보급 상태가 좋지 못한 관계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 저녁은 특별한 날이라고 고기도 좀 넣었는데 . 고기? 고기라고는 기름기 하나 안 보이는데? 고기 조각이라도 들어 있는지 수프 그릇을 훑듯이 살펴보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당혹스런 미소를 보내고 있던 크로아 공작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말라비틀어진 빵 조각을 토막 내어 그들에게 건네 줬다. 그래도 맛은 날 겁니다. 며칠 전에 어떤 백작의 영지에서 징발한 말린 고기 남은 게 있었는데, 그걸 모두 다 넣었거든요. 하지만 만 명이 넘는 인원이 먹는 식사다 보니 흔적도 안 보이는 게 당연하겠죠. 빵이 딱딱하니까 수프 안에 넣어서 드십시오. 따지지 말고 먹어요. 언제부터 음식을 가렸다고 그래요? 다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빵 조각까지 넣은 그 정체 불명의 음식을 한 숟가락 가득 떠서 입 속에 밀어 넣은 후 대충 씹어서 삼켰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아르티어스도 억지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크로아 공작이 수프를 우물거리다가 삼킨 후 말했다. 입에 안 맞으실지 모르겠지만, 병사들은 모두 이런 것을 먹고 있습니다. 사령관이랍시고 저만 좋은 음식을 먹는다면, 내 밑에 있는 기사들도 좋은 것을 먹으려고 들 테고, 그렇게 되면 고급 장교들도 그것을 먹으려고 하겠죠. 하지만 음식의 양은 한정되어 있는 것이니까 결과적으로 병사들의 몫만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전장에 나가면 병사들과 똑같이 먹으라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을 지금껏 실천해 오고 있습니다. 크로아 공작은 그 말을 아르티어스에게 했지만 아르티어스는 음식만 먹고 있을 뿐 공작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다크가 공작의 말에 응수를 했다. 아주 훌륭하신 아버님이었군. 언제 돌아가셨지? 30년쯤 전이었지. 폐하를 피하게 하시려고 몇몇 기사들과 함께 적의 발목을 잡으셨어. 그 덕분에 폐하는 탈출에 성공하셨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들었네. 언제나 전장에서 죽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분이셨는데, 뭐 평생의 소원은 푸셨으니까 여한은 없으셨겠지. 자랑스런 아버지로군. 그럼, 아주 자랑스러운 분이셨지. 내가 가장 존경하는 기사야. 그리고 내가 가장 되고 싶은 이상형이기도 하고. 밥은 대충 다 먹은 것 같으니 술이나 한잔 할까? 좋지. 크로아 공작은 디지드의 마개를 딴 후 한 잔씩 건넸다. 그런 다음 잔을 들고는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했다. 옛날 수련하던 도중 마을로 살짝 도망 쳐 나와 조금씩 마셔 봤던 디지드. 평민들이 즐기던, 결코 좋은 술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그 향기와 텁텁한 뒷맛이 아련한 추억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보급 사정이 형편없는 모양이지? 다크가 말을 걸자, 공작은 회상에서 깨어나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후방에 일곱 개 사단을 풀어 놨지만, 원체 점령지가 넓다 보니 그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아쉬운 대로 점령지에서 징발하고 있지만 그나마 이제는 한계에 부딪쳤어. 아르티어스는 아들과 공작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디지드를 조금씩 홀짝거리고 있었다. 이런 인간들의 말에 드래곤인 자신이 나설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농만들로부터 뺏으면 말썽이 생기지 않을까? 아, 물론 농민들이나 농노들의 것은 빼앗지 않아. 지방 여주들의 주머니를 털 뿐이지. 하지만 녀석들이 우리 쪽으로 식량을 넘기기 전에 창고를 불태워 버리는 실정이라서 징발도 쉽지는 않아. 전쟁이 오래간다면 아주 힘들어지겠군. 머잖아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 거야. 그에 대한 대비도 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글쎄. 하루하루도 빠듯한데 그렇게 멀리까지 계획을 잡고 있을 여력이 없어. 우선은 지금 후방에서 새로이 증원되어 배속된 5개 사단을 뒤로 돌려서 차근차근 부숴 나오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는 언제 끝이 날지 의문이지. 그렇다면 대책이 없는 거야? 아니, 대책은 있어. 어떤?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답은 나오지. 첫째, 놈들은 여기저기에서 공격해 들어오기는 하지만 소수야. 둘째, 녀석들은 각 영주의 소속 부대로서 분산되어 활동하고 있어서 일관된 명령 체계가 없지. 셋째, 녀석들은 모든 보급을 자기들이 알아서 해결해야만 해. 그것 때문에 첫째처럼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 넷째, 각 지방에 흩어진 영주 직속의 부대들이기에 검술에 능한 인물은 없어. 자, 그런 상황에서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조금씩 디지드를 마시면서 크로아 공작의 말을 듣고 있던 다크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관된 명령 체계가 없다면 하나하나 다 부수는 수밖에 도리가 없잖아? 그리고 검술에 능한 인물이 없는데다가 소수라면 이쪽은 정예 기사 몇 명쯤 내보내면 될 테고 . 대충 그렇게 답이 나오겠지?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이쪽에서 기사단을 분산시키면 녀석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기사단을 투입해 올 거야. 파견 기사들로부터 올라온 보고서에 의하면 벌써 철십자 기사단의 타이탄도 두 번 나타났었지. 물론 격퇴하긴 했지만, 녀석들이 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은십자나 금십자 기사단을 동원해 온다면 얘기는 또 달라질 거야. 기사단을 분리시킬 수도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지? 물론 기사단을 분리시키기는 해야겠지만, 그렇게 큰 규모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 벌써 유령 기사단 쪽에 명령해서 오너 셋, 그래듀에이트 둘, 기사 넷, 마법사 한 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 다섯 개를 내보냈어. 다크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효과가 있던가? 물론, 효과는 좋았어. 하지만 본진의 전투력이 너무 약화되는 것 같아서 그게 문제지. 그런 때 자네가 와 준 거야. 덕분에 나는 같은 전력을 가진 부대 다섯 개를 더 만들어서 내보낼 수 있었지. 이제부터 전세가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할 거야. 잘 되었군.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그냥 앉아만 있어도 모든 게 끝난다는 건가? 아니지, 그러다가 놈들이 오면 싸워 줘야겠지. 그건 그렇고, 토지에르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크루마와 코린트가 휴전을 했다고 하더군. 혹시 들었나? 아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주 위험해. 코린트는 주력 부대를 이쪽으로 돌릴 여유가 생긴 것이거든. 대책은 있어? 토지에르의 말대로 와리스 백작을 크루마에 보내 따질 거라고 했지만, 글쎄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야. 와리스 백작을 보내 어떻게 하려고? 일단 전쟁 도중에 발을 뺀 것에 대한 사과는 받아야 하겠지. 그리고 될 수 있다면 원군을 얻어 내야 할 테고 . 물론 그 녀석들이 원군을 파견해 준다고 해도 정상적인 원군은 힘들고, 아마도 자네가 했던 것처럼 정체를 숨긴 기사단쯤이 되겠지. 뭐, 잘 되겠지. 그런데 이런 식의 게릴라 전은 여기서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군. 크라레스의 강력한 기사단이 힘을 못 쓰는 것을 보면 말이야. 크로아 공작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사단만 강하면 뭐 하나? 원래 기사단을 받쳐 줄 강한 군대도 필요한 거야. 보급로를 확보하고, 점령지를 지킬 군대가 말일세. 시시각각 보급로를 위협받고, 기사단이 뚫고 들어간 대지의 반도 통제하지 못하는 군대라면 정말, 흐휴 힘들둔. 토지에르의 말로는 지금 새롭게 용병을 모집중이라고 하던데, 이 넓은 영토를 통제할 만한 군대를 확보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크로아 공작이 투덜거리자 다크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자네나 토지에르는 지금 꿈을 이뤄 가고 있잖아? 저 예전부터 목표로 해 왔던 꿈을 말이지. 내 앞에서는 죽는소리 해 댄다고 해도 자네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피곤해도 기분은 좋으면서 딴소리 하지 마. 크로아 공작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나? 하지만 꿈을 이뤄 가는 것은 정말 힘든 작업이야. 뚱뚱이의 패배 세계 최강의 제국이라 자처하던 코린트를 농락한 두 국가의 외교 담당관은 처음 만남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요즘 아주 좋은 소식이 들려 오고 있더군요. 가레신 후작은 일부러 크라레스의 승리를 빙 둘러서 말했다. 가레신 후작은 이 능구렁이 뚱뚱보를 만나기 전에 크라레스가 현재 처한 상황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왔기에 미리 선수를 치고 있는 것이다. 허허허, 그거야 뭐 . 뚱뚱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의 말을 끊으며 가레신 후작은 슬슬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공격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단 튼튼한 발판을 마련해 두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말을 교묘하게 끊어 버리는 작전을 구사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 능구렁이 가레신 후작이 워낙 교묘한 타이밍에 말을 차단했기에, 뚱뚱이는 물론이고 뒤편에 서 있는 크라레스의 마법사나 기사도 가레신 후작이 일부러 말을 막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넓은 크로나사 평원을 다 차지하셨으니 곧이어 크라레스 제국의 위명(偉名)이 천하에 진동할 것 같더군요. 그렇게도 막강하던 코린트에게서 연전 연승을 거두고 계시다니, 정말이지 대단하외다. 글쎄요. 그렇지만 . 또다시 가레신 후작은 뚱뚱이가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고 말을 끊었다. 자신이 싸우기 좋은 토대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무슨 겸양의 말씀을. 귀국의 기사단은 정말 부럽군요. 본국의 기사단은 코린트의 기사단과 몇 번 부딪친 다음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을 정도인데 말이오. 그것 때문에 미네르바 전하께서는 새롭게 기사단을 편성하신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죠. 은근하게 상대를 높여 주면서, 자신들의 처지는 매우 심각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보고 뚱뚱이도 이제서야 상대의 의도를 눈치 채고 방어를 시작했다. 설마 그 정도야 되겠습니까? 대크루마의 기사단이 그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면 지나가던 오크가 비웃을 겁니다. 귀국의 기사단을 쳐부수는 것은 오우거를 맨손으로 때려 잡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그렇게 심한 엄살의 말씀은 필요 없지요. 뚱뚱이의 말에 가레신 후작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엄살이 아니외다. 지금 레디아 근위 기사단의 오너들 중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보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오? 이런 식의 전쟁을 한 번만 더 하게 되면 아예 국가가 망할 지경에 될지도 몰라요. 그에 비하면 귀국의 기사단의 무훈은 정말 대단하지요. 아직까지 크로나사 전선에서 잃은 타이탄은 단 한 대도 없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그건 바로 알고 계신 겁니다. 하지만 코린트의 기사단이 . 상대의 말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으므로 뚱뚱이는 일단 그 말을 인정했다. 하지만 가레신 후작은 그 뒤에 이어지려는 뚱뚱이의 말을 의도적으로 끊었다. 아, 그것도 정보국에서 들었소. 코린트의 외곽을 담당하던 동십자 기사단 전대를 단시간 내에 전멸시키셨다구요.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 눈부신 진격 속도에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소이다. 그토록 뛰어난 기사들을 보유하고 계신 것도 그래지에트 황제 폐하의 복이시겠죠. 간신히 말할 틈을 잡은 뚱둥이는 재빨리 지금 크라레스가 처한 상황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지금 본국은 전선이 너무 확장된 탓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귀국에서 일방적으로 휴전을 해 버리는 바람에 . 이번에도 가레신 후작은 상대의 말을 끊으며 정중히 사과했다. 하지만 능구렁이답게 매우 미안해 하는 듯한 표정으로 사과의 말을 던지며 시작했기에 이것 또한 도중에 말을 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당하기만 하는 뚱뚱이는 지금 슬며시 약이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아, 그건 어쩔 수 없었소. 본관은 대지의 여신 케레스에게 맹세코 어떻게 해서든지 휴전 조약을 방해라려고 했지만 미네르바 전하께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신 일이라 본관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소. 이번에는 상대가 말을 끊지 못하도록 재빨리 뚱뚱이가 말했다. 가레신 후작 각하의 입장을 이해는 하지만 동맹국인 본국이 아직도 전쟁중인데, 전쟁을 시작한 그쪽에서 발을 먼저 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가레신 후작은 가증스럽게도 애처로운 표정까지 연출해 보이며 능수 능란하게 말을 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 해도 할 말이 없소이다. 하지만 코린트 쪽에서 치열한 게릴라전을 감행해 오는데다가 아직도 쟈크렌 요새에는 놈들의 주력 부대가 버티고 있고 . 보급은 어렵고, 최전방에는 막대한 병력을 주둔시켜 둬야만 하고, 그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소. 그렇게 어려운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지요. 아아, 그렇지는 않을 거외다. 귀국의 기사단은 대단한 정예가 아니오? 그리고 본국과의 전선에 코린트의 주력 부대가 잡혀 있으니 녀석들도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할 거다, 이 말이외다. 섣불리 손을 못 쓴다고 해도 크로나사 지방에서는 연일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국에서는 귀국에 정예 기사단을 파병했었습니다. 이제는 귀국에서 본국에 병력을 파병해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우려하고 있던 문제를 끄집어내자 가레신 후작은 침을 튀겨가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아, 와리스 백작. 본국도 귀국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당연히 도와 드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본국은 얼마 전까지 전쟁터가 되었던 미란 국가 연합에도 원조를 해 줘야 하고, 또 본국 기사단이나 군대가 입은 피해도 막심하오. 더군다나 쟈크렌 요새에 주둔중인 코린트의 주력 부대는 대단히 강력하지요. 본국의 정예 부대는 코린트와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주둔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 말이오. 귀국의 사정만 주장하지 말고 본국의 어려움도 이해해 주셔야지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귀국 본토를 지키고 있는 로투스 급이면 어떻습니까? 귀국 기사단보고 적 타이탄을 상대해 달라는 부탁은 아닙니다. 게릴라들을 상대하기 위해 로투스 급 타이탄과 그래듀에이트, 마법사, 기사, 그리고 10개 사단의 병력만 빌려 달라는 거지요. 가레신 후작은 정말이지 깜짝 놀란 듯한 표정까지 연출하며 능청스레 말했다. 10개 사단이라고요? 10개 사단이나 되는 병력을 빌려 줄 여력은 없소. 본국에서도 정령지를 관리하기 위한 병력이 모자라는 형편이니까 말이오. 그러지 말고 우선 1개 여단을 파병해 드리겠소. 그리고 나머지는 차츰 형편이 좋아지면 보내 드리겠소. 어떻소? 병력은 최소한 만 명은 넘어야 합니다. 그러지 말고 오천 명으로 합시다. 본인이 폐하께 허락 받은 최대한의 군대요.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 폐하를 설득할 테니 우선은 그 정도로 참아 주시오. 와리스 백작이 확정적으로 말했지만, 아직도 가레신 후작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주절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기에 와리스 백작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상대편의 황제가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는 데야 어쩔 것인가? 나중에 꼭 증원을 해 주셔야 합니다. 와리스 백작이 사정하듯 말하자, 가레신 후작은 매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소? 본인을 믿어 보시오. 그렇다면 기사들은? 다시 증원군 얘기가 나오자 가레신 후작은 주절주절 그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코린트 최강의 기사단들이 모두 크루마 쪽에 집결해 있는데 어떻게 기사나 타이탄을 꺼낸단 말이오? 지금 본국의 정규급 이상의 타이탄들은 대부분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소. 골고디아 일부와 로투스는 모두 산악 지대나 북서부에서 몬스터 또는 적들과 대치중이지요. 도저히 그들을 뺄 수는 없소. 그들을 빼기보다는 오히려 최전선의 기사들을 빼는 것이 더 쉬울 거요. 그러자 이제 완전히 화가 난 뚱뚱이가 얼굴이 벌게지면서 하소연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가레신 후작 각하, 본국은 지금 단 한 명이라도 많은 병력이 필요합니다. 귀국은 일방적으로 전쟁을 종료했는데 이렇듯 혈맹(血盟)의 처지를 무시해도 상관없는 것입니까? 이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누군데 이렇듯 혈맹을 박대하시는 겁니까? 와리스 백작, 오해하지 마시게나. 내가 하는 말은 절대로 귀국을 박대하는 뜻이 아니외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금 귀국을 도울 만한 여유가 없다는 얘기지요. 우선은 오천 명의 병력으로 만족해 주시오. 미네르바 전하와 상의를 해 보고 여력이 남는 대로 계속적인 증원을 약속 드리겠소. 가레신 후작은 파병의 문제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며 간곡히 말했기에, 와리스 백작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대가 문서로 확답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일단 오늘 토의된 내용을 서류로 만들어야 하겠지요? 그대가 초안을 잡아 주시오 내 기꺼이 서명해 드리리다. 사앧의 말에 와리스 백작은 종이에다가 대충 초안을 잡아서 가레신 후작에게 넘겼다. 그러나 후작은 차근차근 읽어 본 후 심각한 어조로 와리스 백작을 향해 말했다. 이건 말이 잘못 되었소. 본관은 곧이어 2차 파병을 한다고 말한 적이 없소. 본국의 상태가 호전되는 대로 미네르바 전하와 상의한 후 즉각 보내 준다고 했소. 그렇다면 어쩌다는 겁니까? 가레신 후작은 직접 펜을 잡고는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지운 다음 토를 달아서 와리스 백작에게 넘겼다. 와리스 백작은 수정된 초안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제 상대의 속셈이 완전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말은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병력을 보내 줄 수 없다는 말이십니까? 와리스 백작이 따지고 들자, 가레신 후작은 난처한 듯 말했다. 아아, 그렇게 오해하지 마시오, 와리스 백작. 조만간 코린트 쪽에서 어느 정도 긴장을 완하하면 그때 전선에서 표시가 나지 않게 병력을 빼서 그대들에게 보내 줄 거요. 제발 그때까지만 참으시오. 아마도 본인의 예상으로는 5개월 내에 2차 파명은 분명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오. 내 말을 믿어도 좋소. 와리스 백작의 분노는 이제 폭발 직전까지 도달하고야 말았다. 그는 주먹으로 탁자를 큰 소리가 나게 두들기면서 따졌다. 5개월이라고요? 5개월 후면 겨울입니다. 겨울에 무슨 파병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때까지 본국의 군대가 전멸 당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면 다행일 겁니다. 상대가 신경질적으로 흥분하자 가레신 후작은 오히려 다독거리듯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자 자, 와리스 백작, 상황을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시오. 만약 귀국이 그렇게 어렵다면 그때 마법진을 이용해서 수십 명의 오너를 즉각 보내 드릴 것이오. 코린트를 막으려면 귀국과 본국이 연합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절대로 귀국이 어려움을 당하도록 방관하지는 않을 거요. 그러니까 우선은 오천명으로 참아 주시오. 또 한 차례의 줄다리기가 있었지만 와리스 백작은 어쩔 수 없이 가레신 후작이 작성한 서류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 관례에 따라 정식 서류는 종이보다는 장기적인 보관이 가능한 양피지(羊皮紙)에 작성하게 된다. 와리스 백작은 이건 사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크루마가 크라레스와 결별을 선언한다면 크라레스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서류에 서명을 했던 것이다. 와리스 백작은 축 처진 몰골이 되어 크루마의 황궁에서 걸어 나왔다. 상대방이 군대 파견을 최대한 피하려고 들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겨우 1개 여단만 파병하겠다는 것은 나무나도 지나친 처사였다. 망할 자식들. 울분에 차서 욕설까지 중얼거려 보는 와리스 백작이었지만, 지금은 크루마가 이쪽보다 월등하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엇다. 아마도 이번 전쟁에서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막강한 실력을 과시하자, 크루마는 코린트와 크라레스가 맹렬하게 치고 받기를 원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가 크라레스가 코린트에게 재기불능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을 때쯤 참전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전쟁을 벌인다고 심하게 국력을 낭비한 코린트와 크라레스를 자신들이 제어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현재의 전력으로는 크루마 혼자서 코린트를 상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크라레스를 잘 이용한다면 코린트를 쓰러뜨리는 일이 의외로 쉬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뒤에서 따라오던 마법사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묻자, 와리스 백작은 한숨을 내쉬며 힘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휴, 글쎄. 이런 휴지 조각을 가지고 폐하를 알현할 욕기가 나질 않는군. 지금 크라레스는 크루마의 우방이지만 미래에도 계속 우방으로 남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또 크루마 쪽에서도 크라레스의 막강한 기사단을 보고 서서히 경계하기 시작, 될 수 있다면 이번 전쟁에서 코린트쪽에 치명타만 입혀 준 후 쇠퇴의 길로 들어서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기에 와리스 백작보다 훨씬 더 유능한 인물이 갔다고 하더라도 크루마는 최대한 병력을 보내 주지 않으려고 용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구원병을 청하는 사신으로 온 것은 와리스 백작이었고 전후 사정이나 배경이 어찌 되었건 그는 겨우 5천 명의 구원병밖에 얻어 내지 못한 것이다. 와리스 백작의 무능함에 격분한 황제는 어쩌면 보고를 듣자마자 그의 목을 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본국으로 귀환하여 폐하께 보고를 올리기보다 미란에 가서 원군을 청해 보는 것입니다. 만약 결과가 좋다면 폐하께서도 크루마에서 백작 님이 실패하신 것을 용서해 주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와리스 백작은 미란이 이번 전쟁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쪽도 피해 복구 작업이 한창일 텐데, 도와 주려고 할까? 도와 줄지도 모릅니다. 지금 미란은 거대해진 크루마 제국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언젠가는 크루마 제국에 합병될 것을 걱정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걸 이용해서 잘 설득한다면 1개 사단 정도는 파병해 줄지도 모릅니다. 5천 명에 만 명을 합하면 만 오천 명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밑져 봐야 본전인데 미란에 가서 구원병을 청해 보신 후에 본국에 돌아가서 폐하께 보고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법사의 말을 한참 생각해 보던 와리스 백작은 결심한 듯 외쳤다. 좋아. 그렇게 하지. 미란으로 가세나. 예. 영구적인 동맹 조약 미란은 갑작스런 방문객으로 인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리스 백작은 먼저 미란 국가 연합의 의장인 지크프리트 데 가므 3세를 방문해 파병 문제에 대해 상세하게 상의를 했다. 하지만 미란 국가 연합은 왕들의 토의에 의해 움직이는 합의체였다. 그러므로 의장 독단에 의해 파병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가므 왕국으로 네명의 왕들이 소환되었고, 그곳에서 모두들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미란 국가 연합은 크루마를 제어하기 위해 강력한 힘을 갖춘 동맹국을 원하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막강한 기사단을 가지고 있는 크라레스를 도와 주는 것에 대해 그렇게 회의적이지는 않았다. 크라레스 왕국에서 사신이 도착했소. 구원병을 파견해 달라는 얘기더군. 가므 의장의 말에 모두들 파병이 의미하는 바를 깊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흐음. 나중을 생각한다면 조금 무리가 있더라도 크라레스를 도와주어 빛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국의 기사단은 지금 엉망진창입니다. 도저히 남을 도와 줄 형편이 아닙니다. 그건 본인도 잘 알고 있소. 다행히 크라레스에서 파견되어 온 와리스 백작의 말로는 기사단을 파견할 필요는 없다고 하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군대의 파병이오. 물론 신분을 철저하게 숨긴다면 어려울 것은 없을 것 같소이다만은 . 군대라면 괜찮겠지요. 본국은 14개 사단과 기병 4개 여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시(戰時)가 아니니까, 한 2개 사단, 심지어 4개 사단을 뺀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겁니다. 가므 의장은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자네 말이 맞을 것 같네. 사실 전쟁이란 것이 타이탄들끼리의 결전에서 모든 것이 판가름 나니까 말이야. 문제는 본국의 군대가 별로 전쟁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인데 .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점령지 곳곳에서 출몰하는 소규모 게릴라들을 제압하는 것일세. 점령지가 워낙 넓다 보니 크라레스의 군사력 가지고는 그걸 모두 제압하는 것이 턱도 없는 모양이더군. 전쟁을 하다 보면 점령을 해 나가면서 확보한 도시에 얼마간이라도 병력을 주둔시켜 둬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크라레스는 7개 사단을 이용해서 간신히 보급로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면 될 걸세. 가므 의장의 말에 토란 국왕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7개 사단이라면 그렇게 작은 병력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점령지가 얼마나 넓은데 그러십니까? 크로나사 평원의 절반, 그러니까 미란 전 영토의 세 배 정도는 되는 크기겠지. 그 영토를 13개 사단으로 커버하는 중이라더군. 그나마 2개 사단은 기병일세. 그러자 스므에의 국왕이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큭큭 ,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겨우 그 병력으로 어떻게 그 넓은 땅덩어리를 먹을 생각을 했는지 . 웃을 일은 아닐세. 기사단은 지금도 계속 진격중이야. 크라레스는 크로나사 평원 전체를 집어 먹을 생각인 것 같아. 그러니까 13만이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도 턱도 없이 모자라는 것이지. 불가능합니다. 크로나사 평원이라면 미란 전체의 여섯 배나 되는 영토입니다. 그것을 잡아 먹는데 13개 사단이라면 . 겨우 13개 사단을 그 넓은 땅덩어리에 풀어 놓으면 한 개 도시에 몇 명이나 배치가 가능하겠습니까? 분명 엉터리 같은 생각이죠. 그러니 구원병을 청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사태가 그 지경이라면 본국에서 4개 사단을 파병해 준다고 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습니다. 가망성이 없는 전재이라구요. 꼭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니라고 보네. 보병은 그렇지만 크라레스의 기사단은 매우 강하지. 그건 벌써 크루마 전선에서 입증이 된 것이고, 또 크로나사 평원에서도 입증되었지. 동십자 기사단의 전대 하나를 간단히 전멸 시킨 것을 보면 모르나? 그리고 그 막강한 코린트가 왜 병력을 한곳에 모으지 않고 확 퍼뜨려서 게릴라전을 벌이겠나? 전면전으로 나간다면 더욱 힘들다는 것을 이미 알아챘기 때문이지. 크라레스의 군대는 적은 숫자지만 그만큼 소수 정예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알렌의 국왕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단호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파병한다고 하고, 어떻게 보낼 생각이십니까? 4개 사단, 4만 명의 병력입니다. 그들을 마법진으로 옮기실 겁니까, 아니면 아르곤을 통과시킬 겁니까? 그도 아니면 코린트 영토를 가로 지르게 만드실 겁니까? 그래서 하는 말일세. 어떻게 하면 조용하게 병력을 파병할 수 있겠나? 해로로 하면 어떨까요? 쟈렌 국왕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하자, 알렌 국왕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해로로 하면 빙 돌아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립니다. 일단 크루마에 양해를 구해 크루마를 가로질러서 라크비에 왕국으로, 그 다음에 랜트 연방으로 이동해서 그곳에서 해로를 이용해 크라레스로 보내는 방법이 가장 빠르겠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토란 국왕이 그 의견에 회의적인 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게 가장 비밀스럽고 빠른 길이라고 해도 최소한 3개월은 걸립니다. 원군이란 원래 적은 수를 파병하더라도 지금 당장 보내야 하는 것이죠. 그 때문에 보통 기사단을 보내 주는 것이구요. 그럼 한 번의 마법진으로 파견 가능한 인원은 몇 명인가? 아마도 각국의 마법사들을 몽땅 다 모은다고 해도 한 번에 2천 명 정도가 고작일 겁니다. 물론 조금 무리한다면 하루에 3번 정도는 보낼 수 있을 테죠. 아시다시피 크라레스와 본국과의 거리는 엄청나서 마력 소모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무리하지 않고 보낸다면 하루에 4천 명씩, 열흘이면 다 보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모든 마법사를 한곳으로 불러 모아야 하겠지만요.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은 괜찮지만 아마도 크루마는 훗날 마각을 드러낼 수도 있어. 나는 그때를 대비해서 크라레스와 좀더 친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의장의 생각이 맞습니다. 크루마는 코린트와의 휴전을 단번에 성사시키면서 겨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그 못된 놈을 보내 겨우 황금 3톤 정도로 입막음을 하지 않았습니까? 본국이 그놈들을 위해 흘린 피를 생각한다면 그 열배를 배상해도 부족할 지경인데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나오는 크루마를 더 이상 믿는다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대충 파견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가므 의장은 왕들을 쭉 둘러본 후 말했다. 흐음, 좋소. 그럼 크라레스에서 파견되어 온 와리스 백작을 한번 만나 보겠소?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찬성입니다. 먼저 그쪽의 의견을 들어 보고 최종 결정을 내리기로 하죠. 가므 의장은 고개를 돌겨 밖을 향해 외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그러자 호화로운 옷차림을 한 장교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무슨 일이시옵니까? 전하. 와리스 백작을 들라고 해라. 예, 전하. 곧이어 뚱뚱한 와리스 백작이 등장했다. 그는 매우 검소한 크라레스 황실의 분위기에 익숙했었기에 금은색이 번쩍이고 있는 호화로운 방 분위기에 주눅이 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가 조심스러운 자세로 들어오자 널찍한 원탁에 앉아 있는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 원탁과 떨어진 또 다른 탁자 옆에 놓여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 앉게나. 예, 전하. 와리스 백작은 공손하게 대답한 후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탐색하듯 바라보는 다섯 명의 왕들, 만만해 보이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아주 가벼워 보이는 똑 같은 형태의 자그마한 왕관을 쓰고 있었는데 왕관 중앙에 박혀 있는 커다란 보석의 색상은 각자 달랐다. 투명한 다이아몬드, 녹색의 에메랄드, 적색의 루비, 청사의 사파이어, 옥색의 비취였다. 아마도 연합 왕국의 협정을 맺으면서 왕관의 형태를 정한 것 같았다. 하지만 왕관에 박혀 있는 서로 다른 보석들은 다섯 개의 왕국을 뜻할 뿐, 각 나라의 상하 관계를 규정한 것은 아니었다. 짐이 각 왕들과 상의한 결과, 몇 가지 그대와 상의할 일이 있을 듯 하여 불렀네. 이미 얼굴을 알고 있는 에메랄드 왕관을 쓴 가므 의장이 말하자 와리스 백작은 최대한 예의를 차려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이번에는 루비 왕관을 쓰고 있는 인물이 말했다. 도대체 귀국은 그 전쟁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것인지 그것을 알고 싶네. 예, 전하. 본국은 현재까지 크로나사 평원에 9개 보병 사단, 3개 용병 사단, 4개 기병 여단을 투입했사옵니다. 그리고 3개 기사단, 타이탄 100여 대도 집어넣었지요. 또 후방에서는 새로운 용병 사단을 추가로 투입할 것이옵니다. 코린트의 경우 병력은 크라레스보다 우위에 있을지 모르겠사오나, 기사단의 전력에 있어서는 훨씬 뒤처지는 것이 사실이옵니다. 지금 코린트의 병력 배치로 판단하건대 본국을 향해 총력전을 벌일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이번 전쟁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되옵니다. 솔직하게 자신들의 어려운 점을 인정하면서도 미래의 전망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하는 와리스 백작을 향해 모든 왕들은 의외라는 듯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보통 이렇게 구원병을 청해 올 때는 자신들이 어떻게 어려운지, 또는 대비책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대충대충 넘기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흐음 , 어째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말인가? 예,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말이옵니다. 지금 현재는 게릴라로 인해 전방으로 가는 물자 보급에 어려움이 있고, 또 적들이 결전을 회피하는 덕분에 전세가 지지부진한 것도 사실이옵니다. 하지만 조만간 새로이 용병들을 모집하여 투입할 것이고, 또 한 달 내로 본국에서 대기중인 예비 기사들까지 투입할 예정이오니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이옵니다. 지금 도와 주신다면 그래지에트 폐하께서는 절대로 그 은혜를 잊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와리스 백작은 현재 전황을 비교적 솔직하게 말했다. 외교의 물꼬를 트는 첫 번째 과제는 상대와의 신뢰를 쌓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롭게 예비 기사들을 투입한다는 말이 비취 왕관을 쓰고 있는 인물이 질문했다. 귀국에서 새롭게 투입할 기사의 수는? 그래듀에이트만 200여 명이옵니다. 와리스 백작의 답변에, 비취 왕관을 쓰고 있는 인물은 놀랍다는 듯 말했다. 대단하군. 그래듀에이트만 200여 명이면 전세를 뒤집기에 충분하겠지. 그런데 왜 진작 그들을 투입하지 않은 것이오? 예, 지금 그들에게는 따로 주어진 비밀 임무가 있사옵니다. 그 때문에 지금 당장은 투입이 불가능 하옵니다. 절대로 미란 연방에는 폐가 되지 않도록 하겠사오니 원병을 파견해 주셨으면 하옵니다. 와리스 백작이 말한 200여 명의 그래듀에이트들은 모두 포로들이었고 그들은 지금 세뇌중이었다. 토지에르 경의 말에 따르면 아마도 1개월 내에 그 작업이 마무리될 것이다. 그렇지만 국제법에 위반되는 세뇌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와리스 백작은 대충 비밀 임무라는 말로 회피해 버렸던 것이다. 한참 서로 쑤군거리며 의논을 하기 시작한 얼마 후, 가므 의장이 뚱뚱보를 향해 말했다. 왕들과 상의해 본 결과, 어려운 그대들을 일부러 핍박하는 것 같아 별로 모양새는 좋지 않지만 . 가므 의장은 일부러 한동안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원군을 파병하는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소. 일단 말이 끊어졌을 때 가슴이 콩닥콩닥하던 뚱뚱이는 재빨리 말했다. 사실 조건만 들어 보는 데야 시간만 다소 지체될 뿐, 손해 볼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이옵니까? 전하. 우선, 영구적인 동맹 조약을 맺었으면 하오. 뭐 엄청난 조건을 제시할 줄 알았는데 상대가 의외로 당연한 것을 말해 오자 와리스 백작은 망설일 필요도 없이 즉각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제 혈맹이 될 것이온데,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옵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소. 그리고 두번째 조건은, 귀국의 황태자비는 우리 미란 국가 연합의 왕족들 중의 한 명으로 해 줬으면 좋겠소. 물론 그것이 어렵다면 두 번째 왕자의 처라도 상관은 없소. 눈치가 빠른 와리스 백작은 가므 의장이 제일 뒤에 붙인 말의 의미를 읽었다. 두 번째 왕자의 처라도 상관없다는 것은, 그냥 맨입으로 때우기는 좀 이상하니 서로간에 신뢰 관계를 더욱 돈독히 쌓기 위하여 사돈을 맺자는 의도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이쪽의 딸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쪽의 딸을 주겠다는 것이니 별로 손해 될 것은 없었다. 예, 아직 황태자 전하께서는 반려자가 없으시니 그것 또한 어렵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만약 본국이 장차 어려움에 처한다면 힘을 아끼지 말고 도와 줘야만 하오. 마지막의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짐작하며, 뚱뚱이는 공손하게, 하지만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저희 폐하께서도 이렇듯 어려운 때 도와 주신 미란 연방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좋소, 문서로 작성합시다. 저 , 그런데 얼마나 파병할 생각이시온지? 여러 왕들과 의논해 본 결과 4개 사단 규모가 적합할 것 같소. 마법진을 이용해서 10일에 걸쳐 보내 주겠소. 4만 명이나 보내 주겠다는 말에 와리스 백작은 입이 딱 벌어졌다. 미란의 사정을 잘 아는 그로서는 그 많은 병력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감격한 듯 다섯 명의 왕들을 향해 말했다. 4개 사단이라고요? 그렇게나 많이 . 가므 의장은 당연한 듯이 말했다. 도와 줄 때는 화끈하게 도와 주는 것이 미란 연합의 방식이오. 원래가 미란은 상업 국가, 밀어 줄 만한 상대가 나타났을 때 결코 주저하지 않소. 나중에 형편만 된다면 기사들도 파견해 주겠소. 너무도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이 은혜 기필코 잊지 않겠사옵니다. 서류를 작성하고 사라지는 뚱뚱이를 바라보며, 가므 의장은 옆 자리의 왕에게 중얼거렸다. 크루마의 그 뻔뻔한 사신 녀석과는 비교가 안 되는군. 상당히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속은 잘 모르는 것이니 . 상대가 속이려고 든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자, 모두들 오랜만에 만났으니 함께 한잔 하는 게 어떻겠소? 아주 좋은 술을 구해 놨소. 그것 좋지요. 유령 기사단의 출현 자 자, 모두들 힘내라.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장교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주위를 쭉 둘러봤다. 정말이지 드넓은 황무지가 그들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크로나사 평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넓은 이 대지는 아직도 미개간지가 60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영토였다. 간혹 가다가 몬스터가 출몰하기도 하지만, 머리가 멍청한 대형 몬스터 종류는 기사단에 의해 토벌된 지 오래였기에 나타난다고 해 봐야 오크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가 겁내고 있는 것은 겨우 몇 십 마리 정도로 떼지어 다니며 못된 짓거리나 하는 오크가 아니었다. 그놈들은 오크보다 훨씬 더 머리가 좋았고, 훨씬 더 좋은 무기로 무장 했으며, 훨씬 더 잔인했고, 또 지독하게 교활했다. 말 두 필이 끄는 대형 수레 50대로 이루어진 보급 부대와 제51경기병 여단에서 지원 받은 1개 소대(10명0의 기병들을 중심으로 1개 대대에 해당하는 부대가 그들을 호휘하며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멀리 이동해야 했기에 모두들 경장갑을 착용한 경장 보병들이었다. 그리고 마차 중간 중간에 섞여 함께 가고 있는 기병들도 모두 말을 끌고 걸으며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경기병대의 말들은 중기병대의 말처럼 두터운 철판으로 만든 마갑(馬甲)까지는 씌우지 않는다고 해도 적이 나타났을 때 하프 플레이트 아머(half plate amor : 몸통 정도만을 가릴 수 있게 만든 철판 갑옷)를 걸친 묵직한 주인을 태우고 전력 질주에 가깝게 달려야 했기에 평상시에 힘을 비축할 수 있도록 전투가 없을때는 끌고 다니는 것이 상식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 그의 주위로 한순간 짙은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가라졌다. 그 순간 그는 즉시 공중을 쳐다봤다. 멀리 하늘 위로 거대한 짐승이 날아가고 있었다. 방금 전의 그림자는 바로 그 녀석이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하늘 위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상이 없다는 신호였다. 이렇듯 하늘 위로 와이번을 타고 날아 다니는 용기사(龍騎士)는 보급로를 지키는 중요한 파수꾼이었다. 크라레스 여덟 명밖에 되지 않는 용기사들을 전원 다 보급로 확보에 투입하고 있었다. 원래는 정찰 활동을 하며, 적의 전력을 분석하는 일을 해야 하는 그들이 모두들 후방에 잡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중에서 그토록 감시를 하고 있음에도 게릴라들의 활동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용기사가 지나가는 것을 보니 오늘도 그럭저럭 무사할 것 같군요. 대대장님. 아마도 그럴 것 같군. 자,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누크리아 시에 도착 해야 한다. 모두들 힘을 내라. 자, 서둘러! 아무리 힘 좋은 말 두 필이 끌고 있다고 해도 귀족들이 소풍 가는데 쓰는 그런 가벼운 마차가 아닌 이런 짐마차는 그렇게 빠른 속도를 내지 못한다. 위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말들이 걸어가는 정도밖에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위급한 일을 다해서 달리게 한다면, 무거운 마차를 끄는 말들은 금방 지치게 될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말 들이 힘을 되찾을 때까지 오랜 시간 쉬어야 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그렇게 가까운 곳이 아니었기 때뭉이다. 이럇, 하! 마부들은 말들을 채근하면서 꾀를 부리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모두 튼튼한 짐말들이었기에 덩치도 좋았고, 또 다리도 매우 튼튼했다. 이런 짐말은 달리는 속도는 빠르지 못하지만, 대개 힘이 좋고 지구력도 좋았다. 잘 돌봐 주기만 한다면 자기 몸무게의 몇 배나 되는 마차를 별 탈 없이 잘 끌어 주는 것이다. 어느덧 정오가 지나 한풀 꺾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날씨는 무더웠다. 사람이나 말 모두 땀에 젖어 움직이고 있었다. 말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는 돌투성이의 도로를 중심으로 대대 병력이 퍼져서 사방을 경계하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가벼운 갑주를 입고 있었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중장 보병이 채택하는 방어력이 뛰어난 두터운 철판 갑옷보다는 움직이기 편리한 가죽 갑옷을 채택하고 있는 경장 보병은 떨어지는 방어력을 보충하기 위해 넓고 큰 사각형의 방패를 가지고 다녔다. 그 방패도 전체적으로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어 가벼웠고, 겉에 얇은 철판을 덧대었지만 그래도 방어력에서는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런 방패는 강력한 검이나 철퇴, 전투 도끼 등을 막는 데는 역부족일지 모르지만 숨어서 쏘아 대는 화살을 막기에는 매우 좋았고 방어력을 생각한다면 무게도 가벼운 편이었다. 수레를 둘러싸고 있는 경장 보병들은 모두들 그 커다란 방패를 허리에 달고 움직이고 있었다. 방패 안쪽에 붙어 있는 길쭉한 구조물을 허리에 걸친 후 손으로 슬쩍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온전히 손으로 잡고 있는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들기에 장거리 행군을 하는 데 좋았다. 허리에는 경장 보병의 정식 무기인 장검을 차고, 오른손에는 길이 2미터 정도의 창을 들었다. 그런 상태에서 방패까지 들어야 했기에 보병들이 조금이나마 힘이 적게 들게 배려해 놓은 것이다. 높이 1.2미터, 폭 70센티나 되는 커다란 방패로 외곽 부분을 방어하면서 단단한 투구가 씌어져 있는 머리통을 한 번씩 좌우로 돌려 가며 적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자갈이 마차 바퀴와 보병들의 두터운 가죽 신발에 채여 부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그들은 천천히, 하지만 끊임없이 앞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용기사가 지나가고 난 후 약 1시간 정도 걸어갔을까? 바로 그때 수풀 속에서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울리며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그 화살들은 처음부터 보병을 노린 것이 아니었기에 보병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히히히힝~ 수십 필의 말들이 고통을 호소하듯 구슬피 울며 바닥에 쓰러졌고, 마차 위에 무장비 상태로 타고 있던 마부들 중에서도 몇 명인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경장 보병들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몇몇 경장 보병들의 방패에 화살이 꽂혀 있었지만, 그 방패를 관통하지는 못한 듯 보였다. 대대장이 급히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풀들을 몸 여기저기에 묶어 위장을 한 사람들이 커다란 활을 든 채 도망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대대장은 우렁차게 외쳤다. 제2중대는 마차를 보호하라. 제1중대, 적들을 향해 돌격! 대대장의 외침 소리에 호응하여 1중대장이 외쳤다. 1중대 돌격! 중대장의 투박한 외침에 50명의 경장 보병들이 허리에 걸려 있던 방패를 왼쪽 손목에 부착하고는 롱 소드를 뽑아 들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부하들이 돌진해 가는 것을 채 보지도 않고 그는 돌격하기 위해 말에 올라타고 있는 기병 소대장을 향해 소리 쳤다.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는 마시오. 알겠습니다. 전원 승마! 속보 앞으로! 기병 소대장은 말 안장에 걸려 있던 원형 방패를 왼쪽 손목에 끼운 후, 왼손으로 말 고삐를 잡고 말을 제어하며 천천히 달려 나갔고, 그의 부하들도 대장의 뒤를 따랐다. 일단 부하들이 모두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한 기병 소대장은 장검을 뽑아 들엉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돌격 앞으로! 10기(騎)의 기병들은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적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돌진해 들어간 후 대대장은 그제야 수송대를 쭉 둘러봤다. 거의 반수에 달하는 말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제기랄! 이래서야 오늘 저녁까지 도착하기는 다 글렀군. 이때 한 병사가 달려와서는 급히 보고했다. 마부 네 명이 죽었고, 여덟 명이 부상 당했습니다. 대충 응급 처치를 했지만 세 명은 빨리 치료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 자 자, 죽은 말들을 마차에서 떼 내라. 마부가 없는 마차는 아무나 마차를 몰아 본 녀석들이 대신 몰아. 자, 서둘러라. 대대장의 독려에 몇몇 병사들이 달려들어 죽은 말이나, 죽어 가는 말들을 마차에서 떼 냈다. 활에 맞았지만 그런 대로 멀쩡해 보이는 말들은 그냥 놔뒀다. 그들은 상처 입은 말에서 화살을 뽑아 낸 후, 급히 피워 놓은 불로 상처 부위를 지졌다. 이렇게 해 두면 말은 아프겠지만 일단 출혈은 막을 수 있어 오늘 하루 정도는 버텨 줄 것이다. 대충 정리가 끝났을 때쯤 돌진해 들어갔던 제1중대와 기병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그들의 몰골 역시 말이 아니었다. 몇 명 남지 않은 기병들 중 세 명의 말은 어디다 두었는지 절룩거리면서 걸어왔고, 네 명은 아예 돌아오지도 않았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앞서서 용맹스럽게 달려갔던 소대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몇몇 병사들은 임시로 만든 들것에 부상병을 싣고 오고 있었다. 화살이 박혀 있던 흔적이 있는 방패를 든 채 걸어오는 제1중대장을 향해 대대장이 물었다. 잭슨, 어떻게 되었나? 그리고 다렌 소대장은? 예, 함정이 있었습니다. 황무지에다가 말 다리가 걸리기 좋게 로프를 설치해 놨더군요. 다렌은 말이 엎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즉사했습니다. 시체만 가져 왔습니다. 놈들이 시체를 훼손할 까 봐서요. 놈들은 처음부터 엄청나게 준비를 했습니다. 퇴로에다가 로프까지 설치해 두었고, 기병들이 그 함정에 걸려서 주춤한 틈을 이용해 화살을 날렸습니다. 우리들이 기병을 돕기 위해 달려갔을 때에는 놈들은 이미 모두 도망 친 후였습니다. 놈들은 몇 명이나 죽였나? 설마 한 놈도 못 죽인 것은 아니겠지? 제1중대장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원통한 일이지만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멍청한 자식들! 대대장은 욕설을 퍼붓긴 했지만, 곧이어 마음을 돌리고 돌아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했네. 자네에게 한 욕은 아닐세. 그리고 자네의 실수도 아니야.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놈들을 향해 돌격을 명령한 내 잘못이지. 자, 모두들 출발 준비를 하도록 하게. 시체는 마차에 실어서 운반한다. 옛! 제1중대장은 용맹스럽던 동료가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는 커녕, 이 자리를 벗어나는 데 급급해야만 한다는 것에 우울해진 부하들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자, 모두들 출발 준비 해! 그리고 1소대는 척후를 위해 먼저 출발해라. 자 자, 서둘러라. 이렇게 출발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가운데, 앞쪽으로 먼저 출발했던 제1소대의 병사가 외쳤다. 그들은 길을 가기 위해 앞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출발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병사들보다 움직이는 물체를 먼저 발견했던 것이다. 전방에 기병이 접근중입니다. 수는 대략 10기. 전원 전투 준비. 제1중대는 앞서서 대 기병전 준비. 기병대는 1중대 후미에서 대기. 자, 서둘러라! 제1, 2소대 전진 앞으로! 대기병 난입 대비! 구령에 따라 20여 명의 병사들이 앞에 방패를 세우고 창의 끝 부분을 땅에 꽂으며 창날 부분을 앞으로 향한 채 충격에 대비했다. 이렇게 하면 기병이 쉽사리 충돌하며 돌진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제3, 4, 5소대 투창 준비! 구령에 따라 30여 명의 병사들이 창을 들고 던질 준비를 갖췄다. 만약 궁병(弓兵)이 있었다면 그들이 뒤에서 지원 사격을 했겠지만, 여기에는 없었기에 다음 대응책으로 선택한 방법이다. 상대는 급격히 거리를 좁혀 왔다. 번쩍이는 하프 플레이트 아머에 보이는 금빛 나는 드래곤 문장이 보이자 그들은 서서히 긴장했던 근육을 풀었다. 금빛 드래곤의 머리는 하나, 둘, 셋. 뒤에 조그많게 드러나 있는 머리까지 합해서 세 개가 분명했다. 바로 크라레스의 국가 문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에 뜨거운 맛을 봤던 이들은 겨우 국가 문장 따위에 속을 수 없다는 듯 전투 태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드래곤 문장 옆에 붙어 있는 히아신스 꽃이나 기사의 오른쪽 가슴에 붙어 있는 선명한 붉은 해골의 문장도 그들을 안심시킬 수 없었다. 앞에서 다가온 무리들은 긴장하며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보병들의 뒤편에 보이는 말 시체들과 마차에 군데군데 꽂혀 있는 화살을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는 듯 창을 겨눈 보병들 앞에 말을 세우며 말했다. 여기 대대장이 누군가? 본인은 유령 기사단 제4유격전 대장 알프레드 폰 막시무스 자작이다. 유령 기사단? 그런 기사단도 있었나? 하며 쑤군대는 보병들 뒤에 서 있던 대대장이 재빨리 외쳤다. 전투 준비 해제. 모두 정렬해라! 그러면서 그는 앞쪽으로 나서면서 공손하게 말했다. 막시무스 경, 저는 제5경 보병 사단 소속 제 34대대장 리온 헤스니아 입니다. 그런가? 기습은 언제 당했는가? 예, 30분쯤 전에 당했습니다. 적들은 모두 반대쪽으로 퇴각했습니다. 놈들은 치밀하게 준비했기에 기병들과 말들의 피해가 심했습니다. 그리고 갑옷을 입지 않아 아무리 경보병이라도 추격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알겠네, 수고하게나. 자, 가자. 기사들은 재빨리 말을 몰아 대대장이 가리킨 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이 달려가는 것을 보며 앞쪽에 서있던 잭슨 제1중대장이 대대장을 향해 말했다. 유령 기사단이 뭡니까? 저는 처음 들어 보는데요. 부하의 물음에 대대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듯 유령 기사단이라고 당당히 소속을 밝히며 기사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이제 전처럼 기밀 사항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기에 대대장은 자신이 아는 바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나도 전쟁이 시작될 때에야 연대장님께 들었다. 그들은 본국 최강의 기사단이라고 알고 있으면 돼. 만약 다음에 만나면 실례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게나. 자, 녀석들의 복수는 기사들에게 맡기고 모두들 출발하자. 자, 선두 전진! 이렇듯 정작 점령지를 장악해야 할 병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보니 최전방으로 보급해야 할 물자는 도착이 지연되거나 심한 경우 약탈까지 당하고 있었다. 크라레스는 초기에 용기사들을 전부 다 병참로 확보에 투입했지만, 용기사들이 커버해야 할 영역이 너무 넓었기에 겨우 여덟 명밖에 되지 않는 용기사들로서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크라레스가 세 명의 오너가 포함된 그래듀에이트 다섯 명, 기사 네 명, 그리고 마법사 한 명으로 구성된 막강 전력을 보유한 열개의 유격 전대를 전장에 투입하자 전세는 서서히 크라레스 쪽으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에 철십자 기사단 소속의 타이탄이 두번에 걸쳐 게릴라 활동을 지원했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이 전대의 경우 소규모 타이탄 전투를 상정하여 구성되어 대 게릴라전을 펼치기에는 필요 이상의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격 전대의 투입에 때맞춰 4개 사단, 1개 여단이라는 구원병까지 도착하고 보니 이제 전선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던 코린트의 게릴라들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모두가 다 옳은 일은 아니었어 대공 전하, 자리에 누워 계시지 않고 무엇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병자가 자리에 누워 있지 않고 나무에 기대어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죠드가 키에리의 등판을 향해 따지듯 말하자, 키에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답했다. 후, 자네는 아직도 나를 대공 전하라고 부르는가? 본인은 기사의 맹세를 저버린 몸. 이제 더 이상 기사도, 대공(大公)도 아니라네. 그런 말씀 하지 마시옵소서. 자네는 왜 돌아가지 않는가? 나는 이제 더 이상 코린트의 귀족이 아닐세. 나를 자네가 더 이상 돌봐야 할 의무가 없다는 말이야. 그래도 전하, 상처가 찢어질 수 있사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렇게 큰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살아나신 것만도 아레스 신의 도우심이옵니다. 아닐세, 나는 이제 많이 좋아졌어. 더 이상 치료 마법을 필요로 하지는 않을 거야. 자네도 그 사실을 잘 알 텐데 왜 여기에 남아 있나? 돌아가지 않을 텐가? 제임스의 부탁 때문이었다면 이제 돌아가도 된다네. 키에리가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죠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키에리를 혼자 두고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설혹 조국이 지금 전쟁중이라고 해도 .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전하. 왜?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전하이시기 때문이옵니다. 전하께서 안계신 코린트는 생각할 수도 없고, 또 그런 곳에 남아 있고 싶은 생각도 없사옵니다. 죠드의 말에 키에리는 비웃듯 내뱉었다. 미친 녀석이군. 하지만 죠드는 그 말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간곡하게 키에리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상관없사옵니다. 제발 저를 돌려보내지만 말아 주시옵소서. 좋아, 자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내 한 가지 부탁함세. 뭐든지 하명하소서. 나는 더 이상 공작이 아닐세. 그러니 그 말할 놈의 전하 소리는 좀 빼 주게. 그리고 작위에 관계된 그런 존칭은 더 이상 받을 자격이 없으니 말투를 좀 낮춰 주게나. 그렇다면 내가 참고 들어 주지. 예, 그게 좋으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아아 , 석양이 참 아름답구먼. 예전에 수련할 때는 석양을 바라보는 것을 참 좋아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이 그 좋아하던 것을 바라볼 여유도 없이 살아왔군. 예, 전하께서도 이제 좀 쉬실 때가 되었지요. 전하 소리는 빼래두 그러는구먼. 예, 전하. 푸흐흐흐, 어쩔 수 없는 놈이군.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키에리가 말하자, 죠드는 도무지 난처한 듯이 말했다. 입에 익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전하가 아니라면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냥 발렌시아드라고 부르게. 그게 어색하면 님 자라도 붙이든지. 어느덧 해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고 하늘에는 붉은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사위는 어둠에 덮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제 해는 졌으니 들어가시지요. 밤이슬은 상처에 안좋습니다. 키에리는 죠드의 부축을 받으며 작은 오두막집을 향해 가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죠드로서는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키에리는 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죠드가 알고 있는 키에리는 말 수가 적고 엄하며, 불같이 화를 잘 내기는 하지만 관용(寬容)이라는 것이 있었다. 실수를 했을 때 부하에게 엄하게 질책하기도 했지만, 부하의 실수를 감싸 줄 줄 알았다. 그야말로 죠드가 꿈꾸고 있는 최고의 상관이었던 것이다. 그냥 드러누워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서 그러네. 리사, 까뮤, 그라세리안, 그렇게 넷이서 코린트를 위대한 제국으로 만들자고 맹세했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너무 오낼 세월이 흘러 버렸어. 자네는 이렇듯 후회되는 삶은 살지는 말게. 예? 발렌시아드 님의 삶이 어때서 그렇습니까? 발렌시아드 님께서는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복권(復權)되실 것입니다. 쯧쯧, 나는 지금 복권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세. 코린트를 키워 놓은 것은 좋았지만, 충성심이란 미명 아래 너무나도 못된 짓을 많이 했구먼. 아마도 그것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만큼 코린트를 위해 열심히 일하신 분이 누가 있으시겠습니까? 자, 전하, 그만 침대에 좀 누우시죠. 그게 편하실 겁니다. 키에리는 죠드에게 통나무로 얼기설기 짠 후, 그 위에 짚을 세워 만든 매트리스를 깐 침대에 몸을 눕혔다. 오랜 시간 서 있어서 그런지 상처가 쑤셔 오고 약간 현기증도 나는 듯싶었다. 죠드가 자신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 주는 것을 보며 키에리는 약간 힐책하듯 말을 꺼냈다. 또 전하로군. 그게 아닐세, 코린트를 위하는 것이라고 그게 다 옳은 일은 아니지. 권력이라는 것에서 떠나는 순간, 그것을 이해하겠더군. 그리고 그라세리안이 왜 떠났는지도 알겠어. 그는 이제 싫증이 났었던 거야. 코린트와 친구들에게서 말이지. 키에리의 돌연한 말에 죠드는 놀랍다는 듯 물었다. 예? 떠나시다니요? 코타스 전하께옵서는 행방 불명이 되거나 암살 당하셨을 확률이 . 아닐세, 그건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숨어서 마법 실험이나 하고 있던 그 친구를 산 속에서 끌고 나온 건 우리들이었지. 그는 정말 대단한 마법사였지. 그는 우리들과 함께 세상에 나온 후 열성적으로 우리들을 도왔었어. 하지만 적기사를 개발한 후, 더 이상 뛰어난 엑스시온을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회의감을 느꼈겠지. 그 자신이 처음 개발한 카로사, 그리고 미노바, 그 다음 흑기사. 카로사와 미노바는 크라레스 전쟁이 끝난 후에야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지만 흑기사는 달랐지. 개발과 동시에 다섯 대가 만들어져 처음 전쟁에 쓰였을 때 그는 그것이 살육을 위한 무서운 병기라는 것을 깨달았겠지.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흑기사보다 더 뛰어난 타이탄을 만든다는 목표가 있었어. 그 때문에 수십 년을 틀어박혀 있었지. 흑기사의 엑스시온을 개발하는 데 토대가 된 헬 프로네 쿨룩쿨룩! 상처가 쑤시는지 기침을 해 대는 키에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죠드가 말했다. 말씀을 너무 많이 하지 마십시오. 아직 상처가 . 괜찮네, 지금은 뭐라고 지껄이고 싶군. 그래, 아마도 그 녀석은 주인도 아닌 주제에 헬 프로네에 탑승한 유일한 인물이었을 테지. 그가 내 헬 프로네에 탄 것도 운전석 밑에 보이는 헬 프로네의 마법진을 연구하기 위해서였어. 하지만 모방으로는 흑기사 이상의 출력을 낼 수 있는 엑스시온은 개발하기 힘들었지. 그래서 모든 것을 잊고 그렇게 오랜 시간 틀어박혀서 적기사의 엑스시온을 개발한 거야. 수많은 시험용 엑스시온을 만들며 폭발 사고도 많이 일으켰었고, 또 좌절도 겪었겠지. 하지만 그걸 개발하겠다는 일념으로 죽자고 연구를 해 댔으니 그때 친구들인 우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고, 또 부강해진 코린트가 약소국을 잡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적기사의 엑스시온은 완성되었고, 그는 그제야 할 일이 없어져서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되찾은 거야. 그런 후 환멸을 느꼈겠지. 쿨룩 쿨룩쿨룩! 그 얘기의 둣부분은 내일 듣겠사옵니다. 이제 그만 주무십시오. 아닐세, 좀더 얘기하고 싶어. 하지만 죠드는 키에리의 말을 무시하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는 노련한 마법사 답게 재빨리 주문을 완성한 후 시동어를 외첬다. 이렇게 나약하신 분이 아니셨는데 . 그래, 몸이 병이 들어서 그 때문에 마음까지 약해지신 거야. 나중에 건강이 회복되시면 다시 예전의 자신감을 회복하시겠지. 괴씸한 놈들 이봐. 에? 예, 나으리. 겁에 질린 묘인족 특유의 얼굴 모양. 묘인족은 표정이 어떻든 귀의 모양을 보면 그 심리 상태가 아주 잘 드러나는 특이한 종족이다. 평상시에는 뾰족하게 머리 위로 뻗쳐 있다가, 겁을 집어먹거나 하면 귀가 아래로 축 처지는 것이다. 물론 귀와 함께 얼굴 표정에서도 겁을 먹었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말해. 안 그러면 알아? 바로 이렇게 만들어 놓을 거야. 다소곳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묘인족 소녀를 우악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눈이 위치하는 부분에 두 개의 구멍밖에 뚫려 있지 않은 복면을 뒤집어쓴 괴한이 위협용으로 쥐고 있던 몽둥이를 꽉 쥐자 몽둥이의 손잡이 부분이 박살이 나 버렸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손아귀의 힘(握力)이었다. 뭐, 뭘 말입니까? 너는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의 시종인 세린이 맞지? 세린은 겁에 질린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한껏 쾌락에 들뜬 것처럼 묘하게 풀려 있었다. 예. 그녀와 만난 것이 언제야? 지금부터 한 일 년 반쯤 전이었던가? 그때 만났습니다요. 그녀는 지금 어디 있지? 전쟁터로 가신다는 것 외에는 잘 모릅니다요. 이것이? 머리카락을 확 틀어쥔 후 괴한은 얼굴을 세린의 얼굴 바로 위로 들이밀었다. 순간 지독한 민트 향기가 세린의 코를 자극했다. 심문해야할 상대가 사람이 아닌 묘인족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자신의 체향(體香)을 맡지 못하도록 강렬한 향수를 뿌려 놨던 것이다. 복면 안으로 보이는 희번덕거리는 눈에도 불구하고 세린은 묘하게 기분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원래가 고양이들은 민트 향기를 미치도록 좋아한다. 그렇다 보니 무슨 마약이라도 맞은 듯이 기분이 붕 떠 버리던 것이었다. 저는 , 저는 잘 모릅니다요. 좋아, 그녀는 어디서 태어났나? 그리고 아버지는 누구야?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어? 예? 제가 전에 언뜻 듣기로 그분은 고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검술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자기는 여자가 아니라고 길길이 뛰시면서 욕도 엄청 잘 하는, 별로 힘도 없는 분이셨는데 언제부턴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강해지셨죠. 빠른 속도로 강해졌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요. 옛날에 한 번 도망 치셨다가 실바르 경에게 잡혀서 얼마나 맞았는지, 완전히 죽은 듯이 뻗어 있던 모습도 봤는걸요. 그렇지만 지금은 . 가만, 도망 치다니? 예? 처음 그분이 오셨을 때는 제가 감시역이었거든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토지에르 나리께서 절대로 도망 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직접 분부하셨었죠. 그때 그분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데도 모든 옷이 이렇게 부풀어 오른 드레스들이나 굽이 높은 구두가 전부였습니다. 실바르 경이 한번은 짧은 치마와, 굽이 낮은 신발을 사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걸 입고 도망 치셨었죠. 그렇다면 말이 안 되잖아. 왜 지금은 엄청난 힘이 있는데도 도망 치지 않는 거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텐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느 날 갑자기 광폭해져서 크로돈 시를 박살 내고 도망 치셨죠. 그때 타이탄까지 도원되어서 그분을 잡으려고 했었는데 정말 무서웠어요. 평상시의 그분이 아니었어요. 정말 다정하신 분이셨는데 . 그렇게 떠나신 후 한 달 정도 지나서 돌아오셨죠. 하지만 다시 그분을 뵈었을 때는 좀 무서웠어요. 왜? 뭔가 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그런 , 그런 이상한 이질감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주인님이셨기에 저는 용기를 내어 다가갔었죠. 다행히 전처럼 잘 대해 주셨어요. 아무튼 그분은 제가 만난 여러 주인님들 중에도 아주 특별한 성격이셨거든요. 성격이 어때서? 사실대로 자세하게 말해. 예, 강자에게는 강하게, 약자에게는 약하게 뭐, 그런 성격이셨어요. 제가 눈물을 흘리는 걸 아주 싫어하셨죠. 노예인데도 제가 부탁하면 뭐든지 잘 들어 주셨어요. 그래서 어떤 때는 도저히 주인님이라는 생각이 들지가 않았을 정도였죠. 꼭 누이동생 같기도 하고, 어니 같기도 했구요. 하지만 가금 화가 나시면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함께 하지만 그렇게 무섭지는 않으셨어요. 아무리 신경질을 내고 위협을 해도 절대로 때리지는 않으시거든요. 말로만 팔아 버린다, 때려 주겠다, 가죽을 벗기겠다고 위협하셨죠. 하지만 울면서 사정하면 투덜투덜 하면서도 다 들어 주셨어요. 그러자 복면의 남자 옆에 서 있던 몸집이 좀더 가냘퍼 보이는 복면 쓴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몸집만큼 매우 가느다랗게 들렸다. 아주 특이하네. 전형적이 외강 내유(外剛內柔)형의 성격 아냐? 그런 데다가 막강한 실력까지 갖췄으니, 아마도 뭔가 꼬투리만 잡고 있다면 크라레스로서는 부려먹기 딱 좋겠지. 흐음, 대충 들어 보니까 뭔가 크라레스와 거래가 있었어. 그녀가 크라레스에 협력할 수밖에 없는 그런 뭔가가 말이야.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겠는데. 그건 그렇고 이 아이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대충 필요한 것은 다 알아 낸 것 같은데, 죽여 버릴까? 그러면서 복면 쓴 여자는 세린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 보면 말을 이었다. 묘인족은 등 부분에 아주 부드러운 털이 있다구. 묘인족 한 마리 잡아 봐야 얼마 안 나오니까 우주 비싸지. 어때? 최고급 목도리 하나 필요 없어? 끔찍한 말에 세린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남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 죽일 필요까지 있을까? 그 따위 가죽은 필요 없고 노예로 팔아 버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수입이 짭짤할 거야. 제, 제발 . 세린이 겁에 질린 채 사정하는 것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복면 쓴 여자가 이죽거렸다. 호호 , 떨고 있는 것 좀 봐, 제법 불쌍하게 보이지? 이러니까 노예로밖에 쓸 데가 없다니까. 이미 세린의 공포감이 쾌락의 감정을 아예 초월해 버린 상태였다. 다크에게 듣던 팔아 버린다느니, 가죽을 벗긴다는 말과는 차원이 다른 위협에 완전히 겁에 질려 버렸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흥분이 극에 달한 세린의 손톱이 길쭉하게 빠져 나오며, 동시에 몸집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을 그 남자가 먼저 포착했다. 남자는 그것을 알아 채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야말로 바람이 일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퍽! 변신을 완료하기도 전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쓰러져 버린 묘인족 소녀를 살펴보며 복면을 한 여자가 말했다. 어머? 그러고 보니 변신 방지용 목걸이도 없었잖아.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목걸이도 없는 고양이를 애완용으로 기르고 있는 거야? 죽으려고 작정했나? 이봐, 겨우 묘인족 따위가 아무리 설쳐 봤자 한 주먹거리도 안 돼. 그런데 나보다 더 강한 인물이 그 주인이니까 그런 것은 처음부터 걱정도 안 했겠지. 그건 그렇고 진짜 죽일 거야? 호호, 농담이야. 저 아이가 슬쩍 없어진 상태에서 우리가 협상합시다 하고 간다면 스스로 범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밖에 안 돼. 원래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의 애완 동물은 괴롭히는 게 아니지. 기왕에 기절했으니 옮기자고. 어디로? 어디 나무 그늘 같은 곳에 낮잠 자는 것처럼 놔두면 되잖아. 그러면 이 고양이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하기 힘들걸? 또 누구한테 이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노예의 말 따위는 잠꼬대 정도로 생각할 거야. 그건 그렇네. 남자는 세린을 등에 지면서 투덜거렸다. 납치해 온다고 온갖 고생을 했는데, 이제는 표 안 나게 돌려 둔다고 고생을 해야 하는군. 제기랄! 참아, 그 대신 아주 많은 정보를 얻었잖아. 그건 그렇고 다음에는 누굴 납치하지? 그늘에 앉아서 팔시온과 체스를 두고 있던 다크는 아르티어스가 뒤로 뭔가를 감추고 싱글거리면서 다가오는 것을 보며 말했다. 어디 갔다 오시는 거죠? 아까 찾아 보니까 안 보이시던데 .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웃음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헤헤 , 코린티아에 갔다가 왔지. 코린티아요? 코린티아면 코린트의 수도잖아요. 거기는 왜? 의아해 하는 다크를 향해 아르티어스는 뒤에 감추고 있던 것을 앞으로 내놓으며 유쾌하게 말했다. 왜기는 짠! 이걸 봐라. 이걸 산다고 온 코린티아 시의 상점을 다 뒤졌지. 이게 , 뭐예요? 황당하는 표정의 다크를 향해 아르티어스는 당연한 듯 말했다. 뭐기는? 옷이지. 다크는 아르티어스가 내민 옷을 끔찍하다는 듯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아르티어스가 내민 옷은 보통 16세 정도 되는 여자 아이들을 위해 만든 여름용 원피스였다. 아주 밝으면서도 화사한 색상을 지닌 얇은 고급 천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아무리 안이 비치지 않는 옷이라고는 해도 그걸 입으면 어떤 꼴이 될지 대충 상상이 가는지 다크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옷인 것은 알겠는데, 그게 뭐냐구요. 설마 그 따위 통자루 같은 옷을 나보고 입으라는 말은 아니겠죠? 아니기는 왜 아니냐? 이런 무더운 날씨에 시꺼먼 옷을, 그것도 바지를 입고 있으니 얼마나 덥냐? 아르티어스의 목소리는 무척 다정하고 은근했지만 다크는 매섭도록 모질게 대답했다. 하나도 안 더워요.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이 무더운 날씨 탓에 팔시온의 목덜미는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땀방울 하나 솟아 있지 않았다. 설마? 나는 아예 털 코트를 입고 있어도 상관없으니까 제발, 그다위 옷은 가져오지 말아요. 이게 얼마나 시원한 옷인데 그러냐? 내가 그 먼 코린티아까지 가서 가져온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입어 보는 척은 해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냐? 에구구구 , 처음부터 아들 녀석을 잘못 가르쳤어. 어떻게 아비 말을 안 들을 수가 있나? 들어 줄 말이 있고 듣지 못할 말이 있다구요. 그 쓰레기 들고 딴 데로 가세요. 나는 체스 두느라 바쁘다구요. 정 입힐 사람이 없으면 그 드워프한테나 입히시라구요. 이 옷의 크기를 보고 그런 말을 해라. 그 녀석이 입으면 금방 찢어 진다구. 그러지 말고, 응? 이번에는 못 들어 줘요. 아버지 때문에 이놈의 목걸이도 했고, 또 귀고리도 했지만, 이번만큼은 절대로 못 들어 줘요. 체스 두는 거 방해하지 말고 가시라니까요? 정 상대가 없으면 그 드워프 녀석하고 노시라구요. 팔시온은 부자의 대화가 오래 지속되자 한심하다는 듯 그 둘을 쳐다봤다. 한사코 하기 싫다는 다크를 잡고 그걸 시키고 있는 아르티어스나, 나중에는 하게 될 것이 뻔한데도 죽자고 뻗대고 있는 다크. 하지만 대충 결말은 팔시온이 생각한 대로 익히 정해져 있었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나이를 헛먹지는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듯, 다크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든다면 도저히 성공할 가능성이 업었지만, 죽자고 매달리면서 부탁하면 웬만한 것은 다 들어 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한 시간 가량을 죽자고 따라다니며, 애걸하고, 협박하고, 사정한 후에야 다크는 그 옷으로 바꿔 입었다. 물론 협박이라는 것도 자신의 무력을 과시한 것이 아니라, 다크의 검은 옷에 붙어 있는 그 웃기게 그려 놓은 금색 드래곤 문양을 꼬집어 대며 협박하고 사정했기에 지은 죄가 있는 다크로서는 반격을 펼치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제기랄! 새침한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는 아들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감탄했다는 표정을 말했다. 왜 그러냐? 이렇게 잘 어울리는 옷은 처음 본다. 그렇지? 아르티어스는 팔시온이 자신의 말에 동조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듯 다크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팔시온을 향해 인상을 구겨 댔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협박이 아니라도 팔시온은 진심으로 그녀의 모습에 감탕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잘 어울려요. 그렇지? 그렇지? 모두들 그렇다고 하는데 놰 너만 그렇게 이 아비 말에 반발하는 거냐? 다크는 울분을 삼키며 팔시온을 향해 말했다. 으휴휴휴 . 팔시온, 체스나 두자. 너 둘 차례야. 팔시온의 말에 다크는 체스 판을 열심히 살펴봤다. 역시 변화는 있었다. 상대의 승정(Bishop)이 저 먼 쪽에서 말(馬 : Knight)의 비호 아래 슬며시 자신의 성장(盛裝 : Castle)을 노리고 있었다. 제기랄! 다크는 턱을 괴고 앉아, 이리저리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가 이윽고 성장을 다섯 칸 앞으로 움직여 비호하고 있던 상대방 말을 포획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팔시온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즉시 또 다른 말(Knight)을 집어드는 찰나, 병사 하나가 달려오며 외쳤다. 공작 전하, 크로아 전하께서 찾으시옵니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사옵니다. 크로아 전하께옵서는 지금 저쪽 통신실에 계시옵니다. 팔시온이 말을 들고 뭘 하려는 것인지 알아챈 다크는, 전세가 팔시온 쪽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1실버짜리 내기 체스에서 발을 빼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그래? 에헤헤. 팔시온, 나머지는 다음에 하자구. 상대의 속셈이 빤히 보인다는 듯, 팔시온은 우람한 근육질을 흔들며 비웃듯 말했다. 후!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나중에 기억해 놨다가 계속할 테니까. 좋을 대로 해. 팔시온의 기억력이 그렇게 좋을 리가 없지. 으헤헤헤 . 다크가 이죽거리는 것을 보며 여태껏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말했다. 내가 대신 둬도 되냐? 좋을 대로 하세요. 다크는 크로아 공작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며 아무렇게나 말했지만, 팔시온의 반응은 달랐다. 팔시온은 황급히 체스 판을 거두면서 말했다. 아뇨, 저도 바빠서 그만 . 팔시온이 그렇듯 내빼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 현재 크로아 공작이 거느리고 있는 주력 부대는 적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보급 사정이 어려워서 매우 천천히 진격중이었다. 그 때문에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기사들끼리 자주 체스를 뒀는데, 거기서 불패의 전적을 자랑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 아르티어스였기 때문이다. 파견 나와 있는 몇 명의 마법사들마저도 모두 아르티어스에게 처참하게 박살이 났을 정도니까, 마법사들보다 두뇌 회전이 떨어지는 기사들은 보나마나였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뒤로하고 팔시온은 체스 판을 챙겨 들고는 다크를 대신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황급히 떠났다. 질 게 뻔한 상대하고 체스를 둘 멍청이가 있을까? 통신실에 들어서느 다크를 향해 뭔가 말을 건네려던 크로아 공작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잊어 버리고 말았다. 원래 미모가 대단한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던 것이다. 뭘 그렇게 빤히 보고만 있어? 나를 부른 용건을 말해야 할 거 아냐. 아 , 그게 말이지. 구원병이 도착한다고 하는군. 그래? 크루마에서 제법 선심을 쓴 모양이군. 그래 얼마나 보내 준다고 하던가? 크루마에서 5천 명. 뭐? 5천 명? 농담하냐? 진담이야. 크루마 군 1개 여단이 크로돈에 도착했는데 어떻게 하면 될지 물어 왔거든. 아, 그렇다면 부대를 나눠서 보내 온 모양이군. 그렇다면 2진은 언제 도착한다는 거야? 2진은 없어. 5천 명이 다야. 와리스 백작의 말로는 상태가 호전된 후에나 보내 준다고 했다더군. 언제쯤 상태가 호전되는데? 크루마에서는 벌써 전쟁이 끝난 거 아니었나? 보내 주지 않겠다는 말을 조금 우회적으로 한 것뿐이지. 5천 명의 병력만으로 끝낼 생각인 거야. 5천 명 가지고 충분해? 아니, 적어도 새로운 병력이 투입될 때까지 최소한 그 열 배는 있어야 해. 대신 미란에서 4만 명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는군. 오늘 제1진으로 4천 명이 도착했대. 앞으로 9일 동안 계속 4천 명씩 도착할 거라고 하더군. 미란이라면 이번에 내가 싸운 그 전쟁터 말이야? 크로아 공작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보며 다크는 화가 난 듯 말했다. 아무리 사람을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악독하게 나올 줄은 몰랐어. 여기서는 동맹이라는 것이 그렇게 하찮은 거야? 하기야 내가 열을 낸다고 될 일은 아니지. 자네가 사령관이니까 알아서해. 나 혼자서 독단으로 처리해도 돼? 물론이지. 자네가 사령관이고 나는 부 사령관이니까. 나는 다시 체스나 두러 가 볼까? 팔시온은 너무 강하니까 미디아하고 붙는 게 좋겠군. 중얼거리면서 나가려는 다크를 크로아 공작이 재빨리 제지했다. 잠깐! 뭔데? 결정을 내렸어. 지금 여기는 별로 일이 없으니까 자네가 크로돈으로 가. 거기서 토지에르하고 상의를 한 후에 결정하라구. 미란에서 병력을 대규모로 파병했기에 급한 불은 껐지만, 그래도 그따위 짓거리를 한 크루마를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왜 내가 가야 해? 시큰둥하게 묻는 다크를 향해, 크로아 공작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사령관이고 자네는 부 사령관이니까. 원래 사령관은 전장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거든. 대신 전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지면 이쪽으로 날아오면 되겠지. 별 귀찮은 일을 다 시키는군. 자네가 좀 해 줘. 요즘 할 일이 없어서 매일 체스나 두든지 아니면 자네 아버지하고 놀러 다니고 있잖아? 좋아, 기분 전환 겸 갔다 오기로 하지. 대답이 시원해서 좋구먼. 고마워, 대신 나중에 진짜 근사한 선물을 꼭 할게. 기대하겠어. 아르티어스는 통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나오는 다크에게 달라붙어서 추근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왜 여기 계신 거예요? 네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헤헤, 어디 여행이라도 가는 거냐? 아뇨. 그런데 저하고 꽤 오래도록 함께 계셨는데, 뭐 딴 볼일은 없으세요? 다크의 모진 말에 아르티어스는 한껏 슬픈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탄 조로 말했다. 이제는 내가 싫어진 거야? 그래, 이 아비가 따라 다니는 것이 그렇게 귀찮아? 이번에도 슬쩍 가슴이 뜨끔해진 다크는 끝내 모질게 굴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건 아니구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헤헤, 그렇다면 된 거지 뭐. 나의 기나긴 삶에 비한다면 지금은 너무 짧은 순간일 뿐이야. 사랑하는 아들에게 시간을 조금 투자하는 것이 뭐가 아깝겠냐? 그리고 여기 음식은 드워프나 먹지 나는 도저히 못먹겠다. 에구구구 , 돌아 버리겠군. 잠시 작은 소리를 내뱉은 후 다크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말했다. 크로돈 시로 갈 거예요. 왜? 무슨 일인데? 황제 녀석이 불러? 내가 알아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해결사 노릇은 신물이 난다구요. 해결사? 또 무슨 일이 터졌구나. 글쎄요. 그걸 알아 보러 가는 길이잖아요. 기다릴 테니 가서 드워프를 데려오세요. 드워프는 왜? 여태까지 데리고 다니셨잖아요. 흐흐흐, 이번에는 데리고 가지 않을 거야. 또 여기 놔둔다고 해도 도망 칠 녀석도 아니고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손아귀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힘껏 잡으면서 살기 넘친 어조로 말했다. 제깟 놈이 튀어 봐야 벼룩이지. 감히 내 손아귀에서 도망 칠 정도로 간 큰 놈은 여태껏 없었어. 또 세상 끝까지 도망 쳐 봐야 그런 녀석 잡아오는 것은 일도 아니지. 그건 그렇고, 그 녀석에게 시켜 놓 아니, 부탁해 놓은 일이 있어서 말이야. 설마, 또 엉뚱한 걸 만들라고 협박한 것은 아니겠죠? 물론 어음, 아니지. 자기가 좋아서 만들고 있는 것을 내가 어쩌겠냐. 나는 그 녀석이 뭘 만들지에 대해서 힌트를 준 것밖에 없다구. 원래 드워프란 놈들은 심심하니까 계속 뭔가 만들려고 하지. 거기에 적당한 자극만 주면 아주 열심히 좋은 걸 만들어 낸다구. 아르티어스는 수긍을 하려다가 아차, 하고는 재빨리 변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변명이라는 것이 빤히 보이는 것이었기에 다크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적당한 자극이오? 전에 내가 봤다구요. 그게 적당한 자극이면, 이 세상에 고문이란 말은 벌써 없어졌을 거예요.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펄쩍 뛰며 그런 악질적인 중상 모략을 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했다. 무슨 끔찍한 말을 하는 거냐? 어떻게 아들 녀석이 아버지를 그렇게 못 믿는 거냐? 이 세상의 도덕과 . 다시 아르티어스가 주절거리기 시작하자 다크는 고개를 흔들며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그만 해요. 그래요, 나는 도덕 따위를 모를 뿐만 아니라 배운 적도 없으니까 강요할 생각은 하지 마시라구요. 그건 그렇고 데려갈 사람도 이제 없으니까, 크로돈으로나 빨리 가요. 토지에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지 뭐. 별로 어려운 것은 나니니까. 크로돈이라고 했지? 자! 공간 이동(空間移動!) 아르티어스는 주문 따위를 외울 필요도 없이 엄청난 양의 마나를 끌어 모아 곧장 마법을 시전했다.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크로돈까지 이동하는 데는 주문을 외우는 수고를 할 필요 없이 용언 마법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희뿌연 빛이 번쩍하고 사라진 순간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 토지에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평상시 꼭 남자 같은 옷에다가 장신구라고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아쿠아 룰러만 끼고 있었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나니 옷이 날개라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 어서 오시옵소서, 공작 전하. 감탄했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토지에르를 향해 곱지 못한 시선을 보내며 다크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 자네는 별로 안녕하지 못한 것 같군. 그건 그렇고 어떻게 처리해 주면 되지? 토지에르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다크의 전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허리에 검을 차고는 있었지만, 아름다운 원피스에 작고 깜찍한 귀고리, 그리고 가느다란 목에 잘 어울리는 목걸이, 거기에다가 왼손에는 가느다랗고 예쁜 쇠사슬형의 팔찌까지 달고 있었다. 그 모든 장신구들은 오직 그녀만을 위해 화이어헤머가 꽁지 빠지게 만든 세공품이었으므로 최고라는 찬사가 결코 어색하지 않았다. 저 저, 그러니까 일단 협상을 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이봐, 나를 보고 얘기해.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거야? 정, 정말 잘 어울리시는군요. 죽고 싶냐? 싸늘한 살기를 피워 올리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는 찔끔해진 토지에르가 황급히 답했다. 아뇨. 그럼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요점만 말해. 일단 크루마가 우리를 일부러 도와 주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뭔가 항의를 하든지 아니면 실력 행사를 해야만 하옵니다. 안 그러면 전쟁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어 있지요. 한 달만 잘 버티면 되옵니다. 그때는 새로운 병력을 투입할 준비가 완료되니까 말이옵니다. 그래, 얼마 정도의 병력을 빌려 오면 되는 거지? 많을수록 좋지요. 게릴라들 덕분에 후방 보급로는 완전히 붕괴 직전이고, 놈들을 잡는다고 엄청나게 많은 병력이 투입되어 있지만 그들만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하옵니다. 최소한 잘 훈련된 5개 사단은 더 있어야 하옵니다. 5개 사단이라 . 그럼 크루마에 가서 누구를 만나서 따지면 되지? 미네르바를 만나면 되나? 미네르바 전하를 만나는 것은 힘들 것이옵니다. 아마도 외교 담당관 가레신 후작을 만나시게 될 테지요. 가레신 후작이라, 알았어. 빨리 좌표나 말해. 빨리 일 끝내고 돌아가서 체스나 둬야 하니까. 다크는 토지에르를 통해 크루마 황성의 좌표와 이번 회담에서 주의해야 할 점을 몇 가지 들은 후 즉시 공간 이동을 했다. 헤즐링은 아닐 거야 흡! 자다가 갑자기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 입이 틀어 막힌 사내가 침대에 놔둔 검을 잡기 위해 버둥거리자 복면을 쓴 사내는 흉악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이봐, 조용히 해. 안 그러면 죽을 줄 알아. 상대는 목에서 섬뜩하게 느껴지는 차가운 이물질을 느끼고 버둥거리던 것을 멈췄다. 사실 아무리 버둥거려 봐야 상대의 힘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진작 느끼고 있었다. 몸집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도 이렇듯 엄청난 힘을 내는 것을 보면 보통 실력자는 아닌 듯이 보였다. 좋아, 그래야지. 자,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에 성실하게 답변하는 것이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알지? 너 하나만 죽는 것이 아니야. 옆에 자고 있는 계집부터 시작해서, 위층에 잠들어 있는 네 아들, 딸들도 목과 몸통이 분리될걸? 시험해 보고 싶어? 덩치가 우직한 사내는 재빨리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좋아, 그래야지. 네가 황실 경비대 대대장 맞지? 상대가 고개를 까닥거리는 것을 보며 복면의 사내는 흐뭇하게 미소 짓고는 뒤에 서 있는 복면 쓴 여자에게 말했다. 봐, 제대로 찾아왔다구. 그런 다음 그 대대장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해다. 자, 이제부터 질문을 하겠어. 다크 폰 로니에르라는 공작을 알고 있지? 멈칫거리며 상대가 답변을 하지 않자 복면을 쓴 사내는 손바닥으로 상대의 배를 가격했다. 상처가 나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살짝 쳤을 뿐이지만 정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퍽! 우으윽! 손바닥으로 입이 막혀 있었기에 대대장의 신음 소리는 별로 크게 들리지 않았다. 치레아 지구 총독 각하를 경비대 대대장이 모른다면 곤란하지. 알고 있지? 그제야 사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자네는 이제부터 다크 로니에르 공작이 아닌, 다크 크라이드라는 이름만 나오면 왜 사람들이 친절해지는지 그 이유를 말해 줘야겠어. 그, 그건 . 상대가 다시 대답을 망설이자 그 복면의 사내는 옆에 잠들어 있는 여인의 이불을 슬쩍 걷어 올렸다. 그에 따라 털북숭이 다리 옆에 곧게 뻗은 새하얀 다리가 드러났고, 조금 더 올리자 통통한 허벅지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이 여자는 아주 깊게 잠들어 있지. 무슨 일을 당해도 모를 거야. 대대장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당연히 마법을 썼지. 이 집안에서 마법으로 잠재워 놓지 않은 사람은 너뿐이야. 자네가 보는 앞에서 이년을 천천히 즐기며 죽여 줄까? 으으으 . 빨리 선택해! 좋다. 마, 말하겠다. 복면을 쓴 사내가 기대 어린 눈빛을 던지고 있는 가운데 대대장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다크 크라이드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무시무시한 마법사가 등작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아버지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고작해야 스물 대여섯도 안 되어 보였지. 그런 주제에 자기 아들을 찾아왔다고 난동을 부렸고, 수십 명의 경비원들을 끔찍한 방법으로 죽였다. 호호, 난리가 났었겠군. 그런데 그것이 그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그렇다면 그녀가 그 아이의 어머니라도 된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러니까 황당한 사건이었지. 그자가 찾고 있는 아들이 다크 크라이드라는 여자였으니까 말이야. 이봐,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여자가 어떻게 아들이 된다는 거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소란이 벌어졌으니 대기하던 그래듀에이트들이 출동했다. 하지만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나가셔서 그 마법사에게 사과하고 일을 마무리 지었지. 그 다음부터 다크 크라이드라는 이름을 찾아오는 인물에게는 최대한 성의껏 대하라는 칙명이 내려왔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하지만 좀 이상하잖아? 황궁이라면 당연히 우수한 근위 기사들이 있었을 텐데? 그리고 카프록시아를 보유하고 있는 크라레스의 근위 기사단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나잖아?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타이탄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야. 사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대대장은 말을 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때 궁전 내 제1급 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유령 기사단에 대한 타이탄 사용 허가와 함께 스바시에와 치레아에까지 나가 있던 모든 기사들에 대한 소환 명령이 떨어졌었다. 하지만 스바시에로 피신하실 예정이셨던 폐하께서 나타나시면서 일이 간단하게 마무리 지어졌지. 유령 기사단? 크루마 전쟁에 투입되었던 그 시커먼 타이탄을 보유한 기사단 말이냐? 잘 알고 있군. 바로 그 기사단이다. 퍽! 아니 왜 그러는 거야? 더 물어 볼 것이 많았는데? 더 이상 물어 보면 곤란해. 잠깐만 기다려. 복면을 쓴 여자는 이제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남자의 머리 위에 손을 놓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곧 희뿌연 빛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랩스 오브 메모리(lapse of memory : 잘못된 기억)! 주문을 끝마친 여자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물어 볼 필요 없어. 그리고 기억을 헝클어 놨으니까 별 문제는 없을 거야. 대충 감은 잡았으니 빨리 여기를 떠나자. 그들은 은밀하게 그 집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집에서 나오자마자 복면을 벗어 호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복면 속에 얼굴은 까미유와 마도사인 지레느였다. 정령 냄새를 풍기는 다크라는 아가씨를 찾기 위해서는 마법사보다 정령술을 알고 있는 지레느 쪽이 훨씬 더 적합할 것 같아서 데려온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복면까지 감춰 버린 상태였기에 천천히 걸어가며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뭘 알아 냈다는 거야? 물론 알아 낼 것은 다 알아 냈지. 그 소녀를 찾아온 남자, 엄청나게 강한 마법사라고 했지? 지레느의 물음에 까미유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대답했다. 그랬지. 네가 생각했을 때 여러 명의 기사들과 함께 싸울 수 있는 마법사가 있을까? 그것도 기사들이 상대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정면 대결에서 마법사가 기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무리 6사이클 급에 이르는 숙련된 고위 마법사라도 그래듀에이트를 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근위 기사단에 속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그래듀에이트라면 절대로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까미유는 이윽고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며 궁색하게 말했다. 그, 글쎄 . 코타스 전하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지레느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코타스 공작 정도라면 이길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거기에 대해서 반론을 펴는 대신 딴 부분을 물고 늘어졌다. 그렇다면 타이탄은? 지금 가지고 있는 군사력으로 봤을 때 크라레스가 여기저기 파견된 타이탄까지 불러들였다면 아마 100대가 넘을 텐데, 그 100대나 되는 타이탄과 혼자 싸울 수 있는 마법사가 있어? 그러고도 안심이 안 돼 황제가 직접 나가서 사죄해야 할 상대는? 물론 없었다.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평상시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지만 일단 화가 나면 국가 하나쯤 잿더미로 만드는 것은 간단하게 생각하는 악마 같은 존재. 힘과 공포의 상징. 그것이라면 타이탄 100대쯤은 간단하게 해치울 수도 있을 것이다. 설마, 그래곤? 그 설마가 맞을 거야. 그것도 웬만한 국가쯤은 겁내지 않는 강력한 녀석이겠지.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그 소녀에 대한 궁금증도 풀리게 되지. 헤즐링(어린 드래곤)? 헤즐링은 아닐 거야. 전에 드래곤 사냥하는 것 못 봤어? 헤즐링은 결코 그녀 정도의 힘을 낼 수 없어. 아마도 헤즐링은 벗어난 드래곤일테지. 그것도 검술 익히는 것을 좋아하는 변종 드래곤. 호호, 그래서 아들이 되었다 딸이 되었다가 하는 거로군. 그렇지. 드래곤은 양성체(兩性體)니까 말이야. 또 그녀가 드래곤이 라면, 그것도 천 년 넘게 살아온 드래곤이라면, 그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의문도 풀리지. 연구 결과에 따르면 보통 드래곤은 3천 살을 전후해서 새끼를 낳는다고 하니까 아마도 그 드래곤은 4천 살은 넘었겠지? 그 정도의 드래곤이라면 코린티아 시에 나타나서 대학살극을 벌여도 막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놀라운 사실이군. 빨리 쟈크렌 요새로 돌아가자. 공작 전하께 이 놀라운 사실을 보고해야지.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다크는 방문이 열리며 약간 마른 듯한 사내가 들어서는 것을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키가 180센티는 조금 넘는 것처럼 보였는데, 금갈색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기른 상당한 멋쟁이였다. 그는 노련한 눈으로 크라레스에서 새로이 파견된 사신을 슬쩍 바라봤다. 그는 아무래도 점잖게 앉아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대사이고, 예쁘게 차려입은 금발의 미소녀는 시녀쯤 된다고 생각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가레신 후작은 이곳 별궁(別宮)에 마련된 화려하면서도 거대한 응접실에서 이들을 일부러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한 후 나타났다. 당연히 구원을 청하기 위해 온 인물들은 심리적으로 초조한 법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들을 좀더 초조하게 만든 다음 만날 작정이었다. 그래서 한껏 시간을 끈 다음 응접실에 들어와 보내 새로운 인물들이 사신으로 도착해 있었다. 뚱보가 올 줄 알았는데 새로운 인물이 도착한 것을 보면 아마 그 뚱뚱보는 크라레스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목이 날아간 것이라 생각했다. 가레신 후작은 불쌍한 뚱보를 생각하며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지만, 간신히 표정을 근엄하게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런 다음 장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일단 상대의 기를 죽이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반갑소. 머나먼 크라레스에서 이곳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본인은 가레신 후작이라고 하오. 와리스 백작이 올 줄 알았는데 그대들은 누구신가요? 네놈이 가레신 후작이냐? 도저히 사신들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천박한 말을 내뱉은 소녀를 가레신 후작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도대체 그 얼굴에서 나온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투박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크흐흐흐흐 , 안 그래도 네놈을 찾았었는데 . 소녀가 앞으로 손을 쭉 뻗자 넓은 커다란 탁자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가레신 후작의 몸뚱이가 자석에 끌리듯 끌려 나왔다. 가레신 후작은 있는 힘을 다 해서 자신의 몸이 움직이는 것을 저지하려 했지만 소녀에게 끌겨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손아귀에 멱살이 잡힌 가레신 후작을 바라보며 소녀가 싸늘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잘 되었군. 갑자기 후작의 몸이 날아가서 소녀의 손아귀에 멱살이 잡히는 희한한 구경을 한 가레신 후작 뒤편에 서 있던 두 명의 경비병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곧 가레신 후작에 의해 저지 되었다. 가레신 후작은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이 희한한 경험을 통해 미네르바가 말했던 그녀 가 떠올랐던 것이다. 멈춰라. 그런 후 가레신 후작은 앞의 소녀를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로니에르 공작 전하십니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레신 후작은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상대는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를 패배 시킨 이 시대 최강의 검객이었기 때문이다. 저, 로니에르 공작 전하. 이번에 파병한 본국의 병력 때문에 약간의 오해가 생긴 모양이온데, 귀국의 어려움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본국의 어려움도 생각해 주십시오. 헤헤, 저희들은 국경의 긴장 상태만 풀리면 최소한 10개 사단쯤 파병해 드릴 겁니다. 아직도 코린트의 주력 부대가 회군하지 않고 쟈크렌 요새에서 호시탐탐 이쪽을 노리고있는 관계로, 국경에서 병력을 뺄 수가 없습니다. 제발 저희들 사정을 이해해 주십시오. 하지만 상대의 눈은 이해하겠다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싸늘하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본국의 주력 기사단은 쟈크렌 요새 전방에 배치중입니다. 물론 레디아 근위 기사단은 수도로 복귀했지만, 나머지 두 개의 기사단은 전방을 지키고 있습니다요. 그리고 최전선에는 20개 보병 사단과 7개 용병 사단, 10개 기병 연대가 깔려 있습니다. 코린트의 주력 부대를 경계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귀국에서 요청하신 대로 10개 보병 사단을 빼낸다면 전선에 큰 구멍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쪽도 새롭게 입수한 쟉센 평원을 장악하고, 또 확실한 본국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병력이 꼭 필요합니다. 쟉센 평원은 이번에 전공을 세운 많은 귀족들에게 새로운 영지로 하사되었고, 또 새로운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를 장악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시간을 좀 주십시오. 자신이 내뿜는 살기에 질려 주절주절 떠들어 대고 있는 가레신 후작을 노려보고 있던 다크는 슬쩍 힘을 주면서 털어 버렸다. 분명 살짝 힘을 쓴 것처럼 보였지만 가레신 후작의 몸이 붕 날아가서는 한쪽 벽에 철퍼덕 처박힌 후 완전히 뻗어 버렸다.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경비병을 향해 다크는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저 녀석은 회담을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한 것 같아. 봐, 벌써 뻗어 버렸잖아. 너 빨리 가서 의사를 불러오고, 그리고 나하고 회담할 좀더 튼튼한 녀석을 불러와. 지적을 당한 경비병은 그녀가 여태껏 뿜어 내고 있던 살기에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기회는 이때라는 듯 재빨리 밖으로 튀어 버렸다. 다크는 이제 혼자 남아서 한껏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경비병을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봐, 크루마의 예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목이 좀 마르니까 음료수, 아니 수을 가져와. 아버지는 뭐 드실래요? 나? 차 한 잔하고 뭐 맛있는 음식 좀 가져오라고 해. 이 몸뚱이를 유지하려면 열심히 밥을 먹어 둬야 하거든. 들었지? 음식하고 술, 차 한 잔이야. 술은 독한 것일수록 좋아. 알았어? 예. 그 경비병도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첫 번째 경비병이 사라진 후 조금 지나서 다크가 앉아 있는 방 주위로 근위 기사들이 깔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궁전 내에서 싸우는 것이었기에 중무장을 갖추고 있었고, 만약을 대비해서 정원에도 세 명의 기사가 타이탄을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시녀들이 들어와서 음식과 술, 차를 차려 두고 재빨리 사라졌다. 다크는 술잔 가득 술을 가득 부어 향을 음미하면서 마신 다음 아르티어스를 바라봤다. 아르티어스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며 우선 차부터 한 모금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보며 다크는 농담이라도 하듯 생글거리며 말했다. 독약이 들어 있을 거예요. 푸악! 쿨룩 콜록! 뭐라고? 아르티어스는 기껏 한 모금 마셨던 차를 브래스 토하듯 뿜어 낸 후 기침을 해 댔다. 다크느 그걸 보고 방글거리며 말했다. 독약이오. 한 방울이면 큼직한 말(馬)도 죽일 수 있는 독약이 아주 많죠. 아마 그걸 넣었을걸요? 아르트어스는 음식들을 향해 재빨리 용언으로 해독 마법을 펼쳤다.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그 따위 표정으로 할 수가 있는 거냐? 에엣 제기랄! 밥맛 떨어지게 하는군. 해독!(解毒!) 다시 차를 마시기 시작하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다크가 말했다. 그걸로 해독이 끝난 거예요? 물론, 용언의 힘은 위대한 것이란다. 그러고도 해독 안 되면 어쩌려구요. 그러고도 안 되면 본체로 돌아가면 돼. 그따위 독쯤이야, 나한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지. 그런 다음 나한테 독을 먹인 놈들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릴 거야. 쯧쯧, 그런 결과가 안 생기기를 빌어야겠군요. 그런데 인간 세상에 간섭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안 그랬어요? 물론 그랬지. 하지만 그것은 나한테 피해를 안 줬을 때 얘기지. 호비트 따위가 감히 나한테 . 인간들은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불렀지만, 인간 외의 것들, 그러니까 엘프나 드워프, 오크, 오거, 트롤 따위는 인간을 호비트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그들을 몬스터라고 싸잡아 낮춰서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다크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들은 다음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호비트잖아요.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아아, 호비트와 아들은 분명히 다른 거지. 암, 다르고말고. 호비트는 호비느고 아들은 아들이야. 그건 그렇고 이거 참 맛있구나, 쩝쩝. 아르티어스가 음식을 한참 맛있게 먹고 있을 때 미네르바가 달려 들어왓다. 그녀는 쟉센 평원에 설치된 사령부에 있다가, 이 불청객에 대한 보고를 받고 즉시 달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미네르바를 따라서 매우 날카로운 눈매를 한 기사 세 명이 함께 들어와 그녀의 뒤에 섰다. 미네르바는 방 안을 쓱 둘러본 다음 말했다. 반갑군. 미네르바는 의자에 앉으면서 한쪽 구석에 처박혀서 뻗어 있는 가레신 후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옮겨서 치료해 줘라. 옛! 한 기사가 가레신 후작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보지도 않고, 미네르바는 시선을 다크에게로 고정 시키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인사치고는 상당히 거칠군. 그래 무슨 일로 왔지? 하지만 다크는 답변은 하지도 않고 술을 쭉 들이킨 후 말했다.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묻지. 그쪽에서 벌이진 전쟁에는 이쪽에서 열성을 다해서 도와 줬는데, 이쪽 전쟁에는 그쪽에서 영 성의 없게 도와 주는 것에 화가 났을 뿐이야. 다급하게 구원병을 청하는데 고작 오천 명이라니. 너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상대의 말에 미네르바는 노련하게 대답했다. 글쎄, 우리는 5천 명이라도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쪽의 기사단은 엄청나게 강하잖아. 그런데 뭐 때문에 원군을 청하는 것이지? 그리고 이쪽에 여유가 있다면 도와 주겠지만, 이쪽도 급하다구. 호호, 그려셔? 다크는 미네르바를 오래도록 노려보다가 말을 이었다. 진짜 급한 게 뭔지 가르쳐 줄까? 좋을 대로. 후회하지는 마. 미네르바는 상대의 위협 따위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절대로 후회 안 해.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다크의 검이 날았다. 도대체 언제 뽑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발검이었고, 일단 금빛 검광이 휙 지나간 후에야 미네르바는 급히 검을 뽑아들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검을 뽑기는 했지만 일단 자신에게 피해가 없었기에, 미네르바는 상대가 위협용으로 첫 번째 공격을 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뒤에서 철버덩하는 쇳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 있는 호위 기사들이 그녀를 돕기 위해 검을 뽑는 소리가 아니었다. 어, 어느새?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쓰러지는 소리라는 것을 파악한 미네르바가 경악하는 사이, 다크는 그녀를 향해 이죽거렸다. 그 다음은 네 목이야. 그리고 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기사 녀석들을 다 죽일 거야. 그 다음 이 황궁을 박살 내는 것이지. 이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위급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오늘, 정말 위급하다는 것이 뭔지를 보여 주겠어. 그 말의 끝 소리와 함께 다크의 검이 움직였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며 엄청난 불꽃이 번쩍였다. 미네르바는 검끼리 부딪치는 충격에 뒤로 밀려나면서도 간신히 막아 내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충격 때문에 이미 반쯤 감각을 잃은 상태였다. 상대는 겨우 한 손으로 휘둘렀을 뿐인데 그 충격은 양손 검의 충격 이상이었던 것이다. 저법이군. 내 공격을 막아 내다니. 그 검 꽤 좋은 것인 모양이지? 두 여자가 검을 뽑아 들고 싸우는데도 아르티어스는 열심히 음식을 먹으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 둘의 격돌은 엄청났다. 안에서 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오자 응접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정원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타이탄을 불러 내고 있었고, 아직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인물들고 별궁 내에서 타이탄을 꺼내고 있었다. 별궁이라고는 하지만 크루마의 재력을 과시하듯 엄청나게 크게 지어져 있었기에 그 안에서 타이탄을 끄집어 내도 머리가 부딪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상시처럼 과시용으로 꺼내 놓는 것과는 달리 이 안에서 전투를 벌인다면 이 별궁도 완전히 박살이 날 것이 분명했다. 금빛 검광이 대기를 가를 때마다 미네르바를 도우려고 달려들었던 기사들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이때 벽을 뚫고 타이탄 한 대가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워낙 좁은 장소에서 아군들과 뒤섞여 있는 상태라서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세 명의 기사를 간단하게 해치우고 자신을 향해 달려 들어오는 다크를 향해 외쳤다. 잠깐! 구원군을 주겠어. 다크는 또 다른 기사를 베려고 하다가 순간적으로 멈춘 후 뒤로 빠졌다. 기사들도 분노의 눈빛을 뿜어 내고는 있었지만 잠깐 이라는 말 때문에 미네르바의 뒤편으로 슬슬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줄 수 있어? 미네르바는 잠시 숨을 가다듬은 후 물었다. 얼마나 필요해? 5개 사단. 아마 그 정도면 아쉬운 대로 될 거라고 토지에르가 말하더군. 겨우 5개 사단을 빌려 달라고 여기서 목숨을 건 모험을 한 거야? 호호, 이제야 겨우라는 말을 나오는군. 사람이 5만 명인데 말이야. 그리고 넌 틀렸어. 나는 절대로 목숨을 걸지는 않아. 미네르바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여기를 빨리 치워라. 그리고 부상자들을 빨리 신관에게로 보내. 그제야 기사들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신속하게 움직여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피투성이의 동료들을 업고 신관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자 그녀는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들 물러가라. 부하들이 주춤주춤 자리를 피하고 나자 미네르바는 자신이 앉았던 피 묻은 의자를 치워 버린 후 옆에 있던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일단 내 부하들을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해. 내일부터 시작해서 하루에 만 명씩, 5일에 걸쳐 보내 주지.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이쪽도 여유가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어야지. 아이, 아버지. 내 술 마시지 말아요. 독약이 들어 있다니까요? 모처럼 멋진 식사를 긑낸 아르티어스는 이제 찻잔에다가 다크가 마시던 술을 한 잔 가득 부은 후 마시다가 뿜어 내고는 투덜거렸다. 푸웁! 또 독약이냐? 그런데 너는 왜 멀쩡한 거야? 아르티어스가 뿜어 낸 술은 묘하게도 미네르바의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것을 바라보며 다크는 미네르바가 조금 더 옆쪽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야 이 따위 독으로 어떻게 될 정도는 아니죠. 하지만 아버지는 다르잖아요. 제기랄, 그래 잘난 아들 둬서 오늘 하루 두 번이나 독약을 먹을뻔 하는군. 아르티어스는 투덜거리면서 이번에는 미네르바의 눈을 의식한 때문인지 용언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재빨리 주문을 외운 후 시동어를 외쳤다. 카운터액팅 포이즌(Counteracting Poison)! 마법의 대상이었던 찻잔과 술병에서 희뿌연 푸른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일단 해독이 끝났다고 생각한 아르티어스는 방금 전의 그 예의에서 벗어난 행동을 만회하려는 듯 찻잔을 들고 우아한 표정으로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다크는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이었어요.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확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미네르바까지 키득 거리며 웃었다. 아르티어스가 노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크는 뻔뻔스레 그걸 무시하며 미네르바를 향해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보답은 기대하지 마. 5만 명의 증원군은 여기 황궁을 박살 내는 대신 받은 것뿐이니까. 후! 그게 가능했을까? 여기 모인 기사만 몇 명인 줄 알아? 물론 알고 있지. 일단 일이 계획대로 되었으니 이제 돌아가는 것이 좋겠지. 뭐야? 벌써 가는 거야? 아직 찻잔의 술을 반도 못 마신 아르티어스가 재빨리 그것을 입속에 털어넣으며 투덜거리자, 다크는 이 철없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그럼 여기서 얼마나 더 있다가 갈 생각이었어요? 덕분에 맛있는 밥을 먹었잖아요. 빨리 가자구요. 검술을 배운 드래곤 다크가 크루마의 황궁을 뒤집어 놓고 있을 때,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의 머리 속도 까미유의 보고에 의해 뒤집어지는 중이었다. 뭐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지레느가 까미유의 옆에서 지원을 해 줬다. 까미유와 달리 지레느는 로체스터 공작 가문과 약간의 혈연이 있었기 때문에 공작에게 의견을 말하는 데 좀더 편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아저씨. 만약 그 상대가 드래곤이 아니라면 크라레스의 근위 기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드래곤이 한 국가를 뒤집어 엎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찾아다니는 아들이라면 그 역시 드래곤일 것입니다. 원래가 드래곤이란 것들은 인간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니까 말입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하지만 말이 이상하지 않느냐? 그녀가 만약 헤즐링이라면 그 드래곤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힘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 엄청난 검술 , 거건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리고 만약 그 아이가 헤즐링이 아니라면 그 드래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지. 드래곤은 새끼가 500살이 되어 분가시킨 후에는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종족이니까 말이다. 좋아요. 그렇다면, 이런 가정은 어떨까요? 그녀가 헤즐링이라고 하고, 그녀는 오래 전부터 검술을 익혔다고 가정하는 거예요. 사실 드래곤의 유아기는 인간에 비해서 엄청나게 길죠. 헤즐링이 검술을 익혔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발렌시아드 공작 전하께서도 95년 만에 완성하셨잖아요? 헤즐링이 한 300살쯤에 검술을 배우기 시작해서 450살쯤에 그 정도 경지에 들어갈 수도 있잖아요. 그건 더욱 말이 안 돼. 원래 드래곤은 검술을 배우지 않아. 여태껏 검술을 배운 드래곤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다. 로체스터 공작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지레느는 악착같이 자신의 의견을 펼쳤다. 하지만 드래곤이 절대로 검술을 배우지 않는다는 법도 없잖아요. 누가 알아요? 검술 익히는 것을 좋아하는 특이한 드래곤일 수도 있죠. 두 사람의 대화가 약간씩 언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감지한 까미유가 그들 사이에 재빨리 끼여들었다. 공작 전하, 어떻게 되었건 그녀와 드래곤 사이에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한 것 사옵니다. 그에 대한 대비도 좀 해 두시는 편이 좋을 듯하옵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대비한단 말이냐? 그녀가 속한 크라레스가 우리 나라를 박살 내려고 들고 있는데, 그녀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 그냥 항복하고 끝내라는 것이냐? 그런 뜻은 아니었사옵니다. 어쨌건 그녀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좀더 조심할 필요는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옵니다. 제기랄, 요즘 왜 이렇게 계속 문제만 터지는 거냐? 곧이어 유성이 떨어지는데 그것도 대비를 해야 하고 또, 이번에는 드래곤이라고?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되지? 전하, 유성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시옵니까?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시민을 대피 시키는 방법밖에 없지. 어디에 떨어지는 것이옵니까? 흐음, 너희들은 그걸 못 들었느냐? 예. 참, 조사하러 다닌다고 들을 시간이 없었겠군나. 유성은 다섯 곳에 집중된다. 예? 수도에 여섯 개, 쟈코니아의 쟈크렌 요새에 하나, 크로나사의 중심 도시 크라레인 시에 하나, 스웨인의 군사도시 스위트에 하나, 발렌시아드 공국의 수도 발렌시아 시에 하나. 그렇게 해서 모두 열 개다. 녀석들은 수도를 제외한 모든 공격 목표를 방어 마법진이 없거나 있더라도 유성을 막기 힘든 도시에 한정 시켜 놨다. 대신 수도에는 강력한 마법진이 있으니 여섯 개를 집중 시켜 놓은 거겠지. 피신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조용히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수도에서도 모든 사람들을 철수 시키고 있는 중이지. 물론 아직 시민들에게까지는 그 사실이 발표되지 않았다. 귀족들과 황족들, 그리고 도서관이나 박물관, 뭐 그런 것들의 책들이나 기타 유물들의 철 수가 완료되는 2, 3일 후에나 발표할 계획이야. 그렇다면 대 혼란이 .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겠지. 대신 군대와 기사단에는 거의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혼란을 막도록 지시해 뒀다 그리고 너희들은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무리한 부탁이지만 다시 짐을 꾸려 두도록 해라. 유성이 떨어질 때쯤 되면 여기에서 철수해서 바얀 요새로 사령부를 옮길 거다. 여기에도 하나 떨어질 거니까 말이야. 옛, 전하. 이렇듯 총 사령관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굵직한 문제들 때문에 정신이 없을 때,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계획대로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는 인물도 있었다. 그로체스 공작의 심복인 다리엔 후작은 처음부터 전쟁을 빨리 끝낼 생각은 없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완벽한 승리였다. 그리고 될 수 있다면 현재 막강한 권력을 지닌 그로체스나 그와 관련되는 기사단의 도움이 없이 그 계획을 이뤄 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다리엔 후작은 그로세스 공작의 믿음직스러운 심복 답게 그 계획을 잘 이뤄 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전세는 다리엔 후작의 계획대로 코린트 군이 크라레스 군을 거의 궁지에 몰아넣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다리엔 후작의 지시를 통신 마법을 통해 직접 받고 있는 마법사를 거느릴 정도로 세력이 큰 몇몇 귀족들이 효율적으로 통제되고 있었다. 그들에 의해 전방의 상황은 세세하게 다리엔 후작에게 전달되고 있었고, 다리엔 후작은 이제 크라레스 군이 붕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크라레스 군 붕괴의 시작은 녀석들의 기사단 투입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게릴라들의 출몰에 도저히 대응책이 나오지 않으면 크라레스는 기사단을 분산해서 게릴라 토벌에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리엔 후작이 바라는 상황이었다. 놈들의 소단위 부대들은 열 대 내외로 구성된 은십자 기사단을 투입해서 부숴 나가면 된다. 이렇게 한두 부대가 전멸 당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녀석들은 소단위 기사단의 규모를 늘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기사단의 수는 반대로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다섯 명 단위로 열 개 부대를 편성했다가 몇 개가 부숴지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열 명 단위의 다섯 개 부대로 줄어들 것이고 나중에는 25명 단위로 부대 수가 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기사단의 수가 대형화 되면 게릴라를 막기 힘들 뿐만 아니라 이쪽에서 30명 단위로 1개 부대만 운영해도 별 피해없이 놈들을 제압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면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뿔뿔이 흩어져 박살 날 것이고 마침내 겨울이 되면 사기가 저하된 크라레스의 군대는 게릴라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적들이 보급로로 사용하고 있는 길은 여기 보이는 열 가닥이 전부입니다. 지금 전체 전선에서 본국의 여러 귀족들의 분투로 말미암아 놈들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다리엔 후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계획대로 되어 가는 것에 매우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크라레스는 보기와는 달리 대단히 강력한 기사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을 꼭 기사들만 가지고 하라는 법은 없었다. 좋아. 그래, 언제쯤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 버릴 수 있겠나? 몇 가지 문제점만 없다면 아마도 오래지 않아 끊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령관 각하. 몇 가지 문제라니? 새로운 증원군이 도착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대비책이 있어야 할 것이옵니다. 다리엔 후작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크라레스는 벌서부터 증원군을 파병할 정도로 여력이 많지 않았다. 얼마 전에 본국의 군대를 모조리 다 긁어 모아서 동원한 5개 사단 이후로 증원군이 파병되려면 새로이 용병을 모집하는 길밖에 없으므로 최소한 한 달 정도는 걸려야 1개 사단이 들어올 것으로 다리엔 후작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벌써 증원군이 도착했다는 것은 의외의 사건이었다. 증원군이라고? 예, 오늘 거의 1개 사단급의 보병이 새로이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리고 크라레스 본국에서는 용병을 모집한다고 연일 난리 법석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증원군이 계속 보충된다면 적의 보급로를 완전히 끊는 것은 힘듭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수도에 연락해서 그 증원군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해 보라고 해.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크라레스의 군대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설혹 크라레스의 군대라고 해도 용병들로 모집된 증원군이라면 최전선에 투입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 다리엔 백작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다른 장교가 입을 열었다. 조금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 전체적인 작전 지휘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몇몇 중요한 귀족들과는 연락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그들 중 일부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갑자기 두절되었다고? 다리엔 후작이 되묻자 장교는 재빨리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으며 상세히 설명했다. 예, 바로 이 일대를 담당하고 있던 마그레인 백작, 이쪽을 담당하던 쟈코 백작, 이쪽을 담당하던 뮤카 자작입니다. 그들에게 연락을 하면 즉시 부근 귀족들에게 연락을 넣는 형식으로 작전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일대 지방에 포진하고 있는 게릴라의 전력의 핵심이 되는 귀족들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들에게서 연락이 끊겼다는 것은 아마도 살해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다리엔 후작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마도 그렇겠지. 예?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말이다. 녀석들이 슬슬 기사들을 투입할 시점이 되었다는 거지. 그 일대의 지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 기습전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군대라면 몰라도 기사라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지. 50명의 병사가 그래듀에이트 한 명을 당할 수 없다고 하지. 평지에서도 그런데, 저런 숨을 곳이 많은 황무지라면 100명을 보내도 그래듀에이트 한 명을 죽일 수 없어.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옵니까? 빨리 대비책을 세워야만 합니다. 아무리 게릴라전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그 핵은 귀족들입니다. 귀족들이 무너지고 나면, 게릴라전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투르넨 후작! 다리엔 후작의 지명에 여태껏 묵묵히 앉아 있던 투르넨 후작이 간단히 답했다. 왜 그러시오? 일단 이쪽에서도 기사들을 풀어야 할 것 같소. 전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여러 명의 오너들을 함께 투입하는 것이 좋겠지요. 요 며칠 사이에 그 정도로 많은 귀족들이 당했다면, 녀석들도 기사들을 꽤 많이 투입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요. 그런 후 다링네 후작은 잠시 시간을 끌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좀 과하더라도 열 명 정도의 오너를 한 조로 투입하면 어떨까 싶소만, 준비해 주시겠소? 다리엔 후작의 의견에 투르넨 후작은 불쾌하다는 듯이 답했다. 은십자 기사단을 뭘로 보는 거요? 은십자 기사단 열 명이면, 웬만한 국가의 기사단 전체 전력과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소. 그래도 상대는 철십자 기사단의 타이탄들을 간단히 막아 낸 놈들이오. 간단히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크루마 전선에서도 대단히 뛰어난 무훈을 세웠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들었소? 아니, 그 말은 맞소. 좋소, 당신 말대로 열 명을 준비하리다. 마음에 안 들지만 그대가 사령관이니까. 좋소, 내 지시가 있을 때 당장 출동 시키시오. 알겠소. 투르넨 후작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찌푸린 얼굴로 앉아 있자, 그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다리엔 후작은 탁자에 쭉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큼직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자, 제군들! 이제 녀석들이 본국의 공격에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기사단을 투입해 왔다. 분명히 놈들의 기사단은 게릴라를 제압하기 위해서 매우 소규모로 분산되어 있을 것이다. 사실상 그래듀에이트 한 명이면 게릴라 1개 부대쯤 전멸시키는 것은 쉬울 테니까 말이다. 이제부터는 기사들기리의 전투가 시작된다. 투르넨 후작의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동십자 기사단 제8전대의 그래듀에이트들, 그리고 마법사 전부를 투입해라. 상대가 적으면 그 즉시 공격을 가하고 상대가 많다면 투르넨 후작에게 연락한다. 그러면 은십자 기사단의 정예 기사들이 적을 무찌를 것이다. 이런 식으로 놈들의 기사단 전력을 격파해 나간다면 이번 겨울이 오기 전에 놈들은 크로나사 평원에서 후퇴하게 될 것이다. 만약 후퇴하지 않는다면 녀석들에게 크로나사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가르쳐 줘라. 황무지 위의 썩은 시체들 넓은 황무지 여기저기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죽어 있는 그들의 손에는 활, 검 같은 무기들이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반항도 못 하고 몰살을 당했는지, 아니면 이들을 해치운 것들이 동료들의 시체를 치워 버렸는지 모두들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모두 제법 고급인 듯한 청색으로 물들인 면으로 만든 옷으로 복장을 통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절대로 산적 패거리는 아니었다. 바로 이들이 크라레스를 괴롭히고 있던 코린트의 게릴라 들이었다. 여기저기에 피워져 있는 불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큼직한 솥이 걸려 있었고 그 안에는 음식들이 끓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시체들이 그 불 주위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 식사 준비를 하다가 기습을 당했다는 것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으으으윽! 에헤헤 , 이 녀석 제법 입이 질긴 놈이군. 저, 그러지 마시고 마법을 쓰시는 편이 . 체구가 외소해 보이는 사람이 주춤 주춤 입을 열었지만, 그 의견은 곧 묵살되었다. 젊은 마법사가 그 잔인한 장면에 안색이 하얗게 질려 사정하는 것을 보다 못한 한 기사가 말했다. 이봐, 그냥 놔두고 이쪽으로 와서 음식이나 먹어. 그 녀석은 포로들을 족치는 게 유일한 재미니까 말이야. 동료들이 인정했을 정도로 바로 이 센티그라는 기사는 자신을 이 황무지에서 헤매게 만든 게릴라들에게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늘 고문이란 형태로 풀고 있었다. 절대로 정보의 획득을 위한 힘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게서 정보란 것은 복수에 대한 부가적인 산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젊은 마법사는 비위가 어지간히도 약했던지 이 시체 구덩이 속에 뒤섞여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후 웩웩거리며 토하기 시작했다. 야야, 센티그! 대충 하고 죽여. 밥맛 떨어지게 . 한쪽에 모여서 음식을 먹고 있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이 투덜거리자, 그 사내는 간단하게 그 말을 받아친 후 다시금 하던 일에 열중했다. 히야, 밥맛 떨어진다는 사람이 이런 시체 구덩이에서 녀석들이 만들어 둔 음식을 먹고 있냐? 제기랄, 빨리 말해. 편안하게 죽고 싶으면 빨리 말하라구. 비명을 질러 대는 포로는 한때 상당히 높은 직위에 있었던 인물인듯, 고급스러운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지만 지금은 걸레가 다 되다시피 한 옷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상대가 무작스럽게 발로 차서 뼈를 부수고 그것을 툭툭 건드리고 있자 그는 거의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심한 두려움에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으으아아악! 상대가 자신의 무력함에서 오는 두려움과 자포자기, 그리고 공포, 고통에서 거의 발광 상태의 비명을 질러 댔지만 기사는 무표정하게 고문을 계속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동료들의 표정이 찌푸려들 정도였고, 마법사는 이제 더 이상 토할 것도 없는지 쭈그리고 앉아서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안 그러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지. 흐흐흐 . 한참의 괴롭힘을 당한 상대는 끝내는 입을 열었다. 알코인 알코인 시에서 동남쪽으로 30킬로쯤 떠 떨어진 곳에 듀, 듀란 남작이 사병을 거느리고 . 호호, 봐. 족치면 다 불게 되어 있다니까. 그래, 병력은 어느 정도야? 이, 이백 명 정도 . 이백 명이라 이거지. 흐흐흐. 그 기사는 고문에 의해 거의 걸레가 되어 있는 상대방의 목을 밟아 버렸다. 우두두둑 하는 끔찍한 소리가들린 후 꿈틀거리던 상대의 움직임은 완전히 멈췄다. 그는 적을 처치해 버린 다음 역시 음식을 먹고 있던 몇 명의 동료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대장. 알아 냈습니다. 알코인 시에서 동남쪽 30킬로에 듀란 남작이 있다는데요? 병력은 이백 명 정도. 기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음식을 먹고 있던 대장은 씁쓰레한 표정으로 퉁명스레 대답했다. 수고했다. 뭐 좀 먹어 둬라. 그리고 가면 아마도 저녁은 늦게나 먹게 될 테니까. 예. 무표정한 얼굴로 입 속에 음식을 떠 넣으며 기계적으로 씹고 있던 대장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그릇을 땅바닥에 던져 버린 후 재빨리 말했다.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라. 엄청난 마나가 느껴진다. 한두 놈이 아니야. 빨리! 타이탄 세 대가 공간을 열고 나오는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장은 마법사를 향해 외쳤다. 될 수 있는 한 멀리, 안정권으로 이동해서 본국에 도움을 청해라. 그리고 너희들은 니키가 통신을 끝마칠 때까지 목숨을 다 바쳐서 보호해라. 센티그! 서둘러! 옛, 대장. 그와 동시에 대장은 자신의 뒤편에 나타난 거대한 붉은색과 푸른색의 도장이 칠해진 타이탄에 올라탔다. 그리고 대장이 올라타는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센티그를 포함한 두 명의 그래듀에이트가 마법사의 양쪽 팔을 잡아들고는 엄청난 속도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니키가 통신을 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까지 그를 보내 주고, 또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저 멀리에서 먼지를 붐어 올리며 다가오는 타이탄은 여섯 대나 되었다. 5미터는 됨직한 체구에, 은색의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의 방패, 바로 은십자 기사단의 미네르였다. 적당히 흩어져라. 포위 당하면 끝장이야! 물론 타이탄의 등급에서는 이쪽이 훨씬 위였다. 겨우 정규 출력을 내는 미네르에 비했을 때 이쪽은 1.3이나 되는 근위 타이탄 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코린트가 여태껏 세계를 제패했던 이유가 알카사스 처럼 고성능 타이탄을 등에 입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들은 엄청나게 두터운 기사 층을 확보하고 있었고, 그들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들만이 타이탄을 지급 받았다. 그러니까 기사들의 동급에 있어서 세계 최고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도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일단 오너 급이 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인물들은 뭔가 하나씩의 직책을 맡게 되어 있었고, 또 그런 직책에 필연적으로 따라 다니는 각종 연회라든지 뭐 그런 행사에 참가해야 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수련할 시간이 매우 부족 했는데 그에 비해서 크라레스의 유령 기사단 소속 기사들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그들에게 주어진 직위나 직책은 모두 숨겨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역사의 뒤편에서 언젠가 자신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날을 기다리며 끝없이 무술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검과 검이 대기를 가르고 굉음을 내며 부딪쳤다. 모두들 두터운 철판을 두르고 있었기에 웬만한 검의 타격으로는 상대방 타이탄을 박살 낼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무게가 10톤 정도 더 무거운 테세우스가 월등하게 유리했지만, 숫자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넓게 산개해서 압박을 가해 오는 미네르들을 상대해서 테세우스들은 방어에 전념하면서 후퇴하고 있는 중이었다. 헉헉 헉헉 . 가쁜 숨을 몰아쉬는 기사들에게는 시선을 보내지도 않고 센티그는 냉정하게 젊은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빨리 통신을 보내. 예, 예. 니키가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힐끗 바라본 후 센티그가 말했다. 나머지는 모두들 주위에 퍼져서 매복한다. 자, 빨리 서둘러! 흔적을 지우라고. 기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니키는 열심히 주문을 외웠다. 니키의 경우 이제 4사이클 급 마법 몇 개를 배웠을 분이 수련 마법사였다. 그런 그가 이곳 전장에서 기사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크라레스에 있는 모든 마법사와 4사이클 급 수련 마법사들은 거의 다 타이탄 제작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전방에서 전쟁을 도와야 할 마법사들을 거의 대부분 후방으로 철수시켰을 정도로 크라레스의 사정은 급박했던 것이다. 마나가 모이고 희뿌연 빛이 일어나며 상대가 나타났을 때, 니키는 다급하게 외쳤다. 적 타이탄이 나타났 . 하지만 티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를 향해 엄청난 불곷 덩어리가 날아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아마도 상대방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가 이쪽에서 연락을 휘하는 녀석이 있는지 알아 보러 마법을 이용해서 날아 다니다가 니키를 발견한 모양이엇다. 마법사들이란 존재는 뷰 마나 포스나 뷰 매직 포스의 주문만으로도 상대를 찾아 내는 것이 매우 쉬웠으니까 말이다. 바로 이때 기사 한 명이 뛰쳐나와 그 불꽃 덩어리를 자신이 가진 방패로 틀어막았다. 쿠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그 충격으로 방패를 가진 그 기사는 시커멓게 그을린 채 뒤로 튕겨 나갔다. 그 사내의 방패는 거의 박살이 난 상태였고, 남아 있는 부분도 군데군데 녹아 내린 흔적이 보일 정도였다. 그가 쓰러지자 다른 기사들이 재빨리 등에 지고 있던 작은 활을 꺼내 마법사를 향해 발사할 준비를 했고 숨어 있던 그래듀에이트 한 명이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래듀에이트는 묵직한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움직임으로 나뭇가지들을 밝고 도약하기 시작, 공중에 떠 있는 마법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기사가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상대 마법사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가급적 정신을 집중해서 자신의 몸을 위로 떠오르게 하려고 하는 중이었지만, 바로 눈 앞으로 상대가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드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았다. 바로 이때 날아 오르는 기사를 향해 또 다른 인물이 몸을 날려 왔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충격으로 뒤로 튕겨 버린 그래듀이에트는 재빨리 시선을 아래로 돌려 뭔가 착지할 안전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본 후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곳에는 자신을 향해 몸을 날렸던 기사가 자신과 같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니키는 같은 편의 기사가 몸을 날려서 자신을 지켜 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검게 타서 죽어 있는 기사의 시체를 봤을 때, 머리 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 통신이고 뭐고 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방에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자신을 중심으로 들려 오고 있었다. 퍽! 크윽! 어디선가 비명이 들리더니 자신의 주위에 잘려진 팔과 함께 검이 떨어졌다. 그 손의 주인의 몸체에서 잘려진 상태에서도 끝까지 검을 잡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아카데미 마법 학부를 졸업하고 겨우 어떤 마법사의 수련생으로 뽑혀서 방구석에 박혀 마법 실험이나 하고 있던 니키로서는 지금의 이 피 튀기는 격투를, 그것도 동료들이 죽어 가는 것을 견뎌 낼 만한 정신력이 없었던 것이다. 퓨욱! 갑옷과 함께 살이 잘라지는 특이한 소리를 끝으로 사방이 조용해졌다. 저벅저벅하는 낮은 소리가 들리더니 부들부들 떨고 있는 니키의 옆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하, 이봐, 한스. 이 꼴을 보라구. 혹시나 통신을 보낼까 봐서 죽자고 싸웠는데 이 마법사 녀석 아예 오줌을 싸고 있었어. 이봐, 빨리 없애 버리고 돌아가자. 저 소리 안 들여? 아직도 싸우고 있는 모양이야. 녀석들의 기사들은 상당한 실력인데, 마법사는 왜 이렇게 덜 떨어진 거지? 한스가 채근하자 그 기사는 피 묻은 검을 들었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으아악! 비명 소리는 지를 줄 아는군. 병신 자식! 그 기사는 검을 충분히 찔러 넣었다고 생각했는지 이제 옆으로 반바퀴 정도 돌렸다. 그에 따라 우두둑 하는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제야 검을 뽑아 낸 후 쓰러져 있는 마법사의 옷자락에 닦으면서 말했다. 기사들의 실력은 대단했어. 만약 우리 네 명이나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해치우기는 힘들었을 거야. 마법사만 제대로 된 녀석을 가지고 있었다면 .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자. 은십자 기사단이 이 따위 3류 기사단과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시간만 끌다가 겨우 이겼다는 소문이 퍼지면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어. 알았어. 한참 격투를 진행중이던 대장은 자신들의 동료들이 모습을 감췄던 그 방향에서 네 대의 타이탄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자 상대 타이탄을 향해 맹공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그의 부하들도 상관의 의도를 대충 짐작하고는 각자가 맡은 타이탄들을 압박했다. 덩치와 파워에서 월등하게 유리한 적이 여태가지의 수세에서 전환하여 공세로 나오자 상대는 당황하여 뒤로 조금씩 후퇴했다. 바로 그때를 이용해서 세 대의 타이탄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뒤로 반전하여 빠른 속력으로 도망 치기 시작했다. 그들과 싸우고 있던 여섯 대의 타이탄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최대한 빨리 따라잡으려고 했지만, 덩치와 무게가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상대박 타이탄의 출력은 미네르보다 뛰어났다. 서로간의 거리가 점점 멀어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두 대의 타이탄이 검을 얄미운 상대의 등판을 향해 던졌지만, 그것은 별로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제기랄! 도망 치는 것 하나는 아주 숙련된 놈들이군. 전쟁과 창녀의 관계 공작 전하. 제 5유격 전대에서 적 기사단 과 부딪틴 모양이옵니다. 뭣이? 부하의 다급한 보고를 받고 크로아 공작은 튕기듯이 일어났다. 적 기사단과의 접전 소식은 그가 정말이지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다. 놈들도 이제 이 끝도 없을 것 같은 전쟁을 슬슬 결말 지을 생각이 든 모양이었으니까 말이다. 크로아 공작은 급히 통신실로 달려가며 물었다. 적의 규모는? 공작의 물음에 상대는 난처한 듯 대답했다. 그게 , 정확히 알 수가 없사옵니다. 지금 예상으로는 최소한 3대 이상이라는 것밖에는 . 그리고 통신을 방해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 전력이 있는 것이 확실하옵니다. 통신의 내용이 뭐였기에 그러느냐? 적 타이탄이 나타났다는 한 마디뿐이었사옵니다. 곧바로 통신이 두절되었사온데, 아마도 마법사가 살해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지요. 유격 기사단의 경우 타이탄전이 시작되면 그래듀에애트 두 명을 포함한 기사 여섯 명이 마법사를 보호할 수 있사옵니다. 아마도 마법사가 당했다는 것은 그들도 모두 죽었다는 . 가능성은 있지. 통신실에 도착한 공작은 마법사를 향해 물었다. 제5유격 기사단이 활동하던 영역은 어디냐? 켈라크 지역이옵니다., 전하. 최후에 들어온 통신은? 아티온 마을 부근에 나타나던 게릴라의 본거지를 포착했다는 것과, 그들이 가고자 하는 좌표였사옵니다. 공작은 고개를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마법진을 준비해라. 내가 직접 가겠다. 예? 하지만 전하께서 직접 가시는 것은 위험하옵니다. 무슨 소리냐? 너는 내 실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거냐? 군소리 말고 빨리 준비해라. 예, 전하. 곧 적의 유격 기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열 명의 기사들이 집합했다. 공작은 그들과 함께 마법진을 완성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번 적전의 생명은 시간이었다. 놈들이 이쪽의 기사단을 전멸시킨 후 돌아간 다음에는 그곳에 도착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 젊은 마법사의 마법진 그리는 속도는 도저히 공작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윽고 젊은 마법사가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하자, 공작 일행은 재빨리 마버진 위에 올라갔다. 마법사는 일행들을 향해 주의 사항을 말했다. 지도에 의하면 전하께서 가시고자 하는 곳은 숲이옵니다. 하지만 숲에 있는 나무들의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어 위험하니 좀더 안전한 지형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1킬로쯤 떨어진 곳에 바위들이 있는데 그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하여 상공 5미터 정도 높이를 목표로 공간 이동할 것이니 모두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그리고 누구 한 분은 제가 안전하게 밑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마법사는 시동어를 외쳤다. 그와 동시에 주위가 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마법진으로 공간 이동을 할 때의 전형적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위가 핑핑 도는 것 같고, 뭔가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모두들 눈 앞이 밝아지는 것과 동시에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지만 이미 예측하고 있었으므로 침착하게 충격에 대비했다. 크로아 공작은 직접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마법사를 붙잡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들이 공간 이동한 장소는 돌과 바위들이 많아서 그런지 키가 작은 잡목들과 잡초들만 군데 군데 솟아 있었다. 마법사는 해를 보고 방향을 가늠해 본 후, 한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목표로 하시는 장소는 저쪽으로 1킬로 정도 지점이옵니다. 공작이 먼저 앞장을 서자 기사들 중의 한 명이 마법사를 껴안고 달렸다. 이윽고 목표 지점에 도착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자 마법사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 이상하네, 공작 전하께서 오고자 하신 곳은 이곳이 틀림없사옵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한 젊은 마법사의 말은 듣고 싶지도 않다는 듯 공작은 주위를 빙 둘러봤다. 자, 모두들 흩어져서 찾아라. 아마도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옛, 전하. 공작이 거느리고 온 열 명의 그래듀에이트들은 모두 오너 급이었기에 공작 앞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하듯 최대한 빨리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네는 마법으로 찾아보게나. 혹시 뭔가 흔적이라도 있는지 . 옛, 전하. 공작이 거느리고 온 마법사는 고작 4사이클 급의 수련 마법사였기에, 진짜 마법사라면 비행 마법(Aviation)이라도 사용하면서 찾았겠지만, 그런 실력이 되지 못했다. 그는 마법을 이용해서 나무로 올라가는 그 마나도 아끼기 위해서 겨우 택한 나무 위로 낑낑거리며 올라갔다. 그런 젊은 마법사를 보면서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법사도, 기사도, 병사도, 모든 게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나무 꼭대기에서 이리저리 한참을 둘러보고 있는 사이, 기사 한 명이 재빨리 돌아와 공작에게 보고했다. 저쪽에 건물들이 있사옵니다, 전하. 그래? 그곳으로 이동한다. 나머지 오너들을 빨리 불러 모아라. 옛! 공작이 그쪽으로 향해 달려 갈 때 뒤쪽에서 마나를 실은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퍼져 나갔다. 공작이 목표지에서 본 것은 시체들뿐이었다. 공작은 시체들의 상처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때쯤 나머지 기사들이 마법사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도 거의 100여 구에 달하는 시체들을 보고는 신속하게 조사를 시작했는데, 마법사는 이 처참한 장면에 놀랐는지 하얗게 질린 채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다. 현재 시체들의 상태로 봤을 때 죽은 지 약 세 시간 정도 흐른 것 같사옵니다. 흐음, 그렇군. 공작은 여기저기서 흔적이 될 만한 것을 필사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곳에 시선을 멈췄다. 저것은 여자 시체가 아닌가? 예? 공작이 가리킨 곳을 향해 기사 한 명이 즉시 몸을 날렸다. 그 기사는 시체들을 살펴본 다음 돌아와 상황에 대한 보고를 했다. 창녀들의 시체이옵니다. 전쟁터에는 어디를 가도 창녀들이 있사옵니다. 아마도 . 공작은 한 손을 살짝 들어 상대의 말을 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 너무 심하게 학살했다는 것을 질책하는 것은 아니니 변명할 필요는 없네. 사냥꾼의 오두막을 중심으로 대충 얼기설기 건물들을 급조해서 지어 놓았기는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창녀들이 있는 곳이라면 여기는 본진일 거라는 것이지. 공작의 말대로 전쟁과 창녀들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대부분의 경우 창녀들은 포주를 중심으로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병사들에게 몸을 팔았다. 이런 식으로 전쟁터를 전전하는 창녀들이라 거의 싸구려 창녀들이 대부분이었고, 아주 저질인 여자들이 많았지만 상관들은 그녀들이 군대를 따라 이동해 오는 것을 묵인해 주었다. 병사들이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마저 막는다면, 근처 인가의 여자들을 겁탈하는 불상사가 발행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들도 될 수 있는 한 며칠 단위로 작전을 나가는 패거리를 따라다니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작전을 수행한 후 본진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습지요. 그렇다면 아마도 이 녀석들은 여기서 몇 명을 생포해서 고문을 했겠지. 그런 다음 공격조를 따라갔을 가능성이 커. 만약 이곳처럼 고정적인 목표라면 여기를 전멸시킨 후에 전과에 대한 보고와 함께 그 다음 예정지를 알려 왔었겠지. 공작의 세밀한 추리에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것 같사옵니다, 전하. 문제는 그 녀석들이 어디로 갔느냐 하는 것인데 . 여기서 가장 가까운 본국의 보급 루트가 어디냐? 공작의 질문에 한 기사가 황급하게 지도를 꺼내어 보면서 말했다. 예, 여기서 주도로까지는 42킬로 정도 떨어져 있사옵니다. 좋아, 그쪽으로 가자. 그리로 가다 보면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지. 옛, 전하. 중간 중간에 서서 주위를 관찰하는 것을 제외하고 공작 일행은 최대한 빨리 이동하기 시작했다. 말은 처음부터 가져오지도 않았기에, 그들은 그냥 달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두 그래듀에이트를 상회하는 인물들이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물론 마법사는 제외였는데, 마법사는 꼭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누군가 한 사람은 마법사를 안고 뛰어야 했다. 한참 달리고 있던 공작은 갑자기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저쪽으로 가자. 상관의 돌연한 행동에 부하들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예? 왜 그러시옵니까? 저쪽에서 연기가 보이는데 너희들은 안 보이냐? 예? 저희들의 눈에는 . 아무튼 저쪽으로 간다. 그들은 공작의 지시에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져서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더 달리자 몇몇 기사들의 눈에도 미세하게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정말이지 난장판이었다. 수많은 시처들과 함께 솥이 걸려 있는 것도 보였다. 공작 일행은 이곳까지 안내한 연기는 솥 밑에 피워져 있던 불에서 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식사 준비를 하다가 제5유격 기사단 전대에 걸려서 전멸 당한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기사가 한쪽을 가리키며 공작을 향해 말했다. 저쪽에 타이탄 발자국이 보이옵니다. 일단 이곳이 목표 지점이라는 것을 확인한 공작은 재빨리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이런 게릴라들을 죽이는 데 구태여 타이탄을 꺼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너희 넷은 타이탄을 꺼낸 후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적의 공격에 대비해라. 그리고 자네들 여섯은 풀숲을 조사 해라. 혹시 생존자가 있는지 . 옛, 전하. 모두들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동안, 공작은 타이탄들의 발자국이 있는곳으로 다가갔다. 호오 , 여섯 대군. 삼 대 육으로 싸운 건가? 상당한 실력자들이군. 그리고 타이탄의 발자국 모양을 보아 하니 미네르로군. 미노바는 형태는 같지만 이것보다 조금 더 크니까 말이지. 은십자 기사단 녀석들인가? 계속 발자국을 따라가던 공작은 자신의 부하들이 적을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법이로군. 미소를 지으며 흐뭇해 하고 있는데, 숲 속에 들어갔던 부하들 중의 한 명이 뛰어와 보고를 올렸다. 공작 전하, 숲속에서 시체들을 발견했사옵니다. 공작의 미간에 잠시 그늘이 스쳤다. 오너들은 어떻게 해서든 탈출한 모양이지만 그 외의 부하들은 적들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크라레스는 기사 한 명이 아쉬운 때였다. 그래? 예, 마법사 이하 일곱 명 모두 전사했사옵니다. 흐음, 역시 . 가 보자. 옛, 전하. 공작이 숲 속에 도착했을 때, 여기저기 쓰러진 시체들이 보였다. 그 중에서 시커멓게 탄 시체는 아무래도 적의 마법에 적중된 듯 보였다. 시체들을 검사하고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 공작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다가가서 보고했다. 20분쯤 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옵니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았사옵니다. 그런가? 공작은 대충 시체들의 쓰러진 모양새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마도 반대쪽에서 코린트의 마법사가 나타난 모양이군. 거기서 이쪽 마법사를 공격했겠지. 그걸 저기 쓰러져 있는 기사가 마법의 강도를 채 가늠하지도 않고 마법사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거고 말이야. 모두들 훌륭하게 싸웠구나. 공작의 말이 끝나자 그는 자신이 조사한 바를 설명했다. 아마도 적은 기사 네 명과 마법사 한 명 이상인 듯하옵니다. 시체들에게 남겨진 검상(劍傷)으로 봤을 때 모두들 그래듀에이트 급을 상회하는 실력자들임이 확실하옵니다. 그렇겠지. 공작은 마법진을 앞에 두고 단정하게 죽어 있는 마법사의 이체를 중심으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들을 자세히 바라봤다. 대충 어떻게 싸웠기에 이런 모양새가 만들어졌는지 이해한 공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들 통신 마법을 시도하는 마법사를 목숨을 아끼지 않고 훌륭하게 지켰다. 이들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은 적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지, 이들이 무능하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다. 이들의 시체를 정중하게 거둬들여라. 크리프! 호명 당한 기사가 재빨리 대답했다. 옛, 전하. 이렇듯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려다가 전사한 이들의 유가족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은, 수도에 남아 있는 될 수 있다면 높은 직위에 있는 인물이 직접 하라고 지시해라. 그렇게 하면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질 것이다. 아마도 , 레이폴트 후작 정도라면 좋겠지. 옛! 그리고, 이들 모두들 국상(國喪)으로 처리하고, 각기 작위를 한 단계씩 높여 줘라. 그리고 . 로체스터 공작은 언뜻 마음 속에 떠오른 금액을 말하려다가 그게 너무 많은 것 같은 생각이 들자 그 액수를 반으로 줄인 다음 말했다.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연금을 그래듀에이트는 40골드, 기사는 20골드, 수련 마법사는 10골드씩 매달 지급하도록! 옛, 전하.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하도록 해라! 옛! 공작은 부하들이 시체들을 거두고 있는 것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나하고 저 시체들을 크로돈으로 보낼 수 있겠나? 크로돈에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리고 거기에 가는 길에 시체는 내가 가지고 가지. 예, 가능하옵니다, 공작 전하. 좋아, 그렇다면 우선 크로돈으로 가는 마법진을 그려라. 그리고 내가 공간 이동한 후에 좀 쉬었다가 본진으로 돌아가도록! 옛, 공작 전하. 마법사는 즉시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람과 같은 여자 토지에르는 갑자기 크로아 공작이 시체 입곱 구와 함께 황궁의 마법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 공작은 한참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공작의 앞에 놓인 레드 드래곤 이 거의 반 이상 없어졌고, 그 옆에는 또 다른 빈 병이 놓여 있다는 것을 살핀 토지에르는 무슨 일인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가 알고 있는 크로아 공작은 이렇듯 대낮에 과음을 하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옵니다, 공작 전하. 그런데 어찌하여 대낮부터 술을 . 공작은 손짓으로 토지에르에게 의자를 권했지만 별로 유쾌한 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이제야 나타났군. 나는 지금 별로 기분이 좋지 못하다네. 그 이유를 아는가? 예? 그, 글쎄요. 오늘 있었던 일은 들었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기에 토지에르는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기로 공작이 저렇듯 술을 과하게 마실 정도로 나쁜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예, 이리로 달려오기 전에 통신실에서 온 전갈을 받았사옵니다. 타이탄들끼리 전투가 있었다구요. 그래. 전사 일곱 명, 아니 여섯 명! 웃기는 일이지. 토지에르는 도저히 공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일곱 명의 전사자를 내긴 했지만, 사실상 타이탄의 손실은 한 대도 없었기에 그렇게 큰 피해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직접 일곱 구의 시신들을 가지고 온 공작이 왜 여섯 명이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오늘 내가 아끼던 부하들이 여섯 명이나 죽었네. 그건 들었겠지? 예, 들었사옵니다. 부하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그놈들은 쓸데 없는 짓을 했어. 쓸데 없는 전투를 벌였단 말일세. 크로아 공작이 술 주정을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토지에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런가요? 놈들은 애송이 마법사를 지키기 위해, 그 빌어먹을 놈이 통신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죽은 거지. 그동안 그 지옥에나 떨어질 마법사 녀석은 뭐하고 있었는지 아나? 토지에르야 그곳에 가 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토지에르가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공작은 다시 술을 한 잔 입속에 털어 넣은 후 분노에 찬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 개자식은 겁에 질려서 벌벌 떨고 있었어. 그 정도라면 통신 마법 따위는 시도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겠지. 물론, 부하들에게는 그 사실을 맣하지 않았네. 그 따위 것 말해 봐야 별 소용 없는 거니까. 도망 칠 생각도 못 하고 겁에 질려서 벌벌 떨면서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뒤에서 찌르는 칼에 맞아서 죽은 거야. 그런데 내가 이끼던 부하들은 그 쓰레기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던진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 이제야 공작이 왜 술을 마시고 있었는지 이해한 토지에르가 재빨리 대답했다. 예, 전하. 토지에르가 알았다고 대답하자, 공작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당장 유격 기사단에 5사이클 급의 마법사들을 배치 해라. 전하 그것은 . 물론 새로운 타이탄을 좀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뛰어난 부하들과 타이탄들을 잃어야 한다는 나는 아예 타이탄을 생산하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모든 마법사를 전장으로 돌릴 거야. 통신 마법으로 좌표 한 마디만 말했어도 이번 전투는 이길 수 있었어. 그리고 쓸데 없이 부하들이 죽을 필요도 없었고 말이야. 이제 내 말을 이해하겠나? 알겠사옵니다, 전하. 토지에르가 수긍하고 나오자 공작도 조금 누그러지며 말했다. 5사이클이 힘들다면 4사이클이라도 좋으니까 새파란 애송이들 말고 좀더 경험 있는 마법사를 보내 줘. 크로나사 평원은 너무 넓어. 그 넓은 면적을 커버하려면 통신이 잘 되어야 해. 이런 식으로 지역적인 전투에서 병력의 열세가 계속 된다면 나는 폐하께 크로나사를 포기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릴 수밖에 없어. 이길 수도 없는 전쟁을 계속 해 봐야 나중에는 본국까지 위태로워져. 내 마음을 이해해 주겠나? 예, 전하. 방금 내가 했던 말은 자네만 알고 있게. 우리 크라레스 군대에 겁쟁이가 있어서도 안 되고 나오서도 안 되네. 알겠나?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될 수 있으면 빨리 마법사들을 전선에 보내 줘. 예, 전하. 좋았어, 마법진을 준비해 주게. 전선으로 돌아갈 거야. 전하, 오늘은 여기서 쉬시고 내일 돌아가시옵소서. 그리고 기쁜 소식이 도착해 있사옵니다. 뭔가? 로니에르 전하께서 크루마로부터 5개 사단을 받아 내셨사옵니다. 조금 전에 크루마로부터 제1진 만 명이 도착했사옵니다. 그래? 좋은 소식이군. 그 녀석들 모두 전방으로 보내 버려. 전방에서 며칠 시달리면 우리들의 고충을 이해하겠지. 그렇다면 로니에르 공작은? 공작의 물음에 토지에르는 난처하다는 듯 어물쩡 대답했다. 예? 저, 그게 . 그들의 말로는 어제 이쪽을 향해 떠나셨다고 하온데, 행방이 묘연하옵니다. 토지에르의 말에 공작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정말 바람 같은 존재라고 느꼈던 것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또 어디에도 구속 받기를 거부하는 바람. 훗, 또 어디 가서 놀고 있겠지. 하기야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그건 당연한 것인지도 몰라. 아마 며칠 있으면 올 테니 걱정하지 말게. 지금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그녀가 나설 만한 것은 아니니까 지금은 그녀가 필요 없어. 예, 전하.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방을 나섰다. 그것을 보고 토지에르가 황급히 공작을 부축하며 밖을 보고 외쳤다. 경비병! 예, 각하! 공작 전하를 방까지 모셔라. 많이 취하신 듯하다. 토지에르는 공작이 떠난 후 공작이 마시던 빈 술잔에다가 술을 채워 넣고는 냄새를 맡아 본 후에 입 속에 털어 넣었다. 화끈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밑으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전하께서는 바람이라고 하셨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도와야 할 겁니다. 그녀를 제어하기 위한 모든 것은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 만약 이 사실을 안다면 그녀가 나를 죽이려고 들겠지만 흐흐흐, 그녀는 절대로 이 사실을 알 수가 없지요. 자, 그녀를 위해서 건배! <『묵향10 외전 다크 레이디』에서 계속> 제10부 미투랑 전투와 나이아드와의 대결 차례 호비트 족의 욕심 브로마네스의 영토 지도에서 사라진 코린티아 시 아르티어스의 정체 풀 줄기와 검의 대결 마법의 책 소년 첩자 제스터 아르티어스 님의 목걸이 말토리오 산맥의 침입자들 감사합니다, 드래곤이시여 미투랑 요새 전투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마스터들의 협상 변화하는 제국의 질서 닥쳐 온 운명의 시간 다시 나타난 정령왕 나이아드 아주 오랜 친구의 만남 다크의 실종 정령계로 간 묵향 나이아드와 묵향의 대결 고약한 드래곤의 성격 아르티어스의 바보스러운 모습 풀리지 않는 비밀의 내공술 황태자의 무도회 새로운 여행의 비밀 <묵향 릴레이 줄거리> 호비트 족의 욕심 전쟁은 이제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미란 국가 연합의 세 배가 넘는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은 크라레스 제국은 그 넓은 땅덩어리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사정이 약간 달라지기 시작했다. 크루마에서 보내 온 5만 5천 명과 미란에서 보내 온 4만 명, 도합 9만 5천 명의 새로운 병력이 추가로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병력들이 주요 병참선을 지키기 위해 곳곳에 배치되기 시작하자 이제 발 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코린트 제국이었다. 크라레스 제국의 점령지 요소 요소마다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9개 사단 급의 병력들. 그 갑옷 위에 산뜻하게 그려진 문장으로 봤을 때, 그것들을 서둘러 날림으로 그려 넣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용병(傭兵)을 의미하는 꺾어진 버드나무 문장이 한쪽 구석에 그려져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들이 전혀 정체 불명의 군대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소속을 숨기고 다른 나라에서 보내 준 지원군일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반 군대에 소속된 수준 낮은 병사들의 경우 그 녀석들이 어떤 국가 소속인지 알아 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또 재수 좋게 어느 국가에 소속된 놈들인지 알았다 하더라도, 그래서 어느 나라 놈들 아니냐고 캐묻는다 하더라도 상대가 발뺌을 해 버리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더러는 얼마 전에 군대에서 해고되었다거나, 그만 뒀다고 하는 식으로 변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기사 급의 병력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기사 급 정도라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키운 인물이기에 해고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반면 용병이나 하급 병사들의 경우 이리저리 떠도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태어난 국가에 소속감이나 충성심 따위를 바란다면 오히려 그게 웃기는 일일 것이다. 평민이나 농노들의 경우, 될 수 있다면 세금도 적고 영지 주민들을 살뜰하게 보살펴 주는 인자한 영주가 오기만을 바랄 뿐,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물론 바라는 것이 없는 만큼, 그들이 뭔가를 솔선해서 해 줄 가능성 또한 없었다. 이렇듯 크라레스가 거의 10만에 가까운 병력을 추가로 배치하고자 코린트 남부 집단군 사령관인 다리엔 후작은 지지부진 전략 을 포기하고 크라레스 침공군을 향해 본격적인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만 끌다가는 적의 병참선이 더욱 튼튼해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바짝 방바닥에 엎드려 몸을 숨긴 채, 망원경을 통해 앞을 살피던 사내가 옆에 있던 사내를 향해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한 놈들이야. 전에도 한 번 봤지만 도대체 저 녀석들의 저 살기 넘치는 만행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구먼. 안 그래, 맥스?" 사내의 망원경에는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춘 듯 보이는 몇 명의 기사들이 엄청난 속도로 돌아다니며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적 기사들은 고작 10여 명이었다. 그나마 다섯 명 정도는 뒤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었고 나머지 다섯 명만이 거의 학살극이다 싶을 정도로 무참히 상대를 쓰러뜨리고 있었다.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검이나 창, 혹은 활 따위로 무장을 하고 어설프게 저항을 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원체 강하다 보니 그야말로 헛된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십 명이 죽어 나자빠지자 이들은 아예 그나마 저항도 포기하고 도망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악착같이 쫓아다니며 그들을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였다. 사내와 함께 아래쪽 골짜기에서 펼쳐지는 지옥도(地獄圖)를 감상하던 맥스 또한 그와 같은 의견이었는지 이 갈리는 듯한 목소리로 내뱉듯 말했다. "지독한 놈들!" 사내는 눈에서 망원경을 떼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우우욱... 속이 메슥거려서 더는 못 보겠군." 하지만 맥스는 질리지도 않는지 아래쪽을 계속 노려보면서 이죽거렸다. "저 녀석들 기사 맞아? 도대체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들 같지는 않는데 말이야." "저놈들은 기사도 아니야. 제기랄! 그냥 달려 내려가서 저것들을..." 분노에 찬 음성을 내뱉으며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갈 듯 급하게 몸을 세우는 사내를 맥스가 붙잡았다. "이봐! 참으라구. 자네 혼자 내려가서 될 일이 아니야. 그래듀에이트만 다섯 명이야. 우리 둘 다 내려간다고 해도 저 밑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 숫자만 보태는 꼴이 될 거야." "에엣! 제기랄. 지원군은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느려 터진 놈들!" "그러게 말이야. 이봐, 쟈크! 아직도 멀었나?" 쟈크라고 불린 사내는 간단하게 무장한 무사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법진에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예, 통신은 벌써 끝냈습니다. 아마 2~3분 내로 공격대가 도착할 겁니다." "빨리 와야 할 텐데... 전처럼 일이 다 끝난 후에 도착한다면 큰일이야. 저 녀석들은 떼거지로 옮겨다니니까 우리들만으로는 어떻게 기습을 가할 수도 없고 말이지." 맥스가 한참 투덜거리고 있을 때, 망원경을 들고 있던 사내가 급히 말했다. "이봐, 저놈들 벌써 끝냇어. 전처럼 곧장 공간 이동해 버리면 큰일인데..." 맥스도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이미 전에도 한 번 이런 식으로 놓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설마... 하지만 그럴지도 몰라. 제발 빨리 와라, 굼벵이들아!" "어어? 저 마법사 녀석, 공간 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있어. 어딘가로 공간 이동하려는 모양이야." "제기랄! 이번에도 또 실패인가?" 그들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아래쪽 산중턱쯤에서 뿌연 빛이 일렁였다. 그리고는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료들이 나타난 것을 재빨리 알아 본 사내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아직까지 망원경으로 적을 주시하고 있는 동료의 어깨를 툭 치면서 소리치듯 말했다. "이봐, 맥스! 도착했다구." "어디?" 맥스가 동료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급히 시선을 돌렸을 때 공격대는 이미 여섯 대의 타이탄을 꺼내 드리고 탑승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네 명의 기사들은 두 명의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상대방 마법사를 사냥하기 위해 밑으로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 재빠른 동작에 감탄했다는 듯 맥스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야~! 굿 타이밍이야. 아직도 놈들은 도망 못 쳤어. 이제 느긋하게 구경하는 일만 남았군." "도와주지 않아도 될까?" 맥스는 동료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는 듯 신랄한 표정으로 맞받아 쳤다. "너 미쳤냐? 네 실력을 알아야지. 우리는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는 게 도와 주는 거야." "그도 그렇겠지." 맥스와 그의 동료가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적들도 이미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세 대를 급조해서 만든 것처럼 투박하게 생긴 큼직한 타이탄을 꺼내 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법사나 기사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어디론가 피신해 버렸을 것이다. "저 녀석들, 아주 훈련을 잘 받은 놈들이야. 실력도 대단히 뛰어나고 말이지. 방금 소탕전을 벌이는 것 봤지? 순식간에 수십 명을 죽여 버리잖아." 맥스의 말에 상대는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헤헤..., 아무리 그래도 은십자 기사단의 정예들에 견줄 수 있겠어? 저놈들 타이탄이 덩치가 조금 큰 것 같지만 저 모양을 보라구. 철판만 덕지덕지 붙인게 누가 봐도 대충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크라레스 같은 작은 국가가 우수한 타이탄을 만들 능력이 있겠어?" 그의 말에 맥스도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과연 무식하게도 생겼구먼..." 거기다가 숫자도 이쪽이 훨씬 많잖아. 압승일 거야. 곧 이어 양쪽의 타이탄들이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참 전투를 지켜보던 사내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어? 그렇지도 않은데? 6대 3인데도 저 녀석들 잘 버티고 있잖아. 확실히 덩치가 크니까 유리한 면도 있는 모양이군." "설마? 내가 듣기로는 표준 중량을 벗어날 정도로 무겁게 만들어 봐야 동작만 굼떠진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놈들 타이탄에 붙은 엑스시온이 상당히 강력하다는 말인가?" "글쎄..., 그거야 알 수가 없지." 더 이상 할 일이 없자 살금살금 그들 옆으로 다가와서 같이 구경하던 쟈크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저쪽 타이탄이 훨씬 더 강력합니다. 움직이는 속도도 오히려 저 덩치 큰 타이탄이 더 빨라 보여요. 속도나 파워 면에서 상대쪽 타이탄이 월등합니다. 하지만 원체 이쪽 숫자가 많으니까 밀리고 있는 것뿐이죠." 자신들보다는 타이탄을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마법사 쟈크가 그렇게 말하자 맥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뭐야? 그렇다면 저놈들을 상대하려면 금십자 기사단 정도가 동원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기야,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감히 본국을 침공할 생각을 했겠지." "아무리 그래도 크라레스의 군사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경우에도 실력이나 타이탄의 성능은 어떤지 모르지만 숫자에서 밀리고 있지 않습니까?" "크흐흐흐, 그건 그래. 그래도 녀석들 제법 버티는군." "아마 로래지 않아 결판이 나겠죠." 정말 대단하군. 흐흐흐..., 며칠 동안 여기서 죽치고 있으면 놈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어. "대단하죠? 타이탄들끼리 치고 받는 것은 정말 돈 주고도 보기 어려운데." 바로 이때 그들의 시야에 공간 이동을 해 오는 또 다른 무리들이 잡혔다. 희뿌연 빛이 번쩍이더니 10여 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쪽을 가리키며 맥스가 외쳤다. "이봐! 저것들은 또 뭐지? 쟈크 자네, 도대체 증원군을 얼마나 요청한 거야?" "그, 글쎄요." 그들은 새롭게 나타난 인물들이 과연 어느 편인지 몰라서 허둥대고 있었다. 새롭게 나타난 녀석들이 아군이라면 모르겠지만 적이라면 낭패였다. 엄청나게 곤란한 사태를 맞게 되는 것이었다. 새롭게 나타난 인물들 중에서 약간 체구가 작아 보이는 인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자신들을 향해 가르키자 그들은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 작은 체구의 인물이 자신들 쪽을 가리키자 건장해 보이는 무사 한 명이 그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인물들의 뒤편 공간이 활짝 열리면서 아홉 대의 타이탄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공간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는 타이탄들이 모두들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단순한 형태의 타이탄들인 것을 보고 맥스가 놀라서 외쳤다. "저, 적이닷!" "모두들 튀어!" 자신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기사가 적이라는 것과 그 달려오는 속도로 봤을 때 자신들보다 한참 윗줄에 놓이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을 눈치 채자, 그들은 이제부터 벌어지게 될 돈주고도 못 볼 구경거리 를 구경할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죽자고 도망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추격자가 단 한 명이었기에 자신들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서 각기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야 최소한 50퍼센트 정도로 생존율을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명의 기사가 무력한 자신을 내팽개치고 죽자고 도망 쳐 버리자 이제 홀러 버려진 쟈크는 계속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사를 향해 흐트러지는 정신을 억누르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에이비에이션(Aviatoin : 비행마법)!" 다행히 아직 거리가 꽤 많이 떨어져 있었기에 쟈크는 상대가 도착하기 전에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고, 곧이어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곧이어 방금 전까지 쟈크가 있던 위치까지 도착한 상대방 기사는 재빨리 품 속에서 단검을 꺼내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얄미운 마법사 녀석을 향해 던졌다. 그런 다음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둘 중 한 녀석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쟈크는 기사의 행동이 워낙 빨랐기에 기사가 자신을 향해 뭔가를 던졌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계속 고도(高度)를 올리다가 사타구니 쪽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지독한 고통에 비명을 터뜨렸다. "으아아악!" 쟈크는 거의 수십 미터가 넘는 높이로 비상을 하고 있던 상태였기에 고통에 의해 정신이 흩어지며 마법이 깨진 순간, 쟈크의 몸은 땅바닥을 향해 급속도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퍽!"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사방으로 피가 튀는 것으로 쟈크는 자신의 생애를 비통하게 마감할 수밖에 없었고, 살 길을 찾아서 튄 둘 중의 한 명에게도 쟈크와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떠그랄! 더럽게 빠르군. 하필이면 왜 내 뒤에 붙은 거야? 맥스나 따라가지.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억!" 뒤쪽에서 점차 거리를 좁혀 오고 있는 상대편 기사를 보며 투덜거리는 순간, 상대가 품 속에서 단검을 떠내서 던지자 사내는 다급한 신음을 삼키며 재빨리 피했다. 하지만 그가 단검을 피한다고 무리하게 진행 방향을 비튼 사이 상대와의 거리는 더욱 좁혀지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될 때까지 달아나던 사내는 이윽고 검을 뽑아 들며 반전했다. 하지만 그가 채 반전을 끝내기도 전에 뒤에서 쫓던 상대는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그를 지나쳐 버렸다. 뒤쫓던 상대는 달리던 속도가 워낙 빨라서인지 재빨리 반전하지 못하고 크게 원을 그리며 뒤로 돌아 뛰어가 버렸다. 하지만 남아 있던 사내는 그제야 자신이 이미 상대의 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독하게 빠른 검..., 으욱!" 사내가 쓰러지자 그의 옆구리 쪽으로 길게 나 있던 상처가 더욱 넓게 벌어지며 폭포수처럼 피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내가 숨을 거두자 피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서로간에 반대 방향으로 도망 쳤고, 가공할 실력을 지닌 것처럼 느껴졌던 상대방은 운 좋게도 동료를 쫓아가 버렸다. 맥스는 죽자고 달려가면서 무력한 자신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자신이 아닌 자신의 동료를 뒤따라 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도 들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나 하는 일말의 회의감이 들었지만 맥스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그런 순진한 감정을 쫓아 내 버렸다. 동료들의 희생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맥스는 잠시지만 혼란한 와중에 자신이 달리는 속도가 느려졌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사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죽은 동료를 대신해서 상부에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방 기사 녀석이 얼마나 꽁지가 빠지게 도망 쳤는지, 첫 번째 놈을 황천으로 보내고 나서 돌아왔을 때 이미 녀석은 어디로 도망 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놈의 흔적을 대충 뒤지다가 잡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직도 쿵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타이탄들끼리의 전투는 상당히 오래 끄는 것이 정석이었기에 어쩌면 서둘러 달려간다면 자신의 먹잇감이 한 대 정도는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격전지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기사들의 실력도 이쪽이 약간 앞서는 상태에서 등급이 앞서는 타이탄으로 12대 10으로 싸웠으니 이렇듯 결과가 빨리 나 버린 것이었다. "제기랄! 내 것도 하나 남겨 둬야지. 그렇게 빨리 끝내 버리는 법이 어디 있어?" 사내의 투덜거림에, 자신의 타이탄을 이용해서 뒤처리를 하고 있던 동료가 낄낄거렸다. "헤헤, 미적거리다가 지금에야 나타난 녀석이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그건 그렇고 갔던 것은 어떻게 됐어?" "그놈들 어찌나 재빠르던지 한 놈은 놓쳤어." "설마?" "아니야. 내가 뛰어가니까 아예 저항할 생각도 안 하고 바로 튀더라구. 그것도 한 놈은 이쪽, 한 놈은 저쪽! 내 몸이 두 개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었어. 자식들, 반항이라도 좀 했으면 모두 다 황천으로 보낼 수 있었는데..." "뭐, 다음에는 기회가 오겠지." "그건 그렇고 대장은?" "저쪽에서 포로를 심문중이야. 뭔가 괜찮은 정보라도 건지면 좋을텐데 말이지." "정말 거창하게도 해치웠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시체 더미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내린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소감이었다.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들어선 곳은 제법 큰 마을이었는데, 식사나 하고 갈까 하는 생각에 들어선 후 그들이 본 광경은 반쯤 썩어 버린 수많은 시체들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체들이 문제였다. 군인들끼리 싸우다가 서로가 죽였다고 한다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이건 아무런 힘도 없는 마을 주민들을 학살해 놓았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행해진 이 학살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쓰러진 시체들 외에 광장 한복판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인물의 시체가 가로수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반란 분자들에게 협조하면 이렇게 해주겠다는 명확한 포고문까지 붙어 있었다. 다크는 이리저리 둘러본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좀..., 심하네요. 아무리 보급 상태가 안 좋고, 또 게릴라들 때문에 힘들다고 해도 이런 방식은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아요. 이건 최후에나 쓰는 방법이지, 지금 크라레스에는 충분한 힘이 있는데..." "그건 아니야. 나도 오래 전에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지. 이런 광경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말이야. 이건 크라레스라는 나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야. 이 나라만 이런 식으로 행했다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만, 다들 그러는 것 같거든. 왜 호비트란 종족들은 이렇게 서로를 못 잡아 먹어서 쓸데없는 곳에 정력을 낭비하지? 왜 쓸데없이 적을 만들어서 전쟁을 벌이는지 이해를 못 하겠구나." "글쎄요. 아마도, 욕심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겠죠." "욕심이 많다고? 그건 무슨 말이냐?" "아버지는 그런 거 못 느껴 봤어요? 예를 들어 그러니까 으응..., 아버지가 예전에 살던 곳 주변에 혹시 다른 드래곤의 레어가 없었나요?" 원래가 생각이란 것을 깊게 안 하던 인물이 뭔가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한 예를 찾아 내려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물음에 아르티어스는 자부심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없어. 오래 전부터 말토리오 산맥은 나 혼자만의 것이었지. 그러니까 다른 드래곤들이 나를 말토리오의 지배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냐?" "말토리오 산맥은 아주 넓은 곳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혼자서 사세요?" "우리들 드래곤의 경우, 누군가가 먼저 둥지를 틀고 살고 있는 곳 주변에 새로이 정착하고자 하는 녀석이 생겼을 때는, 새로 정착하려는 녀석이 먼저 둥지를 튼 드래곤들을 찾아가서 정중하게 부탁을 해야 하지. 여기에 둥지를 틀고자 하는데 괜찮겠느냐고 말이야. 그때 먼저 살고 있던 드래곤이 모두 좋다고 허락을 해야 둥지를 틀 수 있는 거지." 하지만 다크는 아르티어스에게 미심쩍은 시선을 던지며 비꼬았다. "그렇다면 다른 드래곤들에게 허락을 안 했다는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들이 자신을 그렇게 속 좁은 드래곤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나는 그렇게 속 좁은 드래곤이 아니야. 이웃이 하나쯤 있어도 좋을 텐데, 이상하게도 우리 골드 일족 주변에는 다른 드래곤들이 잘 정착하지 않아. 아마도 녀석들이 봤을 때 재혜나 힘에서 모두 다 우리들 골드 일족에게 밀리니까 근처에 살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거겠지. 하하하핫!" 다크는 호기스럽게 웃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도 골드 드래곤들은 모두들 다른 드래곤보다는 자신들이 훨씬 잘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고, 또 그것을 유감없이 다른 드래곤들에게 표현하고 있는 모양이니까 모두들 "에잇, 재수없어." 하면서 그 주변에 안 오는 모양이었다. 대충 그 전말을 짐작한 다크는 헤시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헤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렇다면, 옆에 드래곤의 레어가 있다고 가장하자구요." "그래, 그렇게 가정한다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 레어에 가 보니까 아버지의 레어보다 훨씬 근사하고 쾌적하더라 이거죠. 그때는 어떤 생각이 들어요?" 아들이 말하는 의도가 뭔지를 잘 알 수가 없었기에 아르티어스는 얼떨떨한 어조로 답했다. "그..., 글쎄? 나도 드워프 몇 마리 잡아다가 이렇게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 "아니, 그렇게 말구요. 이 녀석을 해치우든지 아니면 내쫓아 버리고 이 둥지르 뺏을 생각은 안 들어요?"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아들을 보고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는 듯 질책했다. "뭐?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냐? 겨우 레어 하나 뺏자고 드래곤들끼리 집안 싸움을 벌이라는 말이야? 그냥 드워프들을 찾아가서 족치는 편이 훨씬 쉬운데 그럴 필요가 있겠어? 또 우리들에게 있어서 레어가 크든 작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렇기에 일부 드래곤들은 그냥 동굴에서 살기도 해." '으음, 주택 문제로는 해결이 안 되는 군.' 하고 생각하면 서 다크는 또 다른 것이 뭐가 없을까 궁리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르티어스의 창고 가득히 쌓여 있던 그것. "그렇다면 황금은 어때요? 전에 둥지에 가 보니까 많이도 쌓아 놨던데. 다른 드래곤의 레어에 아버지가 모은 것보다 더 많다면 그걸 뺏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아르티어스의 대답은 전과 동일했다. "드래곤의 것을 탐내는 것보다는 드워프나 호비트를 족치는 쪽이 빠르고 더욱 쉽지. 또 겨우 황금 따위 뺏자고 그렇게 치고 받을 필요는 없어. 많이 쌓아 둬 봐야 그거 일 년에 한 번 구경할까 말까 하는데 그렇게 많이 모아 봐야 별 소용이 없거든."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 그렇다면 관점을 바꿔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하죠. 사람들이 만약 황금이나 토지를 원한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드래곤을 잡아다가 족칠 수도 없으니까 만만한 상대를 고를 거 아니에요? 드워프 따위 족쳐 봐야 모아 놓은 황금도 별로 없을 거고, 이웃 나라를 박살내서 황금을 뺏는 게 더 쉽죠. 뭐 그런 식으로 서로 치고 받는 거예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아르티어스가 끄덕거렸다. 다크의 말을 통해 몇 가지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드래곤이 드래곤들끼리 싸우지 않고 호비트나 드워프, 또는 엘프를 족치는 이유는 드래곤을 족치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비트나 드워프, 또는 엘프가 만약 드래곤보다 더 강력하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족치기 쉬운 드래곤을 택하겠지.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드래곤도 동족들끼는 충동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뿐, 절대로 호비트보다 욕심이 덜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흐음. 그러니까 호비트들이 이렇듯 난리를 치는 이유가 욕심 때문이라 이거지?" "그럼요. 욕심에는 아주 많은 종류가 있죠. 재물에 대한 것, 권력에 대한 것, 무술에 대한 것 등등 별별 것들이 다 있다구요.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움을 걸고, 남을 중상모략하고..." 다크가 줄줄이 나열을 하기 시작하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아. 만약 그런 식으로 엉망진창인 종족이라면 오래 전에 멸망의 길에 들어섰어야 해. 하지만 호비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 가고 있거든." "아뇨, 욕심이 없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죠. 하지만 모두들 그렇게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했다가는 엉망이 되기에 법이라는 것을 만들었지요. 남을 이유 없이 죽인다든지, 또는 물건을 훔친다든지, 폭력을 가했다든지 하면 잡아다가 벌을 주죠. 그 때문에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합법적인 노력을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이 탐이 난다면 훔치거나 빼앗지 않고 일을 해서 번 돈으로 구입하는 식이 되는 거죠. 전에 제가 살던 곳도 그랬고, 여기도 대충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하지만 국가들 간에는 제재를 가할 만한 다른 수단이 없으니 당연히 강한 국가가 마음대로 하게 되죠.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흐음..., 대충 이해가 가는구나. 그러니까 여기 내가 보고 있는 작품은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거로구먼?" "그럼요, 당연하 거죠.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가 충돌하면 이 모양이 되는 거죠. 물론 이들이야 지키려는 자는 아니지만, 지키려는 자를 도와 줬다든지, 뭐 그와 비슷한 이유겠죠." "그건 그렇고, 식사는 어디서 하지? 시체들보고 밥을 해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뭐 그런 걸 가지고 걱정을 해요? 딴 마을로 가면 되죠. 이런 식으로 본보기를 보이는 것은 딴 사람들이 보라는 뜻인데, 주변에 있는 다른 마을들까지 몽땅 다 이렇게 만들지는 않죠. 왜냐하면, 와서 볼 사람이 꼭 있어야 본보기 라는 것이 빛을 발하거든요." "그도 그렇군. 어디 보자." 아르티어스는 품 속에서 지도를 꺼내 뒤적거리다가 말했다. "여기 있군. 저 길을 따라 한 10 킬로쯤 내려가면 마을이 하나 더 있어." 브로마네스의 영토 죠드는 키에리가 짐 보따리를 드리고 움막집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자 기겁을 하며 말했다.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으셨는데 어디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죠드의 말에 키에리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대충 회복되었으니 걱정 말게나. 가 보고 싶은 데가 있어서 말일세." "어디 말씀이십니까?" "테롯사 산맥의 남쪽." "예에? 거기는 갑자기 왜 가시려고 하십니까?" "그냥 가 보고 싶구먼." "가만..., 테롯사 산맥이라면." "깊게 생각할 것 없네. 자네도 제임스가 올린 보고서를 봤으면 알겠지만 그라세리안이 실종된 곳이지." "예, 그런데 거기는 왜?" "그리고 우리들이 처음 그라세리안을 만난 곳이기도 해." "예?" "나는 아들 녀석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라세리안이 사망하거나 납치 되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아. 아마도 그는 또다시 은둔을 시작했는지도 모르지. 처음 그를 만난 곳과 마지막으로 그가 사라진 곳이 같다면 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죠드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야 그렇지요." "나는 한 번 더 그에게 부탁하려고 하네. 코린트를 위해 조금만 더 일해 주지 않겠느냐고 말일세. 여기서 그곳까지는 너무도 멀지. 자네가 함께 가기 싫다면 그쪽으로 공간 이동만 시켜 주면 돼." "아닙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짐이 별로 없으니까 시간도 별로 안 걸릴 겁니다." 죠드는 재빨리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실 이곳으로 은밀하게 키에리를 모시고 와야 했기에 가지고 온 것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 와중에도 가지고 온 작은 보따리 안에는 마법사로서 여행을 하는 데 거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모두 들어 있었기에 그것을 그냥 놔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운명의 날이 마침내 찾아왔다. 크루마가 금지된 마법들 중에서 가장 악랄한 것이라고 알려진 유성 소환 마법을 쓴 이상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유성 소환 마법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정밀하고,또 매우 힘든 마법이다. 저 머나먼 우주에 모여 있는 자그마한 혹성들 중의 하나를 끌어 와서 지구에 떨어뜨리는 이 마법은 유성이 도착하는 데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최강의 위력을 지닌 공격 마법이었다. 멀리 떨어진 혹성에 힘을 가해 그것이 일정한 궤도로 날아와서 시술자가 원하는 정확한 위치에 메다꽂히게 만드는 것은 정말 엄청나게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해서 날아오기 시작한 유성은 정확한 위치 파악이 불가능 하기에 상대방으로서는 알면서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쯤 대충 떨어질 때가 되지 않았나?" 로체스터 공작은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노 마법사에게 물어 보고 유성 소환 마법의 위력을 구경하기에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기다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몇 시간이나 기다렸는데도 이놈의 유성은 떨어질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아록 있는 노 마법사는 송구스러워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전하." "코린티아는 어떻게 되었지?" "예, 모든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사옵니다. 생각한 것보다는 혼란이 적었다는 제임스 각하의 보고였사옵니다." "그런가?"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뭔가?" "예, 인질로 잡아 놨던 각국의 왕자들 중에서 일부가 그 혼란을 틈타서 탈출했사옵니다. 지금 수색중이온데..." 로체스터 공작은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놔 둬라." "예? 하지만..." "대신 그놈들의 명단과 소속 국가명을 상세히 적어서 보고서를 올리도록 해라.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면 그 국가의 국왕들을 문책하면 되니까 말이지." "저, 하지만 그 와중에 크라레스 왕자도 도망 쳤는데요? 지하 감옥에서 꺼내어 이송하는 도중에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와 있습니다." 이번에는 로체스터도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왕자를 인질로 잡고 계속 협박을 했었지만 아직까지 통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만약 도저히 안 된다면 인질로서 가치가 없는 왕자를 공개 처형하여 귀족들의 사기를 높여 줄 생각이었는데, 그 왕자 녀석이 이걸 눈치 챘는지 도망 쳐 버렸던 것이다. "크라레스의 왕자가? 으음...,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지. 그놈들은 처음부터 왕자의 생사(生死) 따위는 걱정하지도 않고 전쟁을 벌인 거니까 말이야. 왕자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던 놈들인데, 그런 가치 없는 인질이 없어졌다고 해서 크게 걱정할 것은 없겠지." 노 마법사는 주위를 둘러본 후 불꽃놀이를 구경할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기에 훔쳐들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 그런데 그 왕자의 건 말이옵니다, 서거하신 키에리 전하의 명령에 따라 지하 감옥에서 약간의 세뇌 작업을 행했사옵니다. 일단 적국의 왕자이니 만큼 다음에 크라레스의 국왕이 될 가능성도 크지 않겠사옵니까?" 노 마법사의 말에 로체스터는 크게 흥미를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역시 그것이 어느 정도 비밀을 요하는 사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어떻게 세뇌를 했는데?" "예, 아예 바군다면 표시가 날 테니까 조금만 수정했사옵니다. 기억을 약간 왜곡시켰고, 또 본능을 조금 자극해 놓았사옵니다. 그리고 자제력을 조금 억제해 놨구요. 사실 성장이 끝난 인물에게 이런 방식을 쓴다면 별로 큰 영향이 없겠지만 성장기의 인물은 다르지요. 지금은 별로 표시가 나지 않겠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엉뚱한 인물로 변해 버릴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래? 대충 언제쯤 되면 그 결과를 알 수 있지?"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쯤 후면 결과가 나올 것이옵니다. 아마도 지독하게 호색하고 게으른 욕심 덩어리에 부하들을 못 믿는 그런 희한한 인물이 되어 있겠죠." "크크크, 5년이라... 그때까지 크라레스가 멸망하지 않고 남아 있을까?" "그것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천천히 인성이 변해야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겠죠. 어쩌면 왕좌를 빨리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할지도 모르구요." "글쎄, 그건 그때가 되어 봐야 알겠지. 그건 그렇고 저기 오는군." 불현듯 로체스터 공작이 시퍼런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자, 노 마법사는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몇 군데 구름 조각이 떠 있기는 했지만, 밤도 아니고 이런 대낮에 유성을 본다는 것은 무리였다. "예? 어디에 말이옵니까?" "참, 자네 눈에는 안 보이나? 저 멀리 하얗게 빛나면서 떨어지는 것이." 시간이 좀더 지나자 노 마법사의 눈에도 하얗게 빛나며 떨어지는 작은 덩어리가 들어왔다. 엄청나게 큰 유성이었기에 눈에 보인 것이다. 유성은 정확히 쟈크렌 요새 위쪽은 아니었지만 대충 그 부근쯤에 떨어질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법서에 기록되어 있는 위력의 절반 정도의 위력만 낸다고 해도 쟈크렌 요새는 먼지로 화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바로 이대 이변이 일어났다. 쟈크렌 요새의 오른쪽에 위치한 산들 중의 하나에서 붉은색의 빛 줄기가 하늘 위로 치솟는 것이 보였더ㅏ. 그리고 곧 이어 들려 오는 지축을 울리는 대폭발. 하늘 위에는 새로운 태양이 탄생한 것처럼 거대한 빛의 덩어리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른 붉은색 빛 줄기가 가지는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그 폭발에 따른 충격파까지 몽땅 다 하늘 위로 날려 버린 듯 아래쪽에서는 엄처나게 밝은 빛무리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로체스터 공작이 물었지만, 노 마법사 역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지 못했다. "저, 그건 소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혹시 드래곤이 뭔가 일을 벌린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사옵니다." "호오, 그렇다면 잘 되었군. 모두들 다시 쟈크렌 요새로 불러 모아. 그 공백을 틈타서 크루마 놈들이 쟈크렌 요새를 점령하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지. 그 천혜의 요새를 크루마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 않겠나?" "전하, 그것을 잠시만 미룰 수 없겠사옵니까?" "왜 그러나? 모든 게 잘 끝나지 않았나?" "그게 아니옵고, 아마도 빛 줄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짐작한건대, 저쪽은 웜 급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의 영토이옵니다. 웜 급의 레드 드래곤이 자시의 영토를 향해 날아온 유성 때문에 분노했다면..., 그렇다면..." 이제야 노 마법사가 걱정하고 있는 것이 뭔지를 눈치 챈 로체스터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큰일이군." 노 마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 궁리 저 궁리 한다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는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오, 좋은 의견이라도 있나?" "예,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옵니다. 재빨리 브로마네스에게 사신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푸짐한 선물과 함께 그의 둥지 위로 떨어지는 유성을 어떤 녀석이 만들었는지 넌지시 알려 주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크루마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브로마네스의 분노 를 받아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겠지요. 어떻사옵니까?" 로체스터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답했다. "좋아, 그 의견이 매우 마음에 드는군. 까미유를 불러라. 그 녀석이라며 충분히 브로마네스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일을 해 내겠지." "예, 전하." 하얀 빛을 뿌리며 일어난 대 폭발. 다크의 능력도 엄청나게 뛰어났지만 아르티어스의 막강한 방어 마법 덕분에 그들은 로체스터 공작과는 달리 크라레인 시에서 고작 3킬로 정도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유성이 떨어지기만을 학수 고대하며 기다렸다. 이것보다 더 대단한 불꽃놀이는 구경하기 힘들다는 아르티어스의 꾀임에 넘어간 다크는 아르티어스가 그들의 주위에 둘러쳐 놓은 열 겹이 넘는 방어 마법진의 한가운데에서 마법과 대자연이 어우러져서 만들어낸 이 경이로운 폭발을 구경할 수 있었다. 유성 소환 마법의 특성상 오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아르티어스는 자신들의 머리 위에 유성이 직격해도 끄떡없을 정도로 강력한 방어 마법진을 친 것이었는데, 정작 유성은 그들로부터 5킬로, 크라레인 시로부터 3킬로 정도쯤 벗어난 위치에 떨어졌다. "정말 장관이지?" 유성이 떨어지면서 벌어진 대 폭발은 둘째치고 그에 따른 강력한 충격파에 3킬로쯤 떨어진 크라레인 시가 박살나는 것을 보고 입을 떡벌어진 다크는 잠시 할 말을 잊고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그, 그렇네요." 얼빠진 아들의 모습에 대단히 만족한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법의 힘이란 것은 저렇게 위대한 것이란다. 겨우 검술 따위 아무리 익혀도 저 정도 위력은 죽었다 깨어나도 낼 수 없지. 어때? 이제 다시 마법을 배워 볼 의욕이 솟아 나오지 않냐?" "아뇨, 저건 너무 심한 것 같아요. 어떻게 저렇게 강력할 수가 있죠? 저런 위력이라면 쓸데없는 희생자만 생기는 것 아니에요?" "뭐,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서 싸울 필요는 없지. 우연히 저 근처에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놈들은 그날 재수가 없었을 뿐이야. 그런 놈들까지 생각한다면 무술도 익힐 수 없는 것 아니겠냐? 예를 들어 검을 던졌는데 맞으라는 녀석은 피하고 그 뒤로 지나가던 행인이 맞을 수도 있는 거잖아. 지나가던 사람 한 명이 죽으나 만 명이 죽으나 똑 같은 거 아니냐?" 아르티어스는 아들의 동의를 구하려고 한 말이었지만 아들의 대답은 그의 기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녀는 오히려 아르티어스의 정신 상태가 의심된다는 듯 새초롬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틀리죠. 아버지는 숫자 관념이 그렇게 없어요? 하나하고 만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구요." "내 생각에는 별로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야. 개미 구멍 근처에 앉아서 한 마리를 죽이는 거나 백 마리를 죽이는 거나 똑 같은 거야. 둘 다 무료할 뿐이지." "뭐, 아버지야 종족이 다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만약 상대가 드래곤이라고 해도 한 마리가 죽으나 백 마리가 죽으나 마찬가지예요?" "그야 당연하지. 나약한 놈들은 죽어 봐야 별것도 아니야. 평소에 수련을 안 한 탓이지. 그 기나긴 시간, 레어에 틀어박혀서 마법이나 익힐 일이지 낮잠이나 퍼 잤으니 죽어도 싼 거라구." "그런 식으로 생각하신다면 뭐 할 말 없죠." 아르티어스는 유성의 폭발로 생긴 거대한 구멍과 완전히 박살나 버린 크라레인 시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 이제는 어떻게 할 거냐? 다시 날아올 유성은 없는 모양인데..." "뭐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돌아가죠. 이제 시체 더미 보는 것도 질렸으니까." "흐음... 그러니까 감히 내 영토에다가 유성을 떨어뜨린 놈들이 크루마의 마법사들이라는 거냐?" 그야말로 잡티 하나 안 섞인 찬란한 금발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용모의 사내, 바로 이 사내가 바로 유성을 간단하게 소멸시킨 웜 급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였다. 그에게서 뿜어 나오는 엄청난 투기(鬪氣)와 살기(殺氣) 덕분에 까미유와 함께 왔던 짐꾼들은 모두들 파랗게 질린 채 한쪽 구석에 모여 눈치만 힐끔거리고 있었지만, 까미유는 브로마네스 앞에서도 할 말은 차근차근 침착하게 다하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주 치졸한 놈들이죠." "훗! 아무리 호비트 따위가 간덩이가 커져도 그렇지, 감히 내 영토에?" "호비트가 아니라 엘프일 것이라는 것이 아마도 정확한 추리일 것입니다. 크루마에는 엘프들이 아주 많이 살거든요." 브로마네스는 앞에 서 있는 젊은이를 꽤나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렇듯 침착하게 말하는 호비트는 처음 봤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 광폭한 눈길을 그대로 받아 내는 호비트 또한.... "엘프들이라...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그들이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썼다는 것은 좀 의외로군. 그런데 네 녀석은 누구냐?" 갑자기 자신이 누군지 묻자 까미유는 상대의 저의가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순순히 답변을 했다. "예? 저는 코린트의 기사인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입니다. 이번에 유성이 떨어진 것 때문에 브로마네스 님께서 열 받으... 아니, 진노하셨을 거라는 추측 때문에 그걸 사용한 사람이 누군지 명확하게 알려 드리라는 로체스터 공작 전하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죠." 까미유는 얼마 전 어머니가 전사함으로 인해 그녀의 작위를 이어받아 명실공히 후작으로서 각하 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제2근위대의 대장이라는 중책을 떠맡고 있었다. 그런 까미유의 대답을 듣고 브로마네스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요 근래 밑에서 투닥거리던데, 이번 일을 기회로 내가 크루마에다 복수해 주기를 원해서 온 것은 아니고?" 정곡을 찌르는 상대의 말에 까미유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헤헤..., 그런 마음도 있죠. 하지만 브로마네스 님의 진노가 피해자인 코린트 쪽에 떨어지는 것을 막는 게 우선입니다." 브로마네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꽤나 정직한 놈이군. 그래 네 녀석 말은 잘 알았으니 가 보거라." "예. 저..., 그런데..." 상대가 가지 않고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자 브로마네스가 말했다. "왜? 또 다른 용무가 있느냐?" "예,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한 가지만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 "뭐냐?" "혹시 검술을 극한까지 익힌 헤즐링이 진짜로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죠." "뭐라고? 검술을 익힌 헤즐링이라고? 그런데 그 질문을 하는 저의가 뭔지 궁금하군." "저, 그건 다름이 아니라..." 까미유는 여태껏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상세하게 브로마네스에게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브로마네스의 표정은 매우 심각하게 변해 갔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호비트의 말을 들어 보니 그의 추리도 일리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로마네스는 까미유보다 숨겨진 진실을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코린트의 대 마법사인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가 사실은 광포 하기로는 레드 드래곤을 앞선다는 블루 드래곤이라는 것이라든지, 호비트와 호비트로 트랜스포메이션 한 드래곤이 겉모양은 같더라도 마나를 구동시키는 내부는 다르기에 절대로 절정의 검술은 익히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등이었다. "흐음, 네 녀석의 추리도 그럴듯하다마는 아마도 그 호비트 계집 아이가 드래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그 아이를 따라다닌다는 아버지는 드래곤일 가능성이 매우 크겠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역사상 호비트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였던 드래곤은 꽤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그 아이는 호비트고 드래곤이 양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군." "그렇다면, 코린트 최강의 고수이셨던 키에리 발렌시아드 전하를 패배시킨 그 꼬마 계집 애가 인간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나이에 그런 검술을 익힌다는 사실 자체가 도저히 불가능한데도 말입니까?" 까미유의 말에 브로마네스도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의 말에 상당히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냥 여자도 아니고 꼬마 여자라고?" "예, 15세 정도... 아무리 많이 봐 줘도 18세는 힘들죠. 마법사들에게 물어 봤지만 그렇게 어린 몸을 유지하는 것은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로체스터 전하께서도 절대로 그런 몸으로 검술을 익힌다는 것음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검술을 익히다 보면 근육도 붙는 것이고 최고의 경지로 올라가면 육신도 젊어지긴 하지만 어려지면서도 그렇게 가냘픈 몸매로 바뀐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셨죠." "호오, 그렇다면 뭐냐? 호비트는 절대로 아니라는 말이냐?" "예, 그래서 내린 결론이 드래곤이었습니다만... 드래곤은 원래 성체가 되면 독립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버지가 따라왔으니 헤즐링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는 것이었죠." "아주 재미있는 문제로군. 글쎄..., 그건 내가 좀더 조사해 보면 알게 되겠지. 그건 그렇고 일 다 끝났으면 가 보거라." "예,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 젊은이를 따라서 짐꾼들이 허겁지겁 산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며 브로마네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야? 진짜 헤즐링인가? 그래도 호비트들의 검술을 제대로 익힌 드래곤은 나하고 아르티어스뿐인 줄 알았는데, 누가 그 헤즐링에게 종족의 특성을 뛰어 넘어서 고급 검술을 가르쳤지? 나나 아르티어스도 그걸 익히지 못했었는데... 어쨌든 둘이 어울려 다니던 그때가 좋았지. 그 녀석이나 나나 그때는 젊었으니까. 으헤헤헤." 그렇게 말하면서 브로마네스는 자신의 허리에 매달려 고풍스런 멋을 풍기고 있는 바스타드 소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검은 아르티어스가 자신에게 선물한 것이었고, 자신은 그 대신 자신의 바스터 소드를 아르티어스에게 선물했었다. 레드 일족과 골드 일족은 원래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브로마네스와 아르티어스는 여행 도중에 만나서 매우 깊은 우정을 나눴다. 그때 서로간의 변치 않는 우정을 상징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적색에서 황금색으로 바꿨다. 물론 아르티어스도 황금색에서 적색으로 바꿨고.... "참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게 아니잖아. 감히 내 머리 위로 유성을 떨어뜨릴 생각을 한 녀석들부터 손을 봐 준 다음 그 궁금증은 천천히 해결하기로 하지. 흐흐흐흐흐." 지도에서 사라진 코린티아 시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사옵니다, 공작 전하." 부하의 표정에서 이미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챘지만, 공작은 시치미를 떼고 부하에게 질문했다. 그래야만 부하도 자신의 할 말을 하기가 쉬운 것이니까. "호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예. 적 타이탄 10기 파괴, 그리고 세 명의 포로를 잡아 왔사옵니다. 그런데 포로를 심문해 보니까 의외의 소득이 있었사옵니다." "그래. 뭔가?" "예, 이번에 투입된 은십자 기사단은 그 보유 전력의 절반인 32기인 것을 알아 냈사옵니다. 나머지는 모두 쟈크렌 요새에 남아 있다고 하옵니다. 그 외에 철십자 기사단 3개 전대, 30여 대를 합해 봐야 타이탄 60여 대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그런데 오늘 10기를 파괴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겨우 50기 남짓밖에 안 되옵니다." "부하의 보고에 공작은 싱글거리며 말했다." "아주 좋은 것을 알아 냈군.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 더 좋은 소식을 이미 알고 있지." "예?" "코린트의 수도 코린티아가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예? 어떻게 그럴 수가..." 경악하는 부하의 표정을 보며 공작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부하는 황급하게 표정을 감추며 죄송스런 표정을 지었다. 상관 앞에서 지나친 경박함을 보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작이 미소를 보인 이유는 달랐다. 자신도 그 사실을 보고받고 엄청나게 놀랐는데, 역시 평소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부하도 자신의 반응과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 지은 미소였던 것이다. "토지에르의 보고로는 처음 두 개까지는 막아 냈는데, 세 번째 유성이 상당히 옆 쪽으로 어긋나 떨어지면서 그 여파가 방어 마법진에 마나를 공급하던 보조 마법진을 쓸어 버렸다고 하더군. 그 다음은 뻔하지 않나? 방어 마법진은 제 기능을 상실했고, 곧장 코린티아 시는 박살나 버렸지. 아마도 코린트는 제2의 도시 케락스로 수도를 옮길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더군." "수도가 박살나 버린 바람에 코린트의 타격이 엄청나겠군요." "그야 이를 말인가? 대충 시외로 옮겼다고 하더라도, 코린트의 타이탄 생산 시설들 중에서 거의 70퍼센트 정도가 코린티아 시에 있었는데, 그것들을 잃었으니 아마도 타격이 엄청나겠지. 한동안은 제대로 된 타이탄 생산은 힘들다고 봐야 할 거야." "크루마가 뜻밖의 도움을 주는군요. 지금부터 맹공을 퍼부어서 녀석들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 내기만 하면 본국의 승리가 될 것이 확실하옵니다, 전하." "그야 이를 말인가? 참, 이번에 녀석들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니, 다음 번에는 확실하게 만회하려고 들 거야. 최소한 20기 이상의 타이탄을 동원해서 국지적인 병력 우세를 노리려고 들 테지." "하지만 전하, 여유 분의 타이탄이 그렇게 많지 않사옵니다.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사옵니다. 또 언제 놈들의 타이탄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이때에 전선에서 타이탄을 돌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 옵니다." "그 때문에 토지에르에게 지시해 뒀어. 내일 근위대 파견대가 합류 할 것이다." 공작이 말하는 근위대 파견대라는 것은 정식 명칭으로 유령 기사단 근위대 파견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근위대는 10기의 청기사를 보유중이었지만 공식 석상에서 청기사를 사용할 수는 없었기에 카르록시아를 근위대에서 넘겨 받은 유령 기사단이 그것들을 다시금 황궁에 파견하여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카프록시아를 전선으로 돌리는 것이옵니까?" "그 외에는 방법이 없잖은가? 그리고 녀석들이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타이탄을 쏟아 부을지 알 수 없으니 나도 가는 것이 좋겠지. 그리고 이번에는 인원을 좀더 엄선해서 가장 실력있는 녀석들만 추려 둬라. 재수 없으면 50기가 모두 다 등장할 수도 있어. 알겠나?" "예, 전하." "오늘과 같은 승리를 한두 번만 더 거두면 남쪽에 주둔중인 코린트의 타이탄은 전력이 거덜나게 되어 있어." "하지만 전하, 코린트가 추가 병력을 파병할 가능성도 예상해야 하지 않을까요? 크루마와는 전쟁이 끝났는데, 계속 쟈크렌 요새에 대규모 병력을 썩혀 두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들의 실력을 보여 준다면 코린트 쪽에서 먼저 화해를 청해 올 가능성이 커. 본국과 싸운다고 타이탄을 대량으로 소모한다면 그 다음에는 자국을 유지하기에도 벅찬 최악의 상황이 온다는 것을 모를 바보들은 아니겠지. 크루마가 아직도 건재한 이상 본국과 사생 결단을 하려고 들지는 않을 거야." "그 말씀을 들으니까 힘이 나는 것 같사옵니다, 전하. 그럼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그래, 격전을 벌이느라 수고했네. 푹 쉬게나." "옛!" 유성 공격에서 신..., 아니 드래곤의 도움으로 쟈크렌 요새가 파괴되는 것을 피하자 코린트 군은 재빨리 쟈크렌 요새로 돌아왔다. 쟈크렌 요새에는 대 타이탄용 방어 병기가 엄청나게 많은 관계로 적들도 섣불리 덤벼들기 힘든, 그야말로 요새 중의 요새였기에 그걸 크루마 쪽에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쟈크렌 요새에서 짐을 푼다고 북적거리던 병사들은 머리 위로 거대한 붉은 물체가 비상해 오르는 것을 보고 캄탄사를 터뜨리며 구겨아에 여념이 없었다. 브로마네스가 그 거대한 덩치를 이끌고 크루마를 향해 출발한 것은 까미유가 고자질을 하고 돌아간 후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무슨일이냐?" 요란하게 경보가 울리는 가운데 허겁지겁 자신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온 기사를 향해 미네르바가 짜증난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생각했을 때 코린트와의 전쟁이 종료된 상황에서 이렇듯 난리를 피울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전하, 큰일 났사옵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느냐?" "예,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사옵니다. 그 레드 드래곤이 이륙한 곳은 쟈코니아 산맥이온데, 그때부터 계속 추적해본 결과 엘프리안 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것이 확실하옵니다." "설마? 그 녀석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우연히 엘프리안이 있을 수도 있지않느냐?" "예, 그것도 그렇사오나..., 실은 쟈크렌 요새에 떨어지던 유성이 정체 불명의 붉은색 나는 빛 줄기에 가로막혀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켰사옵니다. 마법사들의 추측으로 그것이 레드 드래곤의 브래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 드래곤은 지도에 쟈크렌 요새 근처에 서식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포악한 웜 급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일 가능성이 크옵니다." 부하의 말에 미네르바는 아연실색했다. 얼마 전까지는 코린트라는 강적하고 아귀 다툼을 벌였는데 그게 무사히 끝나자 이번에는 레드 드래곤이라니.... "뭣이? 그렇다면 자신의 영토 쪽으로 유성이 날아간 것에 대해 그 드래곤이 화가 났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마법사들은 그쪽이 드래곤들의 집단 서식지인데도 왜 유성 소환 대상지로 선택한 것이지?" "예? 그건 저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책임 추궁은 드래곤을 막아 내고 난 다음에..." "이런 멍청한 녀석! 웜 급 레드 드래곤을 무슨 재주로 막아 낸다는 말이냐? 그린레이크를 불러라, 빨리!" "옛, 전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린레이크가 마법을 이용해서 우아하게도 날아서 도착했다. 미네르바나 그린레이크는 둘 다 공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마법사인 그린레이크보다는 소드 마스터인 미네르바가 한 단계 위였기에 그린레이크는 그녀의 호출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네르바는 슬쩍 그린레이크의 얼굴을 바라봤다가 재빨리 시선을 엘프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짙은 녹색의 길게 기른 머리카락 쪽으로 돌렸다. 물론 그린레이크의 얼굴은 모든 엘프들이 그러하듯 대단한 미모도 지니고 있었다. 이제 3백 살이 넘은 나이인 만큼 그 미모는 한꺼풀 수그러들고 있었지만, 중년의 나이치고는 엄청난 미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3백 살이 넘은 나이인 만큼 그 미모는 한꺼풀 수그러들고 있었지만, 중년의 나이치고는 엄청난 미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얼굴의 미모가 문제가 아니라 그린레이크의 표정이나 성격을 미네르바는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린레이크는 보통의 엘프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매우 강력한 힘과 자부심, 그리고 오만한 자신감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표정에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거기에다가 자신이 이 세상에 열 명도 존재하지 않는 7사이클 급의 대 마법사라는 사실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을 만만하게 보는 경향도 있었다. 언젠가도 한 번 미네르바를 어린애 취급했다가 혼찌검이 난 후, 그래도 미네르바 앞에서는 조심하는 형편이었지만, 저 얼굴 표정에 가득히 떠올라 있는 자부심과 자만심은 미네르바 따위가 자신보다 위에 있다는 것은 참기 힘들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린레이크는 미네르바를 지긋한 눈길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를 찾으셨소? 지금 바븐 일이 있으니 빨리 끝내 줬으면 좋겠소." 미네르바는 그의 오만한 말투에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지만 겨우 참았다. "알겠소, 그린레이크 공작. 본인도 그대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생각은 없소. 그대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보고를 받았겠지?" "물론 보고를 받았소. 레드 드래곤 한 마리가 이리로 날아오고 있다고 하더군." "이번에 행해진 유성 소환 마법의 사용은 내가 없을 때 결정된 것이라고 들었소. 그리고 유성 소환 대상지도 마법사들이 일방적으로 정했고 말이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소?" "그대가 알고 있는 그대로요." "그런데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왜 드래곤의 영토 주위에 유성 소환을 감행해 가지고 드래곤을, 그것도 웜 급에 이르는 강력한 레드 드래곤을 자극했느냐 하는 것이오." "하! 이 바쁜 때어 책임 추궁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게 할 일이 없소?" 그린레이크는 꼭 어린애를 다루듯 간단하게 질책한 후 미네르바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물론 브로마네스나 그라시안이 간섭해 올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었소. 유성이 정확히 자크렌 요새 위에 떨어졌다고 한다면 그 둘의 영토 경토 경계점이니 만큼 녀석들이 간섭할 가능성은 없었소. 하지만 보고를 들은 바에 의하면 운이 없게도 유성은 브로마네스의 영토 쪽으로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브로마네스가 뛰쳐나온 것이었고 말이오. 물론 유성 소환 마법의 특성상 오차가 아주 크기에 둘 중 한 드래곤은 뛰쳐나올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소. 하지만 유성을 브레스로 박살내 버리고 이쪽으로 올 거라고는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소." 오는 말이 별로 곱지 못한 관계로 가는 말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네르바는 한껏 비꼬는 어조로 그린레이크를 향해 말했다. "호오, 예상을 하고 있었다구? 그렇다면 분노한 레드 드래곤을 막을 방법 또한 생각해 뒀겠군. 엘프리안 시에 쳐진 방어 마법진으로 웜 급 레드 드래곤의 브래스를 막을 수 있소?" 하지만 그린레이크는 미네르바의 비꼬는 어조를 간단하게 무시하며 말했다. "떨어져 내리는 유성까지 박살내는 브레스인데, 물론 방어 마법진으로는 막을 수 없지. 대신 그것 때문에 준비해 둔 것이 있소. 진귀한 선물을 한다면 드래곤은 그깟 일은 간단히 잊어버리고 돌아갈 거외다." 그린레이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그 기발한 착상에 미네르바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도시 하나쯤은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수 있는 유성이 자신의 둥지 주위에 떨어졌는데 그 정도 선물을 받고 돌아갈 거라고 생각을 하다니, 당신 제정신이야?" "물론 제정신이오. 인간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유성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면 엄청난 위협이 되겠지만, 드래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게 그 어떤 타격도 주기 힘들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그들에게는 아무런 생명의 위험이 없었으니까, 솔직히 사과하고 선물을 준다면 조용히 물거갈 거요. 드래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따위 도시 하나 박살내는 것보다 선물을 받는 편이 훨씬 더 득일 테니까." "젠장!그렇게 자신 있으면 말리지 않을 테니 좋을 대로 해 보시오!" "알겠소. 그럼 나는 가 보겠소."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는 자신의 거대한 몸매를 과시하듯 1킬로도 안 되는 상공을 유유히 날아왔다. 그는 일단 자신이 파괴하고자 마음 먹은 동쪽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 도시 엘프리안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 넣기 위해 엘프리안 시를 천천히 한바퀴 돌았다. 그런 다음 브래스로 잿더미를 만들어 놓은 후 다시 한 바퀴 더 돌면서 자신의 작품을 감상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궁 위쪽을 날아가고 있을 때 자신이 보기 쉽게 매우 큼직하게 써 놓은 글자들을 볼 수 있었다. 브로마네스는 천천히 고도를 낮춘 후 황궁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어 있는 방어탑들 중의 하나를 골라잡아 그 위에 내려앉았다. 탑의 상부 구조물이 갑작스런 불청객의 무게 덕분에 허물어졌지만 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단 브로마네스가 내려서자 엘프 몇 명이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왔다. 그들 중에서 짙은 녹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엘프가 정중하게,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브로마네스를 향해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위대하신 분이시여. 저는 티란드 그린레이크라고 합니다." <크흐흐흐..., 나는 브로마네스라고 한다. 내 방문이 그렇게 기분 좋은 것은 아닐 텐데, 애써 미소 지을 필요 없다. 그래, 나를 부른 이유는?> 그린레이크는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자신 있게 말했다. "예, 호비트의 도시 하나를 파괴하시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시겠지만, 사실상 남는 것 또한 없지 않습니까? 이 도시를 구하고자 하는 대가로는 너무나 약소하지만 이것을 받아 주시고 이번 일은 용서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원래는 제가 직접 찾아 뵙고 사죄를 드렸어야 옳지만 위대한 분께서 이곳까지 먼저 왕림하셨기에 순서가 약간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티란 드 그린레이크는 뒤쪽에 커다란 상자를 들고 서 있는 엘프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엘프들은 그 자리에 상자를 내려 놓은 후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금은 보석 다위로 만든 번쩍거리는 세공품들이 하나 가득 들어있었다. 그 하나하나는 모두 드워프가 만든 최고의 예술품들이었다. 사실상 드래곤이라는 것은 이미 최강의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기에 힘이 깃들인 물건, 즉 마법 검이라든지 마법 도구 따위의 선물은 받아 줄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이런 세공품들이라면 매우 좋아할 것이라는 것이 그린레이크의 추측이었다. 브로마네스는 고개를 아래로 한껏 내려서는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 본 후 갑자기 고개를 위로 쳐들며 포효를 터뜨렸다. 물론 브로마네스는 그 세공품들이 탐나기는 했지만, 저 엘프 녀석의 공포에 질리지 않은 자신만만한 얼굴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쿠오오오오오오오~~~~~!"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복종시킨다는 드래곤 로어는 그 굉음을 터뜨린 당사자가 거의 4천 년 이상이나 먹은 레드 드래곤이었기에 그 파괴력에서부터 엄청났다. 브로마네스를 기점으로 거의 반경 2킬로 내의 모든 유리창들이 박살나 버렸고, 황궁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절해서 넘어졌다. 그린레이크는 같이 왔던 두 명의 엘프들이 기절해서 넘어졌지만, 간신히 마법 방어막을 쳤기에 무사히 서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약간이지만 그 지독한 굉음을 들어야만 했기에 그의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이제 상대의 얼굴에 약간 공포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 브로마네스의 기분은 슬슬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브로마네스는 짐짓 화가 난다는 듯 외쳤다. <감히 이따위 물건으로 내 분노를 삭일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이 어리석은 녀석아!>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 그린레이크는 예상 밖이었지만 그래도 초인적인 노력으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겨우 이 정도의 물건은 마음에 차지 않으실 거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 10톤의 황금과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거대한 레어 하나를 선사하겠습니다. 물론 일처리는 드워프에게 위탁할 것이구요." 그린레이크는 이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놀라운 기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10톤의 황금이 가지는 가치도 엄청나겠지만, 황금색으로 도금을 입힌 거대한 지하 구조물을 건설하려면 엄청난 돈이 추가로 지불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레어를 건설하려면 최소한 1년은 필요했고, 그만큼의 시간은 일단 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혹시 드래곤이 새로운 레어로 이사만 가 준다면 두 마리의 드래곤 영토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에 엄청난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게 된 쟈크렌 요새도 그 가치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눈 앞에 보이는 이 멍청한 도마뱀의 거처를 어디로 옮길 것인지의 선택권이 자신에게 반쯤은 주어지는 것이다. 이 녀석을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에 살게 만든다면 천연의 방어 마법진이 되어 줄 것이 아닌가?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거대한 레어라고?" 그린레이크가 무슨 생각을 하고 내 놓은 의견인지 모르지만, 일단 지금 살고 있는 자신의 저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브로마네스에게는 사실 이것보다 더한 매력적인 제안은 없었다. 거기에다가 저 금은 보화에 황금 10톤이 추가되는 것이다. 하마터면 브로마네스는 그 제안에 응할 뻔했다. 하지만 지금 답답한 쪽은 자기가 아니었다. 산사태가 나서 레어가 무너져 내린 것도 아니고, 아직은 조금 작지만 쓸 만한 집이 한 채 있는 상태였기에 브로마네스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슬쩍 튕기기 시작했다. <호오, 10톤의 황금에다가 멋진 레어라고? 그렇다면 레어는 어디에다가 지어 줄 생각이냐?> 브로마네스가 약간 구미가 당긴다는 듯 묻자 그린레이크는 손가락으로 엘프리안에서 멀찌감히 보이는 아주 높은 산을 가리키며 재빨리 대답했다. "저곳이면 어떻겠습니까?" 브로마네스는 신중한 자세를 보이며 대답했다. <흐음..., 하지만 저곳은 이런 대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서 시끄럽지 않을까?> 브로마네스가 신중하게 대답하자 그린레이크는 재빨리 얼버무렸다. 만약 브로마네스를 엘프리안 부근에 주거하게만 만든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호비트가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저쪽까지는 들리지 않습니다. 또 건설에 필요한 재료를 조달하는 데도 어렵지 않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저 산은 크루마의 수호 신전이 있는 곳이기에 왕래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지요." 일단 첫 번째 조건은 만족된다는 것에 만족한 브로마네스는 그 다음 문제점을 말했다. <흐음, 레어의 구조는 어떻게 만들 생각이냐?> 이제 상대가 거의 넘어올 것 같자 그린레이크는 더욱 열성을 가지고 말했다. "그거야 하명해 주시는 대로 성의껏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공사하는데 1년 정도 걸리겠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분의 입장에서 보신다면 1년은 매우 짧은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10톤의 황금은 들고 나르기도 힘드니까 새로운 레어가 만들어질 때 그 창고 안에 넣어 두겠습니다." <흐음...,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라. 겨우 황금 10톤과 레어 따위야, 조금 귀찮기는 하겠지만 드워프들을 족친다면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지.> 브로마네스의 말에 그린레이크는 욕지기가 튀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는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놈의 레드 드래곤은 정말 원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럼 뭘 더 원하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브로마네스는 엘프의 얼굴이 분노로 물드는 것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내가 새로운 레어로 들어갈 때 가장 친한 친구 녀석을 초대하려고 한다. 그를 찾아서 그날 데려 와라. 기한은 1년이다. 이것이 마지막 조건이다. 만약 그것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나는 처음의 계획대로 이 도시를 박살내 버릴 테다. 알겠느냐?> "저, 그렇다면 친구 분의 성함이라도 알려 주셔야 저희들이 손을 쓸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아, 물론 그 정도는 알려 줘야지.> 브로마네스는 그 거대한 날개를 휘저어 하늘 위로 천천히 떠오르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초대하고자 하는 녀석은 아르티어스다. 잘 찾아 보도록! 크흐흐흐흐.> 성인지 이름인지 모르겠지만 아르티어스 라는 말만 하고 브로마네스는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나중에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이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은 성질이 자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 하지 않은 드래곤이었다. 그런 드래곤을 겨우 호비트나 엘프 따위가 이쪽까지 데려 올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브로마네스는 마지막에 내 놓은 자신의 조건이 결코 지켜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떠났던 것이다. 1년 후 브로마네스는 새로운 레어 입주 기념식을 엘프리안 시를 가루로 만드는 것으로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었다. 브로마네스가 돌아간 후 그린레이크는 이 아르티어스 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을 찾기 위해 며칠 동안 모든 자료를 뒤졌다. 일단 드래곤이 친구 라고 말했으니 아프티어스도 드래곤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A 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것은 골드 드래곤 일족이었다. 드래곤들 중에서 레드 일족과 골드 일족은 매우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그린레이크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단 찾아 볼 만한 것은 드래곤이 최우선이었다. "아무리 뒤져 봐도 없사옵니다, 공작 전하. 혹시 드래곤이 아닌 것이 아닐까요?" "흐음, 처음부터 기대는 안 했지만.... 그렇다면 어디서 찾지?" 바로 이때 그린레이크의 밑에 있던 엘프 중의 한 명이 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라는 존재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말했다. 그는 매우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단 알려 주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았기에 조심스럽게 상관을 향해 입을 열었던 것이다. "저..., 공작 전하. 알려 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뭐냐?"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사옵니다." "뭐야? 그런데 왜 지금 말하는 것이냐?' "저는 마법 시료를 모으기 위해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녀야 합니다. 그 때문에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혹시 「아르티어스 애가(哀歌)」라는 노래를 아시옵니까?" 일단 흔적도 찾아 보기 힘들었는데, 아르티어스 라는 이름이 나오는 말이었기에 그린레이크는 흥미를 가지고 물어 봤다. "뭐? 그런 노래도 있었나?" "예, 여기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말토리오 산맥 주위에서는 흔히들 애창되는 노래이옵니다. 안젤리아나라는 여류 음유 시인이 지은 노래이온데, 교과서에까지 나올 정도로 그 지방에서는 유명한 노래이옵니다." "노래의 내용은?" "예, 지금부터 한 2천 년쯤 전에 활약한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기린 노래이온데...." 2천 년 전 이라는 말에 더 이상 부하의 보고를 들을 마음이 없어진 그린레이크가 노성을 터뜨렸다. "뭣이? 이 멍충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2천 년 전이라면 살아 있을 사람이 어디 있어? 백골도 찾기 힘들 텐데 아무리 브로마네스가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든다고 해도 설마하니 시체를 찾으라고 했겠느냐? 사람이건 엘프건 그 외의 또 다른 뭐건 아르티어스 라는 이름은 모조리 찾아라. 빨리!" "옛, 전하." 그리고 레어 건설 건에 대해서 드워프들에게 협조를 부탁하고, 엘프란 기사단에 연락해서 로투스들을 지원해 달라고 해라. "예? 로투스 급 타이탄을 어디에다가 사용하실 예정이시옵니까? 그걸 알려 주셔야 몇 대나 지원받을지...." 로투스 급 타이탄은 출력이 0.5밖에 되지 않았고, 또 크기도 작앗기에 오실롯 왕국이나, 라크비에 왕국과의 국경선이 되는 오실라니아 산맥에 주둔하고 있었다. 산악에서 돌아다니는 데는 오히려 덩치 큰 타이탄보다는 로투스 같은 소형의 타이탄이 더욱 적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작은 타이찬은 적의 유격 부대를 상대할 때나 몬스터 사냥 외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렇기에 부하는 그 명령을 궁금하게 여긴 것이다. "그야 당연히 레어 만드는 토목 작업에 쓸 거지. 열 대 정도 지원받으면 충분할 거다." "옛, 전하." "그리고 나는 잠시 여행을 갔다 올 테니 그리 알고 있도록!" "예? 어디로...." "너희들은 몰라도 된다. 아마 오늘 저녁이나 내일쯤 돌아올 것이다." 아르티어스의 정체 미네르바는 부하의 보고에 대단한 흥미를 느꼈다. 그녀의 앞에 서있는 사내는 궁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후 그녀에게 밀고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물론 이 같은 행위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직위가 전군의 총사령관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군대에만 신경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정적들을 감시해야 했고, 또 그녀를 모략하는 따위의 엉뚱한 유언비어가 돌아다닐 수도 있었기에 이런 부하의 존재는 거의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호오,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을 가지 존재를 찾고 있다고?" "옛, 전하." "그래, 찾기는 찾았느냐?" "며칠 동안 찾았사오나 자료가 거의 없기에 그린레이크 공작 전하께서는 매우 당황하고 계신 눈치였사옵니다. 브로마네스가 쟈코니아 산맥에 거주하는 만큼 쟉센 평원 주둔군에도 그런 이름을 가진 주민이 없는지 찾아 보라는 협조 공문을 띄었사옵고, 혹시나 코린트 사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에 첩자들이 그런 이름을 지닌 사람을 찾는다고 광분하고 있사옵니다." 부하의 말에 미네르바는 웃음을 터뜨렸다. "호홋! 재미있군. 그래 그 녀석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참! 브로마네스가 준 기간이 1년이라고 했느냐?" "예, 전하." 그녀는 부하의 대답에 매우 유쾌한 마음이 들었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조금 더 기다려 보고 찾아 낼 방도가 없다는 것이 알려지면 폐하께 천도하시는 것이 어떻겠는지 여쭤 봐야겠군. 이만 가 보거라." "옛! 전하." 젊은 이가 사라지고 나자 미네르바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황금 10톤과 거대한 레어를 짓는 데 들어가는 돈 따위야, 이 거대한 도시가 멸망하는 시간을 1년이나 늦춰 준다면 아까울 것이 없었다. 코린트의 경우 수도가 하루 아침에 날아간 결과로 지금 엉망진창이 아닌가? 하지만 1년이라는 시간 여유가 있다면 모든 기반 시설들을 점차적으로 다른 도시로 옮기기에 충분했다. 거기에다가 더욱 기분 좋은 것은 그 꼴사나운 그린레이크의 얼굴을 이 도시가 잿더미가 되는 그날부터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미네르바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흥겹게 말했다. "그 녀석의 참수(斬首)는 내가 직접 해도 될지 폐하께 여쭤 볼까? 호호호." 그린레이크가 그날 마법진을 이용하여 서둘러 도착한 곳은 자신의 고향 마을이었다. 자신의 고향 마을의 한 귀퉁이에는 엘프 여행자들을 위한 이동용 수신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혹시나 그곳에 잡초 따위가 자라거나 나무 토막 같은 것이 올라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이동 마법시 기존의 물체가 존재하는 곳에 이동해 온다면 간섭 현상에 의해 치명적인 결과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희뿌연 빛이 번쩍거리다가 그린레이크가 순간적으로 마법진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것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엘프들이 그린레이크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린레이크는 크루마에 사는 모든 엘프들 중에서 가장 출세한 몇 명 되지 않는 엘프들 중의 한 명이었고, 또 그린레이크는 그 높은 직위를 이용해서 크루마에 살고 있는 엘프들의 권리 신장에 노력하고 있었기에 꽤 평이 좋았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그린레이크." "잘 있었는가? 엘노리아." 순식간에 엘프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 들었기에 그린레이크는 그들 하나하나와 일일이 인사를 나눈다고 매우 바빠졌다. 그는 따로 할 일이 있기에 여기에 왔지만, 그렇다고 오랜만에 만난 고향의 엘프들을 못 본 체 지나칠 수는 없었기에 잠시지만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거의 10년은 보지 못했던 그리운 얼굴이 그의 눈에 띄었다. "어서 오거라." "안녕하셨습니까? 아버님." "그래, 우리들이야 안녕하지. 그런데 어쩐 일이냐? 대제국 코린트와 전쟁이 벌어졌다고 들었는데, 설마 피신이라도 온 것이냐?" "아닙니다, 아버님. 전쟁에서는 승리했습니다." "오오, 기쁜 소식이구나. 들어가서 축배를 들어야겠어. 어서 오거라. 마침 지난 가을에 담가 놓은 산딸기 술이 남아 있지."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또 그 아들이 가져온 좋은 소식 때문에 기뻐하는 아버지를 보고 차마 그린레이크느 지금 자신이 어떤 처지에 처해 있는지 말을 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끊임없이 '이럴 시간이 없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을의 엘프들과 어버지, 그리고 동생의 손에 이끌려 촌장인 아버지의 집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엘프들은 매우 숲을 사랑하는 종족이다. 왜냐하면 숲은 그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외부의 족속들과 별로 연락을 취하지 않는 상당히 폐쇄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엘프에 대해 잘못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 있다. 사실 엘프는 숲을 사랑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종족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세간에 전해지듯 육식도 안 하고 이슬만 먹고 사는 숲의 요정과 같은 종족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들의 허약하면서도 아름다운 외모를 봤을 때 파리 한 마리 죽일 수 있을 것 같이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 그들은 매우 민첩하면서도 강인했다. 그리고 엘프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광대한 숲을 필요로 하는데, 그 안에 들어오는 침입자들을 살려 두는 예가 거의 없을 정도로 호전적이었다. 숲은 엘프들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가급적 숲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필요에 의해서 나무를 베거나 풀을 없애는 것까지 꺼리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들은 정착해서 살기 좋은 곳을 발견하면 그곳에다가 진흙 벽돌이나 돌을 깎아서 집을 짓는다. 물론 이런 경우라도 가급적 숲에 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어떤 나무를 잘라 내지 않고는 집을 세울 공간이 부족하다면 가차없이 나무를 잘라 없애기도 한다. 엘프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 그렇다고 목축을 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식생활은 태곳적 호비트들이 이 땅에 태어났을 때 행해졌다고 생각되는 것, 즉 사냥과 채집 생활이었다. 숲에서 나오는 각종 열매나 버섯 따위가 그들의 주된 식량이 된다. 또 숲에서 생활하는 모든 동물들도 그들의 식량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있어 모든 것을 제공해 주는 숲을 보존하기 위해 힘을 쏟는 것이다. 이들의 생활 방식은 숲을 개척하여 농경지나 목축지로 만들려는 호비트들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예전에는 호비트들과 충돌도 심했었다. 강력한 마법과 사냥을 통해 다져진 엘프들의 활솜씨는 호비트들에게 상당한 위협을 줬다. 하지만 호비트느 농경이나 축산을 통해 방대한 생산력과 그에 걸맞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프들은 그야말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도 계속 뒤로 밀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엘프들이 호비트들과의 전쟁에서 밀리는 것은 그들이 하나의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작은 부족 단위로 흩어져서 생활한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또 미모를 지닌 엘프들의 경우 매우 좋은 노옛감이었기에 엘프 사냥꾼들까지 등장해서 어린 엘프들을 납치하기 시작하면서 엘프들은 숫자가 급감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크루마 제국이 들어서면서 엘프들의 처지는 전과 다르게 개선되기 시작했다. 개국 공신들 안에 엘프가 끼여 있었기에 크루마는 엘프들에 대해 매우 관대한 국가였다. 또 크루마는 엘프들에게 방대한 숲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국가였다. 크루마는 엘프들을 자신의 국가 안에 흡수함으로써 강력한 군사와 뛰어난 마법사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마법생물 타이탄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시대에 강력한 마법사의 확보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고, 지금에 이르러서야 엘프들을 우대하여 그들의 힘을 얻고자 하는 국가들도 생겨나고 있었지만, 엘프들은 극한 상황이 닥치지 않는 한 자신들이 한번 정착한 땅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기에 엘프 마법사들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크루마의 번성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소박하게 돌로 만든 집 안은 창문이 그렇게 크지 않았기에 어두컴컴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내부는 생각만큼 어둡지 않았다. 빛의 정령 윌 위스프들을 불러 내어 빛을 밝힌 덕분에 집 안의 곳곳에는 작은 빛 무리가 떠다니고 있었고 그에 따라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밝았던 것이다. 오랜만에 반가운 손님이 왔기에 월동을 위해 저장고에 놔 뒀던 사슴 고기를 꺼내어 굽고, 각종 과일들을 풍성하게 내왔다. 그리고 도자기(陶瓷器)에 담겨진 산딸기 술이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갔다. 그들은 협동 생활을 했기에 그날 채집한 음식물은 일단 한 곳에 집산 된 후 다시 각 사람들에게 골고루 배분되었다. 만약 그날 채집한 식량이 없었다면 마을 전체가 굶는 경우도 있었다. 하루 정도 굶는다고 죽는 것은 아니었지만, 겨울을 날 식량이 없다면 마을 전체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기에 겨울용 비축 식량을 꺼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마을의 엘프들에게 그린레이크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하지만 그린레이크는 가족돌과 또 마을의 엘프들의 환대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마음은 급한 상태였고 그들은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축제도 끝나 버렸고 엘프들은 하나 둘씩 자신의 집으로 흩어졌다. 그린레이크도 여러 엘프들이 권하는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오늘 목적했던 일을 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피곤하다는 이유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 다음 먼동이 터 오는 새벽에 원래 자신이 목적했던 곳을 향해 출발했다. 그린레이크의 고향 마을 근처에는 그린 드래곤이 한 마리 살고 있었다. 이제 겨우 1,44살 정도밖에 안 된 드래곤이었는데, 성체가 되어 아버지에게서 독립하게 되었을 때 그린레이크의 고향 마을 근처에 둥지를 틀었기에 지금껏 9백여 년 간 이웃의 엘프들과 친분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드래곤들 중에서 비교적 성질이 유순한 그린 드래곤답게 그 드래곤은 자신과 취향이 유사한 엘프들과 아주 사이 좋게 지내 오고 있었으므로, 그린레이크는 이 드래곤에게 부탁할 생각을 감히 했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 그린레이크 밑에 있는 마법사들이 열심히 자료를 뒤졌고, 또 아르티어스 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몇 명 찾아 내기는 했지만, 부하들을 파견해 알아 본 결과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대답만을 듣고 돌아왔다. 물론 아직도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군지 알아야 그를 초대할 방법에 대해서도 궁리를 할 수 있을 텐데, 그 대상이 누군지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를 점점 더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린레이크는 일단 하나하나 가능성을 줄여 가기로 결정했다. 우선 드래곤, 드래곤의 개체 수는 많지 않으니 조사하는 데도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드래곤들을 철저히 조사한 후 드래곤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면 그 다음으로 오래 사는 종족인 엘프를 집중적으로 조사한다. 그런 다음 엘프도 아니라는 확신이 들면 드워프를 조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 조사와 병행하여 확실하게 인구 조사가 되어 있는 호비트의 조사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드래곤에 대해서 조사하기에는 인간 세상에 쌓인 자료가 너무 적었다. 드래곤들 중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밝힌 드래곤보다 안 밝힌 드래곤이 더 많았던 것이다. 즉, 내 이름은 아무개다. 내 영토에 얼씬거리는 것들은 몽땅 다 디저트로 먹어 버리겠다. 하고 선포한 놈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그냥 레어에 처박혀서는 죽은 듯이 지내고 있었다. 또 아주 심한 놈들의 경우 자신의 레어에 접근한 것들은 경고도 없이 몽땅 다 죽여 버림으로써 아예 입을 막아 버렸기에 그냥 포악한 드래곤 이라고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린레이크가 생각해 낸 것이 이것이다. 드래곤의 일은 드래곤에게 물어 보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것이라는 점. 자신이 알고 있는 드래곤은 자신의 고향 마을 주변에 살고 있는 그린 드래곤이 유일했다. 물론 그린 드래곤이 다른 드래곤의 신상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는 않았지만, 드래곤의 개체 수가 그렇게 많지 않기에 교양 과목으로 그들의 아버지에게 배웠을 가능성이 아주 배제하기는 힘들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느냐?" 그린레이크는 돌 위에 우아한 자태로 앉아 있는 낯선 엘프가 그린 드래곤 갈렌시아임을 알아 보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가지 여쭈어 볼 것이 있어서입니다." 갈렌시아는 시선을 다시금 무릎 위에 놓여진 책 위로 돌리면서 낮은 어조로 허락했다. 그린 드래곤은 엘프들과 사이가 좋았기에, 특히 그린레이크의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 청을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어디로 가서 뭘 해 달라는 부탁도 아니고 지식을 조금만 나눠 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해 보거라." "예, 아르티어스라는 인물을 찾습니다. 그게 드래곤일 수도 있고 엘프일 수도 있고 호비트나 혹은 다른 것일 수도 있는데, 저는 드래곤이 아닌가 싶습니다." 갈렌시아는 잠시 책에서 시선을 돌려 그린레이크를 바라보며 자신의 의문점을 말했다. "왜 드래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예, 웜 급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실은 브로마네스가 그 자를 1년 내에 찾아서, 자신이 새 레어로 입주할 때 초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훗! 초대하고 싶으면 브로마네스보고 직접 초대하라고 해야지, 왜 네가 나서서 초대해야 한다는 것이냐?" "실은, 이번에 한 가지 실수한 것이 있어서 브로마네스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며칠 전에 하마터면 엘프리안 시가 분노에 찬 그의 브레스에 날아갈 뻔했는데, 몇 가지 보물과 10톤의 황금, 그리고 커다란 새 레어를 제공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지요. 그런데 브로마네스는 자신이 새 레어로 입주하는 그날 초대할 친구 이름을 가르쳐 주면서, 그때 그를 데려오지 않으면 엘프리안을 계획대로 날려 버리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묻는 겁니다." 레드 일족이라면 충분히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하며 갈렌시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르티어스를 찾는 것은 포기해라. 지금부터 천도할 곳을 물색해서 새로운 수도로 옮기는 게 좋을 거야. 아마도 아르티어스를 석득하는 것보다 그 편이 더 쉽고 빠를 거다." 갈렌시아의 확정적인 말에 그린레이크는 그가 아르티어스를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혹시 아르티어스를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있지. 말토리오 산맥의 지배자를 모른단 말인가?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드래곤인데 말이야." 갈렌시아의 말에 그린레이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예? 말토리오 산맥에는 드래곤이 살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니, 헤즐링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가지 거기에서 살고 있는 골드 드래곤이 있지.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대충 4천3백 살쯤 되었겠지." 4천3백 살이라는 말에 그린레이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그린 드래곤의 경우 1천4백 살 정도쯤 된 녀석이었다. 바로 이 드래곤이 여기에 자리를 잡은 후부터 자신의 마을 사람들과 서로 우호 관계가 유지되어 오고 있었기에, 이 드래곤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드래곤의 경우 분가하기 전이나 분가할 때 그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지식을 전수받거나 또는 ㅊ책 따위를 선물 받기도 한다. 드래곤의 기억력은 정말 대단했기에, 그들이 처음부터 잘못된 사실을 전해 듣지 않았다면 켤코 틀릴 리가 없엇다. 일단 초대해야 하는 드래곤이 거의 에이션트 급을 바라보는 웜 급 드래곤이라는 것이 조금 찔리기는 했지만, 그린레이크는 나중에 포기하더라도 일단 시도는 해 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일단 부탁을 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설혹 거절을 당하더라도 시도는 해 보는 것이...." 살짝 미소 띤 얼굴이었지만, 갈렌시아는 그린레이크를 바라보며 책망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말토리오 산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고 있느냐?" "예? 예, 그건 당연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넓은 곳을 왜 아르티어스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을까?" "그, 글쎄요." "그건 성질이 더럽기 때문이야. 나도 잘 모르기는 하지만 내 아버지에게 듣기로 2천 년쯤 전에는 정말 대단했다고 하더군. 역사책을 뒤져 보면 나올 테니까 조사해 보거라.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던 생명체들 중에서 살아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이해가 되겠느냐? 그런데, 골드 드래곤과 레드 드래곤이 친구가 될 수 있다니 놀랍군. 하기야 아르티어스의 그 포악한 성격은 레드 드래곤과 약간은 닮은 점이 있기도 하니까 그것 때문에 서로 통했는지도 모르지. 아마도 브로마네스는 너한테 모든 것을 다 받아 낸 후에 엘프리안을 잿더미로 만드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한 모양이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명령한 것을 보면 말이야. 너희 나라가 코린트라는 강대국과 전쟁중이라던데 사실이냐?" "예, 그런데 그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사실 전쟁은 얼마 전에 끝났습니다. 운 좋게도 약간 우세한 상황에서 휴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좋아. 너희가 그 강대한 코린트를 한 달 내로 멸망시키는 것이 아마도 아르티어스를 설득하는 것보다 쉬울 거다." "저, 그렇다면...." 그린레이크는 어려운 부탁을 생각한 듯 쭈뼛쭈뼛 말문을 열기 시작했지만, 갈렌시아는 재빨리 그것을 봉쇄했다. "나에게 아르티어스에게 가서 말 좀 해 달라는 부탁이라면 거절이야. 내가 그런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골드 드래곤을 만나러 갈 이유도 없고 말이지. 또 찾아가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책임도 없어.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가 보거라." "예." 풀이 죽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린레이크가 안돼 보였는지 갈렌시아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2천 년쯤 조용했으니까 어쩌면 성격이 좀 바뀌었는지도 모르지. 거기에 희망을 가지라구." 그린 레이크는 축 처진 어깨를 끌고 엘프리안으로 돌아갔다. 하긴 아르티어스의 정체를 알아 낸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르티어스 애가 어쩌구 할 때 그게 아르티어스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눈치 챘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을 연관시킬 만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정체는 알아 냈지만 그와 함께 더욱 난감한 정보까지 들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르티어스를 초대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라? 이건 또 뭔가?" 토지에르가 궁금하다는 듯 묻자 서류를 가져왔던 마법사가 재빨리 대답했다. "크루마에서 날아온 것입니다. 토지에르 후작 각하." "협조 공문이라고? 그런데 왜 우리가 아르티어스 라는 드래곤을 찾아 줘야 하는 거지?" "그..., 글쎄 말입니다. 일단 지급으로 협조 공문이 도착하기는 했는데, 그를 찾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습니다." "아르티어스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더? 어디서였더라.... 아르티어스... A 로 시작되니까 골드 드래곤인데, 내가 아는 골드 드래곤이 있었던가?" 바로 이때, 토지에르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황금색 드래곤 문장.... "맞아, 바로 그거였어. 로니에르 전하와 함께 다니는 그 드래곤이 아르티어스였지. 그런데 왜 그놈들이 아르티어스를 찾는 거지? 이보게." "옛." "일단 크루마에는 자료를 찾는 중이지만 시간을 좀더 달라고 공문을 띄우게나. 그리고 안티노스 경에게 가서 크루마에서 왜 아르티어스라는 골드 드래곤을 찾고 있는지 조사해 달라고 청하게." 지그발트 폰 아티노스는 국내외의 모든 정보를 관장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뭔가 조사할 것이 있다면 그에게 부탁하는 것이 가장 빠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옛, 각하." "그리고 코린트의 수도가 박살난 것 때문인데, 그 때문에 입은 손실에 대해서 직접적인 피해 외에도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피해에 대한 상세한 자료도 지급으로 부탁한다고 전하게나. 코린트의 타격이 크면 클수록 이번 전쟁이 오래 가기는 힘들 거야. 그런 만큼 코린트의 손실이 가지는 의미는 아주 크다고 봐야겠지. 알겠나?" "옛! 각하." 풀 줄기와 검의 대결 밤 하늘 저 멀리서 크르르르릉 하는 괴수의 포효 소리가 들려 오자 죠드는 몸을 살짝 움추렸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이런 행동이 같이 모닥불을 쬐고 있는 상대에게 얼마나 실례가 되는 행동인지를 깨닫고는 다시 어깨를 폈다. 그의 앞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는 인물은 오우거(Ogre)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뛰어온다 해도 눈도 깜짝 안 할 강자였기 때문이다. 이곳이 맞습니까? 키에리는 상대의 말에 급히 상념에서 깨어나며 대답했다. 흐음..., 내 기억에는 이 근처인데,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먼. 그때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으음, 그때 코타스하고 만난 것은 정말 운이 좋았었지. 예전에는 리사, 까뮤, 나 이렇게 셋이서 자주 여행을 다녔어. 이 근처를 여행하고 있을 때, 이 일대에 블루 드래곤이 산다는 정보를 얻어 들을 수 있었지. 그 소릴 듣자 리사가 드래곤을 한 번 보고 싶다고 우기기 시작했지. 그래서 몰래 구경하는 것쯤이야 어떻겠나 싶어서 레어를 찾아간거야. 하지만 사흘동안 뒤졌는데도 레어를 찾을 수가 없었지. 그 당시 우리들은 큰 드래곤이 사는 레어라면 입구도 엄청나게 거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런 곳은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지. 그런데 그때 코타스를 만났어. 처음에 그는 우리를 아주 수상한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우리들과 친해졌고 같이 여행을 떠나게 되었어. 나중에야 그는 자신을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어떤 괴짜 마법사에게서 수련을 했고, 그와 헤어진 후 이 근처에 처박혀서 마법 시험을 하고 있는 마법사라고 소개했지. 그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종종 그의 마법 실력을 보게 되었는데 정말 놀라웠지. 그렇다면 코타스 전하의 거처에는 가 보시지 않으신 겁니까? 키에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도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 함께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가 그대로 여행을 떠났으니까 말일세. 그건 참 이상하군요. 일부 고급 마법사들의 경우 마나를 절약하기 위해 특별한 시약을 쓰기도 하는데 그런 시약을 준비하지도 않고 곧장 여행을 따라나서다니.... 허허, 그렇지 않아. 그는 이미 7사이클의 마스터였는데 뭐가 더 필요해서 시약을 가지고 다니겠나? 검객이 검술을 계속 익히다 보면 나중에는 검이 필요 없는 경지까지 올라가게 되지. 나를 보게나. 몇몇 의례상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검을 가지고 다니지 않잖아. 검이란 것은 덩치도 크고 들고 다니기도 불편하거든. 그럴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예를 들어서 전에 전하에게 상처를 입혔던 그 상대를 기억하십니까? 거대한 타이탄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면서 드러났던 소녀의 모습을 키에리는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상대에게서 고수다운 면모를 찾아볼 수 있었다면 몰라도 도저히 자신을 이길 거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꼬맹이를 보고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키에리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죠드는 재빨리 말했다. 그렇다면 그 상대가 풀 줄기를 들고 싸우고, 전하..., 아니 발렌시아드 님이 검을 들고 싸웠다면 결과가 똑같았을까요? 키에리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제법 시간이 지난 만큼 자신과 소녀의 차이를 냉정하게 분석해 본다면 물론 검술 실력이나 마나를 부리는 데 있어 소녀가 한 단계 앞서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외형으로 봤을 때 실질적인 파워는 그렇게 강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마나로만 구동되는 타이탄에 타고 있었기에 소녀의 막강한 실력과 마나가 모두 다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검만을 가지고 싸운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타이탄의 역할을 해 줄 것은 이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체가 될것이고 그 육체의 성능에 있어서는 자신의 것이 소녀의 그 나약한 것 보다 월등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소녀가 정말 풀 줄기를 잡고 있었다면.... 키에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글쎄. 확실한 것은 그런 식으로 한번 붙어 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내가 이길 확률은 훨씬 더 높아지겠지. 풀 줄기로 검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것은 엄청난 마나가 필요하니까 말일세.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마법도 그와 같습니다. 시약을 사용했을 때는 마법의 종류에 따라 틀리지만 심한 경우에는 거의 80퍼센트까지, 보통의 경우 30~50퍼센트의 마나를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7사이클 급의 마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 사용되는 마나의 양이 1백만 기간트라라면 5십만 기간트라만 가지고도 마법의 구동이 가능하다는 말입지요. 물론 그런 방식으로 7사이클 급 마법사가 8사이클의 마법을 구동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마나가 절약됨으로 인한 한 번 쓸 마법을 두 번 이상 쓸 수 있죠. 그런데 왜 그런 기회를 포기하셨을까요? 글쎄? 그건 내가 코타스가 아니니까 알 수가 없군. 나중에 코타스를 찾으면 그에게 물어 보게나. 후방이 든든해지기 시작하자 크라레스의 기사단은 다시 진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크라레스 군의 진격에도 코린트 군은 전면적인 결전을 회피하는 식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로체스터 총사령관에게 구조 신호를 보낸다면 로체스터 공작은 곧장 휘하 기사단과 함께 남족으로 내려와서는 다리엔 후작의 지휘권을 박탈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후 여태까지의 패전의 책임을 물어 다리엔 후작을 즉각 숙청해 버린 후 자신은 기사단을 대대적으로 투입하여 적을 일거에 몰아 낼 것이다. 그런 식으로 로체스터 공작이 승리를 거둔다면 여태껏 지지부진하게 대처했던 다리엔 후작은 물론이고, 다리엔 후작을 지지했던 그로체스 공작의 기반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아마도 황제는 그로체스 공작의 퇴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역시 군무(軍務)는 예전처럼 기사들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다시금 생각을 굳히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수정 구슬을 통해 들려 오는 그로체스 공작의 힐책에 다리엔 후작은 몸둘 바를 몰라 하며 통사정 하기 시작했다. 예, 공작 전하.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다리엔 후작의 모습을 그로체스 공작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자네의 힘에 부치는 것은 아닌가? 다리엔 후작은 급히 변명을 늘어놨다. 만약 그로체스 공작의 신임이 사라진다면, 자신의 미래는 끝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니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사온데, 갑자기 10개 사단 급의 병력이 새로 파병되는 바람에 상당한 차질이 왔사옵니다. 그 말은 예상대로 그로체스 공작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사실 다리엔 후작도 그걸 알아 냈을 때 매우 놀라지 않았었나? 그것은 약소국으로 생각되던 크라레스가 투입할 수 있다고 예상한 병력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개 사단이라고? 그렇다면 크라레스가 지금까지 투입한 병력이 거의 20개 사단을 넘어선다는 말인가? 송구하지만 그렇사옵니다, 전하. 적이 예상 외로 대병력을 투입하고 있는지라 보급로 차단에 상당한 차질을 겪고 있사옵니다. 크라레스에 갑자기 그렇게 많은 추가 병력을 증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턱이 없는데도 그 많은 병력이 증파된 것을 보면 아무래도 크루마가 암암리에 뒤로 봐 주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흐음, 크루마 녀석들이? 옛, 전하. 크루마는 지금 본국과의 접전을 끝낸 후 병력에 다소 여유가 생기지 않았사옵니까? 로체스터 공작이 거느린 본국의 기사단 주력이 쟈크렌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이상 기사단을 빼기는 힘들겠지만 병력을 빼기는 쉬웠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흐음,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불찰이었군. 그런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기사단끼리의 접전에서도 패배를 했다고.... 예, 안타깝게도 미네르 10기를 잃었사옵니다. 그때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기사의 보고에 따르면 적은 12기의 타이탄을 동원한 것 같사온데, 전멸 당한 것으로 보아 적의 기사단 전력은 소문대로 엄청나게 강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렇다면 적은 몇 대나 타이탄을 잃었나? 예? 여섯 대를 파괴한 것으로 보고 받았사옵니다. 다리엔 후작은 적 타이탄을 단1기도 파괴하지 못했다고 보고할 수 없었기에 살짝, 아니 엄청나게 부풀려서 보고했다. 만약 한 대도 못 부쉈다고 곧대로 보고한다면 공작은 상황의 어려움을 인식 하기보다는 자신이 무능하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으음, 적이 그렇게도 강하다는 말이냐? 예, 적의 타이탄이 두 대 정도 더 있었다는 점도 작용을 했사오나, 적의 실력은 예상 밖이었사옵니다. 크라레스 기사단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거의 100대가 넘은 타이탄을 거느리고 있사옵니다. 그에 비해 소신이 지닌 타이탄은 고작 50대가 조금 넘는 실정이옵니다.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상황 타개가 불가능하오니, 기사단 전력의 충원을 좀 더 부탁드리옵니다. 그로체스 공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전쟁 때문에 은십자 기사단의 전력이 감소되었다고 해도, 그 전력의 반이나 줬는데도 크라레스 따위에게 밀리다니.... 처음부터 크라레스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작전을 펼친 것이 뼈아픈 실책이로구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좋다, 내 폐하께 상소하여 좀더 많은 병력을 보낼 수 있도록 해 보겠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다리엔 후작은 그로체스 공작의 모습이 수정 구슬에서 사라진 후 통신을 주관했던 마법사에게 나가 보라고 지시했다. 마법사는 후작에게 인사를 한 후 수정 구슬을 들고 총총히 사라졌다. 다리엔 후작은 부하 앞이라서 침착함을 가장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있었지만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그로체스 공작의 휘하에 들어간 후 이렇게 질책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고, 자신이 이렇게 질책을 받게 만든 놈은 그 잘난 은십자 기사단이었다. 어떻게 삼류 기사단 하나 해치우지 못해 파견대 전체가 전멸을 당할 수가 있나? 그러면서 어떻게 대 코린트 제국에서 정예 기사단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가? 다리엔 후작은 허공에 대고 괴성을 질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저리 같은 놈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분이 안 풀리는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애꿎은 화병을 집어 던져 버렸다. 꽤 비쌀 것 같은 화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 버렸지만, 다리엔 후작은 소기의 목적인 화를 조금 가라앉히는 데는 성공할 수 있었다. 바로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경비병들이 후작의 방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침입자가 들어온 줄 알고 급히 달려왔을 것이라고 후작은 생각했다. 아아, 아무 일도 아니다. 물러가라. 하지만 경비병은 물러가지 않고 문을 살짝 열었다. 후작이 돌아보니 문을 연 인물은 이 성의 성주(城主)였다. 그는 방 안의 풍경을 살짝 훑어본 후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하녀가 필요하겠습니다요, 후작 각하. 그런 성주를 보고 후작은 짜증 어린 목소리로 질책했다.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성주는 계속 미소를 지으면서 넉살 좋게도 입을 열었다. 후작 각하께서 그렇게 짜증을 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왜 이유가 없어? 군대는 제 몫을 하고 있는데, 기사단이라는 것들이.... 성주는 실례 되는 행동이지만 더 이상 후작이 말을 못 하게 말을 가로챘다. 물론 들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혹시나 일이 잘못 꼬일 수도 있었다. 언제나 칭찬은 말로 하는 것이 좋지만, 남에게 욕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말로 뱉지 않는 것이 최고였다. 특히 후작과 은십자 기사단들 간에 묘한 갈등이 보이고 있는 이때는 서로가 조심하는 것이 좋다. 후작 각하, 오우거 사냥을 해 보셨습니까? 성주가 뜬금 없이 몬스터 사냥 얘기를 꺼내자 후작은 성주를 찬찬히 바라봤다. 성주는 비쩍 마른데다가 별로 볼품없게 생긴 위인이었다. 군인 스타일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마법사는 더더욱 아니었다. 한번씩 왜 이런 멍청이가 이런 곳의 성주로 와 있는지 궁금증이 생길 때도 있었기에, 후작은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후작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성주는 즉시 말을 이었다. 오우거는 집단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혼자서 조용히 돌아다니지요. 그리고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기에 만나기도 정말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우거를 사냥할 때는 먼저 오우거의 서식 지역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 다음 오우거가 좋아하는 것을 이용해서 그놈을 꾀어 들입니다. 오우거는 거의 4미터나 되는 당당한 덩치를 가지고 있기에 혼자서 사냥할 수는 없습니다. 몇 십 명이 덤벼도 오히려 사상자만 내고 놓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놈이 나타날 만한 곳에 함정을 파고, 강력한 활들을 준비해 놓았을 때 녀석이 나타난다면 쉽게 잡을 수가 있죠. 다리엔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그러니까 자네 말은 크라레스의 기사단과 우연히 만나기를 바라지 말고 미리 함정을 판 다음 유인하라는 것인가? 다리엔 후작의 말에 성주는 질색을 하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후작 각하. 저는 사냥 얘기만 했을 뿐이지요. 사소한 사냥 얘기 안에서 그런 멋진 계책을 찾아 내신 것은 각하께서 영민하신 것이지. 소인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내의 말투에서 다리엔 후작은 성주가 상당히 술책에 능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런 인물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자신은 뒤로 빠지면서 다른 사람을 올려 준다는 것, 그러면서 자신은 그 뒤에서 안전하게 진급해 나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띄면 당연히 출세는 빠르겠지만, 그만큼 적도 많이 만들게 되는 것이 세상의 순리니까 말이다. 알겠네, 대신 성공했을 때 내 자네를 잊지 않겠네. 제가 뭐 한 게 있겠습니까? 나중에 높은 권좌에 앉으셨을 때, 저를 잊지나 말아 주십시오. 그래서 말인데, 함정 준비를 자네가 해 주겠나? 예? 그렇게 중요한 일을 어떻게 제가 감히.... 그렇게 자신을 낮출 필요 없네. 그래, 얼마나 시간을 주면 되겠나? 최소한 2주일은 주셔야 합니다. 대 타이탄용 전투 병기들을 옮기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지요. 좋아. 모든 준비 작업을 자네에게 일임할 테니 잘 해 보게. 옛, 후작 각하. 마법의 책 으음.... 블루 드래곤 카드리안은 요즘 들어 심기가 약간 불편했다. 그는 며칠 전 자신의 영토에 감히 호비트가 침입했다는 것을 자신의 영토 사방에 깔아 놓은 마법 트랙에서 발신되는 경보를 통해 알아 내고는 급히 그쪽으로 갔다. 처음에는 단단히 혼을 내 줄 생각이었지만, 침입자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은 급속히 사그라들었고 그는 재빨리 자신의 레어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카드리안의 레어 입구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그런 형태가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오크 굴처럼 산비탈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과 같은 형태였다. 그리고 동굴 내부도 일부 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드래곤들처럼 레어의 내부 장식을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냥 동굴이 무너지지 않는 지지대 정도로만 돌들은 쌓아놓았다. 물론 그 공사는 드워프 부족을 한 무리 잡아다가 완성했기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잘 만들어져 있었지만, 아르티어스 같은 드래곤의 레어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을 정도로 검소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 검소한 레어의 복도를 왔다갔다하면서 카드리안은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오래 생활 함께 했던 동료를 죽이지 않고 이곳에서 내쫓을 방법을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가 그냥 제풀에 지쳐서 포기하고 돌아가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몇 날 며칠이 지났지만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드래곤으로 현신한 채 위협을 가할 수도 없었다. 지금 찾아온 동료는 드래곤 한 마리가 어슬렁 거리면서 위협을 가한다고 곱게 물러갈 놈이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실력 행사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카드리안이 대충 상대하고도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절대로 아니기에 나중에는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누군가 하나는 크게 다치거나 죽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그 대상은 카드리안이 아닌 카드리안을 찾아온 동료가 되겠지만. 에휴..., 직접 손을 쓸 수밖에 없나? 아니면 한두어 달 더 숨어 있으면 돌아갈까? 왔다갔다하면서 궁리를 하고 있던 카드리안은 갑자기 멈춰 서면서 딱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튕기며 외쳤다. 참! 그 녀석은 일이 바쁘니까 한참 더 숨박꼭질을 하면 돌아갈 수밖에 없겠지. 그래, 그거야. 일국의 총사령관이 자리를 그렇게 오랫동안 비울 수 없다는 것을 깜빡 잊다니 내 머리도 다되었군. 흐흐흐.... 안녕하셨습니까? 스승님.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다론을 보자 토지에르는 한껏 미소를 지으며 치하했다. 다론에게 몇 명의 그래듀에이트와 마법사들을 붙여 주면서 모종을 임무를 맡겼는데, 토지에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임무를 완수해 내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래, 먼 길에 수고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스승의 물음에 다론은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의 표정에는 존졍하는 스승이 맡긴 일이 완경하게 완수해 냈다는 충족감이 어려 있었다. 예, 그때 보고 드린 대로 찾아 냈습니다. 그리고 증거는 철저하게 없앴습니다. 오오, 수고했다.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진 토지에르를 보고, 다론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두터운 책자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토지에르는 제자가 내미는 책자를 서둘러 받아 들고는 읽어 보려다 말고, 마음을 바꾼 듯 재빨리 책장을 덮어 제자에게 건네 주었다. 하지만 토지에르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잔뜻 남아 있었다. 마법사가 새로운 마법에 대해서 흥미가 없다면 거짓말이기에, 그걸 의지의 힘으로는 억누르기는 했지만 그 아쉬운 감정까지도 억제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아니, 이것은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좋겠군나. 다론으로서는 스승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책자를 열었는데, 곧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재빨리 책장을 덮은 후 자신에게 다시 건넸기 때문이다. 예? 그건 왜? 그건 알 필요 없고, 너는 이 책을 내가 절대로 찾아낼 수 없는 곳에다가 숨겨 두거라. 그리고 내가 나중에라도 혹시 이것의 출처를 묻거들랑 절대로 모른다고 대답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스승님. 그리고 그때가 바로 너와 나의 사제의 인연이 끊어지는 날이 될 것이야.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느냐? 예, 스승님. 내가 악마에게 혼을 판 지도 벌써 20여 년이 흘러가고 있구나.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성을 잃어버렸을 때 그 뒤처리는 너에게 일임한다. 그때가 되면 나를 스승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악마라고 생각해라. 한 치의 실수라도 있으면 안 될 것이야. 만약 네 힘에 부칠 것 같으면 로니에르 전하께 부탁하거라. 그분이라면 충분히 나에게 안식을 주실 수 있을 게다. 토지에르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다론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또한 스승이 흑마법을 익히면서 자신에게 특별히 해 준 말이 있었기에, 반박은 못 하고 물기 어린 눈으로 스승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필요에 의해 흑마법을 몇 번 썼기에, 나도 얼마나 내 몸이 버텨 줄지 알 수가 없다. 너는 그날을 위해 언제나 대비하고 또 대비해야 한다. 만약 본국이 좀더 안정되어 있다면 깨끗한 마무리를 위해 자결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현실은 그런 여유조차 주지 않는구나. 하지만 스승님, 너무 나쁜 방향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흑마법사라고 꼭 악마에게 혼이 먹힌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잖습니까? 흑마법 사단의 정예들 중에 미친 사람은 단 세 명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토지에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그것은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가능성이 적다고 하더라도 딴 사람이 미쳤다면 나도 미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에 대한 대비는 확실하게 해 둬야만 한다. 여태껏 미친 마법사들이 증명하듯 언제 어떻게 미칠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알겠느냐? 예. 그리고 내가 너에게 그 책을 맡기는 것은, 만약 내 몸 속의 악마가 깨어났을 때 그가 로니에르 공작과 힘을 합치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책은 네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켜 내야만 한다. 알겠느냐? 예, 기필코 마법 책을 지켜내겠습니다. 오냐, 나는 네가 반드시 지켜 내리라고 믿는다. 그 책을 소유하고 있다면 상대가 악마라고 하더라도 로니에르 전하께서는 망설임 없이 손을 잡으실 것임을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이야. 언젠가는 로니에르 전하를 약속대로 돌려보내 드려야 하기에 그 책은 꼭 필요하다. 지금 당장은 로니에르 전하의 힘이 꼭 필요하지만 제국에 안정기가 찾아오고 나면 그분의 힘은 더 이상 소용이 없어진다. 아니 그때가 되면 그분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처럼 위험한 존재로 변하게 되지. 혹시 그분이 지루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모반이라도 일으키거나, 혹은 딴 녀석들에게 로니에르 전하께서 원하는 것이 뭔지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파멸이야. 그때를 대비해서 그 책을 소각해서도 안 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다론 또한 그녀의 막강한 파괴력을 잘 알기에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 스승님. 만약 로니에르 전하의 존재가 본국에 해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지면 그 책을 전하께 전하거라. 그러면 전하께서는 두 말 않고 사라져 줄 것이다. 절대로 전하와 싸우려고 들지 마라.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참, 이것은 하렌 공이 스승님께 전해 드리라는 서류입니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토지에르는 제자에게 서류 뭉치를 받아 들고는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제자는 스승의 얼굴이 서류 몇 장을 넘기면서 서서히 밝아지더니 다 읽고 나서는 한껏 미소까지 띠자 그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쓰여져 있습니까? 그래, 아주 좋은 소식이 쓰여져 있구나. 이대로 아르티어스와 브로마네스만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면 되겠군. 그렇게 되면 엘프리안이 박살날 테고, 크루마의 힘은 상당 부분 감소될 것이 분명하겠지? 흐흐흐. 예? 제자가 도통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맹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토지에르는 입 아프게 설명하는 대신 자신에게 건네 줬던 서류를 다시 돌려주었다. 제자는 그것을 열심히 읽으면서 그제야 방금 스승이 뭣 때문에 음흉한 웃음을 흘렸는지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론! 예? 크루마에다 통신을 보내라고 전하거라. 뭐라고 답하는 게 좋을까? 그러니까 본국도 성심껏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을 찾아보았으나 자료 부족으로 인해 발견 불가능. 뭐 대충 이런 뜻을 좀더 정중하게 해서 보내 주면 되겠지. 앞으로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뭔가를 찾아 달라고 저쪽에서 협조를 구하면 대충한두 주일 정도 시간을 끌다가 찾을 수 없었다고 답을 보내라고 일러라. 알겠느냐? 예, 스승님. 그런데 이 아르티어스라는 드레곤, 꽤 귀에 익은 드래곤인데요? 다론의 질문에 토지에르는 제자의 기억력이 형편없음을 탓하는 듯 한숨을 쉬었다. 휴~, 그야 당연하겠지. 로니에르 전하와 함께 다니는 드래곤이 아르티어스 님이 아니냐? 아, 예. 그렇군요. 거기 쓰여진 대로 그놈들이 아르티어스 님을 모르게 되면 본국에 막대한 이익이 되니까 혹시라도 그 사실이 크루마 쪽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리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이만 가 보거라. 오랜 여행을 하느라 피곤할 텐데 통신실에 전갈을 주고 숙소로 가서 한 며칠 푹 쉬도록 해라. 예, 스승님. 다론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께 정중하게 인사를 드린 후 밖으로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여태껏 참고 있던 눈물이 두 눈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기에 그는 행여 누가 볼세라 재빨리 닦아 냈다. 흑마법의 후유증에 대한 악질적인 소문 때문에 그는 스승이 어둠의 마왕 크로네티오와 계약을 맺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었다. 하지만 스승은 국가를 위해 크로네티오와 계약을 맺고야 말았고, 숨어 지내던 많은 흑마 도사들을 크라레스의 깃발 아래 뭉치도록 유도했다. 그 흑마도사들은 지금 크라레스 제국의 숨겨진 힘이자, 타이탄 제작에 엄청난 보탬을 주고 있었지만 그들이 언제 터질지도 화산처럼 위험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크라레스 제국은 이렇듯 아슬아슬한 곡예를 너무 심하게 하고 있었다. 소년 첩자 제스터 부르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는 두 젊은이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들 중의 한 명은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이었고, 또 한 명은 이제 16세 정도나 됨직해 보이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래, 거기 앉거라. 예. 옛! 까미유는 느긋한 표정으로 앉았지만, 코린트 제국의 최고 사령관을 처음 대하게 된 소년의 안색은 긴장으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소년을 로체스터 공작은 인자한 눈빛으로 바라본 후, 시선을 까미유에게로 돌려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소년이 긴장을 풀기 위한 시간을 줘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소년과는 나중에 대화할 생각이었다. 경을 부른 것은 하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야. 명령만 내리시옵소서. 까미유의 말에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명령을 하는 것은 아니야.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자네가 제일 적임자인 것 같아서 불렀지. 크로나사 평야에 가볼 생각은 없나? 예? 드디어 다리엔 후작이 물러난 것이옵니까? 아니야. 남부 집단군의 총사령관은 아직도 다리엔 후작이다. 까미유는 실망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명령이 아니시라면 거절하겠사옵니다. 저는 투르넨 후작처럼 다리엔 후작의 밑에 있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사옵니다. 그 정도는 미리 예상했다는 듯이 로체스터 공작이 신중한 어조로 답했다. 물론 그 경우도 생각해 봤었네. 하지만 자네의 지체나 현재의 직위, 그리고 능력으로 봤을 때 절대로 다리엔 후작의 밑에는 들어갈 수 없지. 이번에 제2근위대의 대장이 된 자네를 어떻게 다리엔 따위의 밑에 둘 수 있겠나? 자네를 그곳에 파견하는 것은 다리엔 후작이 요청해서가 아닐세. 크루마 전쟁이 끝난 후 근위대도 상당한 개편 작업이 진행되었다. 우선 두 개 부대로 나누기에는 턱도 없이 모자라는 흑기사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 제1근위대로 만들었다. 그런 후 그 대장으로 로체스터 공작은 까미유를 지명했다. 물론 전사해 버린 리사에 대한 우정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 인사였다. 하지만 한 곳에 얽매이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까미유는 공작에게 찾아가 그 명령을 철회해 달라고 청을 올렸고, 그 때문에 제임스가 제1근위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제임스의 적기사는 프로토 타입이었기에 자아가 아주 강해서 매우 다루기가 까다로운 녀석이었고, 또 이번 전쟁을 통해 적기사의 존재가 완전히 드러난 이상 구태여 제임스와 적기사를 갈라 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로체스터 공작은 제임스를 적기사와 함께 제1근위대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이제 적기사 2기밖에 남지 않게 된 제2근위대의 대장은 까미유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겨우 2기뿐이라고는 하지만 제2근위대의 대장이라는 직책이 대단히 높고 중요한 것은 사실이었고, 그런 그가 겨우 다리엔 따위의 밑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 의문을 표시하는 까미유를 향해 로체스터 공작은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 그에게 까미유나 제임스는 아들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혹독한 검술 교육이 싫다고 야밤에 도망 쳐 버린 아들 따위는 이제 더 이상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자존심이 강한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내 독단이야. 자네에게 정예 기사 몇 명을 붙여 줄 테니까 크로나사로 가서 전세의 추이(推移)를 지켜봐 주게. 크루마 군이 크라레스 전선에 투입되었다는 보고를 며칠 전에 들었지. 크루마의 기사단이 움직인 것은 아니고, 보병만 10개 사단 정도 보내 온 모양이야. 10개 사단이나 말씀이옵니까? 까미유는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10개 사단이라는 병력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네. 그 때문에 다리엔 후작의 작전에 막대한 차질이 왔고, 지금 상당히 밀리고 있는 모양이야. 오죽하면 그로체스 공작이 더 많은 병력을 그쪽으로 돌려 달라고 폐하께 상소를 했겠나? 그렇다면 독립 부대 형식으로 파견되어 다리엔 후작을 도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아니야. 도와 주어야 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자네의 판단에 맡기겠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충분히 공작의 요청 을 들어 줄 수도 있었기에 까미유는 세부 사항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공작 전하께서 진짜로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저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기준을 세울 수가 있사옵니다. 나는 그로체스 공작이 망상을 버리고 군부의 일에서 손을 떼기를 원하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린트의 기사단이 크라레스와의 전쟁에서 너무 많은 피해를 입기를 원하는 것도 아닐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그것뿐이라면 나는 제임스를 보냈을 거야. 자네나 제임스, 둘 중의 한 명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해. 그런데 왜 자네를 택했는가 하면 첫째는 크라레스에 있는 그 소녀에 대해 자네가 제임스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둘째는 제2근위대 대장인 자네가 몸을 빼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아서야. 제임스는 수도를 방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하니까 말일세. 전에 그녀가 혹시 헤즐링이 아닐까 하는 귀중한 정보까지 자네가 입수했으니, 그 뒤도 자네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나? 예. 까미유가 수긍하고 나오자 공작은 이제 시선을 그와 함께 들어온 소년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너를 부른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란다. 소년은 로체스터 공작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기에 용기를 얻었다. 예, 전하. 너는 어린 나이에도 제법 검술 실력이 괜찮다지? 물론 그 소년의 검술 실력은 발군의 것이었다. 하지만 겨우 16세의 소년이 검술을 익혔으면 얼마나 익혔겠는가? 자신의 또래 중에서는 상당히 앞서는 위치였지만 그래도 검술을 제대로 익히려면 최소한 20년 이상 더 검술을 익혀야 했다. 소년도 자신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겸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공작 전하께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기분이 매우 좋아진 상태였다. 전하께서 관심을 쏟으실 정도는 결코 아니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래 전이기는 했지만 자신에게도 저 소년과 같이 자신의 자그마한 검술 실력을 남이 알아 주면 우쭐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지. 이게 방금 까미유와 말했던 소녀의 초상화다. 잘 기억해 둬라. 연약하게 생긴 소녀지만 그녀의 신분은 대단하지. 급속도로 진급해서 지금은 공작의 칭호를 받은 소녀다.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던 소년은 로체스터 공작의 설명을 듣고 초록색의 눈동자를 더욱 크게 뜨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초상화에 그려진 가냘픈 소녀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초상화를 뜯어 봐도 자신의 또래 정도로만 보였기에 소년은 매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 소녀,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은 지금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다. 치레아 지구 총독인 만큼 그녀는 크라레스 공격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있지. 일단 조치는 취해 놨으니까 자네는 그곳에 가서 소녀와 그녀가 접촉하는 인물들을 잘 감시해야 할 거야. 소년은 초상화에서 시선을 돌려 로체스터 공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이 제 임무입니까? 하지만 저는 너무 어리고 경험도 없습니다. 그리고 검술도 저보다 능한 사람이 많은데요? 소년으로서는 대단히 겸손하게 말한 것이었다. 웬만한 소년들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이 좋은 기회를 자신이 해 낼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고 덥석 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의 이런 깊은 생각이 담겨진 말에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지는 않지. 아무래도 첩보 교육을 받은 인물들은 자신들이 교육받은 습성 때문에 들킬 확률도 높아지지.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정식으로 정보부에 도움을 청한다면 그 자료는 그로체스 공작에게도 보고될 가능성이 아주 높기에 이번 작전은 로체스터 공작이 비밀리에 독단으로 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경험을 쌓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네. 자네는 이번 일을 기회로 아주 많은 색다른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거야. 또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이지만 그 소녀는 소드 마스터야. 키에리를 격패시킨 장본인이 바로 그 소녀라구. 소드 마스터에다가 그 소년이 가장 존경했던 키에리 발렌시아드 대공을 격패시킨 장본인이라는 말에 소년은 경악했다. 예에? 그녀라면 상대가 어느 정도나 무술을 익혔는지 아주 간단하게 알아 볼 수 있겠지. 그 때문에 너를 선택한 거야. 너는 아직 어리고 검술도 미숙하지. 하지만 그녀의 주위에 침투시키기에는 안성맞춤이야. 이제 네가 선택된 이유를 알겠느냐? 예에. 아마 네가 열성을 다해서 그녀를 위한다면, 그녀는 너에게 자그마한 상을 내릴지도 모르지. 자질이 뛰어난 너를 선택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 그녀가 너의 재능을 알아 본다면 아마도 검술을 가르쳐 줄지도 몰라. 그것을 열심히 익혀라. 너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을 통해 그녀가 누구에게서 검술을 배웠는지 알아 내는 데도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야. 알겠느냐? 옛, 공작 전하. 될 수 있다면 그녀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입수하면 좋겠지만, 쓸데없이 정보를 입수한다고 돌아다니지는 마라. 그래야 의심을 받지 않는다. 너를 그녀의 주위에 배치하는 것은 상대방의 작전 따위를 훔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야. 너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중을 들면서 그녀가 접촉하는 사람들을 슬그머니 살펴봐라. 그녀가 누구를 가장 좋아하는 지 그걸 알아 보라는 말이다. 예. 그녀가 크라레스를 돕는 이유가 어떤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그것만 알아 보면 된다. 그러려면 너는 그녀와 아주 친해져야만 해. 군의 기밀 따위를 물어 보는 것이 아니니까 슬며시 시간과 장소만 잘 맞추면 손쉽게 말해 줄 가능성도 있다. 알겠습니다, 전하. 까미유 자네는 제스터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비밀리에 도와 줘라. 그리고 제스터와 나 사이에 연락을 담당해 주면 좋겠군. 옛, 전하. 아르티어스 님의 목걸이 다녀오셨습니까? 공작 전하. 부하들의 인사를 대충 받으며 그린레이크는 서둘러 말했다. 마법사 20명을 집합시키고 너는 지발틴 기사 단장에게 연락해서 그래듀에이트 40명을 지원해 달라고 전해라. 부하는 그린레이크의 지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웬만한 국가하고 전쟁이라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예? 40명이나 지원해 달라고 한다면 이유를 밝혀야만 하옵니다. 알프레드 쟉센 후작 각하께 뭐라고 해명을 해야 하올런지 하명해 주시옵소서. 그거야 당연히 아르티어스가 대충 어디쯤에 사는지 알아냈으니까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것 아니겠느냐? 예? 그런 정보를 어디서 입수하셨사옵니까? 그린레이크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도 자료를 뒤지고 있었던 부하는 어떻게 상관이 그 사실을 알아 냈는지 궁금해 했지만 그린레이크는 그런 것에 친절히 대답해 줄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잔말 말고 너는 통신실로 달려가거라. 옛, 전하.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모두들 이리저리 뛰어가는 것을 보며 그린레이크는 마음 속으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아무리 지독한 성질을 가진 골드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또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는 아르티어스를 엘프리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접촉을 계속해 나갈 작정이었다. 아르티어스를 불러들이지 못한다면 최악의 경우 자신의 기반까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그린레이크는 눈빛을 사악하게 빛내며 미네르바의 집무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네르바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의 목을 벨 궁리까지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호비트 계집 따위가 감히.... 그린레이크는 황궁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미네르바의 집무실을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어떻게 보면 음흉한 듯했고, 어떻게 보면 사악함이 넘치고 있었다. 그린레이크는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한 가지 기가 막힌 계획을 준비했던 것이다. 우선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아르티어스가 숨어 있는 곳을 찾아 내는 것을 최선의 목표로 한다. 그런 후 황제께 상소하여 아르티어스를 설득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을 미네르바로 임명할 작정이었다. 그게 성공한 후에는 아르티어스를 불러들이는 것이 실패해도 상관없었다. 그때 자신의 목을 베려고 드는 적 또한 함께 사라질 것이므로.... 어라? 식사 드시다 마시고 왜 그러세요? 아버지. 아들의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아르티어스는 스푼을 내려 놓은 후 갑자기 옷깃을 헤치고는 목걸이를 꺼냈다. 아르티어스의 목걸이는 매우 아름답게 세공된 것이었는데, 그 목걸이에 붙어 있는 붉은빛의 보석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 진동은 다크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했기에 다크는 신기하다는 듯이 그것을 바라봤다. 저렇듯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는 보석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이야, 그거 희한하네요. 나 좀 보여 줘요. 아르티어스는 아들에게 자상한 미소를 건네며 말했다. 별로 희한한 것은 아니야. 마법일 뿐이니까. 마법 때문에 울리는 거라구요? 그래. 그렇다면 왜 움직이는 거죠? 지금까지 목걸이가 울린 적은 없었잖아요? 너는 못 봤겠지만 과거에는 자주 울린 적이 있었지. 아르티어스는 목걸이를 다시 옷 속으로 밀어 넣은 후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궁금점이 생겼는데도 그냥 넘어갈 다크가 아니었다. 언제 울리는데요? 아르티어스는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내 영토에 침입자가 있을 때지. 보석의 울림으로 봤을 때 아마도 레어에서 20킬로 정도 떨어져 있겠지. 우와, 거리까지 알 수 있어요? 웬만하면 놀라지 않는 아들이었기에 아르티어스는 우쭐해져서 대답했다. 헤헤..., 이건 아주 간단한 알람 마법이란다. 침입자가 있다면 목걸이가 울린다. 물론 레어에 가까워질수록 울림은 더욱 심해지도록 만들어 뒀지. 만약 소리가 좋다면 요란한 종소리가 울리도록 조작할 수도 있지. 그건 그렇고 옛날 같았으면 당장 달려가서 모두들 따끔한 맛을 보여 줬겠지만, 역시 나이가 들어 가면서 우리들 드래곤은 더욱 원만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 정석이지. 요즘은 레어에 도둑질하기 위해 침입하는 놈들이 아니라면 다 용서해 준단다. 그 말을 듣고 다크는 일부러 목소리를 비꼬며, 불신에 가득 찬 눈길을 아르티어스에게 마구 던졌다. 호오, 원만하고 부드러운 성격이라구요? 에잉? 이 녀석이 애비를 바라보는 눈길이 왜 그 모양이야? 글쎄요, 그건 아버지가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화이어헤머를 다루는 모습에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버지는 결코 부드럽다고 하기는 힘들죠. 삐딱한 아들의 말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화를 벌컥 냈다. 내가 왜 신의 실패작까지 신경 쓴단 말이냐? 그 녀석들은 한평생 노예 노릇이나 하다가 죽으면 되는 거라구. 알겠어? 아르티어스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을 느낀 다크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괜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으음, 스프 식겠어요. 음식이나 마저 먹자구요. 그래도 요즘은 보급 사정이 많이 좋아졌잖아요? 전에는 정말 사람이 먹기는 좀 힘든 거였는데.... 아들이 슬쩍 말을 돌리자 아르티어스도 그것을 기회로 다시금 식사에 열중했다. 괜히 아들 녀석하고 싸워 봐야 남는 것도 없는데다가 서로 단란하게 생활한다 해도 호비트의 수명은 너무나도 짧았기에 그는 될 수 있으면 아들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아무튼 아르티어스가 아들과의 식사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때, 그린레이크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부하들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있는 곳은 말토리오 산맥의 어느 봉우리에 급조해서 만들어진 전진 기지. 다섯 개의 천막이 만들어져 있고 그것들은 모두 나뭇가지와 풀입으로 정교하게 위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지의 주변은 수많은 마법 트랙이 좍 깔려 있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침입자를 경계했다.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쓴 이유는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이 크라레스의 영토였고, 그들은 크라레스에 정식 허가도 받지 않은 채 이곳에 기사단을 끌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린레이크에게 마법사 한 명이 재빨리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리가드 경께서 드래곤의 영토를 찾았다는 보고이옵니다, 전하. 순간 그린레이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역시 그린 드래곤 갈렌시아의 말대로 이곳 말토리오 산맥에도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드래곤이 서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대단히 빨리 찾았구나. 예, 수많은 마법 트랙들이 깔려 있었기에, 뷰 매직 포스의 주문으로 간단히 찾을 수 있었다고 하옵니다. 리가드 경께서는 전하의 다음 행동 지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라고 전할까요? 일단 사방에 퍼진 기사단 전력을 드래곤 영역에서 20킬로 외곽에 집결시켜라. 상대는 대단히 포악한 드래곤이다.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알겠느냐? 옛, 전하. 그리고 일단 우리들도 그곳으로 이동해서 합류하자. 옛! 그린레이크가 그곳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지시한 일은 탈출용 이동 마법진을 그려 놓으라는 것이었다. 일단 유사시에는 중간 경유지로 코린트 서남부를 선택하여 공간 이동한 후 그곳에서 다시 코린트 서북부로, 그런 후 또다시 코린트 북동부로, 그런 후 아르곤 서북부로 도망 쳤다가 그곳에서 아르곤 북동부로 이동해서 마지막으로 라크비에 왕국까지 연속적으로 공간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런 다음 라크비에 왕국에서 육로를 이용해 크루마로 귀환할 생각이었다. 일단 드래곤의 영역으로 침입을 시도하기 전에 그린레이크는 자신이 세운 도주 루트에 각각 마법사 한 명씩을 두 명의 그래듀에이트와 함께 파견했다. 그들은 그린레이크의 지시대로 수신용 이동 마법진과 다음 도주 루트로 도망 칠 이동용 마법진을 그려 놓고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사시에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아 연속적으로 공간 이동하여 라크비아 왕국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드래곤이 탐지 마법에 능하다고 해도 거기까지 따라오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린레이크의 추측이었다. 일단 모든 지시를 다 마친 후, 탈출용 마법진을 그리기 위한 마법사들이 각자가 맡은 구역에 도착해서 충분히 마법진을 완성해 놓았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까지 기다린 후 그린레이크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린레이크는 남은 열네 명의 마법사와 스물여덟 명의 그래듀에이트를 거느리고 드래곤의 영역 부근에 도착했다. 저기부터가 드래곤의 영역이옵니다. 매우 민감한 마법 트랙들이 저쪽에 보이는 나무에서부터 깔려 있사옵니다. 그린레이크는 부하가 가리켜 보이는 쪽을 뷰 매직 포스의 주문을 사용한 상태로 둘러봤다. 좋아. 이제 다시 전력을 나누기로 하지. 드래곤의 영역을 조사하러 가는데는 인원이 작을 수록 좋지.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가면 드래곤이 의심할 거야. 자네들 열 명은 각기 그대듀에이트 두 명씩을 거느리고 탈출용 마법진을 그려 두게. 그러면서 그린레이크는 손짓으로 각자가 마법진을 그릴 위치를 지시한 후 말을 이었다. 나머지 나하고 함께 조사할 인원들은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마법진을 향해 사력을 다해 도망 쳐라. 드래곤이 쫓아온다면 마법사는 동료가 도착함과 동시에 공간 이동하도록! 그리고 남은 인원들의 행동은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알겠나? 옛! 자, 모두들 행동을 시작해라. 그린레이크는 이번에도 부하들이 탈출용 마법진을 완전히 완성할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이들 중에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드래곤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분명히 나올 것이다. 하지만 사람 수가 많을수록, 또 탈출로가 다양할수록 자신이 죽을 확률은 줄어드는 것이다. 정말 대단하구니. 그린레이크의 감탄 어린 말에 부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의 눈으로 봤을 때 주변의 경치는 전혀 대단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 뭐가 말씀이시옵니까? 전하. 맹한 부하의 말에 그린레이크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쯧쯧, 마법 트랙 말이다. 드래곤의 영토라면 몇 군데 가 봤지만 이렇게 많은 마법 트랙이 깔려 있는 곳은 처음 본다. 보통 사람들이 만드는 마법 트랙은 24시간을 지속시키기 힘들지. 원래 대자연의 마나는 한 곳에 집중되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설혹 한 곳에 모아 놓았다고 하더라도 곧 쉽게 분산되려고 하지. 그것 때문에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마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내 상식이 깨지고 말았구나. 저~, 혹시 드래곤이 날마다 돌아다니면서 마법을 갱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을까 해서 그린레이크는 생각을 다시 정리해 봤지만 사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었다. 그건 아닐 게다. 이렇게 많은 마법 트랙이라면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하나하나 갱신하는 데만 며칠이 걸릴 거야. 또 드래곤이란 족속들은 원래가 엄청나게 게으른데, 그렇게 부지런을 떨 가능성이 없다고 보야 하겠지. 아무튼 모두들 조심해라. 드래곤은 벌써 우리들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고, 또 놈은 모든 마법을 마스터 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공작 전하, 그런데 도대체 드래곤의 레어는 어디에 있는 것이옵니까? 글쎄다. 이렇게 마법 트랙이 많이 깔려 있어서야. 뷰 매직 포스의 주문으로는 거기가 거기 같아서 도저히 찾기가 힘든데? 반경 수 십킬로에 걸쳐 마법 트랙을 듬뿍 깔아 놓은 미친 짓을 하는 녀석이 존재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뭔가 대책을 세워야만 하겠다. 다크는 자신에게 소개된 소년을 찬찬히 살펴봤다. 붉은 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뒤로 묶은 침착해 보이는 표정을 지닌 소년이었다. 이 아이가 새로운 내 시종이라고? 예,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전에 있던 밀로드는 어떻게 하고. 다크의 말에 장교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시종을 자신이 직접 뽑아서 데려오지 않는 한 언제라도 필요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상관이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하, 밀로드는 전하의 시종이 없었기에 배치되었을 뿐, 그의 실력이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시종이나 하고 있을 위치가 아니옵니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옛, 전하. 그리고 밀로드는 제8보병 사단으로 발령을 받았으니, 그 대신으로 제스터가 온 것이죠. 지금 전선에는 경험 있는 병사들이 부족하옵니다. 그 점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뭐, 그렇게 말한다면 할 수 없지. 제스터, 앞으로 네가 모실 공작 전하시다. 인사 드려라. 처음 뵙겠사옵니다, 전하. 제스터 크로스란이라 하옵니다. 소년은 또렷한 어조로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소녀가 침착하지만 무표정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제스터를 데려온 장교가 재빨리 말했다. 제스터가 마음에 안 드시옵니까? 마음에 안 드신다면 딴 아이로 바꿔 드리겠사옵니다. 이곳 전선에 다섯 명이 배치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아이는 크로스란 백작의 먼 친척이고 그 외모나 성품 등이 나무랄 데가 없사옵니다. 여기 젝슨 폰 크로스란 백작의 친필 추천장을 가지고 있사옵니다만.... 아니, 그냥 둬라. 제스터라고 했느냐? 예. 너는 밀로드가 임지로 가지 전에 그가 하던 일을 좀 보고 배워라. 예, 전하. 그만 나가 보거라. 말토리오 산맥의 침입자들 드넓은 엘프리안 아카데미 연병장의 한쪽 구석에서 검술 교육을 받고 있는 일단의 젊은이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던 미네르바는 손을 들어 한 소년을 가르키며 말했다. 저 아이가 크라레스의 제1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엘리안 폰 그래지에트 왕자인가? 미네르바의 물음에 노 마법사는 재빨리 대답했다. 옛, 전하. 제법 쓸만해 보이는군. 그래, 실력 테스트 결과는? 대단히 우수하옵니다. 이곳으로 오면서 많은 정예 무사들을 거느리고 왔었지만 정작 아카데미에 입교하면서 두 명의 시종을 제외하고 모두 다 돌려보냈사옵니다. 미네르바는 가볍게 미소하며 답했다. 제법 배짱이 있군. 예, 전하. 그 중년의 시종은 부부인 것으로 조사되었사온데, 열과 성을 다해서 왕자를 모시고 있었고 또 왕자 또한 그들을 대단히 세심하게 배려해 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군.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배려할 줄 모른다면 이미 윗사람으로서의 자격 미달이지. 꽤 탐나는 인재야. 아무리 탐나는 인재라도 적국의 왕자인지라.... 그건 별로 이유가 안 되지. 그건 그렇고, 대인 관계는 어떻던가? 예, 잘생긴 외모에 동맹국 왕자라는 직위, 거기에다가 세련된 매너로 다른 학생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사옵고, 벌써 친구도 몇 명 정도 사귄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호오, 대인 관계까지 원만하시다 이거군. 일국의 왕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놈이로구먼. 프랑크 황제에게는 왕자가 저 녀석 하나뿐인가? 아니옵니다. 한 명이 더 있사옵니다. 그래? 그 녀석은 어떻다고 하던가? 예. 첩보부의 조사 결과로는 성격이 완전히 정반대라고 하옵니다. 사색과 책 읽는 것을 좋아해 심성이 착하지만 유약한 젊은이라고 하옵니다. 더군다나 낯가림이 심하여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한다고 들었사옵니다. 미네르바는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결코 동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기분 좋은 미소까지 어려 있었다. 쯧쯧..., 그런 녀석은 일찍이 도태시켰어야지. 아니면 때려잡아서 교육을 좀더 강압적으로 시켜 놓든지. 예, 그게 아무래도 형이 너무 잘 나가는 바람에 그에 따른 열등감, 그리고 타고난 성격도 있고, 뭐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던 모양이옵니다. 최근에 엘리안 왕자가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제2왕자에게는 아예 황위 세습에 대한 교육을 중지한 것으로 보고받았사옵니다. 정말인가? 미네르바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웬만한 제국들의 경우 세 명에서 다섯 명 정도의 황위 계승자를 교육시킨다. 물론 그들 중에서 정식 황위 계승권을 지닌 인물은 두세 명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두세 명을 더 교육시키는 것이다. 황제로서의 예비 교육을 받았지만 황제가 되지 못한 인물들은 대부분 황실의 중신(重臣)으로 성장할 정도로 그 교육은 대단히 치밀하고도 어려운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그들은 장차 황제가 될 인물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자라기에 서로간의 우정을 나눌 기회도 많았다. 그 때문에 뛰어난 황제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신하와 서로 친구인 경우도 흔했던 것이다. 예. 으음, 그 부분은 철저히 조사해라. 그리고 만약에 불행한 사고에 의해 제1왕자가 황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누구에게 황위가 갈 것인지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도록 해. 알겠나? 예, 전하. 그런데 그것은 갑자기 왜? 몰라서 묻나? 지금은 크라레스가 우방이라고 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프랑크 황제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해도, 제1왕자가 우리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데 그냥 교육 잘 시켜서 돌려보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미네르바의 말에 상대도 슬쩍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리안 왕자의 여자 관계도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게. 만약 여자 친구가 없다면 하나쯤 만들어 붙이는 것도 좋겠지. 물론 인위적으로 맞출 생각은 하지 말고 엘리안 왕자가 사귀는 친구들의 여동생이라든지, 또는 같은 아카데미 안의 여학생들과 사귈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라는 말이야. 알겠나? 예를 들어서 본국으로 귀환하기에는 모자라지만 친구 집에 가서 놀기에는 충분한 정도의 휴가를 준다든지, 아카데미 내에서 전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무도회를 개최한다든지, 뭐 그런 식으로 말지. 청춘 남녀들이란 대충 사귈 여건만 마련해 주면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타오르게 되어 있으니까 너무 인위적으로 짝을 붙일 생각을 할 필요까진 없어. 알겠사옵니다, 전하. 실수 없이 잘 해야 하네. 재차 당부를 거듭하는 미네르바에게 노 마법사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맡겨 주시옵소서, 전하. 아르티어스라는 망할 드래곤에 대한 수색 작업은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어려웠다. 엄청난 면적에 걸쳐 촘촘하게 깔아 놓음 마법 트랙들. 그것도 험준한 말토리오 산맥 안에 깔려 있었기에 일단 그 안에 들어서면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 관계로, 마법 트랙이 좀더 세밀하게 깔린 곳이라든지 뭐 그런 생각으로 찾아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 덤빌 때만 하더라도 아르티어스의 영역이 그렇게 넓은 줄 몰랐던 일행들은 인식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 트랙이 깔려 있는 면적을 기반으로 추리해 봤을 때 아르티어스의 영토로 짐작되는 면적은 무려 반경 20킬로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린레이크는 부하의 보고를 들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뭔가 다른 인식의 전환이 필요했다. 이렇게 무작정 찾아 헤매기만 해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있다고 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시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년 정도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서는 몇 달이 지나도 찾을 수가 없겠다. 일단 지도를 가져오너라. 그린레이크의 말에 기사는 재빨리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고급 양피지로 제작되어 있는 지도를 꺼내 상관에게 건냈다. 여기 있사옵니다, 전하. 그린레이크는 지도를 펴 놓고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이곳이지? 예,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리고 탈출용 마법진을 준비해 둔 곳이 이곳들일 거야. 그렇지? 그렇지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아르티어스의 영토는 엄청나게 넓어 내 기억에는 뒤편에 마법트랙이 끝나는 곳이 여기니까 일직선 거리로 따져도 40킬로에 가깝다는 거지. 아르티어스의 영토가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마법 트랙이 깔려 있는 곳만 잡아 내자 이거야. 그것도 알기 쉽게 마법 트랩이 끝나는 경계선만 계속 연결한다. 그렇게 되면 대충 이런 모양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면서 그린레이크는 지도위에 큼직하게 원을 그렸다. 이렇게 외곽이 잡히고 나면 아마도 드래곤의 레어는 이 영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지 않을까? 부하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면서 상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알아 낼 수 있겠군요. 그렇지. 일단은 외곽 경계선을 정확하게 알아 내라. 그렇게 되면 지도를 통해서 중앙 부분을 정확하게 잡아 낼 수 있겠지. 그리고 나서 중앙을 기점으로 집중적으로 찾는다면 시간이 조금은 단축될 것 같아. 옛, 즉시 시행하겠사옵니다. 전하. 시종이 쟁반에 레드 드래곤과 컵 두 개를 담아 가져왔다. 다크는 이번에 새로 시종이 된 소년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아주 눈치가 빠른데다가 꾀를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크는 소년에게 방긋이 미소를 보냈다. 수고했다. 시종에게 간단하게 고마움을 표시한 후 다크는 레드 드래곤을 한 컵 가득 부어서 아르티어스에게 건넸다. 아르티어스는 술잔을 들어 쓱 향기를 맡아 본 후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아르티어스는 이렇게 강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술 말고는 안 마시는 거냐? 그것밖에 없으니까 할 수 없죠. 디지드는 다 마셔 버렸잖아요. 디지드? 우욱! 아르티어스는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며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말했다. 디지드보다는 이게 낫지. 아니, 내 말은 이거 말고 좀 순한 술은 없냐는 거지. 아르티어스의 투정에 다크는 간단하게 자신의 술에 대한 취향을 피력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술을 따로 확보할 정도로 세심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견은 바로 이거였다. 싫으면 안마시면 되지. 술이야, 찌르르 울리는 그 맛에 마시는 거지 뭐 딴 이유가 있어요? 안 그래도 레드 드래곤 이것도 별로 남아 있지 않으니까 마시기 싫으면 관둬요. 아니, 마실게. 마신다구. 레드 드래곤을 한 모금 마신 후 컵을 탁자에 내려 놓으며 아르티어스가 심각하게 말했다. 으음, 느낌이 좋지 않아. 예? 술맛이 이상해요? 아니면 제가 그 안에 독이라도 넣었다는 거예요? 으음, 드래곤이 쪼잔하게 독을 겁내요? 그 말이 아니야. 레어 주위에 접근하는 녀석들 말이야. 처음에는 화전민( 田民) 정도인 줄 알고 그냥 놔 뒀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아. 이제는 아주 레어 근처까지 다가왔어. 도둑인가요? 글쎄, 그건 가 봐야 알겠군나. 다크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잘 다녀 오세요. 하지만 아들의 대답이 아르티어스에게는 의외라는 듯 그는 급히 반문했다. 뭐? 애비가 가는데 너는 함께 안 갈 거냐? 제가 왜 가요? 애비의 집이 털릴지도 모르는 이런 중대한 사건을 눈 앞에 두고 있는데, 하나뿐인 아들 녀석이 나 몰라라 하다니 이럴 수가 있는 거냐? 그럴 수도 있죠. 황금도 엄청나게 많던데, 조금 나눠 준다고 해서 뭐 그게 대수인가요? 내가 황금 때문에 이러는 줄 아느냐? 드래곤의 둥지인 줄 뻔히 알면서 접근해 왔다면 그 목적은 뻔하지. 하나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멍청이들이고 또 하나는 마법이야. 마법이요? 그럼. 레어에는 내가 연구하던 마법서들이 가득 쌓여 있는데, 그걸 훔치려고 들어온 거야. 말토리오에 둥지를 튼 후 3천5백 년 동안 내 둥지에 접근해 온 녀석들의 목적은 그 둘 중 하나였어. 글쎄요.... 그렇다면 처음 하신 말하고 약간 앞뒤가 안 맞는데요? 드래곤 슬레이어라면 최소한 둥지가 털릴 염려는 없잖아요. 주인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지 않을까요? 오래 전에 드래곤을 잡으려는 사람들을 봤었는데, 그들의 목적은 황금이나 마법책 따위가 아닌 드래곤 자체였다구요. 아버지는 여기 있는데 뭐가 걱정이세요? 아들의 말이 대충 맞는 것 같았기에 아르티어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이 그렇게 되나? 아니잖아! 내가 없다면 빈 집을 털어 갈 가능성도 있다고 봐야지. 갈 거야 말거야? 솔직히 할 일도 없잖느냐? 이렇게 애비가 부탁하는데 할 일도 없으면서 안 가겠다는 거냐? 아르티어스가 이렇게 사정조로 나오면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따라가 드리죠. 다크는 자신의 응답과 동시에 눈 앞이 희뿌옇게 변하더니 돌연 다시 사물이 명확하게 보이는 순간,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의자를 놔 둔 채 공간 이동을 했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윽! 주저앉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니 과거 아르티어스와 단란한 생활을 보냈던 바로 그곳, 아르티어스의 레어에 자신이 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그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다는 점만 빼고는 말이다. 그때는 열심히 청소를 했었는데.... 하는 기억이 떠올랐고 추억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르티어스가 멀쩡한 표정으로 서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방금 전에 자신이 엉덩방아를 찌었다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말을 하고 공간 이동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짜증스럽게 말하는 아들에게 아르티어스는 멋쩍은 웃음을 흘려 댔다. 헤헤...,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이동한다는 것이 그만 그렇게 되어 버렸구나. 미안하다, 얘야. 아르티어스는 손을 뻗어 다크가 일어서는 것을 도와 줬다. 정말 오랜만이지? 너와 처음 만난 게 엊그제처럼 느껴지는데....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이렇게 감상적으로 나오면, 일이 빨리 진척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다크는 모질게 말을 끊었다. 아르티어스에게 시시때때로 자신들이 거기에 왜 있는지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수명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드래곤이라는 족속들은 게을러 터져서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진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자구요. 참, 식사도 대충 하셨는데 디저트로 드시는 것은 어때요? 아들의 무지막지한 말에 아르티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씩 아들 녀석과 함께 살면서 느끼는 의문이 또다시 일었다. 너 정말 호비트 맞냐? 물론이죠. 도와 드려요? 아니, 도와 줄 필요는 없을 게다. 슬쩍 아르티어스가 튕겼다. 물론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도와 주려고 들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마지못해 도와 준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짜식! 자기도 한 판 하고 싶으면서 말을 돌려 대긴.... 함께 가 드릴 수는 있지만, 그걸 나눠 먹지는 못해요. 내가 먹지 않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 이니까. 그렇다면 도와 주려고? 아뇨, 드래곤이 사람 먹는 것은 한 번도 못 봤거든요. 꽤나 자극적일 것 같은데.... 으이그.... 그린레이크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째 수색이 계속되고 있었고, 또 아르티어스의 영역도 엄청나게 넓었기에 그들은 지금 영역의 중앙 부분에 천막을 쳐 놓고는 임시 지휘소로 삼고, 주위를 철저하게 수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임시 지휘소의 왼편에 위치하고 있던 산비탈의 한쪽이 사라지면서 레어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두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감히 어떤 놈들이 나의 단잠을 깨우느냐? 아르티어스가 호기스럽게 외치자 다크가 옆에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언제 잠을 잤다고 그래요? 지금 막 도착해 놓고는.... 원래 다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야 저놈들이 내가 언제나 여기에 있는 줄 알지. 그건 사기잖아요? 사기가 아니라는데도 그러는구나. 그린레이크는 낮은 목소리로 아웅다웅 다투는 두 남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부하들이 저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이미 그걸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처음에 호기스럽게 외쳐 댔던 저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미청년이 정말 포악한 드래곤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 의문을 쫓아 버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위대하신 골드 일족의 후예이시여, 저희들이 이곳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청이 있어서.... 물론 그린레이크는 서로 대화를 터 보자고 입을 연 것이었는데, 이것이 가장 큰 치명적인 실수였다. 아들하고 얘기하느라 정신이 팔려 자신이 원래 이곳에 온 목적을 망각하고 있던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상대의 그 말에 언뜻 제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일단 제 정신을 차리자 아르티어스는 더 이상 다정 다감한 청년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 번만 봐도 오금이 저릴 것 같은 싸늘한 표정에, 무시무시한 위화감을 뿜어내는 저 광포한 눈동자. 아르티어스는 지독할 정도로 싸늘한 어투로 그린레이크를 향해 말했다. 청? 헛소리하지 마라. 내 영토에 들어온 대가는 잘 알고 있겠지? 갑자기 분위기가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은 짧았다. 대신 그린레이크는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재빨리 말했다. 이때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 황금 말씀이십니까? 여봐라, 빨리 준비해 둔 선물을 가져와라. 그린레이크의 부하 몇 명이 천막으로 큼직한 선물 궤짝을 가지러 갔지만, 그린레이크의 예상과는 달리 아르티어스에게는 그따위 선물은 조금도 필요 없었다. 그에게는 바로 이놈들이 이곳에 다시는 얼씬도 못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크흐흐흐, 누가 황금 따위를 말하는 것이냐? 대가는 목숨이다. 아르티어스가 맹렬한 속도로 주문을 외우며 손을 천천히 위로 쳐들자 두 손에서 불그스름한 방전(放電)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린레이크는 순간 경악했다. 저렇게 순간적인 짧은 시간에 8사이클 급 대인 공격 마법 중에서는 최강의 위력을 지닌다는 금지된 마법을 구사할 줄이야.... 헬 화이어다. 모두들 도망 쳐라. 그린레이크는 재빨리 외치며 뒤로 도망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뒤로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드래곤답게 벌써 8사이클 급 주문을 엄청난 속도로 완성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본체로 돌아간 상태였다면 주문 따위를 외울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호비트의 모습으로 트랜스포메이션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헬 화이어! 공간을 찢어발기며 붉고 거대한 빛 줄기가 날아갔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사방으로 분산해서 도망 쳤기에 그 마법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것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티어스도 이들을 모두 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몇 명은 시범 케이스로 통구이를 만들 필요가 있었지만 일부는 살아 돌아가서 아르티어스란 드래곤의 포악함과 무시무시함을 선전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다시는 찾아올 놈이 안 생길 테니까. 헬 화이어는 정확히 그린레이크 쪽으로 날아갔지만 그는 극한의 마법 방어막과 회피 기동으로 목숨을 건질 수 었었다. 대폭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튕겨 나가자마자 그는 약속된 장소로 달려갔고, 그와 동시에 부하들과 함께 공간 이동해 버렸다. 다크는 붉은 빛 줄기가 산의 한쪽 귀퉁이를 박살내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검술이란 정밀도로 승부하는 것이지 이렇듯 무식할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았다. 전에 봤었던 유성 소환도 엄청났고, 이번에 보는 헬 화이어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에 대한 그녀의 인식을 바구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이게 무슨 마법이죠? 아들의 물음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헬 화이어라는 거다. 나한테는 이런 강력한 마법을 한 번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잖아요? 가르칠 수가 없었지. 왜요? 너는 8사이클 급 마법을 그렇게 쉽게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방금 그게 8사이클 마법이에요? 그럼. 저 정도 마법을 혼자서 구사할 수 있는 호비트는 없지. 엘프라도 불가능해. 오직 우리들 드래곤만이 가능하지. 흐헤헤헤.... 자만심에 가득 차서 음흉스런 웃음을 터드리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다크는 한 소리 쏘아 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한 가지 목적이 있었기에 참고 물어 봤다. 저도 불가능해요? 물론 대충 찔러 본 말이었지만, 아르티어스의 대답은 다크로서는 의외의 것이었다. 아니, 너는 가능하지. 하지만 배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아니,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도 않지. 아르티어스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다크는 해실해실 미소를 지으며 반쯤은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자신이 아무리 원래 나이가 많은 고수라고 해도 이런 치매 드래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좀더 손쉽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했고, 또 자연적으로 배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헤헤, 그럼 가르쳐 줘요. 아르티어스는 아들을 미소 띤 표정으로 바라봤다. 홀딱 빠질 것 같은 아들의 연기력에 그만 가르쳐 주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것을 초인적인 인내로 참아 냈다. 이번 것은 그렇게 쉽게 넘어 갈 정도로 가치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사탕 발림을 한다면 좀더 나은 대가를 받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강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스는 아들 녀석의 성격을 자신이 거의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 물론 가르쳐 주지. 단, 지금부터 계속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라고 부른다면. 끄응.... 고민에 빠져 있는 아들을 향해 아르티어스는 열심히 설득 작전을 전개했다. 방금 그 마법은 정말 위력이 대단하단다. 작은 도시 정도는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수 있는 위력이 있지.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싶지 않느냐? 모든 마법사들의 꿈이 바로 저 마법이란다. 어떄? 괜히 오기 부리지 말고 허락하지 그래? 그거 말고 딴 조건은 안 되겠어요? 으음, 그렇다명 이건 어떻겠냐? 잠자기 전과 후에 뽀뽀 한 번씩. 하지만 혐오감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아들이 재빨리 답했다. 으엑, 그것보다는 아빠가 좋겠어요. 좋아, 허락하는 거냐? 으음, 그런 거 안 배워도 나는 충분히 강한데, 과연 그런 게 꼭 필요할까?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그런 아들을 보며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재빨리 말했다. 이런 너구리를 넘기려면 생각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되는 것이 철칙이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네 무술은 아주 대단하기는 하지만 저 정도 위력은 없잖냐? 그리고 이건 아주 장거리 공격도 가능하지. 살다 보면 이렇게 강력한 게 필요할지도 몰라. 안 그러냐? 평상시에는 생각도 안 하면서 웬 생각하는 척을 하려고 그러냐?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겨우 아빠 라는 말하고 최강의 힘을 맞바꾸는 거야. 어때? 이런 기가 막힌 거래는 평생에 한 번 걸릴까 말까 한 거란다. 결국은 아르티어스의 꼬임에 넘어간 다크. 깊이 생각하지 앟는 성격인 만큼 일단 마음을 정하자 대답도 시원스러웠다. 좋아요. 허락하죠. 흐헤헤헤, 약속한 거다. 나중에 딴말 하기 없기야. 누가 아버지 같은 줄 알아요?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라니까? 좋아요. 누가 아빠 같은 줄 알아요? 글쎄, 네가 자주 하는 말 있잖아. 그건 거짓말이었어. 라고 둘러댈지 누가 알아? 기억력도 좋아요. 이건 정말이에요, 아빠! 아빠라는 발음이 약간 이빨 갈리는 듯 들리자 아르티어스는 투덜댔다. 그런 어조도 안 돼. 밝고 부드럽게 아빠. 좋아요, 아빠. 흐흐흐..., 그럼 이제 전수를 해 주마. 일단 네 검을 뽑아라.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하고는 갑자기 검을 뽑으라고 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며 다크가 물었다. 이렇게요? 그래. 그렇게 한 후에 목표물을 정해서 검을 겨눠. 이렇게요? 그래. 그런 후 최대한 마나를 검 속에 밀어 넣으면서 외치는 거야. 헬 화이어 라고 말이지. 헬 화이어! 그와 동시에 붉은 빛 줄기가 뿜어져 나갔다. 다크는 자신이 검 속에 밀어 넣은 것 외에도 엄청난 양의 기가 검 속으로 순간적으로 흡수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겁을 했다. 하지만 예전에 마력 검을 사용할 때 검 속으로 기가 흡수되었던 것이 떠오르자 그 놀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자신의 검에 엄청나게 많은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예사로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막강한 마법이 숨겨져 있었다니.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때? 아르티어스는 또다시 자신의 영토 한 귀퉁이가 묵사발이 된 것이 가슴 아팠지만 애써 참으며 아들에게 물었다. 약간 피곤해요. 마나의 소모가 엄청나네요. 물론 엄청나지. 아무리 너라도 그걸 한꺼번에 세 번 이상 사용하기는 힘들 거야. 글쎄요..., 그건 그렇고 일 끝났으면 돌아가죠. 감사합니다, 드래곤이시여 크라레스의 군대는 코린트의 크로나사 지방을 완전히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겉모양만 그렇다는 말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점령지에서 게릴라들이 날뛰고 있었기에 완전히 점령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이 10만 병력이 투입되었고, 또 크라레스에서 모집한 용병 사단 한 개가 추가로 투입되기는 했지만 점령한 영토는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병력은 턱도 없이 모자라는 실정이었다. 물론 본토에서 긴급히 투입된 200여 명의 그래듀에이트 덕분에 어느 정도 숨을 돌리고 있었고, 또 더 이상 전쟁을 확대할 이유는 없었기에 차츰 나아질 테지만 현실적으로는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하. 무슨 일인가? 포로를 심문하던 중에 놀라운 정보를 입수하였사옵니다. 뭔데 그러나? 예, 게릴라들을 통괄 지휘하는 곳이 어딘지 알아냈사옵니다. 뭣? 그게 사실인가? 예, 바로 미투랑 요새이옵니다. 미투랑 요새라.... 그곳은 크로나사 지방이 아닌데? 예, 그렇사옵니다. 전쟁 전에는 몬스터나 상대한다고 건설한 것이온데, 그곳이 지금은 본국과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주둔중인 병력은? 예, 1개 여단이 주둔중이옵고, 몬스터 토벌을 위해 건설된 만큼 대 타이탄용 방어 병기는 없다고 하옵니다. 그 외에 은십자 기사단에서 보유하고 있는 타이탄 20기, 그리고 철십자 기사단에서 보유한 타이탄 30기가 존재하옵니다. 포로의 말로는 은십자 기사단의 절반이 왔사온데, 얼마 전 10기를 상실했다고 하더군요. 흐음..., 정보의 정확도는 어떤가? 혹시 거짓말이 아닐까? 아니옵니다. 정보부에 문의해 본 결과 타이탄의 수가 현재 이쪽에서 추정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옵니다. 그리고 포로에 대해서도 마법까지 동원해서 철저하게 조사했사오니 그가 처음부터 잘못 알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는 한 정확할 것이옵니다. 심문한 놈은 믿을 수 있나? 예, 이번에 잡아온 마르레인 백작은 이 일대를 관할하던 핵심 인물 이옵니다. 그는 마법사까지 거느리고 있을 정도로 대단히 큰 세력을 떨치던 인물이온데, 이번 전쟁이 벌어졌을 때 마법 통신망을 매우 잘 써 먹은 녀석이죠. 그는 미투랑 요새와 직접 마법 통신으로 명령을 전달받은 후 또 다른 게릴라들에게는 전서구를 이용해서 연락을 주고 받았사옵니다. 다행히 그가 잡히면서 굉장히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사옵니다. 흐음..., 그래도 그 한 명의 말만 듣고 움직인다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커. 예, 그래서 본국에 연락해서 전에 잡았던 은십자 기사단 소속 기사들을 심문해 보라고 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들이 탈진해서 의식이 없었던 관계로 심문을 거의 못 했었는데, 지금은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군요. 그들을 심문해서 얻은 정보와 마그레인 백작의 자백이 일치하옵니다. 흐음, 그렇다면 좋아. 이번 기회에 그곳을 박살내면 되겠군. 예, 그곳에 있는 다리엔 후작이 남부 집단군 총사령관이라고 하옵니다. 일단 포로의 진술에 따라 초상화를 그렸사온데, 한 번 보시겠사옵니까? 그러지. 여기 있사옵니다. 공작은 초상화에 그려진 궁글넓적한 인물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정말 자신을 이 지경까지 고생시킨 상대를 찢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듯 했었던 것이다. 크로나사 평원을 놓고 멋지게 총력전을 한 판 한다면 설혹 패한다고 해도 속이 시원할 텐데, 이런 끝도 없는 소모전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망할 녀석은 정말 눈에 보이기만 하면.... 으드드득! 이놈이 우리를 이렇게 애먹이고 있는 놈이라고? 공작은 이빨을 갈며 말을 이었다. 통통한 몸매를 보아하니 기사는 아닌 것 같은데? 예, 문관 출신이라고 들었사옵니다. 그로체스 공작이라고, 이번에 키에리가 전사한 후 갑자기 권력의 핵심에 등장한 인물이 있사옵니다. 그 공작의 심복이라고 하옵니다. 기습 작전에 투입할 병력은 어느 정도가 좋을까? 놈들의 전력이 전력인 만큼 모든 테세우스들을 거니리고 가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미가엘이나 로메로는 만일을 대비해서 여기에 놔 두는 것이 좋겠지만 말이옵니다. 좋도록 하게. 그리고 본인도 갈 것이야. 아마도 이번 전쟁에서 타이탄 전투는 이것으로 끝이겠지. 적의 본거지를 박살내고, 코린트의 남부 집단군을 와해시킨 후에 휴전 교섭에 들어갈 테니까 말이야. 다음 날 새벽, 미투랑 공격대는 공작의 인솔 하에 출발했다. 청기사 1기와 테세우스 49기로 이루어진 강력한 타이탄 부대와 그들을 호위하기 위한 20명의 그래듀에이트, 여섯 명의 마법사로 이루어진 막강한 기습 부대였다. 이렇듯 대부대를 거느리고 갈 정도로 미테랑에서 행해질 전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중요한 회전에 다크와 아르티어스는 빠져 있었을까? 왜냐하면 그 둘은 그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속이 부글부글 끊었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 그 망할 녀석이 잔꾀를 부린 덕분에 무산되어 버린 것이다. 젠장,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 자식을 없애 버릴 수 있었는데.... 그런데, 그놈 이 자신만 고이 죽지 않고 추잡스럽게도 미네르바까지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진 것이었다. 크루마의 수도 엘프리안을 박살내 버리겠다고 공언한 광포한 드래곤의 주문은 아주 많았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주문은 수도가 박살나는 것을 감안한다면 어렵지않게 들어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한 가지만 빼고는.... 가장 곤란한 주문은 아르티어스라는 골드 드래곤을 초대해 와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주문을 이행하기가 불가능해진 그린레이크는 미네르바에게 일을 떠맡기는 데 성공하고야 만다. 그는 일의 중대성을 황제에게 역설한 후, 아르티어스를 꾀어 내는 데 가장 적임자는 크루마 최강의 고수이자, 저번에 벌어졌던 초록 도마뱀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미네르바뿐이라고 설득했던 것이다. 그러자 곧 황제의 칙명이 내려왔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사지(死地)를 향해 걸어 들어가야 하는 최악의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상대는 이제 그 이름도 공포스러운 에이션트 급을 바라보는 웜 급 드래곤이었다. 워낙 포악한 상대라서 협상을 하기도 힘들 것이지만, 일단 칙명을 받은 이상 이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고약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 일을 그녀가 처리하면 당연히 엘프리안은 건재하게 될 것이니, 그린레이크는 살아 남을 것이다. 그렇다고 처리하지 못하면 그린레이크를 그녀의 소원대로 처형장에 보낼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황제 폐하가 칙명까지 내려서 맡긴 일을 소화해 내지 못한 미네르바도 공동의 책임을 져야만 했던 것이다. 처형장에 가야 할 그린레이크가 미네르바의 무능 때문이라고 걸고 넘어지면 그녀로서도 할 말이 없어지게 되는 매우 고약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이 협상하러 왔소. 하면, 제대로 협상을 해 주는 온순한 드래곤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린레이크를 따라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기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놈의 망할 드래곤은 웬 소녀와 함께 쑥덕거리다가, 그린레이크가 협상하자고 말을 건넴과 동시에 엄청난 마법을 퍼부어 댔다고 하지 않던가? 그 덕분에 마법의 공격권에서 재빨리 몸을 빼지 못했던 세 명의 기사들과 일곱 명의 마법사들이 먼지로 화해 버리고 말았을 정도였다. 우선 레어 앞에다가 선물을 풀어 놓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 드래곤은 일단 선물을 먼저 보게 될 테고, 자신에게 이렇듯 훌륭한 선물을 하는 의도를 궁금해 하지 않을까? 전하, 선물과 함께 친구인 브로마네스가 레어 입주 기념식을 한다고 청한다는 쪽지도 함께 놔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런 다음 아르티어스가 나오기 전에 도망 치는 것이.... 하지만 미네르바는 부하의 의견을 일언지하에 묵살해 버렸다. 그녀 역시 자존심 높은 무인 이었기 때문이다. 닥쳐라. 아무리 드래곤이 무섭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엇는 것이야. 대국 크루마의 제1기사로서의 명예가 있지. 어떻게 말도 붙여 보지 않고 도망 칠 궁리부터 한단 말이냐? 하지만, 전하. 위험 부담이 너무 크옵니다. 너희들은 선물만 놔 두고 뒤로 빠져 있거라. 아무리 상대가 드래곤이라고 해도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도망 치는 것뿐이라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가시겠사옵니까? 지금. 곧장 달려 들어가서 레어 앞에다가 선물을 놔 둔 후 너희들은 먼저 철수하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하지만.... 내가 결정한 일에 더 이상 말꼬리를 붙이려고 들지 마라. 자, 출발! 미네르바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서 있을 때, 역시 먼저 여기 왔었던 부하들의 증언대로 산의 한쪽 귀퉁이가 사라지더니 높이 4미터가 될듯 말 듯한 자그마한 레어의 입구가 드러났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뭔가 중얼거리는 음성이 바람을 타고 들려 왔다. 미네르바가 청력을 한껏 돋워 그 소리를 주워 듣자 그것은 그녀로서는 정말 기가 막힌 내용들이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간 큰 놈이 들어왔지? 아직 맛을 덜 본 모양이지? 헬 화이어도 안 통하면 이제는 어떻게 하려고요? 글쎄다. 괜히 강력한 마법을 써 봐야 내 아까운 영토만 가루가 되니까, 몇 놈 잡아다가 시범 삼아 먹어 버릴까? 우와, 그럼 드디어 사람을 산 채로 씹어 먹는 걸 볼 수 있는 거예요? 으이그.... 아무래도 그건 정서 교육상 안 좋을 것 같고, 그냥 대충 빨리 죽여 버리는 편이 좋겠군. 그러면서 두 사람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미네르바는 일찌감치 도망 치려다가 아직 트랜스포메이션 하지 않은 상태의 드래곤이라면 상대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놈이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검을 뽑으려는 그 순간, 안에서 걸어 나오는 두 인물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어라? 어? 미네르바 아니야? 여기에는 웬일이지? 다, 다크.... 너야말로 여기에 웬일이지? 그리고.... 미네르바가 손짓으로 가리키는 상대. 전에 다크와 함께 행패 부리러 와서 칼부림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음식을 먹고 있던 그 청년.... 이제야 미네르바는 그때 그 청년이 왜 그렇게 겁도 없이 앉아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전에 소개해 주지 않았었나? 내 아버지 아니, 아빠. 그리고 여기는 우리 집이지. 그런데 무슨 일로 왔지? 미네르바로서는 입이 쩍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미네르바가 경악한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자 다크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다시 말을 건넸다. 며칠 전에 왔었던 그 녀석들도 네가 보냈던 거였어? 그리고 저기 놔둔 것들은 뭐야? 번쩍번쩍 하는데? 선물 이지. 부탁이 한 가지 있어서. 부탁? 무슨 부탁? 1년 후에 브로마네스의 레어 입주식이 있을 건데, 거기에 참석해 달라고. 얼빠진 듯한 미네르바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무슨 일인지 짐작하기가 힘들었지만, 일단 자신의 친구인 브로마네스의 이름이 나왔기에 질문을 던졌다. 브로마네스의 레어 입주식이라고? 브로마네스는 지금 쟈코니아 산맥에 살고 있을 텐데, 새로 레어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냐? 예, 드래곤이시여. 이번에 일이 있어서 브로마네스의 분노를 산 일이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 이쪽에서 사죄하고 브로마네스의 조건을 들어 주는 것으로 무마할 수 있었는데, 그의 조건이 문제지요. 새로운 레어를 하나 지어 줄 것, 그리고 아르티어스라는 친구를 자신이 레어에 들어가는 날 초대해 줄 것 등입니다. 미네르바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브로마네스의 저의가 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 왜 나를 초대한단 말이지?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자기가 찾아오면 될 것을 가지고 왜 너를 보냈는지 모르겠군. 내가 호비트의 청 따위는 들어 주지 않고 죽여 버릴 것을 잘 알고 있는.... 이제야 아르티어스도 뭔가 눈치 챌 수 있었다. 브로마네스란 녀석은 사실은 아르티어스가 그날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아르티어스로서는 괘씸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나쁜 녀석, 자기 일에 귀찮게 왜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를 끌어들여. 드래곤이시여, 제발 청을 들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미네르바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흔쾌히 대답했다. 오냐, 좋다. 들어 주지. 브로마네스 녀석의 계책이 괘씸해서라도 가주지. 미네르바로서는 이유가 어떻든, 아르티어스가 와 준다는 데야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때려 잡아서 가져가기에는 상대가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드래곤이시여.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드래곤이라는 것들은 조건 붙이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미네르바가 물었다. 무엇이십니까? 좋은 포두주를 한 상자 다오. 예? 레드 드래곤은 도저히 입맛에 안 맞으니까 포도주를 가져오라니까? 예, 그러죠. 즉시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부하들이 집결해 있는 곳으로 서둘러 돌아가려고 하는 미네르바의 뒤에서 상큼한 목소리가 끼여 들었다. 이봐, 기왕이면 강한 술도 한 상자 부탁해. 레드 드래곤을 거의 다 마셔 버렸거든. 미투랑 요새 전투 미투랑 요새에는 지난 며칠간 엄청난 토목 공사를 위해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었다. 타이탄까지 동원된 이 거대한 토목 공사는 그 규모로 봤을 때, 매우 단기간에 끝이 난 역사상 기록에 남을 만한 공사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얕보면 큰 코 다치십니다. 특히 상대방이 타이찬을 동원하는 만큼 그에 걸맞은 대비를 하셔야지요. 그래도.... 거기에다가 될 수 있다면 로체스터 전하께 연락해서 필요한 만큼의 지원군도 부러야 할 것입니다. 가능하면 지원군 없이 끝낼 수 있도록 해 보게. 예, 그렇게 노력은 하고 있사오나.... 저도 적의 공격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감히 예상할 수가 없는지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것만 가지고도 충분하지 않을까? 다리엔 후작은 자신이 계획한 것보다 더욱 규모가 커져 버린 방어 진지에 혀를 내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처 요새들을 모두 뒤져 타이탄에 타격을 줄 만한 대형 몬스터용 공격 장비들은 모두 다 끌어 모았다. 그리고 본국에 애걸해 몇 가지 최신형 타이탄 공격 장비도 가져왔다. 그렇게 하고서도 모자라 타이탄들이 빠지기에 충분한 거대한 구덩이를 30개나 팠다. 구덩이 안은 물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기름 종이로 세심하게 바른 후 물과 지푸라기를 가득히 채워 넣었다. 단순히 물만 채워 두는 것보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수렁처럼 되어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기 대문이다. 그런 후 그 위를 튼튼한 나무로 덮고 다시 흙을 깨끗하게 깔아 놨다. 수십 톤이나 되는 타이탄을 겨냥한 함정이었기에 사람이나 마차가 지나 다녀도 상관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만든 것이다. 후작은 면밀한 계획 하에 함정이 완성되었을 때쯤 이곳에 대한 정보가 흘러 들어가도록 조작했다. 물론 그 조작은 후작이 가한 것이었고, 그 역할을 해야 하는 부하들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기에 일이 잘못될 수도 있었다. 마그레인 백작이 일을 잘 해 주어야 할 텐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후작을 향해 성주는 재빨리 말했다. 잘 될 것입니다. 마그레인 백작님은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니까요. 솔직히 이런 일에 소모해 버리기에는 아까운 분입지요. 내가 하는 말을 그게 아닐세. 자기가 무슨 영웅쯤이나 되는 듯 입을 다물고 있거나, 또는 자살해 버렸으면 처음부터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말이지. 젠장, 오히려 부하가 술술 털어 놓기를 바래야만 한다니. 이미 예정일보다 하루나 지체되고 있지 않은가? 슬쩍 마그레인 백작의 주둔지에 대해서 놈들에게 정보를 흘렸고, 놈들이 그를 잡아간 것이 3일 전인데, 왜 이렇게 늦는지 이해를 못 하겠군. 나라면 벌써.... 다리엔 후작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예를 잘못 들었던 것이다. 드러내고 자신이 단순 무식하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으니 그로서는 입을 다문 것이 당연했다. 그것을 눈치 챈 성주도 노회한 너구리답게 슬쩍 화제를 돌려 다리엔 후작을 도왔다. 참, 본국에서 도착한 신형 타이탄 병기를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100대 정도 도착했는데, 도무지 신뢰가 안 가더군요. 보통 보던 것보다 덩치가 너무 작아서.... 성주의 말에 다리엔 후작도 흥미를 느꼈다. 타이탄을 때려 잡는 병기는 예로부터 몇 종류 되지 않았다. 거대한 나무 말뚝에 강철 촉을 붙여 놓은 것을 발사하는 대형 쇠뇌라든지, 대형 투석기 등등 대부분이 공성전(攻城戰)에서 자주 사용되는 병기들이었다. 보통 기계 장치의 덩치가 크면 클수록 파괴력이 좋아지기에 대 타이탄용이라면 성이나 요새에나 배치할까 들고 다니기에는 벅찬 병기들뿐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사이엔가 타이탄용 공격 무기라면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모두들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각하. 신무기를 처음 본 다리엔 후작의 소감은 이랬다. 흐음.... 괴상하게 생겼군. 아무리 신형 무기라도 타이탄을 향해 발사하는 도구로 똑같았다. 2미터는 됨직한 큼직한 나무 말뚝의 끝 부분에 강철로 된 거대한 촉이 붙어 있는 초대형 창 같은 것을 날리는 것이다. 그런데 신형 무기는 거청한 기계 장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 강철은 쇠로 된 원통 같은 곳에 꽂혀 있었는데, 그 원통은 나무틀로 만들어져 있는 곽 같은 것에 고정되어 있었고 움직이기 편리하게 밑에는 몇 개의 바퀴가 붙어 있었다. 그것을 보면 쇠로 된 원통 같은 것만으로 그 거대한 창을 날리는 모양이나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저 작은 장치로 과연 타이탄을 박살낼 만한 힘과 속도를 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예, 신무기와 함께 조작 인원도 200여 명 정도 함께 도착했사온데, 그들의 설명으로는 대단한 위력이라고 하더군요. 그들의 말로는 여기 있는 이 심지에 불을 붙이면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다리엔 후작은 의심스런 표정으로 그것을 훑어보며 말했다. 흐음.... 이거 발사 시험이라도 거친 제품인가? 도저히 이 따위 걸로 타이탄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구먼. 글쎄요, 그건 모르지요. 실전에 배치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가? 역시 그로체스 공작 전하셔. 최신 무기라면 동부 전선으로 우선 배치되어야 할 텐데도 이곳으로 먼저 보내 오신 것을 보면 말이지. 아무튼 놈들이 언제 공격해 들어올지 모르니 발사수들은 항시 대기하라고 일러라. 옛, 각하. 자신의 지시를 전달하기 우해 총총히 사라지는 성주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리엔 후작은 신형 무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봐도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사실 부하의 앞이기에 애써 좋은 방향으로 해석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부하의 입에서 그만큼 이쪽 전투가 중요하지 않다든지, 아니면 그로체스 공작의 힘이 약하니까 아직 테스트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 나올 염려도 있었기 때문에 원천 봉쇄를 한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머리 하나는 비상한 놈인 것 같으니까 말이다. 사실 이런 공인되지 못한 시험 무기는 신뢰도가 매우 떨어지기에 가급적이면 지휘관들이 사양하는 품목 중의 하나였다. 저기가 미투랑 요새인가? 옛, 전하. 산꼭대기에 잘도 만들었군. 예, 엄청난 인력이 동원된 작업이었다고 들었사옵니다. 산을 깎아서 만든데다가 북쪽과 동쪽을 40미터 정도 뇌는 절벽이 막아 주고 있는 천혜의 요새입지요. 요새 부근의 나무들은 가지 치기를 해 놨기에 기습을 당할 염려도 없사옵니다. 겨우 몬스터나 상대하려고 만든 규모가 너무 크구먼.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야. 슬슬 준비를 하라고 지시할가요? 그러세. 일단 다섯 대만 꺼내라고 하게. 공작의 지시에 따라 오너들은 각자의 타이탄을 불러 냈다. 그에 따라 대량 생산을 위해 단순한 형태를 한 타이탄 테세우스들이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성 밑 저 먼 곳에서 갑자기 타이탄들이 튀어 나오는 것을 본 성의 경비병들은 요란하게 경종을 울려 댔다. 적군이 아니라면 이렇듯 타이탄을 끄집어 낼 이유가 없었기에 울려 댄 경종이었고, 성내의 모든 인원들이 그 경종이 뜻하는 바가 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담당할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새벽에 울린 갑작스런 경종이었기에 모두들 자다가 일어난 듯 복장들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은 당연했다. 유독 복장 상태가 엉망인 사람들은 대 타이탄용 공격 무기를 다루도록 지시받은 인물들이었다. 일반 병사들이나 기병들은 침착하게 자신의 무장을 갖춘 후에야 자신의 구역으로 이동했다.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타이탄의 이동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이었다. 적의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후작 각하. 어디? 저곳에 있습니다. 여기 이걸 사용하시지요. 투르넨 후작은 성의 상당히 높은 위치에 마련되어 있는 중앙 지휘탑에 서 있었다. 이곳은 매우 높은 위치였기에 사방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전망이 좋았고, 또 성의 각 곳에 마련되어 있는 각종 무기들과 병력을 총괄 지휘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는 곳이었다. 성주가 내미는 망원경을 받아 들고 후작은 여명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느 ㄴ타이탄들을 관찰했다. 성을 중심으로 반경3킬로 주위로 낮은 관목 정도만 남겨 두고 키 큰 나무들은 전분 없애 버렸고, 그나마 1킬로 정도에는 그런 관목조차도 엇애 버렸다. 그렇게 해야만 교활한 오크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엇다. 후작은 성주가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 여명 아래 숲을 뚫고 솟아 올라 있는 다섯 개의 시커먼 물체들을 볼 수 있었다. 겨우 다섯 대뿐인가? 그렇습니다. 으음, 투르넨 후작을 불러라. 투르넨 후작을 불러 오라고 지시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 뒤를 돌아 보던 성주는 수해원 두 명을 거느리고 느긋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투르넨 후작을 보고 급히 다리엔 후작에게 속삭였다. 저기 오고 계십니다, 각하. 그래? 다리엔 후작은 뒤를 돌아보며 느긋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시오, 투르넨 후작. 기사단에 준비하라고 지사하고 오는 길이오? 투르넨 후작은 다리엔 후작의 속을 태우려고 일부러 늑장을 부리면서 천천히 나타났는데도, 상대가 그걸 무시하고 준비 운운하자 인상을 찡그렸다. 상대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보니꼭 자신이 다리엔 후작의 충실한 부하인 듯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늑장을 부리다가 왔다고 맞받아 말하기도 껄끄러웠다. 상대는 명목상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상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투르넨 후작은 일부러 다리엔 후작을 무시하고 옆의 수행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찰조로부터 보고는 없었나? 자신의 말이 묵살 당하자 다리엔 후작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지만 투르넨 후작은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수행원은 급히 답한 후 그들의 앞쪽에 삐죽 나와 있는 금속제 관(管 : Pipe)이 있는 곳으로 재빨리 다가섰다. 금속제 관은 두 개나 솟아 나와 있었는데, 혹시나 비가 올 때를 대비해서 위쪽에 작은 뚜껑이 붙어 있었다. 관을 통해서 대화하면 말을 훨씬 더 멀리 전달할 수 있기에 이런 장치를 붙여 놓은 것이다. 물론 아무리 관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 거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중앙 지휘탑 내에 위치해 있는 통신실과 사격 통제실, 이 두 곳에만 연결되어 있었다. 관 위의 뚜껑은 벗겨져 있었기에 그는 관에 대고 곧장 외쳤다. 통신실! 정찰조로부터 들어온 보고가 있소? 그러자 관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정찰조로부터의 보고로는 적은 70명 정도로 구성된 부대라고 합니다. 아직 주위가 어두워서 적들의 정확한 구성은 알 수 없답니다. 관 속에 들려 온 말을 수행원은 재빨리 복창(復唱)했다. 그 말을 들은 다리엔 후작은 미간을 찡그렸다. 적군의 정확한 구성을 모른다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70명? 그렇다면 70기의 타이탄을 거느리고 왔다는 말인가? 하지만 투르넨 후작은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내는 다리엔 후작에게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대는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니 인원 구성을 이해하기 힘들거요. 보통 타이탄 한 대가 움직이려면 최소한 두 명의 기사와 한 명의 마법사가 타이탄을 서포트 하기 위해 움직이게 되지. 그러니까 대략 네 명에 타이탄 한 대라고 보면 맞을 거외다. 물론 이것은 통상적인 전투에나 맞는 인원 대비이고 이렇듯 목표가 단순하게 정해져 있는 경우에는 정찰을 위한 인원이 감소한다고 보면 맞겠지. 투르넨 후작의 태도가 별로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에게서 정보를 획득해야만 했기에 다리엔 후작은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경의 의견대로라면 17기 정도라는 말이오? 투르넨 후작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간단하게 답했다. 아니, 열일곱 대 이상이라는 말이오. 일부러 말을 짧게 끝내는 바람에 자신이 계속 질문을 하도록 만드는 상대를 향해 다리엔 후작은 짜증 어린 어조로 다시금 물었다. 그렇다면 상한선은 얼마요? 돌아가기 위해 최소한 마법사 한 명,. 그렇다면 적 인원이 70명이라면 69기가 되겠지. 흐음, 17에서 69라. 오차가 너무 크군. 좀 더 오차를 줄일 수는 없소? 이번에 돌아온 대답은 좀더 길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리엔 후작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투르넨 후작은 이번 작전이 자신을 제외하고 다리엔 후작 혼자서 몇몇 부하들만 데리고 쑥덕 공론을 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며칠 전부터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하면서 적의 타이탄이 이곳에 쳐들어온다는 간단한 통보만 나에게 했었소. 그토록 야단법석을 부리며 준비했을 정도라면 적 타이탄이 이곳에 쳐들어온다는 정확한 정보를 그때 입수했다는 말일 것이오. 만약 경이 정보부에서 그런 정보를 얻어 들었다면 나에게도 통보가 왔을 테데, 정보부에서는 아무런 보고도 듣지 못했소. 그렇다면 경 혼자서 일을 벌인 것이 분명한데, 도대체 무슨 공작을 한 거요? 나도 정보가 있어야 그놈의 오차를 줄일 수 있을 것 아니오? 이쪽이 본거지라고 정보를 흘렸소. 다리엔 후작도 상대의 질문에 간단하게 답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예의에 어긋날 정도로 투박한 것이었다. 당신 정신 나갔소? 그렇게 하면 놈들은 최고 정예를 이끌고 이곳으로 와 쑥대밭으로 만들 게 분명한데. 물론 제정신이오. 대신 놈들은 이곳에 대 타이탄 병기라든지 또는 타이탄을 상대하기 위한 그런 준비는 없다고 들었을 거요. 다리엔 후작은 변명하듯 주절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슬며시 자존심이 상하는지라 따지듯 투르넨 후작에게 말을 이었다. 나도 이곳이 본거지라고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소. 하지만 당신의 그 잘난 부하들이 패배한 것도 모자라서 몇 명 생포 당했으니 자연히 이쪽 정보는 샐 것이 분명하단 말이오. 그런데 딴 곳이 본거지라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가는 금방 들통 날 것이 아니겠소? 내 부하들은 입이 무거운 놈들이오. 겨우 고문 정도 한다고 해서 그렇게 정보를 술술 얻어 낼 수는 없소. 투르넨 후작은 급히 변명을 했다. 하지만 다리엔 후작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몰아 붙였다. 이제는 주도권이 완전히 자신에게 넘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고문을 하겠지. 그동안 자살하지 않았다면. 결국은 불게 되어 있소. 마법사들은 폼으로 기르고 있는 줄 아시오? 마법사까지 동원한다면 당연히 불 것이다. 그건 의지와는 상관 없는 고문술이니까 말이다. 투르넨 후작은 할 말이 없어지자 슬쩍 화제를 바꿨다. 으음.... 그때라면 나머지 은십자 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이니까, 대략 50기 정도의 타이탄이 있다고 한 거요? 물론이오. 은십자 20기에 철십자 30기라고 했지. 그렇다면 50기 이상 69기 이하로 보면 비교적 정확할 거요. 놈들이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감이 있다면 50기 정도만 가져 왔을테고, 그렇지 않다면 좀더 가져 왔겠지. 그런데 왜 다섯 대밖에 안 보이는 거요? 그거야 당연히 이 좁은 곳에서 치고 받기가 힘들 테니까 적은 숫자만 꺼내 놓고 이쪽을 꾀고 있는 거지. 그건 그렇고, 대 타이탄 공격 무기는 얼마나 준비했소? 다시 화제가 바뀌자, 다리엔 후작은 상대의 저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며 퉁명스게 답했다. 그게 지금 중요하오? 물론 중요하오. 아무리 쟈크렌 요새에 남아 있던 기사단이 며칠 전에 모두 도착했다고 하지만 철십자까지 전부 다 합쳐도 70대뿐이오. 그 중에서도 은십자는 50대밖에 없다는 말이오. 그런 상황에서 이쪽 50대를 확실하게 박살내겠다고 온 부대라면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왔을 테니 대략 짐작해 본다면 빠듯한 전투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만약 대 타이탄 공격 무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면? 다리엔 후작의 물음에 투르넨 후작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싸워야지. 그래야 위험하면 후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다리엔 후작으로서는 매우 황당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인원들은 어쩌라는 말인가? 여기 있는 모든 인원들을 버려 놓고 탈출하겠다는 말이오? 당연히. 당신도 전황을 지켜보다가 여차하면 이동 마법으로 튀면 될 것 아니오? 그렇다면, 방어 무기가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어쩔 거요? 그렇다면 당연히 여기서 싸워야지. 그편이 훨씬 더 유리할 거요. 요란한 경종이 울려 대면서 성 위쪽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도 정작 상대방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타이탄이 나와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글쎄요.... 혹시, 성내 전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옆에 서 있는 마법사의 말에 공작은 무표정하게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내 전투라.... 성 안에서 싸우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것은 없지만 어떤 대비가 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뛰어드는 것이 과연 현명한 행동인지 조금 생각해 봐야겠군. 하지만 대 타이탄용 방어 장비도 없다고 알려진 성이옵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야. 대 타이탄용 공격 무기가 없다면 왜 구태여 저 좁은 성에서 싸우려고 들겠나? 저렇게 좁은 곳에서는 만약 전세가 불리해져도 도망 치기가 아주 힘들 텐데. 하지만 타이탄이라면 저 높은 절벽에서라도 뛰어내려 탈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40미터 정도의 절벽이야 뛰어 내릴 수가 있겠지. 하지만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라면 그 충격을 소화하기 힘들어. 그리고 뒤어 내리면서 타이탄의 몸체가 절반 이상 땅바닥에 푹 박힐 텐데, 그건 어떻게 처리할 건가? 전투중이 아니라면 상관 없겠지만, 적을 코 앞에 두고 그 따위 짓을 한다면 위험 천만하지.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있을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쩝..., 이런 식으로 일이 전개될 줄 알았다면 로니에르를 데려오는 건데 그랬군. 그렇다고 지금 불러 오기도 뭣하니까 강행 돌파를 해보기로 하지. 마법을 준비해라. 예? 마법이라 하시면? 공격 마법 말이다. 마법사이면서 공격 마법 한 가지도 할 줄 모른단 말이냐? 저..., 알고는 있습니다만, 타이탄을 상대로 한 마법은 거의 소용이 없는지라.... 마법사의 말에 공작은 한심하다는 어조로 질책을 했다. 누가 타이탄을 잡으라고 했나? 저기 있는 성을 박살내란 말이다. 무론 대 마법사라고 해도 성을 완전히 박살내기는 힘들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들의 실력으로도 저 성에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는 있지 않은가? 그런 다음 녀석들의 반응을 보기로 하세. 놈들이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타이탄을 꺼내서 밑으로 달려 내려올 거야. 옛, 전하. 곧 마법사들은 저마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전번의 사건 이후로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기사단에 투입되는 마법사들의 수는 최소한으로 줄었지만, 그 질은 월등하게 상승했다. 신참 마법사들은 모두 본부에 배속되거나 타이탄 공장에서 잡무를 보는 식으로 대폭적인 교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마법사들이 저마다 날려 댄 마법으로 미투랑 성은 굉음을 발하며 폭발을 일으켰지만, 요란함에 비한다면 그리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몇 명인가 병사들이 불에 타 죽기도 하고, 성벽의 위쪽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기에 처음 잠시 동안 허둥지둥하는 것같이 보였던 크루마 병사들은 금세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성 위에서 붉은 화염 덩어리들이 직격하듯 공격대를 향해 쏟아졌다. 콰앙! 굉음을 내며 터지는 화염 덩어리들을 보며 공작은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기사들은 어떤지 몰라도 마법사에 있어서는 상대방이 질과 양에서 한 수 위였던 것이다. 겨우 여섯 개의 화염 덩어리를 날리고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수십 개를 두들겨 맞았으니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었다. 먼저 꺼내 놨던 다섯 대의 타이탄들이 날아오는 화염 덩어리를 보고 재빨리 막아 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상당한 곤욕을 치를 뻔했던 것이다. 마법사들은 적들의 엄청난 반격에 질려서 아예 마법을 구사할 의욕조차 상실한 듯 더 이상의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되로 주고 말로 받았으니까 말이다. 그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마법사가 어물쩍 공작에게 다가와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공격을 재개할까요? 전하. 아니, 그래 봐야 별 소용도 없을 것 같군. 실망스런 어조로 공작이 말하자 마법사는 대안을 제시했다. 본국에 마법사들을 지원해 달라고 연락을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아니, 이 정도 대 부대를 이끌고 와서 마법사를 지원받는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또 그런 요청을 해 봐야 토지에르에게 더욱 무거운 짐을 지우는 일이 될 뿐이야. 노 마법사에게 그렇게 대댭해 준 뒤, 공작은 뒤쪽에 서 있는 기사들 중의 한 명을 호명했다. 이보게, 하인드! 옛, 전하.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한다.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라고 지시하도록! 내가 앞장서겠다. 이쪽에서 위력 제압으로 나간다면 무슨 꿍꿍이 속인지 곧 알 수 있겠지. 적들이 타이탄을 모두 꺼낸 것 같습니다. 수호는 50여 기 정도! 망원경으로 적진을 관찰하고 있던 다리엔 후작의 수행원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걸 듣고 투르넨 후작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꺼내는 정도의 행동인데도 저렇듯 놀라다니, 실전 경험이 없는 다리엔 후작과 마찬가지로 그 부하들도 역시 실전 경험이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 수행원이 자신의 부하였다면 당연히 질책을 했겠지만, 다른 사람의 부하였기에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망할 녀석은 상관의 부하였기 때문이다. 투르넨 후작은 자신의 명령을 참착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듬직한 자신의 수행원에게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전 기사단 성내 전투 준비. 걸리적거리는 것은 뭐든지 박살내도 상관 없다. 마음껏 싸우라고 전해라. 옛, 각하. 수행원은 이번에는 사격 통제실로 연결된 관에다가 외쳤다. 사격 통제실! 전 기사단 성내 전투 준비! 그렇게 외친 후 그는 재빨리 옆쪽에 마련된 탁자로 다가갔다. 그 탁자 위에는 종이와 펜, 그리고 잉크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장 펜을 들고는 투르넨 후작의 명령을 휘갈겨 썼다. 그런 후 종이를 구겨 가지고는 아래쪽으로 던졌다. 아래쪽에는 그 종이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연락병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그 종이를 펴 본 후 명령을 전해야 하는 곳으로 곧장 달려갈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후작의 명령을 들은 사람이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이렇게 자세한 전달 사항에 종이를 이용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격 통제실은 성의 각 지점으로 연결된 로프가 집결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약속된 신호에 따라 로프를 잡아 당김으로 인해 명령이 효율적으로 전달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치열한 성내 전투가 벌어지고 나면 곧장 그 명령 체계는 박살날 것이 분명했지만, 그 정도 상황이 벌어질 정도면 이미 외곽의 타이탄 공격 무기는 필요 없어지기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하고 있었지만 막상 투르넨 후작이 명령을 내리는 것을 듣고 성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투르넨 후작의 명령은 최악의 경우에나 내리는 것으로, 전투만 우선시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런 식으로 되면 인정 사정 없이 싸우는 아군 타이탄에 깔려 압사하는 병사들이 발생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성주의 표정은 본 체 만 체하고 투르넨 후작은 다리엔 후작에게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다. 지휘는 계속 그대가 할 거요? 이건 병정 놀이가 아니니 본인에게 양도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만. 귀공은 기사단을 인솔하는 것에나 신경 쓰시오. 내 지휘권까지 넘보지 말고. 정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하시오. 투르넨 후작은 슬쩍 비웃음을 흘린 후 수행원들을 이끌고 아래족으로 내려가 버렸다. 여기에 있어 봐야 별로 할 일도 없을 게 분명했고, 더군다나 똥고집이나 부려 대는 녀석 근처에 있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투르넨 후작이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격 진형을 갖춘 적의 타이탄 부대들이 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리엔 후작은 거대한 적 타이탄이 돌진해 오는 것을 창백한 안색으로 바라보았다. 상대와의 거리가 1킬로 정도 남았는데도 땅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전장에 선 그로서는 거대한 적 타이탄들이 돌진해 오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중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후작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타이탄이라면 이쪽에도 많았고, 또 철저하게 준비까지 되어 있지 않던가? 만약 저 많은 타이탄들을 제압할 수만 있다면, 아예 전세가 역전되는 정도를 넘어서서 크라레스의 항복까지도 받아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모든 사수 발사 준비. 후작의 말에 따라 수행원은 떨리는 어조로 사격 통제실로 연결된 관에다가 외쳤다. 사격 통제실! 모든 사수 발사 준비!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리엔 후작은 창백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제 적 타이탄은 거의 코 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발사. 발사! 그와 동시에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놀란 다리엔 후작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뭐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놈들이 또 마법을 쓴 거냐? 다리엔 후작은 성벽의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며 놈들이 뭔가 화염계 마법을 써서 공격을 가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수백 개도 넘는 거대한 나무 말뚝들이 상대방 타이탄들을 향해 날아갔다. 적들도 이 요란함에 놀랐는지 다급하게 방패로 상체를 가리면서 자신들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말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갑자기 날아든 말뚝의 양은 엄청난 숫자였고 몇 대의 타이탄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렀다. 장갑이나 방패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타이탄도 있었다. 하지만 쟈크렌 요새처럼 처음부터 타이탄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의 경우 엄청나게 많은 타이탄 공격 무기를 보유하고 있기에 이 한 번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는 타이탄이 나올 가능성도 있었지만, 미투랑 요새는 그렇지 못했다. 다리엔 후작이 급히 무기를 끌어 모았다고 하지만, 거의 태반 이상 몬스터 퇴치용이었기에 타이탄들에게 치명적일 정도의 타격을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쏟아지는 화살 비. 혹시나 상대방 타이탄의 머리 쪽에 나 있는 구멍을 통과해서 기사를 다치게 할 수 없을까 하는 망상에서 쏘아 대는 것이었다. 물론 기사가 맞을 확률은 정말 적었지만 수천개가 날아드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상대방 타이탄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괜히 지체해 봐야 화살 세례나 대 타이탄 병기들의 세례를 한 번 더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던 순간, 거의 일곱 대 정도의 타이탄들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파 놓은 함정이 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것은 타이탄의 발목을 잡고, 그 안의 기사를 익사시키려는 의도였다. 다리엔 후작과 성주의 의도대로 물과 지푸라기로 뻑뻑해진 물에 잠긴 순간, 타이탄은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엄청난 쇳덩어리의 무게에다가 물이라는 속성 때문에 높게 도약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동료들이 빠지고 나자 적들은 더욱 진격 속도를 높여서 달려들었다. 이것 외에는 동료를 살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렇게 물 속에 빠진다고 해서 마법 생물인 타이탄이 익사할 리는 없었고, 그것을 꺼낸다고 난리를 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공간의 저편에서 기다리게 한 다음 그 구덩이에서 탈출해서 다시 불러 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탈출한 기사가 물 위로 나올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이때가 가장 좋은 화살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놈들의 궁수들은 기사들이 물 위로 생쥐마냥 기어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동료들이 탈출하기 전에 적의 궁수들을 침묵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알프레드는 이 성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둘러서 수리를 했다고 하지만 이 성은 처음부터 몬스터 정도만을 막을 수 있도록 구축된 곳이었다. 그렇기에 타이탄을 상대하기에는 성벽이 좀 약하다는 것은 둘째치고, 너무 비좁아서 초대형 병기들을 놔 둘 만한 장소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병기를 수납할 공간도 별로 넓지 않은 이곳 73보루(堡壘)에 무려 8개의 대형 쇠뇌와 7개의 신형 무기르 쑤셔 넣어 놨으니 비좁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좁은 장소에서 버적거리니까 초가을인데도 땀 방울이 절로 흘러 내리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신형 무기는 발사할 때 꼭 불을 필요로 했다. 그렇기에 보루 내는 이미 한증막을 연상시킬 정도로 찜통이 되어 있었다. 땡땡땡 땡땡땡....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종이 두 번 울리자 발사수들은 모두들 긴장하며 작자의 물기를 발사할 준비를 했다. 이것은 발사 준비의 신호였고 보루의 벽 틈새로 적이 먼 곳에서 돌진해 오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신형 무기의 발사수였기에 오른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다. 이제 종이 한 번 더 울리면 그때 발사하면 되는 것이다. 땡땡땡.... 종이 울림과 동시에 알프레드는 큼직한 쇠통의 위쪽에 삐죽이 솟아있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푸지지직.... 묘한 소리를 내면서 심지가 타들어 가자 먼저 설명을 들은 신형 무기 사수들은 모두들 귀를 틀어 막았다. 독 이어 굉음이 울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쇠뇌의 사수들은 얘기가 달랐다. 그들은 곧이어 굉장한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옆의 동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손으로 귀를 틀어 막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발사와 동시에 다음 발사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쇠뇌 발사수들이 발사를 끝내고 막 시위를 뒤쪽으로 당기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때 천지가 뒤집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신형 무기가 발사되긴 했는데, 그건 여섯 발뿐이었다. 나머지 하나 남은 신형 무기는 발사되기는 커녕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파편과 충격을 주위로 퍼드렸다. 알프레드는 운 좋게도 자신의 옆에 있던 동료가 그 파편을 막아 주는 그야말로 인간 방패의 역할을 해 줬기에 충격만 받고, 옆쪽으로 밀리다가 벽을 들이받고 기절해 버렸다. 쾅! 쾅! 거대한 성벽을 허물듯 박살내고 돌진해 들어오는 적 타이탄들을 향해 성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타이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달려 들었다. 이제 성 안은 그야말로 나장판이 되고 말았다. 상호 100대가 넘는 타이탄들이 집단전을 벌이는 통에 성 내부가 무사할 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기사단을 책임지고 있던 트루넨 후작은 생각해 보지 않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돌진해 들어온 적들 중에서 가장 거대한 타이탄의 존재였다. 그 거대한 타이탄은 단순 무식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방패로 막고 검을 휘두르는 타이밍이 매우 정교했기 때문에 순식간에 다섯 대의 은십자 기사들을 피의 제물로 삼아 버렸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직접 상대하기는 벅찬 괴물로 보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기사들의 실력은 어떤지 몰라도 상대 타이탄의 덩치와 출력이 이쪽보다 월등하게 우세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넓은 대지 위에서 치고 받는다면 숫자가 월등하게 많은 이쪽이 유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좁은 성 안에서 치고 받자니 자연히 장애물이 많았고, 큰 덩치와 함께 그에 따른 강력한 파워를 지닌 타이탄이 월등하게 유리하게 되는 것이다. 성내 곳곳에서는 아직 생존해 있는 대 타이탄 무기들이 적 타이탄을 향해 공격을 가하고는 있었다. 그 중 몇 대의 신형 무기는 발사 때 폭발을 일으키며 사수들을 전멸시키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좁은 공간에서의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쪽에 처진 적 타이탄들이 공성 무기를 하나하나 찾아 내어 박살내기 시작했고, 눈에 띄는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하면서 대타이탄 무기들은 하나하나 침묵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가자 트루넨 후작은 억눌렀던 분노를 터뜨렸다. 제기랄! 탁상 공론이나 하던 놈이 생각해 낸 작전이니 뻔하지. 그는 슬쩍 타이탄을 돌려 오른쪽에 솟아 있는 곳곳에 상처가 생긴 중앙 지휘탑을 바라봤다. 타이탄 몇 대가 그 덩치를 가지고 비비적거렸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벌써 도망 쳤나? 이런 식의 전투라면 여기서 개죽음 당할 필요가 없잖아? 트루넨 후작은 탑 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슬며시 분노를 느꼈다. 아무리 명목상이라고 해도 사령관이 도망 쳤다면, 자신도 여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타이탄을 몰아서 좀더 앞쪽으로 나간 다음 적 타이탄과 접전을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자신이 나설 단계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지금 한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기에 앞으로 나선 것이다. 투르넨 후작은 적과 몇 차례 검을 겨누다가 상대의 검이 묵직한 공격을 가했을 때, 그걸 기회로 뒤쪽으로 밀리는 듯 쿵쾅거리며 후퇴하여 그대로 중앙 지휘탑을 등판으로 밀어 버렸다. 보통 타이탄이 상대의 검에 밀려 중심을 잃은 것이였다면 여태까지처럼 탑에 큰 충격을 주지 않고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투르넨 후작은 아예 탑을 박살내려고 힘껏 뒤로 밀어 붙였기에 탑은 그 엄청난 중량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 졌다. 트루넨 후작은 아예 내친 김에 뒤로 자빠지면서 밀어 붙인 후 다시 일어서면서 탑의 잔해를 지근지근 밟아 버렸다. 혹시나 다리엔 후작이 도망 치지 않고 탑 안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투르넨 후작은 자신의 행동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목격자들에게 아주 우연히 벌어진 일인 것처럼 보였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중에 그걸 상부에 적 타이탄의 힘에 밀렸기에 벌어진 매우 불행한 사고였다고 진술할 생각이었다. 투르넨 후작은 완전히 탑을 박살내 버린 후 마나를 힘껏 끌어 모아 외쳤다. 전원 후퇴! 트루넨 후작은 후퇴하라고 외쳤지만 정작 자신은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목격자가 한 둘은 살아 남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생각한다면 자신은 후퇴하면서 가장 모범적인 상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투르넨 후작과 몇몇 기사들이 사력을 다해 막고 있는 사이 부하들은 뒤로 빠지면서 일부 성벽을 허물어 버리고는 아래로 뛰어 내리기 시작했다. 40미터 정도의 높이의 절벽이었기에 상당한 충격이 오기는 하겠지만, 그건 각자가 지닌 재주껏 억누르면 되는 것이다. 부하들이 차례로 빠져 나가는 사이 투르넨 후작은 정말이지 후퇴 작전에 있어서 모범적인 상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적의 사령관이 탑승했을 것으로 보이는 그 거대한 청색 타이탄을 직접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수들은 고수들끼리 겨뤄야 서로 간의 피해가 줄어든다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투르넨 후작도 저 청색 괴물하고 싸워서 이길 자신은 아예 없었다. 그리고 또 잘못해서 상대가 상상 이상의 고수라면 자신은 그놈에게 발목을 잡혀서 아예 탈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가능성마저 있었기에 그는 일부러 거대한 청색 타이탄의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3분의 2가 넘는 부하들이 절벽 밑으로 뛰어 내린 후 그들의 퇴로를 지켜 주던 후작도 아래로 뛰어 내렸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탈출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론 자신의 부하들처럼 타이탄을 타고 그대로 뛰어 내릴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타이탄에 탄 채로 땅바닥에 박혀서는 해답이 안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뛰어내리기 직전 타이탄의 머리를 뒤로 젖혔고 타이탄이 땅바닥에 격돌하려는 순간 타이탄에서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런 다음 땅바닥에 처박혀 있는 자신의 타이탄에게 공간 저편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남기고 쏜살같이 도망 쳐 버렸다. 크라레스의 기사단은 끝까지 퇴로를 사수하고 있던 상대방 타이탄 다섯 대를 해치운 후 절벽 쪽으로 달려갔다. 상당수의 타이탄은 벌써 구덩이를 빠져 나와 도망 쳤지만 아직 몇 대 는 도망 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검이나 철퇴 등의 무기를 아래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타이탄들을 향해 던졌다. 그런 후 성벽의 일부를 뜯어 내어 그대로 아래쪽을 향해 던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다섯 대의 타이탄이 아래쪽으로 뛰어 내렸고, 드디어는 여섯 대의 적 타이탄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일단 더 이상 적 타이탄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기에, 크로아 공작은 자신의 타이탄 프루토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공작은 타이탄이라면 더 이상 탑승하는 것조차도 질린다는 듯 끔찍한 표정으로 프루토를 바라봤다. 로니에르는 청기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 걸까 .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크로아 공작이었다. 그만큼 프루토는 지독스럽게도 말을 듣지 않는 타이탄이었기에 공작은 눈 앞의 적과 프루토를 함께 상대해야 했기에 다른 전투보다 피곤이 배로 몰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공작은 프루토에서 내리자마자 부하들에게 피곤한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쓸 만한 서류가 있는지 뒤져라. 그리고 적의 마법사나 기사가 보이면 생포하도록! 그리고 그 외의 포로는 필요 없으니 모두 본보기로 처형하라. 옛, 전하. 부하들은 공작의 명령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그야말로 사냥을 시작했다. 몇몇은 타이탄에 탑승한 채였지만, 대부분은 성안을 뒤지기 위해 타이탄을 돌려보낸 후 였다. 사방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공작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부하를 향해 말했다. 참, 그 우레 소리를 내던 적의 대 타이탄 병기 기억하나? 예, 전하. 혹시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있는지 뒤져봐라. 그리고 사수들 중에서 살아 있는 녀석도 몇 명 잡아와라. 옛, 전하.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로체스터 공작에게로 남부 전선의 지휘권이 넘어온 것은 미투랑 전투가 끝난 후 정확히 이틀 뒤였다. 그 전투에서 살아 남은 투르넨 후작이 전투 도중 지휘권을 내팽개치고 도주한 다리엔 후작을 고발한 후, 코린트의 황제는 끝내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된 작전으로 인해 무려 48기의 타이탄이 손실되고 성 한 개와 1개 사단급의 병력이 몰살한 것은 둘째치고, 지휘자가 전투중에 도주했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탈출에 성공한 기사들과 몇몇 생존한 병사들의 증언에 따라 최후까지 부하들의 퇴로를 마련해 주기 위해 분투했던 트루넨 후작은 간단한 징계만 받을을 뿐,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징계를 받은 이유는 부사령관이라는 위치에 있으면서 사령관인 다리엔 후작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리엔 후작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의 목이 날아가는 것과 함께 그로체스 공작의 꿈도 박살나 버렸다. 모든 군권(軍權)이 로체스터 공작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남부 전선이 자신의 관할 하에 들어오자마자 근위 기사단과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제외한 남은 모든 여유 전력을 이끌고 남부 전선에 도착했다. 하긴 여유 전력이라고 해 봐야 철십자나 동십자 기사단은 직접적인 대 타이탄 전투에 사용하기에는 무리였기에 금십자와 은십자 기사단이 주축이 되었지만, 한때 200기에 이르던 막강 전력은 이제 겨우 80기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생각 같아서는 근위대의 일부라도 돌리고 싶었지만 근위대 또한 오랜 전쟁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당해, 제1 2근위대를 통합하여 제1근위대로 만들어 제임스에게 맡겼고, 제3근위대는 제2근위대로 명칭을 바꾼 상태였다. 한때 최강의 타이탄 36기로 구성되었던 근위대는 지금 불과 15기 정도로 감소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개편된 제2근위대의 경우 비밀 임무를 위해 크라레스에 들어가 잇는 상태가 아닌가? 불과 적기사 2기로 이루어진 제2근위대라고 해도 갖춰진 전력은 엄청난 것이었고, 더 이상의 전력을 근위대에서 빼낸다는 것은 어려웠다. 로체스터 공작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쟈크렌 요새에는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배치하고, 이제 새로운 수도로 확정된 케락스 시에 제임스가 거느리고 있는 제1근위대를 배치했다. 그런 후 곧바로 모든 전력을 거느리고 남하했던 것이다. 사실 로체스터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지금의 전력으로는 전쟁을 지속한 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정보에 따르면 크라레스는 정규 급이 거의 100여 기, 크루마는 130여기가 남아 있었다. 그에 비했을 때 코린트는 모두 다 합한다면 정규 급 118기, 그것도 발렌시아드 기사단까지 합해서 말이다. 이런 최악의 상태에서 그나마 두 나라 모두 견제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 때 재빨리 휴전을 하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은 당연했다. 공작은 전선에 도착한 후 크라레스에 잠입해 있는 까미유를 불러냈다. 안녕하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오, 갑작스런 호출이었는데 빨리 도착했군. 옛, 전하. 이번에 남부 전선까지 총괄하게 되신 것을 경하(敬賀) 드리옵니다. 경하는 무슨....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지. 그건 그렇고, 그 멍청한 다리엔 녀석이 50여 대에 이르는 타이탄을 손실한 덕분에 이제 크라레스와는 한 판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원통할 뿐이지. 자네가 있었는데도 그 낌새를 채지 못했나? 예, 로니에르 공작은 이번 전투와는 무관하옵니다. 얼마 전에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들었사온데, 그 외에는 대부분 자신의 천막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낸다고 하옵니다. 그 때문에 그의 시중을 드느라 제스터는 별로 돌아다닐 여유가 엇다고 하더군요. 사실, 제스터도 그날 거의 70명이 넘는 기사들이 공간 이동한 것을 저에게 보고해 오기는 했사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미투랑을 공격하러 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사옵니다. 흐음, 오히려 쓸데없이 정보 수집한다고 돌아다니지 않는 게 더 좋겠지. 또 그 작전은 나에게도 보고되지 않았을 정도로 다리엔 혼자서 세운 작전이었다. 만약 이쪽에 도움을 청했었다면 사정이 약간 틀려질 수도 있었지. 그건 그렇고, 이번 패전으로 더 이상 크라레스와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쯤에서 손을 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예? 그렇게 된다면 코린트의 명성은 무너지고 말 것이옵니다. 하지만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다가 나중에 크루마에게 뒤통수라도 얻어 맞는 날이면 명성 유지는 고사하고 멸망할 가능성마저도 있다. 그만큼 본국의 전력은 형편없이 떨어져 있어 크루마는 그때 수거한 고철 타이탄들로 새로운 타이탄들을 생산 중이다. 하지만 지금 본국은 그것마저도 어려워. 생산 시설을 다시 복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내년 봄이나 되어야 새로운 타이탄 생산이 가능해질 거란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현재까지 입수된 가장 정확한 정보에 의하면 크라레스의 타이탄 총수는 150기를 넘어서고 있다. 물론 그 중에서 70기 정도는 루시퍼나 푸치나 같은 별 볼일 없는 타이탄이야.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거의 대부분이 1.3의 출력을 지닌 카르록시아나 그에 준하는 출력을 내는 것으로 조사된 알파 급, 그리고 거대한 덩치와 상상하기도 힘든 출력을 지닌 최신형 베타 급이다. 조사된 바에 의하면 베타 급은 2기 이상, 아마도 5기 이하일 것으로 추측된다. 로니에르가 가지고 있는 것 1기, 그리고 미투랑 전투에서 투입된 1기. 정보에 의하면 미투랑 전투는 크로아 공작이 지휘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크로아 공작이 베타 급을 가지고 있겠지. 그 외에는 많아 봐야 3기 이하일 것으로 추측된다. 대단한 전력이옵니다, 전하. 그렇지. 그에 비해 본국의 전력은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격감했다. 이제 은십자 기사단과 금십자 기사단을 합쳐도 겨우 78기. 철십자나 동십자 기사단의 전력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아. 발렌시아드 기사단 10기에다가 근위대 총 전력 17기. 이 상황이라면 크루마나 크라레스 보다는 약간 우위에 서겠지만 그 둘이 한꺼번에 침공해 들어온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설마 그렇게 까지야....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것이 좋겠지. 한 가지 네가 명심해야 할 것은 크루마보다는 크라레스 쪽이 더 강하다는 사실이다. 키에리를 격패시킬 정도로 강력한 기사가 존재하는 한, 크라레스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야. 그래서 자네를 불렀네. 자네가 사신으로 가 주겠나? 예? 자네에게 여태껏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 이유가 바로 그거야. 현실적인 힘의 균형을 잘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네. 내가 자네를 사신으로 선택한 이유는 자네라면 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크라레스에 많은 것을 양보하지 않고 종전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지. 지금 크라레스도 너무 많은 영토를 폭식(暴食)한 덕분에 소화 불량에 걸리기 직전이야. 아마도 협상이 어렵지는 않을 거야. 해 주겠나? 옛, 전하. 처음부터 내 의견대로 크라레스를 게릴라전으로 발목을 잡고, 그 사이에 크루마를 박살내 버렸으면 이런 사태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이지 원통하구나. 안녕하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이번 미투랑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신 것을 축하 드리옵니다. 축하라고 할 것 있겠나? 테세우스 12기가 파괴되고 기사 두 명 사망, 여덟 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오랜 전쟁에 쐐기를 박는 멋진 승리였사옵니다.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공치사나 듣자는 것이 아니고 보여 줄 것이 있어서네. 토지에르가 궁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공작은 괴상하게 생긴 물건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것은 이번 미투랑 전투에서 노획해 온 적의 최신 무기였다. 이게 뭔지 알겠나? 크로아 공작의 물음에 토지에르느 한참 생각한 후 대답했다. 그, 글쎄요. 이게 무엇이옵니까? 여기 나 있는 구멍은 또 무엇이지요? 공작이 가리킨 물건의 용도를 토지에르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제법 크고 둥그런 구멍이 뚫려 있는 길이 1미터 정도의 원통형 쇠 막대기가 놓여 있었고, 그 쇠막대는 나무로 만든 틀로 견고하게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틀의 아래쪽에는 바퀴가 붙어 있어 어느 정도 움질일 수도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 해괴한 물건은 토지에르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터라 그 용도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게 무엇이옵니까? 전하. 자네도 모르는군. 이게 이번에 미투랑 요새에 배치되어 있던 신형 대 타이탄 병기지. 이름은 뭔지 잘 모르겠고. 이게 대 타이탄 병기라구요? 그렇다면 여기 뚫려 있는 이 구멍으로 뭔가를 쏜다는 것이옵니까? 그렇네, 열 번 설명하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좋겠지. 이봐. 그러자 공작의 뒤에 서 있던 장교가 즉각 대답했다. 옛, 전하. 발사 준비를 하라. 그리고 포로들도 데려오고. 옛! 명령을 받은 장교가 성큼성큼 어디론가 가 버린 후 공작은 토지에르에게 설명했다. 어떻게 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기에, 이걸 쏘던 녀석 몇 명을 잡아왔지. 아, 예. 토지에르가 흥미진진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이, 포대(布袋)로 덮어 두었던 큰 화살이 운반되어 왔고, 흑색의 가루가 잔뜩 들어 있는 통도 날라져 왔다. 그 통의 내용물을 흘끗 바라보던 토지에르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빛내며 그곳에 다가간 후 내용물을 집어서 만져 보다가 급기야 냄새까지 맡아 보고 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나? 예, 이건 화약이라는 것이옵니다. 거의 100년쯤 전에 개발된 것이온데, 불이 붙으면 금방 타들어 가면서 짙은 연기를 내지요. 낮은 수준의 마법사들이 높은 분들 앞에서 연출 효과를 내기 위해 주로 애용하는 물건이옵니다. 그 외에 화염계 마법을 사용하면서 좀더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수련 마법사들이 사용하기도 하지요. 흐음..., 이게 폭발하기도 하나? 예? 폭발이라고요? 글쎄요. 이건 어떤 특수한 조건을 만들어 주지 않는 한 폭발하지 않습니다요. 아주 맹렬하게 타들어 간다고 보는 것이 옳겠습죠. 한 번 보시겠습니까? 토지에르는 통 속의 화약을 한 주먹 가져다가 흙 위에 올린 후 불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 화약은 순식간에 타들어 가 버렸고, 재도 거의 남지 않았다. 연기는 엄청나게 솟아 나왔지만, 토지에르의 말대로 폭발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자네의 말대로군. 그런데 이게 굉음을 내면서 저걸 쏘아서 날리더라구. 좀 있다가 포로들이 도착하면 자네도 알 수 있을 걸세. 곧 이어 포로들이 도착했다. 포로들은 이걸 발사해 보라는 지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사 목표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산 쪽으로 잡은 후 그들은 숙련된 동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그 쇠통 위의 작은 구멍에 심지를 박아 놓은 후, 화약이 들어 있는 통 속에서 작은 통 세 개 분량의 화약을 떠서 쇠통에 집어 넣은 후 적당히 다졌다. 그런 다음 그 쇠통에다가 대형 화살을 집어 넣었다. 그런 다음 포로들은 잠시 쑤근거리더니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 쇠통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후 귀를 틀어 막았다. 귀를 막으십시오. 이 광경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던 토지에르가 발사하려는 것을 갑자기 중지시키며 물었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멀찌감치 떨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이려는 자네의 손은 왜 그렇게 떨리는 거지? 포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이번에 폭발 사고가 몇 번 있었습니다. 발사되는 것도 있었지만, 그대로 폭발하는 것도 있었죠. 이게 폭발하면 근처에 있는 사람은 다 죽습니다. 포로의 대답에 토지에르는 놀랍다는 듯이 그 쇠통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는데 이게 터져 나갈 정도라면 화약에는 과연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대단한 힘이 있는 모양이었다. 토지에르는 일단 그 힘을 구경해 보기로 작정했다. 그는 그 쇠통을 중심으로 방어 마법을 펼친 후 말했다. 이제 쏘아 봐라. 그 마법 방어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기에, 포로는 눈 앞의 이 늙은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렇기에 또다시 부들부들 ㄸ러리는 손으로 심지 쪽으로 불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쾅! 발사는 성공이었다. 엄청난 굉음 덕분에 주변에 있던 나무에서 새들이 기겁을 하며 날아 올랐다. 흐음, 1킬로는 족히 날아가는 것 같은데? 예, 웬만한 쇠뇌들도 그 정도는 화살을 날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덩치에 있습죠. 저 정도로 작다면 더욱 좁은 면적에서 더욱 많은 쇠뇌를 적 타이탄을 향해 발사할 수 있을 겁니다. 저건 정말 혁신적인 무기군요. 나도 그게 놀라워서 가져온 것이지. 하지만 포로의 말대로 가끔식 폭발한다면 그 점은 개량해야만 하겠지. 방금 본 대로라면 저 화약이 쇠통의 내부에서 폭발하면서 그 힘으로 쇠뇌를 밀어 붙이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저 쇠통은 화약이 그냥 타들어 가지 않고 폭발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모양이옵니다. 아주 혁신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습죠. 그런데 문제는 일단 화약이 타 들어가 폭발하도록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쇠통이 그 폭발력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겠죠. 아마도 제 생각으로는 저 쇠통의 두께를 좀더 두껍게 만든다면 상관 없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좀 연구를 해 보게. 이제 영토가 비약적으로 늘었으니 영토의 방어를 기사단에만 의존하기는 힘들거야. 전략적 요충지에는 적의 타이탄 부대를 저지할 만한 강력한 요새들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겠지. 그땔르 위해서 이런 무기는 필수적이지 않겠나? 좀더 개량한다면..., 예를 들어 더 많은 화약을 넣어 폭발력이 강해진다면, 지금보다 더욱 강력한 파괴력을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한번 연구해 보겠사옵니다, 전하. 쇠뇌를 발사하는 쇠통은 훗날 대포 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예로부터 타이탄을 상대하는 무기는 화살 종류였고, 쇠뇌에서 발사하는 것도 큼직한 나무 통이었기에 대포에도 탄환으로 나무 통을 넣어서 쏜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야 몇몇 선지자들이 구태여 그렇게 큰 나무 통을 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대포의 탄환은 작아지기 시작한다. 초기의 대포가 폭발할 확률이 높았던 것은 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두께의 균일함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포의 두께가 일정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타이탄 제작 기술에 힘입어 대포를 주물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틀을 만들고 거기에 쇳물을 부어서 만드는 방식으로는 대포를 크게 만들면 만들수록 그 두계를 일정하게 만들기 어려워진다. 거기에다가 주철은 깨지기가 쉽고, 또 대포 내부에 기포 같은 것이 생길 여지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한쪽이 약해지면 손쉽게 대포가 폭발하는 참사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훗날 주물이 아닌, 포신 안쪽을 커다란 드릴 같은 것으로 깎아 내는 신 기술이 개발되면서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그렇게 해야만 포신의 두계를 균일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대포는 적에게 강력한 위협이 되는 무기였지만, 동시에 아군에게도 생명의 위협을 주는 괴상한 무기였던 셈이다. 마스터들의 협상 전하,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 왔사옵니다. 노 마법사의 표정이 매우 밝은 것에서 공작은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원하는 만큼의 영토를 집어 삼킨 크라레스로서는 이제 휴전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녀석들이 휴전 제의를 해 왔는가? 옛, 전하. 휴전 협상을 위해 사신을 파견한다고 하옵니다. 오오, 드디어 녀석들도 이 지긋지긋했던 전쟁을 끝내려고 하는구먼. 그래, 누가 파견되어 온다고 하던가? 예, 까미유 드 코로데인 후작이 다섯 명의 협상단을 거느리고 온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까미유 드 크로데인이라.... 코린트의 유명한 무가(武家) 크로데인 가문의 태생이라면 상당히 실력이 있는 인물이겠군. 그래, 그 인물에 대해 조사는 해 봤나? 예, 전하. 전쟁의 신전에 알아 본 바로는 7년 전에 그래듀에이트 시험을 통과한 뛰어난 인물이옵니다. 추정 나이 42세.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의 아들이옵니다. 뭐? 이번에 전사한 소드 마스터인 리사를 말한 건가? 옛, 전하. 크로데인 후작 부인이 전사했기에 후작의 작위를 물려 받은 것이죠. 으음. 생각 외의 거물을 보내 오는군. 상대가 크로데인 가문의 적자(嫡子)라면 예의상 이쪽에도 그에 걸맞은 인물을 보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예, 그것 때문에 토지에르 각하께서는 그를 전하께서 맡아 주셨으면 하고 연락을 보내 왔사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협상 장소는 어딘가? 예, 국경에 위치한 라벤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틀 후에 할 것이옵니다. 좋아, 준비는 자네가 책임 져 주게. 옛, 전하. 협상 당일이 되었을 때, 라벤트 마을 주위에는 유령 기사단 인원의 절반이 깔려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라벤트 마을은 작은 마을이었기에 마을 공회당 같은 대화를 나눌 만한 장소가 없었기에, 술집을 징발하여 이용했다. 하지만 테이블이나 의자, 양탄자까지도 본국에서 가져왔기에 술집 내부는 꽤 근사한 협상 장소로 바뀌어져 있었다.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병사의 보고를 받은 후 10분 정도 지나자 문제의 인물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등장했다. 천천히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술집 안으로 들어서는 젊은이를 보며 크로아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겨우 삼켰다. 과연 코린트 최고의 명문인 크로데인 가문의 적자(嫡子)다웠기 때문이다. 까미유 후작의 자신감 넘치는 눈동자를 쏘아보며 크로아 공작은 상대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욱 대단할지도 모른다고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먼 길에 수고하셨소.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예, 반갑습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는군요.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이라고 합니다.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 높은 크로데인 가문의 귀재(鬼 )를 만나 뵐 수 있어서 나야말로 영광이지요. 적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지만, 까미유는 서둘러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인사는 이쯤에서 생략하고, 그래 그쪽의 조건이나 먼저 말해 보시오. 으음, 협상을 제의해 온 쪽은 그쪽으로 알고 있는데요. 귀하가 먼저 말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지? 상대는 과연 나이 값을 하는 능구렁이라고 생각하며 까미유는 즉각 준비해 온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좋소, 우선 국경선부터 확정 짓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지요. 본국에서는 지금 현재 양국의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곳까지를 그대들의 영토로 인정해 주겠소. 그리고 서로 간의 전쟁 배상금이니 뭐니 복잡한 것은 붙이지 맙시다. 우선 휴전부터 하기로 하고, 이 조약의 유효 기간은 5년으로 합니다. 5년 단위로 다시 만나 조약을 갱신하기로 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다가 서로간에 신뢰가 쌓이면 종전 협정이나 아니면 불가침 협정으로 확대하는 것이 순서겠지요. 상대의 의견을 듣고, 공작은 상대가 속임수가 아닌 진짜로 휴전하려는 것임을 깨달았다. 결코 무리가 없는 조건이었고, 또 휴전시에 꼭 논의해야만 할 필요한 사항을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구태어 그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겠소? 그냥 휴전 협정으로 하고, 휴전하기 싫다면 어느 한쪽에 그 사실을 통보하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물론 통보는 전쟁이 벌어지기 최소한 3일 전에는 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말이오. 5년마다 한 번씩 만나서 협상을 하는 것은 번거로운 짓이기 때문이오. 크로아 공작의 말에 까미유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절차를 상당히 간소화시키는 것을 좋아하시는 모양인데, 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3일 전에 통보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소? 상대의 병력 이동 상황만 봐도 전쟁을 벌일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알 수 있소. 그런데 구태여 상대에게 쳐들어갈 것이라고 선전 포고를 할 필요는 없겠죠. 또 일단 휴전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중요할 뿐이지, 다음 전쟁의 시작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어떻게 협약을 맺어 둔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그것을 지킬 마음이 없다면 이건 휴지 조각일 뿐이니까 말이오. 그건 그렇지요. 그렇게 봤을 때 귀국과 본국은 너무나도 서로에게 상처를 많이 줬다는 것이 사실이오. 동맹국이었던 본국을 갑자기 기습 공격해서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힌 코린트를 믿기는 참으로 힘든 노릇이지요. 크로아 공작의 가시 돋친 말에도 까미유는 침착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닐까요? 본국이 크루마와 전쟁중일 때를 틈타서 선전 포고도 없이 뒤통수를 친 것 또한 사실이지 않소? 서로가 국제 관례를 한 번씩은 어겼으니 대충 비긴 것으로 하죠. 이번 전쟁을 통해 귀국은 잃었던 영토를 다시 되찾았으니 이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겠소? 그 다음 역사는 또 어떻게 쓰이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일단 본국은 지금 이 전쟁을 지속해 나갈 여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오. 그리고 귀국 또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 힘들 것이오. 그렇다면 상호 적당한 조건으로 전쟁을 마무리 짓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다음을 기약하자는 대목에서 까미유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빛나는 것을 보며 크로아 공작은 섬뜩함을 느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코린트의 기둥은 키에리, 로체스터, 리사, 그라세리안이었다. 세 명이나 되는 마스터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코린트는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쟁이 마감되면서 그들은 로체스터를 제외한 두 명의 마스터를 잃었다. 하지만 정보에 따르면 그들 외에도 숨겨진 마스터 급은 존재하고 있었다. 키에리가 전사하던 그 전투에서 추격전을 벌이던 미네르바를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넣을 뻔했던 붉은색의 타이탄 두 대. 그것을 보면 까미유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가 숨겨진 마스터 중의 한 명임을 확신했다. 일단 협정을 맺기에 앞서 실례되지 않는다면 귀공의 직책을 알고 싶소. 크로아의 말에 까미유는 싱긋 웃음을 떠올렸다. 자신부터 먼저 드러내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소? 흐음, 나는 스바시에의 총독이며, 유령 기사단 단장이고, 크라레스 전군 총사령관이라는 소임을 맡고 있소. 상대의 말에 까미유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근위 기사단 단장은 누구란 말이오? 혹시 로니에르 공작인가요?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이 코란 근위 기사단 단장이었듯, 모든 국가들의 경우 최고의 실력자는 근위 기사단 단장 직을 겸하고 있었기에 물어 본 말이었다. 근위 기사단은 프로이엔 폰 로가르트 백작이 맡고 있소. 그렇다면 로니에르 공작은? 하지만 크로아 공작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녀에 대해서는 알 것 없고, 나는 이미 말했으니 그대가 말할 차례요. 현재 미흡하긴 하지만 제2근위대 대장 직을 맡고 있소. 흐음, 그런가요? 그렇다면 약간의 세대 교체가 있었다는 말이겠군요. 답변해 주셔서 고맙소. 상대의 말에서 크로아 공작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당연히 제1근위대 대장에서 근위 기사단 단장으로 진급했을 것이다. 평상시라면 빈 자리를 놔 두고 권력 투쟁이 오간다고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둘 가능성도 존재했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그러니만큼 키에리와 리사라는 거목들이 뽑혀 나간 빈 자리를 그냥 놔 둘 수는 절대로 없었다. 그런데 까미유가 로체스터의 제1근위대를 넘겨 받지 못하고 리사의 제2근위대를 넘겨 받았다는 것은 제1근위대를 넘겨 받을 또 다른 한 명이 더 존재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니까 코린트가 보유하고 있는 마스터 급의 검객은 모두 세 명인 것이 확실했다. 저 격전을 거친 후 코린트는 아마도 15기 내외의 근위 타이탄밖에 남지 않았을 테니, 세 토막을 칠 수는 없었고 아마도 두 토막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말이다. 서로간에 대충 이해 관계는 정리가 된 것 같고, 나머지 세부적인 협의 사항은 수행원들끼리 처리하면 될 것이오. 서로가 될 수 있는 한 빨리 휴전에 합의하려고 한다면, 구태여 서로에게 난해한 조건을 제시해 불필요한 힘 겨루기를 할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오. 서로간의 토의는 수행원들끼리 어느 정도 의견을 맞춘 후 다시 재개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럽시다. 여기에 온 김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혹시 만남을 주서해 주시겠소? 누구를 말하는 거요? 로니에르 공작. 만나게 해 드리고 싶지만, 그녀는 이곳에 없소. 또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그녀 또한 할 일이 많기에 이곳으로 불러 내기도 어렵소. 이해해 주겠소? 이건 부드러운 거절이었다. 까미유는 입맛을 다시며 쌍방의 수행원들끼리 토론을 벌이는 시끄러운 술집에서 나와 자신의 숙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안녕하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그래, 크라레스 쪽의 반응은 어떻던가? 예, 그쪽도 휴전에 꽤 적극적이옵니다. 사실 양쪽에 다 휴전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있고, 또 서로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세부 사항을 협상하는 것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락을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래, 뭔가? 협상 장소에 나온 크라레스 쪽 대표는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으로서 스바시에 지역 총독이자 유령 기사단 단장, 그리고 전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을 가진 대단한 인물이옵니다. 그의 실력은 직접 검을 나눠 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만 대충 저와 동급 정도로 짐작되옵니다. 흐음, 로니에르 공작은 총사령관이 아니라는 말이군. 그렇다면 그녀는 근위 대장이자 부사령관인가? 근위대 대장은 외부에 알려진 대로 론가르트였사옵니다. 그렇다면 유령 기사단이 뭔지를 파헤치는 것이 의문을 풀어 나가는 기준점이 되겠군. 예, 전하. 아무래도 제 짐작으로는, 이번 전쟁에서 갑자기 튀어 나온 크라레스가 지닌 여분의 전력이 모두 유령 기사단에 집결되어 있는 것 같더군요. 아마도 모든 알파 급과 베타 급을 보유하고 있는 크라레스 최강의 기사단이 그곳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옵니다. 아마도 그렇다고 보는게 옳겠지. 그런데, 그가 갑자기 유령 기사단의 존재에 대해 자네에게 말한 저의가 뭔지도 생각해 봤나? 예? 글쎄요.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지. 아마도 전쟁이 끝나고 나면 크라레스의 기사단들은 대대적인 재편성에 들어가게 될 거야. 베타 급들은 근위대에, 알파 급은 그대로 유령 기사단에, 그리고 새롭게 생산되는 타이탄은 뭐가 될 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령 기사단이나 제3의 기사단으로 보내겠지. 그런 후에야 크로아 공작이나 로니에르 공작이 근위대 대장으로 나서게 될 테지. 하지만 로니에르 공작이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없어 보였사옵니다. 그녀에 대해서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옵니다. 참, 지금 어뜻 떠오르는 게 있는데, 그녀의 실력은 모두가 공인하는 바야. 그런데도 왜 그녀의 실력에 합당한 직위에 올리지 않는 거지? 총사령관이든지, 근위대 대장이든지 뭐 그런 직위를 줘야 함에도 그러지 않고 있어. 그거야 그녀의 나이가.... 까미유의 의견에 공작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겉모습에 드러난 나이를 믿지 않아. 그 정도 경지에 올라가려면 엄청난 세월을 검술에 바쳤다고 봐야 해. 그녀에게 그런 지위를 내리지 않는 이유는 따로 봐야지. 자네는 짐작이 가나? 죄송하옵니다. 소신이 미흡하여.... 아닐세. 지금 떠오른 건데, 보는 시각의 방향을 조금만 바꾼다면 답이 나오지. 실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뢰도로 보는 거야. 그렇다면? 크라레스는 그녀를 믿지 않아. 무슨 이유가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그녀를 이용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문제가 없어. 하지만 믿을 수는 없다는 거겠지. 제스터가 그녀와 크라레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빨리 알아내 준다면 그 고리를 부술 방법도 자연히 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때가 우리들의 복수가 시작되는 날이겠지. 안 그런가? 크흐흐흐.... 변화하는 제국의 질서 코린트의 협상 사절이 도착한 다음 날, 코린트와 크라레스는 전쟁이 꽤나 오래 끌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타국들을 비웃기나 하듯 전격적으로 휴전 합의에 성공한다. 코린트나 크라레스 양국 모두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에 서로 의견이 일치했던 것이다. 코린트로서는 크라레스와 계속 전쟁을 수행하려니 옆쪽의 크루마라는 존재가 거슬렸고, 크라레스로서도 더 이상 땅 덩어리를 집어 삼켰다가는 식중독에 걸릴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국 모두 조금만 더 군사력을 키운다면 서로를 잡아 먹으려고 들기에 충분할 정도의 저력을 갖춘 국가들이었기에 이 휴전 합의가 양국간의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거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 평화는 예상 외로 오래 갈 수도 있었다. 만약 이게 두 국가간의 일이라면 어느 한쪽의 힘이 커지는 순간 전쟁이 발발하게 되겠지만, 쿠루마를 포함한 세 국가 간의 일이었기 대문에 한족이 두 나라를 제압할 만한 힘이 있지 않고는 다시 전쟁이 재개되기는 힘든 게 사실이었다. 그 어느 쪽도 한쪽의 힘이 강해지기를 원치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게 되고, 그 덕분에 평화를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양국 간의 전쟁이 종료되자 크라레스 황제는 승전을 기념하여 전국민들에게 일주일 동안의 휴일을 선포했다. 크로나사 수복의 일등 공신으로 책정된 두 명의 공작들은 각기 스바시에와 치레아를 공국(公國)으로 하사받고, 개인 기사단까지 가지게 되는 영예를 얻었다. 토지에르도 작위가 한 등급 올라 공작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는 유성 공격으로 인해 흔적만 남아 버린 옛날의 수도였던 크라레인 시로 천도하겠다는 것도 이때 발표되었다. 그 덕분에 새로운 크라레인 시를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토목 사업이 시작되었다. 기사단의 편제도 대대적으로 바뀌었다. 가장 큰 변동을 보인 것은 역시 치레아와 스바시에에 있던 친위 기사단들이었다. 제1친위 기사단은 스바시에 기사단으로 개명되었고, 10기의 카프록시아와 10기의 테세우스가 배당되었다. 물론 차후에 10기의 카프록시아를 더 생산하여 테세우스와 교체시킬 예정이었다. 제2친위 기사단은 치레아 기사단으로 개명되며 10기의 미가엘과 10기의 로메로를 지급받았다. 물론 추후에 겉모양을 더욱 근사하게 개장시킨 카프록시아 급의 타이탄 20기로 교체해 준다는 약속 하에서 말이다. 상당히 색다르게 생긴 카프로니아 급 타이탄 두대는 수거된 후 근위대에 소속되어 황실의 전시용으로 사용될 예정이었고, 유령기사단은 대폭적으로 개편되어 국가의 중앙 기사단으로서 위치를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10기씩을 1개 전대씩으로 묶어서, 두 명의 공작에게 지급하고 남은 모든 정규 급 이상의 타이탄을 유령 기사단에 배치했다. 그리고 콜렌 기사단은 평상시에는 변방에 주둔하면서 몬스터 토벌과 타국에 대한 전쟁 억지를, 전시에는 유령 기사단의 보조 기사단으로서의 임루를 수행하는 처지로 격하되었다. 다크는 오히려 전쟁이 끝나면서 더욱 바빠졌다. 오랜만에 전쟁터에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영지에는 그녀가 처리해야 할 사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얼마 전까지 그녀의 영지는 말토리오 산맥 한 귀퉁이에 있던 아름다운 로니에르 마을이었고, 그녀의 직책만 치레아 총독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의 영지였던 로니에르 마을은 황제에게 반납되었고, 대신 그녀는 치레아를 그녀의 영지로 받았다. 하지만 그 영지가 크라레스라는 한 국가에 포함되는 영토가 아닌, 완전한 하나의 독립된 국가라고 볼 수 있는 공국(公國)이었다. 공국은 일족의 속국이라고 할 수 있는 형태였기에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어야만 했다. 우선 새로운 법률도 만들어야 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공국의 각 지방을 다스릴 영주들도 뽑아야 했으며, 공국을 지킬 군사력도 독자적으로 새롭게 정비해야 하는 등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엄청나게 발생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일을 몽땅 자신이 처리하고 앉아 있을 멍청한 다크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의 태반을 어거지로 그녀의 오른팔이 되어 버린 비운의 사나이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에게 떠 넘겼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이나 심지어는 그녀의 게으른 아버지에게까지도 억지로 하나씩 더맡겨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분산을 시켰는데도 그녀는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말토리오 산맥에 다녀온 후 오랜 시간 혼자서 사색에 잠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날도 집무실의 책상 앞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때 문득 옆에서 조금 가벼운 기침 소리가, 그러다가 좀 지나서는 조금 더 큰 기침 소리가 들려 왔다. 미네르바는 흠칫 놀라면서 그쪽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나이가 지극한 두 명의 인물들이 약간은 무안한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미네르바는 부하들이 방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도 그들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에 자연히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 때문에 두 인물들은 더욱 쩔쩔매기 시작했다. 상대는 크루마 최고의 권력을 지닌 미네르바였으니까 말이다. 그 중 한 사람이 미네르바의 마음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듯 재빨리 용무를 꺼냈다. 예, 전하. 방금 코린트와 크라레스가 휴전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사옵니다. 부하의 말에 미네르바는 크게 놀랐다. 그만큼 두 나라의 휴전은 의외의 정보였던 것이다. 미네르바로서는 그 둘을 좀더 치고 받아 줬으면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뭣, 그게 사실인가? 예, 전하. 놀라운 일이군. 사력을 다해 한 판 할 줄 알았는데.... 예, 갑작스레 시작되었다가 끝난 미투랑 전투에서 코린트가 저희들이 예상한 것 이상의 피해를 입은 것이 확실하옵니다. 그렇기 않고서야 오만한 코린트가 얌전히 꼬리를 내릴 리가 없다고 사료되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미투랑 전투 직후, 코린트 남부 집단군 사령관이었던 다리엔 후작이 공개 처형 당했고, 로체스터 공작에게로 지휘권이 넘어간 지 불과 며칠 만에 양국은 휴전을 했사옵니다. 그 때문에 베일에 쌓인 미투랑 전투에 대해 아직 조사를 계속하고 있사오나 워낙 보안이 철저해서 그 피해 규모를 정확히 입수할 수는 없었사옵니다. 만약 피해 규모가 저희들의 예상대로라면 아마도 코린트의 전력은 본국보다 낮을 거라고.... 순간 미네르바는 이블리스의 말을 막았다. 아니, 괜히 그런 거 조사한다고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 타이탄 전력이 이쪽보다 낮다고 해도 지금 코린트와 전쟁을 벌일 수도 없고, 또 벌여 봐야 이쪽이 상대가 안 돼. 저쪽은 로체스터 공작을 위시하여, 뛰어난 기사들이 많기 때문이야. 결코 타이탄의 수만으로 서로의 전력을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미네르바는 패퇴하는 코린트 군을 추격할 때 자신을 상대했던 두 대의 붉은 타이탄을 떠올렸다. 만약 그 가운데 하나라면 자신이 상대 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 둘을 함께 상대하는 것은 그녀로서도 무리였다. 그만큼 강한 기사들을 보유하고 있는 한 코린트의 힘은 크루마를 앞서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그건 그렇고, 테시온 자네는 이블리스와 함께 웬일인가? 그러자 테시온은 서류 뭉치를 미네르바에게 건네며 즉각 대답했다. 예, 전하. 어제 지시하셨던 신형 타이탄의 생산 계획서를 가져왔사옵니다. 미네르바는 그것을 받아 들며 치하했다. 미네르바는 테시온에게 앞으로 1년 동안 크루마가 생산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타이탄 생산량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으음, 수고했네. 예, 1개월 후 생산 시설이 좀더 확충되면 전하게서 원하시는 만큼의 타이탄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잘 되었군. 미네르바의 칭찬에 테시온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예, 그렇게 되면 내년 여름쯤에는 60기 정도를 추가로 보유, 코린트보다 분명 우위에 설 수 있게 될 것이옵니다. 앞으로 6개월 분의 타이탄 생산 계획은 전하의 분부대로 안티고네 7기, 에프리온 30기, 카마리에 20기 이옵니다. 그리고 일단 1차 생산이 완료도니 시점에서 57기가 납품되고 나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게 되기에 그 다음부터느 ㄴ안티고네 30기, 에프리온 20기를 추가로 생산할 계획이옵니다. 2차 생산까지 끝나고 나면 본국은 헬 프로네 1기, 안티고네 40기, 에프리온 50기, 카마리에 70기, 골고디아 76기, 로투스 52기를 보유, 타이탄 총 수 289기, 정규 급 이상 237기로서 코린트를 압도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현재 회수 및 노획량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것보다 더 많이 생산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2차 생산만 완료되어도 최강으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좋군. 조사한다고 수고했네. 미네르바는 테시온을 치하한 후 이블리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보게, 이블리스. 크라레스의 타이탄 생산 계획에 대해서는 조사가 된 것이 있나? 미네르바의 물음에 아무래도 정보 쪽으로 관련이 있는 듯 보이는 이블리스가 즉시 대답했다. 예, 크라레스는 정보에 따르면, 지금 대대적으로 카프록시아를 생산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옵니다. 막대한 양의 노획품이 있으니까 당연한 결과겠지요. 아마도 노획품을 대략적으로 추정해 봤을 때 놈들은 카프록시아 200기 정도를 추가로 보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 하지만 본국이 2차 생산을 완료했을 때, 크라레스는 아무리 많이 만든다고 해 봐야 100기 내외일 것이옵니다. 애초에 상대가 안된다고 봐야지요. 현재 크라레스의 군사력에 대해서는 알아 봤나? 예, 알아 봤사옵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사옵고, 아마도 로니에르 공작이 사용하던 그 거대한 타이탄은 5기 내외가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옵니다. 지금까지 그 타이탄이 사용된 것은 단 두 번. 모두 가장 중요한 전투들뿐이었사옵니다. 그것도 단독으로 투입되었지요. 그리고? 예, 근위대가 보유중인 카프록시아가 10기. 카프록시아의 대량 생산용 변형이 아마도 50기 내외. 총독용의 카프록시아 변형이 2기, 미가엘이 20기 내외, 로메로가 10기 내외, 그 다음 루시퍼 35기, 푸치니 33기이옵니다. 그래서 대략적인 추정 전력은 타이탄 총165기 내외. 그 중 정규 급은 100여 기 정도라고 추정되옵니다. 100기라.... 그렇다면 거기에 100기를 더 생산할 수 있다면 200기로군. 그렇다고 봐야 하옵니다. 물론 40기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난다는 것은 사실이오나 그 등급에서는 차이가 엄청나게 나옵니다. 겨우 카프록시아 정도는 안티고네, 아니 카마리에와도 비교가 안 되옵니다. 으음.... 비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예? 이블리스가 의아한 듯 의문을 표시했지만, 미네르바는 그걸 무시하고 테시온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바쁠 테니 먼저 가 보게나. 테시온은 자기들끼리 비밀스런 대화가 있으니 나가라는 미네르바의 은유적인 표현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예, 전하. 그럼 물러가겠사옵니다. 테시온이 물러가고 난 후 미네르바는 이블리스를 향해 낮은 어조로 물었다. 자네라면 말일세, 엄청나게 강력한 국가, 그러니까 도저히 이쪽에서 힘을 키운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강대한 국가가 상대라면 어떤 작전을 쓰겠나? 예? 그렇게 강대한 국가라면 코린트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렇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네. 그야 전에 써 먹었던 방법을 다시 써야겠죠. 이번에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그로체스 공작은 숙청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옵니다. 하기야 그로체스 공작은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사라져 줘도 상관 없습죠. 우리들의 기대대로 키에리를 없애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니까 말이옵니다. 이제 또 다른 인물, 그러니까 로체스터를 없애 줄 만한 실력과 야망을 겸비한 인물을 키워야 하옵니다. 원래가 욕심에 눈이 멀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옵니까? 강대한 제국은 밖에서 무너뜨릴 수가 없사옵니다. 하지만 안에서부터라면 얘기가 틀립지요. 역시, 그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는가? 예, 코린트의 권력 층에 대해서 조사해 둔 것이 있사옵니다. 그 중에서 적임자가 세 명 있사온데 적당히 충동질을 하면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하게 되어 있습죠. 작전을 시작해 볼까요? 아니, 그보다도 먼저 크라레스의 권력 층이나 권력 구조에 대해서는 조사해 둔 것이 있나? 예? 조사해 두긴 했사옵니다. 하지만 크라레스는 약간 이상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별로 강력한 국가가.... 그건 자네가 아니라 내가 결정할 일이야. 옛, 송구스럽사옵니다. 전하. 크라레스의 권력 층을 뒤져 봐. 그렇다면 뭔가 허점이 나올 거야. 전하, 크라레스의 권력 층은 꽤 재미난 구석이 있어서 상당 부분을 이미 파악하고 있사옵니다. 일단 최고 권력은 황제가 잡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세 명의 인물이 있사옵니다. 첫째가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 둘째가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세 번째가 토지에르 폰 케프라 후작입죠. 앞의 두 인물이 겉으로 드러나면서 크라레스의 힘을 과시하는 존재라면 토지에르는 뒤에서 모든 잡무를 처리하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토지에르가 어떤 면에서는 앞의 두 사람을 제어하고 있다고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옵니다. 총사령관인 루빈스키 공작이 뭔가를 지시했다고 하더라도 토지에르의 허가가 있어야지만 그게 행해진다는 식이죠. 물론 대부분의 경우 토지에르는 불허한 적이 없었고, 그 때문에 루빈스키의 권력이 강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숨은 실력자는 토지에르입니다. 그는 이상하게도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뒤에 숨어서 황제를 위해 열심히 충성하는 것만이 삶의 보람인 듯한 괴상한 녀석이옵니다. 그렇게 욕하지 말게. 진짜 충신이라고 불러도 아깝지 않은 인물이 아닌가? 그런 인물에게 경의를 표하지 못할망정 욕을 해서는 안되지. 옛, 전하. 송구스럽사옵니다. 하지만 적국의 입장에서는 아주 눈에 거슬리는 녀석임에는 사실입죠. 그건 그렇겠지. 토지에르? 처음 듣는 이름인데도 그렇게 권력이 막강하다는 말인가? 예, 전하. 열심히 뒷조사를 하는 것이 제 임무 아니겠사옵니까? 거의 정확한 정보이옵니다. 토지에르는 마법사이므로 암살하기도 그렇게 어렵지 않사옵니다. 토지에르를 암살하든지, 아니면 토지에르를 밀어 낼 새로운 인물을 키우든지, 그것도 아니면 토지에르와 두 명의 대공들 사이를 이간질하든지, 그 세 가지 모두가 가능성을 안고 있습지요. 어떤 것을 택하시겠사옵니까? 그 세 가지를 한꺼번에 추진해 봐. 그것들 중에 하나만이라도 성공하면 좋은 것 아닌가? 그리고, 전에 말했었던 것은 시행했나? 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크라레스 황태자를 세뇌시카는 작업. 아, 예. 한밤중에 살짝 해 놓았사옵니다. 지금은 표시가 나지 않겠지만 서서히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옵니다. 좋아. 우리 쪽에서 코린트를 칠 일은 없을 거야. 예? 그건 무슨 말씀? 코린트는 크라레스에 대한 방패야. 쓸데없이 코린트를 건드려서 방패를 약화시키지 말고 내 지시를 기다리도록 해. 지금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크라레스니까 말이야. 미네르바의 말에 이블리스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자신은 지시하는 대로만 행동하기 되기 때문이다. 예. 크라레스는 전쟁 후 대대적으로 전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했다. 우선 드넓은 대지를 방어하기 위한 병력들을 모집하고, 군사 훈련을 시작했으며 노획 물자들을 동원하여 테세우스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벌어질 전쟁은 코린트나 크루마 같은 강대국만을 상대로 해야 하기에 출력이 약한 타이탄은 사실상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드래곤 하트가 없으니 청기사를 제작할 수도 없었고, 남은 선택은 오로지 카프록시아뿐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 출력의 엑스시온은 카프록시아의 것이었고, 그 때문에 그들은 카프록시아의 변형들을 계속 생산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크라레스에 비했을 때 크루마는 그래도 형편이 조금은 나은 편이었다. 새로운 엑스시온을 만드는 것이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저 옛날 위대한 대 마법사 안피로스에 의해 대단히 많은 엑스시온들이 설계되었고, 지금도 그 설계도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 설계도에 의지하여 고출력을 자랑하는 안티고네나 에프리온, 그리고 카마리에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네르바의 특명에 의해 에프리온의 생산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코린트에 비했을 때 기사들의 질이 떨어지는 크루마로서는 그 외에는 선택의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루마가 이렇듯 군비 증강에 열심인테, 코린트라고 손을 놓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코린트는 코린티아가 파괴된 지 한 달 만에 새로운 타이탄 생산 공장 시설을 갖추는 놀라운 재주를 부렸다. 일단 타이탄 생산 시설이 갖춰진 후 로체스터 공작이 생산을 명령한 타이탄은 놀랍게도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미노바-P형과 흑기사였다. 물론 적기사도 몇 대 더 생산할 예정이었지만 적기사의 형태상 특성에 따라 집단적에는 흑기사가 더 유리하다는 점이 작용했기에 생산이 재개된다고 해도 2~%기 정도일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미노바-P형의 경우 외장을 매우 아름답게 만들었기에 생산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그렇기에 미노바-P2형이라는 모델을 새롭게 설계했다. 미노바-P형의 외관은 크라레스의 주력 타이탄 테서우스처럼 아주 탄순한 외관을 가진 대량 생산형 모델이었지만, 그 엑스시온은 미노바-P와 같은 1.5라는 고출력을 뿜어 내는 타이탄의 심장이었다. 그리고 로체스터 공작의 명령에 의해 적기사를 흑기사와 같은 집단 전용 형태로 개작하는 작업도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크루마가 자랑하는 신형 타이탄 안티고네를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단 전쟁이 완전히 종료된 후 각국은 전쟁 때 노획, 또는 수거한 대량의 타이탄들을 이용해서 엄청난 양의 신형 타이탄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의 아르곤 제국이나 마도 왕국 알카사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저마다 강력한 군비 경쟁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신형 타이탄들을 개발, 또는 구입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다음의 전쟁은 어떤 형태로 벌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했으므로.... 닥쳐 온 운명의 시간 코린트 제국의 새로운 수도 케락스. 케락스는코린토비아 지방과 스와덴 지방의 경계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코린트 제2의 도시였다. 과거 스와덴이 코린트의 영역에 편입되기 전, 양국의 모든 산물이 교류되는 요지였기에 엄청난 기세로 발전했었다. 그러다가 스와덴이 코린트에 병합된 후에도 그 기세를 잃기 않고 발전을 거듭해 왔고, 코린트가 낳은 위대한 대 마법사 그라세이란 코타스가 케락스에 마법 방어진을 설치한 후 더욱 발전했다. 전시라면 몰라도 평상시에는 마법 방어진으로 흘러갈 마나를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관례였기에 생활의 편의성에서 근처에 있는 타 도시들을 훨씬 앞섰기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케락스가 두 번째 수도로 정해지게 된 데는 또 다른 실리적 측면이 있었다. 케락스는 작기는 하지만 황제의 별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실은 케락스로 이사를 왔고, 그와 함께 별궁의 신축 작업이 한창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에는 매일 공사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오고 있었다. 예?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사옵니까? 상대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로체스터 공작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럴 수가 있지요. 현재 본국에는 귀국에 타이탄 구입 대금을 지불할 여력이 업소. 그리고 지금 본국이 안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신형 타이탄을 제작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이 점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소. 그럴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그 당시 본국에서 타이탄을 구입하면서 10분의 1은 선불로, 나머지는 20년 분할 상환으로 못박지 않았사옵니까? 그런데 처음 주기로 했었던 선금도 전쟁중이라며 물건만 가져갔을 뿐, 대금은 며칠 후에 지급한다고 말씀하시고서 차일피일 지급을 미루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코린트나, 공작 전하를 믿을 수 있단 말이옵니까? 열이 올라서 씩씩거리는 알카사스 사신의 얼굴을 보며 로체스터는 한껏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미안한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그 돈을 떼어먹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소? 다만 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까 조금 더 연기해 달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에 따른 이자도 지불해 줄 용의가 있소. 몇 년만 기다려 주시오. 모든 구입 대금과 함께 이자까지 톡톡히 지불해 드리리다. 그리고 이건 귀하에게 드리는 내 자그마한 성의니 받아 두시오. 로체스터 공작이 내미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바라보며 사신은 약간은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이게 뭣이옵니까? 열어 보면 자연히 알게 될 텐데, 뭘 묻고 그러나? 돌아가는 여비에나 보태 쓰게나. 내 작은 성의일세. 가죽 주머니 안에는 여러 가지 색상의 보석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뭔가 형태가 있는 세공품이라면 몰라도 이런 식의 보석 알맹이의 경우에는 팔아 먹기도 쉬웠고, 또 꼬투리가 잡힐 염려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보석의 양으로 봤을 때 평생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막대한 액수인 것은 틀림없었기에, 사신의 눈빛은 슬며시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자자, 빨리 집어 넣게나. 물론 그때 발생한 타이탄 구매 대금은 이자까지 합쳐서 나중에 줄 테니 몇 년만 참아 달라고 자네가 윗사람들에게 말을 잘 전해 주게. 하, 하지만 전하. 이러시면.... 내 방의 주위에는 수십 명의 그래듀에이트와 마법사들이 경비하고 있다네. 결코 자네에게 누가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야. 내가 그 돈을 떼어먹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자까지 모두 다 상환해 주겠다는데 무슨 딴 말이 필요하겠나? 자네는 몇 년만 뒤로 상환 시일을 늦춰 주면 돼. 그리고, 내가 들은 정보로는 요즘 알카사스에서 주력 타이탄을 가이아 급으로 대체하고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알카사스는 최근 강대국들이 치열한 군비 경쟁을 시작했기에 그에 위협을 느끼고 주력 타이탄을 노리에(1.02)에서 가이아(1.32)로 교체하는 작업을 한창 진행시키고 있었다. 예? 예, 그렇사옵니다. 으음, 그렇다면 거기에서 대체된 노리에 급 타이탄들은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 예? 물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듯이 판매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걸 본국에다가 판매해 달라고 주선을 좀 해주게. 자네도 여기에 오기 전에 아마 말을 들었을 게야. 코린트에 이제 쓸 만한 타이탄은 100여 대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말일세. 지금 크루마와 크라레스가 힘을 합쳐 밀어 붙인다면 우리 나라는 망할 수 밖에 없지. 안 그런가? 공작이 솔직하게 털어놓자, 사신은 의외라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코린트가 이번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나게 약화되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말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예, 소인이 알고 있는 바로도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코린트에는 아직 세 명의 마스터가 있고, 또 뛰어난 기사들이 많지 않사옵니까? 사신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허, 그게 아닐세. 두 나라가 함께 공략해 들어온다면 마스터의 숫자도 비슷해지지. 크라레스에 두 명이 있고, 크루마에 한 명이 있으니까 말이야. 크라레스에 마스터가 두 명이나 있다는 말에 사신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로서는 그런 정보를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크라레스에서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코린트를 침공했을 것이고, 또 코린트는 그 막대한 땅 덩어리를 뺏기고도 휴전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들어간 것이 아닐까? 사실이옵니까? 그럼, 내가 왜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오히려 우리 코린트가 반석과 같이 안전하다고 떠들어 대는 것이 거젓말이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코린트가 망하면 귀국은 우리 나라에 타이탄을 판매했던 대금을 어떻게 회수할 건가? 그야.... 그 막대한 금액을 날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신을 향해 공작은 차근차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알겠나? 자네들이 판매 대금을 받아 내려면 본국이 망하지 않게 도와 줘야 한다는 것을 말이지. 내 말이 거짓인지 사실인지를 조사해 보면 알 걸세. 본국은 지금 개국 이래 최악의 상태에 직면해 있네. 지금 우리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것은 자네들뿐이야. 이제 몇 년 지나지 않아 코린트는 다시금 힘을 회복할 거야. 그때는 결코 자네들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나? 예. 노리에 급을 우리에게 판매할 수 있도록 손을 써 주면 내가 방금 줬던 보석의 두 배를 자네에게 줄 거야. 그러니 힘을 좀 써 보게나. 자네만 믿겠네. 로체스터 공작은 보석 주머니를 품 속에 소중히 감추고 문을 나서는 사절의 뒷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흘려 보냈다. 멍청한 녀석.... 물론 로체스터 공작은 이번 거래가 성사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코린트는 최악의 상태였고, 또 알카사스는 원금이라도 회수할 목적으로 코린트를 도와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안그러면 그 막대한 금액을 통째로 날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코린트는 원체 저력이 있는 국가였기에, 조금만 도와 주면 다시 일어설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가 빚이라는 것은 웃기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 부채가 작을 때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들볶을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 채무가 늘어났을 때는 정 반대의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채무자가 큰 소리를 치게 되고 채권자는 제발 원금이라도 돌려 주거나 아니면 원금의 반이라도 돌려 달라고 사정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가 알카사스에 만들어 놓은 이 막대한 부채를 상환할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빚을 더욱 불려 놓을 생각이었다. 그런 수, 코린트의 힘이 다시금 막강해졌을 때, 그 빚을 갚건 그렇지 않건, 그건 그때 가서 마음 내키는 대로 처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가을도 이제 늦었는지라 아침 저녁으로 제법 찬 기운이 돌았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오늘도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차라리 레어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적적한 레어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활발하기 그지없는 이 신생국에 머무르는 생활이 훨씬 더 자극적인 것은 사실이었기 그는 일부러 아들에게 투덜거리면서도 남아 있었다. 아들 녀석은 처음에 아프티어스에게 갖은 아양을 떨며 몇 가지 일을 시켰다. 그녀로서는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애교에 홀딱 넘어가서는 전혀 할 생각이 없었던 일을 떠맡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후닥 해치우고 쉬자는 생각에서 아르티어스는 그 일들을 빨리빨리 처리했다. 안 해서 그렇지, 일단 하려고만 들면 어떤 일이든 처리하지 못할 것이 없는 아르티어스였다. 그는 드래곤이었고, 드래곤의 머리가 뛰어나다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지금에서야 그때 왜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일을 했었는지 후회 막급인 심정이 되었다. 일단 자신이 일을 잘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아 챈 아들 놈은 그 다음부터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애비에게 중노동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끝도 없을 것 같은 일에 질려 버렸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다음 찬장을 열고는 미네르바가 뇌물로 갖다 바친 포도주를 꺼내 맛을 음미하면서 한 잔 마시기 시작했다. 포도주의 그윽하고도 풍요로운 맛과 향이 그를 매료시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그 지독한 레드 드래곤을 마셔야만 했다는 것이 그로서는 악몽과 같이 느껴졌다. 그것도 다 자신과 술에 있어서는 극과 극의 취향을 지닌 아들 놈의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겨울도 머지 않았군. 이제 조금 더 지나면.... 그러다가 아르티어스에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요즘 너무 바쁘다 보니 그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오늘이 그날인가? 가만 있자, 계산을 해 보자구. 한참 머리를 굴리던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르티어스는 아들의 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다시 나타난 정령왕 나이아드 히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경치구먼. 다크는 문득 자신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이 오래 전에 아주 신물 나게 봤던 것임을 깨달았다. 정령왕 나이아드에게 걸려서 엄청나게 고생하던 매일 매일이 악몽과 같았던 그때, 사실 그때는 모든 것이 시커멓게 보였을 뿐 주위 경관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경관들을 볼 수가 있었고 제일 마지막에 나이아드와 만났을 때는 아주 확연하게 이 작은 이상한 세계를 볼 수 있었다. 그놈이 아는 곳은 여기밖에 없나? 만날 여기로 나를 불러 내는 것을 보면.... 그녀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호수 옆에 있는 바위를 하나 찾아 내고는 그곳에 가서 앉았다. 새파랗게 빛나는 호수는 몹시 아름다워 보였지만, 그 안에 물고기는 살고 있지 않았다. 또 새파란 하늘과 호수 주변에만 있는 몇 그루 안 되는 나무들. 그 외에는 사막과 같은 넓고 척박한 대지였다. 다크가 느긋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호수의 물이 갑자기 치솟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잘 생긴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긴 후 마치 땅 위에서 걷듯 물 위를 천천히 걸어왔다. 오랜만이로군. 오만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상대를 향해 다크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나 역시! 그런데, 아직도 나한테 볼일이 남아 있나? 물론 남아 있지. 이제 약속한 1년도 다 되었으니 나에게 협조를 해줘야 하지 않겠나? 상대의 말에 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속한 1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협조는 무슨 협조? 상대의 반응에 나이아드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이런 이런.... 아르티어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던 모양이군. 나를 위해서 한 가지 일을 좀 해 줘야겠어. 나이아드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다크가 재빨리 답했다. 거절한다. 뭐야? 무슨 일인지 들어 보지도 않고 거절이야? 들어 보나마나야. 나는 남의 일 해 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네 녀석처럼 뻔뻔하게 부탁해 오는 놈의 청을 들어 줄 정도로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야. 쯧쯧..., 이런 식이라면 전번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군. 네년은 꼭 두들겨 맞아야 말을 듣는 타입인 모양이지? 나이아드가 이죽거리며 말하자, 다크는 슬며시 몸 속의 마나를 움직이며 자신의 몸 상태가 최적의 상태라는 것을 재삼 확인했다. 몸 상태는 정상, 그렇다면 겁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글쎄, 그게 뜻대로 될까? 정 소원이라면 몇 대 때려 주고 다시 대화를 시작해 보기로 하지. 그 순간 나이아드의 몸에서 수십 가닥의 미세한 물 줄기가 뻗어 나가 다크를 강타했다. 하지만 다크의 몸 주위에 생겨나기 시작한 푸르스름한 막을 뚫지는 못했다. 소녀가 자신의 공격을 간단하게 막아 내자 나이아드는 무척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전에 미쳤을 때 만났을 때도 상당히 강하기는 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실력이라면 조금 어렵기는 하겠지만 못 할 것도 없겠다 싶어 찾아왔는데 해괴한 마법을 써서 자신의 힘을 차단하다니? 그게 무슨 마법이냐? 멍청하기는..., 말 못 해 주겠으니까 한 번 맞혀 봐라. 그때부터 소녀의 가공할만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이아드는 소녀의 공세를 막는 데 급급한 형편이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주문이나 시동어 따위를 외친 적이 없었다는 것. 엄청난 강기(剛氣)의 회오리가 덮쳐 오며 나이아드가 구축한 거대한 물의 장벽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강철도 뚫는 물의 힘이었지만, 소녀가 뿜어 내는 힘은 그보다 더욱 강했던 것이다. 크으윽! 나이아드의 형체는 엄청난 힘에 의해 찢겨져 나갔고, 소녀는 이죽거리며 서서히 나이아드가 있던 곳에 다가가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물의 정령왕이니까 물로 도망 쳤나? 크흐흐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할 것 같아? 순간적으로 소녀의 손에서 푸른 빛이 튀어 나오더니 쑥쑥 자라서 찬란한 검의 형상을 만들자 그것을 나이아드가 사라졌던 얖은 호수 바닥을 향해 거침없이 쑤셔 넣었다. 쿠콰콰콰콰.... 거대한 기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반구형의 강기 덩어리가 급속도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호수에 고인 물과 충돌을 일으켰다. 엄청난 굉음을 울리며 주위의 공간이 찢어질 정도의 파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 소녀는 주위가 황폐화되다 못해, 완전히 박살이 났고 자신이 서 있는 곳 주위에 거대한 웅덩이가 생겼는데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다시 그 기술을 사용했다. 엄청난 힘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순간, 더 이상 소녀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나이아드가 만들어 놓은 공간이 찢어지듯 박살나 버렸다. 어? 여기는! 다크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을 향해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서 있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에요? 아르티어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변명했다. 네가 잘 있는지 궁금해서 와 봤지. 맡긴 일은 다 끝내고 여기서 노닥거리고 계신 거예요? 아들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헛바람을 삼키며 변명에 급급했다. 저, 그게 그러니까 말이다. 아직 다 끝내지는 못했는데, 아마도 내일 점심 때쯤이면 끝낼 수.... 빨리 나가서 일해요. 여기에서 노닥거리지 말구요. 내일 아침까지 끝내라구요. 드래곤은 한 번에 1년도 잘 수 있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고 자랑했었잖아요. 빨리 안 가요? 다크는 아르티어스의 변명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몰아붙이기 시작했고 아르티어스는 왜 내가 그 일을 해야만 하는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신세 한탄만 늘어놓으며 돌아가서 일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에구구구..., 내 팔자야. 아르티어스가 나가고 난 후 다크는 몸을 일으켜 옆에 두었던 미네르바가 선물한 크루마산 브랜디, 블랙 홀 을 한 모금 마신 후 아쉬운 듯 투덜거렸다. 아깝다. 완전히 끝장을 낼 수 있었는데.... 다크는 가볍게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나이아드란 놈이 한 번 더 자신의 눈에 띄기만 하면 다시는 자신의 앞에 나타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소녀의 숨소리가 점차로 잦아들기 시작하자, 소녀가 끼고 있던 반지에서 물 줄기가 천천히 흘러 나오더니 방금 전 소녀와 격투를 벌였던 바로 그 황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청년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젠장! 정말 이 계집이 호비트가 맞기는 맞는 거야? 내가 5천 년 전에 공을 들여 만들어 놓은 세계를 완전히 박살내 버리다니.... 어떻게 호비트 계집애 따위에게 공간을 박살낼 정도의 힘이 있는 거지? 그런 공간은 밖에서는 깨기 쉽지만 안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말이야. 하기야, 저 정도 힘이 있으니까 이용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말이야.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문제지. 나이아드는 도저히 닭 모가지 하나 비틀지 못할 것 같은 순진한 얼굴을 하고 평화로운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소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으으윽! 저 아이를 어떻게 하면 이용할 수 있지? 지금 그녀의 힘은 내가 이 공간에서 발휘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버렸어. 조금만 탈출하는 것이 늦었다면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받을 뻔했을 정도니까 말이지. 그렇다고 꼬마 애 하나를 상대하자고 다른 정령왕에게 부탁하는 것도 자존심이 걸리고.... 으음..., 이래 저래 문제로구먼. 저 아이를 끌어 들이는 것은 좀더 궁리를 해 봐야겠어. 나이아드는 깊이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순식간에 물이 되어 허물어졌다. 아주 오랜 친구의 만남 이봐, 가스톤! 황금 비축분은 얼마나 되지? 갑작스런 질문에 가스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따지고 들었다. 그가 이렇듯 따지고 든 이유는 자신도 정확한 황금 비축량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엄청난 양이 소모되고, 또 들어오는 지금, 그걸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것 자체가 엉터리였다. 예? 어디에 쓰시려는지 용도를 말씀하셔야죠. 용병도 더 고용해야 하고, 기병대도 만들어야 하고, 아르곤 국경에 요새도 몇 개 건설해야 하고, 지금 돈 들어가는 곳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용도를 말씀 하셔야 우선권을 정해서 금을 드리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으음, 이 궁의 겉을 완전히 황금으로 입히려면 많은 금이 들어갈까? 가스톤은 순간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는지 착각을 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다크의 표정으로 봤을 때 잘못들은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확인은 필요했다. 궁의 겉을 황금으로 입힌다고 하셨습니까? 응. 가스톤은 어이가 없었다. 궁의 크기가 작은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과거 부유한 상업 국가였던 치레아 왕궁 아닌가? 그렇기에 왕궁의 크기도 엄청나게 컸다. 그 표면을 황금으로 입힌다면 1톤이나 2톤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표면에 바르는 것인 만큼 약간은 두껍게 입혀야 비바람에 견딜 수 있을 것 아닌가? 지금 정신이 있으십니까? 그게 얼마나 많은 황금이 필요한데요. 그리고 금만 있다고 됩니까? 기술자들도 고용해야 하니까, 노임도 생각해야 할 거 아닙니까? 지금 얼마나 할 일이 많고, 또 돈이 필요한 곳도 얼마나 많은데, 그런 정신 나간 궁리나 하고 있으신 겁니까? 으음, 아마도 그렇겠지? 으으..., 조금 말이 심하게 나온 것은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방금 전에 말씀하신 것은 절대로 안 됩니다. 가스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이 왕궁 주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흐으으음, 그래도 나는 해야겠어. 그렇다고 세금을 더 거두자는 것은 아니야. 토지에르에게 연락해서 필요한 황금을 보내 달라고 해. 아마도 그 녀석은 보내 줄 거야. 만약 토지에르가 안 보내 준다면 따로 구해 보기로 하지. 다크는 만약에 토지에르가 구두쇠처럼 주지 않는다면 아르티어스의 금고를 털 생각이었다. 원래가 자신들이 기거할 궁의 겉을 황금으로 입히자는 의견을 낸 것은 다크였지만, 아르티어스도 그 의견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찬성한 죄(罪)가 있었다. 만약 진짜 그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아르티어스는 두 말 않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금을 줄 것이다. 그런 후, 토지에르는 아르티어스 어르신에게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서 묵사발이 되겠지. 일단 가스톤이 토지에르에게 치레아 대공의 의견을 전하자 의외로 순순히 승낙해 줬기에 가스톤을 놀라게 했다. 토지에르로서야 다크에게 몇 톤이 되었든 황금을 보내 준다고 해도 별로 아까울 게 없다는 것을 가스톤은 미처 몰랐었기 때문이다. 토지에르는 가스톤과 일단 의견 조정을 본 후, 다크를 불러 줄 것을 원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자네도.... 요즘 바쁠 텐데 웬일인가? 하하하, 그래도 대공(大公) 전하만 하겠습니까? 황금은 원하시는 대로 말씀하십시오. 즉각 보내 드리겠습니다. 참, 연락이 된 김에 전에 설명하신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군요. 그러면서 토지에르는 서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확인을 해? 예, 타이탄이란 것이 원래가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다시 손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우선, 주문하신 타이탄이 황금색이 맞죠? 그래, 될 수 있으면 누런 황금색으로 부탁하네. 토지에르는 다크가 금을 매우 좋아한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음 질문을 했다. 그리고 머리 형태는 골드 드래곤과 최대한 유사하게 만들어 달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예, 아마도 내일쯤 외장 설계도가 완성될 것입니다. 전체적인 파트의 제작이 꾸준히 진행 되고는 있지만, 스바시에 대공 전하께서 개인 타이탄으로 선택하신 카프록시아의 생산이 우선이기에 카프록시아 10기의 생산이 끝난 후에야 생산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봄쯤이나 되어야 끝나겠군요.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파트들이 카프록시아와 동일하니까 이렇듯 생산 기간을 줄일 수 있는 거겠죠. 참, 카프록시아Ⅳ의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스바시에 대공 전하라는 것은 예전의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을 말하는 것이었다. 루빈스키도 다크와 마찬가지로 스바시에를 공국으로 하사받았기에 지금은 루빈스키 폰 스바시에 대공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이름이라..., 아버지는 드라쿤(DRAKOON)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던데? 아 예, 알겠습니다. 저도 지금 타이탄을 생산한다고 제 정신이 아니지라, 이만 통신을 끊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주문대로 만들죠. 시간이 나시면 크로돈으로 오셔서 설계도를 보시고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을 말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일단 프로토 타입이 제작된 후에는 새로이 변경하기가 아주 힘드니까 말입니다. 알겠네, 수고하게나. 예, 안녕히 계십시오. 그라세리안 코타스, 아니 카드리안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도대체가 자신의 레어 근처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두 녀석 때문이었다. 일도 바쁠 테니까 며칠 있다가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참고 있었지만, 떠나기는커녕 사태가 장기화되자 아예 나무를 잘라서 볼품 없는 통나무집까지 한 채 짓는 것을 보고 이들이 쉽사리 떠날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키에리 발렌시아드는 통나무 집 앞의 자그마한 바위 위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다가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 이유는 그 기척이 그라세리안의 것과 아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그토록 만나고 싶은 친구였는데도 고개를 천천히 돌렸을까? 그 이유는 상대가 그라세리안이 아니라면 실망감만 더 커질 것이기에,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키에리의 예상대로 그곳에는 그라세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키에리는 친구를 확인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의 몸은 이제 거의 완쾌된 상태였기에 동작이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막 그라세리안을 향해 뛰어들려는 순간, 그라세리안의 냉랭한 목소리가 키에리의 행동을 저지했다. 무슨 일로 왔나? 키에리는 상대의 쌀쌀맞은 어투에 적이 당황했다. 자네를 만나고 싶어서 왔네. 내 짐작대로 살아 있었군. 생사를 모르던 친구를 만난 그 흥분된 표정을 조롱하듯 바라보며, 카드리안은 코웃음을 쳤다. 훗, 누가 감히 나를 죽인다는 말인가? 그래,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가? 그렇네. 이제 확인했으면 만족했을 테니 돌아가게. 자네는 언제나 바븐 사람이었잖나? 나를 위해 이 정도 시간을 내 준 것만 해도 감사한다네. 만약 나를 데려갈 생각으로 온 것이라면 단념하게나. 나는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하지만 이번에는 키에리의 반응이 카드리안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그는 이미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가? 그렇다고 해도 상관 없네. 일단 들어가세나. 술이라도 한 잔 해야지. 내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그래도 자네는 포도주를 마셔야 할 의무가 았네. 리사가 죽었거든. 그게 우리들의 규칙이었잖은가? 설마? 리사가..., 왜 죽었지? 크루마와의 전쟁에서 전사했지. 자네들은 기어코 그 전쟁을 벌이고야 말았군. 하지만 크루마에 그녀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검객이 있었나? 참, 미네르바라면 가능했을지도.... 미네르바는 아니었어. 미네르바는 로체스터가 상대하고 있었지. 루엔이라는 젊은이였네. 복수는 내가 해 줬지. 이제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감을 잡은 카드리안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웃음 소리에는 왠지 쓸쓸함이 묻어있었다. 하하핫, 그렇다면 자네 원하는 대로 되었겠군. 크루마는 멸망했을 테고, 친구의 복수도 완성했고. 그런데 여기에는 왜 왔나? 새로운 점령지를 다스리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말이야. 그런 카드리안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키에리는 뭔가 짚이는 부분이 있었는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자네는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이번 전쟁에서 코린트는 패배했어. 설마? 농담이겠지. 진짜일세. 자네가 한 번 알아 보면 바로 들통 날 거짓말을 왜 하겠나? 크루마에게 쟈코니아 산맥 동쪽을 다 뺏겼고, 크라레스에게는 크로나사를 뺏겼지. 이제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어서 휴전했다고 하더군. 자네가 있는데도 그 모양이 되었나? 아니, 나는 죽은 걸로 되어 있네. 크루마 전쟁의 패전 책임으로 참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로체스터가 구해 준 것이지. 나는 크루마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어. 그 덕분에 크라레스 전쟁에는 참전해 보지도 못했지. 그럴 수가.... 아무리 적의 타이탄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조종하는 이상 조종하는 사람의 실력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어있어. 코린트에는 다섯 명의 마스터가 있었는데, 어떻게 크루마 따위에게 패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키에리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보다 더 강한 고수가 있었지. 미네르바가 그렇게 강했다는 말인가? 아니, 미네르바가 아니라 갈색 머리를 길게 기른 소녀였네. 크라레스의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이라고 하더군. 갈색 머리, 그렇다면 ? 카드리안에게 짚이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에게 도전했던 그 맹랑한 호비트 소녀. 그 소녀도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었다. 자신의 브레스를 가볍게 막아 냈고, 골드 드래곤 아르티어스를 양아버지로 삼고 있는 불가사의한 소녀. 아마도 그녀라면 키에리와 싸워서 승리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자네는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군. 제임스는 자네가 행방 불명 되었을 때 조사해 본 후, 그녀가 자네를 죽인 것이 아닌가 추측했었네. 그러니까, 자네가 그 소녀와 만나기는 만난 거였군. 쩝, 만났었지. 자네가 은거한 것과 그 소녀가 관계가 있나? 아니, 나 혼자만의 결심이었네. 더 이상 있을 필요를 못 느꼈지. 한번만 더 조국을 위해 일해 주지 않겠나? 이 상태라면 코린트는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네. 적은 너무나 강하고 코린트의 힘은 쇠약해져 있어. 자네가 도와 준다면 우리들의 조국을 예전처럼 강대하게 탈바꿈시킬 수가 있어. 제발 도와 주지 않겠나? 하지만 카드리안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사양하겠어. 나는 이제 코린트의 일에는 손을 뗐어. 자네도 쓸데없이 나서지 말고 이 기회에 은퇴하게나. 소녀도 무섭지만 소녀의 뒤에 있는 사람은 더욱 무섭다네. 소녀와 함께 왔던 마법사 말인가? 그래, 그 마법사 말일세. 그 사람을 봤었나? 카드리안의 질문에 키에리는 고래를 가로 저었다. 그는 제임스의 보고서를 통해 그라세리안과 소녀의 뒤를 추적하듯 공간 이동해 들어간 마법사가 한 명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얘기만 들었지. 그를 화나게 해서는 안 되. 그는 사람이 아니라 골드 드래곤이야. 말토리오 산맥의 지배자지. 카드리안의 말에 키에리는 경악했다. 드래곤이라고? 그렇네. 그리고 그녀의 양아버지이기도 하지. 그는 유희를 위해 인간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딸을 위해 나온 것일 뿐이야. 그렇기에 그에게는 유희의 규칙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만약 소녀가 잘못 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바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어. 그 소년가 소속된 나라가 적이라면 처음부터 손을 떼는 것이 좋아ㅏ. 무슨 일이 있어도 승리는 불가능해. 자네가 하는 말의 뜻은 대충 이해하겠는데, 유희라는 것이 뭔가? 카드리안은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드래곤은 엄청난 수명을 가진 종족이야. 거의 8천 년 가까이 살 수 있지. 그렇기에 그들은 오래 삶에서 오는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생명체의 삶을 즐긴다네. 예르 들어 용사로 변해서 세상을 호령하기도 하고, 오크가 되어 산적질을 하기도 하지. 그걸 보고 유희라고 부르는 거야. 단 이 유희에도 드래곤들끼리 무언중에 정해진 규칙이 있지. 사실 이 규칙이 뭐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드래곤들은 자신의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 지키려고 노력한다네. 사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번번히 드래곤으로 되돌아가서야 그 생물의 삶을 체험하는 자극적인 유희가 될 턱이 없잖은가?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경우 단순한 유희를 위해 그 소녀를 따라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이런 말은 듣기에도 처음인지라 키에리는 문득 코타스가 드래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드래곤들의 생활은 베일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 억이 넘는 인구에 비해 드래곤은 그 숫자가 몇 백 마리도 안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트랜스포메이션 하여 세상을 떠도는 드래곤은 그보다 훨씬 적어 몇 십 마리 되지 않았다. 그 말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트랜스포메이션 한 드래곤을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기에 키에리는 자신에게 그렇게 낮은 가능성이 찾아올 리 없다는 이성적인 생각도 함께 들었던 것이다. 그는 애써 코타스가 드래곤일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지워 버리며 자신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질문했다. 자네, 그걸 어디서 들었는가? 어디서냐고? 그러니까.... 카드리안은 일부러 뜸을 좀 들여 변명할 여유를 잡은 후 답변을 시작했다. 겨기 사는 블루 드래곤 카드리안에게서 들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카드리안의 영역 안에서 살고 있네. 서로가 이웃이니까 한 번씩 만나기도 하지. 그렇다면 자네, 드래곤과 친하다는 말인가? 아니, 친한 것은 아니고 서로 아는 척은 하는 사이라는 말이지. 어쩌다 한 번씩 만나기도 한다네. 운이 좋다면 같이 차 한 잔씩 하면서 얘기를 하기도 해. 원래가 드래곤은 그 오랜 삶에 염증을 느끼는 생명체니까 그런 파격적인 행동도 가능하지. 하지만 그것뿐, 더 이상 관계가 진척되지는 않더군. 왜냐하면 드래곤은 원래 호비트를 매우 하등한 족속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우정 따위가 싹틀 수가 없었어. 그런데 아르티어스와 그 소녀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지. 어떻게 그런 관계가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는 아르티어스의 양녀고, 그녀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음 분명한 사실이야. 역시, 자네를 만나니까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는군. 자네는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친구야. 제발 나하고 함께 산을 내려가세. 조국 코린트는 지금 자네를 원하고 있어. 나는 사양하겠네. 그렇게 좋다면 자네나 가 봐.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온 거였어. 카드리안은 이 말을 끝으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어딘가로 공간 이동을 해 버린 것이다. 키에리는 오랜 친구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오늘의 대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크라는 무서운 적의 존재에 대해서까지도.... 다크의 실종 키에리가 블루 드래곤 카드리안을 만나고 있었던 그때, 치레아 공국에서는 갑작스런 다크의 실종으로 온통 날리법석이었다. 웬만한 직위에 있는 인물이 실종되었다고 해도 어떻게 된 것인지 철저히 조사하는데, 행방 불명된 대상이 치레아 공국의 주인인 치레아 대공 전하이니 그것은 당연했다. 아, 아르티어스 님! 대공 전하께서 갑자기 사라지졌습니다. 장교의 보고에 아르티어스는 아들의 야속함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 녀석이 애비를 놔 주고 어디로 튀어 버린 것이지? 그래! 모든 일은 나에게 떠넘기고 튀어 버렸다 이거지. 자기 혼자만 어딘가를 여행하면서.... 예휴, 내 팔자야. 원망스럽게 말하는 아르티어스에게 장교는 재빨리 자신의 말을 정정해서 보고했다. 아르티어스가 사건의 본질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닙니다. 실종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지금 그곳에 가 보십시오. 입고 계시던 옷가지만 남겨 두고 갑자기 사라지셨다니까요? 뭐라고 옷가지를 남겨두고? 그제야 사태의 중요성을 깨달은 아르티어스는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가 알고 있는 한 다크는 공간 이동 마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가 사건의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시선을 압도할 정도로 거대한 강철 구조물이었다. 이게 왜 나와 있는 거야? 바로 그 강철 구조물은 다크가 사용하던 청기사였다. 아르티어스는 청기사의 흉부에 자신을 비꼬아 만든 황금 드래곤의 문장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이게 다크가 사용하던 타이탄이라는 것을 재빨리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청기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타이탄은 주인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가장 확살히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는 왜 나와 있는 거지? 주인하고 같이 간 것이 아니었냐? 그러자 안드로메다는 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원래 주인이 있는 타이탄이라면 주인 외의 인물과 대화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지금 주인이 없었다. <갑자기 주인과의 맹약이 해지되었다.> 그렇다면 다크가 그 맹약을 해지한 거야? <그것은 아니다. 주인의 존재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맹약이 깨진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청기사가 하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놀라서 외쳤다. 맹약이 깨졌다고? 골렘의 맹약은 그렇게 갑자기 깨질 수가 없는 것인데,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냐? 거기 덩치! 너는 다크가 없어지는 것을 봤느냐? 갑자기 아들이 없어진 것으로 인해 누군가 걸리기만 하면 가루로 만들겠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광기를 머금은 아르티어스의 눈과 마주치자 팔시온은 팔시온 이라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이름을 놔 두고 덩치 라고 간단히 축약해서 말한 상대에게 항의할 말이 목구멍 밑으로 쑥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르티어스의 공포스러운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온몸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은 위압감을 느꼈지만 사력을 다해 말했다. 만약 말하지 않으면 진짜 아르티어스에게 찢겨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팔시온으로서는 그야말로 이렇게 무섭게 보이는 아르티어스의 모습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평상시 다크에게 끽소리도 못 하고 끌려 다니는 팔푼이 아빠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아르티어스였기에, 도대체가 저 사람이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다크가 어리광을 부리는 유일한 존재가 아르티어스이듯, 평소에 팔시온이 대하는 얼빠진 아르티어스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인 다크의 앞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여태까지 팔시온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공 전하께선 제스터에게 검술을 가르치시던 도중에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그야말로 갑자기 몸통이 쓱 사라지면서 옷가지와 검이 땅바닥으로 그냥 떨어졌습니다. 제가 미친 것이 아니라 정말이라구요. 저기 옷가지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잖아요. 안 그러냐, 제스터? 우연히 그들 주위에서 검술을 연마하다가 증인이 된 팔시온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와 검을 가리켜 보이며 그때 상황을 말했지만, 아르티어스가 자신의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자 식은땀을 흘리며 제스터에게 팔밀이를 했다. 로체스터 공작에게 지시받은 대로 제스터는 다크에게 열과 성을 다해서 봉사했고, 그것을 인정받아 이곳까지 왔다. 물론 치레아에는 다크를 시중 드는 세린이 있었다. 그렇기에 제스터는 요즘 타크의 시중을 드는 대신 그의 간단한 심부름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고, 다크는 검술에 대한 제스터의 비범한 재능을 눈치 채고는 요즘 그를 가르치는데 조금씩 시간을 투자해 주고 있었다. 제법 검술도 익혔고, 키도 제법 크다고 하지만 이제 겨우 열여섯 살 정도의 미숙한 청년이었기에, 저 격렬한 광기를 뿜어 내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눈빛에 질려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사실이냐? .... 아프티어스는 주눅이 들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제스터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다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대답을 햇! 저 덩치가 한 말이 사실이냐니까? 저..., 그 그러니까 아 아 아르티어스 님. 파 팔시온 님의 말이 사실이십니다. 더듬더듬 주눅이 든 채 제스터가 말을 마치자 아르트어스는 그 광기 어린 눈동자를 하늘로 향했다. 갑자기 사라졌다념 공간 이동 마법이나 뭐 그런 것을 첫째로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크는 공간 이동 마법을 할 줄 몰랐고, 또 검술을 교육시키다가 갑자기 공간 이동 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다크를 공간 이동해서 끌어 간 것을 생각할 수 있엇다. 아르티어스의 눈은 주위를 샅샅이 훑어 나갔다. 하지만 패밀리어(familier)를 찾을 수는 없었다. 마법사들은 필요에 의해 자신의 눈과 귀, 그리고 손과 발이 되어 줄 동물을 평생 동안 딱 한 마리만 패밀리어로 선택;할 수 있었다. 물론 패밀리어는 선택하고 나면 교체가 불가능했고, 패밀리어가 무슨 이유인가로 사망했을 때 그 마법사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에 바보가 되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경우까지 있는 아주 위험도가 큰 마법이었다. 하지만 패밀리어를 가지고 있다면 정보 수집에 매우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었기에 한 번씩 사용되기도 하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는 패밀리어를 만들지 않았다. 패밀리어를 만듦으로 인해 생기는 이점보다 위험도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패밀리어를 이용해서 다크가 있는 좌표를 잡고 강제로 공간 이동해서 끌고간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문제였기에 아르티어스는 어떤 망할놈의 마법사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패밀리어를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잠깐 동안이기는 했지만 패밀리어를 찾다가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공간 이동을 한다고 해서 절대로 존재감이 사라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타이탄과의 맹약이 해지되었다는 말은 다크라는 인물이 아예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그도 상당히 당황했고, 또 그 때문에 상황 판단이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존재 자체를 없앨 수 있는 마법이 있었던가? 맞아, 존재 자체를 없앤다면 차원 이동뿐이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왜 갑자기 차원 이동이 발생한 거지? 예전에 차원 이동해서 이리로 왔으니까 자연히 다시.... 아니야, 그것은 아니야. 어떤 망할 놈이 개입했다고 봐야 해. 그렇다면 다크를 향해 차원 이동 마법을 쓸 놈이 누가 있지? 그러다가 아르티어스의 눈에 땅 위에 널브러져 있는 다크의 옷가지 사이로 뭔가 반짝이는 푸른 것이 눈에 띄었다. 바로 다크가 언제나 끼고 있었던, 아니 뺄 수가 없었기에 끼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반지였다. 세상에..., 아쿠아 룰러까지 그대로 있다니.... 그렇군! 딴놈이 그녀에게 마법을 걸었다면 아쿠아 룰러가 막아 줬을 거야. 그런데도 아쿠아 룰러가 방관했다면 차원 이동 마법을 쓴 놈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르티어스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나이아드! 이런 행동을 할 놈은 나이아드뿐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나이아드를 떠올리면서 얼굴이 핼쓱해졌다. 자신이 만든 아공간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라면 구태여 이런 방법을 쓸 이유가 없다. 꿈 속에서 그 아이의 정신만을 끌어들여도 충분하기 때문이야. 이렇게 완전한 차원 이동가지 사용해서 다크를 어디로 데려갔을까? 왜? 무슨 목적으로.... 그게 이 사건을 푸는 문제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르티어스는 기겁을 하며 재빨리 주문을 외워 대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의 몸은 사라져 버렸다. 무서운 얼굴로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던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자 남은 사람들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훔쳐봤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에게서도 그 해답을 얻어 낼 수 없었다. 정령계로 간 묵향 엄청나게 짙게 우거진 숲. 평생 보도 듣도 못했던 기이한 식물들이 엄청나게 짙게 우거져 있었다.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우거진 수풀 덕분에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시종으로 데리고 있는 제스터가 제법 검술에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재미삼아 조금씩 가르치며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물론 자신이 검술을 가르치며 제자가 잘 소화해 내는 것에 뿌듯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걸 역으로 생각해서 자신이 마법을 잘 따라서 배우면 아르티어스가 얼마나 좋아할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크는 평소에 자신이 하던 대로 바쁜 와중에 약간의 시간을 내어 제스터에게 검술을 가르치던 도중, 갑자기 눈 앞이 흐려지더니 이렇듯 울창한 숲이 나타난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갑자기 굵직한 목소리가 입에서 튀어 나오자 그 목소리를 낸 당사자가 오히려 더 놀랐다. 검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사내.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며 이게 꿈이 아닌지 여기저기 만져 보기 시작했다. 그런 후 터져 나오는 만족스런 목소리. 드디어 남자로 돌아왔어, 남자로.... 으하하핫! 한참 웃음을 터뜨렸지만, 이윽고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자 여기는 어딜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선 이 무더운 온도와 해괴한 나무들이 빽빽한 울창한 숲, 그 어떤 것으로 봐도 중원으로 돌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남만(南蠻) 지방으로 가면 무덥다고 하던데, 설마 거기에 왔나? 하지만 머리만 굴린다고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일단 나무 위로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보기로 작정했다. 나무 위로 몸을 날렸을 때, 묵향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군데군데 솟아 올라 있는 화산들에서는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화산들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 곳은 끝없는 밀림의 연속이었다. 바로 DEO 저 먼 곳으로부터 엄청난 먹구름이 강력한 바람을 타고 흘러오며 대지를 향해 마치 화살을 뿌리듯 번개를 뿌려댔다. 아직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하늘에서 지상으로 연결되는 그 뇌전의 축제는 발 밑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윽고 그 먹구름은 묵향이 서 있는 곳까지 몰려 들었고 사방에는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섬광이 피어 올랐다. 그리고 곧 이어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뭐 이런 곳이 다 있지? 눈에 보이는 것은 식물뿐이고, 지독하게 퍼붓는 비, 바람, 번개.... 대기는 그 모든 것들이 뿜어 내는 기로 소름이 끼칠 만큼 충만해 있고, 생명력이 약동(躍動)하는 이런 곳이 말이야.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묵향은 먼저 여기가 어딘지 알려줄 사람부터 찾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었던 그곳에 처음 갔을 때도 먼저 민가를 찾아 말부터 배우지 않았던가? 젠장, 재수 없으면 전과 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하게 생겼군. 무작정 한쪽 방향을 정한 후 묵향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나무 위로 달려가고 있었기에 발 밑으로 울창한 밀림들이 쏜살같이 자나가는 듯한 착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밀림은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묵향은 강을 하나 발견했다. 나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강물 속에는 이상하게 생긴 거대한 물고기 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 저걸 잡아 먹고 갈까? 언제 또 먹음직한 먹거리를 발견하게 될지 모르는데.... 그가 잠시 궁리하는 사이, 갑자기 붉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상체에 몸매가 완전히 드러날 정도로 꽉끼는 옷을 입고 있었고, 하체는 늘씬한 다리의 허벅지가 거의 다 드러나도록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묵향을 노려보더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방금 이쪽으로 차원 이동되어 온 놈이 너가 맞냐? 다행히 일단 말은 통하는 세계라는 것을 확신했기에 묵향은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 했다. 언어의 장벽이 없는 세계라는 것을 알려 준 보답으로 저쪽의 질문은 다 들어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는 저 년에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알아낼 작정이었지만.... 이상하네 대상을 잘못 잡았나? 분명히 아쿠아 룰러의 기척을 느끼고 잡아들인 것이었는데, 내가 실수를 하다니.... 이봐, 너는 누구지? 묵향이라고 한다. 무키앙? 웃기는 이름이군. 어떻게 해서 너가 왔는지 모르겠지만ㅡ 너는 크라레스라는 작은 나라에서 왔나? 또다시 사내가 고개를 까딱 하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말했다. 다크라는 계집과는 어떤 관계지? 그년을 잡아들였는데,왜 너가 왔는지 그걸 묻는거다. 다크? 다크라면 난데? 오호호홋, 미친 녀석! 그 계집 애가 자기라고 말하다니 찐짜 미.... 갑자기 그녀는 말을 중단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아쿠아 룰러의 주인은 원래 남자였다. 그것이 저주를 받아 여자로 변한 것이다. 이곳은 물, 불, 바람, 뇌전, 대지를 주관하는 5대 정령이 다스리는 정력계였다. 차원이 바뀌었기에 묵향을 소녀로 만드는 저주를 주관했던 마왕 크로네티오의 힘도 여기서는 그 빛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묵향의 저주는 풀리게 되고, 다시 남자의 모습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오호호호호.... 바로 여기에 놔 두고 찾는다고 그 난리를 피웠었군. 나를 기억하겠나? 묵향의 뇌리에는 저렇게 퇴폐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는 계집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을 보고 계집은 생긋 웃더니 어느 순간 그 모습을 확 바꾸어 버렸다. 몸이 허물어지는 듯 보이다가 다시 재구성되는 것을 보면 괴물인 듯 보이기 까지 했지만, 다시 나타난 얼굴을 보는 순간 묵향은 상대의 얼굴을 며칠 전에 봤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나이아드? 빛나는 금발을 뒤로 쓸어 넘기면서 남자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이제야 기억을 하는군. 네년을 제압하기 위해 이런 수고까지 하게 만들다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에게 복종하겠다고 맹세해라. 이곳은 정령계. 여태까지의 금제는 사라지고 나는 모든 힘을 다 쓸 수 있다. 그러니 괜한 생각 말고 일찍이 포기하는 것이 좋아. 미친 놈! 흐흐흐..., 매를 버는구나. 그래 네년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타입이었지. 오냐, 원대로 해 주마. 그때부터 묵향으로서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자신과 주종의 관계를 맺었던 타이탄은 어디로 도망 갔는지 나오지도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어떤 무공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이아드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생명이 있는 곳이라면 물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으니 물을 주관하는 나이아드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헉헉헉.... 묵향으로서는 자신을 이렇듯 숨차게 만든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아마도 묵향이 만났던 인물 가운데 제일 마지막으로 만났던 자신을 고생기킨 인물은 그의 마지막 사부 유백분이었을 것이다. 젠장! 아무리 기(氣)가 충만한 곳이라고 해도, 이렇게 되면 밑 빠진 독에 물.... 아니지, 기가 충만하다면 한 번 해 볼만 하지. 묵향은 슬쩍 몸을 숨긴 채, 나이아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히히히..., 겨우 여기까지밖에 도망 치지 못하다니. 내가 시가니을 줘도 그 모양이라니, 호비트란 것들은 고집은 고집만 세고 정말 쓰잘데기가 없어. 거의 포기한 듯 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묵향을 보며 나이아드는 이죽거렸다. 이제 포기한 것인가? 포기했다면 빨리 나에게 충성을 맹세해라.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네년을 잡고 실랑이 하는 것도 귀찮은 노릇이니까 말이야. 으하하하핫. 바로 이 순간, 묵향의 손에서 빛나는 막대기 같은 것이 쑥 솟아 올랐고 그와 동시에 묵향의 몸은 나이아드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나이아드는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그 빛나는 검의 목표는 나이아드가 아닌 나이아드와 비교적 가까운 땅 속 깊은 곳을 흐르는 기였다. 쿠콰콰콰콰.... 무서운 폭발이 일어났다. 대지의 기운을 충돌시키는 이 무공을 깨달은 이후, 가장 강력한 위력이었고, 그 강기의 폭풍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주위를 완벽하게 초토화시켜싿. 헉헉헉.... 간신히 끝난 모양이군. 바로 그때 묵향의 뒤에서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오오, 다오(DAO : 대지의 정령왕)가 슬퍼하겠군. 그가 아끼는 숲을 이렇듯 묵사발을 내놓다니 말이야. 흠칫 굳어 있는 묵향의 뒷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나이아드는 말했다. 어때?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 깨달았나? 겨우 그따위 공격으로 나를 없앨 수는 없어. 나이아드와 묵향의 대결 아르티어스가 정신 없이 돌진해 들어간 곳은 블루 드래곤 키아드리아스의 레어였다. 키아드리아스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영토로 공간 이동해 온 엄청나게 강렬한 드래곤의 기척에 약간 정신이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찾아온 손님을 마중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레어 밖으로 나온 키아드리아스는 자신의 레어로 허락도 받지 않고 접근해 오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을 나무끼는, 아름답지만 광포한 표정을 아낌 없이 드래내고 있는 호비트를 볼 수 있었다. 강렬한 드래곤의 존재감에 저 생김새.... 머리 색깔만 금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을 뿐, 저 트랜스포메이션 한 모습은 키아드라스의 뇌리에 잊혀지지 않고 남아 있는 악몽과도 같은 기억과 함께 되살아났다. 누군가 했더니, 아르티어스 님이었군요. 여기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신 거죠? 여기는 말토리오 산맥이 아닌데.... 아르티어스가 목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곳에는 초록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엘프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고혹적인 커다란 눈동자로 아르티어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는 절대로 환영의 빛은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남의 영역에 들어온 것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느낄 아르티어스는 아니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찾으려고 했던 당사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곧장 목적을 밝혔다. 카렐! 카렐은 어디에 있지? 갑자기 아르티어스가 자신이 생명처럼 사랑하는 카렐을 찾자 키아드리스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르티어스는 예전에도 한 번 겪어 봤지만 정말 무서운 드래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렐은 왜 찾나요? 아르티어스는 카렐의 위치는 말하지 않고 우선 그를 찾는 목적부터 물어 보는 키아드리아스에게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남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만큼 그로서는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며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그래. 부탁이라고요? 당신이 엘프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쓸데없이 말을 빙빙 돌리자 아들의 실종으로 초조하기 이를 데 없는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벌컥 화부터 냈다. 제발 닥치고 카렐이 있는 곳이나 말해. 하지만 드래곤들 사이에 이렇듯 남의 영토에 들어와서 신경질부터 내는 경우는 매우 예의에 어긋난 행위였다. 아무리 아르티어스가 키아드리아스보다 700년쯤 더 살았다고 하더라도 키아드리아스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던 것이다. 전에 내가 그랬을 때는 엄청나게 신경질을 내 놓고는.... 하고 생각하며 키아드리아스는 일부러 더욱 비꼬듯 말했다. 호호호..., 말을 안 해 주면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것인가요? 약간 애를 태우며 아르티어스가 자신의 연인인 카렐을 찾는 이유를 탐색하려는 의도였지만, 키아드리아스는 처음부터 상대방의 감정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죄였다. 젠장, 그래! 무력 사용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각오해! 내가 힘을 스면 전처럼 날개 하나 부러드리는 정도에서 끝내지는 않을 거야. 으드드득, 나에게 그만큼 시간을 낭비하게 했으니 이번에는 아예 죽여 버릴 거야! 키아드리아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남의 영토에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렇듯 폭언을 해 댈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어린 드래곤도 아니고 이제 고룡이 다 되어 가는 영감이 말이다. 예전에 아르티어스의 영토에서 깝죽거리다가 치고 받았을 때가 무려 2천 년 전이었다. 아무리 블루 드래곤이 골드 드래곤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키아드리아스는 아직 성장기에 있었던 반면 아르티어스는 성장을 마치고 완숙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그렇기에 키아드리아스가 묵사발이 났었지만 그때만을 생각하고 이렇듯 오만하게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거의 700년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키아드리아스도 이제는 완숙기에 접어든 웜 급 드래곤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상대의 영토에 무단 침입해서는 저렇듯 오만하게 나올 수 있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혹 아르티어스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상대로 그리 쉬운 승리를 장담하기는 힘들 텐데 말이다. 도대체 뭘 믿고 남의 영토에서 그렇게 오만한 거죠? 내 실력과 힘을 믿는 거지. 설혹 네가 에인션트라고 해도 상관 없어. 빨리 카렐이 있는 곳이나 말해. 네년하고 한가하게 입씨름이나 하고 있을 여유는 없어. 완전히 이성을 잃다시피 한 채 서슬이 시퍼렇게 소리를 지르는 아르티어스를 보며 키아드리아스는 상대가 결코 좋은 뜻으로 카렐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르티어스의 저 광포한 눈동자는 아무래도 카렐을 찾기만 하면 찢어 죽이겠다는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에게는 알려 줄 수 없어요. 키아드리아스의 말이 끝나자 마자 아르티어스는 경고도 하지 앟고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괜히 시간을 끌 필요 없이, 아직 엘프일 때 없애 버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대기를 뚫고 날아오는 엄청난 바람의 칼날을 느끼고 키아드리아스는 경악했다. 그녀는 재빨리 방어 마법을 펼치며 그것도 못 미더워서 몸을 날려 칼날을 피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날린 바람의 칼날은 그대로 키아드리아스를 따라오며 작렬했다. 꺄악! 본체의 상태도 아니고 엘프로 트랜스포메이션 한 상태였기에 그녀가 황급하게 친 방어막은 그렇게 강하지 못했고, 그것이 풍압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나면서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줬다. 아르티어스는 상대를 향해 연속 공격을 감행했다. 일단 기선을 제압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키아드리아스는 상대의 공격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아르티어스는 달랐다. 아르티어스는 조금의 여유를 이용해서 바람의 정령왕을 불러 냈다. 바람의 정령왕은 아르티어스의 부름에 따라 투명에 가까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 아르티어스여!> 제길! 저년을....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바람의 정령왕을 보고 아르티어스는 공격 목표를 지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단 정령왕을 불러 내고 보니 자신이 괜한 일을 벌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렐을 통해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를 불러내어 정령계로 보낼 필요 없이 바람의 정령왕 아리엘(ARIEL)을 보내 버리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노릇이 아니던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다크의 아쿠아 룰러를 보면서, 마음이 급하다 보니 미처 자신도 정령왕을 불러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정령왕을 불러 낼 수 있는 다른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카렐에게 도움을 청하러 이곳까지 온 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이런 제기랄!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잖아! 공격의 템포가 끊긴 사이 키아드리아스는 정신을 되찾았다. 원래가 정령 마법의 특성상 전기의 정령은 방어에 약간 취약했다. 그 점을 노리고 자신을 그렇게 정신 없이 몰아 붙인 것에 감탄을 하긴 했지만, 전기가 방어에 취약한 대신 공격력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강하지 않던가? 일단 여유를 찾자 키아드리아스는 공격을 시작했다. 대지를 꿰뚫고 날아오는 뇌전의 세례 속에 아르티어스는 상대에게 잠깐의 시간 여유를 준 건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아르티어스의 평소 성깔대로 일단 죽여 버린 후 생각했어야 했는데, 상대를 죽이기도 전에 해결책이 먼저 떠오른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저년을 죽엿! 그와 동시에 아리엘은 키아드리아스를 향해 막강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르티어스는 키아드리아스의 공격을 피하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이렇게 되자 다시 키아드리아스가 압도적으로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의 공격만을 시도 했을 뿐, 그 다음부터 연속되는 아리엘의 공격을 피하는 데도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아리엘은 드래곤인 아르티어스와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엄청난 공격을 퍼부어 댔다. 그리고 그 사이 아르티어스는 본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황금빛 광채가 솟아나오는 가운데 거대한 아르티어스의 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정말 잠시지만 이 순간이 아르티어스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때였다. 공격이고, 방어고, 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키아드리아스는 바로 그 절호의 찬스를 아리엘의 공격을 피하면서 이빨을 갈면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전기의 정령왕 카르스타를 불러 냈다면 모르겠지만, 아리엘은 그녀에게 그 작은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아르티어스의 황금빛 거체가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키아드리아스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곧 그녀는 드래곤으로 돌아가 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치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키아드리아스는 아르티어스가 한 말을 이해했다. 자신의 실력과 힘을 믿는다는 말. 그리고 상대가 에인션트 급 드래곤이라고 해도 겁나지 않는다는 말. 자식도 낳지 않고 온갖 무예를 익힌다고 떠돌았던 아르티어스는 키아드리아스에 비해 실전 경험이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본체로 돌아가자마자 즉각 용언 마법을 펼쳤다. 그에 따라 아르티어스의 두 손에서 무시무시한 붉은색 방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양손에 각각 8사이클 급 공격 마법 헬 화이어를 쓰려고 하는 것이었다. 얄미울 정도로 자신을 몰아 붙이며 승기를 잡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키아드리아스가 차라리 깨끗한 최후를 맞이하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산 밑에서 부터 찬란한 금빛 광채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아르티어스와 같은 찬란한 금빛 광채를 뿜어내고있는 그것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지만 아르티어스와 같은 거대함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키아드리아스는 드래곤 두 마리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잠시 자신의 집으로 내려갔던 카렐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카렐이 강하다고 해도 이 무지막지한 아르티어스에게 이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키아드리아스는 아직도 정신 없이 계속되고 있는 아리엘의 공격을 피하며 절망적으로 외쳤다. 카렐! 오지 말아요. 달아나요! 제발! 자신은 죽어도 괜찮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까지 죽는 것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티어스의 두 손에 맺힌 붉은 덩어리. 그것은 이제 발사를 앞두고 응집된 힘의 결정체였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걸 키아드리아스에게 발사하지 않고 잠시 멈춘 후 말을 시작햇다. 그리고 그 엄청나던 아리엘의 공격도 그때 멈췄다. <그렇게 죽고 싶냐? 이제 그만 싸움을 멈추는 것이 어때? 나는 너 따위와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키아드리아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승낙했다는 것을 확인한 아르티어스는 곧장 자신의 양손에 맺혀 있던 두 개의 붉은 빛의 덩어리를 소멸시키면서 아리엘에게 말했다. <부탁이 있다.> <뭐냐?> <지금 곧장 정령계로 돌아가서 내 아들을 구해 다오. 정령왕 나이아드가 여기서는 도저히 손을 쓰지 못하자 정령계로 그 아이를 끌고 갔다.> <정말인가?>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그 청은 수락한다. 이 계의 생명체를 정령계로 끌어 가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 그리고 그 순간 투명하던 아리엘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아리엘이 모습을 감춘 그때,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등 뒤로 압박해 들어오는 엄청난 압력을 느꼈다. <이건 또 뭐야?> 아르티어스는 날아오는 그 엄청난 힘의 근원이 아들 녀석이 주로 애용하는 괴상한 마법 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아마도 예전의 아르티어스였다면 이 일격으로 상당한 상처를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르티어스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 엄청난 기운은 설혹 드래곤 본이라고 해도 찢어 발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아들 녀석에게 용언 마법을 가르치기 위해 며칠 동안 고민했었던, 드래곤 하트를 단전으로 대체하게 하는 그 힌트를 역으로 자신에게 적용하여 상당 수준까지 검술이란 것을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순간 아르티어스의 몸에서 뿜어 나오던 금광이 더욱 밝아졌다. 그리고 그 몸체에 카렐이 뿜어 낸 강기 세례가 부딪쳤을 때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아르티어스는 흔히 호비트들이 검술에 써먹듯 자신의 비늘에 마나를 주입한 것뿐이었지만, 마나를 주입받은 드래곤 본은 상상도 못 할 강도를 발휘했던 것이다. 자신의 공격을 아주 간단하게 막아 낸 드래곤을 향해 카렐이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사이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그 거대한 몸을 천천히 뒤로 돌렸다. <네가 카렐이냐?> 그렇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녀석! 네 녀석이 내 아들에게 아쿠아 룰러만 주지 않았어도 이번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아쿠아 룰러라는 말이 나오자 카렐은 흠칫 했다. 으응? 다크라고 하던 그 소녀를 말하는 것인가? <그래. 그 아이는 나이아드의 술수 때문에 지금 정령계에 끌려 가 있다. 네 녀석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크하하하하....> 자, 잠깐, 이럴 시간이 없지 않나? 그녀가 위험하다면서? 내 이프리트에게 부탁하면 될 거야. <이미 아리엘을 보냈으니 이프리트 따위는 필요는 없다.> 그래도 상대는 나이아드인데, 정령왕 하나보다는 둘이 좋지 않을까? 상대의 말도 일리는 있었기에 전의에 불타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조금 누그러든 어조로 말했다. <그럼 빨리 보내라.> 이때, 여태까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앉아서 오가던 대화를 도청(盜聽)하고 있던 키아드리아스도 한 마디 보탰다. 나이아드에게 납치된 아르티어스의 아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같은 드래곤을 죽일 각오까지 할 정도로 아들에 대한 아르티어스의 사랑이 극진하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만약 이대로 아들을 찾지 못한다면 아르티어스는 엄청난 분노를 터뜨릴 것이고 그 분노의 첫 번째 대상은 자신과 카렐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방금 전의 격전을 되씹어 봤을 때 그들 둘이 힘을 합한다고 해도 아르티어스를 이길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의 아들은 무조건 정령계에서 구출해 와야만 했고, 또 정령계에서 그 아이를 데려올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늘리려면 키아드리아스 자신도 끼여드는 것이 좋을 듯했던 것이다. 잠깐, 나하고 소통하는 카르스타도 보내죠. 정령왕 둘보다는 셋이 좋지 않겠어요? 키아드리아스까지 이렇게 말하자 아르티어스는 더욱 누그러든 어조로 말했다. <좋을 대로....> 묵향은 절망감을 느꼈다. 아무리 자기 집에서는 강아지도 한 수 먹고 들어간다고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 막강하게 탈바꿈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후의 비기까지 동원해 봤지만, 상대의 옷자락 하나 찢을 수 없었던 것이다. 크흐흐흐..., 이제 그만 포기하지 그래. 나에게 복종하면 네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 강한 쾌락과 신에 가까운 힘을 주마. 너와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 이죽거리는 나이아드를 향해 묵향은 입가에서 흘러 내리는 피를 손으로 쓱 훔친 후 쏘아 붙였다. 젠장! 사양하겠다. 묵향의 온몸은 나이아드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인해 만신창이에 가깝게 변했다. 하지만 나이아드는 묵향을 일단 살려 두어야 했기에 그렇게 심한 상처가 생기지는 않게 하고 있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자 묵향은 죽을 각오를 하고 온 힘을 동원해서 주위의 모든 기를 빨아 들이기 시작했다. 전에 살던 중원이나, 얼마 전까지 살았던 새로운 세계보다도 이곳은 더욱 기가 충만한 곳이었다. 그 약동하는 대자연의 모든 기운을 온몸이 터져 나갈 정도로 끌어 들이기 시작했다. 단전을 가득히 메운 기운은 이제 혈맥에 쌓이기 시작했고 조금 더 지나자 최 하부의 말단 세맥에까지도 꽉꽉 들어 차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엄청난 양의 마나가 상대의 몸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나이아드는 처음에는 그걸 그냥 놔 두었다. 제까짓게 아무리 용을 쓴다고 해도 자신을 능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나가 겨우 한 명의 호비트의 몸 속에 그야말로 한없이 흘러 들어가고 있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거냐? 엄청난 물 줄기가 묵향의 몸을 강타했다. 물론 나이아드는 묵향을 이용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기에 그렇게 강한 일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태껏 그래왔듯 묵향에게 중상(重傷)을 입히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묵향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던 그 공격은 단번에 튕겨 나가 버렸다. 묵향의 몸에 차고 넘치는 그 엄청난 힘이 자연스레 묵향의 몸 주위에 보이지 않는 장막을 치며 보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묵향은 다시 비트리거리며 일어섰다. 나이아드에게 당한 상처 곳곳에서 피가 흘러 내록 있었다. 그런 그가 악귀와도 같은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볼 만했다. 네 녀석에게 복족할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 그 말을 끝으로 묵향은 자신의 모든 축척된 힘을 발을 통해 대지에 쏟아 부었다. 묵향의 몸 속에 축적된 힘은 그 어느 때보다 막강했고, 그것이 몽땅 대지의 기운과 충돌을 일으켰으니 그 결과는 어마어마 한 것이었다. 콰콰콰콰.... 그야말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강기의 회호리는 약동하는 대지 밑으로 흐르고 있던 마그마를 건드렸고, 엄청난 화산 폭발까지 동반했다. 온몸의 기운을 폭발적으로 써 버린 묵향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에 가까울 정도로 무리한 기의 운용으로 인해 심각한 내상까지 입고서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아직 묵향이 화산 폭발의 한가운데에서 살아 있는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그는 자신의 공력을 폭발적으로 발 밑으로 뿜어 냈고, 그 반동에 의해 몸이 하늘 위로 솟아 올라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인간의 몸이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간단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곧 이어 용암이 흐르고 있는 저 불타는 대지를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내공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는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서 화산 폭발에 휩쓸려 죽을 수도 없었다. 그는 무리해서 주위의 기운을 빨아 들여 비등술(飛騰術)을 펼쳤다. 그에 따라 아래로 곧두박질치던 묵향의 몸은 그 속도를 줄이는 것 같더니 다시 날아 오르기 시작했고, 곧 이어 속도를 얻어 화살과 같은 빠르기로 용암의 대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이어 진기가 역류하면서 묵향은 입으로 피를 뿜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라면 언제 절명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지독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렇듯 무리한 공격 운용을 해 댔으니 몸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의식의 끈이 거의 다 끊어져 가는 가운데 묵향의 몸은 중심을 잃고 빠른 속도로 대지를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묵향은 자신의 몸이 대지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죽음뿐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손바닥에 끌어 모았다. 대지에 충돌하려는 그위험천만의 순간, 단전은 이제 완전히 비어 버린 상황이었지만 그의 의지에 따라 기적적으로 주위의 기가 동조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묵향의 몸은 급속도로 감속하기 시작하더니 안전하게 대지에 안착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묵향은 의식을 잃었다. 젠장할! 이렇게 지독한 놈은 내 평생 처음 보는군. 하지만 이제 네 몸뚱아리는 내 것이야, 크하하핫! 나이아드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웃음 소리는 곧 또 다른 목소리에 의해 끊겨 버렸다. 그것은 아주 공허한 울림을 담고 있는 특이한 목소리였다. <누구 마음대로?> 서서히 한쪽에서 투명한 음영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나이아드는 뭔가 장난질을 치다가 들킨 아이마냥 깜짝 놀라서 외쳤다. 어엇? 아리엘? <그렇다. 다른 차원에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이곳으로 끌어 오는 것은 금기된 사항이다. 너는 그것을 어겼어.> 나이아드는 주변을 획 둘러보며 또 다른 정령왕의 존재를 가늠해 보며 아리엘을 향해 대꾸했다. 그렇다면 겨우 다 잡아 놓은 먹잇감을 놔 주라는 말이냐? <그렇다.> 나이아드의 감각에는 땅밑에 또 다른 정령왕의 존재감이 잡혔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더욱 안심시켰기에 나이아드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그렇게는 못 하겠다. 아무리 그것이 금기라고 하더라도 나는 해야겠어. 이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 여기로 끌고 오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거든. 다오와 내가 세운 계획을 실행하려면 이 녀석이 꼭 필요하지. 안 그런가? 다오. 그러자 땅 속에서 정말 듣기에도 껄끄러운 꽉 쉰 듯한 텁텁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나이아드의 말대로다. 아리엘,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우리들을 이길 수는 없다.> 희미한 음영을 만들고 있던 아리엘은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신이 강하다고 해도 정령왕 둘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5대 정령왕의 힘은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꺼져라. 네가 아무리 금기를 떠들어 대도 소용없어. 일단 이 녀석을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으니까 곧 놈이 살던 세계로 돌려 보낼 거다. 그때까지만 자네는 눈 감아 주면 돼. 아주 잠시면 모든 일이 끝날 테니까 말이야, 흐흐흐. 하지만 이번에도 나이아드의 웃음 소리는 또다른 목소리에 의해 가로 막혔다. 그 목소리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지를 흐르는 용암 속에서 울려나왔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모처럼 카렐이 부탁을 했는데, 나는 그것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거든. 그리고 너는 금기를 어겼으니 두말 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동시에 하늘 위에서도 우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그래. 그 녀석을 돌려 보내라. 우리 셋이서 너희들을 응징하기 전에.> 또 다른 정령왕 둘이 거의 근소한 시간 차를 두고 약속이나 한 듯 등장했기에 나이아드는 당황했다. 이제 사태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2대 2로 싸워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인데, 2대 3이라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제기랄. 도대체 이 녀석이 뭐길래 정령왕 셋이서 이놈을 구출 하려는 것이냐? 너희들은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느냐? <일단 약속은 약속! 돌려 보내라. 우리가 너희들을 죽이고, 너희의 뒤를 이을 정령왕을 탄생하게 만들기 전에.> 아리엘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다른 세계에서는 정령왕이 자신의 힘을 모두 사용하지 못한다는 금제가 붙지만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 정령계에서라면 얘기가 다르다. 여기에서는 모든 힘을 쓸 수 있지만 소멸 당하면 그야말로 죽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령왕이란 것이 죽는다고 해서 뭐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령왕이 사멸하고 나면 그를 대신할 또 다른 정령왕이 거의 순간적으로 태어나기 때문이었다. 겨우 호비트 한 마리 때문에 그 오랜 세월 사귄 우리들을 없애겠다는 말인가? 나이아드가 항변했지만, 그의 말은 이프리트에게 간단하게 묵살 당했다. <네 녀석이 언제 나하고 사귀었단 말이냐? 나는 언제나 꼴 보기 싫은 네 녀석이 사라지기를 원하고 있었어.> 이제 나이아드와 다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잘못하면 자신들이 무(無)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돌려 보내자.> 다오의 체념적인 말에 나이아드는 화를 벌컥 냈다. 그냥 놔 주기에는 여태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닥쳐! 내가 이 년을 어떻게 잡았는데 돌려 보낸단 말이야? <그렇다면 너는 무로 돌아가고 싶나? 선택하라!> 이프리트의 최후 통첩에 나이아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로서도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돌려 보내겠다. <잘 생각했다, 나이아드여.> 젠장! 언젠가는 너희들에게 복수하고야 말겠다. 나이아드는 자신이 오랜 시간 공 들여 이룩한 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며 그 존재감을 지워 버렸고, 곧 이어 땅 밑에서 느껴져 오던 기척 또한 함께 사라져버렸다. 두 정령왕이 사라지자 아리엘은 거의 시체처럼 창백하게 쓰러져 있는 벌거벗은 청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직 죽지는 않았군.> 아리엘은 투명한 자신의 손을 호비트 청년에게로 뻗어 그를 안아 들었다. 아리엘의 몸이 원체 투명했기에 청년은 축 늘어진 채 저절로 공중에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리엘은 청년을 안아 들자마자 아르티어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차원 이동을 감행했다. 고약한 드래곤의 성격 황금빛이 확 뿜어 나오는 가운데, 아르티어스는 처음과 같이 인간의 몸으로 트랜스포메이션 했다. 문득 이 영토의 주인이 저렇듯 엘프의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는데, 손님인 자신이 위압적인 드래곤의 형태로 있다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험험 아르티어스는 잠시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뭐라고 입을 열어야 할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만큼, 타이탄을 집어 넣은 후 키아드리아스의 옆에 서 있는 카렐이나 그의 연인 키아드리아스에게 다짜고짜로 행패를 부린 것이 상당히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해 목숨을 걸고 저 포악한 아르티어스를 향해 돌진했던 자신의 연인을 향해서 그야말로 달콤한 시선을, 그러면서 아르티어스를 향해서는 감히 드러내 놓지는 못하고 밑바닥에 살짝 분노를 깔아 놓은 시선을 던지고 있는 키아드리아스를 향해 아르티어스는 언제 자신이 그렇게 분노했었느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는 주절거렸다. 미안하게 되었구먼, 원래 내 성격이 이렇지 않았는데 아들에 대한 사랑이 원체 지극하다 보니 실수를 하게 되었어. 자네가 카렐인가? 일단 상대가 의외로 예의를 차리고 나오자 카렐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위압적인 존재감과 무지막지한 광기를 드러내던 포악한 드래곤과, 저 약간은 쑥쓰러운 듯한 선량한 미소를 얼굴 가득 짓고 있는 인물이 동일인이라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예, 제가 카렐 아미타유스라고 합니다. 나는 아르티어스라고 한다네. 말토리오 산맥에서 쓸쓸하게 살고 있지. 그러다가 정을 붙인 아이니까 내가 얼마나....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말은 키아드리아스에게 가로 막혔다. 상대가 일단 예의를 차리고 나오자, 방금 전까지 그 놀라운 아르티어스의 전투력과 광기 덕분에 주눅이 들어 있던 것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또 연인까지 옆에 서 있었기에 정신적으로 기댈 곳까지 생기자 원래의 성깔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놈의 성질머리를 뻔히 알고 있는데, 저렇듯 내숭을 떠는 것에 그야말로 기가 막히기 시작한 키아드리아스의 회심의 반격이었다. 흥! 누가 쓸쓸하게 살았다고 그래요? 2천 년 전에 자기 허락도 받지 않고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고 노발대발하면서 달려와서는 내 날개를 박살낸 것은 누구였죠? 그러면서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도 쓸쓸하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느냐구요. 키아드리아스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면서 항변을 했다. 허허허..., 그런 일이 있었던가?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서 기억도 나지 않는구먼. 아, 원래 드래곤이 살다 보면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는데, 뭐 그런 걸 가지고 아직까지 꽁하니 가슴에 품고 있나? 그런 사소한 기억은 훌훌 털어 버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지. 날개 부러지는 것이 아르티어스 님에게는 사소한 일인지 몰라도 저에게는, 특히나 처음 잡았던 레어가 너무 비좁아 새로운 삶터를 찾고 있었던 저에게는 얼마나 엄청난 충격이었다구요. 그리고 그걸 다시 치료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혹시 날개가 잘못 붙어 버릴까 봐 딴 생명체로 트랜스포메이션도 할 수 없었다구요. 그런 저를 보면서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드래곤들이 비웃었는데요. 상대가 계속 밀어 붙이자 신경질이 나기 시작한 아르티어스는 슬며시 항변을 하기 시작했다. 허허, 자네 좀 집요한 데가 있군. 이만 딴 데로 화제를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르티어스는 난처한 듯 억지 미소를 지으면서 주절거렸지만, 눈에는 한껏 힘을 주면서 만약 말을 안 들으면 아예 없애 버리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살짝 키아드리아스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걸 눈치 채고는 카렐이 키아드리아스의 팔을 은근하게 잡아 끌면서 말했다. 아르티어스 님의 말이 맞아. 괜히 싸울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쉬쉬.... 오늘 당신답지 않게 왜 그러는 거야? 여태껏 우리들은 평화롭게 살았었잖아? 나는 이런 사소한 해묵은 감정을 가지고 우리들의 생활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허허헛!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깐. 해묵은 감정은 씻어 버리고 우리 지금부터라도 사이 좋게 지내세나. 나도 옛날보다는 아주 많이 달라졌다니까. 원래가 세월이 가면 모든 생명체의 삶을 거부하는 거대한 바위도 풍요로운 옥토로 탈바꿈하는데, 내 성격이라고 안 바뀌겠는가? 이해해 줄 거지? 딴 거는 다 좋았는데 이해해 줄 거지? 하는 그 말을 내뱉으며 공포스러운 광기를 드러내는 것을 보며 키아드리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적당히 손을 봐 준 후 다시 시작하겠다는 저 더럽기 그지없는 성질머리, 아르티어스의 성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비로서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해해 드리죠. 키아드리아스의 표정으로 보아 억지로 내뱉는 말이라는 것이 확실했음에도, 아르티어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 그래! 이웃끼리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나? 누가 이웃이라는 거야? 여기서 말토리오 산맥이 얼마나 먼데.... 하는 생각을 키아드리아스가 하고 있는 그때 공간이 확 열리며 누군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아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티어스의 앞에 자신의 성과를 보여 주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나타났지만, 바로 그 순간 아리엘은 엄청나게 당황하고 말았다. <이런 변이 있나?> 피투성이의 청년이 자신의 팔에 안겨 있어야 했는데, 거기에는 피투성이의 어린 계집 애가 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인사불성인 상태로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아리엘은 본 체 만 체하고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와 빼앗듯이 소녀를 받아 들었다. 이럴 수가.... 방금 전까지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아들을 아리엘이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기나 한 듯 포악한 분노를 아리엘을 향해 터뜨리며 외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 사랑스러운 아들이 왜 이 모양이 되었냐고? 아르티어스가 축 늘어져 있는 소녀를 단번에 알아 보자 아리엘은 마침내 안심했다. <이게 네 아들이 맞느냐? 그렇다면, 약속은 지켜졌다.> 뭐야? 이 빌어먹을 녀석아. 어떻게 약속이 지켜져? 너는 저게 안보이냐?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아직은 숨이 붙어 있잖은가? 나는 분명히 살아 있는 채로 너에게 건네 줬다. 네 손에서 죽건 말건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야. 이긋으로 약속은 지켜졌다!> 아리엘은 더 이상 욕을 듣기 싫다는 듯 사라져 버렸다. 사실 아리엘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르티어스가 아들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상태로 돌려 주기를 원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르티어스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타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치료에 들어갔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치유 마법을 이용해서 일단 아들을 살려 놓고 봐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우려와는 달리 아들의 치료는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끝났다. 그게 아르티어스로서도 불가사의한 일이었지만, 아들의 몸은 내부에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아르티어스의 치유 마법이 합쳐지자 정말이지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어 버렸다. 자요. 이제는 축 늘어져서 잠들어 있는 아들을 하염없이 불안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약간은 불쌍한 듯한 마음이 일었던지 키아드리아스는 비록 걸레가 되다시피 한 옷이었지만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아르티어스에게 건네 줬다. 그제야 정신이 든 아르티어스는 그 옷을 조심해서 아들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레어 안으로 들어가죠. 거기에는 편안한 침대도 있으니까 말이에요.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치유를 했다고 해도 금방 공간 이동을 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을 거예요. 그 아이를 그렇게 아끼신다면 며칠 정도 여기서 몸조리나 하고 가는 것이 현명 하겠죠. 그런데..., 이런 말 묻기는 좀 이상하지만 저 아이, 드래곤이 맞아요? 제가 보기에는 호비트 같은데? 내 아들이야. 더 이상 딴 수식어는 필요 없다. 쳇, 잘난 척하기는.... 알았어요. 빨리 따라 들어와요. 아르티어스의 바보스러운 모습 여기는.... 오오, 이제 정신이 드냐? 다크는 자신을 향한 한없는 사랑을 가득 담고 있는 자애로운 아르티어스의 눈동자를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된 거죠? 이상한 밀림이 우거진 곳에서.... 아, 거기가 정령계일 게다. 5대 정령의 힘이 절대적으로 행사되는 미지의 세계지. 하기야 물, 불, 바람, 번개, 대지의 정령이 함께 어울려 있을 테니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는 대충 감이 잡힌다마는.... 그래, 네가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너무나도 감사하고 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누워 있는 아들을 두 손으로 일으켜 꽉 안았다. 정말 그에게는 지금 아들의 건강과 행복 이상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처음에는 조용히 안겨 있던 다크의 얼굴 빛이 핼쑥해지면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으으..., 숨 막혀요. 으엑, 미안하구나. 내가 힘을 너무 줬나? 아르티어슨는 숨 막혀 하는 아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으며 뒤로 물러선 후에야, 아들이 어던 꼴을 하고 누워 있는지 불현듯 깨달았다. 방금 상체를 일으킨 덕분에 새하얀 이불이 아래로 내려가고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뽀얀 상체가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아들 녀석은 그런 것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데, 오히려 아르티어스가 민망해졌다. 아르티어스는 오래 전부터 오랜 시간 인간계를 떠돌았기에 인간들의 생활을 꽤 많은 부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기다려라. 옷을 장만해 올 테니.... 아르티어스가 나가고 잠시 후 웬 녹색 머리결을 흩날리는 아름다운 미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흔히 엘프들이 그러하듯 그녀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엘프들의 경우 숲에서 생활하기에 치마는 짧게, 그렇지 않으면 바지나 반바지를 애용했다. 그렇게 해야만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르티어스와 싸운 후 거의 걸레가 되어 버린 옷을 벗어 버리고 화사한 옷으로 갈아 입고 있었는데, 깜찍하게 생긴 작은 조끼가 그녀의 가냘픈 몸매에 아주 잘 어울렸다. 이것을 입어요. 내가 입던 옷이기는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키가 나보다 좀 작긴 하지만 잘 어울릴 거예요. 당신은 누구지 요? 다크는 상대의 몸에서 은근히 느껴지는 강렬한 마나를 통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 크고 뾰족한 귀에다가 저 얼굴..., 어렴풋이 기억에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잠시 뒤 예전에 자신을 뒤쫓아 다니던 도둑 엘프의 모습이 떠올랐다. 엘프?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엘프는 아니지만, 키아드리아스라고 해요. 그 옷을 입고 나와요.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요. 그도 당신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죠. 키아드리아스라고 소개한 여인은 옷가지를 건네 준 다음 수수께끼 같은 말만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크가 예쁘게 차려 입고 밖으로 나섰을 때, 그의 눈에는 아들의 예쁜 모습을 보고 자랑스러워하는 아르티어스와 방금 전에 봤던 수수께끼 같은 엘프 여인, 그리고 카렐이 탁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카렐은 다크를 보자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야. 내가 선물한 아쿠아 룰러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다니 정말 미안해. 그 말에 다크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만약 그게 없었다면 아빠를 만나지 못했겠지. 다크의 눈길을 받은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헤벌레 벌어졌다. 그것을 보며 키아드리아스는 자신이 카렐을 진정으로 사랑하듯, 아르티어스도 저 소녀를 엄청나게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키아드리아스로서는 아르티어스의 저런 바보스러운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으니까.... 풀리지 않는 비밀의 내공술 아르티어스가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청기사까지 갑자기 모습을 감춰 버렸기에 모두들 초조하게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모습을 드러냈기에 모두들 기뻐했다. 다크는 치레아의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우선 옷도 갈아 입어야 했고, 신발도 신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크는 자신의 방에 돌아간 후 세린에게 부탁하여 옷부터 갈아 이ㅃ었다. 옷을 갈아 입고 있을 때 작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푸른빛 나는 작은 보석이 박힌 반지가 우연히 다크의 눈에 띄었다. 다크는 신발을 신은 후, 그 반지를 집어 들고는 아르티어스에게로 갔다. 아르티어스는 언제나 다크가 입고 다니는 그 시커먼 군복을 보고 혀를 차면서 말했다. 쯧쯧, 옷을 갈아 입었군. 네게는 이런 옷이 어울리지 않는다니까 그러는구나. 아까 그 키아드리아스가 선물한 옷은 정말 보기 좋았었는데.... 하지만 다크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손에 작은 금속성의 물건을 쥐어 주며 말했다. 잔소리 말고 이거나 받으세요.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는 푸른색의 작은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가 뭔지 즉각 알 수 있었다. 이건..., 아쿠아 룰러? 이게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게 없애 버리세요. 아니면 아빠가 가지든지.... 아르티어스는 아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반지를 받아서 주머니 안에다 집어 넣었다. 알겠다,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하지. 그건 그렇고, 해 놓으라는 일은 다 끝내셨어요? 갑자기 대화가 매우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왔기에, 아르티어스는 허둥지둥 대답했다. 뭐? 중간에 네가 실종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는데.... 그렇다면 내일 아침까지 끝낼 수는 있겠죠? 사정 없이 자신을 몰아 붙이는 다크를 야속하게 생각하며 아르티어스는 아들의 청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차근차근 따지기 시작했다. 그걸 인간들한테 한 번 시켜 보라구! 아무리 내가 드래곤이라고 하지만 그건 너무 촉박한 시간이 아니냐? 좀더 시간을 줘야지. 이잉~, 내일 아침까지~~~. 알겠죠? 다크는 아르티어스가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자 속이 메스껍긴 했지만 비장의 무기를 동원했고, 아르티어스는 거기에 홀딱 넘어가서는 모든 것을 잊고 호언장담을 해 댔다. 물론 오늘 저녁 밤을 새우면서 투덜거릴 것이 분명했지만.... 그럼, 내가 누구냐. 내일 아침까지 완료하지. 그럼 부탁 드려용~. 생긋 웃으며 돌아서는 아들을 향해 아르티어스는 헤벌쭉거리다가 갑자기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깨닫고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비명을 터뜨렸다. 이런, 또 당했닷! 아르티어스와 헤어진 후 궁 밖으로 나온 다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이아드와 절망적인 대결을 펼치고 있을 때를 돌아보면 뭔가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렴풋이 생각나는 대로 자신의 앞에 있는 나무 쪽으로 손을 펼쳤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도,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살짝 접어 그것이 남의 손이나 되는 듯 찬찬히 들여다 봤다. 그러다가 그녀는 손을 쓱 뻗으며 내공을 뿜어 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내공의 덩어리가 뿜어져 나가 앞에 서 있던 나무에 선명한 손 자국을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그녀도 예상하고 있었고, 또 잘 알고 있는 기술이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손을 나무가 있는 쪽으로 쓱 뻗었다. 하지만 내공의 이동이 없이 그냥 손만을 뻗었기에 전과 같이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뻗었던 손을 뒤로 물리며 자신의 손바닥을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렴풋이 떠오르는 나이아드와의 대결 후반부를 다시금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 절명의 순간, 자신의 모든 내공을 폭발적으로 운영한 결과 자신의 몸에는 단 한 올의 내공도 남아 있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무리한 내공의 운용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내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은 밑에서 뿜어 올라오는 엄청난 열기와 시뻘겋게 타오르는 재지를 어렴풋이 보고는 본능적으로 탈출을 시도했었다. 그때 그는 급한 대로 대기의 기운을 흡수하며 그것이 급히 공력으로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서 비등술(飛騰術)을 펼쳤던 것이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로 그런 억지 수법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 고도를 높이며 날아 오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곧 이어 진기가 역류하면서 모든 것이 끝장나고 말았다. 그 덕분에 자신의 내상이 더욱 악화되었고 혈도 몇 군데가 터져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향해 급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는 디지를 어렴풋이 볼 수 있엇다. 그대로 있으면 그야말로 맨 땅에 박치기를 하며 돌아가실 최악의 상황. 그는 내공을 끌어 모아 그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몸에 남아 있는 내공은 한 올도 없었고, 이제는 외부에서 내공을 흡수할 더 이상의 방법도 없었다. 진기가 역류하면서 내상만 더욱 심화시켰던 그때, 사실은 완전히 끝장 났던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은 거의 반쯤은 무의식중에 손을 앞으로 뻗었었다. 젠장! 그 다음은 어떻게 한 거야?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도 해답을 얻어 낼 수 없었다. 한 올의 내공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대지에 격돌하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그덕분에 지금 살아 있는 것이니까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사용했던 한 수를 도저히 기억해 낼 수 없었고, 또 어떻게 된 노릇인지 아무리 이성적으로 궁리해 봐도 해답을 얻어 낼 도리가 없었다. 만약 그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그녀를 한 단계 더욱 높은 무예의 차원으로 이끌 수가 있을 텐데 말이다. 그녀는 한 단계 더욱 높은 무예의 차원으로 이끌 수가 있을 텐데 말이다. 그녀는 그날 아르티어스가 그렇게 바쁘게 일하고 있는 동안 밤새도록 나무 앞에서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작만 반복했을 뿐, 아무런 소득도 없엇다. 오히려 자신의 머리가 돌머리라는 사실만을 뼛속 깊이 새겼을 뿐.... 황태자의 무도회 제스터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물론 상관은 이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매우 싫어했지만, 그것을 그는 도저히 억제할 수 없었다. 지난 6년간 그녀를 모시면서 자신은 이제 더욱 성숙하고, 건장한 몸매를 지닌 수련 기사(脩練騎士)로 성장해 왔다. 하지만 그의 상관이 6년 전에 봤을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함이 없는 18세가 될까 말까 한 가녀린 소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냐? 자신을 괴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약간 기분이 상한 다크가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거기에 정신을 차린 제스터는 즉각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공 전하, 황태자비 전하의 생신 무도회에 참석하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6년 전에는 나이 어린 시종에 불과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의 시중을 성실하게 들고 또 검술 실력까지 꽤 좋았기에 다크는 수련 기사가 된 제스터를 부관(副官)으로 승진사켜 아직까지 자신의 주위에 두고 있었다. 놀고 있군.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너나 참석하지 그래? 상관의 말투가 원체 더럽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그였기에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그 말뜻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옛, 정말 제가 가도 되는 것이옵니까? 어라? 그렇게 가고 싶으냐? 원래 다크는 되는 대로 떠든 것이었지만, 제스터가 정말 그곳에 가고 싶어하는 눈치였기에 순간 당황했다. 크라레스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해 버린 지금, 황궁에서 개최되는 무도회는 대단히 성대하고 화려했다. 물론 1년 전만 해도 크라레스 황궁 무도회는 짠돌이 황제 덕분에 매우 검소했었다. 오히려 무도회라기보다는 무도회의 탈을 쓴 작전 회의에 가까웠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크루마에서 돌아오면서부터 그것이 완전히 변해 버렸다. 작년에도 거창하게 진행되었었지만, 올해는 그 규모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황태자의 명령에 따라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도 그래듀에이트나 후작 이상의 작위를 지닌 사람에 한했기에 거기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제국의 실세에 가까운 인물들뿐이었다. 물론 그 당사자만 참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인이나 애인, 또는 그 가족의 참석도 가능했다. 그렇기에 모든 숙녀들은 호화로운 무도회에 참석할 자격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고, 남자들도 그런 바람은 마찬가지였다. 거기에서 운 좋게 짝을 얻는다면 그야말로 권력의 핵심에 한 발자국 다가선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예, 전하. 좋다, 대신 올해 휴가는 없다. 그래도 가겠느냐? 예, 보내만 주시옵소서. 여자 친구가 정말 가고 싶어하거든요. 쯧쯧, 검술을 배운다는 놈이 저 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황송하옵니다. 네가 없는 동안 세린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될 테니까 상관은 없겠지. 그건 그렇고 팔시온이나 불러다 줘. 옛, 전하. 제스터는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이 최대한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잡고는 밖으로 나갔다. 제스터가 나가고 난 후 다크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의 한쪽 귀퉁이로 보이는 건무리의 외벽이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 팔시온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들어섰다. 그는 주위를 쓱 둘러본 후 다크와 둘뿐이라는 것을 아록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치레아 기사단의 부단장인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은 다크가 부하들과 말을 터놓고 지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과거 총독 시절에는 그래도 봐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치레아 공국을 다스리는 대공이 된 다음에도 그게 바뀌지 않았기에 다크에게 잔소리를 해 댔었다. 하지만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 다음부터는 그따위 반말 짓거리를 해 대고 있는 부하들을 족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요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말을 터놓고, 주위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존대를 하면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로 불렀어? 나하고 좀 갈 데가 있어. 어딜? 크라레인 시. 수도에? 그럼 그 뭐시냐? 무도회에 함께 가자는 말이야? 팔시온의 입이 헤벌쭉 벌어지는 것을 보며, 다크는 꿈을 깨라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무도회가 아니라 폐하를 만나러 갈 거야. 준비하도록 해. 폐하를 만나러 가는 거라면 평상시처럼 혼자서 가면 되잖아? 크라레인 시에 들렀다가 다시 딴 곳으로 갈 거야.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렇다면 미카엘이나 미디아도 데려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가스톤은 일이 바쁘니까 곤란하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지미하고 라빈까지 불러서 모두들 함께 오랜만에 여행을 하는 거야. 쯧쯧, 너는 노는 생각밖에 안 하냐? 지미하고 라빈은 수련을 해야 할 테니 안 되고 미카엘하고 미디아는 불러도 상관 없겠지. 알았어, 빨리 준비하라고 할게. 그런데 며칠간 여행을 할 거야? 아마도 일주일에서 이주일 사이? 에게? 겨우 그것밖에 안 돼? 싫으면 말고.... 실바르를 데려가면 되니까. 아니, 갈게. 간다고. 조금만 기다려. 모두들 불러 모을 테니까. 그런데 황궁에 갈 거니까 정복을 입어야 하나? 내가 황제를 만나지 너희들이 만나냐? 간편한 여행복을 입고 준비를 갖춰서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와. 알았어! 팔시온이 뛰어 나간 후 다크는 큰 소리로 외쳤다. 세린! 예. 팔시온이 나간 문과는 달리 한쪽 구석에 붙어 있는 작은 문을 열고 세린이 얼굴을 드러냈다. 저기 책상에 있는 편지를 정확하게 한 시간 후에 카슬레이 백작에게 전해. 알겠어? 예.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 한 시간쯤 전에 정원에 계시다, 아마도 화이어헤머의 숙소로 가시는 것 같던데요? 흐음.... 그거 잘 되었군. 아버지를 어떻게 떼어 놓나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절호의 기회가 찾아 오다니. 나중에 아버지가 찾거든 기사들 검술 교육시키러 갔다고,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전해라. 알겠느냐? 다크의 말에 뭔가 음흉한 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곧장 눈치 챈 세린은 귀를 축 늘어뜨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마도 나중에 아르티어스가 속은 것을 알면 자신을 제일 먼저 경을 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예. 하지만 다크가 그냥 몇 시간 정도 아르티어스를 따돌리는 것이 아니라 몇 주일을 따돌릴 계획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대로 아르티어스에게 달려가서 고자질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크가 없을때 아르티어스는 너무나도 무섭게 변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벌써 터득했기 때문이다. 다크는 대충 준비를 마친 후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갔고 그곳에서 세 명의 동료들과 합류하여 곧장 크라레인 시로 공간 이동했다. 이런 식으로 도망 쳐 버리고 나면 남은 사람들이 아르티어스에게 얼마나 곤욕을 치러야 할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다. 새로운 여행의 비밀 안녕하셨습니까? 폐하. 오, 어서 오게나. 자네를 부른 것을 대충 언질을 주기는 했지만 왕자의 결혼식 때문이야. 예? 그렇다면 미란 국가 연합에 가라는 이유가.... 태자는 크루마의 여인과 결혼식을 올렸지. 그걸 막으려고 했었지만, 이미 깊은 정이 들어 버린 상태라 떼어 놓기 힘들었어. 그리고 그 아이가 왜 그렇게 고집이 세졌는지, 아무리 말려도 듣지를 않았어. 그래서 가므 의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둘째를 그곳 여인과 결혼시킬 필요성이 생긴 거야. 그래서 호위를 해 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지금 미란은 크루마 제국 내에 존재하면서 살아 남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상황이지. 그리고 본국은 과거의 약속을 지킨다는 명분도 있지만, 크루마를 견제하기 위해 미란의 존재가 필요하고 말이야. 하지만 크루마 쪽에서도 그 사실을 알아 챈다면 어떻게든 막으려고 총력을 기울여 올 거야. 물론 왕자가 가는 것은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지만, 그 비밀이 새어 나갈 우려는 언제나 있는 것이지. 내 아들을 맡아 줄 수 없겠나? 뭐..., 오랜만에 바람이나 쐴겸 제가 맡기로 하죠. 오오, 고맙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내가 몇 명 붙여 줄 테니.... 아니, 폐하. 제 부하들을 몇 명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경의 부하들을 데려 왔다면 그들을 데려 가는 것도 상관 없겠지. 수효가 많을수록 비밀이 샐 우려만 커지니까 말일세. 그렇다면 왕자는? 사람을 보냈으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앟아 아리아스 폰 그래지에트 왕자가 도착했다. 다크는 그 왕자가 꽤 낯이 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정원에서 만났던 그 부끄럼을 잘 타던 소년이었는데, 어느덧 청년이 되어 있었다. 거의 180센티에 가까운 키였지만, 아버지와 달리 아주 나약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다크로서는 처음보는 물건인 안경이라는 것을 끼고 있었다. 동그란 쇠테에 역시 동그란 유리로 만든 렌즈를 붙여 놓은 것이었는데, 유리에 대한 섬세한 가공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관계로 안경의 가격은 대단히 비쌌다. 그렇기에 감히 서민들은 눈이 나쁘다 해도 구입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인사하거라. 이쪽이 네 안전을 책임 질 치레아 경이다. 그리고 저 아이가 내 둘째지. 아리아스라고 한다네. 아리아스는 부황(父皇)의 소개를 듣고, 눈 앞의 소녀를 향해 안경의 렌즈 너머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치레아 공국을 다스리는 치레아 대공은 엄청난 무예와 당당한 위엄을 지닌 여자 호걸쯤으로 전해 듣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도 다 다크가 거의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떠도는 헛소문이었지만. 다크 일행은 황제와 헤어진 후 곧장 미란 연합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 미란에서는 혹시나 이들의 행적을 크루마가 눈치 챌 우려가 있었기에 매우 간소한 환영 행사를 했을 뿐이었다. 미란에서 마중 나온 인물은 단 한 명으로 미란의 근위 기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이오네 기사단에 배속된 근위 기사였다. 그는 평소의 복장대로 호화롭게 차려 입은 채, 손님들을 마중했다. 사실 그는 가므 의장으로부터 크라레스에서 오는 친선 사절이 도착하는데, 그들을 마중하라는 지시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먼 길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가므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숙소까지 안내를 맡을 스테노 네르갈이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스테노는 자신이 위임받은 일의 반이상을 처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공간 이동을 해온 인물들을 봤을 때 한눈에 뭔가 찜찜함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친선 사절이라면 그렇게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고, 또 예전처럼 육로나 해로를 이용한 장거리 이동을 해서 도착하는 것도 아니라 공간 이동을 행했기에 호위의 규모는 매우 작은 것이 관례였다. 물론 대단히 비중이 높은 인물이 방문한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이렇듯 근위 기사 혼자 마중을 나갈 정도의 대접을 받는 인물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과 같았다. 그런데오 저 비싼 안경을 쓴 새파란 젊은이를 뒤에서 호위하고 있는 세 명의 기사들은 스테노가 첫눈에 봤을 때 벌써 그래듀에이트 급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잘 훈련된 기사들이엇다. 별 볼일 없는 인물을 호위하는 규모치고는 그 도가 지나치는 것이다. 크라레스에 그래듀에이트가 겨우 450여 명 정도뿐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추리였다. 이곳으로 모시라는 의장 전하의 명을 받았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것이나, 불편한 점이 있다면 시녀들에게 말씀하시면 해결해 드릴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스테노가 더욱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가므의 왕궁 내에서도 가장 경비가 철저한 곳들 중의 한 곳에 그 손님들이 묵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아주 중요한 손님들이 묵는 거처 바로 옆에 자리를 줬으니 그 혜택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는 위치임에는 틀림없었다. 저 녀석들이 과연 누군지 궁금증이 치민 그는 한참 생각에 잠겨 걸어 가다가 앞에서 마주 오는 근위 기사의 존재를 뒤늦게 눈치 챘다. 이봐, 스테노.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면서 걸어 가는 거야? 애인한테 차였냐? 글쎄...,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디에 가는 길인가? 아, 며칠 동안 숙소를 변경하라는 지시가 있어써 말이야. 나하고 믹스보고 당분가 저기 있는 저 방을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거든. 뭐, 숙소의 내부를 수리한다나 뭐라나 하면서 말일세. 그것 때문에 오늘 밤부터 묵어야 할 방을 한 번 구경해 보려고 왔지. 그래? 이것저것 해야 할 생각이 많았기에 처음에 스테노는 동료가 하는 말을 대충 넘겼다. 하지만 돌아서서 가려는 순간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의 동료들이 오늘부터 묵게 되는 방과 특별 손님을 위한 방의 사이에 크라레스에서 온 사신들이 거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성르 눈치 채자마자 라이오네 기사 단장실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임무는 정확히 수행했나? 예, 각하. 그런데 소관이 한 가지 여쭈어 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뭔가? 그들의 정체가 뭡니까? 누구 말인가? 크라레스의 사신들 말입니다.. 비리비리해 보이는 안경 쓴 사신을 호위하기 위해 그래듀에이트가 세 명이나 함께 왔단 말입니다. 자네는 알 필요 없네.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돌아가서 자네 일을 보게나. 저도 어떤 일을 한해서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알고 있는 것이 커다란 도움이 될 때도 있죠. 이 정도까지 말한 스테노는 갑자기 자신이 추측하고 있는 사실을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찌르면 뭔가 상대에게 반응이 올 것을 노렸던 것이다. 왕국의 안위에 관련된 일이죠? 그건.... 갑작스런 부하의 질문에 당황했었던 기사 단장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버무렸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라면 자네 한 사람을 마중을 보냈겠나? 쓸데 없는 머리 쓰지 말고 자네 할 일이나 하게. 정략 결혼입니까? 헙! 갑자기 숨이 막히는지 괴상한 소리를 질렀던 기사 단장은 재빨리 일어서서는 집무실 문 밖과 창문 밖을 살펴본 후 목소리를 낮추며 으르렁거렸다. 코린트와의 전쟁에 휩쓸리 덕분에 뛰어난 기사들의 거의 대부분이 전사해 버린 가므 왕국이었기에 기사 단장 또한 저 밑바닥에서 그야말로 벼락 출세를 한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아직 윗사람으로서 미숙함이 많았던 것이다. 자네 그걸 어떻게 알았나? 그거야 아주 쉽죠. 엄청난 호위를 받는 인물. 그런데 이쪽에서는 될 수 있다면 표 안 나게 맞아들였조. 그리고 그 다음 진행된 것은, 호위하는 당사자들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비밀스런 경호. 그런데도 그런 대접을 받는 임루이은 비리비리한 새파란 젊은이. 그 젊은이의 나이로 봤을 때 그렇게 높은 경륜이나 직위를 가진 인물은 아닌 게 확실하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신분뿐이죠. 설혹 크라레스의 귀공자가 방문한다고 해도 이렇게 조심스럽게 호위를 하진 않아요. 또 그런 귀공자가 본국을 방문한다고 해서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구요. 그렇다면 크라레스의 왕자가 방문했다고 봐야겠죠. 그 왕자도 뭔까 꿍꿍이가 있어서 방문한 것일 테니까, 저런 미숙한 왕자가 해 낼 수 있는 것은 색싯감이나 고르는 것 외에 또 있겠습니까? 하기야 저렇게 비리비리 해서야 첫날밤이나 무사히 보낼까 걱정되기는 하지만.... 자네, 말 조심 해!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거야. 저는 틀린 말 한 거 없다구요. 휴~, 그래 이왕 눈치챘으니 어쩔 수 없지. 오늘부터 자네는 잠도 잘 생각 하지 말고 크라레스 왕자를 호위하도록! 예? 네 녀석 할 일은 안 하고 쓸데없는 데 잔 머리 굴린 벌이다. 이번 혼례는 본국의 미래가 걸린 일이야. 크루마의 야욕을 막으려면 크라레스 같은 강대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단 말이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크라레스도 나름대로 정예 기사들을 호위로 보내 왔을 것이고, 여기는 왕궁이기에 경비도 철저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 만약 비밀이 새어 나가면 크루마는 사력을 다해서 방해 공작을 가해 올 테니 정신 바짝 차리라구. 알겠나? 옛, 맡겨만 주십시오. 크라레스의 왕자가 도착한 다음부터 본격적인 짝 맺어 주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선택된 한 명의 여인을 강제로 밀어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지체 높은 귀족들의 여식들을 차례로 선 보일 수도 없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비밀이 새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곳곳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무작정 내보내서 아무나 짝이 되게 만들 수도 없었다. 무도회에 참석하는 경우는 왕자의 경호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지체 높은 귀족의 여식이 선택된다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므 쪽에서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가므 의장과 어느 정도 의논 조정을 끝낸 가상의 인물을 먼저 신랑감으로 내세운 다음, 그 인물과 결혼하려는 여인을 찾는다는 미명 아래 지체 높은 귀족 여식들의 초상화를 대량으로 입수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크라레스 왕자는 그 많은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고르는 것으로 1차 작업이 완료된다. 그런 다음 그 여인과 하루 동안 비밀스러운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 2차 작업이다. 그리고 그 여인이 마음에 든다면 곧장 결혼식을 감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왕자의 결혼 상대는 정말이지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왕자가 선택한 여인들이 왕자와 만남을 가진 후 모두들 퇴짜를 놨기 때문이다. 비밀 유지를 위해 자신을 만나야 하는 상대가 강대한 신흥 제국 크라레스의 왕자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그녀들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이 재미없는 왕자와의 만남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던 것이다. 젠장! 오늘도 헛일이겠는데, 안 그래? 나는 오늘도 안 된다는 것에 1골드 걸지. 아서라, 누가 그 내기에 응하겠냐? 저 아가씨 하나도 재미없다는 듯 하품을 하고 있잖아. 누가 저 아가씨 귀에다 저 양반이 크라레스의 왕자라고 한 마디만 해 줬어도 저러지는 않을 텐데.... 시간 낭비야. 이래가지고는 결말이 나지 않아. 저렇게 숫기 없는 사내녀석은 그냥 아무나 하나 데려다가 그냥 결혼시켜 버리는 것이 최고야. 정이야 함께 살다 보면 자연히 생겨나는 것 아니겠냐? 여태껏 계집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으니, 처음 접한 그 여자하고 자연히 정이 쌓이게 되어 있다구. 미친 소리 하지 마! 그게 될 법이나 한 소리야? 호위들이 왕자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아서 아우다웅하는 모습을 보며, 스테노는 기가 막혔다. 어떻게 저러고도 대 제국의 근위 기사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 아니, 스테노가 봤을 때 저들의 거친 말투라든지 행동거지는 절대로 근위 기사의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근위 기사들은 처음 뽑혔을 때부터 일정 기간 왕궁 예절을 철저하게 교육받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근위 기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왕자의 경호를 맡을 수 있었을까? 그들의 실력이 근위 기사들보다 뛰어나다는 추측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다. 원래가 그렇게 높은 실력자들만이 근위 기사가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스테노는 크라레스에서 온 경호 기사들에게 어슬렁거리며 다가가서 슬쩍 말을 건넸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쪽이야말로. 저런 왕자 호위한다고 그렇게 땀 뻘뻘 흘리며 있을 필요 없어요. 아니, 저런 왕자라니요? 댁들은 근위 기사로서의 예절도 모른단 말입니까? 스테노는 일부러 그런 식으로 찔러 봤는데, 역시나 상대들은 껄껄 웃으며 스테노가 원하던 것을 알려 줬다. 우리들은 근위 기사가 아니오. 그렇다면..., 중앙 기사단 소속인가요? 크라레스는 코린트와 대전이 끝난 후 유령 기사단과 콜렌 기사단을 해체하고 중앙 기사단이라는 단일 체제를 구축했다. 더 이상 힘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 유령 기사단의 존재가 필요 없었고, 콜렌 기사단은 원체 구형 타이탄들로 구성된 부대였기에 구형 타이탄들이 모두 다 용광로로 들어가거나 타국에 판매도어 버리면서 해체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중앙 기사단이었다. 현재 크라레스의 중앙 기사단은 8개 전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전대는 카프록시아급 타이탄 30기씩으로 이루어진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니오. 그렇다면.... 상대가 해답을 찾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자 미디아가 친절하게 알려 줬다. 우리는 치레아 기사단 소속이죠. 어? 그렇다면 치레아 대공의 개인 기사단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근위대를 제쳐 놓고 호위를 떠맡을 수 있었죠? 대공께서 이 일을 맡았기 때문이죠. 참! 그런데 치레아 기사단이라면..., 진짜로 황금빛이 나는 타이탄을 사용합니까?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자 스테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황금 도금을 한 건가요? 아니면 미스릴을 그대로 둔 건가요? 황금 도금을 한 거죠. 반짝반짝하면서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아아, 소문이 사실이엇구나 여기가지 소문이 퍼진 모양이죠. 하기야 드라쿤을 가지고 처음 도톤 시 외곽에서 기동 연습을 했을 때 정말 대단했었죠. 시민들이 모두들 타이탄을 구경한다고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거든요. 그렇다면 댁들께서도 드라쿤을 지급받으셨습니까? 상대의 물음에 팔시온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팔시온은 자신들이 몇 년에 걸쳐 치레아 대공의 검술 지도를 받았고, 2년 전에 그래듀에이트가 됨과 동시에 타이탄을 지급 받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원래 그래듀에이트가 된다고 해서 탕이탄을 곧바로 지급받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다크의 친구였고 또 치레아 기사단은 그녀 개인의 기사단이었기에 타이탄 한 대씩 지급해 주는 것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남에게 떠벌리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한 번 구경할 수 있을가요? 이렇게 부탁 드립니다. 뭐, 어려울 것은 없으니까 나중에 궁에 돌아간 다음 보여 드리죠. 감사합니다. 상대가 인사를 하고 있을 때 미카엘이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다. 끝난 것 같아. 자, 일어서라구. 오늘도 굉장히 빨리 끝났네. 보면 몰라? 오늘도 꽝이라구. 이렇듯 가므 의장이 애태우는 가운데 왕자의 결혼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2주 정도로 잡고 있었던 여행은 계속 날짜만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가므 의장은 끈질기게도 이 결혼을 밀어 붙이고 있었다. 강대국 크라레스와 혈연을 맺는 것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므 의장이 이렇듯 정략 결혼에까지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정도로 그들의 이웃 나라 크루마는 강했다. 크루마는 코린트와의 전쟁이 끝난 다음 불 붙기 시작한 군비 경쟁 덕분에 미란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군비 경쟁의 시작은 재미있게도 신생 강대국 크라레스가 불을 질렀다. 그들은 전쟁에서 노획한 타이탄들을 이용해서 구준히 카프록시아의 변형인 테서우스를 생산했던 것이다. 테세우스의 숫자가 계속 불어나면서 크라레스와 국격을 맞대고 있던 코린트는 불안을 느꼈고 그들도 무리할 정도로 타이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코린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크루마로서도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2차 군비 증강이 끝난 후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코린트가 급속도로 전력을 팽창시키자 크루마는 다시 타이탄의 생산을 재개했고 또 크루마의 생산에 위협을 받은 코린트가 생산을 하고.... 이런 식의 경쟁이 연속되다 보니, 나중에는 멀쩡하게 굴러가는 구형 탄이탄들까지 용광로 속에 쑤셔 넣어 신형 타이탄으로 wotodtskgo 버리는 사태까지 들어갔다. 지금에 이르러서 크루마에서 최하의 출력을 내는 타이탄이 출력 1.5나 되는 카마리에였으니 도대체 얼마나 군비 경쟁이 치열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되자, 코린트, 크루마, 크라레스의 3대 강국과 그 주변 국가 들간의 군사력 차이가 점점 심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큰 불안을 느끼고 있는 인물들 중의 한 명이 가므 의장이었다. 미란 국가 연합은 크루마에 완전히 둘러 싸인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크루마로서는 쟉센 평원의 점령지와 본국을 가로 막고 있는 미란의 존재가 매우 못 마땅할 것은 당연했다. 그렇기에 호시탐탐 미란을 병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미란은 크루마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묵향11 외전 다크 레이디』에서 계속> 유니텔 묵향 사랑 의 묵향 릴레이 줄거리(1~9) 유니텔 묵향 사랑(go dark) 제공 DARK STORY SERIES Ⅰ 1 마교의 장 마교는 정기 회의에서 아수 혈교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이것은 80년 전 마교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던 혈교의 후신이었다. 이에 대해 고심하던 마교의 장로들은 10세 미만의 어린 아니 3000명을 뽑아 고수로 키우기로 계획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마교에서 키운 인재들 중에 살수로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으나 그쪽보다는 검술에 더 관심이 많은 2044호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항상 묵혼이라는 검을 지니고 묵의를 입고 있어 묵향이라 불렀다. 그의 검술이 뛰어나자 마교는 그를 무사로 키우기로 하고 환사검 유백이란 자에게 무예 수업을 의뢰한다. 묵향은 검술에 대한 경지가 나날이 높아지고 나이가 한 마흔쯤 되었을 때에 비로소 검강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후 3년 간 더욱 수련을 거친 묵향은 강기를 제대로 사용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낙양 부분타주로서의 임무를 부여받는다. 낙양에 내려온 묵향은 소연을 만난다. 묵향은 소연의 어머니를 가정부로 고용하면서 소연 모녀와 기묘한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공부를 배우던 소연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얼마 후 묵향이 산적을 토벌하자 낙양 표국은 더욱 신용이 높아지고 낙양의 표국 점유율이 6할 대까지 올려 놓는다. 그러자 마교의 총단에서는 그의 능력을 인정해 천랑대의 백인 대장 직을 맡게 한다. 다시 교주의 부름을 받은 묵향은 삼황 오제 중의 하나인 뇌전 검황을 죽이라는 명을 받는다. 뇌전 검황을 죽인 묵향을 보고서야 마교의 수뇌부에서는 그가 탈마의 고수란 것을 눈치 채게 된다. 그를 죽이고 본타에 돌아가자 묵향을 부교주로 임명한다. 무술만 열심히 수련하던 묵향은 마교 뇌옥에서 탈출한 천지문의 제자 세 명이 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그들을 도와 주게 된다. 그들이 입은 내상을 치료하는 동안 그들 중의 하나가 소연임을 알게 되고 그들을 더 잘 대해 준다. 급기야 그들을 마교에서 탈출시켜 교주에게 5년 간 근신을 받게 되지만 천지문과의 충돌이 있자 교주는 묵향이 해결할 것을 지시하고 낙양으로 보낸다. 낙양에 도착한 묵향은 천지문과의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무당과 태진문에 진 빚을 갚으러 간다. 그 후 묵향은 얼마간 조용히 수련을 하다가 더 이상 무예의 진전이 없게 되자 교주에게 북명 신공을 보고 싶다고 요청을 하고 허락을 받아 낸다. 북명 신공을 익히는 도중에 묵향은 사천에서 당문과 마교의 한 분타가 싸운 일을 해결해 달라는 교주의 부탁을 받는다. 다시 무림으로 떠난 묵향은 사천으로 가는 도중 작은 마을 에서 무림 맹주의 손녀인 옥령인을 납치한다. 묵향이 사천의 일을 원만히 해결하고 마교의 본타로 돌아왔을 때 마교에서는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바로 암흑 마교의 장인걸이 마교와 다시 합쳐지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마교는 비밀 회의를 통해 암흑 마교와의 통합을 결정 짓는다. 한편 조용히 지내던 묵향에게 다시 교주의 부탁이 내려온다. 무림 맹주 옥청학의 생일 초청을 받아 마교에서 교주의 손녀를 보내기로 했는데, 그 손녀가 하도 안하무인아라 묵향이 동행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묵향은 무림 맹주의 생일 잔치에 순탄하게 참가하고 무사히 마교로 돌아온다. 그러나 묵향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교주의 배신이었다. 교주는 장인걸의 이간질어 걸려 평소 묵향이 자신의 밑에 있기에는 너무나도 뛰어난 고수라는 점과 자신의 경쟁자인 무림 맹주에게도 무공을 가르쳤다는 것 등을 이유로 그를 없애려고 한다. 무림 맹주를 초고수를 없앨 수 있는 기회였기에 교주의 요청 대로 자신의 두 손녀까지 빌려 주어 그를 도와 준다. 암습을 당한 묵향은 간신히 국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탈출한다. ID : KARMA12 이름 : 김민호(닉네임 : 이프리트) DARK STORY SERIES Ⅰ 2 전쟁의 장 자신의 애검인 묵혼과 묵영비로 단전이 파괴되고 심장에 치명상을 입은 묵향. 만신창이가 되어 물에 빠진 것을 상장군 옥상이 구해 치료해 주고 돌보게 된다. 그러나 묵향은 기억을 잃고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손도 이상하게 붙어 버렸고 얼굴도 반쪽이 망가진데다가 대부분의 혈도도 파괴되고 막혀 있었다. 처음에는 내력을 회복하기 힘들 것이라고 여져졌으나 회복이 빠르고 힘이 붙어 다시 살펴본 결과 점차 혈도가 뚫리고 있으며 내력도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란다. 옥상은 그의 과거를 궁금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원에게 치료를 받는 동안 무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공을 가르치게 한다. 무공을 수련하던 어느 날 묵향은 운기 행공법을 얻어 듣게 된다. 그때 운공법을 듣고 있던 묵향은 대자연의 기라느 말을 듣고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 파괴되었던 단전이 복구되고 모든 혈도가 뚫린 다음 환골 탈태를 거쳐 다시 한 번 정상의 몸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옥상이 이 일을 자신의 아버지 옥영진 대장군에게 알리자 옥영진은 그를 데려가 돌보게 된다. 그는 유난히 국화를 좋아해서 국광이라 불리며, 옥영진의 도움으로 황궁 무고에 들어가 3000여 가지의 비급을 몽땅 읽게 되는 행운을 얻는다. 한편 금의위는 묵향의 과거를 은밀히 추적하기 시작하고 정파의 무영문도 그가 마교의 부교주 묵향이라는 것까지 알게 된다. 현재 마교는 교주와 장인걸 부교주가 대립중이었다.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묵향은 세외 이민족을 치기 위해 파병된 옥영진과 같이 흑풍단에 소속되어 몽공 원정에 나서게 된다. 찬황 흑풍단의 백인 대장이 된 묵향은 그의 뛰어난 무공과 통솔력으로 많은 공을 세운다. 몽고족은 철진천을 중심으로 대항하지만 송이 각 부족에게 잔인한 처사로 위협하자 몇몇 부족이 철진철을 배신하고 급기야 전쟁에서 패하고야 만다. 이렇게 흑풍단과 몽고족과의 전쟁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을 때 드디어 마교에서 묵향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에 마교는 묵향의 기억이 돌아온다.면 마교에 피 구름이 덮일 거란 생각에 다시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마교에서는 묵향이 동자공을 익히고 있다고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동자공을 파괴할 생각에 음희 설약벽을 시켜 그를 유혹하고, 그 사이에 옥영진이 자신들을 소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들은 뒤늦게 이상한 느낌을 받고 이에 대비하려 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이들을 반역자로 몰아 내는 금의위와 친황대에 의해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된다. 뒤늦게 이를 안 묵향이 옥영진의 관저로 가지만 천랑대와 친황대의 해공공에 의해 부상을 당한다. 이 와중에 묵향은 잃었던 기억을 되찾고 자신을 추격하던 능비계와 해공공을 죽인다. 그리고 약육 강식의 철칙을 지키는 마교인들과 천랑대, 천리 독행은 묵향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송은 옥영진 대장군을 죽이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친황대는 무사 12명의 죽음으로 거의 모든 절정 고수를 잃어 제 기능을 상실했으며 금의위 또한 천여 명의 무사를 잃음으로써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는다. 더군다나 옥영진 장군 휘하의 찬황 흑풍단은 백인 대장 급 이상의 고수들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고, 일부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괴정체의 마인 집단에게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초야엥 묻혀 버린다. 이로써 황권을 수호하던 대부분의 핵심 세력이 와해되어 반란이라는 형태로 그 결과가 드러나게 된다. ID : 몽환인 이름 : 김정란(닉넥임 : 로니에르) DARK STORY SERIES Ⅰ 3 혼돈의 장 4 복수의 장 천랑대를 접수한 묵향은 자신의 복수를 위해 세력의 필요성을 느끼고 흑룡문을 거처로 삼기로 하고 염왕대를 접수하낟. 묵향의 기억이 돌아온 이상 그는 엄연한 마교의 부교주이기 때문에, 또 이 싸움은 어디까지나 교내의 권력 투쟁이 괴는 것이므로 좀더 강한 자의 밑에 들어가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한 염왕대는 쉽게 그의 휘하로 들어간다. 흑룡문을 접수한 묵향은 모사의 필요성을 느끼고 예전에 천마문의 문상이었던 설무지를 찾아 그를 영입한다. 흑풍단의 일부를 도와 주고 그들 또한 휘하에 두게 된다. 이쯤 되자 무림 정 사파의 모든 이목이 묵향에게 집중된다. 그러나 묵향은 상관치 않고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 그 괴팍한 성격으로 무림을 휘젓고 다닌다. 그 와중에 묵향은 자신의 사부 유백의 죽음 알게 되고 그의 죽음으로 괴로워한다. 우연히 옛 전진의 문하였던 또 한 명의 현경의 고수, 그것도 자기보다 더 높은 경지의 고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와 몇 번의 초식을 교환하고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다시 구흑룡문-천마신교 섬서분타에 돌아온 묵향은 설무지로부터 묵향의 세력이 더 강해졌으며, 그들을 이용해서 새로운 사업을 벌여 자금을 충당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마교 교주로부터는 묵향의 양녀 소연을 미끼로 위협하는 전보를 받는다. 묵향은 그런 교주의 서신을 묵살하고 전면전을 벌일 것이라며 경고한다. 이후 세력의 관리와 확정을 위해 설무지를 중심으로 계획을 세워 실행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숨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섬서분타에서 사용할 소모품들을 구하고 또한 첩자의 이목을 숨기기 위해 비무 대회를 열기로 한다. 그러던 중 특별한 일이 없던 묵향은 모든 일을 부하들에게 맡겨 두고 마화와 관광을 겸해서 진영 공주의 호위를 맡게 된다. 하지만 진영 공주가 묵향을 핍박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일로 묵향은 공주에게 앙심을 품게 된다. 이에 묵향은 진천왕이 공주를 노리고 있음을 이용하여 공주를 빼내고는 복수로 온갖 생색을 내며 괴롭힌다. 그렇게 추격자들과 밀고 당기며 공주를 핍박하던 묵향은 현상금 사냥꾼으로 있던 초씨 세가의 초류빈을 만난다. 그와 같이 공주를 호위하던 중 반란을 일으킨 진천왕을 돕던 혈교와 붙게 되고 그들을 물리치며 초류빈을 휘하로 끌어 들인다. 한편 섬서 분타에서는 묵향 대역을 맡던 이가 암습을 받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일로 묵향이 중상을 입었다는 소문을 내고 묵향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묵향은 자신을 부르러 온 수하와 함께 초류빈을 대동하고 섬서 분타로 돌아와 교주가 보낸 사신, 여지고 수석 장로 일행을 맞이한다. 그들은 교주의 명으로 묵향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교주는 묵향을 축출할 때의 일이 장인걸의 함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묵향이 더 이상 그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장인걸의 손이 미치지 않은 마교의 세력 일부를 보내 준 것이다. 한편 마교의 교주는 천마 혈검대를 맡고 있는 구양운 장로가 이미 장인걸에게 포섭된 것을 모르고 그에게도 묵향에게 가라고 지시한다. 그 때문에 교주가 묵향과 다시 결합하려는 것을 눈치 채고 장인걸을 옹호하는 세력들은 교주를 제거할 계획을 세워 이를 실행하게 된다. 그래서 무림맹의 맹주와 교주가 만나도록 함정을 파고 이 둘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장인걸은 교주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원로원의 독수 마제가 개입하려는 것을 막고는 안심한다. 한편 정파에서는 맹주가 실종됨에 따라 차기 무림 맹주의 자리를 노리느라 서로간에 신경전이 펼쳐지고, 맹주의 중재로 충돌을 피하고 있던 남궁 세가와 서문 세가가 구휘의 무덤을 기화로 정면 충돌하게 된다. 거기다가 사파 다섯 개 방파와 정파 일곱 개 방파까지 무덤을 빌미로 충돌을 벌여 구휘의 무덤을 중심으로 정 사 구분 없는 격돌이 시작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한편 묵향은 세력을 위해 실력이 뛰어나지만 소속된 방파가 없는 고수들의 명단을 작성 이들을 포섭할 계획을 세운다. 그 와중에 묵향의 암살을 의뢰 받아 온 살수에 의해 묵향은 암습을 받지만 위기를 모면한다. 묵향은 즉시 암살자를 죽이는 대신 자신을 죽일 기회를 줄 테니 자신의 일에 협조하라며 포섭한다. 한편 마교는 교주를 제거한 장인걸이 교주로 등극해 남은 교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마교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 마교는 세력을 너무나 많이 잃었기에 묵향을 이용해 정파 무림을 칠 계획을 세우며 그를 포섭하려 한다. 이에 묵향은 그의 제의를 수락하는 척하며 위장 마교 총단 주위에 임시 분타를 확보하고 마교를 칠 준비를 해 나간다. 묵향은 장인걸의 제의를 수락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정파의 몇몇 방파를 치고 이에 장인걸은 인질로 잡혀 있던 묵향의 양녀 소연을 돌려준다. 이 와중에 묵향은 무영문의 제의로 회담을 갖고는 옥화 무제의 손녀 매영인을 공식적인 인질로 잡게 된다. 한편 무영문은 현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황자를 빼돌려 그를 황제에 앉힐 것을 계획한다. 묵향은 군사 설무지와 함께 총단 공격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하던 묵향은 마침내 총단을 공격, 장인걸을 몰아 내고 마교를 장악하게 되지만, 장인걸을 놓치게 된다. 묵향에게 패한 장인걸은 혼자 묵향을 제거할 수 없게 되자 혈교와 손 잡고 북명신공의 후반부를 이용하여 묵향을 유인, 혈교의 비버으로 그를 제거 하려고 한다. 묵향의 자만심을 이용한 장인걸의 계략은 마침내 그를 함정에 빠뜨리고 묵향을 사라지게 만든다. ID : COBAS 이름 : 송승원(닉네임 : 묵향) DARK STORY SERIES Ⅱ 5 묵향, 환타지 세계로 가다 묵향은 혈교와 장인걸의 음모로 낯선 세상에 떨어지게 된다. 묵향은 경공술을 펼쳐 무림으로 되돌아가려고 어느 한쪽으로만 계속 달려간다. 하지만 그는 못 볼 것을 보고야 만다. 달이 두 개였던 것이다. 결국 묵향은 이곳이 송 나라, 아니 무림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어느 외진 사냥꾼의 집에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며 언어를 익히기 시작한다. 묵향과 뜻이 같은 다크라는 이름도 갖게 된다. 어느 정도 언어를 익힌 묵향은 자신이 무림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 도중 그는 팔시온 일행을 만나게 된다. 다크는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들과 동행하기로 한다. 도중에 마차를 호송하는 무리들의 싸움에 끼여들게 되고 여기서 다크는 그래듀에이트를 단숨에 해치우고 마차 안의 기억이 봉인된듯한 예쁜 여자 아이를 구한다. 팔시온 일행이 그녀를 돌보기로 하지만 다크는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라나라는 여자 아이를 짐짝 취급 한다. 훗날, 이것은 다크에게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크는 팔시온 일행과 같이 용병 길드에 들게 되고 라나와 헤어지게 되지만 악연인지 외딴 집에서 다시 마법에 걸린 라나를 만난다. 마법을 풀어 주고 그 집의 지하에 있는 던전에 들어간 다크 일행은 던전에서 많은 것을 얻는다. 그러고 있는 동안 다크는 토지에르와 그 일행들의 갑작스런 습격에 약간 다치게 되지만 치료 마법으로 다시 회복한다. 라나는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토리아 쪽으로 가고 있던 일행은 땅이 울리는 것을 느끼면서 거대한 타이탄의 모습을 본다. 타이탄은 타이탄만이 상대할 수 있다는 상식을 깨고 다크는 타이탄을 상대하여 망가뜨려 버린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토지에르는 다크에게 마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한다. 결국 저주에 걸린 다크는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라나로 모습이 바뀌게 된다. 자아는 그대로인 채. 그 이후로 다크는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게 된다. 매일 술에 절어 있고 세상을 비꼬아 보기 시작한다. 일행들은 일행들대로 다크의 저주를 풀기 위해 이곳 저곳 다녀 본다. 하지만 신탁을 통해 얻은 얇은 지식으로는 저주를 풀기 위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다크는 미네온 마법사 길드에서 지금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현문의 태허 무령 심법을 시행한다. 마나를 채워 북명 신공을 이용해 환골 탈태하기 위해. 한편 블루 드래곤 키아드리아스를 찾아간 일행은 드래곤 대신 엘프 카렐의 집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서 다크는 카렐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주고 받았다. 다크는 카렐에게서 아쿠아 룰러를 받고 다시 먼 여행을 떠나기 시작한다. ID : KIMHJ6 이름 : 김홍천(닉네임 : 제임스) DARK STORY SERIES Ⅱ 6 다크, 아이아드의 힘을 얻다 드래곤 하트를 빼앗긴 트루비아 왕국의 시드미안에게 달갑지 않은 방문객이 찾아온다. 그들은 코린트 제국의 사람들로 오만 방자한 무리들이다. 코린트가 워낙 센 나라라 시드미안은 분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시드미안은 다크 일행과 헤어져 코린트 제국 사람들의 일을 도와 준다. 드래곤 하트를 훔쳐 간 것이 블루 드래곤일 수도 있다며 가장 가까운 블루 드래곤을 만나자는데, 시드미안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결국 그 전에 카렐을 만났던 곳까지 가게 된다. 그 사이 다크는 미디아에게 끌려 하기 싫은 시장 구경과 보기 싫은 미디아의 물건 값 깎는 실력을 구경하게된다. 이렇게 한참을 끌려 다니다 돌아온 그들은 조용히 만나자는 시드미안의 전갈을 받고 약속 장소로 향하지만 알지 못할 녀석들에 의해 기절하고 만다. 한참 뒤에 깨어난 후 몇 번의 워프 끝에 어딘가에 도착한 일행. 그곳에서 다크는 자신에게 저주를 걸어 여자로 만든 녀석을 만난다. 그놈을 향해 공격을 해 대지만 역부족으로 기절만 하고 만다. 시드미안과 코린트 제국 사람들은 카렐의 집에 당도해 카렐의 보물에 손을 대다 수백의 스톤 골램의 공격을 받는 다. 이들은 전설의 골든 나이트를 꺼낸 카렐에게 모두 무참하게 죽는다. 감금 생활에 들어간 다크는 어느 날 밤 탈출을 시도한다. 보초병을 피하다 만나게 된 타이탄 청기사 안드로메다와 계약을 맺고 다시 도망 치지만 군견을 앞세우고 쫓아 온 병사들에게 잡히고 만다. 신나게 얻어 터진 다크. 그는 탈출을 포기하는 대신 힘을 기르기로 작정한다. 내공을 쌓아 가던 어느 날 밤 꿈에서 정령왕 나이아드에게 죽어라고 얻어 맞는다. 열 받은 다크는 마교의 공력 수련 방법과 북명 신공을 이용해 엄청난 공력을 쌇게 된다. 그리고 그 엄청난 공력을 바탕으로 나이아드를 공격해 이기게 된다. 하지만 마교의 공력 수련 방법의 부작용으로 뇌에 마기가 침입하자 기억 상실증을 일으켜 크라레스의 궁전을 거의 박살내 놓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크레아 공작은 이 상황을 진압하고자 3대 1이라는 치사한 방법으로 간신히 다크를 잡는데 이때 누군가가 찾아와 아쿠아 룰러를 보고는 다크를 넘겨 줄 것을 요구한다. 크레아 공작은 그가 드래곤임을 알고 할 수 없이 다크를 넘겨 준다. ID : ISB304 이름 : 이동석(닉네임 : 아리아스 폰 그라지에트) DARK STORY SERIES Ⅱ 7 드래곤의 아들 한 달 후 기억이 돌아온 다크는 아르티어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그의 양자가 되고, 의자할 만한 그 어떤 든든함을 느끼게 된다. 한편 드래곤 하트를 찾지 못한 트루비아는 악에 물들었다는 죄명 아래 코린트에 멸망한다. 트루비아의 근위 기사단과 왕자는 크라레스에 귀의하고 크라레스는 세력의 확정을 스바시에 왕국과 치레아를 흡수한다. 크라레스의 반 협박으로 군대에 들어간 팔시온 일행은 상부의 호출로 제2친위 기사단에 소속되어 치레아로 떠난다. 그곳에서 예전의 힘을 되찾고 치레아 총독이 된 다크를 만나 그의 휘하에 들어간다. 일행을 치레아의 주요 요직에 앉힌 다크는 절제되고 강한 통치를 시작하고 아르곤 국경에서 문제가 되던 몬스터들을 아르곤 영지까지 넘어가 과감하게 토벌해 버린다. 이 문제로 아르곤에서 사신들이 오지만 다크는 가짜 총독을 내세워 그들을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지미와 라빈을 데리고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지미와 라빈을 골탕 먹이면서 여행을 하던 다크는 아르곤 왕국에서 드래곤 사냥을 떠나는 일행을 만나 합류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그들을 의심하고 경계한다. 결국 800살 정도 된 그린 드래곤을 잡았으나 다크 일행과 파시르 그리고 드래곤 사냥의 주체인 크루마의 인원만 뺀 나머지 일행은 모두 죽게 된다. 여기서 다크는 드래곤 사체를 노리던 코린트의 제임스를 만나게 된다. 크루마의 드래곤 사냥꾼들은 코린트 기사단과 싸우며 계략으로 그들을 속인 다음 드래곤 사체를 무사히 본국으로 이송하게 된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다크는 제임스 일행을 따라 코린트로 가게 된다. 제임스는 다크가 엄청난 정령사일지도 모른다는 설정하에 본국으로 끌어 들이기로 계획하지만, 코린트에 도착한 다크는 블루 드래곤이자 코린트의 마법사 그라세리안으로 현신해 있는 카드리안과 시비가 붙어 대결하게 된다. 다크와 헤어진 아르티어스는 몇 달이 지나자 다크와 지냈던 시간을 잊을 수가 없어서 크라레스 왕궁으로 다크를 만나러 간다. 사람들이 다크 크라이드 남작을 모르자 화가 난 아르티어스는 난동을 부려 왕국을 초긴장 상태에 빠지게 한다. 뒤늦게 나타난 황제와 오해를 풀고 레드 드래곤이 만든 마법 검을 선물로 준다. 치레아로 간 아르티어스는 그곳에서도 다크가 없자 직접 찾아 나선다. 다크의 행방을 찾던 아르티어스는 코린트에서 블루 드래곤 카드리안과 대결하고 있던 다크를 만나 둘의 대결을 말리고 카드리안에게 타이탄의 위험성을 알려 준다. 그리고 카드리안은 드래곤으로 돌아가 자신의 레어로 숨어 버린다. ID : 별항아리 이름 : 하지은(닉네임 : 라나) DARK STORY SERIES Ⅱ 8 제1차 제국 전쟁 카드리안이 인간 생활을 접고 레어로 돌아감에 따라 크라레스의 복수는 한결 쉬워진다. 다른 곳에선 크루마와 크라레스의 외교 사절 뚱뚱이와 뻔뻔이의 피 터지는 말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겉으론 웃으면서 동맹의 밀약을 맺지만 말이 동맹이지 서로 뒤통수 칠 궁리만 하고 한쪽은 상대편 왕자를 볼모로 잡아 전쟁에서 이길 경우를 대비한다. 어쨌든 이 동맹 아닌 동맹은 타결되고 본격적인 1차 제국 전쟁의 막이 오른다. 한편 철딱서니 없는 아르티어스와 여행이나 다니던 다크는 크라레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통보 및 귀환 명령을 받고 돌아와 살라만더 기사단의 단장으로 출전하게 된다. 주요 전장인 미란 국가 연합에 도착한 파견군 사령관 다크. 그는 코린트와 크루마의 전쟁이 초읽기에 달하는데도 철딱서니 없이 정찰한답시고 산책이나 타이탄 사냥을 하며 본의 아니게 타이탄 노획에 힘쓴다. 한편 코린트의 제임스와 까미유는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 공작의 실종 사건을 멋대로 끼워 맞추고 공작의 복수를 하겠노라며 크라레스에 잠입한다. 이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아든 긴급 전문. 크루마가 유성 소환 마법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이를 갈던 키에리는 크루마를 멸망시켜 빚을 갚겠다고 다짐한다. 이로써 코린트와 크루마의 충돌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의외의 변수가 일어난다. 토끼를 사냥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전쟁에 임하던 코린트는 크루마에 쓴맛을 보게 된다. 단 한 대의 타이탄에 300대에 달하는 타이탄이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던 것. 한편 다크를 찾아 다니던 제임스는 다크의 오빠라고 거짓말까지 하게 되고 전쟁터까지 오고 만다. 거기에서 제임스는 경비병들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 낸다. 바로 자신이 찾던 여자 아이가 살라만더 기사단의 단장이라니. 한편 미네르바는 이번 전쟁에서 노획한 타이탄의 파편 하나 건지지 못하자 잔뜩 화가 나서 다크에게 따지지만 다크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미네르바는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다크에게 거절만 당한 채 또다시 코린트와 접전을 시작한다. 크루마가 우세해 보이던 전투는 키에리의 등장으로 완전히 역전된다. 하지만 이 전투가 코린트가 크루마에 승리하는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미네르바는 키에리가 있는 한 크루마가 코린트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크에게 키에리를 없애 줄 것을 부탁한다. ID : 고룡 이름 : 신칠현(닉네임 : 제갈천) DARK STORY SERIES Ⅱ 9 크로나사 전기(戰記) 다크는 미네르바의 요청으로 참가한 크루마와 코린트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안드로메다를 선보인다. 코린트 최고의 검객으로 알려진 키에리와의 전투를 위해서다. 하지만 다크는 키에리와의 전투를 단순한 재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적당히 전투를 즐기다 계획대로 키에리를 죽이지 앟고 다크의 뒤를 쫓던 제임스와 까미유를 통해 살려 보낸다. 다크와 키에리 대결의 결과가 양국의 전세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코린트가 독주하던 시대가 가고 바야흐로 힘의 전국 시대가 온 것이다. 이 한 번의 전투로 크라레스는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 된다. 크루마로서는 휴전만 해도 이긴 전쟁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정말 이겨 버리는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린다. 그러자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고 좀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끌고 나가려고 한다. 또 하나의 소득이라면 키에리의 죽음이다. 코린트 본국에 있던 키에리의 정적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그를 제거한 것이다. 다크로 인해 다 이긴 전쟁에서 패했던 것이 원인이 되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전사한 것으로, 국내에서는 자살한 것으로 하여 역사의 전면에서 물러나기로 한다.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난 키에리는 권력의 허무함을 깨닫는다. 코타스가 떠난 이유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수세에 몰린 코린트는 강대한 크라레스 기사단에 밀려 영주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적인 게릴라 전술을 펼친다. 게릴라 전술로 병참선 구축에 애를 먹는 와중에 다크는 크로나사 평원 수복 전쟁에 지원을 나가게 된다. 다크는 아르티어스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드워프 화이어헤머로 하여금 다크에게 어울릴 장신구를 만들게 하고는 그것을 다크에게 걸치게 한다든가,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히는 등의 일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크는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강호에 있을 때처럼 해결사 노릇을 주로하게 된다. 크루마에서 지원 병력을 얻어 온다든지 하는 일들을 하면서. 크루마의 성의 없는 지원으로 화가 난 다크는 크루마 왕궁으로 날아가 5만의 병력을 강탈하다시제10부 미투랑 전투와 나이아드와의 대결 차례 호비트 족의 욕심 브로마네스의 영토 지도에서 사라진 코린티아 시 아르티어스의 정체 풀 줄기와 검의 대결 마법의 책 소년 첩자 제스터 아르티어스 님의 목걸이 말토리오 산맥의 침입자들 감사합니다, 드래곤이시여 미투랑 요새 전투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마스터들의 협상 변화하는 제국의 질서 닥쳐 온 운명의 시간 다시 나타난 정령왕 나이아드 아주 오랜 친구의 만남 다크의 실종 정령계로 간 묵향 나이아드와 묵향의 대결 고약한 드래곤의 성격 아르티어스의 바보스러운 모습 풀리지 않는 비밀의 내공술 황태자의 무도회 새로운 여행의 비밀 <묵향 릴레이 줄거리> 호비트 족의 욕심 전쟁은 이제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미란 국가 연합의 세 배가 넘는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은 크라레스 제국은 그 넓은 땅덩어리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사정이 약간 달라지기 시작했다. 크루마에서 보내 온 5만 5천 명과 미란에서 보내 온 4만 명, 도합 9만 5천 명의 새로운 병력이 추가로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병력들이 주요 병참선을 지키기 위해 곳곳에 배치되기 시작하자 이제 발 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코린트 제국이었다. 크라레스 제국의 점령지 요소 요소마다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9개 사단 급의 병력들. 그 갑옷 위에 산뜻하게 그려진 문장으로 봤을 때, 그것들을 서둘러 날림으로 그려 넣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용병(傭兵)을 의미하는 꺾어진 버드나무 문장이 한쪽 구석에 그려져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들이 전혀 정체 불명의 군대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소속을 숨기고 다른 나라에서 보내 준 지원군일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반 군대에 소속된 수준 낮은 병사들의 경우 그 녀석들이 어떤 국가 소속인지 알아 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또 재수 좋게 어느 국가에 소속된 놈들인지 알았다 하더라도, 그래서 어느 나라 놈들 아니냐고 캐묻는다 하더라도 상대가 발뺌을 해 버리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더러는 얼마 전에 군대에서 해고되었다거나, 그만 뒀다고 하는 식으로 변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기사 급의 병력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기사 급 정도라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키운 인물이기에 해고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반면 용병이나 하급 병사들의 경우 이리저리 떠도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태어난 국가에 소속감이나 충성심 따위를 바란다면 오히려 그게 웃기는 일일 것이다. 평민이나 농노들의 경우, 될 수 있다면 세금도 적고 영지 주민들을 살뜰하게 보살펴 주는 인자한 영주가 오기만을 바랄 뿐,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물론 바라는 것이 없는 만큼, 그들이 뭔가를 솔선해서 해 줄 가능성 또한 없었다. 이렇듯 크라레스가 거의 10만에 가까운 병력을 추가로 배치하고자 코린트 남부 집단군 사령관인 다리엔 후작은 지지부진 전략 을 포기하고 크라레스 침공군을 향해 본격적인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만 끌다가는 적의 병참선이 더욱 튼튼해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바짝 방바닥에 엎드려 몸을 숨긴 채, 망원경을 통해 앞을 살피던 사내가 옆에 있던 사내를 향해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한 놈들이야. 전에도 한 번 봤지만 도대체 저 녀석들의 저 살기 넘치는 만행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구먼. 안 그래, 맥스?" 사내의 망원경에는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춘 듯 보이는 몇 명의 기사들이 엄청난 속도로 돌아다니며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적 기사들은 고작 10여 명이었다. 그나마 다섯 명 정도는 뒤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었고 나머지 다섯 명만이 거의 학살극이다 싶을 정도로 무참히 상대를 쓰러뜨리고 있었다.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검이나 창, 혹은 활 따위로 무장을 하고 어설프게 저항을 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원체 강하다 보니 그야말로 헛된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십 명이 죽어 나자빠지자 이들은 아예 그나마 저항도 포기하고 도망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악착같이 쫓아다니며 그들을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였다. 사내와 함께 아래쪽 골짜기에서 펼쳐지는 지옥도(地獄圖)를 감상하던 맥스 또한 그와 같은 의견이었는지 이 갈리는 듯한 목소리로 내뱉듯 말했다. "지독한 놈들!" 사내는 눈에서 망원경을 떼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우우욱... 속이 메슥거려서 더는 못 보겠군." 하지만 맥스는 질리지도 않는지 아래쪽을 계속 노려보면서 이죽거렸다. "저 녀석들 기사 맞아? 도대체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들 같지는 않는데 말이야." "저놈들은 기사도 아니야. 제기랄! 그냥 달려 내려가서 저것들을..." 분노에 찬 음성을 내뱉으며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갈 듯 급하게 몸을 세우는 사내를 맥스가 붙잡았다. "이봐! 참으라구. 자네 혼자 내려가서 될 일이 아니야. 그래듀에이트만 다섯 명이야. 우리 둘 다 내려간다고 해도 저 밑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 숫자만 보태는 꼴이 될 거야." "에엣! 제기랄. 지원군은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느려 터진 놈들!" "그러게 말이야. 이봐, 쟈크! 아직도 멀었나?" 쟈크라고 불린 사내는 간단하게 무장한 무사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법진에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예, 통신은 벌써 끝냈습니다. 아마 2~3분 내로 공격대가 도착할 겁니다." "빨리 와야 할 텐데... 전처럼 일이 다 끝난 후에 도착한다면 큰일이야. 저 녀석들은 떼거지로 옮겨다니니까 우리들만으로는 어떻게 기습을 가할 수도 없고 말이지." 맥스가 한참 투덜거리고 있을 때, 망원경을 들고 있던 사내가 급히 말했다. "이봐, 저놈들 벌써 끝냇어. 전처럼 곧장 공간 이동해 버리면 큰일인데..." 맥스도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이미 전에도 한 번 이런 식으로 놓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설마... 하지만 그럴지도 몰라. 제발 빨리 와라, 굼벵이들아!" "어어? 저 마법사 녀석, 공간 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있어. 어딘가로 공간 이동하려는 모양이야." "제기랄! 이번에도 또 실패인가?" 그들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아래쪽 산중턱쯤에서 뿌연 빛이 일렁였다. 그리고는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료들이 나타난 것을 재빨리 알아 본 사내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아직까지 망원경으로 적을 주시하고 있는 동료의 어깨를 툭 치면서 소리치듯 말했다. "이봐, 맥스! 도착했다구." "어디?" 맥스가 동료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급히 시선을 돌렸을 때 공격대는 이미 여섯 대의 타이탄을 꺼내 드리고 탑승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네 명의 기사들은 두 명의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상대방 마법사를 사냥하기 위해 밑으로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 재빠른 동작에 감탄했다는 듯 맥스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야~! 굿 타이밍이야. 아직도 놈들은 도망 못 쳤어. 이제 느긋하게 구경하는 일만 남았군." "도와주지 않아도 될까?" 맥스는 동료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는 듯 신랄한 표정으로 맞받아 쳤다. "너 미쳤냐? 네 실력을 알아야지. 우리는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는 게 도와 주는 거야." "그도 그렇겠지." 맥스와 그의 동료가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적들도 이미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세 대를 급조해서 만든 것처럼 투박하게 생긴 큼직한 타이탄을 꺼내 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법사나 기사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어디론가 피신해 버렸을 것이다. "저 녀석들, 아주 훈련을 잘 받은 놈들이야. 실력도 대단히 뛰어나고 말이지. 방금 소탕전을 벌이는 것 봤지? 순식간에 수십 명을 죽여 버리잖아." 맥스의 말에 상대는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헤헤..., 아무리 그래도 은십자 기사단의 정예들에 견줄 수 있겠어? 저놈들 타이탄이 덩치가 조금 큰 것 같지만 저 모양을 보라구. 철판만 덕지덕지 붙인게 누가 봐도 대충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크라레스 같은 작은 국가가 우수한 타이탄을 만들 능력이 있겠어?" 그의 말에 맥스도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과연 무식하게도 생겼구먼..." 거기다가 숫자도 이쪽이 훨씬 많잖아. 압승일 거야. 곧 이어 양쪽의 타이탄들이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참 전투를 지켜보던 사내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어? 그렇지도 않은데? 6대 3인데도 저 녀석들 잘 버티고 있잖아. 확실히 덩치가 크니까 유리한 면도 있는 모양이군." "설마? 내가 듣기로는 표준 중량을 벗어날 정도로 무겁게 만들어 봐야 동작만 굼떠진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놈들 타이탄에 붙은 엑스시온이 상당히 강력하다는 말인가?" "글쎄..., 그거야 알 수가 없지." 더 이상 할 일이 없자 살금살금 그들 옆으로 다가와서 같이 구경하던 쟈크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저쪽 타이탄이 훨씬 더 강력합니다. 움직이는 속도도 오히려 저 덩치 큰 타이탄이 더 빨라 보여요. 속도나 파워 면에서 상대쪽 타이탄이 월등합니다. 하지만 원체 이쪽 숫자가 많으니까 밀리고 있는 것뿐이죠." 자신들보다는 타이탄을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마법사 쟈크가 그렇게 말하자 맥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뭐야? 그렇다면 저놈들을 상대하려면 금십자 기사단 정도가 동원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기야,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감히 본국을 침공할 생각을 했겠지." "아무리 그래도 크라레스의 군사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경우에도 실력이나 타이탄의 성능은 어떤지 모르지만 숫자에서 밀리고 있지 않습니까?" "크흐흐흐, 그건 그래. 그래도 녀석들 제법 버티는군." " 제11부 제2차 제국 전쟁 내 아들 어디 갔어! 노망 난 드래곤 비위 맞추기 치레아 대공을 감시하라 멍청한 드래곤과 한심한 아들 저들은 뭘 하는 놈들인고 난폭한 습격자 공작이 암습을 당할 정도라면? 암소 네 마리를 보내 주시오 괴물 키메라의 정체 수줍음을 많이 타는 왕자 도대체 알 수 없는 키메라 점령자를 다스리는 고도의 계략 아주 재미있는 정보 신의 축복인지 악마의 장난인지 밝혀지는 황태자의 배후 코린트와 크라레스의 충돌 들개와 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겠노라 다시 불붙은 제국 전쟁 눈물을 흘리는 황제 전쟁터에서 보자, 비열한 자식들 키에리, 코린트는 자네가 필요하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 해골 가면을 쓴 수수께끼의 사나이 루빈스키 대공의 피 고양이가 움직였다고 하옵니다   내 아들 어디 갔어! 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1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요 근래에 아주 꿈같은 멋진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무려 6년 동안에 걸쳐 뻔뻔스런 아들 녀석에게 악질적이고도 강제적인 노동 착취를 당해 오다가 드디어 잠시 동안이나마 달콤한 휴가를 얻게 된 것이었다. 처음, 아들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을 알아챘을 때는 속상한 마음에 야속함도 느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잠시' 뿐이었다. 아들이 없어 진 지금 감히 아르티어스 어르신께 노동을 강요할 만큼 간이 큰 놈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 오래도록 부족했던 수면을충 분하고도 넘치도록 보충했다. 그런 후에는 침대에서 잘 꾸며진 정원 으로장소를옳겼다. 따뜻한 햇볕을 쬐기도하고,햇볕이 따가을 때는 그늘에 들어가서 낮잠을 자거나, 좋아하는 주스나 포도주를 마시며 책을 읽기도 했다. 그로서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끝장날 가 능성이 농후한 이 오랜만의 휴가를 정말이지 알뜰하게 즐기고자 했 던 것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이 제발 빨리 돌아오지 말 아야 할 텐데.' 하던 생각이 서서히 바픽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는 물가에 애를 놔둔 부모처럼 아들의 안위가 걱정되기도 했고,또 한편 으로는 어딘지 모를 색다른 곳에서 아버지가 윌 하는지도 잊고 여행 을하고 있을 아들 생각에 슬며시 화가 치밀기도 했다. "이런 제기랄! 얼마나 좋은 곳에서 놀고 있기에 돌아을 생각을 않는 거야?' 걱정과분노로 인해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 것은 다크가 여행을 떠난후 12일째 되던 날 황혼 무렵이었다. 원래 보편적으로흐르는 심리라는 것이, 나쁜 일은 모르고 그냥 당 하는 편이 속 편하다. '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처럼,혹 은 그 일을 당할 것은 분명히 알지만 그것을 당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억지로 속여 가면서 남들은 다 당해도 절대로 자신은 당하지 않을 것 같이 현실 도피를하는 것이 정신 건강상좋으니까말이다. 그 때문에 아르티어스 어르신도 이 휴가의 끝이 언제일지 알아 볼 생각도 하지 않고 현실 도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편이 혹시나 내일 이라도 아들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스릴이 있어서 좋기도 했다. 하지 만 그런 스릴이 하루 이틀 계속되면서 스릴보다는 걱정이 점점 커지 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아들의 행적을 알아보기로 마 음을 바꾼 이상, 얘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사실 일부러 알아 보지 않 아서 그렇지, 알려고만 마음을 먹는다면 아주 간단하게 아들의 행적 을 알아 낼 수 있는 요령과 지능,그리고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 결과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제일 먼저 찾 은 인물은 치레아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아들의 심복(?)인 카알 폰 카 슬레이 백작이었다. "저어,대공 전하께옵서는 폐하로부터 모종의 비밀 임무를 맡으시고 2주일 정도 자리를 비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만‥‥‥‥" 아르티어스가 눈을부라리며 질문을 퍼붓자,다크에게 걸려 팔자에 도 없는 오른팔 노릇을 억지로 하고 있는 불쌍한 카슬레이 백작은 이 제 망할 놈의 상관 덕분에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며 재빨리 자신이 알 고 있는 바를 토해 냈다. 원래 상관에게 충성하는 부하라면 상대를 적당히 따돌리거나 아니 면 대충 거짓말을 하여 둘러 댈 테지만,카슬레이 백작으로서는 다크 에게 그 정도의 의리를 지킬 이유가 눈곱만치도 없었다. 하지만 아르 티어스의 눈동자가 번뜩거리는 것이 카슬레이 백작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모종의 비밀 임무?설마,그놈의 임무가 무엇인지 대공의 아비인 나 한테도 발설하기 힘들다는 것이냐?" 아르티어스의 추궁에 카슬레이 백작은 식은땀을흘리며,서랍 속에 들어 있던 편지를 펼쳐 보이면서 다급히 항변했다. "그게 아니라,전하의 서신에 그렇게만 써 있기에 저도 자세히 알 수 가 없습니다. 저는 말로만 오른팔이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니까 요." 카슬레이 백작이 거품을 토해 내며 한 손으로 흔들어 대는 편지를 힐끗 바라본 아르티어스는 카슬레이 백작의 태도로 보아 더 이상 알 아 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2주일이라 이거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을하다가 아르티어스는 그 2주일이라는 것이 무엇을뜻하는 것인지 생각하며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그렇다면! 에구구‥‥‥ 휴가가 이틀밖에 안 남았잖아?" 처음에 카슬레이 백작을 잡아 먹을듯이 추궁하던 것과는 대조적으 로 아르티어스는 그 사실을 괜히 알아 냈다는 후회감에 젖으며 급히 자신의 휴양지(?)로 돌아왔다. 이제 이 꿈같이 달콤한 휴가도 이틀밖 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면 아비를 마소처럼 부려먹는 그잔악무도한아들놈이 '짠' 하고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행해질 밤낮을가리지 않는 중노동에 대비해서 잠 이라도 좀더 자두는 것이 자신의 장수에 보탬이 될 것은 분명한사실 이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방에 다시 꽁 박혀 버린 아르티어스는 5일 동안 아예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들은 돌아오 지 않았다. 처음 이틀까지는 아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이 마냥 기 쁠 뿐이었다. 아들이 예정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그때부터 하루하 루가 특별 휴가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약속된 날로부터 무려 4일이 경과했을 때,아르티어스 어르 신은 또다시 살기를 가득 품고 카슬레이 백작을 족치러 두 번째 방문 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카슬레이 백작에게서 더 이상의 정보를 알아 낼 수는 없었기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이번에는 곧장 수도인 크라 레인 시로 직행했다. 그곳에는 쥐어 짜면 아들의 행선지를토해 낼 것 으로추측되는 인물이 몇 명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라레인 시는과거 제1차 제국 전쟁 때 3루마가감행한유성 공격 에 의해 폐허가 되어 버렸지만,크로나사 지방을 점령한 크라레스 제 국이 그곳을 다시 수도로 정하고 대대적인 복구 작업을 벌여 다시금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전쟁이 끝난 후 겨우 6년이라는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기에,대규모의 황궁과 몇몇 주 요 관청 건물만이 들어서 있을 뿐 인구는 아직 그렇게 많지 못했다. 하지만 크라레인 시는 신흥 제국 크라레스의 새로운 수도로 선정되 었기에 폐허의 잔재는 신속히 다 치워졌고 그 위로 넓고 탄탄한 대로 가닦였다. 그리고 새롭게 놓인 도로망 주변 곳곳에 수많은 건물들이 지어지 고 있는 모숩으로 봐서 10여 년 후에는 대제국 크라레스의 수도에 걸 맞은 인구와 경제 규모를 갖춘 거대한 도시로 발전할 것은 분명해 보 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일단 상대가 매우 부유해 보였기에 경비병은 아주 공손하게 물어 왔다. 아르티어스가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이다 보니 그 옷이 매우 고 급스럽고 화려했을 것은 당연했다. 그러므로 웬만큼 부유한 상인들 도 입기 힘든 고급 옷을 입은 인물에 대해 감히 소흘히 대할 수 없었 던 것이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에 먼저 불같이 화부 터 냈었던 아르티어스였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르티 어스 어르신은 비록 치레아 공국에서는 마소처럼 부림을 당하는 처 지에 있었지만,그래도 신분은 대단히 높지 않던가?아르티어스 어르 신은 대귀족의 아버지답게 점잖게 미소를 지으며 경비병에게 말했 다. 아들의 체면을손상시키는 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토지에르에게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가찾아왔다고 전해 주게." 상대가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경비병은 자신 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경의를 표해 왔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상대는 크라레스 제국 최고의 레벨에 들어가는 귀족 이었기 때문이다. "옛,급히 기별을 넣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이어 경비병의 보고를 받은 몇 명의 기사가 튀어나와 아르티어스 를 극진하게 대우하며 토지에르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자신의 신 분이 아닌 아들의 신분을 밝힌 것만으로도 이렇듯 응숭한 대접을 받 게 되자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자신의 영광보다도그 아들의 영광을 더욱 가슴 뿌듯하게 여기지 않던가?그것도 자신이 목숨보다도 더 사 랑하는 아들임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기사들이 아르티어스에게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공손하게 대한 것은 치레아 대공의 위세가 아니라 과거 황궁에서 난동을 부린 덕분에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이 기사들의 뇌리에 '공포'라는 이름 으로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로부터 쫴 오랜 시일이 흘렀기 에 경비병들 사이에서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은 잊혀진 것이 되어 버 렸지만‥‥‥‥ 노망 난 드래곤 비위 맞추기 "이게 문제란 말이야. 도대체가 이 주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어." 복잡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는 수백 장이 넘는 도면을 보면서 토지 에르가 짜증스럽게 투덜거리자 토지에르와 함께 마법진을 바라보고 있던 마법사중의 한 명이 공손하게 말했다. 그 중년의 마법사는 바로 토지에르가 아끼는 수제자 다론이었다. "스승님,본국에 있는 자료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법진을 알아 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조건 하나 만들어서 실험을 해 보는 것이 좋 지 않을까요? 전에 청기사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저 녀석을 통째로 복사해서 우선 하나 만들어서 실험을 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를 것 같습니다. " 수제자라는 다론의 입에서 이 따위 말이 튀어나오자,토지에르는 처 음에는 어이없는 얼굴이었다가곧이언 불같이 화를내기 시작했다. "뭐라고? 이런 멍청한 녀석 ! 이게 어디 저출력의 시험용 엑스시온인 줄 아느냐?그 따위 소리를 하게 ?' "예?제 생각이 짧았다면 용서해 주십시오,스승님." 당황해서 얼버무리는 다론을 노려보며 토지에르는 자신의 제자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지 상세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토지에르로 서는 일단 이 녀석을 제대로 가르쳐 놓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다음부터 다론은 크라레스 의 마법사들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적인 위치에 올라서야 했다. "이건 추정 출력 2.3 정도를 낼 수 있는 최강 급 엑스시온이야. 이걸 대충 만들어 놓고 마력을 불어 넣었다가는 십중팔구 거대한 폭발로 이어진다. 만약 이 정도 엑스시온이 폭발을 일으키면 실험실 정도만 박살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수도 전체가 쑥대밭이 될 가능성도 있 다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하지만 스승님, 이런 식으로아무리 연구를 계속해 봐야 더 이상 진 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료도 거의 없는 지금,다소 무리가 있더 라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제자가 계속 우기자 토지에르는 짜증 어린 어조로 질책했다. "아직도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였느냐?네 마음과뜻을 모르 는 바는 아니지만, 엑스시온의 후면 마법진에 대한 데이터가 없다면 그건 자살 행위야. 지금으로서는 전면에 드러나 있는 마법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청기사의 엑스시온 연구를 함께 병행하는 수밖 에 없다고 봐야지. 청기사의 엑스시온은 현재 개발된 것 중에서는 최 강일 것이야. 그러니 그것과노획한 엑스시온의 연구를 함께 병행해 나간다면 어 쩌면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현재 연구를 진행중인 것이 지. 전에 청기사의 경우 설계도가 있었기에 그걸 토대로 차근차근 실 험용 엑스시온을 만들면서 연구를 해 나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얘 기가 완전히 다르다. 후면 마법진에 대한 데이터가 하나도 없는 상태 에서 무조건 만들고 볼수는 없는 것이지, 너무무리한 과욕을부리다 가는 아무 것도 안 돼. 오히려 피해만가중시킬 뿐이지. 알겠느냐?' "예." 지금 크라레스 제국은 1.3이라는 강력한 출력을 내는 타이탄들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의 군사력을 10년쯤 전에 가 지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세계 최강의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주변의 국가들이 그것을 상회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었다. 가상적인 적국이라고 할 수 있는 코린트나 크루마의 경우 출력 1.5 이상 급의 타이탄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수적으로는 크 라레스 쪽의 타이탄 보유량이 조금 더 많았지만,성능 면에서는 상대 국들이 월등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비록 크라레스 제국이 최강의 타이탄인 청기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드래곤 하트를 더 이상구할수 없었기에 지속적인 생산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드래곤을 때려 잡아 그것을 구하는 것에도 문제가 따랐 다 드래곤을 잡기가 매우 힘이 들 뿐더러,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가 드래곤인데 그가 자신의 동족인 드래곤을 학살하는 것을 묵인할지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에 크라레스는 드래곤 하트 같은 희귀한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새로운 엑스시온을 개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크 라레스의 마법 기술로 봤을 때 새로운 엑스시온을 독자적으로 개발 할수 있는능력은 별로 없었다. 거의 90퍼센트 이상 완성되어 있었던 청기사의 엑스시온 설계도를 가지고도 완벽하게 완성해 내는 데 수십 년이 걸렸을 정도로 다른 나 라에 비해 엑스시온 개발 능력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 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고 있을 수도 없기 에 토지에르는 전선에서 노 획한 타이탄들의 엑스시온을 복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리를 하 게 되었다. 토지에르는 1차 전쟁이 끝난 후 전선에서 노획한 타이탄 중에서 가 장 강력한 것들을 모아 봤지만, 정작 필요한 엑스시온을 탑재한 타이 탄은노획된 것이 없었다. 코린트가 1.2이하의 출력을 내는 미네르 급 이나 미노바 급을 주력 타이탄으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1.5의 출력을 내는 미노바-P도 있기는 했지만,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발렌시아드 기사단은 전장에 투입되지 않았기에 노획 자체가 불가능 했던 것이다. 1.5정도의 엑스시온만노획되었어도 1.3을 만들던 기술이 있으니 어느 정도 극복할 가능성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1.5는 아예 없었 고, 덩그러니 붉은색 타이탄만 우람한 덩치를자랑하며 여기 이곳 실 험실에 놓여 있는 것이다. 거대한 붉은 타이탄에서 기사가 탑승하는 의자를 해체한 후 안을 들여다 본 토지에르는 엄청난 엑스시온의 크기와 거기에 그려져 있 는 복잡한 마법진을 보고 절망감을 느꼈었다. 1.5 정도라면 겨우 0.2 정도밖에 안 되는 출력 차이였기에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할 것으로 여겼었는데, 이건 최소한으로 잡아도 2.0은 확실하게 넘는 진품이었 던 것이다 대마법사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몇 가지 마법진들,그 마법진이 무 엇을 뜻하는지도 모른 채 그대로 복사했다가는 장차 무슨 사태를 당 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후면에 그려져 있을 마법진은 아예 추측도 하기 힘든 상황이 아닌가?만약 실험 도면을 입수했다면 작은 실험용 엑스시온들을 만들면서 계속되는 실험을 통해 그 지식을 간 접 흡수할 수도 있으련만,완제품만 들어와서는 그게 말이 안 되는 것 이다. 그리고 엑스시온이 마법을 가장 잘 전달하는 금속인 크로네에 감싸 져서 완전히 그것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것도 가장 큰문제점 가 운데 하나였다. 타이탄을 제작할 때 엑스시온에 생명을 불어 넣은 후 타이탄에 집어 넣고 크로네를 부어서 완전히 한 덩어리로 만들게 된 다. 그 결과로 타이탄에서 엑스시온을 완벽하게 해체할 방법이 없게 되는 것이다. 크로네를 녹인다면 생명이 없는 엑스시온의 외장을 감싸고 있는 금(Gold)도 함께 녹아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금에는 복잡한 마법진 이 그려져 있었다. 그 말은 엑스시온의 위쪽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은 어느 정도 복사를 해 낸다고 하더라도 크로네와 달라붙어 있는 쪽의 마법진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는 도저히 알아 낼 길이 없다는 것과 같 았다. "젠장,골치 아프군‥‥‥‥ 무려 6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하고 나서야 고작 몇 겹으로 중복되어 그려져 있는 마법진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들 의 대부분은 토지에르가 익히 알고 있던 마법진이었다. 그 부분을 분 리시키고 난 남은 마법진들을 하나하나 해체하여 그것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파악해 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작업은 대단히 힘들었 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연구 자체가 완전히 제자리 걸음만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님." "뭐냐?" "이럴 것이 아니라 알카사스에서 1.7짜리 엑스시온을하나수입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그거라면 어느 정도 연구만 하면 복사도 가능하 지 않을까요?" 제자의 이번 의견은 좨나타당성이 있었기에 토지에르는오랜 시간 고심을 한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 알카사스는 1.25 이상의 엑스시온은 수출을 금지하고 있 지 않느냐?" "하지만 아르곤 제국에는 판매를 했었지 않습니까? 단 한 개뿐이었 지만 말이지요." "흐음‥‥‥‥ 글쎄다. 아르곤에 팔았으니까 우리에게도 팔아야 한다 고 우길 수는 없지. 아르곤이야그걸 팔았다고 해도 생산할 능력이 없 으니까 상관없겠지만,우리들은 그것을 생산할 능력이 있지 않느냐? 만약 알카사스에서 이쪽에 수출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3루마나 코린 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건 그렇겠군요, 스승님." "그것 때문에 내가 이 엑스시온을 잡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야 하 지만 지금의 연구 진척 상황으로 봤을 때 과연 내 생전에 이것을 해독 이나 해 낼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구나." 하지만 한참 궁리를 하던 다론은 교활한 표정으로 토지에르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는 것은 어 떻겠습니까, 스승님 ?' "어떻게 말이냐f' "만약 판매를 하지 않는다면 협박을 하는 것은 어떨까요?본국의 군 사력은 알카사스보다 훨씬 우위에 있습니다. 일단 밑져 봐야 본전이 니까 협박을 해 보는 것도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알카사스의 속국인 엔테미어 공국 근처에서 대규모 기동 훈련을 하면서 넌지시 압력을 가해 보라는 것이냐?' "예,그렇죠,스승님. 상대가 들어 주면 좋고,못 하겠다고 하면 그만 이고 말이죠. 하지만 여러 개도 아니고 1.7파리 엑스시온 한 개만 비 밀리에 팔라고 한다면 못들어 줄부탁도아니지 않습니까?' "글쎄‥‥‥ 한번 생각을 해 보자꾸나." 토지에르가 제자의 의견을 어느 정도 긍적적으로 검토하고 있을 때 젊은 마법사 한 명이 다가와서 조용하게, 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황궁 경비실로부터 연락이 들어와 있사옵니다,전하." "그래?무슨 일이지?' "예,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전하를 뵙기를 청 한다고 하옵니다. 우선 기사단에 연락을 했으니까 진위 여부를 가린 후사실이라면 이곳으로 안내할 것이옵니다. "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라고? 으웅? 그렇다면 그 드래‥‥‥‥ 에구구, 큰일 나기 전에 빨리 가봐야겠군." 제자의 의견을궁리한다고 정신이 없었기에 대충들어 넘기려고 했 던 토지에르는불현듯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가 누구를뜻하는지 떠 오르자 허둥지둥 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지에르가 재빨리 건물 밖으로 달려나갔을 때, 저 멀리서 붉은 머 리카락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청년이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토지에르는 재빨리 자신이 지을수 있는 한 최대 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상대에게 다가가 깍듯이 인사를 보 냈다. "안녕하셨습니까?아르티어스 님 이렇게 먼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 까?그냥 치레아에서 부르겼으면 제가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갔을 텐 데 말입니다. " 토지에르로서는 파격적일 정도로 아부성이 심한 발언이었다. 아르 티어스를 안내해 온 기사들이 토지에르의 이런 모습을 보고 속으로 키득거리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자신을 향한 토지에르의 태도가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뭐 자네같이 바쁜 사람이 치레아까지 달려을 필요는 없지. 그건 그 렇고내가 여기에 온 것은내 아들 녀석 때문이야." "예?그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들 녀석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그걸 물어 보려고 왔단 말일세." "아,예.험험‥‥ 이보게,자네들은이제볼일보러가보게." 토지에르가 헛기침을하며 점잖게 말하자 기사들은 즉각 인사를 건 넨 후 자신들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 버렸다. 토지에르는 기사들이 멀 리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낮은목소리로 말했다. "대공 전하께선 폐하의 칙명을 받아 미란 국가 연합으로 가셨습니 다. " 토지에르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미란에?거기에는 왜?" "예,아리아스 왕자 전하의 호위 때문이지요." "쯧, 왕자 하나를 호위하는 데 왜 내 아들이 가야 하지? 여기는 그렇 게 인재가 없다는 말이냐?' "저,그게 아니고 아주 비밀을 요하는 일인 데다가 위험성이 높기 때 문에 그렇습니다. 몇 명 되지 않는 기사들을가지고모든 위험을 감수 해야 하거든요. 사실 대공 전하께서도 겨우 세 명의 기사밖에 데려가 지 않으셨구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면서 토지에르를 노려봤 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토지에르의 머리 속에서는 위험 경보가 울려 퍼졌다. 말을조금 잘못 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느긴 것이다. 토지에 르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지으며 말했다. "에에,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기사들을 보냈을 때 얘기지 마스터 급 의 실력을 지니신 전하라면 얘기가 틀리지요. 원래는 스바시에 대공 전하께서 오랜만에 휴양이나 하실 겸 가실 예정이었습니다만, 전하 께서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치레아 대공께 부탁을 하신 것입죠. 아마도 지금쯤 대공 전하께옵서는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계실 것 입니다. 겨우 날파리 몇 마리쯤 날아든다고 해서 전하의 안전을 귀찮 게라도 할수 있겠습니까?헤헤‥‥‥‥" 그러나 미소를 떤 토지에르의 얼굴을 슬며시 노려보며 아르티어스 가 윽박질렀다. "흐음,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결코, 저는 아르티어스 님께 거짓말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가급적이면 진실만을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습 니다. 믿어 주십시오." "흐으음‥‥‥‥ 신음을 흘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토지에르 는 속으로 하지만 진실을 말하지 않고 건너 뛴 적은 많습죠. 모르는 것이 좋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는 것이 확실한 아르 티어스를 향해 토지에르는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제 말을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미란에 가셔서 아드님과 함 께 휴양이나 즐기다가 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치레아 공국의 기 반을 새롭게 다지신다고 힘드셨을 텐데, 이 기회에 푹 쉬시다가 오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럴까?' "아무렴요, 그러셔야죠. 원래 아드님하고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계 시는 것도 남들이 보기에 좋지 않잖습니까?헤헤헤‥‥‥‥ 아르티어스는그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면서 마치 자 신은 가기 싫은데 억지로 밀려서 간다는듯둘러 댔다. "으음,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한번 가 볼까?" "예. 부자간에는 꼭 붙어 계시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도좋습지요. 그 림 마법진을준비시키겠습니다. " "아니 , 그럴 필요는 없고, 좌표만 일러 주게." 아르티어스는 토지에르가 좌표를 말하자마자 곧장 공간을 이동해 서 사라져 버렸다. 토지에르는 아르티어스가 사라지자 얼굴 가득 짓고 있던 미소를 싹 지워 버린 후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놀라을 정도로 빠른 표정 변 화였다. "제기랄!요즘 안 그래도 일이 꼬이는데 드래곤까지 말썽이라니! 내 가 이 나이에 노망 난 드래곤 비위나 맞추고 있어야 하다니, 나 자신 이 너무 한심한 것 같구먼." 투덜거리고 있던 토지에르는문득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외쳤다.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작전 회의가 시작될 때가 되었는데,딴 데 정신이 팔려 있었군." 황태자비의 생신 축하 관계로 이번 달에 있어야 할 전체 회의는 생 략되었다. 대신 황제를 포함한 최고 측근들만의 소규모 회의가 계획 되어 있었던 것이다. 토지에르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던 비행 마법 까지 써서 회의 장소로 날아갔지만, 이미 그곳에는모두 다 모여서 그 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지에르는 루빈스키 대공이 탐탁하지 않다는 눈초리로 노려보는 가운데 식은땀을 흘리며 그곳에 모여 있는 인물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자신에게 할당되어 있는 자리를 찾아 재빨리 앉았다. 토지에르가 앉은 원형 탁자에는 겨우 다섯 개의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앉게 되어 있는 다섯 명의 인물들은 모두 다 크라레스 제국을 이끌어 나가는 최고의 권력자들이었다. 토지에르가 자리에 앉자 비대하게 생긴 인물이 입을 열었다. 바로 그가 지그발트 폰 안티노스 후작으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계급이 낮았다. 원래는 정보를 관장하는 안티노스 후 작이 토지에르보다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3국 전쟁을 승리 로 이끈 공훈을 인정받아 토지에르가 공작으로 승급해 버리자 서로 의 위치가 뒤바픽었던 것이다. 안티노스 후작은 우선 좌중을 쭉 둘러본 후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 했다. "이번 달에는 황태자비 전하의 생신 축하 무도회가 열리고 있어 회 의가 없을 계획이었지만 긴급 정보가 입수된 관계로 이렇게 회의를 주선하게 되었습니다. 치레아 공작 전하께서는 칙명에 의해 미란 국 가 연합에 가 계신 관계로 회의에 불참하셨습니다. " 그런 후 안티노스 후작은 뒤를 돌아보며 대기하고 있는 노 마법사 에게 지시했다. "준비해 둔 영상을 비춰 보도록,!" 그러자 노 마법사는 원탁 위에 놓여 있던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넓 은 판에 다가가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마법진 위로 붉은색 타이탄 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은 코린트가 자랑하는 신형 타이탄인 적기 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자세히 보면 조금 달랐다. 두툼한 장갑을 가 지고 있는 데다가크고 단단해 보이는사각형의 방패를 들고 있었다. 마법진을 발동시킨 노 마법사는 인사를 건넨 후 밖으로 나가 버렸 다. 안티노스후작은 마법사가나간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자료는 어제 첩보망에 걸린 것입니다. 코린트의 근위대 전용 기 동 연습장에서 간신히 첩자들이 포착한 것이지요." "자네의 그 말은 이것이 코란 근위대의 신형 근위 타이탄이라는 말 인가?" 탁자 위에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붉은 타이탄을 바라보며 루빈 스키 대공이 말하자안티노스후작은고개를끄덕이며 수긍했다. "예, 그렇사옵니다, 대공 전하, 전체적인 외형으로 추리해 봤을 때 적기사의 신형 모델인 것이 화실하옵니다. " 루빈스키 대공은 영상을노려보며 내뱉듯 말했다. "놀라운 일이군." "대공 전하,사실 이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적기사가 일 단 개발된 이상그것이 실전 배치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토지에르의 말에 루빈스키는 토지에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 했다. "그렇다면 경은 이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말이오?' "예, 전하. 본국에서도 카프록시아를 원형으로 하여 다섯 가지 모델 이 추가로 생산되었습니다. 엑스시온을 새로 만드는 것이 어려운 것 이지,타이탄의 외형을바꾸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것이 벌써부터 실전 배치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노획한 적기사를 두고 추론해 봤을 때 적기사 2기를 생산할 자원으로 혹기사 3기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작업인데‥‥‥신형이 개발되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본격적 으로 흑기사를 적기사로 대체할 만큼 막대한 액수의 자금이 확보되 었다는 것이겠죠. 그건 그렇고,안티노스 경." 토지에르의 물음에 안티노스는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며 답했다. "예, 공작 전하." "정보국에서는 코린트가 저 신형 적기사를 몇 기나 실전에 배치했다 고보는가요?" 토지에르 공작의 물음에 안티노스 후작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30기 정도로추측됩니다. 그보다 많을수도,혹은 적을수도 있습니다만 30기 정도가 정확한추측일 것입니다. " 안티노스후작의 말에 루빈스키 공작이 놀라서 말했다. "30기 씩이나?그렇다면 그런 추측이 나오게 된 배경은 원가?정확한 추리인가?" "예,사실상 타이탄의 숫자는 그 나라에서 발표하지 않는 한 정확한 숫자를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물며 코린트의 경우 적기사 의 신 로델 생산자체를 숨기고 있었을 정도니까 두말할 여지가 없습 니다. 그렇기에 그 생산 대수를 추측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 다. 하지만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참고로 한 결과 어느 정도 숫자를 추 측하게 된 것이지요." "발렌시아드 기사단이?발렌시아드 기사단과 적기사가 무슨 연관성 이 있지?" "예, 물론 생산된 적기사가 발렌시아드 기사단에 배치되는 것은 아 닙니다. 하지만 적기사가 근위대에 배치된다면, 여태까지 근위대에 있었던 흑기사는 다른 곳으로 돌려지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 때문 에 저는 근위대보다는 발렌시아드 기사단 쪽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고,다행히 그 변화를 잡아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 안티노스 후작은 좌중을 한 번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발렌시아드 기사단은 서서히 증강되기 시작해서 지금은 20명의 새 로운 기사들이 합류했습니다. 물론 오너가 아닌 정찰조가 보강되었 을 거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발렌시아드 기사단으로 보내진 기 사 20명은 모두 다 일류들입니다. 그렇기에 발렌시아드 기사단의 타 이탄 총수가 10기에서 30기로 증강되었다고 예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30기로 중강되었느냐 하는 것이 중 요합니다. 3국 전쟁 후 코린트는 약화된 근위 기사단을 보강하기 위 해 혹기사를 추가 생산했을 것은 당연합니다 정확한 흑기사의 추가 생산량은 추측이 불가능하지만, 근위 기사단에 재편성된 인원은 30 명 가량이었습니다. 그 말은 혹기사가 30기 정도로 급속히 증강되었 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30기로 증강되었으니 아마 도 근위 기사단의 혹기사들이 모두 다 그쪽으로 넘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흑기사가 빠져 나가고 난 근위 기사단에는그만큼의 적기사들이 그 공백을 채웠을 겁니다. " 안티노스후작의 보고가 상당히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있는 것이 화 실하자,모두들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전쟁에서 이미 겪어 봤지 만 적기사의 파워는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적기사 2기 정도가 합치면 청기사 1기를 상대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나마 지난번 전쟁에서 적기사 2기가 손쉽게 박살이 난 것도, 그들을 상대한 사람이 치레아 대공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다른 근위대 대원들이었다면 치레아 대공처럼 그들을 손쉽게 제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코린트가 지금처럼 엄청난 속도로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해서 근위 대를 적기사로 완전히 채우고, 흑기사를 대량 생산 한다면 현재 37국 간의 군사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가 된다면 코린 트를 향해 칼을 들이밀고, 또 패배에 가까운 치욕을 선물했던 크루마 와 크라레스가 첫 번째 분풀이 대상이 되어 줘야 할 것은분명했다. 토지에르는 이제 이 보고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 자창백한 어조로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폐하,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정보이옵니다. 만약 적기사가 진짜로 그렇게 많은 수가 생산 배치되었다면,또 코린트가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조만간 3국 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사옵니다. " 토지에르의 말에 루빈스키 또한 찬성했다. "폐하, 토지에르 경의 말이 맞사옵니다. 현재의 3국 체제는 코린트 의 군사력보다 크루마와 본국의 군사력의 합계가 더 많기에 유지되 고 있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본국과 크루마의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 코린트의 힘이 우위에 서는 그날,3국 체제는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 분명하옵니다. 폐하,단안을 내리셔야 할 때이옵니다. 시일이 지나면 어쩌면 너무늦어 버릴지도모르옵니다. " 이번에는 안티노스 후작이 말을 이었다. "폐하,하지만 아직까지는 시간이 조금 있사옵니다. 우선 제가 보고 드린 그 정보가 정확한지부터 확실히 검증을 해야만 하옵니다. 그런 후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손을 써도 늦지는 않을 것이 옵니다. " 세 명의 중신들의 의견을모두를어 본후 황제는 결정을 내렸다. "좀더 확실한 정보를 최대한빨리 입수하도록 해 보게나." "옛, 폐하." 황제는 시선을 안티노스 후작에게서 토지에르 공작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케프라 공작?' "옛,폐하." "새로운 엑스시온 개발 계획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예,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거의 진척이 없사옵니다. " 고개를푹숙이며 대답하는토지에르를 향해 황제는짜증스럽게 말 했다. "7년이라는 시간을 줬는데, 아직도 진척이 없다고? 짐이 그대에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고하지는 않았네. 노획한 적기사2기까지 참고 하라고 보내 줬지 않던가?" "폐하, 본국에 축적되어 있는 엑스시온 제작 기술을 훨씬 초월하는 적기사의 엑스시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사옵니다. 엑스시온의 위 부분에 드러나 있는 마법진은 엑스시온에 새겨진 수많은 마법진 들중에서 겨우20퍼센트정도‥‥‥ 위 부분에드러나있는20퍼센트 만으로 나머지 50퍼센트를 짐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옵니다. " "그렇다면 어쩌자는 것인가?코린트는 모든 타이탄을 1.5 이상의 출 력으로 상숭시켰다고 하지 않는가? 거기에다가 적기사까지 30기가 생산되었다면,본국과의 전력 차이는 더욱 벌어지지 않겠는가?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3국 간의 군사적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 본국이 멸망하는 날 이 될 것이라는 것을모르는가?" "그래서 한가지 대안을 세운 것이 있사옵니다,폐하." "말해 보라." "예,알카사스에서 그것을 구입하는 것은 어떠하올는지요?' "알카사스에서?안티노스 경, 알카사스에서 1.5 이상의 출력을 내는 엑스시온을 판매할까?" 황제의 말에 안티노스 후작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신중하게 답변 했다. "폐하, 알카사스에서 엑스시온을 판매하고는 있사오나,그런 고출력 엑스시온은 판매를 금하고 있사옵니다. " "폐하, 물론 판매를 금하고 있다는 것은 소신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알카사스에서 1.7짜리 엑스시온을 아르곤 제국에 판매한 전 례가 있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많이 구입할 필요도 없 고 단 한 개만 비밀리에 구입하면 되옵니다. 갖은수단을 다동원한다 면 한 개 정도야 어떻게 구입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 "안티노스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예, 폐하. 단 한 개만 구입한다면 가능성도 있을 것이옵니다. 본국 의 군사력이 코린트에는 못 미치지만 알카사스보다는 월등하게 우위 를 점하고 있사옵니다. 침략하겠다고 협박을 한다면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갈지도 모르겠사오나‥‥‥‥만약 그것이 외부에 발설된다면 코린 트가수단 방법을가리지 않고 저지해 올 것이 분명하옵니다. " "그럴지도모르지 루빈스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알카사스에 웬만한 협박은 아예 통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알카사스는 엄청난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들의 뒤에는 코린트 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사옵니다. 협박보다는 회유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물론 알카사스 국왕이나 의회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 라, 엑스시온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고위 마법사들을 상대로 공작을 벌인다면 성과가 있을지도 모르옵니다. " "경의 의견이 옳은 것 같군. 안티노스 경." "옛,폐하." "첩보원들을보내서 알카사스의 마법사들을 회유해 보라." "옛,폐하." 이번에는루빈스키 대공이 황제를 향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폐하,본국의 모든 타이탄을 카프록시아 급으로 대체하는 데 6년이 라는 시간이 걸렸사옵니다. 그런데 1.5급의 엑스시온을 생산하는 방 법을 터득해서 지금부터 생산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코린트를 따라 잡으려면 또다시 6년을 허비해야만 하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코린트가가만히 있을 틱이 없사옵니다 그들은 지난 번 전쟁에서 타이탄을고급으로등급 향상시키는 것에 게을리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 이옵니다. 코린트는 본국보다 타이탄 제작 기술에서 월등하게 우위 를 점하고 있사옵니다. 그들을 타이탄의 성능에서 이겨 보겠다는 것 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사료되옵니다. " "그렇다면 경에게는다른 방법이라도 있는가?" "예,폐하. 동맹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옵니다. 과거 코린트가 어이없 이 무너졌던 것도 동맹의 힘을 너무 하찮게 본 것이 원인이라 사료되 옵니다. 코린트 동맹군의 타이탄 200여 기가 아주 간단하게 전멸 당 하지 않았나이까? 그 때문에 본국에서는 카프록시아의 신 모델인 테리아를 동맹국에 수출하고 있사옵니다. 동맹국이 강대해질수록 본국이 전시에 동원할 수 있는 고급 타이탄의 숫자는 중대된다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그리 고 더불어 코린트의 동맹국들을 점차적으로 해체시켜 나가야 할 것 이옵니다. 그렇게 한다면 코린트 자체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능히 군 사적 균형을 이룰수 있을 것이옵니다. " "그렇다면 경의 말은 코린트의 동맹국들을 치자는 말인가? 그렇게 한다면 코린트가 가만히 있을까?" "물론 본국이 직접 침공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하지 만 타국을 이용한다면 상관이 없을 것이옵니다. 예를 들어서 코린트 의 동맹국인 토리아 왕국을 치는 데 트루비아를 이용한다면 코린트 가 상관할 리가 없을 것이옵니다. 예로부터 코린트는 약소국들 간의 다툼에는 별로 참견을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옵니다. " "트루비아를? 하지만 트루비아의 군사력은 형편없지 않은가?본국 에서 전후에 그들을 독립시켜 주고,그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유지할 때까지 2개 사단의 병력까지 지원해 줬었지 않는가? 이제 간신히 안 정을유지한국가에 어떻게 타국을 침공할 만한 여력이 있겠는가?' 의아해 하는 황제를 향해 루빈스키 대공은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 어 보였다. "아마도 테리아 4기 정도를 더 보충해 준다면 충분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테리아만 10기가 되옵니다. 거기에 안토로스 급도 2기가 남아 있으니까 토리아를 정복한 후, 새로운 영토의 방어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옵니다. " 테리아는 카프록시아의 수출용 모델이었다. 크라레스는 자국의 타 이탄 증강 작업이 완료된 후 동맹국에도 신형 타이탄을 수출하여 동 맹국들의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제작된 것이 카프록시 아7인 테리아였다. 테리아의 외형은 국적 식별이 어렵도록 안토로 스 급 타이탄과 유사하게 만들어졌기에 카프록시아 급들이 가지고 있는 원형의 방패가 아닌 모서리가 각이 진 사각형의 방패를 채택하 고 있었다. 크라레스는 테리아를 자신들의 동맹국이 된 8개 국에 총 16기를 수 출한 상태였고,그 중에서 트루비아 왕국에 6기를 준 상태였다. 미란 국가 연합에는 아직 수출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과거 미란이 크라레 스에 군사 원조를해 준 점과둘째 왕자의 결혼등두나라의 사이가 매 우 친밀해지고 있었기에 조만간수출협약이 체결될 것은분명했다. "그것 참 좋은 의견이로다. 그렇다면 루빈스키 공은 코린트의 동맹 국들을맡으라" "옛,폐하." "그리고 안티노스 후작은 알카사스에서 고성능 엑스시온을 수입할 수 있는지 접촉해 보라." "옛,폐하." 치레아 대공을 감시하라 "여기야,자 긴장을 풀고 들어가게. 자네한테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니 까 말이야," 제스터는 상대의 미소 띤 얼굴을 불안한 표정으로 한 번 더 바라본 후 천천히 문을 열었다. 대단히 호화로우면서도 넓은 방,과거 크라레 스 왕국의 수도였던 크로돈에 있는 왕궁에 비하면 엄청나게 화려했 다. 하지만 제스터는 이런 화려함에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그가 여태 껏 근무하고 있었던 치레아의 대공이 거처하는 궁전도 과거 치레아 왕국의 왕궁이었던 만큼그에 못지 않게 화려했기 때문이다. 방 안에는 화려한 제복을 입은 젊은이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깊숙 이 누이고 앉아 있었다. 그는 포도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다가 제 스터가 들어오는 것을 잔잔한 눈빛으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제 스터가 앉아야 할지 그대로 서 있어야 할지 망설이며 어색한 몸짓을 보이자 포도주 잔을 탁자에 내려 놓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에 앉게나." 황태자비 생신 무도회는 하룻저녁에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낮에는 잠도 보충해야 했고, 또 체력도 비축해 둬야 했다. 제스터는 자신에게 할당된 방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던 도중 난데 없이 칼을 들이미는 괴한에게 끽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끌려왔던 것 이다. 제스터는 일단 상대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정신만 잘 차리고 있으면 희망이 보일 가능성도 있었 다. 그렇기에 제스터는 상대가 앉아 있는 탁자의 반대편에 서서 그의 허리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상대는 무장을 하 고 있었다. 제스터는 일단 상대가 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낸 후,포도주 잔을 쥐고 있는 상대의 손을 슬쩍 바라봤다. 손바닥 부분에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열심히 검술 공부를 한 손이 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제스터는 부하도 없이 자신과 일 대 일로 앉아 있으면서 도 흔들림 없이 자신감 넘치는 눈을 유지하고 있는 상대의 수련 정도 가 상당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을 이쪽으로 납치해 온 인물도 감히 반항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였던 점을 생각한다면, 그런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저 인물의 정체가 한편으로는 매우 궁 금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다네. 나는 자네를 해치기 위해서 이곳으 로초청한 것이 아니야. 참,내 소개를 먼저 하는 것이 순서겠지?나는 엘리안폰그레지에트라고 한다네." 상대의 말에 제스터의 고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숙여졌다. 그가 여태껏 받아온교육의 성과였다.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황태자 전하. 소신은 제스터 크로스란이 라하옵니다. " "아아,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할 필요는 없어. 자네가 치레아 대공의 심복이라지?" "심복은 아니옵니다,전하. 그냥 시종일 뿐이옵니다. " 제스터의 답변에 황태자는웃음을터뜨리며 호쾌하게 말했다. "허허,아직 어린 나이인데 벌써부터 겸손의 미덕을 알고 있구먼. 자 네도한잔들겠나?" "영광이옵니다, 전하." 황태자는 손수 잔에 포도주를 따라 주며 말했다. "이렇게 자네를 부르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던 나를 이해해 주게나. 내가자네를 부른 것 은한가지 물어 볼 것이 있기 때문이야." "무엇이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의 황가(로툰)에 대한 충성심은 어떤 가?" 황태자의 말에 제스터는 망설일 것도 없이 즉시 답했다. "절대적이옵니다, 전하. 명예로운 기사를 꿈꾸는 저에게 황가에 대 한충성심은 저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이 변함이 없사옵니다. " "그렇게 말해 주다니 내 마음이 흡족하구먼. 그렇다면 내 한가지 물 어 보겠네, 자네가모시고 있는 대공에 대한 충성심과 황가에 대한 충 성심이 서로 어긋난다면 어느 쪽을 우선으로 하겠는가?' 이 순간,제스터의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이 질문을 하는 상대는 황실의 황태자,그렇다면 그 대답은 당연히 상대의 구미에 맞 추는 것이 중요했다. 그에게는 로체스터 공작으로부터 부여받은 임 무가 최우선이었다. 그 임무를 이행하려면 먼저 살아 있어야만 했다. "당연히 황가이옵니다. 기사에게 있어 충성심은 최고의 덕목이며 선 택의 여지는 없다고배웠고,또그렇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 모범 답안같은 대답에 황태자는 얼굴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대 같은 젊은이들이 있는 한 황실과 크라레스는 영원할 것이야. 내 그대에게 황태자로서 특별히 한가지 부탁할 것이 있네. 들어 주겠 나?" 제스터는 황태자의 말이 단순한 '부탁' 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 부탁을 거절한다면 어쩌면 행방 불명으로 처리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황태자가 그를 비밀리에 이곳으 로 납치해 왔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생명을다바쳐서라도 명령을따르겠나이다. " 황태자의 얼굴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으로보아 제스터의 말은 상대를 매우 기쁘게 해 준 것 같았다. "치레아 대공을 감시해 주게. 그리고 그녀의 모든 행동을 모두 나에 게 보고하게나." 황태자의 부탁은 제스터를 놀라게 했다. 이 순간 제스터의 머리 속 에는 온갖 가능성들이 줄을 이어 떠오르고 있었다. 황태자가 대공의 감시를 명한다는 것은 대공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가 아는 한 치레아 대공은 뛰어난무인이었고또 현명한 통치자였다. 만약 그가 코린트의 국민이 아닌 크라레스의 국민이었다면 그녀를 우상과 같이 숭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를 황실에서 믿지 못한 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했기에 갖은 생각들이 다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얼굴 표정에 드러난 것을 보고 황태자는 씁쓰름한 미소 를 지으며 말했다. "왜 그러는가?" "솔직히 말씀 드린다면‥‥‥ 너무나 의외의 명령이기 때문이옵니다, 전하. 물론 명령이시라면 수행하겠사옵니다. " 제스터의 말에 황태자의 표정은환하게 밝아졌다. 원래가 기사들이 라면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기에 아주 불합리한 명령이 아니라면 명령에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기에 황태자 는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제스터 같은 아직 세파에 찌들지 않은 젊은수련 기사들을자신의 첩자로서 이용하려고 계획한 것이었다. "고맙네. 그대의 작은 노고가 황실의 안위에 커다란 보탬이 될 것이 다. 자네가 나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 준다면 3년 이내로 기사로 책 봉될 수 있도록내가 힘써 보겠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옵니다.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 "아아, 그런 말은 하지 말게나.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를 위해 힘 써 주었다면 그에 따른보상은 해 줘야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보고는 어떻게 올리면 되겠사옵니까?' "아,상세한부분은 데이더스 백작에게 지시를 받으면 될 거야." "예,전하." "내가 자네를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 두고 있었군. 데이더스의 보고 로는 애인과 함께 왔다고 하던데,그녀를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 면 안 되겠지?" "그럼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전하." 제스터는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신을 납치해 온 기사,즉 데이 더스 백작에게서 보고를하는 방법 외에도 많은 것을 알아 낼 수 있었 다. 그러나 제스터로는 아쉽게도 이번 일은 치레아 공작의 신뢰도와 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제스터가 가장 추잡하다고 생각하는 일,즉 황태자의 권력 강화에 관계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황태자는 무술 수련을 위해 오랜 시간 크루마에 있었고,또 부인도 크루마에서 얻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황태자의 지지 세력은 매우 미 미한 상태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계 정세 덕분에 황태자가 돌아 오지 못할지도 모르기에 이미 두 명의 예비 후보가 책정되었고,교육 도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명의 경쟁자들은 여태 껏 크라레스에 있었던 강점을 살려 저마다 자신들의 지지 세력을 조 금씩 키워 나가고 있는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태자의 입장에서 가장 걸리는 인물들이 바로 제국의 최고 권력자들이었다. 루빈스키 폰 스바시에 대공, 다크 폰 치레아 대공, 토지에르 폰 케프라 공작‥‥‥‥ 바로 이 세 명이 크라레스 최고의 권력 자들이었다. 당연히 이들이 지지하는 인물이 다음의 황제가 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황태자는 그 세 중신들의 행보에 관심을 곤두세우게 된 것이었다. 제스터가 나간 후 한참 지나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 왔다. "들어오게." "예." 소리를 죽여 조심해서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황태자의 심복인 데이더스였다. 그는 제스터를바래다 준다음즉시 돌아온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는 않았나?" "예,전하. 조심해서 처리했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사옵니다. " "좋아, 수고했네." "감사하옵니다, 전하." "오늘 저녁쯤 손님이 올 거야. 그들이 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위험 하니 자네가 그들을 맡아 주겠나?" "예,전하 " "그들이 누군지는 나도 잘 몰라. 그것 때문에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 했지. 무크 시에 가면 드래이크라는 여관이 있을 거야. 내일 아침 여 덟 시에 그곳에 가서 포도주와 맥주를 동시에 주문하고 앉아 있으면 누군가가 말을 걸 거야. '크라레스의 여름은 정말 덥군요. 그것 때문 에 아침부터 맥주를 드시는 모양이지요?그런데 왜 포도주를 함쩨 드 시는 겁니까? 서로 짝이 맞지 않을 텐데.'하고 상대가 말하면 자네는 '포도주를 마시고 맥주로 입가심을 하면 더위를 덜 탄다고 해서요.' 하고 답하면 돼. 그러면 바로 자기 소개를 할 걸세. 오기로 되어 있는 사람의 이름은 워렌이야. 알겠나?" 데이더스는 황태자의 말에서 손님들이 아르곤을 경유하여 입국한 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크 시는동쪽의 아르곤으로 뻗어 있는 넓은 도로가 시작되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황태자의 말을 머리 속에 잘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답했다. "예,전하." "자네는 그를 데려다가자네 집에 숨겨 놓으면 돼. 이 일은 철저하게 비밀이 지켜져야 해, 잘 해 낼 수 있겠나?" "예,전하. 최선을다하겠습니다. " "좋아. 참, 워렌 혼자일 가능성은 없고 아마 동행이 있을 테니 그들 을모두다 태우려면 큰마차를가져가야 할 걸세. 알겠나?"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처남이 보내 오는사람들이니까 실례가 되지 않토록주의하게." 처남이라는 말이 나오자 데이더스는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 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황태자의 처남은 미티 베르키아 백작으로 서 베르키아 후작의 장남이었다. 그리고 그 베르키아 가문은 3루마 에서 알아주는 명문 귀족이었다. 황태자의 처남이 된 미티 베르키아 백작은 황태자가 크루마에 인질 로 잡혀 있을 당시 엘프리안 아카데미에서 사귄 아직 나이 새파란 젊 은이였다. 그렇기에 무술 실력이 그렇게 띨어난 것도 아니었고, 때문 에 관직에 나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높은 직위를 차지하기도 힘들 었다. 하지만 그는 크라레스 제국 황태자의 처남이라는,정치적으로봤을 때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도와 준다고 보 내 오는 사람은 황태자의 처남이 구한 사람이 아닌,미네르바가 파견 한 사람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크루마에서도 자신 들과 친한 엘리안 황태자가 황제로 등극한다면 대단한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라레스와 크루마 간에 이상한 공기가 감도는 지금, 아무 리 처남이 돕는 것이라고 해도 황태자가 크루마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만약 그것이 발각된다면 최악의 경우 폐위 당할 위험마저도 안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데이 더스는 긴장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옛,전하." 멍청한 드래곤과 한심한 아들 코린트 제국의 새로운 수도 케락스. 코린트 제2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부유했던 상업 도시에 웅장한 황궁이 들어서고 수도 방어를 위한 보병들과 기병, 그리고 기사단들 이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그규모가 더욱 비대해지고 있었다. "3라레스에 대한 최신 정보가 입수되었사옵니다, 공작 전하." 로체스터 공작이 총사령관의 자리를 움켜쥔 후,정보부를통괄하게 된 베르딘 후작은 아주 깡마른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삭막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전에 그로체스 공작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정보부 때문 에 상당히 고생을 했던 로체스터 공작은 그로체스 공작이 물러난 후 정보부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애를 썼고,그 결실로 맺어진 것 이 바로 이 베르딘 후작이었다. 로체스터 옹작은 베르딘의 그 날카로 운 눈을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 새로운 것이라도 있는가?" 그러자 베르딘은 즉각 대답했다. "예,크라레인 시 외곽에 설치되어 있는 군사통제 구역에 대한 집중 적인 조사를 시행해 본 결과 그곳이 스바스(SWAS) 근위 기사단의 훈 련장임이 밝혀졌사옵니다. 아마도 대단히 넓은 면적으로 추리해 보 건대 타이탄 기동 연습장이 아닌가사료되옵니다. " "그거야 당연하겠지. 그렇게 넓다면 근위 기사단만이 아니라 중앙 기사단의 몇 개 전대가 함께 기동 훈련을 해도충분한 면적이야. 그런 데 왜 그렇게 넓은 곳을근위 기사단혼자만사용하고 있느냐하는 것 이지."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그는고개를숙이며 답했다. "송구스럽사오나 아직 그것까지는 알아 내지 못했사옵니다. 적의 대 비 태세가 워낙 삼엄하기에 내부에 첩자를 몇 번 침투시켜 보았지만 모두들 실패했사옵니다. " "그게 수상하다는 말이야. 크라레스의 근위 타이탄은 청기사(Blue kngh1t). 출력 3.0에 높이 6미터 정도,추정 전투 중량 160톤 내외, 이 상상하기도 힘든 괴물에 대한 데이터는 지난 번 전쟁에서 웬만한 것 은 다 밝혀졌었는데 도대체 윌 더 숨기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안 그 래? 레티안?' 레티안이라는 이 아름다운 중년의 여 마법사는 2년 전에 로체스터 공작의 부관이자 상담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녀의 엄청난 암기력과 뛰어난 판단력은 로체스터 공작에게 대단한 도움이 되고 있었다. 레 티안은 로체스터 공작의 질문에 즉각 대답했다. "아직 청기사의 숫자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사옵니다. 혹 시 그것을숨기려고그 난리를 떠는 것일까요?" "글쎄, 청기사의 숫자는 대략 3기에서 14기 정도겠지. 두 명의 대공 들이 1기씩 가지고 있을 거고, 명색이 근위 타이탄인데 근위 기사단 단장이 1기는 가지고 있을 것 아닌가? 스바스 근위대가 열두 명의 오 너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져 있는 상태니까 최대로 잡 아 봐야 14기겠지. 그런데 겨우 그 숫자를 숨기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그 보안이 너 무 과도하다 이 말이야. 본국의 최신형 적기사ll의 경우에도 그 정도 로 보안을 신경 쓰지는 않고 있지 않나? 어느 나라가 근위 타이탄의 훈련장까지 통제하면서 보안을 유지하느냐 이 말일세. 사실 타이탄 이라는 것은 조종술만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더 이상 타이탄에 탑승 하고 훈련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일종의 거대화된 갑옷 이상의 의 미가 없다고 봐야지. 그래서 그런 훈련 모습따위를통제하고 있는 그 놈들이 더욱수상하게 생각되고 있는 거라네." "전하의 말씀이 옳으시옵니다. "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하는 레티안에게 미소를보낸 후로체스 터 공작은 장교에게로 시선을돌렸다. "참,그 외에는 없나?" "물론 더 있사옵니다. 크라레스의 왕자가 미란에 파견된 것 같사옵 니다.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아마도 정략 결흔을 통해 양국 간의 우 의를 더욱다지기 위해서가 아닌가사료되옵니다. " "뭐? 놀라운 소식이군. 그 사실을 안다면 크루마에서 가만히 있지 않 을 텐데‥‥‥‥ 로체스터 공작은 이 사실을 어떻게 이용할까 맹렬하게 머리를 회전 시켰다. 분명히 이번 일로 인해서 크라레스와 미란,그리고 크루마는 미묘한 갈등 상태에 빠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크루마는 아직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사옵니다. 저회 쪽에 서도 수많은 단편적인 정보들을종합해서 내린 결론이니까요." "그래,왕자의 호위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기사 세 명에 시녀가 한 명 정도인 것으로 보고받았사옵니다. 현재 조사중인데 모두들 전쟁의 신전에 등록되지 않은 관계로 자세한 자 료를 얻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사옵니다. " "크라레스의 기사들은 왜 전쟁의 신전에 가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 군. 그 녀석들은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지?" "그러게 말이옵니다,전하." "미란과 크라레스가 혈맹을 맺는다고 하면 본국에 문제가 될 것이 있을까?" 공작의 물음에 레티안은잠시 생각을 정리한후신중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본국에는 영향이 거의 없을 것이옵니다. 대신 크루마에는 상당한 위협이 될지도 모르겠사옵니다, 전하." 레티안의 의견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공작은 베르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아. 그렇다면 크루마에다가 넌지시 이 사실을 알려 주게나. 미란 내에서 크라레스와 3루마가 한판 붙는다면 아주 재미있게 될지도 모르지. 아마도 왕자의 호위들이니까 어쩌면 근위 기사들이 투입되 었을 거야. 이 기회에 스바스 근위대의 실력이 어떤지 알아 볼 수도 있지 않겠나? 그리고 크루마에 조금의 빛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겠 지 ." "예,즉시 시행하겠사옵니다, 전하." 스테노 네르갈은 이제 두 번째로 마법진 앞에 서서 3라레스에서 오는 귀빈을 마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사 단장은 이미 크라레스에 서 오는 인물들에 대한 비밀을 대충이나마 눈치 채고 있는 스테노에 게 모든 일을 맡기고 있었다. 전에 왕자가 을 때도 그렇게 단단한 다 짐을 받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도착하는 인물은 도대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마중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테노는 이번에 올 인물이 누군지,또 그 수행원들 은 누가 될지 매우궁금해 하며 기다리는중이었다. 이윽고 마법진이 뿌옇게 빛나는 순간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숙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스테노는잠시 멍한상태에 빠 졌다. 남장을 한 여성이 호위 무사를 한 명도 거느리지 않고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정신을 수습해서 멋진 환영의 인사말을 건넸다. "미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스테노는 레이디에 대한 인사법이 그러하듯 다가가서 그녀가 손을 내밀기를 기다렸다. 물론 그녀가 손을 내밀면 손등에 키스하려고 하 는 것이다. "다크는 어디 있지?" 순간스테노는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아니 그는 남자였다. 목소리가 굵직한‥‥‥‥ "예? 다크라니요? 아‥‥‥‥ 먼저 크라레스에서 도착하신 분들 중의 한 분이신 토양이군요. 그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 오십 시오." 스테노는그 미모의 남자를 한참 맞선이 진행중인 대저택으로 안내 했다. 그곳에는 왕자와 그 호위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에 다크라 는 인물이 그곳에 있을가능성이 가장높았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가 스테노의 안내를 받아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팔시온은 재빨리 일어서서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 다. 예전에야 덜떨어진 아르티어스가 오건 말건 별 신경도 쓰지 않았 을 팔시온이었지만, 다크의 실종 사건 때 아르티어스의 참모습을 본 후에도그럴 만한 배짱은 없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아르티어스 님." "흐음‥‥‥‥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약간의 노기를 머금은 눈동자로 세 명의 죄인 을 쭉 훌어봤다. 아르티어스의 눈길을 받은 팔시온과 그 일행들은 이 번 여행 자체가 아르티어스를 따돌린 행동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기에 표정을 태연하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중이기는 했지만 속으로 는 엄청나게 켕기고 있었다. "네 녀석들이 감히 나를 빼고 여행을 떠나?" 아르티어스가 눈을 부라리고 말하자 팔시온이 급히 변명을 시작했 다. 하지만그 변명의 대부분은자신들의 잘못은 아예 없고모든 죄는 다크에게 있다는 팔밀이성 발언이얼다. "그건 절대로, 엄청난, 말도 안 되는 오해십니다요, 아르티어스 님. 저희들은 아르티어스 님과 함께 가자고 전하께 말씀 드렸지만 전하 께서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전하의 그 고집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 니까?그 분의 뜻을 저희들이 어떻게 꺾을 수 있겠습니까?그런 일로 저희를 닦달하신다면 정말이지 억울합니다요." 팔시온이 꾸미는 게 뭔지를 눈치 챈 미디아도 재빨리 끼여 들었다. "팔시온의 말이 맞습니다, 아르티어스 님. 전하께서 그냥 가자고 하 겼다니까요. 저희들에게는 죄가 없다구요." 일행들은 그때부터 이구동성으로 모든 죄를 다크에게 뒤집어씌우 기에 급급했다. 물론 이 일로 인해 다크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간다면 모르지만, 아르티 어스도 다크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한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기에 아르티어스의 로든 분노는 다크에게로 덮어씌우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던 것이다. 이 네 명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스테노는 정신이 어지럽다는 것 을느꼈다. 원래가 기사도라는 것은 충성을 최고의 목표로 한다. 그런 데 여태껏 매우 사내답다고 여겨 왔던 이 치레아 기사단의 기사들이 모든 것을 상관에게,그것도 전하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저쪽에서 숙녀에게 더듬거리며 말을 건네고 있는 덜떨어진 왕자에게 다 뒤집 어씌우는 것을보고 매우큰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얘는 어디 있냐?" "전하께서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떠넘기시고 저쪽에서 낮잠을 주무 시고 계십니다." 팔시온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돌리자금발을축늘어뜨린 소녀 가 옆에 과일과 술병을 두고 잔디밭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르티어스는 그 모습을 보고 불현듯 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자 신은 그녀를 그렇게 걱정해서 행여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쏜살같이 달 려왔건만, 정작 그 당사자는 토지에르의 말대로 저렇듯 평화로운 표 정으로 낮잠에 빠져 있는 것을보자속이 뒤집혔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그 얄미운 낮짝을 한 대 때려 주려고 맹렬한 속도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그 기세가 너무 맹렬했던 탓인지 그 가 채 주먹으로 꽁 쥐어박기도 전에 다크의 눈이 살짝 떠져 버렸다. 다크의 눈이 떠지는 것을 보자 아르티어스는 헛바람을 삼키며 앞으 로 뻗어 나가던 자신의 손을급히 멈췄다. "어라? 여기에는 웬일이에요?그리고 아빠 지금 뭘 하는 거예요?" "에? 엑! 뭐 하기는, 잠자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조금 쓰다듬 어 주려고‥‥‥‥" "요즘은주먹 쥐고쓰다듬어 줘요?" "에에‥‥‥‥ 처음부터 손을 펴서 머리까지 보내는 것보다 주먹을 쥔 편이 공기 저항을 덜 받지 않니? 조금이라도 힘을 절약하는 삶의 지혜 때문이지, 허허허!" 말도 안 되는 변명과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슬쩍 의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다크는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 로 했다 자신에게도 죄가 있는 만큼 괜히 그런 사소한 일을 따지고 들어가봐야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아 르티어스의 자신에 대한 공격을 원천 봉쇄할 무슨 방법이 없는지 열 심히 머리를굴리기 시작했다. "아빠까지 이리로 와 버리면 어떻게 해요?제가 없으면 아빠가 공 국을 다스려야 할 거 아니에요?아빠만 믿고 황제의 부탁을 받아들여 이 리로 왔는데‥‥‥‥" 슬쩍 넘겨 버리는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그녀를 질책하려고 여 기까지 쫓아온 것도 잊어 버리고는,자신이 아들의 믿음을 저버린 것 같은 양심의 가책을느끼며 황급히 얼버무렸다. "네가보고 싶어서 그만‥‥‥‥그리고 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공국은 어 떻게 하고 오신 거 예요?" 다크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슬쩍 그녀의 '오른팔' 에게 팔밀이를 했다. "내가 없어도,카슬레이 녀석 혼자서 잘 할 텐데 뭘." "혼자서 잘 하기는 뭘 잘 해요? 그 녀석은 부하라구요. 치레아 공국 이 저 혼자만의 나라인가요? 아빠의 나라기도 하다구요. 왜 그렇게 '주인 의식' 이 없어요? 제가 없는 동안에는 아빠가 이끌어 나가야 할 거 아니에요?" "미안하구나. 그럼 나는 돌아갈까?'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하는 아르티어스를 보고 다크도 조금은 양심 이라는 것이 있어 약간은 어리광스런 말투로 말했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좀 쉬시다가 가시죠「' "헤헤헤,그럴까?' 아들의 쉬고 가라는 그 말이 그렇게도 좋고 고마운지, 여기에 왜 왔 는지 그것조차도 망각하고 히죽거리는 아르티어스를 보며 팔시온과 그동료들은 황당한 표정으로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한방 먹일 기 세로 달려가더니만‥‥‥ 한편 이들의 말을 옆에서 들으면서 스테노의 머리 속은 뒤죽박죽이 되고 있었다. 분명히 이들은 '전하' 라는 인물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웠었고,소녀의 말에 따르면 '치레아'를 자기 대신에 이 붉은 머리 의 미남이 다스려야 한다고하지 않던가?그렇다면 저 소녀가? 스테노는 슬쩍 미카엘을 꾹 찌르면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혹시,저 분께서 치레아 대공 전하십니까?" 스테노는 상대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보며 머리 속이 온통 하 얗게 탈색되는 것을느꼈다. 그도그릴 것이 자신이 여태껏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치레아 대공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코린 트가 자랑하던 최고의 기사 키에리 발렌시아드를 패배시킨 이 시대 최강의 고수,그리고 20기의 고성능 타이탄으로 구성된 개인 기사단 까지 가지고 있다면 웬만한 국·가의 국왕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쥐 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인물이 저런 새파란소녀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외감도 며칠 가지는 못했다. 왕자의 호위는 됫전이고 크라레스에서 온 절대로 아버지같이 보이지 않는 인물과 히히덕거린다고 거의 모든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소녀를 봤을 때 스 테노의 눈에는서서히 불신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저들은 뭘 하는 놈들인고 "빙고! 저 녀석이 틀림없어?" 망원경을 통해 상대를 차근차근 관찰하던 스펜 안트리아는 이윽고 확신을 가진 듯 외쳤다. "정말이야?" 아더 존슨의 물음에 스펜은 자신의 품 속에 소중히 가지고 온 초상 화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그래,바로 저 녀석이야. 여기 있는 이 초상화에 그려진 그 놈이 확 실해 ." "좋았어. 이제 목표물은 찾았고,호위의 규모는?' 아더의 물음에 스펜은 다시금 망원경으로 살펴보며 말했다. "가만있자‥‥‥ 옳지! 저기 나무 밑 그늘에 모두 모여 있군. 하나,둘, 셋,넷‥‥‥ 모두 네 명이야." "모두 네 명밖에 안 된다고?뭔가 이상하지 않아?왕자의 호위인 데 다가, 정략 결흔의 중요성을 따져 본다면 저건 너무 적어. 만약 이 사 실이 외부에 새어 나간다면 본국에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으려고 , 들 거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을 텐데,겨우 네 명이 라‥‥‥ 이봐,기므에. 저 녀석들의 신분을조사해 봐." 아더의 명령올들은마법사가스펜에게 말했다. "예. 망원경을 좀 주십시오." "여기 있네. 호위들은바로 저 나무 밑에 있어." "예." 기므에는 망원경을 건네 받은 후 호위 기사들의 생김새를 열심히 기억했다. 그런 후본국에 그들의 모습을 전송했다. 이제 조금만 기다 리면 본국의 마법사들이 그들의 신분이나 실력 등을 조사해 그 결과 를 전송해 줄 것이다. 잠시 후 수정 구슬에 기사 한 명의 얼굴이 나타나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름은 스테노 네르갈. 라이오네 기사단 소속 기사. 8년 전 그래듀 에이트 자격 취득. 제국 전쟁 후 라이오네 기사 임명. 전체적인 데이 터에 따르면 본국의 수준으로 봤을 때 간신히 1류 정도에 편입될 수 있는 실력인 것 같습니다. " 그런 후 수정 구슬에는 두 번째 기사의 영상이 떠야 함에도 곧장 마 법사의 모습으로 바픽 었다. "방금 말씀 드린 스테노 외에 다른 사람은 전쟁의 신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크라레스의 기사들 중에서 구 유령 기사단 소속의 기 사들은 전쟁의 신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전쟁 이 끝난 후에토 그들은 여전히 등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감안 한다면 저들은 아마도 근위 기사급에 가까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던 구 유령 기사단 소속의 기사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크라레스 유령 기사단 소속 기사들의 실력은 이미 6년 전에 입증되었으니까 말 입니다. " 수정 구슬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아더는 스펜 에게 말했다. "흐음, 근위 기사급 세 명에 라이오네 한 명이라. 그야 당연하겠지. 상대는 크라레스의 왕자니까 근위 기사들이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크 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놈들의 타이탄은 카프록시아인가? 아니면 그 괴물 같은 청기사?" 청기사라는 말이 나오자스펜은 신중하게 생각한 후 말했다 "청기사라면 중원을 좀더 요청해야 해. 안티고네 다섯 대 가지고 덤 비기에는좀무리가 있지 않을까?" "좋아,안전하게 나가자구. 기므에,중원을 요청해. 안티고네 5기 정 도를 더 불러들인다면 어느 정도승산이 있지 않을까?" "그건 모르지 우리는 그때 병원에 있었으니까 청기사가 어떤 타이 탄인지 모르잖아? 기므에, 청기사 3기가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지원 을 요청한다고 해. 그렇게 하면 그에 따른 전력 평가는 본국에서 해 주겠지," "알겠습니다. " 기므에가 또다시 본국에 통신을 시도하고 있을 때, 아더는 다시금 상대편 기사들을 망원경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크라레스의 근위 기사로 보기 시작하자 그 당당한 덩치라든지 말쑥한 외모 등등 상대가 매우강인하고 실력 있는 기사들로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녀석들이 그렇게 뛰어난 기사들이라 이 말이지?초록 도마뱀 작 전에서 뛴 이후 다시금 만나보는 좋은 적수들이구먼‥‥‥‥ 그런데,으 응?저 미인들은또누구지?우와,정말 예쁘게 생겼는데?" "뭐야?나도 한번 보자." 스펜의 채근에도 아더는 망원경을 넘기지 않았다. 망원경에 비치는 그 모습들이 정말 대단한 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미인들이군. 저 녀석들 여자 친구들쯤 되나?그런데 저 금 발‥‥‥‥상당히 낮이 익지 않아?' "뭐? 이리 줘 봐." 스펜은 망원경을 받아 들고 찬찬히 살펴본 다음 고개를 끄덕거 렸다. "가만있자‥‥‥ 그러네. 상당히 낮이 익어. 저 짱딸막한 검이나‥‥‥ 맞아!초록 도마뱀 작전 때 만났었던 그 마법사소녀 ,7' 스펜의 말에 아더가 이제서야 기억 난다는듯주절거렸다. "그래,바로그녀야. 그런데,죽은줄 알았었는데‥‥‥‥ "그런데 이상하네. 그 작전은 크라레스와는 무관했었는데, 어떻게 저 소녀가 크라레스의 인물들과 어울리고 있지?아니면 미란과 관계 가 있는 건가?" "글쎄‥‥‥‥" "하기야 뭐,저 소녀가 한 명 더 끼여 있다고 해도 바필 것은 없을 테 니7가‥‥‥‥" "그래도 보고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지,뭐. 이봐,기므에." "예?' "통신이 개통되었으면 저기 있는 소녀하고 그 일행도 함께 보고해. 크라레스 쪽인지 미란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근위대하고 함께 있는 것을보면 아마도 어느 쪽의 근위대 소속 마법사들일 테니 좨 실 력이 있다고 봐야 하겠지." "알겠습니다. " 하지만 기므에가 보고를 올린 후 얼마 안 있어서 온 답신은 놀라운 것이었다. "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하라는 지시 입니다. " 상대방 마법사의 말에 기가 막힌 아더는 기므에를 옆으로 밀치고 수정 구슬에 나타난 마법사에게 직접 따지고들었다. "뭐라고?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하라고?" 아더의 물음에 수정 구슬 속에 비춰지고 있는 노 마법사는 간단하 게 답했다. "예."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봐. 자네가뭔가 잘못 전달받은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 마법사가 수정 구슬에서 모습을 감추고 난 후 잠시 기다리고 있자 이번에는 화려한 복장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더는 상대가 누 군지 즉시 알아보고는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셨습니까? 바르데 각하." "그래, 타국까지 파견되어 작전하느라 수고가 많았네. 전달은 이미 받았겠지만 내가 다시 한 번 더 명령하지. 작전을 중지하고 복귀하 라." "하지만 적의 호위 규모는 매우 적습니다. 본국 기사단을 몇 시간 내 상대가 매우강인하고실력 있는 기사들로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녀석들이 그렇게 뛰어난 기사들이라 이 말이지?초록 도마뱀 작 전에서 뛴 이후 다시금 만나 보는좋은 적수들이구먼‥‥‥‥ 그런데,으 응?저 미인들은또누구지?우와,정말 예쁘게 생겼는데?" "뭐야? 나도 한번 보자." 스펜의 채근에도 아더는 망원경을 넘기지 않았다 망원경에 비치는 그 모습들이 정말 대단한 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미인들이군. 저 녀석들 여자 친구들쯤 되나?그런데 저 금 발‥‥‥‥상당히 낮이 익지 않아?" "뭐? 이리 줘 봐," 스펜은 망원경을 받아 들고 찬찬히 살펴본 다음 고개를 끄덕거 렸다. "가만있자‥‥‥ 그러네. 상당히 낮이 익어. 저 짱딸막한 검이나‥‥‥ 맞아!초록 도마뱀 작전 때 만났었던 그 마법사소녀 ?' 스펜의 말에 아더가 이제서야 기억 난다는듯주절거렸다. "그래,바로그녀야, 그런데,죽은줄 알았었는데‥‥‥‥" "그런데 이상하네. 그 작전은 크라레스와는 무관했었는데, 어떻게 저 소녀가 크라레스의 인물들과 어울리고 있지?아니면 미란과 관계 가 있는 건가?" "글쎄‥‥‥‥" "하기야 뭐,저 소녀가 한 명 더 끼여 있다고 해도 바필 것은 없을 테 니까‥‥‥" "그래도 보고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지,뭐. 이봐,기므에." "예?' "통신이 개통되었으면 저기 있는 소녀하고 그 일행도 함께 보고해. 크라레스 쪽인지 미란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근위대하고 함께 있는 것을보면 아마도 어느 쪽의 근위대 소속 마법사들일 테니 쫴 실 력이 있다고 봐야 하겠지." "알겠습니다. " 하지만 기므에가 보고를 올린 후 얼마 안 있어서 온 답신은 놀라운 것이었다. "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하라는 지시 입니다. " 상대방 마법사의 말에 기가 막힌 아더는 기므에를 옆으로 밀치고 수정 구슬에 나타난 마법사에게 직접 따지고 들었다. "뭐라고?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하라고?' 아더의 물음에 수정 구슬 속에 비춰지고 있는 노 마법사는 간단하 게 답했다. "예."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봐. 자네가 뭔가 잘못 전달받은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 마법사가 수정 구슬에서 모습을 감추고 난 후 잠시 기다리고 있자 이번에는 화려한 복장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더는 상대가 누 군지 즉시 알아보고는 인사를올렸다. "안녕하셨습니까?바르데 각하." "그래, 타국까지 파견되어 작전하느라 수고가 많았네. 전달은 이미 받았겠지만 내가 다시 한 번 더 명령하지. 작전을 중지하고 복귀하 라." "하지만 적의 호위 규모는 매우 적습니다. 본국 기사단을 몇 시간 내 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증원을 보내 주시 "면‥‥‥‥ "자네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군 " "예?' "크라레스는 신홍 제국이기는 하지만 매우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 고 있다. 그런 나라가 정치적,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미란과의 정략 결혼에 겨우호위 기사 몇 명만을보낼 것으로 생각했나?" "하지만 정말 몇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안티고네 10기만 있어도 금 방 해치운다음 철수할수 있을 겁니다. " "10기가 아니라 40기 모두 다 보낸다고 해도 승산이 없다. " "예?" "자네의 보고대로라면 그곳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은 근위 기사단이 아니라 치레아 기사단이다. 그것도 치레아 대공 자신이 직접 인솔하 고 있는‥‥‥‥ "치레아 대공이라면‥‥‥‥" "그래,바로 그 크라레스 최고의 무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 를 도와주는 드래곤까지 함께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답이 나을 수가 없어. 잔말 말고 빨리 철수해라." 이제 더 이상수정 구슬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더와 스 펜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물론 크라레스에 있는 엄 청난 검객에 대해서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지겹도록 그 소문을 들었 었다. 그런데 그소문의 당사자가바로 저기에 있다는 것이다. '망원경 다시 한 번 줘 봐." 하지만 아더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스펜이 먼저 망원경으로 그쪽을 관찰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누가 치레아 대공이지?맞아, 바로 저기 있는 덩치 좋은 여 기사인 가?치레아 대공은 여자라고 들었으니까 말이야. 정말 대단한 근육질 이군." "나도 좀 보자." 아더는스펜에게서 망원경을 뺏어 든 후 아래쪽을 살피며 감탄사를 뱉었다. "그래,정말 한가닥 하게 생겼군 그래. 저 우락부락한 근육질 좀 봐. 엄청나게 수련을 한 여자인 모양인데?그런데 드래곤은 어디 있는 거 지?" "아마 사람으로 트랜스포메이션 하고 있는 모양이지, 에‥‥‥ 저 중 에서 드래곤이 변신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저쪽에 있는 키 큰 빨강 머 리 미녀밖에 없잖아.사람이라고하기에는 너무 예쁘니까말이야." "앞으로는 저 두 녀석을 잘 기억해 둬야겠군. 자, 철수하자. 여기 오 랫동안 있어 봐야좋을 것 없으니까말이야." 바르데 후작은 아더에게 작전 중지를 지시한후 급히 미네르바에게 로 향했다. 미네르바가총사령관이었기에 그녀에게 이번에 있었던 모든 일을 보고한 후 다시금 지시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보고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 "무슨 일인가?" "예,치레아 대공이 드래곤과 합께 미란에 나타났사옵니다. " "미란에?그렇다면 왕자의 호위로 말인가?' "예, 그것을 알아 내는 즉시 작전을 중지시켰사옵니다. " 미네르바는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치는 것을 간신히 억눌러 야 했다. 미란과 크라레스의 밀착이 강화될수록 크루마에는 불리했 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그것을 막으려고 했는데,막을 가능성이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를 애꿎은 부하에게 터뜨려 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서로의 감정만 상하게 될 뿐‥‥‥‥ 그래서 미네르바는 초인적 인 인내심으로 우선 화를 억눌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자,잘 했군. 그래,옳은 선택이었어. 그건 그렇고, 이렇게 된다면 크 라레스와 미란의 관계가 더욱 밀착될 텐데‥‥‥‥ 이제 어떻게 하는 것 이 좋을까?" "일단은 뒤로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좋을듯하옵니다. "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녀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기에, 무심결에 그녀의 목소리는 올라가고 있었다. "지켜본다고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전하,크라레스가 계속 힘을 키워 오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코린트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옵니다. 또 본국의 경우 코린트라는 든든한 방파제가 있사옵니다. 만약 크라레스 황제가 욕심을 부린다 고 하더라도 우선은 코린트와 충돌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 다. " "그러니까 경의 말은크라레스가 먼저 행동을 취할 때까지 기다리자 는 것인가?" "예, 전하. 만약 코린트와 크라레스가 정면 충돌을 벌인다면 그때를 이용해서 미란을 박살 내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아무리 크라레스 가 힘이 강하다고 해도 코린트와 맞붙게 된다면 미란으로 돌릴 여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일단 가루가 되어 버린 후라면 크 라레스도 비빌 언덕이 없으니 미란 방면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 "하지만 록 코린트와 크라레스가 충돌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시간을 주게 된다면 오히려 미란파 크라레스의 관계만 더욱 단단해 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옵니다. 지금크라레스사단들이 움직이고 있사옵 니다. " "어떻게 말인가?" "2개 사단급 병력이 크로나사 북서쪽으로 이동중이옵니다. 얼핏 본 다면 코린트의 스웨인 지방에 대한 대비 태세를 더욱 강화하는 듯 보 이겠지만,토리아 왕국이나 트루비아 왕국으로 그 병력을 움직일 수 도 있다고봐야할 것이옵니다. 6년 전 크라레스는 트루비아가 해방된 후 안정을 찾을 때까지 1개 사단의 병력을 빌려 줬던 예가 있었사옵니다. 그만큼 트루비아와 크 라레스는 친밀하기에 그들이 트루비아 왕국을 수비하기 위한 목적으 로 그 병력을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것이 토리아 왕 국을 병합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라면 코린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 "그러니까 자네 말은 그 병력이 어디로 갈 것인지가 확실해진 후에 작전을 세워 보자 이 말이로군." "옛,전하." "자네 의견을 참고하도록하겠네. 이만가보게나." "옛." 정보관인 바르데 후작이 나가고나자 미네르바는 지도를 향해 시선 을돌렸다 "왜 서북쪽으로 2개 사단을 이동시킨 것일까?크라레스의 서북쪽에 는 이미 3개 사단이 주둔중인데,추가로 2개 사단이나 더 투입하는 이 유가 뭐지?" 크라레스의 2개 사단이 움직이고 있는 것, 이것은 통상적으로 벌어 지는 사단의 위치 변경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바르데의 말대로 트루 비아나 토리아 쪽으로 이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3 국 전쟁이 끝난 후 패전국이 되어 버린 코린트를 이상하게도 열심히 지원하고 있는 마도 왕국 알카사스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카사스에 직접적인 위협을 주려면,코린트와 알카사스의 동맹국인 토리아 왕국을 치는 것보다 엔테미어 공국 쪽으로 병력을 돌리는 것이 더 쵸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엔테미어 공국은 마도 왕국 알카사스가 대제국 코린트와 국경선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독립시킨 완충 지대였다. 그리고 엔테미어 공국을 다스리고 있는 미카엘 엔테 미어 대공은 코린트와 알카사스 간의 불화를 중재하는 역할을 훌릉 하게 해 냈었다. 미카엘 엔테미어 대공은상당히 뛰어난 외교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 다. 크라레스가크로나사 평원을 집어 삼켰을 때 제일 먼저 축하사절 을 보낸 인물이 그였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는 크라레스와 매우 친하 게 지내려고 엄청난 노력을 퍼부었고,그 덕분인지 크라레스 제국은 엔테미어 공국과의 국경선에 단 1개의 사단도투입하지 않고 있었다. "흐음, 크라레스가 알카사스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엔테미어 공국 쪽으로 병력을 돌릴 가능성도 있겠어. 그렇게 되면 코린트와는 아무 런 관계가 없잖아!그리고 놈들이 행동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자니, 빌어먹을! 서서히 크라레스가 본국의 목을 조르고 있는데 가만히 참 고만 있으라는 것인가!" 미네르바가 미란과크라레스의 밀착을 저지하지 못한 것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미란은 크루마의 영토 안에 존재하고 있는 국 가. 유사시에 군대의 이동을 해야만 할 때 미란이 크루마군대의 자국 영토 이동을 거절한다면,매우 심각한사태에 처하게 될 수 있었다. 미란이 길을 막는다면 크루마의 군대는 마법진을 통해 이동하든지, 아니면 오실롯 왕국과 아르곤을 통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 실롯 왕국이나 아르곤은 둘 다 중립국이었기에 타국 군대의 이동을 허용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마법진밖에 없는데,그것을 이용해서 대량의 병력을 이동시킨다는 것은 매우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크라레스는 미란이라는 동맹국을 만듦으로 인해 3루마의 목줄기를 꽉꽉 죌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었다. 미네르바는 이리저리 궁리해 봐도 좋은 방법이 없자, 옆에 있던 물 잔을 잡고는 힘껏 바닥에 패대기쳐 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잔 이 깨져 버린 후 씩씩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던 미네르바는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사태를 타개할 방법을 의논할 만한 상대가 필요했 던 것이다. "여봐라." "옛,전하." "지오그네한테 급히 오라고 일러라, 그리고 시녀보고 방을 청소하라 일러라." "옛,전하." 대답이 들려 온후곧이어 시녀가 들어와서는 미네르바의 집무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미네르바는 시녀가 청소하고 있는 동안 창 밖을 바라보며 이 궁리 저 궁리 하며 지오그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 윽고 밖에서 경비병의 목소리가들려 왔다. "마리나 지오그네 후작 각하께서 도착하셨사옵니다. 공작 전하." 경비병의 말에 미네르바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들라고 해라." "옛 ?' 미네르바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오그네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 했다. 미네르바는 미란과 크라레스의 관계가 밀착되는 것에 대해 엄 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에 는 분노가 깔려 있었다. "크라레스가본국이 싫어할 것을 뻔히 알면서 미란과 밀착하기 시작 했어. 그 둘이 결혼을 통해 연합을 공고히 하면 더욱 손 대기가 껄끄 러워질 거야. 그래서 말인데‥‥‥ 점점 안하무인으로 콧대가 높아지 고 있는 크라레스의 힘을 조금은 감소시켜 둘 필요성이 있겠어. 그렇 지 않으면 크라레스의 세력은 점점 더 커질 것이고,미란을 통해 본국 에 직접적인 압력을가해 올 것이 당연해." 미네르바의 말에 지오그네는 궁금한 듯 물었다. "예 ? 하지만 어 떻게 ‥‥‥‥" "워렌에게 연락해라." 워렌이라는 말에 지오그네는고개를끄덕이면서 나직하게 물었다. "뭐라고 하면 되겠사옵니까?" "토지에르를 암살하라, 그는 크라레스의 기등이야. 그가 없어진다 면 크라레스의 힘은 엄청나게 감소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전에도 몇 번 시도를 해 봤지만,그에 대한 경호가 워낙 치밀한 데다가 그 자신 이 뛰어난마법사다보니 틈을 찾을수 없었지. 하지만 엘리안 황태자가 협조해 준다면 가능성이 있어. 토지에르만 사라져 준다면 미란 정도와는 동맹이 아니라, 서로 통합된다고 해도 무서을 것이 없다고 봐야겠지. 아마도 토지에르가 죽는다면 그의 뒤 를 잇기 위해 마법사들끼리의 권력 쟁탈전이 벌어질 게 분명해. 제1 마법사의 자리는 각국 궁전 마법사들의 꿈이니까 말이야. 또,그렇게 해서 뒤를 잇는 마법사가 잇다고 하더라도 여태까지 모은 정보에 의 하면 토지에르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없으니 한동안은 크라레스가 잠 잠해질 거야. 어떤가?내 생각이?" 미네르바의 말에 지오그네는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주좋은 계책이시옵니다,전하." "그래?그렇다면 워렌에게 실수 없이 처리하라 일러라." "옛,전하." 난폭한 습격자 엘리안 황태자는 지금 데이더스의 저택에 와 있었다. 크루마에서 도착한 손님이 그와 만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엘리안 황태자는 자신 을 따르는 기사 몇 명만을 대동하고 조용히 데이더스의 저택으로 갔 다. 그런 후 기사들에게는 데이더스와 비밀스럽게 의논할 것이 있으 니 저택 밖을 경비하라고 이르고 저택 안으로는 혼자만 들어갔다. 데 이더스는 황태자를 자신의 지하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황 태자와 만나기를 원하는 인물이 짙은 녹색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채 음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워렌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질문을 들은 엘리안 황태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황위를 계승하는 데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사 람이 누구냐 이건가?" "예,전하." "글쎄‥‥‥‥ 그것을 묻는 저의가 뭔가?" "현재 크라레스는 세 명의 공작들이 이끌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 닐 것이옵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등에 엎을 수 있다면 전하께서 황제 로 등극하시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고 봐야 하겠지요. 전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전하께서는크루마에 오랜 시간 와 계셨 기에 전하의 지지 기반은 매우 미약한 상태이옵니다. 미네르바 전하 쩨서도 이 점 때문에 심히 우려하고 계시옵니다. 이런 때는 전하를 밀 어 줄 강력한 존재가 필수적이옵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없다면 걸 림돌들을 차례차례 없애 나가야 하지요. 현재 전하를 밀어 줄 인물이 세 명의 공작들중에 있사옵니까?" 엘리안 황태자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흐음. 경의 말에 일리가 있구먼. 아마도 그들 중에서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은 루빈스키 아저씨뿐일 거야. 루빈스키 아저씨는 내가 크루 마에서 돌아온 후에도 나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고 있지. 하지만 아저씨 혼자서만 나를 도와 준다고 될 일이 아니지. 토지에르 영감은 웬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상당히 싫어하거든. 그리고 치레아 경의 경우는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으니 얼굴도 못 봤지만,들 리는 얘기를 종합해 본 결과 그녀는 아예 황위 계승권 자체에 관심이 없는듯보이더군." 엘리안의 말에 워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뭔가를 궁리하는 듯하더 니 이윽고 결심한듯 말했다. "그렇다면 토지에르 영감만 없어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요. 그 렇지 않사옵니까? 한 사람은 중립이고 한 사람은 전하를 밀고 있사옵 니다. 그러니 토지에르 영감만 없어진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옵 니다. " "하지만그를 어떻게 제거한단 말인가?나도 많이 생각해 봤지만,그 에게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뒤집어씌워 물러나게 만들 수는 없어. 그 에 대한 아버님의 신뢰는 절대적이야. 서로를 이간질한다는 것은 불 가능해." "흐흐흐,전하. 제가 언제 이간질하자고 했사옵니까?" 워렌은 음산하게 웃으며 물었다. 엘리안이 조용히 앉아 있자 그는 힘이 깃들인 음성으로 됫말을 이었다. "제거하자고 했습지요. 쥐도 새도 모르게 말이옵니다. " "과연 그게 가능할까?그에게 엄청난 호위들이 붙어 있는 것은 둘째 치고, 그 자신도 6사이클을 마스터한 마법사라구 나에게 혐의가 오 지 않도록 없애 버릴 수 있었다면 내가 벌써 했겠지." "흐흐흐, 전하. 전하와 제가 힘을 합친다면 그것도 결코 불가능한 것 은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조금만 도와 주신다면 별로 어려운 일은 아 니지요." "어떻게 도와 주면 되겠는가?" "토지에르를 한적한 곳으로유인해 주시옵소서. 대신 전하의 이름이 나오면 안 되고,또 호위의 규모가 커서도 아니 되옵니다. 그가 절대 로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하려면 그것이 필수 조건이옵니다. 그것만 해 주신다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사옵니다. " "으음‥‥‥ 힘든주문이로군.시간을좀주게나,좋은방법이 없을지 데이더스와 의논해 보찬네." "옛,전하." "휴우‥‥‥‥" 토지에르는짜중섞인 한숨을 내쉰 후투덜거렸다. '바빠 죽겠는데 왜 오라는 것이지?" 아침에 루빈스키 대공의 밑에 있던 수련 기사가 달려와서, 대공이 그와 상의할 중요한 사안이 있으니 근위대의 타이탄 기동 연습장으 로 급히 오시라고 하더라는 연락이 왔다고 전했던 것이다. 루빈스키 대공은 근위대 훈련 때문에 조금이라도 시간만 있으면 기 동 연습장으로 달려갔었다. 그러다가 적기사의 신 모델이 완성되었 다는 정보가 들어온 후부터는 아예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렇기에 토지에르는 루빈스키 시종의 말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 들이고는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토지에르의 마차 주위에는 네 명의 경호 기병이 호위하고 있었고, 토지에르의 마차 안에는 그래듀에이트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물론 이 것은 공작이라는 그의 신분에 따른 통상적인 경호였다. 그렇기에 경 호병들도 경무장이었고, 그들을 지휘하는 기사 또한 달랑 검만을 허 리에 차고 있는 정도였다. "젠장,기동 연습장에도 이동 마법진을 설치해 둬야 하겠군.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무리가 있더라도 이동 마법진으로 가는 것인데 잘못 했어. 헤드필드 경,도착하려면 아직도 멀었나?' 토지에르의 짜중 섞인 물음에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중년의 기사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40분 후면 도착할 것이옵너다, 전하." 크라레스근위대의 기동 연습장은보안상 워낙 외진 곳에 건설했기 에 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토지에르가 투 덜거리는 가운데 마차는 어느덧 포장된 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마차가 너무 심하게 흔들리는군 " "산길을 달려가는 것이니까 어쨀 수 없사옵니다. 그렇다고 잘 포장 하여 훈련장이 어디 있는지 광고할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헤드필드의 말에 토지에르는 빠른 시일 내에 꼭 이동 마법진을 설 치하고야 말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기사들이야 숙련된 승마 실력 이 있을 테니 운동을 겸해서 달려오겠지만 마법사들에게 이 길은 너 무 힘들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왜 스바시에 전하께서 나를 보자고 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수 없단 말이야." "청기사 때문이 아닐까요." 헤드필드의 조심스런 추측에 토지에르도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 했다. "글쎄‥‥‥ 나도 그것 외에는 생각 나는 이유가 없으니,조금 걱정이 되는군. 만약 청기사 때문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었으면 좋을 텐데 말 이야." 이렇듯 한참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헤드필드가 검을 뽑아 들며 검을 휘둘렀다. 좁은 마차 안에서 휘두른 검이었기에 마차의 상 부 구조물이 검에 찢겨 나갔지만, 헤드필드는 일단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토지에르를 향해 날아오던 상대의 검을 막아 냈던 것이다. 그는 검을 막아 내자마자마차문을 박살내면서 튀어나갔다. 문을 열 그 짧은 시간도 아쉬웠던 것이다. 상대는자신이 가까스로 거 리를 알아 낼 수 있었을 정도로 대단한 놈들이었다. 그러니 이런 좁은 곳에서 미적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짙은 녹색의 로브로 몸 전체를 감싼 정체 불명의 적들은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들의 공격이 막히자 뒤로 재빨 리 물러섰던 그들은 두 번째 공격을 위해 다시금 도7했다. 상대는 두 명,헤드필드는 마나를 끌어 모으며 그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슉!" "우윽!" 대기를가로지르는 날카로운 검음이 울려 퍼지는가운데,헤드필드 는 앞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상대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 내면서 검을 휘둘렀다. 상대의 숫자가 많았기에 그는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거의 본능적으로 적의 수를줄이는 데 중점을 뒀던 것이다. 혼심을 다한 그의 공격은 아쉽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금속질로 된 가면을 쓰고 있는 정체 불명의 적이 사람이 아닌 괴물이 라는 점은 알 수 있었다. 길게 찢어진 짙은 녹색의 로브 자락 사이로 인간의 피부라고 생각되지 않는두터운가죽이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가죽 갑옷일 가능성도 있었지만,가공해 놓은 가죽 갑 옷과는 전혀 색다른 질감이 엿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터운 가죽 은 깊지 않게 가로로 갈라져 있었고, 가죽 바로 밑에서 붉은 피가 조 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약 그것이 진짜 가죽갑옷이라면 피가 밖 으로 흘러나오지 않고 피부를 타고 밑으로 흘러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 내는 데 헤드필드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렀다. 앞의 상대와 검을 주고받는 동안, 뒤쪽에서 치고 들어온 녀석에게 등 에 깊숙한 검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는 공격을주고받은 그짧은 순간 에 상대가 어쩌면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미 치명적일 정도로 깊은 검 상을 입고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상대가 시도한 두 번째 공격에 의해 목이 몸통에서 분리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헤드필드의 눈동자는 이 미 머리가몸통에서 분리되었음에도불구하고,아직도자신이 이렇 게 허무하게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강한불신감을 담고 있 었다. 헤드필드가 쓰러졌을 때쯤에야 호위병들이 검을 뽑아 들고 공격을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진 격투였다. 하지만 호 위병들은 변변한 공격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모두들 피를 뿌리며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짙은 녹색의 괴한들이 감행한 공격이 끝나자 풀숲에서 또 다른 괴 한이 한 명 더 뛰어나왔다. 그도 처음 공격해 들어온 인물들과똑같은 복장이었다. 그는 짙은 녹색의 로브를 펄럭이며 걸어오더니 마차 안 을 확인했다. 하지만 마차 안에는 핏자국이 있기는 했으나 정작 목표 물의 시체는 없었다. "제기랄, 놓쳤구나." 넷으로 이루어진 공격조의 마차에 대한 공격은근소한 시간차를 두 고 양쪽에서 감행되었다. 첫 번째 공격을 막아 낸 호위 기사가밖으로 뛰쳐나왔을 때,그때 이미 그가 뛰어나오는 반대편에서도 검이 마차 를 찢으며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6사이클을 마스터한 고위급 마법사라고 해도 주문 을 외을 시간적 여유도 없는 그런 갑작스런 공격에는 어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상대는그짧은 시간을 이용해 도망쳐 버렸다. 그것 은 상대가 주문을 통해서 마법을 구사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법 도구 를 이용해 공간 이동을 한 것이 틀림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그의 시선에 특이한 것이 잡혔 다. 바로 자신이 데리고 왔던 부하들 중에서 한 명이 피를 흘리고 있 는 것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는 그 피를 흘리고 있는 부하에게 다 가가서 팔을 난폭하게 잡아챘다. 과연 그 부하의 팔은 손목 부분에서 잘려 나가 있었고,거기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그 상처는 빠 르게 아물어 들어 가고 있는중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그는 시선을 돌려 반대편에서 공격을 감행했던 또 다른부하를바라봤다. 역시 그 부하의 손에도 이상이 있었다. 왼손에 붙어 있는 무기의 절반이 잘려 나가고 없었던 것이다. 그것까지 확인 한 그는 고개를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대로 공격이 성공하기는 했군. 그래‥‥‥ 손목이 날아간 것으 로보아 아주 깊숙한 검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어. 아마도 죽기 직전에 도망친 모양인데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 쫓아가지. 젠장! 되는 일이 없 구먼." 습격자들의 우두머리가 목표물의 시체 확인을 못 한 것을 원통해 하고 있을 때,그 '목표물'은 크라레스의 황궁 한 귀퉁이에 마련되어 있는 연구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싸구려 마법 도구를 이용한 제법 먼 거리의 이동이었기에 마나의 손실이 크긴 했지만,그래도 목숨이 붙 어 있는 채로목적지에 도착할수는 있었던 것이다. "전하,어떻게 된 일이시옵니까?" 갑자기 피투성이가 된 채 모습을 드러낸 토지에르를 보고마법사들 은 경악했다. 괴상하게 생긴 검이 웬 고깃덩어리가 달라붙은 채로 복 부를 레뚫고 있었고,또 다른 것은 옆구리를 뚫고 들어가 있었다. 하 지만 그것은 그렇게 깊게는 들어가지 않았기에 다행히 심장이 있는 곳까지는 미치지 못해 토지에르가 즉사하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었 다. 거기에다가 검이 꼽혀 있는 채로 이동되어 왔기에 출혈도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그것이 토지에르가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이유였다. 마법사들은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서 토지에르를 살리기 위해 부산 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작이 암습을 당할 정도라면? 크라레스의 황제는 토지에르가 치명상을 당한 것을 보고받고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맹렬한분노를토해 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조사해 봤느냐?흉수는 어떤 놈인가? 필히 밝혀 내어 복수를 해야 할 것이야!" 분노에 미쳐 길길이 뛰는 황제 덕분에 중신들은 한동안 숨을 죽여 야만 했다. 이렇듯 이성을 잃고 소리를 치는 황제는 처음 봤던 것이 다. 바로 이때 그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스바시에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 루빈스키는서둘러서 들어온후 황제에게 예를올렸다 "그래, 생각보다 늦었구먼." "예, 폐하. 범행 현장이 제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현 장을 둘러보고 오느라고 늦었사옵니다. " "그래 ,어떻던가? 단서라도 찾았나?" "약간은 알아 낸 것이 있사옵니다. 발자국들을 따져 봤을 때 습격자 들은 다섯 명,그 중 네 명이 습격에 가담했고 한 사람은 그냥 지휘만 한 것으로 추측되옵니다. 놈들의 보폭을 따져 봤을 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 것이 분명하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발자국을 살펴봐도 뭔가 이상한 점이 있기에‥‥‥그 러니까 파여 있는 발자국의 깊이를 따져 봤을 때 몸무게만 약 70킬로 전후인 것 같은데,한 명을 제외하고 네 명의 발자국 특성이 거의 동 일인이라고 생각될 만큼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아무래도 나머지 네 명은 움직이는 습성이나 공격 시의 발놀림까지 똑같을 정도로 고도 의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로 사료되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호위 무사들의 사인은 검 같은 예리한 것 에 베인 것이었는데 검상을 유심히 판찰해 본 결과 헤드필드 경의 목 숨을 앗아 갔을 정도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자들의 검술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수준 낮은 검상이라는 것이지요. 검술이고 뭐 고 없이 단순히 속도와 힘만으로 벤 것이었사옵니다. 그런 자들이 어 떻게 헤드필드의 목숨을 앗아 갔는지 이상하옵니다. " 검술에 대한 공작의 높은 안목에 만족스러운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경의 검술에 대한 안목은 짐도 인정하는바이니,그 원인은딴 데 있 다고 생각해야 하겠지 " 황제의 말에 루빈스키 대공이 급히 물었다. "폐하께서는뭔가 알고 계신 것이 있사옵니까?' "짐도 처음에 다론 경이 가져온 것을 보고 확실히는 잘 몰랐었는데, 자네의 말을들으니 이해가 가는구먼." 여기까지 말한 황제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한쪽에 서 있던 다론을 향해 말했다. "다론 경,경이 가져왔던 것을다시 이리 가져와보라." "옛,폐하." 다론이 천에 둘러싸인 물건을 가져와 황제의 앞에 펴 놓았다. 그것 은 토지에르의 몸에 박혀 있던 흉기들로 다론이 마법사들을 지휘하 여 뽑아 낸 것이었다. "바로 이거야, 여기 이 낫처럼 생긴 것의 끝 부분에 달려 있는 이 뭉 툭한 살 덩어리‥‥‥ 다론 경도 말했었지만, 이건 도저히 사람이 쥐고 사용했던 무기로는 보이지 않지?" 루빈스키 대공도 그 천에 둘러싸인 물건을 자세히 바라본 후 황제 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예, 아무래도 말로만 듣던 키메라인 모양이군요. 하지만 키메라는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고들었습니다만‥‥‥‥" 그 말에 다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전하의 말씀이 옳으시옵니다. 키메라는 마법으로 재구성된 강력한 전투 생명체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그것 때문에 알카사스의 경우 병 사들의 일부를 키메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키메라가 강하다는 것은 보통 사람보다 강하다는 것이지, 마법사나 기사보다 강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이것을 폐 하께 보여 드리며,그 점이 이상하다고 보고 드렸었사옵니다. 키메라들만으로 토지에르 전하와 경호 무사인 혜드필드 경 , 그리고 경비병들을 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요. 하지만 전하의 말씀대 로 엄청난 속도와 힘을 낼 수 있는 키메라라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 다론의 말을듣고 한참 궁리하던 루빈스키는 황제를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알카사스가 이 짓을 꾸몄다는 것이옵니까? 키메라를 병 사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은 알카사스뿐이옵 니다. " 잠시 침묵하며 생각을 정리한 황제는 천천히 말했다. "글쎄‥‥‥ 경의 말이 옳긴 하지만, 알카사스는 본국과 아무런 원한 도 없어. 그리고 이해 관계도 없지. 혹시나놈들이 본국에서 테리아를 수출하는 것 때문에 자국 타이탄의 수출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 했다면 모르겠지만 본국에서 수출하는 테리아의 양은 많지가 않고, 또 동맹국에 한해서 수출하기에 녀석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을 것이야," "그렇다면 크루마나 코린트 둘 중 하나라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고 봐야 하겠지." "명확한 증거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속단하기는 이르겠지만 아 마도 코린트일 가능성이 클 것이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본 국의 지휘 체계에 타격을 주는 한 가지 방편으로 채택했을 테니 말이 옵니다. 본국 최대의 적은 아무래도 코린트가 아니겠사옵니까?그런 데 황궁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던 토지에르가 왜 그 외진 타이 탄훈련장 근처까지 온 것이옵니까?' "글쎄‥‥‥ 다론의 보고로는자네가 불렀다고 하던데?" 황제의 말에 루빈스키는 기가 막힌다는 듯 다론을 향해 따지고 들 었다. "예?다론 경,다시 한 번 말해 보게." "예,전하. 전하를 수행하던 수련 기사가 오늘 아침에 달려와서 전하 께서 비밀히 상의할 것이 있으니 타이탄 훈련장까지 와 달라고 전했 었사옵니다. 그 때문에 토지에르 전하께서는 소수의 경호병만 대동 하고 그곳으로 가신 것이지요." "나는 그를 부른 적이 없었는데?그 수련 기사가 누군가?" 루빈스키 대공의 서슬 시퍼런 물음에 다론은 그 망할 수련 기사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다행히 겨우 생각이 났기에 다론은 대공 에게 그 녀석의 이름을보고할수 있었다. "예 , 로날드‥‥‥‥로날드 거트니안이었사옵니다. " 다론의 보고에 루빈스키 공작은 자신을 따라왔던 기사들 중의 한 명에게 신경질적인 어조로 외쳤다. "자네가 가서 로날드를 잡아와라," "옛,전하." 하지만 로날드는 행방이 묘연했고,다음 날 점심때쯤 죽은 지 왜 오 래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로써 토지에르 폰 케프라 공작 습격 사건 의 범인에 대한조사는완전히 오리무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 중대한 사건을 그냥 덮어두고 넘어갈 루빈스키가 아니었 다. 루빈스키는 스바시에에서 자신이 아끼는 부하를 불러들였다. "불러 계셨사옵니까? 대공 전하." 40대 중반쯤으로 강인하게 보이는 사내를 믿음직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루빈스키는 반갑게 맞이했다. 쥬리앙 폰 아그리오스 후작 은 과거 크라레스에 콜렌 기사단이라는 단 하나의 기사단이 외부에 드러나 있던 약소국이었던 시절, 콜렌 기사단을 지휘했을 정도로 이 름 높은 용장이었다. 그때 그는 코린트가 부여하는 어 려운 임무들을, 콜렌 기사단이라는 약소한 전력만 가지고 처리해 나갔을 정도로 뛰어난 책략가이기도 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콜렌 기사단은 코린트의 횡포 아래 여기 저기 전쟁터에 끌려가서는 벌써 소모되고말았을 것이다. "오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 그래 스바시에는 어떻게 해 놓고 왔 나?" "예, 스바시에는 카렌에게 맡겼사옵니다. 그녀가 잘 처리할 것이옵 니다. " 카렌 폰 헤이워드라면 스바시에 기사단의 수석 궁정 마법사였다. 그런 만큼 충분히 효율적으로 스바시에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 분명 하기에 루빈스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현명한 인선이로군. 자네를급히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기 때문이야. 혹시 이렇게 생긴 것을 본 적이 있 나「' 쥬리앙은 루빈스키가 내민 괴상하게 생긴 물건을 자세히 바라봤다. 하지만 칼처럼 생긴 그것이 뭔지 짐작하기조차 힘들었다. "모르겠사옵니다. 칼 같기도 한데‥‥‥ 왜 손잡이가 붙어 있지 않고 그렇게 큰 말린 고깃덩어리가붙어 있는 것이옵니까?" "허허허, 그게 아니라네. 이게 조금 시간이 지나서 겉이 말라 버린 것이지 처음부터 말린 고깃덩이가 붙어 있던 것은 아니지. 피가 뚝뚝 떨어지던 신선한 살덩이가 붙어 있었지. 마법사들의 예상으로는 키 메라의 손일 거라고하더군." "칼과 같은 손을 달고 있는 키메라‥‥‥‥키메라라면 전에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온갖 동물들을 합성시킨 마법 생물이라고 말이옵니다. 그러니 이런 모양을 만들지 못하라는 법은 없겠지요. 그런데 왜 그것 을 보여 주시는 것이옵니까?" "왜냐하면 이것이 토지에르 경을 해친 놈의 신체 일부분이니까그렇 지, 자네는 단서가 거의 없기는 하지만 범인을 추격해 줘야겠어. 알카 사스가 키메라 연구의 종주국이니까 거기서부터 조사해 나오면 뭔가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해 주겠나?" "옛." "고맙네. 경에게 스바시에 기사단의 오너 네 명을 주겠다. 자네 마음 에 드는 녀석들로 알아서 뽐아 가도록 해. 그리고 마법사 두 명과 그 래듀에이트도 몇 명 데려가는 것이 좋겠지. 자네는 근들을 데리고 철 저하게 조사해서 뭔가 단서가 잡히면 즉시 보고하도록! 폐하의 윤허 는 이미 떨어져 있으니 즉시 출발하게,!" "옛,전하." 쥬리앙 폰 아그리오스 후작이 문을 나서는 것을 지켜본 후 루빈스 키 대공은 안티노스 후작을 불러들였다. 뚱뚱한 체구를 지닌 안티노 스는 루빈스키 앞에 도착하자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우아하게 예 를올렸다. "불러 계겼사옵니까?전하." 루빈스키 대공은 그에게 좀더 가잠게 다가오라고 살짝 손짓을 한 후 안티노스 후작이 가까이 다가오자 속삭이듯 말했다. "쥬리앙 경이 토지에르 경의 시해자를 찾기 위해 알카사스부터 뒤져 들어갈 것이라는 보고를 들었나?" "옛, 전하, 그건 이미 어제 폐하의 윤허가 떨어진 사항이 아니옵니 까?" "그렇지. 나는 일부러 그걸 공식적으로 처리했네. 또 쥬리앙의 보고 도 공식적인 통로를통해 나에게 보고되겠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안티노스 후작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루빈스키 대공은그에게 좀더 자세히 말했다. "본국의 공작이 시해를 당했어. 물론 키메라들의 공격에 의해 일어 난 사건인 만큼, 타국이 관여했다고 봐야 하겠지 하지만, 그것으로 끝일까? 분명히 내통자가 있을 거야. 토지에르 공작은 몇 겹으로 보 호되고 있었는데,그가 당했을 때는 매우 취약한 상태로 노출되어 있 었지. 내통자가 없고서야 불가능해, 자네는 철저하게 내통자를 색출 해 내게, 이번에는 그 대상이 토지에르였지만,다음에는 폐하가 될지 도 모른다는사실을 명심하고,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야." 루빈스키 대공의 말에 안티노스도 이번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얼 마나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인식할 수 있었다. "옛,전하." "내가 자네를 고른 것은 그 때문이야. 쥬리앙이 밖에서 휘저으며 눈 길을 끌고 있는 동안에,자네는 비밀리에 놈들을 압박해 들어가서 일 망타진하게나. 물론 거의 단서가 없다는 것이 문제겠지만,자네라면 훌릉하게 처리할 것으로 믿네."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전하." 암소 네 마리를 보내 주시오 "에‥‥‥‥, 그러니까 경의 말은 토리아 왕국을 침공해 달라는 것인가 요?" 이제 갓 스무 살이 될 듯 말 듯 보이는 새파랗게 젊은 왕을 잔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뚱보가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어린 왕은 애써 생각하는 척하다가 자신의 뒤쪽을 슬며시 바라봤 다. 그곳에는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기사가듬직하게 서 있었다. 젊은 왕은그 기사를향해 뭔가도움을 청하는듯한눈길을보냈다. 그러자 그 눈길을 이해했는지 그 기사는 앞으로 슬쩍 나서면서 뚱보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생각할 시간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쪽에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좀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와리스 후작각하." 와리스는 상대의 망설임이 당연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비대한 얼굴에 일부러 실망감을 잔뜩드러내며 투덜거렸다. "아니,시드미안 공. 저는 공이나 전하께서 이 계획을 전폭적으로 지 지해 주실 줄 믿고 왔었소이다. 그 때문에 폐하께는 전하께서 이쪽에 서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곧장 토리아로 진격하실 것이라고 장담을 드렸었소. 과거 트루비아가 어려을 때 오직 본국만이 그대들을 도와 주지 않았었소?" "하지만 본국의 군사력으로는‥‥‥" 와리스 후작은 일부러 시드미안의 말을가로막았다. 그는루빈스키 대공으로부터 특명을 받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는 대공에 게서 자신이 이번에 맡은 임무가 얼마나 국가의 안위에 절대적인 보 탬이 될 것인지를 상세하게 설명을 들었었다.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 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수를 쓰든 간에 트루비아를 꼬셔서 토리아를 박살내야만 했던 것이다. 토지에르가 습격 당한 후, 크라레스 황제는 계획을 앞당겨 토리아 침공 작전을 시작할 것을 루빈스키 대공에게 명했다. 그만큼 그 사건 은 황제에게 엄청난 분노와 초조함을 안겨 됐던 것이다. 그리고 크라 레스 황제는 토지에르를 습격했을 것이라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잡지 못한 범인,즉 코린트를 향해 이것을 통해 간접적인 복수를 하려 고 결심했던 것이다. 와리스 후작은 일부러 대국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거만한 어조로, 혈맹의 부탁을무시하는 상대의 태도에 분노를느낀 듯 말했다. "폐하께서 전하께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것이 아니지 않소이까? 지 금 트루비아는 본국에서 지원해 준 카프록시아 급 타이탄 테리아를 6 기나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안토로스 급도 2기나 남아 있 지 않소? 합쳐서 타이탄 전력만 8기에다가 6개 사단의 병력을 보유하 고 있지 않소이까? 그에 비한다면 토리아 왕국은 12개 사단의 병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기사단은 형편없지 않소이까?타이탄이 21기 라고하지만그 대부분이 정규출력도 내지 못하는고철들이오." 여기까지 말한 와리스 후작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슬쩍 젊은 국왕 의 안색을 훔쳐본 후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가 상대에 대한 질책이라 면, 이제부터는 전쟁을 선택했을 때의 장미 빛 가득한 미래를 달콤하 게 말해 줘야만하니까말이다. "물론 전하께서 전쟁을 결심하신다면 본국에서는 테리아 4기를 추 가로 드릴 것이오. 합계 12기의 타이탄이라면 충분하지 않겠소?그리 고 타이탄 전투가 자신이 없다면 이쪽에서 1류 기사 몇 명을 타이탄 과 함께 추가로 빌려 줄 수도 있소. 순식간에 토리아 왕국의 타이탄들 을 파괴하고 그 여세를 몰아 보병들을 박살 낸다면 아주 손실게 숭리 를 얻을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 그것이 뭐가 어렵다는 것이오?' 하지만 시드미안은 와리스 후작에게 자신이 우려하는 바를 신중하 게 말했다. "토리아를 치는 것이 쉽다는 것은 이쪽에도 이견이 없습너다, 와리 스 후작 각하. 하지만 토리아 왕국의 배후에는 코린트 제국이 있습니 다. 그쪽에서 간섭하기 시작한다면 도저히 그 됫감당을 할 수가 없습 니다. " 당연히 와리스 후작은 트루비아에서 우려하는 것이 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사태까지 발전해 나간다면 최악의 경우 트 루비아를 도와 주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 만 그것을 그대로 상대에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와리스 후작은 일부러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뒷감당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소. 만약 코린트가 간섭한 다면 이쪽에서도 당당하게 기사단을 파견하여 도와 주겠소. 귀국은 본국의 혈맹이 아닌가요?귀국이 어려을 때 도와준다는 것은 누가 봐 도 명분이 서지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미 트루비아 접경 부근 에 1개 사단의 병력을 대기시켜 놨고, 비밀리에 수도에서 중앙 기사 단 제7전대를 빼내서 트루비아 접경 부근에 포진시켜 뒀소이다. 제7전대가 지닌 타이탄 30기라면 만약 코린트가 간섭해 온다고 하 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은 벌어 줄 수 있을 것이오. 그런 후 코린트가 투입하는 타이탄의 수량에 따라 기사단을 추가적으로 증파해 드리겠 소. 폐하께서는 귀국에 결코무리한주문을하는 것이 아니오." 트루비아의 근위 기사단 단장인 그라드 시드미안후작을 향해 여기 까지 설명을한후,와리스후작은다시 시선을젊은 왕에게로돌렸다. "전하, 코린트의 동맹국들을 치는 데 본국에서 직접 나선다면 자칫 전면 전쟁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사옵니다. 그렇기에 트루비아에서 코린트 동맹을 해체시키는 것을 조금만 도와 달라는 것이지요. 과거 트루비아가 어려을 때 본국에서 성심껏 도와 드린 것을 기억해 주시 옵소서." 이렇게까지 말하자 젊은 왕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는 아직 젊었기 에 어려을 때 도와 줬던 크라레스에 대해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순수 함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경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겠네. 폐하께는 짐이 승낙했다 고 전해 주게나." "그렇다면 언제 행동을 시작하실 것이온지?' "이쪽에도 전쟁을 준비할 여유가 필요하네.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정도는 걸릴 거야." "알겠사옵니다, 전하, 폐하께서도 전하의 전폭적인 지지를 크게 기 뻐하실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하께 약속 드린 테리아 4기는 3일 안에 보내 드리겠사옵니다. " 일단 협상이 아닌 협박에 성공한 와리스 후작은 느긋한 표정으로 궁을 나섰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완수해 낸 것이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 한 명과 마법사 한 명이 그에게 급히 다가 왔다. 원칙상 사절이라고 하면 이들 외에 두 명 정도의 수련 기사가 댄동하지만, 이것은 워낙 기밀을 요하는 방문이었기에 매우 단출하 게 왔던 것이다. "협상이 성공하신 모양이군요. 축하드립니다,각하." 와리스 후작의 표정을 보고 짐작을 한 기사가 먼저 축하 인사를 을 렸다. 그들은 와리스 후작을 수행하고 경호하라는 명령만을 받았을 뿐,그 외의 협상 내용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 만 그들은 와리스 후작이 처음 이리로 올 때는 매우 초조한 표정이었 는데 이제 약간은 미소를 떤 느긋한표정인 것을 보고 짐작을 했던 것 이다. "고맙구먼. 그건 그렇고,가로 경," 와리스후작의 말에 노마법사가즉시 대답했다. "예, 후작 각하." "본국에 지금 통신을 보내게나." "뭐라고 보고를 올릴까요?" "트루비아의 국왕이 일주일 후에 사용하기 위해서 암소네 마리를 보내 달라고 했다고 전하게나." "예? 암소라뇨?" "자네는 그렇게만 전하게 " "옛,각하," 노 마법사는 그게 암호라는 것을 눈치 채고는 급히 마법진을 그리 기 시작했다. 노 마법사가통신용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며 와 리스후작은 뒤에 서 있는 기사에게로 시선을돌리며 말했다. "르베이 경." "옛,각하." "자네 시간을좀 내줄 수 있겠나?" "예?' "기왕 나온 김에 엔테미어 공국과 크루마에도 잠간 들릴까 하는데 상관없겠느냐 이 말일세." "예,특별히 곧장 돌아가야 할 정도로 바쁜 일은 없습니다,각하. 편 하실 대로하십시오." "고맙군. 그렇다면 통신이 끝난 후 먼저 엔테미어 공국으로 가세 나." "옛,각하." 괴물 키메라의 정체 "웁‥‥‥‥웁‥‥‥‥" 허공에 손을 휘젓는 늙은이를 향해,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복면 을 한 사내가 으르렁거 렸다. "가만히 있어! 죽여 버리기 전에‥‥‥‥" 그 노인은 지금 자신이 처한 사태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곳은 그 이름도 유명한 마도 왕국 알카사스의 도시들중의 한곳에 있는 그 의 저택이었다. 알카사스의 치안은 대단히 견고해서 한밤중에 이렇듯 괴한이 침입 해 오는 사고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저택은 견인 족 노예가스무마리나 경비를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견인 족들이 경비를서면서 개처럼 끌고다니는 네 발 짐 승은 거대한 투견이 아니라 자신이 손수 제작한 난폭하기 그지없는 키메라였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저택의 외곽에는 불의의 침입자에 대처하기 위 해 알람 마법진까지 쳐져 있었는데,상대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이 안 으로들어왔던 것이다. 복면을 쓴사내가늙은이를 틀어쥐고 있는 사이,또 다른 복떤의 사 내가 재빨리 품 속에서 쇠사슬을 하나 꺼내어 그 늙은이의 목에 걸었 다. 늙은이는 발버등을 쳤지만 상대의 우악한 힘을 당해 낼 수는 없 었다 "좀, 잘 잡고 있으라구." "젠장,늙은이 힘이 보통이 아니군." "목걸이를 채됐으면 빨리 입을 봉해.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각하께 서 밑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구 " "알았어." 그들은 허우적거리며 발버등을 치는 노인의 입을 틀어막은 후, 팔 다리를 묶어서 큼직한 포대 자루에 집어넣었다. 복면을 쓴 사내는 노 인 한 명쯤의 무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가볍게 포대 자루를 등에 짊어진 후 창밖으로몸을 날렸다. 포대 자루를 짊어진 그들이 땅에 착지하자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 그 포대 자루를향해 시선을슬쩍 던졌다. "잡았나?' "옛,각하." "퇴각!" 각하라고 불린 인물의 지시에 따라 세 명의 인물들은 재빨리 이동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달려가는 정원에는 토막 난 시체들이 즐비하 게 널려 있었다 "우선 초대하는 방법이 예의에 조금 어긋났던 점을 사과합니다. 하 지만 이 방법 외에는 그대와 대화를 나눌 길이 없었기에 취한 조치였 기에 이해해 주기를바랍니다. " 복면을 쓴사내가 정중하게 말을 하자 늙은이는 꽁꽁 묶여 있는자 신의 손과 발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정중한 척하지 말고 이것부터 좀 풀어 주는 것이 어떻소? 손발이 저려서 참을수가 없군‥‥‥‥ 복면을 쓴 사내가 눈짓을 하자, 역시 그 옆에서 복면을 쓰고 있던 사내가 재빨리 노인에게 다가와서 손발을묶었던 줄을 풀어 줬다. 그 복면인은 노인의 손발에서 풀려 나온 줄을 집어 든 다음 정중한 어조 로말했다. "그대의 마법을 봉인하기 위해 마법 도구를 사용했지만, 그걸 사용 한 덕분에 이쪽에서도 당신에게 마법을 걸 수 없게 된 것이 문제였소. 안 그랬으면 편안히 잠자는 사이에 이리로 오겼을 텐데 말이오. 그렇 다고 한 대 때려서 기절시키자니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저질스런 방법을사용했소.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노 마법사는 탐탁치 않은 듯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쇠사슬을 이리 저리 당겨 봤지만 마나를 구동시킬 수 없는 상태에서는 그저 야윈 모 습의 노인일 뿐,그 이상도 이하도아니었다 "젠장. 아주 잘 만든 물건이군." "그럴 겁니다. 아주특별히 제작한 것이니까요." "이렇게 나를 납치한다고해서 네 녀석들 일에 협조할 것 같으냐?' "아마 협조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생명이 위태로우 실 테니까요." "훗, 이제 다 늙어 생에 미련은 없다. 키메라는 대단히 위험한 생명 체야. 그런 위험한 것의 제조법을 알려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좋을 대로해." "크라드마 경,제가 원하는 것은 키메라의 제조법 따위가 아닙니다. 이게 혹시 뭔지 아시겠습니까?? 노마법사는 약간은호기심 어린 표정으로복면한사내가주섬주섬 풀고 있는 보따리를 쳐다봤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낫같이 보였 다. 하지만 보통의 낫과 틀린 점이 있다면 그 손잡이 부분이 매우 특 이하다는 점 이었다. "키메라‥‥‥ 인가?' "예,저회 나라의 대단히 높은 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낸 놈입니다. 겨우 네 마리의 키메라만으로 그 분을 경호하던 그래듀에이트 한 명 과 경호병들을 해치우고 말입니다. " 순간노 마법사의 눈이 뭔가궁리를 하는 듯 살짝 가늘어졌다. "키메라의 크기는?" "인간 정도의 크기입니다. 대략 2미터 정도‥‥‥‥ 두 다리와 두 팔을 가진 인간형입니다. 그런데 양팔에는 이런 것이 붙어 있었지요." 상대의 설명을 제대로 들어 보지도 않고 크라드마는 고개부터 가로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그래듀에이트와 대등하게 대결을 펼칠 수 있을 정 도로강인한 키메라는 아직도만들어 낼 수 없었어 왜 그런지 아나?' "글쎄요‥‥‥‥" "그래듀에이트는 근력에 마나의 힘이 보태져서 움직이지. 그 때문에 그래듀에이트는 상상하기도 힘든 속도와 힘을 낼 수 있는 것이고. 그 런데 보통의 생명체는근력만으로움직이는 거야. 키메라가 아무리 마법의 생명체라고 하지만, 일단 그 뿌리가 되는 동물이 존재해야만 해. 트롤의 몸뚱이에 그래듀에이트의 다리를 붙 인다고 해서 그 다리 부분이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을까? 나는 그것 을 실험해 봤다네. 전쟁터에서 사망한 기사의 시체를 이용한 실험이 었지. 하지만 그 다리는 인간의 다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 정도의 힘밖 에 내지 못했어. 다리만 잘라서 붙인다고 마나가 함께 구동하지는 않 았던 것이지. 또,기사의 몸통에 트롤의 팔다리를붙인다고 해서 마나 가 함께 움직이지는 않네. 키메라는 것은 그저 마법 생물일 뿐. 살아 있는사람에 그런 것을붙일 수는 없기 때문이지. 키메라라는 것은 죽은 것을 마법으로 합성시켜 되살리는 것이야. 그 때문에 기사가 생전에 익혔던 모든 기술이 키메라에게 그대로 계 승되지는 않는다네." "그렇다면 살아 있는 것에 다른 생명체의 몸을 접합시킬 수는 없을 까요?" "그것을 시도해 보지 않은 마법사가 어디 있겠는가?키메라를 연구 하는사람이라면 누구나그런 시도를 한 번쯤은 해 봤겠지. 내 선배는 뭔가 실수를 했을 것이고,나는 그것을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아집을 가지고 실험을 해 보는 거야. 하지만 모두들 실패하지. 나도 노예나 몬스터들을 엄청나게 죽여 놓고 나서야 그 연구에서 손을 뗐으니까 말이야." "흐음‥‥ 그렇다면더더욱이해할수가없군요.겨우네마리가모 여서 본국의 그래듀에이트를 해치운 것은 사실인데, 크라드마 경께 서는그것이 불가능하다고우기시니 말입니다. " "우기는 것이 아니야.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노 마법사는 신중하게 궁리하고 있는 상대를 힐끗 바라본 후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원하는 것은 뭔가?저 해괴한 키메라의 제조법인가,아니면 그걸 만든 사람인가?그것도 아니라면‥‥‥‥" "이제 대충 짐작을 하셨을 텐데요? 저것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를 알 고 싶습니다. 그래야 저 따위 것을 만들라고 의롸한 나라가 어디인지 도 알수 있을테니까요." "으음‥‥‥‥ 그렇다면 이렇게 해 보는 것은 어떻겠나?저것을 가지고 내가 연구를 해 볼 수 있게 시간을 좀 주게. 저런 특이한 것이라면 아 주 특별한 재료가 사용되었을 거야. 그 재료를 알아 낸다면 많은 도움 이 되지 않을까?' "글쎄요. 고작그런 것으로도움이 될까요?' "충분할 걸세. 널리 분포하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실험 재료로 다 써 먹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세. 오크,고블린,트롤,오거 등등‥‥‥‥ 하 지만 저것은 아주특별한 속도와 근력을 지닌 존재야. 그 재료가 되는 몬스터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안 그랬다면 내가 전에 벌써 만들어 냈을 테니까말이야. 안그런가?' 노마법사가 보자기 위에 펼쳐져 있는 키메라의 일부를 가리키며 말 했다.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상대도 그럴 듯하다고 느꼈는지 고개 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시간을 얼마나 드리면 되겠습니까?' "며칠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 수줍을 많이 타는 왕자 각국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가운데 크라레스의 왕자가구애 작 전을 벌이고 있는 가므에서도 여태까지 공을 들인 만큼 약간의 결실 이 맺어지고 있었다. "어? 어? 오늘은제법 오랫동안 얘기를하는데? 이상하지 않아?" "그렇군. 저 아가씨가 처음에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건성으 로 대답할 때는 일찌감치 자리를 털고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건 모르지, 아주 예의 바른 아가씨인 것 같은데, 예의상 가만히 앉아 있는지도 몰라." 이렇듯구구하게 의논이 오가는 가운데 드디어 첫날의 데이트는 무 사히 끝이 났다. 아리아스로는 기록적으로 오랜 시간 행해진 여성과 의 데이트였다. 아리아스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내일도 만나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사실 기대 따위는 하지 않고 예의상 물어 본 것이었는데,그녀의 대답은 놀랍게도 '예스(Yes)' 였다. 다음 날에도 만나 주겠다는 상대방의 약속 때문에 아리아스는 그날 밤,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고 누워 있어도 잠은 오지 않고 다소곳이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의 가냘픈 모습이 자꾸 떠 올랐다. 그녀의 생각에 잠긴 듯한 옆모습. 그녀는 시종일관 고개를 살짝 돌 린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계속 만나 주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녀도 그런 아리송한 표 정을 짓고는 있었지만 자신을 싫어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이 좋은 방향으로만흘러가자그녀의 그런 수수께끼 같 은 모습도 미란의 명문이라고 볼 수 있는 지벨리아 가문의 엄한 가정 교육 때문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건성으로 대충 대답 하던 것들까지도 자신과의 의견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좋은 방향으 로 대화를하기 위한 노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리아스의 호위들이 그들의 만남이 몇 번째 데이트에서 깨질 것인 지 내기를 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상대방의 표 정이나 분위기로 봤을 때는 도저히 오래 가지 않을 것 같은데도,어쨌 든그들의 만남은 일주일째 계속되었다. 이때쯤에서 아리아스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던 것이다. 상대도 어느 정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 고,그도 상대가 별로 싫지는 않았다. 물론 그 정도의 감정만으로 결 혼을 청하기에는 약간무리가 있는 것도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것에 대해 의논할 만한 상대도, 시간도 없 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가장 의지하는사람들은모두 다 머나먼 곳 에 있었고, 제일 가깜게 있는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은 왠지 모를 차가 움 때문에 그런 의논을 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리고 미란의 의 장은 그가 빨리 배우자를 선택하도록 무언의 압력을 가해 오고 있었 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결혼은 사실 정략 결혼이어서 상 대자가 마음에 들건 그렇지 않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두 나라 가 결혼이라는 자그마한 사슬로 연결되는 것만이 중요했다. 운명의 그날,아리아스로서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기에 그녀 에게 청혼을 했다. "저 ‥‥나,나하고 겨 결흔해 주시겠소?" 말조차 더듬거리는 멋없고 형편없는 청혼이었지만,그녀는 고개를 살짝 까딱거려 그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아리아스는 머리가 텅 빈 듯한 충격을 받으며 더 이상 할 말을 잊은 채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퍼부었다. 뜻하지 않는 상대의 대답에 아리아스는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짜고 친 포커처럼 결론이 이렇게 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 리안은 원래 사랑하던 남자가 따로 있었지만 그 남자와의 결혼은 불 가능했기에 취해진 결론이었다. 그 남자는 그녀의 소꿉 친구로 그녀 집안 하인의 아들이었다. 그들 은 몰래 사랑을 키워 왔었는데,결국은 그게 발각되었고 그 때문에 마 리안의 아버지 크라크 지벨리아 백작은 이 결혼을 강경하게 밀어붙 였던 것이다. 그녀의 사랑하던 남자 친구는 이미 지벨리아 백작의 저택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이 결혼을 하지 않는 다면 남자 친구를 죽여 버 리겠다는 최후 통첩을 받고 있었다. 지벨리아 백작의 입장에서는 비천한 신분의 녀석에게 딸을 줄바에 야 스와질렌 가문의 병약한 아들에게 주는 것이 백 배 낫다고 생각했 을 것은 당연했다. 스와질렌 가문이 요 근래에 워낙 병약하기에 오랜 세월 시골에서 요양하게 했던 막내 아들의 신랑감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귀족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확 퍼져 있었다. 흠이 있는 딸을 스와질렌 후작 가문에 시집 보내는 것이 좀 꺼림칙하기는 했지 만,상대방이 워낙 병약해서 세상구경을 못 했다고 하니 대충 넘어갈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 계획을 실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벨리아 백작이 그의 딸의 결혼 상대가 스와질렌 가 문의 병약한 자식이 아닌 신흥 제국 크라레스의 수줍음을 많이 타는 왕자라는사실을 먼저 알았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카드였다. 엔테미어 공국은 모국인 알카사스에 비교한다면 매우 아름 다운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알카사스는 저 먼 서쪽의 사막 지 대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가였다. 외진 변방이었기에 소수의 마법 사들이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동쪽 대륙의 주도 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은 대아르곤 제국이었었다. 그리고 크루마,코 린트, 크라레스 제국들이 연합해서 아르곤 제국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다. 대제국들이라 불리고 있었던 네 나라들은 저마다 푸른 젖줄이 흐르 는 비옥한 평원들을 끼고 있었고,그 평원들에서 생산되는 산물들이 곧그들의 막강한 힘의 원천이었다. 그에 비해 알카사스는 변방의 사막 지대에서 탄생한 국가였던 만큼 신이 선물한 자연의 혜택을 입을 수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에 게 적대적인 자연을 마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일단 마법진을 이용하여 자연을 제어하는 데 성공하자, 그 인근의 부족 국가들은 더 이상 알카사스의 적이 될 수 없었다. 알 카사스는 마법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방법을 개발했고, 그 방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강대한 군사력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작은 왕국들을 복속하며 동진을 거듭하던 아르곤 제국은 크 라레스라는 강력한 벽 앞에서 진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몇 번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여태껏 알카사스가 상대해 왔던 변방의 자그마한 왕국들의 군사력과 4대 강국에 들어가는 크라레스 의 군사력은 엄청난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엔테미어 공국동쪽에 있는 자그마한 평야에서 벌어진 대규 모 전투에서 무참한 패배를 당한 알카사스는 더 이상 싸워 봐야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크라레스 제국에 휴전을제안했다. 크라레스 제국도 배후에 아르곤 제국이라는 막강한 적을두고 군사 력을서쪽 전선에 오랜 시간돌리는 것이 별로좋지 못할 것이라는 판 단에 그 조약은서로간에 공평하게 아주 빨리 체결되었다. 그러다가 아르곤 제국이 갑자기 내전 상태로빠지면서 곧이어 일어 난 크라래스 제국의 몰락은 알카사스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때 처음 모습을 드러낸 흑기사라는 신형 타이탄의 막강한 성능도 놀라웠었지만, 상대국의 수도만을 박살 내면서 조기에 전쟁을 종결 시키는그 전광석화 같은 전술에 엄청난충격을 받았었던 것이다 그 뒤로 알카사스는 코린트의 그 전격전에 대비하여 수많 은 탐지 마법진과 방어 마법진을 건설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미 크라 레스 제국을 집어삼키면서 급성장한 코린트에 추파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상호간의 완충 지대라고할수 있는 엔테미어 공국이었다. 엔테미어 공국의 첫 번째 영주는고 크라이더 엔테미어 대공이 었다. 그가 엔테미어 공국의 대공으로 즉위한 것에는 그의 뛰어난 외 교적 센스가 한몫을 했다. 알카사스는 코린트와의 전쟁에 도움이 되 는 '동맹 위성 국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비무장 지대의 성격을 떤 '무력 완충 지채' 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튼 고 크라이더 엔테미 어 대공은 그의 모국인 알카사스의 바람대로 그 역할을 훌릉하게 완 수해 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아들인 미카엘 엔테미어 대공이 시험대 에 올라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와리스 후작각하." "무슨 말씀을‥‥‥ 이렇게 불쑥 찾아 뵈서 죄송할 따름이옵니다, 대 공 전하." 만약에 제1차 제국 전쟁 전에 와리스 백작이 이렇듯 무례한 방식으 로 그에게 찾아왔었다면 미카엘 대공의 얼굴도 구경하지 못한 채 쫓 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외교관이라는 직업은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실력자냐 하는 것보다는 뒤 배경이 얼마나 대단하냐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것이다. 상대는 거대한 군사력을 보유한 신흥 제국 크라레스의 외교 담당 관, 이렇듯찾아오기 10분 전에 통신 마법을통해 가겠다고 '일방적 인 통보' 만 하고서는,마법진을 이용해 나타나서 사전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만나자고 해도 상대로서는 만사를 제쳐 놓고 만나 줘야만 하는 것이다. "뭐 우리 사이에 그것이 그렇게 큰 흠이겠습니까?그건 그렇고 오늘 은 어쩐 일이신가요?" "허허허,대공 전하께서는 제가 꼭 무슨 부탁이 있을 때만 찾아오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이거 섭섭하군요." "무슨 그런 말씀을‥‥‥ 자 들어와서 차라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기 로 하죠. 때마침 꽃이 활짝 피어서 테라스에서 보는 경치가 정말 좋지 요. " "그럴까요?" 하지만 와리스 후작은 본론으로 빨리 넘어가지 않고 시간만 질질 끌었다. 원래 외교를 담당하는 너구리들이 흔히들 써먹는 방법이었 기에 미카엘 대공은 마음을 푸근하게 가지고 대충 대답하면서 상대 가 언제쯤 본론으로 넘어갈까 기다리고 있었다. 외교라는 것이 조급 한 마음을 가지고 임하면 실패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오래 전부터 이 런 습관이 몸에 익어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뚱뚱한 너구리 쪽에서 뭔가를 꾸미기 위해 왔다면 일단은 대화의 실마리는 그쪽에서 풀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 에 있었다. "타이탄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한 병기가아닙니까,전하?" 뭐 때문에 그런 말을 꺼내는지 의도를 생각하면서 미카엘은 찜찜하 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렇죠." "저는 기사가 아니기에 타이탄을 타 보지 못했지만,그걸 타 보면 정 말 기분이 좋을 것 같더군요. 전하께서는 한 번이라도 타 보셨습니 까?" 미카엘 대공도 외교관으로잔뼈가 굵은 인물이었지 결코 기사는 아 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전용의 타이탄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없 었다. 미카엘 대공이 기사가 아니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알 고 있는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미카엘 대공은 이 늙은 너구리가 왜 자 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나 생각하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아직 타보지 못했습니다. 제 밑에 기사단이라도 있다면 한 번 타 봤을 텐데, 원래가 본국에는 타이탄은커녕 기사단도 없지 않습 니까? 본국은 알카사스의 속국일 뿐이지요." "그렇다면 타이탄을구경해 보신 일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본국에는 콘도르(Condor) 기사단의 분대가 주둔하고 있지요. 그 덕분에 노리에 급이나 가이아 급 타이탄은 몇 번 봤습니 다. " 가이아 급 타이탄은 현재 알카사스의 4개 기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타이탄이었다. 노리에 급은 가이아 급으로 대체되면서 모두 다 타국 에 수출되었기에 지금은 알카사스 영토 내에서는볼수 없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그 두 가지 타이탄밖에 보지 못하셨습니까?' "예 " "믿어지지 않는군요. 저는 전하께서 저보다 훨씬 더 많은 타이탄들 을 구경해 보신 줄 알았습니다. 몇몇 국가에서는 사열식을 할 때 타이 탄을 동원하여 위엄을과시하기도하지 않습니까?" "아 예, 그런 식이라면 몇 가지 더 되는군요. 미란의 타이탄은 정말 아름다웠었지요." "예,하지만 강력한 힘은 느껴지지 않더군요. 원래가 타이탄이란 것 이 힘의 상징 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외형을 그렇게 예술품처럼 만드는 것은 웃기는 노룻이지요. 역시, 힘이 느껴지는 외형은 코린트의 타이탄 이상 가는 것은 없지요. 당당 한 5각형의 방패, 기다란 뿔‥‥‥ 특히 적기사의 경우는 붉은색 페인 트를 칠해서 그런지 더욱 무시무시하게 보이더군요. 적기사를 보셨 습니까? 전하." "아니오. 소문만 들었을 뿐,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 " "예,적기사는 정말 대단하지요. 특히 이번에 실전 배치된 신형 적기 사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보이더군요. 커다란 방패와 거대한 검‥‥‥‥ 정말이지 위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 "신형 적기사라구요?" 와리스 후작은 상대의 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라레스도 간신히 알아 낸 정보인 만큼 알카사스에 서 그것을 알 가능성은 없다는 판단에 여기 와서 일부러 떠들어 본 것 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미카엘 대공의 모습을 보니 아직 알카사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음이 확실했다. 와리스 후작은 넌지시 시침을 떼 고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 모르고 계겼습니까? 이번에 30기씩이나 생산되어 혹기 사를 밀어내고 정식 근위 타이탄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역시 코린트 는 정말 대단한 국가지요. 전쟁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토록 엄청난 자금을 확보하다니 말입니다. " 네 시간 동안이나 와리스후작은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 대다가 돌 아갔다. 국경 문제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소리가 다 오고갔기에 미카 엘 대공은 상대가 왜 여기까지 와서 노닥거리다가 갔는지 쉽게 의도 를 눈치 채지는 못했다. 그만큼 와리스 후작이 적기사에 대해 떠들어 댄 것이 매우교묘한타이밍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말이 흘러가다가 보니 그런 말을 하게 된 형국이었 기에 미카엘은 와리스 후작이 일부러 정보를 흘리려고 여기까지 왔 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미카엘 대공은 와리스 후작이 마법진에 서 모습을 감추는 것을 배웅한 후 통신실로 달려갔다. 원로원에 급히 보고할 특급 정보가 생긴 것이다. 도대체 알 수 없는 키메라 미네르바는 소환된 몇몇 인물들을 쭉 둘러봤다. 제1근위대 대장,제 2근위대 대장, 지발틴 기사단 단장, 제네리아 기사단 단장, 엘프란 기 사단단장,그리고정보부장,마법사 연합 의장과그의 수행원 다섯 명 이 그들이었다. 긴 사각형의 탁자의 끝에 앉아 있는 미네르바를 중심 으로오른쪽에는 기사들이,왼쪽에는마법사들이 쭉 앉아 있었다. 미네르바는자신의 왼편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그린레이크를 곱지 못한 시선으로 힐끗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경들을 소환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 몇 가지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이블리스 경,브리핑을 시작하게." "옛, 공작 전하." 자리에서 일어선 이블리스는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에게 눈짓을 했 다. 그러자 그 마법사는 마법진이 그려진 얇은 판 두 개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올려왔다. 그런 후 마법진을 발동시키자 그 위로 두 대의 거대한 붉은타이탄들이 모습을드러냈다. "이번에 들어온 최신 정보에 따르면 코린트는 새로운 모델의 적기사 를 근위 타이탄으로 채택하여 30여 기를 생산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것이 그 새로운 모델입니다. 옆에 있는 구형의 적기사와 대비하여 보 신다면 간단하게 그 차이점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구형의 모델이 일 대 일의 격투를 상정하여 제작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신형은 집단 전 전용으로 추측됩니다. " 크라레스 쪽에서 노획한 적기사를 연구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기 에 크루마 쪽에서 적기사를 보는 관점은 약간 차이가 있었다. 크라레 스에서 적기사를 '다목적 타이탄' 으로 보는 데 비하여 크루마에서는 '일 대 일 격투용 타이탄' 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크루마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적기사에 사용된 여러 가지 최신 기술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출력은 거의 안티고네 급으로 추측되며 외형상 전체적인 무게나 장 갑의 두께 등도 안티고네를 그대로 복사했다고 보시는 것이 옳을 것 입니다. 이것이 30기나 제작되어 흑기사를 대체했다는 증거가 몇 곳 에서 잡혔습니다. 그리고 크라레스에서 이쪽으로 보내 준 정보도 우 리 쪽에서 추측하는 것과같았기에,더욱 현실성이 있습니다. " "크라레스에서 보내 줬다니,무슨말인가?' 지발틴 기사단 단장인 알프레드 쟉센 후작의 물음에 이블리스는 재 빨리 대답했다. "예, 크라레스에서 와리스 후작을 파견하여 자신들이 수집한 최신 정보를 이쪽에 알려 줬습니다. 아마도 코린트의 군사력 팽창에 대해 크라레스도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대답을끝낸 이블리스는 이제 다시금 시선을 쟉센 후작에게서 돌려 미네르바를 향하며 말했다. "근위대에 있던 흑기사 30기는 발렌시아드 기사단으로 보내진 것으 로 추측됩니다. 그 외의 타이탄 총수는 전번 회의 때 발표한 수와 거 의 차이가 없습니다. 코린트의 전력은 헬 프로네 1기, 적기사 5기, 신 형 적기사 30기, 흑기사 30기, 백기사 1기, 미노바-P 10기, 미노바-P2 210여 기 정도로 추측됩니다. 그래서 합계 287기 정도로서 본국의 전 력과 비슷한 수준까지 따라 온 것으로 사료됩니다. " 이 보고는 현실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크루마에서는 코린트의 키에리 발렌시아드가 전사했기에 그의 헬 프로네를 로체스터 공작이 물려받았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형인 미노바-P2의 생산 수량을 약간 작게 추측하고 있었 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크루마의 기사들이 코린트의 기사들 보다 실력이 조금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코린트의 군사력은 크루마의 군사력을 월등하게 앞서가고 있다고봐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크라레스의 군사력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 이블리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마법사는 다시 탁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여러 개의 판들을 올려 놓고는 마법진들을 발동시켰 다. 이윽고 마법진 위에는 각종모양의 타이탄들이 모습을드러냈다. "가장 앞에 있는 거대한 청색 타이탄이 크라레스가 자랑하는 근위 타이탄 청기사입니다. 추정 전투 중량 160톤 정도로서 3.0의 출력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 지만 5기 내외만 생산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 외의 모든 타이탄은 카프록시아 혹은 그의 변형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출력 1.3의 엑스시온을 사용하고 있으며 총 보유량은 252 기 정도로서 카프로니아 A형과 B형 각 1기,테세우스 120기 내외,트 라노 130기 내외입니다. 그 외에 스바시에 공국의 카프록시아 20기, 치레아 공국의 드라쿤 20기가 따로 존재합니다. 현재 추정하기로는 크라레스의 총 타이탄 수량은 297기로서 3국 중 에서 가장 많은 타이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첨기사를 제외하면 카프록시아의 변형인 것 을 감안한다면 크라레스는 1.3을 초과하는 출력을 지닌 엑스시온을 생산할능력이 없다고봐야 할 것입니다. 현재 정보국에서는 크라레스가 던전 같은 곳에서 청기사의 엑스시 온을 습득한 것이 가장 현실성 있는 추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크라레스가 더 이상 청기사를 제작하지 않고 있는 것을 설명 할 방법이 없으니까말입니다. " 여기까지 말한 이블리스는 주위를 한 번 쭉 둘러본 후 다시 말을 시 작했다. "3라레스의 타이탄 보유량은 297기라고 하지만 주 전력이 카프록 시아 급이기에 3국중에서 가장 뒤처지는 타이탄 전력을 보유하고 있 습니다. 하지만 크라레스가 본국이나 코린트와 어깨를 겨를 수 있는 군사 강국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바로 청기사들과 우수한 기사들의 덕 분입니다. 겨우 다섯 기의 청기사지만 그 소유주들의 실력은 이미 지 난 번 전쟁에서 입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휘하에 있는 기사들의 실력 또한 거의 코린트의 기 사들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균형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코린트가 적기사를 30여 기나 더 생산했고,또 그것을추가 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최소한 5년 이내에 힘의 균형은 무 너지리라는 것이 정보부의 분석입니다. " "내가 경들을 소집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오. 코린트는 힘을 키우고 나면 크라레스나 본국,둘 중 한 곳을 침략할 가능성이 크오. 그렇기 에 코린트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3국 간의 적당한 균형을 잡 아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이제부터 그 방법에 대해 각자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 주기 바라오." 회의는 장시간 계속되었다. 하지만 내려진 결론은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군사력을 더 키운다든지, 타이탄을 더 생산한다든 지‥‥ 모든 것이 돈과 관련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이탄 한 대 만 드는 데 들어가는 돈은 천문학적 인 액수였다. 과거 국가의 존망이 걸렸을 때는 생산하지 않으면 국가가 망하는 판국이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쪽으로 국가의 모든 힘을 투입했었 지만, 지금은 외관상으로 봤을 때도 안정기였기에 그렇게 몰아붙일 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그린레이크가 중심이 된 마법사 무리들이 안정적인 3국 체 제라는 이유를 들며 더 이상 기사단을 증강시키기를 원하지 않았던 이유도 진다. 그린레이크 등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는 것이 코린트를 크루마 혼자만 상대한다면 모르겠지만, 크라레스라는 든든한(?) 동맹 이 있는 한 크게 염려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겨우 적기사 몇 기 정도 만든 것 가지고 전쟁을 시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그 들의 주장이었다. 회의가 아무런 성파 없이 설전으로 번지기 시작하자 미네르바는 서 둘러서 회의를 끝냈다. 그런 후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몇몇 부하들만 을 모아서 따로 회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라면 그래도 제대로 된 토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일이 꼬이는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전하."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지금으로서는 그래도 그린레이크 경의 의견대로 크라레스를 믿어 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사옵니까?" "끄응‥‥‥그게 예전의 크라레스라면 믿을수 있겠지만,토지에르의 생사가 불분명한 지금으로선 썩 신뢰가 안 간단 말이지. 젠장! 괜히 토지에르를 건드렸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신이 너무서둘렀다며 미네르바가후회가 담긴 한탄을터뜨리자, 부하는 상관을 위로하듯 말했다. "이미 쏟아진 물이옵니다.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을 테너 다른 방법 을강구해 보는 것이 좋겠지요. 이러면 어떻겠사옵니까?" "뭐 좋은 의견이라도 있는가?" "예,전에 썼던 방법을 다시 한 번 더 사용해 보는 것이옵니다. " "전에 썼던 방법이라고? 무슨 방법 말이냐?' "두 번째의 그로체스 옹작을 만드는 일이옵니다. " 부하의 말에 미네르바의 눈동자가 묘하게 불타 올랐다. 그로체스 공작 덕분에 상당한 이득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전에 키에 리가 그랬듯이 두 번째의 그로체스 공작을 키워 로체스터라는 거목 을 뽑아 낼 수만 있다면 아무리 상대가 적기사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겁날 것이 없지 않을까? "그래? 그것 괜찮은데? 이블리스!" "옛,전하." "전에 조사해 둔 놈들이 있다고 했지?그것을 좀 가져와 보게." "옛!" 노 마법사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들을 보며, 슬 그머니 짜증이 솟아 나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범인의 색출이라는 과제와 연구의 진전이라는 서로 간의 잇속이 맞아 떨어졌기에 둘은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한 덩어리로 뭉칠 수 있었다. 그런 후 저 사내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노마법사의 저택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는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다. 자신이 죽인 견 인 족 열 마리와 키메라 열 마리의 값을 즉시 지불했을 뿐 아니라,노 마법사의 연구에 보태라고 거금을 내놨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그 부하들은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에게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해 오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저들의 신분이 보통 은 아닐 것이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렇듯 몸에 밴 예절 은하루아침에 갖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 머문 지가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저 시커먼 포대 자루를 뒤집어쓰고 있다니‥‥‥‥ 그것이 이쪽 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시위처럼 느껴져서 문득 그것이 생각 날 '때 마나짜증이 났던 것이다. "소문은 들었지만 키메라에도 종류가 참 많군요." 이번에 새로들어온 저택의 괴수들을 바라보며 복면의 사내는흥미 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야 자신들이 해치운 놈들을 대신할 키메라들이 도착했던 것이다. 전에 저택에 있던, 커다란 개처럼 생겼 지만 무시무시한 이빨과 섬뜩해 보이는 발톱이 달려 있는 키메라가 아니라 사람처럼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이상한 괴물 같은 키메라들 이 스무 마리나 들어왔던 것이다. 키메라들은 노 마법사의 지시를 들 은 후 저택의 으슥한 곳에 몸을 숨겨 버렸지만, 그들이 와서 몸을 숨 기기 전까지의 과정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복면의 사 내가 말을 건 것이다. "키메라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지. 어떤 것은 타이탄만한 것도 있으 니까 말이야. 그것은 오거를 재료로 변형시킨 것이지만 소기한 목적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지. 타이탄을 상대할 수 있도록 계획해서 만들 어진 것이었지만, 실패작이었단 말이야. 변방에 출몰하는 몬스터나 상대할 수 있을까‥‥‥ 타이탄을 상대한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 "여러 가지로 연구를 하셨군요." "그럼. 그건 그렇고 몇 가지 자료가 넘어온 것이 있는데 한번 보겠 나?" "그러지요." 노 마법사는 자신의 서재로 상대를 안내했다 노 마법사의 연구실 은 그의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그곳에는 여 러 명의 마법사들이 함께 연구하고 있는 매우 큰 규모의 연구실이었 다. 그 때문에 그는 이번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끼여 든 이 손님들을 자 신의 집에 조용히 머물도록 배려해 준 다음,그 자신은 연구소와 집을 들락거리면서 그 연구 결과를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이거야.전체적인근육조직,뼈대의흔적 ‥‥모든것을종합 해 봤을 때 이것은 아무래도트롤의 변형이란 말이지." "이렇게 칼처럼 생긴 손을 가지고 있는 트롤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요?" "아,그 칼 부분은 아주 딱딱하기는 하지만 생체에서 만들어지는 조 직이야. 자네도 들어 봤겠지? 와이번이라는 놈을 말이야. 와이번을 개량해서 그 뼈대를 생성하는 세포 조직을 이용한 거야. 하지만 전체 적인 뼈대의 형상은 와이번이 아니라 직립 보행을 하는 동물에 가깜 게 설계되어 있지. 그것들중에서도가장가까운 것은트롤이야." "흐음‥‥‥ 크라드마 경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믿어야 하겠지요." "생각 잘 했네,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이 엄청난 근육 조직을움직이려면 아주특별한 피가 필요해. 생명력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피는 강력한 힘을 내는 근육 세포의 구석구석에까지 영양 과 산소를 공급해 주지. 그리고 파괴된 조직을 재생해 주고말이야." "그‥‥‥ 그렇습니까?" "지금까지는 트롤의 피가 키메라의 가장 각광받는 생명의 원천이었 어. 그 엄청난 재생력과 약동하는 생명력은그 어느 것과도 견줄 만한 것이 없었지. 자네,포션이라는 것이 뭔 줄 알겠지?' "그야 성직자들의 축복을 받은 생명수 아닙니까?" 당연한 듯이 말하는 복면의 사내를 보고 크라드마는 피식 미소 지 으며 말했다. "꼭 그렇다고만 할 수 없지. 맹물로 된 가짜 포션도 있지만, 일부 포 션의 경우트롤의 피를가공처리한 것도 있다네. 어떤 신전에서는포 션의 효력이 떨어지는 것을 염려해서 그것을 조금 섞어서 판매하기 도 하지. 그만큼 엄청난 재생력과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트롤의 피 야." "으음, 그렇군요." "트롤의 피는 그렇게도 강력하지만, 뛰어난 키메라를 만드는 데는 역부족이지. 상식 이상의 근력을 지닌 키메라를 만들려고 하면 그 힘 을 버티지 못하고 근육과 뼈대가 분리되어 터져 나가거나 아니면 산 소가 모자라서 괴사하는 경우도 생긴다네.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 하고 있는 점이 이것이지." 크라드마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상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금 말을 이었다 "여기 이 자료를 보면,뼈대에 붙은 치밀한 근육 조직을 통해 엄청나 게 강한 힘을 내는 키메라라는 것을 알 수 있어. 하지만 그 조직을 지 탱하는 피가 뭔지는 도저히 알수가 없더군. 뭔가 획기적인 것이 쓰였 을 텐데 말이야. 그게 뭔지를모르겠어‥‥‥‥ 말라죽은 핏덩이만을 가 지고 알아내는 데는한계가 있으니까말이야." "그렇다면 도저히 알수 없는 것입니까?' "이것 하나는 확실하지. 알카사스에서 제작된 키메라는 절대로 아니 야, 만약 그런 엄청난 생명의 원동력이 발견되었다면 벌써 보고가 을 라갔을 테고,그것을나도 알았겠지. 내가 있는 연구소는 군대에 납품 되는 키메라를 연구하는 곳이야. 당연히 뛰어난 키메라를 생산하는 기법이 발견되면 지체없이 우리 연구소로보고서가올라오지." "그렇다면 딴 나라에 가서 알아 봐야겠군요.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 니다.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점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이 만‥‥‥ 안녕히 계십시오." "지금 떠날 텐가?" "예,더 이상 이곳에 있어 봐야소득도 없을 테니까요." 잠시 궁리를 하던 크라드마는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한 어조 로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가세." "예?' "나는 키메라를 연구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엄청난 것이 개발된 것 이 확실하다면,자네만따라다니면 뭔가 얻어들을 수 있겠지. 안 그런 가?뛰어난 기사들과 마법사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정말 얻기 힘든 기회라는 것을 나도 잘 안다네. 데려가줄 거지?" 한참 궁리하던 복면의 사내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면서 허락했다. 어쨌든그 마법사에게 신세를 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빨리 준비하시죠." "고맙네, 그런데 다음 목적지는 어딘가?" 방금 전까지는 자신들의 신상 정보가 누출될 것을 우려하여 알려 주지 않았었지만, 함께 행동한다면 행선지를 알려 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기에 복면의 사내는무뚝뚝한 어조로짧게 대답했다. "코린트." 정령지를 다스리는 고도의 계략 "전하,보고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 "뭔가?" "예, 오늘 새벽에 트루비아가 토리아 왕국을 침공했다는 보고가 들 어왔사옵니다. " 베르딘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트루비아는 토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정도로 강 력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으음, 트루비아? 가만있자‥‥‥ 트루비아라면 본국에 흡수되었다가 6년 전의 전쟁에서 크라레스의 도움으로 독립한 그 작은 왕국 말인 가?"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뒤로 돌리면서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레티 안에게 물었고, 그녀는 언제나 그러하듯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전하. 바로 그 왕국이옵니다. " "으음, 거기가 맞다면 토리아 왕국을 침공할 여력 따위는 없을 텐 데‥‥‥" 침착한 어조로 말하는 로체스터 공작에게 베르딘은 확신에 차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벌써 트루비아가 움직인 원인을 알고 있었던 것 이다. "저도 그 점을 수상하게 여기고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6년 전 전쟁에서 크라레스 편에 서서 전투를 벌였고,그 덕분에 노획물에 대해서 일정량을 할당받은 모양이옵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크라레스 에서 동맹국에만 판매하고 있는 테리아라는 고성능 타이탄을 몇 대 구입한 것 같다는보고가 입수되어 있사옵니다. " "추정 수량은?" "정보에 의하면 5기에서 8기 사이로 추측되옵니다. " "8기라‥‥ 겨우그 정도타이탄 만을가지고침공할수 있을정도 로 토리아 왕국이 만만한 국가가 아닐 텐데?' "예전에는 그랬지요. 하지만 6년 전에 본국을 도와 준다고 기사단을 파견했다가 10기의 타이탄을 상실한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옵니다. 그리고 테리아라는 타이탄에 대해서 조사해 본 결과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을 알아 냈사옵니다. " "뭔데 그러나?" "예, 첩자들의 보고로는 거의 카프록시아 급에 맞먹는 파워를 지니 고 있다고 하옵니다. " 베르딘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프록시 아 급이라면 대부분의 국가들이 근위 타이탄으로 사용하고 있는 타 이탄과 동일한 성능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트루비아가 수입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사실이었다. "카프록시아 급이라고? 카프록시아 급이 8기 정도라면 우습게 여길 전력이 절대로 아니지. 그래‥‥‥ 그 정도라면 힘이 허약해진 토리아 왕국을 침공할 만도 할 거야."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베르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처리하시겠사옵니까? 일단은 철십자 기사단에 출동 대기 명령을 내려 두었사옵니다만‥‥‥‥" 아무리 베르딘이 정보부를 통괄하고 있다고 하지만,기사단을출동 시킬 정도의 권력은 지니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각 기사단 에 출동 대기를 명령할 정도의 권한은 있었다. 기사단이 출동을 하려면 그 인원이나 장비를 챙겨야 했고,또 그들 이 움직이게 될 마법진도 준비해야 했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로 했 다. 그렇기에 베르딘은 기사단이 투입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판단되면 출동 대기 명령을 내린 후 총사령관에게 보고 한다. 그러면 총사령관이 기사단의 출동을 명령했을 때 그 기사단은 벌써 출동준비 완료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고,조금이라도 빠른 시간 안에 그곳에 투입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철십자 기사단은 제1차 제국 전쟁 후 대대적인 개편이 가해졌다. 코린트는 구형 타이탄을 모두 다 없애 버리고 그것들로 신형 타이탄 을 만들었기에 철십자 기사단은 일시적으로 해체되었었지만,금십자 와 은십자 기사단이 정원을 채우게 되자 다시금 편성되어 새로 생산 되는 타이닫을 지급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현재 보유 타이탄 은 브기였고 한 대씩 아주 천천히 늘어나고 있는중이었다. 하지만보유 전력이 타이탄 38기라고하지만 철십자 기사단이 지닌 전력은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차이를나타내고 있었다. 그 모 든 타이탄은 현재 코린트의 신형 주력 타이탄인 미노바-P2형이었기 때문이다. 1.5의 출력을 지니는 이 강력한 타이탄 르기를 토리아 전선에 투입 한다면 곧장 결판이 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모든 것을 그렇게 쉽게 판단할 수는 없었다. 토리아의 동맹국이 코린트인 것처럼, 트루비아 는 크라레스라는 동맹국을 등에 엎고 있는 것이다. "글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동맹국이니까 도와 주는 것이 좋겠지만, 이게 상황이 아주 미묘해. 트루비아는 크라레스의 동맹국 이란 말이지, 본국에서 기사단을 투입한다면 크라레스도 군대를 투 입할 수 있는 기회를가지게 될 것은자명한 사실이지. 잘못하면 토리 아 전선에서 크라레스의 정규 기사단과 일전을 벌여야 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렇다면 토리아는 포기하는 것이옵니까?" 베르딘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오랜 시간 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 에 잠겼다. 기사단을투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의 생각은 오래 도록 계속되었다. 그만큼 토리아 전선에 기사단을 투입하는 것은 국 제적으로 미묘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결심을 내린 로체스 터 공작은 시선을부하에게로돌리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자네는 그쪽 전쟁터에 첩자를 몇 명 파견 해서 혹시나 그 전쟁의 배후에 3라레스가 관여하고 있는지 철저히 조사해라. 만약 그 녀석들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라면 그 즉시 병 력을 파병하여 응징해야 해. 그러나 이것이 만약 트루비아의 독자적 인 움직임이라면 그냥 두자구. 괜히 크라레스를 건드려서 좋을 것은 없을 것 잗으니까 말이지." "예, 명령대로 시행하겠사옵니다. 전하."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로 첩자들이 트루비아를 철저히 조사했지만 크라레스가그 일에 관여했다는그 어떤 중거도 잡을수 없었다. 타이 탄이 동원된 전투가 벌어진 결과 트루비아가 코린트의 예상보다 2기 많은 12기의 타이탄을 동원한 것이 밝혀졌지만, 거기에 탑승하고 있 던 기사는 트루비아 인이었고 또 타이탄 또한 완벽한 트루비아 정규 군 소속이었기 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 때문에 코린트는 토리아 왕국에서 벌어진 전쟁을 단순한 국지전 정도로만 판단하고 철십자 기사단에 대한 동원 준비령을 해제해 버 리게 되었다. 트루비아는 엄청난 속도로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여 일주일 만에 토 리아 왕국의 수도를 점령했고,토리아 왕국은 트루비아 왕국 토리아 령으로서 흡수되고 말았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재빨리 전쟁이 종결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트루비아 왕국이 코린트 제국의 침입을 받았을 때 살아 남은 방법이 상당한도움이 되었는데,이것은 매우 재미있는사실이었다. 트루비아 왕국은 전 영토가 코린트에 함락되었다고 하더라도 국왕 이 살아 있다면 국가가 절대로 멸망하는 것이 아님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 얻은 체험을 이번 전쟁에서 십분 활용하여 상대국의 국 왕과 그의 가족들을 잡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토리아 기사단을 전멸시킨 후 거의 쉬지도 않고 그 여세를 몰아 수 도를 포위했고,포위 작전과 동시에 수도 함락 작전도 함께 수행되었 다. 기사단이 전멸 당한 훈였기에 토리아 왕국은 타이탄을 앞세운 트 루비아 군대를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거의 순식간에 수도가 함락되 었으며 왕족과 귀족들 거의 대부분이 생포되는운명에 처했다. 왕이나 왕족을 처형했다고하더라도국왕의 먼 친척뻘 되는사람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고는 반정부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도 허다했 기에 침공군 사령관인 그라드 시드미안 후작은 아주 빨리 움직였다. 그는 최대한 빨리 수도 외곽을 포위했고, 또 국경을 봉쇄했다. 그런 후 철저하게 수색하여 모든 귀족들을 남김없이 잡아들였다. 그리고 여태껏 모든 점령 국가들이 그랬듯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몽땅 다 처형해 버렸다. "우리가 너무나도 많은 죄를 짓고 있는 것 같구려." 시드미안의 충고를 받아들여 비밀리에 점령지를 방문한 젊은 국왕 은 처형장에 쌓여 있는 어린 아이들의 시체를 보며 한 줄기 이슬을 뿜 어 내듯 말했다. "전하, 최대한 빨리 점령지를 안정시키려면 이 방법 외에는 없었사 옵니다. 하지만 이 피값은 전하가 아닌 제가 모두 짊어지겠사옵니다. 전하께옵서는 일주일 후에 이곳에 방문하시어 점령지를 피로서 장악 하고 있던 저를 총독 직에서 파면하시고 다른 인물을 세우시옵소서. 그런 후 선정을 베푼다면 그 전의 억압은 시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질 것이옵니다. " "그렇게 된다면 경의 명성에 누가 될 텐데‥‥‥‥ "소신의 하찮은 명성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사옵니다. 하지만 전하의 위치는 절대로 흔들리면 아니 되십니다. 그 점을 명심해 주시 옵소서." "알겠소. 하지만그대에게만 너무못할 짓을 시키는 것 같구려." "오로지 소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옵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젊은 왕은 눈물을 머금고 이 우직한 무사의 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후 젊은 왕은 외형적으로 봤을 때 시드미안을 '숙청' 했다. 그의 죄목은 필요 이상으로 점령지를 탄압했다는 것이었다. 점령지 의 주민들은 이 잔인무도한 기사를 숙청한 후 인자하면서도 노련한 인물로 총독을 교체한 젊은 왕을 칭송했다. 원체 지독한 탄압을 받았다가 그것이 풀리면서 살기 좋은 방향으로 풀리자 주민들의 불평은 급속도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와 함께 젊은 왕은 현명한 군주로서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각인되게 된다. 한 충성 스런 무인의 희생을 발판으로‥‥‥‥ "역시 트루비아를 잘 선택한 것 같군 순식간에 토리아를 점령해 나 가는 것을 보니 과연 토지에르 경의 말대로 대단한 저력을 지닌 국가 로다. 그가 짐의 곁에서 떠난 후에야 그의 소중함을 한층 깊이 깨닫게 되는구먼." 황제의 한탄에 루빈스키 대공이 재빨리 끼여 들었다. "폐하,그런 말씀은 너무 이르옵니다. 토지에르 경이 죽은 것도 아니 고‥‥ 며칠 간 위험하기는 했지만, 이제 생사의 고비는 넘겼다고 하 지 않사옵니까? 이제 조만간에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폐하의 앞에 나 타날 것이옵니다. "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전에 찾아갔을 때, 너무나 안색이 창백하 고 초췌하여 그를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생겼던 것은 사실 이라네, 그대와 토지에르는 짐에게 꼭 필요한 존재들이야. 그대도 이 번 일을 밑거름 삼아 매사에 조심하게나. 토지에르 경도 소중하지만, 그대를 잃는다면 짐은 도저히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수 없을 것이 야." "소신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어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폐하." "짐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네. 감사할 필요까지는 없지." "폐하, 그건 그렇고 트루비아에서는 대사를 파견하여 노획한 타이탄 15기를 테리아로 바꾸고 싶어하옵니다. 몇 대나 주는 것이 존겠사옵 니까?" 잠시 궁리를 하던 황제는 루빈스키에게 물었다. 원래가 황제의 상 담역은 토지에르였지만, 그가 없는 지금 루빈스키에게 모든 문제를 상의하고 있는 것이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황제의 물음에 루빈스키는 자신이 부하들과 장시간 상의해서 준비 한 대답을 말했다. 토지에르가 돌아을 때까지 자신이 황제의 상담역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아마도 7기 정도만 주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10기 정도는 주 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면 누가 봐도 본국에서 트루비아를 지원해 주 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옵니다. 이쪽에서도 약간의 이익을 남기 면서 판매하는듯한 인상을 줘야 할 것이옵니다. " "그것이 좋겠군. 경의 판단대로하게나." "예,폐하." "2단계 작전은 언제 시작할 예정인가?" "예, 일단트루비아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난후 탄벤스 공국 쪽으로 진격시킬 예정이옵니다. 탄벤스 공국이 무너지고 나면 그 다음은 리비아나 왕국의 차례가 되겠지요. 그리고 미란 국가 연합에 서도 테리아를 수입하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1차 분으로 10기를 원 하고 있는데,그쪽에 납품할 것도 생산하라고 지시해 뒀사옵니다. " "미란도 장차 쓸모가 있을 테니 원하는 만큼 수출해 주게나. 토지에 르 경이 자리를 비웠으니, 타이탄 생산에도 차질이 클 거야, 자네가 그쪽에도 신경을 좀 써 주게나," "예,폐하." "그건 그렇고 트루비아에서만 전쟁을 벌인다면 코린트가 의심할 가 능성도 있지 않을까?" "예,그것 때문에 다른 왕국들과도 의논을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하 지만 너무 동시다발적으로 전쟁이, 그것도 코린트의 동맹국들을 상 대로 벌어진다면 코린트가 눈치를 채겠지요. 그 때문에 조심에 조심 을 거듭하고 있사옵니다. " "알겠네. 그 일도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나. 근위대의 교육도 중요 하기는 하지만, 경은 최선을 다하여 코린트가 힘을 키우지 못하게 막 아야 할 것이야." "옛,폐하." 아주 재미있는 정보 "이 녀석 인가?" "옛. 이 자가 연구소의 책임자라고하더군요." 복면을 쓰고 있는 이 괴이한 사내들은 마법진 위로 나타난 깡마른 괴팍하게 생긴 노인을자세히 노려보며 대화를 나누는중이었다. "그래?수고했다. 뒤처리는 잘 했겠지?' 상관의 말에 복면을 뒤집어쓴 부하는 아주 자신 있다는 듯 대답했 다. 연구소에서 일하던 수련 마법사한 놈을 납치해서 모든 것을 실토 할 때까지 철저하게 고문을가했고,원하는 정보를 얻어 낸 후에는완 벽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시체가 발견되려면 며칠 걸릴지도 모르지 만,그때까지는 '실종'으로처리될 것이다 사실 하위 직에 있던 수련 마법사 한 명이 없어졌다고 해서 큰 문제 로 삼는 것은 아니었기에 놈들도 대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또는 일이 힘들다고 도망치는 하급 마 법사들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예,깨끗하게 처리했습니다. " "좋아. 행동은 오늘 밤에 하기로 하지. 마법사라는 것들은 마법 도구 를 이용해서 순실간에 도망칠 수 있으니 그게 문제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이들의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노마법사가슬쩍 끼여 들었다. "이보시오,오늘 저녁에 행동을 시작할 거요?" "예,납치해서 이곳으로 데려을 테니 기다리십시오." 노 마법사는오늘 밤에 또 한 명의 마법사가 여기에 들어오게 될 것 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들과 함께 행동해 보니 마법사둘을 제외하 고 여덟 명 전원이 그래듀에이트들이었다. 이 정도 패거리가 함께 돌아다니기도 매우 힘든 노릇이었지만, 또 그런 만큼 그들이 지닌 능력은 엄청났다. 철저하게 대비를 하지 않는 한 이들의 행동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자신의 집에 있던 키메라들과 견인 족들을 순식간에 해치웠듯이, 오늘 납치되어 올 마법사의 집에 있던 경비들도 뭐가 되었건 죽은 목 숨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과연 그들은 다섯 시간쯤 후에 퍼덕거리는 자루 하나를 등에 짊어 지고 다시 나타났다. 코린트의 경우 키메라 연구는 알카사스와 달리 그렇게 활발하게 진척되어 있지 못했다. 키메라가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아니었고, 일부 마법사들의 흥미에 의해 연구되는 수 준이었기에 경비도 취약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는 아주 간단 하게 납치되어 와서 이 자리에 끌려왔다. "이런 나쁜 녀석들!네 녀석들의 정체가 뭐냐?" 재갈이 풀리자마자 냅다욕설부터 퍼붓는 늙은이를 향해 복면을 쓴 한사내가 험악한 눈초리,를 빛내며 으르렁거렸다 "이봐,죽기 싫으면 닥치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해." 그것을 보고 복면을 쓴 또 다른 사내가 나무랐다. 그러자 처음에 으 르렁거리던 복면을 쓴사내는 조용히 물러났다. "이봐,말 버룻이 그게 뭔가? 이보십시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그 대를 납치해 왔지만, 몇 가지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만 해 주신다면 조용히 보내 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크라드마 경." 크라드마 경은 한밤중에 납치되어 와서 머리 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있는 그 마법사에게 다가가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키메라요. 나도 그 때문에 납치되어 왔 었소. 하지만 저기 있는 대장이 하는 말은 사실이니까 제대로 살아서 풀려나고 싶다면 협조하시는 게 좋을 거요. 아아,그런 눈초리로 바라 보지 마시오. 나도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오. 혹시 이런 데이터를 낼 수 있는 키메라의 제조법에 관해 들은 적이 있소?' 크라드마가 내미는 종이에는 빽빽하게 수치가 적혀 있었다. 바로 그것은 키메라의 데이터가 아니라 그래듀에이트 급 기사의 데이터를 조금 고친 것이었다. 그래듀에이트를 해치우는 데,그와 비슷한 체격 조건이라면 아마도 그 데이터 또한 비슷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물 론 기사의 경우 검술이라는 것과 마나라는 부가적인 요소가 들어가 기에 그 정도의 속도를 근력만으로 내기 위해서 데이터의 수치는 좀 더 높여져 있었다. "나를 놀리는 거요?" "설마‥‥‥ 왜 사람을 납치까지 해 와서 농을 건단 말이오. 이건 확실 한 데이터요." "이 엄청난 근력, 폐활량‥‥‥ 이런 것을 키메라 따위로 만들 수 있다 는 말이오? 만들 수 있다면 내 눈 앞에 한번 가져와 보시오. 그럼 내가 믿어 줄 테니." "그대는 이런 키메라가 있다는 소문도들어 본 적이 없소?" "없소." "이상하군. 본국을 제외하고는 코린트가 마법에 있어서는 최고를 달 린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대는 알카사스 인이오? 그런데 어떻게 알카사스에서 이 따위 짓 을 한단 말이오?알카사스는 키메라를 실전에 배치했을 정도로 엄청 난 기술이 쌓여 있지 않소? 본국은타이탄 제작에 있어서는 최고를 달 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키메라에 있어서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오. 그 것도 모른단 말이오?" 이때 복면을쓴사내가 그들의 대화에 끼여 들었다. "죄송하지만,그대의 말을 못 믿는 것은 아니나 코린트가 키메라 제 작에 있어서 그렇게 불모지라는 것은 믿기 힘듭니다 " "이런 제기랄! 못 믿겠다면 그만둬. 본국의 윗분들은 타이탄만으로 도 세계를 제패했었는데, 겨우 키메라 따위의 연구에 돈을 쏟아 부을 필요를느꼈을 것 같아? 또6년 전에는 엄청난 전쟁이 있었고,그 때문 에 기사단이 절단 났었는데 키메라 연구에 돌릴 여력이 어디에 있었 겠어? 에잉!말이 되는소리를 해야지,원‥‥‥‥ "그래도 당신의 말을 그대로 믿긴 힘드니 조금 강도 높은 조사를 해 야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이봐,!" 그러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복면을 쓴 인물 둘이 접근해 왔다. 그들은 다른 복면인들과는 달리 가느다란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들은 마법사의 몸에서 모든 장신구를모두다 찾아 내어 제거했다. 그 것들이 마법 도구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취하는 조치였다. 그런 다음 한 사람이 중얼중얼 뭔가 주문을 외우는 사이 또 한 사람 은 납치해 온 마법사의 목에 걸어 놓았던 마나가 모이지 못하게 막는 마법 도구를 없앨 준비를 했다. 그런 후 동료가 마법을 시행하는 그 순간 마법 도구를 없애 버렸다. 동료가 시행한 주문은 매료의 주문으로서 적을 동료처럼 느끼 게 만들어 모든 것을 털어놓게 만드는 아주 지독한 정신계 마법이었 다. 그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그 마법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낱낱이 실토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정신계 마법은 부작용이 크기에 아무리 적이라도 잘 사 용하지 않는다. 그 부작용은 약간의 두통 정도로 끝나는 사람도 있었 지만 최악의 경우 정신 이상에 걸리는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이 그 무자비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아무도 막지 않 았다. 부작용이 크다고 하더라도 그 마법사는 타국의 인물이었고,또 그는 포로였기 때문이다. "전하, 재미 있는 정보가 입수되었사옵니다. "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는 베르딘에게 로체스터 공작은 궁금증이 밴 어조로 물었다. "무엇인가?" "예,토리아를 정복한 후 피로써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드미안 후 작이 숙청되었다는 보고이옵니다. 하기야 그의 철권 통치는 너무 심 하다고 들었으너까요." 베르딘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가 베르딘에게 여태껏 보고받은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시드미안은 숙 청될 정도로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토리아 왕국에 입성한 후 귀족이라면 어린애까지 다 처형한 것이 좀 심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로체스터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해 줄수 있는 행위였다. 시드미안은 전쟁 후 무력을 듬뿍 동원하여 치안을 확실하게 유지했 는데, 이때 애매하게 도매 급으로 얽혀서 처형을 당한 시민들도 왜 있 었다. 그야말로 숨소리 하나 제대로 못 내도록 철저하게 때려잡으려 고 들었기에 파생된 결과였다. 그러면서 전후 불안정한 시기를 틈타 물가를 올리려고 들거나, 상 품을 쟁여 놓고 팔지 않는다거나 하는 상인들을 철저하게 잡아 내어 족쳤기 에 물가는 왜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전쟁 덕분에 거리에 넘쳐 나는 유랑자들을 몽땅 다 잡아들 여서 파괴된 요새나 도로등을 수리하게 했다. 그들을 매우 저렴한 인건비로 부려먹기는 했지만, 일단 최소한의 생활은 할 수 있을 정도로 품삯을 지급했기에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 는 것 외에도 치안 유지라든지 상업이나 공업이 다시 활기를 떨 수 있 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물론 그 부차적인 것은 몇 달 정도가 지나야 효력이 발휘되기 시작 하겠지만, 로체스터 공작의 경험으로 봤을 때 시드미안의 점령지 관 리는 매우 강력하면서도 효과적인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별로 재미있는 정보라고는 볼 수 없군 그는 상당히 뛰어난 기사였 었는데‥‥‥ 적이라고 해도 뛰어난 기사가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 이지. 설마 공개 처형 당한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를 처형했다면 트 루비아 국왕은 정말 형편없는 녀석이야."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베르딘은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니옵니다. 트루비아 촤고의 기사인데 처형할 수는 없었겠지요. 불시에 방문한 국왕이 점령지의 탄압 실상을 본 후 그에게 공작의 작 위를 내릴 계획을 취소했고,곧바로 본국 소환 명령과 함께 1만 골드 의 벌금형에 처했다고 하옵니다. " "벌금형이라고? 그렇다면 그 외의 직위는보존된 것이군." "예,전하." 베르딘이 자신의 말을 인정하자 로체스터 공작은 너털웃음을 터뜨 렸다. 이제야 베르딘이 처음에 들어오면서 '아주 재미있는 정보'라 고 했던 말의 뜻이 무엇을뜻하는 것인지 눈치 챈 것이다. "으하하핫! 그래, 그렇게 된 것이군. 자네 말대로 아주 재미있는 정 보야. 초기의 강력한 탄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시민들의 불만을 시드미안에게 뒤집어씌운다 이거로군. 그러면서 그 녀석은 본국으로빠져서 군대의 통솔에만 힘쓸 테고‥‥‥‥ 하기야그가 해임되었을 때쯤에는 점령지에서 거의 불만 세력은 뿌 리가 뽑혀 버린 후일 테니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안정을 찾게 되겠지. 상당히 재미있는 작전이야‥‥‥‥ 그런데 어떤 녀석이 그런 얄팍한 수를 생각해 낸 것이지?설마, 그 새파란국왕 녀석인가?" "그것까지는 알아 낼 수 없었사옵니다, 전하." "좋아. 그 정도로 머리를 쓸 줄 알고,또 힘이 있다면 토리아를 넘볼 자격이 있다고 봐야 하겠지." 신의 축복인지 악마의 장난인지 마리안은 몇몇 친척들만이 초대된 결흔식을 조촐하게 올렸다. 비록 미란 국가 연합의 가므 의장이 예상 외로 하객 명단에 올라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신분으로 봤을 때 너무나도 간소한 결혼식이라는 사 실을 부인하기는 힘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첫사랑도,또 그 뒤에 아버 지의 강요에 못 이긴 결혼식도 축복받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홀로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녀의 남편인 아리아스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는 사실은 결흔 전부터 알고 있었다. 결혼 전에 아리아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을 위해 성장기를 모두 시골에서 보냈다고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그녀는 신혼 여행이 끝난 후 병약한 남편을 따라 시골에 내려가서 고적한 생활을 하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순박한 농 노들에 의해 경작되는 자그마한 시골 농장,작기는 하지만 귀족의 품 위를 살린 예쁜 집, 그 집의 정원에 꽃을 가꾸고 하인들을 거느리고 하다 보면 곧이어 아이들이 생길 것이고,그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차 츰 세월이 흘러가리라‥‥‥‥ 그리고 그녀의 사랑도 잊혀져 가리 라‥‥ 이것이그녀가세운미래에대한설계였다. 하지만 만리안도 그녀의 아버지도 신혼 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사실 을 뒤늦게 통보받고 약간 당황했었다. 신혼 여행 대신 그녀의 친정 집 에서 3일 정도 묶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받고, 그녀의 아버지인 크라크 지벨리아 백작은 사위가 딸과 함께 시골로 내려가게 되면 서 로 만나기도 힘들 테니 이쪽의 사정을 봐 준 것이라고 매우 고마워했 었다. 13일 동안 지벨리아 백작은 결혼 지참금 외에도 혼수품과 함께 딸 에게 딸려 보낼 여자 노예를 다섯 명 정도 선발해 뒀다. 그리고 시부 모가 될 스와질렌 후작 부처에게 보내는 흔수품도 최고급으로 장만해 두었다. 그렇게 해서 사위가 딸과 함께 떠나는 날,그 혼수품 과노예들을 실은세 대의 마차가 정원에 대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라? 이건 다 뭡니까?' 사위의 경호원들 중에서 대단한 덩치를 하고 있는 무사가 물어 왔 기에 지벨리아 백작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상대가 스와질렌 후 작 가문의 사병이라고 하지만, 일단 사위를 호위하는 정도의 인 물이니 그렇게 높은 신분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그는 하대를 하고 있었다. "딸 아이의 혼수품이네. 왜,너무 약소한 것 같은가?" 스와질렌 가문이라면 그래도 미란에서는 알아주는 명문이었기에 그는 그 사실이 조금 켕기고 있었다. 사위의 건강이 별로 안 좋은 데 다가 막내아들이니까 유산도 사위에게는 돌아갈 몫이 별로 없을 테 고,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 봐도 말이 스와질렌 가문이지 그렇게 대단 한사위를본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벨리아 백작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잔머 리를 굴려 가며 장만해 둔 혼수였기에 약간은 부족한 느낌도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의 대답은완전히 그의 예상 밖이었다. "저쪽에 아르티어스 님께서 공간 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계십니다. 말이나 마차는 필요 없으니까 마법진이 완성된 후에 짐만 따로 그곳 에 옳겨 주십시오." 마법진이라는 말에 백작은 의아함을느꼈다. 스와질렌 후작이 거처 하는 저택까지는 그런 거창한 방법을 동원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가 까웠기 때문이다. "마법진이라고? 스와질렌 저택까지는 채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데 무슨 마법진을‥‥‥?" 백작의 의문에 그 경호병은흠칫하며 둘러댔다. "그 두 시간도 아까우니까 그렇지요. 후작 나으리께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며느리를 만나보고 싶어하시거든요." "그런가? 알겠네. 내 그렇게 지시하겠네," 그리고 공간 이동 후에야 마리안은 자신의 결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거대한 황궁 한편에 마련된 마법진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경비병들과 노예들을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낸 순간, 화려한복장을 한사람들이 일제히 인사를 건넸고,그 뒤로 엄청난 수 의 군인들이 도열하고 서서는 일제히 예를 올렸다. 그녀는 그것을 보 고 남편의 신분이 자신이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도 더 대단할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마중 나온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황궁 쪽으로 이동을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거대하고 웅장한 궁 전을 롤 수 있었고,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귀족의 여식이었 기에 왕궁에서 거행되는 무도회에는자주 참석했었다. 그렇기에 가므 의장이 거처하는 왕궁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인파들의 뒤로 보이는 화려한 궁전은 절대로 가므의 왕궁은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 마리안은 얼이 빠진 채 남편의 손에 이끌려 황궁으로 걸어가며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없이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가 후들거렸고, 아찔한 것이 진짜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녀가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 것 은 그녀의 옆에서 팔장을 끼어 주고 있는 그녀의 남편의 덕이었다. 비 쩍 마른 샌님 스타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이 나약한 남편 은자그마한 정신적 힘이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태로 그녀는 남편에게 이끌려 붉은 양탄자 위를 정신없이 걸어가서 거대한 흘로 안내되었다. 그 거대한 흘에는 높은 단상이 한 쪽구석에 자리잡고 있었고,그 위에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의자 가놓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30대 후반, 많이 봐도 4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 지 않는 사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묵직해 보이는 왕관을 머리에 쓰고 앉아 있었다. 좌우에서 쑤군거리는 나이 많은 사내들의 속삭임을 통 해 그녀는 그가 '황제' 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안개가 긴 듯 희뿌예진 그녀의 머리 속으로 황제라는 단어를 자신 의 이름 뒤에 붙일 수 있는 군주는 몇 명 되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 다. 코린트,크루마,크라레스,타이렌 등 정말 엄청난 국력을 지닌 나 라들만이 감히 황제라는 칭호를쓸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가물거리는 시선으로 올려다 보니,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 대한 홀의 한쪽에 마련된 높직한 단상에 그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그 의자의 좌우에는 거대한 덩치의 타이탄 두 대가서 있었다. 생김새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 남자의 오른쪽에 서 있는 타이탄은 한 손에는 원형의 방패를, 다른 한 손에는 검을 가지고 당당하게 서 있고, 왼편에 서 있는 것은 검집에 넣어 둔 검을 왼손에 들고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이 언제라도 달려들 것 같은용맹함을나타낸다면, 왼쪽의 것은 필요할 때만 검을 뽑겠다는 사려 깊음을 나타내는 듯 보였다. 과연 모든 위엄과 현명함을 두루 갖춘 일국의 황제 다운 자태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저런 황제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온 것을 보면 자신의 남편 은 정말 대단한 신분임이 확실했다. 아마도 엄청난 귀족의 자제일 수 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황실의 가까운 친척인지도 몰랐다. 그런 엄청난 신분의 남자를 오점이 있는 육체와 정신을 지닌 자신 이 남편으로 감히 맞이했던 것이다. 만약 그것이 밝혀진다면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도,어머니도,그리고 자신의 옛 애인도 모두 다 죽음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제는 식은땀까지 흘려 대며 남편의 팔을 꼭 붙잡았다. 이 미덥지 못하고 가녀리게 생긴 남편 외에는 의지할 곳 이 없을 거라는 생각밖에 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불안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 결정타가 날아들었다. 그녀의 남 편은 그녀를 슬쩍 이끌어 단상 위에 높이 앉아 있는 인물에게 인사를 건네며 말했던 것이다. "아버 님 ‥‥‥." 그녀의 귀에는 아버님이라는 말 외의 다른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아버님이라는 그 말에 그녀의 섬세한 정신은 더 이상 압박을 버터 내 지 못하고 끊어졌던 것이다. 황자의 부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여인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신 의 축복인지 모르겠지만,그녀에게는 악마의 장난과 다를 바가 없었 다. 자신의 비밀이 발각되는 날에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형제 자매들도,사랑했던 연인도,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일가 친척들까지도‥‥‥‥ "어떻게 된 일인가?" 첫 인사를 드리기 위해 들어왔던 며느리가 갑자기 쓰러지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좌우에 늘어선 중신들이 당황해서 웅성거 리는 가운데 황제는 근엄하게 앉아 있다가 황좌에서 허등지등 단상 아래로 내려와서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노 마법사에게 물었 다. 노 마법사는 이 리저 리 살펴본 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예, 몸에 다른 이상은 없으신 것 같사옵니다. 아마도 뭔가 다른 이 유로 혼절하신 것 같사옵니다. " "이런 변이 있나. 갑자기 며늘아이가흔절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황제는 여기까지 말한 후 한참 동안 궁리를 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 었다. "그렇군!너는 며늘아이에게 네 신분에 대해서 말해 줬느냐?" 황제의 물음에 아리아스는 머뭇거리다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 다. "저‥‥‥ 죄송하옵니다,아버님. 아찍 말하지 못했사옵니다. "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한 황제는 혀를차면서 말했다. "쯧쯧쯧‥‥‥‥ 뭐, 지나간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이 아이를 방으로 옮겨서 간호해 줘라." "옛,폐하." 시녀들이 기절한 며느리를 엎고 나가는 됫모습을 바라보며 황제는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둘째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별종으 로 놀더니만 마누랏감마저도 별종을 구한 것 같아 울화가 치밀어 오 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남편이 황자라는 것을 안다면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여자 들은 환호할 것이다. 기뻐했으면 기뻐했지,저렇듯 기절할 이유가 없 는 것이다. 물론 기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혼절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런 극소수의 여 자가자신의 며느리가 되었느냐하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황제는 짜증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에잉. 며늘아이가 저렇게 되었으니 오늘 환영식은 취소하기로 하 지. 모두들 물러가라." "옛,폐하." 모두들웅성거리면서 흘의 문을나서는 가운데 황제는 뒤돌아 서서 걸어가기 시작하는 한 소녀를불러 세웠다. "치레아 경!" "예?" 소녀가 뒤로 돌아서자 황제는 그녀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무사히 일을 잘 끝내서 다행이야. 사흘 후에 황자의 결혼식이 거행 될 텐데 와줄수 있겠나?" 이미 미란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는 했지만,그렇다고 왕자가 미란에 서 비밀리에 결흔식을 올렸다는 말만으로 중신들을 설득하기는 어려 웠다. 그 결혼식은 마리안의 부모를 위한 결혼식이었을 뿐, 정식으로 황 실의 예법에 따른 결혼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아리아 스황자내외는 신하들을모두모아놓고 거창한 결혼식을다시 한 번 더 치를 예정이었다. "죄송하지만, 이번에 오랜 시간 나가 있었던 관계로 일이 상당히 많 이 밀려 있을 것입니다. " 이것은 정중한 거절이었다. 사실상 치레아에서 마법진으로 오면 되 니까 몇 시간 정도만 시간을 할애하면 될 것인데도 이렇게 거절하는 것은 다크가 원래 이런 일에 참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 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할 수밖 에 없었다. "그래?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머쓱한 표정으로 말하는 황제를 뒤로하고 문을 나서 려던 다크는 다 시 뒤로돌아서며 황제에게 물었다 "혹시 토지에르 경에게 무슨 일을 시키셨습니까?" "응?그‥‥‥‥ 그건 왜 묻나?" 갑작스런 다크의 물음에 황제는 당황했다. 다크가 여기에 잡혀 있 는 가장 큰 이유는 토지에르 때문이었다. 토지에르에게 뭔가 일이 생 겼다는 것을 알면, 다크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것을 잘 알기에 황제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일단 시간을 끌기 위한 물음 을 더듬거리며 던졌다 "토지에르가 모두다 모이는자리에 없었던 적은오늘이 처음이니까 요. 이리로 오기 전에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찾아갔더니 자리에 없다고 하던데요?" 황제는 다크가 토지에르를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는데도 그의 행방 을 제대로 알아 내지 못했다는 것을 신께 감사 드렸다. 하지만 일단 감사는 나중이고 이 어려운 곤경으로부터 빨리 벗어나는 것이 중요 했다. 황제는 자신인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머리를 회전시키며 뭔가 둘러댈 말을 지어 냈다. 하지만 그렇게 급조하려니 말이 더듬거 려질 수밖에 없었다. "아,그 그 그건 내가 시킨 일이 있어서 아주 멀리 갔다네. 그러니까, 그‥‥‥토지에르 경은 아주중요하면서도 비밀스런 일 때문에 아주 멀 리,멀리‥‥‥그래,거기!알카사스에 가 있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그가 거기에 가 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코린트나 크루마에서 자객을 보낼 수도 있어. 그러니 자네도그냥 모른 척해 주게. 알겠나?" 황제의 태도에 다크는 조금 수상쩍은 눈길을 보냈지만, 일단은 수 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토지에르가 공무 수행 차 알카사스에 갔다는 데 뭐라고 반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전하." "젠장! 끝내는 크루마까지 왔군‥‥‥‥" 투덜거리는 복면을 쓴 사내를 향해 노 마법사는 슬그머니 물어 봤 다 여태껏 왜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정체를 밝힐 만도 하건만,상 대는끝내 자신 앞에서 복면을 벗지 않고 있었다. "이보시오,그럼 그대들은크라레스 인들이오?" "아닙니다. " "그럼 어느 나라 사람들이오?" "그건 아실 필요 없습니다. " "만약 크루마도 아니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요?" 노마법사의 의도를 눈치 채고 우두머리는 일부러 확정적으로 말했 다. 사실 그들의 모국이 크라레스니 크라레스는 절대로 아니었다. 하 지만 이런 식으로 그가 말한 이유는 크루마가 범인일 가능성이 거의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강대국인 크라레스를 뒤져야겠지요." "그러고도 없다면?" "건너뛰었을지도 모르니 다시 알카사스부터 시작해서 한 바퀴 돈후 에 타이렌 제국으로 넘어가야 겠지요." "그냥 타이렌 제국으로 가지 않고 왜 한 바퀴 돈다는 말이오?' "타이렌 제국은 본국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까, 암살을 시도할 리 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고 건너뛰었을 확률이 높다고 봐야겠지요." 여기까지 말한후우두머리는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은 나가서 정보를 좀 얻어 와라. 크루마의 키메라 생산을 위 한 연구소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아보란 말이다. " "옛." 우두머리는 밖으로 달려나가는 부하들의 됫모습을 보며,크루마도 아니라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노마법사부터 정신 마법을 사용해서 그 밑바닥까지 훑어 내겠다는 결심을굳히고 있었다. 영감쟁이가 알고 있 으면서 능청을 떨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힘드니까 말이다. 밝혀지는 황태자의 배후 "폐하." 황제는 정원에서 산책하고 있다가자신을 향해 서둘러 걸어오고 있 는루빈스키 대공을보고반가이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그래,무슨 일이오?" "예, 폐하. 긴히 아될 보고가 있사옵니다. 좌우를 물리쳐 주시옵소 서." 황제는 루빈스키의 말에 자신의 뒤에 서 있던 기Al들을 뒤돌아 보 며 짤막하게 외쳤다. "잠시 물러가라." "옛." 루빈스키는 기사들이 확실한 거리까지 물러간 후에 황제에게 가까 이 다가가서 속삭였다. "아그리오스 후작의 보고에 따르면 아무래도 범인이 크루마인 것 같 사옵니다." "으으음, 크루마라고?" "예,폐하, 그러니 이제 단안을 내리셔야만 하옵니다. 크루마가 적이 라고 생각한다면 그 내통자는 엘리안 황태자 전하이실 가능성이 크 옵니다. 토지에르 경이 이미 말씀을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촹태자 전하께옵서는 세뇌를 당하신 것 같다고 말씀이옵니다. 코린 트에 인질로 갔던 가짜 황태자도 황태자 전하와 거의 비슷한 증세를 보이고 있사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토지에르 경이 그를 데려 다가 철저하게 조사해 보고 내린 결론이 아니옵니까? 이제 단안을 내 리셔야 할 때이옵니다. " "루빈스키 경." "옛,전하." "그것을 잠시만 좀 미 뤄 줄 수 있겠는가?" "예?" "지금 국가에 중대한 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혐의만으로 그 녀석을 내치고 싶지 않군. 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아이는 생은 그것 으로끝장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나? 짐은 조금이라도 더 그 아이가 살 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군." 루빈스키 대공은 황제가 살짝 꺼내 보인 아버지로서의 소박한 정 때문에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런 자잘한 정에 이끌릴 수는 없 는 노릇이 아닌가? "폐하, 그래도 이것은 국가의 중대사이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적 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사옵니다. 윤허를 내려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나? 그 아이는놔두고 일단 주위의 잔가지만 먼 저 치게. 그리고 그 아이는 잠시만 더 놔둬 주게. 일단 시작되면 그 아 이는 다시는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걸세. 잠시만이라도 더 그 아이에게 햇볕을보게 하고 싶다네. 그래도 안 되겠는가?" "칙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 황제는 멀어져 가는 루빈스키의 됫모습을보며 자신의 눈시울이 뜨 거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황급히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엘리안이 어 렸을 때는 코린트에 대한 복수에 광분하여 그 아이에게 조그마한 정 도 베풀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장성한 후에는 타국에 인질로 주기까지 했다. 그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이었고,그 때문에 자신의 아들은 만신창이가 된 정신 으로 고국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황제인 자신의 잘못이었 는데,그 잘못의 대가를 또다시 엘리안이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나도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루빈스키 대공은 근위 기사 여섯 명을 소집했다. 우선 여섯 명만 소 집한 것은 남은 여섯 명은 황제를호위해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근 위대 대장인 론가르트에게 주의 사항을 일러 준 후 황태자의 최고 측 근이라고할수 있는 데이더스 백작부터 잡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백작은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황궁에 있을 것이옵니다." "메트렐 경, 이것은 칙명이다." "옛." "경은 데이더스를 잡아다가 감금해 놔라. 내가 올 때까지 그 놈은 살 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오기 전까지 그 누구도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무 것도 먹지도, 마지시도 못하게 해라. 알겠는 가?" "옛."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옛 !" 아그리오스 후작의 예상대로라면 토지에르 암살의 배후는 크루마 일 것이다. 그렇다면 크루마에 세뇌 당했고,또 크루마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황태자가 그들의 끄나풀일 가능성은 매우 커지는 것이다. 만 약 공작의 예상대로 황태자가 범인이라면 크루마에서 보내 온 키메 라들은 황태자의 최고 측근인 데이더스 백작의 집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물론 공작의 예상은 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고,조만간에 황태자는 폐위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오른팔인 데이더스도 목이 날아갈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감히 이런 초강수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빈스키 대공은 흘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근위 기사 네 명은 집 주위를 포위하고 있다가 만약 도망치는 놈이 있다면 잡으라는 지시 를내리고 말이다. "놈들은 어디에 있나?" 손가락의 뼈다귀를 몇 개 분질러 놓자 집사는 고통과 공포에 질려 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횡설수설 다 토해 냈다. 일단 놈들 이 지하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 낸 공작은 집사를 앞세우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옛날에 던전 발굴하러 다니던 때가 생각 나는군‥‥‥‥" 군데군데 밝혀져 있는 작은 등불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기에, 던전 을 뒤지던 때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생각을 생각하며 집사의 뒤를 따 라 내려가자 어느덧 제일 밑에까지 내려왔다. 똑똑 "들어와라." 집사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윽 고조심스레 문을 열자 역겨운 피 냄새가 확 퍼져 나왔다 "우그적 우그적‥‥‥ 쩝쩝‥‥‥ 와작‥‥‥ 우직‥‥‥‥" 공작이 집사의 등 뒤로 실내를 들여다 봤을 때,한쪽 구석에는 사람 들이 손을 쓰지 않고 머리를 커다란 통 속에 밀어 넣고는 꼭 개처럼 뭔가를 씹어 먹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이 약간 몸을 이동하여 시선을 넓히자 탁자 위에 앉아 서 뭔가를 들여다 보며 포도주 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들 어왔다. 그사내는 집사가 아직도 조용히 서 있자 짜증난다는 듯 외쳤 다. "이봐,무슨 일이야? 들어왔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러다가 그 사내는 집사 뒤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뒤늦게 발견 했다. 사내는손가락을 딱소리가나게 튕겼다. 그러자 정신없이 뭔가 를 씹어 먹고 있던 무리들이 재빨리 고개를 뒤로돌려 왔다. 됫모습을 봤을 때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만,그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지하실 안에 환하게 비춰지고 있는 등잔불 아래서 그게 아니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났다. 몬스터들처럼 두털고도 끈적거리는 듯한 피부,그리고 등그러면서 도 광기에 가득 찬 눈,도마뱀 같이 뚫려 있는 콧구멍들,송곳니가 끔 찍하게 솟아올라 있는 악귀와 같은 입에는 방금 전까지 식사를 하던 중이라서 그런지 군데군데 피가묻어 있었다. "과연,그렇게 된 것이었군." 집사를 밀치면서 앞으로 나오는 루빈스키를 상대방은 금세 알아봤 다. 크라레스의 두 명뿐인 대공들 중의 한 명이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 다. "루,루빈스키 대공? 젠장 발각된 것인가?죽여랏!" 명령이 떨어지는 그 순간,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네 마리의 키 메라는 순간적으로 튀어 오르며 루빈스키를 향해 육박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루빈스키의 검도 엄청난 속도로 뽑히며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루빈스키의 검이 횐 궤적을 그리는 순간 뭔가가 부딪치는 듯한 금 속성 소리가울려 퍼지며 붉은 피가 확 터져 나갔다. 그리고 토막토막 잘려 버린 키메라의 몸통들이 여기저기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루 빈스키가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이미 그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는 사 라지고 없었다. "젠장,마법 도구를 가지고 있었나?" 루빈스키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괴물의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 했다. 엄청난속도와폭발적인 도약력,단순히 괴물이라고 여기기에는 뭔가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인간이 창조해 낸 생명체가그 정도파 워를 지니고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루빈스키 였다. "감히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다니‥‥‥‥ 그 놈들은 언젠가 신의 저주를받게 될 거야."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루빈스키는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키 메라의 토막 난 검 조각이었다. 처음에 그것을 다론에게서 넘겨받아 왔을 때는 검이 손에 붙어 있는 괴상한 생명체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이제 갓 잘려 나간 놈의 검을 봤을 때 자신의 판단이 약간은 틀렸었다 는 것을 알수 있었다. 잘려 나간 검에는 붉은 피가 약간씩이지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키 메라의 검은 소의 뿔처럼 죽은 조직이 아니라 피가 통하는 살아 있는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저쪽에 토막 나 있는 키메라의 손을 봤을 때 더욱 명확해졌 다. 겨추 며칠이 지났을 뿐이었는데도 토지에르를 습격하는 데 동원 되었다가 검의 한쪽이 날아가 버린 그 놈의 검 끝은 조금씩 자라 나오 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검 자체가 살아 있는 조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청난 재생력이군. 이건 다론에게 말해 줄 만한 값어치가 있겠 어 ." 크라레스의 둘째 황자의 결혼은주변 국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국인 코린트나 크루마, 미란의 경우 이미 결혼 사 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 외의 주변 국들은 크라레스와 미란의 결합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왜 냐하면 미란이 크라레스와 결합함으로 인해 크라레스는 크루마에 군 사와 경제적으로 미묘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기 때문 이었다. 크라레스의 둘째 황자가 결흔하는 그 해는 크라레스 국내외로 수많 은 사건과 사고들이 벌어진 매우 분주한 해였다. 세계의 곳곳에서는 수많은 국지전들이 벌어졌고, 복수는 복수를 낳으면서 더욱 가열되 었다. 그 대부분의 전쟁들이 국지전이었는데,대부분의 경우가타국에 대 한 보복보다는 경제적 이권이나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것들 이었다. 그렇기에 그 양상은 서로 상대 영토의 한 귀퉁이를 뺏고, 뺏 기는 가벼운 분쟁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상대방 국가가 멸망할 정도 의 대규모 전쟁도 여섯 번이나 벌어졌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그 멸망 당한 국가들이 모두 다 코헌트의 동맹국들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코린트는 이 사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 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멸망한 동맹국·들이 6년 전에 있었던 3국 전쟁 에서 코린트를 지원했다가 상당한 전력 손실을 당한 국가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멸망하는 국가가 하나 둘 늘어나면서 코린트는 뭔가 이상하 다는 것을 눈치 채고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로 밝혀진 것은 침공국 들이 모두다 크라레스의 동맹국들이라는사실이었다. 그것을 코린트가 뒤늦게 눈치 챈 것도 모두 크라레스가 3국 전쟁 시 절부터 매우 비밀리에 이 계획을 진행시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크라레스와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3 라레스가 그야말로 한입에 꿀꺼덕 삼키기 쉬을 정도로 만만한 국가 였다면, 코린트는 진작에 군사적 웅징을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크라레스는 하루아침에 박살 낼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국 가가 절대 아니었고,또 크라레스와 푸닥거리를 하고 있을 때 크루마 가 개입해 온다면 문제는 더욱 난감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을 역으로 해석하면 크라레스도 코린트와 전쟁을 벌여 봐야 크루마 가 개입해 온다면 재미가 적을 게 뻔하니,군사적 행동을 취할 가능성 은 거의 없다고 해석할수 있었다 이렇듯 3국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기에,전쟁이 발발할 가 능성은 거의 없는 게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상황을 크라 레스가 더욱 장기화시키기 위해서 코린트가 힘을 키우는 것을 방해 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코린트의 지도부가 확실하게 느긴 것은 크라레스의 둘째 황자가 결혼식을 올린 그해 8월 중순쯤이었다. "한 시간 전,트루비아의 군대가 탄벤스 공국(췄료)의 국경선을 넘었 다는 보고가 들어왔사옵니다. 변방의 동맹국인 쿠레오 왕국을 로사 나 왕국이 침공, 점령한 것을 비롯하여 올해 들어 행해진 일곱 번째 전쟁이옵니다. 전하,이제 결단을내려 주시옵소서!" 로체스터 공작은 한참 동안이나 창 밖을 바라보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쟁의 배후에 크라레스가 있다는 것이 확실한가?" 로체스터 공작의 물음에 베르딘은 확신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처음 한두 번은 분명치 않았사오나 이제 확연히 드러났사옵니다. 올해 행해진 일곱 번 전쟁의 주역으로 활동한 타이탄은 테리아였사 옵니다. 테리아는 외관은 투박하지만 고성능 타이탄으로서 그 정도 타이탄을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몇 나라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출할 만한 국가는 알카사스 정도라고 봐야 할 것이 옵니다. 하지만 알카사스는 고성능 타이탄은 판매하지 않는다는 점 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것은 동맹국들의 전력 강화를 위해 비밀리에 판매되고 있는 한정 수출품이라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 베르딘은 잠시 로체스터 공작을 살펴본 후 말을 이었다. "정보부에서는 몇 달 동안 조사해 본 결과 그 국가들이 크라레스의 비밀 동맹국들이라는 것을 밝혀 냈사옵니다. 그러니 테리아를 자국 에서 수출한 타이탄이 절대로 아니라고 크라레스가 아무리 발뺌을 한다고 해도,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임이 분명하옵니다. 아마도 그 나 쁜 녀석들은 테리아를 수출하면서, 그 조건으로 타국에 대한 침공을 종용한 것일 테지요." 상당히 많은 증거들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체스터 공작 은 애써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단안을 내려 병 력을 파병한다고 해도 곧장 크라레스와 전쟁 상태로 갈 가능성은 없 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크라레스와는 충돌을 피 하기 힘들 것이고,양국의 사이는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 크루마의 위치는 매우 상승될 것이다. 그들이 누구의 손을 들어 주느냐에 따라 엄청난차이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적기사의 배치를 완료했을 정도였기에, 다크가 있는 크 라레스에 월등한 우위를 점유하게 될 때까지는 될 수 있다면 충돌을 피하고 싶은 것이 로체스터의 마음이었다. 지금 조금 힘들더라도 참 으면서 힘을 더 키운다면 최후의 승자는 코린트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글쎄‥‥ 꼭그렇게볼수도없지않은가?최신형타이탄들을확보 한 김에 옆에 있는 약소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일 수도 있다 네." 로체스터 공작의 애매한 태도에 베르딘의 옆에 서 있던 당당한 체 구의 무장이 답답한 듯 외쳤다. 그는 금십자 기사단의 단장인 프레드 드 알파레인 후작이었다. "전하, 무엇을 망설이고 계시옵니까? 이번에 트루비아의 침공으로 모든 것이 확실해졌사옵니다. 트루비아는 두 달 전에 토리아 왕국을 침공, 점령했사옵니다. 트루비아의 군사력으로 봤을 때, 겨우 두 달 내에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하옵너다. 그것도 방어 의 개념이 아닌, 선제 기습 공격이었지 않사옵니까? 이것은 더 이상 물중을 확보할 여지도 없사옵니다. 결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 알파레인 후작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로체스터 공작은 망설이 고 있었다. 그는 될 수 있다면 파병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교적 통로로압력을가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그의 말은 알파레인 후작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그게 효과가 없다는 것이 벌써 입증되지 않았사옵니까? 크라레스 가 본국이 적기사를 대량 생산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여기저기에 떠벌리고 다닌 덕분에 주변의 모든 국가들이 본국의 힘이 강성해지 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사옵니다. 또 크라레스 같은 철면피들은 그런 외교적 압력 따위를 아무리 가 해도 눈도 깜짝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최근에 입수한 정보 에 의하면 라이지엔 공작이 전하를 탄핵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옵 니다. 사방에서 본국의 동맹국들이 점령을 당하고 있는데도 됫짐을 지고 있는 무능한 사령관이니 교체해야 한다떤서 말이지요. 더 이상 시간 을 끄는 것은 전하께도 위험하옵니다." 라이지엔 공작은 그로체스 공작이 실각된 후에 그자리를차지하고 앉은 인물이었다. 그 역시 그로체스 공작처럼 황제와는 먼 친척이었 다. 하지만 아직 그는 혈기만을 앞세우는 젊은이일 뿐,그로체스 공작 만큼 실력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로체스터 공작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인데, 요 근래에 와서 제법 황실에서의 입김 을 키우면서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위험 인물이었다. 황제도 로체 스터 공작 혼자만의 독주를 견제하여 일부러 그를 키워 주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기에 로체스터 공작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 들고 있었던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한숨을 내쉰 후 한탄조로 말했다. 이제 그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이쯤에서 크라레스에 본때를 보 여 주는 것도 좋겠지. 이쪽이 개입할 수도 있다는 것을 놈들에게 살짝 알려 준 후 외교적 협상을 시도해 보게나. 한 번 쓴맛을 보고 나면 이 쪽의 말을 좀 들을지도 모르지." "호되게 맛을 보여 준 후에 외교 사절을 보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옵니다." 알파레인 후작의 의견에 공작은고개를가로 저었다. "아닐세. 호되게 맛을 보여 줘 봐야 남는 것은 없어. 적당히 그 녀석 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서로가 자존심이 안 상하는 정도에서 물러서 는 것이 좋을 거야." 이윽고로체스터 공작은 베르딘에게로 시선을돌렸다. "기사단은 준비시켰나?" "옛,전하. 철십자 기사단에 동원 대기령을 내려 뒀사옵니다만,그들 을 모두 다보낼까요? 신속한 작전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전 부다 투입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사료되옵니다만‥‥‥‥" 잠시 생각하던 로체스터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이왕에 투입할 것이라면 전번 전쟁을 교훈 삼아 넉넉하게 투입하는 편이 좋다고 결 심했기 때문이다. 전번 전쟁 때는 쓸데없이 자존심 세운다고 단계적 으로 넣었다가 결국은각개 격파 당해서 쌍코피 터지지 않았던가? "좋아,모두들 마법진에 집합시키도록! 폐하의 윤허는 내가 직접 받 아 내겠다. " "옛,전하." "가가린 후작!" 쭉늘어서 있는 기사들 중에서 제일 뒤쪽에 서 있던 가가린이 한 발 자국 앞으로 나서며 힘차게 답했다. 그가 철십자 기사단의 단장이라 고하지만 그의 휘하에 있는 것은 겨우 34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의 지위는 은십자 기사단의 부단장보다도 떨어지는 것 이었다. 그래서 그가 제일 뒤에 서 있는 것이다. 만약 나중에 철십자 기사단이 50기 이상으로 증편된다면 그보다 더 높은 인물이 기사단 단장으로 임명되고 그는 부단장으로 밀려날 것이 확실했다. "옛, 공작 전하." "경은 이번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최선의 목표가 아니라 적이 후퇴 할 만한 명분을마련해 주는 것이 최선의 목표라는 것을 명심해라." "옛,전하."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필요 없이 전략적인 우세 정도만을 점 하고 있으면 그때 외교적인 협상을 통해서 그들을 후퇴시킬 것이다. 그 동안 경은 놈들의 진격로를 막고,더 이상 전쟁이 확대되지 않도록 막기만하면 되는 것이야. 알겠는가?" "옛." 코린트와 크라레스의 충돌 "폐하,급보이옵니다. " 한 마법사가 달려 들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통신실에 배속되 어 있던 마법사인데,급한 전갈을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코린트가‥‥‥‥ 코린트가 개입했사옵니다. " 황제는 이 뜻하지 않은소식에 놀라 엉거주춤 일어서며 외쳤다. "뭣이? 그게 정확한 정보냐?' "예,지금 트루비아 왕실로부터 긴급 전문이 들어왔사옵니다. 적 타 이탄은 50여 기,문장으로 봤을 때 철십자 기사단 소속의 타이탄으로 추정 된다 하옵니다. " 마법사의 보고를 듣고 있던 황제는 자신이 지금 체통에 어긋나는 행위를하고 있다는 것을깨닫고는슬며시 자리에 앉으며 외쳤다. "루빈스키!루빈스키 대공을불러 와라?" 황제의 부름을 받은 루빈스키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나타났다. 루빈스키는 제국 안에 퍼져 있던 친크루마 세력을 완전히 소탕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일 처리는 매우 신속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잔인한 것이었기에 죄 없는 피해자도 많이 나타났다. 황태자 를 자주 만났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된 중신도 있었을 정도니까 말 이다. 하지만 사건의 발단이자 그들의 최고 괴수라고 할 수 있는 황태자 는 나쁜 친구들을 사귀지 말라는 황제의 훈시 정도만 듣고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그를 지하 감옥에 집어넣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황제가그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때부터 황태자의 주위에는 그를 감시하는 눈들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루빈스키는 황태자가 지하 감옥에 가기 전까지 도망치지 못하게 황궁에 잡아 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황태자가도망친다거나또 다른 외부의 세력을 포섭해 들어오 면 매우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게 된다. 지금은완전히 힘을 상실했지 만,그래도 엘리안은 황제의 아들인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황태자의 부하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대규모 소탕전이 벌어진 후 루빈스키는 타이탄 연습장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그만큼 부하들 을 훈련시키고,또 청기사가 제대로 된 위력을 내게 만드는 것이 중요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제의 명에 따라 그를 데려오기 위해 마법사들이 재빨리 움직였고,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서 움직였기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아 황제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 오게,루빈스키 경. 그래,보고는들었는가?" "예,폐하. 대충 보고는 들었사옵니다. " "경의 의견은 어떻소? 구원군을 보내야 할까,아니면 충돌을 피해야 할까?" "폐하,놈들이 50여 기나 되는 신형 타이탄을 투입했다는 것은 트루 비아 전선에 대한 구원병의 차원을 넘어,아예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 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트루비아 를 충동질한 본국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 지요." "그야,그렇겠지. 그렇지 않다면 지금 트루비아가 가지고 있는 타이 탄총수가 20기를 넘지 못하는데,50기나 밀어 넣었을 리가 없겠지." "폐하,소신의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구원병을 파견해서는 안 된다고 사료되옵니다. 하지만‥‥‥" "파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고 의견을 말했으면 됐지, 하지만은 또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신의 판단이옵고, 폐하께서는 한 가지 더 생 각하셔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물론 군사적인 입장에서는 강력한 코 린트와의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할 것이옵니다. 하지만,트루비아는본국의 동맹국이옵니다. 그것도본국의 부탁을 받아 타국을 침공한 맹방이옵니다. 그런 그들을 이번에 외면한다면 다음에는 본국의 부탁을 들어 줄 동맹국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 "그렇군. 경의 의견은 잘 알았네. 최후의 선택은 짐이 내리라는 것인 가?" "예, 하명을 하시옵소서 !" "으음, 어쩔 수 없구먼. 만약 구원군을 파병하지 않는다면 동맹국들 은 등을 돌릴 것이 분명하겠지?파병하는 것으로 하세. 하지만 코린 트와 정면 충돌을 일으키지 말고, 격퇴하는 수준으로 공격을 끝내는 것이 좋겠지. 알겠나?" "옛,폐하." 황제의 집무실에서 물러난 루빈스키 대공은 즉시 두 명의 기사를 호출했다. 그들은 중앙 기사단 7전대와 8전대를 책임 지고 있는 쟈므 란 백작과 라테민 백작이었다. 제7,8전대는 전방에 포진중인 다른 전대들과 달리 수도에 주둔하 는 예비 부대의 성격이 강했지만,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이들 이 우선적으로 투입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루빈스키의 호출에 급 히 달려와서는 예를 올렸다. "명을 받고 달려왔사옵니다, 전하." "오, 어서들 오게나. 자네들은 지금 탄벤스 공국으로 가야겠 다. 부대원들을 소집하고,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이동 마법진으로 집 합하도록," "옛,전하." "피터슨." 공작의 호명에 피터슨폰 라테민 백작이 즉각답했다. "옛." "자네는 다 거느리고 갈 필요 없이 30기만 가져가도록. 나머지 8기 는 수도에 두고 가라," 제8전대의 경우 아직 편성중인 부대였기에 다른 부대들보다 수가 조금 더 많았다. 만약8전대의 수가 정수인 30기를 훨씬초과하여 40기 를 넘어 버리면그초과분 10기로 제9전대가 편성되게 되는 것이다. "옛!" "자네들도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트루비아가 탄벤스를 침공 하는 데 갑자기 코린트가 개입해 왔다. 적의 전투력은 확실하지 않지 만 타이탄 50여 기 정도니까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작 전은 트루비아를 돕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코린트의 기사단과 정면 충돌할 필요 없이, 될 수 있으면 체면만 세워 주고 돌아오면 된다. 알 겠나?" "옛,전하." 그로부터 20달 후 그들은 마법진을 이용해서 탄벤스 공국으로 날아 가, 탄벤스 공국의 군대와 대치중인 트루비아 군대와 합류했다. "전세는 어떻습니까?" 자므란의 물음에 시드미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세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코린트의 타이탄을 발견 하자마자,전 군에 후퇴 명령을 내린 후 여기까지 도망쳤으니까 말입 니다. 지금 제각기 후퇴하여 이곳에 도착하고 있는 부대들을 재편성 중입니다. " "그렇다면 적의 위치는 파악하고 계십니까?" "그거야 당연하지요." 시드미안은 그들을 지도가 있는 곳으로 안내한 후 설명을 시작했다. "적은 세 방향에서 진격중입니다. 중앙의 주력 부대,그리고 주력 부 대에서 40킬로 정도 떨어져서 좌우에서 이동중인 좌익과 우익 부대 입니다. 정보에 의하면 코린트의 기사단은 주력 부대와 함께 이동중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적들의 이동 속도는 아주 느리기 때문에 오늘이나 내일 오후쯤 되어야 만나 보실 수 있을 겁니 다. "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격멸하는 것이 전투의 정석인데, 왜 저들 의 진격 속도가그렇게 느린 것입씨까?" "글쎄요. 그 이유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덕분에 별 피해 없이 후 퇴하는 데 성공했으니 다행이라고 봐야겠지요. 놈들의 움직이는 속 도로 미루어 봤을 때, 내일 오후에 여기에 도착하여, 진형을 짜고 준 비를 갖춘다면 아마도 모래쯤 되어야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이 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휴식이나좀 취해 두십시오." "알겠습니다, 시드미안 경." 오랜 휴가를 끝낸 아르티어스는 또다시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들인지 원수인지, 요즘 들어서는 분간이 잘 가지 않지만, 하여튼 그 망나니의 마수에 걸려서 호된 경험을 치르는중이었다 "수고했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잘 되어 가는 거야." "감사합니다, 아르티어스님" "그래, 파이프 라인 공사는 언제 끝낼 수 있겠나?" 여기저기 공사가 진행중인 현장을 설계 도면과 비교하면서 바라보 던 아르티어스는 한쪽에서 길이 10미터가 넘어 보이는 아주 길면서 도두터워 보이는파이프를 땅에 묻고 있는 것을보며 말했다. "예, 일주일 정도는 시간을 더 주셔야 하겠습니다. 수도 전체에 거미 줄같이 파이프들을 깔자니까 시간이 예상보다 더 많이 들어가고 있 기 때문입니다. " "뭐, 일주일이면 그렇게 늦는 것도 아니야. 고생 좀 했겠구먼." "천만에요. 할 일을 했을뿐입니다. " 아르티어스는 공사 현장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상태 대로 공사가 진행된다면 아마도 반년 이내로 공사를 완료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완료는 될 수 있다면 자신과 아들이 처음 만난 그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장기인 마법을 이용해서 아들과 자신의 나라 를 발전시킬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치레아 곳곳에 는 이동용 영구 마법진들이 설치되고 있었고,수도 주위에는 거대한 방어 마법진과 함께 상하수도 망까지 마련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올 겨울부터는 따뜻한 물을하루 종일 수도 내의 각 가정 에 공급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도에 사는 시민들은 난방비가 필요 없게 될 테고,그때부터 수도세의 명목으로 세금을 조 금 더 걷는다면 일석이조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아르티어스는 이곳 치레아 공국이 아들의 영토가 되었을 때부터 세 심한 주의를 기울여 아들의 영토를 돌보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아마도 10년 이내에 마도 왕국 알카사스에 버금갈 정도로 마법에 의 한 편의 시설이 잘 갖춰진 나라로 거듭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뭔가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확실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거의 반 영구적일 정도로오랜 수명을 가지고 있고,또그것이 사용되는 것에 대해 모든 시민들이 찬사를 늘어놓는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생활에 보탬까지 된다면 더 이상 말할 나 위가 없어지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그 때문에 재정이 허락하는 한 여러 가지를 틈틈이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기념할 뭔가를 말이다. "아빠! 여기서 뭐 해요?" "헤헤헤, 보면 모르겠냐? 너와 나의 소중한 기념품들을 만들고 있 지." 희희낙락하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다크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말했다. "수도의 모든 사람들이 왕래하는 중앙로에 거대한 분수대를 만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요. 여름에 물이 뿜어져 올라가면 아주 시원하게 보일테니까‥‥ 그런데 거기에 만들어 놓은거대한동상은또뭐예 요?" "뭐긴 뭐겠니?너와나의 동상이지. 흐헤헤‥‥‥‥" "그딴 거 만든다고 계속 돈을 낭비하실 거예요?가스톤과 카알이 매 일 나한테 와서 투덜거린단 말이에요. 국경에 요새를 건설해야 하는 데 돈이 없다면서 ‥‥‥‥" "헤헤헤,뭐 그 따위 걸 가지고 그러냐?걱정하지 마라, 만약 적이 쳐 들어오면 내가 내쫓으면 되지. 그런 쓸데없는 것보다는 좀더 우아하 면서도 실용적인 것들을 많이 만드는 편이 좋아?" "글쎄요‥‥‥‥" "아,평상시에는그런데 신경토 안 썼으면서 오늘따라 왜 그러냐?" "그래도 밑에서 투덜거리니까신경이 쓰여서 그러지요." "그 따위 것은 이 아비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 끄라구. 몇 년 만 더 지나면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어 줄 테니 아무 걱정도하지 말란 말이야 " "글쎄요‥‥‥‥ 저는그게 더 걱정이 되는데‥‥‥‥" 들개와 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겠노라 탄벤스 공국은 동쪽으로는 드보레크 산맥을 끼고 있는 그렇 게 크지 않은 국가였다. 드보레크 산맥이 끝나는 부분에 위치한 토리 아 왕국이 알카사스와 코린트, 크라레스와의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것에 비한다면 탄벤스는 그렇게 상업이 잘 발달한 국가는 아니었다.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고 있는 탄벤스 공국은 공왕이 다스리 는 국가다. 공왕이라는 것은 전제 왕권이 발달하기 전의 과 도기적인 국가에서 나타나는 왕이다. 전제 왕권의 왕위가 아들이나 혹은 딸에게 세습되는 데 반하여,공왕의 경우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 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 탄벤스 공국의 경우 세 개의 가문이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가문에서 돌아가면서 왕이 배출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공 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왕이 다스리는 국가를 보고 공국이 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적인 선출에 의해 탄생되는 왕이 다 스리는 공화국과는찬전히 다른 개념의 국가인 것이다. 탄벤스 공국은 공왕이 다스리는 만큼 전제 왕정보다는 왕권이 떨어 지고 귀족들의 권한이 강했다.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주어지지 않 고, 기득권 층인 귀족들이 그 권세를 장악함으로 인해 대단히 보수적 인 성격이 짙은 국가가 되었다. 귀족들의 경우 될 수 있다면 변화를 싫어했기에,타국에 대한 침략 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재수 없게도과거 약소국으 로 깔봤었던 트루비아의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이다. 탄벤스 공국의 군대는 트루비아 군이 침공해 들어오자, 국경 수비 군이 트루비아 침공군을 저지하고 있는 사이 뒤로 후퇴하여 일단 전 력을 정비해야 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부대들이 한곳에 집결을 완료한 후에야 탄 벤스 군은 트루비아 군과 감히 싸을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 단 전력이 정비된 후 탄벤스 군은 트루비아 군의 힘을 알아 보기 위해 간단한 탐색전을 펼쳤었다. 그런데 막상 전투를 해 본 결과 상대방의 군사력이 보통이 넘는다 는 것을 알아 내고는 재빨리 자신들의 맹방인 코린트에 구원병을 요 청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벤스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 철십자 기사 단 장 가가린 후작이다. 그는 철십자 기사단을 거느리고 전선에 도착한 후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은 가가린 후작에게 트루비아 군을 전멸시켜 크라레 스를 자극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고,서서히 트루비아 군을 압 박하여 그냥 국경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령을 했었기에 그가 거느린 철십자 기사단도 상당히 수동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그 덕분 에 트루비아 군대는 코린트의 강대한 기사단 앞에서 거의 피해도 입 지 않고 후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흐음‥‥‥‥아직도 후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가?" "옛, 각하. 트루비아 군의 진형으로 봤을 때 일전을 벌일 각오인 것 같습니다." 부단장으로부터 모고를들은가가린 후작은잠시 뭔가를궁리했다. 놈들이 과연 무엇을 믿고 일전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도대체 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뭔가 속임수가 아닐까? 일전을 하는 듯이 보이면서 실지로 주력 부 대는 뒤로 빠지는 것 말이야. 놈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쪽에서 서 둘러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뭔가 감춰진 내막이 있다고 지레 짐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안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놈들에게 이쪽에서 전투를 벌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리 는 것은 어 떨까?" "각하, 만약 그것을 공왕이 안다면 우리들의 저의를 의심할지도 모 릅니다." '맞아,그걸 생각못 했군.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일단 위력 제압부터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껏 밀어붙여 버리면 놈들은 그냥 도망칠 겁니다. 그걸 추격 섬멸만 하지 않으면 상관없지 않을까요?" 실질적인 정면 전쟁에서 오는 피해보다 패배하여 도주하는 적을 추 격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피해가 더 크다는 것은 거의 상식에 가까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 였다. 철십자 기사단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타이탄까지 보여 주며 은근히 압력을 가했는데토 불구하고 녀석들은 국경을 넘어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꼭 일전을 겨루겠다는 의지를보이고 있었다. 꼭 말로 해서 안 듣는 상대라면 일단 이쪽의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가린 후작에게 떠올랐다. 적을 전멸시 키지만 않는다면, 혹은 전멸시킨다고 하더라도 토리아까지 침공해 들어가면서 전쟁을 확대시키지만 않는다면 크라레스는 묵인해 줄 것 이다. "좋아,부하들에게 전투 준비를 하라고 지시해라," "옛,각하." "천천히 이동하는속셈을모르겠단 말이야. 자네 생각은 어때?" "글쎄‥‥‥ 혹시 이쪽에서 그냥순순히 물러나주기를원하는것은 아닐까?" "순순히 물러나주기를 원한다면 저쪽에서 전령이 빨리 물러나지 않는다면 전멸시켜 버리겠다 ' 하는 포고문을 가지고 달려왔겠지." "그럼 뭐지?혹시 함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딱히 함정을 만들 만한 것은 없으니까 우리들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듀런더러 부하 몇 명을 데리고 가서 퇴로를 확보 하라고 지시를하는 게 좋겠군." "그게 안전하겠지." 트루비아 군과 크라레스 군이 적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당황하고 있는 사이,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는 천천히 이동해 와서는 트루비 아 군과 2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양국 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대방을 향해 욕설 을 퍼부으며 저마다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상대의 됫수가 뭔지를 궁 리했고, 또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며 날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양군은 서서히 이동하여 상대방과의 거리를4킬로 정 도로줄인 후 진형을짜기 시작했다. 탄벤스 공국을 지원하기 위해 파 견된 코린트 군으로서는 타이탄을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그것들을 모두 다 밖으로 꺼내어 배치했다. 코린트 쪽으로서야 자신들의-강력 한 타이탄을 상대가 보고, 알아서 도망쳐 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왜 그래?" "저거 서른네 대 맞지?" 쟈므란 백작의 물음에, 라테민 백작은 상대방 진형에서 코린트의 타이탄을 찾아서 헤아리기 시작했다. 코린트의 미노바-P2의 경우 탄 벤스 공국이 보유하고 있는 타이탄보다 훨씬 덩치가 컸기에 판별하 기는 쉬웠다. "맞아,서른네 대야." "그럼 열여섯 대가 어딘가로 갔다고 보는 게 옳겠군. 안 되겠어. 자 네가 아흡 대를 더 가지고 뒤로 가. 자네가 뒤에서 놈들의 퇴로를 막 아 준다면 든든할 것 같아." "내가 뒤에서 꽁지 빠지게 막아 주는 동안에 너 혼자 영웅이 되겠다 는 거냐?" "히히,그럴지도 모르지. 싫다면 내가 뒤로갈까?" "아니 , 내가 뒤로 가지." "고마워. 무슨 일이 있으면 빨리 연락해." 쟈므란 백작의 말에 라테민 백작은 빙긋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잘해 봐라." 라테민 백작은 서둘러서 자신이 지휘하던 8전대에서 아홉 명을 추 린 다음 마법진을 이용해서 부하들이 포진하고 있는 후방으로 가 버 렸다. 그렇게 하여 쟈므란 백작은 8전대의 남은 열 명까지 합한 40기 의 타이탄을 투입해 코린트와의 정면 대결을준비하기 시작했다. 쟈므란 백작은 20기의 타이탄을 퇴로 확보를 위해 30킬로 후방에 배치시킨 후,면밀하게 적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34대 40이라면 그 런 대로 팽팽한 싸움이 될 것이다. 거기에다가 코린트의 경우 탄벤스 공국이 보유한 19기의 타이탄을 믿을수 없는 데 반해서,크라레스의 경우 트루비아가가지고 있는 14 기의 타이탄을 믿을 수 있었다. 근위대 소속의 3기가 트루비아의 수 도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시드미안이 거느리고 있는 14기 중에서 12 기가 카프록시아 급이었기 때문이다. 양국 군대의 전투 진형이 완전히 갖춰지고 나자,관례에 따라 탄벤 스 공국의 전령이 백기를 들고 트루비아 군 진형으로 달려왔다. 전령 은 시드미안이 있는 곳까지 달려와서는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는 거 만한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본국의 영명하신 라미네르 공왕 전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 어, 너희 침략의 무리들이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물러간 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노라! 너희 침략의 무리들 은 목숨이 아까운줄 알면 이곳 탄벤스 영토에서 조용히 물러가라. 그 렇지 않다면 너희들의 시체를 들개와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겠노라," 전령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들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 수작이 빤 히 보였던 것이다. "헛소리를 하고 있군, 전쟁 준비를 완전히 갖춘 후에 물러가라니,말 이 되나? 만약 어제 밤 정도에 사신을 보내 왔다면 몰라도‥‥‥‥ 후퇴 하면 뒤통수를 치겠다는 말이겠지 " 쟈므란 백작의 말에 시드미안 공작이 덧붙였다. "그렇지 않다면 탄벤스 지휘관들의 상상력이 부족한 것일 겁니다. 탄벤스를 침공하면서 모든 전투에서 이와 똑같은 보고문을 들었으니 , 까 말입니다. 아마도 탄벤스에서는 지휘관들에게 포고문에 대한 공 식 책자라도 나눠주는 모양이지요. 어떻게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지, 원‥‥‥‥" 시드미안은 툴툴거리면서 자신의 부하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그 부하는 말을 달려 나가 전령의 백기를 낚아채 그것을 높이 들어올린 다음 꺾어 버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전쟁이나하자는표시였다. "적들이 깃발을 꺾었습니다 "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라미네르 그론티어 공왕은 자신도 눈으로 적 의 기사가 깃발을낚아챈 후 깃대를 꺾어 버리는 것을봤으면서도 짐짓 못본 척하고 있다가,부하가 보고를 올리자 허세를 부리면서 외쳤다. "이런 천인공노할 녀석들, 이쪽에서 자비를 베푸는데도 그것을 못 알아듣다니. 여봐라!저 극악무도한 놈들에게 맛을보여 줘라," 공왕의 옆에 서 있던 노 장군이 외쳤다. "기사단 돌격하라!' 코린트의 기사단은 트루비아의 기사단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알 기에 탄벤스 공국의 타이탄이 돌격해 들어갈 때,그들을 따라서 돌진 하기 시작했다. 코린트 쪽의 입장에서는 적들에게 호된 맛을 보여 준 후 놈들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그냥 놔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방 에서도 타이탄을 꺼내 놓기 시작하자 철십자 기사 단장 가가린 후작 은 경악했다. 삼두의 드래곤 문장을 달고 있는 크라레스의 타이탄들 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가가린 후작은 매우 당황했디. 그들은 탄벤스 공국 군대에 코린트의 기사단이 지원 나와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면 승부로 나온 것을 보면 진짜로 한판 해 볼 작정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후퇴할 충분한 시간의 여유를 뒀음에도 아직까지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은,코린트 군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 으로 볼수밖에 없었다. "젠장! 사정 봐주지 마라, 돌격,!" 가가린 후작은 상대방과 격전을 벌이면서도 매우 당황했다. 상대방 타이탄은 크라레스 중앙 기사단 소속의 7전대와 8전대가 분명했다. 적 타이탄에 그려져 있는 전대 문장을 무시하고 생각한다 고 해도 트라노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5전대부터 8전대까지였다. 그 리고 저 문장들은 7전대와 8전대를 뜻하는 것이었다. 가가린 후작의 머리 속은 급속도로 회전했다. 크라레스 기사단의 1 개 전대는 타이탄 30기였다. 그런데 저 앞에서 돌진해 들어오는 것은 40여 기, 그렇다면 최소한 20기 이상이 이곳에 모습을보이지 않은 것 이다. 적들은 분명 이쪽에 코린트의 기사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덤비는 이상,상황을 예측한 충분한 대비가 있을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포위 공격인가?' 가가린 후작은 후방에서 적의 타이탄이 나타날 가능성을 따져 보기 시작했다. 불안하게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겨우 34기 밖에 안 되는 철십자 기사단을둘로나눈다는 것은자살 행위였다. 그 렇다면 방법은 하나. 정면의 적을 박살 낸 다음 도주하는 적을 뒤쫓지 않고,180도 반전하여 탄벤스 군을 학살하는 크라레스의 별동대를 무 찌르는 것뿐이었다. '젠장!더럽게걸렸군‥‥‥' 이제 가가린 후작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최소한 눈 앞의 적이라도 박살 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뒤로 포위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황제 폐하로부터 지휘권을 하사받은 이 철십자 기사단이 오늘 전멸 당할 가능성까지 있었던 것이다. "돌격!황제 폐하께 영광을!" 하지만 이어서 벌어진 대규모 타이탄 전투는 놀랍게도 코린트 기사 단의 압승이었다. 트루비아 연합군 쪽의 주력 부대인 크라레스 기사 단은 대충 하고 끝내려고든 것에 반해서,위기를느긴 코린트의 기사 단은 대충 할 생각은 아예 포기하고 총력전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고철이 되어 나뒹구는 가운데 가가린 후작은 패퇴하는 크라레스 기사단을 추격하지 않고, 곧장 반전하여 공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적의 별동 부대가 언제 들이닥칠지 알지 못했 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만약 가가린 후작이 뒤의 적을 생각하지 않고, 패퇴하는 크 라레스 기사단을 전멸시키기 위해 추격전을 감행했다면 어떻게 되었 을까? 그랬다면 가가린 후작은 크라레스 군의 퇴로를 지키고 있었던 라테민 백작의 별동대와 패주하던 쟈므란 백작의 양쪽 부대에 게 협공을 당해서 되레 전멸 당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렇듯 전쟁에 있어서 가장 큰 변수를 차지하는 것은 전략도, 전술도 아니고 운 이었다. 그렇기에 예로부터 가장 뛰어난 장수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운이 들어가는 것이다 크라레스 파견군이 대패했다는 보고는 재빨리 각국에 보고되 었다 루빈스키 폰스바시에 대공은 그 급보를 받자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마시고 있던 포도주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와 황제가 2개 전대를 트루비아에 파견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트 루비아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것이었을 뿐,승리나 패배,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적당한 수준에서 트루비아와 탄벤스 공국의 체면을 살려 주면서 은 근슬쩍 '후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파견군을 보내 놨 더니 그가 가장 원하지 않던 행위,즉 '정면 대결' 을 펼쳐서는 결국은 패배를 자초했던 것이다. "이런 제기랄?"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뭐라고? 추가적인 파병이 필요하다고?" "예, 폐하. 원래는 적당한 수준에서 후퇴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사옵니다. 본국이 대패한 이상, 동맹국들이 본국의 능 력을 의심하며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옵니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 사옵니다.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여 흔들리는 본국의 위상을 바로 세 워야 하옵니다. 그렇게 큰 승리는 필요 없지만, 어느 정도 '우세한 상 황' 으로 전세를 몰고 가야 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 루빈스키 대공의 말을다들은 황제는 고개를주억거리며 말했다. "경의 말이 옳구려, 그렇다면 얼마나파병을 하는 것이 좋을까?하지 만꼭 파병을 더 한다고 해서 승리를 거둘수 있을까?' "승리를 거두도록 해야지요. 아르곤 국경에 주둔중인 제1전대를 투 입하겠사옵니다. 제1전대장인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이라면, 지난 번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던 만큼 충분히 임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이라면 루빈스키 대공의 먼 친척이었다. 루빈 스키는 크로아후작이 젊었을 때 검술을 가르쳐 준 적도 있었기에,그 의 차분한 성품이라든지 꼼꼼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 실력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6년 전 3국 전쟁에서 크로아 후작은 미란에 파견되었던 살 라만더 기사단 부단장의 직분을 훌릉하게 완수해 냈고,또 그에 뒤이 어 벌어진 코린트와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무공을 세웠었다. 그 덕분 에 지금은 후작으로 작위가 한 단계 상승한 상태 였다. 크라레스의 군 지휘부는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분류하고 있는 코 린트와 '잠재적인 위험 지역'으로분류하고 있는 아르곤의 국경에 중 앙 기사단의 최고 정예들로구성된 전대들을배치해 두고 있었다. 코린트는 그렇다고 해도 왜 여태껏 크로노스 교가 통치를 시작한 이래로 타국을 침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아르곤이 '잠재적인 위 험 지역 으로 잡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아르곤의 군사력이 대단히 강력하고,또 그 국력 또한 대단하기에 그렇게 설정된 것이 아닐까 하 고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6년 전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크로아 후작이 지휘하는 제1전대와 역시 뛰어난 무훈을 통해 을 라온 린넨 후작이 지휘하는 제2전대. 이들은 만약 큰 사건이 벌어지 게 되면 '안전한 아르곤 국경' 을 부담 없이 이탈하여 그곳에 투입할 수 있는 예비군적인 성격이 짙었다. 물론 이렇게 아르곤을 위험 지역으로 선포해 두면 속사정을 잘 모 르는 적들은 1, 2전대가 아르곤 국경에 꼭 매달려 있어야만 하는 줄 알고 이쪽의 유동 전력에 대해 오판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1,2전대에는 그 예비군적인 성격 외에도 한가지 중요한 임 무가 더 있었다. 말토리오 산맥 부근의 아르곤과 치레아로 갈수 있는 도로가 위치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에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이유는, 최악의 경우 크라레스 제국에 가장 위협이 되는 적으로 발전할 수 있 는 치레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말토리오를 넘어 진격해 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치레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1,2전대가 주둔하고 있는 말도른 요새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스바시에 공국으로 진격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란군이 말토리오 산맥을곧바로 넘지 않고스바시에 공국 쪽으로 진격한다면 그곳에는 스바시 에 기사단과 제5전대가 주둔하고 있으므로 본국에서 증원군을 파병할 동안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 분 명했다. 이렇듯,제1,2전대는 크라레스 중앙 기사단의 최고 정예였고 그 목 적에 맞는 위치에 주둔중이었다. 그런 만큼 제1전대를 전장으로 보낸 다면 충분히 막강한 실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렇게 처리하라." "옛,폐하." 이렇게 해서 탄벤스 공국을 무대로 거대 강대국 간의 제2차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탄벤스 공국에서 벌어진 제2차 전투는 순전히 크라레 스의 자존심과국제적 지위 하락을 염려해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에 비해 코린트의 로체스터 공작은 가가린 후작으로부터 대승의 보고를 접하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전해진다. 이번 전쟁을 대충 끝 내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둬 버린 한 심한 부하 때문에 쏟아져 나온 가슴 아픈 한숨이었다. 이렇게 되면 크라레스가 그냥 순순히 물러날 가능성은 더욱 없어 지기에 로체스터 공작은 추가로 30기의 타이탄을 파병할 수밖에 없 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명령을 어기고 승리를 거둬 버린 멍청한 가가린 후작을 사령관 직에서 박탈하고 대신 은십자 기사단의 부단장인 알 프레드 드 크로데인 후작이 탄벤스 전선의 사령관으로 즉위하게 된 다. 알프레드 드 크로데인 후작은 6년 전에 벌어졌던 3국 전쟁에서 전사한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을 배출한,코린트의 유명한 3대 무가들 중의 하나인 크로데인 가문의 기사로서 대단히 실력이 뛰어 났다. 크로데인 후작은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로체스터 공작에게 불려 가 서 한 시간동안이나잔소리를 들어야 했는데,그 잔소리의 요지를 간 단하게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적당한 수준에서 놈들에게 승리를 맛보게 해 주게나. 본국의 체면 이 있으니 패배는 절대로 안 돼. 일단 치고 받다가 적당한 순간에 슬 쩍 전략적 후퇴를 하란 말이야. 그래야 이놈의 망할 신경전을 끝낼 수 있다구 알겠나?" 다시 불붙은 제국 전쟁 이제 바야흐로 탄벤스 공국에서의 전쟁은 당사국인 탄벤스 공국과 트루비아 왕국을 됫전으로 두고, 코린트와 크라레스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로 흘러가고 있었다. 증원 부대와 함께 도착한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은 쟈므란 백작과 라 테민 백작에게 상황 보고를 들었다. 대패라고는 하지만 타이탄 전투 직후 적들은 패주하는 쟈므란 백작의 기사단에 대해 추격전을 펼치 지 않았기에,타이탄 부대의 직접적인 피해는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 었다. 대신 후퇴하는 타이탄 부대를 따라 재빨리 전장을 이탈하지 못한 트루비아의 정규군이 입은 피해가 막심했다. "시드미안 전하." "예?" "귀국 군대는 30킬로 뒤쪽으로 좀 빼 주십시오. 이제부터 벌어지게 될 전쟁은 코린트의 타이탄 부대를 상대로 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병이나 기병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또, 전쟁중 에 그들까지 신경 쓰면서 싸을 수는 없지요. 이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 "라테민 백작." "예." 같은 전대장급이라고 해도 그 연륜이나 지위로 봤을 때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특히 아르곤이나 코린트의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는 1,2,3,4전대장들은 6년 전 3국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했던 매우 노련하면서도 우수한 실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에 비해 스바시에나 크로나사 서부, 혹은 수도에 주둔하고 있는 5,6,7,8전대는 3국 전쟁 후에 새로 창설되어 배치된 부대들인 만큼 그 지휘관들도 대부분 신출내기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3국 전쟁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독립 부대를 이끈 지 휘관은 아니었던 것이다 "전번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어떻소?' "예,26기를 잃었습니다, 각하." "26기라‥‥‥ 어려운 전투가 되겠군." 한참 고심하고 있던 크로아 후작은 시드미안 공작을 향해 말했다. "전하,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어쩌면 도움을 드릴 수 없는 지경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보유하고 계신 타이탄 전력만으로 군 대를 보호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예,아직도 10여 기가 남아 있으니 그런 대로충분할 것입니다. " "좋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기사단과 함께 트루비아 군을 보호 하는 데 치중하십시오." 크로아 후작은 로련한 인물답게 천천히 이동해 오는 적을 삼면에서 포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적들은 천천히 이동해 오면서 이쪽을 압 박해 오고 있었기에 기습 공격을 가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천천히 이동해 오는 적의 주력 부대를 라테민 백작과쟈므란 백작이 각각 지휘하는좌 ·우익 부대가각각서쪽과동쪽을 맡고,크로아후작 이 거느리는주력 부대는 남쪽을 맡는다. 상대는 매우 천천히 이동해 오고 있으니 기습전에 있어서 서로 간의 시간차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크로아 후 작이 북쪽에 대해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적들이 일단 치고 받다가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깨닫게 되면 충분히 도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배려였다. 다음 날 오후,새롭게 코린트 파견군의 사령관이 된 알프레드 드 크 로데인 후작은 정찰조로부터 적의 주력 부대가 30킬로 전방에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을 보면 전에 트루비아 군이 대패를 했던 전투와 같이 트루비 아 군이 먼저 기다리고 있는 그곳에 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가 10킬 로쯤 접근해 들어가서 밤을 지새운 다음,다음 날 아침 무점에 상호간 에 진형을 갖춰 격전을 치르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확실히 서로의 체면이 걸린 싸움이라서 그런지 매우 신사적으로싸 운단 말씀이야. 전번 전쟁에서는 정규전은 거의 없고, 계속 게릴라전 만 펼쳤었는데‥‥‥‥" "후작각하." 탄벤스 공국의 전령이 급히 말을 달려 오며 크로데인 후작을 찾았 다. 그것을 보고 후작의 경호 기사 한 명이 그쪽으로 달려가 그를 후 작이 있는 곳으로 데려왔다 "무슨 일인가?" "예, 공왕 전하께옵서 이쯤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진격을 하자고 말 씀하셨사옵니다." 크로데인 후작은 태양을 살짝 바라봤다. 이제 겨우 정오가 조금 넘 었을 뿐이다. 오늘 저녁에 야영하기로 정한 목적지까지 겨우 17킬로 남짓 남았으니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행군을 계속 해도 목적지에 도 착하는 데는 별다른 무리가 없을 듯 생각되었다. 또 내일 아침에 있을 전투를 생각한다면 병사들에게 충분한 식사와 휴식이 필요할 것은 분명했다. "알겠다. 공왕 전하의 현명하신 판단을 따르겠다고말씀드려라," "옛,각하." 탄벤스 군대는 상관의 명령대로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 이나 저녁 식사의 경우 든든한 방어진이 설치되기에 그래도 격식을 갖춘 식사가 장만되어 배급된다. 하지만 이렇듯 점심 때의 휴식을 겸 한 식사는 빵과 고기포,그리고 물만으로 간단하게 넘어가게 되는 것 이다. 적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절호의 순간을 놓칠 리 없는 노련한크 로아 후작의 군대는 그때를 노려 기습 공격을 가했다. 서로간에 진형 을 짜고 횐 깃발을 들고 상대를 설득하거나 엄포를 놓기 위한 전령 따 위를 보내야 하는 정식 전투가 아닌 기습 공격인 만큼,크라레스의 64 기나 되는타이탄들이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당황해서 우왕좌 왕하고 있는 적진을 향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진해 들어가기 시작 했다. "젠장!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라! 적 타이탄을 막아라. 탄벤스 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 줘라,!" 크로데인 후작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기사단뿐이었 다면 재빨리 적이 공격해 오지 않는 북쪽으로 달아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탄벤스 공국의 군대와 함께 이동중이라는사실이었다. 자신들이 먼저 도망치면 탄벤스 공국의 군대는 맥없이 전멸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공왕이 전사하기라도 한다면 그들을 도 와 주기 위해 파견되었던 코린트 기사단과 그 형편없는 기사단을 동 맹국에 파견해 준 코린트의 명성은 땅바닥에 패대기쳐질 것은 분명 한사실이었다. "공왕 전하를 피신시켜 !" 삼면에서 육박해 들어오는 적 타이탄들 때문에 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는 기병과 보병들이 섞여 우왕좌왕하는 혼란의 극치를 이뤘다. 이 전투에서 크로데인 후작이 지휘하던 코린트의 타이탄 부대는 탄 벤스 공국의 군대가 퇴각하는 것을 지원해 주기 위해 크라레스 군과 본의 아니게 사생결단을 벌였다. 하지만 이런 노럭에도 불구하고코린트 파견군에게 남은 것은 전력 의 반 이상이나 상실한 참패,그리고그 혼란의 극치를 이뤘던 전장의 어느 구석에서 죽어 버렸는지 모르지만 멍청한 공왕의 전사 소식이 었던 것이다. "대패를 하였다고 하옵니다. " 베르딘 후작 대신에 로체스터 공작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는 마법사 는 붉게 충혈 되기 시작하는 로체스터 공작의 분노에 타오르는 눈동 자와 마주하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뿌드드득'하는 이빨갈리는 소리와함께 '우지끈'하 며 로체스터 공작이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가 무의식적인 그의 손 아귀 힘에 의해 부서져 나가는 소리까지 함께 들려 오자,마치 자신이 대패를 당하고 보고하는 당사자가 된 듯,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다. 로체스터 공작은 새파랗게 질려서 떨고 있는 마법사를 향해 드디 어 노성을 터뜨렸다. "이런 멍청한 녀석!그냥 싸우는 척하다가 슬쩍 후퇴하는 것도 못 한 단 말이냐?그 녀석의 목을 당장 잘라 버려?" 베르딘은 기사단이 대패했다는 그 보고를 접하면 로체스터가 발광 을 할 것이 분명했기에 슬그머니 부하에게 팔밀이를 했고,보고서를 대신 들고 온 마법사가 예상대로 경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듯화 를내는로체스터 공작을 바라보며 그 옆에 서 있던 까미유가 말했다. "전하, 이렇듯 이성을 잃으시면 될 일도 아니 되옵니다. 고정하시옵 소서 , " 로체스터 공작은 다시 붉게 충혈 된 눈동자를 까미유 쪽으로 돌렸 다. 마법사는 잘모르고 있었지만로체스터 공작의 붉게 충혈 된 눈은 오늘의 분노 때문만이 아니라 격심한 픽로감 때문이었다. 이놈의 전쟁이 벌어진 후에 연속적으로 벌어진 대책 회의 때문에 거의 잠을 못 잔 때문이었다.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로체스터 공작의 심기는 이미 폭발 일 보 직전에 와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기름을 붓고 불을 당겼으니 로체스터 공작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 버렸던 것 이다. "내가 고정하게 됐어? 탄벤스 공국을 도와 주라고 보내면서 꼭 승리 하고 돌아오라는 어려운 주문을 한 것도 아니잖아? 상대의 체면을 세 워 주면서 슬쩍 후퇴하는 그것도 못 한다는 말이야? 그러면서 탄텐스 공국의 공왕까지 전사했단 말이다. 이렇게 되면 본국의 체면이 땅바 닥에 떨어지는 것은 둘째치고,아무 것도 모르는그 병신 같은 놈들은 나를 탄핵해 올 것이 분명한데?" "한 번 실수를 했다고 해서 뛰어난부하를죽일 수는 없사옵니다. 일 단 사령관 직책의 해임과 동시에 본국으로 소환을 하시옵소서, 그런 다음 투옥해 놓고 나서 천천히 처리를 궁리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하옵 니다. " 로체스터 공작은부글부글 끓어오르는화를 최대한 억눌렀다. 까미 유의 말대로 변방에서 일어난 작은 잘못을 가지고 부하를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좋아. 경의 의견대로처리하기로하지." "감사하옵니다, 전하," "그래,승리한후 적의 동태는 어떤가?" "그것이 이상하게 그 여세를 이용해서 몰아붙일 생각을 하지 않고, 국경을 넘어서 퇴각했다고하옵니다." "승리한 후에 국경을 넘어 퇴각했다고? 이런 괘씸한 놈들‥‥‥ 자기 들만 대승을 거두고 후퇴하면 끝인 줄 알아?당장 국경을 넘어 추격하 여 놈들을 박살내 버려?" "전하, 그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할 사안이 아니옵니다. 어제도 밤을 새우셨지 않사옵니까? 조금 쉬신 후에 다시금 의논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붉게 충혈 된 피로한 눈을 들어 까미유를 바라봤 다. 의지가 되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 탄벤스 공국에서 전쟁이 벌어진 후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고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내외의 사정도 어려운 데다가 정적들의 모략도 막아야 했 고,또 그들의 모략에 대응할수단까지 짜 내다 보니 무지막지하게 피 로와 짜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믿고 보냈던 부하가 자 신의 믿음을 완전히 배신한 꼴을 연출했으니 그가 이성을 잃은 것도 당연했다. "경의 말대로 조금 쉬는 것이 좋겠군 두 시간만 자고 올 테니까 대 웅할 작전을 구상해 보게," "옛,전하." 방문을 나서면서 로체스터 공작은 투덜거렸다. "젠장, 예전에 키에리가 존경스럽군.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하 면서 정적들까지 억눌렀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두 시간 후 로체스터 공작이 아직도 충혈 된 눈으로 나타났을 때, 까미유는 결정된 사항을 보고했다. "일단 기사단을 추가로 파병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지금의 군 사력으로는 도저히 적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옵니다. 아마도 은십 자 기사단에서 타이탄을 30기 정도 빼내어서 보내 준다면 괜찮겠지 요. 그리고 이쯤에서 크라레스와 협상을 통해서 서로 간에 끝을 보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쓸데없이 변방에서 소모전을 펼치고 있을 이유는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 "협상이라‥‥‥‥" "옛, 녀석들도 이번에 대승을 챙겼으니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 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옵니다. 놈들도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좋 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좋아, 그렇게 하지. 참, 기사단을 이용해서 무력 시위를 벌이면서 협상을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협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전면 전쟁으 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야. 그렇게 되면 놈들은 좀 더 많은 것을 양보해 올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30기가 아니라 은십자 기사단 전부를 다 집어넣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무력 시위는 규모가 클수록 효과 또한 크지 않겠사 옵니까?" 까미유의 의견에 로체스터 공작은고개를끄덕여 허락했다. "좋아,그건 그렇게 처리하기로하지. 그리고 협상은자네가 해 주겠 나? 자네라면 믿을수 있을 것 같군." "옛,전하." "고맙네,자네라면 훌릉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야." 로체스터 공작의 치하에 까미유는고개를 숙였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이제 한 가지 일이 처리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또 다른 일을궁리하기 시작했다. 탄벤스 공국은 들인 공에 비했을 때 정 말 얻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뭔가를 확보해야 만 했다. 탄벤스에서 잃어 버린 타이탄의 보상은 받아 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탄벤스 공국은 이제 주인 없는 나라가 되겠지? 공왕도 전사했고,막대한수의 군대와 뛰어난 장 군들도 많이 죽어 버렸어. 이 기회에 본국이 탄벤스에 더욱 깊은 영향 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 "영향력을 확실하게 행사하시려면 다음 공왕을 우리 쪽 인물로 세우 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전하." 까미유의 의견에 로체스터 공작은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그게 좋겠지. 다음 공왕은누가 될 예정이지?" 로체스터 공작이 고개를 살짝 뒤로돌려서 질문을 하자, 레티안은 잠 시 생각을 한후 답했다. "예. 여태껏 탄벤스 공국에서 공왕이 선출되었던 전례를 따져 본다 면다음차례는 아크레니아가문에서 공왕이 나을 것이옵니다." "으음‥‥‥‥ 하지만 정식적으로 공왕이 선출된다면 이쪽에서 영향력 을 행사하기가 힘들어. 탄벤스 공국의 경우 공왕이 되기 위해서는 30 세가 넘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지 않던가?그 정도 나이라면 자신의 주관이 벌써 정립되어 있는 나이니까조종하기 힘들지. 어떻게 한 다?' 이리저리 궁리를하던 로체스터는 의자의 손잡이를 탁하고 치면서 말했다. "참, 이번에 전사한 라미네르 그론티어 공왕에게는 혈족이 없나?그 놈을 왕위에 올린다면 명분도 세울수 있고, 이용해 먹기도 편할 텐데 말이야." 두 번째 질문에도 레티안은 즉각 대답을 했다. 정말 엄청난 암기력 이었다. "예, 있사옵니다. 아들 둘과 딸이 하나 있사온데,그 장자의 나 이는 이제 열세 살 이 된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 "열세 살이라‥‥‥‥ 이용하기에 꼭 좋은 나이로군. 그렇지 않은가,까 이유?" "그렇사옵니다, 전하." 까미유도 찬성하는 것을 보며, 레티안은 방금 떠오른 계략을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전쟁 때문에 탄벤스 공국의 뛰어난 중신들도 많이 죽은 것으 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탄벤스 공국을 완전히 차지하 는 것은 어 떻겠사옵니까? 이번 전쟁에서 탄벤스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사옵니다 이것을 기회 로 탄벤스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군대를 한 5개 사단쯤 파병하여 완 전히 틀어쥐는 것이옵니다. 그런 다음 꼭두각시 왕을 한 명 세운 후 귀족들을 차례로 숙청해 나간다면 머지않아 본국의 속국·으로 편입시 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 레티안의 조언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주억 거리면서 말했다. "그렇군 그런 다음 그 어린 왕까지 없애 버린 후 아예 본국의 공국 으로 편입시키면 아주 재미있어질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다른나라들의 비난을사지 않을까?동맹국을 집어삼켰다고 말이지." "그것은 걱정하실 것이 없사옵니다, 전하. 어린 왕을 세우고 충신들 을 차례차례 없애 버린다면, 탄벤스는 머지않아 완전히 무법 지대가 될 것이옵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되도록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가 훗날 일거에 그들 을 쓸어버리면서 전면에 나서는 것이옵니다. 그러면서 어린 공왕은 폐위시키고 누구 한 사람에게 권해서 두 번째 꼭두각시 공왕을 만드 는 겁니다. 그런 후 그 공왕을 협박해서 '짐은 흔자서 왕위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코린트의 품 안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노라.'하고 선언하 게 만들면 되옵니다. 그 놈에게 대공의 작위를 내린다면 그 다음부터 탄벤스는 본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좋겠군,그게 좋겠어. 탄벤스를 본국의 영토로 흡수할 수 있 다면 이번의 실패를 만회하기에 충분하겠지. 입만 살아 있는 놈들도 군소리를하지는못할 거야. 안그런가?' "그럴 것이옵니다. 전하." 협상을 해 보자는코린트의 제안은크라레스에 의해 즉각 받아들여 졌다. 크라레스 쪽의 입장으로 봤을 때 탄벤스 전선의 마지막을 대승 으로 장식했기에 더 이상아쉬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번 승리를 통해 설사 적이 코린트라고 하더라도 동맹국을 위해서는 검을 뽑아 들고 맞서 싸워 주는 의리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소득을 얻었다. 그리고 첫 번째 전투에서 상실했던 타이탄을 보충하기 에 충분할 딴큼의 노획품도 챙겼던 것이다. 코린트에서 까미유드 크로데인 후작이 협상 책임자로나온다는 것 을 통보받고 크라레스에서는 그와 격을 맞추기 위해서 루빈스키 폰 스바시에 대공을 그 상대로 내보냈다. 그리고 그들의 협상 장소는 코 린트와 크라레스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 선택되었다. "오랜만에 뵙는구려,크로데인 후작."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6년 만인가요?" "허헛,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려. 그대를 볼 때마다 그대와 같은 훌릉한 후진들을 거느리고 있는로체스터 공작이 부럽소이다. " "과찬이십니다. " 이렇듯 양국의 대표는화기애애한분위기로 회의를 시작했다. 사실 상 이번에 양국이 갈등을 려게 된 것이 동맹국에 대한 파병 때문이었 기에 이런 분위기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현안들을 차근차근 의논하며 해결해 나갈 생각이었다. 설혹 양보를 해서 땅덩어리 하나를 상대국에게 떼어 준다고 해도 그건 자국의 영토가 아니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을 정도였 다. 당연히 느긋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그들의 뒤에는 이번 회의가 어떻게 결론 지어질지 지켜보는 동맹국들이 있었다. 회의에서 강한 쪽이 좀더 많은 것을 얻어 낼 것이 고, 약한 쪽이 보다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 러므로 이번 회의의 결과에 따라 누가 강자인지,또는 약자인지가 확 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또 얻어 내게 되는 것에 대한 혜택이나 손해는 고스란히 동맹국인 트루비아 왕국이나 탄벤스 공국이 책임 지게 된다. 그 때문에 자국의 동맹국·을 위해 '얼마나노력해 주는국가' 인가가 이 한판의 회담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서로 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어차피 양보할 수 없는 한판 대결을 이 좁은 탁자 위에서 벌이게 된 것이다. 뒤에서 지 켜보는 눈들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로체스터 대공과 까미유 후작의 입씨름은 며칠에 걸쳐 매우 지루하게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까미유와 루빈스키가 팽팽한 평화 협상을 하고 있는 동안 코린트의 군대는 마법진을 통해서 탄벤스 공국에 입성했다. 육로를 통해 발렌시아드 공국을 경유하여 트레보크 산맥을 넘어서 올 수도 있었겠지만그렇게 되면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르게 된다. 로체스터 공작의 계획은 비어 있는 공왕의 자리에 새로운 공왕이 앉기 전에 코린트의 군대가 탄벤스를 장악해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5개 사단,즉 5만 명에 해당히-는 방대한 병력과 은십자 기사단 전부 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은십자 기사단 단장인 투르넨 후작은,6년 전 치촉적인 패배를 당했었던 코린트 남부 전선의 부사령관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휘자로서의 뛰어난 실력과 행동이 인정되어 아직까지 도그 직위를유지하고 있었다. 투르넨 후작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 먼저 가 있던 가가린 후작은 직 접 마중 나가 새로운사령관을 환영했다. "어서 토십시오,사령관각하!" "그래,수고했네. 알프레드는 어디에 있나?" "예,부단장각하께서는 지금사택에 연금되어 계십니다. " 가가린 후작의 보고에 투르넨 후작은 역정을 냈다. "그런 멍청한 놈에게 부단장이라는 직함을 붙이지 말게!그 놈의 직 위는 박탈되었으니까 말이야." "옛, 죄송합니다, 각하." "어떻게 부단장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전에 있었 던 칸테로마도 그랬고, 이번에는 알프레드까지. 젠장!" 화부터 내는 투르넨 후작을 보고 송구한 듯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 지 갈팡질팡하는 가가린 후작에게 투르넨 후작은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자네가부단장이었다면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을 텐데 말이야." "감사합니다,각하." "그래도 어잴 수 없지. 지금 은십자 기사단에는 부단장이 없으니 자 네가그 직책을 맡아주겠나?" "영광입니다,각하." "고맙구먼. 자네는 마법진을 통해 이동해 오는 병사들이 도착하는 대로즉각 곳곳에 투입하여 우선적으로수도를장악하라." "옛." "탄벤스의 수도 방위군 사령관은 어디 있나?" 투르넨 후작은 일단 일을 벌이기 위해서는 탄벤스 공국의 수도 방 위군을 딴 곳으로 따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괜히 양쪽의 무력이 한 장소에 집결해 있다가는자칫 칼부림이 날수도 있었다. 그리고 일단 그런 칼부림이 일어나게 되면 탄벤스의 동맹국으로서 이곳에 와 있는 코린트의 명성이 실추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방 위군 사령관을 타일러서 수도가 아닌 딴 곳으로 보내 버리려는 계획 이었다. 투르넨 후짜의 말에 가가린 후작은 사령관이 묻는 의도를 알지 못 해서 다소 장황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가린 후작은 아직까지 젊은 야전 군인이었을 뿐, 정치적인 의도나 모략 ·술수 따위를 이해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충성을 다하고 있는 기사도의 나라 코린트가 동맹국을 꿀꺽 집어삼키려고 술수를 부리고 있는 줄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 었던 것이다. "예, 각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전방으로 보냈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옵서 다거스 후작을 방위군과 함께 전방으로 보내어 본 국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적의 발목을 잡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 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상세히 설명했더니 다거스 후작은 수도 방위군 1개 사단을 이끌고 전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며칠 후 본국 군대의 도착이 완료되면 그들과 위치 교대를하면 될 것입니다. " 가가린 후작의 말에 투르넨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가린 후작 이 일 처리를 매끄럽게 해 뒀던 것이다. "좋아 수도 방위군이 빠져 나간 빈 자리를 본국의 군대가 대신한다. 공왕이 없는 때를 틈타 불순분자들이 설치지 못하도록 수도를 확실 하게 장악해야 한다. 자,빨리빨리 움직이게나." "옛,각하." 부하들을 이끌고 분주하게 달려가는 가가린 후작의 됫모습을 보며 투르넨 후작은 미소를 지었다. 탄벤스의 수도 방위군까지 빠져 나가 고 없다면 일은 더욱손쉽게 진행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제 탄 벤스의 수도를 장악한 후, 철없는 꼬맹이를 왕위에 올리는 일만 남았 던 것이다. 물론그 전에 반대 세력부터 없애 버려야하겠지만‥‥‥‥ 눈물을 흘리는 황제 "폐하, 놀라운 정보가 입수되었사옵니다. "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는 안티노스 후작이었지만, 어디서부터 얼마나 달려왔는지 다소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런가?" "예,코린트의 군대가 비밀리에 탄벤스 공국에 집결중이옵니다. " 그 보고를 듣고 황제는 지그발트 폰 안티노스 후작의 의도대로 기 절할 듯이 놀랐다. 코린트의 군대가 평화 회담을하고 있는 와중에 탄 벤스 공국에 집결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라레스 쪽이 그러했 듯이 파견했던 기사단을 철수시킨다면 모를까‥‥‥ "뭣이?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은십자 기사단이 모두 다 투입된 데다가, 거의 3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이 도착했사옵니다. 마법진을 통해 3만에 달하는 군대까지 이동 시킨 것을 보면 분명히 대대적인 전쟁을 벌일 야욕이 있음이 분명하 옵니다. " 하지만 황제는 애써 좋지 않은 생각들을 털어 내며 조심스럽게 긍 정적인 방향으로 말했다. 은십자 기사단이 전부 다 투입된 것에 비해 3개 사단의 병력이란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우 3개 사단인데‥‥‥‥" "하지만이 아니옵니다. 지금도 계속 마법진을 통해 병력이 이동해 오고 있사옵니다. 코린트가 하루에 1만이 넘는 병력을 지속적으로 탄 벤스 공국으로 보내고 있다는 것은 전쟁 외에는 답이 있을 수 없사옵 니다. 빨리 대책을 세워야하옵니다. " 하루에 1만씩 계속 보내지고 있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병력 이 추가로 투입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가 수비적인 개념의 전쟁을 하는 데는 기사단만으로 충분하지만, 공격을 하려면 점령지를 장악하기 위해서 군대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상 식이었다. 6년 전에 대규모로 벌어졌었던 전쟁에서 병력이 모자라서 엄청난 고전을 면치 못했던 크라레스였다. 그렇기에 기사단과 함께 상대방 의 병력이 대규모로 이동중이라는 것은 뭔가 코린트가 침략적인 전 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으음‥‥‥‥ 이런 난감한 일이 있나?다론을불러 들여라. 빨리!" "옛." 황제의 명령을 받고 근위 기사가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 다론이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그는 연구실에 있다가 끌려왔는 지 여기저기에 뭔가가묻어 있는 지저분한복장을하고 있었다. "부르셨사옵니까?폐하." "다론 경,토지에르 경의 치료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가? 이틀 전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으로 보고를 받았었는데,그 이후 어떻게 되 었나?" "예, 지금 회복되고 있는 중이옵니다. 이대로 경과가 좋다면 아마도 한 달쯤후에는완치될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 "지금 토지에르 경과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는데, 주선을 좀 해 줄 수 있겠는가?" 지금은 스승이 안정을 취해야만 할 때였다.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 었던 스승이었기에 다론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의견에 반대했다. "예?하지만 토지에르 경은 안정을 취해야 하는지라, 여기까지 오는 것은무리일 것이옵니다. " "아,그것은 상관없네. 통신용 마법진을 통해서 몇 가지 의견 교환만 하면 되지, 직접 여기까지 나을 필요는 없는 것이지. 그것도 안 되겠 는가?" 직접 스승이 와야 한다면 몸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지만, 침상에 누 운 채로 마법진을 통해서 대화를 한다면 그렇게 무리가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다론은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토지에 르를 찾을 정도라면 보통큰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폐하의 명이시라면‥‥‥" "빨리 준비해 주게." "옛,폐하." 잠시 후 다론의 노력에 의해 회의가 개최되었다. 수정 구슬에 모습 을 드러낸 토지에르는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그래도 눈빛은 여전히 맑게 살아 있었다. 황제는 병상에 누워 있는토지에르의 야윈 얼굴을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런 감정을 표현할수는 없었다. 일단 이 장소는 공식적인 회의 석상이 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천장을보며 겨우 참아 냈다. 그런 후 자신이 낼 수 있는 한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황제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토지에르 경. 그래,몸은좀 어떤가?" 눈물을 참기 위해 천장을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을보고 토지에르는 가슴이 터질 것 간았다. 자신이 황제에게 그만큼 커다란 사랑과 신뢰 를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도 않은 듯 가장하여 답했다. "소신의 몸은 괜찮사옵니다.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려 황송할 따름 이옵니다. " "그런 소리는 하지 말게나. 하루라도 빨리 털고 일어나는 것이 짐을 위하는 것이야. 그건 그렇고 몸이 불편한 경을부른 것은 상의할 일이 있어서네. 그대가 설명을 해 주겠나,안티노스 경?" 안티노스는 병상에 누워 있는 토지에르에게 이번 전쟁의 시작부터 전개 과정까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토지에르는트루비아에서 전쟁 이 터지기 전에 병원에 실려 갔기에 좀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했던 것 이다. 다론은 병상에 누워 있는스승이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쓰지 않 도록 복잡한 사건은 아예 보고를 하지 않았기에 그런 과정이 필요했 던 것이다. "경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코린트는 트루비아를 쓸어버림으로써 본국의 동맹국들에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인 것 같사옵니다. 만약‥‥ 만약 본국의 동맹이 무너 진다면 더 이상코린트를 제압할 수는 없다고사료되옵니다. " 토지에르로서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코린트는 엄청난 힘을 지닌 강대국이었고, 또 이번에 적기사까지 대량으로 생산한 저 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도 크라레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크라 레스의 동맹들을 해체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경도그렇게 생각했는가?" "탄벤스는 머나먼 변방일 뿐이옵니다. 만약 그곳에서 전쟁이 조금 크게 벌어진다고 해도 코린트는 전면전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옵니 다. 코린트에게 본국의 힘을 보여 주소서. 그렇다면 코린트는 양보하 지 않을수 없을 것이옵니다. 이때 코린트가 완전히 두 손을 들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입 혀야만 하옵니다. " "흐음‥‥‥ 그렇게 되면 코린트가 물러설까?" 황제의 고심에 찬 물음에 토지에르는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가 생각했을 때 코린트가 이쪽의 뒤통수를 치려다가 그게 발각되 어 오히려 자신들이 커다란 타격을 당했다면, 크라레스가 결코 만만 한 국가가 아님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고또그렇게 된다면 알아서 꼬 리를내리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예. 그 정도타격을 당했으니 손을 털지 않을수 없을 것이옵니다. " "은십자 기사단을 상대하려면 타이탄들을 많이 투입해야 할 텐 데‥‥‥‥" "폐하,스바시에 전하께서는 지금 회담 장소에 가 계시니 어쩔 수 없 고, 치레아 대공을 보내시옵소서. 그녀와 치레아 기사단이라면 다른 곳에서 병력을 빼지 않아도충분할 것이옵니다. " 황제는 잠시 궁리를 했다. 물론 키에리라는 검호를 물리친 치 레아 대공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타이탄 전력에서 너무 심한차이가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간다고 해도 20기는 너무 적은 숫자가 아닐까?적의 규모는 거의 100기에 달하는데‥‥‥‥" "그러시다면 폐하,탄벤스 전선에서 빼냈던 기사단을 재차 투입하시 면 될 것이옵니다. 국경선에 대기중인 다른 기사단들을 빼낼 수는 없 기 때문이옵니다. 적들이 이쪽을 향해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기습을 펼쳐야만 피해를 줄일 수 있사옵니다. 또 이번 전투가 기습으로승부를하는 것인 만큼 그렇게 많은 병력은 필요 없을 것이오나 기밀 유지가 철저해야만 하 옵니다. 그렇게 하여 너무 큰 타격을 받게 된다면 놈들도 이쪽을 향해 기습 공격을 준비했던 터 였기에 아마도 간담이 서늘해져서 더 이상 딴 생 각을 못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 탄벤스 전선에서 빼낸 것은 1,7,8전대였다. 그들은 이번에 있었던 두 번에 걸친 격렬한 전투 덕분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하지 만크라레스의 대부분의 기사단들은 국경의 중요 요새들을 기지로 하여 타국의 침략을 억제하고 있었기에 빼낼 수는 없었다. 크라레스 기사단들 중에서 임의로 빼낼 수 있는 기사단은 치레아 기사단과 스바시에 기사단,그리고 1,2,7,8기사단뿐이었던 것이다. "알겠소, 그렇게 하지." "감사하옵니다, 폐하." "다론! 통신을 해제하라." "옛,폐하." 다론이 재빨리 통신용 마법진을 해체하고 있는동안 황제는 안티노 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티노스 경." "옛,폐하." "치레아에 연락을보내라. 그리고소집을 해제했던 기사단들을다시 소집하라. 평화 회담을하면서 뒤로는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그 가중 스러운코린트에게 호된 맛을보여 주는 것이다. " "옛,폐하." 전쟁테에서 보자, 비열한 자식들 "오호,황제의 말대로 저기들 있군." 탄벤스와 트루비아의 국경선 너머에서 은십자 기사단의 깃발이 펄 럭이는 것을 보고 다크가 이죽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적극적으 로 호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은십자 기사단의 전력이 엄청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 실이었다. 그런데 치레아 기사단이 보유한 타이탄 20기와 1,7,8전대 의 잔여 세력 42기만으로 그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리한 작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7,8 전대의 경우 두 차례에 걸친 격전 끝에 겨우 34기만 남았었는데,수도에 남아 있던 8기를 보충받았기에 42기로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치레아 기사단의 경우 그녀 개인의 기사단으로서 강자에게 타이탄을 준다는 원칙에서 벗어나서 그녀의 친구들에게 배당한 타이 탄도 많았을 뿐더러,루빈스키 대공의 물밑 작전에 의해 그녀에게 할 당된 기사들도 그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각 전대장들과 스바시에 기사단 부단장인 카알 폰 카슬레이 백 작은 그런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심사가 복잡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바짝 다가서 있는 제스터의 경우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이동되어 온 상태였기에, 어떻게 하면 빨리 코린트에 정 보를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 는 아직까지 이 사실을 코린트에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자,쓸데없이 얼굴 표정을 굳힐 필요 없어. 적이 바로 코 앞에 있 는데 그렇게 긴장을 해서 쓰나?자,모두들 모여 보라구. 작전 회의를 해야 할 것 아냐?" 모두들 쭈뺏쭈뺏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고 있을 때, 제스터가 그녀 에게 허등지등 말했다. "저,전하,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사옵니까?" "왜?" "저 그게 말이옵니다,그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다가 그 말이 전하라는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숙녀' 에게 해도 되는 말인 지 망설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스터가 머뭇머뭇 말을 못 하고 있 자짜중이 난다크가 퉁명스레 말했다. "뭐냐? 빨리 말 안하면 아가리를 찢어 놓을 테다. " "화 화장실에‥‥‥‥" 제스터가 마지못해 낮게 중얼거리는 말에 모두들 키득거리는 가운 데 ,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너는 작전하고 상관없으니 가도 좋다. " "옛,전하." 제스터는 자신의 상전들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재빨리 숲 으로 달려갔다. 그는 다크와 오랜 시간 함께했기에 그녀가 마나의 움 직임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될 수 있는 한 멀리 달려간 다음 자신의 목걸이를 꺼 내 들었다. 그의 목걸이는 마법사도 아닌 제스터가통신을 할 수 있도 록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제작된 마법 도구였다. 제스터는 그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여기는고양이 벼룩. 늑대 굴 나오세요." 그가 암호를 정확하게 말하자목걸이에서 아주 작은목소리가흘러 나왔다. 일반적인 통신 마법과는 달리 수정구를 통한 것이 아니기에 상대의 모습을 볼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뭔지를 알리 는 암호가 들어가는 것이다. "예,여기는 늑대 굴.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고양이는 탄벤스국경선 옆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기습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정확한 정보입니까?" "지금 나는 고양이와 함께 와 있습니다. 박쥐 하나에 해당되는 정확 한 정보입니다. " 박쥐 하나라면 특급 정보를 말하는 것이 었다. "그렇다면 언제 ?" "기습인 만큼 아마도 내일 새벽쯤에 돌진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 니다. " "귀하의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조심하시기를바랍니다. " 제스터는 필요한 말만 전한 후 재빨리 통신을 끝냈다. 괜히 통신이 길어져 봐야 들킬 확률만 높아지는 것이다. 제스터는 허등지등 자신 이 있던 위치로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는아무도 없었다. "돌격 !" 우렁찬 외침 속에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저마다 창과도끼,철퇴,검 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특히 치레아 기사단의 드라쿤이 뿜 어 내는 황금 빛 때문에 그움직임은 더욱 현란했다. "이런 젠장! 이게 기습이야?" "알 게 뭐야?위에서 시키니까우리는그대로 해야지." 팔시온과 미디아는 타이탄 전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이런 식의 농담으로 대신하 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팔시온의 말대로 이건 기습도 뭐도 아니었다. 다크는 작전 회의를하자고 한 후 밤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돌격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부하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그건 일언지하에 묵살 되었다. 그런 후 이렇게 허겁지겁 준비를 갖춰 돌격하고 있는 것이다. 코린트의 은십자 기사단은 평화 협상을 자신들에게 좀더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국경 부근에서 대규모 기동 연습을 준비중이었다. 병 력의 이동과 더불어 기동 연습 준비가 겹치다 보니 크라레스에서는 그것을 상대가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행동으로오판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은십자 기사단이 주둔중인 평원 부근에는 기동 연습 때 사 용될 타이탄의 보조 장비들인 철퇴나 창 등이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 다. 그리고 기동 연습 전에 몸을 풀기 위해 타이탄에 타고서는 서로 간에 대결을 펼치고 있는 타이탄들도 몇 기 보였다. 하지만 지축을 을 리며 백주대로를 달려오는 이 엄청난 크라레스의 타이탄 무리들을 그들이 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적이다!" 일제히 웅성거리며 모두들 타이탄을 끄집어내어 탑승하고 있는 가 운데 가가린 후작은 마법사를 향해 외쳤다. "사령관 각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카이론의 임시 사령부에 계십니다,각하." 카이론이라면 탄벤스 공국의 수도였다. 투르넨 후작은 새로운 공왕 을 즉위시키는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수도에 남아 있었다. 그는 이곳 탄벤스 주둔군의 총사령관이었기에 모든 것을 그가 총괄해서 지휘해 야만 했기 때문이다. 현재 은십자 기사단에는부단장이 없었기에 투르넨 후작은자신 휘 하에 있는 모든 타이탄 부대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 부사령관인 가가 린 후작에게 맡겼다. 그런 후 가가린 후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이곳 트루비아와의 국경선 에 도착하여 기동 연습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동 연습 당일 날에는 투르넨 후작이 도착하여 직접 기동 연습을 참관(츳르)할 예정이었다. "사령관 각하에 빨리 연락해라. 크라레스 기사단이 기습 공격을 가 해 왔다고 말이다. " "옛, 각하,!" 가가린 후작은 통신 마법을 시도하고 있는 마법사에게서 시선을 돌 려 은십자 기사단 작전관을 바라봤다. "자네는 정찰조를 좀더 폭넓게 배치하게. 특히 후방에 대한 적의 공 격대가 있는지 주의해서 살펴." "옛 ,!" "내가 타이탄들의 전투 지휘를 하는 동안 잘 부탁하네." "옛,각하." 작전관은 사령관이 타이탄을 타고 일선에 나가 버렸을 때, 전체적 인 부대의 지휘를 담당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가가린 후작이 자리 를 비운 동안 타이탄 부대가 최대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토록 있는 힘껏 도와야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마법사들을 지휘하여 가가린 후작의 지시대로 여기저기에 흩 어져 있는 정찰조들을 더욱 폭넓게 배치하고, 또 새로운 정찰조 3개 를후방에 투입하여 뒤로부터의 기습에 대비했다. 가가린 후작은 자신의 타이탄을 몰고 일선으로 달려나가 부하들이 전투 대형을 완벽하게 갖추도록 독려했다. 그들이 준비하는 동안에 적들의 타이탄은 이제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가가린 후작은 기습을 위해 달려오는 적들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에 그나마 위안을 느꼈다. 이쪽이 93기의 타이탄을 보 유하고 있다면 적은 60여 기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적의 공격군이 지금 눈에 보이는 저 정도의 규모라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저것들 외에 우회 공격대가 따로 있다면 위 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밤중도 아니고 해가중천에 떠 있었기에 시야가 확트여 있었다 조금만주의를 한다 면 결코 놈들에게 약점을 잡힐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가가린 후작의 시야에, 앞서 달려들고 있는 적 타이탄들 뒤 에서 먼지를 뚫고 따라오는 타이탄이 언뜻 보였다. 타이탄들이 전속 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기에 엄청난 먼지를 뿜어 내고 있었지만, 일단 가가린 후작이 상대를 보고자 마음 먹은 이상그것은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먼지 사이로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는 거대한 청색 타이탄‥‥‥ 6미 터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에,짙푸른 색을 칠한 크라레스의 최신형 타 이탄이 6년 전 전쟁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코린트군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는 것을 가가린 후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먼지 뒤로 보이는 상대방의 타이탄이 바로 그 소문의 타이 탄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느끼는 순간, 가가린 후작에게는 이번 전투 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떠올랐다. 정보 부장인 베르딘 후작은 잠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후,자신의 책상 위에 붉은표지의 문서가 놓여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장식 용의 가벼운 여름 외투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고 책상으로 왔기 때문 이었다. 붉은표지 사이에 노란색의 줄이 세 개 쳐져 있는문서‥‥‥‥ 이것은 특급을 뜻한다는 표시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베르딘 후작은 서류 부터 집어들고 황급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방금 벗어 놨던 여름 외투를 다시 걸칠 생각도 하지 않 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향하는 목적지는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 실이었다. "헉헉 ‥‥‥‥" 씨근덕거리며 그가 달려들자 공작의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병이 창 을 들어 그를 막았다. 물론 경비병도 자신이 막아 선 상대가 베르딘 후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가 는 예법을 무시하려고 하는 베르딘 후작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젠장! 비 켜라?" 베르딘 후작은 거친 동작으로 경비병을 밀치고 공작의 집무실로 뛰 어들었다. 그리고그와동시에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병들도 황급히 그 를 뒤따라 들어와 그를 제압하려고 했다. 어쩌면 상대는 베르딘 후작 으로 변장한 적의 첩자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바로 그때 마법사로부터 새로 도착한 통신문을 건네 받고 는 그것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베르딘이 공작의 눈초리가 사납다는 것을 느긴 순간 공작은 그 통신문을 갈기갈기 찢어서 내팽개치고 있 었다. "이런 제기랄!" 뭔가 분통을 터뜨릴 만한 대상을 찾고 있던 공작은 자신의 책상 위 에 놓여 있던 꽃병을 집어들고는 처음에는 바닥에 내려꽃으려고 했 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 앞에 베르딘이 있다는 것을 안 순간 꽃병은 그대로 베르딘의 머리통을 향해 쏜살과 같이 날아갔다. 요란한 음향이 울려 퍼지고 산산조각이 난 도자기 조각과 물,그리 고 꽃들이 허공을 떠돌며 비산하는 가운데 이미 기절해 버린 베르딘 의 몸은 뒤로 나자빠졌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특급 기밀 문 서 또한 땅바닥에 떨어져서 나됩굴었다. "정보부라는 새끼들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크라레스의 기사단 이 기습을가해 오는 데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뿌드드득하는 이빨 갈리는소리와 함께 으르렁거리는로체스터 공 작의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 루빈스키 대공은까미유의 표정을물끄러미 바라봤다. 회의 도중에 갑자기 뛰어 들어온 마법사가 종이 쪽지를 전하자,그것을 받아 든 까 미유의 손은 루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표정은 한껏 일그러지기 시 작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받아 든 종이 쪽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늘 냉철했던 기사가 저렇듯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코린트에 뭔가 큰 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게 뭘까 궁리해 보는 루 빈스키 대공이었다. 황제가 죽었을까?아니면 로체스터 공작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그것도 아니면‥‥‥‥ 하지만 루빈스키 대공의 상념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까미 유가 갑자기 불타는 듯하면서 분노에 얼룩진 눈동자를 들어 을렸던 것이다. 엄청난 살기를 내뿜으며 까미유는 이가 갈리는 듯한 음성으 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귀하가 이렇게도 비열한 인간인 줄 몰랐었소. 어떻게 평화 협 상을 하면서 감히 본국을 기습할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젠 장!" 까미유는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고, 그와 함께 루빈스키 대공 의 뒤에 도열해 서 있던 기사들도 그에 대웅하여 검을뽑았다. 당연히 까미유를수행해 왔던 기사들 역시 검을뽑아들었다. 이 세 동작은 순차적으로 벌어지기는 했지만, 거의 순간적으로 벌 어진 일련의 동작이었다. 하지만 루빈스키 대공은 상대가 왜 갑자기 검을 뽑아 들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에,차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그 꾸밈없는 눈동자를보며 까미유는자신의 분노를 억눌렀 다. 아무래도 루빈스키 대공은 그 비열하기 그지없는 기습 작전에 관 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그의 다음 행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던 것이다. 순간 머뭇거리고 있는 상관을 마법사가 급히 막았다. 마법사는 이 제야 겨우 상관을 막아설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그만큼서로간에 검 을 뽑아 드는 속도는 빨랐었다. "후작 각하, 참으셔야 합니다. 일단 전하의 지시대로 수도로 돌아가 셔야 합니다. " 자신을 말리는 마법사를 뒤로 밀치 며 까미유는 조금 앞으로 나와서 는 종이 쪽지를 손바닥에 붙인 채 책상을 힘껏 내리찍었다. 까미유의 손바닥에 가격 당했을 뿐이었는데도 책상은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자신 을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루빈스키 대공을 향해 까미유는 내 뱉듯이 말했다. "전쟁터 에서 보자, 비 열한 자식들!" 까미유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거칠게 문을 열고는 나가 버렸다. 그리고 이제 흘로 남겨진 루빈스키 대공은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 져 있는 종이 쪽지를 집어 올렸다. 한순간 엄청난 힘으로 내려찍어진 까미유의 손바닥과 탁자 사이에 위치했었는데도 종이는 아주 말짱했다. 곧이어 루빈스키 대공의 손 바닥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루빈스키 대공은 떨리는 목소리 로 부하들에게 외쳤다. "최대한 빨리 수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라." 투르넨 공작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후였 다 사방에서 거대한 타이탄들이 검과 방패를 뽑아 들고 힘과 기술을 겨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패배해서 땅바닥에 자빠져 있 는 타이탄들의 대부분은자신의 부하들이었다. 도착한 투르넨 후작의 시선에 제일 먼저 잡힌 것은 자신의 부하들 을 간단하게 제압하고 있는 거대한 청색 타이탄이었다. 큰 덩치에 어 울리는 거대한 방패와 검을 들고 자신의 부하들을 그야말로 간단하 게 '때려잡고' 있었던것이다. 그리고그것을보자마자투르넨후작 의 머리 속에는 6년 전 악몽 같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자신의 부하들을 죽이고 있던 그 거대한 타이탄 그때 그 단 한 번 의 전쟁으로 인해 남부 집단군의 타이탄들이 괴멸을 당했었다. 당연 히 자신이 치촉적일 만큼 지독한 패배를 당하게 만든주 원인은 그 지 옥에 떨어져 마땅한 청색 타이탄이었다. 그 놈이 있었기에 서로 간에 밀고 밀리던 그 균형은삽시간에 박살나 버렸던 것이다. "후퇴하라?' 투르넨 후작은 있는 힘껏 마나를 끌어올려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저 놈을 상대로곡여기서, 이 전력으로 싸운다는 것은 6년 전의 실패를 다시 한 번 더 되풀이하는 것과같았다. 투르넨 후작은자신의 타이탄을불러 내어 전장의 한가운데로 달려 나가면서도 계속 후퇴하라는 외침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상대 와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이는 상태에서 부하들이 상관의 명령을 이행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을 도망치도록 그냥 놔주지 를 않기 때문이었다. "스바시에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 루빈스키 대공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 의 얼굴은 치솟아오르는분노로 인해 상기되어 있었다. "오오,먼길에 수고했네. 그래 협상은 어떻게 되었나?" 반갑게 맞이하는 자신을 향해 분노에 얼룩진 시선을 보내 오는 루 빈스키를보고 황제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루빈스키는 황제 앞으로 다가가서 문제의 종이 쪽지를 그에게 들이밀며 노기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이게 정녕 사실이옵니까?" 루빈스키가 내미는 쪽지에는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탄벤스 공국에 주둔중이던 파견 기사단에 대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는 보고가 적 혀 있었다. 그것을 힐끗 쳐다본후,황제는 시선을루빈스키에게로다 시 돌렸다. "사실이라네. 코린트가 일거에 트루비아를 쓸어버리기 위해 기사단 과 함께 군대들을 탄벤스에 집결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에 내린 결정이었지‥‥" 루빈스키는 황제에게 분노를 터뜨릴 수는 없었기에 정말사력을다 해 노화를 억눌렀다. 하지만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기습을 가할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만약 적이 기습을 가 해 온후에 되받아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가 집결시킨 병력이 너무 나 강력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어. 90기가 넘는 적의 기사 단을 기습이 아니라면 어떻게 막을 건가? 코린트도자신들이 꾸미고 있던 꿍꿍이가 있기에 이쪽만 그렇게 탓 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 놈들도 이번에 본국의 힘이 어떤지를느꼈을 테니, 이쪽에서 선후를 차근차근 따져서 교섭을 청한다면 웅해 올 테 지." "기습은 성공했사옵니까?" "대승을 거뒀다는 보고를 들었네." "누가 지휘를 했사옵니까?' "자네가 없었기에 치레아 대공에게 부탁했다네." 황제의 말에 루빈스키는 골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3를 보냈 다면 모르면 몰라도 상대방은 거의 치명타를 입었을 가능성마저 있 었다. 어느 정도 타격을 당했다면 그래도 협상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 지만,전멸을 시켜 놨다면 그 이후의 사태는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오 직 신만이 아시리라. 키에리, 코린트는 자네가 필요하네 로체스터 공작은 깨어난 베르딘으로부터 제스터가 뒤늦게 정보를 줬다는 것과, 상대방의 기습 작전이 매우 갑자기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기랄‥‥‥‥" 베르딘이 건넨 특급 기밀 서류를 보고서야 로체스터 공작은 이번 기습 부대를 인솔한 놈이 '고양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양이는 치레아 대공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터에게 벼룩처럼 달라붙어 rL 시하고 있는 제스터가 을린 보고니 그건 확실했다. '그녀가 전면에 나서서 전투를 지휘한다면 승산이 없어. 젠장! 이 일 을 어떻게 하면 좋지?" 로체스터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는오른손 손가락으로 팔걸 이의 윗면을톡톡 둔틀기면서 생각에 깊게 빠져 들었다. 그런 상관의 모습을 보면서 베르딘 등의 부하들은 그의 결정을 조용히 기다렸다. 이제 전개가 어떻게 되느냐는 오직 상관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아주 지루한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로체스터의 손가락이 팔걸이 를 두들기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윽고 로체 스터는 뭔가 결심을 한듯 외쳤다. "전 군에 전투 준비령을 내려라. 그리고 모든 기사 단장들은각자자 신의 부대를 점고하고출발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드디어 로체스터 공작이 단안을 내렸기에 그의 방에 모여 있던 기 사들과 장군들은 열기 가득한 표정으로 힘있게 답했다. "옛,전하." "자,모두들 빨리빨리 행동해.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누가 먼저 행동을 시작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다. 그 리고 제임스,로젠!자네들은나좀보세나 " 모두들각자치 위치로달려가고나자공작의 집무실에는제임스와그 의 형인로젠,그리고로체스터,로체스터의 부관인 레티안이 남았다. "이제부터 자네들에게 어려운 임무를 맡기려고 한다,제임스!" "옛,전하," "경과 까미유만큼 치레아 대공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거 야. 그녀가 앞장서서 기사단을 지휘해 공격해 온다면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어. 이번 기습 공격도 그녀가 직접 지휘해서 쳐들어왔다. 아직 전투 결과에 대한 보고가 접수되지는 않았지만, 아예 연락이 불통인 것을 보면 상황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고 해야겠지. 이번 상황을보면 크라레스는처음부터 그녀를 이용해서 강공을 펼 쳐 올 것임이 틀림없다고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본국은 어쩌면 멸 망의 길을 걷게 될지도모른다. " 처음부터 공작이 크라레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점 을 느낀 루엔이 끼여 들었다. 그가 생각했을 때 적기사까지 대량으로 생산한 코린트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그런데, 왜 겨우 크 라레스따위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는지 이해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하, 그것은 너무‥‥‥‥" 하지만로체스터 공작은로젠의 표정에서 그가무슨말을하려는지 눈치 채고그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아,로젠!자네는 그녀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 이지만, 이건 사실이야. 도저히 코린트 혼자만의 힘으로 그녀를 이길 방법은 없다. "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힌트를 얻은 제임스가끼여 들었다. "전하,하오면?" "동맹국들을 불러 모아야 해, 하지만 지금 본국의 동맹국들은 아무 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도움이 될 만한 국가들을불러 들여야 한다. 그래서 말인데,제임스 경이 알카사스에 가주겠나?" "예? 알카사스에 말이옵니까?" "그래,자네는 그녀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러니 그들을 열심 히 설득한다면 어쩌면 좋은 결과를 얻을수 있을 거야. 알카사스에 가 면 국왕보다도 먼저 원로원부터 설득해라. 예로부터 알카사스의 모 든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원로원이야." "예, 전하, 명심하겠사옵니다. " 로체스터 공작은 제임스에게 할 말을 다 했는지 시선을 로젠에게로 돌렸다. "로젠 경." "옛,전하." "경은 크루마로 가서 미네르바를 설득해라." "예?하지만 크루마는 경쟁국이옵니다. 그들이 우리들을 도와 줄 리 가 없지 않사옵니까?' "경은 치레아 경을 잘 모르지만, 미네르바는 잘 알고 있을 거야. 서 로가 힘을 합쳐서 싸웠으니까그건 당연하겠지. 경은 있는 사실만을 그녀에게 전해라, 크라레스는 처음부터 그녀를 이용해서 강공을 펼 쳐 왔고 그 결과 본국의 은십자 기사단과 철십자 기사단은 괴멸 당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세 개 기사단밖에 없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힘이 남 아 있는 본국과 힘을 합쳐 저 새파란 신흥 강국을 때려잡을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코린트가 망한 후 홀로 남아 나중에 멸망할 것인지 그 것만물어 봐. 그러면 나머지는 미네르바가 결정하겠지 " "예,전하." "그리고 나는 잠시 다녀을 데가 있으니까,제임스 경은 잠시 남아 있 다가 까미유 경이 돌아오면 그에게 아르곤의 교황을 설득하라고 전 하게. 알겠나?' "예,전하." "이만 나가 보게나." 로젠과 제임스가밖으로나간후로체스터는 레티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로체스터의 전속 마법사이자 부관이었고 또 그의 친 구들이 하나둘 없어져 버린 지금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를나눌수 있 는 대화자였다. "레티안." "예,전하." "그곳에 갈수 있도록준비해라." 레티안은 공작의 지시에 약간 창백해진 표정으로 상관을잠시 바라 봤다. 그녀는 로체스터가 한 번씩 다녀오곤 하는 '그곳' 이 어딘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그녀는그곳에 로체스터가가는 것을 별로 탐 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죄인 들이었 기 때문이다. 레티안이 마법진을 이용해서 로체스터를 안내한 곳은 코린트 서부 의 변방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마법진을 이 용해 모습을드러낸 곳은그 시골 마을의 가장 외곽에 외로이 서 있는 초라한 농가였다. 농가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우리 속에는 아직 살 이 오르지 않은 새끼 돼지 두 마리가 먹이통에 코를 박고 있었고, 농 가의 옆에 있는 작은 밭에는 옥수수들이 푸른 잎사귀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한 시골 장정이 도끼를 들고 나무를 쪼개고 있는 것을 발견한 후 서슴없이 그곳으로 발길을 옳겼다. 시골 장정의 벗어 붙인 구리 빛 상체에는 크고 작은 흥터들이 도끼질을 할 때마다 춤을 추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잠시만 기다리게. 얼마남지 않았어." 시골 장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하던 일을 계속했다. 도끼질 한 번 에 장작은 어김없이 반듯하게 두 토막이 되어 쪼개져 나갔다. 절대로 헛손질을하는 법이 없었다. 한 번에 하나씩,너무나도 규칙적인 몸놀 림이었다. 이윽고 모든 장작을 다 쪼개 버린 그는 천천히 뒤로돌아섰 다. 그는바로7년 전에 모습을감춰 버렸던 키에리 발렌시아드였다. "죠드는?" "시장에 물건을사러 갔지, 아침 일찍 갔으니 아마도 두세 시간 후에 는돌아을 거야. 죠드에게 볼일이 있나?" "아니,자네한테 볼일이 있지."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를잠시 바라본후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의 힘이 필요해." 공작의 말에 레티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공작이 지금 한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공작이 키에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전쟁터일 것은분명했다. 그렇 게 되면 키에리는 타이탄을 꺼내지 않을 수 없을 테고, 그가 가지고 있는 헬 프로네는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는 타이탄이었기에 그가 죽 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모두가 당장에 눈치 채게 되는 것은 뻔한 일이다. "껄껄‥‥‥‥ 이제 코린트가 망하든 황제가 죽어 나자빠지든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자네도잘 알지 않나?모든 것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늙은이를 놀리면 못쓴다네. 들어가지, 술이라도 한잔하고 가게." "크라레스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것이 한 시간도 지나가지 않았네. 크라레스는 초전부터 그 소녀를 전장에 투입했어. 그녀가 있는 한 도 저히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지 않나?제발 코린트를 위 해 한 번만 더 검을 들어 주지 않겠나?" "훗, 검을 놓은 지 벌써 6년이 흘렀어. 이제 검술이고 뭐고 다 잊어 버린 지 오래지. 내가 가도 도움이 안 될 거야. 그건 그렇고, 이게 뭔 줄아나?" 키에리는선반 위에서 술병을하나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라페르야. 옛날 우리들이 여행하면서 즐겨 마셨었지. 그때나 지금 이나 맛은 변함이 없더군." 라페르는 코린트 서부와 발렌시아드 공국에서 생산되는 서민들을 위한 싸구려 술이었다. 풍요로운 스웨인 평야에서 재배되는 옥수수 와 밀, 그리고 감자를 이용해서 생산되는 이 술은,강렬한 맛을 지니 고 있었다. 잔에 가득부어 권하는 키에리를 바라보며 로체스터는 언제나 그러 했듯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근심 없는 얼굴을 보았을 때 '어쩌면 이게 더 키에리를 위해 좋지 않을까.'하는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우리 모두가 이룩했던 것이 이제 산산이 부서져 내리려고 하고 있 네. 자네와나,그리고 리사와 그라세리안이 이룩했던 그 모든 것들이 말일세, 리사도, 그라세리안토 자신이 이룩했던 것들이 파괴되는 것 을 원하지는 않을 거야. 그들이 이곳에서 살았었던 그 작은 흔적이라 도 지켜야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가아닐까?" "훗, 자네 말솜씨가 많이 늘었군. 하지만 자네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냥 여기에 있을 거야." "타이탄 때문에 그러나? 자네 정도의 인물이라면 헬 프로네보고 1년 만 기다려 달라고 청할 수도 있을 거야. 타이탄을 교체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또 그것이 안 된다면 헬 프로네를 버리게. 내가 그 대신이라고하기 에는 뭣하지만 자네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타이탄을 주겠어. 적기사 급의 엑스시온을 넣었으니 헬 프로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 는 것을 내가 보증하지." 로체스터는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 비밀리에 제작 한 초강력 타이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러 적기사와 다른 형 태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코 누구도 코린트의 타이탄이라고 생각할 수 없도록 코린트의 타이탄이 가지고 있는 모든 특징들을 제 거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서 단 한 대만이 만들어졌다. 그 타이탄은 지금도 자신의 주인을 기다리며 발렌시아드 공국의 궁 전 지하실에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키에리는고개를가로 저었다. '타이탄따위가 걸리는 것이 아니야." "그렇다면 뭔가?" "나는 여기서 6년을 보내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다네. 권력의 덧없음과 허무함도 알게 되었고, 돼지우리 같은 집 안에서 벼룩들과 합께 우글우글 부대끼며 살고 있지만 자그마한 행복과 만족을 느낄 줄 아는 농노들을 보았지. 내 나이가 어느덧 70을 넘은 지가 오래야. 마누라도 오래 전에 죽어 버렸고, 아들들은 그 나름대로 장성해서 자신들만의 이름을 쌓아 을 리고 있지.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있겠나?더 이상 세상사에 눈길을 돌린다는 것은 미 련한 짓이야." "그래도‥‥‥" "아닐세. 권력의 정상에 있을 때만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기 에 있으면서 깨달았지. 비로소 그라세리안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을 이 해할 수 있겠더군. 그는 그때 벌써 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던 거야. 망할 녀석!나한테도좀가르쳐 주고 떠날 일이지‥‥‥‥" "설마‥‥ 그라세리안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괴에리를 보며, 로체스터는 뭔가 배신감 같기도 한서운함을느꼈다. 그중요한사실을자신에게는한마디도 말해 주 지 않았다니‥‥‥‥ 로체스터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레티안도 진짜 배신감으로굳 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법사인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대 마법사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 공작이었을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 가 국가의 중대사를 앞두고 자기 흔자 편하기 위해 은둔을 해 버리다 니‥‥‥‥ "나한테까지 그런 것을 숨기다니 너무하군." 따지고 드는로체스터를 향해 키에리는 어설픈 미소와 함께 변명을 늘어놨다. "꼭 자네에게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네. 중간에 나도 한 번 그를 찾아갔었어. 하지만 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지. 그런 일을 한참 분주한 자네에게 알려서 마음을 심란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 던 것이지,딴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내가 말하는 것은 자네보고 새롭게 권력을 잡으라는 것은 아닐세. 조용히 이름을 숨기고 나를 도와 달라는 것이야. 그런 후 전쟁이 종료 되면 다시 떠나게나. 아마도 다시는 내가 자네에게 도와 달라는 부탁 을하지 않을 거야. 이번 한 번만나를도와주게." "쯧,미련이 많은 놈이로군‥‥‥‥ 내가 그렇게 세상사에 미련이 없다 고 말했건만‥‥‥‥" "황제가 아닌 나를 도와 달라는 것일세. 자네의 오랜 친구에게 그런 작은 것도못들어 주겠나? 넉넉잡고 세 달도 안 걸릴 거야." 한참궁리하던 키에리는 이윽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좋아, 이번 한번 만이야."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의 손을굳게 잡았파. "고맙네." 진심 어린 친구의 태도에 키에리는 밝은 미소로만 응답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 "미네르바 전하, 방금 지발틴 기사단 제3전대장인 쟈드 백작으로부 터 통신이 도착했사옵니다. " "제3전대라면 쟉센 평원 주둔군일 텐데‥‥‥?" 쟉센 평원이라면 6년 전 전쟁에서 크루마가 코린트로부터 빼앗은 영토였다. 현재 쟉센 평원에는 지발틴 기사단 제3전대와 제네리아 기 사단의 제5,6전대가 주둔중이었다. 비록 코린트와 접해 있는 최전방 이었지만 적의 선제 기습 공격을 피하기 위해 소수의 병력만이 배치 되어 있었다. "예,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래 뭐라고 하던가?" "코린트로부터 비밀리에 사신이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그는 전하와 의 단독 면담을 원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 지 하명해 주시옵소서," "그래?그 녀석이 나하고 직접 회담할자격이 있던가?그렇지 않다면 외교 담당관을 보내라." 약간은 거만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부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신으로 온 기사는 로젠 드 발렌시아드 대공이옵니다. " "로젠이라고? 으음‥‥‥‥ 그 녀석이라면 직접 만나야 하겠군. 이리로 불러들여라," "옛,전하." 10분 후 로젠은 그의 수행원들과 마법진을 통해 크루마의 수도 엘 프리안에 도착했다. 하긴 수행원이라고 해 봐야 겨우 기사두 명과 병 사두 명뿐이었지만 말이다. "발렌시아드 대공이 도착했사옵니다. " "이리로 안내해라." "옛,전하." 잠시 후 로젠이 그녀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로젠은 미네르바의 경 비병들이 문을 열어 주자 안을 힐끗 바라본 후, 안에 미네르바 흔자 있는 것을 보고는자신의 부하들에게 명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옛,전하." 로젠은 기운찬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미네르바 공작." "어서 오세요, 발렌시아드 공작. 자,그쪽으로 앉으세요." 미네르바는로젠이 자리에 앉자 생긋 미소를보내면서 말했다. "그래,무슨 일로 찾아오셨지요?" "로체스터 전하의 명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 "그래,무슨 일인가요?" 미네르바는 자신이 상대에 비해 월등히 나이도 많고 또 지위도 높 았지만 존칭을 해 주었다. 그만큼 코린트 발렌시아드 가문의 후계자 라는 지위는 높았던 것이다. 물론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거대한 발렌 시아드 공국의 주인이기에 얻어지는 것이었지만. "공작께서는 본국과 크라레스 제국 간에 몇 번의 전투가 벌어진 것 을 알고 계십니까?" "예, 부하들로부터 보고는 들었어요. 뭐, 서로가 큰 피해 없이 휴전 협정을 맺으신다고요?" "그렇다면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는모르시는모양이군 요." 미네르바가 궁금하다는 듯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로젠은 말을 이었다.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본국의 파견군을 기습했습니다. 은십자 기사 단과 철십자 기사단이 괴멸 당했지요." 이건 미네르바로서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기에 그녀의 어조는금방 차가워졌다. 상대가 지금하고 있는 말이 진실일까?아니면 거짓일 까? "사실인가요?" "알아 보시면 알 겁니다. 탄벤스 국경선에 본국의 타이탄들이 고철 이 되마 즐비하게 뻗어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크라레스가 치레아 대공을 선두에 세워서 공격을 감행해 올 경우 본 국혼잔서는 상대할 수 없다고 하겼습니다. 그 때문에 저를보내신 거 지요. 이제,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미네르바 공작님의 선택을 기다리 고 계십니다. " "호호호,무슨선택을하라는 거지요?" "코린트가 멸망한후 크라레스의 다음 먹이가 될 것인지‥‥‥아니면 지금 힘을 합쳐서 건방진 신흥 대국·을 멸망시킬 것인지‥‥‥‥" 하지만 미네르바는 상대의 얄팍한속셈에 쉽사리 걸려들지 않았다. 3국 체제가 유지되려면 서로 간의 힘의 균형이 유지되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밀리는 국가를 뒤에서 도와 줘야만 하는 것이다. 그 렇지 않으면 3국 체제는곧깨어지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의 뜻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것을 나 혼자서만 단독 으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일단 부하들과 상의도 해야 하고,또 폐하 의 윤허도 받아야만 해요. 그러니 결정을 내리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텐데,어떻게 하겠어요? 기다리겠어요?" "아닙니다. 돌아가겠습니다. " 로젠은즉시 일어서더니 미네르바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그는 로체스터 공작의 모든 지시를 이행한 상태니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 가 없었다. 이제 선택은 오로지 미네르바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상관의 생각 대로 미네르바가 크라레스를 위험한 강국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머지않아 허락의 메시지를 보내 올 것이다. 그러니 그는 구태여 여기 에 남아 있을 필요 없이 발렌시아드 공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기사 단을 점검해야하는 것이다. 로젠이 밖으로 나가는데도 미네르바는 그를 잡지 않았다. 그가 얼 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잘 알면서도 그녀는 그를 순순히 보내 주는 것이다. 동맹군을 청하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로젠. 그러면서도 사실만을 말하면서 절대로 상대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 는 고지식하면서도 강인한 무인의 모습. 그야말로 군침이 흐르는 인 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를 사로잡아 세뇌하여 자신의 부하로 삼거나, 또는 그를 붙잡아 둠으로 인해 코린트에 간접적인 타격을 입힐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가는 로젠의 됫모습을 바라보면서 미 네르바는 6년 전에 전사한 자신의 부하 루엔을 아련히 떠올렸다. 아 마 살아 있었다면 저 녀석보다 훨씬 더 근사한 기사가 되어서 자신에 게 든든한 힘이 되어 줬을 텐데‥‥‥‥ 생각하면 너무나도 잃은 것이 많 았던 전쟁이 었다. 커다란 유리창이 붙어 있고 그 창문의 바깥쪽에는 두 명이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제임스였고,또 한 명은 그를 상대하게 된 알카 사스의 외교 담당관이었다. 유리창 바깥에는 안쪽에 있는 두 사람들 을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의자들이 놓여져 있었고,그 위에는 다섯 명 의 노인들이 앉아서 저마다 한마디씩 해 대고 있었다. "허허‥‥‥‥우리들을 만나겠다고 청한 것이 저 젊은이인가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 "대단한 젊은이로군요." "그렇지요, 마스터 급의 강자가 사신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는데‥‥‥‥" "그것도부하네 명만 거느리고 왔다고하지 않습니까?" 노인네들이 웅성웅성 떠들어 대자,그들 중에서 한 노인이 손을 천 천히 들어올리며 제지했다. "자자,모두들조용히 하게나. 저 젊은이의 말도들어 봐야지." 노인들이 앉아 있는 방과 제임스가 앉아 있는 방은 매우 특이한 방 이었다. 그 두 방의 사이에 놓여 있는유리창은마법을 이용해서 특별 히 제작된 것으로서 제임스가 봤을 때는 그냥 벽으로 보였지만,노인 들이 봤을 때는 유리와도 같이 투명해서 저 반대편을 완전하게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쪽에서 말하는 것은 이쪽에 들리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 은 저쪽에 들리지 않았다. 이곳은 약간은 위험할 듯한 인물을 다수의 사람들이 관찰하며 심문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 놓은 장소였다. "그러니까 후작께서는 본국에서 동맹군을 파병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소." "본국은 귀국과 매우 사이 좋게 지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개국 이래 여태껏 중립을 지켜 왔었기에 아마도그건 어려을 것입니다. " "귀국의 노선은 잘 알고 있소. 타국 간의 전쟁에는 절대적으로 간섭 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다르오. 크라레스가과거 본 국과 겨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제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지 만 그것은 과거일 뿐,지금은 한낱 신흥 제국일 뿐이오. 그런 신흥 제 국이 코린트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귀국과 아르곤,크루마와 힘 겨루 기를하고 있소. 과거 본국이 선제 공격을가해 왔던 크라레스를무너뜨리고 대제국 이 되었을 때, 세계의 평화를 위협한 적이 있었소? 본국은 그때부터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했었소, 그렇지 않소?" 제임스는 상대의 대답을 들으려는 듯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크라레스는 잃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끊 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있소. 6년 전 대전쟁을 통해 본국으로부터 크로나사 평원을 되찾았는데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번에는 자신 들의 동맹국들을 충동질해서 사방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소. 그 때문 에 지금 멸망한 국가가 다섯 개나 되오. 그 동안 본국은 될 수 있다면 크라레스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참고 있었으나,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었소." 외교 담당관이 자신의 얘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제임스는 말을 이었다. "크라레스가 본국과의 휴전 회담중에 기습 공격을 가해 왔기 때문이 오. 아무리 기습 공격이었다고 하지만,본국의 기사단은 그렇게 만만 하지 않다고 생각했었소. 그렇지만 이번 기습으로 본국의 은십자 기 사단과 철십자 기사단이 전멸을 당했소." "이런‥‥‥‥" "내 말은 사실이오. 그렇다고 적이 엄청난 수의 타이탄을 동원한 것 도 아니오. 보고에 의하면 겨우 60여 기 남짓밖에 안 되는 수였소. 그 런데도 그들이 거의 100여 기의 본국 타이탄들을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다크 폰 치레아 대공이라는 검호가 있기 때문이오. 아마도 이대 로 계속나간다면 본국은곧이어 멸망의 지경에 이를지도모르오." "그래도설마‥‥‥ 너무 상대를 과대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까?" 상대의 지적에 제임스는단호하게 고개를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절대로 아니오. 그녀는 아마도 지금 현재 세계 최고의 검객 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소.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를 전 사케 했고,6년 전에는 겨우60여 기의 타이탄으로 200기가 넘는 본국 의 동맹 타이탄부대를 괴멸시켰었소. 이건 절대로 내가 지어 낸 말이 아닌 사실이오." "그럴 리가‥‥‥‥" 여기까지 말이 나왔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울려 퍼졌다. "그대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조사해 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 그 래,코린트가 그들을 그렇게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지금 동 맹군을 파병하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지. 그런데,우리가 동맹군을 파 병한다면 그대들은우리에게 무엇을 줄수 있나?" 이제야 숨어 있던 노인들이 미끼를 문 것이다. 제임스는 상대방이 잘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약간 더 크게 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스바시에와 치레아 지방을우리에게 줄수 있겠나?" 제임스는 잠시 골똘하게 생각했다. 그 두 지방은 대단한 가치가 있 었다. 알카사스와 아르곤,그리고 저 동쪽의 여러 왕국들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가 바로그 두나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깜다는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되는 문제였다. 정 주 기 아까우면 그때 가서 한판 해도 늦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공작 전하께서는 아마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 "좋아,그리고 또 한 가지.크라레스의 근위 타이탄이 청기사라는 초 강력 타이탄이라면서 ?" "예." "만약 그것의 설계도가 노획된다면 우리들에게 넘겨 줄 수 있나?물 론 원본을 넘겨 달라는 것은 아니고 복사본을 달라는 것일세." 제임스는 그것 또한 어렵지 않게 허락했다. 뭐 남의 것 가지고 인심 을 쓰는 것인데 그렇게 박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아쉬운 판에, 말로 는 무슨 말을 못 하겠는가? "예,그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 "그런데,자네. 그 모든 것을 너무 쉽게 허가하는 것은 아닌가?" 상대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제임스는 미소를 지어 보이 며 보이지 않는상대에게 자신 있게 답했다. "국가가 망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설마‥‥‥‥ 크라레스가 그 정도로 어려운 상대 였는가?" "한번 맞붙어 보시면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 해골 가면을 쓴 수수께끼의 사나이 아르곤 제국의 저 깊은 밀실에서 주교들의 회합이 열리고 있었다. 이곳에 참석한 인물은 모두 20여 명. 이들은 모두 현재 아르곤 최고의 권력자들이었다. 물론 아르곤 제국에는 교황이라는 최고 지도자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사실 유명무실했고, 실질적인 권력 은 이 주교들이 쥐고 있었다. 주교들이 교황을 제치고 모든 권력을 쥐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 었다. 처음에 아르곤이 종교 국가가 되었을 때는 성기사의 권력도 엄 청났었다. 원래 성기사는 전쟁이 벌어지면 최전선에 나가서 싸워야 만 하는 존재들인 만큼,내전을 통해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과도기를 거쳐온 이상그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이 중앙의 전쟁터에서 패배한 무리들을 뒤쫓아 잔 당들을 소탕한다고 저 변방에서 분주할 무렵,전쟁을 할 줄 모른 탓에 교황과 함께 수도에 남게 된 주교들은 권력이라는 금단의 사과가 가 져다준 단맛에 취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주교들은 전쟁 때는 꼭 필요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냥 없는 듯이 숨어 있는 편이 좋은 성기사들에게 종교의 교리를 들어 고 행파 순종, 그리고 인내를 강요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을 수련이나 하게 만들어 놓고 보니 매우 다루기 도 편할뿐더러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매우 보탬이 된 것은 말할나위 가 없었다. 그러다가 교황이 죽자,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다. 선대 교황의 유 언에 따라 그 다음 교황은 성기사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 선택의 기준이 문제였다. 이때 이미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던 주교들의 집합체인 주교 원은 패기만만한 교황이 선출되어 자신들의 권력이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교황을 실력이 아닌, 얼마나 신앙심 이 깊은지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가장 순종적이고, 인내 심 강하고,또 신앙심이 깊은 인물을 선택해 버렸다. 이게 몇 대를 거치다 보니, 교황의 권력은 차츰 축소되었다. 물론 교황의 권력은 아르곤에서는 거의 신에 필적할 정도로 막강했다. 물 론 그 권력을 사용하는 교황은 없었다. 그러니 쓰지 않는 것은 못 쓰 는 것과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호랑이 없는굴에 토끼가 왕이듯 주교원이 아르곤의 최고 권력 기관으로서 막강한 힘을 휘두 르고 있는 것이었다. "형제들,코린트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동맹군을 청하더군요." "코린트가 왜 동맹군을 청한다는 것입니까? 코린트의 힘이 엄청나 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데 말입니다. " "뭔가 함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형제. 사신의 말로는 크라레스가 너무나도 강력 하기에 구원을 청하는 것이라고하더군요." "그럴 수가‥‥‥ 크라레스는 이제 갓 태어난 듯한 신흥 강국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코린트와 정면으로 겨를 힘이 있다는 말입니까?' "글쎄 말이오. 오늘코린트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오." 그 말에 모두들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전부터 코린트는 탄벤스를, 크라레스는 트루비아를 도우면서 그곳 국경에서 몇 차례 전투를 벌였다는 것쯤은 형제들도 잘 아시고 계실 겁니다. 그러다 두 나라가 얼마 전 평화 협정을 한다는 것을 듣고 더 이상 전 투가 확대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크라레스 의 기사단 일부가 탄벤스에 주둔중이던 코린트의 기사단을 기습하여 전멸시켰다고 하더군요." "기습을 당한 것을 보면 파견되었던 기사단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제가 전해 듣기로는 은십자 기사단과 철십자 기사단 전체였습니다, 형제." 상상 외로 규모가큰 대부대가 전멸 당했다는 것을 알고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둘을합치면타이탄이 130기가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크라레스는 신흥 강국으로서 자기들의 분수를 모르고 날뛰고 있습 니다. 코린트와 7루마 간의 전쟁에 편숭하여 국토를 엄청나게 넓히 는 데 성공했고, 지금은 치레아를 기지로 하여 알카사스와 아르곤과 중개 무역을 하여 막대한 재화를 긁어모으고 있지요. 거기에다가 치 레아의 대공이라는 작자는 일개 공국의 주인인 주제에 크라레스를 등에 엎고 뻣뺏하게 나오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이 기회에 물을흐리 고 있는그 미꾸라지를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치레아를 차지하고 앉은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은 처음 총독 자리 에 앉은 후 될 수 있으면 아르곤과 사이 좋게 지내려는 심산이었는지 가급적 충돌을 피했었다. 하지만6년 전 전쟁이 끝난후 치레아 대공으로 임명되고나자간덩 이가 커지기 시작해서 충돌을 회피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아예 시비 를 걸어 오고 있었기에 그 대처 방안에 대해 주교원은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과거 치레아 왕국과 스바시에 왕국은동쪽의 아르곤 등의 국가들과 서쪽의 알카사스 등의 국가들의 중개 무역을 행했다. 그렇기에 이 두 국가는 왕성한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했었던 것이다. 그래도 옛 날그 시절에는 어느 정도 상식이 통하던 시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운업을 발달시킴으로 인해 싼운송료로 승부를 했을 뿐, 상대국에 부당한 불이익을 줘서 강제적으로 틀어막지는 않 았었다. 하지만 치 레아가 공국으로 탈바꿈한 후, 치 레아 공국은 아르고니아 산맥의 연장선상인 미르시엔 열도가 자신들의 영토라는 점을 내세웠 고, 그 점을 이용하여 그 일대 모든 해상 통로들을 영토로 선포했다. 그런 다음타국의 선박들에 대해 거액의 통행세를요구했던 것이다. 통행세를 내기 싫으면 저 멀리 미르시엔 열도를 돌아서 이동하든 지,아니면 통행세를 내고 열도를 통과해야 했는데 그런 식으로는 치 레아나 스바시에 상선들과 운송 단가면에서 그야말로 경쟁 자체가 되지 않게 되었다. 아르곤에서는 이것을 몇 번이나 항의했지만,치레아 대공이란자는 늘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치레아나 스바시에의 상선 들에게 보복 통행세를 물리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르곤의 내륙에서 나오거나 들어 갈 화물들이 운송료가 비싼 해로를 통하지 않고 치레아와 아르곤을 가로막고 있는 말토리오 산맥의 끝자락을 통해 이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르곤 내륙의 수출품들의 경우 과거에는 아르곤의 항구들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선박을 통해 치레아를 거쳐 서쪽으 로운반되었다. 그리고그 역방향으로 수입품이 배급되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르곤의 동남부의 경우 예전과같은 방 식으로 운송되고 있었지만,북서 내륙 지방의 운송로는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것들은 곧장 육로로 동쪽으로 이동해서 말토리오 산맥을 넘어 치레아로 보내진다 그런 다음 치레아에서 해로를 이용 해 서쪽으로 수출되는 것이다. 이래저래 치레아의 해운업만 날로 발전해 가는 구도가 되어 가고 있었다. 협박이나 항의가 통하지 않는 상대를 향해 아르곤의 주교원 은 점점 불만이 쌓여 오고 있는중이었다. 그러다가 치레아가 말토리오 산맥을가로지르는 대로에 세 개의 작 은 요새를 건설했고,그것도 모자라서 타이탄 부대를 저지할 수 있는 강력한 요새를 건설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해 볼 테면 한번 해 보자하는 식의 무언의 선전 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형제들! 전능하신 신을 받드는 우리들이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될 수 있으면 대화와 타협을 통해 좋은 방향으로 끌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치레아는 크로노스 교에 대해 예로부터 나쁜 감정이 없는 국가입니다. 로니에 사제가 그곳에서 중책을 맡고 있지 않던가요? 그를 통해서 잘 타협해 보면‥‥‥‥ 하지만그런 평화적인 의견은간단하게 묵살되어 버렸다.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지금 치레아에는 다섯 명의 형제들이 활 동하고 있지만,대부분의 경우 빈민 구제 등 대부분 권력과는 무관한 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크로노스교를 인정하는듯하지 만,보이지 않게 탄압을하고 있단 말입니다. 몇 십 년이 더 지나더라도 치레아는 나아질 것이 없을 겁니다. 처음 에는 인자한 얼굴을 하고 발톱을 숨기고 있더니,지금은 일마다 트집 을 잡고 있어요. 이건 그 자가 그만큼 본국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표결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 "그게 좋겠습니다. 설왕설 래해 봐야 귀중한 시간만 흐를 뿐이오." 모두들그것이 좋겠다고 했기에 곧이어 투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전쟁이었다. 원래가 구 세력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이 상실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신진 세력이 커 나오기 힘들듯, 신생국도 마찬가지였다. 신생국이 편안하게 성장하 도록 기존의 대국들은 그냥 묵인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눈에 들어 온 가시 마냥 뽑아 내려고 안달이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 니까. "일단 전쟁은 해야겠지만, 이 기회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어 내야 만 합니다. 치레아를 전리품으로 얻어 내든지,그게 안 된다면 최소한 미르시엔 열도라도 받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국가들에 대해 크로노스 교를 전파할 수 있는 권리도 얻어 내야 합니다. 코린트 는그것을 약속해 줄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린트의 최신형은 곤란하다고 하더라도 두 번 째로 강력한 엑스시온부터는 본국에서 수입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 아 내야 할 것입니다. " 그 외에도 많은 토의가 오고갔다. 원래가 대규모로 전쟁이 벌어지 고 나면 각국의 세력 구도가 많이 바픽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기 에 아르곤은 이번 전쟁에 적극 관여함으로써 자신들의 세력 판도를 더욱 넓힐 심산이었다. 두터운 해골 모양을 한 특수한 재질의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인물 이 로체스터 공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공작이 자리를 잠시 비 운 지 세 시간 후의 일이었다. 모두들 수상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가 운데 그 남자는 코린트의 용병 기사단 단장으로 임명되 었다.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따르면 지금 현재 그에게 부하가 한 명도 없 었지만,시간이 조금 지나면 대륙 여러 곳에 퍼져 있는유명한용병들 이나 용병 기사들을 모집하여 그의 지휘 하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그 리고 그에 따라 여러 유명한 용병 기사단들에게 그들을 고용하고 싶 다는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발표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쯤에 용병들을 대량으로 모집하는 경우 는 비일비재 했기에 부하들은 공작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크라레스쪽에서 허겁지겁 사신이 와서 협상을다시 시작할 것을 원한다는 부하의 보고가 들려 왔다. 로체스터 공작은 상대의 꿍 꿍이를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기에 한동안 궁리를 하다가 일주일 후에 협상을 재개하자고 통보했다. 하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저 비열한크라레스를상대로 일주일 후에 협상을 다시 시작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상대가 먼저 이쪽의 코털을 건드린 만큼, 놈들의 속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의 준비 가 갖춰지는 대로 먼저 기습 공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그 준비가 갖춰 지는 것은 용병대가 모이는 때가 아닌, 크루마, 알카사스, 아르곤이 방향을 분명히 정했을 때가 될 것이다. 코린트가 이렇듯 이빨을 갈면서 회심의 카운터 펀치를준비하는줄 도 모르고 크라레스의 황궁에서는 조촐한 축하 파티가 열리고 있었 다. 오늘의 승전을 축하하는 황제와 루빈스키 대공 둘만의 작은 파티 였다. 황제는 포도주를 루빈스키의 잔에 가득 채워 주며 말했다. "그쪽에서 회답이 왔네. 일주일 후,전에 그곳에서 다시 회담을 하자 고하더군." "그래도 다행이옵니다, 폐하. 상대가 섣불리 행동에 옮기지 않고 회 담에 웅해 준 것은 아주 잘 된 일이라고봐야하겠사옵니다. " "허허허,그것은 벌써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지. 토지에르 경의 앞을 바라보는 안목이 옳았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놈들이 섣불리 행동 을 하지 못하는 것은 기습전을 감행하다가 들켜 버렸기 때문일 것이 야. 자신들의 추잡한 행동이 발각된 데다가, 기습 부대마저도 엄청 난 타격을 입었지. 이래저래 그들로서는 화해에 응하는 길밖에 없겠 지." 황제가 미소를 띠며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보며, 루빈스키는 자신 이 우려하는 바를 말했다. 상대의 피해가 작다면 모르겠지만,치레아 대공은 너무 일을 크게 벌여 놓았던 것이다. 상대방 기사단을 완전히 박살을 내왔다는 호기스러운 보고를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치레아 대공의 보고로는 은십자 기사단을 거의 전멸시 켰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상대에게 너무 큰 피해를 입힌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옵니다. " "하하하, 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나. 예로부터 강자가 이 세계를 지 배하는 것이지. 이쪽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줬는데 뭐가 걱정 이겠는가? 치레아 대공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 준 것이 고마을 뿐 이지‥‥‥‥ 녀석들이 회담에 응한 이상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 야." "하지만, 전하. 그때 회담 장소에서 이쪽의 행동을 보고받았던 까미 유 후작의 행동으로 봤을 때,그는 이쪽을 불시에 기습하려다가 되레 기습을 당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사옵니다. 아무래도 너 무 성급한 행동이 아니었나 하는‥‥‥‥" "허허허,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 놈들이 병사들까지 대량으로 이동 시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습을 계획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 그리고 그런 기밀 사항의 경우 될 수 있으면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 않겠나?회담장에 나가는 까미유 후작에게 그 사실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황제는 포도주를 쭉 들이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자네는 생각을좀해 봐 야 할 것이야. 협상 때 이쪽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할지,또 놈들 이 어떤 조건을 제시해 올지 그런 것도 예상을 해 둬야 하지 않겠나? 아마도 농들이 일주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둔 것도 다 그 때문이겠 지," "옛,전하." 루빈스키 대공의 피 코린트의 크라레스 국경 부근. 그곳에는 지금 거의 100여 명의 사람 들이 웅성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 화려한 복장을 걸 친 인물들이었고,상당수는 화려한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이렇듯 엄청나게 화려한복장을하고 있는 기사단은 코린트 내에서 도 두 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만큼 쉽사리 그들의 신분을 파악하는 것 은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바로코란근위 기사단이 진을 치고 있는 것 이다. 중앙에 위치한 가장 큰 천막의 위에는 코란 근위 기사단을 뜻하는 붉은 드래곤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천막 안에 는 코린트 전군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로체스터 공작과 제임 스 후작,까미유 후작,그리고 해골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혐오스 러운용병 대장이 얇은 로브까지 뒤집어쓰고서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수군대다가 통신실로 사 용되고 있는 옆 천막에서 걸어 나오는 레티안을 발견하고는 말을 걸 었다. "모든 기사단의 배치는 끝났다고 하던가?" "예,전하." 레티안의 대답에 로체스터 공작은 뒤에 서 있는 부하들을 향해 시 선을 돌려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미소를 지었다. 지금 크라레스를 향 해 공격 준비를 갖추고 있는 기사단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알카사스 국왕 휘하의 레드 이글 기사단, 아르곤의 정예인 타리아 와 네리아 성당 기사단, 코란 근위 기사단, 그리고 코린트의 금십자 기사단이었다. 본국에 있는 모든 기사단이 전장에 투입되는 관계로수도에는 발렌 시아드 기사단이 이동해 와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습에 의해 괴멸되다시피 한 은십자 기사단과 철십자 기사단의 잔여 병력들은 모두다금십자 기사단에 편입되어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다시금 레티안쪽으로 시선을돌렸다. "아직도 3루마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나?" "예, 미네르바는 아무래도 포기하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그렇듯 망 설이는 것으로 보아 우리 쪽에 가담한다고 하더라도 믿기 어려을 것 이옵니다. " "그 말이 맞는 것 같군. 크라레스의 동태는 어떻던가?" "예, 10분 전에 루빈스키 대공이 회담 장소에 도착했사옵니다. 그는 네 명의 기사를 대동하고 도착한 후,회담 장소를 점검하고부근에 배 치되어 있는 호위 부대들을 점검했사옵니다. 그런 후 그들과 함께 회 담 장소로 들어갔다고 보고받았사옵니다. " 로체스터 공작은고개를살짝끄덕였다. 모든 것이 예정된 대로였다. "베르딘으로부터 새로 연락 온 것은 없었나?" "예, 고양이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하옵니다. " "좋았어. 그녀만 개입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없지. 정찰조로부터 크 라레스호위 부대 증강에 대한 정보는들어온 것이 없던가?" "예,전방에 3개 연대(3,000명)가 주둔하고 있을 뿐 별다른 이상은 없 사옵니다. 그리고 20킬로 후방에 위치하고 있는 마로덴 요새도 잠잠 하옵니다. 그들의 움직으로 보아 놈들은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한 듯하 옵니다. 하지만 회담 장소 부근에는 기사들이 몇 명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적의 기사단이 존재하는 듯하옵니다. 하지만 오너들이 몇 명이나 투 입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사옵니다. 적들의 기사들이 깔려 있는 관 계로 먼 거리에서 관찰만 하고 있기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기 때문 이옵니다. " "뭐, 신경 쓸 것은 없다. 많아 봐야 1개 전대 정도겠지. 기사단에 전 투준비를 명하라." "예,전하." "적의 구원 부대가 도착할 가능성도 있으니 전 기사단을 한꺼번에 투입한다. 루빈스키 공작이 탈출할 우려도 있으니 후방에 열 명을 투 입하라고 일러라." "예,전하." 이제 로체스터 공작은 시선을 까미유 쪽으로 돌렸다. 까미유는 기 대에 넘치는 표정으로 공작의 시선을 맞받았다. "까미유!" "옛,전하." "그대만 믿겠다. " "옛, 전하. 목숨을 걸고 해 내겠사옵니다. " "도착한 즉시 인사를 하는 척하고 공격을 시작하라. 그것을 신호로 우리도 공격해 들어가겠다 " "옛,전하." 까미유는 공작의 지시가 떨어지자 마차를 타고 급히 회담 장소로 향했다 로체스터 공작이 거느린 것과 같은 네 명의 기사만을 거느리 고 말이다. 물론 그 기사들의 등급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까미유 휘하의 제2근위대 대원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차가 출발한 후 로체스터 공작과 함께 근위대는 이동을 시작했 다. 코란 근위대가 가지고 있는 삼십 명의 오너들 중에서 열 명은 몇 명의 기사들을 거느리고 후방으로 적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마법진 을 이용하여 이동했다. 남은 스무 명은 남은 기사들을 거느리고 로체스터 공작을 뒤따랐 다. 까미유가 행동을 개시하기 전까지 그들은 최대한 적에게 가까운 돌격 위치에 도착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마차가 오고 있사옵니다, 전하." "그래?그 외에 이상은 없는가?" "옛,모든 것이 이상이 없사옵니다. 전방 정찰대의 보고로는 그의 마 차를 호위하고 있는 것은 네 명의 기사뿐이라고 하옵니다. 모두들 호 . 화로운 정복을 입고,간편하게 검만을 착용한 상태라고 하옵니다. " 코린트는 이번 기습 작전에서 군대를 아예 사용하지 않고 기사단만 을 살짝 움직였기에 크라레스의 정보망에서 교묘하게 벗어날 수 있 었다. 기사단의 경우군대와 달리 그 엄청난 전투력에 비해 수가 적었 기 에 포착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 알겠다. 도착하면 이곳으로 정중히 모시도록!" "옛,전하."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고 마차 소리가 들려 오자 루빈스키 대공은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마차와 그것을 호위하 는 기사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에 따라 100여 명의 호위병들 이 일렬로 정렬하여 귀빈들을 맞을 준비를 했고, 기사들은 루빈스키 대공의 뒤에 정렬했다. 루빈스키 대공은 호위 기병은 한 명도 없이,호화로운 근위대 복장 의 기사들 네 명이 마차를 호위해 오는 것을보고 약간의 의아함을 느 끼기는 했지만,그것은 곧 잊혀졌다. 왜냐하면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까미유 후작이 당당하게 내려을 때, 그 안을 힐끗 보니 안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경호 기병들이 밖에 둘러싸고 기사들은 마 차 안에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협상을 하러 올 때는 실무자인 문관이나 마법사가 동행하게 되는데 왜 마차 안에 그들이 한 명도 없는지 의구심을 가지기도 전에 까미유 후작은 루빈스키 대공의 앞에 섰다. 그런 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것을 보고 루빈스키 대공도 고개를 숙이는 순간 상대의 검이 거의 투명하다시피 한 궤적을 그리며 순식간에 날아왔다. 과연 마스 터라고불릴 만한 검술이었다. "헛!". 루빈스키 대공은 자신의 검을 완전히 뽐을 여유도 없었다. 그나마 노련하게 검을 잡고는 뽑아 올리며 간신히 적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 만그것으로끝이 아니었다. 까미유 단독으로그를 공격해 온 것이 아 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데려온 네 명의 기사들 또한 제2근위대란 이름에 어울리는 무 서운 검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공격을 가함과 동시에 둘은 좌우에서 루빈스키를 공격해 들어갔고, 남은 둘은 상대방 기사 들을 제압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루빈스키는 까미유의 공격을 막는 것도 힘든 판에 양쪽에서 둘이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예 전의를 상실했다. 그렇다고 항복할 수도 없는 노룻이었다. 그는 상대와 대적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 다는 것을깨닫고순간 공간 이동주문을 외웠다. 그의 왼손에 끼워져 있는 것은 토지에르의 목숨을 건진 것과 칼은 이동용 마법 도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동이라는 단 두 마디 주문을 외을 시간에 상대방의 검은 그의 몸통을 좌우에서 훌고 지나갔다. 검이 쉽쓸고 지나간 후 곧이어 희뿌연 빛 무리가 대공의 주위를 감쌌고,그 순간 그의 몸은사라지고 없었다. 적이 사라지고 나자 루빈스키를 공격했던 기사 두 명은 이제 홑어 져서 4대 2로 싸우고 있는 접전장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그제야 정 신을 차린 루빈스키의 경호병들이 그 난장판 안으로 달려들었지만, 사상자의 수를 늘릴 뿐이었다. 도저히 상대 자체가 안 될 정도로 적은 막강했던 것이다. 사방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접전을 벌이는 동안 까미유는 루빈스키 대공이 빛 무리와 함께 사라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겨우 두 발자 국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 후 그는 고개 를 숙여 물기에 젖은 흙을 매만졌다. 피에 젖은 축축한 흙이었다. 순 간적인 칼부림으로 인한 것치고는 매우 많은 피‥‥‥‥ 그것을 확인한 까미유의 얼굴에 살기 어린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기습 공격으로 크라레스 군은 거의 묵사발이 나 버렸다. 북쪽에서 기습을 가해 온 금십자 기사단에게 제3전대가 요새와 함께 박살 났다. 그리고 협상을 위해 나갔던 루빈스키 대공은 치명상을 입 은 채 돌아왔고,그를 호위하던 부대는 전멸 당했다. 그리고 루빈스키 의 호위를 위해 파견되었던 제4전대 또한 적의 근위 기사단에게 치명 타를 당한 채 후퇴 했다. 서쪽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르곤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인해 치레아의 감시역으로 그곳을 지키고 있던 제1, 2전대는 위장용으로 선포해 놓았던 목적, 즉 아르곤의 침입을 저지한다고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적의 타이탄 수는 2개 기사단 60기. 만약 이쪽도 2개 전대 60기였다 면 어느 정도 대결을 펼칠 수 있었겠지만,초기에 코린트와 접전을 벌 인다고 제1전대가 많이 소모된 상태였기에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제1,2전대가 치레아 대공의 기습을 저지하기 위해 건설했던 요 새에 주둔하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판가름이 났을 것이다. 동쪽으로는 알카사스의 레드 이글 기사단이 엔테미어 공국을 경유 해서 침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국경 수비군을 돌파한 후 토리아 왕국 멸망후 엔테미어 공국과의 국경선으로 이동 배치되어 있던 제6전대 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중이었다. 하지만 레드 이글이 50기의 타이탄을 보유하고 있는 데 반해서 제6 전대는30기뿐이었기에 이 전투 역시 매우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고양이가 움직였다고 하옵니다 "루빈스키 경은 어떻게 되었는가,?" 황제의 물음에 다론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려운 고비는 넘겼사오나,출혈이 너무 심했기에 오랫동안 휴식을 취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 "천인공노할 코린트 녀석들‥‥‥ 협상을 하자고 해 놓고 기습을 가해 오다니."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이윽고 황제는 울분을 가라앉히며 외쳤다. 토지에르가 당했을 때와 는 달리 지금은자신의 가장 아끼는 부하가 치명상을 입고 누워 있음 에도 불구하고 아예 슬퍼할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크라레스는 멸망까지 생각해야 할 정도로 최악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황제에게는 회망이란 단어가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치레아 대공이라는 마지막 카드가 남아 있었 기 때문이다. "에잇,망할자식들!치레아 대공을불러 들여라." "이미 대공 전하에는 기별을드렸사옵니다. 머지않아 도착하실 것이 옵니다. " 분노를 참지 못해 씨근거리고 있는 황제를 향해 안티노스후작이 채 근했다. 지금은 1분 1초가 아까운 때였다. 적은 정면 공격을감행해 오 고 있었고, 방어선은 깨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크라 레스에게 있어서는풍전등화의 위기가찾아온 것이다. "전하, 적들은 지금 세 곳에서 물 밀듯이 진격해 들어오고 있사옵니 다. 빨리 결정을 내려 주시옵소서." "지금 남은 기사단은 얼마나 되는가?" "옛, 스바시에 기사단, 치레아 기사단, 그리고 치레아에 주둔중인 5 전대 이옵니다. " "이럴 수가 있는가?단하루 만에 본국 전력의 절반 이상이 날아가다 니‥‥‥‥" 황제가 머리를 감싸쥐고 고뇌에 빠져 있을 때 경비병의 커다란 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겼습니다. " "어서 오시오,치레아 경." "별로 안녕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폐하." 다크의 인사에 황제는 메마른 웃음을 기운 없이 토해 내며 중얼거 렸다. "허허허 ‥‥ 뭐 그렇지. 알카사스와 아르곤이 코린트와 손을 잡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짐의 실책이야. 경이 짐을좀 도와주 겠나?"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안티노스 경,치레아 경에게 설명을부탁하네." "옛, 폐하. 전하, 지금 적들은 세 곳에서 맹렬하게 진격중이옵니다. 북쪽의 코린트 군은 제3,4전대를 간단히 박살 내고 수도를 향해 맹 진격해 들어오고 있사옵니다. 서쪽의 알카사스 군은 제6전대가 막고 있지만 아마그렇게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이옵니다. 그리고 동쪽은 제1,2전대가 사력을 다해 아르곤 군을 저지하고 있 지만 지금 현재는 세 곳 전선들 중에서 가장 안정된 방어막을 유지하 고 있사옵니다. " "흐음‥‥‥ 그렇다면 내가 제일 먼저 갈곳은북쪽이군." "예, 전하. 코린트 군만 막아 내시면 될 것이옵니다. 이미 스바시에 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기사단들을 불러 들였사옵니다. 그들을 지휘 하신다떤‥‥‥" "아니, 치레아 기사단만 거느리고 가겠다. 남은 기사단들은 경이 알 아서 다른 전투에 투입하도록!" "예?금십자 기사단이나 코란 근위 기사단은 무시하지 못할 적들이 옵니다. 아무래도 치레아 기사단만 거느리시고는‥‥‥‥" "아아,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그럼 폐하, 저는 지금 전선으로 가 보겠사옵니다. " "수고해 주게나." 황제는 뒤돌아 서서 당당히 걸어 나가는 다크의 가녀린 어깨가 그 날따라 웬일인지 아주듬직해 보였다. 그녀의 됫모습을보고 약간 기 운을 차린 황제는 안티노스를 향해 말했다. "동맹국들에게 사신을보내라, 구원병을보내 달라고 말이야," "폐하,소신이 이미 보냈사옵니다. " "오오,그래. 잘 했군. 원군이 도착하고 난 후에 놈들에게 맛을 보여 줘야겠어. 그때쯤이면 치레아 대공에 의해 전세도 어느 정도 안정된 후겠지." "고양이가 움직 였다고 하옵니다. " 레티안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경악했다. 자신이 가장 우려하고 있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 치레아 대공은 상대하기 버거을 정도로 강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뒤에 있는 드래곤 때문에 정면 승부를 벌여 없애 버리기도 난처한 그 야말로 최악의 우환 덩어리였던 것이다. "뭣이 ? 어디로 간다고 하던가?" "금십자 기사단이 있는 곳이옵니다. " "프레드 드 알파레인 후작에게 지금 있는 그 지역에서 마법진을 이 용하여 최대한 빨리 이탈하라고 지시하라!" 로체스터 공작은 레티안이 통신실로 달려나간후 이제야 약간의 여 유가 생긴 탓인지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이동이 최악의 변수였다. 하지만 그걸 잘 뒤집으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 각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상대하기에 문제가 있는 적은 무조건 회 피한다. 그녀 외의 딴 녀석들흐 철저히 해치운다. 크라레스 제국이 그녀 혼 자만의 제국이 아닌 만큼 딴 놈들을 다 해치우면 크라레스는 자연히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로체스터 공작은 큰소리로 레티안을불렀 다. 통신실은 로체스터가 있는 천막의 바로 옆에 있는 천막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레티안은곧장 달려왔다. "금십자 기사단에게 전해라. 근거리 공간 이동에 성공했으면, 장거 리 이동 준비를 해서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스바시에 공국의 수도를 기습하라고 일러라, 그리고 근위대에 출동 준비를 명해라. 또 마법사 들에게 크라레인 시로 이동할 수 있도록 장거리 이동용 마법진을 준 비하라고 일러라, 빨리!" "예,전하 " 레티안이 공작의 지시를 전하기 위해 밖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보 며,해골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는용병 대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수도를 기습할 건가?" "당연하지. 벼룩은 고양이가 곧이어 금십자 기사단으로 공간 이동 할 것이라고보고를 했어. 그렇다면 수도는 곧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될 테고,놈들의 근위대나 딴 것들이 버티고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해 치을 수 있을 거야. 그녀만 없다면 크라레스의 기사단 따위는, 하루 아침 해장 거리도 안 되지." "그럴 만한 시간 여유가 있을까?그녀가 돌아온다면?" "그때는 곧장 도망쳐야 하겠지만‥‥‥‥ 그렇지만 시간 여유는 충분할 거야. 고양이는 금십자 기사단이 쟈드 시를 공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곧이어 받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그녀는또다시 쟈드 시를 향해 장거 리 이동을 해야 해. 그리고 그때를 이용해서 우리는 크라레인 시를 박 살내는 거야. 후퇴할수 있는모든준비를다갖춰 놓고 말이야." 서둘러서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도착했을 때 다7를 기다리고 있 는 것은 텅 빈 벌판과 수풀,그리고 반쯤 박살 나서 불타 오르고 있는 작은 요새 하나뿐이었다. . "여기 어디에 적의 기사단이 있다는 거지?" 공작의 물음에 마법사는 당황해서 외쳤다. 불현듯 자신이 이동할 좌표를 잘못 알고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가 맞는지 다시 확인해 보겠사옵니다,전하." "좋아, 자네는 수도에 연락해 봐, 그리고 팔시온, 너는 미카엘과 함 께 요새에 가서 적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봐." "알았어!" 어이없게도 목표물을 찾지 못해서 허등대고 있는 다크를 위해, 팔 시온은 미카엘과 함께 요새를 향해 달려갔다. 이곳으로을 때 말은 아 예 가져오지 않았기에 그들은 전속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팔 시온이 미디아와 함께 떠난 직후 마법사가 외쳤다. "수도에 확인해 본 결과 여기가 맞다고 하옵니다. "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팔시온이 뭔가 정보를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다크는 주위를 빙 둘러본 후 자신이 걸터앉기에 적당해 보이는 돌 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서는 앉았다. 그녀가 거느리고 온 대원은 마법사 둘과 기사 20명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최 소의 인원만을 이끌고 이곳으로 급히 달려왔던 것이다. 여분의 인원들이나 보급품들을 모두 다 수도에 남겨 두고 왔기에 식사한 끼 해결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도 빨리 이곳으로 왔는데 도 상대가 없다는 것이 못내 석연찮았다. 저 요새의 상태를 보면 놈들 은 얼마 전까지 저 요새를 신나게 박살내고 있었던 듯한데‥‥‥‥ 다크가초조하게 팔시온과 미카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로체스터 공작과 그의 패거리들은 크라레스 제국의 수도인 크라레인 시에서 10킬로도 안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로체스터 공작은 위급할 때 재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이동용 마법 진부터 갖춰 놓은 후 금십자 기사단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초조하 게 기다렸다. 이쪽의 공격은 금십자 기사단이 공격을 시작한 후 조금 있다가 시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로체스터의 공격대가 수도를 박살 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다크는 이리 저리 딴 생각들을 하면서 팔시온 일행을 기 다리고 있었다. 완전 무장을 하고 요새를 공격중인 금십자 기사단 가 까이에 타이탄이 없이 공간 이동을 할 수는 없었기에,다크의 공격대 는 타이탄을 꺼낼 시간을 벌기 위해서 요새에서 상당히 떨어진 장소 에 도착했었다. 그 때문에 팔시온 일행이 돌아오는 시간도 상당히 많 이 걸렸다. "대공 전하!" 마법사가 얼굴이 노랗게 질려서 외쳤다. "무슨 일이냐?" "금십자 기사단이 쟈드 시에 나타났사옵니다. 지금 쟈드 시를 쑥대 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옵니다. " "어디로 갔나 했더니 그리로 갔었군. 스바시에로갈준비를 해라." 놈들의 이동 시간과 이쪽의 이동 시간이 교묘하게 일치했었던 모양 이라고 투덜거리며 다크는 마법사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타이밍이 절묘했다. 다크는 찜찜한 속마음을 감추며 우연일 거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그 렇지 않다면 자신의 가까운 곳에 있는 누군가를 의심하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옛 !" 스바시에는 아주 먼 거리에 있었기에 마법진의 규모는 거대해질 수 밖에 없었고,그만큼 그리는 데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다. 게다가 20명 이상이 움직이는 마법진이니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마법진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다크는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마법사에게 손짓을 하 며 말했다. "자네는 여기서 기다렸다가 미카엘과 팔시온과 합류하여 수도로 가 라." "옛." 머지않아 마법진은완성되었고,마법사는 기나긴 주문을 외워 댔다. 그들은 크라레스 제국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요새에서 시작해서 거 의 남쪽 끄트머리 곳까지 초장거리 이동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마 법사의 주문은 엄청나게 길었다. 초조하게 마법사의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마법사는 주문을 멈 추고땀을 닦으면서 외쳤다. "완성되었습니다. 모두들 마법진에 올라가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은 곧장 쟈드 시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군데군데 폐허가 되어 있는 쟈드 시였다. 방금 전과 같이 적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금십자 기사단은 로체스터 공작의 지 시로 벌써 후퇴해 버렸던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적을놓치는 것이 두 번이나 연속되자 다크는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놈들의 이런 행동은 자신을 고려해서 만들어 놓은 작전이라는 것이 확실하 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약아빠진 놈. 나하고싸우는 것이 그렇게도 겁이 난단 말인가?" 투덜거리는다크를향해 이번에는 새파랗게 질린 마법사가 외쳤다. 그는 이번에도 적을 만나지 못했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 수도에 연락 을 했었는데,그때 의외의 보고를들었던 것이다. "전하! 놈들이 수도를 침공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 "금십자 놈들이냐?" "아니옵니다. 코란 근위대이옵니다. 지금 수도에 있는 모든 기사단 들이 투입되어 적들과교전을 벌이고 있다고하옵니다. " "나를아주가지고노는군‥‥‥‥‥" 놈들에게 농락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을 라 툴툴거리던 다크는 갑자기 손바닥을 탁 치면서 외쳤다. 복수할 멋 진 계획이 떠올랐던 것이다. "코린트의 수도로 공간 이동 할 수 있나?" 놈들의 근위 기사단과 금십자 기사단이 없으니 수도는 텅 비어 있 든지,아니면 발렌시아드 기사단 흔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놈들처럼 한바탕 휘저어 놓은 후 적의 근위대가 도착하기 전에 내빼면 될 것이 라는 생각이 떠올라 외친 것이었지만,마법사는 죄송한 듯 고개를 수 그리며 사정했다. "예? 저 전하,코린트의 수도는 너무 머옵니다. 제 능력으로는 하루 에 세 번이나 장거리 이동을 한다는 것은 힘드옵니다. 만약 조금이라 도 실수가 있다면 폐하의 생명을 보장해 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다시 생각해 주시옵소서." "젠장!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언젠가는 이 빛을 이자까지 붙여서 갚 아주겠다. " 다크는 어쩔 수 없이 부하들을 인솔하여 수도로 회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크의 예상대로 수도는 처참한 몰골로 다크를 기다리고 있 었다. 군데군데 무너진 성곽과 궁전‥‥‥‥ 수십 대가 넘는 타이탄들 이 그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온갖 난리를 쳐 댔으니 그건 당연한 결 과였다. 다크는 자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나온 기사들의 인사를 대강대 강 받은 후 천천히 걸어갔다. 황궁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무거 웠던 것은 적에게 완전히 농락 당한 채 복수라고는 해 보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적이 자신을 이토록 철저하게 농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주변에 놈들의 첩자가 있었을 것이 분명 했다 자신과 자신의 기사단은 마법진을 이용해서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 었다. 하지만 무려 세 곳이나 되는 곳에 달려갔는데도 불구하고 놈들 의 그림자도 못 봤다는 것은 그녀의 행동을 놈들이 손바닥 들여다 보 듯환하게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다시 동료를 의심해야 하는 처지에 서게 된 다크. 여태껏 살아오 면서 상대의 비열한 수법에 고생을 많이 했었고,또 치가 떨리는 배신 도 당했었기에 그녀의 마음은 더욱무거웠다. 뿌드드드득! 그녀는 황궁으로 걸어가면서 자신을 배신한 그 놈을 찾기만 하면 그야말로 찢어 죽여 버리겠다고 이를 갈며 자신에게 맹세하고 또 맹 세하고 있었다. 고양이 옆에 있는 첩자 전쟁은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6년 전에 있었던 제1차 제국 전쟁이 대제국 코린트, 크루마, 크라레스가 주축이 되어 대지를 피로 물들인 전쟁이라고 한다면, 이제 다시 그에 버금가는 규모의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6년 전과는 달리 이번 전쟁에서는 크루마가 빠졌지만, 여태껏 중립 노선을 지켜 오던 아르곤과 알카사스가 가담했기에 그 규모에 있어서 제1차 제 국 전쟁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두들 이번 전쟁을 제2차 제국 전쟁이라고 불렀다. 제2차 제국 전쟁은 코린트를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이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크라레 스를 기습하면서 서막을 장식했다. 그 때문에 크라레스 제국은 전쟁이 시작된 바로 첫날부 터 기사단 전력의 절반을 상실하는 뼈아픈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크라레스의 패배가 너무나도 짧은 시간에, 그것도 기습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기에 전쟁에 직접 관여하 지 않은 나라들의 경우에는 아직까지도 크라레스가 어느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당했는지 제 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는 병사들과 그들 사이를 열심히 뛰어다니며 치료하고 있는 마법사와 신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군데군데 생명을 마친 거대한 타이탄들이 그 찬 란했던 전적과 용맹함을 자랑하듯 육중한 몸을 누이고 있었다. 다크는 천천히 걸어가다가 매우 눈에 익은 타이탄의 몸체를 발견하고는 얕은 신음을 흘렸다. 푸른색이 칠해진 거대한 타이탄은 몸체에 깊은 검상을 입은 상태에서 황궁의 한쪽 담벼락을 허물어뜨린 채 엎어져 있었다. "청기사도 당했나?" 다크의 질책에 그녀를 뒤따르던 기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 기사의 제복은 금은색의 실을 많이 사용해 만들어진 탓에 크라레스 기사단의 복장치고는 매우 화려 해 보였다. "예, 전하. 3기가 파괴되었사옵니다." 기사의 대답에 다크의 눈이 놀랍다는 듯 커졌다. "놀라운 일이군. 그렇다면, 적의 피해는?" 다크의 물음에 기사는 여전히 풀이 죽은 음성으로 답했다. "적은 코린트의 최고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코란 근위대였사옵니다. 흑기사를 대체하여 새로 이 배치된 거대한 붉은 타이탄의 파괴력은 거의 청기사에 버금가는 것 같았사옵니다. 그리 고 무엇보다 놈들은 숫자가 30기나 되었기에......" "나는 적의 피해를 물었다." 확정적인 다크의 말에 기사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한 대도 파괴하지 못했사옵니다." "단 한 대도?" 변명 따위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다크는 무자비하게 요점만을 재촉해서 물었다. 그녀에 게 있어 적 타이탄이 몇 기나 있었고, 또 그들 중에서 몇 기에 '상처'를 입혔는지는 중요하 지 않았다. 타이탄의 팔다리는 떨어져 나간다고 해서 시간만 지나면 치료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적 타이탄에게 얼마나 상처를 입혔는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완벽하게 파괴해 버린 숫자만이 중요했다. 청기사의 강인함과 크라레스 기사들의 뛰어난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적을 한 대 도 잡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보고를 하고 있는 기사는 그런 모든 결과 들이 마치 자신의 책임인 양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긴 이 모든 상황은 그 기사에게 책임이 있을 수 있었다. 그가 바로 근위대 대장인 론가르트 백작이었기 때문이 다. "예, 전하. 원체 대단한 놈들이었기에 황궁을 지켜 내는 것도 벅찼을 정도이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후퇴하기 시작했사옵니다. 기선을 제압하고 있던 적들이 갑자기 후퇴하기 시 작한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해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놈들은 자취를 감췄사옵니다. 뒤늦게 그 것이 함정이 아닌 진짜 후퇴라는 것을 깨닫고 놈들을 추격해 본 결과 마법진을 이용해서 황 급히 도주했다는 것을 밝혀 냈사옵니다." "황궁 정원까지 밀고 들어올 정도였는데 갑자기 후퇴해 버렸다? 조금만 더 밀어붙였으면 황 궁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을 텐데......?" "예,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 때문에 저는 녀석들이 후퇴하는 이유가 본국의 방어 대형을 흩 트리기 위해 일부러 후퇴하는 것처럼 꾸미는 계략으로 판단했던 것이옵니다." "흐음..... 그런데 놈들은 진짜 후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도착했다는 것이지?" "예, 전하." 자신의 질문에 프로이엔이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해 주자 다크는 이제야 모든 것이 머리 속 에서 정리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분통을 터뜨렸다. "망할 자식들! 어쩐지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더니, 처음부터 모두 다 계획된 움직임이었 어." "예?" 상관의 분노에 대해 확실한 이유를 모르는 프로이엔이 멍한 표정으로 의문을 던지자 그녀는 황급히 표정을 바로잡으며 딴청을 부렸다. 자신이 망신을 당한 것을 딴 사람에게 광고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건 그렇고, 지금 폐하는 어디에 계시지?" "집무실에서 대책 회의를 하고 계시옵니다." 다크는 론가르트를 뒤로하고 황제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크가 사라지자 론 가르트는 다시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부하들에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지시를 내리기 시 작했다. "어서 오게나.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황제의 물음에 다크는 약간 풀이 죽은 어조로 대답했다. "놈들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했다고 봐야 하겠죠." "으음......코린트가 그렇게 강했었나? 경이 당해 낼 수 없었다니......" 황제가 약간의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하자 다크는 황급하게 덧붙여 말했다. 이번의 경우도 자 신이 약했기에 패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이다. 놈들이 자신과의 결전을 회피했을 뿐, 만약 제대로 붙었다면 결코 이런 결과가 나왔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뜻이 아니죠, 폐하. 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저는 녀석들을 구경도 못 했습니다. 제가 가면 어디론가 이미 도망쳐 버리고 없더군요. 놈들은 제가 어떻게 움직일지 이미 눈치를 채 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속뜻을 이해한 황제가 다소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렇다면 첩자가 있다는 말인가?" 다크는 고개를 살짝 까딱거렸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많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래서 말인데...... 제 부하들의 신 상을 다시 한 번 철저하게 조사해 주십시오. 또한 치레아 기사단의 움직임을 대략이나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들도 점검해야만 할 것입니다." "알겠네. 노력은 해 보겠지만 인원이 원체 많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릴걸세." "예, 폐하/"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피곤할 텐데, 우선 가서 쉬게나. 그리고 뒷일은 모든 보고서들이 집 계된 후에 토론해 보기로 하지." "예, 폐하.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다크는 황제를 만나 대략적인 보고를 한 후 황궁 내에 마련되어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 다. 자신의 영지는 치레아 공국이었지만, 그녀가 수도에 머물 때를 위해서 토지에르가 배려 해 놓은 호화로운 방이었다. 오랜 시간 주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은 구석구석 깨끗하 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다크는 푹신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우, 피곤하군. 차라리 한판 붙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피곤하지는 않을 거야. 젠장! 어떻 게 복수를 하지? 진짜 첩자가 붙어 있다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그렇 다면......" 문득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다크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누구 없느냐?" "예,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다크의 부름에 응답한 것은 세린이었다. 뾰족한 귀를 귀엽게 까딱거리면서 그녀는 한쪽 방 문을 열고 사뿐히 걸어 나왔다. "어라? 네가 여기 왜 있는거냐? 생각지도 않았던 인물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다크는 약간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세린은 약간의 과잉 반응을 보이는 주인이 재미있게 생각되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상 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인님께서 오늘 여기에서 묵으실 거라고 연락이 와서요. 아무래도 딴 하녀보다는 제가 나 을 것 같아서 서둘러서 이리로 왔지요." 세린은 귀를 뒤로 한껏 붙이며 애교스럽게 자신을 칭찬해 달라는 듯 말한 것이었는데, 오히 려 돌아온 것은 칭찬이 아닌 의심이 가득한 눈길이었다. "그으래?" 약간 수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흘끗 노려보는 다크를 보고 세린은 뭔지 모를 괴이한 공포를 느꼈다. 묘인족인 그녀의 섬세한 신경 가닥 하나 하나가 그 순간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위험 경보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고...... 세린은 자신도 모르 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서고 있었다. 다크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첩자 때문에 신경이 곤두 서 있는 판에, 갑자기 세린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이곳에 와 있었던 것이 지독하게 마음에 걸렸다. '저것이 첩자는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요절을 내? 무턱대고 의식 없이 이런 궁리를 하는 다크의 몸 속에서부터 은연중 미세한 살기가 뿜어 나 가고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린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을 따르던 종이었다. 그리고 다크는 세린에게 '자유'라는 커다란 선물까지 했었다. 그런데도 세린은 다크를 떠나 지 않았고, 다크를 정말 살뜰하게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번 전쟁 때도 세린은 있었지만, 자신에 대한 비밀이 밖으로 새나간 적은 없었따. 다크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잡생각을 흩어 버렸다. 설마하니 세린까지 의심한다고 해서 야...... 만약에 진짜 첩자라고 해도 그것이 완전히 들통나기 전까지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 주 인 된 도리가 아닌가. 다크는 언제 살기를 뿜어 올렸냐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가서 가스톤, 팔시온, 미디아, 미카엘을 불러 와라." "예, 주인님." 세린은 공손하게 대답한 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다크의 속마음을 모르는 세린으로서는 순간적으로 주인이 왜 그렇게 무섭게 느껴졌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 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크 는 세린이 모셔 본 여러 명의 주인들 중에서 가장 지독스러운 괴짜였기에 아주 오래 전에 주인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다. "전하, 긴급 정보이옵니다." 자신의 꾀주머니라고 할 수 있는 이블리스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이미 그가 무슨 소식 때문에 그렇게 당황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아침부터 갑 작스럽게 발발한 제2차 제국 전쟁이 자신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음이 분명 했따. 하지만 그놈의 다크라는 인물이 개입된 이후부터는 도무지 정확한 예상을 하기가 어 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미네르바는 '또다시 틀렸나?' 하는 생각에 골치가 아파지는 것을 느끼며 이블리스에게 물었다. "그래? 크라레스와 코린트의 전쟁 소식인가?" "옛, 전하." "그래, 전세는 어떻다고 하던가? 설마 초전부터 그라레스가 압승을 거두고 있다는 것은 아 니겠지?" "그게 아니옵니다. 크라레스 쪽이 약간의 우세를 보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코린트 쪽의 압 승으로 전개되고 있사옵니다." 이블리스의 확정적인 말에 미네르바의 눈동자가 한껏 커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뭣이? 그럴 리가......" 한껏 의심스러워하는 미네르바와는 달리 이블리스의 대답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그 는 자신이 입수해 온 정보의 정확도에 대해 무척 만족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실이옵니다, 전하. 이번 전쟁에서 알카사스와 아르곤이 코린트의 손을 들어 준 것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 모양이옵니다. 크라레스의 3개 전대가 그들에게 발목이 잡혀 있는 동안, 코린트의 기사단들이 인접 국경에 배치되어 있던 크라레스의 2개 전대를 순식간에 전멸시킨 후 크라레인 시에까지 쳐들어가서 격전을 벌인 다음 후퇴했다고 하옵니다." "......" 이 놀라운 소식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기 위해 미네르바가 생각에 몰두하고 있자, 이블리 스는 신중하게 상관에게 건의했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만 하옵니다. 세부 사항은 확실하지 않지만, 정보부의 분석에 의하면 오 늘 하루의 전투로 크라레스 기사단은 그 세력의 절반을 잃었다고 하옵니다." 이블리스의 채근에 미네르바는 또다시 얕은 신음을 흘렸다. 겨우 하루 동안의 전투로 크라 레스가 절반의 기사단을 잃었다면, 그야말로 대규모로 치고 받은 것은 확실한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초전에서 그토록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면 코린트는 예전에 했듯이 승기를 확실하 게 다지고자 전력을 다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지금 뭔가 손을 써 두는 것이 좋을 것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 너무 일찍 끝난다면 크루마로서도 득이 될 게 없었다. "야간에도 전투를 할 가능성은?" "옛, 첩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코린트의 기사단은 케락스 시로 모두 철수했다고 하옵니다." 이블리스의 보고를 들으며 미네르바는 뭔가 이상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꼈다. 기사단 이 수도로 철수했다면 전장에 남겨진 병사들은 누가 보호한단 말인가? 그리고 초반에 잡은 승기를 굳히지 않고 왜 그냥 철수했을까? 크라레스 기사단의 절반이 무너질 정도라면 그야 말로 엄청난 대승리를 거둔 것이 확실한데..... "케락스 시로? 그렇다면 전선의 군대에 대한 호위는 어떻게 하고?" 이블리스는 미네르바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즉각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미처 보고하 지 못한 부분 때문에 미네르바가 다소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코린트는 이번 전쟁에 기사단만을 활용하고 있을 뿐, 군대를 이동시킨 그 어떤 징후도 보 이지 않고 있사옵니다. 국경선을 지키고 있던 크라레스의 2개 전대를 완파하고, 요새 2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기에 진로를 저지할 방해물이 없는데도 군대를 투입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하옵니다. 그 떄문에 바르데 후작에게 첩자들을 풀어 그것을 좀더 상세히 조사해 두라고 일러 뒀사옵니다. 아마도 야간 행군을 해서 국경을 돌파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예 상도 가능했기 때문이옵니다." "그건 잘 처리했군." 미네르바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낮게 중얼거리자, 이블리스는 상관이 뭔가 중요한 결심을 하 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번 전쟁의 향방은 크루마가 누구의 손을 들어 주느냐게 따라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지금 미네르바가 고민에 빠져 있는 것도 바로 그 때 문이었다. 이블리스는 주저하지 않고 상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직 미네르바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상태였기에 지금 의견을 말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 니라고 생각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조언'이 되지만, 상관이 결정을 내 린 후에 주절거리면 그건 '항명'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보부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속도로 전투가 진행된다면 전쟁은 예상 밖으로 일찍 종결될 지도 모른다고 하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본국의 태도를 확실히 정해야만 하옵니다. 코린 트와 연합해 망할 위기에 처한 크라레스를 완전히 끝장내든지, 아니면 크라레스를 도와주든 지 말이옵니다. 제 생각으로는 크라레스를 돕는 것이 좋지 않을까 사료되옵니다. 만약 코린 트가 크라레스를 저토록 쉽게 끝장낸다면 더욱 강성해지지 않을까 염려가 되옵니다. 지금이 라면 그들을 도와 주는 것이 늦지 않았사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네르바는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사실 자신의 집무실 안이었기에 주위를 둘러볼 필요도 없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거의 습관적으로 둘러본 것이다. 그런 다음 미네르바는 코방귀 를 뀌며 말했다. "훗, 크라레스가 그렇게 만만한 상대라면 내가 이렇게 고심하지도 않겠지. 하지만 치레아 대 공이 크라레스를 돕는 한 그 나라는 망하지 않아. 지금은 뭔가 특단의 방법을 썼기에 코린 트가 우세한 듯 보이는 것이겠지만, 일단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코린트는 막대한 피를 흘릴 수밖에 없을 거야." "전하께서는 치레아 대공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코린트에는 세 명의 마 스터가 있사옵니다. 그리고 신형의 적기사들까지 가담한다면, 아무리 청기사가 있는 크라레 스나 치레아 대공이라 하더라도......" "물론 코린트가 전력을 기울인다면 어렵더라도 치레아 대공을 잡을수 있겠지. 하지만 그녀 가 죽는다면 바로 그날이 코린트가 멸망하는 날이야. 오호호홋!" 미네르바는 다크의 뒤에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골드 드래곤이 의붓 아버지로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터뜨린 웃음이었다. 그녀는 그 망할 드래곤을 레어까 지 찾아가서 직접 만나 보지 않았던가? 여러 가지 정보에 따르면 그놈은 에인션트 급에 근 접하는 엄청난 괴물이었다. 그리고 더 안 좋은 점은, 종족이 다른 도저히 건널 수 없을 듯 한 넓은 간격을 뛰어넘어 인간이 다크를 매우 아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드래곤과 인간 사 이에서는 도저히 성립되기 힘든 관계였지만, 어쨌든 그 둘은 진짜 부모와 자식 같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녀를 해치는 것은 곧장 골드 드래곤의 분노와 직결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였다.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상관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며 이블리스가 의문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미네르바도 부하가 자신을 의심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순간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단호한 어투로 지시를 내렸다. "당장 휘하 기사단 단장들을 모두 소집해라/" "옛, 드디어 마음을 정하신 것이옵니까? 아무래도 코린트보다는 크라레스를 도와 주는 것이 좋겠지요?" 부하의 물음에 미네르바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느긋하게, 그러면서도 매우 음흉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니, 둘이서 싸우고 있는 동안 미란을 친다." 미네르바의 엉뚱한 말에 이블리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의견을 내놓았다. "저, 미란은 크라레스의 동맹국이옵니다. 그리고 코린트와도 친분을 쌓고 있사옵니다. 미란 을 친다면 둘 다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이블리스의 조심스런 항변에도 불구하고, 미네르바의 결심은 조금도 흔들릴 기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이 부족한 이블리스를 조롱하는 듯했다. "그건 상관없지 않나? 미란을 도와 줘야 할 그 둘이 치고 받고 있으니까 말이야." 이제야 미네르바의 의중을 눈치 챈 이블리스가 활달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옛, 전하." 사악한 미소를 짓는 아들 코린트는 크라레스와의 전쟁에서 불필요한 소모전을 치를 의향이 없었는지 아예 처음부터 군대를 투입하지 않고 기사단만을 투입했다. 그리고 그 기사단은 크라레스 영토 깊숙한 곳 까지 공간 이동으로 침투해 막대한 피해를 입힌 다음, 저녁쯤이 되자 재빨리 본국으로 후퇴 해 버렸다. 물론 이것은 모두 다크라는 존재를 염두에 둔 작전이었다. 군대는 원체 인원이 많아 기동성 에 있어서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단은 소수 정예이기 때문에 마법진을 이용해서 이동한다면 엄청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사단도 군대를 보 호한다는 굴레에 묶여 버린다면 뛰어난 기동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더군다나 다크를 피해서 재빨리 이동하려면 기동성을 최대한 간직하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상황을 판단할 만한 경험이 부족했던 아르곤과 알카사스의 기사단들은 그 날 저녁 늦게까지 자신들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는 크라레스의 기사단과 군대들을 상대로 계 속 드잡이를 벌였다. 코린트와 달리 아르곤과 알카사스의 경우에는 기사단과 함께 군대가 함께 이동해 들어오고 있었다. 코린트는 단순히 크라레스 제국의 멸망만을 원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크라레스의 드넓은 대지를 차지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 들은 여태껏 벌어졌던 모든 전쟁이 그랬듯 조금씩 확실하게 적을 섬멸하면서, 군대를 이용 하여 점령지를 견고하게 확보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크라레스의 풍요로운 서부 지역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기 시작한 레드 이글 기사단은 그날 늦게까지 클라레스 기사단과 접전을 벌였다. 그러다 상대가 꼬리를 말고 후퇴하자 더 이상 전투를 확대시키지 않고 진격을 멈춘 후 피로를 풀며 내일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 을 이용한다면 밤을 대낮처럼 밝히면서 전투를 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양쪽 모두 그렇게 무리해서까지 전투를 계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양쪽 다 낮에 있었던 전투의 피로를 푸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리고 다음날 있을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했고...... "아직 그거 다 못 끝냈어. 조금만 더 시간을....." 마법 구슬에 모습을 나타낸 아르티어스는 다크의 얼굴을 보자마자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 리기 시작했다. 최강의 종족이라 자부하는 드래곤의 이런 멍청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보며 다크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내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아뇨, 그 일은 이제 그만 됐어요. 지체하지 말고 지금 곧장 이쪽으로 오세요. 급한 다른 일 이 생겼어요." "응, 일은 무슨 일?" 썩 내키지 않는다는 아르티어스의 표정으로 봤을 때 근래 들어서 아들 녀석 덕분에 호된 경 험을 치렀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 아르티어스의 물음이 못마땅하다는 듯 다크는 단호하게 외쳤다. "당장 이리로 와요!" 다크의 '명령'에 아르티어스의 얼굴은 금세 죽을상이 되었다. 그러다 곧 체념한 듯한 표정으 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어찌하랴, 다 사랑하는 아들 녀석 때문에 겪는 수모이니. 으이그, 지지리도 궁상맞은 이놈의 드래곤 팔 자...... "아, 알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와 동시에 아르티어스의 몸은 희뿌연 빛 무리에 감싸졌다 곧 사라졌다. 그렇게 아르티어 스가 사라진 잠시 후, 다크의 옆에 또 다른 빛 무리가 생기더니 난처한 표정의 아르티어스 가 다시 나타나 서 있었다. "빨리 오라는데 왜 그렇게 잔말이 많아요?" "그, 그거야......" 하지만 다크는 궁색한 대답만 반복하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언제 그 랬냐는 듯 표정을 확 바꾸면서 친근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놀라운 표정의 변화 요, 확실한 분위기의 반전이었다. "아, 이왕에 오셨으니까 그만 됐어요. 실은 아빠와 연락하기 전에 부하들과 몇 가지 사소한 일을 의논하던 중에 아주 좋은 작전이 떠오른 것이 있는데요. 그것 때문에 아빠한테 부탁을 드릴 일이 있어서요. 헤헤......" 갑작스레 표정을 바꾸면서 미소를 짓는 다크를 보며 아르티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들 녀석의 부탁이 무엇이든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나도 한심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밤하늘에 두 개밖에 떠 있지 않은 달 가운데 하나를 가지고 싶다고 '부탁'한다고 하더라도 아르티어스는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허 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그 약속을 지켜 내기 위해 밤하늘로 날아올랐을 것이 다. 아르티어스는 언제 자신이 한숨을 내쉬었냐는 듯, 부드러운 눈길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마도 왕국 알카사스, 마도 왕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최신형 타이탄을 대량으로 보유해 주 의의 약소국들을 긴장시켰던 강력한 대국이었다. 알카사스에는 총 다섯 개의 기사단이 존재 했다. 근위 기사단은 1.5의 카르마 50기를, 그 외 4개 기사단은 1.32급의 가이아를 각각 50기 씩 보유하고 있었다. 6년 전부터 불이 붙기 시작한 군비 경쟁 때문에 차세대 주력 타이탄인 가이아를 대량으로 생산하기는 했지만, 알카사스는 훗날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이 얼마나 강력한 타이탄을 연구하고 생산하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실수요, 어리석은 판단이 아닐 수 없었다. 알카사스가 고작 카르마와 가이아를 생산하는 동안 상대국들은 최소 1.3급부터 시작하여 2.0 을 상회하는 초강력 타이탄들을 생산하고 있었으니 그런 사실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다음이었다. 알카사스의 원로원은 크라레스를 위험한 도박을 통해 성장한 '신흥 강국'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처음부터 크라레스가 코린트, 크루마, 알카사스, 아르곤으로 형성되어 있는 4대 강국 체계에 끼어들 정도의 실력이 있다고 믿지 않고 있었 다. 6년 전의 제1차 제국 전쟁에서 그들이 승자의 입장에 선 것도 크루마라는 강국의 뒤로 줄을 잘 섰기에 얻어진 행운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그들은 왜 크라레스가 제1차 제국 전쟁에서 승자의 대열에 설 수 있었는 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국경을 지키고 있는 크라레스의 기사단은 겨우 제6전대 하나 뿐이었고, 보유한 타이탄의 숫자고 겨우 30기뿐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들이 지니고 있는 타이탄은 은빛 찬란한 겉모양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성능 또한 가이아 급에 필적할 정 도로 뛰어났다. 더군다나 그것을 조종하는 기사들의 능력은 알카사스의 기사들에 비해 월등 하게 뛰어났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알카사스가 소위 강대국과 전쟁을 치렀던 것은 거의 반 세기 전. 그것도 당시 알카사스의 동진을 정면으로 막고 있었던 대제국 크라레스를 상대로 한 것 이었다. 그 전쟁에서 알카사스는 대패를 당했었고 그 후로 크라레스와의 충돌을 두려워해서 엔테미어 공국까지 완충 지대로 만들지 않았던가. 알카사스가 이렇듯 승리가 확실하지 않은 전쟁이라면 될 수 있으면 접전을 꺼렸던 것에 반 하여 크라레스는 어떻게 보면 매우 호전적이기까지 한 제국이었다. 40년 전의 치욕을 씻기 위해 국력을 비축했고, 또 그것을 제1차 제국 전쟁을 통해 완수해 내는 놀라운 재주를 부렸 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다크라는 변수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지만 크라레스 기사들의 충분한 실전 경험과 실력도 당당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크라레스의 제6전대와 알카사스의 레드 이글 기사단이 격전을 벌인 바로 그날 저녁, 레드 이글 기사단은 상대방이 예상 밖으로 강력하다는 데 무척 놀라고 있었다. "겨우 적 타이탄 30기를 상대로 이렇게 고전을 면치 못하다니, 정말 치욕스런 일입니다. 각 하." 젊은 기사가 투덜거리자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노년의 기사는 혀를 껄걸 찰 수밖에 없었 다. 절믕ㄴ 것들이 정말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쯧쯧,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렇게 말할 것 없다." "예? 하지만......" "크라레스는 예로부터 뛰어난 기사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강력한 대국이었다. 그들의 실 력은 결단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야." 그 노년 기사는 야전 천막의 천장을 날아다니고 있는 나방들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긴 듯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군. 과거 내가 처음 참전했을 때도 그랬었지. 하지만 병영의 분위기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었다. 그때는 초강대국의 대열에 들어 있는 크라레스 제국을 상대로 변방에서 힘을 키 워 온 우리들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기대감을 안고 전장으로 향해었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모두들 한 번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새롭게 세력을 키우는 크라레스 따위는 상대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크라레스는 수백 년 전부터 당당 하게 초강대국의 대열에 들어 있었던 대제국이다. 근래에 조금 힘이 쇠약했었다고 하나, 오 늘 보니 과거의 그 전성기로 다시 돌아간 듯했다. 결코 얕볼 상대가 아니야." 노년의 기사가 그렇게 말하자, 즉각 또 다른 젊은 기사가 질문을 던졌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게습니까? 각하." "으음." 노년의 기사는 우선 신음 소리부터 흘린 후 나직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적을 기습하여 힘껏 밀어붙였다고 하나, 사실 얻은 것은 거의 없다. 적 타이탄 14기를 파괴했다고 하지만, 적들의 방해로 인해 노획한 수는 겨우 4기 정도다. 노획한 타이탄의 수 가 적었던 것도, 전장을 이쪽에서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어. 그런데도 우리는 타 이탄 23기를 잃었다. 기습 작전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그 정도의 투혼을 발휘했다는 것은, 내 일부터는 전세가 어떻게 바뀔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아무래도 대책을 세워 두는 것이 좋겠지." "달리 생각해 두신 것이 있으십니까? 각하." "으음, 전투 첫날부터 치욕스런 일이기는 하지만 본국에 증원을 요청하는 것이 좋겠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노년의 기사와 대화를 나누었던 그 약간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의 청 년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적들은 지금 여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코린트와 아르곤을 막기에 급급해서 더 이상의 증원 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도 증원군까지 부른다면 폐하로부터 무능하다는 질책을 받으실 우려가 있습니다. 설혹 폐하로부터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하더라도 원로원에서 가만히 있 을까요? 그 마법사 늙은이들은 어떻게 하면 폐하의 힘을 줄일 수 있을까, 그것만 연구하는 것 같던데요." 노년의 기사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이의 눈을 잠시 바라봤다. 젊은이의 눈에는 상관 을 향한 우려의 감정만이 있을 뿐, 그 어떤 잔꾀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후 노 년의 기사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따위 질책 정도 받는 것은 하찮은 일이다. 또 원로원으로부터 무능하다고 손가락질을 받 아도 상관없어. 본관은 폐하께 하사받은 이 침공군이 승리를 얻을 수 있도록,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많은 병사들이 이 전쟁에서 살아 남아 고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줘야 하는 의무 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본관에게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야만 하는 과제인 것이야. 알겠는가?" "옛, 각하." "그리고 솔직히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이 병력만으로 적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 라는 자신감이 솔직히 서지 않는군. 아마도 내가 너무 늙은 탓인 모양이야."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 각하께서는 과거에 있었던 엔테린 평원 전투에 참가하셨던 분들 중 몇 되지 않는 생존자의 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누구도 각하께서 늙으셨다 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가장 앞장서서 적들과 격투를 벌이셨지 않습니까?" 엔테린 평원은 크라레스와 엔테미어 공국의 국경 부근에 있었다. 그리고 그 곳은 과거 알카 사스와 크라레스의 양쪽 군대가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했다. 그 전투에서 대패했던 알카 사스는 패배의 후유증과 함께 많은 유능한 기사들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지금 그 전 쟁이 벌어진 후 50여 년이 흘렀다는 점을 감안하다면 그 때의 참전 용사들이 지금까지 생존 해 있을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허허허, 늙은이를 보고 늙지 않았다고 하다니..... 그건 좀 심한 말이군. 그건 그렇고 테네 즈." "옛, 각하." "자네는 본국에 지원을 요청해라." "지원 규모는 어떻게 보고하면 되겠습니까?" "브르세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예, 각하께서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셨다면...... 기왕에 요청할 바에야 약간 과하기는 하 겠지만 1개 기사단 정도를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지금 정도라면 너무 과한 것 이겠지만, 크라레스 쪽에도 지원군이 도착한다면......" 브르세르의 조심스런 답변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노년의 기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본관도 그게 걱정이야. 좋아, 브르세르 경의 말대로 1개 기사단 정도를 청하기로 하세나." "옛, 각하." 노년의 기사는 이제 시선을 밤하늘 쪽으로 돌렸다. 여름이 지나면서 어느덧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곤충들이 등잔불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렇듯 많고 다양한 곤충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의 환경이 풍요롭다는 뜻이 아닐까. "과연 멋진 대지로군. 마법이 없이도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다니...... 이 땅을 위해서라면 피를 흘릴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어. 그렇지 않은가? 브르세르." "맞습니다, 각하." 알카사스의 침공군 총사령관인 클레멘스 후작은 테네즈를 시켜 대단히 사태가 어려우니 1개 기사단을 추가로 파병시켜 달라고 원로원에 정식으로 요청했다. 클레멘스 후작은 원로원 측 에서 국왕파인 자신에 대해 이번 요청으로 인해 뭔가 문책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각 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로원은 처음부터 추가 파병 요청을 이용해서 국왕파를 견제할 생각 따위는 가지 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보고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 그들은 벌써부터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그들은 클레멘스 후작의 요청이 날아오자마자, 곧장 원로 회의를 소집했다. 첫 날 전투가 예상 밖으로 격렬했고, 또 피해도 컸다는 것에 그들은 심각한 우려를 감추지 못 하고 있었다. "50여 년 전의 실패를 또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빨리 용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의장 님." "클레멘스 후작의 요청대로 빨리 1개 기사단을 파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로들 중에서 추가로 기사단을 파병하는 것을 반대하는 인물은 없었다. 그들 중에서 클레 멘스 후작이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엉터리로 보고한다고 믿는 인물은 한 사람도 없 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번 크라레스 침공군을 이끌고 있는 클레멘스 후작의 능력은 원로 파와 국왕파 양쪽 모두에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1개 기사단만으로 사태가 호전될까?" "우선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겁니다." "좋아, 그렇다면 콘도르 기사단을 그 쪽으로 보내기로 하세." "이번에도 국왕파의 기사단을 파병한다면 반발이 있을 겁니다. 젊은 것들은 우리들이 국왕 을 쓸데없이 견제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팔콘(FALCON)기사 단을 파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쉽게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야. 잘못하면 상호간에 다툼이 생길 우려가 있어. 적들 을 앞에 두고 반목하게 된다면 크게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지. 둘 다 국왕파로 하는 것이 문제가 없을거야." "하지만......" "아, 내가 직접 국왕을 설득해서 처리할 테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게나." "예, 알겠습니다." "의장님, 꼭 크라레스와 사생결단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클레멘스 후작의 보고에 따 르면 예상 밖으로 적이 강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 적들과 정면 대결을 벌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예전에 크라레스 제국와 전쟁을 벌이지만 않았어도 지금 본국은 더 욱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100명이 넘는 기사들을 잃었습니다. 그런 실 수를 다시 되풀이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뭔가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모양이지?" "예, 크라레스와 협상을 해 보는 겁니다." 예상 외의 의견에 의장은 미심쩍은 듯 물었다. 적을 상대로 선전 포고도 없이 전투를 시작 한 지 겨우 하루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협상을 들고 나왔으니 무리도 아니었던 것이다. "협상? 협상이라고?" "예. 비밀리에 사신을 보내어, 이쪽에서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면 기사단을 철수하겠다고 통 보하는 것입니다. 그놈들도 적이 하나 준다는데, 차마 거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밑 접촉을 해본다...... 그것도 괜찮군, 그래, 조건으로는 뭘 내걸 텐가?" "이쪽이 아주 유리하니까 뭘 내걸어도 상관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본국의 오랜 숙원을 이 룰 수만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타이탄은 재생산할 수 있지만, 한 번 죽은 기사를 다시 되살 릴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의장님." 그의 의견은 승리를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얻게 될 기사의 소모를 염려하고 있었다. 알카사 스는 마법사의 수에 비했을 때 우수한 기사의수가 너무나도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런 기사 들을 잃는다는 것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으음...... 자네 의견에도 타당성은 있군. 그래, 자네들의 생각은 어떤가?" 의장의 물음에 원탁에 앉아 있던 다른 원로들도 찬성을 표했다. "저희들도 찬성입니다. 싸우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그리고 나중에 가서 코린트와 아르곤이 크라레스를 멸망 직전까지 밀어 붙인다면, 그때 다시 참전 하여 스바시에를 획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모두의 생각이 그렇다면, 좋아! 사신을 파견하기로 하지.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서 내일 새 벽에 콘도르 기사단을 추가로 파병하기로 하세나. 그 편이 안전하지 않겠나?" "그게 좋겠습니다." 별게 다 거치적거리는군 다음날 새벽, 총사령관인 루빈스키 공작의 부재로 인해 작전 회의는 부사령관이 다크에 의 해 주도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시에 의해 급히 소집된 고위급 기사들과 장군들을 쭉 훑어 본 후 오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경들을 소집한 것은 괜한 작전 따위나 의논하자고 부른 것이 아니다." 거의 본 적도 없는 새파란 소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기에, 그곳에 모인 대부분의 인물들은 거의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랄 수 없었던 것은 사 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녀의 모습 자체를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들이 감히 그녀를 향해 얼굴만 찌푸릴 뿐,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지닌 '공작'이라는 어마어마한 작위와 '부사령관'이라는 직위 때문이었다. "아그리오스 후작!" "예, 전하." 아그리오스 후작은 키메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크루마 제국에 파견 나가 있었지만, 그 배후가 크루마로 밝혀진 데다가 갑작스레 전쟁까지 벌어졌기에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하는 것 을 포기하고 귀국해 있었다. 그는 전쟁이 벌어지면 자신에게 주어진 스바시에 기사단을 이 끌고 싸워야 하는 최우선적인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은 기사단을 거느리고 알카사스와 접전을 벌이고 있는 제6전대와 합류하라. 이후로 서쪽 국경에서 일어나는 전투는 경에게 일임하겠다." "옛, 전하." "준비가 되는 대로 즉시 출발하도록!" "옛,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아그리오스 후작은 시원스럽게 대답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걸걸한 목소리로 답을 한 후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있는 아그리오스 후작을 빤히 바라보던 다크가 궁금 하다는 듯 물었다. "경은 지금 뭘 기다리고 있나?" "예.......?"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나?" "아닙니다. 이미 모든 준비는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준비가 되는대로 즉시 출발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냥 앉아 있는 거야?" "옛, 전하." 얼굴을 붉히며 급히 밖으로 뛰어나가는 아그리오스 후작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다크는 '멍청한 녀석!' 이라고 중얼거린 후에 다시 시선을 젊은 기사들쪽으로 돌렸다. "쟈므란 경!" "옛, 전하/" "경은 기사단을 이끌고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을 도와라. 이후로 동쪽 국경에서 벌어지고 있 는 모든 작전에 대한 지휘권은 크로아 후작에게 위임한다." 다크의 명령에 쟈므란 백작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저...전하, 하지만......" "뭐냐?" "제 휘하의 기사단은 전쟁 초기부터 치열한 접전을 거쳤기에 많이 소모된 상태이옵니다. 그 점을 참고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쟈므란의 말에 다크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금세 무표정하게 표정 관리를 한 다음 재빨리 주위를 훑어 보았다. 주위에 앉아 있는 장군이나 기사들은 총사령관인 그녀가 그런 기초적인 것들도 모르고 있다는 것에 한심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다크는 될 수 있으면 표정을 변화하지 않고 다시 쟈므란 백작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런가? 지금 타이탄은 몇 기나 남아 있나?" "옛, 8기이옵니다." "음, 그런가? 그렇지, 피해를 당한 것을 생각하지 못했군. 론가르트 경!" 다크의 호명에 근위 대장이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는 즉시 대답했다. "옛, 전하." "현재 본국의 전력에 대해 그대가 간단하게 설명해 주게.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는 장군들 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일세." 다크의 말에 참석한 기사와 장군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작자신이 몰라서 물어 보는 주제 에 남에게 덮어씌우는 그 철면피한을 비웃는 것이었다. "제1, 2전대는 아르곤의 침략군을 상대로 분전중입니다. 그리고 제6전대는 알카사스의 침략 군을 상대로 싸우는 중입니다. 양쪽 다 힘든 전투를 치르고 있기에 원군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린트의 국경에 주둔 중이던 제3, 4전대는 코린트 군의 기습을 받아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습니다. 또 7, 8전대의 경우 전쟁 초기 탄벤스 작전 때 상당히 소모된 상 태입니다. 그렇기에 현재 본국이 보유한 여유 전력은 제5전대, 근위대, 스바시에 기사단, 치 레아 기사단이 전부인 실정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이렇게 하기로 하지. 제3, 4전대의 잔여 세력과 7, 8전대를 합치는 것이 좋 겠군. 그것을 7전대로 이름 붙이고 쟈므란 경이 맡아 주게. 그리고 라테민 경은 부전대장의 직책을 주겠네. 서로 잘 해보도록!" 그녀의 말에 쟈므란 백작과 라테민 백작은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옛, 전하." "쟈므란 경은 제7전대를 거느리고 크로아 후작에게 신고하라. 이후, 그의 지휘를 받으면 될 것이다." "옛, 전하." "지금 즉시 출발하도록!" 상관의 단 한마디 명령에 둘 다 전대장이었다가 한 명은 전대장, 다른 한 명은 부전대장으 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일단 총사령관의 직책으로 내린 명령이었기에 그에 이의를 제기 할 수는 없었다. 쟈므란 백작과 라테민 백작은 곧바로 일어서며 주위 사람들에게 인사를 보 낸 후 서둘러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런데 이들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한 늙은 장 군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전하, 그렇지 않아도 본국의 기사단 전력은 매우 약화된 상태이옵니다. 그런데 또다시 수도 에 남아 있는 기사단을 분산시킨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결정이옵니다. 거기에다가 오늘 아 침에 크루마가 본국의 동맹국인 미란을 기습했다고 하옵니다. 그에 대한 대비도......" 하지만 다크는 그 늙은 장군의 의견이 끝까지 들어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단번 에 말을 끊어 버리며 호통을 쳤다. "조용히 하라. 내가 처음에도 말했듯이 지금 이 자리는 경들의 의견을 듣고자 모인 자리가 아니다. 알겠는가?" 다크는 불만이 가득한 장군들의 얼굴을 쭉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프로이엔 경!" "옛, 전하." "치레아 기사단을 제외한 수도에 남아 있는 모든 전력을 경에게 주겠다. 경은 그들은 이용 하여 수도 방어에 만전을 기하라. 소소한 일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으니 사소한 것은 경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치레아 기사단을 제외한다면 남은 타이탄 전력은 근위대와 제5전대뿐이었지만, 상관이 이렇 게 말하고 보니 꽤 많은 병력이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는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프로 이엔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옛, 전하." "치레아 기사단에는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라고 일러 놓았다. 이제 본국의 기사단 전력이 존재하는 곳은 세 곳으로 한정되었다. 동쪽이나 서쪽에서 지원 요청이 온다 면 내가 직접 치레아 기사단을 이끌고 그곳으로 달려갈 생각이다. 그러니 요청이 오는 즉시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마법사들은 준비 태세를 유지해 주기 바란다." 여기까지 말한 다크는 장군들을 쭉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장군들은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기사단들을 도와 줄 것을 명한다. 하지만, 적 의 군대와의 접전은 가능한 한 피하도록 하라." "예." 장군들의 대답에는 불만이 배어 있었지만 다크는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마쳤다. "토지에르 경이 부재중이기에 힘들겠지만, 마법사들은 타이탄의 재생산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그리고 본국에 남아 있는 병력은 적들에 비해서 매우 소규모다. 그 적은 병력으로 세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우세한 적들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공간 이동 마법을 십분 활 용한 기사단의 운용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마법사들은 기사단의 요청이 있을 때 그것을 충분히 지원해 줄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유지하도록 하라." 다크의 말에 긴 탁자의 뒤편에 앉아 있던 네 명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역시 전쟁 은 기사가 하는 것이지만, 마법사가 없다면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을 총사령관을 잘 알 고 있다고 생각하며...... "예, 전하." "자자, 이제 탁상공론은 그만하고 모두들 돌아가서 맡은 바 임무를 처리하라." 어떻게든 대충대충 회의를 끝낼 생각이었는지 다크는 그렇게 말했지만, 회의중에 말을 건냈 던 그 장군은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고 다시 따지고 들었다. "전하, 미란의 처리에 대해서도 하명을 해 주셔야 하옵니다. 지금......" "경은 지금 본국에 미란을 도울 여력이 있어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물론 아니 옵니다. 하지만 미란은 과거 본국에 많은 원군을 파병해 주었던 우방인 것은 분명하옵니다. 그런 그들을 외면한다는 것은......" "젠장, 별게 다 거치적거리는군. 내가 그걸 모르는 게 아니야. 하지만 본국에는 여분의 기사 단이라고는 거의없는 실정이야. 경이라면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나?" "예, 전하의 말씀대로이옵니다. 미란을 향해 정면 침공을 개시하고 있는 크루마의 군대를 막 아 내려면 기사단 한두 개 정도 파병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닐 것이옵니다. 또 현재 본국에 그 정도의 여유 전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씀이옵니다. 그러므로 제 의견은 미란에 기사단 을 파병해서 크루마를 물리치자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적이 원체 강한 만큼 사방에서 압박한다면 미란의 왕족과 그 측근들조차도 국외로 탈출하 기 힘들 것이옵니다. 상황이 이러하오니, 본국에서는 그들이 탈출하여 후일을 기약할 수 있 도록 조금만 도와준다면 미란에 대한 의리는 지키는 것이 될 것이옵니다. 또 그 정도를 시 행하는 데는 1개 기사단이면 충분하옵니다." "좋아, 그런 정도라면 별로 어렵지 않겠군. 파견했던 기사단이 장시간 미란에 묶이는 것이 아니고, 또 적들과 정면 대결할 필요도 없겠군. 안 그런가?" "예, 하지만 일단 파병하실 결심이시라면 최대한 빨리 기사단을 보내야 할 것이옵니다. 크루 마의 기사단을 막기에는 미란의 기사단이 턱없이 약하니까 말이옵니다. 빨리 기사단을 파병 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좋아, 좋아. 그렇다면 지금 당장 보낼 수 있는 기사단이라면......맞아, 그게 있었지. 카슬레이 경!" "옛, 전하." 다크가 카슬레이 백작을 부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제의 실패 때문에 열이 받아 있던 다 크의 명령으로 치레아 기사단은 그 순간부터 출동 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적 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함과 동시에 다크가 그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뛰어가기만 하면 바로 목적지로 공간 이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기사단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출동을 위한 아무런 준비도 갖추고 있지 않았기 에, 인원을 점검하고 보급품을 갖추고 마법사를 할당받는 등의 준비를 하다 보면 보통 30분 에서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경은 기사단을 이끌고 미란의 귀족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라. 준비는 갖춰져 있을 테 니 지금 당장 출발하라." "옛, 전하." 카슬레이 백작이 회의실 밖으로 뛰어나간 후 다크는 아름다운 금발을 단정하게 기르고 있는 젊은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제5전대의 대장이었다. "래리츠 경." "옛, 전하." "치레아 기사단이 돌아올 때까지 경의 기사단이 그 대역을 해 줘야 겠어. 경의 기사단이 출 동 대기 태세에 들어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지?" 래리츠 백작은 잠시 생각에 잠긴 다음, 신중하게 대답했다. 우선은 자신의 부하들을 끌어모 으는 게 순서였고, 또 단독으로 작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식량 따위의 보급도 받아야 했다. 또한 그것과 병행하여 마법사들에게 이동 마법진도 구축을 지시해 두어야 했다. "옛, 약 30분은 걸리옵니다. 딴 것은 시간을 줄일 수 있지만, 이동 마법진을 구축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30분 동안은 발이 묶이게 되는군. 좋아, 될 수 있다면 좀 더 빨리 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하게." "옛, 전하." 알카사스 군의 집결지. 이른 새벽인데도 병사들은 부지런히 천막을 걷어 이동준비를 서둘렀 고 그 외에도 식사 준비를 하는 등의 일로 온통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런 병사들의 움직임 을 바라보고 있는 노 기사의 뒤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넨 후작 각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테네즈의 말에 노 기사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원로원에서 의외로 순순히 이쪽의 요청을 받 아들여 준 것이었다. 더군다나 라이넨 후작이라면 그가 제일 신뢰하는 기사가 아닌가. 생각 지도 않은 선물을 받은 것처럼 흐뭇한 생각까지 들었다. "오오, 그래? 빨리 모셔 오도록 해라." "옛." 곧이어 테네즈의 안내를 받으며 당당한 덩치를 자랑하는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활 기찬 걸음으로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각하." 노 기사는 라이넨 후작의 손을 꽉 잡으며 반겼다. "그래, 잘 와 주었네. 자, 앉게나. 이봐, 차를 가져오너라." "옛." "의외로 원로원에서 쉽게 허가를 해주었군. 나는 며칠 늦추면서 잔뜩 ㅇ를 태울 줄 알았는 데 말일세." "아마 그렇게 쉽게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응? 자네는 뭔가 달리 생각하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노인들은 저까지 이곳으로 보내어 폐하의 힘을 더욱 약화시키겠다는 속셈이겠지요. 지 금 전선에 파병된 병력들은 모두 다 폐하께 소속된 부대들이 아닙니까." "으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관민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닐까? 크라레 스와 싸우는 것은 본국만이 아니야. 코린트, 아르곤도 함께 대군을 투입하고 있다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크라레스가 그리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거야. 승리를 거둔다면 그 영광은 당연히 폐하께로 돌아갈 테고, 폐하의 입지는 더욱 강해지지 않겠나?" "이번 전쟁은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셔서 될 일이 아닙니다. 결국에 가서는 승리를 획득하게 되겠지만, 그 과정이 문제지요. 전쟁이 시작된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상당수의 전사자들이 나왔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폐하를 받드는 우수한 기사 들을 많이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에 가면 전쟁에 뛰어들지 않은 원로원 쪽만 이익을 얻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라이넨 후작이 전사자 운운하자 미구엘 후작의 안색은 갑자기 흐려졌다. 그도 크라레스가 손쉬운 상대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끼 때문이었다. 숫자는 저쪽이 적었지만, 기사들의 실력은 이쪽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런 상대가 끈질기게 이쪽을 물고 늘어진다면 사상자의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자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왕에 이리로 파견되어 왔는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나는 딴 사람이 오는 것보다 자네가 와 줘서 더욱 든든하네.아무래도 손발이 맞는 사람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이 편하니까 말일세." "그건 그렇고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염두에 두신 작전은 있으십니까? "이미 생각해뒀지. 이봐, 테네즈. 작전관을 불러 와라." "옛, 각하." 곧 작전관이 들어오자, 미구엘 후작은 작전관에게 계획한 것들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작 전고나은 지도의 곳곳을 짚으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 보이는 것이 제라린 성입니다. 알카사스에서 크라레인 시로 연결되어 있는 대로상에 위치한 강력한 방어 거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전선에서 패퇴한 적들은 이곳에서 전열을 재 정비하여 방아 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만큼 주 공격로의 방향을 제라린 성 쪽 으로 잡았습니다. 이곳으로부터 60킬로나 떨어진 곳인 만큼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하며 천 천히 이동하여 곧장 포위 공격을 펼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럴 것이 아니라, 제라린 성으로 단숨에 공간 이동하여 공격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각 하." "글세...... 그 방법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좋은 방법 같지 않군." "어쨰서 말입니까? 적은 겨우 1개 전대에 불과합니다. 놈들의 예상 집결지에 기습을 가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만약 후속 부대가 마음에 걸리신다면 콘도르 기사단만으로 결행하겠습 니다." "물론 후속 부대에 적이 기습해 올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걸린 것은 아닐 세. 솔직히 크라레스의 기사들은 아주 실력이 좋아. 만만히 볼 상대는 결코 아니야." "하지만 본국의 기사단도 강합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각하." "아니, 내가 더욱 염려하는 것은 그것이 아닐세. 지금 크라레스는 본국하고만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코린트도 상대해야 하고, 또 아르곤과도 싸워야 할 형편이야. 그러니 무리해서 적들과 결전을 벌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코린트가 계속 압박을 가한 다면 자동적으로 크라레스는 무너질 텐데 왜 우리가 먼저 무리하게 전쟁을 벌인단 말인가."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는 거야. 이쪽이 너무 안 움직이면 코린트에서 의심하겠지. 그러니 까 아주 천천히 이쪽에서도 크라레스를 침공중이라는 것을 코린트에 보여 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 나머지는 코린트가 알아서 하겠지. 이번 전쟁을 일으킨 것도 코린트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각하." "자, 경의기사단도 출발 준비를 갖추도록 조치해 두게. 식후에 출발하여 20킬로 정도 전진할 까 생각중이야. 그러니까 제라린 성에서의 전투는 아마도 3일 후가 되겠지." 출세 지향형의 인물 크라레스 제국의 동쪽 국경 지대.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이곳은 크라레스 제국의 영토였지 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려졌다. 침략해 온 아르곤 군대를 격퇴하지 않는 한, 이곳은 아마 도 영원히 아르곤의 새로운 영토로 기록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크라레스로서는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격퇴하는 것이 결코 손쉬운 일은 아니었다. 과거 코린트 제국의 전성시대 이전에 동쪽 대륙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아 르곤이었다. 비록 크로노스 교가 들어온 이래 상대적으로 힘이 쇠퇴했다고 하짐나 아르곤 제국이 지닌 저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아르곤 제국은 크라레스와의 전쟁에 2개 성기사단, 총 200명의 성기사와 60기의 타이탄, 그 리고 4개 보병 사단과 2개 기병 여단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만약 이 전력으로도 어려울 경 우를 대비하여 본국의 4개 성기사단에 동원 준비령이 내려져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더하여 5개 용병 기사단 중 2개가 이미 국경 쪽으로 이동을 완료해 놓은 상태였다. 타국의 입장에 서 봤을 때 이런 규모의 벙력이라면 엄청난 전력이었지만, 아르곤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그 저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기사단들을 이번 전쟁에 퍼부을 수 있을 정도로 아르곤의 인적, 물적 자원은 풍부했다. 과거 아르곤 제국의 성기사단은 2000명의 성기사로 구성되었었지만, 그린 드래곤을 잡기 위 해 침입했던 크루마 제국의 기사단과 충돌한 후 성기사의 숫자만 늘려봐야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1000명으로 줄였다. 그들이 성기사의 숫자를 그렇게나 많이 할당했었던 이유 는 성기사들의 능력이 엄청나다는 그릇된 판단 덕분이었다. 타국에서 사신들의 호위로 그래 듀에이트 급 기사들이 방문하면 관례에 따라 친선 비무회를 가졌고, 그 비무에서 성기사가 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때문에 아르곤은 자국이 보유한 성기사의 능력과 힘을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크루마와의 충돌로 인해 그들의 믿음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말았다. 그제 야 주교원은 현재 강대국이라고 불리는 국가들이 실제 얼마나 강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런 사실을 깨닫자 주교원은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대량으로 타이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아르곤에는 마법사는 없었지만, 대신 엄청난 자금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 게 하여 현재 10개뿐이었던 성기사단은 무려 19개로 늘어나 있었고, 타이탄 총수는 무려 568기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 엄청난 것으로 느껴지는 타이탄 568기라는 숫 자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슴 아픈 사정이 있었다. 엄청난 재정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타이탄의 수는 막대하게 늘려 놓았지만, 타국들처럼 저급 타이탄을 폐기하지 않았기에 단순히 숫자만 크게 불려 놓은 상태였다. 타이탄의 질도 질이었지만, 그것을 조종하는 기사의 능력에는 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타국의 경우, 타이탄을 지급받는 기사의 대부분은 그래듀에이트 급을 상회하는 실력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래듀에이트 급 기사들의 수가 타이탄의 숫자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타이탄을 지급받는 인물들을 따로 오너 급 기사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르곤의 성기사들 중에 그래듀에이트 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력자는 겨우 422명 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실력이 떨어지는 인물들에게까지 타이탄을 할당해도 정수를 채울 수 는 없었다. 그래서 주교원에서는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50명이나 되는 용병 기사들을 각지에서 대량으로 채용하여 그 공백을 채웠다. 물론 용병 기사들에게 지급된 타이탄은 라 르곤이나 타비곤 급이었는데,그런 정도의 타이탄도 과분할 만큼 용병 기사들의 실력은 형편 없었다. 진짜 뛰어난 실력자들이라면 벌써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서 기사 생활을 하고 있 지, 용병 따위로 떠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타국의 경우 저급 타이탄을 폐기하고 그것을 재활용하여 더욱 강력한 신형 타 이탄으로 교체하는 데 반해, 아르곤은 형편없는 저급 타이탄까지 모두 가동하려고 들까? 그 것도 용병들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매우 어려운 문제 같지만, 의외로 해답은 간단한 곳에 있었다. 바로 기동성의 문제 때문이었 다. 아르곤에는 마법사들이 없었고, 신관이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즉 아르 곤의 기사단은 타국의 기사들처럼 여기저기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여 민첩하게 돌아다니 면서 작전을 벌일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아르곤은 이 점에 대해서 그렇게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크 로노스 교를 국교로 정한 후부터 타국을 침공하지 않고 줄곧 아르곤 평원이라는 한 지역에 만 뭉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득이하게 전쟁이 필요한 경우에는 기습전을 감행했기 때문에 마법사의 도움 없이도 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구태의연한 방법이 통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며 태양이 떠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이며 오늘 있을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20여 명이나 되는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마차가 멈추자 성기사 한 명이 재빨리 그 쪽으로 다가가 마차의문을 열 었다. 마차 안에서는 아주 젊은 사제가 한 명 걸어 나왔는데, 보통의 사제들이 입고 있는 복 장에 비해 로브에 붉은 줄이 하나 그어져 있는 점이 이색적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 사제를 향해 성기사가 매우 존경 어린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보아 외모와 달리 꽤 신분이 높은 존재인 것만은 분명했다. 젊은 사제는 건물 내에 위치한 한 방 으로 안내되었다. 그 방 안에는 10여 명이 넘는 성기사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젊은 사제는 방 안으로 들어서며 로브에 달린 모자를 뒤로 젖히고 웅성거리는 성기사들 중의 한 명에게 아는 척을 했다. "바쁜 모양이군, 레가르 형제." "아니, 어서 오십시오. 포스타나 대신관님. 기별이 없어서 마중 나가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그런데 대신관님께서 어떻게 이런 변방까지 나오셨습니까?" 크라레스 침공군 선발 부대의 사령관은 크로미아 성기사단의 단장인 레가르였다. 레가르는 기습 공격을 위한 2개 성기사단을 거느리고 왔고, 오늘 아침에야 후속 부대들 가운데 하나 인 1개 성기사단이 더 도착한 상태였다. 크라레스의 저항이 꽤 완강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더 많은 성기사단이 투입될 것이 확실했다. 현재까지는 이곳 전선에 있는 성기사단 단장들 중에서 레가르가 가장 선임자였기에, 좀더 계급이 높은 인물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가 이 곳 전선의 사령관인 셈이었다. 그런 레가르가 마중까지 나가야 하는 이 젊은 사제는 겉모습과는 달리 매우 나이가 많았고, 그 지위 또한 대단히 높아서 대신관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주교원은 250명이 나 되는 대신관과 열다섯 명의 주교에 의해 구성된다. 그렇게 따진다면 포스타나 대신관은 겨우 250명씩이나 되는 인물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또 주교원내에서 그의 지위는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주교원 밖으로 나왔을 때 그의 윗자리에 놓일 수 있는 인 물은 거의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레가르는 왜 전쟁터인 이곳에 자신보다 월등한 직위를 가지고 있는 대신관이 나타난 것인지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실상 사제 계급은 전쟁과는 무관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쟁터에 서 작전 지휘권을 맡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포스타나 주교가 단독으로 여기까 지 올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갑작스런 방문은 주교원의 결정일 텐데, 그가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보낸 것인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허허허, 무척 바쁠 텐데 일부러 마중까지 나올 필요가 있겠는가. 레가르 형제, 나는 이곳 점령지의 개종을 담당하기 위해서 왔다네." "개종......이라구요? 하지만 개종 문제라면 저희들과 함께 사목관이 몇 명의 사제들을 모시고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야 소규모의 점령지라면 사목관들로 충분하겠지만, 이제 점령지가 얼마나 더 넓어질지 알 수 없는 상태니까, 서둘러서 내가 온 것이라네." 이제야 레가르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점령지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개종시켰느냐......, 이것은 나중에 포스타나 대신관의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아르곤처럼 타국을 오랫동안 침략하지 않아 모든 것에 변화가 적고 지극히 안정된 사회에서는 눈에 띄 는 업적을 쌓기가 힘든 것이 당연했다. 250명이나 되는 대신관들 중에서 다만 열다섯 명 만 이 주교가 될 수 있었기에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업적으로 쌓아 두는 것이 유리했 다. 아직 점령지가 그다지 넓지 못했기에 다른 대신관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슬쩍 주교원을 움직여 이곳으로 달려온 것을 보면 포스타나 대신관은 대단한 출세 지향형의 인물임이 분명했다. "아, 예." "그래, 전황은 어떤가?" "적의 저항이 예상 밖으로 거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적의 기사단이 길목을 딱 가로막고 있는데,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대단히 강력합니다. 하지만 오늘 새벽에 지안디 기사단 이 새로이 도착했고, 곧이어 3개 성기사단이 더 도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경에는 2개 용병 기사단이 대기중이구요. 그렇기에 전세는 대단히 낙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대제 국 코린트를 제치고 얼마나 많은 점령지를 차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믿음직스럽게 들리는군. 그렇게 많은 기사단들이 동원된다면 내 부탁을 들어주기도 그렇게 어렵지 않겠군." "뭔데 그러십니까?" "성기사를 좀 지원해 줬으면 하네. 아무래도 포교를 하면서 크로노스 교단의 위엄을 보이려 면 성기사가 좀 필요하지 안겠나?" 상대는 출세 지향형의 인물인 데다가 지위가 높은 대신관이었다. 지금 슬쩍 인연을 만들어 두는 것도 별로 나쁘지 않을 것이기에 레가르의 대답은 매우 시원스러웠다. "예, 지원해 드리게습니다. 몇 명이면 되겠습니까?" "한 열 명 정도면 되겠군." "아, 열 명 가지고 되겠습니까? 20명을 차출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보내 드 리면 될까요? 지금은 대부분의 인원이 전장에 나가 있기에 당장은 빼기가 힘들어 드리는 말 씀입니다." "아, 그렇게나 협조를 해준다니 정말이지 고마울 뿐이구먼. 내 결코 잊지 안겠 네." "별 말씀을...." "바크론 요새에 여장을 풀 생각이니까, 그리로 보내 주게." "예, 대신관님." 레드 이글과 콘도르, 2개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알카사스 군은 천천히 크라레스의 중심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알카사스 군의 본대에는 여러 대의 마차들이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 마 차 안에는 마법 통신을 위한 설비와 함께 마법사들이 동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전방에 부챗살처럼 퍼져서 이동하는 정찰조들과 각 기사단에 다섯 몇씩 배정되어 있는 용기 사들에게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가 취합되어 사령관과 작전관에게로 전달되었다. 아르곤의 경우 와이번에 용기사 외에도 마법사를 함께 태웠다. 물론 빠른 연락을 위해서였 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점에 부딪히게 되었다. 아무리 와이번이 크다고 해도 그 위 에 만들 수 있는 한정된 공간으로는 도저히 통신용 마법진을 그릴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렇기에 와이번에 탑승하는 마법사는 수정구만 가지고도 통신이 가능한 실력이 있어야만 했 다. 하지만 타국의 경우 우수한 마법사들을 그런 통신용으로 할당할 처지가 못 되기에, 마법 사들을 와이번에 태우면 얼마나 유용한지를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차 옆에서 말을 몰며 나란히 가고 있던 전령들 중의 한 명이 마차 안에서 건네지는 종이 를 움켜쥔 후 급히 사령관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다. "제라린 성으로 간 용기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각하." 미구엘 후작은 전령에게서 종이를 낚아챈 후 급히 읽었다. 하지만 정작 그 종이에 기록된 정보는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적들의 방어 거점이 되어야 할 제라린 성이 이토록 조용하다니......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왜 그러십니까? 각하." 중요한 방어 거점이라면 함부로 비워 두거나 경계를 소홀히 하는 바보들은 없었다. 더군다 나 지금은 전쟁이 한창중인데 정작 요새의 분위기는 평온하다 못해 아예 텅 빈 듯한 느낌을 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제라린 성 쪽은 아주 조용하다는군. 뚜렷한 전투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말 이야. 아무래도 크라레스의 방어 거점이 제라린 성이 아니라 딴 곳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 서야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지." "제라린 성이 확실합니다, 각하. 이곳 전선에서 패퇴한 군대를 재편성하는데 거기 외에 더 적합한 곳은 없습니다. 그 정도 거리쯤은 떨어져야 방어선을 새로이 구축할 만한 시간적 여 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군." 이때 두 번째 전령이 달려와서는 급히 쪽지를 전달했다. 이번에는 더 긴급한 내용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본국으로부터 긴급 정보입니다." "줘 보게." 홱 낚아채서 쪽지를 읽어 보던 미구엘 후작의 손이 갑자기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눈치 챈 라이넨 후작이 급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십니까? 각하." "스바시에 기사단이 이쪽으로 왔다는 정보일세. 코린트 쪽에서 입수해 건네준 정보인데, 거 의 정확할 것이라는 예측일세." "스바시에 기사단이라면, 그 쥬리앙 후작이 이끄는 기사단 말입니까?" "그렇네. 본국의 정보로는 근위대 다음가는 정예 부대로 추정되고 있어. 비록 타이탄이 20기 밖에 안 되는 소규모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야. 거기에다가 쥬리앙 폰 아그리오 스 후작이라면 문무가 뛰어난 사람이야. 아무래도 힘들겠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후퇴하세." "예?" 라이넨 후작의 표정에서는 일순간 당혹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들은 이 일대 지리를 잘 몰라. 그런데 적들은 전투력이 뛰어난 소규모 기사단이야. 그 렇다면 놈들은 치고 빠지는 전술을 쓸 것이 분명한데, 이런 상황에서 더욱 깊게 들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후퇴까지 하실 것은 없지 않습니까?" "아니, 후퇴하는 것이 좋겠네. 괜히 무리해서 대적할 상대가 아니야. 어차피 녀석들은 이곳 전선에 스바시에 기사단 같은 강력한 전력을 오랜 시간 박아 둘 수 없는 처지야. 며칠 지나 지 않아 코린트 쪽으로 이동해야만 하겠지. 그렇지 않은가?" 현재의 크라레스 전력을 그런대로 정확히 파악하고 하는 말이었다. 기사단의 실력은 무서울 정도로 뛰어났지만 세 나라의 협공을 받고 있는 처지에서 한정된 기사단으로 일정한 지역에 서 장시간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우선은 정면 대결을 피해 전력의 소모를 막 은 다음 적이 다른 전선으로 이동했을 때 기회를 엿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후퇴하기로 하세. 괜히 피를 흘려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네." "알겠습니다. 부하들에게 지시하겠습니다." 인간의 대역을 맡은 골드 드래곤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미카엘의 물음에 다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누군지 모르는 첩자는 찾아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코린트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만은 없었다. 그래 서 다크는 불쌍한 아버지를 불러다 엉뚱한 일을 맡기고야 말았다. "이렇게라도 해야지. 언제까지 녀석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다크는 어제 저녁, 아르티어스를 불러 자신의 대역을 부탁한 후 가장 믿을 수 있는 동지들 인 팔시온, 미카엘, 미디아, 가스톤만을 거느리고 이쪽으로 와 있는 상태였다. 아르티어스는 오랜 시간 다크와 함께 지냈었기에, 다크의 습관이나 행동거지, 말투 따위를 잘 알고 있었 다. 그렇기에 그가 다크의 대역을 하는 한 들통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아르티어 스는 드래곤이 아닌가. 다크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꾸미고 있을 수 있다는 장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튼 이 불쌍한 드래곤은 이제 아들 덕에 훌륭한 광대 노릇까지 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다크는 안심하고 대역을 맡긴 다음 이렇듯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었다. "에구구, 허리야. 오랜만에 말을 탔더니 허리가 쑤시는군. 승마를 오래 하는 것은 나같이 고 귀한 분께는 조금 무리야."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주물러 대며 투덜거리는 미카엘을 보며 미디아가 곱지 못한 시선을 보냈다. "헛소리하지 마. 눈은 그렇지 않은데 입으로만 투덜거리고 있잖아. 누가 모를 줄 알아?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갈 거야?" 미디아의 물음에 다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물론 코린트의 영내로 들어섰으니 그 뒤는 당연한 것 아니겠어?" "어떻게?" "일단 놈들의 집결지를 찾아 낸 후 박살내는 거야. 그만큼 당했으면 갚아 주는 게 도리지." "겨우 우리들만으로?" "그거야 붙어 보면 알겠지. '겨우' 인지 '씩이나' 인지......" 다크의 대답에 황당함을 느끼면서도 미디아는 선결 조건부터 말했다. 다크의 말대로 붙어보 면 알겠지만, 어디 있는 줄 알아야 붙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언제부터인가 놈들은 다크 와는 따로 철저히 움직였다. 찾아가면 도망가고, 없으면 찾아오고...... "하지만 어디에 집결해 있는 줄 알고......" 그러자 그런 걱정 따위는 할 필요 없다는 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다크가 말했다. "헤헤헤, 그거야 다 알아내는 수가 있지. 어젯밤에 열심히 궁리해서 방법을 다 생각해 뒀어. 이젠 녀석들도 벗어나지 못할걸." "어떻게?" 미디아의 물음에 다크는 아주 자신감있게 대답했다. 자신의 의견이 곧 진리라도 되는 것처 럼 말이다. "내가 찾아 낼 수 없으면 놈들이 나를 찾아오게 하라. 그래 방법이지." "그렇다면......" "근처에 어디 큼직한 요새나 성이 있으면 그걸 박살내는 거야. 그러면 놈들이 상부에 지원 을 요청할테고, 그러면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 아니겠어?" 다크의 말이 지니고 있는 무시무시한 허점을 생각하면서 팔시온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외 쳤다. "진짜 억수로 많이 몰려오면 어쩔 거야? 우리는 겨우 네 명밖에 안되는데." "언제는 그런 거 생각하면서 싸웠냐? 자, 잔소리 말고 얼른 가자구." 태평스레 말을 마친 후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가는 다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팔시온이 고 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투덜거렸다. 언제나 늘 이런식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으면서도 단순 무식하게 저지르고 마는 게 벌써 몇 번째였던가. "미치겠군. 이런 식이라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거야." 매우 튼튼하고 정교하게 세공된 문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던 경비병은, 근위 대장인 프로 이엔 폰 론가르트 백작이 나타나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론가르트는 즉시 인사를 받아 준 다음 그대로 멈추어 섰다. 그는 처음부터 그냥 통과해서 지나갈 생각이 아니었다. 이 방안에 있는 사람과 만나려고 이곳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전하께 만나기를 청한다고 전해 주게." "예." 경비병은 짧고 낮게 대답한 후, 즉시 문 뒤쪽에서도 충분히 들리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전하, 근위 대장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라고 해라." "예." 문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경비병들은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두터운 문을 활짝 열어 주었 다. 이곳은 며칠 전만 해도 이름만 있을 뿐, 경비병 한 명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빈 방이었 다. 왜냐하면 이곳에 있어야 할 부총사령관은 총사령관 루빈스키 대공과 달리 황궁보다는 자신의 공국을 더 좋아했기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기 앉게나. 나는 지금 차 생각이 간절했는데, 자네도 차 한잔 하겠나?" "영광이옵니다, 전하." 그렇게 크지 않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론가르트가 자리에 앉자, 다크는 시선을 집무실의 한 쪽 구석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문 쪽으로 돌리며 외쳤다. "세린, 차를 가져와라." "예, 주인님." 문 안쪽에서 가녀린 음성의 대답이 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잘 끓여진 차를 가지고 묘인 족 소녀가 나타났다. 론가르트는 바로 그 묘인족 소녀가 치레아 대공의 전속 하녀인 세린이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녀와 안면도 좀 있었기에 탁자에 찻잔을 조심스런 손길로 올려 놓고 있는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보내줬다. 세린이 돌아간 후 론가르트는 그녀가 올려놓은 차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차를 마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론가르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지 시작했다. 론가르트는 그러한 느낌을 받는 것과 동시에 찻잔을 잡은 손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꿨 다. 오른손은 찻잔을 잡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왼손으로 잔을 들어 조 금씩 차를 마시면서도, 그의 오른손은 조금씩 허리에 매려 있는 검을 향해 슬그머니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동작은 상대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론가르트 경, 경을 부른 것은 한 가지 의논할 것이 있기 때문이야." 아주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마시며 상대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아주 우아 한 몸짓으로...... 론가르트가 알고 있는 한 다크 폰 치레아 공작은 선머슴 그 자체였다. 론가 르트가 근위 대장이었기에 부사령관인 그녀와는 차를 마실 기회가 자주 있었다. 둘러서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차 마시는 예절은 거의 낙제점 수준이었다. 그렇던 그녀가 놀 랍도록 짧은 시간 동안, 그것도 오랜 시간 익숙해진 것 같은 우아한 동작을 몸에 지니게 될 가능성은 갑자기 토끼 머리에 뿔이 솟아오를 가능성보다도 훨씬 어렵다는 것은 뻔한 사실이 었다. 하지만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는 것이고, 상상하기 어렵지만 진짜로 그녀가 몇 달 만나지 못한 사이에 기적같이 우아한 예의를 몸에 익혔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었다. 아무튼 상대의 생김새는 다크와 완벽하게 같았고 말투라든지 뭐 그런 것도 다크가 아니라고 우기기에는 너 무 비슷했다. 그렇기에 론가르트는 짧은 순간이나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래서 은근히 시험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진짜 치레아 대공 전하라면 소 드 마스터를 넘어선 경지, 자신의 공격을 분명히 피해 낼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가짜라면 자신의 검에 여지없이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자 론가르트의 오른 손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슉!" 론가르트의 검이 대기를 가르는 순가,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 검이었다. 하지만 그의 검은 상대의 목을 조금도 꿰뚫지 못했다. 뭔가 별에 부딪힌 듯 시 퍼런 불꽃을 뿜어내며 퉁겨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론가르트의 몸은 뭔가 엄청난 힘에 의해 뒤로 퉁겼다. 꽝, 하는 소리를 내며 벽에 금이 갈 정도로 부딪친 후 바닥에 볼썽 사나운 모습으로 나뒹굴기는 했지만, 그래도 론가르트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도 자신의 검을 꼭 쥔 상태였다. '진짜인가?' 만약 상관이 단순한 재미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장난을 친 것이라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었다. 론가르트로서는 정말 가까스로 비명을 참고 있을 정도로 온몸이 쑤셔 오고 있었던 것 이다. 바로 그때, 다크 집무실의문이 급하게 열리면서 경비병들이 뛰어 들어왔다. 그런데 벌어진 광경은 한마디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찻잔은 박살난 채 뒹굴고 있었고, 면회하러 들어 갔던 론가르트 백작은 검을 뽑아든 채 한쪽에서 뒹굴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 창가로 달려갔다. 그들로서는 론가 르트가 공작을 시해하기 위해 검을 뽑아 들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발견하고는 다크를 향해 공손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전하." 하지만 다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으면서 말했다. 괜히 귀 찮은 일을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썩 기분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잠시 장난을 친 것뿐이다. 나가 보도록!" "예, 전하." 상관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데 더 이상 따져서 할 말이 없었기에 그들은 재빨리 밖으로 나 가 버렸다. 경비병들이 나가고 나자 소녀는 그 귀여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음흉하게 미소 를 지으며 말했다. "흐흐흐, 눈치가 아주 빠른 녀석이로군. 생각보다는 꽤 쓸 만한데......"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며 일어서고 있던 론가르트는 상대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자신의 처음 짐작이 정확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상대는 분명 자신이 아무리 민첩한 공격을 가해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실력자 였다. 론가르트는 이제 곧 자신의 목숨이 부질없어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래도 자신은 황제폐하 께 실력을 인정받아 근위 기사단을 책임지고 있는 당당한 신분이었다. 그런 자신이 적국의 자객 따위에게 설혹 곧장 목숨이 날아간다고 해도 숙이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리가 충격 때문에 후들거리고 있는 상태에서도 일부러 침착한 척 가장하 며,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한 가장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분명 자 신도 모르게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강자 앞에서 겪어야 하는 약자의 어쩔 수 없는 나약함 이었다. "네 녀석은 누구냐?" "나? 나는 누구일까, 아주 재미있는 문제 아닌가?" 비장하기까지 한 론가르트의 질문에 상대는 장난기 어린 대답을 했다. 비웃듯 미소를 지으 면서 여유있게 말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자신 따위는 아예 신경 쓸 만한 가치조차도 없다는 것 같았다. '나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것인가? 하기야 내 기습을 막아 낸 것만 봐도 보통 실력 은 아니야. 아마도 마법사인 것 같은데...... 나에게 아직도 일격을 가하지 않고 시간을 주는 것을 보면, 내가 아무리 소란을 떨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근처에는 어느새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뭔가 마법이라도 걸어 놨다는 것이겠지.' 론가르트가 이런저런 복잡한 잡생각을 하느라 아무런 말이 없자 정체 불명의 상대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걸 알려 주려고 불러들였는데, 벌써 눈치채고 검을 뽑아 들다니...... 아들 녀석은 생각 밖 으로 좋은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군." "예? 그, 그렇다면......" 순간, 그렇게 말을 한 상대는 몸은 그대로 유지한 채, 머리만 슬쩍 아르티어스로 바뀌었다가 다시 다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론가르트는 갑자기 등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뭔가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든 괴물이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 같은 매우 괴이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단 한번도 이런 경우를 당해 보지 않았는지라 그렇지 않아도 얼어붙은 입이 도무지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혹시 들어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르티어스라고 하지. 아들 녀석의 부탁 때문에 잠시 대역을 하고 있는 중이야. 자, 그렇게 멍한 얼굴로 있지 말고 일어서서 여기에 앉게나. 나였 으니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들 녀석이 기껏 어렵게 세워 놓은 소중한 대역의 목이 떨어질 뻔했어." 그제야 론가르트는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가 오할 만한 실력을 지닌 상대는 적국의 자객이 아니라 아군이었던 것이다. 론가르트는 재빨 리 정신을 수습하여, 검을 검집에 넣은 후 뒤집어져 있는 의자를 바로 놓고 거기에 앉았다. 이제 겨우 상황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다크 같은 강자를 누가 감히 흔적도 없이 해치 우고 대역을 할 수 있겠는가? 또 황제나 토니에르에게 들었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아버 지는 골드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그 드래곤은 강력한 마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어떤 형태로 든 변화시킬 수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아르티어스 님.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아르티어스라면 공작 전하의 아버지였기에 론가르트의 자세나 말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특히 상대는 골드 드래곤이었다. 더군다나 성질이 더럽다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기에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실례한 것은 아니야. 오히려 자네의 그 빠른 눈치에 감탄했을 뿐이지. 그건 그렇고 용건을 말하지. 나는 여기서 아들 녀석의 대역은 할 수 있지만, 전쟁터에서까지 대역을 할 생각은 없어. 그것은 아들 녀석도 이미 잘 알고 있고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힘들겠지만 전 쟁터에서의 대역은 자네가 대신 해 줘야겠어." "예?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나는 타이탄을 조종해 본 적도 없고, 또 내 타이탄도 없어. 그러니까 자네의 타이탄에다가 아들 녀석 타이탄의 문장을 그리란 말이야. 그리고 치레아 대공이 타이탄을 써야 할 때가 되면 나 대신 자네가 나가면 되는 거야. 어때, 복잡한 것 같아도 간단하지?" 결코 간단하지 않은 문제를 이처럼 간단하게 말하는 탓에 론가르트는 질려 버리고 말았다. "하, 하지만 전하와 저는 실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차이가 나는데......" 식은땀을 비질비질 흘리면서 론가르트가 항변했지만, 아르티어스는 매우 느긋하게 대답했다. 벌써 그것까지 다 생각해 뒀던 것이다. 성질만 더러운 게 아니라 이상한 데로 머리도 잘 굴 리는 것 같았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거야. 자네가 타이탄을 타고 나가서는 슬쩍 허세만 부려도 적들은 꼬리가 빠지게 도망칠 테니까 말이야. 아들녀석 말로는 상대국의 윗녀석들은 대부분 자신의 실력을 다 알고 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당연히 허세가 먹혀 들어갈 거라구."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잔머리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었다. 다행히 적들이 겁을 먹고 도망친 다면 모르지만, 단 한 명이라도 에라 모르겠다는 기분으로 덤벼든다면 론가르트의 실력은 그대로 들통이 날 것이 뻔했다. "하, 하지만 도망치지 않으면요? 그떄는 어떻게 합니까?" "싸우면 되지, 당연한 걸 가지고 왜 물어? 내가 대신 싸워 주랴?" 자신을 어여삐 여겨 마법으로 도와 주겠다든지 뭐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건 아예 적이 덤 비면 너 혼자 싸우다가 죽든 말든 모르겠다는 아르티어스 옹의 기가 막히는 대답. 어찌 보 면 무책임하고 한심스러운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 옹에게 있어서 이따 위 제국이 망하고 흥하는 문제는 전혀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론가르트의 생사 따 위는 도무지 관심 밖이었다. 언제 골드 드래곤이 인간의 생사에 그토록 자상한 배려와 관심 을 가질 필요가 있었던가. 오직 그의 관심사는 자신의 양아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 때 문에 아들의 일만 아니라면 어디까지나 속 편한 소리만 하는 아르티어스 옹이었다. 근위 대장인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후, 얼마 있지 않아 기사 한 명 이 달려와 시급한 일이라며, 점잔을 빼고 앉아 있는 아르티어스 옹에게 보고를 했다. "알카사스에서 사신이 도착했다고?" "예, 전하. 비밀리에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그래? 좋아, 이리로 오라고 일러라." "예, 전하." 잠시 후, 알카사스의 사신이 도착했다. 그런데 그는 먼저 자신이 협상을 진행해야 할 상대가 너무나 어린 여자아이라는 것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 동안 여러 나라를 숱하게 돌아다니면 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협상을 했었지만 이렇게 어린 소녀와 중대사를 논한 적은 없었 다. 더군다나 상대는 나이나 생김새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전하'라고 불리는 적국의 총사령 관이었다. 하지만 어떻든 '전하'라는 호칭에 걸맞은 권한 또한 지니고 있을 것은 분명한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상대가 어리고 만만하게 보인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결코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 이 들었다. 오히려 협상 상대가 중후하거나 노련한 인물인 것이 더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저는 에리카 트로이아라고 합니다. 크라레스 제국의 뛰어난 기사이신 전하를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상대가 입에 발린 칭찬을 해 대기 시작하자 아르티어스는 손을 휘저어 사양의 뜻을 전한 후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본관을 찾아온 이유는 뭔가?" '급하기도 하군. 역시 어려.' 트로이아는 눈앞의 풋내 나는 소녀가 예상대로 미숙하게 반응을 보이자 속으로 비웃으면서 천천히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원래 노련한 외교관일수록 반은 능구렁이가 되는 게 사실 이다. 자신의 뱃속은 철저하게 감추면서 급할 것 없다는 듯 천천히 이끌어 가는 것이 협상 의 기본 상식이었기에, 트로이아는 이제 더욱 상대를 얕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바야흐로 코린트와 크라레스는 쌍코피가 터지게 싸울 것이다. 물론 알카사스도 거 기에 동참하기로 했었지만, 알카사스의 원로원은 자신들이 원했던 것을 크라레스가 제공해 줄 마음이 있다면 이 전쟁에서 손을 떼는 것으로 의견을 바꾼 상태였다. 어제의 전투에서 크라레스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타이탄이야 어떻게 수리 하거나 재생산하면 되겠지만, 전사한 기사들을 되살릴 방법은 없었다. 그러므로 기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알카사스로서는 가급적이면 이번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줄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시작했던 전쟁이 아닌 만큼 지나치게 열심히 싸워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적당히 싸워 희생을 줄이고 필요한 것을 얻어 내기만 하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여기에는 상업 국가인 알카사스 의 상인 기질도 크게 반영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런 속셈과 계산을 근거로 파견된 트로이아는 만만해 보이는 소녀를 슬며시 바라 보며 이번 협상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다고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예, 우선 본론을 말하기에 앞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트로이아는 소녀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핀 후 말을 이었다. "귀국은 지금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코린트가 대병을 앞세우고 압 력을 가해 오고 있지요. 정보에 따르면 벌써 귀국의 2개 전대가 전멸을 당했고, 수도까지 적 이 난입해 들어와서 곤경을 치렀다고 하니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리고 동쪽에서 는 막강한 아르곤 제국이 침공해 들어와서 매우 곤란을 겪고 계시고요. 또 서쪽에는......"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항복하라는 것이냐?" 상대를 깔보는 듯한, 어떻게 보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소녀가 퉁명스레 말을 끊어 버리자 트로이아는 상대의 무례함에 혓바닥을 찰 뻔했다. 물론 외교관들끼리 대화를 나눌 때 상대 의 말을 가로막는 경우는 허다했다. 하지만 이렇듯 노골적으로 대화를 끊어 버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게다가 지금은 크라레스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렇듯 고 자세를 유지하다니. 언뜻 보면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앉아 있는 것 같 았다. "아, 그것은 아닙니다. 본국이 귀국을 침공한 것은 코린트의 압력도 있었지만 한 가지 오랜 숙원을 해결하려는 것도 있었지요. 본국은 저 머나먼 서쪽의 건조한 초원에서부터 동쪽으로 동쪽으로 그 영토를 키워 왔습니다. 동쪽의 그 비옥한 토지를 손에 넣기 위해서였지요. 그러 는 도중에 본국은 마법을 이용하여 기후를 제어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전 영토가 비옥 하고 풍요롭게 변화했습니다. 그렇기에 본국이 영토를 확장해 오던 첫 번째 목표는 이미 사 라졌다고 봐도 상관이 없죠. 그러던 중에 두 번째 목표가 생겼습니다." 트로이아는 소녀가 지겨운 듯 하품을 하는 것을 보고 잠시 말을 끊었다. 도무지 외교 예절 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는 존재였다. "본국은 상업 국가라고 불릴 만큼 예로부터 상업을 장려해 왔습니다. 물론 국토가 비옥하지 못해서 농업 생산력이 떨어지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만약 개국 초부터 상업에 의존해서 국력을 키워 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마도 왕국으로 발전하기도 전에 본국은 멸망했 을 것입니다. 지금은 마법을 이용해서 국토를 비옥하게 만들어 토지의 생산력을 엄청나게 높였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본국에 있어서 상업이 가지는 그 중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 지요. 본국에서 남아도는 엄청난 잉여 생산물들을 타국에 수출하고 또 본국에 필요한 막대 한 물자들을 수입하며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력을 더욱 더 부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 는 육로를 통해 대량의 화물을 옮기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다는 것이지요. 또 거기에 귀국과 같이 중개 무역을 하는 나라가 끼여들기라도 한다면 본국의 몫이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 까?"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트로이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상 대의 속셈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더 이상 지겨운 말을 듣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 각했다. 역시 인간들이란 단순하면서도 간교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항구가 필요하다는 말이로군. 대량의 화물을 취급할 수 있는 커다란 항구가 말이 야. 장황한 자네의 설명을 요약하면 우리가 스바시에 서쪽 귀퉁이의 항구가 포함된 땅덩어 리를 뗴어 준다면 귀국의 군대를 철수시키겠다, 이거겠지?" "그... 그건......" 소녀가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카사스의 속셈을 짚어 말했으므로 트로이아는 잠시 말문이 막 혔다. 그 사이에 소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놀고 있군. 그따위 협박을 한다고 해서 이쪽에서 '그러십니까?' 하고 땅덩이를 떼어 주리라 생각했어?" "좋습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이쪽에서도 생각이 있습니다." 트로이아는 성질이 발끈 치미는 것을 느껴야 했지만, 일단은 노련한 외교관답게 상대에게 이쪽의 제안을 좀더 깊이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약간의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소녀의 반응 은 트로이아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으헤헤헤, 좋아. 당연히 이렇게 나오는 것이 재미있지. 그래, 어떻게 할 건데?" 의외의 반응에 트로이아는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 드었지만 이왕에 갈 데까지 간 상태였다. 더 이상 조심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지금 불리한 것은 알카사스가 아니라는 믿음은 큰 힘이 되었다. 3개의 강대한 제국과 고독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크라레스는 분명 약자의 입장이었고, 당연히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므로 조금만 더 위협을 하면 통할 여 지도 있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희생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1개 기사단을 더 투입하여 우리 쪽에서 원하는 것을 뺏 으면 되겠지요." "하, 겨우 1개 기사단만으로 될까? 기왕에 하는 김에 모두 다 투입하는 것은 어때? 듣기에 알카사스는 5개의 기사단을 가지고 있다면서? 합게 250기면 꽤 재미있는 한 판 승부가 되지 않을까?" "정말 말이 안 통하시는군요!" "그걸 이제 알았냐, 이 멍청한 자식! 여봐라!" 아르티어스의 부름이 떨어지자 밖에서 대기중이던 중무장한 경비병 두 명이 들어오며 대답 했다. "예, 전하." 갑자기 경비병들을 불러들이는 소녀 때문에 트로이아의 안색은 새파랗게 굳어졌다. 그런 트 로이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무자비한 명령을 내렸다. "저 싹수머리 없는 녀석을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패서 돌려보내도록! 반드시 죽지 않을 만큼이다!" "예, 전하." 트로이아는 경비병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바동거리면서 악을 썼다. 이런 난처하고 황당 한 수모는 처음이었다. 문득 저 소녀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는 후회도 들었지만 이미 엎질 러진 물이 아닌가. 트로이아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그냥 장난이나 단순한 연극이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상대는 장난과 연극을 즐기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멍청한 인간 트로이 아가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전하, 외교 사절에게 이러실 수는 업지 않습니까?" "흐헤헤헤, 헛소리하고 있군. 내가 된다면 되는 거야. 사신을 죽이지만 않으면 별탈 없는 것 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상식이라구. 흐헤헤헤." "놀랍게도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트로이아 경은 어디 가고 자네가 왔는가?" "예, 지금 치료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치료? 무슨 일이 있었나?" "예, 아주 잘 다져서 보냈더군요." "다져?"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의장을 향해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면 사죄를 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좋지 않은 문제였으므로 잘못 들으면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급히 의장이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설명을 했다. "죄송합니다. 흠씬 두들겨 팼다는 말입니다. 후작의 호위병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일어설 힘 도 없을 정도로 늘어져 있는 그를 부축해서 마법진을 통해 돌아왔으니까 말입니다. 사신을 그렇게 대하다니...... 정말 상식과 교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뢰배들입니다." "흐음, 크라레스의 반응이 이상하군. 본격적으로 본국과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는 그냥 항구 하나 양보하고 끝내는 것이 좋을 텐데 말이야. 3국에서 크라레스에 전쟁을 건 이상 크라레 스로서도 이쪽에서 손을 떼 준다면 땅덩어리 하난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훨씬 더 이익이 아 닐까? 거기에다가 이쪽의 사신을 그 모양으로 만들면서 우리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보 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지 않을까? 안 그런가?"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의 하나가 바로 코린트입니다. 현재 코린트의 행동을 봤을 때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부 분이 한 가지 있습니다. 코린트의 기사단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군대는 아직도 국경 을 넘지 않고 있습니다. 점령지를 확보하려면 군대를 투입해야만 하는데도 말이지요. 이건 흡사 기동력이 좋은 기사단만을 사용하여 크라레스의 군대나 기사단에 조금씩의 타격을 주 고 뒤로 빠지는 게릴라전을 감행하는 듯이 보이고 있어요. 이건 대단히 강력한 국가를 혼란 에 빠뜨리기 위해 자주 써먹는 전법이 아닙니까?" "글쎼,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미리 짐작하여 설전을 벌일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코린트에서는 군대를 언제 투입할 것인지 알아보게." "예, 의장님." "그리고 코린트에서 보내 온 정보에 따르면, 오늘 새벽 크라레스는 스바시에 기사단을 6전 대와 합류 시켰다고 한다. 이로 인해 크라레스 서부 전선의 사령관은 아그리오스 후작이 되 겠지. 아마도 무척 힘든 싸움이 될 거야." "그렇다면, 오늘 새벽에 콘도르 기사단을 그쪽에 보낸 것이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군요." "나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저쪽은 모두 합쳐서 60기도 안 돼. 하지만 이쪽은 100기나 되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인가?" "그래도..... 옛날부터 크라레스 기사들의 용맹성은 소문이 난 것이기에 약간은 우려가 되는 군요. 단순히 타이탄의 숫자로만 판단할 수는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아,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크라레스의 최고 정예 기사단은 근위 대와 치레아, 스바시에 기사단이야. 코린트의 근위대가 크라레스의 수도에까지 진입해 들어 가서 격전을 벌였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면, 놈들은 최강인 스바시에 기사단을 그 렇게 오랫동안 이쪽 전선에 놔둘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을거야. 그 동안만 잘 버티면 되 는 거야." "예, 의장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의장님의 뜻을 클레멘스 후작에게 전하겠습니다. 가장 노련한 지휘관이니 만큼 잘 해 낼 것입니다." "그래야 하겠지." 벼룩의 보고에 따르면... "저리고 하자." 여기저기를 한참 돌아다니다가 다크가 지목한 곳은 3킬로 정도나 떨어져 있는데도 엄청난 덩치로 압박해 오는 거대한 성이었다. 그 덕분에 다크의 손을 따라가던 팔시온의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커지고야 말았다. "뭐, 뭐...... 저 큰 성을 공격하자고? 타이탄을 이용한다고 하지만 겨우 네 명이서?" 팔시온의 의견에 미카엘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맞아, 저건 너무 커. 딴 걸로 고르자구. 여기까지 지나오면서 요새를 두 개 정도 봤잖아? 솔직히 그 정도가 알맞다구. 저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야. 암, 아니고 말고." "한 번 정했으면 그걸로 밀어붙이는 거야. 척 봐도 많이들 있을 것 같잖아." 찬란한 황금빛을 뿜어내며 드라쿤이 공간을 가르고 튀어나오는 것을 힐끗 보고 다크는 심드 렁하게 말했다. "타이탄은 집어 넣어. 여기서 타이탄을 꺼내면 놈들은 결코 오려고 하지 않을거야." "그러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어쩌기는...... 이렇게 하지." 다크는 자신의 짧은 검을 쭉 뽑아 들었다. 그리고 황금빛이 찬란한 검신의 끝이 성을 향하 게 되었을 때 짤막하게 외쳤다. "헬 화이어(Hell Fire)!" 그와 동시에 진홍색의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무시무시한 열기를 토해내며 성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고 성에 부딪히자 엄청난 굉음을 내며 성의 태반을 박살내 버렸다. 방어 마법진이 쳐 져 있었다면 그 정도까지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변방에 있는 작은 성 하나에까지 강력한 방어 마법진을 설치하고 있을 정도로 코린트의 마법사들이 할 일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방어 마법진 하나를 설치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 "새로운 정보가 도착했사옵니다, 전하." "그래, 뭐냐?" "벼룩의 보고로는 오늘 새벽에 작전 회의가 있었다고 하옵니다. 그 작전 회의를 주도한 것 은 고양이었사옵니다. 사실상 토지에르와 루빈스키가 없어진 지금 크라레스의 총사령관은 그녀가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옵니다." 로체스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귀찮게 되었군. 그래, 거기서 토의된 내용은?" "벼룩은 그 회의에 참관할 수 있을 정도로 지위가 높지 않기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고 하옵니다. 하지만 회의가 끝난 후 스바시에 기사단이 제6전대를 돕기 위해 서쪽으로 공간 이동을 했고, 제7,8전대 및 3,4전대의 잔여 세력이 모두 아르곤 전선을 돕기 위해 이동했다 고 하옵니다. 그리고 치레아 기사단은 미란을 돕기 위해 즉시 출발했다고 하옵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수도의 방어력이 현저히 떨어질 텐데, 그때 만약 조금만 더 밀어붙 였으면 크라레스 수도 함락도 시간 문제였을 것이야. 놈들은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는 것인가?" "예,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사옵니다. 부하들을 여기저기에 파견하여 급한 불을 끄면서도 고 양이는 계속 수도에 남았다는 것이지요. 또, 치레아 기사단 대신 제5전대가 그녀와 함께 행 동하기 위해 대기 태세에 들어갔다고 하옵니다." 부하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아무튼 고양이가 움직이지 않고 수 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전혀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고 작전을 펼치는 것도 그만큼 한계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매우 귀찮게 되겠군. 어디도 건드릴 수 없지 않나. 어디를 치든지 곧 그녀가 기사 단을 이끌고 구원하러 올 건데......"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는 로체스터에게 해골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기사가 툭 던지듯 말을 걸었다. "그렇지 않아." "자네에게 뭐 다른 생각이라도 있나?" 그러자 해골 가면을 쓰고 있는 기사는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는 듯 침착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린 이유야 어떻든 간에 풍겨 나오는 기운은 그가 범상한 인물이 충분히 아니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국가라는 것은 말이지, 시민들에 대한 통제력이 무너지면 곧이어 망하는 거야. 그 통제력이 무너지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 군대가 무너진다든지, 상층부에 있는 귀족들이 모두 죽는다든지, 왕족들이 죽는다든지...... 하지만 꼭 그렇게 위로부터 무너지는 것만을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광범위한 지역에 기사단을 투입하여 녀석들의 말단을 하나씩 파괴해 나가면 제국 전체는 오래지 않아 붕괴하게 되어 있어. 원래가 군대나 기사단의 임무가 그 속살이 밖으로 드러나 지 않도록 감싸서 막는데 있기는 하지만, 녀석들은 기사단의 보호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속살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어. 그러니 오히려 기회는 지금이라고 생각하네." "좋아, 쓸데없는 피를 많이 봐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녀석들이 원한 거 니까 사양할 필요는 업겠지." 로체스터 공작은 크라레스의 영토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를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면 서 훑어보기 시작했다. 꼭 상대방의 군대와 대결할 필요가 없다면 공격할 목표는 얼마든지 있었다. 상업 도시, 군사 거점, 행정의 중심지,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곳들 중의 하나가 세 금의 이동 통로 및 식량 저장고였다. 세금을 순전히 돈으로만 거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추수에 맞춰 각종 식량들을 거둬들여 쌓아 둔 저장 창고들은 바로 세금의 이동 통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군대도 주둔하고 있겠지만, 그들은 도적 따위를 방비하기 위 한 것이지 결코 기사단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좋아, 여기와 바로 여기...... 그리고 여기부터 시작하기로 하지. 모두들 가장 큰 식량 집적소 들이니까 말이야." "식량 집적소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백작들의 저택이나 성들도 같이 뭉개 버리 면 효과가 좋을 거야." "그렇군. 그 편이 더욱 효과적이겠지." 두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공격할 목표들과 그곳에 파견할 기사단 규모를 의논하고 있을 때 마법사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고 거친 숨을 삼킬 틈도 없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 했다. "전하, 밀티 성이 공격을 당했다고 하옵니다. 시급히 원군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그래? 규모는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밀티 성이라면 코린트 동남부의 군사 요충지였다. 코린트의 동쪽에는 아르곤이, 남쪽에는 크 라레스가 포진하고 있었다. 남쪽의 크라레스에서 코린트로 들어오는 통로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아르곤과 코린트 사이에는 거대한 쟈코니아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르곤에서 코린트로 들어올 수 있는 통로는 몇 개 되지 않았고 그런 의 미에서 밀티 성은 아르곤을 대비하기 위한 확실한 방어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1개 보병 사단과 함께 두세 명의 기사들이 파견되어 지키고 있을 정도로 중요시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물론 크라레스와의 전쟁이 터진 후, 아르곤이 침공해 들어올 가능성이 사라진 시점이라 기 사들은 철수한 상태였지만, 군대는 여전히 주둔하고 있었다. "그게...... 도무지 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없사옵니다." "놈들이 공격을 가해 왔다고 하면서 적의 규모도 모른단 말이냐?" "그것이 마법만으로 장거리 공격을 가해 왔기에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고 하옵니다." "마법이라고? 마법사라면 밀티 성에도 있을 것 아니냐? 그리고 대 타이탄 용의 장거리 병 기들도 많을 텐데......" "하지만 마법사의 등급이 너무 차이가 나는지라......" 모든 질문과 대답이 핵심을 비켜 가는 듯하자 로체스터 공작은 약간 짜증스러운 어조로 물 었다. 보고 내용이 너무 막연해 상황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그러느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사오나 대단히 강력한 위력의 마법이 사용된 것 같사옵니다. 어쩌면 대마법사 정도 되는 인물이 끼여 있을 수도 있사옵니다. 단 한 방에 성을 반쯤 박살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이옵니다." "뭐야? 마법 한 방에 성이 반쯤이나 부서지다니...... 도대체 어떤 마법이기에?" 놀라움에 오히려 당혹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로체스터 공작의 질문에, 마법사는 약간은 난감 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신이 마법사이긴 하지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더군다나 현장을 목격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세한 내용을 설명한다 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제가 직접 본 것이 아니기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사옵니다. 그것이 혼자서 공격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여럿이 한꺼번에 공격했을 수도 있기에 자세한 것까지는 알 수 없사옵니다. 어 쨌든 지금 밀티 성은 성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 확실한 모양이옵니다." "으음...... 놈들이 밀티 성을 공격한 이유는 뭘까?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글쎼....... 일단 적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 크라레스에는 분명히 토지에르 이상의 뛰어난 마법사는 없어. 그렇다면 놈들은 상당수의 우수한 마법사들을 이번 기습 작전에 동원했다고 봐야 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뭘까? 본국 동남쪽의 방어 거점 하나를 박 살낸다고 해서, 크라레스 쪽에 어떤 이익이 있지? 혹시 크라레스가 아니고 알카사스가 아닐 까?" "아니야, 그놈들이 그렇게 간덩이 크게 나올 수는 없겠지. 게다가 지금은 크라레스라는 공동 의 적이 앞에 있는데 말이야. 어쨌든 그냥 놔둘 수는 없으니 원군을 파병하기로 하지. 알파 레인 후작을 불러라!" "옛, 전하." 잠시 후 알파레인 후작이 도착하자 로체스터 공작은 그를 지도 쪽으로 불러들여 간단히 상 황을 설명한 다음 지시를 내렸다. "금십자 기사단을 동원해서 여기에 표시된 지점들에 20기씩의 타이탄을 투입하게." "예." "그리고 정체 불명의 적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밀티 성에는 남은 40기를 투입하도록 하 라. 상대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 또는 마법사들 이 함께 있는 것 같다. 그 점을 유의하도록!" "예, 전하." 자신감 있는 표정을 보이며 알파레인 후작이 방을 나선 후, 로체스터 공작은 후작의 뒷모습 을 잠시 바라보다가 뭔가 떠오른 듯 레티안에게 물었다. "참, 방금 전 치레아 기사단이 미란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고 했었나?" "예, 전하."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은 로체스터 공작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그렇다면 일이 재미있게 되겠군. 그 정보를 크루마 쪽으로 흘려라. 그렇게 해서 크라레스와 크루마의 기사단이 충돌한다면, 더 이상 크루마도 저울질을 하며 참고 있기는 힘들겠지." "예, 전하.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로체스터 공작의 명령을 받은 알파레인 후작은 부단장인 해리슨 드 윌리엄스 후작에게 40기 의 타이탄과 보조 인력 10여 명을 주어 밀티성으로 급파했다. 그런 후 자신은 남은 전력들 을 3등분하여 공작이 지시한 크라레스의 식량 집적소들을 공격하기 위해 출동했다. 하지만 윌리엄스 후작이 자신에게 할당된 기사단을 이끌고 밀티 성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성벽의 한쪽이 완전히 박살나 버렸고, 성 내부의 건물들도 상당수 무너져서 화염에 휩싸여 있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건물 곳곳에는 사상자들이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린 채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단 한 방으로 이렇게 완전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출발 전, 대략적인 설명만을 들었기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온 윌리엄스 후작에게 이런 광경 은 분명히 충격 그 이상이었다. 이 거대한 성에 이 정도의 타격을 주려면 얼마나 집중적인 마법 공격을 펼쳐야만 할까? 윌리엄스 후작도 여러 전장을 돌아다녔지만, 마법에 의해 이 정도로 처참하게 묵사발이 난 곳은 본 적이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여기 지휘관은 어디 있나?" 성내에 설치된 영구 마법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건물 더미에 깔린 부상자를 구 출하고 있던 병사의 팔목을 부여잡고 묻자 병사는 상대방이 대단히 높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즉시 인사를 건네오며 답했다. "부상자 구출을 위한 일부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령관님을 따라 성 밖으로 나갔습 니다. 그러니 밖에 나가셔서 찾으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기야 이 정도 맹렬한 마법 공격을 한 번 더 당한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이 곳 성주는 그것을 알고 병력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산개 시킨 모양이었다. 일단 적의 집중적인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병력을 안전하게 보존한 다음에야 반격을 해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브러스!" 윌리엄스 후작의 외침에 뒤쪽에 서 있던 나이 많은 마법사가 음침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각하." "너는 이 상황을 즉시 상부에 보고해라." "예!"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 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금빛 광채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윌리엄스 후작이 그곳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찬란한 금빛을 칠해 놓은 타이 탄들이었다. 윌리어스 후작이 알고 있는 사실이 정확하다면 세상에서 금빛 타이탄들을 가지 고 있는 국가는 단 한 곳뿐이었다. 바로 크라레스의 속국인 치레아 공국이 보유하고 있는 드라쿤이라는 타이탄. 정보에 의하면 드라쿤의 생산 대수는 20기 내외였다. 하지만 상대방이 치레아 대공의 개인 기사단으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타이탄의 수는 이쪽이 두 배는 많았다. 놈들의 마법사가 뒤에서 화력 지원을 해 준다는 것을 감안해 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전투였던 것이다. 타이탄이 한 대만 더 있어도 전세가 확실히 보장 되는 전투에서 무려 배가 더 많다는 것은 든든한 배경이 아닐 수 없었다. 윌리엄스 후작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음침한 미소를 흘리면서 마법사에게 외쳤다. "브러스, 너는 이 사실을 보고해라. 치레아 기사단의 드라쿤 3기 발견. 격퇴하겠다고 말이 야." "예, 각하." "오너들은 타이탄을 즉시 꺼내라." "예, 각하."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고 있을 때 작전관이 망원경으로 상대편 진영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 고 외쳤다. "각하." "왜 그러는가? 작전관." "예, 적들과의 거리가 너무 멉니다. 이쪽에서 다수의 타이탄들이 돌격해 들어간다면 놈들이 지레 겁을 먹고 후퇴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딴은 그렇군. 그래, 뭐 좋은 의견이라도 있나?" "예, 각하. 이 근처의 지형을 살펴봤을 때, 놈들이 저쪽으로 펼쳐진 평지에 탈출용 마법진을 갖춰 놓았다고 가정해도, 이쪽의 추격 속도가 빠르니까 공간 이동을 하기는 힘들 겁니다. 물 론 운이 좋다면 도망이야 칠 수 있겠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되겠지요. 대신, 저 뒤쪽에 있는 숲 쪽으로 도망친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원체 고목들이 많기 때문에 아무리 덩치 좋 은 타이탄이라도 엄폐시키기 딸 알맞지요. 놈들이 매복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고 말이지 요. 그러니까...... 제 생각으로는, 그 숲의 저 뒤편으로 열 명 정도를 공간 이동시켜서 적의 퇴로를 막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글세, 무척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녀석들한테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가 있는 것 같은 데, 일이 잘못 되면...... "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도 타이탄과 승부를 겨룰 수는 없으니까요. 처음에 이동해 들어갔을 때만 조심하면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좋아, 매트 경!" "옛, 각하." "경에게 아홉 명을 줄테니 저 숲 뒤쪽으로 들어가라. 놈들에게는 뛰어난 마법사가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도록." "염려 마십시오, 각하." 미네르바는 보통 여자가 아니야 자욱하게 솟아올랐던 먼지가 차츰 가라앉고 여기저기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가운데, 성은 벌 집을 건드린 것처럼 갑자기 수많은 인간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엄청난 폭발이 있 었는데도 아직 이만한 인간들이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끈질긴 생존력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대방에 엄청난 클라스의 마법사가 있는 게 분명했기에 그들은 일단 성을 포기하고 넓게 산개한 다음 방어진을 치고 한편으로는 부상자들을 구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마법사 들은 지금쯤 구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리라. "히야......" "정말 대단하군." 모두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한 마디씩 했다. 다크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성의 반쪽이 날아가 버릴 정도의 엄청난 폭발은 그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게 말력 검이었어? 거의 뽑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마력 검인지도 몰랐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있는 다크를 바라보며 팔시온이 부러운 듯, 또 탐난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도 마력 검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저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력 검이 얼마나 구하기 힘든 진품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팔시온은 곧이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머리 속을 맴돌고 있는 탐욕을 쫓아 냈다.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걸어 주는 것처럼 자신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물건임을 스스 로도 잘 알고 있었기 떄문이다. 만약 자신이 저 검을 쓴다면 채 마법을 뿜어 내기도 전에 마나가 고갈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던 것이다. "어때, 내 말이 맞지?" 다크가 가리킨 곳으로 팔시온이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서는 이미 공간을 뚫고 정체 불명의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은 타이탄 50기로 마법사를 떄려잡고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 는 타이탄들을 없애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거지?" 상대방의 기사들이 저마다 타이탄들을 꺼내어 신속하게 탑승하는 것을 지켜보며 미카엘이 ㄹ물었다. 대책이 없을 리 만무했지만 50여 기에 해당하는 타이탄과 맞붙을 일을 생각하니 그 대책이라는 게 무엇인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조용히 해치우려면 일단 목격자 수가 적은 게 중요해." "그렇다면?" "녀석들을 저기 보이는 숲으로 유인하기로 하지. 나는 저쪽 숲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너희들은 대충 녀석들과 싸우면서 유인해서 끌고 와." "자신은 있는거지?" 미디아는 아직도 걱정이 되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다크가 아무리 마스터 급의 검객이라고 하지만 상대방의 타이탄은 50여 기나 되는 것이다. "그런 걱정은 말고 제대로 불러들이기나 해." "알았어." 다크와 가스톤이 언덕 뒤로 펼쳐져 있는 숲 속으로 몸을 감추고 나자, 미디아의 타이탄을 선두로 해서 황금빛 나는 타이탄 3기가 공간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죽자고 싸우면 안 돼. 알았어?" "잘 알고 있어. 내가 그렇게 돌머리인 줄 아냐? 대충 싸우고 빠지면 되는 거잖아?" "네 녀석은 적이 앞에 있기만 하면 이성을 잃어버리니까 그렇지." 3기의 황금색 타이탄이 성을 향해 달려나가자 곧이어 성 쪽에서는 수십 기의 타이탄들이 모 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상대는 곧장 달려들지 않고 조금 웅성거리는 듯 보이더니, 그들 중 몇 명이 성 뒤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지금 뭐하는 짓이지?" "글세...... 이쪽이 양동 작전이라도 벌이는 것으로 착각하는 모양이지. 사실 여기 나타난 3기 는 숫자가 너무 적잖아. 앞에 몇 기 보여주고 자신들의 뒤쪽으로 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은 아닐까?" 전투에서는 힘보다 머리를 잘 써야 하지만 너무 머리를 굴리다 보면 오히려 더 다치는 경우 가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게 가장 좋은 작전이 될 수도 있었다. 아주 가끔은...... "쩝...... 그럴 수도 있겠군. 하여튼 쓸데없이 잔머리를 굴리는군. 이렇게 되면 계획하고 조금 차질이 생기잖아." "차질이 생길 것도 없어. 저 봐, 놈들 타이탄 숫자가 장난이 아니야." 거의 30여 기에 달아하는 타이탄들이 출동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일단 타 이탄에 모두 탑승한 상태에서도 돌격해 들어오지 않고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다. 아무래도 뒤쪽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젠장, 되게 쫀쫀한 놈들이군. 저렇게 걱정이 많아서야 어디 제 명대로 살기나 하겠어. 뒤로 쳐들어가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걱정 말고 달려오라니까." 상대는 한 20여 분 정도 웅성거리면서 시간은 끌더니 급기야 돌격을 시작했다. 30여 대의 타이탄들이 달려 나오는 것은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거대한 덩치와 무게에 짓눌린 대지는 비명을 질러 댔고, 더불어 뿜어 오르는 먼지로 인해 앞의 10여 기만이 제대로 보였고 그 뒤는 자욱한 먼지만이 보일 뿐이었다. 살벌한 전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정말 넋을 놓고 볼 만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우힉, 저렇게 보니까 정말 엄청난데?" "우리들끼리 연습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박력이야." "어떻게 할래? 계획대로 여기서 한 판만 하고 곧장 튈거야?" "미, 미쳤냐? 저놈들하고 한 판 벌이기 시작했다가는 곧장 포위당해서 도망칠 틈도 없어져. 빨리 도망치자!" "놈들이 퇴각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부하의 말에 윌리엄스 후작은 잠시 고민을 했다. 놈들이 도망치는 방향으로 봤을 때 뭔가 대비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매복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위협적인 숫자일 수 는 없을 것 같았다. 치레아 기사단의 정수는 20기. 그러므로 숨어 있다고 해야 17기를 넘을 수는 없었다. 치레아 기사단 외에 다른 기사단이 지원을 왔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크라레스와 연 결되는 직접적인 전략적 이점도 없는 시골 구석에 2개 기사단 이상을 밀어넣는다는 것도 현 실성이 없었다. 만약 그런 작전을 짜는 지휘관이 있다면, 그따위 멍청한 놈을 지휘관으로 임 명한 크라레스는 망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놈들의 규모는 1개 기사단을 넘어 설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후작은 이윽고 결심한 듯 외쳤다. "쫓아라, 놈들이 숨어 있을 가능성은 있으니 주위를 경계하도록!" "놈들이 숲 속으로 도망칩니다, 각하." 과연 놈들이 언덕을 슬쩍 돌아서 평지 쪽으로 도망치지 않고 숲속으로 들어갔기에, 윌리엄 스 후작은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놈들은 이제 자기들 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 정 성 들여 무덤까지 파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모르겠지만, 놈들 의 행동은 벌써 이쪽에서 예측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흐흐흐, 숲 속이라...... 그렇다면 독 안에 든 쥐로군. 양쪽에서 협공하여 박살낸다. 자, 돌격 하라!" 80톤이나 되는 타이탄에 탑승한 기사와 동등한 속도를 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엑스시온 을 1.0급이라고 부르며, 대부분의 타이탄이 이 기준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금십자 기사단 의 주력인 미노바-P2가 90톤이나 나가는 중형 타이탄이라고 하지만, 그 심장은 1.5나 되었 기에 그 움직임은 더욱 빨랐다. 지축을 울리면서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파괴하며 돌진하는 그 위용은 이 세계 최강 의 생명체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과 견줄 수 있을 맡큼 위압적인 것이었다. 10미터가 넘는 굵직굵직한 나무들이 모여서 숲을 이루는 장대한 삼림이라고 하지만 90톤이 넘는 타이탄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쫓는 자들도, 쫓기는 자들도, 거치적거리는 나 무들을 간단하게 밀어붙이며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숲 전체를 온통 휘저어 놓은 것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 저건......" 거대한 푸른색의 타이탄이 나무를 헤치며 쓱 나타나자, 여태껏 도망치기에 급급하던 금빛 타이탄들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재빨리 푸른색 타이탄의 등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각하." 윌리엄스 후작은 상대편 타이탄을 구석구석 훑어 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작의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악취미하게 이상한 황금색 드래곤을 그려 놓은 견갑부 를 보는 순간, 아무래도 키에리를 때려눕혔다는 그 타이탄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 었다. 하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그녀'가 지금 크라레스의 수도에 그대로 있다고 했다. 그렇다 면 눈 앞에 보이는 저 녀석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뭘 어떻게 해? 곧 있으면 매트 경이 뒤쪽에서 포진해 올 거다. 놈들의 퇴로는 막힌 상태니 까 마음놓고 몰아 붙여라." "하지만, 저 거대한 타이탄은......" "어차피 대단한 상대는 아니다. 근위대의 얘기를 못 들었나? 이번 기습 작전에서 저런 놈을 3대나 격파했다는 무용담을 말이다. 겉모습만 대단할 뿐이야. 밀어 붙여라." 부하들에게 그렇게 명령은 내렸지만 정작 윌리엄스 후작 자신은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 않 고 있었다. 금십자 기사단의 경우, 제1차 제국 전쟁 때 딴 곳에서 작전을 하고 있은 탓에 키 에리를 패배시켰다는 타이탄을 본 기사가 없었다. 그렇기에 후작은 상대가 누군지 어느 정 도 짐작은 하면서도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능성은 50퍼센트, 진짜 아니 면 가짜일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의 정체가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은 이상 후작 자신이 달려 나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거대한 타이탄의 검이 거대한 반원형의 푸른 원반을 그릴 때, 이미 2대의 타이탄이 고철이 되어 뒹굴기 시작했다. 푸른색 타이탄의 동작은 엄청나게 재빨랐다. 완전히 늑대가 양떼를 헤치면서 그들 중에 맛있는 먹이를 고르듯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검이고, 방패 고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거대한 타이탄이 휘두르고 있는 불타는 듯한 검은 앞을 가 로막는 것이 검이든 방패든, 타이탄의 몸통이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둘로 쪼개고 있었다. "이건...... 악몽이야......" 몇몇 실력 있는 검사들이 타고 있는 타이탄들의 경우 검과 방패에 마나를 충만하게 주입하 여 버텨 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상대방의 공격을 막는 것도 두세 번의 칼부림이 고 작이었다. 곧이어 방패가 찢겨 나가고, 검이 잘려져 나갔다. 어느덧 코린트의 타이탄들은 엉거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처음에 돌격해 들어갔던 그 패기 만만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들은 모두 한껏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도저히 상대가 불가능한 괴물에 대해서...... "후퇴, 후퇴하라!" 몇 분 되지 않는 격돌이었지만, 윌리엄스 후작의 뒤를 따라 도망치는 타이탄은 10기도 채 되지 않았다. 도대체가 어떻게 된 노릇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었는데 도망치는 후작의 뒤쪽 에서 계속 쿵쿵거리며 뭔가 거대한 물체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침내 "슉!"하는 날카로운 칼부림 소리와 함께 곧이어 어떤 거대한 물체가 땅바닥을 구르는 굉음 이 함께 들려 왔다. "으아아악! 이럴 수가......" 후작이 제일 먼저 도망쳤고, 또 그의 실력이 자신의 부하들보다는 우월한 만큼 적 타이탄으 로부터 제일 멀리 떨어져 있던 것도 후작이었다. 처음 후퇴를 시작했을 때, 아니 도망치기 시작했을 때 후작의 타이탄을 뒤따르는 부하들의 발소리가 쿵쾅거리며 보조를 맞추고 있었 다. 하지만 후작은 채 3분도 달리지 못해 더 이상 자신과 보조를 맞춰 달리는 부하들의 발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쿵...쿵...쿵......" 그 대신 부하들이 요란하게 내던 발소리보다는 훠씬 크고 무거운 소리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후작의 심장은 이제 금방이라도 가슴을 박차고 튀어나올 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길을 없어. 반전하여 반격을......' 하지만 윌리엄스 후작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뒤에서 날아온 검에 의해 자신의 몸과 타이탄은 정확히 두 토막이 나버렸던 것이다. "젠장, 비무할 때는 몰랐는데, 정말 겁나는군." "그러게 말이야. 우리들이 나설 틈도 없었어. 30기의 타이탄이 순식간에 전멸이라니...... 이게 말로만 듣던 마스터의 실력인가?" "코린트에는 저런 실력자가 3명이나 있는거야. 그야말로 세계 최강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 지." 팔시온의 말에 미카엘이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다크를 그냥 마스터와 비교해 버린 다는 것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뭔가 다른 게 있었다. 다크에게 는...... "그렇지 않아. 나도 마스터를 한 명 알고 있지만, 결단코 저 정도는 아니었어." 이때 푸른색 타이탄의 머리 부분이 열리면서 다크가 뛰어내렸다. "이봐, 가스톤!" 엄청난 광경에 얼이 빠져 있던 가스톤은 무심결에 바짝 긴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대답하고 생각해도 너무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다. "예!" "예?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대답이 그 모양이야?" 다크의 약간 짖궂은 듯한 물음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가스톤이 쑥스러운 듯 얼버무렸다. "아......, 왜?" "본국에 연락해서 5전대를 이리로 보내서 타이탄을 수거해 가라고 해." "이봐, 다크." "왜?" "지금은 타이탄 수거가 문제가 아니야. 너 말대로라면 누군가가 첩자일 거 아냐? 5전대를 이쪽으로 불러들인다면 네가 이 일을 했다는 것을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긴 그렇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냥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니야. 실력 있는 놈이라면 여기저기 엎어져 있는 타이탄의 잔해만 봐도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유추해 낼 수 있어. 그냥 놔두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야."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아빠한테 연락해. 그래 가지고...... 뭐 아빠한테 말하면 어떻게 하겠지." "알았어, 연락하지" 잠시 후, 수정 구슬에는 권태로운 모습의 예쁜 소녀가 모습을 나타났다. 그녀는 하품을 쓱 하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아아함- 무슨 일이야?" 가스톤은 아르티어스의 말투나 표정이 정말 다크와 쏙 빼 닮았다는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 다. 역할을 거꾸로 해 보니까 과연 이 부자가 얼마나 닮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 예, 아르티어스 님. 여기는 그러니까......" 가스톤은 허겁지겁 품 속을 뒤져서는 지도를 꺼내 자신들이 위치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 좌표가 328345, 234763인데요, 이곳에서 적 타이탄 부대를 해치웠습니다." "그런데?" 아르티어스의 표정은 그딴 걸 왜 지금 자기에게 이야길 해서 귀찮게 하느냐는 태도였다. 도 무지 관심이 없었다. "여기 적 타이탄의 잔해가 쭉 널려 있으니까 회수해 가시라구요. 그리고 절대로 증거를 남 기지 말라는 대공 전하의 부탁이십니다." 가스톤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코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자기를 이곳에 처박아 두고는 아들놈 이 혼자서만 재미 보고 다니는 것에 속이 상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아들 녀석 에게 따지기에는 아르티어스의 속마음이 너무나 여렸다. 덕분에 그 분풀이를 애매한 가스톤 이 온통 뒤집어써야 했다. 새우도 아니면서 등만 터지는 꼴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흥! 내가 그런 뒤치다꺼리나 해 주는 사람이냐?" 중간에 끼인 가스톤만 입장이 난처해졌다. 다크도 무서운 존재였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보다 백 배는 훨씬 더 무서운 존재였다. 물론 다크가 앞에 있을 때는 그런 표정을 드러내지 않지 만, 그녀가 눈 앞에 없을 때는 그 표정부터가 몬스터 쯤음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포악하고 잔인하게 바뀌는 것이다. "저, 그런 말씀을 하셔도......" 가스톤이 겨우 용기를 내 가까스로 반론을 제기하려고 했지만, 아르티어스는 그 광포한 눈 빛으로 제압하면서 반론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성질 더러운 골드드래곤을 설득하거나이 해시킬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딸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퉁기듯 내뱉었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하라고 해." 아들 녀석에게 전하는 말치고는 무척 용기있는 표현이었는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다크 가 슬며시 약이 올라서는 끼여들었다.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아르티어스의 소행이 괘씸해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한테 직접 말하기 뭣하니까 밑의 사람만 득볶는 쩨쩨한 드래곤 같으 니라구...... "뭐라구요?" 갑자기 수정 구슬에 약이 바짝 오른 아들 녀석의 얼굴이 나타나자 아르티어스는 낮게 비명 을 질렀다. 아무리 독하게 마음을 먹고 또 먹어도 아들 앞에서는 모든 게 허사였다. 아르티 어스는 공포에 질린 눈을 크게 뜨며 말까지 더듬었다. "에, 엑!그, 그 근처에 있었냐?" "다 들었어요. 아까 하신 말 다시 한 번 더 해 보세요." 다크가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말하자, 아르티어스는 허둥지둥 뒤 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하 지만 뒷수습이라기보다는 완전히 오리발 작전이었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가스톤에게는 꼭 쥐를 눈 앞에 두고 어떻게 잡아먹을까 하고 노려보는 것 같은 눈빛을 보냈었지만, 다크가나 타나자 언제 바뀌었는지 알 수 업을 정도로 표정이 바뀌어 버렸다. 오히려 먼저와는 반대로 꼭 고양이 앞의 쥐처럼 되어 버렸다고 해야 할까? "응? 내, 내가 뭐라고 했다고 그러냐...... 곧 누군가 보내서 아주 깨끗하게 처리할 테니 걱정 말라고 했잖니.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아르티어스는 허둥지둥 통신을 끊어 버렸다. 그러자 다크는 아차하는 표정으로 허둥지둥 말 했다. "이런, 아직 할 말도 다 못했는데 끊어 버렸잖아! 가스톤, 통신 다시 걸어." "에, 그건 왜?" "설마 너도 저기 엎어져 있는 타이탄들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너희들이 오기 전에 저 뒤쪽에서 공간 이동을 해 온 놈들이 있기에 손을 좀 봐줬는데 그것도 남김없이 회 수해야 한다구. 알았어?" "알겠어, 다시 연락할게." 또다시 아르티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아 르티어스는 약간 아부성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다크의 모습이었기에 너 무나도 깜찍스러워 보였다. "왜 또 연락을 했냐? 좌표 잊어 먹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구. 곧 그리로 제5전대를 보내 줄 테니......" "물론 아빠는 아까 말한 좌표를 기억하고 있겠죠. 그게 아니라 아직 전할 말이 더 있어서 다시 통신을 한 거예요. 여기 말고 숲 안쪽에 고철이 된 타이탄 열 대가 더 있어요. 그것도 회수해야 한다구요. 그리고 절대로 증거는 남기지 말구요. 알겠어요?" "알겠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 없었어요?" "글쎄다...... 뭐 별일은 없었다. 네가 말한 대로 론가르트 녀석에게 내 정체를 말해 줬고 만 약 타이탄을 써야 할 때는 어떻게 하라고 말해 뒀지. 그리고 참, 알카사스에서 서로 휴전하 다고 사신이 왔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녀석들이 가소롭게도 항구 하나만 주면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하더구나." "그래서요?"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서 보냈지. 어때, 잘 했지?" "아이고...... 골치야. 그리고요?" "그리고는 뭐가 그리고야. 그냥 두들겨서 보냈다구. 참, 미란에서 전쟁이 터진 모양인데......." "미란에서요? 코린트가 미란에까지 손을 댔다는 거예여?" "아니, 그게 아니고 크루마가 침공했다고 하더구나. 웬 꼬장꼬장한 영감이 계속 그 쪽을 도 와 줘야 한다고 떠들어 대서 치레아 기사단을 그리고 보냈다. 뭐, 잘 해 내겠지." "언제 보냈어요?" "방금 전에 보냈지. 그래, 뭐 잘못 되었냐?" "아뇨, 별로 잘못 된 것은 아니에요. 그리고 그 외에 다른 문제는 없어요?" "뭐 더 이상 중요한 일은 없었어." "알겠어요. 그럼 이만 끊어요." 통신을 끝낸 후 다크는 씩 미소를 지으면서 일행을 둘러봤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체적으로 악의에 가득 차 있었다. 다크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은 분명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었다. "왜, 왜 그래?" "가스톤!" "왜?" "케락스로 가자. 코린티아가 박살난 후 거기가 코린트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면서?" 다크가 내린 의외의 결정에 가스톤은 경악했다. 지금 거길 가자는 의도가 문지는 몰라도 분 명 그냥 구경이나 하자는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뭐, 뭐? 지금 제 정신이야? 코린트의 수도에 가서 뭘 하려고......." "그거야 가 보면 알겠지. 자, 준비해 줘!"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우리들만으로 케락스로 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야." "절대로 자살 행위는 아니지. 지금 이곳을 박살내 놨으니, 분명히 놈들은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누군가를 파견할 거야. 그러니 녀석들의 전력은 상당히 줄어들거나 최소한 분산된다고 봐야겠지. 바로 그 틈을 노리는 거야. 놈들이 나를 가지고 놀았으니 나도 그만큼은 갚아 줘야 할 것 아냐? 자, 빨리 준비해. 지금 이건 친구로서가 아니라 치레아 대 공으로서의 명령이야!" 명령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가스톤은 마지못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친구였기에 어느 정도 허물없이 지내고는 있었지만, 사실상그녀와 자신들의 신분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우정이니 뭐니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너무나도 복수라 는 단어에 미쳐 있었다. 케락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전하, 치레아 기사단과 접전에 들어갔다고 연락을 했었던 윌리엄스 후작 말이옵니다......" 레티안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자못 흥미를 느낀다는 듯 눈빛을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왜, 새로운 정보라도 있는가? 벼룩으로부터 보내 온 정보에 따르면 고양이는 그대로 있따 고 했잖은가? 또, 치레아 기사단은 미란에 파견 나갔다고 했고 말이야. 그래서 밀티 성에 나 타난 것은 아무래도 치레아 기사단은 아닌 것 같다고 결론을 짓지 않았던가?" 그러자 레티안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 로체스터의 기억이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며 말을 이었다.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무래도 잘못 된 것 같사옵니다. 윌리엄스 후작은 황금빛 타이탄 들, 그러니까 치레아 기사단이 가지고 있는 드라쿤들과 교전에 들어갔다고 보고를 했었으니 까요." "뭐야? 그렇다면 미란으로 간 것은 또 뭐라는 말이냐? 분명히 벼룩은 치레아 기사단이 미란 으로 갔다고 했잖은가?" "예. 그래서 미란에 있는 정보원들에게 그 내용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 보라고 지시해 뒀사옵니다. 그리고, 밀티 성에서 다시 연락이 왔사온데......" "그런데?" "윌리엄스 후작 이하 타이탄 부대가 그때의 보고 이후로 행방 불명이 되었다는......" 부하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당혹감을 넘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이탄 40대로 이 루어진 막강한 부대가 갑자기 행방 불명이라니......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 문이다. "그렇게 중요한 사안을 왜 이제야 보고하는가?" "적들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던 타이탄이 40기이옵니다. 적들과 교전한 후 노획품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까지 생각하며 기다리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 식이 없어 숲 쪽으로 급히 척후병을 파견했는데, 전투의 흔적만 발견했을 뿐 그 외에는 아 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옵니다." "멍청한 것들!" 로체스터 공작은 레티안의 얼굴이 더 이상 보기 싫다는 듯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쪽 에는 해골 가면을 쓴 용병 대장이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용병 대장 도 이번 사건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문제가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40기의 타이탄을 흔적도 없이 박살낼 정도의 실력이라면, 이건 엄청난 적일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 은 다시금 시선을 제임스 쪽으로 돌렸다. "까미유는 어디 있나?" "예, 후작 각하께서는 지금 금십자 기사단을 도와 준다고 나가셨사옵니다." "좋아, 까미유한테 수도로 돌아오라고 전해라." "옛, 전하." "그리고 근위대에도 출동 명령을 내려라. 내가 직접 가겠다." "예? 그렇게 되면 수도가......" "괜찮아, 로젠 공작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로젠 경." 로체스터 공작의 호명에 로젠 드 발렌시아드 대공은 앞으로 한 발 자국 나서며 외쳤다. "맡겨만 주십시오, 전하." 로젠은 2차 제국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거느리고 이곳 수도에 진을 치 고 있었다. 흑기사들로 이뤄진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있는 한 근위대를 밖으로 빼도 크게 문 제 될 것은 없었으므로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이 직접 근위대를 이끌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 갈 생각이었다. "한 30분쯤 후에 까미유의 제2근위대가 도착하면 경이 그 지휘를 맡아 주게. 발렌시아드 기 사단과 제2근위대가 있으면 수도를 지키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게야." "알겠습니다, 전하." "좋아, 이동 마법진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참, 자네도 갈 텐가?" 로체스터 공작의 물음에 용병 대장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공손히 대답했다. "예, 전하."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화려하고 거대한 도시, 이것이 코린트 최대의 상업 도시인 케락스의 모습이었다. 케락스는 예전에도 코린트 제2의 도시에 어울리는 규모와 부를 자랑하는 거대 도시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에 황궁이 들어서면서 황족들과 함께 모든 귀족들과 신하들까 지 이주해 왔다. 거기에다 덧붙여 기사단과 대규모의 군대까지 주둔하게 되어 더욱 흥청거 리는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흐흐흐! 저 거대한 성을 보니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드는군." 시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크는 첫 소감을 내 뱉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 성은 최강의 제국 코린트를 상징할 만큼 규모가 대단했다. 다크의 눈빛은 마치 대단한 먹이를 앞에 두고 있는 맹수의 그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팔시온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젓더니 슬쩍 참견을 시작했다. "이봐, 진짜로 할 거야?" "그럼, 내가 여기까지 뭐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다크는 저 멀리 보이는 코린트의 황궁을 확인한 후 일행에게 지시했다. "자, 이제 목표지에 도착했으니까 밥이나 먹자." "뭐?" "새벽에 출발한다고 아직 밥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 우선 식사나 하고 일을 시작하자구." 너무 느긋하게 말하는 다크를 보며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가 그게 적국의 한복판에 도착해서 할 말인가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명령은 떨어졌으니 돌이킬 수는 없었다. 곧장 보 따리를 뒤적거려 먹을 것을 꺼내기 시작했고 곧이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적국의 황궁을 힐끗거리며하는 식사는 상당한 스릴이 있었다. 마치 긴 장이라는 양념을 적당히 뿌려 놓은 것처럼....... 가스톤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다시 걱정스러 운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적국의 수도에 가까운 곳이니까 어딘가 탐지 마법진이 쳐져 있을지도 몰라. 놈들이 먼저 알아 채고 공격해 오면 어쩔 거야?" "어쩌기는, 싸우면 되지. 거기까지 찾아갈 수고를 덜 수 있으니 더욱 좋잖아." 무슨 질문에도 태평스럽기만 한 다크를 보며 모두들 쓴웃음을 지었다. 어쩄든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은 한정되어 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 시간은 종료를 고했다. 다 크는 천천히 일어서서는 뚜둑, 소리가 나도록 이리저리 몸을 흔들더니 가스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 이제 식사는 했으니 가볍게 한 판 해 볼까? 너희들은 탈출 준비를 해 놓고 여기에서 기다려." "뭐? 그렇다면 저길 너 혼자 가겠다는 거야. 지금 미쳤냐?" "지극히 제정신이야. 대신 좀 위태로워지면 이리로 돌아올 테니 탈출 준비를 해 놓고 있으 란 말이야. 재빨리 도망치게 말이야. 또다시 명령이란 단어를 떠올려야 말을 들을거야? 자 자, 군소리하지 말고 준비들 하라구." "알았어." 가스톤이 마법진을 그리고 있을 때, 다크는 자신의 타이탄을 불러 냈다. 거대한 청색 타이탄 이 다시금 긴 잠을 깨고 공간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안드로메다는 타이탄 특유의 저음 으로 말했다. <불렀는가, 주인이여.> "멍청한 녀석! 불렀으니까 나왔지. 자 가자구. 한바탕 멋지게 휘저어 놔야지." <바라던 바다. 오늘은 일거리가 많아서 좋군.> "자, 머리를 열어라." 다크는 청기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일행들에게 외쳤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기다려!" 이윽고 청기사의 거대한 머리가 원상태로 돌아가면서 허리에서 거대한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이 세계 최강의 기사와 타이탄! "이건 시작일 뿐이야. 지금부터 걸리는 놈은 모두 다 죽여 줄테다. 자, 기대하라구. 오호호호 호!" 청기사는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지축을 울리 는 굉음과 함께 대지에는 거대한 발자국을 남기며...... 이제 누가 어떻게 청기사와 대적할지 는 모르지만 아마도 대단히 재수없게 걸려든 존재가 될 것이다. "정말 못 말리겠군." "어쩌겠냐. 아무리 해도 말을 안 듣는데..... 가스톤, 그렇게 넋 놓고 있지만 말고 탈출 준비 나 서둘러. 우리가 할 일은 그것뿐이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이일은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닌 것 같아." 코린트의 새로운 수도 케락스, 코린티아 시가 크루마의 유성 소환 공격에 의해 먼지로 변해 버린 후, 코린트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케락스 시의 외곽 한구석에는 거대한 황궁이 위용을 자랑하며 자리잡고 있었다. 황궁은 전쟁으로 파괴된 '피의 궁전보다 더 웅장 한 규모로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얼마나 큰지 전쟁이 끝난 후 6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완성 되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코린트의 자존심이 담겨 있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아직 미완성인 황궁 건물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붉은 벽돌로 만든 건물이 코린트의 근위 기사단이 위치한 사령부였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위치한 것이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 실이 마련되어 있는 코린트 군의사령부 건물이었다. 사령부 건물의 3층에 있는 넓은 회의실 에서 큼직한 체스 판을 두고 땅콩을 씹으며 체스에 열중인 두 사람. 그 중 한 명은 로젠 대 공이었고, 또 한 명은 급히 전장에서 돌아온 까미유 후작이었다. 나이트(Knight)가 성장(Rook)과 승정(Bishop)의 도움을 받으며 상대방의 방어 진형을 압박 하고 있었다. 최대한 이쪽에서도 그에 대비하기 위해 전력을 집중시키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전력이 조금 딸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상대가 슬며시 여왕(Queen)을 거기에 가 담시키자 까미유는 짐짓 우는 소리를 늘어놨다. "이봐요, 로젠 형. 좀 봐주면서 두세요. 이거 원 이렇게 무자비하게 둘 수가 있는 겁니까?" "하하하! 이거 하수를 벗겨 먹으려니까 너무 미안하구먼. 아무튼 이걸로 100골드 벌었으니 기분은 괜찮은데. 어때, 지금이라도 항복하시지." "젠장, 누가 그렇게 순순히 두 손을 들 줄 알아요. 자, 어때요?" 까미유는 여태껏 아껴두고 있던 나이트를 방어진에 가담시켰다. 이제 어느 정도 평수를 유 지했다며 한숨을 돌리는 순간, 로젠은 이미 까미유의 수법을 예상했는지 회심의 미소를 지 으며 여왕을 대각선으로 크게 전진시켜, 까미유의 왕(King)을 사정 거리에 잡았다. "체크!" 물론 까미유의 왕이 도망갈 자리는 있었기에 체크 메이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왕을 회 피시키면 왕과 함께 사정 거리에 잡혀 있는 성장이 비명횡사할 게 분명했다. "젠장, 치사하게......" 그때 밖에서 분주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덜컥 열렸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사 람은 오른편 가슴 위에 금색 표식만이 없을 뿐 로젠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재 빨리 부동 자세를 취하며 보고를 올렸다. "적의 기습이옵니다, 대공 전하. 일단 프로글리 경이 막고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뭣이? 누가 감히 본국의 수도에 기습 공격을 했단 말이냐? 그래, 적의 수는 얼마나 되느 냐?" "그것이......" "빨리 보고해라." "예, 그런데 그게.... 적은 단 1기이옵니다."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냐?" "제정신이옵니다, 전하. 적은 엄청나게 큰 청색 타이탄을 타고 나타나......" 까미유는 거기까지 설명을 듣고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갔다. 까미유의 표정을 보고 뭔가 이 상함을 느낀 로젠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려왔다. "자네,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나?" "형은 청기사라는 타이탄에 대해 못 들었어요?" "크라레스의 근위 타이탄이라는 그거 말이야? 하지만 이번 크라레인 시 기습 작전에서 단 시간에 3기나 파괴했다면서? 그것을 보면 단독으로 쳐들어올만큼 그렇게 대단한 놈은 아닌 모양인데?" "그거야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느냐에 달린 거겠죠. 아무리 강력한 타이탄도 바보 같은 녀석 이 타면 고철에 불과하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요. 더군다나 강력한 타이탄 에 최고의...... 아무튼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벌써 사령부 건물의 제일 위층에 마련되어 있는 망루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청색 타이탄과 그것을 막기 위해 분투하 고 있는 흑기사들이었다. 이미 로젠에게 보고가 들어가기도 전에 적이 달려오는 것에 대한 보고를 들은 기사들이 먼저 달려갔기에 전투가 이미 벌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로젠은 청기 사의 검이 불타 오르듯 푸른 광채를 뿜어 내고 있는 것을 보며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것이..... 청기사? 정말 대단한 기사가 타고 있군. 어떻게 아버님만이 익히셨다는 신기인 '오러 파이어'를 익혔지?" 오러 파이어는 코린트가 낳은 최강의 검객인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이 직접 이름을 붙 인 최강의 검술이었다. 키에리는 그것을 익혔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다른 사람은 그 기술을 익힐 수 없었다. 심지어 마스터인 로체스터나 리사마저도...... "그거야 당연하죠. 대공 전하를 이긴 상대니까요." 까미유의 설명을 듣던 로젠의 눈동자는 순간, 분노에 불타 올랐다. 로젠의 아버지인 키에리 가 모든 것을 잃고 은거하게 만든 원수 같은 놈이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뭐야, 저놈이?" 까미유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로젠은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이어 시커멓게 생 긴 육중한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까미유는 기겁을 하며 뒤따라 달려온 기사 에게 명령을 내렸다. 로젠도 뛰어난 기사이기는 했지만, 도저히 그녀의 상대가 될 수는 없다 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잘못 하면 부자가 모두 그녀 때문에 세상을 등져야 하는 경우 가 생길 수도 있었다. "가능한 한 모든 타이탄들을 즉시 출동시켜라. 발렌시아드 기사단과 제3근위대를 모두 다! 즉시 명령을 전달해라!" "예, 각하." 까미유는 명령을 내린 다음 건물 아래쪽으로 급히 뛰어내렸다. 곧이어 사령부 건물 옆에는 붉은 색의 거대한 타이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제법 반응이 있는데? 상당한 실력자들이야. 안 그래?" 방패와 검으로 양쪽에서 날아오는 검들을 각각 막아내며 다크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놈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것보다는 이렇듯 발악이라도 할 줄 아는 놈들 을 죽이는 편이 훨씬 재미있는 것이다. "자, 이건 어떻게 할까?" 그와 동시에 청기사는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사방으로 검기를 내뿜었다. 굉음과 함께 순 식간에 자욱한 먼지가 솟아올랐다. 그러자 청기사를 포위하고 있던 10여 기의 흑기사들이 방패를 앞세운 채 거의 20여 미터 뒤로 밀려 나갔다. 흑기사들이 뒤로 밀린 자리에는 길게 땅이 파여 있어 그들이 자의에 의해 뒤로 후퇴한 것이 아님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105톤이나 되는 거구들이 20여 미턴나 뒤로 밀려날 정도로 다 크의 일격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뛰어난 실력의 기사들이 타고 있었기에 마나를 이용하여 간신히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해. 여태껏 이만한 놈들은 보지 못했어. 호호호!" 사실 다크도 처음부터 그 정도 일격에 상대가 전멸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쉽고 호락호락한 놈들이었다면 오늘의 코린트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다크는 대신 놈들이 뒤로 밀려나며 넓어진 공간을 이용해서 앞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청기 사는 그 엄청난 덩치와 무게에도 불구하고 비둘기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는 매와 같은 움직 임을 보여 주었다. 앞쪽에 있던 흑기사는 뒤로 밀려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상대방 이 먼지를 뚫고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자 침착하게 대응해 왔다. 정말 무섭도록 훈련을 잘 받은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것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던 다크는 이번에는 검이 아니라 방패로 상대를 후려 쳤다. 12톤이나 나가는 방패에 무지막지한 힘이 더해져 있었기에 그것을 방패로 막은 흑기 사는 예상치 못한 엄청난 충격에 놀라 뒤로 퉁겨 나갔다. 그리고 먼지를 피워 올리며 흑기 사가 땅바닥에 곤두박질 쳤을 때, 그 옆에는 아직도 방패를 꼭 쥐고 있는 몸뚱이 잃은 팔이 함께 떨어졌다. 엄청난 충격으로 팔이 부서져 나갔던 것이다. 일단 첫 번째 목표를 밀어붙인 후, 다크는 옆에 서 있는 놈에게로 공격의 방향을 바꿨다. 다시 한 번 검과 검이, 그리고 방패와 검이 부딪쳤다. 전투 중량이 160톤이나 되는 거대한 청기사가 뿜어 내는 파괴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단 한 번의 충격으로 흑기사들은 형편 없이 뒤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흑기사가 집단전을 위해 만들어진 105톤이나 되는 무거운 타이탄임을 감안한다면, 그것을 압도하고 있는 청기사의 무게는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이때, 공간이 열리면서 새로운 타이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붉은색과 검은색의 조합 으로 이루어진 타이탄들. 거의 20여 기가 넘는 타이탄들이 새로이 전투에 가담한 것이다. 그 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10기의 흑기사가 대충 평균 수를 이루면서 격 전을 벌였기에, 35기로 숫자가 불어난 코린트 쪽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할 것 같았는데, 오 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코린트의 타이탄들은 오히려 동료들에게 공간을 방 해받아 회피 기동력이 떨어진 데 반해, 다크는 이제야 해 볼 만하다는 듯 극악한 정면 공격 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청기사의 불타는 듯한 검이 대기를 가를 때마다, 불꽃이 퉁겨 올랐다. 그리고 뭔가 박살이 났다. 그 전에는 공격을 당한 흑기사가 충격으로 뒤로 퉁겨 나가면서 그 틈을 옆의 타이탄 들이 대신했기에 청기사의 공격이 특정한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았지만, 지금은 뒤 로 퉁겨도 쭉 밀리는 것이 아니라 아군 타이탄 때문에 도중에 멈춰 버렸다. 그러한 순간, 청 기사의 검은 정신 없는 상대의 몸통을 사정없이 그어 버렸다. 5대의 흑기사가 땅에 쓰러지고서야, 루엔은 지금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를 간파했다. 즉시 10여 기만 앞으로 돌리고 나머지는 뒤쪽으로 뺐다. 소수의 적을 다수가 상대할 때 자주 사 용하는 전법을 사용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상대의 실력이 뛰어날 때는 장시간 격투를 벌 여 적의 힘을 빼고, 또 이쪽은 전력을 다해 적을 막아낸 후 뒤쪽의 힘이 넘치는 동료들과 교대를 하여 지속적인 힘을 유지하는 전법, 즉 차륜 전법을 쓰도록 지시한 것이다. "제법 하는군." <이 상태로 가면 위험하다.> 안드로메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인에게 위험 신호를 보냈다. 안드로메다가 봤을 때 지금 의 상황은 위험한 것이 사실이었다. 여태껏 다크는 타이탄 전투를 벌이면서 실력 없는 다수 의 적을 상대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키에리와 승부를 벌일 때도 다른 적들은 크루마의 기사 단이나 유령 기사단이 막아 줬기에 거의 일 대 일의 상황으로 전투를 전개했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얘기가 달랐다. 상대는 대단히 능력 있는 놈들로만 이뤄진 집단이었다. 그리 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외로운 싸움이었다. 한 대 한 대 파괴되어 나 뒹구는 흑기사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그만큼 청기사의 몸집에도 상처가 늘고 있었다. 워낙 많은 적에게 둘러싸여 있어 다크의 장기라고 할 수 있 는 빠른 몸놀림이 불가능했기에 벌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크를 힘들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강력한 적들을 상대로 타이탄 전투를 벌여 본 경험이 전무하다는 사실이었다. 일 대 일이나 그와 유사한 경우에는 대충 힘으로 밀어붙이면 결판을 낼 수 있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타이탄과 자신이 완전히 한 몸이 되어 격전을 벌여야 하는데, 여태껏 혼자서 검을 들고 설쳐 댔던 습 성이 미묘한 불일치를 조성하고 있었다. 덩치 큰 안드로메다가 아무리 빨리 움직여 주고 있 다고 해도, 그녀 자신의 움직임을 그대로 표현해 내지 못하기에 벌어지는 문제였다. "제기랄, 이렇게 되면 이젠 속도가 아니라 힘으로 승부하겠다." 다크는 계속 간발의 차로 적을 놓치자 신경질이 바짝 나서 외쳤다. 두 명의 적을 공격한 후 또 다른 타이탄을 먹이로 휘두른 검이 허공을 갈랐을 때 내린 결정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적들과 격투를 벌이는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검을 대지에 박아넣었다. "쿠콰콰콰콰콰......." 대지의 기운과 검의 기운을 충돌시키는 최강의 검법. 그 검법이 타이탄에 탑승한 채 시현된 것이다. 앞 열에 있던 흑기사들은 그 순간 흔적도 없이 바스러져 버렸고, 외곽을 포위하고 있던 타이탄들은 그것을 보는 것과 동시에 뒤로 후퇴했지만 거대한 강기의 회오리에서 완전 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반경 수백 미터에 걸쳐 순식간에 강기의 회오리가 퍼져 나가으며 그 회오리가 지나간 후에 남은 것은 처절한 파괴의 현장이었다. 강렬한 검강의 회오리가 지나간 후 살아 남은 코린트의 타이탄은 단 1기. 겉이 너덜너덜해 져 버린 적기사뿐이었다. 하지만 그 적기사도 주인의 생명을 지켜 내는 데 모든 힘을 소진 했는지 천천히 땅바닥에 거대한 몸을 눕히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한참동안 말이 없던 안드로메다가 자신이 이런 엄청난 기술을 쓴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뇌까렸다. "자기가 하고도 몰라? 이 머저리. 후우- 아무튼 힘들어 죽겠군.: 다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천천히 훑어 봤다. 일어서 있는 적의 타이탄은 단 1기도 없었다. 일단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다크가 천천히 말했다. "이봐." <왜 그런가? 주인이여.> "내가 말이야. 지금 기...... 아니, 마나를 좀 보충해야 하는데 말이야. 지금 기를 빨아들여도 너한테 상관없을까?" <그것은 안 된다. 나 또한 마나를 흡수해서 생을 유지하는 몸. 나의 마나를 뺏긴다면 생명 을 마칠 수밖에 업다.> "제길 그럼 머리를 열어. 그리고 너는 돌아가. 나도 어디 가서 손실된 마나를 좀 보충해야겠 어. 이 기술을 타이탄에 탄 채 쓰는 것은 아무리 나라도 좀 힘들군." 안드로메다는 선뜻 머리를 위로 들어올렸다. 다크는 아래로 뛰어내린 후 자신이 만든 작품 을 다시 한 번 흥미롭게 감상했다. 형체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타이탄은 단 1기도 없었다. 청기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10여 기의 타이탄들은 몸체의 절반 이상이 파괴된 채 널브러져 있었다. "휘유- 정말 대단하군. 훌륭한 작품이야." 다크는 청기사가 공간을 가르고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하지도 않고 재빨리 팔시온 일행이 기 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이렇듯 위험한 곳에서 운기 조 식을 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급보를 받고 돌아온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처절한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 었다. 키에리라는 검호가 공들여 키웠고, 또 흑기사라는 막강한 타이탄들로 무장한 발렌시아 드 기사단이 단 한 순간에 전멸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적기사들로 이뤄진 제2근위대와 함 께 말이다. "생존자는 있느냐?" "예, 전하. 다섯 명이 생존했사옵니다." "단 다섯 명뿐인가, 누가 생존했느냐?" "예. 로젠 대공 전하와 까미유 후작, 그리고 제2근위대 소속의 오스카 경, 스칼 경, 그리고 발렌시아드 기사단의 메글리 경이옵니다. 지금 마법사들이 치료를 하고 있사오나 최소한 두 달은 정양을 해야 한다고 하옵니다." 부하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젠과 까미유가 살아 남았다는 것이 그에게는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런가?" 로체스터 공작은 그제야 천천히 주위를 쭉 둘러봤다. 황궁의 한쪽 귀퉁이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단 한 명의 인간이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로체스터 공작은 용 벼 대장에게로 잠시 시선을 멈췄다. 용병 대장 또한 이 엄청난 파괴의 현장을 보고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용병 대장!" "예, 전하" "잠시 나 좀 보세." "예." 부하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후에야 로체스터 공작은 소리를 낮춰 얘기했다. "무슨 기술인 것 같나?" "글쎄...... 나도 생전 처음 보는 기술이야. 이런 기술이 있다는 말도 못 들어 봤어. 어떻게 수 십 대의 타이탄을 한꺼번에 박살낼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로체스터 공작은 힐끗 파괴의 현장을 다시금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더욱 분명해졌군. 그녀가 있는 한 크라레스는 무적이라는 사실 말이야. 이제부터 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근위대를 밖으로 빼면 안 되겠어.근위대 전력을 그대로 보존해 놓고, 부하들만으로 크라레스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 수밖에 없어. 이번 기회에 크라레스를 멸망 시키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역으로 본국이 크라레스에게 먹히고 말거야." 로체스터 공작이 크라레스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분노에 찬 다짐을 하고 있을 때, 다크는 일 행들과 함께 멀찌감치 공간 이동을 한 다음 운기 조식에 들어간 후였다. 그녀가 운기 조식 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일행들의 얼굴은 활짝 펴졌다. 거의 모든 힘을 소진한 듯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돌아온 그녀가 아주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이제 몸은 괜찮아?" "어느 정도는...... 그건 그렇고 그 동안에 아버지하고는 연락해 봤어?" "응, 가스톤이 했지. 그런데......" "그런데?" "카슬레이 백작이 출발한 후 30분 이상이 흘렀는데도 아직 연락이 없다고 하시더군. 원래는 그 전에 보고가 올라와야 정상이거든." "그게 언제야?" "한 20분쯤 전이었던가?" "젠장, 그럼 나를 불렀어야지." "하지만...... 너가 그러고 있을 때는 주변에 다가가기가 겁난다구. 저걸 봐." 팔시온은 다크가 운기 조식을 위해 앉아 있던 곳 주변에 서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나무에 는 별로 이상이 없는 듯 보였지만, 다크가 앉아 있던 곳 주위에는 수많은 벌레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거들은 한눈에 척 봐도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가 그러고 있을 때는 주위에 있는 마나를 엄청난 기세로 흡수한다구. 아마 잘은 모르겠 지만 저 나무도 하루만 지나면 나뭇잎이 다 떨어져 버릴걸?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잖아." 다크도 그 나무를 본 후 깨닫는 바가 있었다. 북명신공을 이용해서 있는 대로 기를 빨아들 였으니, 주위의 생명체가 살아 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다크는 더 이상 그것을 문 제삼지 않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럼 어떻게 하지? 가스톤, 가스톤은 어디 있지? 지금 미란으로 가야겠어. 가스톤에게 마법 진을 그리라고 해." "이미 그리고 있어. 네가 마나를 빨아들이는 바람에 여기서는 마법을 쓰기 어렵다고 저쪽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작업을 하고 있지." 동료의 말에 다크는 슬쩍 미소를 보냈다. 역시 오랜 시간 함께 일해왔던 동료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 전하의 특명 이곳은 미란 국가 연합. 6년 전, 코린트와 크루마 사이에서 일어난 대규모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치열한 격전장 이 되었던 탓에 미란의 피해는 실로 막대했었다. 이제 그 악몽에서 벗어나려는데 갑자기 크 루마가 대대적인 기습 공격을 가해 왔다. 미란의 정규군은 보병 10개 사단, 기병 4개 사단, 2개 기사단 체계였다. 거기에 6년 전 전쟁 때 편상한 4개 용병 사단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웬만한 다른 중소 국가들과 비교한다면 대 단히 강력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딴 것을 모르겠지만 미란의 기사단만은 상당한 문 제가 있었다. 미란의 기사단은 6년 전 전쟁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었다. 거의 90퍼센트에 가까운 타이 탄이 파괴되었고, 전체 기사의 반 이상이 전사했다. 그야말로 미란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었 던 거이다. 자신들이 주체가 되지 못한 전쟁에서, 강대국의 다툼에 휘말려 거의 전멸에 가까 운 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외형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전쟁이 끝난 지 6년, 다행히 평화로운 여유 시간이 있었기에 타이탄의 질과 양은 전쟁 이전 수준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이탄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실 력 있는 기사를 겨우 6년 동안 대량 생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타이탄이야 승전국의 대열에 들어간 탓에 노획하거나 파괴된 타이탄을 수거하여 알카사스에 의뢰하여 재생산할 수 있었지만 이미 죽어 버린 기사들을 되살릴 길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취약점을 가지고 있는 미란을 크루마의 근위 기사단을 선두로 한 수많은 병력이 한꺼 번에 밀어붙였으니, 그야말로 소 쓸 여지도 없이 무너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렇게 약소 국들은 늘 강대국의 횡포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크루마가 미란을 집어 삼키려고 한 이유는 6년 전 전쟁에서 획득한 쟉센 평원과 관계 가 깊었다. 새로운 점령지인 작센 평원과 크루마 본국 사이에 위치한 미란 국가 연합은 그 야말로 크루마로서는 눈에 들어 있는 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소수로 구성되어 있는 기사단의 경우에는 마법진을 이용해서 신속히 본토에서 쟉센 평원으 로 이동할 수 있었지만 군대의 경우는 그게 힘들었다. 그런 탓에 크루마의 군대가 대량으로 이동하려면 부득이 미란의 영토를 통과해야 하는데, 미란이 그걸 순순히 허락할 리가 없었 다. 평상시라면 그럭저럭 마법진을 이용해서 필요한 만큼의 병력을 수십 번에 나눠 수송하 면 되겠지만, 만약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대량의 병력이 통과해야 하므로 미란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하는 사태까지 몰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크루마는 전쟁을 일으키자 곧장 그토록 갈구해 왔던 미란의 도로망부터 집어삼켰 기에 쟉센 평원으로 향하는 도로망을 갖추고 있던 토란과 가므 왕국이 제일 먼저 함락되고 말았다. 꿈에도 원하던 도로망을 손에 넣게 되자, 크루마의 군부에서는 이제 더 이상 바쁠 것 없다 는 듯 주력 부대를 그대로 쟉센 평원 쪽으로 이동시켜 버렸다. 미란은 이미 가므왕국과 토 란 왕국을 집어 삼키는 대규모 전투에서 기사단의 70퍼센트를 상실한 상태였기에, 남은 잔 여 세력을 소탕하는 데에는 소규모의 기사단만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아름다운 호반 도시인 마로니카의 변두리 쪽에 미란 국가 연합의의장인 지크프리트 데 가므 3세의 왕궁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하지만 그 곳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격렬 ㄹ한 전투로 인해 군데군데 부서져 있었고, 곳곳에 파괴된 타이탄들과 시체들이 널려 있었 다. 부상자들을 처리하기에도 바빴기에, 타이탄의 수거라든지 전사자의 매장까지는 신경쓰기 가 힘들었던 것이다. 마로니카에는 현재 5개 연대(5천명) 정도의 보병이 주둔하고 있었고, 다섯 명의 기사가 남아 있었다. 크루마의 주력 부대는 이미 쟉센 평원을 향해 출발한 후였고, 미란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부대들은 그들을 쫓아 남하하고 난 후였다. 문득, 마로니카의 왕궁 한 쪽 귀퉁이에 마련되어 있는 영구 이동 마법진이 한순간 밝게 빛 나더니 사람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미란 국가 연합의주요 인물들이 국외로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라는 아르티어스의 명령을 받고 미란의 맹주인 가므 의장과 상의하기 위해 급히 도착한 치레아 기사단이었다. 하지만 치레아 기사단을 이끌고 도착한 카슬레이 백작은 마법진 주위에 배치된 병사들의 군 복을 보는 순간, 자신이 다크에게 완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몸을 떨었다. 미란이 아직 점령당 하지 않았으니 가서 구출하라는 명령이었는데, 이미 크루마에 의해 점령된 다음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사령관 각하를 만나 뵈려고 오셨습니까?" 급히 정신을 수습한 카슬레이 백작이 마법진 주위에 서 있던 세 명의 경비병들을 해치우려 고 하는데 이미 저쪽에서 먼저 발견하고 인사를 건네오고 있었다. 보통 마법진이 원활히 돌 아가는 경우는 높은 인물들이 그것을 통해서 이동해 오기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아직 여기저기에 죽어 나자빠져 있는 시체들을 치울 일손도 없는 판국에 꼼꼼히 신경을 쓸 수 없어서 하급 병사 몇 명을 마법진 주위에 배치해 둔 것이 카슬레이 백작 일행에게 오히 려 행운을 안겨 주었다. 마찬가지로 경비병들 역시 그 한순간의 인사로 인해 값싼 목숨을 건진 것이다. 카슬레이 백작은 검 쪽으로 향하던 손을 황급히 들어올려 슬쩍 흔들면서 얼버 무렸다. "어 어..... 그래, 수고가 많구먼." 마법진 주위에 서 있던 크루마의 경비병들은 번쩍 거리는 옷을 입고 있는 이 사람들이 본국 에서 지원 나온 기사들인 줄 착각하고는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대했다. 그 번쩍거리는 옷에 는 저마다 자신들의 신분을 드러내는 문장들이 그려져 있었지만 낮은 지위의 경비병들은 그 수많은 문장이 뜻하는 바가 뭔지를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곳에 좀더 높은 계급을 지닌 인물이 있었다면 이들이 적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을 터였다. 예상하지도 않았던 경비병의 인사를 받으면서 카슬레이 백작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쭉 둘러 봤다. 아직도 군데군데 시체들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일대가 점령된 지 얼마 되지 않 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복장을 하고 계속 주위를 어슬렁거릴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이 멍청한 경비병 녀석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 들을 알아볼 수 있는 놈이 언제 나타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저쪽으로 가시지요. 사령관께서는 성 안에 계십니다." 여기까지 말한 경비병은 동료에게 급히 말했다. "한스, 자네는 윗분들이 오셨다고 대대장님께 통보하게." 카슬레이 백작은 부하들의 일부가 경비병이 달려가는 것을 보고 흠칫하는 것을 눈짓으로 막 았다. 아직까지는 괜한 사고를 일으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시치미를 떼고 는 경비병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어쨌든 상대는 이쪽의 정체를 모르는 게 분명했으므로 그것을 이용해서 정보를 취득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므 의장은 잡았나?" "예,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것은 잘 모릅니다, 기사님. 대대장님이 오시면 물어 보시지요. 아 마 공 오시 겁니다." "아니, 대대장보다는 사령관에게 안내하게. 그쪽에 볼일이 있으니까." "예. 이리로 오시지요." 성실하게 자신들을 안내해 가는 경비병의 뒤에 따라붙으면서 카슬레이 백작은 슬며시 질문 했다. 주위를 쭉 둘러보니 시체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고, 심지어 파괴된 타이탄까지 2,3기 눈에 띄었다. 상황이 이 지경으로 방치된 것을 보면 이것들을 치우고 회수할 인원이 부족하 다는 말일 것이다. 시체를 치운다고들 것을 들고 다니며 애를 쓰는 인물들도 간혹 보이기는 했지만, 그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전토는 언제 끝났나?" "예, 약 30분쯤 전에 끝났습니다, 기사님." "30분이라...... 미란이 패배했다고 하지만, 아직 잔당들이 많이 남아 있을테니 고생이 많겠구 먼." "잔당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놈들은 황급히 남쪽으로 철수했고, 우린 여기에 있는 수비군 을 제외하고는 모두 놈들을 추격해 들어갔으니까요. 기사님들 대부분이 추격전에 가담하신 것을 보면, 미란도 이제 끝장 난 것이지요." 그 말에 카슬레이 백작의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이 경비병들은 기사들이 아군인지 적군 인지 구별도 못 할 정도니까, 결코 높은 계급은 아닐 것이고 또 그렇다면 군대의 사정이 어 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보고 들은 것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슬쩍 유도 심문을 하니까 경비병은 대충 자신이 아는 바를 친절하고 구체적으로 토해 냈다. 물론 너무 노골적으로 물으면 수상하게 여길테니 지나가는 듯한 말 로 물었을 뿐이었기에 더욱 간략한 대답밖에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 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이 병사의 말대로 크루마의 주력 부대가 여기에 없다면 안심하고 행동해도 상관없을 거이다. 만약 들키면 그 때는 재빨리 튀면 될 것이 고...... "그런가? 오늘과 같은 대승리를 거둔 것도 다 자네들 같은 하급 병사들이 열심히 해 줬기 때문이야. 아무리 기사단이 강하다고 해도, 병사들이 약하다면 힘들거든. 안 그런가?" "그렇습죠, 기사님. 헤헤헤......" 카슬레이 백작이 슬쩍 띄워 주자, 병사는 상관에게 치하를 받아서 신이 났는지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내가 미네르바 전하의 특명을 받고 이곳에 온 것은 미란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야." 능청스레 말하는 카슬레이 백작에게서 '미네르바 전하의 특명'이라는 말이 나오자 병사는 바 짝 긴장한 어조로 즉각 답했다. 역시 단순한 게 하급 병사들이어서 그들은 일단 높은 사람 의 이름만 나오면 무조건 긴장하고 굳어 버린다. 이 병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옛!" "아무래도 미란의 동맹국인 크라레스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이거지. 그래서 혹시나 하 고 왔는데, 예상보다는 잘 풀리고 있어 다행이로군. 하지만 녀석들이 언제 손을 써 올지 모 르니까 경계를 늦추면 안되겠지." 상관이 매우 긍정적인 어조로 말했으므로 병사의 한껏 굳었던 표정은 조금 풀렸다. "예, 전투가 끝난 후 사령관 각하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것 때문에 바 쁘신 모양이지요. 그렇게 급하신 일이라면 빨리 사령관 각하를 만나 보셔야 하겠군요." 병사가 걸음을 점점 더 빨리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한 장교가 뛰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외 양은 병사들이나 마찬가지로 투박한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갑옷에 작은 문장이 그려져 있 었고, 대대장임을 뜻하는 표식이 붙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는 병사가 카슬레이 백작에게 보 고 했다. "저기 대대장님이 오십니다." "아, 그렇군." 드디어 일은 급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거리가 좀 멀어서 대대장은 이쪽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거리가 가까워져서 옷에 붙어 있는 문장을 알아보기만 한다 면 문제는 심각하게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카슬레이 백작은 다급히, 하지만 자신의 초조함을 병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쩍 말했다. "파시르, 자네는 부하 몇 명 데리고 대대장과 함께 이 근처 경비 상황을 점검하게나. 한시가 급하다." 카슬레이 백작이 한쪽 눈까지 찡긋하며 말했기에, 오랜 세월 용병 생활로 잔뼈가 굵은 파시 르가 그 속뜻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옛!" 하고 대답함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기사들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기에, 그가 대대장에게 도착한 것은 거의 순식간이었다. 대대장은 갑자기 튀어나온 크라레스의 기사를 보고기겁을 한 모양이지만, 파시르는 목에다 가 다정스레 팔을 거는 척하면서 목뼈 안쪽에 숨어 있는 숨골을 지그시 압박했다. 대대장은 저항도 못 하고 순식간에 저 세상으로 떠나 버렸다. 정말 대단한 살인 기술이 아닐 수 없었 다. 파시르는 일부러 호들갑스럽게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대대장에게 말을 걸며 그 대대장 을 그야말로 물건 들 듯 양쪽 어깨를 잡아 들고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남은 크루 마의 병사들은 그 기사가 주위를 급히 둘러보기 위해 걸음이 느린 대대장을 도와 준 줄 알 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대대장이 이미 시체가 되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가므 국왕을 구출하는 것도 중요하긴 했지만, 여기에 남아 있는 적의 기사들이 몇 명인가 확인하는 것도 중요했다. 또한 잘못하면 그들과 정면 충돌을 벌일 수도 있었으므로 카슬레 이 백작은 자꾸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억눌렀다. 만약 여기에 자신들이 침입한 것이 밝혀진 다 해도 몇 명 남아 있지 않은 적의 기사들은 충분히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기사가 있다면 반드시 주위에 마법사도 있는 법. 마법사들이 사방에 퍼져 있는 적의 주력 부대를 급히 불러들인다면 일이 아주 복잡해질 수 있었다. 카슬레이 백작은 슬쩍 걸음을 늦춰 뒤로 처지면서 뒤에서 따라오는 부하에게 낮은 어조로 속삭였다. "건물에 들어가면 행동을 개시한다. 준비하도록!" 카슬레이 백작의 명령은 뒤따라오는 10여 명의부하들에게 신속하게 전달되었다. 카슬레이 백작은 왕궁 안에는 보나마나 고급 장교들이 있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 면 정체가 발각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건물에 들어가는 그 순간 행동 을 개시해야만 했다. 카슬레이 백작 일행이 건물 안으로 돌격해 들어간 지 20분 쯤 흘렀을까? 그들이 처음 모습 을 드러냈던 왕궁 한 쪽에 구축되어 있는 그 영구 마법진은 이제 두 번째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영구 마법진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밝은 빛과 함께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던 치레아 기사들처럼 화려한 복장을 하고있었는데, 그들 의 어깨 쪽에서 쌍두의 그린 드래곤이 새겨진 문장이 붙어 있었다. 새로 나타난 인물들 중 두 명에게는 특이한 문장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바로 드래곤 슬레 이어의 문장. 전 세계를 뒤져 봐도 드래곤을 죽였다는 인물은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그들 의 실력은 거의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실력을 크루마도 인정한 다는 듯 그들의 갑옷 위에는 하얀 유니콘의 문장도 함께 붙어 있었다. 그 둘 중 한 명이 너 무 조용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늘씬한 여기사였다.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데...... 스펜, 여기가 아닌 것 아니야?" "글쎄..... 여기가 아니라면 토란 왕국이겠지. 그 쪽에는 워렌과 아더가 갔으니까 잡을 수 있 을거야. 그렇지 않고, 아직 점령하지 못한 딴 왕국으로 갔다면 어쩔 수 없지. 알!" 스펜의 뒤쪽에 서 있는 기사들 중의 한 명이 즉시 대답을 했다. "예!" "자네는 먼저 가서 살펴봐라. 혹시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여기 사령관한테 가서 나를 좀 보 자고 전해. 정보가 정확하다면, 놈들은 가므의 요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이쪽으로 올 가능성 이 크다.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하니." "알겠습니다." 알이 왕궁을 향해 달려간 후 스펜은 샤트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들은 분명 누군가를 쫓아 여기에 온 것이 분명했지만 아직 미묘한 상황의 변화를 감지하 지는 못한 듯했다. "일단은 왕궁 근처를 경계하는 것이 순서겠지?" "당연하지." "에드먼드." "예." "자네는 부하들을 궁 주위에 매복시켜라. 놈들이 언제 나타날 지 모른다, 서둘러라." "예!" 에드먼드가 기사들을 이리저리 배치시키고 있을 때, 왕궁을 향해 달려갔던 알이 헐레벌떡 돌아오며 다급하게 외쳤다. 얼굴은 어느새 노랗게 질려 있어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음을 단번 에 알 수 있었다. "적입니다. 놈들이 이미 와 있습니다. 안은 시체 투성이구요!" "뭐? 음, 이거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네. 정보가 아주 정확한 것 같아. 그건 그렇고 놈 들은 벌써 도망쳤을까?" "그거야 가보면 알겠지/" 스펜은 시선을 저쪽에서 인원을 움직이고 있는 에드먼드 쪽으로 돌렸다. "에드먼드!" "예!" "실력 있는 녀석으로 10명 정도를 차출해라. 지금 바로 궁 안으로 돌입하겠다. 그리고 남은 대원들은 왕궁을 포위해 쥐새끼 한 마리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라." "알겠습니다." 일단 에드먼드에게 대비 태세를 유지시킨 후 스펜은 샤트란에게 말했다. "너는 밖을 맡아. 내가 들어갈 테니까." "후! 정보에 의하면 이리로 온 것은 치레아 기사단이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드라쿤이 라는 카프록시아 급의 변형 20기 밖에 되지 않아. 밖에 남아 있다가 안에서 다 처리해 버리 면 내 몫이나 어디 있겠어?" 샤트란은 스펜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왕궁 안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스펜은 서둘러서 부하들은 인솔하여 그 뒤를 쫓았다. 왕궁 안에 들어서자 자극적인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건물 안에는 먼저 정찰을 갔던 알이 발견했다는 적나라한 적의 침입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여기저기에 크루마 군의 복장을 한 시체들이 널려 있었던 것이다. 샤트란은 시체에 나 있는 검상을 유심히 살펴본 후 말했다. "역시 정보대로 기사들이 침입한 게 분명하군. 조심해야겠는데?" "역시 정석대로 나가는 것이 좋겠지. 녀석들의 목표는 아마도 요인들의 구출일 거야.그러니 지하 감옥을 뒤지는 것이 우선이겠지." 어느새 찾고 쫓기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들은 분명 가므 국왕을 찾고 있는 카슬레이 백작 일행을 쫓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좋아, 알!" "예!" "자네가 앞장서라. 놈들은 실력 있는 기사들이 분명하다. 각별히 조심해라." "염려 마십시오." "그리고 나머지는 알의 뒤를 따른다.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라." "저 대장님, 여기서 타이탄 전투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 놈들도 기사들이니 아마 타이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 맨몸으로 들 어갔다가는 죽음 뿐이야. 자, 거치적거리는 것은 몽땅 다 부숴도 상관없으니 타이탄을 꺼 내!" "알겠습니다." 자신들을 쫓고 있는 크루마의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 카슬레이 백작은 부하들과 함께 왕궁 의 지하 감옥에 있었다. 강력한 적의도착을 알지 못한 채, 카슬레이 백작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을 풀어 주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한 가지 난감한 문제 점에 봉착하게 되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완전히 뒷북친 격이로군......" 감옥 곳곳에 수감되어 있던 가므 왕국의 요인들을 구출했지만, 정작 그들 중에서 가므 국왕 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가므 국왕은 체포된 후 곧장 크루마의 수도인 엘프리안 시 로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가므 국왕이 미란 국가 연합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상 각 국가들은 개별적으로 움 직였다. 그렇기에 그의 이용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의장은 의장이었다. 일단 가므 의장을 붙잡아 세뇌를 하든 협박을 하든 해서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으면 미란의 남은 저항 세력을 잠재우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 확실했기에 서둘러 엘프리안으로 끌 고 간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다 보니 카슬레이 백작 일행은 완전히 뒷북만 친 꼴이 되었 고 소득이라곤 왕족과 귀족 몇몇을 건진 게 전부였다. "글쎄 말입니다. 설마 엘프리안으로 곧장 끌고 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사실, 가므 왕국이 이렇듯 손쉽게 무너질 거라고도 생각지 못했으니까요.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 므 의장의 구출도 중요하지만 겨우 치레아 기사단만으로 엘프리안에 잠입해 들어간다는 것 은 자살 행위나 같습니다." 카슬레이 백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외쳤다. "일단은 여기서 구출한 요인들과 의장의 가족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놓는 것이 우선이다. 나머지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자. 본국에서도 다음 일에 대한 지시가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마법진이 완성되려면 아직도 멀었나?" 카슬레이 백작의 물음에 저쪽에서 마법진들을 만들고 있던 마법사들 중의 한 명이 대답했 다. 마법사들은 일행을 무사히 귀환시키기위해 벌써부터 열심히 마법진을 만들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적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조금도 늑장을 부릴 수 없다. "적어도 15분은 더 필요합니다." "언제 놈들이 몰려올 지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서둘러 주게." "예." 이때 위쪽에서 망을 보고 있던 기사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 내려왔다. "적의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기사의 말에 카슬레이 백작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하고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자기 딴에는 완벽한 기습 작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적의 지원군이 이 렇게 빨리 올 수 있었는지 도대체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일이 자꾸 꼬여 가는 것 같 았다. "뭐! 이건 너무 빠르군. 설마, 그 와중에 도망친 놈이 있다는 말인가? 그래, 적의 수는?" "예, 마법진으로 60여 명이 도착했습니다. 그 녀석들이 지금 곧장 이 쪽으로 오고 있습니 다." "이리로 온다고? 그렇다면 뭔가 알고 오는 것이겠지. 이게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건물 안으 로 들어서기만 하면 널려 있는 시체들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곧 눈치 챌거다. 이걸 어떻게 한다?" 카슬레이 백작은 당혹스러웠다. 도대체 되는 일이 없었고 안심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듯했다. "시체들을 좀 치울까요?"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데 겨우 시체 따위를 치워서 무얼하려고. 일단 기사들은 나를 따르라. 혹시 놈들의 대비 태세가 별로 좋지 못하다면 우리쪽에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 지." "예!" 카슬레이 백작은 적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이쪽으로 떼지어 이동해 오는 것이라면 건물 부근 에서부터 기습을 가해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거의 배 이상이나 되는 적이라 고는 하지만, 기습에는 어쩔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카슬레이 백작의 기대는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적은 그렇게 단순한 돌대가리가 아니었고 앞서 비명횡사한 멍청한 대대장이나 병사들과는 근본적으로 질이 달랐다. 카슬레이 백작 일행이 위로 올라왔을 때, 이미 적의 기사가 정찰을 한 후였고 적들은 벌써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40여 명 정도의 기사들이 왕궁을 향해 포위망 을 완벽하게 형성한 후 남은 인원이 왕궁을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카슬레이 백작은 이쪽으로 접근해 오는 적들의 숫자를 보며 뭔가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스 물두 명, 정확히 스물두 명이었다. 포위망을 형성하는 것과 안으로 치고 들어오는 인원 비율 이야 쳐들어오는 녀석들 마음이겠지만, 치레아 기사단의수와 비슷한 스물 둘이라는 인원은 뭔가 묘한 일치감이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완벽한 우연이 아니라면 지독히 재수 없는 계산 된 함정에 말려든 것 같았다. '놈들은 우리가 치레아 기사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일까? 아니야, 그것은 너무 비약적 인 상상이야. 아마도 녀석들은 우리들이 미란의 기사단이라고 판단한 것이겠지 .' 속에 들어 있는 적의숫자와 대충 맞춰서 싸우는 것은 타이탄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철칙 이었다. 승리하고 싶다면 적보다 1기라도 많은 타이탄을 동원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와중 에 놈들은 나머지는 밖에 놔두고 20여 기만을 끌고 들어왔다. 그게 치레아 기사단의수와 같 았기에 약간 찜찜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란의 중앙 기사단도 전대급의 20기였기에 카슬레이 백작은 고개를 슬쩍 흔들면서 애써 불안감을 털어 버리려고 했다.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 이봐, 모두들 철수시켜. 퇴각하기 좋도록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부근에서 격투를 벌이는 것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로니에르 공작의 문장 맨 앞에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조심스럽게 전진하는 기사, 그리고 그 기사의 뒤로 거의 20여 기의 타이탄이 약간 떨어진 상태로 따라가고 있다. 시야가 탁 트인 넓은 들판이라면 구태여 이런 방식을 취하진 않겠지만, 여기는 왕궁 안이었다. 위엄을 보이기 위해 최대한 넓 게 복도를 설계해 뒀지만, 아무리 그래도 타이탄 3대가 딱 가로막으면 거의 빈틈이 없었다. 하지만 복도에 이어져 있는 작은 방들은 벽을 조금 허물지 않는다면 거대한 타이탄이 들어 갈 수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따로 있었다. 타이탄에 탑승한 기사들의 경우 좁은 창틈 으로만 밖을 보기 때문에 시야가 아주 좁아진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 때문에 더더욱 이런 복잡한 곳에서 타이탄 전투를 벌이려 하는 멍청이들은 거의 없었지만, 만약 상대가 멍청한 행동을 저지르고 나오는 이상 이쪽도 멍청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앞에 기사가 슬그머니 돌아다니며 정찰을 하고, 그 뒤를 타이탄들이 어기적거리며 따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적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전진 속도는 대단히 조심스러우면서도 느렸다. 하 지만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적이 나타나지 않자 저마다 나지막이 투덜대면서, 샤트란 일행은 지하로 연결된 계단에 거의 접근해 있었다.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왜냐하면 도주나 침입을 막기에 그 편이 훨씬 좋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 게 먼 거리를 이동해 왔음에도 적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벌써 탈출해 버린 것 아니야?" 샤트란이 나지막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알이 복도를 가로막고 있는 문에 접근해서 뒤쪽에 서 들리는 기척을 확인한 후 살짝 문을 열기 시작했다. 문 뒤에 누군가 숨어 있는지 슬쩍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문이 약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문을 관통하면서 거대 한 검이 튀어나왔다. 그 검은 문을 일자로 훑고 지나갔고, 문에 바짝 붙어서 살며시 열고 있 었던 알의 몸통은 피를 뿜으며 아래 위로 분리되어 나뒹굴었다. "적이다!" 이제 누구도 사방에 막힌 벽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쌍방은 서로를 확인하는 그 순 간부터 벽을 허물고, 거치적거리는 것을 박살내며 무조건 검과 방패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검과 검이 부딪치고, 검과 방패, 방패와 방패가 부딪치며 불꽃과 함께 굉음을 토해냈 다. 타이탄들의 쌍무에서 벽과 기둥들이란 하찮은 장애물도 되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재로 변해갔다. 오직 남은 것이라곤 검과 방패가 뒤엉켜 울려 내는 요란한 소리들 뿐이었다. 이렇듯 지하 감옥에서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었을 때, 왕궁의 외곽에 마련되어 있는 영구 이동 마법진은 이제 세 번째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번쩍하며 섬광이 약하게 빛나는 순 간, 5명으로 이뤄진 단출한 손님들이 도착했다. "어라, 저것들은 또 뭐여?" 거대한 타이탄들이 여기저기에서 왕궁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다크가 말했다. 보통 기 사들이라면 자신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문제이므로 타국 타이탄들의 성능과 모습, 그리고 문장 등등을 열심히 외우다. 하지만 다크는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당연히 외울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왕궁을 향해 서 있는 타이탄들이 어느 나라 것이며 왜 늘어서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함께 온 동료들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은 저 타이탄의 종류가 뭐고, 또 그 성능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크, 크루마의 타이탄이야. 벌써 미란은 점령당했어." 하지만 경악하는 동료들과 달리 다크는 여유있게 주위를 빙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치레아 기사단은 어디 있지? 이리로 보냈다고 했잖아." "글쎄, 보이지 않는데..... 나는 여기서 한 판 벌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어쩔 거야?" 이렇게 대화를 주고 받는 사이, 저쪽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던 크루마의 마법사와 팔시 온의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마법사는 또다시 적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는 재빨리 소리 높여 외쳤다. "적이다, 저쪽 마법진 쪽이야!" 그제야 마법사의주위에 서 있던 3대의 타이탄들이 허리를 뒤로 돌렸다. 현재 왕궁 안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타이탄들은 모두들 건물 안에서 적이 도망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뒤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뒤쪽에서 적이 나타났기 때문에 조금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젠장, 타이탄을 불러!" 순간, 팔시온의 등 뒤에서 금색의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이쪽을 알아본 적들은 그렇게 순순히 타이탄에 탑승할 기회를 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엄청난 먼지 를 일으키며 다크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다크는 적의 움직임 을 보면서, 지금 타이탄을 꺼내는 것은 너무 늦었다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그녀는 자신의 타이탄을 불러내는 것을 포기하고, 저쪽에서 달려드는 적의 타이탄들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 들어간 후 그 중 1대를 향해 높이 몸을 날렸다. 자그마한 그녀의 몸은 놀 라울 만큼 높은 점프력을 보이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웬 계집애하나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앞에서 달려오던 타이탄이 그녀를 향해 맹렬하게 방패 를 후려쳤다. 일단 하늘 위로 몸을 날리 이상 궤도 수정이 불가능할 것이기에 이것은 아주 적절한 공격처럼 보였다. 하지만 타이탄의 육중한 방패는 공기를 가르는 엄청난 소리만 냈을 뿐, 다크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다크는 상대가 방패를 휘두르는 그 순간, 재빨리 사태를 파악하고 발 밑쪽 을 향해 장풍을 쏘았다. 자그마한 그녀의 몸은 밑으로 뿜어져 나가는 장풍의 반동에 의해 그 궤적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어느새 그녀의 몸은 처음보다 훨씬 높은 위치로 올라섰다. 그 리고 그 순간, 그녀의 황금빛 검이 빛나며 엄청난 푸른 빛줄기가 타이탄의 머리 쪽을 향해 작열했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빛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뿐, 옅은 연기가 사라졌을 때 드러난 타이탄의 피해는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다. 원체 철갑이 두꺼워서 그런지 철판 위쪽이 움푹 파여 나가고 페인트들이 폭넓게 벗겨져 나 갔을 뿐, 구멍이 뚫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상대의 인식을 바꾸기에는 충분한 공 격이었는지 타이탄은 주춤주춤 물러서며 급히 방어 자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한 타이탄 과 맨몸뿐인 인간의 희귀한 대결이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다크는 장풍을 하늘 위로 쏘아 올리며 그 반동을 이용해 재빨리 땅에 착지했다. 그리고 검을 땅에 박아 넣으며 대지의 기운을 폭주시켰다. 그녀로서는 오늘만 두번째로 쓰 는 최강의 기술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그녀는 거의 대부분의 마나를 보충할 수 있었기에 그위력은 변함없이 파괴적이었다. "쿠콰콰콰콰......" 그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이 방패가 되어 3대의 타이탄들은 뒤로 주춤 거리면서 물러났다. 치솟아오른 흙더미와 먼지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취한 행 동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다림은 길게이어지지 않았다. 다크가 시간을 끄는 동안 타이탄 에 탑승하는데 성공한 팔시온, 미디아, 그리고 미카엘이 황금빛 찬란한 타이탄과 함께 먼3지 폭풍을 뚫고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근방에서 합계 6기의 타이탄들이 어우러져서 격전을 벌 이기 시작하자, 왕궁을 포위하고 있던 타이탄들이 급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언뜻 몇 대 되지 않는 수였지만, 어느새 왕궁 뒤쪽에 있던 타이탄들까지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 와 이미 그 수가 30여기에 가까웠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타이탄들은 과거 크루마의 근위 타이탄이었던 에프리온들 이었다. 에프 리온은 전투 중량이 100톤 정도로서 드라쿤과 비슷했지만 출력은 월등하게 높았다. 적 타이 탄의 성능이 어떤지 이미 교육을 받아서 알고 있었던 팔시온 들은 그것들이 정확히 28기나 모여들기 시작했기에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엄청나게도 모여 있었군." 하지만 적들은 이쪽에 나타난 타이탄들이 드라쿤 3기인 것을 알고는 2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적들을 처리하는데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드라쿤 3기가 분탕질을 일으 키는 동안 다른 적들은 비어 있는 곳으로 도망칠 가능성도 있었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바로 이때였다. 그들은 발길을 돌릴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엄청난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아직도 자욱하게 솟아올랐던 먼지를 헤치며 또 다른 타이탄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오 늘 벌써 세 번이나 모습을 드러낸 청기사 안드로메다로서는 아주 바쁜 하루임에 틀림없었 다. 군데군데 페인트 칠이 찢겨지듯 벗겨져 있었지만, 청기사라는 사실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 푸른색의 위압적인 생김새를 잘 알고 있는 녀석들이 군데군데에서 놀라운 외침 이 터져 나왔다. "청기사다!" "빨리 가서 대장에게 보고해라. 저 문장....., 바로 로니에르 공작의 문장이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보고하란 말이다." 분명히 크루마의 타이탄들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크루마의 기사들중 6년 전 전쟁 때 중앙 집단에서 싸웠던 사람들은 청기사를 타고서 키에리를 해치운 영웅이 누군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대형을 정비했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지던 타이탄들도 다 시 정신을 차리고 한 곳으로 뭉쳐서 진형을 짜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적들이 진 형을 완전히 갖추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을 다크가 아니었다. 청기사는 그녀의 충실한 종인 듯 그녀의 생각대로 곧장 적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수색하던 기사를 베는 것으로 불붙은 왕궁 내 전투는 이제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다. 밑을 받치던 기둥이 무너지면서 위층이 아래로 무너져 내리건 말건 그들은 사력을 다해서 치고 받고 있었다. 상호간의 타이탄 전투 중량은 비슷했다. 크루마 쪽의 엑스시온 출력이 0.4정도 높았지만, 크라레스 쪽은 기사들의 실력이 뛰어났기에 그 정도의 격차는 충분히 메울 수 있 었다. 하지만 그것도 적이 에프리온일 때 해당되는 말이었다. 크루마 기사단을 지휘하는 킬러 마 크가 붙어 있는 두 대의 거대한 안티고네들. 드래곤 슬레이어인 만큼 기사들의 실력도 괜찮 은 편이었고 더군다나 그들은 드란쿤에 비해 10톤은 더 나가는 덩치와 월등한 출력을 자랑 하는 안티고네를 타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안티고네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은 가장 검술 실력이 뛰어난 카슬레이 백작과 파시르였다. 카슬레이 백작은 원체 뛰어난 실력자였기에 어느 정도 버티고 있었지만, 파시르 는 겨우 겨우 버티다 마침내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실바르가 자신의 적을 밀어붙이고는 파시르를 지원하기 위해 이 대 일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실바르의 공백을 다른 기사들이 메우며 수적으로 열세한 대결을 벌이자니, 전투는 쉽사리 끝이 나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슬레이 백작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곳을 다행히 벗어난다 해도 왕궁 밖에는 더 많은 적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밖에 있는 적들이 다만 다섯 대라도 이쪽을 돕기 위해 합류한다면 박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간신히 균형만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렇기에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 후퇴해야 할 때가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적을 뒤로하고 후퇴할 수는 없었다. 적들이 이쪽을 순순히 편안하게 놔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뒤로 그냥 내뺀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지하로 이어져 있는 계단을 내려가야만 했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타이탄이 지나갈 만큼 그리 넓지 못했다. 탈출 하기 위해서는 타이탄을 버리고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남은 타이탄 은 당연히 아주 좋은 적들의 먹잇감이 될 게 분명했다. 공간 저편으로 사라지는 데도 시간 이 조금은 필요하기에. 그 때문에 그들은 시간이 다되었는데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복도를 가로질러 맹렬하게 뛰어오는 적 타이탄이 카슬레이 백작의 눈에 보였다. 자신들만으로 쉽게 제압하기 힘들자 추가로 지원군을 부른 것이 확실했다. 서서히 카슬레이 백작의 눈에 절망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저 2대의 안티고네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적들을 밀 어붙이고 튈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티고네를 몰고 있는 녀석들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밖에 큰일이 났습니다. 강적이 나타났다구요, 대장." 기사의 말은 카슬레이 백작 일행에게 있어서는 정말 천사가 내지르는 구원의 음성처럼 들렸 다. 그 말 한마디에 안티고네의 움직임이 약간 둔해진 것으로 보아, 상대편의대장도 당황하 는 게 분명했다. 적에게 안 좋은 일이라면, 어쩌면 이것이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카슬레이 으 로 백작은 생각했다. "뭐라고? 젠장, 적의 응원군인가." 스펜의 물음에, 달려온 기사는 다급하게 말하려니 상대의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지 생각 나는 대로 풀어서 설명했다. "옛, 미네르바 전하께서 누차 말씀하시던 그녀가 부하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빨리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미네르바 전하가 누차 말하던 그녀..... 적으로서 전장에서 만나면 절대로 상대하지 말라던 로니에르 공작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린 드래곤을 포획하던 작전 때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휴양하던 와중에 전쟁이 터졌기에, 스펜은 그 사실을 뒤늦게 말로만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크라레스 왕자가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미란에 파견되었을 때 멀리서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여자라고 믿기 힘든 우락부락한 근육질을 가 진 검호였다. 그리고 그 근육에서 나오는 거대한 힘은 키에리에게 사망에 이르는 상처를 안 겨 줬다고 하지 않던가? 스펜은 그 사실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상대방 타이탄을 다시 한 번 힘껏 밀어붙이기 시작했 다. 적을 떼 내고 이 격전지에서 이탈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스펜을 상대하고 있 던 노련한 카슬레이 백작은 스펜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카슬레이 백작도 적들끼리 나누는 말을 들었고, 그러니 당연히 스펜을 붙잡고 늘어진 것이다. 당연히 스펜의 검은 자신의 초조함을 대변하는 듯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빨리 몸을 빼내 야겠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 마음만 앞섰고, 그러다보니 타이탄과의 동조가 잘 맞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스펜을 향해 카슬레이 백작은 정말 얄밉도록 완벽하게 응수를 해왔다. 검을 이용해서 그의 공격을 교묘하게 흘려 버리고, 또 방패로 가로막으면서 오히려 더 적극 적으로 스펜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스펜의 시야에는 옆에서 싸우고 있던 샤트란이 자신의 상대를 밀어내고는 뒤로 반전하 여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뒤를 부탁해!" 샤트란의 가녀린 목소리가 스펜의 귀에 들려 왔다. 어쨌든 둘 중 한 명은 이 난장판에서 이 탈해서 외부에 있는 부하들을 지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펜은 일단 정신을 수습하고 상 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에 온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스펜의 타이탄도 점차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펜의 타이탄이 슬슬 안정 상태를 찾아가고는 있었지만 그 순간부터 전세는 서서히 뒤집히 기 시작했다. 샤트란이 빠지고 나니까 샤트란이 상대하고 있던 크라레스의 타이탄 둘이 여 유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곧장 한 대씩 적을 골라서 달려들었다. 이제 바야흐로 숫 자도 일 대 일로 딱 맞아떨어졌기에 크라레스의 기사들은 용기 백배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사기 충천하여 자신이 맡은 타이탄과 격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전세는 금세 크루마 쪽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크라레스의 기사들은 여태껏 숫자와 성능에서 밀리고 있 었지만, 치레아 대공으로부터 직접 검술을 사사받은 최고의 정예들이었다. 몇 분 간 팽팽한 대결이 펼쳐졌지만, 이윽고 한 기의 에프리온이 파괴되는 것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에프리온 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스펜은 완전히 일이 틀어졌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외쳤다. "후퇴하라!" 무자비한 종교 재판 "저, 저럴 수가......" 왕궁 밖으로 나선 샤트란이 본 것은 미친 듯이 전장을 누비는 거대한 청색 타이탄이었다. 거대한 타이탄이 불타는 듯 타오르는 검을 휘두를 때마다 에프리온들은 맥없이 파괴되어 나 뒹굴고 있었다. 실력 자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후퇴해!" 샤트란은 최대한 빨리 그곳으로 달려 들어갔지만, 그 사이에도 벌써 2대의 타이탄이 부서져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무서운 상대였다. "모두 후퇴해라! 도망쳐, 빨리!" 거대한 타이탄을 선두로 한 3기의 타이탄들과 싸우던 에프리온들은 대장의 명령에 따라 급 히 반전을 시도했다. 기다리고 또 바라던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이들과 싸워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적을 쉽게 떨쳐 낼 수는 없었다. 에프리온들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이탈을 시도했지만, 청색의 타이탄은 그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 하고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며 사냥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모두들 흩어져라!" 에프리온들은 대장의 명령에 따라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살아 남을 가능성이 있으려면 흩어져야 했다. 뭉치면 공격 방향이 단일화되고 그렇게 되면 무지막지한 놈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치는 에프리온들을 쫓아, 팔 시온 패거리들과 다크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토막난 타이탄의 잔해들이 쓸 쓸히 흩어져 있었다. 적들을 섬멸하기 위해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가 되레 쫓겨 나온 스펜과 그의 부하들은 황당 했다. 샤트란이 함께 있음으로 해서 처음에는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샤트란이 빠져나감으로 인해 완전히 사태가 역전되어 거꾸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너무나 고맙게도 스펜 일행들이 도망치는 동안, 카슬레이 백작은 부하들을 수습하여 지하로 내려간 후 탈출해 버렸다. 카슬레이 백작은 적들이 말하던 '그녀'가 설마 자신의상관인 치레 아 대공을 말하는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 만약 알았다면 그는 위쪽에 상관이 버티고 있 으니 당연히 적을 추격해서 치레아 대공이 있는 곳으로 몰아 갔을 것이다. 어쨌든, 일은 간발의 차이로 어긋나 버렸다. 하지만, 카슬레이 백작이야 최악의 상황에서 그 야말로 신의도 우심으로 원래의 목적을 어느 정도는 이룰 수 있었지만 스펜의 입장은 완전 히 달랐다가 부하들과 함께 밖으로 달려나왔을 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미 고철이 된 타이탄의 잔해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타이탄의 머리 부분이 꽉 닫혀 있는 것을 보면, 샤트란 은 부하들을 구출할 엄두도 못 내고 도망친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문제의 적도 없는 것을 보면 샤트란을 쫓아간 모양이었다. 스펜은 침착하게 주위를 빙 둘러본 후 부하들에게 지시 했다. "빨리 부상자들을 구출해라." "그래도, 그녀가 언제 돌아올 지 모르는데 그냥 탈출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스펜은 타이탄의 잔해들 중 안티고네가 없었고, 또 파괴된 수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벌 써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도 도망치는 아군을 쫓아서 멀리 가 버렸을 거라는 판단이 들 었다. 그렇다면 적들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철수할 시간은 충분할 거이다. "아니, 벌써 멀리 간 것 같다. 빨리 구출해라. 그런 후 재빨리 철수한다." "예!" 부하들이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스펜은 토막 난 타이탄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타이탄은 정말이지 그 앞에 선다면 얼굴이 비칠 정도로 깨끗하게 잘려져 있었다. 타이탄도 쇠고 검도 쇠다. 모든 것이 다 쇠였다. 그렇기에 타이탄을 검으로 자른다는 것은 가능한 일 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그것을 손쉽게 해낸 것이다. 스펜은 타이탄의 머리를 위 쪽으로 젖혀 버린 후 아래를 내려다 봤다. 타이탄의 머리를 뒤로 젖혀 버리고 나니 한결 관 찰하기가 용이했다. "정말 무서운 검술이군.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반질반질하게 잘라 버렸지? 통상 타 이탄들끼리 격전을 벌일 때 '자른다'라는 개념보다는 '부순다'는 개념에 더 가까울 건데....." 스펜은 좀더 자세히 관찰해 보기 위해 타이탄에서 슬쩍 내렸다. 일단 모든 부하들을 구출해 나가는 데는 조금은 시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때, 저 멀리서 쿵쿵거리는 울 림이 들리는가 싶었는데, 곧장 문제의 타이탄이 들이닥쳤다. 상대가 무슨 마술을 부려서 이렇게 빨리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적은 모습을 드러냈고 이미 그를 향해서 부하 두 명이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스펜은 재빨리 자신의 타이탄 위로 몸을 날렸다. 놀랍도록 빨리 타이탄에 탑승하기는 했지만 아직 뒤로 젖혀졌던 두부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을 때, 웬 여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 왔다. "호호호, 이거 재미있군. 그때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주나 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 반갑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일단 상대가 은혜 운운하는 말과 반갑다는 말을 하자, 무슨 소린가 해서 모두들 움직임을 멈췄다. 상대는 간단하게 동료 두 명을 해치운 엄청난 실력자였다. 하 지만 일단 상대가 대화를 시작했으니, 어떻게 보면 대화로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 대가 들기도 했다. 스펜은 궁금증이 치밀어 올라 타이탄의 두부를 원상태로 만드는 것도 잊고 목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려다. 그 거대한 청색 타이탄은 어느 틈엔가 자신에게 돌진해 왔 던 타이탄 2대를 간단하게 토막내 버린 채 천천히 스펜의 타이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타이탄의 두부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마침내 드러난 탑승자의모습..... 그것은 스펜도 익히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너, 너는......" 한껏 눈이 커진 채 스펜은 자신도 모르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청기사에 타고 있는 여 기사는 익히 그가 로니에르 대공일 것이라고 짐작했던 두툼한 근육질의 강인해 보이는 여성 이 아니었다. 사랑스러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있으며, 청순한 생김새와는 달리 입이 거칠었던 괴상한 아가씨. 그 아가씨는 그린 드래곤을 포획하던 작전에서 드래곤을 꼬 시는 미끼로서 사용되었던 적이 있었다. "정말 반갑군, 반가워. 아마도 옛날에 헤어졌던 친구를 다시 만난다 해도 이것보다는 덜 반 가울 거야." 하지만 청기사에 타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광기에 번들거리고 있었고, 타이탄은 천천히 검을 하늘 위로 들어올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스펜의 앞과 뒤에 서 있는 그의 부하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스펜은 그녀가 이렇듯 자신을 광기 어린 표정으로 반기 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스펜이 조종하는 타이탄은 검을 꽉 틀어쥐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상대가 자신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아직 상대가 전투 준비 가 덜 되었을 때를 노린 행동이었다. 점령한 지 하루 정도밖에 되지 않아 아직은 부산한 바크론 요새. 이 곳은 저 옛날 크라레스 제국이 대제국이었던 아르곤을 막기 위해 건설한 요새였다. 그 후 주인이 코린트로 바뀌었 고 다시 크라레스로 바뀐 후에도 그 역할은 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아르곤이 주인이 되면서 그 임무가 약간 변하고 말았다. 아르곤에서는 중간 단계의 계급에 '사목관'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가장 말단 계급인 사 제와 수사들을 통괄 지휘하여, 주교원의 뜻을 실행하는 계급이었다. 주교원 소속의 대신관이 나 주교들의 수가 아주 적은 데다가,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주교원을 벗어나지 않는 점을 미루어 본다면 아르곤을 이끌어 나가는 실질적인 힘과 권위의 상징은 사목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 사목관부터는 한 가지 강력한 권한을 가지게 되는데, 바로 '종교 재판권'이었다. 사목관부 터 종교 재판소를 열어 '이단재판'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재판을 통해 일단 이단으 로 선언당한 인물은 샤이하드의 경전 [니트라]에 따라 살아 있는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자 신의 말 한 마디로 사람들의 생사여탈이 좌우되었기에, 사목관이 지닌 힘은 강력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아르곤에서는 이곳 점령지에 다섯 명의 사목관을 파견했다. 그리고 그 사목관들은 저마다 여기저기에 종교 재판소를 개설해서 열심히 사람들을 노릇노릇하다 못해 시커먼 통 구이로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여태껏 크로노스 교를 믿지 않던 국가에 들어와서는 종교 재 판을 열고 있었으니 통구이 당하는 불행한 시민들의 수가 결코 적을 수가 없었다. 바크론 요새는 그런 종교 재판소들 중의하나로 임무가 달라져 잇었다. 끌려온 수만은 시민 들이 바크론 요새의 광장에 설치된 임시 수용소에 빼곡이 운집해 화형을 당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낯선 인물들이 더 많겠지만, 그들 중에는 자신이 아는 인물들도 있었 다. 그런 이유로 더러는 눈물을 흘리거나 비통해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은 더 이상 그럴 힘도 없는지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화형대를 향해 허망한 시선만 하염없이 보내고 있 었다. 이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며 튼튼해 보이는 마차가 한 대 도착했다. 20여 명이 나 되는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마차 문을 열고 내린 인물은 포스타나 대신관이 었다. 마차 문을 열고 나타난 대신관을 알아본 몇 명의 수사들이 종교 재판소를 향해 달려 갔고, 곧이어 그곳에서 피로에 지친 듯한 표정의 사목관이 수사들을 거느리고 달려 왔다. "어서 오십시오, 대신관님." "그래, 수고들이 많구먼." 광장에서 지금 막 수십 명을 화형에 처하고 있었으므로 짙은 나무 연기와 함께 뭐라고 말하 기 힘든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대신관은 슬쩍 자신의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막으면서 말했다. "이것들은 다 뭔가?" "예, 이단으로 판결된 자들입니다. 될 수 있다면 포교가 가능한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허허, 내 말은 그게 아니야. 저기 있는 저걸 말하는 거야. 왜 저렇게 사람들이 많은가 하는 거야." 대신관이 가리킨 것은 화형대가 아니라 임시 수용소였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화형대 를 절망에 찬 눈길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예, 어제만 해도 천오백 명 이상이 잡혀 왔기에 병사들에게 지시해서 임시로 수용소를 설 치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사람들이 많은가, 라고 묻는 게 아닌가? 지금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잡 혀 올 텐데 이렇게 진행 속도가 느려서야 도대체 어떻게 하잔 말인가? 무슨 좋은 방법이라 도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대신관님. 저들도 확실한 판결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저들의상당수는 열심히 포 교한다면 개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을 골라 내는 것이 저의임무가 아닙니까. 어제 밤 새도록 재판을 열었지만....." "이런 쯧쯧, 그러니까 자네가 일을 잘못 처리하고 있다는 거야. 하나 하나 열심히 재판해서 언제 저 많은 인원들을 처리한다는 말인가? 전혀 요령도 없고 의지도 없는 사람이구먼. 내 가 시범을 보여 줄 테니 죄수들을 데려와 봐." "예." "아, 한 번에 50명 정도 데려와. 그래야 손쉽게 끝나지. 그리고 저 화형대는 더러운 악취가 나니까 요새 밖에다가 설치해. 살 타는 냄새가 그렇게 유쾌한 것도 아닌데, 꼭 여기서 태울 건 또 뭐야? 그럴 만한 가치라도 있다는 건가?"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잠시 지나자 병사들이 50명의 죄수들을 끌고 왔다. 이틀 전만 해도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고, 그에 따라 각자의 취향대로 여러 신들 중에서 하나의 신을 믿거나 또는 무신론자로 살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지금 어떤 종교를 일방적으로 강요당하고 있 는 것이다. 그것도 목숨을 담보로 해서 말이다. 대신관은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서 있는 죄수들을 쭉 둘러본 후 외쳤다. "너희들 중에서 샤이하드 외에 그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오 른편에 서라. 그 사람들은 크로노스 교를 믿는 형제로서 대우를 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 게 하지 않는 자는 당장 화형에 처할 것이다. 버러지 같은 너희들에게 이나마 선택권을 주 는 것만 해도 다 샤이하드의 은혜라고 생각해라. 자 ,뭘 꾸물거리느냐, 빨리 선택해라. 샤이 하드를 믿을 것인지, 아니면 처참하게 개죽음을 당할 것인지 말이야." 상당수의사람들이 오른편으로 갔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대신관은 죄수들 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음흉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자신과 함께 온 사목관에게 말했다. "형제는 저들에게로 가서 확인을 해 주게. 그리고 오늘부터라도 당장 포교 작업을 시작하게 나. 하루라도 빨리 개종을 시켜야 하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런 후 대신관은 자신의 주위에 서 있는 한 장교에게 지시했다. "저기 남아 있는 놈들은 모두 다 요새 밖에서 처형해 버리게. 요새 안에서 태우니까 냄새가 지독하구먼." "예." 그 장교는 부하들을 통솔하여 거의 20여 명 정도 남은 죄수들을 끌고 요새 밖으로 나갔다. 끌려 가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그야말로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으며 드러내 놓고 욕을 해 대 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허망한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지 못했다. 그냥 그 렇게 죽어갈 뿐이었다. 그것을 보며 대신관이 사목관에게 말했다. "자, 이렇게 하는 거야. 시간이 훨씬 절약되지 않나? 자 이번에는 100명 정도 데려오게. 빨 리 빨리 끝내야 다른 일도 처리하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다면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래도 각 자와 대화를 나눠 보고 포교를 할 수 있을만한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만, 그만 해! 자네 말은 정확히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어. 물론, 평상시라면 철저히 따 져야 하겠지만, 지금은 전시란 말이야. 점령지에서는 매일 수많은 포로들이 들어오고 있어. 그들 하나 하나와 친절하게 면담하며 포교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는 것은 시간 낭비란 말이 야. 자, 다음 데려와!" 이렇듯 대신관이 직접 나서서 무자비하게 이단자들을 선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뭔가 거대 한 것의 그림자가 지상 위를 훑고 지나갔다. 대신관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하늘을 바라 보았다. 그것은 꼭 드래곤처럼 생겼으나 덩치가 작은 것으로 봐서 와이번 같았다. 물론 그것들이 야생의 와이번이라든지, 아니면 적들이 타고 있는 것이라면 모두들 혼비백산 했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와이번의 등에는 짙은 녹색의 펄럭거리는 로브를 걸 친 성기사들이 두 명씩 긴 창을 잡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와이번의 배 쪽에는 신성 아르곤 제국을 뜻하는 쌍십자 문장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와이번들은 착륙할 곳을 찾기 위해 둥글게 활강하며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대신관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 성기사들이 도착한 모양이군. 흐흐흐......" 주교원에서는 그린 드래곤 작전 이후로 마법을 사용하는 타국에 비해 기사단의 이동 속도가 상당히 떨어진다는 점을 파악해 냈다. 그린드래곤 때문에 크루마와 맞장을 떴을 때도 이동 속도만 짤랐다면 중앙의 강력한 성기사단을 파견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토록 처 참한 피해를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지난 6년 동안 주교원은 성기사단의 기동 력 증강에 엄청난 투자를 해야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와이번이었다. 거의 대부분의기사단들 에 와이번을 지급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자금 동원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 다. 하늘 위에서 천천히 요새를 향해 하강해 오고 있는 저 다섯 마리의 와이번에는 열 명의 성 기사들이 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다면 대신관은 자신이 원하던 목 적을 더욱 빠른 시간에 이륙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대신관의 얼굴에 슬며시 싸늘한 미 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자신이 맡은 일을 아주 성공적으로, 그리고 단시간에 해 낸다 면 자신의 출세는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저 성기사들이 보 장해 줄 것이다. 다크는 귀환할 수 없어 "전황은......, 전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 토지에르 폰 케프라 공작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절뚝거리며 들어오자, 모여 있던 마법 사들이 놀라 기겁을 했다. "토지에르 전하, 아직 몸도 성하지 않으신데....." "지금 그런 것 따질 때인가? 조국이 침공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 침대에 편히 누워 있을 수 있겠는가? 빨리 전황이나 설명해 보게나." 재촉을 당한 마법사는 토지에르의 뒤에 사색이 되어 따라와 있는 다론을 향해 난처한 눈길 을 돌렸다. 하지만 다론도 더 이상 고집쟁이 스승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표했다. 다론의 표정만 살피던 마법사는 이윽고 커다란 지도 쪽으로 토지에르를 안내한 후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상황은 그야 말로 최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악이라고 했느냐?" 토지에르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정보를 차단하고 있던 다론을 향해 무시무시한 분노를 머금 은 눈으로 째려본 후 다시 눈길을 돌렸다. "설명을 해 보거라. 그래도 아직은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 적들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인해 위치가 노출되어 있었던 3,4전대가 이미 전멸당했 고....." 부하의 설명을 듣고 있던 토지에르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 지 비틀비틀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렇게 의자에 앉는 토지에르의 안색은 회의실에 들어설 때보다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침 상에 누워 있을 때도 시중드는 하녀들이 쑤군거리는 말을 엿들어 어느 정도 사태가 위급할 거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악화되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코 린트가, 그 강력한 대제국 코린트가 혼자도 아니고 주변의 강대국들을 모조리 끌어들여 전 쟁을 시작할 줄이야..... "코린트의 소규모 기사단들이 본국의 영내를 휩쓸고 있사옵니다. 오늘 파괴된 곡물 저장고 만 해도 무려 여섯 군데이옵니다. 그리고 저장고와 인접해 있는 요새들을 마구 파괴하고 있 사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도저히....." "그만해라. 대충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겠다. 루빈스키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그게 저....." "무슨 일이냐? 빨리 말해라!" 부하가 계속 눈치를 보며 말하지 못하고 있자, 보다 못한 다론이 뒤에서 끼여 들었다. 어차 피 내뱉기 난처한 말이라면 자신이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루빈스키 전하께서는 중상을 입으시고 치료중이십니다." 다론의 보고에 토지에르는 그야말로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루빈스키 대공의 실력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루빈스키 대공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 하게 될지도 잘 알고 있었다. 루빈스키 대공이야말로 누가 뭐래도 크라레스를 떠받치고 있 는 가장 굵직한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누가 그분께 중상을 입혔단 말이냐? 설마, 전하께서 그 전멸 당했다는 2개 전대만을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셨다는 거냐?" "아닙니다, 스승님. 루빈스키 전하께서는 전쟁터가 아니라 적의계략에 걸리셔서 중상을 입으 신 겁니다. 비열한 코린트 놈들이 협상을 하자고 꾀어 내서는 기습을 가한 것이죠. 중상을 입으시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탈출하신 것만도 천행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안전에 문제는 없겠지?" "예, 크로돈 시로 후송하여 정성을 다해 치료하고 있습니다. 크로돈은 본국의 모든 타이탄 생산 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고, 또 그만큼 경비가 철저한 곳이어서 안심하셔도 될 것입 니다. 또 여차하면 영구 마법진을 이용해서 곧장 기사단을 투입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군대를 지휘하는 것은 누구냐? 폐하께서 직접 하시고 계시느냐?" "아닙니다. 로니에르 전하께서 사령관이 되셨습니다." 토지에르는 이제야 로니에르 공작을 생각해 내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 가를 생각하니 그나마 답답했던 마음이 다소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참, 그랬지. 로니에르 전하께서 계셨었구. 그래, 전하는 어디에 계시느냐? 설마, 뒷일은 생 각하지도 않고 기사단들을 이끌고 전장에 다려가신 것은 아니겠지?" "염려 놓으십시오, 스승님. 전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동쪽에 7전대를 파견하시고, 서쪽 에는 치레아기사단을 파견하신 후 돌아가는 사태를 관망하고 계십니다." "그래? 별 일도 다 보겠구.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을 분이 아니신데......" 토지에르가 평상시에 알고 지내던 다크라면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전장으로 달려 갔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빠져나간 후 허술해진 황궁이 적에게 기습을 당하건 말건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당연히 수도는 텅 비게 될 것이고 코린트는 그런 적국의 수도를 가만히 놔둘 정도로 멍청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토지에르가 아는 한 코린트는 이동 마법을 통한 기습전을 대단히 적절 하게 펼칠 줄 아는 교활함이 넘치는 제국이었다. 만약 루빈스키 공작이 건재한 상태라면 괜 찮겠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이었으므로 어쨌든 토지에르로서는 다크가 수도에 남아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니 내심 안심이 되었다. "근위 대장은?" "예, 로니에르 전하의 명을 받고 수도 방어를 위해 힘쓰고 계십니다. 이리로 부를까요?" "아니다. 먼저 로니에르 전하부터 만나 뵙고 상의를 드리는 것이 순서겠지. 론가르트는 그 다음에 만나도 된다. 자, 그럼 안내하거라." "예, 스승님." "오오, 어서 오게나. 토지에르 경." 토지에르는 총사령관 집무실에 들어서는 자신을 환영하는 다크의 태도가 조금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를 여자로 만든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에 지금껏 다크의 태도는 늘 비린 생선을 대하는 것처럼 매끄럽지 않았다. 최근에 들어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알 수 없는 냉랭함 이 늘 두 사람의 관계를 감싸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 만나 보니 그런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토지에르는 자신의 수척한 얼 굴로 제자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다 보니 그녀가 약간 측은하게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별 생각없이 넘겨 버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그렇군. 그런데 몸은 왜 그런가? 자네가 아프다는 보고는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예, 전하께 심려를 끼칠 것 같아서 입단속을 좀 시킨 것이지요." "그건 그렇고,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알아 냈나? 자네가 부상을 당한 것은 혹시나 그 것을 조사하다가 생긴 변고가 아닌가 추측되네만..... 그렇지 않고 루빈스키처럼 전쟁터에서 당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었겠지." 그 말을 하는 아르티어스의 눈동자는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토지 에르가 그 방법을 알고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겠다는 뜻이 매우 강력하게 내포되어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토지에르는 그 눈동자를 보며 알 수 없는 주눅이 들었다. 가냘픈 소녀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하기 힘든 힘과 광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토지에르는 여태껏 그러했듯이 상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둥글 넓적 둘러서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자신도 모르게 광기 어린 눈으로 토지에르를 노려보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만약 토지에르가 다크의 귀환에 관한 은밀한 방법을 알아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 리지 않고 그것을 뺏은 다음, 그 일을 아예 영원히 묻어 버릴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것을 묻어 버리기 위해서 국가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어야 한다 해도 아르티어스는 결코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차마 다크에게 이곳을 떠나지 말라는 말 을 하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떠나지 못하게 막을 궁리를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부상을 당한 것은 크루마의 자객들 때문이었습니다. 마법사들 수십 명을 풀어서 조사 하고 있으니 조만간 결과가 나올 거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저에게 모든 것 을 맡겨 주십시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으음, 내가 너무 과민 반응을 보인 거였군.' 아르티어스는 이렇게 생각하며,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했다. 이제 자신이 알고 싶었던 사 항을 알아낸 만큼, 토지에르에게 대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가 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험 험..... 알겠네. 그래, 무슨 일인가? 참, 세린! 차를 내오너라." 세린이 차를 가져다가 한 잔씩 놓았지만 아르티어스는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전에도 론 가르트와 대화가 잘 풀리다가 그놈의 차가 나온 후에 들통났었던 뼈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토지에르는 여전히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고 차를 조금 마신 후 입을 열 었다. "전하께서는 이번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실 생각이십니까? 세 방향에서 적의 대군이 몰 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론에게 보고를 들으니 알카사스에서 휴전을 교섭하러 왔던 사신 을 반쯤 죽여서 보내셨다구요? 적의 사신을 그 모양을 만드셨다면, 뭔가 다른 계획이 서 계 실 것 아닙니까?" "허! 겨우 그따위 일을 가지고 그러나. 나는 그놈의 능글거리는 낯짝이 보기 싫었을 뿐이지, 뭐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이 무계획적인 아르티어스의 대답에 토지에르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금 삼면이 온통 적인데, 그것들 중의 하나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아르티어스가 날려 버린 것 이다. "어휴, 그렇다면 이제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거기에 자극받은 알카사스는 틀 림없이 전면 공세를 취해 올텐데요." "스바시에 기사단을 보냈으니 별 문제 없을거야." "하지만 서쪽은 그렇다고 쳐도, 동쪽은요? 겨우 2개 전대만으로 얼마나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더군다나 가장 강력한 적인 코린트를 막을 기사단은 하나도 없지 않습 니까? 이대고 나간다면 파멸이라는 것을 진정 모르십니까?" "파멸은 무슨 파멸. 미란에 보낸 치레아 기사단이 돌아오면 상태는 좋아질 거야. 안 그런가? 자자, 최악의 상황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구." "하지만......" "아아,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라니깐, 자, 나는 할 일이 많으니까 이만 가 보게나. 총 사령관의 자리는 매우 바쁘다네." "그러지요." 더 이상 다크와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끼자 토지에르는 소득 없는 실랑이를 벌일 생각을 깨 끗하게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크와 의논을 해봤자 건질 게 없었으며, 그 자신 역시 총사령관인 다크의 허락이 없이도 아직은 모든 일을 장악해 나갈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스승이 일찌감치 손을 털고 나오자 오히려 불안감을 느낀 것은 다론이었다. "이대로 둬도 되겠습니까? 스승님." "당연히 안되지." "그렇다면?" "일단 최악의 사태를 가정해서 뒷일을 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단 둘째 황자님을 타이렌 제국으로 피신시키도록 해라. 본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쓸모가 없지만, 그분이 적 들의손에 넘어간다면 문제가 커진다. 타이렌 제국은 힘이 있는 남방의 대국이니 코린트가 압력을 가해 온다 하더라도 문제는 없을거야." "예." "그리고......, 둘째 황자님과 함께 데이비드 폰 그래지에트 후작도 보내라. 만의하나 이번 전 쟁이 잘못 되었을 때를 대비함이다." "예." 엘리안 황자가 크루마에 인질로 가게 되었을 때 만약을 대비해서 키워진 인물들이 데이비드 와 타일러였다. 둘 다 황제의 친척들이었는데 타일러가 조금 더 자질이 뛰어나다고 인정받 고 있었기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두 번째 황위 계승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계승 권 약속 따위야 나중에 어떻게 뒤집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 아니던가? 황위 계승 권은 평상시에는 엄청난 것이겠지만, 지금과 같이 뒤를 알 수 없는 전시의 상황에서는 그다 지 의미 없는 약속일 뿐이었다. 모든 미래가 불확실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론 너는 지금 당장 크로돈으로 가거라." "예? 크로돈에는 무슨 일로 말입니까?" "아무래도 상황이 안 좋아. 수도는 좀 위험하니 폐하를 크로돈에 계시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러니 너는 폐하께서 그곳에서 일을 보시기에 충분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두거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지금 당장 가 보거라." "예, 잘 처리해 두겠습니다." "이틀 내로 모든 것을 처리해 두도록! 폐하께서는 그날 근위대와 함께 크로돈으로 행차하실 것이다." "저, 스승님, 그렇다면 크로나사 평원을 포기하시는 것입니까?" "포기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구나. 크로나사 평원을 지탱하고 있던 동맥들이 하나하나 잘려 나가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머지않아 크로나사 평원은 통제 불능의 땅이 되고 말아. 오히려 이런 때는 아깝다고 해도 적들이 원하는 땅을 주고, 뒤로는 협상을 하면서 최악의사태만은 방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너는 빨리 지체 하지 말고 가 보아라. 나는 기회를 봐서 폐하와 상의해 볼 테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스승님." "후우, 일이 왜 이렇게까지 꼬여 버렸는지. 자네는 빨리 가서 와리스 후작보고 이리 오라고 전하게." 토지에르 말에 마법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전하." 오래지 않아 와리스 후작은 비대한 몸집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는 오랜만에 만나는 토지에 르 공작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했지만 가급적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말했다. "안녕하시옵니까, 전하." 토지에르는 뭔가 열심히 서류를 작성하다가 와리스 후작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들면서 반겼다. "그래, 빨리 왔구먼. 내 경을 부른 것은 한 가지 중대한 일을 부탁하기 위해서야. 해 주겠 나?"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전하." "경은 지금 바로 크루마로 가 주게. 지금 남은 희망은 크루마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 뿐이야. 다소간의 출혈이 있더라도 상관없네. 자, 이건 전권을 위임한다는 위임장일세. 최대 한 빨리 일을 성사시키도록 노력해 보게." "이토록 저를 신임해 주셔서 감사 드리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다네. 크루마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자네는 거리 에서 곧바로 체포될 수도 있어. 결코 생환을 장담할 수 없다는 이야기야." "외교관에게 그 정도 위험도 없을 수 있겠사옵니까? 사력을 다해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노 력할 뿐이지요. 그럼 가 보겠사옵니다." "그래, 수고해 주게나." 토지에르는 방을 나서는 와리스 후작의 뒷모습을 보면서 일이 잘 성사되기를 기원했다. 가 능성이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크루마는 현재로서는 가장 믿고 싶은 존재였다. 6년 전 전쟁에서도 두 나라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힘을 합치지 않았는가. 무리가 되는 요구 를 들어주어야 한다 해도 다시 한 번 우방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아깝지 않을 것 같았 다. 토지에르는 잠시 후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밖으로 걸어 나오자 방 앞에서 대기 하고 있던 마법사가 즉시 부축을 하며 말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전하." "이동 마법진으로 가세." "예?" "치레아 공국에 볼일이 있어서 그래." "알겠사옵니다." 다크가 크루마로 간 까닭 수정 구슬 저 너머에서 들려 온 보고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고관들 을 많이 구출했다고 하더라도, 정작 국왕이 빠져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미란 국가 연합 의 각 나라들은 모두 다 국왕이 통치하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후 사정이야 어떻게 되었든지 가므의 국왕 구출에는 실패했다 이건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런 그렇고, 너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거야, 가므에 간 것이 아니었나? 지금 딴 곳에 있 는거야?" "예, 지금 저희들은 가므 왕국의 남부에 와 있사옵니다. 정확히 말하면 수도로부터 남쪽으로 15킬로 떨어진 곳이옵니다." "가므 남부에? 거기에는 왜 간거야, 감옥이 그곳에 있었나?" "그건 아니옵니다. 가까스로 가므의 왕궁 잠입에는 성공했사온데, 갑자기 적의 대부대가 들 이닥쳐서 포위를 당했사옵니다. 그래서 서둘러 탈출을 하다 보니 장거리 공간 이동을 할 시 간 여유가 업어서, 급한 대로 이곳에 온 것이옵니다. 지금 마법사들이 장거리 공간 이동 마 법진을 그리고 있사오니, 1시간쯤 후에는 크라레인 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전하.: "좋아, 그렇다면......" 다크는 부하들과 합류하자는 말을 꺼내려다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첩자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다시 말을 바꿨다. 부하들은 지금 다크 일행들이 어 디에 있는지 알지 못할테니까 말이다."알았다. 될 수 있으면 적들과의 충돌은 피하고 조심해 서 돌아오도록!" "예, 전하." 다크가 통신을 끝내자마자, 팔시온이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기는..... 당연히 엘프리안으로 가야지." "엘프리안? 크루마의수도인 엘프리안 말이야?" 놀라서 외치는 팔시온에게 다크는 마치 옆집에 놀러 가는 듯 태평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크 루마가 언제 중립국에서 적국으로 돌변할 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도무지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너무 믿는 것인지 종잡기가 어려웠다. 이러다 큰 사고라 도 당한다면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진단 말인가. "엘프리안 시가 거기 말고 딴 곳에도 있었나?" "그건 아니지만...... 크루마라면 요즘 별로 사이가 좋은 나라가 아니잖아. 그리고 이번에는 미란까지 침공해 들어왔고 말이야. 이렇게 되면 크루마는 적국이나 다름없어. 거기에 가서 뭘 하겠다는 거야?" "아직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주고 받은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가서 미네르바를 만나자고 요청하면 들어줄 거야." "미쳤군, 그건 자살 행위야. 너무 위험하다구." "자살 행위인지, 아닌지는 가보면 알겠지." 다크는 팔시온에게 대충 대답을 한 다음 가스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스톤!" "응?" "엘프리안으로 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줘!" "하, 하지만,......" "무조건 반대만 하지는 말아 줘. 미네르바를 설득해야만 일이 풀린다구. 아무리 내가 있다고 해도 코린트를 혼자 상대한다는 것은 힘들어. 요 근래 벌어진 전투가 그걸 증명해 주고 있 잖아. 녀석들이 나와 싸우지 않으려 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러니 그 녀석들이 나와 싸 우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어야 해. 그렇게 하려면 현재로는 크루마의 도움이 꼭 필요하단 말 이야. 미란의 국왕을 돌려받는 것은 그 다음 일이지." "알았어. 준비할게." 가스톤은 주머니를 뒤져 얇은 책자를 꺼낸 다음 이리저리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크루마 크로마..... 음, 여기 있군. 엘프리안 근처에 공간 이동하기에 괜찮은 장소 가..... 좋아, 마침 엘프리안 근처로 강이 흐르고 있어. 그 위로 공간 이동하기로 하지." 다크 일행은 마법진을 이용해 크루마의 수도인 엘프리안 시 외곽으로의 공간 이동을 감행했 다. 마법을 역으로 탐색하여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알카사스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들은 엘프리안 근처까지 곧장 공간 이동할 계획을 짰던 것이다.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곳, 그곳의 위쪽에서 하얀빛이 번쩍하더니 사람들이 떨어져 내렸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장애물을 생각해서 15미터 상공으로 공간 이동을 한 것이었으므로 모두들 엄청난 속도를 감당하며 땅으로 떨어져야만 했다. 그러나 역시 다크는 고수의 면모를 보이며 마법사인 가스톤까지 껴안은 채 안전하게 아래쪽 에 착지했다. 그녀는 자신의 발 아래쪽에 얕은 개천이 흐르는 것을 알고는 장풍을 일으켰다. 그 추진력을 이용해 옆쪽으로 이동한 다음 땅 위에 착지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속수무책, 얕은 개천 위로 곤두박질을 쳤다. "이런 젠장!" 아예 강이었다면 몰라도 얕은 개천이었기에, 모두들 흙투성이가 된 채 개천에서 기어나왔다. "이봐, 분명히 강이 흐르고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무르겠어. 분명히 지도에는 강 위라고 되어 있는데 말이야." 가스톤은 당황하여 주위를 훑어봤다. 개천이 흘러가는 주변 지형을 봤을 때 개천의 규모가 훨씬 더 커야 함에도 그 흐르는 물의 양은 이상하리만큼 적었다. "위쪽을 둑으로 막아 놨나? 지형으로 봤을 때, 꽤 많은 양의 물이 흘렀던 것 같은데 말이 야." "에퉤퉤...... 벌써 흙투성이가 되어 버렸으니 그따위 것은 중요하지 않아. 젠장, 가스톤, 너 또다시 이따위로 공간 이동을 하면 가만히 안 둘거야." "그건 그렇고 여기는 어디야?" "저쪽으로 한 20킬로 정도 걸어가면 엘프리안 시가 나올 거야." "좋아, 오긴 제대로 온 모야이군. 자, 가자구." "전하, 큰일났사옵니다." 허겁지겁 달려 들어오는 이블리스를 바라보며 미네르바는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 조심스 럽게 행동하는 사람이 이렇듯 당황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큰일이 벌어진 듯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예, 미란에 치레아 기사단을 막기 위해 파견한 부대가......" "그 부대가 왜? 치레아 기사단을 놓쳤단 말이냐? 50기나 보냈는데?" "놓친 것만이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30기 이상을 파괴당한 채 후퇴했사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아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네르바를 향해 이블리스는 다급하게 말했다. 분명 납득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설마가 아니옵니다, 전하. 전사자들 중에는 스펜 안트리아 경도 있사옵니다." 스펜 안트리아라면 녹색 도마뱀 작전에 파견되었을 정도로 실력 있는 근위 기사였다. 그런 그가 전사하다니...... "뭐야? 그 정도의 실력자가 전사할 정도로 치레아 기사단이 강하단 말이냐?"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결정적으로 치레아 기사단을 몰아붙였을 때 , 지원군이 나타났다고 하옵니다." "지원군? 크라레스에 그렇게나 많은 여유 부대가 있었단 말이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군." "그것이 아니옵니다. 또 다른 기사단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로니에르 공작이 직접 움직인 모양이옵니다. 우스꽝스러운 황금색 드래곤의 문장을 붙인 초대형 청색 타이탄. 그것을 조종 하는 것은 그녀뿐이옵니다." 이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알아챈 미네르바는 탁자가 움푹 패도록 두들기며 노성을 터뜨렸다. "젠장, 샤트란은 어디 있나? 스펜과 함께 있었을 텐데....." "지금 상처를 치료하는 중입니다." "뭐, 상처라고? 설마 중상은 아니겠지?" "다행히 중상은 아니어서 샤트란 경의 상처는 그렇게 심하지 않사옵니다. 다만 타이탄이 좀 심하게 부서졌을 뿐이지요. 상처가 치료되는 대로 이리로 오라고 일러뒀사옵니다." "젠장, 어쩐지 시작이 순조로운 것 같더라니..... 하지만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상상도 못 했군. 크라레스는 코린트와 싸우는 데 바빠서 이쪽은 신경도 못 쓸 줄 알았는데, 나의 실수 였어." 이떄, 다시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경비병에게 미네르바를 만나게 해 달 라고 요청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경비병이 미네르바에게 그 말을 전하기도 전에 그녀는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이냐?" "예, 뮤토 백작님께서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급한 일이라고 하옵니다." "들라고 해라." "예!" 뮤토 백작은 경비병이 문을 열어 주자마자 급히 달려 들어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 서두르나?" "예, 로니에르 공작 일행이 도착했사옵니다. 정문 경비병들로부터 연락이 들어왔기에 설마 하면서 가 봤는데 진짜였사옵니다. 전하를 만나 뵙겠다며 시비를 걸고 있사옵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사옵니까?" 뮤토 백작은 6년 전 전쟁에서 로니에르 공작을 직접 만난 일이 있었기에 그녀를 분명히 확 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뮤토 백작의 보고에 미네르바의 인상이 확 일그러지고 말았다. 자국 의 타이탄을 그토록 무참히 박살낸 원흉이 다시 여기에 나타나 시비를 걸고 있다니,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시비를 걸고 있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만약 전하를 뵙게 되지 못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 다는 말이옵니다." "젠장, 아이구 골치야." 도대체 그놈의 로니에르 공작이라는 여자는 자신이 잊을 만하면 찾아와서 뭔가 사건을 일으 키니 정말 골치 아픈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 힘으로 못 하게 막으려니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머리를 쥐어뜯듯 감싸안았던 미네르바는 갑자기 고개를 쳐들 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녀가 왜 왔지? 동맹국인 미란을 집어삼켰다고 항의하러 왔나? 아냐, 그런 일이라면 그 뚱보 녀석을 보내도 충분할 텐데......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군." 미네르바가 이것저것 혼란스럽게 말하자, 이블리스가 옆에서 충고를 했다. "혹시 동맹을 맺자고 온 것은 아닐까요? 정보에 의하면 크라레스는 지금 매우 힘든 모양이 옵니다. 기사단 전력의 반 이상이 무너졌을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으니까 말이옵니다. 아무 리 그녀가 키에리를 물리쳤을 정도로 강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녀 개인의 힘이지요. 국가 전체를 방어하는 데 있어 혼자만 강해 봐야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 다는 것을 그녀도 아 마 꺠달았을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치레아 기사단의 일로 미란에서 본국의 기사단과 한 판 붙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쪽을 적으로 돌렸을 때 뒤처리가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는 뒷수 습을 하러 왔다고 보시는 것이 정확할 것이옵니다." 그러자 미네르바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 "어떻게 하시겠사옵니까, 일단 만나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대공이라는 그녀의 신분으로 봤을 때 만나 보지도 않고 내칠 수는 없사옵니다." 이블리스의 의견을 옳았다. 상대국의 대공이 사신을 보낸 것도 아니고 직접 찾아왔는데 그 것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미네르바는 뮤토 백작에게 지시를 내렸다. "좋아, 이쪽으로 모셔라." 이때 이블리스가 옆에서 끼여들었다. "귀빈들을 위한 숙소로 안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일단 상대와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 눌 것인지, 또는 저쪽에서 어떤 것을 들고 나올지 의논하고 대비책을 세울 시간이 필요하옵 니다." "그것도 그렇군."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후 뮤토 백작에게 다시금 명령을 수정해서 지시했다. "그들을 귀빈들을 위한 숙소로 안내해라. 그런 다음 그들이 의심을 가지지 않도록 아주 성 대하게 대접을 해줘라." "예, 전하." 지시를 받은 뮤토 백작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미네르바가 급히 그를 불러 세우며 질문 을 던졌다. 한 가지 깜빡하고 알아 보지 않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 누구와 함께 왔던가? 혹시, 붉은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어쩌면 여자로까지 혼동할 만 큼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던가?" 뮤토 백작은 잠시 로니에르 공작과 함께 온 일행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 해 봐도 미네르바가 말한 인물과 대충 비슷한 인물조차도 거기에 포함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근육질, 아니면 나이 많은 비쩍 마른 마법사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사람은 없었사옵니다. 일행은 네 명이 더 왔사온데 생김새로 봤을 때 세 명은 기사였 고, 한 명은 마법사인 것으로 추측되옵니다. 기사들 중에서 둘은 남자, 하나는 덩치 좋은 여 자였사옵니다. 마법사는 한 40대 쯤 되어 보였사온데, 뭔가 비범함 같은 것은 엿보이지 않았 고 흔히 볼 수 있는 마법사들과 다름이 없었사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드래곤은 오지 않았나?" "예? 드래곤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아, 아닐세. 그냥 혼자말이야. 그건 그렇고, 만약을 대비해서 기사들이나 병사들에게 철저하 게 입 단속을 시키게나. 그녀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코린트가 알아서 좋을 게 없어. 혹시 라도 코린트가 우리들끼리 동맹을 맺으려고 한다고 오해하고 군대를 보내 온다면 매우 귀찮 은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알겠는가?"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모든 것을 은밀하게 처리해주게. 그럼 자, 빨리 가 보게." "예!" 뮤토 백작이 나간 후 미네르바는 이블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쟉센에 나가 있는 근위대를 불러 들여라. 그리고 고위급 마법사들도 모두 다 소집해라. 만 약에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준비를 좀 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나?" "현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전하." "일단 숙소로 안내하기는 했는데,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좀 끌 수 있는 방법 을 없나? 근위대가 도착하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릴 테고 말이야." 이블리스는 창밖을 바라봤다. 정오는 한참 넘었지만, 아직도 해가 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저녁 식사에 초대하시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최소한 서너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옵니 다." "그게 좋겠군. 자네가 직접 가서 통보하게. 그러면서 상대를 관찰해봐. 참, 마법사 몇 명을 데리고 가서 상대방에 대해서 확실하게 조사해 보게."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블리스와 의논하고 있는데, 뮤토 백작이 다시금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의 눈 주위는 방금 전 나갔을 때와는 달리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명령받은 대로 손님들을 숙소로 안내하려 고 하다가, 다짜고짜 미네르바를 먼저 만나겠다고 우기는 다크에게 한 대 맞았던 것이다. 뮤 토 백작은 이 성가신 방문객을 어떻게 좀 처리해 달라고 미네르바에게 다시금 간청하기 위 해 올라온 것이었다. "전하! 도저히 안 되겠사옵니다. 일단 전하를 뵙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좀 선처를 해 주시옵 소서." 뮤토 백작도 꽤 뛰어난 검객이라고 하지만, 미네르바가 알고 있는 한 로니에르 공작은 그보 다 훨씬 윗줄에 놓이는 검객이었다. 뮤토 백작 정도는 한다스가 덤벼도 이길 수 없는...... 미 네르바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안내해라." "옛, 전하." 미네르바는 방문을 나서며 이블리스에게 지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방금 상의해 둔 일을 모두 처리해 두게." "옛, 전하" 귀한 손님을 이따위로 접대하나 "오랜만이군. 그런데 요즘 크루마에서는 귀한 손님을 이따위로 접대하나?" 새파란 꼬마 숙녀에게서 나오는 말투치고는 매우 고약했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터져 나오는 감정을 꾹꾹 참으며 미소를 띄운 얼굴로 대답했다. 언젠가는 이 수모를 꼭 갚아주리라 생각 하면서...... "아니야, 내가 지금 아주 바빠서 말이지. 그러니까 제발 좀 기다려 주면 안 될까?" "언제까지?" "오래 기다려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 급한 일만 대충 처리하고 바로 만나면 되잖아. 너도 멀 리서 왔으니 좀 쉬어야 할 테니까 말이야." 미네르바는 다크와 그 일행들을 슬며시 관찰한 후 다크가 데려온 부하들의 옷에 상당량의 먼지가 묻어 있는 것을 알아챘다. "일단 휴식부터 취하고 있으라구. 따뜻한 물로 샤워를 좀 하면 한결 기분이 좋아지지 않겠 어?" "이봐, 나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그걸 물었어." 미네르바는 끝까지 뻑뻑하게 나오는 상대를 향해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다시금 미소를 보냈다. 언젠가는 몇 배로 갚아 줄 수 있으리라. "오늘 저녁 식사 시간에 함께 대화를 나누기로 하지. 어때? 식사도 하고, 그러면서 함께 대 화도 나누면 좋잖아? 지금 나로서는 그게 최선의 대답이야. 지금 나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 할 정도로 바쁘다구." "좋아, 그렇게 바쁘다니 기다려 주지. 하지만 저녁 식사 때까지야. 더 이상은 못 기다려, 알 았어?" "약속은 꼭 지킬게. 자, 뮤토 백작이 안내해 줄 거니까 샤워나 하면서 피로를 좀 풀라구." 미네르바는 다크를 좋은 말로 달래 보내는 데 성공했다. 다크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미 네르바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다크 일행은 뮤토 백작의 안내로 황궁의 한쪽 편에 마련되어 있는 근사한 숙소에 자리를 잡 았다. 그곳은 외국에서 사신들이 왔을 때 묵는 곳이었기에 대단히 호화롭기는 했으나 방은 감시하기 좋은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일단 건물 자체가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 하고 있었고, 그 건물 주위에는 경비병들의 막사가 물 샐 틈 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아마도 사신들이 안전하게 체류하다가 돌아갈 수 있도록 경호하는 것과 함께, 그들이 몰래 첩보 활 동 등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다크 일행은 오늘 새벽에 크라레인 시를 떠난 후 벌써 세 번씩이나 치열한 전투를 겪었기에 온몸이 땀으로 끈적거렸으므로 숙소로 안내되자마자 서둘러 목욕부터 했다. 뜨거운 물로 씻 으면서 그들은 이토록 눈치 빠른 크루마 측의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가졌다. 그들이 욕실에서 나오자 하녀들이 신선한 과일들과 주스, 차 따위를 가져왔다. 미카엘은 차 맛을 살짝 본 후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정말 좋은 차로군. 맛도 좋지만 향이 정말 근사해. 확실히 여행은 신분이 높은 사람하고 같 이 다녀야 해. 대접이 다르거든." 미카엘이야 어정쩡한 폼을 잰다고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여태껏 변두리 전쟁터를 돌아 다 니는 데 익숙했던 털털한 성격의 팔시온은 차가 영 입에 맞지 않았는지 찻잔을 내려 놓고는 입맛을 다시면서 시녀에게 물었다. "시원한 맥주는 없소?" 맥주는 서민들이 마시는 대중적인 음료수였다. 당연히 귀족들은 그런 천박한 음료를 마시지 않았기에, 황궁에는 미처 맥주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신이 촌놈이라고 광고하 는 듯한 상대의 모습에 시녀는 얼굴에 떠오르는 비웃음을 감추려고 최대한 노력하면서 정중 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맥주는 드시는 분이 안 계셔서요. 대신 포도주를 가져다 드릴까요? 밖에 사람 을 보내어 맥주를 사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말입니다." "그럼 포도주를 가져다 주시오. 그리고 독한 술이 있으면 한 병 가져다 줬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이때 다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도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봐, 이런 거 말고 술은 없어?" 다크의 말에 시녀는 공손히 대답했다. 시녀는 바로 이 눈앞에 오만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소 녀가 가장 극진히 모셔야 할 높은 분이라는 귀띔을 이미 받았던 것이다. "저기 시원한 포도주가 있사옵니다, 전하. 혹시 백포도주를 원하시옵니까?" "그런 거 말고 맥주는 없어? 뜨끈하게 목욕한 후에는 맥주가 최곤데 말이야." 투덜거리는 소녀의 말에 시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런 고귀해 보이는 소녀가 맥주 같 은 천민들이나 마시는 술을 달라고 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죄송하옵니다, 전하. 곧 사람을 보내어 준비해 올리겠사옵니다." "빨리 가져와. 여기 맥주 맛은 어떤지 궁금하군." "예, 전하." 시녀가 나가고 나자 팔시온이 입을 열었다. "저녁 식사 전까지는 꼼짝없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로군." "어쩔 수 없지. 미네르바가 바쁘다니까 말이야. 일단 이쪽에서 부탁을 하러 왔으니 그 정도 기다려 주는 예의는 지켜 줘야지." 모든 것을 그렇게 간단히 넘겨 버리는 다크였다. 다크 일행이 저녁 회담을 기다리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미네르바는 여러 가지 일로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네르바에게는 지금 일 분 일 초가 모자라는 실정 이었다. "그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예, 쟉센 방면에 나가 있던 마법사들과 근위대가 방금 도착했사옵니다." "좋아, 제법 서둘러서 왔군. 그건 그렇고 조사해 보라고 한 것은 어떻게 되었지?" "예, 역시 세 명은 기사였고, 한 명은 마법사였사옵니다. 루크란의말로는 마법사를 제외하고 기사들의 경우 모두들 꽤 실력이 좋다고 하더군요. 마법사는 아무리 후하게 인정해 줘도 4 사이클 급 정도에 랭크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옵니다. 그리고 그녀의 경우는 아무 것도 알아 낼 수 없었사옵니다. 루크란은 아마도 그녀가 마법이나 뭐 그런 것으로 자신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확실한 건가?" "예! 루크란에게 제가 직접 들은 것이니만큼 착오는 없을 것이옵니다." 마법사는 신체 내에 포함되어 있는 절대적인 마나의 양을 조사하는 뷰 마나 포스와 마법을 포착하는 뷰 매직 포스라는 마법을 쓸 수 있었기에 상대방의 실력을 조사하는 데는 적격이 었다. 부관의 보고를 들은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렇다면 드래곤이 오지 않은게 확실하군." "예? 드래곤이라니요?" "아니, 아니다. 자네가 지휘해서 근위대를 사방에 배치하고, 마법사들 또한 원거리에서 지원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해라." "예." "그래, 로니에르 공작 일행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던가?" "예, 시녀들의 보고로는 모두들 한 방에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저녁 식 사를 함께 하자고 전했으니까 아마 그때까지 잡담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인 모양이지 요." "좋아. 계속 감시하고, 뭔가 특이한 일이 있으면 지체 없이 나에게 보고하도록 해라." "예, 잘 알겠사옵니다." 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똑똑." "무슨 일이냐?" 문이 살짝 열리면서 경비병이 안으로 들어와서는 부동 자세로 보고를 했다. "뮤토 백작님이 전령을 보내 오셨사옵니다." 뮤토 백작은 눈이 퍼렇게 멍이 든 꼴 사나운 모습을 지극히 높은 상관에게 보이기가 싫어 전령을 보내 온 것이었다. 경비병은 전령에게서 전달받은 서류를 미네르바의 책상 위에 올 려놓은 후 경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미네르바는 그 보고서를 급히 읽어본 후 중얼거렸 다. "알 수가 없군." "예?" 미네르바는 그 서류를 이블리스에게 전해 주며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거기에는 지금 크라레스에서 와리스 후작이 전권 대사의 자격을 가지고 도착했다고 쓰여 있 었다. "좀 이상하군요. 로니에르 공작이 여기 와 있는데, 왜 와리스 후작이 또 왔을까요? 그것도 전권 대사의 책무를 띠고 말입니다. 혹시, 로니에르 공작은 그녀 독단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와리스 후작도 여기에 따로 온 것이겠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하지만 짐작만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지." 미네르바는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그녀의 부름에 즉각 경비병이 안으로 들어왔다. "예, 전하." "가서 가레신 후작을 불러 와라." "예!" 잠시 후 가레신 후작이 들어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크라레스에서 와리스 후작이 전권 대사의 자격으로 도착했는데, 경이 좀 만나 줘야겠어. "예, 전하. 그런데 뭐 따로 지시하실 사항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해. 지금 로니에르 공작도 협상을 하러 와 있는데 그쪽의 말도 들어봐 야 할 것 같거든." "예? 그렇다면 정식으로 협상하러 온 사람은 누군가요?" "그게 확실하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야. 그러니까 경은 시간을 끌면서 와리스 후작이 왜 여 기에 왔는지를 조사해 봐.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말이야...... 혹시 와리스 후작은 로니에르 공작이 이리로 온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지. 무슨 소린지 알겠나?" 그러자 가레신 후작은 음흉스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예, 이쪽은 최대한 숨기면서 저쪽의 정보만을 긁어내서 보고를 올리겠사옵니다." "부탁하네." "예, 전하." 가레신 후작이 회담장으로 향한 후, 밖에서 경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샤트란 페르 백작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라고 일러라." "예!" 곧이어 샤트란이 창백한 얼굴로 들어왔다. 샤트란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검을 풀어서 앞 에다 놓은 후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전하께서 지시하신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동료와 많은 부하들까지 잃었사옵니 다. 그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상대가 로니에르 공작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이냐?" "예, 전하." "그녀가 상대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처음부터 그녀가 상대가 될 줄 예상했다면 너희 들만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 일은 크라레스가 간섭해 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 나 의 잘못이지 네 잘못이 아니다. 일어서거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많은 부하들을 잃은 것은 명백한 저의 지휘 미숙이옵 니다. 처벌해 주시옵소서." "그게 아니라는데도 고집을 부리는군. 썩 일어서지 못할까!" "예." "너는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 말고, 본대에 합류하여 포위망을 굳건히 하는 데 주의를 기 울이도록 해라." "예? 무슨 포위망 말씀이옵니까?" "로니에르 공작이 지금 부하들과 함께 이곳에 와 있다. 아무래도 너희들과 싸운 후 곧장 이 곳으로 온 모양이다. 만약 협상이 결렬된다면 그때는 뭔가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경은 딴 생각하지 말고 임무에 충실해라." "예, 전하. 그럼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양국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머리 싸움을 해야 하는 뚱뚱이와 뻔뻔이는 다시금 만나게 되 었다. 둘 다 이 방면에는 노련한 인물들이라서 그런지 두 사람의 실력은 막상막하,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와리스 후작은 비대한 몸집에 가려져 있는 자그마한 눈으로 가레신 후 작을 훔쳐보며 넉살좋게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셨습니까, 가레신 후작 각하. 오랜만에 뵙는군요." 가레신 후작은 상대의 말을 점잖은 어조로 받았지만, 그의 말도 상당히 꼬여 있었다. "나야 언제나 그렇지요. 그건 그렇고 요즘 귀국의 형편이 좀 안 좋은 모양이군요. 전에 만났 을 때 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소이다." 역시 상대방의 비꼬는 말을 와리스후작은 아주 넉살 좋게 넘어갔다. "허허허! 살이 너무 찐 것 같아서 요즘 살을 좀 뺀다고 노력중이지요. 아무래도 그 노력의 결실이 드러나는 모양이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너구리같은 놈!'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가레신 후작은 슬쩍 화제를 바꿨다. 일단 미네 르바가 알아 보라고 지시한 것을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슬쩍 알아내야 하는 게 급선무였 다. "그건 그렇고, 요즘 로니에르 대공께서는 안녕하신가? 6년 전에 몇 번 뵈었었는데, 좀더 성 숙해지셨는지 궁금하군. 그때도 대단하셨지만 지금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지셨는지 모두들 궁금해하고 있소." 갑자기 상대가 왜 로니에르 대공을 거론하는 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기에, 와리스 후작 은 약간 떨떠름한 어조로 답했다. "글쎄요, 대공 전하께서는 언제 같은 모습이시지요. 아예 세월이 그분을 비껴 가는 듯 느껴 지니까 말입니다."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부셔서 여기까지 오셨소이까?" 와리스는 이 능청맞은 놈이 자신이 왜 왔는지를 뻔히 알면서도 이유를 묻자 아니꼽다는 생 각이 들었다. 외교도 마찬가지다. 사정을 하러 가는 입장은 늘 이렇게 하고 싶은 말도 한 수 접어서 해야 한다. "예, 귀국과 좀 더 관계를 친근하게 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관계를 친근하게라...... 사실 6년 전에 본국과 귀국은 코린트를 상대로 싸운 혈맹이 아니었 소?" "그랬었지요." "그런데 왜 지금에 이르러서 이 모양이 되었겠소. 그건 다 귀국에서 미란을 끼고 돌면서 본 국과의 긴장 상태를 조성해 나갔기 때문이 아니오? 이 모든 것이 다 귀국의 책임인데, 지금 에 이르러서 갑자기 관계를 정상화하자니 그게 말이 된다고 하는거요?" 상대방의 통렬한 공격에 와리스 후작은 먼저 웃음부터 터뜨리면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노 력했다. 전과 달리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저 뻔뻔이 쪽이었으니까 말이다. "허허허, 가레신 각하. 그건 귀국의 오해입니다. 6년 전에 코린트를 상대로 전쟁을 했던 것 은 귀국과 본국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미란도 본국의 맹방이었습니다. 그들이 부탁을 하는 데 차마 거절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국의 입장도 좀 이해를 해주셔야지요." "으음, 그렇다면 본국은 귀국의 맹방이었는데 미란만 끼고 돌면서 이쪽을 불편하게 만든 것 이 정당하다고 지금 주장하고 있는 거요?" "허허허, 그게 다 오해라니까 그러시네. 사실 본국이 귀국에게 뭐 못할 짓을 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귀국에게 선전 포고를 한 것도 아니었고, 또 귀국의 상인들이나 여행자들을 핍박 한 적도 없었구요." "내가 말하는 것이 결코 밖으로 드러난 그런 자질구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 그 렇게 말하시오. 좋아요. 그래 관계를 정상화하고 싶다고 하는데 귀하에게 그럴 만한 권한이 있소?" 와리스 후작은 상대가 그런 질문을 하는 목적을 알지 못했으므로 아주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의 수중에는 토지에르 공작이 써 준 위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토지에르가 쓰기는 했지 만, 그 위임장에는 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었기에 완벽한 것이었다. "허허, 제가 그런 권리도 없이 이 자리에 나타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 전권을 위 임받았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말에 가레신 후작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지금 와 있는 로니에르 공작은 또 뭐란 말인가? "아무리 귀하가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귀국과 본국의 악화된 관계를 감안했 을 때 귀국의 공작이 직접 와서 회담을 하는 성의를 보이는 것이 옳지 않소?" "허허허, 그것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본국은 전쟁중이기에 공 작님들은 이런 외교 협상을 하실 만한 시간을 내시기가 어렵지요." 가레신 후작은 와리스 후작의 말에 회심의미소를 지었다. 이제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와리 스 후작은 로니에르 공작이 크루마에 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더군다 나 와리스 후작이 전권 위임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와리스 후작을 이곳 으로 파견한 크라레스의 상층부 권력자들도 로니에르 공작이 이곳으로 온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로니에르 공작은 완전히 단독행동으로 이곳에 왔다는 것이 분명히 입증된 셈이었다. 가레신 후작은 시간을 질질 끌면서 같은 얘기를 몇 차례나 돌린 후, 와리스 후작에게 내일 다시 회담을 진행하자고 한 다음 숙소로 돌려보냈다. 그런 후 곧바로 미네르바에게 자신이 알아 낸 사실을 보고했다. "그렇다면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 군. 그렇지 않은가, 이블리스." "그렇사옵니다, 전하. 로니에르 공작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는 것은 어떨까요?" "뭐? 그래도 괜찮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냥 내친김에 왔다면 충분히 그래도 상관없사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손쉬운 상대가 아닌데? 또 그녀를 없애려면 이쪽의 피해도 엄청날 거야. 그녀는 누가 뭐래도 최고의 고수라는 인정을 받고 있는 실력자니까 말이야." "아니지요. 꼭 그렇게 근위대를 투입해서 공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을 없애는 방법은 그 런 직선적인 것 외에도 많은 추가적인 방법들이 있으니까요." "그래? 뭔가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가?" "암습을 하는 마법이라든지, 약물 같은 것이 많다고 들어사옵니다. 역사상 많은 위대한 무인 들이 암습에 의해 세상을 뜨지 않았사옵니까? 조용히 처리하는 데는 역시...... 흐흐흐." "그것도 그렇군. 여봐라, 마리아 지오그네를 불러 와라." 잠시 후 세련된 용모의 여 마법사가 들어왔다. 미네르바는 그녀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 다. "어서 오게나.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불렀어." "무슨 일이시옵니까?" "아주 실력 좋은 기사 한 사람을 제압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서론이 원체 황당한 것이었기에 지오그네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미네르바 님이시라면 상대가 누가 되었든 간단히 하실 수 있을텐데, 왜 그런 것을 저에게 물으시옵니까?" "내 실력으로도 힘든 녀석이 있으니까 그렇지." 미네르바의 말에 지오그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관을 바라봤다. 미네르바의 실력을 잘 아는 그녀로서는 도저히 그렇게나 강한 인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떤 방법이 있겠나?" "그, 글쎄요...... 상대가 기사입니까, 아니면 마법사?" "기사라네." "예, 그렇다면 마법이나 약물 종류를 쓰는 것이 좋겠지요. 원래 기사들의 경우 마법사의 기 습 공격에 조금 취약한 면이 있으니까 말이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법보다는 약이......" 미네르바는 살짝 눈을 빛내며 말을 받았다. "마법보다는 약이 효과적인가?" "예, 그렇사옵니다. 물론 상대가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면 마법도 효과적이옵니다만, 상대를 제압하기만 하는 마법은 슬립(Sleep)등 소수로 제한되기에 대비책을 세우기도 쉽사옵니다. 그런 마법들의 경우 대부분 불시에 적을 기습하기 위해 아주 삘리 실행할 수 있게 되어 있 지요. 하지만 그만큼 파워는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좀 괜찮은 실력자 정도만 되어도 그 런 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지요. 그러니까 그런 상대라면 대비하기 힘든 약 종류가 더 효과 적일 겁니다. 상대를 죽이는 독약부터 시작해서 잠을 재우거나 몽롱하게 만드는 마취제까지 별의별 것이 다 있지요. 그 종류도 수백 종이 넘기에 일일이 대비책을 세우기도 어렵고 말 이옵니다." "호오, 그래? 그렇다면 말이지, 아주 어려운 상대가 한 명 와 있는데 말이야." "예? 도대체 상대가 누군데 하시는 말씀이시옵니까?" "전에 경도 만나 봤겠지?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말이야. 그녀가 여기에 와 있어. 경도 알다 시피 그녀는 검호 키에리를 격패시켰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지. 그녀는 제압할 약물이 있 을까? 하지만 상대는 매우 눈치 빠르고 괴팍한 녀석이라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그러 니 아주 효과가 뛰어나면서도 비밀스런 것이 좋겠지." 물론 지오그네도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6년 전의 전쟁에 참가한 사람이라면 크라레스 파 견군의 총사령관인 그녀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전세가 어려웠을 때, 움직이지 않고 있 는 크라레스 군을 중앙 쪽으로 돌리기 위해 살라만더 기사단에 찾아가서 당했던 그 수모를 그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감히 대 크루마 제국의 궁정 마술사인 자신을, 공작도 아닌 가짜가...... 이제 그때의 수모를 돌려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오그네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 나기 시작했다. 코끼리도 잡을 수 있는 독약 호화로운 근위대 복장의 기사에게 안내되어 식당에 들어섰을 때, 그곳에는 이미 미네르바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거대한 식당에는 오직 한 개의 넓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바로 이곳이 미네르바가 단장급의 고위 기사들과 만찬을 즐기는 장소였다. 미네르바는 식당 앞에 서 있던 경비병이 "로니에르 공작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하고 보고하자,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경은 나가 보게." "예, 전하." 미네르바의 지시에 이곳까지 다크를 안내해 온 기사는 인사를 한 후 즉시 뒤돌아서서 돌아 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자, 이리로......" 미네르바는 다크에게 직접 자리를 권한 후 옆에 시중을 드는 하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녀의 의자까지 밀어 주는 필요 이상의 친절을 보였다. 분명 이제껏 볼 수 없는 행동이었는 데 기다리게 한 대가로 이런 친절을 베푼다고 해도 좀 과한 친절이었다. "식사를 가져오너라." "예, 전하." 시녀가 인사를 한 후 물러나자 미네르바는 한껏 표정을 부드럽게 하여 말을 걸었따. "그래, 무슨 일로 왔지?" "잘 알텐데, 왜 물어?" "잘 모르니까 묻지. 이쪽은 미란을 정복한다고 바빠서 다른 나라의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 어." "좋아, 내가 온 목적은 동맹이야." 물론 미네르바는 다크가 이쪽으로 온 목적을 처음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맹 이 좋다고 덜컥 그래, 라고 답하고 앉아 있을 미네르바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미네르바의 입장에서 봤을 때, 코린트보다 더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적은 다크였으니까...... "동맹이라...... 잘 나가던 크라레스도 요즘은 꽤 힘든 모양이군. 미란의 일을 따지러 온 줄 알았더니 동맹이라 이거지? 하지만 사람을 잘못 부른거 아니야? 나는 군대를 총괄할 뿐이 지 외교는 내 소관이 아니야. 가레신 후작을 불러 줄 테니 그와 상담을 하는 것이 좋을거 야." "이봐, 나는 크루마 총사령관의 힘이 그렇게 형편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렇게 빼지 말 고 같이 대화를 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 편이 서로에게 득이 될텐데 말이야." "망해 가는 크라레스와 동맹을 맺어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 "당연히 좋은 것이 있지. 본국이 망한 후, 그 다음 차례는 크루마가 될 것은 뻔하잖아. 코린 트는 아마도 6년 전에 당한 그 수모를 결코 잊지 않을거야. 그렇지 않아?" "글쎄...... 그거야 그 때가 되어 봐야 알겠지. 코린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쪽도 결코 만만한 국가는 아니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식사부터 하지." 서로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음식들이 들어왔다. 대제국 크루마의 총사령관이 먹는 식사답게 메뉴는 정말이지 호화로웠다. 그리고 음식들이 담겨 있는 식기들도 모두 다 금 아니면 호화 롭게 구워진 도자기들이었다. 미네르바는 다크에게 식사를 권한 후 조금씩 먹으면서 대화를 했다. 하지만 다크는 그냥 대화만을 나눌 뿐 음식을 입에 넣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식사가 시작되고 10여 분이 흐른 후에도 상대가 먹으려고 하지 않자 결국은 참 지 못하고 짜증스런 어조로 말했다. "왜 그래? 뭐 독이라도 넣었을까 봐 그러는 거야? 나는 그런 치사한 짓은 하지 않아." 그러자 다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맞받았다. 그녀도 별의별 치사한 수법이 난무하는 무 림에서 잔뼈가 굵어졌기에, 그 따위 얄팍한 도발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글쎄, 나는 적이 권하는 음식은 먹지 않는 주의라서 말이야. 친구가 아니면 모두 적 아니겠 어?" "쪼잔하기는......" 미네르바는 포크와 숟가락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다크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왔 다. 탁자는 대단히 넓었기에 여러 걸음을 걸어야 그녀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네 르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크의 자리에 놓여 있는 모든 음식들을 조금씩 먹었다. 음식 에 장난을 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제 믿겠어?" 그러자 다크는 대답 대신에 앞에 놓여 있는 음식들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미네르바는 그 녀가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몇 발자국 가지 못했을 때 다시 다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봐, 포도주는 마시지 않았다구." 미네르바는 일부러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가서는 다크 앞에 놓인 포도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꿀꺽꿀꺽 다 마신 다음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됐어?" 다크는 그런 미네르바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보낸 후 포도주를 잔에 가득 따 랐다. "충분히 믿을 만해." 이렇게 해서 다크의 식사는 시작되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짠돌이 황 제의 밑에 있었던 다크로서는 그야말로 처음 먹어 보는 진수성찬이었다. 다크는 여태까지 먹지 않고 있었던 10여 분을 보상받으려는 듯 맹렬한 기세로 먹기 시작했다. 그렇듯 열심히 먹고 마시고 있는 다크를 미네르바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윽고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미네르바는 깜빡 잊었다는 듯 과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경은 포도주보다는 좀더 강한 술을 좋아한다는 걸 깜빡 잊었네." "괜찮아." "아니, 손님의 취향을 잘 알면서도, 내가 강한 술을 싫어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대접을 엉터 리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봐!" 근처에 서 있던 시녀는 재빨리 대답하고 미네르바의 곁으로 다가갔다. "예, 전하." "술 담당자에게 말해서 좀 강한 술을 한 병 내오라고 일러라. 참, 술 담당자에게 내가 달라 고 했다면서 '로얄 크루마에'를 받아 오너라." "로얄 크루마에 말씀이옵니까? 알겠사옵니다, 전하." 시녀는 재빨리 나가더니 잠시 후 고풍스러운 도자기 병에 담긴 술을 한 병 가지고 들어왔 다. 이윽고 시녀가 조심스럽게 술을 따라 다크 앞에 올려 놓았지만 그녀는 그냥 포도주만을 마실 뿐, 거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자신을 계속 의심하고 있는 다크를 향해 얄밉다는 듯 쏘아 댔다. "이봐, 좀 작작 해두지. 그것까지 내가 직접 맛을 봐야겠어?" "물론이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넉살 좋은 대답에 미네르바는 기가 막힌다는 표저을 지어 보이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나는 강한 술을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 시녀보고 대신 맛을 보라고 해도 괜찮을까?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마시지 마. 황족이나 마실 수 있는 정말 귀한 술을 특별히 생각해서 내왔더니...... 쯧쯧." "뭐, 시녀가 맛을 봐도 상관은 없겠지." 자신의 안전이 확인되기만 한다면, 특별히 강한 술을 좋아하는 다크가 이렇듯 귀한 술을 마 다할 리가 없었다. 이것을 마시지 않고 있는 것은 미네르바의 의도를 믿을 수 없다는 단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다크가 살며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을 확인한 미네르바는 시녀에게 무뚝뚝한 어조로 명령했다. "시음하거라." "예, 전하." 시녀는 조심스럽게 잔을 받아 한 잔을 다 마셨다. 다크는 시녀가 혹시 마시는 척하면서 입 에 머금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의 목젖을 잘 관찰하고 있다가, 그것이 아래위로 꿀꺽거리 면서 액체를 위장으로 흘려 보내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런 확인을 거치고서도 다크는 잠시 기다렸다. 사실 자신에게 위험을 안겨 줄 수 있는 독이 이 세상에 존재할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미 루어 독 대용품, 즉 무림에서 사용하는 몽혼약 따위에는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정신이 흐트러져도 미네르바 같은 고수가 상대라면 위험할 수 있었다. 시녀는 술을 마신 후 어딘가로 가 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 식사 시중을 든다고 서 있었다.그 녀의 볼은 약간씩 올라오는 취기로 발그레해져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뭔가에 중독된 듯한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한 10여 분을 기다린 후 다크는 이제 충분하다고 느끼고는 고풍스러 운 도자기 병을 기울여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크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시녀가 먹었을 때는 멀쩡했었는데 술을 입에 넣고 삼키자마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이 흐려 왔다. 순간,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다크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다크는 더 이상 지체하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대로 탈출하면 미네르바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을 우려가 있었다. 다크는 재빨리 검을 뽑ㄹ아 들며 미네르바에게 달려들었다. 상대가 공세를 취해 올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던, 미네르바는 황급히 검을 뽑아 들 고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미네르바는 다크의 검술 실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에 검에는 충분한 마나가 실려 있었다. 시퍼런 빛을 아련히 뿜어 내고 있는 미네르바의 검이 황금빛의 검과 부딪쳤을 때, 그때서야 미네르바는 상대의 검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황급히 힘을 뺏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때늦은 조치였다. 챙, 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면서 다크는 그 반동으로 뒤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다크의 검은 멋대로 퉁겨 나가 천장에 부딪히더니 아래로 떨어지면서 식당 바닥에 꽂혀 버렸다. 만약 다 크의 검이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주인의 몸과 함께 두 토 막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미네르바는 우선 다크에게로 걸어가서 그녀를 상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크는 쓰러진 후 완전히 정신을 잃었는지 평온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그제야 미네르바는 천천히 황금빛 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검을 뽑은 후 날을 세밀히 살펴봤지만, 그 어느 곳에도 이빨이 나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이 주인의 생명을 건졌군 그때도 느꼈지만 정말 좋은 검이야. 이런 최상품을 어디 서 구했을까? 참, 그렇지. 이 애의 양부가 드래곤이니까 아마도 그 드래곤이 선물했겠지." 미네르바는 다크의 허리에 걸려 있는 검집을 풀고는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그 안에 천천히 꽂아 넣었다. 그런 후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다크를 바라보고 있는 시녀를 힐끗 쳐다봤다. 아마도 시녀는 자신이 먹은 것이 뭔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얼굴빛이 노래져서는 공 포에 질려 있었다. 미네르바는 다크에게서 뺏은 검을 자신의 허리춤에 찔러 넣은 후, 주머 니를 뒤적거려서 뭔가를 꺼내어 시녀에게 건넸다. "네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을 테니 걱정 말아라. 자, 받아라." 미네르바가 건넨 것은 부피는 아주 작았지만 그 안에는 금화로 가득 차 있는 자신의 비상 지갑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드는 시녀를 향해 미네르바는 아주 차가운 어조로 속삭였다. "이 일을 외부에 발설하면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버릴 테다. 알겠느냐?" "예,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사옵니다, 전하." "밖에 나가면 마리아 지오그네 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보고 들어오라고 전해라." "예, 전하." 잠시 후 마리아 지오그네가 시녀의 인도를 받으며 근위 기사 한 명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 다. 지오그네는 문 앞에 서 있는 경비병들에게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지시한 후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마리아는 탁자 위에 긴 금발 머리카락의 자그마한 체구를 지닌 사람이 엎 어 져 있는 것을 보고, 역시나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저 소녀를 자루에 담아라." "옛, 전하." 마리아 지오그네와 함께 들어왔던 근위 기사는 이미 뭔가 지시를 받았었는지 큼직한 자루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자신이 가지고 온 자루의 용도를 비로소 깨달았는지 순간 흠칫하는 듯했지만, 곧이어 재빨리 소녀를 자루 속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미네르바는 기사가 소녀를 자루 속에 집어넣고 있는 장면을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 보다가 고개를 뒤로 돌려서 시녀에게 말했다. "너는 술 담당자에게 가서, 내가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내 방으로 오라고 했다.'고 전해라. 알겠느냐?" 시녀는 미네르바의 말을 듣고 저 소녀를 쓰러뜨린 약물이 술 속에 들어있을 것이란 사실을 눈치 챘다.하지만 그녀는 오랜 궁중 생활을 해 오면서 터득한 것이 있었기에, 자신이 뭔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의 표정에 무심결에 떠오르지 않도록 조심했다. 이곳에서 오래 살 려면 될 수 있다면 조용히,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또 아 무것에도 관심 없다는 듯 행 동해야만 했던 것이다. "예, 전하." "어디로 옮기면 되겠사옵니까? 전하." "으흐흐, 당연히 지하 감옥이지." 미네르바는 다시 시선을 마리아 지오그네에게로 옮겼다. "저 소녀를 제압할 만한 마법 도구 같은 것이 있나?" "물론 있사옵니다, 전하. 마나가 모이지 않도록 하는 도구가 있지요." "그녀는 무술도 엄청나게 강하지만, 마법도 쓸 줄 안다. 그 두 가지를 다 막을 수 있어야 해. 알겠나?" 미네르바의 말에 마리아 지오그네는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어떻게 마법까지 함께 익혔으면서도 절정의 고수가 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 다. "그녀가 진짜로 마검사입니까?" 내가 알고 있는 한은 그렇다. 그리고 그녀가 이곳에 잡혀 와 있는 것을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비밀 유지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라." "예, 전하." "그럼 가 보거라." "전하께서도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니었사옵니까?" "아니, 나는 할 일이 하나있어. 그것을 끝내고 그리로 가지. 그 동안 일을 끝내도록!" "예, 전하." 마리아 지오그네를 따라 큼직한 자루를 든 기사가 식당 밖으로 나가 버리자, 미네르바는 잠 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식당 문을 나섰다. 그녀가 가는 곳은 당연히 다크와 함께 온 팔시온 일행이 묵고 있는 숙소였다. 그들까지 모두 잡아 버린다면, 만약에 나중에 드래곤이 찾아와서 다크를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린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발뺌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기억을 지워라 "괜찮을까?" 가스톤은 창가에 서서 밖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과 어조에는 다크에 대한 걱 정과 우려가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스톤의 행동이 못마땅했는지, 미카엘은 트긋한 표정으로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일침을 놨다. "아마 괜찮을 거야. 다크가 누구야? 이 시대 최강이라고 불렸던 키에리 발렌시아드를 물리 친 녀석이야. 걱정 말라구." 하지만 미카엘과 함께 적진 안에서 느긋하게 술타령을 벌이고 있는 팔시온과 미디아를 노려 보며 가스톤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구. 너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녀석이냐? 우리들은 지금 적국의 한 복판에 있는 거라구. 그것도 코린트 다음 간다는 크루마에 말이야. 저기를 봐. 네 눈에는 안 보이겠지만 사방에 무장한 기사들이 득실거리고 있다구. 그것도 대단히 수준 높은 기사들이 말이야."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응대 뿐이었다. 팔시온과 같은 검을 쓰는 무리들에게 있 어서 다크에 대한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크루마의 황궁이니 당연하겠지. 황궁에 있는 기사들 하면 근위 기사 아니겠냐? 오 히려 수준 낮은 녀석들이 있다면 그게 이상한거야. 쓸데없는 잔소리하지 말고 여기 와서 술 이나 한잔 해." "젠장, 모두들 간이 부었는지, 아니면 아예 겁을 상실했는지......" "너는 기사가 아니라서 잘 모를거야. 다크를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녀석은 없다고 봐도 과 언이 아니야. 혹시 모르지, 크루마의 근위대가 전부 출동한다면 가능성은 있겠지. 하지만 그 나마 다크가 정면 대결을 포기하고 그냥 도망치려고 한다면 아무도 막을 수는 없어. 그것을 미네르바도 잘 알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구." "젠장, 들어간 지 벌써 두 시간이 넘었어. 이 정도면 식사를 해도 수십 번은 더 했겠다. 그 런데도 왜 안 오는 거야? 역시 뭔가 잘못 된 것이 분명해." 그런 가스톤을 보고 미카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분명 속이 좁거나, 옹졸하거 나, 아니면 지나치게 겁이 많아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고급 귀 족들끼리 나누는 만찬이 얼마나 화려하고 긴 지 잘 몰라서하는 촌놈의 푸념이거나...... "이봐, 너는 근검 절약하는 크라레스에만 있어서 잘 모르고 있어. 이런 대제국 공작의 식사 초대를 받았다면 최소한 몇 시간은 먹고 마시게 되어 있다구. 별의별 해괴한 것들로 요리를 만들어 먹으면서 자신들이 미식가라고 자처하는 놈들도 많지만, 미네르바의 직위나 다크의 직위를 감안한다면 결코 싸구려 음식을 대접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지. 게다가 다크는 중요한 협상까지 해야 하잖아. 그것까지 감안한다면 두 시간 정도는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니 야, 알겠어?" "그도 그렇군." "너도 늘 서류 더미에만 파묻혀서 궁상떨지 말고 상류 사회의 생활에 대해서 좀 배워라." "제기랄, 그래 너 잘났다." 이때, 저쪽에서 이상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췄다. 가스톤은 창가에 서 있었기에 그것을 가 장 먼저 눈치 챌 수 있었다. 어둠 속에 보이는 그들의 허리에 검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모두들 기사들인 듯 했다. 가스톤은 중얼거리면서 주문을 외운 후 나지막하게 시동어를 외쳤다. "뷰 마나 포스!" 마나 포스를 관찰해 보니 이곳에 접근중인 인물은 네 명. 역시 모두 다 근위 기사급의 강력 한 마나를 몸 속에 지니고 있었다. 일단 자신의 예상이 맞아 떨어지자 가스톤은 시선을 뒤 쪽으로 돌렸다. 여기저기에 엄청난 마나의 덩어리들이 보이고 있었다. 최소한 가스톤이 확인 한 것만도 10여 개에 달할 정도였다. 그런데 다시 시야의 저 뒤편에 진홍색의 붉은 덩어리가 보였다.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대상은 엄청난 마나를 보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지금 사방에 퍼져 있는 기사들의 몸체가 짙은 주황색인 것을 감안한다면 분명 차원을 달리하는 고수임이 분명했다. 가스톤은 처음에는 그가 다크인 줄 알고 활짝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는 이내 딱딱하게 굳 어지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만약 그가 진짜 다크라면 결코 저쪽에 서 있지 않 고 곧장 이리로 들어왔을 것이다. 가스톤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짤막하게 외쳤다. "미네르바다." "미네르바가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기에 미네르바가 와 있어." "헛소리 좀 하지 마. 미네르바는 다크와 함께 있을 텐데 어떻게 여기에 와 있겠어?" 미카엘은 코웃음을 치며 넘겨 버리려 했지만, 팔시온은 그렇지 않았다. 팔시온은 그만큼 가 스톤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미네르바가 확실해?" "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다크라면 이리로 곧장 들어왔을 거 아니야? 그런데 저기에 그냥 서 있다구. 그리고 지금 저 쪽에서 네 명의기사가 이리로 오고 있어. 이건 분명 무슨 일이 벌어 진 게 분명해." 가스톤이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하자 팔시온의 안색도 급격히 굳어졌다. 미네르바가 여 기에 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지금 다크와 협상을 벌이고 있어야만 하지 않 는가. "젠장, 뭔가 분명 잘못 됐군. 모두들 준비해라, 탈출한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거 설명하고 있을 시간 없어. 상대는 근위 기사야. 시간을 끌면 안 된다구. 빨리 준비해. 빨리!" 허둥지둥 자신의 짐을 챙기려고 하는 미디아에게 팔시온은 다시 외치듯 짤막하게 말했다. "이봐, 짐 챙기고 앉아 있을 시간 없어. 모두 다 놔두고 이리 와." "에이! 저거 돈 많이 준 건데......" "저런 것은 목숨 붙어 있으면 다시 살 수 있어. 자, 준비해!" 팔시온이 긴장을 풀지 않고 천천히 검을 뽑아 들자 미디아와 미카엘도 함께 검을 뽑아 들었 다. 적국의 심장 한가운데서, 그것도 근위 기사들에 둘러싸인 위급한 지경을 당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정신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눈 뜨고 세상 보는 것도 곧 마지막이 될 수 있었다. "어둠 속이야. 재빨리 행동하면 잘 하면 탈출할 수 있을 거야. 자, 가자! 이봐, 가스톤 뭐 하 고 있는거야?" 팔시온은 혼자서 뭔가 중얼거리며 가만히 있는 가스톤을 향해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여태 껏 자기 혼자서 위험하다느니 떠들어 댄 주제에, 정작 탈출하려고 하니까 거기에 보조를 맞 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가스톤은 중얼거림을 멈추더니 동료들을 향해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외쳤다. "하이드 마나 포스(Hide Mana Force)!"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나는 도망쳐 봐야 곧 잡힐 거야. 마법으로 마나를 감췄어. 너희들만이라도 탈출해라." "이봐, 그래도 함께 탈출해야지." "내가 가 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될거야. 모두 어서 가!" 가스톤은 확정적으로 말한 후 다시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봐, 가스톤!" 하지만 가스톤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젠장...... 그래, 그렇다면 여기에 남아 있어라, 꼭 구하러 올게. 가자!" 슬쩍 돌아서는 팔시온의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오랜 시간 가스톤과 함께 생활했던 팔 시온은 그가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팔시온은 가스톤을 막을 수없었다. 그래듀에이트인 자신들의 탈출도 장담을 못 하는 판에,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기에 거의 마법 수련을 하지 못했던 가스톤까지 함께 데려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쨍그랑!" 셋은 유리창을 박살내며 도약했다. 그들의 목표는 성벽! 성벽을 건너뛰어 드넓은 밖으로 나 가면 주위가 어둡기 때문에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들은 오로지 거기에 희망 을 걸고 달려나가는 것이다. "쫓아라!" "저놈들 잡아라!" 순식간에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도망치는 팔시온 일행을 따라 몸을 날리기 시작했 다. 바로 이때 가스톤이 그들의 뒤통수에 대고 마법을 뿜어 냈다. 시간이 없어 그렇게 강력 한 마법은 쓸 수 없었지만, 어쨌든 커다란 불꽃 덩어리가 근위 기사들의 뒤통수를 향해 날 아갔다. 근위 기사들은 설마 집 안에 누군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하고 무조건 도 망치는 적들을 쫓아가다가 뒤쪽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들을 향해 불덩어리가 날 아오는 것을 눈치챘다. "마법이다!" 안타깝게도 가스톤이 준비한 회심의 일격에 맞은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크루마 의 근위 기사답게 옆으로 몸을 비틀며 불꽃을 피했다. 하지만 불꽃을 피하느라 조금의 시간 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팔시온 일행은 상대와의 거리를 조금 더 벌릴 수 있었다. 이제 멀어져 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가스톤은 창가에 그냥 서 있었다. 사실 도망갈 방법도 없었으므로 거기에 서서 동료들이 무사히 탈출하기를 빌며 그들을 배웅했던 것이다. 이때 그의 뒤에서 숨막히는 마나의 힘이 느껴졌다. 가스톤이 천천히 돌아서자 거기에는 차가운 표정의 미네르바가 서 있었다. "잔꾀를 부리다니......" "퍽!" 미네르바는 가스톤의 따귀를 호되게 갈긴 후 쓰러지는 가스톤을 가리키며 싸늘한 어조로 명 령했다. "체포해!" 실내로 들어서는 미네르바를 향해 이블리스가 치하를 보냈다. "축하 드리옵니다, 전하." "고마워, 이블리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야. 마법사 녀석이 잔꾀를 부리는 바람에 놈 들이 다 도망쳐 버렸어. 제2근위대를 전부 투입했는데도 놓치다니...... 으이그!" "어두워서 그럴 것이옵니다. 하지만 마법사가 없으니 그리 멀리 도망치지는 못했을 것이옵 니다. 날이 밝은 후 본격적으로 추격을 시작하면 곧 잡아들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2근위 대만으로 충분하면 좋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 쟉센에 나가 있는 제네리아 기사단을 불러들 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마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들까지 동원한 다면 좀더 빨리 잡아들일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좋아, 그렇게 하게." "예, 곧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지는 대로 용기사들을 출동시키도록!" "예, 전하. 용기사들에게도 지시해 두겠사옵니다." "참, 그녀를 찾기 위해 그녀의 양아버지가 찾아올지도 몰라. 그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까?" 다크의 양아버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이블리스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상식적으로 대답했다. "예? 크라레스가 감히 이곳까지 사람을 보낼 수 있겠사옵니까? 설혹 조사하기 위해 온다고 해도 대충 변명을 둘러대어 내쫓든지, 아니면 감옥에 집어넣으면 될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지." 의외의 대답에 이블리스는 당황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설마 그녀의 양아버지도 엄청난 실력의 기사이옵니까?" "아니, 드래곤이다. 그것도 에인션트 급에 가까운 골드 드래곤이지. 도대체 어떻게 서로간에 부자지간이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지만......" 미네르바의 말에 이블리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얼어 버렸다. 드래곤이 양아버지라면..... 결코 드래곤은 자신의 아들이 행방불명된 사실을 묵과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계획을 좀 수정해야 하옵니다. 드래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으니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일단 이번 사실을 알고 있는 병사들의 입 단속부터 해야지요. 그렇다고 그들을 없애 버릴 수는 없사옵니다. 황궁 병사들의 상당수가 행방불명된다면 그들의 가족들을 통해서 소문이 퍼질 것이고, 그것을 드래곤이 들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일단 이 일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데려다가 마법으로 기억을 지워야 하옵니다." "음, 기억을 지운다...... 그런 마법도 있었나?" "예, 있사옵니다. 마리아 지오그네 경에게 지시하면 될 것이옵니다." "좋아, 그 다음은?" "최대한 빨리 도망친 녀석들을 체포해 와야겠지요.그 런 후 그 작전에 동원된 인물들의 기 억도 지워버려야 하옵니다. 드래곤은 매우 영리하고 집요한 몬스터지요. 조금이라도 빈틈을 만들었다가는 큰일이 나옵니다." "알겠다. 지오그네에게 지시하도록 하지. 그럼 새벽에 시작될 수색 작전에 대해 만전을 기해 두도록 해라." "예, 전하." 미네르바는 마리아 지오그네가 기다리고 있을 지하 감옥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 다. 드래곤의 아들을 건드린 결과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집무실 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어제 아침, 타이탄을 수거해 가라는 연락을 끝으로 아들 녀석에게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고 있기 때 문이었다. 아무리 서로간에 정기적인 연락 시간을 정한 것도 아니었고, 또 하루에 한 번 이 상은 꼭 연락을 하겠다고 약속을 정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들 녀석이 돌아다니고 있 는 곳은 전쟁터였다. 마법사 가스톤까지 데려갔으면 하다못해 예의로라도 하루에 한 번씩은 자신이 잘 있다는 연락을 보내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쁜 녀석! 내 이럴 줄 알았어. 최소한 어디서 뭘 하는지는 가르쳐 줘야 걱정을 하지 않지. 이봐, 세린!" 세린은 즉시 대기실에서 달려나왔다. 그녀는 일부러 시선을 조금 낮춰서 아르티어스와 눈길 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예, 전하." "포도주 좀 가져와라." "예." 세린은 뭔가 말을 할 듯하다가 돌아서서는 포도주를 가져다 줬다. 다크는 언제나 손님들을 위해 포도주 몇 병 정도는 준비해 두라고 일렀었기에, 포도주는 금세 아르티어스 앞에 놓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다크와 생활하며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세린은 거의 본능적으로 눈앞의 인물이 다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다크라면 브랜디 같은 독한 술이 떨어지지 않는 한 포도주는 절대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린은 이 사실 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상대의 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근한 힘을 그녀는 동물적 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밀고를 한 사실이 드러난다면 상대는 가만히 있 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또 그녀는 오랜 노예 생활을 통해,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없다면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 좋다는 지혜도 이미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를 따라서 향을 슬쩍 음미하면서 자꾸 고개를 쳐드는 불안감을 가라앉 혔다. 사실 자신의 아들은 웬만한 드래곤이라도 때려잡을 만큼 강했다. 그렇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아르티어스의 이불안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인 아르 티어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신의 아들은 아직도 가녀린 소녀에 불과했다. "젠장, 정말 신경 쓰이는군." 투덜거리면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던 아르티어스에게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가만히 생 각해 보니 아들 녀석과 마지막 통신을 주고 받으면서 미란의 일에 대해 언급했던 거이 떠올 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 녀석은 미란으로 갔을 가능성이 컸다. 아르티어스는 즉시 큰 소 리로 외쳤다. "이봐, 세린!" "예, 전하." 세린은 주눅이 든 어조로 무심결에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진짜 다크에게는 '주인님'이 라고 불렀지 결코 '전하'라는 호칭을 쓴 적이 없는 세린이었다. 아르티어스는 기억력이 비상 한 드래곤인 만큼 그것을 간단히 알아챘지만, 지금 아르티어스는 그따위 것에 신경을 쓸 여 유가 없었다. "가서 카슬레이 백작을 불러와라, 당장!" "예, 전하." 드래곤은 성질도 급했다. 일단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걸 알아 내거나 해결하지 않으면 견디 질 못했다. 더군다나 아들 녀석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참거나 기다린다는 단어는 사전에 나 오질 않았다. 잠시 후 카슬레이 백작이 헐레벌떡 달여 들어왔따. "무슨 일로 찾으셨사옵니까? 전하." "어제 미란에 갔을 때 말이야.그러니까......, 나에게 연락을 했었던가?" 만약 다크가 카슬레이와 연락을 했다면, 즉 다크로 변장하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했다는 것 과 같지 않은가? 그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조금 궁리를 하다가 짐짓 그때 일이 떠오르지 않 는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예? 어제 탈출 준비를 하고 있는 제게 연락을 주셨잖습니까.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기에 대답을 해 드렸었지요." 일단 카슬레이 백작과 연락을 했었다는 사실에 아르티어스는 내심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 뱉을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이제야 그때 일이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는 듯 딴청을 부렸다. "아, 그랬었지. 참, 그때 경이 뭐라고 보고했었지? 그게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말이야. 폐하 께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생각이 잘 정리가 되질 않아서 말이야. 그러니 다시 좀 설명해 보 게." "예, 저희들은 가므 의장과 국외 탈출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마로니카 시에 먼저 갔사옵니 다. 하지만, 이미 가므는 크루마에 점령당한 후였지요. 그래서 지하 감옥에 혹시 가므 의장 이 잡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지하 감옥으로 쳐들어갔사옵니다. 하지만 가므 의장은 이미 크루마로 압송된 후여서 감옥 안에 갇혀 있던 요인들만 구출하여 서둘러 탈출 준비를 했사옵니다. 하지만, 그때 타이탄 50여 기로 이루어진 적의 대부대가 도착했사옵니다. 그들 과 싸우다가 적들이 웬일인지 병력을 뒤로 뺐을 때, 그들을 물리치고 재빨리 후퇴한 것이지 요. 일단 시간이 없었기에 마로니카 시에서 남쪽으로 약 15킬로쯤 떨어진 지점으로 공간 이 동을 했고, 거기에서 장거리 마법진으로 돌아왔사옵니다. 전하께서 치레아 기사단이 지금 어 디 있느냐고 물어 보셨을 때 저희들은 장거리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사옵니다." "오, 그래!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 그래, 그랬었어. 좋아, 이만 가 보게나." "예, 전하." 아르티어스는 카슬레이 백작을 보낸 후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아들 녀 석이 미란으로 간 것은 확실했다. 아마도 치레아 기사단이 우세한 적에게 꼬리를 잡혔는데 도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녀석이 그곳에 간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 분 명했다. 그것 외에는 적들이 다 잡은 치레아 기사단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다음 에는 이 녀석이 어디로 갔을까? '만약 내가 그 녀석이라면......'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아르티어스 어르신을 씩 미소를 지었다. 필시 아들 녀석은 카슬레이 에게서 보고를 들은 후 크루마로 갔을 것이다. 부하가 완수하지 못한 일을 완수하기 위해 서...... 이제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적이 안심하며 본격적으로 포도주의 그윽한 향과 맛을 즐기기 시 작했다. 크루마의 황궁에는 이미 아들과 함께 찾아가서 한 번 난동을 부렸었고, 또 자신의 레어에서 미네르바라는 여 기사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미네르바라는 그 공작은 결코 아들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드래곤의 아들을 건드리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잘 알 것이므로...... 와리스 후작은 비대한 몸뚱이를 이리저리 뒤틀며 지루함을 참고 있었다. 아홉 시에 회담을 재개한다고 해 놓고는 벌써 열 시가 넘었는데도 얄미운 가레신 후작은 회담장에 모습을 드 러내지 않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와리스 후작의 머리 속에는 불안감 이 커지고 있었다. 이렇듯 자신을 박대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크루마는 동맹을 체결할 의 사가 없는 듯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레신 후작 각하께서 드십니다." 회의장의 앞에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이 문을 열면서 와리스 후작에게 통보했다. 드디어 가 레신 후작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레신 후작은 짐짓 점잔을 빼는 몸짓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와서는 와리스 후작의 정면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와리스 후작. 생각보다 회의가 오래 계속되어서 말이오." "아닙니다. 그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안하오. 나는 귀국과 동맹했을 때 어떤 이점이 있는지를 상층부 인사들에게 설명했지만, 기각되고 말았소." "하,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본국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국이 망한 후에는 귀국의 차 례가 될 텐데,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까? 다시 한 번 더 재고해 보실 수는 없 습니까?" "미안하오. 나도 귀하와 같은 논리로 설명을 했었소. 하지만 그 멍청한 녀석들은 코린트가 귀국을 점령한 후에는 본국의 차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니 나로서도 더 이상 방법이 없군요." "그, 그럴 리가......" "내가 귀하를 믿기에 하는 말이지만, 지금 본국의 상층부는 코린트와의 화친을 모색하고 있 소. 그들이 귀국이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을 텐데요?" "물론이오. 그 돌머리들은 지시만 내리면 끝인 줄 아니까 말이오. 실무자인 나는 코린트와 화친을 맺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 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상층부의 지시에 따 라야만 하는 하급 관리에 불과하오. 나도 최선을 다했지만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구려." 물론 와리스 후작은 가레신 후작의 공치사가 순전히 거짓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 지만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바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제 자신이 크루마에 도착했 을 때부터 아마도 크루마는 코린트에 붙을 것을 결의했을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와리스는 자위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는 오늘 후작 각하께서 본국을 대변해서 최선을 다해 주신 사실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 다. 그럼, 저는 이마 가 봐야 하겠군요.""일이 이렇게 끝나게 되어 정말 미안하오. 자 갑시 다.내가 마법진까지 바래다 드리지." 와레신 후작은 이번 회담의결과가 다크의 실종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짜 다크가 크라레스의 황궁에 계속 버티고 있었기에 그것은 짐작 조차도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예, 전하. 마법진을 이용해서 떠나는 것을 배웅해 주고 왔사옵니다." "후! 로니에르가 없는 크라레스 따위는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지. 그건 그렇고, 가레신 경." "예, 전하." "경은 지금 즉시 코린트로 가라." 미네르바는 이미 다크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다음 일을 진행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 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일사천리로 크루마의 안정을 다져 가면 되는 것이었다. "예, 가서 어떻게 하면 되겠사옵니까?" "그들은 로니에르가 사려졌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한다. 그 점을 십분 활용해야 하는 것 이야. 상호 불가침 협정을 맺어 주지 않는다면 동맹도, 동맹군의파병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 을 그들에게 주지시켜라. 놈들은 지금 로니에르 공작이 무서워서 기동력이 좋은 기사단만으 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어. 그런 만큼 우리들을 참전하게 만들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양 보해 줄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때 옆에 있던 이블리스가 끼여들었다. "전하, 그 외에도 본국의 미란 병합을 코린트가 인정한다는 각서도 받아야 할 것이옵니다. 미란은 제국 전쟁 후 코린트와도 사이를 개선해 왔기에 아무래도 코린트가 그 점을 들어 압 력을 행사해 올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군. 그것도 함께 시행해라." "예, 전하."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 내야만 한다. 철저하게......" "유래를 찾기 힘든 전쟁 "두두두두두......" 50여 명의 기병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사슬 갑옷을 입고 있었고, 중 요 부위는 두터운 철판으로 된 금속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병들 이 지나가자 희뿌연 먼지와 함께 지축을 울리는 듯한 엄청난 소음을 내고 있었다. 그들은 마을 안에 들어와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으므로 길을 지나가던 주민들은 그 서슬에 놀라서 길옆 좌우로 황급히 비켜섰다. 기병들의 목적지는 마을의 위쪽에 있는 작은 요새였다. 그 요새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 는 버니즈 백작은 요새를 중심으로 반경 30킬로에 가까운 광활한 대지의 관리를 황제로부터 위임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영지가 넓은 만큼 버니즈 백작은 거의 400여 명에 가까운 사병 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지금 마을을 빠른 속도로 가로질러 달려오는 무리들도 백작의 사 병들이었다. 요새 위에 서 있던 보초병은 달려오는 기병들이 몇 시간 전에 이 요새에서 출발한 잭슨 남 작 일행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는 아래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잭슨 남작님께서 돌아오셨다. 문을 열어라!" 기병들이 요새의 정문에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기병들은 잠시도 지 체하지 않고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갑옷, 그리고 기병들이 가 지고 있는 긴 창날과 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낼 만큼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모두들 쉬어라, 수고했다." 잭슨 남작은 도착과 동시에 말의 고삐를 종자에게 넘겨준 후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영주인 버니즈 백작에게 갔던 일의 전말을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예, 영주님. 농노들이 봤다는 그 수상한 무리들은 피난민들이었습니다." "피난민이라고? 어디에서 왔다고 하던가?" "예, 발크레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발크레라면 여기서 겨우 이틀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설마 거기에까지 적들이 나타났다 는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피난민들에게 물어 보니 갑자기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요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고 합니다. 적들은 곧이어 물러갔지만, 아무래도 안심이 되질 않아 피난을 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처리해 놓고 왔는가?" "예, 일단 병사들에게 영지의 경계선에 검문 검색을 강화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피난민들을 설득해서 고향으로 다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지요." "잘 처리했군. 이 기회를 이용해서 농노들이 도망칠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 영지 안에 있는 농노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게." "각별히 주의하고 있습니다. 참, 다른 곳에서 흘러온 한 농노 가족을 붙잡았는데 어떻게 처 리할까요?" 농노를 붙잡는 일이 그렇게 희귀한 일은 아니었으므로 버니즈 백작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늘 하던 대로 처리해." "예, 그런데 그 농노의 딸이 상당한 미인이던데요? 그냥 노예로 팔아 버리기는 아깝더군요." 잭슨 남작은 슬며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부하의 말투가 자신에게 달라는 듯 느껴졌는지, 버니즈 백작은 잭슨을 힐끗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뭐 좋다면 그 계집은 자네가 가지게. 대신 그 아버지는 교수형을 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노 예로 팔아 버리는 것을 잊지 말게." "감사합니다, 영주님." 이때, 갑자기 비상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땡땡땡땡땡......" 하지만 그 소리는 다시 급격히 잦아들더니 곧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버니즈 백작은 급히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감히 비상종을 가지고 장난 치는 못된 녀석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못된 녀석의 장난이 가득한 얼굴이 아니라, 비상종 밑에 쓰러져 있는 병사의 시체였다. 그것을 목격한 버니즈 백작의 등에는 갑자기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적이다." 버니즈 백작은 부하들을 지휘하기 위해서 아래로 달려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곧이어 뒤따 라온 잭슨에게 붙잡혔다. 잭슨은 버니즈 백작을 꼭 붙잡은 후 상관이 무모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설득했다. "지금 사방에 돌아다니며 지방 영지들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코린트의 기사단입니다. 기사 들을 상대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적들은 곧 있다가 철수할 겁니다. 그러니 일단 몸 을 잠시 감추십시오. 나중에 적들이 물러간 후에 이 영지를 관리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 그렇군. 내가 죽으면 안 되겠지?" "당연하지요. 지금 놈들이 여러 곳에서 숱하게 활개를 치는 바람에 지방 행정이 붕괴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주님께서는 반드시 살아 남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주님의 영 지만이라도 보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럿이 황제 폐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부하의 말대로였다. 놈들은 점령지의 확보가 목적이 아니었다. 크라레스의 지방 행정 의 중심부들을 파괴하면서 크라레스가 망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는 잭슨 남 작의 말대로 용감하게 적들과 싸우는 것보다는 비겁하게라도 살아 남는 것이 중요할 것 같 았다. 그래야 놈들이 떠난 후에 다시 이곳의치안과 행정력을 복구할 수 있을 테니까......버니 즈 백작은 거기까지 생각하며 자신에게 충언을 해 준 잭슨 남작에게 감사를 보냈다. "그렇군. 경의 현명한 조언에 감사하네.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있는 한 크라레스는 무궁히 발전할 수 있을 것이야. 내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겠네." 영주의 말에 잭슨 남작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영주가 이렇게 까지 말했으니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또, 크라레스는 코린트 군의 기습 작전으로 이 미 수많은 지방 영주들이 사망한 상태였다. 만약 버니즈 백작이 뒤를 밀어 준다면 작은 지방의 영주쯤 되는 것도 시간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미소가 떠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건 그렇고 빨리 몸을 피하셔야만 합니다. 자, 이쪽으로......" 버니즈 백작이 잭슨 남작의 안내를 받으며 달려간 곳은 요새 외곽으로 빠지는 비밀 통로가 있는 곳이었다. 잭슨 남작은 비밀 통로의 문을 연 후 다급한 어조로 외쳤다. "빨리 들어가십시오, 영주님." 하지만 버니즈 백작은 어둡고 습한 비밀 통로를 앞에 두고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놈들이 올지 모릅니다. 겨우 병사 몇 백 명으로 기사들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 빨리......" 자신을 채근하고 있는 잭슨 남작을 향해 버니즈 백작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비밀 통로의 앞에 도착했으므로 언제든지 안전하게 밖으로 나갈 수 있었기에 버니즈 백작의 마음 은 상당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참, 그러고 보니 가족들이...... 이렇게 나만 빠져나갈 수는 없지 않겠나?" 사실 잭슨 남작은 필요 이상으로 서두르고 있었다. 적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성내의 경 비병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요새 안까지는 단 한 명도 들어오지 않 고 있었다. 속도가 빠른 기사들은 다수의 병사들과 싸울 때 가능한 한 운신의 폭이 좁은 실 내에서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지금 움직인다면 영주의 가족들을 구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도 아니고, 겨우 영주의 가족을 구한다고 목 숨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지금 이 상태로 가족들을 구하러 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영주님. 먼저 빨리 나가셔 야만 합니다. 일단 영주님께서는 살아 남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놈들이 언제 실내로 진입할 지 알수 없습니다. 서두르시지요." 버니즈 백작은 몸을 뒤로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요새 내의 연병장 위에서는 지금 그 야말로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적들로 인해 겁에 질린 병사들이 도망치다가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아니, 도망이라도 치는 놈들은 그래도 용감한 녀석들이었다. 아예 겁에 질려서 부들부들 떨며 그냥 서 있거나, 아예 오줌까 지 지리고 있는 놈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은 밖에 있는 병 사들을 모두 처치한 후 실내로 진입해 들어올 것이다. "알겠네. 그렇다면 자네가 가서 내 가족들을 이리 데려다 주지 않겠나?" "예?" 적들이 언제 실내로 진입해 들어올지 알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영주의 가족들을 구한답 시고 왔다갔다 하다가 적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버니즈 백작은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을 쓰며 말했다.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모 르지만, 그래도 놈들이 실내로 진입해 들어와서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 했기 때문이었다. "놈들은 아직 요새 안으로 진입해 들어오지 못했어. 지금 움직인다면 가능할거야. 부탁......" 그러나 버니즈 백작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잭슨 남작이 뒤에서 단검으로 그의 등을 찔러 버렸기 때문이었다. "으윽! 네 ..... 네 놈이 이럴, 이럴 수가 있느냐?" 비틀거리면서 검을 뽑아 들려고 애쓰고 있는 상관을 보며, 잭슨 남작은 단검을 옆으로 던지 고 허리에 꽂혀 있는 장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잭슨은 한껏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죽고 싶으면 네 놈이나 가서 죽어. 나는 살아야겠어. 겨우 네 녀석 가족 따위 구한다고 창 창한 내 목숨을 걸 수는 없지. 알아?" 잭슨 남작의 검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서 있는 버니즈 백작의 옆구리를 베고 들어갔다. 잭슨 남작은 우람한 근육질의 소유자였지만 그의 검은 버니즈 백작의 몸통을 완전히 반으로 가르 지는 못했다. 반쯤 잘라 버리다가 힘이 부족해 그만 멈춰 버렸던 것이다. 잭슨 남작은 이제 시체가 되어 버린 버니즈 남작의 몸통을 발로 차서 뒤로 넘어뜨리면서 자 신의 검을 뽑아 냈다. 그런 다음 피묻은 검을 든 채로 황급히 비밀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어찌되었건 이 망할 전쟁에서 살아 남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일단 살아 남아야 영 주건, 뭐건 직책을 받아서 호의호식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어쨌든 코린트 기사단의 크라레스 공격은 엄청난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각 지방의 행정과 치안, 그리고 세금의 징수를 담당하는 지방 영주들이 그 공격 대상이 된 것인데, 이런 전투 방법은 여태껏 그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것이었다. 수백 명에 달하는 피난 행렬...... 소나 말이 끄는 수레에 짐과 아이들을 태우고, 어른들은 그 고삐를 잡고 앞장서서 터덜터덜 걸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그래도 좀 나은 편에 속했다. 등과 한쪽 손에 짐을 잔뜩 든 채 남은 한쪽 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꼭 쥐고 걷는 사람들의 고생이란 이루 다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부렸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피난 행렬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이번 전쟁으로 아르곤에 점령된 거의 대부분의 영 토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인구의 대이동이었다. 국가끼리 전쟁이 벌어졌을 때, 많은 피난민이 발생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렇듯 대규모의 피난민이 이동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왜냐하면 평민들의 경우 거주 지를 이동할 자유가 있었지만, 영지에 소속되어 있는 농노들의 경우에는 주거지를 이동할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옆 마을에서 격전이 벌어져도 피난을 떠날 수 없었다. 거주지를 이탈하여 탈주한 농노라는 것이 밝혀지면 노예로 팔려 가거나 아니면 교수형에 처 해지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후 새로운 주인이 영주가 되어 나타나면, 그들은 또다 시 농사를 지어 그 영주에게 바치는 생활이 지속되게 된다. 평민이나 귀족들이야 적군이 쳐 들어오면 엄청난 생활의 변화가 오겠지만, 농노들의 경우는 바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 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농노의 생활을 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피난민들이 발생했다는 것은 농노들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피난을 시 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왜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피난민들이 이동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의 수는 30여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래도 두터운 갑옷과 검과 창으로 무장을 갖추고 있는 진짜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피난민을 보자 그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서라,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라, 더 이상 앞으로 갈 수는 없다." 병사들이 길을 막아서자 피난민들의 대열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철없는 아이들을 제외하고 모두들 병사들의 모습을 보자 허탈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잃을 것 이 없었다. 정들었던 집과 생활을 보장해 주던 토지를 버리고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들에 게는 집과 토지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바로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호화로운 집과 많 은 소출을 내는 토지라도 목숨이 없다면 필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을 보내 주시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외쳐 봤지만, 병사들에게 그런 부탁은 통하지도 않았다. 병사들은 지휘 자의구령에 맞춰 검을 뽑아 들고 피난민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들로서도 상관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있기에 불쌍하긴 하지만 이들을 그냥 통과시킬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병사들이 자신들을 통과시켜 주지 않을 것 같자 피난민 행렬은 잠시 멈칫했다. 그 리고 곧 여태까지의 체념이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들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돌 아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죽으나 돌아가서 화형을 당하나 똑같은 것 이다. 아르곤의 종교 재판에 걸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피난민들은 저마다 지팡이로 쓰던 나무 막대나 수레에서 꺼내 든 농기구를 들고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피난민들이 이렇게 거칠게 나오자 병사들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 다가 맞아 죽을테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사방에 피보라가 일기 시작했고, 피난 민들은 더욱 흥분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새 죽기 살기로 덤벼 오는 피난민들의 몽둥이에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아 무리 상대가 허술한 무장을 갖춘 농노들이라고 해도 숫자는 이쪽의 몇 배나 된다. 부하들의 절반 이상이 광기 어린 시민들에게 죽음을 당하자 병사들의 우두머리도 어쩔 수 없었는지 퇴각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평소에 교육받은 대로 열심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10여 명의 동료들의 시체들을 뒤로 하고 말이다. 그리고 피난민들도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이 없어지자 또다시 앞으로 걸 어가기 시작했다. 수십 명이 넘는 이웃이나 친지들의 시체를 뒤로 하고..... 어느 쪽이나 뒤끝 이 깨끗하지 못한 허무한 전투였다. 바크론 요새의 포스타나 대신관의 집무실에는 지금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포스타나 대신관 으로서는 지금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보고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형제가 지금 하는 말은 민란이 발생했다는 말과 같은 뜻 아닌가?" 대신관의 말에 보고를 올린 사목관은 변명했다. "아니지요, 대신관님. 민란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점령지의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크라레스 쪽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는 보고는 어제 드렸잖습니까?" "물론 그랬었지. 그래서 내가 형제에게 그것을 막으라고 지시했던 것 아닌가? 땅이란 것은 몇 달만 경작을 하지 않아도 황무지로 변하니까 말이야. 형제도 알다시피 주교원에서 아직 까지 전쟁이 완료되지 않은 이곳에 이주민을 보낼 리가 없지 않겠나? 또 많은 이주민들을 보내 온다 하더라도 산맥을 통과하여 여기까지 도착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 그러니 까 본국에서 이주민이 도착할 때까지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인구는 남아 있어야만 하기에 내린 지시였네." "예, 그래서 각 사단장들에게 대신관님의 지시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단장들의 보고에 따 르면 피난 가던 주민들은 병사들을 보자마자 공격하기 시작했답니다.그래서 지금 곳곳에서 군대와 주민들 간에 격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게 민란이란 소리 아닌가?" 사목관은 예기가 통하지 않아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민란은 아니죠.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태니까요." 서로의 해석 차이로 인해 말이 겉돌자, 대신관의 눈초리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민들 이 군대를 향해 무기를 들었다면 그것이 민란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형제, 지금 나하고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사목관도 대신관의 눈을 마주 쏘아봤다. 하지만 곧 시선을 아래로 푹 내렸다. 그는 대신관에 게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도저히 그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대 신관의 무리한 이교도 사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왜 농노들이 자신들의 정든 터전을 버리 고 이동을 시작했겠는가? 도망갈 틈도 안 주고 막다른 통로로 계속 밀어 붙이니 반발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사목관은 대신관에게 고개를 조아려 사과를 해야 했다. 따지고 봤을 때 대신관의 행 동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어차피 상대는 자신보다 월등하게 높은 직위를 지닌 존재였기 때 문이다. "아, 아니 죄송합니다, 대신관님. 결코 그런 뜻을 아니었습니다." "좋아, 어차피 청소 작업이 앞당겨졌을 뿐이야. 병력을 총동원하여 반항하는 무리들은 싹 쓸 어버려라. 내가 관장하는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주교원에서 안다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나? 다시는 반항할 엄두르 내지 못하도록 싹부터 철저히 짓밟아 버리게. 알겠나?"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태는 더욱 겉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허허, 괜찮아. 민란을 일으키면 어떤 꼴이 되는지 보여 주면 다시는 그러지 못할 것이야. 원래 민중이란 것은 겁이 많거든. 즉시 실행하게."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자 사목관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대신관님." 사목관은 대신관의 집무실을 나와서는 휘하 장교들을 불러서 대신관이 명령한 사항을 전달 했다. 일단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으니 그것이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도 일단 실행해야만 했 기 때문이다. 그런 후 사목관은 걸음을 옮겨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사목관의 숙소는 그전에 이곳 요새에 소속되었던 장교들이 묵던 방이었다. 사목관은 한숨을 푹 내쉰 후 장문의 편지를 쓰기 시작 했다. 지금 현재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게 된 배경 등에 관해 서...... 그런 다음 그는 서랍을 열고 얇고 작은 양피지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여 있던 두툼한 책자 하나도 꺼냈다. 그런 다음 사목관은 자신이 방금 썼던 편지의 내용을 두툼한 책자 안에서 찾아내서는 그것을 얇은 양피지 안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전서구를 통해 편지 를 보내려면 비밀 유지를 위해 이렇듯 암호를 이용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사목관은 편 지작성을 마친 다음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목관님." 사목관은 양피지를 아주 조그마하게 돌돌 말아서는 작은 통 속에 넣었다. 그 통과 밀랍으로 봉인한 편지를 경비병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전령에게 보내게. 화급으로 말이야. 주교원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전서구는 3일이면 도착하겠지만, 편지는 족히 한 달은 걸릴 것입니다. 그렇게 급하신 일이 시라면 엔드슨 수사님을 불러다드릴까요?" 엔드슨 사제라면 통신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사제였다. 하지만 지금 사목관이 하고 있는 일 이 만약 대신관의 귀에 들어간다면 엄청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사목관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엔드슨 수사도 일이 많이 바쁠테니 그를 부를 필요는 없네. 자네가 직접 처리해 주 게. 이건 전서구로 보내고, 이건 전령을 통해서 보내게. 될 수 있는 한 빨랐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사목관님." 경비병이 밖으로 나가고 나자 사목관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새의 담 저 밖으로 삐 죽삐죽 솟아오른 나무 장대들이 보였다. 오늘도 많은 시민들이 이교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것으로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것을 보며 사목관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절한 복수가 시작될 것이다 "전하, 방금 크라레스에서 사신이 도착했사옵니다." 장교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오늘은 위해서 그토록 크로나사 지방을 들쑤셔 댔으니까 말이다. "그래, 누가 왔던가?" "예, 크라레스의 공식 외교 담당관인 와리스 후작이옵니다." "음, 그 녀석 예기는 많이 들었어. 아주 노회한 놈이지.그래 무슨 일로 왔다고 하던가?" "예, 휴전을 청하러 왔다고 하옵니다. 어떻게 처리할 지 하명해 주시옵소서." "좋아, 뭐 밑져 봐야 본전이겠지. 내가..... 아니, 아니지. 딴 놈들은 보내 봐야 영 미덥지가 않으니 제임스를 불러라."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이 직접 와리스 후작을 만나려고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겨우 외 교 담당관 따위를 자신이 직접 만나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코린 트에 믿을 만한 외교 담당관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기에 로체스터 공작은 제1근위대 대장인 제임스 후작을 부른 것이었다. 제임스라면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테니까 말이 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제임스 후작이라면 크라레스의 루빈스키 공작과 거의 동급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문이 열리면서 제임스 후작이 걸어 들어왔을 때,와리스 후작은 입 밖으로 욕설이 튀어나오 려는 것을 사력을 다해서 참아 낸 후 상대에게 미소를 보냈다. 아무래도 오늘의 설전은 아 주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벌써부터 들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예, 프랑크 폰 그래지에트 황제 폐하의 서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와리스 후작이 건네는 편지를 쭉 훑어본 후 제임스는 차갑게 질문을 던졌다. "휴전을 하자고? 그래, 어떤 조건으로 휴전을 하자는 말인가?" "본국과 귀국은 과거 30년 전에 벌인 대전쟁을 제외하고는 아주 평화롭게 지내지 않았습니 까? 비록 6년 전에 불행스러운 격전이 있었지만, 그것은 크루마와 귀국 사이의 전쟁이었지 요. 본국의 경우 크루마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쓸데없는 잔소리는 집어치우게. 크로나사 평원이 원래 귀국의 영토였고, 그것은 귀국이 6년 전에 되찾은 것에 대해서 이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그때 귀국은 그것을 되찾 을 힘이 있었어. 지금은 어떤가?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게. 귀국에는 그 만한 힘이 있나?" "예, 그것 때문에 찾아 뵈었습니다. 귀국도 크로나사 평원을 차지할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 단적인 예로 여태껏 전쟁이 벌어진 지 며칠 되었지만, 귀국의 군대는 아 직도 국경을 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흥, 그건 작전 때문이야. 쓸데없이 병사들의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지. 만 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지금 15개 사단에 이르는 병력이 국경선을 넘을 만반의 태세를 갖추 고 있어. 그러니 그따위 궤변은 집어치우는 것이 좋겠지." "전쟁이 오래 지속되어 봐야 좋을 것은 없습니다. 한쪽에서는 아르곤이, 또 한쪽에서는 알카 사스 군이 진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전쟁이 오래 된다면 귀국의 몫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 이죠. 어떻습니까? 크로나사 평원의 북쪽을 떼어 드리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 니까?" "충분하지 않아. 황제 폐하께서는 귀국의 멸망을 원하신다. 그런데 겨우 크로나사 평원의 북 쪽만으로 만족하라는 말인가? 그것도 승리하고 있는 전쟁에서 말이야." 와리스 후작은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은 후 항변을 시작했다. "정 귀국이 그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본국도 전력을 다해서 귀국과 전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 다. 본국도 전쟁을 통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까지 4개 전대와 3개 기사단이 남아 있 습니다. 이번 전쟁으로 귀국의 피해도 엄청나지 않았습니까? 만약 지금처럼 전쟁이 계속된 다면 상호간의 피해는 더욱 확대될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 으시는 편이......" 순간, 제임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소. 나도 쓸모 없는 말싸움으로 시간을 낭비할 만큼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럼 잘 가시오." 와리스 후작은 당황해서 주절거렸다. 말로는 도저히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지 마시고...... 예, 예. 크로나사 평원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제임스는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그는 와리스 후작의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느끼한 얼굴을 혐오스런 표정으로 쏘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오." "예? 크로나사 평원은 엄청나게 기름진 대지입니다. 사실 그 때문에 양국이 반목해 온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말토리오 산맥 이남의 땅까지도 원하신다는 겁니까?" "훗, 땅은 더 이상 필요없소." "그렇다면 기사단을 감축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 기사단을 줄인다면 귀국도 어려워지겠지. 폐하께서는 귀국에 그렇게 많은 것을 원하 시는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일단 귀국이 소유하고 있는 청기사의 엑스시온 설계도를 넘기시오." 이건 이미 예상하고 있던 요구 사항이었다. 그렇기에 와리스는 겉으로는 당황한 듯한 표정 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 "청기사의 엑스시온은 로체스터 전하께서 대마법사 안피로스의 던전을 발굴하던 도중에 입 수한 거입니다. 완성된 것 10개를 발견했지요. 설계도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귀하의 그 주문에는 응할 수가 없겠군요." 와리스 백작이 10개라고 말한 것은, 코린트가 이번에 크라레인 시공략 작전을 펼치면서 근 위대와 결전을 벌이면서 어느정도 청기사의 수가 드러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근위 기사 한 명이 빠져 있었기에 10기라고 둘러댈 수 있었다. 제임스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크라레스가 그 막강한 타이탄인 청기사의 생산을 중도에서 포기했는지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좋소. 그렇다면 모든 청기사를 본국에 넘겨주시오." "예? 그것은 너무 무리하신 주문이......"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오. 전쟁을 계속하고 싶소? 그것만 말하시오." "허허허, 이거 너무하시군요. 계속 사람을 그렇게 몰아붙이시다니..... 저는 결코 청기사를 돌 려 드리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귀국 기사단이 크라레인 시 기습 작전을 펼쳤 을 때, 3기의 청기사가 파괴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10기를 다 드릴 수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파괴된 것도 넘기시오." "그것도 힘듭니다. 이미 재처리를 시작했기에 절반쯤 녹아 버렸을 테니까요." 와리스 후작은 절대로 청기사의 잔해를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특명을 받고 있었다. 적들이 청기사의 엑스시온을 녹여 본다면 그 안에서 루비 대신에 드래곤 하트를 발견할 것이 분명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한 녀석을 넘겨 준다면 그들은 결코 청기사를 분해하지 못할 것 이다. 겨우 전 세계에 7기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청기사를 어떻게 분해할 엄두를 내겠는가. "으음..... 곤란하게 되었군. 하지만 청기사의 덩치는 엄청나게 크니까 분해 작업이 완료되지 는 못했을 것 아니오?" "물론입니다. 하지만 재생산을 위해서 엑스시온의 분해 작업은 끝났다는 말은 언뜻 들은 것 같군요." "젠장..... 좋소, 분해 작업이 끝난 것이라도 우리에게 넘기시오." "알겠습니다. 귀국에는 황금이 엄청나게 많을 텐데 그렇게 욕심을 부리시다니..... 뭐 귀국이 원한다면 드려야 하겠지요. 참, 살아 있는 청기사는 6기만 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그건 왜 그렇소?" "로니에르 전하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도저히 반납 받아 돌려 드리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건 황제폐하께서 그분께 직접 하사하신 것으로 그분 개인 소유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반 납하라는 말씀을 올린다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가능성이....." 그러면서 와리스 후작은 상대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로니에르라는 말이 나오자 제임스의인 상이 확 구겨졌다. 와리스 후작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귀국 황제가 하사한 물건이라면 어쩔 수 없겠구려. 개인의 소유물까지 뺏을 수는 없으 니까 말이오."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예?" 바로 그 로니에르 공작을 귀국에서 영구히 추방하시오." 이 마지막 한마디에 와리스의 입이 한껏 벌어졌다. 설마 로니에르 공작을 추방하라는 조건 이 제시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코린트 측의 입장은 달랐다. 원래는 세 명의공작을 모두 추방하라고 할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너무 심한 것 같아서 로니 에르 한 명으로 줄인 것이었다. "그, 그것은 폐하와 상의 해봐야 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오. 내일 회의를 다시 할 테니 그때까지 한번 의견을 모아 보도록 하시오." "예, 감사합니다.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 제임스가 회담장에서 돌아오자 로체스터 공작은 초조한 어조로 결과를 물었다. 잘만 하면 이 아슬아슬한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체스터 공작은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전멸 시킨 이후 더 이상 고양이의 행동이 계속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는 있었지만, 그 래도 상대가 너무 조용하다 보니 우려감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예상대로였습니다. 크라레스는 안피로스의 던전을 발굴하면서 엑스시온만을 구한 것이더군 요. 그래서 더 이상 청기사의 수가 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9기의 청기사를 반납 받기로 했습니다.3기는 용광로에 들어 있던 거라도 꺼내서 달라고 했습니다." "잘 했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니에르 공작을 추방하라고 했더니 그 뚱보 녀석 얼이 빠져서는 황제 와 상의해 본 후에 다시 회의를 하자고 하더군요." "잘 했다. 그녀만 추방해 버린다면 크라레스 따위는 하루 아침 식사에 불과하지, 그리고 더 이상 그녀 때문에 근심할 일도 없어질 거야." "그렇사옵니다, 전하. 하지만 휴전을 한 국가를 침공한다면 그다지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질 텐데요?" "그런 것은 상관없어. 덫을 놓은 후 시간을 주고 기다리다 보면 놈들은 언젠가 걸려들테니 까 말이야. 그때 가서 박살내 버리면 되겠지." 로체스터 공작이 살기 어린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제임스도 동조의 미소를 보냈다. 언젠가 돌아올 그날이 기다려졌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은거하게 만든 원흉인 로이에르 공작이야 그 뒤에 드래곤이 버티고 있기에 복수를 할 수 없지만, 로니에르를 데리고 있는 크라레스 제국은 얘기가 달랐다. 그날이 오면 처절한 복수가 시작될 것이다. 다크의 위기 "정신을 차리십시오." 다크는 누군가가 자신을 흔드는 느낌에 서서히 눈을 떴다. 어찌 된 노릇인지 근육이 있는 대로 풀어져서 눈을 뜨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힘겹게 눈을 떴을 때도 보이는 것은 희미한 잔상뿐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기에 그냥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 상대방의 굵 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데요. 약이 너무 과했던 것 아닐까요?" 그러자 이번에는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흥 그럼 키에리도 죽인 위험 인물에게 적당량의 약을 쓴단 말이냐? 강인한 신체와 정신력을 가진 기사들은 웬만큼 약물을 투입해도 견디는데, 도대체 어디에 기준을 두고 적당량을 잡는단 말이야? 실험을 대상도 없는데....." "그럼 도대체 약을 얼마나 쓰신 겁니까? 48시간이나 흘렀는데......" "뭐, 코끼리 한 마리는 충분히 뻗을 정도로 넣었지. 그래도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 해. 내 예상으로는 아마도 일 주일은 혼수 상태에 있을테니 헛수고하지 말고 그냥 놔두라 구." "그렇게 많이 넣으셨다는 말입니까.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시려구요." "죽으면 그때 가서 대비책을 생각해 봐야지. 그건 그렇고 나는 전하를 만나 뵈러 갈 테니 경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라. 그리고 저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해. 불쌍해 보인다고 채 워놓은 구속 장비를 풀어 주지 말라는 말이다. 알겠느냐?" "옛, 명심하겠습니다." 그 다음 나직한 발자국 소리가 또각 또각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다크는 또다시 심해와도 같이 깊고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넓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숙적인 미네르바를 마주하고 앉은 로체스터 공작은 떨떠름한 표정 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이곳까지 찾아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귀하가 여기까지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소. 그래, 무슨 일이시오?" 로체스터를 향해 미네르바는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로체스터 공작." "마찬가지요." "한 가지 상의 드릴 것이 있어서 왔어요." "그래 뭔가요?" "귀국과 본국과의 상호 불가침 및 미란 병합의 인증, 그리고 쟉센 평원에 대한 본국의 완전 한 귀속에 대한 약속을 부탁해요." 그 말에 로체스터는 과장되게 감탄사를 터뜨리며 비꼬았다. "후아...... 대단히 많은 것을 원하는구려." "하지만 이쪽의 조건을 들어 보면 그 정도 대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실 거예여." "그래, 도대체 뭘 가지고 오셨기에 그렇게 많은 것을 원할 수 있는지 궁금하오." "로니에르 공작이에요. 이번에 귀국은 아주 수월하게 전쟁을 치르셨더군요. 그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로니에르 공작을 본국에서 구속하고 있어요." "뭣이, 그게 사실이오?" 로체스터 공작의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미네르바는 그가 놀라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 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반응으로 보아, 이번 회담은 필히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 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왔지요. 방금 제시했던 그 조건을 들어준다면 로니에르 공작 을 넘겨 드리죠." "만약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부하가 과잉 충성으로 그 짓을 했다고 그녀에게 깨끗이 사과하고 동맹을 맺은 후 귀국을 칠 수밖에 없어요. 그녀의 위력은 귀하도 잘 알겠죠? 한 번 약 때문에 곤욕 을 치렀으니, 더 이상 그런 수법은 통하지 않을 거예요. 자, 어때요?" "으음..... 잠시 생각할 여유를 주시오." "좋아요." 로체스터 공작은 이제야 크라레스가 왜 조용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초반에 로니에르 공 작이 설치면서 상당한 피해가 생겼었지만, 나중에는 조용해진 것도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로니에르 공작은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대상이었다. 코린트 제국의 힘을 집중하기 만 한다면 그녀쯤이야 손쉽게 처리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드래곤이 가만히 있지 안 을 테니,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지 않은가? 한참을 궁리하던 로체스터 공작은 낮은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비밀의 유지는 어떻소?" 이게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만약 드래곤이 이 비밀 거래를 눈치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은 뻔했다. 하지만, 드래곤이 이 사실을 모른다면 그 뒤는 아주 손쉽게 처리된다. 그녀를 죽이건 말건 로체스터 공작 마음대로 되는 것이다. "완벽해요. 드래곤은 절대로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미네르바의 확답에 로체스터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장 골치 아픈 적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크라레스 제국도 완전히 지도상에서 없어지게 될 것이다. "좋소, 그렇게 해 드리리다." "좋아요. 일단 서류로 작성해 주시죠. 그녀는 제가 돌아간 후에 곧장 보내 드리죠." 잠시 생각한 후 로체스터 공작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좋소. 하지만 이것이 만약 속임수라면 그 따위 서류는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명 심하는 것이 좋을거요." 하지만 미네르바는 그 정도 위협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상대에게 생긋 미소를 보내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 전하." 코린트와 크라레스의 2차 협상도 와리스 후작과 발렌시아드 후작에 의해 주도되었다. 와리 스 후작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제임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다음, 그가 자리에 앉자 사 안에 대해서 지체없이 입을 열었다. "바쁘신데 오늘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뭘요, 내 일이니 별로 괘념치 마시오." "어제 폐하와 상의를 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귀국의 모든 제안을 수용하시겠다고 허락하셨 습니다. 그러니....." 제임스는 피식 미소를 지은 후 손을 들어 와리스 후작의 말을 가로 막았다. 그런 후 느긋하 게 입을 열었다. "아아, 어제 했던 그 제안은 이제 소용없게 되었소이다. 귀국이 너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시효가 지났단 말이오." "예? 그렇다면....." "하루가 지난 만큼 더 많은 것이 추가되오. 청기사 외에도 귀국이 보유한 타이탄들 중에서 카프록시아 및 테세우스 급은 전략 본국에게 양도하시오." "그, 그건 너무....." 제임스는 손을 들어 와리스 후작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오. 그리고 귀국은 이번 전쟁을 통해 노획한 타이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런만큼 엑스시온에서 빼낸 황금은 엄청나겠지?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귀국이 이번 전쟁에 대한 배상금으로 250톤의 황금을 지불해 줄 것을 요청하라고 전하셨소."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불가능한 것은 아닐거요. 탄벤스 공국의 전쟁에서 본국의 은십자 기사단을 전멸시 킨 것만으로도 150톤은 건졌을 테니까 말이오. 그리고 철십자도 그대들이 전멸시켰지 않소? 그 외에도 귀국 타이탄들 중에서 파괴된 것은 수거한 것도 있을 거요.그것을 모두 긁어 모 은다면 수월찮게 250톤 정도는 모을 수 있을거요." 와리스 후작은 식은땀을 닦아 내고 있었다. 물론 은십자를 전멸시키면서 그 정도의 노획물 을 건졌다. 하지만 코린트 또한 기습 침공으로 3,4전대를 전멸시켰다. 그러니까 이쪽에서 노 획한 것은 모두 받아내고, 저쪽은 저쪽대로 노획을 해 갔으니..... 이대로라면 크라레스의 군 사력은 대폭 감소할 수밖에 업었다. "그래도 그것은 너무한 처사입니다, 각하." "별로 너무할 것도 없소. 또 스바시에를 알카사스 왕궁에 넘기시오. 그리고 치레아의 미르시 엔 열도를 아르곤에 넘기시오." "이건 억지입니다, 각하." "억지라고 볼 수 없소. 하겠소, 아니면 하지 않겠소? 그 결과를 말하시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폐하와 의논을....." "후후후, 하루가 지났는데 얼마나 많은 조항들이 붙었는지 알았을 거요. 만약 오늘 해가 넘 어간다면 내일은 그 조항에 치레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들어갈 거라는 것을 명심하시 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비웃음을 흘리며 제임스가 떠나고 난 후, 와리스 후작은 허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일 주일전 만해도 코린트와 다투며 경쟁을 하던 조국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주저 앉을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와리스 후작의 보고를 들은 토지에르는 격분했다. 만약 그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크 라레스는 완전히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런 젠장, 놈들이 이렇게 나온다면 정면 승부밖에 없다. 이래도 국가가 망하고, 저 래도 망할 거라면 코린트 놈들에게 본국의 저력을 보여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렇게 전하겠사옵니다." 와리스 후작과의 통신을 끊은 후 토지에르는 한달음에 로니에르 공작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이제 벌어질 본격적인 전쟁에 대해서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전하께서는 어디에 가셨는냐?" "죄송하옵니다, 전하. 그건 저희들도 알 수가 없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아침에 출근하신 후 밖으로 나오시지 않으셨사옵니다." "무라고? 그렇다면 전하께서 어디로 가셨다는 것이냐? 여봐라, 세린!" 토지에르가 서슬 시퍼렇게 고함을 질러 대자, 세린은 주눅이 들어서는 귀를 뒤로 착 붙인 채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부르셨사옵니까, 토지에르 전하." "그래, 전하께서는 어디로 가셨느냐?" "그건 소녀도 잘 모르겠습니다요. 아침에 포도주를 달라고 하셔서 드렸습니다. 그런 후 나중 에 포도주를 치우기 위해 갔을 때는 어느새 전하는 안 계셨습니다요." "경비병도 모르고 시녀도 모른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안단 말이냐?" 허공에 대고 괴성을 질러 댄 후, 토지에르는 세린을 노려보고 으르렁거렸다. "넌 전하의 노예야. 갑자기 전하께서 사라진 이유를 너는 알고 있겠지?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이 없었느냐? 사실대로 말해봐라. 몽둥이 찜질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토지에르가 잡아 먹을 듯 노려보자 세린은 가련한 표정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저, 사실은 토지에르 전하..... 우리 전하께서 좀 이상하셨어요."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냐?" "그러니까 보통은 즐겨 마시시던 브랜디도 안 드시고 포도주만 드셨구요.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도 않으셨구요..... 원래 말은 좀 거칠게 하시지만 속마음은 참 따뜻한 분이셨거든 요. 그런데 요 근래에는 전혀 그런 것을 찾아 볼 수가......" "그래? 좀 이상하군......" 토지에르는 세린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수상한 점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경비병들을 향해 질책했다. "너희들은 요 근래에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느냐?" 세린의 말을 들었던 경비병들은 서로를 슬쩍 보며 눈을 한 번 맞추더니, 그 중 한 명이 앞 으로 나서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사건이 있었사옵니다, 전하." "무슨 일이냐?" "예, 며칠 전에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 백작께서 집무실로 들어간 후 쿠당하는 큰 소리가 들 리기에 안으로 달려 갔었사옵니다. 아무래도 안에서 뭔가 싸움이라도 벌어진 듯 했었거든 요."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보니 론가르트 경이 검을 쥔 채 한쪽 구석에 쓰러져 계셨사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장난을 친 거라고 하시며 나가라고 하셨기에...." "그래? 그렇다면 론가르트를 불러 와라." "예!" 경비병을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론가르트 백작이 달려 왔다. 론가르트 백작은 세련된 동작으로 토지에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그래, 경은 며칠 전에 로니에르 전하와 한바탕 했었다지?" "예? 누가 그런 말을....." 둘러대면서 경비병들을 노려보는 론가르트를 제지하며, 토지에르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경비병들에게 다 들었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탓하고자 경을 부른 것이 아니야. 지금 로니 에르 전하께서 행방 불명이 되셨는데, 자네는 혹시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해서 부른 것이 네." "행방... 불명이시라고요?" "그렇네. 세린의 증언으로도 뭔가 석연찮은 것이 있고 말이야." "너희들은 나가 있거라." 론가르트는 세린과 경비병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 아주 낮은 어조로 보고를 올렸다. "여기 계셨던 분은 전하가 아니라 아르티어스 님이었습니다." 그 말에 토지에르의 눈은 한껏 커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뭐야?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어디로 가셨단 말이야?" "코린트 놈들이 본국을 제집 드나들 듯 하면서 설쳐 대니 가만히 앉아 계실 수 없었던 것이 겠죠. 아마도 한 판 하러 가신 듯 합니다." "크. 어떻게 그럴 수가..... 어쩐지 조용히 계시더라 했더니 그렇게 된 것이었군. 그렇다면 아 르티어스님은 또 어디로 가신거냐?" "글쎄요......" 토지에르와 마찬가지로 론가르트도 그 점만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때 토지에르의 몸 이 휘청했다. 재빨리 그것을 눈치 챈 론가르트가 토지에르를 부축했다. "괜찮으시옵니까? 전하." "아아, 괜찮아. 잠시 현기증이 났다네.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아." 론가르트는 토지에르가 거듭 괜찮다고 하는데도 그를 의자가 있는 곳까지 부축해 앉혔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사옵니다. 잠시 심신을 편안히 하시고 노여움을 가라앉히 소서. 지금 모두들 자리를 떠나시고 전하 혼자만 남아 계시옵니다. 그런 지금 전하까지 쓰러 지신다면 제국은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그러자 토지에르는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이제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는데, 내가 어찌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여태 껏 얼마나 많은 세월을 조국의 재건을 위해 바쳤는데, 어떻게 이렇듯 허무하게 끝날 수 있 단 말인가? 여태껏 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어마 나 많은 이들이..... 흑흑." 급기야 토지에르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자신이 젊었을 때, 그 때 조국은 패망의 길을 달리기 시작했었다. 갑작스런 코린트 제국의 침입과 곧이어 연결된 황제의 치욕적인 죽음. 그리고 지금의 황제를 옹위하여 부흥의 깃발을 내걸고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의 인 생..... 하지만 40여 년에 걸친 맹목적인 삶의 결실이 이런 식으로 다가온 것이다. 수많은 충신들의 목숨과 노력을 삼키고도 말이다. 론가르트가 그런 토지에르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누구보다도 조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해 온 충신의 마음을 말이다. 하지만 론가르트는 감히 토지에르 공작을 위로할 엄두를 못 내고 옆에서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와 토지에르의 사이에는 바다만큼이나 넓은 신분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시선을 딴 곳에 두어 토지에르가 오열하고 있는 장면을 짐짓 모르 는 체 해 주는 것밖에 없었다. 아르티어스의 분노 "이보게 젊은이" 젊은 병사는 자신을 젊은이라고 부른 이 새파란 놈을 같잖다는 듯 바라봤다. 하지만 상대의 옷이 대단히 고급이었고, 부티가 팍팍 나는 것을 보고는 처음에 생각했던 단어를 꿀꺼덕 삼 킨 후 공손히 대답해 주었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는데 말이야." "예, 질문하시죠." "여기 내 아들 녀석 안 왔나? 다크 폰 로니에르라고 한다네." 그 말에 젊은 병사는 사납게 콧김을 뿜어 냈다. 아침부터 별 해괴한 놈이 황궁 정문에 접근 해서는 꼴값을 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기기는 꼭 야들야들한 계집처럼 생겨 가지고, 뭐, 아들을 찾아? 여지가 탁아소인 줄 착각을 해도 유분수지..... "잘못 찾아왔소. 여기는 대 크루마 제국의 황궁 정문이란 말이오. 딴 데가서 알아보쇼. 아침 부터 별 미친 놈을 다 보겠군." 그나마 병사로서는 최대한 자신의 분노를 억제한 '친절한'대답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미네르바라는 아가씨' 어쩌구.... 하면서 물 어볼 예정이었지만, 병사의 불친절한 대답을 듣고는 예정대로 '미네르바'를 운운할 정도로 속이넓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다 평소에 아르티어스가 인간을 하등한 벌레쯤으로 생각했 기에 얻어진 고매한 습관이었다. "뭐야, 그럼 네놈의 눈에는 내가 미친 놈으로 보이냐?" "그럼 아니오?" "크아악, 이런 빌어먹을 자식!" 아르티어스의 손이 앞으로 쭉 밀려가는 것과 동시에, 병사의 목이 잘려서 아래로 뚝 떨어졌 다. 가공할 정밀도를 보이는 아르티어스 옹의 마법이 작렬했던 것이다. 병사의 목이 아래로 뚝 떨어지고, 곧이어 몸이 옆으로 넘어지는 것을 본 다른 병사들이 창과 칼을 앞세우고 달 려들었다. "이런 벌레 같은 것들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모두들 죽어 버려라, 풍검!"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용언 마법이 작렬하는 그 순간, 그를 향해 달려오던 병사들의 몸은 피 를 뿜으며 일제히 상하로 분리되었다. 정말이지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가공스러운 장면이었 다. "마법사다, 기사님들께 연락해라." 여기저기서 외침이 터져 나왔고, 곧이어 10여 명의 기사들이 뛰어 나왔다. 아르티어스 어르 신은 기사들이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 오는 데도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배짱 좋게 나갔다. "네놈들도 내 아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 그 말에 기사들은 어리둥절해져서 서로를 바라봤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마침 그날 당직인 뮤토 백작이 웬 침입자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서둘러 달려 나오다가 이 모습을 목격했다. 뮤토 백작은 로니에르 공작과 함께 전쟁을 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 다니던 이 붉은 머리의미청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미네르바의 지시를 받은 지오그네에 의 해 로니에르 공작 일행이 이곳에 왔던 기억은 사라진 상태였지만, 오래 전의 그 기억은 남 아 있었던 것이다. "잠깐! 멈춰라!" 뮤토 백작은 서둘러 아르티어스의 앞으로 달려간 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저 혹시 제1차 제국 전쟁 때 크라레스 군 진영에 계시던 마법사 아니십니까?" 상대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보자 아르티어스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졌다. "자네, 혹시 나를 알고 있나?" "로니에르 전하와 함께 계시던 모습을 몇 번 뵌 것 같은데요." "그래 그래. 자네라면 내 고충을 이해하겠군. 그 아이를 찾아서 이리로 왔어. 어디 있지?" "예? 그분께서는 이리로 오신 적이 없으신데요?" 어리둥절해서 말하는 상대의 표정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 래도 연극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어디로 갔을까? 이번에 만난 상대는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친절한 녀석이었기에 아르티어스는 노기를 약간 가라앉히고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사용할 대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지, 자네는 잘 모를 수도 있지. 가서 미네르바라는 아가씨를 데려오게. 아르티어스가 보자고 전하면 될 게야." 뮤토 백작은 상대가 미네르바 공작을 보고 '아가씨'라고 호칭했지만, 일단 미네르바와 어느 정도 면식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무례함을 참았다. "저, 전하께 이곳까지 오시라고 전할 수는 없습니다, 아르티어스 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뮤토 백작은 재빨리 기사들 중의 한 명에게 지시했다. "전하께 아르티어스란 분이 찾아오셨다고 전해라" "예!" 일단 뮤토 백작은 기다렸다. 그쪽으로 보낸 기사가 지금 정문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해미네 르바에게 설명을 할 것이다. 만약 미네르바가 여기서 10여 명의 병사들이 죽어 나간 사실을 묵인한다면 그것으로 넘어가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아르티어스라는 이 녀석과 사생 결단 을 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0여 명의기사들이 앞에 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이놈을 상대로는 아무래도 체포하겠다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뮤토 백작이 미네르바에게로 보낸 기사는 구원병을 청하는 전령과도 같은 역할로서 보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뮤토 백작은 구원병이 달려와서 이 녀석을 체포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사태는 전혀 예상 밖으로 진행되었다. 미네르바가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왔던 것이다. 미네르바는 부하들 이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사이 아르티어스를 향해 깍듯이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안녕하셨습니까? 아르티어스 님." "그래, 잘 있었나?" "예, 그 때 브로마네스 님 때는 아주 크게 신세를 졌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 "뭐, 그 정도 일을 가지고..... 허허허!" 미네르바는 여기저기에서 시체를 치우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아르티어스에 게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들을 찾아서 왔다네. 자네도 알지? 다크 폰 로니에르 말이야. 부하 몇 명과 함께 나가더 니 그 아이가 며칠 전부터 행방이 묘연하다 이말일세. 젠장, 나하고 함께 갔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저런, 큰일이군요. 하지만 아르티어스 님, 아드님은 6년 전에 세계 최강의 검객이라 불렸던 발렌시아드 대공을 물리친 분이시죠. 그런데 감히 누가 아드님을 해롭게 할 수 있단 말입니 까? 저는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혹시, 어디 여행이라도 다니시는 것 아닐까요?" 제일 마지막 말이 아르티어스의 가슴을 찔리게 만들었다. 진짜 그 망할 놈이 여행이라도 간 거이 아닐까? 그렇다,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젠장, 자네 말도 일리는 있군." "아드님을 찾으시는 데 혹시 지원은 필요 없으신가요? 저희도 지금 미란을 병합했기에 여력 은 별로 없지만, 6년 전의은혜를 생각한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몇 명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아, 됐어! 젠장,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먼." "이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좋은 포도주가 있습니다만......" "아니, 나는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군. 그럼 잘 있게." 아르티어스는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멀지 않은 곳에 도움을 청할 만한 녀석이 하나 있 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오호, 이게 누군가?" 입구부터 시작해서 황금으로 번쩍거리는 레어에서 금발의 미남 청년이 걸어 나오며 아르티 어스를 반겨 맞이했다. 아르티어스는 이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레어에 들어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정말, 탐이 나는 레어였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드워프를 족쳐서 이와 유사한 레 어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애써 털어 냈다. 지금 급한 것은 레어가 아니었으니까. "브로마네스, 오랜만이군. 6년 만인가?" "이 박정한 녀석. 그래 그때는 대충 코빼기만 보이고 돌아가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서 온 거야?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자구. 아주 좋은 포도주를 구해 놓 은 것이 있어. 드워프 녀석들에게서 뺏은 건데. 자그마치 43년이나 된 진품이야."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슬쩍 가로 저으며 말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딴 곳으로 가자구." "왜, 내 레어에는 들어가기 싫다는 거야? 이걸 보니까 네 집은 그야말로 허름한 동굴처럼 느껴지지? 으하하하하!" "그런게 아니야. 뭐,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다구." "이봐, 물어보는데 장소를 바꿔 가며 대화를 할 이유라도 있나? 일단 들어가자구. 그리고 6 년 사이에 얼마나 더 멋지게 장식을 해 놨는지 보란 말이야." 브로마네스의 레어. 아닌게 아니라 그 레어 안은 그야말로 호화찬란했다. 그 때문에 황금을 결코 돌같이 볼 수 없었던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이 안으로 들어오기를 망설인 것이다. 드래 곤은 원래부터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니까 말이다. 거기다가 아르티어스 같은 골드 일족은 특히 황금을 좋아했다. 하지만 브로마네스가 말한 '장식'이란 것은 황금이 아니었다. 벽면 전체가 황금인데, 거기에 황금 장식물을 붙여 봐야 모양이 잘 안 나기 때문인지 장식은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실물 크기의 조각상들이 중앙 통로의 좌우에 일렬로 쭉 늘어서 있었다. 호비트, 오 거, 고블린, 엘프, 드워프 등등 하여튼 전 세계의 모든 생물들이 다 만들어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의 모습이 중앙 통로를 지나가는 존재에게 인사를 올리는 듯한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황금색의 벽에 흰색의 대리석이 섞여 있다 보니 아주 묘한 대비를 이루 며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어때, 멋있지? 내가 드워프들 보고 이 중앙 통로의 좌우에다가 이 조각상들을 배치하라고 일렀지. 완성된 지는 얼마 안 되었어. 자네가 첫 번째로 이것을 구경하게 되어 나는 매우 흡 족하다네." 아르티어스는 애써 조각상들에서 시선을 돌리며 저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퉁명스레 말했다. "나는 자네의 이런 악취미나 둘러보고 있을 여유가 없어.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구." 브로마네스는 계속 걸음을 레어 안쪽으로 옮기며 비웃듯 말했다. "호오, 무슨 일인데 천하의 아르티어스가 이렇듯 조급해 하시나. 그래, 무슨 일인데?" "전에 왔을 때 말한 적 있지? 양자를 하나 얻었다고 말이야." "아, 그 호비트 계집?" 호비트 계집이라는 멸시를 가득 담은 표현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발끈했다. "말조심해, 이 빨갱아! 금방 드래곤 구이를 만들어 버리기 전에!" "호오, 그것 기대되는 군. 노랭이의 마법 실력이 꽤 좋아진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네가 아무리 말토리오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꼬마 애들 잡고 심심풀 이장난 할 것밖에 안되잖아? 나를 그런 꼬맹이들하고 동급으로 취급하면 안 되지이-" "젠장, 그래 너 잘났다. 혹시 요 며칠 사이에 강렬한 마나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냐? 그러니 까, 그래, 혹 엘프리안에 유희를 나온 드래곤이 느껴지지 않던?" "유희를 나온 드래곤이라.... 글쎄, 나는 별로 그런거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말이지. 여기 도 시가 꽤 크다보니 간혹 가다가 한 놈씩 보이지. 그런데, 그런 것 만으로 내가 그 놈이 네 아 들인지, 남의 아들인지 알 게 뭐냐?"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요 며칠 사이라고 말이야." "글세.... 하나 있기는 했지. 하지만 한 3-4일 기척이 느껴지더니 그냥 사라졌는걸." "그 기척은 어디서 느껴졌는데? 황궁이야, 아니면 시내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 나는 요즘 저거를 보느라고 정신이 없었으므로 딴 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거든." 브로마네스가 가리킨 것은 중앙 홀에 만들어지고 있는 거대한 벽화였다. 그것은 아직 미완 성 작품이었고, 드워프들이 분주히 왔다갔다하면서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20 여 미터에 이르는 그 거대한 벽화는 물감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무엇을 섞었는지는 모르 지만 붉은 색이나는 황금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직 반 정도밖에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 지만, 아르티어스 한눈에 드워프들이 뭘 만들고 있는지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바로 브로마 네스의 본모습이었다. 붉은색 황금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레드 드래곤의 형상. 정말 멋있었 다. 과연 브로마네스가 딴 곳에 신경을 쓰지 못할 만도 했다. 브로마네스는 여기저기서 분주히 일하고 있는 드워프들을 가리키며 으스댔다. "어때, 저 녀석들 일 잘하지? 저 멀리 오실라니아 산맥까지 날아가서 잡아온 녀석들이야" "미쳤군. 나 같으면 그럴 시간 있으면 낮잠이나 더 자겠다. 그건 그렇고, 기척을 느꼈다는 그드래곤 녀석 말이야. 어디로 갔는지 알아?" "글세, 신경 써서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잘 모르겠는걸?" "이런 젠장, 네 녀석은 그럼 아는게 뭐가 있냐?" 아르티어스는 화를 발칵 내면서 곧장 발걸음을 돌려서 여태껏 걸어온 곳을 다시 되돌아갔 다. 그제야 허겁지겁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어스를 뒤따라오며 달래기 시작했다. "이봐, 그렇다고 그렇게 화낼 이유는 없잖아." "이유가 충분해. 도대체가 도움이 안 되고 있잖아. 따로 알아보는 수밖에..... 네놈을 조금이 라도 믿고 있었던 내가 머저리다." 아르티어스는 브로마네스의 레어를 빠져 나와서 산 아래를 바라봤다. 산 아래쪽으로 거대한 엘프리안의 시가지가 펼쳐져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엘프리안을 한참 내려다 본 후 꼭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듯 비장한 어조로 외쳤다. 꼭 누군가 범인이 있다면 들으라는 듯이..... "만약 내 아들을 해친 놈이 있다면.... 그것이 호비트이건, 드래곤이건, 혹은 또 다른 무엇이 건 나의 무서운 분노를 피하진 못할 것이다." 아르티어스의 눈동자는 폭발적인 광기를 이기지 못해 황금색으로 번뜩거리고 있었다. 묵향 13권 정동조 장편 환타지 소설 초판발행: 2001년 7월 3일 초판 10쇄: 2001년 7월 21일 펴낸곳: 도서출판 명상 여신의 신탁 아르티어스가 협박하고 돌아간 후 미네르바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 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일단 한 가지 일은 해결된 것이다. 저 드래곤 의 이목만 피하면 만사가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미네르바는 집무실에 마련되어 있는 푹신한 의자에 내려앉듯 주저앉 으며 말했다. "포도주나 한 잔 가져다 다오." "예,전하." "자네도 한 잔 할 텐가?' 미네르바의 물음에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있던 이블리스는 황송하 다는 듯 말했다. "예,전하." "어쨌건 시작은 좋군. 그린레이크 녀석 , 재수없는 놈이기는 하지만 실력만큼은 큰 소리 칠 만하군. 드래곤도 탐지하지 못할 정도의 보호 망을 구축했으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 제야 안심이 되는구먼. 자, 이제 드래곤을 따돌렸으니 그녀를 최대한 빨리 코린트로보내 버려야겠어." 그린레이크는 미네르바의 요청에 의해 다크의 마나를 봉쇄하고,또 그녀의 기척을 지을 수 있는 팔찌를 만들어 냈다. 물론 그린레이크는 그 두 가지 작용을 한 번에 할 수 있는 것을 만들 만큼 바보는 아니었 다. 그 두 가지 작용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마법 도구를 만들기는 한 가지 작용을 하는 것을 만드는 것보다 두 배 이상 어렵기 때문이다. 적국의 마법사나 기사들을 생포했을 때, 그들이 마나를 끌어모으지 못하게 막는 팔찌는 이미 각국에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기 척을 숨길 수 있는 팔찌만을 제작해서 미네르바에게 거드름을 피우 며 건넸던 것이다. 때문에 다크는 지금 양팔에 팔찌를 하나씩 찬 상태 로 쭉 뻗어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다크의 마나를 제어할 수 있건 없건 간에,그녀는 아 주 위험한 인물이었다. 지금은 제어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그것이 지 속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 드래곤이 다음에도 저렇게 조 용히 물러난다는 보장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이블리 스였기에 미네르바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이었다. 다크도 위험하지 만 드래곤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했던 것이다. "예, 그녀가 본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을 것이옵 니다. " "그래,그녀의 상태는 어떻다고 하던가?' "아직도 변함이 없다고 하옵니다. " "약이 너무 과했던 것은 아닐까? 이대로 죽어 버린다면 큰 일이야. 계획의 초점은 그녀를 죽이는 것이 코린트여야 한다는 것 아니었나? 그래야만 드래곤의 분풀이 상대로서 코린트를 방패막이로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일세." "그렇지요. 이쪽은 들통나더라도 코린트의 '강압' 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고 발뺌할 수 있으니까 말이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코린트에 건네질 때까지 그녀는 꼭 살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어 쨌든 지오그네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고 장담 했사옵니다. " 미네르바는 신께 기도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글쎄, 그 말이 사실이어야 할 텐데" "전하, 원래가 기사들의 그 강인한 육체는 보통 인간의 것과는 다르 지 않사옵니까?하물며 그녀는 최강자의 칭호를 받았던 인물이 아니 옵니까?잘 될 것이옵니다,심려 놓으시옵소서." "그럴지도..어쨌건 깨어나면 즉시 내게 보고하라고 이르게. 일 단 청기사도 빼앗아야 하겠지만 몇 가지 의문점도 풀어야 할 테니까 말일세.그리고 최대한 빨리 이 숨막히는 초조감에서 벗어나고 싶 어 ." "옛,전하." 아주 넓은 방. 아니,중간은 넓은 홀로 되어 있었고,그 홀의 가장자 리에는 푹신한 소파들이 빙 둘러서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방이라기보 다는 무도회장 같기도 했다. 아름다운 문양의 금붙이들이 군데군데 장식되어 있는 호화로운 가구들. 모든 가구들은 마호가니나 흑단,자 단 같은 값비싼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구들에 새겨진 문양만 척 봐도 대단한 실력의 장인들이 공들여 제작한 것이라는 것 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순은으로 뼈대를 만들 고 여러 가지 색상의 수정들로 장식된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붙어 있 는 것만봐도 대단한 부호의 집인 모양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렇게 많은 재력을 가진 인물이 만든 듯한 홀 에 창문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창문 대신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등 잔에서 흘러 나온 아련한 빛들이 홀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침실에 이 렇게 창문을 만들지 않은 이유는 뭘까?숙면을 방해하는 햇빛이 조금 이라도 들어오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서? 여긴 침실이 아니니까 그 건 아닐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르고 실컷 춤을 추고 싶 어서?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두꺼운 커튼을 사용해도 충분했을 것이 다. 넓은 창문이 있어야만 여름에 시원한 바람을 받을 수 있고,또 겨 울에 따뜻한 햇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햇볕을 싫어하는 듯한 이 홀의 주인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 고 있을까?그건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그 홀 어딘가에 사람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확실히 홀의 한쪽 구석에는 햇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짓거리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홀의 한쪽 구석에서 얕은 신음 소리 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뭘 하고 있는지는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긴 소파 위에서는 아리따운 여인과 두툼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사내 사이에 한참 정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인가?' 문이 활짝 열리는 동시에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 고,기겁을 한 여인이 후다닥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들고 부리나케 도 망쳤다. 하지만 그 근육질의 사내는 그 도망치는 여인의 하얀 엉덩짝 을 바라보며 아쉬운 듯한,또 당황한 듯한 시선을 던졌다. 자신도 저 여인처럼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못되었던 것이다. 그는 재 빨리 자신의 옷가지를 주워 들어 앞을 가리고는 얼굴이 벌개진 채 그 여인과 함께 쥐구멍으로라도 도망치고 싶은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지오그네 각하." "그러는 경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보시다시피." 얼버무리는 사내를 향해 지오그네는 앙칼지게 외쳤다. "경을 여기에 배치한 것은 시녀와 그 짓이나 하라고 한 것은 아니 야." "저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 고,원체 무료하기에 그만.." "토린 경은?' "저와 교대한 후 쉬고 있습니다. " '빨리 옷이나 입게." "옛,각하." 사내는옷가지를 쥐고 뒤쪽으로 엉기엉기 걸어간후 주섬주섬 차려 입고는 다시 그녀의 앞으로 나왔다. 빨리 입다 보니 옷차림이 엉망이 었지만,그래도 허리에 빛나는 장검을 차는 것은 잊지 않은모양이다. "안내해." "옛 ?' 기사는 홀의 한쪽에 있는 문 앞을 막고 있는 묵직한 가구를 옆으로 치웠다. 그가 힘껏 밀어야 할 만큼 그 가구는 육중해 보였다. 기사는 가구를 옆으로 치운후,두터운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가시지요, 각하." "흠.." 문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방도 호화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창문이 없는 것 또한 그러했다. 방의 한쪽 구석에는 비단 휘장이 드러 워진 넓은 침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던 시녀가 기겁을 하며 일어서서는 인사를 건네 왔지만 지오그네는 그 녀를 본체만체하고 장인이 공들여 새겼음직한 각종 문양이 새겨진 흑단 침대에 천천히 다가섰다. 휘장을 옆으로 살짝 치우자 침대 위에 죽은듯누워 있는 창백한 안색의 소녀가보였다.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았느냐?' "예,소녀를 공들여 감시했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었사옵니다,각하." "그래? 미네르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약이 너무 과했 나?" 지오그네의 혼잣말을듣고 옆에서 기사가 참견해 왔다. "이렇게 마냥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해독제를 쓰시면 되지 않 겠습니까?각하," 기사의 참견에 지오그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해독제?독약도 아니고 수면제에 무슨 해독제가 있단 말이냐?그리 고 처음부터 저렇게 강한 상대에게 해독제가 존재하는 약을 썼을 리 가 없지 않나?" "그, 그렇습니까?" 지오그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소녀를 다시금 차근차근 살 펴보기 시작했다. 과연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깨어날 수 있을까? 이 대로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그렇다면 큰 일이었다. 하지만 지오 그네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아예 치료가 불가능한 약을 썼으니 까... "시간만이 해결해 주는 것인가?' 지오그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소녀의 눈이 살짝 떠지며 밖으로 나서는 그들의 뒤통수를 슬쩍 바라 본 후 다시 감기는 것을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지오그네라는 높은 상관에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는 지오그네를 뒤따라 나온 후 문을 닫고는 또다시 힘껏 가구 를 밀어서 문을 틀어막았다. 문 앞쪽에 걸쇠나 뭐 그런 것을 붙일 수 도 있겠지만,그렇게 하면 문에 손상이 가기에 이런 편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포로가 이곳에 영구히 갇혀 있을 것도 아니니까. "철저히 감시하고 뭔가 변동사항이 있으면 즉시 나에게 연락하도록 하게, " "옛,각하." 기사는즉시 대답한후 조금 걱정된다는듯 말을 이었다. "지오그네 각하. 저 소녀, 아무리 혼수 상태라고 하지만 4일 동안이 나 아무것도 못먹었는데 괜찮을까요?" 그녀로서도 이것이 조금 걱정되던 차에 부하 녀석이 괜한 참견을 해 오자 짜증난다는 듯 톡 쏘았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의식도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음식물을 목구 멍에 흘려 넣다가 혹시 걸리기라도 하면 질식사한다는 것도 경은 모 르나?쯧쯧..하여튼 기사란 것들은 무식하게 검이나 휘둘러댈 줄 알지." 자신의 무식함을 들먹이자 기사의 얼굴색이 시뻘개졌다. 하기야 기 사들보다야 마법사들이 유식한 것은 사실이고 또 상대는 자신보다 상급자니 참고 넘겨야 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무식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식하다고 하는 것과 진짜 무식한 사람에게 무식하다고 탓하는 것은 조긍 얘기가 틀리다. 그 기사는 읽을 줄도 모르는 진짜 '무식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기사의 얼굴색이 점점 더 붉어지며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자 지오그네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 을 알아채고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미네르바 전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죄수다. 혹여나 실수가 있다면 경의 그 어깨 위에 달려 있는 것을 반납하는 것으로 사 죄를 해야 할 거야 " "걱정마십시오. 지하로들어오는 각 통로마다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있으니 그 어떤놈도 여기까지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 "그렇게 자만할 일이 아니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경비나 잘 서 게" "예,각하." 기사와 헤어진 후 지오그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경계 상태를 점 검했다. 이곳 지하 구조물은 대단히 넓고도 복잡했다. 마법에 능통한 드래곤이 자신의 아들을 찾기 위해 지하 감옥에 슬쩍 잠입할 가능성 도 있었기에 소녀를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었다. 처음 이틀 동안은 소녀를 지하 감옥에 넣어 두었지만, 곧이어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곳은 황궁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지하에 만 들어 둔 임시 피난처였다. 황제를 위시한 황족들과 귀족들,그리고 그 사용인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기에 대단히 넓었고, 미 로와 같이 복잡했다. 하지만 보안상의 편의를 위해 여러 구획으로 나누었고,각 구획의 통로에는 튼튼한 보루를 만들어 경비병들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지금은 보안상의 이유와 드래곤의 잠입 위 험 등을 고려하여 각 통로마다 오너급 기사 한 명과 기사 두 명,그리 고 마법사 한 명이 견인족 스무 마리씩을 배당받아 경비를 서고 있었 다. 지오그네가 통로로 향하는 문을 열자 타이탄의 이동을 방지하기 위 해 높이는 3미터 정도밖에 안 되지만, 마차는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 어 놓은 널찍한 복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 복도는 20미터 정도밖에 안 되었고 또다시 강철로 된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지오그네는 철문 앞에 서서 가볍게 두 번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강철 문에 붙어 있는 작은 창문이 살며시 열렸다. 창문을 통해 통과하려는 인물이 지 오그네라는 것을 확인한 상대방은 황급히 문을 열었다. 기기기긱 하 는금속음이 울리며 문은 힘겹게 열렸다. 아무런 소리 없이 문이 열리 도록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첩자의 침입에 대비하여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 둔 탓이었다. 철문 안쪽에는 아주 넓은 공간이 연결되어 있었다. 높이 7미터,폭 8미터의 아주 넓은 공간. 전쟁이 벌어지면 이곳에 있는 기사는 타이 탄을 꺼내 놓고 적을 막게 된다. 이런 데서 타이탄 1기가 가로막고 있 다면, 그리고 그 안으로 타이탄을 탄 채로 돌입할 수 없을 만큼 통로 까지 좁다면 적들은 이 방어선을 뚫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을 투입해 야만 할 것이다. 타이탄을 이 통로 안쪽으로 집어넣기 위해 통로 전체 를파괴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2미터가 넘는 거구에 강인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견인족. 개처럼 튀 어나온 주둥이 사이로 하얗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견인족의 통보를 받았는지 공간의 옆쪽에 있는 문이 열리며 기사들이 달려나 와 인사를 건네 왔다. 지오그네는 주위를 쓱 훑어본 후 만족스런 표정 으로 말했다. "그래, 뭔가 수상한 점이라도 없었나?"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각하. " 지오그네는 마법사인 듯 보이는 사내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말했 다. "그래. 적의 마법사나 뭐 그런 것들이 침입해 올 수도 있다. 그런 만 큼 경의 임무가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될 수 있으면 마법 트랙들을 많이 설치하여 대비하도록 해라." "옛,각하." "모두들 고생이 되더라도 며칠만 더 참아주게." "옛,각하." 사라져 버린 코린트의 수도 코린티아로부터 새로이 수도가 된 케락 스로 연결되어 있는 악티움 대로. 중무장한 보병 여덟 명이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도로 양편으로 심어져 있는 족히 수십 년은 묵은 가로수들이 적당한 그늘을 만들어 주어 한낮에도 걸을 만 했다. 어쨌든 악티움 대로는 상업 도시 케락스와 수도 코린티아 간의 군수 물자의 이동과 병력 이동을 위해 건설된 것이었다. 하지만 대개 의 도로들이 그렇듯 여행객의 이동을 통제하지는 않았기에 많은 화 물들과 여행객들이 이 도로를 애용했고,그렇기에 그 도시들이 더욱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기하학적 도형이 수놓아져 있는 하얀 로브(robe ;길고 헐 거운 겉옷)를 입고 대로 위를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 한 명 은 어른이었고,또 한 명은 아직 어린 소녀였다. 소녀와 달리 어른의 경우 로브에 달린 모자를 깊이 눌러쓴 상태라서 얼굴을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나긋나긋한 걸음걸이와 언뜻언뜻 로브 아래로 드러나는 늘씬한 다리의 곡선으로 보아 여성인 듯했다. 어른은 차분한 눈길로 정면을 한 번씩 주시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소녀는 달랐다. 그 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차의 행렬을 구경하거나, 노새를 끌고 가는 사람들 혹은 등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소녀는 그것도 지겨워졌는지 저 앞쪽으로 시선 을 돌렸다. 곧게 펼쳐진 넓은 대로. 지평선 끝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 어 있었다. 그들은 벌써 몇날 며칠 동안 이 대로를 걸어왔는지 모른 다. 소녀는고개를 위로올리며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수녀님 ." 소녀의 물음에 답하여 돌아오는 음성은 아주 부드러웠다. "왜 그러느냐?" "수녀님께서는 왜 마차를 안 타시고 걸어가시는 건가요?마차를 빌 릴 수 있을 정도로 여비는 충분하잖아요." 비싼 값에 마차를 빌릴 필요도 없이,악티움 대로를 왕복하는 승합 마차라는 값싼 대중 교통 수단도 있었다. 20여 명은 탈 수있는 거대한 마차에 여러 사람이 탑승하여 부대끼며 가는 것이기에 속도도 느렸고, 쾌적도도 떨어졌지만 어쨌건 걸어가는 것보다는 한 결 나았다. 소녀의 말투에서 약간의 짜증을 읽어낸 상대는 미소를 지 으며 답했다. "후훗, 네가 발이 아픈 모양이구나." 수녀가 정곡을 찌르자 소녀는 당황해서 말했다. "그건 아니구요." "아프기도 하겠지. 그러면 저쪽에 앉아서 쉴 만한 장소가 있으니 거 기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꾸나." "예." 나무 그늘 밑에 자리잡은 제법 큰 돌덩어리가 길가에 있는 것을 보 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수녀를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며 소녀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수녀님께서 마차를 달라고 부탁하셨으면 충분히.." "그건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란다. 신을 받드는 사도들이 육체의 안락을 꾀하면 안 되는 것이야. 아주 급한 일이라면 또 모르지. 하지만 신탁에서 정해 놓은 때까지만 케락스에 도착하면 돼." 소녀는 수녀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싱그러운 가을 바람이 상쾌했 다. 이제 곧 겨울이 올 테지만,그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므로 도 보로 여행하기에는 최적의 계절이었다. "좀 빨리 가시면 안 될까요?아무리 다음에 다가올 암흑의 세기를 막 아 줄 영웅이 케락스에 나타난다는 신탁이 내렸지만, 그가 누군 지,또 어떤 사람인지는 하나도 알지 못하잖아요?조금이라도 빨리 케 락스에 가서 조사를 해 보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수녀는 소녀를 향해 사랑을 가득 담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그 녀도 과거에 그러했듯, 이 소녀 또한 범상한 신분은 아니었다. 다음 세대의 종단을 이끌어 갈 뛰어난 인재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소녀 는 모든 것에 호기심을 느끼며 수많은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던져대 고 있었지만, 수녀는 언제나 한결같이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 로 대답해 줬다. 이렇듯 소녀의 인성과 지성을 다듬어 가는 것에 무한 한 재미를 느끼면서도, 옛날 자신이 세상 구경을 나가서 저질러댔던 얼토당토않은 짓거리를 회상하다 보면 미소가 절로 지어지기도 했 다. 어쨌든 종단에서는 이런 식으로 다음의 인재들을 교육시켰고,수 녀 또한 이 교육 방법이 매우 좋다고 시간이 흐를수록 깊게 공감하고 있었다. 사원 안에서만 쌓은 경험과 지식은 아무래도 세상의 그것과 는분리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미 케락스로 가라는 신탁이 내린 이상,그 대부분의 힌트는 아데 나 신께서 가르쳐 주신 셈이라고 봐야 하겠지." "어째서요?" "그 강력한 암흑의 기운을 몰아낼 수 있을 만한 강력한 기사단을 가 지고 있는 나라는 아마 전세계를 통틀어 코린트뿐일 거야. 지금은 오 랜 전쟁으로 인해 코린트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코란 근위 기사단이 세계 최강이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지 않느냐?' 이제서야 뭔가 집힌다는듯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이란 옛날부터 전해 오는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란다. 전설에서야 농부의 아들이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거나, 아니면 이름 없는 시골 무사가 드래곤으로부터 강력 한 무기를 얻어내어 영웅으로 등장하지만,현실은 그렇게 될 수가 없 는 것이지. 그만큼 타이탄이란 것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으니까 말 이야." "그렇다면 수녀님께서는 케락스로 가셔서 아그립파 4세 폐하를 만 나서 도움을 청하실 건가요?" 소녀의 철없는 물음에 수녀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내 신분으로는 도저히 황제 폐하를 알현할수 없단다. " 사실 아무리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고 하지만 젊은 그녀에게는 경험과 실적이라는 것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아직 '수녀'라는 말단 직에 머물러 있었다. 수녀로서 교단의 계율을 지키고 몸과 마음을 수 양하는 단계를 지나 수양 정도를 인정받게 되면 지금과 같이 누군가 를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하지만 하나의 신전을 책임질 수 있는 대사제의 직함을 받으려면 아직도 더 많은 수련을 거 쳐야 하고,또 자신이 맡은 제자들을 훌륭하게 성장시켜야만 했던 것 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코린트의 황 제에게 감히 알현을 청할 정도가 되려면 신녀나 그녀를 보좌하는 교령정도는 되어야 했다. 대사제가 되기에도 아직까지 까마득한 여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알현을 청하기에 하늘에서 별을 따기만큼 어려운 코린트의 황제 폐 하는 너무나도 지고한 신분을 가진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녀님께서 수녀님께 영웅을 찾으라는 교시를 내리신 것일까요?드로아 대신전에는 수녀님보다 훨씬 능력이 크신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내가 가야만 한다고 아데나 여신께서 신탁을 내리셨단다. 어떻게 여신님의 깊은 뜻을 한낱 인간인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니?가 보면 그분의 뜻을 알 수 있겠지 "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영웅을 찾으실 거죠?무작정 케락스 시를 헤 맨다고 만날 수 있을까요?" "아데나 신께서 도우신다면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 하지만 일단 케 락스가 목적지인 것으로 보아 영웅은 코린트의 기사일 확률이 높지 않겠느냐?그리고 코린트의 기사들 중에서도 근위 기사거나 아니면 그보다 높은 지체를 가지고 계신 분일 가능성이 크겠지." "으음, 그렇다면 누구를 만나 뵈어야 하는 거죠?" 권력의 구조나 기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에 심각하 게 궁리하는 소녀였다. 수녀는 그런 자신의 제자를 재미있다는 듯 바 라봤다. 물론자신의 신분으로 봤을 때 황제는 고사하고 근위 기사도 만나기를 청하기는 힘들었다. "우리가 직접 찾아가는 것보다는 케락스에 있는 신전에 도움을 청하 는 것이 좋을듯하구나. 자,이만 일어서자. 갈 길이 멀단다. " 다크의 탈출 "죄수가..죄수의 상태가 이상하옵니다,나으리." 실내에 울려 퍼지는 시녀의 다급한 외침 소리를 듣고, 기사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냐?" 그는 정신없이 문을 가로막고 있는 가구를 옆으로 밀쳐낸 후 황급 히 문을 열어젖혔다. 평상시에는 묵직하게 느껴졌던 가구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죽은 것 같습니다요." 시녀는 당황해서 침대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뭔가 이상 이 생긴다면 그녀의 목으로 대가를 치러야 할 만큼 침대 위에 죽은 듯 이 누워 있는 죄수의 안위는 중요했던 것이다. 기사는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밀쳐 버리고는 죄수 의 옆에 다가섰다. 과연 시녀의 말대로 창백하기 그지없는 안색이었 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여기에 잡혀 올 때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 기도 했다. 그가 처음에 이곳에서 죄수의 얼굴을 봤을 때도 이렇듯 창 백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먼저 상대의 호흡을 살폈다. 역시 죄 수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기사의 심장은 세 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이렇게 중요한 죄수가 하필이면 내가 당번일 때 죽어 버리다니.죽고 싶으면 아까 지오그네 경이 왔을 때 죽었으면 좋 았을 거 아냐?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되지? 그는 마지막으로 소녀의 경동맥 위에 살짝 손가락을 대고 상대의 맥박을 살폈다. 만약 맥박이 아직 희미하게나마 뛰고 있다면 손 쓸 길 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감사합니다! 아직 죽지 않았다. 희미하지만 맥박이 살아 있어." 기사는 소녀의 이제 갓 자라나기 시작한 듯한 소담한 가슴에 그 커 다란 손을 대고 세차게 압박했다가 풀었다가 하기를 반복하며 황급 히 시녀에게 외쳤다. '너는 빨리" 기사는 시녀를 보내 봐야 그녀의 걸음걸이로는 도저히 제시간에 닿 을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녀는 죽어 가고 있었다. 아마도 약을 너무 과하게 쓴 탓일 것이다. 한시가 급했다. '너는 여기에서 내가 돌아을 때까지 소녀의 심장이 뛰도록 도와라. 나는 가서 도움을 청하고 오겠다. " "예, 나으리," 기사는 정신없이 문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기사가 달려나가고 난 후 3분쯤 지났을까? 콧등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열심히 가슴을 지압하고 일던 시녀는 문득 죽은 듯이 누워 있 는 상대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죄수 는 쏜살과도 같이 손을 뻗쳐 왔다. 상대의 턱과 뒤통수를 잡고 획 돌 리자마자 우두둑 하는 기괴한 음향이 들려 왔다. 그리고 죄수는 자신 의 배 위에 쓰러져 버린 시녀를 옆으로 밀치면서 일어섰다. "휴우 " 소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침대 밑에 놓여 있는 자신의 작은 신 발을 신을 생각도 안 하고 곧장 밖으로 달려나갔다. 언제 기사가 돌아 올지 모른다. 미네르바에게 직접 보고를 하러 달려갔을 수도 있고,도 중에 다른 기사를 만나 그에게 연락을 청하고는 다시 돌아을 수도 있 었다. 소녀로서는 최대한 빨리 밖으로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소녀는 기사가 먹다가 놔둔 빵 한 덩어리와 큼직한 고깃조각 하나, 그리고 포도주 병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녀가 달려나가고 나서 한 5분 정도 지났을까? 마리아 지오그네가 사색이 다 되어 도착했다. 그녀는 마법사에게 이 기막힌 소식을 전달 받은 즉시 이곳으로 공간 이동해 왔던 것이다. 소녀는 코린트에 살아 있는 채로 넘겨줘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야만 드래곤의 진노를 코린 트에게로 떠 넘길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여기에서 죽는다면..그뒤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마리아 지오그네는 실내의 전경을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 다. 시녀는 목이 획 돌아간 채 엎어져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시녀 의 얼굴 표정으로 보아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최후의 순간까지도 모 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바로 이때 각 구획을 나누는 통로에 대기 중인 마법사에게 위급 사항을 전달하고 곧장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기사가 헐떡거리며 도착했다. 그 역시 눈 앞의 벌어진 상황을 보고 벌 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빠진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부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지 오그네는 음산하게 외쳤다. "빨리 죄수를 찾아라! 각 통로는 막혀 있다. 그러니 이 구획 내의 어 딘가에 숨어 있을 거다. 빨리 찾앗!" "옛,각하!" 후다닥 달려가는 기사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지오그네는 좀 더 인원 을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이 좋아서 한구획이지, 이곳은 엄청 나게 넓고 복잡했다. 결단코 기사 한 사람이 이곳 저곳 뒤져서 숨어 있는 쥐새끼를 찾아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멍청한 것! 죄수를 감시하는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지오그네는 곧장 당직실로 달려가서는 어젯밤을 새운 후 자고 있는 토린을 두들겨 깨워서 함께 통로 쪽으로 달려갔다. 통로에는 각 구획 을 차단하는 방어 거점이 있었고, 거기에 가면 비밀리에 신속하게 투 입할 수 있는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단의 기사나 방어 사령 부의 병사들을 추가로 뽑아서 수색 작전에 투입하지 못할 것도 없었 지만, 그렇게 하려면 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쾅!쾅!" 세차게 철문을 두들기자 작은 창이 열리며 두 개의 눈이 드러났다. 상대는 철문 앞에 씨근덕거리며 서 있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 보자마자 곧장 철문을 열었다. 부하의 보고를 받고 서둘러 달려나온 기사는 깍듯하게 인사를 건넨 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 한적 한 곳에서 하루에 두 번씩이나 만나기에는 지오그네의 신분이 너무 나 높았던 것이다. "어쩐 일이십니까?각하." "빨리 병사들을 풀어라." "예?하지만 보루의 병사들을 풀려면 그에 따른 절차와 허가서가 있 어야만 합니다. " 기사의 말에 지오그네는짜증스런 어조로 외쳤다. "내가 그걸 모르는 줄 아나? 경도 들었겠지?포로의 신상에 뭔가 일 이 벌어졌다는 것을 말이야." "예,각하. 저희 보루를 통해서 각하께 보고가 올라갔으니 그건 당연 하지요." "그 포로가 탈출했다. 죽은 척한 것은 연극이었다, 이 말이다.알겠 나?" 지오그네의 말에 기사는 기가막힌 듯 중얼거렸다. "그럴 수가" "경도 포로가 탈출하는 데 일조를 한 이상,전하의 귀에 이 사실이 들 어가기 전에 일을 조용히 마무리짓도록 도와 주는 것이 좋지 않을 까?" 기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포로가 각 구획을 나누고 있는 보루 를 파괴할 힘이 없는 한 탈출은 불가능했다. 또,그 어떤 곳의 보루도 파괴되었다는 연락을 들은 적이 없으니 물론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 을 것이다. 병사들을 대량으로 투입한다면 금방 찾아내겠지만,소수 의 병사들로 못찾을 것도 없었다. 그 말은 열심히 뒤진다면 상급자들 에게 보고가 들어가기 전에 지하에 남아 있는 인력만으로 포로를 찾 아낼 수도 있다는 말이었고,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각 보루에서 기사 한 명과 견인족 열 마리씩 차출하여 수색 작전에 투입해라. 남은 인원만으로도 경비 태세는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 것 이다. " 이곳 지하는 5개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그 다섯 구획은 여덟 개의 통로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여덟 개의 보 루가 있다는 말이었고,동원 가능한 인력은 기사 여덟 명과 견인족 80 마리였다. 그 정도면 구획 하나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 아 포로를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특히나 견인족들은 후 각이 뛰어나지 않던가?" "옛,각하." 지오그네는 자신과 함께 달려왔던 토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경은 보루에서 인력을 할당받는 즉시 로린스 경과 합류하여 수색을 시작하라!" "옛 !" "두 시간의 여유를 주겠다. 그게 내가 경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시 간 여유다. 그 안에 찾아낸다면 이번 일은 내 손에서 무마시킬 수 있 다. 알겠는가?" "옛,각하." "이런 젠장?' 다크는 한 모금 가득 포도주를 들이킨 후 욕설을 내뱉었다. 병을 흔 들어 보고는 속에 액체가 들어 있는 것만 확인하고 가져왔는데, 이게 물이 아니고 포도주였던 것이다.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할 겨 를도 없었던 탓이었다. "끄윽!완전히 빈 속에 마셨더니 술기운이 오르는데?가만, 이럴때가 아니지. 시간이 없어." 다크는 고기를 한입 크게 베어물고 우물거리면서 달려가기 시작했 다. 발에는 아무것도 신지 않았기에 그녀의 발걸음 소리는 거의 들리 지도 않았다. "무슨 건물이 이렇게 커?하기야 대제국 크루마의 황궁이니 클 만도 하겠지." 한동안 달려왔는데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것이 거의 없었다. 마차 두 대는 족히 지나갈 수 있을 만한 넓은 복도, 그리고 또 마차 한 대는 지나갈 만한 복도,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중무장한 병사 두세 명이 통 과할 수 있는 복도들이 층층이 얽혀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방들이 그 안에 있었다.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지 넓은 복도들을 제외하고는 횃불이 놓여 있지 않았기에 전체적으로 컴컴했다. 오히려 그 편이 다크를 안심시 켰다. 몸을 숨기기에는 제격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횃불을 하나 뽑아들고 달려가다가 어떤 방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 곳에 서 묵직한 촛대 한 개를 주워 들었고,촛대가 놓여 있던 가구의 서랍 을 뒤져서 부싯돌도 찾아냈다. 그런 후 횃불은 버렸다. 횃불이 이런 곳에서 움직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들킬 확 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다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기를 끌어올릴 수가 없었고,그로 인해 어둠속에서 보통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시력밖에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사용한 방법이 이것이다. "탁!" 부싯돌이 섬광을 발하는 순간 주변의 지리를 머릿속에 기억한다. 그런 후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다크는 한 번 요령이 생기자 그 다음 부터는 달려가면서 부싯돌을 한 번씩 탁탁 쳤다. 다크는 한참을 달려가다가 막다른 벽에 부딪쳤다. 여기까지는 연결 되는 크고 작은 통로가 있었지만,이 부분에서 단절되어 있었다. "이건 또뭐지?아하! 그렇군. 건물의 외벽이야." 다크는 촛대로 벽면을 슬쩍 두들겨 봤다. "툭툭." 들려 오는 소리는 아주 둔탁했다. 속이 꽉 차 있다는 증거였다. 그 리고 이 벽의 두께가 매우 두껍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거 1,2 미터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하기야 타이탄이 설쳐대니 까 두꺼울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어딘가에 통로가 있을 거야.' 다크는 벽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 중한 강철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힘껏 그것을 밀어 봤지만 꼼 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힘이 모자라거나, 아니면 문이 잠겨있다는 증거였다. "제기랄!" 그녀는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또 다른 통로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열려 있는 통로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 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복도의 저편에서 불빛이 비쳐 왔던 것이다. 그 불빛은 움직이고 있었고,두런두런 말소 리까지 들려 오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벽 쪽에 바싹 붙어서 숨었 다.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 아니 괴물들 같았다. 사람의 몸통이었 지만 머리는 꼭 커다란 개대가리 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한 번씩 바닥에 엎드려 킁킁대기도 하면서 천천히 이동해 오고 있었다. 그러 면서 통로 주변에 있는 모든 문을 열면서 철저하게 내부를 수색하고 있었다. "최악의 사태군." 다크는 서둘러서 빛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슬그머니 달려가기 시작 했다. 다크가 몸을 숨긴 후, 드디어 수색대가 지척에까지 도착했다. 잠시 바닥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본 견인족은 고개를 들면서 말했 다. "냄새를 찾았습니다!" "어느 쪽이냐?" "이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 " 견인족 사내가 가리킨 곳은 통로가 있는 방향이었다. 견인족의 보 고를 들은 기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쪽으로 가봐야 통로는 굳게 잠 겨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이쪽을수색해 봐, 그리고 너는 저쪽!" 기사는 양쪽엔 있는 건물에 또다시 견인족을 한 마리씩 보내서 수 색하게 하고는 냄새를 따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10여 미터쯤 전진했을까? "깨갱!" 어디선가 뭔가에 두들겨 맞는 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여기서 말한 개소리는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당치도 않은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개가 말하는 소리를 말함이다. "저쪽이닷!" 기사와 견인족들은 그쪽으로 잽싸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마에 커다란 혹이 난 채 기절해 있는 견인족 한 마 리뿐이었다. 그리고 그 견인족이 가지고 있던 무기도 사라진 상태였 다. "이런 젠장할!끝까지 말썽을부리는군. 빨리 흩어져서 찾아라. 멀리 는 가지 못했을 거다. " "옛 !" 기사는 재빨리 견인족들을 지휘하여 통로를 차단한후 샅샅이 뒤졌 지만 소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잠깐 사이에 마나를 운용하지도 못하 면서 어떻게 도망쳤을까?그 소녀의 가냘픈 체구를 생각했을 때,도저 히 상상할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소녀를 찾을수 없다는 보고가 날 아오는 가운데 기사는 처음부터 뭔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녀에 대한 예상이 잘못된 것일까?가냘픈 소녀가 달리 는 속도라면 절대로 포위망을 벗어날수 없을 텐데. 그녀는 대단한 검 객이라는 말을들었다. 그런데도 얕잡아보고 시작을 했으니." 수색을 끝마치고 또 다른 지시를 듣기 위해 모여든 견인족들에게 기사는 마음을 정한 듯 분명한 어조로 외쳤다. "도망치는 상대를 소녀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상대를 소녀가 아니라 매우 잘 단련된 검객이라고 생각해라. 그녀의 체력이나 속도,근력 그 모든 것을 우수한 검객에 맞춰 행동하라는 말이다. 알겠느냐?" "옛!" "너희 둘은 다른 수색조들에게도 이 말을 전해라. 마나를 쓰지 못한 다고 해서 그녀의 힘과 속도를 가냘픈 소녀쯤으로 지레짐작하지 말 라고 말이다. " "옛!" 견인족 둘이 달려가고 난 후,기사는 또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이제 는 한층 더 조심스럽게. "젠장할! 더럽게 무겁군." 다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투덜거렸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긴 했지만,그래도 상대가 포위망을 갖추기 전에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검까지 빼앗은 것이다. 자신의 손에 검이 들려 있는 이상 더 이상 겁나는 존재는 있을 수 없었다. 비록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닐지라 도. 어느 정도 숨을 고른 후 다크는 왼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검을 단단히 쥐었다. 검이 조금 무거워서 힘들기는 했 지만,그녀는 자신의 오랜 숙련도를 믿고 있었다. 검을 높이 들어올린 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내리찍었다. "팡!" 검은 곧장 팔찌를 향해 떨어졌지만, 팔찌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뭔가의 힘에 가로막혀 불꽃을 번쩍이며 튕겨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지독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으갸갸갹!" 한참 동안 몸에 찌릿찌릿한 전기가 통하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 었던 그녀는 곧이어 고통이 멈추자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검으 로 힘껏 내리찍었는데도 흠집도 없었을 뿐더러, 온몸에 쩌릿찌릿한 충격까지 안겨 주어 놀랐던 것이다. "젠장!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하지만 이것은 다크였으니까 그냥 찌릿찌릿하고 끝난 것이지,보통 사람이었다면 감전에 의한 충격으로 기절에까지 이르게 하는 보호 장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과거 블루 드래곤 카드리안의 뇌전을 자 신의 마나로 끌어들여 흡수해 버린 전례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에 게 흘러들었던 강력한 전기 충격의 대부분은 상당 부분 뇌전의 기운 이 모여 있는 단전으로 끌려들어가 버렸기에,그녀가 직접적으로 받 은 충격은 크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이놈의 구속 도구들을 풀어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 명확해 졌다. 있다면 길은 한 가지, 이곳을 탈출하여 아르티어스에게 부탁하 는 것뿐이다. 아르티어스라면 손쉽게 이것을 풀어 줄수 있을 것이다. "포위망은 어떻게 되어 가나?" "워낙 쥐새끼처럼 잘 도망치기에 이번에는 아예 폭넓게 둘러쌌습니 다. " "포위망이 약하지 않을까?" "방금 전에 마지막 병력이 합류했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 아무리 넓은 지하 공간이라고 해도,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각 보 루에서 증원병들이 차례 차례 도착하여 순차적으로 투입되었으므로 처음에는 잡기 힘들었지만,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었다. 이제 포 위 인원이 완전히 다 도착한 지금, 기사 아홉 명과 그들의 지휘를 받 는 견인족 80마리가 포위망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좋아. 마지막 병력까지 합류했다면 이제부터 포위망을좁혀 들어가 라고 이르게." "예." "독 안에 든 쥐이기는 하지만, 조심하라고 해!언제 물지 모르니까." 제 2근위대의 출현 "헉헉헉" 혹시나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까 해서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가빠 오고 있었다. 다크는 이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멈춰서서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숨이 가빠 온 것이 몇 년만이었던가? 이 여자애의 육체로 뒤바뀌었을 때,한동안 나약한 육체로 인해 고통을 받았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힘을 되찾았 을 때, 그때 이후로 그녀는 땀 한 방울 흘린 적이 없었다. 두 번에 걸쳐 환골탈태를 거친 강력한 육체의 힘은 똑같은 신체 조건을 가진 계집 아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고, 거기에다가 마나까지 효율적으 로 이용하면 순간적으로는 수십 배 이상의 힘까지 낼 수 있었다. 하지 만 어이없게도 갑자기 마나를 쓸 수 없게 된 지금, 너무나 처량한 상 태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헉헉, 젠장! 한동안 게으름을 부렸더니 그 덕을 톡톡히 보는군. 헉 헉." 다크는 아무리 뒤져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런 때는 아직까지 포위망이 느슨할 때 뚫고 나가는 것이 좋 을 것이다. 포위망이 좁혀지기 시작한다면 그 두께는 더욱 두꺼워질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그녀는 살금살금 다가가서 놈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 앞쪽의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실내라서 바람이 안 불기에 바람 때문에 위치 선정에 신경쓰는 성가신 작업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차근차근 숨을 고르며 상대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아마도 포위망이 완전해지면 놈들은 앞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한동안 기다리자 삐이이익!하는 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 고 곧이어 여기저기서 삑삑거리는 응답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저 앞 쪽에 위치한 똥개들도 그것에 답하듯 뭔가를 입에 물고 삐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내였기에 그들은 복도를 중심으로 천천히 앞으로 이동해 들어가 면서 문을 만나면 두세 마리가 이 그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밖 에 대기하고 있는 똥개들은 실내의 수색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대기 했다. 괜히 수색조가나오기 전에 앞으로 전진하게 되면 또 다른 문을 만나게 될 것이고,또다시 병력을 분산해서 그 안에 투입해야 하지 않 겠나?그들은 최대한 많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 이다. 점차 그들과 다크와의 거리는 좁아지기 시작했다. 상대와의 거리가 약 10미터 정도로 좁아졌을 때,그들은 또 다른 문을 만났고 세 마리 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다크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것은 일곱 마리. 처음에 서너 마리씩 보일 때 치고박는 편이 좋았을 텐데,괜히 탈출할 곳을 찾는다고 싸우는 것을 회피한 것이 후회스러 웠다. 다크는 똥개들이 실내를 뒤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대충 측정해 두었기에 잠시 더 기다려서 수색조가 실내로 깊숙이 들어가기를 기 다렸다가 돌진해 들어갔다. "삑삑삐이이익 ! 삑삑삐이이익!" 제일 뒤쪽에 서 있던 견인족이 동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신호를 보내는 순간, 다크는 상대의 지척까지 거리를 좁혔다. 남은 똥개들도 저마다 검을 뽑아들고 상대를 잡기 위한 준비 태세를 끝낸 상태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크에게 매우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똥개들 은 포로를 무조건 살아 있는 채로 잡아 올 것을 명령받았지만, 다크는 똥개들을 살려 주건, 죽이건, 보신탕을 끓여 먹건 마음대로 할 수 있 다는 단 한가지 사실이었다. 아무리 마나를 쓰지 못한다는 제약이 가해졌다고 하더라도, 일단 달릴 수 있고,뛸 수 있고, 팔을 휘두를수 있고, 또손에 검을 쥘 수 있 는 한 다크를 겨우 똥개 몇 마리가 사로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상대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견인족들은 매우 큰 체 구를 가지고 있었고, 또 두툼한 근육질을 가지고 있는 아주 강인한 족 속이었다. 묘인족이나 호인족등 고양이과 수인족의 경우,덩치와 힘에 다소차이는 있지만,고양이 특유의 유연하면서도 매끄러운 몸놀림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견인족 같은 개과는 그런 유연한 몸놀림보다는 강력한 힘과 초인적인 맷집으로 승부하는 족속들이었다. 정면으로 맞부딪쳤을 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미꾸라지처럼 파고든 그녀를 잡는 데는 그러한 그들의 특성이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했다. 상대가 '죽여 주쇼.' 하면서 저돌적으로 달려들었지만, 그들은 그 순간에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강한 팔힘으로 검을 휘두르면 소녀의 몸은 그대로 두 토막이 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 한순간의 망설임이 끝났을 때 요란한 개잡는 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컹!" "캥!" 두 마리의 견인족이 다크의 검에 치명상을 입은 후에야 그들도 살 기 위해서는 상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 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상대에게 검을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동료들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데다가 상대는 미꾸라지 같은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동료들을 방패막이로 쓰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놈을 '생포' 하라는 명령이었다. 거기다가 세 마리는 실내를 수색하러 들어갔기에 동료들과의 합류 가 아주 조금 늦었다. 수색조 세 마리가 도착했을때는 이미 두마리가 확실히 저 세상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는 상태였고, 네 마리는 크고 작은 부상으로 완전한 제실력을 낼 수 없었다. 거기에 셋이 힘을 합해 봐야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기는 힘들었다. 또 이곳 자체가 기나 긴 복도를 통한 미로의 구조였기에 저쪽에 있는 아군들이 합류해 들 어오는데도 시간이 꽤나 필요했다. "히힛! 아주 좋은 것을 발견했군. 그렇다면 탈출은 식은 죽 먹기겠 어." 다크가 방어는 완전히 무시하고 왕성한 공격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처음 부딪칠 때 똥개들이 과감하게 검을 휘두르지 못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싸우면 싸울수록 확실하 게 전달되었다. 상대는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설혹 자 신들의 숨이 끊어진다하더라도. 다크는 모든 똥개들을 처치한 후에 싸우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다시금 암흑 속으로 달려갔다. "아차! 늦었군. " 뒤늦게 달려온 기사들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 는 견인족들의 전투 능력은 대단했다. 그렇기에 충분히 그녀를 붙잡 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도착해 놓고 보니 이미 포위망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군요. 견인족 열 마리라면 웬만한 기사들도 막을 수 없 는데, 그녀는 지금 마나가 봉인되어 기사급의 파워를 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하겠나?" 그 중에 계급이 높은 듯한 기사가 우선 지시를 내렸다. 일단 추격도 중요했지만,죽어 가는 견인족들을 살리는 것도 중요했다. 견인족 한 마리 한 마리가 얼마 짜리인데, 그냥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 리고 황궁 내에도 견인족은 통틀어 200마리도 안 된다. 그런 그들의 숫자가 줄어든 이유를 위에 보고해야만 할 것이고,그에 대한 문책 또 한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이래저래 입맛이 쓴 생포 작전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놈은 빨리 보루로 호송해서 치료를 받게 해라. 그리 고 나머지는 그놈을 추격한다. " "옛!" "병력을 좀 더 지원해 주십시오." "뭐라고?" 지오그네는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오기에 생포에 성공했다는 보고 를 올리려고 왔는 줄 알았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저따위 소리나 지 껄이고 있다니, 정말 저 기사놈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상관의 눈초리가 아주 매서워지는 것을 포착한 기사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견인족 30마리가 당했습니다. " "뭣 ?" "지하가 너무 넓어서 포위망을 구축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거기에다 가 칼부림까지 해대는 상대를 겨우 그 인원으로 생포해 오라는 것은 너무 무리하신 명령입니다. " "이런 멍청한 녀석들! 겨우 힘없는 계집애 하나 못잡아 온단 말이 냐?" 상관의 질책에 기사는 묵묵부답으로 저항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네가 가서 잡아보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 꼴을 보며 지오그네는 화 가 머리끝까지 뻗었다. 이렇게도 쓸 만한놈이 없다니. 그녀는 하 마터면 자신이 내려가겠다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자신이 내려가 봐야 바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 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탁 트인 공간도 아니고, 미로와 같이 복잡한 곳에 자신이 내려가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견인족도 죽어 나가 는 판에 공격 속도가 느린 마법사가 내려가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멀찍이서 막강한 마법 공격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 지하 궁전을 박살내 놨다는 것이 들통나면 그녀를 잡고, 못잡고 간에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지. 전하께 말씀드리는 수밖에. 경은 밑에 내려가서 일단 수색 작전을 잠시 중지하고 현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라고 전하게." "옛,각하." "포로가 탈출했다고?" "예, 전하. 긴급히 병력을 투입했사오나 견인족 30여 마리만 사상을 당했사옵니다. " 지오그네는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보고 했다. 미네르바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지시를 내렸다. 예상 외로 그녀의 목소리는 별로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제2근위대를 비밀리에 투입해라. 그녀가 아무리 마나를 쓰지 못한 다고해도,생포하는 것은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닐 것이야." 미네르바는 일부러 생포라는 단어에다가 힘을 줘서 말했다. 미네르 바는 이미 일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짐작했던 것이다. 견인족의 전 투력은 매우 강력하다. 기사에는 못미치겠지만, 그래도 수련 기사 정 도의 전투력은 지니고 있는 강인한 종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 리 그렇다고 해도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생포하라는 명령이 떨 어진 이상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예 죽여 버리겠다고 덤비지 않는 한, 잡기 힘든 상대임을 미네르바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위대 기사들에게 전해라. 포로의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 마 음껏 싸우라고 말이야. 대신 빨리 잡아서 끌고오라고해." "하지만 전하, 그렇게 지시했다가 큰 상처라도 입히면 어떻게 하옵 니까?" 다급한 지오그네의 조언에 미네르바는 의미 있는 미소를 씩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 "그때는 자네가 목숨을 걸고 살려내야겠지. 안 그런가?" "예,전하." 지오그네는 미네르바의 말에 얼굴색이 새하얗게 탈색되었지만, 일 단 상관의 물음에 대답은 했다. 너무나도 심한 상처라면 자신의 마법 실력으로 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일단 대답을 한 이 유는 근위대에 명령을 전달하는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휴식 중이었던 제2근위대에 비상 소집령이 비밀리에 내 려지고, 기사들이 하나 둘씩 복귀하기 시작했다. 비번이라서 술집에 처박혀 있던 인물들이나, 오랜만에 애인이나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 을 보내던 인물들도 있었고,또 친구들과 취미 생활을 즐기던 인물들 도 있었기에 모든 인원을 소집해 들이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무슨 일이야?비밀 소집령이 내려지다니." "글쎄?나도 잘 모르겠는걸?" "마법사들이 빠진 것을 보니 어디에 파견 가는 것은 아닌 것 같고,기 사들만 모아서 뭐하자는 거지?" 나지막한 어조로 서로가 아는 정보를 교환하는 기사들. 제2근위대 의 오너급 기사 20명과 정찰조 20명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기다리라 는 지시뿐이었으니, 기다림에 지쳐 저마다 수군댈 만도 했다. 그것도 비밀리에 소집한 것이 아닌가? 모두들 갑자기 소집되어 와서 그런지 행색도 가지각색이었다. 사냥복을 입고 있는 기사부터 시작해서, 데 이트 중이었는지 연미복으로 정장을 한 인물들, 그리고 일부는 입에 서 술냄새까지 팍팍 풍기고 있었다. 마지막 기사가 도착한 후에 지오그네가 슬며시 등장했다. 그리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들 잡담을 멈췄다. 지오그네는 득실대 는 엘프들 덕분에 크루마 궁정 마법사들 중에서 서열이 그렇게 높지 못했지만, 총사령관이자 근위 기사단 단장인 미네르바의 심복이었기 에 그녀를 통해 종종 지시가 내려졌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긴급한 사안이 발생했기에 모처럼 휴식을 즐기고 있던 경 들을 불러내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 지오그네는 기사들 중에서 제일 앞열에 앉아 있는브랜트 베리어스 후작을 바라보며 떨떠름한 어조로 경칭을 사용해 브리핑을 시작했 다. 브랜트는 드래곤 슬레이어였던 타론이 전사한 후 제2근위대를 이 끌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부하에게 집합 대상에 그를 빼라고 지시 했었는데,아마도 근위 기사들 중 누군가에게 주워 듣고 따라온 모양 이었다. 제2근위대 대장이라면 그녀가 아무리 영광스런 드래곤 슬레 이어에다가 궁정 마법사라 하더라도 계급에서 밀렸다. 그 때문에 그 를 뺀 것이었는데, 상대는 이미 와버렸으니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룻 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 가란다고 갈사람도 아니었고. "긴급한 사안이란게 뭔가?" 제2근위대 대장인 브랜트는 오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툭 질문을 던졌다. 이곳에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의 행 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오그네의 얼굴이 조금 더 찌그러들었다. 기 사들에게 일장 훈시를 내린 후 투입 명령을 내릴 작정이었는데, 처음 부터 계획이 틀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감 중이던 포로가 탈출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지하 궁전에 숨 어있는 그 포로를 생포해 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 지오그네는 '생포'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말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다시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수감 중이던 포로라면 지하 감옥에 있 었을 텐데 어떻게 지하 궁전까지 숨어들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다가 지하 궁전의 각 통로에 설치된 보루는 1,2근위대가 교대로 지키고 있 지 않던가?포로가 그 보루를 뚫고 통과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조용히 해라. 여기가 선술집 인줄 아느냐?" 브랜트는 뒤를 슬쩍 보면서 짜증스레 외쳤다. 그도 부하들처럼 오 랜만의 휴식이 물거품이 된 상태라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여기 와서 설명을 들어 보니 자신이 올 일도 아닌 것이다. 거 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겨우 탈출한 포로 한 명 잡자고 제2근위대 전 체를 소환하다니! 자신이 지휘하는 제2근위대의 실력을 뭐로 보는 것 인가?그 때문에 그는 더욱 기분이 안 좋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브랜 트는 지오그네를 빤히 올려다 보며 말했다. "공작 전하의 명령서는 가지고 있겠지?" 브랜트는 그녀가 감히 명령서도 없이 제2근위대를 소환할 수가 없 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일부러 명령서 제시를 요구했다. 제2근위대 대장인 자신이 미네르바가 아닌 마법사 따위에게 지시를 받을 이유 가 없다는 것을 지오그네에게 명확하게 인지시키기 위한 행동이었 다. 상대의 속셈을 잘 아는 지오그네는 소태 씹은 얼굴로 서류를 내밀 었다. "여기 있습니다,각하." 브랜트는 앉은 채로 서류를 받아 들고는 꼼꼼히 읽어 봤다. 읽어 보 니 지오그네의 말과는 약간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그것이 지오그네 의 고의인지 아니면 실수인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꽤나 마음 에 드는 차이점이었다. 브랜트는 살짝 고개를 뒤로 돌려 부하들을 향 해 호기롭게 외쳤다. "공작 전하께서는 포로가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 조금이 라도 저항하면 반쯤 죽여 놔." 안 그래도 소중한 휴식을 박탈당한 부하들은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옛 !" "그리고 그 망할 포로 녀석을 최대한 빨리 내 앞에 대령해라. 알겠 나?" "옛!각하!" "그놈을 생포해 오는 놈에게 금화 20골드의 포상금과 선술집에서 동 료들에게 술을 살 수 있는 영광을 주겠다. " 겨우 27골드 받아서 이 술고래들에게 술을 사 준다면 결국 포상금 은 얼마 남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은 대장의 말을 듣고 환호 했다. 그렇게 작은 포상금을 제시한 것을 보면 휴식 시간을 날려 버린 부하들을 위로하기 위한 이 술자리의 술값을 대장이 내면서도 그 영 광을 잡은 사람에게 돌리는 점이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우와와앗!" 근위대 기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앞다투어 우르르르 눈에 살기를 띤 채 지하 궁전 쪽으로 달려갔다. 지오그네는 '생포' 를 원했지만, 자 신들의 대장은 '반쯤 죽여놓기' 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 말을 들어야 옳겠는가? 당연히 자신들의 대장 말을 들어야 한 다. 또, 안그래도 열받는 김에 그들은 화풀이할 사냥감이 하나 생겼다 고 좋아서 달려간 것이다. 그것을 보며 지오그네의 얼굴색은 새하얗 게 탈색되었다. 이제 포로 체포 작전의 지휘권은 자신의 손을 떠난 것 이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믿기에 지하 궁전에 도착하자마자 견인 족 한 마리씩을 거느리고 흩어졌다. 그들은 견인족의 전투력이 아닌 그들의 코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기 사가 50여 명이나 투입되었기에 토끼 사냥은 맹렬한 가속도를 붙이 며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맹렬히 뒤지는 상황에서 아무리 지하 공간이 넓다고 하지만, 다크가 계속적으로 몸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캉!" 검과 검이 부딪치며 작은 불꽃을 튕겼다. 다크가 숨어 있다가 일격 을 날렸지만, 상대 또한 노련한 기사답게 여유 있게 검으로 막았다. 이미 견인족이 냄새를 맡고 상대가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 기에 충분히 대비를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쥐새끼 같으니라고.. 여기 숨어 있었군." 다크는 기습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재빨리 뒤로 물러서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기사는 이제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포로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 밖에서는 견인족이 동료를 불러모으기 위해 불어대는 호각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왔다. "이거 순꼬맹이 아냐?" 기사는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이런 계집애를 잡기 위해 제2근위대 를 총출동시키다니, 얼마나 윗사람들이 제2근위대를 만만하게 봤으면 이딴 일을 시키겠느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인 원을 투입한 것을 보면 이 꼬맹이가 뭔가 한 가닥 하는지도 알 수 없 었다. 그래서 기사는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한 공격을 슬쩍 던졌 다. 기사의 검이 아름다운 은빛 궤적을 남기며 다크의 눈 앞을 통과했 다. 물론 처음부터 다크의 눈이나 기타 다른 곳을 공격할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기선 제압 및 상대의 대응 행동을 관찰하기 위한 허위 공 격이었다. 하지만 그 기사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이런 검술 대결은 다크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상대의 속셈을 빤히 아는 이 음흉하신 다크 어르 신은 상대의 검이 눈 앞을 통과하기를 기다렸다가 그제서야 그것을 눈치챈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폴짝 뒤로 물러섰다. 그것을 본 기사는 이 꼬맹이가 진짜로 검술에 있어서는 맹탕이라고 단정지어 버렸다. 자신의 검이 지나간 다음에야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더 이 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기사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일격에 꼬맹 이를 제압하겠다는 듯 큰 기술을 휘둘러 왔다. 그리고 노련한 다크의 숙련된 눈은그 기술의 숨겨진 헛점을 재빨리 찾아냈다. 하지만 다크는 상대의 헛점을 눈으로는 찾아냈지만, 자신의 육체가 그 헛점을 재빨리 공격할 정도로 민첩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그렇기에 그녀는 일부러 허둥거리면서 엉뚱한 방향을 막는 척했 다. 기사는 자신의 검이 흘러가는 방향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다 른 방향으로 느지막히 검을 움직이는 소녀를 완전히 얕잡아보고는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하고 끝까지 검술을 밀어붙이 려고들었다. 목표는 지금 흘러가는 검의 방향과는 달리 상대의 오른쪽 어깨였 다. 어깨에 검상을 입으면 더 이상 반항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취한 공격이었다. 기사의 검이 아주 기괴한 곡선을 그리며 다크의 어 깨를 관통하려는그 순간 다크의 어깨가 아래로 푹 꺼졌다. 동시에 여 태껏 기사의 검로도 찾지 못하고 허둥대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의 검 은 어느 새 조금 더 움직여 상대의 오른편 어깨를 꿰뚫고 있었다. "크윽!" 요란하게 호각을 불며 동료들을 모으고 있던 견인족은 활짝 열린 문을 통해 기사가 검상을 입고 비틀비틀 물러서는 것을 보고는 기사 를 구하기 위해 황급히 돌진해 들어왔다. 삽시간에 검을 뽑아들며 맹 렬한 기세로 돌진해 오는 견인족의 위용은 과연 대단했다. 하지만 다 크에게 그것은 불을 쫓아 뛰어드는 불나방의 행동과 다를 것 없게 느 껴졌다. 다크는 일부러 견인족이 휘두르는 검 끝에 자신의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생포'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견인족은 놀라서 황급히 검을 뒤로 뺐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순간 다크의 검이 견 인족의 가슴을 관통해서 심장 깊숙이 꿰뚫고 들어갔던 것이다. "이 정도는 식은죽 먹기지. 혜헤헷!" 다크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꺽꺽거리고 있는 견인족의 몸통을 힘껏 차서 뒤로 밀어버리며 검을 뽑아냈다. 다크의 검이 뽑힌 곳에서는 분수와도 같이 피가 솟구쳐 올랐다. 다크는 피묻 은 검을 들고 살기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뒤로 돌아섰다. 거기에는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덤비다가 오히려 깊은 검상을 입고 허우적거리는 기사가 경악한 듯 두 눈을 부릅뜨고는 다크를 노려보 고 있었다. 방금 전에 견인족이 호각을 불기는 했지만, 또 다른 견인 족이 이곳까지 오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크는 그것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는지라, 이 기사놈까지 해치운 후에 달아나기 로 작정했다. "잠깐!" 다크는 갑자기 들려 온 또 하나의 목소리에 멈칫 해서는 뒤로 슬그 머니 돌아봤다. 그녀의 등 뒤에는 또 다른 기사가 이미 도착해 있었 다. 그 녀석 또한 견인족 한 마리를 뒤에 달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견 인족들끼리 패거리를 지어서 다녔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잘 안 통한 다고 생각했는지 기사들이 투입된 것이다. 다크는 괜히 여기에서 지 체했다고 후회하며 다시금 검을 앞으로 들이밀어 방어 자세를 취했 다. 술냄새를 풍기면서 워렌은 중얼거렸다. 워렌은 일부러 검을 슬슬 돌리면서 음흉한 어조로 말했다. "솜털도 벗겨지지 않은 계집애를 얕잡아보고 덤비다가 상처를 입다 니. 아직도 미숙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한테는그게 통하지 않지. 나는 밀러처럼 몸과 마음이 약하지 않거든." 워렌은 빈정거리듯 부드럽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거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반항하면 반쯤죽여 놓을 거야. 어떻게 할 거냐?빨리 선택햇!" 다크는 바짝 긴장하며 검을 중단으로 올린 후 상대가 먼저 공격하 기를 기다렸다. 저런 뛰어난 놈을 상대로 선제 공격을 가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공격하는 틈을 노린다면 방금 전 밀러라 는 놈이 당했듯이 가능성은 충분히,아니 넘치도록 있었다. 미숙하다는 질책을 들은 밀러는 도와 주지 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래도 저 포로를 상대할 상관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주지 않을수 없었다. 여차하면 부상자가 또 한 명 더 생길 것은 자 명한 노릇이 아닌가? 양심이 아무래도 간질간질했던 밀러는 퉁명스 레 말했다. "워렌 경, 저 계집을 조심하십시오. 보통 실력이 아닙니다. "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워렌은 상대가 저항할 의사를 확실히 해 오자, 밀러의 조언에 퉁명 스레 대꾸한 것과는 달리 매우 조심스레 상대하기 시작했다. 밀러도 수준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듀에이트급이었다. 그런 그가 당한 것을 보면 뭔가 숨겨 놓은 한 수가 있는 듯했다. 워렌이 검을 처음 날린 방향도 밀러처림 상대의 얼굴이었다. 원래 이렇게 반반한 계집애들의 경우 자신의 얼굴을 끔찍하게 아끼니까 선택한 목표였다. 워렌의 검이 날아간 순간, 다크의 검은 살짝 위로 들려졌다. 저 옆에 있는 기사놈이 조언을 해 줬으니 이번에는 연약한 척 속이기 힘들 것이 분명했기에 다크는 처음부터 대비에 들어간 것 이다. 워렌은 그대로 검을 그었을 때 상대의 얼굴도 절단이 나겠지만, 동시에 자신의 손목도 함께 날아간다는 것을 즉각 눈치챘다. 그렇다 고 검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맹렬히 휘두르는 기세 때문에 멈추기도 쉽 지 않으려니와 그 동안에 상대의 검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수 없는 노 릇이 아닌가? 워렌은 검을 계속 휘두르면서 손을 살짝 안으로 당겼다. 그에 따라 워렌의 검이 그리고 있던 궤도 또한 약간 수정되었다. 이번 목표는 상 대가 쥐고있는 검의 측면이었다. 이때 다크는 살짝 손목을 움직여 검 신을 옆으로 돌렸다. 그와 동시에 '챙' 하는 소리가 울렸다. 워렌의 롱 소드는 의도와 달리 미들 소드를 박살내지 못하고 엇비슷하게 부딪 치며 튕겨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크의 검이 옆으로 누운 채 앞으로 쑥 밀고 들어왔다. "헉 !" 워렌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잘못하면 배에 구멍이 뚫릴 뻔한 것이다. "이런 망할 계집애가?" 콩알만한 계집애에게 조롱을 당했다는 생각에 안 그래도 술취해서 조금 벌겋던 얼굴이 더욱 벌개졌다. 그리고 옆에는 방금 전에 그가 미 숙하다고 욕까지 한 밀러가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신경질 난 김에 다짜고짜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뒤쪽에서 그들의 격투를 지켜보던 견인족이 동료들을 부르기 위해 건물 밖으로 달려나간 후 호각을 불기 시작했다. "삑삑삐이이 익 ! 삑삑삐이이익 !" 견인족이 호각을 얼마 불지도 않아 기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밀러 를 안내하던 견인족이 이미 호각을 불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다 투어 실내로 들어선 후 안의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실내의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견인족이 큰대자로 뻗어 있었고, 밀러는 동료들을 보고는 고통을 참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걸어나왔다. 그의 어깨에서 는 피가 샘솟듯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실내의 중앙에서는 밀 러의 신호를 듣고 제일 먼저 달려온 워렌과 포로 사이의 대결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 었다. 워렌은 상당한 검술 실력을 지닌 오너급 그래듀에이트였다. 그런 그가 한낱 계집애를 상대로 광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그의 얼굴 한쪽에는 살짝 칼에 긁힌 상처가 나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고, 옷의 여기저기가 조금씩 잘려 있었다. 아무리 그가 술에 취해 있다고 하지만, 동료들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으아아아! 죽여 버릴 테닷!" 자신이 아무리 검을 휘둘러대도 상대의 검은 정말 머리 꼭지가 돌 정도로 얄밉게 움직이며 방어와 공격을 병행하고 있었다. 검을 휘두 르는 속도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으니 조금씩 살짝살짝 움직이 면서 워렌의 공격을 모두 무위로 돌리고 있었다. 워렌 또한 대단한 실 력자니만큼, 상대 검끝의 움직임을 세심히 관찰하고 있었고 상대의 움직임에 대항하여 휘둘러대다 보니 상대는 거의 검을 안 움직이는 데 비해, 워렌은 아예 혼자서 칼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상대의 검이 이때라는 듯 그 틈을 노리고 들 어와서 작은 상처들을 안겨 줬다. 여태껏 벌여 놓은 자신의 추태(?)가 수많은 동료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드디어 워렌은 이성을 잃었다. 이제 계집을 사로잡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어졌다. 자신에게 이런 치욕을 선사한 계집을 토막토 막 잘라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워렌의 롱소드에 한껏 마나가 주입되 자 제법 두터운 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동치듯 떨리며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워렌이 무슨 짓을 하려고 드는지 눈치 챈 동료들은 기절할듯이 놀라서 외쳤다. 포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생 포해야 하는 것이다. 저런 기세라면 생포는 고사하고 온전한 시체도 건지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워렌!" 하지만 이미 분노로 인해 이성을 상실한 워렌에게 그딴 소리는 들 려 오지도 않았다. 이 좁은 실내에서 절정의 검술을 사용한다면 사방 으로 뿜어나가는 검기 때문에 건물이 내려앉을 수도 있었고, 사방에 있는 동료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 로를 생포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검법이 끝났을 때쯤 그의 눈 앞에는 아마도 조각조각 잘라진 고깃덩이만이 존재할 테니까 말이 다. 하지만 분노에 눈이 먼 그에게 그런 하찮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 다. 다크는 상대의 눈, 어깨와 팔, 그리고 손목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 것들이 움직이고 나서야 검은 따라서 움직이니까 검의 움직임은 생 각할 필요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상대방의 검이 움직이는 1미터라 는 간격까지 생각해야 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 다. 상대가 검기나 검강을 쓰려고 작정한 이상, 간격을 유지한다는 것 이 아무런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검술의 진로에 따라 사방으로 검기가 뿌려지는 가운데, 다크는 상 대의 검이 움직이기 전에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전과 달라진 점이 있 다면 검의 예상 경로에서 살짝 뒤로 몸을 빼던 것이, 이번에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야 했다. 왜냐 하면 그쪽으로 검기의 덩어리가 지나가니 까 말이다. 그런 후 다크는 여태껏 그렇게 해 왔듯 검술의 고수만이 가지고 있는 예리한 안목으로 상대의 빈틈을 찾아내어 주저하지 않 고 거기에 검을 쑤셔넣었다. 이렇듯 적이 고급 검술을 쓰건 그렇지 않건 그를 상대함에 있어서 다크에게는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신 그녀를 상대하고 있는 워렌에게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냥 휘두르는 상황이었다 면 상대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었겠지만, 최대한 마나를 끌어올려 고급 검법을 가동하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틀렸다. 상대의 검이 쑥 들어오는 것을 보며, 그에게 남은 것은 둘 중 하나 의 선택뿐이었다. 일단 맹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마나의 흐름을 강 제적으로 멈추고 뒤로 빠지든지, 아니면 그대로 곧이곧대로 검을 휘 두르고는 한 칼 맞든지. 사방에 뿌려지는 검기 때문에 기겁을 한 동료들은 저마다 방어 태 세에 들어갔다. 저 검기에 휩쓸리면 목숨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방심하지 않고 대비를 하는 가운데 요란한 소리가 들려 왔고, 사방의 벽이 먼지를 뿜어내며 검기가 뿌려진 기나긴 흔적들을 만들 어냈다. 그리고 갑자기 워렌이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그런 후 술기운 과 분노 때문에 벌겋던 워렌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우웨에엑!" 갑자기 피를 토하는 워렌. 일단 급속도로 돌기 시작한 마나를 강제 적으로 멈추면서 크게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동료들은 왜 갑자 기 워렌이 피를 토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 다. 부상을 당한 워렌을 구출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두 명의 기사가 달려들어가 또다시 소녀를 상대하는 동안, 다른 기 사 두 명이 워렌을 구출해서 끌고 나왔다. 안에서 워렌이 부축을 받으 며 밖으로 나오면서 여태껏 문 앞에서 와글거리던 기사들과 견인족 들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열어 줬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 호기심을 불태우고 있던 샤트란 페르가 들어섰다. "저..저건?" 샤트란 페르는 경악했다. 기사들이 상대하고 있는 포로는 꿈에 나 올까 무섭던 바로 그녀였다. 이 시대 최강의 검객이자, 스펜을 죽인 원수! 처음 그녀라는 것을 알자마자 샤트란은 재빨리 도망치려고 했 다. 상대에 대한 공포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램 과는 달리 동료들에게 가로막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100여 명 이나 되는 기사들과 견인족들이 문을 중심으로 우글대고 있으니 그 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샤트란은 남아 있는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검을 뽑아들며 적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누 구도 그녀를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다. "샤트란, 갑자기 왜 그래? 너도 몸이 근질근질하냐?" '아음은 이해하지만 너까지 끼여들틈이 없어." 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던 기사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좁은 실 내에서 포로와 두 명의 기사가 싸우고 있었다. 기사들은 원기왕성하 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소녀는 헉헉거리며 이리저리 회피 동작을 취하면서 살짝살짝 검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샤트란 페르에 게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녀가 겨우 저 정도 실력의 기사 둘을 상대로 가쁜 숨을 몰아쉬다니 말이다. 이때 그녀는 다크의 손에 채워져 있는 팔찌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샤트란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샤 트란은 싸우고 있는 동료들에게 외쳤다. "이봐! 큰 기술을쓰지 말고 상대를 지치게 만들어!" "뭐?" "아무리 미들 소드라도 무겁잖아. 그 계집애의 힘을 빼란 말이야." 샤트란의 말을 들은 기사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상대의 검술이 예상보다 훨씬 정밀하면서도 매끄러운 것에 놀라고 있었지만, 일단 상대는 장시간 싸을 만한 힘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벌써부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지 않은가?그들은 그때부터 큰 기술을 쓸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방어에 힘을 쓰며 장 기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떠도는 다크의 운명 "그래,지하에서의 산책은 즐거웠나?" 다크가 꽁꽁 묶여서 돌아오자 미네르바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반겨 맞이했다. 그녀가 미들 소드를 휘두를 힘도 바닥나 버려 지쳐 쓰 러진 것을, 여태껏 고생한 기사들이 지근지근 밟아 놨기에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었지만 그런 건 아예 미네르바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 다. 그녀는 일단 상대가 건강하게 돌아왔다는 것에 만족했던 것이다. "지..하라고?" "그럼. 황궁 필숙히 마련되어 있는 지하 궁전이었지. 요소 요소에 마 련되어 있는 거점만 막고 있다면 마법사가 아닌 한, 절대로 탈출할 수 없는.." "그랬었군." 이제서야 다크는그 괴상했던 실내 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봐, 시작하기로 하지." "전하,정말 정신계 마법을 써도 상관없겠사옵니까?" 지오그네가 이렇게 물어 본 것은 따로 이유가 있었다. 고문 같은 것 은 해 봐야 육체만 절단날 뿐이지만 정신계 마법은 달랐다. 훨씬 힘이 적게 들고,빨리 알아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상대의 정신에 심각 한 타격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네르바의 입장은 달랐 다. 다크가 바보가 되든, 아니면 또 다른 어떤 후유증이 생기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신은 엉망이 되어도 상관이 없었지만 육체는 말 짱해야만 했던 것이다. 코린트에 넘겨줘야 했으니까 말이다 "잠깐만 기다려 !" "뭐지 ?" 미네르바는 궁금한 듯 물었다. 상대는 정신계 마법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일이 좀 더 쉽게 풀릴 수도 있었다. "마법을 걸든 뭘 하든 상관은 안하겠는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서.." 곧 있다가 다크의 운명이 어떻게 풀릴 것인지 대충 짐작하는 미네 르바는 호기롭게 응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는 죽은 목숨이 나 다름없을 텐데, 죽기 전에 소원이나 들어 주겠다는 심정으로. "좋아. 뭐냐? 크게 중요한 것만 아니면 가르쳐 주지." "나한테 쓴 약이 뭐지? 나도 꽤 조심한다고 애를 썼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호호홋, 그거야 간단하지. 검술의 고수에게 내가 미련하게 독약을 썼겠냐?수면제를 썼지. 그것도 아주 특이한 것으로 말이야. 먼저 음 식에다가 약을 썼고." "음식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너도 같이 먹었잖아." "물론 같이 먹었지. 그리고 또 하나 술에도 약을 썼지." "술은 시녀가 시음을 했는데?그년은 멀짱했잖아." "물론이지. 술과 음식에 들어간 약은 서로 달라. 그리고 그 둘은 합 쳐져야 약효를 발휘하지. 코끼리도 잠들 정도로 강력한 약효를 말이 야." 다크는 이제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조심했는 데도 약에 당했는지 말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딴 방법에 당하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미네르바가 이죽거렸다. "아마도 다시는 그런 약물에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겠지?" 다크는 미네르바를 빤히 올려다 봤다. 속으로는 당연하지 하고 대 답하면서 말이다. "내가 이렇듯 친절하게 알려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아마 짐작도 못하겠지. 내가 이렇게 말해 주는 이유는, 너에게 다시는 그런 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알아?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 라구. 호호홋! 자,지오그네. 빨리 시작해." 미네르바가 지시하자 지오그네는 곧장 정신계 마법을 썼다. 다크는 적의 마법 공격을 막아 주는 그 어떤 마법 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았 다. 그리고 적의 정신계 공격을 막기 위해 마나를 구동시킬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쌓은 마나의 근원은 모든 사악한 대법을 저절로 막아 준다는 정종의 내공 심법인 태허무령심법 도 아니었다. 그녀는 공력을 상실한 후 태허무령심법으로 내공의 기 초를 쌓다가 나이아드의 방해에 가로막히자 그것을 포기하고, 곧장 무리를 해서 매우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마교의 정통 심법을 이용하 여 속성으로 내공을 쌓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정신력이 아무 리 강하다 하더라도 정신계 마법 공격을 막을수는 없었다. "끼야아아아악!"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다크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강력한 정신력이 정신계 마법이 침투해 들어 오는 것을 막으면 막을수록 그 고통은 엄청나게 가중되고 있었다. 그 리고 어느 순간, 다크의 눈빛은 뭔가에 홀린 듯 흐리멍텅하게 바뀌었 다.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고통도 멎었다. "다 되었사옵니다, 전하." "좋아." 미네르바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크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 다. "그대의 이름은?" "[묵향.]" "무키앙? 이상하군 그래, 그대는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나?" "[여러 사부들에게 배웠다.]" 지오그네를 바라보며 미네르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어느나라 말인지 알아듣겠나?" "잘모르겠사옵니다, 전하. 이게 말로만 전해듣던 저 머나먼 서방 땅 의 언어가 아닐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검의 모양도 그렇고." "서방 땅이라고?그렇게 먼 곳에 있는 녀석이 왜 여기까지 온단 말인 가?또 왜 크라레스의 일에 간섭하고 있는 거고?" "글쎄요." "이봐, 너는 왜 크라레스를 돕는 거지?" 미네르바의 질문에 다크는 몽롱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에게 자신들을 도와 주면 그 대가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으니까.]" 미네르바는 짜증난다는 듯 외쳤다. "이쪽 말로 해.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까." "나에게 자신들을 도와 주면 그 대가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다고 했으니까." "고향에 돌아간다고?" 그로부터 몇 시간에 걸쳐 미네르바의 심문은 계속되었다. 그런 후 미네르바가 알아낸 사실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다. 상대가 다른 세계에서 날아온 인물이라는 점은 미네르바에게 가히 충격적인 것이 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녀를 이쪽에서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나?"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전하. 이쪽이 크라레스 따위보다 는 훨씬 더 마법이 발달한 상태니까요.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그녀를 잡아 온 이상 분노에 이성을 잃은 그녀가 협상에 응할까요? 또,그녀 같은 강자가 만약 약속을 저버리고 배신한다면 도저히 손 쓸 방법이 없사옵니다 ." 지오그네의 말에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확 실히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풀려난 후에 다크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 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글쎄‥‥‥‥ 그건 그래. 그녀가 풀려났을 때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지." "이렇게 하면 어떻겠사옵니까?" "어떻게 말인가?" "여태껏 타국의 기사를 체포했을 때 했듯이 세뇌를 하는 것이옵니 다. 그렇게 하면 그녀를 마음껏 써먹을수가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 말에 미네르바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가 만약 혼자였다면 이 런 궁리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가 그녀의 아버지라는 그 드래곤이 찾아온다면?" 미네르바의 말은 잠시 지오그네가 잊어버리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 게 했다. "그렇군요. 우리가 그녀를 써먹는다면 분명히 소문을듣고 드래곤이 찾아오겠죠." "과거의 기억만을 봉인한 채 코린트에 넘기는 것은 어떨까? 코린트 가 그녀를 이용할수 있는 근원을 제거해 버리는 거지." "그럴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기억을 봉인하는 마법은 마법사가 조 금만 조사를 해 보면 금방 눈치챌 것이옵니다. 그리고 능력 있는 마법 사라면 손쉽게 풀수 있겠지요. 그냥 코린트에 넘겨준다고 해도,코린 트가 그녀를 이용하려고 들 이유는 없사옵니다. " "왜 그런가?" "코린트는 그녀가 없다고 해도 현재 최강의 자리를 잡고 있사옵니 다. 물론 기사단 전력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옵 니다. 그런 상황에서 언제 누군가가 또다시 그녀에게 좋은 조건을 제 시한다면 돌변할지도 모르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녀를 이용하는 모 험을 감행할까요?오히려 그들은 변수를 없애기 위해 그녀를 즉각 없 애려고 들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녀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들은 강하기 때문이옵니다. " "그들이 그녀를 반드시 죽인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드래곤이 있는 데.." 미네르바의 말에 지오그네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염려마시옵소서. 코린트에서는 그녀가 드래곤의 양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전하께옵서도 그 브로마네스 사건 이후에 아르 티어스의 레어에 찾아가신 후에야 아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미네르바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자신이 그녀와 드래곤의 연관 관계를 알아낸 것은 그야말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다가 한 곳 에서 일치했기에 얻어낸 행운이었던 것이다. 다크는 절대로 그녀의 아버지가 드래곤이라고 떠든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코 린트는 그 사실을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군. 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세뇌한다면?" "그건 방금 말씀드렸듯이 드래곤의 존재로 인해 오히려 더 피해가 클 것이옵니다. 만약 본국이 세뇌당한 그녀에게 기습을 당한다면 상 당한 타격을 받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드래곤에게 넌지시 알려주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그날로 코린트는 끝장이옵니다. 안 그 렇사옵니까?헤혜헷." "그렇군. 경의 말이 옳아. 자, 이제 그녀에 대한 처리 방법이 결정되 었으니, 타이탄부터 빼앗아야 하겠지?그런 다음 곧장 코린트에 넘겨 줘 !" "옛,전하." 지오그네는 다크를 다그쳐서 타이탄과의 계약을 해지하도록 했고, 이미 이성을 잃고 있는 다크는 그 맹세를 따라 했다. 그러자 공간이 열리면서 거대한 타이탄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너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다. 앞으로 도 그딴 일로 나를 성가시게 하지 마라.) 그런 후 타이탄은 다시금 공간 저편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계약 을 해지한 타이탄이 갑자기 모습을 감춰 버렸기에 당황한 미네르바 가 외쳤다. 계약을 해지한 타이탄이 모습을 감춘다는 것은 절대로 있 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미스릴을 입히지 않은 헬 프 로네라면 혹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계약이 해지되면 거의 반 장님이나 다름없는 타이탄은 그자리에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냐?" 타이탄과 주인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가 다른 사람에게 들릴 리가 만무했기에, 지오그네 또한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 것인지 알지 못하 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기에 지오그네는 다크에게 물어 봤다. "왜 갑자기 모습을감춰 버린 것이지?" 다크는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드로메다는 나와의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고 했다. " "그럴 수가 있나? 타이탄이 주인의 말을 거역하다니 있을수 없어!" 그런 지오그네를 바라보며 미네르바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헬 프로네 정도만 해도 자아 가 강한데, 그보다 더 강력한 청기사라면 능히 그럴 수 있겠지." "그렇다면 치레아 대공을 없애지 않는 한은 타이탄을 빼앗을 수 없 겠군요." "그렇다고 없앨 수는 없지 않나?그녀를 죽이는 것은 코린트에게 떠 넘겨야 할 테니까 말이야." "그냥 넘겨줄까요?"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언제 또다시 드래곤이 찾아올지도 모 르는 상황에서 타이탄 한 대 빼앗자고 시간을 낭비할수는 없지. 빨리 코린트에 데려가게." "옛,전하." "현재 각 군단들은 예정된 목표지를 향해 순조롭게 진격 중에 있사 홉니타.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예정대로 5일 후면 알카사스의 전위 군과 만날 수 있게 될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로체스터 공작이 기사들 및 군의 고위급 장교들과 함께 회의를 하 고 있는 도중에 마법사 한 명이 슬쩍 들어오더니 공작에게 다가가서 귓속말을 건네 왔다. "전하! 크루마에서 사신이 도착했사옵니다. " 공작은 한 장교의 보고를 경청하던 중이었기에 미간에 주름을 잡으 며 퉁명스레 말했다. "크루마에서 사신이 한두 번 온 것도 아닌데 뭐가 급하다고 회의 중 에 들어온 것인가?" 공작의 질책에 마법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렇다 고 보고를 올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매우 중요한 보고였기에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보고를 올렸다가는 경을 칠 우려가 있었던 것 이다. "크루마의 사신이 한 소녀를 데리고 왔사옵니다. 그의 말로는 그 소 녀가 치레아 대공이라고 하옵니다. " 드디어 미네르바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 리고 있는 중이었던 공작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뭣이?흐흐흐.. 드디어 그녀가 우리의 손에 들어왔군." 공작은 모여 있는 기사들 및 장교들을 향해 외쳤다. "경들! 대단한 희소식이 접수되었소. 치레아 대공이 본국의 손에 넘 어왔다는 보고외다. " 그녀로 인해 엄청난 고생을 했던 코린트군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야 말로 경사스러운 소식이었다. 회의장에 모여 있던 기사들 및 장교들 이 회의고 뭐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 경악할 만한 소식을 두고 저마 다 수군거리는 가운데, 로체스터 공작은 한껏 희열에 들뜨기 시작했 다. 이제 드디어 복수를 할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는 흥분감이 과도 한 탓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로체스터 공작과는 반대로 용 병대장의 눈빛은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총사령관인 로체스터와 달리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난 용병대장에게 있어서 그녀는 더 이상 얄미운 적이 아니었기에 냉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오 히려 뛰어난 무인이었던 상대가 이렇듯 허무하게 생을 종료해야 한 다는 데 대한 동정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당장 그 계집을 처형할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로체스터 공작은 마법사에게 지시한 후 다시금 회의장쪽으로 시선 을 돌리며 통쾌하게 외쳤다. "나는 경들에게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그녀가 처형되는 모습을 직접 보여 주겠다!" 로체스터 공작은 포로를 공개 처형할 생각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었다. "우와!" 부하들의 환희에 찬 함성을 들으며 로체스터 공작은 여태껏 자신이 이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살아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 다. 그만큼 통쾌했던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에게 있어서 그녀는 검술이나 뭐 그런 것에 대한 경 쟁자가 아닌, 오로지 모든 일에 사사건건 방해를 놓는 훼방꾼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손쉽게 죽여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로체스 터 공작은 명령을 내려놓고 이제 손 안에 들어온 '웬수'를 구경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체스터 공작이 막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그를 가로막는 사내가 있었다. "잠깐!" 용병대장은 친구가 이렇게 빨리 손을 쓰려고 들 줄 몰랐기에 당황 했다. 그리고 당황한 김에 평소에 하던 식으로 친구의 앞을 막아선 것 이다. 하지만 그런 그를 이해해 줄수 있는 것은 진실을 알고 있는 로체스 터 공작뿐이었고,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는 기사들이 벌떼와 같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감히 천한 용병대장 따위 가 총사령관의 가는 길을 막아섰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로체스 터 공작은 기사들을 물리친 후 용병대장에게 낮은 어조로 말했다. "무슨..일인가?" 용병대장은 주위의 눈을 의식한 탓인지 아주 정중한 어조로 부탁했 다. "전하,잠시5만 시간을 내 주실 수 있겠사옵니까?긴히 말씀올릴 의견 이 있사옵니다. " "허락하네. 경은 나를 따라오게나." 로체스터 공작은 용병대장을 이끌고 멀찍이 떨어진 후 속삭였다. "무슨 일인가?" "그녀를 이렇듯 급하게 죽일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자네는 어쩌자는 건가?" "그녀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보는 것이 좋겠지. 아무래도 그녀의 아버 지라는 드래곤도 좀 마음에 걸리고 말이야. 또 크루마가 순순히 그녀 를 이쪽에 넘겨준 것도 좀 의외거든. 그들의 속셈도 좀 더 철저히 분 석해 본 후에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 용병대장의 얘기를 들으면서 로체스터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차분 히 생각을 정리하니 친구의 말이 꽤나 일리가 있었다. 적은 손아귀에 들어온 상태인데, 서둘러서 죽여 버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로체스 터는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서는 최종적인 명령을 내 렸다. "죄수를 지하 감옥에 가두어라." 기사들이 웅성거렸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그들의 의견을 간단히 무 시하며 외쳤다. "좀 더 조사해 볼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경들은 자숙하고 해산 하라." 아르티어스 옹의 잘못된 화풀이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크루마에 다녀온 후 그런 식의 조사로는 아무 래도 다크를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 동 안 머리를 감싸쥐고 궁리를 시작했다. 아무리 아르티어스가 드래곤 이라고 하더라도 어디에 숨었는지도 모르는 호비트 한 마리를 찾기 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호비트의 개체 수가 드래곤처럼 몇 백마리뿐인 것도 아니고, 수십억에 이르지 않던가?그 엄청나게 많 은 속에서 하나를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끙끙대며 고민하 던 아르티어스 옹은 갑자기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기며 벌떡 일 어섰다. 그렇게나 애타게 묵향 13권 정동조 장편 환타지 소설 초판발행: 2001년 7월 3일 초판 10쇄: 2001년 7월 21일 펴낸곳: 도서출판 명상 여신의 신탁 아르티어스가 협박하고 돌아간 후 미네르바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 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일단 한 가지 일은 해결된 것이다. 저 드래곤 의 이목만 피하면 만사가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미네르바는 집무실에 마련되어 있는 푹신한 의자에 내려앉듯 주저앉 으며 말했다. "포도주나 한 잔 가져다 다오." "예,전하." "자네도 한 잔 할 텐가?' 미네르바의 물음에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있던 이블리스는 황송하 다는 듯 말했다. "예,전하." "어쨌건 시작은 좋군. 그린레이크 녀석 , 재수없는 놈이기는 하지만 실력만큼은 큰 소리 칠 만하군. 드래곤도 탐지하지 못할 정도의 보호 망을 구축했으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 제야 안심이 되는구먼. 자, 이제 드래곤을 따돌렸으니 그녀를 최대한 빨리 코린트로보내 버려야겠어." 그린레이크는 미네르바의 요청에 의해 다크의 마나를 봉쇄하고,또 그녀의 기척을 지을 수 있는 팔찌를 만들어 냈다. 물론 그린레이크는 그 두 가지 작용을 한 번에 할 수 있는 것을 만들 만큼 바보는 아니었 다. 그 두 가지 작용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마법 도구를 만들기는 한 가지 작용을 하는 것을 만드는 것보다 두 배 이상 어렵기 때문이다. 적국의 마법사나 기사들을 생포했을 때, 그들이 마나를 끌어모으지 못하게 막는 팔찌는 이미 각국에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기 척을 숨길 수 있는 팔찌만을 제작해서 미네르바에게 거드름을 피우 며 건넸던 것이다. 때문에 다크는 지금 양팔에 팔찌를 하나씩 찬 상태 로 쭉 뻗어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다크의 마나를 제어할 수 있건 없건 간에,그녀는 아 주 위험한 인물이었다. 지금은 제어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그것이 지 속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 드래곤이 다음에도 저렇게 조 용히 물러난다는 보장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이블리 스였기에 미네르바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이었다. 다크도 위험하지 만 드래곤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했던 것이다. "예, 그녀가 본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을 것이옵 니다. " "그래,그녀의 상태는 어떻다고 하던가?' "아직도 변함이 없다고 하옵니다. " "약이 너무 과했던 것은 아닐까? 이대로 죽어 버린다면 큰 일이야. 계획의 초점은 그녀를 죽이는 것이 코린트여야 한다는 것 아니었나? 그래야만 드래곤의 분풀이 상대로서 코린트를 방패막이로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일세." "그렇지요. 이쪽은 들통나더라도 코린트의 '강압' 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고 발뺌할 수 있으니까 말이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코린트에 건네질 때까지 그녀는 꼭 살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어 쨌든 지오그네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고 장담 했사옵니다. " 미네르바는 신께 기도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글쎄, 그 말이 사실이어야 할 텐데" "전하, 원래가 기사들의 그 강인한 육체는 보통 인간의 것과는 다르 지 않사옵니까?하물며 그녀는 최강자의 칭호를 받았던 인물이 아니 옵니까?잘 될 것이옵니다,심려 놓으시옵소서." "그럴지도..어쨌건 깨어나면 즉시 내게 보고하라고 이르게. 일 단 청기사도 빼앗아야 하겠지만 몇 가지 의문점도 풀어야 할 테니까 말일세.그리고 최대한 빨리 이 숨막히는 초조감에서 벗어나고 싶 어 ." "옛,전하." 아주 넓은 방. 아니,중간은 넓은 홀로 되어 있었고,그 홀의 가장자 리에는 푹신한 소파들이 빙 둘러서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방이라기보 다는 무도회장 같기도 했다. 아름다운 문양의 금붙이들이 군데군데 장식되어 있는 호화로운 가구들. 모든 가구들은 마호가니나 흑단,자 단 같은 값비싼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구들에 새겨진 문양만 척 봐도 대단한 실력의 장인들이 공들여 제작한 것이라는 것 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순은으로 뼈대를 만들 고 여러 가지 색상의 수정들로 장식된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붙어 있 는 것만봐도 대단한 부호의 집인 모양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렇게 많은 재력을 가진 인물이 만든 듯한 홀 에 창문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창문 대신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등 잔에서 흘러 나온 아련한 빛들이 홀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침실에 이 렇게 창문을 만들지 않은 이유는 뭘까?숙면을 방해하는 햇빛이 조금 이라도 들어오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서? 여긴 침실이 아니니까 그 건 아닐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르고 실컷 춤을 추고 싶 어서?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두꺼운 커튼을 사용해도 충분했을 것이 다. 넓은 창문이 있어야만 여름에 시원한 바람을 받을 수 있고,또 겨 울에 따뜻한 햇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햇볕을 싫어하는 듯한 이 홀의 주인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 고 있을까?그건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그 홀 어딘가에 사람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확실히 홀의 한쪽 구석에는 햇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짓거리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홀의 한쪽 구석에서 얕은 신음 소리 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뭘 하고 있는지는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긴 소파 위에서는 아리따운 여인과 두툼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사내 사이에 한참 정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인가?' 문이 활짝 열리는 동시에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 고,기겁을 한 여인이 후다닥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들고 부리나케 도 망쳤다. 하지만 그 근육질의 사내는 그 도망치는 여인의 하얀 엉덩짝 을 바라보며 아쉬운 듯한,또 당황한 듯한 시선을 던졌다. 자신도 저 여인처럼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못되었던 것이다. 그는 재 빨리 자신의 옷가지를 주워 들어 앞을 가리고는 얼굴이 벌개진 채 그 여인과 함께 쥐구멍으로라도 도망치고 싶은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지오그네 각하." "그러는 경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보시다시피." 얼버무리는 사내를 향해 지오그네는 앙칼지게 외쳤다. "경을 여기에 배치한 것은 시녀와 그 짓이나 하라고 한 것은 아니 야." "저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 고,원체 무료하기에 그만.." "토린 경은?' "저와 교대한 후 쉬고 있습니다. " '빨리 옷이나 입게." "옛,각하." 사내는옷가지를 쥐고 뒤쪽으로 엉기엉기 걸어간후 주섬주섬 차려 입고는 다시 그녀의 앞으로 나왔다. 빨리 입다 보니 옷차림이 엉망이 었지만,그래도 허리에 빛나는 장검을 차는 것은 잊지 않은모양이다. "안내해." "옛 ?' 기사는 홀의 한쪽에 있는 문 앞을 막고 있는 묵직한 가구를 옆으로 치웠다. 그가 힘껏 밀어야 할 만큼 그 가구는 육중해 보였다. 기사는 가구를 옆으로 치운후,두터운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가시지요, 각하." "흠.." 문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방도 호화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창문이 없는 것 또한 그러했다. 방의 한쪽 구석에는 비단 휘장이 드러 워진 넓은 침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던 시녀가 기겁을 하며 일어서서는 인사를 건네 왔지만 지오그네는 그 녀를 본체만체하고 장인이 공들여 새겼음직한 각종 문양이 새겨진 흑단 침대에 천천히 다가섰다. 휘장을 옆으로 살짝 치우자 침대 위에 죽은듯누워 있는 창백한 안색의 소녀가보였다.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았느냐?' "예,소녀를 공들여 감시했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었사옵니다,각하." "그래? 미네르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약이 너무 과했 나?" 지오그네의 혼잣말을듣고 옆에서 기사가 참견해 왔다. "이렇게 마냥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해독제를 쓰시면 되지 않 겠습니까?각하," 기사의 참견에 지오그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해독제?독약도 아니고 수면제에 무슨 해독제가 있단 말이냐?그리 고 처음부터 저렇게 강한 상대에게 해독제가 존재하는 약을 썼을 리 가 없지 않나?" "그, 그렇습니까?" 지오그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소녀를 다시금 차근차근 살 펴보기 시작했다. 과연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깨어날 수 있을까? 이 대로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그렇다면 큰 일이었다. 하지만 지오 그네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아예 치료가 불가능한 약을 썼으니 까... "시간만이 해결해 주는 것인가?' 지오그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소녀의 눈이 살짝 떠지며 밖으로 나서는 그들의 뒤통수를 슬쩍 바라 본 후 다시 감기는 것을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지오그네라는 높은 상관에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는 지오그네를 뒤따라 나온 후 문을 닫고는 또다시 힘껏 가구 를 밀어서 문을 틀어막았다. 문 앞쪽에 걸쇠나 뭐 그런 것을 붙일 수 도 있겠지만,그렇게 하면 문에 손상이 가기에 이런 편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포로가 이곳에 영구히 갇혀 있을 것도 아니니까. "철저히 감시하고 뭔가 변동사항이 있으면 즉시 나에게 연락하도록 하게, " "옛,각하." 기사는즉시 대답한후 조금 걱정된다는듯 말을 이었다. "지오그네 각하. 저 소녀, 아무리 혼수 상태라고 하지만 4일 동안이 나 아무것도 못먹었는데 괜찮을까요?" 그녀로서도 이것이 조금 걱정되던 차에 부하 녀석이 괜한 참견을 해 오자 짜증난다는 듯 톡 쏘았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의식도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음식물을 목구 멍에 흘려 넣다가 혹시 걸리기라도 하면 질식사한다는 것도 경은 모 르나?쯧쯧..하여튼 기사란 것들은 무식하게 검이나 휘둘러댈 줄 알지." 자신의 무식함을 들먹이자 기사의 얼굴색이 시뻘개졌다. 하기야 기 사들보다야 마법사들이 유식한 것은 사실이고 또 상대는 자신보다 상급자니 참고 넘겨야 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무식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식하다고 하는 것과 진짜 무식한 사람에게 무식하다고 탓하는 것은 조긍 얘기가 틀리다. 그 기사는 읽을 줄도 모르는 진짜 '무식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기사의 얼굴색이 점점 더 붉어지며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자 지오그네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 을 알아채고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미네르바 전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죄수다. 혹여나 실수가 있다면 경의 그 어깨 위에 달려 있는 것을 반납하는 것으로 사 죄를 해야 할 거야 " "걱정마십시오. 지하로들어오는 각 통로마다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있으니 그 어떤놈도 여기까지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 "그렇게 자만할 일이 아니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경비나 잘 서 게" "예,각하." 기사와 헤어진 후 지오그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경계 상태를 점 검했다. 이곳 지하 구조물은 대단히 넓고도 복잡했다. 마법에 능통한 드래곤이 자신의 아들을 찾기 위해 지하 감옥에 슬쩍 잠입할 가능성 도 있었기에 소녀를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었다. 처음 이틀 동안은 소녀를 지하 감옥에 넣어 두었지만, 곧이어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곳은 황궁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지하에 만 들어 둔 임시 피난처였다. 황제를 위시한 황족들과 귀족들,그리고 그 사용인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기에 대단히 넓었고, 미 로와 같이 복잡했다. 하지만 보안상의 편의를 위해 여러 구획으로 나누었고,각 구획의 통로에는 튼튼한 보루를 만들어 경비병들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지금은 보안상의 이유와 드래곤의 잠입 위 험 등을 고려하여 각 통로마다 오너급 기사 한 명과 기사 두 명,그리 고 마법사 한 명이 견인족 스무 마리씩을 배당받아 경비를 서고 있었 다. 지오그네가 통로로 향하는 문을 열자 타이탄의 이동을 방지하기 위 해 높이는 3미터 정도밖에 안 되지만, 마차는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 어 놓은 널찍한 복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 복도는 20미터 정도밖에 안 되었고 또다시 강철로 된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지오그네는 철문 앞에 서서 가볍게 두 번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강철 문에 붙어 있는 작은 창문이 살며시 열렸다. 창문을 통해 통과하려는 인물이 지 오그네라는 것을 확인한 상대방은 황급히 문을 열었다. 기기기긱 하 는금속음이 울리며 문은 힘겹게 열렸다. 아무런 소리 없이 문이 열리 도록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첩자의 침입에 대비하여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 둔 탓이었다. 철문 안쪽에는 아주 넓은 공간이 연결되어 있었다. 높이 7미터,폭 8미터의 아주 넓은 공간. 전쟁이 벌어지면 이곳에 있는 기사는 타이 탄을 꺼내 놓고 적을 막게 된다. 이런 데서 타이탄 1기가 가로막고 있 다면, 그리고 그 안으로 타이탄을 탄 채로 돌입할 수 없을 만큼 통로 까지 좁다면 적들은 이 방어선을 뚫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을 투입해 야만 할 것이다. 타이탄을 이 통로 안쪽으로 집어넣기 위해 통로 전체 를파괴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2미터가 넘는 거구에 강인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견인족. 개처럼 튀 어나온 주둥이 사이로 하얗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견인족의 통보를 받았는지 공간의 옆쪽에 있는 문이 열리며 기사들이 달려나 와 인사를 건네 왔다. 지오그네는 주위를 쓱 훑어본 후 만족스런 표정 으로 말했다. "그래, 뭔가 수상한 점이라도 없었나?"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각하. " 지오그네는 마법사인 듯 보이는 사내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말했 다. "그래. 적의 마법사나 뭐 그런 것들이 침입해 올 수도 있다. 그런 만 큼 경의 임무가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될 수 있으면 마법 트랙들을 많이 설치하여 대비하도록 해라." "옛,각하." "모두들 고생이 되더라도 며칠만 더 참아주게." "옛,각하." 사라져 버린 코린트의 수도 코린티아로부터 새로이 수도가 된 케락 스로 연결되어 있는 악티움 대로. 중무장한 보병 여덟 명이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도로 양편으로 심어져 있는 족히 수십 년은 묵은 가로수들이 적당한 그늘을 만들어 주어 한낮에도 걸을 만 했다. 어쨌든 악티움 대로는 상업 도시 케락스와 수도 코린티아 간의 군수 물자의 이동과 병력 이동을 위해 건설된 것이었다. 하지만 대개 의 도로들이 그렇듯 여행객의 이동을 통제하지는 않았기에 많은 화 물들과 여행객들이 이 도로를 애용했고,그렇기에 그 도시들이 더욱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기하학적 도형이 수놓아져 있는 하얀 로브(robe ;길고 헐 거운 겉옷)를 입고 대로 위를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 한 명 은 어른이었고,또 한 명은 아직 어린 소녀였다. 소녀와 달리 어른의 경우 로브에 달린 모자를 깊이 눌러쓴 상태라서 얼굴을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나긋나긋한 걸음걸이와 언뜻언뜻 로브 아래로 드러나는 늘씬한 다리의 곡선으로 보아 여성인 듯했다. 어른은 차분한 눈길로 정면을 한 번씩 주시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소녀는 달랐다. 그 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차의 행렬을 구경하거나, 노새를 끌고 가는 사람들 혹은 등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소녀는 그것도 지겨워졌는지 저 앞쪽으로 시선 을 돌렸다. 곧게 펼쳐진 넓은 대로. 지평선 끝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 어 있었다. 그들은 벌써 몇날 며칠 동안 이 대로를 걸어왔는지 모른 다. 소녀는고개를 위로올리며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수녀님 ." 소녀의 물음에 답하여 돌아오는 음성은 아주 부드러웠다. "왜 그러느냐?" "수녀님께서는 왜 마차를 안 타시고 걸어가시는 건가요?마차를 빌 릴 수 있을 정도로 여비는 충분하잖아요." 비싼 값에 마차를 빌릴 필요도 없이,악티움 대로를 왕복하는 승합 마차라는 값싼 대중 교통 수단도 있었다. 20여 명은 탈 수있는 거대한 마차에 여러 사람이 탑승하여 부대끼며 가는 것이기에 속도도 느렸고, 쾌적도도 떨어졌지만 어쨌건 걸어가는 것보다는 한 결 나았다. 소녀의 말투에서 약간의 짜증을 읽어낸 상대는 미소를 지 으며 답했다. "후훗, 네가 발이 아픈 모양이구나." 수녀가 정곡을 찌르자 소녀는 당황해서 말했다. "그건 아니구요." "아프기도 하겠지. 그러면 저쪽에 앉아서 쉴 만한 장소가 있으니 거 기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꾸나." "예." 나무 그늘 밑에 자리잡은 제법 큰 돌덩어리가 길가에 있는 것을 보 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수녀를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며 소녀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수녀님께서 마차를 달라고 부탁하셨으면 충분히.." "그건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란다. 신을 받드는 사도들이 육체의 안락을 꾀하면 안 되는 것이야. 아주 급한 일이라면 또 모르지. 하지만 신탁에서 정해 놓은 때까지만 케락스에 도착하면 돼." 소녀는 수녀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싱그러운 가을 바람이 상쾌했 다. 이제 곧 겨울이 올 테지만,그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므로 도 보로 여행하기에는 최적의 계절이었다. "좀 빨리 가시면 안 될까요?아무리 다음에 다가올 암흑의 세기를 막 아 줄 영웅이 케락스에 나타난다는 신탁이 내렸지만, 그가 누군 지,또 어떤 사람인지는 하나도 알지 못하잖아요?조금이라도 빨리 케 락스에 가서 조사를 해 보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수녀는 소녀를 향해 사랑을 가득 담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그 녀도 과거에 그러했듯, 이 소녀 또한 범상한 신분은 아니었다. 다음 세대의 종단을 이끌어 갈 뛰어난 인재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소녀 는 모든 것에 호기심을 느끼며 수많은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던져대 고 있었지만, 수녀는 언제나 한결같이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 로 대답해 줬다. 이렇듯 소녀의 인성과 지성을 다듬어 가는 것에 무한 한 재미를 느끼면서도, 옛날 자신이 세상 구경을 나가서 저질러댔던 얼토당토않은 짓거리를 회상하다 보면 미소가 절로 지어지기도 했 다. 어쨌든 종단에서는 이런 식으로 다음의 인재들을 교육시켰고,수 녀 또한 이 교육 방법이 매우 좋다고 시간이 흐를수록 깊게 공감하고 있었다. 사원 안에서만 쌓은 경험과 지식은 아무래도 세상의 그것과 는분리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미 케락스로 가라는 신탁이 내린 이상,그 대부분의 힌트는 아데 나 신께서 가르쳐 주신 셈이라고 봐야 하겠지." "어째서요?" "그 강력한 암흑의 기운을 몰아낼 수 있을 만한 강력한 기사단을 가 지고 있는 나라는 아마 전세계를 통틀어 코린트뿐일 거야. 지금은 오 랜 전쟁으로 인해 코린트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코란 근위 기사단이 세계 최강이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지 않느냐?' 이제서야 뭔가 집힌다는듯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이란 옛날부터 전해 오는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란다. 전설에서야 농부의 아들이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거나, 아니면 이름 없는 시골 무사가 드래곤으로부터 강력 한 무기를 얻어내어 영웅으로 등장하지만,현실은 그렇게 될 수가 없 는 것이지. 그만큼 타이탄이란 것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으니까 말 이야." "그렇다면 수녀님께서는 케락스로 가셔서 아그립파 4세 폐하를 만 나서 도움을 청하실 건가요?" 소녀의 철없는 물음에 수녀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내 신분으로는 도저히 황제 폐하를 알현할수 없단다. " 사실 아무리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고 하지만 젊은 그녀에게는 경험과 실적이라는 것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아직 '수녀'라는 말단 직에 머물러 있었다. 수녀로서 교단의 계율을 지키고 몸과 마음을 수 양하는 단계를 지나 수양 정도를 인정받게 되면 지금과 같이 누군가 를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하지만 하나의 신전을 책임질 수 있는 대사제의 직함을 받으려면 아직도 더 많은 수련을 거 쳐야 하고,또 자신이 맡은 제자들을 훌륭하게 성장시켜야만 했던 것 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코린트의 황 제에게 감히 알현을 청할 정도가 되려면 신녀나 그녀를 보좌하는 교령정도는 되어야 했다. 대사제가 되기에도 아직까지 까마득한 여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알현을 청하기에 하늘에서 별을 따기만큼 어려운 코린트의 황제 폐 하는 너무나도 지고한 신분을 가진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녀님께서 수녀님께 영웅을 찾으라는 교시를 내리신 것일까요?드로아 대신전에는 수녀님보다 훨씬 능력이 크신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내가 가야만 한다고 아데나 여신께서 신탁을 내리셨단다. 어떻게 여신님의 깊은 뜻을 한낱 인간인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니?가 보면 그분의 뜻을 알 수 있겠지 "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영웅을 찾으실 거죠?무작정 케락스 시를 헤 맨다고 만날 수 있을까요?" "아데나 신께서 도우신다면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 하지만 일단 케 락스가 목적지인 것으로 보아 영웅은 코린트의 기사일 확률이 높지 않겠느냐?그리고 코린트의 기사들 중에서도 근위 기사거나 아니면 그보다 높은 지체를 가지고 계신 분일 가능성이 크겠지." "으음, 그렇다면 누구를 만나 뵈어야 하는 거죠?" 권력의 구조나 기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에 심각하 게 궁리하는 소녀였다. 수녀는 그런 자신의 제자를 재미있다는 듯 바 라봤다. 물론자신의 신분으로 봤을 때 황제는 고사하고 근위 기사도 만나기를 청하기는 힘들었다. "우리가 직접 찾아가는 것보다는 케락스에 있는 신전에 도움을 청하 는 것이 좋을듯하구나. 자,이만 일어서자. 갈 길이 멀단다. " 다크의 탈출 "죄수가..죄수의 상태가 이상하옵니다,나으리." 실내에 울려 퍼지는 시녀의 다급한 외침 소리를 듣고, 기사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냐?" 그는 정신없이 문을 가로막고 있는 가구를 옆으로 밀쳐낸 후 황급 히 문을 열어젖혔다. 평상시에는 묵직하게 느껴졌던 가구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죽은 것 같습니다요." 시녀는 당황해서 침대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뭔가 이상 이 생긴다면 그녀의 목으로 대가를 치러야 할 만큼 침대 위에 죽은 듯 이 누워 있는 죄수의 안위는 중요했던 것이다. 기사는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밀쳐 버리고는 죄수 의 옆에 다가섰다. 과연 시녀의 말대로 창백하기 그지없는 안색이었 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여기에 잡혀 올 때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 기도 했다. 그가 처음에 이곳에서 죄수의 얼굴을 봤을 때도 이렇듯 창 백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먼저 상대의 호흡을 살폈다. 역시 죄 수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기사의 심장은 세 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이렇게 중요한 죄수가 하필이면 내가 당번일 때 죽어 버리다니.죽고 싶으면 아까 지오그네 경이 왔을 때 죽었으면 좋 았을 거 아냐?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되지? 그는 마지막으로 소녀의 경동맥 위에 살짝 손가락을 대고 상대의 맥박을 살폈다. 만약 맥박이 아직 희미하게나마 뛰고 있다면 손 쓸 길 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감사합니다! 아직 죽지 않았다. 희미하지만 맥박이 살아 있어." 기사는 소녀의 이제 갓 자라나기 시작한 듯한 소담한 가슴에 그 커 다란 손을 대고 세차게 압박했다가 풀었다가 하기를 반복하며 황급 히 시녀에게 외쳤다. '너는 빨리" 기사는 시녀를 보내 봐야 그녀의 걸음걸이로는 도저히 제시간에 닿 을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녀는 죽어 가고 있었다. 아마도 약을 너무 과하게 쓴 탓일 것이다. 한시가 급했다. '너는 여기에서 내가 돌아을 때까지 소녀의 심장이 뛰도록 도와라. 나는 가서 도움을 청하고 오겠다. " "예, 나으리," 기사는 정신없이 문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기사가 달려나가고 난 후 3분쯤 지났을까? 콧등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열심히 가슴을 지압하고 일던 시녀는 문득 죽은 듯이 누워 있 는 상대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죄수 는 쏜살과도 같이 손을 뻗쳐 왔다. 상대의 턱과 뒤통수를 잡고 획 돌 리자마자 우두둑 하는 기괴한 음향이 들려 왔다. 그리고 죄수는 자신 의 배 위에 쓰러져 버린 시녀를 옆으로 밀치면서 일어섰다. "휴우 " 소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침대 밑에 놓여 있는 자신의 작은 신 발을 신을 생각도 안 하고 곧장 밖으로 달려나갔다. 언제 기사가 돌아 올지 모른다. 미네르바에게 직접 보고를 하러 달려갔을 수도 있고,도 중에 다른 기사를 만나 그에게 연락을 청하고는 다시 돌아을 수도 있 었다. 소녀로서는 최대한 빨리 밖으로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소녀는 기사가 먹다가 놔둔 빵 한 덩어리와 큼직한 고깃조각 하나, 그리고 포도주 병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녀가 달려나가고 나서 한 5분 정도 지났을까? 마리아 지오그네가 사색이 다 되어 도착했다. 그녀는 마법사에게 이 기막힌 소식을 전달 받은 즉시 이곳으로 공간 이동해 왔던 것이다. 소녀는 코린트에 살아 있는 채로 넘겨줘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야만 드래곤의 진노를 코린 트에게로 떠 넘길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여기에서 죽는다면..그뒤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마리아 지오그네는 실내의 전경을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 다. 시녀는 목이 획 돌아간 채 엎어져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시녀 의 얼굴 표정으로 보아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최후의 순간까지도 모 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바로 이때 각 구획을 나누는 통로에 대기 중인 마법사에게 위급 사항을 전달하고 곧장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기사가 헐떡거리며 도착했다. 그 역시 눈 앞의 벌어진 상황을 보고 벌 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빠진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부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지 오그네는 음산하게 외쳤다. "빨리 죄수를 찾아라! 각 통로는 막혀 있다. 그러니 이 구획 내의 어 딘가에 숨어 있을 거다. 빨리 찾앗!" "옛,각하!" 후다닥 달려가는 기사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지오그네는 좀 더 인원 을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이 좋아서 한구획이지, 이곳은 엄청 나게 넓고 복잡했다. 결단코 기사 한 사람이 이곳 저곳 뒤져서 숨어 있는 쥐새끼를 찾아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멍청한 것! 죄수를 감시하는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지오그네는 곧장 당직실로 달려가서는 어젯밤을 새운 후 자고 있는 토린을 두들겨 깨워서 함께 통로 쪽으로 달려갔다. 통로에는 각 구획 을 차단하는 방어 거점이 있었고, 거기에 가면 비밀리에 신속하게 투 입할 수 있는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단의 기사나 방어 사령 부의 병사들을 추가로 뽑아서 수색 작전에 투입하지 못할 것도 없었 지만, 그렇게 하려면 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쾅!쾅!" 세차게 철문을 두들기자 작은 창이 열리며 두 개의 눈이 드러났다. 상대는 철문 앞에 씨근덕거리며 서 있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 보자마자 곧장 철문을 열었다. 부하의 보고를 받고 서둘러 달려나온 기사는 깍듯하게 인사를 건넨 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 한적 한 곳에서 하루에 두 번씩이나 만나기에는 지오그네의 신분이 너무 나 높았던 것이다. "어쩐 일이십니까?각하." "빨리 병사들을 풀어라." "예?하지만 보루의 병사들을 풀려면 그에 따른 절차와 허가서가 있 어야만 합니다. " 기사의 말에 지오그네는짜증스런 어조로 외쳤다. "내가 그걸 모르는 줄 아나? 경도 들었겠지?포로의 신상에 뭔가 일 이 벌어졌다는 것을 말이야." "예,각하. 저희 보루를 통해서 각하께 보고가 올라갔으니 그건 당연 하지요." "그 포로가 탈출했다. 죽은 척한 것은 연극이었다, 이 말이다.알겠 나?" 지오그네의 말에 기사는 기가막힌 듯 중얼거렸다. "그럴 수가" "경도 포로가 탈출하는 데 일조를 한 이상,전하의 귀에 이 사실이 들 어가기 전에 일을 조용히 마무리짓도록 도와 주는 것이 좋지 않을 까?" 기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포로가 각 구획을 나누고 있는 보루 를 파괴할 힘이 없는 한 탈출은 불가능했다. 또,그 어떤 곳의 보루도 파괴되었다는 연락을 들은 적이 없으니 물론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 을 것이다. 병사들을 대량으로 투입한다면 금방 찾아내겠지만,소수 의 병사들로 못찾을 것도 없었다. 그 말은 열심히 뒤진다면 상급자들 에게 보고가 들어가기 전에 지하에 남아 있는 인력만으로 포로를 찾 아낼 수도 있다는 말이었고,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각 보루에서 기사 한 명과 견인족 열 마리씩 차출하여 수색 작전에 투입해라. 남은 인원만으로도 경비 태세는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 것 이다. " 이곳 지하는 5개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그 다섯 구획은 여덟 개의 통로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여덟 개의 보 루가 있다는 말이었고,동원 가능한 인력은 기사 여덟 명과 견인족 80 마리였다. 그 정도면 구획 하나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 아 포로를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특히나 견인족들은 후 각이 뛰어나지 않던가?" "옛,각하." 지오그네는 자신과 함께 달려왔던 토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경은 보루에서 인력을 할당받는 즉시 로린스 경과 합류하여 수색을 시작하라!" "옛 !" "두 시간의 여유를 주겠다. 그게 내가 경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시 간 여유다. 그 안에 찾아낸다면 이번 일은 내 손에서 무마시킬 수 있 다. 알겠는가?" "옛,각하." "이런 젠장?' 다크는 한 모금 가득 포도주를 들이킨 후 욕설을 내뱉었다. 병을 흔 들어 보고는 속에 액체가 들어 있는 것만 확인하고 가져왔는데, 이게 물이 아니고 포도주였던 것이다.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할 겨 를도 없었던 탓이었다. "끄윽!완전히 빈 속에 마셨더니 술기운이 오르는데?가만, 이럴때가 아니지. 시간이 없어." 다크는 고기를 한입 크게 베어물고 우물거리면서 달려가기 시작했 다. 발에는 아무것도 신지 않았기에 그녀의 발걸음 소리는 거의 들리 지도 않았다. "무슨 건물이 이렇게 커?하기야 대제국 크루마의 황궁이니 클 만도 하겠지." 한동안 달려왔는데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것이 거의 없었다. 마차 두 대는 족히 지나갈 수 있을 만한 넓은 복도, 그리고 또 마차 한 대는 지나갈 만한 복도,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중무장한 병사 두세 명이 통 과할 수 있는 복도들이 층층이 얽혀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방들이 그 안에 있었다.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지 넓은 복도들을 제외하고는 횃불이 놓여 있지 않았기에 전체적으로 컴컴했다. 오히려 그 편이 다크를 안심시 켰다. 몸을 숨기기에는 제격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횃불을 하나 뽑아들고 달려가다가 어떤 방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 곳에 서 묵직한 촛대 한 개를 주워 들었고,촛대가 놓여 있던 가구의 서랍 을 뒤져서 부싯돌도 찾아냈다. 그런 후 횃불은 버렸다. 횃불이 이런 곳에서 움직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들킬 확 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다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기를 끌어올릴 수가 없었고,그로 인해 어둠속에서 보통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시력밖에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사용한 방법이 이것이다. "탁!" 부싯돌이 섬광을 발하는 순간 주변의 지리를 머릿속에 기억한다. 그런 후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다크는 한 번 요령이 생기자 그 다음 부터는 달려가면서 부싯돌을 한 번씩 탁탁 쳤다. 다크는 한참을 달려가다가 막다른 벽에 부딪쳤다. 여기까지는 연결 되는 크고 작은 통로가 있었지만,이 부분에서 단절되어 있었다. "이건 또뭐지?아하! 그렇군. 건물의 외벽이야." 다크는 촛대로 벽면을 슬쩍 두들겨 봤다. "툭툭." 들려 오는 소리는 아주 둔탁했다. 속이 꽉 차 있다는 증거였다. 그 리고 이 벽의 두께가 매우 두껍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거 1,2 미터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하기야 타이탄이 설쳐대니 까 두꺼울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어딘가에 통로가 있을 거야.' 다크는 벽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 중한 강철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힘껏 그것을 밀어 봤지만 꼼 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힘이 모자라거나, 아니면 문이 잠겨있다는 증거였다. "제기랄!" 그녀는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또 다른 통로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열려 있는 통로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 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복도의 저편에서 불빛이 비쳐 왔던 것이다. 그 불빛은 움직이고 있었고,두런두런 말소 리까지 들려 오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벽 쪽에 바싹 붙어서 숨었 다.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 아니 괴물들 같았다. 사람의 몸통이었 지만 머리는 꼭 커다란 개대가리 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한 번씩 바닥에 엎드려 킁킁대기도 하면서 천천히 이동해 오고 있었다. 그러 면서 통로 주변에 있는 모든 문을 열면서 철저하게 내부를 수색하고 있었다. "최악의 사태군." 다크는 서둘러서 빛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슬그머니 달려가기 시작 했다. 다크가 몸을 숨긴 후, 드디어 수색대가 지척에까지 도착했다. 잠시 바닥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본 견인족은 고개를 들면서 말했 다. "냄새를 찾았습니다!" "어느 쪽이냐?" "이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 " 견인족 사내가 가리킨 곳은 통로가 있는 방향이었다. 견인족의 보 고를 들은 기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쪽으로 가봐야 통로는 굳게 잠 겨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이쪽을수색해 봐, 그리고 너는 저쪽!" 기사는 양쪽엔 있는 건물에 또다시 견인족을 한 마리씩 보내서 수 색하게 하고는 냄새를 따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10여 미터쯤 전진했을까? "깨갱!" 어디선가 뭔가에 두들겨 맞는 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여기서 말한 개소리는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당치도 않은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개가 말하는 소리를 말함이다. "저쪽이닷!" 기사와 견인족들은 그쪽으로 잽싸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마에 커다란 혹이 난 채 기절해 있는 견인족 한 마 리뿐이었다. 그리고 그 견인족이 가지고 있던 무기도 사라진 상태였 다. "이런 젠장할!끝까지 말썽을부리는군. 빨리 흩어져서 찾아라. 멀리 는 가지 못했을 거다. " "옛 !" 기사는 재빨리 견인족들을 지휘하여 통로를 차단한후 샅샅이 뒤졌 지만 소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잠깐 사이에 마나를 운용하지도 못하 면서 어떻게 도망쳤을까?그 소녀의 가냘픈 체구를 생각했을 때,도저 히 상상할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소녀를 찾을수 없다는 보고가 날 아오는 가운데 기사는 처음부터 뭔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녀에 대한 예상이 잘못된 것일까?가냘픈 소녀가 달리 는 속도라면 절대로 포위망을 벗어날수 없을 텐데. 그녀는 대단한 검 객이라는 말을들었다. 그런데도 얕잡아보고 시작을 했으니." 수색을 끝마치고 또 다른 지시를 듣기 위해 모여든 견인족들에게 기사는 마음을 정한 듯 분명한 어조로 외쳤다. "도망치는 상대를 소녀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상대를 소녀가 아니라 매우 잘 단련된 검객이라고 생각해라. 그녀의 체력이나 속도,근력 그 모든 것을 우수한 검객에 맞춰 행동하라는 말이다. 알겠느냐?" "옛!" "너희 둘은 다른 수색조들에게도 이 말을 전해라. 마나를 쓰지 못한 다고 해서 그녀의 힘과 속도를 가냘픈 소녀쯤으로 지레짐작하지 말 라고 말이다. " "옛!" 견인족 둘이 달려가고 난 후,기사는 또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이제 는 한층 더 조심스럽게. "젠장할! 더럽게 무겁군." 다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투덜거렸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긴 했지만,그래도 상대가 포위망을 갖추기 전에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검까지 빼앗은 것이다. 자신의 손에 검이 들려 있는 이상 더 이상 겁나는 존재는 있을 수 없었다. 비록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닐지라 도. 어느 정도 숨을 고른 후 다크는 왼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검을 단단히 쥐었다. 검이 조금 무거워서 힘들기는 했 지만,그녀는 자신의 오랜 숙련도를 믿고 있었다. 검을 높이 들어올린 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내리찍었다. "팡!" 검은 곧장 팔찌를 향해 떨어졌지만, 팔찌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뭔가의 힘에 가로막혀 불꽃을 번쩍이며 튕겨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지독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으갸갸갹!" 한참 동안 몸에 찌릿찌릿한 전기가 통하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 었던 그녀는 곧이어 고통이 멈추자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검으 로 힘껏 내리찍었는데도 흠집도 없었을 뿐더러, 온몸에 쩌릿찌릿한 충격까지 안겨 주어 놀랐던 것이다. "젠장!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하지만 이것은 다크였으니까 그냥 찌릿찌릿하고 끝난 것이지,보통 사람이었다면 감전에 의한 충격으로 기절에까지 이르게 하는 보호 장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과거 블루 드래곤 카드리안의 뇌전을 자 신의 마나로 끌어들여 흡수해 버린 전례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에 게 흘러들었던 강력한 전기 충격의 대부분은 상당 부분 뇌전의 기운 이 모여 있는 단전으로 끌려들어가 버렸기에,그녀가 직접적으로 받 은 충격은 크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이놈의 구속 도구들을 풀어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 명확해 졌다. 있다면 길은 한 가지, 이곳을 탈출하여 아르티어스에게 부탁하 는 것뿐이다. 아르티어스라면 손쉽게 이것을 풀어 줄수 있을 것이다. "포위망은 어떻게 되어 가나?" "워낙 쥐새끼처럼 잘 도망치기에 이번에는 아예 폭넓게 둘러쌌습니 다. " "포위망이 약하지 않을까?" "방금 전에 마지막 병력이 합류했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 아무리 넓은 지하 공간이라고 해도,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각 보 루에서 증원병들이 차례 차례 도착하여 순차적으로 투입되었으므로 처음에는 잡기 힘들었지만,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었다. 이제 포 위 인원이 완전히 다 도착한 지금, 기사 아홉 명과 그들의 지휘를 받 는 견인족 80마리가 포위망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좋아. 마지막 병력까지 합류했다면 이제부터 포위망을좁혀 들어가 라고 이르게." "예." "독 안에 든 쥐이기는 하지만, 조심하라고 해!언제 물지 모르니까." 제 2근위대의 출현 "헉헉헉" 혹시나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까 해서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가빠 오고 있었다. 다크는 이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멈춰서서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숨이 가빠 온 것이 몇 년만이었던가? 이 여자애의 육체로 뒤바뀌었을 때,한동안 나약한 육체로 인해 고통을 받았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힘을 되찾았 을 때, 그때 이후로 그녀는 땀 한 방울 흘린 적이 없었다. 두 번에 걸쳐 환골탈태를 거친 강력한 육체의 힘은 똑같은 신체 조건을 가진 계집 아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고, 거기에다가 마나까지 효율적으 로 이용하면 순간적으로는 수십 배 이상의 힘까지 낼 수 있었다. 하지 만 어이없게도 갑자기 마나를 쓸 수 없게 된 지금, 너무나 처량한 상 태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헉헉, 젠장! 한동안 게으름을 부렸더니 그 덕을 톡톡히 보는군. 헉 헉." 다크는 아무리 뒤져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런 때는 아직까지 포위망이 느슨할 때 뚫고 나가는 것이 좋 을 것이다. 포위망이 좁혀지기 시작한다면 그 두께는 더욱 두꺼워질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그녀는 살금살금 다가가서 놈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 앞쪽의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실내라서 바람이 안 불기에 바람 때문에 위치 선정에 신경쓰는 성가신 작업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차근차근 숨을 고르며 상대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아마도 포위망이 완전해지면 놈들은 앞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한동안 기다리자 삐이이익!하는 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 고 곧이어 여기저기서 삑삑거리는 응답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저 앞 쪽에 위치한 똥개들도 그것에 답하듯 뭔가를 입에 물고 삐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내였기에 그들은 복도를 중심으로 천천히 앞으로 이동해 들어가 면서 문을 만나면 두세 마리가 이 그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밖 에 대기하고 있는 똥개들은 실내의 수색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대기 했다. 괜히 수색조가나오기 전에 앞으로 전진하게 되면 또 다른 문을 만나게 될 것이고,또다시 병력을 분산해서 그 안에 투입해야 하지 않 겠나?그들은 최대한 많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 이다. 점차 그들과 다크와의 거리는 좁아지기 시작했다. 상대와의 거리가 약 10미터 정도로 좁아졌을 때,그들은 또 다른 문을 만났고 세 마리 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다크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것은 일곱 마리. 처음에 서너 마리씩 보일 때 치고박는 편이 좋았을 텐데,괜히 탈출할 곳을 찾는다고 싸우는 것을 회피한 것이 후회스러 웠다. 다크는 똥개들이 실내를 뒤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대충 측정해 두었기에 잠시 더 기다려서 수색조가 실내로 깊숙이 들어가기를 기 다렸다가 돌진해 들어갔다. "삑삑삐이이익 ! 삑삑삐이이익!" 제일 뒤쪽에 서 있던 견인족이 동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신호를 보내는 순간, 다크는 상대의 지척까지 거리를 좁혔다. 남은 똥개들도 저마다 검을 뽑아들고 상대를 잡기 위한 준비 태세를 끝낸 상태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크에게 매우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똥개들 은 포로를 무조건 살아 있는 채로 잡아 올 것을 명령받았지만, 다크는 똥개들을 살려 주건, 죽이건, 보신탕을 끓여 먹건 마음대로 할 수 있 다는 단 한가지 사실이었다. 아무리 마나를 쓰지 못한다는 제약이 가해졌다고 하더라도, 일단 달릴 수 있고,뛸 수 있고, 팔을 휘두를수 있고, 또손에 검을 쥘 수 있 는 한 다크를 겨우 똥개 몇 마리가 사로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상대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견인족들은 매우 큰 체 구를 가지고 있었고, 또 두툼한 근육질을 가지고 있는 아주 강인한 족 속이었다. 묘인족이나 호인족등 고양이과 수인족의 경우,덩치와 힘에 다소차이는 있지만,고양이 특유의 유연하면서도 매끄러운 몸놀림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견인족 같은 개과는 그런 유연한 몸놀림보다는 강력한 힘과 초인적인 맷집으로 승부하는 족속들이었다. 정면으로 맞부딪쳤을 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미꾸라지처럼 파고든 그녀를 잡는 데는 그러한 그들의 특성이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했다. 상대가 '죽여 주쇼.' 하면서 저돌적으로 달려들었지만, 그들은 그 순간에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강한 팔힘으로 검을 휘두르면 소녀의 몸은 그대로 두 토막이 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 한순간의 망설임이 끝났을 때 요란한 개잡는 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컹!" "캥!" 두 마리의 견인족이 다크의 검에 치명상을 입은 후에야 그들도 살 기 위해서는 상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 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상대에게 검을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동료들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데다가 상대는 미꾸라지 같은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동료들을 방패막이로 쓰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놈을 '생포' 하라는 명령이었다. 거기다가 세 마리는 실내를 수색하러 들어갔기에 동료들과의 합류 가 아주 조금 늦었다. 수색조 세 마리가 도착했을때는 이미 두마리가 확실히 저 세상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는 상태였고, 네 마리는 크고 작은 부상으로 완전한 제실력을 낼 수 없었다. 거기에 셋이 힘을 합해 봐야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기는 힘들었다. 또 이곳 자체가 기나 긴 복도를 통한 미로의 구조였기에 저쪽에 있는 아군들이 합류해 들 어오는데도 시간이 꽤나 필요했다. "히힛! 아주 좋은 것을 발견했군. 그렇다면 탈출은 식은 죽 먹기겠 어." 다크가 방어는 완전히 무시하고 왕성한 공격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처음 부딪칠 때 똥개들이 과감하게 검을 휘두르지 못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싸우면 싸울수록 확실하 게 전달되었다. 상대는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설혹 자 신들의 숨이 끊어진다하더라도. 다크는 모든 똥개들을 처치한 후에 싸우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다시금 암흑 속으로 달려갔다. "아차! 늦었군. " 뒤늦게 달려온 기사들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 는 견인족들의 전투 능력은 대단했다. 그렇기에 충분히 그녀를 붙잡 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도착해 놓고 보니 이미 포위망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군요. 견인족 열 마리라면 웬만한 기사들도 막을 수 없 는데, 그녀는 지금 마나가 봉인되어 기사급의 파워를 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하겠나?" 그 중에 계급이 높은 듯한 기사가 우선 지시를 내렸다. 일단 추격도 중요했지만,죽어 가는 견인족들을 살리는 것도 중요했다. 견인족 한 마리 한 마리가 얼마 짜리인데, 그냥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 리고 황궁 내에도 견인족은 통틀어 200마리도 안 된다. 그런 그들의 숫자가 줄어든 이유를 위에 보고해야만 할 것이고,그에 대한 문책 또 한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이래저래 입맛이 쓴 생포 작전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놈은 빨리 보루로 호송해서 치료를 받게 해라. 그리 고 나머지는 그놈을 추격한다. " "옛!" "병력을 좀 더 지원해 주십시오." "뭐라고?" 지오그네는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오기에 생포에 성공했다는 보고 를 올리려고 왔는 줄 알았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저따위 소리나 지 껄이고 있다니, 정말 저 기사놈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상관의 눈초리가 아주 매서워지는 것을 포착한 기사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견인족 30마리가 당했습니다. " "뭣 ?" "지하가 너무 넓어서 포위망을 구축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거기에다 가 칼부림까지 해대는 상대를 겨우 그 인원으로 생포해 오라는 것은 너무 무리하신 명령입니다. " "이런 멍청한 녀석들! 겨우 힘없는 계집애 하나 못잡아 온단 말이 냐?" 상관의 질책에 기사는 묵묵부답으로 저항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네가 가서 잡아보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 꼴을 보며 지오그네는 화 가 머리끝까지 뻗었다. 이렇게도 쓸 만한놈이 없다니. 그녀는 하 마터면 자신이 내려가겠다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자신이 내려가 봐야 바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 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탁 트인 공간도 아니고, 미로와 같이 복잡한 곳에 자신이 내려가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견인족도 죽어 나가 는 판에 공격 속도가 느린 마법사가 내려가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멀찍이서 막강한 마법 공격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 지하 궁전을 박살내 놨다는 것이 들통나면 그녀를 잡고, 못잡고 간에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지. 전하께 말씀드리는 수밖에. 경은 밑에 내려가서 일단 수색 작전을 잠시 중지하고 현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라고 전하게." "옛,각하." "포로가 탈출했다고?" "예, 전하. 긴급히 병력을 투입했사오나 견인족 30여 마리만 사상을 당했사옵니다. " 지오그네는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보고 했다. 미네르바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지시를 내렸다. 예상 외로 그녀의 목소리는 별로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제2근위대를 비밀리에 투입해라. 그녀가 아무리 마나를 쓰지 못한 다고해도,생포하는 것은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닐 것이야." 미네르바는 일부러 생포라는 단어에다가 힘을 줘서 말했다. 미네르 바는 이미 일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짐작했던 것이다. 견인족의 전 투력은 매우 강력하다. 기사에는 못미치겠지만, 그래도 수련 기사 정 도의 전투력은 지니고 있는 강인한 종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 리 그렇다고 해도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생포하라는 명령이 떨 어진 이상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예 죽여 버리겠다고 덤비지 않는 한, 잡기 힘든 상대임을 미네르바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위대 기사들에게 전해라. 포로의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 마 음껏 싸우라고 말이야. 대신 빨리 잡아서 끌고오라고해." "하지만 전하, 그렇게 지시했다가 큰 상처라도 입히면 어떻게 하옵 니까?" 다급한 지오그네의 조언에 미네르바는 의미 있는 미소를 씩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 "그때는 자네가 목숨을 걸고 살려내야겠지. 안 그런가?" "예,전하." 지오그네는 미네르바의 말에 얼굴색이 새하얗게 탈색되었지만, 일 단 상관의 물음에 대답은 했다. 너무나도 심한 상처라면 자신의 마법 실력으로 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일단 대답을 한 이 유는 근위대에 명령을 전달하는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휴식 중이었던 제2근위대에 비상 소집령이 비밀리에 내 려지고, 기사들이 하나 둘씩 복귀하기 시작했다. 비번이라서 술집에 처박혀 있던 인물들이나, 오랜만에 애인이나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 을 보내던 인물들도 있었고,또 친구들과 취미 생활을 즐기던 인물들 도 있었기에 모든 인원을 소집해 들이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무슨 일이야?비밀 소집령이 내려지다니." "글쎄?나도 잘 모르겠는걸?" "마법사들이 빠진 것을 보니 어디에 파견 가는 것은 아닌 것 같고,기 사들만 모아서 뭐하자는 거지?" 나지막한 어조로 서로가 아는 정보를 교환하는 기사들. 제2근위대 의 오너급 기사 20명과 정찰조 20명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기다리라 는 지시뿐이었으니, 기다림에 지쳐 저마다 수군댈 만도 했다. 그것도 비밀리에 소집한 것이 아닌가? 모두들 갑자기 소집되어 와서 그런지 행색도 가지각색이었다. 사냥복을 입고 있는 기사부터 시작해서, 데 이트 중이었는지 연미복으로 정장을 한 인물들, 그리고 일부는 입에 서 술냄새까지 팍팍 풍기고 있었다. 마지막 기사가 도착한 후에 지오그네가 슬며시 등장했다. 그리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들 잡담을 멈췄다. 지오그네는 득실대 는 엘프들 덕분에 크루마 궁정 마법사들 중에서 서열이 그렇게 높지 못했지만, 총사령관이자 근위 기사단 단장인 미네르바의 심복이었기 에 그녀를 통해 종종 지시가 내려졌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긴급한 사안이 발생했기에 모처럼 휴식을 즐기고 있던 경 들을 불러내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 지오그네는 기사들 중에서 제일 앞열에 앉아 있는브랜트 베리어스 후작을 바라보며 떨떠름한 어조로 경칭을 사용해 브리핑을 시작했 다. 브랜트는 드래곤 슬레이어였던 타론이 전사한 후 제2근위대를 이 끌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부하에게 집합 대상에 그를 빼라고 지시 했었는데,아마도 근위 기사들 중 누군가에게 주워 듣고 따라온 모양 이었다. 제2근위대 대장이라면 그녀가 아무리 영광스런 드래곤 슬레 이어에다가 궁정 마법사라 하더라도 계급에서 밀렸다. 그 때문에 그 를 뺀 것이었는데, 상대는 이미 와버렸으니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룻 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 가란다고 갈사람도 아니었고. "긴급한 사안이란게 뭔가?" 제2근위대 대장인 브랜트는 오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툭 질문을 던졌다. 이곳에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의 행 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오그네의 얼굴이 조금 더 찌그러들었다. 기 사들에게 일장 훈시를 내린 후 투입 명령을 내릴 작정이었는데, 처음 부터 계획이 틀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감 중이던 포로가 탈출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지하 궁전에 숨 어있는 그 포로를 생포해 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 지오그네는 '생포'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말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다시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수감 중이던 포로라면 지하 감옥에 있 었을 텐데 어떻게 지하 궁전까지 숨어들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다가 지하 궁전의 각 통로에 설치된 보루는 1,2근위대가 교대로 지키고 있 지 않던가?포로가 그 보루를 뚫고 통과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조용히 해라. 여기가 선술집 인줄 아느냐?" 브랜트는 뒤를 슬쩍 보면서 짜증스레 외쳤다. 그도 부하들처럼 오 랜만의 휴식이 물거품이 된 상태라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여기 와서 설명을 들어 보니 자신이 올 일도 아닌 것이다. 거 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겨우 탈출한 포로 한 명 잡자고 제2근위대 전 체를 소환하다니! 자신이 지휘하는 제2근위대의 실력을 뭐로 보는 것 인가?그 때문에 그는 더욱 기분이 안 좋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브랜 트는 지오그네를 빤히 올려다 보며 말했다. "공작 전하의 명령서는 가지고 있겠지?" 브랜트는 그녀가 감히 명령서도 없이 제2근위대를 소환할 수가 없 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일부러 명령서 제시를 요구했다. 제2근위대 대장인 자신이 미네르바가 아닌 마법사 따위에게 지시를 받을 이유 가 없다는 것을 지오그네에게 명확하게 인지시키기 위한 행동이었 다. 상대의 속셈을 잘 아는 지오그네는 소태 씹은 얼굴로 서류를 내밀 었다. "여기 있습니다,각하." 브랜트는 앉은 채로 서류를 받아 들고는 꼼꼼히 읽어 봤다. 읽어 보 니 지오그네의 말과는 약간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그것이 지오그네 의 고의인지 아니면 실수인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꽤나 마음 에 드는 차이점이었다. 브랜트는 살짝 고개를 뒤로 돌려 부하들을 향 해 호기롭게 외쳤다. "공작 전하께서는 포로가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 조금이 라도 저항하면 반쯤 죽여 놔." 안 그래도 소중한 휴식을 박탈당한 부하들은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옛 !" "그리고 그 망할 포로 녀석을 최대한 빨리 내 앞에 대령해라. 알겠 나?" "옛!각하!" "그놈을 생포해 오는 놈에게 금화 20골드의 포상금과 선술집에서 동 료들에게 술을 살 수 있는 영광을 주겠다. " 겨우 27골드 받아서 이 술고래들에게 술을 사 준다면 결국 포상금 은 얼마 남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은 대장의 말을 듣고 환호 했다. 그렇게 작은 포상금을 제시한 것을 보면 휴식 시간을 날려 버린 부하들을 위로하기 위한 이 술자리의 술값을 대장이 내면서도 그 영 광을 잡은 사람에게 돌리는 점이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우와와앗!" 근위대 기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앞다투어 우르르르 눈에 살기를 띤 채 지하 궁전 쪽으로 달려갔다. 지오그네는 '생포' 를 원했지만, 자 신들의 대장은 '반쯤 죽여놓기' 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 말을 들어야 옳겠는가? 당연히 자신들의 대장 말을 들어야 한 다. 또, 안그래도 열받는 김에 그들은 화풀이할 사냥감이 하나 생겼다 고 좋아서 달려간 것이다. 그것을 보며 지오그네의 얼굴색은 새하얗 게 탈색되었다. 이제 포로 체포 작전의 지휘권은 자신의 손을 떠난 것 이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믿기에 지하 궁전에 도착하자마자 견인 족 한 마리씩을 거느리고 흩어졌다. 그들은 견인족의 전투력이 아닌 그들의 코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기 사가 50여 명이나 투입되었기에 토끼 사냥은 맹렬한 가속도를 붙이 며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맹렬히 뒤지는 상황에서 아무리 지하 공간이 넓다고 하지만, 다크가 계속적으로 몸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캉!" 검과 검이 부딪치며 작은 불꽃을 튕겼다. 다크가 숨어 있다가 일격 을 날렸지만, 상대 또한 노련한 기사답게 여유 있게 검으로 막았다. 이미 견인족이 냄새를 맡고 상대가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 기에 충분히 대비를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쥐새끼 같으니라고.. 여기 숨어 있었군." 다크는 기습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재빨리 뒤로 물러서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기사는 이제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포로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 밖에서는 견인족이 동료를 불러모으기 위해 불어대는 호각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왔다. "이거 순꼬맹이 아냐?" 기사는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이런 계집애를 잡기 위해 제2근위대 를 총출동시키다니, 얼마나 윗사람들이 제2근위대를 만만하게 봤으면 이딴 일을 시키겠느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인 원을 투입한 것을 보면 이 꼬맹이가 뭔가 한 가닥 하는지도 알 수 없 었다. 그래서 기사는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한 공격을 슬쩍 던졌 다. 기사의 검이 아름다운 은빛 궤적을 남기며 다크의 눈 앞을 통과했 다. 물론 처음부터 다크의 눈이나 기타 다른 곳을 공격할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기선 제압 및 상대의 대응 행동을 관찰하기 위한 허위 공 격이었다. 하지만 그 기사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이런 검술 대결은 다크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상대의 속셈을 빤히 아는 이 음흉하신 다크 어르 신은 상대의 검이 눈 앞을 통과하기를 기다렸다가 그제서야 그것을 눈치챈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폴짝 뒤로 물러섰다. 그것을 본 기사는 이 꼬맹이가 진짜로 검술에 있어서는 맹탕이라고 단정지어 버렸다. 자신의 검이 지나간 다음에야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더 이 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기사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일격에 꼬맹 이를 제압하겠다는 듯 큰 기술을 휘둘러 왔다. 그리고 노련한 다크의 숙련된 눈은그 기술의 숨겨진 헛점을 재빨리 찾아냈다. 하지만 다크는 상대의 헛점을 눈으로는 찾아냈지만, 자신의 육체가 그 헛점을 재빨리 공격할 정도로 민첩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그렇기에 그녀는 일부러 허둥거리면서 엉뚱한 방향을 막는 척했 다. 기사는 자신의 검이 흘러가는 방향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다 른 방향으로 느지막히 검을 움직이는 소녀를 완전히 얕잡아보고는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하고 끝까지 검술을 밀어붙이 려고들었다. 목표는 지금 흘러가는 검의 방향과는 달리 상대의 오른쪽 어깨였 다. 어깨에 검상을 입으면 더 이상 반항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취한 공격이었다. 기사의 검이 아주 기괴한 곡선을 그리며 다크의 어 깨를 관통하려는그 순간 다크의 어깨가 아래로 푹 꺼졌다. 동시에 여 태껏 기사의 검로도 찾지 못하고 허둥대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의 검 은 어느 새 조금 더 움직여 상대의 오른편 어깨를 꿰뚫고 있었다. "크윽!" 요란하게 호각을 불며 동료들을 모으고 있던 견인족은 활짝 열린 문을 통해 기사가 검상을 입고 비틀비틀 물러서는 것을 보고는 기사 를 구하기 위해 황급히 돌진해 들어왔다. 삽시간에 검을 뽑아들며 맹 렬한 기세로 돌진해 오는 견인족의 위용은 과연 대단했다. 하지만 다 크에게 그것은 불을 쫓아 뛰어드는 불나방의 행동과 다를 것 없게 느 껴졌다. 다크는 일부러 견인족이 휘두르는 검 끝에 자신의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생포'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견인족은 놀라서 황급히 검을 뒤로 뺐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순간 다크의 검이 견 인족의 가슴을 관통해서 심장 깊숙이 꿰뚫고 들어갔던 것이다. "이 정도는 식은죽 먹기지. 혜헤헷!" 다크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꺽꺽거리고 있는 견인족의 몸통을 힘껏 차서 뒤로 밀어버리며 검을 뽑아냈다. 다크의 검이 뽑힌 곳에서는 분수와도 같이 피가 솟구쳐 올랐다. 다크는 피묻 은 검을 들고 살기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뒤로 돌아섰다. 거기에는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덤비다가 오히려 깊은 검상을 입고 허우적거리는 기사가 경악한 듯 두 눈을 부릅뜨고는 다크를 노려보 고 있었다. 방금 전에 견인족이 호각을 불기는 했지만, 또 다른 견인 족이 이곳까지 오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크는 그것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는지라, 이 기사놈까지 해치운 후에 달아나기 로 작정했다. "잠깐!" 다크는 갑자기 들려 온 또 하나의 목소리에 멈칫 해서는 뒤로 슬그 머니 돌아봤다. 그녀의 등 뒤에는 또 다른 기사가 이미 도착해 있었 다. 그 녀석 또한 견인족 한 마리를 뒤에 달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견 인족들끼리 패거리를 지어서 다녔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잘 안 통한 다고 생각했는지 기사들이 투입된 것이다. 다크는 괜히 여기에서 지 체했다고 후회하며 다시금 검을 앞으로 들이밀어 방어 자세를 취했 다. 술냄새를 풍기면서 워렌은 중얼거렸다. 워렌은 일부러 검을 슬슬 돌리면서 음흉한 어조로 말했다. "솜털도 벗겨지지 않은 계집애를 얕잡아보고 덤비다가 상처를 입다 니. 아직도 미숙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한테는그게 통하지 않지. 나는 밀러처럼 몸과 마음이 약하지 않거든." 워렌은 빈정거리듯 부드럽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거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반항하면 반쯤죽여 놓을 거야. 어떻게 할 거냐?빨리 선택햇!" 다크는 바짝 긴장하며 검을 중단으로 올린 후 상대가 먼저 공격하 기를 기다렸다. 저런 뛰어난 놈을 상대로 선제 공격을 가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공격하는 틈을 노린다면 방금 전 밀러라 는 놈이 당했듯이 가능성은 충분히,아니 넘치도록 있었다. 미숙하다는 질책을 들은 밀러는 도와 주지 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래도 저 포로를 상대할 상관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주지 않을수 없었다. 여차하면 부상자가 또 한 명 더 생길 것은 자 명한 노릇이 아닌가? 양심이 아무래도 간질간질했던 밀러는 퉁명스 레 말했다. "워렌 경, 저 계집을 조심하십시오. 보통 실력이 아닙니다. "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워렌은 상대가 저항할 의사를 확실히 해 오자, 밀러의 조언에 퉁명 스레 대꾸한 것과는 달리 매우 조심스레 상대하기 시작했다. 밀러도 수준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듀에이트급이었다. 그런 그가 당한 것을 보면 뭔가 숨겨 놓은 한 수가 있는 듯했다. 워렌이 검을 처음 날린 방향도 밀러처림 상대의 얼굴이었다. 원래 이렇게 반반한 계집애들의 경우 자신의 얼굴을 끔찍하게 아끼니까 선택한 목표였다. 워렌의 검이 날아간 순간, 다크의 검은 살짝 위로 들려졌다. 저 옆에 있는 기사놈이 조언을 해 줬으니 이번에는 연약한 척 속이기 힘들 것이 분명했기에 다크는 처음부터 대비에 들어간 것 이다. 워렌은 그대로 검을 그었을 때 상대의 얼굴도 절단이 나겠지만, 동시에 자신의 손목도 함께 날아간다는 것을 즉각 눈치챘다. 그렇다 고 검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맹렬히 휘두르는 기세 때문에 멈추기도 쉽 지 않으려니와 그 동안에 상대의 검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수 없는 노 릇이 아닌가? 워렌은 검을 계속 휘두르면서 손을 살짝 안으로 당겼다. 그에 따라 워렌의 검이 그리고 있던 궤도 또한 약간 수정되었다. 이번 목표는 상 대가 쥐고있는 검의 측면이었다. 이때 다크는 살짝 손목을 움직여 검 신을 옆으로 돌렸다. 그와 동시에 '챙' 하는 소리가 울렸다. 워렌의 롱 소드는 의도와 달리 미들 소드를 박살내지 못하고 엇비슷하게 부딪 치며 튕겨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크의 검이 옆으로 누운 채 앞으로 쑥 밀고 들어왔다. "헉 !" 워렌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잘못하면 배에 구멍이 뚫릴 뻔한 것이다. "이런 망할 계집애가?" 콩알만한 계집애에게 조롱을 당했다는 생각에 안 그래도 술취해서 조금 벌겋던 얼굴이 더욱 벌개졌다. 그리고 옆에는 방금 전에 그가 미 숙하다고 욕까지 한 밀러가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신경질 난 김에 다짜고짜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뒤쪽에서 그들의 격투를 지켜보던 견인족이 동료들을 부르기 위해 건물 밖으로 달려나간 후 호각을 불기 시작했다. "삑삑삐이이 익 ! 삑삑삐이이익 !" 견인족이 호각을 얼마 불지도 않아 기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밀러 를 안내하던 견인족이 이미 호각을 불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다 투어 실내로 들어선 후 안의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실내의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견인족이 큰대자로 뻗어 있었고, 밀러는 동료들을 보고는 고통을 참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걸어나왔다. 그의 어깨에서 는 피가 샘솟듯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실내의 중앙에서는 밀 러의 신호를 듣고 제일 먼저 달려온 워렌과 포로 사이의 대결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 었다. 워렌은 상당한 검술 실력을 지닌 오너급 그래듀에이트였다. 그런 그가 한낱 계집애를 상대로 광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그의 얼굴 한쪽에는 살짝 칼에 긁힌 상처가 나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고, 옷의 여기저기가 조금씩 잘려 있었다. 아무리 그가 술에 취해 있다고 하지만, 동료들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으아아아! 죽여 버릴 테닷!" 자신이 아무리 검을 휘둘러대도 상대의 검은 정말 머리 꼭지가 돌 정도로 얄밉게 움직이며 방어와 공격을 병행하고 있었다. 검을 휘두 르는 속도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으니 조금씩 살짝살짝 움직이 면서 워렌의 공격을 모두 무위로 돌리고 있었다. 워렌 또한 대단한 실 력자니만큼, 상대 검끝의 움직임을 세심히 관찰하고 있었고 상대의 움직임에 대항하여 휘둘러대다 보니 상대는 거의 검을 안 움직이는 데 비해, 워렌은 아예 혼자서 칼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상대의 검이 이때라는 듯 그 틈을 노리고 들 어와서 작은 상처들을 안겨 줬다. 여태껏 벌여 놓은 자신의 추태(?)가 수많은 동료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드디어 워렌은 이성을 잃었다. 이제 계집을 사로잡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어졌다. 자신에게 이런 치욕을 선사한 계집을 토막토 막 잘라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워렌의 롱소드에 한껏 마나가 주입되 자 제법 두터운 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동치듯 떨리며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워렌이 무슨 짓을 하려고 드는지 눈치 챈 동료들은 기절할듯이 놀라서 외쳤다. 포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생 포해야 하는 것이다. 저런 기세라면 생포는 고사하고 온전한 시체도 건지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워렌!" 하지만 이미 분노로 인해 이성을 상실한 워렌에게 그딴 소리는 들 려 오지도 않았다. 이 좁은 실내에서 절정의 검술을 사용한다면 사방 으로 뿜어나가는 검기 때문에 건물이 내려앉을 수도 있었고, 사방에 있는 동료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 로를 생포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검법이 끝났을 때쯤 그의 눈 앞에는 아마도 조각조각 잘라진 고깃덩이만이 존재할 테니까 말이 다. 하지만 분노에 눈이 먼 그에게 그런 하찮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 다. 다크는 상대의 눈, 어깨와 팔, 그리고 손목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 것들이 움직이고 나서야 검은 따라서 움직이니까 검의 움직임은 생 각할 필요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상대방의 검이 움직이는 1미터라 는 간격까지 생각해야 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 다. 상대가 검기나 검강을 쓰려고 작정한 이상, 간격을 유지한다는 것 이 아무런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검술의 진로에 따라 사방으로 검기가 뿌려지는 가운데, 다크는 상 대의 검이 움직이기 전에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전과 달라진 점이 있 다면 검의 예상 경로에서 살짝 뒤로 몸을 빼던 것이, 이번에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야 했다. 왜냐 하면 그쪽으로 검기의 덩어리가 지나가니 까 말이다. 그런 후 다크는 여태껏 그렇게 해 왔듯 검술의 고수만이 가지고 있는 예리한 안목으로 상대의 빈틈을 찾아내어 주저하지 않 고 거기에 검을 쑤셔넣었다. 이렇듯 적이 고급 검술을 쓰건 그렇지 않건 그를 상대함에 있어서 다크에게는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신 그녀를 상대하고 있는 워렌에게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냥 휘두르는 상황이었다 면 상대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었겠지만, 최대한 마나를 끌어올려 고급 검법을 가동하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틀렸다. 상대의 검이 쑥 들어오는 것을 보며, 그에게 남은 것은 둘 중 하나 의 선택뿐이었다. 일단 맹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마나의 흐름을 강 제적으로 멈추고 뒤로 빠지든지, 아니면 그대로 곧이곧대로 검을 휘 두르고는 한 칼 맞든지. 사방에 뿌려지는 검기 때문에 기겁을 한 동료들은 저마다 방어 태 세에 들어갔다. 저 검기에 휩쓸리면 목숨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방심하지 않고 대비를 하는 가운데 요란한 소리가 들려 왔고, 사방의 벽이 먼지를 뿜어내며 검기가 뿌려진 기나긴 흔적들을 만들 어냈다. 그리고 갑자기 워렌이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그런 후 술기운 과 분노 때문에 벌겋던 워렌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우웨에엑!" 갑자기 피를 토하는 워렌. 일단 급속도로 돌기 시작한 마나를 강제 적으로 멈추면서 크게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동료들은 왜 갑자 기 워렌이 피를 토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 다. 부상을 당한 워렌을 구출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두 명의 기사가 달려들어가 또다시 소녀를 상대하는 동안, 다른 기 사 두 명이 워렌을 구출해서 끌고 나왔다. 안에서 워렌이 부축을 받으 며 밖으로 나오면서 여태껏 문 앞에서 와글거리던 기사들과 견인족 들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열어 줬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 호기심을 불태우고 있던 샤트란 페르가 들어섰다. "저..저건?" 샤트란 페르는 경악했다. 기사들이 상대하고 있는 포로는 꿈에 나 올까 무섭던 바로 그녀였다. 이 시대 최강의 검객이자, 스펜을 죽인 원수! 처음 그녀라는 것을 알자마자 샤트란은 재빨리 도망치려고 했 다. 상대에 대한 공포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램 과는 달리 동료들에게 가로막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100여 명 이나 되는 기사들과 견인족들이 문을 중심으로 우글대고 있으니 그 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샤트란은 남아 있는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검을 뽑아들며 적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누 구도 그녀를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다. "샤트란, 갑자기 왜 그래? 너도 몸이 근질근질하냐?" '아음은 이해하지만 너까지 끼여들틈이 없어." 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던 기사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좁은 실 내에서 포로와 두 명의 기사가 싸우고 있었다. 기사들은 원기왕성하 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소녀는 헉헉거리며 이리저리 회피 동작을 취하면서 살짝살짝 검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샤트란 페르에 게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녀가 겨우 저 정도 실력의 기사 둘을 상대로 가쁜 숨을 몰아쉬다니 말이다. 이때 그녀는 다크의 손에 채워져 있는 팔찌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샤트란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샤 트란은 싸우고 있는 동료들에게 외쳤다. "이봐! 큰 기술을쓰지 말고 상대를 지치게 만들어!" "뭐?" "아무리 미들 소드라도 무겁잖아. 그 계집애의 힘을 빼란 말이야." 샤트란의 말을 들은 기사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상대의 검술이 예상보다 훨씬 정밀하면서도 매끄러운 것에 놀라고 있었지만, 일단 상대는 장시간 싸을 만한 힘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벌써부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지 않은가?그들은 그때부터 큰 기술을 쓸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방어에 힘을 쓰며 장 기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떠도는 다크의 운명 "그래,지하에서의 산책은 즐거웠나?" 다크가 꽁꽁 묶여서 돌아오자 미네르바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반겨 맞이했다. 그녀가 미들 소드를 휘두를 힘도 바닥나 버려 지쳐 쓰 러진 것을, 여태껏 고생한 기사들이 지근지근 밟아 놨기에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었지만 그런 건 아예 미네르바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 다. 그녀는 일단 상대가 건강하게 돌아왔다는 것에 만족했던 것이다. "지..하라고?" "그럼. 황궁 필숙히 마련되어 있는 지하 궁전이었지. 요소 요소에 마 련되어 있는 거점만 막고 있다면 마법사가 아닌 한, 절대로 탈출할 수 없는.." "그랬었군." 이제서야 다크는그 괴상했던 실내 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봐, 시작하기로 하지." "전하,정말 정신계 마법을 써도 상관없겠사옵니까?" 지오그네가 이렇게 물어 본 것은 따로 이유가 있었다. 고문 같은 것 은 해 봐야 육체만 절단날 뿐이지만 정신계 마법은 달랐다. 훨씬 힘이 적게 들고,빨리 알아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상대의 정신에 심각 한 타격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네르바의 입장은 달랐 다. 다크가 바보가 되든, 아니면 또 다른 어떤 후유증이 생기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신은 엉망이 되어도 상관이 없었지만 육체는 말 짱해야만 했던 것이다. 코린트에 넘겨줘야 했으니까 말이다 "잠깐만 기다려 !" "뭐지 ?" 미네르바는 궁금한 듯 물었다. 상대는 정신계 마법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일이 좀 더 쉽게 풀릴 수도 있었다. "마법을 걸든 뭘 하든 상관은 안하겠는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서.." 곧 있다가 다크의 운명이 어떻게 풀릴 것인지 대충 짐작하는 미네 르바는 호기롭게 응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는 죽은 목숨이 나 다름없을 텐데, 죽기 전에 소원이나 들어 주겠다는 심정으로. "좋아. 뭐냐? 크게 중요한 것만 아니면 가르쳐 주지." "나한테 쓴 약이 뭐지? 나도 꽤 조심한다고 애를 썼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호호홋, 그거야 간단하지. 검술의 고수에게 내가 미련하게 독약을 썼겠냐?수면제를 썼지. 그것도 아주 특이한 것으로 말이야. 먼저 음 식에다가 약을 썼고." "음식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너도 같이 먹었잖아." "물론 같이 먹었지. 그리고 또 하나 술에도 약을 썼지." "술은 시녀가 시음을 했는데?그년은 멀짱했잖아." "물론이지. 술과 음식에 들어간 약은 서로 달라. 그리고 그 둘은 합 쳐져야 약효를 발휘하지. 코끼리도 잠들 정도로 강력한 약효를 말이 야." 다크는 이제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조심했는 데도 약에 당했는지 말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딴 방법에 당하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미네르바가 이죽거렸다. "아마도 다시는 그런 약물에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겠지?" 다크는 미네르바를 빤히 올려다 봤다. 속으로는 당연하지 하고 대 답하면서 말이다. "내가 이렇듯 친절하게 알려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아마 짐작도 못하겠지. 내가 이렇게 말해 주는 이유는, 너에게 다시는 그런 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알아?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 라구. 호호홋! 자,지오그네. 빨리 시작해." 미네르바가 지시하자 지오그네는 곧장 정신계 마법을 썼다. 다크는 적의 마법 공격을 막아 주는 그 어떤 마법 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았 다. 그리고 적의 정신계 공격을 막기 위해 마나를 구동시킬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쌓은 마나의 근원은 모든 사악한 대법을 저절로 막아 준다는 정종의 내공 심법인 태허무령심법 도 아니었다. 그녀는 공력을 상실한 후 태허무령심법으로 내공의 기 초를 쌓다가 나이아드의 방해에 가로막히자 그것을 포기하고, 곧장 무리를 해서 매우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마교의 정통 심법을 이용하 여 속성으로 내공을 쌓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정신력이 아무 리 강하다 하더라도 정신계 마법 공격을 막을수는 없었다. "끼야아아아악!"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다크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강력한 정신력이 정신계 마법이 침투해 들어 오는 것을 막으면 막을수록 그 고통은 엄청나게 가중되고 있었다. 그 리고 어느 순간, 다크의 눈빛은 뭔가에 홀린 듯 흐리멍텅하게 바뀌었 다.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고통도 멎었다. "다 되었사옵니다, 전하." "좋아." 미네르바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크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 다. "그대의 이름은?" "[묵향.]" "무키앙? 이상하군 그래, 그대는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나?" "[여러 사부들에게 배웠다.]" 지오그네를 바라보며 미네르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어느나라 말인지 알아듣겠나?" "잘모르겠사옵니다, 전하. 이게 말로만 전해듣던 저 머나먼 서방 땅 의 언어가 아닐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검의 모양도 그렇고." "서방 땅이라고?그렇게 먼 곳에 있는 녀석이 왜 여기까지 온단 말인 가?또 왜 크라레스의 일에 간섭하고 있는 거고?" "글쎄요." "이봐, 너는 왜 크라레스를 돕는 거지?" 미네르바의 질문에 다크는 몽롱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에게 자신들을 도와 주면 그 대가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으니까.]" 미네르바는 짜증난다는 듯 외쳤다. "이쪽 말로 해.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까." "나에게 자신들을 도와 주면 그 대가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다고 했으니까." "고향에 돌아간다고?" 그로부터 몇 시간에 걸쳐 미네르바의 심문은 계속되었다. 그런 후 미네르바가 알아낸 사실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다. 상대가 다른 세계에서 날아온 인물이라는 점은 미네르바에게 가히 충격적인 것이 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녀를 이쪽에서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나?"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전하. 이쪽이 크라레스 따위보다 는 훨씬 더 마법이 발달한 상태니까요.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그녀를 잡아 온 이상 분노에 이성을 잃은 그녀가 협상에 응할까요? 또,그녀 같은 강자가 만약 약속을 저버리고 배신한다면 도저히 손 쓸 방법이 없사옵니다 ." 지오그네의 말에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확 실히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풀려난 후에 다크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 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글쎄‥‥‥‥ 그건 그래. 그녀가 풀려났을 때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지." "이렇게 하면 어떻겠사옵니까?" "어떻게 말인가?" "여태껏 타국의 기사를 체포했을 때 했듯이 세뇌를 하는 것이옵니 다. 그렇게 하면 그녀를 마음껏 써먹을수가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 말에 미네르바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가 만약 혼자였다면 이 런 궁리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가 그녀의 아버지라는 그 드래곤이 찾아온다면?" 미네르바의 말은 잠시 지오그네가 잊어버리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 게 했다. "그렇군요. 우리가 그녀를 써먹는다면 분명히 소문을듣고 드래곤이 찾아오겠죠." "과거의 기억만을 봉인한 채 코린트에 넘기는 것은 어떨까? 코린트 가 그녀를 이용할수 있는 근원을 제거해 버리는 거지." "그럴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기억을 봉인하는 마법은 마법사가 조 금만 조사를 해 보면 금방 눈치챌 것이옵니다. 그리고 능력 있는 마법 사라면 손쉽게 풀수 있겠지요. 그냥 코린트에 넘겨준다고 해도,코린 트가 그녀를 이용하려고 들 이유는 없사옵니다. " "왜 그런가?" "코린트는 그녀가 없다고 해도 현재 최강의 자리를 잡고 있사옵니 다. 물론 기사단 전력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옵 니다. 그런 상황에서 언제 누군가가 또다시 그녀에게 좋은 조건을 제 시한다면 돌변할지도 모르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녀를 이용하는 모 험을 감행할까요?오히려 그들은 변수를 없애기 위해 그녀를 즉각 없 애려고 들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녀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들은 강하기 때문이옵니다. " "그들이 그녀를 반드시 죽인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드래곤이 있는 데.." 미네르바의 말에 지오그네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염려마시옵소서. 코린트에서는 그녀가 드래곤의 양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전하께옵서도 그 브로마네스 사건 이후에 아르 티어스의 레어에 찾아가신 후에야 아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미네르바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자신이 그녀와 드래곤의 연관 관계를 알아낸 것은 그야말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다가 한 곳 에서 일치했기에 얻어낸 행운이었던 것이다. 다크는 절대로 그녀의 아버지가 드래곤이라고 떠든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코 린트는 그 사실을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군. 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세뇌한다면?" "그건 방금 말씀드렸듯이 드래곤의 존재로 인해 오히려 더 피해가 클 것이옵니다. 만약 본국이 세뇌당한 그녀에게 기습을 당한다면 상 당한 타격을 받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드래곤에게 넌지시 알려주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그날로 코린트는 끝장이옵니다. 안 그 렇사옵니까?헤혜헷." "그렇군. 경의 말이 옳아. 자, 이제 그녀에 대한 처리 방법이 결정되 었으니, 타이탄부터 빼앗아야 하겠지?그런 다음 곧장 코린트에 넘겨 줘 !" "옛,전하." 지오그네는 다크를 다그쳐서 타이탄과의 계약을 해지하도록 했고, 이미 이성을 잃고 있는 다크는 그 맹세를 따라 했다. 그러자 공간이 열리면서 거대한 타이탄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너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다. 앞으로 도 그딴 일로 나를 성가시게 하지 마라.) 그런 후 타이탄은 다시금 공간 저편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계약 을 해지한 타이탄이 갑자기 모습을 감춰 버렸기에 당황한 미네르바 가 외쳤다. 계약을 해지한 타이탄이 모습을 감춘다는 것은 절대로 있 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미스릴을 입히지 않은 헬 프 로네라면 혹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계약이 해지되면 거의 반 장님이나 다름없는 타이탄은 그자리에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냐?" 타이탄과 주인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가 다른 사람에게 들릴 리가 만무했기에, 지오그네 또한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 것인지 알지 못하 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기에 지오그네는 다크에게 물어 봤다. "왜 갑자기 모습을감춰 버린 것이지?" 다크는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드로메다는 나와의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고 했다. " "그럴 수가 있나? 타이탄이 주인의 말을 거역하다니 있을수 없어!" 그런 지오그네를 바라보며 미네르바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헬 프로네 정도만 해도 자아 가 강한데, 그보다 더 강력한 청기사라면 능히 그럴 수 있겠지." "그렇다면 치레아 대공을 없애지 않는 한은 타이탄을 빼앗을 수 없 겠군요." "그렇다고 없앨 수는 없지 않나?그녀를 죽이는 것은 코린트에게 떠 넘겨야 할 테니까 말이야." "그냥 넘겨줄까요?"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언제 또다시 드래곤이 찾아올지도 모 르는 상황에서 타이탄 한 대 빼앗자고 시간을 낭비할수는 없지. 빨리 코린트에 데려가게." "옛,전하." "현재 각 군단들은 예정된 목표지를 향해 순조롭게 진격 중에 있사 홉니타.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예정대로 5일 후면 알카사스의 전위 군과 만날 수 있게 될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로체스터 공작이 기사들 및 군의 고위급 장교들과 함께 회의를 하 고 있는 도중에 마법사 한 명이 슬쩍 들어오더니 공작에게 다가가서 귓속말을 건네 왔다. "전하! 크루마에서 사신이 도착했사옵니다. " 공작은 한 장교의 보고를 경청하던 중이었기에 미간에 주름을 잡으 며 퉁명스레 말했다. "크루마에서 사신이 한두 번 온 것도 아닌데 뭐가 급하다고 회의 중 에 들어온 것인가?" 공작의 질책에 마법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렇다 고 보고를 올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매우 중요한 보고였기에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보고를 올렸다가는 경을 칠 우려가 있었던 것 이다. "크루마의 사신이 한 소녀를 데리고 왔사옵니다. 그의 말로는 그 소 녀가 치레아 대공이라고 하옵니다. " 드디어 미네르바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 리고 있는 중이었던 공작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뭣이?흐흐흐.. 드디어 그녀가 우리의 손에 들어왔군." 공작은 모여 있는 기사들 및 장교들을 향해 외쳤다. "경들! 대단한 희소식이 접수되었소. 치레아 대공이 본국의 손에 넘 어왔다는 보고외다. " 그녀로 인해 엄청난 고생을 했던 코린트군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야 말로 경사스러운 소식이었다. 회의장에 모여 있던 기사들 및 장교들 이 회의고 뭐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 경악할 만한 소식을 두고 저마 다 수군거리는 가운데, 로체스터 공작은 한껏 희열에 들뜨기 시작했 다. 이제 드디어 복수를 할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는 흥분감이 과도 한 탓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로체스터 공작과는 반대로 용 병대장의 눈빛은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총사령관인 로체스터와 달리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난 용병대장에게 있어서 그녀는 더 이상 얄미운 적이 아니었기에 냉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오 히려 뛰어난 무인이었던 상대가 이렇듯 허무하게 생을 종료해야 한 다는 데 대한 동정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당장 그 계집을 처형할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로체스터 공작은 마법사에게 지시한 후 다시금 회의장쪽으로 시선 을 돌리며 통쾌하게 외쳤다. "나는 경들에게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그녀가 처형되는 모습을 직접 보여 주겠다!" 로체스터 공작은 포로를 공개 처형할 생각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었다. "우와!" 부하들의 환희에 찬 함성을 들으며 로체스터 공작은 여태껏 자신이 이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살아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 다. 그만큼 통쾌했던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에게 있어서 그녀는 검술이나 뭐 그런 것에 대한 경 쟁자가 아닌, 오로지 모든 일에 사사건건 방해를 놓는 훼방꾼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손쉽게 죽여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로체스 터 공작은 명령을 내려놓고 이제 손 안에 들어온 '웬수'를 구경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체스터 공작이 막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그를 가로막는 사내가 있었다. "잠깐!" 용병대장은 친구가 이렇게 빨리 손을 쓰려고 들 줄 몰랐기에 당황 했다. 그리고 당황한 김에 평소에 하던 식으로 친구의 앞을 막아선 것 이다. 하지만 그런 그를 이해해 줄수 있는 것은 진실을 알고 있는 로체스 터 공작뿐이었고,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는 기사들이 벌떼와 같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감히 천한 용병대장 따위 가 총사령관의 가는 길을 막아섰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로체스 터 공작은 기사들을 물리친 후 용병대장에게 낮은 어조로 말했다. "무슨..일인가?" 용병대장은 주위의 눈을 의식한 탓인지 아주 정중한 어조로 부탁했 다. "전하,잠시5만 시간을 내 주실 수 있겠사옵니까?긴히 말씀올릴 의견 이 있사옵니다. " "허락하네. 경은 나를 따라오게나." 로체스터 공작은 용병대장을 이끌고 멀찍이 떨어진 후 속삭였다. "무슨 일인가?" "그녀를 이렇듯 급하게 죽일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자네는 어쩌자는 건가?" "그녀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보는 것이 좋겠지. 아무래도 그녀의 아버 지라는 드래곤도 좀 마음에 걸리고 말이야. 또 크루마가 순순히 그녀 를 이쪽에 넘겨준 것도 좀 의외거든. 그들의 속셈도 좀 더 철저히 분 석해 본 후에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 용병대장의 얘기를 들으면서 로체스터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차분 히 생각을 정리하니 친구의 말이 꽤나 일리가 있었다. 적은 손아귀에 들어온 상태인데, 서둘러서 죽여 버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로체스 터는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서는 최종적인 명령을 내 렸다. "죄수를 지하 감옥에 가두어라." 기사들이 웅성거렸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그들의 의견을 간단히 무 시하며 외쳤다. "좀 더 조사해 볼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경들은 자숙하고 해산 하라." 아르티어스 옹의 잘못된 화풀이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크루마에 다녀온 후 그런 식의 조사로는 아무 래도 다크를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 동 안 머리를 감싸쥐고 궁리를 시작했다. 아무리 아르티어스가 드래곤 이라고 하더라도 어디에 숨었는지도 모르는 호비트 한 마리를 찾기 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호비트의 개체 수가 드래곤처럼 몇 백마리뿐인 것도 아니고, 수십억에 이르지 않던가?그 엄청나게 많 은 속에서 하나를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끙끙대며 고민하 던 아르티어스 옹은 갑자기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기며 벌떡 일 어섰다. 그렇게나 애타게 찾아헤매던 방법이 떠올랐던 것이다. "맞아! 그 방법이 있었지. 그 녀석의 몸 속에는 엄청난 마나가 축적 되어 있으니 그걸 목표삼아 차근차근 찾아보는 거야." 확실히 아들 녀석의 몸에 축적된 마나는 보통 사람들의 그것에 비 해 엄청났다. 물론 아들을 납치한 놈들이 마법진을 이용한다든지 해 서 그것을 조사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몰라도 그렇게 조심성이 없는 놈들이라면 드래곤인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 다. 그 잘난 척하는 호비트나 엘프 마법사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일단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드래곤인 본체로 돌아간 상태에서 마법 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트랜스포메이션한 육체로는 끌어모 을수 있는 마나에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 스는 레어의 중앙에 마련되어 있는 거대한 홀에서 본체로 변신했다. 하지만 본체로 변신하고 보니 자신의 몸집에 비해 레어가 터무니없 이 작았다. (제기랄! 본체는 너무 몸집이 커. 오랜만에 변신을 하니 더 좁아 보 이잖아.)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돌돌 말기 시작했다. 꼬리 를 몸쪽으로 돌돌 말고, 머리도 마찬가지로 돌돌 말고, 일련의 작 업이 끝나고 나자 제법 여유 공간까지 생겼다. (흐흐흐,보아라! 브로마네스여. 내 레어도 크지 않느냐?성룡이 들 어가고도 공간이 이만큼이나 남았잖아, 괜히 레어 확장한다고 쓸데 없는 데 신경쓰느니 나 같으면 낮잠이나 자겠다. ) 아르티어스 옹은 호기롭게 중얼거린 후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괜히 호비트와 관계를 맺어 이런 쓸데없는 생고생을 하는 아르티어 스가 현명한 것인지,아니면 자신의 욕구를 충실히 쫓아가고 있는 브 로마네스가 현명한 것인지, 그건 누구도 판단할수 없을 것이다. "끄응! 여기에도 그 정도 클라스가 한 놈 있었군." 아르티어스는 한쪽에 놔둔 자그마한 잉크병 안에 그 거대하면서도 날카로운 손톱의 끝을 살짝 담궜다가 꺼냈다. 그런 다음 낑낑거리며 그 옆에 있던 작은 종잇조각 위의 한 지점에 손톱 끝을 콕 찔렀다. 그 러자 그 종잇조각 위 에는 새까만 작은 점이 하나 찍혔다. 그 종잇조각이 드래곤의 몸체에 비했을 때 매우 작은 듯 느껴지겠 지만, 사실 드래곤의 몸집이 너무 큰 것이지 그 종잇조각이 작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각 국가에 존재하는 1,000명 이상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들 까지 표시되어 있는 상당한 정밀도를 자랑하는 지도였기 때문이다. 호비트들이 와이번을 길들여 탑승하기 시작한 이후로 지도의 정밀도 는 엄청난 가속을 붙여 높아졌기에 꽤 신뢰성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 었다. 거의 3일 동안 전세계를 탐색 마법으로 뒤지는 '무식한 짓' 을 한후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탈진해서 일 주일 정도 뻗어 버렸다. 아무리 그 가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마법을 쓰는 것은 정말 미친 짓 이 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그것이 상당히 무모한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것 이상 좋은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 기에 밀어붙였던 것이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잠에서 깨어난 후 지도를 보기 쉽게 호비트의 몸체로 트랜스포메이션을 했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자그마한(?) 레 어에 비해 그의 거대한 본체는 너무나도 거추장스러웠으니까 말이 다. 그런 다음 여섯 장의 지도를 만족스런 표정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여섯 장의 큼직한 지도 위에는 군데군데 시커먼 점들이 큼직하게 찍 혀 있었다. 또 어떤 것은 힘 조절을 조금 잘못하여 지도에 아예 커다 란 구멍을 뚫어버린 것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전부 다 했을 때, 한 50군데 정도 되는군. 자, 이제 생각을 정리해 보자." 드래곤이 용언 마법을쓰기 시작했을 때에야 상대 드래곤은 이웃이 가지는 용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아르티어스는 성체인 드래곤만이 뿜어내는 그 독특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헤즐링은 다르다. 헤즐링은 아직 용언 마법을 쓸 정도의 능력이 안 되기에 드래곤의 존 재감을 드러내기 힘든 것이다. 그렇기에 오차까지 아주 많은 초 원거 리 탐색 마법으로 전세계를 뒤지다 보면 이게 헤즐링인지, 아니면 호 비트인지, 엘프인지 알아낼 재주가 없는 것이다. 또 웜급 드래곤 정도 되면 드래곤으로부터도 자신의 기척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영역을 지키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드래곤이 드 래곤만이 알아볼수 있는 자신의 기척을 숨길 이유는 거의 없었고, 또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을 즐기는 어긋난 오 크 발톱 같은 괴짜가 한두 마리는 꼭 있는 법이다. 또 헤즐링과 그 아버지가 함께 살고 있다면 그 둘이 함께 있다는 사 실 하나만으로 자신이 포착한 그 존재가 헤즐링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24시간 내내 헤즐링과 함께 꼭 붙어서 놀아 주는 드 래곤은 거의 없었다. 위험하지만 않다면 주변에 놀러 다니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고, 아버지인 드래곤도 뭔가 일이 생기면 따로 돌아다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생각하기 힘든 여러 가지 오차 및 부정확성으로 인해 아 르티어스가 확인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 어 르신이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처음부터 여 기에 표시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표적이 동쪽 대륙 전역에 걸 쳐 56개나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기억 에 의존한 '확인 사살' 이 시작된 것이다. 어쨌든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려면 최대한 머리를 굴려야 했으니까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붉은색 잉크가 찍힌 펜을가지고 와서 지도에다가 또 다른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산맥이 그려진 한쪽 구석 에 찍혀있는 검은 점에 엑스(X)표시를 하며 중얼거렸다. "이건 아마도 아르메디아가 낳은 혜즐링일 거야. 론다 산맥 남서쪽 에 산다고 들었으니까 말이지. 그리고 이놈은.." 아르티어스는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이 주워들은 헤즐링들의 서식 지를 지워 나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르티어스는 키아드리아스와 함께 살고 있는 카렐을 지워 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이렇게 해서 스물네 개만 남았군. 흐흐흐! 예상보다는 좀 많이 남았지만 뭐 좋아. 이제 하나씩 개별적으로 방문하면서 알아보 면 손쉽게 찾아낼 수 있겠지. 자, 아들아!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고 있 어라. 아빠가 간다. " 아르티어스는 그 말과 동시에 공간 이동해 버렸고, 이제 주인이 떠 나 버린 텅 빈 레어만이 남았다. 아르티어스는 공간 이동을 시작한 지 몇 초후 지상 1킬로미터쯤 높 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공간 이동을 끝내자마자, 에이비에이 션마법을 통해 고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또다시 탐지 마법을 사 용했다. 레어에서 행한 광범위한 탐지 마법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잡을 수 없었기에, 이곳까지 공간 이동해 온 상태에서 또다시 탐지 마법을 사 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막강한 정신력을 갖춘 드래곤으로서는 두세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기에, 이제 노룡이 다 되어 가는 아르티어스로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곧이어 자신의 시야에 상대의 위치가 잡혔다. 아르티어스는 눈에 힘을 주며 중얼거 렸다. "이번에도 엉터리는 아니겠지?" 하지만 도착해 놓고 보니 이번에도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었다. 아르티어스가 도착한 곳에는 아름다운 엘프 소녀가 꽃을 따고 있었 다. 그녀는 붉은색의 아름다운 꽃을 따다가 귀 위에 꽂았다. 붉은색의 꽃이 그녀의 푸른 머리색에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광포한 기운을 느끼고는 재빨리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처음에는 몬스터인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 대가 몬스터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운 존재라는 것 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눈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어 흉악스런 기운을 내뿜는, 붉은 머리를 길게 기른 미청년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상대의 의도는 뭘까?그리고 왜 아버지의 영역 에 이렇듯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는 자신을 노려보는 것일까?그녀가 아버지로부터 교육받기로는 드래곤은 될 수 있는 한,남의 영역에 들 어가서는 안 되며 혹시 들어갈 일이 있다면 정중히 허락을 구해야만 한다고 들었던 것이다. "야,꼬맹이! 너 이리로 와봐."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자신을 부르고 있었지만, 쌍심지를 잔뜩 돋운 상대의 무섭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봤을 때 결코 좋은 뜻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예?저 말인가요?"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밖에 없었기에 엘프 소녀는 죽을 상을 하고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주춤주춤 다가갔다. 아르티어스는 다가서 는 소녀의 멱살을 다짜고짜로 잡아 쥐고는 으르렁거렸다. "너 말이야. 용언의 힘을 쓸 능력도 안 되는 주제에 왜 이렇게 나돌 아다니는 거야?응?한 번 죽도록 맞고 싶냐?" 여러 번의 헛걸음으로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한 아르티어스 옹이 화풀이를 하려는 찰나, 뒤에서 점잖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녀는 갑자기 자신의 영역 저 한 귀퉁이에서 막강한 드래곤의 존재감 이 잡히자 서둘러서 이쪽으로 공간 이동해 왔던 것이다. "누구신데 제 영역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셨습니까?그리고 왜 제 아 이를 괴롭히고 있는 거죠?" 뒤에서 척 봐도 붉은 머리 청년이 드래곤, 그것도 전성기를 맞이한 노회한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상대의 잘못을 잘 알면서 도 이렇듯 정중하게 물어 온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정중 함 따위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정신 상태는 온전하지 못했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잡고 있던 소녀를 던져 버린 후 뒤로 획 돌아서면서 노기에 찬 어조를 터뜨렸다. 꼬맹이보다는 화 풀이하기 더 좋은상대가 제발로 나타난 것이다. "뭐야?그래, 너 잘 만났다. 자식 새끼를 낳았으면 여기저기 인사를 다니면서 소개를 해 둬야 할거 아냐? 싸가지없게도 이런 곳에 처박혀 서 애를 길러서는 나로 하여금 또다시 헛걸음을하게 만들어?너 오늘 한 번 죽어 봐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아아..꾸에 에 엑!" 블루 드래곤인 상대방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끓어오르 는 성질을 수습하기 위해 분풀이 상대를 찾고 있던 아르티어스 옹에 게 재수없게도 잘못 걸린 것이 그들에게는 불행이었던 것이다. 이곳 에 온 목적은 까맣게 망각하고는 대뜸 막강한 마법 공격부터 퍼부으 며 상대의 기선을 제압해 나갔다. 블루 드래곤은 황급히 마법 방어막을 치면서 회피했지만, 상대는 아예 자신을 죽일 작정인지 그 공격의 강도를 더욱 더해 가고만 있었 다. 옷이 여기저기 찢어진 비참한 몰골로 엘프 여성은 화가 머리 끝까 지 난듯 외쳤다. "이런 미친 드래곤 같으니라구 나도 더 이상은 못참겠다. " 그녀는 순간적으로 비행 마법을 사용하여 엄청난 속도로 공중으로 비상해 버렸다. 얼마나 빨리 이동했는지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작아 졌고, 곧 이어 푸른 하늘만이 보였다. "훗! 하늘로 도망치면 못쫓아갈 줄 알았냐?" 아르티어스도 곧바로 하늘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엘프 여성이 사 라졌던 저 먼 하늘 위에서 희미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건 화가 단단히 난 상대가 드래곤으로 현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흥! 본체로 현신하면 겁먹을 줄 알았나?그래 봐야 바뀌는 것은 하 나도 없어." 곧 이어 아르티어스의 몸도 찬란한 금빛 광채에 휩싸이기 시작했 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본체로 돌아가는 것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저 멀리서 블루드래곤 한 마리가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물 론 그 녀석은 먼저 본체로의 현신을 시작했던,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 웃이었다. 아르티어스는 상대가 지척에 도달했을 때 본체로의 현신을 가까스 로 끝낼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의 눈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머리 한가운데 난 뿔에서 스파크를 뿜어내고 있는 블루 드래곤의 얄미운 대가리가 순간적으로 보였다. 아마 곧 이어 블루 드래곤의 브래스가 터질 것이다. "이동!" 뇌전이 대기를 가르며 뿜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 사이에 끼여서 전 기 충격을 받으며 뼈저리게 반성을 하고 있어야 할 그 노망난 골드 드 래곤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뇌전이 뿜어져 나오는 그 순간 무식하 게도 본체 그대로 공간 이동해 버렸던 것이다. 아무리 드래곤의 용언 마법이 강하다고 하지만,그 무거운 본체를 통째로 용언 마법만으로 공간 이동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일이었다. (어디 있지?) 블루 드래곤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상대를 찾는 그 순간,블루 드래곤은 자신의 머리 위에 뭔가 이질적인 섬뜩한 마나의 기운을 느 낄 수 있었다. 블루 드래곤이 재빨리 옆으로 몸을 틀려는 순간 불로 지지는 듯한 무지막지한 고통이 전해져 왔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폭 발음이 들려왔다. 아르티어스가 양손에 만든 헬 파이어를 각각 상대 의 양쪽날개에 던져 버렸던 것이다. "쿠에에엑!" 엄청난 고통에 블루 드래곤은 괴성을 질러댔다. 활짝 펼쳐져 있는 취약한 날개를 향한 일격! 이건 정말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드래곤본 으로 덮여 있고,또 방어 마법으로 보호된다고 하더라도 헬 파이어의 충격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아르티어스 의 공격. 여기에는 드래곤들끼리의 전투를 꽤 많이 해 본 그의 숱한 경험이 깔려 있었다. 물론 말토리오 산맥에 간 크게도 들어온 애송이 들을 족치며 얻은 것이었지만. 아르티어스는 헬 파이어 여섯 방을 상대의 날개에 연속적으로 퍼부 은 후 급속히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그런 후 아직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대의 몸 위에 올라서서는 오른쪽 날개를 향해 힘껏 발길질을 해버렸다. 우지끈 하는 괴성이 울려 퍼지 며 오른쪽 날개가 꺾였다. 그리고 블루 드래곤의 거대한 몸체는 땅으 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으헤헤헤! 이런 거야 식은 죽 먹기지.)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날개를 한껏 몸에 붙 여 추락하는 블루 드래곤을 따라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이제 최후의 일격을 먹일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저 높은 하늘 위에서 떨어져내린 블루 드래곤의 몸은 엄청난 굉음 을 토해 내며 땅에 처박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금색 드래곤 또한 블루 드래곤이 방금 만들어낸 거대한 구덩이 옆에 날개를 퍼덕 이며 우아하게 착륙했다. 블루 드래곤은 마법을 이용해서 순간적으 로 대지와 자신의 몸 사이에 완충 공간을 만들었지만 워낙 높은 곳에 서 떨어지다 보니 그 충격을 완전히 해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러다 보니 정신이 오락가락했고,온몸은 크고 작은 상처로 만신창이 였다. 그는 무지막지한 고통을 참으며 우선 회복마법을 몸에 걸었다. 그런 후 분노에 찬 괴성을 질러대며 방금 자신의 몸뚱이가 대지와 격 돌하며 만들어낸 구덩이에서 기어나왔다. 그리고 곧 이어 블루 드래 곤은 구덩이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골드 드래곤을 볼 수 있었 다. 상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먹이가 튀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블루 드래곤의 눈이 절망으로 물드는 순간,골드 드래 곤의 거대한 발이 대기를 갈랐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고, 블루 드래곤의 몸이 수십 미터를 날아가서 곤두박질쳤다. 아르티어스는 힘겹게 일어서려고 하는 상대를 향해 그 거대한 다리 를 튕기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러면서 아르티어스는 광기 에 물든 표정으로 통쾌하게 외쳐댔다.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말토리오 산맥에 둥지를 틀다니, 맛 좀봐라!) 블루드래곤으로서는 도대체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든 말을 내 뱉으며 아르티어스는 한쪽 발을 한껏 들었다가 상대의 무릎 부분을 모질게 짓밟았다. "우드드득!" "쿠아아아악!" 블루 드래곤의 관절은 기괴한 음향을 내며 부서졌고, 곧 이어 고통 에 찬 비명이 길게 길게 울려 퍼졌다. 블루 드래곤은 " 여기는 말토리 오 산맥이 아닌뎁쇼?"하고 항변하려 했지만 고통 때문에 더 이상 생 각이 연결되지 않았다. 생전 처음 당해 보는 너무나도 강렬한 고통에 기절해 버렸던 것이다. 블루 드래곤의 길쭉한 목은 요란한 소리와 함 께 먼지를 피워 올리며 땅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아르티어스는 쓰러 진 상대의 몸 위에 한쪽발을 올린 채 승리의 괴성을 질러댔다. "쿠오오오오오!" 감히 자신에게 도전한 놈은 어떻게 되는지를 과시하기 위해 한껏 드래곤 로어를 뿜어내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이게 드래곤간의 영역 싸움이라든지 뭐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딴 건 다 좋았는데 여기는 말토리오 산맥이 아닌 것이다. 이건 순전히 잘 지내 고 있는 온순한 이웃 드래곤을 찾아가서 무조건 박살낸 것이 아닌가? 그것도 비슷한 등급도 아니고 3,000살도 안 되는 애송이를 말이다. (크에엑! 이런 실수가 있나. 그냥 주변 어른들한테 인사 하지 않았 다고 따끔하게 '훈계' 만 할 생각이었는데..하기야 이것도 훈계 는 훈계군.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긴 했지만 말이지.) 아르티어스는 쓰러져 있는 블루 드래곤의 몸에 회복 마법을 걸어 준 후 길쭉한 꼬리를 슬슬 흔들면서 뒤뚱거리며 헤즐링이 있는 곳으 로 다가갔다. 자기딴에는 약간은 쑥스러운 듯한 걸음걸이 였는데, 그 걸 바라보는 헤즐링의 입장에서 그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먹이 를 앞에 두고 그 순간을 즐기며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헤즐링은 너무나도 공포에 질린 나머지 자신의 본체로 돌 아갈 생각도 못하고,도망칠 생각도 못한 채 작은 바위 틈에 꼭꼭 숨 어있었다. 또 여태껏 자신이 살아 오면서 가장 강할 거라고 생각했던 자기 아버지도 힘 한 번 못쓰고 박살나는 판에 자신이 본체로 돌아가 서 발악해 봐야 한주먹거리도 안 될 것은 너무나 뻔했다. 아르티어스는 황금빛 찬란한 고개를 아래로 쭉 내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엘프 소녀를 쳐다봤다. 물론 자신의 행동이 과했기에 조금 미안 한 듯한 마음이 담긴 눈길이었지만,그 눈길을 받은 소녀는 너무나도 공포에 질려서 뒤로 털썩 주저앉아서는 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아르 티어스 옹은 상대가 자신을 악마로 생각하든 뭐로 생각하든 그런 것 은 신경포 안 쓰며 자신의 생각대로 중얼거렸다. 일단 이렇게 해둬야 나중에 됫수습이 될 테니까 말이다. (너의 어미가 깨어나거든 주변에 살고 있는 어른들에게 인사좀 하 라고 전해라. 헤즐링을 출산하는 경사스러운 일을 치렀으면,그 기쁨 을 이웃 모두와 함께 나눠야 할 것 아니냐?안그래?) 수긍하지 않으면 자신을 죽일 것 같았기에 소녀는 기를 쓰고 대답 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떨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에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너도 그렇게 생각하지?착한 아이로군. 흐헤헤혜 아무리 드 래곤이 혼자서 생활한다고 하지만,그래도 살아 가면서 예의라는 것 이 필요할 때가 있단다. 무슨말인지 알겠냐?) 무슨 뜻인지 이해할 생각도 못하고 소녀는 죽자고 고개를 아래 위 로 흔들었다. (너도 앞으로 예의바르게 생활해야지. 연장자들에게 인사도 꼬박 꼬박하고 말이야. 흐흐흐!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다. ) 어느 정도 됫수습을 해 놓고 아르티어스 옹은 재빨리 그 자리를 벗 어났다. 물론 그 됫수습도 자기 마음대로한 것이었지만,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바탕 난리를 쳤더니 속은 시원하군.' 아르티어스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쳐 하늘 위로 한껏 날아오른 후, 맹렬한 속도로 케락스를 향하여 날아가기 시작했다. 다음 목표 지 점이 케락스 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후 아르티어스는 인 간의 모습으로 다시금 변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금빛 나는 거대한 드래곤 모습을 한 채 그곳으로 가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젠장, 귀찮기는 하지만 또다시 트랜스포메이션해야겠군. 다른 건 다 좋은데 이 덩치는 너무 거추장스럽거든.)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투덜거리며 하늘을 나는 도중에 곧바로 호비 트로 트랜스포메이션했다. 물론 자신의 몸은 그 순간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지만, 곧 이어 떨어지는 것을 멈췄다. 비행 마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후 그의 몸에서 희뿌연 빛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아르 티어스는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케락스 시로 공간 이동했 던 것이다. 코린트에 나타난 드래곤 "이제 며칠 후면 모든 것이 끝이군.7" 로체스터의 중얼거림에 용병대장도 고개를 살짝 끄덕여 동의했다. 크라레스는 이제 완전히 끝장이 난 상태였다. 항복 문서에 조인하기 위해 크라레스의 황제가 10일 후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케락스에 오 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개선 축하 행사에서 코린 트의 황제인 지그문트 드 아그립파 4세 폐하에게 전쟁의 신전에서 무 릎을 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적국의 황제에게 엄청나게 치욕적인 일 일 테지만 크라레스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다시 떠날 건가?" "더 이상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이번 전쟁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 크 다네. 나는 자네가 도와줬으면 해. 리사가 못다한 몫까지 자네가 해 줘야 할 것 아닌가?자네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책임이 있어." 해골의 눈구멍으로 보이는 용병대장의 눈은 씁쓸함을 담고 있었다. "책임은 있는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럴 자격이 없네. 또 세월이 지나 면서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어." 도저히 참고 있기 힘든 듯 로체스터는 벌떡 일어서서는 화가 난 어 조로 외쳤다. "그렇게 떠나 버리면 나 혼자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라세리안도 떠 나고 리사도 떠났어. 그리고 자네까지 떠나 버리면 남은 나는 어쩌라 는 거야?나도 이딴 거 다 때려치우고 떠나라는 거야?처음부터 난 남 들 앞에 서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싫어했어. 자네도 잘 알지 않나?친 구라는 놈들은 다 떠났는데, 왜 내가하기도 싫은 총사령관자리에 남 아 있어야하나? 젠장!그것도 이렇게 어지러운 시국에 말이야." "자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잘 알잖아." "제기랄, 그렇겠지. 나도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겠어. 나한테는 총사 령관 자리가 그다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지 않아. 자네는 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않았는가?앞으로 도 잘 해 나갈걸세." "놀고 있군, 그게 속 편하게 떠나는 자네가 할 소린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떠나겠어. 이제 그 지겨운 라이지엔 공작 새끼 낮짝도 볼 만큼 봤고, 폐하에게 아첨으로 일관하는 무능한 귀족 새끼들한테도 질렸어. 또 그런 놈들을 두둔하고 있는 황제에게도.." "자네, 너무 말이 심하군 " "빌어먹을! 심할 것도 없어. 이놈 저놈 다 자기 편한 대로 산다는데, 나혼자서 여기에 미쳤다고 남아 있으면 뭘 해?무슨 영화를 누리겠다 고." 이렇게 둘이서 아웅다웅하고 있을 때 갑자기 지축이 진동하는듯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아무리 떠나는 것을 궁리하고 있었지만, 로체스터는 그런 괴성을 듣고는 무시할 수 없었기에 벌떡 일어서서 창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용병대장은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심드렁한 어조로 중 얼거렸다. "이런 일 한두 번 당해 보나?뭘 놀라고 그래. 타이탄 연구소 쪽인가? 아니면 마법 실험실?" 타이탄 연구소나 마법 실험실은 간혹 폭발사고를 일으키는 곳이었 다. 심지어 그라세리안이 흑기사의 엑스시온을 연구할 때는 연구소 가 통째로 날아간 일까지 있었을 정도니까 말이다. 하지만 로체스터 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쪽이 아니야. 별궁쪽인 것 같은데?" "뭐야?그렇다면 무슨 일이지 ?" 그들이 허둥지둥 정문 쪽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반대편에서 달려 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로체스터는 상대가 정문 쪽에서 달려오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외쳤다. "무슨 일이냐?" 그 기사는 상대가 로체스터 공작임을 알고 곧장 방향을 틀어 상대 를 뒤따라가며 외쳤다. "예,동쪽 별궁 방향에 침입자가 들어왔사옵니다. " "별궁에까지?그렇다면 외곽 경비들은 도대체 윌 하고 있었단 말이 냐?' "곧장 공간 이동해 왔기에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 공간 이동해 왔다는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공간 이동 마법 자체는 놀라울 것이 없었다. 흔히들 써먹는 방법 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적이라 해도 황궁 한복판으로 공간 이동 을 할 미친 놈들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기사 몇 명이 적진 한복판으로 공간 이동해서 들어와 봐야 타이탄을 꺼내기 도 전에 전멸당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공간 이동해 왔다고?감히 어떤 놈들이 그렇게도 대담할 수가 있단 말이냐?도대체 적의 규모는 어느 정도냐?' "옛, 마법사 한 명이옵니다. " 의외의 대답에 로체스터는 달리던 것도 잊어버리고 속도를 줄이며 도대체 이해할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뭣이?단 한 명?" "옛,전하." "양동 작전이나 그런 것도 아니고 단 한 명이란 게 사실이냐?" "옛,전하." "겨우 마법사 한 명이 침입했다고 이 소란이란 말이냐?" "겨우 한 명이 아니옵니다. 엄청난 마법사이옵니다. " 그러는 와중에 또 한 번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곧 이어 그들 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엄청난 돌개바람이 몰아치며 붉 은색 타이탄 2기가 서로 뒤엉키며 둥실둥실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붉 은색 타이탄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근위대의 주력 타이탄인 적기사 II였다. 하지만 적기사ll가 보통 헤비급 타이탄인가? 110톤이 넘는 그 육중한 타이탄이 지금 바람의 힘만으로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본 로체스터 공작의 입은 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구먼!" 용병대장은 옆에 서 있는 기사를 힐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 다. "예,전하. 소신도 처음보는광경이옵니다. " "도대체 어떤 마법사이기에 저런 마법을 사용한단 말인가?빨리 가 보세 ." 로체스터 일행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 일대는 완전히 난장판이 었다.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는 가운데 별궁의 한쪽 귀퉁이 는 흔적도 없이 날아간 상태였고,하늘 위로 날아 올라갔던 적기사ll 2기는 땅바닥레 처박힌 채,푹 파인 구덩이 안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적기사ll 1기가 마법사를 향해 용맹스럽게 돌진해 들어갔다. 그 순간, 마법사의 손에서 붉은 광채가 뿜어져 나왔고 대폭 발이 이어졌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화염과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돌진해 들어갔던 타이탄은 뒤로 튕겨나와서 건물의 잔해에 부딪쳤다. 방패의 앞부분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몸체 앞부분에 칠해져 있던 붉은색 페인트가 거의 다 벗겨진 처참한 몰골이었다. "크하하하핫! 벌레들 주제에 간 크게도 내 앞을 가로막다니 !오늘 공 포라는 것이 뭔지 가르쳐 주겠다!" 그 난장판의 중간에 서 있는 마법사는 호기롭게 외쳐대고 있는 중 이었다. 그것을 바라본 용병대장은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가만..저 마법사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 "뭐라고?" 로체스터 공작은 용병대장의 말에 타이탄을 꺼내려다 말고 전장의 한복판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방금 전 마법의 여파로 인해 엄청난 흙먼지가 피어올라 있는 상태였기에 시야가 상당히 좋지 못했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그 먼지구덩이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을 포착 할수 있었다. "헉 !" "역시 그렇군. 그녀의 아버지가 맞지?"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미 로체스 터 일행이 도착할 때쯤에는 근위대원들이 상당수 더 도착한 상태였 기에 곳곳에서 더 많은 수의 붉은 타이탄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 다. 로체스터 공작은 부하들을 말려야 했다. 저 마법사,아니 드래곤과 싸워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로체스터가 막아서기 전, 이미 3기의 적기사ll가 상대가 드래곤인 줄도 모르고 돌진해 들어갔 다. 제아무리 마법사가 강하다고 해도 타이탄의 대검 한 방이면 두토막이 날 것은 뻔한 이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이탄들의 검이 마법사를 향해 휘둘러지는 그 순간, 마법사의 몽 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퍽퍽 하는 소리를 내며 타이탄의 검들이 땅 바닥을 파고드는 그때, 마법사는 안전한 허공 중에 자리잡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아르티어스는 오만한 눈초리로 밑에 모 여 있는 타이탄들을 훌어봤다. 까짓거 저런 것쯤 상대한다고 본체로 현신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자신의 자랑스런 브레스 한 방이면 이 성 을 초토화시킬 수 있겠지만, 아들과 비슷한 기척이 저 난장판 속에서 느껴지는 가운데 그런 초강수를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역시 웬만한 마법 가지고 저 고철덩이를 해결할 수는 없군. 역시 헬 파이어가 저런 거 잡는 데는 최고지." 성질을 참지 못한 아르티어스가 침입자로 오인하고 공격을 가해 오 는 병사 한둘을 죽인 것으로 시작된 전투였기에, 아르티어스는 갑작 스럽게 돌진해 들어오는 타이탄들을 향해 강력한 마법을 쓸 시간 여 유가 없었다. 인간으로 변신해 있는 상태로 끌어모을 수 있는 마나의 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처음에 바람의 정령 마법을 주축으로 하는 마법 공격을 퍼부었었다. 하지만 이렇게 멀찌감치 떨어진 상태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제는 시간 여유를 가지고 주문을 외을 수 있는 것이다. 아르티어스의 눈빛 이 광기를 더해 가는 가운데,주문은 급격하게 완성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저 아래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위대한 분이시여. 무슨 오해가 생겨서 그렇 게 분노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노기를 가라앉히십시오. 서로가 대화 로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로체스터는 저 하늘 위에 떠서 주문을 외우고 있는 젊은이를 향해 힘껏 소리쳤다. 로체스터는 상대의 주위에 파동치는 막강한 마나의 기운을 느꼈고,그것이 곧 이어 뭔가 형체를 완성할 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다급하게 외쳤던 것이다. 밑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아르티어스는 주문 외우기를 멈추고는 요 동치는 마나를 해방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어쩌구 하는 것으로 봐서 상대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괜히 드잡이질한다고 시간 낭비할 것이 아니라 곧장 본론으로 들어 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아르티어스는 풍계의 주문을 외워 자욱하게 치솟아 있는 먼지를 흩어버렸다. 곧 이어 아르티어스는 저 밑에서 와 글거리는 호비트 떼거리를 볼 수 있었다. 굳건한 자세로 전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호화로운 복장의 호비트가 보였다. 아마도 저 녀석이 자신을 부른 것이리라. 그리고 아들 녀석과 유사할 정도로 강렬한 마나의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가 아주 가깜게 느껴졌기에 그쪽으로도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떠올랐다. 아들은 저따위 해골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이 라고 의심해 보기에는그 호비트의 덩치가 너무 컸다. "네놈은 호비트냐?" 아르티어스가 그렇게 크게 소리친 것도 아니었건만, 밑에 있는 모 든 사람의 귀에 그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호비트라구요? 예, 호비트가 인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렇습 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네놈 말고 저 해골바가지 덮어 쓴 녀석 말이다. " 갑자기 질문을 당한 용병대장은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 "젠장!또 다시 헛다리를 짚었군." "예?무슨 말씀이신지.." "네놈은 호비트 주제에 그렇듯 많은 마나를 쌓아서 나를 헷갈리게 만들어?성질나는데 여기서도 한판 해 버려?" 아르티어스의 눈빛이 한 순간 사나워지자 용병대장은 한껏 마나를 끌어올리며 슬쩍 검에다가 손을 올렸다. 아무리 상대가 드래곤이라 고 하지만 아직 본체로 현신하지 않은 상태였다. 서로간의 거리를 믿 고 상대가 방심하고 있는 상태라면 운만 좋다면 해치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검술의 극한까지 익힌 그에게 이미 '거리' 라는 개념 따위는 잊혀진 지 오래였다. 바로 그때, 아르티어스 는 용병대장을 노려보고 분노에 찬 음성을 뇌까렸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그냥가겠지만, 호비트면 호비트답게 살 란 말이다! 젠장,아들놈 같은 녀석이 하나 더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 군." 투덜거리면서 날아가 버리는 아르티어스. '아들놈' 이라는 말에 밑 에서 바라보고 있던 로체스터 공작과 용병대장은 움찔할 수밖에 없 었다. 그가 찾고 있는 아들이 이곳 황궁의 지하 감옥에 얌전히 갇혀 있는게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라. 아르티어스의 몸이 거의 조그마한 점으로 보일 때쯤, 로체스터는 한숨을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 드래곤이 이렇게 빨리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네 " "동감이야. 드래곤이 한 말로 미루어 보아 사람의 몸 속에 쌓여 있는 마나의 양을 기준으로 광범위 탐색 마법을 펼친 후 이리로 찾아온 거 겠지. 그녀와 나의 실력은 대충 엇비슷했으니까 말이야. 어찌 되었건 이번에는 따돌린 것 같군 " "설마, 한 국가 단위를 탐색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넓은 면적 을 탐색하기야 하려고, 아무리 드래곤이지만, 전에 그린 드래곤 을 포획하던 작전 때,그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했었 나?그런데 정작 정보는 마법사들이 아닌 아르곤에 투입한 첩자들로 부터 얻었지 않나?그리고,아무리 정밀한 탐색 마법을 쓴다하더라도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엄청난 오차가 따른다고 그라세리안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지금 현재 크라레스의 적국은 코린트와 아 르곤,그리고 알카사스야. 드래곤이 그 세 나라만을 국한해서 뒤진다 면 못할 것도 없지 않겠나?" "과연!그럴 수도 있겠군. 잠깐! 만약 이런 식으로 그 드래곤이 계속 뒤를 판다면 어떻게 될까?언젠가는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들 통나지 않을까?" 그 말에 용병대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드래곤이 지닌 능력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 가 없긴 하지만, 마법에 있어서는 최강의 존재들이 아닌가?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일 뿐이네만, 어쩌면 그 전에 미네르바가 드래곤에게 여 기에 찾는사람이 있다고 밀고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확연히 알고 있는 로체스터는 경악했다. "설마!" "설마가 아닐세. 미네르바가 드래곤에게 밀고하면 본국은 그날로 멸 망이야. 본국이 멸망했을 때,가장 큰 득을 보는 것은 크루마가 아닐 까?" 용병대장의 말을 듣고 미네르바의 계략을 깨달은 로체스터는 분통 을 터뜨렸다. "이런 망할!그년이 그것을 노리고 재빨리 그녀를 이쪽으로 넘긴 것 이었군.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풀어 줄 수도 없는노릇이 아닌가?" 용병대장은 확신을 가지고 대답해 왔다. '나는 풀어 주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네. 뛰어난 무사에게 그런 치욕을 안겨 주는 것은 좋지 않아." 로체스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 렸다. "아니,그건 아니야. 그녀를 풀어 준다면 크루마에 막대한 타격을 줄 수는 있겠지만, 또 다시 크라레스의 위협에 시달려야만 해. 또다시 크 라레스의 기사단들과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지. 어쨌든 대책을 생각 해 봐야겠어." 그대들의 뜻대로 하라 치레아 대공과 그녀를 비호하던 드래곤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 이 알려진 그날. 그날은 크라레스 고위층이 멸망이란 단어를 떠올린 암울한 날이었다. 그날 이후 다론은 아무래도 스승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았다. 그는 수십 년이 넘게 토지에르를 곁에서 모셨던 수제자였다. 그렇기에 그 는 스승의 습관이라든지 말투 따위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스승은 뭔가 조금 바뀌었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다론은 아 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조용히 황궁을 떠났다. 이런 증상은 흑마법 사들을 상대하면서 자주 보아 왔기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르르르르!'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다론은 재빨리 탁자 위에 놓아 두었던 짐꾸러미를 꾸려 등에 지면서 투덜거렸다. "젠장! 빨리도 찾아냈군." 건물 내의 몇 군데에 쳐왔던 알람(Alarm)마법에 누군가가 걸렸는지 요란한 소리가 들려 왔다. 침입자가 실내로 들어왔다는 말이었다. 빨 리 탈출하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자신을 쫓고 있는 인물은 다론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다론은 짐을 들고는 미리 만들어 두었던 공간 이동 마법진 위로 올라선 후 서둘러 시동어를 외쳤다. 상대와 싸워 봐야 승 리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는 만큼 오직 도망만이 살 길이었다. "콰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지붕이 와르르 먼지를 뿜어내며 내려앉았다. 상대는 다론이 지하실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냄과 동시에 지하실 입구를 찾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고 과감하게 지하실 지붕을 통째로 날려 버린 것이다.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 추격자는 희뿌연 빛과 함께 다 론이 사라지는 걸 보며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희미한 빛이 아직 남 아 있는 곳을 향해 재빨리 검붉은 덩어리를 날렸다. 그와 함께 또다시 대폭발이 일어났다. 자신의 발 밑에서 대폭발이 일어났기에 그는 먼 지를 흠뻑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는 개의치 않고 강력한 흑마법에 직격당 해 엄청난 열기와 고약한 냄새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지하실로 뛰어 내려서 이리저리 살펴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시체의 흔적은 없었다. "쥐새끼 같은놈." 추격자는 자신의 공격이 조금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놈이 있는 곳을 조금만 빨리 찾아낼 수만 있었어도 공간 이동이 되기 직전에 죽 여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추격자는 품 속에서 주먹만한 수정 구슬을 꺼낸 후 땅바닥 위에 조 심스럽게 올려놓고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곧이어 수정 구슬 안에 는 토지에르의 모습이 보였다. 추격자는 토지에르의 모습이 보이자, 곧바로 땅바닥에 엎드리며 사죄했다. "놈을 놓쳤사옵니다, 폐하. 지금 현재로서는 놈이 어디로 도망쳤는 지 알수 없사옵니다. 지시를 내려 주시옵소서 !" 토지에르는 불같이 분노했다. 그놈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놈이었 다. 그놈이 어딘가 가서 나불거린다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때문에 서둘러 죽이려고 했는데, 바보같은 부하놈이 실패한 것이다. "멍청한놈,겨우 시덥잖은 마법사 한 놈 못 죽인단 말이냐?" "죽여 주시옵소서!" "닥쳐라! 네놈은 죽일 가치도 없다. " 그 말을 들은 추격자는 고개를 더욱 땅바닥에 푹 가져다가 붙였다. "내 생각 같아서는 네놈을 찢어 죽이고 싶다만, 아직도 네놈에게 시 킬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라." "감사하옵니다, 폐하!" "단서도 찾기 어려운 놈을 잡는 것은 포기하고, 네놈은 즉시 1단계 작업을 시작해라." "옛,폐하." 그와 동시에 수정 구슬에서 토지에르의 모습이 사라졌다. 추격자는 한숨을 내쉬며 공간 이동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토지에르,아니 어둠의 마왕 크로네티오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설혹 그것이 죽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흑마법사들만이 가지는 상하 관 계에 따른 율법이었다. 크라레스는 완전히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청기사도 3기 정 포밖에 파괴되지 않았고, 카프록시아급 타이탄도 139기나 남아 있었 다. 웬만한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전력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것은 결 코 작은 전력이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최고 고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루빈스키나 토지에르도 사망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항복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 하면 다크라는 인물의 지원이 없이 코린트, 알카사스,아르곤의 3국 연합군과 싸운다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이제 크라레스는 와리스 후작의 주도하에 최소한의 대가만을 치르 는 상태에서 항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세는 협상 할 건덕지라고는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조금이라 도 피해를 줄이려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다 내줘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크라레스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와리스 후작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순전히 승전국들 간 의 이해 관계가 얽혀 서로 간에 갑론을박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소모되었기 때문이었다. 승전국들 간의 분쟁의 원인은 이러했다. 처음 동맹을 맺으면서 알카사스는 스바시에 공국을, 아르곤은 크로 나사 평원의 서부와 치레아 공국의 동부를 차지하는 것을 코린트로 부터 약속받았었다. 하지만 코린트의 군대가 크라레스로 단 한 명도 진군해 들어가지 않았기에 코린트는 단 한 치의 땅도 확보하지 못한 데 문제가 있었다. 아르곤은 협상을 질질 끌면서 서쪽으로 군대를 계 속 이동시켜 더 넓은 땅을 확보하려 했고, 그것은 알카사스도 마찬가 지였다. 그 때문에 코린트는 서둘러서 크로나사 평원의 각처에 병력 들을 파견하여 상대가 점령지를 더 넓히지 못하게 막는 한편, 협상을 빨리 종결지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둘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서로 간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었기에 협상은 계속 늦춰지고 있었지만,무한의 법칙은 없는 것이기에 끝이 다가오 고 있었다. 코린트는 양국에 최후 통첩을 넣어 서로 간의 의견 일치를 도출해 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코린트는 크라레스의 황제에게 항복의 조건 중에 하나로 황 제가 직접 케락스 시에 와서 아그립파 4세 황제에게 사죄의 뜻을 표 시한 후,항복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사색이 다 된 와리스 후작이 통신을 통해 그 보고를 올리자,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벌떼같이 일어서서 그것이 불가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사건은 그 다 음 날 터졌다. "무슨 일이냐?"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면서 기사 한 명이 거의 피투성이가 된 채 달려들어오자 황제는 크게 놀라서 외쳤다. 적의 침입이란 말인가? 항복을 위한 사신까지 보낸 상황에서 이런 일이..복잡한 생각들 이 황제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기사는 바쁜 와중에도 예법 대로 황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는 비장한 어조로 외쳤다. "폐하,속히 피하소서. 반란이옵니다. " "뭣이 ?반란이라고?" 황제는 경악하여 벌떡 일어섰다가 서 있을 기력도 없는 듯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반란군이 들어오다니, 근위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 인가?그리고 토지에르 경은?" "토지 에르 그 사악한 놈이 반란을 일으켰사옵니다. " 황제는 그때서야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스바시 에 대공은 치료 중이었고, 치레아 대공은 행방불명이었다. 그렇다 보 니 자연히 군대의 지휘권은 토지에르가 가지고 있었다. 토지에르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는 근위대와 수도에 주둔 중이던 제5 전대를 어딘가로 보내 버린 후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시간이 없사옵니다,폐하. 빨리 피신을..으악!" 보고를 올리던 기사는 갑자기 뒤에서 날아온 붉은 불덩이를 맞고는 재가 되어 버렸다. 황제가 불덩이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니 그곳에 는 토지에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황제는 허리에 찬 검 의 손잡이를 꽉 그러쥐었다. 그의 손은 분노로 인해 덜덜 떨리고 있었 다. "감히 네놈이.짐이 너를 그렇게 믿었거늘.." 황제는 불같이 치밀어오르는 노기로 인해서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 었다. 바로 이때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 오며 기사들과 병사들이 도착 했다. 그들은 토지에르 쪽에 가담한 인물들인 듯, 저마다 손에는 피에 젖은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그것을 토지에르 쪽으로 겨누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을 황제 쪽으로 겨누지도 않았다. 황제는 실내로 들어선 기사들의 얼굴을 보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실내에 모습을 드러낸 기사들은 크라레스를 향해 충성을 다하 던 명망 높은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던 인물들 이었다. 이들까지 가세했다면 대세는 기울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경들까지도." 토지에르는 황제를 향해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소신이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일으켰사오나, 결코 폐하와 국가 에 대한 충성심만은 변함이 없사옵니다. 이점을 이해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토지에르와 함께 달려들어온 기사들도 같이 외쳤다. "이해해 주시옵소서 !" 황제는 검에서 손을 놓으며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일이 이 지경까지 갔단 말인가? 허탈하도다! 어찌 황제 된 자로서 신하들의 뜻을 그렇게도 모를 수 있었단 말인가? 다 짐의 잘못이로 다. 그래, 그대들의 뜻대로 하라." 황제는 저항의 뜻을 버렸다. 물론 자신도 그래듀에이트니만큼 일전 을 불사할 수도 있을 테지만,그래 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었던 것이다. 신하들이 충성심이 약해서 반란을 일으켰겠는가?오히 려 반란에 참가한 이들은 크라레스 황가에 대한 충성심이 지나치게 강한 자들이었다. 누가 그들의 행위를 비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기 사들은 항복의 뜻을 표하는 황제의 앞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 이 렇게 자신들의 의사를 전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 면서. 그날 황제는 황궁의 지하 깊숙이 마련되어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 다. 그리고 끝까지 황제를 옹호했던 신하들 역시 감옥에 갇혔다. 토지 에르는 수도에서의 반란이 성공적으로 일단락되자 반란의 주모자들 중의 하나인 지그발트 폰 안티노스 후작을 불러들였다. 크라레스 제 국의 모든 정보를 통괄하던 인물이 안티노스 경이었기에 토지에르도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를 포섭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안티노스 후작." "예 , 공작 전하." "각 기사단의 지휘관 및 부지휘관들을 즉시 수도로 소환하도록 하시 오." "예?지금 말씀이시옵니까?" "조금이라도 시간이 늦으면 안 될 것이오. 마법 통신망은 본인이 통 제해 버렸기에 아직까지 수도에서의 변고를 그들이 모르고 있을 때 소환해야만 하오." "예,전하. 하지만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사옵니까?그들에게 도 설명을 하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옵니다. " 토지에르는 혀를 차며 상대를 책망했다. "쯧쯧,경은 황궁에서 피를 흘린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타이탄을 앞 세워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싶소?만약 말로해서 그들이 듣는다면 상 관없지만,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소?" "소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전하. 하지만 지휘관이라면 몰라도 부지휘관까지 소환한다면 그쪽에서 의심하지 않겠사옵니까?지휘관 이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자리를 메꿔야 하기에 둘다 부르는 경우는 없 었지 않사옵니까?" "전쟁은 이미 끝났소. 패전에 따른 대책 회의라고 하면 그들까지 소 환 가능할 거요." "예,전하." "그들이 수도에 도착한 후 각 기사단에 전문을 띄워 수도로 집결시 키도록하시오. 그편이 기사단들을 통제하기 쉬울 거요. 안 그래도 어 려운 시기요. 우리끼리 자중지란을 일으키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 을 명심하시오." "예,전하." 안티노스 후작이 서둘러서 통신실 쪽으로 달려간 후,홀로 남은 토 지에르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 밖으로는 크라레인 시의 야 경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토지에르의 눈이 벌 겋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얼굴 가득 광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토지에르의 얼굴을 누군가가 봤다면 악마라고 할 만큼 여태까 지의 중후한 토지에르의 얼굴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토지에르는 살 기를 잔뜩 머금은 미소를 지으면서 뇌까렸다. "1,500년 만인가?크하하하핫!드디어 쾌락의 시간이 도래했도다!" 토지에르의 믿음직한 수족들 "전하, 렉손요새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보고가 올라왔사옵니다. " 이블리스의 말에 미네르바는 하던 일을 멈추고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렉손 요새라는 곳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짚이는 것이 없 었다. "렉손 요새?처음 들어 보는군." "예,카스티오 산맥에 위치한 작은 요새니까 전하께서 모르실 것은 당연하옵니다. " "그래?그렇다면 설마 프랑코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것인가?" 카스티오 산맥 뒤쪽에는 프랑코 왕국이 있었다. 프랑코 왕국은 전 력으로 보나, 국력으로 보나 강대국인 크루마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 로 열악한 국가였다. "그것은 아니옵니다, 전하. 감히 프랑코 왕국 따위가 본국을 넘볼 수 야 있겠습니까. 카스티오 산맥은 원체 험준하기 때문에 정규급 타이 탄들은 투입이 불가능해서 로투스를 배치한 것이 아니옵니까?타이 탄의 이동도 어려운데 그쪽에서 국경을 넘는 모험을 할 수는 있을 리 가 없사옵니다. " 프랑코군이 공격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그런 변방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미네르바 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면 뭔가?누구하고 전투를 벌인 거지 ?" "오우거들이 나타났다고 하옵니다. " 오우거라는 말에 미네르바는 짜증난다는 듯 외쳤다. 미란 국가 연 합의 합병으로 인해 그녀는 정신없이 바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겨우 오우거 몇 마리가 나온 것 가지고 나한테 보고할 것까지 있 나?" 물론 이블리스도 오우거 몇 마리와 싸운 것 정도는 보고할 거리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타이탄이 개발된 이후,오우거는 그 야말로 멋진 사냥감 정도밖에 안 되는 위치로 전락했으니까 말이다. 그 때문에 과거에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오우거가 지금 에 이르러서는 드래곤의 영토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수 가 급감해 있었다. "전하께서 바쁘신 것은 잘 알지만, 이것은 보고드리지 않을 수 없사 옵니다, 전하. 렉손 요새의 지원 요청을 받은 엘프란 기사단 산악 파 견대에서 로투스 2기를 급파했다고 하옵니다. " 엘프란 기사단 산악 파견대는 유일하게 로투스급 타이탄을 보유하 고 있었다. 로투스급은 출력이 0.5밖에 되지 않는 저성능 타이탄이었 기에,2차 제국 전쟁 직전에 있었던 군비 경쟁 때 대부분이 폐기되어 카마리에로 재생산되었다. 하지만 험준한 서부 산악 지대의 특성상 헤비급 타이탄을 투입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로투스 10기를 폐기 하지 않고 그곳에 배치해 두었던 것이다. 미네르바도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되물었다. "그래서?" "그런데 그들이 오우거한테 당했다는 보고이옵니다. 타이탄 전력이 감소했기에 전하께 보고가 올라오게 된 것이지요." 미네르바로서는 기가 막히는 보고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아무 리 저급 타이탄이기로서니 오우거한테 당한단말인가? "타이탄이 오우거한테 당했다고? 도대체 오우거가 몇 마리나 나타 났기에 로투스가 당했단 말인가?" "세 마리이옵니다,전하." "세 마리! 세 마리라고? 자네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인가?" "결코 아니옵니다, 어찌 감히 전하를 기만할 수 있단 말이옵니까?" "그런데 어떻게 겨우 오우거 세 마리가 타이탄 두 대를 부술 수 있다 는 말인가? 아무리 로투스가 형편없는 타이탄이라고 하지만." "그건 소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아무래도 타고 있던 기사에게 문 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사료되옵니다만 전하의 생각은 어떠하오신 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도 그런 시골 구석에는 가려고 안 하니,사 고를 친 놈들이나 좌천당한 놈들을 보냈으니까 말이야. 그놈들 설마 술 퍼마시고 만취한 상태에서 타이탄을 조종한 것은 아닐 테지?" "그런 것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 "어쨌든 엘프란 기사단에 공문을 띄워라. 또다시 그런 추태를 보이 는 날에는 엄히 문책하겠다고 말이야." "옛,전하."` 신성 아르곤 제국과 크라레스 제국의 경계선인 쟈코니아 산맥은 매 우 험준했기에 과거부터 이 근처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나라들의 경계선 역할을 톡톡히 해온 거대한 산맥이었다. 쟈코니아 산맥의 가 파른 경사와 험준한 지형은 이 시대 최강의 병기라고 할 수 있는 타이 탄의 행동에 막대한 지장을 안겨 주었다. 특히나 100톤이 넘어가는 헤비급 타이탄들의 경우는 짙게 우거진 삼림과 험준한 지형에 가로막혀 투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인 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험준한 지형에 자리를 잡고 좋아하는 많은 드 래곤들이 등지를 틀고 있었기에 설혹 타이탄의 이동이 가능한 곳이 있다고 해도 접근하지 않는 것이 통례였다. 그렇기에 쟈코니아 산맥에 몬스터들이 번성하는 것은 당연했다. 수 십 또는 수백 마리씩 떼지어 다니는 오크부터 시작해서 트롤, 오우거 등이 쟈코니아 산맥에서 서식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이곳에 터전을 잡은것도 다 따지고 보면 험준한 지형을 좋아하여 곳곳에 등지를 틀 고있는 드래곤들 덕분이었다. 아무리 막강한 토벌대를 구성하여 몬 스터 사냥을 하려고 해도, 그놈들은 약속이나 한 듯 드래곤의 영토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들을 괴롭히는 몬스터를 드래곤들이 사육하는 것이 아 니냐? 혹은 몬스터들과 드래곤간에 어떤 밀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 냐하는 의혹이 인간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실질적인 생태계의 먹이 사 슬은 조금 달랐다. 그 먹이 사슬의 핵심에는 드래곤의 식습관이 자리 하고 있었다. 물론 드래곤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하지만 헤즐링일 때는 육체의 성장을 위해 식사를 해야만 했다. 아무리 새끼라고 해도, 원체 드래곤 자체가 덩치가 있는 존재들인 만큼 막대한 양을 먹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헤즐링 한 마리가 몬스터들을 멸종으로 몰 고 갈 만큼 많은 분량의 식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오크나 트롤 같은 좀 두뇌 회전이 빠른 몬스터 들은 드래곤이 새끼를 낳으면 헤즐링의 식사감들을 사냥을 하든지 채집을 해서,혹은 민가를 약탈해서라도 드래곤에게 갖다 바쳤다. 그 때문에 헤즐링의 식사 메뉴에는 호비트라고 불리우는 인간의 고기도 포함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열심히 구하러 다녔지만 아무것도 못구하는 날도 생 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동족들 중에서 두셋을 뽑아서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헤즐링의 식사감이 떨어지는 날이 없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은 드래곤의 보호를 필요로 했 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받드는 몬스터들을 드래곤이 귀엽게(?)봐주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또 몬스터들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호비트들의 행태는 또 어떠한 가? 그놈들은 자기들만 똑똑한 줄 알고 감히 드래곤의 영토에 침입해 서 보물이나 마법 서적을 훔치려고 들고,또 심한 경우에는 드래곤 슬 레이어를 꿈꾸며 도전장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예로부터 드래 곤의 영역은 호비트들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쟈코니아 산맥의 한귀퉁 이에 호비트족의 본거지가 있었다. 호비트족의 구성원은 돼지 대가 리에 탄탄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먹음직한, 아니 용맹스러운 오 크들이었다. 오크들은 겉보기와 달리 두세 시간만 강한 햇빛을 쬐면 화상을 입을 정도로 피부가 연약했기에 햇빛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 때문에 이렇게 삼림이 울창하게 우거진 음침한 곳에 동굴을 파고 생 활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기저기 피워 놓은 모닥불 주위에 십여 마리씩 모여 앉아 고기를 굽고 있었다. 대규모 약탈 작전에서는 믿음직한 동료가 되었 다가, 먹을 게 궁할 때는 먹잇감도 되어 주는 이웃의 오크 마을과 전 투를 벌여 전사자와 포로들을 챙겨 와서 지금 굽고 있는 중이었던 것 이다. 물론 굽고 있는고기 중에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전투에서 전사 한 동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기가 익어 가는 향긋한 냄새가 퍼져 나가고, 강한 온도를 받아 지 글거리며 떨어지는 기름기를 보면 모두들 마음이 느긋해지기 시작한 다. 이때 누군가가 고기를 크게 한 조각 뜯어내어 씹어먹기 시작했다. 물론 가장 먼저 식사를 시작한 것은 족장이었다. 족장이 식사를 시작 하자, 곧이어 오크들은 암컷,수컷,새끼들 할 것 없이 모두들 아직 덜 익어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족끼리 전투를 해서 먹이를 조달할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악화된 지금은 조금 이라도 더 먹어 두는 것이 장수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었다. 과거 평화로을 때는 그래도 식량 사정이 좋았지만, 지금 호비트들 은 맹렬하게 전투를 벌인 후였다. 그 때문에 오크마을에 푸짐한 선물 을 건네며 통행하던 밀수꾼들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코린트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피난가 버린 농가들을 털어 봤자 나오는 것은 먼지뿐이었다. 옛날에는 여러 부족들이 연합하여 큰마을의 식량 저장고를 털기도 했지만, 코린트의 기사단들이 초토화 작전이라는 명목 하에 식량 저 장고들을 불태워 버린 후에는 사정이 많이 바꿔어버린 것이다. 그렇 다고 험준한 산맥을 넘어 아르곤 쪽으로 갈 수도 없었다. 그곳은 카만 트족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점점 고기의 양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모두들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악을 쓰기 시작했다. 몇몇 곳에서는 벌써 고깃덩이를 두고 주먹 다짐까지 시작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암컷들은 새끼들을 거 느리고 화톳불에서 멀찍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힘에서 밀 리는 그들이 얼정거려 봐야 피해만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때 시커먼 로브를 걸친 호비트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갑작스 러운 불청객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벌어졌던 싸움은 곧 멈췄다. 오크 들은 저마다 자신의 무기를 챙겨들었다. 무기라고 해 봐야 농가에서 약탈한 도끼나 쇠스랑 같은 각종 농기구에다 병사들을 죽이고 빼앗 은 창,칼,단검 따위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나무 몽둥이와 돌도끼까지 가지각색이었다. 쉭쉭거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부터 시작해서 끄르룽거리는 각종 비 음까지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려 왔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실력 행사 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들은 이미 상인들과 각종 거래를 해 본 경험 이 있었기에,방문객과 '협상' 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한 경 우도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우두머리의 지시를 받 은 오크 한 마리가 앞으로 쓱 나서면서 말했다. "쉭 ! 그대는 누구인가?" 그 말에 방문객은 살기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이죽거렸다. "이놈들은 제법이로군, 크하하핫! 나는 어둠의 마왕께서 내리신 명 령을 네놈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왔노라. 네놈들은 무릎을 꿇고 위대 하신 마왕님의 명령을 경청하라!" "쉭쉭 ! 무슨 헛소리냐?" "역시 하등한 것들이 되어 놔서 언제나 손을 써야만 하는군." 검은 로브를 입은 늙은이는두손을 위로쭉 뻗으면서 외쳤다. "미천한 것들이여! 어둠의 명령에 따르라. 오우베이(Obey)!" 그 순간 번쩍 들려 있는 그 노인의 양손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검붉 은 덩어리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오크들의 눈동자가 어느 사이인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어느 새 노인의 주위에 살기등등하게 서 있던 오크들의 표정에는 살기가 지워졌다. 그들은 저마다 노인의 주위에 복종을 맹세하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엎드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노인은 오만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꿇어 엎드리는 오크들의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앞 의 오크들이 엎드리면서 시야가 뚫린 뒤의 오크들도 그 빛을 볼 수 있 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일 뒤쪽에 있던 암컷들까지도 새끼들과 함께 엎드렸다. 그런 노인의 눈에 빛을 보지 않고 도망치는 오크들이 몇 마리인가 눈에 띄었다. 그것을 보는 즉시 노인은 차가운 어조로 명령했다. "저놈들을 잡아 와라!" 그와 동시에 꿇어 엎드려 있던 오크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뒷줄에 서서 노인을 바라보지 않고 서 있던 것들 은 암컷이나 새끼들 혹은 별로 강하지 못한 오크들이었다. 강한 오크 들은 뒷줄에 서 있기는 했지만, 상대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 지 관찰하고 있었기에 그 빛을 바라보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곧바로 잡혀 왔다. 그들 또한 강제로 시선을 그쪽 으로 향했기에 곧이어 복종의 못짓을 표시했다. 노인은 모든 오크들 을 노예로 만드는 작업이 성공하자,이번에는 또다른 주문을 외웠다. 어둠의 마왕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강력한 암흑의 기운을 이들에게 줌으로써 더욱 강력한 전투력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모든 작업을 끝낸 노인은 오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새롭게 장만한 이 듬직한 병사들을 하루라도 빨리 예정된 집결지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은 비단 이곳뿐만 아니라, 여러 산맥에 파견된 수백 명의 흑마법사들이 벌이고 있었다. 악마를 받드는 흑마법사들은 이미 마 왕으로 현신해 버린 토지에르의 수족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곳곳에서 하등한 몬스터들을 복종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고등한 정신 체계를 가진 엘프나 인간들에게 이런 흑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저등한 몬스터들에게는 매우 잘 통했다. 그리고 그들 은 곧 이어 새롭게 탄생하는 암흑 제국 크라레스의 믿음직한 병사들 이 되어 줄 것이다. 신탁을 받은 수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대사제님." "까다로운 문제로군요. 지혜로우신 아데나 여진께서 신탁을 내리셨 다면, 어떤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참 대답하기가 어렵군요." 수녀의 질문을 받은 대사제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코린트의 상 층부와 접촉하는 것은 대신관인 자신도 힘든데, 하물며 수녀 따위가 감히 먹혀 들어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이곳 코린트는 아데나 신보다는 전쟁의 신 아레스를 열광적으로 받드는 나라였다. 아레스를 모시는 고위급 사제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혜의 여신을 섬기는 그녀들은 파고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신관님께서 알고 계신 한도내에서 암흑의 세기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전할 만한 인물은 없을까요?" "글쎄요‥‥‥‥ 참,내가 왜 그 생각을못했지?" 대신관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활기찬 어조로 말했다. "지금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기에 뛰어난 기사들 가운데 의료 시설에서 요양하고 있는 환자들이 많이 있지요." 대사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즉각 이해한 수녀는 탄성을 질 렀다. 건강한 기사들이라면 물론 미천한 자신들이 만나기 힘들 것이 다. 하지만 아파서 누워 있는 상태라면 치료할 자격만 얻는다면 아주 손쉽게 접촉할수 있지 않겠는가? "아! 그렇군요." 대사제는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 서 말했다. "케락스 황실 병원에 가면 될 거예요. 여기에 소개서를 써 주시겠어 요. " 대사제는 서랍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서는 소개장을 열심히 쓰면서 말했다. "거기에 가면 고위급의 지위를 가진 환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황실 병원이다 보니까 그곳에 입원한 환자들은 고위급 관 료들이나 기사들인 경우가 많지요. 그리고 전쟁 막판에는 크라레스 의 기사단이 케락스 시에까지 난입해 들어와서 격전을 벌였으니까 요." 이것은 수녀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예?"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황궁에까지 침입해 들어가서 격전을 벌였었 죠. 그렇게 엄청난 대폭발을 일으켰었으니까 나도 알고 있는 거예요. 물론 군 당국에서는 적의 침입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언비어를 유포 하는 자를 처벌한다는 명목 하에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았지만 말이 에요." "그랬었군요." "자, 여기 있어요. 이걸 가지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대사제님 ." "뭘요. 신녀님의 명을 행하는 것을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수녀가 자신의 제자와 함께 병원에 도착했을 때,그녀는 별 어려움 없이 병원에 취직할 수 있었다. 왜냐 하면 몇 시간 전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한바탕 휘저어놓고 갔기에 엄청나게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 해서 그야말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지경으로 인력난이 극 심했기 때문이었다. "자, 여기 있는 환자들을 치료해 주세요." 수녀는 아연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커 보이는 병원은 이미 꽉 차버렸는지, 환자들을 병원 앞에 펼쳐져 있는 넓은 잔디밭 위 에다가 쭉 늘어왔던 것이다.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환자들을 치료 하면서 수녀는 그 막대한 수의 환자들이 마법에 의해 상처를 입었다 는 것을 알고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고 있을 틈이 없이 환자의 치료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정도로 아주 심한 상처를 입은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크리스틴,포션하고 약초,그리고 붕대 좀 더 가져오너라 " 수녀는 자신이 가지고 왔던 포션(환자 치료용 성수)을 환자들에게 다 써버리자 제자에게 부탁했다. "예 , 수녀님 ." 크리스틴은 수녀의 부탁에 따라 병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한참 지나서 그녀는 약초하고 붕대만 가지고 돌아왔다. "포션은?다 떨어졌니 ?" "아뇨." "그럼 ?" "천한 것들을 위해서 귀중한 포션을 줄 수 없대요." 시무룩한 표정의 제자의 대답을 듣고 수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 다. 어떻게 상처입은 병사들에게 그딴 소리를 내뱉을수 있을까? "뭐라고?" "너는 이 환자에게 약초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 주거라," "예. " 수녀는 병원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병원 내부는 밖에서 본 것보다 매우 호화로웠다. 수녀는 병원 앞 경비실에서 소개장을 내보인 후 곧 장 환자들을 향해 투입되었기에 아직 실내에 들어와 보지 못했던 것 이다. 실내는 대리석으로 번쩍이고 있었고,각종 아름다운 화초들이 심어져 있는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수녀가 가장 충격을 받은 사실은 실내에는 거의 환자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 많 은 환자들을 잔디밭 위에다가 눕혀 놨단 말인가? 수녀는 마법사의 복장을 하고 있는 젊은이를 보자마자 따지기 시작 했다. "이보세요. 환자들을 어떻게 저렇게 야외에 방치할 수 있단 말입니 까? 여기에는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위중한 환자들을 위해서 포션을 좀 주세요." 그 젊은이는 얼굴 가득 거만한 표중을 지으며 비웃었다. "그런 천한 것들을 귀족들이 치료받는 이 병원에 입원시키란 말인 가? 그리고 포션 한 병의 가격이 얼마나 비싼데 그런 데다 쓰라는 건 가? 저기 눕혀 놓은 것들은 하급 병사들이란 말이야. 황궁에서 사고 가 났기에 저것들을 우선 이리로 데려온 것이지, 천한 것들이 감히 이 곳에서 치료받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저것들은 여기서 대충이나마 치료를 해주는 것만도 황감히 여겨야 할 것이야. 곧 다른 곳으로 이 송해서 치료할 거니까 그런 주제넘은 말은하지 말게." 거만한 마법사의 설명을 들은 수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되돌 아 나왔다. 빈손으로 미간에 줄을 두 개 그은 채로 나오는 수녀를 보 며, 크리스틴은 그보란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감히 그 이상의 표현은 하지 못했다. 수녀의 얼굴은 결코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크리스틴은 지난 1년간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미간에 줄을 긋고 있는 것이 그녀 나름대로 화가 잔뜩 났음을 표시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크리스틴!" "예 , 수녀 님 ." "급히 가서 물병에 깨끗한 물 좀 길어 오너라." "예." 크리스틴은 쪼르르 달려가서 물을 떠왔다. 과연 스승이 이 물을 가 져다가 무얼 하려는 것인지 궁금하게 여기면서 말이다. 수녀는 제자 가 떠온 물을 앞에 놓고 아데나 신께 성심껏 기도를 올렸다. 깊은 부 상으로 신음하면서도,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는 병사들을 위 한 것이었다. 기도가 계속될수록 물병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에서는 푸르스름한 광채가 더해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길고 긴 기도가 끝난 후 수녀는 힘없는 어조로 제자에게 말 했다. "저 포션을 신관과 무녀들께 나눠 드려라. 그리고 저기 있는 부상자 들의 상처에도 발라주고 말이다. " "예 , 수녀 님 ." 수녀는 잠시 쉰 후에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포션을 직접 만드느라 엄청난 신성력을 썼지만, 그래도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는데 계속 쉬 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옆에서 환자를 치료하다 가,그녀가 포션을 직접 제작하는 것을 본 신관들과 무녀들은 그녀에 게 존경심을 가득 담아 살짝 인사를 건넸다. 2리터는 족히 됨직한 그 런 큰 물병에 가득 들어 있는 물을 포션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웬 만한 신성력으로는 되지 않는 것임을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병자들에 대한 응급 처치가 어느 정도 다 되었을 때, 수십 대의 짐 마차들이 도착했다. 그리고 부상병들은 그 짐마차에 차곡차곡 실려 어딘가로 떠나갔다. 아마도 수도 내에 산재해 있는 작은 병원이나,아 니면 수도 외곽에 있는 수도 방위 사령부 예하의 각 연대 단위에 있는 야전 병원으로 보내지는 것이리라. "이제서야 끝났군요. 무녀님께서는." 마지막 마차가 떠난 후에 한 신관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그는 잠 시 수녀의 로브를 살펴본 후 말을 이었다. 로브에 그려진 각종 문양을 통해 어떤 교단의 무녀인지 알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데나 신전에서 나오셨군요. 저는 아레스 신전에서 나왔습니다. 믿음이 깊은 무녀님과 함께 일을 할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 상대의 말에 수녀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답했다. "믿음이 깊은 무녀라니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수녀일 뿐입 니다. " "수녀라구요?" 그 신관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정도 의 신성력을 지녔다면 고위급, 그러니까 최소한 대사제는 될 것 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예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아데나 교단 에는 독특한 진급 방식이 있었다. 다른 교단은 믿음이 강하면 그에 따 라 직위도 함께 올라가지만, 그곳은 성공적으로 제자를 길러내야만 대사제의 직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제자 한 명을 길러내는 데는 짧은 시간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 이 떠오르자, 신관은 미안한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믿음이 짧아서 잠시 경망된 어조를 사용했습니 다.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아닙니다, 형제님.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용히 미소짓고 있는 수녀를 보며 신관은 궁금한 듯 물었다. "지금 어디에서 봉사하고 계신지요? 저는 수도 방위대 제34연대에 서 종군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곳으로 파견되어 왔지요." "저는 어제 케락스 시에 도착했기에.." "그러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무녀님처럼 믿음이 깊으신 분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을 받으실 겁니다. " 이때 병사 한 명이 다가오더니 수녀에게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드로아 대신전에서 나오신 수녀님이십니까?" "예. " 수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대답하자, 병사는 상관에게서 받은 명령을 전달했다. "병원장이신 에스키스 백작님께서 수녀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 수녀는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신관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병사를 따 라 병원장실로 갔다. 황실 직속의 병원이라서 그런지 실내의 규모와 화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제자인 크리스틴은 스승을 따라가면 서도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구경했다. 이윽고 병원장실에 도착했다. 수녀는 제자를 밖에다가 놔두고 혼자 만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장은 인사를 건네는 수녀를 보며 슬쩍 고개 를 끄덕여 대답을 한 후,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를 노려본 후 자신이 들고 있는 편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다음 잠시 후 입을 열었 다. "케락스 신전의 레이 대사제의 소개장을 가지고온 드로아 대신전에 서 수련을 했다는 수녀가 그대인가요?" "예." "소개장을 가지고 온 것을 보아, 이 병원에서 일하고 싶소?" "예." "여태껏 아데나 신전의 무녀들이 병원에서 일한 적은 거의 없기에 묻는 것이오. 대부분 아데나 신전의 무녀들은 세상을 떠돌면서 종교 를 전파하고,또 의술을 베푸는 것으로 알고 있었소. 그런데 왜 그대 는 딴 무녀들과 달리 병원에서 일하고자 하는 것이오? 그것도, 이 병 원은 귀족들을 위해 황제께서 직접 설립하신 곳이라서 환자들도 많 지 않은데.." 병원장의 질문에 수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신탁을 쫓아 이리로 흘러왔을 뿐입니다. " "신탁?신탁이라..그렇지,아데나 교단은 신탁에 따라 움직인다 는 사실을 잠시 잊었었소. 신탁의 내용이 뭔지는 말해 줄 수 있겠소?" "그것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 "그으래요?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여기에 머물게 할수는.." 여기까지 말한 에스키스 백작은 콧수염을 슬쩍 쓰다듬으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들어오는 목적을 뚜렷이 알지 못하는데, 그 녀를 쓰기는 조금 뒤가 찜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션을 만들 수 있는 능력 있는 수녀를 그냥 내치 기도 그랬다. 포션 한 병의 가격은 매우 비쌌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부하들에게서 들은 후에 이리저리 그녀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해서 몇 시간 전에 소개장을 정문에 전달하고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내지 않았던가?그런 후 케락스 시에 있는 아데나 신전까지 사람을 보내어 그것이 가짜가 아님을 확인까지 받았었다. 이런 모든 것을 다 해 본 후였기에, 그녀를 내치기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있었다. "잠깐,그대의 신탁이 코린트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이 믿 는 아데나 신께 맹세한다면 그대를 써주겠소." "물론이지요." 상대가 아주 손쉽게 승낙을 했기에 백작은 조금 더 머리를 굴렸다. 그렇듯 쉽게 대답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코린트에 해가 안 된다는 것 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데나 신을 안 믿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겠는 가? "그리고 자신이 믿는 대상이 아데나 신이라는 것 또한 맹세해야만 하오." 수녀는 병원장의 요청대로 맹세를 했다. 만약 신을 받드는 사도라 면 거짓 맹세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특히나 자신이 받드는 신의 이름 을 걸고 말이다. 왜냐 하면 그런 짓을 해서 신의 미움을 받으면 모든 신성력을 한꺼번에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수녀가 포션을 만드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어떤 신이 되었든 신을 받드는 인물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맹세를 행할 수는 없는 것 이다. 병원장은 싱긋이 미소지은후 말했다. "어떤 부서에서 일하고 싶으시오?"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면 어디라도 상관없습니다. " "좋소." 병원장은 자신의 뒤쪽에 있는 줄을 슬쩍 당겼다. 그것이 누군가를 호출하는 신호인 듯 근엄하게 생긴 무녀 한 명이 곧바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저 수녀님을 요양 환자 병동에 배치하도록 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 그 무녀는 수녀를 향해 말했다. "자,따라오세요." 백마법과 신성 마법이 발달한 후 환자를 치료함에 있어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병원장으로서는 아직 까지도 수녀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기에 그를 수많은 귀족들이 들락거리는 병실에 배치할 수 없었다. 대신 백마법이나 신성 마법이 통하지 않는 장기 요양 환자들을 돌보도록 배치한 것이다. 그곳은 환 자의 수도 적을 뿐더러, 사람의 왕래가 극히 적은 곳이기에 시간을 두 고 차근차근 감시할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수녀는 소기의 목적대로 병원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 다. 그녀는 그곳에서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요양 병동이라고 해 서 꽤 거창한 듯하지만 거대한 병동에 환자라고 해 봐야 30명도 채 안 된다는 것이 그녀를 허탈하게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침상에 누워 대부분의 시간을 잠만 자고 있는, 반쯤은 식물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 었다. "수녀님, 왜 이사람들은 깨어나지 않는 거예요?" "글쎄다. 잘모르겠구나." 수척한 환자의 몸 구석구석을 젖은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 준 후, 다 시금 옷을 입히면서 수녀는 대꾸했다. 신성 마법이 이렇듯 발달해 있 는 상태에서 이런 중환자가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 각해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들에게 신성 마법을 써서 치료할 수 없는지 물어 봤지만, 그곳에 근무하는 무녀들은 헛수 고라고 답해 주었다. 그들은 신성 마법으로는 절대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 오셔서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환자의 침대는 절대로 이 마법 진밖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수녀님." 이 병실 환자들을 책임지고 있는 마법사는, 그녀가 환자를 일광욕 시키기 위해 침대를 창가로 옳겨놓은 것을 발견하자마자 주의를 주 었다. "예. 그런데 마법사님, 왜 환자를 저 마법진에서 벗어나게 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또 저 환자들의 병명은 뭡니까?저는 저렇게 오랜 시 간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처음보기 때문입니다. " 마법사는 왜 그런 실수가 생겼는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아, 여기에 새로 오신 모양이군요." "예, 어제 저녁에 배치되었습니다. " "저 환자들의 병의 원인은 마나의 고갈이죠." 그런 병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기에 수녀는놀랐다. "예?" "인체 내에서 사용되고 또 들어오는 마나의 밸런스가 깨졌기에 그냥 놔두면 생명을 지탱하기도 힘듭니다. 그 때문에 마나를 공급해 주는 마법진 위에 놔두는 것이죠. 물론 대기에 떠도는 마나를 자연적으로 흡수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죠. 그래 서 개발한 것이 저 방법입니다. 환자에게 있어서 유일한 치료법이죠. 그러니 될수 있으면 환자를 저 마법진 위에 놔두세요." "알겠습니다. " 수녀는 한 번씩 병원장의 부탁에 따라 포션을 만들어 주기도 하면 서 환자들을 돌봤다. 환자들의 치료에 신성력을 쓸 일이 없었던 그녀 였기에 병원장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병원장은 일이 생겨서 포션이 내일쯤 도착하는데, 지금 쓸 것이 없 다는 등 그런 변명을 하면서 그녀에게 포션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 다. 물론 이런 고급 병원에서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다. 병원 장은 이런 식으로 여러 무녀들과 신관들을 꼬드겨서는 포션을 헌납 받고있었고,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는 '꿀꺽' 하고 있었던 것이 다. 황실 병원의 암운 드래곤이 떠나고 난 후 로체스터 공작은 집무실로 돌아가는 즉시 레티안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레티안이 들어오자 공작은 의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자고 불렀네. 자네도 들었겠지? 드 래곤이 와서 난리를 친 것 말일세." "예, 공작 전하. 별궁이 박살났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보고 는 들었사옵니다. " 로체스터는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 드래곤은 그녀를 찾아온 것 같아. 만약 그녀를 죽여 버렸다면 큰 일날 뻔했어. 미네르바가 재빨리 이쪽에 그녀를 넘겨줄 때 눈치챘어 야 했는데 말이야." 레티안은 로체스터 공작의 말을 수긍했다. "예, 미네르바 공작은 우리 쪽에다가 드래곤의 분노를 떠넘긴 것이 라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저렇게 악착같이 찾아댄다면 언젠가는 들 통이 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우리가 그녀를 죽였다는 사실을 미네르바가 이용할 수도 있지요. 그것을 드 래곤에게 고자질할 수도 있다는 것이옵니다. 그녀를 지하 감옥에 수 감해 둔 것은 매우 잘 하신 결정이옵니다. " "맞아. 그럴 수도 있겠지. 크루마의 입장에서 코린트는 넘기 힘든 장 벽일 테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그녀를 드래곤에게 넘겨주는 것은 어떨까? 용병대장은 그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던데 말이야." 레티안은 잠시 생각해 본 후 냉정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대 답했다. "그녀를 지금 드래곤에게 넘겨주는 것은 좋지 않사옵니다. " "왜 ?" "크루마에서 사용한 정신계 마법에 따른 부작용으로 약간 상태가 안 좋사옵니다. 그런 그녀를 드래곤에게 넘긴다면 드래곤이 가만히 있 겠사옵니까? 거기에다가 크루마 쪽에서는 우리가 강압적으로 요구했 기에 그렇게 했다고 대답한다면 최종적으로 드래곤의 분노를 받을 나라는 본국이옵니다. " 충분히 이해가 가는 답변이었다. "그렇겠지." "그런 만큼,그녀를 없애는 것보다는 회유하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 니까? 일단 그녀가 우리 쪽의 손을 들어 준다면 더 이상 좋을 것이 없 을 것이옵니다. 그녀야 지금 상태가 좋지 못하지만, 그녀의 뒤를 돌봐 주는 드래곤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사옵니까?또 드래곤 이 직접 나선다면 정신계 마법의 부작용쯤은 아주 간단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요." 로체스터는 구미가 당기는지 입맛을 다셨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그 고생을 했겠는가? "회유라, 하지만 그것이 쉬울까?" "일단 그녀를 지하 감옥에서 꺼내 주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그런 후 귀빈으로서 대접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시간을 들여서 회유한 다면 어쩌면 가능성도 있을 것이옵니다. 사실 그녀와 크게 원수질 일 을 한 적은 없지 않사옵니까?또 지금 그녀의 몸사 정은 좋지 못하옵니 다. 사람은 몸과 정신이 피곤할 때, 그때가 회유하기 좋지 않사옵니 까?" "그럴까?" "그렇사옵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존재는 뭔가에 약점이 있게 마련이 옵니다. 돈, 재물, 뭐 그런 것들 말이옵니다. " "하지만 그런 것이 소용이 있을까?그녀는 크라레스 황제에게 충성 을 맹세한 기사인데 말이야." "그렇다면 크라레스 황제를 인질로 잡는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크라레스는 이미 끝장 난 국가인데 어려울 것도 없겠지요." "그렇군 내가 그 생각을 못했어." "하지만 전하, 회유는 급할 것이 없겠지만 지금 당장 해 둬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 로체스터 공작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렇게 급한 일이 뭔가?" "회유하기 전에 드래곤이 이곳을 찾아낸다면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 게 될 것이옵니다. 그 점을 유념해 주시옵소서." "쯧,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드래곤은 코 앞까지 왔었지 만,그녀의 기척을 찾아내지 못했어." "물론 드래곤이 마법을 이용해서 그녀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옵니다. 미네르바가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것을 이미 봤으나까요. 하지만 정령 마법이라면 또 얘기가 틀려지옵니다. " "정령 마법 이라고?" "예,전하. 만약 드래곤이 정령왕을 불러내어 그에게 뒤질 것을 부탁 한다면 당장 발각될 것이옵니다. 그녀를 찾아왔던 드래곤은 바람의 정령력을 가진다는 골드 드래곤. 바람의 정령왕에게 부탁한다면 당 장 찾아낼 것이옵니다. 전세계에 바람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있을 수 없으니까 말이옵니다. " "큰 일이로군. 뭔가 대책이 없겠는가?" 로체스터의 걱정스런 물음에 레티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즉시 대답했다. 이미 그것에 대한 궁리를 해뒀던 것이다. "당연히 대책이 있으니까 전하께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정령 마법을 막을 수 있는 마법진을 쳐두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정령 왕이라도 그녀가 있는 곳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갑 자기 그런 것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돈이 좀 많이 들 것이옵니다. " "돈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상관없네. 즉시 시행하게." "옛,전하." 레티안은 우아하게 인사를 올핀 후 급히 밖으로 나갔다. 고위급 마 법사들을 소환하기 위해서. 환자들은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잠자면서 보내고 있었지만,그렇다 고 계속 잠만 자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식사를 했다. 수녀는 소화가 잘 되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영양가 높은 수프를 조금 씩 떠먹여 줬다. 병상에 오랜 시간 누워 있었던 탓인지 수척해진 어떤 환자는 그것을 다 받아 먹은 후 감사의 인사를 건네 왔다. 이 환자는 수녀가 배당받은 세 명의 환자들 중의 한 명이었는데, 상당히 쾌활하 면서도 넉살이 좋았다. 명패에 붙어 있는 그의 이름은 '찰스' 였다. "고맙소. 힘이 없어서 밥도 내 손으로 못 떠먹다니, 내 신세야." "찰스 씨,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열심히 드시고, 빨리 회복하 셔야지요." 위로의 말을 건네는 수녀를 향해 찰스는 언제 신세 한탄을 했냐는 듯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이봐요,수녀님. 남자 친구 있소?" "예?" 의외의 물음에 수녀가 경악했지만 찰스는 그런 것쯤이야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넉살좋게 말했다. "나도 한때는 잘 나가던 사람이었소. 재수없게 사고를 당한 것이었 지만, 조만간에 회복될 거요." 수녀가 빙그레 미소짓자 찰스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내가 미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상당히 수척하긴 했지만 아마도 살이 좀 더 붙는다면 꽤나 잘생긴 얼굴이 될 것임이 분명했기에 수녀는 미소를 지으며 응해 주었다. "예. 세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찰스 씨는 아주 미남이시지요." "헤헤헤 ,으아아암." 웃음을 터뜨리다가 찰스는 크게 하품을 한 후 말을 이었다. "요즘은 완전히 돼지가 되어 가는군. 먹고 자고, 먹고 자고..수 녀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어쩔 수 없지 않은가요?빨리 건강해지셔야죠." "그런데,수녀님. 혹시 전에 만난 적이 없던가요? 아무래도 낯이 익 은 것 같아서 ." "글쎄요. 수행을 하기 위해 3년간 코린트 전역을 떠돌았으니 뵌 적 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건 아닌 것 같군요. 나는 지난 6년간 황궁 밖을 나선 일이 거의 없 었으니까 말이오. 어디선가 만난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네" 찰스는 침대에 누운 채 한참 궁리를 하는 듯하더니 어느덧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아무리 강건하고 야심찬 젊은이라고 해도, 장기간 병석에 누워 있다 보면 아무래도 마음이 나약해지게 마 련이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이라도 옆에서 말벗이 되어 주고 간호도 해 주고 하면 마음이 슬며시 움직이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눈알이 튀어나을 만큼 아름답고 또 현숙한 무녀라면 그건 거론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런 이유로 수녀는 자신이 배당받은 세 명의 젊은이들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수녀가 데리고 온 제자 역시 그들에게 아주 귀여 움을 받았다. 그녀는 수녀를 도와 여러 가지 심부름을 했고, 그러다 보니 역시 환자들과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약간의 문제 점을 낳고 있었다. 환자들과 속닥속닥 해 가지고는 수녀 몰래 뭔가를 해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날 수녀가 노크를 한 후 곧바로 찰스의 병실문을 열었을 때,제자 가 뭔가를 황급하게 감추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녀 가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제자 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간 후 낮은 목소 리로 추궁을 시작했다. "뒤에 감춘 것은 뭐지?" "아무것도 아닙니다,수녀님." "뭐지 ?" 슬쩍 수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본 제자는 재빨리 감추고 있던 것을 황급히 밖으로 꺼냈다. 평상시에는 조신하게 행동하는 스 승이었지만, 한 번 속이 뒤틀리면 끝장을 본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녀는 제자가 들이민 것을 찬찬히 살펴봤다. 그것은 체스판이었다. 그것도 말들이 얽히고 한참 접전이 진행 중 인 체스판이었다. 그런데 괴이한 것은 자신의 제자는 체스를 둘 줄 모 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 병실에는 제자와 저 환자 둘밖에 없 는데 누구와 체스를 두었단 말인가?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고 제자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찰스는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온화한 모습일 때 는 잘 몰랐는데, 저렇게 뭔가를 파고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까 누군가의 얼굴이 슬며시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부름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수녀님 ." "심부름이라..잠깐 나좀 보자." 수녀가 자신을 밖으로 불러내자, 제자는 찰스에게 애달픈 시선을 보냈다. 이런 심부름을 시킨 당사자는 당신이 아니냐는 듯한, 또 찰스는 찰스대로 뭔가 옛 기억이 떠오르려는 상태에서 수녀가 밖으 로 나간다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우려가 있기에 참견하기 시작 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수녀님. 제가 시킨 일입니다. " "그러신가요? 도대체 누구와 체스를 두고 계셨던 거죠?" "저 앞쪽 병실의 15호 환자와 두고 있었죠. 저와 토랜 시간 친분이 있었던 분이니까요." 그 말에 수녀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곳 요양 병동 에 있는 환자들의 신상 정보는 일체 비밀이었다. 거의 무방비 상황에 처해 있는 환자들이지만, 황실에서 관리할 정도로 비중이 높은 환자 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병실에 누가 치료를 받고 있는지,그 모 든 것이 비밀 사항이었던 것이다. 지금 찰스라고 부르는 이 사람도, 편의상 찰스라는 가명을 쓰고 있 을 뿐이었다. 그런데 찰스가 친분이 있는 사람을 찾아냈다는 것은 제 자가 이 병동의 상황을 찰스에게 말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 은 이 병동에서 최고의 금기를 어겼음을 의미했다. "크리스틴, 따라나오너라." 수녀는 잔뜩 분노를 억누른 어조로 말했다. 평상시라면 웃고 넘길 수 있는 자그마한 실수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녀에게는 신 녀님으로부터 받은 교시를 이행해야만 하는 중대한 사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채 시도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멍청한 제자가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틴은 스승이 화가 잔뜩 난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체념한 상태에서 스승을 따라나가려는 순간, 찰스가 억 하는 신음소리를 삼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스승은 재빨리 찰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멍청한 제자를 체벌하는 것은 환자를 돌 본 후에 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수녀의 그 매서운 눈동자는 자신도 모르게 찰스를 향했다. 찰스는 하마터면 심장 마비를 일으킬 뻔했다. 그만큼 지금 수녀와 겹쳐져 보이는 얼굴이 그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수녀의 얼 굴은 자신을 이 모양으로 만든 그 사람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순간 적으로 찰스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공포에 물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여기까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쫓아을 줄이야.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떠오르며 그는 뒤에 매달린 줄을 공포에 의해 떨리는 손으로 정신없이 잡아당겼다. 그 줄은 자신이 잠에서 깨어났음을 무 녀나 신관에게 알리는 신호였다. 사실 자신에게 공포심을 일깨워줄 만한 '그녀' 가 진짜로 왔다면, 겨우 그들만 불러 가지고는 턱도 없다 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살아남아야겠다는 생존 본능에 떨고 있는 그에 게는 그런 생각은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녀 한 명이 요란한 종소리를 듣고는 재빨리 달려들어왔다. 찰스 는 그 무녀를 보며 겁에 질린 어조로 외쳤다. "검을다오!검을!" 정신없이 검을 달라는 소리만 외치던 그는 갑자기 실신해 버리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수녀님." 무녀는 갑자기 환자가 정신을 잃어버리자 어리둥절한 어조로 수녀 에게 물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마법사님을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찰스는 깨어나자마자 곧장 공포에 질린 어조로 검을 달라고 외쳤 다. 아무리 달래도 통하지 않았기에 병동을 담당하는 마법사는 환자 를 진정시키기 위해 검을 가져다 주었다. 물론 찰스의 검이 아니라 경 비병에게 부탁하여 그의 검을 빌려준 것이다. 경비병은 검을 빌려준 후 찰스의 옆에 붙어서서는 그 검으로 자해를 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 꼬지하지 못하도록 옆에 서서 감시했다. 찰스는 일단 검을 손아귀에 쥐자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침착한 어조로 15호실의 '로젠 형'을 불러 줄 것을 요청했다. 마법사는 무녀들과 신관들 틈에 끼여 있던 수녀에게 사나운 눈초리 를 보내며 질책했다. "도대체 어떻게 찰스님이 병동 내의 내부 사정을 알게 된 것인가?병 동 내부의 환자 배치는 절대 기밀이라고 누차 말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 수녀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이 병동에서 요양하고 있는 환자들에 대한 보호는 중요했던 것이다. 마법사가 경비병에게 뭐라고 막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 수녀의 얼 굴을 본 찰스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저 마녀를 죽여야 해!" 하 면서 두려움에 질린 어조로 비명을 지르며 검을 뽑아들었던 것이다. 경비병은 실내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환자가 검을 휘두른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를 잘 알기에, 급히 환자가 검을 휘 두르지 못하게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마법사는 이 모든 사태의 원 인이 수녀였다는 것을 눈치채고 경비병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수녀 가 경비병들에게 끌려갔음에도 환자는 로젠을 찾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마법사님." "할 수 없지. 15호실의 로젠을 이쪽으로 불러주게. 일단은 환자를 안 심시키는 것이 우선이야." "그랬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합니까?" "괜찮을 거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난동을 부리겠나?" "예 ,그렇게 하죠." 곧 이어 창백한 안색을 한 로젠이 신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 다. 찰스는 로젠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안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만큼 찰스는 로젠이란 인물을 믿는 것 같았다. 로젠은 약간의 설명을 신관들에게서 들었음인지 찰스에게 다가서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 다. "일단 검부터 놓고 얘기하자." "그녀 ,그녀가 나타났어 , 형!" "그녀라니?" "우리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치레아 대공 말이오." "치레아 대공이라고?그녀가 어디 있는데?" 그 물음에는 뒤에 서 있던 마법사가 답해 주었다. "수녀를 말씀하는 모양인데, 병실에 구금해 두었습니다. " "구금해 두었다고?" 로젠으로서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여기 에 왔다면 결코 구금 따위를 당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를 그녀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시오." "예." 마법사는 지체없이 로젠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오랜 시간 이 병동 에서 일해 왔던 마법사는 이들의 신분 내력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 었다. 신성력을 주축으로 수련을 해 온 신관이나 무녀들의 경우 잘 모 르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마나를 다루는 법을 익혀 온 그는 이 '마나 고갈' 이란 희귀한 병이 아무나 걸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병에 걸려서 황실 소속의 이 병원에 입원 하려면 타이탄을 조종하던 오너 정도는 되어야 올 수 있음을 그는 잘 알고있었던 것이다. 병자 개개인의 신상은 모르지만 대략적인 신분 을 알고 있는 그였기에 감히 상대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이곳입니다. " 로젠이 만난 수녀는 여느 성직자와 다를 바 없었다. "왜 그런 오해가 생겼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환자의 신상 을 누설한 죄를 물으신다면, 당연히 제가 그 책임을 져야하겠지만 저 를 보고 마녀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제 신상에 대해서는 드로아 대신전에 문의하시면 곧바로 아실 수 있을 텐데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저는 절대로 흑마법 따위를 익힌 적이 없습니 다. " 로젠은 가만히 앉아서 정중하게 수녀의 말을 경청했고, 또 그녀의 외모를 살펴봤다. 마녀라고도 불리는 치레아 대공은 15세 정도의 소 녀와 같은 외모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모에 도 저히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검술 실력 때문에 모두들 마녀라고 수군 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수녀는 20대 초반의 완 숙미를 뿜어내는 아름다운 성직자였던 것이다. "저도 그 녀석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군요. 참, 이럴 것이 아 니라 다시 한 번 그 녀석과 얘기를 나누어 보기로 하죠. 같이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지요. 저도 누명은 벗어야 할 테니까요." 로젠은 수녀를 문 앞에 세워 둔후 말했다. "제가 신호를 하면 들어오십시오." 잠시 후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려 오자 수녀는 문을 열고 들어 갔다. 그녀를 보자마자 찰스의 표정이 다시금 공포로 물드는 것을 보 자, 로젠은 곧장 그의 뺨에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비틀거리는 자신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로젠은 꼴사납게 자빠질 뻔했다. 황급히 옆에 서 있던 신관이 그를 부축했다. 로젠은 한 대 맞고 침대 밑에 널브러 져 있는찰스를 향해 외쳤다. "야, 이 정신빠진 놈아! 몸이 조금 말을 안 듣는다고, 그 사이에 정신 까지 썩어 문드러졌냐? 똑바로 정신차리고 봐. 저분이 진짜 마녀가 맞아?" 우악스런 일격을 당한 찰스는 머리가 떵한 지 두세 번 고개를 세차 게 흔들더니 좀 더 세심하게 수녀를 살펴봤다. 물론 그가 이렇듯 용기 를 짜낸 것도 옆에 로젠이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만큼 마녀와의 마지막 만남은 그의 마음 속에 격심한 공포를 심어왔 던 것이다. 차근차근 따지면서 보자, 확실히 다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 수녀의 얼굴에서는 마녀와 달리 오만함이나 자유분방함은 찾아보기 힘들었 고, 무엇보다 나이대가 맞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녀가 처녀로 성장한 다면 꼭 저런 얼굴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나이를 먹지 않는 마녀는 결코 처녀가 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예전에 만났던 그 모습을 유지 하고 있다는 '벼룩' 의 보고서를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누군가와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 찰스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하지만 로젠에게 한 대 맞 은 것은 억울했는지 침대에 자빠진 상태에서도 그쪽에 변명을 남기 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은 마녀의 얼굴을 한 번도 못봐서 냉정을 유지한 모양인데, 진짜 닮았다니까." 이제 제정신을 차린 찰스를 경비병이 황급히 들어서는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로젠도 호기심이 이는지 말했다. "진짜 그렇게 닮았냐?" "진짜라니까. 그 마녀가 나이를 좀 더 먹으면 꼭 저 여자와 똑같아질 거야. 내 명예를 걸고 그건 확신할 수 있어." "하기야, 이 세상에 닮은 사람이 한둘은 있다고 하지 않냐?그건 그 렇고, 마녀가 이렇게 생겼단 말이지." 로젠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수녀를 쏘아봤다. 수녀의 그 모습을 자 신의 뇌리에 담아 두었다가 언젠가 복수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수녀 는 상대의 살기어린 눈빛에 오한이 나는 듯했지만,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이제 오해가 풀린 모양이군요." "예, 죄송합니다. 수녀님." 이때 여태까지 조용히 사태의 경과를 주시하고 있던 마법사가 젊잖 은 어조로 끼여들었다. "오해는 풀렸지만, 그것으로 수녀의 죄가 용서될 수는 없소. 끌고가 라." "옛!" 경비병이 수녀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며, 마법사는 신관들에게 지 시했다. "로젠님을 병실로 모시게. 많이 피곤하실 거야." 로젠은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했지만, 신관들의 손에 이끌려 병실 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시끌벅적하던 병동은 일단 정돈이 되었다. 하 지만 스승은 끌려가 버리고 이제 홀로 남겨진 크리스틴의 문제는 아 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위의 눈치를 살짝보면서 찰스의 병 동으로 숨어들었다. 크리스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모든 일의 원흉 은 찰스였다. 그가 크리스틴을 꼬셔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니 까 말이다. "이봐요, 아저씨! 아저씨! 일어나욧!" 모든 일이 해결되었기에 곧이어 찾아온 격심한 피로감에 깜빡 잠이 들어 있던 찰스를 크리스틴은 사정없이 흔들어 깨웠다. 정상인의 몸 이 아닌 찰스였기에 달콤하게 자고 있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그 손 길은 정말이지 짜증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무,무슨 일이냐?" "이렇게 주무실 때가 아니라구요. 수녀님을 구해 주세요." "수녀 ?수녀가 누구였지 ?" 아직 잠이 덜 깨서 몽롱한 정신에 이리저리 생각을 하던 찰스에게 수녀가 누군지 떠올랐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잡혀들어간 수녀를 말 이다. 그녀는 제자의 잘못을 모두 다 덮어쓰고 구금되어 있었다. 하지 만 그것이 아무리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지금 찰스 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입장이 아니었다. 크나큰 공포에 따른 긴장에서 해방된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격심한 피로감뿐이었다. 너 무나도 피곤했다. 그리고 그것도 한참 잠이 든 상태에서 강제로 일어 난 상태였기에 피로감은 더욱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으응,그건 좀 자고 나서 생각하자." 찰스는 시트를 끌어 덮으며 잠꼬대하듯 중얼거렸고, 곧이어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아들을 찾기 위한 노력 한 며칠간 열심히 세상을 휘젓고 다녔던 아르티어스는 또다시 레어 에 들어앉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 중이었다. 처음 떠올랐던 '무식하기 그지없었던' 계획이 막상 실행해 놓고 보니 힘만 들었을 뿐,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탓이다. "젠장!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못찾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 는 거지?아무래도 탐지 마법에 걸리지 않는 무슨 수작을 부려놓은 것 일 거야. 그렇지 않다면 이 위대하신 내가 못 찾아낼 리 없어." 아르티어스는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한 가지 기가 막힌 것이 떠오름을 느끼고는 '딱'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튕기면서 외쳤다. "그렇지! 정령왕이야. 정령왕에게 부탁하면 되는 것을 왜 미처 그 생 각을 못했지?" 아르티어스가 소통하는 바람의 정령왕이라면 당연히 해답을 알려 줄 것이 분명했다. 아르티어스의 지식으로는 공기(Air)가 없는 곳에서 살수 있는 호비트는 보지를 못했고, 또 공기가 존재한다면 당연히 바 람도 따라다니게 되어 있다. 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아르티어스가 아 직까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여태껏 이런 일로 정령왕을 불 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아르티어스의 능력으로 찾 아내지 못한 대상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간이 좀 많 이 걸리기는 했었지만, 물론 정령왕의 도움이 없다고 해도 언젠 가는 다크를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행방 불명된 다크 를 '빨리' 찾아내야 했다. "아리엘! 태고적부터 골드 일족에게 전해지는 피의 맹약에 따라 그 대를 소환한다. 모습을 드러내라!" 곧 이어 희미한 음영이 아르티어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 한 뭔가가 어른거린다는 것이 느껴질 뿐, 그 형체를 알아보기는 매우 힘들었다. 잠시 후 공허한 울림이 들려 왔다. (무슨 일인가? 아르티어스여.) "내 아들 알지? 전에 자네가 정령계에서 구해 준 그 아이 말일세." (정령계에서는 수컷이었다가, 이리로 가져오니 암컷이 되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그 괴상한 호비트 말이군.) '괴상한' 이라는 말에 아르티어스의 얼굴 색이 약간 찌푸러들었지 만, 이쪽에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판에 그런 사소한 것을 가지고 따질 이유는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표정 관리에 신경쓰며 다급히 말 했다. "그래 ! 바로 그 아이야." (그 호비트가 왜?) "그 아이가 또 행방 불명이 되었다 이 말이야. 뭐 내 능력으로도 찾 아낼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바람의 정령왕인 자네보다는 시 간이 더 걸릴 것 아닌가? 안그래?" 은근슬쩍 상대를 띄워 주자 바람의 정령왕이 이 오만무도한 드래곤 이 웬일인가 싶은 듯했지만, 그래도 잘 났다고 추켜세우는 데야 기분 이 나쁠 턱이 없었다. (물론이지. 나의 종들이 미치지 않는 대륙은 이 세상에 없다. 어디 에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다. ) "그래, 그래. 그래서 내 자네에게 부탁하려고 말이야. 그 아이를 나 한테 데려와 줘. 알겠나?" (드래곤과의 싸움도 아니고, 고작 그 일을 시키려고 피의 맹약 을 거론하다니. 자네도 성격이 많이 바뀌었군. 그런 사소한 일이라면 그냥 나한테 슬쩍 부탁해도 얼마든지 들어 줬을 텐데 말이야.) "나한테는 다급한 일이야. 최대한 빨리 부탁하네. 알겠나?" (알았다. ) 찰스는 크리스틴의 기나긴 설명이 끝나자 다시금 확인하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수녀님은 그 신녀라는 사람이 내린 교시를 행하기 위해 이리로 왔다는 거냐?" "예. 그러니까 아저씨께서 수녀님을 좀 도와주세요. 따지고 보면 아 저씨의 잘못이잖아요. 아저씨가 나한테 그런 심부름만 안 시켰어 도 .. 흑흑." 찰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크리스틴은 마침내 눈물 공격까지 시 작했다. 하지만 찰스의 시선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크리스틴 의 얼굴에 가 있지 않았다. 그만큼 크리스틴이 전해 준 말은 섬뜩한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암흑의 기운이 전세계를 덮고, 또 그것을 퇴치 할 영웅이 케락스 시에서 나온다는 크리스틴의 말. 물론 어린 계집애 가 하는 소리니까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짜로 그 수녀가 드 로아 대신전에서 왔고 또, 영웅을 찾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옛부 터 아데나 신전에서 나오는 신탁은 그 정확도를 인정받고 있었기 때 문이다. 물론 상당히 추상적인 부분이 많아서 해석이 불가능한 신탁 이 나오는 경우도 많긴 했지만 말이다. "너는 가서 병동 담당 마법사를 불러 오너라." 찰스의 말에 크리스틴은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되물었다. "예?그럼 아저씨가 마법사님께 말씀해 주실 거에요?" "그래,빨리 가거라." "예."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크리스틴은 마법사를 데리고 왔다. 마법사는 찰스를 보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지금 당장 저 아이와 함께 왔던 수녀를 나한테 데려오시오." 찰스의 명령에 마법사는 당혹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아무리 상대 가 오너급의 기사라고는 하지만 들어 주기 어려운 명령이었던 것이 다. "예? 하지만 그건 어렵습니다. 이 병동 내에서 환자의 신상을 누설하 는 것은 절대로 엄금하고 있습니다. 만약 꼭 그렇게 하셔야 한다면 병 원장님과 상의를 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지금 당장 불러 오시오." "저,그런 것은 정말.." 마법사가 끝까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난처한 듯 발뺌을 하자, 찰 스는 표정을 굳히며 확정적으로 말했다. "자네는 내가 누군지 아는가? 나는 대코린트 제국의 제2근위대 대장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이다. 네놈이 감히 내가 병든 것을 악용해서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인가?" 까미유의 말을 들은 마법사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상대가 기사급인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거물일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또 이런 거물이 명령한다면 병원장이라고 해 도 거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자신처럼 병동을 책임지는 말단 마법사라면 말할 나위도 없었다. 상대의 신분을 들은 즉시, 마법 사의 허리는 순식간에 90도로 꺽어졌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후작 각하!" "이거 뭔가 잘못되지 않고서야 바람의 정령왕이라는 놈이 이렇게 시 간을 끌 수가 있나? 아니면 또 딴놈이 뭔가 부탁을 해서 그거 들어 준 다고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 것 아냐? 내가 그래서 피의 맹약까지 들고 나왔거늘." 아르티어스가 투덜거릴 만도 했다. 그 정도 일은 매우 손쉽다는 듯 큰 소리를 쳐놓은 주제에 아리엘은 사흘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 던 것이다. "젠장! 더 이상은 못참겠다. 아리엘! 이 빌어먹을 녀석아, 나의 소환 에 응해랏!" 곧이어 아리엘이 그 투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찾아보기나 한 거야?" 으르렁대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아리엘의 풀이 죽은 음성이 울려왔 다. (실피드와 실프들을 총동원하여 세계 곳곳을 이잡듯이 뒤졌다. 하 지만 이상하게도 그 호비트가 있는 곳을 알수 없었다. 뭔가 마법적인 것을 통해서 결계를 쳐왔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만약 그 렇다면 나로서는 그 호비트가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없다. ) "젠장할, 꼴도보기 싫으니 꺼져 버렷!" 아리엘은 아르티어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빨리 모습을 감춰 버 렸다. 물론 그가 그렇듯 빨리 사라져 버린 것은 아르티어스의 말을 잘 들어서는 절대로 아니었다. 드래곤과 정령왕 간에 이어져 오는 피의 맹약을 요구했을 때, 정령왕은 드래곤의 요구를 무슨 일이 있어도 들 어 줘야만 했다. 태초에 드래곤과 정령왕 간에 이루어진 이 피의 맹약에 따르떤 드 래곤은 정령왕에게 평생을 통해 단 한가지의 '강압적인 명령을 할 수 있었다. 정령왕은 드래곤이 '피의 맹약' 이란 조건을 들고 나오면 자신의 소멸 같은 말도 안 되는 명령이 아닌 한, 거의 다 들어 줘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완수하지 못했을때는 벌칙으로 또 다른 명령을 들어 줘야 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거부의 권리마저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아르티어스가 '지금은 내릴 명령이 없으니 다음에 보 자구' 라고 했다면 상관없겠지만, '꺼져 버렷!' 하고 명령조로 말했 으니 정령왕쪽에서 본다면 엄연히 이것도 '명령'에 포함되는 것이 다. 그러니 이런 호기를 놓치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한다?이거 원..정령이란 놈들처럼 관계를 맺은자와 뭔 가 심령으로 연결되지 않고서야 아무리 나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알 아낼 방법이 없잖아." 무심결에 지껄인 소리였지만,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 벌떡 일어서면서 외쳤다. "그렇지 ! 나이아드가 있었지."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가 비록 아쿠아 룰러라는 매개체를 통해서였 다고는 하지만 일단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정령과의 관계 는 그 정령을 불러냄으로 인해서 성렵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정령술 사들의 경우 상대가 어떤 정령을 불러냈는지를 매우 귀신처럼 알아 내게 되는데,그들은 정령을 불러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만큼 서로간에 맺어지는 영적 교감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령왕 같은 경우 자신과 한 번 영적 교감을 맺은 상대라면, 공간은 물론이고 차원에도 제약을 받지 않고 상대를 찾아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만큼 정령과 정령왕간의 능력의 차이는 극심했던 것 이다. 아르티어스는 그 즉시 자신의 레어 필숙한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 다. 레어의 가장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 방의 한쪽에 아들 녀석의 부탁 대로 아쿠아 룰러가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봉인해 두었기 때문 이었다. 다섯 겹의 마법진이 중복으로 그려진 막강한 결계 속에 아쿠 아 룰러는 봉인되어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그 결계 안으로 서슴치 않고 들어섰다. 결계는 자신 이 만들었고,아르티어스는 그 결계 안에 자신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르티어스는 아쿠아 룰러를 가지고 결계 밖으로 나온 후 반지의 정령을 불러냈다. 소녀의 모습인 반지의 정령은 상큼한 목소리로 인 사를 건네 왔다. "부르셨습니까?아르티어스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래,빨리 가서 나이아드 좀 불러 와라." 아르티어스의 말에 반지의 정령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예?나이아드님을요?불러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별로 도 움이 되지 않으실 텐데요."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내가 결정해. 네녀석은 빨리 가서 불러 오기 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 반지의 정령은 사라졌지만, 나이아드는 곧바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 았다. "도대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지?이상한 일이군. 누군가 선약이 있나?" 또 다른 정령술사나 드래곤이 정령왕을 아르티어스보다 먼저 소환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널린 것이 정령이지만 정령왕은 하나뿐이었 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때는 물론 먼저 소환한 쪽에 우선권이 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르티어스는 초조 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은 1분,2분 흘러가더니 이윽고 5분,10분 단위를 넘어서서 한 시간을 넘어 두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누가 정령왕을 이렇듯 오래 잡고 있단 말이야? 웬만한 일은부탁하면 후딱 해치우.." 아르티어스는 그제서야 생각이 미쳤다. 나이아드와의 마지막 만남 이 결코 서로 간에 유쾌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젠장, 겨우 그딴 일로 꽁해 가지고 안 나온다 이거지. 정령왕이란 놈이 쪼잔하기는." 아르티어스는 투덜거리면서 또다시 반지의 정령을 불러냈다. 반지 의 정령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풀이 죽은 모 습이었다. "예, 또 부르셨어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나이아드님께서는 아르 티어스님과 만나기 싫다고 하셨는데요." "쯧,그럼 이렇게 전해라. 내 레어 안에 봉인되어 영원히 세상구경 하기 싫다면 좋을 대로하라고 말이야. 알겠어?" "예,그렇게 전하겠습니다. " 반지의 정령이 모습을 감춘 후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나 이아드는 재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반지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순식 간에 형상을 만들더니 곧이어 거대한 오우거로 변했던 것이다. 흉칙 한 몰골의 오우거는 아르티어스를 비웃듯 노려보더니 이죽거렸다. "아쿠아 룰러를 봉인하겠다고? 그게 네녀석 마음대로 될 줄 알아?" 거대한 오우거의 목소리라서 그런지 레어 안이 울릴 정도로 그 목 소리는 컸고,아주 굵직했다. 그리고 인간이나 엘프와 같은 섬세한 구 강 구조를 지니지 못한 탓인지 중간 중간에 바람이 빠지는 듯한 거북 한 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쨌건 만나자마자 대뜸 시비부터 거는 상대를 향해 아르티어스는 느긋하게 말을 건넸다. "마음대로 될지 안 될지는 두고 보면 알걸?" "훗! 에인션트 실버 드래곤 쟈키므로네가 만든 아쿠아 룰러를 봉인 하겠다고?겨우 네녀석 실력으로?오래 살다 보니 별 미친 소리를 다 들어 보겠군." 비웃고 있는 나이아드를 향해 아르티어스는 일침을 가했다. "후훗,물론 아쿠아 룰러 자체를 봉인할 수는 없지. 하지만 이곳 레 어 안에서 그 누구도 아쿠아 룰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둘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군, 그런 후 나는 기다릴 거야. 내가 아 쿠아 룰러를 봉인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말이야. 그런 다음 계약을 무위로 돌리고 이걸 단순한 금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거야." "으드드득! 네 녀석은 그럴 자격이 없어. 왜 네놈이 실버 일족과 나 사이에 만들어진 계약을 없애려고 든단 말이냐?" "물론 내 부탁을 들어 준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봉인 같은 것 하지 않고 아쿠아 룰러에 어울리는 멋진 주인을 찾아주겠어. 어때?" "호오, 갑자기 웬 뜬금없는 협박을 해 대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 좋아. 그렇게 터무니없는 궁리를 하고 있는 골드 일족의 사생아께서 나한테 부탁하고싶은 게 뭐지?" '사생아' 라는 말의 뜻을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는 엄청나게 성질이 치솟으려고 했지만, 일단 이쪽에서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꾹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사실 드래곤에게 있어서 사생아라는 것이 있 을 수 없었기에 그런 미약한 도발에 이성을 상실하기는 힘들었다. "내 아들이 행방 불명되었다. 너는 그 녀석과 관계를 맺었으니 어디 에 잡혀 있는지 알수 있을거야. 안그래?" "오호라! 바로 그거였군. 이 위대하신 나로 하여금 그날 그 치욕적인 일을 당하게 한 그 계집 말이야. 그년이 행방 불명되었다니 축하할 일 인데 그래." 이죽거리는 나이아드를 향해 아르티어스는 화를 벌컥 냈다. "농담을 할 대상이 따로 있지, 빌어먹을 녀석 ! 어쨌든 그 아이를 이 리로 당장 데려와. 그러면 내가 이곳에 아쿠아 룰러를 봉인하지 않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줄 것을 이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을 걸고 맹세하 겠다. " 드래곤으로부터 맹세를 얻어내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지만 나 이아드는 상대가 그런 소중한 맹세를 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이아드는 콧방귀를 뀌며 이죽 거렸다. "헷! 놀고 있군, 그래서 나한테 얻어지는 이익이 뭐지?한 번씩 세상 구경을 하는 것 말인가?하지만 겨우 그따위 것으로는 짓뭉개진 나의 이 자존심이 치료될 것 같아? 이 미친 드래곤아! 그 따위 아쿠아 룰러 가 없어도 나는 세상구경을 할 수 있어." 물론 나이아드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퍼져 사는 드래 곤들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것이 실버 드래곤이었다. 그 실버 드래곤이 뭔가 부탁을 하기 위해 나이아드를 부를 수도 있었고, 정령력이 강한 엘프가 그를 소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쟈 키므로네 같은 할 일 없는 노룡이 또 다른 아쿠아 룰러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이기에 속이 뒤틀리기는 했 지만, 한 발자국 물러서서 흥정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나? 너의 그 계획을 도우라는 말인가?좋아. 그 대상이 내 아들만 아니라면 그것도 도와 주겠어. 자 네가 이 세상의 모든 호비트를 다 죽여 없애려고 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대상에서 내 아들만 제외한다면 말이야." 매우 파격적인 제안임에도 나이아드에게는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 았던 모양이다. "미친 소리하고 있군. 그 사건이 있기 전에 그런 약속을 했다면 나도 환영했겠지만, 지금은 시효가 지나 버렸어. 이번 일로 모든 게 명 확히 드러나 버렸단 말이야. 아무리 나와 다오가 연합해서 움직인다 고 해도, 또 다른 정령왕 셋이서 반대한다면 이루어질 수 없어. 그런 의미에서 내 계획이 완전히 좌절되도록 만든 그 호비트 계집이 사라 져 준 것은 정말 기분좋은 일이지. 나는 이제 돌아가서 다오하고 축배 나 들어야겠어. 작은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으하하 하!!" "젠장! 그럼 아리엘에게 부탁해서 중립을 지키게 해 줄게. 그러면 되 지 않나?" "헛소리하지 마! 네놈 말고 또 다른 골드 드래곤이 아리엘에게 막아 달라고 부탁한다면 그딴 약속은 휴지 조각이 되겠지. 그걸 모를 정도 로 내가 멍청한 줄 알아?그럼 다음에 보자구. 아니, 너같이 재수없는 녀석은 다시는 안봤으면 좋겠어." 나이아드가 사라져 버린 후 아르티어스는 바닥에 뿌려져 있는 물을 보며 절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이아드가 심통이 날 것은 당연했다. 그딴 계획이야 틀어져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령계에서 최 강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자존심이 짓뭉개진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아르티어스로서는 나이아드를 불러낸 것이 오히려 역효과였다 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이아드는 다크를 찾아내는 것을 도와 주는 것은 고사하고, 이제 기회를 만났다는 듯 수색 작업을 방해 할 가능성까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르티어스는 머리카 락을 쥐어뜯으며 외쳤다. "으아아아! 빌어먹을!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드래곤들의 분노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또다시 고민에 잠긴 아르티어스 어르신. 그 의 머릿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 로 된 방법은 좀체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령왕 아리 엘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바람의 정령왕 아리엘은 다크를찾을수 없 다고 했다. 하지만 나이아드는 찾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생 각은 여기에서 멈췄다. 그렇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내가 정령왕 아리엘을 부를 수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노회한 실버 드래곤들 또한 정령왕 나이아드를 불러낼 수 있을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그리 고 나이아드는 실버 드래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으하하하하찻! 가장 가까운 실버 드래곤이 어디에서 살고 있더라?" 아르티어스가 만족스런 웃음을 터뜨리며 막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 는데, 이때 자신의 영역에 엄첨난 드래곤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리고 아르티어스가 걸고 있던 목걸이가 요란스레 진동한 것도 거의 동시 였다. 이것은 상대가 레어에 아주 가깝게 접근해 왔다는 것을 의미했 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감히 자신의 영역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드래곤의 존재는 거의 500 년만에 처음이었기에 아르티어스는 궁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레드 드래곤 브론티어의 다리뼈를 부숴 버린 것을 마지막으로 그 소 문이 퍼졌는지 어떤 드래곤도 말토리오 산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이번에는 어디를 부숴 줄까 궁리를 하 면서 슬슬 레어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음! 자네가 아르티엔님의 아들, 쉭! 아르티어스인가?" 레어 출입구에서 아르티어스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세 마리나 되는 드래곤이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슬슬 걸어나오는 것을 보며 그들 중에서 오크로 변신 하고 있는 드래곤이 물어 왔다. 그 오크는 보통의 오크들과 달리 털 색이 초록색이었다. "그,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상대에게서 뿜어나오는 거대한 드래곤의 존재감, 이건 거의 에인션 트급이었기에 아르티어스도 적성에는 맞지 않았지만 말을 높였다. 아르티어스는 왜 여기에 나오기 전에 상대가 누군지 확실히 알아보 고 나오지 않았는지 뼈저리게 후회하는 중이었다. 상대가 에인션트 급 드래곤 세 마리였다면 어슬렁거리며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멍청하게도 벌써 나와 버린 것이다. 상대가 시인하자 오크는 옆에 서 있는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엘프 청년에게 말했다. "음! 제대로 찾아왔군." "내가 말했잖아. 말토리오에는 이놈밖에 안 산다고 말이야. 오크들 과 오래 살았다고 기억력도 오크를 닮아 가냐?" 붉은 머리의 엘프가 오크에게 퉁명스레 말하며 시비를 걸 듯 말하 자, 뒤쪽에 조금 떨어져서 서 있던 트롤이 앞으로 슬쩍 나서면서 말했 다. "자자, 쓸데없는 말다툼은 나중으로 미루고 여기에 온 목적부터 해 결해야지. 자네, 악평이 자자하던데? '그런 위대한 분에게서 이런 개 망나니가 나오다니 이해할수 없다. '고 하면서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아르티어스는 넉살좋게도 짐짓 분개한 듯한 어조로 외쳤다. "어떤 놈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던가요? 저는 4000 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 말토리오에서 평화롭게 산 죄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그런 악의에 찬 거짓말에 속으시면 안 되지요." 딱 잡아떼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엘프가 씩씩거리며 따지고 들었다. "수많은 드래곤들이 자네에게 날개가 부러지고, 다리뼈가 꺾였는데 도 그렇게 딱 잡아떼긴가?" "그건 그놈들의 잘못입니다. 제 영토에 들어와서 허락도 받지 않고 둥지를 틀려고 하는데 그것을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드래곤 간의 영역 싸움은 서로가 간섭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지 않습니까?아무리 나이가 많은 노친네들이라고 해도 그 불문율까지 어기면서 저에게 따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르티어스가 노친네라는 단어를 쓰자, 붉은 머리의 엘프도 슬며시 화가 치미는지 말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네놈의 말도 맞기는 해. 하지만 자네가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면적이 너무 넓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이 세상에 어떤 드래곤이 산 맥 하나를 통째로 자신의 영토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좋아,뭐 면적 쯤이야 백보 양보해서 그냥 넘어간다고 하고, 며칠 전에 있었던 일들 은 말토리오 산맥에서 벌어진 것이 아닌데?그에 대해서 네놈은 뭐라 고 변명할 거냐?" "저는 절대로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변명하겠습니다. " 얼굴 가죽 두꺼운 아르티어스의 변명에 엘프는 치미는 분노로 인해 얼굴색이 시뻘개졌다. "이런 뻔뻔스러운 놈을 봤나! 이런 짓을 할 골드 드래곤은 네놈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도 발뺌을 해? 거기다가 네놈은 크 록시안을 무자비하게 두들기면서 말토리오 산맥 운운했지 않느냐? 증거가 명백한데도 그렇게 빤한 거짓말을 늘어놓을 거냐?" 상대는 이미 다 알고 찾아온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이성을 잃고 혼 자서 흥이 나서는 습관대로 말토리오 산맥을 거론했던 것이 치명적 인 실수였다. 아르티어스는 할 수 없이 '잘못의 일부'를 시인하지 않 을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아, 난 또 뭐라구요. 겨우 그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건 그 아이들 한테서 듣지 않으셨습니까? 연장자로서 헤즐링을 출산한 경사스러운 일을 함께 나누자는 의미에서 버릇없는 후배들을 조금 교육시킨 것 뿐입니다. 그리고 놈자는 좀 빼시죠. 아무리 나잇살 좀 더 먹었다고 놈놈하시면 됩니까? 저도 4007살 넘은 지가 오래라구요." "뭣이?" 뺀질뺀질하게 말대답을 해 대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엘프는 이제 분 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는지 입에 거품을 물고 쏘아댔다. "이런 떠그랄 놈을 봤나! 어르신이 말씀을 하시면 잠자코 들을 일이 지, 끝까지 말대답을 해? 그리고 네놈이 했다는그 교육! 조금만 더 교 육했으면 드래곤 여러 마리 잡았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냐? 네놈도 오늘 나한테 교육 한 번 당해 볼래?" 그런 엘프를 트롤이 막아서면서 다독거렸다.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면 저놈과 똑같이 된다는 것을 모르나? 연 장자로서 좀 체통을 생각하게." 트롤은 아르티어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자네한테 '교육' 을 당한 드래곤들이 각자 자기 종족의 노룡들을 찾 아가서 하소연을 했다네. 나한테도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크록 시안이 헤즐링을 데리고 찾아왔더군, 자신의 아이가 보는 앞에서 자 네한테서 무참하게 박살이 났다고 하면서 말일세. 그때의 충격이 얼 마나 컸는지 그 헤즐링은 지금까지 말도 못하고 있는 실정일세. 그래 서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이 나선 것이지, 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텐 가?" 갑자기 각 종족을 대표하는 영감탱이들이 왜 자신의 집을 방문했는 지 아르티어스옹은 비로소그 이유를 알수 있었다. 여태껏 말토리오 에서 사고친(?)것은 그래도 그곳을 아르티어스의 영역권으로 봐줬기 에 그냥 넘어갔지만, 딴 드래곤의 영역에까지 원정가서 사고친 것은 도저히 못봐 주겠다는 뜻이었다. 자, 일은 이미 벌어진 것이고,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제 어떻게 해야 할까? '죄송합니다'하고 사과해서 모든 일이 끝날 거 라면 아르티어스는 곧장 사과부터 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지금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끝날 수 있는 일 이라면 이렇듯 많은 노룡들이 올 이유가 없었다. '한 판 해버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노회한 아르티어스로서도 감히 노룡 세 마리를 상대로 맞짱 뜬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다면 노룡 한 마리 정도는 어 떻게 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그 이상은 무리였던 것이다. 거기 에다가 저 붉은 머리의 엘프가 가장 큰 문제였다. 트랜스포메이션 한 상태라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서 레드 드래곤의 존재감이 강렬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만약 저 엘프가 자신의 짐작대로 광폭하 기로 유명한 에인션트 레드 드래곤 브라키어라면 그 하나만을 상대 하기도 벅찰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이제 싸운다는 것은 아예 생각 밖으로 접어두고, 탈 출할 궁리부터 하기 시작했다. 약간 투닥이는 척하면서 장거리 공간 이동 몇 번 하면서 저것들을 따돌린 후 어디 먼 섬에 가서 한두 달 숨 어있으면 어떨까? 하지만 그것은 미봉책일 뿐, 해답이 될 수는 없었 다. 저 할 짓 없는 노룡들은 시간이 남아도는 존재들이 아니던가?아 르티어스와 아무리 오랫동안 숨바꼭질을 한다고 해도 절대로 포기할 존재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잘 알기에 아르티어스는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었다. 또,도 망친다고 하더라도 저들을 따돌릴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수 십 년,아니 수백 년 동안 끝없이 도망만 다니다가 결국에는 항복하거 나 맞아 죽을 것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항복하고 저들에게 끌려갈수도 없었다. 불문율 을 어긴 드래곤에게 주어지는 형벌은 그만큼 가혹했던 것이다. 어쩌 면 수백 년 동안 지하에 봉인당해 다시는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지 도 모른다. 자신이 왜 이웃 드래곤을 찾아다니며 분풀이를 한 것이었 는데?그것도 다 아들 녀석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 일어난 불상사가 아 니었던가! 아르티어스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을 때, 또다시 희뿌연 빛을 뿜어내며 뭔가가 공간 이동을 해 왔다. 아르 티어스는 희뿌연 빛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또 다른 드래곤이 한 마리 더 동참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공간 이동해 오는 드래 곤이 뿜어내는 존재감 또한 강렬한 것이었다. '젠장할!도대체 나 하나를 잡겠다고, 에인션트를 몇 마리나 부른 거 야?' 공간 이동이 끝난 순간, 아르티어스의 눈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이제 겨우 열너댓 살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소 녀였다. 하지만 이제 공간 이동이 완료된 순간,드러나기 시작한 완벽 한 존재감 바로 그것을통해 이 망할 소녀는 아르티어스가 꿈에도 보 기를 원치 않는 존재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공간 이동 마법은또 다른 이질적인 마법에 의해 소멸당했다. "이런 망할 녀석! 네 녀석이 이번에도 사고쳤다며?" 갑작스럽게 자신의 마법이 소멸당하자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달려 서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상대에게 머리끄뎅이를 붙잡힌 상태였다. 아르티어스는 탈출을 저지당하자 어설픈 억지 미소를 지으며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 소녀는 바로 골드 일족의 최고 연장자이자,아 르티어스가 최고로 껄끄럽게 생각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거 다 헛소리라니까요! 그런 헛소문에 현혹당하셔서 죽을 때가 다 되셨으면서 묘자리나 알아볼 생각은 안 하시고 이곳까지 찾아오 시다니.." "헛소문이라니! 내 네녀석이 하는 못된 짓꺼리는 안봐도 훤하다. 이 보게들 잘 있었나?" 모두들 소녀를 향해 고개를 조아려 왔다. 종족을 떠나 7000살이 넘 은 노룡에 대한 예의였기 때문이다. "안녕하셨습니까?아르티 엔님." "나야, 이 말썽꾸러기가 사고치지만 않으면 잘 지낸다고 봐야지. 그 런데 이놈이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쳤나?전갈을 받자마자 달려왔기 에 자세한 것은 잘 모르거든." 소녀의 말을 들은 오크가 그녀에게 다가가서는 낮은 어조로 쑥덕거 리기 시작했다. "그래?그랬단 말이지." 한참 설명을 듣던 소녀는 한 번씩 아르티어스 쪽으로 곱지 못한 시 선을 힐끗힐끗 던졌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은 아르티어스는 오한이 나는지 한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르티어스는 왜 자신이 좀 더 과감하게 일찍 결정을 내리지 못했나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중이 었다. 일단 아르티엔이 나선 이상 아르티어스는 고양이 앞의 생쥐 꼴 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르티어스의 인격 및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 을 끼친 이 노룡은 아르티어스가 아무리 해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 던 것이다. "그래, 이제는 말토리오 산맥에서 손님을 받기도 힘드니까, 멀리 원 정까지 가서 이웃 드래곤들을 괴롭히는 못된 취미를 가지기 시작했 다고?"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아버지!" 아르티어스는 힘겹게 반론을 제기했지만,무자비하게 묵살당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죽기 전에 그 삐뚤어진 근성만은 고쳐 놔야겠다. " "젠장,그게 아니라니까 그러시네요." "이보게나." "예." 아르티엔은 쭉 늘어서 있는 드래곤들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부탁했 다. "이번 일은 나한테 맡겨 주지 않겠나?자식을 이렇게 키운 내 잘못을 바로잡을수 있는 기회를 좀 주게나. 내 이렇게 부탁함세." "안 돼요!아버지가 왜 저를 데려가신단 말씀이십니까? 일단 헤즐링 이 드래곤으로 성장한 후에는 독립시켜야 한다는 불문율을 잊으셨어 요?독립한 드래곤은 무슨 일을 하든, 또 어떤 일을 당하든지간에 그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무슨 권리로,꾸엑!" 아르티어스가 따지고 들자 아르티엔은 그 가냘프게 보이는 손바닥 으로 매우 매섭게 뒤통수를 갈겼다. 하지만 그 정도에 기가 꺾일 아르 티어스 어르신이 아니었다. 아르티어스는 아르티엔에게 항의해 봐야 씨도 안 먹힌다는 것을 알고는, 공격의 목표를 재빨리 바꿨다. 여태껏 윽악대며 말씨름을 했던 엘프를 향해 애달픈 시선을 보내며 구원을 청했던 것이다. "자, 항복할 테니까 가자구요, 가요!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 다. "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무리 각종족의 규율을 책임지기 위해 선임되어 있는 노룡들이라고 해도, 골드 일족 의 최고 연장자의 청을 무시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명하신 분께서 직접 나서시겠다는네,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좋을 대로하십시오." 엘프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전과는 달리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다. '짜식!순순히 자기들에게 끌려가서 약간의 체벌만 당하면 끝이었는 데, 이제는 이미 물 건너갔어?'하는 시선이었던 것이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 "수고했네. 잘가보게. 늙은이의 청을 들어 줘서 고맙구먼." "예." "흐음, 이제 오붓하게 둘만 남았으니 일을 시작해야 하겠지?" 일단 둘만 남게 되자 아르티엔은 살기등등한 미소를 살포시 아르티 어스에게 던지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꼬여 버리다니, 갑자기 울 고 싶어지는 아르티어스 어르신이었다. 신탁의 해석 "전하,약간의 변수가 작용했사옵니다. " "변수?그건 무슨 말인가?" "방금 들어온 '벼룩' 의 보고로는 크라레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옵니다. " 벼룩의 경우 반란의 중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치레아 공국 에 있었고, 또 그는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기사라기 보다는 다크의 시종 정도로 취급되고 있었기에 치레아 기사단이 본국으로 소환될 때까지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수도에서 반란이 일 어난 사실을 알아내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반란이라고?그래,반란의 수괴는 누구인가?" "놀랍게도 토지에르 폰 케프라 공작이라고 하옵니다. " 토지에르의 이름이 거론되자 로체스터는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 뜨렸다. "크하하핫! 막다른 골목까지 몰리고 나니까 별의별 얕은 죄를 다 짜 내는군. 토지에르가 누구인가? 크라레스의 충신 중의 충신이 아닌가? 그런 그가 반란을 일으킬 턱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반란이 일어난 것은 사실인 모양이옵니다. " "물론 사실이겠지. 놈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구실 삼아 황제를 이리로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야. 보나마나 반란이라는 것도 한 바탕 연극이겠지." 로체스터의 말을 듣자 레티안도 뭔가 깨닫는 점이 있었다. 자신은 반란이라는 말에, 서둘러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 대한 대비 책을 준비하고는 로체스터에게 달려왔는데 상관은 그녀가 빠뜨린 것 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소란을 피운 점 용서해 주시옵소 서 ."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사옵니까? 전하." "크라레스에 최후 통첩을 보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약속한 그날까 지 황제를 케락스로 보내라고 말이야." "옛,전하, 그리고 또 한가지 보고 사항이 있사옵니다. " "뭔가?" "요즘 들어 변경에서 몬스터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는 보 고서가 계속 들어오고 있사옵니다. 이동 중인 수십,수백 마리의 오크 나 트롤을 목격했다는 자들이 있고, 심지어는 오우거나 미노타우르 스 같은 희귀한 몬스터를 봤다는 목격자도 있는 모양이옵니다. " "그래?그런 하등한 몬스터들이 일으킨 소란 때문에 전국에 팽배해 있는 전승 분위기를 망칠 수야 없겠지. 기사단을 파견해서라도 주민 들이 몬스터의 피해를 입는 일은 없도록 막게. " "예, 그렇게 조치하겠사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는 없었사옵니다. " "뭐라고?정확한 보고인가?몬스터들이 민가를 약탈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나?" "예,그들이 으슥한 외진 곳을 골라서 서둘러서 이동하는 것이 포착 되었을 뿐, 민가를 약탈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사옵니다 " "이상한 일이군. 얌전히 다닐 놈들이 아닌데 말이야." "좀 더 자세히 조사하도록 할까요?" "아니 , 아니야. 겨우 몬스터들 좀 돌아다닌다고 신경 쓸 필요가 있겠 나?그것보다도 아르곤에다가 첩자들을 더 투입하게나. 아무래도 크 라레스가 항복한 이후에는 그놈들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지 않겠나? 미리미리 조사해 두는 것이 큰 도움이 되겠지." 로체스터의 결정은 별로 잘못된 것이 없었다. 사실상 트롤이나 오 크 정도는 기사단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이,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군 대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처치가 가능했다. 그리고 오우거나 미노타 우르스 같은 경우 인간의 힘으로는 처치하기 힘들 정도의 초대형 몬 스터였지만, 모두들 많아 봐야 다섯 마리 정도가 뭉쳐 다니기에 기사 두세 명만 파견해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타이 탄이 개발된 이후 변방에 돌아다니는 몬스터 따위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몬스터에 신경 쓰느니 그 시간에 타국의 동태를 감시 하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레티안이 아직도 나가지 않고 서 있자 공작이 물었다. "아직도 보고하지 않은사항이 남았나?" "아니옵니다.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전하를 뵙기를 청하며 기다 리고 있사옵니다. " "좋아. 들라고 하게." "예." 레티안이 나가고 난 후 곧이어 제임스가 들어왔다. 그런데 제임스 는 혼자가 아니라 웬 미모의 무녀와 함께 들어왔다. "안녕하셨사옵니까?공작 전하. " "그래,그런데 그분은 누구신가?" "예,드로아 대신전에서 나오신 수녀님이십니다. " '수녀' 라는 말에 로체스터의 표정이 약간 떨떠름해졌다. 신녀나 교 령도 아니고 감히 수녀 따위가 감히 자신의 집무실까지 찾아올 이유 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 말씀하십시오. 수녀님." "예, 저는 신녀님의 교시를 받고 케락스 시에 왔사옵니다. 여신님께 서 내리신 신탁의 대상자를 찾아 그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 이지요." "대상자는 누군가?" "예,암흑의 기운이 세계를 뒤덮을 때, 그것을 막을 영웅이 케락스 시 에 있다는 신탁이 내렸습니다. 저는그 영웅을 돕고자 왔사옵니다. " "그런가?어린 나이에 대단히 막중한 임무를 맡았군. 그렇다면 그 증 거는 가지고 있나?수녀를 내가 못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요즘 국내 사정이 좀 그렇다보니 확인 절차를 밟자는 것이야." "예, 여기 있사옵니다. " 수녀는 신녀로부터 전해받은 명령서를 공작에게 건넸다. 공작은 그 명령서를 주머니 속에 슬쩍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이곳까지 오신다고 피곤했을 텐데, 좀 휴식을 취하게. 아직 암흑의 기운이라든지 뭐 그런 것이 뭘 뜻하는지 잘 모르겠으니 그에 대한 조 사는 해 보라고 지시하지. 그런 후 뭔가 단서가 잡히면 그때 대화를 나눠 보는 것이 어떻겠나?" "알겠사옵니다, 공작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살짝 줄을 당겨서 벨을 울린 후, 벨 소리를 듣고 쫓아온 시녀에게 명령했다. "무녀에게 휴식할 곳을 마련해 주거라." "예,전하." 수녀는 시녀를 따라 방에서 나갔다. 그녀가 방에서 나가자 로체스 터 공작은 신녀의 밀지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보며 미소를 지었 다. "이거 좋은 게 손에 들어왔군."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전하." "아,자네는 알 것 없네. 이 검은 기운이 뭔지는 자네도, 나도, 이것을 가지고 온 수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것을 물리치는 영웅이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지 " "그렇죠." "그렇다면 이건 아주 이용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참, 자네와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겠군. 경은 레티안이나 불러다 주고 볼 일보게나." "옛,전하." 레티안이 다시금 들어오자 로체스터 공작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 며 말했다. "뜻하지 않게 아주 좋은 것이 들어왔어. 자네는 이게 뭔지 알겠나?" 서류를 훌어보던 레티안은 조금 놀라운 듯 말했다. "아데나 여신의 신탁이 아니옵니까?" "그래, 맞았어. 그것도 드로아 대신전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신탁이 지." "그런데 왜 이걸 소신에게 주시는 것이옵니까?" "이걸 이용할 방토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야. 신탁의 내용은 세계를 덮고 있는 암흑의 기운이 존재하고, 그것을 막는 자가 케락스에서 나 온다는 것이지. 대충 그림으로 그려 왔으니 이해하기는 좀 힘들지만 말이야. 신전 쪽의 해석은 그런 모양인데,어때?" "그렇군요." 서류 뒤에 첨가되어 있는 그림을 훑어보며 레티안은 고개를 끄덕거 렸다. 사실 이놈의 신탁이 뭐를 뜻하는지는 설명을 들어야 알수 있을 정도로 난해하니까 말이다. 일단 설명을 듣고나서 보니 과연 그런 것 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번 사태에 써먹으면 어떨까 싶은데 말이야. 본국의 명성을 드높이고, 또 크라레스 황가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증 거물로 말일세. 크라레스 제국이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은 누 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을 제압한 것은 코린트 야. 그러니 크라레스를 마왕과 결탁한 세력이라고 선포하고 아예 끝 장을 내버리는 것이지. 그리고 그들을 응징한 것은 본국이 아니었나? 어때? 이용 가치가 충분하지 않겠나?" 레티안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신다면, 전하께옵서 위험해지실 수도 있사옵니다. 군의 총사령관은 전하시니까요. 신탁은 영웅의 출현을 알리고 있사 옵니다. 그러니 국민들은 전하를 영웅으로 추대할 것이고, 폐하께서 위기감을 느끼시지 않으실까요?" "딴은 그렇군. 하지만 영웅 따위야 대충 아무나 하나 만들면 되지 않 나?" "그것은 어려울 것이옵니다. 일단 영웅이 되려면 공훈이 있어야 하 니까요. 만약 제국 전쟁 전에 이런 신탁을 받았다면, 누군가를 지휘관 으로 임명하고 그를 계속 손쉬운 전장에 보내어 공훈을 쌓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지금 그 공훈을 날조한다면 부하들의 반 발을 살 우려도 있사옵니다. "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써먹지?자네에게 좋은 쟁 각 없나?" "정적 타도에 써먹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옵니다. " 과거부터 아데나의 신전에서 나오는 신탁의 정확성은 상당히 정평 이 나 있었다. 하지만 왜 미래를 예지하는 그들이 정치적,경제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 가장 큰 원인은 신탁이 거의 해석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하다는 데 있었다. 그 때문에 뭔가 사 건이 종료된 후에야 그 신탁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구나 하면서 고개 를 끄덕이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기에 일부에서 는 대충 난해한 징조라든지 언어들을 나열해 놓고는 나중에 그것을 끼워맞추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 월이 흐른후에 보면 그것과 대충 들어맞는 일이 꼭 한두 번은 나왔기 에 아데나 여신의 신탁이 홀대를 받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아데 나 교단의 교세가 미약한 것일까? 거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 신탁이 내렸을 때 그것이 거의 해석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난 해 하다는 점을 악용하여 황실이나 군부에서는 얼렁뚱땅 끼워맞춰 이용해 먹으려고 들었다. 그 가장 큰 예가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은, 150년 전에 있었던 코린트 황실에 대한 반란 미수사건이었다. 코린트 황가에 검은 기운이 퍼진다는 것을 신탁으로 받은 교단에서 는 그것을 즉각 통보했다. 그리고 그 통보를 받은 코린트 황실에서는 교단의 기대와는 달리 이 검은 기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엄 청난 정쟁에 휩싸였다. 물론 나중에 세월이 한참 지난 후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에 그 검은 기운이 황제의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음 으로 인해서 생기게 되는 내분을 뜻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결론을 짓게 되었지만, 처음 그 신탁이 보내졌을 때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것은 반대파를 숙청하는 명분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놈의 신 탁 덕분에 수구 세력과 대치하던 개혁파의 정치인 및 군인 3천여 명 이 반란 미수죄를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당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용만 당하면서 점차 세상에 환멸을 느낀 아데나 교 단에서는 최대한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아무리 예언이라고 해도 그것이 이미 밝혀져 버리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가 생기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었고, 또 해 석하기가 난해하기에 구구한 억측을 만들어 생사람을 여럿 때려잡게 되기 때문이었다. 로체스터 공작과 레티안은 과거 선조들의 본을 받아 이 신탁을 정 적 타도에 이용할 궁리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토지에르의 음모 크라레스의 황실은 격변의 소용돌이를 거쳐, 이제 그 제위는 토지에르 폰 케프라 공작이 이어받았다. 토지에르는 몇몇 충신들에 게 거짓 반란만이 그래지에트 황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꼬드겨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반란은 성공이었다. 군의 통수권을 토 지에르가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토지에르는 반 란에 성공한 후 처음 충신들과의 계획과는 달리 황제를 지하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런 후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흑마법사들을 그곳에 배치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황제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 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때까지도 흑마법사들 외에 이렇다 하게 신뢰할 만한 부하들이 없었다. 아무리 마왕의 현신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육 체를 뒤집어쓴 이상 그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있었기에, 모 든 기사들을 잡아다가 한꺼번에 세뇌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일부 쓸만한 기사들을 골라 세뇌를 하는 한편, 흑마 법사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몬스터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인간보 다는 훨씬 지능 지수가 떨어지면서도 암흑의 기운에 가까운 존재들 인 몬스터들이라면 손쉽게 부려먹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마왕은 주위에서 자신이 아직 강림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때, 자신의 세력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독 아를 감추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옵니까?전하?" 갑자기 달려온 근위 기사단장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 백작의 말에 짐짓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뭐가 말이냐?" "신성한 황궁에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것 말이옵니다. " "그들은 황제 폐하의 새로운 병사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강적 코린트와의 전쟁을 하려는 마당에 몬스터들의 손이라도 빌릴 수 있 다는 것은 신의 도우심이 아니신가? 이것도 다 내가 혹마법을 익힌 덕 분이 아닌가 말이야." 뭐 마신도 신은 신이니까 말은 되는 것 아닌가? "그거야 그렇사옵니다만, 그래도 황궁에까지 그런 추악한 것들이 돌 아다니게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니옵니까?" 몬스터의 이동은 첩자들의 눈을 피해서 한밤중에 진행된 일이었는 데, 론가르트 백작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하다 보니 그것을 보았던 모양 이었다. 토지에르는 점잖게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아아, 그건 다 나에게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이야. 몬스터들은 다 지하 감옥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는데, 경은 운좋게 그것을 본 모양이 군." "지하 감옥에 말씀이시옵니까?" 토지에르는 일부러 뭔가 비밀스러운 말을 하는 듯,주위를 슬쩍 둘 러본 후 목소리를 낮춰서 속닥거렸다. "그렇지, 폐하의 안전을 도모하고,또 첩자들의 침입을 막는 데는 오 히려 몬스터들이 낫지 않겠나?사실 반란을 일으켜 폐하를 폐위하고, 지하 감옥으로 모신 것도 다 타국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말이야, 몬스터는 마법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이니 확실히 믿을 수 있지. 본국의 첩자가 열 명이라면 코린트의 첩자는 50명이야. 하지만 그 첩자들이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지하 감옥 안으로 몰래 들어갈 수 있겠나? 바로 들통날 것이 뻔하기에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거야. 그래서 그것들을 지하감옥에 배치시킨 거라네. 알겠나?" 뭔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들어 봤을 때 말은 되었기 에 론가르트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예." "그건 그렇고, 기사단의 재정비는 끝났나?" "예,그런 대로 기사단 단장들과 대충 의견 일치를 보았사옵니다. " "어떻게 하기로 했지?" "중앙 기사단의 각 전대는 전력 유지를 위해 30기씩으로 나누는 것 으로 의견 일치를 보았사옵니다. 3전대만 트라노 30기와 테세우스 7 기로 편성했사옵니만, 나중에 추가로 생산되면 4전대로 독립시켜야 하겠지요. 그 외에 나머지 기사단들의 변동은 없사옵니다. "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수고했 네." "감사하옵니다, 전하. 그런데, 예전에는 이틀에 1기씩 납품되고 있던 타이탄이 요즘은 거의 납품되지 않고 있사옵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이옵니까?" "아아, 그것은 흑마법사들을 긴히 쓸 일이 있어서 파견해 버렸기에 엑스시온 생산에 문제가 생긴 것 때문이지. 며칠 정도 있으면 정상적 인 생산이 가능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예,알겠사옵니다. 전하." "내가 지시한 대로 병력 배치는 시작하고 있나?" "예, 일단 기사단의 배치는 이미 시작했사옵니다. 수도에는 치레아, 스바시에, 근위 기사단이 남고 중앙 기사단은 각 방위선의 핵으로 배 치할 것이옵니다. " "군대의 배치는?" "군대는 아직 재편성 중에 있사옵니다. 아마도 일 주일 이내로 완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재편성이 끝나는 대로 방 위선으로 보내겠사옵니다. " "잘 해 보게. 나는 경의 능력을 믿고 있으니까 말일세." "감사하옵니다, 전하." 론가르트 백작이 밖으로 나가고 난 후 토지에르는 문쪽을 보고 빈 정댔다. "벌레 같은 것들이 눈치 하나는 빠르군. 생각 같아서는 모두 다 몬스 터의 밥으로 던져주고 싶지만, 그래도 충성스러운 마계의 신하 들을 소환하기 전까지는 저놈들이 살아 있는 편이 좋겠지. 자, 그럼 다시 소환 의식을 시작해 볼까?" 토지에르는 곧장 지하 감옥으로 공간 이동했다. 그것 때문에 지하 감옥을 몬스터로 채워 넣은 것이니까 말이다. 지하감옥에 도착한 토지에르는 주문을 외워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 기 시작했다. 여타의 마법진들과 달리 그가 만들고 있는 마법진에서 는 엄청나게 사악한 기운이 뭉실뭉실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토지에 르는 마법진이 완성되자그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자신의 본체를 암 흑의 저편에 있는 마계에서 가져올 수만 있다면 이따위 조잡한 마법 진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이 강력한 소환 마법을 실행할수 있었을 것 이다. 하지만 현재 자신이 빼앗는 데 성공한 벌레의 육신을 통해 뿜어 낼 수 있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마력은 마왕인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도 미미한 것이었다. 일단 마법진 위에 올라선 마왕은 또다시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그 주문에 따라 거대한 마법진이 형체를 만들어갔다.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어둠의 맹약에 따라, 템스트라! 그대를 소환 하노니 신성한 빛의 장막을 뚫고, 기나긴 어둠의 통로를 거쳐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마법진의 중간에서 시커먼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곧이어 그 것은 뭔가 형체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템스트라는 지고하 신 마왕 앞이라서 자신의 형체를 만들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형체는 아니었다. 뭔가 울룩불룩한 시커먼 액체로 만든 인형과 같은 형상이 었다. 템스트라는 고개를 바닥에 조아리며 듣기 껄끄러우면서도 텁 텁한 목소리로 외쳤다. "끅끅, 지고하신 어둠의 마왕께서 이 미천한 종을 불러 주셔서 영광 이옵니다. " 템스트라의 말대로 마왕은그야말로 마계에서 '미천한' 놈을 불러 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가진 힘의 한계였으니까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인간계에서 주어진 내 힘으로 불러낼 수 있는 것은 너 같은 놈들뿐이니까 말이다. " 토지에르는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린 후 템스트 라에게 말했다. 그토록 오랜 작업을 했고, 마력을 집중했는데 겨우 이 정도밖에 불러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묘미가 있는 것이 아 니던가? "네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리겠다. " "하명하시옵소서 !" "코린트 제국의 황제를 죽여라. 실패는 용서하지 않겠다. " "옛! 명을 받들겠나이다. 하지만 속하는 공간 이동 마법을 할 줄 모 르옵니다. 그리고 그 코린트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옵고, 더군다나 황제라는 자가 누군지도 모르옵니다. " 템스트라의 말을 들은 마왕 토지에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실 그 자신도 코린트 황제라는 놈의 상판때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 던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마왕은 한가지 좋은 방도를 떠올렸다. "너를 코린트의 수도라는 케락스 시로 보내 주겠다. 그곳에서 황제 라는 놈을 찾아서 죽여라." "옛 !" 마왕은 품 속을 뒤져서 공간 이동 좌표가 자세히 나와 있는 책자를 꺼내서는 코린트라고 쓰여있는 부분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케 락스로 가는 좌표를 찾아낸 마왕은 곧장 템스트라를 그곳으로 공간 이동시켰다. 마왕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템스트라가 아무리 마계에서는 등급 이 낮은 악마지만 이곳에서도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왕이 이곳에다가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 리고 템스트라는 마왕에게 그 금쪽 같은 시간을 마련해 줄수 있는 충 분한 능력이 있었다. 전에 강림했을 때는 미개한 인간들을 얕잡아보 고 서두르다가 실패했지만, 이번에도 그런 실패를 되풀이하지는 않 을 것이다. 절대로! "전하! 전하! 일어나시옵소서 !"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로체스터는 급히 일어났다. 그는 평소의 습 관대로 침대 머리맡에 놔뒀던 검부터 집어들었다. 하지만 주위에는 그 어떤 위험도 감지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전하,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사옵니다. " "뭣이 ?" 로체스터 공작은 재빨리 일어서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여태껏 잘 살아오던 황제가 왜 갑자기 죽었단 말인가?수녀가 건네준 그 신탁을 무시했던 것이 영 찝찝했다. 세계가 어둠에 쉽싸인다는 것. 영웅의 출 현에 중점을 두고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둠이란 것은 황제의 사망을 뜻하고, 영웅이란 것은 새로운 황제를 뜻하는 것이 아 니었을까? "젠장!그것도 생각해 뒀어야 했는데.." 로체스터는 서둘러 옷을 입은 후 황궁으로 향했다. 로체스터가 황 궁에 도착하고 보니 제1근위대가 물샐틈없는 경비 태세에 들어가 있 었다. 제임스는 로체스터 공작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급히 달려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 "암살자(Assassin)가 들어왔사옵니다. " "뭣이 ? 암살자?" "옛 !" 로체스터 공작은 황제 폐하의 침실 쪽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기며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그 물샐틈없는 경계망을 뚫고 황제 폐하의 처소까지 잠입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소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 "비밀 유지는 확실히 해 놨겠지?" "옛! 황제 폐하의 승하 사실을 알고 있는 시녀들은 모두 다 체포해 두었사옵니다. " "모두 다 없애 버려라." "예." 이윽고 그들은 황제의 침실에 도착했다. 황제의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 부근을 관통하고 있는 깊은 검상이었다. 그리고 황제와 동침하 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두 명의 어린 시녀들의 시체도 함께 있었 다. 그녀들의 공포에 질린 듯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선 근위 기사단 소속의 마법사 몇 명이 마법을 사용하여 증거를 수집하는 중 이었다. "여기서 난장판이 될 때까지 경비 무사들이나 근위 무사들은 뭣을 했던가?" "예. 심문해 본 결과 그들의 말로는 과거에도 침실에서 계집의 비명 소리라든지 뭔가 두들겨 패는 듯한 소리가 한 번씩 들려 왔기에 오늘 도 그렇거니 하고 생각했다고 하옵니다. " 황제는 늙은 후 약간 취향을 바꿔 가학적인 성 행위를 즐겼던 것이 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로체스터는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 다. "경비 무사들은?" "모두다 체포해 뒀사옵니다. " "그래듀에이트를 남기고 모두 다 처형해라. 그리고 그래듀에이트는 따로 모아서 철저히 조사하되, 의심이 가는 자가 있다면 정신계 마법 을 사용해도 상관없다. 알겠나?" 황제를 죽일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래듀에이트뿐이었기에, 만약 내 부인의 소행일 때를 가정하여 내린 명령이었다. 자국 기사의 경우 정 신계 마법은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에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워낙 후 유증이 대단해서 최악의 경우 미쳐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워낙 중 대한 사안이었기에 로체스터는 그것마저도 허락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 외의 경비 무사들은 비밀 유지를 위해 죽여 버리라는뜻이었다. "옛,전하." "폐하의 시신을 깨끗하게 단장하고 장례식을 치를 준비를 하도록 해 라. 절대로 칼자국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써야 한 다. 그리고 암살자에 의해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신 것이 아니라 격렬 한 정사로 인한 심장 마비로 승하하셨다고 발표하도록." 만약 자객이 들어와서 황제가 사망했다면 근위대의 책임을 묻게 된 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국력이 쇠약한 판에 한 명이라도 근위 기사를 잃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근위 기사단의 단장인 로체스터 공 작에게까지도 그 불똥이 튕겨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로체스 터 공작은 이런 지시를내리는 것이다. "옛,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모든 지시를 내린 후 나가려다 말고 방 한쪽에 나 뒹굴어져 있는 갑옷에 이색적인 눈빛을 던졌다. 젊은 시절 황제가 입 었던 그 황금색 찬란한 갑옷은 앞부분이 푹 찌그러들어 있었던 것이 다. 그리고 그 찌그러들어 있는 모양은 오른손 손바닥의 모양과 똑같 았다. "잠깐! 경도 저것을 봤나?" "옛." "혹시 전부터 저런 모양이었었나?" "시녀들에게 물어 봤지만, 그전에는 멀쩡했었다고 하옵니다. " "그래? 이상하군. 그렇다면 폐하를 해친 무기는 무엇이었나?" "저 갑옷에 딸려 있던 장검이었사옵니다. 저 갑옷은 원래 완전 무장 한 기사의 행색으로 저쪽에 서 있었다고 하옵니다. " 로체스터 공작이 제임스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갑옷을 거치해 두는 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슬그머니 갑옷 쪽으로 다가가서는 갑옷 위에 있는 헬멧의 안면 가리개를 들어올려 슬쩍 안을 들추어 봤다. "그쪽은 벌써 확인해 봤사옵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 "놈이 들어오거나 나간 흔적은 발견했나?" "특이하게도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사옵니다. 아무리 뛰어 난 암살자라도 아무런 흔적 없이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인데 말이옵니다. " "아무래도 내부의 소행임이 확실한 것 같기는 한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일단 그래듀에이트들을 족쳐 보면 뭔가 단서가 잡힐지도 모르지." 이때 마법사가 공작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드디어 증거를 잡았사옵니다. " "그래?" "범행이 일어난 후 이곳에 대한 출입을 철저히 막고 찾은 결과 어렵 지 않게 범인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냈사옵니다. " "잔말 말고 한 번 보여 주게." "옛 !" "리멤브런스 오브 더 록(Rernembrance Of The Rock ;암석의 기억)!" 그와 동시에 침실 밑에 깔려 있는 대리석판 한쪽에서 3차원적인 희 미한 영상이 뿜어졌다. 대지보다는 단단한 암석 쪽이 아무래도 정보 의 저장력이 떨어지기에 영상은 상당히 희미했다. 황금색 갑옷이 검 을 쥔 채 움직이는 장면이 슬쩍 보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뭔가 그럴 듯한 것이 있을 것을 기대한 로체스터 공작은 신경질적으로 외 쳤다. "이게 뭐야? 그 망할 암살자놈이 갑옷 안에 들어가서 움직였다는 것 은 척 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실이야. 나는 범인이란 놈의 상판 떼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은 거야. 알겠나?" "예,전하." 마법사는 호된 질책을 당한후 다시금 이리저리 훑어나가기 시작했 다. 그리고 제임스는 공작의 지시를 행하기 위해 밖으로나갔다. 제임스는 부하들을 불러서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를 전달한 후, 덧 붙여서 금십자 기사단까지 불러들여서 수도의 경계를 더욱 강화하라 고 지시했다. 그런 다음 그 자신은 궁전 내외부를 샅샅이 뒤지면서 적 이 침입해 들어을 가능성이 있을 만한 곳을 직접 탐색하기 시작했다. 첩자가 와서 황제가 살해당했는데도 상대가 어떻게 침입했는지, 또 상대가 어떻게 유유히 빠져나갔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은 제임스의 자존심을 엄청나게 긁어놨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병사들과 함께 걸어가는 수녀를 발견했다. 수녀의 표정이 원체 자연스러웠기에 제임스는 그냥 넘어가려고 하다가 아무 래도 이상해서 병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런 한밤중에 수녀가 병사 들과 함께 걸어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병사는 근위대 복장을 한 기사가 질문을 던져 왔기에 지체없이 대 답했다. "행동이 수상해서 연행해 가는중입니다. 기사님." "뭐 ? 연행하는 중이었다고?" "예." 제임스는 수녀를 향해 의혹에 찬 질문을 던졌다. 연행당하는 입장 에서 봤을 때 수녀의 표정이 너무 담담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예, 밤에 산책을 하다가 이분들이 수상하다며 가자고 해서 따라가 던 중이었습니다. " 제임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니, 이 한밤중에 따라오라고 한다고 해서 따라갑니까?그리고 달 밤에 무슨 산책을 하시고 계셨던 거지요? 썩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도 아닌데 말입니다. " "잠을 자다가 좀 이상한 꿈을 꾸었거든요. 뭔가 시커먼 것이, 이 곳 황궁을 덮기에 놀라서 잠에서 깼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별로 뚜렷 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꿈 속에서는 무서웠는지 모르지요. 다시 잠을 청해 봤지만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리며 진정 이 안 되기에 기분 전환 겸 잠시 밖에 나와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 들이 왜 여기를 서성거리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산책 중이라고 대답 했는데. 가자고 하기에 따라가던 중이었습니다. 저에게 죄가 있는 것 이 아닌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제임스는 꿈 얘기를 들으면서 상대의 표정을 세밀히 관찰했다. 하 지만 수녀는 제임스의 의혹에 가득찬 시선을 받으면서도 시종 담담 한 어조로 말을 끝마쳤다. 사실 그녀 말대로 죄가 없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시기가 안좋았다. 황제가 암살당한 이때 이 근처를 어슬렁 거리다가 잡혀들어가면, 필히 고문을 동반한 생사람잡기가 됫따를 것이다. 결국에는 무죄가 입증될지는 몰라도 묵사발난 후 아무리 실 수였다고 하며 죄송하다는 사과를 들어 봐야 이미 늦은 것이다. 제임스는 잠시 수상쩍은 듯한 시선으로 수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이어 생각을 바꿨다. 수녀를 전문적인 암살자, 그것도 늙기는 했지 만 그래듀에이트급의 기사를 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암살자 라고 의심하기 에는 너무나도 무리가 있었다. 수녀가 입고 있는 새하얀 로브는 언제나 그러하듯 주름살 하나 가 있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갑옷 안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었겠 는가?또 만약에 백보 양보해서 그녀가 시커먼 암살자의 복장을 한 채 황제를 죽였다고 하더라도,무슨 할 짓이 없어서 옷까지 갈아입고 이 달밤에 산책을 한단 말인가?그건 나를 의심해 주세요 하는 꼴밖에 안 되지 않는가. 제임스는 수녀가 아데나 신전의 무녀인 만큼, 뭔가 황제 암살을 예 고하는 예지몽을 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제임 스는 어떻게 보면 무모하고, 또 어떻게 보면 순진하기 그지없는 이 수 녀를 향해 미소를 보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산책하기에는 너무 날씨가 싸늘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별로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기에, 이 숙소 밖을 서성거리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럼 가보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 "그리고 언제 그 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대화를 해 보고 싶군요. 저 는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 수녀는 다소곳이 인사를 한 후 자신에게 배정된 숙소 쪽으로 걸음 을 옮겼다. 병사들은 제임스의 지시를 받고는 또다른 수상한 자를 잡 기위해 수색을 계속했다. 로체스터 공작의 세상 크라레스가 몬스터를 끌어들여 엄청난 국력 팽창을 하고 있을 때, 코린트는 황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한 권력 쟁탈전이 극심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코린트의 경우 황위가 아들에게로 승계되는 것 이 아니라, 혈족 내의 그래듀에이트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에게 승계 되도록 법으로 정해놨기에 누가 황위를 이어받을 것인가를 놓고 치 열한 암투를 벌일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만약 코린트에서 크라레스가 아직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황위 쟁탈전에 그토록 많은 정력을 소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 하면 누군가 적이 나타나 있을 때는 군부의 입김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 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판단했을 때 크라레스는 완전히 재기 불능이었고, 알카사스와 아르곤은 제2차 제국 전쟁을 통해 획득한 점 령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크라레스의 뒤를 이어 코린트의 가장 강력한 가상 적국으로 발돋움한 크루마는 새로이 영토에 편입된 미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국내외적으로 봤을 때 적을 찾기 힘 든 코린트로서는 군부의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기세가 오른 귀족들과의 한판 승부가 없을 수가 없었다. 로체스터를 비롯한 군부는 승하한 지그문트 드 아그립파 4세 황제 의 아들이자 싹수가 노랗게 방탕한 행동을 일삼고 있었던 카스피아 드 아그립파 황자보다는 승하한 황제의 조금 먼 혈족인 비스마 드 아 그립파 후작을 지지했다. 비스마는 조금 먼 혈족인 자신이 제위를 이 어받는다는 꿈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군부에 진출하여 금십자 기사단의 기사로서 근무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대단히 뛰어난 검객 은 아니어서, 금십자 기사단의 정찰조들 중 하나의 지휘관으로 있었 다. 하지만 그도 그래듀에이트였기에 황제로서의 기본 조건은 충분 히 갖추어져 있는 셈이었다. 그에 비했을 때, 34세에 즉위하여 95세에 승하할 때까지 무려 71년 간을 통치한 황제를 아버지로 둔 카스피아 드 아그립파 황자는 우수 한 혈통 덕분에 간신히 그래듀에이트의 시험에 통과하기는 했지만, 그 뒤로 수행에 전념하기는 커녕 황제인 아버지를 믿고 별의별 못된 짓을 다 저질러 왔다. 물론 그의 행동이 아그립파 황제의 아들 스물다 섯 명 중에서 특별히 더 악했던 것도 아니었고, 웬만한 귀족자제들은 다 하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방탕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던 로체스터 공작에게는 일찌감치 눈밖에 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상당수의 귀족들은 카스피아를 다음의 황제로 점찍 고 있었다는 점이다. 황제의 자식들 중에서 그래듀에이트는 카스피 아 혼자였기에, 다음에 황제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것을 잘 아는 귀족들은 미리 연줄을 대놓기 위해 자신의 딸을 가 져다가 바친 놈도 있었고, 먼 친척 여식을 양녀로 삼은 후 바친 놈은 더 많았다. 또 궁핍한 천민이나 농노의 반반한 자식을 돈주고 양녀로 삼은 후 바친 놈은 더더욱 많았고,자신의 영지에서 살고 있는 미녀를 잡아다가 바친 놈들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았다. 그 외에 각종 귀금속이나 골동품 등 별의별 값진 것들을 가져다가 바쳤고, 우의를 돈독히 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사냥이나 무도회 등 을 열어 주빈으로 모시면서 아부와 아첨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렇게 우의를 돈독히 쌓아놓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봉을 황위에 앉 히기 위해서 발악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로체스터 또한 그 것을 가만히 지켜볼 위인이 아니었다. 친구였던 키에리가 권력의 핵 에서 밀려난 것도,또 가깝게는 자신도 그 망할 귀족들 때문에 골치를 썩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로가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 었기에, 로체스터가 이끄는 군부와 귀족들은 거의 10일 가까이 입싸 움을 벌였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젠장할! 자신들의 권력에만 눈이 먼 미친 놈들 같으니라구!" 궁정 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온 로체스터 공작은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황제가 승하한 후,그는 언제나 궁정 회의에 참가한 후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돌아왔으므로 레티안에게 그것은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현상이 었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전하." 그녀는 언제나 판에 박힌 대화가 오갈 것을 예상하면서 예의상 던 진 질문이었는데, 오늘은 로체스터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이 틀렸다. 상대방에 대한 욕을 잔뜩 늘어놓을줄 알았는데 말이다. "차기 황제가 누가 될지 결정이 안 된다며, 그 개새끼들이 의회를 소 집하여 투표에 의해 황제를 결정하기로 의견을 모았어." 코린트는 황제의 말 한 마디가 법인 상태였기에, 귀족이 주축을 이 루는 상원과 평민들로 이뤄진 하원으로 구성되는 코린트의 의회는 사실상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그런데도 의회가 존속하고 있었던 이 유는, 평민들과 귀족들이 모여 각종 자질구레한 사항들을 토의하고 결론을 도출해내서는 황제께 보고를 올리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었 다. 물론 그들이 도출해낸 사항을 황제가 허락을 하건 말건 그건 황제 만의 권리였지만,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을 때는 그것의 시행을 허락 했기에 평민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기관이었다. 그리고 또 귀족들 에게도 중요한 기관이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귀족들에게 있어 서도 의회는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기관이기도 한 것이다. 거기 에 뽑혀나온 평민놈들만 주무르면 모든 일이 순탄하게 돌아가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의회는 군부보다는 귀족들의 입김이 매우 센 곳이 었다. "의회라구요?" "그래. 나하고 싸워서 결론이 안 나니까 의회를 끌어들인 거야. 젠 장!의회에서 이 일을 처리한다면 보나마나 그놈들이 이길 테지. 그놈 들이 그런 자신감이 없다면 왜 의회를 끌어들였겠어?"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요량이시옵니까? 전하." "글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국가의 장래를 위 해서는 비스마가 황제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야. 하지만 의회의 그 멍 청한 평민놈들이 그걸 이해할까?황족이나 귀족들의 감추어진 추잡 한 사건들에 대해 그놈들은 잘 모르잖아." "하원의 의원들을 설득하시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글쎄. 귀족놈들도 하원을 설득하고 있을 테니 그건 효과가 없을 거 야. 또 상원에서 만장 일치로 카스피아를 민다면 하원에서 비스마를 전폭적으로 밀어줘도 소용이없잖아, 안 그래?" 상원 100명과 하원 100명으로 구성된 코린트 의회는 각 의원당 1표 씩의 권한을 행사한다. 그렇기에 상원 쪽에서 모두 다 반대한다면 하 원쪽에서 무슨 짓을 해도 가결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레티안이 난처한 듯 얼버무리자, 로체스터는 더 이상 쓸모없는 궁 리를하고 싶지 않는지 목 뒤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아! 피곤해. 신경을 썼더니 됫골이 뻐근하구먼. 자네는 그만 퇴 근하게, 나는 부하들을 몇 명 불러서 술이나 한잔 해야겠어." "예,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그날 밤 제1근위대 대장인 제임스와 금십자 기사 단장인 프레드 드 알파레인 후작을 불러들였다. 술이나 한잔 하자는 제의를 받고 온 그들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로체스터 공작의 저 택을 방문한 것이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술을 얻어먹기는 힘들 어 보였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집에 들 어온 기사들을 향해 로체스터 공작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경들은 나를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옛,전하." "그렇다면 지금부터 명령을 내리겠네. 지금 즉시 복귀하여 기사단을 출동시키게." 갑작스런 출동 지시에 둘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적이 침 공해 들어왔다는 그 어떤 보고도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예?목표는 어디이옵니까?" "목표?궁정 회의에 참가할 자격을 가지고 있는 모든 귀족들과 의회 의 상원의원들을 잡아들이고, 황궁 및 의회를 점거해라. 그 외에 불온 분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 일차적으로 일은 끝날 것이다. " "옛,전하." "지금 이 자리에서 명확히 밝히지만, 이건 반란이 아니다. 귀족들이 원하는 썩어빠진 놈이 아닌 제대로 된 황제를 세우자는 것이다 알파 레인 경." 로체스터는 금십자 기사단장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옛,전하." "귀 기사단에 근무하는 비스마 드 아그립파 후작을 철저하게 보호하 도록하게. 다음 황제 폐하가 되실 분이니까 말이야." "옛, 전하. 맡겨만 주시옵소서 !" 알파레인은 고개를 팍 숙이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만약 로체스터 공작이 자신이 황제가 되겠다든지,뭐 그딴 소리를 했다면 아마도 지 금 자신부터 검을 뽑아들었을지 모른다. 알파레인도 로체스터 공작의 부하이기 이전에 황실에 대해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 역시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후 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황제는 죽어 버렸기에 얼마나 쓸 만 한 후계자를 내세우느냐 하는 것은 황가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스르 지 않은 상태에서 개입할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스마는 군부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황제였다. 군대 내에서 다 함께 생활하다 보니 그가 부하들을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유능한 군인이라는사실을 모두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크와 라나의 재회 로체스터 공작의 행동은 은밀하면서도 재빨랐다. 귀족들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코린트 전체가 로체스터 공작의 세상이 되어 버렸 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였다. 로체스터가 평소에 믿고 의논하던 레티 안마저도 따돌리고 행한 갑작스런 행동이었기에 그들로서는 아예 대 비할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이제 남은 길은 항복하고 목 숨을 구걸하든지, 아니면 국외로 탈출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들은 영지에 포함되어 있는 농노들을 단속하고 산적들을 토벌하거나 황제 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 꽤 많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그들을 거느리고 무력 투쟁을 벌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기사단이 새로운 황제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이번에 벌어진 군부의 행동에 정당성을 더하기 위 해 아데나 신전에서 흘러들어온 신탁을 이용했다. 여태껏 지그문트 황제를 등에 엎고 못된 짓을 해 온 귀족들을 코린트의 앞날을 혼돈케 하는 무리들이라고 매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타파하기 위해 나타난 영웅으로서 비스마 드 아그립파 후작을 내세웠다. 정적들을 몰살시키고 새로운 황제가 제위를 이어받는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신탁을 빌려 해석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사태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자 의문을 느낀 사람은 제임스였다. 수녀와 함께 로체스터에게 건네 준 신탁에 나와 있는 암 흑의 기운은 절대로 썩어빠진 귀족들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 문이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수녀를 찾아갔다. "안녕하셨습니까?오랫동안 이곳에서 무료하게 지내시게 해서 죄송 합니다. " 수녀는 여태껏 그래 왔듯, 법식에 따라 흰색 로브를 입고 그를 맞이 했다. 수녀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그녀에게는 제자가 딸려 있었기에 이곳에서 제자를 교육시키며 소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저에게는 보람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신탁에 나와 있는 암흑의 기운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그리고 그것을 물리치는 영웅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 까?과연 그 영웅이 코린트의 황제 폐하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죄송하지만, 그것은 저도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 "수녀님은 이곳에 계시기에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실 겁니다. 지금 로체스터 전하께옵서는 그 신탁을 이용해서 정적들을 소탕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신탁에 나오는 영웅으로서 비스마 드 아 그립파 후작을 지목했지요. 아마 정적의 소탕이 일단락되면 그가 제 위에 등극할 것입니다. " 제임스의 설명에 수녀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적이 암 흑의 기운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그녀 자신은 거기에 그려져 있던 시 커먼 것이 마왕이나 뭐 그런 사악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발렌시아드 후작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과연 로체스터 전 하께옵서 하시는 일이 선한 것이라고 확신하시나요? 그것이 확실하 다면 그리고 만약에 전하의 정적들이 악한 무리들이라면 일단 암흑 의 기운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것은 확실합니다. 제 상관으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무인이 시자, 그분께서 평소에 보여주신 검소하면서도 소박한 행동,그리고 권력에 집착하지 않으시는 마음가짐을 저는 믿고 있거든요." 열정적으로 말하는 제임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수녀는 의미 있는 미소를 띄었다. "당신 같은 분의 존경을 받고 계시다면 그분이 하시는 일이 옳을지 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그것을 역행하는 무리들은 암흑 으로 생각할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다른 의문이 하나 생 기는군요. 과연 그 작업에서 주체가 되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지요. 로체스터 전하신가요?아니면 비스마 후작이신가요?" 제임스는 곰곰이 생각해 본 후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로체스터 전하신 것 같습니다. 물론 비스마 후작을 표 면에 내세우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모든 명령은 전하께서 내리고 계 시니까요. 또 현재 소탕 작업을 벌이고 있는 기사단들이나 군대도 로 체스터 전하께서 관할하고 계시구요. 비스마 후작은 황실의 직계 자 손이 아니기에 세력이라 부를 만한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렇다고 기 사단을 통솔할 만한 그런 대단한 직위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 니구요." "그렇다면 그 암흑의 무리를 없애는 영웅은 로체스터 전하가 되셔야 하겠군요." 그 말에 제임스는 약간의 정정을 가했다. "그건 아마도 전하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비스마를 앞 에 내세운 것은 그를 제위에 올려놓기 위해서겠지요. 아무래도 비스 마는 황제로 선택되기에는 명목이 좀 약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글쎄요. 저는 다만 여신을 받드는 무녀일 뿐, 정치를 알지는 못합니 다. 신탁은 여신께서 내리시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또 사용 하느냐는 인간들의 몫이겠지요. 하지만 한 가지는 정확할 것입니다 여신께서 영웅이라고 하셨다면 그는 만인이 영웅으로서 확신할 수 있는 인물일 것입니다. 비스마 후작처럼 날조된 영웅이 아니고 말입 니다. " 제임스는 수녀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듣고서야, 자신의 생각이 잘못 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신탁에서 지시하는 영웅은 따로 있는 것 이다. 그렇다면 암흑의 세력 또한 존재할 것이다. 그림상으로는 그냥 넓직하게 뿜어진 검은 잉크였다. 신전에서는 그것을 '세계'로 해석 했지만 '코린트'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다는 것이 문제였긴 하지 만, 세계를 뒤집건 코린트를 뒤집건 어쨌든 뒤집을 만한 세력이 하나 존재한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그는 코린트의 기사였으니까 말이다. 하여튼 이 방문을 시작으로 제임스는 틈이 날 때마다 수녀를 찾아 갔다. 그도, 수녀도 어둠의 세력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싶다는 하나 의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둘은 친분을 쌓아 갔다. 강 인한 무사임과 동시에 귀족적이면서도 우아한 품성을 가지고 있는 제임스와, 다소곳하며 여성스러운 수녀는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존 경심을 쌓아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눈발이 살짝 흩날리 고 있었다. "저는 아마도 그 영웅이 당신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제임스는 마시던 차가 뿜어져 나오려는 것을 황급히 꿀꺽 마신 후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댔다. 제임스는 어느 정도 기침이 진정되자 황 당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어디서 그런 오해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 다. "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시는 것이지요?" "코린트에는 저 말고도 뛰어난 기사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수녀님이 병원에서 만나신 까미유나 로체스터 공작 전하, 그리고 또 한 분. 모 두다 대단한 기..검객들입니다. 제가 끼여들 여지는 거의 없어요." 제임스는 자신의 아버지 키에리를 슬쩍 끼워넣어 말했다. 물론 키 에리가 들어간다면 기사라는 단어를 쓰기 힘들었기에 검객이라는 말 로 바꾼 것이다. "그런가요?" "예. 저는 제1근위대를 맡고 있습니다. 제2근위대는 까미유가 맡고 있죠. 만약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 일에 기사들을 투입해야 한다면 제2근위대가 투입됩니다. 그리고 아주 강력한 적이 나타났을 때는 전 하께서 직접 나서시죠. 이래저래 저는 직접 나설 수가 없는 입장입니 다. " "아,그래서 발렌시아드님께서는 영웅이 될 수 없다고 하신 것이군 요." "그렇죠." "하지만 지금 암혹의 세력에 대해 가장 열심히 파고드시는 분은 제 임스님뿐이시잖습니까?" "글쎄요. 하지만 한 달 정도 지나면 까미유가 퇴원할 겁니다. 그때는 아마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그에게 이 사건을 일임하시겠죠. 저는 그 가 퇴원하기 전까지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을 모으고 있는 중 이구요." "그러신가요?" "그건 그렇고 오늘 가 보실 데가 있습니다. " "예?" "환자를 한 명 부탁드리기 위해서 왔거든요. 대단히 중요한 환자이 기에 수녀님께서 그녀를 치료한 것에 대해 모두에게 비밀로 할 수 있 다는 맹세를 해 주셔야만합니다. 그것 때문에 그 환자는 아직 누구에 게도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맹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임스는 그 동안 수녀에 대한 됫조사를 충분히 해 두었다. 드로아 대신전에서 엘리트 코스의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에 비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신성 마법을 구사할수 있는 신앙심이 깊은 무녀였다. 그 녀의 행적에 있어서 단 한 가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의문점은 첫 번째 교육 수련 중에 그녀와 동행하던 스승이 사망한 것 정도였지만, 그 다음 스승에게서는 아무런 문제 없이 교육을 수료했다. 자세한 것 은 드로아 신전 내의 기밀 사항에 들어가기에 알아낼 수 없었지만, 현 재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 봤을 때는 신뢰할 수 있는 우수한 무녀였기에 이런 부탁을 하게 된 것이다. "교단에 보고해서도 안 되는 것인가요?" "예,설혹 신녀님이 묻더라도 침묵의 계율을 지켜주실 수 있어야 합 니다. " 신녀님이라면 아데나 교단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기밀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뭘까?하는 생각을 하며 수녀는 조용히 입 을 열었다. "아데나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 드리지요. 고통받는 환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라도 치료해 줘야 한다는 계명을 받았습니다. " "좋습니다. 준비해 주시죠. 물론 제자분은 데리고 가실 수 없습니 다. " "예." 제임스가 수녀를 데리고 간 곳은 황궁의 한쪽 구석 은밀한 곳에 마 련된 작은 집이었다. 집은 예쁘고 아담하게 지어져 있었지만, 집을 중 심으로 반경 100미터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마법진의 모습은 상당 히 이채로운 것이었다. "상당히 특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집이군요." 수녀는 눈발이 조금씩 흩날리는 가운데서 마법진 위에 만들어져 있 는 넓은 정원에 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만약 그 약속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제자를 데리고 왔을 것이다. 호기심이 왕 성한 제자는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놀라워할 것인가? 수녀는 이 커다란 마법진이 저 마도 왕국 알카사스의 마법진과 같 이 온도를 제어하는 마법진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각 거대 제국에 대 해서 교양자목으로서 책으로 많은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 녀는 이 마법진이 눈가림일 뿐, 정작 중요한 마법진은 그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전문적으로 마법진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고, 또 그 마법진은 지하에 숨겨둔 채, 그 위에 또 다른 마 법진이 2중으로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꽤 그럴 듯한 장소죠?" 수녀는 주위를 획 둘러본후 말했다. "저에게 그렇게 다짐을 하신 것에 비해 관리는 허술하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집을 주위로 엄청난 경계망이 쳐져 있죠. 설혹 황제 폐하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까지 철저한 경호를 받지 못하십니 다. 수녀님도 저와 함께 오셨기에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가요?" 수녀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 자신이 보기에 병력이라고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리로 오시죠." 수녀는 제임스와 함께 정원으로 들어서는 작은 문을 통해 마법진 안으로 들어섰다. 마법진 안은 지금의 계절을 비웃듯 매우 따뜻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이렇듯 많은 꽃들이 피어 있는 모양이다. 수녀는 마 법진 안의 모습이 신기한 듯 둘러보며 제임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똑똑 " 가볍게 노크하자 문에 붙은 작은 창문이 슬쩍 열렸다가 닫혔다. 그 런 후 곧 이어 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후작 각하. 그런데 함께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제임스는 수녀를 슬쩍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데려왔다. 아데나 신전의 무녀로서 신분은 확실하다. " "하지만 이러시면 안 되십니다. 전하의 허락 없이 누구도 그녀를 만 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지금 전하께서는 이런 하찮은 일에 매달릴 시간이 없으시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수녀의 신분에 대해서는 내가 보장할 테니 눈감아 주게. 나는 그녀가 그렇게 고통받고 있는 것을 덜어주기 위해서 이분을 모셔 왔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각하." "지금은 상태가 어떤가?" '방금 전까지는 상당히 괴로워했었는데,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습니 다. 뭐,하루에 너댓 번은 그런 발작을 일으키니까요." "이쪽으로." 제임스가 안내한 방에는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독한 술병 을 앞에 두고 벌컥벌컥 들이키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술이 좀 들어가 면 고통이 둔해지니까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서 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거의 흡사한 얼굴, 흐트러진 긴 금발머리, 가녀린 어깨, 작은 체구. 물론 그렇게 생긴 소녀가 이 세상 에 여러 명 존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한 그런 소녀 중 에서 저렇듯 독한 술을 좋아하는 술고래는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 았다. "어?" 수녀는 경악했다. 왜 그가 여기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에게 내려 진 저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일까? "아저씨가 왜 여기에 계신 거예요?" 수녀는 놀란 탓인지, 자신의 본분도 잊어버리고는 옛날의 습성대로 툭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을 받은 상대 또한 놀라서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매우 더럽게도 기분나쁜 추억과 마음 속 깊이 증오라는 단어와 함께 기억되던 목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무녀를 의미하는 각종 문양이 그려진 흰색 로브를 걸치고,또 로브에 달린 모자를 필게 눌러쓴 상대를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일부 그렇지 않은 교단도 있었지만, 아데나 교단의 경우 무녀들이 교단 밖에 나갔을 때에는 불상사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녀 들의 미모가 드러나지 않도록 항상 모자를 깊게 눌러써야 한다는 규 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년은 누구지 ?" 날카로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수녀는 깊이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뒤로 젖히며 감격어린 어조로 대답했다. "저,라나예요. 기억하시겠어요?그런데 아저씨는 하나도 안 변하셨 네요. 정말 놀라워요." 그 말을 들은 소녀의 인상이 소태를 씹은 듯 팍 일그러졌다. 소리는 바로 다크였다. 그리고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었던 계집이 눈 앞에 떡 하니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는 또 무슨 횡액을 당하게 하려 고.. 이때 제임스는 모자를 벗은 수녀의 모습을 처음 봤다. 여태껏 수녀 의 얼굴이 어딘지 눈에 익은 듯했지만,그는 그것이 친근감 정도일 것 이라고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이마 위쪽까지 푹 가리고 있던 로브의 모자가 뒤로 젖혀지자 수녀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 얼굴 생김새는 다크의 모습과 쌍둥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 도로 거의 똑 같았다. 다만 키라든지 몸매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 었지만, 얼굴 생김새로 봤을 때는 거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다. 둘의 생김새만으로도 경악할 지경인데, 서로가 나누는 대화는 또 어떤가? 왜 수녀는 치레아 대공을 보고 '아저씨' 라고 부르는가? 자신 의 눈에는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소녀로밖에는 안 보이는데. 수 녀가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일까?아니면 수녀가 예전에 치레아 대공을 만났을 때, 그때는 남자였다는 말인가? 사실 드래곤의 경우는 암수구분이 없 었고, 뭐로도 변신할 수 있지 않은가? 여태껏 치레아 대공과 싸우면서 알아낸 바로는 그녀는 마법에 있어 서는 거의 수준 이하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 또, 치레아 대공은 왜 수녀를 보자마자 꼭 무심결에 곰 쓸개를 핥은 듯 인상이 일그러져 있는가? 도대체가 제임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 었다. 제임스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둘을 번갈아가며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 사이, 둘의 대화는 계속 연결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꽤나 악 의에 가득찬 일방적인 것이었다. "못된 년. 빨리 내 눈 앞에서 사라지란 말이다! 왜 잊을 만하니까 나 타나서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거야? 죽고 싶냐? 오냐 죽여 주겠닷!" 다크는 쥐고 있던 술잔을 신경질적으로 들어서는 라나에게로 힘껏 던졌다. 미친 듯이 분노에 차 있는 다크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라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가볍게 술잔을 잡아챘다. 신성력에 의지하여 근력 증가를 시켜놓은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별로 어려 운 일이 아니었다. "옛날과 별로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은데 , 어디가 아프시다는 거죠?" 갑자기 수녀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왔기에, 제임스는 일순간 상 대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의 머릿속은 지금 터져나 갈만큼 혼란하면서도 복잡한 상태였다. 하지만 일단 질문이 주어진 만큼 제임스는 성심껏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대답해 주었다. "예?아, 예. 그러니까 정신계 마법에 의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 때 문이죠." "제가 좀 살펴볼수 있도록 잠시 좀 잡아주시겠어요?" "뭐,그러죠.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제임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뒤 따르는 행동은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 을 정도로 빨리 다크에게 접근한 후 손을 날렸다. 하지만 상대의 동작 을 눈치채지 못할 다크가 아니었다. 현재 마나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 뿐,그의 눈은 보통사람보다는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상대의 손 이 뒤통수를 때리는 순간, 다크는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 면서 세차게 손을 내저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숙련에 의해 만들 어진 본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퍽 !" 제임스는 일부러 피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의 주먹이 보통 매서운 것이 아닌 듯했지만,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자신에게 타격을 줄 정도 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피하는 대신 두 번째 공격을 연 이어 날렸다. 퍽!하는 소리가 뒤이어 들려 왔고,곧이어 콰당!하는소리와 함께 다크가 큰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자,보세요. 쉽죠?" 그렇지만 수녀 몰래 옆구리를 살짝 매만지는 것을 보면 결코 손쉬 웠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수녀는 제임스가 왜 그렇게 무작스런 방법 을 동원해서 다크를 기절시켰는지, 첫 번째 주먹을 다크가 손쉽게 피 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다크가 붙잡힐 가능성 이 별로 없었고, 괜히 엎치락 뒤치락 해 봐야 다크의 몸에 상처만 생 길 것은 뻔한 이치였던 것이다. 어쨌든 수녀는 드러누워 있는 다크를 안아들었다. 이제 그 시절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자신과 똑같은 얼 굴을 가지고 있는 다크를 찬찬히 바라보며 수녀는 감회가 새로웠다. 다크의 작고 가녀린 몸을 들고 가며 자신이 옛날에 이렇게도 가녀렸 던가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아저씨를 만난 후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던 가?그리고 그때는 왜 그렇게 철없이 굴었던가?그 때문에 이 아저씨 는 버릇없었던 나를 못잡아먹어서 길길이 날뛰었었던 것 같았다. 생 각해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기는 하지만 남에게 말하기는 쑥스러 운 까마득한 추억 이었다. 수녀는 다크의 머리에 손을 얹은 후 신성력을 발동시켰다. 그에 따 라 그녀의 몸에서는 신성한 빛이 살며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 고 어느 순간 그 빛은 사라졌다. "무슨 마법을 쓰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로군 요.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저로서는 그것을 바로잡을 능력 이 없습니다. " "어떤 방법 이 없겠습니까?' "저의 능력으로는 약간의 도움밖에는 드릴 수가 없군요. 이분이 두 통으로 고통받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죠?" 제임스는 수녀에게 치료를 부탁한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느꼈다. 황궁 안에도 여러 종파의 신관과 무녀들이 있었고,또 그들 중에서 신 뢰할 수 있는 몇 명이 이미 다크를 치료하려고 시도했었지만,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두통은 이분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실타래가 엉크러지며 나타나는 현상이죠. 점점 간격이 짧아진다는 것은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는 것이구요. 빨리 치료를 해야만 합니다. 안그러면 나중에 미치거나 바 보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 "병의 원인을 아신다면 치료를 하실 수도 있으실 것 아닙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제 능력으로는 완전히 회복시켜 드릴 수 없습니 다. 다만 그것이 엉크러지는 속도를 늦출 수 있을뿐이죠." "그렇다면 그거라도 부탁드립니다. 수녀님께서 치료하시는 동안, 아 데나 신전에 연락하여 더욱 실력 있으신 무녀님을 초청하면 되지 않 겠습니까?" "예,그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교단에서 응해 주실지 모르겠군 요." 수녀의 말에 제임스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원래 저희 교단은 여신님의 신탁을 받는 것이 큰 사명인 만큼,신탁 을 받다가 잘못되어 벌어지는 각종 정신 질환에 대한 치료가 발달해 있죠. 하지만 저희 교단에서는 이런 정신계 질환에 관련된 치료는 엄 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정신의 영역은 여신님이 관장하 시는 부분이고,그 부분을 파고들 수 있는 것은 본 교단의 무녀들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저희 교단의 무녀가 아닌 사람이 정신적인 질환을 겪을 때는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 아닌 한 치 료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그가 가해자든 피해자든 그것은 중요한 것 이 아닙니다. 교단에서는 그것을 무녀들의 영역을 침범한 행위로 간 주하니까요." "그렇다면 수녀님께서는 어떻게 이분을 치료해 주시겠다고 허락을 해 주신 건가요?나중에 혹시 교단의 추궁을 받으시는 것은 아닌가 요?" 수녀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쑥쓰러운 듯 말했다. "저는 과거에 저분에게 아주 큰 빛을 진 것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치료를 해 드리는 것이죠. 결코 제임스님의 부탁 때문이 아니니까 마 음의 가책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 "아, 예. 그러십니까?그럼,우선 치료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제임스는 수녀가 다크를 치료하는 것을 뒤에서 바라보며 나름대로 속셈을 굴리고 있었다. 수녀가 마음의 빚 때문에 치료를 허락한다는 말은, 교단도 뭔가 빚 또는 압력이 있다면 굴복할 수 있다는 말과 같 은 것이 아닌? 어떤 수단을 동원해야 신녀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인 가?이리저리 방법을 궁리해 보는 제임스였다. "정말인가?' "예,전하. 분명 그렇게 말했사옵니다. " "흐음!그 외에 수녀에게서 알아낸 것은 없나?" "예,더 이상은 말해 주지 않았사옵니다. 아무래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은 확실하오나, 그렇다고 잡아다가 고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 옵니까?" "그거야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 괜히 아데나 교단까지 자극할 이유 는 없지. 그럼 어떻게 한다? 참, 그녀를 치레아 대공과 자주 만날 수 있게 해 주게나. 그러면 둘 사이에 뭔가 대화가 오고 갈 것이, 그것을 듣다 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히지 않겠나" "저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전하."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레티안이 끼여들었다. "치레아 대공을 시중들고 있는 시녀를 닦달해본 결과, 그녀는 며칠 전에 월경을 끝마쳤다고 하옵니다 " "그런가?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예, 그렇다면 그녀는 완전한 여자라는 것이옵니다. 정말 발렌시아 드 후작 각하의 말씀대로 수녀가 '아저씨' 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그녀는 도중에 변신을 거쳤다는 말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그거야 그렇지." 로체스터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레티안은 말을 이었 다. "트랜스포메이션 마법으로는 절대로 성별이 바뀔 수는 없사옵니다. 만약 여자가 근육질의 남자 모습으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형상은 여성일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 또한 마찬가 지구요. 오로지 단 한 존재를 제외하고는 남녀의 모습을 완벽하게 바 꿀 수는 없사옵니다. 바로 그것은 드래곤이죠." "드래곤?하지만, 전에도 말했지만 그녀가 드래곤이나 헤즐링일 가 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짓지 않았었나? 헤즐링이 그렇듯 엄청난 검 술을 익힐 수는 없어. 마법이라면 몰라도." "그것은 저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그녀가 헤즐링이라면 사 건은 더욱 복잡해지옵니다. 자신의 자식이 행방 불명되었다고 그 골 드 드래곤이 떠들어댄다면, 이 세상의 모든 드래곤들이 그녀를 찾기 시작할 것이옵니다. 드래곤 한 마리라면 몰라도, 그 많은 드래곤들이 설치고 다닌다면 곧바로 들통날 것은 분명하옵니다. " 레티안의 말을 들은 로체스터 공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과연 일 이 그렇게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드래곤의 헤즐링에 대한 광적인 보호는 익히 알려져 있으니까 말이다. 공작은 단호한 어조로 제임스 에게 말했다. "수녀를 잡아서 고문을 하든지, 아니면 치레아 공작과 대질 심문을 시키든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녀의 정체를 빨 리 밝혀내라." "옛, 전하.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 제임스가 서둘러서 밖으로 나간 후, 레티안은 서류 몇 장을 로체스 터 공작에게 건네며 말했다. "사흘 뒤에 있을 폐하의 대관식 말이옵니다. 거기에서 한 가지 문제 가 있사옵니다. " 공작은 서류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뭔가?" "황제 폐하께서 암살당하시는 바람에,크라레스의 황제가 케락스에 오는 것이 연기되지 않사옵니까?사실 이쪽에서도 그 동안 반대파의 숙청을 감행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크라레스에 압력을 넣을 형편도 아니었사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정도 국내 사정이 안정되었기 에, 그쪽에 황제 폐하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새로운 황제 폐하께 충성 을 맹세하고, 항복 문서에 서명하라고 권고를 보냈사옵니다. 이것이 그 답장이옵니다. " "그런가?" 로체스터 공작은 서류를 뒤져 봤다. 앞부분은 크라레스에 보낸 명 령서의 복사본이었다. 그리고 제일 뒤쪽에 붙어 있는 답장, 그것 을 읽은 로체스터 공작은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이놈들이 지금 정신이 있는 건가? 항복 따위는 할 수 없다니, 그게 제정신을 가진 놈들이 할수 있는 대답이냐 그거야." "글쎄요. 그건 잘 알 수 없사옵니다. 복잡한 국내 사정 때문에 본국 은 그동안 타이탄 생산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사옵니다. 그에 비해 크 라레스는 이를 악물고 전쟁 준비를 했을 테니, 최소한 카프록시아급 타이탄 15기는 더 만들었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큰 소 리 칠 수는 없는노릇이 아니옵니까?" "혹시 크루마와 다시 손을 잡은 것이 아닐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사옵니다. 크루마는 치레아 대공을 이쪽으로 넘겨주지 않았사옵니까? 왜 크라레스와 손을 잡으려고 하겠사옵니 까?" "글쎄, 그건 알 수 없지. 미란을 털도 안 뽑고 꿀꺽 한 후 시간이 좀 흘렀으니 또 다른 먹잇감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본국이 크라 레스와 한 판 하고 나면 중간에서 이익을 볼 국가는 현재 크루마뿐이 지 않은가? 제2차 제국 전쟁에서 아무런 피해도 당하지 않았으니 그 놈들의 군사력은 최고조를 달리고 있을 것이야." "서둘러서 조사를 실시해 보겠사옵니다. 전하." 몬스터들의 대진격 "선발 부대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오크의 보고를 들은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 씩 하고 음흉한 미 소를 지은후 명령했다. "적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돌격 태세를 정비하라. 공격은 오우거들이 도착한 후 내일 새벽에 시작한다. 준비하도록!" "옛." 오크는 이빨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명령을 전달하기 위 해 짧은다리로 뒤뚱거리며 달려갔다. 오크나 트롤 같은 몬스터들은 쇠를 제련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또 방법을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 재료가 되는 쇠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에 그들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가죽이나 나무 껍질 따위로 원시적인 갑옷을 만들어 입는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 는 무기 또한 나무 몽둥이나 돌도끼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농가 를 급습하든지 또는 토벌 부대를 상대해서 노획하든지 하여 각종 무 기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검은로브를 입은 인물이 거느리고 있는 몬스터들이 하나같 이 번쩍이는 강철 갑옷을 입고 있었고,강철로 만든 크고 작은도끼나 철퇴 따위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눈에 척 봐도 누군가 인간들 이 그들에게 맞는 갑옷과 무기를 제작해서 제공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갑옷이나 무기들이 새 것인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들이 인간과 손잡은 것이 요 근래의 일이라는 것 또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날 밤, 40여 마리의 거대한 오우거들과 함께 다섯 마리의 미노타 우르스도 도착했다. 그들 역시 엄청나게 두꺼운 철갑으로 몸을 보호 하고 있었고,초대형 도끼나 철퇴 따위를 들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했 다는 보고를 듣고 나서 로브를 입은 사내는 지도를 꺼내서 확 펼쳤다. 그들은 쟈코니아 산맥을 통해 이 대부대를 거느리고 조심조심 이동 해서 이곳까지 도착했다. 내일 전투가 끝나면 아르곤의 주력 부대는 두 토막으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크로나사 평야 깊숙이 진격해 들어 간 부대와 본토에 남아 있는 부대로 말이다. 그 둘을 연결해 주는 통 로가 바로 이곳이었다. 로브를 깊숙히 눌러쓴 그 인물은 수정 구슬을 통해 통신을 시작했 다. 그는 수정 구슬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그 앞에 정중히 무릎 꿇 고 앉았다. 그런 다음 수정 구슬 안에 사람의 모습이 보이자 상체를 앞으로 푹숙이면서 말했다. "모든 준비가 갖춰졌사옵니다, 폐하. 하명을 내려주시옵소서." "예정대로 공격을 시작하라." "옛." 서둘러서 천막 밖으로 뛰어나온 그는 대기하고 있는 몬스터들에게 외쳤다. "공격하라!" "꾸에에에엑 !" "크와아아악!" 몬스터들은 저마다 괴성을 질러대며 이제 어스름하게 밝아오기 시 작하는 산길을 달려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몬스터들이 돌진 해 들어간 곳은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크라레스의 국경 곳곳에서 이 런 공격이 벌어지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공격을 시작한 그날 새벽, 크라레스의 모든 고위급 기 사들은 명령을 받고 황궁에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는 스바시에 기사 단장인 아그리오스 후작과 치레아 기사단장인 카슬레이 백작도 포함 되어 있었다. 크라레스의 모든 기사단들은 토지에르의 반란 이후 모 두 다 수도에 집결해 있었기에 그들을 모두 다 소집하는 것은 별로 어 려운 일이 아니었다. 토지에르는그들을 쓱 훑어본 후 자리에 앉았다. "이른 시간에 모두들 모이느라 수고했다. 이제부터 폐하의 말씀을 전하겠다. "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황제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인물은 토지에르로 국한되어 버렸다. 그날 이후로 토지에르는 황제의 명령 을 전달하는 중계자로 나섰고, 황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기 사들은 토지에르의 말을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 새벽 , 선발대가 아르곤과 알카사스의 국경을 넘었다. " 토지에르의 말에 기사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항복 선언을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상대국의 국경을 넘어 공격을 감 행한다는 말인가? 모든 기사단장들을 대표하여 아그리오스 후작이 항의했다. 총사령관인 루빈스키 공작이 없는 지금 그가 여기 모인 기 사단장들 중에서는 가장 계급이 높았기 때문이다. "선발대가 국경선을 넘다니요? 저희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어떻 게 그런 결정이 내려졌다는 말씀이시옵니까?그리고 그 선발대의 지 휘관은 또 누구이옵니까?" "몬스터들일세. 몬스터들은 폐하께 동맹의 우의를 피로써 맹약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들이 본국을 돕겠다고 발벗고나선 것이지." 모두들 벌집을 건드려 놓은 듯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토지에르는 오른손을 슬쩍 들어 조용히 시킨 후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모든 공격은 몬스터들이 한다. 대신 몬스터들이 적의 기 사단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기에 그대들을 소집한 것이다. 제2차 제 국 전쟁에서 본국을 파멸의 궁지로 몰아넣었던 각국들은, 지금 서로 간의 이권을놓고다투고 있다. 본국이 파멸 직전에 놓여 있다고 적들 이 자만하고 있는 이때, 바로 지금이 본국에게 남아 있는 최후의 기회 임을 경들은 명심하라." "옛,전하." "우리의 숙적은 코린트지만, 그들을 직접 공격할수는 없다. 왜냐하 면 아르곤과 알카사스가 코린트가 쓰러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교적 군사력이 약한 알카사스와 아르곤을 먼저 친다면, 코린트는 그들을 직접적으로 돕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코린트는 전번 전쟁에서 너무나도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 런 코린트가 적국이 몬스터의 공격을 받는다고 귀중한 전력을 투입 할 가능성은 없다. 코린트가 몬스터의 배후에 크라레스가 있다는 사 실을 모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코린트가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그 때를 이용하여 양대국을 우선적으로 괴멸시킨다. 그런 후 코린트에 게 지금까지 받았던 수모와 원한을 돌려줄 것이다. " "우와아아!" 토지에르는 손을 번쩍 들어 기사단장들의 환호성을 가라앉게 했다. 그런 후아그리오스 후작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호명했다. "아그리오스 후작." 토지에르의 호명에 스바시에 기사단장인 쥬리앙 폰 아그리오스 후 작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했다. "예,전하." "그대의 기사단은 본국 최고 정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은 휘하 기사단과 함께 제2전대를 함께 거느리고 코린트 전선을 책임지도록 하라." "예, 폐하의 뜻이라면 책임지겠나이다. " "크로아 후작." 토지에르의 호명에 중앙 기사단 제1전대 대장인 발칸 폰 크로아 후 작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했다. 크로아 후작은 아그리오스 후작 다 음으로 계급이 높은 인물이었고 그 실력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 었다. "예,전하." "경은 치레아 기사단과 함께 아르곤 국경을 맡아라." "예,전하." 토지에르는 일단 크로아 후작에게 명령을 내린 후, 카슬레이 백작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스바시에 기사단의 경우 중앙 기사단의 한 패 거리로 취급되고 있었지만, 치레아 기사단은 조금 얘기가 달랐기 때 문이다. "카슬레이 백작." "예,전하." "경이 맡고 있는 기사단이 치레아 대공님의 휘하에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지금 대공께서 안 계시니 그분의 허락을 구할 수가 없군. 황 제 폐하의 칙명이니만큼 경이 좀도와줘야겠소." "충심으로 받들겠사옵니다. " "좋소." "론가르트 백작?" "예,전하." "경은 남은 기사단들을 모두 책임지시오. 그 중 1개 기사단은 항시 대기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오. 그러 묵 향 외 전 (Dark Story Series Ⅱ- Dark Lady) 제14부 부활하는 다크 墨 몬스터에게 배후가 있다? 香 "세상에....." 끝도 없이 널려 있는 시체를 보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수많은 병사들과 말, 그리고 크고 작은 몬스터들의 시체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그들의 시체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또한 죽어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은 웬만한 전쟁터는 두루 돌아다녔다고 자부하는 병사들이 봐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털보가 언성을 높이며 부하들을 꾸짖었다. 여러 전쟁터를 전전했던 자신도 이런 처참한 광경은 거의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두려움에 휩싸인 상태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면 더욱 안 좋은 결과가 뒤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식들! 이런 것 한두 번 보냐? 이번 정찰 활동을 시작하고 이런 장 면은 몇 번이나 봤잖아. 용병이라는 것들이 겨우 이런 것 때문에 감탄사 를 터뜨려서야 뭐가 되겠나? 너희 셋은 저쪽을 정찰해 봐! 그리고 너희 셋은 이쪽을!" "예!" 용병 기사들이 정찰을 위해 떠난 후, 털보는 해골바가지를 보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한 번 혼이 난 덕분인지 그의 목소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대장, 더 이상 둘러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곳곳에 널려 있는 시체들로 미 루어 보아 몬스터의 반란 규모가 상상 이상인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몬스터는 몬스터입죠. 기사단들이 투입되기 시작하면 곧 진압될 것입니다." "글쎄....." 다소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던 용병 대장의 눈길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는 여태껏 자신이 찾고 있었던 것을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저리로 가자." 용병 대장이 앞서서 달려가자 그 부하들도 헐레벌떡 상관의 뒤를 따라갔다. 용병 대장이 발견한 것은 깊숙히 파여 있는 타이탄의 발자국이었다. 용병 대장은 타이탄의 발자국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역시, 이 정도까지 사태가 심각한데 기사단을 투입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털보는 약간 질린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기사단을 투입했는데도 피해가 이 정도라는 말입니까?" "나도 그 점이 마음에 걸리는군. 자, 타이탄의 발자국을 따라가세. 저쪽으 로 맹렬히 달려갔으니까 말이야" "옛!" 타이탄들의 발자국은 상당한 간격을 두고 하나씩 깊숙하게 찍혀 있었다. 용병들은 곧이어 타이탄들이 왜 그쪽으로 달려갔는지 알 수 있었다. 오우거들의 시체들이 하나씩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뒤에서 검에 맞은 흔적으로 보아 타이탄들은 오우거들을 추격하면서 그들을 죽이며 나갔다고 추리할 수 있었다. "오우거들이 저쪽으로 도망친 모양이군. 타이탄들은 그쪽으로 계속 추격 해 들어갔고......." 그들의 추격은 산 뒤편에서 끝이 났따. 산 뒤편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오우거 밑 미노타우로스의 발자국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타이탄들의 발자국도 그곳까지만 발견할 수 있었다. "갑자기 대형 몬스터들의 발자국이 많아졌습니다. 그걸 보면 이곳에 대형 몬스터들을 매복시켜 놓은 후 끌어들인 것이 아닐까요?" "쯧쯧, 자네는 대형 몬스터들이 그 정도로 지능이 높다고 생각하나?" 사실 오크나 트롤, 고블린 같은 경우 꽤나 지능이 높다고 볼 수 있었지만, 오우거나 미노타우로스 같은 대형 몬스터는 지능지수가 아주 낮았다. 그리고 그들은 본능적으로 단독 생활을 즐기는 놈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매복 작전 같은 것을 생각하고, 또 실행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잘 아는 털보가 아무 소리도 못하자 용병 대장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위를 빙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몬스터들을 조종하는 뭔가가 있어.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겠지." "예? 인간이라구요? 어떻게 몬스터들을 인간이 조종할 수 있다는 말씀이 십니까?" "그거야 당연한 노릇이 아닌가? 저 트롤이나 오크의 시체를 좀 봐." 용병대장은 쓰러져 있는 벌거벗은 몬스터 시체의 한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런 자국을 자네는 본적이 없나?" 트롤의 시체를 봤을 때는 확실하진 않았지만,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연약한 피부를 가진 오크의 시체에는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여기저기 묵직한 것에 짓눌린 듯한 흔적들, 그리고 곳곳에 햇빛이 파고들어 그을린 자국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것은 털보에게 매우 눈에 익은 것이었다. "이건 갑옷을 입은 흔적이 아닙니까?" "바로 그거야. 이놈들은 시체가 되기 전에는 갑옷을 입고 있었어. 흔적으 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강철로 만든 묵직한 것을 입고 있었겠지. 그리고 아무리 여기저기 둘러봐도 몬스터들이 사용했음직한 무기는 보이지 않 지? 저 병사의 시체를 봤을 때 도끼에 찍혀서 죽었음이 분명한데, 이 전장 어디에도 몬스터들이 사용했음직한 도끼는 보이지 안지 않나? 아 마도 전투가 끝난 후 모두 다 거둬 간 것이 분명하다고 봐야지. 그건 그 렇고, 자네는 몬스터들이 강철 갑옷을 입고 강철 도끼를 들고 다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털보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시인했다. 물론 몬스터들이 농가에서 약탈한 도끼라든지, 곡괭이 같은 농기구나, 토벌대를 역으로 토벌해버린 후 뺏은 검이나 창 같은 무기를 소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갑옷만은 어떻게 되지 않는 것이다. 가죽갑옷 같은 경우 잘 안 맞는 부분을 잘라내든지 해서 어떻게든 입을 수 있겠지만 각자의 체형에 맞춰 제작되는 강철로 된 갑옷만은 몬스터들이 절대로 입을 수 없었다. 인간과 몬스터들은 체형 자체가 완전히 틀렸으니까 말이다. "어떤 놈들이 몬스터들에게 갑옷과 무기를 대준거야. 그리고 여기에 타이 탄들의 잔해가 있어야 정상인데 그것도 없지 않나? 갑옷이나 무기라면 몰라도 몬스터들에게 있어서 타이탄의 잔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테니까 놔뒀을거 아닌가." "혹시 알카사스 쪽이 승리하면서 회수해 간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전세 가 어느 정도 고착되었을 때를 노려서 회수했든지 말입니다." "자네 말도 일리는 있어. 하지만 승리했다면 병사들의 시체를 장사지냈겠 지. 병사들의 시체를 거두기 힘든 여건이라면 최고한 귀족들이나 기사들 의 시체라도 거두어서 묻어줬을 거야.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어. 그리고 오던 길에 여기저기 있던 반쯤 뜯어 먹힌 시체들 봤나? 몬스터들이 전 쟁을 끝낸 후 승리를 축하하면서 식사를 한 것이겠지. 완벽한 승리를 쟁 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렇듯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을까?" "과연... 그렇군요." "이보게, 카마엘!" 용병 대장의 호명에 마법사 한 명이 앞으로 쓱 나서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의 경우 여기에 파견되어 온 마법사였고, 한낱 용병 나부랭이에게 존칭을 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시오?" "통신 마법진을 그려 주게. 전하께 보고를 해야겠어." "그러지요." 잠시 후 마법진이 완성되고, 수정구슬에 상대편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는 총사령부 통신실... 어, 자네는 카마엘이군. 듣자 하니 용병들하고 떠났다던데, 무슨 일인가?" "용병 대장이 사령관 전하께 보고사항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 말해보게." 용병 대장이 앞으로 쓱 나서서는 수정 구슬을 향해 말했다. "정찰을 해 본 결과 아무래도 어떤 국가가 몬스터들과 연합하고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연관을 짓고 있는 것이 틀림없소." "그게 정말인가?" "틀림없고. 몬스터들은 잘 만들어진 두터운 강철 장갑을 두르고 있고, 강 철로 만든 도끼나 검 따위를 가지고 있었소, 몬스터들이 그런 것을 만들 줄 모른다는 것은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소? 누군가가 그것을 만들어 줬다고 봐야 하겠지. 그것도 각종 몬스터의 체격에 잘 맞춰서 제작되었 을 거요. 인간이 입은 갑옷은 도저히 몬스터들이 입을 수 없으니까 말이오." 수정 구슬 저쪽에 있는 노마법사의 의아스러운 표정이 비춰졌다. "그럴리가....." "그리고 이곳에서 타이탄들도 다수 파괴된 것 같소. 거대한 오우거나 미 노타우로스의 사체도 있소. 하지만 타이탄의 잔해는 찾을 수 없었소. 몬 스터들에게 그 무거운 타이탄의 잔해를 굳이 운반할 필요가 있었겠소? 타이탄의 잔해를 굳이 운반할 필요가 없지 않소? 그러니 당연히 그 잔 해가 흘러 들어간 곳이 몬스터들과 손을 잡은 인간들의 본거지일 것이 오." "그렇다면 경은 어떻게 하실 참이오?" "타이탄의 잔해를 따라서 추적해 갈 거요." "아무래도 타이탄의 잔해를 오우거가 운반해 간 것 같은데, 타이탄의 무 게 덕분에 평상시보다는 발자국이 깊게 파일 테니 추적은 문제없을 듯 하오." "알겠소. 이 사실을 전하께 전하겠소. 귀하는 일단 전하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현 지점에 대기했다가 지시를 받도록 하시오. 귀하의 무운을 빌 겠소. 그럼 이만....." 통신을 끝낸 후 용병 대장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타이탄의 잔해의 이동경로를 따라간다. 자. 모두들 집합시키도록 해라." "지금 말씀입니까?" 대장의 명령에 털보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수정 구슬 속의 그 노마법사는 이곳에서 대기하라고 했기 때문에 대장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지금 당장!" "예." 털보는 재빨리 정찰을 위해 산개해 있는 부하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상부의 명령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장은 지금 당장 떠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털보는 오랜 용병 생활을 통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상부'보다 눈에 보이는 '대장'을 따르는 것이 훨씬 만수무강에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카마엘은 수정 구슬을 집어든 후 마법진을 발로 쓱쓱 지우면서 약간 신경질적으로 따지듯 물었다. "이보시오. 대장. 내가 상부에서 듣기로는 그대들이 맡은 것은 단순한 정 찰임무였소. 우리들은 그것을 보조하는 것이었고 말이오. 그리고 방금 현 지점에서 대기하라는 지시가 있었지 않소? 그런데 지금 움직인다는 것은 항명죄에 해당하오." 이 마법사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목숨걸고 적진 깊이 들어가는 것을 겁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용병 대장은 무섭게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그럼 네놈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마법사는 매서운 용병 대장의 눈길을 슬쩍 피하면서 궁시렁거렸다. "이보시오. 우리는 그대들을 돕기 위해 파견된 것이오. 그렇게 위협적으로 나온다면....." "한낱 목숨이 아까워서 정찰 임무를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만약 그딴 소 리를 한 번만 더 한다면 내가 여기서 네놈을 죽여주겠다. 그러니 그만 입 닥치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알겠어?" 아무리 용병이긴 해도 저쪽은 기사였다. 그리고 카마엘은 마법사, 둘이서 정면대결을 한다면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카마엘은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가라앉히며 나중을 기약했다. 나중에 본국으로 돌아가면 용병 대장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 상부에 보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총사령부로부터 새로운 지시사항이 하달되었습니다." 널찍한 탁자였지만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국의 주인인 대공은 행방불명이었고 치레아 기사단은 수도로 이동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고위급의 기사들 및 마법사들이 부재 중인 상태였다. 그렇기에 이 회의는 본의 아니게 치레아 공국에서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버린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백작이 주재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본국은 몬스터들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말에 회의석상에 앉아 있던 모든 인물들이 경악한 듯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그는 손을 들어 모두를 조용하게 마든 후 말을 이었다. "물론 그것은 표면적인 사실입니다. 토지에르 전하께서는 강력한 마법의 힘으로 몬스터들을 지배하시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 해서 현재 알카사스 및 아르곤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계신 것이죠." 회의석상에 앉아 있던 장군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인물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얼마 전 총사령부의 명령으로 치레아 변방의 요새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몬스터들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은 적들을 기만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몬스터들의 발원지는 경들도 아시다시피 말토리오 산맥의 양 끝단이죠. 하지만 여태껏 말토리오 산맥의 중심을 끼고 있는 본국 의 피해가 거의 전무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몬스터들은 토지에르 전하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타국이 괴이하 게 여길 우려가 있기에 본국이 몬스터들에게 점령된 것으로 해야할 필 요성이 생기게 되었단 말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카르토 백작은 주위를 쓱 훑어본 후 목소릴 낮춰서 말했다. "물론 이 사실은 절대적으로 기밀입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외에는 아무 도 알아서는 안 됩니다. 대공 전하께서 안 계신 상태에서 이곳을 폐허 로 만들 수 없기에 항복하는 것이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하십시오. 그러 면서 대공 전하꼐서 돌아오시는 그때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몬스터 들과의 충돌을 피해야 한다고 설득해야만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으음 적을 속이려면 먼저 아군을 속여라, 이것이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몬스터들 또한 쓸데없이 주민들이나 병사들과 충돌을 일으키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쪽에서 시비를 건다면 아 무리 토지에르 전하의 지시를 받았다고 하지만 그 흉폭한 것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워낙 난폭한 것들 이니 그 본성이 되살아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될 수 있다면 조심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지요." "알겠습니다. 부하들에게 지시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도 이 사실을 주지시켜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몬스터 들을 향해 돌을 던지든지 혹은 공격당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단속해야만 할 것입니다." "옛!" 墨 제임스의 이상적인 기사상 香 "헉헉헉!!" 가쁜 숨소리를 내쉬며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소녀,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는 찰랑거리는 금발과 더불어 한껏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큼직한 철봉을 양손에 쥐고 달리고 있었는데 가녀린 몸매로 미루어 봤을때 굉장히 힘이 드는 듯했지만 소녀는 연신 땀을 흘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허용된 범위인 둥근 마법진 안을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체력이 완전히 바닥이 났는지 헐떡거리면서 쓰러졌다.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벌떡벌떡 요동치는 심장, 온몸은 솜털 하나의 무게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나른해져 오고 있었다. 몸 속의 모든 피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가벼운 현기증까지 치밀어 올라 순간적으로 사위가 시커멓게 보이기까지 했다. 다크는 헐떡거리면서 이렇게 자신이 힘겹게 수련한 것이 몇 년만인지 생각했다. 수십 년 전, 아직 내공의 힘이 쌓이기 전에 이런 단순무식한 육체의 수련을 했었다. 하지만 내공이 쌓이기 시작한 후에는 이런 수련은 무의미해졌다. 폭발적인 내력을 근력에 싣는 요령을 익힌 후, 순간적이나마 수십 배의 힘도 뽑아낼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육체 수련보다는 정신 수련에 더욱 무게를 두기 시작했고, 그 후 강기(剛氣)를 익힌 후 육체수련은 더 이상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왜냐하면 그때를 전후하여 그는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더욱 강인한 육체를 새롭게 얻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은 환골탈태를 걸쳐 보통 사람들보다는 월등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강화된 육체뿐이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 강화된 것이지. 처음부터 형편없이 가느다란 이 육체가 힘을 내면 얼마나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일단 단단한 근육이 붙고. 또 그곳에 원활하게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해 줄 혈관이 두텁게 발달하지 않은 팔다리는 큰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크루마의 지하 궁전에서 탈출을 시도를 했을 때 그녀가 기사들에게 뭇매를 맞은 것도 당연했다. 일단 그들은 육체적으로 강인한 남자였다. 그것도 엄청난 수련을 거친..... 거기다가 맹목적인 견인족들과 달리 원활하게 돌아가는 대가리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라면 그녀의 수십 배가 넘는 힘을 한꺼번에 낼 수 있었다. 근위대의 그래듀에디트급 기사들을 상대로 두 명이나 부상을 입힌 것도 알고 보면 상대가 방심한 덕분에 얻어낸 행운에 가까웠다. 약간의 가속이 붙었을 때 얘기기는 하지만 1초에 20~30미터를 움직일 수 있는 기사들을 상대로 내공 없이 승부를 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쉽지 않고 달리다가 지쳐서 쓰러지는 소녀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제임스의 입가에는 살며시 미소가 어렸다. 저 머나먼 아르곤의 오지(奧地)에서 그녀를 처음 알게 된 후부터 그녀는 계속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헤즐링인지 인간인지조차 헷갈리는 그녀였지만 어찌되었건 그녀는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에게 검술로써 패배를 안겨 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것만 해도 제임스의 존경심을 사기에 충분한데 그녀는 미네르바의 함정에 빠져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기죽지 않고 말이다. 그녀를 납치하는 등 지어 놓은 죄가 많은 까미유는 그녀에게 공포심을 느낄지 몰라도 제임스가 바라보는 다크에 대한 시각은 조금 달랐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조금의 틈이라도 엿보이면 돌파하겠다는 그 근성, 정말이지 기사로서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임스가 알고 있는 한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이 진짜로 강했다면 포로가 된 즉시 코린트에 협조하겠다고 공언했을 것이다. 원래가 자신의 삶을 중시하는 놈들은 남의 삶 따위는 하찮게 생각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빈말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한번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는 사람, 최악의 상황에서도 국가와 황제를 향한 충성심에 변함이 없고 약자를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강자들과 싸우는... 그것이야말로 제임스가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기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 덕분에 서로가 적인 채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제임스가 그리는 이상적인 기사상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조금의 오해가 가미된 착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것만 해도 그의 존경을 사기에 모자람이 없는데 그녀는 용모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빠져들만큼 사랑스럽지 않은가? 거기에다가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에 따라 그녀를 책임지면서 곁에서 지켜보며 또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제임스는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될 수 있는 한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여자를 많이 다뤄 봤던 그의 본능이 그렇게 만드는 것도 있었지만 일단 그녀는 포로였고 가장 중요한 죄수였기 때문이다. "왜! 여기에 계시나요? 안 들어가실 건가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제임스는 흠칫하며 시선을 뒤로 돌렸다. 그의 등 뒤에서 무녀가 다소곳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임스는 무녀가 이토록 가깝게 다가올 때까지도 몰랐을 정도로 딴 곳에 신경 쓰고 있던 자신을 책망했다. 그랬기에 그녀에 대한 말투도 은연중에 약간 딱딱해져 있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예? 예, 방금 왔습니다." "그러십니까? 함께 들어가시지요." 무녀는 슬며시 제임스의 옆쪽에 자리를 잡고 마법진 안으로 들어섰다. 신분상으로 따지면 제임스가 앞장서고 그녀가 뒤에서 따라가야 옳았지만 그는 검객 특유의 감각상 딴 사람이 뒤에 서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자그마한 불쾌감을 알아챈 후부터 그녀는 제임스와 함께 걸어갈 때는 언제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높은 신분과 직책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는 그에 대한 자그마한 배려였던 것이다. "오늘도 열심이시네요. 아저씨." "으으흠!" 아름다운 무녀는 반가이 인사를 건넸지만, 소녀는 그것이 결코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헛기침을 세차게 하며 고개를 돌렸다. "두통은 어떠신가요?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소녀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자 무녀는 다시금 부드러운 어조로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두통이 일어나는 횟수가 조금 줄지 않았습니까?" "너 따위와 다시 말을 한다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소녀는 투덜거리며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일으켰다. 소녀는 이곳에 온 후 매일 같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러면서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또다시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충분히 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 소녀를 감시하는 기사들은 그녀가 마법진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마음껏 육체를 혹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투덜거리면서 실내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무녀는 생긋 미소만 보냈다. 여태껏 수련을 하며 별의별 사람들을 다 겪어 본 그녀에게 있어서 그런 퉁명스런 반응쯤은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녀가 몸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여태껏 무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던 제임스가 다크를 향해 말했다. "좋은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드로아 대신전에 치료를 부탁했더니 대신전 으로 온다면 치료를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대신 한가지 조건이 있답니다." "뭔데?" "원칙적으로 정신계 마법에 대한 부작용을 치료받는 것은 드로아 종단의 무녀여야 한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치레아 대공께서는 여자시니까 무 녀로 등록만 하신다면 치료를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나보고 무녀가 되라고? 오래 살다보니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네." 퉁명스럽게 말하는 다크를 향해 제임스는 조리있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무녀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무녀로 등록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 태껏 대공 님을 괴롭히던 그 두통은 완전히 없어질 겁니다." "겨우 두통 때문에 나보고 팔자에도 없는 무녀가 되라는 말인가?"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이대로 계속 그것을 방치한다면 언 젠가는 미쳐 버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점차 증상 이 가벼워지기 시작해서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아 무리 그래도 모든 것을 운에 맡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한번 안 한다고 했으면 안 하는 거야. 뭐 미쳐 버린다면 그것도 나 름대로 괜찮겠지. 도중에 치유된다면 그것도 좋고." 다크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툴툴거렸지만 제임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진짜로 미쳐 버린다면 그 뒷수습이 골치 아퍼지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다크와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시간 동안만 대화를 한 후, 헤어지자마자 곧장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로 갔다. "그녀가 드로아 교단으로 가는 것을 거절했사옵니다, 전하." "그래? 그렇다면 일이 어려워지기 시작하는군." "예, 전하."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그녀를 미칠 때까지 여기다가 잡아 놓을 수도 없 고 그렇다고 드래곤에게 인계를 할 수도 없고 말이지. 크루마와 뒷공론 까지 했다는 것을 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 말이야. 이래저래 문제군." 이때 뒤에선 듣고 있던 레티안이 끼어 들었다. "이렇게 하면 어떻사옵니까 전하." 그 순간 제임스와 로체스터의 시선이 레티안 쪽으로 즉시 움직였다. 둘 다 뭔가 좋은 대답을 구하는 듯한 표정이었기에 레티안으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나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치레아 대공의 처리는 본국으로서는 가장 골치 아픈 사안이옵니다. 죽이 자니 뒤가 껄끄럽고 또 드래곤에게 넘기자니 크루마와의 맹약이 걸린다 는 것이옵니다. 2차 제국전쟁에서 본국이 막대한 희생을 떠안았을때 크 루마는 참전하지 않고 조용히 힘을 키워 왔지 않사옵니까? 그런만큼 크 루마의 신경을 건드린다는 것 또한 본국에서 별로 유익하지 않사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실 수 있을 것이옵니 다." "어떻게?" "일단 치레아 대공을 처형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옵니다. 물론 드래 곤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게 비밀스럽게 소문을 내야 하지만 크루마에는 그 정보가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크루마는 그 사실을 드래곤에게 알릴 가능성이 크옵니다." 레티안의 말에 로체스터가 약간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설마 그들이 그것을 드래곤에게 알려 봐야 좋을 것이 없을 텐데..... 그리 고 그들은 치레아 대공의 뒤에 있는 드래곤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것이 아닐까? 만약 미네르바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드래곤과 관계를 맺 고 있는 그녀를 납치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야. 만약 드래곤에 게 그 사실이 새나가기라도 한다면 크루마는 곧장 멸망의 길로 들어선 다는 것을 잘 알 테니까." 레티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로체스터의 말에 일단 긍정했다. "물론 전하의 말씀도 옳으시옵니다. 하지만 그녀의 두통은 정신마법의 후 유증이 아니옵니까? 그것을 보면 그들은 정신마법을 동원하여 치레아 대공을 심문했음이 틀림없사옵니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그들은 그녀와 드래곤의 관계를 알아냈을 것이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국에다가 그 골 치 아픈 일을 떠넘긴 것이지요." "음! 일리가 있군." "예, 그들은 본국에서 치레아 대공을 죽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사옵니다. 그런 다음 드래곤에게 밀고하면 본국은 곧장 파멸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 이옵니다." "아니지. 그건 경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 만약 우리 쪽에서 화풀 이 하러 온 드래곤에게 전후 사정을 알려준다면 어떻게 되겠나? 드래곤 도 바보가 아닌데 설마 한쪽 말만 듣고 일을 처리할 리가 없지 않나? 치사한 방법을 동원해서 그녀를 잡아들인 것은 그쪽이 아닌가 말이야." "그렇지 않사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짓은 슬쩍 숨기고 드래곤에게 코린트가 강압적으로 시켰기에 어쩔 수 없이 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하 옵니다." "그러면 되면 큰일이 아닌가? 그것을 잘 알면서도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 자는 이유는 뭔가?" "그러면 당연히 드래곤이 저희를 응징하기 위해서 올 것이고 그때 본국에 서는 그녀를 드래곤에게 양도하는 것이옵니다. 아마도 치레아 대공은 자 신이 어떻게 해서 이곳으로 잡혀 왔는지 드래곤에게 고자질 하겠지요. 그러면 크루마는 끝장이옵니다. 또 설혹 크루마가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맹약을 깬 것은 자신들이기에 이쪽에다가 뭐라고 탓할 수 없 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더 이상 본국에서 뒤탈을 걱정 할 필요가 없지 않겠사옵니까?" 로체스터 공작은 이 기가 막힌 계략에 놀랐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호오! 정말 기가 막힌 계책이군."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그럼 지금부터라도 슬슬 소문을 퍼뜨리게.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야. 크루마 쪽에서 이 쪽의 속셈을 눈치 챈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뿐더러 더 이상 그런 잔꾀를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게. 크루마 는 똑같은 수단에 두 번 속을 만큼 만만한 놈들이 아니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이때 밖에서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앙 통신실에서 전하께 전할 급한 통신문이 있다고 하옵니다." "들라고 하라." "옛 전하." 곧이어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 노마법사가 들어와서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로체스터 공작 전하를 뵈옵니다." 노마법사는 지체하지 않고 그가 가지고 온 서류를 건넨 후 말했다. "일단 현 지점에 대기하라고 일러 놨사옵니다. 용병기사단의 항후 행동에 대한 조치를 조속히 내려 주시옵소서." "알았네, 물러나게." "옛, 전하." 노마법사가 물러간 후 로체스터 공작은 서류를 쭉 훑어봤다. 그런 다음 그것을 레티안에게 건네며 말했다. "기사단까지 괴멸시키는 것을 보면 몬스터들의 세력이 아주 대단한 모양 이야." 서류에 써진 내용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기에 레티안은 모든 것을 빠른 속도로 훑어본 후 담담하게 물었다. "용병 대장이 건의한 대로 타이탄의 잔해를 추격하라고 이를까요?" 로체스터 공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네. 아마도 그는 벌써 잔해를 따라 이동하고 있을 거야.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말이지." "만약 그가 독단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면 내부에서 충돌이 일어날 것이 옵니다. 용병들은 그의 말을 따른다고 해도 마법사들은 그의 부하가 아 니니까요." "훗훗훗, 누가 감히 그에게 반항하겠나? 반항하다가 몇 대 맞고는 지시에 응할 테지. 그건 그렇고 까미유와 로젠은 어떻게 되었지? 아마도 며칠 내로 그 녀석들을 써먹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예 퇴원하는 즉시 근위대 기동연습장으로 가라고 지시해뒀사옵니다." "좋아 그들에게 지급할 타이탄은 기동연습장에 도착했나?" "예, 전하. 분명히 4기의 적기사I이 도착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레티안은 이렇게 말한 후 로체스터 공작을 슬쩍 살펴봤다. 그녀는 분명히 4기의 적기사I을 생산하여 그곳으로 보내라던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보내지고 있는 초특급에 랭크되어 있는 기사는 다섯 명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혹시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숫자까지 말하며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슬쩍 고개만 끄덕임으로써 그녀의 보고가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다고 로체스터 공작이 말해 주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왜 4기만을 보내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그 부분을 슬쩍 넘긴 후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생산창에 가서 받아 가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기동연습장까지 가 라고 하셨습니까?" "어차피 그 녀석들은 기동연습장으로 가서 여태껏 빈둥댔던 것에 대한 대 가를 치러야지. 오랫동안 검술 연습도 안 했을 텐데, 곧바로 타이탄을 준 후 전장으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지만 레티안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제임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경은 당장 근위대 기동연습장으로 가게. 원래는 그 말썽꾸러기들의 훈련 을 용병대장에게 맡길 계획이었는데 그는 임무를 맡아 지금 없잖아. 그 렇다고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 내가 직접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 이야. 아무래도 자네 정도는 되어야 그놈들의 상대가 되지 않겠나?" 제임스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거기에 도착하면 4기의 적기사I이 도착해 있을 거야. 그것을 까미유를 제외한 전원에게 분배해 주도록 하게." "예? 그렇다면 까미유는....." 로체스터 공작은 일부로 제임스의 말을 끊으며 확정적으로 말했다. "경은 그렇게만 하면 돼. 그럼 이만 가보게나." 제임스 역시 레티안과 같은 의문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까미유의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대답해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옛 전하." 레티안은 제임스가 떠나고 난 후 자신이 가지고 왔던 서류를 공작에게 건넸다. 레티안은 이것을 제임스에게까지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아직까지 보고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크라레스 쪽에서 보낸 최신 정보이옵니다." "벼룩이 보낸 것인가?" "예, 전하." 로체스터는 서류를 읽어보다가 문득 말했다. "왜 크라레스는 치레아 공국에 몬스터가 침입할 것을 방관하고 있는 거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상부로부터 지시가 있었다고 하옵니다. 치레아 공국의 파괴를 막기 위해 서 그곳에서의 접전은 칙명으로써 불허한다는 것이지요." 레티안의 설명이 도움이 되지 않은 듯,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야. 아무리 치레아 공국이 독립국가고 또 치레아 공국이 자리를 비운 상태라고 하지만 그곳은 크라레스 제국의 속국이 아닌가? 그녀가 없으니 그 공백을 크라레스의 황제가 책임져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몬스터들과 모종의 협약을 맺은 것 같사옵니다.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 않사옵니까?" 레티안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모종의 협약이라고?" "예 사실 치레아에서 몬스터들을 상대로 대규모 접전을 벌인다면 그곳은 폐허가 될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러니 크라레스는 치레아를 몬스터에게 그냥 넘겨주는 대가로 그곳을 파괴하든지 말라든지 뭐 그런 밀약을 맺 지 않을까요?" "쯧쯧, 레티안 경은 간혹 한번씩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예?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전하." "경은 쉬운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해서 본질적인 문제를 놓칠 때가 있어. 이것은 인간들끼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무식하기 짝이 없는 몬스터와의 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해. 그렇다면 한번 말해보게. 크라레스가 왜 그놈들과 밀약을 맺어야 하지?" "방금 전에 말씀드렸지 않사옵니까? 치레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로체스터 공작은 딱하다는 듯 혓바닥을 차면서 말했다. "쯧쯧, 그게 아니지. 몬스터들이 인간들과 맺은 그딴 협약을 제대로 이행 할지도 의문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거야. 크라레스 황제의 입장에서 는 치레아가 몬스터들에게 짓밟히는 것이 훨씬 유리해. 치레아 대공은 없어졌지만, 그녀의 영지인 치레아가 몬스터 따위에게 뭉개졌다는 소문 이 퍼졌을 때 과연 그녀를 돌봐 주는 드래곤이 가만히 있을까?" 레티안은 그제야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을 보며 로체스터는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 크라레스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몬스터들이야. 그 때문에 전번에 뚱뚱한 사신으로 와서 구원을 청한다고 주절거리지 않았었나? 하지만 치레아가 짓밟힌다면 그 모든 것을 드래곤이 한꺼번에 해결해 줄 거야. 자기 아들의 영토에 침입한 몬스터들을 드래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 지. 그 저주받을 생명체에게는 그 정도는 아주 손쉬운 일이니까 말이야. 그것을 보면 뭔가 있는 것이 분명해. 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과연 그렇사옵니다. 전하. 즉시 크라레스에 대한 첩보 활동을 더욱 강화 하라고 이르겠사옵니다." "나도 설마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몬스터의 배후에 크라레스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군. 하지만 과연 그들이 무슨 재주를 부려서 그 포악하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몬스터들을 포섭했을까?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墨 리치가 된 마왕 香 "우와아아! 드디어 퇴원이군요." 신이 난 듯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까미유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로젠이 투덜거렸다. "야, 제발 호들갑 좀 떨지 마라, 제 2근위대 대장이자, 후작의 작위를 가 지고 있는 녀석이 원.... 체통을 생각해야지. 낯 뜨거워서 함께 다니겠나?" "그러는 형은 기분 좋지 않수? 나는 마치 감옥에서 풀려난 기분인데...." 헤벌쭉 미소를 지어대는 까미유를 바라보며 로젠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야야, 안 그래도 내가 감옥에서 풀려난 해방감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데 옆에서 계속 밀래? 오스카 너, 퇴원 기념으로 오늘 나한테 죽도록 맞고 싶냐?" 까미유는 뜬금없이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보며 걸어 오자 오스카는 황급히 변명했다. "제가 아니라 옆에서 스칼이 미는 거라니까요." 하며 슬쩍 앉은 스칼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자 스칼이 펄쩍 뚸며 변명했다. "옆에서 각하께서 앉아 계신대 어떻게 제가 감히 오스카를 밀 수가 있겠 습니까? 마차가 비좁은 거라니까요.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어떻 게 마차 한 대에 다섯 명이나 타고 갈 수 있단 말입니까?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와 크로데인 후작 각하께서 퇴원하시는데 겨우 마차 한 대만 보낸 놈들이 죽일 놈들이죠. 그러니까 나중에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 이 따위로 마차를 배정한 수송부 장교놈을 작살 내버리죠." "으음, 물론 그것도 생각해 두고 있었어. 하지만 두들겨 패버리고 실은 수 송부 장교놈은 여기에 없는데 어떻게 할까? 참, 이건 어때? '필요는 창조 의 어머니' 라는 말이 있지 않아?" 능글능글 미소짓는 까미유의 속마음을 모르겠다는 듯, 두 부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데요?" "너희 두 놈이 옆에 찌그러져 있으면 내 공간이 조금 더 확보되지 않을까?" 능청스레 말하는 까미유를 향해 오스카와 스칼이 기가 차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원, 농담도." "농담?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으로 보이나? 죽고 싶냐?" 오스카와 스칼은 까미유의 시퍼런 눈동자에 질러서 옆으로 '사사삭' 이동하여 최대한 붙어 앉았다. 사실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는 세 사람이 충분히 앉아서 갈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처음에 탑승할 때 발렌시아드 패거리와 함께 자리할 수 없다고 농담을 흘리며 앞은 발렌시아드 기사단 둘, 뒷좌석은 근위대 패거리 셋이 앉았던 것이다. 그런데 한참 가다가 자리가 좁다고 몰아붙이는 데야 할말이 없는 것이다. 까미유가 뒷좌석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앉아서 히히덕거리고 있는 꼴을 보며 로젠이 말했다. "이봐, 메글리 경." "옛, 대공 전하." "저놈하고 자리 바꿔 줘. 저래서야 오스카하고 스칼이 너무 불쌍하잖아." 까미유는 로젠의 말에 얼른 반박을 하며 나섰다. 사실은 두 부하들에게 시비 건 것이 순전히 재미를 위해서 그런 거지, 자리가 비좁아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글리는 좋은지 몰라도 저는 싫다고요. 여기가 얼마나 편한데....." "괜히 죄 없는 부하들 들볶지 말고 이리로 와. 여태까지 쌓여 있던 스트 레스를 그런 식으로 엉뚱한 데 화풀이하면 로체스터 전하께 보고한다." 로체스터 공작을 들고 나오자 까미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막 나가는 그라 해도 로체스터 공작은 상대하기 좀 껄끄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예? 제가 언제 싫다고 했습니까? 헤헤. 이봐, 메글리 경. 저쪽으로 가주 게.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께서는 내가 옆으로 오기를 원하시니 말일세." "그러죠. 각하." 자리를 바꿔 앉은 후 까미유는 점짓 시치미를 떼고는 점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 '대' 발렌시아드 공국을 다스리시는 대공 전하의 지위가 밑바닥으 로 떨어진 모양이죠? 저를 직접 처리하지 못하시고 로체스터 전하의 이 름까지 파시는 걸 보면...." 까미유는 일부러 "대"에다가 힘을 주어 말했다. 키에리 대공과 로젠 대공을 비교하여 비꼬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로젠의 눈초리가 실쭉 가늘어지며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주먹에서 '우드드득' 소리가 났다. 발렌시아드 공국은 순전히 키에리의 실력에 의해 손에 넣은 광대한 영지였다 거기에다가 발렌시아드 기사단까지 황제로부터 받았다. 그 정도면 왠만한 국왕에 못지않은 지위였던 것이다, 까미유는 아무 생각 없이 단순히 농담으로 한 것이었지만, 로젠은 갑자기 그 엄청난 국가를 이어받았다는 것에 대해 심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건 발렌시아드 기사단까지 전멸 당했으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가 느끼고 있던 자괴감(自愧感)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까미유가 무의식중에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슬쩍 찌르자 로젠은 평상시와 달리 매우 분명하게 분노를 표출했다. 평상시에 온화했던 그가 평상심을 잃자, 마차 안의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로젠은 마스터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키에리로부터 직접 사사받은 매우 실력 있는 검객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까미유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가는 건지 알아요, 형?" 로젠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허탈감을 억지로 참으며 까미유에게 대답했다 그렇기에 그의 말투는 매우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가는 방향을 보니 근위대 기동연습장일 가능성이 커 수도가 아니라 코린 티아 시 쪽으러 가고 있잖나." "기동연습장이요? 우리들은 모두 타이탄도 없는데 거기 가서 뭐하려구요?" "글쎄, 그건 가 보면 알겠지." 그 말을 끝으로 로젠은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려 버렸다. 근위대의 기동연습장은 지금은 사라져 버린 코린티아 시 외곽에 있었다. 물론 그때는 근위대를 위해서 가까운 수도 외곽에 훈련장을 마련해 놓은 것이었지만. 코린티아 시가 먼지로 화해 버리고 케락스로 수도를 옮긴 후에는 얘기가 조금 달라졌다 근위대의 기동연습장에서 훈련하게 되는 타이탄은 모두 다 근위 타이탄 즉 코린트가 보유하고 있는 최신형 타이탄이 된다. 그렇기에 첩자들의 이목을 차단하기 위한 각종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야 했고, 그런만큼 그 면적도 엄청나게 넓었다. 또 그것은 타이탄이 움직일 충분한 공간 확보라는 것외에도 첩자가 육안으로 관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근위대 기동연습장은 그 면적이 엄청나게 넓었고, 그런 것을 또다시 케락스 시 옆에 하나 더 만든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사라져 버린 코린티아 시 쪽으로 방향을 잡고 3일간의 마차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드넓은 코린토비아 평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 그들은 마차의 오른쪽 창문을 통해 선홍빛 해가 검붉은 대지 아래로 잠겨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사방이 모두 빗빛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자연이 하루에 한 번씩 만들어내는 장관이었다. 그 황홀한 장관을 바라보던 까미유의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형! 혹시 느꼈수?" "뭘?" "사악한 뭔가가 저 앞쪽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까미유가 가리킨 방향은 마차가 지금 나가고 있는 그 방향이었다. 즉, 남쪽이라는 말이다. "글세...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런가? 너무 희미한 느낌이라서, 내가 잘못 느낀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까미유는 자신의 느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을 알아채지 못한 로젠에게 설명할 방법이 막막했기에 그냥 얼렁뚱땅 넘겨 버렸다. 또, 로젠이 뭣 때문인지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인데 로젠보다 자신의 실력이 높은 것 같은 티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해는 저버렸고 마차는 어두운 밤길을 희미한 등잔불에 의지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겨울이라서 낮이 짧았기에 어쩔 수 없이 강행군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 시간 정도 더 달린 후 그들은 여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까미유는 늦도록 잠들 수 없었다. 점점 더 밤이 깊어 갈수록 남쪽에서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은 더욱 또렷하게 느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까미유는 창문을 열고는 은은하게 마기가 뿜어져 나오는 남쪽의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내뱉듯 말했다. "저 남쪽에 뭐가 있는 거지?" 까미유는 그것이 매우 궁금했다. 자신이 병실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 세월은 흐르고 흘러 또 다른 사건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까미유에게 시간이 있었다면 그는 곧장 궁금중을 해결하기 위해 혼자 혹은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갔을 것이다. 그에게 주어져 있는 제2근위대의 대장이란 직책은 그만큼 자유스러웠던 것이다. 일단 사건을 저지른 후에 보고를 올려도 될 정도의 막강한 권한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제2근위대가 이렇듯 전폭적인 권한을 쥐게 된 것은 지금의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나 있는 키에리 발렌시아드 대공의 배려였다. 그는 제2근위대에 단독 행동을 할 수 있을 만한 막강한 권한과 함께 충분한 힘 또한 줬다. 적기사 다섯 대와 거의 마스터급에 근접하는 최고급의 검객들만 배치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제2근위대가 그토록 엄청난 권한과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첫 번째 대장으로 임명되었던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의 인품을 모두가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대방으로 임명된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 또한 약간 엉뚱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이어받기에 손색이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아무리 단독 행동을 할 수 있는 전폭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까미유는 밤하늘의 저편에 은근히 퍼져 있는 사악한 기운을 보며 궁금증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지금 권한만 이을뿐 힘이 없었다. 전번 전투에서 모든 타이탄을 상실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지금 수행해야만 하는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가 있었다. ‘왜 기동연습장으로 가라는 것일까??‘ 까미유는 창문을 닫고는 천천히 걸어가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어쨌든 이틀 후면 로체스터 공작의 계획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크라레스 황성 지하 깊숙이 마련되어 있는 마왕의 안식처. 예전에는 국가반역죄 같은 것을 저지른 중죄인들만이 수감되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마왕의 안식처로서 새롭게 변모해 있었다. 죄수들은 수감하던 감방(監房)들과 그들의 탈출을 막던 수많은 구조물들은 어느새 철거되어 없었고, 드넓은 광장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광장의 바닥에는 수많은 마법진들이 설치되어 어둠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거대한 마법진의 수는 총 여섯 개로, 자그마한 한 개의 마법진을 사이에 두고 네 개의 마법진이 둘러싸듯 존재하고 있고, 그 밑에 또 다른 마법진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왕은 제일 밑에 따로 떨어져 있는 마법진 위에 서 있었다. 마왕은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 짜내고 있는 듯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흉악한 모습을 하고는 마법진을 발동시키고 있는 중이다.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있는 마왕의 주변으로 엄청난 사악한 기운이 모여들고 있다. 그가 모아들인 사악한 기운은 주위에 모여 있는 네 개의 증폭 마법진을 거쳐 중앙의 마법진으로 집약된다. 크라레스의 황성인 크라레인 시의 외곽을 방어하게 되어 있는 방어 마법진의 모든 힘이 이곳 증폭 마법진으로 흘러들고 있기에 마왕의 힘은 수십 배로 증폭되어 세찬 마나의 폭풍을 만들고 있다. 토지에르라는 나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을 그 매개체로 삼고 있는 한 그가 뿐어낼 수 있는 마력(魔力)에는 한계가 있기에 이런 거추장스러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마왕의 모든 힘이 집중되는 그 순간, 내밀고 있던 마왕의 손이 마나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난 폭주가 시작되려 했다. 그것을 보고 마왕의 뒤에 서 있던 몇몇 하급 악마들이 뛰어들어 그 것을 막고자 했으나 이미 중앙의 한 지점에 뭉쳐진 마나의 양은 그들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고 있었다. "피하시옵소서" "이제 금방이다. 네놈들은 마나가 폭주하지 못하게만 막아!" 마왕이 여태껏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 다섯의 하급 악마들은 사력을 다해 마왕을 도왔다. 그리고 토지에르는 비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흉측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어둠의 마왕, 마계에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최고의 다섯 마왕 가운데 하나였다. 여흥으로 즐기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과도한 수고와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악조건을 뛰어넘어 목적을 달성하면 고 쾌감은 더욱 진할 것이 분명했다. 초인적인 노력으로 토지에르라 불리었던 늙은 육신의 모든 힘을 다 쥐어짜는 그 순간 암흑의 기운이 한 군데로 모이며 엄청난 회오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순간 그 회오리는 흩어져 버렸고, 그 속에는 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악마가 검은 날개로 몸을 감싼 채 송곳니를 드러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성공했는가?" 악마는 천천히 다가와서는 토지에르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음침하면서도 사악한 어조였다. "지고하신 어둠의 마왕께서 이계 정복에 다시금 소인과 같은 미천한 종을 불러주셔서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마왕은 이미 탈진해 버렸는지 그 ‘미천한 종‘에게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는 정말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록 극심한 중노동을 한 것이다. 폭주하는 것을 바로잡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엄청난 폭발에 휘말려 마계로 강제 소환당할 뻔한 것이다. 물론 그가 힘들여 여기까지 끌고 온 하급 악마들과 함께 말이다. 악마는 마왕의 상태를 지그시 바라본 후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마왕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나를 뿜어 넣었다. 그 역시도 하급 악마이기는 했지만,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다른 놈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했고, 어느 정도 고위급 흑마법도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마왕은 정신이 드는 지 고개를 들어 악마를 천천히 올려다보며 투덜거렸다. "발록 따위를 소환하는 데도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발록은 여전히 음침한 어조로 말했다. "주인님 예전에는 드래곤의 육신을 빼앗아서 사용하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런데 왜 이번엔 이렇게 허약한 인간의 몸을...." "멍청한 것! 전에는 그것 때문에 드래곤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실패하지 않 았더냐?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하라는 말이냐?"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힘드실 것이옵니다. 주인님 그 늙은 육신과 허 물어져 가는 뼈대 그리고 물렁한 뇌에서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은 보잘 것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으나....." "이렇게 하면 어떠하올는지요 그 늙은 육신으로도 몇 배의 힘을 끌어낼 방도가 있사옵니다. 생사를 뛰어넘어 정신만이 남게 하는 것이옵니다. 원래가 정신은 주인님의 것 육신의 장벽을 뛰어넘는다면 어떻겠사옵니까?"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마왕이 외쳤다. "리치(LICH), 리치가 되라는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주인님" "그래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군 크하하하하핫!" 리치라는 것은 매우 우수한 실력을 지닌 고위급의 흑마법사가 마법의 힘으로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보석같은 어떤 유형의 물체 안에다가 가둬 버리면서 탄생하게 되는 속된 말로 ‘걸어다니는 시체‘였다. 물론 일반적인 언데드(UNDEAD)들과는 달리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리치는 이미 자신의 모든 생명의 근원을 어떤 물체에 가둬버린 후렸기에 나이를 먹지 않을 뿐더러 죽지도 않는다 또 왠만한 상처 따위로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없다. 리치를 죽이는 방법은 본체를 완전히 박살내 버리든지, 아니면 그가 생명력을 저장해 놓은 물체를 파괴하는 것뿐이었다. 대부분의 언데드들 중에서도 리치는 매우 특이한 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좀비(ZOMBIE) 같은 대부분의 언데드 몬스터들의 경우 그들이 무덤에서 살아나오는 것은 타의적인 것이다. 하지만 리치는 자신이 자신을 불사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영생을 얻는다는 매우 훌륭한 이점이 있음에도 대부분이 흑마법사들이 리치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일단 그 외모에 있다.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리치가 되면 거의 말라비틀어진 살점이 붙어 있는 뼈다귀뿐인 시체의 형상으로 바뀌게 된다. 마법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을 뿐 그 육체는 이미 사멸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치가 되는 것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눈에 띄는 그놈의 외모 덕분에 꼼짝을 하기 힘들다 리치가 되는 그 순간 ‘나는 아주 사악한 흑마법사니까 누구든지 나를 죽인다면 영웅이 될 걸?‘ 하고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모든 생명을 담아 놓은 물체의 보관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누군가가 슬며시 숨어 들어와서 그것을 파괴한다면 그의 목숨은 바로 그 순간 끝장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리치가 된 그 순간부터 그는 누구도 찾기 힘든 산간벽지에 숨어 살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어쨓든, 흑마법사드이 리치가 된다는 것은 얻는 것도 많지만, 잃는 것은 더욱 많다. 그래서 흑마법사들은 영생이 탐나기는 하지만 절대로 리치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마왕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욱 많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마왕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하잘것없는 육신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특히나 그 육체는 자신의 것이 아니니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순전히 마왕 마음이었던 것이다. 墨 라나의 결심 香 로체스터 공작의 밀명으로 그 부하들이 치레아 대공을 처형했다는 소문을 은밀하게 퍼뜨리고 있는 그 무렵, 코린트의 황궁 한 구석에서는 언제나처럼 긴 금발을 단정하게 뒤로 묶은 후 이마까지 로브를 깊숙하게 뒤집어 쓴 정식 무녀의 복장을 하고 있는 무녀가 한 가지 일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저질러댄 철없는 짓거리 때문에 자신을 원수 보듯 미워하는 저 소녀, 그 소녀와 어떻게 화해를 할 것인지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무녀는 자신이 근처에 서 있는 데도 불구하고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달려서 지나가는 다크를 보고는 잠시 망설였다. 오늘은 '감시자' 격인 제임스와 함께 온 것이 아니었기에 소녀와 얘기라도 나눌 작정이었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한 듯 다크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육체에는 신성마법에 의한 근력강화를 시킨 덕분에 쉽게 다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무녀는 다크와 나란히 달려가며 생긋이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변함없이 건강하시군요, 아저씨." 숨이 턱에 찬 듯 헐레벌떡거리며 다크는 옆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꼴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헉헉! 미친 소리 하고 있네." 하지만 무녀는 그 정도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푸대접은 그 동안 수없이 당해 봤기에 별로 새로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저씨가 나를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나도 이해할 수 있어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는 지 잘 알거든요 하지만 계속 이렇게 지낼 필요가 있을까요? 세월이 많 이 흘렀으니 저를 용서해 주실수는 없을까요?" "헉헉헉, 절대로, 헉헉, 절대로 용서 못해!" "어떻게 하면 저를 용서해 주실 수 있겠어요?" 무녀는 신성마법의 덕택인지 오랜 시간을 달렸어도 호흡이 하나도 가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따라서 달려가며 이런저런 말로 다크를 설득했다. 그런 모든 말이 다크에게는 헛소리로만 들렸기에 그녀는 거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뭔가 매혹적인 제안이 들려왔다. 다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헉헉, 뭐라고?" "제가 아저씨가 탈출하는 것을 도와드리면 저를 용서해 주실 거냐구요?" 다크는 더 이상 달릴 기분이 아닌 듯 속도를 줄였다. 그런 다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진담이냐?" "예, 아저씨가 왜 여기에 잡혀 오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예전 의 아저씨의 성품이라면 절대 나쁜 일을 하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 아요, 그러니 제가 힘이 된다면 도와드리겠다는 것이지요." "흐음, 어려울 텐데?"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거예요." "어째서?" "아저씨가 여기서 도망칠 힘이 없다는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거든요." "그거야....." "그러니까 제가 도와드린다면 쉬울 거라는 거죠, 아무도 아저씨가 누군가 딴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으 니까요." 자신 있는 라나에 비해서 다크의 반응은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글세, 너 따위가 도와준다고 뭔가 바뀔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데?" "한번 믿어 보시라니까요." "언제, 어떻게 할 건데?" "오늘 저녁에 탈출하도록 하죠. 저도 준비할 것이 있구요. 저녁식사를 단 단히 한 후 준비하고 기다리세요. 해가 질 때쯤에 올게요, 참! 뭐 필요하 신 것은 없으신가요?" "한 이 정도 길이의 짤막한 검, 그 뭐라더라... 그렇지 샤벨(Sabre)을 구해 다 줘. 아주 얇고 가벼울수록 좋아. 그리고 혹시 시간이 난다면 검의 손 잡이를 이런 식으로 바꿔 줘, 대장간에 가서 말하면 될 거야." 다크는 손짓으로 검의 크기를 말한 후, 자신이 좋아하는 손잡이의 방식을 땅바닥에 슬쩍 그리면서 설명한 후 곧장 그 흔적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전에 마나를 흡수하면서 근력을 높여주는 장갑을 써본 적이 있는 데 그걸 내가 쓸 수 있을까?" "글쎄요 저는 마법 쪽은 잘 몰라서 확실한 대답을 해드릴 수는 없네요, 혹 시 몸 속에 있는 마나는 느껴지세요?" "당연히 느껴지지. 하지만 그걸 사용할 수가 없을 뿐이야. 아마도 이 녀석 들이 막고 있는 모양이야." 다크는 자신이 양쪽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라나는 살며시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아마 써도 별 상관은 없을 거에요, 원래 마법도구들은 그 사용자의 마나 를 강제적으로 흡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렇기 에 마법도구를 이용해서 능력 이상의 마법을 구사하면 목숨을 잃는 경 우도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저씨의 몸 속에 마나가 있기만 하면 아 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 되겠죠." "그래? 그렇다면 힘을 배가시켜 주는 그런 마법도구를 하나 구해줄 수 없을까?" 그말에 라나는 약간 미안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드릴 수가 없어요, 저는 신을 받드는 사제거든요 마법도구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돈이 많지 않아요" 다크는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자신의 목걸이와 귀걸이를 풀었다. 물론 이것들은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화이어해머를 족쳐 만들어 준 것으로 대단히 값진 세공품들이었다. 그녀는 사로잡힌 채 크루마를 거쳐 코린트로 왔지만. 신분이 신분인만큼 그녀가 가지고 있건 물건은 검 외에는 압수당하지 않았기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팔면 안 될까?" "예? 그건 매우 소중한 것 같은데, 팔아도 괜찮겠어요?" "물론이지" 라나는 다크가 내미는 것을 자세히 살펴봤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무녀로 성장했기에 보석이나 장신구 따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다크가 내미는 이 물건들이 얼마나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사실, 그녀가 내미는 목걸이나 귀걸이에 붙어 있는 보석들은 아주 작았고, 전체적으로 어린 소녀에게 어울리도록 아주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보통 금은 세공품들의 경우 붙어 있는 보석들의 덩치가 클수록 비싼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니까 라나는 이것으로 그 비싼 마법도구를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부탁은 받았으니까 성심껏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보석이나 뭐 그런 것에 대한 가치는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걸 팔아서 마법도구를 살 수 있을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기 는 코린트의 수도니까 금은방들도 많거든요, 그러니까 아마도 괜찮은 가 격에 팔 수 있을 겁니다." "좋아 그리고 이 정도 길이의 짧은 단도(Dagger)도 몇 개 부탁해 아주 가 벼운 것일수록 좋아" "예, 한번 구해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탈출할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듣지 못한 것 같은데?" "그건 나중에 자연히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나중에 올게요." 라나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떠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다크는 라나의 갑작스런 탈출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열심히 궁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원래 그런 쓸데없는 곳으로의 시간낭비는 되도록 사양하는 이 행동파는 머리 쓰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운동의 열기로 넘쳐있던 그녀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나중에 알 수 있겠지. 설마 신을 받든다는 무녀가 거짓말을 하겠어? 샤 워나 해야겠군." 墨 크라레스 군부의 반발 香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였지만 가장 윗자리에 앉아 있던 노장군은 매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그 회의석상에 앉아 있던 모든 장군들의 이목이 문 쪽으로 쏠렸다, 그때 문 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도 방위 사령부 예하부대로부터 긴급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가져오게." "옛!" 곧이어 두터운 회의실 문이 열리고, 젊은 장교 한 명이 날랜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회의실 안에 거의 이십여 명이나 되는 장군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긴장한 듯했지만, 그런 표시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재빨리 오른손 주먹을 꽉 쥔 채 왼쪽 가슴에 절도 있게 올려붙이며 경례를 올렸다.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더 경례를 올리고는 신속히 그 방을 나갔다. 전문을 받아들고 훑어보던 노장군이 한껏 격앙된 음성으로 외쳤다. "경들 희소식이 도착했소." 노장군은 주위를 쭉 둘러본 후 말했다. "스바시에 대공 전하가 이곳으로 오고 계신다고 하오." 그러자 여태껏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실내의 분위기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장군 총사령관 전하께서 돌아오신다면 이제 케프라 공작의 독주는 끝나 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령관 전하께서는 절대로 저 빌어먹을 흑마법사들이나 구역질 나는 몬 스터 따위에 의지하지 않으길 겁니다." "우선 냄새나는 몬스터들을 황궁에서만이라도 쫓아내 버려야 합니다."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별의별 의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스바시에 대공이 중상을 당한 후, 그 다음에 벌어진 토지에르 폰 케프라 공작의 독주, 대량의 몬스터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것까지는 그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을 최전선에 투입하여 지금도 꽤나 많은 실리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크라레스 제국의 모든 실권은 토지에르가 움켜쥐고 있었다. 황실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가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곳에 모인 장군들 중의 상당수도 토지에르의 의견에 찬동하여 그와 함께 행동했었다. 하지만 반란이 성공한 후, 토지에르는 지하에 모셔둔 황제를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오르지 그만이 알현했다. 그런 다음 황제의 이름을 빌어 모든 업무를 독선적으로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 장군들의 불만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게 된 원인은 따로 있었다. 각 장군들의 말했듯이 군대가 해야 할 몫을 몬스터들이 대신함으로 인해서 그들이 설 지라가 없어져 버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자자, 모두들 참으시오, 수도 외곽에서 연락이 왔었으니 한 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전하를 뵈올 수 있을 것이오 잡시 휴식을 취했다가 전하께서 도착하시면 다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노장군은 회의석상에 앉아 있는 장군들의 얼굴을 쭉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선에 파견 나가 있는 각 기사단에도 통보를 해주는 것이 좋겠소." "예, 그건 제가 지시해 두겠습니다." 장군들이 초초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루빈스키가 도착했다. 장군들은 루빈스키가 탄 마차가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성 내로 들어서는 것을 마중했다. 그들은 저 교활하기 그지없는 토지에르와 만나기 전에 그보다 먼저 루빈스키 공작을 만나서 설득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시옵소서, 스바시에 대공 전하!" 저마다 인사를 건네는 장군들을 보며, 루빈스키는 약간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몸은 아직 완쾌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국 크라레스가 국운을 건 마지막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데 가만히 누워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경들, 오랜만이구료. 전쟁으로 바쁠 텐데 이렇게 모두들 나를 마중 나와 주어서 고맙소, 제국과 폐하께서 가장 나를 필요로 하실 때 자리를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던 점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오." 루빈스키는 장군들을 쭉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일단 모두들 모여 있는 것을 보니, 내가 따로 그대들을 소환할 필요가 없는 것 같군. 폐하를 알현한 후에 회의를 시작할 테니 모두들 그렇게 알고 준비해 두시오," "가셔서 폐하를 만나시기는 어려울 것이옵니다, 전하." "그건 무슨 말이오?" "케프라 공작 전하께서는 전세가 완전히 기운 것을 느끼시고 황실의 안전 만이라고 도모하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셨습니다." "아아, 그 일은 알고 있소, 토지에르는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병석에 있는 나에게 놀라지 말라면서 전령을 보내 주었소." "예, 그것은 케프라 공작 전하께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코린트로 부터 폐하를 인도하라는 요청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음을 저희 들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그 조치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매우 변 질되어 버렸사옵니다." "어떻게 말이오?" "케프라 공작은 폐하를 대신하여 국가의 전권을 잡고 난 후에 권력이 주 는 달콤함에 맛이 들었는지, 지금은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있 사옵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으로 봤을 때 실제로 폐하를 유폐시킨 후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노장군의 말에 루빈스키는 안색을 굳히며 꾸짖었다. "닥치시오! 토지에르는 그 이전부터 국가의 모든 중대사를 도맡아서 처리 해왔소, 그런 그가 세삼스레 권력에 탐닉(眈溺)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 지 않소?" "하지만 전하, 황제의 자리와 신하의 자리는 완전히 틀린 것이옵니다. 지 금 케프라 공작 전하께서는 완전히 황제처럼 행동하고 계시옵니다. 반란 이 성공한 후 케프라 공작을 제외한 그 누구도 황제 폐하를 뵌 사람이 없사옵니다. 어쩌면 케프라 공작은 폐하를 이미 시해해 버렸는지도....."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따위 망상 할 시간이 있으면, 국가와 폐하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그거나 생각해 보게!" 루빈스키는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서둘러서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표면적으로는 몬스터들을 앞에다가 세워 났지만, 이것도 분명히 전쟁이었다. 이번 전쟁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코린트를 끝장내 버려야 한다. 코린트라는 거대한 산맥을 넘기 위해서 모두가 일치단결을 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이 얼마나 자리를 비웠다고 벌써부터 내분의 조짐이 보이다니..... "쓸모없는 것들!" 루빈스키는 곧장 케프라 공작을 만나러 갔다. "드시라고 하십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토지에르의 모습은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는 과거와 달리 주렁주렁한 장식물이 달려 있는 해괴하게 생긴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갑옷의 투구까지 써서 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상관을 맞이하면서도 그는 투구를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스바시에 대공 전하." 루빈스키는 과거와는 달리 그의 몸에서 엄청나게 사악하기 그지없는 이상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알 수 없었고, 또 여태껏 온갖 고난을 함께해 온 토지에르였기에 루빈스키는 반가운 어조로 인사를 받았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워서 미안하게 되었네. 그래, 잘 있었는가?" "예, 그리고 이 갑옷은 몬스터들을 조종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입니 다. 그렇다 보니 오랜만에 뵙는 전하의 앞에서 계속 착용하고 있어야 함 을 이해해 주십시오." 토지에르는 루빈스키가 물어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갑옷을 입고 있는 이유는 몸을 리치로 만든 것을 숨기면서, 동시에 아직까지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분간은 이 사실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이 무사는 아직까지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으니까 마음 쓸 필요 없네. 갑옷에 서 뿜어져 나오는 그 사악한 기운도 그것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예, 원래가 몬스터라는 것이 악의 기운과 연관이 있는 것들 아니겠습니 까? 그건 그렇고 몸은 좀 어떠십니까?" "그런데로 돌아다닐 만은 하네."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렇잖아도 전하께서 안 계시다 보니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지금 전쟁은 두 곳에서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습 니다. 알카사스 방면과 아르곤 방면이지요. 아직까지는 코린트를 향해서 이빨을 드러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선택이야." "코린트에서 몬스터의 뒤에 본국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는 것은 시간문제 일 것입니다. 코린트가 그것을 눈치 채고 본국을 타도하기 위한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아르곤이나, 알카사스 둘 중 하나는 끝장내야만 합니다. 전하께서 그것을 좀 맡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좋아, 최선을 다하겠네. 그건 그렇고, 전선으로 떠나기 전에 폐하를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네. 모두들 폐하를 뵙고 싶다면 자네를 통해야만 한다 고 하더군. 주선을 해주겠나?" 속으로 뜨끔했지만, 토지에르는 내색하지 않고 여태껏 생각해 뒀던 대답을 호기롭게 떠들어댔다. "물론입니다. 폐하께서는 전하를 뵙기를 학수고대 하시며 기다리셨으니까 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이곳 황궁이 아닌 다른 안전한 장소에 피신해 계 시다 보니 지금 당장 뵙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루빈스키 전하께서는 크 라레스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 따라서 수도 주변에 각국에서 보낸 숨 겨진 눈들이 전하를 예의 주시하고 있음은 당연할 것이고, 자칫 들킬 염 려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전선의 상태는 1분 1초를 지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언제 코린트가 간섭해 올지 알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폐하 를 뵙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단 전선이 안 정되고 난 후에 돌아오셔서 폐하와 느긋하게 포도주라도 한잔 나누면서 오랜 시간 대활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루빈스키는 방금 전에 장군들로부터 들은 말이 있었기에 약간 미심쩍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토지에르의 말 또한 일리가 있었기에 뒤로 물러섰다. "으음,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다음에 폐하를 뵐 때, 아르곤 교 황의 목이나 알카사스 국왕의 목을 선물로 가져와야겠군."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보세나." 루빈스키가 문을 나서고 난 후 어디선가 껄끄러운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그를 죽여 뒤탈을 없애는 것이 좋지 않았겠사옵니까?" "아직은 쓸모가 있어. 만약 눈치 챈다면 사로잡아서 꼭두각시로 만들면 돼. 이 늙은 육신을 버리고, 저 녀석의 육체를 쓰면 되지 않겠나? 아주 단련 이 잘된 육체였어. 드래곤에는 비길 수 없겠지만, 인간들 중에서는 내가 본 것 중에는 최고로군. 크카카카카." 토지에르의 목소리는 변해 있었다. 리치와 같은 미이라와 같이 몸이 바짝 말라 버린 언데드(UNDEAD)가 되어 버린 이상 그의 목소리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루빈스키가 방문했을 때는 자신의 정체를 숨겨기 위해서 마법을 통해서 음성변조(音聲變造)를 해야 했지만, 이제 그가 떠난 마당에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墨 탈출하는 다크 香 라나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은 신녀가 내린 교령을 받들어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이 세상을 구해낼 영웅을 찾아내어 그가 하는 일을 도와 주라는 것, 그러면서 신녀는 코린트의 수도 케락스 시로 가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랜 시간 황궁 한 귀퉁이에서 하릴없이 지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해 회의감이 들고 있었다. 코린트는 예로부터 엄청난 군사대국이었다. 또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다. 코린트의 군대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있었고, 또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각 종단의 무수한 신관들이 고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종단들 중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떨치는 것은 아레스를 모시는 자들이었다. 아레스는 전쟁의 신으로서 코린트의 호전적인 기호와 잘 맞았기에, 그 신관들이 상당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라나는 이미 코린트의 최고사령관인 로체스터 공작까지 만나서 신탁을 전했다. 하지만 그 후 뭐가 바뀌었는가? 그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코린트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 결정하는 것에 관여할 아무런 힘도 능력도 직책도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코린트의 군부는 라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그녀가 가지고 온 신탁을 정적(政敵)타도에 이용했으며, 또 그런 사실이 외부에 새나가지 않도록 슬그머니 라나를 감시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모든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라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 온 뛰어난 무녀였던 그녀였기에, 코린트의 그러한 처사는 어떻게 보면 배신행위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고 있었다. 또, 현명한 그녀는 코린트의 수뇌부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지까지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바로 권력에 대한 탐욕이었다. 한 사람이나 혹은 한 국가가 오랜 세월 최강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려면, 수많은 다른 사람이나 국가가 그 자리에 올라서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라나는 제임스의 설명을 통해 로체스터 공작이 개인의 권력에 집착하는 인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충신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은 코린트의 신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조국 코린트가 초강대국의 위치를 유지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만약, 악의 세력이 번성하더라도 코린트에 득이 된다면 기꺼이 그들의 행동을 방관할 것이 분명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제임스와의 잦은 만남을 통해서 다크라는 소녀가 대단히 뛰어난 인물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녀는 제임스가 매우 조심스럽게 대할 정도로 신분 또한 높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라나는 이곳에서 무작정 허송세월을 하는 것보다는 그녀의 탈출을 도와줌으로써, 새롭게 일을 시작해 보려고 하고 있었다. 과연 라나의 짐작대로 그녀가 대단한 인물이라면 탈출을 도와준 자신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녀의 도움은 앞으로 어둠의 세력과 싸우는 데 큰 힘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낮에 보석상점에 가서 확인된 것이 아닌가? 목걸이는 고사하고 그 조그마한 귀걸이 한 쌍만 팔아도 다크가 원하던 모든 것을 구입하고도 돈이 남을 정도로 그녀가 건네준 장신구는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건넨 귀걸이 한 쌍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금은방의 주인들... 라나는 열 곳이 넘는 금은방들을 돌아다니며 그 중에서 가장 후하게 가격을 불렀던 곳에서 귀걸이를 팔았다. 한 쌍으로 제작되어 있음이 분명했던 목걸이까지 함께 넘기면 더욱 높은 가격을 지불하겠다는 금은방 주인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은 귀걸이만 팔아도 충분했었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드워프가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을 총동원하여 만든 최고의 걸작품들을 싸구려 모조품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지니고 있다가 현금으로 바꿔 오라고 턱 내줄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귀걸이 한 쌍만 해도 800골드나 하는 물건을 말이다. 그것도 목걸이와 함께 판다면 1000골드를 주겠다니.... 보통 용병들이 목숨걸고 싸운 다음 얻는 한달 수입이 10골드 정도임을 생각한다면 정말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보면 다크라는 저 소녀가 옛날에 만났을 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저 소녀가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을까? 장사를 했다 하더라고 겨우 10년 만에 이 정도로 엄청난 부자가 될 수는 절대로 없었다. 또 그때 봤을 때도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검객이었는데 무슨 수완이 있어서 장사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뭔가 권력이라든지 뭐 그런 것과 모종의 연관을 맺고 있지 않을까? 권력만 있다면 돈은 함께 굴러오는 것이니까 말이다. 만약 그녀에게 권력이 있다면 라나에게 엄청난 힘이 되어줄 것이다. "여신님이시여,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옵니까?" 라나는 나직한 어조로 여신의 뜻을 물었다. 물론 여신님이 자신과 같이 비천한 종에게 직접 대답을 내려 주실 것으로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고 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그 어떤 대답도 없었다. 그녀는 그냥 답답한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떠든 것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라나는 한참을 더 서성이면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다크라는 소녀를 도와주는 것이 순수하게 옛날의 빚을 갚는 의미였다면 이렇게까지 갈등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나는 너무나도 머리 회전이 빨랐기에 자의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속마음에는 그녀를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쩍 들었고, 그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그런 하잖은 잔꾀는 많이 쓰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무녀가 아닌가? 신의 뜻을 대변하는..... "그래, 나중에 도와달라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아무 문제없을 거야, 아마 여신께서도 내가 이렇게 못된 생각을 품었던 것을 용서해 주시겠지."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한 라나는 총총히 다크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자신의 제자는 케락스에 있는 신전에 맡겨 두었고, 제임스가 마련해 준 숙소에 남아 있는 짐이라고 해봐야 별로 소중한 것도 없었다. 또 감시자의 눈이 번뜩이는 이때 과감하게 짐을 챙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다크의 탈출을 돕는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였다. 여기 저기에서 몬스터들이 날뛴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가 자리를 비운 것이다. 어제 제임스가 어딘가로 떠난다면서 다크의 병간호를 부탁한다고 인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다크의 감시를 총책임지고 있는 제1근위대 대장인 그가 떠났다면, 탈출이 한결 쉬워질 것은 분명했다. 천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라나는 다크의 숙소에 도착했다. 여태껏 그녀가 여러 번 이곳에 왔었기 때문이었는지 그녀를 제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크는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시큰둥한 어조로 물었다. 아직까지 라나의 진심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준비는 끝났어?" "예" 라나는 살짝 다크와의 거리를 좁혔다. 주변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눈들이 많을 것이니 대비를 해야 했다. "이것을 끼세요" 살며시 내미는 작은 반지, 파란색 보석이 박혀 있는 마법 도구였다. "이것도 역시 시동어로 "파워 업" 이라고 외치면 되는 것인가?" "잘 아시는군요." 반지를 슬며시 손가락에 끼자 살짝 빛이 나며 반지를 스스로 주인의 손가락에 맞춰 크기를 줄였다. 모든 마법이 걸려 있는 반지를 그렇게 제작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손가락 굵기는 매우 다양하기에 어쩔 수 없이 추가되는 사항이었다. 다크는 반지를 끼자마자 나직하게 시동어를 외쳤다. "파워 업!" 몸 속에서 반지 쪽으로 마나가 흘러 들어가는 것이 슬며시 느껴졌다. 그녀가 직접 마나를 움직이고자 했을 때는 그렇게도 안 되더니 마법도구는 그것을 별로 어렵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 "검은?" 하나는 긴 로브자락을 슬쩍 들추며 검을 건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뭔가 경악한 목소리들이 처져 나오며 두명의 기사가 몸을 날려 왔다. 그리고 저 뒤편에 있던 기사들은 이쪽의 기사들이 몸을 날리는 것을 보고는 그들도 이쪽으로 약간 뒤늦기는 했지만 몸을 날려 왔다. 그들은 여태껏 라나와 다크를 감시하던 중에 검을 건네는 것을 본 것이다. 다크는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다음 검의 손잡이를 꽉 쥐자 오랜만에 느껴지는 이 푸근한 느낌. "흐흐흣!" 몸은 최상의 상태였다. 거기에다가 전에 지하 궁전에서 탈출할 때와는 달리 검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이었고, 온몸에 힘이 넘치고 있었다. 절로 살기 어린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다크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접근해 오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달려 들어갔다. 라나는 황급히 다크를 뒤쫓으면서 주문을 외웠다. "자애로우신 지혜의 여신이시여, 저 용맹한 전사를 위해 힘을 주소서!" 그리고 한순간 다크의 몸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오는 듯하더니 다크는 더욱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녀로부터 축복을 받는 순간 검의 무게가 더욱 가볍게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의 맹렬한 검격에 기사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과감하게 휘둘러 오는 검! 상대가 도저히 가냘픈 소녀 그것도 마나까지 봉인된 소녀라는 생각 자체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저쪽에서 네 명의 기사가 가담하기 전에 이미 두명의 기사는 피를 흘리며 쓰리지고 말았다. "너는 먼저 도망가!" 새로이 네 명이 도착하자 라나가 도우려 했지만, 다크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라나 또한 미숙하지만 검술을 배운 적이 있었다. 물론 호신을 위해서였다, 뛰어난 미모를 지닌 무녀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에 교단에서는 무녀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데나 교단의 신성 마법들 중에서는 공격마법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봤을 때 다크의 검술은 상상 이상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옆에 있다는 것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라나는 재빨리 계획해놨던 탈출로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네 명의 기사들과 어울려 칼질을 하고 있는 다크를 뒤로 남겨두고 말이다 "뭣이? 그녀가 탈출했다고?" 레티안의 보고를 받는 순간 로체스터 공작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졌다. "예, 전하." "마나도 쓸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데 탈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마나가 봉쇄된 상태라면 힘을 못쓴다는 것은 누 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레티안은 잠시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곧 솔직하게 대답했다. 숨겨서 될 일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것이 무녀가 도왔다고 하옵니다" "무녀? 제임스가 데려왔던 그 아데나 신전의 무녀?" "예, 전하. 전하도 아시다시피 신성 마법은 마나하고는 무관한 것이라서 그녀 혼자 힘으로 빼간다면 막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그녀가 신성 마법으로 치레아 대공을 도와줬다는 데 있었다고 하옵니다. 사실 치레아 대공이 어느 정도 힘만 차린다면 웬만한 기사들로는 막기 가 매우 힘들지 않겠사옵니까?" 로체스터 공작은 얼굴이 벌개져서는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물론 신경질이 나서 그런 것이었지만. 그가 한 번 내리치자 탁자는 ‘퍼억‘ 하는 굉음을 내며 돌 맞은 개구리마냥 너덜너덜해진 채로 쭉 뻗어버렸다. "이런, 제기랄!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데... 수도 경비사단들과 근위 기사단을 총출동시켜서라도 빨리 그녀를 잡아 와" 펄펄 뛰는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레티안은 냉정한 어조로 조언했다. "그렇게 추격작전을 대규모로 벌이신다면 크루마가 눈치 챌 것이옵니다." 레티안의 지적에 로체스터 공작은 망연한 듯 중얼거렸다. "크루마? 그렇지, 크루마가 있었지 이런 빌어먹을! 하필이면 지금 한창 헛 소문을 퍼뜨려 놓은 상태에서 탈출이라니...." "만약 이번 일이 연극이라는 것을 크루마가 안다면, 결코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것이옵니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말이옵니다. "이런, 젠장!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다면.... 지금 당장 마법사 세 명 정도 와 오너급 근위 기사 다섯 명 정도를 대기시켜라 그리고 정찰대에 연락 해서 용기사 세 명 정도 지원받도록 해. 내가 직접 그녀를 잡아들이겠다. 레티안은 다급하게 로체스터 공작을 말렸다. 어느 곳에 크루마의 첩자가 있을지 모른다. 이쪽이 크루마의 미네르바를 중점적으로 감시하는 만큼 적들도 로체스터 공작을 감시하고 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고정하시옵소서, 전하. 전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오나, 전하께서 직접 나서시면 아니되옵니다. 모두의 이목(耳目)이 전하를 바라보고 있음을 잊지 마시옵소서." "그것도 그렇군 그렇다면....." 잠시 고민하던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에게 부탁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그는 중요한 일 때문에 이곳에 없다는 것은 상기했다. "별 수 없군. 좋다, 제임스를... 제임스를 불러들여라." "발렌시아드 각하께서는 기동연습장에 계시옵니다. 아마도 불러들이는데 최소한 한 시간은 필요할 것이옵니다." "조금 늦어도 상관없으니 최대한 빨리 제임스를 불러들여라 아무래도 그 녀의 실력이 실력인만큼 왠만한 기사들로는 생포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 사들에게도 그녀를 발견하면 정면 충돌은 삼가고 제임스의 도착을 기다 리라고 지시해라." "옛, 전하." "헉헉헉... 젠장! 끈질긴 놈들...." 다크가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는 것에 비해 라나는 여태까지 열 번이 넘는 신성 마법을 사용했음에도 거의 지친 것 같지 않았다. 보통 전장에서 신성 마법을 통하여 병사들의 사기, 방어력, 근력, 체력 회복 따위를 담당하는 것이 신관의 몫이었고, 그것은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다수의 병사들을 향해서 사용하는 것이었지 오늘처럼 단 한 사람만을 향해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라나는 탈출하면서 지속적으로 신성 마법으로 그녀를 도왔음에도 거의 지치지 않았던 것이다. "괜찮으세요?" "별로 괜찮지 않아. 하지만 전번에 탈출했을 때보다는 아주 상태가 양호 한 편이야." 일단 상대를 따돌린 직후였기에 라나는 다크의 몸에 있는 상처를 치료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다크는 두 곳 정도 상처가 있었지만 그렇게 깊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빨리 치료해야지 적들이 피의 흔적을 따라서 추격해 올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포션을 약간 바른 후 신성 마법을 동원하여 치료를 보조하자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다. 자신의 몸에 나 있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다크는 눈앞에 있는 소녀가 꽤 쓸모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에 봤던 그 골칫덩이에다가 짐덩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세월의 장난이라는 것은 정말 무섭군." 나직이 중얼거리는 다크, 아무리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이렇듯 사람이 바뀔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라나는 신성마법을 사용하느라 정신을 집중한 상태여서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기에 되물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니다. 자, 다 끝났으면 빨리 가자." "잠깐만요, 아저씨." "왜?" "이쪽으로 가면 케락스 시의 외곽으로 빠집니다." "그런데?" "그리로 가는 것보다는 빙 둘러서 케락스 시내로 되돌아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너 돌았냐? 내가 방금 도망쳐 왔던 곳으로 왜 돌아가야 하지?" 콧방귀를 뀌며 퉁명스레 대답하는 다크. 하지만 라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케락스 시내로 들어가서 숨는 것이 가장 좋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케락스 시는 코린트 최대의 도시입니다. 인구가 무려 50만 명이 넘는 상업도시죠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이 산길로 도망치는 것 보다는 좋지 않을까요?" 잠시 궁리를 해보던 다크였다. "상당히 괜찮은 의견이야, 그런데 어떻게 숨어들지? 아마도 여기저기에 경비병들이 꽉 깔려 있을 텐데? 그리고 너 어디로 가야 케락스 시인지 나 알고 있어?"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다크는 이곳 코린트의 지리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렇듯 아무 생각 없이 죽자고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크라레스가 나올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전번 전쟁에서 코린트를 향해 북진해 들어갔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코린트의 남쪽에 크라레스가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근처 지리를 잘 모르지만 최소한 케락스 시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墨 헬 프로네의 새로운 주인 香 까미유는 황당하다는 듯 외쳤다. "어? 어? 잠깐! 왜 나한테는 안주는 거야? 응?" 잠시 제임스가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까미유는 음흉스레 미소 지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너 나 놀리려고 괜히 그러는 거지?" 하지만 제임스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기에 너한테 줄 타이탄은 없어" "그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구나. 괜히, 사람을...." "그것도 아니야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분명히 전하께 지시를 받았어. 여 기 있는 적기사들을 로젠 형하고 메글리, 오스카, 스칼에게 전해 주라는 거였지. 하지만 너한테 적기사를 주라는 지시는 들은 것이 없어. 그리고 너한테 줄 타이탄이 생산 중이라는 말도 들은 바가 없고 말이야." 제임스의 말에 까미유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냈다. 기사에게 타이탄이 없다면 뭐가 된단 말인가? 그것도 자기처럼 뛰어난 기사에게 말이다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럼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타이탄도 없이 검만 들고 전장을 뛰어다 니라는 말이야?" "글세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제임스는 자신에게 할당된 각각의 적기사와 계약을 끝마친 기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려 외쳤다. "형! 오랫동안 쉬었을 테니 밖에 나가서 몸이나 푸는 것이 어때요?" "좋지, 너무 오래 쉬었더니 몸이 근질거리는군." "자, 함께 나갑시다. 제가 상대해 드리죠." "그럼, 나는?" "너는 어디 구석에 쳐박혀서 왜 나한테만 타이탄이 배당되지 않았는지 무 릎 꿇고 반성해 봐." "뭣이?" 까미유는 우울한 얼굴로 적기사 4기와 적기사Ⅱ 1기가 드넓은 대지에서 굉음을 울리며 치고 박고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물론 적기사Ⅱ는 제1근위대 대장인 제임스의 것이었다. 제임스의 타이탄은 제1근위대 소속의 타이탄답게 여러 가지 문장들이 붙어 있었다. 왼쪽 어깨에는 발렌시아드 가문을 상징하는 노란색 히아신스가 그려져 있었고 오른쪽 어깨에는 코린트를 뜻하는 백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 흉갑에는 제1근위대를 뜻하는 ‘Ⅰ’이라는 숫자가 그려져 있는 불을 뿜는 레드 드레곤의 문장이 흉폭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렇듯 제임스의 타이탄이 각종 문장들이 그려져 있는 데 반해 다른 타이탄들은 흉갑에 제2근위대를 뜻하는 문장 하나만이 달라 그려져 있었다. 원래 비밀작전에 많이 동원되는 만큼 기밀유지의 필요성 때문에 그려넣지 않은 것이다. 6년 전의 전쟁 때 적기사가 사용되기 전에는 아예 문장 자체를 하나도 그려 넣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적기사가 코린트의 타이탄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기에 근위대 표시만 그려 넣은 것이다 물론 그 적기사에 누가 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가문의 문장은 빼버리고 말이다. 로젠이 검술로는 까미유보다 조금 뒤진다고 하지만 발렌시아드 가문의 우두머리이자 지금은 없어진 발레시아드 기사단 단장이었다. 까미유는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는 적기사들을 보며 우울한 시선을 던졌다. 아마도 자신에게 적기사를 주지 않고 로젠에게 준 것을 보면 로체스터 공작은 로젠을 제2근위대 대장으로 점찍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제2근위대를 파멸로 몰아넣은 자신은 좌천된 것이 확실하리라. ‘젠장!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살짝 귀띔이라도 해줬어야 할 것 아냐! 그 리고 나만 부하들을 다 잃었나? 그건 로젠 형도 마찬가지 않아?‘ 화가 난 김에 너무 세게 벽을 후려쳤는지 까미유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벽에 둥근 구멍이 뚫린 다음이었다. 뒤에서 병사 하나가 놀란 눈초리로 보고 있는 가운데 까미유는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훈련을 마친 후 호젠 형이나 제심스가 이것을 보면 뭐라고 할 것인가? 그것까지 생각하면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낫다. 겨우 그 정도를 참지 못하고 애꿏은 벽에다가 화풀이를 하다니... "제기랄"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까미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이탄들끼리 싸우는 굉음을 들을수록 괜히 신경질만 더 나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숙소 뒤편, 까미유는 그곳에서 하늘을 봤다가 땅을 봤다 반복하다가 그것도 지루해지면 애꿎은 땅바닥을 몇 대 쳤다가 하면서 울화를 삭이고 있었다. 타이탄들끼리 격투를 벌이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원체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크게 들려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까미유는 자신의 못난 꼴을 병사들에게 보이기 싫었기에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공간의 한쪽 귀퉁이가 열리면서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이탄의 몸체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울퉁불퉁한 기하학적 흔적들.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는 흔적이었지만, 그것만 봐도 그 타이탄은 미스릴이 입혀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타이탄은 거대한 몸체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까미유에게 다가갔다. 까미유는 타이탄의 흉갑에 그려져 있는 레드 드래곤의 문장을 보고 경악하는 중이었다. "어째서 헬 프로네가 여기에....?" 아무런 숫자 표시도 없는 레드 드래곤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타이탄은 이 세상이 아무리 넓고, 타이탄이 많다고 하지만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코린트 총사령관용과 또 하나는 황제 전용이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그 문장을 달고 있는 타이탄이 여기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네 녀석은 나의 주인이 될 충분한 조건이 갖춰져 있는 상태다. 나와 태 고적부터 내려오는 골렘의 맹약을 맺고 싶으냐?> 매우 건방지게 울려 퍼지는 나지막한 저음의 투박한 말소리. 그제서야 까미유는 왼쪽 어깨에 그려져 있는 노란 하이신스 문장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타이탄의 주인이 누군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바로 코린트 최강의 검객인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이었다. "설마,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께서 돌아가셨나?" 키에리는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났을 뿐 소문처럼 전사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까미유였다. <그놈은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나와의 계약을 파기했다. 그러면서 네놈을 추천했지. 일단 네 녀석의 실력도 나쁜 편은 아니니 제안하는 거다. 좋으 냐? 아니면 싫으냐? 싫다면 새로운 주인을 찾아서 머나먼 여행을 떠나 야 하니 빨리 대답해라.> 그제야 까미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자신에게 적기사가 주어지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그에게는 적기사 대신 키에리로부터 이어지는 헬프로네의 주인이라는 명예로운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까미유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것이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헬프로네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인이 꿈꾸는 최고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墨 등잔 밑이 어둡다 香 "뭐야! 나보고 신관 나부랭이가 되라고?"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저씨의 미모는....." 라나는 아무래도 아저씨라는 단어를 붙인 상태에서 ‘미모‘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는 것이 조금 어색했는지,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을 수정했다. "아무래도 지금 얼굴로는 아무리 변장해도 곧장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무녀로 변장을 하시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고 저는 생각하는 데요" 한참 궁리를 하던 다크 힘이 제대로 돌아온 상태라면 구태여 이런 것을 할 필요가 없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탈출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는가? 무녀들은 모두들 미인들이니만큼 무녀로 변장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할 것은 분명했다. 그것을 잘 알기에 다크는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이것을 입으세요. 오늘 낮에 구해 온 겁니다." 라나는 자신의 짐 보따리를 뒤진 후 무녀복을 건네줬다 하지만 그 무녀복은 라나의 옷과는 생긴 것도 조금 틀렸고, 거기에 그려져 있는 문양도 달랐다. "이건 뭐지? 네가 입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아... 예. 이것은 대지의 여긴 케레스를 모시는 무녀들이 입는 옷입니다. 아데나를 모시는 무녀들은 아주 드물기에 아무래도 위장을 하기에는 조 금 안 좋다고 봐야 하겠죠" 무녀들이 호신용으로 검을 차고 다니기도 한자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다크는 서둘러서 무녀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에 검을 찼다. 그런 다음 겉옷인 헐렁한 로브를 걸쳤다. 로브에 달린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자 다크는 흔히 볼 수 있는 무녀의 모습이 되어 버렸다. 그에 비해 라나는 무녀의 옷을 벗은 후 날렵한 수렵복장으로 갈아 입었다. 몸에 꽉 끼는 가죽 바지와 가죽 재킷을 걸친 후 그 위에 약간 얇아 보이는 가죽으로 된 갑옷의 상의를 걸쳤다. 그것을 옆에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다크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외쳤다. "이봐 나한테는 이따위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게 하고 너는 뭘 입고 있 는 거야? 그거 빨리 벗어서 나한테 내놔" "그건 곤란합니다. 아저씨. 저는 아데나의 무녀이기에 케레스의 무녀복을 입을 수 없어요 그래서 이걸 입는거죠" "네가 아까 말했잖아 이 얼굴로는 뭐로 분장해도 힘들다고.... 그러면서 이 망할 무녀복을 권했잖아 너도 나하고 똑같은 얼굴인데. 왜 나만 이 빌어 먹을 옷을 입어야 하는 거야?" "그건 아저씨한테만 통용되는 거였죠 저는 엘프로 분장을 하려고 합니다." 그 말에 다크는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엘프? 그 당나귀 귀를 가진 놈들 말이냐?" "예." 라나는 조용히 신성 마법의 주문을 외워서 분장을 시도했다 푸르게 빛을 뿜고 있는 그녀의 손이 쓱 훑고 지나가자 그녀의 귀는 아주 길고 끝이 뾰족해졌다. "이건 신성마법으로 유지되는 것이기에 저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저씨에 게도 해드리고 싶지만 신앙심이 없는 상태에서는 10분도 유지가 안 되 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계속 주문을 외워드릴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자, 가시죠." "케락스 시에도 도착한 다음에는 어떻게 할거야?" "그것도 생각해 뒀습니다 여행자 길드에 가보면 코린트의 남쪽으로 떠나 는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들과 뒤섞여서 이동한다면 손쉽 게 케락스 시를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다크는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호오, 제법인데?" "감사합니다." 다크는 다시 한번 찬찬히 라나를 바라봤다 과연 10년이라는 세월은 무서웠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라나와 탈출을 하는 동안 여태껏 쌓여 있던 서로간의 두터운 벽이 약간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 벽은 다크가 일방적으로 쌓아둔 것이었지만. 대단한 미모에 완벽한 무녀의 복장, 어디서든지 흔히 볼 수 있는 무녀의 모습이었다. 만약 무녀의 복장을 하기는 했지만 미모가 밪쳐주지 않는다면 모두들 가짜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중간중간에 서 있는 검문소에서도 신분증을 제시하라는 따위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그녀와 함께 지나가는 엘프 여성은 엄청난 미모에다가 뾰족한 귀 늘씬한 몸매하며 누가 봐도 엘프가 아닌가? 알카사스에서는 엘프를 노예로 사용하기에 혹시나 도망친 엘프가 아닌 가하여 신분 확인을 하겠지만 여기는 코린트였다. 총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신관 특히 아데나 신전의 무녀를 중점적으로 색출하여 ‘라나 슈바이텐베르크‘라는 무녀를 잡아들이기 위해 수도권 일대의 검문 검색이 강화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일행도 무조건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져 있긴 했지만, 그 일행의 신분에 대한 자료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명령서에 따르면 그녀는 주로 아데나 신전의 무녀로 분장하고 돌아다니지만 사실은 밀수, 사기, 강도, 강간, 납치, 인신매매 따위의 매우 추잡한 범죄를 저질러대고 있는 ‘푸른 표범‘이라는 강도 패거리 두목의 정부(情婦)라고 되어 있었다. 대단한 미모에 황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과거의 진짜 무녀였던 적이 있었기에 상당한 수준의 신성 마법까지 쓸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당부 또한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정체가 발각되자 케락스 시를 탈출하여 패거리와 합류하기 위해 도주 중인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체포되어야만 했다. 원래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먹는다는 말이 있다. 총사령부에서 내려온 지시 자체가 이렇게 엉터리였으니, 그 밑에서 일하는 병사들도 엉터리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케락스에서 탈출하는 도둑의 정부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상대의 생김새라든지 기타 모든 것은 거의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케락스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검문검색은 철저하게 이루어졌지만 그 반대로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 조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망할 공문 덕분에 케락스 시외로 나가려고 하던 각 종파의 무녀를 포함한 ‘금발‘의 미녀들이 곤욕을 치러야 했다. "또, 생사람 잡는 모양이군." 아닌게 아니라 검문소 쪽에 거의 이십여 명의 병사들이 늘어서서 무녀를 포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협조해주십시오." 병사들이 무기를 겨눈 채로 협조해 달라니..... 일단 이런 일을 당해보면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당한 듯한 무녀의 떨떠름한 묘한 표정, 불꽃 문양이 그려진 무녀복 치고는 비교적 화려한 로브를 입고 있는 무녀였다. 무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로브의 모자를 뒤로 젖혔다. 저 지휘관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괜히 병사들하고 드잡이질을 해봐야 좋을 것이 없으므로 무녀는 순순히 말을 들었다. 그녀에게는 죄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자 깊숙이 로브에 감춰져 있던 탐스런 금발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수도 생활에 거추장스러웠던지 짧게 자르기는 했지만 아무튼 ‘금발‘이었다. "역시, 금발이군요.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무녀는 당황해서 외쳤다. "저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금발인 것도 죄인가요? 무언가 착오가......" "무녀님 말씀대로 죄가 없으시다면 결국은 무죄가 입증될 겁니다. 저희들 은 무녀로 위장한 죄수들을 체포하라는 명령만 받았습니다. 그 도망자는 금발에 여성이라는 것밖에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자, 협조해 주시죠." "무녀로 위장했다면 신성마법을 쓸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신성마법을 사 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증거로 하면 안 될까요?" "범인 또한 예전에 무녀였기에 약간의 신성 마법을 쓸 수 있다고 들었습 니다. 그러니 그것으로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곳 검문소의 지휘관은 무녀에게 상당히 정중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전에 봤던 검문소의 지휘관은 매우 강압적으로 나갔다가 호된 전투를 치르지 않았던가? 무녀와 그 일행이 반항을 시작하자 사방에서 구원하기 위해 병사들이 달려 들어왔고, 결국은 여러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대규모 패싸움으로 발전했다. 결국 그들의 반항은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고 출동해온 기사가 도착한 후 종말을 맞았다. 두 명의 기사는 반항하는 그들을 거의 개 패듯이 팬 다음 꽁꽁 묶어서 질질 끌고 가버렸었다. 다크의 의문점들을 알아본 듯 라나가 나지막한 어조로 속삭였다. "저 무녀는 아레스를 모시는 무녀입니다. 코린트가 가장 숭배하는 신의 아레스인 만큼 병사들도 그녀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지요" "역시 모든 것에는 차별이 없을 수가 없군." 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금발의 처녀들 또한 무녀의 신세와 다를 것이 없었다. 힘이 없는 그녀들은 아예 저항조차 변변하게 못해보고 튼튼해 보이는 죄수 수감용 마차에 실려서는 어디론가로 출발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금방이라는 죄 아닌 죄로 끌려가는 그 무녀도 푸함되어 있었다. 케락스 시내로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검문은 거의 없었기에 그들은 쉽사리 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사실, 병사들은 시외로 나가는 ‘금발 소녀‘를 체포하는 작업만 해도 힘겨운 실정이었기에, 시내로 들어가는 사람한테까지는 감시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라나는 케락스 시내로 들어오자마자 여행자 길드로 갔다. 아마도 케락스 외부로 나가는 것에 대한 검문검색을 아무리 강화해도 걸리는 것이 없으면 그 다음부터 시내를 이 잡듯 뒤지기 시작할 것이 분명하기에 하루라도 빨리 케락스 시를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라나는 앞서 가다가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여행자 길드입니다. 케락스는 아주 큰 도시이기 때문에 여행자 길드가 네 개씩이나 있다고 하더군요, 저것은 그 중에 남쪽에 있는 거 죠, 남쪽으로 여행하기 위한 동료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빨리 들어가서 동행할 만한 어수룩 한 놈이 있는지 알아보자." "예. 함께 가시죠." 여행자 길드의 건물은 그렇게 크지 않은 2층 건물이었다. 건물 내부의 벽에는 수많은 종이들이 붙어 있었다. 라나는 그 종이들을 샅샅이 읽어 나갔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하여 다크도 그 옆에 서서 그 종이에 써진 글을 읽어 봤다. <11월23일, 아르곤 뮤크시를 향해 출발 크루마령 쟈코니아 평원을 통과하 여 오실롯 왕국을 거쳐 아르곤으로 입국 예정, 크루마를 거치게 되므로 크루마에 입국 금지된 분은 사절 자세한 것은 안내원에게 문의 요망> <11월15일 엔테미어 공국 렉슨 시를 향해 출발, 몬스터들이 활개를 치는 크라레스를 피해서 발렌시노 산맥을 통과하여 쥬리오 왕국 탄벤스 공국 토리아 왕국 순으로 이동할 예정 자세한 것은 안내원에게 문의 요망.> 그것은 모두 각종 여행의 동반자들을 모집하는 광고들이었다. 라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것들을 읽더니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역시 요즘 들어 남쪽에 몬스터들이 창궐한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아마 도 그 때문인지 크라레스 쪽으로 가는 여행객은 없네요" "그래도 코린트 남부에 가는 사람은 있을거 아냐?" "원래 여행자 길드라는 것은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산적이나 몬스터 따위 에게서 몸을 지키기 위해 뭉쳐서 가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 자면 서로가 약산씩 손해를 보더라도 출발 시간을 정하고 또 그 일정을 정합니다. 하지만 코린트 국내의 경우 도로가 아주 잘 정비되어 있는 데 다가 요소요소 병력들이 주둔하고 있기에 치안 상태가 매우 좋다고 봐야 하겠죠. 물론, 변경 지방에는 몬스터나 도둑들이 사는 곳도 있지만, 각종 물자들이 수송되는 도로망에 대한 경비는 철저합니다. 그런만큼 코린트 국내 여행객들의 경우 길드를 통해 동행자를 모집할 이유가 없죠. 여러 명이 서로의 편의를 존중해 주며 출발 시간이나 여행 경로를 정하는 것 은 매우 성가신 작업일 테니까요" "호오, 그렇군.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어쩔 수 없죠 여기는 일단 포기하고 딴 곳으로 가시죠" "어디로?" "용병 길드에요. 만약 몬스터가 창궐한다면 용병길드에는 일거리가 있을 테니까요" "혹시 거기 신청하면 용병사단이나 뭐 그런 군대에 들어가야 하는 것 아 냐?" "아니, 그때 만난 후로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그 동안 뭘 배 우셨어요?" 기가 차다는 듯 라나가 물어오자 다크는 난처한 듯 얼버무렸다. 사실, 이런 ‘서민‘들의 생활과는 상관없는 특수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자신도 세삼 느꼇던 것이다. "글세........" "용병사단은 정규군이나 마찬가지에요 몬스터 사냥 같은 일회용으로 모집 하는 집단이 아니란 말입니다. 소규모의 산적들이 날뛴다든지 몬스터들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대 각 지방의 영주들은 치안 확보를 위해 그들을 토벌하게 되죠. 하지만 그들의 규모가 자신들이 거느린 사 병들로는 제압하기가 조금 힘들고 그렇다고 중앙에 정규군 파병을 요청 하기는 작은 규모일 때 일시적으로 용병들을 고용해서 해결하죠" "호오, 무녀가 그런 일들을 상세하게도 알고 있군." "전에 수련하면서 용병들과도 함께 지냈기 때문입니다." "좋아. 그럼 그쪽으로 빨리 가자." 용별 길드에는 남쪽으로 가는 일행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원래 떠돌이 용병들이라는 것이 산적이나 몬스터들이 성업 중일수록 그들도 덩달아서 일거리가 풍족하게 늘어나는 것이 정석이기 때문이다. "흐음, 남쪽에서 일거리를 찾으신다구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매우 깐깐해 보이는 40대 여성이 말했다. 그녀는 용병 길드의 접수를 받는 사람으로서 온몸이 깡마른 것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모습이었다. 라나는 예의 신중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예" "여러가지 일거리가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거리를 찾으십니까?" 라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예. 당신같은 엘프라면 귀족 부인이나 딸의 경호 같은 따분하면서도 보 수가 짭짤한 것부터 시작해서 몬스터 사냥이나 산적 토벌같은 힘만 들 고 보수는 별로인 것까지 다양하게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라나는 저쪽에 서있는 다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동행이 있어서 말이죠." "흐음 무녀라... 얼굴이 너무 앳된 것 같은데, 혹시 신전에서 도망친 수련 생이 아닙니까?" 수상쩍은 듯 눈길을 보내는 그녀를 향해 라나는 딱 잘라서 대답했다. "결코 아닙니다. 아직 정식 무녀는 아니지만 세상 경험을 시키기 위해서 허락을 받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녀의 보호자죠. 그녀가 있던 신 전의 제사장과 친분이 있었기에 그녀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어서 데리 고 다니는 중입니다" "수고가 많으시군요. 사연은 이해하겠지만 치료 마법도 제대로 구사할 수 없는 무녀를 고용하겠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물론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아이는 월급이 적어도 상관없고, 없어도 괜찮습니다 목적은 세상 경험이니까요" "그런 각오라면 좋습니다. 아무래도 저 애송이 무녀와 함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으셔야 할 테니까 어렵거나 힘든 것은 무리겠군요." "어떤 일이라도 괜찮습니다 저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흐음... 어떤 일거리라도 상관없기에 하지만, 될 수 있다면 무녀 지망생과 함께 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이 말씀이죠?" "예." 한참 궁리하건 그녀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두터운 책자를 이리저리 뒤져본 후 말했다. "마침 괜찮은 일거리가 있습니다. 드루이드 후작님의 영애(令愛: 딸)께서 케락스에 쇼핑하러 오셨는데 그분을 드루이드 성까지 안전하게 호위하 는 일입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처음부터 호위병들을 여럿 거느리고 오셨 으니 호위는 문제될 것이 없을 겁니다." 상대의 말에 라나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왜 용별 길드에 호위를 요청하신 거죠?" "예, 사실 그분은 이번 나들이를 위한 일회용 호위병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분을 충성스럽게 모실 개인 호위병을 원하십니다. 그분의 우아한 취향 에 어울리는, 세련되고 품위 있는 여성 용병을 추천해 달라고 하더군요. 드루이드가 제법 큰 성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케락스보다는 촌구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수도에서 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경호원을 구하는 것이죠, 그런데, 당신의 경우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품위 있는 언어를 구사하니 아마도 그분의 마음에 드실 것 같군요. 우선 그분을 두 루이드까지 수행하세요. 그분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앞으로 안정적인 생 활이 보장될 겁니다." 원래 엘프라고 해서 모두 다 품위 있는 행동거지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 섬세하고 가녀린 몸매와는 달리 엘프는 숲 속에서 사는 매우 호전적인 종족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숲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유명했다. 그런데도 숲을 떠나서 이렇듯 세상을 떠돈다면 대부분 뭔사 사연이 있는 엘프들인 경우가 많았고 그만큼 성격은 더욱 모가 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출발은 언제인가요?" "4일 후입니다" 4일씩이나 이곳 케락스에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제 수색 방향을 케락스 내부로 돌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좀더 빨리 떠날 수 있는 일거리는 없나요?‘ 하는 식으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용병들의 경우 일거리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얼마나 많은지 혹은 일거리의 위험부담은 어느 정도인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결코 시간 따위를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라나는 최대한 표정이 변화하지 않도록 신경쓰며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렸다. "그것 말고 딴 일자리는 없나요?" "글쎄요..." 한참 책자를 뒤적거리던 그녀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딴 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런 소녀를 데리고 함께 할만큼 만만 한 일거리는 없습니다. 일단 제가 권하는 것부터 한번 해보시고, 정 안되 겠으면 그때 다시 상의하기로 하죠." 라나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는 ‘루비의 눈‘이라는 고급 호텔에 묵고 계십니다. 거기에 가서 드루이드 후작님의 집사를 찾으세요. 아니, 이번엔 저와 함께 가는 것이 좋겠군요 저를 따라오시죠." "예" "아직도 찾지 못했다고?" "예, 전하." 제임스는 풀이 죽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검문검색 및 수색 범위를 좀더 넓혀 보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어쩌면 빠져나갔을 수도 있기에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나?" 레티안은 곰곰이 궁리를 해보더니 신중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잔꾀를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되옵니다만." "어떻게?" "황궁에서 탈출한 후 곧장 시외로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케락스 시로 다 시 돌아간 것이 아닐까요? 그녀가 탈출한 후 저는 제임스 각하께서 도착 하시는 시간 동안 수도방위사령부 예하의 모든 부대들을 동원하여 수도 에서부터 반경 50킬로미터에 걸려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형성했사옵니다. 아무리 병사들이 투입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해도 마법사가 개입하지 않는 한 그 짧은 시간 동안에 5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추격하는 기사 들을 따돌리면서 이동할 수는 없사옵니다." 레티안의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을 보며 레티안을 말을 이었다. "제한된 인력으로 시외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하여, 무조건 압송하다 보니 시내로 흘러 들어오는 인구들에 대한 감시는 거의 생각 할 수 없는 상태이옵니다. 그 점을 역으로 이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는 없사옵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숨어서 경계가 허술해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건가?" 여태껏 자신이 헛수고만 하고 있었다는 레티안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제임스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점을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레티안은 서로간의 의견을 절충해서 또 다른 안을 내놓았다. "그럴 가능성도 있사옵니다. 각하. 그러니 더 이상 검문검색의 범위를 늘 리지 말고 지금까지 확보한 지역에 대한 철저한 수색작전을 벌여 나가 자는 것이옵니다. 케락스 시 또한 그 범위 안에 들어 있지 않사옵니까?" 레티안의 말이 상당히 그럴듯했기에 제임스는 수긍했다. 현재의 인력으로 더 이상 수색 범위를 늘린다는 것은 힘들었다. 물론 여기저기에다가 병력을 보내달라는 전문을 보내 놨지만, 그들이 도착하는 데 최소한 이틀은 필요했다. "경의 말이 타당하겠군" 제임스가 레티안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하자 로체스터 공작은 레티안을 향해 물었다. "수색 방법은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일단 지금까지 확보하고 있는 지역을 100개 정도로 세분화시킨 후 숨기 에 좋은 곳부터 우선적으로 철저히 수색해 나가는 것이옵니다. 그러면서 차츰 포위망을 케락스 시 쪽으로 압축해 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녀가 잡힐 때까지 절대로 포위망을 풀어서는 안 되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만약 그녀가 경의 말대로 케락스 시에 숨어 있다면 어떻게 하지? 적국의 이목이 있는데 초상화를 곁들인 수배전단을 뿌릴 수도 없지 않나?" "당연하옵니다. 그녀의 얼굴이 그려진 수배전단을 뿌려 봐야 크루마에게 그녀를 놓쳤다는 것을 광고하는 것밖에 안 되옵니다." "이래저래 쉽지 않은 체포작전이 되겠군" 墨 라나의 시녀가 된 다크 香 다크 일행이 고용인의 안내를 받아 실내로 들어서자 콧수염을 매우 짧게 다듬은 단정한 모습의 사내가 아는 척을 했다 너무 말라서 그런지 약간 허리가 구부정한 것이 흠이었지만, 그는 일행을 안내한 고용인과 달리 매우 고급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주 잘 어울리는 인상 좋은 사내였다. 그는 중개인의 설명을 듣자 섬세한 시선으로 라나를 이리저리 뜯어본 후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외모와 어울리게 목소리 또한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아마도 지체 놓은 귀족 집안의 집사인 만큼 그런 식으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으리라. "과연! 이 정도면 공녀님의 마음에 드실지도 모르겠군요, 자 이리로 오시 죠." 집사가 일행을 안내한 곳은 공녀가 묵고 있는 방이었다. 공녀는 호화로운 물건들을 잔뜩 쌓아 놓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집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투덜거렸다. "알카사스에서 전쟁이 벌어졌다고 하더니 영 물건이 마음에 안 들어. 전 에 왔을 때보다 더 형편없는 것 같아. 크라레스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최고급 물품들은 대부분 알카사스에서 제작된 것이 많았다. 알카사스는 그 뛰어난 마법 실력을 십분 이용하여 산업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 알카사스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니 자연히 최고급 물품들의 공급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저, 공녀님. 부탁하신 호위병이 도착했습니다." "호위병? 저 엘프 말이야?" "예." 공녀는 찬찬히 라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소문으로 듣던 대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알카사스라면 노예시장에 가서 손쉽게 엘프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코린트는 공식적으로 엘프를 노예로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보기가 매우 어려웠다. 물론 비공식적인 밀매 루트를 통해 변태 성욕자라든지 뭐 그런 놈들에게 공급되기도 하지만 아무튼 ‘공식적‘으로는 엘프는 ‘비매품‘이었다. 그렇기에 여태껏 자신에게 허락된 제한된 공간만을 움직일 수 밖에 없었던 공녀는 지금까지 엘프를 구경한 적이 없었다. 공녀는 그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며 이모저모 뜯어보다가 이윽고 결정한 듯 말했다. "좋아, 저 정도면 그 얄미운 엘리리아의 콧대를 꺾어 놓을 수 있겠어. 전 에 만났을 때 자기 호위병이 얼마나 품위가 있는지, 아름다운지... 별의별 자랑을 다 늘어 놨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앙갚음을 해줘야지. 당장 계약 해." "예, 공녀님." 공녀의 말을 들은 다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공녀는 대체 호위병의 존재를 뭐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호위병들을 무슨 장난감쯤으로 생각하지 않고서야 저 따위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호위병 선택 요건 중의 첫 번째는 외모가 아닌 실력에 있었다. 호위병이라면 그 어떤 극악한 조건이 닥쳐와도 주인을 지켜낼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집사는 일행을 임시 집무실로 데리고 돌아갔다. 집사는 집무실의 한쪽에 놓은 책상에 앉은 후 서랍을 열고 서류들을 꺼내 들며 말했다. "공녀님께서는 당신이 마음에 드신다고 하니, 서로 조건을 따져서 좋은 방 향으로 계약을 맺었으면 좋겠군요. 그래, 금액은 얼마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라나는 잠시 생각한 후 집사에게 되물었다. 라나는 용병들을 따라서 여행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듯 귀족의 집에 고용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대충 어느 정도 선에서 월급이 책정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집사님은 얼마 정도를 예상하게 계십니까?" "일단은 한 달에 50골드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영지로 돌아 갈 때까지만 그렇게 하고 일단 영지에 도착한 후에 장기 계약을 맺기로 하죠. 공녀님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한다면 어쩌면 두 배, 혹은 세 배까지 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보통 용병들의 경우 한 달 10골드 혹은 그 작전에서 살아 남았을 때 50골드 하는 식으로 급료를 책정했다. 물론 후자가 전자의 경우보다 조금 더 후한 급료를 주게 되지만 작전이 실패했을 때는 땡전 한푼도 못 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 것을 따지고 본다면 50골드면 꽤 후한 월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고용할 용병의 실력 테스트는 한 번도 안 해보고 말이다.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 아이는....." 라나가 다크를 가리키며 서두를 꺼내려고 하는데 집사가 그것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공녀님께서는 당신만을 고용하기를 원하신 겁니다 당신의 동료가 아니구 요. 물론 시종을 두셔도 상관없습니다만 하지만 시종의 급료까지 제가 지불해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은 잘 아시겠지요? 일단 급료가 만족스러우 시다면 여기다가 서명을 해주십시오" 집사의 말인즉슨 저 새파란 무녀를 하녀로 두는 것은 상관없지만 동료로서는 절대로 둘 수 없다는 뜻이었다. 라나는 잠시 다크를 바라봤다 그녀의 의향을 물은 것이다. 다크는 여태껏 그래 왔듯이 결과만을 생각할 뿐, 그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든 별로 신경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것을 본 라나는 재빨리 집사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했다. 집사는 유려한 필치로 계약서를 작성해서는 라나에게 건네어 서명을 받아냈다. 집사는 라나의 서명이 된 계약서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바라본 후 그것을 서랍에다가 집어넣으며 밖에 대고 외쳤다. "한스"! "예" "새로 오신 공녀님의 전속 경비다 내가 비워 두라고 했던 남쪽의 그 방으 로 안내해 드리도록 해라." "예, 집사님." 그런 다음 집사는 라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계약서에 서명함으로 인해서 그녀도 이 집안의 고용인이 되었기에, 그녀에게 하는 말투는 어느새 하대로 바뀌어져 있었다. "한스를 따라가게. 자네의 방을 안내해줄거야." ‘루비의 눈’이라는 고급 호텔은 중간에 큰 본 건물과 여러 채의 호화 주택들로 이루어진 별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체 놓은 귀족이라면 당연히 그에 딸린 식구들이 많다. 호위 기사 호위병 시중들 시녀가 시종들 짐꾼들 기르고 호위 기사의 시종들 등등..... 그리고... 그들이 수는 주인의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증가했다. 꼭 법으로 어떤 지위에서는 호위병이나 수행원의 수를 얼마만큼이나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정해 놓을 필요도 없었다. 주인의 지위가 높다면 좀더 비옥하고 더욱 넓은 영지를 차지할 수 있었고 그것은 곧 그들의 부(富)와 직결되었다. 일단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돌아다니고 싶어도 돈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간혹 산적이나 몬스터들이 출몰하기도 했지만 지위가 놓은 자일 수록 그 호위병의 수는 엄청났을 뿐만 아니라 코린트의 변방도 아니고 이런 중심부에서 그런 걱정을 할 이유는 없었다. 호위병과 시종들을 대규모로 이끌고 다니는 것도 다 자신들의 지위와 풍요로움을 과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이런 지체 높은 귀족들이 애용하는 호텔이라면 당연히 귀족이 이끌고 다니는 호위병이나 시종들에 대한 배려도 해야 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호텔의 치안 상태가 아무리 좋아도 혹은 아무리 서비스가 좋다고 해도 자신의 근위병이나 시종들과 따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곧 자신의 힘과 권력을 과시하는 방법이었고 오랜 시간 자신을 모셔온 시종들이 훨씬 더 눈치가 빠를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급 호텔일수록 최고급 귀빈들을 위해서 호텔의 다른 손님들과 격리된 독립된 거대한 주거 구역을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나와 다크가 한스라는 사내에게 안내된 방도 그것들 중의 하나였다 귀족의 고용인이 사용할 방이라서 그런지 별로 크지도 않았고 방금 전 공녀라는 소녀의 방처럼 고급스런 가구도 없는 간단한 구조의 침실이었다. 라나는 자신들의 짐을 차곡차곡 간소한 모양의 옷장에다가 세심하게 챙겨넣으면서 말했다. "일단, 달리 숨을 곳이 없으니까 이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수색 작전이 시작된다고 해도 귀족을 상대로 함부로 뒤지기에 는 무리가 있을 테니까요." "좋을 대로 해." 墨 인신매매범에 팔리다 香 다음날 다크는 일어나서 무녀 복장 대신에 보통 시녀들이 입는 허름한 옷가지를 입었다. 무녀의 옷을 입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그들 틈에 녹아 들어가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자신이 라나의 하녀쯤으로 생각하지 절대로 여행 동료로 취급을 안 하고 있다는 점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과거에 살수로서 생활했을 때,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녹아 들어가는 방법을 혹독하게 교육받았던 다크였다. 그렇기에 하녀로 분장을 한 것인데.... "이번에 공녀님의 호위 기사가 고용되었다고 하더니, 그분의 시녀가 너인 모양이구나."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하녀가 다크를 보고 말을 걸었다. 다크가 그 쪽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빨리 따라오너라. 그렇게 빈둥대고 있으면 어쩌니?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많단 말이야." 다크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 저 하녀를 따라가서 일을 해야만 하는가? 거기에다가 자신은 라나의 시녀로 되어 있는 것이지. 공녀의 시녀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될 수 있으면 가냘픈 미소를 지어 보이면 항변했다. "저...저는 라나님의 시녀인데요?" 그 하녀는 콧방귀를 뀌며 같잖다는 긋 말했다. "흥, 겨우 고용 무사의 시녀인 주제에 내 말을 못 듣겠다는 거냐? 안그래 도 할 일이 많은데 별 고약한 년을 다 보겠군. 너 이리 좀 따라와 봐." 그 하녀는 물정 모르는 꼬마 계집에게 신경질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이 신참은 상하관계에 따른 법칙을 잘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겨우 고용 무사의 하녀 주제에 대귀족의 하녀 나으리와 맞먹으려고 들다니 말이다. 그리고 더불어 다크 또한 슬며시 약이 올라서 맞받아쳤다. "뭐야? 누구 따라오라면 무서워할 줄 알아?" 하녀가 데리고 간 곳은 그 근처에 있는 아무도 없는 빈방이었다. 다크가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하녀는 곧장 본색을 드러냈다. "이것이 내가 누군 줄 알고 꼬박꼬박 말대답이야?? 나는 드루이드 후작 가문의 하녀란 말이야. 어디 근본도 없는 천한 것이 알량한 무사 나부랭 이를 믿고....." 말을 하며 하녀는 다크의 뺨을 때리기 위해 손바닥을 날렸지만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손이 손쉽게 저지당해 버렸다. 다크가 날아오는 그녀의 손바닥을 아주 간단하게 낚아챘던 것이다. "훗! 감히 누구한테 손찌검을 하려고 들어? 죽고 싶냐?" 다크가 손에 점점 힘을 주자. 하녀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상대는 가냘퍼 보이는 소녀인데도 그 손아귀 힘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신참내기 하녀를 길들이겠답시고 깝죽거리던 하녀는 뭔가 일이 생각대로 풀려가지 않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았다. 짝!! "꺄악!!" 방금 전 그 하녀가 신참 하녀를 상대로 써먹으려고 했던 그것, 그것이 정반대로 자신의 뺨에서 터진 것이다. 그리고 한 3분 정도? 그 동안 그 하녀를 정말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호되게 구타를 당했다. 온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대는데 어찌 머리에서 딴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볼썽사납게 널브러져 있는 하녀를 싸늘한 눈빛으로 흘끗 바라본 그 신참은 차가온 어조로 말했다. "다음에 또 한 번 더 귀찮게 굴었다가는 죽을 줄 알아. 이제는 아주 개나 소나 다 나하고 맞먹자고 드는군. 나 참! 더러워서." 툴툴거리면서 나가는 다크를 보며 하녀는 이빨을 ‘뿌드드득‘ 갈며 원한에 찬 시선을 보냈다. 손가락도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그만큼 두들겨 맞았으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만도 하련만. 그 하녀는 전혀 그럴 기색이 아니었다. 만약 길 가다가 만난 사이였다면 하녀로서도 그날 재수없었다고 투덜거린 후 침 한 번 ‘퇘‘ 뱉고 끝냈겠지만, 범인이 한 지붕아래 있으니 당연히 복수할 기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년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뿌드드득! 두고보자! 내 저년을....." 원래가 두고 보자는 놈은 하나도 무서울 것이 없고, 또 ‘두고보자‘는 저주성이 다분한 글귀는 힘없는 자들이 내뱉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행일치를 주장하듯 그날 저녁에 다시금 다크를 만나러 왔다. "똑똑!" "예" 하녀는 슬쩍 문을 연 후에 대답한 사람이 엘프라는 것을 알고는 두리번거리며 그 얄미운 계집아이를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으므로 공손을 가장한 어조로 표정을 부드럽게 하여 물었다. "저, 하녀는 어디로 갔습니까?" "내가 포도주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는데 무슨 일이지?" "그런 일이라면 저에게 지시를 해주셨으면 되는데 괜한 일을 하셨군요. 딴 곳에서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공녀님의 지시로 무사님들이 드실 좋은 술을 언제나 준비해 둔답니다. 물론 과음하시는 것은 안 되겠 지만요." "아,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너에게 부탁하기로 하지." "예, 그럼 편히 쉬십시오." 하녀는 깍듯이 인사를 한 후 방문을 나겄다. 그런 후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뇌까렸다 안 그래도 밖으로 유인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상대가 벌써 밖에 나가 있다니.... "챠아안스. 후후훗." 그런 다음 부리나케 그 얄미운 년에게 복수하기 위해 달려 나갔음은 물론 말할 필요도 없다. "바로 저년이야" 하녀는 포도주병을 들고 느긋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그러자 하녀를 따라오고 있던 남자들 중에서 수염을 잔뜩 기른 덩치 좋은 사내가 감탄조로 말했다. "이야, 아주 삼삼하게 생겼는데? 내다 팔면 제법 비싸게 받을 수 있겠어." "내가 말했잖아 물건 하나는 끝내준다고 말이야." "뒤탈이 날 염려는 없겠지?" "안심하라니까 저년은 후작 가문의 하녀가 아니라 떠돌이 무사가 고용한 하녀야. 뒤탈이 날 염려는 절대로 없어. 그리고 3일 후면 영지를 향해 출 발할 거야. 그 엘프 무사가 하녀를 찾으려고 해도 시간이 없다는 말이지." "흐음, 좋아." 털보는 품 속에 손을 넣어서 작지만 두툼한 주머니를 꺼내어 하녀에게 건넸다. "자, 약속한 5골드야." 하녀는 주머니 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살짝 이빨로 깨물어서 진짜인지 확인한 후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는 내 눈앞에 저 계집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줘." "염려 말라니까. 다시는 못 보게 해주지." 하녀는 금화가 든 주머니를 자신의 품 속에 슬쩍 집어넣은 후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너무 험하게 다루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제 값을 받으려면 물건의 상태 가 좋아야 하니까 말이야." "염려 말라구. 이런 장사 한두 번 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녀가 떠나고 난 후 털보는 주위의 사내들에게 말했다. "자 시작하자 더 정도라면 못 받아도 60골드는 받을 수 있어. 흠집 안 나 게 조심해서 모셔라." "염려 마십쇼. 두목." 다크는 포도주를 사 들고 호텔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물론 그것은 라나가 아닌 자신이 마실 것이었는데, 라나보고 사 오라고 하면 남들이 보기에 조금 이상할 듯하여 직접 움직이게 된 것이다. 사위에 어둠이 깔려 있었기에 지나다니는 행인은 거의 없었다. 이때 그녀의 뒤쪽에서 발걸음을 빨리해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추격자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다크는 걸어가는 속도를 조금 더 줄이면서 그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 두 명의 사내는 다크를 지나쳐 앞쪽으로 바쁘게 걸어가 버렸다. 아무리 탈출하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너무 과민반응을 보인 것 같다고 내심 투덜거렸다. 앞쪽으로 지나쳐 간 두 사내는 옆으로 뚫려 있는 골목길의 앞쪽에 서서는 뭔가 대화를 나누면서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무언가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그 두 사내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앞으로 걸어가는 다크와의 거리는 자연히 다시금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때 뒤쪽에서 남자 두 명이 달려오면서 외쳤다. "이봐, 오래 기다렸지?" "아니야, 방금 왔어." 그러면서 어쩌구저쩌구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크는 그 네 명의 사내들이 만나는 자리에 우연히 지나가게 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앞과 뒤에 두 명씩 완전히 포위된 입장이기는 했지만 그런 것은 대수롭게 생각되지 않았다. 곧이어 자신은 전면의 둘을 지나쳐 앞으로 나갈 것이고, 뒤에서 오는 두 놈은 앞의 두 놈과 만나서 술이라도 마시러 갈 것이니까 말이다. 바로 이때 뒤쪽에서 다가오던 한 사내가 우악스럽게 다크의 목을 뒤에서 감아 왔다. "조용히 해!" 사내는 여태껏 계집들을 납치하면서 몇 번이나 써먹어 왔던 그 수법을 다시금 재현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여자를 제압한 다음 저 골목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꽁꽁 묶어서 자루에 집어넣은 후 자신들의 소굴로 운반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은 초장부터 뭔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뒤에서 상대가 손을 감자마자 다크는 거의 본능적으로 앞쪽으로 크게 돌면서 패대기쳤다. "어이쿠!" "이런, 제길! 제법 반항을 하는군." 옆에서 사내는 투덜거리면서 그녀를 뒤쪽에서 껴안았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는 그 순간 옆구리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다. 소녀가 약간 몸을 비틀면서 왼손으로는 포도주병을 꼭 껴안고 오른쪽 팔꿈치로 상대의 옆구리를 인정사정없이 가격한 것이다. "헉" 엄청난 통증으로 상대의 손이 조금 느슨해지는 그 순간, 소녀는 오른쪽으로 돌아갔던 허리를 다시 왼쪽으로 튕기며 순간적으로 왼손과 오른손을 교대하여 포도주병을 껴안고 왼쪽 팔꿈치로 자로 잰듯 상대의 목을 가격했다 사내는 목을 가격당하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동료 둘이 당하는 것을 보고 구원차 달려온 털보와 또 다른 사내의 운명도 앞서간 녀석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뒷골목을 전전하며 어렸을 때는 소매치기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도둑, 강도, 강간, 인신매매를 일삼는 흉폭한 무리들이었지만 사실 그들은 약자들이나 괴롭히는 인간쓰레기들이었다. 특별히 격투술 따위를 교육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부녀자들이나 나약한 사람들은 상대로 칼로 협박할 줄이나 알았지. 이렇듯 본격적으로 수련을 쌓은 무사와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비록 그녀가 아무리 힘을 쓸 수 없는 소녀인 상태라 해도.... "갑자기 나를 공격한 이유가 뭐지?" 덩치가 산만한 네 명의 사내들은 모두 방금 전 격투를 벌였던 도로 옆에 나 있는 컴컴한 뒷골목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눈앞의 소녀가 소녀로 보이지 않았다. 퍽 "흐어어억" 명치 부분을 발로 호되게 가격당한 후 앞으로 꼬꾸라지는 동료를 보며 남은 세 명의 안색은 더욱 핼쑥해졌다. "갑자기 나를 공격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퍽! "케엑!" 이번에는 명치를 부여잡고 헉헉거리고 있는 놈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녀석의 턱이 획 돌아가며 이빨 부스러기가 날아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턱이 날아간 놈의 오른쪽 녀석이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하녀의... 하녀의 부탁을 받았습니다요." "하녀라고?" "예. 후작 가문의 하녀라고 하던뎁쇼. 이름 같은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 니다. 그냥 우리들에게 좋은 일이 있는데 한번 해볼 생각은 없냐고 하면 서....." "그래서?" "쓸 만한 계집을 하나 살 생각은 없느냐구요." 다크로서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산다고?" "예. 원래 이 바닥 일이란게 그렇지 않습니까? 쓸만한 계집을 구해서 매 음굴에 넘기자면 최소한 20골드는 받을 수가 있잖습니까?" 매음굴에 넘긴다 이제야 ‘산다‘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예전에 살아왔던 중원이나 이곳 이상한 세계에서도 여자들은 그녀들의 신체적 특성 때문에 매매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대략적으로 알고만 있는 것과 그 대상이 자신이 들어갔다는 것은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야말로 머리꼭지가 돌 정도로 열화가 치미는 일이었다. "이런 망할 자식! 그래서 나를 매음굴에 넘기려고 했단 말이냐?" "아닙니다요.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이정도 미모라면 좀 멀리 가 서 노예 경매장 쪽으로 넘기면 최소한 60골드는 족히... 흐어억!" 다크는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그놈의 턱에 깨끗한 발차기를 날린 것을 시작으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놈들은 살아 남으려는 일념으로 어기적어기적 기어서 큰길 쪽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것은 안 될 말씀이었다. 네 명이 모두 다 두들겨 맞다가 맞다가 지독한 고통 때문에 기절해 버리자 다크는 손바닥을 탈탈 털면서 어둑한 뒷골목을 걸어 나왔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감히... 게다가 나를 팔아 버리려고 하다 니, 그년을 가만히 두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다크가 하녀를 향해 복수의 감정을 불태우고 있는 그 시각,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의 심복이 레티안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젠장! 아직도 못 잡아들이다니... 제임스로부터 연락은 없었나?" "예, 전하. 시 외곽으로 더욱 범위를 넓혔지만... 그렇게 범위가 넓어서는 아무래도 수색 작전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사옵니다." "경의 말대로 시내로 숨어든 것일까?" "시내에도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사오나, 아무래도 워낙 많은 인구가 밀 집해 있기에 그것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옵니다." 씨근덕거리면서 실내를 한동한 왔다갔다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로체스터 공작은 손가락을 탁 튕기면서 말했다. "이렇게 된다면 아예 화근을 없애버리는 것은 어떨까?"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녀가 무슨 이유로 크라레스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그녀는 크라레스 태생이 아니야 그 정도로 뛰어난 고수가 갑자기 만들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당연히 그렇사옵니다 본국에서도 뛰어난 기사 한 명을 키우려면 최소한 30년은....." "그러니까 뭔가 모종의 밀약이 그녀와 크라레스 황제 사이에 맺어져 있다 고 봐야 하겠지." "지당하신 생각이시옵니다" "그러니 그녀를 잡아들이는 것이 힘들다면 크라레스를 아예 없애 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예?" "크라레스는 이번 정쟁에서 치명타를 입었어. 그리고 더불어 몬스터들까 지 날뛰면서 그나마 남아 있는 국력을 갉아먹고 있지 오죽하면 크라레 스에서 사신이 와서 지원을 요청했겠나?" "아, 그러니까 이 기회에 아예 크라레스를 없애 버리면 그녀가 더 이상 본국을 적대시할 명분도 함께 없어지겠군요." "그렇지. 그건 그렇고 타이탄 훈련장에 가 있는 말썽꾸리기들의 상태는 어떻다고 하던가 제임스가 빠졌다고 농땡이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로젠 대공 전하로부터 모든 적응 훈련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 를 들었사옵니다. 참 대공 전하께서는 덧붙여서 크로데인 후작 각하께서 헬 프로네를 손에 넣으셨다고 전해 오셨사옵니다." 보고를 올리면서 레티안은 로체스터 공작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하지만, 로체스터 공작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헬 프로네의 입수가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때, 레티안은 공작이 헬 프로네가 까미유에게로 갈 것을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적기사들을 지급하면서도 까미유에게만 타이탄을 할당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로젠에게 전해라. 제2근위대장에 임명한다고 말이야" ‘헬 프로네‘ 건에 대한 생각을 잠시하고 있던 레티안은 갑작스런 로체스터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제2근위대장은 크로데인 후작 각하신데요?" "까미유는 제2근위대 부대장으로 강등한다 오히려 그녀석도 그것을 좋아 할 거야 녀석은 언제나 책임이 무거운 대장보다는 부대장 쪽을 좋아했 으니까 말이지." "그렇게 전하겠사옵니다. 전하." "그리고 제2근위대의 대원으로는 오스카, 스칼, 메그리로 한다." "예" "대충 훈련이 끝났으면 그 녀석들도 수도로 불러들여라 그런 다음 근위대 와 금십자 기사단에 출동 준비를 지시해 둬." "예? 곧바로 크라레스를 침공하실 계획이시옵니까?" "당연하지 본국에 남아 있는 모든 타이탄 전력을 한꺼번에 쏟아부으면 약 체화된 크라레스도 며칠 못 견딜 것이다. 그녀와 크라레스가 다시금 합해 지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 키에리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일행은 타이탄 운반 경로를 따라 크라레스 영토 안으로 들어선 상태였다. 그리고 그 흔적은 말토리오 산맥을 따라 쭉 동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물론 몬스터들의 소굴은 산맥 안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키에리의 고민은 그것이 아니었다. 크라레스 제국 영토 깊숙이 들어갈수록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흔적은 앞쪽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사악한 기운은 북동쪽에서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으으음." 침중한 신음소리를 토해낸 후 키에리는 부하들에게 물었다. "저쪽 길로 쭉 가면 크라레인 시가 아니냐?" 키에리의 뒤쪽에 서 있던 털보가 즉시 대답했다. "맞습니다. 대장. 크라레인 시 쪽으로 가는 주 도로로 연결됩죠." "크라레인 시라....." "그렇다면 이쪽 길로 쭉 가면 어디로 연결되나?" 키에리는 타이탄을 들고 갔을 거라고 추측되는 깊숙하게 패인 오우거의 발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질문에는 털보도 조금 아리송한지 다른 부하들하고 수군거리더니 대답을 했다. "이 길은 말토리오 산맥의 서쪽 끝자락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길의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 마을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케르바라는 작은 마을 이 저희들이 알고 있는 제일 마지막 마을입니다. 아마도 산길을 타고 들 어가면 작은 마을이 몇 개 더 있을지도...." "흐음... 말토리오 산맥이라....." 키에리는 잠시 중얼거리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오래전에는 크라레스 수도가 말토리오 산맥의 위치하지 않았던가?" "예, 맞습니다. 크로돈입죠. 크로나사 평원을 차지한 후에는 크라레인 시로 수도를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바로 그거야." 키에리는 타이탄들의 잔해가 어디로 옮겨졌는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수도를 크라레인으로 옮겼다고 해도 타이탄 생산 시설까지 모두 다 옮긴 것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산악 지역에 놔두는 편이 수비하기도 편할 것이 아닌가? "좋아. 타이탄이 어디로 갔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니까 지금부터는 저 묘한 기운을 참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키에리는 저 북동쪽 하늘 위에 퍼져 있는 사악한 기운을 노려봤다. "아니 너는?" 포도주병을 껴안은 체 다가오는 다크를 발견한 시녀는 마치 한밤중에 유령을 본 듯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쯤 꽁꽁 묶여서 얌전히 노예시장을 향해 떠났을 것으로 생각한 상대가 자신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다크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게 맞이했다. 두 눈에 불을 켜고서..... "오호라! 이거 내가 손수 찾아가야 하는 수고를 줄여 주시는구먼. 너 자알 만났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달려드는 다크를 피해 하녀는 도망가려고 했으나 그것은 마음뿐, 곧장 머리 끄덩이를 붙잡혔다. 다크는 도망치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움켜쥔 후 한 바퀴 획 돌려서 패대기를 쳤다. 그런 다음 쉴쉴 틈도 없이 들려오는 가죽 두들기는 소리 짝! 짝! 짝! 패대기쳐졌던 하녀의 뺨은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바로 이 때 저 먼 곳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뭣들 하는 짓이냐?" "어?" 다크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공녀가 집사와 몇몇 하인들을 거느리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지금 친구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행차하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도중에 출입구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하녀들이 드잡이를 하는 상스러운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집사는 아직까지도 엉켜있는 두 하녀에게 눈을 부라리면서 꾸짖었다. "냉큼 일어서지 못할까? 이것들이 뉘 안전이라고!" 주섬주섬 일어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하녀들을 보면서 공녀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집사에게 말했다. "누가 이런 모습을 봤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큰일 날 뻔했잖습니까. 앞으 로 주의해 주세요"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집사는 매우 호된 질책을 들은 듯 안색이 시뻘개졌다. 하인 하녀 그리고 노예들에 대한 단속은 모두 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불화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에게 책임이 있었다. "예, 철저히 주의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공녀님." 공녀는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앞으로 가다가 잠시 멈추면서 하녀들 중 한 명을 바라봤다. "고개를 들거라." "예?" 공녀는 고개를 든 다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집사에게 넌지시 말했다. "이 아이는 못 보던 아이같은데....." 물론 공녀가 라나를 고용할 때 그녀와 함께 다크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공녀는 처음 보는 엘프에게 온 정신이 팔려서 그녀와 함께 왔던 다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다. 하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대단한 미모, 이런 아이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엔테로아가 데려온 하녀입니다." 엔테로아는 라나가 꾸며댄 가명이었다. "그런가?" 공녀는 지신의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던 라나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저 아이를 나한테 줄 수는 없겠느냐?" 갑작스런 제안에 라나는 흠칫 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공녀님." "서로 간에 좋은 일일 것이다. 저 아이에게도 앞으로 편안한 삶이 약속될 것이고 그대에게도 원하는 만큼의 지위와 돈을 주겠다.." "예? 그건 저 아이를 팔라는 말씀이십니까? 죄송하지만 저 아이는 제 하 녀입니다. 노예 같은 것이 아니라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흐음, 그런가? 뭐 시간은 많으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라.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될 테니까 말이야. 그럼, 가자." 그날 저녁 늦게 돌아온 라나는 다크에세 오늘 있었던 일의 전말을 말했다. "뭐라고? 그렇다면 공녀가 원하는 것은....." "예. 다크님을 그녀의 아버지에게 노리개로 선물하겠다는 것이죠. 집사에 게 자세히 물어봤는데 후작은 상당한 호색한으로 벌써 여러 명의 미소 녀들을 곁에 두고 있답니다. 집사는 나에게 아저씨를 넘겨준다면 후작 가문 내에서 상당한 직위와 돈을 약속하더군요. 그리고 더불어서 공녀님 의 요청을 거절한다면 응분의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넌지시 말하며 협박했습니다." 으드드득, 다크가 이빨을 가는 것을 보며 라나는 위로하듯 말했다.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여성들에게 아름다운 용모는 신의 축복이 아니 라 어떤 의미에서는 악마의 저주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녀들의 대부분 은 귀족들의 성적 노리개로서 삶을 마쳐야 하는 운명이 기다리니까 말 입니다 그녀들의 신분이 낮은 이상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거든요 특히나 그녀가 농노같은 노예 계층이라면 더 이상 말 할 필요도 없겠죠." 화를 삭이기 위해서 포도주를 꿀꺽꿀꺽 마셔대고 있는 다크를 힐끗 쳐다본 후 라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일단은 진정을 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케락스 시를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니까요. 그 외의 것은 나중에 생각하고 처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태까지 다크가 살아온 방식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언젠가는 복수해주겠다고 벼르면서 화를 삭였다. 언젠가는.... ‘좋아, 일단 나중에 힘을 되찾는다면, 그 망할 후작 놈부터 손을 봐주기로 하지.‘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는 다크였다. "전하. 몇 가지 보고 드릴 사항이 있사옵니다." 이블리스의 말에 미네르바는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예. 드디어 코린트에서 치레아 대공을 처형했다고 하옵니다." "뭐야!" 미네르바는 놀라서 외쳤다. 여태껏 미끼를 던져 놓고 고기가 물기만을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이 너무 잘 풀린 것 같아서 오히려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그것이 정확한 정보인가?" "예. 한가지 의문점을 제외한다면 꽤나 믿을 만한 정보라고 할 수 있사옵 니다." "의문점?" 역시 뭔가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았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미네르바가 물었다. "그래. 의문점이라는 것이 뭔가?" "예. 치레아 대공은 코린트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혀 왔던 숙적이옵니다. 그런 그녀를 처형했는데 매우 비밀스럽게 했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사옵니까? 오히려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며 기사들 및 병사들의 사기 를 고취시켜도 시원찮을 텐데 말이옵니다." "당연한 의문이로군. 하지만 그것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코린트는 치레아 대공의 목을 전쟁터에서 벤 것인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만약, 코린트가 그녀의 목을 전쟁터에서 날린 것이라면 사방에 선전을 해대며 축배를 들 일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그녀의 죽음 에는 본국의 비열하기 그지없는 수단이 사용되었고, 또 코린트는 그 연 장선상에서 그녀를 인도받아서 처형한 것이야. 결코 자랑할만한 것이 아 니지 그녀를 죽였다는 것을 부하들에게 알린다면 당연히 부하들의 사기 가 올라가겠지만, 그녀를 죽이는 과정에서 사용된 그 치사하기 그지없는 일련의 사건들이 공개된다면 그래도 사기가 올라갈까? 또, 기사도를 숭 배하는 기사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아, 예. 제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전하, 그렇다면 2단계 작전을 시작해도 괜찮겠사옵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좀더 시간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하세나. 이번 작전 은 그 대가가 큰 만큼 위험도 또한 너무 커 작전이 성공하면 코린트가 멸망하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 본국이 멸망한다. 가능한 한 철저하게 확 인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좋겠지." "예, 전하. 그렇게 첩자들에게 이르겠사옵니다." 이블리스는 서류를 미네르바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알카서스와 아르곤의 첩자들이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아무래도 이번 몬스터들의 난동이 상상 이상의 규모인 것 같사옵니다. 각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거의 연이어 벌어지고 있으며, 두 나라 다 기사단을 파견한 상황에서도 난동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본국에서 도 몬스터들의 난동에 대비하여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글쎄, 아직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나? 몬스터들은 알카사스와 아 르곤만을 목표로 하고 있고 그 두 나라와 열심히 잘 싸우고 있지 않나? 그리고 아직까지는 코린트가 그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있어. 아마 코린 트도 우리들처럼 눈치를 보고 있겠지. 알카사스와 아르곤의 국력이 고갈 되기를 말이야 그런 다음에야 코린트는 전쟁에 동참할 테지. 그리고 그 때쯤 본국도 움직이기 시작해야 할거야." "그렇다면 언제쯤이 좋겠사옵니까?" "일단 코린트가 참전한 후에 계획을 세워 나가도 늦지 않을 거야. 물론 코린트가 참전하기 전에 몬스터가 지리멸렬할 정도라면 본국이 참여해 도 얻어낼 것은 없지 않겠나? 그들 스스로도 막아낼 수 있을 테니 본국 이 도와주는 대가로 무엇을 얻어낼 수 있겠나?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야, 그러면서 계속적으로 힘을 비축하는 것이 좋겠지."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블리스가 보고를 끝내고 나간 후 미네르바는 포도주를 한 잔 따라 천천히 향을 음미하면서 말했다. "자, 로체스터 공작. 그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墨 닭대가리 아르티어스 香 "저.... 아버지!" 무려 일주일에 걸쳐 설교라고 하기보다는 신세 한탄에 가까운 주절거림을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설교를 듣고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아까웠던 것이다 "왜? 내가 틀린 말을 했냐?" 그러면서 슬그머니 올라가는 아르티엔의 주먹을 힐끗 쳐다보고,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말했다. "그건 아니구요." "그럼 뭐냐?" "며칠 동안 저에게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목은 안 마르세요? 아버지를 위해서 아주 좋은 포도주를 장만해 뒀습니다." 아르티엔은 갑자기 자신에게 웃는 낮짝을 보이며 포도주를 권하는 아들놈을 향해 수상쩍은 시선으로 빈정거렸다. "호오, 그래? 없던 효성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닐테고.... 너 같은 닭대가 리가 왠일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냐?" 닭대가리라는 말은 아르티어스가 아르티엔에게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으면서 마법을 배울 때 불렸었던 별칭이었다.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가 마법을 배우는 속도가 자신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자 닭대가리라며 엄청난 구박과 박해를 가했었다. 아르티어스의 그 삐뚤어진 성격도 알고 보면 다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아르티어스가 마법 배우는 속도는 결코 딴 헤즐링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딴 헤즐링보다 월등하게 뛰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태껏 다른 헤즐링이 마법을 배우는 것을 보지 못했던 아르티엔의 기대치에는 엄청나게 못 미쳤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아르티엔은 모든 것은 무시하고 마법만을 마스터한 좀 이상한 드래곤이었고, 또 마법에 있어서 아르티엔을 따라갈 수 있는 드래곤은 극히 드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아르티엔은 자신의 어렸을적 기억을 되살리면 자신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이 덜 떨어지는 아들놈을 게으름을 부린다며 무지막지하게 닦달했었다. 그것이 오랜 세월 계속된 부자간 불화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우이씨, 닭대가리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여태껏 그런대로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얼굴색이 변해서 따지고 들자 아르티엔은 슬그머니 후퇴했다. "그랬었나? 이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역시 늙으면 죽어야 한다니까" 얼렁뚱땅 말끝을 흐리는 아르티엔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드래곤, 그것도 4천 살이 넘은 드래곤의 별명으로 닭대가리는 좀 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일 뿐, 아직까지도 아르티엔의 눈에 아르티어스는 말썽꾸러기 헤즐링을 못 벗어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쳇! 그렇게 기억이 가물가물하는 양반이 4천년 전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기억해?‘ 하지만 그것을 입으로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르티어스는 아부성 짙은 미소를 얼굴 가득 뿜어내며 공손히 말했다. "저도 이제 에인션트 드래곤이 다 되어 간다구요, 예전의 제가 아니란 말 입니다." 아르티어스가 아무리 자신의 나이를 강조해도 아르티엔의 눈에 비치는 그는 말썽꾸러기 헤즐링일 뿐이었다. 그것도 철이 들려면 한참 먼..... 그렇기에 아르티엔은 의심스런 눈길을 던지면서 투덜거렸다. "그건 그렇고, 왠일로 내 생각을 다 해주느냐? 오래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구나."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정색을 하고는 섭섭한 듯 말했다. 그의 표정과 어투로 봤을 때 이 세상에 ‘불효자식‘이라는 단어는 절대로 존재 할 수가 없다는 불굴위 의지를 드너내고 있었다.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누가 뭐래도 저는 아버님의 하나뿐인 자식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어느 아들이 아버지 생각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 생각을 해준다는 놈이 분가한 후 코빼기도 안 보였나? 무려 3천년 하고도......" 또 다시 지겨운 설교가 시작될 순간이었기에,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손을 가로저으며 말을 막았다. "그건 오해십니다요, 몇 번이나 찾아뵙고 싶었지만. 여태껏 아버님의 명성 에 누만 끼쳐 드렸기에 솔직히 찾아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대신 아버님과 만났을 때를 위해서, 좋아하시는 포도주를, 언젠가는 대접해 드려야지 하 는 생각에 미리 구입해뒀었죠." 사실은 아르티엔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 그 자체가 싫었기에 가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만큼 아르티엔과 얽혀 있는 기억은 부자간이 아니라 사제제간보다도 더한 강압적인 교육을 하려는 부친과 그것에서 해방되려는 아들 간의 어긋난 시련의 역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부친의 마수(魔手)에 떨어져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 아닌가? 아르티어스는 여태껏 별로 쓰지도 않던 ‘아버님‘이란 말을 계속 집어 넣으며 슬쩍 입에 발린 말로 아르티엔을 설득했다. 아르티엔은 포도주를 매우 좋아했기에 그 정도 사탕발림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랬냐? 오오, 며칠동안 설교가 아주 큰 효과가 있었구나. 네 녀석이 그 런 생각까지 다 하게 만들어 준 것을 보면 말이다. 좋다. 목도 컬컬한데 한잔 하면서 부자간의 오붓한 대화를 이어 나가기로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행여나 포도주 가지러 가는 척하면서 도망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것이 좋을게다." "제 머리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구요. 어떻게 아버님을 앞에 두고 감히 도망칠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르티어스는 변명을 늘어놓은 후 레어 안을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뛰어 창고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창고 구석구석을 뒤져서 오래 전에 숨겨뒀던 것을 찾아냈다. 그가 꺼낸 병에는 핏빛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전에 미네르바가 그에게 뇌물로 바쳤던 최고급 포도주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병이었다. 아들놈이 행여라도 훔쳐 먹을까 봐 레어까지 들고 와서 창고 깊숙이 감춰 두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 정도로 아르티어스가 아끼던 것이었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대어를 낚기 위해서는 미끼의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또다시 아르티어스는 창고 구석을 이리저리 뒤져서 작은 스위치 하나를 찾아 눌렀다. 그러자 벽이 스르릉 열리면서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것에는 수천 개도 넘는 작은 병들이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그 병들 중에서도 ‘독약‘이라고 씌어진 곳에 놓여 있는 병들을 유심히 살피면서 찾다가 그중 하나를 꺼내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늘게 떨리는 그의 손이었다. 아르티어스의 손은 그 독약병을 잡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하다가 기나긴 한숨소리와 함께 멀어져 갔다. 아무리 아버지를 싫어하는 아르티어스라고 하더라도 그를 독살하는 것만은 도저히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제기랄!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아버지니까 할 수 없잖아." 다시 아르티어스의 눈길이 뒤지기 시작한 곳은 ‘수면제‘ 쪽이었다. "가능한 한, 아주 강력한 놈으로....." 아르티어스가 이리저리 뒤지다가 선택한 작은 푸른색 약병, 단 한 방울이면 코끼리까지 한 달 동안 잠재울 수 있는 최강의 수면제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약병 밑에 써져 있는 주의사항처럼 그 약의 효력만큼이나 부작용이었다. 이 약은 약의 안정성은 아예 무시한 채 효력만을 중시해서 만든 것이기에 부작용이 심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방금 전 독약병을 집으려고 하면서 망설인 것과는 달리 매우 과감하게 그 병을 집어 들었다. 직접 독약을 사용해서 살해하는 것은 차마 못할 노릇이겠지만, 그 약의 부작용 때문에 죽은 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고 자위할 여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조심조심 포도주병의 마개를 뽑은 후 그 약병을 조심스럽게 살짝 기울여 한 방울 집어넣었다. 지금 그에게는 아들을 구해야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설혹 재수가 없어서 아버지가 부작용 때문에 사망한다고 해도 아르티어스는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주 오래 장수를 누렸기에. 이제 더 이상 산다는 것에 대해 미련이 없으실 것이 분명했다. 뭐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자라온 환경상 효심(孝心)이라는 것에 대해서 교육받은 적이 전무한 이 아들놈은 그럴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수면제가 든 병을 처음 놓여 있던 곳에 집어넣으려다가 다시 꺼내어 한 방울을 더 추가했다. 아무래도 한 방울로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만큼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은 더욱 증가하겠지만.... "여기 있습니다."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병과 투명한 술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아버지 앞에 다시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르티엔은 슬쩍 병을 보는 듯 가장하며 조심스럽게 포도주병의 밀봉 상태를 점검했다. 그러다가 병에 붙은 이름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이건 크루마 황실에거나 마신다는 ‘로얄 크루나‘가 아니냐?" "예, 아버님. 오래 전에 아버님 생각을 하며 구입해뒀습니다. 하지만 솔직 히 아버님께 가져다 드릴 염치가 없어서...." 아르티어스는 슬쩍 뒷말을 흐렸다. 더 이상 말을 하다가는 이 포도주를 포기해야만 하는 아쉬움이 목소리에 녹아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포도주는 아르티어스가 아끼고 아꼇던 것이었다. 아르티엔은 입맛을 다시며 포도주병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렇게 좋은 것을 구했으면 빨리 가져와야지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났냐? 혹시 엘프리안까지 날아가서 황제를 협박한 것은 아닐 테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나이가 있는데, 쪼잔하게 포도주 몇 병 구 하겠다고 그 수고를 하겠습니까?" "나도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네놈이 크루마 황궁에 모습을 드러내 뒤집 어 엎었다는 소문은 못 들었으니까 말이다." 아르티엔은 과거 아르티어스가 황금에 눈이 뒤집혀서 말토리오 산맥 인근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협박하여, 금은보화를 긁어들이던 시절을 슬쩍 꼬집어서 말한 것이었다. "아버님만 늙은 게 아니고 저도 늙었다구요. 어릴 때나 그런 데 돌아다니 지, 나이 들어서까지 그런 망령된 짓을 하겠습니까?" 아르티엔은 병에다가 무슨 장난을 쳐놓지 않았는지 세심하게 살펴봤다. 하지만 아주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는 것이 확실했다. 병의 겉만 봐가지고는 그 어떤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기에, 그는 아르티어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포도주 마개를 따며 투덜거렸다. "글쎄다, 하고도 남을 놈이니까 하는 말이지." 투덜거리면서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를 힐끔 쳐다봤다. 뭔가 기대에 가득 찬 눈빛. ‘아무래도 저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언제나 사고 치기 전에 꼭 저런 눈빛이었다. 그렇다고 아직 확증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귀중한 선물 공세를 펼치는 아들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르티엔은 슬며시 시치미를 떼고는 말했다. "나 혼자서만 마시기에는 너무 아까운 술이구나 자 너부터 한잔해라. 오 랜만의 부자 상봉을 축하하며 함께 한잔 하자꾸나." 역시나 아르티엔의 예상대로 아르티어스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떻게 제가 감히 아버님 앞에서 술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아버 님께 술주정 한번 했다가 쥐어터... 아니. 절대로 아버님 앞에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소중한 맹세를 어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흐음....." 당황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르티어스를 본 아르티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슬그머니 지었다. ‘역시 뭔가 못된 꾀가 숨어 있구먼....‘ 하지만 아르티엔은 짐짓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투덜거렸다. "여태껏 네녀석이 살아온 과정을 낱낱이 알고 있는 내 앞에서 감히 그딴 소리를 하다니....." "저도 개과천선했다구요, 그 동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아직도 과거사 에 얽매어 계십니까? 개과천선이라는 단어는 지금의 저를 위해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십니까?" "어디 보자....." 아르티엔은 애주가답게 포도주 잔을 집어들고는 향기를 맡는 척 했다. "오! 정말 향기롭군." 그러면서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반응을 살폈다. 아르티어스는 그런 줄도 모르고 활짝 미소 지으며 맞장구 쳤다. "그렇죠? 헤헤... 자, 목도 마르실 텐데 한잔 쭈욱 들이켜십시오."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기대 어린 눈길을 받으며 포도주를 조금씩 음미하면서 한잔을 다 마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뜬 채 목에 손을 갖다 대며 숨이 꽉 막히는 듯 버둥거렸다. "으윽! 큭큭....." 역시 수면제의 효력은 대단했다. 에인션트 드래곤에게 해독의 주문하나 외울 시간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뭔가 이상을 깨닫고 발버둥을 치고 있기는 하지만 곧이어 아버지가 깊은 수면에 빠질 것이라고 확신한 아르티어스는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다. "거기 누워서 한 달 정도 푹 쉬십쇼. 그때쯤엔 일이 끝났을 테니까요. 설 혹, 부작용 때문에 돌아가셨다면 시신은 나중에 돌아와서 후하게 장사지 내 드립죠. 그럼 저는 이만 바빠서..... 헤헤헤." 아르티어스는 지긋지긋했던 아버지와의 이별을 기뻐하느라 미쳐 아르티엔이 쓰러지는 순간에 보이는 행동에서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르티어스는 절대로 독약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냥 슬그머니 잠들어야 정상인데. 왜 큭큭거리면서 꼭 독에 중독된 듯 버드럭거리다가 잠잠해졌단 말인가? 서둘러서 아르티어스가 내빼고 난 후 쓰러졌던 아르티엔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어쭈! 뭔가 이상해서 중독된 척했더니 나보고 여기서 한 달 동안 퍼질러 서 자라고? 그렇다면 그 지독한 록사나의 뿌리를 주원료로 만든 수면제 를 썼다는 소리구먼 사망률 40퍼센트가 넘는 수면제를 나한테 먹여? 이 런 망할 녀석!" 아르티엔은 투덜거리다가 ‘우욱‘ 하면서 붉은 덩어리를 토해냈다. 그것은 마나의 막에 싸여진 방금 전에 마셨던 로얄 크루나였다. 완벽하게 마나의 막에 둘러싸였기에 단 한 방울도 그의 체내에 흡수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티엔은 허공에 둥둥 떠있는 그 붉은 덩어리를 버리려다가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고는 손짓을 해서 다시 병속에 담았다. 그런 다음 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품 속에서 끄집어낸 것은 작은 약병이었다. 아르티엔은 그 안에 들어 있던 액체를 마나를 이용해서 조금만 꺼냈다. 푸른색 투명한 액체의 자그마한 방울이 진주 알갱이처럼 병 위로 천천히 떠올랐다. 아르티엔은 그 약병을 밀봉해서 다시 품속에 집어넣은 후 손가락을 그 액체 방울 쪽으로 향했다. 아르티엔의 손가락 끝에서 휘황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반대로 푸른색의 액체는 점차 붉은빛을 띄기 시작했다. "흐흐흣! 원료만 짐작할 수 있다면 그깟 해독약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지." 아르티엔이 손을 뻗자 아직까지도 공중에 떠 있던 자그마한 붉은빛 액체 덩어리는 빠르게 움직여서 포도주 병 속으로 퐁당 들어가 버렸다. 아르티엔은 살며시 포도주 병을 흔들어서 해독약이 섞이도록 한 후 다시금 포도주를 잔에 따랐다. 아르티엔은 포도주의 그 영롱한 붉은빛을 바라보며 자조하듯 말했다. "젠장, 아들놈이 준 최초의 선물을 그냥 버릴 수는 없잖아." 이제는 눈치 볼 것이 없이 향을 음미한 후 천천히 포도주를 마셨다. "정말 좋은 포도주로군 동기가 좀 불순한 것을 제외한다면 나무랄 데 없 는 첫 선물이야." 뭔가에 홀린 듯 또다시 한 잔을 더 따르며 아르티엔은 말했다. "무턱대고 마법 교육만 시켰더니 드래곤으로서 꼭 가져야만 하는 품성과 성격 교육을 안 시켰더니 결과가 이 모양으로 나타나는구먼. 하지만 아 직 늦지 않았어. 죽기 전까지 저놈을 제대로 교육시켜 놓아야 하는 것 이 내 의무지.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아버지를 뵐 면목이 서지." 잔을 들어 훌쩍 입 속에 털어 넣은 후 아르티엔은 동굴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빨을 뿌드드득 갈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다시 동굴로 돌아와서는 술별을 집어 들고 품 속에 넣으면서 외쳤다. "네놈이 튀어 봤자 벼룩이지! 이번에 잡히기만 해봐라." 아르티엔은 바람과 같은 속도로 달려나갔다. 애비를 우습게 보는 놈은 어떤 꼴이 되는지 확실하게 알려준 후 다시금 설교를 시작할 작정으로..... 서둘러서 레어 밖으로 나온 아르티어스, 하지만 그는 마음만 급할 뿐 아직까지 어디로 갈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실버 드래곤을 찾아가야해. 그놈들이라면 나이아드에게 명령을 내 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러데 조금 만만하면서도 나이아드를 불러 낼 만한 놈이 누가 있지? 그러니까....." 아르티어스는 열심히 궁리를 했다. 너무 약한 놈이면 나이아드를 불러낼 만한 능력이 안될테고 너무 강한 놈이면 말을 안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최강의 종족인 실버 일족을 상대해야 하는 일인만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버 드래곤이 웜급에 이르면 그 파워는 에인션트급 그린 드래곤과 맞먹을 정도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아르티어스 옹이라도 자연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실버 일족은 해양에서 살아가는 만큼 그 덩치와 파워는 육상의 드래곤과 차원이 달리할 만큼 컸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뒤에서 소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 섯거라!" "이런 빌어먹을! 잠든 것이 아니었군"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소녀 아르티엔이었다. 그것을 본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아르티어스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순순히 붙잡히느니 반항을 해보기로 작정했다. 마법으로 따진다면 자신은 절대로 아버지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여태껏 수많은 골드 드래곤들이 태어나고 또 죽었지만 아르티엔만큼 마법에 깊숙이 파고든 드래곤은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상대로 마법으로 승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 많음을 과시하는 것이 아닌가? 싸움이라는 것은 자신의 강점으로 승부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아르티엔의 약점은 몸싸움일 것이다. 아르티엔은 여태껏 줄곧 마법에만 매진해온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싸우기로 작정한 후 아르티어스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나오며 그 빛의 크기는 엄청나게 커져 가기 시작했다. 그는 마법으로는 상대가 안 됨을 진작부터 깨닫고 현신을 한 상태로 육박전을 전개하기로 작심했다. "어쭈? 너 간덩이가 부었냐? 감히 애비한테 반항할 망상을 하는 것을 보 면....." <어디 누가 죽나, 해보자구요.> "맨날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나한테 닭대가리라는 소리를 듣는 거얏!"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르티엔의 몸은 빠른 속도로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르티엔의 손에서 수십 가닥의 은빛 광선이 뻗어 나갔다. 아들 놈의 현신이 끝나기 전에 감행하는 기습 공격이었다. 콰콰콰쾅! 요란한 소음이 울리며 아르티어스의 주위에 엄청난 흙먼지가 뿜어져 올라왔다. 아르티어스가 그먼지 구덩이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을 때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낭패스러운 몰골이었다. 군데군데 상처를 조금 입기는 했지만 뭐 자신의 예상보다는 피해가 작은 편이었다. 이정도면 해볼만했던 것이다. ‘현신한 나를 상대하려면 당신 또한 현신할 수 밖에 없을 테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 손으로 장사지내 드리죠. 흐흐흐.‘ 이제 왠만한 마법 따위는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는 꼬리를 슬슬 흔들며 여유만만하게 서서 까마들히 높은 하늘 위에 자리 잡고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아르티엔을 놀봤다. 서로간의 거리는 1킬로미터가 조금 더 넘는 아주 먼 거리였다. 하지만 골드 드래곤의 밝은 눈에는 상대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다 보였다. 여유로운 미소가 마름에 들지 않는 아르티어스였다. 아직까지 아버지는 본체로 현신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본체로 현신하는 그 찰나는 완벽한 무방비의 대단히 위험한 순간이었기에 아르티엔이 아르티어스의 눈앞에서 현신하는 위험을 자초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전체적인 전력상으로 미루어 봤을 때 아르티엔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이 아르티어스가 가지고 있는 상식이었다. 그런데도 왜 저렇게 여유만만한 것일까? 겨우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가 가져다 주는 시간 여유는 몇 초도 되지도 않는다. 겨우 그 몇초의 시간 여유로 에인션트급에 근접하는 아르티어스의 브래스를 막을 만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을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용언마법을 사용한다면 시간 여유는 충분하겠지만 위력에 문제가 있을 테고 마법은 주위의 마나를 응집하고 압축할 시간 여유가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여유만만한 미소가 아르티어스를 헷갈리게 하기 위한 속임수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는 골드 일족 최강이라 불리는 드래곤이다. 그런만큼 아르티어스가 알지 못하는 뭔가를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죽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르티어스는 뭔가 단안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쪽으로 내려오시죠! 왜, 겁나십니까?> 슬그머니 도발을 가하는 아르티어스 하지만 아르티엔은 거기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러는 네놈이나 올라오려무나." 드래곤이 날아올랐을 때의 그 커다란 날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아르티어스 자신도 그 점을 이용해서 드래곤 여럿 잡지 않았는가? 그것을 잘 알면서 하늘 위로 따라 올라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헤헤헷! 세상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겁나 십니까? 아버지는 골드 일족중에서 가장 뛰어나신 분이지만, 아무래도 배짱은 그 정도가 안 되는 모양이죠?> 아르티어스의 말에 아르티엔의 얼굴이 시뻘겋게 바뀌었다. "저런 때려 죽일 놈을 봤나!" 노기를 터뜨리는 아르티엔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조금만 더 도발하면 열받아서 내려올 거야 그러면 킥킥킥, 이 손으 로.....‘ <어중간한 마법 따위는 거기서 날려봐야 본체로 돌아간 나한테 그 어떤 타격도 주기 어렵자는 것을 잘 아시죠? 어때요? 여기 내려와서 한 판 해보실 배짱이 있으십니까? 맨날 닭대가리라고 놀려댄 아들하고 한 판 해보실 배짱이 있으시냐구요?> 으드드득! 아르티엔은 분노를 참지 못해 이빨을 갈아댔다. 하지만 아르티엔은 아래쪽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것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점점 확신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그 미소는 속임수였다는 것을 말이다. 만약 그만큼 자신이 있다면 이리로 내려와서 싸워도 될 것이 아닌가? 아르티어스가 어떤 방식으로 아르티엔을 공격할까 궁리하는 중에 아르티엔이 선수를 쳐왔다. 아르티엔은 저 아래서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거대한 골드 드래곤을 향해 한쪽 손을 슬쩍 들어 가리켰다. 그 와 동시에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는데도 아르티엔의 주위에 파동 치는 엄청난 마나의 기운에 따라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사방에서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아르티어스의 눈가가 슬쩍 찌푸려졌다. ‘마법인가? 아마도 그렇다면 8내지 9싸이클급?‘ 그러다가 왜곡이 생기고 자신의 주위가 뭔가 이상한 마법진의 의해 공간의 왜곡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것은?‘ 그 공간의 왜곡은 엄청난 마법이 터졌을 때 그 여파가 딴 곳으로 퍼지지 않도록 한정시키는 오브젝트 리머테이션(Object Limitation: 목표 제한) 마법을 사용했을 때 그 여파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좁은 공간만을 그 목표로 했을때는 왜곡의 정도가 미미했기에 눈치채기 어렵지만. 아르티엔은 엄청나게 넓은 지역에 걸쳐 그 마법을 썼기에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처럼 무턱대고 마법을 남발하는 유형의 드래곤이 아니었다. 꼭 필요한 상대만을 철저히 파멸시킨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에는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마법 컨트롤이 뛰어난 것을 다른 드래곤에게 과시하는 것이다. 공간 왜곡이 이토록 광범위하다면 아르티엔이 사용하려는 마법의 위력이 결코 약한 것일 수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르티엔은 마법으로 자신에게 반항하는 아들놈을 반쯤 죽여 놓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죠. 옛날의 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르티어스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자신의 몸 속에 쌓여 있는 바람의 기운을 섞어 내뿜을 준비를 시작했다. 그에 따라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한껏 벌어진 입 속에서 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그것은 폭발적인 파괴력을 품고 하늘 높이 뿜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르티엔의 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선제공격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자랑하는 최강의 무기인 브래스로 말이다. "어엇? 브래스까지? 이녀석이 나를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약간 당황한 듯했던 아르티엔. 하지만 곧이어 그의 눈을 슬쩍 가늘어지며 살기가 가득한 어조로 외쳤다. 이렇게까지 아들놈이 막 나가기 시작하자 정말 열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냐, 그래! 한 번 죽어 봐랏!" 그와 동시에 아르티엔의 쭉 뻗은 손바닥 끝에서 엄청난 기운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아르티엔은 그 어떤 주문도 외우지 않았는데도 단시간 안에 엄청난 마나를 사방에서 끌어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엔은 마법이 막 완성되기 직전, 욕설을 내뱉으며 주문을 해제해 버렸다. 차마 아들놈에게 그 마법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식이라는 것이 뭔지..... "젠장!" 주문을 해제한다고 해서 뭉쳐진 마나가 순순히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일단 마법 사용을 위해 인위적으로 뭉쳐진 마나들은 처음 끌어 모았을 때의 역순으로 차근차근 흩어 버려야 했다. 안 그러면 스스로 폭주하면서 대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르티엔이 마나를 되돌리는 그 순간, 이미 아르티어스가 내뿜은 브래스는 아르티엔의 지척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르티엔은 황급히 용언마법을 사용하여 공간 이동을 했다. 아르티엔이 공간 이동을 한 그 순간, 그의 통제력을 잃은 마나의 덩어리는 대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이어 그 폭발 지점 위를 아르티어스의 브레스가 쓸고 지나갔다. <히히힛! 드디어 해방인가?> 저 정도라면 최소한 사망 아니면 중상일 거라고 희희낙락하면 아르티어스가 통쾌하게 미소 짓는 것도 몇 초 되지 못했다. 그는 곧이어 자신의 브래스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신을 노려보며 떠 있는 아르티엔을 발견한 것이다. ‘젠장! 그 짧은 순간에 공간 이동한 것인가? 삶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 시군. 저 정도의 기동력이라면 브래스는 거의 무의미하다고 봐야 하잖아.‘ 그때부터 시작하여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강력한 마법을 아르티엔에게 퍼부었다. 브래스를 또 쓸 수 있었지만 이렇게 거리가 벌어져 있는 이상 상대가 또 다시 공간 이동할 가능성도 있었다. 앞으로 전력으로 뿜어낼 수 있는 브래스는 겨우 두 번, 강적을 앞에 두고 그걸 헛되게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이 닭대가리 녀석아 지금 당장 레어로 돌아간다면 방금 전까지 대든 것 을 용서해 주겠다. 안 그러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아르티어스가 자신만만하게 따지고 들자 아르티엔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 아예 겁을 상실한 모양이구나" <그럴지도 모르죠. 아버지도 제 처지가 되어 보시라구요. 눈에 뭐가 보이 는지.> 그 다음부터 시작된 것은 아르티어스의 처절하다고 할 만큼의 ‘발악‘이었다 상대는 하늘 높이 자리잡고 있으니 몸싸움을 벌일 수도 없고 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에 브래스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마법뿐인데 이 세계에서 아르티엔과 마법으로 맞장떠서 이길 드래곤이 과연 몇 마리나 될까? 물론 이 수치도 아르티엔은 드래곤이 아닌 뭔가 다른 생명체로 트랜스포메이션하고 있고 상대방은 마법을 쓰기에 매우 유리한 드래곤의 몸체를 유지한 상태라는 단서가 붙어야만 손가락이 몇 개 정도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아르티엔의 마법 실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자신을 낳은 아비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아르티어스. 왠만한 공격은 막거나 맞받아치고 아주 강력한 공격을 날리면 살짝 피해서는 카운터를 날리는 아르티엔 처음부터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마지막 한 방울의 마나가 남을 때까지 악착스럽게 공격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치티어스를 바라보는 아르티엔의 눈은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헤즐링 때야 닭대가리라고 구박하며 처절할 정도로 마법수행을 시킨 것도 사실이었지만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가 목숨을 걸고 달려들고 있는 지금에서야 자신이 낳은 아들의 진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들놈이 헤즐링일 때야 비교 대상이 없어서 그렇게 구박했다고 하지만 4천 살이 넘은 드래곤들을 수도 없이 만나 본 아르티엔이었다. 그 많은 드래곤들과 비교해봤을 때 자신이 낳은 아들의 실력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흐흐흐.... 성격이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실력 하나는 제대로 쌓았구나. 마법을 통한 실전경험이 좀 떨러지는 것이 흠이다만 저 정도면 내 자 식으로서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다고 봐야 하겠지?‘ 뿌듯한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르티엔과 달리 아르티어스의 눈동자는 점점 절망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써도 또 브래스를 써도 그의 아버지는 태산과 같이 자신의 앞을 당당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서로 간에 실력 차가 너무 심하게 난다는 것을 깨다든 순간 아르티어스는 완전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력한 마법의 주문을 쏘아대면서도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절망이 라는 이름의...... <크흐흐흑!> 아르티어스가 더 이상 허무하기 그지없는 공격을 포기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는 그 순간, 방금 전에 모아 뒀다가 아직 뿜어내지 못한 마법의 기운이 폭주하면서 대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튼튼한 드래곤의 외갑(外甲)을 뚫지는 못한 채 여기저기 자그마한 상처만이 만들었을 뿐이다. 갑작스런 아들의 행동을 보고 아르티엔이 오히려 당황했다. "어라? 저 녀석이 왜 저래?" 하지만 아르티엔은 호기심 어린 시선만을 던지고 있을 뿐, 드래곤으로 현신해 있는 아들의 주위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저놈이 또 무슨 나쁜 꾀를 부려서 자신을 꼬시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흐어어어엉~, 내 아들 죽는다. 그런데도 나는 애비가 되어 가지고 도와 주러 가지도 못하다니... 엉엉~.> 산만한 덩치의 골드 드래곤으로 현신한 채 사발만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부짖는 모습은 그것이 과연 지상 최강의 존재인지 의심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당한 표정으로 아들놈의 짓거리를 보고 있던 아르티엔은, 그 절규하는 목소리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이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아르티엔, 낮은 듯한 목소리였지만, 도대체 그 목소리 안에 얼마나 많은 마나를 실어서 뿜어 내었는지 아르티어스는 주위의 공기가 요동친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게 절망감을 안겨 줬을 정도로 강한 아버지..... 하지만 그 아버지는 자신과 싸우면서 본래 실력의 십분의 일도 발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방금 내뱉은 목소리로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르티어스에게 더더욱 깊은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하나뿐인 내 아들이... 아들이, 흐흑! 그 어리고 나약한 것이 지금 어디 서 무슨 일을 당하고나 있지 않은지..., 엉엉엉.....> 이성을 잃고 울음을 터뜨려 대는 아르티어스를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아르티엔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이라 그리고 어리고 나약하다고? 그렇다면 헤즐링... 헤즐링 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저놈이 알을 낳았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는데.....‘ 아르티엔은 힐끗 아르티어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저것이 또 무슨 못된 꾀를 부리는 것은 아닌가 가늠해 봤다 하지만 퍼질러 앉아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저 꼴사나운 모습 평소에 아들 놈의 그 오만 방자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아르티엔으로서는 단 한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아들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듯한 저 모습.... 그것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연극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기야 알은 혼자서도 낳을 수 있지. 그렇지 저 녀석은 요 근래 사고도 안치고 레어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었잖아? 그 동안에 몰래 알을 낳아서 키운 것일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티엔의 얼굴은 점점 희미한 미소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의 아들이라면 자신에게는 손자가 아닌가? "하하하, 손자를 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늘... 하하하 핫!" 혼자서 북 치고 장구까지 친 후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 아들이 어찌 되었다는 말이냐? 응?" <아들놈이 행방불명되었단 말입니다. 엉엉~. 그 나약한 것이 지금 무슨 꼴을 당하고나 있을지, 흑흑흑!> "나약하다고? 설마 그렇다면 헤즐링이라는 말이냐? 한동안 조용하다더니 너는 그 동안 헤즐링을 키우고 있었단 말이냐?"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아르티어스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원래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다크를 헤즐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에게 헤즈링이라고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나중에 다크를 찾은 후에 어떤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호비트를 양자로 삼은 것이라고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오직 강함을 추구하는 아르티엔에게 호비트 양자라는 것은 씨도 안 먹힐 것이 뻔했자. 오히려 다크를 찾는 것은 악착같이 방해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는 두루뭉실하게 대답을 회피했다. 그냥 ‘나약하다‘는 말과 함께 ‘아들‘이라고만 말하며 울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해놔야 나중에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테니까. "헤즐링이 납치되었다면 그건 중대한 사건이다. 왜 좀더 일찍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느냐?" <흑흑 저는 제 힘으로 찾을 수 있을 줄 알고.......> "이런 망할 녀석 갑자기 네놈이 왜 이웃 드래곤들까지 찾아가서 난리를 피워댔나 했더니 그 때문이었구나 그런 일이 있었다면 빨리빨리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니냐? 이런 미련한 녀석! 그러니까 닭대가리라는 소리 를 듣지!" 아르티엔이 슬쩍 손을 흔들다 대기가 요동치며 엄청나게 강한 공기의 흐름이 아르티어스의 머리통을 직격했다. 꽝! <으갸갸갹!> 그 공기의 흐름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드래곤으로 현신해 있는 아르티어스의 머리통이 수직으로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속도로 보아 어느정도의 충격이 가해졌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마법을 이용해 아르티어스의 머리통을 갈긴 후 아르티엔은 저 맑은 하늘 쪽으로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시선을 돌렸다. "허허허. 내가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이냐? 허허. 저놈 하는 꼴을 봐서는 절대로 손자 같은 것은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르티엔과는 달리, 아르티어스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그 긴 목을 아래쪽으로 한껏 끄집어 내려 작은 손으로 머리통을 감싸 쥐고는 주물러 대고 있었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손자를 만나 봐야겠다. 그 녀석의 특징부터 소상하 게 말해라. 광범위 수색 마법을 통해서 그 목표를 찾아낸 후 곧장 공간 이동하면 끝날 일이 아니냐?"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제가 왜 이웃 영토까지 침범하면서 난리를 쳤겠 습니까? 아무래도 뭔가 결계 같은 것을 쳤는지 도저히 위치를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한번 시도는 해보는 것이 좋겠지 네녀석과 나는 방금 당해 봐서 알다시피 레벨이 틀리지 않느냐?" <그러실 게 아니라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마지막에 써먹으려고 생각했던 건데요.> "뭔데?" <아들 녀석이 전에 나이아드 하고 관계를 맺은 적이 있거든요 그러니 정 령왕 나이아드를 불러내어 행방을 물어보면 가르쳐 줄겁니다.> 순간 아르티엔의 눈이 살짝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면서 가늘어졌다. "오호라, 나이아드라고? 그렇다면 너 혼자서 자가 수정한 것이 아니라 혹 시 실버드래곤하고? 누구냐 그놈 이름이?"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발끈하며 외쳤다. <누가 실버 드래곤 따위하고 거시기를 해서 애를 만든다는 말입니까? 그 게 아니라 아쿠아 롤러 때문에 맺어진 인연이었죠.> "그래? 그렇다면 아쿠아 롤러는 어디있냐? 그걸 이용한다면 간단히 나이아 드를 불러낼수 있을 것 아니냐? 아무리 마법 실력이 막강한 아르티엔이라고 해도 종족의 특성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그건 마법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드래곤의 특성과 관계되는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나이아드는 아들 녀석을 아주 미워한 단 말입니다. 아쿠아롤러를 통해 나이아드를 불러내봤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구요.> "그건 또 왜? 정령왕이 헤즐링을 미워한단 말이냐?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려고 하기 시작하는 아르티엔을 향해 아르티어스는 당황해서 외쳤다. 여기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아들이 호비트라는 것이 발각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르티엔은 수색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도와주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서 호비트 따위를 양자로 삼은 행위는 가문의 수치라면서 오히려 다크 수색 작전을 방해할 우려마저도 있었다. <자세한 설명을 하려면 너무 복잡하단 말입니다. 그건 나중에 자세히 설 명해 드릴게요. 아무래도 나이아드에게 강제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실버 일족뿐이잖습니까? 실버를 한 마리 족쳐서 나이아드를 불러 내어 알아보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손쉬운 길이라니까요.> "흐음 실버를 한 마리 족쳐야 한단 말이지?" <예.> 잠시 궁리하던 아르티엔,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그 ‘먼저 저지른 후에 생각하는‘ 성격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아르티엔의 표정이 갑작스레 음흉하게 변한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래, 어떤 녀석을 족치면 되는 거냐?" 墨 실버 드래곤의 레어는 하렘 香 "여깁니다" 아르티어스가 아르티엔을 안내한 곳은 꼭 낙타처럼 두 개의 작은 언덕을 가지고 있는 크라세 섬이었다. "흐음....." "크라세 섬에 쥬브로에타라는 웜급 실버 드래곤이 살고 있다고 언젠가 들 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놈도 혼자 사는 것을 어지간히 좋아하는지 기척 을 숨기고 있지만요. 느껴지지는 않지만 여기서 사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아르티엔이 갑자기 말했다. "흐음, 바로 저쪽이로군. 가자." 아르티어스조차 알아내지 못했던 쥬브로에타의 기척을 아르티엔은 아주 손쉽게 발견한 것이다. 아르티엔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아르티어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쪽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허락도 없이 레어까지 들어가면 누가 봐도 명백한 불법 침입인데요." "지금 그런 거 따질 때냐? 헤즐링에 관계된 일인데." "그거야, 그렇지만....." 막상 아르티엔이 앞장서서 설치기 시작하자 아르티어스는 간이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르티엔의 말은 맞았다. 헤즐링을 찾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찾고 있는 아들은 헤즐링이 아니지 않은가? 둘은 섬에 솟아 있는 두 개의 야트막한 산들 중에서 북쪽에 있는 산 쪽으로 날아갔다. 이윽고 그들의 시야에 그 산의 경사면에 박혀 있는 커다란 바위가 보이자 급격히 고도를 낮춰 바위 앞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바로 이 바위가 쥬브로에타의 레어로 들어가는 출입문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바위 위에다가 손을 올려서 탐지를 해본 후 말했다. "아주 강력한 마법진이군요. 손쉽게 뚫기는 힘들 것 같으니 여기서 기다 리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르티엔은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제법이군. 아주 결계를 잘 쳐놨어. 외부와의 교류를 아예 끊고, 혼자서 꽁꽁 숨어서 지내고 싶은 모양이지?" 말뜻과는 달리 별로 감탄스러울 것도 없다는 어조로 아르티엔이 중얼거렸다.그런 다음 자신의 앞쪽에 있는 바위 위에다가 손을 올렸다. 아르티엔의 손이 밝게 빛나는 순간 옆에서 보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기겁을 해서 외쳤다. "출입구를 박살내면, 이건 완전히 변명의 여지가 없다구욧! 정신이 있으십 니까? 없으....."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예상과는 달리 대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 거대한 바위가 통째로 슬며시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그들의 20여 미터 뒤쪽에서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그 짧은 순간에 방어 마법을 무력화시킨 후에 문짝을 아예 옮 겨 버리다니....‘ "누가 네녀석 같은 줄 아냐? 가능한 한 평화롭게 해결해야지. 일단 말로 해보고, 그것이 안 통하면!" 아르티엔은 슬그머니 주먹을 한 번 쥐는 것으로 그 뒷말을 대신했다. 그런 다음 바위가 사라지고 나서 드러난 기나긴 통로를 턱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자, 가자." "예." 레어의 복도는 매우 길었다. 꼬불꼬불 아래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복도는 아예 빛이라고는 한 점도 새들어 오지 않는 암흑의 세계였다. 아르티어스는 자그마한 빛의 덩어리를 마법으로 만들어 내어 앞을 비췄다. 드래곤의 본체라면 이런 것 없이도 잘 보이겠지만. 호비트로 변신해 있는 상황이었기에 앞을 보려면 빛이 필요했던 것이다. "매우 특이한 구조군요. 중앙 홀이 나와도 벌써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헤어의 복도를 이렇게 길게 만들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왜 이렇게 복도가 좁지요? 이 정도라면 호비트나 엘프로 변신한다면 모를까, 오우거 정도 크기로만 변신해도 통과한다는 것은 어 림도 없지 어림도 없지 않습니까?" "글쎄다. 실버 일족은 바다를 좋아하니까, 어쩌면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것은 육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샛길일 가능성도 있겠지. 진짜 통로는 아 마도 바다 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중앙 홀 또한 그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겠지." "으음,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생긴 것도 완전히 다른 것들이, 자기들끼 리 따로 노니까 만날 기회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도 잘 모를 정도라면 왠만한 드래곤들은 아예....." "대충 다 온 것 같구나." 드디어 튼튼해 보이는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르티어스는 문을 슬그머니 밀면서 말했다. "설마, 또다시 계단이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겠죠?" 문일 열리면서 안쪽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여태껏 짙은 암흑의 공간을 통과해 온 탓인지. 눈이 쓰라릴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어라라?" 실내의 정경을 바라본 아르티어스는 순간, 자신이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반나체에 가까운 암컷 호비트들이 이러저리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보통 드래곤은 혼자 산다. 설혹 분가하지 않은 자식과 함께 산다고 해도, 드래곤은 보통 자식을 하나만 낳기에 둘이 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저 많은 숫자는..... "이상한 곳으로 들어와 버렸네....." 바로 이때, 커다란 생선을 들고 가던 괴상하게 생긴 시커먼 놈 둘이 낯선 침입자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들고 있건 생선을 내동댕이치고는 삼지창을 겨누며 달려왔다. 두텁고 볼품없는 발은 꼭 거위의 발처럼 생겼기에, 헤엄치기는 어떤지 몰라도 걷기에는 아주 불편한 듯, 자기들은 달려왔는지 모르지만 아르티어스가 보기에는 뒤뚱뒤뚱하는 것이 자빠지지나 않을까 염려되었다. 가까이 다가오자, 시커멓게 생긴 이유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피부색이 시커먼 것이 아니라, 온몸에 윤기가 흐르는 짧은 털이 빽빽하게 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삼지창을 쥐고 있는 손가락들의 사이로 얇은 막도 보였다. "크르륵! 왠 놈들이냐?" 냄새를 맡을 필요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코는 구멍만 뚫려 있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매우 기묘한 소리로 ‘그것들‘은 외쳤다. "이것들은 또 뭐야?" "호오, 수인족이로구나." "원, 농담도..... 무슨 수인족이 저렇게 생겼어요??" "저것은 바다에서 사는 수인족이야, 아주 먼 바다에나 나가야 볼 수 있는 데. 여기에 있는 것을 보면 쥬브로에타의 레어가 맞기는 맞는 모양이군." "수인족이라면 아예 발이 없,이 그러니까 꼭 생선 지느러미 같은 것이 붙 은 놈들이 아닌가요?" "그건 완전히 바다에 적응한 놈들이고, 이놈들은 육지와 바다를 함께 오 갈 수 있는 놈들이야." "아아. 그렇군요." "네녀석들 주인에게 안내해라. 골드 드래곤 아르티엔이 왔다고 하면 알 거다." 드래곤이라는 말에 수인족들은 공손하게 그 둘을 안내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수인족이 안내해 간 방은 호화롭기 그지 없었다. 방은 온갖 값진 물건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서 가장 눈에 뛴 것은 상아와 진주로 장식된 다섯 명은 충분히 앉을 만큼 널찍한 의자였다. 손잡이와 밑판은 상아와 진주로 꾸며져 있었고, 그 위에 엉덩이와 등판이 닿을 곳은 새하얀 물개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의자의 우아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꺼비처럼 생겨먹은 수인족 녀석이 좌우에 아름다운 미녀를 끼고 앉아 있었다. 그놈은 그녀들이 권하는 포도주를 마시며 오만한 표정으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손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완전히 하램(HAREM)을 차려 놓고 있구먼, 나 원 참! 드래곤들 중 에서 이렇듯 괴상한 취향을 가진 놈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군." 원래가 육지에서 서식하는 드래곤들과 바다에서 서식하는 실버 일족은 별로 내왕이 없었다. 서식하는 환경부터 시작해서 그 생김새까지 서로가 완전히 달랐기에 자연히 그런 식으로 분리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쥬브로에타에게 ‘아르티엔‘ 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채 기억을 떠올리기도 전에 손님들이 실내로 도착해 버렸다. 예의 없게도 허락도 받지 않고 여기까지 침입해 온 주제에 자신의 취미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험담을 늘어놓다니..... 거기에다가 자신의 노리개 정도로나 취급하는 호비트로 변신하고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대의 취향에 경멸감까지 느끼는 쥬브로에타였다.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손님들이 도착했을 때 쥬브로에타의 머릿속에서 ‘아르티엔‘이라는 이름은 벌써 사라져 버렸다. 아니, 그러한 기억을 더듬을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다. 어린 암컷 호비트로 변신하고 있는 놈은 척 보아도 별로 대단할 것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그와 함께 온 저 붉은 머리의 수컷 호비트로 변신해 있는 놈은 제법 강해 보였다. 웜급은 오래전에 통과했고... 어쩌면 에인션트급이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골드 드래곤 주제에 그 정도의 실력으로 감히 쥬브로에타님 앞에서 목에 힘을 주다니 가소로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 꼬마로 변신해 있는 놈은 자신들의 주제 차악도 못하고 남의 취미생활에 대해서 비꼬아 대면서 헤즐링을 찾는다는 등 돼먹지 못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쥬브로에타는 아예 인사는 생략한 채 비꼬는 듯한 어조를 곁들여 시비조로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아르티엔 일행을 안내해 왔던 그 수인족과 비슷했지만, 울림이 훨씬 적었기에 알아듣기는 편했다. "이거 골드 일족의 두분께서 저의 보금자리까지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인가 요?" 꼬마 호비트로 변신해 있는 녀석이 쓱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리들은 헤즐링을 찾고 있네." "호오, 자식이 분가해 버린 이후로 나는 이곳에서 헤즐링은 커녕 도마뱀 한 마리도 못봤는데... 뭔가 잘못 찾아온 것 아닌가?" 그런대로 점잖은 어조로 타이른 쥬브로에타였지만, 상대는 아주 당차게 나왔다. 주제 파악도 못하고 말이다. "자네한테 직접 볼 일은 없고, 나이아드에게 볼 일이 있다네. 자네가 나이 아드를 불러 주겠나? 그리고 그 녀석이 내가 묻는 말에 착실하게 대답하 도록 자네가 옆에서 좀 도와주어야 할 거야" ‘자네‘라는 말에 쥬브로에타는 슬그머니 열이 더 받고 있었다. 척 보아도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는 것이, 옆에 있는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드래곤을 믿고 까불어? "흐음.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라..... 그를 불러들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 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예의 없이 순서와 절차를 생략한 방문 객에게까지 그런 수고를 해줄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뭣이라고?" 꼬마 호비트가 발끈해서 외치자, 옆에 있던 수컷 호비트가 슬그머니 그녀를 말리면서 말했다. "참으십시오, 여기서 사고 치면 안 된다니까요" "뭐야? 그럼 저런 싸가지 없는 녀석을 그냥 놔두라는 말이냐?" "하지만, 우리들은 부탁하러 온 입장 아닙니까?" "괜찮아. 적당히 손 좀 봐준 후에 부탁해도 늦지 않아." "그렇게 하시면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구요. 저도 아들 녀석 찾는다고 여 기저기 들쑤시고 다녀 가지고 모두들 삐딱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데, 아 버지마저도 그러시면 어쩝니까?" "그런 건 잘 알고 있지만, 저놈 하는 말이 괘씸하잖아 그리고 헤즐링을 찾는 일에는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어 안 되면 내가 용서가 되도록 만 들면 되지." 다부지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아르티엔 어르신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가만히 계십쇼. 제가 할게요. 아버지가 손 을 쓰면 사망 아니면 중상 아닙니까? 꼴에 실버니까 조금 힘들기는 하 겠지만, 처리하지 못할 상대는 아니라구요." 여기서 아르티엔까지 사고를 친다면 사태가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했기에. 아르티어스는 모든 일족들에게 ‘사고뭉치‘로 찍혀 있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헤즐링도 아닌 양자를 구출하는 사건이었기에, 자신이 실버 한 마리를 반쯤 죽여 놨다면 아버지가 방파제가 되어 줄 수 있겠지만, 아버지가 직접 손을 쓴다면 누가 방파제가 되어 준다는 말인가? 그것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아르티엔을 막아서며 자신이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모든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부여받은 실버 일족의 후예인 자신을 반쯤 죽여 놓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저 둘, 평상시에 어떤 딴 놈들이 저딴 소리를 했다면 즉각 두 팔과 한쪽 다리를 분질러 버린 후에 남아 있는 성한 발에 돌멩이를 달아서 바다에다가 전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쥬브로에타는 그런 말에 노기 따위를 느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에인션트급으로 봤던 수컷 호비트의 입에서 ‘아버지‘하는 단어가 튀어나온 바로 그때, 쥬브로에타는 기겁을 할 정도로 놀라 버렸던 것이다. 자신은 저 젊은 호비트 녀석의 몸에서 은근히 뿜어져 나오는 기척을 읽고 상대가 에인션트급 정도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녀석이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라면 저 꼬마 계집으로 변신하고 있는 드래곤의 수명은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쥬브로에타 정도나 되는 막강한 실버 드래곤의 이목을 완전히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기척을 감출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상대가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 아닌가? 순간, 쥬브로에타는 등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대충 흘려들었던 ‘아르티엔‘이라는 이름. 골드 드래곤들 중에서도 특이하게도 마법에 대한 연구를 미친 듯이 한 괴짜 드래곤의 이름이었다. 보통의 드래곤들이 그 처치 곤란할 정도로 기나긴 수명을 누리면서 시간 때우기를 위해서 별의별 취미생활을 즐기는 동안, 그 괴짜는 미친 듯이 마법만을 연구했다. 그에게는 마법만이 그 기나긴 생의 유일한 동반자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자의 파워는 너무나도 강대해서, 육상의 드래곤을 그야말로 도마뱀 정도로 취급하던 실버 일족의 수장인 쟈크레아마저도 그의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행동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거의 천 년쯤 전에 만나서 얘기를 나눴었던 쥬로미네는 인간 세상을 약간 돌아다녔던 실버 드래곤이었다. 아르티엔에 대한 가공할 만한 정보는 모두 그에게서 그 때 얻어들은 것이었다. 그 누구도 올라보지 못한 경지까지 마법을 완성시킨 위대한 드래곤이라는 휘황찬란한 수식어부터 시작해서 5백년쯤 전에 나타났던 어둠의 대마왕을 죽인 후 ‘대마왕 슬레이어‘라는 존경 어린 명칭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격은 그 망나니 아들 아르티어스와 유사할 정도로 개차반이라는 둥..... 그러면서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의 별의별 기행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웃음보를 터뜨리지 않았던가? 그 기억이 떠오르자마자. 여태까지 한껏 거드름을 피워대던 쥬브로에타는 자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비굴할 정도로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귀한 손님을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갑작스런 쥬브로에타의 태도 변화에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는 잠시 당황해서 바라봤다. ‘저놈이 갑자기 쥐약이라도 먹었나?‘ 그런 후 그는 아직까지도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두 소녀를 향해 꾸짖었다. "얼른 이 귀한 손님들을 자리에 모시지 않고 뭣들 하느냐? 그리고 너는 빨리 달려가서 내가 아끼던 포도주를 가져오너라. 그리고 파크들에게 말해서 성대하게 요리를 준비하라고 일러라. 어서 움직여!" 마지막 순간에 ‘아르티엔‘이라는 드래곤에 대한 공포스러운 소문들이 뇌리에 떠오르면서 목숨을 건진 쥬브로에타였다. 쥬브로에타는 자신들의 노예들을 동원해서 귀한 손님들을 위한 접대 준비를 손수 명령하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의 친구인 쥬로미네에게 감사했다. "어르신, 나이아드만 불러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 외에 더 도와드릴 것은 없습니까?" 갑자기 이렇듯 태도를 바꾸자. 아르티어스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에게 뭔가 또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는 그 순간, 아르티엔은 넉살 좋게도 여태까지 펄펄 날뒤던 것은 잊어버렸는지 옆에 앉은 소녀가 권하는 포도주를 한창 마시는 중이었다. "아버지, 우리가 지금 포도주 마시러 왔습니까?" "아, 참. 그렇구나. 하지만 워낙 좋은 포도주라서 말이야. 자네 아주 포도 주에 대한 취향이 뛰어나군, 그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어르신. 헤헤헤." 쥬브로에타는 장단에 맞춰 헤헤 거린후 말을 이었다. 확실히 사람이나 드래곤이나 힘이 있고 봐야 했다. "지금 바로 나이아드를 불러 드릴까요?" "그래 주게나." 곧이어 쥬브로에타의 부름에 응해서 정령왕 나이아드가 나타났다. "오랜 벗이여, 무슨 일로 나를....." 하고 제법 친근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던 나이아드는 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아르티어스를 보는 순간 얼굴을 확 구겼다. "네 녀석은 또 여기에 무슨 일로 왔느냐?" "남이야 무슨 일로 왔건,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나이아드는 쥬브로에타를 향해 살기 어린 어조로 물었다. "저놈을 죽이는 데 힘을 보태 달라는 부탁인가? 그렇다면 내 흔쾌히 들어 주지." 그 말에 쥬브로에타는 얼굴색이 약간 창백해지며 속삭였다. "그놈 말고 그 옆에 있는 분을 알아보겠나?" "누구?" 힐끗 나이아드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옆에서 소녀가 따라 주는 포도주를 감탄사를 연발하며 마시고 있는 또 다른 소녀, 힘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교묘하게 숨기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쥬브로에타의 조언에 따라 자세히 관찰하자 그 힘의 실체가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헉! 이 정도의 마나라면... 그렇다면 당신은 아르티엔?" "오! 오랜만이군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여. 그 동안 잘 지냈는가?" 나이아드는 아르티엔이 아르티어스의 아버지라는 것을 떠올리며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위대하신 골드드래곤께서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이군요." 정중하게 인사를 한 나이아드는 손으로 아르티어스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저 망할 녀석만 내 눈에 띄지 않는다면 편안하죠." "그런가? 아들놈에게 들으니 자네가 손자의 행방을 안다면서?" "손자라구요? 핫! 그 망할 계집 말씀이십니까?" "자네하고 사이가 안 좋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바로 그 아이일세." 이야기가 길어지면 다크가 호비트라는 사실이 밝혀질 우려가 있기에 아르티어스는 둘의 대화를 끊었다. "길게 얘기할 필요 없이 그 아이가 있는 곳이나 알려 줘 자네도 나하고 계속 얼굴 보기는 싫을 것 아닌가?" 정령과 한 번 관계를 맺으면 그 정령의 향기가 시술자의 몸에 죽을 때 까지 남아 있다. 그것을 통해서 정령사들의 경우 상대가 어떤 정령을 다루는 지를 읽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정령의 향기‘라고 정령사들이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정령과 시술자 간의 교감의 끈을 말하는 것이었다. 정령을 단 한 번이라도 불러낸 정령사는 죽을 때까지도 그 정령과 교감이 연결되며, 역으로 정령도 그 끈을 통해 정령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정령사를 어떤 마법이나 정령술, 마법진으로 숨겨 놨다고 하더라고 한번 교감을 맺은 정령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나이아드는 그런 이유로 다크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위치를 손수 가르쳐 줄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그 싸가지 없는 계집과 그녀를 두둔하는 아르티어스의 불행은 곧 나이아드의 행복이었으니까 말이다. "싫어, 내가 왜 그딴 것을 알려 줘야 하나?" 아르티어스는 더 이상 나이아드를 상대하지 않고 쥬브로에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도와준다고 했지요?" 쥬브로에타는 마지못해 말했다. "빨리 대답해 주게. 내, 부탁함세." 쥬브로에타가 간청하자 나이아드는 한동안 고심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으으음, 어쩔 수 없군, 그 아이는 지금 코린트에 있다. 케락스라는 도시 에 있는 루비의 눈이라는 호텔에 있지." "케락스 시라고?" 아르티어스는 전에 크라레스의 패거리들과 함께 일할 때 받아 뒀던 공간 이동 좌표책을 꺼내 들었다. 파파파팍. 페이지들을 들추자 곧이어 케락스의 좌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읽음과 동시에 아르티어스는 아르티엔을 잡아끌며 말했다. "어딘지 알았습니다. 빨리 가자구요" "잘 되었구나. 이거 조금만 더 마시고 가자 . 어차피 어디 있는 줄 알았으 니 조금 지체한다고 해서 별 문제 될 것은 없잖느냐?" "빨리 가자구요. 그딴 포도주는 나중에 배터지게 사 드릴 테니까....." "나이아드에게 그 아이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빠르 지 않을까?" "그렇게 안 해도 찾을 수 있다구요. 빨리 가요!" 더 이상 나이아드와 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도록 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르티어스는 서둘러 아버지를 붙잡고 공간 이동했다. 아들이 있는 도시 케락스 시로. 墨 내 아들 내놔! 香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눈에 띈 길 가던 행인을 아무나 몇 명 잡아다가 닦달을 하여 루비의 눈이라는 호텔에 도착한 것은 사위에 어둠이 깔린 지 오랜인 매우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바로 이곳이군."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건물, 확실히 온갖 영화를 누려 온 코린트의 수도인만큼 건물 또한 거기에 맞게 호화로웠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을 맞이하러 나오는 종업원의 멱살부터 다짜고짜 틀어쥐고 아르티어스는 으르렁거렸다. "여기에 타크 폰 치레아라는 아이가 있느냐? "이것 보십시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한밤중에 찾아와서 이렇게 행패를 부리는 겁니까? 그리고 저희 업소에서는 투숙하는 손님들의 신상을 절대 로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헉!" 종업원의 마지막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르티어스의 주먹이 그의 턱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말에 대꾸를 한 종업원의 얼굴에 계속하여 친절한 예절 교육을 시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 책임자 나오라고 해. 빨리! 이따위 건물 통째로 날려 버리기 전에 빨리 나오라고 하란 말이다." 그런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아르티엔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한마디 이죽거렸다. "내가 그래서 나이아드한테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하 는 것이 빠를 거라고 했지? "지금 불 난데 부채질하시는 겁니까? 정 안되면 이딴 건물, 가루를 내서 라도 찾아낼 수 있다구요"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요." 포도주를 마시고 있던 다크는 언제 술을 마셨냐는 듯 재빨리 창 쪽으로 다가가서 밖의 동정을 살피며 말했다. "글세, 무슨 일일까?" "혹시 이곳까지 코린트 군이 수색하러 들어온 것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 "제가 한번 살짝 나가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저는 엘프로 변장하고 있 으니까 아저씨가 가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밖으로 나갔던 라나는 곧이어 돌아왔다. "왠 이상한 사람이 호텔의 종업원들과 싸우고 있더군요 호텔 측에서 신고 를 했는지 병사들도 눈에 띄었는데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어요. 벌써 몇 명인가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래? 희한한 일이군 코린트의 수도 한복판에서 싸움질을 벌이다니 말이 야. 그것도 이렇게 높은 사람들이 많이 묵는 호텔에서 말이지 그래. 어떤 녀석인데 그렇게 간이 큰 짓을 하지?" "모르겠습니다. 한 명이었는데 정말 아름답게 생긴 청년이더군요 붉은 머 리를 길게 기르고....." 다크는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드디어 아버지가 자신을 구하러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폭력적인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왔던 병사들의 우두머리와 또 다른 한 명의 멱살을 잡고는, 그 중에서 한 명을 병사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다가 힘껏 던진 후 또 다른 한 명을 어디에다가 던져 버릴까 궁리하며 빙 둘러보더 도중에 달려 나오는 아들을 발견했다. "아빠!" "아들아!" 아르티어스는 한쪽 손에 쥐고 있던 병사를 아무 곳에나 던져 버린 후 ‘후다다닥‘ 달려가서는 가냘픈 아들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이런 그들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아르티엔의 눈이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한눈에 그녀가 헤즐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몸 속에 감춰져 있는 호비트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마나의 기운도 "저 아이가 나약한 손자라고? 흥! 저 아이가 나약하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 는 호비트들에게 있어서 강자(强者)라는 개념이 좀 수정되어야 하겠군. 그 래, 그건 나중에 저놈을 족쳐 보면 자연히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아르티엔은 다시금 아르티어스에게 꽉 안겨서는 숨이 막히는지 버둥거리고 있는 소녀를 차근차근 훑어봤다. 아르티엔이 알기에는 호비트들은 드래곤과 달리 암컷과 수컷이라는 성이 분리되어 존재했다. 그리고 호비트는 자식을 성별에 따라 두 가지로 분리해서. 부른다. 아들과 딸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쳐다봐도 아르티어스가 ‘아들‘이라고 우기고 있는 대상은 제법 뛰어난 미모에 봉긋한 가슴이 튀어나와 있는 ‘딸‘이 아닌가? 아르티엔은 그것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 수 있겠지. 하기야 내가 바깥 세상 을 돌아다닌 것이 4천년 전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때는 수컷 호비트를 아 들이라고 부르고, 암컷 호비트를 딸이라고 불렀었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서로가 가지는 뜻이 뒤바뀌어 버렸나? 뭐 호비트들의 짧은 수명 으로 봤을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봐야 하겠지." 아르티엔이 등 뒤에서 곱지 못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도 잊은 채, 아르티어스는 다크를 꼭 끌어안고는 연신 주절거렸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어디보자,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으 잉? 그런데 이건 또 뭐야? 어떤 망할 놈이 이딴 것을 몸에 달아 놓은 거냐?" 아르티어스는 다크의 몸에 상처가 없는지 유심히 살펴보다가 그녀가 차고 있는 팔찌들을 발견하고는 화가 나서 외쳤다. 그리고 곧이어 그는 그 두 개의 팔찌를 제거해 버렸다. 드래곤인 그에게 있어서 이따위 팔찌를 해제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르티엔은 뒤쪽에서 이 희한한 두 부자가 하는 꼬락서니를 찬찬히 보고 있다가 아르티어스가 팔찌를 해제하는 것을 본 후, 이정도면 아르티어스가 ‘손자‘라고 주장하는 아이에게 그 어떤 위험도 없을 것이라고 판단되자 슬그머니 아르티어스의 뒤쪽으로 다가왔다. 아르티엔은 헛기침을 해대며 말문을 열었다. "험험, 감격스러운 부자 상봉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옆에서 가만히 보아하니 우리 둘 사이에도 너무나 많은 대화가 필요한 것 같다 는 생각이 드는구나.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이게 무슨 소린가 해서 다크는 그 말을 꺼낸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자신과 아르티어스를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다크가 슬쩍 아르티어스의 눈치를 보자 그는 그 말을 듣고 질겁을 한 듯 얼굴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그것을 얼버무리려고 하는 모습이 눈이 빤히 보였다. "예? 그런 무슨 말씀이신지... 헤헤헤." 억지웃음을 짓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아르티엔은 생긋이 미소를 지었다. "아들아, 대화라는 것은 원래 서로 간에 오해를 없애는 데 최적의 수단이 아니겠느냐?" 갑자기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다고 느끼며 아르티어스는 잘만 말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후 재빨리 변명을 시작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절대로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물론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아비를 속 인 것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아르티어스는 아버지가 결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짓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는 감춰 두고 있던 비장의 한 수를 급히 써먹었다. 자신은 진실만을 말했었다. 그것을 엉뚱하게 오해를 한 아르티엔이 잘못한 것이 아닌가? "절대로 아버지를 속인 적은 없습니다. 기억해 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 제가 언제 손자를 헤즐링이라고 한 적 있습니까? 안 그래요?" "오호라, 그러니까 네녀석은 의도적으로 나로 하여금 오해하도록 만들었 다. 이거로군. 그렇다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겠는걸. 일단 몇 대 쥐어 팬 후에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진실에 보다 빠르게 접근할 수 있 겠어." "아, 아버지 ! 그게 아니라니까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아르티엔은 주문을 외워서 어디론가 아르티어스와 함게 공간 이동해버렸다. 어린가 한적한 곳으로 아들놈을 끌고 가서 실컷 팬 후에 오붓한 대화를 나룰 생각으로... 팔찌만 없애 버린 후 갑자기 아르티어스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왠 어린 계집애하고 사라져 버리자, 다크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드래곤이라는 것들은..... 도대체가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를 할 수 가 없군. 그건 그렇고... 흐흐흐 이 힘 단전에서부터 시작해서 사지의 끝 까지 휘몰아치는 이 느낌! 드디어 해방이야. 하하핫!" 다크는 잠시 호텔의 정문 앞쪽에서 아르티어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무작정 이러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여기서의 볼일부터 해결해 두는 것 이 좋겠군. 안 그래도 꼭 해야겠다고 작정해둔 일이 몇가지 있으니까 말 이야." 라나는 갑자기 밖으로 달려 나간 다크가 돌아올 생각을 안 하자 걱정이 되어 따라 나왔다. 그러다가 호텔 정문 쪽에서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는 다크를 발견했다. 라나는 그쪽으로 달려가서 말을 붙이려고 하다가 갑자기 멈칫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지냈던 다크와 뭔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잃지 않는 소녀. 그리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오만하게 눈을 치켜뜨고는 다른 사람들은 내려다보는 듯한 저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여기까지는 그 전과 같았지만. 라나는 바로 그때 지금까지 그녀의 행동이나 모습에서 느낄 수 없었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느긋한 여유를 말이다. 라나가 주춤거리는 사이, 다크는 어느새인가 그녀의 앞을 통과하고 있었다. 라나는 뭔가 조금 달리진 분위기 때문에 아무래도 말을 걸기가 좀 힘들어서 그대로 그녀를 따라갔다. 어쨋건 그녀가 갈 곳은 방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있었던 그 방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간 다음에 천천히 눈치를 봐서 대화를 나눨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크는 라나에게 배정되어 있던 방을 지나친 다음 더욱 안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냐? 너는 내실 담당 하녀가 아닐 텐데.....?" 공녀가 거주하는 내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던 호위병들은 더 이상의 말은 꺼내 보지도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자신들이 어떻게 두들겨 맞았는지도 느끼지 못하고 말이다. 상대를 들을 수도 없게 만들어 놓은 후에야 다크는 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이죽거렸다. "내가 내실 하녀가 아닌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 라나는 다크를 따라가며 그녀를 말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바뀐 것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저씨는 저렇지 않았었는데. "저... 아저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몰라서 물어? 공녀라는 계집이 감히 나를 일게 노리개쯤으로 만들려는 망상을 품었잖아, 내게 그딴 생각을 품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예? 아무리 그게 마음에 안 드시다고 해도 이렇게 일을 크게 벌여 놓으 면 안됩니다. 발각될 우려가 있다구요." 그 말에 다크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는 라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자신을 그저 바라봤지만, 라나는 어느샌가 자신의 몸에 소름이 돋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크는 다시 내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내뱉듯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그딴 것은 신경 안 써도 돼!" "이게 무슨 짓이냐? 게 누구 없느냐? 빨리 저년을 잡아서 내 앞에 무릎을 꿇려라!" 물론 공녀도 자신의 말이 부하들에 의해 실행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공포에 가득 찬 그녀의 ‘머리통‘은 습관적으로 여태껏 해오던 말을 내뱉도록 ‘입‘에게 명령한 것이다. "크어어억!" 다크는 마지막 남아서 저항하던, 아니 공포에 질려서 도망치려고 하던 호위병의 뒷덜미를 꽉 틀어쥐고는 벽에다가 우악스럽게 처박아 버렸다. 그런 다음 축 늘어진 병사를 놓고는 손바닥을 탈탈 털었다. 실력이 좋아서 여태껏 살아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병사는 머리가 깨진 채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상태로 거품을 물고 뻗어 있었다. "이런, 이런 어쩔까나. 그 명령을 이행할 녀석은 이제 더 이상 없는 것 같 은데 말씀이야?" 잔인하게 이죽거리면서 천천히 다가오는 상대를 보며, 공녀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이이, 괴물! 다가오지 마!" "흐흐흣! 감히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이 나를 후작이라는 놈의 노리개 로 선물하겠다고 야무진 꿈을 꾸다니 말이야." 다크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공녀의 멱줄을 감아쥐었다. "헉!" 상대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찰나, 다크는 살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빨리 복수의 순간이 다가올 줄은 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흐흐흐, 너 따위 죽여봐야 내 손만 더러워질 뿐이고..... 네가 여태껏 해온 대로 노예시장에 내다 팔아 버릴까? 이 정도 미모라면 용돈 벌이 정도는 될 것 같은데 말이야 하하핫!" 잠시 상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다크는 장난감이 부서진 아이처럼 심드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런, 자극이 너무 강했나? 기절해 버렸군." 다크가 갑자기 그 광폭한 이빨을 드러낸 그 순간, 다크를 팔아먹었던 하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공녀를 호위하던 수십 명이나 되는 호위병들이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바닥에 뒹구는 것을 보자마자.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미친 듯이 호텔 출구를 향해 달려갔다. 상대가 저렇게 강한 줄도 모르고, 뒷골목의 놈팡이들 몇 명에게 그녀를 팔아먹었다니. 그녀가 노예시장으로 넘어가지 않고. 당당하게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어린 하녀는 공녀의 꾸지람을 받은 후 잠시지만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잠잠하게 있었다. 그것을 보고 이번 일은 어떻게 잘 넘어가겠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저주스러워지는 그녀였다. 그 개망나니 하녀는 자신을 가로막는 호위병들을 해치우며 공녀가 묵고 있는 내실 쪽으로 걸어갔다. 호위병들이 힘 한번 못 써보고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보아서 머지않아 자신을 저 미친년으로부터 지켜주고 있던 공녀가 조만간 어떻게 될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공녀를 해치운 후에 저 미친년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당연히 자신을 씹어 먹으려고 달려올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결론은 뻔한 것이었다. 저 미친년에게 맞아 죽기 전에 가능한 한 멀리 도망쳐야만 했다. 그런 후, 군대가 출동해서 저 미친년을 끌고 가기 전까지 꼭꼭 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헉헉헉." 호텔은 아주 넓었기에. 출구 쪽까지 전력으로 질주해 온 그녀는 숨이 턱까지 차오를 지경이었다. "사람 살려!" 있는 대로 비명을 질러대며 도망가는 하녀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수군대며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하녀의 시야 앞에서 십수 명의 병사들이 실내로 진입해 들어오는 것 또한 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었다. 고르고 고른 후작의 호위병들을 간단하게 땅바닥에 내팽개쳐지던 장면을 공포에 질려 몰래 숨어서 훔쳐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 않은가? 그녀는 계속 치달려서 호텔 밖으로 도망쳤다. 그녀를 호텔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는 어떤 건물에 슬쩍 몸을 숨기고는 호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야 숨을 고를 시간 여유를 가진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호텔 주위를 살펴봤다 호텔 주위는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방금 전까지 아르티어스가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고 난 후였기에, 여기저기에서 병사들이 호텔 쪽으로 집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많은 행인들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궁금증을 느끼고 호텔 안쪽을 지켜보며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이때, 그녀의 뒤에서 음흉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흐흐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은 상상도 못했군. 며칠 동안 여기에서 기다려야 하나 했는데 말이지." 기절할 듯이 놀란 하녀가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얼굴이 여기저기를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울긋불긋 거무탱탱한 멍자국 이 아로새겨져 있는 남자 둘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수많은 멍자국 때문에 더욱 괴이한 형상을 하고 있는 털보가 이죽거렸다. "네가 팔아먹은 노예가 우리를 이 꼴로 만들었으니, 그 대가는 네가 치러 야겠지?" "아,안 돼!!" 그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반항은 끝이 났다. 털보 옆에 서 있던 사내가 천으로 잘 감싼 몽둥이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고 하던 하녀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하녀가 쓰러지자, 털보는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원체 주위가 어수선해서 그런지 하녀의 비명소리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 빨리 자루에 쑤셔 넣어 이거라도 대신 팔아치워야 직성이 풀리겠다." 털보 사내는 자신을 이 꼴로 만든 그 끔찍한 경험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꼭 복수는 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당사자에게 원한을 풀 수는 없으니, 당연히 그 원인을 제공한 놈, 아니 년이 대신 복수의 대상이 되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墨 죽음의 기사 香 펄럭이는 망토를 아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기에 그 생김새는 짐작 할 수 없었지만, 농민들이 밀을 거둬들일 때 사용하는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농민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밀을 거둬들일 시기도 아니었고, 또 이런 무덤 앞에서 무슨 농작물을 거둬들일 것이라고 낫을 들고 설치겠는가? 무덤을 단장하기에는 그 낫의 크기는 너무나도 컸다. 그는 뼈가 앙상하게 보이는 손을 이용해서 큼직한 책자를 뒤적거리다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클클클클.... 바로 이곳이군." 그곳은 코린트의 모든 전쟁 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황실의 묘역이었다. 물론 자신이나 그 후손들이 그가 이곳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딴 곳에 장사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귀족들이나 기사들에게 있어서 이곳에 묻힌다는 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었기에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이곳에서 잠들 수 있는 특권을 거절한 경우는 없었다. 그는 주위를 잘 살펴봤다. 하지만. 예상외로 경비는 아주 허술했다. 코린트 최고의 성역이라고는 하지만, 무덤들이 모여 있는 묘지일 뿐이었다. 무덤 속에 들어 있을 값진 부장품(副葬品: 시체와 함께 넣는 물건들)을 노리는 도둑들 정도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렇듯 경비가 허술한 것이었다. 그는 일단 가장 유명하면서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의 묘지부터 선택했다. "어디에 있나?" 이러저리 기웃거리며 찾은 무덤, 고생해서 찾아내긴 했지만 이번에도 그의 예상과는 달리, 위대한 무인의 무덤치고는 너무나도 검소해 보이는 무덤이었다. 그는 상대가 코린트 최고로 지칭되는 무인이었던 만큼 무덤 또한 아주 호화로울 것으로 생각하고 그 순서로 뒤졌기에 시간이 더욱 많이 걸렸던 것이다. "젠장! 아무리 검약한 것을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영웅의 무덤을 이따위로 만들다니, 죽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모르는 것들 같으니라 구." 그는 잠시 투덜거린 후 두 손을 하늘 위로 뻗으며 주문을 외웠다. "잠들어 있는 위대한 기사의 영혼이여. 대마왕 크로네티오님의 권능을 받 아 그대에게 명하노니 지저(地底)의 혼돈에서 깨어나, 나 캐론(CHARON) 일족의 권능을 이어받은 라쿠나의 명령에 따르라."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라쿠나는 당황한 듯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웠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무덤 안에서 사자(死者)의 응답 소리가 들려와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한이 무엇인지 죽은 자가 말하고, 그 다음 그 원한을 푸는 것에 대해서 몇 가지 흥정이 오고간 후에 이쪽에서 그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면 그는 죽음의 기사(DEATH KNIGHT)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라쿠나는 당황하여 다시 한 번 책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곳에는 분명히 ‘전사(戰死)‘라고 되어 있었다. 전쟁터에서 죽은 인물인 만큼 그 원한은 당연히 뼛속까지 사무쳐 있을 것이고, 왠만한 조건만 충족된다면 깨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처음부터 좌절된 것이다. "이럴수가... 어떻게, 전사했는데도 그 어떤 원념(怨念)도 남아 있지 않을 수가 있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무덤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무덤 속을 관찰하던 라쿠나는 이윽고 뭔가 느꼈다는 듯 외쳤다. 그는 사자(死者)를 관장하는 마족인 만큼 정신만 집중한다면 직접 무덤을 파볼 필요도 없이 충분히 자세한 관찰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제기랄! 전사한 것이 아니라, 참수(斬首)당한 시체였군. 그것도 이 건 위대한 무인 따위가 아니야. 해골 병사로도 만들 수 없는 형편없이 삭아빠진 뼈다귀.....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따위 장난을 해놓은 거야?" 투덜거리며 라쿠나는 딴 무덤으로 향했다. 그가 두 번째로 시도한 무덤은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이라는 뛰어난 무사였다. 그녀도 키에리가 전사했다고 전해지는 바로 그 전쟁, 그러니까 제1차 제국전쟁에서 크루마와 교전 중에 전사란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라쿠나는 리사의 무덤 앞에 서서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상하군 이번에도 가짜인가?" 라쿠나는 전번처럼 두 번이나 주문을 외우지 않고, 곧장 무덤 내부의 관찰로 들어갔다. 곧이어 라쿠나는 감탄 어린 신음을 삼켰다. "정말 대단한 뼈야. 화려한 영기(靈氣)가 감도는군 진짜가 분명해. 그런데 도 왜 응답이 없는 거지?" 잠시 생각해 보던 라쿠나는 그녀가 아무런 원한 없이 죽었다고 결론 짓고는 또 다른 무덤으로 미련 없이 자리를 옮겼다. 원념 없이 죽은 기사의 시체는 무슨 짓을 해도 깨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원한을 품은 기사의 영혼은 그 원념이 강한 정도에 따라 복수를 하기 위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십 년간 세상을 떠돈다. 그런 그들을 죽음의 기사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육체를 부여받은 후 복수를 위해 날뛰는 마물이 되는 것이다. 마왕은 천5백 년 만에 세상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후, 세계 정복이 그렇게 만만한 작업이 아님을 곧 눈치 챌 수 있었다. 그것은 천5백 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타이탄이라는 마법병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월은 흘러서 자신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면 마계의 강력한 힘을 지닌 부하들을 불러들여 타이탄을 직접 상대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불러들일 수 있는 부하들의 양과 질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대마왕 어르신이 생각해낸 새로운 돌파구가 이것이었다. 자신을 향해 원한을 품지 않은 기사들에게 다시금 육체를 부여하여 꼭두각시로 삼는 것이었다. 물론 죽음의 기사들은 예전만큼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충분한 숫자는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조종할 수 있는 특별한 엑스시온의 제작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엄청난 힘이 순식간에 굴러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걸 생각해 낸 후 카론 일족 네 명을 불러들여 죽음의 기사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파워가 좀 떨어지더라도 암흑의 마나에 동작할 수 있는 엑스시온의 개발 작업 또한 병행하고 있었다. 墨 정신계 마법의 치료 香 한 시간쯤 후에 아르티어스는 아르티엔과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다크에게 채워져 있던 팔찌를 제거한 상태였기에, 아르티어스는 그녀의 위치를 언제 어디서든지 파악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곧장 바로 그녀의 옆에 공간 이동해서 나타났다. "살아서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구나" 반쯤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다크를 본 후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도대체 누구한테 얼마나 쥐어 터졌는지, 얼굴이 밤탱이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디 가서 뭘 했기에 모양새가 이래요?" 아르티어스는 힐끔 아르티엔을 바라본 후 대답을 해주려는 찰나, 다크는 아르티어스를 그 꼴로 만든 상대가 누군지를 눈치 채고는 아르티어스를 옆으로 밀면서 앞으로 쓱 나섰다. "네년이 아빠를 저 모양으로 만들었냐?" 다크의 공격은 거의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아르티엔의 목줄기는 산산이 부서진 채, 아래로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조차도 언제나 감탄하던 다크의 기술, 순간 적으로 움직이며 상대에게 방어할 틈을 주지 않는 공격. 언제 어떤 기술을 썼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다크의 손은 희미한 푸른빛을 뿜어대며 상대의 멱줄을 관통한 후였다. 너무나도 허무할 정도로 빠른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아르티어스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르티어스로서는 아들을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엉거주춤하게 서서 아버지의 주검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때, 다크는 질퍽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시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도 현실감 있는 영상이었고, 또 확실하게 손에 와 닿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던 그녀였기에 사람의 목을 관통할 때 나타나는 미묘한 느낌에서의 차이점을 즉시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녀로서도 알 수 없었다. 미세한 기의 흐름조차도 감지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저기 쓰러져 있는 것이 진짜 시체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다크는 수많은 격투를 통해 다져진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오만하게 서서 보이지도 않는 상대를 향해 외쳤다.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었기에 방어 자세는 아예 갖추지도 않았다. "나를 깔보는 거냐? 저따위 허상으로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나?" 허상이라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제정신을 차렸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생각하면서 아르티어스는 다급한 어조로 아들을 말렸다. 지금 이라면 그냥 애교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심기를 진짜로 건드려 놨다가는 아예 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 싸우려고 하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너는 절대로 그분과 싸 워서는 안 된다." "왜지요? 그렇게 강한 상대인가요?" "이건 강하고 강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분은 너의 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주신 분이시거든." 아르티어스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아르티엔은 언제인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채 쓰러져 있는 허상을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뒤늦게 눈치 채고 아르티어스가 뭐하고 말할까 궁리할 때, 아르티엔은 슬그머니 손짓을 했다. 그 손짓 한 번에 방금 전까지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 쓰러져 있던 소녀의 시체는 먼지가 날리듯 푸스스스 사라져 버렸다. "정말 대단한 공격이로군. 이정도 기습 공격이라면 왠만한 놈들은 자기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황천으로 가겠어." 투덜거리는 아르티엔의 목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하면서 아르티어스는 아버지에게 다크를 소개했다. "아버지 정식으로 소개 드리겠습니다. 제가 양자로 삼은 다크 폰 치레아 라는 아이입니다. 아버지도 많이 사랑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글쎄다. 그런데 어디서 꼭 너 같은 녀석을 하나 골라내어 양자로 삼은 거냐? 앞뒤 가리지도 않고 무조건 손부터 나간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참 특이한 습관이야..... 이렇게 닮은꼴도 구하기 힘들텐데 어디서 구한 거지?" ‘아버지도 그렇잖아요‘ 하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아르티어스는 생각을 되돌리고 한껏 억지 미소를 지어대며 주절거렸다. "그렇게 빈정대지 마시라구요. 재롱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면 될텐데, 손 자가 장난 좀 친걸 가지고 꽁하기는....." "헛! 요즘은 그런 것을 재롱이라고 하느냐? 손자가 재롱 두 번만 떨었다 가는 할애비 목숨이 남아나지를 않겠군, 그건 그렇고 너는 저 아이를 보 면서 뭔가 느낀 것 없냐?" 아르티어스는 아버지의 말 중에서 ‘할애비‘라는 단어가 들려오자 적이 안심하기 시작했다. 일단 아르티엔은 다크가 그의 손자가 될 만한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며 합격점을 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예? 뭘 말입니까? 원래 처음부터 조금 과격한 성격이라서 저는 잘 모르 겠는데요." "쯧쯧, 아직도 멀었구나. 내 말은 누군가 저 아이의 정신 세계에 침입한 것 같다는 말이야" "정신계 마법이라구요? 아니 어떤 빌어먹을 녀석이 그딴 짓을....." 아르티어스는 화들짝 놀라며 다크의 머리 위에 손을 대고는 열심히 수상한 곳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를 탐색해 본 결과, 과연 아르티엔의 말대로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이 있었다. 그것도 깨끗하게 침입했다가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다크의 정신 세계에 상당한 상처를 남겨 둔 상태였다. "이게 어떻데 된 일이냐?" 아르티어스는 다크에게 물었지만, 다크로서는 별로 대답할 말이 없었다. 미네르바는 다크에게 정신 마법을 쓴 후에 그때의 기억을 완전히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젠장, 가만히 있어 봐라. 이 아빠가 금방 치료해 줄 테니까." 다크의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손이 희뿌연 빛을 뿜기 시작했다. 아마도 뭔가 마법을 사용해서 그녀의 정신 세계에 남아 있는 상처들을 치료하기 시작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다크를 따라서 공녀의 방에 들어왔다가, 자신이 끼어들 틈을 발견하지 못하여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던 라나는 놀라움에 약간 입을 벌린 채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정신계 마법의 후유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코린트 같은 대제국에서도 그녀의 정신을 치료할 수가 없어서 드로아대신전에 의뢰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어려운 일을 금방 해낼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는 저 젊은이에 대해 라나가 경외심을 느긴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이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여성이 또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성으로 변신해 있는 아르티엔이었다.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치료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찬찬히 바라본 후 한마다 툭 내뱉었다. "제법이로구나. 하지만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어." "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욧! 저는 제대로 치료했단 말입니다." "훗, 그러니까 아직 미숙하다는 거야. 정신계 마법의 부작용 때문인지 아 니면 딴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도 주된 정신 세게에 포 함되지 못하고 떠도는 기억들이 있다는 걸 너는 모르겠느냐?" 아르티어스는 뒤통수를 슬그머니 긁어대며 난처한 긋 말했다. "그, 글쎄요" "내가 하는 것을 잘 봐둬. 헝클어진 기억을 바로 잡는 데는 이게 최고의 마법이야 그리고 그 어떤 부작용도 없지." 아르티엔은 다크 쪽으로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리라이프(re-life)!" 이것은 아르티엔이 고안하여 만든 마법으로서, 다른 정신계 치료마법처럼 직접 상대의 정신세계에 침투하여 조각난 기억들을 퍼즐을 연결하듯 끼워 붙이는 저급한 마법이 아니라. 상대가 여태껏 살아왔던 모든 기억들을 어떤 식으로 골라 뽑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인지는 상대의 의지에 맡겨 버리는 것이다. 상대의 의지가 그것을 결정하기에 이 마법은 부작용이 있을 수가 없었다. 타인의 강제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잠시 후 다크는 멍한 머리를 들며 정신을 차렸다. 여태껏 잊고 살았던 수많은 기억들이 마치 어제의 일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많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그런지 머릿속이 ‘띵‘한 것 같았다. "어라?" 갑자기 한줄기 눈물이 다크의 눈에서 ‘또르르르‘ 흘러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기겁하듯 놀라서 아르티엔에게 따졌다. "부작용이 절대로 없다면서욧! 그런데 왜 갑자기 저 애가 저러는 거죠?" 아르티엔은 별것 아니라는 듯 딴청을 부렸다. "글쎄다, 옛날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아니면 여태껏 살아온 삶이 너 무나도 후회스럽다던지." "그럴 리가 없잖아욧! 절대로 후회라는 단어를 모르는 아이인데요." 잠시 망설이듯 말하던 아르티어스는 곧이어 확신하듯 외쳤다. 자신이 아는 한 아들놈은 결코 후회를 모르는 녀석이었다. 설혹 뭔가 잘못된 일을 했다고 하더라고 그 일을 곱씹으며 두고두고 후회하고 고민하기보다는 아예 속 편하게 ‘다음에는 잘하면 되겠지‘ 혹은 ‘에이 벌써 죽여 버린 것을 어떻게 해? 다음에 이런 경우를 당하면 살려 둬야지‘ 하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글쎄다, 잘 모르겠구나. 나도 사실 이 마법을 고안하기는 했지만, 써먹기 는 이번이 처음이라서 말이야." 속 편한 아르티엔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이빨을 갈며 외쳤다. "설마, 사랑하는 손자를 상대로 마법 실험을 했다는 말입니까?" 아르티어스가 아르티엔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을 때, 다크가 나직한 어조로 힘없이 말했다. "아빠, 저 좀 쉬고 싶어요." "그래, 여기는 너무 시끄러우니까 딴 데로 가자." 아르티어스는 방안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어딘가 아들이 쉴만한 곳을 찾아서 공간 이동했다. 루비의 눈이라는 호텔에서 벌어진 일은 곧장 근위대까지 연락이 올라갔다. 그 무렵 코린트의 최강의 기사단인 코란 근위 기사단은 크라레스 침공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그리고 새로이 편성을 끝마친 제2근위대도 합류를 끝마쳤다. 하지만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의 수색 작전에 투입되었던 금십자 기사단이 아직 완전히 귀환하지 않은 상태였다. 치레아 대공에 대한 수색 작전은 매우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기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금십자 기사단의 전투 준비가 완료될 때가지 침공 부대는 발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 방위 사령부로부터의 긴급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부관의 말에 제임스는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긴급 전문? 어딘가에서 마법사나 신관들과 한판 붙었으니 지원해 달라는 것이겠지. 거기에 놔두고 가게." "예. 각하." 제임스는 문을 나서려는 부관의 뒤통수에다가 대고 급히 물었다. "금십자 기사단의 준비는 완료되었는지 알파레인 후작에게 물어봐주게." "예. 각하." "이거야, 원. 출동 명령 떨어진 게 언제인데 금십자 기사단 때문에 발목이 붙잡혀 있다니....." 잠시 궁리를 한 후 제임스는 자신의 명령을 행하러 가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명령이 더 있는지 몰라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부관에게 명령했다. "각 기사단장과 부단장, 그리고 각 기사단의 작전관들을 불러들이게. 금십 자 기사단의 출동 준비가 완료되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할 것 같으니까 그동안 지휘관들과 크라레스 침공 작전에 대해서 토론을 좀 해두는 것 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각하." "좋아, 가보도록." "옛." 부관이 나가고 난 후 제임스는 커다른 탁자에 앉아 무의식적으로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톡톡톡‘ 몇 번 두들기다가 이윽고 부관이 놔 두고 간 서류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일단 자신의 휘하에 있는 제1근위대의 출동 준비는 다 갖춰 놓은 상태였고 부관에게 지시해 놓은 작전 회의에 참석할 인원이 모이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동안 제임스는 할 일이 없었다. 제임스는 그 동안 시간을 때울 목적으로 서류를 집어 들고는 따분한 표정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곧이어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맹렬한 속도로 그 서류를 읽은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가 방금 읽은 서류는 루비의 눈이라는 호텔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보고서였다. 그 사건을 일으킨 두 명, 즉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미남 청년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노랑머리 하녀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호텔의 경비병들과 난투극을 벌이고는 그 다음으로 드루이드 후작 가문의 용병들과 격투를 벌였다. 그리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방위사령부에서 파견한 병사들과도 드잡이를 벌였다. 수십 명이 넘는 부상자들이 발생했지만. 정작 그 범인들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출동은 미뤄 둔 채, 여기저기를 들쑤셔서 정보를 끌어 모았다 그 덕분에 각 기사단의 지휘관들은 회의실에 제임스가 나타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려야만 했다. 제임스는 일단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끌어 모은 후에도 회의실에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장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 것 같사옵니다, 전하." "그건 무슨 말이냐, 제임스?" "아무래도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본 결과 그녀가 드래곤과 접촉한 것 같사 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뭣이라고?" 제임스는 방금 전에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서류들을 로체스터 공작의 앞에다가 차곡차곡 놓으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이것은 치레아 대공으로 추정되는 하녀와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청년이 루비의 눈이라는 호텔에서 난투극을 벌인 것에 대한 방위사령부의 보고 서이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법의 탑에서 가지고 온 수도 내에서의 마 법 사용 탐지기록이옵니다. 탐지기록에 따르면 호텔 내부 혹은 그 근처 에서 강력한 마법이 몇 차례나 걸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사옵 니다." "하지만 그런 것만 가지고 꼭 그것이 드래곤이고, 그 하녀가 치레아 공작 이라고 짐작하는 것도 무리가 있지 않겠나?" "제가 마법사를 거느리고 그곳에 직접 가서 확인한 것이니 틀림없사옵니 다. 그들은 마법사가 만든 이미지를 보고 그녀가 확실하다고 증언했사옵 니다." "그렇다면 이미 늦었다는 말이냐?" "그녀가 이미 크라레스로 갔다면, 이번 기습 작전은 중지해야만 하옵니다." "큰일이로군.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인가?" 바로 이때 옆에서 있던 레티안이 끼어들었다. "그녀와 드래곤이 만났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사옵니까? 이왕에 이 렇게 되었으니, 전부터 계획해왔던 작전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 다." 레티안은 잠시 로체스터 공작이 생각할 여유를 준 후에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어쩌면 크루마는 분노한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에게 치명타를 입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전에 세웠던 작전과 달리 드래곤은 이쪽의 해 명도 듣지 않은 채 그녀와 만났사옵니다. 그런 만큼 빨리 손을 써서 드 래곤에게 본국에게 죄가 없다는 점을 납득시켜야만 하옵니다. 가능한 빨 리 말이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의 말이 옳은 것 같군." "예, 그리고 이번 원정은 포기하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전하 그녀가 크라 레스의 손을 들어주는 한 저희가 승리할 방법은 전혀 없사옵니다." 墨 혼란스런 과거의 기억 香 "기나긴 역경을 견뎌내고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네."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대서사시「아르티어스 애가」의 마지막 구절을 읊은 후 미소 띤 얼굴로 다크에게 말했다. "어려울 때는 역시 고향이 최고지 너에게는 이곳 치레아가 고향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여기서 한 며칠 푹 쉬면 괜찮아 질 거야." 아르티어스는 코린트의 수도 케락스에서 곧장 치레아로 공간 이동해 왔다. 그가 생각했을 때 이곳이 최적일 테니까 말이다. 치레아 공작 관저의 한쪽 구석에 위치한 공간 이동 마법진에 도착한 일행들은 곧바로 관저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공간 이동 마법진 근처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것들.... "어라?" 갑자기 나타난 손님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트롤들을 보고 아르티어스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잘못 왔나? 이런, 이런, 벌써부터 치매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나? 이미 수십번도 더 와본 이곳 좌표를 잘못 기억하다니....." 아르티엔이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제대로 찾아온 것일 게다. 저놈들은 흑마법에 조종당하는 것들이 야. 그렇지 않고 야생의 그들이었다면 벌써 공격해 왔겠지." "그도 그렇군요."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트롤들이 뒤쪽에 꽁꽁 묶여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서서는 그들에게 달려오며 외쳤다. "어서 오시옵소서, 대공 전하!" 그 순간 무표정하게 트롤들을 둘러보던 다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달려오는 남자가 누군지 알아봤던 것이다. 그녀는 상대가 여태껏 몬스터에게 잡혀 있다가 구원을 청하는 것으로 여기고,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손을 썼다. 그녀의 손이 우아하게 원을 그린 그 순간, 그녀의 사방으로 푸른 강기의 다발들이 쫙 뿌려져 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 벌어진 일은 여태껏 인간 세상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던 아르티엔 어르신의 입을 쫙 벌어지게 만들었다. 뭔가 강력한 마나의 존재를 느낌과 동시에 사방에 있던 트롤들이 일제히 피보라를 일으키며 쓰러졌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 다음 순간 다크는 달려오고 있는 사내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그리고 이 몬스터들은 뭐야?" 사내는 공포에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우, 우선, 돌아오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하지만... 하지만, 몬스터 들을 왜 죽이셨사옵니까?" 사내는 공간 이동을 통해 나타난 자들 중에서 적과 아군을 선별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몬스터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마법진을 통해 왔다갔다하는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그자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걸 대신 선별해 줘야 하는 사람이 한 명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뒤에 서 있다가 몬스터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은 누군가 첩자가 본다면 들통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꽁꽁 묶여서 포로인 척 연극을 하면서 몬스터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그걸 착각해서 다크가 몬스터들을 몰살시켜 버린 것이었다. "어라?" 사내의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다크였다. 이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줬더니, 물에 떠내려간 보따리는 왜 안 건져 주느냐고 따지는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다크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것을 느낀 사내는 다급하게 말했다. "카르토 백작님을 만나서 보고를 받으시면 이 상황이 이해가 가실 것이옵 니다." 다크는 잠시 카르토 백작이 누군가 생각을 정리했다. 곧이어 그 이름을 가진 인물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크가 알고 있는 그 카르토 백작이 맞다면 그의 경우 요직에 있기는 했지만 공국 내부에 몬스터를 끌어들인다든지 하는 그런 중대한 일까지 처리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높은 상급자가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은 어디에 있느냐? 먼저 그를 만나서 보고를 듣고 난 후에 카르토 백작을 만나겠다." "대공 전하, 송구스럽게도 카슬레이 백작님은 치레아에 안 계시옵니다." "왜?" "황제 폐하로부터 치레아 기사단의 출동 명령이 떨어져서 지금 전선에 나 가 있사옵니다. 기사단 전원이 출동해 버렸고, 또 가스톤 님도 대공 전하 와 함께 행방불명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카르토 백작님이 책임을 맡으 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내는 다크와 뒤에 서 있는 일행들을 힐끔 쳐다봤다. 팔시온, 가스톤, 미디아, 미카엘, 이렇게 네 명이 대공과 함께 행방불명되었다. 하지만 왜 이 자리에 대공 혼자만 양아버지와 함께 나타난 것일까? 그리고 대공을 따라온 저 사람들은 또 뭐란 말인가? 그런 것들이 궁금해서 힐끗 던져 보는 눈길이었다. "기사단이 출동했단 말이지.... 알겠다. 집무실로 갈 테니 카르토 백작을 불러오도록 해라." 다크는 너절하게 쓰러져 있는 트롤의 사체들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쓰레기들은 빨리 치워 버려." "옛, 전하!" 보고를 끝마친 후 카르토 백작이 나가고 나자, 다크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면서 푹신한 의자에 주저앉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푹 퍼져 있는 주인의 눈치를 보며, 세린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주인님 따뜻한 물을 받아 놓을까요? 목욕을 좀 하시면 기분이 한결 개운 해지실 겁니다." "아, 목욕은 됐고, 술이나 좀 가wu오너라." "예, 주인님." 다크는 천천히 술을 따라 마시면서 혼란스럽게 엉켜 있는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오래전의 일들이 마치 몇 시간전에 있었던 일인 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참기가 힘들었다. 다크가 최초로 인간적인 정을 느꼇던 사람은 마지막 사부였던 유백이었다. 아마도 그는 다크를 자신의 마지막 제자로 생각했기에 좀더 인간적으로 대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지막 제자라는 것 때문에 조금 더 감상적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 망할 사제라는 녀석에게서 사부의 최후를 전해 들었을 때가 기억났다. 탈마(脫魔)에 이르지 않고서는 피해 갈 수 없는 산공의 고통, 무리한 수단을 써서 역행하여 쌓은 내공은 죽기 직전에 흩어지면서 무시무시한 고통을 안겨 준다. 그때 자신이 곁에 있었다면 여태껏 배운 대로 일 검에 그 고통을 없애 드렸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작 된 마교 교주와의 갈등, 아마도 그것은 아주 사소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연속되면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때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마교 내에서 자신을 찍어내려고 하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을 먼저 파악 하기만 했어도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하던 ‘죽’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갑자기 떠오른 사라졌던 과거의 기억들. 그 중에서 가장 참기 힘든 것은 그가 꽤 존경했었던 옥영진 대장군과 그 부하들의 죽음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다. 자신이 마교의 유치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간단한 술책에 놀아나고 있을 때, 그들은 무참하게 학살당하고 있었다. 만약 그때 자신이 그 집에 있었다면 그때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원래가 인간이 살아오면서 천천히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이 추억이라고 한다면, 그 추억들 중에는 죽는 그날까지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 반면, 최대한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일수록 더욱 더 오랬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습성이 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망각이라는 신이 내려준 축복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 기억들이 아주 희미해지기에 그런 부분이 떠오른다고 해도 약간의 불쾌감 정조만 생길 정도로 사건의 전말이 흐려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일들이 바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인 듯 아주 또렷하게 떠오른다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이 망할 이상한 세계로 떨어진 것도,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믿고 깝죽거린 결과가 아닌가? 그리고 여기에 떨어진 후에도 그 전의 일은 망각하고 설치고 돌아다니다가 미네르바에게 호되게 당하지 않았는가? 수많은 기억들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떠오르면 수많은 감정들이 그녀의 가슴속에 넘치고 있었다. 분노. 후회.슬픔, 그리고 그리움..... 그런 수많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소용돌이쳤다. 그러다가 그 모든 기억들은 ‘후회’라는 감정으로 집약되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다크는 마시고 있던 술잔을 벽에다가 패대기쳐 버린 다음, 한동안 씩씩거리다가 급기야는 술병을 들고 통째로 꿀꺽거리기 시작했다. "주인님. 그렇게 드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다크에게 그런 말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단숨에 한 병을 다 비워 버린 후 말리는 세린을 밀쳐 버리면서 벌떡 일어서서는 집무실 옆에 딸려 있는 작은 방으로 달려갔다. 그 방에는 집무실에서 다크가 원할 때 가져오기 위해 준비해 둔 술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뭐가 어떻게 돼?" "왜 저러느냔 말입니다" "훗" 씨근거리는 아들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아르티엔은 시선을 돌려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하늘에 달이 두 개나 동시에 떠 있었기에 달빛에 가려서 별들이 어둡게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아르티엔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왜 드래곤이 서로 어울려서 살지 않는 줄 아느냐?" "예? 갑자기 왠 뜬금없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그것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일을 겪어 보니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 부분이 있구나." 아르티엔은 잠시 아르티어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우리들 드래곤의 기억은 거의 완벽한 수준을 유지하지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일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나. 하지만 우리들 드래곤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기억들은 레어에 혼자 들어앉아서 만들어 놓은 아주 밋밋한 것들이지. 물론 세상을 떠돌면서 호비트나 오크, 트롤, 오우거 따위와 어울려서 유희를 즐기기도 하지. 그 과정에서 동료가 죽기도 하고, 하잘 것없는 것들을 가지고 싸우기도 하 고 울고, 웃고, 분노하면서 지내게 되지. 하지만 그것들의 경우는 얘기가 조금 다르지. 유희의 경우 우리는 타인의 입장에서 그 생을 바라보는 것 이야. 호비트들이 연극 구경을 하면서 울고 웃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에 그런 기억은 아무리 떠올려도 크게 무리가 없는 것들이지, 똑같은 연 극을 한번 더 본다는 것 정도 외에는 별 감흥이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드래곤끼리 어울려서 만들어 낸 기억은 조금 얘기가 다르다고 봐야 해. 그것 때문에 우리 종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주는 것을 매우 꺼리지, 그 기억은 죽을 때까지 선명하게 떠오를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저는 드래곤인 친구가 몇 있습니다. 그리고 몇몇 드래곤들끼리 어 울려서 친구로 지내는 녀석들도 많아요 그건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 아닙 니까?" "맞아 드래곤들도 소수이긴 하지만 친구를 깊게 사귀지. 하지만 그것도 다 헤즐링 시기를 벗어나서 독립된 개체로서의 완성이 끝난 상태에서 이루어 지게 된다. 헤즐링일 때, 그들은 절대로 아버지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 이 허락되지 않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아직 성숙 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일을 당한다면? 아마도 그 기억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기는 힘들 거야." "그렇다면 아버지가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뭡니까? 손자 일을 물었는데, 왜 난데없이 우리 종족에 대해서 별로 흥미도 없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 을 시작하시는 겁니까?" "닥치고 들어봐 다 연관성이 있으니까 말이야. 인간은 드래곤에 비해서 훨씬 덜 성숙된 자아와 정신 체계를 가지고 있지?" "그렇다고 봐야 하겠죠." "하지만 인간은 망각이라는 신의 축복을 가지고 있어. 기억하기 싫은 것 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모두 다 세월이 가면 잊어버리는 놀라운 신의 축복을 가지고 있단 말씀이야." 그것이 신의 축복이 될 수 있나? 하는 회의적인 심정으로 아르티어스는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래서요?" "그렇기에 인간은 현재에 매달리게 되는 거지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는 별 로 중요한 것이 아니야. 미래도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현재만이 중요 한 거야.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과거에 자신이 행했던 모든 일을 한꺼 번에 기억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걸 과연 성숙되지 못한 정신 체계가 어 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참으로 흥미로운 주제라고 할 수 있겠지." 아르티엔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챈 아르티어스의 어굴이 시뻘겋게 달라지게 시작했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정신붕괴 또는 자아상실까지 갈 수도 있는, 속된 말로 미치거나 자폐증에 걸린다는 말이 아닌가? 아들의 표정 변화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아르티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것은 최악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야." "어째서 그렇게 장담하시죠?" 수상쩍은 어조로 질문하는 아르티어스에게 아르티엔은 으스대듯 대답해 줬다. "나는 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마법을 남발하지는 않으니까 하는 말이다. 원래가 호비트의 두뇌라는 것은 매우 불완전해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도 곧잘 잊어버리지 않느냐? 지금은 잊고 지냈던 수많은 과거의 기억 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라서 당황스럽겠지만, 차 츰 시간이 지나면 모두 다 잊어버리게 되어 있어, 하지만 그 잊어버리는 순서에 조금 문제의 여지는 있지. 내가 예상하는 최악의 가정은 그 아이 가 안 좋았던 일들 그러니까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모든 일들에 집착하게 되는거야. 후회스러운 수많은 일들을 계속 떠올리면서 괴로워 하고, 또 괴로워하고...... 그러면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히는 것이지." 아르티엔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한눈에 척 봐도 호비트의 수명을 기분으로 따졌을 때 이제 겨우 20년도 채 못 살았을 거 아니냐? 겨우 20년 동안 쌓인 안 좋 은 기억이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지 기껏해야 남자한테 퇴짜를 맞았다든 지, 혹은 짝사랑이라든지... 그런 몇 가지 후회되는 부분이 있을지는 모르 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게다." 아르티엔은 아들이 안심하라고 덧붙인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들은 아르티어스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것을 보고 이상하게 느낀 아르티엔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도 있냐?"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아이는 겉모습은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80년 은 충분히 살았다구요, 우리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극히 짧은 순간이 지만. 호비트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긴 세월이지요, 그리고 안 좋은 기억 도 무지하게 많을 거예요." 아르티엔은 약간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80년? 80년이라.....? 그렇군. 뭔가 이상한 기척이 바로 그거였어. 혹시 그 아이 저주 같은 것에 걸린 것이냐? 뭔가 흑마법에 당한 것 같은 흔적이 엿보이던데......" 아르티어스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본격적으로 조사해 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아셨어요? 아버지 말씀대로 흑마법 중에서 악명 높은 디스라이크에 걸린 모습이죠." 아르티엔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핫! 디스라이크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예쁜 모습이 된 거지? 도대 체가 내가 아는 상식 선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투성이로구나 의외 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어떤 여자애를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상태에서 그 저주에 걸린 것이니 그 렇죠. 그 전에는 남자였단 말입니다. 그것도 호비트들 중에서는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아르티엔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오호라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나는 또 암컷을 보고 아들이라고 하는 새 로운 문화가 정착된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냥 놔두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왜 괜히 그딴 마법은 걸어서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일단은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저 아이가 지나가 버린 시간에 얽매어 버릴 것인지 아니면 과거를 딛고 한 단계 성숙한 모습을 보일 것인지는 말이야 그것을 옆에서 지켜 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겠지." "손자의 일인데도 아주 속 편하게 얘기하시는군요." 아르티엔은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의 사전에 호비트 양자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럼, 나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니까" 아르티어스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 아이는 아버지의 손자라구요" "아니, 그 얘는 너의 아들일 뿐, 나의 손자는 절대로 아니다. 나는 오랜만 에 만난 네가 무엇을 가지고 즐기건 방해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만약 내가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그 아이가 나한테 대든 그 순간 아예 소멸 시켜 버렸을 거야 하지만 그러면 네가 슬퍼할 것 같아서 그냥 놔둔 것 이지 네가 무슨 종족의 아이를 양자로 삼건 나는 상관할 생각이 없다. 엘프나 오크 심지어는 우리들 드래곤의 노예로서 신께서 점지해 주신 드워프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나한테까지 강요할 생각은 하지 말거라. 알겠냐?" "그으래요? 좋아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멀리까지 배웅은 안 할겁니다." 이죽거린 후 픽 돌아서서 들어가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아르티엔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물론 골드 드래곤의 노룡 아르티엔으로서가 아니라. 어쩌면 유희를 즐기 는 드래곤으로서라면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아르티엔은 유희의 대상으로서 손자를 원하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다크를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그 말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손자를 대하듯 다정하게 해줄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아르티엔은 결코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런 다음 퉁명스런 어조로 말을 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좋을 대로 하세요 아버지는 그 아이를 인정하지 않으시겠지만, 저에게 있어서 그 아이는 제가 낳은 헤즐링보다도 더 소중합니다." 아르티어스는 지금은 조금 진정되었나 싶어서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 다크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냐?" "예, 아르티어스님. 주인님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이분을 모시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이번에 함께 오신 신관이시라고 해서요." 아르티어스는 이번에는 라나 쪽으로 시선을 돌려서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돌아가서 쉬게나." "예? 하지만......" "별일 없을 거야 아버지도 그렇게 보증했으니까 말이야 물밀 듯 밀려 오 는 과거의 기억에 파묻혀서 많이 괴로워하겠지만, 결국 에는 아무 일 없 다는 듯 털고 일어서겠지. 이 위대하신 아르티어스의 아들이 저 정도 시 련에 굴복할 수는 없지 않겠나?" 아르티어스의 신념 어린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던 라나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부르십시오 하지만, 이것 한가지는 말씀드리 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어르신께서는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 인 듯 싶습니다. 그렇게 손쉽게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시는 것을 봐서 말 입니다. 하지만 옆에서 조용히 지켜봐 주는 믿음도 중요하겠지만 어려울 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도 큰 힘이 되더군요." "잘 알겠네." 아르티어스는 라나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듯 세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다크는 어디에 있느냐?" "안에 계십니다." 아르티어스가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지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위에는 몇 개인가 빈 병이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인사불성이 되어 축 늘어져 있는 다크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그 위에 있는 담요는 세린이 가져다가 덮어준 것 같았다. 아르티어스는 천천히 다가가서 다크의 옆에 앉았다. 그런 후 아르티어스는 다크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살그머니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작정 도움만을 준다고 네가 좋아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단다. 우선 은 옆에서 지켜봐 주마 그게 며칠이 걸리든지 말이야. 하지만 나는 네가 오래지 않아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단다." 다크의 방황의 시간은 계속되었고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해서 술을 퍼마시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르티어스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섣불리 참견할 수도 없었다. 아들놈이 여태껏 보여줬던 성격으로 봤을 때, 말리면 말릴수록 더할 것이었다. 어쩌면 술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겠다고 날뛸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아들놈이 자살하겠다고 날뛰면 말려야 하겠기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거의 밤잠도 잊고 다크를 몰래 감시했다. 다크는 모르고 있었지만. 수십 개도 넘는 마법의 눈들이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아악! 골치야. 머리통이 빠개지는 것 같군. 이봐, 세린." "예, 주인님. 해장술을 드시겠습니까?" 3일동안 오로지 술만을 마셔왔던 주인이었기에 세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질문을 던져왔다. 어제도 눈뜨자마자, 해장술부터 시작해서 밤늦도록 곤드레가 되도록 마셨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주인의 반응이 달랐다. "세린, 나를 죽이려고 작심했냐?" 세린은 당황하여 대답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오랜만에 네가 차려 주는 따뜻한 식사를 하고 싶구나. 3일동안 후회하고 고민해 줬으면 죽은 녀석들에게 충분히 보답을 해준 거지. 죽은 놈은 죽 은 거고 나는 이렇게 잘 살아 있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 아니겠 냐? 자 우선 목욕물부터 받아 둬라. 씻은 후에 식사를 하고 싶다." 여느 때의 낙천적인 주인으로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세린은 다급하게 말했다. "예 주인님" 세린이 목욕과 식사 준비를 위해 달려 나간 후 다크는 천장에다가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아빠도 아침식사 함께 하시죠, 며칠 동안 감시하신다고 피곤하셨을텐데.... 그리고 그 호텔로 찾아오신 것에 대해서 할 말도 좀 있구요." 그 말과 동시에 천장의 한쪽 귀퉁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둥실 떠 있던 작은 눈알 같은 것이 ‘팍’ 하고 사라져 버렸다. "에구구, 벌써 눈치 채고 있었나?" 아르티어스는 무안해져서 뒤통수를 긁으면 일어섰다. 일단 식사 초대를 받았으니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닌가? "자 오랜만에 함께 하는 아침식사인데 뭘 입고 갈까......" 여기저기에서 사다 모아 놓은 옷들이 수십 벌은 족히 되었기에 아르티어스는 두리번거리면서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한마디 툭 내뱉었다. "어떻게 되어먹은 녀석이야? 나는 그렇게 걱정했었는데...... 죽은 놈들 때 문에 3일씩이나 고민해 줬으면 많이 해준 거라니, 이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호비트가 할 수 있는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또다시 뒤적뒤적 옷을 찾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참, 호텔에 찾아온 것에 대해서 할 말이 있댔지. 에구구, 늦게 찾아왔다 고 또 얼마나 구박을 하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찾아간 줄도 모르고 말이야.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알아듣도록 변명을 해야 하지?" 아르티어스는 옷 찾는 것도 잊어버리고 어떻게 변명을 할 것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별로 변명이 통할 상대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믿져 봐야 본전이니까. "생각 밖이네요" "뭐가?" "저는 할아버지라는 그 드래곤도 함께 데려오실 줄 알았는데, 아빠 혼자 서만 왔어요?" 아버지를 데려온다? 물론 아르티어스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런 잔머리를 굴리려고 든다면, 다크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 자신이 있는 총명한 아르티어스가 아니었던가? 아르티어스는 그것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아르티엔을 데려왔을때의 최악의 상황도 이미 고려해 본 결과 내린 결론이었다. 아들놈이 여태껏 그래 왔던 대로 아르티엔의 앞이라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인다면, 닭대가리라고 자신을 놀리는 아버지 앞에서만은 절대로 아들에게 당하고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왔던 것이다. "뭐, 그 노친네는 바쁘니까...... 그리고 오늘은 오랜만에 함께 하는 식사니 까 우리 둘이서만 오붓하게 먹기로 하자꾸나." "그러죠, 뭐. 세린! 식사 가져오너라." 곧이어 세린이 식당으로부터 날라 온 따끈한 갖가지 음식들이 식탁에 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의 식사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래도 분위기가 조금 심상찮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다크도 뭔가 껄끄러운 기분을 느꼈는지, 포도주를 조금 마신 후에 말을 걸었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아르티어스가 통 말이 없었기에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아빠!"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아르티어스는 화들짝 놀라면서 준비해 놓은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아! 예야, 그게 아니고 말이다. 나는 절대로 고의로 그렇게 늦게 찾아간 것이 아니야. 그 동안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 나도 정말 너를 찾아낸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니까......" 행여나 아들이 ‘조용히 해욧! 드래곤이라면서 그런 것도 못해요?’ 하고 따질세라 다급하게 말을 내뱉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살며시 다크가 자신의 손을 잡아왔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아들의 애정 표현에 멍한 상태인 아르티어스 따뜻한 아들의 체온에 아르티어스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한 술 더 떠서 약간은 쑥스러운 듯한 어조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가 구하러 와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단 한마디의 말, 그 말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폭발하는 줄 알았다. 여태껏 다크가 이렇듯 다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한 적이 없었기에 아르티어스는 더욱 기뻤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다크가 건넨 인사 한마디 덕분에 식사는 아주 화기애애하게 끝 마쳐졌다. 아르티어스는 다크의 이 새로운 변화가 기쁘기는 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는지 식당 문을 나서면서 거의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상은 아니군." 墨 발록과의 혈투 香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군." 용병 대장은 저 멀리 보이는 크라레인 시를 바라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키에리와 용병기사단은 암흑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을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 기운이 흘러나오는 근원지를 찾아냈다. 그런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털보가 말을 걸었다. "크라레인 시내로 잠입합니까, 대장?" 키에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다. 지금까지 모은 정보만으로도 충분해. 크라레인 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암흑의 기운, 그것으로 봤을 때 몬스터들이 미쳐 날뛰게 된 그 원인이 크라레스에 있음이 확실하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 기에 어떤 흑마법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들이 몬스터들을 조종하고 있어." 잠시 말을 끊고 뭔가 생각을 정리한 키에리는 털보에게 명령했다.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마법사에게 지시해라. 정찰은 이것으로 끝마치도 록 하지." "옛, 대장." 털보는 마법사들에게 달려가서 코린트의 수도까지 갈 수 있는 장거리 이동 마법진을 부탁했다. 마법사들은 이곳 용병 기사단에 파견 나온 것이기에 서로 간에 정해진 상하 관계는 없었다. 그 때문에 부탁한 것이다. 마법사들은 강압적으로 자신들을 여기까지 끌고 온 용병 대장에게 드디어 복수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며 흔쾌히 부탁을 받아들였다. 마법사들이 신이 나서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 뭔가가 공간 이동해 오며 갑자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뭐냐?" 나타난 것은 전신이 시커먼 빛을 띤 거대한 박쥐같이 생긴 괴물이었다. 기살들이 순간 당활하고 있는 사이. 괴물은 드러내자마자 그 거대한 날개를 퍼덕거리며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주 길고 굵직한 채찍으로 연속 공격을 퍼부어 왔다. 8미터가 넘는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마법사 두 명이 비명도 질러 보지 못한 채 싸늘한 시체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갔고, 순간 기동력이 뛰어나다는 기사들조차도 여섯 명이나 채찍의 재물이 되어야만 했다. "모두들 대피하라! 그리고 최대한 빨리 자신의 타이탄에 탑승하라." 용병 기사들은 키에리의 명령에 따라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을 피해서 전력을 다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키에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검을 뽑아든 채, 괴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대한 괴물은 모든 기사들이 사방으로 도망치자 순간적으로 어떤 놈을 먼저 죽이기 위해 쫓아갈 것인지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아직도 도망치지 않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괴상한 인간을 한 명 발견하고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던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끌끌끌끌...." 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괴물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쉬엑 엄청난 파공음을 흘리며 쏟아져 들어오는 채찍, 괴물은 날개를 이용하여 거의 40미터 상공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그 채찍의 길이는 서로 간의 거리를 무색케 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런 괴물이 있다는 소리는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와 동시에 키에리가 꽉 쥐고 있던 검이 타오르듯 밝은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성한 최강의 검술, 오러 파이어(AURA FIRE)였다. 털보는 괴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거리가 확보되었다고 판단되는 거리까지 전력으로 질주한 후, 자신의 주위에 흩어져 있는 살아남은 1대 대원들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자. 빨리 타이탄을 꺼내, 허억!" 그 순간 털보는 뭔가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오는 것을 느끼고 헛바람을 삼키며 몸을 틀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쐐액'하는 파공음을 흘리며 화살이 그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자리를 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화살은 그것 하나만 날아온 것이 아니었다. 타이탄을 타기 위해 대기 중이던 대원을 노리고 수십 발이 쏟아진 것이다 털보가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봤을 때, 서 있는 것은 단 한 명. 제 1대에서 자기 다음으로 실력이 뛰어난 한스뿐이었다. "젠장! 이래 가지고 타이탄에 타는 것은 자살 행위야." 자신들이 타이탄에 탑승하도록 상대방이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털보는 숨어 있는 적들을 향해 달려가면서 한스에게 외쳤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 기회를 봐서 타이탄에 타라." 털보는 달려가면서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런 다음 두 번째 날아올 화살을 쳐낼 마음의 준비를 갖췄다. 화살에 실린 강력한 마나의 기운 저곳에 매복하고 화살을 날려대고 있는 놈들 또한 기사임이 분명했다. 쐐애액! 또다시 거대한 채찍이 키에리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뭘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금속으로 촘촘히 얽어 놓은 듯 채찍은 금속성의 거무튀튀한 광택을 내고 있었다. 아무리 가는 부분이라도 어른의 머리통보다 더 굵었고, 끝에는 해골 모양의 검은색 쇳덩어리가 달려 있었다. 키에리가 몸을 살짝 위로 날리자 그 커다란 쇳덩이는 강한 힘으로 땅바닥에 작열했다. 꽝 커다란 소리를 울리며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그 순간 키에리의 검이 빠르게 회선을 그었다. 그와 동시에 반월형으로 생긴 푸르스름한 빛의 덩어리가 엄청난 속도로 괴물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어엇" 괴물은 한순간 당황한 듯 보였다. 이런 식의 공격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었기에, 그 어떤 대비도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왕이 불러낸 마족들 중에서도 제법 상위에 속하는 존재, 바로 발록이었다. 인간의 공격이 아무리 의외였다고 하지만, 서로 간에는 40여 미터라는 거리가 있었다. 마법의 사용에 능통한 발록에게는 그 정도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순간 발록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으나 방금 전까지 있던 곳에서 1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순간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근거리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발록은 이번에는 방어 마법까지 사용해서 전신을 보호했다. 그런 후에 눈길을 돌렸을 때, 이미 그곳에는 해골 뼈다귀를 뒤집어 쓰고 있던 그놈의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던 발록, 그는 곧이어 해골의 사내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아무리 기사가 빠른속도로 달린다고 해도 마법에 능통한 데다가 공중을 날아다닐 수 있는 발록에게있어 그것은 헛된 도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키에리는 힘껏 달려서 순식간에 부하들의 일부와 합류했다. 아니, 타이탄에 탑승하지도 못하고 사방에서 날라 오고 있는 화살을 막느라고 허둥대고 있는 부하들을 앞질러 달려갔다, 일단, 저 괴물을 상대하려면 타이탄이 꼭 필요했다. 그런데, 이렇듯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상태라면 타이탄에 탑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타이탄에 탑승하기 위해 뛰어오르는 그 순간을 노리고 있던 적들에게 아주 좋은 목표물이 되어 줄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키에리는 곧이어 적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적들은 허둥지둥 활을 내려놓고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눈에서는 희미한 붉은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 손발은 미라처럼 시커멓게 말라 붙어 있었다. 하지만, 키에리는 상대방의 모습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검을 날렸다. 상대는 순간적으로 검을 들어 올려 그의 검을 막았다. 하지만, 오러 파이어를 뿜어내고 있던 키에리의 검은 무 자르듯 상대의 검을 토막 내며 상대의 몸까지 위에서 아래로 훑고 지나갔다. "끼에엑!"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상대는 쓰러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먼지가 흩날리듯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키에리는 이런 기괴한 현상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있을 시간 이유가 없었다. 주위에 있던 또 다른 놈들이 다려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록은 감탄했다. 상대의 의도를 깨닫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죽음의 기사 넷이 소멸된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 해골 바가지의 사내는 또 다른 죽음의 기사를 해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에 쥐새끼가 숨어 들어왔으니 죽여 버리라는 지시를 마왕에게서 받고 그는 황궁지하실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리고 있던 죽음의 기사들을 몽땅 다 긁어모아 온 것이다. 만약 상대가 이렇게도 애를 먹일 줄 알았다면 차라리 발록만을 두셋 더 데리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마왕이 거느리고 있는 마족들 중에서 비교적 고차원적인 마법을 쓸 줄 아는 종족인 발록들은 대부분 마왕과 함께 소환 의식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발록이나 아미면 발록보다 더욱 강한 존재를 이 세계로 데려오기 위해서...... "호비트 따위가 제법이로군. 하지만 그래 봤자야." 저 어둠 밑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껄끄러운 음성을 내뱉으며 발록은 공간 이동을 시작했다. 발록이 공간 이동을 하자 키에리와 발록간의 거리는 순간적으로 좁혀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발록의 거대한 채찍이 대기를 갈랐다. 츄앗! 하지만 발록의 예상과 달리 상대는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 아주 재빠른 동작으로 옆으로 비켜섰다. 상당한 속도로 달리고 있는 중이었기에 그 뛰어난 방향전환 능력은 감탄을 자아내게 할 만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발록은 여유만만이었다. 마족의 우월함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피해 보거라." 발록은 키에리를 향해서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어댔다. 하지만, 키에리는 요리조리 잘도 피해대며 죽음의 기사들 간의 거리를 좁혔고, 드디어 그들 중 한 명을 토막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주위에서 공격에 동참하려고 했던 죽음의 기사 넷은 발록의 채찍질에 산산이 분해되어 버렸다. "이런!" 오히려 자신의 채찍질에 죽음의 기사들이 더욱 큰 희생을 치르자. 발록은 그제야 슬슬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의 엄청난 덩치가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었다. 상대방은 아주 작았기 때문이다. 그런 적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자 공격하기가 매우 까다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발록은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태까지 자신의 가장 큰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마법을 쓰지 않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마법에 있어서 감히 호비트 따위가 마족과 대등할 수는 없었다. "태고의 혼돈이여, 적의 발목을 잡아라." 키에리가 달려가고 있는 주변의 땅이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며 꼭 수렁과 같이 변해 버렸다. 하지만 수렁처럼 약간 미끌미끌한 것이 아니라. 이건 꼭 아교풀을 풀어 놓은 것처럼 끈적끈적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또 뭐야? 마법인가?’ 키에리는 끈적끈적하게 땅바닥이 붙어 오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발록이 날린 두 번째 마법이 그를 향해 뿜어져 오고 있었다. 키에리는 뭔가 가공할 만한 기운이 자신을 향해 뿜어져 온다고 느낀 그 순간, 자신의 검을 힘껏 땅바닥에다가 꽂았다. 그와 동시에 검에 응축된 기운과 마법의 기운이 충돌했다. 대폭발이 일어난 그때, 키에리는 자신의 발에 더 이상 끈적이며 달라붙는 것이 없음을 느꼈다. 발록은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미세한 차이로 피했음을 알고 즉시 두 번째 공격을 날렸다. 발록의 한쪽 손바닥에서 시커먼 기운이 응집되는 듯하더니 곧이어 엄청난 기세로 뿜어져 나갔다. 하급 악마라고 하지만, 거의 8미터나 되는 거대한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마법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가공스러움 그 자체였다. 키에리는 위로 몸을 날린 상태에서 두 번째 공격이 접근한다는 것을 알고 손을 앞으로 뻗은 후 마나를 뿜어냈다. 그랜드 마스터급의 강자인 그는 전문적인 맨손 격투술을 익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떤 방식으로 기를 운용하면 뿜어낼 수 있는가는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손을 통하여 엄청난 마나가 뿜어져 나오며 강력한 반발력이 발생했고, 그 결과 키에리의 몸은 그 반대 방향으로 충격에 의해 밀려나갔다. 그리고 바로 그때, 발록의 두 번째 공격 마법이 키에리가 방금 전에 체류하고 있던 공간을 가르며 통과했다. 마법 공격까지 상대가 간발의 차이로 피해 버리자 드디어 바짝 열받은 발록이 전력을 다해 공격을 가해 왔다. 겨우 인간 따위를 상대로 이렇게 시간을 끌다니, 그것도 마왕에게서 받은 죽음의 기사들을 태반이나 잃어버리고 말이다. "크아아악!" 발록은 괴성을 지르며 돌진해 왔다. 키에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는 발록을 힐끗 바라본 후 또 다른 죽음의 기사들을 향해 돌격했다. 저런 식으로 상대가 돌진해 들어오면 어떤 식으로 대응할 것인지 이미 머릿속으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계의 생명체인 발록은 보통 인간들이 보이는 움직임과는 완전히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아주 자유자재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십분 활용하여 단거리 공간 이동을 수시로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간 이동 한번에 발록은 키에리의 머리 위에 나타났고,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부은 후 키에리가 반격하면 살짝 옆쪽으로 초단거리 공간 이동을 했다. 발록의 거대한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워라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측정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타이탄 정도나 되어야 가능할 텐데. 그런 발록이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서 타이탄 보다도 더욱 민첩하게 움직이며, 또 마법 공격까지 병행해서 하기 시작하자 키에리는 처음 가졌던 자신의 선입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뼈저리게 느낄 시간 여유도 없이 부상을 당하고야 말았다. 갑자기 뒤쪽에서 번개처럼 날아오는 채찍을 막기 위해 검을 가져다 댔지만, 오러 파이어로 보호되고 있는 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방에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검과 채찍이 부딪치는 그 미세한 반동을 이용하여 몸을 살짝 피한 덕분에 직격타를 얻어맞는 것은 피했지만, 그래도 발록이 휘두르는 채찍이 어디 정상적인 크기인가? 길이는 40여 미터에 달하고 그 끝에는 사람의 머리통을 몇 개 합해 놓은 것만 한 쇳덩어리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옆으로 훑고 지나갔으니 절대로 키에리의 몸이 무사할 수는 없었다. 키에리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지만, 곧이어 벌떡 일어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 부하들의 안위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부상 당한 몸으로 부하들까지 챙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사실. 자신이라도 살아남아서 친구인 로체스터에게 이런 괴물이 크라레스에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통해 크라레스가 몬스터들의 배후 집단이라는 것을 확인했지 않은가? 키에리는 그것을 보고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공간 이동을 마음대로 하면서 돌진해 오는 발록에게서 도망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불쑥 튀어 나와서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해 올지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키에리는 숲 속까지 가까스로 도주한 후에야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아무리 발록의 마법이 대단한 것이라고 해도 키 큰 나무들이 우거진 숲 속으로 공간 이동해 올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발록이 공간 이동해 오는 곳에 작은 나뭇가지 하나만 놓여 있어도 발록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키에리는 자신들이 적들과 싸운 곳 바로 근처에 숲이 있다는 것을 아레스 신께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사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는 길만이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墨 황당해진 마왕 香 토지에르, 아니 마왕 어르신은 지금 영 기분이 찜찜하면서 가슴이 답답한 상태였다. 그 이유는 결코 지근거리까지 적의 기사단이 침투해 들어온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발록 한 마리와 죽음의 기사들을 보내 놨으니 곧이어 좋은 소식이 올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마왕은 이렇듯 걱정을 하고 있을까? "뭐라고 변명을 늘어놔야 할까?" 토지에르의 마음 한편에서 점차 자신의 자리를 넓혀 가다가 어느 한순간 토지에르가 방심한 그때,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 것은 마왕으로서는 그렇게 힘든 작업이 아니었다. 물론 그때 토지에르는 다크와 드래곤이라는 마지막 카드가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제 정신이 아니었기에. 마왕으로서는 생각 밖으로 빨리 그의 정신을 차지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뭔가 얻는 것이 있다면 그 반대로 잃는 것도 생기는 법이다. 마왕은 자신의 계획보다 몇 달 더 일찍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토지에르를 통해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든 것은 아주 골치 아픈 문제였다. 크라레스의 권력의 정점에 있는 세 명의 공작에 의해 움직이는 체제였다. 하지만 그 세 명의 관계는 매우 묘한 구석이 있었다. 검객인 둘은 보이는 권력을, 그리고 마법사인 토지에르는 뒤에서 보이지 않게 그 둘 모두를 통제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치레아 공작은 권력 자체에 무관심해서 공국에 틀어박혀서 놀고 있었기에 크라레스를 이끄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앞에서는 루빈스키 대공이, 뒤에서는 토지에르가. 마왕이 토지에르의 마음을 뺏은 시기는 아주 묘하게도 두 명의 공작들이 다 부재 중인 상태였다. 루빈스키는 부상으로 치료 중인 상태였고, 다크는 행방불명인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쉽게 크라레스라는 대제국을 꿀꺽 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한다면, 마왕은 그 둘에 대한 정보를 거의 모으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을 너무 크게 벌려 놨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모든 것이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왕의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루빈스키가 총사령관직에 복귀했다. 군부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말이다. 물론 루빈스키는 부상 당하기 전부터 총사령관이었으니 그가 회복했다면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마왕의 입장에서는 눈치를 봐야 하는 혹이 하나 생긴 것이었기에 그렇게 바람직한 진행은 아니었다. 마왕은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 갖춰질 때까지는 크라레스 군부의 도움의 필요했다. 그리고 그 군부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는 사람이 루빈스키였다. 그렇기에 마왕은 될 수 있으면 그와의 충돌은 피하려고 노력했다. 루빈스키는 조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납득하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루빈스키를 잘 구슬려서 전장으로 보내 버리고 한 시름 놓고 있었더니,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던 다크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 또한 권력에 욕심을 내지 않아서 그렇지, 크라레스를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 중의 한 명이었다. 루빈스키가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는 가운데, 또 다른 한 명까지 자신을 의심하게 만든다면 자신이 세운 원대한 계획의 토대부터 무너져 내릴 우려가 있었다. 어쨌든 힘이 갖춰질 때까지는 그들의 힘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또 어떻게 꼬드겨서 황제와 못 만나게 한단 말인가? 그녀는 총사령관이 아니었기에 전선의 상황이 심상찮다는 이유 따위로 내쫓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듯 괴상한 갑옷을 입고 있는 것에 대한 변명은? 생각할수록 골치 아픈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핑계 거리가 떠오르지를 않는군." 이때 밖에서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전하,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셨사옵니다." "이크, 벌써?" 토지에르보다는 다크 쪽이 한 단계 놓은 직위를 가졌기에 경비병은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소문에 듣던 대로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마왕은 그녀를 보는 순간 마른침을 꿀꺽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최고의 몸이야. 루빈스키의 몸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여기 더 좋은 것이 있었군 드래곤까지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정말 대단...응?’ 마왕은 다크를 따라 들어온 두 명을 보는 순간 온몸이 바짝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전번에 이곳에 왔을 때, 결정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틀어 버린 것이 드래곤들이었다. 그런데 왜 저 공작을 따라서 드래곤이 두 마리씩이나 따라 들어온다는 말인가? 지금의 마왕에게는 다크를 따라 들어온 저 청년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는 드래곤 한 마리도 상대할 만한 힘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일을 채 벌리기도 전에 드래곤이 두 마리씩이나 여기에 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마왕은 일단 다크와 대화를 나누면서 사태를 관망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저 청년으로 변신하고 있는 드래곤은 거의 에인션트급에 가까운 노룡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제일 늦게 들어온 여자애로 변신하고 있는 드래곤은 거의 드래곤이라는 것도 간신히 알아챌 정도로 나약한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런 어린 드래곤과 함께 온 것을 보면 자신과 싸움을 하자고 온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잘 있었나? 그런데, 얼굴에 뒤집어 쓰고 있는 그건 뭐야? 왜 갑자기 실 내에서 갑옷을 입기 시작한 거지?" 마왕은 전에 루빈스키에게 대답했던 것돠 똑같은 대답을 하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가장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또, 이사람한테 이 말하고, 저 사람한테 저 말을 해 봐야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예. 이 갑옷은 몬스터들을......" 그때 대답했던 것들을 줄줄 늘어놓으려고 하려는 순간, 다크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아아, 뭐 자네가 뭘 입고 있건 자네 마음이니까 내가 상관할 이유는 없 겠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자 오히려 약간 당황한 쪽은 마왕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주 오랫동안 내가 행방불명이라서 걱정했겠군." "예, 그렇습니다. 그 동안 대체 뭐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아, 그건 자네가 알 필요 없잖아, 내 사생활이니까 말이지." 걱정했을 거라고 말해 놓고는 사생활이라고 둘러대는 것은 또 뭔가? 마왕은 이 계집이 지금 감히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왕은 엄청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때, 그녀와 함께 드래곤들이 들어와 있지만. 않았다면 마왕은 손을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등 뒤에는 무려 두 마리씩이나 되는 드래곤들이 있었고, 마왕은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진 그녀의 말 한마디 때문에 마왕의 노기는 쑥 들어가 버렸다. 마왕이 가장 우려하는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온 용건은 말이야......" 행방불명되었던 대공이 이곳에 온 용건이야 뻔하지 않겠나? 그것 때문에 다크가 마법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변명거리를 생각해 낸다고 머리를 쥐어짰지 않은가. "황제 폐하를 뵈려고 오셨습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마왕의 말은 또 다시 끊겨야만 했다. 다크는 마왕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혓바닥부터 찼다. "쯧쯧... 이봐, 내가 언제 황제 만나러 여기 오는 것 봤나? 내가 언제 여행 갈게요, 혹은 다녀왔습니다. 하면서 황제한테 보고하는 것 봤냐구." "......" 이제 마왕은 당황스러움을 넘어서서 황당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만약 이런 놈이 내 부하였다면 벌써 두 토막을 내버렸을 거야. 황제라는 놈도 불쌍하구먼, 저딴 놈을 부하라고 데리고 있으니, 등등 별의별 생각이 다 순간적으로 마왕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리고 내 부하들에게 들으니까 뭔가 작전 때문에 내 영지에다가 그 냄새나는 것들을 주둔시켜 놨다고?" 마왕은 잠시 잡생각을 하느라고 다크가 말하는 그 ‘냄새나는 것들’이 뭘 말하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 했으나, 곧이어 몬스터들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예? 예." "그것들 모두 오늘 중으로 다 치워 버려, 안 그러면 내가 직접 치워 버릴 거야. 알겠어?" "예, 그렇게 하지요. 그렇다면 겨우 그 말씀하시려고 몸소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전에 내가 부탁해 놓은 것에 대해서 뭔가 변동사항 이 없는가 해서 들렀지. 뭐 좋은 소식 같은 거 없어?" 다크가 말하는 부탁이라는 것이 뭔지 알 도리가 없었던 마왕 어르신. 그렇다고 그 부탁이 뭔지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마왕은 두루뭉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대답했다. "예? 에... 글쎄요, 요즘 워낙 전쟁통에 일거리가 폭주하는 상태라서....." "국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만, 나하고의 약속을 잊으면 곤 란하지." "물론 가슴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좋아! 뭐 별일 없는 것 같으니 나는 빚이나 갚으러 가야겠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해서 마왕은 아연한 어조로 물었다. 그토록 거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 대공이 갑자기 무슨 빚을 갚으러 간다는 말인가? "예?" 다크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상대에게 오히려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간다니까 예는 무슨 예야? 그럼 잘 있으라구 무슨 일 있으면 부르고." 치레아 대공은 올 때와 같이 갈 때도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왕을 남겨두고......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서 청년으로 변신하고 있는 드래곤도 사라져 버렸다. 이때, 마왕이 어린 드래곤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던 드래곤이 슬그머니 마왕에게 다가와서 음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어조로 속삭였다. "오랜만이군. 대마왕, 크로네티오." 마왕은 황당한 표정으로 다크가 사라진 문을 보고 있다가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말뜻이 뭔지 깨닫는 순간 화들짝 놀라서는 뒤로 후다닥 물러서며 외쳤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이런, 내 생애에 자네를 두 번이나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 었어. 아무튼 또 다시 만나니 반갑구먼." "......." 마왕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으로 변신하고 있던 그 드래곤을 잘 속여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어린 드래곤이 자신을 알아본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리다고 생각했던 드래곤이 사실은 더욱 강한 드래곤이란 말인가? 식은땀이 나는 순간이었다. 당황한 마왕을 바라보며 아르티엔은 미소까지 지으며 능청스레 말했다. "나를 벌써 잊어버렸나? 겨우 천5백 년밖에 안 지났는데 말이야. 이거 섭 섭하군. 자네를 강제 소환시켜 버린 나를 기억도 안 하고 있다니 역시 대마왕의 통은 크단 말씀이야 겨우 드래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보 면......." 만약 마왕이 토지에르의 몸을 리치로 만들지만 않았다면 핼쑥하게 안색이 질렸을 것이다. 그때 자신을 강제소환시켰다면, 그 말은 곧 그때 자신이 빼앗아 가지고 있던 드래곤을 죽였던 놈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리고 오래전 일이기는 했지만, 마법에 의해 드래곤의 육신이 산산이 파열되면서 느꼈던 지독한 고통도 함께 떠올랐다. "뿌드드드득!" 마왕은 이빨을 갈면서 외쳤다. "네놈이 그때의 골드 드래곤?" "오호라.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군, 그래, 이번에는 무슨 재미를 보시려고 오셨나?" "네놈은 나하고 무슨 원수를 졌다고, 끝까지 내 일을 방해하려고 드는 것 이냐?" 악에 받쳐서 따지고 드느 마왕,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렇듯 과욕에 찬 호비트의 몸을 빌려 세상 나들이를 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자신을 불러내어 계약을 맺으려면 최소한 6사이클급의 마법사는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가 뭔 할 짓이 없어서 흑마법에 의지하려고 하겠는가? 그렇다 보니 그가 세상에 내려올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운이 좋아서 특이한 놈을 만나 오랜만에 내려와서 뭔가 일을 꾸며 보려고 했는데. 그 원초적인 기회마저도 저 망할 드래곤 때문에 좌절될 의험에 처하자 실력행사는 할 수 없고, 입으로라도 악의에 찬 반항을 해보는 것이었다. 아르티엔은 그런 대마왕을 보며 아주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아, 방해는 무슨...... 나는 강자들을 좋아하지. 자네는 아직 본래 힘의 1퍼센트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닌가? 그런 자네를 지금 죽여 봐야 뭘 하겠나? 나는 그저 오랜만에 세상 구경을 한다고 나와서 자네를 또 다시 만났기에 반가워서 인사를 건넨 것 뿐이야 딴 뜻은 없다구." "감히 드래곤 주제에 나를 가지고 놀겠다는 것이냐? 만약 여기가 마계라 면......" 이를 가는 마왕에게 아르티엔은 능글능글하게 대답했다. "물론, 나는 절대로 마계에 가지 않으니까 그런 가정은 해볼 필요가 없을 거야. 아마도 내가 거기에 가면 자네를 비롯해서 좋아할 마왕들이 몇 있 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나는 절대로 자네를 가지고 놀 생각은 없어 아까 도 말했듯이 반가워서 인사한 것뿐이라니까 그런데, 자넨 질리지도 않고 여기에 오면 꼭 세계정복 사업을 시작하는군. 그것 외에는 할 일이 없나? 상상력이 아주 빈곤한 녀석이로군." 마왕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건 내 마음이다." "그런가? 그것이 자네 취미라면 어쩔 수 없군,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전처 럼 드래곤은 건드리지 말어, 나도 이 삭아빠진 육신을 가지고 자네와 드 잡이질 하기는 싫으니까 말이야. 이런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잘 되실 빌겠네. 그럼 수고하게나." 아르티엔과 만남은 마왕을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이다지도 파악이 불가능한 놈을 근소한 시간차로 둘씩이나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잠시 후 마왕은 손바닥을 탁 치면서 말했다.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군, 그놈도 유희를 즐기는 거였어. 내가 악조 건 속에서 천천히 힘을 키워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나를 누 가 상대할 것인지 바라보며 유희의 즐거움을 만끽하겠다는 말이겠지? 망 할 녀석!" "어디로 갈 거냐?" "크루마로 갈 거예요" "크루마? 거기에는 왜?" "빚도 갚을 겸 맡겨 놓은 것도 찾을 겸....만약 그녀가 맡겨 놓은 물건들을 임의로 처분해 버렸다면 응분의 보상을 해야겠지만 말이지요." 다크는 이빨을 갈며 말했고, 아르티어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물건 따위를 임의로 처분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일 것인가? 왜 그녀가 한껏 살기를 뿜어내며 이를 가는지 아르티어스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간 이동 마법진이나 준비하시죠, 목표는 크루마의 수도인 엘프리안 시 로 해주세요." "엘프리안 시라......" 잠시 생각하던 아르티어스는 곧이어 그것 좌표를 기억해낸 후 곧장 공간이동을 시작했다. 墨 황실 사냥대회 香 "공작 전하. 긴급 정보가 도착했사옵니다." "뭐냐?" "예,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우려하신 대로 그녀는 드래곤과 만난 것 이 확실하옵니다. 벼룩에게서 온 보고에 따르면 그녀가 아버지와 함께 치레아 공국에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리고 그녀의 탈출을 도운 그 무녀 계집과 또 다른 한 명의 일행도 도 착했다고 하옵니다. 그녀는 도착 즉시 현재까지 치레아를 책임지고 있었 던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백작을 불러들여 여태까지의 일을 보고받았 다고 하옵니다." "경은 그녀의 다음 행동이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나?" "예, 아마도 그녀는 본국과 크루마에 대한 복수를 할 가능성이 가장 크지 않겠사옵니까? 그런만큼 그 복수 대상에서 본국을 빼버리는 것이 최우 선적인 과제라고 사료되옵니다." "그렇겠지......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일단 그녀에게 사신을 보내어 해명을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미네 르바가 그녀를 우리에게 넘겼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통할까?" "통하도록 해야겠지요." 로체스터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제임스를 불러라. 아무래도 그가 적격일 것 같군." "예, 전하." 제임스는 치레아 대공이 코린트에 체류했을 때 매우 즐겨 마셨던 아주 강한 술 두 상자와 드래곤에게 뇌물로 바칠 포도주 한 상자, 그리고 그 외에 몇 가지 금은보화를 선물로 가지고 치레아 공국으로 떠났다. 로체스터 공작은 그녀를 만났을 때, 어떤 식으로 해명할 것인지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제임스를 보낸 후 초조하게 기다렸다. 마법진으로 갔으나 치레아에 곧장 도착했을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제임스는 한 시간도 안 되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로체스터 공작은 그가 너무 빨리 돌아온 것에 대해 찝찝함을 느끼며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되었나?" 제임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황송하옵니다, 전하. 그녀는 만나 보지도 못했사옵니다." 제임스가 찾아갔을 때 다크는 술독에 빠져 있었기에 만난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로체스터 공작은 더욱 난감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그녀가 코린트까지도 복수의 대상에 넣지 않았다면, 사신을 만나 보지도 않고 돌려보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뭣이라고?"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청을 넣었으나 곧장 거절당했사옵니다. 대신, 그 드래곤은 만났사옵니다." 그 말에 로체스터 공작의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어찌되었건 문제는 다크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드래곤이 아니던가? "그래? 그건 잘되었군. 이야기를 해보니 어떻던가? 그런대로 이쪽의 사정 에 대해 이해해 주는 눈치던가?" "예, 그게......" 난처한 어조로 제임스는 말을 이었다. "그런대로 이해해 준느 것 같은 눈치였사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때 그가 본국에 나타났을 때 모든 것을 알려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죄 는 나중에 묻겠다고 하더군요." "으휴, 산 넘어 산이군." "드래곤은 별 잔소리 없이 이쪽에서 건네주는 모든 선물을 받았사옵니다. 그런만큼 어쩌면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로체스터 공작은 드래곤이라는 족속은 치가 떨린다는 듯이 힘주어 말했다. "욕심이 목구멍까지 차 있는 족속들을 그런 이유 하나만으로 믿기는 힘들 지. 어쩐다......" 이때, 레티안이 옆에서 차분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전하, 나중에 일어날 일을 지금부터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이옵니다." "응? 왜 그런가? 경에게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일단, 본국은 그녀가 찾아올 두 번째 대상이라는 점이 중요하옵니다. 먼 저 그녀는 자신을 배반한 크루마부터 찾아가지 않겠사옵니까?" "그런데?" “예, 일단 그들이 크루마에서 행패를 한껏 부리고 난 후에는 화가 많이 풀릴 것이라는 점이지요. 그런 상태에서 본국에 온다면, 어쩌면 말만 잘 하면 넘어갈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럴까?" "예, 그리고 그녀가 풀려났다는 사실을 크루마에 알릴 필요가 있사옵니다." "그것은 왜?" "미네르바는 보통 뛰어난 여자가 아니옵니다. 그녀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크루마의 멸망을 막으려고 할 것이옵니다. 만약, 미네르바가 그녀를 잘 구슬려서 넘어간다면, 주범인 크루마를 놔뒀는데 공범의 입장인 우리들 에게 크루마보다도 가혹한 처분을 내릴 이유는 없을 것이 아니옵니까?" "흐음, 그러니까 크루마 쪽에다가 책임을 전가하자는 말이군." "예,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의 말도 일리는 있군." 로체스터 공작은 제임스에게 말했다. "경은 지금 바로 엘프리안으로 가라." "예, 전하." "그곳에서 드래곤이 크루마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히는지 세밀하게 관찰 하도록. 드래곤은 될 수 있으면 인간의 일에는 관여를 하지 않았었다. 그 런만큼 크루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면서, 본국의 대처 방 안을 논의하기로 하지." 코린트로부터 치레아 대공의 탈출 소식을 접한 미네르바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부하로부터의 보고에 한동안 말도 못하고 앉아있던 그녀는 이윽고 정신을 차린 후 불같이 분노했다. 회의 중이었기에 부하들이 다 보고있는 상황이었지만, 평소와 달리 미네르바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이런 망할 녀석들! 완전히 힘 빠진 계집애 하나 단속을 못했다는 말인가?" 분노하고 있는 그녀에게 지오그네가 조언을 올렸다. "그녀는 지하 궁전에서 탈출한 전례가 있지 않사옵니까? 코린트 쪽에서 그녀에 대한 대비를 조금이라도 허술하게 했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 한 것이옵니다. 전하, 어서 대책을 강구하셔야만 하옵니다. 언제 그녀가 기사단을 이끌고 쳐들어 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니옵니까?" "기사단이 문제가 아니야. 분노에 가득 찬 드래곤이 문제지. 이 일을 어떻 게 수습한단 말인가?" 그 자리에 모인 인물들 중에서 다크가 드래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미네르바의 참모장인 이블리스와 궁정마법사 마리나 지오그네뿐이었기에, 모두들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정보관인 바르데 후작은 경악하고 있는 모두를 대변하여 미네르바에게 정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바르데 후작까지 모르고 있었을 정도로 그녀와 드래곤 사이의 연관성은 최고의 극비사항이었던 것이다. "전하, 치레아 대공이 드래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이옵니까? 왜 그녀 의 일에 드래곤이 분노하여 나선다는 것이옵니까?" "젠장! 나도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연관성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미네르바는 그렇게밖에는 부하에게 할 말이 없었다. 곧이곧대로 그녀와 드래곤 사이의 친분 관계를 말한다면, 당장 자신의 무덤을 파는 행위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드래곤과의 연관성을 알면서도 그녀를 체포, 구금, 심문했던 사실이 정적인 그린레이크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녀는 곧 파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네르바는 대충 그 정도로 대답한 후 화제를 바꿨다. 그녀는 이블리스에게 빠른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우선, 최대한 빨리 폐하를 지하 궁전으로 대피하시게 해라." 사정을 어느 정도 선까지 파악하고 있는 지오그네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상대는 어린 드래곤도 아니고 거의 에인션트를 바라보는 막강한 드래곤이었다. 그런 드래곤의 브래스가 뿜어지면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전하, 웜급을 넘어서는 드래곤의 브래스가 직격한다면 지하 궁전이라고 해도 무사할 수는 없사옵니다. 폐하를 프루니아의 여름 궁전으로 모시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미네르바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드래곤의 브래스가 가지는 파괴력은 아마도 마법사들이 더 잘 알 것이었기 때문이다. "경의 말이 옳군. 여름 궁전이 있었지. 좋아, 폐하뿐만 아니라 모든 황족 및 황실에 소속된 인물들이 다 그곳으로 피난해야 하니까 영구 마법진 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경은 지금 즉시 그린레이크에게 연락해서 이동 용 마법진을 몇 개 더 준비시키도록 해라. 황실 피난 건에 대해서는 지 오그네 경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겠다." "옛, 전하." 이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이블리스가 끼어들었다. "전하, 분명히 드래곤이 쳐들어 온다면 폐하를 피신시키는 것이 옳은 판 단일 것이옵니다. 하오나, 딴 것이라면 몰라도 황제 폐하를 피난시키는 일은 결코 전하의 독단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사안이옵니다. 폐하를 어 떤 식으로든 납득시킨다고 하더라도 그린레이크 전하께서 가만히 계실 리가 없기 때문이옵니다." 미네르바는 갑자기 골치가 아파 오는 지 머리를 지그시 누르면서 투덜거렸다. "젠장, 그렇지. 그 망할 녀석을 잊었군.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한다? 경 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 없나?" 이블리스는 이미 생각해 뒀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대규모 사냥대회를 여는 것이옵니다." "뭐?" "황실의 수렵 지역에서 대규모 사냥대회를 여는 것이지요. 명분은 ‘크루마 의 발전을 위해 황실과 귀족 간의 돈독한 유대’로 하고 한 일주일 정도로 계획해서 성대하게 말이옵니다." "사냥이라......" "예, 그러면서 수도 내에 있는 모든 귀족들을 그 사냥에 초대하는 것이 좋 지 않겠사옵니까? 그리고 그 가족들도 말이옵니다." 미네르바는 사냥대회를 개최하면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알아채고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호오, 그것 아주 좋은 생각이군. 그러면 황족과 귀족들의 피난을 별탈 없 이 일거에 처리할 수 있겠군." "예, 그리고 폐하께서 가시는 것인만큼 수도 방위군의 상당수를 합법적으 로 대피시킬 수 있사옵니다. 아무래도 상대가 드래곤이라면 군대의 필요 성은 거의 없어지니까 말이옵니다." 미네르바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지오그네에게 말했다. "좋아, 즉시 그렇게 시행하게. 사냥대회 일정을 너무 급작스럽게 잡은 것 을 가지고 그린레이크가 뭐하고 떠들기는 하겠지만, 뭐 그 정도는 어떻 게 무마시킬 수 있겠지. 나머지 세세한 사항은 경이 알아서 처리해 주게." "옛, 전하." 미네르바는 이제 테시온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경은 타이탄 생산 시설 및 인원들을 모두 시외로 대피시킬 수 있도록 준 비해라. 대피 자체는 폐하께서 별장으로 가신 후에 할 수 있겠지만, 그 규 모와 인원이 엄청난만큼 준비 작업을 갖추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닐 것 이다." "예." "대신 절대로 그린레이크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비밀스럽게 조용히 일을 처리하도록 해라." "옛, 전하." "바르데 후작." "옛, 전하." "경은 수도에 체류하는 귀족들 모두에게 사냥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해라. 경은 정보관인만큼 수도 내에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들어와 있는지 파 악하고 있겠지?" "옛, 전하." "그들 모두가 참석해야 한다. 물론 보잘것없는 귀족들이야 빠져도 상관없 다." "예, 즉시 시행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워렌." "옛, 전하." "경은 수도 방위군에게 협조를 구해서 2개 사단 규모를 여름 별장으로 이 동시키도록 해라." 미네르바의 명령에 워렌은 난처한 듯 대답했다. "전하, 그건 너무 많은 수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수도에는 1개 사단 밖에 남지 않는데...... 여태껏 그렇게 많은 병력이 수도를 비운 전례가 없사옵 니다." "물론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방위사령관에게 이번 임무 자체가 드넒 은 사냥터에서의 폐하의 호위이니만큼 병력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 하면 이해할 것이다." "예, 전하." "경은 제2근위대를 거느리고 방위군 1개 사단과 함께 먼저 여름 별장을 향해 출발하도록 해라." "옛!" 일단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되는 시시를 다 내린 후 미네르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빼먹은 것은 없나 하고...... 그러다가 그녀는 뭔가를 생각해 냈다. 다크를 납치했던 그때, 그녀의 동료들도 함께 체포했었음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들을 돌려보낸다면 아마도 어느 정도 복수의 강도가 약해지지 않을까? 미약한 희망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블리스." "옛, 전하." "그때, 그녀와 함께 체포했던 포로들은 어떻게 되었나?" "아, 예. 정보부에서 포로들을 심문하겠다고 해서 건네줬사옵니다." "뭐? 정보부에서?" "예, 전하. 그들은 모두 다 치레아 기사단 단원들이었기에 그들을 심문하 면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치레아 대공을 체포했던 것은 철저하게 기밀로 취급되었지만, 그 동료들의 경우 도주하는 것을 잡아들인다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기에 정보부에서 넘겨 달라고 하는 것 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사옵니다." "그랬던가?" "예, 그 건에 대해서도 전하께 서류가 올라갔고 결재가지 받았사옵니다." "글세...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군." 미네르바는 하루에도 수십 내지 수백 건씩 서류가 올라오기에, 하나하나를 기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미네르바는 이블리스가 직접 설명을 하는 중요한 사안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읽어 보지도 못하고 서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미네르바는 일단 지나간 일을 가지고 시시콜콜 따지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곧장 시선을 바르데 후작에게로 돌렸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지금쯤이라면 포로에 대한 심문은 끝났을 텐 데?" 바르데 후작은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게... 그들을 그린레이크 전하께서 데려가셨사옵니다." "뭣이?" "드라쿤급 타이탄을 무려 3기나 노획할 수 있는 데다가, 그들을 세뇌한다 면 전력적으로도 엄청난 이득이 있지 않겠사옵니까?" "이런 제기랄. 벌서 세뇌 작업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할 수가 없지 않나? 지오그네 경, 정신계 마법을 쓴 것을 다시 되돌릴 방법은 있나?" 미네르바의 물음에 지오그네는 난처하다는 듯 대답했다. "일단 정신계 마법을 쓴 상태에서 다시 원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 하옵니다. 정신 세계란 것은 워낙 복잡한 것이기에 한번 엉클어져 버리면 인간의 힘으로 되돌릴 수는 없사옵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돌릴 수 없다고? 그렇다면 드래곤이라면 어떻겠나?" "물론 그쪽은 차원을 달리하는 정신 체계를 가진 존재이기에, 인간의 정 신 세계쯤은 쉽게 치료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좋아, 이블리스." "예, 전하." "마법사 협의회에 연락을 넣어서 그들을 돌려 달라고 협조 공문을 보내라. 그들이 필요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빨리 돌려 달라고 말이다." "예, 전하." 墨 미네르바와 그린레이크의 갈등 香 다크가 술에 절어 있는 그 절호의 기간 동안 미네르바의 수도 피난 계획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미네르바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고 해도, 수도 전체를 비우는 것이 말처럼 쉬울 리는 없었다. 그린레이크는 다짜고짜 미네르바를 찾아와서 인상을 구기면서 말했다. "지오그네에게서 사냥 계획에 대한 협조 공문을 전달받았소." 미네르바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그린레이크를 빤히 쳐다봤다. 그린레이크는 크루마에 있는 열두 명의 공작들 중의 한 명이었으며, 원로원의 의장이자 마법사 협의회의 의장이었다. 그는 엘프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미네르바가 이끄는 군부와 세력을 다투고 있는 반대파의 수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네르바는 평소에는 하지 않던 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원로원이나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고 대규모 사냥대회를 계획하고 발표했던 것이다. 물론 귀족들이나 기사들이 참석하는 사냥대회였다면 그들과 충돌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그 대회에 황제 및 그 일족들이 전부 다 참석한다는 데 있었다. 황제가 참석해야 하는 모든 업무 계획은 원로원과 의회의 재가를 거쳐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미네르바는 그것을 무시하고 일을 처리한 것이다. 미네르바는 분노에 찬 그린레이크를 빤히 올려다보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침착하게 말했다. "공문에 써져 있는 대로 황제 폐하께서는 오늘 저녁식사를 프루니아의 여 름 별장에서 하시게 될 거요. 그러니까 일정에 어긋나지 않도록 경은 마 법사들을 이끌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린레이크는 공문을 드넓은 책상 위에 살며시 놓은 것이 아니라, 공문을 잡고 있는 손바닥으로 ‘쾅‘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내리치면서 씩씩거렸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어떻게 황실의 일정과 계획을 군부에서 독단 적으로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사냥 계획 자체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 지만, 그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경은 엄청난 월권 행위를 하고 있다 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린가?" 미네르바는 그린레이크를 쏘아보며 말했다. "나도 일의 순서는 알고 있소. 먼저 국무대신에게 계획서를 보내고, 국무 대신은 그 계획을 다른 일정들과 비교하여 일정을 조정하겠지. 그런 다 음 의회의 심의와 원로원의 재가를 거쳐 폐하께 보고되어 최종 결정을 얻어 낸다는 것을 말이오." 국무대신 지크니아 얼스웨이 후작도, 원로원 의장인 그린레이크 공작도, 또 의회 의장인 어스무스 그랜딜 공작도 다 엘프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린레이크와 한통속이라는 말이다. 글들은 엘프들 간에 연대감을 높이기 위해서 성과 이름 사이에 ‘엘‘ 자를 붙여서 엘프보다는 훨씬 미개한 종족인 인간들과 차별화하려는 노력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아무리 긴급 사안이라고 사냥대회를 개최하자고 말해도 그것이 통할까? 그린레이크는 빈정대듯 말했다. "아주 잘 알고 있군." "물론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최소한 6개우러은 걸려야 일을 시작할 수 있 다는 것 정도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소. 현재 시국이 어수선하기에 귀족 들의 동요를 억제하고 폐하를 중심으로 결속을 다지자는 취지에서 마련 하는 행사요. 지금 꼭 해야만 한단 말이오. 6개월은커녕 1개월만 지나도 그 효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거요. 현재 폐하께서는 비교적 한가하신 상 태가 아니오? 며칠 더 지난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오. 그 래서 지금 당장 시행하겠다는 것이오. 이의 있소?" 그린레이크는 미네르바의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물론 이의가 있소. 경은 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이오. 대규모 사냥 대회 를 직접 계획했고, 또 군대 및 기사단이 폐하를 호위한다는 명목하에서 대대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소. 오늘 낮에 마법진으로 수도방위군의 1개 사단을 프루니아로 보냈고, 내일도 또 다른 1개 사단을 프루니아로 보내 달라고 협조 공문이 왔더군. 그 외에 제1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기사단도 폐하의 호위라는 명목으로 프루니아에 간다고 하던데? 평소 폐하의 호위 규모치고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린레이크는 미네르바를 압박해 가면서 서서히 기분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 따위가 감히 위대한 엘프와 사사건건 맞서려고 하다니, 그는 미네르바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아예 딴 생각을 못하도록 쐐기를 박기 위해 손수 찾아온 것이다. "지금 시죽이 어수선하니까 만전을 기하자는 것 외에 별 뜻은 없소." 애써 변명하는 미네르바를 향해 그린레이크는 준비해 뒀던 가장 큰 쐐기를 무자비하게 박았다. 마음속으로 승리의 V자를 그리면서 말이다. "훗, 누가 아는가? 그런 것은 다 핑계고, 고위급 귀족과 황족들을 프루니 아에 모두 모아 놓고 반란이라도 일으킬 생각인지 말이야." 설마 자신의 행동을 반란과 연관시킬 수 있다는 것을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미네르바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만큼 반란이라는 단어가 파급하는 효과는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미네르바와 그녀의 부하들은 물론이고, 그녀를 낳은 크루마 굴지의 무가(武家)인 켄타로아 가문을 비롯한 수많은 가문에 소속된 모든 남녀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 신세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반란에 대한 징벌은 잔인할 정도로 철저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이 되는 소리일 수도 있지. 저 코린트의 총사령관인 로체스터 공작도 하룻밤 사이에 정권을 잡아 버렸어. 그런 다음 꼭두각시 황제를 세워 놓 고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지 않나." 새파랗게 질려 있는 미네르바를 정면에서 쏘아보며 그린레이크는 말을 이었다. "경은 폐하계 위임을 받아 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일 뿐이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야. 왜 국정 전반에 걸쳐 자신의 힘을 뿌리내리려고 하는 거지? 폐하께서 행차하실 때 그렇게 절차가 복잡한 것도 다 만일의 사 태에 대비해서 만들어 둔 안전장치라고 봐야 해. 폐하께서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에게 둘어싸여 눈과 귀가 막히시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나?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나? 이 나라는 폐하의 나라이지, 경의 나라가 아니란 말이야." 미네르바는 우선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마음을 안정시켰다. 지금 곤장 말을 했다가는 ‘그딴 반란 따위 여기서도 충분히 일으킬 수 있어.‘ 라든지, ‘내가 만약 반란을 일으킨다면 네녀석 모가지부터 날아간다는 것을 몰라? 그걸 잘 알면서 여기에 제 발로 기어 들어오다니.‘라든지 뭐 그런 종류의 악담이 튀어나올 우려가 있었다. 물론 그 말을 내뱉을 때는 아마도 통쾌할지 모르겠지만, 그 후환은 엄청날 것이다. 반란을 모의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꼴밖에 안 될 테니까 말이다. 그녀는 약간 마음을 안정시켜서 말을 시작했지만, 말을 하던 중에 열이 뻗쳐 올랐기에 결코 좋은 방향의 대화는 진행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반란‘이라는 단어가 미네르바에게 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말 다 했나? 뒷공론이나 일으켜서 쓸데없이 정쟁이나 일삼는 주제에, 뭐 가 잘났다고 남을 모함하는 거지? 경은 마법사들의 수장이라며서 그렇 게 할 일이 없는 것인가? 도대체가 지금 시국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 는지 오크 정도의 지능만 있어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찬성했을 거야. 이 머리에 똥밖에 안 들어 있는 미친 엘프 늙은이야! 늙으려면 곱게 늙 어야지." "뭣이?" 그린레이크는 기가 꽉 막힐 정도로 노기가 치솟아 올랐다. 자신이 누군데 이렇듯 지독한 폭언을 듣는단 말인가? 위대한 엘프족의 대변인이자, 대제국 크루마의 원로원 의장이 아닌가? 그리고 덧붙여서 마법사 협의회의 의장직도 겸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미네르바와는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은 실권자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이렇듯 지독한 쌍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학식이 높은 마법사였기에 별로 욕을 많이 알고 있지 못했던 그린레이크는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지독한 욕설을 토해냈다. "이, 이런 미친 계집년이...." 마법사는 열 받으면 정신이 산란해져서 주문을 외우기 힘들지 몰라도, 검객인 미네르바에게는 그 어떤 제약도 없었다. 미네르바는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뭣이? 다시 한 번 더 지껄여 봐. 그 빌어먹을 혓바닥을 잘라 버릴 테니 까?" 미네르바는 급기야 검까지 뽑아 들자 그린레이크는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맹렬하게 위험 신호가 울리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린레이크가 아무리 마법에 능통하다고 해도 마스터급의 검객과 싸워 이길 가능성은 만에 하나도 없었다. 그런 데다가 지금 자신은 치밀어 오르는 노기 때문에 정신마저 산란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린레이크는 이 자리를 회피한 후 다른 방법으로 미네르바에게 복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린레이크는 노회한 마법사답게 꼬리를 말며 후퇴했다. 하지만 조용히 떠나기는 아무래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는지, 노기에 찬 한 마디를 남기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젠장, 두고 보자. 내 오늘 일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미네르바는 그린레이크가 떠나고 난 후 물밀 듯 밀려드는 후회감에 머리를 싸쥐며 외쳤다. "빌어먹을,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방금 있었던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싶군." 악담을 퍼붓고 돌아간 그린레이크는 자신의 말을 곧 실행에 옮겼다. 미네르바는 그린레이크와 한바탕 한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지 몇 시간 후에는 뼈저리게 느낄 수가 있었다. "뭐라고?" "예, 방위사령부에서 온 보고에 따르면, 프루니아에는 오늘 폐하께옵서 출 발하시기 전에 공간 이동시킨 제3사단만으로도 당분간 충분할 테니 제2 사단의 공간 이동은 사냥대회 직전으로 연기한다는 통보가 왔다고 하옵 니다." 이블리스는 분노 때문에 얼굴색이 점차 상기되고 있는 상관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보고를 멈출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법사 협의회에서 공문이 도착했사온데, 그들은 모두 세뇌 중이 기 때문에 절대로 돌려줄 수 없다는 회답이었사옵니다."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를 제외한 모든 마법사들은 그린레이크의 세력권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린레이크는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한 것이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미네르바는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며 외쳤다. "망할 자식,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다니." "어떻게 하면 되겠사옵니까, 전하!" "기사단에 있는 마법사들을 모두 동원해라. 오늘 밤 안으로 제2사단에 대 한 공간 이동을 끝마치도록 해라." "예, 전하." 이블리스는 잠시 미네르바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법사들이 협조를 하지 않는다면, 아니 그린레이크 전하께서 협조를 하 지 않으신다면 철수 작전을 매우 어려워질 것이옵니다. 뭔가 대책을 세 우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미네르바는 이블리스의 조언을 못 들은 척 천천히 일어서서 포도주 병을 잡고는 한 잔 가득히 따랐다. 이블리스가 그런 조언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는 이미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하겠다고 작심한 상태였다. 미네르바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이블리스에게 물었다. "경도 한잔 할 텐가?" "아니옵니다, 전하." 미네르바는 포도주 잔을 들고 창가에 서서 밖의 경치를 보면서 조금씩 마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블리스에게 말했다. "타이탄 생산 공장에 있는 마법사들을 모두 다 귀족들의 이동에 동원해라." "예?" "폐하께서 프루니아로 출발하신 후에 각 생산 공장에 연락을 넣도록 해라. 내일 아침부터 귀족들을 프루니아로 공간 이동시킬 것이다. 그리고 각 귀족들에게도 연락을 넣어. 마차로 그 먼 거리까지 여행할 필요 없이 황 궁에서 마법진으로 출발하라고 말이야." "그렇게 명령하시면....." 미네르바는 슬쩍 손을 들어 이블리스의 말을 제지하며 말을 이었다. "경도 알다시피 프루니아로 개설되어 있는 영구 이동 마법진만 사용해서 는 황족 및 그 사용인들, 그리고 황궁에서 사용되는 각종 집기들의 이동 만 해도 3일은 족히 걸린다. 운이 없어서 그 전에 드래곤이 나타난다면 엄청난 손실을 입게 도리 거야. 그런만큼 놀고 있는 그 마법사들을 이용 하자는 거지. 귀족들의 이동이 없다면 황궁의 물자도 이동시킬 수 있게 말이야." "좋은 계획이시옵니다. 하오나, 그렇게 하시면 그린레이크 전하와 또다시 충돌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기사단에 소속된 자를 제외한 마법사들은 모 두 그분의 관할이 아니옵니까? 그린레이크 전하께서 가만히 계실 리가 만무하옵니다." "물론이지." 미네르바는 그 정도는 잘 알고 있다는 듯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다음 다시금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참, 가는 길에 스메르 경을 불러 주겠나?" 타론 스메르라면 제1근위대 대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블리스는 왜 그를 찾는 것인지 의아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예, 전하." 다음날 아침이 되자 미네르바의 예상대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린레이크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미네르바의 집무실로 쳐들어 왔다. 그 전날에 미네르바의 무력에 꼬리를 말았던 것이 그의 분노를 더욱 재촉했는지, 그는 자신의 수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엘프 마법사를 무려 열두 명이나 이끌고 온 것이다. "그린레이크 전하께오서 오셨사옵니다." 집무실 밖에 배치되어 있던 경비병은 그린레이크가 왔음을 알렸다. "드디어 왔군." 미네르바는 싱긋이 미소 지었다. 밖이 소란스러운 것으로 보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린레이크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시비를 걸려고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에서 몸을 사렸다면 내가 실망했겠지. 과연 예상대로 움직이는군. 아무리 머리가 잘 돌아가는 마법사라도 분노에 가득 차서야 판단력이 흐 려지는 법이지." 그녀는 그린레이크가 이렇게 행동하도록 충동질하기 위해서 그의 관할이었던 타이탄 공장에 소속된 마법사들을 독단적으로 이동시킨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곧이어 성이 잔뜩 난 그린레이크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에잇, 비켜라."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전하." 경비병의 만류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쿠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을 세차게 밀치며 그린레이크가 부하들과 함께 들어왔다. 그린레이크는 미네르바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보고 싶지 않아도 그 안의 광경을 볼 수밖에 없었다. 실내에는 다섯 명의 기사가 미네르바와 함께 뭔가를 의논하고 있었던 듯 그녀와 함께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린레이크는 그런 것은 개의치 않고 분노를 표출했다. "이럴 수가 있소? 내가 어제 경고했잖소. 내 권한을 침범하지 말라고 말 이야." 미네르바는 그린레이크는 본체만체한 상태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기사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안 그런가, 스메르 경?" 타론 스메르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대답했다. "전하의 선견지명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좋아, 저 반란의 무리들을 모두 다 체포하라." "옛!" 미네르바의 입에서 반란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그린레이크와 그를 따라온 마법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를 따라온 마법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이어 미네르바와 함께 있던 기사들이 가세하여 포위해 왔다. 그린레이크가 보니, 그들은 모두 다 스메르가 이끄는 제1근위대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재빨리 마법사들을 하나하나 제압하여 마법을 쓸 수 없도록 만드는 구속 장비를 채운 다음 꽁꽁 묶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자신이 반역에 연루되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거의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그린레이크는 순식간에 기사들에게 포박당한 상태에서 무릎 꿇려졌다. 그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있었는가? 그는 머리끝까지 분노하여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미네르바, 지금 경이 하는 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예상이나 하고 행하는 것이오?" "물론이지. 감히 폐하께서 안 계신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킬 궁리를 하다 니." "반란? 무슨 반란. 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인가?" "당신이지, 누군 누구야. 그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마법사 들을 잔뜩 거느리고 내 집무실에 난입했다는 말인가?" "그거야....." 어제 그렇게 호된 일을 경험한만큼,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부하들을 잔뜩 끌고 온 것이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상대가 변명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나를 마법으로 제압한 후에 반란을 일으킬 계획이었음이 자명한데, 무슨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하는가?" 미네르바는 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즉시 모두 다 끌고 가서 지하 감옥에 수감해라. 죄수들은 반란 미수죄를 적용받는만큼 그 누구와도 접촉을 못하게 해라. 폐하께서 돌아오신 후에 심문을 시작할 것이다." "옛." 미네르바는 그린레이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 자는 주모자인만큼 심문할 것이 있으니 남겨 두도록." 그린레이크가 끌려가는 도중에 그의 부하들과 뭔가 의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제 홀로 미네르바와 마주한 그린레이크는 마법을 쓸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지만 조금도 기죽지 않고 이빨을 갈며 외쳤다. "네년이 나를 이렇게 만들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물론, 그건 나중에 결과가 나오겠지."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곧 나의 무죄가 입증도리 것이다. 그리고 네년은 나를 모함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미네르바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폐하께서는 곧바로 돌아오시지는 않을거야. 왜 냐하면 이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는 올라가지 않을 생각이거든." "뭣이? 그렇다면 네년은 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 나를 가두 고 진짜 반란이라도 일으킬 생각이냐?" "훗,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어찌되었든 그대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일하기는 편하겠군. 미네르바는 그린레이크의 뒤에 살기등등하게 서 있는 기사를 향해 명령했다. "끌고 가서 가장 갚은 지하 감옥에 가둬 둬라." "예, 전하." 미네르바는 스메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뒷처리는 자네가 직접 해줘야겠어. 아주 신속하면서도 비밀스럽게 말이야." "예, 맡겨만 주시옵소서." "우선 그린레이크의 심복들부터 모두 다 체포하라. 절대로 이 사실이 황 제폐하께로 흘러 들어가서는 안 된다. 아마도 드래곤은 늦어도 10일 내 로 올 거야. 그때까지만이라도 폐하께서 이곳으로 오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알겠나? "옛,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행하겠사옵니다." 墨 파괴되는 엘프리안 시 香 철수 작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그린레이크를 반란죄를 물어 지하 감옥에 가두고, 또 그의 심복 부하들도 모두 가둬 버렸다. 그 외에 의회나 국무부에서 일하던 인물들도 몇몇 체포되었는데, 그들이 이 사실을 황제와 함께 프루니아로 떠난 국무대신이나 의회 의장에게 알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후 엘프리안 시내의 철수 작전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황제가 황궁에서 떠난 다음날 철수 작전은 거의 막바지에 달했다. 황궁 내의 거의 모든 값나가는 집기들과 각종 유물 등 가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수도 밖으로 빼냈던 것이다. 겨우 하루 동안에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크루마의 문화재들을 수도 밖으로 꺼내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 승리에 가까운 혹독한 중노동이었다. 그리고 그 중노동에 동원된 것은 엄청난 인구를 자랑하는 엘프리안 시의 시민들이었다. 징발된 건장한 남자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짐을 엘프리안 시 외곽으로 옮기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거의 5만 명이 넘는 남자들을 동원했기에 그 엄청난 일이 하루 동안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미네르바는 일단 큰 일거리가 끝나고 나자 그때서야 수도에서 모든 시민들의 철수를 발표했다. 수도방위군의 남은 1개 사단과 황궁 경비대까지 출동하여 시민들의 혼란을 수습했기에, 그것도 비교적 순조롭게 행해졌다. 대부분의 준비를 갖춘 후, 미네르바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크와 그 일행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 궁리하면서. 다크일행은 곧장 황궁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다음 천천히 아래쪽으로 고도를 낮추어 땅바닥에 내려섰다. "왠놈들이냐?" 하늘 위에서 날아서 내려온 그들을 발견한 경비병이 달려오자, 다크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미네르바를 불러오너라." 미네르바는 이미 자신을 찾아오는 일행들에 대해서 실례가 없도록 모든 부하들에게 당부를 해놓은 상태였기에 경비병은 공손하게 질문을 던졌다. "켄타로아 공작 전하를 찾아오신 분들이십니까?" "그렇다." 잠시 후 경비병의 보고를 받은 미네르바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것을 보며 다크는 살기 어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허둥대는 꼴을 보니, 자신이 지은 죄가 뭔지 알긴 아는 모양이군." 미네르바는 달려오면서 다크의 뒤에 서 있는 아르티어스를 확인했다. 역시 그녀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 혼자 온 것이 아니고 드래곤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것도 가동할 만한 힘을 지닌 웜급 드래곤을. 미네르바는 다크의 앞에 서자 곧장 준비해놨던 것을 내밀었다. 아르티어스가 직접 만들어서 다크에게 선물했던 그 검이었다. 미네르바는 다크가 검을 허리에 차는 것을 보며, 망설이지 않고 무릎을 꾾고 고개를 조아리며 사정했다. "제발, 나 한 사람의 목숨으로 용서해 줘. 이곳에는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 이 살고 있어. 그들은 이번 사건이 어떻게 해서 비롯된 것인지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 제발 그들은 용서해 주길 바래." 다크는 무표정하게 미네르바를 잠시 바라봤다. 그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용서를 구하기에 앞서서, 나한테 먼저 건네줘야 하는 것들 중에서 하나 가 빠진 것 같은데?" 미네르바는 흠칫했지만, 솔직하게 털어놨다.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그린레이크 공작이 데려가서 세뇌를 시키고 있었던 모양이야. 어제 그를 감옥에 수 감해 버린 후 그들을 빼내기는 했지만, 도저히 너에게 건네줄만한 상태 가 아니었기에....." "도대체 그들에게 뭔 짓을 한 거야?" 다크가 화가 나서 외칠 때, 뒤에서 아르티어스가 한마디 했다. "그들을 데려오너라. 내가 치료해 주마." 미네르바가 고개를 살짝 까딱이자 몇몇 기사들이 달려갔다. 그들은 곧이어 다크가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그들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어딘가 좀 이상했다. 모두들 두 눈이 풀려 있었고, 뭔가 멍청한 상태였다. 다크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아르티어스에게로 간절한 시선을 담아 보냈다. "치료하실 수 있는 거지요?" "헛, 나를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내가 누구냐? 그 위대한 골드 일족의 후예로서 나보다도 잘난 드래곤이 있으면....."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멈추고 아르티엔의 눈치를 힐끔 봤다. 아르티엔은 저런 바보탱이 아들 따위는 둔 적이 없다는 듯 먼 산을 보는 척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 자기 잘난 맛에 있는 상태에서 저따위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아르티엔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고칠 수 있으면 빨리 고쳐 주세요." "알겠다. 그만 보채거라. 알아서 해줄 테니까." 아르티어스는 멍청하게 서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서는 마법의 푸른 오러(aura)를 뿜어내고 있는 손을 들어 각자의 머리 위에 살짝 올리기를 반복했다. 잠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날 때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더니 갑자기 팔시온이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 아르티어스님,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팔시온은 갑자기 눈앞에 아르티어스가 보이고, 또 저 앞쪽에는 다크의 모습까지 보이자 어리둥절해서 말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분명히 정보부원이라고 솔직하게 자신들의 신분을 밝힌 그 개자식들에게 별의별 고문을 당했던 것 같은데, 그게 꿈이었나? 하지만 이리저리 둘러보던 팔시온의 시선에 미네르바와 그의 부하들이 잡히자 화들짝 놀랐다. 그건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희들을 구해 주러 오셨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충 사태 파악을 한 그들은 저마다 아르티어스에게 감사의 말을 한 다음 다크에게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모두들 한마디씩 던졌다. "너 때문에 우리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이빨이 갈린다구." "그 정보부에 소속되어 있다는 개자식들..... 너도 한번 당해 봤으면 혀를 내둘렀을 거야. 얼마나 지독한 놈들인지 말이야."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것 같다구." 다크에게 별의별 말을 다 하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신뢰를 가득 담은 미소가 말이다. 다크는 아르티어스가 동료들을 완벽하게 치료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미네르바에게로 다가갔다. 미네르바 또한 시선을 딴 데로 돌리지 않고 다크를 마주 봤다. 다크는 서로 간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졌다고 생각된 그 순간 발을 날렸다. 퍽. 아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미네르바는 뒤로 나뒹굴어졌다. 그리고 사방에서 그녀의 부하들이 다크를 향해서 저마다 검을 뽑아 들며 달려들었다. 입술이 찢어져서 피가 흐르는 상태에서도 미네르바는 단호하게 외쳤다. 부하들은 검을 뽑아 든 상태에서 모두들 멈춰 섰다. 하지만 아직 검을 회수할 생각은 모두 하지 않고 있었다. "모두들 검을 거둬라. 이것은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가 거둬야 옳은 것. 나 혼자만의 책임으로 끝낼 수 있게 도와다오." 타론 스메르는 입을 악 다물며 분노를 씹어 삼켰다. 그런 다음 침중한 어조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검을 넣어라. 이건 명령이다." 제1레디아 근위대의 기사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미네르바는 정말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다크에게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두들겨 맞는 미네르바의 입가에는 미소가 희미하게 서려 있었다. 다크가 이런 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봤을 때, 결코 또 다른 뒤탈을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엘프리안 시, 60만의 인구가 모여 사는 이 도시만 지킬 수 있다면 그녀는 그 어떤 굴욕이라도 참아낼 수 있었다. 다크는 두들겨 팰 만큼 팼다고 생각했는지 이제 동작을 멈추고는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배반당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고 싫어해. 두 번 다시 나의 호의를 받아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나는 나를 한번 속인 인간은 절대로 신뢰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다크는 아르티어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아빠, 갈 준비를 해줘요." 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그가 아는 한 아들놈은 결코 이 정도에서 복수를 마무리할 인간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벌써 가려고? 이제 시작인 거 아니냐? 너는 한 번도 이 아빠의 브래 스가 얼마나 대단한지 못 봤잖냐. 오늘 한 번 보여주려고 했더니."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는 미네르바가 치를 떠는 가운데, 다크는 냉정하게 외쳤다. "그만 가자구요. 최소한의 반항도 안 하는 상대를 무슨 재미로 계속 두들 기고 있겠어요?" 아르티어스는 기죽은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 알겠다. 나는 절대로 가기 싫다고 한 것은 아니다. 이리로 와라. 아 버지도 이리로 오시죠." 그런 다음 팔시온 일행에게는 갑자기 사나운 눈초리를 희번뜩거리며 말했다. "네놈들은 그렇게 눈치가 없느냐? 알아서 재깍재깍 기어와야 할 거 아냐?" "옛, 어르신." 팔시온 일행이 허둥지둥 아르티어스의 주위로 모여들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는 다크에게 다시금 다정한 시선을 보내며 사근사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 어디로 가고 싶냐? 치레아로 돌아갈 거야?" "몰라요. 어디 조용한 곳에서 친구들하고 술이나 한잔 하고 싶어요."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 아르티어스는 공간 이동을 하기 직전, 미네르바에게 사나운 눈초리를 보내면서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으드드득, 나를 속인 벌은 네년의 뼛 속 깊이 새겨줄 것이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미네르바는 그것을 정확히 들었다. 미네르바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스메르 경!" "예. 전하." "모두 철수할 준비를 해라. 오늘 하루 동안은 수도를 비운다. 아무래도 이 것으로 일이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치레아 대공은 그런대로 용서를 해준 것 같은데, 드래곤은 그런 것 같지가 않은 모양이다. 자, 서둘러라." "옛, 전하." 다크 일행이 공간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것을 보고 마법사는 제임스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발렌시아드 각하, 아무래도 이것으로 끝인 모양입니다. 복수가 의외로 싱 겁게 끝났군요." "다행한 일이 아닌가? 주범인 크루마를 이 정도로 처리한 것을 보면, 본 국은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겠어. 자, 돌아갈 준비를 해둬라." "지금 통신으로 보고를 하시지 않고 돌아가서 직접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화급을 다투는 보고 사항은 없지 않느냐? 그건 그렇고, 정말 오 늘은 멋진 광경을 봤어. 미네르바 켄타로아..... 정말 대단한 여자다. 같은 기사로서 존경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엘프리안 시가 소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저 엄청난 치욕을 참아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치레아 대공 도 대단해. 자신에게 충분히 복수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 에서 넘길 수 있는 것을 보면, 약자에 대한 관용이 있는 진정한 기사임 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훌륭한 기사들과 같은 시대에 살게 해주신 아 레스님께 감사드린다." 마법사는 제임스의 혼잣말은 들은 척도 않고 말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각하." "그래, 출발하자." "여기면 괜찮겠냐?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는 술집인 것 같은데 말이야." "괜찮네요. 빨리 들어가죠." "자, 모두들 고생했을 텐데 실컷 마시자. 계산은 내가 할 거니까." "안 그래도 지금 수중에는 땡전 한 푼도 없어. 모두 다 압수당했거든."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는 가운데 팔시온이 호기롭게 외쳤다. "이봐, 여기 주문 받아." "맥주, 역시 시원한 맥주가 최고지. 모두에게 맥주 큰 걸로 한 잔씩. 그리 고 소시지하고 햄, 구운 닭, 새끼돼지 통구이. 그리고 어..... 미디아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그거면 충분해." 미디아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하자, 팔시온은 아르티어스를 향해 물었다. "저, 어르신께서는 뭘 드시겠습니까?" "포도주..... ‘진홍의 망토‘라는 포도주 있나? 전에 여기서 먹어 보니까 그 게 제일 나은 것 같던데." "예 있습니다, 손님." "그거 한 병... 아니, 다섯 병 가져다 줘. 여기에 배터지게 포도주를 마셔 보고 싶다는 분이 계시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손님. 그렇다면 맥주 큰 거 네 잔하고." "잠깐, 어떻게 해서 네 잔이야. 다섯 잔이지." "예? 하지만....." 점원은 다크가 아주 어리게 보였기에 설마 맥주를 마시랴 싶어서 계산에서 뺏던 것이다. 그걸 짐작한 팔시온은 점원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았기에 다짜고짜 주문량을 확정했다. "헛소리 하지 말고 맥주 큰 거 다섯 잔하고 포도주 다섯 병, 그리고 소시 지하고 햄, 구운 닭, 통구이한 새끼돼지 한 마리나 가져와." "알겠습니다, 손님." 점원이 달려가고 난 후, 아르티어스는 헛기침을 해대며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섰다. "어디에 가려고?" 아르티엔이 슬쩍 말을 걸자, 아르티어스는 난처하다는 듯 대꾸했다. "저, 화장실에 잠시....." 아르티엔은 일부러 큰 소리로 되물었다. "화장실이라고?" "예, 그래요. 화?장?실! 금방 갔다가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시라구요." "인간의 일에 너무 크게 관여하는 것은 좋지 않단다. 특히나 네 개인적인 감정만으로 그 거대한 도시를, 헙!"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아르티엔의 입을 꽉 틀어막으며 귓속말을 했다. "이런 식으로 비협조적으로 나오신다면, 그 어둑한 레어로 돌아가셔서 혼 자서 쓸쓸한 시간을 보내야 할 거라는 점을 명심하세요. 아시겠어요?" "훗, 네가 설마 나를 레어로 쫓아 보낼 실력이 있단 말이냐?" "그게 아니라 제가 레어로 돌아가 버릴 테니까, 아버지도 여기에 계속 붙 어 계시지는 못할 거라는 말이죠." 아르티어스의 협박에 아르티엔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들을 놀리려고 해본 소리였지, 사실 호비트의 도시 하나쯤 박살내 버린다고 해도 아르티엔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놈이 가루를 만들 작심을 하고 있던 그 도시에서 느껴지는 인기척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이미 그에 대한 대비를 해둔 것처럼 느껴졌었다. "오냐, 눈감아 주지. 대신 향기로운 포도주를 배터지게. 알겠지?" 아르티어스는 이가 갈리는 소리로 대꾸했다. "물론이죠." 크루마 황궁 밑 지하 깊숙이 마련되어 있는 지하 감옥. 이곳은 국가 반역죄 같은 아주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른 놈들만 투옥되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지금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 아니 엘프들이 수두룩하게 갇혀 있었다. "이봐, 네놈들이 나를 이렇게 취급하고도 멀쩡할 줄 아느냐? 지금 당장 미네르바 그 계집년을 내게 불러와라." 노기에 가득 차서 울부짖는 그린레이크. 얼마나 괴성을 질러댔는지 또랑또랑했던 그의 목소리는 꽉 쉬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수감되어 있는 감옥 앞에는 중무장한 기사 두 명이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 또한 처음에는 그린레이크를 달래기도 하고, 비위를 맞춰 보려고 해봤으나 통하지 않자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젠장, 폐하께서 돌아오신다면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미네르바 네 년이 무슨 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결코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야. 네년이 아무리 황제 폐하의 귀를 막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영원히 계속될 줄 아느냐? 조만간에 나의 충직한 부하들이 이 사실을 폐 하께서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그린레이크가 악을 쓰고 있을 때,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지하에 울려 퍼졌다. 그린레이크는 자신을 방면하라는 지시를 가지고 온 전령이거나, 혹은 폐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가지고 오는 인물이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발걸음 소리는 더욱 가까워지더니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켄타로아 전하의 명령이다. 철수한다. 서둘러라." "정말이십니까? 전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 리가..... 그렇다면 저 죄 수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에 대한 언급은 없으셨다. 최대한 빨리 수도를 이탈하라는 지시만 계 셨을 뿐이다. 모두들 서둘러라. 한시가 급하다." 기사들은 잠시 웅성거리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죄수들의 패거리가 혹시나 자신들을 따돌리고 이들을 탈옥시키려고 하는 음모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기사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자신들의 상관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다 그 기사를 따라서 서둘러서 지하 감옥을 떠났다. "그러면 그렇지. 나의 충직한 부하들이 벌써 손을 썼구먼." 드린레이크는 자신의 부하들이 몇몇 기사들을 매수하여 이곳에 있는 모든 기사들을 철수시켰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다면 갑자기 감옥을 경비하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나 둘도 아니고 모두 다 철수할 리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감옥 문을 열어주기 위해 나타나는 마법사는 없었다. "전하, 보소서. 골드 드래곤이옵니다!" 거대한 골드 드래곤은 갑작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골드 드래곤은 황금빛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며 그곳에 떠있었다. 육중해 보이는 날개를 퍼덕이며 잠시 한 자리에 떠 있던 드래곤의 입에서 순식간에 흰 광선 같은 것이 폭발적인 기세로 뿜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광선에 휩싸여 엘프리안 시는 갈갈이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잠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작품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 엘프리안 시 상공을 천천히 몇 바퀴 선회하더니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미네르바는 형언하기 힘든 감정 상태에 빠져 있었다. 엘프리안 시는 그녀가 어렸을 때도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던 북방의 거대한 도시였다. 그녀는 그 도시가 더욱 더 찬란하게 성장해 나가기를 바랐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다해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나갔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것이 사라져 버렸다. 폐허가 되어 버린 엘프리안 시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작은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그녀와 함께 서 있던 타론 스메르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미네르바는 황급히 눈물을 닦은 후 근엄한 어조로 말하려고 노력하며, 명령을 내렸다. "타론 스메르 경. 오랫동안 경은 나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 주었네. 그것을 나는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별 말씀을 다 하시옵니다, 전하." "총사령관이자 근위대 대장으로서 경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자 한다." 타론은 어리둥절해서 대꾸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엘프리안 시가 소멸한 것을 폐하께 즉시 보고하라." "예, 전하." 미네르바는 망설이지 않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놓으면서 비장하게 말했다. "그리고 사태가 이렇게 되도록 만든 나를 체포하라." 그 말을 들은 주위의 모든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여기저기서 간간이 흐느낌 소리도 들려왔다. 타론은 자신감 있게 미네르바를 설득했다. 그만큼 미네르바에 대한 군대의 충성과 신뢰는 엄청난 것이었다. "전하, 희망을 잃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제국과 황실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것을 폐하께서도 알아주실 것이옵니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구나. 나를 체포하라, 스메르 경" "전하, 한 가지 보고드릴 사항이 있사옵니다." 마법 통신을 담당하고 있는 중년의 마법사 나르데어스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로체스터는 궁금증을 가지고 물었다. 나르티어스가 직접 자신에게까지 와서 보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왜냐하면 통신이라는 것 자체가 밖에서부터 들어온 보고를 최대한 빨리 공작에게 넘겨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전령을 통해서 전달하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예, 몬스터들의 세력을 탐색하기 위해 투입한 용병기사단에 관한 것이옵 니다." "그래서?" "그게... 언제나 세 시경에는 연락을 보내 왔었사옵니다. 아마 식사를 마친 후에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연락을 해오는 것 같았사옵니다. 그런데 오늘 은... 세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아직도 연락이 안 오고 있사옵니다. 뭔가 일 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로체스터 공작은 ‘겨우 그런 일을 가지고 나한테 보고를 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부하에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이제 겨우 세 시간인데 말이야. 뭔가 급한 일이 있다 보면 보 고 올리는 시간이 늦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여태까지의 보 고를 토대로 유추해 보면, 오늘 용병기사단은 크로돈 시 외곽에 이르게 된다. 그곳까지 몬스터의 세력이 미치고 있다는 보고는 아직 없었어." "폐하의 말이 옳으시옵니다. 하오나, 용병 대장은 아무래도 몬스터 세력의 배후에 크라레스가 있지 않나 의심하고 있었사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 이라면, 어쩌면 크라레스의 기사단과 충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쯧쯧, 쓸데없는 걱정을 다하고 있군.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하세. 이만 나 가 보게나." "예, 전하." 나르데어스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조용히 있던 레티안은 그가 나간 후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나르데어스의 의견도 조금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사실 크라레스의 기사단과 맞붙었다면,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것 아 니겠사옵니까?"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있게 말했다. 나르데어스는 용병기사단을 이끌고 크라레스에 있는 용병 대장의 신분이 뭔지 모르기에 저렇게 걱정을 하는 것이겠지만, 용병 대장 그가 누구인가. "결코 어떤 일도 생길 리가 없다. 경은 용병 대장이 누군지 잊었나? 크라 레스의 근위대가 총출동한다고 해도 그를 어떻게 하지는 못해. 그녀가 직접 나선다면 혹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지금 드래곤과 함 께 크루마에 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결과적으로 별 일 아니라는 말이 되는 거지." "예, 전하." 이때, 문 밖에서 경비병이 외쳤다.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오셨사옵니다, 전하." "오오, 벌써 왔는가? 들라고 해라." "옛, 전하." 경비병이 문을 활짝 열자, 제임스가 들어섰다. 경비병은 제임스만을 들여보낸 후 다시금 문을 닫고 부동자세로 문 앞에 섰다. 로체스터 공작은 제임스의 안색이 아주 밝은 것을 보고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사건의 전모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궁금했기에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예, 전하. 일이 아주 잘 풀렸사옵니다. 전하께서도 함께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켄타로아 공작은 대단한 여걸이었사옵니다." 제임스는 방금 전에 본 광경을 흥분한 어조로 자세하게 설명했다.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크가 그녀를 얼마나 개 패듯이 팼는지,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참으면서 수도를 지켜낸 미네르바에 대한 아낌없는 칭찬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또한 평소 다크에 대한 호감도 아낌없이 흘러나왔다. "정말 그녀는 기사들의 귀감이 된다고 하겠사옵니다. 복수할 수 있는 강 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결코 저항하지 않는 상대를 끝까지 핍박하는 비열한 근성은 없었으니까 말이옵니다." 제임스의 보고를 통해 코린트가 무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로체스터 공작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되자 로체스터 공작은 다크의 복수라는 것을 자신이 직접 가서 보지 않은 것이 억울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자신의 가장 큰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미네르바가 오뉴월 개 맞듯이 맞았다는데, 그걸 못 본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던 것이다. "호오, 대단한 구경을 했군. 나도 한번 봤으면 십 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 려갔을 텐데 말이야. 미네르바가 그토록 두들겨 맞을 거라고 그 누가 상 상이나 해봤겠는가? 하하핫! 정말 가서 보지 못한 것이 원통할 뿐이군." 제임스도 밝아진 로체스터 공작의 영향을 받아 미소를 지르며 말했다. "전하, 일이 아주 쉽게 풀릴 것 같사옵니다.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크루 마의 처우가 그렇게 관대했던 것을 보면, 이쪽에서 사신을 보내 정중하 게 예의를 갖춰 변명을 한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지 않사옵 니까?" "경의 말이 옳도다. 제임스." "예, 전하." "이번에도 경이 수고해 줘야겠군. 전보다 좀더 많은 선물을 가져가도록 하게. 드래곤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최고급으로 열 상자정도 가져가고, 최고급 브랜디(포도주를 증류한 술)도 서너 상자 가져가고 말 이야. 그 외에 금은보화를 두루 갖춰 가지고 가서 변명과 함께 사과를 하는 거야. 사실 우리가 그녀에게 못할 짓을 한 것은 하나도 없지 않나? 정신계 마법에 당한 후유증을 치료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고 말이야. 안 그런가?"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전하." "그래, 그 부분을 확실하게 설명해 주란 말이야. 또, 그녀가 도주했을 때 도 사로잡으려고만 했지, 결코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 않았나? 그 때문에 이쪽의 피해가 엄청났던 것이고, 결국은 그녀가 달아 날 수 있었던 주된 원인도 그것 아니겠나? 그 모든 것을 잘 설명하란 말이야. 그럼 잘하면 그냥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겠지."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럼 준비가 되는 대로 즉시 출발하겠사옵니다." "아니, 내일 가는 것이 좋겠지. 지금은 벌써 시간이 많이 늦었어. 이쪽에 서도 선물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만, 저쪽도 오랜 시간 헤 어졌던 부하들을 다독거리려면 오늘 저녁 화끈하게 술 파티를 할 것이 아니겠냐?" "예, 전하.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제임스가 막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그때, 밖에서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중년의 마법사가 뛰어 들어왔다. 그는 제지하려는 경비병과 부딪치면서 방 안으로 나뒹굴며 들어왔는데, 로체스터 공작을 보고도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전하, 큰일 났사옵니다." "뭔데 그러느냐? 폐하께서도 심장마비라도 걸리셨나? 왜 이렇게....." 마법사를 나무라던 로체스터 공작의 질책은 마법사의 보고 한마디에 멈춰 버렸다. "엘프리안 시가 소멸당했다는 첩자들의 보고가 올라왔사옵니다. 거대한 골드 드래곤이 엘프리안 시 상공에 갑자기 나타나서 흰 광채의 브래스 를 뿜었다고 하옵니다. 그 때문에 지금 엘프리안 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 어 버렸다고 하옵니다." 그 보고를 들은 로체스터 공작과 제임스는 경악감에 입이 쩍 벌어진 채 굳어 버렸다. 과연 코린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Chapter 1. 철좀 들어라 아르티어스 크루마의 외딴 시골에 있는 한 작은 술집에는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시끌벅적했다. 겨울 철 농한기도 아니라 아직 술꾼들이 모여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렇듯 소란스러운 데 는 다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초라한 술집에 다크 폰 치레아 대공 일행이 죽치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어이! 여기 술 가져와." 팔시온이 술을 더 가져오라 주문하자, 미카엘도 자신의 잔을 단숨에 쭈욱 비운 후 '쾅' 소 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으며 호쾌하게 외쳤다. "야! 감질나게 잔으로 가져오지 말고 아예 술통 째로 들고 와!" 미카엘이 큰 소리로 술을 통째로 가져오라고 시키자 다크는 잠시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미카엘은 술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팔시온 일행은 비록 구출되기는 했지만, 감옥에 있을 때 워낙 호되게 고문을 당해서 그런지 그 악몽 같은 감옥들을 술로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다크는 충분히 그들의 심정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는 배만 부르고 취하지도 않는데 좀더 센 걸로 마시는 건 어때?" "오! 그거 좋은 생각이다." 팔시온이 좋아라 찬성하자, 다크는 점원을 향해 외쳤다. "이런 맹물 같은 맥주말고, 좀더 화끈한 것 없어?" 다크의 말을 들은 점원은 어이가 없는지 가만히 그녀를 쳐다봤다. 콩알만한 계집애가 우락 부락한 남자들 사이에 끼어 초저녁부터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는 지 더 화끈한 술을 달라고 하다니. 게다가 반말을 찍찍 내갈기는 버르장머리하고는, 잠시 어 이가 없다는 듯 다크를 쳐다보던 점원은 한쪽 구석에서 포도주를 홀짝히고 있는 아르티엔에 게 시선을 돌렸다. '하! 꼬맹이가 잘도 마신다. 내가 아무리 이 짓을 해야 먹고산다 고해도 저런 애들한테까지 술을 팔아야 하나?' 점원은 문득 계집애들의 부모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저 계집애들이 자기 딸들이었 다면 아마 보는 즉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놨을 테니까 말이다. 어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들이 초저녁부터 술타령을 해? 벌써부터 이렇게 자기 인생을 망치며 살아야겠느냐! 라며 준엄하게 훈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점원이었다. 하지만, 점원은 더 이상 잡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소녀의 옆에 앉아 있는 우람한 덩치 의 사내가 험악하게 인상을 긁으며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야! 술 가져오란 말 안 들려?" "예? 아, 예 손님." 그때, 아르티어스가 개운한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자리에 앉아 포도주를 한 잔 쭈욱 들이켠 뒤 통쾌하게 외쳤다. "자, 모두들 고생 많았을 텐데. 한 잔 쭉 마시고 훌훌 털어 버려. 오늘 내가 한턱 크게 쓰 지." 식당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아르티어스의 표정은 뭔가 찜찜한 듯했었다, 미카엘은 그가 이렇 듯 활기차게 바뀐 것을 보고 팔시온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변비가 있으신 모양이군. 화장실 다녀온 후에 표정이 완전히 바뀌신 걸 보면 말이야." 평상시라면 절대 이런 말을 할 미카엘이 아니었다. 악몽과도 같았던 크루마 감옥에서의 처절한 고문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긴장감이 풀린 상태 에서 급하게 마신 술 탓이었을 것이다. 말을 듣자 팔시온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다크를 제외한 딴 사람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아르티어스는 결코 대하기 쉬운 상대가 아니 었다. 아르티어스가 깐깐한 성격에 유난히 깔끔을 떠는 드래곤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카엘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변비 어쩌구 저쩌구하자 평상시 그의 근엄한 행동과 화장실에서 앉아 온갖 인상을 쓰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겹치면서 치밀어 오르 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하하하하핫!" 한동안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던 팔시온은 이윽고 정신을 차렸는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음! 꽤 덩어리가 있었던 모양이지?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 걸 보면 말이야?" 미카엘과 팔시온이 키득거리며 이야기하자 아르티어스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술에 취한 그들의 목소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 에게 들릴 만큼 상당히 컸다. 또한 아무리 작은 소리라 하더라도 신의 영역에 도달해 있는 드래곤의 귀는 그들의 대화를 낱낱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예민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 녀석과 즐겁게 먹고 마시고 있는 화기애애한 술자리가 아닌가? 아르티 어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그러쥐며 다크에게 환한 웃음을 억지로 지어 보였다. '저놈의 시키들이 간덩이가 부었나? 아주 죽으려고 발악을 하는군. 하루 날 잡아서 확실히 손 좀 봐줘야지.' 팔시온의 말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르티어스를 훔쳐보고 있던 미디아는 그가 그다지 기 분 나빠하지 않은 듯 환하게 웃자, 먹고 있던 돼지 뼈다귀를 팔시온에게 휙 던지며 소리를 꽥질렀다. "이 자식들은 꼭 뭐 먹고 있을 때 지저분한 소릴 해. 그리고 변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줄 알아? 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그 고통은 쉽게 참을 수 있는 게 아냐. 그런데 히히 덕거리며 웃다니, 아주 나쁜 놈들이야. 그렇죠, 아르티어스 어르신?" 마치 나잘했죠,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 미디아를 보고 아르티어스의 눈가에 굵은 핏줄이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참자고 이를 악물었지만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아르티어스의 주먹이 불끈 쥐어 지는 순간이었다. 꽝! 이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술집의 문짝이 부서져 날아갔다. 모두들 무슨 일인가 하여 그쪽 으로 시선을 돌리자 잡티 하나 없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사내가 씩씩거리며 들어 왔다. 그 사내는 미 청년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게 생겼지만, 그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사내는 단 한마디 대꾸도 없이 자신을 막아서는 점원의 멱살을 잡아 가볍게 술집 한쪽 구 석에 집어던진 후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찾고자 하는 사람을 찾았는지 순간 그의 눈빛이 번 쩍였다. 그는 다크 일행이 앉아 있는 술자리로 험악한 인상을 쓰며 다가왔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감히 허락도 받지 않고 내 집 한 귀퉁이를 가루로 만들어? 그렇게 도 죽고 싶냐?" 다크 일행은 감히 아르티어스에게 저 딴 소리를 지껄인 사내를 보며 어이없어 했다. 에인 션트에 근접하는 아르티어스에게 죽고 싶냐? 라고 협박을 하다니..... 저 사내는 이르티어스 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도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팔시온 일행은 자신들이 방금 지옥의 문턱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모르고 히죽히죽 웃으며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는 듯 좋아했다. 그들은 천천히 술을 마시며 아르티어스가 저 사내를 어떻게 박살낼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일행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르티어스는 빙그레 웃으며 유들유들하게 대꾸 했다. 그의 어투로 보아 결코 마음이 상했다거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여어! 너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있었냐?" 그 황금빛 머리카락의 젊은이는 아르티어스가 유들유들하게 대꾸하자 더 화가 치밀어 오르 는지 이를 뿌득뿌득 갈며 소리쳤다. "말 돌리지마! 왜 내 집 한쪽을 작살냈냐구?"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오랜만에 만나 반갑긴 하지만 내가 뭘 했다고 이 난리 야. 성질 돋우지 말고 이리 와서 술이나 마시자." 아르티어스는 찔리는 것이 있었기에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이 한 일을 모두에게 알려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기에 난감하기만 했다. 그래서 계속 무슨 말이냐는 표 정으로 시침을 뚝 떼기로 했다. 하지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금발의 사내는 기가 막 힌다는 듯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 "이, 이 자식이, 이제는 발뺌까지? 파괴된 흔적만 봐도 누가 그랬는지 뻔하잖아. 진짜 너 죽을래?" 금발의 사내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고 악을 쓰자 아 르티어스는 더 이상 발뺌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 드래곤의 브래스는 특유의 정령력을 가지고 있다. 골드 드래곤의 브래스는 '바람' 의 기운을 가지고 있기에 파 괴된 폐허를 보면 강력한 폭풍이 쓸고 지나간 듯한 흔적이 남는다. 그리고 현존하는 골드 드래곤들 중에서 브로마네스보다 강한 드래곤은 많지만, 그의 영토에 아무 말 없이 브래스 를 뿜을 만큼 간덩이가 부은 드래곤은 아르티어스 외에는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하지만 잘못을 용서해달라는 표정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아, 그래, 그래. 내가 그랬어. 네가 전에 그 밑쪽이 너무 시끄럽다고 투덜거렸잖아. 마 침 나도 볼일이 있어서 그곳에 간 김에, 네 대신 그놈들에게 앞으로 조용히 살라고 적당히 타일러준 거야. 짜식이, 내가 수고해줬으면 고마워하기는커녕 보자마자 성질을 내고 있어. 잔말말고 이리 와서 같이 술이나 마시자.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거든 히히히." "뭐야? 그딴 변명으로 내가 얼렁뚱땅 넘어갈 것 같아? 적당히 타일렀다는 것이 완전 폐허 냐? 그리고 허락 없이 남의 영토에 침입했다면,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율법은 알고 있겠지?" 큰 소리로 악을 쓰듯 말하던 금발 사내의 목소리가 점차 차갑게 바뀌자 주위에 싸늘한 살 기가 감돌았다. 아르티어스는 순간 당황했다. 그까짓 도시 하나 날려보낸 걸 가지고 이렇게 난리를 치다니, 저 짜식이 약을 먹었나? 평소 금발 사내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이러다 다크가 눈치라도 채는 날이면 자신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아르티 어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야아, 빨갱이. 너하고 나 사이에 무슨 얼어죽을 율법....." 말을 하던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갑자가 벌떡 일어서자, 눈이 화등잔 만해져서 그쪽으로 시 선을 돌렸다. 조금 전과는 달리 아들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 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저런 식으로 눈빛이 '회까닥' 돈 아들놈은 반드시 상상할 수 없는 사고를 치고는 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다급하게 다크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벌써 그녀는 브로마네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버린 상태였다. "이런 또 뭐야? 너 죽고......" 하지만 브로마네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브로마네스는 드래곤으로 태어난 이 래 처음으로 왠지 모를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본능적으로 브로마네스는 즉시 뒤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황금빛 광채가 브로마네스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의 목 언저 리 부분을 통과했다. 무섭도록 빠른 쾌검이었다. "허억! 이, 이게 뭐야." 다크는 그렇지 않아도 뭔가 화끈하게 화풀이를 할 만한 대상을 찾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 을 되찾고 난 뒤에 느껴지는 낯설기만 한 께름칙한 감정에 도무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 문이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마음이 정리되지 않자 이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뭔가에 몰두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크루마로 온 것이다. 빚을 갚는다는 좋은 명분도 있었 기에 크루마의 수도에서 화끈한 한판을 벌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대를 가지고 찾아갔던 미네르바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죽일 테면 죽여라, 하는 식으로 반항도 하지 않는 그녀를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는가? 그 때문에 마음이 더욱 언짢아진 다크는 술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 제물이 될 놈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아르티어스와 주고받는 말을 들어보니 상대는 드래곤임에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아르티어스 가 난감해하는 표정을 보니 금발 사내는 상당히 강한 놈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잊고 한판 속 시원하게 싸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덤벼든 것이다. 다크는 이렇게 해서라도 지금의 혼란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금발 사내 브로마네스로서는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상대의 검은 그 속도도 엄청났 지만, 자신의 몸 주위를 감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마법 방어막을 간단하게 찢어버릴 정도로 그 위력 또한 엄청났기 때문이다. "흥!" 다크는 콧방귀를 뀌며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면서 연속 공격을 퍼부었다. 브로마네스는 물밀듯 흘러드는 다크의 공격을 정신 없이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 무리 강력한 드래곤이라고 하지만, 피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어디에서 날아올지도 모를 정도로 해괴한 음직임을 보이는 상대의 쾌검을 피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목이 날아가는 것이다. 계속 상대의 목만을 공격하던 다크의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뒤에서 아르티어스가 그녀의 뒷덜미를 붙잡았던 것이다. "놔요. 저런 헛소리를 지껄여대는 놈은 모가지를 잘라버려야 해요!" 순간적으로 기선을 제압당하고 정신 없이 몰렸던 브로마네스는 다크의 공격이 한순간 멈추 자 그때서야 마법을 사용할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브로마네스의 양손이 영롱한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위협을 준 강력한 검객을 상대로 검으로 드잡이를 할 마음은 전혀 없었 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마법으로 승부하려는 것이다. 일단 최소한의 준비가 갖춰지자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브로마네스가 다크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감히 내 목을 자르겠다고 까불다니. 우선 네년의 건방진 혓바닥부터 뽑아버린 후 네 소 원대로 모가지를 잘라주마." 아르티어스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그 둘의 중간에 급히 끼어들며 외쳤다. "모두들 진정해. 브로마네스, 자네는 농담도 자리를 봐가면서 해야지. 그리고 너도 이 아 비의 얼굴을 봐서 좀 참거라." 브로마네스는 콧방귀를 뀌며 투덜거렸다. "흥! 자리를 봐가면서라니? 내가 호비트 계집 따위가 무서워서 할 말을 못할 줄 알았나?" 아르티어스는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연신 뒤쪽을 향해 눈짓을 해대며 말했다. "이 아이가 아니라 저 뒤 말이야." "뒤?" 브로마네스의 시선이 아르티어스의 눈짓을 따라 뒤쪽에 앉아 있는 인물들 쪽으로 향했다. 슬그머니 탁자 밑쪽으로 보이지 않게 검을 그러쥐고는 여차하면 뛰어들 태세를 갖추고 앉아 있는 호비트 세 마리..... 그리고 형편없이 약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나약한 호비트 마법 사 한 마리. 그러다가 브로마네스의 시선은 특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호비트 소녀에게서 멈 췄다. 아주 미약하지만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지는 존재. 하지만 브로마네스의 엄청난 능력으 로도 소녀가 가진 능력을 읽어낼 수 없었다. 멀뚱히 소녀를 쳐다보다 브로마네스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빛내며 저 소녀가 누구냐고 묻는 듯 아르티어스를 쳐다봤다. <아버지야.> 순간, 자신만만하던 브로마네스의 얼굴이 갑자기 경악감으로 물들며 입이 떡 벌려졌다. 그 때였다. 얌전히 앉아 포도주를 연신 홀짝이던 소녀가 한마디 한 것은. "오랜만이로구나, 이리 와서 한잔하지 않겠느냐?" 브로마네스는 감히 그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똥 씹은 표정으로 엉거주춤 다가와서 자리에 앉았다. 브래스를 날린 놈이 아르티어스라는 것을 알자 마침 심심하던 참에 잘 됐다 싶어 달려온 건데 아르티엔이 있을 줄이야. 하여튼 저놈하고 어울려서 뒤끝이 좋았던 적이 한 번 도 없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왜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통곡하고 싶어지는 브로마네 스였다. "어, 어르신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엔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드는지 속마음과는 달리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 다. 그만큼 아르티엔이란 이름이 주는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나야, 저 말썽꾸러기만 조용히 있다면 안녕하지." 아르티어스는 아르티엔의 괜한 트집에 발끈해서 맞받았다. "누가 그렇게 말썽을 부려댔다고 그래요?" "훗! 그럼 내가 이 자리에서 네 녀석들 어렸을 때 한 해괴한 짓거리들은 나열해볼까? 마 법을 조금 배우자마자 둘이서 어울려 다니며 호비트를 쥐 잡듯이 잡지 않나, 건방지다고 해 즐링들을 쥐어 패 가지고 허구한 날 이웃 드래곤들에게 사과하러 다닌 것을 생각하면..... 으 이구, 속 텨져!" 직격탄을 맞은 아르티어스의 입은 조개 마냥 꽉 다물어져 버렸다. 저 노친네한테서 이 이 상 더 이야기가 흘러나오면 자신의 모든 과거가 아들은 물론이고, 저쪽에 앉아 있는 호비트 들에게까지 알려질 것이 아닌가? 그리고 두고두고 자신의 얘기를 하며 술안주로 씹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전 대륙에게까지 소문이 퍼질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무슨 일이 있더 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에이, 어릴 때는 그러면서 크는 거잖아요, 뭐." "너는 닥치고 있어!" 아르티엔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다가 포도주를 신경질적으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여간 이놈들만 만나면 지병인 두통이 도지는 듯 했다. 사실 그 두통도 따지고 보면 이놈 들 때문에 생긴 병이 아닌가? 아르티엔은 브로마네스를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래, 요즘도 이 녀석이랑 어울려 다니며 말썽을 부리는 모양이구나. 이제 네 녀석도 슬 슬 철들 대가 되지 않았느냐? 에인션트가 다 되어 가는 놈들이 나잇값도 못하고, 쯧쯧." "........" 아르티엔에게 말대답을 하면 자신만 손해라고 속으로 되새기며 브로마네스는 떨떠름한 표 정으로 포도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괜히 말대꾸 한번 잘못하면 몇 시간이고 잔소리를 들을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쭈? 이제는 아예 대답도 하지 싫다 이거냐?" 브로마네스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변명했다. "그건 아닙니다, 어르신. 저도 요즘 바쁘다구요. 오늘은 저 녀석이 근처에 온 것 같아서 얼굴이나 볼 겸 나왔을 뿐입니다." "그래?" 아르티엔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바쁘다고? 또 무슨 못된 궁리를 하고 있기에 바쁜 거냐? 네놈들 말썽 피운 것 뒤치다꺼 리하는 것도 이제는 지겹다, 지겨워. 에잉! 쯧쯧." 브로마네스는 두 손까지 내저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절대로 아닙니다, 어르신. 저도 개과천선했다고요. 과거를 훌훌 털어 버리는 의미에서 이 사까지 했다니까요." "이사라고? 아! 그렇군. 네 녀석 집은 코린트 쪽에 있었지 않았냐?" "예, 그랬지요. 어르신도 이사를 해보셔서 아시겠지만 이사하면 어디 할 일이 한두 가지입 니까? 솜씨 있는 드워프도 잡아 와야하고, 집 단장하는 것 감독도 해야 하고.... 그래서 할 일이 많았단 말입니다. 아, 참. 이런, 이런, 내 정신 좀 봐. 오랜만에 친구 녀석이 왔기에 그 냥 잠시 얼굴이나 볼까 해서 왔는데...... 헤헤.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거든요." 헤픈 웃음을 흘리며 브로마네스는 꼬리를 말고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곱게 놔둘 아르티엔이 아니었다.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나를 두고 겨우 얼굴 한번 보인 다음 집 단장한다고 도망치 겠다 이거냐?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하기도 힘든데 말이야. 그렇다고 네 녀 석이 꼬박꼬박 인사를 올 놀도 절대 아니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요. 집 단 장이 끝나고 나면 찾아뵙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인사를 드릴 작정이었다구요."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의심스럽다는 어조로 물었다. "저 녀석이 언제 이사했지?" '사실대로 말하면 죽을 줄 알아' 하는 브로마네스의 위협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아르티어 스는 사실대로 말했다. 브로마네스가 언제 이사했는지는 수소문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테 고, 거짓말했다가 들통나면 자기만 시달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한 6년쯤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르티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죽거렸다. 이놈들에게 한두 번 당해봤는가? "6년이라고? 그렇다면 집 단장이 끝나고도 남았을 텐데? 아니면 진짜 게을러빠진 드워프 들을 잡아 왔던지.... 하지만 네놈은 드워프들이 태만을 하도록 그냥 놔둘 녀석도 아니잖느 냐? 감히 누굴 속이려고 들어." 브로마네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게 말입니다. 1차 공사는 끝났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허전하더라 이거죠. 그 래서 몇 달 전부터 다시금 2차 공사를 하고 있기에.... 헤헤헤." 브로마네스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타개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드래곤이라는 족속 자체 가 워낙 두뇌 회전이 빠르지 않는가? 그는 곧이어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참, 어르신께 드린다고 준비해 둔 것이 있는데요. 집 단장이 끝난 후 찾아뵙고 드릴려 고 했는데, 마침 잘 됐네요." 브로마네스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레어에 놔뒀던 포도주 한 상자를 술집으로 공간이동시켰다. 희뿌연 빛이 번쩍 하자마자 브로마네스의 손바닥 위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포도주 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브로마네스는 그것을 아르티엔 앞에다 내려놓으며 호기롭게 말했다. 하지만, 결코 속마음까지 호기로울 수 없었던 그의 미소는 약간 어색해 보였다. "제가 어르신을 얼마나 흠모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아 르티어스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말도 못합니다. 그래서 어르신을 뵈면 꼭 제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았죠. 저희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 깊은 도량과 사랑으로 감싸주시지 않으셨습 니까? 어르신의 아들도 아닌 저를 잘되라고 그렇게 훈계를 아끼시지 않으셨죠. 그때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는 어르신의 말씀대로 제대로 한 번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노력 중입니다. 오죽하면 새 집까지 구했겠습니까." 브로마네스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한참 아부를 해댄 후에 아르티어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 며 말했다. 아르티엔에게 가장 잘 통하는 무기는 무력 따위가 아닌 아부라는 것을 오랜 경 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아부만이 살길이었고,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이 녀석아, 돌아가신 후에 후회하지 말고 살아 계실 때 효도해라.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말이야." 아르티엔은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오, 네가 이제야 철이 좀 든 모양이구나. 그런데, 아르티어스는 언제나 철이 들는지...... 쯧쯧." 아르티어스는 아르티엔 몰래 브로마네스를 향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 <너 죽을래? 왜 나를 걸고 넘어져?> 브로마네스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안타까운 어조로 주절거렸다. "저도 아르티어스를 보면 언제나 걱정입니다. 저 녀석을 볼 때마다 충고를 하지만 어디 제 말을 들어야죠. 그렇다고 두들겨 팰 수도 없고 말이죠. 참, 이건 어르신을 생각하며 다음 에 뵈면 꼭 선물하겠다고 준비해둔 겁니다. 입맛에 맞으실 지....." 고풍스러운 문양이 아로새겨진 포도주 상자를 슬쩍 아르티엔 앞으로 밀어놓으며 브로마네 스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저는 너무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브로마네스는 행여 아르티엔이 자신을 잡을까 봐 재빨리 공간이동해 버렸다. 포도주를 엄 청 좋아하는 아르티엔은 일단 포도주 상자부터 재빨리 열어젖혔다. 선물이 마음에 안 들면 브로마네스를 다시 잡아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이기에 그가 허둥지둥 도망친 것에는 별 로 신경도 안 썼다. 아르티엔은 아홉 병의 포도주들 중에서 한 병을 꺼내 들고는 놀라서 말 했다. "아니, 이건 로열 크루나 아냐? 이 귀한 술을 한 상자씩이나?"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를 흘겨보며 한탄 조로 주절거렸다. "이놈아 브로마네스를 좀 본받아라, 어릴 때는 말썽만 부리는가 싶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의젓해지지 않았냐? 으이구, 내 팔자야!" 아르티어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아르티엔을 바라보았지만, 감히 대꾸는 하지 못했다. 아르 티어스는 로열 크루나 한 상자를 보는 그 순간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마도 6년쯤 전에 브로마네스가 이사했을 때, 레어를 방문하게 된 아르티어스와 나눠 먹으 라고 미네르바가 브로마네스에게 건네줬을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포도주를 좋아한다는 것을 마네르바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때 아르티어스가 브로마네스의 레어를 방문하는 조건으로 받은 것이 포도주 한 상자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놈은 그 술이 아주 좋은 것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보고 자기 혼자 처먹으려고 꽁꽁 숨겨놨을 것이다. 그런 후 그놈은 차마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아까워서 소중히 보관하다가 이번에 다급한 김에 아르티엔에게 넘긴 것이다. 하긴, 나도 그놈의 술이 아무리 좋아도 안 먹고살지. 아버지에게 2박 3일 잔소리 듣는 것보 다는 그게 훨씬 나을 테니...... 아르티어스는 한 잔 마셔보지도 못하고 소중히 모셔뒀던 로열 크루나를 포기한 브로마네스 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왜 자기를 걸고넘어진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것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르티어스는 심술 가득한 어조로 이죽거렸다. "혹시 그거 가짜 아닐까요? 내가 저놈을 잘 아는데요, 이렇게 좋은 술을 상자째 줄 놈은 절대 아니거든요." 아르티엔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고?" "혹시 술에 뭔가 탔을지도 몰라요. 그놈 수법을 제가 잘 알거든요. 자기가 못 먹는 것에는 꼭 뭔 짓을 하거든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못된 심보를 가진 놈이죠."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으르렁거렸다. "짜식이, 착한 브로마네스를 헐뜯고 있어." "틀림없다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아버님을 대신해서 시음해 보겠습니다." 자신의 말이 맞다는 듯 열변을 토하며 은근슬쩍 포도주병으로 손을 뻗는 아르티어스. 그런 그를 아르티엔은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속 보인다. 이 녀석아. 한 잔 하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지 딴청은......." 왠지 아르티엔의 어조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오랜만의 바깥나들이에서 만난 아들은 과거와 달리 아주 믿음직스러웠다. 아들이 진정한 마법 실력이 자신의 기대 이상이라는 것을 확인 한 후, 아르티엔은 아주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계기를 만들어준 손자인지 손녀인 지 헷갈리는 호비트 또한 싫지 않았다. 그 직선적인 성격이 아무리 봐도 낯설지 않았던 것 이다. "제 말이 맞다니까요. 어이! 포도주 잔 두 개 더 가져와!" 아르티어스가 은근슬쩍 자신도 한 입 걸치기 위해 점원에게 외쳤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 던 팔시온이 은근슬쩍 다크에게 말했다. "로열 크루나? 우리도 같이 마셔볼까? 아주 좋은 술인 것 같은데..." 그러자 옆에 있던 얼큰하게 취한 미카엘이 점원에게 외쳤다. "이봐! 여기 인원만큼 잔 더 가져와!" 비교적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인 미디아는 이 둘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로열 크루나가 어떤 술인가? 크루마의 황실을 위해 제조된 최고급 포도주.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대륙 최고의 술이 아닌가? 그렇기에 로열 크루나라는 이름이 던져주는 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미디아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슬쩍 다크를 팔고 넘어졌다. 아무리 무서운 아르티어스 라고 해도 다크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와 같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봐, 다크. 우리도 함께 마시는 게 어때?" 미디아의 말에 다크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러지 뭐. 이봐, 빨리 잔 가져와." 아르티어스는 팔시온 등을 향해 사나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가 갑자기 다크가 찬성하고 나오자 눈꼬리를 내렸다. 저놈들이 아무리 버릇없이 나온다고 해도 아들을 방패막이로 쓴 이상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가슴속에는 저놈들을 어떤 일이 있 더라도 반드시 손봐놓겠다는 결심이 확고해 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세 시간 뒤, 다크와 팔시온 일행은 모두들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두 드래곤은 차분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분위기는 상당히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아르 티어스는 뭐가 불만인지 팔시온 일행들을 째려보고 있었다. ' 저 쉐이들이! 나는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아까워서 입술만 적시고 있는데, 아예 쏟아 부어 라! 부어! 술을 음미할 줄도 모르는 저럼 무식한 것들에게 이런 고급술은 돼지 목에 진주야, 진주' 얼큰하게 술에 취한 다크는 한 잔 쭉 들이킨 후 로열 크루나를 다시 한 잔 따라서 아르티 어스에게 권했다. " 아빠는 왜 안 드세요? 자, 한잔 쭉 들이켜세요." '에구구구. 내 아들이지만, 왜 이렇게 술 먹는 모습도 이쁜지. 술도 정말 화통하게 잘 마신 다니까. 히히, 하지만 저 무식한 것들은 미친 듯이 퍼먹는 거지, 저게 마시는 거야?' 술잔을 받아 쭈욱 들이켠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이뻐 못 견디겠다는 듯 바라보다가 문득 이 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얘야. 왜 할아버지에게는 안 권하는 거냐? 지금껏 옆에서 가만히 보니까 할아버 지한테는 말도 안하고 술도 안 권하는데 왜 그러느냐? 옆에서 보니까 좀 어색한 것 같아서 보기에 안 좋구나." 다크는 혀 꼬부라진 소리고 대답했다. "그게.. 도저히 할아버지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 말이죠. 아빠도 생각해봐요. 저게 할아버지 의 모습이냐구요." 아르티엔은 현재 겨우 열댓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확실히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아르티엔은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드래곤처 럼 취향에 따라 곁모습을 자주 바꾸는 종족이라면 의래 그렇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 지만, 다크로서는 이런 일은 처음 당해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고, 약간 당황스러운 김에 그 냥 무시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흐음. 그러니까 내 겉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구나." "아뇨. 그건 아니구요. 그러니까 뭐랄까.... 전혀 할아버지 같다는 느낌이 안 든다는 거죠. 할아버지라면 할아버지다워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아르티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는 있군. 그렇다면 어떻게 생겨야 할아버지라는 거냐? 네가 생각 하고 있는 이상형을 한 번 말해봐라." "으음. 글쎄요. 일단 위엄이 있어야죠.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연장자의 느낌. 그리고 모 든 것을 다 받아줄 것 같은 푸근함. 거기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노련미가 있으면 더욱 좋죠. 주름도 조금 있으면 좋구요. 그리고 세월에 퇴색해 가는 오랜 상처의 흔적도 하 나 있으면 좋죠. 적당히 긴 수염. 그리고........" 술에 취해 정신 없이 횡설수설하고 있는 다크의 눈빛이 점차 꿈꾸는 듯 몽롱하게 변해갔 다. 그가 중얼거리는 이상적인 할아버지는 바로 사부 유백의 모습이었다. 기나긴 인생에서 자신에게 아낌없이 정을 줬고, 또 모든 것을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상승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줬던,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유일한 인 물이었다. 물론 아르티어스도 자신에게 아낌없이 정을 주고 있었지만, 그는 워낙 젊은 용모 를 하고 있었기에 이상적인 할아버지의 상이 될 수 없었다.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상황이었기에 아르티엔으로서는 다크가 말하는 할아버지의 인상 이 어떤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연장자의 느낌? 푸근함? 노련미? 그리고 적당히 긴 수염 등등... 이건 완전히 주관적인 해석이 아닌가?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아 르티엔에게는 필요했다. 그렇기에 아르티엔은 슬며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곧 유백의 모습 을 이리저리 궁리하며 주절대고 있는 다크의 머리 위로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오호라. 바로 저 모습을 가져다가 저렇게 횡설수설하고 잇는 것이로군.' 역시 백 번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직접 한 번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아르티엔 은 슬며시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좋아. 내 겉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꿔주지. 어쨌든 유희를 즐기기로 한 이상 그 정도의 서비스는 해 줘야 하겠지." 말을 마친 아르티엔의 모습이 슬그머니 바뀌었다. 뭔가 빛이 확 뿜어져 나온 후 그 빛이 사라지고 나니까 바뀌었더라 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 키 작은 소녀의 몸집이 점점 자라 나 오고, 팽팽하건 피부가 약간 쭈글쭈글 해지며 주름도 몇 겹 생겨났다. 그리고 곧이어 수염이 눈에 보일 정도로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커다랗던 소녀의 눈망울은 옆으로 길게 찢어지면서 평범한 크기로 돌아갔고, 오똑하던 코는 약간 낮아지면서 옆으로 슬쩍 퍼져버렸다. 그리고 새하얗던 피부는 문어처럼 급격히 변색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황갈 색으로 바뀌었다. 이 변신은 1분 정도 걸렸는데, 처음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을 때 매우 신기한 듯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던 다크의 표정이 변신이 완료되자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눈물이 한 방 울 떨어졌다. 곧이어 입술까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격동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 사부." 물론 다크도 상대가 유백이 아니라 아르티엔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현실 감각이 없 어질 정도까지 취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의 모습이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고, 또 임종을 도와 드리지도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웠던가. 다크는 술까지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혼란스러웠다. 사실 아르티엔의 도움으로 모든 기억을 되찾았을 때부터 그는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삶을 한꺼번에 되돌아보며 느꼈던 혼란, 후회 등등 그가 평범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그것은 더욱 심했는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로 몹시 지쳐 있던 그에게 유 백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유백은 그가 최초로 인간의 정을 느꼈고, 믿고 기댈 수 있는 유 일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의 눈앞에 있는 유백이 아르티엔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 만, 다크로서는 가짜라도 좋았다. 그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그리고 그의 삶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 사부...." 다크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르티엔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 다.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아르티엔은 가볍게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아르티엔으로서는 할아버지 역을 다만 유희로 즐겼을 뿐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다크는 그렇지 않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부가, 다 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을 위로해주고 있는 것이다. "보고 싶었어요. 흑흑." 급기야 다크가 벅차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어르티엔의 품에 안겨 오열하기 시작했 다. 아르티어스는 처음에는 어이없는 듯 바라보다가 곧이어 잔뜩 독 오른 독사 마냥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아들놈이 언제 자신에게 저런 나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던가? 생각할수록 열 받는 일이었 다. 어떻게 겉모습 하나 바꾼 것을 가지고 저렇게까지 대접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왜 애를 울리고 그래요?" 아르티어스가 심통 궂은 어조로 아르티엔에게 항의하는 가운데, 옆에 앉아 있던 놈들이 그 의 분통을 더욱 터뜨리게 하는 것이다. "휘익! 너무 감동적이야." 팔시온과 미카엘이 술김에 휘파람까지 불어대며 난리를 쳤고, 미디아도 두 손을 가슴에 대 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겉모습이 우락부락한 무사라고 해도 그녀도 여자였던 것이다. "왠지 가슴이 찡한 것 같아." 한참을 오열하던 다크의 울음소리가 점차 낮아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아르티엔이 축 늘어 져 있는 다크를 안고 일어섰다. "너무 감정이 격해지는 것 같아서 내가 마법으로 재웠다. 얘는 내가 데려다가 눕힐 테니 까 너희들은 좀더 마시다가 오너라." 아르티엔은 다크를 안고 나가는 와중에도 남아 있던 마지막 로열 크루나를 품속에 집어넣 은 것만은 잊지 않았다. 아르티엔이 다크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티어스는 이를 뿌드득 갈았 다. 저 영감탱이의 노회한 술수에 아들을 뺏길 것 같다는 불안감이 아주 진하게 들었던 것 이다. 이때, 옆에서 팔시온이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아르티어스를 향해 주절거렸다. "어어~르신, 꺼억! 술이 없는뎁쇼." "뭣이! 이 새끼들이!" Chapter 2. 코린트에 감도는 전운 드넓은 초원과 야트막한 산으로 이뤄져 있는 아름다운 프루니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달리며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오랜 옛날에는 사냥대회라는 행사 자체가 각자의 기마술과 궁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기회였고, 국가가 자기의 세력을 타국에 과시할 수 있는 무대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해 들어감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군사 훈련의 목적까지 띠고 있었다. 하지만 검술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기사들의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압도할 정도로 비약적 으로 향상되고, 또 그들에게 타이탄이라는 마법 병기가 주어진 후부터 사냥대회의 성격은 많이 변질되었다. 군사 훈련의 목적보다는 귀족들의 친목 도모의 장소로 바뀐 것이다. 크루마의 황실 사냥터에서 벌어진 이번 사냥대회도 여태껏 있어왔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족들 간의 친목도모는 물론이고 미란을 흡수 통합한 후 더욱 강대해진 국력을 대 외적으로 과시라도 하는 듯, 크루마의 모든 귀족들이 참여하여 크루마 제국 역사상 최대 규 모로 개최되었다. 경호의 임무보다는 귀족들이 사냥감들을 비교적 사냥하기 쉽도록 몰아주는 임무를 더욱 중 시하게 된 1개 사단급 병사들이 폭넓게 포진하여 귀족들을 향해 사냥감들을 몰아주면서 사 냥대회는 시작되었다. 잡털 하나 없는 흰말을 타고서 그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백발이 성성 한 노인. 그가 현재 크루마의 63대 황제 알카파이네 드 크루마였다. 한 귀족 젊은이가 한껏 폼을 잡고서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자, 화살은 사슴의 엉덩이 부근에 명중했다. 상처 입은 사슴은 길게 울부짖으며 더욱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황제는 혀를 끌끌 찼다. 황제 또한 사냥을 즐겼기에 젊은이의 미숙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의 뒤에 서 잇던 늙은 기사가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서 나직하게 말했다. "이렇게 구경만 하실 것이 아니라 폐하께옵서도 사냥에 참가하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 까?" 황제는 자신도 참가할까 하는 마음이 솟구쳤지만, 곧이어 그 욕수를 너털웃음으로 억눌렀 다. "허허헛, 아닐세. 짐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아. 뒤늦게 끼여들어 봐야 괜히 욕만 듣게 된 다는 것을 짐이 모를 줄 아는가? 모두들 짐이 더 많은 짐승을 사냥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 해 각별히 배려할 것이고, 또 짐보다 더 많은 짐승을 사냥하지 않도록 모두들 조심하지 않 겠는가? 오랜만에 여는 대규모 사냥대회인데, 괜히 모두의 흥을 깰 이유가 없지." 바로 이때, 마법사 한 명이 뒤쪽에 마련되어 있는 임시 마법진으로 공간이동해 왔다. 그는 초조한 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는 찾으려던 사람을 발견했 는지 황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찾은 사람은 황제의 뒤편에 서 있었기에 마법 따위를 사용하여 접근할 수 없었다. 만 약 그런 식으로 접근하려고 들었다가는 황제의 뒤편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 암살자로 간주되 어 즉각 목이 달아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추어라." 곧이어 기사 한 명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마법사는 황급히 기사의 명령에 따라 멈춰 서며 말했다. "엘프리안에서 온 긴급 전문입니다. 국무대신 각하를 긴급히 뵙기를 청합니다." "가보시오," 그곳은 황제로부터 100걸음도 채 되지 않는 위치였기에 마법사는 국무대신 얼스웨이 후작 을 향해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방금 전의 그 기사 가 검을 뽑을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로 두 걸음 뒤에서 뒤따르기 시작했다. 얼스웨이 후 작만 있다면 모르겠지만, 황제가 바로 근처에 있었기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취해지는 조치였다. 마법사는 얼스웨이 후작 앞에 이르자 예법에 따라 인사를 건넸다. "무슨 일이냐?" "엘프리안에서 도착한 긴급 전문입니다, 각하." 마법사는 자신의 품속에 넣어 온 전문을 아주 천천히 꺼내어 건넸다. 황제 근처에서 품속 에 넣었던 손을 급히 뽑기라도 한다면, 뒤에 서 있는 기사는 그 행위를 단도 같은 흉기를 던질 준비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즉시 목을 날려버릴 우려가 있는 것이다. 국무대신 지크니아 엘 얼스웨이 후작은 그것을 받아서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 악에 찬 표정으로 변했고, 손까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얼스웨이 후작은 황제를 향해 천 천히 걸어간 후 땅바닥에 엎드리며 통렬한 어조로 외쳤다. "폐하, 큰일이 벌어졌사옵니다." 황제는 마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근엄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얼스웨이 경?"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긴급 보고이옵니다." 황제는 그다지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 듯 시큰둥하게 물었다.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고?" "예, 폐하. 갑자기 골드 드래곤이 나타나서 엘프리안을 폐허로 만들었다고 하옵니다," 황제는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황실의 주요 인물들이 이곳에 다 와 있다고 하지 만, 수도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미네르바가 기사단을 이끌고 남아 있지 않는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켄다로아 경은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무리 드래곤이라 고 해도 이유 없이 엘프리안을 파괴할 리는 없을 텐데 ......" "어쨌건 사실인 듯하옵니다. 그러니 빨리 궁으로 귀환하시어 전체적인 피해의 정도를 파 악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일인 듯 하옵니다." "허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어쨌든, 들아가세." "그렇다면 사냥을 중지시킬까요?" "아니, 놔두게나. 괜히 저들의 흥을 깰 이유는 없지. 또 저들이 사냥대회를 중지한다고 해 사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옛, 폐하." 일단 여름궁전에 돌아간 황제는 모든 보고를 종합하여 정확한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기 시 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황제는 엘프리안이 파괴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루 마의 수뇌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법사는 엘프리안에서 전송된 영상을 마법으로 보여줬 다.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브래스 한 방에 엘프리안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것을 보며 사방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황제는 그것을 본 순간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평생을 가꿔왔던 수도가 하루 아침에 가루가 된 것을 실감할 수 있었고, 그 충격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황제가 쓰러지고 나자 국무대신 얼스웨이 후작은 급히 의회 의장인 어스무스 엘 그랜딜 공 작에게 그것을 보고했다. 후속 조치를 독단으로 처리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린레이크 공작의 행방이 묘연했기에, 그랜딜 공작은 그를 대신해서 원로원을 소집함과 동 시에 황태자를 소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스웨이 후작이 주치의의 소견에 따르면 황제의 건강 상태가 매우 위독하다는 보고를 했 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급보를 받자마자 황제를 배알했다. 황제와 그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황제를 알현하고 나오자마자 긴급히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군의 총사령관인 로체스터 공작 이 평상시에 소집하는 것은 기사단의 수뇌부나 각 군의 사단장급들인데 이번에 소집한 사 람들은 모두 다 내정을 담당하는 관료들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경들을 소집한 것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사안이 발생했기 때문이오." 갑자기 로체스터 공작이 자신들을 회의에 불러내어 국가의 존망이 걸렸다는 둥 뜬금없는 말로 서두를 장식하자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은 손을 들어 조용히 시 킨 후 말했다. "일단 본국에 어떤 위험이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보부장인 베르딘 후작의 보고부터 들어본 후에 회의를 시작하기로 하겠소." 지명을 받은 베르딘 후작은 인사를 한 후 설명을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치레아 공국의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베르딘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잠시 생각할 여유를 준 후 말을 이었다. "일의 발단은 그녀의 실종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제2차 제국전 쟁 당시 본국의 최대 숙적인 그녀로 이해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자칫 전쟁 패배라는 한계 상황에까지 치달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크라레스 전력의 핵인 그녀가 전쟁이 한창 진 행되던 와중에 갑자기 실종되었기 때문에 본국은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 만 문제는 그녀가 실종됨에 따라 엄청난 존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데 있습니다. 정보부에 서 치밀하게 조사한 결과, 그녀는 골드 드래곤과 상당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 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그 판단에 가장 큰 단서를 제공한 것이 크루마 제국의 수도 엘프리 안의 파괴였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국무대신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질문을 던졌다. "엘프리안의 소멸에 대해서는 나도 겨우 한 시간 전에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것과 그녀가 연관이 있다는 것인가?" "예. 정보부에서 각 채널을 동원, 철저히 정보를 분석한 결과 치레아 대공이 실종될 당시 마지막 흔적이 크루마의 수도 엘프리안에서 실종되었다는 것이지요. 골드 드래곤은 그녀의 실종에 크루마가 관계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엘프리안을 가루로 만들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드래곤의 분노가 풀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는 한 드래곤의 파괴 행각은 계속될 게 분명하다는 것이 정보부의 분석입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의 요점이 뭔가? 다음 대상이 본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예, 그렇사옵니다, 국무대신 전하. 그녀가 실종될 때까지 크라레스의 가장 강력한 적은 저희 코린트였습니다. 그런 만큼 드래곤으로서는 그녀가 실종된 것에 대해서 본국에 혐의를 둘 가능성이 지대하지 않겠습니까?" 국무대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골드 드래곤이 그녀의 실종에 대한 책임을 물으러 다음 파괴 대상으로 케락스 를 선택할 가능성이 짙다는 말이군." "예, 그렇사옵니다, 국무대신 전하. 그런데 문제는 골드 드래곤이 언제쯤 본국에 올지 전 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케락스 상공에 그 모습을 드러낼 가 능성도 있사옵니다." 베르딘 후작의 말이 끝나자 로체스터 공작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경들을 긴급히 소집한 것이오. 이미 폐하의 윤허는 떨어졌소, 국무대신은 최우선 순위에 따라 황족 및 주요 시설을 긴급히 시외로 대피시키도록 하시오."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로체스터 공작. 아무리 긴급 사항이라고 해도 확인되지도 않 는 정보를 믿고 대피시킬 수도 없을뿐더러 그 많은 시설 및 재화들을 어떻게 단시일 내에 시외로 대피시킨다는 말입니까?" 국무대신이 곤란하다는 어조로 말하자 로체스터 공작은 화가 나서 외쳤다. "그렇기에 폐하의 칙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당장 철수 작업을 시작하란 말이다. 수 도방위사령부에는 내가 이미 명령을 내려놨으니까 원하는 만큼 병력을 지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일 아침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타이탄 생산 시설을 몽땅 시외로 옮기도록 해 라." "하지만 그렇게 대대적으로 몽땅 시외로 밤중에 인원을 동원한다면 시민들이 눈치 챌 것 입니다. 그렇다면 엄청난 혼란이...." "닥쳐라. 그런 것도 내가 생각하지 않았는 줄 아는가? 하지만 지금의 비상 상황에서는 어 쩔 수 없는 일, 시민들의 혼란은 감수해야 한다. 전에 코린티아 시가 파괴되었을 때, 타이탄 생산 시설의 파괴로 인해 본국이 얼마나 막대한 타격을 받았는가? 그것을 완전히 복구하는 데 3년이란 세월이 결렸다. 그런 악몽을 또다시 되풀이할 수 는 없다." 로체스터 공작은 회의장에 모여 있는 모든 관료들을 한 차례 둘러 본 후 서슬 퍼런 어조로 외쳤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모두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단축시켜라. 만약 게으름을 피우는 자가 있다면 내 직접 반역죄로 처단하겠다. 그리고 철수 작업에 방해 가 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파괴해도 무방하다." 로체스터 공작의 강압적인 자세에 국무대신은 어쩔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내정을 담당하는 수장이 그럴 정도니 그 밑의 관료들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더 이상 토를 다는 사람도 없었기에 회의는 로체스터 공작이 일방적인 지시로 끝이 났다. 회의를 마 친 후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던 도중 베르딘 후작에게 질문을 던졌다. "치레아 대공에 대한 벼룩의 보고는 없었나?" "아직 없사옵니다, 전하. 크라레인 시로 일행을 이끌고 갔다는 것 외에는 없는 걸로 보아, 엘프리안을 파괴한 후 치레아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으로 판단되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나?" "현재로서는 없사옵니다. 일반적인 마법사가 그들을 이끈다면 모르겠사오나 상대는 드래 곤이옵니다. 도저히 첩자들의 능력으로는 추격 자체가 불가능하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제임스는 분명히 치레아 대공이 미네르바를 용서해 주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갑자기 드래곤이 엘프리안을 파괴했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경은 혹시 짚이는 것이 있나?" "......." 베르딘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잠시 후 로체스터 공작이 말을 이었다. "크루마의 첩자들에게 연락하여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하 좀더 확실하게 알아보라고 하게. 드래곤이 왜 엘프리안을 파괴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란 말이야." "옛, 전하." 급히 자리를 뜨려는 베르딘 후작의 뒤통수를 향해 로체스터 공작이 말했다. "아아, 그리고...." "무엇이옵니까, 전하." "용병대장으로부터는 연락이 없는가? 그때 연락이 끊어진 후로 새로운 소식이 들어온 게 없는가 이 말일세." "아직 없사옵니다." "경은 크라레스에 침투해 있는 첩자들에게 연락해서 통신이 끊어진 지점을 최대한 빨리 상 세히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이르게." "옛, 전하." "가보게나." 베르딘 후작을 보낸 후 자신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는 로체스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오래 전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했을 때,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무서운 게 없었다. 그들이 한창 활동하던 그때의 코린트는 대륙 최강의 힘을 자랑했었다. 키에리가 모든 것을 지시했 고, 또 그들은 그 지시에 따라서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해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며 친구들이 하나 둘 자신의 곁에서 떠나고 혼자 남게 되자 로체스터는 너무 외로웠다. "이 친구야, 지금 자네가 필요해. 나 혼자 코린트를 짊어지려니 너무 힘들군." 집무실에 않아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Chapter 3. 극악한 정신 교육 이후 "아아함, 자긴 잘 잔 것 같은데 머리가 깨질 듯 아프네." 다크는 힘껏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어떻게 침대까지 와서 자고 있지? 젠장,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시..." 다크는 잠시 어제의 일을 생각하다 뭔가를 떠올렸는지 안색이 창백해지며 닭살이 마구 돋 기 시작했다. 아무리 겉모습은 여자 애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령의 남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털이 부숭부숭 난 사내에게 안겨서 펑펑 울다니. 이거야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술김에 행한 일이었다. 꼭 따진다면 다크의 잘못이었다. 그러 나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런 원인을 제공한 놈이 절대로 잘못한 것이 아닌가? 자신 의 잘못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분노를 아르티엔에게로 돌리며 어제의 실수를 자위하려고 하는 다크였다. "이 영감탱이, 가만 안 둔다. 변신할 대상이 따로 있자. 감히 사부님의 모습으로 변신을 해? 껍질을 홀랑 벗겨놓을 테닷!" 다크가 씩씩거리며 1층 식당에 도착했을 때, 일행들은 모두 다 식사 중이었다. 한쪽 탁자에 팔시온 일행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사를 하고있었고, 또 다른 탁자에는 드래곤 일가가 앉 아서 느긋하게 식사 중인 것이 보였다. 다크는 팔시온 패거리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 은 채 곧장 드래곤들이 앉아 있는 식탁으로 씩씩거리며 다가갔다. 아르티엔은 다크가 다가 오는 것을 보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얘야, 잘 잤느냐? 어제 보니까 너무 피곤한 것 같더구나. 몸 생각도 해야지." 다크는 아르티엔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며 얼떨결에 대답했다. "예? 예. 사...... 아니 예, 그래요." "우린 이미 식사를 끝냈으니까 너도 빨리 식사를 하거라. 아무리 전날 술을 많이 먹었다 고 하더라도 아침을 거르면 안 되지." 따뜻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아르티엔은 걱정스런 시선을 다크에게로 보내고 있는 아르티 어스를 끌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뭔가에 홀린 듯이 아르티엔을 바라보고 있던 다크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주먹으로 탁자를 쾅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왜 이러지?" 그녀는 투덜거리며 팔시온 일행이 앉아 있는 탁자로 걸어갔다. "닮아도 너무 닮았단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부드러운 미소까지 같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중얼거리다 다크는 점원을 향해 외쳤다. "이봐, 주문 받아!" 순간 점원은 인상을 팍 쓰며 다크를 노려봤다. 아무리 손님이라 하지만 꼬맹이의 말투가 너무 시건방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손님은 왕이니까! "아, 예." 다크도 당연히 점원의 인상이 일그러졌다가, 억지로 펴지는 것을 봤다. 내가 누군데 저게 감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크는 일단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안 그래도 마음이 싱숭생 숭한데 점원 따위와 드잡이하기도 귀찮았던 것이다. "이봐, 야채수프에다가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서 얼큰하게 해 가지고 와. 그리고 소시지하 고 빵도 적당히 가져와." 고향의 요리를 어떤 식으로 만드는지 몰랐던 다크는 자신이 알고있는 고향의 얼큰한 맛을 내려면 고춧가루 외에는 없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그 외의 복잡한 향신료에 대해서는 거 의 무시했고, 또 알고 있다고 해도 이곳에 그런 것이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렇기에 고춧가 루를 듬뿍 넣으라는 주문을 한 것이다. "예? 수프에 고춧가루라니요? 후추가 아니고요?" "임마! 후추 뿌려서 얼큰한 맛이 나오냐? 잔말말고 시키는 대로 가져와." 점원은 뭔가 맞받아 치려다가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미카엘의 거대한 등을 힐끔 보고는 ' 내가 참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낮은 목소리로 궁시렁거리며 주방으로 돌아섰다. "젠장! 점원 생활 십 수년에 저 딴 주문은 처음 받아보네." 다크는 앞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수프를 떠먹고 있는 팔시온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야, 내가 언제 그렇게 취했었냐? 한창 마시던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이상하게 그 다음 에는 기억이... 어? 너 얼굴이 왜 그래? 푸하하핫!" 팔시온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자 다크는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평상시에도 조금 험악한 인상이 드는 얼굴이었는데, 이제는 아예 괴물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굴 전체가 울긋불긋 푸르뎅뎅했고, 오른쪽 콧구멍은 휴지조각을 쑤셔 넣어서 불룩 솟아올라 있 었다. 팔시온이 쪽팔린다는 듯 다시금 고개를 푹 숙이자, 다크는 옆에 앉아 있는 미카엘을 쿡 찌르며 말을 건넸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다크는 역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카엘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탁자에 얼굴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너도 그러네. 어제 나를 빼놓고 너희들끼리 패싸움이라도 한 거야?" 미카엘은 도저히 다크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들었다. 미카엘의 준수 한 얼굴도 역시 떡이 되어 있었다. 미카엘은 뺨이 퉁퉁 부어서는 입안이 다 헐었는지 불분 명한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흑흑, 나가이 고기하신 기조기 이러 꼬으 다하다니. 마야 아버이가 보셔다며 기저하셔을 거야(나같이 고귀하신 귀족이 이런 꼴을 당하다니. 만약 아버지가 보셨으면 기절하셨을 거 야.). 어허허헝!" 미카엘은 너무나도 원통했는지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다크는 미카엘이 도저히 대답을 할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비교적 느긋한 성격인 가스톤을 향해 말을 건넸다. "이봐, 가스톤. 어떻게 된 거야?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고개를 드는 가스톤의 얼굴은 그래도 비교적 깨끗했다. 물론 그것은 미카엘이나 팔시온 등 과 비교했을 때의 얘기지 결코 상태가 양호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2층으로 올라간 후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버릇이 없다고 우리들을 밖으로 불러냈거 든." "그래서?" "밤새도록 훈계를 들었지." "그런데 모두들 얼굴이 왜 그래?" "조금만 움직이거나 말대답을 하면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다고 엄청 두들겨 맞았거든. 나 는 저놈들보다는 그래도 머리가 잘 돌아가잖냐. 끽 소리 않고 있었기에 비교적 덜 맞았지. 히히힛!" 빙긋 웃고 있는 가스톤의 가지런한 치아 한 군데가 비어 있었다. 히히덕거리고 있는 가스 톤이 얄미웠는지 그 앞에 억지로 식사를 하고 있던 미디아가 화난 어조로 외쳤다. 그녀의 얼굴 또한 떡이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명색이 여자인데 어떻게 저렇게 무자비 하게 두들겨 팰 수 있단 말인가? 팔시온하고 나란히 세워놓으면 거의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둘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그에, 너 자나다(그래, 너 잘났다.) 그리고 서 시추이느 뭐 저어케 시이 나서 처머냐(그리 고 저 식충이는 뭘 저렇게 신이 나서 처먹냐)?" 빵을 수프에 적셔 와구와구 입 속에 밀어 놓고 있던 팔시온은 고개를 쓱 들더니 손가락으 로 왼쪽 콧김을 확 뿜었다. 킁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콧구멍을 막고 있던 피에 전 휴지 조각이 탁자 밑으로 날아갔다. "킁! 때리면 맞아야지 별 수 있냐? 그리고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을 신께 감사하다구. 누가 드래곤에게 그렇게 쥐어터지고 살아남았다는 거 들은 적 있어? 그 정도면 많이 봐준 거라고 봐야지." 팔시온의 말에 미디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팔시온이 여태껏 이렇게 자포자기한 모습을 보인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 그런 것을 보면 확실히 팔시온의 적응력은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모양이었다. 다크는 이런 동료들을 보고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동료라는 것을 잘 알면서 어 떻게 이렇게까지 두들겨 팰 수 있단 말인가? 저 나약한 애들을 어디 두들겨 팰 데가 있다 고, 저런 상태로 만들었단 말인가? 다크가 더 열이 받았던 것은 이들을 겨우 감옥에서 구해 와서 풀어줬는데, 해방감을 채 느껴보기도 전에 저렇게까지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 이었다. "이런 주책바가지 드래곤이?" 다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동료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아르티어스에게도 화가 났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유백의 모습으로 변해있는 아르티엔은 정말 가만히 놔둘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성질을 건드리고 있었다. 어떻게 아르티엔이 유백의 모습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만약 아르티엔이 중원에라도 가봤다 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국 결론은 뭔가 마법을 사용하여 자신 의 기억을 훔쳐봤다는 말밖에 안 되지 않는가? 자신이 기억하기 싫은 부분까지도 자신의 동의를 받지 않고 훔쳐봤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 욱 기분 나쁘게 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이건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다크는 발을 쿵쾅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다 크가 씩씩거리며 들어서자 방안에 앉아 있던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가 그녀 쪽으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다크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아르티엔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식사는 하지 않고 왜 올라왔는냐? 끼니를 거르면 속 버린단다." 아르티엔의 자상한 말을 듣자 다크는 일순 할 말을 잊어버렸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 다. 분명 유백으로 변신한 아르티엔의 모습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성일 뿐이고, 그녀를 휘감고 도는 감정은 그게 아니었다. 그리운 모습에다가 자상한 말까지 곁들이자, 그 한마디 한마디가 공허했던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다크로서는 당혹스러웠다. "아니, 저......" "음식이 입에 안 맞느냐? 그럼 먹고 싶은 것을 말해보렴. 손자를 위해서라면 내가 그 정 도는 해줄 수 있다. 허허헛." "아니, 저... 으이구. 그게 아니구요. 저... 차라도 한잔 드시겠어요?" 버벅거리던 다크는 결국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토해내고 말았다. 속으로는 이게 아니 라고 생각하면서. "그러자꾸나. 아침에는 차를 잘 안 마시지만, 손자가 마시자는데 거절할 수가 없지. 안 그 러냐, 아르티어스야?" "그럼요, 아버지. 헤헤헤. 나도 한잔 부탁하자." "예?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밖을 나온 다크는 어이가 없는지 허허 웃으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제길! 닮아도 너무 닮았단 말이야." 도저히 제어가 잘 되지 않고 있는 자신을 향해 투덜거리며 식당으로 내려가자, 이미 그곳 에는 주문해놨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점원을 불러서 2층에 차 두 잔을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한 후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얼큰한 수프가 뱃속으로 들어가자 속이 확 풀리 면서, 옛날 중원에서 먹던 해장국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크, 이 맛이야! 속이 확 풀리는군. 역시 술을 마신 다음날은 얼큰한 국물이 최고지." 그리운 얼굴에, 그리운 목소리 그리고 그리운 맛까지. 다크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이때, 과연 주문한 음식을 인간이 먹을 수 있는지 살펴보고 있던 점원은 어이가 없 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런 것도 음식이라고 먹는 년이 있는 걸 보면 과연 세상은 요지경이야." 순간 다크의 눈썹이 꿈틀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한 기분을 저 따위 점원녀석이 망쳐 놓다니.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다크가 벌떡 일어서는 것을 보고 옆에 앉아서 음식을 와구 와구 먹고 있던 팔시온이 궁금한 듯 물었다. 입 속에 음식이 가득 들어 있었던 탓에 발음조 차 불분명했다. "야, 왜 그애(왜 그래)?" "아니, 저 녀석이 어제부터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말이야. 방금 전에도 뭐라고 이 죽거리잖아." 다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팔시온이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입 속에 잔뜩 들어 있던 음식물들을 바닥에 퇘 뱉어버린 후 유쾌한 듯 말했다. "그래? 잘 됐다. 네가 나설 것까지 있냐? 내가 해줄게. 거기서 지켜만 보라구." 팔시온이 팔을 걷어붙이고 점원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고, 가스톤이 벌떡 일어서면서 외 쳤다. "야, 나도 같이 하자." 다크는 40대 중반이나 되는 삐쩍 마른 가스톤까지 만면에 희색을 띠고 일어서는 것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바라봤다. 평상시 침착하게 혈기왕성한 팔시온이나 미카엘을 뒤에서 이끌던 형같이 자상한 가스톤마저 저런 상태로 만든 것을 보면 어젯밤의 정신 교육이 대단 하기는 대단했던 모양이라고 다크는 생각했다. 다크가 자신을 노려보며 신경질적으로 일어서는 것을 볼 때까지만 해도 점원의 표정은 가 소롭다는 듯 여유 만만했다. 하지만, 갑자기 험상궂게 생긴 큰 덩치의 사내가 일어서서 자신 에게 다가오자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다. 그는 재빨리 주방 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먹이를 놓칠세라 달려들어가는 팔시온과 가스톤. 곧이어, 주방을 완전히 때려부수는 듯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메웠다. 게다가 간간이 약간 카랑카랑한 가스톤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평상시와는 달리 엄청난 독기를 머금은 듯 했다. "죽어! 죽어! 죽엇!" 주위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몇몇 손님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슬금슬금 식당 밖으 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팔시온과 가스톤이 개운한 듯한 표정으로 양손을 탈탈 털 면서 걸어 나왔다. 그것을 보며 미카엘과 미디어가 원통하다는 듯 탁자를 치며 분해했다. "제자, 내가 가서애 하는 거데(젠장, 내가 갔어야 하는 건데)." "저 너서드은 이러 때마 도자이 재사다 마이야(저 녀석들은 이런 때만 동작이 잽싸단 말 이야)." 이것을 보며 다크는 아연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제 저녁에 아르티어스에 게 어떤 교육을 받았길래, 저들이 저렇게 까지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도 궁금한 다크 였다. Chapter 4. 알카사스의 긴급 원로회의 프루니아는 크루마 제국의 북부에 있는 고원지대다. 그렇기에 여름에 비교적 시원하다는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크루마 황실에서는 그곳에 여름 궁전을 제법 근사하게 만들어 놓았다. 여름 궁전 앞에 거대한 인공호수까지 조성해서 황족들이 수영이나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대륙에서 손꼽히는 호화로운 궁전이었다 여름궁전의 후원에 위치한 대규모 영구이동 마법진들. 황제가 이곳에 행차할 때 거의 1개 사단급에 가까운 호위 병력과 수많은 시종들이나 고관 대작들이 함께 움직이기에 그 마법진 의 규모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 거대한 마법진들 중의 하나에서 빛이 번쩍 하더니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나 타났다. 호위병은커녕 동행조차 없이 혼자 나타난 사내를 보고 마법진 주위에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이때, 마법진 주위에 한 시간 전부터 부 동 자세로 꼿꼿하게 서 있던 기사가 날렵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 춰 그 사내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옵소서, 황태자 전하." "무슨 일인가?" "예, 의회 의장이신 어스무스 엘 그랜딜 공작께서 황태자 전하를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이 쪽으로 가시옵소서." "알겠다. 안내하라." "갑자기 나를 소환한 이유가 뭔가, 그랜딜 경?" 의회 의장인 어스무스 엘 그랜딜 공작은 침착한 눈빛을 하고 있는 40대의 사내를 자부심 어린 눈길로 바라봤다. 황태자를 마법사로 교육시킨 것은 그린레이크 공작을 비롯한 원로원 이 군부를 밀어내고 이뤄낸 최고의 성과였다. 총사령관인 미네르바의 권력이 더욱 강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황태자에게 손을 썼다. 일단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쪽이 다음 세대 크루마의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은 당연한 진리였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를 우두머리로 하는 군부는 황태자를 기사로서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했 고, 그린레이크를 우두머리로 하는 궁정대신들 및 마법사들은 그를 마법사로 교육시켜야 한 다고 주장했다. 서로 간에 치열한 신경전이 오갔고, 결국은 그린레이크가 승리했다. 군사 쪽 이 아닌 궁정 안에서 벌어지는 각종 크고 작은 일을 관장하는데 있어서는 그린레이크 쪽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폐하께옵서 갑자기 쓰러지셨기 때문입니다. 황실 주치의 및 신관들은 아무래도 오늘 저녁이 고비가 되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 뭣이? 도대체 병명이 뭔가? 궁 안에는 수많은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있을 텐데, 어찌 치 료를 할 수 없다는 말이냐?" " 그것이 정신적인 부분이기에 손을 쓸 여지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으셨기 에……." 황태자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요 근래 인근의 제국들이 몬스터들의 침공에 시달리고 있지만, 오히려 크루마에는 여태껏 있어왔던 몬스터들마저도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그렇기 에 크루마는 평온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어떤 전쟁에 대한 소문도 없는 상태였기에 황제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충격이라고?" "예. 엘프리안이 골드 드래곤에게 파괴되는 영상을 보신 후 그렇게 되셨습니다." 황태자는 그랜딜 공작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뭣이?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고?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인가?" '예. 어제 오후의 일입니다. 시민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아직까지는 엘프리안이 파괴되었 다는 사실이 퍼지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골드 드래곤이 왜 엘프리안을 공격했단 말인가? 마법학교에서 드래곤은 이쪽에서 건드리 지 않는 한 평화를 지키는 종족이라고 배웠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말인가?" "황태자 전하께서 배우신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부분을 세밀하게 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쩌면…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엘프리안의 소멸에 켄타로아 공작이 관여한 듯합니다." "아니, 켄타로아 공장이…왜?" "그것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엘프리안에서 돌아온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심문해 본 결과 켄타로아 공작은 골드 드래곤이 엘프리아을 공격할 것이라는 사식을 이미 알고 있 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타이탄 생산 공장의 인부 및 주요 장비들을 시외로 급히 대피시 켰고, 갖가지 명목을 붙여 수도에 주둔 중이던 군대 및 기사단도 시외로 빼돌렸습니다. 어쩌 면 이번에 벌어진 대규모 사냥대회도 황족과 귀족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꾸민 계략일 가능성 까지 제기되고 있습니다." "으음iªiª.알겠다. 일단 이 모든 것을 비밀리에 처리하되, 경이 책임지고 철저히 진상을 파악하도록 하라." "옛, 전하."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후원에 있는 침실에 계십니다. 아무래도 그 쪽이 조용하니 말입니다." "잘했다. 수도까지 파괴된 마당에 폐하께서 쓰러지셨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좋을 게 없겠 지. 나는 폐하께 가볼 테니 뒷일은 경이 알아서 처리해주기 바라네." "옛, 전하" 알카사스의 왕국 지하 4층에 마련된 비밀 회의실. 이곳은 강철과 벽돌로 이루어진 매우 튼 튼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방의 외곽에는 다섯 겹의 마법 방어막까지 쳐져 있어서 사실상 이 안에 거주하는 한 타살 당할 염려는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알카사스의 최 고 권력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원로원이 회의실로 애용하는 장소였다. "모두들 바쁠 텐데 회의에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해주어 고맙소." 회의에 참석한 노인들을 쭉 훑어본 후 의장은 말을 이었다. "그대들과 몇 가지 토의할 것이 있어서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소. 먼저, 정보에 의하면 크 루마의 수도 엘프리안이 골드 드래곤에게 파괴되었다고 하오." 의장의 말에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원로원 노인들이 경악한 어조로 외쳤다. "오오! 그것이 사실입니까, 의장님?"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오. 몬스터들이 날뛰는 마당에 드래곤까지 가세해서 크루마 같은 거 대 제국의 수도를 파괴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소." " 그렇다면 최근 몬스터들이, 갑자기 인간들이 그들의 적이라도 되는 양, 군대 규모의 조 직력을 갖춰서 공격을 가해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드래곤까지 엘프리안을 공격 했다면, 혹시나 몬스터들의 뒤에 바로 그 드래곤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밖에 생각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의장님?" 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우려하는 것도 바로 그것일세. 바로 그 때문에 원로원을 소집한 것이야. 혹시 그 드 래곤이 몬스터들을 사주하여 인간을 공격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드래곤이 뒤에 있다면 여태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몬스터들의 집단 난동도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하지. 안 그런가?" 드래곤이 배후에 있는 것으로 지목되자 그곳에 앉아있던 원로들은 당혹스러운 듯 저마다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공포에 질려 얼굴빛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 다. 그들도 드래곤의 실체를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 파괴력이 어떠한지 수많은 서 적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의 진상을 정확히 밝히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시급히 그에 따른 대책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엘프리안 정도 되는방어마법진으로 싸여 있는 거대도 시를 브래스 한방으로 초토화시킬 정도라면 최소한 웜급을 상회하는 드래곤일 가능성이 큽 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드래곤에 대한 자료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웜 급이 아니라 에인 션트 급일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브래스의 힘이 강하기로 이름나 있는 레드 드래곤이나 실 버 드래곤이라면 웜 급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골드 드래곤이라면 에인션트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장은 손을 들어 일단 주위를 조용히 시킨 후 말을 이었다. "나도 자네들의 의견에 찬성하네. 그리고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만, 에인션트 급 드래곤이 이 사건을 일으켰다면 거의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사실이야. 일단 가장 시급한 일은 그 드래곤이 엘프리안을 공경한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야. 그리고 이렇다 할 이유가 없는데도 엘프리안을 공격했다면 그 드래곤이 몬스터들을 조종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봐야겠지." 의장은 원로들을 쭉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선에서 들어오는 보고도 썩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일세. 벨리아드, 자네가 좀 설명해주겠나?" "예." 의장의 지시를 받은 벨리아드는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몬스터들의 집단 난동에 본국은 거의 대부분의 전력을 투입하고 있지만, 썩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 근래에는 근위기사단을 제외한 4개 기사단 모두를 투입했지만, 전선에서 이렇다 할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기에 저희 정 보부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종합해 본 결과 한가지 방법을 도출 해낼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벨리아드는 헛기침을 한번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것은 바로 용병기사들을 대규모로 모집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원로들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원로들 중의 한 명이 벌떡 일어서서 차분한 어조로 주위를 조용히 시켰다. 그는 바로 알카시스의 대외업 무를 담당하고 있는 카스피아였다. "자자, 조용히들 하시오." 그런 다음 그는 의장과 벨리아드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용병기사를 모집하는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어디서 용병기사를 뽑는다는 말입니까? 아르곤 제국이 대규모로 용병기사들을 흡수했고, 또 2차 제국전쟁 때 코린트도 대규모를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서 무슨 방법으로 우수한 용병기사를 모집한다는 말입니까? 쓰레기 같은 것들을 모집하려고 해도 웃돈을 얹어줘야 할겁니다. 그런 만큼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 까?" 카스피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벨리아드는 실례되지 않게 정중한 어조로 반론을 펼쳤다. "카스피아 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동쪽 대륙에서 용병기사들을 모집하 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 모두들 웅성거리는 가운데, 벨리아드는 손을 들어 모두를 조용히 시킨 후 말 을 이었다. "자자, 모두들 조용히 들어주십시오. 카스피아 경께서 말씀하신 대로 요 근래 계속되는 전쟁 과 군비 증강으로 인해 실력 있는 용병기사를 동쪽 대륙에서 모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합니다. 하지만, 이 세계가 동쪽대륙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서쪽 대륙에 제가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약간씩 흘러 들어오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대략적으로나마 그곳의 사정을 파악할 수는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아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크 로우(crow)'라는 용병단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희들은 그들을 포섭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이 말에 원로들 중 한 명이 낮은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전쟁터에 떠도는 그 피에 젖은 까마귀들이라는 전설적인 용병단을 말하는 것인가?" "예, 맞습니다." 벨리아드가 수긍하자 여기저기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만큼 그들은 철의 장막을 치 고 있는 타이렌 제국을 통과할 정도로 엄청나 소문을 몰고 다닌다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오오, 바로 그 전설적인 용병단 말인가?" "나도 ,숫자는 많지 않지만 서쪽 대륙 최강의 용병단이라는 소문은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 소." 하지만 카스피아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벨리아드에게 말했다. "크로우 기사단이 막강하다는 것은 나도 소문을 통해 알고있네. 하지만 그들을 고용하려 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걸세. 좋아, 뭐 돈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자네는 어떻게 서쪽 대륙 에 가서 그들과 접촉한다는 말인가? 서방으로 가는 관문은 타이렌 제국이 꽉 틀어막고 있 네. 그들은 동방과 서방의 무역을 아주 장기적으로 독점하기 위해 양쪽의 교류를 철저히 막 고 있어. 자네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래 전에 타이렌 제국에 가본 적이 있네. 타이렌 제국 동 쪽에는 작은 구획이 하나 있지. 나는 줄곧 거기에만 있다가 돌아왔다네. 그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사람에게 물으니까 동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곳에서만 생활할 수 있다고 하더군. 그 렇다면 서방에서 온 사람들도 그것은 마찬가지 아니겠나? 거기에다가 그놈들은 공간이동마 법을 왜곡하는 괴상한 마법까지 개발해내지 않았나? 거대한 마법 탑을 건설하고, 그곳에서 부터 괴상한 힘을 방출하여 공간이동 마법을 왜곡하도록 조작해놨기에 설혹 저쪽의 좌표를 알고 있다고 해도 공간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타이렌 제국은 그런 식으로 양쪽을 완전히 분리시켜 놓고, 그 사이에서 철저하게 단물을 빨아먹고 있지. 이 런 상황에선 서방으로 가서 크로우 용병단과 교섭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일세. 혹 타이렌 제국을 멸망이라도 시킨다면 모르겠지만 말이야." "꼭 서방에 가야만 그들과 교섭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벨리아드는 주위를 쓱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물론 타이렌 제국이 철저하게 막고 있기에 서방으로 직접 들어가서 교섭할 수는 없습니 다. 하지만 그것을 타이런에 의뢰하면 어떨까요? 넉넉하게 수수료를 지급한다면 그들도 적 극적으로 협력할 것이 분명합니다. 정보부에선 크로우 용병단만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전세 를 완전히 뒤집어엎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의장은 주위를 쭉 둘러본 후 말했다. "벨리아드, 자네는 즉시 타이렌 제국으로 가게. 자네가 제안한 것이니만큼, 자네가 맡는 것이 좋지 않겠나?" "예, 의장님." Chapter 5. 아비규환이 된 케락스 "이봐?" 아르티미어스의 지명을 받은 팔시온은 화들짝 놀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무 놀란 탓인지 대답조차 못하고 버벅거리며 서 있었다. 그것을 본 아르티어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어른이 부르면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냐? 아직 교육이 좀 덜된 것 같다." 교육이라는 말에 팔시온은 진저리를 치며 즉시 대답했다. "아그그극! 아, 아닙니다요, 어르신. 왜 그, 그러십니까?" "우리 아들 못 봤어?" "저, 정원으로 나가던데요." "그래?" 아르티어스가 정원에 나갔을 때, 다크는 나무 위에 앉아있었다. 상당히 높은 나무의 위쪽이 었기에 아르티어스는 기겁을 했다. 물론 거기서 떨어진다 해도 별탈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르티어스의 눈에 보이는 다 크는 가냘픈 소녀일 뿐이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않아서 아르티어스는 발걸음을 멈췄 다. 다크는 나무 위에 높직하게 앉아서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바로 아르티엔이 기거하고 있는 방이었다. 그녀는 아르티어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방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겐 아르티엔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오래 전에 봤던 사부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정말 사부가 환생한게 아닐까? 어쩌면 저렇게 표정 하나하나가 똑같지?" 뭔가에 홀린 듯 중얼거리던 다크는 거칠게 머리를 흔든 후 투덜거렸다. "젠장! 내 기억을 훔쳐봤을 테니 똑같은 것은 당연하겠지. 하, 하지만…….빌어먹을! 근데 도 보면 볼수록 왠지 마음이 편하단 말이야. 에이, 기분은 좀 그렇지만, 사부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내가 참고 말지 뭐." 다크는 다시금 시선을 여관 쪽으로 옮겨 아르티엔을 멍하게 훔쳐봤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 서 그곳에는 아르티엔은 사라지고 유백과의 추억만이 남아있었다. 다크의 눈은 조금씩 젖어 들었다. 저렇게 인자한 수부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했다니…. "사부님 iª???≡ ┐δ?¡??┴???┐Σ." 다크의 말을 엿듣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너무나도 사 랑하는 아들이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를 흘린 듯 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달은 그 순간, 아르티스 어르신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만약 상대가 아르티엔만 아니었다면 갈가릴 찢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대가 아버지 였다. 그것도 도저히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존재인…. '어떻게 이럴수가 있다는 말인가? 아무도 호비트의 지능이 드래곤에 비해 떨어진다고 하지 만 겉모습의 조그마한 변화가 이렇게까지 영향을 주다니……. 아버지가 깨물어주고 싶을 정 도로 귀여운 모습일 때는 퉁명스럽게 대하더니 저 밥맛 떨어지는 모습으로 변하자 아예 정 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아르티어스는 극심한 위기감을 느꼈다. 더 이상 가만히 놔뒀다가는 사랑하는 아들을 저 심 술궂은 아버지에게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저 둘을 떼어놔야만 했다. 아르티어스는 다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 리기 위해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애야, 뭐하고 있냐?" 다크는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렸다. 아르티어스가 밑에서 있는 것을 보고 그 녀는 가볍게 몸을 날렸다. 사뿐히 땅에 내려선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는 아빠는 여기서 뭐 해요?" "네가 보고 싶어서 나왔지. 나하고 산책이라도 할래? 너하고 산책해 본 게 언제인지 이제 는 기억도 안 난다. 제발, 응?" "산책하고 싶으면 혼자 하시라니까요. 저는 바쁘다구요." "바쁘다고? 으으으iªiª." 매몰차게 자신의 제의를 거절하는 다크를 보자, 아르디어스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수가iªiª. 잠시 안타까운 눈으로 다크를 바라보던 아르티어스는 생각해뒀던 회 심의 카드를 내밀었다. "참, 바쁘겠구나. 이제는 코린트에 가야 할테니까 말이다. 안 그래?" "코린트요? 코린트에는 왜요?" "아, 그거야 너를 잡아뒀던 놈들이 코린트 놈들이었잤아. 불같은 네 성격에 그 얄미운 놈 들을 그냥 놔두지는 않겠지? 안 그래?" "글쎄요……."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미적거리듯 대답하자, 선수를 치며 재빨리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네가 코린트에 갈거니까 그 애들한테 떠날 준비를 하라고 일러뒀다. 그러니까 너도 빨리 준비하거라. 그러고 보니 너하고 예전에 함께 여행하던 기억이 나는구나. 그때는 둘만 단란 하게 다녀서 참 즐거웠는데, 이제는 일행이 많아서 그런지 영 기분이 안 나지 안니? 그러지 말고 우리 둘이서만 갈까? 코린트 따위야 나 혼자서도 충분하지." "그럴 필요……." 다크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눈치챈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빨리 가자. 모두 준비를 해놨을테니까 너도 준비하거라."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무슨 말으 꺼내기도 전에 총총히 여관으로 돌아가 버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다크는 투덜거리면서 아르티어스를 따라 여관으로 들어갔다. 아르디어스는 다크가 곧바로 자신을 뒤따라 들어오자 기겁을 했다. 설마 곧바로 따라 들어올거라고는 예상을 못했던 것 이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날까봐 식탁에 앉아서 계란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한담을 나누고 있던 팔시온 일행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봐! 준비는 끝났어? 이 새끼는 봐라.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한 게 언젠데 계란 마사지나 하고 앉아 있다니. 교육을 좀더 시키든가 해야지, 원. 역시 호비트란 족속들은 줘 패야 말을 듣는다니까." 아르티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팔시온 일행은 화들짝 놀라 일어서며 말했다. 처음에 는 아르티어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곧 은근히 자신들을 향해 흔들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주먹을 보고 본능적으로 그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 다. "옛, 준비는 벌써 끝났습니다." 팔시온 일행이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가져온 짐이 없으니 준비할 것도 없었 기 때문이다. 그들이 케락스로 공간이동한 것은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다크 일행은 케락스 시내로 들 어가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 많은 인파들이 마차에 짐을 싣고, 혹은 짐을 이고 지고 이 동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까지 섞여서 아비규환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인파에 당황한 아르티어스를 보며 다크가 이죽거렸다. "아빠, 혹시 잘못 온거 아니에요?" 며칠 전에 다크를 찾기 위해 케락스로 공간 이동한 적이 있었던 아르티어스는 그때의 좌표 를 거억하고 있었고, 바로 그리로 공간이동을 한 것이다.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때와 너무나도 상황이 다르자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좌표를 잘못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왜냐하면 크린트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 었던 것이다. 이 수많은 인파들이 피난이라도 가는 듯 크고 작은 짐을 허리에 지거나 들고 부대끼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전쟁터가 바로 옆이라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품속에서 책자를 꺼내어 찾아봤다. 하지만 그 곳에 기록된 좌표는 자 신이 알고있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이상하네. 여기가 분명한데?"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팔시온이 겁에 질려 밀려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붙들 고 말을 건넸다. "무슨 일입니까?" 그 사람은 팔을 뿌리치려다가 떡이 되어 있는 팔시온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는 순간 순순히 말해주었다. 그는 팔시온과 오랫동안 대화하고 싶지 않은지 빠른 어조로 말했다. "당신들도 살고 싶으면 빨리 도망가쇼." 대충 말하고 도망치려는 그를 팔시온은 우악스럽게 잡고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상대의 대 답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전쟁이라도 터졌습니까? 아니면 몬스터라도 쳐들어온답니까?" "케락스 시가 박살난다고 해요." "케락스시가 박살난다구요? 아니, 갑자기 왜 케락스 시가 파괴된다는 말입니까? 코린트의 기사단은 대륙 최강이라고 들었는데, 누가 감히 케락스를 파괴한다는 말입니까?" 그 사람은 말을 하고 있을 시간도 아깝다는 듯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빨리 떠들었다. "사악한 드래곤이 케락스 시를 박살내려고 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소. 어제 밤새도 록 중요시설을 시외로 대피시키는 것을 보면 뻔하지 않소? 병사들이 시내에 쫙 깔려서 헛소 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공개처형까지 하고 있지만, 대낮에도 수많은 짐을 시외로 실어나르고 있는 것을 보면 뻔한 일이오. 자, 그만 나도 가봐야겠으니 놔주시오." 사내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팔시온의 팔을 뿌리치며 서둘러서 피난행렬에 합류해버렸다. 팔시온은 사내의 말뜻을 이해하느라 잠시 멍한 상태였지만, 곧이서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상대의 말은 팔시온이 알아듣기 힘들만큼 빠른 속도롤 쏟아져 나왔다. "큰일났는데요. 케락스 시내에는 다음에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르신." "왜?" "엄청 사악한 드래곤이 케락스 시를 가루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답니다. 지금 들어가 봐야 좋은 꼴 못 볼 것 같은데요." "뭐? 드래곤이라고?" 아르티어스가 시큰둥하게 물어오자, 팔시온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사악한 드래곤이 날아온 다는 시내로 들어가기는 싫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도 드래곤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가 얼마 나 강한 드래곤인지 팔시온은 알지 못했다. 아르티어스가 현신한 모습을 본적도 없었고, 오 랜 기간 인간의 모습을 한 아르티어스와 어울리다 보니 그가 절대자인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가끔 잊어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사악한 드래곤이 아르티어스보다 강한 드래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답은 뻔하지 않은가? 살고 싶으면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어르신, 미쳐 날뛰는 드래곤이랍니다. 자고로 미친놈한테는 약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덩치도 엄청 클 뿐 아니라 성질도 더럽게 생겼다고 하던데요. 케락스 시를 박살낸다 고 호언장담하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히 강한 드래곤인 모양이에요. 빨리 도망가죠, 예." 아르티어스는 궁금하다느 듯 중얼거렸다. "대체 어떤 자식인데 케락스를 부수겠다고 하는 거지? 나 같은 놈이 또 있었나?" 그것을 보며 아르티엔이 한심스럽다는 듯 혀를 치며 말했다. "쯧쯧, 멍청한 녀석. 이런 것도 아들이라고 두었다니. 바로 너를 말하는 거잖아." "예? 덩치 크고 성질 더럽게 생기고 미쳐 날뛰는 드래곤이라잖아요. 나같이 몸매 좋고 , 성질 좋고, 비교적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드래곤과 비교하시다니요. 에이! 어떤 자식인 지 모르겠지만, 하는 꼴을 들어보니 우리 드래곤 종족의 수치야 ,수치." 아르티엔은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감싸안으며 중얼거렸다. "아이구, 머리야. 네가 얼마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벌써 까먹은게냐?"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에요?" 맹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아르티어스. 하지만 곧이어 뭔가 떠오른 듯 분노한 표정으로 외쳤 다. "아니, 그럼 이 자식들이 잘못을 반성할 생각은 않고 튀고 있는 겁니까?" 아르티어스는 피난 행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에 거품을 물고 외쳤다. "이런, 쳐 죽일 놈들! 어르신이 훈계를 하려온다는 말을 들었으면, 푸짐한 선물을 준비해 서 아부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내빼고있다니!" 다크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아르티어스의 푼수 짓을 보고 있다가 피난 행렬 쪽으로 가려고 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빠, 빨리 가자구요.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배 안 고파요?" 한창 분노에 몸을 떨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자신의 손을 꼭 잡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함박만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래, 그래. 가자, 가. 그건 그렇고 여기에 헬파이어 한방만 먹이고 가면 안될까?" 그 말에 아르티엔이 기가 막힌다는 듯 아르티어스의 뒤통수를 갈기며 외쳤다. "이 자식은 언제 철들려고 이래? 이러니까 너보고 미친 드래곤이라고 그러잖앗!" "아야야야! 뭐라구여? 그러니까 미친……." 그제야 아르티어스는 팔시온이 하던 얘기가 전체적으로 떠올랐다. 아르티어스는 손가락을 까딱해 팔시온을 불러들이며 말했다. "야! 너 이리 와봐." "예?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네 놈 말이다." 엉거주춤 다가오는 팔시온의 멱살을 그러쥔 후 아르티어스는 으르렁거렸다. "뭐? 덩치 크고, 성질 더럽게 생기고, 미쳐 날뛰는 드래곤이라고?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이데? 응?" 그 말에 팔시온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설마하니 아까 자신이 뻥튀겨서 얘기만 대상이 아르티어스일 줄이야…….그 순간 모든 것을 체념하는 팔시온이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을 수가. 그래, 평탄했던 삶에 저 성질 더러운 드래곤을 만난 것 그 자체가 신의 저주였어. 이렇게 허구한 날 쥐어맞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팔시온의 두 눈에 닭똥같은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나요. Chapter 6 나도 여자라구요!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 콰당 열리면서 기사 한 명이 새파래진 안색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저, 전하, 큰일났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수많은 서류뭉치들을 들여다보다가 귀찮다는 듯 외 쳤다. 철수작업이 진행된 이래 계속되는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그의 신경은 매우 날카로워 져 있었던 것이다. "또, 뭐야?" "크, 큰일났사옵니다. 일전에 찾아왔던 그 드래곤이 다시 왔사옵니다." "뭣이?" "예전에 동쪽 별궁을 초토화시켰던 그 드래곤 있지 않사옵니까? 그 드래곤이 치레아 대공 과 함께 왔사옵니다." "그래, 지금 그들을 어디로 모셨는가?" "예, 제 1귀빈관으로 모셨사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경비병들이 실례를 저지른 모양입니 다만, 그들의 보고를 받고 출동한 근위대 기사들이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것이 운이 좋았사옵니다." 황궁 후원에 있는 제1 귀빈관은 여타 다른 귀빈실들과 다릴 각 국의 황제를 접대하기 위해 건설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건설 후 30여년이 흘렸지만, 겨우 10여명이 들렀 다 갔을 정도로 최고의 귀빈만을 모시는 곳이 바로 거기였다. "그런가? 최대한 예의를 다해서 극진히 모시라고 지시하라." "옛!" 이때 옆에서 레티안이 조언을 건넸다. "전하, 제임스 각하에게 접대를 맡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왜?" "제임스 각하는 치레아 대공이 이곳에 있을 때 잘 보살펴주지 않았사옵니까/ 제가 보기에 는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상당히 노력하시는 것 같았사옵니다. 그렇기에 그분이 적임자 라고 생각하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빨리 그에게 전하라." "예, 전하." 한참 철수 작업을 진두지휘하던 제임스는 부하의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 "뭐라고? 그녀가 왔다고?" "예, 각하. 로체스터 전하께옵서 각하께 그들의 접대를 명하셨사옵니다." "지금 어디에 계시냐?" "제 1귀빈실에 모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알겠다. 그녀가, 그녀가 왔단 말이지?" 부하의 보고를 급히 달려가는 제임스의 마음은 마냥 설레기만 했다. 그는 이런 설레임이, 자신이 이상적인 기사로서 존경해 마지않는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기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똑똑  . 나지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밖에 서 있는 시종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치레아 대공 전하를 뵙기를 청하시옵니다." "들라고 해라." 다크가 대답하자, 조용히 문이 열리며 제임스가 실내로 들어섰다. 실내에는 아르티어스와 다크, 그리고 또 다른 특이한 모습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서 쪽대륙에서 온 듯, 피부색이 색다른 이민족이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런 이민족에게까지 신 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실내로 들어선 제임스의 시선은 곧장 다크에게로 가서 멈추었다. 그는 정중하게 인가를 건넸다. "안녕하셨사옵니까, 대공 전하." 이곳에서 포로 생활을 할 때에 제임스가 상당히 깎듯이 대접해 주었기에 다크는 그에게 비 교적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크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짓궂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안녕해. 그런데 전에 만났을 때와는 사정이 많이 바뀐 것 같지?" 제임스도 같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상큼한 그녀의 미소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 끼면서. "그렇군요." 제임스는 곧장 옆에 앉아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위대하신 분의 뵙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 다크가 뭐라고 잘못을 지적하기도 전에 아르티어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봐, 내가 아니라 이분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지. 이분이 내 아버지시거든." 아르티어스의 말에 제임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곧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추 며 정중하게 아르티엔에게 인사했다. "몰라 뵈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이렇듯 위대하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코린트의 제 1근위대를 맡고 있는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라고 합니다." 아르티엔은 제임스를 자세히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아주 젊은 것 같은데 대단한 호비트로구먼. 내 제법 오랜 세월을 살았다고 자부하 지만 이 정도 인물을 만난 것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 "과찬이십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아르티엔이 제임스를 너무 추켜세우는 것 같자 심통이 난 아르티어스가 이죽거렸다. "흥! 저 정도가 뭐 대단하다고 그래요. 저런 녀석을 마차에 하나 가득 실어와도 내 아들만 하겠습니까?" "쯧쯧쯧!"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말이 못마땅한지 혀를 찬 다음, 제임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 다.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아직 철딱서니가 없어서 그래." "아니, 저 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치레아 대공 전화와 견주겠습니까? 저분 은 저희 기사들의 이상형이기에, 저도 대공 전하와 같은 위대한 무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허허, 참 겸손한 젊은이로군." 아르티엔의 감탄에 이번에는 아르티어스도 토를 달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추켜세우는 말이었으니까. "식사시간이 되었는데 식사 준비를 시킬까요? 아니면 그 전에 간단히 시원하게 마실 거라 도 준비할까요?" "오호, 좋아 좋아. 우선 포도주를 한잔하기로 하지." "예, 당장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다크와 드래곤 두 마리가 제임스와 우아한 만남을 가지고 있을 때, 팔시온 일행은 옆방에 서 열심히 얼굴에 계란을 문지르고 있었다. 팔시온은 계란을 열심히 얼굴에 문지르다가 벽 에다 신경질적으로 던져 버리며 씩씩거렸다. "젠장! 열심히 문질러서 이제 겨우 멍이 옅어지나 했더니, 팬 테 또 패냐? 전보다 더 심해 졌잖아!" 그런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미디어가 가스톤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미카엘 못 봤어?" "아아, 밖에 나갔어." "밖에는 왜?" "여기 도착한 다음에 나보고 혹시 마법으로 멍 자국을 없앨 수 있는지 묻잖아." "넌 치료 마법은 못 배웠잖아." "그렇지.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말해줬거든. 내가 그거 알면 이러고 다니겠냐고 말이야. 그 랬더니 여기 신관을 불러줄 수 있는지 알아보러 갔어." 잠시 후 미카엘이 만면에 희색을 띠고 돌아와서는 말했다. "으하하하. 역시 다크와 함께 다니면 편하단 말이야. 한마디만 하면 제까닥 되잖아." 그 말에 팔시온이 발끈해서 외쳤다. "뭐야? 두 번만 편했다가는 사람 잡겠다. 이제는 다크고 나발이고 징그럽다, 징그러워. 다 크 따라다녀서 좋았던 일 있어?" 그 말에 가스톤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너희들은 다크 덕분에 무술이라도 배웠잖아.그녀가 아니었다면 너희들이 언감생심 그래듀에이트를 꿈이라도 꿀 수 있었을 것 같아? 지금은 너희들 모두 당당한 그래튜에이트 아니냐." 그 말에 팔시온은 더욱 열 받는다는 듯 외쳤다. "웃기지마. 그래듀에이트? 말이 좋아서 그래듀에이트지,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뭐 변한 거 라도 있어?" "물론 있지. 대륙을 떠돌던 말단 용병에서 이제는 타이탄까지 지급 받은 치레아 기사단의 품위 있는 기사잖아." "기사? 허구한 날 쥐어터지는 게 기사냐? 처음에 그 녀석 만났을 때, 그때 알아봤어야 했 어. 멍청하게 그때 눈치 못 채고 함께 다니다가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냐? 그놈의 드래곤 하 트인지 뭔지 찾으러 다닌다고 목숨걸고 블루 드래곤까지 만나러 쫓아갔었지. 그뿐이냐? 토 지에르에게 납치 당해서 몇날 며칠을 고문당했지. 그리고 이번에는 크루마에도 잡혀가서 죽 을 고생을 했는데  뭐? 품위 있는 기사? 웃기고 있어. 내 얼굴을 보고 그딴 소리가 나오 냐?" 확실히 팔시온의 얼굴은 처참했다. 전날 밤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떡이 된 것도 모자라서, 미친 드래곤이라는 말 한마디로 인해 오크조차도 고개를 돌릴 정도로 비참하게 변해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다크를 원망하기는 좀 그렇잖아. 다크는 그래도 우리를 얼마나 잘 대해줬냐?" "젠장! 내가 다크 때문에 그래? 그 망할 드래곤 때문이잖아. 그런데 왜 우리가 드래곤하고 함께 다니다가 이 꼴을 당해야 하는 거야?" "하긴……. 그 말이 맞아. 그런데, 생각하면 참 신기하지? 남들은 평생을 가도 구경 한번 하기 힘들다는 드래곤하고 우리는 맨날 같이 부대끼며 살고 있으니까 말이야." 똑똑똑……. 방금 전까지 주고받던 말이 있었기에 모두들 당황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혹시나 밖 에 있는 사람이 아르티어스라면? 하지만 그들은 곧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무언중 의견일치 를 봤다. 결코 노크 따위를 할 아르티어스가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누, 누구요." 그러자 밖에서 상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하신 신관이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미카엘이 다급히 문을 열어제쳤다. 그 곳에 시녀와 함께 서있는 신관의 모습이 보 였다. 너무나도 젊고 잘생긴 신관을 미심쩍다는 듯 바라보며 미카엘이 물었다. "혹시 수련생은 아니시죠?" "허헛, 안심하시지요. 저는 아레스 신전의 대신관인 브레드 에스타리아라고 합니다. 제가 너무 젊어 보여서 불안하신 모양인데, 원래 실력 있는 신관일수로 뛰어나 신성 마법으로 젊 음을 유지하여 신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자, 이쪽으로……." "예, 그러죠. 얼굴이 상당히 많이 다치셨네요. 그럼 곧 바로 치료를 ……." 신관은 곧바로 미카엘을 치료하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내로 들어서자 그의 눈이 휘둥 그래졌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실내에 있는 사람들 주에서 그래도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던 것이다. 특히나 저쪽에서 계란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은 보기조차 안타 까울 정도였다. 신관은 네 사람 중에서 상태가 가장 안 좋다고 생각되는 떡대 좋은 사내에 게로 다가가서 말했다. "혹시, 몸에도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팔시온이 연신 계란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신관은 말했다. "그렇다면 옷을 좀 벗으셔야겠는데요. 전체적으로 얼마나 심한 상처를 입었는지 확실하게 알아야 어떻게 치료를 하는 것이 좋을지 판단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포션을 사용 하려면 아무래도 벗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팔시온이 머뭇거리자 신관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했다. "허허, 다 같은 남자들 아닙니까? 그리고 저분들도 상태가 안 좋으실 것 같은데, 빨리 치 료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옆에서 미디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나는 여자라구요." 신관은 놀랍다는 듯 그녀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울퉁불퉁 잘 단련된 근육질로 이루어진 육 체 탓도 있었지만, 얼굴이 워낙 심하게 망가져 있어 차마 여자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 다. "죄송합니다. 너무 얼굴을 심하게 다치셔서 설마……." 신관은 황급히 말을 멈추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렇다면 무녀를 한 명 불러 드리겠습니다. 옆방에서 따로 치료를 받으시는 것이 졸겠군 요." 미디아는 옆방으로 가면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 내가 미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에는 다들 봐줄 만한 얼굴이라고 그랬는데……. 지 금 내 꼴이 이게 뭐야. 흑흑." 신관은 미디아가 나간 후 한숨을 푹 내쉰 다음 팔시온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팔시온이 옷 을 벗자, 온 몸의 상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검상를 비롯해 수많은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지만, 신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은 그런 과거의 상처가 아니었다. 그의 몸은 온통 푸르죽죽한 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허어, 놀랍군." 신관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말했다. "과연 기사님들의 몸은 다르신 것 같군요. 보통 사람이 이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면 벌써 관을 짜야 할겁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무자비한 짓을 한 겁니까? 아주 교묘하게도 상대 는 기사님이 견딜 수 있는 체력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합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 군요." 옆에서 듣고 있던 가스톤과 미카엘은 새삼 진저리를 치며 그 처절했던 밤을 떠올렸다. 하지만 특히나 아르티어스에게 가장 많은 교육을 받았던 팔시온은 뿌드득 이를 갈았다. 이 래도 맞고 저래도 맞을 바에는 차라리 속 시원하게 개겨나 보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나도 과거에는 쾌남 팔시온으로 불린 사람이라구. 그런데, 내가 왜 허구한 날 그딴 도마 뱀 눈치까지 보면서 맞고 살아야 하냐 이거야. 나도 이제 더 이상은 못 참아. 두고 보자구. 사나이가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과연 제 1 귀빈관의 대접은 특별한 것이었다. 식탁 옆에서 다섯 명의 악사들이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거대한 탁자 위에는 수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놓여있었다. 평상시에 상류층의 물을 먹은 듯 행동해왔던 미카엘 마저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진귀한 음식들이었 다. 그리고 각자의 앞에 놓여 있는 식기들마저도 모두 금은 세공품들로서, 드워프가 세공한 듯 예술품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제임스가 모두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 한 뒤, 정중하게 말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제임스는 한군데에 모여 서 있던 시종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 자 그들은 일제히 움직여 식사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귀빈들이 손짓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가리키면 시종들은 그 음식을 작은 접시에 담아서 가져왔다. 그 작은 접시는 각자의 앞에 놓여 있던 순금 접시 위에 놓여졌다. 이때 한쪽 귀퉁이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 관의 치료를 받아서 얼굴의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팔시온이었다. 그는 입안 가득 음식을 우 물거리며 말했다. "젠장! 이거 감질나서 먹겠나. 가져오려면 좀 많이나 갖다주지. 한 입 털어 넣으면 없잖아. 안 그래, 미카엘?" 그 말에 미카엘은 들은 척도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젠장! 치료나 끝난 후에 먹으러 오라고 하지. 하필이면 내가 치료받을 차례가 되니까 밥 먹으러 오래." 팔시온은 미카엘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자 의아하 게 생각했다. 평상시에는 귀족 물을 먹은 듯 갖은 품을 다 잡던 그였다. 미카엘에게 지금처 럼 자신을 과시할 좋은 기회가 있겠는가? 마치 오랫동안 이런 생활을 했던 것처럼 우아한 품을 잡으며 음식 먹을 것이고, 또 자신들 에게 이런 것은 이렇게 먹는 거라고 으스대고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저렇게 주위를 한 번씩 힐끔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까? 이리저리 궁리해본 팔시온은 한 가지 결론에 도 달할 수 있었다. " 야, 미카엘!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귀족 물먹었다고 거짓말한 게 들통나서 그러는 거야? 짜식! 그렇게 의기소침해 있지 말고 나처럼 편하게 먹어. 뭐, 우리가 언제 주변 신경 쓰고 먹었냐? 그냥 입안에 퍽퍽 집어넣으면 되는 거지 뭐." 팔시온의 말을 들은 미디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래. 귀족처럼 먹을 줄 모른다고 기죽을 필요 없어. 넌 그렇게 안 먹어도 멋있잖 아. 팔시온을 봐, 포크만 쓰고도 멋있게 먹고 있잖아." 미디아의 칭찬에 입 안에 음식을 연신 퍼 넣고 있던 팔시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음식은 복스럽게 먹어야 한데." 팔시온의 말에 미카엘은 인상을 벅벅 쓰며 말했다. "이 자식들이, 닥치고 밥이나 처먹어." 이때, 시종이 들어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곧이어 식당 문이 열리며 로체스터 공작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시종 한 명이 고풍스러 운 문양이 새겨진 술병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로체스터 공작은 아르티엔을 행해 정중히 인사를 올린 후 말했다. 이미 제임스에게서 아르 티엔의 존재에 대해 보고를 받았기에 그는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게 위대하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술은 황제 폐하께서 위대하신 분께서 왕림하셨다는 것을 아시고 특별히 하사하신 것입니다. 제가 직접 따라 드리는 영광을 누려 도 될는지요?" 아르티엔은 포도주 병을 힐끗 본 후 경악했다. "이, 이것은 대륙에 몇 병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하는 아그리파 1세가 아닌가?" 로체스터 공작은 상대의 박식함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코린트 역사상 가장 완벽한 포도주라는 아르리파 1서가 맞습니다. 이 술은 돈을 아무 리 많이 준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황실에만 내려오는 진품이지요. 아마 현재 남아 있는 술 은 단 세병밖에 없을 겁니다. 나머지는 전에 크린티아 시와 함께 파괴되었으니까요." 오랫동안 레어에 있었기에 인간 세상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코린티아 시가 왜 파괴됐지? 혹시 너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도시 파괴자가 아니라구요. 코린디아 시는 몇 년 전에 크루마에서 유성 소환 마법으로 박살내버렸죠." 아르티어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한 후 로체스터 공작에게 시선을 돌리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 다. "이봐, 유성 소환 따위로 도시를 파괴한 것을 보면 크루마는 정말 나쁜 놈들이지? 유성소 환은 금지된 마법인데 말이야."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없는 물음에 로체스터 공작은 노회하게 대처했다. "허허허, 어쩔 수가 없죠. 알고도 당한 저희들 잘못이라고 봐야죠."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엘프리안이 파괴된 걸 아느냐?" "예." "내가 자네를 대신해서 원수를 갚아줬는데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그거 한 병 더 얻을 수 없을까? 그때 힘을 너무 썼더니 목이 컬컬해서 말이지." "예?" 로체스터 공작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재빨리 표정관리를 하며 말했다. "위대하신 분의 부탁이신데 당연히 들어 드려야죠. 더욱이 저희들의 원수까지 갚아주셨는 데……." 로체스터 공작은 뒤에 서 있는 시종에게 나직하게 지시했다. "이거 한 병 더 가져와." 거기까지 말한 후 로체스터 공작은 아르티엔을 힐끔 본 후 명령을 수정했다. "두 분이 오셨는데 한 분께만 드리면 예의가 아니지. 내가 나중에 폐하께 말씀드릴 테니 두 병 다 가져오너라." "옛, 전하." 로체스터 공작의 말을 들은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는 좋아서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Chapter 7. 눈물의 부자 상봉 집무실에 들어오는 로체스터 공작의 안색이 밝은 것을 보고 레티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셨던 일은 잘 되신 모양이옵니다, 전하." "응, 모든 일이 잘 해결됐어.이제 수도를 옮길 필요는 없으니 철수작업을 중지하라고 전하 게." "축하드리옵니다, 전하." "허허헛, 다 경의 덕분이야. 경의 아그라파 1세를 뇌물로 건네자는 말이 제대로 먹혀 들어 갔어." "과찬이시옵니다. 그럼, 아그리파 1세 두 상자가 케락스 시를 구한 셈이군요. 아무리 귀한 포도주라고 하지만 수도가 파괴되는 것에 비할 수 있겠사옵니까?" 레티안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으하하핫! 두 상자가 아니라 단 세병일세. 왠지 상자 채로 준다고 하면 가치가 떨어질 것 같아서 전 대륙에 단 세병만 남아있다고 했거든. 그랬더니 그 드래곤이 은근히 협박을 하며 한 병을 더 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아주 크게 인심 쓰는 척 하면서 한 병 더 줬지. 그랬더니 입이 쭉 찢어지더구먼." 레티안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역시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대단하시옵니다." 이때, 가벼운 노크소리와 함께 경비병이 들어가며 말했다.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고 하게." "옛." 곧이어 제임스가 들어왔다. 로체스터 공작은 미소 띤 얼굴로 제임스의 공을 치하했다. "역시 처음에 경을 보내길 잘 했어. 거물급 드래곤이 왔다는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으면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거든. 그리고 그 드래곤이 포도주를 아주 좋아한다는 정보를 빨리 보 내줬기에 대책을 세울 수 있었어. 하하핫, 이제 모든 것이 잘된 것 같군. 적당히 달래서 보 내면 끝이거든."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곧이어 제임스는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드래곤이 베크렐 드 드루이드 후작을 잡아오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뭐? 베크렐? 그게 누구지?" 옆에서 레티안이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그녀는 코린트 제국의 귀족 족보를 죄다 외우 고 있었던 것이다. "예, 케락스에서 100킬로쯤 남쪽으로 가다 보면 드루이드라는 지방이 있사옵니다. 그곳을 다스리는 영주이온데, 그이 아버지 대부터 궁정에서 이렇다 할 직위를 얻지 못했기에 전하 께서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이옵니다." "그런가? 그런데, 그를 왜?" "치레아 대공이 탈출했을 때 그의 딸과 관계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딸은 그녀를 아 버지의 성 노리개로 선물할 생각을 했던 모양이옵니다." "그래? 하지만, 그 정도는 웬만한 놈들은 다하는데, 그 죄를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 가? 그것도 귀족을 말이야." "하지만 여기서 드래곤의 제의를 거절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드루이드 후작은 약간 도를 지나치다고 할 수 있사옵니다. 너무 많은 세금을 농노들 에게서 거둬들이는 바람에, 그들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하옵니다." "글세……. 하지만, 지방 영주가 폐하께 30퍼센트의 세금만 제대로 납부한다면 그가 얼마 를 거둬 들이든지 상관학수는 없지 않나? 폐하의 몫을 빼돌렸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말 이야." "그렇지만, 드루이드는 농노들의 영지 이탈이 너무 심하옵니다. 거의 태반에 가까운 농노들 이 탈출했고, 그 농노들을 잡아들인다고 인근의 군대까지 동원되었을 정도였사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직도 잡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그에게 영지를 맡긴다면 결국에는 단 한 명의 농노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 점을 생각하시옵소서,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그 말도 일리는 있군. 그러니까 경의 말은 영지의 관리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쪽으 로 밀어붙이자는 게군." "예, 전하." "좋아. 폐하께는 내가 말하지." 로체스터 공작은 결심을 한 듯 제임스를 향해 명령했다. "그 놈을 당장 잡아들이게." "예, 전하." 밖으로 나가려던 제임스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금 돌아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전하. 혹시 치레아 대공의 일행 중에 섞여 있는 기사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셨사옵 니까?" "뭐? 글쎄……. 그 드래곤들한테 신경 쓴다고 미처 거기까진 여유가 없었네. 뭐 특이한 점 이라도 있었나?" "그게 말이옵니다. 저…제가 잘못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 중에 미카엘이 끼어 있는 것 같았사옵니다." "뭣? 미카엘이." "예, 전하. 식사 중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 도……."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수행이 고되다고 도망친 놈이 치레와 대공 같은 거물급을 수행하 는 기사가 되어 있다니, 말이 안되지 않나?" "예전의 미카엘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제가 잘못 본 건지도 모르겠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필요 이상으로 딱딱한 어조로 힐책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경은 치레아 대공 일행을 잘 영접해서 보낼 궁리나 하게." "옛, 전하." 제임스가 나가고 난 후, 로체스터 공작은 레티안에게 말했다. "잠시 혼자 생각할게 있네. 경은 자리를 좀 비껴주겠나?" "예? 예. 전하." 레티안이 나간 후 로체스터 공작은 잠시 창 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에잉, 못난 놈 같으니라구.' 옛일을 회상하는지, 로체스터 공작의 두 눈이 아련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의 방해로 인해 리사의 사랑을 얻지 못하자, 울분을 달래기 위해 미친 듯이 무술 수련에만 전념했다. 그러다가, 메를리나라는 미모의 여인과 뒤늦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몄다. 자신의 마음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리사라는 존재를 잊는데 그만큼 많은 시간이 필 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달콤한 메를리나와의 사랑도 단 5년으로 막을 내려야만 했다. 몸이 약했던 그녀는 난산을 견디지 못하고 첫아이를 낳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로체스터 공작은 태어난 아기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아주 잘 생 간 사내아기였는데 오히려 그 점이 로체스터 공작의 속을 뒤집어놨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 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사랑스러웠던 메를리나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로체스터 공작은 아들로 인해 부인이 죽은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어 자연히 쌀 쌀맞게 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전통적인 무가인 로체스터 가문의 적자로 태어났으면서도, 가문의 검술을 제대 로 교육받지 못했다. 로체스터 공작이 어쩌다 한번씩 직접 교육을 시킬 때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짜증 섞인 꾸중으로 교육을 끝맺곤 했다. 그래서 아이는 대부분의 교육을 로체스터 공작의 부하들에게 받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가 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무술의 기초를 배워야 할 어린 시절을 어영부영 태평스럽게 보내 버렸던 곳이다. 그 아이가 청년기에 들어섰을 때, 로체스터 공작은 그제야 가문의 검술을 전수해 줘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는지 조금 강도 높은 수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수련은 6개월을 넘 기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아들의 행방이 묘연했던 것이다. "못난 녀석, 그까짓 수련을 못 견디고 가출을 하다니……. 휴! 그나저나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내가 죽어서 그녀의 얼굴을 어찌 볼지 걱정이군. 그러고 보니, 메를리나의 기일도 얼마 남지 않았군." 로체스터 공작은 잠시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급히 집무실을 나섰다. 처음에는 울적한 마음 에 산책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로체스터 공작의 발길은 어느덧 제 1귀빈관으로 향하고 있었 다. "치레아 대공을 수행하고 온 기사들은 어디에 묵고 있는가?" 로체스터 공작의 질문을 받은 시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대답했다. "예, 저 앞방이옵니다,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막상 방문 앞에 섰지만 망설이기만 할 뿐,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다. 미카엘은 걱정스럽다는 듯 신관에게 물었다. "저, 흉터 없이 깔끔하게 될까요?" 신관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어진 상처가 없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약간 시간을 들여 천천히 치 료하면 아주 깨끗하게 나을 수 있으니까요." 그때, 낮은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 그 소리에 미카엘이 신경질 난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또 뭐야? 왜 내가 치료받으려고만 하면 오는 거야?" 문이 쓱 열리면서 로체스터 공작이 들어서자, 팔시온과 가스톤은 화들짝 일어서서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적국이라고 하지만, 상대는 공작이라는 지고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에 반해 미카엘은 두 눈이 왕방울만 해지더니, 신관의 허리를 잡고 몸을 번쩍 들어다 자신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인사를 건네는 신관에게 손짓을 해 보이며 로체스터 공작이 말 했다. '자네가 여기는 웬일인가? 환자가 있었나?" '예, 전하. 여기 계신 분들이 아무래도 몸 상태가 안 좋다고 치료를 요청하셔서 말이옵니 다." "그런가?" 로체스터 공작이 휙 둘러보니 수행원들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어디서 패싸움이라도 벌 였는지, 온 얼굴이 멍투성이였던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으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다크를 수행하는 기사들이 이토록 심하게 두들겨 맞을 이유가 없고, 또 맞았다고 하더라도 마법에 뛰어나다는 드래곤이 둘씩이나 있는데 저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치레아 대공은 보기보다 성격이 과격한 모양이군.' 자신의 아들을 찾을 수 없었던 로체스터 공작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미안하네. 방을 잘못 들어온 모양이군. 편히들 쉬게나." 그런 다음 그가 방을 막 나서려고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전하. 대공전하께서는 왼쪽 두 번째 방에 계시옵니다." 그리고 신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안녕히 가시옵소서, 전하." 그런 다음 곧이어 신관의 짜증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보시오, 이거 좀 놔주시겠소? 그래야 치료를 할게 아닙니까?" 무슨 말인가 하여 로체스터 공작이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였다. 신관의 허리를 잡아 자신 의 앞을 가리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로체스터 공작을 엿보고 있던 미카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헉!" 미카엘이 숨넘어가는 듯 괴상한 소리를 내지를 때, 로체스터 공작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감추기 어려운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카엘, 진짜 너로구나." 미카엘을 바라보는 로체스터 공작의 눈은 놀라움으로 부릅떠졌다. 오랜만에 만난 미카엘을 바라보는 로체스터 공작의 심경은 복잡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다시 보는 아들로 인해 반가운 마음이 앞섰지만, 곧이어 엉망이 된 얼굴을 보며 점차 짜증으로 바뀌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감정도 잠시,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는 아들의 상체에 나있는 얼룩진 멍자국을 보며 그의 마음은 안쓰러움으로 채워지기 시작 했다. "그래, 몸은 좀 괜찮으냐?" 로체스터 공작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미카엘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흐느끼기 시작했 다. 그런 부자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팔시온과 가스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귀족인 척 하는 줄만 알았는데, 미카엘이 코린트 최고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로체스터 공작의 아들일 줄이야……. 속이 깊은 가스톤은 분위기를 살피다가 팔시온과 신관의 손을 이끌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 아버지." 미카엘이 울먹이자, 로체스터 공작은 가만히 아들의 멀리를 쓰다듬어 주며 부드럽게 말했 다. "그래, 고생이 심했나 보구나." "아,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래, 네가 몸 성히 돌아와준 것만으로도 아레스 신께 감사하단다." 생각 외로 부드러운 아버지의 반응에 감히 얼굴을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하던 미카엘은 고 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두 눈은 차가웠던 과거와는 달리 슬픔 으로 젖어있었다. 아버지의 두 눈을 바라본 미카엘의 가슴은 더욱 미어지는 듯했다. 과거 자신이 떠날 때의 그 자신감 가득한 모습과는 달리, 아버지는 세월에 퇴색된 듯 상당히 지쳐 보였다. 차라리 어렸을 때처럼 엄하면서도 차가웠던 그때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미카엘이었다. "많이 늙으셨군요, 아버지." "허허헛, 나도 나이는 속일수가 없구나. 이제는 미래보다는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이 많아 진 것을 보면 말이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못난 자식이 근심만 끼쳐 드렸습니다." "괜찮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네 어머니가 무척 기뻐할 테니까 말이다." "예?"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네 어머니의 묘지에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 방문이 쾅 열리며 팔시온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다크! 야, 굉장한 소식이 들어왔어." 그것 을보고 아르티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아니, 저 녀석! 손이 부러졌나? 노크는 왜 안 하는 거야?" 하지만 팔시온은 아르티어스는 아예 무시한 채 다크에게 말했다. '싸나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그래,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겉으로는 아르티어스를 무시하고 있었지만, 속으로까지 그럴 수 없었던 팔시온은 약해지려 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크에게 말했다. "미카엘이 진짜 굉장한 귀족 나으리였더라 이거야. 방금 전에 로체스터 공작이 찾아왔는 데 말이야. 글쎄, 그분의 아들이라지 뭐냐." 팔시온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넘어가자 아르티어스의 눈이 실쭉 가늘어졌다. '저게 미쳤나?'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생각이 어떻게 돌아가든, 둘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다크는 믿어 지지 않는다는 듯 팔시온에게 물었다. "정말이야?" "글세 말이야. 나도 놀랐다니까. 그놈 맨 날 자기가 엄청나 귀족이었다고 할 때, 순 거짓 말인줄 알았는데……. 하긴, 그러고 보면 행동 하나하나가 왠지 우아하고 품격이 있긴 했지. 유달리 잘난 척을 해대서 재수가 없기는 했지만 말이야." 가스톤도 방금 전에 본 광경을 떠올리는지 초점을 흐리며 말했다. "둘이서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데, 정말 가슴이 찡하더라구." "그래? 정말 축하할만한 일이군." "그렇지." "내일 후작 녀석만 손봐준 후 돌아가려고 했는데, 며칠 더 머물러야겠다. 미카엘에게도 시 간을 줘야 할 것 아니겠어?" "공작 전하, 아직도 집무실에 계셨사옵니까?" 레티안은 서둘러서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서며 말을 걸었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 그녀는 우선 공작의 침실로 갔다가 그가 없자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와 서 그런지 약간 거친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으음. 생각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래, 밤도 깊었는데 무슨 일인가?" "예, 공작 전하. 크루마의 첩자들에게서 긴급 전문이 도착했사옵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전하께서 흥미로워하실 것 같아서 말이옵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레티안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 중에서 하나를 건네며 보고했다. "예.켄타로아 공작이 엘프리안이 파괴된것에 책임을 지고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다고 하옵니 다. "뭣이! 미네르바가?" 경악했던 로체스터 공작은 곧 이성을 회복한 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설마……. 잘못 알았겠지. 그녀는 크루마 전력의 핵이 아닌가?" 그런 그녀를 투옥시키다 니 말도 안되지." "그건 아닌 모양이옵니다. 첩자의 보고에 따르면, 그녀는 투옥된 것이 확실하고, 곧 그녀 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릴 것이라고 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군사재판의 책임자가 어스무스 그랜딜 공작이라는 것이옵니다." "사실인가?" "예. 거의 정학한 정보인 모양이옵니다." "그렇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로군. 그랜딜 공작이라면 원로원파인데 말이야. 미네르바도 손 쉽게 빠져나가기는 힘들겠군. 맞아. 아주 좋은 기회야." 로체스터 공작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군사재판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확실히 조사하라고 이르게." "예." "그리고…그랜딜 공작하고 비밀리에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나?" 기대를 가지고 물어본 것이었지만, 레티안의 대답은 회의적이었다. "그것은 힘들 것이옵니다. 아무리 그가 군부와 대치하는 반대파의 수장이라고 하지만, 자 국 일을 해결하자고 적국인 본국과 손을 잡을 정도로 미련한 인물은 절대로 아니옵니다." "그런가? 아까운 일이군. 이 기회에 미네르바를 확실하게 밀어내야만 하는데 말이야.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잠시 궁리하던 레티안이 의견을 내놓았다. "역공작을 하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어떻게 말인가?" "예. 본국에서 미네르바를 구원해달라고 크루마 황실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옵니다. 그러 면서 뒤로는 미네르바와 본국이 얼마나 친했었는지를 슬며시 흘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본국 과 크루마 간의 미묘한 관계가 있기에 그 점이 오히려 미네르바에게 독으로 작용하지 않겠 사옵니까?" "흐음, 괜찮군. 하지만 그것만으론 조금 약할 수도 있겠어." "그러면서 또 한가지 작전을 병행하는 것이옵니다."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로체스터 공작을 바라보며 레티안은 음흉한 어조로 말했다. "어스무스 그랜딜 공작을 암살하는 것이옵니다. 물론 그 암살은 미수에 그쳐야 하겠죠. 그 러면서 크루마의 군부와 원로원이 정면대결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유도하는 것이옵니 다. 그렇게 되면 군사 재판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원로원에서 가만히 있겠사옵니까? 어쩌면 미네르바의 처형까지도 유도 해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좋은 계획이다. 즉시 시행하도록 해라." "예, 전하. 명령대로 이행토록 하겠사옵니다. 그리고……." 그녀는 두 번째 서류를 건네며 보고했다. "참, 크라레스의 첩자들에게서 회답이 왔사옵니다" "크라레스? 크라레스에서 왜?" "전하께옵서 용병대장의 위치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리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책망하듯 말했다. "아, 맞아 그랬지. 요즘 일이 많다 보니 깜빡 잊어버렸군." 그런 다음 로체스터 공작은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그가 키에리를 찾은 것은 케락스 시가 드래곤에게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중압감을 함께 나눌 만한 동료가 필요해 서였다. 하지만 그 일이 너무나도 순조롭게 해결되어 버렸기에 잠시 잊고있었던 것이다. "예, 바로 그 보고서이옵니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 일대에서 격투를 벌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을 뿐, 그 외의 것은 알아낼 수 없었다고 하옵니다. 몇몇 마법의 흔적들……. 그리고 타이탄을 사용한 듯한 거대한 무기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옵니다. 하지 만 더 이상 타이탄의 발자국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 이상하다고 하옵니다." "그런가……. 이일을 어떻게 한다? 로젠을 불러라." "예, 전하." 레티안이 로젠을 호출하기 위해 방을 나간후 로체스터 공작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 다. "메를리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오? 우리 미카엘이 돌아왔다오." 로체스터 공작은 싱긋 미소지었었다." '아주 훌륭한 기사로 성장했더군. 처음에는 워낙 한심한 몰골을 하고 있기에 못 알아봤지 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크라레스의 기사가 되어 있는 것은 정말 의외였지만, 당신을 닮아서 그 녀석이 사람 보는 눈은 있는 것 같소. 치레아 대공의 개인 기사단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말이오. 아무래도 크라레스가 적국으로 존재하는 한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검술 을 미카엘에게 전수하지는 못할 것 같소. 대신, 뛰어난 무가로서의 로체스터 가문의 명성은 크라레스에서 계속 이어질테니 돌아가신 아버님도 용서해주시지 않겠소?" 까미유는 날쌔게 좌우로 움직이며 주변을 살펴본 후 돌아와서 로젠에게 보고했다. 아직 해 가 뜨기 직전이기는 했지만, 주위를 살펴보기에는 충분한 정도로 밝았다. "주변에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 일단 이곳은 적국이니까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지. 너하고 오스카는 주변을 살펴 보고 흔적을 찾아라. 나는 이곳에서 나머지와 함께 대기하겠다." "알았수. 오스카, 따라와라." 까미유는 오스카와 함께 날 듯이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가버린 후에 로젠은 메글리에게 말 했다. "경은 타이탄에 탑승해서 대기하도록 해. 어쩌면 적들 사이에 상당한 실력자가 끼어 있는 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옛, 전하." 까미유와 오스카는 곧이어 마법이라도 직격한 듯 깊이 팬 구덩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덩이들의 크기가 대단히 컸기에 그들은 손쉽게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무슨 자국일까요? 아주 깊이 팬 것을 보면 마법이라도 쓴게 아닐까요?" "글세……. 아니야. 마법은 아니고 뭔가 묵직하면서도 거대한 것이 날아와서 부딪친 것같 아. 여기를 봐." 까미유는 재빨리 구덩이 안쪽으로 들어간 후, 제일 안쪽에 둥그렇게 솟아 있는 곳을 가리 키며 발했다. "이 곳에 엄청난 물리적인 충격이 가해진거야. 그 때문에 주위의 흙들이 몽땅 위로 나라 가 버린 거지." 그러곤 궁덩이 외곽의 미끈한 부분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곳이 미끈한 것을 보면, 대단한 힘이 가해졌음에 틀림없어. 안 그러면 이렇게까지 깨끗 한 경사면이 만들어질 수가 없거든." "그렇다면 적 타이탄이 철퇴라도 던졌다는 겁니까?" "글세. 철퇴는 아닌 것 같아. 멀리서 철퇴를 던졌다면 이런 흔적이 생길 리가 없지. 이것 은 좀더 높은 각도에서 떨어진 물체에 의해서 생긴 거야. 물론 자네 말대로 먼 곳에서 타이 탄이 철퇴를 던졌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철퇴는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혹시 녀석들이 회수해 갔다면, 이 근처에 타이탄의 발자국이 있어야 할텐데, 그것도 없잖아. 주위의 풀들을 봐. 어디에도 타이탄처럼 묵직한 것들이 돌아다닌 것 같은 흔적은 하나도 없 어. 심지어 마차가 지나간 흔적조차 없잖아?" "이해학수가 없네요. 놈들이 날아다니는 것도 아닐텐데……." "글쎄 말이다. 도대체 이해 할 수가 없구만. 어쨌건, 이것만 가지고는 뭐가 어떻게 된 건 지 알 수가 없으니 좀더 찾아봐야겠다. 너는 이쪽으로 가봐. 나는 저쪽으로 가볼 테니까." "예." 잠시 수풀 여기저기를 뒤지던 까미유는 화살 한 대가 커다란 돌덩어리를 뚫고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웬만한 힘과 속도로도 화살이 돌을 파고들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상당한 실력의 기사로군." 화살은 거의 20센티미터가 넘게 푹 박혀 있었다. 까미유는 검을 뽑아서는 솜씨 좋게 돌덩 어리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과연 어느 정도 깊이로 들어갔는지 알아보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로젠에게 보고할 자료 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때, 저 멀리서 오스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서둘러서 작업을 끝내고 잘라낸 돌 조각을 가지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것 좀 보십시오." 오스카가 가리키는 곳에는 아름드리나무가 밑동째 박살이 나서 쓰러져 있었다. "대장 말대로 마법은 아닌 모양입니다. 나무를 박살낸 후 저 뒤쪽에 있는 땅바닥까지 푹 팬 것을 보면, 철퇴 같은 둥근 것을 던진 게 확실해요." "철퇴는 아니야. 뭔가 굵고 긴 사술 같은 것 끝에 묵직한 철구가 붙어 있는 형식인 듯하 다. 이쪽을 봐. 사슬 같은 것이 쓸고 지나간 흔적이 있지 아나? 물론 철퇴에도 사슬을 붙이 는 경우가 있지만, 상대방의 발자국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철퇴는 절대로 아니야. 철 퇴라는 것은 원래가 근접 공격무기잖아." "그럼, 채찍 같은 것일까요?" "전체적인 흔적은 그런 것 같지만, 그걸 사용한 놈의 발자국을 찾을 수가 없잖아. 대체 뭐 지? 크라레스 놈들이 뭔가 신무기라도 개발한 건가?" "글쎄요.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짐작이 안 가는데요." "뭐 어쨌든, 적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겠지. 그건 그렇고, 우선 생존자를 찾는 제 급선무다. 자네는 저쪽으로 가봐 나는 이쪽으로 가지. 딴사람은 몰라도 한두 사람은 탈출에 성공했을 거야. 그들이 달아나 흔적을 찾아보라구." "예, 알겠습니다." Chapter 8. 대마왕 크로네티오의 집착 "쿠크마스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쥐새끼들 잡으라고 보낸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도 돌아오지 않는 거지?" 토지에르, 아니 대마와 크로네티오의 질문에 그의 앞에 서 있는 거대한 발록들 중의 하나 가 대답했다. "아직까지 처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쓸모 없는 자식!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여기가 마계라면……." 크로네티오의 분노에 발록들은 몸을 움찔거렸다. 사실 이곳이 마계라면 그런 일을 처리 못 한 쿠크마스는 당장 죽은목숨인 것이다. 발록들 중의 하나가 대마왕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 럽게 말했다. "제가 가면 어떻겠사옵니까? 당장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크로네티오는 그 발록에게 눈을 부라리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닥쳐! 건방지게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감히 참견을 해?" "죄, 죄송하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 거대한 덩치를 하고 있는 발록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즉시 납작 엎드려서 용서를 구했 다. "에잇 젠장!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 쿠크마스에게도 즉시 돌아오라고 일러라. 너희들은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지금부터 철통같이 이곳만을 방어하도록 해라." "옛." 빛과 같은 것이 번쩍 빛난 순간, 죽음의 기사의 몸통이 두 토막으로 쫙 갈라졌다. 기사의 몸 은 두 토막이 나자마자 먼지로 화해서 흩어져 버렸다. "헉헉헉! 젠장, 이걸로 스물 둘." 키에리는 자신을 수색하고 있던 기상한 시체를 처치하는 데 성공하자마자,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가 이동한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방금 전에 있었던 마나의 방출 때문에 그 지독한 몬스터가 곧 이리로 공간이동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는 격투 현장에서 겨우 수십 미터도 안 되는 수풀 속에 납작 엎드릴 정도밖에 여유가 없었 다. 쿠아아아아. 키에라가 엎드리는 그 순간 발록이 번쩍 하는 빛과 함께 그 거대한 덩치를 드러냈다. 이번 에도 적을 찾을 수 없었기에 발록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지금까지 며칠 간 추격전을 벌이며, 겨우 호비트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웬만한 일류 기사를 능가한다는 죽음의 기사를 몽땅 다 잃었다. 이대로 놈을 놓친다면 어쩌 면 대마왕에게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발록은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쥐새끼 같은 놈, 나와랏." 발록은 그 거대한 채찍을 사방으로 미친 듯 휘둘러댔다. 그의 채찍질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푹푹 쓰러졌다. 한참 동안 그렇게 채찍을 휘둘러대던 발록은 이제 간신히 노기를 가라앉혔는지, 씩씩거리며 숨을 고른 후 천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발록은 떠나지 않고 그 근처 하늘을 계속 날아다니며 얄미운 쥐새끼를 찾아내기 위 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발록이 사라진 후 한참이 지나자 쓰러지는 나무 밑에 깔렸던 키에리가 간신히 기어 나오며 투덜거렸다. "쿨럭쿨럭! 젠장. 늑골이 두세 대 나갔나?" 키에리는 쓰러진 나무들을 은폐물로 이용하면서 재빨리 황폐해진 숲을 벗어나, 아름드리나 무들로 빽빽이 숲이 우거진 곳까지 기어서 이동했다. 그런 다음 한참 동안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하지만, 여태껏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붙던 괴상 하게 생긴 병사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군. 지금쯤이면 한둘 정도 나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야." 잠시 더 기다려본 후 키에리는 나무 위로 슬금슬금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삼분의 이쯤 올라갔을 때, 저 멀리 까마득한 하늘 위로 선회하고 있는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군." 키에리는 나무 위에서 내려온 후, 자신의 타이탄을 불러냈다.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못 먹 고 놈들에게 쫓기기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결국은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 다. 아직까지 기력이 남아 있을 때, 최후의 도박을 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로체스터가 단 한 대만을 생산해서 키에리에게 선물했고, 키에리는 거기에 게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출력은 적기사와 동급인 2.3이었지만, 흑기사와 적기사들을 생산하며 얻은 각종 지식들이 몸체 곳곳에 집합된 최고의 타이탄이었다. 하지만, 키에리는 모습을 드러낸 게레리아에 채 탑승하기도 전에 사력을 다해 도망쳐야만 했다. 게레리아의 어깨까지의 높이는 무려 6미터. 머리위에 솟은 뿔까지 합한다면 6.3미터나 되는 크기였다. 그런 대형 타이탄이 공간을 가르고 숲에 모습을 드러내니 것을 발록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발록이 만약 날아서 그곳까지 왔다면 키에리는 든든한 우군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 만, 발록은 키에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간이동해서 나타났다. 발록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게레리아르 향해 거대한 채찍을 날렸다. 게레리아가 요란한소 리를 내며 나뒹굴고 있을 때, 이미 키에리는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발록은 게레리아를 고철로 만들기 다는, 쥐새끼에게 더 볼일이 많았기에 그쪽으로 날아가며 무시무시한 마법 공격을 퍼부었다. 그 덕분에 게레리아는 첫 출동에 주인도 태워보지 못한 채 고철덩어리가 되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수십 개가 넘는 붉은 구체가 날아가며 맹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곳곳에 불이 붙었다. 엄청난 화염과 연기 때문에 상대의 모습을 놓쳐버렸지만, 그래도 발록은 끈질기게 그 일대 를 초토화시켜 나갔다. "헉헉헉……. 뭐 저런 게 다 있지? 타이탄도 아닌 게 무슨 덩치가 저렇게 커? 그리고 그 파괴적인 힘은 또 뭐야? 그리고 날아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공간이동을 자유자재로 하다 니……. 그나저나 게레리아는 제대로 살아서 돌아갔는지 모르겠군." 키에리는 나무 그늘에 몸을 꼭꼭 숨긴 후, 마나를 최대한 억제하여 기척을 숨겼다. 땅바닥의 그늘 위에 바짝 엎드린 상태였지만, 높은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서 헤매고 있 는 적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는 데는 이 방법이 최고였다. 키에리는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 며 숲이 불타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거의 절망에 가까운 좌절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내 살아 생전에 저런 엄청난 몬스터는 처음 보는군. 그 거대한 채찍을 휘둘러 대는 힘도 힘이지만, 마법까지 쓰다니. 저런 놈이 몇 마리나 더 있는 거지? 아무리 코린트의 힘이 강대하다지만 수백 마리가 있다면 도저히 당해낼 수 없겠군." 키에리는 이제 다소 여유를 갖게 되자, 우선 지혈부터 했다. 방금 전 그 지옥과 같은 난리 통을 신속히 빠져나오느라고 상처를 지혈할 시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키에리는 지혈을 대충 끝낸 후 칼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그는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마나를 움직이며 자신이 쓸 수 있는 최강의 기 술을 쓸 준비를 했다. "지금 내 몸 상태로 갑자기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을까?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는 시 간이 너무 길어지면 끝장이야. 그렇다고 지금 끌어 모은다면 놈이 눈치 챌거야. 어차피 모험 이야. 더 이상 기회는 없어. 그래, 조금만 더 이쪽으로 가까이 와라. 뿌드드득!" 군데군데 불에 그은 상처가 쓰라려왔지만, 그는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키에 리는 자신의 기척을 최대한 숨긴 상태에서, 하늘로 도약할 준비를 갖췄다. 몸의 상태도 최악 이었지만, 더욱 큰 문제는 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타이탄만한 덩치의 상대가 날아다니는 데다 공간이동 마법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그렇기에 여태껏 키에리가 상대해온 적과는 판이하게 다른 움직임을 보이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키에리는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기습 공격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통할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었다. "젠장. 타이탄에 제대로 탈수만 있었더라도 이 상태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키에리가 이를 갈며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발록은 그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겠다는 듯 공격을 퍼부어 대다가 갑자기 공격을 멈췄다. "으응? 저놈이 왜 저래?" 키에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발록은 뭔가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나 타났을 때와 같이 퍽 하고 사라져버렸다. 키에리는 상대가 무슨 유인 작전을 벌이는가 싶어 서 감히 움직이지는 못하고 계속 숨어서 동정을 살폈다. 그러다가 땅거미가 내려 사위가 어 득해진 후에야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적은 더 이상 수색을 포기하고 돌아간 것 같았다. "포기했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키에리는 상대의 기척을 도저히 찾을 수 없자, 검을 도로 검집에 꽂 아 넣으며 투덜거렸다. "으으윽!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군." 케이리는 서둘러 옷을 ?어 화상으로 진물이 흘러나오는 상처를 싸맸다. 대충 치료가 끝나 자 그는 서둘러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이곳을 벗어난 다음에 쉬도록 하자. 여긴 아무래도 위험해." 크로네티아는 지하로 내려온 후 투덜거리며 열심히 마법진을 그렸다. 이계와 연락을 해야 만 하는 마법진이었기에 그 복잡 미묘함은 여타의 통신 마법진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크로 네티오는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주문을 외워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흑마법사라면 이런 식으로까지 복잡한 마법진을 사용할 엄두도 못 내겠지만, 그에겐 가능 했다. 곧이어 마법진 위로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로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가 그 모 습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도니티에여, 자네에게 부탁이 있어서 불렀다." 마계의 다섯 대마왕들 중의 하나인 도니티에는 마법진에 모습을 드러낸 후 약간 의외라는 듯 토지에르를 잠시 바라봤다. 비쩍 말라비틀어진 리치가 자신과 대화를 원하고 있는 것이 다. 리치하면 흑마법사가 영생을 추구하기 위해서 변신하는 궁극의 형태다. 그렇다면 상대는 이미 누군가와 계약을 한 상태이다. 그렇지 않으면 흑마법 자체를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이자는 또 다른 마 왕과 계약하고자 불러낸 것이다. 그전의 계약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담보로 잡았는데, 이번 에는 무슨 조건을 걸고 계약을 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한 듯 도니티에는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을 끼치게 만드는 껄끄러운 목소리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불렀는가? 세상을 파멸시킬 힘을 원하는가? 하지만 그대는 이미 누군가와 계약을 맺었을 텐데……." 말을 멈춘 도니티에는 토지에를를 잠시 노려보더니, 이윽고 김빠진 듯한 어조로 투덜거렸 다. 상대가 누군지 눈치 챘기 때문이다. "젠장! 오랜만에 먹음직한 먹이인줄 알았더니, 크로네티오 자네였군. 자네가 어수룩한 호 비트 한 마리를 꼬드겨 저쪽 세계에서 재미 보고있다는 보고는 부하로부터 들었네. 그건 그 렇고, 무슨 일인가?" "자네에게 한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지." "뭐? 부탁이라고? 그렇게나 자존심이 강한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그렇게나 다급한 일인가? 자넨 절대로 부탁 따위는 해본 적이 없지 않았나." "물론이지. 하지만……." 크로네티오는 이를 뿌드득 갈며 증오에 찬 듯 외쳤다. "예전에 내 즐거움을 방해했던 그 가증스러운 놈을 찾아냈어. 호비트 세계의 정복이고 새 로운 마계의 건설이고 뭐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그 놈만은 용서할 수가 없어. 도와줄 거지?" "누군데 그러나? 겨우 호비트 따위가 자네의 속을 뒤집어놨을 리는 없을 테고……. 참, 예 전의 즐거움이라고? 호비트가 그렇게 오랫동안 살수는 없지 않나? 그렇다면 설마?" "맞아, 드래곤이야. 마법을 아주 잘 쓰는 황금색 도마뱀 새끼지." "드래곤이 상대라……. 그래서 자네가 나한테까지 도움을 철하게 된 것이군. 사실 그쪽 세 상에 가면 드래곤 때문에 아주 힘들긴 하지. 마계의 힘을 그대로 가져간다면 한방에 통구이 를 만들어버릴 수 있겠지만 말일세. 하지만 그쪽 세계는 태고 적부터 형성된 중간지대가 아 닌가? 신도, 마왕도, 정령도 다스릴 수 없는…….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는 자가 드래곤이지. 그렇기에 오락을 제대로 즐기려면 드래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현명하지."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도니티에는 잠시 크로네티오를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잘 안다면서 자네는 드래곤을 건드렸어. 그 때문에 강제 소환 당한 것이고 말이야. 자업 자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뭘 그걸 가지고 열을 내고 그러나? 나는 자네가 부러워. 마계의 틀에 박힌 따분한 생활에서 벗어나 도락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선한 자극인가? 이제 더 이상 적이 없는 마계에서 벗어나, 추구할 마한 목표와 적이 있는 새로운 세상이 자 네에게 주어져 있다네. 쓸데없는 과거의 자그마한 원한을 가지고 시간 낭비하지말고, 착실하 게 새로운 마계 건설이나 신경 쓰는 것이 좋지 않겠나? 드래곤은 그곳을 완전히 정복해서 힘을 충분히 갖춘 후에 간단히 제압할 수 있지 않나?"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 망할 자식이 얼마 전에 찾아와서 나 를 깔보는 듯 유들유들한 어조로 재미 많이 보라고 하더군. 그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 지만, 생각할수록 열불이 치밀어 올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어떻게 감히 드래곤 따위가 나를 깔볼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능청스러운 낯짝을 찢어발길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모두 포기해도 좋아. 그 빌어먹을 자식을 죽여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마계에서 얼굴을 들 고 다닐 수 있겠나?" "그러니까 해묵은 감정이 더해진 자존심의 문제로군." 잠시 궁리를 하던 도니티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나?" "자네도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나." 도니티에는 기가 막히다는 듯 내 뱉었다. "미쳤군." "내 마음을 이해해주게나." "휴우∼. 자네의 마음이 이미 확고하다면, 내가 뭐라고 말려도 통할단계는 아니겠지?" "그 말 대로일세. 나는 지금 힘을 원한다네. 드래곤 따위가 더 이상 나를 깔보지 못할 정 도의 힘을 말이야. 그리고 그 자식의 머리통을 잘라서 내 의자를 장식할거야. 그렇게 해서 두고두고 나를 깔본 놈은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삼을거라구."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대법을 실행한 후에 혹시라도 이계에서 죽임을 당한다면 이건 강 제 소한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야. 어쩌면 그 충격으로 본체마저도 소멸 당할지도 모른다 는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잃는 것에 비해서 얻는 것은 너무나도 작다는 말일세." 도니티에의 완곡한 말에도 불구하고 크로네티오는 섬뜩한 미소를 지오며 단호히 말했다. "더 이상 생각 할 것 없어. 나는 그놈의 목을 원해." "좋아 . 어쩔 수 없지. 자네의 부탁인데, 도와주기로 하겠네. 어쩜 시라에뉴라면 자네를 도 와줄지도 몰라. 하지만 비슈누나 바크로니아는 힘들텐데? 그들은 어떻게 설득할 텐가?" "우선 자네와 시라에뉴부터 끌어들인 다음에 천천히 궁리해보면 되겠지." 밤이 되자 다크 일행은 조촐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내일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뭐? 벌써 가려고?" "이제 더 이상 할 일도 없잖아. 후작 녀석이 처형되는 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했고, 융 숭한 대접도 받았으니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미카엘이 아버지하고 만난 지 얼마 안됐는데, 벌써 가자고 하는 건 너무 하는 것 아냐? 그리고 미카엘에게 들으니까 사흘 후면어머니 기일이라고 하던데. 성묘라도 할 만한 시간 여유를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팔시온의 말을 듣고 다크는 미카엘에게 즉시 질문을 던졌다. "너, 솔직히 말해봐. 여기에 남을 거야, 아니면 우리와 함께 갈 거야. 어떻게 하고 싶어? 다크의 노골적인 질문에 미카엘은 당황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 글세……." "아버지랑 사이가 좋지 않아서 20년쯤 전에 집을 나왔다는 것은 팔시온으로부터 들었어. 하지만 내가 들어보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전에는 아주 원망스러웠는데, 이번에 보니까 많이 늙으셨더군. 아버님이 마스터인 것은 알고있지만, 왠지 몸이 예전보다 많이 안 좋아지신 것 같아서 눈물이 나더라." 미카엘은 상당한 근육질이었던 로체스터 공작의 몸이 예전보다 많이 말랐다는 사실을 염두 해 두고 한말이었다. 사실 그것은 몸이 안 좋아진 것이 아니라 로체스터 공작의 검술이 그 만큼 더 발전했다는 것을 뜻한다는 걸 그는 모르고 있었다. 팔시온은 미카엘이 분위기를 잡고 얘기하자, 유쾌했던 술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마 음에 안 든다는 듯 투덜거렸다. "짜식! 너 변한 것 생각 안 하냐? 그동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말이야. 너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가관이었는지 아냐? 비쩍 말라서는 오크 한 마리도 제대로 상대 못해서 헤매고 있던 것을 구해준 게 엊그제 같은데. 어휴∼지금은 그래듀에이트? 나를 따라다니면서 참 많 이 컸지." 팔시온의 말에 미카엘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부끄러운 과거를 왜 낱낱이 들춰내는 것인가? 그것도 여태껏 다크가 모르도록 아주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었는데 말이다. 미카엘은 발끈 해서 말했다. "웃기지 말어, 새꺄! 네가 나한테 뭐 해준 게 있다고 그래. 네가 보수가 좋은 데다 실전 경험까지 쌓을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 된다고 꼬드기는 바람에, 로우니 산맥이 오크 토벌전 에 참전했다가 하마터면 몽둥이에 맞아 죽을 뻔했지. 어디 그 뿐이야? 역시 기사의 힘은 근 육에서 나온다고 해서 한달 동안 성벽보수 작업장에서 벽돌 나른다고 허리가 휘도록 죽을 고생을 했더니, 세상에, 그 돈을 몰래 훔쳐내서 술값으로 탕진한 놈이 누구였지?" "짜식, 쫀쫀하게! 그런 건 잊어 버려. 그리고 남자의 로망은 근육이야." 팔시온은 자신의 근육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말했다. "이 근육질을 보면 여자들이 뿅뿅가잖아? 그때의 아픔이 없었다면 그 몸매가 만들어지는 줄 알아? 다 나 같은 훌륭한 동료를 만난 덕인 줄 알아야지."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한심하다는 듯, 팔시온의 뒤통수를 갈기며 이죽거렸다. "그딴 비곗덩어리는 오크 때려잡는 데나 필요하지, 정작 검술의 궁극을 익히는 데는 방해 만 된다는 것을 몰라? 이런 머저리 같은 것들. 다크를 봐라." 팔시온 일행의 눈이 다크에게로 모아질 때, 아르티어스는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필요 없는 근육은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잖아. 최적화된 몸매라는 것은 저런 걸 두고 하는 말이지. 대가리 속까지 비곗덩어리가 가득 찼으니 알 도리가 없나? 쯧쯧." "아야야야. 그런 말씀 마시라구요. 저런 새다리 같이 가는 게 근육입니까? 역시 근육이라 면 이 정도는 돼야죠." 팔시온은 옆에서 가만히 술을 홀짝거리고 있던 미디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남자들도 혀를 내두르는 저 오우거 같은 파워. 강하고 민첩한 검술도 근육이 아니면 어 디서 나온다는 말입니까 ? 마나도 중요하긴 하지만 역시 그 밑바탕은 근육이죠. 어르신은 마법만 쓰시니까 그걸 모르시는 거라니까요. 하기야 검이라고는 한번도 휘둘러보지 않으신 분이 어찌 그걸 아시겠어요?" 미디아는 팔시온이 자신의 강점이자 최대의 약점을 지적하자, 기분이 상한 듯 투덜거렸다. "그래, 나는 여자의 탈을 쓴 오우거다. 왜, 보태준 거 있냐? 가만히 있는 남의 아픈 데를 왜 건드렷! 젠장!" 팔시온의 완강한 저항에 아르티어스는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이 자식이? 요 며칠 전부터 갑자기 뭘 잘못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하는 말에 슬슬 딴지를 건단 말이야. 젠장, 그때 교육이 좀 약했나?"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팔시온이 그 말을 못 들었을 리 없었다. 팔시온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헤헷! 좋을 대로하십쇼. 그래, 구워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시라 이겁니다. 그런다고 내가 설설 기면서 기죽을 줄 아셨습니까? 싸·나·이 팔시온, 한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다 이겁니다. 흥!" "그만 좀 해요, 아빠." 아르티어스는 다크의 짜증을 동반한 말 한마디에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입을 닫았지만, 희번덕거리는 눈빛이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 는 미카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실 미카엘은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은 혼란을 느끼 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보자 자신이 지금 내려야 할 옳은 결정이 무엇인지 곧장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말했다. "나, 나 남을 거야.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 그 말에 열심히 눈치를 살피던 가스톤이 미카엘에게 말했다. 재빨리 회전하는 마법사의 머 리는 이 극악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제공해줬던 적이다. "혹시 여기 나도 같이 남으면 안될까? 나 일 잘해. 그리고 열심히 할게. 치레아에서도 봤 잖아. 서류 작업도 잘한다구." 미디아도 재빨리 끼여들었다. "나도 남으면 안될까? 나도 열심히 할게. 로체스터 공작께 잘 말씀 드려줘." 동료들이 다 떠난다는 말에 그제야 기가 팍 죽어버린 팔시온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중얼 거렸다. "나, 나는?" 그 말에 미카엘을 비롯한 가스톤과 미디아는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너는 안돼애." 미카엘은 밤하늘의 달을 보며 울적한 마음을 씻어내고 있었다. 적당히 오른 취기에다 풀벌 레 소리가 들려오는 밤. 달 하나는 중천에 걸려 있었지만, 다른 하나는 새벽이 오려면 멀었 는데도 벌써 지고있었다. 20년이나 정들었던 친구들과 이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서로 악의 없이 싸우고, 웃고, 도와가며 수많은 모험을 했던 사이가 아니던가. "지금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남는다고 결정은 했지만, 크라레스와 크린트가 서로 적국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미카 엘이었다. "뭐, 괜찮겠지. 다크가 있으니까 말이야." 애써 자위하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카엘이 뒤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다크가 서있었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있는 그녀는 아련한 달빛 아래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미카엘의 시선이 흘린 듯이 위에서 아래로 슬며시 이동하며 그녀를 훑어보다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에서 멈췄다. 검을 바라보는 그 순간 미카엘은 그녀 가 누군 지를 깨달으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 무슨 일이야?" "으응.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는데, 그냥 떠나보내려니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아서 말이야. 한가지 선물을 줄까 하는데 괜찮겠어?" 그 말에 미카엘은 호기롭게 대답했다. "나야 공짜라면 뭐든지 좋지." "그래? 그렇다면 이렇게 앉아봐." 다크는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말했다. 미카엘은 다크가 수련을 한답시고 설칠 때 취했던 자세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최대한 그를 흉내내어 앉았다. 다크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건 과거 내가 살았던 곳에서 마나를 수련할 때 취하는 기본적인 자세야. 물론 어느 정 도 수준에 이르면 이런 자세를 꼭 취할 필요는 없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 야." 다크는 미카엘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잠깐만 참고 있어. 그리고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돼. 순간적으로 미카엘은 의구심을 느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나가 흩어지기 시작했던 것 이다. 미카엘은 경악해서 다크를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그 마음을 이해했던지 다크는 다급 하게 다시 말했다. "그냥 차분하게 앉아있어. 나를 믿지?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 그리고 마나의 움직임을 느 끼라구." 순간적으로 소멸한 것처럼 느껴졌던 마나가 다시금 미카엘의 몸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마나의 근원은 다크였다. 다크는 미카엘의 잡스러운 마나를 완전히 소멸시킨 후, 새 로운 대기에서 마나를 끌어 모아 미카엘에게 주입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마나의 움직임을 느껴. 그리고 그것이 움직이는 통로를 잘 기억해둬." 마나는 하나의 법칙에 따라서 미카엘의 몸 속을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 법칙은 저 무 림에서도 잊혀진 태허무령심법의 마나를 돌리고 조절하는 운기조식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 다. 미카엘의 몸속에는 태허무령십법의 법칙에 따라 다크에 의해 소멸되기 전보다 더욱 정 순하고 강력한 마나가 뿌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충실하게 단전에 쌓여가기 시작했다. "이제 됐어. 마나가 움직이는 통로를 잘 기억했겠지? 앞으로 하루에 두 번, 한시간 정도씩 똑같은 방법으로 수련해, 그렇게 계속 수련하다보면 검술을 익히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거 야." 미카엘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주먹을 꽉 쥔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믿어지지가 않아." 그는 꽉 쥔 손에서, 그리고 몸 속에서 넘치는 힘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비실거리는 늙은 말만을 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젊고 힘이 넘치는 말을 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새로운 세계 에 대한 경이감. 오늘 저녁 아르티어스가 술자리에서 근육을 두고 비곗덩어리라고 비꼬아대 던 것이 무슨 뜻인지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느낌은 아마도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새로운 힘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니 그 래듀에이트였기에 더욱 확연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검술은 로체스터 공작이 가르쳐 줄 테니까, 나는 마나를 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거야. 아무래도 이곳에선 이런 식의 기법은 별로 발달해 있지 않으니까. 검술을 배울 때 많 은 도움이 될 거야." 멍청하게 서 있는 미카엘의 어깨를 다독거린 후 다크는 방으로 돌아갔다. Chapter 9. 차라리 전쟁터로 보내줘! 다크 일행은 다음날 아침 치레아 공국으로 돌아왔다. 일단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기에 산 적한 문제들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다. 카르토 백작이 낑낑거리며 어마어마한 서류 더미 를 가지고 들어오자, 다크는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이게 뭐야?" "전하께옵서 판단하시고 결재를 하셔야만 하는 서류들이옵니다. 아무래도 저 혼자 독단적 으로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다크는 한심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봐, 카르토 백작." "예, 전하." "그 한계라는 것은 누가 정한 것이지?" "그거야 엄연히 공국의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사항이옵니다." 다크는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이거 뭔가 잘 모르고 있군, 자네 어깨 위에 달려 있는 것은 뭐야? 그 머리통으로 생각해 보고 꼭 해야 될 일이면 알아서 처리하면 될 거 아냐. 이따위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일일이 내 결재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대공 대리인 자네가 알아서 처리해." "하, 하지만 저는 말단 관료......" 다크는 모질게 카르토 백작의 말을 잘랐다. "물론 자네는 그 일이 처리된 이후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만 책임지면 되는 거야. 알 겠나? 아주 간단한 거잖아. 나는 자네를 믿어. 자네는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잖은가? 그럼 그거 다 가지고 가봐." 카르토 백작은 암담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며 서류들을 챙겼다. '책임을 지라고? 내 직책이 뭔데, 이런 일들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거야? 이거 하나라도 잘못 처리했다가는 내 목숨은 물론이고 우리 가문 전체의 목숨을 걸어도 안 될 텐데...... 아 마도 대공은 나를 죽이려고 작정한 모양이지?' 사실상 그는 행정부에서 일하는 관료였다. 지금 카슬레이 백작이 치레아 기사단을 모두 거 느리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대공 대리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받고 있 지만, 그것은 모두 우수한 인재들이 기사단에 소속되어 자리를 비워버렸기에 빚어진 결과였 다. 말이 안 통하는 상관과 더 이상 실랑이를 할 마음이 사라져버린 카르토 백작은 자포자 기한 심정으로 서류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고 다크가 말했다. "밖에 나가면 실바르를 불러주게." 카르토 백작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예? 드미티리 실바르 경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 녀석 말고 실바르가 또 있나?" "이곳에 도착하셨을 때, 제가 보고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치레아 기사단은 황제 폐하의 칙 명에 의해 전장에 투입되었다고 말이옵니다. 그러니 당연히 실바르 경도......" 다크는 이마를 살짝 치면서 말했다. "아아, 깜빡 잊었군. 그래, 자네가 보고했었지."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어깨가 축 늘어져서 나가는 카르토 백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크는 짐짓 능청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참,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지?" 결재 서류를 황급히 챙겨 오느라고 바빴던 카르토 백작이 아르티어스의 행방을 알 리가 없 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카르토 백작은 오랜 관료 생활을 통해 몸에 밴 모범답안을 무의식중에 내뱉었다. "예? 예, 곧장 알아보고 보고드리겠사옵니다." "그래? 그럼 자네는 그 서류들 여기 놔두고 아버지부터 빨리 찾아와." "옛, 알겠사옵니다." 상관의 의중을 읽은 카르토 백작은 그 한마디에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치레아 대공의 아버지가 얼마나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인지 말이 다. 아무리 많은 서류를 쌓아 놔도 하룻밤 새에 깔끔하게 끝내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아르티어스 밑에서 일해 봤기에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그 엄청난 능력을 직접 보기까지 했던 것이다. 방금 전과는 달리 만면에 희색을 띠고 활기찬 걸음으로 나가려는 카 르토 백작의 뒤통수에 대고 다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참, 루빈스키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게. 한참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안 가볼 수는 없겠 지." "예, 전하." "그리고 오랜만에 루빈스키와 만나는데, 쓸 만한 포도주나 한 병 준비해주게. 그리고 자네 는 출세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는군." 그때서야 카르토 백작은 방금 전 자신에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기회가 왔다가 사라졌는지를 깨달았다. 다크는 자신에게 그 정도는 처리할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고 일을 맡긴 것이다. 아 마도 그것을 자신이 다 처리해낸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행정 관료들 중에서는 최고의 위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르토 백작은 다시 금 어깨가 축늘어지며 힘 빠진 어조로 말했다. "아, 알겠사옵니다, 전하." 잠시 후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도착했다. 그는 아들이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나 싶어서 만 면에 희색을 띠고 있었다. "내 아들아, 나를 찾았다고?" "예, 아빠. 제가 부하들의 보고를 받고 있는 동안 많이 심심하셨죠?" 다크가 생글거리며 물어보자,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녀석이 저렇게 애교를 떨 때는 뭔가 꽁수가 있음을 수많은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속 으면 내가 드래곤이 아니지. 음. "아, 아니다. 뭐 심심할 것까지야 있겠느냐. 나도 나름대로 할 일이......" 그런데 바로 이때, 다크의 시종인 세린이 고풍스럽게 생긴 포도주 병을 하나 가져다가 탁 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주인님, 카르토 백작이 부탁하신 포도주를 가져왔습니다." 한참 허공을 내젓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손이 황급하게 내려갔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들놈이 기특하게도 자신과 한잔하기 위해 부른 것을, 자신은 깊은 속마음도 모르고 거절할 뻔한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황급하게 덧붙였다. "물론 나도 일이 있긴 하지. 하지만 네가 부탁하는 일이라면 없는 시간도 내야지. 암." "정말이예요?" "그럼, 그럼." 다크는 세린이 놓고 간 포도주 병을 집어 들며 부탁했다"저는 지금 루빈스키를 만나러 갈 거거든요. 그동안 저기 있는 서류 좀 부탁해요." 어이없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물었다. "그렇다면 그 포도주는......" "아, 이거요? 루빈스키한테 줄 거예요. 오랜만에 만나는데, 이 정도 선물은 줘야죠." 아르티어스는 분개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산더미처럼 쌓인 일은 애비에게 맡겨놓 고, 자기는 술 마시러 가겠다고? "뭐? 네가 술 마시러 가 있는 동안 나보고 저따위 일이나 하고 있으라는 말이냐?" "에이이~ 아빠, 좀 해줘용. 오늘 밤 저녁식사는 근사하게 둘이서만 하자구요. 예?" 슬쩍 애교 어린 말투로 부탁하자, 아르티어스는 정신이 홀랑 빠져 버린 듯 자신 있게 대답 했다. "그럼, 내가 누구냐. 골드 일족의 위대한 후예라는 것은 나를 두고 하는 말 아니겠냐? 식 사시간 전까지 확실하게 처리해 놓으마, 마음 푹 놓고 놀다 오너라." "그럼 부탁드려용~" 다크가 사라지고 난 후 아르티어스는 탁자를 쾅 치며 투덜거렸다. "젠장! 또 당했군. 어떻게 된 게 저 놈의 미소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겠단 말이야." 크라레스 군 지휘부의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마법진에 번쩍 하는 빛과 함께 다크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는 바쁘게 움직이는 기사나 마법사, 병사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보던 팔시 온은 어깨에 힘을 주어 건들거리며 말했다. "야, 역시 남자의 로망은 전쟁이야, 전쟁. 봐, 활기가 넘치잖아?" 그 말에 미디아도 동감한다는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 "확실히 전쟁터가 그리워. 요 근래에 너무 편안한 생활을 했더니 몸이 근질근질하는 것 같아. 안 그래, 가스톤?" 미디아가 허리를 쿡 찌르자 찔끔하며 가스톤도 재빨리 동의했다. "그, 그럼. 당연하지. 우리는 여태껏 전쟁터를 주름잡은 용병들 아니겠냐?" 동료들이 한마디씩 하자 팔시온이 다크에게 물었다. "이봐, 다크. 지금 치레아 기사단이 어디에 있지?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잖아. 우리들 도 거기 소속 오너인데 동료들만 고생하게 놔 둘 수는 없잖아. 아, 우리들도 가서 화끈하게 몸 좀 풀어볼까?" 팔시온의 말에 다크가 빙긋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아냐, 너희들 오랫동안 크루마의 감옥에서 고생했잖아. 나하고 좀 더 있으면서 휴식을 취 하라구. 뭐하려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가려고 그래?" 다크가 점잖은 어조로 거절하자 팔시온의 표정은 약간 다급해졌다. 어제 저녁, 자신들을 바 라보던 아르티어스의 그 살기 어린 눈동자...... 이상하게 그날 저녁에는 아무 일 없었지만,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이제 더 이상은 맞고 싶지 않았다. "아냐. 우리를 전쟁터로 보내줘. 꼭 가고 싶단 말이야. 응?" "좀더 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얼마 전에는 아버지한테 많이 맞았잖아. 아무리 신관이 치 료했다고 하지만, 아직 회복도 다 안 됐을 텐데......" "제발 우리들을 보내줘. 아니면 오늘 저녁 어르신에게...... 흑흑, 이제 더 이상 맞으면 정말 죽어버릴 것 같단 말이야." 팔시온의 절규에 다크는 그들이 왜 전쟁터로 가고 싶어하는지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다크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며 말했다. "너희들의 뜻이 그렇다며 어쩔 수 없지. 루빈스키한테 말해둘게.' "우와! 살았닷!" 다크가 총사령부 건물에 도착했을 때, 널찍한 실내에는 움직이는 각종 복장의 사람들로 시 끌벅적했다. 게다가 실내 한복판에는 아주 널찍한 탁자가 하나 놓여 있고, 그 탁자에는 엄청 나게 넓은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상관의 지시에 따라서 지도 위에 놓여 있는 여 러 가지 도형들을 재빨리 이동시키거나 없애고 있었다. 그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 전장의 모든 상황을 이 지도를 봄으로써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줬다. 실내의 한쪽 구석에는 마법사 십여 명이 통신 마법진을 그려놓고 수정구슬에 나타난 상대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하, 발칸 폰 크로아 후작 각하로부터 통신이 도착했사옵니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 "론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적의 3개 성기사단을 유인, 섬멸했다는 보고이옵니다." 병사 한 명이 지도상의 론도 지역에 꽂혀 있던 세 개의 작은 푸른색 깃발을 치워버렸다. 대신 그곳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섞인 깃발 하나와 2자가 쓰여진 녹색 깃발 하나가 놓여졌 다. 스바시에 기사단과 제2기사단을 뜻하는 표식이었다. "그래? 잘 되었군. 피해는 어떻다고 하던가?" "테세우스 5기 파괴, 드라쿤 1기 파괴, 기사 2명 전사이옵니다. 그리고 몬스터들 쪽의 피 해도 크다는 보고이옵니다." "으음. 동쪽으로 가는 관문을 연 것 치고는 피해가 그렇게 크다고 볼 수는 없군. 노획한 타이탄들의 이동에 제 3기사단을 동원해라." 루빈스키 대공 옆에 서 있던 장군 하나가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작전관으로서 전장의 총지휘를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전하, 지금까지는 몬스터들을 이용해서......" "그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현재 겉으로 드러난 주력은 몬스터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형 몬스터들을 고철 수송에 쓸 수는 없다. 그리고 제3기사단 대신 근위대에게 출동 대기 상태를 유지하도록 지시 해라." "옛! 그렇게 전하겠사옵니다, 전하." "그리고 크로아 후작에게는 좀더 동쪽으로 진출해도 괜찮다고 전해라." "옛, 전하." "아그리오스 후작 각하로부터 전문이 도착했사옵니다. 기뻐하소서, 전하. 적군을 격파하고 칸타르 시를 점령했다는 보고이옵니다." 병사 하나가 그 말에 따라 알카사스 동쪽 외곽의 칸타르 시에 꽂혀 있는 독수리와 매가 그 려진 깃발들을 치워버렸다. 이윽고 1자가 쓰여진 녹색 깃발과 황금색 깃발이 그 자리를 대 신 차지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루빈스키 대공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점령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비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어쨌든 대단한 공을 세 웠다. 적국의 2개 기사단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것이 아니옵니다, 전하. 전문에 따르면 적 1개 사단이 주둔 중이었을 뿐, 기사단과의 전투는 없었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현재 적 기사단이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보 고이옵니다." 루비스키 대공은 이마에 세 겹의 주름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어디로 갔지? 혹시 적들의 기만작전은 아닌가? 작전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작전관은 즉시 대답했다. "옛, 전하. 일단 적 기사단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사옵니다. 그리고 적들의 위치가 파악될 때까지 기사단은 뒤쪽으로 후퇴시키는 편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사실상 본 국 기사단이 최전선에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옵니다." "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 적들에게 본국이 뒤에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는 것이 선 결 요건이니까 말이야." 루빈스키 대공은 전령에게 전했다. "아그리오스 후작에게 전해라. 한시라도 빨리 기사단을 이끌고 뒤로 후퇴하라고 말이야." "옛, 전하." 지금까지 루빈스키 대공이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다크는, 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이봐, 루빈스키!" 고음의 목소리에 루빈스키의 시선이 다크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다크는 포도주병을 손 가락 위에 올려놓고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자네 생각이 나서 왔지, 한잔 어때?" 여태껏 다크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루빈스키 대공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녀 가 크라레스를 끝까지 도와줄 것인지에 대해서 루빈스키는 조금 미심쩍게 생각했었고, 나름 대로 그에 대한 대비도 충실히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그녀가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고 있었기에 취한 조치였던 것이 다. 그만큼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믿고 있던 루빈스키였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루빈스키는 그녀를 보자마자 반색을 하고 달 려 내려왔다. "돌아왔군. 어떻게 지냈나?" "응. 사연이 좀 복잡하지. 그건 그렇고 시간 좀 있나?" 그 말에 루빈스키는 작전관을 향해 외쳤다. "나는 좀 나갈 테니까 자네가 알아서 지휘하도록 하게." "하지만 전하......." 루빈스키는 더이상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듯손을 내저으며 다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버렸 다. "자네 얼굴을 보니 정말 반갑군. 그래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지금껏 소식이 없었나?" 다크는 간략하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루빈스키에게 말했다. 크루마에 찾아가서 미네르바 에게 복수한 것까지도. "...그래서 내가 곧바로 엘프리안에 찾아가서 미네르바를 줘패버렸지. 그녀도 태어나서 그 렇게 무작스럽게 맞아보긴 처음이었을 거야." 루빈스키는 기가 막힌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거 복수 한번 거창하게 했군. 자네였군. 갑자기 엘프리안이 파괴 되었다는 정보가 들어 와서 안 그래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제야 사건의 전모를 알겠네 그려. 정 말 큰일을 해주었어."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말에 다크의 눈이 둥그레졌다. 자신은 결코 엘프리안을 파괴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둥그레졌던 다크의 눈이 곧이어 실쭉하게 변했다. 범인이 누군지 순간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다크의 순간적인 표정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루빈스키는 포도주 잔을 들고 그 영롱한 붉은색을 감상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미란의 일도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미란?" 다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하자, 루빈스키는 약간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설마, 미란의 문제에 대해서 미네르바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건가?" 다크는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사실상 그녀가 크루마에 억류된 것도, 미란에 대한 침입을 중지하고 다시금 동맹을 맺자고 요청하러 갔다가 당한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깜빡 했어. 사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거든." "사실 자네가 실종되었을 때, 미란은 크루마에 완전히 통합되어 버렸어. 지금 미란을 독립 시킬 수만 있다면, 크루마는 최전선과 본국이 분리되면서 상당한 전력 감소를 당할 수밖에 없지. 그런 실리적인 목적 외에도, 미란은 1차 제국전쟁 때 본국을 열성적으로 도왔었네. 도 의적인 관점에서도 미란의 몰락을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럼, 내 조만간에 시간 내서 다시 한 번 크루마에 가보지 뭐." "아니, 그런 하찮은 일로 자네를 번거롭게 할 수는 없지. 내일 당장 크루마로 와리스 후작 을 보내겠네. 유능한 친구니까 잘 알아서 처리 하겠지."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뭔데?" "나하고 같이 갔던 동료들이 치레아 기사단에 복귀하려고 하거든. 자네가 좀 도와줘야겠 어." 큰소리는 쳤지만 어려운 부탁이면 어쩌나 하고 속으로 염려하고 있었던 루빈스키의 안색이 환해졌다. "물론 도와주지. 타이탄 3기의 전력을 전쟁터로 보내는 일인데, 그걸 거절할 수 있나?" "부탁해."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지금 아주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태산같이 쌓인 서류를 저녁식사 시간 전까지 모두 다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서류를 검토해보지도 않고 몽땅 다 서명 해 버린다면 일은 순식간에 끝나겠지만, 그런 식으로 처리했다가는 나중에 아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 대충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도 노회한 드래곤이다. 옆에서 아들놈이 지켜보고 있을 때나, 열심히 하지,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그러고 있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말씀이다. 아르티어스는 널찍한 공간에 수십 명의 인원을 데려다 놓고 그들을 철저히 쥐어짜고 있었 다. 아르티어스는 직접 일하는 대신 옆에 포도주 병을 놔두고 가끔씩 한잔 하면서 그들을 감독 하고 있었다. "야, 거기. 너 말이야, 너. 한눈팔지 말고 열심히 안 해? 죽고 싶어?" 아르티어스가 으르렁거리며 독려하는 가운데, 검토를 거친 서류는 카르토 백작에게로 모였 다. 카르토 백작은 그 서류들을 최종 단계까지 검토한 후 그것을 아르티어스에게 넘기는 것 이다. 그리고 아르티어스는 카르토 백작이 넘긴 서류를 거의 보지도 않고 쓱쓱 서명하며 으 르렁 거렸다. "이거, 서류 올라오는 속도가 느린 것 같아. 다시 한 번 정신교육을 실시한 후에 새 마음 으로 산뜻하게 일을 시작할까?" 한쪽 눈두덩에 퍼런색 잉크를 뿌려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카르토 백작은 진저리를 치며 정신없이 대답했다. 처음 몇 번 올라간 서류를 면밀하게 검토한 아르티어스에게 계산 이 틀렸다고 모두 다 집합당해서 먼지 나게 맞았을 때 생긴 상처였다. 아르티어스는 어쩌다 하나씩 그런 식으로 검토를 했기에, 모두들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꼼 꼼하게 처리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 아닙니다, 어르신.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빨리 가봐. 일거리가 쌓이고 있잖아." "옛!" 자신의 책상을 향해 뛰어가는 카르토 백작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 신 후 중얼거렸다. "역시, 호비트는 쥐어짜면 짤수록 더욱 열심히 일하거든. 하등한 드워프하고 하나도 다르 지 않다니까." 이런 식으로 열심히 일한 덕분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저녁식사 전까지 모든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돌아오는 다크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헤헤헤. 일은 다 끝내놨다. 그리고 근사한 식사까지 준비해뒀어. 자, 식사하러 가자. 응?" "예, 아빠. 정말 고마워요." "뭘, 그 정도 가지고...... 으헤헤헤. 뭐, 어려운 일 있으면 모두 다 아빠한테 부탁해. 뭐든지 다 해줄 테니까 말이다." "충분히 저한테 잘 해주고 계신데요, 뭘." "참, 그런데 너하고 같이 갔던 그 떨거지들은 다 어디 갔냐?" 떨거지라는 말에 다크의 눈이 실쭉 가늘어졌다. "떨거지라뇨? 제 친구들이라구요." "그래, 그 녀석들 말이야." "제발 전쟁터로 보내달라고 사정하기에 소원대로 보내줬죠. 아마 지금쯤 아르곤 전선에서 싸우고 있을 걸요?" 어제 저녁에는 다크가 미카엘을 데리고 밤에 뭔가 하고 있었기에 아르티어스는 그들을 교 육시킬 기회를 놓쳐버렸었다. 그래서 오늘 밤을 노리고 있었는데, 미리 알고 튀어버린 것이 다. "그래? 그런 식으로 도망쳤단 말이지......" 아르티어스가 다시는 도망칠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반쯤 죽여 놓겠다고 훗날을 기약하며 다짐하고 있을 때, 다크가 의도적으로 되물었다. "뭐가 도망쳐요?" "아, 아냐. 헤헤헤. 늙으면 한번씩 헛소리가 튀어나온다니까......" "그건 그렇고, 저 몰래 엘프리안을 파괴했다면서요?" 뭔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헛바람을 삼킨 아르티어스였지만, 노회한 그답게 그 것을 역이용하여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헛! 누가 그딴 헛소리를 하더냐? 헛소리를 내뱉은 그놈의 주둥아리를......" 아르티어스가 짐짓 울분에 찬 어조로 말했지만, 다크는 속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가 그랬는지는 아실 필요 없어요. 이미 소문이 쫙 퍼졌는데,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어 요? 다시는 저 모르게 이상한 일 하지 마세요, 예?" 의외로 아들이 화를 내지 않는 데 대해 안도한 아르티어스는 함박 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지. 헤헤헤." "약속했어요?" "그럼." "그리고 거기에는 제 친구들을 괴롭히는 것도 포함되는 거예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함정에 빠졌음을 알고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연결되나? 에이, 좋아. 그렇다면 그렇게 해주지." 하지만 풀이 죽은 것도 잠시, 아르티어스는 다시금 활기찬 어조로 물었다. "그건 그렇고, 내일은 뭐 할 거냐? 오늘은 나 열심히 일했잖냐." "내일은 크루마에 가볼 거예요." "크루마에는 왜?" "몰라서 물어요? 아빠의 처사는 너무 심했다구요. 그런 만큼 가서 사과라도 해야죠."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오붓하게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을 때, 카르도 백작은 멍든 눈에 열심 히 계란을 굴리며, 왜 오늘 아침에 다크의 말을 듣지 않았는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나중에 아르티어스에게 줘터져가며 자신이 다 처리할 일이었는데, 그때 하겠다고 했으면 진급이라도 했을 게 아닌가? 카르토 백작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굴리고 있던 계란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울부짖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내가 할 걸! 내가 왜!" Chapter 10.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 와리스 후작은 그 비대한 얼굴에 가려진 자그마한 눈망울을 열심히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뭔가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와리스 후작은 아직까지 미네르바의 실각과 같은 미세한 부분까지 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대략 엘프리안이 파괴되 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을 파괴한 사람이 치레아 대공이라는 것 정 도였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사실은 치레아 대공이 직접 루빈스키 대공 에게 말한 것으로서, 정보부에서 알아낸 사실이 아니었다. 그만큼 크 라레스의 모든 정보력은 현재 알카사스와 아르곤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와리스 후작은 프루니아의 여름궁전, 아니 크루마의 임시 황궁에 도착한 후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가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던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품었던 의문은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똑똑. 짧게 노크를 한 뒤 문이 활짝 열리며 근엄하게 생긴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와리스 후작에게 자신을 정중하게 소개했다. "나는 라이언 반도로스 후작이라고 하오." 외교 담당관은 예전부터 가레신 후작이었기에 와리스 후작은 의문을 느꼈다. 어디로 간 것인가? 아니면... "가레신 후작은 어디에...?" "아, 그분은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귀하를 접대하실 수 없소. 그래, 본국을 방문한 용건은 무엇이오?" 성급하게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상대를 보며 와리스 후작은 속으로 비웃었다. 상대는 아직 외교적 화술의 기본조차 모르고 있는 애송이인 것이다. "예, 우선 귀국의 수도 앨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시고 저희 폐하께서 귀국의 폐하께 심심한 조의를 표하셨소." 자국의 수도가 가루가 난 것에 대해 상대가 화제로 올리자,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던 반도로스 후작은 조금은 언짢은 어조로 대답했다. "예, 귀국의 폐하께 하찮은 타국의 일에까지 신경을 써주셔서 감읍할 따름이라고 전해주시오." 타국이라는 말이 나오자, 와리스 후작은 일부러 과장되게 감증을 표현하며 떠들어댔다. "타국이라니요, 이거 섭섭하군요. 귀국과 본국은 제1차 제국전쟁때 코린트 를 물리친 혈맹이 아니었소이까? 요 근래 한동안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과거의 친분을 잊어버릴 수는 없지 않소이까? 대제국 코린 트와 싸우기 위해 서로의 국력을 합쳐 총력전을 벌였던 혈맹들이었는데 말이오." '과거의 친분 따위가 중요할까?'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반도로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의 말은 도덕적 관점에서 봤을때 충분히 납득이 갈 만큼 논리 정연했기 때문이다. "그거야 그렇지요." 상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긍하자, 와리스 후작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의도하는 페이스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모든것을 보면 귀국과 본국은 작은 일 따위로 사이가 벌어질 관계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 폐하의 생각이십니다. 사실 제2차 제국 전쟁에서 본국이 위태로울 때, 귀국은 갑자기 미란을 침공하여 합병 하였잖습니까?" 그건 사실이었기에 반도로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와리스 후작은 꼭 상대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곧장 말을 이었다. "다른 국가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역시 동맹이라는 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말이오. 크루마가 동맹국인 크라레스가 잠시 어려워지자 크 라레스의 동맹국인 미란을 일거에 점령해버렸다고 말이오." 제 2차 제국전쟁때의 치부를 드러내자 반도로스 후작의 안색은 약간 벌개졌다. 그런 그를 보며 와리스 후작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지금 상대의 심리를 완전히 읽고 있는 상태였다. 원래 외교관이란 상대가 속마음을 읽을 수 없도록 자신의 표정을 절대로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 이 아닌가? 하지만 저 애송이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어허, 하지만 내말을 오해하지 마시오. 설마 그런 속 좁은 무리같이 동맹국인 귀국이 우리가 어려운 틈을 타 미란을 진정으로 점령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오. 솔찍히 고백하자면 사실 우리같이 생각이 짧은 자들은 귀국의 행동을 오해했었소. 하지만 저희 황제 폐하께서는 귀국을 굳게 믿으셨지요. 황제 폐하께서는 만약 귀국이 미란을 삼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냐고 저희들에게 말씀하시며 믿음이 부족했던 저희들을 깨우쳐주셨소. 사실, 크루마가 그 당시 미란을 점령하지 않았다면 코린트는 본국을 정리한 후 곧장 군세를 돌려 공개적인 본국의 동맹국인 미란을 침공했을 것이오. 그것을 잘 알고 계신 귀국의 황제폐하께서는 저희 크라레스의 동맹국인 미란이 야욕에 찬 코린트의 손 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손을 쓴 것이지요. 본국과의 의리를 생각해서 크루마가 악역을 담당한 것이라고 저희 황제 폐하께서는 상당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 그렇지요. 귀국이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외다." 와리스 후작은 대화가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잘 흘러가자 상대방에게 회심의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제 본국 사정도 어느 정도 호전되었고 코린트 와의 관계도 그런대로 정상화되었소. 그러니 더이상 귀국이 악 역을 감당하실 이유가 없어졌다는 황제 폐하의 말씀이셨소." 갑자기 화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반도로스 후작은 기겁했다. "뭐, 뭐라고요?" "그러니까 코린트가 미란을 집어삼킬 염려가 없어진 만큼 미란을 풀 어줘도 된다는 말이외다. 또한 수도 엘프리안이 파괴된 터라 귀국도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을 테고 말입니다." 여태껏 자신이 상대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반돌 스 후작은 안색을 굳혔다. 사실 와리스 후작의 논리대로라면 크루마는 미란을 토해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약속했다가는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이 아닌가? 반도로스 후작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소. 이 사안은 아무래도 내가 처리할 수 있는 문 제가 아닌 것 같으니 윗분들에게 보고를 해야겠소." 와리스 후작에게 양해를 구한 반도로스 후작은 회의장을 나와 곧장 원로원 의장 대리인 어스무스 그랜딜 공작의 집무실로 갔다. 현재까지 행방을 알 수 없는 그린레이크 공작을 대신해서 그가 임시로 원로원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왔다고 하던가?" "미란을 되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전하." 반도로스 후작의 말에 깜짝 놀란 그랜딜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미, 미란을 말이냐?" "예,전하." 반도로스 후작은 굳은 안색으로 차분히 와리스 후작과의 회담 내용 을 그대로 전한 뒤,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송구스럽사옵니다, 전하. 저로서는 도저히 역부족이옵니다." "그렇게 대단한 자인가?" "말솜씨가 대단한 인물이옵니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있어도 계속 대화를 나누다 보면, 결국은 그놈이의도한 방향으로 화제가 진행되는..." "에잇, 이런 멍청한! 하긴 처음부터 경에게 능숙한 외교관으로서의 역량을 기대한 내가 잘못인지도 모르지." 한심스럽다는 듯이 반도로스 후작을 쳐다보던 그랜딜 공작은 펜을 들어 뭔가를 종이에다가 쓴 다음, 경비병에게 건네주며 지시했다. "너는 지하 감옥에 가서 가레신 후작을 인계받아 오너라." "옛, 전하." 경비병이 명을 받고 나가자, 그랜딜 공작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우선, 한동안은 가레신 후작을 따라다니며 그의 옆에서 일을 배워라. 그는 미네르바의 측근이지만 외교관으로서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던 인물인 만큼 배울게 많을 것이다." "옛, 전하." 그랜딜 공작은 슬며시 미소지으며 말을 끝냈다. "어느정도 경이 일을 배우면 그때 그놈을 처형하기로 하지." 현재 미네르바의 측근에 있던 모든 인물들은 투옥된 상태였다. 미 네르바를 숙청하는데, 그 측근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취해진 조취였다. 그리고 사실상 그 측근들이 군의 요직을 거의 차 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미네르바를 제거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기때문이다. 와리스 후작은 반도로스 후작과 함께 가레신 후작이 회담장에 들어오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또다시 머리싸움을 치열하게 벌여야 할 자신의 천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오호, 가레신 후작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괜찮으 십니까?" 가레신 후작은 조금 수척해진 얼굴로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오랜만입니다." "옆에 계신 분과는 영 얘기가 안 통하시더군요. 역시, 가레신 후작님 정도는 되어야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겠습니까? 또 밀고 당기는 재미도 있고.." "껄껄껄, 과찬의 말씀이오.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반도로스 후작에게 접대를 맡겼더니, 귀하의 기대에 못 미쳤나 보오.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건 그렇고 괜찮으시겠습니까? 얼굴이 많이 수척해지신 것 같은 데 말입니다. 저야 비축해둔 지방질이 너무 많다보니 한번씩 단식도 하곤 하지만, 후작님이 그러신다면 며칠도 안 돼 신관에게 신세를 져야 할 가능성이 클 텐데요?" "하하! 무슨 말씀을. 저는 필요한 영양분을 뼈 속에 저장해두는 체질 이라 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불필요한 지방질을 늘릴 필요가 없죠. 또 이 나이쯤 되면 비만에 의한 고혈압도 두렵고 말입니다." 반도로스 후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와리스 후작과 가레신 후작을 번 갈아가며 바라봤다. 그랜딜 공작은 옆에서 보고 들으며 가레신 후작의 외교술을 배우라고 했지만, 도대체 뭘 배운단 말인가? 서로 간에 쓸데없는 잡담만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저들에게서 말이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와리스 후작과 가레신 후작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신경전은 놀라울 만큼 치열한 것이었다. 반도로스 후작에게는 잡담으로밖에 안 들렸겠지만, 그들은 서로 간에 나름대로 치열하게 탐색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또 뭘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지, 그런 모든 것에 대한 정보의 꼬투리를 잡기위한 머리싸움이었던 것이다. 반도로스 후작은 밀려오는 졸음을 억지로 참으며 계속 그들의 잡담 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근사한 대화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잠시 끄덕끄덕 졸다가 일어났을 때도 그들은 계속 잡담으로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반도로스 후작 은 외교관이라는 것이 자신의 마누라가 친구들과 쓸데없는 화제로 수다 떠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차리ㅏ리 자신의 마누라를 외교관으로 임명하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들의 잡담은 끝없이 이어 졌다. 그가 대화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만나 잡담을 나 누기 시작한 지 두 시간 정도가 흐른 뒤였다. "글쎄요, 저희 황제 폐하계서 어떤 생각으로 미란을 흡수했는지는 저희 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폐하께 여쭈어보려고 해도 지금 잠시 여행을 떠나 계신 터라 좀 곤란하군요." 가레신 후작의 말에 와리스 후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바로 이때가 적기라고 생각하고는 쐐기를 박기 시작한 것이다. "허허허, 저희 치레아 대공께서 엘프리안을 방문하신 후 모든 것이 오해 였다고 하시더군요. 그러시면서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다고 폐하께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그동안 귀국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숨기지는 않겠 습니다. 역시 서로간에 대화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에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두꺼운 철판과 같이 표정의 변화가 없던 가레신 후작의 얼굴에 동요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화는 무슨 얼어 죽을 대화, 복날 개 패듯이 팬것이 대화인가? 그리고 엘프리안을 가루로 만든 것이 대화 라는 말인가? 가레신 후작이 분노를 삭이고 있을 때, 그의 표정을 보며 와리스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까지 양국 간의 오해의 여지가 남아 있다면 치레아 대공 전하 를 다시 이곳에 오시도록 제가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그 편이 훨씬 시간도 절약될 테니 서로 간의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와리스 후작의 위협은 명확한 것이었다. 까불면 또다시 그녀를 보내서 크루마를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아, 아니 잠깐만. 그렇게 바쁘신 분을 또 다시 이 누추한 곳까지 방문 하시게 할 수는 없느 노릇이 아니겠소?" "어허~. 그래도 서로 간에 ?날 며칠 동안 말싸움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좋지 않겠소? 그분이 오시면 금방 오해도 풀릴 것이고 말이 외다." "이 사안은 치레아 대공께서 오신다고 해도 어쩔수 없는 일이오. 왜 냐하면 미란의 독립은 본인이 약속할 만한 범주를 벗어나 있소. 본인 의 생각에도 귀국과의 오랜 친분을 생각해서 미란을 지금 당장이라 도 독립시켜야 함이 옳다고 생각하오. 처음에는 야욕에 찬 코린트에 게 미란의 국민들이 불의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본국이 먼저 군대 를 투입하였소. 나중에 귀국이 다시금 전열을 갇듬었을 때, 그때 그 들을 독립시켜 주면 되니까 말이오. 하지만, 그동안 사정이 많이 바뀌 었소." "어떻게 말입니까?" 와리스 후작이 뚱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가레신 후작은 정색을 하며 차분히 설명했다. "이제는 미란의 국민들이 크루마의 우수한 정치적 지도력을 신뢰하 여 우리에게 편입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말이오. 그리고 일부 국민들 은 그 전의 나약했던 미란의 왕들보다는 크루마의 황제 폐하를 더욱 존경하며 따르고 있소. 일부 귀족들의 경우에는 아예 황제 폐하께 충 성을 맹세하며 신께 서약한 사람들까지 있는 형국이오. 이렇다 보니, 그들을 억지로 내몰다가는 미란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데, 어떻게 독립시킬 궁리를 한단 말이오? 허참, 난감하군." 사실상 미란의 국민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 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가레신 후작의 뻔뻔스러운 대답이었다. 바로 이때,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크 폰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뭣이?" 은근슬쩍 넘어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한참 말을 하고 있던 가레신 후작은 기겁을 한 듯 튕기듯 일어섰다. 그런 다음 곧장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다. 잠시 후 경비병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서는 다크의 모 습을 확인하는 순간, 가레신 후작은 와리스 후작을 째려보며 나직하 지만 잔뜩 힘을 준 어조로 물었다. "자네가 치레아 대공을 부른 것인가?" 와리스 후작은 천천히 일어서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절대로 모르는 일일세. 나는 어제 크루마에 가서 미란 건에 대 해서 협상하라는 루빈스키 전하의 지시를 받았을 뿐이야." 슬그머니 발뺌을 하는 와리스 후작의 유들유들한 표정을 보며 가레 신 후작은 더욱 화가 뻗쳤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다크의 뒤를 따라 서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는 아르티 어스를 바라보는 순간 창백하게 바뀌었다. 와리스 후작은 재빨리 일 어서서 다가오는 다크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치레아 대공 전하를 뵈옵니다." 그리고 가레신 후작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어찌되었건 상대의 신분으로 봤을 때, 정중히 예의를 갖춰야만 했 던 것이다. "그래, 자네가 여기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리로 왔지. 협상은 어 떻게 되었나?" "저....그게...송구하옵니다, 전하. 아직 진전이........" "그래? 하기야 저런 잔챙이를 상대로 밀고 당기고 해봐야 결과를 빨 리 얻어내기는 힘들겠지." 그 말에 '잔챙이'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다크는 가레신 후작에 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전에 한 번 본 얼굴인 것 같군. 그래 미네르바는 잘 있나?" 다크의 물음에 가레신 후작은 약간 비꼬아 대답했다. 하지만 말투 는 아주 정중한 것이었다. "대공 덕분에 자알 계십니다." 다크 덕분에 미네르바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다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잘있다니 다행이군. 미네르바를 불러와라. 내가 직접 협상할 테니까 말이야." 예? 하, 하지만......." "왜? 무슨 문제가 있나?" 계속되는 다크의 질문에 가레신 후작은 진땀을 흘리며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크루마의 내부 사정이 외부에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게....전하께서는 지금 이곳에 안 계십니다. 전방을 순시하러 가 셨기에....." "그래? 그러면 기다리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진을 이 용하면 금방 올 수 있을 것 아닌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 리 불러와." "아, 예." 가레신 후작은 머리를 움켜잡으며 자신을 그 망할 협상장소로 보낸 그랜딜 공작에게 달려가 상황을 보고했다. 현재는 그가 크루마의 대 소사를 책임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뭐야, 벌써 협상이 끝났나?" "그게 아니옵니다, 전하." 그랜딜 공작은 또 뭐가 문제냐는 듯 짜증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럼, 뭔가?"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이 왔사옵니다." "그래?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다크가 지닌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고 있었던 그랜딜 공작 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생각을 고쳐먹었다. 일단 상대국의 공작이 왔으니 이것을 계기로 자신이 공식적으로 외부로 등장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음, 하기야 상대국에서 공작이 왔는데, 자네를 보내어 영접하는 것 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는 하지." "그분께서는 켄타로아 전하와 직접 협상하시기를 원하고 계시옵니 다." "뭐? 크하하! 미네르바를? 그녀가 투옥된 것도 모를 정도로 정보력 이 형편없다니. 크라레스는 소문으로 듣던 것만큼 그렇게 굉장한 나 라는 아닌 모양이군." "그, 그게 아니옵니다, 전하." 가레신 후작이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했지만, 그랜딜 공작은 더 이 상 그의 말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 옆에 서 있는 엘프에게 지시 를 내렸다. "이봐." 후작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새하얀 피부의 아름다운 엘프 ?년이 즉 각 대답했다. "옛, 전하." "국무대신한테 그녀를.... 아니야. 지금은 별로 할 일도 없으니 내가 직접 만나볼까? 소문대로 그렇게 미인인지 한번 보고 싶으니까 말이 야. 하지만 아무리 호비트가 아름다워도 우리들 엘프만 하겠나?" 호기롭게 말한 그랜딜 공작은 반도로스 후작을 향해 지시했다. "안내하게. 내가 협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직접 가르쳐 주지." "옛, 전하." 당당하게 나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레신 후작은 한탄할 수 밖에 없었다. "허허, 참. 크루마 황실의 미래가 걱정되는군." "어스무스 엘 그랜딜 공작 전하께서 드시옵니다."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아르티어스가 과자를 씹어 먹다가 중얼거렸다. "그랜딜이 누구냐?" "글쎄요. 미네르바는 전방 순시갔다고 하잖아요. 아마 미네르바가 곧장 오지 못하니까 대신 접대하기 위해 나오는 녀석이 아닐까요?" "그런가? 어? 그러고 보니 엘프네."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를 한 전 더 따르면서, 실내에 들어선 후 자신 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그랜딜 공작에게 말했다. "이봐, 과자 좀더 가져와. 쩝쩝, 이거 맛이 괜찮군. 제법이야." 자신의 상관을 마치 시종 대하듯 편하게 말하는 금발 청년의 태도 에 반도로스 후작이 화가 잔뜩난 어조로 질책했다. "무례하다.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이번에는 다크가 빙글빙글 미소지으며 장난삼아 대답했다. "누군데?" "대 크루마 제국의 의회 의장이시자, 원로원 의장 대리이시며, 총사 령관 대리를 겸임하고 계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린레이크 공작 전하 와 함께 본국에 단 두분밖에 안 계시는 7사이클 급 마법을 마스터하 신 마법사협회의 부의장이시기도 하다. 지금 당장 무례를 사죄하지 않는다면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아빠, 뜨거운 맛을 보여준다는데요?" 아르티어스는 기가 막힌 듯 어이없어 하다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 다. "허이~ 참, 너 이리 와봐." 아르티어스는 멍청한 부하는 무시하고, 그 옆에서 이미 눈치를 챘 는지 벌벌 떨고 있는 그랜딜 공작을 향해 험상궂게 인상을 긁었다. 그 의 표정을 본 그랜딜 공작은 생명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그는 사 색이 된 얼굴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휘청휘청 아 르티어스에게 다가갔다. 아르티어스는 상대의 면상을 손바닥으로 힘 껏 후려친 후 투덜거렸다. "도대체가 쫄다구들 교육을 어떻게 시킨거야? 빨리 이리 튀어와!" 뒤로 나자빠졌던 그랜딜 공작은 후다닥 일어선 후 신음성을 터뜨릴 여유도 없이 재빨리 아르티어스 앞으로 달려갔다. 그런 상관의 모습을 보며 반도로스 후작의 얼굴은 천천히 핏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요, 용서하십시오. 위대하신 분이시여. 감히 위대한 일족을 몰라 뵈 었습니다. 하찮은 호비트가 어리석어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니 제 발 노여움을 푸시기 바랍니다." 옆에서 빙글거리며 가만히 보고 있던 다크가 이죽거렸다. "어? 나도 호비트인데....." 아르티어스는 힐끗 다크의 눈치를 본 후 더욱 화가 난 어조로 외쳤 다. 상대가 다크를 향해 한 말이 아님을 알긴 하지만, 아들이 그걸 탓 하는데 자신이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다크가 얼마 나 귀여운 자식인데...... "이짜식이, 그럼 내 아들이 하찮고 어리석다는 말이냐?" 아르티어스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하자, 그랜딜 공작의 안색은 더 욱 창백해졌다. 고위급 마법을 수련한 만큼 민감한 정신체계를 가지고 있던 그는 지금 아르티어스가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존 재감만으로도 기절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그의 머릿속은 두려 움에 질려 하얗게 텅 비어 있었다. 그 오랜 삶을 거치며 배운 수많은 지식도, 연룬도, 경험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완전히 무로 돌아가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저, 절대로 오해이십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저, 저는 제 부하를 두고 생각 없이 한 말이었습니다." "멍청한 자식.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미네르바를 데려와. 내 아들이 보고싶다고 하잖아. 기다리기 지루하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알 겠어?" "예,옛!" 후다닥 문을 박차며 달려가는 그랜딜 공작의 뒤통수에 대고 아르티 어스가 외쳤다. "이봐, 과자도 좀더 가져와." 곧장 감옥으로 달려간 그랜딜 공작은 다짜고짜 미네르바에게 질문 을 던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왜 드래곤이 치레아 대공하고 함께 다니는 것이오?" 하얗게 질린 상대의 얼굴에 미네르바는 고소하다는 듯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미네르바는 자신의 예상보다 그녀의 방문이 훨씬 빠르다 는 것에 일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후후, 그녀가 온 모양이군." "당신은 뭔가 알고 있소?" "물론, 드래곤은 그녀의 양아버지야. 그리고 그녀를 대단히 사랑하 고 있지.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드래곤의 관례를 깨고 엘프 리안을 날려버렸으니까." 미네르바의 대답에 그랜딜 공작은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려다. "엘프리안을 파괴한 드래곤이 바로 그, 그 드래곤이었소?" "호오, 몰랐던 모양이군. 하기야, 그녀와 그 드래곤에 대한 접대는 여태껏 내가 직접 했으니 몰랐을 수도 있겠지. 그래, 접대를 한번 해 보니까 총사령관직이 해볼 만하던가?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생명의 위협 정도가 아니라 크루마가 박살날 수도 있으니 기분이 짜릿짜릿 하지? 어떤 면에서는 자칫 지루해질수 있는 크루마의 총사령관이라 는 직책에 함께 따라다니는 청량제라고나 할까. 자극ㄱ이 조금 지나쳐 서 그렇지, 계속 그들을 상대하다 보면 꽤 재미있을 거야." "그, 그렇다면 당신은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 어내는 그 드래곤과 자주 만났단 말이오?" 미네르바는 창백한 안색의 그랜딜 공작을 바라보며 그가 지금 엄청 난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랜딜 공작 정 도로서는 도저히 크루마를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드래곤? 흥. 드래곤뿐이라면 내가 말도 안하지. 드래곤은 어떤 의 미에서 보면 상대하기 휘운 족속이야. 그들은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 주면 조용하지만, 치레아 대공은 얘기가 달라. 한때 세계 최강이라고 불렸던 키에리 발렌시아드를 박살냈을 만큼 엄청난 실력을 가졌으면 서도, 전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거든. 거기에다가, 비위를 거스르면 엘프리안 정도가 아니라 크루마도 하루아침에 박살낼 만큼 성격도 더럽지." "헉! 말도 안돼! 어떻게 호비트 따위가 그런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 질 수 있단 말인가. 그 막강한 코린트의 전권을 잡았던 키에리라도 본 국을 하루아침에 박살낸다는 호언장담을 하지 못했어." "웃기고 있네. 물론 그녀 혼자서 크류ㅜ마를 멸망시킬 수는 없겠지. 하지 만, 방금 자네가 봤던 그 드래곤이 누구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인다 고 보나? 그녀의 말 한마디면 망설이지 않고 크루마를 하루아침에 가루로 만들걸." "그, 그럴리가......" "잘 해보게. 그녀의 비위 맞추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 미네르바의 말에 그랜딜 공작의 두뇌는 맹렬히 회전했다. 이제는 대화를 종료하고 싶다는 듯한 상대의 말.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협 상을 원하는 듯한 말이 아닌가?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협상할 용의가 있었다. 그만큼 드래곤 은 두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족속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다면 그대는 그녀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이오?" 미네르바는 필사적인 상대의 태도에 빙글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칼 자루를 쥐고있는 것은 자신이라고 느낀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 주 여유 만만했다. "꼭 다룰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은 없어. 그녀를 다루는 데 실수 한 번 했다가 엘프리안이 날아갔으니까 말이야. 물론 그런 커다란 대가를 지불한 만큼 나는 그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지. 그 런 만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겠나? 하지만, 자네는 어떨까? 자네도 나처럼 실수를 되풀이하며 정보를 쌓을 텐가? 아마 아차 하다가는 도시 하나, 둘 정도는 잃을 각오를 해야 할 거야." 공갈이 조금 섞인 미네르바의 말을 듣던 그랜딜 공작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안 그래도 무시무시했던 아르티어스의 눈초 리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던 그랜딜 공작으로서는 미네르바의 말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대서야 미네르바 가 자신의 생명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 설마. 그런 말도 안되는....." 사실, 아르티어스의 그 지독한 존재감에 억눌려서 말 한마디 제대 로 못 건넸던 그랜딜 공작으로서는 미네르바라는 존재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최ㅏ고의 핑계였던 것이다. 엘프인 그에게 다크라는 호 비트의 능력은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호비트 보다 훨씬 더 민감한 정 신체계를 가지고 있는 엘프인 그로서는 에인션트 급에 가까운 그 엄 텅난 드래곤의 존재감은 공포 그 자체로 다가왔었다. 어차피 자신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드래곤이었고, 또 상대하지 않고 무 시했다가는 이곳 크루마의 임시 황궁마저 파괴될 것이 분명하지 않 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네르바의 말은 드래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매혹적인 제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별로 대단하지도 않 다고 생각하는 드래곤이 무섭다고 하자니 영 자존심이 상했기에, 그 랜딜 공작은 상대가 두려워하는 다크로 말을 돌렸다. "그 호비트가 그렇게 대단한가?" 미네르바는 자신의 위협이 제대로 먹힌 것으로 생각하고 미소지었다. 다크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데...빌어먹을 년! "당연하지." "그렇다면 자네가 크루마를 구해주게. 또다시 수도를 날릴 수는 없 는 노릇이 아니겠나." "글쎄....하지만 나한테는 그만한 실권이 없다는 것을 경도 잘 알 텐데? 나는 이미 크루마의 총사령관이 아니라 한낱 초라한 죄수일 뿐 이야." 미네르바의 빈정거림에 그랜딜 공작은 황급히 대답했다. 사실 이번 건만 처리해준다면 무슨 약속인들 못하겠는가? 이 일만 무사히 끝난다 면 확실하게 미네르바를 단두대에 올려놓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는 그랜딜 공작이었다. "그건 염려 말게. 드래곤만... 아니 그녀만 처리해주게. 이 일에 크루 마의 장래가 달려 있지 않나?" 상대의 얄팍한 술수에 놀아나기에 미네르바는 너무 똑똑했다. 그리 고 사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뻔한 상황에서 무슨 권한으로 협상을 한 단 말인가? "쯧쯧, 한낱 죄수의 신분인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녀와 협상을 한 다는 말인가?" 미네르바의 정곡을 찌르는 지적에 그랜딜 공작은 당황하며 말했다. "그, 그렇지. 그럼 내 지금 당장 황태자 전하께 말씀드리겠네." 그랜딜 공작의 말에 미네르바는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황태자 전하라니, 그건 무슨 말인가? 이건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 사항이 아닌가?" 어이없다는 미네르바의 질문에 그랜딜 공작은 당황해서 얼버무렸 다. "아아, 말이 잠시 헛 나왔군, 내 황제 폐하께 즉시 아뢰겠네. 그 럼......" 서둘러서 감옥을 나서는 그랜딜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미네르바는 절망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 폐하께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렇다면 본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직 젊은 황태자 전하의 주위에 저런 녀석들만 있다 면..." 큰소리는 쳐놨지만, 아무래도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미 네르바로서는 다크에게 웃으며 말을 건네기는 힘들었다. "여~ 오랜만이군." 슬금슬금 다가오는 미네르바를 보고 다크가 방긋이 웃으며 손을 들 어 흔들자, 미네르바는 상대의 그 귀여운 모습에 오히려 오한이 드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렇지?" 미네르바는 재빨리 시선을 옆으로 돌려 감탄사를 연발하며 과자를 열심히 먹고 있는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위대하신 분이시여. 요즘 자주 뵙는군요." 아르티어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미네르바를 째려보며 말했다. "젠장, 저 얼굴을 또 보게 되다니.. 쩝쩝, 확실히 호비트는 튀는 데 일가견이 있는 족속이란 말이야. 그때 확실히 보냈어야 하는데." 아르티어스의 말에 안색이 핼쑥해지는 미네르바를 보며, 다크가 질 책하듯 말했다. "아빠, 그만좀 해. 얘가 무서워서 말도 못하잖아." "아, 알았다." 미네르바는 대제국 크루마의 총사령관이었던 자신을 애송이 취급 하는 다크의 말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열불이 치미는 것을 느꼈 다. '얘가 무서워 말도 못해? 이런 빌어먹을 년!' 미네르바는 분노를 차분히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누군가 분노는 두려움을 초월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분노의 힘 덕분인지 미네르바는 아르티어스라는 존재를 잊고 다크와 차분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왔지? 우린 편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구." "아아, 전에 왔을 때 깜빡 잊고 간게 있어서 말이야. 미란을 돌려받아 야 하는데, 그걸 까먹었단 말이지. 너도 아마 예상하고 있었을 텐데?" 상대의 말에 미네르바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이 제안을 거 절해봐야 그 뒷감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대의 제안은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하겠지만, 자신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좋아, 독립시켜 주겠어." 화끈한 미네르바의 말에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와리스 후작과 가 레신 후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저렇듯 빨리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협상 전문가들인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그런 와리스 후작을 향해 다크가 외쳤다. "이봐, 문서 가져왔겠지? 빨리 내놔." 와리스 후작이 허둥지둥 문서를 꺼내놓고, 서명을 받을 준비를 하 고 있을 때 미네르바가 조용하게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뭐? 조건? 까불지 마." 퉁명스런 다크의 대답에 미네르바는 약간 당황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한번 들어봐. 결코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조건일 거야. 본국과 다시금 동맹을 맺는 것이 좋지 않겠어? 사실, 그런 조건이 선 행되지 않는다면 미란을 돌려받는다고 해도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 잖아." 다크는 미네르바의 말이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럴지도 모르겠군. 다시 크루마를 동맹국으로 삼는다면 아마 루빈스키가 좋아할지도...." "그리고 미란을 포기하면 본국은 쟈코니아 평원과 단절되게 돼. 그 런 만큼 미란과 본국의 동맹을 크라레스에서 주선해줬으면 해. 삼국 이 단결하여 평화를 누리자는 말이지. 그 편이 독립하게 되는 미란에 게도 좋지 않겠어? 사실 지금 미란은 독립시켜 준다고 해도, 자국을 방어할 여력 따위는 하나도 없잖아." "뭐? 방어할 여력" 웃기고 있네. 만약 또다시 미란에 손을 대면 내가 가만히 놔둘 줄 알아? 이번에는 아예 지도상에서 크루마라는 이름 자체를 없애주지." 으르렁거리며 인상을 팍 쓰던 다크는 잠시 생각하다 크게 인심을 쓴다는 듯 덧붙여 말했다. "좋아. 뭐, 그정도 조건은 들어주지." 마치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다크가 말하자 미네르바는 속으로 열불 이 치밀었지만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내 얼굴을 봐서 그렇게 큰 양보를 해줘서." 다크는 와리스 후작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기에 대충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말했다. "이봐, 뚱땡이. 방금 미네르바가 말한 조건을 들었지? 서류를 다시 작성해" "옛, 대공전하." 미네르바는 주의를 슬쩍 둘러본 후 다크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잠깐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은데...." "뭔데? 그럼 얘기해봐." 다크는 약간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곧장 기를 움직여 주위에 막을 쳤다. 뭔가 강력한 마나의 움직임을 느낀 미네르바는 놀라서 물었다. "이게 뭐지? 뭐가 우리를 둘러싼 거지?"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다며? 우리 주위에 음파를 차단하는 막을 쳤을 뿐이야." '헉! 무서운 년.." 미네르바는 아무렇지 ?다는 듯 마나를 움직여 음을 차단하는 다크 를 보며 아무래도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다 시 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 나한테는 별로 힘이 없어. 만약 네가 떠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말이야." "엘프리안이 파괴되었기에 그런가?" "응. 그래서 하는 말인데......" Chapter 11.말 한마디에 얻은 미란 그랜딜 공작과 뭔가 쓱덕쑥덕 나지막한 어조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황태자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서는 미네르바를 보고는 사무적인 어 조로 딱딱하게 말했다. "어서 오시오, 켄타로아 공작."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래, 협상은 어떻게 되었소?" "예, 전하. 드래곤은, 아니 그와 함께 온 치레아 대공은 미란의 독립 을 원하고 있상보니다." 미네르바의 말에 황태자는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미란의 독립을?" "예, 전하." "아버님이 그 땅을 획득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데, 감히 그 땅을...." "그래도 미란을 포기하셔야 하옵니다, 황태자 전하. 만약 그렇지 않 다면 이번에는 프루니아의 황궁이 파괴될 것이옵니다. 그러고도 허 락하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크루마를 멸망시키려고 할 것이옵니다. 물론, 제가 감히 황태자 전하께 뜻을 꺾으라고 압력을 가하는 것은 절 대로 아니옵니다. 그랜딜 공작에게 물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협상이 결렬된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이오니 오해 는 말아주시옵소서." 황태자는 핼쑥하게 질린 얼굴로 그랜딜 공작과 나직한 어조로 ? 마 디 주고받은 후,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군. 미란의 독립을 허가하오." "예, 전하. 그리고 치레아 대공은 미란, 크루마, 크라레스 삼국의 영 구적인 동맹 및 불가침 조약을 제안했사옵니다." "뭐! 영구적인 동맹 및 불가침 조약이라고?" "옛, 전하. 인간들의 관점에서 영구적인 조약이라고 해도 채 10년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옵니다. 하지만 에인션트 급에 가까운 골드 드래곤이 보증을 선다면 드래곤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 조약 은 지켜질 것이옵니다. 본국의 경우 크라레스보다 월등한 대국인 것 이 사실이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드래곤의 지원을 받는다면, 단 몇 시 간 만에 본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것도 사실이옵니다. 그런 만큼 두 번째 제안은 본국에 결코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하옵니다." 또다시 그랜딜 공작과 의견을 주고받은 후,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예, 전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시 그랜딜 공작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본 미네르바는 말을 이었 다. "마지막으로 드래곤은 의회 의장인 그랜딜 공작과 국무대신인 얼스 웨이 후작을 원하고 있사옵니다." 미네르바의 말에 그랜딜 공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런 그를 힐끗 바라보며 황태자는 놀라서 물었다. 왜 자신이 가장 아끼며 존경하는 두명의 충신을 드래곤이 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뭣이? 아니, 드래곤이 왜 그들을 원한단 말이오?" "저도 그것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하지만, 치레아 대공과 함께 찾아 온 드래곤에게 그랜딜 공작이 큰 실례를 저지른 것 같사옵니다. 아마 그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올지..." "그게 무슨 말이오 그랜딜 공작? 드래곤에게 무슨 실례되는 행동을 했기에 경을 원한다는 말이오?" "그, 글쎄 말이옵니다. 반도로스 후작이 조금 실례되는 언동을 한 적 은 있사옵니다. 하지만 저는 대지의 여신게 맹세코, 드래곤에게 실례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사옵니다. 믿어주시옵소서, 전하!" 자신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외치는 그랜딜 공작을 향해 황태자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 역시 자신이 가장 아끼는 부하 둘을 잃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켄타로아 공작. 경이 드래곤에게 잘 말해서 딴것으로 그의 노기를 가라앉힐 수는 없겠는가? 얘기를 들어보니 그랜딜 공작이나 어스무스 후작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보석 같은 것으로 안된다면, 그 원인 제공자인 반도로스 후작을 데려가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 나? 아무런 죄도 없는 그의 상관들을 잡아가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 은가?" 미네르바도 황태자가 그 둘을 순순히 내줄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생 각하지 않았기에 이쯤에서 뒤로 물러섰다. 그만큼 황태자를 원로원 파가 꽉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결코 조국 크루마의 미래는 밝을 수가 없었다. 엘프리안이 파괴된 후, 자신 의 책임을 통감하며 뼈 저린 죄책감에 미네르바는 스스로 투옥되었 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그녀가 듣고 본 것은 무엇이었는가? 새로운 수도를 중심으로 크루마의 국력을 재정비해야 할 때, 원로원은 그들 의 세력 확장에 혈안이 되어 움직였다. 수많은 충신들을 투옥하거나 좌천시켰다. 그런 후 그 자리를 그들의 수하들로 채워 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도가 파괴되어 모든 지휘 체계가 삐걱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지휘부의 대대적인 교체는 크루마를 거의 통제 불능에 가까운 상 태로까지 몰아가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있 는 조국이 망해가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치레아 대공 과 모종의 밀약을 맺은 것이었다. "예, 알겠사옵니다, 전하.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다시 협상을 해보겠다고 물러났던 미네르바는 잠시 후 두 명의 낮 선 방문객과 함께 황태자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기른 미청년과 금발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붉은 머리의 텅년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나온 말이 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상스러운 소리를 다짜고짜 내뱉었다. "어떤 자식이 황태자야?" 갑작스러운 드래곤의 등장에 그랜딜 공작이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 으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붉은 머리의 미청년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황태자를 발견한 듯 화가 잔뜩 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물론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오호, 바로 네놈이구나. 그래, 저엘프 떨거지 둘 달라는데 뭐 그렇 게 군소리가 많아!" 미네르바가 슬그머니 아르티어스를 말리기 위해 말을 걸었다. 황태 자에게 자신의 성의를 보이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뭐, 나중에 는 각본대로 되겠지만. "위대하신 분이시여, 제발 노여움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위대하신 분께서 지명하신 두 명은 저희 크루마의 충신이기 때문에 저희가 이 러는 것입니다. 혹시 보석이라든지 황금, 보물 기타 뭐 이런것..." 그 말에 다크의 언질을 받은 아르티어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외쳤 다. "뭣이? 크루마 자체를 없애버리려다가 아들이 말려서 가만히 놔뒀 더니 이것들이 슬슬 화를 돋우고 있네? 엘프 떨거지 둘 달라는데 뭔 잔말이 그렇게 많아?" 그 말에 미네르바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슬쩍 장단을 맞췄다. "저, 그렇다면 방금 전 무례를 범한 반도로스 후작을 데려가심 은...." "뭣야? 몇십년 살지도 못하는 호비트 따위 데려다가 어디에다 쓰라 는 말이야? 그래도 엘프 정도는 되어야 한 500년쯤 잡일이라도 시키지. 안그래? 그리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때깔도 좋아 보이잖아." 그 말에 황태자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그, 그래도...."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홱 돌리고 황태자를 향해 눈알을 부라리며 말 했다. "오호라, 그럼 네놈이 대신 죽을 때까지 레어 청소를 하고 싶다는 거 냐?" 아르티어스의 광폭한 살기에 짓눌린 듯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황태 자는 그랜딜 공작을 향해 재빨리 말했다. "그랜딜 공작, 크루마 황실은 그대의 충절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 오." 갑작스런 황태자의 돌변에 그랜딜 공작의 얼굴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저, 전하. 제게 이러실 수가...." "전하,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와 크로데인 후작 각하께서 도착하셨사 옵니다." 문이 활짝 열리며 로젠이 까미유와 함께 들어왔다. 그들을 보며 로 체스터 공작은 다급히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옛, 아버...아니, 용병대장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사옵니다. 실종 지 점에서 계속 흔적을 따라 추격해 들어간 결과 리런드 숲에서 부상을 당한 그를 발견 할 수 있었사옵니다." 로젠은 힐끗 주위를 둘러봤다. 그것을 눈치 챈 로체스터 공작은 레티 안과 까미유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 낮은 어조 로 로젠에게 물었다. "그가 부상을 입었다고? 믿기지 않는군. 누가 있어 그를 부상 입힐 수 있단 말인가?" "예, 아버님께서는 지금 신관의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그런데, 마법 사가 아버님의 기억을 통해 분석해본 결과, 믿을 수 없게도 그분과 싸 운 상대가 발록이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발록이라고? 발록이 뭔가?" 발록이라는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어리둥절한 듯 되물었지만, 같이 듣고 있던 레티안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로젠에게 물었다. "발록이 확실하다고 했사옵니까, 대공전하?" 로젠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레티안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사옵니다. 발록은 하급 마족이긴 하지만, 그 힘은 타이탄에 비교될 정도로 강력하다고 하옵니다." 발록의 힘을 설명하기 어려웠던 레티안은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기사들인 점을 감안하여 타이탄을 예로 들었던 것이다. 레티안은 주 변을 둘러본 후 발록의 위력이 제대로 전해졌는지 확인한 후 계속 말 을 이었다. "만약 흑마법사가 발록과 계약을 맺었을 때라면, 그가 발록의 마법 은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막강하기 그지없는 본체를 현세에 드러 낼 수는 없사옵니다. 그만큼 마계의 생명체가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 기 위해서는 수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옵니다. 그런데, 만약 발록 이 그런 모든 제약을 깨고 현세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그를 직 접 소환할 만큼 월등히 강한자, 즉 마왕 정도가 세상에 강림했음을 뜻하는 것이옵니다. 옛 문헌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마왕이 강 림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사옵니다." "이상하군. 경도 알고 있는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다니 말이야. 마왕 이 강림하면서 피바람을 일으켰다면, 응당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것 아닌가?" 마왕이라는 말이 나오자 로체스터 공작은 믿기지 않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왕이 강림하는 것은 거의 수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일이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인간이 아닌 드래곤에 의해 말살되었사옵니다. 우리들 마법사들은 태고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잊혀진 언어로 기록된 자료들을 배우기도 하고, 누군가 드래 곤을 사냥했을 때, 그 레어에서 찾아낸 문헌들을 통해 지식을 얻기도 하옵니다. 그 때문에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월등하게 광범위 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흠, 그런가? 경의 말대로라면 발록의 등장은 곧 마왕이 강림했다는 말이 되겠군. 참, 그러고 보니 전에 왔었던 그 라나라는 무녀 말일세. 치레아 대공을 탈출시킨..." "아, 암흑의 기운이 세계를 뒤덮는다는 아데나 여신의 신탁을 가지 고 찾아왔던 그 무녀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그 무녀 말이야. 그러고 보니 암흑의 기운이 세계를 뒤덮는다 는 말이, 마왕의 강림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의 말씀대로 발록이 출현했다면 마왕의 강림이 확실하다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겼던 로체스터 공작은 뭔가 기억이 났 다는 듯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 그렇다면 그 신탁에서 밝혔던 영웅은 치레아 대공이라는 말인 가? 사실, 그 무녀도 지금 치레아 대공에게 가 있으니 말이야." "속단하기는 이르오나, 그럴 가능성은 아주 크옵니다. 사실 그녀가 세계 최강의 검객이라는 점에는 그 누구도 의의를 제기할 수 없으니 말이옵니다." 레티안의 말이 계속될수록 주위의 공기는 무거워져 갔다. 모두들 침중한 얼굴로 레티안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흐음, 그런데 마왕이라는 존재가 있기나 한 것인가? 사실 나는 옛날 부터 내려오는 동화나 영웅담에서나 등장하는 악역이 마왕이라고 알 고 있었거든. 그런게 과연 있을까?" "물론 있사옵니다, 전하. 신관들은 신의 힘을 받아 신성 마법을 쓰고 있사옵니다. 만약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신성 마법을 쓸 수 있겠사옵니까? 마찬가지로 흑마법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사 옵고, 각국에서는 흑마법사들을 발견하는 대로 처형하고 있지 않사옵 니까? 그것도 다 마왕의 강림을 막자는 의도에서 하는 행동이옵니다." "그런가? 하지만 과거 영웅담을 들어보면 마왕도 그렇게 강한 것 같지는 않던데? 사실 아무리 전설에 나오는 영웅이 강하다고 해도, 타이 탄만 하겠는가?" "그것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하지만, 이번에 마왕의 수하라고 할 수 있는 발록에게 용병대장께서 부상을 당하신 것으로 보아 결코 마왕 의 힘을 얕볼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레티안은 일부러 키에리 전하라고 하지 않고 용병대장이라고 불렀다. 사실상 코린트에서 키에리는 이미 죽은 존재이지 않은가? 하지만 로체스터는 그런 부하를 책망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속에도 키에 리라는 대륙 최강의 기사가 발록이라는 마물에게 당했다는 것을 믿 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로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왕의 힘이 그렇게 강하다면, 본국의 힘만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그녀를 끌어들이는 것은 어떨까?" "치레아 대공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사옵니다. 하지만, 전하. 아버님의 부상을 당 하신곳은 크라레스의 영토이옵니다. 그것을 보면 몬스터들의 난동 도 마왕의 강림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리고 그녀 또 한 크라레스의 대공이 아니옵니까? 만약 그녀가 마왕과 한통속일 가 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 말에 레티안이 옆에서 조심스러운 어조로 반박했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옵니다. 대공전하." 자신의 의견이 곧바로 반박되자 불쾌한 표정으로 로젠이 말했다. "어째서 그런가?" "그녀의 양부는 드래곤이옵니다. 그리고 드래곤은 절대로 마왕과 손 을 잡지 않사옵니다." 레티안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을까? 만약 모른다면 알 려주면서 서로 간의 유대 관계를 돈독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지 않겠 나? 사실 지금터럼 어떤 찜찜한 일이 벌어질지 모를 격변기에는 그녀 와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지 않겠나? 사실상 그녀가 그 드래곤들을 움 직이니까 말이야." "좋은 생각이시옵니다, 전하." 레티안의 찬성에 힘을 얻은 로체스터 공작은 로젠에게 지시를 내렸 다. "로젠, 그대가 치레아 대공을 만나보겠나? 서로 친분도 한번 쌓아보 고, 만약 얘기가 잘 풀리면 동맹도 맺고 말이야. 어찌되었건 그녀에게 마왕이 강림했다는 사실을 알린다는 좋은 명분이 있으니까 말일세. 물론 그녀와 대화할 때 드래곤이 옆에서 듣는다면, 마왕의 등장에 대 해 뭔가 반응을 보이겠지."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로젠은 난색을 표했다. "그것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사실상 마왕이 강림했다고 해서 그녀 가 과연 흥미를 보이겠습니까? 사실, 저는 그녀를 직접 만나보지는 못 했지만, 그녀가 남의 일에는 매우 무관심하다는 정보를 들은적이 있 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화해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동맹을 제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겠지? 일리가 있어. 나도 그게 걸리는군." 이때 뒤쪽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까미유가 끼어들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옵니다, 로체스터 전하." "뭔가 좋은 생각이 있나? 말해보게." "예, 미카엘 말이옵니다. 미카엘에게 그 임무를 맡기는 것은 어떻게 사옵니까? 며칠 전, 오랜만에 제임스하고 셋이 모여서 술을 마셨사옵 니다. 그때 그가 자신이 치레아 대공하고 굉장히 친하다고 자랑을 했 었사옵니다. 자신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준다고 하더군요." "정말인가?" "예, 전하. 그날 미카엘의 얼굴이 영 엉망이었잖습니까?" "그랬지." 그날 미카엘의 얼굴을 떠올리자 왠지 기분이 떨떠름해지는 로체스 터 공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말투에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 다. "사실은 그게 밤새도록 드래곤을 말리다가 입은 상처라고 하옵니다. 코린트를 그냥 두라는 미카엘의 부탁에 치레아 대공은 흔쾌히 승낙 했지만, 원래 그 드래곤이라는 것들이 성질이 더럽잖습니까? 그래서 조국을 위해 자신이 대신 드래곤의 화풀이 상대가 되어줬다고 하더 군요. 하지만,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드래곤과 맞서 그 정도 상처 로 끝났다는 것이 말이옵니다. 어쨌든 그래서 다음날 그들이 본국에 도착했을 대는 드래곤의 분노도 완전히 풀린 상태였고, 덕분에 잘 넘 어갔다고 하더군요." 제임스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아 들이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뒤에서 해내고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 었다니... 엉망이 되어 있는 아들의 한심한 모습에 잠시나마 부끄 럽게 생각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워지는 로체스터 공작이었다. "허,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작에 말할 일이지...." 후회 가득한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까미유는 존경스럽다는 듯 말했 다. "옛, 전하 그날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사오나, 분명히 그렇게 말한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물론 치레아 대공이 옆에 있었기 에 죽을 염려는 없었겠지만, 밤새 드래곤에게 두들겨 맞으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그당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 말을 하면서도 공포에 질린 표정에 눈물을 흘리더 군요. 듣고 있던 저희들마저도 가슴이 찡해졌을 정도였사옵니다." "오오, 아레스 신께서 코린트를 도우시는군. 자네는 급히 가서 그 아 이를 불러오게." "옛, 전하." 미카엘이 까미유와 함께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왔을 대, 그곳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 자신의 귀 환을 축하하며 밤새도록 진탕 마셨던 제임스 형과 까미유 형. 그리고 옛날부터 왠지 대하기가 어려웠던 근엄한 표정의 로젠형. 그리고 웬 미인 아가씨 한 명과 아버지. 그리고 해골바가지처럼 생긴 괴상한 투 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 한 명. 미카엘은 우선 아버지에게 인사한 후 다른 형들에게 인사를 건넸 다. 그런 그를 이채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해골바가지를 쓴 남 자가 갑자기 쓱 다가서더니 미카엘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억?" 미카엘은 흠칫 놀랐지만, 상대는 미카엘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보더 니 감탄 어린 어조로 로체스터 공작에게 말했다. "자네는 늘 입버릇처럼 아들이 순 망나니라고 하더니, 나를 속이고 있었군. 아주 수련을 잘 한 제대로 된 몸이야." 상대는 로체스터 공작에게 질책하듯 말했지만, 그 눈은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는 다시 미카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동안 집을 나갔다더니 어디서 수련을 했느냐?" "예? 그냥 이곳저곳.." "그럴리가.... 네 몸은 마스터를 거의 눈앞에 두고 있는 상태다. 내가 그렇게도 혹독하게 단련시킨 로젠과 거의 비슷하다는 말이지. 도대체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느냐?" 상대의 말에 미카엘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마스 터가 될 수 있다니. 미카엘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날밤, 뭔 가 자신에게 괴상한 술법을 걸었을때, 온몸에 힘이 넘쳐흐르지 않았 던가? 미카엘은 하늘을 날것 같은 환희에 젖어 다크에게 감사했다. "...." 그 말에 놀라서 로체스터 공작이 다급하게 물었다. 자신도 처음 만 났을 때, 얼핏 아들이 꽤 상당한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정도까지 발전해 있을 줄이야. "저 정말인가?" 해골바가지의 사내는 자신이 농담을 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정 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럼, 절대 내 눈은 틀리지 않아. 물론 로젠처럼 더 이상 앞으로 나 가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젊은 나이에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마스터도 그렇게 불가능하지 않을 거야." 로체스터 공작의 눈은 어느덧 물기에 젖어들고 있었다. 키에리의 세 아들들이 모두 엄청난 검객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 그는 얼마나 부 러워했던가. 자신의 가문을 코린트 최고, 아니 대륙 최고라고 해도 좋 을 가문으로 만든 키에리를 볼 때마다 얼마간은 질투가 담긴 눈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들놈이 집을 나갔을 때,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창피했기에 한심한 놈이라고 입버릇처럼 푸념을 늘 어 놓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견 딜수 없는 로체스터 공작이었다. "메를리나,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우리 들의 아들 미카엘이 너무나 자랑스럽지 않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얼굴로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로체 스터 공작에게 해골바가지 사내가 부러운 듯이 말했다. "허~참. 나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세 놈을 쥐 잡듯이 잡았는 데도 불구하고 겨우 한 놈을 건졌는데....... 정말 부러우이."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의 얼굴이 눈물에 젖어 있는 줄도 모르고,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요 근래 들어 가장 자신감에 차있는 당당한 것이었다. "크하하핫, 내가 저놈에게 가전의 검술을 하나도 가르치지 않았는 데도 저런데, 가르치기만 한다면 마스터가 문제겠어? 아마 곧 자네 도 능가할 거야. 허허, 내 자식이지만 너무나도 믿음직스럽지 않나?" 언제나 자신을 질책하던 기억밖에 없는 아버지로부터 믿음직스럽 다는 칭찬까지 들은 미카엘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또한 계속 이어지는 자상한 어조에 그동안 쌓여왔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한 순간 훨훨 날아가는 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오, 미카엘. 너, 치레아 대공하고 아주 친하다면서?" "예, 아버님." ", 역시. 잘되었다. 그렇다면 너는 곧장 제임스와 치레아 공국으로 가거라." "예? 예. 알겠습니다. 아버님." 헤어진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친구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카엘의 기분은 더욱더 높이 날아올랐다. 그런데 아버지의 계속 이어진 말 한마디가 그의 기분을 순간 저 하늘 위에서 땅바닥으로 곧장 추락시켜 버렸다. "가서 치레아 대공과 동맹을 맺고 오너라. 내 제임스에게 상세한 것 은 다 일러놨으니 너는 그를 조금만 도와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이번 일은 사실 네가 아니면 시도할 엄두도 못 냈을 개다. 치레아 대공에게 사과하고 달래서 보낸것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동맹을 청한 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잘 부탁한다." "예." 기대에 가득 찬 로체스터 공작의 시선을 받고, 미카엘은 어쩔 수 없 이 대답했지만 마음은 별로 편하지 못했다. 헤어질 때 아르티어스의 그 흉폭했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한번 작심한 것은 결단코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임을 잘 알고 있는 미 카엘이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미카엘." 미카엘은 아버지의 칭찬에 가슴이 뿌듯함을 느꼈다. 언제 자신이 이렇게 아버지에게 따뜻한 눈길을 받아봤단 말인가. 이제 그 흉폭한 드래곤에게 맞아죽더라도 더이상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버님." 대답을 하면서도 미카엘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휴~. 이번에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할 수 없지. 갈때까지 가보 는 거지뭐. 그나저나 뇌물로 바치려면 무슨 포도주가 최고지? 젠장, 집안에 있는 거 몽땅 다 털어서 가져가 보면 알겠지." 미카엘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회심의 미 소를 지으며 방에서 부리나케 튀어나갔다. "호오, 이게 죽으려고 제 발로 기어들어 왔군." 아르티어스는 팔시온과 미디아, 가스톤이 튀어버린 후 무척이나 심심 했었다. 사실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호비 트들은 벌벌 떨기만 했다. 그런데 이놈들은 정신이 나갔는지 간혹 가 다 개기기도 했다. 물론 아르티어스가 봤을 때는 가소롭기만 했지만 그래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팔시온 일행이 도 망간 자리가 휑하니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미카 엘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오늘 밤 아들 녀석 몰래 미카엘을 어떻게 괴 롭히는 것이 좋을지 이것저것 상상하며 키득거리는 아르티어스 어르신 이었다. "이게 뭐야?" 즐거운 기분으로 밖으로 나선 아르티어스는 곧 미카엘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인상을 쓰기보다는 이상한 것을 본 듯 말했다. 미카엘의 뒤 에는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포도주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던 것이다. 미카엘은 아르티어스의 눈치를 힐끔거리다 다급히 대답했다. "포도주입니다. 어르신 생각이 나서 저희 집 창고에 있는 것을 가져 왔습니다. 마음에 드실는지...." 족히 마차 석 대는 동원해야 다 옮길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분량 의 포도주 상자를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 다음 슬그머니 다가가서 그것들 중의 한 병을 집어 들며 말했다. "흠, 뇌물로 바치기에는 그렇게 좋은 포도주라고는 볼 수 없군. 그래 서 질보다는 양으로 보충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이 가져온 거냐?" 로체스터 공작이 평상시에 마시는 것인 만큼 싸구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고급이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카엘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포도주를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창고를 몽땅 털어 가져온 것입니다. 아마 찾아보시면 괜찮은 것도 있을 겁니다." 아르티어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도주 상자를 이리저리 뒤적거 리고 있을 때, 아르티엔이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어슬렁거리며 다 가왔다. 그 또한 포도주라면 질과 양을 따지지 않는 애주가였으니까 말이다. "오호, 이게 다 포도주야? 요즘 들어 술 복이 터지는구나. 흐흐흐." 아르티엔이 흐뭇한 웃음을 짓는 가운데,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포도 주 상자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최단 시간 내에 최상급 포도 주를 찾아 꿍쳐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의 시야에 전에 한번 본 것 같은 고풍스러운 병이 들어왔다. "어엇!" 아르티어스의 놀란 듯한 신음성에 아르티엔이 괴이쩍다는 듯 의문 을 던졌다. "왜 그러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버지. 하마터면 맛도 못 보고 한 병을 깰 뻔했거든요. 헤헤헤." "별 싱거운 놈을 다 보겠군." 아르티어스는 자신을 경악하게 했던 그 병을 몰래 집어 들었다. 틀 림없었다. 밀봉까지 확실하게 된 것으로 보아 아직 한 번도 따지 않은 진품이었다. '단 세 병밖에 남지 않았다고" 웃기고 있네. 자기가 마실 것은 이렇 게 꼬불쳐놓고 말이야. 에그그, 빨리 숨겨야지. 저 노친네가 알아채기 전에 말이야.' 아그리파 1세 한 병을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공간이동시켜 버린 후, 또다시 열심히 뒤졌지만 더 이상 그것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아르티 어스가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는 것을 보고 미카엘은 슬그 머니 다가가서 은근슬쩍 말했다. "선물이 마음에 드십니까, 어르신?" 아르티엔 모르게 최고급 포도주 한병을 꿍치는 데 성공한 아르티 어스는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물론 마음에 들어. 확실히 교육 한번 받더니 자네 눈치가 많이 늘었구먼. 그건 그렇고 여기에는 어떻게 온 거야? 이거 가져다 주려고 오지는 않았을 테고 말이야." "예, 다크를 좀 만나보려구요." "다크? 집무실에 있을 거야. 이렇게 콩알만한 국가라도 제대로 챙겨 나가려면 잡다한 일이 많거든." 처음 봤을 때는 영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아르티어스가 미카엘 의 말 ? 마디에 저렇게까지 호탕한 웃음을 짓는 것을 보며 제임스 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련은 뒷전이고 언제나 말썽만 부려대던 그 철부지가 저렇게까지 듬직하게 성장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자 신도 집구석에서 수련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넓은 세상에 나가서 수련을 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해보는 제임스였다. 제임스와 함께 다크를 만나러 들어온 미카엘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 고 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듯 술자리에서 뻥을 좀 쳐놨더니 이런 결과가 나타날 줄이야. 과연 다크가 동맹을 맺 어줄지 영 자신이 없었다. 사실,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국가 간 의 거래가 얽히면 서로 양보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미카엘이 열 심히 눈치를 보는 가운데 양국의 정상은 회담을 시작했다. 제임스는 다크를 만나자 로체스터 공작에게 지시받은 대로 마왕의 강림과 현재 국제 정세를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 둥댔다. 그리고 가슴은 또 왜 이리 쿵쾅거리는 것인지 정신을 차릴수 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말은 자주 끊어졌고, 어떤 의미에서는 횡 설수설에 가까운 대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잠시후, 다크는 짜증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요점은, 시국도 어수선하니까 서로 간에 동맹을 맺자는 거 아냐?" "예? 예, 전하." "그런 말을 왜 그렇게 어렵게 빙빙 돌려가면서 하는 거야? 사람 헷갈리게 말이야. 뭐, 좋아. 미카엘이 함께 왔는데 그 정도는 들어줘야겠지. 그 래, 서류는 준비해 왔겠지?" 다크가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자 뒤쪽에 서 있던 미카엘의 입이 함지 막하게 벌어졌다. 제임스도 미카엘의 얼굴을 봐 동맹을 맺어준다 는 다크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서류를 꺼내며 대답했다. "예." 서류를 쭉 훑어보던 다크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영구적인 동맹과 불가침 협정을 맺을 대상이 왜 치레아 공국이지? 이거 크라레스 제국을 치레아 공국으로 잘못 써놓은거 아냐?" "아닙니다, 전하. 어쩌면 그 마왕의 강림과 크라레스 제국이 어떤 연 관성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정보부의 분석이.." "헛소리 하고 있네. 이건 내 발을 묶어놓고 크라레스를 박살내겠다 는 음모가 깔린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크라레스를 본국으로 생각하시는 한, 결단코 그들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전하께서 그쪽을 적으로 생각하신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흠, 그래? 좋아. 그렇다면 그 문구도 집어넣어서 서류를 다시 만들 어." "예." 제임스가 화려한 필치로 다시금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가운데, 다 크는 미카엘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아빠 품이 좋긴 좋은 모양이지? 며칠새 살이 피둥피둥 쪘는 걸." 그 말에 미카엘이 붉으락 푸르락해져서 외쳤다. "뭐야, 새꺄. 겨우 며칠 사이에 무슨 군살이 붙었다고 헛소리야." "아냐, 아니야. 왠지 얼굴에 자를르 윤기가 흐르는 게 확실히 좋아진 것 같아." "하긴, 너하고 그 누군가를 며칠 안 봤더니 입맛이 도는 개 살맛이 나 더구먼." 둘의 대화에 제임스가 기겁을 해서는 다급하게 미카엘에게 외쳤다. "자네, 치레아 대공 전하께 그 무슨 무례한 언동이냐!" "괜찮아, 괜찮아. 뭐 옛날부터 친했는데, 현재의 신분이 대수인가?" "그럼, 그럼. 너 처음에 봤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촌놈이었는데도 이젠 엄청 출세했잖아. 이것도 다 우리들이 자상하게 옆에서 보살펴 줬기 때문이 아니겠어? 하하핫." 히히덕거리며 둘이 계속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며 제인스는 부럽기 그지없었다. 지고한 신분을 지닌 그녀에게 어떻게 저렇듯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말 한마디를 건네려고 해도, 가 슴이 울렁울렁, 말까지 더듬더듬 나오는데 말이다. 모든 회담이 성공 적으로 성사된 후, 제임스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대공전하의 호쾌한 결단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라나라 는 그 수녀님을 좀 만나 뵙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뭐, 상관없어. 내가 부하에게 지시해 놓을 테니까 만나고 가라구.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미카엘을 통해서 연락하게.그는 앞으로 도 영원한 나의 친구니까 말이야." "예,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참, 그리고미카엘이 지급받은 타이탄은 반납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치레아 기사단을 탈퇴할 때 타이탄을 반납했어야 하는데, 조치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그럼, 그것을 누 구에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카르토 백작에게 말해놓을 테니, 그를 따라가면 될 거야." "예, 전하."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서려는 제임스를 다크가 불러 세웠다. "참, 잠깐만." "예? 왜그러십니까?" "그러고 보니 본국에 박아놓은 쥐새끼들 있지?" 다크의 말에 제임스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론 쥐새끼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실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난처한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다크는 매몰차게 말했다. "없다고는 하지 마. 여태까지의 정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확실해. 자네는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저...그게..." "그리고 그놈들 중에는 나하고 아주 가까운 놈도 하나 있을 거야. 나 는 그놈이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조용히 데려가게. 이젠 더 이상 배신의 쓴맛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야." "예, 옛. 전하." "나도 어느 정도는 그놈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어. 다만 부하 놈의 배 신을 확인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만약 자네가 떠난 후에도 그녀석이 남아 있다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더불어서 그런 더러운 짓거리를 시킨 코린트까지도 말이야." "옛, 전하." "안녕하셨습니까, 수녀님." 제임스가 다가오자 수녀는 조금 찔끔했지만, 그래도 환하게 미소지 으며 그를 맞이했다. "예, 제임스 님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전에는 실례를 범했습니다. 제가 한 행동으로 인해 제임스 님께 누가 되지는 않았는지요?" "뭐, 상관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수녀님을 만나 뵙고 싶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마왕의 등장 때문입니다." 제임스의 말에 라나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릴 정도로 놀랐 다. "예? 마왕의 등장이라니요?" "예. 얼마 전에 코린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뛰어난 기사 가 부하들을 이끌고 마왕의 부하인 발록과 싸운 적이 있습니다. 마법 사들의 의견으로는 발록이 본체를 드러낼 때는 마왕이 등장했다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마왕외에는 인간의 힘으로 그 마신의 본체까지 소환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답니다. 어쨌든 그가 거느린 부대가 발록 한 마리 때문에 거의 전멸당했을 정도로, 발록은 마왕의 부하라고 하 지만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도 그가 부상을 당했지만 사력을 다해서 가까스로 탈출했기에 얻 을 수 있는 귀중한 정보였지요. 그래서 아무래도 예전에 수녀님이 가 져오신 그 신탁의 검은 세력은 마왕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어 수 녀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제임스는 일부러 자신이 알고 있는 마왕에 관한 모든 정보를 라나 에게 아주 자세하게 말했다. 다크가 마왕의 등장에 대해서 별로 관심 을 가지지 않았기에, 그녀의 주위에 있는 수녀를 통해 이 사실이 전달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쨌든 이 수녀는 다크가 코린트에서 탈출하 도록 도와준 은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그렇다면 저도 어서 코린트로 가봐야겠군요. 저는 신탁에 따라 서 영웅을 도와야 할 사명을 띠고 있으니까요." "아니, 수녀님은 이곳에 계셨으면 합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탁은 케락스로 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이곳까지 흘러왔지만, 코린트가 마왕의 존재를 파악하고 그를 상대할 준비를 한다면 저는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임스는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수녀님이 도와야 할 곳은 코린트가 아닙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녀님은 지금 세계 최강의 국가가 어디라고 보십니까? 코린트, 크 루마, 아르곤, 알카사스 등등 모두 다 강력한 제국이라고 하지만 지금 수녀님이 계신 치레아 공국만큼 막강한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임스의 말에 라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럴리가......" "제말은 사실입니다. 치레아 대공은 세계 최강이라고 인정받는 검 객입니다." 제임스의 말에 라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이 그 정도였나요?" "모르고 계셨나요? 그리고 치레아 대공을 따라다니는 두 분은 에인 션트 급에 이르는 골드 드래곤들입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도 못하고 서 있는 수녀를 보며 제임스는 말 을 이었다. "아마도 신탁이 영웅을 예고한다면, 치레아 대공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수녀님은 여기서 그분을 도와주십시오. 저는 이 말을 전하 고 싶었습니다. 그럼 이만..." Chapter 12.드래곤 용병 사냥대 출격 의장은 자신의 탁자 앞에 제멋대로 서 있는 험상궂은 다섯 명의 기 사들을 둘러봤다. 과연 그들의 몸에 감춰진 마나의 기운은 1류급 기 사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의장은 흐뭇한 얼굴로 그들 중에서 제일 앞 쪽에 서 있는 사내를 향해 물었다. 그의 어깨에는 진홍색의 까마귀가 그려진 문장이 달려 있었다. "자네가 크로우 용병단 단장인가?" 의장이 묻자, 그 말을 옆에 서 있던 벨리아드가 더듬더듬 약간 서투 른 어조로 통역했다. 서방과 동방은 워낙 오랫동안 교역이 없어서 그 런지, 완전히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 로 타이렌 제국까지 끼어들어 서로 간의 언어가 상대쪽으로 유출되 는 것을 틀어막았기에 상대쪽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도 극히 드문 상황이었다. 그런 악조건에서 이 정도라도 서쪽 대륙의 언어를 배운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험상궂게 생긴 젊은이가 뭐라고 대답하 자, 즉시 벨리아드가 통역했다. "저 자가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 대승을 거뒀다는 보고를 들었네." "그는 아무래도 불만이 좀 많은 모양입니다. 자신들의 승리가 대단 치 않다는 듯 말하면서 좀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거리를 원하고 있습니다." 벨리아드가 용병단장의 말을 통역하자, 의장은 퉁명스런 어조로 물 었다. "돈은 많이 줬잖소?" "예, 의장님. 하지만 그는, 벌레 같은 몬스터는 아무리 죽여도 돈이 안 되니까 타이탄 같은 부수입이 있는 상대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실 파괴된 타이탄이라도 그 가치는 엄청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흐음. 부수입이라....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그런게 있을 리가 없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니까 말이야." 회의적으로 중얼거리던 의장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벨리아드에 게 말했다. "참, 그렇다면 저 자에게 대래곤 사냥을 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시 오." " "예? 드래곤이라고요? 잘 알겠습니다." 벨리아드의 서투른 말이 어느 정도 통했는지 알 수 없지만, 용병대 장은 함께 온 부하들과 뭔가 한동안 쑥덕거리더니 대답했다. 역시 알 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상대의 얼굴에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은 한눈 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예, 해본 적이 있답니다. 놀랍게도 그는 두어 마리 잡아본 적이 있 다고 하는군요." 용병단의 대답에 벨리아드도 놀랍다는 말투로 통역을 했다. "정말인가? 오오, 드래곤 슬레이어를 대장으로 삼고 있었으니, 피에 젖은 까마귀단이 서쪽 대륙의 최강 용병단으로 불렸겠지. 정말 대단하구먼." "예, 의장님. 그리고 그는 드래곤을 잡을 때 보통 방법으로는 힘들다 고 합니다. 일종의 요령이 필요하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 방법은 사 업상 기밀이기에 가르쳐줄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래? 하기야 저들의 비장의 수법까지 알 필요는 없겠지." 의장은 그 수법이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정말 급한 것은 그놈의 망 할 드래곤을 잡는 것이었기에 궁금증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그리고 그 준비를 하기 위해 돈이 좀 많이 필요하답니다." "그래? 돈이야 얼마든지 내주게. 그 드래곤만 잡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 아니겠나? 하지만 딴 것은 몰라도 그 드래곤의 사체 는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일러두게. 레어에서 나오는 보물이 야 저놈들이 다 가져도 상관없어. 그리고 마법 도구도... 아쉽기는 하지만 저들이 원한다면 양보해야겠지. 하지만 마법서만은 안돼. 마 법서하고 드래곤의 사체는 결단코 양보할 수 없지 않겠나?" "예, 알겠습니다." 벨리아드가 뭔가 한참동안 중얼거리자, 그 말을 들은 상대는 뭔가 알아듣기 힘든 듯 그의 동료들과 오랫동안 떠들어댔다. 그런 다음 벨 리아드를 향해 말했다. "허락한답니다. 드래곤의 고기는 저쪽 대륙에서도 고가에 매매되는 데 다가, 가죽으로 방패나 갑옷 따위를 만들 수 있기에 그 사체의 가치 는 엄청나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는 그 정도는 의뢰인의 체면을 생각 해서 자신들이 포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 훌륭하군. 그래, 혹시 지원은 필요 없는지 물어봐주게. 기사 는 좀 힘들지만, 마법사라면 얼마든지 지원해 주겠다고 말일세." "자신들에게도 마법사는 있답니다. 공간이동 좌표만 알려달라고 하 는군요." "좋아, 그럼 자네가 확실하게 일러주게." "옛." 그들이 집무실에서 나가고 난 후 의장은 한동안 드래곤을 잡을 수 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통쾌한 심정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더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의장은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한순간의 꿈이었지만 유쾌하긴 유쾌했어. 하지만,아무리 그놈들이 강하다고 해도 그렇지, 에인션트 급 드래곤을 물로 보다니... 도무지 믿음이 안 간단 말이야." 의장은 서류 한 장을 뽑아내어 거기에다가 유려한 필치로 쓰기 시작했다. <크로우 용병단, 행방불명. 그들의 생존이 확인될 때까지 타이렌 제국을 통한 1차 고용 대금의 지급을 정지할 것.> "죽은 놈들한테까지 급료를 줄 이유는 없지." 크로네티오는 불같이 분노했다. 며칠 전보다 더욱더 어마어마한 힘 을 내뿜고 있는 그가 분노하자 지하의 그조물들이 흔들리며, 대리석 조각들이 떨어져 내릴 정도였다. "서쪽 전선에서 대패를 했다고?" 대마와으이 분노에 불칸은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했다. 신장 이 거의 10미터에 달하는 이 검붉은 색의 거대한 악마는 중급 마족 계열 에 속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흉폭한 성정 을 기반으로 한 엄청난 위력의 화염계 마법은 마계에서 조차도 경원 의 대상일 정도였다. 하지만 화염계 마법을 제외한 전반적인 마법 능력 은 발록보다도 한참 뒤떨어진다는 것이 흠이었다. "예, 대마왕님. 적들이 대규모로 기습 작전을 펼쳤기에 서쪽에 투입 한 몬스터들의 거의 태반을 잃었사옵니다." "기사단은? 그ㅡ 알량한 기사단은 무얼하고 있었단 말이냐? 그것 때문 에 그놈들을 살려두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 호비트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사옵니다. 상대의 기습으로 시작되었기에, 그들은 정체를 들킬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작전을 전 개할 수 없다며, 기사단 투입을 포기했사옵니다." "뭣이? 이런 망할놈들! 내 이것들을..." "그 쓸모없는 것들을 모두 다 처치해버리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크로네티오는 분노에 찬 노성을 내뱉었다. "닥쳐라." "옛, 대마왕님." "지금은 그래도 그놈들은 아직 쓸모가 있다. 그것들을 동부 전선으로 보내 성기;사단을 상대하도록 해라." 잠시 궁리하던 마왕은 마음을 정했는지 불칸을 쏘아보며 말했다. "네놈에게 발록 열마리와 전체 마신군의 절반을 주겠다. 그 알량한 호비트 족속들을 완전히 쓸어버려라." "제게 그렇게 큰 영광을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불칸이 쿵쾅거리며 나간 후 대마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바므 로니아와 비슈누를 설득하기 시작한 지도 4일째... 어떻게 해야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지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고 있지만, 아무 래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이래가지고는 자신이 가진 힘의 절반 정도를 간신히 낼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망할 드래곤을 확 실하게 가지고 놀면서 처참하게 끝장내기 위해서는 네 명의 마왕들 중에서 최소한 셋 이상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Chapter 13.성질 더러운 아르티어스 "아웅, 며칠 침대에서 뒹굴거렸더니 온몸이 다 찌뿌둥하네. 뭐 재미 있는 일이라도 없나? 이거 심심해서 죽겠네." 한껏 기지개를 켠 후 다크가 심심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옆에 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순간적으로 얼굴에 힘줄이 뻗쳤다. 모든 일을 애비에게 떠넘기고 저런 소리가 나올 수가 있는 거 야?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놈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곧이어 아르티어 스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마음을 고쳐먹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음, 이럴때는 여행이 최고지. 한적한 산길을 걸으며 머리도 식히 고, 또 알아! 순진하고 예쁜 엘프라도 나타나면 꼬시는 재미도 쏠쏠하 잖아. 그래, 간혹 겁대가리를 상실한 오크라도 뛰어나오면 맛있는 별 식을 즐길수도 있고, 허 그러고 보니 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군." 아르티어스의 은근한 부추김에 잠시 생각해보던 다크는 뭔가 생각 이 났다는 듯 말했다. "맞아, 예전에 언제 한번 붙어보자고 약속한 엘프가 있었지. 그래, 그 녀석에게 놀러 가면 되겠네." 다크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자 아르티어스는 얼른 표정 관리를 하며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하, 오랜만에 너와 오붓하게 여행을 가면 좋을 텐데,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정말 안타깝구나." 다크가 여행을 떠나면 즉시 모든 일을 호비트 들에게 떠맡기고 여유 롭게 휴식을 취하고 싶은 아르티어스였다. "그래요. 그럼 할수 없죠 뭐." 그때였다. 뭔가 '쿠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와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무실 한쪽 구석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더 미에 파묻혀 머리만 보이던 카르토 백작이었기에 다크와 아르티어스 는 잠시 그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황 급히 일어섰는지 의자가 뒤로넘어지며 큰 소리를 낸 것이다. 그는 일 어서자마자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함께 가십시오, 어르신. 모든 일은 제가 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다크는 급하게 말을 내뱉는 카르토 백작의 얼굴을 기묘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봤다. 한 며칠 그를 못 봤기에 얼굴이 온통 퉁퉁 붓고, 푸르 죽죽하게 멍들어 있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쟤 얼굴이 왜 저래요? 아빠가 그랬어요?" 싸늘한 다크의 시선에 아르티어스는 당황해서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 놓았다. "그, 그러니까... 애들이 게으름을 피우기에 조금 교육을 시켰을 뿐 인데..." "나 모르게 아무도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요!" 다크의 눈초리가 높게 올라가며 사나운 눈빛을 보이자 아르티어스 는 당황하면서도 열심히 변명했다. "그, 그러니까 그게 말이다. 그 약속을 하기 전에 해놓은 거였거든. 사실 너도 생각해봐라. 열심히 두들겨 패고 치료 마법으로 증거 인멸 을 할 수 있는데도 내가 왜 그냥 놔뒀겠냐? 이것은 너하고 한 약속 이 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구."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죠. 하지만 제발 적당히 하세요. 아빠가 마음 먹고 패면 최소한 사망이라구요. 그건 그렇고, 카르토 백작. 아빠와 함께 가라고?" 다크의 질문에 카르토 백작은 힘차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아르티어스가 제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기를 신에게 갈구할 만큼 간 절하기만 했다. "옛, 전하. 두분께서 오붓하게 여행을 다녀오십시오. 모든 것은 제가 책임을 지고 확실하게 처리해 두겠사옵니다." "그래? 그럼 잘 됐네. 아빠도 함께 가죠." "그, 그래? 오랜만에 함께 가자꾸나." 아르티어스는 당황해서 말했다. 잠시 동안이라도 여유로운 휴식을 만끽하려던 그의 모든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르 티어스가 카르토 백작을 향해 사나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을 때, 아르 티엔이 대낮부터 무슨 포도주를 그렇게나 많이 마셨는지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뭐, 여행을 간다고?" 아르티어스는 황당하다는 듯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니, 여행 간다는 말이 언제 나왔는데, 벌써 오십니까?" "하하, 전에 네 녀석이 나를 떼놓고 놀러갔잖냐. 그래서 나도 나름대 로 준비를 해뒀지. 그래, 어디로 갈건데?" 다크가 말하는 엘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아르티어스는 대충 얼버무리며 다크에게 떠넘겨 버렸다. "그, 그.. 그러니까 얘야, 네가 말씀드려라." "카렐이라는 엘프한테 놀러갈 건데요." "그래, 카렐이라... 혹시 그 키아드리아스하고 함께 사는 별종 엘프 말이냐?" "예." 다크와 아르티엔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안색이 더욱 찌푸려졌다. 안 그래도 가기 싫은 여행을 따라가야 하는 데다가, 아버지까지 같이 간다는 것이 영 불만이었다. 뭐, 거기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하지만 사이가 좋지 못한 키아드리아스의 집을 방문해 야 한다니..." "일단 준비 좀 해야 하지 않겠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다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준비할 거나 있나요. 아빠가 옆에 있을 건데..." "그, 그래도 한 며칠 신세지려면 이것저것 좀 챙겨야 할 것도 있을 테 고, 뭐 그렇잖냐?" 황급히 얼버무리듯 대답하는 아르티어스의 말에 그런대로 수긍을 하던 다크는 세린을 떠올리고 대답했다. "그러죠, 뭐. 세린한테 준비하라고 이를게요." 다크가 나가고 나자 아르티어스는 카르토 백작을 향해 으르렁거렸 다. "너, 이자식. 빨리 이쪽으로 튀어와!" "예? 왜, 왜그러십니까?" "내가 하는 일에 끝까지 방해를 해? 넌 이제 죽었다." 아르티어스는 만족한 표정으로 손을 탈탈 털며 밖으로 나오다가 기 겁을 했다. 문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크와 수녀가 얘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을 본 아르티어스는 뭔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즉시 방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서 카르토 백작을 불렀다. "야! 야, 이자식아. 빨리 튀어와." 아르티어스에게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지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카르토 백작은 사력을 다해 엉금엉금 일어서며 겨우 입을 벌려 대답 했다. "예?? 예. 에 그어시니가? 어으시(왜그러십니까? 어르신)." "빨리 안와?" 아르티어스가 으르렁거리자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거의 실신 지경 이었던 카르토 백작이 좀비가 마법으로 움직이듯 비틀거리며 아르티어 스에게 필사적으로 걸어갔던 것이다. 카르토 백작의 육신은 이미 한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에 대한 두려움이 무 의식을 자극해 그의 몸을 힘겹지만 움직인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카르 토 백작의 멱살을 틀어잡아 쓰러지려는 그를 바로 세운후, 치료 주 문을 사용하며 투덜거렸다. "젠장, 내가 호비트의 멍 자국 따위를 없애려고 힘들게 마법을 배웠 냐?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지?" 이때, 아르티어스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부르르 진동했다. 아르티어스는 신경질 난다는 듯 멱살을 잡고 있던 카르토 백작을 놔 버렸다. 카르토 백작은 거의 반쯤 실신해 있는지 아르티어스가 손을 놓자마자 풀썩 쓰러져버렸다. 겉에 보이는 멍 자국은 없어졌는지 모 르지만, 속으로 든 골병은 하나도 치료가 안 되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보석으로 아름답게 세공된 목걸이를 쓱 꺼내들었다. "이상하네. 레어에 누가 침입한 줄 알았더니 누가 통신을 보내는 거 지?" 슬며시 주문을 외우자 곧이어 목걸이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 위로 금발을 길게 기른 근육질의 사내가 등장했다. "여어, 내 친구여. 오랜만이야." 반갑게 인사하는 상대에게 아르티어스는 버럭 화부터 냈다. "뭐야, 새꺄? 친구 좋아하고 있네." "에이, 너무 화내지 말라구.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우리가 어디 하루 이틀 사귄 사이야? 무려 수천 년을 함께한, 형제보다도 더욱 끈끈하게 맺어진 우정이 아닌가?" 느물거리는 듯한 브로마네스의 말투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는 아 르티어스였다. "우정 좋아하고 있네. 그런 놈이 나를 아버지한테 팔아넘겨? 아버지 의 마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자네 마음은 십분 이해해. 나라도 그랬 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자고 나까지 걸고 넘어져? 그러고도 이제와 서 친구와 우정을 찾냐?" "에이,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잖아. 그건 그렇고 어르신은 어때? 선 물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던?"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머리꼭지가 확 도는 것을 느꼈다. 그 포도주 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원래부터 그 반은 자기 것이 아니던가. 그것 을 선심쓰듯 선물로 써먹는 것도 모자라서 효도가 어떻고, 불효자가 어떻고 주절거려 괜히 아버지의 눈총을 받지 않았던가. 아르티어스 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겨우 참다가 선물이라는 말에 뭔가 생각났다 는 듯 브로마네스에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너 빨리 튀어오래." 아르티어스의 말에 브로마네스는 흠칫 하는 듯하더니 곧이어 억지 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뭐? 왜? 에이, 너 농담하고 있는거지? 그렇지? 하지만 농담이라도 섬뜩하다, 야."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정색을 하고는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농담 좋아하고 있네, 너 그 포도주 시음이라도 하고 아버지한테 드 린거냐?" "뭐? 내가 먹던 걸 어떻게 어르신에게 선물을 해. 왜? 선물에 무슨 문 제가 있었냐?" "야, 아무리 다급해도 그렇지. 상한걸 선물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르티어스의 말에 브로마네스는 기겁을 할 정도로 놀랐다. "뭐? 상했다고?" "그래, 밀봉이 좀 부족했는지 한 모금 드시더니 바로 뱉아내며 불같이 화를 내시는데, 애꿎은 나만 왕창 깨졌잖아." "그, 그래? 이거 큰일났구나. 어, 어쩌지? 큰일났네." 허둥거리며 당황해하는 브로마네스를 보면서 아르티어스는 속으 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행여 어디로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너,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지? 대륙 끝까지 도망쳐 봐라, 못 찾아내시는지. 그 리고 도망치다가 붙잡히면 아예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걸!" "그러니까 내가 사정하잖아. 어떻게 하지? 어쩌면 좋을까?" 역시 물에 빠져서 정신이 없으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드는 것은 당연한 심리였다. 그것을 느긋하게 즐기며 아르티어스는 아주 묵직 한 쇳덩어리를 던져줬다. 아예 이것을 잡고 그대로 침몰해 버리라고 간구하며. "어쩌긴 뭘 어째. 아버지 명령대로 해야지. 노여워하시며 그러시던 데, 아버지가 가실 때까지 내 레어에 끓어앉아서 두 손 들고 있으라 고." "뭐? 그럼 언제 오시는데?" "몰라, 임마. 나도 지금까지 깨지다가 아버지가 뭔가 볼일이 있으시 다고 어디 가셨어. 그 덕분에 지금 겨우 쉬고 있는 거 안 보여? 아마 나중에 레어에 가셨을 때 너 없으면 죽이려고 드실걸." 그 말을 들은 브로마네스는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봤다. 혹시나 자기를 놀린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다크에게 매일 혹사당하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깔끔하던 그가 눈꼽까지 끼어 있는 데다가, 왠지 수척해 보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브로마네스 는 그것이 다 아르티엔에게 들볶여서 생긴 흔적인 줄로 착각하고 안 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야, 임마! 나 지금 바빠. 언제 아버지가 오실지 모른단 말이야. 이만 끊자구." 그 말에 브로마네스는 모든 것을 체념했는지, 풀이 죽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우리, 다음에 살아서 만날 수 있는 거지?" 브로마네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다 재빨리 통신을 끊은 아르티어 스는 수백 년 묵은 체증이 쫙 내려간듯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이제야 기분이 좀 풀리는군. 짜식, 거기서 수백 년을 기다 려봐라. 아버지가 가시는지..." 아르티어스는 이번에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는 여유롭게 휘파람 을 불면서 문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도 라나와 다크는 입씨름을 벌 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너무 불안해요. 아저씨도 느끼실 거예요. 며칠 전부터 엄청나게 사악한 기운이 소용돌이치잖아요. 밤에도 몇 번씩이나 악몽 을 꾸다가 깬다구요. 그러니까..." "아, 짜증나게 계속 그러네. 마왕이니 뭐니 그런 거는 없다니까." "그렇게도 저를 못 믿으시는 건가요?" "이건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설명했잖아. 저 이상한 기운은 뭔가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만들어진 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그 이상은 국가 기밀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어. 그리고 너한테 꼭 내 가 알려줄 이유도 없고 말이야." 완강한 다크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라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동 안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이제야 신탁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좋아요. 여행에 저도 함께 데려가주세요." "그것도 안돼. 그냥 떠나는 여행이라면 몰라도 나는 키아드리아스 라는 드래곤의 둥지에 갈 거야. 거기에 너를 데리고 갈 이유가 없잖 아." "그래도..." "자자, 며칠 내로 돌아올 거야. 그동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 니까 안심하고 기다리라구." 거칠게 말을 내뱉은 다크는 더 이상의 대화는 짜증난다는 듯 서둘 러서 걸어가 버렸다. 내뱉은 다크는 더 이상의 대화는 짜증난다는 듯 서둘 러 걸어가 버렸다. Chapter 14. 엘프 최강의전사 카렐 엄청난 드래곤의 존재감에 레어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리고 있던 키아드리아스는 후다닥 밖으로 튀어나갔다.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키아드리아스의 얼굴이 소태를 씹은 듯 일그러졌다. 그곳에는 재수없는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한 늙은이와 서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쌀쌀맞게 말했다. "흥, 오늘은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찾아온 거죠?" "젠장, 겨우 날개 한번 부쉈다고 너무 그러지마." "뭐요, 겨우 날개 한번? 정말 상종 못할 드래곤이군. 내가 당신의 날개를 부숴볼까요? 그딴 소리가 나오는지..." 적당히 달래서 넘어가려고 하던 아르티어스는 같잖게 보던 상대가 계속 강짜를 부리자. 성질을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가만히 듣고 있자니까........너 정말 죽을려고 환장했냐?"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갈기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 이놈은 심심하면 애들을 괴롭히네. 너는 언제 철들래?" 그 장면을 키아드리아스는 황당한 듯 바라봤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있어서 저 개망나니 드래곤의 뒤통수를 태연히 갈길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궁금증은 곧 풀렸다. "에이, 씨. 아버지는 가만히 좀 있어봐요. 이게 자꾸 까불잖아요."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너 정말 죽을래?" 인상을 확 구기며 아르티엔이 한쪽 손을 번쩍 들자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어 비굴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키아드리아스는 '아버지'라는 말이 들리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뭔가 깨달은 듯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공손하게 말했다. "혹, 아르티엔님 아니십니까?" "여, 정말 오랜만이군. 처음 봤을 때는 날개가 부러졌다고 징징 울고 짜고 하던 꼬질꼬질한 꼬맹이더니 그동안 많이 컸구먼." 키아드리아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중히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 속마음은 결코 편하지 못했다. '울고 짜고, 꼬질꼬질 꼬맹이. 빌어먹을, 꼭 표현을 해도 그딴 식으로 하다니.' 혹시 누가 들었을까 두려워 은근히 주위를 살피는 키아드리아스였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안녕히 지내셨는지요." "오냐, 오냐. 그래, 너도 잘 있었냐?" "예" "그건 그렇고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르티엔은 자상한 눈길로 다크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내 손자 녀석이 카렐이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아르티엔의 말을 들은 키아드리아스는 왠지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예? 제 남편을 ...요? 무슨 일로 말입니까?" 이때 다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카렐과 전에 약속한 게 있거든. 그래서 약속을 지키러 왔어." 다크의 말을 들은 키아드리아스는 내심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놈, 그 애비나 아들이나 싸가지 없기는 마찬가지구만. 나이도 어린 게 계속 반말 을 찍찍 내갈기고 있어.' 키아드리아스는 분을 삭이느라 길게 한숨을 내쉰 후에 말했다. "제 남편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그쪽으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거 좋겠다, 그럼 안내해." 빙그레 웃으며 끝까지 반말을 해 키아드리아스의 복장을 뒤집는 다크였다. 다크 일행은 키아드리아스의 안내를 받아서 카렐의 집으로 갔다. 다크는 집 뒤쪽에서 명상에 잠겨있는 카렐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듯 소리쳤다. "이봐, 카렐!" 카렐은 자신의 명상을 방해하는 인물이 누구가 하여 눈을 살며시 떴다. 오랜만에 장시간 명 상을 하기 위해 키아드리아스까지 레어로 돌려보냈는데 방해를 받자 약간 짜증이 난 것이다. 하지만, 그를 부른 사람이 다크라는 것을 알자, 반가운 듯 미소지으며 일어섰다. "여, 다크, 안녕.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그리고 이쪽은....." "응, 할아버지셔." 다크의 말을 보충하듯 키아드리아스는 카렐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골드 일족의 최고 연장자인 데다가, 아주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존재니까 조심하세요.> "아, 그래. 안녕하십니까, 저는 카렐 아미타유스라고 합니다." 골드 일족의 최고 연장자라는 말에 카렐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후 이채롭다는 듯 살그머니 상대를 관찰했다. 아르티엔은 인자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가 그 엘프의 이단아라는 카렐이로군. 만나서 반갑네." "예, 안으로 드시지요. 차라도 한잔 하시지 않겠습니까?" 다음날 아침, 다크와 카렐이 검술 시합을 벌이겠다며 나가자, 키아드리아스는 연인의 실력을 믿으면서도 그에게 걱정스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모두들 화끈한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좋아서 따 라 나섰다. 아르티엔은 누가 이기든 오랜만에 보는 사움 구경에 관심이 있었고, 아르티어스는 꼴 보기 싫었던 건방진 키아드리 아스의 남편이 자신의 아들에게 박살나는 광경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카렐의 말에 다크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황금빛 찬란한 검신을 가슴으로 끌어당긴 후 고개를 끄덕여 상대에 대한 경의를 표한 후 천천히 기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둘 다 대륙에서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인물들 끼리의 싸움이었기에, 처음은 상대에 대한 탐색적으로 시작되었다. 서로의 검이 불타오르는 듯한 광채를 뿜어내며 대기를 가르기 시작했다. 둘의 치열한 접전을 지켜보며 아르티엔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와우, 저게 뭐냐? 화려한 것 하면 마법인 줄 알았더니, 검술이라는 것도 연출 효과가 대단 한데?" 아르티어스도 고래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글쎄 말입니다. 쇠막대기 가지고 하는 체조도 상당히 볼 한하죠? 역시 내 아들이라니까요." 히히덕거리면서 그들이 지켜보는 동안 두 고수는 점점 더 치열한 싸움을 전개해 나갔다. 하 지만 그 둘은 줄곧 싸우면서도 3미터 이상을 떨어지지 않았다. 지근 거리에서 어검술이 부딪치면서 간혹 엄청난 충격파를 만들어 냈지만, 그들은 떨어지지 않고 자신이 익히고 있던 모든 몸놀림을 화려하게 펼쳤다. 점 점 더 격전이 치열해지자 드래곤조 차도 인상을 찡그릴 정도로 그들의 몸놀림은 빨라졌다. 웬만한 기사들이 봤다고 해도 희미한 잔상밖에 못 볼 정도로 그 들의 몸놀림은 쾌속했고. 그들의 검은 더욱더 빨라서 새하얀 궤적만을 간신히 볼수 있을 정도였다. 꽈꽝. 한동안 치열하게 싸우던 그들은 갑자기 검을 부딪치며 엄청난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귀청을 찢는 폭발음과 함께 사방으로 그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갔기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키아드리아스나 아르티어스가 약간 비틀거렸다. 아르티어스는 가볍게 기침을 하며 손을 휘휘 내저으며 투덜거렸다. "콜록, 콜록. 젠장, 살살 좀 하지. 이게 도대체 뭐야?"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투덜기리는 아르티어스에게 시선도 보내지 않은 채, 아르티엔은 아주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검술이라는 것을 나는 여태껏 몸 풀기 위한 체조 정도인 줄 알았더니 제법이군. 아주 날카 로워. 다시 봤는걸." "참 내, 아버지가 그 때 말리지만 않았다면. 저도 저 정도는 했을 거라구요. 역시 마법보다 는 검이 훨씬 더 멋지잖습니까?" "헛소리 마. 만약 네가 계속 익혔다고 해도 체조 수준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었을 걸? 너는 저 아이들처럼 검술에 마나를 사용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무조건 근육만 잔뜩붙인 몸매를 선호했잖아. 그래서는 아무리 수련해 봐야 체조 수준이지. 그건 그렇고 정말 볼만하군." 다크와 카렐은 서로의 검을 세차게 부딪치며 약속이나 한 듯 거리를 넓게 벌렸다. 그런 다 음 곧이어 시작된 이기 어검술 간의 싸움. 서로의 검이 불타오르며 대기를 날아다녔다. 그들의 검은 마치 그 하나 하나가 의식을 가지고 있는 생명 체라도 된 듯, 마음껏 허공을 누비며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고 또 충돌하기도 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아르티엔은 놀랍다는 듯 말했다. "굉장하군. 저 하나하나가 엄청난 파과력이 담겨 있잖아? 저런 식으로 사용한다면 거리의 제약이 거의 없어지겠군. 정말 대단 기술이야. 그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멋진걸." 이윽고 어검술 하나만으로는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자, 그 둘은 본격적으로 강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검이 이기 어검술에 의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한편, 그들은 강기를 이용하여 상대 의 빈틈을 노리기도 했고, 또 없는 빈틈이라도 만들기 위해 상대를 압박해 들어갔던 것이다. 서로 간의 강기 다발이 곳곳에서 부딪치면서 엄청난 폭발음이 휘황찬란한 빛과 함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두 강자들간의 사력을 다한 대결은 엄청나게 빨랐다. 하지만 그 하나 하나에 담긴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드래곤들로서는 자연 탄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르티어스가 진정한 아들의 실력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대, 아르티엔 또한 자신이 경시했던 호비트가 발전시켜온 검술에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 정말 저게 검술이란 말인가? 대단하군. 처음에는 몰랐는데 가만히 보니까 서로 주고 받는 공격들의 태반 이상이 가짜잖아. 지근 거리에서 맞붙는다면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알기 힘들겠어. 아마 저런 식으로 상대방의 시야를 현혹시키는 거겠지. 직접 맞붙어보면 아주 상대하기가 까다롭겠어." 잠시 더 대결을 바라보던 아르티엔은 뭔가를 깨달은 듯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말도 안돼. 저 빛줄기 하나하나가 6사아클 급 마법과 거의 비슷한 위력인 것 같은 데? 아니지, 마법의 특성상 넓게 퍼지는 것에 비해 저것은 거의 한점에 모든 힘이 집중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부분이 받는 충격은 8-9사이클 이상이라고 봐야겠군. 웬만한 방어 마법은 그냥 뚫고 들어가겠어. 한낱 호비트나 엘프 따위가 저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정말 직 접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칼부림을 해대던 그들은 이윽고 서로 간에 무언의 합의 를 했는지 검을 멈추고 풀썩 제자리에 주저 않았다. 둘다 오랜만에 전력을 다했던 탓인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내가 검을 배운 후로 이렇게 후련하게 싸워본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아." 카렐의 말에 다크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온몸이 녹초가 된 듯했다. 온몬의 근육들이 탈진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그 뻐근한 느낌조차도 황홀했다. 그녀는 카렐이 자신의 몸 상태를 생각해서 이쯤에서 그친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였을 때의 자신었다면 이틀 밤낮을 싸운다고 해도 견텨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가는 팔과 다리는 아무리 내공이 받쳐준다고 해도 이것인 한계인 것이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다크에게 카렐은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자존심을 건드리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네 검술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아주 대단한 실 력이라는 것을 잘 알아.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부족하단 말이야." 카렐의 말레 약간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무공에 대한 호기심에 다크는 슬쩍 질문을 던졌 다. "뭐가?" "너의 검은 순간순간 아주 적절하면서도 매끄러운 움직임을 보여줬어. 굉장한 속도, 그러면 서도 아주 다각적인 공격력,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극심한 변화.... 이 모든 것들 때문에 나는 네 공격을 막아낸 다는 것이 처음에는 아주 힘들었어. 왜냐하면 그런 검술을 쓰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거든." 카렐의 검술은 이 세계의 모든 기사들이 그러하듯 변화보다는 한점에 집중되는 파괴력을 중 시하는 것이었기에 다크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나는 너를 압도할 수 있음을 깨달 았지. 너의 검술은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어. 엄청난 속도와 그 변화, 그러면서도 네 검격은 엄청난 힘을 싣고 있었지. 어쩌면 너와 전장에서 목 숨을 걸고 격투했다면 그 허점을 알아내기도 전에 내가 목숨을 잃었을거야. 그만큼 너의 검술은 무서웠다고 할 수 있지." 잠시 다크를 쳐다보던 카렐은 다크가 그런 대로 대담한 얼굴로 앉아 있자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검이란 한 점을 향해서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폭발적으로 터져나가야 할 텐데, 이 상하게 그것이 뭔가에 구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단 말이야. 나는 이런 느낌을 형식에 얽매어 있는 자들에게서 느꼈거든. 바로 그 느낌을 자네에게서 받았단 말이지." "구속된다고? 글쎄.....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검술하나를 연구하고 있는데, 그 때문인가? 사 실,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은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거든. 어쩌면 그때문인지도......" "검술이라고? 한번 설명해봐. 너 정도 수준이라면 사실 검술이라는 틀에 얽매어서는 절대로 안 되지. 그리고 또 틀에 얽매어 있어서는 결코 네 수준에 올라설 수가 없어." 카렐의 말에 다크는 어이없다는 듯 항변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가능했어. 그래서 나는 여태껏 내가 잘못 알고 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 었거든." 다크는 자신의 사부 유백이 창안한 방법을 카렐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검술을 쪼개고, 쪼개 고, 또 쪼개서 더 이상 쪼갤수 없을 만큼 쪼개어 그것을 개별적으로 격투에 응용하는 방법을 말이다. 사부는 이 방법을 통해 모든 검술을 '잊을 수 있다'면 최강 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설명을 한참 듣고 있던 카렐은 고래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아, 그래서 그렇게 된 거군. 그렇다면 너는 진정한 의미에서 '잊었다'고 할 수 없어. 최고 의 경지란 그런 식으로 쪼개어 나가는 것이 아니야. 진짜로 잊어야만해. 완벽하게 자신을 잊고, 검을 잊고, 정해진 투로를 잊었을 때, 그때가 돼야 검술은 새로운 경 지를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참 이상하군. 형식이라는 것에 얽매어 있는한, 의식과 한계이상으로 성장한 무의식이 충돌하면서 정신이 상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너는 어떻게 그 고비를 넘긴거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다크는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글쎄, 나는 그런 것을 한번도 느낀 적이 없었어. 아, 참. 예전에 사부님께 검술을 배울때, 어느날 명상을 하다가 검술의 이치를 깨달은 적이 있어.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무를 통한 검술은 아니었지. 하지만 그후 내검술은 비약적으로 발전 해서 사부님을 능가했거든. 그래서 나는 그런 식으로 벽을 넘었다고 생각했지." "허, 참.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보세. 자네의 사부는 마스터였나?" "마스터?아니" 다크는 잠시 생각해봤다. 유백은 조금 수준 높은 그래듀에이트 정도..... 그렇다면 마스터는 아니다. 다크의 대답을 들은 카렐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런데, 너는 그런 사부에게 검술을 익혀서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이거지?" "응." "그것은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일이야. 원래가 어떤 검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나가다 보면, 그 마지막으로 자신을 가로막는 벽이 생기지. 그것을 뚫었을 때, 비로소 그 검술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스터의 칭호를 얻을 수 있어. 그런 다음 형식 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완벽한 자유를 향해 일보를 내디딘 사람을 그랜드 마스터라고 부르지. 내가 봤을 때 넌 형식에 얽매어 있어. 네 검술이 빠르고 아주 심 한 변화를 보였기에 내가 상대하기 힘들었지만, 결국 너는 그 틀 속에서의 변화와 틀 속에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을 뿐이야. 나는 네 검술처럼 완벽한 검술을 단 한 번도 본적 이 없어. 하지만, 너는 바로 그 함정에 빠져 있는 거야. 나는 내가 익혔던 검술의 한계를 깨닫고 그 형식을 버렸어. 하지만 너는 검술의 한계를 깨 닫지 못한 것 같아. 네 검술은 너보다 한 차원 높은 나까지도 당황하게 만들 만큼 완벽했거든. 그게 바로 함정이라는 거지." 너무나도 완벽하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말에 다크는 조금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을 지 었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게 또 하나 있어." "뭐가?" "너의 몸은 이미 그랜드 마스터의 것이야. 나는 한눈에 그것을 알아 볼수 있었어. 단전에 가 득 차 있는 그 엄청난 마나.......도저히 마스터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강함이지. 정신은 마스터에 머물러 있는데, 몸은 그랜드에 들어서 있다? 이건 도저히 말도 안 돼. 의식 이 그정도 성장하지 못했다면 한계이상으로 성장한 무의식과 충돌하면서 정신이상이 되어야만 하는데, 너는 의식이 뒤떨어져 있는 채로 무의식이 스스로 동작하여 육체를 재구성했으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겠어?" 카렐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던 다크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오래 전에, 적의 계략에 빠져서 기억의 끈을 한순간 놓친 적이 있었어. 그런 다음 다시 기 억을 되찾았을 때, 뭔가 나도 모르지만 내 무공이 한 단계 더 진보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 나는 그게 마나를 거의 무한대로 쓸 수 있게 해주는 '북명신공'이라는 무공의 영향일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면 '생사경'이 가까웠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지. '생사경'은 내가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무술인이 도달 할 수 있는 최 강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거든." "놀랍군. 너는 그런 식으로 해서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을 교묘하게 피한거야. 너의 육체가 그랜드로 탈바꿈하고 있을때, 네 의식은 저 깊은 곳에 묻여 있었던 거지. 정말 하늘의 도움이 아니면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없었겠지. 그 계략이 정신이상이 됐어야 할 너를 구했다고 봐야 하겠군." "그, 그런가?" 다크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자신이 목표로 하던 생사경은 커녕, 현경에 조차 제대로 도 달하지 못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네가 연구하고 있다는 그 검술을 기억속에서 한시바삐 지워버리는 것이 좋을 거야. 그것이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을때, 그리고 자아까지도 완전하게 지울 수 있을때, 완벽한 자유라는 것이 뭔지를 깨달을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때, 다크는 한 가지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래 전 나이아드에게 잡혀서 정령계에 갔을 때.... 내공을 거의 끌어올릴 수 없었던 그 때, 자신도 모르게 발휘되었던 어떤 무공.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는데, 바로 그것이 현경의 무공인 모양이었다. 그는 그때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언제든지 응용해서 발출할 수 있는 무상 검법도. 나이아드도 관심밖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의식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현경의 발치를 슬쩍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에 잠겨있던 다크는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과거 자신이 국광의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그때 몽고벌판에서 수많은 몽고 병사들을 상대로 혼자서 분투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 때의 자신은 황궁의 무공을 사용했었다. 그 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벌떼 같이 달라붙던 적들을 베고 또 베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정도로 그는 수많은 적을 상대로 무아의 상태로 싸웠다. 황궁의 무학이 가지는 단순함, 그것을 수많은 상대를 향해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줬었다. 하지만 그것이 부담이 된다는 생각을 할 겨를 조차 없을 정도로 적은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적이고 아군이고 초식이고 생각할 겨를 도 없이 무조건 자신이 아는 모든 수법을 동원해서 공격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안정하게 흘러가던 기의 유통이 원할하게 풀리며 전대되었던 어검술....... 다크는 카렐과 대화하던 상태 그대로 멍하니 굳어버렸다. 이때,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 있던 아르티어스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이봐, 다 싸웠으면 들어와야 할 것 아냐. 네 마누라가 식사 준비까지 다 끝냈는데 말이야." 한참 카렐을 향해 말하던 아르티어스는 멍하니 앉아 있는 다크의 눈앞에 자신의 손을 쓱쓱 휘둘러 보더니 카렐에게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 무슨 짓을 한거지? 얘가 왜 이렇게 정신이 빠져 있느냐구." 카렐은 천천히 일어서면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뭔가 큰 깨달음을 얻고 있는 모양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 한 과정이 라고 보시면 될겁니다." "그거 좋은 거냐?" "물론이죠. 최고의 검객으로 성장하려면 저런 과정을 여러번 거쳐야 되거든요. 언제 끝날지 모르니 안으로 들어가서 향기로운 차라도 한잔 하시며 기다리시죠." "그럴까?" 카렐을 따라 들어가며 아르티어스는 궁시렁거렸다. "젠장, 더 이상 강해지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니야. 음식 향기가 그럴듯하다고........." Chapter 15. 드래곤과 드라군의 차이 말토리오 산맥을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울창한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는데, 복장이나 전체적인 분위 기로 보아 사냥꾼들은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숲 속의 작은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구석 구석을 뒤지면서 전진하고 있었기에 속도는 상당히 느린 것이었다. 이때 제일 앞에서 걸어가던 험상궂게 생각 사내가 말했다. "젠장, 엄청나게 광활하군. 이봐!" "옛, 단장님." "그 흉폭한 드라군(Dragoon)이 있다는 곳이 여기가 맞기는 맞는 거야?" 단장의 질문에 부단장 겸 참모 역할을 하고 있는 미노시가 즉시 대답했다. "옛, 여기가 틀림없습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저쪽 마법사들이 우리 쪽 마법사들에게 좌표 설명을 정확히 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공간이동을 마친 지점에서 북쪽으로 30킬로쯤 북상했으니 슬슬 드라군의 서식지에 들어설 때가 되었습니다." 미노시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단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드라군의 서식지면 발자국이라도 하나 눈에 띄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건 그렇고, 정찰 보낸 놈들은 아직 안 돌아왔나?" "글세요, 올 시간이 넘었는데 말입니다." 단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래? 설마.....벌써 드라군하고 싸움이 붙은 것은 아니넸지? 지원 부대를 보내야 하는 걸 까? 놈이 숲 속 깊숙이 도망가면 찾기가 힘든데 말이야." 이때 미노시가 왼쪽 숲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저쪽에서 옵니다." 미노시의 말을 증명하듯, 숲을 헤치고 십여 명의 기사들이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 다. 그들은 오크 다섯 마리를 잡아서 길쭉한 장대에 묶어서 가지고 오는 중이었다. 그것을 본 미노시는 가장 앞장서서 오는 사내에게 벌컥 화를 냈다. "이봐! 뭐하다가 이렇게 늦은 거야?" 그말에 맨 앞에서 걸어오던 사내가 등에 지고 있던 장대를 내리면서 말했다. 그는 노미란 이름의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검객이었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능 숙하게 일을 처리했기에, 보통 정찰대 혹은 전위 부대를 이끌고 선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다가 보니까 포동포동한 피그 대여섯 마리가 겁도 없이 달려들잖아. 잘 됐다 싶어서 잡 아 왔지, 뭐." "잘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위험한 드라군의 서식지니까 조심했어야지." 말을 마친 미노시는 단장의 허락을 받은 후 모두에게 식자 준비를 할 것을 명령했다. 물론 어디에서 몬스터가 출몰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그들 중의 몇 명은 경계를 서야만 했다. 오크들을 통나무에 꿰어 불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통구이를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훨훨 타오르는 불 위로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저마다 입맛을 다셨다. 오크 통구이는 아주 맛있 는 별미들 중의 하나로 용병단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던 것이다. "이쪽 대륙 놈들은 음식 아가운 줄을 모른다니까. 식량이 남아도는지, 그 많은 피그들을 잡 아놓고도 그냥 버리다니 말이야. 안그래?" 단장의 말에 엄청난 거구를 자랑하는 다쿠다가 지글거리는 오크의 넓적다리를 탐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음식 함부로 버리면 벌 받는데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단장님?" 다쿠다의 말에 단장을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런 후 그는 알카사스 놈들의 괴상한 행동 에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맞아. 전투가 끝난후에 배도 고프고 해서 피그 다리통 하나 잘라 구워 먹으려는데, 자식들 이 영 못 먹을 걸 먹는 것처럼 구역질난다는 듯 쳐다보잖아. 에이, 재수 없는 자식들." 이윽고 고기가 다 익은 듯하자, 정말을 담당했던 노미가 군침을 삼키며 말했다. "단장님, 고기가 다 익은 것 같은데 빨리 먹지요." 그는 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크의 넓적다리를 잡자, 행여 딴 놈이 잡을 세라 재빨리 자 신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그 반대편 다리를 움켜잡았다. 그런 후 다소 여유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누구 술 가진 거 없나?" "위험한 드라군을 앞에 두고 술을 마시겠다니, 제정신이야? 아차 실수하는 날에는 아무리 자이언트에 타고 있다고 해도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나! 나도 예전에 한번 방심했다가 그놈한테 물려서 자이언트의 발목이 박살난 적 이 있어. 그놈들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힘도 엄청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해. 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 식사나 해라." 단장은 근엄한 표정으로 부하를 질책한 후 넓적다리를 크게 베어 물었다. 아르티어스의 레어에서 한쪽 눈두덩이 퍼렇게 변색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열심히 청소를 하 고 있던 어스무스 그랜딜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마법 경보음을 듣고 놀라서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얼스웨 이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예, 공작 전하. 적들이 어르신의 영토 안으로 침입한 모양입니다. 여기에 있는 상황판에 따 르면 영토 외곽에서 폭넓게 포진하여 올라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큰일이군, 빨리 가보세." "예." 레어 밖으로 슬쩍 나가서 정찰을 한 후 그들은 적들의 규모와 실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에 의견 일치를 봤다. "아무래도 브로마네스 어른신께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들보고 얼씬도 하지 말라은 엄명을 내리셨는데...... 허 참, 난감하군." 어제 브로마네스가 찾아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는 오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고 앉더니 양 손을 번쩍 드는 것이었다. 꼭 아이들이 벌을 받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브로마네스를 보고, 그가 드래곤이라는 사실도 잊고 키득키득 웃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때, 그 둘은 브로마네스한테 그야말로 비 온 뒤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았던 것이다. 그후 브로마네스는 방 하나를 정해서 그곳에서 그 짓을 하면서 엘프들에게는 그 방에 얼씬 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랜딜 공작은 문 가까이까지 슬그머니 다가간 후 조용히 불렀다. "저, 어르신." 용기를 내어 불러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조금 더 큰 소리로 불렀다. "어르신!" 곧이어 짜증이 가득 담긴 브로마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큰일 났습니다." "뭐냐?" "침입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레어가 떠나갈 듯 노기에 가득 찬 브로마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망할 녀석들! 네놈들이 처치하면 될 거 아냐! 좀도둑 몇 놈 가지고 또다시 나를 귀찮 게 하면 너들을을 먼저 파묻어버릴 테다." 그랜들 공작은 기겁을 해서 물러났다. 그런 후 얼스웨이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힘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그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저놈들과 싸우는 편이, 어르신께 맞는 것보다는 낫겠지?" "물론입니다. 공작 전하." "그럼, 가자." "옛" 이윽고 그 토실토실하던 오크들이 전부 뼈다귀로 바뀌었을 때, 단장은 부른 배를 쓰다듬으 며 말했다. "드라군 사냥은 정말 오랜만이군. 드라군은 사냥하기는 아주 힘들어도 고기 맛은 아주 끝내 주지. 자네는 먹어봤나?" 주위를 천천히 살펴본 후 단장은 말을 계속 이었다. "이런 피그 따위는 드라군에 비하면 정말 먹을 것이 못돼. 아마 그 때문에 드라군이 거의 멸종당했는지도 모르지." 그말에 미노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그놈들이 드라군의 시체를 달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12미터짜리 드라군 한마리를 잡으면 고기가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우리들한테 조금 주는 것도 아까워서 하나도 안 주겠다고 하다니, 째째한 놈들." 미노시가 투덜거리자, 노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설마, 본국에도 거의 멸종됐는데, 여기에 그렇게 큰 놈이 남아 있겠어? 10미터만 되도 수지 맞는 거라구. 하긴, 드라군 고기 맛을 한번 본 사람을 절대로 못 잊지. 그것만 해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겠지만, 그 가죽하 고 뼈는얼마나 귀하냐? 게다가 여기는 마법사들이 많다니가 그것으로 무기나 갑옷 따위를 만들어서 고가에 팔 수 있을 것 아냐?" 부하들의 잡답이 계속되자 단장은 약간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야야, 그건 놈을 잡았을 때 얘기고..... 일단 드라군을 포착하면 무엇보다 확실하게 한번에 잡아야 한다. 놈의 발은 정말 빠르거든. 상처만 입히고 놓치면 아예 추격을 포기해야 하지. 내 경험에 의하면 놈의 발을 묶는 것이 이 사냥이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관건이 될거야. 너희들은 드라군이 나타나면 내 명령대로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기만 하면 돼." 이때,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작은 덩치의 라누마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는 행동이 매우 재빠르고 전투 실력이 탁월하기에 동료들 사이에서 돌격대장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언제나 전투가 시작되면 가 장 앞에서 싸웠는데도 아직까지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단순히 빠르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수 있었 다. "그런데, 단장. 여기서는 드라군이 보물도 모으는 모양이죠?" 단장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말했다. "글세.... 하기야 대륙이 다르니까 그런 변종이 나올 수도 있겠지. 사실 별의 별 데빌들이 다 돌아다니는 곳이니까 말이야. 여기 와서 싸워봤잖아. 이쪽 대륙의 데빌들은, 덩치는 우리쪽과 비슷하고 생긴 것도 마찬가 지지만, 그 힘이 두배는 되는 것 같더라. 거기에다가 수만마리씩 여러 종류의 데빌이 뭉쳐서 다니니까 상대 하기가 아주 까다로웠잖아. 그걸 보면 이쪽 데빌들은 뭔가 다른 모양이지." 라누마는 설마 하는 듯 억지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보물을 모은다면........설마 테로돈을 말하는 것은 아니겟죠? 하하." "하하하, 당연하지. 어떻게 감히 테로돈을 자이언트 가지고 잡을 생각을 한단 말이냐? 이봐, 드라군이라고 한것이 확실하지?" 단장도 불안감을 웃음으로 흘리며 호쾌하게 대답했지만, 아무래도 못 미더웠는지 미노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만큼 테로돈은 공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물론입니다. 드래곤이라고 하더니 이쪽에서 못 알아들으니까 엄청나게 거대한 도마뱀이라 고 했잖습니까? 이봐, 너도 그때 들었잖아. 그녀석 발음이 좀 안 좋아서 그렇지 드라군이 확실할 겁니다." "그래? 자, 이제 잡담은 그만 하고 전진하자." "알겟습니다. 단장님. 자, 모두들 짐을 챙겨라. 이동한다." 모두들 전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붉고 푸른 빛 덩어리들이 엄청난 기세로 주위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덩어리가 지면에 닿는 즉시 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쾅! 사방에 폭발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모두들 그 폭발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허둥지둥 피하 기 바빴다. 그런 가운데 행동이 재빠른 라누마와 미노시가 타이탄을 꺼냈다. "이봐, 놈들은 몇 명 안 되는 것다. 미노시 자이언트로 빨리 앞에서 막아." "맡겨주십시오, 단장님." 미노시가 타이탄으로 동료들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 라누마는 이미 단장의 명령을 기다리지 도 않고 앞으로 돌진해 들어가고 있는 상태엿다. 단장은 미노시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세밀히 전방을 살펴볼 수 있었다. 곧이어 그는 자신들을 향해 공격 마법을 퍼붓고 있는 상대를 발 견했다. "어? 귀가 뾰족한 거 보니 저거 샬로테 아냐? 왜 샬로테가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그말에 미노시가 타이탄에 탄 채 답해왔다. "글쎄요, 혹시 저것들 숲의 파수꾼이라고 자처하고 있으니까 몇 마리 남지 않은 드라군을 보호하기 위해서 저러는게 아닐까요?" "에이,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별것들이 다 사람 고생시키는 군." "저도 돌진할까요? 상대는 몇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아니, 라누마 혼자서도 충분해. 혹시 저것들 외에도 있을지 모르니까 자네는 자이언트에 탄 상태로 경계 태세를 유지해." "옛." 하지만 라누마는 엘프를 단 한 명도 해치우지 못한 채 돌아왔다. 산꼭대기까지 재빨리 돌진 해 올라갔지만, 상대는 어디로 튀었는지 흔적조차 모호할 정도로 모습을 감춰버렸던 것이다. "젠장." 타이탄을 돌려보낸 후 투덜거리면서 라누마가 털레털레 걸어오는데, 방금 전 엘프가 사라졌 던 곳에서 또 다른 근육질의 잘생긴 금발 사내가 엘프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미노시가 말했다. "단장님, 아무래도 저놈들.......혹시, 경쟁자가 아닐까요?" "경쟁자? 아하, 그러니까 저놈들도 드라군 사냥을 하기위해 여기 왔다는 말인가?" "예, 안 그러면 갑자기 우리들을 공격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저놈들은 우리들을 내쫓고 드 라군을 독식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새로 나타난 상대를 보자 다쿠다가 앞으로 쓱 나섰다. 그는 크로우 용병단원들 중에서 가장 키가 컸고, 또 머릿속까지 근육질일 정도로 우람한 몸매를 과시하는 사내였다. 그는 저쪽에 자기 처럼 엄청난 근육질의 사내가 있다는 것을 본 순간 치밀어 오르는 호승심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 던 것이다. 그는 건들거리면서 상대를 도발했다. "이봐, 네놈도 힘 좀 쓰게 생겼는데, 나하고 한 판 할 용기가 있냐? 응?" 거리가 워낙 떨어져 있었기에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는지, 금발의 사내는 인상을 일 그러뜨리며 투덜거렸다. "젠장, 뭐라고 하는 거야? 빌어먹을 놈들. 인상의 봐서는 분명 내욕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 잠시 혼자 씩씩거리던 금발의 사내가 갑자기 주먹을 꽉 쥐자 우두두둑하는 소리가 들려왔 다. 그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외쳤다. "이리로 올라와라. 내 지옥이 뭔지 가르쳐줄 테니." 다쿠다는 상대가 건방지게 뭐라고 씨부렁거리며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빌어먹을 자식, 올라오라면 내가 못 올라갈 줄 알아?" 다쿠다는 잠시 단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장은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단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그 육중한 몸매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산꼭대기를 향해 달려 올라갔다. 그리고 곧이어 시작된 육중한 사내들끼리의 육박전, 힘으로는 금발의 사내가 조금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기술 쪽은 다쿠다가 한 수 위였다. 한동안 탐색전을 벌이던 다쿠다는 이윽고 빈틈 을 잡고 그 육중한 근육질의 주먹으로 금발 사내의 면상을 직격했다. "퍽!" 상대를 얕보고 있던 금발의 사내의 머리가 충격 때문에 확 튕겨질 듯 젖혀졌다. 그리고 곧 그림으로 그린것 같은 잘생긴 그의 코가 찌부러진 것이 보였고, 거기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금발 사내는 슬쩍 코를 만져보다가 손에 붉은 액체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분통을 터드리고 야 말았다. "이런 벌레 같은 자식! 죽여버리겠다." 곧이어 금발 사내의 손은 희뿌연 오러를 뿜어내기 시작했고, 도저히 근육과 뼈로 이뤄진 손 으로는 만들기 힘든 동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퍼버벅! 한동안 북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금발 사내가 엄청난 힘으로 다쿠다를 두들겨 패기 시작한 것이다. 한참 동안 다쿠다를 두들겨 패던 그는 이미 기절해 있는 다쿠다를 발로 차서 산 밑으로 굴러 떨 어뜨렸다. 그런 다음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 올라오고 있는 용병기사들을 향해 엄청난 마법 공격 을 퍼붓기 시작했다. 엄청난 폭발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위로 돌격했던 기사들이 재빨리 뒤로 도망쳐 내 려왔다. 단장은 한심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전장의 사신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은 우리가, 한낱 마법사 한놈 때문에 쫓겨 내려온다 는 말이냐?" 그 말에 노미가 옆에서 발끈한 듯 대답했다. 아무래도 단장의 말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상대는 엄청난 마검사입니다. 단장, 여태껏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녀봤지만, 저렇듯 폭발적 인 마법 공격을 가해오는 놈은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쪽이 불 리한 것이 사실입니다." "멍청하기는, 모두들 자이언트를 꺼내라. 아무리 마법 공격이 강력하다고 해도 자이언트의 철갑을 뚫겠는냐? 모두 돌격하라!" 여기저기에서 타이탄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광폭한 웃음을 터뜨리며 마법 공격을 가하고 있 던 금발 사내도 약간 움찔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40여 기가 넘는 타이탄들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마법사라면 위압감부터 느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욱 기고만장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그가 서 있던 산정상은 푸른빛에 뒤덮이고 말았다. "저게 뭐냐?" 모두들 갑자기 일어난 괴이한 사태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곧이어 그 광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존재. 50미터는 족히 될 것같은 장대한 체구의 레드 드래곤이 빛무리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 이다. "이럴수가! 테로돈이다! 모두들 피해라." 단장의 명령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산위로 돌진해 올라가던 타이탄들은 드래곤을 발견하자마 자 기겁을 하고는 모두들 재빨리 뒤로 돌아서 아래쪽으로 사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맹렬히 돌격할 때 의 폭발적인 기세와는 달리, 온통 흩어져서 도망가는 그들이 표정은 겁에 질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여유 있게 바라보던 레드 드래곤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 다. 몸이 완전히 부풀어 오를 때까지 숨을 들이쉰 레드 드래곤은 그 정점에서 입을 쩌억 벌리며 폭발적으로 숨을 토해냈다. 입속에서 시뻘건 광채가 맺히는가 싶더니 한순간 어마어마한 붉은빛의 다발이 앞 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뒤쪽으로 쳐졌던 타이탄들부터 엄청난 열기에 먼지처럼 흩날리는 것이 보였고, 곧이어 그 모습조차도 검붉은 화염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곧장 이어지는 엄청난 대폭발........ 모든 것이 끝난 후 산 정상에는 금발의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화산이 대폭발이라도 일으킨 듯 주위는 온통 잿더미로 화해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허연 연 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는 산불이 났는지 검붉은 연기가 화염과 함께 치솟고 있었다. 군데군데 반 쯤 녹아버린 타이탄의 잔해가 방금 전에 있었던 말도 안 되는 붉은 빛다발의 위력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한참동안 자신이 만들어놓은 작품을 감상하고 있던 그는 찌부러진 코를 쓱쓱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내가 너무 심했나? 그래도 시야가 확 트여서 좋긴 하구먼. 젠장 그런데..... 아르티어스에게 는 뭐라고 변명하지?" Chapter 15. 신탁의 영웅은 누구? 아직도 여름의 열기를 간직하고 있는 태양이 맑게 갠 하늘 위에서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겨울의 영향 때문인지 한낮인데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 와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꽃잎들을 흔들고 있었다. 거대한 정원에 피어있는 수많 은 꽃들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화려하면서도 포근한 평화로움을 자아내 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여인은 그런 대지의 축복에 눈길조차 주 지 않고 습관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이 벌써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아데나 여신님, 저 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나는 그 커다란 갈색 눈망울로 잠시 드높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으며 다시금 시선을 정원으로 옮겼다. 수많은 화초들이 가을을 맞이하여 저마다 자신만의 꽃을 피우며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들의 아름다움이 눈길에서만 머물뿐, 가슴속까지 와 닿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저씨가 싫다고 했어도 따라갔어야 했어. 그래야....." 그때, 그녀의 눈에 뭔가 휙하고 건물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기사? 아니야. 기사가 마음먹고 움직인 거라면, 나라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빨랐을 거야. 그렇다면?' 라나는 재빨리 몸을 놀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엔 대공 관저를 호위하기 위한 약간 의 병사들만 남아 있을 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대공 직속에 2개 사단이 있었지만, 그들은 거의다 아르곤 국경이나 말토리오 산맥 쪽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리고 평상시에는 제2친위기사단이 머물러 있었지만, 그들도 모두 전선으로 이동해버려 텅 비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사람과 싸우는 것에 대한 교육을 정식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녀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을 정도 였다. 그녀는 보통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 곧장 그 칩입자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던 것이다. '첩자인가? 아니면 마법사?' 그녀가 정체불명의 인물을 향해 쏟살같이 거리를 좁히고 있을 때, 상대는 슬그머니 대공의 침실과 집무실 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원하는 뭔가를 발견할 수 없었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뭔가 궁리를 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때 그 사내와 돌진하고 있던 라나의 시선이 뒤엉켰다. 정체불명의 인물은 멈칫하더니 재 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뭔가 마법이라도 쓰는 것인지, 상당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 다. 하지만, 그녀도 무녀로서 근육 강화의 신성 마법을 쓰고 있었기에 쫓아가는 데 크게 어 려움은 없었다. "서라!" 하지만 도망치는 놈이 서라고 한다고 서겠는가? 상대는 뒤를 힐끔 거리며 열심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자연히 쫓고 쫓기는 추격이 시작되었다. 라나는 있는 힘을 다해 쫓아 갔지만, 괴한과의 거리를 조금도 좁힐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괴한은 대공관저에서 한참을 벗어나 숲에 이르자 드디어 라나에게 공격 마법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괴한은 라나 를 죽일 생각이 없는지 처음부터 그녀를 목표로 하지 않고, 그 주변에 마법을 직격시켜 그 녀로 하여금 포기하고 돌아가게 유도하고 있었다. 꽝. 주위에서 불꽃이 작열하며 굉음을 울렸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상대를 쫓아갔다. 한참을 더 달리자 도망치는 상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괴한은 공격마법과 속도 증가의 마법을 한꺼번에 쓰는 것이 힘에 겨운 것이 분명했다. 그것에 힘을 얻은 라나 는 더욱 용기를 얻어 앞으로 달려나갔다. "거기 서!" 이때 괴한은 다시 한 번 라나를 향해 공격을 가했다. 이번에는 라나의 주위를 향한 위협 공 격 정도가 아니라, 그의 옆에 서 있는나무를 향해서였다. 아름드리나무의 밑둥이 박살나면서 맹렬한 기세로 쓰러졌다. 그것도 괴한이 어떤 교묘한 수법을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라나와 그 괴한 사이로 쓰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무는 바로 지척에서 쓰러져 내리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옆으로 돌아간다면 괴한을 놓칠지도 알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나무의 위쪽 으로 뛰어오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완전히 나무가 주저앉은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너무 높았다. 또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금 지금의 속도로 달릴 수도 없었다. 라나는 이를 악 물고 더욱더 힘껏 달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괴한을 추격하려면 나무가 쓰러지기 전에 그 밑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쿵! 굉장한 소리와 함께 라나의 비명이 숲 속에 울려 퍼졌다. 간발의 차이로 나무 밑을 통과하 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라나가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괴한은 속도를 멈추고 섰다가 이쪽으 로 몇 발자국 다가오는 듯 하더니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곧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발길을 되돌렸다. "젠장, 젠장, 제엔장!" 괴한은 라나에게 다가와서 마법을 사용해서 굵은 가지를 잘래내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 다. "괜찮소?" 라나는 상대가 아주 특이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나무에 깔린 것을 보고 도 망치지 않고 돌아와서 도와주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지 만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에 잠시 망설인걸 보면 도망쳐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 됐다. "예. 덕분에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라나는 잠시 상대를 관찰한후 말을 이었다. 이마의 땀을 훔치는 사내의 얼굴은 상당히 준수 한 편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라나는 더욱 아리송함을 느꼈다. 그녀가 국가의 일을 잘 모르기 는 하지만, 그래도 마법사를 첩자로 부려먹지는 않는 다는 상식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아 무래도 고생해서 키운 마법사를 첩자나 정탐꾼 정도로 소모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노릇 인 것이다. "무슨 일로 대공 관저를 정탐하시는 것입니까?" 라나가 상대를 자세히 관찰한 것처럼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라나가 신성 마법으 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잠시 노려보더니 통명스럽게 말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렇소. 말이 나온 김에 물어봅시다. 대공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는 것이오?" "전하께서는 지금 여행을 가셨습니다. 언제 돌아오실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소. 휴-.전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겨우겨우 이곳까지 왔건만...." "대공 전하를 뵙기 위해 오셨다면, 응당 정문에서 경비병들에게 면회를 신청하시면 될 텐데 요. 왜 그렇게 숨어서 안을 살피신 거지요?"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마도 그대가 무녀가 아니었다면, 당신을 죽였을지도 모르오." "예?" "나는 마왕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치레아 대공 전하를 찾아왔오. 지금 크라레스 내부에는 마왕의 뿌리가 너무 깊게 내려 있는 상황이라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 문이오." "그렇다면 왜 저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상대는 손가락으로 희뿌연 빛을 발하고 있는 라나의 손을 가리켰다. "신성 마법 때문이오. 마왕을 따르는 자라면 절대로 신성 마법을 쓸수 없을 테니까 말이오." "아, 그렇군요." 라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후, 상대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당신을 믿지요?" 그말에 상대는 피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믿건, 그렇지 않건 그런 당신 자유요. 왜냐하면 나는 이제 떠날 거니까 말이 오. 그럼, 잘 계시오." 상대가 미련없이 돌아서서 걸어가자 라나는 당황해서 외쳤다. "당신은 어떻게 마왕의 존재에 대해서 아시게 된 거죠? 얼마 전에 코린트의 제임스 드 발렌 시아드 후작님도 대공님께 마왕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러 오셨어요." 그녀의 말이 상대의 흥미를 끈 것은 확실했다. 상대는 다시금 되돌아와서 당혹감을 감추며 질문을 던졌다. "그말이 정말이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그건 저도 잘 몰라요. 나중에 카르토 백작님께 들으니까 코린트와 치레아 공국 사이에 동 맹 및 불가침 협정이 맺어졌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약간 놀란 사내는 잠시 후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분명히 크라레스 제국이 아니라 치레아 공국과의 동맹이오?" "예, 그렇게 들었습니다." "허 참, 그렇다면 그분께서도 크라레스를 의심하시는 것이 분명하군. 무녀님도 오래 살고 싶 다면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코린트나 뭐 그런 딴 나라에 가시란 말이오. 지금 마왕이 그 힘 을 키우고 있는 곳은 크라레스의 수도인 크라레인 시요. 마왕의 꼭두각시가 된 인간이 얼마 나 많은지 알 수 없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이 땅을 벗어나는 것이 좋을 거요." "분명히 크라레스라고 하셨습니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나는 뭔가 깨닫는 것이 있었다. 지금 자신이 영웅이라고 생각하 고 있는 치레아 대공은 이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아데나 여신의 뜻인지, 자신은 이곳에 남 아서 이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신탁에 의하면 그녀는 영웅을 도와야 할 사명을 지닌 자. 그렇다면 어쩌면.... 이 남자와 치레아 대공을 만나게 하는 것도 그 사명의 하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진짜 자신이 영웅임이 확실하다면 마왕의 세력권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서 힘을 기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마왕의 토벌을 위해서....... "지금 대공 전하께서는 키아드리아스라는 드래곤을 찾아가셨습니다. 아마 지금 그의 레어에 계시겠죠." "키아드리아스라.... 꽤 유명한 블루 드래곤을 찾아가셨군요. 참, 그런데 아르티어스님도 함께 가셨습니까?" 상대가 아르티어스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고 있자 라나는 더욱 신뢰감을 가질수 있었다. "예, 지금 바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분께 빨리 알 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예. 그럼 이만...." 상대가 인사만 하고는 떠나려고 하자, 라나는 다급한 어조로 사정했다. "이보세요.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예? 하지만....." "저는 아데나 여신님을 섬기는 무녀, 라나 슈바이텐베르크 수녀라고 합니다." "아, 예. 저는 다론 패터슨이라고 합니다. 그냥 다론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모두들 그렇게 부 르니까요." Chapter 16. 밝혀지는 마왕의 정체 드래곤의 경우 한번 둥지를 틀게 되면 세가지 정도의 행동 양식을 보인다. 그 첫 번째는 자 리를 잡은 드래곤이 매우 온순해서 죽은 듯이 살고 있기에 아예 사람들이 자신들의 뒷산에 드래곤이 사는지조차 모르는 경우이다. 이런 식으로 틀어박혀 있는 드래곤을 수소문헤서 찾 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두 번째는 자리를 잡은 드래곤이 매우 호전적인 경우다. 이 경우는 자신의 영역에 침입하는 모든 생명체를 아예 말살해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예 소문을 퍼드리고 다닐 생존자가 없어지기에 그의 레어가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자는 말이 없으니까. 세 번째는 위협을 통해 평화를 얻고자 하는 경우이다. 지나가는 호비트 몇마리를 잡아다가 잔뜩 겁을 준 후에 놔준다. 이때 명심할 것은, 다음에 또 걸리면 잡아드실 것이라는 협박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몇번 해놓으면 그곳에 드래곤이 산다는 소문이 그 일대는 물론 대륙 전체에 쫙 퍼져 서 아무도 접근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드래곤의 보물을 노린다든지, 혹은 드래곤을 잡아 영 웅이 되고 싶다는 망상을 품은 놈들의 공격을 가끔 받을 우려가 있다. 키아드리아스의 레어는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쫙 퍼져 있는 그런 곳이었기에 다론은 찾아가는 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둥지가 워낙 널리 알려져 있으니 드래곤의 유형들중에서 세 번째에 해당되는 그런대로 온순한 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하지만 그건 어마어마한 착각이었다. 키아드리아스는 정확히 말하면 이곳에 없는 네 번째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왜 네 번 째 유형이라고 정의하는가 하면, 그런 독특한 성격의 드래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네 번째 유형이라는 것은 예전의 아르티어스처럼 자신의 영역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을 들볶으며 괴 롭히는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 악행에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 도 여러 차례의 토벌대가 동원되기도 했지만, 토벌대 중에서 살아서 돌아온 자는 전무했다. 그러다가 요 근래 몇 년간 조용히 지내고 있는 중인데, 주위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 점을 더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성격이 매우 특이한 드래곤들을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예의상 드래곤의 영역 밖에서 공간이동한 후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다론이 라나에게 말을 걸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특이한 성격이라니요?" "아르티어스님도 그렇고 키아드리아스 님도 그렇고...... 모두다 아주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 들이라는 말입니다. 아르티어스 님의 경우 아주 오래전에는 광룡이라는 칭호를 받으셨고, 키 아드리아스님도 그건 마찬가지거든요." "그, 그런가요?" "예, 그분들의 레어가 있는 장소는 웬만한 지리 서적을 조사해보면 거의 다 나올 정도로 유 명하죠. 물론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면 아르티어스님이 그 뒷처리에 있어서는 좀더 치 밀하다는 것 정도죠. 사실 그분은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예?" 의아해하는 라나를 보고, 다론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말토리오 산맥의 폭군, 혹은 광룡이라고 불렸던 드래곤을 잡은 드래곤 슬래이어의 이름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 그, 글쎄요." "아르티어스라는 용사죠." "예에?" "코린트에서 성장하셨으니 잘 모르시겠지만, 「아르티어스 애가」라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찬미한 노래는 말토리오 산맥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겁니다. 이것 도 예전에 크루마에서 아르티어스라는 드래곤을 조사해달라는 요청 때문에 알아낸 사실이 죠. 여태껏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다가 그게 심드렁해지자 아주 기발하게 뒷마무리를 해버리 는 것을 보면 아르티어스님도 아주 재미있는 드래곤이죠."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며 걷다 언덕을 넘자 눈앞이 탁 트여있었다. 자신들의 발밑으로 드넓은 구릉지대가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다론은 구릉지대 옆에 쭉 나 열되어 있는 산들을 가르키며 말했다. "아마 키아드리아스의 둥지는 저쪽에 있는 산들 중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앞으로도 갈 길이 험하군요. 하기야 드래곤의 영토는 레어를 중심으로 반경 수십킬로미터 씩이나 된다고 들었으니까 당연하겠죠." "자, 가시죠. 구릉 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것보다는 이쪽으로 질러가는 것이 시간을 단 축할 수 있을 듯합니다. 힘은 더 들겠지만요." 이리저리 경치를 둘러보던 라나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다론 님은 저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쪽에 돌무더기들이 많이 보이는데..........." "돌무더기라구요?" 다론은 드래곤의 레어라면 높은 산의 중턱쯤에 있을 거라는 생각에 레어가 있을 만한 곳만 둘러봤을 뿐 밑에 펼쳐진 구릉 쪽은 자세히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클레어보이언스(Clairvoyance:천리안)!" 다론은 지체없이 마법을 사용하여 구릉을 자세히 관찰했다. 과연 수많은 돌무더기들이 보였 다. 그리고 그 돌무더기의 사이에 집이 한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군요. 이런곳에 집이 있을 턱이 없는데..........." "혹시 저것이 키아드리아스의 레어가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드래곤이 레어 대신 집에서 산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일단 한번 내려가보는게 좋지 않을 까요? 혹시 저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면 키아드리아스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죠, 그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이 집을 향해 한참 걸어갈 때, 아름답긴 하지만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는 왜 왔지? 길을 잘못 든 거라면 좋게 말할 때 돌아가라." 그들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곳에는 초록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기 른 엘프 여성이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나무위에 앉아 있었다. 다론은 정중하게 그녀에게 물 었다. "혹시 저 집에 사십니까?" "그렇다면?" "이 근처에 키아드리아스님이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 위치를 아십니까?" "흥, 그 블루 드래곤에게는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설마 너희 둘이서 드래곤 슬레이어 놀 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다론은 깜짝 놀라 연신 손을 흔들며 말했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그분의 레어로 가셨닫고 하셔서요." "혹시 다크라는 꼬마 계집애를 만나러 온 거냐? 키는 조그마하고 금발에다가 갈색 눈을 지 닌 깡마른 계집애 말이다." 상대가 치레아 대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꼬마 계집애라고 하는 것을 보고, 다론은 존 경 어린 어조로 대답했다. 혹시나 상대가 키아드리아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젠장, 요즘은 별의별 잡것들이 다 이곳에 기어들어 오는군." 엘프는 턱짓으로 집을 가리키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저쪽에 가봐. 거기에 있을 거니까 말이야." "예, 감사합니다."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다론과 라나를 본 다크는 어이없어 했다. 그리고 그 둘이 하는 말은 그녀를 더욱 어처구니없게 했다. 다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토지에르가 마왕이라고?" 다론은 자신의 경험까지 덧붙여서 가능한 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예, 대공전하. 저는 스승님을 모시면서 많은 흑마법사들이 계약을 맺었던 악마에게 육신을 뺏기는 것을 몇번인가 봤사옵니다." "뺏겨? 그게 무슨 말이야?" "겉모습은 그대로지만, 그 영혼은 악마의 것이라는 말이옵니다. 육체라든지 능력, 그 모든 것이 악마의 것으로 바뀌는 거지요." "그, 그렇다면 나와의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응?" "아마도 마왕은 그 계약이 뭔지 조차 모를 것이옵니다." 다크는 허탈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토지에르가 도와주는한 언젠가는 자신이 살았 던 세상으로 가라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면 나 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때, 다론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변을 당하시기 전에 제게 책 한 권을 맡겼사옵니다. 스승님은 대공 전하께서 그 책을 원하실거라고 하셨습니다. 오래전에 잊혀진 차원과 공간,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 라가는 마법이 기록된것이니까요." "뭣이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대공 전하께서 스승님께 부탁하셨던 그것을 제가 받았다고 했사옵니다." 다크는 다론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다급하게 말했다. "다, 당장 내놔." "대공 전하, 제가 그 책을 받은 것은 사실이옵니다. 하지만..... 지금 그책을 전하께 드릴 수 는 없사옵니다." "어째서?" "마왕을..... 아니, 스승님을 죽여주시옵소서." 이제야 다론의 속셈을 눈치 챈 다크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허허! 하여간 스승이나 그 제자 놈이나 잔머리 굴리는 데는 질려버리겠군. 내가 마왕하고 싸우느니 그 시간에 네놈을 족치는 쪽이 훨씬 빠르다는 것을 네놈에게 확실히 가르쳐주마!" 다론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황급히 변명했다. "저, 전하를 이용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옵니다. 제가 스승님께 책을 받은 것을 사실이옵니 다. 하지만 원체 다급하게 황궁을 탈출하다 보니, 숨겨놨던 책을 회수할 시간이 없었사옵니 다. 책은 지금 황궁 지하에 감춰져 있사옵니다." "뭐야! 황궁 지하라고....?" "예, 전하. 황궁 지하의 마법 연구소이온데, 지금 마왕이 기거하고 있는 곳이라서 저로서는 도저히 그 책을...." 다크는 욕설을 내뱉으며 투덜거렸다. "젠장, 그렇다면 어쩔수 없이 마왕하고 싸울 수 밖에 없잖아. 할 수 없는 일이지. 아빠, 그 빌어먹을 황궁으로 공간이동해줘요." 성급하게 크라레인 시로 가겠다는 다크의 말에 기겁을 한 다론이 말렸다. "마왕의 힘은 대단히 강대하옵니다, 전하. 스승님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시면 안 되옵니다. 또한 마왕의 능력도 엄청나지만, 그 수하들의 힘도 무시할 수 없사옵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라나가 기억을 떠올리며 끼어들었다. "아저씨, 전에 제임스 님께서 오셨을 때 저에게 해준신 말이 있습니다. 코린트에서 다섯 손 가락 안에 들어가는 기사와 그 부하들이 마왕도 아닌 발록에게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론이 옆에서 보충 설명을 했다. 그는 크라레스의 황궁이라든지 마왕 의 동태를 감시하던 중이었기에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녀님이 말씀하신 발록이 한두 마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수많은 몬스터들에다가 흑마법사 들 그리고 이상하게 생긴 괴물들까지...." "그렇게 많아? 에이, 씨. 그럼 할수 없이 루빈스키를 만나봐야겠군. 치레아 기사단을 돌려받 으면 충분하겠지?" 다론은 슬쩍 아르티어스의 눈치를 살핀 다음 다크에게 속삭였다. "저...어르신도 도와주시는 건가요?" "아빠가? 아빠가 왜? 나는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한다구. 물론 귀찮은 거 몇가지는 가끔 떠넘기기도 하지만 말이야." 퉁명스럽게 말하는 다크 때문에 다론은 속이 타서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르티어스를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어르신이 도와줬으면 하는 기대감을 가득 담고 말이다. "그래도 아르티어스 어르신께 도와달라고 하시는 게 좋지 않겠사옵니까? 스승님의 육신을 빼앗은 놈은 그냥 마왕도 아니고 어둠의 대마왕 크로네티오라고 하옵니다." 그 말에 여태껏 뒷짐을 지고 나 몰라라 하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분명히 대마왕 크로네티오라고 했느냐?" "예, 어르신" 갑자기 아르티어스가 끼어들어 다론에게 질문을 던지자 다크는 그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어? 아빠가 그놈을 알아?" "조, 조금 알고 있지." "그놈 쎄요?" "발록 몇마리 정도는 아주 가볍게...." 아르티어스가 슬며시 딴청을 부리자 다크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채근했다. "발록이 아니라 대마왕 말이에요. 대.마.왕." 아르티어스는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말을 시작하다가, 갑자기 아르티엔을 힐끔 쳐다본 후 아주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그, 글쎄. 대마왕이라. 아, 참. 그렇지. 현존하는 최강의 드레곤이자 대마왕 사냥을 취미로 하시는 대마왕 슬레이어가 여기에 계시지 않느냐?" 자신에게 은근슬쩍 떠넘기는 그 속셈을 잘 알고 있는 아르티엔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르티 어스를 바라봤다. 한 대 쥐어밖을까 생각하다가 의도는 불순하지만 자신에 대한 칭찬이 대 부분이었기에 참기로 했다. "흠흠, 내가 왜 그놈하고 싸워야 하지?" "예?무슨 말씀이세요? 전에 그놈이 나타났을 때 아버지를 포함한 각 드래곤 종족의 수장들 이 협공을 가해서 겨우 끝장을 냈다는기록을 분명히 읽었는데 말입니다." 그 말에 라나와 다론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드래곤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 게다 가 각 종족의 수장들이라면 적어도 에이션트 급일텐데, 그런 드래곤이 몇 마리씩이나 뭉쳐 야 겨우 상대할 수 있었다니....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리 많이 덤벼도 죽음을 재촉하는 것 외 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아르티엔은 나지막한 어조로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그것은 그놈이 드래곤을 건드렸기에 일어난 결과였다. 하지만 지금은 호비트들만을 상대하 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내가 왜 그녀석과 대적한다는 말이냐?"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다크는 마왕을 퇴치하기 위하여 각 드래곤 종족의 수장들이 동원되었다는 말에 심각하게 다시금 상황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진짜 대마왕이 그렇게까지 강하다면 처음에 혼자 상대하려던 그런 간단한 대처 방법으로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놔야 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크는 먼저 아르티어스를 힐끔 쳐다봤다. 아 마, 아르티어스라면 도와줄 것이다. 그런후 또 다른 실력자들을 끌어 모야야 하는 것이다. 다크는 여태껏 조용히 듣고 있던 카렐에게 말했다. "도와주겠어? 사실 이건 인간들의 문제이기에 너에게 부탁하기는 좀 그렇지만..." 카렐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친구의 일인데 도와야지. 사실 대마왕이 인간들을 정복한 다음엔 또 다른 종족들을 건드리 기 시작할 건데 뭐." 카렐의 말에 그의 옆에 서 있던 키아드리아스는 다크를 섬뜩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자신의 연인을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하지만, 카렐이 옆에 있었기에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대신 그녀는 다급하게 말했다. "저도 갈 거예요." "그렇다면 모두 일단 크라레스로 가기로 하자. 그곳에서 루빈스키를 끌어들이는 거야. 그런 후에 코린트로 가서 로체스터 공작에게 힘을 빌려달라고 하면 될거야." Chapter 17. 대륙 동맹군의 결성 코린트의 수도 케락스는 난데없는 손님들의 방문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황궁 외곽에 만 들어져있는 이동 마법진에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경비병들은 일순 기겁 을 할 정도로 놀랐다. 이때, 먼저 연락을 받았는지 기사 한명이 달려나오며 그들을 맞이했다. "빨리 오셨군요.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나왔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 연락을 드렸으니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로체스터 공작은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될 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들을 환대했다. 로체 스터 일행은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들어서는 다크 일행을 보고,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에게 우선 인사를 건넸다. 다크는 한눈에 용병대장이 누군지 눈치챘다. 그렇기에 빙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야∼, 역시 살아 있었군. 하기야, 처음부터 나는 자네가 죽었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어. 그 때 죽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히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말에 용병대장은 해골 가면 밑으로 일그러진 미소를 띠었다. 출혈과다로 거의 죽을 뻔하 게 만들어 놓고는 저딴 소리를 내뱉다니 말이다. "자네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했군." "참, 소개하지. 이쪽은 카렐이야. 숲 속에서 조용히 사는 친구인데, 내가 끌어냈지." "설마, 그랜드 마스터?"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용병대장은 한눈에 카렐의 실력을 알아보고 경악했다. 그런 그 를 보고 카렐은 빙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다크 외에서 이렇듯 대단한 실력을 지닌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나는 카 렐 아미타유스라고 하오. 그리고 이쪽은 내 아내인 키아드리아스라고 하지요." 아내라는 말에 로체스터 등은 놀란 듯했다. 드래곤을 데리고 사는 엘프가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 대륙에 성질 더럽기로 소문이 난 블루 드래곤이 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위대한 분이시오. 저는 키에리 발렌시아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현 재 코린트의 총사령관인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입니다. 그리고 저쪽은......" 키에리의 소개에 따라 회의실에 모여 있던 로젠, 제임스, 까미유 등이 카렐, 키아드리아스, 그리고 루빈스키와 인사를 나눴다. 일단 서로간에 소개와 인사가 끝난 후 로체스터의 권유 에 따라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는 없었다. 아르티 엔이 자신은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밖으로 나가면서 아르티어스의 귀를 잡아당겨 같이 나가버렸던 것이다. "현재 마왕군의 세력은 알카사스 쪽으로 점차 집중되고 있소." 얼마 전까지 마왕 편에 가담해서 싸웠기에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루 빈스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확실한 정보입니까?" "그렇소. 새로운 마수들이 대거 등장한 덕분에 알카사스의 기사단이 뒤로 밀리고 있다는 보 고를 받았소."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루빈스키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며칠 전 서부 전선에 투입된 몬스터의 대군은 알카사스 기사단의 허를 찌르는 기습 작전으로 3만 에 이르는 막심한 피해를 입은 후 점차 뒤로 후퇴하는 중이었다. 그 전투는 알카사스의 주 력을 한꺼번에 투입하여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내버린 것이었기에, 루빈스키 대공으로서는 뒤 로 빠져 있던 기사단을 투입할 여유가 없었다. 그 때문에 무려 3만이라는 몬스터를 잃고 대 패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런 지시가 내려 왔던 것일까? 토지에르는 서쪽에 대 량의 몬스터를 추가 투입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알카사스 쪽에는 마왕 토벌군을 보내달라는 말을 할 수 없겠군." 다크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도 그럴 거요. 그들은 지금 자기들 앞가림을 하기에도 벅찰 테니까 말이오."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어?" "일단 크루마와 아르곤에 마왕 토벌대를 파견해달라는 공문을 보내도록 합시다." "크루마에는 공문 같은 거 보낼 필요가 없어. 통신으로 내가 미네르바에게 부탁하면 되겠지. 하지만 아르곤도 지금 몬스터와 전쟁 중인데 보내줄까?" "글세, 하지만 한 번 시도는 해봐야지요. 일단 병력을 치레아 공국에 집결시키는 것이 좋겠 다고 생각하오. 안전을 위해서 실력이 우수한 몇 명은 타이탄에 태운 채로 공간이동시키는 쪽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려면 공간이동을 위한 거리를 짧은 것이 훨씬 유리하지 않겠 소. 그런면에서 치레아가 가장 적격인 것 같소. 치레아 공국 북쪽에 있는 치론 시 근처를 기 점으로 잡으면 어떻겠소?" 다크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다크가 동의하자 로체스터 공작은 지금껏 자신이 짜놓은 작전을 설명했다. "먼저 마왕의 주력부대는 이쪽 알카사스에 있소. 하지만 우리쪽 정찰대가 상대해본 결과, 발 록을 주축으로 하는 상급 마족들의 경우 상당한 수준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오. 그 놈들은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에 어디로든지 이동 가능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 요. 따라서 이쪽에서 기습 공격을 가한다고 해도, 그들은 곧 크라레인 시로 돌아올거요. 하 지만, 그 많은 부하들까지 함께 거드리고 오지는 못할테니, 엄청난 수의 마물들과의 격전은 피할 수 있어 다행이 아닌가 하오." "그렇다면 마왕을 처치한 후에 남은 마물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 마물들은 마왕이 불러낸 것들이오. 그런 만큼 그들을 소환한 주체인 마왕이 사라지면 그들 또한 마계로 돌아갈 거라는 것이 우리 쪽 마법사들의 의견이오." "그래? 그렇다면 알카사스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마왕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 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말이군." 다크에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런 치레아 대공의 말이 맞소." "흐음, 그래?" 잠시 머리를 굴리던 다크는 루빈스키에게 말했다. "이봐, 이 기회에 알카사스에도 빚을 만들어두는 게 좋지 않을까?" 그말에 루빈스키는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방금 전에 말했던 그 의미 없는 싸움에 끼어들어서 본국도 피를 흘리자는 말인가?" "아니, 그게 아니야. 기습 작전에는 근위대만 있으면 될테니까, 자네는 나머지를 이끌고 알 카사스를 도와주는 거야. 현재 격전을 벌이고 있을테니 그들이 마왕군을 피해서 후퇴할 수 있게만 해주면 되지 않겠어?" 루빈스키는 다크의 말에 뭔가 깨달았다는 듯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아하, 그러니까 충돌은 할 필요없고, 후퇴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말이군." "맞아, 그렇게만 해두면 알카사스와의 관계 개선에 많은 도움이 되겠지." "좋아, 그럼 나는 지금 당장 떠나겟네." "수고하게." 다크와 통신을 끝낸 미네르바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것을 보고 이블리스가 슬쩍 말을 건넸다. "근위대에 출동 명령을 내릴까요?" 한동안 어떻게 하는 것이 크루마에 도움이 될 건지 머리를 굴리던 미네르바는 이윽고 결심 했는지 명령을 내렸다. "아니, 지발틴 기사단에 출동 명령을 내려라. 상대는 마왕.... 아마 피해가 클 수밖에 없는 싸 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본국의 영광을 위한 전쟁도 아닌데 근위대의 엘리트를 낭비할 수는 없다. 이런 명분만 세워주면 되는 싸움에는 일류 정도만 데려가도 충분히 생색을 낼 수 있 어." 이블리는 미네르바의 현명한 결정에 감탄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전하. 곧 알프레드 쟉센 후작에게 지시하겠습니다." "참, 오너들만 집합시켜라." 미네르바의 말에 이블리스는 의아해했다. 타이탄이 움직이면 당연히 부수적으로 함께 이동 해야 하는 보조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타이탄을 지급받은 오너만을 집합시키라는 말 일까? "예? 오너들만 말이옵니까? 하지만 타이탄을 보조하기 위해서는 정찰조와 마법사가...." "마물들을 상대로 정찰조는 무의미해. 기습해서 마왕의 본거지를 박살내는 작전이다. 오직 마물을 상대하기 위한 타이탄만이 필요할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없다." "옛! 그렇게 전하겠사옵니다, 전하. 그런데, 전하께옵서도 가실 것이 옵니까?" "물론이지."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미네르바에게 이블리스는 기겁한 듯 만류했다. "그건 너무 위험하옵니다." "후후, 괜찮다.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으니까. 그럼, 준비하도록." "옛! 전하." Chapter 18. 최후의 전쟁 아르곤은 마법사를 사용하지 않는 체제 때문에 연락소라는 특이한 기관을 필요로 하는 국가 였다. 왜냐하면 신성마법과 마법의 차이점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국가 간에 는 서로가 약속하여 개방해 놓은 통신 채널을 통해 마법 통신을 주고 받을 수 있었다. 하지 만,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는 아르곤 제국과 그런 식으로 통신을 주고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물론 아르곤 내부에는 통신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사제들끼리 통신을 하고 있었다. 하 지만, 통신의 권능을 가진 사제와 마법사 간에는 서로 간의 불일치점 때문에 통신이 불가능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왕을 토벌하기 위해 힘을 보태달라는 로체스터 공작이 띄운 공문은 일단 아르곤에 있는 코린트 연락소에 상주하는 마법사들을 통해 수신되었다. 그런 후 연락 소에 근무하는 병사나 관리가 그 공문을 가지고 아르곤 쪽에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르 곤에서 코린트에 연락을 보낼 때는 그 역순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아르곤의 수도에 이런 연 락소를 설치해 놓은 국가는 상당히 많았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안 해놓으면 서로간에 연 락 한번 하려면 최소한 한 달 이상이라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왕이 출현했다는 공문은 아주 빨리 위쪽으로 위쪽으로 전달되어 갔고, 공문을 받은 지 채 다섯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최고의 권력 기관인 주교원가지 도착했다. 아마 이토록 빨리 아 래쪽에서 위쪽까지 이동된 서류는 아르곤 역사상 없었을 것이다. 루빈스키가 기사단을 거느리고 알카사스에 도착했을 때, 알카사스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갑자기 쏟아져 나온 마물들 때문에, 근위대까지 투입한 상태였지만 전 세는 결코 호전되지 않고 있었다. 또한 발록과 처음 보는 마물들은 타이탄을 능가하는 위력 을 보였기에 알카사스 기사단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빈스키는 모습을 드 러내자마자 부하들에게 신속히 명령을 내렸다.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라. 빨리." "옛!" "각자 자신의 능력껏 싸워라. 나는 이곳에서 승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경들의 사상자 또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알겠는가?" "옛! 전하." "자, 그럼 돌격하라." 알카사스의 병사들은 갑자기 후방에 나타난 대규모의 타이탄 부대 때문에 잠시 혼란에 빠졌 다. 이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뒤에서 돌진해 들어온 타 이탄 부대들은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던 그들을 비껴 지나가서 마물들에게로 공격해 들어갔 다. 이 모습을 본 알카사스의 기사들은 용기백배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원군이 온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규모의....... 그들도 뒤처지지 않고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루빈스키 대공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마물들을 아주 능숙한 솜씨로 베면서 돌진했다. 확 실히 마스터인 그의 실력은 부하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것이었다. 부하들이 한 마리 접는 것도 힘에 부쳐서 난타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는 거의 칼질 한번에 한 마리씩 끝을 내니 말이다. 그는 주위에 서 있는 붉은 매의 문장이 그려진 타이탄을 타고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귀국의 총사령관은 어디에 계시나?" "예, 쥬프티안 공작 전하께서는 선두에 계셨습니다. 하지만 마물들의 세력이 더욱 증가한 후 에는......." "알았다." 루빈스키는 마물들을 베면서 앞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크라레스의 정예 라고 할 수 있는 스바시에 기사단과 치레아 기사단이 아그리오스 후작의 지휘 아래 뒤따르 며 엄호했다. "쥬프티안 공작!" 상대편 총사령관을 찾으며 점차 앞으로 진격해 가던 루빈스키는 점점 더 많은 마물들이 자 신을 가로막는 것을 느끼고 다시금 뒤로 후퇴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쥬프티안 공작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철갑과도 같은 두꺼운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마물들. 마물들의 모양은 가지각색이었고, 4 미터부터 시작해서 10미터 정도로 크기도 들쭉날쭉했다. 하지만 마물들은 강철보다 튼튼한 것 같은 두꺼운 껍질로 싸여 있었고, 별의별 희한한 무기들을 가지고 공격해왔다. 가위처럼 날카로운 날을 가진 거대한 집게발이라든지, 칼 같은 형태로 진화한 앞발, 강력한 철침 같은 꼬리 등등.... "이것들은 뭐야?이렇게 생긴 몬스터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어." 미디아가 마물들의 흉칙한 모습에 기겁을 해서 외치자, 팔시온은 그들을 향해 덤벼드는 거 대한 마물의 집게발을 향해 방패를 들이밀며 악을 썼다. "닥치고 싸워!" 팔시온과 싸우는 마물은 그의 타이탄보다 거의 2미터 정도 키가 더 컸고, 떡 벌어진 어깨에 양손에는 집게발 같은 것이 붙어 있으면서 두발로 돌아 다니는 특이한 형태였다. 전체적으 로 인간과 비슷한 체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가보다 훨씬 더 어깨의 폭이 넓었고 두터운 장갑판 같은 천연 갑옷을 두르고 있는 데다가 끔찍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팔시온의 거대 한 검이 대기를 가르며 마물의 집게발 아래를 향해 직격했다. 하지만 불꽃이 번쩍 튀었을 뿐, 검은 튕겨져 나갔다. "이, 이럴수가........" 팔시온이 앞에 있는 마물과 서로의 장갑이 얼마나 두터운지 내기라도 하듯 난타전을 벌이고 있을 때, 뒤에 쳐져 있던 미디아의 타이탄이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미디아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타이탄의 무게를 십분 이용하여 앞으로 검을 쭉 내밀며 충격에 대비했다. 퍽! 검이 마물의 어깨 부분에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마물은 더욱 괴성을 질러대며 반대편 집게 발을 쳐들어 타이탄을 떨쳐내 버렸다. '쩡'하는 소리와 함께 미디아의 검이 부러졌고, 그녀의 타이탄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킨 후 검 끝에 마나를 주입했다. 그 러자 검에서 빛이 나며 순식간에 검이 재생되었다. "젠장, 엄청나게 강하네. 집게손이 두 개니까 각가 하나씩 맡자. 좋지?" 미디아의 말을 알아들은 팔시온은 약간 후퇴한 후 다시금 방패를 앞으로 밀며 마물에게 돌 격했다. 마물의 오른쪽 집게를 팔시온이 후려치며 파고드는 순간, 미디아는 옆에서 마물의 왼손 집게를 방패로 저지했다. 그리고 곧이어 팔시온은 검을 곧장 심장이 있음직한 마물의 왼쪽 가슴을 향해 힘껏 찔렀다. 하지만 불꽃만 번쩍였을 뿐, 그의 검은 옆으로 튕겨져 나갔 다. 또다시 마물의 공격에 뒤로 후퇴한 후, 미디아는 팔시온에게 투덜거렸다. "야, 그냥 힘으로 찌르면 어떻게 해? 여태껏 배운 고급 검술은 어디에 써먹으려는 거야? 힘 만으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저런 돌대가리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뭐야? 나도 힘껏 하는 중이라구." 말이 안 통하는 팔시온에게 약이 바짝 오른 미디아가 악을 썼다. "뭐가 힘껏하는 거야? 이렇게 하란 말이야!" 미디아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휘둘러지자, 엄청난 마나의 회오리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마물의 머리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래쪽으로 피보라가 터진 것도 그 순간이 었다.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끄떡도 않던 마물이 너무나 싱겁게 두 토막으로 갈라지며 좌 우로 무너져 내렸다. "뭐야? 검기를 쓰라는 말이었냐? 그렇다면 진작 말했으면 좋았을 거 아냐?" 아무래도 타이탄을 탄 상태에서 검기를 구사하는 것은 타이탄에 따라 다르지만 표준 출력을 기준으로 따진다면 약 네 배의 마나가 더 필요했다. 그렇기에 미디아는 순간적인 마나의 방 출로 인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 정도는 알아들었어야지, 이 돌머리야. 자, 빨리 가자." 알카사스의 주력부대는 크라레스 군의 도움으로 겨우 전선에서 후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입은 피해는 너무나도 막심한 것이었다. 거의 태반에 가까운 기사가 전사한 것이다. 사실 크라레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멸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적들로부터 멀 찌감치 떨어진 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그들은 크라레스의 도움에 감사를 표했다. "이 자리에 계시지는 않지만 국왕 폐하를 대신해서 귀국의 도움에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 다. 오늘, 귀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본국의 기사단은 아마 전멸했을지도 모릅니다." 상대편 노기사의 말에 루빈스키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자자, 우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알카사스와 크라레스는오랫동안 평화를 유 지해왔지 않소? 귀국이 어려움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소." "그나저나, 큰일이군요. 본국은 오늘 전투로 총사령관 전하께서 전사하실 정도로 지독한 피 해를 입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저것들을 상대로 계속 싸울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 는 군요. 귀국의 상황도 어려울 텐데, 본국을 계속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 말입 니다."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루빈스키 대공은 가만히 미소를지으며 말했다. "적과 꼭 맞서 싸울 필요는 없을 거요."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일이면 본국을 비롯해서 코린트, 크루마, 아르곤의 연합 부대가 마왕을 해치우기 위해 움 직일 거외다. 모든 국가에서 자랑하는 최고의 기사들에다가 드래곤들까지 동원되는 전쟁이 니 승리할 것이 분명하오. 그때까지 귀국은 적들과 전쟁을 벌이지 말고 적당히 막으며 계속 후퇴만 하면 되오." 루빈스키의 조언에 상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사실, 귀국의 기사단이 마왕군에게 전멸당하도록 그냥 놔둘 수도 있었소. 하지만 여태껏 귀 국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소. 귀국과는 요 근래 몇 년을 제외하 고 아주 좋은 이웃이었지 않소?" "제2차 제국전쟁을 기회로 귀국을 공격한 본국을 위해 이렇게까지 힘을 써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Chapter 19. 신의 검을 뽑아든 성기사단 드디어 마왕의 본거지를 습격하기로 결정된 그날, 코린트의 근위대와 크라레스의 근위대, 그 리고 다크 일행은 점심 식사후 공간 이동하여 치레아 공국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도시, 치론 에 도착했다. 마법사들이 크라레인 시로 갈 수 있는 공간이동 마법진을 만들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각자 시간을 보내며 크루마와 아르곤에서 보내올 병력을 기다렸다. 다크 일행이 기다리기 시작한 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지면에서 4미터 정도 높이에서 빛 이 번쩍하더니 크루마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네르바는 뛰어난 기사답게 지면에 우 아하게 착지한 후 먼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드래곤들에게 차분히 인사했다. "저것들은 뭐야?" 다크가 자신의 부하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미네르바는 눈치도 빠르군, 하고 생각하면서도 태 연하게 시치미를 뗐다. "뭘 말하는 거지?" "네가 데리고 온 떨거지들을 말하는 거다. 나는분명히 마왕과의 싸움인 만큼 가장 실력있는 기사들만을 거느리고 오라 말했을 텐데." "물론이야. 지발틴 기사단은 가장 우수한 가시들로 이루어진 크루마의 정예라구. 2차 제국전 쟁 때, 반 정도를 잃었기에 40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말이야." "내 말은 근위대응 어떻게 했느냐는 말이야. 가장 우수한 가시는 근위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내가 바보야? 하여튼, 잔머리 굴리는 데 있어서는 토지에르와 비슷하군." 미네르바는 당치도 않다는 듯 깜짝 놀라는 척하며 항변했다. "잔머리라니, 무슨 그런 말을...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도내에서 가장 우수한 기사들을 데리 고 왔다구. 얼마 전에 황태자 전하께서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셨지. 선황제께서 도저히 황권 을 계속 이어나가실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선황제께서 황제 폐하의 위를 유지하고 계 셨다면 근위대를 이끌고 올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신임 황제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뿐더러 현 황제 폐하는 원로원파와 친하거든. 그런 상태에서 근위대를 빌려달라는 부 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내 처지를 이해해주길 바래. 그리고 내 처지를 그렇게 만든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너 때문이잖아." 미네르바는 마지막에 그 책임을 슬그머니 다크에게로 밀어붙였다. 다크도 일단 지은 죄가 있었기에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추궁하지는 않았다. 미네르바의 변명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뭐, 어쩔수 없지. 네 부하들에게도 공간이동할 준비를 하고 대기하라고 해. 아르곤에서 병 력이 도착하는 대로 공간이동할 거니까 말이야." "알았어. 그런데 용케도 아르곤을 끌어들였군. 그 녀석들은 타국의 일에 절대 참견을 않기로 유명한데 말이야." "글세,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지만 별로 어렵지 않았어. 마왕이 나타났으니 병력을 좀 보내 달라고 했더니, 그쪽에서 쾌히 승낙했거든." "그래? 이상한 일이군." 하지만 금방 도착할 것 같았던 아르곤의 기사단은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 기에 기다리다가 짜증이 난 다크는 키에리에게 투덜거렸다. "이 자식들, 혹시 무서워서 꽁무니를 빼버린 거 아냐?" 포도주를 한잔 하면서 다크가 투덜거리자 키에리는 그녀를 달랬다. "그건 아닐걸세. 아르곤은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 마법사가 없으니까 말이야. 아 마도 그 때문에 도착이 늦어지는 것 같군." "마법사가 없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이동한다는 말이야? 설마 여기까지 말을 타고 오거나 달려서 온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거리가 얼마나 먼데..." "물론 그건 아닐세. 아르곤 제국은 아주 부유한 국가지. 그들은 그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와이번을 사 모으고 있지." "와이번? 아, 그 드래곤 닮은 도마뱀?" 키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부터 그것들을 기사단에 대량으로 배치해서 부족한 기동력을 보충한다고 들었네. 아마도 날아서 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하 지." "그걸 잘 알면서 왜 아르곤 제국에 미리 마법사를 보내지 않은 거야?" "이쪽에도 준비할 것이 많아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네." "지금이라도 아르곤에 마법사를 보낸다면?" "글세.. 와이번을 타고 날아오는 중일 텐데. 지금 마법사를 보내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되겠 지." 다크는 신경질적으로 포도주를 잔에 따르며 투덜거렸다. "젠장, 그렇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군." 바로 그때, 카렐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뭐지? 뭔가 엄청나게 많이 날아오는 것 같은데..." 다크가 시선을 돌렸을 때, 동쪽 하늘 위에는 수백개의 점들이 찍혀 있었다. 아직 거리가 너 무나도 멀어 그것이 뭔지 알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전투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군. 마왕이 눈치채고 부하들을 보낼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다크의 말에 키에리가 일어서며 말했다. "마왕군이라면 북쪽에서 내려올 가능성이 크겠지만, 뭐... 만약이라는 것도 있으니 준비해둬 서 나쁠건 없겠지." 코린트, 크루마, 크라레스의 연합군이 전투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을 때, 하늘 위의 점 들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하더니 잠시후 확실하게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 다. "아르곤 제국의 성기사단이다!" 로체스터 공작이 상대의 복장이나 문장을 보고 외치자, 모두들 꺼냈던 타이탄을 돌려보냈다. 그런 와중에 수백 마리나 되는 와이번들이 서서히 착륙을 시작했다. 와이번 위에는 두명씩 타고 있었는데, 그런 와이번이 거의 4백여 마리가 일제히 착륙하자 그 모습은 일대 장관이 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와이번들이 등에 메고 있는 안장의 재질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것들은 가죽위에 금실이나 은실 따위를 써서 멋을 낸 정도였지만, 그 중에서 몇 마리는 아예 도금을 했는지 안장 전체가 금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금색 안장이 달려있는 와이번에서 내린 유려한 외모의 남자가 천천히 로체스터 공작에게로 다가오자, 그는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본 듯 상당히 놀란 듯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시옵니까, 교황 폐하!" "오오, 로체스터 경. 경이 보낸 공문을 받자마자 10개 성기사단을 이끌고 서둘러서 달려왔다 네. 짐이 직접 성전에 참가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될 줄이야. 이것도 다 샤이하드 님의 은 혜로다." 말을 하던 교황은 마음의 격동을 참기 어려운 듯 감격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언제 출발할 건가? 아직 다 안 온 것 같은데..." "다 도착했습니다, 폐하. 기습을 통한 단기 결전을 노리고 있기에 각국의 최고 정예 기사단 들만 모여 있사옵니다." "이게 다라고? 신성한 성전에.... 겨우 이게 다라고?" 허탈한 듯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교황은 이윽고 결심한 듯 외쳤다. "이렇게나 마왕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다니...어쩔수 없군. 짐이 직접 지휘하는 수밖에 없겠노 라. 경들은 빨리 출발 준비를 서두르라. 내 직접 마왕에게 신께서 존재하심을 알리겠노라." 신의 뜻을 펼친다는 자신의 기분에 도취해서인지 일장연설을 해대고 있는 교황의 뒷모습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다크가 로체스터 공작에게 소근거렸다. "저멍청한 녀석은 뭐야?" "아르곤의 지배자, 즉 교황이오." "그런가? 나는 교황이라고 해서 상당한 인물인줄 알았는데... 저건 겨우 그래듀에이트를 통 과했음직한 놈이잖아." 다크의 말에 로체스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교황은 검술 실력 같은 객관적인 자료로 뽑는 것이 아니오. 신앙심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선출되는 것이지요." 다크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 신앙심. 그래서 저 모양이군. 이쪽 기사들의 실력도 한눈에 못알아보는 주제에 숫자만 믿고 까부는 것을 보니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않소. 전쟁터에 도찰할 때까지만 참아주길 바라오. 마법사들의 일이 좀더 늘 어나겠군. 그건 그렇고, 저 많은 와이번들도 공간이동을 시켜야 하나?" 로체스터 공작은 미간에 줄을 그으며 중얼거렸다. 마왕 정벌대는 크라레인 시 외각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저마다 타이탄들을 꺼냈다. 아르곤 에서 교황과 법왕 두명이 더해진 10개 성기사단이 가세한 상태였기에 타이탄의 수는 엄청난 것이었다. 교황은 자신의 전용 타이탄 '아르곤'을 꺼냈다. 아르곤은 실전용이라기보다는 교황 을 위한 의전용으로 제작된 너무나도 아름다운 타이탄이었다. 어깨까지의 높이가 5.6미터나 되는 이 타이탄은 출력은 1.5정도밖에 안되었지만 드래곤 본과 와이번 본을 대량으로 사용 했기에 무게는 67톤밖에 나가지 않았다. 교황은 타이탄의 검을 높이 빼들며 외쳤다. "샤이하드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천천히 아르곤의 검이 크라레인 시를 향해 세워졌다. "신의 뜻을 받들어 모두 돌격하라!" 4백여 명의 성기사들이 오러소드를 뽑아들고 괴성을 질러대며 와이번에 탄 채 하늘을 날아 서 돌격하는 가운데, 3백여 기의 타이탄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 던 다크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군. 영광은 무슨 얼어 죽을 영광!" "신을 열심히 섬기다 보면 저런 믿음이 생기는 거겠지. 마왕이나 마족 같은 미지의 적에게 생기는 두려움도 저런 믿음이 희석시키는 거야. 저들에게는 승리에 대한 신념이 굳게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키에리가 빙그레 웃으며 다크에게 말했다. "하지만 승리는 신념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야." Chapter 20. 아르티엔 마왕과 대격돌 거의 4백여 기의 타이탄이 크라레인 시로 돌격하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 수없이 많은 각양 각색의 마물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이쪽의 공격을 이미 눈치챘는지 크라레인 시 쪽에서 마구 달려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 앞서 서 달려오는 마물들의 흉칙한 모습만 보일 뿐, 그뒤에 달려오는 마물들은 자욱한 먼지에 가 려서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이, 이게 뭐야? 주력 부대가 알카사스에 가 있다고 하더니 언제 다 돌아온 거야?" 마물들의 엄청난 숫자에 놀란 다크가 어이없어 하자 키에리도 가볍게 인상을 찡그렸다. "글세, 아무래도 저쪽에서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일단 후퇴했다가 다음 기회 를 노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크와 키에리가 수군거리고 있을 때, 이미 전투는 시작된 상태였다. 선두에 선 아르곤의 성 기사단은 엄청난 수의 마물들이 나타났는데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하늘을 나는 여러 종류의 마물들은 와이번을 타고 있는 성기사들과 공중에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땅에서는 타이탄과 마물들 간의 치열한 격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어쩔수 없군. 돌격하라!" 다크의 청기사, 키에리의 게레리아, 카렐의 골든 나이트가 앞장서서 돌격하자 로체스터가 코 란 근위대를 지휘하며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를 크라레스의 스바시에 근위대가 바짝 뒤 따랐다. 미네르바는 슬금 슬금 눈치를 보다가 제일 나중에서야 지발틴 기사단에 돌격을 명 령했다. 이렇게 해서 4백여 기의 타이탄들과 4백여의 용기사들이 거의 5천에 이르는 마물들 과 대격돌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악." "쿠어, 쿠어억." 곧 처절한 비명과 마물들의 울부짖음이 전쟁터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땅은 순식간에 그 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으며 피비린내는 역겨우리만큼 진하게 풍겨 나왔다. 사방 여기 저기에는 처참하게 박살난 마물들의 시체와 파괴된 타이탄이 나뒹굴고 있었고, 이미 공포와 광기에 사로잡힌 기사들의 눈빛은 마물과 별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미쳐있었다. 일단 격전이 벌어지고 나자. 아르곤의 성기사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는 지를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50여기의 타이탄들이 고철이 되어 나뒹굴기 시작했고, 그 다음부터 그들은 전투가 아닌 살기 위한 발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마물들의 겉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은 튼튼한 것이었다. 또한 어마어마한 힘으로 휘둘러지는 마물들의 각종 무기들은 타이탄의 장갑판까지 관통할 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마물들의 중앙을 돌파해 나가는 무리들이 있었다. 세명의 그랜드 마스터를 주축으로 하는 삼국 연합군이었다. 그들은 아르곤의 기사단과는 달리 마물들과의 혼전 중에도 철저하게 지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명의 그랜드 마스터들은 각자의 판 단에 따라, 마물들을 간단하게 처리하며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각 기 사단 단위로 로체스터, 미네르바, 론가르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그 뒤를 떠받치는 것이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오랫동안 레어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호비트들이 이렇게까지 무섭게 성 장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마물들과 거의 동급으로 싸우다니 말이다." 아르티엔의 감탄에 아르티어스는 히죽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예? 헤헤, 굉장하죠. 특히나 저 앞에서 싸우고 있는 다크는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마물들 이 앞을 가로막을 엄두도 못 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 찢어지는 듯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오며 마물들의 후방에서 거대한 발록 두 마리가 모 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갑자기 허공에 그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거대한 채찍을 날렸다. 다크의 청기사는 채찍을 간단하게 방패로 튕겨낸 후 무시무시한 강기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시퍼런 광채가 하늘을 꿰뚫으며 통과하는 그 순간 이미 발록은 그 자리에 없었다.다크는 상 대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엄청난 속도로 달려나갔다. 여태껏 세명이 삼각형의 형태 로 적당하게 길을 개척하는 정도의 격투를 벌이다 갑자기 다크가 앞으로 뛰쳐나가자 키에리 와 카렐은 당혹스러웠다. 키에리가 다급하게 다크를 따라 달려나가려는 순간, 카렐이 제지했 다. "잠깐! 뭔가 이상하오. 이렇게 분별없이 앞으로 튀어나갈 리가 없는 데 말이오. 잠시만 상황 을 지켜보기로 합시다." 그리고 그들은 곧이어 엄청난 대폭발을 보고야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청기사를 중심으로 가공할 만한 마나의 폭풍이 일어나더니 반구형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가 며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그녀를 공격하던 발록 두 마리중에서 한 마리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엄청난 충격파에 휩쓸려 모래처럼 부서져 날아갔다. "호오! 저런 기술도 있었나? 저아이는 정말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지금 그런 얘기하실 때입니까, 아버지? 저 엄청난 마나의 회오리를 보라구요. 아무리 저 아 이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저런 짓을 몇번만 하면 거의 몸이 거덜난다구요. 그리고 저런 기술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마물은 백마리도 채 안 죽었잖아요? 안되겠어요. 저 아이의 힘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요." 걱정이 된다는 듯 굳은 안색으로 아르티어스가 앞으로 튀어나가려 하자 아르티엔이 가볍게 팔을 잡으며 말렸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다는 것이냐?" "예." 단호한 아들의 대답에 아르티엔은 따스한 눈길로 다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놔둬라. 아무리 대마왕이라고는하나 크로네티오의 힘은 그렇게 강하지 못하단다. 그가 호비 트의 육체를 빌리고 있는 한, 과거와 같은 그런 엄청난 힘을 낼수는 없다는말이다." 아르티엔의 말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뭔가 알겠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어렵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해낼수 있는 일이니 도와주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나는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싶단다. 우리 드래곤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룩해낸 그런 영웅의 신화를 말이다. 더군다나 그 영웅 이 우리의 사랑스런 다크라면 그 얼마나 기쁘겠냐? 너의마음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은 가만히 지켜봐주는 것이 다크를 위해 좋을 것 같구나." 아르티엔은 다크의 모습을 보며 어릴 적 죽어라 말썽만 부리던 자식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 악여주었다. "끄응, 알겠습니다.아버지 말씀은 언제나 옳으셨으니까요. 하지만, 마왕이 아버지의 예상보다 월등하게 강하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도와줘도 괜찮겠죠?" "그럴 가능성은 없다니까 그러네." 아버지의 말에 아리티어스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누르며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도 사 랑스러운 아들이 위대한 대마왕 슬레이어로 탄생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하지만, 아무 리 그렇다 하더라도 다크가 작은 상처 하나라도 입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그였다. 바로 이 때 거의 천여 마리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마물들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알카 사스를 향해 진격해 들어가던 마물들로서 그곳에 있던 불칸이 대마왕의 소환 명령을 받고 발록들과 함께 이끌고 급히 돌아온 것이었다. 마왕성이 습격을 받고 있다는 연락에 알카사 스에 배치된 발록은 최고 정예 마물만 추려 황급히 공간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록 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한 마리당 백마리 이상의 마물을 공간이동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새롭게 적이 충원되자 전세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더 이상 남편의 안위를 무시 할 수 없었던 키아드리아스가 급하게 본체로 돌아갔다. 그녀는 곧장 거대한 블루 드래곤으 로 모습을 바꾼 후 뒤쪽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브래스를 뿜어버렸다. 꽈꽈꽝. 푸른색 뇌전이 번쩍이며 대기를 관통하면서 엄청난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 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전장을 바로보고 있던 아르티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것은...... "설마 힘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무슨 말이십니까, 아버지?" "너는 저쪽 황국에서 새어 나오는 어마어마한 힘을 느낄수 없다는 말이냐? 도대체 어떻게 이런.... 그놈이 1500년 전에 드래곤의 몸을 빼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강력하게 느 껴지는 이 힘.... 본신의 힘을 거의 태반이나 확보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가 있는 거지?" 아르티엔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이 알고 있는 마계의 지식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았다. 하지만 결론은 불가능이었다. 거의 신에 필적하는 그들이 이곳에서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소멸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낱 유희를 위해 소 멸을 각오한다는 것은 아르티엔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서, 설마... 어둠의 대마왕이라는 녀석이 힘이 그렇게 엄청나다는 말씀이십니까?" 잠시 마왕이 있는 황궁을 쳐다보던 아르티엔은 고개를 돌려 가만히 자신의 말썽꾸러기 아들 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허, 설마 내가 어릴 적에도 이렇게 철이 없었을까?" 아르티엔은 아들을 향해 애정이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눈길과는 달리 그는 아르티어스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으며 놀리듯 말했다. "으이그, 이 닭대가리. 어릴 때는 말썽이라는 말썽은 도맡아 피워 애비 속을 썩였지. 이제 좀 커서 철이 들었나 싶었더니 하찮은 호비트에게 빠져 저 모양이지. 내 자식이지만 한심하 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구나." "우이씨, 왜 또 닭대가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찮은 호비트라니요. 다크는 엄연히 내 아들이라구요. 젠장, 비록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머리를 만지며 투덜거리던 아르티어스는 걱덩된다는 듯 다크를 쫓아 연신 시선을 움직였다. 아르티엔은 그런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보다 마음을 굳힌 듯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힘을 숨기고 있듯, 저놈도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구나. 너는 빨리 저 아이를 데리고 가능한 한 멀리 도망쳐라. 그리고 혹시나 내가 죽는다면 너는 이 사 실을 각 종족의 드래곤 로드들에게 알려라. 아마 모든 드래곤이 힘을 합치지 않는다면 대마 왕은 결코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에이 씨, 농담 좀 그만 해요, 아버지. 각 종족의 드래곤 로드들이 모두 달려들어도 충분히 이길 만큼 강한 분이 왜 자꾸 그래요. 그리고 아버지 모르셔서 그렇지 저도 제법 강하다구 요." 아르티엔은 빙그레 웃으며 투덜거리는 자식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가볍게 허공으 로 날아올랐다. "빨리 이곳에서 피하도록 해라. 그리고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말을 끝내자마자 아르티엔은 드래곤으로 모습을 바꾸지도 않고, 곧장 황궁 쪽으로 날아갔다. 이미 마법의 극한을 본 그에게 드래곤의 모습으로 현신한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었기 때 문이다. 오히려, 황궁 같이 좁은 곳을 격전장으로 삼는다면 몸집이 작은 쪽이 훨씬 유리했 다. 황금색 궤적을 그리고 빛과 같은 속도로 아르티엔이 사라지고 나자 잠시후 지축을 울리 는 대폭발이 일어났다. 유성소환 마법이 일으키는 폭발이 엄청나다고 하지만, 이건 그것보다 수십 배는 강력한 것처럼 보였다. 한번의 폭발에 크라레인 시라는 도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 졌고, 엄청나게 거대한 구덩이만 남았으니까 말이다. 대폭발의 충격파는 웬만한 마물들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상대하던 타이탄들까지 휩쓸고 지나 갔다. 그랜드 마스터 정도 되는 막강한 검객들이 타고 있는 타이탄들은 강기로 재빨리 막아 서인지 그래도 무사했지만, 제일 앞장서서 공격하던 아르곤의 타이탄들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산산 조각 난 상태였다. 그리고 폭발의 진원지인 황궁의 폐허 위에는 거대 한 황금빛 광채와 함께 거대한 드래곤이 얼핏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 같은 특이한 모습을 한 존재가 허공에 떠 있었다. "후퇴하라!" 키에리가 부르짖듯 외치자 가장 뒤쪽에 처져 있던 미네르바가 거느린 지발틴 기사단이 재빨 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몇 명 남지 않은 각국의 기사단들이 뒤따랐다. 다크 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말 수 없었지만, 직격당하지 않았는데도 이정도 충격파 를 안겨줄 만큼 엄청난 폭발이라면 자신의 목숨이 열 개가 넘는다고 해도 절대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연속해서 엄청난 폭발이 크라레인 시를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주위는 새하얀 빛줄기와 검붉은 화염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충격파에 완전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했던 마물들과 타이탄은 충격파에 휩쓸리며 마치 모래가 스러지듯 사라져버렸 고, 조금 전까지 수많은 마물들과 타이탄이 싸우던 전쟁터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폐허 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는 공간마저 뒤틀릴 정도로 엄청난 공격을 주고 받으며 신적인 존재들이 격돌하고 있었다. 다크가 전속력으로 크라레인 시에서 한참 도망쳐 나왔을 때, 그녀의 앞에 거대한 골드 드래 곤이 날아 내려왔다. 순간적으로 그 드래곤이 아르티어스임을 알아본 다크가 크게 외쳤다.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버지가 마왕과 싸우게 계신 거다." "하, 할아버지가요?" "아무래도 아버지가 제일 나중에 한 말이 걸리는구나. 뒷일은 키아드리아스에게 말해뒀다. 혹시 내가 죽더라도 너는 복수 따윈 절대 생각하지 말고 네가 살던 세상으로 빨리 돌아가거 라. 정말 너를 사랑했단다." "아빠! 그, 그게 무슨 말......" 다크는 아르티어스에게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아르티어스는 그곳에 없었다. 그녀가 재빨리 뒤로 고개를 돌렸을 때, 아르티어스는 빛처럼 빠르게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는 폭발 의 근원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대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마왕 정벌 대는 충격파가 미치는 범위를 벗어나기 위해 정신없이 도망쳤다. 하지만 거기를 벗어났다고 해서 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 폭발에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도망쳐 나온 마물들과 또다시 대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물론 처음 폭발의 충격파로 가장 막대한 피해 를 본 것은 마물들 쪽이었다. 하지만, 불칸이나 발록 등을 주축으로 하는 마족들은 대부분 살아남았고, 6천에 다다르던 엄청난 수의 마물들도 몇백 정도밖에 안되긴 했지만 그래도 살 이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일단 위험 범위 밖으로 대피하자마자 타이탄들을 향해 달려들 었다. 다크는 이동 마법을 사용하며 채찍이나 마법으로 자신을 공격하던 발록 세 마리를 상 대로 엄청난 격전을 벌였다. 그녀가 간신히 그들 중의 한 마리를 해치웠을 때, 그녀의 앞에 는 신장이 거의 10미터에 달하는 검붉은 색의 거대한 불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불칸은 나타나자 마자 다크를 향해 양손으로 검붉은 화염 덩어리를 뿜어내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 크는 침착하게 마나를 잔뜩 주입한 방패로 막았지만 반격할 엄두는 전혀 내지 못했다. 화염 마법 따위에 방패가 뚫릴 위험은 없었지만 주위에서 맴돌며 틈을 노려 채찍을 휘두르는 발 록 두 마리의 공격에 겨우 몸을 빼내는 데만 급급할 뿐이었다. 꽈꽈꽝. 한순간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이 번쩍이더니 귀청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위력의 충격파가 밀려왔다. 다크는 충격파를 견디기 위해 모든 내공 을 끌어올려 강기의 막을 펼쳐야 했다. 잠시 후 충격파가 사라진 전장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흘렀다. 천천히 강기의 막을 풀던 다크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방금 전 까지 엄청난 위력의 불덩어리를 뿜어내며 자신과 격전을 벌이던 마독들의 모습이 조금씩 투 명하게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이동 마법을 통한 이동이라면 빛과 함께 번쩍 사라지거나 나 타나야 할 텐데, 전신이 마치 투명한 유리처럼 변하며 그 거대한 몸체가 서서히 먼지로 화 해 흩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다크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습을 감추는 것은 불칸 혼자만 이 아니었다. 하늘 위를 날고 있던 발록도 그렇게 흩어지고 있었고, 땅 위에서 다른 타이탄 들과격전을 벌이고 있던 마물들이라고 예외는아니었다. 다크가 멍청하게 보고 있을 때, 카렐 의 곤든 나이트가 옆으로 다가왔다. 군데군데 녹아내려 흉물스럽게 변한 골든 나이트의 머 리가 뒤로 젖혀지더니 카렐이 모습을 드래냈다. "대마왕 크로네티오가 죽은 모양이군. 그가 소환한 모든 마족들이 마계로 돌아가는 것을 보 니 말이야."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이겼다는 말이야?" "할아버지? 그러면 방금 전의 그 어마어마한 폭발들이......아르티엔님이 마왕하고 격전을 벌 인 것이란 말인가?" 카렐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뭐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다크는 청기 사에서 뛰어내린 후 격전장을 향해 달려갔다. 청기사에 탄 상태로 달리는 것보다는 그녀가 직접 달리는 쪽이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그녀가 연기를 내뿜고 있는 거대한 구덩이에 도착 했을 때, 구덩이의 저 아래쪽에 황금빛 찬란한 드래곤 두 마리가 엉켜 있는모습이 보였다. 다크는 밑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드래곤 한 마리는 몸체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드래곤은 성장기를 마친후 노 확기에 들어가 있는동안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이 차지하는 부분은 점점 줄어들고, 대신 드래곤 본이라고 불리는 금속성 물질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아르티엔처럼 거의 수명을 다해 가는 드래곤의 경우 그 몸은 드래곤 본과 마나의 덩어리라고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 렇게도 심한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아르티어스가 정신없이 몸을 흔들자 아르티엔은 힘겹게 눈을 떴다. "괜찮아요, 괜찮죠. 헤헤, 걱정했잖아요." 말을 하는 아르티어스의 얼굴은 흘러내리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미 아버지가 더 이상 살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는 것을 아르티어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 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없었다. "헤헤, 괜찮다고 말 좀 해봐요. 드래곤 역사상 최강이라는 아버지가 이따위 마왕 하나 때문 에 누워 있다는 게 말도 안 되잖아요. 그렇죠, 아버지? 헤헤, 괜히 나 놀리려고 일부러 그러 시는 거죠? 아버지, 제발 말좀 해봐요." 아버지의 몸을 꽈악 안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몸과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르티 엔은 힘겹게 눈들 떠 그의 아들을 보며 작은 목소리고 중얼거렸다. "헉헉, 우, 울지말고. 너, 너를 지, 진정으로 사랑해...." 겨우 말을 이어가던 아르티엔은 끝내 말을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순간 아르티어 스는 지금껏 몰랐던 아버지의 마음이 한순간에 왈칵 가슴으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리고 이제는 아버지의 짖궂은 음성을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장난 그만치고 눈 좀 떠봐요. 내가 잘못했어요. 이제는 말 잘들을게요. 제발, 제발 눈 좀 떠봐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르티어스의 음성은 어느덧 처절한 절규로 변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발!" 정신없이 아버지의 몸을 흔들며 울부짖던 아르티어스는 아버지의 몸에서 마나가 급속도로 흩어지는 것을 보며, 그가 숨을 거뒀다는 것을 알고 절규하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엄청난 기세로 퍼져 나가는 아르티어스의 절규. 지상의 모든 것을 복종시킨다는 드래곤 로 어가 울려 퍼지자 아르티어스에게 가까이 다가가던 다크조차 눈을 찡그렸다. 있는 힘껏 기 를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다크는 아무말 도 할 수 없었다.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두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오열하던 아르티어스는 조용히 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일 어서며 중얼거렸다. "아버지를.....대자연의 품에 돌려보내고 돌아오마." "아, 아빠......." 다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르티어스는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 거대한 몸집째 공간이동 해 버린 것이다. 아버지를 대자연의 품에 돌려보내기 위해서........ Chapter 21. 그후, 2년 뒤 마왕의 주력 부대 침공을 받았던 알카사스가 군사적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면, 크라레 스는 수도였던 크로나사 시가 전쟁의 주무대가 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대마왕 크로 네티오와 최강의드래곤이었던 아르티엔이 격전을 벌이면서 수도는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정 도로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엄청났던 전쟁의 상처도 마도전쟁이 끝난지 어 언 2년이 경과하자 어느 정도 서서히 아물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르티어스 어르신 의 피눈물나는 희생이 밑바탕에 깔렸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크라레스 제국이 받은 경제적, 인적 손실은 너무나도 막대한 것이었다. 크라레스 제국은 파괴된 크라레인 시에서 동쪽으로 30키로미터쯤 떨어진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해야 했다. 그리고 그 수도를 방어할만한 초대형 방어 마법진도 건설해야 했다. 황궁은 물론 도로, 병원,공장 등등 별의별 것들을 모두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 에 걸쳐 코린트와 대규모 전쟁을 벌였고, 마지막에는 대마왕 크로네티오와 전쟁을 벌이면서 수도까지 통째로 날아가버린 크라레스에 그럴 만한 여력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 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지만 크라레스는 겨우 2년 만에 수도 건설 작업을 대충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실 속사정을 알고 나면 전혀 기적이 아니었다. 수도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은 아르티엔의 레어에 쌓여 있던 엄청난 금은보화를 가져오 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걸 꿀꺽 하고 싶었던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다크의 부탁 때 문에 피눈물을 삼키며 포기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황궁의 내부 장식을 담당할 우수한 장인 은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솜씨 좋은 드워프들을 잡아 오는 것으로 간단 히(?) 해결되었다. 그리고 수도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방어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데는 수백 명의 우수한 마법사들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 또한 아르티어스 어르신 혼자서 간단히 발동 시켜 버렸다. 그야말로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없었다면 2년만에 수도를 어느 정도 재건한다 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집무실은 작업 효율의 극대화라는 명목으로 수백 명은 족히 들어갈 만 큼 넓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거의 백여명에 가까운 관료들이 저마다 책상에 앉아서 꽁지가 빠지게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아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책상에는 서류 더미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기에 앉아 있는그의 모습을 정면에서는 아예 볼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집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언제든지 훔쳐볼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 한 것 같은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책상 옆에 또 다른 책상 하나를 놔두고 거기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단 말씀이야."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편안하게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에서 포 도주를 즐기며 '작업감독'을 하고 있는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책상에는 다론이 앉아서 열심 히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호비트는 쥐어짜면 짤수록 일을 열심히 한다는 진리 말이지. 그걸 치레아에서 미리 깨달았 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내가 이걸 모두 혼자서 처리해야 할 것 아냐? 역시 늙으나 젊 으나 인생을 편안하게 즐기려면 배워야 한다니까." 따스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며, 황궁 앞의 거대한 정원에서부터 짙은 꽃 향기를 실어 오고 있었다. 할 일도 많았지만, 스트레스를 풀 대상도 많았다. 수틀리면 한번씩 쥐어짰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영 굼뜬 움직임을 보이던 호비트들도 이제는 눈빛까지 완전히 달라졌지 않은가? 잠시도 일을 하지 않으면 왠지 공포를 수반한 불안감을 느낄정도로 말이다. 바로 그때, 나직한 노크소리가 들리며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이, 이런!"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후다닥 일어섰다. 그런 다음 자신의 널찍한 책상으로 달려가더니 그곳 에 앉아 있는 다론의 멱살을 다짜고짜 움켜잡았다. "헉! 왜 그러십니까, 어르....으아악!"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다급한 김에 다론을 창밖으로 집어던진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서류를 검토하는 척했다.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다크가 안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적인 시간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다크는 쓱 들어오더니 아르티어스 옆에 서서 방글 거리며 말했다. "비교적 한가하신 것 같네요." 그말에 아르티어스는 분개한 목소리로 따졌다. "뭐야? 네 눈에는 내가 한가한 것처럼 보이냐? 이렇게 많은 서류 더미가 쌓여 있는데 말이 다." 아르티어스는 열심히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했다. 하지만 다크에게 그 런 잔꾀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거 글씨체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아빠가 글씨를 이렇게 못 쓰지는 않잖아요." 아르티어스가 당황해서 다크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그녀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고 있 었다. 그것을 보고 기겁을 한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서류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 "얘야, 그건 그렇고, 이것 좀 봐주겠냐? 하수도를 건설하는데 말이다. 이걸 이런 식으로 하 면 어떨까 하는 안이 올라와 있거든. 내 생각에는 조금 돈이 많이 들더라도 배관을 곧바로 강에다가 연결할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작은 늪지대를 만들고 그리고 연결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말이다. 그렇게 하면 강물이 오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아빠 좋을대로 하세요."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다급히 다크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다크는 간단하게 대답하면서 창가 로 걸어갔다. 그런 다음 창밑을 바라봤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집무실은 2층에 있었기에 아 래쪽으로 아름답게 꽃이 핀 황궁의 주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창밑에는 큰 대자로 뻗어 있는 다론의 뒤통수도 보였다. "저녀석은 누구죠?" "누,누구 말이냐?" 아르티어스는 당황한 듯했지만, 곧이어 정색을 하고는 창가로 걸어갔다. 밑을 내려다보니 아 론이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 아르티어스는 짐짓 화가 난 듯 외쳤다. "아니, 저 녀석이! 안 보인다 싶었더니 저기 숨어서 낮잠을 퍼자고 있었군. 내 이놈을 당 장..." "아빠가 집어던진 거잖아요. 그리고 간이 붓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저기서 낮잠을 자겠어 요?" "........" 아르티어스가 아무말도 못하자, 다크는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이제 아랫사람들 교육도 대충 끝나지 않았어요? 아빠가 없어도 모두들 열심히 일할 것 같 은데 말이에요." "글세, 하지만 내가 감독을 안하면 모두들 꾀를 부리니까 하는 말이지." "꾀 안 부릴 거에요. 그건 그렇고, 한가지 부탁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안 그래도 뭔가 약점을 잡힌 것 같았기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물어 봤다. "뭔데?" "저쪽에 앉아 있는 가스톤 있잖아요." 다크는 저 뒤쪽에서 아르티어스의 눈치를 살피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가스톤을 가리켰다. "저놈을 빼달라고? 안 그래도 인력이 모자라는데 열심히 일하수 있도록 잘 교육시켜 놓은 녀석을 빼가면 나보고 어떻게 일하라는 거냐?" "안되면 젊고 튼튼한 놈으로 한명 더 뽑아 드릴게요. 그건 그렇고 저 가스톤에게 마법 교육 좀 시켜주세요." 아르티어스는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하다가 곧 생각을 고쳐먹고 희번득이는 눈빛으로 가스톤 을 쏘아보며 음흉스럽게 미소지었다. 아르티어스의 눈길을 슬쩍 훔쳐본 가스톤은 부르르 떨 더니 재빨리 서류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제자? 아르티어스는 절대로 호비트를 제자 따위로 받지 않는다. 하지만 제자가 아니라 공인된 스트레스 발산 대상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용 의가 있었다. 원래가 수련이라는 것은 약간의 고통을수반하는 것인니까. "마법 교육이라...흐흐흐, 알겠다. 누구 부탁인데 내가 거절하겠느냐? 단기간에 호비트들이 말하는 대마법사라는 것으로 만들어주지." 그가 의외로 간단하게 승낙하자, 다크는 믿어지지 않는지 되물었다. "정말이에요? 그럴 수 있어요?" "내가 누구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냐? 걱정마라. 확실하게 교육시 켜 주지." "그럼 부탁드려요. 저는 그동안 팔시온과 미디아에게 검술교육을 좀 시켜야겠어요. 무슨 일 이 벌어질 때마다 내가 직접 돌아 다니는 것도 귀찮고 말이죠. 철저하게 단련시켜서 마스터 정도로 만들면 홀가분하게 여행이라도 돌아다닐 수 있잖아요. 안그래요?" "물론이지."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마음잡고 가스톤과 팔시온, 미디아를 교육시키기 시작한 지 5년이 흐 르자, 다론은 여태까지 숨겨놓고 있었던 마법책을 다크에게 건네줬다. 다론은 처음에는 조 국의 안위를 생각하다보니, 다크에게 그 책을 건네줄 수가 없었다. 다크가 떠나버린다면, 약 체화된 크라레스를 코린트나 크루마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토지에르 대신 수석 궁정마법사가 된 다론은 다크에게 마법서를 건네주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에게 허구한 날 두들겨 맞는 것도 참기 힘든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선뜻 그렇게 하지 못했다. 조국의 안위도 문제였지 만, 대마왕과의 격전때 수도가 송두리째 파괴되면서 마법서는 소멸되었다고 다크는알고 있 었다. 그런 그녀에게 뒤늦게 그 책을 건네줬다가 무슨 꼴을 당할 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마음을 모질게 먹고, 다크에게 마법서를 건네줬다. 제국도 안정기에 들 어간 상태였고, 두명의 마스터가 새로이 추가되었기에 조국의 미래는 그 애물단지들이 없어 도 밝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르티어스에게 쥐어터지는것도 이제 한 계점에 다다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다면, 그래도 한번에 끝내 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책을 건네준 그날 다크에게 밤새도록 두들겨맞았지 만... "드디어 떠나는구나." "응, 그동안 즐거웠어. 그런데 가스톤은?" "이상하네, 어제 말했는데....어, 저기 오는군." 다크는 가스톤은 보면서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옛날부터 살이 별로 없었지만 5년 간 못 본 사이 가스톤은 아예 미라처럼 깡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독기가 서린 듯 불을 뿜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다크는 가스톤의 교육을 아빠에게 부탁한 것이 잘한 일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 한동안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과 간단하게 작별을 나눈 후, 아 르티어스는 마법서를 들여다보며 뭔가 궁리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마음을 정한 듯 쓱쓱 마 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주문을 외우기에 앞서 옆에 서 있는 ,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이별이구나, 아들아." 아르티어스는 눈물 어린 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다크를 바라봤다. 그 모습 하나하나까지도 머릿속에 기억해두려는 듯. 그러다가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다크를 와락 안으며 사정했다. "제발 나도 같이 가자, 응? 아버지도 돌아가신 지금, 나한테는 너밖에 남아 있지 않잖니." 다크는 자신을 안은 채 슬픔에 젖어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도저히 거절 할 수 없었다. 자기 때문에 아르티엔이 죽은 것은 빼놓고라도, 여태껏 이렇게 정이 든 아르 티어스와 헤어진다는 것은 그녀에게도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크는 손을 내밀며 다정스 럽게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려요, 아빠."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눈물에 젖은 채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잠시 뒤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새하얀 빛이 번쩍이며 서서히 그들의 모습을 감춰버렸다. Chapter 22. 숨겨진 뒷이야기 아르티어스가 다크와 함께 그의 고향으로 돌아간 지 20년 하고도 몇 년이 지난 어느날. "이런 제기랄! 그 자식은 왜 공간이동 좌표도 잘 모르는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 사는 거 야? 덕분에 물어물어 찾아오느라고 힘만 들었잖아." 사실은 물어물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레어에 있는 엘프들을 족쳐서 공간이동 좌표가 기록된 책을 강탈한 것이었다. 하지만 브로마네스로서는아르티엔이 있을지도 모르는 대공 관저의 상공에 공간이동할 배짱은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치레아 공국의 수도에서 멀찌감치 떨어 진 곳에서 나타나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친구인 아르티어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려 고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런 그렇고, 설마 어르신이 그놈과 함께 계시는건 아니겠지?" 한참을 수도 쪽으로 걸어가던 그는 수십명의 말 탄 병사들의 행렬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행 인들은 그들을 바라보고 열심히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흥! 무슨개선식이라도 하는 모양이군. 호비트라는 것들은 도대체가 자기들끼리 서로 못 잡 아먹어서 안달이라니까...." 이때 옆에서 개선식을 지켜보고 있던 행인들이 두러두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후작각하께서는 대단하신 분이야. 엄청나게 많은 오크들을 한번에 토벌하셨다고 하더 군." "저 오우거같이 우람한 덩치를 봐. 그딴 오크들 따위 한주먹이면 끝장나지 않겠어? 하여튼 이 일대에 몬스터들이 씨가 마른것도 다 이해가 가는일이지." "이 사람아, 후작 각하만 굉장한 줄 아나? 저것봐. 후작 부인의 덩치도 만만치 않지? 예전에 는 여자의 탈을 쓴 오우거라고 불렸다고 하더라구. 저 모습만 척봐도 그 무서운 마도전쟁에 서 용맹을 떨치셨다는게 이해가 간다구." 행인들의 대화를 듣던 브로마네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도전쟁? 웃기고 있네. 무슨 얼어죽을 마도전쟁이야. 발록이라도 한 마리 나왔나 보지?' 비웃음을 흘리며 발길을 돌리던 브로마네스는 병사들의 가슴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골드 드래곤 두 마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히벌쭉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브로마네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허, 참. 그놈 취향 한번 희한한 놈일세. 자신을 저렇게 그려놓고 싶을까?"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던 브로마네스는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아니지, 어르신이 계신데 감히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저 둘에 하나는 어르신이 분 명한데 말이야. 하긴 그럴수도 있겠지. 아르티어스의 성격이 어디서 왔겠어?" 주변을 살피며 조심조심 수도안에 들어간 브로마네스는 감히 대공관저에 들어갈 생각을 못 하고 술집에서 시간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냥 돌아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던 브로마네스는 이윽고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더 이상 레어에서 시간을 죽이고 싶지 않 았던 것이다. 엘프들을 쥐어박으며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아르티엔 을 기다리며 불안한 마음으로 사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르티어스 있나?" 으리으리한 대공 관저에 도착한 브로마네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정문에 서 있는 병사에 게 나직하게 물었다. 그 말에 병사는 황당하다는듯한 표정을 상대를 살펴봤다. 주위를 기웃 거리는 것이 꼭 범죄형인 듯했지만, 아무래도 저 우람한 몸매에 귀족적인 얼굴, 게다가 화려 한 의상을 걸친 상대를 함부로 대하기는힘들겠다고 결론지었다. "아르티어스? 이름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이 름을 쓰는 사람은 없는 것이 확실하오." '이런... 저런 말 탄 병사 놈에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어쩐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브로마네스는 한 가지 이름이 더 생각난 듯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여기 다크라는 사람은 있나? 다크 폰 치레아라는 계집 말이야." 그 말에 병사의 눈이 분노로 가득 찼다. 감히 대공 전하께 계집이라는 상스러운 용어를 사 용하다니.... "이런 무엄한 놈! 네놈을 당장 체포하겠다." 브로마네스는 황당했다. 이놈의 버릇없는 병사를 한주먹에 박살내버린다면 속이 다 시원하 겠지만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다간 어르신에게 들킬 우려가 있는 것이 다. 혹시나 여기에 어르신이 계실 가능성을 무시하기는 힘든 것이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브 로마네스는 짐짓 황당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라서 무심결에 버릇처럼 말한 것뿐일세." "예? 설마....." 잠시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하던 병사는 뭔가 생각이 난 듯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상관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잠시 후 기사 하나가 재빨리 달려오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대공 전하를 뵈려고 오셨습니까? 저는 경비대장을 맡고 있는 케빈 패터슨이라고 합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대공 관저의 거대한 응접실로 안내된 브로마네스는 열심히 주위를 살피며 혹시라도 아르티 엔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때, 한쪽 문이 활짝 열리며 근엄한 모 습의 늙은이가 들어왔다. 그는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치레아 공국의 궁정을 맡고 있는 카르토 백작이라고 합니다. 다크 폰 치레아 대공 전 하를 뵈러 오셨다구요?" "그렇소. 아, 그리고 혹시 아르티어스라고 알고 있소?" "아,르,티어스!" 잠시 생각하던 카르토 백작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며 급히 반문했다. "혹, 혹시 골드 드래곤이신 아르티어스 어르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토 백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육중한 발걸음 소리와 함게 거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브로마네스가 가만히 보니까 낮에 개선식에서 앞장서서 말을 타고 가던 바로 그 사내였다. "저는 현재 치레아 공국의 임시 총독을 맡고 있는 팔시온 폰 엘마리노라고 합니다. 아르티 어스 어르신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친구라네." "친, 친구란 말씀이십니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위, 위대한 분이시오." 팔시온은 곧장 뒤로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카, 카르토 백작! 당장 최고급 포도주와 음식을 준비하라고 이르시오. 자, 이쪽으로 오시지 요,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브로마네스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팔시온은 그를 귀빈실로 안내했다. 그후 음식들이 줄 줄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브로마네스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의 음성이 들려왔다. "후작 부인께서 영애와 함께 드십니다." 브로마네스가 보니 웬 오우거 찜 쪄 먹을 만큼 등발이 좋은 여자 둘이 어울리지도 않는드레 스를입고 들어왔다. 워낙 우람한 그녀들이었기에 한 발씩 움직일 때마다 드레스가 터질 듯 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짙게 화장을 한 그녀들의 얼굴은 너무 급하게 화장품을 처발랐는 지 차마 보기조차 끔찍했다. 브로마네스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나직한 음성으로 투덜거 렸다. "빌어먹을! 차라리 오우거를 보는 게 낫겠군. 이건 고문이야." "오, 위대하신 분이시오, 제 사랑하는 아내인 미디아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저희들의 귀염둥 이인 다이아나라고 합니다." 팔시온의 소개에 따라 오우거 두 마리가 인사를 건넸다. 브로마네스는 차마 그녀들을 바라 보지 못하고 애꿎은 술만 연신 들이켰다. 대충 인사가 끝나  브로마네스는 그제야 기회를 잡고,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혔다. "혹시 아르티어스는 어디에 있나?" "아르티어스 어르신 말씀이십니까?" "그러네. 그를 만나기 위해서 왔거든. 그런데, 설마 여기에 아르티엔 어르신이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 브로마네스가 못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하자 팔시온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마도전쟁 때 일을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내가 사정이 있어서 한동안 레어에 처박혀 있었거든." "아, 그래서 모르셨군요. 얘기를 하자면 2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그때...." 콰콰쾅! 갑자기 치레아 공국 대공 관저의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며 엄청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화가 머리끝까지 난 브로마네스는 팔시온과 미디아, 그리고 오우거 같은 계집을 먼지 나게 두들겨 팬 후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아르티엔이 세상을 떠난 지금, 더 이상 자신을 핍 박할 드래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공간이동을 하지 않고, 그 거대한 몸집을 드 러낸 채 자유롭게 밤하늘을 향해 날아오른 것이다. 치레아의 대공 관저에서 그 거대한 몸집 이 날아올랐기에 밑에 있던 수많은 호비트들이 자신을 보고 환성을 질러대는 것이 보였다. "응? 이곳은 다른 도시들과 달리 호비트들의 반응이 조금 특이하군. 드래곤을 보고 저렇게 좋아할 이유가 없을 텐데 말이야." 사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드래곤은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한 존재였 다. 밑에 있는 호비트들이 수호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아우성을 치며 구경하는 가운데 브로 마네스는 점점 더 그 거대한 몸집을 하늘 높이 올려갔다. 얼마나 오랜만에 이렇듯 마음껏 날아보는것인가? 그놈의 포도주 아홉 병 때문에 무려 30년을 레어에서 벌 받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브로마네스였다. 미네르바의 가슴은 저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형언할 수 없는 흥분 때문에 폭발할 것만 같 았다. 발밑으로 보이는 거대한 엘프리안 시의 위용. 아직까지 주민들을 입주시키지 않았기에 허허벌판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과거 그 번영을 부렸던 엘프리안시의 전성기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대마법사 안피로스의 도시 방어 마법진의 설계도대로 외곽에 초대형 방어 마법진을 갖추는데 얼마나 많은 인력과자금이 소모되었던가. 그리고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이 새로운 황궁은 얼마나 웅장하고 멋진가. 모든 사람들이 서쪽 대륙에서 가장 찬란하 고 아름다운 황궁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서 3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공들여 건설한 것이다. 이제 일주일 후면 대무도회를 시작으로 황제는 프루니아에서 이곳 엘프리안의 황궁으로 이 주하게 된다. 황궁과 초대형 방어 마법진의 건설을 위해 그 어떤 시민들의 이주도 아직까지 허용되지 않았지만, 천도와 동시에 주민들의 이주도 시작될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흥청거리는 엘프리안이 눈에 보이는듯했다. 그리고 엘프리안 시의 한쪽에는 드넓 은 공장지대를 건설할 계획어었다. 그곳의 가장 핵심에는 타이탄 생산 공장이 들어설 것이 다. 여태껏 30년이라는 세월동안 정예 기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그녀는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 았었다. 주변 국가들이 정예 기사들을 마도전쟁에서 잃었지만, 크루마는 아니었다. 이제 10 년만 더 고생하면 그녀의 노력은 결실을 맺기 시작할 것이다. 10년만.... 그것 때문에 강력한 군대와 기사단을 갖춘 서쪽 대륙 최강의 제국 크루마의 수도에 어울리게 엘프리안의 건설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한참 상념네 잠기던 그녀는 밤하늘에 뭔가 이상한 그림자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시선을 그 쪽으로 집중했다. 새?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고도가 너무 높았다. 그리고 새라고 하기에는 너 무나도 컸다. 브로마네스는 오랜만에 찾은 자유를 만끽하며,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 었다. 아르티어스 때문에 이제는 사라져버린 엘프리안 옆에 건설되어 있는 자신의 안락한 보금자리. 이제 더 이상 호비트들이 내는 신경 거슬리는 소음은 들려오지 않겠지. 그때, 브 로마네스는 보고야 말았다. 저 아래쪽으로 펼쳐져 있는 거대한 방어 마법진을 말이다. 그리 고 그 방어 마법진의 중앙에 호화의 극치를이루고 있는 거대한 궁정. 아스라한 달밤에 보는 것이라서 그런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후후, 내가 처박혀 있는 동안에 건설한 것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또다시 슬금 슬금 들볶아 서 금은보화라든지, 최고급 포도주 따위를 마음껏 빼앗을 수 있겠는데?' 흐뭇한 마음으로 황궁을 바라보던 브로마네스의 눈에, 발코니에 나와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 는 호비트 계집이 보였다. 그 계집을 보자마자 순간 브로마네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저, 저년은! 이런 망할 계집. 저년이 준 불량품 때문에 내가 30년씩이나 그 고생을 했는데. 딴 놈은 다 용서해도 저 년만은 도저히, 아니 절대로 용서 못해!' 브로마네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대로 날씬해 보이던 브로마네스의 몸집이 한순간 돼지처럼 뚱뚱해지는가 싶더니, 곧이 어 그의 입에서 폭발적인 붉은 광채가 사정없이 뿜어져 나왔다. 30년 동안 쌓이고, 쌓이고, 또 쌓였던 수만은 울분과 함께. 묵향16 차례 털이 숭숭난 다리 신을 사칭한 사기 행각 오! 북극성 계속되는 사기행각 연기파 배우 아르티어스 둥루젠의 수도 고기를 굽는 데는 혈수마공이 최고 번개의 신 당케 탱게르 짜식들이 꼭 패야 믿나 서서 오줌 누는 여신 초죽음이 된 묵향 잔인한 해적들 혹시 여행 오셨나 보죠? 문도 못 여는 바보 드래곤 젠장, 이제 겨우 4천 살인데 화염의 술을 쓰는 닌자 잔대가리의 대결 묵향, 청혼을 받다 이따만큼 큰 사케 싸움 구경이 최고 한밤중의 침입자 털이 숭숭 난 다리- 푸석푸석한 흙먼지만 날리는 황량한 땅이 끝없이 이어지는 벌판에도 봄은 찾아오는지 여기저기서 푸르른 새싹들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 사위는 점차 어둠에 잠겨들며 붉은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둥루젠의 한 작은 촌락민들은 마을 옆 공터에 피워놓은 화톳불 주변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무사히 보내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맞이해서인지 먹을 것은 별로 없었지만 촌락민들의 안색은 밝고 넉넉해 보였다. 화톳불에 걸려 있는 거대한 솥에는 그동안 비축해 두었던 얼마간의 고기와 나물을 아낌없이 넣고, 모든 촌락민들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국을 끓이고 있었다.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끓는 국에서 퍼져 나오는 구수한 냄새는 촌락민들의 코를 사정없이 사로잡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촌락민들이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하던 어느 순간이 었다. 번쩍! 지상에서 약 3미터쯤 되는 공간에서 갑자기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촌락민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고 그 빛을 바라봤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흐르자 빛 모래 가운데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더 더욱 촌락민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였다. 빛 무리의 중심 부위가 시커멓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둥그런 물체 두 개가 불쑥 튀어나오며 땅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사람은 순식간에 균형을 잡으며 우아하게 착지했다. 일단 착지에 성공한 그들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살펴보았다. "으아아악!" "헉!" 촌락민들은 허공에서 사람이 튀어나오자 기겁을 하며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놀라기는 빛 속에서 튀어나온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차원이동을 끝내자마자 자신들의 눈앞에 웬 털이 숭숭 난 시커먼 것들이 괴성을 지르며 와글거리는 것을 보자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던 것이다. "이, 이건 뭐라고 하는 몬스터냐?" 아르티어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적으로 중얼거리자, 이미 냉정을 되찾은 묵향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에이, 씨. 또 잘못 왔잖아요." 묵향의 투덜거림에 아르티어스는 천천히 자신들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커먼 것들을 둘러봤다. 처음 봤을 때는 너무 지저분하여 몬스터라고 착각할 정도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호비트였다. 그 호비트들은 모두들 화톳불 주변에 둘러앉아 자신들을 경악한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는지 아직 덜 익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호비트도 있었고, 볼이 불룩 튀어나오도록 입 안 가득 음식물을 머금고 있는 호비트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놀라서인지 아예 음식물을 삼킬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자신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없이 많이 여행을 다녀본 아르티어스였지만, 이렇게 지저분하고 멍청하게 생긴 호비트는 난생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어째 생긴 것은 호비트 같은데, 하고 있는 꼬라지는 오크냐?" 아르티어스가 몬스터라고 착각할 정도로 그 촌락민들의 차림새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들 모두 털가죽으로 몸을 두르고는 있었지만, 이들이 입고 있는 것은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너무 단순했다. 그저 큼직한 털가죽을 대충 잘라서 이어 붙여 몸에 둘러놓은 형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가죽을 가늘고 길게 잘라서 허리를 질끈 동여매어 상체에 두르고 있는 털가죽을 고정했다. 그 털가죽 밑으로 또 다른 가죽이 삐쭉 내려와 있는 것을 보면 아마 하의도 가죽으로 만들어서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아르티어스가 어이가 없었던 부분은 그들의 머리 모양이었다. 수컷들은 앞머리를 빡빡 밀었고, 뒷머리는 한 가닥으로 길게 땋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암컷들은 머리를 밀지는 않았지만 머리카락을 여러 가닥으로 땋아서, 그 끝에 갖가지 색깔의 수실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있었다. 좀 늙은 몇몇 암컷들은 그 끝에 작은 방울을 달고 있기도 했다. 나름대로 모양을 낸다고 수실이나 방울을 달고는 있었지만 머리카락을 얼마나 감지 않았는지 온통 기름기로 번질거리고 있었다. 그런 괴상한 머리 모양에다가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그 위에 털가죽으로 잔뜩 몸을 감싼 것들이 우글우글 오며 있으니 아르티어스로서는 몬스터들이 떼거리로 모여 있는 줄 착각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그들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을 때, 촌락민들도 얼이 빠진 듯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괴상한 복장의 이방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짐승 가죽을 그저 걸치고 있는 자신들에 비해 이방인들의 옷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바람만 불어도 살짝 날릴 것 같은 하늘하늘한 천으로 된 옷이었다. 그리고 이방인들 중의 한 명은 정말이지 특이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오도록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피부색은 창백하리 만큼 희었다.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르티어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번엔 뭐가 잘못된 거지? 그만큼 좌표가 정확한지 몇 번씩이나 확인했는데 말이야." 이리저리 손가락을 꼽아보며 아르티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묵향의 얼굴은 확 찌그러졌다. "아버지! 또 좌표를 잘못 계산한 거예요?" "글쎄다, 난 분명히 제대로 한다고 했는데...... 그나저나 내 살다 살다 이런 미개한 호비트들은 처음 보는군." 아르티어스의 눈에 비친 미개한 호비트들은 지금 난리가 아니었다. 멍하니 자신들을 바라보던 호비트들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암컷들은 비명을 지르며 새끼들을 데리고 부리나케 뒤로 달아났고 수컷들은 허겁지겁 자신의 주위에 놓여 있는 창이나 활을 주워든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의 몇 명은 허리에 찬 반월형으로 생긴 길쭉한 칼을 뽑아들고 있었다. 일단 대충이나마 무장이 갖춰진 수컷 몇몇이 창을 들고, 자신들 딴에는 잔뜩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보이며 아르티어스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인지 그들이 쥐고 있는 창 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심드렁한 눈빛으로 하는 꼴을 바라보던 아르티어스는 그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자 갑자기 인상을 팍 찡그리며 소리쳤다. "에이, 씨. 이것들은 목욕도 안 하나? 내 코가 썩는다! 썩어!" 아르티어스의 말대로 그들이 다가오자 코가 마비될 정도로 강한 악취가 풍겨 나왔다. 때가 꼬질꼬질한 털가죽 옷이나 꾀죄죄한 용모로 미루어 봤을 때 아주 비위생적인 생활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화톳불 저 뒤편으로 여러 채의 이동식 천막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한곳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민족은 아닌 듯했다. 건장한 수컷들 몇몇이 무기를 들이밀며 위협적인 어조로 외쳐대고 있었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위협적인 몸짓과 괴성에도 불구하고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묵향에게 입을 열었다. "거참, 술에 취했을 때 봤으면 완전히 오크로 보이겠군, 그나저나 저 놈들이 뭐라고 하는 거냐?" "위대한 드래곤이신 아버지가 모르시는데, 미천한 호비트 따위인 제가 어찌 알겠어요?" 왠지 비비꼬인 묵향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맞받아쳤다. "같은 미천한 호비트니까, 혹시 알까 해서 물어본 거지." 안 그래도 또 다시 차원이동이 잘못된 것 같아 기본이 좋지 않았던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빈정거림에 화가 나는지 버럭 소기를 질렀다. "에잇, 젠장.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차원이동 따위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반응에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차원이동 따위? 감히 차원이동에 "따위"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놈은 네놈밖에 없을 거다. 드래곤이 비록 신과 맞먹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아마 전 드래곤 일족 중에서 차원이동을 경험해 본 드래곤은 나밖에 없을 걸?" 거드름을 피우며 아르티어스가 목에 힘을 주어 말하자 묵향은 웃기지 말라는 듯 빈정거렸다. "어호! 그래요? 그럼 다른 드래곤들은 능력이 없어서 차원이동을 못한다는 말씀이네요? 혹시 차원이동이 어려워서 못하는 게 아니라, 할 수는 있지만 귀찮아서 안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아버지가 지금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다 마법 실력이 강하다고 착각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죠? 할아버지도 차원이동을 안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묵향의 말에 한껏 거드름을 피우던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차원이동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간만에 기분 좀 내려했더니 이런 식으로 빈정거리다니...... 물론 그 말이 사실이기는 했지만 아르티어스의 기본은 순식간에 사늘하게 식어버렸다. "그, 그게 자식으로서 애비에게 할 말이냐? 너를 위해서 이렇게 별 같잖은 차원을 떠돌아다니는 나에게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분노에 찬 표정을 본 묵향은 약간 찔끔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기분을 맞춰주기 시작했다. "에이, 그냥 농담한 것 가지고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요? 그나저나 이렇게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다니니 정말 좋네요. 아버지도 여행 좋아하시잖아요? 기분 푸시라구요." 묵향의 너스레에 아르티어스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행? 여행이라고? 이게 뭐가 내가 좋아하는 여행이라는 말이냐? 내가 원하는 여행은 이런 게 아니었다. 나는 아들내미하고 오붓하게 여행하고 싶었단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하고 있잖아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의 인상은 확 찌그러졌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버럭 소리쳤다. "머시라? 사랑스러운 내 아들은 너처럼 다리에 털이 숭숭 나지는 않았어!" 이렇게 서로의 대화가 겉도는 것은 아르티어스의 묵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아들인 다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살던 차원을 벗어나자 저주는 풀려 버렸고, 그 리고 아르티어스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 다크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물론 묵향이 다크와 동일 인물임을 알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현재의 모습에는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성난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자, 묵향의 시선은 그의 손가락을 따라 자신의 다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이어 예쁜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스커트 자락 밑으로 시커먼 털이 숭숭 난 자신의 다리통이 보였다. "허걱!" 그제서야 묵향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원래가 차원이동을 하면 몸만 이동할 수 있을 뿐, 신체를 제외한 그 어떤 물건도 함께 이동하지 못한다. 검 같은 무기는 물론이고, 옷가지 하나 조차도......저번 차원이동을 할 때 벌거벗은 몸으로 떨어져 얼마나 놀랐던가. 차원이동이 끝나는 그 짧은 순간에 혹시나 중원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묵향은 그것을 잠시 잊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묵향이 입고 있는 것은 아르티어스가 차원이동이 끝나는 시점에 마법으로 만들어준 옷이었다. 하지만 만들어 준 옷이 이게 뭐란 말인가? "이, 이게 뭐야?" 묵향이 어이가 없어 중얼거리자 아르티어스는 화가 난 어조로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싫으면 벗어!" 아르티어스의 통렬한 일격에 묵향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한참을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던 묵향의 인상이 서서히 험악하게 굳어져갔다. "정말 이렇게 유치하게 나올 거예요?" "뭐가?" "왜 이따위 옷을 입히느냔 말이에요? 나는 여자가 아니라구요. 남자란 말입니다. 자, 봐요!" 묵향은 털이 숭숭 난 자신의 다리가 잘 보이도록 스커트 자락을 번쩍 위로 치켜 올리며 외쳤다. "도대체가 이런 다리에 스커트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묵향의 표정이 점점 더 사나워지자, 아르티어스는 찔끔거리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성질을 건드렸다가는 저 더러운 성격에 뒷감당을 하기가 버거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흐흠, 그럼 옷에 어울리게 여자로 변하면 될 것 아니냐? 그 방법은 아주 오래전에 너한테 가르쳐 준 것으로 아는데 말이다." "오호! 아버지의 속셈이 그거였군요. 정말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제기랄! 그딴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차원이동을 제대로 할 리가 없지!" 말을 하던 묵향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가 힘들었던지, 입고 있던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벗어 발기발기 찢어 버렸다. "저하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 그렇게 싫으시다면 차라리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죠." 차가운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살살 구슬렸어야 하는데, 저 지랄같은 성격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너무 다그친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고 내심 후회하는 아르티어스였다. 급히 마법으로 묵향의 옷을 만들어 주며 아르티어스는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번쩍! 빛과 함께 묵향의 벌거벗은 몸 위에 뭔가 아른거리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인가 단정한 여행복이 입혀져 있었다. "에이~, 뭐 이런 사소한 걸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냐? 내가 비록 좀 심한 장난을 쳤다고 아빠에게 그렇게 화를 내면 못쓰지. 자, 옷도 이렇게 새로 만들어 줬잖니? 이제 그만 화를 풀거라. 마음에 안 들면 말해. 마음에 드는 걸로 한 벌 쫘악 뽑아줄 테니까 말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해 주면 될 것을, 계속 사소한 것을 가지고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아르티어스에게 묵향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자신만을 의지하여 이 먼 곳까지 따라와 준 아르티어스가 아닌가? 그렇다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힘들었기에 내심으로만 아르티어스에 대한 욕설을 퍼붓고 있는 묵향이었다. -신을 사칭한 사기행각- 묵향의 눈치를 보던 아르티어스는 화제를 돌릴 겸해서 호비트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저 좀들은 어떻게 할 거냐?" 묵향이 야만인들을 바라보니, 그들은 아까보다 더욱 부들부들 떨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방금 전에 자신의 옷이 마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대단히 놀란 듯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공격할 의사는 없는 듯한데, 어디 딴 데로 가 보죠. 설마 이 근처가 모두 다 이런 야만족들만 살고 있겠어요?" 아르티어스는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음흉스레 미소를 지으며, 묵향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오랜만에 너에게 이 애비의 실력을 보여주지. 저런 야만인들은 어떻게 요리하는지 말이다, 흐흐흐." 말을 마친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주문을 외워 휘황찬란한 빛으로 몸을 감싸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근엄한 표정으로, 목에 힘을 주어 소리쳤다. "듣거라! 이 미개한 놈들아! 아직도 내가 어떤 존재인줄 모르겠느냐!" 마을 구석구석에 까지 닿는 장중한 아르티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깡마른 노인 하나가 다급한 표정으로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장정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오며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그 노인의 복장은 다른 야만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털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옷 위에는 갖가지 작은 동물들의 가죽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또 머리 위에는 기다란 새의 깃털이 꼽혀 있었다. "오오, 텡게르! 텡게르!" 노인의 외침에 다른 야만인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땅바닥에 코를 쳐박고 엎드리며 탱게르를 목이 터져라 외쳐대기 시작했다. 노인은 아르티어스가 떠 있는 공중을 바라보며 뭐라고 계속 외치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한참을 외치며 다가서던 그 노인은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그는 하늘과 당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그 어떤 주문을 노래를 부르듯 박자를 맞춰가며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발을 쿵쿵거리며 요란하게 춤을 췄다. 노인은 춤을 추는 와중에도 천천히 아르티어스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이윽고 노인이 허공에 떠 있는 아르티어스의 앞쪽에 다다르자, 머리를 땅바닥에 납작 붙이며 절을 했다. "이것들이 지금 뭐하는 거예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씨익 웃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면 모르냐! 이게 다 호비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습성이지. 뭔가 불가사의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면 그것을 신과 결부시켜서 생각하니까 말이다. 이것도 호비트가 매우 이성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가지게 된 습성일 수도 있지." 노인은 한참 절을 한 뒤 살그머니 일어서서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어떤 방향을 가리켰다. 하지만 묵향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겁에 질린 표정으로 더욱 정중하고도 끈기 있게 계속 그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자는 말인 것 같은데요." 묵향이 노인이 손짓하는 방향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에게 말하자, 아르티어스는 내 실력이 어떠냐는 듯 으스댔다. "하하하, 이것들이 이제야 신을 모시는 접대를 하려나 보군. 가보자. 뭐, 정신을 못 차리고 까불면 한방에 날려 버리면 되지." "그것도 그러네요." 노인을 선두로 해서 야만인들은 묵향과 아르티어스를 마을에서 가장 큰 천막으로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가죽으로 된 물을 젖히고 들어선 천막 안은 노린내 같은 괴상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그 냄새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데 노인은 그들을 천막 한쪽에 놓여 있는 비교적 깨끗한 털가죽 위에 앉도록 안내했다. 묵향이 그 위에 앉을 때, 밑에서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천막 제일 밑바닥에는 건초 같은 것을 깔아서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습기를 막는 모양이었다. 일단 그들이 자리에 앉자, 노인과 몇몇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늙은이 3명이 들어와 꿇어앉아서는 한 번씩 고개를 깊숙이 조아리며 신성심이 가득한 어조로 뭐라고 쉴새없이 떠들어댔다. 한참을 그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떠들어대던 그들이 입이 다물어진 것은 음식들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든 여인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그 노인들은 여인들이 벌벌 떨며 조심스럽게 음식을 아르티어스와 묵향 앞에 차려놓기 시작하자 코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한 후 밖으로 나갔다. 뭔지 모를 액체가 담겨 있는 사발들, 그리고 잘 구은 고깃덩이, 처음보는 새까맣고 자그마한 열매들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묵향과 아르티어스의 앞에 가지런히 놓여졌다. "오, 안 그래도 시장하던 참이었는데 잘됐군." 아르티어스는 넉살좋게 웃으며 먼저 사발에 담겨 있는 허연 액체의 냄새를 맡아본 후 곧바로 몇 모금 들이켰다. "제법 먹을 만하네. 그런데 맛이 비릿한 게 양젖 같은데?" "그런가요?"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들고 있던 사발을 받아들고 쭉 들이켰다. 아르티어스는 사발에 담긴 커다란 고깃덩이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겉은 노릿노릿 잘 구어진 듯했지만, 속은 하나도 안 익었는지 한 입 베어 물자 선홍빛 핏물이 배어나오는 데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거 고기가 신선해서인지 맛이 기가 막히군. 너도 어서 먹어라." 그래곤이야 오크건 와이번이건 통째로 잡아먹는 경우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오히려 신선하다고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묵향을 그렇지 못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바라보던 묵향은 비위가 상한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새까맣고 작은 열매를 집어서 먹었다. 보기에는 조금 이상했지만, 달콤한 것이 제법 맛이 괜찮았다. 묵향이 열매를 한참 먹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는 커다란 고깃덩이를 먹다가 텁텁한 냄새가 나는 부연 액체를 쭈욱 들이키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크! 이단 것도 술이라고 마셔야만 하다니......" 술이라는 말에 묵향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술이라구요?" 묵향이 반색을 하며 묻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이며 대답했다. "그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양젖 같은 걸로 만든 술 같구나. 젠장! 이런 걸 술이라고 만들고 있다니, 이건 술에 대한 모욕이야." "그런 말씀하실 거면 제가 마실테니 주세요." 아르티어스에게 빼앗듯 사발을 받아든 묵향은 단숨에 쭈욱 들이켰다.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텁텁하면서도 비릿한 술 맛은 옛날 몽고전때 자주 마셨던 마유주를 떠올리게 했다. 중원에 대한 그리움이 되살아났는지 묵향의 얼굴이 일순 침울해졌다. 묵향의 표정을 살피던 아르티어스는 그것 보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젠장, 어쩔 수 있냐! 딴 게 없으니 이거라도 마셔야지."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자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10여 가닥으로 땋은 소녀 둘이 들어왔다. 방금 전에 음식을 천막 안으로 날랐던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4가닥으로 땋은 것에 비해서는 꽤나 비교가 되는 모습이었다. "저것들은 또 뭐하려고 들어온 거지?" "글쎄요......?" 그녀들은 천막 바닥에 깔려 있는 두툼한 가죽을 정성을 다하여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또 다른 깨끗한 가죽을 한 장 깔았다. 아래에 깔려 있는 것보다는 얇고 보드라운 것이었다. "아하! 잠자리를 정리하는 모양인데요." "그런 모양이군." 그녀들은 어느 정도 잠자리 정리가 되자 묵향과 아르티어스에게 경건한 어조로 뭐라고 말한 다음 그 옆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것들이 뭐하는 거죠?" 약간 당황한 듯한 묵향과는 달리 아르티어스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야. 호비트라는 것들은 불가사의한 존재에게 여자를 바치는 습성이 있거든. 옛날에도 나한테 여자를 갖다 바친 정신 나간 놈들이 몇몇 있었지." "그건 아빠가 드래곤일 때 얘기잖아요." 워낙 습관이 돼서 그런지 아무 생각 없이 묵향의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그냥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빠"라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소름이 끼친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며 투덜거렸다. "참 나, 다 큰 사내자식이 "아빠"라니!" "아, 아버지...... 이거 오랬동안 버릇이 돼서인지 잘 안 고쳐지네요. 그건 그렇고 ,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묵향이 왠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했지만, 아르티어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전혀 문제가 안 되지. 저것들 표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거든. 봐, 얼굴에 존경심이 가득 하잖아. 하늘에서 떨어진 우리들을 아마 전지전능한 신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야. 왜? 호비트가 나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좀 그런가 보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한 아르티어스의 표정에 묵향도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럴까요?" "당연하지. 내 말이 틀림없다. 흐흐흐, 어디 오랜만에 회포나 풀어볼까."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보란 듯이 과장된 몸짓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소녀들 중 한 명을 가볍게 껴안았다. 하지만 그 소녀는 가만히 떨고만 있을 뿐,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아르티어스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소녀의 얼굴로 입술을 대려다가 갑자기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소녀의 목덜미 쪽으로 얼굴을 접근시키자 뭔가 표현하기 힘든 기괴한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세히 보자 옷밖으로 드러난 살갗에는 얼마나 씻지 않았던지 꼬질꼬질한 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우엑! 제, 젠장. 이것들이 엄청 불결하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군." "히히힛!"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묵향을 얄밉다는 듯 잠시 노려본 아르티어스는 마법의 힘을 끌어올려 거칠게 외쳤다. "슬립(Sleep)!" 그와 동시에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던 두 소녀는 기절하듯 픽 쓰러졌다. 소녀들이 잠이 들자 아르티어스는 헛기침을 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험험, 저런 단순한 놈들의 경우 이쪽에서 호의를 거절하면 곧장 우리가 자신들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다고 오해하거든. 이런 경우에는 계집들을 천막 밖으로 내쫓아서는 절대로 안 되지" 묵향이 꼴좋다는 듯 빈정거렸다. "그럼 잠을 재우는 것은 상관없고요?" 아르티어스는 짜증이 나는지 두 소녀를 천막 한쪽 구석에다가 휙 집어던지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 계집들이 우리와 함께 자는지 구석에 찌그러져 자는지 그 놈들이 알게 뭐냐! 그건 그렇고 이만 자자. 아무리 나라도 차원이동을 하고나니 조금 피곤하구나." 묵향은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두 소녀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구, 성질 더러운 드래곤을 만나 너희들도 참 고생이다. 팔자려니 생각해야지, 뭐." 묵향은 자려고 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쩌면 이 곳이 자신이 찾고 있던 중원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거창한(?) 식사가 주어졌고, 묵향은 또 다시 작은 열매로 배를 채워야 했다. 식사가 끝나자 머리에 기다란 깃털을 꼽은 노인이 들어와 한참동안 절을 하며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아르티어스와 묵향을 마을 외진 곳에 위치한 천막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지독한 악취가 확 풍겨져 나왔다. "웁, 이게 뭐야?" 아르티어스는 질겁을 하며 코를 막고 뒤로 물러섰지만, 묵향은 천천히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 같은데요, 이마에 땀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고열에 시달리는 것 같은 데...... 그렇다면 자연히 정신이 오락가락 할 테고, 아무렇게나 용변을 싸댈 수밖에 없는 노릇이겠죠."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이리로 우리를 데려 온 거지?" 말을 하던 아르티어스는 순간 뭘 생각해 냈는지 손가락을 탁 튕기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오호라, 그러니까 이놈들을 치료해 달라는 말이로군. 하늘에서 떨어진 신의 사도인 우리들에게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죠." 아르티어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젠장, 밥값 한번 비싸군. 그나저나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해줘야겠지. 또 다시 차원이동 하기 전까지 편안하게 지내려면 저놈들이 나를 신으로 떠받들게 하는 것이 편할 테니까 말이야."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랍다는 투로 물었다. "정말 치료하실 수 있겠어요?" (형석아 재밌냐?ㅡㅡ?)저타내..으하하하 "이 녀석이 나를 뭐로 보고...... 이래봬도 위대한 골드일족의 후예란 말이다. 이 정도 허접한 증상 정도야 식후 디저트지." 툴툴 거리던 아르티어스는 슬며시 손을 들어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는 휘황찬란한 빛 무리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보자 안내를 해 온 노인뿐만 아니라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던 병자들까지도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는 뭐라고 외쳐대기 시작했다. "그건 무슨 마법이에요?" 저쪽 세상에서 치료마법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이렇듯 화려한 마법은 본 적이 없었기에 묵향이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뭐긴 뭐야. 이런 미개한 호비트들을 속이기 위해서는 화려한 연출 효과라는 게 필요한 것 아니겠냐?" 아르티어스는 무지개색 빛 무리를 뿜어내고 있는 손으로 자신을 향해 무릎 꿇고 있는 환자들 머리에 가볍게 대었다. 그러자 그들이 뭔가에 홀린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직까지는 힘이 없는 듯 비틀거렸지만 이미 완쾌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병이 낫자마자 존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아르티어스를 향해 머리를 땅에 닿을 정도로 연신 절을 하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어떠냐? 효과 만점이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아르티어스에게 묵향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런 것 같네요." "이제부터는 이놈들이 다 내 노예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히히힛!" 잠시 혼자서 낄낄거리던 아르티어스는 뭔가에 생각이 미친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노예라는 것들을 부리고 싶어도, 말이 통해야 부려먹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 말에 묵향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말을 배우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뭐, 자연히 이놈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말을 배울 수 있겠죠.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하기야 아버지 같은 경우 머리가 좋으시니까 몇 달이면 충분하겠네요." "몇 달! 그 동안 답답해서 어떻게 살겠냐. 가만있자......" 잠시 궁리를 하던 아르티어스는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옳지,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뭘 하시려구요?" "가만히 보고만 있거라. 흐흐흐, 곧 이 애비의 능력에 감탄하게 말들어 줄 테니까......"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앞에서 연신 절을 하고 있는 환자의 머리에다가 살짝 손을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마법을 사용해서 상대의 기억을 읽어 들이기 시작했다. 그 환자가 어렸을 때부터 사용했던 말들은 물론이고,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기억을 모두 말이다. 몰론 상대의 기억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읽어낸다고 해도 머리 속의 기억은 야만족 언어로 저장된 것이었기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머리 속에 저장된 것이 어디 언어뿐이겠는가? 수많은 영상도 함께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르티어스의 완벽한 기억력과 우수한 두뇌는 그 영상과 언어를 차근차근 합쳐 하나의 단어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30분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손을 뗏다. 그런 다음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군. 으하하핫! 과연 나의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무 위대해." 어깨를 으스대며 자화자찬을 하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뭔가 한마디 비꼬아 주려다가 묵향은 참기로 했다. 일단 아쉬운 쪽은 묵향이었기에 아르티어스의 신경을 되도록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나서야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짓는 것이 좋겠네요."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반응이 자신의 생각보다 시큰둥하지 김이 샌다는 듯 힘없는 목소리로 허탈하게 대꾸했다. "그러자꾸나." ------------------------------------------------------------------------- -오! 북극성- 아르티어스가 촌락의 장년층이나 노년층들을 모아놓고 야만족 언어로 뭔가 심각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묵향을 할 일없이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거의 반나절에 걸친 대화를 끝낸 후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돌아왔다. "뭐라고 하던가요?" "뭐 그렇게 대단한 정보는 없더구나. 예전에 네가 살던 나라 이름이 송이라고 했었냐?" "예." "저놈들의 말에 따르면 여기는 대족장 "타르티"가 이끄는 "둥루젠"부족에 속해 있는 "아라오" 촌락이라 하던데."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둥루젠이라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둥루젠이요?" "응. 둥루젠은 63개의 크고 작은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을 지배하는 대족장이 타르티라는 녀석이 라는 거지. 둥루젠 부족의 영토는 대단히 넓은데, 남쪽으로는 신령스러운 "바이투" 산에까지 이르고, 북쪽으로는 "다이슈에" 평원까지 연결되어 있다는구나. 또 서쪽으로는 "헤슈이" 부족의 대족장 "아구다"라는 자가 세운 "진"이라는 나라와 접해 있고, 동쪽은 바다와 접해 있는 모양이더라." 이야기를 듣던 묵향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젠장, 그 정도로는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잖아요. 하다못해 지도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여기서 바다까지 얼마나 먼지, 그리고 진이라는 나라와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그런거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마음을 이해하겠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거야 가보면 알겠지. 저 녀석들 말로는 여기서 바다까지는 건장하고 빠른 말로 5일만 가면 된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대족장 타르티가 사는 곳까지 가려면 말을 타고 가더라도 거의 20일은 족히 서남쪽으로 내려가야 된다고 하더군."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말을 차분히 분석해 보았다. "말을 타고도 20일이라...... 그렇다면 여기는 길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곳이니까 대충 1,000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둥루젠이라는 부족이 아버지 말씀대로 크기는 아주 큰 모양이에요." "그건 모르지. 땅덩어리 크기와 호비트의 수는 비례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묵향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무료한 듯 잠시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아르티어스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나저나 계속 여기에 머물러 있을 생각이냐?" 묵향은 단호한 표정으로 아르티어스의 말에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물론, 여기저기 여행하는 건 좋죠. 하지만 그게 단순히 여행으로 끝나지가 않잖습니까. 아버지가 언제나 쓸데없이 여기저기 시비를 걸어가지고, 복잡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이 한 두 번이에요?" 묵향이 더 이상 말도 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대답하지 아르티어스는 전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있었기에 대충 얼버무리는 투로 중얼거렸다. "뭐, 호비트들 사는 세상에 사건이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리고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나중에 보면 결국 제일 신나 하는 건 언제나 너였잖냐?"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말에 벌컥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 정말 귀찮단 말이에요." "미, 미안하구나. 난 그저 즐거운 여행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아르티어스가 당황해하며 사과를 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 침묵이 싫었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뭔가 말을 걸려고 하다 그만두었다. 그 대신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에 작게 원을 그리듯 돌리기 시작했다.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손가락 끝을 기준으로 대기의 마나가 살그머니 모여들어 파동치기 시작한다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자신의 손가락 끝을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거보고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냐?" "글쎄요......? 지금 뭐하고 계시는 겁니까? 마법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연세에 저하고 장난치자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묵향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런 둔하기 그지없는 녀석, 마나의 양이 다르잖아. 이렇게 대기에 마나가 희박해서는 마법을 사용하기가 아주 힘들지. 여기 와서 몇 번인가 마법을 써봤는데, 강력한 마법을 쓰기는 힘들겠어." 묵향은 또 아르티어스가 무슨 사건을 일을킬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아버지가 야만족들 때려잡을 것도 아닌데, 웬 강력한 마법 타령이죠?"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혀를 차며 설명해 주었다. "쯧쯧, 이런...... 만약 이곳이 중원이 아니라면 다시 차원이동 마법을 써야 하는데 그 마법은 그럼 화이어볼 같은 하위급 마법인 줄 아느냐? 웬만한 공격마법보다도 더 강력한 마법이란 말이다." 그제서야 묵향은 걱정스럽다는 안색으로 얼른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 전처럼 마나를 끌어 모으기 힘드니까, 용언마법으로 차원이동을 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묵향의 질문에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차원이동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현재 내 몸 상태로 용언마법이 가당키나 하다고 너는 생각하는 거냐? 원래 용언마법이라는 것은 아주 빠른 기습 공격에 유효한 것이지, 초강력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어. 물론 드래곤으로 현신한다면 그것도 가능하지만 공간이동이나 차원이동에는 얻는 게 있는 만큼 잃는 것도 생기게 되어 있지. 호비트의 몸체보다도 수백 배나 큰 드래곤의 몸집을 이동시키려면 그만큼 더 많은 마나가 필요하거든. 나 정도 되니까 트랜스포메이션 한 몸으로도 본신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거라구." "그러니까 그거 한 번 더 하시라니까요. 위대한 골드 드래곤의 후예이신 아버지께 불가능이라 단어가 있겠어요? 차원이동 몇 번 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고 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르티어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묵향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끔 자신이 생각한 꿍꿍이를 재빨리 얘기했다. "험험,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현재 내 몸에 남아 있는 마나는 그놈의 차원이동으로 인해서 거의 바닥난 상태라는 말이다. 오랜 시간 몸을 사리면서 용언마법을 쓰지 않고 마나를 저장해 나간다면 네 말대로 충분히 차원이동을 할 수가 있겠지." "흠, 어쨌건 가능은 한 거군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거죠?"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환히 웃으며 얼른 대답해 주었다. "현재 대기에 떠도는 마나의 상태로 보아 최소한 5년, 길어봐야 10년정도? 사실 그 정도 시간은 눈 깜짝하면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으하하핫!"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발끈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도 말라는 듯 소리쳤다.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어찌 나같이 위대한 드래곤 일족이 농담 따위를 할 수 있겠냐." 묵향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아르티어스에게 추궁하듯 말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드래곤에게는 찰나일지 몰라도, 호비트에게는 생사가 갈릴 정도로 긴 시간이라구요." 묵향의 말에 당혹스럽다는 말투로 아르티어스는 대답했지만, 눈은 여전히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 그런가? 가끔 네가 호비트라는 것을 잊어 버린단 말씀이야. 그건 그렇고 네가 호비트라는 생각이 들도록 행동을 해야 내가 잊어 버리지 않을 거 아니냐? 거의 40년을 함께 지내왔지만 뭐 변한 게 있어야지? 늙지도 않는 게 무슨 호비트냐? 세월이 흘렀는데도 늙지도 않는 것은 뱀파이어 이후로 네가 처음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발끈해서 말했다. "뭐요! 나를 흡혈귀 따위와 비교를 하시다니......" "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 머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 궁리해 보기로 하자꾸나." 아르티어스는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후 말을 이었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을 하기에 앞서서, 우선 우리가 제대로 왔는지 아니면 또 다시 잘못 왔는지 그것부터 제대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현재 우리의 위치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또 다시 무턱대고 차원이동을 한다고 하는 것은 네가 생각하기에도 좀 무리가 있지 않겠냐? 사실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고, 우리가 그 모든 차원에 일일이 다 가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냐?" "그럼 어떻게 해요? 아버지만 믿고 이리로 온 건데 말이에요" 묵향이 약간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하자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핫,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위대한 골드일족의 나니까 그 쥐꼬리만한 단서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차원이동이 기록된 마법책을 역으로 되짚어서 좌표를 잡아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무 위대하단 말씀이야. 그나저나 드래곤 일족 역사상 차원이동까지 하면서 부지런을 떨어댄 드래곤은 아마 나뿐일걸? 으하하핫." 묵향은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괜히 아르티어스의 성질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느꼈기에 시큰둥한 어조로 맞장구를 쳐줬다. "그..., 그렇군요." 한참 웃음을 터뜨린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정색을 한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 다시 아까 하던 말로 돌아가서, 네가 살던 세상에는 그 중원이라는 곳만 있었냐? 그러니까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종족은 너처럼 노리끼리한 피부색에, 까만 눈에, 까만 머리카락뿐이었냐는 말이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던 묵향은 어색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 그건 아니죠. 색목인이라는 눈 색깔이 다른 종족도 있다고 들었고, 또 남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묘족이라고 해서 특이한 습성을 지닌 종족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예전에 한 번 가봤던 몽고에도 저 야만족들 못지않게 미개한 습성을 지닌 놈들이 살고 있었죠. 제가 알고 있기로는 아마 가장 문명이 발달한 곳이 중원일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으스대며 말했다. "물론 내가 실수를 했을 수도 있겠지만, 위대한 이 몸이 두 번씩이나 실수를 할 리가 없잖냐? 그래서 그런지 난 아무래도 이곳이 좀 미심쩍단 말씀이야.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아르티어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묵향을 바라본 후 물었다. 아무래도 묵향이 자신을 같잖다는 듯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 표정이 왜 그러냐?" 아르티어스의 질문에 묵향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대다했다. "아, 아니에요. 계속 말씀하시죠." "좋아, 만약 내가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우리들 은 네가 중원이라고 부르는 곳의 외곽지역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우리가 떨어진 이곳이 네가 예전에 살던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할 수 있겠냐?" "그, 그야......" 잠시 생각해 보던 묵향은 그 말도 그럴듯하게 느껴졌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저번 차원이동을 한 뒤 워낙 고생을 한 탓인지 대답이 영 시원스럽지는 않았다. 묵향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럼 역시 이번에도 돌아다녀봐야 하겠군요." 묵향의 대답은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티어스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핫! 바로 그거야. 돌아다녀봐야 진실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냐? 물론 어쩌다 보면 복잡한 사건에 히말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최대한 자신을 숨긴다면 피해갈 수도 있는 문제 아니겠어? 또 위대하신 내가 함께 있는데 뭐가 무서울 것이 있겠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최대한 자신을 숨긴다고? 그럼 언제나 먼저 시비 걸고, 사고 친 게 누구였느냔 말이다. 하지만 묵향은 대놓고 반박할 수 는 없었기에 일단 참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그의 말투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젠장, 어쩔 수 없죠.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뭐, 사방이 탁 틘 벌판이니까 아무 곳이나 골라잡아 보시죠." "흐흐흐, 어디로 갈까?" 음충스런 미소를 지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아르티어스는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먼저 둥루젠의 수도로 가자. 이런 야만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도 수도라면 뭔가 달라도 다른 것이 조금 있겠지. 그리고 정보를 얻으려면 수도에 가서 수소문을 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니겠냐?" "좋을 대로 하세요. 남는 게 시간이니까. 그건 그렇고 언제 떠나실 거에요?" "뭐, 준비할 것도 없으니 당장 떠나야지. 때는 봄, 유희를 떠나기에는 최적의 계절이 아니겠냐? 그리고 준비는 족장에게 말해 놓으면 알아서 해 줄 거고 말이다." 묵향은 유희라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유희라면 중원식으로 생각하면 계집을 옆에 끼고 노닥거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요, 아르티어스가 살던 시대의 유희(Amusement)라면 오락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이번 여행을 아르티어스는 뭐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인가? "유희라구요? 그럼 아버지는 내가 살던 세계를 찾아서 헤매는 것을 장난쯤으로 생각하시고 계신 겁니까?" 생각하지도 못했던 묵향의 반응에 아르티어스는 순간 당황했지만 탁월한 순발력으로 자신의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니. 내가 말을 잘못했군. 여행 말이다, 여행. 우리 드래곤은 그걸 유희라고 말하거든. 여행이라는 단어는 호비트들과 어울린 후에나 배웠지. 하지만 유희라는 말이 입에 익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나 보구나."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변명에 미심쩍은 듯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종족상의 차이라는데, 그걸 따지고 들어봐야 어쩌겠는가? "그래요? 내가 알고 있는 유희하고는 뜻이 조금 틀리네. 그건 그렇고, 누가 촌장인데요?" 묵향이 더 이상 따지고 들지 않자,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응, 바로 저기에 후줄근한 가죽쪼가리를 걸치고 앉아 있는 주술사 노인 말이다. 여기서는 "차간부우"라고 하는데, 대충 뜻을 해석해 봤을 때 주술사가 가장 그것과 비슷한 뜻을 지닌 단어일 거다. 아무튼 그 주술사 오른편에 앉아 있는 녀석이 촌장이지." "아, 바로 저 노인이 주술사였어요?" "그래, 촌락민들 중 몇 명이 갑자기 병에 걸려서 의식을 잃어가자 며칠 전부터 신들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갑자기 우리들이 나타나자 자신의 기도를 듣고 천신이 현신한 것으로 알고 있더군. 그러니까 이 몸을 신으로 알고 있는 거지."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물었다. "그건 무슨 뜻이에요? 아버지를 천신으로 알다니......?" "말 그대로다. 나는 저 녀석들하고 좀 색다르게 생겼잖니, 그러니까 난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고, 너는......" 잠시 말을 멈췄던 아르티어스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신을 수행하고 온 시종이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촌락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둥루젠의 수도를 향해서 출발했다. 환송이라고 해봐야 촌락만들이 모두 다 나와서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해댄 것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황송해 하는 듯한 표정을 보면 그들이 아르티어스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촌장은 아르티어스와 묵향을 위해 말 3필을 내줬다. 그리고 신이라 생각한 아르티어스에게는 존경의 표시로 사금과 담비와 수달, 여우 가죽, 그리고 커다란 반달곰의 가죽에다가 투박한 솜씨이기는 하지만 부드러운 어린 양의 가죽으로 만든 조끼도 챙겨 주었다. 족장이 아르티어스에게 붙여준 "다쿠다"라는 원주민은 이 근처의 지리를 손금 보듯 잘 알고 있어 둥루젠의 수도까지 안내를 해 주기로 했다. 그는 말 3필 중 2필에는 사람이 타고 갈 수 있도록 안장을 준비했고, 나머지 한 필에는 식량과 짐 꾸러미들을 차곡차곡 실었다. 다쿠다는 매우 기마술이 뛰어나서인지 짐말의 고삐를 잡고, 양다리만으로 자신의 말을 조종해서 앞으로 나갔다. 일단 마을을 벗어나자 인적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대평원이 그들을 맞이했다. 대평원은 상당히 황량하기는 했지만, 드문드문 초목도 우거져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 저 너머로 제법 높아 보이는 산들도 간혹 보였다. 끝없이 이어진 광활한 대평원은 여행자에게 단조롭기는 했지만 왠지 모를 자연의 신비로움마저 느끼게 했다. 느긋하게 평원을 감상하며 가던 아르티어스는 맨 앞에서 안내를 하던 다쿠다가 갑자기 말을 세우자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다쿠다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손을 눈가에 대고 햇빛을 가리며 서쪽에 걸려 있는 해를 슬쩍 바라본 다음 아르티어스에게 공손한 어조로 뭐라고 말했다. "뭐라고 그래요?" 묵향이 묻자 아르티어스는 광활한 대평원을 감상하다 흥이 깨져서인지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기서 야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군." "뭐, 급할 것도 없으니 그렇게 하라고 하시죠." 아르티어스가 뭐라고 말하자 다쿠다는 재빨리 야영준비를 시작했다. 근처에서 작은 나무를 베어다가 가지를 쳐낸 다음 4개의 기동을 세웠다. 그리고 기둥의 끝부분을 4개의 나무막대로 연결한 후 밧줄로 단단하게 묶었다. 이렇게 빼대를 세운 후 그 위에 나뭇잎이 잔뜩 붙어있는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엮어 간단하게나마 밤이슬을 피할 수 있는 지붕을 완성했다. 날씨도 좋았고, 또 기온도 야영을 하기에 딱 알맞은 상태였기 대문인지 다쿠다는 양옆에 벽을 세우는 것은 생략하고 근처에서 풀을 베어다가 바닥에 푹신하게 깐 다음 그 위에 두툼한 가죽을 깔았다. 신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잠자리를 만들어 놓은 후 다쿠다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말 등에 매어놓은 짐 꾸러미 중 하나를 풀어 그 안에서 말린 고깃덩어리와 찐 쌀을 꺼냈다. 쌀을 찐 다음 잘 말려 놓은 것이었기에 그것 또한 딱딱하기는 고깃덩이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다쿠다는 작은 나뭇가지를 모아 고깃덩이의 끝부분을 꿰어 적당히 불에 구워 아르티어스와 묵향에게 찐 쌀과 함께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권했다. 돌덩이만큼 딱딱한 찐 쌀과 불에 구운 고기가 그날 저녁식사의 전부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사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하자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아르티어스와 묵향은 다쿠다가 만들어 놓은 임시 숙소에 자리를 잡았지만, 정작 그것을 만든 다쿠다는 말들을 묶어 놓은 곳 바로 옆에 두툼한 천을 깔고 나무에 기대어 쉬었다. 대평원의 싱싱한 풀 내음과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잠을 자기에는 좋았지만 묵향은 왠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옆에 누운 아르티어스는 일찌감치 꿈나라로 가버렸는지 가늘게 코까지 골며 팔지 좋게 자고 있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서 있지 않은 묵향으로서는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쉽게 잠을 잘 수 없었다. "도대체 중원에는 언제나 갈 수 있는 것일까? 과연 내가 살아서 중원에 도착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군." 옆에 누워 자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잠꼬대를 하며 자신의 배위로 다리를 올리자, 묵향은 슬며시 아르티어스의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놓고 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수많은 수련을 통해 단련된 그의 육체에 노숙 정도는 별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옆에서 낮게 코를 골기도 하고, 몸을 뒤척이기도 하는 아르티어스가 그에게는 더욱 성가시게 느껴졌다. 임시 숙소를 벗어나자 투명한 대기를 뚫고 수없이 많은 별들이 묵향을 반기는 듯했다. 그리고 수많은 별들 사이로 반달이 은은한 별빛을 뿌리며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달이군." 묵향은 무심결에 한마디 내뱉은 후 밤이슬을 피할 수 있을 만한 나무그늘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의 발걸음이 멈칫 멈추었고, 묵향의 놀란 시선은 다시금 화들짝 밤하늘을 쫓아 달려갔다. "호..., 혹시......?" 정신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묵향의 눈시울은 어느덧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중원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 커다란 달. 달의 생김새가 아주 비슷한 것 같아서 다시금 밤하늘을 올려다 본 것이었는데, 달만이 아니라 별자리마저도 중원의 것과 똑같았다. 언제나 북쪽을 밝혀주는 북극성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주위에 자리 잡은 수 많은 별자리들도 언제나 자신들은 그곳에 있었다는 듯 미약한 존재감을 희미한 빛으로 던져주고 있었다. "여, 여기가 중원이야! 크하하하핫! 바로 여기라구! 바로 여기야!" 한밤중에 묵향이 미친 듯이 웃음을 떠뜨려대자 나무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다쿠다는 깜짝 놀라 일어나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음소리에 깼는지 아르티어스도 숙소 밖으로 머리만 내밀며 짜증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야! 한밤중에 뭐가 좋아서 웃고 난리야! 잠 좀 자자. 잠 좀!" 묵향은 한달음에 아르티어스에게 달려가서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제대로 찾아왔다구요, 여기가 중원이에요! 내가 태어난 바로 그 중원이라구요."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뭐? 이 녀석이 드디어 미쳐 버렸나? 중원이라는 곳이 이런 황무지였다는 말이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살던 세상임에는 틀림없어요. 달의 모양이 똑같고, 또 별자리들도 똑같다구요.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잖아요. 여기가 틀림없다니까요."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말에 순식간에 의기양양한 표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묵향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위대해. 그 엄청난 시간과 공간의 차원의 미로에서 겨우 두 번만에 제대로 목적지를 찾아내다니...... 크하하하핫!" 한참 동안 묵향과 기쁨을 나누던 아르티어스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돌연 맥 빠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젠장, 그나저나 하필이면 여기일 줄이야. 좀 더 돌아다니면서 즐겼어야 하는 건데...... 하기야, 나도 어디가 어딘 줄을 몰라 대충 찍은 좌표가 중원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 아르티어스의 말에 한참 기뻐하던 묵향은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지만 잠시 후에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따졌다. "엥? 뭐라구요? "하필이면"이라니요? 그리고 "재수가 없다"구요? 전에는 차원의 미로 운운하며 제대로 찾아가는 것은 엄청 어렵다고 얘기했었잖아요. 혹시 아버지는 여태까지 이리저리 차원이동 하는 것을 설마 놀러다니고 있는 걸로 생각하진 거였어요?" 무심결에 속마음을 중얼거린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자 손사래까지 치며 적극적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무, 무슨 소리냐? 너도 봤잖아, 내가 엄청나게 고생한 것 말이다. 마법책을 숙지하고 수많은 복잡한 계산을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내가 얼마나 머리를 굴려야 했는지 말이다. 단지 나는 혹시나 우리가 목적지를 찾지 못했을 때, 네가 너무 실망해 할까 봐 그렇게 얘기한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어떻게......" "크험, 뭐 사소한 말실수를 가지고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고 그러냐. 어찌되었든 제가 말하던 중원에 왔잖니.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지, 뭐." 잠시 아르티어스를 노려보던 묵향은 시간이 지나자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의심이 계속 들었다. "그 외에도 또 뭐 숨기고 계신 거 아니에요?" 묵향이 의심스럽다는 듯 묻자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실토했다. "차원이 제대로 맞아도 시간이 틀릴 수가 있지. 또 차원과 시간이 맞아도 공간이 틀릴 수도 있고 말이다. 공간이야 좀 틀리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아가면 그만이지만, 시간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가 있거든. 그러니까 운 좋게 네가 살던 차원과 공간이 맞는다 해도 시간대마저 똑같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네가 살던 세상에서 100년 전에 떨어질지, 아니면 1,000년 후에 떨어질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야. 한 번 갔던 곳을 또 간다면 혹 모르겠지만...... 아무리 내가 드래곤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가는 것 아니겠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불안감을 조금 느끼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 강도는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르티어스라는 최후의 버팀목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드래곤이면서 그것도 못해요? 언제나 전지전능을 외쳐대면서......?" 묵향의 질책에 아르티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무리 우리들 드래곤이라고 해도 시간을 지배하지는 못한단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렇게 슬퍼했겠느냐? 겨우 몇 시간 앞이었지만, 그 시간을 되돌려 놓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지. 물론 무리하게 방법을 찾아보면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위험부담은 너무나도 커. 몇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고 마법을 썼는데, 몇 만 년 앞으로 가 버릴 수도 있고, 또 몇 만년 뒤로 갈 수도 있지.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은 차원과 맞물려 있기에 자칫 잘못하면 또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 영영 차원의 미아가 되어 버릴 우려도 있거든."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잠시 불안해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중원이라고 기뻐할 것만은 아니었다. 이곳을 잊지 못해 되돌아오고 깊었던 것은 자신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돌아온 중원에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차라지 저쪽 차원에서 미네르바와 투닥거리며 사는 편이 훨씬 괜찮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안과 허탈감에 휩싸였던 묵향은 심호흡을 길게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아르티어스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온 것은 정말 운이 너무나도 좋아서 얻어진 결과라는 겁니까?" "헛! 왜 그렇게 노려보냐? 사실 말하자면 원래 운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내 추리가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간 것도 많은 작용을 한 것이지." 아르티어스의 입에서 추리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튀어나오자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추리라니요? 어떤 추리요?" "네가 살던 곳에는 마법이라는 것이 분명히 없다고 했지?" "그랬죠." "그런데 너는 차원이동을 당했고 말이다." "예." 아르티어스는 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자신이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을 천천히 묵향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쪽에서 누군가가 네가 살던 세상으로 간 것일 거라고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살던 그 세상에서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설명이 되지 않거든. 그렇기에 그 정확한 단서를 파악하는데 다론이라는 놈이 가지고 있던 마법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거지. 일단 그것을 확보한 상태에서 정확한 계산만 할 수 있다면 내 마법으로도 네가 살던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거다. 물론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이렇듯 두 번째는 훌륭하게 성공한 것이 아니겠냐? 하지만..., 내가 직접 이곳으로 와본 것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완벽한 계산과 그에 따른 마나의 컨트롤까지 가능하겠냐? 약간의 오차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 묵향은 그제서야 아르티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오차"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위험도, 떨리는 음성으로 묵향이 물었다. "그 오차가 어느 정도일까요?" "글세...... 공간상의 오차가 생길 여지도 있겠지만, 시간적인 오차가 생길 가능성도 크다고 봐야 하겠지. 나로서도 그 정도만 짐작할 수 있을 뿐 더 이상은 모르겠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의 마음은 천근이라도 되는 양 무겁기만 했다. 답답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쉰 묵향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밝은 달이 둥실 떠 있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기쁘지가 않은 묵향이었다. -계속되는 사기 행각- 대평원을 가로지른 아르티어스 일행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다른 촌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쿠다가 멀리 보이는 이동식 천막들을 가리키면서 뭐라고 한참 설명을 하자, 그것을 다 듣고 난 아르티어스가 묵향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일 일대가 쑤젠 족장의 영토라고 하는군. 이 근처에 퍼져 있는 48개의 크고 작은 촌락들을 이끄는 녀석이래. 그리고 저기에 보이는 저것이 그 중 하나인 샤이푸 촌락이라는군. 오늘은 저기에서 묶는 것이 좋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다." "그러죠, 뭐." "그건 그렇고, 아들아." 갑자기 아르티어스가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묵향은 흠칫 놀라며 뒤로 급히 물러섰다. "왜 갑자기 그렇게 부르세요? 소름 돋치기 시리......" "사실 이 근처에서 너를 알아볼 호비트도 없고, 또 네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삶에 지장 받을 놈도 없지 않냐? 그러니까......" 뭔가를 바라는 듯 은근한 아르티어스의 말을 묵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도 말라는 듯 단숨에 거절했다. "싫어요!" "에이, 그래도......" 싫다고 했는데도 아직 미련을 못 버렸는지 아르티어스는 계속 묵향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묵향의 반응은 한마디로 웃기지 말라, 였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 망할 크로네티오의 저주에서 벗어나서 한시름 놨더니, 또 그 저주받을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겁니까? 안 해요! 아니, 절대로 못해요!" "허, 거∼참!" 잠시 난감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르티어스는 작전을 바꿨다. 아예 안면 몰수하고 언성을 높여가며 반항하는 아들놈에게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불효막심한 놈! 호비트라는 것들은 효도라는 것도 모르냐! 애비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네가 잘 될 줄 아느냐? 자고로 애비의 말을 안 듣는 놈 치고, 그 뒤 끝이 좋았던 놈은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단 한 놈도 찾을 수 없을 거다. 아이구, 아이구, 내가 세상 헛살았지. 어떻게 저런 놈을 아들이라고 믿고 의지하며 그 험한 차원의 미로까지 따라나섰누. 내가 멍청한 놈이지......" 서글픈 듯한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가슴 한쪽이 약간 찔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매몰차게 거부했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약해져 말끝이 떨리는 묵향이었다. "그,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거예요." "그래, 너 잘났다! 이 망할 녀석아. 내 귀여운 천사를 단 한 번만 보여 달라는 데도 싫다니, 그래 너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자." 그 다음부터 아르티어스는 묵향과의 대화를 아예 끊어 버렸다. 아니,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샤이푸 촌락에 도착하자마자 다쿠다는 촌락 중앙에 위치한 조금 커 보이는 천막으로 달려갔다. 곧이어 그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4명의 촌로들과 함께 돌아왔다. 촌로들은 아르티어스를 보자마자 경건한 표정으로 절을 하며 뭐라고 외쳐댔고, 아르티어스는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여 줬을 뿐이다. 그런 후 그들은 뭐라고 장시간 대화를 나눴는데, 그 사이에 묵향이 한 일이라고는 멀뚱멀뚱 서서 아르티어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대화가 끝나자 촌로들은 한쪽 구석에 위치한 그래도 비교적 깨끗한 천막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배불리 식사를 한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편안한 기분으로 쉬고 있을 때였다. 천막 밖에서 헛기침 소리와 함께 한 명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들어와 연신 절을 하며 아르티어스에게 뭔가를 간구하는 듯한 말을 계속하였다. 아르티어스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촌로가 그들을 안내한 곳은 촌락 한쪽 구석에 위치한 거대한 천막이었다. 급히 만든 흔적이 역력한 천막 안에는 수십 명의 환자가 드러누워 끙끙거리고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이웃 촌락에까지 연락이 되어 근처에 있는 환자들이란 환자들은 모두 다 몰려온 것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환자들과 함께 이웃에 있는 촌락민들까지 모두 몰려왔는지 한산했던 작은 햐이푸 촌락은 이제 300여 명의 원주민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촌락민들의 아르티어스에 대한 경외심은 그가 한 명, 한 명 환자를 치료하면서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들것에 실려 왔던 한 환자가 아르티어스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빛무리에 휩싸이자 벌떡 일어서는 것을 보고 극에 달했다. 수많은 촌락민들의 경외심에 모두들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것을 보며 묵향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어쨌건 아르티어스의 신을 사칭하는 행위는 그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환자 치료가 끝난 후 대규모 축제가 벌어졌다. 물론 그렇게 잘 살지도 못하는 촌민들이 300여 명 정도 모인 만큼 말이 대규모지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봤을 때 그건 화려한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촌민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서 축제 준비를 했다. 촌민들은 축제에 쓰기 위해 튼튼해 보이는 백마 1마리를 잡았고, 황소 1마리, 양 5마리, 염소 5마리, 개 10마리를 잡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말은 교통수단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황소는 농경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양은 겨울을 나기에 적합한 따뜻한 가죽옷을 제공하는 원천이였고, 염소는 젖을 제공해줬다. 또 개는 주인의 재산을 지키는 파수꾼이 아닌가. 닭, 오리 같은 식용으로 키우는 것도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물들을 잡아 요리함으로써 신께 대한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던 것이다. 모든 제물들은 신께 비치는 의식에 따라 우유를 먹였다. 우유는 흰색이기에 길상을 상징한다. 만약 제물이 우유 마시기를 한사코 거부한다면 그것은 제물이 상서롭지 못하다는 반증이기에 딴 것으로 바꾼다. 그런데 제물로 선택한 모든 동물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우유를 말끔하게 다 마셔 버렸기에 원주민들은 대단히 좋아했다. 일단 우유 먹이기가 끝나고 나자, 기원을 담은 주문을 외우며 제물의 이마와 등에 우유를 뿌린 다음 도살을 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여기저기에 불을 피워 그 고기들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앞에 놓인 음식에 대해서 원주민들과 즐거운 듯이 얘기를 나누며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서 묵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고기들을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통역을 해 주지 않았기에, 무슨 고기인지 알 수도 없었을 뿐더러 모드 고기들이 속은 거의 생고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고기들은 아예 생것으로 나왔다. 아르티어스에게 부탁해서 고기를 좀 더 익혀달라고 말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젠장! 이럴 바에는 차라리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이 더 낫겠다." 홀가분하게 혼자 여행하는 것이 오히려 둘이 여행할 때보다 덜 외로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묵향은 아르티어스와 결별할 결심을 하지 못했다. 아르티어스의 말대로 시간적 오차가 의외로 클 수도 있었다. 사실 야만족들의 생활상을 보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과거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로서는 아르티어스의 통역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태가 아닌가? 만약 또 다른 통역이 한 명 더 있다면 모르겠지만...... 묵향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투덜거렸다. "젠장, 계속 이러실 겁니까?"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묵향의 시선을 피하며, 옆에 있는 늙은 촌민과 계속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에 묵향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걸칠게 말했다. "이런 젠장! 내가 그런다고 재수 없게 그 계집으로 변할 줄 알아요? 빌어먹을!" 옆에 앉아 있는 촌로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묵향을 힐끔거리며 보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투덜거리자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경우 생고기도 아주 즐겨먹는 편이었지만, 아들놈은 육류에 대한 취향에 있어서 자신과 극을 달리기 때문이다. 동물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3가지 욕구가 있다. 식욕과 수면에의 욕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욕이다. 성욕이야 자제력이 뛰어나다면 참아낼 수 있는 것이겠지만, 식욕과 잠은 도무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며칠 버티기는 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의도대로 되리라는 생각에 아르티어스는 가슴이 부듯해져 옴을 느꼈다. 그런데 슬그머니 미소 짓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묵향의 왼손이 갑자기 투명하리만큼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이, 이럴수가? 저게 무슨 마법이지?" 철을 화로에 넣고 충분히 풀무질을 해 주면 선홍빛으로 아름답게 달아오른다. 그런데 어떻게 호비트의 손이 그렇게 달아오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와중에 저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상한 기운은 또 뭔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손에서는 사람을 억압하는 듯한 파괴적인 사이한 기운까지 함께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묵향 주위에 앉아 있던 촌락민들은 허겁지겁 묵향 주위에서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묵향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자신의 왼손으로 고깃덩이를 슬그머니 쓰다듬었다. 슬쩍 쓰다듬었을 뿐인데도, 고기의 겉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타 버리는 것으로 보아 그 화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잘 되지 않자 묵향은 타버린 고기의 겉 부분을 잘라낸 수 입속에 집어넣으며 투덜거렸다. "젠장! 겉 부분은 다 탔잖아. 뭐, 하지만 탄 부분만 떼어내고 나니 그런대로 먹을 만은 하네. 그건 그렇고, 고기 구워먹기에는 혈수마공이 너무 파괴적인 것 같아." 묵향의 투덜거림은 당연한 것이었다. 소 잡는 거대한 칼로 닭을 잡기가 힘들 듯, 혈수마공이 지닌 엄청난 양강의 힘은 너무나도 파괴적이어서 고깃덩이를 새까맣게 태우는 데는 제격일지 몰라도, 노릇노릇하게 익히는 것은 매우 까다로웠던 것이다. 하지만 묵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열기를 발산하는 극양의 무공은 혈수마공 하나밖에 배운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뭐라고 중얼거리며 잘 익은 부분만 잘라내어 먹고 있는 묵향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오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 내가 여기서 지면 드래곤이 아니다." 아르티어스가 마음 속 깊이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묵향은 인상을 찡그리며 탄 부분을 벗겨내고 먹을 만한 부위를 골라내려는지 고기를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 고기를 구우면서 공력을 조절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묵향은 쉽게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 후에야 묵향은 이쪽 차원에 와서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연기파 배우 아르티어스- "이제 어떻게 한다?" 아주 급속도로 모든 상황에 적응해 나가는 묵향을 상대로 아르티어스는 힘겨울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잠을 못 자게 하는 방법으로 골탕을 먹으려고도 했지만, 묵향이 일단 안 자려고 들면 드래곤인 자신보다도 더욱 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르티어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묵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잠이 아니라 하루에 30여분 정도의 운기조식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처럼 눈치 빠른 드래곤이 왜 묵향이 운기조식을 하면서 기력을 보충하고 있는 사실을 몰랐을까? 원래 내공수련을 위해 토납술을 처음 배우는 경우, 가장 먼저 익히는 것이 좌공(앉아서 하는 운기법)이었다. 좌공을 완벽하게 익힌 후에는 와공(눕거나 엎드려서 하는 운기법)을 익히게 되고, 그마저도 완벽하게 익히면 가장 마지막 단계로 익히는 것이 입공(서서 하는 운기법)인 것이다. 물론 입공을 통해 운기조식을 한다고 해도 좌공을 하는 것보다 더많은 내력이 쌓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입공까지 다 익힌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안전한 곳에서 홀로 운기조식을 할 때는 좌공을 애용한다. 그렇다면 왜 배우기도 힘든 와공이나 입공을 익히는 것일까? 바로 그것은 좌공을 할 여건이 안 될 때를 대비해서 익히는 것이었다. 묵향같은 초절정의 내가고수가 입공까지 익히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운기조식을 할 때 자세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앉으나 서나, 눕거나 엎드리거나 혹은 말 탄 자세에서까지도 운기조식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아르티어스가 제아무리 묵향의 잠을 방해하려고 노력을 해도 도무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잠을 가지고는 도저히 승리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자 아르티어스는 그때부터 묵향을 철저하게 외톨이로 만드는 것으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아예 묵향과는 일언반구 대화를 나누려고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곧바로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길잡이인 다쿠다와는 대단히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고, 일부러 묵향이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도록 여기저기 손짓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아르티어스는 그것도 통하지 않음을 깨닫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은 이제 더 이상 아르티어스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아예 명상이나 즐기자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던 것이다. "이런 젠장! 어떻게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호비트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이지? 진짜 저놈이 호비트가 맞기는 한 건가? 저 지랄 같은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혹시 호비트의 탈을 쓴 드래곤 아냐?" 아르티어스가 그토록 압력을 가했건만, 묵향에게는 전혀 씨알도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일부러 쌀쌀맞게 대해 며칠 외톨이 신세가 되면 자신에게 굴복할 것이라고 믿었던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상종하지 않자, 묵향이 오히려 더 잘되었다는 듯 명상이나 하면서 차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자 기가 막혔다. 외로움을 느끼기는커녕 표정 하나하나에 여유로움까지 배여 있는 놈한테 더 이상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편안한 신색으로 바뀌고 있는 이런 묵향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할 아르티어스가 아니었다. 이제 이곳 샤이푸 촌락에서 둥루젠 부족의 대족장 타르티가 산다는 성까지는 단 하루거리도 되지 않았다. 만약 성에 들어가서 뭔가 중원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찾아낸다면 그때는 이 상태가 영구히 지속될 우려마저도 있었다. 앞으로 이 차원계에서 편하게 지내려면 기선제압이 그 선결요건인 만큼 성에 들어가기 전에 이 신경전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할수록 아르티어스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지고 있었다. "전번에는 주도권을 뺏긴 덕분에 개고생을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럴수는 없지.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럴듯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아르티어스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은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한 호비트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빌어벅을! 빌어먹을!" 투덜거리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눈에 다쿠다의 모습이 보였다. 다쿠다는 몇 번 타르티가 사는 성에 가봤던 탓에, 갑자기 현신한 신들을 모시고 성까지의 길안내를 촌장으로부터 명령받은 상태였다. 성으로 갈 때는 신과 함께여서 편안하게 여행을 해야 했기에, 여러 마을들을 거치며 잠자리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20일은 필요했다. 하지만 돌아갈 때는 황야를 가로질러 죽자고 말을 달리면 넉넉잡고 15일이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무리 일정을 빡빡하게 잡는다 해도 처자식과 무려 한 달 이상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것도 농사 때문에 한참 바쁜 이 시기에 말이다. 봄에 파종을 잘 해놔야 그 해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봄은 일년 중에 가장 중요한 계절이지 않는가? 혹시나 파종할 시기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다쿠다는 우울한 얼굴로 달을 바라보며 한숨짓고 있었다. 그런 다쿠다의 모습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가소롭다는 듯 투덜거렸다. "달을 보고 눈물을 흘리다니, 호비트란 족속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든 놈들이란 말씀이야. 한없이 강한 듯하면서도, 저런 사소한 것에는 저렇게 심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다쿠다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아르티어스의 눈빛이 뭔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번쩍였다. "흑흑흑......"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묵향의 귀에 들려왔다. 묵향은 이때 아르티어스 몰래 살짝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원래가 운기조식을 하게 되면 인체의 가장 말단까지 신선한 기가 펴져나가기에 온 몸의 감각은 몇 배나 증폭되게 된다. 따라서 그 때문에 운기조식 때는 무아지경으로 빠지기 직전이 가장 위험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세심하게 내공을 조절해야 하는 상황에서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에 의해 외부의 미세한 자극들이 여과 없이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묵향은 천천히 운기조식을 끝마쳤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묵향은 소리가 나오는 곳 근처에 있는 나무 위에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그런 다음 아래를 살며시 내려다보던 묵향은 놀라서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오랜 수련을 통한 기적적인 인내심으로 그것을 겨우 극복해 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달을 보면서 서럽게 울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보였던 것이다. 놀람이 끝나자 그 다음에는 더욱 호기심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왜 아르타어스가 울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가 눈물과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드래곤이라는 최강의 종족이 말이다. "흑흑흑, 아버지! 왜 저를 남겨두고 그렇게 빨리 가셨습니까?"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커다란 달은 이제 반쪽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아르티어스는 달을 보면서 주절거리며 진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삼아 할 생각이었으나 아마도 달밤의 묘한 정취가 아르티어스의 감정을 자극했는지도 몰랐다. "왜 이렇게 아버지가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그냥 엄한 아버지가 싫기만 했는데, 지금은 너무 후회가 돼요. 진작 아버지에게 효도해 드리는 건데...... 역시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어요. 너도 자식이 생기면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그 말이 이제야 겨우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이렇게 후회가 될 줄 알았다면, 이렇게 가슴이 아파올 줄 알았다면......" 서글피 울며 주절거리던 아르티어스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어쩔 때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까지 해요, 왜 일찍 돌아가셔서 제게 효도할 기회도 주지 않으시고, 끝내 불효막심한 놈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하시는 겁니까? 왜!" 한참을 주절거리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는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우는 모습보다 더욱 처연하게만 느껴졌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를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짓이라도 이제는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제가 미우시죠. 하지만 너무 절 미워하시지는 마세요. 흑흑, 사사건건 저와 대치해서 싸우려고만 드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과거에 제가 얼마나 아버지께 불효한 놈이었는지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묵향은 도저히 더 이상 숨어서 엿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곳에 있는 야만인들 중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이 조금만 자존심을 숙이고 들어가면 될 것을, 저렇게까지 아르티어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다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아들과 지내고 싶다는 단 하나의 소망만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아르티어스를 말이다. 묵향은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며 아르티어스를 꼬옥 껴안았다. 그의 두 눈에서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제, 제가 잘못했어요. 아버지. 그렇게 슬퍼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제가 잘못한 것이지 아버지가 잘못하신 게 아니라구요." 아르티어스는 흐느껴 우는 묵향을 따스한 손길로 다독거려 주며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꼭 껴안고 있었기에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르티어스는 이미 그때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다, 다 내 잘못이었어. 내가 네게 무슨 도움이 되겠다고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그냥 아버지의 레어나 지키면서 참회하며 사는 것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고향을 찾겠다는 너의 간절한 바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쓸데없이 내 고집만 피웠구나.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잘못했다." 처연할 정도로 나직한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시네요." 묵향은 아르티어스에게서 배운 용언마법을 다급하게 전개했다. 그 것은 아르티어스가 묵향이 다크로 변신해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르쳐 준 트랜스포메이션 마법이었다. 트랜스포메이션으로 변신했을 때는 저주에 걸렸을 때처럼 완벽한 성전환은 불가능하다. 즉, 성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크는 아직 여물지도 않은 소녀였었기에, 가슴은 거의 튀어나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런지 변신한 묵향은 과거 다크였을 때와 비교해 하나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애 띤 소녀와 같은 다크의 모습인 묵향을 꼭 끌어안으며 아르티어스는 감동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오오, 내 사랑스런 아들아......" 묵향을 꼭 끌어안은 아르티어스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득의 에 가득 찬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끌어안은 상태였기에 묵향으로서는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주도권을 확실히 제압했다고 느낀 아르티어스는 나직하면서도 힘이 실린 목소리로 묵향에게 말했다. "아빠라고 불러라. 아빠!" 잠시 망설이던 묵향은 결국 체념한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예, 아빠." 달빛이 포근히 내리는 밤, 오랜만에 부자간에는 오붓하면서도 다정스런 대화가 오고갔다. "젠장, 아들놈 때문에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정말 지독하게도 말을 안 듣는단 말씀이야. 하지만 네가 아무리 까불어도 결국은 내 손바닥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킥킥킥." 아르티어스는 키득거리며 잠을 자기 위해 천막으로 돌아갔다. 사실 단독생활을 즐겨하는 드래곤에게 있어서 무슨 애절한 효심이라는 것이 있고, 또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하지만 비록 연극이기는 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기에 그런 것인지 천막으로 걸어가는 아르티어스의 걸음걸이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천막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묵향을 촌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다쿠다의 경우는 그 충격의 강도가 더욱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같은 황색의 피부에 검은 눈,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루 밤만에 투명할 만큼 하얀 피부에 황금빛 찬란한 아름다운 머리카락, 그리고 커다란 갈색의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로 바뀌어 버렸으니 다쿠다나 촌락민들이 모두들 기절초풍할만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르티어스와 묵향을 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이란 원래 전지전능한 존재, 겉모습이야 언제든지 무엇으로든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그들은 가급적 놀라움을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그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다쿠다가 지켜보는 가운데, 묵향은 가볍게 몸을 날려 말 등에 올라탔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마을 촌장과 주술사와 예기를 나눈 다음 언제나 그랬듯이 작은 주머니 하나를 받아서 품속에 챙겨 넣었다. 여태껏 다섯 군데 마을을 거치면서 하나씩 받았으니 아르티어스의 품속에는 다섯 개의 주머니가 들어 있는 셈이다. 그 주머니 안에는 촌민들이 주변에서 채취한 사금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사금 외에도 촌민들이 존경의 표시로 바친 담비나 족제비 등의 가죽들, 곡물 가루와 말린 고기까지 정성스럽게 가죽 주머니에 담아왔다. 다쿠다가 선물들을 말에다 싣고 있는 것을 보며 묵향이 영 마땅치 않다는 듯 투덜거렸다. "이 작은 마을에서 뭐 긁어먹을 게 있다고 저것들을 다 받는 거예요? 저런 거 없어도 누이가 먹고 사는 데 별 지장 없잖아요?" "후후, 네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의복과 식량만큼 중요한 것이 있더냐? 안 그러면 내가 이 나이에 사냥을 하러 다니리? 그것도 아니면 본체로 현신해서 이 말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협박이라도 하라는 말이냐?" 가볍게 묵향의 의견을 일축한 아르티어스가 다쿠다에게 뭐라고 말하자, 다쿠다는 재빨리 말에 오른 다음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 여행도 오늘이면 끝날 것이기에 그의 채찍질은 경쾌하기만 했다. -------------------------------------------------------------------------- 둥루젠의 수도- 대족장 타르티가 살고 있다는 성은 해안에서 멀지않은 위치에 세워진 돌로 만든 작은 석성이었다. 아마도 그 성은 커다란 항구와 그를 끼고 잘 발달되어 있는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건설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을의 주민들을 모두 다 수용하기에는 성의 규모가 무척이나 작았고, 마을은 성 안쪽이 아니라 항구를 끼고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성의 규모는 크지는 않았지만,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보는 문명적인 것이었다. 물론 성벽을 쌓아놓은 돌 자체도 네모 반듯한 것이 아니라 대충 커다란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 같은 엉성한 구조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며 묵향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자신이 살고 있었던 시절보다 훨씬 과거에 도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조바심을 내고 있었는데, 이 정도 규모의 성까지 쌓아놨을 정도라면 그렇게 심하게 과거로 온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것 봐라." 묵향은 감회어린 표정으로 성을 바라보고 있다가 아르티어스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 막 바다로 출항하고 있는 40여 척의 크고 작은 배들로 이루어진 선단이 보였다. 큰 배를 중심으로 수십 척의 작은 배들이 지네 발 같이 달려 있는 노를 힘차게 저으며 바다를 헤쳐 나가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리고 넓직한 만에 자리 잡고 있는 항구 내에도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항구를 내려다보며 아르티어스는 감탄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야말로 천연적인 항구로구나. 웬만한 폭풍이 불어도 끄떡도 없겠어." "그러니까 여기에다가 항구를 만들었겠죠. 일단 항구로 가 봐요. 혹시나 제가 살던 곳을 아는 상인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자꾸나.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라면 이 주변의 많은 나라에 가봤겠지." 이곳은 둥루젠의 수도였다. 그리고 항고를 수도로 정했다면, 예상외로 이 야만족들은 해상무역을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해상무역의 특성상 먼 곳까지 진출했을 것이고, 교역지의 많은 상인들이 와서 득실거릴 수도 있을 테니 묵향이 원하는 정보를 얻기에 좋을 것이 아닌가? 아르티어스 일행이 시내로 들어서자 길거리를 지나가던 수많은 원주민들은 이 색다른 모습을 하로 있는 이방인들에게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졌다. 하지만 한 눈에 척 봐도 이방인들은 비무장인 것이 확실했기에 호기심 어린 눈길만 던졌을 뿐 별로 주의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항구에 도착해 보니 거의 60여척이나 되는 배들이 선착장에 빼곡이 들어차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 작은 배들이었다. 하지만 큰 배들도 몇 척인가 보였다. 정박해 있는 배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30미터가 조금 넘어 보였고, 유선형으로 길쭉하게 빠진 선체와 배 중심에는 선체의 크기에 비해 짧게 느껴지는 돛대가 두 개 솟아 있었다. 그리고 몇몇 배는 그보다 훨씬 작아서 제법 크다 싶은 것이 25미터 정도였고, 대부분의 배들은 20미터도 안 되는 것들뿐이었다. 묵향이 예전에 통치했던 치레아 공국도 바다를 통한 중개무역을 주축으로 했었다. 묵향은 치레아 공국에 가서야 난생 처음으로 바다를 봤었고, 또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주민들을 위해서 무역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었다. 대량의 상품을 거래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운송수단이 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 정박하고 있는 배들은 그때 봤던 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먼저 한 눈에 척 봐도 길이만 길쭉하게 길었지, 높이와 폭이 작아서 화물을 그다지 많이 실을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미개한 민족이라면 저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묵향이었다. 묵향이 감회어린 표정으로 넓은 바다와 그 사이사이에 떠 있는 배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는 그 배들을 쓰윽 둘러보더니 심드렁하게 한마디했다. "에이 씨, 뭐야 이거! 용골이 없잖아. 뭐 이런 배가 다 있어?"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도무지 의문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기어코 질문을 던졌다. "아빠. 용골이라니요? 그럼 배를 건조할 때 드래곤 본을 써야 된다는 말이에요? 아빠 앞에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드래곤 잡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 귀한 뼈다귀를 배를 만드는데 쓴단 말이에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황당하다는 듯 한동안 말을 잊고 묵향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무식한 녀석이 과연 나의 아들이란 말인가? 정말 어이가 없군." "방금 아빠가 용골이라고 했잖아요. 즉, 용의 뼈다귀!" 계속 묵향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자 아르티어스는 답답하다는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이구! 용골이라는 것은 뼈다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까......" 아르티어스는 땅바닥에 쓱쓱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배의 구조를 대략적으로 설명을 해줬다. 용골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배의 골격을 잡는 그 중심축을 용골이라 부르며 그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 배의 강도에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아르티어스의 설명에 의하면 대해를 횡단하려면 용골은 절대적인 필수조건이었다. 아르티어스는 용골의 구조를 설명한 후,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묵향에게 말해 주었다. "물론 무역선이 전선처럼 튼튼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대해를 횡단해서 무역을 하려면 이런 배로는 어림도 없다고 봐야 하지. 그렇다면 연안을 돌아다니면서 무역을 하는 배인가? 흐음, 하지만 상선이라고 하기에는 배의 형태가 좀 이상해. 배가 너무 날씬하고, 또 높이가 낮은 만큼 짐도 많이 실지 못할 거야. 거∼참 이상한 노릇이군." 알아듣기 쉽게 묵향에게 설명해 주는 아르티어스의 배에 대한 지식은 절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묵향은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우와, 아빠가 어떻게 그렇게 배에 대해서 잘 아세요? 아빠는 바다에 산다는 그 실버 드래곤도 아니잖아요." 아르티어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묵향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험, 내 나이 벌써 4,000! 웬만한 것은 다 경험해 봤지. 내가 소싯적에 네 할아버지 속 많이 썩힌 거 알지?" "그, 그랬죠." "내가 사고 친 다음에 한동안 할아버지를 피해서 튄 곳이 뱃사람 생활 아니겠냐. 네 할아버지는 물 근처에도 잘 안 가시는 성격이었기에 그곳이 안성맞춤이었지." 그 말에 묵향은 아르티엔이 아르티어스를 잡는다고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잠시 연상해 보았다. 처음에는 치기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인자한 사부의 모습. 짧은 시간이었지만 묵향은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의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그때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정말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비록 얼마 같이 지내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 성격도 보통은 아니시던데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그 악몽 같던 시간들이 떠오르는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말도 마라. 내가 그때 한 고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빨이 갈린다. 너무 급하게 튀다보니 보석이나 돈이 될 만한 것을 하나도 못 챙겼거든. 그러니 별 수 있냐?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그런데 바다라고는 난생 처음 접해 보는 사람을 태워 주는 배가 어디 있어야지.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상선에 얻어 탔더니, 신참이라고 자식들이 나를 얼마나 갈구던지......" 아르티어스의 얘기에 묵향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아빠 성격에 그걸 그냥 놔 뒀어요?" 그때를 생각하자 아직도 진절머리가 나는지 아르티어스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어쩔 수 있냐? 그놈의 배 멀미가 뭔지...... 한 달을 생고생을 하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더라. 그리고 배 멀미에 익숙해진 후에도 도망치는 몸에 사고를 칠 수가 있어야지. 그랬다가는 순식간에 소문이 쫘악 퍼질 건데 말이야. 마침 우연한 기회에 내 성격에 대충 맞는 배가 있길래 얼른 그리로 옮겼지." "아빠 성격에 맞는 배가 어딨어요?" 아르티어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어어, 그렇고 그런게 있어. 건실하게 열심히 일하면서도 아주 화끈한 애들이 많이 모여 있는 배가 말이야. 하하하! 그때는 정말 재미있었지. 역시 배를 바꿔 타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거든." "그럼 그 배에 꽤 오래 타셨겠네요? 아빠는 성격에 맞으면 거의 무한정으로 눌러앉아 있잖아요." 한참 흥이 나서 얘기를 하던 아르티어스는 안 좋은 과거를 회상이라도 하는 듯 갑자기 인상을 팍 찡그리다 계속 말을 이었다. "에이 씨! 말도 마라. 한참 재미있을 만하면 군함들 눈치 봐야 하고, 나중에 크게 한 건 하려고 중앙 해로 쪽으로 접근했다가 순시함에 걸려 배는 박살나고 아주 죽는줄 알았다니까. 그때 얼마나 열심히 순시함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헤엄을 쳤는지...... 동료들의 일부는 건져져서 돛대에 목이 매달렸었지. 참, 끔찍했었어. 해적은 잡히면 무조건 사형......"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말을 실수했음을 깨닫고 얼른 말을 멈췄다. 하지만 묵향의 눈이 벌써 실쭉 가늘어진 상태에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르티어스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저것 봐라. 저쪽에 묶여 있는 작은 배들은 한 눈에 척 봐도 고기잡이 배라는 것을 알겠지?" 묵향은 의심스럽다는 듯한 시선을 채 지우지는 못했지만, 일단 아르티어스의 의도대로 시선을 어선 쪽으로 돌렸다. "예" "요 근처를 왔다갔다 하면서 고기 잡는 배들이야 돛을 쓰건, 노를 쓰건 별 상관할 바가 없겠지만 상선은 달라. 상선은 보통 돛으로 움직이지. 노를 이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거든. 왜냐하면 상선의 경우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양의 물건을 옮기는 데 그 의미가 있단 말이야. 많은 노잡이들에 대한 인건비도 문제가 되겠지. 물론 노잡이를 노예로 쓸 수도 있겠지만, 장거리 항해를 한다면 그들의 식량과 물을 실을 공간이 필요하지 않겠니? 그만큼 화물을 적재할 공간이 줄어든다는 말이지. 돛을 사용하면 역풍이 불 때 힘들기는 하겠지만, 노잡이들이 차지할 공간까지도 모두 화물로 채워 넣을 수 있으니 그만큼 짐을 많이 실을 수 있거든." 잠시 아르티어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 묵향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렇다면 결론은 전선이라는 말인데, 그럼 왜 용골을 달지 않았을까? 용골을 달면 깊은 바다에 나갈 때 안정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튼튼하거든. 원래 해전을 하다 보면 배끼리 부딪칠 수도 있고..., 그런 만큼 튼튼한 선체는 필수조건인데 말이다." "용골을 만들 줄 몰라서 그런지도 모르죠." 아르티어스는 손가락을 탁 튕기며 말했다. 아들놈의 말 대로 해답은 너무 간단한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맞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 이유밖에 없겠어. 이놈들이 원체 미개하다는 사실을 내가 잠시 깜빡했군." 아르티어스의 설명에 묵향은 실망한 어조로 말했다. 상선이 모이는 곳이라면 이 근처 바다를 항해한 성원들이 득실거릴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뭔가 중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르티어스의 말을 듣고 보니, 아무래도 저것들이 상선이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것은 상선이 아니라는 말이군요. 그럼 여기에서 어정거려 봐야 별로 득 될 것도 없겠네요.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묵향이 질문을 하자 아르티어스는 미리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 시장으로 가야지." "시장에는 왜요?" 아르티어스는 다쿠다가 끌고 있는 짐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것들을 팔아치워야 할 것 아니냐? 가죽뭉치를 들고 다녀봐야 쓸데도 없고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다쿠다에게 지시해서 시장으로 안내하게 했다. 시장으로 가면서 묵향은 시가지의 규모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월등하게 크다는 데 놀랐다. 물론 시가지의 규모는 겨우 5만 명 정도가 모여 사는 수준이었지만, 지금까지 봐왔던 원주민들의 생활수준에 비했을 때 이것은 정말 대단한 규모였다. 원래 많은 인구를 수용하는 시가지가 발달하려면 상업이나 공업의 발전은 필수적이었다. 한 곳에 집중된 그 많은 인구가 먹고 살 기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역시 묵향의 예상대로 시장의 규모는 대단히 컸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득실거리며 갖가지 물품들을 거래하고 있었다. 말이나, 소, 양, 염소, 닭 등의 각종 가축이라든지 쌀이나 보리, 호밀, 수수 등의 곡물들. 그리고 담비나 족제비, 여우같은 값비싼 가죽들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구리나 무쇠로 만든 솥을 파는 상인도 있었고, 여자들의 장신구로 사용하는 구슬이나 방울 등등 수많은 자질구레한 상품들도 보였다. 시장을 한바퀴 둘러보면서 아르티어스는 다쿠다에게 지시해 상인들과 흥정을 붙여 지금까지 오면서 선물 받은 각종 가죽과 물품들을 사금과 바꿨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가죽을 구하기가 쉬워서 그런지, 말 등에 실려 있던 그 커다란 가죽뭉치를 모두 다 넘겼음에도 받은 사금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르티어스는 짐말과 식량까지도 다 팔아치우려고 했지만, 그것을 묵향이 가로막았다. 묵향은 짐말에 실려 있던 육포들 중에서 며칠 먹을 분량만큼만 꺼내어 자신의 말에 실었다. 그런 다음 나머지는 모두 다 다쿠다에게 줘서 서둘러 돌려 보냈다. 이곳까지 안내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아르티어스가 언제 말과 식량을 팔아 버리는 것으로 마음을 바꿀지 알 수 없었기에 그렇게 서둘렀던 것이다. 다쿠다는 감사하다며 몇 번씩이나 고개를 조아리고 식량을 실은 말을 끌고 돌아갔다. 안내자인 다쿠다를 떠나보낸 후, 묵향은 시장에서부터 떠올랐던 의문을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시장에서는 아르티어스와 다쿠다가 물건을 판다고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한가롭게 대화를 나룰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둘만 남은 상황이었고, 아르티어스도 일을 모두 처리했기에 느긋하게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아빠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뭐가 말이냐?" "여기 시가지의 규모가 너무 크잖아요. 부근에 사는 촌민들의 생활 수준이라든지, 뭐 그런 것들을 봤을 때 이렇게 도시가 크게 발달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죠." 묵향의 질문에 그 정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쉽게 대답했다. "호비트야 약간의 땅만 있으면 쥐 떼처럼 불어나는 속성이 있잖느냐. 내 여태껏 살아오면서 호비트만큼 번식력과 생존력이 강한 동물은 쥐 말고는 본 적이 없다. 거기다가 이곳은 둥루젠 부족의 수도가 아니냐? 주위의 산물들이 이곳으로 집중될 테고, 또 대족장이 사는 곳인 만큼 안전까지 보장되니까 호비트들이 안 모여들 수가 없겠지."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치레아에 있을 때 느낀 건데 말이요, 도시가 발달하려면 뭔가 확실한 이유가 필요하다구요. 상업이나 공업이 발달하지 않는 한, 많은 인구가 한 곳에 모여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든요." 묵향의 말에 별걸 다 신경 쓴다는 듯 아르티어스의 대꾸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또 모르지. 항구니까 물고기가 많이 잡히던지, 아니면 배를 통한 중개무역이라도 하는지 말이다."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배가 상선은 아니라면서요. 그리고 작은 어선 몇십 척 아니, 항구 밖에 고기 잡으러 간 배가 그 몇 곱절이 된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돼요. 그리고 이놈들은 돈이라는 것도 없어서 물물교환을 하던지, 아니면 사금으로 거래를 하잖아요. 그 말은 상업을 통해 먹고 사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증거 아니겠어요?" "글쎄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놈들이 뭘 해서 먹고 사는지 조사하는 것이아니라, 중원을 찾는 거 아니었냐?" 묵향은 더 이상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낀 점을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아르티어스의 말처럼 중원을 찾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죠."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자,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식당이나 찾아보자. 정보를 긁어모으는 데는 여행자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식당이나 술집만한 데가 없느니까 말이다." "그러죠, 뭐" "한 며칠 수소문을 하다 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히겠지." 아르티어스는 묵향을 이끌고 식당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식당을 도저히 찾을 도리가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지나가던 원주민 한 명을 붙잡고 식당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어디에 식당이 있대요?" "글세......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이 저쪽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거기에 가보면 식당이 있지 않겠냐?" 하지만 아무리 가도 식당은 나오지 않았다. 또 다시 아르티어스가 지나가던 원주민 한 명을 붙잡고 장황하게 질문을 늘어놨다. 원주민이 뭔가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아르티어스에게 중얼거리며 가 버린 후 묵향은 짜증난다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겨우 식당 하나 물어보는데 무슨 설명이 그렇게 길고, 또 저놈의 반응은 왜그래요?" "글세 말이다. 식당이라는 게 원주민 말로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거든. 아무리 기억을 유추해 봐도 떠오르지가 않는단 말씀이야. 그러니 자연 빙 둘러서 질문을 해야 하고, 또 질문을 받은 놈도 모르겠다고 저러는구나." "젠장, 그럼 여행자들이 모인다는 그쪽이나 빨리 가 봐요. 거기를 쭉 둘러보다 보면 어딘가 있겠죠. 설마 여기까지 여행을 와서 풀뿌리를 씹고 있겠어요?" 묵향은 천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곳에 도착해서야 왜 자신들이 식당을 찾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천막들은 우물을 기준으로 넓은 공터에 수십 개가 쳐져 있었다. 우물에서 원주민 아낙들이 가죽부대를 가지고 물을 길러 가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천막 앞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곡물과 함께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런 식이라면 이곳에다가 식당을 열어봐야 장사가 될 턱이 없을 것이다. 여행객이라는 것들이 집과 식량을 함께 가지고 다니는데, 어떻게 장사가 될 턱이 있겠는가 말이다. "바로 저거였군요. 그렇다면 여기에는 식당이라는 게 없는 모양이죠?"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심각하게 잠시 생각해 보더니 중얼거렸다. "식당뿐만 아니라 여관이라는 것도 없다는 게 정확한 분석일 게다. 내가 잠시 잊어 버리고 있었는데, 이놈들은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어. 그렇다면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고 난 뒤 무엇으로 대가를 지불할 것이며, 여관에서 하루 밤 자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냐? 아예 그런 식으로 화폐를 사용할 만한 일이 없다는 반증이 될 테지." 아르티어스의 설명에 묵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럼 노숙을 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저쪽에 가서 말린 고기나 구워 먹죠. 저 요즘 고기 잘 굽거든요. 헤헤." "그러자꾸나." -------------------------------------------------------------------------- -고기를 굽는 데는 혈수마공이 최고- Chapt.7 묵향은 말 등에 실려 있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잘 말린 육포 몇 개를 들고 돌아왔다. 불타오르는 듯한 그의 손이 한 번 쓱 훑었을 뿐이었는데도 육포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졌다. 묵향은 그것을 아르티어스에게 건네 준 후, 또 다시 한 개를 구워서 입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역시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무서운 거야. 파괴력이 막강하다는 것만 알았지, 혈수마공에 이런 기가 막힌 용도가 있을 줄이야...... 아예 불이 필요 없구만." 주의 깊게 묵향의 행동을 살피던 아르티어스는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방금 쓴 그 마법이 혈수마공이라는 거냐? 거∼참, 상당히 편리해 보이네. 그거 나도 좀 가르쳐 주라. 주문이 어떻게 되는 거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주문이라고요? 이건 마법이 아니라 무공인데요. 그리고 가르쳐 준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쓸 수 있는게 아니라서......" "짜식 쫀쫀하기는...... 가르쳐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대놓고 따지지는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꿍얼거리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묵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요. 에이∼씨, 가르쳐 드리면 될 거 아니에요." "히히히, 안 그래도 할 일도 없는데 그거라도 한 번 배워보자." "좋아요. 그럼 잘 새겨들으세요." 천천히 묵향이 하는 말을 들으며 아르티어스의 안색은 점점 똥 씹은 듯 누렇게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묵향이 읊어주는 그것은 혈수마공의 구결이었다. 무공을 익혀 본 무인이라면 다 알 것이다. 최상급 무공의 구결이라면 원래가 무공의 아주 근본적인 부분을 파고들게 되기에 매우 추상적인 정신세계를 다루게 된다. 특히나 혈수마공같이 천하 5대 수공에 들어갈 정도의 무공이라면 그 구결의 심오함은 거의 이해불능의 수준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묵향이 자신이 처음 배웠던 구결을 그대로 아르티어스에게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무공서적에 적힌 구결은 타인에게 유출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거의 암호화해 놨기에 그것을 그대로 일러줘 봐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묵향은 자신이 깨달은 부분을 포함하여 비교적 알기 쉽게 일러줬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뭔가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멍청히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보고 묵향은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까지가 총체적인 구결이구요, 그 다음 각 부분에 따른 요결이 따로 있죠. 그러니까......"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혈수마공의 구결을 이해함에 있어서 따라 다니는 요결이었다. 요결은 각 부분부분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뛰어난 고수가 들려주는 요결과 그렇지 못한 인물이 들려주는 요결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해한 부분까지를 총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결 강의가 시작되자, 아르티어스의 안색은 더더욱 멍해지기 시작했다. 원래가 마법만 배운 그에게 있어서 요결은 더욱 혼란만을 가중시켰을 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요결을 모두 말한 묵향은 이해할 수 있겠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아시겠어요?"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반응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맹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곧이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확 뒤바뀌었다. 그 다음에 이어진 묵향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골드일족의 후예이시면서, 전지전능에 가깝다고 자화자찬하시는 아빠니까 그 정도는 금방 익히시겠죠?" 묵향의 비꼬는 듯한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곧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한 말이 있었기에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듯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면, 그에 따른 결과를 묵향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만약 이 난해한 마법을 익히지 못한다면, 아들이 자신을 어떻게 존경하겠는가 말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르티어스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자, 일단 시간을 벌기로 결심했다. 그러자면 뭔가 기대에 가득 찬 듯 자신을 바라보며 실실 웃고 있는 아들놈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려 놓을 필요성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뭘 말이에요?" "이런 미개하기 그지없는 놈들을 상대로 필요한 정보를 얻어낼 뭔가 다른 방법이 있느냐는 것이다." "글쎄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아르티어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참! 왜 내가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 여기도 호비트가 사는 세상인 만큼 계급이 있을 것 아니냐. 여기까지 오면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비록 미개한 족속이라고는 하지만 촌장도 있었고, 각 지역을 관할하는 족장도 있었잖니? 특히 여기는 대족장이라는 놈이 살고 있으니 그놈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환히 웃으며 좋은 방법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곳에서 상인을 찾아다니느니 차라리 이 지역을 통치하는 대족장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아, 맞다.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아르티어스는 씹고 있던 육포를 땅바닥에 던져 버리며 말했다. "그곳에 가면 이것보다는 좋은 음식을 대접받을 수 있겠지. 그리고 따뜻한 잠자리도 말이야. 안 그러냐?" "그럼요. 빨리 가죠." 성은 야트막한 언덕 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번보다는 훨씬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시가지와 항구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시가지와 항구에서도 성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와 묵향은 원주민에게 길을 물어보는 수고를 생략하고 곧장 성을 찾아갈 수 있었다. 성문을 지키고 서 있는 병사는 6명 가량이었는데, 그들의 복장은 거의 통일이라도 시킨 듯 흡사했다.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있는 것은 지금껏 만난 촌락민과 똑같았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성문을 지키는 병사답게 완벽한 무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모든 촌락민들은 무기를 다룰 줄 알고 있었고, 또 무기들은 집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먹고 살 일이 바쁘다 보니 간편한 무장만을 하고 다니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은 방패를 등에 지고, 긴 창을 쥐고 서 있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원주민 병사들은 색다른 모습의 이방인이 나타나자 험악한 인상으로 창을 꼬나들고 앞을 가로막으며 뭐라고 지껄여댔다. "저 녀석들 뭐라고 지껄이는 거예요?" 병사들의 무례한 태도에 기분이 상한 묵향이 묻자,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했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 거야. 그냥 때려눕히고 들어갈까?" "그러면 대판 싸우게 될 게 뻔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아주 중요한 일로 대족장을 만나러 왔다고 해요." "그럴까? 쩝, 귀찮기는 하지만 네 말대로 하마." 병사들 중의 한 명이 대족장을 만나러 왔다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무시하지 못하고, 성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 그 병사는 상관인듯한 한 인물과 함께 걸어 나왔다. 그 또한 여태껏 보아왔던 원주민들처럼 어깻죽지만 감싸고 있는 털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허리에는 병사들처럼 작은 단도만이 꼽혀 있지 않고, 반월형으로 휘어진 커다란 도를 차고 있었다. 그는 도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거만한 표정으로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곧장 아르티어스도 그의 말에 응수해 한동안 서로 원주민 언어로 지껄여댔다. 갈수록 서로간의 말투가 거칠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 묵향이 아르티어스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하는 거예요?" "저놈이 대족장을 만나지 못한다고 하잖아." 아르티어스가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묵향의 생각은 달랐다. 성을 경비하는 병사들로서는 그렇게 나와야 당연한 것이다. 상대가 주변 강대국에서 온 사신도 아니었고, 또 대족장을 만나러 왔다면서 뭔가 대단한 선물을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그것도 그냥 맨손으로 와서는 대족장을 만나게 해달라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묵향은 잠시 생각해 본 후 입을 열었다. "병사들이야 당연히 그렇게 나오겠죠. 그럼 이렇게 하자구요. 여태까지 이리로 오면서 신으로서 많은 대접을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신께서 왕림하셨다고 둘러대면서 대족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설마 그 촌락에서 이쪽까지 20일간에 걸쳐 쉬엄쉬엄 왔는데, 신이 왕림한 사실을 대족장이 모를 리가 있겠어요? 벌써 보고가 올라왔어도 예전에 올라왔을 걸요?" "호오, 그럴 듯한데. 그 방법도 괜찮겠군. 그러니까 내 전공을 살리자는 말인데... 좋아! 한번 해 보자." 아르티어스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감탄사를 연발한 수, 나직하게 목소리를 깔며 병사들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기대와는 달리 병사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존경심이나 경외감 따위와는 거리가 먼 경멸감이었다. 병사들이 뭐라고 지껄여대자 아르티어스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그것을 보고 묵향이 옆에서 아르티어스의 옷깃을 슬쩍 잡아끌며 물었다. "도대체 저놈이 뭐라고 했길래 그래요?" 아르티어스는 사나운 눈빛으로 그 병사를 째려보며 투덜거렸다. "저놈이 나를 보고 사기꾼이라고 하잖아. 씨쥬에서 온 장사치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 감히 신의 이름을 사칭한다고 말이야. 목을 잘라 버리기 전에 꺼지라고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게 생겼냐?"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말에 좋은 정보를 얻었다는 듯 다급히 물었다. "뭐라고요? 씨쥬에서 온 상인이라고요? 호오, 그렇다면 색목인이 여기까지 들어오는 모양이군요. 그럼, 그들을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는지 한번 물어봐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르티어스가 퉁명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상대는 차가운 어조로 뭐라고 떠든 수 성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병사들도 빨리 꺼지라는 듯 창을 들이밀며 아르티어스를 위협했다. 순간 아르티어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며 거칠게 외쳤다. "이것들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어디 맛 좀 봐라." 아르티어스는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뻗으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골드 드래곤은 바람의 정령력을 지니는 존재가 아닌가. 그는 바람의 정령들을 불러서 저 싸가지 없는 놈들을 날려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어? 왜 이래?"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령의 힘이 전혀 느껴지지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렇다면 지금까지 불어오던 바람은 뭐였지? 여기서는 정령이 없어도 바람이 분다는 말인가? 에잇! 젠장, 그건 나중에 천천히 연구해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렇다면 이것은 어떠냐?" 아르티어스는 본격적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강력한 마법이라면 마나가 희박하기에 구사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저런 야만족 병사 하나를 족치는데 그렇게 고급 마법은 필요도 없었다. 아르티어스가 주문을 외워 마법을 발동시키자, 퉁명스레 말하고 되돌아가던 도를 찬 병사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몸이 뒤로 확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비명을 질러대며 질질 끌려왔고, 곧이어 아르티어스의 손아귀에 잡혀 버렸다. 그제서야 그는 아르티어스가 자신에게 먼가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창백해진 안색이기는 했지만, 큰 소리로 지껄여대며 허리에 찬 도를 꺼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반항도 잠잠해졌다. 아르티어스가 그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호되게 갈겨 버렸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모든 병사들이 벌떼를 건드린 듯 웅성거리며 전투대형을 갖췄다. 방패로 몸을 가리며 창을 꼬나 쥐고 서서히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을 보자 아르티어스는 같잖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것들이, 정말 죽으려고 작정을 했군. 그래, 어디 한번 죽어봐라." 아르티어스가 주문을 외우며 슬쩍 손을 뻗자, 그의 손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곧장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던 병사 한명에게 직격했고, 그는 괴성을 질러대며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윽고 잠잠해져 버렸다. 죽은 것이다. 그것을 보자 병사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부들부들 떨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마법을 이상한 방법으로 사용하자 궁금한 듯 물었다. "왜 그렇게 한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안하고, 겁에 질린 병사들의 모습에 기고만장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흐흐흐, 이것들이 이제서야 나를 알아 모시는 모양이군. 하등한 네놈들에 비하면 신에 가까운 이몸을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성문 근처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자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뭔가 주문을 외워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는 찬란한 서광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가사의한 그 광경을 목격한 병사들은 하나 둘씩 무기를 버리고 땅에 꿇어앉은 채 절을 하며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외침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그 안에는 탱게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묵향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모든 병사가 엎드려 절을 하자 아르티어스는 흡족한 표정으로 나무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엎드리고 있던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번쩍! 콰콰쾅. 이때 구름 한점 없던 맑은 하늘에서 새하얀 번개가 내리꽂히며 나무를 수직으로 두동강을 내버렸다. 그 광경을 본 병사들은 공포와 경외감에 질린 얼굴로 아르티어스에게 절을 해대며 연신 탱게를를 외쳐대기 시작했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 그리고 그 외침은 점점 더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성문 주위에서 탱게르라는 커다란 함성이 들리자, 성 내부에 있던 병사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들도 곧 상황을 인식하고 그 대열에 계속 합류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탱게르를 외쳐대고 있는 가운데,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묵향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뒤에서 보니까 시답잖은 전격마법으로 한 명 구워 죽이고, 저 나무를 반쪽 낸 것밖에 없었잖아요. 그런데 왜 이 난리죠?"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씨익 웃으면서 대답했다. "쯧쯧쯧, 그래서 네가 아직 멀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호비트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다니...... 그래서 내가 말했잖냐. 똑같은 마법을 쓰더라도 저런 무식한 것들 앞에서 쓸 때는 연출효과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이야." "연·출·효·과·요?" "그래, 똑같은 마법이라도 어떤 방식으로 조합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지. 라이팅 마법으로 몸을 감싸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전격마법으로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보여 주었잖니. 그랬더니 봐라, 저것들이 나를 탱게르, 즉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잖아." 으스대는 아르티어스를 묵향은 같잖다는 듯 바라봤다. 하지만 묵향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잠시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은은한 빛 무리로 몸을 감싼 아르티어스는 평소의 주책 맞던 그의 모습을 연상하기 힘들 만큼 위엄과 신성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잠시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며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던 묵향은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폼이 나긴 난다만은 참 내, 별 같잖은 게 다 통하네." 그것은 묵향이었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마법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오랜 세월 살며 거기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묵향은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는 거대한 강철 인형이나, 6싸이클급 이상의 막강한 마법들, 그리고 마계의 발록은 물론이며 그보다도 월등한 불칸과도 싸워 보지 않았던가. 그런 묵향이었기에 아무리 연출이 좋다 하더라도 저런 간단한 라이팅 마법과 전격 마법에 속아 땅바닥에 꿇어앉아 천신이라 부르짖고 있는 병사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7fin -------------------------------------------------------------------------- -번개의 신 당케 탱게르- "밖이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것이냐?" 두툼한 호랑이 가죽을 깔아놓은 의자에 앉아 있던 대족장 타르티는 밖에 시끌벅적 시끄럽자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해리바가 즉시 문 앞에 서 있던 호위 병사에게 지시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라." "옛!" 병사가 달려 나간 후, 타르티는 해리바와 방금 전까지 나누던 대화를 계속했다. "흐음, 아무래도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명확한 확증도 없는 상태에서......" 해리바는 침중한 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계속 타르티에게 밀어 붙였다. "대한이시여,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작년에 스루 한님은 딸을 시집 보냈습니다. 여자가 나이가 차면 결혼을 시키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그 상대가 우구나이 한님이었습니다. 우구나이 일족은 둥루젠 북쪽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대부족이 아닙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며칠 전에는 구로 한님께 달을 달라고 청혼을 넣은 모양입니다. 몰론 스루 한님의 둘째 아들이 장성해서 결혼할 나이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그 상대가 구로 한님이라면 저희로서는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이번 혼사가 성립된다면 둥루젠의 북방 전체는 스루 한님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스루 한님께서 대한께 대항하고자 하는 뜻을 한번도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세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세력을 결집한 후에 대항을 시작하면 저희로서는 이미 늦습니다. 그러니 빨리 뭔가......" 하지만 해리바의 말은 여기서 끊겨야 했다. 왜냐하면 방금 자신이 내보냈던 병사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 대한이시여. 큰일 났습니다." 해리바는 인상을 찡그리며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대한께서 계신 곳에서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리 호들갑을 떨고 난리냐?" "탱게르께서 현신하셨습니다. 번개의 조화를 부리시는 것으로 보아 당케 탱게르이신 것이 분명합니다. 오오, 탱게르시여!" 해리바는 대한과의 밀담이 방해를 받은 것도 짜증이 났지만, 그 대화를 방해한 병사가 횡설수설하고 있자 더욱 화가 치밀었는지 언성을 높여 질책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좀더 자세히 말해 보라!" "예, 두 분의 탱게르께서 오셨습니다. 두 분 다 정말 여인처럼 아름다우신 분들인데, 한 분은 불타는 듯 붉은 머리에......" 병사의 보고를 다 들은 후 해리바는 손을 내저어 병사를 물리쳤다. 그런 다음 타르티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당케 탱게르께서 왕림하신 것을 보면, 대한께 탱게르의 축복이 함께 하시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타르티는 시큰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병사의 보고를 듣다 보니 아무래도 씨쥬 상인놈이 농간을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아무 것도 모르는 부족민들이 탱게르를 열성적으로 받드는 것이 부려먹기 편해서 좋기는 하지만 그런 허무맹랑한 전설이나 신화를 믿는다는 것은 바보짓이야." 해리바는 타르티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난 뒤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과연, 현명하신 생각이십니다. 몰론 그들이 진짜 탱게르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가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한께서는 그들을 진짜로서 받아들이십시오." 해리바의 조언에 타르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언성을 높여 외쳤다. "뭐라고? 왜 나가 그런 바보놀음에 장단을 맞춰 줘야 한다는 말이냐?" "탱게르께서 대한께 나타났다는 것은 대단히 상서로운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육십 넷씩이나 되는 탱게르들 중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설혹 그들이 사기꾼들이라도 상관없는 일이지요." 타르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해리바를 바라봤다. 하지만 해리바는 그런 타르티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계속했다. "예, 그런 하찮은 것들은 모두 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탱게르께서 그 누구도 아닌 대한께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잘 이용하신다면 둥루젠 부족의 진정한 화합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서야 해리바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타르티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옳거니, 그런 것이 있었군. 탱게르의 뜻이 나에게 이어졌다면 그 누구도 감히 내게 반항할 수 없겠지?" "예, 물론입니다. 설혹 반항하는 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대한께서 군대를 끌고 가신다면 항복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그 어떤 부족민도 탱게르의 군대를 상대로는 싸우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타르티는 호탕하게 웃으며 해리바에게 지시했다. "크하하핫! 좋아, 좋아. 그렇다면 주술사를 빨리 불러라!" 대족장 타르티의 명령이 떨어졌는 데도 불구하고 해리바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주술사는 왜 찾으시는 것이옵니까?" "탱게르가 왔다면 당연히 주술사와 함께 맞이해야 할 것 아닌가?" 타르티의 대답에 해리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술사는 지금 마을에 환자가 생겨서 성밖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대한께 더 잘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타르티는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탱게르와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여태껏 주술사가 해왔지 않습니까. 탱게르의 뜻이라고 한다면 심지어 한(汗)까지도 바꿔치울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있죠. 그만큼 위험한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탱게르가 직접 현신하셨으니, 이번 경우는 주술사를 통하지 않고 대한께서 직접 대화를 시도해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타르티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호오, 그러니까 탱게르를 끼고 있기만 하면 내 말이 곧 탱게르의 말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약 주술사가 탱게르를 만나게 그냥 놔둔다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해리바는 타르티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오자 곧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예, 만약 주술사가 탱게를가 가짜라는 것을 밝혀 낸다면 아주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겠지." "그러니까 주술사가 탱게르께 접근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타르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을 하다 해리바에게 지시를 내렸다. "좋아, 그럼 자네는 곧장 주술사에게 가서 시간을 끌어. 아니, 그보다는 아예 만나지 못하게 막아." 지시를 받고 급히 밖으로 나가려던 해리바는 뭔가 떠올랐는지 뒤로 돌아서며 타르티에게 말했다. "대한,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일주일 후에 또 다른 선단이 지팡그로 출발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감사제를 대대적으로 올리도록 주술사에게 지시하는 겁니다. 물론 감사제 준비를 넉넉하게 할 수 있도록 금을 듬뿍 집어 주면 되겠지요. 그리고 이번 감사제는 매우 성대한 것이니, 감사제가 무사히 잘 끝마쳐 질 수 있도록 부정이 타지 않는 곳에서 감사제 전까지 탱게르께 기원을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타르티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무릎을 치며 찬성했다. 그러나 곧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호오, 그것 정말 좋은 생각이군. 그나저나 젠장, 그 탐욕스러운 주술사 놈에게 또 얼마나 많은 금을 집어 줘야 되는 거야?" 잠시 투덜거리던 타르티는 해리바에게 지시했다. "황금은 필요한 만큼 자네가 알아서 가져 가게. 어쨌건 자네는 지금 바로 주술사에게 가 보게. 주술사가 언제 성으로 돌아올지 모르니까, 한시가 급해." "옛!" 지시를 내린 타르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이제 둥루젠을 일통시키는 한판 연극을 하러 가 볼까. 흐흐흐." 한동안 목청껏 천신의 이름을 외치고 있던 병사들의 외침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주위가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했을 때, 웬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르티어스의 눈에 보였다. 그의 뒤에는 4명 정도의 기골이 장대한 호위 무사들이 허리에 칼을 찬 채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아르티어스로부터 3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부터 땅바닥에 엎드리더니, 엉금엉금 기어서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왔다. 이윽고 아르티어스 앞에 도착한 그 사내는 정중한 어조로 한동안 중얼거리더니 양손을 뻗어 아르티어스의 발을 조심스럽게 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렸다.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묵향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놈은 도대체 정신이 박힌 놈인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발을 자기 머리 위에 올릴 수 있는 거죠? 내가 저런 꼴을 당했다면 칼을 물고 죽었을 건데, 저놈은 자진해서 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네."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흐흐흐, 이것이 바로 이놈들이 하는 복종의 맹세지. 그러리까 자신을 노예처럼 부려 달라는 의미가 아니겠냐. 너는 이놈이 누군 줄 모르겠지?"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발을 머리에 올리고 있는 중년의 사내를 가리키며 물었다. 묵향은 당연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점쟁이가 아닌 이상 처음 보는 원주민이 누군지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원주민들은 머리 모양도 한결 같았고, 또 모두들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있었기에 그놈이 그놈 같아서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묵향이 맹한 얼굴로 서 있자, 아르티어스는 호기롭게 웃으며 말했다. "으하하핫, 바로 이 녀석이 대족장 타르티라는 놈이야. 이것으로 둥루젠 부족의 모든 호비트는 모두 다 내 노예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서, 설마......" "쯧쯧, 그래서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아직도 너는 좀 더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르티어스도 이것을 공짜로 배운 것은 아니었다. 무슨 할 짓이 없어서 드래곤이 호비트의 심리를 연구하고 있겠는가. 한 번 몸체만 쓰윽 보여줘도 모든 것이 만사형통인데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다 다크 탓이었다. 그녀에게 휘둘리며 아르티어스가 그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수많은 호비트들을 거느리고 막노동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보니 호비트들을 손쉽게 다루는 방법을 어쩔 수 없이 익힐 수밖에 없었던 아르티어스였던 것이다. 잠시 어깨를 으쓱거리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호비트의 심리상태를 꿰고 있으면 뭐하느냔 말이다. 정작 그가 휘어잡고 싶은 호비트 놈에게는 아예 자신의 말이 먹혀들지를 않는데 말이다. 아니, 먹혀들어 가기는커녕, 그 지독한 똥고집과 드래곤도 손을 내저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파워는 이게 정말 호비트가 맞기나 한지 아르티어스도 가끔 헷갈릴 지경이었던 것이다. "에이, 젠장. 만사를 잊어 버리고 오랜만에 뜨뜻한 물로 목욕이나 하고 싶구나. 어서 성으로 들어가자." 아르티어스의 속을 모르는 묵향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예."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타르티의 안내를 받으며 내전으로 들어갔다. 아르티어스는 호랑이 가죽이 깔려 있는 상석에 거만한 태도로 앉아 타르티와 부하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타르티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을 때 타르티는 왠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곧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르티어스가 인상을 팍 찡그리자 허둥지둥 부하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가 왜 그렇게 허둥댔었는지는 목욕을 하러 간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타르티가 안내한 곳은 성의 부엌 뒤편에 급조한 커다란 천막이었다. 천막 안에 들어간 묵향이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이거 목욕탕 맞아요?" 아르티어스 역시 목욕탕을 둘러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글쎄다." "제가 보기에는 통돼지 한 마리 잡아 넣고 삶는 곳 같은데요?" 묵향의 표현대로 이건 돼지를 잡아 삶는 곳인지, 목욕을 하는 곳인지 분간이 안 가는 목욕탕이었다. 소 한 마리는 통째로 삶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무쇠 솥에 물이 펄펄 끓고 있었고, 그 옆에는 찬물이 들어 있는 크고 작은 그릇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젠장, 용도는 네가 말한 그게 맞는 것 같은데 뭐 어쩔 수 있냐. 이놈들은 아무래도 목욕이라고는 거의 안 하고 사는 것 같단 말씀이야. 그래서인지 내가 알고 있는 원주민 말 중에서 "목욕"이라는 단어는 아예 없었다. 그래서 뜨뜻한 물로 몸을 좀 씻은 후에 식사를 하고 싶다고 했지." "뜨뜻한 물이요? 이 정도면 아예 고기를 삶아도 되겠는데요. 하긴 뭐 어쩔 수 없지. 일단 씻을 수만 있다면 이런 거라도 어딘데......" 확실히 대족장이 사는 성에 온 것은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다. 마른 고기조각이나 씹으며 저녁을 때울 뻔했는데, 오랜만에 목욕도 하고 진수성찬까지 대접받았던 것이다. 진수성찬이라고 해 봐야 여태껏 다른 촌락에서 대접받았던 것과 같이 이곳에서도 고기를 굽거나 삶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말린 고기보다야 백배 낫지 않은가. 단지 음식을 차려 놓은 모양이 조금 수상쩍었지만...... "어째 상을 차려 놓은 모양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글쎄 말이다. 이거 꼭 무슨 제사라도 지낼 때 음식 차려 놓은 것 같은 모양인데?" 그도 그럴 것이 묵향과 아르티어스의 앞에는 커다란 탁자가 놓여졌고, 그 위에 수많은 음식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음식들의 상태였다. 한 마리 통째로 삶아 놓은 양이라든지, 커다란 술항아리나 구운 생선 몇 마리가 층층이 쌓여 접시에 담겨 있었다. 일단 요리는 한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어떻게 이대로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적당히 덜어서 작은 접시에 따로 담아서 먹는다면 몰라도 말이다. 이윽고 음식을 탁자 위에 모두 놓자, 병사 한 명이 잡티 하나 없는 아름다운 백마를 한 마리 끌고 왔다. 연회석상에 웬 말을 끌고 오나 싶어서 호기심 가득한 표적으로 바라보며 묵향이 중얼거렸다. "여기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선물을 하는 풍습이 있는 모양이죠? 그나저나 아주 멋진 말이네." "그, 글쎄다. 전에 말을 몇 마리 선물을 받기는 했지만 그때는 떠날 때 받았었는데..., 이상하네?" 하지만 그들의 의문은 곧 풀렸다. 대족장이 손짓을 하자, 병사 한 명이 우유가 가득 든 작은 질그릇을 가지고 다가와서 말에게 먹였다. 말이 우유를 다 마시고 나자 병사는 말의 이마에 우유를 뿌린 후 물러났다. 그러나 커다란 칼을 든 덩치 좋은 병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섰다. 퍽! 단 칼에 백마의 목을 잘라 버렸기에 사방으로 붉은 피가 튀었다. 그는 백마의 목을 자른 후 재빨리 커다란 질그릇을 대고 피를 받기 시작했다. 곧이어 커다란 질그릇은 백마의 피로 흘러넘칠 정도로 가득 찼다. 병사는 질그릇이 피로 가득 차자, 곧장 타르티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는 정중히 바쳤다. 타르티는 그 질그릇을 가지고 상 앞에 놓은 다음 몇 번인가 절을 하며 한참 동안 뭔가 중얼거렸다. 묵향은 자신들의 앞에다가 도저히 먹을 수도 없을 만큼 태산 같이 음식을 쌓아 놓았을 뿐만 아니라, 갑자기 말을 도살하는 등 괴상한 짓을 한 대족장이 오랜 시간 절을 해대며 중얼거려대자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녀석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예요?"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참∼내, 겨우 피 한 사발 놔 두고 원하는 것도 많구먼. 부족의 완벽한 통일을 이루게 해 달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손이 번성하게 해 달라는 등 별의별 자질구레한 헛소리들을 늘어 놓고 있는 중이야." "뭐, 뭐라고요? 그럼 저놈들 지금 우리를 앞에 두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말입니까? 감히 산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다니......?" 묵향이 약간 흥분한 듯하자 아르티어스는 다급히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쉿!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 안 그러면 들통날지도 모르니까." 이윽고 대족장 타르티는 기원을 모두 끝냈는지, 질그릇을 가지고 아르티어스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르티어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질그릇을 바치며 뭐라고 또 다시 말했다. 타르티로부터 질그릇을 받아든 아르티어스는 망설이지 않고 쭈욱 한 모금 들이킨 다음 질그릇을 묵향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거 한 모금만 마셔라." "으엑! 이걸 마시라구요?" "그럼 어쩌겠냐? 도저히 못 마시겠으면 마시는 척이라도 해. 이것도 다 우리가 신인 척하고 있기에 생겨난 결과니까 말이다. 만약 안 마시면 우리가 스스로 신이 아니라고 실토하는 것이나 똑같은 결과가 나오게 될 거다." 묵향은 마지못해 피비린내 나는 그것을 한 모금 마신 다음 타르티에게 돌려줬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피비린내는 숱하게 맡아 봤지만, 그냥 맡는 것하고 그것을 마시는 것은 천지 차이가 있었다. 묵향이 뱃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겨우 참고 앉아 있을 때, 야만인들의 의식은 계속되고 있었다. 타르티는 자신도 한 모금 마신 다음, 그 질그릇을 서열 순서대로 방안에 있는 모든 원주민들이 한 모금씩 마시도록 했다. 아마도 한 모금씩 마시면서 서로간의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모양이었다. 의식이 끝난 다음에는 묵향과 아르티어스 앞에 놓여졌던 음식을 거둬들여 각자 먹을 수 있도록 다시 요리하여 연회석상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배분하기 시작했다. 음식과 술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기에 , 모두들 담소를 나누며 먹고 마시기 시작했기에 자연 연회석상은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연회가 시작되고 난 후, 하녀로 보이는 여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음식물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물론 하녀로 보인다고 한 아유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복장이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엇비슷했기에 옷만 봐서는 신분의 고하를 알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녀는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신선한 생고기를 가득 담아 놓은 접시를 몇 개인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아르티어스와 묵향 앞에다 놓았다. "이건 또 뭐예요? 요리를 해서 가져오지 않고 왜 생고기를 가져오는 거죠? 아니면 즉석에서 요리를 해 주려는 건가?" 묵향의 말이 그럴듯하다 생각된 아르티어스는 하녀에게 뭔가 질문을 던졌는데, 하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몇 마디 대답한 후 줄행랑을 쳐버렸다. 아마도 지고하신 존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아르티어스는 하녀가 떠난 후 묵향에게 대답해 줬다. "그건 방금 잡았던 백마의 심장과 간 그리고 콩팥이래. 아마도 여기서는 이것을 날것으로 먹는 모양이야." 그 말에 묵향이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와 똑같이 날고기가 주어진 곳이 딱 한 군데 있었다. 그곳은 대족장과 그의 심복들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말 한 마리에서 나오는 심장과 간, 콩팥이라고 해봐야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니었기에 일부는 신께 바치고, 나머지는 가장 높은 사람들만 먹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면 이 날고기가 여기서는 꽤나 고급음식인 것 같았다. 그 외에 제공된 음식물은 이곳까지 오면서 촌락에서 먹었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술은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처럼 텁텁한 냄새가 나는 뿌연술도 나왔지만 맑은 빛깔의 술도 있었던 것이다. 원주민들은 그 술을 투박한 질그릇으로 만든 목이 길쭉한 병에 담아와서 화로에다가 술병을 넣어 따뜻하게 데운 후 마셨다. 묵향이 따뜻한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그 술을 한 잔 쭈욱 들이키자 목구멍에서부터 시작해 속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와, 이거 제법 괜찮은데요? 여기 와서 처음 맛보는 제대로 된 술이네요. 이 정도 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을 보면 생각만큼 그렇게 야만인은 아닌 모양이에요." "정말이냐?" 아르티어스도 한 자 쭈욱 들이킨 다음 그 술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연거푸 몇 잔 들이켰다. "정말 특이하구나. 내 여태껏 수많은 술을 마셔 봤지만, 이렇게 따끈하게 데워서 마시는 술은 처음이군. 대부분의 술은 다 차게 해서 마시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마시니 그 나름대로 괜찮구나." "근데 이게 무슨 술이죠?" 아르티어스는 옆에서 시중들고 있던 원주민에게 몇 마디 물어 본 후, 묵향에게 전해줬다. "사케라는 술이라는구나." 묵향은 사케와 함께 자신의 앞에 놓인 고기를 몇 조각 집어 먹다가 궁금한 듯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무슨 고기에요?" 며칠 전만 해도 아르티어스와는 냉전중이었기에 뭔가 물어 보고 싶어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화해를 하고 나니 자신이 지금 먹고 있는 게 뭔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닭이나 오리 같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고, 소나 돼지와는 또 맛이 틀렸다. 그리고 중원에 있을 때 한번씩 별식으로 먹어 봤던 개와도 뭔가 달랐다. 그렇다면 이게 양인가? 하지만 양고기 치고는 노린내가 없지 않은가. "응, 그거 말고기다. 어때, 맛있지?" "이게 말이라구요? 어떻게 여기서는 말을 그렇게 많이 잡아먹죠? 지금까지 거쳐 왔던 마을들 중에서 첫 번째 마을만 빼고는 모두들 말을 잡았잖아요?" "아, 그랬었나? 맞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나는 저쪽 세계에 있을 때 어쩌다 가끔씩 말을 잡아먹었었기에 그런가 보다 했지."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그런 묵향의 모습이 정말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고 생각하며, 아르티어스는 감회 어린 표정으로 일거수일투족을 바라 봤다. "어? 저랑 같이 계실 때는 한 번도 말고기를 드신 적이 없었잖아요? 사실 그쪽에서도 말은 유용한 탈것이었고, 그래서 아주 귀하게 취급된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하긴, 늙어서 쓸모없어진 마을 잡아서 농노들이 먹는다는 말은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는 것도 같지만...... 하지만 아버지가 그런 늙은 말고기를 먹을 정도로 생활이 곤란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데요." "아아, 그건 내 영토에 침입해 들어온 놈들을 해치울 때 말이다. 그 때 사람만 먹자니까 생각 이로 양이 별로더군. 사실 네다섯 명 해 봐야 한입 거리도 안 되니까 말이야. 그래서 그때 말도 함께 먹었지. 쩝..., 아주 싱싱한 말들이어서 그런지 맛이 꽤 좋았거든." 입맛을 다시며 아르티어스가 능청스레 말하자 묵향은 못 들은 것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어어? 얘야. 친절히 대답을 해 줬을 뿐인데, 그런 반응을 보이면 이 애비한테 실례라고 생각되지 않냐?" 순간 아르티어스가 당황한 어조로 말을 건냈지만, 묵향은 그쪽으로는 아예 시선도 돌리고 싶지 않았다. 워낙 오랫동안 그와 함께 지내다 보니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했기에 당황했던 것이다. 드래곤은 파괴와 공포의 상징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친근하게 다가와서 오랜 세월 함께 울고 웃으며 부대꼈다. 그러다 보니 묵향은 그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점차 잊어가고 있었다. 말로야 드래곤이라는 둥, 위대한 골드일족의 후예라는 등 뻐기기는 했지만 그의 행동양식을 인간의 것에 맞춰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드래곤이라면 말과 사람을 생으로 씹어 먹든,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든 별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아르티어스는 단순히 그의 과거를 이야기해 줬을 뿐이었다. 자신이 과민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문득 묵향은 차원이동을 할 때, 자신을 처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함께 가지고 눈물짓던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드래곤인 그가 하등한 호비트인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런 부탁을 했을까. 그에 비해서 자신은 아르티어스의 간단한 부탁 하나도 들어주기 싫어 몇 날 며칠을 감정 싸움을 해대지 않았던가. 묵향은 아르티어스에게 좀 더 잘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묵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르티어스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되돌리며 물었다. 물론 이것은 방금 전에 자신이 아르티어스를 외면한 것을 상쇄시키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저쪽을 보니까 원주민 녀석들이 아주 맛있게 고기를 먹고 있던데요? 그런 걸로 미루어 보아 식량이 모자라기 때문에 폐마를 잡아먹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혹시 묵향이 토라진 것이 아닌가 조마조마하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토라진 것이 아니라 저 뒤쪽을 두러보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던 것으로 착각하고, 즉각 아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서다. 아르티어스는 옆에 서 있던 원주민들을 향해 뭔가 질문을 던졌고, 그들은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아마도 말고기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토론이 끝나자 아르티어스는 환히 웃으며 묵향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저 녀석들 말로는 오늘이 아주 경사스러운 날, 그러니까 천신께서 내려오신 날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말고기를 대접하는 거래. 말고기는 열량이 많아서 추운 겨울을 나는데 양과 함께 최고의 음식으로 친다는구나." 열량이 많다는 부분에서 묵향은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역시 환경적인 문제였군요." "아니, 그보다는 좀 더 복합적인 문제지. 열량도 많고, 맛도 뛰어날뿐만 아니라 말고기에는 기생충이 없다고 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란 것이 잡으면 고기가 엄청 나오잖아." 아르티어스의 말을 듣고 있던 묵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일단 덩치가 있잖아요." "그렇지? 그렇다 보니 보관상에 문제가 생기는 거야. 몇 사람 모였다고 말 한 마리를 잡았다가는 그 고기를 싱싱한 상태에서 다 먹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든.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만 말을 잡는다는 거야. 이리로 오면서 먹었던 육포도 말고기를 말린 것이라하더라." 이곳가지 오면서 먹었던 말린 고기가 말이었다는 사실에 묵향은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예에? 말고기로 육포도 만든다구요?" "물론이야, 여기서는 먹고 남은 음식은 상하지 않도록 잘 저장을 한다는구나. 잘못하면 상해서 버리게 되니까 말이다. 소금은 구하기가 힘드니 소금에 절이는 방법 대신 보통 훈제를 한다고 하더군. 어찌 되었건, 이곳 호비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이기는 하지만 평상시에는 구경하기도 힘든 것이 말고기라는군. 사실 말은 아주 많은 용도로 쓰이는 동물이잖니? 탈것으로도 이용되고, 짐을 옮기거나 밭을 가는데도 쓸모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웬만큼 경사스러운 일이 있지 않는 한 말고기는 거의 구경하기도 힘들다는구나." 아르티어스의 자세한 설명에 이해가 간다는 듯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호오, 그러니까 여기서는 폐마를 잡아서 먹는 방식이 아니군요." "물론 폐마를 잡아먹기도 하겠지. 하지만 신께서 왕림하셨다는데 감히 폐마를 잡아서 대접하는 놈이 어디 있겠냐? 만약 그랬다가는 내가 벌써 박살을 냈지. 내가 이래봬도 입맛이 좀 까다롭잖냐?" 묵향은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아귀처럼 쩝쩝거리던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같잖다는 듯 대꾸했다. "어∼련하시겠어요." 탱게르께 제사 지내는 형식으로 엄숙하게 시작된 대연회는 차츰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그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술 때문이었다. 평상시에 거행되는 탱게르께 대한 제사의 경우, 매우 엄숙하게 진행된다. 물론 이때도 술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 양이 극히 한정적으로 사용됐다. 그래서 한 사람이 두세 잔 정도 마시면 끝이었기에 뒤탈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타르티 대한의 지시에 의해 술이 거의 무제한으로 풀리고 있었기에 연회 자리는 화기애애 해지기는 했지만, 조금 산만한 감이 없지는 않았다. 타르티가 이렇듯 술을 푼 것도 다 따지고 보면, 탱게르께 경배를 드리기 보다는 부족의 화합을 도모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 대한이 저 연회석상의 최고상석에 앉아 있는 둘을 절대로 탱게르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상석에 앉아 있는 그들도 이런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결코 싫지는 않은 듯 흥겹게 먹고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탱게르가 이곳에 온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주위의 한들은 다 불러 모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대연회라는 것도 탱게르가 왕림한 후 겨우 세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급히 준비한 것이다. 그 때문에 수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세 부족의 한들을 초청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세 한들의 경우 수도와 가장 가까운 곳을 영토로 차지하고 있는 만큼, 타르티가 가장 신임하고 있는 한들이었다. 이번 대연회는 탱게르가 대한에게 왕림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식전행사 같은 것으로 급히 계획된 것이었다. 진짜 축제는 한 달 후에 일주일 동안 대규모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이렇게 한 달이라는 여유 기간을 둬야 각 지역을 다스리는 한들이 집결할 수 있을 만큼 둥루젠 부족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둥루젠은 사냥과 목축을 주로 했지만 농업을 통한 생산도 꽤 많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한 곳에 정착하여 사는 생활이 가능했다. 그리고 제법 큰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한들의 경우, 자신들의 항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항구에서 얻을 수 있는 수입이 토지에서 얻는 것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한들이 거주하는 곳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는 말은 곧, 전서구를 통한 빠른 정보의 전달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전서구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한의 영토에 보냈을 때, 그가 연락을 받고 급히 준비를 갖춰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한 달이었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한들이 모두 도착한 후에 대규모 축제를 해야만 대한이 탱게르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둥루젠 전체에 과시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사실 대한에게 있어서 탱게르는 진짜건 가짜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부하들이 탱게르가 현신했다고 믿도록 만들 정도록 확실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에 편승해서 최대한의 이익만 챙기면 되는 것이다. 대족장 타르티는 왼쪽에 앉은 심복 부하들 중의 한 명이 사발에 가득히 담아 권하는 술을 단숨에 마신 다음 오른쪽에 앉아 있는 3명의 한들에게 호기롭게 말했다. "자, 보게나. 탱게르의 뜻이 나에게로 이어지지 않았나?" 타르티의 말에 쑤젠 한이 공손한 어조로 가장 먼저 맞장구를 쳤다. 그는 겨우 48개 촌락을 다스리고 있는 세력이 약한 한이었기에, 이 기회를 이용하여 타르티에게 잘 보여 둘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둥루젠의 영원한 지도자가 될 만한 분은 오직 대한밖에 없으시다는 것을 탱게르께서도 인정하셨다는 명확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쑤젠 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한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하하핫, 쑤젠 한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덕분에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다니 이 모든 것이 다 둥루젠의 태양이신 대한께서 계시기 때문에 누리는 호사가 아닌가 합니다." 타르티 오른쪽에 앉아 있던 한들은 앞 다투어 아부하기에 바빴다. 타르티는 한들의 아부가 싫지는 않은 듯 호쾌하게 웃으며 잔을 쭉 들이 킨 다음 입을 열었다. "하하핫! 탱게르께서 나를 어여삐 여기신 것이지 내가 어디 잘나서이겠는가? 하여간 오늘은 탱게르께서 현신하신 뜻 깊은 날이니 모두들 마음껏 즐기도록 하세!" 그렇게 신이라 사기 친 아르티어스와 이를 이용해 둥루젠의 일통을 꿈꾸는 타르티의 동상이몽이 교차하며 성에서의 밤은 시끌벅적한 가운데 깊어갔다. -짜식들이 꼭 패야 믿나- 다음날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찾아온 대족장 타르티가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벗겨놓은 듯한 넓은 가죽을 탁자에 쭉 펴면서 뭐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아르티어스가 통역을 해 주었다. "네가 부탁한 지도다." 묵향이 쓰윽 훑어보니 지도는 둥루젠의 영토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해안선만 그려져 있었다. 왼쪽 윗부분에 그려져 있는 비스듬하게 내려간 사선은 일정 지점에서 끊어져 있었고,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땅은 뱃길로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 오른쪽 밑 부분에 역시 평행한 사선 형태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산과 강 등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문양이 조잡하게 그려져 있었고, 이상한 문자가 쓰여 있었다. "무슨 지도가 이래요? 도대체 이것도 지도라고 그려놓은 거예요? 도대체 어느 정도 알아 볼 수는 있게 그려놔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 밑은 왜 이렇게 허옇게 되어 있는 거죠?" 묵향의 말을 아르티어스가 타르티에게 전한 뒤, 잠시 후 다시 묵향에게 타르티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그곳은 "다이방"이라는 곳인데, 추장의 말로는 자신들의 조상이 태어난 곳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오랫동안 섬겨 왔던 부족이 산다는군. 그렇기에 신성한 땅이라서 접근할 수 없었기에 공백상태라는 거야." "흐음, 이놈들의 조상이라면 안 봐도 뻔하겠군요. 아마 이놈들과 비슷한 놈들이 득실거리고 있겠죠, 뭐!" 말을 하던 묵향은 슬쩍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계속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신성한 곳이라 하니 어쩌면 그곳에 아빠 같은 사기꾼이 또 있을지도 모르죠."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겸연쩍은지 헛기침을 하며 얼른 화제를 바꿨다. "험험. 그, 글쎄다. 그나저나 지도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글쎄요, 여기는 되게 자세하게 그려져 있네요. 산이나 강, 그리고 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들이 표시되어 있잖아요?" 묵향이 가리킨 곳을 살펴본 아르티어스는 대족장과 한참 대화를 하더니, 잠시 생각을 정리한 수 타르티가 말해준 내용을 묵향에게 천천히 들려 줬다. "여기는 "지팡그"라는 나라인데 자신들에게 식량과 노예를 제공하는 터전이래. 그리고 금이라든지 은, 가축, 철 등등 모든 것을 여기에서 획득한다는군." "획득한다고요? 그건 대체 무슨 뜻이죠?" 아르티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획득이 획득이지 뭐겠냐. 설마 너는 이놈들이 무역이라도 하는 줄 알았냐?" "그럼 해적질을 해서 먹고 산다는 말입니까?" "뭐, 그렇게 이해해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닐 게다." 묵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고향인 송나라의 경우 국방력을 튼튼히 했기에 해적의 피해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광시절 본 고서에는 송나라 그 이전에 세워졌던 많은 제국들의 흥망에는 꼭 해적의 무리가 끼어 있었다. 중원의 국력이 강할 때는 감히 해적질을 할 엄두도 못 냈지만, 국력이 약할 때는 동쪽 해안 전체가 들끓는 해적들로 몸살을 앓았다고 쓰여 있었다. 해적들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왜족이었다. 왜족의 특징은 특이한 머리모양과 작은 키라고 어떤 책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묵향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족장 타르티를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확실이 머리모양이 특이하긴 특이했다. 누가봐도 중원의 머리모양과는 완전히 달랐다. 빡빡 밀어버린 앞머리에 비해 뒷머리는 길게 땋아 내린 것이다. 그리고 키는 또 어떤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대족장의 경우 그래도 키가 제법 큰 편에 속했지만, 지금까지 보아 왔던 원주민들은 영양상태가 썩 좋지 못해서 그런지 키가 대체로 작은 편이었다. "으흠, 바로 이놈들이 왜족이었군." 묵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자 궁금한 듯 아르티어스가 반문했다. "왜족?" "예, 옛날 어디선가 책에서 읽은 그대로에요. 저 특징적인 머리모양, 작은 키, 그리고 해적질...... 그렇다면 이쪽이 중원의 동쪽 해안일 거예요." 묵향은 지도에 그려진 해적질의 주무대가 되는 해안선을 가리키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겨우 중원의 위치를 찾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그것이 문제이지 않겠니? 지금까지 본 야만인들의 모양새로 봤을 때......"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말을 하는 도중에 끊어 버렸다. 괜히 아직 확인된 것도 아닌데 비관적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뇨, 아직 단정할 수는 없어요. 원래 왜족은 미개하기 그지없는 놈들이거든요. 사실 제 고향인 중원을 제외하면 주변국들은 모두들 문화가 한 단계씩 떨어진다니까요. 오죽하면 저희들이 주변국들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고 부르겠어요. 하지만 중원은 중화, 그러니까 문화의 중심이라구요." 확신에 가득 찬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혹 그 말이 틀렸다 하더라도 반박할 마음도 없었다. 중원을 찾고,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확실히 알기 전까지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한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인지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오! 그러냐?" "물론이죠. 얼마나 먹고 살기가 힘들면 왜족들이 해적질을 주업으로 하겠어요? 그리고 그 해적질의 주무대는 대체로 중원의 동쪽 해안이었죠. 그놈의 왜족들이 얼마나 극성스러웠는지 해안의 방비에 너무 큰 국력을 낭비해서 망한 나라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죠." "흐흠, 좋아. 그럼 내가 저놈한테 중원으로 가는 배편이 있는지 물어보마." 아르티어스는 지도의 한편에 이상한 기호가 잔뜩 표시된 지점을 가리키며 대족장에게 그곳으로 가는 배편을 물어 보았다. 그러자 대족장은 뭔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묵향과 아르티어스를 힐끔 바라봤지만,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곧이어 부드러운 표정으로 뭐라고 아르티어스에게 대다했다. 아르티어스는 대족장의 그런 표정을 못 봤기 때문인지 미소를 지으며 묵향에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배편을 알아봐 준다는구나. 내 생각에는 며칠만 기다리면 될 것 같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약간 떨떠름한 듯한 표정으로 묵향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대족장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그래요? 잘 되었네요." 타르티는 아르티어스가 있는 방에서 나오자마자 해리바를 자신의 알현실로 급히 불러 들였다. "찾으셨습니까? 대한이시여." "오, 어서 오게. 큰 일이 났네. 그놈들이 지팡그로 떠나겠다고 하는데 말이야. 그들이 떠나 버리면 자네와 함께 계획했던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니겠나? 일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차라리 병사들을 보내 감옥에 감금시켜 버릴까?" 타르티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해리바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떠나겠다고 하면 떠나게 놔두는 겁니다. 사실 이제 더 이상 그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해리바의 생각이 자신과 너무 다르자 타르티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말인가? 그들이 있어야 탱게르의 뜻을 내가 이었다고 과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입니다. 하지만 탱게르가 대한께 나타났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효과를 얻지 않았습니까? 비록 한 달 후에 대축제가 열린다고 해도, 이곳에 탱게르가 왕림했었다는 것을 증언할 자는 수없이 많으니 그들이 없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의 명령에 따라서 그동안 그들을 따라다니며 가만히 지켜 본 결과 아마 씨쥬에서 온 상인들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들던 참이었습니다. 특히 그들 중에서 그 빨간 머리는 우리말을 아주 잘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 자가 혹시라도 나쁜 마음이라도 먹는 날이면 자칫 대한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해 보면 차라리 그 자가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사라지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해리바의 말을 가만히 듣다 보니 일리가 있는지 타르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흠, 자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 "예, 아마도 그들이 지팡그로 보내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씨쥬 상인들이 맞는 모양입니다. 요즘 지팡그에서는 씨쥬 상인들과 거래를 하기 위해 두 눈이 벌개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타르티는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해리바에게 명령을 내렸다. "흠, 나도 그들이 지팡그로 보내 달라고 하기에 미심쩍게 생각하던 중이었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내일 당장 배 10척 정도 준비해 줄 테니 자네가 직접 갔다 오게. 일주일 후에 출발할 선단의 일정을 앞당겨 줄 테니까 말이야." 타르티의 명령이 떨어지자 해리바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놈들이 씨쥬 상인이라는 것을 부족민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야. 그렇게 되면 여태껏 공들인 것이 모두 허사가 될 테니까 말이지."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항구는 수많은 병사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대족장의 명령으로 전날 밤 갑자기 노략질 하러 가는 일정이 일부 변경되었던 탓에, 오늘 새벽에 출항 명령을 받은 전선들이 항해 준비를 갖춘다고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연락을 받고 항구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병사들은 물이나 식량, 그리고 창이나 화살 등의 무기들을 배로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병사들 중 한 명이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허겁지겁 짐을 내려놓으며 천신의 이름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그 외침은 순식간에 주위로 퍼져나가 지을 나르고 있던 병사들과 노역자들이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리며 탱게르를 외쳤다. 아르티어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주위를 쭈욱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호오, 항해 준비가 한창이었군. 그건 그렇고 우린 어떤 배에 타면 되는 거지? 도대체 대족장이라는 놈은 어디에 있는거야?" 아르티어스가 투덜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 성쪽에서 대족장 일행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흠, 저기 오는군." 대족장 타르티는 아르티어스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춘 후 양손을 높이 들어 병사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런 다음 그가 뭐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병사들은 기운차게 일어서서 잠시 미뤄두고 있었던 출항 준비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타르티는 한참 동안 아르티어스에게 정중한 어조로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호위병들을 손짓으로 가리키면서 뭐라고 말을 이었다.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묵향이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저놈이 뭐라고 하는 거예요?" "원래는 자신이 직접 배를 인솔하여 배웅을 해 드려야 하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함께 가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는군. 대신에 저 뒤쪽에 서 있는 호위병들을 붙여 주겠대. 저들이 자기 대신 충성스럽게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거야." 그 말에 묵향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이제야 어제 저녁에 봤던 대족장의 곤혹스러워 하는 눈빛이 이해가 갔던 것이다.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아빠." "뭐가 말이냐. 저놈이 바쁘다는데 뭐가 말이 안 돼. 대신 호위병을 붙여준다잖아." "신을 모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겠어요? 저기 있는 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주술사를 봐요. 요기에 있는 주술사가 그쪽의 마법사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을까요? 아니죠. 지금까지 봐왔던 것을 보면 알잖아요. 아빠를 보고 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정도로 엉터리들이란 말입니다. 그런 돌파리 주술사가 대족장 앞에 설 만큼 신을 떠받드는 곳인데, 현신한 신이 어딘가로 행차하시겠다는데 대족장이라는 놈이 일이 있어서 빠진다고요?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그제서야 이해가 가는 듯 안색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사실 저쪽 차원에 있을 때는 드래곤으로서 그 어떤 나라에 간다하더라도 국왕급이나 공작급 정도는 되어야 자신을 맞을 자격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물며 드래곤보다도 한 단계 높다고 치는 신인데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대족장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아르티어스의 인상을 옆에서 묵향이 척보니 손 좀 봐 주려고 부르는 것이 확실했다. 대족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슬쩍 고개를 돌려 외면을 했다. 순간 아르티어스의 인상이 확 구겨지며 대족장을 향해 두 손을 쭉 뻗었다. 곧이어 대족장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허공으로 부웅 날아서 아르티어스에게 끌려갔다. 그런 다음 벌어진 것은 정말 사람 잡는 게 아닌 가 싶을 정도의 참혹한 구타였다. 퍽, 퍽, 퍽. "쿠엑! 큭." 대족장이 두들겨 맞는 광경을 보고 있던 주위의 병사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다, 하나둘 땅바닥에 엎드려 신의 자비를 빌기 시작했다. 비록 맞는 사람이 자신들의 대족장이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지엄하신 천신이 아니신가? 거기에다가 대족장이 날개라도 달린 듯 허공을 부웅 날아가서 천신의 손에 잡히는 기적과도 같은 광경을 본 다음이라, 병사들은 대족장을 보호하기 위해 나설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험악한 표정으로 대족장을 패는 천신의 모습에 병사들은 경외감과 더불어 공포심마저 느끼며 바닥에 엎드린 것이다. "탱게르! 탱게르!" 퍽, 꽈직. 한참 동안 탱게르라는 외침에 박자를 맞춰 화가 풀릴 만큼 대족장을 두들겨 팬 아르티어스는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라이팅 마법을 이용하여 온 몸에 빛 무리를 뿜어내자 대족장과 병사들은 그 장엄한 모습에 납작 엎드린 채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기만 했다. 아르티어스는 대족장에게 준엄한 어조로 뭐라 하더니 손을 쭉 내 뻗었다. 순간 그 손에서 새하얀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전격 마법인 것이다. 번쩍. "꽤액!" 전격 마법을 맞은 대족장은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잠시 후, 전격 마법이 끝난 뒤에 드러난 대족장의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온 몸에 털이란 털은 모두 그을렸는지 희미한 연기가 피어 올랐고, 얼굴은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잠시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대족장은 아직까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자 미친 듯이 아르티어스에게 절을 하며 탱게르라고 외쳤다. 직접 천신의 기적을 체험한 마당에 상대를 사기꾼이라고 치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윽고 모든 상황이 일단락 되자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미소를 건넸다. "네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갈 뻔했구나. 저렇게 믿음이 없는 놈은 확실히 신의 위력을 보여 줘야 믿거든. 신을 믿는데 있어서 증거를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는데 말씀이야. 그나저나 짜식들이 꼭 패야 믿나." 확실이 아르티어스가 보여준 증거의 효과가 대단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대족장은 이전과는 달리 항해 준비를 솔선해서 지시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원주민들이 바글거리며 출항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수도 없이 많은 항아리나 짐들이 배로 운반되었고,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이 끊임없이 배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성으로 허겁지겁 올라갔던 병사 둘이 자그마한 궤짝 하나를 짊어지고 내려왔다. 비록 궤짝의 크기는 작았지만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둘이나 붙어서 옮기는 데도 그들은 굵은 땀을 뻘뻘 흘리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대족장 타르티는 그 궤짝을 병사들에게서 받아들었다 궤짝을 든 팔에 힘줄이 불끈불끈 솟는 것으로 보아 궤짝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대족장은 궤짝을 번쩍 들어 아르티어스 앞에다 살그머니 놓은 뒤, 고개를 조아렸다. 아르티어스가 거드름을 피우며 다가가서 궤짝을 열어 보니 금덩이가 가득 들어 있었다. "확실히 네가 말한 대로 이놈이 나를 의심하고 있었던 게 확실한 모양이군. 능력을 보여 주니 대접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 말이야." 대족장이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들어 올렸던 궤짝을 아르티어스는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서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거 40킬로그램은 족히 나가겠는데?" 대족장은 아르티어스가 그 무거운 궤짝을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한 손으로 들어다 놨다 하면서 무게를 가늠하는 것을 보자 기겁을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묵향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사실 그 정도는 그도 가볍게 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들고 가실 거예요?" "후후, 이 정도쯤이야 어떻게 해서라도 들고 다닐 수 있지. 그리고 중원에 도착하면 아무래도 돈이 필요하지 않겠냐?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술. 흐흐흐, 역시 품위 있는 생활을 영위하려면 뭐니뭐니 해도 돈이 있어야 한다니까." "에구, 돈이야 부족하지 않을 정도만 있으면 되는 거죠. 그건 그렇고 대충 준비가 끝난 것 같은데요." 아르티어스가 뭐라고 말하자, 대족장은 자신이 직접 배로 안내했다. 대족장의 배는 길이가 거의 40여 미터에 육박하는 제법 큰 배였지만, 막상 타고 보니 좌우의 폭이 5미터밖에 안 되었기에 아주 좁게만 느껴졌다. 배 위쪽에는 넓직한 갑판을 깔아 놨고, 그 위에 50여 명의 병사들이 각자 노를 하나씩 잡고 좌우측에 쭉 앉아 있었다. 그리고 20여 명 정도의 병사들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굵직한 동아줄을 정돈하는 등 항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대족장의 배는 아주 컸기에 70여 명이 탔지만, 다른 배들은 중간 정도 크기가 50∼60명, 작은 것은 20∼30명 정도가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10여 척만이 항해 준비를 했던 것인데, 갑자기 대족장의 명령으로 100여 척에 가까운 배들이 출항 준비를 했으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하지만 무려 4,000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항해 준비를 갖추는 것치고는 거의 기록적일 정도로 빠른 시간에 작업을 끝냈던 것이다. -------------------------------------------------------------------- -서서 오줌 누는 여신- 대족장이 손을 번쩍 들어 뭐라고 외치자 100여척의 배가 일제히 항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묵향이 감히 어린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자그마한 석성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가 묵향의 어깨를 슬쩍 감싸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족장이 선실로 내려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고 있구나. 맛있는 술을 준비해 놨대." "그러죠." 아르티어스와 함께 좁은 계단을 내려가자 다닥다닥 붙은 선실이 나왔다. 배는 외형적으로는 아주 커 보였지만, 막상 선실 아래쪽으로 내려와 보니 생각 외로 너무나도 비좁았다. 아르티어스도 그것을 느꼈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묵향에게 말했다. "이렇게 선내가 비좁은 것은 먼저 전선으로 사용하는 배 치고는 높이가 낮기 때문이야. 그리고 흘수(배의 물 밑에 잠기는 부분. 이것이 클수록 배가 안정감이 있다.)도 너무 작아. 그렇다 보니 선실의 크기가 아주 좁아지는 거지. 사실 선체 중에서 물 밑에 잠기는 부분이 좀 많아야 파도가 치더라도 배가 안정감이 있는데, 이런 식이라면 폭풍 한번 쳤다가는 그냥 뒤집어질 수도 있지. 그런데 왜 이딴 식으로 배를 만들었을까? 준비한 식량과 음료수를 보면 최소한 10일 이상의 장기 항해를 하는 것 같던데 말이야. 이 정도라면 꽤 외해로 나간다는 것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묵향은 걱정이 되는지 미간을 찡그리며 주절거리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약간은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배가 뒤집어져도 아빠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잖아요. 그런데 뭐하려고 쓸데없는 고민을 하세요? 자, 빨리 가자구요." 대족장 타르티는 아르티어스를 위해 자신의 선실을 내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배 안에서 그곳 외에는 신에게 어울릴 만큼 호화로운 선실이 없었던 탓이다. 술자리는 그곳에서 벌어졌다. 항구에서 출발할 때 실어놨던 삶은 고기와 말린 고기, 싱싱한 과일들 그리고 텁텁한 냄새가 나는 희뿌연 술과 함께 어제 마셨던 사케라는 술도 나왔다. 하지만 사케의 경우 어제는 데워서 나왔지만, 오늘은 미지근한 것이 그냥 나왔다. 아무래도 나무로 만든 배에서 불을 지피기가 곤란했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묵향은 미지근한 사케를 입속에 털어 넣은 후,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어제 마셨던 그맛이 아니었던 것이다. 술맛이 너무 밋밋했다. "빌어먹을, 뭔 놈의 술맛이 이래?" "왜 뭐가 이상하냐?" 왜 그러냐는 듯 물었던 아르티어스도 미지근한 사케를 한 잔 마셔보더니 묵향의 말이 이해가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과연! 이래서 데워서 마시는 모양이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아르티어스에게 묵향이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빠, 내가 어제 혈수마공을 가르쳐 드렸잖아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그런데?" "위대하신 드래곤이시니 지금쯤이면 다 익히셨을 테고, 그 무공을 사용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사실 혈수마공이 고기를 굽거나 술을 데우는 데는 최적의 무공이거든요." 그 순간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 난해하기 그지없는 무공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루 만에 익힐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뛰어난 기억력으로 머리 속으로야 다 기억하고는 있지만, 기억한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말이었다. 아르티어스는 속으로 끙끙 앓기 시작했다.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도대체가 이해할 수도 없는 무공이라는 것을 어떻게 익힌 것처럼 아들놈에게 보여 줘야 할지...... 하지만 이때 갑자기 아르티어스에게 좋은 꾀가 떠올랐다. 문제는 무공을 익혔느냐 익히지 못했느냐가 아니라 술을 데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닌가. 그 정도라면 마법을 사용해도 충분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 있는 모든 야만족 호비트들이 자신의 마법에 껌뻑 속아 넘어 갔는데, 겨우 앞에 앉아 있는 아들놈 하나를 속이지 못한다면 드래곤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물론 아르티어스는 아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주문을 통한 마법이 아닌 용언마법을 사용했다. 용언의 힘이 발동되자 술병을 들고 있던 손이 갑자기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다고 느껴진 순간 그 빛은 다시금 서서히 옅어졌다. 그리고 그때 아르티어스가 쥐고 있던 질그릇으로 만든 술병은 뜨겁게 가열되어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져 있는 것을 보고 통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한 속임수에도 속아 넘어 가는 것을 보면, 아들놈도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간단한 라이팅 마법의 응용으로 손을 붉게 만들고, 또 화염계 마법을 약하게 사용하여 술을 데운 것뿐이었는 데도 저렇듯 쉽게 속아 넘어 가다니...... "어떠냐? 나에게 있어서 불가능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냐?" "서, 설마......? 그 짧은 시간에 벌써 깨달으셨다는 거예요?" "내게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어깨를 으쓱거리는 아르티어스에게 뭔가 한마디 해서 초를 쳐주고 싶었지만 묵향은 그 생각을 접어 버렸다. 그 짧은 시간에 비록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혈수마공의 기초를 재현해 낸 것이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정말이지 드래곤이라는 종족, 아니 아르티어스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듯 느껴졌던 것이다. 술자리에 함께 있던 대족장과 병사들은 신이 손이 불그스름해 진 후 술잔에 술을 따르자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경악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평상시의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전지전능한 천신에게 있어서 저 정도 일쯤이야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술과 고기를 실컷 먹은 후 묵향은 아르티어스와 함께 갑판 위로 올라갔다. 갑판 중앙에 있는 짧은 돛대에는 사격형의 돛이 달려 있었고, 바람을 받아서인지 둥그스름하게 부풀어 있었다. 배는 힘차게 앞으로 나갔다. 병사들은 갑판 위의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눕거나 앉은 자세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거나 딱딱한 육포를 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묵향은 주위를 휙 한바퀴 돌아 본 다음 선미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병사들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여신이 선미로 다가오자 후다닥 자리를 비켜섰다. 그런데 곧이어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쪼르르르륵...... 신들 중 조금 키가 작고, 황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여신이 배뒷전에 서서 주섬주섬 앞자락을 벌리는 듯하더니 힘찬 물줄기를 바다를 향하여 뿜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모습을 본 병사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로 귓속말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묵향은 볼일을 다 본 후 하늘을 바라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선단은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부터 출항 준비를 시작해서 꽤 이른 시간에 출항했다. 그렇기에 출항한 지 세 시간 정도 가 흘렀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침이었다. 그렇다면 응당 해는 배의 오른편 뒤쪽에 떠 있어야 했다. 중원은 왜에서 북서쪽 방향에 있다고 묵향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지금 해는 배의 왼편 위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지금 해는 배의 왼편 위쪽에 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배는 둥루젠의 수도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묵향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방향이 틀린 것 아닌가요?" 묵향이 오줌 싸는 모습을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되물었다. "뭐가 말이냐?" "지금 배가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잖아요." 묵향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했다. "그래, 항구를 출발한 후 줄곧 이 방향을 유지하고 있지. 왜? 뭐가 잘못 되었냐?" "그, 글쎄요. 저는 왜가 중원의 동남쪽에 있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렇다면 중원으로 가려면 북서쪽으로 가야 할 텐데......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은 남쪽이잖아요." 아르티어스는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다 이윽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구나.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중원이 아니거나, 아니면 우리가 지금까지 둥루젠을 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거나......"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어요?" "흠, 일단 둥루젠이 왜라는 것이 증명된 것도 아니니까 끝가지 한번 가 보자.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는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 결정해도 되지 않겠느냐?" 묵향은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머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뭐, 일단 배도 출발한 상태니까 어쩔 수 없겠네요." 고개를 돌린 묵향은 선미에 선 채 멀리 수평선을 둘러보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우와! 그나저나 정말 멋있네요. 저 멀리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속가지 후련해지는 것 같군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그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냐?" "이렇게 바다가 멋있는 줄 알았다면 치레아 공국에 있을 때 진작 배를 타보는 건데......" 홀린 듯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묵향을 향해 아르티어스는 혀를 차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쯧쯧, 그건 네가 배를 처음 타 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돌려 물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계속 배를 타고 있다 보면, 그 느낌 자체가 바뀌거든." "어떻게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천천히 바다를 바라보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시야 상으로 따진다면 수평선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하지만 배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아주 제한된단다. 사실 배에서 뛰어내려 헤엄치며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느냐?" "그, 그렇죠." "그러다 보니 눈으로 보이는 넓은 시야가 결국 배 안에만 얽매여 있다는 심리적인 문제 때문에 점차 왜곡되기 시작하는 거야. 결국 수평선은 아무것도 아니고, 자신은 배 안에 갇혀 있다는 무의식이 지배하게 되지. 그렇게 되면 오히려 바다가 한없이 좁게만 느껴지게 되는 거란다."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말을 아무리 곱씹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글쎄요, 도무지 이해가......?" "한 며칠만 지나 봐라. 때가 되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대 묵향은 선실 뒤편에서 "탁"하는 큰 소리가 들려오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웃통을 벗어젖힌 병사 몇 명이 자기 키만한 활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커다란 나무판에는 기다란 화살이 몇 대 꽂혀 있었다. 묵향이 흥미롭다는 듯 보고 있는 동안 한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활에 1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화살을 재기 시작했다. 그는 단숨에 시위를 끝가지 당기더니 망설임 없이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화살은 나무판에 그려진 둥근 원 안에 꼽히지 못하고 바다로 하염없이 날아가 버렸다. "호오, 저게 뭐야? 제법 재미있겠는데." 어디에나 기어들기를 좋아하는 아르티어스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병사들에게로 걸어갔다. 병사들에게 뭐라고 하자 그들은 아르티어스에게 활과 화살을 황송하다는 듯 곧장 건네줬다. 병사에게 활과 화살을 받은 아르티어스는 이리저리 활을 휘둘러보다 천천히 화살을 재었다. 그리고 힘껏 시위를 당겼을 때까지만 해도 그의 얼굴은 자신 만만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잔뜩 당기고 있는 시위를 선뜻 놓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왠지 인상을 팍 찡그리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으윽! 말 시키지 마라." 슈욱. 한참을 그러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결국 활을 쏘기는 쏘았지만 원에서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젠장, 더럽게 조준하기 힘드네." 투덜거리던 아르티어스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곧장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곧이어 자신이 원하던 것을 발견했는지 한 병사에게로 걸어가서 뭐라고 지껄였다. 그 병사는 즉시 자신의 허리에 꼽고 있던 단검을 아르티어스에게 두 손으로 건네 주었다. 아르티어스는 약간은 감회 어린 표정으로 단검을 가볍게 던졌다 받았다 하며 중얼거렸다. "이거 원체 해 본 지 오래되서 잘 될지 모르겠네." 아르티어스는 공중으로 던졌던 단검을 받아듬과 동시에 과녁을 향해 던졌다. 거의 조준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던진 단검은 은빛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원 안에 그대로 적중되었다. 탁! 그와 동시에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병사들은 단검을 던지는 이런 묘기는 처음 본 듯했다. 아르티어스는 호탕하기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으하하핫! 역시 해적..., 아니지. 바다의 싸나이와 단검은 떼려야 뗄수 없는 관계거든. 어때? 너도 한 번 해 볼래?" "못할 거 없죠. 그런데 활은 별로 쏴 본 적이 없어서 잘 될지 모르겠지만......" 병사로부터 활과 화살을 받아 등 묵향은 자세를 잡은 후 천천히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시위를 힘껏 당긴 후에야 묵향은 이게 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발밑에 있는 것은 딱딱한 배의 갑판이었다. 하지만 그 밑은 한없이 유동적인 바다였다. 아무리 바다가 잔잔하다고 해도, 배는 조금씩이나마 상하좌우로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활을 조준한다는 말인가? 묵향도 아르티어스처럼 한참을 그렇게 조준만 하고 있다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자, 아에 활쏘기를 포기한 듯 시위를 늦추며 활을 내렸다. "왜? 포기하려고?" "아뇨, 이렇게 하려구요." 묵향은 화살을 활로 쏘는 방법을 포기하고 대신, 그것을 손에 잡고는 암기를 발사하듯 던졌다. 내공이 담긴 화살은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고 나가 나무판에 그려진 원의 한 가운데 깊숙이 꽂히는가 싶더니 그대로 뚫고 나가 버렸다. 퍽! 손으로 슬쩍 던진 화살이 두터운 나무판을 아예 관통해 버리자 병사들은 기절할 듯 놀라서 탄성을 질러대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신이 지닌 힘을 직접 보게 되자 그들은 경외감마저 느끼는 듯했다. 그런 병사들의 모습을 보자 아르티어스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핫! 역시 내 아들이야. 이럴 때는 축배를 들어야지." 그 이후에 선상에서 시작된 기분 좋은 술자리. 흔들거리는 배에서 마시는 따뜻한 술은 나름대로 기가 막힌 맛을 지니고 있었다. 몇 시간씩이나 계속된 술자리의 절정은 서편으로 지는 해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저 머나먼 수평선 너머로 붉은 광채를 뿜어내며 침몰해 가는 저녁 노을은 묵향에게 장엄한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하였다. 배를 탄 첫날, 묵향은 그야말로 환상과도 같은 아름다운 기억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술에 취한 묵향은 황홀하다는 눈빛으로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진작 바다에 와 보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는군." -초죽음이 된 묵향- 며칠 동안은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더욱이 순풍까지 불어 주어 선단은 순조롭게 목적지를 향해 항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자 오히려 묵향은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 항해가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묵향에게 너무나도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모든 것이 신기하게만 보였고, 특히나 끝도 보이지 않는 드넓은 바다는 묵향의 가슴을 탁 틔워 주는 듯한 후련함마저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묵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드넓은 바다는 더 이상 그에게 후련함을 안겨 주지 못했고, 오히려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한 곳에 얽매여 있기를 좋아하지 않는 묵향에게 있어서 비좁은 배 안에서만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배 전체를 둘러보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해 봐야 반각(7분)이면 넘치도록 충분했다. 그런 상황에서 몇 날 며칠을 그 비좁은 공간을 뱅뱅 돌아야만 했던 것이다. 따분한 얼굴로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는 묵향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글거리며 물었다. "어때? 재미있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지겹다는 듯 대꾸했다. "빌어먹을! 재미 하나도 없어요. 배로 하는 여행이라는 것이 이렇게 따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구요. 어휴∼, 저놈의 바다도 매일 보니 이젠 질렸다구요. 매일 똑같은 경치에 똑같은 음식! 뭐 좀 바뀌는 맛이라도 있어야지. 육로로 하는 여행이었다면 경치도 보고, 지역마다 다른 음식도 먹어 보고, 뭐 그런 잔재미라도 있는데...... 이건, 젠장! 너무 지겨워서 죽겠네." "호오, 지겹다고? 물론 바다에서도 경치가 바뀌는 경우가 간혹 있지. 그때도 지겹다는 말이 나오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아르티어스의 빈정거림에 묵향은 발끈하며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경치가 바뀌기는 뭐가 바뀌어요? 보이는 것은 저 시퍼런 수평선과 하늘뿐인데. 에잇, 차라리 폭풍우라도 치면 심심하지는 않겠다. 젠장!" 그런데 묵향의 바람이 하늘에 닿았는지 그날 저녁 대부터 서서히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파도가 일렁거리는 것이었다. 천천히 파도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배 위에서 자신이 디디고 서 있는 발판이 흔들흔들거리자 묵향은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듯 환히 웃었다. 이런 것은 육지에서는 도저히 경험해 볼 수도 없는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야∼ 이거 재미있는데요? 흔들흔들 하는 것이......" 묵향이 낄낄거리며 말했지만, 아르티어스는 걱정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끝까지 재미있기를 바란다. 그나저나 파도가 점점 더 거칠어지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 모르겠네." 결국 밤이 되자 아르티어스의 우려대로 파도는 더욱 거칠어졌다.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어왔고, 그때마다 바다는 선불 맞은 멧돼지마냥 날뛰기 시작했다. 한 번씩 큰 파도가 덮칠 때마다 선체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토록 험한 바다에서도 병사들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고 침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 바람이 거세지자, 대족장의 명령에 따라 선단은 폭넓게 산개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런 바다에서 배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가는 밀려오는 파도에 밀려 서로가 충돌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모든 돛을 내리고 배의 앞부분에 있는 돛만을 남겨 두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모든 돛을 다 내리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잡이들도 모두 다 각자의 노에 배치되어 대기하고 있었다. 혹시나 측면에서 파도가 덮칠 때를 대비해서였다. 만약 큰 파도가 옆에서부터 밀어 닥친다면 즉시 그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이 정도 크기의 배는 곧장 뒤집어지게 되는 것이다. 밤이 깊어 갈수록 바람은 더욱 거세졌고, 미친 듯이 밀어 닥치는 파도를 뚫으며 배는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밤새도록 바람은 쉴새없이 불어왔고, 출렁이는 파도가 뱃전을 때릴 때마다 병사들은 바짝 긴장하며 꼬박 밤을 새워야 했다. 다음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날씨는 맑았고 바다는 잔잔해졌다. 하지만 어제 밤에 비해서 많이 잔잔해졌다는 것이지 결코 파도가 낮다고는 볼 수 없었다. 병사들은 밤새 대기하느라 한잠도 못 잤기에, 저마다 여기저기에 몸을 누이고 쉬고 있었다. 대족장 타르티는 그 와중에도 선단의 피해를 보고 받고, 이것저것 지시를 내린 후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왔다. 대족장 타르티는 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길로 묵향을 한번 지그시 바라보더니, 아르티어스와 뭐라고 한참 떠들어 댄 후 다시금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돌아갔다. "무, 무슨 일이에요?" "아, 별거 아니다. 저 녀석 눈치는 빨라가지고...... 아무래도 천신인 네가 배 멀리를 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더라. 그래서 내 한 소리 해 줬지. 그건 그렇고 너한테는 좋은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묵향은 힘겹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뭔데요?" "타르티의 말이 혹시 폭풍으로 발전할까 봐 노잡이들을 배치해 두고, 대비하고 있었는데 생각 외로 파도가 심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더구나. 이것도 다 천신의 덕분이라면서 신의 은혜에 감사하다고 떠들어대더군." 파도가 생각 외로 심하지 않았다는 말에 묵향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세상에, 폭풍이 친 것도 아닌데도 그렇다구요? 그럼 진짜 폭풍이 치면 어느 정도라는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네가 궁금해 할 줄 알았다. 사실 이 정도 파도로 끝난다면 네가 너무 서운하지 않겠냐? 안 그래도 심심하다고 그 난리였는데...... 나도 예전에 배를 좀 타 봐서 아는데 안타깝게도 며칠 동안은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될 거다. 흠,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단다. 진짜 네가 바라는 폭풍은 그 다음에 올 테니까 말이야. 아마 그때가 되면 이 배가 날아다닐 걸?" 순간 묵향의 얼굴은 샛노랗게 질렸다. 슬쩍 그런 묵향의 얼굴을 본 아르티어스는 내심 키득거리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 재미는 있었냐? 그렇게 심심하다고 난리더니 아주 기분이 좋았겠구나?" 한쪽 구석에 널부르져 있던 묵향은 밤새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르티어스의 빈정거림에도 대구할 힘이 전혀 없었다. "젠장, 자꾸 말 시키지 말아..., 우엑!" 힘겹게 말을 하던 묵향은 갑자기 뱃전을 잡고 한바탕 토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꺽꺽거리던 묵향은 기진맥진해졌는지 아예 갑판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런 묵향을 바라보는 아르티어스의 눈가에 살짝 통쾌하다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나 이런저런 이유로 휘둘리기만 했던 아르티어스였기에, 오랜만에 보는 나약한 모습의 묵향에게 신선함마저 느끼는 중이었다. 사실 그것도 다 아르티어스가 해적 생활을 할 때 배 멀미로 죽은 호비트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기에 느끼는 기분이었지만...... 갑판에 누워서 헉헉거리던 묵향은 도저히 못 참겠는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아르티어스를 바라봤다. "아, 아빠! 힐링 마법 좀 걸어 줘요."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물론 내심으로는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지만 말이다. "배 멀미는 상처가 아니기에 아무리 힐링 마법을 쓴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지. 그저 익숙해지는 수밖에 방법이 없단다." "그, 그러면 아빠가 드래곤으로 변신해서 날아가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이게 왠 떡이냐는 듯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호오∼, 역시 배 멀미가 대단하기는 대단한 모양이구나. 네가 나한테 그렇게까지 우는 소리를 다하고 말이다. 좋다! 사랑하는 아들의 그 정도 부탁도 내가 못 들어 주겠냐? 그 대신..., 조건이 있다."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조건이라는 말에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뭔데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르티어스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것이 무엇이건, 앞으로 이 애비의 말을 절대로 거역하지 말 것." "저, 절대로요? 그, 그리고 무엇이건 말이죠?" 잠시 생각해 보던 묵향은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옥 같은 지금의 상황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조건쯤은 들어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배 멀미로 초죽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승낙을 하려고 고개를 들던 묵향은 왠지 전신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것을 느꼈다. 아르티어스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순간 분노가 울컥 치미는 묵향이었다. "정말 치사하게 이럴 거예요?"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치사하다니? 세상에 어디 대가 없는 부탁이 존재하던? 쯧쯧, 그러니 내가 너에게 평소에 누누이 말했잖니. 넌 세상을 더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빌어먹을, 아빠는 내 나이가 도대체 몇 살인지 알고나 있는 거예요? 웬만한 사람들이 이 정도 오래 살면 늙어 죽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구요. 그런데 배우기는 뭘 더 배워요? 젠장, 더럽고 치사해서! 이젠 됐어요!" 매몰차게 소리친 묵향은 그 후로도 계속 배 멀미에 시달려야만 했다. 처음 배 멀미를 할 때만 해도 묵향은 이런 고통도 다 수행의 한 방편이라고 자위하며, 명상이나 운기조식을 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뱃속이 뒤집히는 판국에 무슨 명상이고, 무슨 운기조식이라는 말인가? 결국은 뱃전에 뻗어서 힘없이 늘어져 있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좀 참을 만했다. 그러나 뱃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낸 후, 노오란 위액가지 토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구역질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나중에는 내장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르티어스가 이렇게 배 멀미 심하게 하는 놈은 처음 봤다고 투덜거릴 정도였지만, 그걸 당하는 입장에서는 화를 낼 기력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아르티어스는 저 멀리 수평선 위에 아련히 보이는 희뿌연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묵향은 그 말을 듣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우웨에에엑! 우웩!"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 한바탕 토한 묵향은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들어 아르티어스가 가리키는 부분을 힘없이 바라봤다. 며칠 사이에 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퀭하니 들어간 눈에, 핏기가 가신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 그리고 두 뺨은 홀쭉하게 야위어져 있었다. 멀리 뭔지 모를 물체가 수평선 저편에 어슴프레 보이고, 갈매기 떼가 날아다니고는 있었지만 그의 시야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심한 구토에 머리가 완전히 텅 비어 버린 듯했고, 코 끝에 느껴지는 짭짤한 소금기가 더욱 그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묵향은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정도의 기운조차 없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망할 놈의 배에서 내리고만 싶었다. 수평선에 육지가 그 모습을 보이자 각 배의 병사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모두들 아래쪽 선실에 놔 뒀던 무기들을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여분으로 가지고 온 창과 화살다발을 꺼내더니, 곧이어 각자가 완전 무장을 갖추었다. 병사들의 등에는 둥그렇게 생긴 두툼한 가죽방패가 매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장은 모두 동일하지는 않고 3가지로 나뉘었다. 먼저 배에 타고 있는 병사들의 반 정도는 커다란 활과 화살을 준비해 뱃전으로 뛰어갔고, 그 외의 병사들 반은 2미터 정도 되는 창을, 그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커다란 칼을 들고 상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대족장 타르티가 조심스럽게 아르티어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뭔가 잘못을 했는지, 송구스런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뭐라고 말하자 아르티어스는 괜찮다는 듯 그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자 대족장은 환히 웃는 얼굴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상륙 준비를 하기 위해 선실로 내려갔다. 뱃전에 널브러져 있던 묵향이 불안한 표정으로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뭐, 뭐라는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그런 묵향의 마음을 잘 알겠다는 듯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응, 며칠 전 심한 파도 때문에 목적한 곳에서 많이 남쪽으로 밀려내려 왔다고 하길래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르는 상태인데 그놈이 목적한 곳까지 갈 필요가 없을 것 같길래 말이다. 네 생각은 어떠냐?" 묵향은 더 이상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죽을 것만 같이 고통스러운데 배를 타지만 않는다면 이곳이 어딘들 상관이 있겠는가? "어디에 상륙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빨리 배에서 내리게 해 달라구요." "그러냐? 뭐 그럼 잘됐군." 아르티어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선상을 내려봤다. 돌아선 그의 얼굴은 약간이기는 하지만 왠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동안 배 멀미로 고생하는 묵향을 놀리는 재미도 배를 내리는 순간 끝나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무장이 다 갖춰지고 난 후, 선실 아래쪽에서 대족장이 당당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족장은 배가 요동치는 가운데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며 뱃전에 늘어선 병사들에게 뭔가 기나긴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하는 중간 중간에 탱게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천신께서 함께 하시니 힘을 내라는 뭐 그런 식의 연설인 모양이었다. 묵향은 배 멀미 때문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상태였기에 대족장의 연설이 단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 듣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르티어스는 아르티어스대로 육지를 바라보며 수심에 잠겨 있었다. 만약 저기가 자신들이 찾던 중원이라면 아들과의 관계는 또 다시 어떤 상황으로 변하게 될지 걱정도 되었고, 또 심하게 배 멀미를 하고 있는 아들을 그동안 놀려먹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보복도 은근히 두려웠던 것이다. 대족장이 기나긴 연설을 하고 있는 동안 수평선 저 너머에 보이던 희뿌연 것들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섬처럼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쭉 뻗은 해안선을 갖춘 육지로 변모해 나가고 있었다.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대족장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서도 갑판에 서서 점점 커져가는 육지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묵향이 갑판에 서 있었던 것은 점점 커지는 육지를 바라보기 위함도 아니었고, 대족장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속을 뒤집어 놓는 배 멀미 때문이었다. 밀폐된 선실로 내려가면 오히려 멀미가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요 며칠간의 호된 경험으로 깨달았기에 갑판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대족장은 길고도 긴 연설을 끝낸 후 아르티어스를 향해 넙죽 엎드리며 천신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배에 타고 있던 모든 병사들도 무기를 높이 쳐들며 대족장을 따라 천신의 이름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탱게르! 탱게르! 탱게르!......" 하지만 그 외침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옆의 배에서도 탱게르를 외쳐대기 시작했고, 또 그 옆의 배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에는 선단에 승선하고 있는 모든 병사들이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탱게르를 소리 높여 외쳐대고 있었다. ------------------------------------------------------------------- 살살봐라....이제 반두 안남았다..재밋냥? 일은 안하구 이런거 보니까..재미찌. 흐흐흐... -잔인한 해적들- 모든 병사들이 탱게르를 외쳐대며 소란을 떠는 동안 선단은 천천히 해안선을 따라서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해안에 마을이 보이자 그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겨우 50호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어촌을 목표로 100여 척의 배가 돌진해 들어 간 거시다. 곧이어 앞서 가던 배의 선수 부분이 해안의 모래사장에 걸리자, 그 배에 타고 있던 병사들은 모두들 탱게르를 외치며 앞 다투어 배에서 뛰어내렸다. 일부는 모래사장 위에 뛰어 내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물 위로 뛰어 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옷이 물에 젖는 것 따위는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허리나 아니면 무릎까지 잠기는 바닷물을 박차고 괴성을 질러대며 육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와와와와!"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뱃전에서 보니, 육지에 있던 사람들은 선단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데 그들이 하고 있는 모습이 또 가관이었다. 앞머리는 면도칼로 박박 밀어 버렸는지 반들반들 했고, 남은 머리카락을 괴상한 모양으로 위로 틀어 올려 상투를 만들어 놨다. 그리고 사내들은 웃통을 벗고 있었고, 아랫도리만을 꼭 어린아이 기저귀 차듯이 가리고 있는 놈도 있었다. 그들이 허둥대며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모습을 같잖다는 듯 바라보던 아르티어스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기는 둥루젠보다 더 야만족들이 모여 사는 모양인데?" 그 말에 묵향은 창백한 안색으로 힘없이 대답했다. 그 지독한 고생을 해서 겨우 도착한 곳이 중원이 아니었기에 그의 얼굴에는 짙은 허탈감이 어려 있었다. "그런 거 같네요." "아무리 날씨가 좀 따뜻하다고 해도 하고 다니는 꼴이 저게 뭐냐? 사내놈들은 완전히 벌거벗다시피 하고 있잖아. 그건 그렇고 아무리 신과 함께하고 있다지만 야만족들이라서 그런가? 거 상륙 한번 화끈하게 하는군. 이건 꼭 전쟁하러 온 것 같잖아." 묵향은 아직도 속이 안 좋은지 아르티어스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일단 좀 내리자구요. 도무지 속이 울렁거려서 못 살겠어요." 아르티어스는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꾸나.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자, 빨리 내리자." 묵향은 배에서 뛰어내려 모래사장에 착지하자 그제서야 살 만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혈색이 조금씩 돌아 오고는 있었지만, 거의 며칠동안 생고생을 하고 난 후유증 탓인지 아직까지도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좀 살 만하지?" "예, 신기하게도 육지에 올라 선 것뿐인데, 멀미가 그치는 것 같군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신기해 할 것도 없다. 원래 배 멀미라는 것이 그래. 유독 멀미가 심해 고생하던 놈도 육지에 발만 올려놓으면 그 순간 멀미가 그치거든.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인 희한한 놈들도 있었지." "반대라구요?" "응, 배만 타면 펄펄 나는데, 육지에만 올라가면 맥을 못 추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꼭 배 멀미 하듯이 뱃속도 울렁거린다나? 그걸 육지 멀미라고 하더군. 아주 오랜 시간 배를 탄 호비트들에게 일어나는 특이한 증상이지." 묵향은 이제야 살 만한지 아르티어스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해 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살고 있는 주민들이 하고 있는 꼴도 그렇지만, 여기저기 지어져 있는 집들도 중원식이 아니었다. "젠장! 홀딱 다 벗고 사는 것을 보면 여기가 남만인가? 아니지.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돼. 중원의 서남쪽이 남만,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가면 색목인이 산다고 책에서 봤는데...... 어어? 그런데 저게 뭐죠? 여기는 평범한 마을이 아니었나요?" 묵향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해적들이 상륙하자 마을에서는 일대 소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해적선이 나타나는 그 순간, 요란한 타종 소리와 함께 노인들과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산쪽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일부 건장한 사내들도 보였다. 여기가지는 묵향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70여 명의 어촌민들이 무기를 들고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잘 만들어 놓은 진짜 무기를 가지고 말이다. 묵향은 순간 막의 분타를 떠올렸다. 50여 호의 가옥에서 70여 명이 넘는 사내가 무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은, 마을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무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거 평범한 마을이 아니라 어딘가의 비밀 분타 같은 것이었나?" 묵향이 한 눈에 척 봐도 잘 제련된 길고 늘씬하게 생긴 검을 가진 자들이 몇 명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검보다는 창을 가지고 있었다. 어부들은 마을 입구에 놓여진 장애물을 이용하여 수 명씩 짝을 이루어 대형을 유지하며 용맹스럽게 저항했다. 여기저기에서 피가 튀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겨우 수십 명이 수백 명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해적선단의 또 다른 배들이 하나둘 해안가에 정박하기 시작하자 해적들의 수는 급속히 불어나고 있었다. 해적들이 무기를 들고 반항하는 어부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살육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해적들은 될 수 있으면 어부들을 생포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한참 전투 광경을 보고 있던 묵향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거 참, 괴상한 마을이네요?" "별로 괴상할 것도 없다. 내가 태어난 곳이 호비트들도 저 정도의 무장을 하고 있었거든. 너도 봤잖냐? 치안 상태가 허술한 곳일수록 자체적으로 무장을 하는 것을 말이다. 그쪽에서는 보통 트롤이나 오크같은 몬스터들 때문에 무장을 했었는데, 아마도 여기서는 저놈의 해적들 대문에 무장을 하는 거겠지."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쉽게 납득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해적질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일단 마을의 저항을 분쇄한 후, 병사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과 그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며 먹을 것이나 사람들을 찾아내어 끌고 왔다. "으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 왔으며, 뭐라고 하는 말인 줄 모르겠지만 심하게 발악하는 소리도 들려 왔다. 묵향은 그 비명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곧 알 수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위치였지만, 묵향의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서 병사들의 만행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 몇 명이 높게 쌓인 짚단들을 뒤지다가 그곳에 숨은 사람들을 찾아냈다. 마을 처녀 하나가 서너 명의 아이들과 함께 숨어 있었던 것이다. 처녀는 한사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거친 병사들의 완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병사는 먼저 처녀를 끌어내고, 열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도 끌어냈다. 그런 다음 병사들은 낄낄거리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짚더미 속에 숨어 있던 남은 아이들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피가 튀었고, 아이들의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병사들은 아이들이 죽는 광경을 보고 기절해 버린 처녀와 아이 한 명을 등에 업고 의기양양하게 해안가로 돌아왔다. 해안가에는 곧 13살 정도에서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녀로 가득 찼다. 마을의 청년들은 방금 전가지만 해도 칼과 창을 들고 거칠게 저항했었음에도 불고하고, 포로로 잡힌 후에는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의 우울한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공허하기만 했다. 묵향은 병사들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이들이 해적인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옆에 서 있던 아르티어스도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쯧쯧, 하여튼 호비트란 것들은...... 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몬스터를 봤지만 자신들의 동족을 이토록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아마 호비트를 따를 것들이 없을 걸!" 노예로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쳐 죽이며 길길이 날뛰는 병사들의 피에 굶주린 듯한 얼굴에서 지금까지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험한 파도를 헤치고 나온 뱃사람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숨어 있는 마을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그러다가 발견한 사람이 힘없는 늙은이거나 아이들이면 가차 없이 죽여 버렸고, 건장한 젊은이라면 꽁꽁 묵어서 해변가 모래사장으로 끌고 왔다. 대족장 타르티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함께 온 부하들과 땅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뭐라고 외쳤다. 도중에 신을 뜻하는 "탱게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왔지만, 묵향은 이제 더 이상 대족장의 꼴도 보기 싫은 상태였다. 싸움을 하다 보면 상대를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해 일부러 잔혹하게 적을 죽이기도 했다. 그 대상에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전장 근처에 살고 있는 일반 백성도 포함되었다. 옥영진 대장군의 휘하에서 몽고 침략전을 겪어 본 묵향은 패전한 쪽의 아녀자들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늙어서 노예로 쓸 수 없는 자들을 죽여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아이들을 저렇게 처참하게 죽여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낄낄거리면서 말이다. 엎드려 있는 대족장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묵향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허허헛, 저 녀석이 식사를 마련해 준다는구나. 배 멀미도 심하게 했으니, 뭘 좀 먹어야 힘을 차릴 수 있을 것 아니냐?" 사실 대족장은 식사 준비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천신의 도우심으로 오늘 두둑한 수확을 올리게 되었음을 감사한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오늘의 수확을 축하할 겸 천신께 제사를 지내고 싶다며 허락을 구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묵향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식사 준비를 한다고 둘러댄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을 잡아끌며 말했다. "자,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저기 앉아서 기다리자꾸나." 무려 4,000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상륙한 후라 그런지, 작은 마을에 대한 노략질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마을의 해변가 모래사장에는 200명에 가까운 포로들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모래사장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포로들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약탈한 각종 물품들도 쌓이기 시작했다. 볏짚으로 만든 커다란 가마니들이 차곡차곡 쌓였는데, 그 속에는 대부분 쌀이 들어 있었다. 그 외에도 콩이나 수수, 보리 같은 곡식이 들어 있는 작은 자루도 있었지만, 말린 생선 같은 어촌에서 흔히 장만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닭이나 소, 개 같은 가축들도 병사들의 손길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병사들은 일단 마을의 약탈이 끝나자 느긋하게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가축들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굽거나 삶았다. 곡식 종류는 장기간 보관할 수 있기에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가축들은 보관하기도 어려웠고 배로 옮기기도 힘들었다. 사료를 공급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배설물을 처리하기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곡식은 배로 실어 나르고, 가축은 눈에 띄는 대로 잡아 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적개심을 가지고 병사들이 하고 있는 꼴을 노려보고 있던 묵향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바로 여기서 나타났다. 사로잡힌 포로들 중 사내들 일부는 기회가 오면 도망치려는 듯한 저항의 뜻을 조금씩이나마 내포하고 있는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여인들의 그것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사로잡힌 지 얼마나 지났다고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순순히 병사들의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 일부 여인들은 병사들의 지시에 따라 요리까지 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안, 아르티어스는 묵향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만약 잘못하면 묵향이 병사들을 몽땅 다 죽여 없애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병사들의 숫자가 4,000이라고는 하지만 묵향이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저놈들을 다 죽여 버리도록 그냥 놔둘까?하는 생각도 해 봤었다. 아마도 묵향은 매우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저런 쓰레기 같은 호비트들이라도 아직까지는 아르티어스에게 충분한 이용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르티어스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울컥하는 마음에 4,000명이나 되는 같은 종족을 죽인 후, 묵향이 안아야 할 마음의 부담이었다. "호비드들끼리 죽고, 죽이는 거다. 그런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너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오늘 처음 본 호비트들이 아니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발끈하며 소리쳤다. "뭐라고요? 저게 안 보입니까? 도대체가 저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저항하는 무리들과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고, 또 그들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또 다 늙은 노인들을 죽이는 것까지도 이해해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저런 아이들까지 죽이다니...... 방금 전에도 봤잖아요. 이제 겨우 젖먹이인 애를 엄마의 품에서 뺏어내서는 목을 비틀어 버리는 광경을 말이에요. 도대체 저게 인간이 할 짓이라고 생각하세요?" 순간적으로 아르티어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흘렀다. 아르티어스도 그 광경을 묵향과 함께 봤었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천 년 전에 자신이 어렸을 때는 저것들이 하던 짓보다 더한 짓도 수없이 해 본 경험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아르티어스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상 최강의 생명체인 위대한 드래곤인 그의 시각으로 보자면 호비트와 개미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개미를 100마리 죽이는 것이나, 호비트 100명을 죽이는 것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는 묵향보다는 훨씬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병사들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잠시 머리를 굴린 후 묵향에게 말했다. "저것도 다 저들의 삶의 방식이 아니겠냐? 네게는 네가 태어나고 자라며 배우고 또 만들어진 삶의 방식이 있듯이, 저들에게도 그런 것이 있는 거야. 보통 해적들은 아이들을 잘 죽이지 않지만, 그게 아이들이 가엾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란다. 따지고 보면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 먹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냐? 만약 어린애를 노예로 팔아 먹을 수 없다면 노인과 마찬가지로 쓸모없기는 마찬가지겠지.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또 감정에 휩쓸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잠시 생각해 봤다. 사실 자신의 경우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아주 색다른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철이 들면서 기억이 나는 것은 모두 다 마교에서 피를 토하며 했던 수련이 전부였다. 그 다음은 암살자로서, 그리고 그 다음은 검객으로서 키워졌다. 그런 특별한 삶 속에서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금까지 죽여왔던가. 그가 여태껏 죽인 사람들이나, 또 앞으로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죽여야 될 사람들이 반드시 악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죽인 자들은 최소한 아이들이나 노약자와 같이 나약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모두들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던 묵향은 뭔가를 생각했는지 곧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죽인 자들이 강력한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강력했다는 말이지, 묵향에 비해 강력했다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묵향은 그런 이들을 파리 잡듯 몰살을 시킨 적도 있었다. 저 해적들이 노약자들을 학살한 것처럼 말이다. 그럼 자신과 저 해적들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리고 묵향이 여태까지 죽여 온 사람들이 모두 다 악인들이었나? 물론 만인으로부터 지탄을 받던 악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파의 거목이라는 뇌전검황을 벤 것도 자신이었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많은 기사들도 자신의 검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묵향은 한숨을 푹 내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아빠 말이 맞는 것 같네요. 난 저들을 심판할 권리가 없죠." 아르티어스가 왠지 허탈해 하는 묵향을 다독거리고 있을 때, 사로 잡힌 원주민 여인 몇 명이 음식물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병사들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병사들이 만들어서인지 요리들은 약탈한 가축들을 통구이 해 놓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원주민 여인들은 열심히 음식들을 묵향과 아르티어스 앞에다 차려놓은 후 황급히 물러났다. 음식이 다 차려지고 나자, 대족장 타르티가 자신의 심복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는 예전에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자신의 성에 나타났을 때와 같이 그 앞에서 절을 하고, 뭔가 중얼중얼 읊어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간 흐르자 의식이 다 끝났는지 타르티는 납작 엎드려 아르티어스에게 경건한 표정으로 경배하고는 물러났다. 의식이 끝난 후, 아르티어스가 상 위에 놓여 있는 음식들을 집어먹기 시작하자 원주민 소녀 둘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다가와 묵향과 아르티어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마 대족장 타르티가 시중을 들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따끈하게 데워놓은 술을 잔에 따른다든지, 나름대로 열심히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출출했던 아르티어스는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술을 호쾌하게 마셔대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아르티어스의 시중을 들고 있는 소녀의 표정은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묵향의 시중을 들고 있는 소녀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상대가 음식물은 물론이고 술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 자신에게 음탕스런 시선이라도 보내고 있었다면 혹 모르겠지만 상대는 다만 통째로 요리되어진 강아지 구이만을 슬픈 듯 멍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였다. 멀찍이서 그녀들의 행동을 힐끔거리고 있던 병사들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것은. 그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묵향에게 다가와 뭐라고 정중하게 말한 다음 소녀을 일으켜 세웠다. 소녀는 처음에는 잠시 반항하는 듯했지만, 이내 체념한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소녀가 끌려가고 난 후, 빈 자리는 또 다른 소녀에 의해 다시 채워졌다. "아아악!"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에 묵향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어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그였지만, 그곳을 한 번 바라본 것만으로도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자신의 시중을 들고 있던 소녀가 목이 없는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피 묵은 도를 닦고 있는 병사가 보였고, 그의 발치에는 소녀의 목이 나뒹굴고 있었다. "내 이놈들을!"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없다는 듯 살기에 찬 눈빛으로 묵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아르티어스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만약 저 녀석을 죽인다면, 그놈과 뭐가 틀리냐? 그 소녀는 너의 시중을 제대로 들지 못했기에 불성실의 죄를 물어 그자에게 죽임을 당한 거야. 그렇다면 너는 임무를 성실히 이행한 저 녀석을 무슨 이유로 죽이고자 하는 거냐? 잘못을 정확히 따진다면 그건 네 잘못이다. 네가 그녀의 시중을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지." 묵향은 고개를 휙 돌려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울부짖듯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울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냉정하게 말씀하실 수가 있죠? 물론 제가 잘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런 묵향을 바라보며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저놈들은 아직 쓸모가 있거든." "어떤 쓸모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말을 묵향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지 할 수 없다는 듯 차분히 설명을 해주었다. "마약 이곳이 우리가 생각한 중원이 아닐 때를 대비해서 다시 돌아갈 배편을 준비해 둘 필요가 있거든. 물론 지금 여기서 저놈들을 쓸어버리며 네 속이야 편하겠지만 그럼 돌아 갈 배편을 새로 구해야만 한단 말이야. 그러다 보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네가 정 저놈들을 없애고 싶다면, 나중에 쓸모가 없어진 후에 해도 늦지는 않을 게다. 안그러냐?" "좋아요. 그럼 빨리 떠나자구요. 여기 조금만 더 있다가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르겠다구요." "아, 알겠다. 그 놈의 성질하구는. 아차, 잠시만 기다리거라." 아르티어스는 한쪽에서 따로 자신의 심복 부하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대족장과 몇 마디 주고받은 후 돌아왔다. "그럼 가도록 하자꾸나." 하지만 묵향은 꼼짝도 하지 않고 대족장과 그 부하들이 모여 있는 곳을 노려보며 실기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우리가 돌아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대요?" "아니,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구나. 아마 얼마 안 있으면 이곳 영지의 병사들이 몰려 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맞서 싸워봤자 피해만 생긴다고 하더군. 그래서 이 주변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다른 마을을 털며 시간을 보내다가 한 달쯤 후에 다시 이리로 돌아 오겠다고 했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그제서야 묵향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흉흉한 눈빛으로 미루어 보아 한 달 뒤 대족장 타르티와 그의 부하들을 결코 가만 놔둘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요? 잘 되었군요. 그럼 빨리 가죠." "그러자꾸나." 묵향은 더 이상 그들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해서 경공술을 전개한 것이었기에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묵향의 몸은 점점 작아져만 갔다. 그런 모습에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정작 병사들이 더 기겁한 인물은 따로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이미 달려 가 버린지도 모르고,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는 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은은한 서기가 어린 그의 얼굴은 마치 신이 하강한 듯 장엄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아르티어스는 주위를 한번 쭈욱 훑어본 후 준엄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듣거라!" 이미 주위에 있던 모든 둥루젠 병사들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며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예, 탱게르!" "한 달 후에 이곳으로 오거라! 만약 내가 그때가지 오지 않는다면 3일간 기다린 후 돌아 가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나이다, 탱게르!" 병사들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아르티어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뒤로 돌아보며 말했다. 내심 묵향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며 존경하기를 바랐던 그였지만, 결과는...... "역시 뒷마무리는 깔끔..., 허걱! 어, 어디갔지?" 당황해서 이리저리 둘러보던 아르티어스의 눈에 저 멀리 달려가고 있는 묵향의 뒷모습이 보였다. 마치 새가 날아가는 듯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그 모습은 순식간에 하나의 점으로 보일 정도로 작아져 갔다. "제, 젠장. 더럽게 빠르구먼. 저런 놈이 무슨 호비트야? 괴물이지." 아르티어스는 투덜거리며 급히 대족장이 선물한 금이 든 궤짝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아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곳을 향해 재빨리 달려갔다. 마법을 이용하여 최대한 몸의 무게를 가볍게 하고, 또 근력증가의 마법에다가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마법 등등 아르티어스는 일단 생각나는 대로 속도를 증가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묵향의 뒤통수뿐이었다. "같이가자! 에구구구! 헥헥!" 서로간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아르티어스의 음성은 아예 들리지도 않을 것만 같았다. 아르티어스는 아예 달려가기를 포기하고 제자리에 서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도무지 달려서는 쫓아 갈 수가 없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아르티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투덜거리며 천천히 하늘로 날아 오른 후 급격히 가속하여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젠장! 땅바닥을 달려가는 놈을 쫓아가기 위해 날아 가야만 하다니......"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사라진 후 한참이 지나자 대족장은 살그머니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르티어스의 장엄한 모습에 놀라 얼마나 세게 땅바닥에 처박았는지 그의 얼굴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조심스럽게 곁눈질로 주위를 살펴 본 타르티는 방금 전까지 허공에 몸을 띄우고 있던 천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자신감을 얻은 듯 조금 더 고개를 들어 눈알을 굴려대며 이리저리 살펴 봤다. 물론 그 모든 행동은 혹시나 천신께서 아직 남아 계시다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땅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인 상태로 이뤄지고 있었다. 대족장은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천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모두 듣거라! 탱게르의 명을 받들어 나 타르티가 명령하노라!" 그 말에 아직도 겁에 질려 있던 병사들은 목소리 높이 외치기 시작했다. "탱게르! 탱게르! 탱게르!"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천신의 이름을 외쳐대는 병사들을 둘러보며 타르티의 가슴은 야망으로 가득히 부풀어 올랐다. "흐흐흐, 저 두 분의 탱게르만 잘 모신다면 둥루젠의 일통만이 아니라 천하를 제패한는 것도 이제 시간 문제야. 드디어 내 평생의 숙원인 진을 깨부수고 둥루젠의 천하를 열 때가 왔음이다. 크하하핫." 한참을 호탕하게 웃던 타르티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병사들의 외침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하자, 타르티는 근엄한 음성으로 외쳤다. "자, 빨리 식사를 마치고 출발 준비를 하도록 하라. 탱게르께 선택받은 우리들 앞을 가로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우와와와와! 탱게르! 탱게르!" 탱게르를 연호하는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것을 보던 타르티는 웅심이 치솟는지 호탕하게 웃음을 떠뜨렸다. "이제 탱게르와 함께 하는 우리를 막을 자가 감히 그 누가 있겠는가? 크하하하핫!" 연신 호쾌하게 웃고 있는 타르티의 눈에는 벌써 천하를 호령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던 것이다. 한참 동안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던 타르티는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을 바라 보았다. 아르티어스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의 쥐와 같이 왜소해지는 타르티였지만 지금은 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대족장의 풍모가 물씬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해리바, 네게 선단을 통솔할 권한을 주겠다. 내가 본대를 이끌고 진격하면, 너는 해안선을 타고 본대를 따라 오도록 해라. 사로잡은 노예들과 식량은 배로 운반하고 출항 준비를 서두르도록 해라." "옛,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행로를 잡으시겠습니까?" 타르티는 잠시 생각에 잠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한 달동안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 출발준비를 시킨 것이다. 하지만 파도에 밀려 예상했던 목적지에서 많이 남하한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에 계획했던 행로는 지금으로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보통 대규모로 출정을 하게 되면 내륙지방 깊숙이까지 노략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통상의 경우 노략질은 해안을 따라가며 진행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만 선단과 함께 이동할 수 있어서 여러모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로잡은 노예나 약탈한 것들을 배에 적재하여 이동속도를 높일 수도 있었고, 대규모의 적군이 나타나면 도망치기에도 편했다. 아무리 적군이 대군으로 몰려온다 하더라도 정찰만 확실히하여 미리 포착할 수만 있다면 잽싸게 배에 탄 후에 대해로 빠져나가 버리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가야 좀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갈까? 아니면 남쪽으로 내려갈까...... 허, 참. 고민되는군. 이럴 줄 알았으면 주술사도 데려 오는 건데 잘못했어." 이렇게 택일을 해야 하는 경우, 주술사에게 천신의 뜻이 어떤지 물어본 후 결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지금은 주술사도 없고, 또 천신도 없다. 천신이 워낙 갑작스레 떠나는 바람에 어디로 행보를 잡으면 될 것인지 물어 볼 생각조차 못한 것이다. 타르티는 잠시 고민하더니 해리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해리바! 자네는 어디로 진격했으면 좋겠나?" 타르티의 질문에 해리바는 잠시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이렇게 민감한 사안을 일개 부하에 불과한 자신이 말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사실 해적질이라는 것이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소득과 피해가 결정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아니던가. 만약 자신이 가자고 한 방향에 적의 대군이 기다리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보통 이런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는 주술사에게 조언을 청하는 것이 뒤탈이 없었다. 그렇기에 해리바는 잠시 고만한 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타르티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대한, 점을 쳐 탱게르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해리바의 말이 그럴 듯한지 대족장 타르티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을 했다. 그러자 해리바는 곧 부하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서 애 밴 여자 하나를 끌고 오너라." "옛." 몇 명의 부하들이 포로들 중에서 임산부를 찾아내기 위해 떠난 후, 해리바는 은근한 어조로 타르티에게 말했다. "배를 갈라서 아들이 나오면 북진, 딸이 나오면 남진..., 어떻습니까?" 대족장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하더니, 곧이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탱게르께 둘 중 하나를 물어 보는 게 꽤 좋은 방법인 듯 했기 때문이다. "어∼, 그거 좋은 생각이군. 아주 좋은 생각이야." --------------------------------------------------------------------------- 혹시 여행 오셨나 보죠?- 잘 구워지고 있던 사슴의 몸에서 기름이 흘러내려 모닥불 위로 떨어지며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고기가 익는 구수한 냄새에 아르티어스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사슴을 꿰어 놓은 나무 작대기를 옆으로 약간 돌린 후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이제 먹자!" 그러자 묵향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거 겉만 익었지 속까지 익으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니까요." "너 아직도 잘 모르는구나. 고기는 완전히 익힌 것보다는 조금 덜 익혔을 때가 가장 맛있다구. 한입 베어 물면 선홍빛 핏물이 살짝 흘러나올 정도가 제일 맛있다니까." "아, 글쎄. 조금만 더 참으시라니까요. 설마 의리없게 혼자 드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먹으려면 같이 먹자구요." 한참을 실랑이 하던 그들은, 이윽고 고기가 어느 정도 익자 저마다 사슴 다리 한 짝씩을 뜯어 먹었다. 한두어 입 뜯어 먹었을까? 어디선가 급하게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사슴 고기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우음..., 이게 무은 소리냐?(이게 무슨 소리냐?)" 묵향은 못 들은 척 더욱 열심히 고기를 뜯고 있었다. 아무리 사슴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어린놈이라서 그런지 고기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양껏 포식을 하려면 먹는 속도를 올릴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묵향의 모습을 아르티어스는 사랑스러운 듯 그윽한 눈길로 바라봤다. 길게 기른 황금빛의 머리카락, 애 띤 얼굴. 그리고 저 박력 있는 식성까지...... "에구, 어쩌면 저렇게 먹성이 좋을까? 보면 볼수록 귀엽..., 어어?" 자신이 잠시 바라보고 있는 사이 고기의 양이 팍팍 줄어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여기까지 잘 모이지도 않는 마나를 끌어 모아 날아온다고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한 터라 몹시 배가 고픈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배려해 고기를 양보해 줄 아들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대부터 아르티어스도 질세라 고기를 씹어 삼키는 속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들놈의 먹는 모습을 보니 딴 일에 신경쓰고 있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묵향보다 입이 크다는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고기를 거의 씹지도 않고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아들놈의 위장은 드래곤의 것을 떼다가 붙였는지, 한꺼번에 엄청난 양을 먹어 치울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먹지 않으려고 든다면 몇 날 며칠동안 안 먹어도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필사적으로 먹어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황은 묵향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배 멀미 대문에 먹지 못한 것을 만회하려는 듯 걸신 들린 것처럼 먹어대고 있는 중이었다. 뼈다귀까지 싹싹 핥아가며...... 둘이 사슴 고기에 온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무장한 병사 몇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묵향이나 아르티어스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이 갖추고 있는 무장만은 여태껏 보아왔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르티어스는 흥미롭다는 듯 병사들을 향해 눈길을 보냈지만, 여전히 손과 입은 고기를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병사들 중에서 한 명이 앞으로 쓱 나서며 낯선 이방인들을 향해 뭐라고 큰 소리로 지껄여댔다. 그러면서 그는 길쭉한 검이 꼽혀 있는 검집을 일부러 흔들어 보이며 위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것을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뭐라고 하는 거냐?" 아르티어스의 심드렁한 질문에 묵향은 고기를 한 껏 입안에 머금은 채 대꾸했다. "저에도 마해죠? 아바가 모르는 거스 제가 어떠게 아게서요?(전에도 말했죠? 아빠가 모르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젠장, 여기서는 또 말이 다르네. 거기서는 안 그랬는데, 이곳은 어찌 된 것이 가는 곳마다 언어가 틀리냐? 야! 그건 그렇고 비겁하게 혼자만 먹기냐?" 아예 자신을 상대조차 안 하자, 말을 걸었던 병사는 잠시 황당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동료들에게 큰 소리로 뭐라고 외쳤다. 그러자 병사들은 큰 소리로 뭐라고 지껄여대며 갑자기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일 앞쪽에 긴 창을 든 병사들이 서고, 그 뒤에 검을 든 병사들이 포진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분명했다. "이런 젠장!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는데, 이것들은 뭐야?" 묵향은 오랜만에 만끽하는 즐거운 식사를 방해받자 짜증난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들고 있던 사슴 다리를 휘두르며 병사들을 그야말로 개 패듯이 패기 시작했다. 퍽! 퍽! "꾸에에엑!" "으헉!" 삽시간에 창과 검을 든 병사 5명이 사슴 다리에 맞고 쭉 뻗어 버리자 남은 병사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일단 병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자 묵향은 더 이상 공격할 마음이 없었기에 고기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 다급하게 외쳤다. "이런, 젠장! 도와 주지는 못할망정 혼자서 다 먹기에요?" 묵향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에게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사슴 고기를 향해 달려 들었다. 자신들을 무시한 채 걸신 들린 듯 고기를 와구와구 먹고 있는 이상한 옷차림의 이방인들을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병사들은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일으켜 세워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와중에도 거친 음성으로 뭐라고 지껄여대며 허세를 부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꺼억! 잘 먹었다." 트림을 하며 이빨을 쑤시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얼마나 얄미운지, 묵향은 들고 있던 뼈다귀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바닥으로 내팽개친 뼈다귀는 얼마나 열심히 훑어 먹었는지 살점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거의 광택이 날 정도였다. "이런 젠장. 설마 그렇게 아귀처럼 먹어대다니...... 드래곤으로서 체면을 좀 생각하시죠." 아르티어스는 별소리 다한다는 듯 여유있게 이빨을 쑤시며 대꾸했다. "쩝, 배고픈데 체면 따위나 생각하게 됐냐? 그나저나 너무 급하게 먹었나. 뱃속이 더부룩하네." 아르티어스의 말에 아직까지 허기를 못 채운 묵향의 이마에는 붉은 힘줄이 불끈 솟아 올랐다. "이, 정말 너무 하잖아요. 평소에 예쁜 아들이 어쩌구저쩌구 말만 잘 하시더니 어떻게 먹을 것 앞에서는 아예 안면 몰수할 수가 있는 겁니까? 그리고 사슴은 누가 잡았는데 내가 먹을 것도 없이 왜 그렇게 많이 잡수세요!" 묵향이 성질을 내며 바락바락 대들자 아르티어스는 치사하게 먹을 것 가지고 별 트집을 다잡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사내자식이 치사하게 먹을 것 가지고 계속 그럴래! 그러는 너는? 그 덩치에 그 정도 먹었으면 됐지, 얼마나 더 먹어야 된다는 소리냐? 나야 원래 드래곤이다 보니 이 정도 먹지 않으면 체력 관리가 힘들단 말이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절반 정도는 네가 먹었잖아!" 처음에는 약간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던 아르티어스였지만, 말을 하다보니 점점 열이 받는지 서서히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아르티어스의 반응에 묵향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절반이요? 절반씩이나 먹었으면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겠어요. 삼분지 일 정도도 제대로 못 먹었다구요!" 묵향이 집요하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아르티어스는 겸연쩍은 듯 고개를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젠장, 그 정도면 많이 먹은 거지. 웬만한 호비트는 그 반만 먹어도 배 터지겠다." "그것도 호비트 나름이죠. 비겁하게 내가 배고파하는 거 뻔히 알면서, 싸우는 틈을 이용해 그렇게 많이 먹어대다니......" 계속 묵향이 이죽거렸지만 아르티어스는 신경도 쓰지 않고 포만감이 느껴지는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허허헛! 그게 다 연륜이 아니겠냐?" "연륜 좋아하시네요." 묵향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중얼거렸다. 지금가지 언쟁을 벌이느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오는 듯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물론 그 소리는 아주 작았기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알아챌 수도 없었겠지만 아르티어스는 드래곤이 아닌가? "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하지만 묵향은 그 정도는 벌써 알고 있었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모르죠, 뭐. 아까 몇 대 맞은 놈들이 동료들을 끌고 오는지 말이에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반박했다. "동료라고? 그놈들이 무슨 산적 패거린 줄 아느냐? 동료라고 하게. 그놈들 하고 있는 복장을 봤을 때 어딘가에 소속된 정규군 같았단 말이다. 그리고 이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로 봤을 때 최소한 400명은 넘겠군. 산적 패거리가 그렇게 많이 떼 지어 돌아다닌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다." 안 그래도 사슴 고기를 양껏 못 먹은 데 대한 앙금이 남아 있던 묵향은 계속 이죽거렸다. "정확히 하면 500명 정도에 말 3필이에요. 여기 오면서 못 봤어요? 해적도 4,000명씩 떼 지어다니는데, 산적이 그 정도 안 될 이유가 없죠." "그, 그런가?" 이곳 물정을 모르기는 아르티어스도 마찬가지였기에, 묵향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는 놈들이 병사인지 산적인지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병사건 산적이건 귀찮기는 매한가지니까 말이다. "그럼 발리 자리를 옮기자. 여기 있어 봐야 귀찮기만 하지 않겠냐?" 그 말에 묵향은 아예 뒤로 벌렁 드러누우면서 비비 꼬인 어조로 말했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에요? 드래곤으로서 체력 관리를 하시려면 많이 드셔야 한다면서요. 사슴 고기로는 요기거리도 안 되셨을 텐데, 후식거리가 제 발로 찾아오고 있는데 얼마나 좋아요? 이야∼, 아빠 오늘 먹을 복이 터졌네."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입맛을 다시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한 소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과연 500멍이라는 먹을 거리가 들어갈 수나 있는지 고민했던 것이다. "글세...... 뭐, 호비트 고기가 그리 맛이 없는 것도 아니니 상관은 없겠지만, 아무리 내가 드래곤으로 현신한다고 해도 호비트 500명에 말 3필이면 양이 좀 과한데?" 아르티어스는 그 말을 하며 묵향의 눈치를 힐끗 봤다. 먹으라면 뭐 못 먹을 것도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호비트인 양자 앞에서 호비트를 먹는다는게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묵향의 대답은 전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설마요. 등빨 좋고 위대하신 드래곤께서 그 정도 양에 우는 소리를 하신다면 지나가는 드워프가 웃겠죠." 그제서야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르티어스는 이제 더 이상 묵향과의 대화가 질린다는 듯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계속 여기 있을 거냐? 얼마 안 있으면 저놈들이 도착할 텐데 말이다." 묵향은 슬쩍 옆으로 돌아 누우며 힘없는 어조로 말했다. "맘대로 하세요. 저는 허기져서 움직일 힘도 없네요." 계속된 묵향의 이죽거림에 아르티어스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듯 그 옆에 털퍼덕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이런 망할! 그래, 네 맘대로 해 봐라." 두두두두. 잠시 후,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기사 셋이 5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묵향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빠르게 주위를 포위하여 도주로를 차단했다. 포위망이 완성되자 기사들은 천천히 묵향 앞으로 말을 몰고 나섰다. 그런데 묵향이 보기에 기사들의 표정이 야릇하였다. 수상한 인물들이 있다는 보고에 도망치기 전에 체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달려 왔건만 모닥불 주위에 여유롭게 앉거나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약간 허탈해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그때까지도 이발을 쑤시면서 주위를 흥미롭다는 듯 둘러보았다. "호오, 여기 놈들은 상당히 복장이 특이하네? 방금 전에 봤던 녀석들도 그렇지만, 아주 독특해. 특히 말 위에 앉은 놈들의 갑옷을 보면 저게 방어를 위한 거냐? 아니면 허세를 부리기 위해 양옆으로 얼기설기 붙인 거냐? 되게 헷갈리네." 묵향도 기사들을 힐끗 쳐다 본 후 중얼거렸다. "글쎄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척 보니 단단하게 비끄러맨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마 드시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걸요?" "너는 저것들이 지금 먹을 거리로 보이냐? 얘가 나하고 오래 다니더니 자기가 호비트라는 것을 잊어 버렸나? 너! 아무래도 나한테 치료 좀 받아야 하겠다." 아르티어스가 손가락을 꺾어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서자, 묵향은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호오, 오랜만에 저와 대련을 하시자는 건가요?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 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네." 묵향의 반응에 아르티어스는 질겁을 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다. 트랜스포메이션한 이런 육체를 가지고 맞붙어 가지고는 도무지 상대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아르티어스였기 때문이다. "아, 아니다. 대련은 무슨 대련."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병사들 중 한 명이 앞으로 튀어나와 기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뭐라고 한참 떠들어 댔다. 기사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을 하는 듯하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천천히 아르티어스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왠지 모르겠지만 사뭇 살기에 찬 모습이었다. 아르티어스에게 다가온 그 병사는 살기에 찬 눈빛을 흘리면서도 덤벼들지는 않고 나직한 어조로 뭐라고 한참 동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놈 뭐라고 하는 거예요?" "글쎄다. 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뭐 이런 소리가 아니겠냐?" 묵향은 병사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 보려 했지만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투에 담겨 있는 분위기나 감정은 대략 눈치 챌 수 있었다. 묵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생각하다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아빠, 아마 한판 붙자고 저러는 거 아닐까요? 목소리를 자세히 들어봐요. 은근슬쩍 살기가 느껴지는 것이 결코 대화를 원하는 그런 말투가 아니라구요." "그, 그런가? 가만, 그렇다면 저놈이 지금 나를 째려보고 있는 것이 한판 붙자는 것이었어?" 묵향의 말을 듣고 보니 아르티어스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여 말했다. "그럼 아까부터 떠들어대던 말이 다 욕이겠군. 이런 망할 자식! 감히 호비트 주제에 나한테 욕을 했단 말이지. 너 일루 와 봐. 아예 껍질을 벗겨 주마." 바로 그때, 지금까지 주저리주저리 뭐라고 읊어대고 있던 병사는 말을 끝내고 아르티어스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르티어스가 자신을 향해 마치 강아지 부르듯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덤비라는 손짓을 하자, 그는 심한 모욕감을 느낀 듯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단숨에 검을 뽑아 들며 달려들었다. "끼요오오옷!" 아르티어스는 급히 주문을 외운 후 앞으로 손을 쭈욱 뻗었다. 다음 차원이동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기에 용언마법은 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서로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관계로 시간 여유가 없었기에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순간 아르티어스의 손끝에서는 붉은 화염덩어리가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그 화염덩어리를 온 몸으로 받아내야만 하는 돌진해 오던 병사의 얼굴은 화염을 뒤집어 쓴 그 순간 당혹과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펑! "크아아악!" 병사는 온 몸에 불이 붙은 채, 고통에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데구르르 구르기 시작했다. 병사가 이상한 불덩어리에 당하는 것을 보자 말위에 타고 있던 기사의 안색이 약간 일그러졌다. "으음, 마사카 흐노쥬쯔?" 기사는 슬쩍 말에 박차를 가하여 앞으로 나섰다. 왠지 냉혹한 듯한 눈길로 온 몸에 불이 붙어 뒹굴고 있는 병사를 바라본다 싶은 순간, 흰 선이 번쩍 빛났다. 언제 뽑아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약간의 피가 묻은 검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불이 붙은 몸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병사의 목은 어느 순간에 떨어져 나갔는지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기사는 병사의 시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느긋하게 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기사는 검을 검집에 집어 넣은 후 천천히 앞으로 말을 몰아 나오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오마이다찌 닌자까?" 부하의 목을 냉정하게 날려 버리는 광경을 봐서인지 묵향의 목소리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약간은 떨렸다. 평상시에 자신과 관련되지 않은 일에는 무관심했지만 부하만큼은 확실히 챙기는 묵향이었기에, 마치 벌레 베듯 부하의 목을 날려 버린 기사의 태도가 아주 탐탁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저 새끼, 뭐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누누이 말했듯이 여기 말은 모른다니까. 그건 그렇고 여기는 정말 화끈한 곳인 모양이구나. 저렇게 박력 있게 부하의 목을 자르는 광경은 내 생전 처음이다." 정말 감탄을 했다는 듯한 아르티어스의 대답에 묵향은 인상을 찡그리다가 답답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젠장, 그럼 한 놈 잡아다가 말 좀 배어요. 편한 마법 놔두고 뭐해요? 답답해서 이거 살겠나."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허∼참! 내가 또 그 짓을 귀찮게 해야만 하냐?" "그럼 말도 안 통하는 데 계속 이런 식으로 다니자는 말씀이세요?" 묵향은 기사가 마음에 안 들었기에 그냥 박살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아니 수백 명의 피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꿨다. 사실 한 놈 잡아다가 말을 배우는 것이 수백 명을 때려 잡는 것보다는 훨씬 손쉬울 것이 아닌가? 묵향은 잠시 이리저리 생각해 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게 귀찮으면 둥루젠 말로 해 봐요. 혹시 알아 들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까?" 설마 하는 표정으로 아르티어스가 둥루젠 말로 뭐라고 외치자, 놀랍게도 상대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냉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사 뒤편에 서 있던 병사 한 명이 기사 옆으로 다가와서 뭐라고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 후, 잠시 기사에게 뭔가 지시를 받은 병사는 아르티어스 앞으로 쓱 나서며 말을 건넸다. 비록 서툴기는 했지만 둥루젠 말이었다. "너희들 해적이냐?" 아르티어스는 이곳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자가 나오자 꽤 기분이 좋은 듯 곧바로 대답해 줬다. "당연히 아니지. 네놈 눈에는 내가 해적질이나 할 분으로 보이냐?" 병사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못 알아 들은 듯 일순 당황해 하며 되물었다. "무, 무슨 말이야? 천천히 말해라." 아르티어스는 한입거리도 안 되는 호비트 주제에 건방지게 위대한 드래곤인 자신에게 처음부터 반말을 지껄이자 처음과는 달리 슬그머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죽여 버리고 대화할 만한 상대를 다시 찾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런 놈을 또 찾는 것 또한 귀찮은 작업이었기에 일단 참고 넘어갔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눈동자는 이미 매섭게 변해 있는 상태였다. 아르티어스는 병사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정확히 발음했다. "당연히 아니다." 아르티어스의 살기에 찬 눈빛에 병사는 찔끔거리면서도, 맡은 임무가 있었기에 용기를 내어 계속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주눅이 든 상태였다. "그럼..., 뭐냐? 그리고 어떻게 닌자도 아닌데 화염의 술법을 쓸 줄 아느냐?" 화염의 술법이라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정도야 고삐 잡고 말 타기지." 아르티어스의 말은 둥루젠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었다. 어릴적부터 말을 타는 둥루젠에서 양손을 다 놓고 말을 탈 줄 아는 것이 결코 자랑이 아니었다. 그런 자들이 고삐를 잡고 말을 탄다면 어떻겠는가? 병사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맹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뭐? 고삐 잡고 말을 타? 당연한 말을 왜 하는 것이냐?"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는 상대에게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기에, 말투가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에잇, 젠장. 짜증나게 계속 똑같은 말 반복시키고 있어. 쉽다는 말이다. 쉽다는!" 그 순간 아르티어스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병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병사가 주눅이 든 것은 500명이나 되는 병사의 창과 검에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당당한 상대방의 태도였다. 또한 상대방이 입고 있는 옷은 비단으로 만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주 하늘하늘한 것이 엄청나게 값비싼 천 같았다. 저 정도로 비싼 옷을 입고 있다면 상당히 높은 직위의 인물임이 분명하다고 지레 짐작한 병사는 감히 아르티어스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필사적으로 용기를 내어 겨우 질문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겨우 알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늘게 바뀐 상태였다. "그, 그렇다면 애 여기 계세요?" 병사가 말투를 존댓말로 바꿨지만, 아르티어스의 기분을 돌려 놓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이 답답한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슬슬 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저 놈들을 싸그리 다 뱃속에 처넣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아르티어스가 대답은 않고 자신을 어떻게 죽여 줄까 고민하듯 사납게 노려보고 서 있자, 병사는 당황한 듯 이성을 잃고 혼자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호, 혹시 여행 오셨나 보죠? 아, 그렇구나. 여행..., 여행중이셨구나. 하지만 해적 때문에 여행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당황한 듯 한참을 횡설수설하던 병사는 나중에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혼잣말로 뭐라고 주절거리더니 사납게 노려보고 있는 아르티어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뒤로 돌아서 가 버렸다. 병사가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 버리자 묵향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도대체 뭐라고 한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글쎄다, 저놈이 싸가지 없이 반말로 슬슬 약을 올리잖아. 그래서 네 말대로 몽땅 다 뱃속에 집어넣어 버릴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그냥 돌아가 버리네. 참, 명도 질긴 놈이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기사가 탄 말을 연신 훔쳐보며 묵향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하는 그의 입에는 이미 침이 가득 고여 있었다. "네가 아직도 허기가 진다하니 그냥 다 해치워 버리고 우리 포식이나 할래?" "글쎄요. 동족을 잡아 먹기는 그렇지만, 기사녀석이 타고 있는 저 말은 윤기가 도는 것이 꽤 맛있어 보이네요." 지금까지 둥루젠을 떠돌며 말고기를 먹는 것에 적응을 한 탓인지 묵향도 슬그머니 맞장구를 쳤다.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와 대화를 나눴던 병사도 상관에게 보고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말을 나눠보니 대국에서 온 것 같습니다." 기사는 부하의 말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곧 뭔가 이상하다는 듯 급히 질문을 던졌다. "대국! 대국에서도 닌자술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놀랍군. 그런데 생김새가 말로만 듣던 대국인하고는 좀 다른 것 같은데?" 상관의 질문에 잠시 당황한 표정이었던 병사는 급히 머리를 굴려 대답했다. 아르티어스의 살기에 질려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고 오지 못했기에 우물쭈물하다가는 질책을 받을 것이 뻔했다. "옛, 제 생각으로는 대국 상인들과 함께 온 서역인인 것 같습니다." "서역인이라? 흠......" 기사는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는 두 남녀를 잠시 쳐다본 후 병사에게 물었다. "옷차림새를 보아하니 상인은 아닌 것 같은데?" 병사는 미리 생각해 두었는지 곧바로 대답을 하였다. "옛, 저들은 그러니까..., 여행! 여행중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상인들과 함께 저희 "야마토"로 유람을 온 대국의 귀족들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제게 둥루젠 말을 가르쳐 준 해적에게 듣기로는 서역의 상인들이 대국에 정착해서 높은 벼슬을 하사받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했습니다." 기사는 수하의 말이 그럴 듯한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흐흠,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니까 여행중이라고 했단 말이지?" "옛! 한사코 여행중이라고 우기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사는 잠시 생각해 보다 자신의 오른편에 서 있는 부하에게 물었다. "오키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오키타는 혐오스럽다는 듯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잡아먹고 던져 버린 사슴의 뼈를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육류는 거의 먹지 않았다. 있다면 최하층 계급인 에타뿐이었다. 에타는 늙어서 쓸모없어진 소나 말을 잡아 가죽을 걷고, 그 부산물로 생긴 고기를 먹었다. 그렇기에 사슴 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거의 에타와 같은 식생활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였고, 그것은 바로 혐오의 대상이었다. "옛, 아무래도 서역인이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고려를 통해서 왔지 않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저들을 여기서 죽여 버린다든지 하면 어쩌면 큰 문제로 발전할지도 모릅니다. 일단 성으로 압송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고다마는 자신에게 조언을 해준 오키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많은 참고가 됐군. 좋은 조언을 해 줘서 감사하게 생각하네." 오키타는 황송하다는 듯 조금 깊숙이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하며 겸연쩍은 듯 말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고다마 상." "아무래도 저들을 영주님께로 호송하는 것이 좋을 듯하군. 저놈들이 대국의 귀족이든 아니면 간자(첩자)이든 영주님께서 판단하시고 결정하시는 게 나을 것 같네." 이윽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고다마는 통역을 할 수 있는 병사를 바라보며 명령했다. "이봐!" 고다마가 부르자 병사는 즉시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옛!" "저들에게 여행을 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저희 영지로 가셔서 한 며칠 쉬어 가시면 어떻겠느냐고 물어봐라." "옛!" 병사는 상관의 입에서 임무를 게을리 했다는 질책이 나오지 않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또 다시 그 흉악한 눈빛의 이방인에게 말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별 수 있겠는가? 상관의 명령을 거역할 시에는 자신과 같은 쫄다구는 언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가는 병사의 모습은 엉거주춤 그 자체였다. 물론 자신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간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방인들에게로 주춤주춤 걸어가는 병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다마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그의 왼편에 서 있는 기사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고다마에게 물었다. "만약 저들이 청을 거절하면 어떻게 할까요?" "그때는 곧바로 체포하라. 아무리 이쪽의 병사가 많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화염의 술법을 쓸 줄 아는 자다. 그러니 절대로 방심하지 말도록!" "옛!" 심드렁한 태도로 병사의 말을 한참 듣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저쪽에서 며칠 쉬었다 가라고 초대를 하는데, 어떻게 할까?" "쉬어요? 어디서요?"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다. 자신들의 영지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꽤 높은 놈이 살고 있는 곳이겠지, 뭐." "아빠 생각은 어떤데요?"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뭘 어떻게 해? 한 며칠 쉬어가 달라고 저렇게 사정을 하는데 가서 푹 쉬어 주면 되는 거지." 너무나도 태평한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사실 아무리 500명이나 되는 병사가 있다고는 하지만 드래곤인 아르티어스에게는 눈에도 차지 않았던 것이다. "킥킥, 아빠는 저 녀석들이 좋은 뜻으로 우리를 초청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우리를 포위하고 서 있는 저 병사들을 보시라구요." 묵향이 슬쩍 주위에 서 있는 병사들 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아르티어스도 병사들을 한 차례 훑어봤다.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병사들은 무기를 겨눠 들고는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병사들이 여기에 도착해 포위망을 구축한 뒤, 상관으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생긴 결과였다. "쩝, 뭐 그래봤자 별일 있겠냐? 위대한 드래곤이신 내가 있는데 말이다." "아빠는 몸속에 쌓인 마나가 거의 고갈됐다면서요. 아마 저놈들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시답잖은 마법만 가지고는 곤란할 텐데......?" 계속 자신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묵향을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힐끗 째려 본 아르티어스는 짜증이 나는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에잇, 그래! 내 말을 정정하마. 호비트의 탈을 뒤집어 쓴 괴물 같은 내 아들이 곁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살짝 눈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거 욕이에요? 칭찬이에요?" 아르티어스는 별걸 다 따진다는 듯 내심 투덜거렸지만 더 이상 묵향에게 트집을 잡히고 싶지 않은지 표정 관리를 확실히 했다. "물론 칭찬이지. 어차피 정보를 얻으려면 높은 놈을 만나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저쪽에서 초청을 해 주니 오히려 잘 된 일이지." 묵향은 왠지 미심쩍다는 듯 아르티어스를 꼬나 보았지만 더 이상 말꼬리를 잡기도 그랬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러네요." "저들이 좋다고 했습니다." 병사가 다가와 보고를 하자 고다마는 뒤를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그래? 잘 된 일이군. 오키타." "옛!" "곧장 성으로 전령을 보내라. 수상한 야만인을 발견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시를 하던 고다마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자신이 직접 저들을 데리고 영주에게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저들의 목을 벤다든지 한다면 자신이 직접 하고 싶었다. 아니면 최소한 구경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저렇게도 피부가 하얗고 매끄럽지? 저 가느다란 목을 자르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리고 저 야만인들도 목을 자르면 붉은 피가 흘러 나올까? 어쩌면 피가 파란 색일지도 몰라. 젠장, 이 좋은 기회를 해적 때문에 달리다니......" 고다마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후, 말을 이었다. "오키다, 수고스럽겠지만 자네가 저들을 성까지 데려가 주겠나?" "옛!" 고다마는 오키타에게 20명의 병사를 붙여 준 뒤, 병사들을 거느리고 서둘러서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소속된 마우다 영지의 동쪽에 위치한 고다이 영지에 해적들이 대규모로 상륙했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해적들의 상륙지점이 미우다 영지에서 200리 가량 떨어져 있었기에 현재로서는 급박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언제 미우다 영지쪽으로 방향을 잡아 노략질을 하러 쳐들어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고다마는 영주의 명령으로 동쪽 해안에 구축된 수비진을 보강하기 위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 흐흐흐...재밌냥?ㅡㅡ? 16편 이제방금 나온거니까..또 17편 나올려면 1년정도 기달려야된다 살살~그리고 빠진데없이 봐라...16편두이제..얼마 남지 않아따..오늘은 여기까지만 읽어라 -문도 못 여는 바보 드래곤- 사내는 총총히 걸음을 옮겨, 무사들이 서 있는 앞에 도착했다. 무사들은 그 사내를 이내 알아보고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무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자인 듯한 무사가 앞으로 나서며 사내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메지마 상. 영주님께서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사의 목소리는 아주 정중했다. 사메지마라는 사내의 직책은 민정 담당관이라는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었고, 그가 지닌 미우다 영지 내에서의 위치는 대단히 높은 것이었다. 그는 후지와라 영주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가신들 중 한 명이었고, 언제 어디서나 영주와 단독면담을 청할 수 있는 3명의 고문들 중 한 명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일이 정보를 총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사는 뒤로 돌아서며 문 앞에서 크게 외쳤다. "사메지마 상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낮지만 아주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고 해라." "옛!" 무사는 얇은 창호지로 도배된 문을 드르륵 열어주며 사메지마를 향해 말했다. "어서 드시지요." 가볍게 무사에게 예의를 표한 사메지마는 실내로 들어서다 흠칫 했다. 영주의 오른쪽 옆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무사를 봤기 때문이다. 이제 서서히 백발이 늘기 시작하는 이 깐깐해 보이는 얼굴의 무사는 현재 미우다 영지의 모든 구사를 총 지휘할 수 잇는 권한을 위임받은 장군이었다. 그는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잔인했지만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다. 사메지마가 그를 보고 흠칫 놀랐던 것은, 그는 지금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해적들이 고다이 영지에 대규모로 상륙하여 약탈을 감행한 것이 오늘 정오쯤이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후지와라 영주는 타다마사 장군에게 동쪽 해안선을 지키라고 급히 파견했다. 그리고 미우다 영지의 전 지역에서 동쪽 해안선을 보강하기 위해 지원군이 계속 보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사들을 총 지휘할 타다마사 장군이 왜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잠시 당혹스러워 하는 사메지마의 귀에 후지와라 영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주 급박한 전갈이 날아왔기 때문일세." 급히 정신을 차린 사메지마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후지와라 영주에게 예의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예? 급박한 전갈이라니요?" "고다이 영지로 군사들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일세." "그,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해적들을 토벌하라는 것입니까?" 사메지마의 물음에 후지와라 영주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해 주었다. "토벌이라기보다는 고다이 영지에서 쫓아내라는 것이지. 상황이 급박하니 당장 군사를 파견해 달라는 거야." 후지와라 영주에게 이런 식의 압력을 가해 올 수 있는 것은 미우다 영지 남쪽에 위치한 겐페이 영지를 다스리는 마나모토 다카우지 영주뿐이었다. 미나모토는 3만에 가까운 정예 병력을 가진 겐페이 지역을 다스리는 대영주였다. 그리고 미나모토 대영주는 후지와라 영주의 첫째 아들을 볼모로 잡아 두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과 결혼까지 시켜 두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돈지간의 맹방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나모토 대영주로부터 사사건건 간섭을 받는 속국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사메지마 군사를 총 지휘할 타다마사 장군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후지와라 영주는 그 전갈을 받자마자, 타다마사 장군에게 급히 돌아오라고 전령을 보냈음이 틀림없었다. "간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해적들의 수는 거의 5천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또한 대선단을 함께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병사들만으로는 그들과 정면충돌을 하는 것은 너무 피해가 클 것으로 판단됩니다." 사메지마의 말에 후지와라 영주는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것을 난들 모르는 줄 아는가? 그러니까 자네와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닌가." 후지와라 영주의 신경질적인 질책에 사메지마는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간자들이 보고한 해적들의 진격 방향과 미우다 영지의 군사력 등을 따져 본 사메지마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모내기철입니다. 그런 만큼 병사들을 소집하는 것에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핑계를 대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제가 이리로 오기 전에 들은 보고로는, 해적들은 지금 해안선을 따라서 북쪽으로 이동중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진격 속도로 미뤄봤을 때, 그들은 늦어도 일주일 이내에 고다이 영지를 빠져나갈 것 같습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사메지마의 말을 잠시 생각해 본 후 입을 열었다. "흐흠,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모내기만 가지고는 명분이 너무 약해. 병사들을 소집하여 영지 접경지역까지 보내는데 하루, 그리고 해적들이 있는 곳까지 가는데 이틀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모내기로 핑계를 댄다고 해 봐야 하루 정도를 더 얻어 낼 수 있을 뿐이야." 사메지마는 미리 생각해 두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예, 바로 그 하루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영주님의 말씀대로 해적들이 있는 곳까지 도착하는 데 4일이 걸릴 겁니다. 하지만 그동안 해적들이 그 자리에 가마니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4일 동안 해적들은 이동할 테고, 그들을 따라 잡으려면 최소한 하루, 어쩌면 2일 동안 행군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적들을 따라 잡았을 때, 해적들은 거의 고다이 영지를 빠져 나가기 직전쯤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군." "과연, 그렇겠군.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하루의 시간이라는 것은 엄청난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미나모토 대영주는 그들을 격퇴할 것을 요청했네. 아무리 빠져나가기 직전의 적이라고 해도 싸워야 한단 말일세."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그때 타다마사 장군님께서는 단독으로 해적을 공격하지 마시고, 어떻게 해서든 고다이 영지의 군사들과 합동작전을 벌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고다이 영지측에서는 쉽게 해적들과 전투를 벌일 엄두를 내질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5천이나 되는 해적들과 전투를 벌이게 되면 당연히 자신들의 군사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니까 말입니다." 기가 막힌 계책이라는 듯 후지와라 영주는 무릎을 탁 치며 기뻐했다. "오호라, 그러니까 선택권을 그쪽에 주자는 말이군? 그렇게 되면 그들은 거의 다 빠져 나간 해적들을 때려 잡자고 피해를 입느니 그냥 놔 두는 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겠지?" "예, 바로 그것입니다. 주군." 후지와라 영주는 타다마사 장군에게로 시선을 돌려 명령을 내렸다. "자네에게 병력 5천을 주겠다.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전투가 붙는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게." 후지와라 영주가 동원 가능한 병력은 1만2천이 고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5천식이나 되는 병력을 맡긴다는 것은 엄청난 신뢰의 표시였다. 타다마사 장군은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힘차게 대답했다. "옛, 주군!" 허리에 길고 짧은 두 개의 검을 찬 타다마사 장군이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사메지마는 목소리를 낮추어 후지와라 영주에게 새로운 정보를 보고했다. "주군, 방금 전에 전령이 아주 재미있는 보고를 가지고 왔습니다." "뭔가?" 사메지마는 생각할수록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옛, 동쪽 해안선을 방어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던 고다마 장군이 이방인 남녀 둘을 발견하고 이곳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이방인들이라고?" "옛, 피부색이 새하얗고, 머리색도 색다른 이방인들이라고 합니다. 고다마 장군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한사코 여행중이었다고 주장한답니다. 어쩌면 대국이나 혹은 다른 곳에서 온 간자인지도 모르지요." 후지와라 영주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을 하다가 사메지마에게 물었다. "흐음, 여행중이라고?" "옛, 주군. 전령에게 물어보니 행색으로 보아 남자는 꽤 지체가 높은 것 같았고, 함께 있는 소녀는 하는 행동으로 보아 부인인지 하녀인지 잘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쨌건 그들이 들어 올 수 있는 통로는 후쿠오카밖에 없을 테니, 일단 후쿠오카에 잠입해 있는 간자에게 그들의 인상착의를 알리고 조사해 보라고 일렀습니다. 아마 조만간에 연락이 올 것입니다." 6살짜리 아이를 신부로 맞아들이는 경우도 있었기에, 소녀라고 한다면 물어보기 전에는 부인인지 하녀인지 분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메지마의 빠른 일처리가 마음에 드는지 후지와라 영주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알겠다. 그럼 확실한 정보가 나올 때까지 귀빈으로서 잘 대접하도록 해라. 하지만 감시는 철저히 하도록!" "옛, 아주 감시가 용이한 방으로 배정을 해 놨으니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혹시 이방인 소녀가 하녀일 경우를 대비하여 따로 머물 방도 마련하라 일러두었습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용의주도한 사메지마의 조치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궁금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영주도 이방인은 여태껏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흠, 이방인이라......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만나볼까? 아주 기대가 되는군." 사메지마는 영주의 말에 다급한 표정으로 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 중의 한 명이 화염의 술을 쓴다고 합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사메지마에게서 튀어나오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화염의 술이라고?" "옛, 고도의 수련을 쌓은 닌자들이나 쓰는 술법이기에 주군께서 친히 그들을 만나신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뭔가 생각해 보던 후지와라 영주는 사메지마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자네는 정보나 좀 더 모아 보도록!" "옛, 주군." "이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럼 편히 쉬시기를." 처음 만났을 때 아르티어스에게 접근하여 둥루젠 말로 통역을 했던 병사는 아르티어스와 묵향을 숙소로 안내해 준 다음, 얼른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뒤로 돌아섰다. 원래는 방까지 안내를 해야 마땅했지만 아르티어스의 첫인상이 워낙 흉흉했기에 조금이라도 같이 있기 싫었던 것이다. 병사는 혹시라도 아르티어스가 자신을 부를까 두려운지 도망치듯 황급히 사라져 버렸다. 병사가 가고 난 후, 아르티어스는 방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묵향에게 물었다. "이거 어디가 문이고, 어디가 벽이냐? 아니면 이게 전부 다 문인가? 내가 살다살다 손잡이도 없는 이런 문은 처음 본다. 그나저나 이건 도대체 어떻게 여는 거야? 에이, 성질나는 데 그냥 부시고 들어가?" 아르티어스가 은근히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리자 묵향이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문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문도 못 여는 바보 드래곤이라는 말이 묵향에게서 튀어나올까 봐 아르티어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딴청을 피웠다. "흐흠, 여기에 사는 호비트들은 여태껏 내가 봐 왔던 놈들과 배교했을 대 상당히 특이한 문화를 지니고 있는 것 같군. 너도 오면서 봤잖냐? 성도 아주 이상하게 만들어 놨고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처럼 오키타의 안내를 받아 영주가 살고 있는 성으로 왔을 때 자신들이 알고 있던 성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그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날아오를 듯 아름답게 지어져 있는 내성은 아르티어스는 물론이고 묵향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10미터는 됨직한 높은 성곽 위로 내성의 3층 누각이 아름답게 솟아올라 있는 성은 마치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놀란 것은 성 안으로 들어 갈수록 복잡한 구조였다. 돌로 치밀하게 쌓아올린 성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방어가 용이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아르티어스의 마음이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이곳도 결코 평화로운 곳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만 하면 이곳에서도 흥미진진한 하루하루를 만끽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내심 입이 찢어져라 웃었던 아르티어스였다. 그리고 성안으로 들어 왔을 때, 내부 구조를 본 아르티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밖에서 봤을 때를 생각한다면 성 안에도 분명 두터운 벽들로 가로막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실제의 모습은 그것과 아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빛을 싫어하는 뱀파이어가 사는 성처럼 어두컴컴한 좁은 복도가 마치 미로와도 같이 이리저리 뚫려 있었고, 그 복도의 양 옆으로는 희멀건 종이를 바른 문들이 쭉 연결되어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그들을 안내한 병사가 성의 정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들이 다른 영지의 간자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의식해 구석진 성벽을 따라 내성 가장 깊숙한 곳으로 곧장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가 뭐라고 주절거리든 묵향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나무 창살에다가 얇은 종이를 발라놓은 문에 다가가 이리저리 살펴보다 곧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이거, 미닫이 문이네. 아빠는 처음 보시죠? 이런 식으로 여는 것을." 드드드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묵향도 처음 보는 형태의 방이 그들을 맞이했다. 자신과는 달리 묵향이 너무 쉽게 문을 열자 슬쩍 인상을 찡그리며 안으로 들어서던 아르티어스는 금이 든 궤짝을 한 쪽에다 던져 놓고, 재미있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다. "호오, 여기는 주거문화가 아주 독특하구나. 방바닥을 온통 짚으로 깔아놨을 뿐만 아니라 벽은 없고, 사방이 온통 문이네. 네가 태어났던 중원도 이런 식이냐?" 묵향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흔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뇨, 이런 식으로 벽이 없으면 여름에는 시원할지 모르겠지만 겨울에는 얼어 죽기 딱 알맞죠." 말을 하던 묵향은 짚으로 만든 바닥을 천천히 만져 보더니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아마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는 방인가 봐요. 그나저나 이거 굉장히 촘촘하게 잘 만들었네. 그리고 여름에 문을 전부 열어 놓으면 굉장히 시원하겠죠?" 그 말을 듣자마자 아르티어스는 한쪽 방문을 드르륵 열며 말했다. "안 그래도 방구석도 좁은데 지금 열......?" 문을 열던 아르티어스는 뭘 봤는지 잠시 두 눈을 꿈벅거리다 도로 방문을 탁 하며 닫았다. 옆방에는 검을 든 무사들이 우글우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젠장, 설마 손님이 있을 줄은 몰랐네." 묵향은 피식 웃으며 아르티어스에게 빈정거렸다. "아빠는 꼭 문을 열어 봐야 사람들이 있는 줄 아시나 보죠?" 아르티어스는 대꾸도 않고 반대편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하지만 그 방에도 무사들이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문을 닫으려던 아르티어스는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둥루젠 말로 지껄였다. "젠장, 갑자기 문을 열어 미안하네." 그러자 그들은 당황한 듯 잠시 허둥거리다 벌떡 일어나 아르티어스에게 깊숙이 머리를 숙이며 뭐라고 지껄였다. 무례했던 것은 자신인데 그들이 더욱 고개를 조아리자 아르티어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로 문을 닫았다. 별 웃기는 놈들을 다 본다는 듯 투덜거리던 아르티어스는 뭘 봤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묵향에게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불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이미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의 흥미로움이 전부 사라진 아르티어스로서는 이젠 짜증만이 남아 있었다. "근데 이 자식들은 손님 접대가 왜 이 모양이야? 우리들이 무슨 마굿간 지기인 줄 아나. 짚으로 대충 만든 방에서 자라고 하다니, 영 기분이 안 좋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도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글세 말이에요. 아무리 봐도 참대가 없는데 어디서 자란 말인지 모르겠네요." "그건 그렇고 일단 쉬었으면 좋겠는데 어디에 앉지?" 연신 투덜거리며 이리저리 방안을 둘러보던 아르티어스의 눈에, 방 한쪽에 쌓여 있는 쿠션 같은 것들이 보였다. 아르티어스는 그것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젠장, 바닥이 더러우니 이것을 깔고 앉으면 되겠군." 쿠션을 가져다가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앉았지만, 아무래도 자세가 불편한 아르티어스였다. 불편한지 이리저리 몸을 뒤틀던 아르티어스는 쿠션을 벽 옆으로 옮긴 후 벽에 기대어 앉으며, 편안히 쿠션에 앉아 있는 묵향에게 물었다. "넌 그러고도 편안하냐? 나는 도통 자세가 불편해서 원." "글쎄요, 저는 내공 수련 때 보통 이런 자세로 몇 시간씩 앉아 있기에 별로 불편한지 모르겠는데요." 바로 이때 방문 밖에서 간드러지는 듯한 여성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자신들의 방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두 사람이었기에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한 번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스르륵 방문이 열렸다. 방문 밖에는 웬 여인이 꿇어 앉아 묵향과 아르티어스 쪽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깊숙이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두 사람이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발밑만을 보면서 방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와서는 다시 꿇어 앉아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살짝 뒤로 돌아 앉더니 다시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하는 것이었다. 절을 끝내고 그녀가 고개를 살며시 들었을 때, 그대서야 두 사람은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귀엽게 생긴 소녀였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아르티어스의 발을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놀란 듯하던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나긋나긋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나 싶어 어리둥절해 있는 아르티어스와 묵향의 반응에, 그녀는 이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들임을 그때서야 깨닫고 살그머니 다가와서는 두 사람의 신발을 벗겨서 방문 밖에다 내 놨다. "아, 이제야 알겠네. 여기는 신발을 신고 생활하는 공간이 아닌 모양이네요." 놀랍다는 묵향의 반응과는 달리 아르티어스는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젠장, 내 살다살다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방은 또 처음이네. 그나저나 이거 도무지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해서 죽겠구만." "그러니까 누구 하나 붙잡아서 말을 배우시라니까요. 아까 통역했던 그 병사 녀석을 불러 달라고 하려고 해도 말이 통해야 불러 올 것 아닙니까?" "에잇, 젠장! 어떻게 이 차원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미개한 호비트들의 말을 배워야 하는지, 귀찮게끔......" 아르티어스는 신발을 밖에다가 놔두고 들어오는 소녀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너, 이리 좀 와 봐." 그녀는 아르티어스가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모양을 보고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아 챈 듯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온 소녀의 머리에다가 손을 올렸다. 그녀는 움찔 했지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옆에서 묵향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 한마디 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다짜고자 머리에다가 손을 올리면 어떻게 해요? 그건 아주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라구요. 만약 어떤 놈이 내 머리에다가 그렇게 손을 올렸으면 대가리를......" "시끄러워! 한참 정신 집중을 하고 있는 판에 옆에서 말 걸지 말란말이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아르티어스는 소녀의 머리에서 손을 뗀후,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상대가 지닌 과거의 기억들. 둥루젠의 언어를 배우면서 비참할 정도로 동물적인 그들의 삶을 읽었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던 아르티어스였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오랜 시간 아르티어스가 가만히 앉아 있자 묵향은 약간 불안해졌다. 아르티어스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은 상대가 지닌 과거의 기억을 읽어서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기에 단 한 번에 언어는 물론이고 생활 습관과 관습 등 상대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지식가지도 흡수할 수 있었다. 이런 방법을 드래곤밖에 할 수 없는 것은 단시간에 쏟아져 들어오는 방대한 자료를 모두 기억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욱 큰 문제는 상대의 감정 상태까지도 모두 여과 없이 전달되어 온다는 것에 있었다. 상대가 이제는 거의 잊어 버린 과거의 기쁨이나 슬픔, 그리고 비참했던 기억이나 절망감까지도...... 드래곤이나 되니까 그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견뎌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것은 조금 자극이 지나쳤는지 아르티어스도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묵향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괜찮아요? 이번에는 마법이 실패한 모양이죠? 아니면 여기 말이 너무 복잡해서 이해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애써 대답을 회피했다. 위대한 드래곤인 그가 한낱 호비트의 삶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예전에 유희 삼아 돌아다녔던 호비트 왕국에 있던 그 어떤 노예들도 이 소녀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아르티어스는 생각했다. 그만큼 소녀의 기억에서 파악한 이곳의 관습이나 풍속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투에는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그게 아니다. 따로 좀 생각할 것이 있어서......"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녀는 이 이국적인 생김새의 청년이 마치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유창한 이 지방 사투리로 말하자 깜짝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곧 고개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저는 오키타 사마께서 보내신 하나코라고 합니다. 뭐든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저를 시켜 주십시오." "그래? 알겠다." 하나코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앞으로 두 분을 제가 모시려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가르쳐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르티어스는 소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약간 거만한 투로 말해 주었다. "나는 위대하신 아르티어스라고 한다." 그 말에 하나코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아루테에스?" 아르티어스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하나코를 노려봤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묵향이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리며 빈정거렸다. "아루테에스? 오, 이름이 괜찮은데요?" "이런 젠장! 재미있기도 하겠다." 아르티어스는 언짢은 표정으로 묵향을 째려 본 뒤, 묵향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하나코에게 말했다. "뭐 좋아. 아루테에스라고 불러라. 그리고 저놈 이름은 묵향이야. 아주 성질이 더러운 놈이지. 절대 겉모양에 속으면 안돼. 알겠어?" 소녀는 잠시 난감한 표정으로 묵향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무쿠향?" 이번에는 묵향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을 거의 만나 보지 못했던 묵향은 곧이어 생각을 바꿔 낄낄거리고 있는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묵향보다는 다크라고 해 봐요, 다크. 그편이 발음하기 쉬울 테니까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하나코에게 다시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이봐, 차라리 저놈 이름을 다크라고 불러라." 하나코는 곧 묵향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옛, 다쿠사마." 순간 묵향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더 찌그러졌다. "에잇, 이놈이 종족은 혓바닥이 짧나? 왜 이렇게 발음을 못하는 거야? 젠장, 다쿠가 뭐야, 다쿠다?" 투덜거리던 묵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하나코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래, 다크든 다쿠든 너 편한 대로 불러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젠장, 이제 겨우 4천 살인데- 이제 대충 발음 문제에 대한 합의가 끝났기에 하나코는 깊숙이 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루테에스 사마, 다쿠 사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아르티어스와 묵향의 인상이 팍 찌그러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코는 절을 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나코는 절을 끝내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먼 여행을 하셔서 피곤하실 텐데, 목욕 준비를 시킬까요?" 하나코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목욕을 하겠냐고 묻는데 어떻게 할래?" 묵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에이, 일주일 전에 했잖아요. 무슨 목욕을 그러게 자주 해요?"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하루에 한 번씩 꼭 목욕을 하거든. 아주 광적일 정도로 청결한 족속들이 살지." 묵향은 놀랍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되물었다. "정말이에요? 무슨 목욕을 그렇게 자주 해요?" "여기 여름은 아주 습하면서도 후덥지근하거든. 그래서 그런 습관이 생긴 모양이야." "하지만 지금은 봄이잖아요. 그리고 이 정도면 깨끗한 데 귀찮게 뭐 자주 목욕을 하고 그래요?" 중원에서나 크라레스에서도 어쩌다 생각나면 가끔 목욕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 묵향으로서는 하루에 한 번씩 목욕을 한다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을 보며 혓바닥을 끌끌 차더니 하나코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했다. "목욕은 됐으니까 그냥 물러가거라." 아르티어스의 말에 하나코는 난처한 듯 계속 목욕을 권했다. "저..., 하지만 오키다 사마께서 손님들께 목욕하실 것을 꼭 권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아르티어스는 살짝 찡그리며 하나코에게 물었다. "오키타? 오키타가 어떤 놈인데 감히 목욕을 하라 마라 헛소리를 하는 거냐?" "저 이런 말씀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오키타 사마께서 두 분의 몸에서 야릇한 냄새가 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릇한 냄새라고?" 아르티어스는 즉시 하나코에게서 읽어낸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어 봤다. 곧이어 그의 머리 속에 잘달막하게 생긴 무사 한 명이 하나코에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명령하는 것이 떠올랐다. "너는 손님들에게 목욕할 것을 반드시 권하도록 해라. 영주님을 뵙는 자리에서 그따위 노린래를 풍겨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 "옛!" 하나코를 바라보던 오키타는 미덥지 않은 듯 다시 엄중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의 옷도 가져다가 깨끗하게 세탁해라. 만약 영주님께서 그들의 옷이 더럽다든지, 혹은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말씀을 단 한마디라도 하신다면 너는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알겠느냐?" "옛, 명심하겠습니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군." 혼자서 중얼거리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목욕을 해야겠구나." "왜요?" "너하고 내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주장하는 개 코를 떼다 붙인 듯한 놈이 있어서 말이야."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그러면서 묵향은 자신의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아본 수,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자 벌컥 화를 냈다. "어떤 미친놈이 그딴 소리를 합니까? 내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난다고요?" "글쎄 그런 놈이 있다. 저 소녀를 생각해서 목욕을 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묵향은 하나코를 힐끗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가 목욕하는 것하고 저 계집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아예 그 놈의 잘못된 코를 잘라 버리는 것이 손쉽고 빠르죠." "상관이 있지. 네가 목욕 안하면 저 소녀의 목이 잘리거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묵향은 순간 얼마 전의 일이 기억났다. 아르티어스의 화이어 볼에 맞고 옷에 불이 붙었던 병사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그의 상관은 불을 꺼서 부하를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단칼에 병사의 목을 날려 버렸다. 부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일단 불을 끈 후에 부하의 상태를 보고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병사의 화상은 생각만큼 그렇게 심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부하의 고통을 덜어 주자는 것이 다니라, 아르티어스를 제압하는 데 실패한 것에 대한 처벌을 한 것일 것이다. "여기는 목 자르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놈들이 사는 곳인 모양이군요." "유감스럽게도 그게 사실이야. 내 여기저기 돌아다녀봤지만 이렇게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사는 호비트들은 이곳이 처음이다. 자, 목욕이나 하러 가자. 하녀의 목을 자르겠다고 선언한 그 녀석의 목을 잘라 버린다면 우리도 그놈과 다를 게 없어지는 거잖니. 차라리 그냥 목욕 한 번 해 주는 게 속 편하지." 묵향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그러네요."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하나코의 안내를 받아 목욕탕으로 갔다. 묵향은 하나코의 뒤를 따라가며 대단히 신기하다는 듯, 종종거리며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관찰했다. 그러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도대체 걸음걸이가 왜 저래요? 그냥 쭉 앞으로 걸으면 될 것을, 왜 저렇게 종종걸음으로 걷는 거죠? 뒤 따라 가려니까 정말 속 터져 죽겠네."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리는 묵향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었다. "옷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렇게 걸을 수밖에 없는 거다." "옷이 어때서요?" "여기서 여자들이 입는 옷은 두 다리가 움직일 공간이 아주 적어. 그래서 저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는 거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묵향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저따위 옷을 입고 살 수가 있죠? 나 같으면 답답해서 걸을 때마다 짜증이 날 텐데." "뭐, 습관이 되면 괜찮지 않겠냐? 이곳에는 여자가 입는 옷은 저런것밖에 없으니까 선태의 여지도 없겠지만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코의 옷을 가리킨 묵향은 다짐하듯 말했다. "저따위 옷을 나에게 입힐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세요. 아무리 아빠라고 해도 그때는 참지 않을 거라구요." 여태껏 묵향에게 여자용 옷을 많이도 가져다 입힌 아르티어스였기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역효과일 줄이야. 아르티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내심으로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는 듯 묵향에게 이곳의 옷을 이것저것 입혀보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상상을 하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사진의 생각대로 잘 어울리자 기분이 좋은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나코의 뒤를 따라가던 묵향은 왠지 온 몸에 소름이 돋자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르티어스가 음흉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헤벌쭉 웃고 있는 것이었다. 묵향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짜증이 나서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 붙였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징그럽게 웃는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시치미를 떼며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아, 아니다. 그냥 하나코의 뒷모습이 너무 예뻐서 말이야. 네가 보기에도 특히 엉덩이가 기가 막히지 않니?" "젠장, 늙었으면 나이 값을 하셔야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빨리 따라 오시기나 하라구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약간 기분이 언짢은지 나직한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젠장, 이제 겨우 4천 살밖에 안 되었는데 늙은이라니? 아직도 팔팔하구만." 미로처럼 복잡한 실내를 앞장서서 한참을 걸어가던 하나코는 어느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살짝 뒤로 돌아서서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가 목욕탕입니다." 하나코의 안내를 받으며 문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방이 나왔다. 그 방에는 또 다른 소녀가 한 명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중하게 아르티어스와 묵향에게 절을 한 후, 선반에서 깨끗한 수건 두 장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먼저 이쪽에서 옷을 벗으시고, 반대편 문으로 나가시면 탕이 있습니다." 그 소녀는 탈의실처럼 보이는 작은 방을 가리켰다. 아르티어스는 그 소녀의 말대로 탈의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묵향도 아무 생각 없이 아르티어스의 뒤를 따라 탈의실로 들어 가려고 했다. 바로 이때 그 소녀는 묵향의 옷깃을 살짝 잡아 당기며 말했다. "손님은 저쪽입니다." "뭐라고?" 그러자 그 소녀는 아르티어스가 들어간 남성용 탈의실 바로 옆에 있는 여성용 탈의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님께서는 저쪽 탈의실을 이용해 주십시오." 그제서야 묵향은 상대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기야, 비좁은 곳에 둘이 들어가서 옷을 벗을 이유가 없지." 묵향이 옷을 벗고, 뒤쪽에 나 있는 물을 열고 들어가자 희뿌연 수증기 사이로 여태껏 알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틀린 목욕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 누워도 될 만큼 긴 나지막한 탁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욕조가 놓여 있었다. 중원과 저쪽 세상에 있을 때는 시냇물로 씻거나 아니면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작은 통에서 목욕을 해 본 경험밖에 없었던 묵향으로서는 목욕탕에 있는 욕조의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욕조는 장정 이십여명이 함께 들어가 목욕을 할 수 있을 만큼 컸고, 이미 뜨거운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우와, 엄청나게 큰 욕조군. 들어가서 수영을 해도 되겠는데." 그러자 언제 들어왔는지 아르티어스가 옆에 서며 동감한다는 듯 맞장구쳤다. "참내, 이것 물 낭비야.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 크기면 되지. 이렇게 큰 탕이 필요할까? 원, 오우거가 목욕할 것도 아니고 말이야." "글쎄요, 초대형 욕조 하나만 있을 것을 보면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목욕하는 방식인 모양인데요. 안 그래요?" "워,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구나. 자 오랜만에 아들하고 오붓하게 함께 목욕이나 즐겨볼까? 흐흐흐." 욕조에 들어서던 묵향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목욕물이 엄청나게 뜨거웠기 때문이다. "이거 물이 조금만 더 뜨거웠다면 아예 사람 잡겠는데요?" "글쎄다, 어쨌건 들어가 있으니 기분은 괜찮군." 한 10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탈의실 쪽의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웬 여자 둘과 덩치 좋은 중년 남자 둘이 들어왔다. 원래 목욕이라는 것은 혼자서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묵향에게 그것은 가히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물론 과거 자신의 노예였던 세린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했들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묵향이 여자였을 때였지 않은가? 그리고 목욕하는데 무슨 시중을 들 것이 그렇게 많다고 저렇게 떼거리로 우르르 몰려 들어온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목욕탕에 들어온 중년 남자들은 한쪽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여자들은 앞으로 나서며 묵향과 아르티어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들은 나지막한 탁자를 가리키며 간드러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에 사는 여자들은 모두 다 일부러 목소리를 곱게 발음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하나코의 기억을 읽은 아르티어스는 그녀가 왜 그리로 오라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묵향에게 한쪽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가서 누워." "왜요?" "여기서는 목욕 후 안마를 받거든. 해 봐라, 아마 그런대로 기분 괜찮을 거다."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아는지 의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빠는 이런 식으로 목욕해 보신 적이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물론 내가 받아 본 적은 없지만, 내가 말을 배운 그 하녀의 기억에는 이런 것들이 있더군. 그래서 아는 거지." 그제서야 묵향은 알겠다는 듯 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아무 말 없이 탁자위에 엎드렸다. 아무리 시중을 들러 들어온 여자라고는 하지만 벌거숭이 모습을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 왠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하녀는 묵향의 등에 꼼꼼하게 향유를 발랐다. 한참 동안 부드러운 손길로 묵향의 등 구석구석에 향유를 바른 그녀는 묵향에게 뭐라고 말하며 돌아누우라는 손짓을 했다. 묵향이 그냥 가만히 엎드려 있자 옆에 있던 아르티어스는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리며 말했다. "빨리 돌아누우라고 하잖아!" "젠장, 뭘 돌아누워요? 그냥 내가 바른다고 말 좀 해 줘요." "어쭈? 너 하녀 목이 날아가는 거 구경하고 싶냐? 죄도 없는 하녀가 너 때문에 죽는다면 꿈자리가 아∼주 좋을 거다. 그럼, 아주 상쾌하겠지." 아르티어스의 이죽거림에 묵향은 하는 수 없이 투덜거리며 돌아누웠다. 아르티어스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자기 때문에 하녀의 목이 날아 간다면 별로 기분이 유쾌할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지금 현재 남자의 몸이라고는 하지만 그 전에는 여지의 몸으로 오랫동안 살기도 했지 않은가? 거기에다가 이 나이에 손녀뻘도 안 되는 애들한테 몸 좀 보여준다고 해서 뭐 어쩌겠는가 하며 스스로를 자위하는 묵향이었다. "에잇, 젠장!" 묵향이 투덜거리며 돌아눕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는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받은 명령으로는 분명히 손님이 남녀 한 쌍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묵향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깜짝 놀란 것이다. 더군다나 감히 상상하기에도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년이었으니...... 하녀는 아마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다가와서는 더욱 은근한 손길로 묵향에게 열심히 향유를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밀한 부분까지 그녀의 손길이 슬쩍슬쩍 미치자 묵향의 안색은 똥이라도 씹은 듯 찡그려졌다. 한동안 열심히 향유를 바르던 하녀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지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성과 함께 뭐라고 말을 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아르티어스는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쑥스러운 마음에 눈을 감고 있던 묵향은 번쩍 눈을 뜨고 왜 웃느냐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젠장, 갑자기 왜 웃어요? 어라? 저 여자는 향유를 바르다 말고 왜 저래?" "큭큭큭, 와핫핫핫핫!"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이제는 아예 숨이 넘어 간다는 듯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한동안 웃던 아르티어스는 겨우 웃음을 멈추고 묵향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킥킥, 하녀의 말이 너의 그것이 아주 훌륭하다는구나! 와핫핫핫." 아르티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묵향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어 자신의 사타구니를 바라보았다. 하녀의 손길에 자극을 받았는지 그의 신체 일부가 크게 팽창해 있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묵향은 얼른 몸을 뒤집어 엎드리며 내심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자극을 받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저 망할 계집애는 혼자 보고 말지 그걸 밝혀 가지고 망신을 줘?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목이 달아나게 그냥 놔 두는 건데. 그리고 아빠도 그래! 말로는 사랑하는 아들이라며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 놓으면서 계집하고 맞장구를 치며 나를 비웃어? 성질 나는데 남자 모습으로 확 바꿀까 보다." 하녀들이 향유를 바르고 뒤로 물러서자 여태껏 꿇어 앉아 있던 사내들 중의 한 명이 일어섰다. 그는 묵향의 몸을 천천히 안마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목욕 후에 받는 안마. 거기에다가 안마를 하는 사내는 성에 소속된 인물이라서 그런지 정말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묵향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신의 근육들이 풀리며 온 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난생 처음 안마를 받아 본 묵향은 기분 좋은 감탄사를 내지르며 말했다. "오우, 이 정도면 목욕을 하루에 한 번식 할 만도 한데? 정말 기분 좋군......" 하지만 이런 목욕을 무려 7번식이나 한 후에야 영주를 만나게 될 줄은 묵향도, 아르티어스도 이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묵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옷을 찾았지만, 옷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빠, 옷이 없어졌어요. 이거 어떤 새끼가 훔쳐갔지? 잡히기만 하면......" 묵향보다 조금 늦게 목욕을 마치고 뒤따라 나오던 아르티어스는 아들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없어진 게 아니라, 세탁을 하기 위해 가져간 거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투덜거렸다. "뭐라고요? 허락도 안 받고 남의 옷을 가져가도 되는 거예요?" "흠, 뭐 여기 방식이 그러면 그러려니 해야지. 자, 대신 여기 있는 이 목욕옷을 입어라."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집어 준 목욕옷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중얼거렸다. "어라? 이거 가운하고 비슷하게 생겼네." "생긴 것만 비슷한 게 아니라 용도도 비슷한 거다. 자, 가자."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목욕탕 밖으로 나오자, 처음에 그들을 안내해 왔던 하나코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려는 촉촉하게 물기에 젖은 묵향과 아르티어스의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황홀한 듯 바라보더니, 갑자기 정신이 든 듯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곳에서의 첫 식사는 묵향에게 있어서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 목욕을 끝낸 후 하나코가 식사를 가져오자, 묵향은 가장 먼저 대나무로 만든 작은 젓가락을 집어 들며 추억에 잠겼다. "호오, 여기서도 젓가락을 쓰네? 그런데 중원에서 사용하던 것보다는 길이가 엄청 짧구만." 하지만 일단 젓가락이 가져다 준 추억에서 깨어나자, 곧이어 밥상에 놓여진 음식들이 묵향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고 묵향은 기도 안 찬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게? 이게 뭐야?" 소꿉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자신의 앞에 놓여진 작은 밥상에는 조그만 그릇들이 옹기종기 다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밥 한 공기와 국 한 그릇. 그리고 구운 작은 생선 한 마리가 담긴 접시 하나. 얇게 무를 썰어 놓은 접시 하나. 마지막으로 작은 열매 같은 것이 담긴 접시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한 입에 다 털어넣어도 될 정도로 양이 작았다. "이걸 먹고 어떻게 배를 채우라는 말입니까? 안 그래요?" 묵향이 분개해서 말했지만, 아르티어스는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이미 하녀의 기억을 더듬어 본 그는 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오히려 묵향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여기 사는 놈들은 다 이렇게 먹어." "그래요? 젠장! 어쩐지 여태까지 본 놈들이 몽땅 다 키가 작달막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 묵향은 투덜거리면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밥을 젓가락으로 뜨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 쌀이 좀 이상한데요? 무슨 쌀이 이렇게 끈기가 있죠? 원래 잡으면 후두둑 떨어져야 정상인데......" "여기 쌀은 모두 다 그러니까 투정하지 말고 먹어. 저 먼 옛날부터 여기 사람들은 이런 밥을 먹고 살았으니까 말이다." "젠장, 아빠가 태어났던 그 세계는 딴 건 몰라도 먹는 것 하나는 별로 불만이 없었다구요. 어떤 면에서는 중원의 요리와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있었거든요." 묵향이 계속 투덜거렸지만 아르티어스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거기로 돌아가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중원이라는 곳을 찾아 헤맬 이유가 없잖니?" 아르티어스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묵향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열심히 음식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음식 같은 사소한 문제로 중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생선 뼈다귀마저 다 씹어 먹은 후에야 묵향은 아쉬운 듯 밥상을 물렀다. "젠장, 괜히 입맛만 버린 것 같네. 뭐라도 더 먹어야 양이 찰 텐데." 식사가 끝나자 하나코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가져왔다. 묵향은 차를 보고 반가운 듯 입을 열었다. "이야, 여기서도 차를 마시네? 이게 얼마 만이냐?" 단숨에 차를 마셔 버린 묵향은 빈 잔을 하나코에게 내밀며 외쳤다. "한 잔 더!" 잔을 받아든 하나코는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며 뭐라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당연히 알 수 없었던 묵향은 아르티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묵향에게 설명해 줬다. "쯧쯧, 차는 그렇게 마시는 게 아니야. 천천히 향을 음미하면서 마셔야지, 무식하게 냉수 마시듯 벌컥 들이키다니."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무슨 같잖은 소리를 하느냐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뭘 그렇게 따지고 그래요? 보니까 건데기도 없는데 그냥 마시면 되지." 원래 중원에서는 기름진 음식을 선호하기 때문에 식후에 차는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수나 다름없었다. 물론 상류층의 사람들은 예의를 따지며 차를 마시겠지만 묵향과 같은 서민들은 편하게 차를 마셨던 것이다. 묵향은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 투덜거리며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한참을 누워 있던 묵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라? 처음에 봤을 때는 꽤 양이 작아 보였는데, 제법 든든하네. 거참, 이상하군? 이게 보기보다 양이 많은 건지, 아니면 아까 사슴을 먹어서 그런 건가?" 배가 부르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묵향은 히죽 웃었다. -------------------------------------------------------------------------- -화염의 술을 쓰는 닌자- 성내의 3층 중심부에 마련되어 있는 영주의 밀실에는 후지와라 영주와 그의 심복 부하 사메지마가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성내의 3층은 영주와 그의 가족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기에, 그 경비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삼엄하였다. 그렇기에 3층에 들어올 수 있는 자는 오직 영주가 신뢰하는 최측근 몇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밀실은 3층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영주는 아주 비밀스런 대화를 하고 싶었는지 자신의 경호대장만을 대동한 채, 사메지마와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만큼 후지와라 영주는 사메지마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주군께서 그들을 직접 만나시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다시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괜찮다. 일단 나는 그들을 만나기로 결정했네." "주군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며칠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아무래도 좀 더 조사를 해 본 후에 그들을 만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여기저기 첩자들을 보내 봤지만, 어디서도 그런 특이한 용모를 가진 이방인이 상륙했다는 보고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해적들이 사용하는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상당히 수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아직까지 해적들과의 연관성을 밝혀 내지는 못했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증명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메지마의 말에 후지와라 영주는 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겨우 해적들의 말을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 해적의 첩자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수는 없지 않겠나? 나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그들이 해적일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네. 첫째, 그들은 해적과 용모가 완전히 틀리다고 들었네. 해적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눈에 띄는 용모의 첩자를 파견할 리는 없겠지. 그리고 둘째, 첩자는 원래 그들이 가고자 하는 침략로를 중심으로 배치하는 것이 정석이 아닌가? 그런데 해적들은 지금 북항하면서 노략질을 하고 있다고 자네가 보고했지 않나? 만약 저들이 해적의 끄나풀이라면 해적들은 이쪽으로 왔어야지. 안 그런가?" 물론 그들이 첩자가 아니라면 다행이겠지만 마음을 놓기에는 사메지마의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그렇기에 후지와라 영주가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어도 사메지마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주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 자네 생각은 뭔가?" "예, 북쪽 해적들의 경우 왜구와는 달리 여태껏 동북 지방의 해안을 약탈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전례가 없을 정도의 큰 규모로 훨씬 남쪽으로 내려와서 고다이 영지에 상륙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맞춰서 그 이방인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입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후지와라 영주는 사메지마의 말을 듣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호쾌하게 웃었다. "핫핫핫, 그 정도는 우연의 일치로 볼 수도 있지. 그건 그렇고, 해적들이 고다이 영지를 쓸어 버린 것은 정말이지 통쾌한 일이었어.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거기에다가 해적들이 남하하여 이쪽 미우다 영지로 들어오지 않고 북상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것도 다 주군께서 평소에 부처님을 열심히 섬기신 보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잠시 말을 멈춘 사메지마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는 듯 안타까운 눈길로 후지와라 영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건 저에게 며칠만이라도 더 조사할 시간을 주십시오. 신분이 불분명한 자들과 주군께서 만나시는 것은 너무 위험이 큽니다. 혹시라도 그들이 주군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핫핫핫! 그만두게나. 만약 그들이 자객이어서 내가 죽게 된다면, 그것도 다 내 운명이겠지. 어쨌든, 그들을 지금쯤 내가 만나 봐야 해. 더 이상 시간을 끌 수가 없거든. 만약 그들이 딴 곳을 둘러 보겠다면서 떠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 그동안은 내가 일이 바쁘다든지, 혹은 사냥을 떠났다든지 해서 시간을 끌묵향16 차례 털이 숭숭난 다리 신을 사칭한 사기 행각 오! 북극성 계속되는 사기행각 연기파 배우 아르티어스 둥루젠의 수도 고기를 굽는 데는 혈수마공이 최고 번개의 신 당케 탱게르 짜식들이 꼭 패야 믿나 서서 오줌 누는 여신 초죽음이 된 묵향 잔인한 해적들 혹시 여행 오셨나 보죠? 문도 못 여는 바보 드래곤 젠장, 이제 겨우 4천 살인데 화염의 술을 쓰는 닌자 잔대가리의 대결 묵향, 청혼을 받다 이따만큼 큰 사케 싸움 구경이 최고 한밤중의 침입자 털이 숭숭 난 다리- 푸석푸석한 흙먼지만 날리는 황량한 땅이 끝없이 이어지는 벌판에도 봄은 찾아오는지 여기저기서 푸르른 새싹들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 사위는 점차 어둠에 잠겨들며 붉은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둥루젠의 한 작은 촌락민들은 마을 옆 공터에 피워놓은 화톳불 주변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무사히 보내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맞이해서인지 먹을 것은 별로 없었지만 촌락민들의 안색은 밝고 넉넉해 보였다. 화톳불에 걸려 있는 거대한 솥에는 그동안 비축해 두었던 얼마간의 고기와 나물을 아낌없이 넣고, 모든 촌락민들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국을 끓이고 있었다.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끓는 국에서 퍼져 나오는 구수한 냄새는 촌락민들의 코를 사정없이 사로잡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촌락민들이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하던 어느 순간이 었다. 번쩍! 지상에서 약 3미터쯤 되는 공간에서 갑자기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촌락민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고 그 빛을 바라봤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흐르자 빛 모래 가운데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더 더욱 촌락민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였다. 빛 무리의 중심 부위가 시커멓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둥그런 물체 두 개가 불쑥 튀어나오며 땅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사람은 순식간에 균형을 잡으며 우아하게 착지했다. 일단 착지에 성공한 그들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살펴보았다. "으아아악!" "헉!" 촌락민들은 허공에서 사람이 튀어나오자 기겁을 하며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놀라기는 빛 속에서 튀어나온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차원이동을 끝내자마자 자신들의 눈앞에 웬 털이 숭숭 난 시커먼 것들이 괴성을 지르며 와글거리는 것을 보자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던 것이다. "이, 이건 뭐라고 하는 몬스터냐?" 아르티어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적으로 중얼거리자, 이미 냉정을 되찾은 묵향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에이, 씨. 또 잘못 왔잖아요." 묵향의 투덜거림에 아르티어스는 천천히 자신들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커먼 것들을 둘러봤다. 처음 봤을 때는 너무 지저분하여 몬스터라고 착각할 정도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호비트였다. 그 호비트들은 모두들 화톳불 주변에 둘러앉아 자신들을 경악한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는지 아직 덜 익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호비트도 있었고, 볼이 불룩 튀어나오도록 입 안 가득 음식물을 머금고 있는 호비트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놀라서인지 아예 음식물을 삼킬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자신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없이 많이 여행을 다녀본 아르티어스였지만, 이렇게 지저분하고 멍청하게 생긴 호비트는 난생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어째 생긴 것은 호비트 같은데, 하고 있는 꼬라지는 오크냐?" 아르티어스가 몬스터라고 착각할 정도로 그 촌락민들의 차림새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들 모두 털가죽으로 몸을 두르고는 있었지만, 이들이 입고 있는 것은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너무 단순했다. 그저 큼직한 털가죽을 대충 잘라서 이어 붙여 몸에 둘러놓은 형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가죽을 가늘고 길게 잘라서 허리를 질끈 동여매어 상체에 두르고 있는 털가죽을 고정했다. 그 털가죽 밑으로 또 다른 가죽이 삐쭉 내려와 있는 것을 보면 아마 하의도 가죽으로 만들어서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아르티어스가 어이가 없었던 부분은 그들의 머리 모양이었다. 수컷들은 앞머리를 빡빡 밀었고, 뒷머리는 한 가닥으로 길게 땋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암컷들은 머리를 밀지는 않았지만 머리카락을 여러 가닥으로 땋아서, 그 끝에 갖가지 색깔의 수실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있었다. 좀 늙은 몇몇 암컷들은 그 끝에 작은 방울을 달고 있기도 했다. 나름대로 모양을 낸다고 수실이나 방울을 달고는 있었지만 머리카락을 얼마나 감지 않았는지 온통 기름기로 번질거리고 있었다. 그런 괴상한 머리 모양에다가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그 위에 털가죽으로 잔뜩 몸을 감싼 것들이 우글우글 오며 있으니 아르티어스로서는 몬스터들이 떼거리로 모여 있는 줄 착각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그들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을 때, 촌락민들도 얼이 빠진 듯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괴상한 복장의 이방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짐승 가죽을 그저 걸치고 있는 자신들에 비해 이방인들의 옷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바람만 불어도 살짝 날릴 것 같은 하늘하늘한 천으로 된 옷이었다. 그리고 이방인들 중의 한 명은 정말이지 특이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오도록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피부색은 창백하리 만큼 희었다.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르티어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번엔 뭐가 잘못된 거지? 그만큼 좌표가 정확한지 몇 번씩이나 확인했는데 말이야." 이리저리 손가락을 꼽아보며 아르티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묵향의 얼굴은 확 찌그러졌다. "아버지! 또 좌표를 잘못 계산한 거예요?" "글쎄다, 난 분명히 제대로 한다고 했는데...... 그나저나 내 살다 살다 이런 미개한 호비트들은 처음 보는군." 아르티어스의 눈에 비친 미개한 호비트들은 지금 난리가 아니었다. 멍하니 자신들을 바라보던 호비트들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암컷들은 비명을 지르며 새끼들을 데리고 부리나케 뒤로 달아났고 수컷들은 허겁지겁 자신의 주위에 놓여 있는 창이나 활을 주워든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의 몇 명은 허리에 찬 반월형으로 생긴 길쭉한 칼을 뽑아들고 있었다. 일단 대충이나마 무장이 갖춰진 수컷 몇몇이 창을 들고, 자신들 딴에는 잔뜩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보이며 아르티어스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인지 그들이 쥐고 있는 창 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심드렁한 눈빛으로 하는 꼴을 바라보던 아르티어스는 그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자 갑자기 인상을 팍 찡그리며 소리쳤다. "에이, 씨. 이것들은 목욕도 안 하나? 내 코가 썩는다! 썩어!" 아르티어스의 말대로 그들이 다가오자 코가 마비될 정도로 강한 악취가 풍겨 나왔다. 때가 꼬질꼬질한 털가죽 옷이나 꾀죄죄한 용모로 미루어 봤을 때 아주 비위생적인 생활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화톳불 저 뒤편으로 여러 채의 이동식 천막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한곳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민족은 아닌 듯했다. 건장한 수컷들 몇몇이 무기를 들이밀며 위협적인 어조로 외쳐대고 있었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위협적인 몸짓과 괴성에도 불구하고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묵향에게 입을 열었다. "거참, 술에 취했을 때 봤으면 완전히 오크로 보이겠군, 그나저나 저 놈들이 뭐라고 하는 거냐?" "위대한 드래곤이신 아버지가 모르시는데, 미천한 호비트 따위인 제가 어찌 알겠어요?" 왠지 비비꼬인 묵향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맞받아쳤다. "같은 미천한 호비트니까, 혹시 알까 해서 물어본 거지." 안 그래도 또 다시 차원이동이 잘못된 것 같아 기본이 좋지 않았던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빈정거림에 화가 나는지 버럭 소기를 질렀다. "에잇, 젠장.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차원이동 따위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반응에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차원이동 따위? 감히 차원이동에 "따위"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놈은 네놈밖에 없을 거다. 드래곤이 비록 신과 맞먹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아마 전 드래곤 일족 중에서 차원이동을 경험해 본 드래곤은 나밖에 없을 걸?" 거드름을 피우며 아르티어스가 목에 힘을 주어 말하자 묵향은 웃기지 말라는 듯 빈정거렸다. "어호! 그래요? 그럼 다른 드래곤들은 능력이 없어서 차원이동을 못한다는 말씀이네요? 혹시 차원이동이 어려워서 못하는 게 아니라, 할 수는 있지만 귀찮아서 안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아버지가 지금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다 마법 실력이 강하다고 착각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죠? 할아버지도 차원이동을 안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묵향의 말에 한껏 거드름을 피우던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차원이동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간만에 기분 좀 내려했더니 이런 식으로 빈정거리다니...... 물론 그 말이 사실이기는 했지만 아르티어스의 기본은 순식간에 사늘하게 식어버렸다. "그, 그게 자식으로서 애비에게 할 말이냐? 너를 위해서 이렇게 별 같잖은 차원을 떠돌아다니는 나에게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분노에 찬 표정을 본 묵향은 약간 찔끔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기분을 맞춰주기 시작했다. "에이, 그냥 농담한 것 가지고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요? 그나저나 이렇게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다니니 정말 좋네요. 아버지도 여행 좋아하시잖아요? 기분 푸시라구요." 묵향의 너스레에 아르티어스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행? 여행이라고? 이게 뭐가 내가 좋아하는 여행이라는 말이냐? 내가 원하는 여행은 이런 게 아니었다. 나는 아들내미하고 오붓하게 여행하고 싶었단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하고 있잖아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의 인상은 확 찌그러졌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버럭 소리쳤다. "머시라? 사랑스러운 내 아들은 너처럼 다리에 털이 숭숭 나지는 않았어!" 이렇게 서로의 대화가 겉도는 것은 아르티어스의 묵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아들인 다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살던 차원을 벗어나자 저주는 풀려 버렸고, 그 리고 아르티어스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 다크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물론 묵향이 다크와 동일 인물임을 알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현재의 모습에는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성난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자, 묵향의 시선은 그의 손가락을 따라 자신의 다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이어 예쁜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스커트 자락 밑으로 시커먼 털이 숭숭 난 자신의 다리통이 보였다. "허걱!" 그제서야 묵향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원래가 차원이동을 하면 몸만 이동할 수 있을 뿐, 신체를 제외한 그 어떤 물건도 함께 이동하지 못한다. 검 같은 무기는 물론이고, 옷가지 하나 조차도......저번 차원이동을 할 때 벌거벗은 몸으로 떨어져 얼마나 놀랐던가. 차원이동이 끝나는 그 짧은 순간에 혹시나 중원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묵향은 그것을 잠시 잊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묵향이 입고 있는 것은 아르티어스가 차원이동이 끝나는 시점에 마법으로 만들어준 옷이었다. 하지만 만들어 준 옷이 이게 뭐란 말인가? "이, 이게 뭐야?" 묵향이 어이가 없어 중얼거리자 아르티어스는 화가 난 어조로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싫으면 벗어!" 아르티어스의 통렬한 일격에 묵향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한참을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던 묵향의 인상이 서서히 험악하게 굳어져갔다. "정말 이렇게 유치하게 나올 거예요?" "뭐가?" "왜 이따위 옷을 입히느냔 말이에요? 나는 여자가 아니라구요. 남자란 말입니다. 자, 봐요!" 묵향은 털이 숭숭 난 자신의 다리가 잘 보이도록 스커트 자락을 번쩍 위로 치켜 올리며 외쳤다. "도대체가 이런 다리에 스커트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묵향의 표정이 점점 더 사나워지자, 아르티어스는 찔끔거리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성질을 건드렸다가는 저 더러운 성격에 뒷감당을 하기가 버거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흐흠, 그럼 옷에 어울리게 여자로 변하면 될 것 아니냐? 그 방법은 아주 오래전에 너한테 가르쳐 준 것으로 아는데 말이다." "오호! 아버지의 속셈이 그거였군요. 정말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제기랄! 그딴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차원이동을 제대로 할 리가 없지!" 말을 하던 묵향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가 힘들었던지, 입고 있던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벗어 발기발기 찢어 버렸다. "저하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 그렇게 싫으시다면 차라리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죠." 차가운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살살 구슬렸어야 하는데, 저 지랄같은 성격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너무 다그친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고 내심 후회하는 아르티어스였다. 급히 마법으로 묵향의 옷을 만들어 주며 아르티어스는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번쩍! 빛과 함께 묵향의 벌거벗은 몸 위에 뭔가 아른거리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인가 단정한 여행복이 입혀져 있었다. "에이~, 뭐 이런 사소한 걸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냐? 내가 비록 좀 심한 장난을 쳤다고 아빠에게 그렇게 화를 내면 못쓰지. 자, 옷도 이렇게 새로 만들어 줬잖니? 이제 그만 화를 풀거라. 마음에 안 들면 말해. 마음에 드는 걸로 한 벌 쫘악 뽑아줄 테니까 말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해 주면 될 것을, 계속 사소한 것을 가지고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아르티어스에게 묵향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자신만을 의지하여 이 먼 곳까지 따라와 준 아르티어스가 아닌가? 그렇다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힘들었기에 내심으로만 아르티어스에 대한 욕설을 퍼붓고 있는 묵향이었다. -신을 사칭한 사기행각- 묵향의 눈치를 보던 아르티어스는 화제를 돌릴 겸해서 호비트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저 좀들은 어떻게 할 거냐?" 묵향이 야만인들을 바라보니, 그들은 아까보다 더욱 부들부들 떨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방금 전에 자신의 옷이 마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대단히 놀란 듯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공격할 의사는 없는 듯한데, 어디 딴 데로 가 보죠. 설마 이 근처가 모두 다 이런 야만족들만 살고 있겠어요?" 아르티어스는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음흉스레 미소를 지으며, 묵향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오랜만에 너에게 이 애비의 실력을 보여주지. 저런 야만인들은 어떻게 요리하는지 말이다, 흐흐흐." 말을 마친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주문을 외워 휘황찬란한 빛으로 몸을 감싸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근엄한 표정으로, 목에 힘을 주어 소리쳤다. "듣거라! 이 미개한 놈들아! 아직도 내가 어떤 존재인줄 모르겠느냐!" 마을 구석구석에 까지 닿는 장중한 아르티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깡마른 노인 하나가 다급한 표정으로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장정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오며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그 노인의 복장은 다른 야만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털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옷 위에는 갖가지 작은 동물들의 가죽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또 머리 위에는 기다란 새의 깃털이 꼽혀 있었다. "오오, 텡게르! 텡게르!" 노인의 외침에 다른 야만인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땅바닥에 코를 쳐박고 엎드리며 탱게르를 목이 터져라 외쳐대기 시작했다. 노인은 아르티어스가 떠 있는 공중을 바라보며 뭐라고 계속 외치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한참을 외치며 다가서던 그 노인은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그는 하늘과 당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그 어떤 주문을 노래를 부르듯 박자를 맞춰가며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발을 쿵쿵거리며 요란하게 춤을 췄다. 노인은 춤을 추는 와중에도 천천히 아르티어스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이윽고 노인이 허공에 떠 있는 아르티어스의 앞쪽에 다다르자, 머리를 땅바닥에 납작 붙이며 절을 했다. "이것들이 지금 뭐하는 거예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씨익 웃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면 모르냐! 이게 다 호비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습성이지. 뭔가 불가사의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면 그것을 신과 결부시켜서 생각하니까 말이다. 이것도 호비트가 매우 이성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가지게 된 습성일 수도 있지." 노인은 한참 절을 한 뒤 살그머니 일어서서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어떤 방향을 가리켰다. 하지만 묵향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겁에 질린 표정으로 더욱 정중하고도 끈기 있게 계속 그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자는 말인 것 같은데요." 묵향이 노인이 손짓하는 방향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에게 말하자, 아르티어스는 내 실력이 어떠냐는 듯 으스댔다. "하하하, 이것들이 이제야 신을 모시는 접대를 하려나 보군. 가보자. 뭐, 정신을 못 차리고 까불면 한방에 날려 버리면 되지." "그것도 그러네요." 노인을 선두로 해서 야만인들은 묵향과 아르티어스를 마을에서 가장 큰 천막으로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가죽으로 된 물을 젖히고 들어선 천막 안은 노린내 같은 괴상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그 냄새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데 노인은 그들을 천막 한쪽에 놓여 있는 비교적 깨끗한 털가죽 위에 앉도록 안내했다. 묵향이 그 위에 앉을 때, 밑에서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천막 제일 밑바닥에는 건초 같은 것을 깔아서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습기를 막는 모양이었다. 일단 그들이 자리에 앉자, 노인과 몇몇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늙은이 3명이 들어와 꿇어앉아서는 한 번씩 고개를 깊숙이 조아리며 신성심이 가득한 어조로 뭐라고 쉴새없이 떠들어댔다. 한참을 그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떠들어대던 그들이 입이 다물어진 것은 음식들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든 여인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그 노인들은 여인들이 벌벌 떨며 조심스럽게 음식을 아르티어스와 묵향 앞에 차려놓기 시작하자 코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한 후 밖으로 나갔다. 뭔지 모를 액체가 담겨 있는 사발들, 그리고 잘 구은 고깃덩이, 처음보는 새까맣고 자그마한 열매들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묵향과 아르티어스의 앞에 가지런히 놓여졌다. "오, 안 그래도 시장하던 참이었는데 잘됐군." 아르티어스는 넉살좋게 웃으며 먼저 사발에 담겨 있는 허연 액체의 냄새를 맡아본 후 곧바로 몇 모금 들이켰다. "제법 먹을 만하네. 그런데 맛이 비릿한 게 양젖 같은데?" "그런가요?"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들고 있던 사발을 받아들고 쭉 들이켰다. 아르티어스는 사발에 담긴 커다란 고깃덩이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겉은 노릿노릿 잘 구어진 듯했지만, 속은 하나도 안 익었는지 한 입 베어 물자 선홍빛 핏물이 배어나오는 데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거 고기가 신선해서인지 맛이 기가 막히군. 너도 어서 먹어라." 그래곤이야 오크건 와이번이건 통째로 잡아먹는 경우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오히려 신선하다고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묵향을 그렇지 못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바라보던 묵향은 비위가 상한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새까맣고 작은 열매를 집어서 먹었다. 보기에는 조금 이상했지만, 달콤한 것이 제법 맛이 괜찮았다. 묵향이 열매를 한참 먹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는 커다란 고깃덩이를 먹다가 텁텁한 냄새가 나는 부연 액체를 쭈욱 들이키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크! 이단 것도 술이라고 마셔야만 하다니......" 술이라는 말에 묵향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술이라구요?" 묵향이 반색을 하며 묻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이며 대답했다. "그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양젖 같은 걸로 만든 술 같구나. 젠장! 이런 걸 술이라고 만들고 있다니, 이건 술에 대한 모욕이야." "그런 말씀하실 거면 제가 마실테니 주세요." 아르티어스에게 빼앗듯 사발을 받아든 묵향은 단숨에 쭈욱 들이켰다.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텁텁하면서도 비릿한 술 맛은 옛날 몽고전때 자주 마셨던 마유주를 떠올리게 했다. 중원에 대한 그리움이 되살아났는지 묵향의 얼굴이 일순 침울해졌다. 묵향의 표정을 살피던 아르티어스는 그것 보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젠장, 어쩔 수 있냐! 딴 게 없으니 이거라도 마셔야지."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자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10여 가닥으로 땋은 소녀 둘이 들어왔다. 방금 전에 음식을 천막 안으로 날랐던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4가닥으로 땋은 것에 비해서는 꽤나 비교가 되는 모습이었다. "저것들은 또 뭐하려고 들어온 거지?" "글쎄요......?" 그녀들은 천막 바닥에 깔려 있는 두툼한 가죽을 정성을 다하여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또 다른 깨끗한 가죽을 한 장 깔았다. 아래에 깔려 있는 것보다는 얇고 보드라운 것이었다. "아하! 잠자리를 정리하는 모양인데요." "그런 모양이군." 그녀들은 어느 정도 잠자리 정리가 되자 묵향과 아르티어스에게 경건한 어조로 뭐라고 말한 다음 그 옆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것들이 뭐하는 거죠?" 약간 당황한 듯한 묵향과는 달리 아르티어스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야. 호비트라는 것들은 불가사의한 존재에게 여자를 바치는 습성이 있거든. 옛날에도 나한테 여자를 갖다 바친 정신 나간 놈들이 몇몇 있었지." "그건 아빠가 드래곤일 때 얘기잖아요." 워낙 습관이 돼서 그런지 아무 생각 없이 묵향의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그냥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빠"라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소름이 끼친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며 투덜거렸다. "참 나, 다 큰 사내자식이 "아빠"라니!" "아, 아버지...... 이거 오랬동안 버릇이 돼서인지 잘 안 고쳐지네요. 그건 그렇고 ,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묵향이 왠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했지만, 아르티어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전혀 문제가 안 되지. 저것들 표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거든. 봐, 얼굴에 존경심이 가득 하잖아. 하늘에서 떨어진 우리들을 아마 전지전능한 신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야. 왜? 호비트가 나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좀 그런가 보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한 아르티어스의 표정에 묵향도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럴까요?" "당연하지. 내 말이 틀림없다. 흐흐흐, 어디 오랜만에 회포나 풀어볼까."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보란 듯이 과장된 몸짓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소녀들 중 한 명을 가볍게 껴안았다. 하지만 그 소녀는 가만히 떨고만 있을 뿐,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아르티어스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소녀의 얼굴로 입술을 대려다가 갑자기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소녀의 목덜미 쪽으로 얼굴을 접근시키자 뭔가 표현하기 힘든 기괴한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세히 보자 옷밖으로 드러난 살갗에는 얼마나 씻지 않았던지 꼬질꼬질한 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우엑! 제, 젠장. 이것들이 엄청 불결하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군." "히히힛!"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묵향을 얄밉다는 듯 잠시 노려본 아르티어스는 마법의 힘을 끌어올려 거칠게 외쳤다. "슬립(Sleep)!" 그와 동시에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던 두 소녀는 기절하듯 픽 쓰러졌다. 소녀들이 잠이 들자 아르티어스는 헛기침을 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험험, 저런 단순한 놈들의 경우 이쪽에서 호의를 거절하면 곧장 우리가 자신들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다고 오해하거든. 이런 경우에는 계집들을 천막 밖으로 내쫓아서는 절대로 안 되지" 묵향이 꼴좋다는 듯 빈정거렸다. "그럼 잠을 재우는 것은 상관없고요?" 아르티어스는 짜증이 나는지 두 소녀를 천막 한쪽 구석에다가 휙 집어던지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 계집들이 우리와 함께 자는지 구석에 찌그러져 자는지 그 놈들이 알게 뭐냐! 그건 그렇고 이만 자자. 아무리 나라도 차원이동을 하고나니 조금 피곤하구나." 묵향은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두 소녀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구, 성질 더러운 드래곤을 만나 너희들도 참 고생이다. 팔자려니 생각해야지, 뭐." 묵향은 자려고 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쩌면 이 곳이 자신이 찾고 있던 중원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거창한(?) 식사가 주어졌고, 묵향은 또 다시 작은 열매로 배를 채워야 했다. 식사가 끝나자 머리에 기다란 깃털을 꼽은 노인이 들어와 한참동안 절을 하며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아르티어스와 묵향을 마을 외진 곳에 위치한 천막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지독한 악취가 확 풍겨져 나왔다. "웁, 이게 뭐야?" 아르티어스는 질겁을 하며 코를 막고 뒤로 물러섰지만, 묵향은 천천히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 같은데요, 이마에 땀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고열에 시달리는 것 같은 데...... 그렇다면 자연히 정신이 오락가락 할 테고, 아무렇게나 용변을 싸댈 수밖에 없는 노릇이겠죠."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이리로 우리를 데려 온 거지?" 말을 하던 아르티어스는 순간 뭘 생각해 냈는지 손가락을 탁 튕기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오호라, 그러니까 이놈들을 치료해 달라는 말이로군. 하늘에서 떨어진 신의 사도인 우리들에게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죠." 아르티어스는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젠장, 밥값 한번 비싸군. 그나저나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해줘야겠지. 또 다시 차원이동 하기 전까지 편안하게 지내려면 저놈들이 나를 신으로 떠받들게 하는 것이 편할 테니까 말이야."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랍다는 투로 물었다. "정말 치료하실 수 있겠어요?" (형석아 재밌냐?ㅡㅡ?)저타내..으하하하 "이 녀석이 나를 뭐로 보고...... 이래봬도 위대한 골드일족의 후예란 말이다. 이 정도 허접한 증상 정도야 식후 디저트지." 툴툴 거리던 아르티어스는 슬며시 손을 들어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는 휘황찬란한 빛 무리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보자 안내를 해 온 노인뿐만 아니라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던 병자들까지도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는 뭐라고 외쳐대기 시작했다. "그건 무슨 마법이에요?" 저쪽 세상에서 치료마법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이렇듯 화려한 마법은 본 적이 없었기에 묵향이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뭐긴 뭐야. 이런 미개한 호비트들을 속이기 위해서는 화려한 연출 효과라는 게 필요한 것 아니겠냐?" 아르티어스는 무지개색 빛 무리를 뿜어내고 있는 손으로 자신을 향해 무릎 꿇고 있는 환자들 머리에 가볍게 대었다. 그러자 그들이 뭔가에 홀린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직까지는 힘이 없는 듯 비틀거렸지만 이미 완쾌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병이 낫자마자 존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아르티어스를 향해 머리를 땅에 닿을 정도로 연신 절을 하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어떠냐? 효과 만점이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아르티어스에게 묵향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런 것 같네요." "이제부터는 이놈들이 다 내 노예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히히힛!" 잠시 혼자서 낄낄거리던 아르티어스는 뭔가에 생각이 미친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노예라는 것들을 부리고 싶어도, 말이 통해야 부려먹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 말에 묵향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말을 배우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뭐, 자연히 이놈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말을 배울 수 있겠죠.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하기야 아버지 같은 경우 머리가 좋으시니까 몇 달이면 충분하겠네요." "몇 달! 그 동안 답답해서 어떻게 살겠냐. 가만있자......" 잠시 궁리를 하던 아르티어스는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옳지,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뭘 하시려구요?" "가만히 보고만 있거라. 흐흐흐, 곧 이 애비의 능력에 감탄하게 말들어 줄 테니까......"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앞에서 연신 절을 하고 있는 환자의 머리에다가 살짝 손을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마법을 사용해서 상대의 기억을 읽어 들이기 시작했다. 그 환자가 어렸을 때부터 사용했던 말들은 물론이고,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기억을 모두 말이다. 몰론 상대의 기억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읽어낸다고 해도 머리 속의 기억은 야만족 언어로 저장된 것이었기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머리 속에 저장된 것이 어디 언어뿐이겠는가? 수많은 영상도 함께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르티어스의 완벽한 기억력과 우수한 두뇌는 그 영상과 언어를 차근차근 합쳐 하나의 단어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30분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손을 뗏다. 그런 다음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군. 으하하핫! 과연 나의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무 위대해." 어깨를 으스대며 자화자찬을 하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뭔가 한마디 비꼬아 주려다가 묵향은 참기로 했다. 일단 아쉬운 쪽은 묵향이었기에 아르티어스의 신경을 되도록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나서야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짓는 것이 좋겠네요."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반응이 자신의 생각보다 시큰둥하지 김이 샌다는 듯 힘없는 목소리로 허탈하게 대꾸했다. "그러자꾸나." ------------------------------------------------------------------------- -오! 북극성- 아르티어스가 촌락의 장년층이나 노년층들을 모아놓고 야만족 언어로 뭔가 심각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묵향을 할 일없이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거의 반나절에 걸친 대화를 끝낸 후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돌아왔다. "뭐라고 하던가요?" "뭐 그렇게 대단한 정보는 없더구나. 예전에 네가 살던 나라 이름이 송이라고 했었냐?" "예." "저놈들의 말에 따르면 여기는 대족장 "타르티"가 이끄는 "둥루젠"부족에 속해 있는 "아라오" 촌락이라 하던데."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둥루젠이라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둥루젠이요?" "응. 둥루젠은 63개의 크고 작은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을 지배하는 대족장이 타르티라는 녀석이 라는 거지. 둥루젠 부족의 영토는 대단히 넓은데, 남쪽으로는 신령스러운 "바이투" 산에까지 이르고, 북쪽으로는 "다이슈에" 평원까지 연결되어 있다는구나. 또 서쪽으로는 "헤슈이" 부족의 대족장 "아구다"라는 자가 세운 "진"이라는 나라와 접해 있고, 동쪽은 바다와 접해 있는 모양이더라." 이야기를 듣던 묵향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젠장, 그 정도로는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잖아요. 하다못해 지도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여기서 바다까지 얼마나 먼지, 그리고 진이라는 나라와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그런거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마음을 이해하겠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거야 가보면 알겠지. 저 녀석들 말로는 여기서 바다까지는 건장하고 빠른 말로 5일만 가면 된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대족장 타르티가 사는 곳까지 가려면 말을 타고 가더라도 거의 20일은 족히 서남쪽으로 내려가야 된다고 하더군."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말을 차분히 분석해 보았다. "말을 타고도 20일이라...... 그렇다면 여기는 길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곳이니까 대충 1,000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둥루젠이라는 부족이 아버지 말씀대로 크기는 아주 큰 모양이에요." "그건 모르지. 땅덩어리 크기와 호비트의 수는 비례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묵향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무료한 듯 잠시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아르티어스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나저나 계속 여기에 머물러 있을 생각이냐?" 묵향은 단호한 표정으로 아르티어스의 말에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물론, 여기저기 여행하는 건 좋죠. 하지만 그게 단순히 여행으로 끝나지가 않잖습니까. 아버지가 언제나 쓸데없이 여기저기 시비를 걸어가지고, 복잡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이 한 두 번이에요?" 묵향이 더 이상 말도 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대답하지 아르티어스는 전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있었기에 대충 얼버무리는 투로 중얼거렸다. "뭐, 호비트들 사는 세상에 사건이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리고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나중에 보면 결국 제일 신나 하는 건 언제나 너였잖냐?"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말에 벌컥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 정말 귀찮단 말이에요." "미, 미안하구나. 난 그저 즐거운 여행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아르티어스가 당황해하며 사과를 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 침묵이 싫었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뭔가 말을 걸려고 하다 그만두었다. 그 대신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에 작게 원을 그리듯 돌리기 시작했다.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손가락 끝을 기준으로 대기의 마나가 살그머니 모여들어 파동치기 시작한다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자신의 손가락 끝을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거보고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냐?" "글쎄요......? 지금 뭐하고 계시는 겁니까? 마법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연세에 저하고 장난치자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묵향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런 둔하기 그지없는 녀석, 마나의 양이 다르잖아. 이렇게 대기에 마나가 희박해서는 마법을 사용하기가 아주 힘들지. 여기 와서 몇 번인가 마법을 써봤는데, 강력한 마법을 쓰기는 힘들겠어." 묵향은 또 아르티어스가 무슨 사건을 일을킬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아버지가 야만족들 때려잡을 것도 아닌데, 웬 강력한 마법 타령이죠?"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혀를 차며 설명해 주었다. "쯧쯧, 이런...... 만약 이곳이 중원이 아니라면 다시 차원이동 마법을 써야 하는데 그 마법은 그럼 화이어볼 같은 하위급 마법인 줄 아느냐? 웬만한 공격마법보다도 더 강력한 마법이란 말이다." 그제서야 묵향은 걱정스럽다는 안색으로 얼른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 전처럼 마나를 끌어 모으기 힘드니까, 용언마법으로 차원이동을 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묵향의 질문에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차원이동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현재 내 몸 상태로 용언마법이 가당키나 하다고 너는 생각하는 거냐? 원래 용언마법이라는 것은 아주 빠른 기습 공격에 유효한 것이지, 초강력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어. 물론 드래곤으로 현신한다면 그것도 가능하지만 공간이동이나 차원이동에는 얻는 게 있는 만큼 잃는 것도 생기게 되어 있지. 호비트의 몸체보다도 수백 배나 큰 드래곤의 몸집을 이동시키려면 그만큼 더 많은 마나가 필요하거든. 나 정도 되니까 트랜스포메이션 한 몸으로도 본신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거라구." "그러니까 그거 한 번 더 하시라니까요. 위대한 골드 드래곤의 후예이신 아버지께 불가능이라 단어가 있겠어요? 차원이동 몇 번 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고 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르티어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묵향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끔 자신이 생각한 꿍꿍이를 재빨리 얘기했다. "험험,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현재 내 몸에 남아 있는 마나는 그놈의 차원이동으로 인해서 거의 바닥난 상태라는 말이다. 오랜 시간 몸을 사리면서 용언마법을 쓰지 않고 마나를 저장해 나간다면 네 말대로 충분히 차원이동을 할 수가 있겠지." "흠, 어쨌건 가능은 한 거군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거죠?"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환히 웃으며 얼른 대답해 주었다. "현재 대기에 떠도는 마나의 상태로 보아 최소한 5년, 길어봐야 10년정도? 사실 그 정도 시간은 눈 깜짝하면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으하하핫!"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발끈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도 말라는 듯 소리쳤다.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어찌 나같이 위대한 드래곤 일족이 농담 따위를 할 수 있겠냐." 묵향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아르티어스에게 추궁하듯 말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드래곤에게는 찰나일지 몰라도, 호비트에게는 생사가 갈릴 정도로 긴 시간이라구요." 묵향의 말에 당혹스럽다는 말투로 아르티어스는 대답했지만, 눈은 여전히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 그런가? 가끔 네가 호비트라는 것을 잊어 버린단 말씀이야. 그건 그렇고 네가 호비트라는 생각이 들도록 행동을 해야 내가 잊어 버리지 않을 거 아니냐? 거의 40년을 함께 지내왔지만 뭐 변한 게 있어야지? 늙지도 않는 게 무슨 호비트냐? 세월이 흘렀는데도 늙지도 않는 것은 뱀파이어 이후로 네가 처음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발끈해서 말했다. "뭐요! 나를 흡혈귀 따위와 비교를 하시다니......" "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 머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 궁리해 보기로 하자꾸나." 아르티어스는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후 말을 이었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을 하기에 앞서서, 우선 우리가 제대로 왔는지 아니면 또 다시 잘못 왔는지 그것부터 제대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현재 우리의 위치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또 다시 무턱대고 차원이동을 한다고 하는 것은 네가 생각하기에도 좀 무리가 있지 않겠냐? 사실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고, 우리가 그 모든 차원에 일일이 다 가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냐?" "그럼 어떻게 해요? 아버지만 믿고 이리로 온 건데 말이에요" 묵향이 약간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하자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핫,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위대한 골드일족의 나니까 그 쥐꼬리만한 단서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차원이동이 기록된 마법책을 역으로 되짚어서 좌표를 잡아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무 위대하단 말씀이야. 그나저나 드래곤 일족 역사상 차원이동까지 하면서 부지런을 떨어댄 드래곤은 아마 나뿐일걸? 으하하핫." 묵향은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괜히 아르티어스의 성질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느꼈기에 시큰둥한 어조로 맞장구를 쳐줬다. "그..., 그렇군요." 한참 웃음을 터뜨린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정색을 한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 다시 아까 하던 말로 돌아가서, 네가 살던 세상에는 그 중원이라는 곳만 있었냐? 그러니까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종족은 너처럼 노리끼리한 피부색에, 까만 눈에, 까만 머리카락뿐이었냐는 말이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던 묵향은 어색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 그건 아니죠. 색목인이라는 눈 색깔이 다른 종족도 있다고 들었고, 또 남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묘족이라고 해서 특이한 습성을 지닌 종족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예전에 한 번 가봤던 몽고에도 저 야만족들 못지않게 미개한 습성을 지닌 놈들이 살고 있었죠. 제가 알고 있기로는 아마 가장 문명이 발달한 곳이 중원일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으스대며 말했다. "물론 내가 실수를 했을 수도 있겠지만, 위대한 이 몸이 두 번씩이나 실수를 할 리가 없잖냐? 그래서 그런지 난 아무래도 이곳이 좀 미심쩍단 말씀이야.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아르티어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묵향을 바라본 후 물었다. 아무래도 묵향이 자신을 같잖다는 듯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 표정이 왜 그러냐?" 아르티어스의 질문에 묵향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대다했다. "아, 아니에요. 계속 말씀하시죠." "좋아, 만약 내가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우리들 은 네가 중원이라고 부르는 곳의 외곽지역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우리가 떨어진 이곳이 네가 예전에 살던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할 수 있겠냐?" "그, 그야......" 잠시 생각해 보던 묵향은 그 말도 그럴듯하게 느껴졌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저번 차원이동을 한 뒤 워낙 고생을 한 탓인지 대답이 영 시원스럽지는 않았다. 묵향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럼 역시 이번에도 돌아다녀봐야 하겠군요." 묵향의 대답은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티어스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핫! 바로 그거야. 돌아다녀봐야 진실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냐? 물론 어쩌다 보면 복잡한 사건에 히말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최대한 자신을 숨긴다면 피해갈 수도 있는 문제 아니겠어? 또 위대하신 내가 함께 있는데 뭐가 무서울 것이 있겠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최대한 자신을 숨긴다고? 그럼 언제나 먼저 시비 걸고, 사고 친 게 누구였느냔 말이다. 하지만 묵향은 대놓고 반박할 수 는 없었기에 일단 참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그의 말투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젠장, 어쩔 수 없죠.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뭐, 사방이 탁 틘 벌판이니까 아무 곳이나 골라잡아 보시죠." "흐흐흐, 어디로 갈까?" 음충스런 미소를 지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아르티어스는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먼저 둥루젠의 수도로 가자. 이런 야만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도 수도라면 뭔가 달라도 다른 것이 조금 있겠지. 그리고 정보를 얻으려면 수도에 가서 수소문을 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니겠냐?" "좋을 대로 하세요. 남는 게 시간이니까. 그건 그렇고 언제 떠나실 거에요?" "뭐, 준비할 것도 없으니 당장 떠나야지. 때는 봄, 유희를 떠나기에는 최적의 계절이 아니겠냐? 그리고 준비는 족장에게 말해 놓으면 알아서 해 줄 거고 말이다." 묵향은 유희라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유희라면 중원식으로 생각하면 계집을 옆에 끼고 노닥거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요, 아르티어스가 살던 시대의 유희(Amusement)라면 오락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이번 여행을 아르티어스는 뭐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인가? "유희라구요? 그럼 아버지는 내가 살던 세계를 찾아서 헤매는 것을 장난쯤으로 생각하시고 계신 겁니까?" 생각하지도 못했던 묵향의 반응에 아르티어스는 순간 당황했지만 탁월한 순발력으로 자신의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니. 내가 말을 잘못했군. 여행 말이다, 여행. 우리 드래곤은 그걸 유희라고 말하거든. 여행이라는 단어는 호비트들과 어울린 후에나 배웠지. 하지만 유희라는 말이 입에 익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나 보구나."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변명에 미심쩍은 듯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종족상의 차이라는데, 그걸 따지고 들어봐야 어쩌겠는가? "그래요? 내가 알고 있는 유희하고는 뜻이 조금 틀리네. 그건 그렇고, 누가 촌장인데요?" 묵향이 더 이상 따지고 들지 않자,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응, 바로 저기에 후줄근한 가죽쪼가리를 걸치고 앉아 있는 주술사 노인 말이다. 여기서는 "차간부우"라고 하는데, 대충 뜻을 해석해 봤을 때 주술사가 가장 그것과 비슷한 뜻을 지닌 단어일 거다. 아무튼 그 주술사 오른편에 앉아 있는 녀석이 촌장이지." "아, 바로 저 노인이 주술사였어요?" "그래, 촌락민들 중 몇 명이 갑자기 병에 걸려서 의식을 잃어가자 며칠 전부터 신들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갑자기 우리들이 나타나자 자신의 기도를 듣고 천신이 현신한 것으로 알고 있더군. 그러니까 이 몸을 신으로 알고 있는 거지."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물었다. "그건 무슨 뜻이에요? 아버지를 천신으로 알다니......?" "말 그대로다. 나는 저 녀석들하고 좀 색다르게 생겼잖니, 그러니까 난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고, 너는......" 잠시 말을 멈췄던 아르티어스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신을 수행하고 온 시종이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촌락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둥루젠의 수도를 향해서 출발했다. 환송이라고 해봐야 촌락만들이 모두 다 나와서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해댄 것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황송해 하는 듯한 표정을 보면 그들이 아르티어스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촌장은 아르티어스와 묵향을 위해 말 3필을 내줬다. 그리고 신이라 생각한 아르티어스에게는 존경의 표시로 사금과 담비와 수달, 여우 가죽, 그리고 커다란 반달곰의 가죽에다가 투박한 솜씨이기는 하지만 부드러운 어린 양의 가죽으로 만든 조끼도 챙겨 주었다. 족장이 아르티어스에게 붙여준 "다쿠다"라는 원주민은 이 근처의 지리를 손금 보듯 잘 알고 있어 둥루젠의 수도까지 안내를 해 주기로 했다. 그는 말 3필 중 2필에는 사람이 타고 갈 수 있도록 안장을 준비했고, 나머지 한 필에는 식량과 짐 꾸러미들을 차곡차곡 실었다. 다쿠다는 매우 기마술이 뛰어나서인지 짐말의 고삐를 잡고, 양다리만으로 자신의 말을 조종해서 앞으로 나갔다. 일단 마을을 벗어나자 인적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대평원이 그들을 맞이했다. 대평원은 상당히 황량하기는 했지만, 드문드문 초목도 우거져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 저 너머로 제법 높아 보이는 산들도 간혹 보였다. 끝없이 이어진 광활한 대평원은 여행자에게 단조롭기는 했지만 왠지 모를 자연의 신비로움마저 느끼게 했다. 느긋하게 평원을 감상하며 가던 아르티어스는 맨 앞에서 안내를 하던 다쿠다가 갑자기 말을 세우자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다쿠다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손을 눈가에 대고 햇빛을 가리며 서쪽에 걸려 있는 해를 슬쩍 바라본 다음 아르티어스에게 공손한 어조로 뭐라고 말했다. "뭐라고 그래요?" 묵향이 묻자 아르티어스는 광활한 대평원을 감상하다 흥이 깨져서인지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기서 야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군." "뭐, 급할 것도 없으니 그렇게 하라고 하시죠." 아르티어스가 뭐라고 말하자 다쿠다는 재빨리 야영준비를 시작했다. 근처에서 작은 나무를 베어다가 가지를 쳐낸 다음 4개의 기동을 세웠다. 그리고 기둥의 끝부분을 4개의 나무막대로 연결한 후 밧줄로 단단하게 묶었다. 이렇게 빼대를 세운 후 그 위에 나뭇잎이 잔뜩 붙어있는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엮어 간단하게나마 밤이슬을 피할 수 있는 지붕을 완성했다. 날씨도 좋았고, 또 기온도 야영을 하기에 딱 알맞은 상태였기 대문인지 다쿠다는 양옆에 벽을 세우는 것은 생략하고 근처에서 풀을 베어다가 바닥에 푹신하게 깐 다음 그 위에 두툼한 가죽을 깔았다. 신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잠자리를 만들어 놓은 후 다쿠다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말 등에 매어놓은 짐 꾸러미 중 하나를 풀어 그 안에서 말린 고깃덩어리와 찐 쌀을 꺼냈다. 쌀을 찐 다음 잘 말려 놓은 것이었기에 그것 또한 딱딱하기는 고깃덩이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다쿠다는 작은 나뭇가지를 모아 고깃덩이의 끝부분을 꿰어 적당히 불에 구워 아르티어스와 묵향에게 찐 쌀과 함께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권했다. 돌덩이만큼 딱딱한 찐 쌀과 불에 구운 고기가 그날 저녁식사의 전부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사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하자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아르티어스와 묵향은 다쿠다가 만들어 놓은 임시 숙소에 자리를 잡았지만, 정작 그것을 만든 다쿠다는 말들을 묶어 놓은 곳 바로 옆에 두툼한 천을 깔고 나무에 기대어 쉬었다. 대평원의 싱싱한 풀 내음과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잠을 자기에는 좋았지만 묵향은 왠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옆에 누운 아르티어스는 일찌감치 꿈나라로 가버렸는지 가늘게 코까지 골며 팔지 좋게 자고 있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서 있지 않은 묵향으로서는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쉽게 잠을 잘 수 없었다. "도대체 중원에는 언제나 갈 수 있는 것일까? 과연 내가 살아서 중원에 도착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군." 옆에 누워 자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잠꼬대를 하며 자신의 배위로 다리를 올리자, 묵향은 슬며시 아르티어스의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놓고 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수많은 수련을 통해 단련된 그의 육체에 노숙 정도는 별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옆에서 낮게 코를 골기도 하고, 몸을 뒤척이기도 하는 아르티어스가 그에게는 더욱 성가시게 느껴졌다. 임시 숙소를 벗어나자 투명한 대기를 뚫고 수없이 많은 별들이 묵향을 반기는 듯했다. 그리고 수많은 별들 사이로 반달이 은은한 별빛을 뿌리며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달이군." 묵향은 무심결에 한마디 내뱉은 후 밤이슬을 피할 수 있을 만한 나무그늘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의 발걸음이 멈칫 멈추었고, 묵향의 놀란 시선은 다시금 화들짝 밤하늘을 쫓아 달려갔다. "호..., 혹시......?" 정신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묵향의 눈시울은 어느덧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중원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 커다란 달. 달의 생김새가 아주 비슷한 것 같아서 다시금 밤하늘을 올려다 본 것이었는데, 달만이 아니라 별자리마저도 중원의 것과 똑같았다. 언제나 북쪽을 밝혀주는 북극성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주위에 자리 잡은 수 많은 별자리들도 언제나 자신들은 그곳에 있었다는 듯 미약한 존재감을 희미한 빛으로 던져주고 있었다. "여, 여기가 중원이야! 크하하하핫! 바로 여기라구! 바로 여기야!" 한밤중에 묵향이 미친 듯이 웃음을 떠뜨려대자 나무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다쿠다는 깜짝 놀라 일어나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음소리에 깼는지 아르티어스도 숙소 밖으로 머리만 내밀며 짜증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야! 한밤중에 뭐가 좋아서 웃고 난리야! 잠 좀 자자. 잠 좀!" 묵향은 한달음에 아르티어스에게 달려가서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제대로 찾아왔다구요, 여기가 중원이에요! 내가 태어난 바로 그 중원이라구요."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뭐? 이 녀석이 드디어 미쳐 버렸나? 중원이라는 곳이 이런 황무지였다는 말이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살던 세상임에는 틀림없어요. 달의 모양이 똑같고, 또 별자리들도 똑같다구요.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잖아요. 여기가 틀림없다니까요."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말에 순식간에 의기양양한 표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묵향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위대해. 그 엄청난 시간과 공간의 차원의 미로에서 겨우 두 번만에 제대로 목적지를 찾아내다니...... 크하하하핫!" 한참 동안 묵향과 기쁨을 나누던 아르티어스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돌연 맥 빠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젠장, 그나저나 하필이면 여기일 줄이야. 좀 더 돌아다니면서 즐겼어야 하는 건데...... 하기야, 나도 어디가 어딘 줄을 몰라 대충 찍은 좌표가 중원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 아르티어스의 말에 한참 기뻐하던 묵향은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지만 잠시 후에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따졌다. "엥? 뭐라구요? "하필이면"이라니요? 그리고 "재수가 없다"구요? 전에는 차원의 미로 운운하며 제대로 찾아가는 것은 엄청 어렵다고 얘기했었잖아요. 혹시 아버지는 여태까지 이리저리 차원이동 하는 것을 설마 놀러다니고 있는 걸로 생각하진 거였어요?" 무심결에 속마음을 중얼거린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자 손사래까지 치며 적극적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무, 무슨 소리냐? 너도 봤잖아, 내가 엄청나게 고생한 것 말이다. 마법책을 숙지하고 수많은 복잡한 계산을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내가 얼마나 머리를 굴려야 했는지 말이다. 단지 나는 혹시나 우리가 목적지를 찾지 못했을 때, 네가 너무 실망해 할까 봐 그렇게 얘기한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어떻게......" "크험, 뭐 사소한 말실수를 가지고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고 그러냐. 어찌되었든 제가 말하던 중원에 왔잖니.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지, 뭐." 잠시 아르티어스를 노려보던 묵향은 시간이 지나자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의심이 계속 들었다. "그 외에도 또 뭐 숨기고 계신 거 아니에요?" 묵향이 의심스럽다는 듯 묻자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실토했다. "차원이 제대로 맞아도 시간이 틀릴 수가 있지. 또 차원과 시간이 맞아도 공간이 틀릴 수도 있고 말이다. 공간이야 좀 틀리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아가면 그만이지만, 시간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가 있거든. 그러니까 운 좋게 네가 살던 차원과 공간이 맞는다 해도 시간대마저 똑같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네가 살던 세상에서 100년 전에 떨어질지, 아니면 1,000년 후에 떨어질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야. 한 번 갔던 곳을 또 간다면 혹 모르겠지만...... 아무리 내가 드래곤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가는 것 아니겠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불안감을 조금 느끼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 강도는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르티어스라는 최후의 버팀목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드래곤이면서 그것도 못해요? 언제나 전지전능을 외쳐대면서......?" 묵향의 질책에 아르티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무리 우리들 드래곤이라고 해도 시간을 지배하지는 못한단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렇게 슬퍼했겠느냐? 겨우 몇 시간 앞이었지만, 그 시간을 되돌려 놓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지. 물론 무리하게 방법을 찾아보면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위험부담은 너무나도 커. 몇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고 마법을 썼는데, 몇 만 년 앞으로 가 버릴 수도 있고, 또 몇 만년 뒤로 갈 수도 있지.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은 차원과 맞물려 있기에 자칫 잘못하면 또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 영영 차원의 미아가 되어 버릴 우려도 있거든."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잠시 불안해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중원이라고 기뻐할 것만은 아니었다. 이곳을 잊지 못해 되돌아오고 깊었던 것은 자신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돌아온 중원에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차라지 저쪽 차원에서 미네르바와 투닥거리며 사는 편이 훨씬 괜찮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안과 허탈감에 휩싸였던 묵향은 심호흡을 길게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아르티어스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온 것은 정말 운이 너무나도 좋아서 얻어진 결과라는 겁니까?" "헛! 왜 그렇게 노려보냐? 사실 말하자면 원래 운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내 추리가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간 것도 많은 작용을 한 것이지." 아르티어스의 입에서 추리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튀어나오자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추리라니요? 어떤 추리요?" "네가 살던 곳에는 마법이라는 것이 분명히 없다고 했지?" "그랬죠." "그런데 너는 차원이동을 당했고 말이다." "예." 아르티어스는 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자신이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을 천천히 묵향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쪽에서 누군가가 네가 살던 세상으로 간 것일 거라고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살던 그 세상에서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설명이 되지 않거든. 그렇기에 그 정확한 단서를 파악하는데 다론이라는 놈이 가지고 있던 마법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거지. 일단 그것을 확보한 상태에서 정확한 계산만 할 수 있다면 내 마법으로도 네가 살던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거다. 물론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이렇듯 두 번째는 훌륭하게 성공한 것이 아니겠냐? 하지만..., 내가 직접 이곳으로 와본 것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완벽한 계산과 그에 따른 마나의 컨트롤까지 가능하겠냐? 약간의 오차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 묵향은 그제서야 아르티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오차"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위험도, 떨리는 음성으로 묵향이 물었다. "그 오차가 어느 정도일까요?" "글세...... 공간상의 오차가 생길 여지도 있겠지만, 시간적인 오차가 생길 가능성도 크다고 봐야 하겠지. 나로서도 그 정도만 짐작할 수 있을 뿐 더 이상은 모르겠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의 마음은 천근이라도 되는 양 무겁기만 했다. 답답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쉰 묵향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밝은 달이 둥실 떠 있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기쁘지가 않은 묵향이었다. -계속되는 사기 행각- 대평원을 가로지른 아르티어스 일행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다른 촌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쿠다가 멀리 보이는 이동식 천막들을 가리키면서 뭐라고 한참 설명을 하자, 그것을 다 듣고 난 아르티어스가 묵향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일 일대가 쑤젠 족장의 영토라고 하는군. 이 근처에 퍼져 있는 48개의 크고 작은 촌락들을 이끄는 녀석이래. 그리고 저기에 보이는 저것이 그 중 하나인 샤이푸 촌락이라는군. 오늘은 저기에서 묶는 것이 좋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다." "그러죠, 뭐." "그건 그렇고, 아들아." 갑자기 아르티어스가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묵향은 흠칫 놀라며 뒤로 급히 물러섰다. "왜 갑자기 그렇게 부르세요? 소름 돋치기 시리......" "사실 이 근처에서 너를 알아볼 호비트도 없고, 또 네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삶에 지장 받을 놈도 없지 않냐? 그러니까......" 뭔가를 바라는 듯 은근한 아르티어스의 말을 묵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도 말라는 듯 단숨에 거절했다. "싫어요!" "에이, 그래도......" 싫다고 했는데도 아직 미련을 못 버렸는지 아르티어스는 계속 묵향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묵향의 반응은 한마디로 웃기지 말라, 였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 망할 크로네티오의 저주에서 벗어나서 한시름 놨더니, 또 그 저주받을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겁니까? 안 해요! 아니, 절대로 못해요!" "허, 거∼참!" 잠시 난감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르티어스는 작전을 바꿨다. 아예 안면 몰수하고 언성을 높여가며 반항하는 아들놈에게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불효막심한 놈! 호비트라는 것들은 효도라는 것도 모르냐! 애비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네가 잘 될 줄 아느냐? 자고로 애비의 말을 안 듣는 놈 치고, 그 뒤 끝이 좋았던 놈은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단 한 놈도 찾을 수 없을 거다. 아이구, 아이구, 내가 세상 헛살았지. 어떻게 저런 놈을 아들이라고 믿고 의지하며 그 험한 차원의 미로까지 따라나섰누. 내가 멍청한 놈이지......" 서글픈 듯한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가슴 한쪽이 약간 찔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매몰차게 거부했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약해져 말끝이 떨리는 묵향이었다. "그,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거예요." "그래, 너 잘났다! 이 망할 녀석아. 내 귀여운 천사를 단 한 번만 보여 달라는 데도 싫다니, 그래 너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자." 그 다음부터 아르티어스는 묵향과의 대화를 아예 끊어 버렸다. 아니,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샤이푸 촌락에 도착하자마자 다쿠다는 촌락 중앙에 위치한 조금 커 보이는 천막으로 달려갔다. 곧이어 그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4명의 촌로들과 함께 돌아왔다. 촌로들은 아르티어스를 보자마자 경건한 표정으로 절을 하며 뭐라고 외쳐댔고, 아르티어스는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여 줬을 뿐이다. 그런 후 그들은 뭐라고 장시간 대화를 나눴는데, 그 사이에 묵향이 한 일이라고는 멀뚱멀뚱 서서 아르티어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대화가 끝나자 촌로들은 한쪽 구석에 위치한 그래도 비교적 깨끗한 천막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배불리 식사를 한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편안한 기분으로 쉬고 있을 때였다. 천막 밖에서 헛기침 소리와 함께 한 명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들어와 연신 절을 하며 아르티어스에게 뭔가를 간구하는 듯한 말을 계속하였다. 아르티어스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촌로가 그들을 안내한 곳은 촌락 한쪽 구석에 위치한 거대한 천막이었다. 급히 만든 흔적이 역력한 천막 안에는 수십 명의 환자가 드러누워 끙끙거리고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이웃 촌락에까지 연락이 되어 근처에 있는 환자들이란 환자들은 모두 다 몰려온 것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환자들과 함께 이웃에 있는 촌락민들까지 모두 몰려왔는지 한산했던 작은 햐이푸 촌락은 이제 300여 명의 원주민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촌락민들의 아르티어스에 대한 경외심은 그가 한 명, 한 명 환자를 치료하면서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들것에 실려 왔던 한 환자가 아르티어스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빛무리에 휩싸이자 벌떡 일어서는 것을 보고 극에 달했다. 수많은 촌락민들의 경외심에 모두들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것을 보며 묵향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어쨌건 아르티어스의 신을 사칭하는 행위는 그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환자 치료가 끝난 후 대규모 축제가 벌어졌다. 물론 그렇게 잘 살지도 못하는 촌민들이 300여 명 정도 모인 만큼 말이 대규모지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봤을 때 그건 화려한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촌민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서 축제 준비를 했다. 촌민들은 축제에 쓰기 위해 튼튼해 보이는 백마 1마리를 잡았고, 황소 1마리, 양 5마리, 염소 5마리, 개 10마리를 잡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말은 교통수단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황소는 농경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양은 겨울을 나기에 적합한 따뜻한 가죽옷을 제공하는 원천이였고, 염소는 젖을 제공해줬다. 또 개는 주인의 재산을 지키는 파수꾼이 아닌가. 닭, 오리 같은 식용으로 키우는 것도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물들을 잡아 요리함으로써 신께 대한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던 것이다. 모든 제물들은 신께 비치는 의식에 따라 우유를 먹였다. 우유는 흰색이기에 길상을 상징한다. 만약 제물이 우유 마시기를 한사코 거부한다면 그것은 제물이 상서롭지 못하다는 반증이기에 딴 것으로 바꾼다. 그런데 제물로 선택한 모든 동물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우유를 말끔하게 다 마셔 버렸기에 원주민들은 대단히 좋아했다. 일단 우유 먹이기가 끝나고 나자, 기원을 담은 주문을 외우며 제물의 이마와 등에 우유를 뿌린 다음 도살을 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여기저기에 불을 피워 그 고기들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앞에 놓인 음식에 대해서 원주민들과 즐거운 듯이 얘기를 나누며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서 묵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고기들을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통역을 해 주지 않았기에, 무슨 고기인지 알 수도 없었을 뿐더러 모드 고기들이 속은 거의 생고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고기들은 아예 생것으로 나왔다. 아르티어스에게 부탁해서 고기를 좀 더 익혀달라고 말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젠장! 이럴 바에는 차라리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이 더 낫겠다." 홀가분하게 혼자 여행하는 것이 오히려 둘이 여행할 때보다 덜 외로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묵향은 아르티어스와 결별할 결심을 하지 못했다. 아르티어스의 말대로 시간적 오차가 의외로 클 수도 있었다. 사실 야만족들의 생활상을 보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과거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로서는 아르티어스의 통역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태가 아닌가? 만약 또 다른 통역이 한 명 더 있다면 모르겠지만...... 묵향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투덜거렸다. "젠장, 계속 이러실 겁니까?"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묵향의 시선을 피하며, 옆에 있는 늙은 촌민과 계속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에 묵향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걸칠게 말했다. "이런 젠장! 내가 그런다고 재수 없게 그 계집으로 변할 줄 알아요? 빌어먹을!" 옆에 앉아 있는 촌로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묵향을 힐끔거리며 보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투덜거리자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경우 생고기도 아주 즐겨먹는 편이었지만, 아들놈은 육류에 대한 취향에 있어서 자신과 극을 달리기 때문이다. 동물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3가지 욕구가 있다. 식욕과 수면에의 욕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욕이다. 성욕이야 자제력이 뛰어나다면 참아낼 수 있는 것이겠지만, 식욕과 잠은 도무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며칠 버티기는 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의도대로 되리라는 생각에 아르티어스는 가슴이 부듯해져 옴을 느꼈다. 그런데 슬그머니 미소 짓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묵향의 왼손이 갑자기 투명하리만큼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이, 이럴수가? 저게 무슨 마법이지?" 철을 화로에 넣고 충분히 풀무질을 해 주면 선홍빛으로 아름답게 달아오른다. 그런데 어떻게 호비트의 손이 그렇게 달아오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와중에 저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상한 기운은 또 뭔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손에서는 사람을 억압하는 듯한 파괴적인 사이한 기운까지 함께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묵향 주위에 앉아 있던 촌락민들은 허겁지겁 묵향 주위에서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묵향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자신의 왼손으로 고깃덩이를 슬그머니 쓰다듬었다. 슬쩍 쓰다듬었을 뿐인데도, 고기의 겉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타 버리는 것으로 보아 그 화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잘 되지 않자 묵향은 타버린 고기의 겉 부분을 잘라낸 수 입속에 집어넣으며 투덜거렸다. "젠장! 겉 부분은 다 탔잖아. 뭐, 하지만 탄 부분만 떼어내고 나니 그런대로 먹을 만은 하네. 그건 그렇고, 고기 구워먹기에는 혈수마공이 너무 파괴적인 것 같아." 묵향의 투덜거림은 당연한 것이었다. 소 잡는 거대한 칼로 닭을 잡기가 힘들 듯, 혈수마공이 지닌 엄청난 양강의 힘은 너무나도 파괴적이어서 고깃덩이를 새까맣게 태우는 데는 제격일지 몰라도, 노릇노릇하게 익히는 것은 매우 까다로웠던 것이다. 하지만 묵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열기를 발산하는 극양의 무공은 혈수마공 하나밖에 배운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뭐라고 중얼거리며 잘 익은 부분만 잘라내어 먹고 있는 묵향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오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 내가 여기서 지면 드래곤이 아니다." 아르티어스가 마음 속 깊이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묵향은 인상을 찡그리며 탄 부분을 벗겨내고 먹을 만한 부위를 골라내려는지 고기를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 고기를 구우면서 공력을 조절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묵향은 쉽게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 후에야 묵향은 이쪽 차원에 와서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연기파 배우 아르티어스- "이제 어떻게 한다?" 아주 급속도로 모든 상황에 적응해 나가는 묵향을 상대로 아르티어스는 힘겨울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잠을 못 자게 하는 방법으로 골탕을 먹으려고도 했지만, 묵향이 일단 안 자려고 들면 드래곤인 자신보다도 더욱 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르티어스는 모르고 있었지만, 묵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잠이 아니라 하루에 30여분 정도의 운기조식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처럼 눈치 빠른 드래곤이 왜 묵향이 운기조식을 하면서 기력을 보충하고 있는 사실을 몰랐을까? 원래 내공수련을 위해 토납술을 처음 배우는 경우, 가장 먼저 익히는 것이 좌공(앉아서 하는 운기법)이었다. 좌공을 완벽하게 익힌 후에는 와공(눕거나 엎드려서 하는 운기법)을 익히게 되고, 그마저도 완벽하게 익히면 가장 마지막 단계로 익히는 것이 입공(서서 하는 운기법)인 것이다. 물론 입공을 통해 운기조식을 한다고 해도 좌공을 하는 것보다 더많은 내력이 쌓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입공까지 다 익힌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안전한 곳에서 홀로 운기조식을 할 때는 좌공을 애용한다. 그렇다면 왜 배우기도 힘든 와공이나 입공을 익히는 것일까? 바로 그것은 좌공을 할 여건이 안 될 때를 대비해서 익히는 것이었다. 묵향같은 초절정의 내가고수가 입공까지 익히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운기조식을 할 때 자세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앉으나 서나, 눕거나 엎드리거나 혹은 말 탄 자세에서까지도 운기조식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아르티어스가 제아무리 묵향의 잠을 방해하려고 노력을 해도 도무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잠을 가지고는 도저히 승리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자 아르티어스는 그때부터 묵향을 철저하게 외톨이로 만드는 것으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아예 묵향과는 일언반구 대화를 나누려고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곧바로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길잡이인 다쿠다와는 대단히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고, 일부러 묵향이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도록 여기저기 손짓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아르티어스는 그것도 통하지 않음을 깨닫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은 이제 더 이상 아르티어스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아예 명상이나 즐기자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던 것이다. "이런 젠장! 어떻게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호비트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이지? 진짜 저놈이 호비트가 맞기는 한 건가? 저 지랄 같은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혹시 호비트의 탈을 쓴 드래곤 아냐?" 아르티어스가 그토록 압력을 가했건만, 묵향에게는 전혀 씨알도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일부러 쌀쌀맞게 대해 며칠 외톨이 신세가 되면 자신에게 굴복할 것이라고 믿었던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상종하지 않자, 묵향이 오히려 더 잘되었다는 듯 명상이나 하면서 차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자 기가 막혔다. 외로움을 느끼기는커녕 표정 하나하나에 여유로움까지 배여 있는 놈한테 더 이상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편안한 신색으로 바뀌고 있는 이런 묵향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할 아르티어스가 아니었다. 이제 이곳 샤이푸 촌락에서 둥루젠 부족의 대족장 타르티가 산다는 성까지는 단 하루거리도 되지 않았다. 만약 성에 들어가서 뭔가 중원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찾아낸다면 그때는 이 상태가 영구히 지속될 우려마저도 있었다. 앞으로 이 차원계에서 편하게 지내려면 기선제압이 그 선결요건인 만큼 성에 들어가기 전에 이 신경전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할수록 아르티어스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지고 있었다. "전번에는 주도권을 뺏긴 덕분에 개고생을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럴수는 없지.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럴듯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아르티어스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은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한 호비트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빌어벅을! 빌어먹을!" 투덜거리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눈에 다쿠다의 모습이 보였다. 다쿠다는 몇 번 타르티가 사는 성에 가봤던 탓에, 갑자기 현신한 신들을 모시고 성까지의 길안내를 촌장으로부터 명령받은 상태였다. 성으로 갈 때는 신과 함께여서 편안하게 여행을 해야 했기에, 여러 마을들을 거치며 잠자리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20일은 필요했다. 하지만 돌아갈 때는 황야를 가로질러 죽자고 말을 달리면 넉넉잡고 15일이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무리 일정을 빡빡하게 잡는다 해도 처자식과 무려 한 달 이상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것도 농사 때문에 한참 바쁜 이 시기에 말이다. 봄에 파종을 잘 해놔야 그 해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봄은 일년 중에 가장 중요한 계절이지 않는가? 혹시나 파종할 시기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다쿠다는 우울한 얼굴로 달을 바라보며 한숨짓고 있었다. 그런 다쿠다의 모습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가소롭다는 듯 투덜거렸다. "달을 보고 눈물을 흘리다니, 호비트란 족속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든 놈들이란 말씀이야. 한없이 강한 듯하면서도, 저런 사소한 것에는 저렇게 심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다쿠다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아르티어스의 눈빛이 뭔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번쩍였다. "흑흑흑......"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묵향의 귀에 들려왔다. 묵향은 이때 아르티어스 몰래 살짝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원래가 운기조식을 하게 되면 인체의 가장 말단까지 신선한 기가 펴져나가기에 온 몸의 감각은 몇 배나 증폭되게 된다. 따라서 그 때문에 운기조식 때는 무아지경으로 빠지기 직전이 가장 위험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세심하게 내공을 조절해야 하는 상황에서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에 의해 외부의 미세한 자극들이 여과 없이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묵향은 천천히 운기조식을 끝마쳤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묵향은 소리가 나오는 곳 근처에 있는 나무 위에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그런 다음 아래를 살며시 내려다보던 묵향은 놀라서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오랜 수련을 통한 기적적인 인내심으로 그것을 겨우 극복해 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달을 보면서 서럽게 울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보였던 것이다. 놀람이 끝나자 그 다음에는 더욱 호기심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왜 아르타어스가 울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가 눈물과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드래곤이라는 최강의 종족이 말이다. "흑흑흑, 아버지! 왜 저를 남겨두고 그렇게 빨리 가셨습니까?"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커다란 달은 이제 반쪽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아르티어스는 달을 보면서 주절거리며 진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삼아 할 생각이었으나 아마도 달밤의 묘한 정취가 아르티어스의 감정을 자극했는지도 몰랐다. "왜 이렇게 아버지가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그냥 엄한 아버지가 싫기만 했는데, 지금은 너무 후회가 돼요. 진작 아버지에게 효도해 드리는 건데...... 역시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어요. 너도 자식이 생기면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그 말이 이제야 겨우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이렇게 후회가 될 줄 알았다면, 이렇게 가슴이 아파올 줄 알았다면......" 서글피 울며 주절거리던 아르티어스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어쩔 때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까지 해요, 왜 일찍 돌아가셔서 제게 효도할 기회도 주지 않으시고, 끝내 불효막심한 놈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하시는 겁니까? 왜!" 한참을 주절거리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는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우는 모습보다 더욱 처연하게만 느껴졌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를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짓이라도 이제는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제가 미우시죠. 하지만 너무 절 미워하시지는 마세요. 흑흑, 사사건건 저와 대치해서 싸우려고만 드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과거에 제가 얼마나 아버지께 불효한 놈이었는지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묵향은 도저히 더 이상 숨어서 엿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곳에 있는 야만인들 중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이 조금만 자존심을 숙이고 들어가면 될 것을, 저렇게까지 아르티어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다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아들과 지내고 싶다는 단 하나의 소망만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아르티어스를 말이다. 묵향은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며 아르티어스를 꼬옥 껴안았다. 그의 두 눈에서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제, 제가 잘못했어요. 아버지. 그렇게 슬퍼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제가 잘못한 것이지 아버지가 잘못하신 게 아니라구요." 아르티어스는 흐느껴 우는 묵향을 따스한 손길로 다독거려 주며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꼭 껴안고 있었기에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르티어스는 이미 그때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다, 다 내 잘못이었어. 내가 네게 무슨 도움이 되겠다고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그냥 아버지의 레어나 지키면서 참회하며 사는 것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고향을 찾겠다는 너의 간절한 바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쓸데없이 내 고집만 피웠구나.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잘못했다." 처연할 정도로 나직한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시네요." 묵향은 아르티어스에게서 배운 용언마법을 다급하게 전개했다. 그 것은 아르티어스가 묵향이 다크로 변신해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르쳐 준 트랜스포메이션 마법이었다. 트랜스포메이션으로 변신했을 때는 저주에 걸렸을 때처럼 완벽한 성전환은 불가능하다. 즉, 성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크는 아직 여물지도 않은 소녀였었기에, 가슴은 거의 튀어나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런지 변신한 묵향은 과거 다크였을 때와 비교해 하나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애 띤 소녀와 같은 다크의 모습인 묵향을 꼭 끌어안으며 아르티어스는 감동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오오, 내 사랑스런 아들아......" 묵향을 꼭 끌어안은 아르티어스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득의 에 가득 찬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끌어안은 상태였기에 묵향으로서는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주도권을 확실히 제압했다고 느낀 아르티어스는 나직하면서도 힘이 실린 목소리로 묵향에게 말했다. "아빠라고 불러라. 아빠!" 잠시 망설이던 묵향은 결국 체념한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예, 아빠." 달빛이 포근히 내리는 밤, 오랜만에 부자간에는 오붓하면서도 다정스런 대화가 오고갔다. "젠장, 아들놈 때문에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정말 지독하게도 말을 안 듣는단 말씀이야. 하지만 네가 아무리 까불어도 결국은 내 손바닥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킥킥킥." 아르티어스는 키득거리며 잠을 자기 위해 천막으로 돌아갔다. 사실 단독생활을 즐겨하는 드래곤에게 있어서 무슨 애절한 효심이라는 것이 있고, 또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하지만 비록 연극이기는 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기에 그런 것인지 천막으로 걸어가는 아르티어스의 걸음걸이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천막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묵향을 촌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다쿠다의 경우는 그 충격의 강도가 더욱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같은 황색의 피부에 검은 눈,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루 밤만에 투명할 만큼 하얀 피부에 황금빛 찬란한 아름다운 머리카락, 그리고 커다란 갈색의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로 바뀌어 버렸으니 다쿠다나 촌락민들이 모두들 기절초풍할만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르티어스와 묵향을 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이란 원래 전지전능한 존재, 겉모습이야 언제든지 무엇으로든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그들은 가급적 놀라움을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그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다쿠다가 지켜보는 가운데, 묵향은 가볍게 몸을 날려 말 등에 올라탔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마을 촌장과 주술사와 예기를 나눈 다음 언제나 그랬듯이 작은 주머니 하나를 받아서 품속에 챙겨 넣었다. 여태껏 다섯 군데 마을을 거치면서 하나씩 받았으니 아르티어스의 품속에는 다섯 개의 주머니가 들어 있는 셈이다. 그 주머니 안에는 촌민들이 주변에서 채취한 사금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사금 외에도 촌민들이 존경의 표시로 바친 담비나 족제비 등의 가죽들, 곡물 가루와 말린 고기까지 정성스럽게 가죽 주머니에 담아왔다. 다쿠다가 선물들을 말에다 싣고 있는 것을 보며 묵향이 영 마땅치 않다는 듯 투덜거렸다. "이 작은 마을에서 뭐 긁어먹을 게 있다고 저것들을 다 받는 거예요? 저런 거 없어도 누이가 먹고 사는 데 별 지장 없잖아요?" "후후, 네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의복과 식량만큼 중요한 것이 있더냐? 안 그러면 내가 이 나이에 사냥을 하러 다니리? 그것도 아니면 본체로 현신해서 이 말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협박이라도 하라는 말이냐?" 가볍게 묵향의 의견을 일축한 아르티어스가 다쿠다에게 뭐라고 말하자, 다쿠다는 재빨리 말에 오른 다음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 여행도 오늘이면 끝날 것이기에 그의 채찍질은 경쾌하기만 했다. -------------------------------------------------------------------------- 둥루젠의 수도- 대족장 타르티가 살고 있다는 성은 해안에서 멀지않은 위치에 세워진 돌로 만든 작은 석성이었다. 아마도 그 성은 커다란 항구와 그를 끼고 잘 발달되어 있는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건설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을의 주민들을 모두 다 수용하기에는 성의 규모가 무척이나 작았고, 마을은 성 안쪽이 아니라 항구를 끼고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성의 규모는 크지는 않았지만,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보는 문명적인 것이었다. 물론 성벽을 쌓아놓은 돌 자체도 네모 반듯한 것이 아니라 대충 커다란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 같은 엉성한 구조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며 묵향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자신이 살고 있었던 시절보다 훨씬 과거에 도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조바심을 내고 있었는데, 이 정도 규모의 성까지 쌓아놨을 정도라면 그렇게 심하게 과거로 온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것 봐라." 묵향은 감회어린 표정으로 성을 바라보고 있다가 아르티어스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 막 바다로 출항하고 있는 40여 척의 크고 작은 배들로 이루어진 선단이 보였다. 큰 배를 중심으로 수십 척의 작은 배들이 지네 발 같이 달려 있는 노를 힘차게 저으며 바다를 헤쳐 나가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리고 넓직한 만에 자리 잡고 있는 항구 내에도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항구를 내려다보며 아르티어스는 감탄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야말로 천연적인 항구로구나. 웬만한 폭풍이 불어도 끄떡도 없겠어." "그러니까 여기에다가 항구를 만들었겠죠. 일단 항구로 가 봐요. 혹시나 제가 살던 곳을 아는 상인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자꾸나.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라면 이 주변의 많은 나라에 가봤겠지." 이곳은 둥루젠의 수도였다. 그리고 항고를 수도로 정했다면, 예상외로 이 야만족들은 해상무역을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해상무역의 특성상 먼 곳까지 진출했을 것이고, 교역지의 많은 상인들이 와서 득실거릴 수도 있을 테니 묵향이 원하는 정보를 얻기에 좋을 것이 아닌가? 아르티어스 일행이 시내로 들어서자 길거리를 지나가던 수많은 원주민들은 이 색다른 모습을 하로 있는 이방인들에게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졌다. 하지만 한 눈에 척 봐도 이방인들은 비무장인 것이 확실했기에 호기심 어린 눈길만 던졌을 뿐 별로 주의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항구에 도착해 보니 거의 60여척이나 되는 배들이 선착장에 빼곡이 들어차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 작은 배들이었다. 하지만 큰 배들도 몇 척인가 보였다. 정박해 있는 배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30미터가 조금 넘어 보였고, 유선형으로 길쭉하게 빠진 선체와 배 중심에는 선체의 크기에 비해 짧게 느껴지는 돛대가 두 개 솟아 있었다. 그리고 몇몇 배는 그보다 훨씬 작아서 제법 크다 싶은 것이 25미터 정도였고, 대부분의 배들은 20미터도 안 되는 것들뿐이었다. 묵향이 예전에 통치했던 치레아 공국도 바다를 통한 중개무역을 주축으로 했었다. 묵향은 치레아 공국에 가서야 난생 처음으로 바다를 봤었고, 또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주민들을 위해서 무역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었다. 대량의 상품을 거래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운송수단이 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 정박하고 있는 배들은 그때 봤던 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먼저 한 눈에 척 봐도 길이만 길쭉하게 길었지, 높이와 폭이 작아서 화물을 그다지 많이 실을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미개한 민족이라면 저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묵향이었다. 묵향이 감회어린 표정으로 넓은 바다와 그 사이사이에 떠 있는 배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는 그 배들을 쓰윽 둘러보더니 심드렁하게 한마디했다. "에이 씨, 뭐야 이거! 용골이 없잖아. 뭐 이런 배가 다 있어?"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도무지 의문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기어코 질문을 던졌다. "아빠. 용골이라니요? 그럼 배를 건조할 때 드래곤 본을 써야 된다는 말이에요? 아빠 앞에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드래곤 잡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 귀한 뼈다귀를 배를 만드는데 쓴단 말이에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황당하다는 듯 한동안 말을 잊고 묵향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무식한 녀석이 과연 나의 아들이란 말인가? 정말 어이가 없군." "방금 아빠가 용골이라고 했잖아요. 즉, 용의 뼈다귀!" 계속 묵향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자 아르티어스는 답답하다는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이구! 용골이라는 것은 뼈다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까......" 아르티어스는 땅바닥에 쓱쓱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배의 구조를 대략적으로 설명을 해줬다. 용골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배의 골격을 잡는 그 중심축을 용골이라 부르며 그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 배의 강도에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아르티어스의 설명에 의하면 대해를 횡단하려면 용골은 절대적인 필수조건이었다. 아르티어스는 용골의 구조를 설명한 후,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묵향에게 말해 주었다. "물론 무역선이 전선처럼 튼튼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대해를 횡단해서 무역을 하려면 이런 배로는 어림도 없다고 봐야 하지. 그렇다면 연안을 돌아다니면서 무역을 하는 배인가? 흐음, 하지만 상선이라고 하기에는 배의 형태가 좀 이상해. 배가 너무 날씬하고, 또 높이가 낮은 만큼 짐도 많이 실지 못할 거야. 거∼참 이상한 노릇이군." 알아듣기 쉽게 묵향에게 설명해 주는 아르티어스의 배에 대한 지식은 절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묵향은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우와, 아빠가 어떻게 그렇게 배에 대해서 잘 아세요? 아빠는 바다에 산다는 그 실버 드래곤도 아니잖아요." 아르티어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묵향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험, 내 나이 벌써 4,000! 웬만한 것은 다 경험해 봤지. 내가 소싯적에 네 할아버지 속 많이 썩힌 거 알지?" "그, 그랬죠." "내가 사고 친 다음에 한동안 할아버지를 피해서 튄 곳이 뱃사람 생활 아니겠냐. 네 할아버지는 물 근처에도 잘 안 가시는 성격이었기에 그곳이 안성맞춤이었지." 그 말에 묵향은 아르티엔이 아르티어스를 잡는다고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잠시 연상해 보았다. 처음에는 치기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인자한 사부의 모습. 짧은 시간이었지만 묵향은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의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그때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정말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비록 얼마 같이 지내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 성격도 보통은 아니시던데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그 악몽 같던 시간들이 떠오르는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말도 마라. 내가 그때 한 고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빨이 갈린다. 너무 급하게 튀다보니 보석이나 돈이 될 만한 것을 하나도 못 챙겼거든. 그러니 별 수 있냐?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그런데 바다라고는 난생 처음 접해 보는 사람을 태워 주는 배가 어디 있어야지.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상선에 얻어 탔더니, 신참이라고 자식들이 나를 얼마나 갈구던지......" 아르티어스의 얘기에 묵향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아빠 성격에 그걸 그냥 놔 뒀어요?" 그때를 생각하자 아직도 진절머리가 나는지 아르티어스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어쩔 수 있냐? 그놈의 배 멀미가 뭔지...... 한 달을 생고생을 하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더라. 그리고 배 멀미에 익숙해진 후에도 도망치는 몸에 사고를 칠 수가 있어야지. 그랬다가는 순식간에 소문이 쫘악 퍼질 건데 말이야. 마침 우연한 기회에 내 성격에 대충 맞는 배가 있길래 얼른 그리로 옮겼지." "아빠 성격에 맞는 배가 어딨어요?" 아르티어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어어, 그렇고 그런게 있어. 건실하게 열심히 일하면서도 아주 화끈한 애들이 많이 모여 있는 배가 말이야. 하하하! 그때는 정말 재미있었지. 역시 배를 바꿔 타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거든." "그럼 그 배에 꽤 오래 타셨겠네요? 아빠는 성격에 맞으면 거의 무한정으로 눌러앉아 있잖아요." 한참 흥이 나서 얘기를 하던 아르티어스는 안 좋은 과거를 회상이라도 하는 듯 갑자기 인상을 팍 찡그리다 계속 말을 이었다. "에이 씨! 말도 마라. 한참 재미있을 만하면 군함들 눈치 봐야 하고, 나중에 크게 한 건 하려고 중앙 해로 쪽으로 접근했다가 순시함에 걸려 배는 박살나고 아주 죽는줄 알았다니까. 그때 얼마나 열심히 순시함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헤엄을 쳤는지...... 동료들의 일부는 건져져서 돛대에 목이 매달렸었지. 참, 끔찍했었어. 해적은 잡히면 무조건 사형......"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말을 실수했음을 깨닫고 얼른 말을 멈췄다. 하지만 묵향의 눈이 벌써 실쭉 가늘어진 상태에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르티어스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저것 봐라. 저쪽에 묶여 있는 작은 배들은 한 눈에 척 봐도 고기잡이 배라는 것을 알겠지?" 묵향은 의심스럽다는 듯한 시선을 채 지우지는 못했지만, 일단 아르티어스의 의도대로 시선을 어선 쪽으로 돌렸다. "예" "요 근처를 왔다갔다 하면서 고기 잡는 배들이야 돛을 쓰건, 노를 쓰건 별 상관할 바가 없겠지만 상선은 달라. 상선은 보통 돛으로 움직이지. 노를 이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거든. 왜냐하면 상선의 경우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양의 물건을 옮기는 데 그 의미가 있단 말이야. 많은 노잡이들에 대한 인건비도 문제가 되겠지. 물론 노잡이를 노예로 쓸 수도 있겠지만, 장거리 항해를 한다면 그들의 식량과 물을 실을 공간이 필요하지 않겠니? 그만큼 화물을 적재할 공간이 줄어든다는 말이지. 돛을 사용하면 역풍이 불 때 힘들기는 하겠지만, 노잡이들이 차지할 공간까지도 모두 화물로 채워 넣을 수 있으니 그만큼 짐을 많이 실을 수 있거든." 잠시 아르티어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 묵향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렇다면 결론은 전선이라는 말인데, 그럼 왜 용골을 달지 않았을까? 용골을 달면 깊은 바다에 나갈 때 안정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튼튼하거든. 원래 해전을 하다 보면 배끼리 부딪칠 수도 있고..., 그런 만큼 튼튼한 선체는 필수조건인데 말이다." "용골을 만들 줄 몰라서 그런지도 모르죠." 아르티어스는 손가락을 탁 튕기며 말했다. 아들놈의 말 대로 해답은 너무 간단한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맞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 이유밖에 없겠어. 이놈들이 원체 미개하다는 사실을 내가 잠시 깜빡했군." 아르티어스의 설명에 묵향은 실망한 어조로 말했다. 상선이 모이는 곳이라면 이 근처 바다를 항해한 성원들이 득실거릴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뭔가 중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르티어스의 말을 듣고 보니, 아무래도 저것들이 상선이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것은 상선이 아니라는 말이군요. 그럼 여기에서 어정거려 봐야 별로 득 될 것도 없겠네요.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묵향이 질문을 하자 아르티어스는 미리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 시장으로 가야지." "시장에는 왜요?" 아르티어스는 다쿠다가 끌고 있는 짐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것들을 팔아치워야 할 것 아니냐? 가죽뭉치를 들고 다녀봐야 쓸데도 없고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다쿠다에게 지시해서 시장으로 안내하게 했다. 시장으로 가면서 묵향은 시가지의 규모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월등하게 크다는 데 놀랐다. 물론 시가지의 규모는 겨우 5만 명 정도가 모여 사는 수준이었지만, 지금까지 봐왔던 원주민들의 생활수준에 비했을 때 이것은 정말 대단한 규모였다. 원래 많은 인구를 수용하는 시가지가 발달하려면 상업이나 공업의 발전은 필수적이었다. 한 곳에 집중된 그 많은 인구가 먹고 살 기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역시 묵향의 예상대로 시장의 규모는 대단히 컸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득실거리며 갖가지 물품들을 거래하고 있었다. 말이나, 소, 양, 염소, 닭 등의 각종 가축이라든지 쌀이나 보리, 호밀, 수수 등의 곡물들. 그리고 담비나 족제비, 여우같은 값비싼 가죽들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구리나 무쇠로 만든 솥을 파는 상인도 있었고, 여자들의 장신구로 사용하는 구슬이나 방울 등등 수많은 자질구레한 상품들도 보였다. 시장을 한바퀴 둘러보면서 아르티어스는 다쿠다에게 지시해 상인들과 흥정을 붙여 지금까지 오면서 선물 받은 각종 가죽과 물품들을 사금과 바꿨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가죽을 구하기가 쉬워서 그런지, 말 등에 실려 있던 그 커다란 가죽뭉치를 모두 다 넘겼음에도 받은 사금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르티어스는 짐말과 식량까지도 다 팔아치우려고 했지만, 그것을 묵향이 가로막았다. 묵향은 짐말에 실려 있던 육포들 중에서 며칠 먹을 분량만큼만 꺼내어 자신의 말에 실었다. 그런 다음 나머지는 모두 다 다쿠다에게 줘서 서둘러 돌려 보냈다. 이곳까지 안내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아르티어스가 언제 말과 식량을 팔아 버리는 것으로 마음을 바꿀지 알 수 없었기에 그렇게 서둘렀던 것이다. 다쿠다는 감사하다며 몇 번씩이나 고개를 조아리고 식량을 실은 말을 끌고 돌아갔다. 안내자인 다쿠다를 떠나보낸 후, 묵향은 시장에서부터 떠올랐던 의문을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시장에서는 아르티어스와 다쿠다가 물건을 판다고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한가롭게 대화를 나룰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둘만 남은 상황이었고, 아르티어스도 일을 모두 처리했기에 느긋하게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아빠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뭐가 말이냐?" "여기 시가지의 규모가 너무 크잖아요. 부근에 사는 촌민들의 생활 수준이라든지, 뭐 그런 것들을 봤을 때 이렇게 도시가 크게 발달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죠." 묵향의 질문에 그 정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쉽게 대답했다. "호비트야 약간의 땅만 있으면 쥐 떼처럼 불어나는 속성이 있잖느냐. 내 여태껏 살아오면서 호비트만큼 번식력과 생존력이 강한 동물은 쥐 말고는 본 적이 없다. 거기다가 이곳은 둥루젠 부족의 수도가 아니냐? 주위의 산물들이 이곳으로 집중될 테고, 또 대족장이 사는 곳인 만큼 안전까지 보장되니까 호비트들이 안 모여들 수가 없겠지."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치레아에 있을 때 느낀 건데 말이요, 도시가 발달하려면 뭔가 확실한 이유가 필요하다구요. 상업이나 공업이 발달하지 않는 한, 많은 인구가 한 곳에 모여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든요." 묵향의 말에 별걸 다 신경 쓴다는 듯 아르티어스의 대꾸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또 모르지. 항구니까 물고기가 많이 잡히던지, 아니면 배를 통한 중개무역이라도 하는지 말이다."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배가 상선은 아니라면서요. 그리고 작은 어선 몇십 척 아니, 항구 밖에 고기 잡으러 간 배가 그 몇 곱절이 된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돼요. 그리고 이놈들은 돈이라는 것도 없어서 물물교환을 하던지, 아니면 사금으로 거래를 하잖아요. 그 말은 상업을 통해 먹고 사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증거 아니겠어요?" "글쎄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놈들이 뭘 해서 먹고 사는지 조사하는 것이아니라, 중원을 찾는 거 아니었냐?" 묵향은 더 이상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낀 점을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아르티어스의 말처럼 중원을 찾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죠."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자,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식당이나 찾아보자. 정보를 긁어모으는 데는 여행자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식당이나 술집만한 데가 없느니까 말이다." "그러죠, 뭐" "한 며칠 수소문을 하다 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히겠지." 아르티어스는 묵향을 이끌고 식당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식당을 도저히 찾을 도리가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지나가던 원주민 한 명을 붙잡고 식당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어디에 식당이 있대요?" "글세......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이 저쪽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거기에 가보면 식당이 있지 않겠냐?" 하지만 아무리 가도 식당은 나오지 않았다. 또 다시 아르티어스가 지나가던 원주민 한 명을 붙잡고 장황하게 질문을 늘어놨다. 원주민이 뭔가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아르티어스에게 중얼거리며 가 버린 후 묵향은 짜증난다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겨우 식당 하나 물어보는데 무슨 설명이 그렇게 길고, 또 저놈의 반응은 왜그래요?" "글세 말이다. 식당이라는 게 원주민 말로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거든. 아무리 기억을 유추해 봐도 떠오르지가 않는단 말씀이야. 그러니 자연 빙 둘러서 질문을 해야 하고, 또 질문을 받은 놈도 모르겠다고 저러는구나." "젠장, 그럼 여행자들이 모인다는 그쪽이나 빨리 가 봐요. 거기를 쭉 둘러보다 보면 어딘가 있겠죠. 설마 여기까지 여행을 와서 풀뿌리를 씹고 있겠어요?" 묵향은 천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곳에 도착해서야 왜 자신들이 식당을 찾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천막들은 우물을 기준으로 넓은 공터에 수십 개가 쳐져 있었다. 우물에서 원주민 아낙들이 가죽부대를 가지고 물을 길러 가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천막 앞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곡물과 함께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런 식이라면 이곳에다가 식당을 열어봐야 장사가 될 턱이 없을 것이다. 여행객이라는 것들이 집과 식량을 함께 가지고 다니는데, 어떻게 장사가 될 턱이 있겠는가 말이다. "바로 저거였군요. 그렇다면 여기에는 식당이라는 게 없는 모양이죠?"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심각하게 잠시 생각해 보더니 중얼거렸다. "식당뿐만 아니라 여관이라는 것도 없다는 게 정확한 분석일 게다. 내가 잠시 잊어 버리고 있었는데, 이놈들은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어. 그렇다면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고 난 뒤 무엇으로 대가를 지불할 것이며, 여관에서 하루 밤 자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냐? 아예 그런 식으로 화폐를 사용할 만한 일이 없다는 반증이 될 테지." 아르티어스의 설명에 묵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그럼 노숙을 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저쪽에 가서 말린 고기나 구워 먹죠. 저 요즘 고기 잘 굽거든요. 헤헤." "그러자꾸나." -------------------------------------------------------------------------- -고기를 굽는 데는 혈수마공이 최고- Chapt.7 묵향은 말 등에 실려 있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잘 말린 육포 몇 개를 들고 돌아왔다. 불타오르는 듯한 그의 손이 한 번 쓱 훑었을 뿐이었는데도 육포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졌다. 묵향은 그것을 아르티어스에게 건네 준 후, 또 다시 한 개를 구워서 입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역시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무서운 거야. 파괴력이 막강하다는 것만 알았지, 혈수마공에 이런 기가 막힌 용도가 있을 줄이야...... 아예 불이 필요 없구만." 주의 깊게 묵향의 행동을 살피던 아르티어스는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방금 쓴 그 마법이 혈수마공이라는 거냐? 거∼참, 상당히 편리해 보이네. 그거 나도 좀 가르쳐 주라. 주문이 어떻게 되는 거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주문이라고요? 이건 마법이 아니라 무공인데요. 그리고 가르쳐 준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쓸 수 있는게 아니라서......" "짜식 쫀쫀하기는...... 가르쳐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대놓고 따지지는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꿍얼거리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묵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요. 에이∼씨, 가르쳐 드리면 될 거 아니에요." "히히히, 안 그래도 할 일도 없는데 그거라도 한 번 배워보자." "좋아요. 그럼 잘 새겨들으세요." 천천히 묵향이 하는 말을 들으며 아르티어스의 안색은 점점 똥 씹은 듯 누렇게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묵향이 읊어주는 그것은 혈수마공의 구결이었다. 무공을 익혀 본 무인이라면 다 알 것이다. 최상급 무공의 구결이라면 원래가 무공의 아주 근본적인 부분을 파고들게 되기에 매우 추상적인 정신세계를 다루게 된다. 특히나 혈수마공같이 천하 5대 수공에 들어갈 정도의 무공이라면 그 구결의 심오함은 거의 이해불능의 수준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묵향이 자신이 처음 배웠던 구결을 그대로 아르티어스에게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무공서적에 적힌 구결은 타인에게 유출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거의 암호화해 놨기에 그것을 그대로 일러줘 봐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묵향은 자신이 깨달은 부분을 포함하여 비교적 알기 쉽게 일러줬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뭔가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멍청히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보고 묵향은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까지가 총체적인 구결이구요, 그 다음 각 부분에 따른 요결이 따로 있죠. 그러니까......"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혈수마공의 구결을 이해함에 있어서 따라 다니는 요결이었다. 요결은 각 부분부분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뛰어난 고수가 들려주는 요결과 그렇지 못한 인물이 들려주는 요결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해한 부분까지를 총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결 강의가 시작되자, 아르티어스의 안색은 더더욱 멍해지기 시작했다. 원래가 마법만 배운 그에게 있어서 요결은 더욱 혼란만을 가중시켰을 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요결을 모두 말한 묵향은 이해할 수 있겠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아시겠어요?"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반응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맹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곧이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확 뒤바뀌었다. 그 다음에 이어진 묵향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골드일족의 후예이시면서, 전지전능에 가깝다고 자화자찬하시는 아빠니까 그 정도는 금방 익히시겠죠?" 묵향의 비꼬는 듯한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곧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한 말이 있었기에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듯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면, 그에 따른 결과를 묵향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만약 이 난해한 마법을 익히지 못한다면, 아들이 자신을 어떻게 존경하겠는가 말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르티어스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자, 일단 시간을 벌기로 결심했다. 그러자면 뭔가 기대에 가득 찬 듯 자신을 바라보며 실실 웃고 있는 아들놈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려 놓을 필요성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뭘 말이에요?" "이런 미개하기 그지없는 놈들을 상대로 필요한 정보를 얻어낼 뭔가 다른 방법이 있느냐는 것이다." "글쎄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아르티어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참! 왜 내가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 여기도 호비트가 사는 세상인 만큼 계급이 있을 것 아니냐. 여기까지 오면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비록 미개한 족속이라고는 하지만 촌장도 있었고, 각 지역을 관할하는 족장도 있었잖니? 특히 여기는 대족장이라는 놈이 살고 있으니 그놈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환히 웃으며 좋은 방법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곳에서 상인을 찾아다니느니 차라리 이 지역을 통치하는 대족장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아, 맞다.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아르티어스는 씹고 있던 육포를 땅바닥에 던져 버리며 말했다. "그곳에 가면 이것보다는 좋은 음식을 대접받을 수 있겠지. 그리고 따뜻한 잠자리도 말이야. 안 그러냐?" "그럼요. 빨리 가죠." 성은 야트막한 언덕 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번보다는 훨씬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시가지와 항구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시가지와 항구에서도 성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와 묵향은 원주민에게 길을 물어보는 수고를 생략하고 곧장 성을 찾아갈 수 있었다. 성문을 지키고 서 있는 병사는 6명 가량이었는데, 그들의 복장은 거의 통일이라도 시킨 듯 흡사했다.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있는 것은 지금껏 만난 촌락민과 똑같았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성문을 지키는 병사답게 완벽한 무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모든 촌락민들은 무기를 다룰 줄 알고 있었고, 또 무기들은 집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먹고 살 일이 바쁘다 보니 간편한 무장만을 하고 다니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은 방패를 등에 지고, 긴 창을 쥐고 서 있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원주민 병사들은 색다른 모습의 이방인이 나타나자 험악한 인상으로 창을 꼬나들고 앞을 가로막으며 뭐라고 지껄여댔다. "저 녀석들 뭐라고 지껄이는 거예요?" 병사들의 무례한 태도에 기분이 상한 묵향이 묻자,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했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 거야. 그냥 때려눕히고 들어갈까?" "그러면 대판 싸우게 될 게 뻔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아주 중요한 일로 대족장을 만나러 왔다고 해요." "그럴까? 쩝, 귀찮기는 하지만 네 말대로 하마." 병사들 중의 한 명이 대족장을 만나러 왔다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무시하지 못하고, 성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 그 병사는 상관인듯한 한 인물과 함께 걸어 나왔다. 그 또한 여태껏 보아왔던 원주민들처럼 어깻죽지만 감싸고 있는 털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허리에는 병사들처럼 작은 단도만이 꼽혀 있지 않고, 반월형으로 휘어진 커다란 도를 차고 있었다. 그는 도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거만한 표정으로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곧장 아르티어스도 그의 말에 응수해 한동안 서로 원주민 언어로 지껄여댔다. 갈수록 서로간의 말투가 거칠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 묵향이 아르티어스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하는 거예요?" "저놈이 대족장을 만나지 못한다고 하잖아." 아르티어스가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묵향의 생각은 달랐다. 성을 경비하는 병사들로서는 그렇게 나와야 당연한 것이다. 상대가 주변 강대국에서 온 사신도 아니었고, 또 대족장을 만나러 왔다면서 뭔가 대단한 선물을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그것도 그냥 맨손으로 와서는 대족장을 만나게 해달라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묵향은 잠시 생각해 본 후 입을 열었다. "병사들이야 당연히 그렇게 나오겠죠. 그럼 이렇게 하자구요. 여태까지 이리로 오면서 신으로서 많은 대접을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신께서 왕림하셨다고 둘러대면서 대족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설마 그 촌락에서 이쪽까지 20일간에 걸쳐 쉬엄쉬엄 왔는데, 신이 왕림한 사실을 대족장이 모를 리가 있겠어요? 벌써 보고가 올라왔어도 예전에 올라왔을 걸요?" "호오, 그럴 듯한데. 그 방법도 괜찮겠군. 그러니까 내 전공을 살리자는 말인데... 좋아! 한번 해 보자." 아르티어스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감탄사를 연발한 수, 나직하게 목소리를 깔며 병사들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기대와는 달리 병사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존경심이나 경외감 따위와는 거리가 먼 경멸감이었다. 병사들이 뭐라고 지껄여대자 아르티어스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그것을 보고 묵향이 옆에서 아르티어스의 옷깃을 슬쩍 잡아끌며 물었다. "도대체 저놈이 뭐라고 했길래 그래요?" 아르티어스는 사나운 눈빛으로 그 병사를 째려보며 투덜거렸다. "저놈이 나를 보고 사기꾼이라고 하잖아. 씨쥬에서 온 장사치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 감히 신의 이름을 사칭한다고 말이야. 목을 잘라 버리기 전에 꺼지라고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게 생겼냐?"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말에 좋은 정보를 얻었다는 듯 다급히 물었다. "뭐라고요? 씨쥬에서 온 상인이라고요? 호오, 그렇다면 색목인이 여기까지 들어오는 모양이군요. 그럼, 그들을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는지 한번 물어봐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르티어스가 퉁명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상대는 차가운 어조로 뭐라고 떠든 수 성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병사들도 빨리 꺼지라는 듯 창을 들이밀며 아르티어스를 위협했다. 순간 아르티어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며 거칠게 외쳤다. "이것들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어디 맛 좀 봐라." 아르티어스는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뻗으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골드 드래곤은 바람의 정령력을 지니는 존재가 아닌가. 그는 바람의 정령들을 불러서 저 싸가지 없는 놈들을 날려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어? 왜 이래?"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령의 힘이 전혀 느껴지지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렇다면 지금까지 불어오던 바람은 뭐였지? 여기서는 정령이 없어도 바람이 분다는 말인가? 에잇! 젠장, 그건 나중에 천천히 연구해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렇다면 이것은 어떠냐?" 아르티어스는 본격적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강력한 마법이라면 마나가 희박하기에 구사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저런 야만족 병사 하나를 족치는데 그렇게 고급 마법은 필요도 없었다. 아르티어스가 주문을 외워 마법을 발동시키자, 퉁명스레 말하고 되돌아가던 도를 찬 병사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몸이 뒤로 확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비명을 질러대며 질질 끌려왔고, 곧이어 아르티어스의 손아귀에 잡혀 버렸다. 그제서야 그는 아르티어스가 자신에게 먼가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창백해진 안색이기는 했지만, 큰 소리로 지껄여대며 허리에 찬 도를 꺼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반항도 잠잠해졌다. 아르티어스가 그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호되게 갈겨 버렸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모든 병사들이 벌떼를 건드린 듯 웅성거리며 전투대형을 갖췄다. 방패로 몸을 가리며 창을 꼬나 쥐고 서서히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을 보자 아르티어스는 같잖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것들이, 정말 죽으려고 작정을 했군. 그래, 어디 한번 죽어봐라." 아르티어스가 주문을 외우며 슬쩍 손을 뻗자, 그의 손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곧장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던 병사 한명에게 직격했고, 그는 괴성을 질러대며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윽고 잠잠해져 버렸다. 죽은 것이다. 그것을 보자 병사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부들부들 떨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마법을 이상한 방법으로 사용하자 궁금한 듯 물었다. "왜 그렇게 한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안하고, 겁에 질린 병사들의 모습에 기고만장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흐흐흐, 이것들이 이제서야 나를 알아 모시는 모양이군. 하등한 네놈들에 비하면 신에 가까운 이몸을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성문 근처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자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뭔가 주문을 외워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는 찬란한 서광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가사의한 그 광경을 목격한 병사들은 하나 둘씩 무기를 버리고 땅에 꿇어앉은 채 절을 하며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외침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그 안에는 탱게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묵향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모든 병사가 엎드려 절을 하자 아르티어스는 흡족한 표정으로 나무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엎드리고 있던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번쩍! 콰콰쾅. 이때 구름 한점 없던 맑은 하늘에서 새하얀 번개가 내리꽂히며 나무를 수직으로 두동강을 내버렸다. 그 광경을 본 병사들은 공포와 경외감에 질린 얼굴로 아르티어스에게 절을 해대며 연신 탱게를를 외쳐대기 시작했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 그리고 그 외침은 점점 더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성문 주위에서 탱게르라는 커다란 함성이 들리자, 성 내부에 있던 병사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들도 곧 상황을 인식하고 그 대열에 계속 합류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탱게르를 외쳐대고 있는 가운데,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묵향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뒤에서 보니까 시답잖은 전격마법으로 한 명 구워 죽이고, 저 나무를 반쪽 낸 것밖에 없었잖아요. 그런데 왜 이 난리죠?"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씨익 웃으면서 대답했다. "쯧쯧쯧, 그래서 네가 아직 멀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호비트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다니...... 그래서 내가 말했잖냐. 똑같은 마법을 쓰더라도 저런 무식한 것들 앞에서 쓸 때는 연출효과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이야." "연·출·효·과·요?" "그래, 똑같은 마법이라도 어떤 방식으로 조합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지. 라이팅 마법으로 몸을 감싸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전격마법으로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보여 주었잖니. 그랬더니 봐라, 저것들이 나를 탱게르, 즉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잖아." 으스대는 아르티어스를 묵향은 같잖다는 듯 바라봤다. 하지만 묵향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잠시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은은한 빛 무리로 몸을 감싼 아르티어스는 평소의 주책 맞던 그의 모습을 연상하기 힘들 만큼 위엄과 신성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잠시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며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던 묵향은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폼이 나긴 난다만은 참 내, 별 같잖은 게 다 통하네." 그것은 묵향이었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마법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오랜 세월 살며 거기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묵향은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는 거대한 강철 인형이나, 6싸이클급 이상의 막강한 마법들, 그리고 마계의 발록은 물론이며 그보다도 월등한 불칸과도 싸워 보지 않았던가. 그런 묵향이었기에 아무리 연출이 좋다 하더라도 저런 간단한 라이팅 마법과 전격 마법에 속아 땅바닥에 꿇어앉아 천신이라 부르짖고 있는 병사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7fin -------------------------------------------------------------------------- -번개의 신 당케 탱게르- "밖이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것이냐?" 두툼한 호랑이 가죽을 깔아놓은 의자에 앉아 있던 대족장 타르티는 밖에 시끌벅적 시끄럽자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해리바가 즉시 문 앞에 서 있던 호위 병사에게 지시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라." "옛!" 병사가 달려 나간 후, 타르티는 해리바와 방금 전까지 나누던 대화를 계속했다. "흐음, 아무래도 조금 더 지켜보는 것 묵향 17권 부활하는 마교 작가의 말 안녕하셨습니까? 너무늦게 17권을 출간하게 되어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16권이 혹평을 받았었기에, 제 나름대로 많은 궁리를 했었스니다. “일단 잊자. 그런 다음 시작하자.” 제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글쓰기 방법입니다. 제 글의 줄거리가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었기에 그것들과 달리 새롭게 쓰려면 모두 잊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머릿속의 기존 줄거리를 모두 잊은 후, 새로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듯 다시금 머리를 짜내어 새로운 구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너무 오랫동안 쉰 결과, 잊어야 할 부분과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을 모두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시 글을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더군다나 그동안 둘째아들까지 태어나는 바라멩 더욱 정신이 없었습니다. 시간은 한 달 두 달 계속 흘러가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상경하여 하숙집을 하나 잡아놓고, 가족과 오나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17권을 완성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행동이었지요. 조용히 있으면서, 글 쓸 분위기가 형성되니까 스토리가 술술 풀리는 것 같더군요. 저는 묵향 첫 권을 내놓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었습니다. 재미있지 않으면 아예 재미있을 때까지 뜯어고치는 한이 있더라도 출판을 미루자고 말입니다. 16권이 애독자 분들의 기대에 못미쳤다면 너무나도 죄송합니다. 17권은 나름대로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했는데...... 지금 저는 17권의 반응이 너무나도 궁금합니다. 양에 차는 놈이 없다. 잘 다듬어진 정원. 특이하게도 정원에는 매화나무만이 심어져 있었다. 매화나무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중년인. 그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슬쩍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한쪽으로 튀어나와 있던 나뭇가지 하나가 예리하게 잘려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중년인은 또다시 잘라버려야 할 가지가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군.” 중년인의 이러한 태도를 십분 이해한다는 듯 그의 뒤에 서 있던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선택을 하셔야 하겠지만, 태상교주님께서 조만간에 뭔가 조치를 취해주셔야만 할 것입니다.” 그 말에 태상교주는 난감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알고 있다네. 수석장로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로군. 본교의 미래가 걸린 일인데, 그것을 은퇴한 지 오래인 노부가 결정해야 한다니...... 말년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로구먼.” 조언을 올리고 있는 노인은 지금은 은퇴했지만, 과거 수석장로직을 수행했던 천도왕(天刀王) 여지고(黎志高)였다. 그는 세력 다툼이 은근히 벌어지고 있는 마교의 현실을 우려하여 태상교주와 면담을 하고 있는 주잉었다. “하지만 태상교주님이 아니시면 그 누가 있어 본교의 미래를 결정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교주 자리가 벌써 23년씩이나 비어 있습니다.” 태상교주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쯧, 그걸 누가 모르나. 급하게 덥석 선택한 것이 최악의 수가 될 수 도 있는 일이니,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노부의 생각 같아서는 관지를 교주로 임명하고 싶었다네. 그라면 놀랍게 성장한 본교를 더욱 출실하게 다스려 나갈 수 있을 게야.” 여지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그가 뛰어난 인재인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는 교주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조차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무공이 너무 떨어집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태상교주는 매화나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게 문제야. 정말 세상사가 마음대로 안 되는구먼. 초류빈(楚柳濱)대신에 관지가 화경을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군문(軍門)에 있었기에 조직을 통솔해나가는 감각이 정말 탁월해. 그가 화경을 깨달았다면 주위에서 아무리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노부는 그를 교주로 삼았을 텐데......” 태상교주의 고민은 거기에 있어싿. 관지의 경우 대부분의 조건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 물론 교주는 마공을 익힌 자여야 한다는 율법이 있었으나, 그 정도는 무마시킬 자신이 있는 그였다. 하지만, 화경에도 이르지 못한 자를 교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강자지존의 철칙이 지켜지는 마교에서, 그것은 태상교주의 권위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 초류빈은 묵향의 직속 수하로서 마교에 들어왔다. 그렇기에 묵향이 실종된 후, 그가 할 일은 무공 수련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그가 덜컥 화경의 벽을 깨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교주로 삼기에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싿. 물론 마공을 익히지 않은 것도 문제이기는 했지만, 더욱 큰 문제는 그에게 야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태상교주가 봤을 때 그는 교주가 되기 위한 무공은 충분했지만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나갈 인재는 아니었다. 여지고는 슬며시 태상교주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시다면, 탈명도 부교주를 교주로 세우는 거싱 좋지 않겠스니까? 사실, 지금 탈명도 부교주와 철영 부교주의 세력이 대치 중이라고 하지만, 결국 뒤를 보면 탈명도 부교주를 관지 장로가 받쳐주는 형국 아닙니까? 태상교주께서 관지 장로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신다면, 탈명도 부교주를 교주로 만듦으로써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자는 것이지요.” 탈명도(脫命刀) 초류빈이 화경을 깨달아서 부교주의 직위를 받았다.면, 천리독행(千里獨行) 철영(鐵瀯)도 극마의 경지에 올라 부교주의 직위를 받았다. 교주가 없는 지금, 이 둘을 축으로 하여 교 내의 세력이 양분되어 있는 상태였다. 태상교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그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야. 하지만, 비록 실종된 지 23년이나 되었지만 아직까지 본교의 교주는 묵향이 아닌가? 만일 노부가 누군가를 교주로 임명한다면 그것은 묵향 교주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지 않겠나?” 여지고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왜 갑자기 태상교주가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노부가 누군가를 교주로 만든다면, 그때부터 교주가 되지 못한자가 가만히 있을까? 그나마 지금은 은밀하게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지만, 누부가 누군가를 교주로 삼는다면 그때는 아예 대놓고 세력전을 벌일게 분명해. 강자지존의 율법은 없어진게 아니니까 말일세.” 가만히 생각해보던 여지고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태상교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또, 초류빈은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지. 그를 교주로 만든다면, 철영은 틀림없이 그 점을 들고 나와 초류빈을 교주로 만든 것의 부당함을 제기할 걸세.” “하지만 묵향 교주라는 선례가 있습니다. 그분도 마공을 익히지는 않으셨지 않습니까?” 태상교주는 피식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물론이지. 하지만 그는 논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네. 누부는 지금껏 그보다 뛰어난 인물은 보지 못했네. 그는 교주가 되자마자 본교를 완전히 휘어잡아버렸지. 그 엄청난 무공에 누가 감히 반발을 꿈꿀 수나 있었겠는가? 거기에다가, 사람을 부리는 능력 또한 탁월했어. 그가 일을 맡긴 자들은 아직까지도 본교의 중심축을 이루며 그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율법에 나와 있다고 해도 누가 감히 그에게 그런 문제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겠나?” 여지고는 잠시 묵향 교주를 회상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여지고 장로는 묵향과 같은 인물을 모셨다는 거싱 하나의 자랑거리였다. 어쨌건 초류빈이 안 된다면 남은 것은 철영밖에 없어싿. 그렇기에 여지고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천리독행 부교주를 교주르 삼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는 정통적인 마교의 인물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태상교주는 잠시 매화나무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내 그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닐세. 철영은 아주 야심이 큰 인물이야. 극마에 올라 부교주가 된 이후부터 자신의 세력을 넓히는데 혈안이 되어 있지. 그리고 아주 호전적이지. 그 때문에 많은 고수가 그를 추앙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야. 하지만 그놈은 그릇이 너무 작아.”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만약 묵향처럼 본교를 휘어잡을 만한 능력이 있다면 차라리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문제라는 것일세. 그가 교주가 된다면 초류빈을 주축으로 하는 묵향의 추종파들이 가만히 있을까? 또, 그런 분리된 힘으로 정파 놈들과 맞설 수 있겠나? 주제 파악도 못하는 상태에서 야심만 커봐야 다 헛 거란 말일세. 그놈을 선택하면 기껏 키워놓은 본교를 한순간에 망쳐버릴 rt 같다는 늠낌이 강하게 들거든.” 여지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지만 그래도 교주직을 언제까지고 비워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방관만 하고 계실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묵향을 지지하는 탈명도 부교주의 세력과 교주를 새로 뽑은 뒤 하루빨리 본교의 숙원을 이룩하자는 천리독행 부교주의 세력, 이 두 세력이 충돌이라도 일으킨다면 본교는 또다시 내전에 휩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쯧쯧, 강자를 우선하는 피의 율법..., 하지만 어느 한 녀석도 양에 차는 놈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태상교주는 심란한 표정으로 매화나무를 바라봤다. “어서옵......” 반갑게 손니믕ㄹ 맞이하려던 점소이의 말이 도중에 뚝 끊겼다. 그도 그럴 것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의 옷차림이 너무나도 남루했기 때문이다. 땟국물에 절은 것도 모자라서 여기저기에 구멍까지 뚫려 있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거지나 다름없는 옷차림에 점소이가 상대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려는 순간, 그 목소리는 목구명 밑으로 쑥 들어가고 말아싿. 상대의 등 뒤에 묶여 있는 뭔가를 봤기 때문이다. 거대한 도(刀)의 손잡이를...... 완전 거지꼴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혹시 강호의 고수가 아닐까 생각한 점소이는 방금 전에 하다가 만 말의 뒷부분을 마지못해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시오.” 그런 좀소이의 태도에 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구석진 자리에 앉은 사내는 걸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래탕을 내오너라.” “예.” 점소이가 사라지고 난 후, 사내는 객잔 안을 쓱 훑어봐싿. gjma하기 그지없는 객잔이었고 식사 시간도 아니었기에 싸구려 술 몇 병을 시켜놓고 떠들고 있는 사내 몇이 있을 뿐, 손님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내가 주문한 요리는 오래지 않아 나왔다. 싸구려 음식이기는 했지만 사내가 아주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먹고 있을 때,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몇 명의 손님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말을 타고 온 손님이라 그런지 점소이의 태도 자체가 틀렸다. 점소이는 사근사근한 말투로 손님들을 전망이 좋은 창가의 자리로 안내했다. 사내는 힐끗 새로 온 손님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리따운 묘령의 아가씨 한 명와 우람한 덩치를 지닌 사내 둘 그리고 기생오라비처럼 미끈하게 빠진 소년 한 명이 보였다. 우람한 덩치의 사내나 묘령의 아가씨가 모두 소년에게 대하는 태도로 보아 약관(弱冠:20세)이 채 안되어 보이는 소년이 그들보다 높은 신분임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이때, 그 소년과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음에도 무표정을 유지한 채 멀뚱이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를 향해 소년은 씨익 미소를 지어 보냈다. 물론 사내의 눈에 그 미소는 ‘씨익’이 아니라 ‘방긋’으로 보였지만 말이다. 사내는 뭔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떨떠름 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오리탕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년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찾은 것 같아.” 소년의 말에 무사들 중 왼쪽 뺨에 길게 흉터가 있는 자가 물었다. 병장기에 당한 듯한 상흔이었는데, 그의 날카로운 이목에 더해져 더욱 강인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예? 뭘 말씀이십니까?” “무림인 말이야, 무림인!” 소년의 말에 덩치 큰 사내들의 시선은 허름한 옷에 오리 다리를 먹고 있는 사내에게로 곧장 돌려졌다. 사내의 뒤쪽으로 천에 둘둘 말려있는 거대한 도가 벽에 기대어져 있는 거싱 보였다. 도신의 길이는 약 3척 정도였고, 손잡이는 1척 정도여싿. 손잡이를 제외하더라도 저 두툼한 도신의 두께와 폭으로 봤을 때 그 무게는 엄청날 것이 분명해싿. 그리고 저런 도를 휘두를 정도라면 엄청난 힘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었다. “저자가 무림인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말씀이십니까?” “예전에 어머니ARp 들은 말이 있어. 보다 높은 경지의 무술만을 위해 삶을 영위하는 인물들이 있다고 말이야.” “무술이라면 노사(老師)께 어느 정도 배우셨지 않습니까? 만약 더욱강한 무술을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배우실 수 있을 텐데, 겨우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다는 말씀이십니까? 혹시 노사께 배우시는게 싫으시다면, 미흡하지만 속하가 가르쳐 드릴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사내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꿈꾸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머님한테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어. 그런데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아.” 한껏 들떠 있는 소년에게 뺨에 흉터가 있는 사내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이제 무림인을 찾으셨으니, 다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 사람을 따라갈 거야.” 그 말에 처음으로 사내의 표정에 동요가 일어났다. “예? 그,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저자를 따라가서 뭘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어쩌기는..., 이렇게 할 거야.” 소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오리탕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폐가 안 된다면 합석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수상한 인물은 절대 아닙니다.” 소년은 사내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빨리 점소이에게 요리와 술을 주문해싿. 객잔에서 파는 것 중에서 제일 비싼 것들이었다. 상대는 소박한 음식밖에 먹을 수 없는 형편이니, 합석의 조건으로 값비싼 음식물을 제공하겠다는 뜻이었다. 역시나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덕짓으로 가리켰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다음 소년은 흥미진진하다는 듯 수염이 텁수룩하게 나있는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혹시 소속된 문파가 있으십니까?” 사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소년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실례가 안 된다면 좀 가르쳐주실 수 없겠습니까? 무림인들은 대부분 문파에 소속되어 있다고 들었거든요.” 한동안 말없이 점소이가 가져온 값비싼 음식을 이것저것 먹어보던 사내가 갑자기 몇 마디 중얼거렸다.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다. 강호에는 문파에 소속된 인물보다 소속되지 않은 인물이 더 많다. 또, 설혹 문파에 소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런 곳에서 자신의 문파를 떠벌여대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내의 퉁명스런 반응에 소년은 당황한 듯 물었다. “그..., 그런가요? 그럼 무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소년의 질문에 사내는 기가 막힌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여태까지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했던 사내였기에, 자신의 질문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낀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따졌다. “웃지만 말고 말씀을 해주시죠.” 사내는 오랜만이라는 듯 술잔을 들고 잠시 향기를 음미하고는 한잔 쭉 들이킨 후 말해싿. “무림인이 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 말에 소년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죠?” 말은 그렇게 꺼냈지만 사내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이리저리 생각을 했다. 무림인......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게 뭐라고 꼭 집어서 말하자니까 생각만큼 쉽지 않았던 것이다. 사내는 뭔가 대답할 말이 떠오를 때까지 눈앞에 있는 음식과 술을 묵묵히 먹어댔다. 그러다가 이윽고 사내는 생각이 정리된 듯, 자신이 알고 있는 무림에 대한 정의를 늘어놨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언제든지 죽어주겠다는 마음가짐만 가지면 되는 거지. 아주 간단하지 않나?” 순간 소년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뭐라구요?” 하지만 곧이어 소년은 눈을 실쭉하게 바궈 상대를 노려보며 따졌다. “형장께서 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소년의 말에 사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나는 목숨 가지고 농담하는 취미는 없다.” 상대가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했기에, 오히려 소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다면, 남이 나를 죽인다는 말은 곧 저도 남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렇지.” “그렇게 하면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요?” 사내는 거칠게 콧바람을 일으킨 후 대꾸했다. “흥, 법을 따진다면 영원히 무림인이 될 수 없다.” “관에서 살인자라고 추격을 한다면요?” “당연히 도망쳐야지.” 무덤덤한 사내의 말에 오히려 당황하고 있는 쪽은 소년이었다. 이 사내가 과연 제정신인 것일까? “그, 그렇다면 무림인은 바로 범법자라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렇게 틀에 얽매여 있는 한 영원히 무림인이 되기는 힘들 거다. 그건 그렇고 음식 잘 먹었다.” 사내는 품속을 뒤져 동전 몇 개를 탁자 위에 던져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셔싿. 처음에 자신이 시킨 오리탕 값이었다. 거대한 도를 잡고 뒤돌아서는 사내에게 소년이 다급히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무림에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보아하니 형편도 어려우신 것 같은데,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실례가 안 될까요? 무림이라는게 뭔지 좀 가르쳐주세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그 말에 사내는 피식 웃었다. 눈게에 주름이 조금 잡힌 것도 웃는 거라면 말이다. 사내는 투박한 어조로 대꾸했다.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겨 문을 나서는 사내. 그런데 갑자기 그가 나직한 어조로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소년에게 분명히 들렸다. “꼬마야, 무림에 발을 들여놓지 마라. 반드시 후회하게 될거다.” 소년은 돌아서는 사내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제 이름은 꼬마가 아니라 완..., 아니 그 뭐냐..., 조령(趙鈴)이라고 한다구요!” 이상헤게 이름을 대는 것이 뭔가 망설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사내는 단 하마디 위문도 표하지 않고 그냥 멀어져갈 뿐이었다. 사내가 나가고 난 후, 사내들 중 한 명이 소년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속하의 생각으로는 그만 돌아가시는게......” “아니, 저 사람을 따라가겠어.” “저자를 말씀이십니까? 아니, 왜 저렇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놈을 따라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냥 중원이 아름다운 산천 구경이나 하시다가 돌아가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소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무뚝뚝함이 묘한 매력이야. 그리고 어머니한테 들은 것보다는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어. 더군다나 한 가지 가능성이 생겼잖아?” “예? 가능성이라니요.” “그냥 나갔다면 모르겠지만, 친절하게 조언까지 해줬잖아. 그걸 보면 마음씨가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내는 소년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르티어스의 음모 사메지마가 아르티어스에게 묵향과 함께 오늘 저녁 영주님을 찾아오라는 통보를 하고 있을 때, 고다이 영지의 동북쪽에서는 이제 막 전투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고다이 영지를 약탈하고 있는 해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동원된 군세는 모두 1만 7천. 고다이 영지를 포함한 3개 영지에서 파견된 연합군이었다. 후지와라 영주가 파견한 5천이 합해진 대군인 것이다. 현재 연합군을 총지휘하고 있는 것은 미나모토 대영주 휘하의 가신(家臣) 요리토모라는 자였다. 요리토모는 각 영지에서 파견된 사령관들을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본관이 중앙을 맡겠소. 자, 모두들 군사를 정검하시오. 쌍방의 병력차가 3배 이상이나 나니 손쉽게 승리할 수 있을 거외다. 원래 이 전투는 고다이 영지에서 벌어지는 것이었고, 또 고다이 영지에서 투입된 병력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에 반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뒤에는 미나모토 대영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요리토모는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막대한 피를 흘리게 되는 중앙을 원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해적들은 여태껏 그랬듯이 이쪽의 군대가 접근하면 재빨리 배에 탄 다음 도망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요리토모는 최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했다는 영예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미나모토 대영주는 자신의 동맹국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선전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었다. 연합군은 요리토모의 지휘하에 해적들과 대치했다. 진형이 갖춰지자 부관이 요리토모에게 말했다. “요리토모 사마, 개전 신호를 올릴까요?” 요리토모는 부관의 말에 한껏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물론이다.” 부관은 뒤에 서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화살을 쏴라!” 피유유웅! 소리가 나도록 특수하게 제작된 화살들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하늘로 치솟았다. 이것이 전투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요리토모는 적진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흐흐흐, 꼴에 전의를 불사르는 척하고 있지만 다 허장성세(虛張聲勢)다. 이쪽에서 공격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말겠지.” 부관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조언을 올렸다. “타다마사 상에게 적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전령을 보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요리토모는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무는 법이다. 적들에게 어느 정도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주변 영주들에게 대영주님의 위엄만 보이면 끝나는 일이다. 알겠느냐?” 부관은 뒤의 뒤까지 생각하는 상관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비해서 드러난 앞면만을 바라본 자신은 어떤가? 부관은 생각이 짧았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옛! 요리토모 사마의 가르침,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전투는 요리토모의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해적들이 철수하기는커녕 오히려 투지를 불사르며 돌진해왔던 것이다. 대추장 타르티는 손을 번쩍 들어 적진을 가리키며 외쳤다. “우리에게는 탱게르의 가호가 함께한다. 자, 공격해랏!” “우와아아아!” “탱게르! 탱게르!” 해적들은 탱게르를 외치며 적들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3배가 넘는 적들을 향해 돌진하는 해적 무리의 그 어디에서도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자신들에게는 천신의 가호가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르티어스가 신이 아니었기에, 가호 따위를 해줄 리 없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천신의 가호를 굳게 믿고 있는 해적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자고로 광신도만큼 상대하기 껄끄러운 놈들도 없는 법이다.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夜叉)와도 같이 악착스레ㅐ 덤볃는 해적 놈들의 고아기에 어느덧 병사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전황을 살피던 요리토모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양민들을 약탈하다가도 군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싸울 생각도 안 하고 도망치던 비열하기 작이 없는 놈들이었거늘.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해적들의 공격에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연합군이 뒤로 밀리는 것이 아닌가. “치, 칙쇼. 마, 말도 안 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렸다. 점차 밀리고 있는 중앙부를 바라보며 부관이 당황한 듯 타다마사 장군에게 말했다. “타, 타다마사 사마, 중앙을 지원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타다마사 장군은 오히려 현재의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외로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미나모토는 이제 똥벼락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겠어.” 그는 부관을 향해 명령했다. “슬슬 후퇴할 준비를 하라고 일러라. 적이 중앙을 돌파하면 우리는 전장에서 이탈한다. 저 난장판에 휩쓸릴 이유가 없지 않겠나?” “하,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한낱 해적들에게 패했다고 주군의 명성에 누를 끼치게 될......” 부관의 마렝 타다마사는 답답하다는 듯 노성을 터뜨렸다. “이런, 빠가야로! 지금 전장을 지휘하는 게 누군가? 내가 아니고 요리토모란 말이다. 치욕을 당하는 것은 대영주지 주군이 아니란 말이다! 알겠느냐?” “옛, 즉시 이행하겠습니다!” 부관은 즉각 전령들을 불러 타다마사 사령관의 명령을 전투를 벌이고 있는 지휘관들에게 전달했다. 타다마사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앙을 지긋이 바라봤다. 역전의 노장인 그가 봤을 때, 중앙군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자력으로는 회생이 불가능했다. 아마 조만간에 붕괴도리 것이 틀림없었다. 타다마사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해적 대위에게 패했다고 주군의 체면이 조금 깎이기는 하겠지만, 잃는 것에 비하면 얻는게 더 많지. 무엇보다도 대영주의 세력이 이 일로 인해 크게 약화될 것이 틀림없어.” 점치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광기에 넘치고 있는 해적들을 타다마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이런 칙쇼!” 미나모토 대영주는 보고서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불같이 노했다. 하지만 보고서를 내던져도, 또 그 보고서를 발로 짓밟는다고 해도 땅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체면이 회복될 리 없었다. 오히려 부하들 앞에서 체면만 더욱 구겨질 뿐...... 고다이 영지 동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미나모토 대영주는 최대의 치욕을 당했다. 자신이 파견한 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것도 동맹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론 전쟁을 하다 보면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문제였다. 그깟 오합지졸에 불과한 해적들에게 정예군이 박살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위의 영주들이 그를 깔볼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미나모토 대영주는 대기하고 있는 장수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출동 준비를 해라. 내가 친히 그놈들을 박살내버리겠다.” 묵향은 자신의 무릎에 놓인 검을 찬찬히 바라봤다. 자신이 좋아하는 형식인 아주 가늘면서도 길게 빠진 매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양은 마음에 들었지만, 묵향은 검날을 매만지며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검은 보검도 아니었고, 또 보검 축에 들어갈 만큼 뛰어난 검도 아니었다. 하지만 영주는 왜 이 검을 주면서 뭔가 특별한 선물이라도 주는 듯 생색을 냈던 것일가? 아르티어스는 그런 묵향을 바라보며 쩔쩔매듯 주절거렸다. 아무래도 닌자라는 놈들의 습격이 있었을 때 자기 혼자 술 마시러 도망쳤던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게다가 아들놈이 검을 뽑아들고 뭔가 깊은 궁리를 하는 것을 보니 그걸로 자신을 치려는 생각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에이, 내가 잘못했다. 혼자서 술 마시러 간 걸 가지고 꽁해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설마..., 그걸로 이 애빌 칠 생각은 아니겠지? 응?” 아르티어스의 목소리에는 애교마저 살짝 묻어 있었다. 그런 아르티어스를 향해 묵향은 피식 미소 지은 후 대답했다. “설마요. 그건 그렇고, 왜 이따위 검을 주면서 영주가 큰 보물이라도 주는 듯 떠든 건지 이해가 안 가네요. 이런 정도의 검이라면 별로 대단하다고 할 수도 없는 건데......” 묵향의 의문에 아르티어스는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묵향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영주가 한 말을 묵향에게 제대로 통역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아, 그건 검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사용했던 사람 때문이지. 예전에 그걸 쓴 사람이, 영주의 목숨을 구해주고 전사한 뛰어난 무사였던 모양이야.” “흠, 영주의 추억 어린 기념품인 모양이군요. 어쩐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묵향에게 아르티어스는 말을 이었다. “단순한 기념품은 아니지. 이 세게P에서 그런 검을 준다는 것은, 그 검을 지녔던 주인의 권력을 승계한다는 의미도 있으니까 말이다.” “권력을 승계한다구요?” “그래. 이세계에서는 그렇게 하는 모양이다. 잘만 하면 너 또 여기서도 치레아 공국을 다스리던 것처럼 영주 노릇을 할 수 있을 게다.” “쳇,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이 덜떨어진 야만족들 두목 노릇이나 하고 있겠어요?” 그 말에 아르티어슨 say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나중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될걸? 흐흐흐......’ 아들놈이 아무리 까불어봐야 자신을 따라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고 확신하는 아르티어스 어르신이었다. 미나모토 대영주가 친히 이끄는 1만 5천의 병력이 패잔병 부대와 합류했다. 자신의 영지에 겨우 1만의 방어 병력만을 남겨둔 채 말이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가 얼마나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패장(敗將)요리토모는 이제 천여 명 남짓으로 줄어든 초라한 병력을 이끌고 주군을 맞이했다. 그에 비해 동맹군의 병력은 그렇게 큰 변동이 없었다. 중군을 도와 혼전을 벌이며 공멸(共滅)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신속히 전장을 이탈한 덕분이었다. 대영주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오리토모의 목을 베었지만 조금도 속이 풀리지 않아싿. 그런 분노에 가득 찬 대영주의 시야에 해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대병력을 앞에 두고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탱게르으 l가호가 함께하는 한 자신들에게 패배란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대추장 타르티는 손을 번쩍 들어 적진을 가리킴 자신 있게 외쳤다. “우리에게는 탱게르의 가호가 함께한다. 저놈들을 완전히 쓸어버려라. 돌격!” “우와아아아!” “탱게르! 탱게르!” 해적들은 탱게르를 외치며 적들을 향해 야차와도 같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묵향은 아르티어스와 함께 사사키 겐지의 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 죄도 없는 사사키를 떡으로 만든 것에 대한 사과를 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잘못에 대한 사과가 좀더 빨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묵향도 무인이었다. 무인은 당당한 상태에서 사과 받기를 원하지, 결코 침사엥 누워 눈탱이가 퍼렇게 멍든 상태에서 사과 받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그런 약한 모습을 상대에게 보이기 싫은 것이다. 그렇기에 묵향은 사사키가 적당히 완치된 시점을 골라서, 가능한 한 빨리 그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사키의 도장으로 가던 도중, 그들은 영주의 꾀주머니인 사메지마를 만났다. 사메지마가 자신의 갈 길을 가기 위해 헤어진 후, 묵향은 궁금하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 사메지마라는 녀석하고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했어요?” 아르티어스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 그거? 별거 아니다. 고다이 영지에 침입했던 해적들을 완전히 소탕했대. 그래서 며칠 수면 타다마사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돌아온다고 하더구나. 그가 돌아오면 승전을 기념해서 조촐한 연회를 베풀텐데, 그때 참석해달라고 부탁하더라. 그건 그렇고 멍청한 녀석, 한달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것도 하나 이행 못 하다니...... 돌아갈 배 편이 사라져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하지?”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떠올리기도 싫은 그때의 기억이..., 으윽 멀미라도 시작된 듯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놈의 배 얘기는 두 번 다시 하지 말아요.” 묵향이 사사키의 도장에 도착했을때, 도장에 있던 무사들의 눈에선 흉광이 번뜩였다. 물론 스승을 그렇게 만든 자에 대한 원한과 복수에의 갈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섣불리 손을 쓰지는 못했다. 차원을 달리하는 검객을 상대로 드잡이질을 해봐야 헛일이겠지만, 이유는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복수는 그들에게 있어서 의무였다. 설혹 그것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해야한 했다. 하지만 사사키 선생이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후였기에, 제자들은 스승을 위해 져야한 하는 의무에게 풀려나 있었던 것이다. 제자의 통보를 받은 사사키는 부목을 댄 발을 절뚝거리며 걸어나왔다. 결코 이런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옳은 선택이 아님을 잘 알지만, 그는 나약함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사사키는 발에서부터 전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영주님게서 당신에게 중요한 자리를 맡기셨다고 전해들었소.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나누면서 얘기합시다.” 아르티어스가 묵향을 위해 사사키의 말을 통역해줬다. 바로 그 때문에 묵향이 자신과 함께 온 것이니까. 하지만 묵향에게 곧이곧대로 전할 아르티어스는 아니었다. 영주가 검을 주며 자리를 맡긴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차 아들놈을 설득할 생각이었으니까 말이다.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나누면서 얘기하자는데?” 묵향은 사사키를 따라 실내로 들어갔다. 사사키는 절뚝거리며 도장을 가로질러 자신이 기거하는 내실로 묵향 일행을 안내했다. 사사키를 따라 내실로 덜어서는 순간, 묵향은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活人劍(활인검). 내실의 벽 한쪽에는 커다란 족자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유려한 필치로 ‘活人劍’ 이라는 잘자가 쓰여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묵향의 눈에 살짝 물기기 어렸다. “크하하하하핫!” 갑자기 묵향은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중원의 글자를 쓴다는 것은 곧 중원이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기쁨에 들뜬 묵향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자, 제어되지 못한 공력이 사사키의 도장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듯 사사키의 도장이 요동쳤다. 도장의 생도들은 귀를 틀어막고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단 두 명.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둘밖에 없었다. 사사키는 오랜 수련을 쌓은 무인답게 다리가 후들거리는 데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묵향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강한 불신이 어려 있었다. 저것이 도대체 인간이란 말인가? 사사키에 비해 아르티어스는 멀뚱히 묵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녀석이 미쳤나? 도대체 아들놈이 왜 이러는지 아해하기 힘든 아르티어스 어르신이었다. 묵향의 웃음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웃음을 멈춘 묵향은 고개를 휙돌려 아르티어스를 노려봤다. 불타오르는 듯한 묵향의 시선에 아르티어스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도대체 왜?‘ 아르티어스를 한참 노려보던 묵향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죠?” 아르티어스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을 바로 바라볼 수 없어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던 아르티어스의 눈에 한자가 쓰여진 족자가 보였다. ‘이런 젠장! 저것 때문이었군. 눈에 띄는 것들은 모두 다 영주에게 부탁해서 없애버렸는데, 설마 여기에도 있었을 줄이야......’ 아르티어스는 난감하지 그지없었다. “왜 나를 속였던 거죠?” 눈에 불을 켜고 잇는 아들을 보며 난감하기만 하던 아르티어스 어르신.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리던 그에게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한 끝내주는 생각이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한숨을 내쉰 후 진지하게 말했다. “휴~! 내가 너를 속이고 싶어서 속였던 것은 아니다.” “그게 말이지, 여기서 말하는 대국(大國)이라는 게 바로 네가 가고 싶어하는 송나라란다. 그런데 그곳과 여기는 아주 넓고 험한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바다라는 마렝 묵향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알다시피 너는 뱃멀미가 심하잖니. 그래서 네가 너무 상심해할까봐 숨기고 있었던 거란다.” 그 말에 묵향은 풀이 죽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럼 어떻게 하죠?”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대신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맹세만 해라. 그럼 내가 곧장 그곳까지 빠르면서도 편안하게 실어다주마. 물론 아주 빠르게 말이다. 어때?” “이런 제기랄!” 숙소로 돌아온 후에도 묵향의 두근거리는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묵향은 숙소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때는 완연한 봄이었다. 숙소 앞 작은 정원에는 이름 모를 화초들이 저마다 소담한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리고 정원에 심어진 작은 벚나무에서는 몇 개 남지 않은 하얀 꽃잎들이 눈처럼 떨어져, ?겡 점점 흰 점을 수놓고 있었다. 묵향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의 차가운 이성이 이끄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바다...... 그놈의 바다가 문제였다. 묵향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흰 점이 군데군데 찍혀 있기는 했지만, 하늘은 파랗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고생했던 그 망할 놈의 바다처럼. “젠장,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구먼.” 무심결에 묵향은 그 말을 중원이 언어로 내뱉었다. 아마도 중원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때 자신의 곁에 서 있던 하녀가 살짝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을 묵향은 놓치지 않았다. 마사코 또한 여태껏 자신의 상전들이 단 한번도 중원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방심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무심결에 그에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곧장 마사코에게 날아왔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 계집이 송나라 말을 알고 있었잖아.” 마사코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대답했다. 그녀의 억양은 중원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간드러지는 것이었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물어보시지 않았기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이 맞기는 했다. 뭔가 속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랬지. 그건 내 실수였어.” 마사코는 변명을 늘어놨다. “영주님께서는 중원에서 오신 분들이라고 그쪽 말을 할 줄 아는 저를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이상한 나라의 말을 쓰시는지라, 혹여 대국 말을 모르시는 줄 알고......”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맞아. 듣고 보니 그렇군.” 잠시 뭔가 골똘히 생각한 다음, 묵향은 그녀에게 말했다. “대국은 어느 쪽에 있느냐?” “제가 듣기로는 서쪽으로 오랫동안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여기서 북쪽으로 항해해서 고려에 도착한다음 거기서 육로나 해로로 갑니다.” “그랬군. 그랬어. 처음부터 잘못 온 거였어......”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묵향은 문득 마사코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국으로 가는 배는 어디서 탈 수 있지?” “대국으로 가시게 말입니까?” “물론이지.” 마사코는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는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배는 후쿠오카로 가면 타실 수 있을 겁니다. 무역은 그곳에서만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대국으로 바로 가는 배는 없고, 고려로 가는 배라면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고려라......” 마사코는 묵향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언제 떠나실 겁니까?” “그건 왜 묻느냐?” 수상하다는 듯한 눈빛을 던지고 잇는 묵향을 향해 마사코는 변명을 늘어놨다. 그녀는 대국과의 밀무역을 위해 영주가 키운 가신들 중의 하나였다. 대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온 지금 그녀는 그것을 놓칠 수 없었다. 일단 그 이후의 상황은 대국에 도착한 후에 천천히 궁리를 해보면 되지 않겠는가. “그건..., 저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뭐? 너가 왜 따라오겠다는 거냐?” “저는 영주님께서 주인님께 하사하신 몸종이니까요.” “자신의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아무리 영주의 명령이 그렇다고 해도 굳이 나를 따라나설 필요는 없다. 영주한테는 내가 잘 말해주겠다.” 말을 한느 묵향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사코를 설득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사코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저는 가고 싶습니다.” 묵향은 잠시 마사코를 지그시 바라봤다. ‘왜 따라오겠다는 것일까? 가봐야 뭐 좋은 일이 있다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녀가 따라온다면 그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어를 할 줄 아는 자는 쉽게 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왜국어를 할 줄 아는 자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왜국어와 한어를 함께 구사할 수 있는 그녀라면 아주 쓸모가 있지 않겠는가. “정 따라오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옥화 봉공 매향옥 당당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다가오자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은 황급히 예를 올렸다. 그런 무사들을 힐끗 바라보며 여유로운 어조로 중년 사내가 질문을 던졌다. “맹주님께서는 계시느냐?” “dpt! 기별을 넣어드리겠습니다.” 무사들 중의 한 명이 문 쪽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맹주님, 매화문검(梅花雯劍)장로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청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시라고 해라.” “옛!” 무사들은 문을 호라짝 연 후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드시지요.” 문이 열리자 드러나는 대전은 넓고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금과 은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용과 봉의 형상이 대전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뭔가 허전한 듯한 공간에는 어김없이 고금 명필들의 글이나 그림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대전의 한쪽에는 높직한 단상에 호화로운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그 의자는 이 무림맹에서 오직 한 사람, 맹주만을 위해서 만들어진것이었다. 하지만 맹주는 거기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실내로 들어서고 있는 매화문검 장로를 향해 위엄 있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맹주는 포권을 올리는 장로의 손을 포근히 감싸쥐며 말했다. “무량수불, 원로(元老)에 묘강 땅까지 들어가서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소. 자 이쪽으로 오시구려.” 맹주라는 지위로 봤을 때 그것은 과분할 정도의 환대였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매화문검 장로라는 사내는 그 정도의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가 바로 실종된 전대 맹주의 아들 옥진호(玉振湖)였기 때문이다. 맹주가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옥진호 장로는 공손하게 말했다. “맹주님의 과분하신 환대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량수불, 과분하다니 당치도 않소이다. 혈고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그토록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 아니겠소이까?” “맹주님의 치하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옥진호 장로는 저 멀리 묘강에서 있었던 격전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를 울렸다. 물론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맹주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 작전을 지휘했던 옥진호 장로보다도 더 자세하게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싿. 맹주라는 직책상 옥진호 장로가 보내온 보고서는 물론이고, 감찰이나 첩자들이 보내오는 각종 정보를 종합적으로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혈교 토벌의 최고 책임자였던 옥진호 장로가 함참 최종 보고 겸 자신의 공적에 대해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 밖에서 겨입 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옥화 봉공께서 도착하혔습니다.” 그 말에 보고를 올리고 있던 옥진호 장로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옥화 봉공. 바로 옥화무제(玉花武帝) 매향옥(梅香玉)을 일컫는 명칭이 아닌가? 전대 맹주인 무극검황(無極劍皇) 옥청학(玉靑鶴)이 실종되자 모름맹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무림맹을 이끌어나가는 수장이 실종되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새로운 맹주를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옥청학이 심어놓은 무림맹의 장로들은 그 시기를 계속 뒤로 미루고 있었다. 무공이 높은 옥청학인 만큼 혹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어싿. 맹주의 실종 사실을 알게됨과 동시에 서둘러 폐관 수련에 들어간 옥청학의 아들 옥진호가 화경을 깨닫게 되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이다. 장로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우며 몇 년 동안이나 계속 시간을 끌었다. 맹주의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은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밖에 안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각 문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저마다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 따른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우선 무당파의 은거 고수인 태극검제(太極劍帝) 청영(淸塋)과 곤륜의 은거 고수 곤륜무제(崑崙武帝) 진량(陳亮) 그리고 서문세ㅐ가의 가주인 수라도제(修羅刀帝) 서문길제(西門吉制)가 거론되었다. 모두 명문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 한 명이 맹주가 된다면 옥청학 맹주의 입김으로 인해 공동파가 독식하고 있던 무림맹 수뇌부 자리는 대폭 물갈이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게다가 수라도제의 경우, 명문이라고는 하지만 방계인 5대세가의 가주였다. 지금까지 무림맹주는 최고의 명문이라 자부하는 9파에서만 배출되었다. 아무리 세력이 강성하다고 하지만 서문세가 따위에게 맹주의 자리를 양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옥화무제 매향옥은 후보들 중에서 가장 세력권이 약했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장로들이 원하는 최적의 맹주감이었다. 지닌 세력이 별볼일 없으니 적당히 뒤에서 요리하기에 안성마춤이지 않겠는가? 또 무영문에는 무림맹의 정예들을 이Rfm 만한 막강한 고수도 거의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맹주가 된다면 현재의 수뇌부들이 자리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게 될 공산이 켰다. 하지만 무림맹의 장로들은 그렇게 드러난 겉모습만 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별의별 옥을 다 듣고 있기는 했지만 뛰어난 여걸이었다. 강호에서 ‘범죄의 온상’ 정도로 치부되던 무영문을 당당한 일류 문파로 재탄생시켰다. 이것만 해도 아무나 이룩하기 힘든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시간을 쪼개어 무공 연마에도 힘썼다. 물론 무영문이 정보 단체인 만큼 우수한 비금을 획득한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비급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화경의 대열에 올라서는 것은 아이다. 약간이라도 대가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면 이 점을 놓치지 않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바로 그런 이유로 장로원은 처음부터 그녀를 맹주로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무공을 고려하여 후보자 명단에만 올려놨을 뿐이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론된 후보가 매화문검 옥진호였다. 명문인 공동파의 후예일 뿐 아니라 실종된 옥청학의 아들이어싿. 그렇기에 무림맹 수뇌부로서는 그가 맹주가 되기를 가장 원했다. 하지만 옥진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무공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무림맹주 정도가 되려면 화경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마교의 교주는 흑살마게(黑殺魔帝) 장인걸(張仁傑)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묵향이었다. 극마도 아닌 탈마의 경지에 다다른 자가 교주가 되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데, 어찌 그것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옥진호가 옥화무제에 대해 편치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데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물론 정식적인 경합을 벌여 맹주 후보에서 탈락했다면 옥진호가 옥화무제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그녀가 옥진호가 맹주 후베에서 탈락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 있었다. 그년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맹주 선출을 질질 끌고 있던 장로회에 맹주가 사망했음을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호가실한 물증까지 가지고 말이다. 그 물증이라는 것은 그녀가 묵향으로부터 건네받은 맹주의 신물(信物) 빙백수룡검(氷白水龍劍)이었다. 그 시점에서 옥진호는 맹주 후보에서 탈란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화경에도 들지 못한 상태였다. 어느 날 한순간 화경에 들 수도 있었기에 마냥 기다리고 있던 장로원도 더 이상 기다릴 명분이 사라졌다. 이제 바야흐로 네 명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때,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해도 맹주가 되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장로원과 뒷거래를 시작했다. 맹주 후보에서 자진 사퇴하고, 또 신물인 빙백수룡검을 줄 테니 봉공의 자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봉공’은 모든 무림의 원로가 받기를 바라 마지 않는 가장 영광스러운 명예직이었다. 현재 단 두 명밖에 없는 봉공은 무림맹주에 버금갈 정도의 권위와 발언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명예직인 만큼 실질적인 힘은 없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장로원에서는 선뜻 그것을 승낙했다. 그녀가 제시한 조건은 너무나도 거절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으니까 말이다. 한편, 장로원의 우려와 달리 옥화무제가 원했던 것은 힘이 아니었다. 저 음지에서부터 커 나온 무영문이 양지에 우뚝 서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옥화무제가 맹주직이라는 권력을 버림으로 해서,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무영문은 정파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으로 세인들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옥화 봉공께서 오셨으니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미 보고서들을 통해 상세한 것은 아실 테니 더 이상 보고 드릴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맹주는 옥진호 장로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지 선뜻 허락했다. 하지만 맹주의 대답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듬뿍 배여 있었다. “허어, 이거 그러고 보니 먼 길을 원정하고 돌아온 사람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구려. 무량수불..., 먼 여정에 피곤하실 텐데,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시고 다음에 묘강 땅에서의 무용담이라도 들려주시구려.” 옥진호는 맹주의 따뜻한 배려에 감격했다. “마음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주.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옥진호 장로가 나간 후 곧이어 옥화무제가 들어왔다. 그녀는 옥이 구르는 것 같은 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맹주님.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무량수불, 무슨 말씀을...... 어러가지로 바쁘실 텐데, 이렇듯 늙은이를 잊지 않고 찾아와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맙구려. 자,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예.” 옥화무제는 자리에 앉아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오늘 찾아뵌 것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량수불..., 무슨 일이시기에 전갈만 하시지 않고..., 나쁜 소식이 아니면 좋으련만......” 옥화무제는 잠시 맹주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쁜소식입니다. 마교의 군사였던 마뇌(魔腦) 설무지가 두달 전에 병사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맹주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량수불, 뛰어난 인물이 세상을 등진 것은 분명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마교의 두뇌가 죽었다는 것이 어찌 나쁜 소식일 수 있겠소?” “왜냐하면 그는 마교의 중원 진출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맹주도 깨닫는 바가 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침중한 안색을 띠었다. “그가 죽었으니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무림의 정세는 크게 바뀔 것입니다. 어쩌면 벌써 누군가가 실권을 쥐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죠. 만약 호전적인 인물이 마뇌의 뒤를 잇게 된다면 무림은 피에 잠기게 될 겁니다. 오늘은 그에 대한 대비도 조금은 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서 몇가지 의논드리려고 찾아뵌 것입니다.” 잠시 맹주의 안색을 살피던 옥화무제는 요 근래에 무영문이 수집한 정보에 대해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호수가에 서서 하염없이 수면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홍택호(洪澤湖)는 너무나도 큰 호수라서 그런지 꼭 바다처럼 파도가 치고 있었다. 물론 바다의 파도에 비한다면 그 규모가 작았지만, 도무지 호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 가슴이 탁 트이도록 드넓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내의 가슴은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이때,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투명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어? 또 만났네요.” 그 순간 사내의 안색이 팍 일그러져싿. 주점에서 홍택호까지 걸오오는 동안 일정 거리를 두고 그들이 뒤따라온다는 것은 아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홍택호 일대 또한 동정호에 못지않은 유명한 장소였기에 우연히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아싿. 사내는 자신의 옆에 푹 박혀 있던 거대한 도를 한 손으로 쑥 잡아뽑은 후, 다시금 드엥 걸쳐맸다. 그는 상대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따라오며 소년의 맑은 음성이 이어졌다. “이봐요. 인사를 했으면 최소한 대꾸는 해주는 것이 예의 아닙니까?” “......” “혼자 여행한다면 말벗이 필요하지 않나요?” “......” 사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대답은 기대도 안 한다는 듯 소년은 쉴새없이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여기 경치 참 좋네요. 이렇게 넓은 호수는 처음 봐요. 바다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넓죠?” 소년의 말은 끝도 업싱 이어지고 있었고, 사내의 인내심도 천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이 사내의 인내심이 바닥났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을 소년은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내는 갑자기 뒤로 휙 돌아서며 소년을 노려봤다. 인상을 쓰지 않더라도 사내의 얼굴은 매서운 뭔가가 풍기는 인상이었다. 텁수룩한 수염에다 다부진 턱선, 게다가 무공을 얼마나 연마했는지 태양혈이 불끈 솟아올라 있었다. 그 매서운 눈빛에 소년은 찔끔한 듯한 기색이었지만 곧이어 지지않겠다는 듯 밝은 어조로 말을 걸었다. “오늘밤은 어디서 잘 거죠? 기왕이면 경치가 좋은 곳이었으면 좋겠는데요.” “너 오늘 죽고 싶어서 작정했냐?” “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나 여행이나 같이 하자는 건데 말이에요.” “이런 젠장! 나는 지금 머릿속이 복잡애 죽겠단 말이다. 그리고 너 같은 꼬맹이를 데리고 여행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 알겠나?” 사내가 뒤돌아서서 다시금 걸어가기 시작하자 또다시 말발굽소리가 뒤따라왔다. “그러면 잠시 생각하실 여유를 드릴게요. 그런 다음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한잔 나누면서 얘기를 하죠.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술이 최고가 아니겠어요?” “이런 썅!” 사내는 휙 돌아서며 소년이 타고 있는 말의 머리를 주먹으로 사정없이 갈겨버렸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흑마가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이 철퍼덕 뻗어버렸다. 소년이 주저앉는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 뒤편에서 말을 타고 따르고 있던 무사들이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재빨리 말 등을 박차고 오랄 몸을 날려싿. 뺨에 흉터가 있는 무사는 우아하면서도 날렵한 몸놀림으로 날아오르더니 소년의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가볍게 안아들었다. 그의 수련 상태를 말해주듯이 매끄러운 몸놀림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소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며 사내를 향해 덮쳐갔다. 갑작스런 무사의 공격을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사내는 등의 도를 슬쩍 뽑아들었다. 하지만 도를 완전히 뽑을 시간적 여유는 없었기에 몸을 옆으로 비틀며 아직 등에 매여 있는 도를 이용해 적의 공격로를 차단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캉--! 사내의 도를 검으로 찍고 그 반등을 이용해서 한 바퀴 몸을 날린 후 착지한 무사가 재빨리 돌진하며 두 번째 공격을 가하고 있을 때였다. “그만!” 횡으로 그어지던 무사의 육중한 검이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멉췄다. 놀라온 숙련도였다. 소년은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소년을 품에서 내려놓은 무사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갑작스런 일이라서 손을 쓰게 되어 죄송합니다. 흑아(黑娥)를 해친 저놈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명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무사의 어투는 정중하면서도 조심스러웠지만, 그의 눈은 불에 타는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의 상관이 큰일을 겪을 뻔한 것이다. 소년의 말이 쓰러지는 말의 몸통에 깔렸다면 틀림없이 부러졌을 것이다. 설혹 그런 화를 피한다고 해도, 그 높이에서 아래로 곤두박질 쳤을 때의 충격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무사는 그런 위험한 일을 행한 상대를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그만큼 그의 상관은 귀하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무사에게 지시를 내리기 전에 먼저 사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에 받은 충격을 말해주듯 소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사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에는 등에 매여 있던 그 거대한 도가 매우 가벼운 소검이나 되는 듯 가볍게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또다른 무사가 사내의 뒤편으로 보였다. 사내는 잠시 소년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속 귀찮게 굴면 기절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머리통을 박살내 버리겠다.” 그런 다음 사내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도를 등에 걸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소년은 멀어져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창백해진 입술을 꼭 깨물고 서 있었다. 그 두 사람 사이로 살며시 미풍이 불어왔다. 그놈의 술 때문에 사내는 널찍한 객점의 정원 한 켠에 앉아 멍하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이런 식으로 현실 도피를 하지 않고서는 갑갑해져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현재 자신의 처지나 문파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것은 분명한 일. 하다못해 달이라도 보고 있으면 그런 시름이 줄어들기에 정원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호오! 여기서 또 뵙는군요.” 밝고 상쾌한 음성이었지만 사내의 귀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내의 안색이 일순간 확 찌그러져싿. 사내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획 돌리니, 그곳에는 자에 봤던 그 소년이 었었다. 소년의 앞에는 단촐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저 뒤편에는 두 명의 무사가 싸늘한 눈초리로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도대체 나하고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렇게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히는 거냐?” 사내의 목소리를 싸늘했지만, 소년의 대답은 능청스럽기 그지없었다. “누가 따라다닌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그저 호객꾼의 소개르 전망 좋고 깨끗하며 더욱이 가격까지 싼 객점이 있다고 해서 들어왔을 뿐입니다. 설마, 형장께서 이 객점을 아예 전세 놓은 것은 아니시겠죠? 호객꾼에게서 그런 말은 못 들었거든요.” 일리 있는 대답이었다. 사내가 선뜻 뭐라고 대꾸하기가 어려워 가만히 있는 동안 소년의 말이 이어졌다. “방 안에 있다가 하도 달이 밝아서 술 한 상 차려들고 달구경 나온참입니다. 설마 제가 달구경하는게 형장에게 폐가 된다고 주장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이런 젠장.’ 뭐라고 대꾸는 못하고 욕설을 속으로 씹어 삼키고 있는데, 소년은 사내를 잠시 바라보더니 은근하 어조로 물었다. “형장도 뭔가 가슴속에 묻어놓은 응어리가 있는 모양인데, 같이 술이나 한잔 하면서 푸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달도 밝고 소박하지만 술이 있고, 도 하소연을 들어줄 귀가 여기 있지 안습니까? 사양하지 마시고......” 하지만 사내는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어?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벌써 형장과는 오늘 3번이나 만나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면 보통 인연이 아니지요. 어쩌면 형장과 나는 전생에 형재였을지도 모를 일 아니오. 안그래요? 그런 깊은 인연이 있을진대, 달을 벗 삼이 박주라도 함께 나누며 우애를 돈독하게 다지는 것이......” 도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사내는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휙 돌려 소년에게 으르렁거렸다. “으으..., 이런 빌어먹을! 잘 들어, 꼬맹아. 나는 지금 여러 가지 일로 머릿속이 복잡하단 말이다. 너하고 놀 시간 따위는 단 일각도 없어, 알겠어? 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란 말이다. 다음에 또다시 친한 척하며 내 시간을 방ㅎ하면 아예 그 아가리를 찢어주마.” 발걸음을 쿵쿵 울리며 멀어져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소년은 생긋 미소를 보냈다. “꽤 재미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뭐, 계속 돌을 던지다 보면 수면에 파문이 일기 시작하겠지. 특히나 머릿속이 복잡하다면, 더 잘된 거 아니겠어?” 사내가 사라진 후, 무사들이 슬그머니 소년에게 다가왔다. 뺨에 흉터가 있는 무사가 겉옷을 소년의 등에 살며시 걸쳐주며 정중하게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아니, 달빛도 밝은데 잠시 더 있겠어.” “예. 그런데, 저놈은 왜 따라가시려는 겁니까?” 무사의 말에 소년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꿈꾸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나는 무림이라는 것을 보고 싶어. 그들이 왜 그렇게 자유스러운 것인지 말이야.” 소년의 말에 무사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살짝 뒤로 물러섰다. 무사는 휘황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달로 시선을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자유가 문제였군. 그놈의 자유가......” 본의 아니게 정원에서 나온 사내가 갈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사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은 후, 등에 메고 있던 거도(巨刀)를 침상 옆에 세워뒀다. 그러고는 침상 우에 벌렁 드러누웠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침실 천장의 단조로운 무늬뿐...... 곧이어 여러 가지 잡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해싿. 그러면서 갑갑해져오는 가슴. 이래서 정원에 나갔던 것인데...... 정라돌은 정통성을 주장하며 형이 가문을 이끌기를 원했다. 형은 무공 실력도 뛰어날뿐더러 가문을 이끌어나갈 차기 문주로서 정식 교육을 받았었다. 그리고 비전(秘傳)중의 비전으로 문주에게만 전승된다는 회류도법(回流刀法)의 후4식까지 전수받았다. 게다가 형과의 나이 차이는 거의 15년. 형은 한 문파를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연륜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딴 것은 다 형이 뛰어난데도 무공 하나만큼은 동생쪽이 앞선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아싿. 15년이나 나이 타가 나는 동생이, 그것도 가문 최강의 도법을 전수받은 형보다 무공이 앞선다는 사태가 말이다. 그 때문에 젊은 문도들은 사내가 차기 문자가 될 것을 원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가문은 두 토막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젠장! 날 보고 어떻게 하라고...... “솔직히 하소연을 들어줄 귀는 달갑지 않지만, 술에 대한 제안은 솔깃 했는데 말이야.” 중얼거리던 사내는 한편으로 지금 따라붙고 있는 소년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능철스러운 듯하면서도 정중했고, 또 소년과 이런저런 감정 싸움을 하다 보니 그 순간만큼은 복잡한 가문의 문제도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냥 못 이기는 척하고 함게 여행할까? 아이야, 귀찮기만 할 뿐이지.” 사내는 침상 옆에 놔뒀던 도를 집어들며 신경질적으로 일어섰다. “에잇! 젠장, 괜히 술 생각 나게 만들어가지고...... 아직 문을 연 객잔이 있을까?” 마침 문을 열어놓은 객잔이 있었다. 사내는 실내로 들어서자 주위를 쭉 둘러봤다. 저쪽에 3명의 장한이 담소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아직까지 문을 닫지 않은 듯했다. 그들은 사내를 힐끗 바라본 후, 별로 신경쓸 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두런거리기 시작했다. “에잇, 젠장. 이렇게 술값이 비싸서야 어디 마음껏 술을 사 먹겠나?” “그렇게 아쉬우면 밀주라도 담아서 먹지 그러나?” “그렇지만 집에서 담을 수 있는 술은 뻔하지 않나? 백주나 죽엽청 같은걸 마시려면 객잔에 오는 수밖에.” 그러자 장한 중 한 명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마누라는 술값이 오르니까 좋아하더군. 전처럼 술을 많이 안 마신다고 말이야.” “슬아야 그렇다 쳐도, 나중에 다른 것도 오르는 거 아냐?” 마누라 얘기를 하던 장한은 금세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글세 말일세, 북쪽에서는 야만족들이 쳐들어온다고 하고..., 흉흉한 소문이 꼬리를 물고 떠도니......” 졸린 듯한 눈을 하고 점소이가 다가와서 사내에게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사내는 점소이에게 가장 싼 술을 시켰다. 술이 나오자 사내는 그것이 매우 비싼 금존청이기나 한 듯 향기까지 음미해가며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쩝, 술맛 한번 기가 막히군.” 오랜만에 마셔보는 술이었다. 꼬마 녀석이 충돌질만 하지 않았다면 결코 마시지 않았을 술이다. 가문을 뛰쳐나와 떠도는 신세다 보니 주머니 사정이 그리 여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울적한 기분에 한 전 한 잔 아껴가며 마시기 시작한 술이었지만 어느새 탁자 위에는 빈 술병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싸구려 술이라도 마시면 취하는 게 당연한 이치. 취기가 올라오자 지금껏 그를 괴롭히던 가문의 문제도 조금은 그 무게가 가벼워지는 듯 했다. “어? 술이 없네.” 술병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술잔에 떨어뜨렸다. 그런 후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다른 빈 병까지 박박 긁어서 술잔에 담았다. 3병. 그의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마실 수 있는 한계였다. 술잔을 입속에 털어넣고 일어서려는데, 탁 하는 소리가 울리며 새로운 술병이 탁자 위에 놓여졌다. “술은 혼자 마시는 것보다 둘이 마시는게 더 맛있죠.” 약간 몽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사내를 향해 생긋 미소 지으며 소년이 의자에 앉았다. 그는 능청스런 표정으로 사내의 빈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자아, 한잔 쭉 하시죠. 기왕에 술을 드실 거였으면 저하고 함께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사내는 잠시 술잔에 가득 차 있는 술을 바라봤다. 향긋한 주향이 사내의 코를 자극했다. 방금 전까지 마시던 술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급술이었다. 기왕에 얼큰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다가온 소년의 유혹은 너무나도 뿌리치기 힘든 것이었다. 망설이던 사내는 주저주저 술잔에 손을 댔다. 하지만 일단 술잔을 들자 언제 망설였냐는 듯 화통하게 입속에 털어넣었다. “크으! 기가 막히군.” “호오! 역시 무림인이라서 그런지 술도 화통하게 드시는군요. 보고 있는 제 속까기 다 시원해지는 듯하네요. 자, 한 잔 더......”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으면서도 사내는 얼떨결에 다시금 술잔을 내밀었다. 썩 마음에 내키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싫은 놈은 아니었다. 둘은 말없이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탁자 위에 빈 병이 몇 개 더 늘어났을 때, 사내는 소년에게 오랜 지기를 다시 만난 듯 히꼬부라진 소리로 속에 쌓인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확실히 술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며 맞장구를 치고 있는 소년은 잘 알고 있었다. 사내가 그 말을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사내는 지금 가슴속에 쌓인 얘기를 조용히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아래쪽에 있는 애들은 내가 무공이 높으니 당연히 내가 문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하지만, 나 하고 동문이나 그 위쪽에서는 그걸 탐탁지 않게 여기지. 마공을 연성했다나? 그딴 식으로 나를 헐듣으면서 말이야.” 진팔은 술 한 잔을 입에 털어넣은 후 말을 이었다. “나는 문파에 들어오는 수입이 얼마인지, 그런 사소한 것들을 단 하나도 알지 못한단 말이다. 그리고 형을 밀어내고 문주가 되면 뭐 해? 형은 물론이고 사저(師姐)를 뵐 면목도 없을 것 아냐? 그리고 돌립해나간 대사형은 또 어떻고? 양쪽에서 나만 아주 죽일 놈을 만들겠다는 말이잖아.” “그럼요. 형장의 판단은 정확하신 겁니다. 문주가 되어봐야 골치만 아프죠.”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고. 하지만 내 말을 아무도 안 믿어주는 거야.” “자자, 진정하시고 한 잔 더 하시죠.” 사내는 술을 입속에 털어넣은 후 다시 떠들어댔다. “크으, 나를 문주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오고 난 후, 그 좋던 형과의 사이도 완전히 틀어져 버렸어. 나는 형을 참 좋아했었는데 말이야. 젠장, 형도 그래. 그딴 소리가 나돈다고 나를 멀리할 이유는 없잖아. 그 오랜 세월을 함게했었는데,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안면을 싹 바꾸다니 말이야. 빌어먹을!” 또다시 한 잔을 더 마신 후 사내는 투덜거렸다. “물론 형도 처음에는 그 말에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았어. 하지만 형수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지. 하여튼 속 좁은 계집들이란...... 나는 문주가 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구. 문주가 되봐야 귀찮기만 하지. 나는 그냥 문주의 동생으로 만족했는데 말이야.” “아무렴요, 문주보다는 문주의 동생이 훨씬 낫죠. 골치 안 아프죠, 든든한 형이 있어 좋죠. 형한테서 돈 좀 얻어서 유람이나 다니고, 얼마나 좋아요.” “내 말이 그 말이야.” 한동안 열변을 토해대던 사내는 이윽고 말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 하더니 그대로 탁자 위에 엎어져버렸다. 소년은 사내의 행동을 매우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물론 사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표정 관리를 열심히 하면서 말이다. 사내는 술주정을 하듯 여러 가지 말을 했지만, 그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인 모양이다. 문주가 되기 싫다는 것. 소년은 사내가 쓰러지고 난 후 방긋 미소 지으며 자신을 수행하고 있는 무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기는 했지만, 사내가 하는 말의 가장 큰 핵심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문주라는게 뭐지? 그게 뭔데 저 사라밍 말하듯 그걸 위해서 치열한 암투가 오가는 거야?” 뺨에 흉터 있는 무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문자라는 것은 문파의 주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듣기로 중원 무림은 수많은 문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문파들끼리 서로 세력 다툼을 하며 형성되는 것이 무림이라는 가상의 지역이지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소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호오, 그렇다면 넓은 땅에 흩어져 있는 여러 부족과도 같은 것이겠군.” “바로 그렇습니다. 문주라는 것은 부족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문파라는 것이 작게는 수십, 크게는 수만의 문도를 거느린다고 합니다.” 부하의 말에 소년은 놀란 듯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그 규모가 더욱 대단했던 것이다. “수만씩이나?” “예. 하지만 그 정도로 큰 문파는 몇 개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가 좀 작다고 해도 문파가 지닌 힘은 엄청날 것이 분명합니다. 노사께서 거느리고 계신 직속 무사들의 경우를 봐도, 그 수는 매우 적지만 그 힘은 공포스러울 정도가 아닙니까?” “그렇지. 노사가 아버님께 아주 큰 힘이 되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그렇다면 고도로 무술을 연마한 무사 수만 명을 거느린 자라면 그 힘은 웬만한 부족장보다 월등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만한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금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문주가 되기 위해 사활을 거는 것이겠지요.” 무사의 대답을 들은 소년은 더욱 흥미가 당긴다는 듯 반짝거리는 눈으로 술에 취해 엎어져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흥미가 당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엄청난 힘과 돈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싫다고 달아난 사내인 것을 보면 말이다. “봐, 역시 재미있는 사람이었잖아. 안 그래?” 하지만 무사는 그 말에 맞장구를 칠 의향이 없는 듯 말꼬리를 살짝 돌렸다. “그건 그렇고 저자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당연하잖아. 숙소에 데려다줘.” “예.” 뺨에 흉터 있는 무사가 쓱 눈짓을 하자, 또 다른 무사가 엎어져 있는 사나에게 다가섰다. 무사는 사내를 어깨에 들쳐메고는 옆에 있던 시녀에게 말했다. “저것을 들고 따라오너라.” “예.” 시녀는 사내의 자리 옆에 놓여 있던 거도를 집어들었다. 아니 집어들려고 했다. 하지만 시녀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힘을 썼건만, 거도는 움직임이 없었다. 시녀가 좀 더 힘을 쓰자 간신히 조금 들렸지만 그것도 잠시, 시녀는 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빠지고 말았다. 캉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게 도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무사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눈치채고 재빨리 시녀에게로 다가왔다. 무사는 힘을 주어 도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처음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무거웠는지 나지막한 감탄을 뇌까렸다. “이걸 들고 휘두른달 말인가? 타고난 신력(神力)을 지니고 있었군.” 그러자 뺨에 흉터 있는 무사가 흥미를 보여싿. 그는 무사로부터 도를 넘겨받은 후, 무게를 가늠해보며 감탄성을 토했다. “호오, 70근(약 26Kg)은 족히 나가겠군. 이걸 가지고 자네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말인가?” 무사는 뺨에 휴터 있는 무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쟈타르 님, 설마 무림인들이 모두 이자처럼 대단한 실력자들인 것은 아니겠지요?aksdir 그렇다면 마마의 이번 여행은 너무 위험합니다.” 쟈타르라 불린 무사는 갑자기 사방을 두리번거린 후, 매섭게 무사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말조심해라. 여기는 중원이다. 그리고 너는 마마의 명령에만 따르면 된다.” “옛, 명심하겠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사내는 신음성을 흘리며 눈을 떴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이 탈이었다. “젠장. 어윽! 머리야.” 투덜거리는 순간,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 그는 소년과 술을 마셔싿. 물론 원해서 마신 것은 아니었지만, 소년이 적당히 술을 권하면서 기가 막히게 그의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주며 맞장구를 쳐주니 술자리가 일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후 어슴푸레하게 이어지는 기억...... “허억!” 사내는 술이 확 깨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침상에서 벌떡 얼어서며 외쳤다.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아무리 술에 취했기로선, 사문의 치부(恥部)를 외부인에게 토설하다니. 헙!” 사내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큰 소리로 떠들었다고 느끼고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다음 재빨리 문가로 다가가 주위에 누군가 없는지 살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내공을 운용하여 주위를 샅샅이 살폈는데, 일단 사내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는 그 어떤 침입자도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몸 상태로는 그것을 확실할 수가 없었다. 아직가지도 온 몸에 술기운이 가득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물론 이렇게 대놓고 운기조식을 하는 것은 믿을 만한 사람이 주위에 호법을 서줄 때거나, 혹은 주위에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내로서는 급했다. 빨리 술기운을 체내에서 몰아내고 살짝 도망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사내는 내공을 운용하여 조금씩 술기운을 모랑내기 시작했다. 술기운을 몸 밖으로 몰아내는 것은 중독된 상태에서 독을 체외로 배출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고차원이 내공 운용술이었다. 그것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수련한 것이 아니라면, 순식간에 술기운을 체외로 뱅출하는 것은 화경의 경지에 올라 있는 전설적인 고수 정도는 되어야 가능했던 것이다. 장시간이 경과된 후, 사내는 어느 정도 술기운을 몸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물론 모두 뽑아낸 것이 아니었기에 아직도 얼큰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처음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보다는 월등하게 상태가 좋아져싿.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침상쪽으로 걸어갔다. 침상 옆에는 자신의 애도(愛刀)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가 막 도를 집어들려는 순간, 사내으 lrkarkr이 누군가가 접근 중이라는 것을 알려왔다. 사내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가장하여 참상에 주저앉는 순간 밖에서 걸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소?” “물론이오. 그런데 아직 이른 시각인데 무슨 일이오?” “그럼 잠시 실례하겠소.” 문이 열리면서 뺨에 흉터 있는 무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사는 밖에 누군가가 없는지 슬며시 살핀 후, 사내에게 말했다. “길게 말하지는 않겠소. 도련님은 대갓집에서 곱게 자라신 분이라 세상 물정에 어둡소.” “그건 한눈에 알아봤소. 그래서 지금가지 참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요즘은 여자를 보고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오?” 무사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이어 평정심을 되찾으며 말했다. “언제 그 사실을 눈치채셨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내놈이 그렇게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물론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녀는 풍성한 옷으로 몸매를 가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직 변성기에 이르지 않은 아담한 체형을 지닌미소년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상대는 꽤나 관찰력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무사는 생각했다. “뭐, 좋소. 알아봤다니 말이 쉽겠순. 형장도 어느 정도 눈치챘겠지만, 그분께서는 아주 신분이 높으신 분이오.” 도련님이라는 단어를 상대가 트집잡자, 무사는 ‘그분’이라는 단어로 말을 바꿨다. “그래서? 나를 보고 그 대갓집 꼬맹이 신발이라도 핥아주라는 말인가?” “천만에. 나도 무인이오. 무인에게 그런 부탁을 할 정도로 썩지는 않았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분이 여자의 신분으로, 남장을 하고 중원을 떠돌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을 조금이나마 고려해주었으면 하는 거요.” ‘내가 떠돌게 만들었나? 왜 나한테 지랄이야......’ 사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무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어쩌면 어제 술에 취해서 술주정을 하고 싶었던 사람은 형장이 아니라 그분이었을지도 모르오. 형장을 옆에서 유심히 관찰해본 결과 내 나름대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하는거요.” 단 한 번도 무사가 이렇게 길게 자신에게 말을 건넨 적은 없었다. 무사의 말이 길어지자 사내는 곧 상대가 한인(漢人)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맹이의 매끄러운 발음과 달리 무사의 억양은 뭔가 어늘한 감이 있어던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애써 그에 대한 호기심을 억눌렀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화(禍)를 부른다고 여태껏 배워왔기 때문이다. “말이 너무 길어졌군. 나는 이만 가보겠소.” 상대가 문을 나선 후, 사내는 자신의 짐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세상 구경을 하러 나온 할 짓 없는 변방 호족의 자제인 모양이군. 어디 무림이라는 곳을 신물나게 구경해봐라. 재미있는지...... 나는 이제 떠나볼까?” 짐을 싸들고 문가로 다가서는 순간, 사내는 또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가 있었다.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접근해오는 상대......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 짐을 내려놓고 침상위에 앉았다. 곧이어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어나셨소?” 걸찍한 사내의 목소리였지만, 뭔가를 조심하는 듯 목소리는 한껏 낮춘 상태여싿. 그것을 닫는 순간 사내의 뇌리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그 꼬맹이의 부하들이 차례대로 모두 다 방문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 말이다. 결국 사내는 도망치지 못했다. 그놈의 부하들이 순서대로 방문하며 회방을 놓은 탓이었다. 그의 방에 마지막으로 방문한 사람은 꼬마였다. 젠장할...... 내 이름은 진팔이다. 음식이 차려진 후, 사내가 막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상대가 입을 열었다. “참, 그러고 보니 아직 형장의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듣지 못했네요.” 사내는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잠시 늦추며,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이름은 알아서 머 하려고?” 뭔가 기분이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음식을 먹고 있는 사내를 보며 소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조금씩 서로의 대화가 엇갈리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소년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만나 식사를 함께한 것이 벌써 두 번째인데, 형장의 이름조차 모른대서야 어디 말이 되겠습니까?” “즈김까지 내 이름을 몰라도 서로 대화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는데, 굳이 이름을 알 필요가 있을까?” 이름을 알려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자 소년은 체념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그의 어조에는 심술이 가득함을 느낄 수 있었다. “뭐 좋습니다. 형장께서 알려주기 싫으시다면 할 수 없죠. 지금은 그냥 모르는 상태로 지낼 수 밖에요. 형장의 이름을 알아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뭐 굳이 아침부터 말다툼을 해서 상쾌한 기분을 망칠 이유가 있겠어요?” 이름을 알아낸다는 말에 사내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소년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무림에 수많은 문파가 있다고 들었지만, 첬재와 둘째가 권력 다툼을 하는 문파는 흔하지 않겠죠? 거기에다가 그 둘의 나이 차이가 15년이나 되는데도 둘재의 무공이 높은 문파는 더욱 드물겠죠. 그리고 그 때문에 둘째가 권력 다툼이 싫다고 야반도주까지 했다면 하나나 둘밖에 없을 거라는게 재 생각입니다만......” 사내는 잡아먹을 듯 소년을 노려보며 한 단어 한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서?” 안 그래도 강인한 인상을 지닌 사내가 그렇게 하자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가 따로 없는 듯싶었다. 하지만 소년은 별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대꾸했다. 아마도 그는 저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부하들의 실력을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다 보면 금방 알 수 있겠죠. 물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장이 속한 문파에 대해서 악소문이 좀 퍼질 우려가 있긴 하겠지만, 뭐 큰일이야 나겠어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유포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을 알리는 것뿐인데 말이죠.” “죽고 싶냐?” “그러니까 제가 그런 수고를 하지 않도록 지금 형장의 이름을 알려 달라는 겁니다.” 잠시 잡아먹을 듯 소년을 노려보기는 했지만,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이름을 중얼겨렀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술김에라고는 하지만 저 소년(?)에게 떠든 것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진팔이다.” 순간 소년의 얼굴이 미소(?)로 가득 찼다. 억지로 안면 근육을 굳히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 했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 밖으로 다 드러나고 잇었던 것이다. 어떻게 저렇게도 촌스러운 이름을? 그것도 저렇게 야성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며 노련해 보이는 무림 고수의 이름이 말이다. 소년은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여 다시 물었다. “예? 뭐라고요? 다시 한 번 말씀해주세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진팔의 안색이 팍 찌그러들었다. 하지만 진팔은 씹어먹듯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뱉어냈다. “진팔이란 말이다.” 그 말에 소년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여태껏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한껏 무게를 잡고 있던 무인이, 이렇듯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도 재미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소년은 진팔을 좀 더 골려줄 요량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호오! 진 형의 형제가 여덟이나 되는지는 미처 몰랐군요.” 무식한 하층민들의 경우, 자식들의 이름을 짓기 귀찮아서 혹은 알고 있는 글자가 별로 없어서 자식들의 이름을 낳은 순서대로 일, 이, 삼 등의 숫자를 붙여 짓는 경우가 많아싿. 하지만 사내는 한 문파의 후계자 중 한 명인 만큼 결코 그 부모가 귀찮거나 혹은 무식해서 진팔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리 없었다. 그 말에 진팔은 얼굴에 노기를 띠며 투덜거렸다. “내 이름은 여덟 팔(八)자가 아니라 깨뜨릴 팔(捌)자란 말이다. 내가 이래서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으려 했는데........” “아, 실례. 소제가 본의 아니게 진팔 형의 아픈 데를 건드렸군요. 하지만 음이 똑같은 걸 어떻게 합니까? 누구나 오해할 수 있는 걸 단어를 쓴 게 잘못이죠.” “그래, 이름을 알았으면 이제 된 건가?” “물론이죠. 그런데 진 형께서는 소제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전에 알려드렸는데 말이죠.” “그, 글쎄......” “아하! 소제의 미천한 이름 따위는 기억할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까?” 상대가 비비 꼬인 어조로 이죽거리자, 사내는 약간 당황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 그건 아닐세. 내가 기억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게나.” “좋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알려드리죠. 제 이름은 조령입니다. 여자 이름 같지만 뭐,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것이니 어쩔 수 없죠. 그건 그렇고, 전에 말씀드린 것 말인데요. 같이 길동무나 하자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사내는 그 말을 귓등으로 듣고 투덜거렸다.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길동무는 필요없다고 말이야.” “아아. 그렇게 반대만 하실 게 아니라구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어제 얘기를 들어보니 속에 끓는 것도 많으신 것 같은데.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구요.” 진팔은 차갑게 응대했다. “어떻게?” “아무래도 속에 울분이 쌓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가게 되거든요. 술을 드실 때마다 그런 것을 옆 사람에게 떠들어댄다면 큰일나겠죠? 중원 전체에 진 형의 사문에 대한 소문이 쫙 퍼질 수도 있잖아요. 차리리 그럴 바에는 저한테만 술주정을 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면서 조령은 자신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는 보기보다 상당히 입이 무거운 편이거든요.” 이런 뻔뻔한... 어쩌구 하는 말이 목굼ㅇ까지 치밀어올랐지만, 진팔은 초인적인 의지력을 동원하여 참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이마에는 굵은 힘줄까지 솟아올라 있었다. 이 꼬맹이를 죽도록 두들겨 팬 다음 ‘그딴 소리 하면 파묻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면 끝이겠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여자애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손대기도 난감한 노릇이었다. 울화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어쨌건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젠장, 그겐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나는 너의 그 입을 못 믿겠다.”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죠. 저는 그럼 진 형의 기대에 힘입어 진 형네 문파의 모든 것에 대해 소문을 포뜨리는 수 밖에요. 진 형께서 소제를 그렇게 입이 가벼운 인물로 치부하시는데, 그 기대에 호응해드리는 것도 재미있겠군요. 안 그래요?” 그와 동시에 뿌드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팔이 무의식중에 얼마나 주먹을 힘껏 쥐었는지 관절들이 아우성을 쳐댔던 것이다. “너, 죽을래?” 하지만 그런 위협은 애시당초 먹혀들어 가지도 않았다. 조령은 진팔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진 형께서 바라시는게 뭡니까? 제 입은 못 믿겠다면서, 설마 조용히 있으라는 것은 아니겠죠? 그건 아주 커다란 모순이라는 것을 모르세요?” 그 말에 진팔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말빨에서 밀리다 보니 성질이 마구마구 솟구쳐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망할! 그래! 네 입은 아주 무겁다. 나는 너를 믿어! 결코 그딴 소리를 소문내지 않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마. 이제 됐냐?” “물론이죠. 이런 믿음직한 동행자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진 형의 복이 아니겠어요? 자, 그럼 어디로 여행하실 건지 말씀해주세요. 계획을 세워보기로 하죠.” “왜 내가 너하고 여행을 해야 하는데?” 황당하다는 듯 퉁명스럽게 묻는 진팔에 비해, 조령의 안색은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진팔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는 쪽은 조령이었기 때문이다. “그야 당연히 진형께서는 입이 무거운 동반자를 필요로 하시니까요. 그래야 술주정도 받아줄거고, 이것저것 말벗도 되어줄 것 아닙니까? 만약 저를 거부하시는 이유가 제 입이 너무 가벼울지도 모른다는 오해 때문이시라면, 그 오해를 진실로 만들어드릴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진팔의 안색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왠지 정감이 가더라니 마사코는 두려움에 질려 아르티어스의 뒤편에 서서 덜덜 떨고 있었다. 아무리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껏 주인과 함께 다니는 아르티어스라는 이방인을 그녀는 지금까지 거의 입만 살아 있는 덜떨어진 인간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말만 많았지 실제 행동이 필요할 때는 거의 모든 것을 주인에게 팔밀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에서야 그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덩치의 황금빛 괴물. 머리와 꼬리는 전설상에 나오는 용과 닮았지만, 어마어마한 몸통에 커다란 날개까지 돋아 있었다. 아르티어슨 s자신의 등에 주인과 그녀를 태우고 이곳 대국까지 단숨에 날아온 것이다. 전신이 핑핑 돌 정도의 엄청난 속도 그리고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와 육지......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도대체 이것은 꿈인 것일까?’ 주인은 한상 이곳 대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했다. 그리고 대국이 바로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주인은 바다에 자주 나갔다. 그는 하염없이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에게 주어진 일이 없었기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주인은 바다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 사마와의 대화를 통해, 그 운인이 뱃멀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알고 그녀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꿈에도 가고 싶어하시는 고향 땅을 뱃멀미 대문에 못 가시다니, 얼마나 불쌍하신 분이란 말인가? 그 분의 강인함을 생각한다면 웃음이 터져나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바다를 건너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는데,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것일까?’ 두려움에 떠는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깨비라도 나타나듯 회색 물체가 퍽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깜짝 놀라 헛바람을 삼켰다. 하지만 그것은 회색의 이상하게 생긴 옷을 입고 있는 주인이었다. ‘나는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후지와라 가의 사무라이야. 어떻게 이렇게 깜짝깜짝 놀란다는 말이야? 저 주인을 만나고 나서부터 그런횟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그건 나의 모자람을 도러내는 거야. 더 침착하자. 너는 해낼 수 있어. 마사코, 그리고 꼭 해야만 해. 벌써부터 이러면 어떻게 주군께서 내린 맹령을 완수할 수 있겠니.’ 마사코는 시선을 주인에게로 돌렸다. 짙은 눈썹, 각이 진 턱선,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강인한 인상이었다. 물론 몸매가 나약하고 가늘게 보였기에 그 인상은 크게 완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때, 마사코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금발의 그 아름답던 주인이, 여기에 도착한 후 갑자기 그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런 다음, 비명을 지르고 있는 마사코를 멀뚱하게 쳐다보며 한마디했다. “내 모습은 원래 이래. 잊어버리지 말도록!” 너무 당황해서 그녀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주인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녀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그건 벗어버리고 이 옷을 입어라.” 마사코는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옷을 벗어버렸다. 그런 다음 바닥에 떨어져 있는 허름한 옷으로 재빨리 갈아입었다. 갈아입으라고 명령을 받았으면 장소가 어디건 곧바로 실행해야만 했다. 그녀는 그렇게 교육받으며 성장했으니까 말이다. 몇 가지 사소한 장시물 따위를 달 때는 그것을 어디다 다는지 헷깔리기 십상이겠짐,s 다행히 주인이 던져준 옷은 매운 단순한 것이었다.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질문할 필요도 없었다. 마사코는 옷을 다 갈아입은 후,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뭐 하고 있어요? 아버지도 빨리 변하시라구요.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너무 티가 나서 안 된다니까요.” 곧이어 아르티어스의 몸에서 하얀빛이 뿜어져나왔다. 그리고 잠시후 그 빛이 사라지자, 아르티어스는 없어지고 한족의 옷을 입고 있는 왠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왼쪽눈을 중심으로 훑고 지나간 긴 검상이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검은 수염을 슬쩍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때? 멋있지?” 사부 유백의 모습을 또다시 보게 된 것이다. 묵향은 처음에는 매우 놀란 듯하더니 갑자기 왼손에 들고 있는 검집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놀림은 한 번으로 족하다. 아르티엔에게 느껴지던 정감...... 그리고 그를 잃었을 때의 슬픔. 이제 더 이상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어요?” 무시무시한 살기.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 엄청난 살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묵향의 슬픔을 느꼈다. 슬쩍 장난삼아 해봤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아들이 이렇게 나오자 아르티어스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티어슨 sajtWjr은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쳇, 아버지는 통했는데, 나는 안 되는 모양이군.” 또다시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쭈글쭈글한 피부에 허연 수염이 덮여 있는 촌로의 모습이어싿. 아마도 묵향이 아랫마을로 옷을 훔치러 내려간 사이, 이곳에서 기다리다 그 노인을 봤던 모양이었다. 묵향은 애써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이제 가죠.”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아들의 깊은 슬픔을 느꼈다. ‘생각보다는 정이 많은 놈이란 말씀이야. 저런 놈들이 이용당하기 딱 좋지. 위대하신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객사하기 딱 좋았을 거야. 아무렴. 흐흐흐흐......’ 묵향은 번화한 거리로 들어서자 우선 전장(錢場 : 은행과 유사함)부터 찾았다. 大陸錢場(대륙전장) 묵향은 간판을 보고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대륙전장은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중원에 있는 수많은 전장 가운데서도 꽤나 신용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중년의 점원이 다짜고짜 화부터 냈다. “아니 이것들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빨리 나갓!” 묵향은 단숨에 그의 멱줄을 틀어쥐었다. 멱줄이 잡혀 있는 점원이 자신이 어떻게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빠림이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점원의 목을 놔주며 묵향은 차갑게 말했다. “모르고 한 것은 죄가 되지 않는 법, 하지만 두 번째는 용서하지 않는다.” 점원의 옆에는 경비무사도 몇 명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마디 참견도 하지 않았다. 점원의 멱줄을 쥐는 그 빠름. 자신들의 눈으로 따라가지도 못할 고수였다. 그런 고수가 거지일 리는 없는 법. 거지와 고객을 알아보지 못한 멍청한 점원이 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들은 신조차 쓰지 않았다. 물론 그 고수가 이곳을 털러 들어온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묵향은 경비 무사들을 지나쳐 쇠창살이 쳐져 잇는 창구 쪽으로 갔다. 그는 커다란 퀘짝을 창구 위에 턱 올려놨다. 아르티어스가 퉁루젠 족장에게서 받았던 바로 그 궤짝을 말이다. 쿵! 묵향이 가볍게 한 손으로 올려놓은 궤짝이 낸 소리였다. 경비 무사들의 안색이 조금 더 창백하게 질렸지만, 그들보다 좀 더 허옇게 질린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창구에 쳐진 쇠창살 뒤쪽에 서 있던 뚱뚱한 중년인이었다. 그는 궤짝 속에 들엉 있는 물건이 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묵향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실 전장에 들고 올 물건이야 대충 정해져 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 어떻게 해드립깝쇼?” 묵향은 중년인에게 잛막하게 대답했다. “은자 50냥은 현금으로, 그 중 1냥은 동전으로 주게.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전표로 줘.” 그 말에 중년인은 미세하게 떨리는 소능로 궤짝을 열어봤다. 묵직한 궤짝. 그 안에 은이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하지만 궤짝 안에 들어있는 것은 은괴가 아니었다. 궤짝이 열리는 순간 그 안에서 쏟아지는 황금빛 광채. 세상에...! 이 모든게 황금이라니! 그 엄청난 양에 기가 질린 중년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렇게나 많이?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손님. 뭐, 뭣들 하는것이냐? 빨리 셈을 시작해라.” 한동안 창구 뒤쪽에서는 금 덩어리들의 전체 무게를 재느라고 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 금괴의 전체 무게가 나오자 중년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묵향에게 말했다. “저, 손님. 저희 전장에는 황금 천 냥을 바꿔드릴 만큼 전표가 없습니다.” 중년인의 목소리에는 짙은 아부가 깔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걸 전부 전표로 바꿔준다면, 이곳에는 엄청난 양의 황금이 고스란히 남게 되는 것이다. 황금 천 냥을 굴릴수 있다면, 엄청난 파생 수입이 발생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이 시골 구석이 아닌 좀 더 근사한 곳으로 진급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까지 생각한다면 아부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꿔줄 수 있는 만큼만 바꿔주게.” “옛, 손님.” 중년인의 지휘하에 또다시 창구 뒤쪽에서는 난리가 벌어졌다. 창구 위에 100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전표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은자 1냥짜리 전표까지 간혹 보이는 것을 보면 정말 있는 대로 닥닥 긁어모은 모양이었다. 중년인은 작은 은 덩이 49개와 동전들을 전표 옆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점원과 함께 낑낑거리며 궤짝을 창구 위에 되돌려놓은 뒤 숨을 헐떡거렸다. 궤짝으 무게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자~, 모두 해서 은자 2천 냥입니다. 나머지 금괴는 여기 있습니다. 저희 전장은 신용과 정확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는 만큼 확인해보실 필요도 없으실 겁니다. 저희 전장은 시골의 작은 분점이라서 황금 100냥 분밖에 교환해드리지 못한 점, 너무나도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묵향은 확인해보지도 않고 가볍게 궤짝을 들어 아르티어스에게 넘겼다. 그리고는 창구 위에 쌓인 전표와 현금 들을 품속에 쑤셔넣은 다음 뒤돌아서려고 하는데 중년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미련이 남았던 것이다. “내일, 내일 한 번만 더 방문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때까지는 전표를 마련해놓겠습니다.” 하지만 묵향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는 듯 곧장 출구로 걸어 나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중년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중년인은 지금껏 배어 있던 습관에 따라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음에 또 오십시오.” 잔돈이 마련되자 묵향은 일행을 이끌고 옷가게로 갔다.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른 다음 그가 발걸음을 돌린 곳은 그 마을에서 가장 큰 음식점이었다. 확실히 번드르르한 옷을 입고 들어서자 점소이의 반응에서부터 아이가 있었다. “어서 옵쇼~!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아르티어스는 의자에 앉자마자 기대가 된다는 듯 점소이에게 뭐가 이 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인지 질문은 던지기 시작했다. 아들놈에게 수없이 들어왔던 중원에서의 첫 식사인 것이다. 과연 이곳의 음식 맛은 어떨까나? 아르티어스의 두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묵향이 주위를 둘러보니, 객잔 한구석에는 웬 장님 늙은이가 어떤 소녀의 부축을 받으며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 늙은이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것이 아마도 전문적인 이야기꾼인 모양이었다. 묵향은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본 결과 대충 자신이 중원을 떠난 지 20년 쯤이 흘렀었다. 이야기꾼 노인의 입담은 아주 재미있게 이어지고 있었다. 전설적인 무림의 영웅담이 전개되기도 했고, 또 요 근래에 있었던 무림의 비화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20여 년의 공백을 안고 있는 묵향에게는 주옥과도 같은 정보였다. 묵향이 재미있게 들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가 옥화무제에 얽힌 비사여싿. 그 간교하기 그지 없는 계집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그녀는 무림맹의 봉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매우 겸손하면서도 지혜로운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묵향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주위에 앉아 있던 험악한 인상의 젊은이가 시비를 걸어왔다. “이보시오. 옥화 봉공님의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는데, 왜 그렇게 경박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오? 뭔가 저 이야기에 자못이 있다는 거요?” 그 말에 묵향은 웃음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일행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기에 웃는 것일 뿐, 신경 쓰지 마시오.” “이봐. 시기와 장소를 봐가면서 웃으라구.” 청년은 단 한마디의 이야기라도 더 들을 욕심인 양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시비를 더 걸었다면, 이 객잔을 걸어서는 나가기 힘들었을 거라는 사실은 모른채. 이야기꾼 노인은 또 한 편의 이야기를 끝낸 후,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허험, 이거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나? 목이 마르구먼. 이래서야 나만이 알고 있는 비장의 전설을 들려줄 수가 없겠는데?” 노인이 능청을 떨자, 손님들 중에서 꽤나 돈이 있어 보이는 중년인이 점소이에게 외쳤다. “이봐! 빨리 술과 안주를 가져다 드리거라.” 노인은 술 몇 잔을 연거푸 들이킨 다음, 안주를 한 점 집어서 씹어 먹었다. 그런 다음에야 목청을 가다듬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흠, 지금은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숨겨진 예이야기를 들어보시구려. 이 이야기는 저 사악하기 그지없는 악마들의 단체에 대한 이야기라오. 100여 년 전, 평화롭게 그지없던 무림을 뒤흔들어놓을 악의 씨앗이 음습한 대지에서 태어났소. 그가 바로 저 사악하지 그지 없는 악마들의 지배자, 암흑마제(暗黑魔帝)라는 마인이지요.” 여기까지 이야기가 전해지자 아르티어슨 s궁금하기 짝이 없다는 듯 묵향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20년쯤 전에는 여기에 살았다고 했지?” “예.” “암흑마제가 누구냐? 저 정도 욕을 들을 정도면 너도 알 거 아니냐?” 묵향으 sdjflendwjf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보통 정파에서 마교의 뛰어난 고수들을 부를 때, 뒤에 ‘왕(王)’ 자를 붙이는데, ‘제’자 까지 붙은 걸 보면 대단한 놈인 모양이네요.” 그 사이에도 노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암흑마제는 무림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가장 사악하고도 추잡하기 그지 없는 악마적인 무공을 연성했다고 전해지고 있소. 얼마나 극악무도한지 그 무공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무공이라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그 무공을 어떻게 수련했는지는 곳곳에 증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소. 암흑마제의 탄생 후 무림에는 대규모의 납치사건이 자행됐었다오. 뛰어난 자질을 갖춘 수천 명의 동남동녀가 실종된 것이오. 그것으로 미루어 보면, 악마적인 내공의 원천은 동남동녀들의 정혈(精血)임이 분명하지 않겠소?” 어쩌구저쩌구, 노인의 이야기는 재미있게 이어지고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갖가지 악질적인 행동이 나열되는 것을 듣고,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연신 감탄사를 토뜨리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세상 어디를 가봐도 저른 때려죽일 놈이 꼭 한 놈은 있는 법이지.” 묵향은 황당해하면서도 맞장구를 쳐줬다. 그 때려죽일 놈의 목록에 아르티어스도 능히 포함되고도 남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제 파악을 좀 하시죠.’ 하지만 그대로 말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므로 묵향의 입에서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러게 말이에요.” “암흑마제라는 놈, 정말 악랄하기 그지없구먼. 내가 소싯적에 하던것보다 더하잖아. 쩝, 나도 저런 방법이 있는 줄만 알았다면 해봤을 텐데 말이야.” 아쉬운 듯 쩝쩝 입맛을 다시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표정에느 약간의 존경심마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보고 묵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투덜거렸다. “농담도 골라가면서 하세요. 그딴 짓을 한다고 무공이 올라갈 리가 없잖아요.” “그럴까?” “당연하죠.” 이야기가 끝나자, 술과 안주를 제공했던 그 중년인이 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보시오. 그런데 그 암흑마제라는 사라밍 누구요? 그 별호를 듣는 것이 처음이라서 그렇소만......” 중년인의 말에 노인이 딱하다는 듯 반문했다. “아니, 마교의 절대자 암흑마제를 모른다는 말씀이시오?” 탁자에 앉아 있는 손님들 중 몇몇은 ‘마교의 절대자’라는 말에 뭔가 떠올랐는지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묵향의 머릿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교차하고 있었다. ‘그 암흑마제라는 놈이 내가 실종되고 난 뒤에 본교의 실권을 잡았나? 능히 그럴 수 있지. 힘만 강하다면 교주가 될 수 있는 곳이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본교에 귀환한 후 그놈의 목을 따는 것으로 축하 인사를 대신해야겠군.’ 뿌드드득! 묵향의 결심을 드러내는 듯 그의 꽉 쥔 주먹이 비명을 질러댔다. 노인은 객잔에 모은 손님들을 쭈욱 둘러본 후,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자신만 알고 있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댔다. “암흑마제는 마교가 낳은 최강의 고수지요. 가장 사악하고 가장 무자비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아마도 그건 그의 이름이 피냄새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기 대문이라고 누부는 생각하고 있소이다. 그의 이름은 바로......” 결정적인 순간에 암흑마제의 이름알 말하지 않고 노인은 천천히 술전을 기울였다. 느긋하게 한 잔 하고 있는 노인을 청중들은 애타게 지켜보고 있었다. 분위기를 좀 더 고조시킨 후에야 노인은 비밀스런 얘기를 하듯 소곤소곤 말했다. “묵향(墨香)이라오.” 푸헉!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묵향은 식후 입가심으로 마시고 있던 차를 뿜어내고야 말았다. 왜 거기서 갑자기 자기 이름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묵향은 재빨리 마사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묵향의 예상대로 그녀의 눈은 홛으잔만해져 있었고,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번에는 아르티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오랜 시간을 보낸 아르티어스라면 저게 거짓말임을 이해해주리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아르티어스도 마사코만큼이나 놀란 듯했지만, 그가 놀란 이유는 그뇨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아르티어스는 곧이어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감탄스럽다는 듯 묵향에게 말했다. “너도 옛날에는 정말 대단했던 모양이구나.” 그 말에 묵향은 발끈해서 대답했더. “너도 라니요? 아니, 지금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skfmf 아버지하고 동급으로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아주 불쾌하니까요. 빨리 가자구요. 여행을 하려면 말도 사야 하고, 아주 바쁘단 말입니다. 젠장, 괜히 듣고 있었네.” 묵향은 투덜거리며 일어서서는 서둘러 계산을 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묵향의 뒤를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왠지 처음부터 정감이 가더라니......” 그리고 그 뒤를 새파랗게 질린 마사코가 고개를 푹 숙이며 뒤따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묵향을 따라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완예 아구다 옥화무제가 맹주를 배알하고 무영문으로 돌아왔을 때, 서둘러서 그녀를 마중 나오는 중년 사내가 있었다. 그는 옥화무제에게 깊숙이 예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태상문주님.” 옥화무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을 한 후, 내실로 걸어 들어가며 총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까지 총관이 무슨 일인가요? 나한테까지 보고를 올려야 하는 급한 일이라도 있나요?” “예.” 그 말에 옥화무제는 의아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일은 그녀의 딸인 문주가 알아서 처리해왔기 때문이다. “예, 문주께서는 사천에 가셨습니다.” “사천에?” “예, 마교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기에 급히 사천으로 가셨습니다.” 이미 옥화무제는 그것을 예상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흐음...,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마는 것인가? 그렇다면 총관이 보고 할 사항이라는 것도 바로 마교와 관계된 것인가요?“ 총관은 서둘러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오늘 아침 황궁에서 전서구(傳書鳩)가 도착했습니다.” 황궁에서 보내온 전서구라는 말이 옥화무제에게 얼마나 큰 동요를 줬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잠시 그녀의 걸음을 멈칫하게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전서구를 이용하면 빠르다는 이점도 있지만, 도중에 발각될 우려도 높았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전해야 할 만큼 긴급을 요하는 보고서라는 말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예. 일전에 문주께서 태상문주님께 상의드렸던 그 문제 때문입니다.” “세금 문제 말인가요? 그 문제라면 이미 문주를 통해 지시를 내렸지않나요? 술을 전매하는 것까지는 괜찮겠지만, 전매 품목을 더 이상 늘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었는데 말이에요.” 송은 전국 이래 소금 전매를 정착시켰다. 그 때문에 밀염(密鹽)을 취급하는 자들도 많이 생겼지만, 막대한 세수 증대가 있었다. 그렇지만 요와대치하고 있는 지금, 엄청난 군사비 비출로 인해 극심한 재정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것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좀 더 세수를 증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소금 전매에 착안해서 옥화무제가 생각해낸 방법이 술을 전매하는 것이었다. 그 효과는 아주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술을 전매함으로써 세수가 비약적으로 증대된 것이다. 게다가 술은 소금처럼 실핌품이 아니었다. 술값을 서너 배 올린다고 해서 백성들에게 타격이 갈 리는 없었다. 여기에 판매용이 아닌 각 가정에 담아 먹는 술에는 제약을 가하지 않았기에 크게 불만이 쌓일 리도 없었다. “예, 물론입니다. 태상문주님. 하지만 황실의 지출이 너무 극심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1년에 한 번씩 요의 황제에게 세폐(歲幣)로 지불하는 돈만도 은자 20만 냥에 비단 20만 필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것만 으로는 절대로 평화가 유지될 리 없다는 것을 태상문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쪽에 힘이 없으면 요는 언제라도 맹약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린 후 대군을 몰아 침공해올 것입니다.” 중원에서 일어선 국가가 힘이 약화되어 이민족에게 공물(貢物)을 비치지 않으면 안 도리 상황에 몰렸을 때, 그들은 그것을 공물이라 하지 않고 세폐라고 불렀다. 나약한 민족이 강한 민족에게 물건을 갖다바친다는 뜻을 지닌 공물보다는 새해에 한 번씩 약소국의 국왕에게 화친을 지속하자는 의미에세 하사하는 예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세폐가 훨씬 대국(大國)의 체면을 세워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 때문에 요와의 국경선에 80만에 이르는 정예가 집결해 있잖아요.” “예.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돈 입니다. 요에 건네주는 세폐와 군사비로 지출되는 금액만 재정의 8할에 이르고 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실의 재정이 건실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동관(童貫)의 보고에 따르면 채 재상의 주도하에 새로운 조세법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것 때문에 동관은 태상문주님이 지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면 그가 채 재상을 설득해서 새로운 조세법이 생되지 않게 막을 수 있으니까요." 동관이라면 당금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내시였다. 그리고 그 내시를 통해 그녀는 암암리에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것도 다 황제가 등극하는 데 그녀가 결정적인 도움을 줬었기에 가능해진 연줄이었다. 그리고 채경(菜京)은 동관이 추천하여 재상(宰相)이 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동관의 말을 거역하기가 힘들었고, 이 동관을 옥화무제는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간접적으로 재상인 채경을 이끌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무영문의 태상문주인 그녀가 대송제국의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새로운 조세법이라고?” “예, 태상문주님. 현재의 재정 압박에서 탈피하기 위해 각종 생필품에 대해 더욱 폭넓게 과세를 하자는 것이지요. 현재 전매하고 있는 소금이나 술뿐아니라 차(茶), 백반 등 일용 필수품에 폭넓게 과세를 한다면 일거에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에 옥화무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만약 그렇게 한다면 백성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 멍청이들은 그것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어쩔수가 없습니다. 일단 요를 격파할 때까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여 그렇게 세금을 거두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안 그러면 몇 년 지나지 않아 국경에 배치된 어림군에게 군량조차 보낼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송은 파멸입니다.” 잠시 대화를 멈추고 생각을 정리하던 옥화무제는 이윽고 결심한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져 있었다. 어쩌면 이것 대문에 대송제국이 파멸할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지요.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하지만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요를 멸망시키는 것을 서둘러야 해요. 그토록 무거운 과세를 백성들에게 지운다면, 잠시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폭발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 전에 모든 일을 끈내야만 해요.” “예, 태상문주님.” 방에 도착하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 무사가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 그녀는 살포시 의자에 앉으며 총관에게 질문은 던졌다. “뭔가 방버빙 없을까요?” 총관에게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몽고를 이용할 수는 없을까요? 몽고인들은 아주 용맹한 유목 부족이니 그들을 이용해서 요의 서북부를 공격하게 하고, 남쪽에서부터 어림군이 치고 올라간다면 어쩌면 승산이 있지 않겠어요?” 총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옥영진 대장군이 몽고를 정벌한 이래, 아직까지 몽고를 통일할 만한 실력자가 나오지 못했습니다. 분열된 몽고의 힘으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에 진길영 원수가 요를 침공할 때 옹원했던 여진족의 예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 부족을 끌어들인 결과 30만이나 되는 여진족을 글어모았었지만, 전력에 크게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통일이라...... 아참! 여진족이 있잖아요. 얼마 전 총관이 올린 보고서 중에서 여진족의 동태에 관한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현재 여진족을 통일하고 있는 자가 있다고 말이에요.” “예, 태상문주님. 그가 바로 완옌(完 ) 아구다(阿骨 )라는 자입니다. 아주 용맹한 전사로서 고려의 북쪽 완예부를 본거리로 삼아 세력을 규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진길영 원수가 대군을 이끌고 요를 정벌했을 때, 그와 함께 사우면서 전략과 전술을 배웠다고 하니다. 제법 세력이 커지자 아예 ‘금’이라는 칭호를 쓰며 황제로 등극했다고 합니다.” “잘됐군요. 바로 그자예요. 아구다를 이용하는 거예요. 아구다를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신흥 제국이라면 강력한 힘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들을 이용해보기로 해요.” “그렇다면 금과 연합하여 요를 공격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에요.” “하지만 그건 나무 위험합니다. 금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대제국 요에 견줄수는 없습니다. 만약 요를 끝장낼 수 없다면, 호랑이의 콧털을 뽑는 것과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요가 전력을 다해 본국을 공격해온다면 지금의 재정 상태로는 몇 년 버티지도 못할 것이 자명합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 외에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또, 어떤 의미에서는 금이 너무 강하지 않다는 것도 이점이 있어요. 일단 금과 힘을 합쳐 요를 몰아내고, 그 다음에는 금을 격파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죠. 그러려면 금이 너무 강해선 안 되는 것이죠. 알겠어요?”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태상문주님.” “동관에게 전서구를 띄우세요. 채 재상에게 지시해서 비밀리에 금과 동맹을 맺으라고 말이에요 그리고 몽고쪽으로도 사람을 보내서 세력이 큰 부족들이 있으면 포섭하라고 하세요. 몽고, 금과 협공을 가한다면 요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예, 태상문주님.” “물론 이 일은비밀리에 행해야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려는 총관을 향해 옥화무제가 다급히 말했다. “잠깐!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혹시 비밀이 셀 우려도 있으니 이 모든 일은 구법당(舊法黨)에 맡기세요.” “예? 하지만 비밀을 유지하려면 채 재상이 이끌고 있는 신법당(新法黨)의 사람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대파에게 일을 밭기려고 하시다니 속하는 도대체 이해하기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구법당을 이루는 것은 사마광(司馬光)을 계승한 화북 지방의 대지주, 대상인 출신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정책도 매우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왕안석(王安石)을 계승한 신법당은 남방 출신의 지위가 낮은 자들이 많았다. 그런 만큼 그들은 진보적이고 혁신적이었기에 뒤에서 정치를 조종하고 있는 옥화무제의 입맛에는 신법당 쪽이 훨씬 더 잘 맞았다. 뭔가 정책의 변동이 크게 있어야 떨어지는 콩고물도 많은 법이니까 말이다. “호호홋. 아무리 신법당, 구법당 해서 싸우고 있지만 그들도 같은 한인(漢人)이에요. 오랑캐에게 빼앗긴 연운16주를 회복하자는데 당파를 따지겠어요? 아마 그들도 전폭적으로 협조할 거예요. 만약 협조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총관이 뒤처리를 하면 될 거 아니에요?” 이제야 대충 감이 잡힌다는 듯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에? 예.” “또, 그렇게 해놔야 만약에 일이 뒤틀렸을 때 뒤처리가 쉬워져요. 상처읍은 요의 황제를 달래려면 누군가가 속죄물이 되어줘야 할 테니까요. 물론 더불어서 반대 세력도 싹쓸이 해버리고 말이에요.” 총관은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흐흐, 지당히신 말씀이십니다. 태상문주님. 명하신 대로 동관에게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진팔에게 조령이 말했다. “여기서 식사를 하고 가는게 좋지 않을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래도 지금까지 지나온 음식점들 중에서 제일 낫잖아요.” 그 말에 진팔은 서두르던 걸음을 멈추고 마지못해 대꾸했다. “아니, 여기는 겉만 번지르르하지 음식 맛은 형편없어.” 지금까지 보아온 진팔의 행동으로 봤을 때, 그는 배고픈 것보다 이 곳을 빨리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점이 조령의 장난기를 발동시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령은 여기저기 보이는 모든 객잔과 객점을 가리키며 상대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형편없어요?” “물론이지. 정말 돼지나 먹을가..., 사람이 맨 정신으로 먹기는 힘들지.” 그녀는 멀리 보이는 다른 객잔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다면 저곳은요?” “저기도 마찬가지야. 어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육포나 씹어 먹자고 그게 제일이야.” “지금까지 그런 말로 지나온 객잔히 한두 개인줄 알아요? 저는 지금 배가 봅시 고프다구요. 아무리 맛이 없다고 해도 참고 먹을 수 있어요. 시장이 반찬이라고 하지 않아요?” “이 근처 객잔은 모두 그래. 예전에 내가 여기서 지내면사 다 가봤으니까 틀림없다니까 그러네. 자, 빨리 가자구.” 진팔은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그녀는 따라갈 마음이 없는 듯 가만히 서서 말해싿. “예, 알았어요. 그건 그렇고, 계속 이런 식으로 여행할 건가요?” “왜? 지금까지 오면서 그런대로 구경할 거리는 있었잖아.” “물론 그런대로 괜찮은 여해잉었어요. 하지만 저는 이런 여행이 아니라 무린이라는 것을 보고 싶다구요. 무림 말이에요.” 조룡의 말에 진풀은 조금 난처하다는 듯 대꾸했다. “무림이라..., 지금까지 봐온 모든 게 무림인데......” “진 형은 맨날 그 소리지만, 저는 좀 더 직접적인 걸 보고 싶다구요. 예를 들면, 유명한 문파를 구경한다든지..., 아니면 피 튀기는 비무 같은 거 말이에요.” “쩝..., 꼭 그런 거를 봐야 하겠어?” “예. 마침 이 근처에 문파가 하나 있다고 하던데요.” 조령의 말에 진팔의 안색이 굳어졌다. “남궁세가 말이군.” “예. 바로 그 남궁세가 말이에요. 나는 거기를 구경하고 싶어요.” “흐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남궁세가가 객점도 아니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아니거든. 그러니 빨리 가기나 하자구. 괜찮은 객잔을 찾아서 식사는 해야 할 것 아니냐?”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을 때,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이게 누구야~! 진형이 아니신가?” 진팔의 목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반사적으로 휙 돌아갔다. 그리고 조령의 올굴 또한...... 그곳에는 준수하게 생긴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의 허리에 매여 있는 화려한 장검과 그가 입고 있는 값비싸 보이는 비단옷이 그의 신분을 약간이나마 속삭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10여명의 무사가 뒤따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태양혈이 불끈 솟아 있는 고수들이었다. 그 중년인을 보자마자 진팔의 안색은 급격히 굳어졌다. 하지만 상대를 외면할 수는 없었는지 진팔은 정중히 포권하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남궁 형을 뵙는군요.” “오랜만일세.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안 보고 그냥 지나갈 생각이었나? 진형이 나를 그렇게 어렵게 생각했다니, 이거 섭섭하구먼.”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만으로 봤을 때는 서로가 아주 절친한 사이인 듯 싶었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기운은 뭔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조령은 그것을 재빨리 감지했다. 그녀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환경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줬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렇듯 드러나 보이지 않는 치열한 암투의 와중에서 살아왔다.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으로는 각자 딴마음을 먹고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그런 곳에서 말이다. 저 남궁 형이라는 자와 만날 가능성이 있기에 그렇게 길을 서둘렀던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조령은 갑자기 진팔에게 못할 짓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령은 가능한한 진팔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가만히 서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동행이 있어서......” 진팔이 눈짓으로 자신의 동행을 가리키자 상대는 한결 느긋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진 형의 친구면 내 친구이기도 한 것 아니겠나? 자, 소개나 좀 시켜주게.” 진팔의 얼굴이 무표정하기 그지없는 것을 보면 남궁 형이라는 사내와 그리 찬한 사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진팔이 아루런 말없이 가만히 서 있자 사내는 곧바로 조령에게 가볍게 포권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소. 나는 남궁세가에 적을 e고 있는 남궁길이라고 하오. 진 형의 친구는 나의 친구와 같으니 편히 대해주시기 바라오.” 조령도 마주 포권하며 인사를 갖췄다. “조령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개도 사람 봐가면서 짖는다고, 무림에서 미심쩍은 상대와의 통성명은 매우 중요했다. 괜한 후환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상대의 이름을 들은 후, 남궁길은 머리를 쥐어짜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조룡이라는 이름은 기억에 없었다. 하지만 조심해서 손해 볼 것은 않은가? “혹시 서문세가에 적을 두고 계신 혁련검(赫聯劍) 조풍(趙風) 대협을 아십니까?” 무림에 수많은 조씨가 있었지만, 남궁길이 건드려서 안 될 조씨는 조풍뿐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무림의 명숙이었고,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남궁세가를 등에 업고 있는 남궁길에게 결코 장애 요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남궁길이 그러하듯 조풍의 뒤에는 서문세가가 있었다. 서문세가는 현재 5대세가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과시하고 잇었다. 그런 그의 분노를 산다는 것은 아무리 남궁세가를 등에 업고 있다고 해도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하지만 조령은 이런 질문을 던진 상대의 속셈까지는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상대가 혹시 혁련검과 잘 알고 있는 사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실례되지 않도록 정중하게 말했다. “저는 력련검 대협의 존성대명(尊性大名)은 들어보았으나, 아직 인연이 없어 직접 뵙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남궁길은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호오, 그렇습니까?” 약간 이죽거리듯 대답한 후, 남궁길은 더 이상 조령에게 미련이 없다는 듯 진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듯 오랜만에 만났는데 길거리에서 인사나 하고 헤어질 수야 없지 않겠는가? 마침 본가가 멀지 않으니 며칠 묵으며 담소나 나누세. 오랜만에 벗을 만났는데 대취(大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궁길의 어투는 매우 은근하면서도 정겨웠지만 그것을 듣는 진팔의 안색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남궁 형의 제의는 너무나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지금 갈 길이 바빠서......” 하지만 진팔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남궁길의 뒤편에 서있는 무사들의 손이 장검의 손잠이가 있는 부분으로 슬그머니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재빨리 눈치챈 진팔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남궁 형이 부탁하시는데 뿌리치기가 어렵군요.” 남궁길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헛! 내 그럴 줄 알았다네. 내가 아끼던 좋은 술이 있으니 밤새 통쾌하게 마셔보세나.”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곁에서 봤다면 친한 친구 집에 술 마시러 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진팔 일행을 숙소에 안내해준 다음 남궁길은 콧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에게 나직하게 명령했다. “철저하게 감시해라.” “옛!” 남궁길은 내당 쪽으로 들어서며 경비 무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흑백 무림 회색 문파 전선에 배치된 자를 제외한 대송제국의 고위급 장군들이 모두 정군관(征軍官)에 집합했다. 정군관의 수장인 임청(任淸) 원수가 작전 회의차 고위급 무장(武將)들에게 소집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임청 원수는 며칠 전 추밀원(樞密院)으로부터 요를 격파하기 위한 새로운 작전을 하달받았던 것이다. 송의 군사 편제상으로 봤을 때, 추밀원은 군부를 대표하는 최고기관이었다. 하지만 치밀원의 경우 그 구성원이 전쟁과는 무관한 문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수림한 작전으로 전쟁을 벌이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랐다. 그렇기에 추밀원에서 대략적인 작전을 수립하여 정군관에 보내면, 정군관에 소속된 무관들이 세부적인 작전을 수림하게 되는 것이다. 즉 추밀원이 세우는 것이 군의 전략(戰略)이라면, 정군관은 그에 따른 전술(戰術)을 구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국가 전체의 군을 지휘하고 통제할 권한인 통수권이 문관들의 집합체인 추밀원에 있었기에, 무관들의 집합체인 정군관은 일종의 보조작전 기관일 뿐이었다. 20여 년 전 대요 전쟁이 참패로 끝난 이유도 송의 군사 편제가 가지는 모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전에 익숙한 장군들에게 통수권을 주지 않고, 문관들이 통수권을 쥐고 있으므로 해서 군위 효율적인 운용이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20여 년 전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벌어진 요와의 대회전에서 패배한 송은 수많은 우수한 장군을 잃어야만 했다. 요 정벌을 단행했던 진길영 원수와 마룡 대장군 등 수많은 장군이 애때 전사했다. 하지만 그런 참패를 당한 상태에서도 송이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워낙 땅덩어라가 컸던 이유도 있었지만, 중앙원수부의 수장이었던 이창해 원수의 공로가 컸다. 그는 패퇴하던 송군을 재편성하여 요의 진격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는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연운16주를 집어삼키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런 뛰어난 명장도 세월에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창해 원수가 물러난 후 군권을 이어받은 것이 임청 원수였다. 그는 진천왕의 반란을 제압한 일등공신이었고, 그 공로로 원수로 승진, 현재는 정군관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제장을 소집한 것은 요와의 전쟁계획 수립 때문이오.” “계획은 오래전에 세워 추밀원에 제출했지 않습니까?” “아아, 그것 때문에 제장을 소집한 것일세. 현재 수립된 작전은 방어적 성격으로 짜여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에 추밀원에서 좀더 공격적인 계획이 내려왔기에 제장을 소집한 것일세.” 좀 더 공격적인 계획이라는 말에 장군들의 눈에 약간의 기대감이 떠오른 것을 보며 임청 원수가 말을 이었다. “전에 제장과 한번 토의했던 사안인데, 바로 여진족을 끌어들이는 것 말일세.” “하지만 그것은 여진족의 힘이 너무나도 미약하기에 포기한 작전이 아닙니까?” “물론일세. 하지만 지금은 정세가 많이 바뀌었다네. 대추장 아구다의 세력이 요 근래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말이지. 바로 그를 이용하자는 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야. 요는 현재 본국와의 국경선에 60만 대병을 집결시켜 두고 있지 않나? 하지만 속국인 금이 요에 반기를 든다면, 어쩔 수 없을 거라 이 말이지. 요가 금을 정벌하는 데 신경쓰고 있는 그 틈을 이용해서 뒤통수를 친다면 큰 피해 없이 연운16주를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요를 멸망시킬 수도 있을 거라는 게 추밀원이 수립한 작전의 핵심일세.” 그 말에 악비(岳飛) 대장군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현재 어림군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북동원수부의 부원수들 중 한 명이었다. 북동원수부는 현재 요라는 가장 강력한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보유하고 있는 병력의 규모도 엄청났고, 또 가장 뛰어난 무장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악비 대장군도 그들 주의 하나였다. 훗날 정군관의 수장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최고의 장군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악비 대장군은 추밀원 문관들이 탁상공론해서 만든 작전에 뭐가 문제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원ㅅ, 그 작전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그 작전이 성공하려면 금이 요의 공격을 어느 정도 버텨줘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금의 군사력이 요와 대적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요의 군사력은 강대합니다. 국경에 배치된 60마 외에도 전투에 능한 수많은 장정이 있습니다. 그들을 소집하기만 해도 100만이 넘는 대군을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국력을 갖추고 잇씁니다. 옛날, 진길영원수고 요 정벌에 실패한 것도 그런 요의 저력을 등한시한 추밀원의 결정 때문이 아닙니까? 진천황의 반란이 아무리 위급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대요 정벌을 중단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요의 군대가 재편성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줬고, 결과적으로 참패로 연결되었습니다. 척박한 대지에서 성장한 거란족의 특성상 각 부족의 모든 장정이 전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한 할 것입니다.” 그 말에 임청 원수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악비(岳飛) 대장군, 귀관의 말도 맞네 . 하지만 거란족의 생활이 예전과 많이 바뀌었다는 점 또한 감안해야 할 걸세. 과거 거란족의 장정들은 척박한 대지에서 모딘 고생을 하며 커온 악귀들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란 말이지. 그들이 저 풍요로운 연운16주를 차지한지 벌써 20년이 흘렀다네. 게다가 본국에서 해마다 20만 냥의 은에다 20만 필의 비단을 주고 있지. 배에 기름기가 쌓이기 시작한 오랑캐 놈들이 예전처럼 강할 거라고 귀관은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원수. 그 점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임청 원수는 자애로운 미소를 악비 대장군에게 보내준 후, 장군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금이 독립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면 요의 황제는 정벌군을 파병할 거요 아마도 처음에는 10만 정도가 파병될 것이라고 본관은 추측하고 있소. 사실 그 정도만 해도 금을 멸하기에 충분하니까 말이오. “물론 본국에서 도와준다면 금은 요를 막아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금이 요의 대군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닐 수 있도록 도우려면 막대한 군수물자를 옮길 수 있는 보금로가 우선적으로 확보되어야만 합니다. 한두 명이 싸울 것도 아닌데, 그 많은 무기와 군량을 어떻게 금에다 지원해준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뇌 원수의 말도 옳다네. 본국과 금의 사이에는 요가 가로막고 있기에 육로로는 지원이 불가능하지. 하지만 해로를 이용한다면 가능하지 않겠나? 요가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기마 민족일세. 황해의 제해권을 잡고 있는 것은 본국과 고려란 말이네. 안 그런가?” 그 말에 뇌청 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고려를 통해서 금을 지원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걸세. 금이 요의 황제가 파병한 정별군을 격파해버린다면. 요는 금을 완전히 끝장내버리기 위해 사생결단을 내려고 할 것 아닌가? 그들로서는 코앞에 강대국 송이 있는데, 배후를 위험한 상태로 놔둘 수는 없을 테니 말일세. 그때를 이용해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다면 간단히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보네.” 그제야 이해를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뇌청 원수가 말했다. “고려를 글어들이는 것이 가장 큰 문제겠군요.” 단번에 핵심을 집어내는 뇌청 원수를 보며 임청 원수는 믿음직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교려는 20여 년 전, 강감찬 장군이 주축이 되어 남하해오는 요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때, 요가 입은 타격이 너무나도 컸기에 하마터면 그것이 요의 멺망으로 까지 연결될 뻔했다. 그 이후로 요는 고려를 소 닭보듯 아예 건드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고려는 땅덩어리가 작아서 뺏어봐야 남는 것도 없는 데다가, 군사락은 영토 크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강력한 편이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고려의 지형이어싿. 고려의 산세는 매우 험해서 평원에서의 기동전에 익숙한 거란조긍로서는 공격해 들어가기가 아주 까다로웠다. 그 덕분에 고려와 요는 20여 년간이나 평화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인데, 고려가 사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뇌 원수의 말이 맞네. 하지만 그것까지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군. 금을 설득하는 것이나 고려의 황제를 설득하는 것은 다 추밀원에서 알라서 할 테니까 말일세. 하지만 일단 그 둘을 설득하는데 성공만 한다면 일은 급작스러운 속도로 흘러가게 될 거야. 그대를 대비하여 준비는 어느 정도 해둬야 하지 않겠나? 본관이 제장을 소집한 것도 그 때문이라네. 자, 이제 그에 따른 세부적인 사항들을 의논해보세나.” 문주가 기거하는 내전으로 중년 사내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바로 이 건장한 중년인이 남궁세가의 총관이었다. “무림맹으로부터 긴급 전서(傳書)가 도착했습니다. 문주님” “긴급 전서라구요?” 문주는 중년인이 건네 서신을 펼쳐서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원래 전서구를 통해 도착했을때는 매우 얇고 작은 종이에 빽빽하게 암호로 적혀진 것이다. “드디어 마교가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까?” 남궁세가의 총관 남궁민은 문주의 사촌 형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문주기는 하지만 존장의 예를 표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남궁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옥화 봉공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정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큰일이로군요. 아무래도 장로회를 소집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남궁세가는 4명의 장로가 있고, 중요한 사안의 경우 구들의 승인을 얻어야만 했다. 이렇게 장로원의 입김이 강한 것은 가주가 아직 젊기 때문이었다. 남궁청은 겨우 3살 때 가주직에 올랐다. 그렇지만 어린애가 가주직을 수행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이유로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그의 어머니가 가주직을 대리했었다. 남궁청이 수련을 끝내고 연공실에서 나왔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여덟이었다. 그가 완전히 가주로서의 권한을 행세하기 시작한지 겨우 5년. 그렇기에 그는 아직까지도 장로원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장로님들을 소집하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교의 움직임에 대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없으니까요. 현 단계에서는 세가의 문인들에게, 바깥출입을 할 때 좀 더 주의하라는 당부만 하셔도 될 듯합니다.” 가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을 표했다. “그게 좋겠군요. 그리고 세력권 내에 혹시 수상한 점은 없는지 직접 좀 살펴주세요.” “알겠습니다, 가주.” 총관은 예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가주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돌아서는 총관을 급히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에? 무슨 일이십니까?” 가주는 지금까지 그 문제에 대해 고심해왔었던 듯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길이가 데려온 그들 말씀입니다. 그자들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요. 그건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천지문은 마교와 유일하게 협정을 맺은 문파입니다. 게다가 천지문의 세력권은 낙양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어슬렁거릴 수 있습니까?anjsrk 꿍꿍이속이 없고서야 머나먼 이곳까지 그놈들이 흘러들어올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rm 의문이 풀리지 않는 한 그놈들을 절대로 놔줘서는 안 됩니다.” 총관긔 말에 가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본가를 정탐하기 위해 온 놈들이라면 용서할 수가 없죠. 하지만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마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그놈들이 마교와 내통을 하고 있다면 조만간 꼬리가 밟히겠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마냥 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일단 며칠만더 그들을 관찰해본 후 결정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 요란하게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종소리를 듣자 그들은 경악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종은 비상시에만 울리게 되어 잇는 종이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경비무사 한 명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옛, 후원에 감금해놨던 그놈들이 탈출했습니다!” “탈출했다고?” “옛!”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들여야 한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척살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결코 증거를 남겨서는 안된다. 알겠느냐?” “옛!” 경비무사가 달려간 후, 총관은 가주에게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창궁십팔수(蒼穹十八手)를 출동시키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창궁십팔수라면 남궁세가 내에서 4번째로 강한 무력단체였다. 하지만 가주가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단체들 중에는 그것이 가장 강했다. 나머지는 장로원의 승인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흐음.......” 가주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겨우 다섯 놈을 잡아들이는 데, 창궁십팔수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노파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 중 단 한명이라도 탈출에 성공한다면 본가의 위신은 땅바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그들이 마교도와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하십시오.” 총관의 말에 가주는 이윽고 결단을 내렸는지 총관에게 지시했다. “좋습니다. 창궁십팔수의 동원을 허가하겠습니다. 반드시 그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이세요.” “옛!, 가주님.” “헉헉헉......”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는 진팔. 그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곳곳에 난 상처에는 피가 흘러 옷에 베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 여기저기에 얼룩진 피의 대부분은 그의 것이 아니라 남궁세가원들의 것이었다. 마냥 남궁세가에 갇혀 있을 수 없었던 진팔은 탈출을 생각했다. 다섯 중에서 한 명만 탈출에 성공해도, 정파를 표방하고 있는 남궁세가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탈출한 한명이 남궁세가가 사람들을 무단으로 억류했다는 사실을 퍼뜨릴 것이 분명하기 대문이다. 그래서 진팔은 혼자 탈출하려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놈의 조령이라는 계집이 문제였다. 함께 탈출하겠다고 떼를 써댔던 것이다. 물론 조령이 탈출에 참가한다면 그녀의 부하들 또한 함게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진팔이 앞장서서 길을 열고, 그 뒤를 무사 한 명이 받쳤다. 그리고 얼굴에 흉터가 있는 무사는 제일 뒤에서 따라오며 후방을 맡았다. 아무래도 그가 가장 믿을 만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팔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일행을 둘러봤다. 조령은 별로 큰상처가 없는 듯 했다. 아마도 두 무사가 철저하게 보호한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서 시녀는 별로 상태가 좋지 못했다. 탈출하는 도중에 남궁세가의 무사가 발출한 암기에 맞은 것이다. 진팔은 얼굴에 흉터 있는 무사에게 투박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상처를 치료할 줄 아시오?” 무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팔을 시녀를 엎어놓고 힘을 주어 등에 깊숙이 박혀 있는 암기를 끄집어냈다. 그런 다음 주머니에서 금창약 등을 꺼내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의학 지식이라고 해봐야 아주 간단한 것들뿐이었다. “젠장, 내가 이럴 갓 같아서 그냥 남아 있으라고 한 건데......” 상처 치료를 끝낸 후, 진팔은 조령에게 고개를 돌리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몸은 괜찮나?” 조령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걸로 탈출을 감행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꿈꾸던 무림이라는 것의 참모습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이야기로 들었을 때야 낭만적이고 멋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충분한 실력을 갖춘 자의 얘기다. 햇병아리들에게 있어서 무림은 결코 녹녹한 놀이터가 될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치열한 전장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자, 이제 출발하자. 이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우리들이 찰출한 이상, 그들은 우리를 억류했던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추격해올거야.” 조령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며 따지듯 물었다. “남궁세가라면 정파가 아닌가요? 그런데 왜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거죠?” “내가 말했잖아. 무림이라는 게 다 그렇다고 말이야.” “그럼, 그들이 왜 정파라고 불리는 거죠?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진팔은 초조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남궁세가의 추적자들이 어디서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출발하도록 하자. 가면서 얘기할 수도 있잖아.” 그 말에 조령이 자리를 톨고 얼어섰다. 그러자 얼굴에 흉터 있는 무사가 슬쩍 턱짓을 했고, 다른 무사가 시녀를 등에 업었다. 준비가 갖추어지자 그들은 다시 전력으로 경공술을 전개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경공술이 가장 떨어지는 것은 조령이었다. 그리고 무사, 얼굴에 흉터가 있는 무사는 그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났다. 진팔은 달려가며 조령에게 말해싿. “내가 여태껏 경험한 바에 의하면, 정파라는 것들은 대부분 겉으로는 광명정대한 척하면서도 뒤로는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더군. 특히, 문파의 이익이 관계된 것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지.” 조령은 이해간 간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던졌다. “아아, 그럼 진 형은 사파이신 모양이죠? 정파를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시는 걸 보면 말이에요.” 그 말에 진팔은 좀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그의 말투로 보면 뭔가 지독한 원한이라도 있는 듯했다. “사파라는 놈들은 아예 대놓고 나쁜 짓을 하는 쓰레기들이야. 특히 그중에서 가장 질이 나쁜 놈들이 마교 놈들이구.” 조령은 진팔의 출신이 아리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파도 욕하고 사파도 욕한다면 과연 어디에 적을 두고 있다는 거지? 조령은 무림인들만큼 패를 나누기 좋아하는 족속은 없다고 들었었다. 흑 아니면 백인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회색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한참을 달린 후, 그들은 다시금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신경써서 살펴봐도 추격하는 남궁세가의 무리가 없었다. 남궁세가에서 탈출하던 초기만 해도 수많은 남궁세가원이 벌Ep처럼 덤벼들었었다. 그 와중에 탈출에 성공한 것은 진팔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조령이 거느리고 있는 두 무사의 능력이 진팔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던 덕분이었다. “휴우..., 운 좋게 따돌리는 데 성공한 것 같소. 여기서 쉬면서 몸을 추스립시다.” 진팔과 흉터 있는 무사가 주위를 경비하는 가운데, 조령과 다른 무사는 운기조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냥 쉬고 있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회복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한 식경쯤 흘렀을까? 거의 인기척을 내지 않으며 한 명의 남궁세가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풀숲을 이리저리 살피며 흔적을 찾고 있었다. 진팔은 그가 지니고 있는 검의 수실이 붉은색이라는 것을 보자마자 시선을 재빨리 그의 옷깃으로 돌렸다. 그의 옷깃에는 독특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진팔은 무의식중에 욕지거리를 내뱉은 후 흉터있는 무사에게 살그머니 말했다. “빨리 달아날 준비를 하시오.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오.” 조령 ed이 운기조식에서 깨어나자마가 그들은 전속력으로 경공술을 전개하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에서는 날카로운 장소성(長嘯聲)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휘파람 소리에는 상당한 내력이 실려있었기에 그 소리는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진팔은 달리는 와중에 흉터 있는 무사에게 말했다.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오.” “젊던데..., 저자가 그렇게 강하오? 휘파람에 실린 내력으로 봐서 나와 비슷한 것 같은데?” “저자 혼자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저들은 혼자서 움직이지 않소. 당금 무림에서 창궁십팔수의 공격을 당해낼 수 있는 고수는 그리 흔치 않다오.” 천지문을 잊으셨습니까 묵향은 일단 무한(武漢)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마교로 가기 위해서는 송의 수도가 위치하고 있는 중경(中京), 그러니까 개봉을 통과하는 쪽이 도로의 여건도 좋을뿐더러 거리도 짧다. 하지만 그쪽 길은 서주(徐州), 정주(鄭州), 낙양(落陽) 등 대도시가 많기에, 안 그래도 구경하기 좋아하는 아르티어스와 함께 가기에는 별로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한까지 배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일단 배를 타기만 하면 빠르면서도 쾌적하게 무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르티어스를 신경쓸 필요 없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놈의 뱃멀미가 묵향의 발목을 잡았다. 그 때문에 구경할 게 별로 없는 한적한 시골길을 골라서 행로를 잡게 된 것이다. 그들이 한참 길을 가고 있는데, 앞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호기심이 인 아르티어스는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묵향 일행이 가보니, 그곳에는 20여 명의 검객이 3명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 중 남루한 옷을 입은 장한의 무공은 눈부신 것이었다. 그 혼자서 거의 대부분의 적을 상대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천천히 그를 몰아붙이며 힘을 빼고 있었다. 이른바 다수로 소수의 고수를 상대할 때 가장 유효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차륜전(車輪戰)이었다. 앞에서 힘껏 싸운 자들은 뒤로 빠지고 뒤에서 힘을 비축한 자들이 앞으로 나서서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식으로 장시난 공격을 당하면 결국은 공력이 고갈되어 항복할 수 밖에 없게 된는 것이다.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항복해라.” 진팔은 피에 젖은 몸을 힘겹게 추스르며 악을 썼다. “남궁세가의 개들아! 이러고도 네놈들이 정파임을 자부하느냐?” 물론 이 말은 창궁십팔수에게 한 말이 아니라, 저쪽에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3명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무림인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보고 들은 일을 저잣거리에 퍼뜨려주기만 한다면 이 곤경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있을 듯 싶었던 것이다. 또다시 창궁십팔수의 연합 공격이 가해졌다. 쌍방 간에 치열한 격투가 벌어졌지만, 아무래도 창궁십팔수 쪽에서는 아직까지도 이들을 생포하려는 마음이 강한지 결정적인 공격을 가해오지 않고 있었기에 쌍방 간에 균형이 이루어지고 잇었다. 하지만 그 균형도 머지 않아 문너졌다. 진팔의 두를 맡아주고 있던 흉터 있는 무사의 오른팔이 피보라를 일으키며 잘려나갔다. 무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멍한 시선으로 잘려나간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자신의 발치에 나뒹굴고 있는 오른팔. 아직도 손에는 묵직한 검의 꽉 쥐어져 있었다. 창궁십팔수 중 한 명이 돌진해 와 그 무사를 막 베려고 할 때, 진팔이 도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항복하겠소!” 진팔은 최후의 희망을 걸고 있는 행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지금 있었던 일을 주위에 소문만 내 준다면, 남궁세가의 마수에서 풀려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3명의 행인 하나하나에 소망을 담아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그는 말위에 앉아서 때분한 듯 하품을 하고 있는 청년을 보자마자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아무리 어렸을 때의 일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창궁십팔수 중에서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수장인 듯한 인물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려싿. 그만큼 한계 상황에서 보여준 진팔의 실력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초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저런 녀석이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놈의 동행이 없었다면 잡기 힘들었을거야......” 그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이들을 본가로 끌고가라.” “옛.” 지시를 받은 자는, 힘칫굳은 채 묵향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진팔을 거칠게 밀며 재촉했다. 방금 전까지 진팔의 엄청난 무위에 눌렸던 것이 그의 화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봐, 빨리빨리 걸이! 젠장! 쓸데업싱 탈출을 해서 일거리를 만들고 있어.” 수장의 명령은 계속되었다. “나머지는 나와 함께 천천히 되짚어가며 증거들을 없앤다. 단 하나라도 흔적이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예!” 그들은 시체를 등에 업기도 하고, 여기저기 무공을 사용한 흔적들을 없애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몇 개인가 땅에 떨어져 있는 병장기를 회수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주변의 상황이 정리된 후, 수장은 창궁십팔수 중의 한 명을 호명했다. “장진(張瑨)!” “옛!” 수장은 묵향 쪽을 턱짓으로 가리킨 후 차가운 어조로 지시했다. “절대 증거가 남아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묵향 일행의 앞에 선 후, 스르릉 검을 뽑으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들에게 죄가 없으나, 이 현장을 본 것은 재수가 없었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해주시구려.” 이렇게 말을 하면, 보통 사람들이라면 말을 타고 있으니 재빨리 도망티려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 복장을 보고 남궁세가의 인물인 것을 알고 있는 자라면 도주를 포기한 채 제발 목숨만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장진의 예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우선 나이든 노인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별 떨거지가 다 까부는군.” 그러더니 턱짓으로 장진을 쓱 가리키며 젊은 쪽에게 말했다. “얘야, 처리하거라.” 그 말에 젊은 쪽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뭐라구요? 아버지가 하세요.” “아냐. 너가 꼭 해야만 해.”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이유가 뭐예요?” “왜냐하면 나는 그 동남동녀들의 정혈을 빨아들인다는 흡성대법이 과연 어떤 것인지 너무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건든. 이 아비를 생각해서 구경좀 시켜주라. 나도 나중에 좀 써먹게 말이야.” 그 말에 젊은 쪽이 발끈해서 대꾸했다. “이런, 젠장! 그거 순 엉터리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이런 식으로 말다툼을 하기 시작하자, 황당해진 것은 검을 뽑아들고 서 있는 장진이었다. 처음에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줄기줄기 뻗쳐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렇듯 무시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더럽게 시끄러운 놈들이군. 오냐! 네놈들의 모가지가 떨어져나간 후에도 그놈의 주둥이르 나불댈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그는 경쾌한 속도로 몸을 날렸다. 캉! “허억!”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남궁세가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들 중의 하나였다. 아무리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가문의 비전인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을 사용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이렇듯 무력하게 튕겨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의 애검은 흡사 강철이라도 두들긴 듯 부러져 있었다. 그가 때린 것이 상대의 병장기도 아니고 머리통이었는데 말이다. 그는 뒤로 비칠비칠 물러서며 경악한 듯 부르짖었다. “이, 이게 뭐야?” 이 상황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수장이 주위에 흩어져 있는 창궁십팔수를 재빨리 불러모았다. 저들이 주고받던 대화 중에 ‘흡성대법’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그는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 청년의 대꾸로 보아 마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저런 해괴한 사술(邪術)을 익히고 잇는 것으로 보아 마교도임에 분명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래도 상대의 모습이 수상쩍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만 없었다면평범한 젊은이로 치부할 정도로, 그 어떤 무공을 익힌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반로환동(反老換童)한 마물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사술을 이용해서 그렇게 보이도록 위장하는 것인가?’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질문을 던졌다. 상대의 내력을 알 수 없기에 그의 어조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본인은 남궁세가에 적을 두고 있는 천풍검(天風劍) 곡추(曲抽)라고 하오. 귀하의 성함을 말해주시오.” “내 이름을 알 자격이나 있을까나?” 묵향의 삐딱하기 그지 얺는 반응에 곡추의 안색은 노기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구 성질을 부릴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게 문제였다. 뭔가 믿는게 있지 않고서야 저렇게 나올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귀하는 마교에 소속되어 있소?” 그 말에 묵향은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 세상에 마교라는 단체가 어디 있다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교라고 떠들어대는거지?” “그럼 뭐요? 소속을 밝히시오.” “이 몸은 마교가 아니라 천마신교(天摩神敎)에 적을 두고 계신 분이시다. 어때? 불만 있냐?” 마교도들은 절대로 자신들을 칭할 때 마교(魔敎)라고 칭하지 않는다. 천마신교라고 칭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면 진짜 마교도임에 분명했다. 곡추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단일 문파로서 가장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문파가 마교였다. 사파니 뭐니 하며 멸시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막강한 힘을 무시할 스는 없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에 상대방이 쓴 괴이한 사술까지 본 후가 아닌가? 그리고 곡추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강력한 힘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교도와 노닥 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 일대는 남궁세가의 영역임을 귀하도 잘 알 것이오. 하지만 이번만은 못 본 것으로 해줄 테니 빨리 가시오.” 곡추는 남궁세가의 체면을 슬쩍 세우면서, 상대에게 피해갈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역효과였다. “뭣이? 이번만은 못본 것으로 해주겠다고?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제발 가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도 시원찮은데, 그따위로 말해? 그래, 못 가겠다면 어쩔 건데?” “이런 건방진! 그렇게 나온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곡추는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소창궁무애검진(小蒼穹無涯檢陳)을 펼쳐라.” 곡추의 명령에 따라 곡추와 17명의 검수는 각자의 자리를 잡고 검진을 펼였다. 검진이 발동되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기에 마사코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는 이런식의 공격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당해봤던 것이다. 그리고 저쪽에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있는 진팔 일행도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 상태로 보아 도망가봐야 결과는 뻔했다. 그들로서는 저꼭에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이 창궁십팔수를 물리쳐주기만을 간절히 빌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한편 아르티어스 역시 그들과는 조금(?) 다른 입장이었지만 기대감어린 눈빛으로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소창궁무애검진은 대창궁무애검진과 함께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최고의 검진이었다. 그 둘은 하나의 뿌리에 근간을 두고 있었기에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그 자유성에 있었다. 소창궁무애검진은 소수이 강력한 고수에 의해 발돔됨으로 인해, 그 공격과 수비에 있어 개인에게 훨씬 더 많은 자유를 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변화의 폭이 훨씬 더 심했고,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운 진법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사방에서 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에도 묵향의 안색은 태평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본 후, 품속에서 동전들을 꺼냈다. 말안장에 묶어놓은 검까지 끄집어내기는 귀찮았기 때문이다. 왠만한 고수라면 진법과 마주쳤을 때 생문(生門)과 사문(死門) 등 그진의 특성을 집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생문은 그 진법이 지니고 있는 최대의 약점이다. 그곳을 공격해야만 진법을 깨뜨릴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멋모르고 사문을 공격한다면 진법을 필치고 있는 자들보다 몇 곱절 강한 실력을 지닌 고수라 해도 그곳에 뼈를 묻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이야기였고, 묵향의 역우 그들과 실력 차이가 나도 너무 나는 상황이었다. 묵향의 손에서 동전이 차례차례 던져지기 시작했다.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남궁세가가 자랑하던 검객들이 피를 뿜으려 바닥에 길게 드러눕기 시작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여기저기서 당황한 듯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떻게 되어가는지 이유를 알아채기도 전에 5명이 피를 흘리며 드러누웠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10명의 동료가 쓰러진 후에야, 그들은 동류들을 해치고 있는 자가 누군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만큼 묵향의 공격이 은밀했던 탓이다. 이제 검진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살려면 도망치든지,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돌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자, 검수들의 행동은 얀분되었다. 곡추의 명령에 따라 곡추와 5명이 돌진했지만, 나머지 둘은 그 명령을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면 간혹 배신자가 나오는 법이지. 그런데, 하나는 모르겠지만 둘은 좀 많군......” 묵향의 손에서 8개의 동전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돌진해 들어오던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묵향의 지척에도 이르지 못하고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그리고 도망치던 둘의 신세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게 흡성대법이야? 이게 뭐가 극악하다는 거야? 그냥 동전 몇 개 날린 것뿐이잖앗!” 기대감이 깨진 아르티어스가 괴성을 질러대건 말건, 묵향은 무시하고 말을 천천히 몰아 앞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추정되는 나이에 비했을 때, 제법 쓸 만한 경지에 오른 녀석이야. 생긴 것도 마음에 드는군. 모름지기 무인의 모습이 저 정도는......” 진팔 일행에게 다가서던 묵향의 눈빛이 묘하게 번쩍였다. 진팔의 체내에 쌓인 공력의 근원을 읽었기 때문이다. “태허무령심법?” 묵향은 진팔의 앞에 서서 그를 노려봤다. 진팔의 일행은 방금 전에 벌어졌던 사태에 거의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여기까지 쫓교ㅕ오며 창궁십팔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뼈저릴정도로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을 단 한순간에 전멸시키다니,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묵향은 잡아먹을 듯 진팔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가 아는 한 태허무령심법은 이미 무림에서 잊혀진 심법이었다. 그리고 묵향이 그것을 가르쳐준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게다가 그 사람들에게도 몸으로 직접 체득하도록 해줬지, 절대로 내공의 구결 따위를 알려준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누군가에게 심법을 전수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녀석은 그것을 배웠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익히고 있는 심법을 누구한테 배웠지?” 아직까지도 얼이 빠져 있는 진팔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묵향으 swnajr을 꽉 줘며 중얼거렸다. “어~쭈. 내 말을 무시해? 이게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상대의 기세가 험악해지자 조령이 재빨리 진팔의 앞을 가로막으며 애원했다. “저, 대협. 그러니까..., 그냥 말로 하시는게 좋지 않을까요? 폭력은 절대로 사절입니다.” 묵향은 가소롭다는 듯 조령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이죽거렸다. “꼴을 보아하니 폭력을 사절할 만도 하겠군.” 묵향의 말대로 조령의 꼴 도한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자신의 피, 남의 피 가릴 것 없이 서로 엉켜붙어 검붉은 얼룩을 형성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새, 거기에다가 군데군데 찢어진 옷. 그녀가 방금 전까지 얼마나 막심한 고생을 했는지 간단히 짐작할 수 있었다. “비켜라. 너 같은 꼬맹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원래 막말을 들었을 때, 상대가 어느 정도 만만한 상대라야 화가 나는 법이다. 묵향의 매서운 눈초리가 가해지자, 조령은 자신도 모르게 말 잘 듣는 멍멍이처럼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상대의 눈빛을 본 순간, 치가 떨릴 듯한 미지의 공포가 엄습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비켜서자, 그 공포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묵향이 그녀에게 가하고 있던 압력을 거둬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끽소리도 못하고 물러났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녀는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자신의 작태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것인가? 조령은 오히려 그 분노를 진팔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진팔을 툭 치면서 말했다. “이봐요.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저 사람이 그렇게 겁나는 거예요? 여태까지 강호의 고수랍시고 행세를 했잖아요. 고수 값을 좀 해보라구욧!” 조령이 옆에서 호통을 치자, 진팔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그의 공포심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것도 다 자신이 천지문의 제자였기에 얻을 수 있었던 정보였다. 바로, 마교와 유일하게 협정을 맺고 있는 천지문의. 상대는 이미 20여 년 전에 무림 최강이라는 공포스러운 칭호를 부여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괴물의 신경을 건드려서 득이 될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묵향이 짜증 어린 어조로 말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나? 근놈의 심법을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배웠느냐고 묻고 있잖아. 만약 거짓말을 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게 좋을 거다. 본좌는 거짓말하는 놈을 용서해줄 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거든.” 과연 그럴 것임에 틀림없었다. 저 많은 사람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안고 죽인 것을 보면 말이다. 그것도 저들과 무슨 원수를 진 것도 아니고 그냥 말 몇 마디 마음에 들지 않게 했다고 저 모양으로 만들어 보린 것이다.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경험이 교차되며, 진팔은 평생 단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짓을 하고야 말았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살 길이었으니까. 진팔은 넓죽 엎드려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며 정중하게 외쳤다. “천마신교의 지존이시여!” 그 말에 조령은 깜짝 놀랐다는 듯 진팔을 바라봤다. 여태껏 그와 함게 다니면서 대화를 할 때 이토록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존’이라니...... 그렇다면 저 사람이 마교의 교주라는 말인가? 조령의 시선은 급히 묵향에게로 되돌려졌다. 진팔의 말을 듣고 묵향은 깜짝 놀란 듯했지만, 곧이어 기특하다는 듯 싱글거리며 말했다. “너, 혹시 사파냐? 어느 문파야. 허, 그것참. 쫄따구 교육을 아주 제대로 시켰구먼. 나를 알아보다니 말이야.” “사파는 아닙니다.” 묵향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뭐냐?” “천지문을 잊으셨습니까?” “엇! 천지문이라고?” “그때 제게 그 망할 놈의 심법을 강제로 가르쳐주셨죠. 제가 그것 때문에 무슨 꼴을 당했는지 당신은 알기나 하십니까? 왜 바라지도 않은 그런 일을 해서 저를 괴롭히시는 겁니까? 물론, 교주님 같으신 분들은 장난 삼아 돌을 던지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돌에 맞는 사람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보신 적은 있으신 겁니까?” 말을 하다 보니 울분이 치솟아서 진팔은 마지막에는 거의 절규하듯 외쳤다. 무림에서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따져봐야 목숨만 잃기 십상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며 당한 일이 나머두 억울했기에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원래 이런 식으로 말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묵향의 안색은 헬쑥해져싿. 물론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데, 설마 그 꼬마가 저렇게 성장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묵향은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그 꼬마였냐? 이런, 내 정신좀 보게나. 내가 가르쳐주고도 잊어버리다니,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묵향은 뒤쪽에서 흥미진진하게 구경중인 아르티어스를 향해 외쳤다. “아버지, 빨리 이리 와봐요.” 묵향의 말에 진팔 일행은 화들짝 놀랐다. 도대체 마교 교주가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자가 있단 말인가? 아르티어스가 마지못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자 묵향은 다짜고짜로 말했다. “저기 있는 저 팔 있죠? 저녀석한테 붙여주세요. 그리고 상처 치료도 좀 해주고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내가 왜 해줘야 하는데?” “아들의 부탁이니까요. 만약 들어줄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실 거라면, 호된 경험을 하시게 될지도 몰라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투덜거렸다. “쩝..., 팔 하나 없어도 밥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는데, 귀찮게시리......”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사와 시녀의 시체 옆에 놓여 있는 팔을 주워들었다. “야, 너 이리와봐.”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아르티어스가 부르자 그의 언행을 지켜보고 있던 무사는 그야말로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무사에게 있어서 팔을 잃는 다는 것은 거이ㅡ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치료하라고 하니까 ‘귀찮다’느니 뭐라느니 하며 이죽거리고 있으니, 무사의 성질이 팍팍 치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조령도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한 듯 무사에게 명령했다. 사실 동재로 잘려나간 팔을 다시 붙인다는 것은 그녀가 생각하기에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불구자가 된 자신의 수하를 놀리고 있다고 단정했던 것이다. “그 따위 팔 없어도 상관없잖아. 가지 마!” 하지만 무사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더러워도, 치사해도, 팔을 붙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마교의 교주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비실비실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갔다. “이자식이! 오라면 빨랑빨랑 와야 할 거 아냐! 너, 다리까지 병신이 되고 싶어! 엉?” 아르티어스는 잘린 팔을 원래 있던 자리에 붙인 다음 주문을 외웠다. 푸르스름한 광채가 상처에서 흘러나왔다가 사라졌을 때, 무사의 눈은 화등잔만해져 있었다. 자신의 팔이 원상태로 되돌아왔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느 같은 오른판을 되돌려준 상대에게 무릎을 꿇고 성심껏 절을 올렸다. 만약 자신에게 주군이 없었다면 평생 상대의 종이 되겠다는 의식까지도 치렀을 것이다. 그만큼 무인인 그에게 있어서 오른팔은 소중한 것이었다. 그 외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괴이한 사술을 익혀 잘려진 자신의 팔을 붙일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풍문은 간혹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남의 팔을 붙이다니...... 도대체가 전설로라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괴이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진팔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있을 때 묵향이 슬그머니 다가와 은근슬쩍 진팔에게 말을 걸었다. 그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친절을 베푼 이유가 바로 이것을 위한 포석이었다. 묵향은 친지문에 있는 수양딸의 안부가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진양 문주는 잘 있냐?” 진팔의 아르티어스의 행동에 경악한 상태였기에 묵향의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질문한 인물이 누군가? 없는 기억이라도 짜내야 했다. “예......? 예. 지금은 은퇴하셔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계십니다.” “호, 너무 빨리 은퇴하는군. 그 망할 놈의 할망구는 아직까지도 일선에서 뛰는 모양이던데. 그래, 천지문에는 별일 없느냐?” 그래도 협정을 맺은 문파라고 신경을 조금은 써주는군. 하지만 천지문의 문주가 바뀐게 얼마나 오래전의 일인데 그런 것도 모르는 것을 보면 마교는 천지문 따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라고 진팔은 생각했다. “아직 이렇다 할 큰일은 없습니다.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르지만요.” “하하핫, 앞으로 벌어질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 필요하겠느냐. 그건 그렇고, 진양 문주가 키운 제자가 몇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변을 당한 사람은 없냐?”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나 당황해하면서도, 진팔은 아는 대로 성심껏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그런데 대사형과 둘째사형은 따로 문파를 세워 독립하셨기에, 그 속사정까지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제가 듣기로는 잘해나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없단 말이지. 허허헛.” 진팔의 말을 토대로 유추해보면, 자신의 수양딸은 천지문에서 잘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하고 웃음을 터뜨리던 묵향의 뇌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가 오래전 자신을 해치기 위해 들어왔던 자객 흑월야사(黑月夜死) 전룡(全龍)에게 자신의 수양딸을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임무는 3개월을 기한으로 한 것이었다. “설마, 흑월야사가 내가 없는 동안 계속......?” “네......?” “아, 아니야. 너는 알 필요 없는 일이다.” 수양딸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자 묵향은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이녀석은 딸과 같은 문파에 소속된 제자가 아닌가? 묵향은 진팔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본 후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옷이 이게 뭐냐? 대천지문의 제자가 그런 꼴알 하고 다니면 안 되지.” 묵향은 품속에서 집히는 대로 전표 몇 장을 끄집어내어 진팔에게 줬다. 저 옛날, 이 인물에게 걸려 끔찍한 경험을 한 진팔이다. 그는 주는 대로 받았다. 안받는다고 하면 기필고 받게 만들고야 만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받고 나서 보니 전표의 액수가 예상보다 훨씬 컷따. ‘헉! 은자 100냥?’ “저..., 이건......” “왜? 너무 적냐?” 다시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묵향을 향해, 진팔은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니요. 은자 100냥이라니! 이건..., 너무 많습니다.!” “아냐, 그따위 푼돈 가지고 신경쓰지 말거라. 그건 그렇고, 저 소저하고는 일행인 모야이지? 소개나 시켜주거라.” 원래가 주인이 예뻐 보이면, 그가 기르는 개가 설혹 잡견이라 해도 예쁘게 보이는 법이다. “예, 제 동료인 조룡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쩍은 그녀의 호위무사입니다. 그리고 저쪽은......” 진팔은 더 이상 소개할 수 가 없었다. 나머지 인물들은 시체가 되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신기한 듯 마교의 교주와 진팔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조령도 그제야 수하들이 죽었음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부하들의 주검에 비틀비틀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신이 이번 유람(遊覽)을 결심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꼴을 당했을 리 없는 그들이었다. 조령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눈물을 떨구었다. 오해의 시작 묵향과 진팔 일행이 자리를 뜬 후, 직금까지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자들이 꿈틀거리며 신음성을 흘리기 시작했다. 천풍검 곡추 또한 수하들과 다르지 않았다. 동전이 그의 몸을 꿰뚫었을 때 엄청난 충격파가 그의 온몸을 뒤흔들었다. 게다가 호신지기(護身之氣)가 순간적으로 붕괴되며 몸 전체에 흩뿌린 충격의 여파또한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동전에 꿰뚫리는 순간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기절해버렸던 것이다. “으으윽!” 온몸의 뼈마디가 안아픈 곳이 없었다.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수하들 외에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곧장 자신의 상처를 살펴봤다. 뭐가 몸속을 뚫고 왔다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깨끗한 관통상이었다. 그것도 처명적인 사혈(死穴)에서 정확히 1촌 위. ‘우연인가? 아니면 인정을 베푼 것인가?’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수하들의 상처를 봤을 때, 흠칫 몸이 굳을 수 밖에 없었다. 똑같은 위치에 가해진 똑같은 상처. djEJgrp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천풍검 곡추의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정도 고수를 상대로 못 본 것으로 해주겠다느니, 빨리 가라느니 하며 까불었으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과도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곡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마교가 자랑하는 악마적인 암기, 천마구뢰(天摩九雷)라면 못할 것도 없겠지. 그렇다면 장로급이 먼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마교가 자랑하는 전설적인 무기를 마도십병이라고 한다. 마도십병은 다양한 무기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그 우열을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무기도 강력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주인들도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었다. 마교 교주와 9대 장로가 그 주인들이었던 것이다. 이때, 장진이 비틀비틀 다가와서 보고를 올렸다. “2명이 죽었지만 그 외에는 그런대로 무사합니다.” 천풍검이 고개를 돌리니, 시체들은 모두 적이 있던 방향과 반대 방향을 보고 길게 누워 있었다. 최후의 돌격 때 도망치던 놈들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시체의 상흔을 살펴봤다. 그들의 몸에도 암기에 의해 관통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자신이 입은 상처보다 정확히 1촌 밑. 사혈을 관통당한 것이 그들이 죽은 원인이었다. 천풍검 곡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배신자들에게까지 인정을 베풀 필요는 없다는 말인가? 나는 오늘 진정한 무인을 만났구나.” 그는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자, 시신을 수습하고 빨리 본가로 돌아가자.” “옛.” 조령은 객점에 들러 따뜻한 음식과 술을 앞에 두고 보니 마교 교주라는 작자한테 너무나도 무시당했던 것에 대해 뒤늦게 울분이 치소슨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분풀이를 한다는 말인가? 다시 돌아가서 그 당사자에게 하는 것이 원칙에는 맞겠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내일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을 가능성이 전무했다. 그렇다면 제일 만만한 상대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조령은 생존 본능이 강하다는 점 말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진팔을 향해 이죽거렸다. “그렇게 안 봤는데, 아부하는 실력 하나만큼은 타고난 것 같더군요.” 연거푸 술 몇 잔을 들이킨 후, 그 다음부터는 천천히 하시고 있던 진팔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그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거야.” 조령은 뽀족한 어조로 쫑알거렸다. “나도 다 안다구요. 우리들을 그렇게도 괴롭혔던 남궁세가의 그 창궁뭐라는 검대를 순식간에 쓰러뜨리는 것을 보면......” 그때가 생각나는 지 조령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사실 교주가 목숨을 건져주고 치료까지 해줬으니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은 셈인데, 전혀 고마움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한잔 쭉 들이킨 후, 진팔이 말했다. “그자는 성격이 아주 이상해. 한마디로 지랄 같지.” “지랄 같다구요?” 눈을 동그랗게 드고 자신을 바라보는 조령을 향해 진팔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하고야 말지. 그때, 상대의 의견은 철저하게 무시되지. 그게 지랄 같다는 거야.” 그말에 조령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전혀 고마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와 상관이 있는 것 같았다. 진팔은 과거 자신과 묵향의 만남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조령의 눈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건 진 형에게 있어서 엄청난 복이 아닌가요? 무림인들이 말하는 기연을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 말에 진팔은 신경질을 버럭 내며 소리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무공이 강해졌다는 것은 인정해. 하지만 그 때문에 나는 지금 본문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떠도는 신게가 됐어. 그리고 본문의 경우도 그 빌어먹을 마교와 협정을 맺은 덕분에 완전히 박쥐 신세로 전락했지. 정파에도, 사파에도 끼지 못하고 떠도는 박쥐 말이야! 알겠어?” 그 말에 조령은 언젠가 정사(正邪)에 대해 물었을 때, 진팔이 양쪽을 다 씹었던 것을 기억했다. ‘맞아. 그 때문에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무림에서 회색이 존재했던 거였군.’ 울분이 치솟는지 술 몇 잔을 연거푸 들이킨 후 진팔이 중얼거렸다. “그와 만났을 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아부를 하는 것이 장수에 보탬이 되지.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주는 것이 좋아. 안 그러면 그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걸 꼭 해내고야 마니까 말이야. 사실, 그렇게 강한 고수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이 아니겠어? 휴~, 그러고 보면 나는 정말 어렸을 때부터 이놈의 무림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던 것이군.“ 진팔은 잠시 뭔가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조령에게 물었다. “혹시 암흑마제라는 명호를 들어본 적 있어?” 요 근래에 들어서야 무림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조령으로서는 알도리가 없었다. 조령이 고개를 살래살래 가로젓는 것을 보고, 진팔은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너의 그 무지 덕분에 위기를 한 차례 넘겼는지도 모르겠군.” 무지라는 말에 조령이 살짝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따졌다. “그거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물론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야. 그가 한참 활동하던 때의 마교는 엄청난 위세를 떨치고 있었지. 그런 만큼 마교 부교주였던 그가 활동할 일은 거의 없었어. 그러다 보니 그는 아주 굵지굵직한 일에만 모습을 드러냈지. 물론 비밀스럽게, 조용히 말이야. 그래서 그가 왕성한 활동을하고 있을 때, 그에게는 명호가 없었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암흑마제는 뭐예요?” “그가 무림에서 모습을 감춘 후, 남을 씹기 좋아하는 쓰레기들이 퍼뜨린 거지. 그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강한 걸까? 그리고 그 지랄 같은 성격, 그와 맞대면해서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을 정도의 잔인한 손속. 이 모든 게 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암흑마제라는 명호야. 결코 좋은 뜻이 아니지. 그의 앞에서 결코 암흑마제라는 말을 하지마. 그냥 천마신교의 지존이나 아니면 교주님이나 뭐 그런 식의 호칭은 상관없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그 한마디에 지옥을 경험할 수도 있어. 알았어?” “알겠어요.” 순순히 대답은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양이 안 찼는지 조령은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명호 한마디에 그 정도 반응이 나올까요?” “그가 암흑마제에 얽힌 무림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면 당연히 그럴걸? 암흑마제는 그야말로 최악의 악당을 지칭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어떤 소문인데요?” “그가 익힌 무공이 왜 그렇게 강한지에 대한 별의별 중상모략이라고 봐야 하겠지. 채음보양부터 시작해서, 흡성대법을 통한 정혈 갈취, 수많은 시체를 이용한 시독(屍毒) 흡수, 내공에 있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각종 엽기적인 내공 흡수법. 그 소문들의 대부분이 막강한 그의 내공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지를 말하는 거야. 왜냐하면 그런 편법을 쓰지 안하고서야 그 젊은 나이게 그렇게도 막강한 내공을 쌓는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거지.” “젊은 나이라구요? 하기야..., 젊기는 되게 젊더군요. 어쩌면 장 형보다도 더, 어? 아까 말했을 때, 장형이 어렸을 때 그를 봤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그의 나이는 어느 정도란 말이죠?” “무림의 고수는 겉에 드러난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지. 현재 추정하기로는 100살 전후야. 정확한 나이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야.” “100살이라구요? 세상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조령이 다시금 말을 꺼냈다. “그런데, 교주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그 노인 말이에요. 그분이 마교의 태상교주인가요?” “아니, 태상교주는 따로 있어. 독수마제(毒手魔帝) 한석영(韓夕英)이지. 나도 얼굴은 본 적은 없지만,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는 소문을 통해 알고 있어. 그는 결코 태상교주는 아니었어. 일단 무엇보다 너무늙었잖아. 그 정도라면 고수라면 겉모습이 아주 젊어야 정상이지. 거기에다가 독수마제의 아들은 따로 있어. 그가 부교주일대 교주였던 흑마대제(黑魔大帝) 한중길(韓中吉)이라는 사람이지.” “혹시 일부러 겉모습을 그렇게 꾸미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요? 한순간에 팔을 붙이는거 봤잖아요. 무림의 고수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럴까?”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조령의 말이 그럴 듯 했기에, 진팔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뭣이 놓쳤다고?” 보고를 접한 가주의 안색은 보고를 듣기 전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천풍검 곡추는 알고 있었다. 가주가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고 있음을 말이다. 곧이어 가주의 눈가에 경련이 일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가주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잠시 급한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오겠네.” “예, 가주님.” 잠시후, 가주의 목소리가 옆방에서 새어나왔다. 그 속에는 ‘병신 같은놈’부터 시작해서 가지각색의 육듀문자가 총 망라되어 있었다. 가주는 열이 뻗쳐서 도저히 참기 어려울 때, 옆에 마련해놓은 밀실을 애용했다. 밀실은 방음 시설이 매우 잘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얼마나 고함을 질러댔는지 그 소리가 밖에까지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태사의 옆에 서 있던 총관은 곡추를 볼 면목이 없는 지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실내를 둘러보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가주는 매우 폭급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경질이 날 때마다 수하들에게 욕설을 내뱉는다면 명문세가의 가주로서 품위가 떨어지지 않겠는가. 게다가 남궁세가의 경우 그 특성상 수하들 중에 친족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족보상으로 봤을때 가주보다 항렬이 높은 가신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욕설을 퍼부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회의실 옆에 만들어놓은 밀실인 것이다. 잠시 후, 가주는 개운한 얼굴로 밀실에서 나와 태사의에 앉으며 곡추에게 물었다. “왜 놓쳤나? 설마, 진팔이 녀석의 무공이 그렇게 높았나? 그렇지 않다면 진팔이 동행의 실력이?” “물론 진팔의 능력이 상상 이상으로 높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속하사 실패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가주.” “그렇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마교도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가주는 이제야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마교도? 호오, 마교도가 나타나서 그들을 구출해갔단 말이지? 그렇다면 천지문이 마교와 모종의 밀월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겠군.” “그게 아닙니다, 문주님.” “그렇다면 뭔가?” “저..., 그게......” 잠시 망설이던 곡추는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무리 마교도라고 하지만 그는 진정한 무인이었다. 아예 보고를 안했으면 안했지, 거짓을 입에 올려 사건을 왜곡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곡추의 보고를 들은 가주는 아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마교도와 진팔이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군.” “예, 속하가 고수를 몰라본 죄입니다.” 가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여기까지 마교도가 어슬렁댄다는 것이 왠지 찝찝하군. 안 그래도 무림맹에서 마교가 활동을 개시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라서 그런지 더욱 그래.” 가주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국초를 향해 말했다. “수고했네. 듣고 보니 자네의 잘못도 아니구만. 누구를 보냈다고 해도 상대가 마교도인 이상 그런식으로 말했을 게 분명하거든. 다만 상대를 잘못 만난거지. 자, 빨리 가서 치료를 받고 몸을 추스르게” “옛!” 곡추가 나가고 난 후 가주는 총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장로회를 소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속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궁세가의 밀실에서 장로 회의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회의가 끝난 후, 남궁세가에서 가장 강력한 고수 4명이 은밀하게 세가를 벗어났다. 그리고 수십 마리의 전서구가 사방을 향해 날아올랐다. 무영신마 장영길 무림맹은 긴급히 장로회를 소집했다. 남궁세가에서 긴급한 결정을 요구하는 정보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무량수불, 남궁세가에서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마교의 잘로급 한명이 동료 둘과 함께 무림에 나왔다고 하오.” 맹주의 말에 장로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맹주는 손을 들어 좌중을 조용하게 만든 후 말을 이었다. “무량수불, 그는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창궁십팔수를 순식간에 제압했다고 하오. 천풍검의 증언으로 유추해봤을 때, 아무래도 그 마교도의 무기는 천마구뢰인 듯하다는 개방(?幇))의 보고서가 올라와 있소이다.” “천마구뢰라구요? 천마구뢰라면 무영신마(無影身魔) 장영길(張影吉) 이 교주에게 하사받은 마도십병이 아닙니까?” 이때,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장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허리에는 7개의 매듭이 지어져 있는 허리끈이 매어져 있었다. 개방도의 경우 바로 이 매듭의 수로 자신의 직위를 표시한다. 7개의 매듭이니 장로급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공식적인 자리아 아니라면 매듭 진 허리끈을 차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정보로 먹고사는 개방인 만큼 허리끈을 차서 자신들의 정체를 노출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본방에 보관된 자료에 따르면 그렇소이다. 물론 마교 내에서 또 다른 지각변동이 있었다면, 그 주인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자, 또 다른 장로가 입을 열었다. “무영신마라면 마교 서열 12위로서 자성만마대(紫星萬魔隊)를 책임지는 고수외다. 그런 엄청난 직위를 가진 장로가 겨우 동행 둘만 거느리고 무림을 활보할 리가 없소.” 개방 출신 장로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무영신마로 추정되는 인물이 안휘성에 나타난 것은 틀림없소이다. 하지만 본방의 지도부에서는 그게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소이다. 어쩌면, 마교는 우리가 무영신마를 잡자고 주력 고수들을 움직이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여기까지 말한 개방 출신의 장로는 맹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맹주님, 이것이 마교가 파놓은 함정일 가능성도 고려해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무림맹주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공수개 장로님의 의견 외에 또 다른 의견을 지니신 분은 없소이까?” “이것이 함정이든 아니든 무영신마는 반드시 척살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교에서 멀리 떨어진 안휘성에서 활보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마교가 아무리 잔꾀를 부렸다손 치더라도 파고들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량수불, 또 다른 의견은 없으시오?” 또 다른 장로가 자신의 의견을 발표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일단 본맹의 주력 고수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대기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렇다고 무영신마를 그냥 놔둘 수도 dqjt는 노릇이니, 그 처리는 안휘성 주변의 문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공수개 장로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는 거싱 좋겠습니다. 무영신마와 호위 몇 명을 척살하는데 맹의 상승 고수들을 파견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안휘성 근방에 포진한 모든 분타의 고수들을 동원하고, 주위 문파들에 도움을 청한다면 충분히 그를 척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지금 소주에는 패력검제(覇力劍帝) 대협이 내려와 있습니다. 그분을 이 일에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맹에서 고수를 파견할 필요조차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맹주는 아주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패력검제라면 화경에 이른 고수다. 극마에도 미치지 못하는 마교의 장로 정도는 그 혼자서도 충분히 처치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무량수불, 그 의견이 가장 옳은 듯 싶소이다.” 맹주는 장로들을 둘러보며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각 파에 도움을 청하는 전서구를 띄우시오. 무영신마의 척살을 명하는 바이오.” 총관은 옥화무제의 집무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문주가 자리를 비운 지금, 모든 중요한 문제는 태상문주인 옥화무제가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에서 재미있는 정보가 날아왔습니다.” 옥화무제는 궁금하다는 듯 총관에게 물었다. “무슨 정본데 그러나요?” “옛, 이것을......” 옥화무제는 총관이 건네는 서류를 훑어본 후 놀랍다는 듯 말했다. “사실인가요?” “어느 정도 사실인 모양입니다. 본문에 보관 중이던 천마구뢰에 대한자료와 천풍검의 증언이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정확도, 그리고 악마적인 살상력, 속하의 소견으로 천마구뢰가 등장한 것이 틀림없다고 사료됩니다. 본문의 자료가 틀림없다면 천마구뢰의 주인은 무영신마가 아니겠습니까? 무영신마라면 마교 서열 12위의 절대 고수입니다. 그를 없애려고 한다면 이쪽도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옥화무제는 감탄사를 터뜨리며 말했다. “호오, 놀랍군요. 무영신마가 수행원 몇만 거느리고 무림에 나오다니 말이에요. 간이 배 밖에 나오지 않고서야......”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옥화무제가 총관에게 예리한 시선을 던지며 질문을 던졌다. “무림맹의 반응은 어떤가요?” “물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그를 척살하기로 의견을 모은 모양입니다. 이런 기회는 흔히 오는 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잠시 궁리를 하던 옥화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총관에게 지시했다. “좋아요. 본문의 고수들을 파견하세요. 단, 그와의 정면 충돌은 안됩니다. 멀리서 그의 동태를 파악하여 무림맹에 알려주는 정도로만 하세요. 괜히 본문이 피를 흘릴 이유는 없으니까요.”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태상문주님.” “단, 본문이 무림맹에 전폭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줘야 해요. 알겠어요? 이번 일이 잘 마무리 된다면, 본문은 더욱 맹주의 신임을 얻을 수 있게 될 거예요. 게다가 이번 작전에 참가했던 모든 문파를 통해 소문까지 퍼진다면.......” 옥화무제는 슬그머니 뒷말을 흐렸지만, 그것도 못 알아들을 총관이 아니었다. 그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수하들에게 철저히 주지시켜 놓겠습니다.” 총관은 예를 갖춘 후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옥화무제가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예? 또 하명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옥화무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있군요.” 무엇을 놓치고 있다는 것인가? 총관은 어리둥절해서 반문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갑자기 무영신마가 자성만마대도 거느리지 않고 마교를 벗어났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가 왜 움직였는지, 그리고 혹시 자성만마대가 비밀리에 마교를 벗어난 것은 아닌지 철저하게 조사해보세요. 어쩌면 무림맹의 이목을 그쪽에 집중하게 해놓고, 뭔가 딴 노림수가 있을지도 몰라요.” “옛! 명심하겠습니다.” 옥화무제의 지시를 받고 밖으로 나서며 총관은 자신을 질책했다. 어떻게 그런 간단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단 말인가? 눈앞에 드러난 대어를 잡을 궁리만 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 정도 대어를 미끼로 던져줄 정도라면, 정작 마교가 노리는 것은 더욱 큰 것일 게 뻔한 이치가 아닌가? 도대체 어떤 놈이야 중원 천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꼽으라면 단연 소주(蘇州)가 그 수위를 차지한다. 태호변에 자리잡은 소주는 도시 전체가 운하로 이루어져 있어, 아주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소주에서도 유명한 주루인 태진루. 지금 이곳에선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들의 모임이라는 7룡4봉에 들어가는 젊은이 몇이 경치를 감상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7룡4봉도 처음에는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가장 뛰어난 소수의 후기지수를 칭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또한 공식적인 단체도 아니었기에, 그 어떤 구속력도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7룡4봉도 조금씩 변모했다. 자의건 타의건 간에 하나의 단체에 소속되면 아무래도 서로 간에 조금씩이라도 유대관계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보니 ‘도대체 저놈은 어떤 이유로 7룡4봉에 이름이 올랐지?’ 하는 마음에 서로 만나보고 싶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다가 친분이 깊어지면, 그 우정이 먼 훗날까지도 연견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게다가 과거 7룡4봉에 들어갔었던 선배들의 후광도 맛볼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7룡4봉은 세월이 흐르면서 무림 최고의 사교 단체로 자리잡고 있었다.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7룡중 하나인 매화검(梅花劍) 옥대진(玉大振)이었다. 그의 증조부는 전임 무림맹주인 옥청학, 할아버지는 무림맹의 장로 옥진호였다. 그렇다 보니, 강호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흥미있는 비사들을 남들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두 명의 미녀였다. 4봉에 속해 있는 그녀들은 옥대진의 인솔로 이곳 소주에 유람차 온 것이었다. 물론, 이들 중 한 명을 꼬셔보려는 옥대진의 음흉스런 마음도 함께 작용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한참 얘기를 진행하던 옥대진은 황급히 주루에 들어서는 청년을 바라보고는 중얼거렸다. “허참,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하더니...... 저 친구가 바로 폭풍검(暴風劍) 서량(徐粱) 소협입니다.” 그와 동석하고 있던 미녀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훤칠한 키에 당당한 체구, 그리고 명문의 자제답게 교양이 배여 있는 절도 있는 몸놀림. 서량은 약간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포권하며 사과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역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 제일 늦게 나타나는군. 그래, 패력검제 대협께서는 평안하신가? 자네도 먼 소주까지 내려와서 고생이 많구만.” 제령문(制令門)은 산서성에 둥지를 틀고 있었지만, 요가 침입해오는 통에 터전을 잃고 남하했다. 그리하여 지금은 임시로 소주에 자리를 잡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낮선 곳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옥대진이 그런 인사를 건넨 것이다. 서량은 이미 옥대진과는 어느 정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에게 정중히 포건하며 화답했다. “예, 감사합니다, 형님. 물론 아버님께서는 잘 계십니다.” “이쪽은 초씨세가의 초미(礎美) 소저, 그리고 이쪽은 화산파의 능비화(凌?花) 소저일세.” 옥대진의 소개에 따라 서로간에 인사를 교환했다. 하지만 서량은 자리에 앉지 않고 정중히 사죄했다. “이런 귀중한 자리에 소생을 불러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소생은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려고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옥대진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허~참, 멀리서ㅓ 오신 귀한 손님들을 앞에 두고 할 말이 아니구먼. 천하의 제령문에 무슨 그런 급한 일이 있다는 말인가? 무슨 일인지 말이나 좀 해보게. 우리 모두 7룡4봉에 꼽힌 형제들이 아닌가? 급한 일이 있다면 도와야지.” 제령문은 문도 수는 작지만 대단히 힘 있는 문파였다. 강호상의 그 누구도 제령문을 깔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화경의 고수를 셋이나 배출한 최고의 명문이었던 것이다. 서량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그의 말투는 아주 정중했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도우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께서 직접 나서실 테니까요.” “문주님께서 직접?” 그 말에 모두들 경악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령문의 문주는 패력검제 서진(徐振)이었다. 패력검제라는 명호가 말을 해주듯 그는 화경의 고수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화경의 고수가 직접 움직인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나?” “오늘 아침에 무림맹에서 첩지가 날아왔습니다. 마교의 장로가 남궁세가 인근에 나타났다고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그를 척살하기위해 군웅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도 거기에 동참하시겠다고 하셔서......” 패력검제는 사파라면 자다가도 이빨을 갈 정도로 사파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오늘 아침 무림맹으로부터 첩지가 날아든 것이다. 마교서열 12위 무영신마가 안휘성 근처에 나타났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 패력검제였다. 해서 그는 다른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본인 스스로 무영신마를 치기 위해 몸소 길을 나선 것이다. 서량의 얘기를 들으며 가만히 생각을 굴리던 옥대진이 서량을 향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야 할 게 아니겠는가?” 패력검제의 그 패도적인 무공을 견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또, 그와 동행한다면 자신들이 검을 들 일도 없을 게 뻔했다. 옥대진과 동행하고 있는 4봉의 경우, 무림 명가의 여식들이기는 했지만 무공이 고강한 편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7룡4봉의 가입조건이 무공 수위와는 무관하다는 점도 일정 작용했다. 그런 상황에서 엄청난 고수와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혜택이 되는 것이다. 옥대진의 제안에 그녀들도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4봉은 말이 4봉이지 행동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모두들 명문가의 여식들인 만큼 수행원 없이 외출할 생각은 감히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이런 엄청난 사건을 직접 견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어찌 찬성하지 않겠는가? 모두들 도움을 빙자한 부탁을 하는데, 그것을 거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진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사양할 도리가 없군요.” 그 말에 옥대진과 두 미녀는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풍검 곡추가 요양하고 있는 장소에 남궁세가의 총관이 다급히 달려 들어왔다. “총관 어르신, 어쩐 일이십니까?” 곡추의 물음에 총관은 다급히 말했다. “아, 자네한테 물어볼 것이 있어서 들렀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와 싸워다는 마인이 이자가 맞는가?” 총관이 건넨 종이에는 왠 인물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곡추는 초상화를 대충 훑어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던지 곧장 대답했다. “이자가 아닙니다.” 그 말에 총관은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뭐라고? 좀 더 자세히 보라구. 그자가 바로 무영신마네. 마도십병중의 하나인 천마구뢰의 주인이지. 자네는 그자가 사용한 암기가 천마구뢰일지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곡추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 마인의 얼굴은 그의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초상화의 인물은 결코 그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그자는 저와 싸웠던 마인이 아닙니다.” “이런 제기랄. 그럼 어떻게 한다? 그렇지. 내가 화공을 보내주겠네. 자네 수하들도 모두 불러들여서 초상화를 그려보게. 그걸 무영문에 보내면 누군지 바로 알수 있겠지.” “예, 알겠습니다.” 당부를 끝낸 총관은 화공을 부르러 달려가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모두들 무영신마를 잡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판국인데, 그가 아니라니....... 그럼 도대체 어떤 놈이야?” “그런데, 너 혹시 약 먹었냐?” 아르티어스의 물음에 묵향은 짐짓 딴청을 부려댔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아니, 그러지 않고서야 도저히 네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잖아. 미쳤다고 보기에는 눈빛이 너무 생생하고......” “뭐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저 쓰레기들을 따라다닌게 지금 며칠째냐?” 말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르티어스는 손짓으로 저 아래쪽 계곡을 가리켰다. 마사코는 아르티어스가 손짓한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하지만 저 먼 지평선까지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대체 뭘 가지고 저러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묵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에이, 그거 때문이었어요? 그놈들이 좀 앞서가고 있는 거지, 절대 따라가는 거 아니에요.” “헷! 며칠째 계속 이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게 우연이라고 우기는 거냐? 감히 나를 속이려고 들다니.” 아무리 해도 아르티어슬ㄹ 속일 수 없다고 느낀 묵향은 오히려 될대로 되라는 듯 배짱 있게 나갔다. “좋아요. 따라가고 있어요 됐어요?”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실토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야 실토하기 시작하는군. 그래, 왜 따라가는 거냐?” “천지문은 본교와 아주 인연이 깊은 문파죠. 그들이 위험을 당하고 있는데, 그냥 놔둘 수는 없잖아요. 안전한 곳에 다다를 때까지만이라도 뒤를 봐주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그의 의문은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거야!” “뭐가요?” “바로 그거라니까. 여태까지 네가 해온 행동들을 생각해봐라. 이게 비정상이라는 거야. 그딴 놈들 죽든지 살든지 그냥 내버려두면 끝날 일인데, 왜 이렇게 신경를 써주는 거야?”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팔이 놈은 딸의 사제였다. 아마도 그놈이 죽으면 딸아이가 슬퍼할 게 뻔했다. 묵향은 그것이 싫었던 것이다. “에잇, 그만두자구요. 며칠 있으면 끝날 건데, 쓸데없이 아버지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 얘기는 그만두고, 식사나 하는게 어때요?” 그 말에 단순하기 그지없는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안색이 환해졌다. 이곳에서 먹은 음식이 꽤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저쪽에 있는 객잔이 괜찮을 듯하구나. 풍겨나오는 냄새가 그럴듯하거든.” 아르티어스의 말에 마사코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객점은 일행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풍겨나오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단 말인가? 하긴, 가만히 생각해보니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저건 사람이 아니라 황금빛 나는 괴물인데...... 아르티어스가 점소이에게 주문을 하고 있을 때, 옆 탁자에 앉아 있던 장한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술 몇 병을 시켜놓고 담소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이보게, 봉황이 나타났다는 말 들었나?” “아, 물론이지. 황금빛 찬란한 봉황이 나타났다고 하더군. 봉황이라면 상서로운 동물 아닌가? 그걸 보면 이제 좀 살기 좋아지려나......” 객잔에 오가는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묵향에게 물었다. “도대체 봉황이라는게 뭐냐?” 묵향은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했다. 전설상의 영물다위는 믿지도 않았기에. “저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봉황이라는 새는 아주 좋은 일어난단는 것을 상징하죠. 무지갯빛을 띠고 있다고 들었는데...... 뭐, 전설에나 나오는 소리들이니까 믿거나 말거나죠. 세상이 어수선할 때가 되면 꼭 어떤 놈이 봉황을 봤다느니, 뭐 그런 식으로 헛소문을 퍼뜨린단 말이에요.” 묵향의 얘기를 들을 장한이 벌떡 일어서서는 묵향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뭔가 모욕이라도 당한 듯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그는 묵향 등이 앉아 있는 탁자를 쾅 내리치며 으르렁 거렸다. “아니,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헛소문을 유포한다고 했을 뿐이오.” 장한은 커다랗게 콧김을 뿜어내더니 악을 써댔다. “헛소문? 이런 빌어먹을 놈을 봤나. 내가 직접 봤단 말이다.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봤다고 증언하는데, 감히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묵향도 장한에 못지않은 커다란 콧김을 뿜어내며 말했다. “흥. 그래, 그놈의 잘난 영물을 어디서 봤소?” “태호(太湖) 근처에서 봤다. 저 멀리 황해 바다에서부터 날아왔으니, 그 인근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본거지. 지금 소주나 항주 일대에는 봉황을 봤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야.” “태호? 태호라고? 으하하핫!” 묵향은 배꼼이 빠져라 웃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가 날아가는 모습을 밑에서 보면 아마도 봉황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황금빛 봉황으로...... 사실 봉황이라는 것을 본 사람이 없으니,아무거나 거대한게 날아가기만 한다면 봉황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어쨌건, 그의 비행하는 모습을 봉황으로 착각했다는 것이 묵향으로서는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이봐, 간만에 재미있는 얘글 했으니 내 용서해주마. 빨리 가서 술이나 마셔.” 으드드득! 장한은 이빨을 갈더니, 곧장 주먹을 날려왔다. 하지만 묵향은 가볍게 주먹을 나꿔챘다. 손목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을 가하자 장한의 얼굴이 점점 더 붉게 달아올라싿. “이제 장난은 그만 치고 술이나 마시지?” 한순간 장한의 손목에 가해지던 힘이 사라졌다. 묵향이 풀어줬던것이다. 장한은 떨리는 음성으로 다급히 말해싿. 그의 얼굴에는 이미 짙은 공포가 어려 있었다. “하, 하늘을 몰라 뵙고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이, 인정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한은 물러나자마자 일행과 함께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객점에서 도망쳐버렸다. 괜히 무림인들을 건드렸다가 경을 칠 수도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을 향해 장난끼 어린 어조로 말했다. “이런 너절한 놈들과 놀지 말고, 어서 봉황이나 잡으러 가자. 응? 영물이라고 하니까 뭔가 좋은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말에 묵향의 표정은 묘하게 변했다. 묵향은 아르티어스를 향해 비비 꼬인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호오, 저보고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라는 말씀이세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놀랍다는 듯 대꾸했다. “뭐? 드, 드래곤? 설마, 여기도 내 동족이 살고 있단 말이냐?” “아뇨. 저자들이 말하는 봉황을 잡는다면..., 어쩌면 저는 부친 살해의 죄를 저지를 패륜아가 될지도 모르는데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그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달았다. 그놈의 봉황이라는 것이 자신을 뜻한다는 것을 말이다. “제, 젠장.” 투덜거리는 아르티어스를 뒤로하고 묵향은 창밖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거리에는 어쩐 일인지 거지들이 떼거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물론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것이 이상한건 아니다. 문제는 거지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매우 맑고 깊다는 데 있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개방의 거지들이다. “저..., 아버지.” 아르티어스는 점소이가 가지고 온 오리 다리를 신나게 뜯고 있다가 대꾸했다. “왜 그러냐?” “잠시 화장실좀 갔다 올게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빌어먹을! 그런 일은 그냥 슬그머니 갔다 와. 음식 맛 떨어지게 말하지 말고.” 묵향은 객점 밖으로 나서며 중얼거렸다. ‘거지들을 족치는 것은 오랜만이군. 역시 정보 획득에는 개방의 떨거지들을 조지는 것이 최고지. 흐흐흐흐.“ 묵향은 음흉스런 미소를 흘리며 어딘가로 바삐 걸어가는 개방도들을 따라가싿. 방금 전에 일어난 참상을 이야기해주듯 현장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3명의 거지가 길게 뻗어 있었고, 나머지 거지들은 공포에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은 오줌까지 지렸는지 아랫도리가 축축한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길래? “짜식들, 빨리빨리 털어놓을 일이지. 개기기는.......” 묵향은 손을 탈탈 털면서 이죽거렸다. 개방의 하급 요원들이라서 그런지 족쳐봐야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역시 느긋하게 주리를 틀려면 분타주급은 되어야 제 맛이 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옥과도 같은 정보가 술술 튀어나오는게, 고문하는 재미가 있다고나 할까? ‘분타주를 찾아서 족쳐볼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만으로도 꽤 쓸 만한 정보를 획득한 셈이다. 묵향은 객점으로 돌아가며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방금 전에 개방도들에게서 뺏은 것이었다. “사내답게 잘생겼군. 이놈 얼굴 보는 것도 오랜만인걸?” 장인걸을 제압한 후, 그의 수하였던 무영신마 장열길을 받아들일 때가 생각났다.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하고 묵향이 물었을 때, 장영길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의 표정에는 결코 비굴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장인걸 교주를 향한 의리는 충분히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대답이야 어떻든 간에, 묵향은 장영길의 사내다운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그의 목숨을 살려줬다. 사실, 장인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고수들의 대부분이 그때 처형당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사후처우는 파격적이기까지 했었다. 왜냐하면 묵향은 그의 능력을 높이사서 자성만마대를 맡겼었기 때문이다. “클클클, 아마 그때 무영신마 녀석, 속으로는 식은땀 깨나 흘렸을 거야. 제법 마음에 드는 놈이라서 자성만마대를 맡긴 것이었는데, 그놈이 왜 무림에 튀어나온 거지?” 묵향이 객잔에 돌아왔을 Ei, 아르티어스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이빨에 고기가 끼었는지 이쑤시개를 쑤셔대며 말했다. “꺼억! 이쪽 음식은 정말 마음에 드는군.” “정말이세요? 잘됐네요.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좀 더 돌아다녀야 될 것 같으니까요.” 드러나는 정체 개방은 무림맹이 진행 중인 무영신마 추살 작전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다.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정보 단체 개방. 하지만 개방은 거지로 이뤄진 단체였기에 타 문파와는 다른 독특함이 있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허름한 관제묘(關帝廟). 원래는 삼국지의 영웅들 중 한 명인 관우 장군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었지만, 현재는 거지 떼의 본거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관제묘는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문짝은 떨어져나가고 지붕의 일부는 무너져 안에까지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지붕 틈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봄볕을 바등며 끄덕끄덕 졸고 있던 늙은 거지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후, 품속에 손을 넣어 벅벅 긁으며 일어섰다. “젠장, 이놈의 이는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군.” 온몸을 벅벅 긁던 늙은 거지는 괜제묘의 한쪽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좀 어둡기는 했지만 그곳에는 낮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거지 몇이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잠시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늙은 거지는 문짝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햇볕이 잘 드는 뜰에 삼삼오오 사이 좋게 모여서 이를 잡고 있는 거지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혹시 연락 온 것 없었냐?” “아직 없습니다.” “젠장,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로군. 도대체 어디로 숨어버린 거지?” 이때, 밖에서 거지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타주님, 큰일났습니다!” 큰일이라는 말에 늙은 거지의 눈빛이 불타듯 빛났다. 방금 전의 나태하기 그지없던 늙은 거지가 맞는 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무슨 일이냐?” “취풍개(醉風?) 일행이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분타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고?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누가 무슨 목적으로 우리 거지를 습격했단 말이냐?” “그놈은 갑자기 나타나서 단번에 형제들을 제압했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취풍개라면 꽤나 무공이 뛰어난데, 어찌 그렇게 가볍게 제압을 댕했다는 말이냐? 그리고 그를 따라간 형제들의 수가 10여명인데......” “어쨌건 일순간에 제압했다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고수인 모양입니다. 그는 형제들을 붙잡고 차마 입에 올리기도 거북할 만큼 지독한 고문을 가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좀 이상합니다.” “뭔데 그러느냐?” “왜 이근처에서 얼쩡거리느냐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대답을 안 하면 자근자근 짓밟았다고.......” 도무지 짐작조차 안 간다는 듯 분타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가려운 곳을 찾아 몸을 북북 긁어대고 있었다. “거참 이상하군. 고문을 하려면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그래, 어떤 정보에 그가 가장 관심을 보였다고 하더냐?” “예, 무영신마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형제들이 지니고 있던 그의 초상화까지 뺏어갔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분타주는 손바닥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옳거니. 그렇다면 놈이 원했던 정보는 처음부터 그것일 가능성이 크겠어. 나머지는 연막이겠지. 그건 그렇고, 그런 무지막지한 놈을 피해서 용하게 살아서 나온 형제가 있었던 모양이군.” 거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예? 죽은 자는 하나도 없는데요? 몇 명이 의원에 실려갈 만큼 엉망이 되기는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거지의 대답에 분타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뭐야? 단 한명도 죽지 않았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거지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워낙 순식간에 제압을 당하다 보니, 사상자가 있을 수가 없었죠. 반항하며 치고받아야 누가 다치든지 죽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의원에 실려간 형제들은 정보를 누설하지 않기 위해 버티다가 그렇게 됐답니다. 그리고 그놈은 모질게 고문해서 알아낼 것은 다 알아낸 후에 홀연히 사라져버렸다고 하더군요.” 거지의 말에 분타주는 인상을 찡그리며 한동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요상하네. 고문을 한 후에 왜 죽이지 않았지? 보통 뒷감당이 두려워 살인멸구를 하는 것이 정석인데 말씀이야.” 이리저리 생각을 정리하던 분타주는 이윽고 뭔가 떠올랐는지 버럭소리쳤다. “그놈이 감히 개방을 우습게 보고 그냥 살려둔 건가? 뒷감당 따위는 겁나지도 않는다고?” 분타주는 곧이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일부러 흔적을 남겨 우리의 이목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인지도 몰라. 에잇, 젠장.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구먼.” 원래 분타주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로 내뱉는 경우가 많았기에, 거지는 분타주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한동안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분타주는 갑자기 먼가 떠올랐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멀쩡한 놈들은 고문당하는 게 무서워서 나불나불 다실토했다는 소리 아냐? 멀쩡한 놈들 타 튀어오라고 그래! 내 오늘 고문이 무서운지 내 몽둥이 찜질이 무서운지 단단히 가르쳐줘야겠다. 썩을 놈들!” 그 말에 보고를 올리던 거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분타주의 그 난폭하기 그지없는 성정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거지는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이놈들. 그냥 고문 좀 당하고 의원에 실려갈 것이지...... 분타주 성격상 반쯤 죽여놓을 텐데..., 젠장! 한동안 골병 든 놈들 뒤치다꺼리하려면 허리가 휘겠군.” 남궁세가에서 협조 공문과 함께 날아온 초상화는 무영문에 소속된 하급 무사들의 손을 떠돌다가, 이윽고 총관에게로까지 올라왔다. “무슨 일이냐?” “남궁세가에서 보내온 초상화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빨리 파악해달라는 것이었는데, 도무지 알아낼 방법이 없어서......” 수하의 말에 총관은 짜증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차상화 한 장만 가지고 그게 누군지 알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지금 그 따위를 조사할 시간이 어디 있나? 마교의 장로를 척살하는 일만 해도 일손이 딸리는데......” “남궁세가에서는 이자가 마교의 장로라고 주장하고 잇습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속하가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긴 했지만 도무지......” 총관은 신경질적으로 초상화를 뺏어들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빨리빨리 가져와야 할 것 아닌가? 마교의 고수들만 조사해보면 곧바로 알 수 있는데 말이야.” 그러자 수하는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변명을 늘어놨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보시면 아시다시피 그 어떤 장로의 초상화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젠장, 또 새로운 고수인가? 어쟀거나 마교 놈들, 워낙 보안이 철저해서, 상층부 고수들의 얼굴은 거의 알려진게 없으니......” 총관은 투덜거리며 초상화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이어 초상화를 쥐고 있는 총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인물을...... 초상화를 움켜쥔 총관은 곧장 옥화무제에게 달려갔다. 그가 얼마나 다급하게 뛰어들었는지, 옥화무제가 그의 경망스러움을 탓할 정도였다. 하지만 chdrhksdmldOrl를 듣자 그녀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뭣이라고?” 옥화무제는 총관의 손에 들린 초상화를 뺏듯이 잡아들어싿. 그런 다음 종이를 쫙 펴니 드러나는 얼굴. 세부 묘사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했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틀림이 없었다. 옥화무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총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는게 좋겠습니까? 이 일을 당장 남궁세가와 무림맹에 통보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옥화무제는 편두통이라고 시작되는지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잠, 잠시만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에요.” 말을 마친 옥화무제는 마음이 심란한지 실내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회한 그녀였기에 곧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왜 이 인물이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말인가? 여태껏 20여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너무나도 조용하게 지냈다. 그게 오히려 그녀르르 더욱 불안하게 만들곤 했어싿. 그가 그렇게 조용히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무림에 20여년 동안 그 모습을 보이지 않자 강호에는 죽었을 거라는 둥, 생사경을 깨닫기 위해 무공 수련을 한다는 둥 구구한 억측이 나돌았다. 어쩌면 그녀도 그런 식으로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정신 건강상 더욱 이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는 마교 교주가 새로이 선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기다림의 세월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제야 촐도하는 것인가? 그럼 그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설마, 생사경의 벽을 깬 것은 아니겠지?” 자신의 생각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는지, 옥화무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생사경이라는 것 자체가 호사가들이 만든 헛소리야.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옥화무제는 갑자기 총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차가운 어조로 지시했다. “당분간 이 사실은 총관 혼자만 알고 있으세요.” 총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그건 어떤 연유에서 그러시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쩌면 그가 가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그리고 만약 그가 진짜라 할지라도 이번 기회에 그의 실력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지 않겠어요?” 총관은 당황스러운 듯 대꾸했다. “하,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 잘못되면 정파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태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상대는 탈마의 고수입니다. 겨우 마교의 장로급을 처치하기 위해 동원한 무림맹의 고수들로는 상대도 안 될 겁니다.” 옥화무제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과거에도 그는 그렇게 대량 학살을 저지르며 다니던 사람은 아니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그의 행동은 정당했죠. 그걸 믿는 거예요. 가짜라면 천라지마에서 살아나올 수 없을 것이고, 진짜라면 무분별한 살행을 저지르지는 않을 테니까요.” 총관은 감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사실 어떻게 되더라도 무영문에는 피해가 없지 않은가. 무림맹으로서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은 무영문의 입지가 무림맹 내에서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기회에 마교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을 수 있으니 금상첨화라고 총관은 생각한 것이다. “오, 그렇게 깊은 뜻이 있으셨다니......” 하지만 옥화무제가 총관에게 말하지 않은 가능성이 하나 더 있었다. 2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묵향의 성격이 혹 변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일부 고수 가운데 폐관 수련 중에 인간성이 완전히 바뀌는 경우가 간혹 있어싿. 정통 무공을 익힌 정파의 고수들 중에도 간혹 그런 경우가 발생하는데, 패도적인 마공을 익힌 마교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는가. 만에 하나 만약 그가 잔혹한 성격으로 바뀌었다면 아마도 무림은 피에 잠기게 될 것이 뻔했다. 그는 충분히 그럴 능력과 세력이 있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질리는지 가만히 고개를 흔들던 옥화무제는 총관을 바라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지시했다. “아무래도 내가 안휘성 분타로 직접 가보는 거싱 좋겠군요., 여기서 보고를 듣고 판단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요하니까요.” 확실히 시시각각 변해가는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는 데 안휘성 분타의 총단과의 거리는 너무도 큰 방해 요소였다. 그렇기에 총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런데 호위는 어느 정도 규모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잠시 궁리하던 옥화무제는 마음을 정했는지 총관에게 입을 열었다. “그와 사울 게 아니니 호위는 필요 없고, 가만 있자..., 부문주는 어디 있죠?” “아마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좋아요.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지금 당장 이쪽으로 오라고 전해주세요.” “옛. 그럼 속하는 물러가겠습니다.” 무림 고수 안휘성 집결 “사형과 함께 왔으면 좋았을 것을......” 말을 타고 앞서나가던 패력검제가 중얼거리자, 그의 아들인 폭풍검 서량이 의아한 듯 질문을 던졌다. “마교의 장로기는 하지만, 수행원도 몇 없다고 하는데 사숙의 힘을 빌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나중에 이 일을 아시게 되면 부리나케 달여오셔서 노화를 터뜨리시지 않겠는냐? 그래서 출발하기 전에 사형께 연락을 넣어두기는 했다. 하지만 긴급을 요하는 일이라 그렇게만 처리해놓고 바로 출발한 것이다. 사형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다가, 오랜만에 나온 먹음직한 놈을 남에게 뺏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말을 마친 패력검제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패력검제는 중년의 호위 무사 들을 대동한 채 아들과 함께 앞서나갔고, 그 뒤로 멀찍어 떨어져서 7룡 4봉의 젊은이들이 따라싿. 아직 햇병아리들인 그들이 함께 말을 달리기에는 패력검제의 위상이 너무도 높았던 까닭이다. 화경의 고수와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이 그들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화경의 고수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거려지기도 했지만, 화경은 무예를 익히는 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닌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내뱉는 말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따라가며 앞에서 오가는 얘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문득 초미가 옆을 바라보며 살포시 입을 열었다. “제령문주님의 사형이 누구신지요?” 그러자 옥대진은 자신이 무림의 정세에 해박하다는 사실을 과시하려는 듯 그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했다. “아, 초 소저께서는 강호에 대해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분은 고혼일검(孤魂一劍) 여민(呂敏) 대협이시죠.” 고혼일검은 대단히 유명한 검객이었다. 그는 병사했다고 알려진 뇌전검황(雷電劍皇)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그렇기에 모두들 그가 문주직을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는 문주직을 그의 사제인 서진에게 양보했다. 그것 때문에 세간에서는 뇌전검황과 상당수의 고수가 사망한 원인이 돌림병이 아닌 뭔가 다른 이유일 거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제령문은 돌림병 탓이라고만 할 뿐, 입을 꽉 다물고 있으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어째되었건, 문주직을 양보하고 문을 나온 여민의 행적은 괴이하기 그지 없었다. 강호를 떠돌며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사파의 씨를 말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보고 강호에서는 제령문에서 일어난 일이 혹시 사파하고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잠시 떠돌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파의 손에 변을 당했다고 하기에는 뇌전검황의 명성이 너무나도 높았기에 그 소문은 곧 사그라들었다. 여민은 아주 뛰어난 검술을 지닌 절정 고수였기에, 모두들 대협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파 인물들에게 가하는 손속이 너무나도 잔인했기에, 정파에 적을 둔 무인들조차 그를 멀리하고 있었다. 대협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혈향(血香)이 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말에 초미는 놀랍다는 듯 물었다. 사실, 그런 혈귀와 제령문주가 동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 그 분이 제령문주님의 사형이셨어요?” “잠시만요.” 옥대진은 슬그머니 말고삐를 잡아당겨 앞쪽과의 거리를 한층 늘려잡았다. 그러자 그녀들도 곧 뭔가를 눈치챈 듯 그에 맞추어 슬그머니 뒤로 처졌다. 옥대진은 앞쪽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오래전 제령문에 돌림병이 돌아 많은 고수가 죽었다는 소문 들어보셨습니까?” 그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능비화가 끼어들었다. “예, 들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 문주셨던 뇌전검황님을 비롯해 많은 제령문의 고수가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제가 들은 소문으로는 그게 돌림병이 아니라 마교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마교가 처들어와서 그토록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죠. 지금도 제령문의 모든 식솔이 사파나 마교라는 얘기만 나와도 이를 갈 정도로 그들을 증오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게 소문만은 아닌 모양이더군요.” “그런 소문도 있었단 말인가요?” “예. 대신 제령문쪽에서도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듯하니, 그걸 비밀에 붙인 것이겠지요.” 이때, 멀리서 장소설이 들려왔다. 상당히 내공이 실린 휘파람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자, 모두들 그쪽으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경공을 전개하며 접근해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리기 위해 일부러 장소성을 낸 것이다. 그것을 보면 적대적인 목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상대가 가까이 접근해오자, 초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접금해 오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봤기 때문이다. 장소성을 날리며 다가온 자는 일행의 곁에 멈춰선 후, 패력검제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패력검제 대협.” 그러자 패력검제는 마주 포권하며 환하게 웃었다. “오, 어서오십시오, 일진검(一鎭劍) 대협.” 그 말을 듣자 패력검제와 동행하고 있던 모든 사람이 일진검 초우(礎雨)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젊었을 때 강호행을 하며 가문을 숨기기 우해 검을 이용했다. 그 때문에 도(刀)로 유명한 초씨세가의 가주 명호가 일진검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는 명호와는 달리 거대한 도를 등에 지고 있었다. 모두들 인사를 나눈 후, 패력검제가 초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시는 길이십니까/” “예. 그게 제 여식을 만나려고 말입니다.” 그 말에 패력검제의 시선이 초미에게로 돌려졌다. 그녀의 아버지가 급히 따라온 이유야 뻔한 것 아니겠는가? 그녀는 울상을 해가지고 초우에게 말했다. “아빠, 제발......” 초우는 그녀의 주위를 둘러봤다. 척 보아도 출중한 기량을 가지고 있는 듯한 젊은이가 둘씩이나 보였다. 그들을 보자 가출한 딸을 데리러 온 초우의 마음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결혼할 나이에 다다른 딸을 가진 부모의 심정은 똑같을 것이다. 어디, 파락호 같은 놈팽이 놈들하고 어울려 다니는 것도 아니고, 명문의 자제들하고 어울리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믿음직스럽기 그지 없는 패력검제마저 곁에 있으니 더욱 마음이 놓이는 초우였다. ‘딸아이의 강호 초출 기회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군.’ 초우는 딸아이를 손짓해서 불러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간 후, 음흉스런 표정을 지으며 전음으로 말했다. <혹시 저 중에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있는게냐?> 그 말에 초미는 발끈해서 큰 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아빠는 저를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패력검제 대협께서 마두이 목을 베는 것을 구경하고 싶었을 뿐이라구요!” 초우는 저쪽에 서 있는 패력검제 일행을 힐끔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어 딸에게 말했다. “그, 그러냐? 어흠...... 좋다. 나도 함께 가기로 하지. 대신 자유시간은 충분히 줄테니까 둘 중 하나를 한번 선택해봐라. 둘 다 뛰어난 녀석이기는 하지만, 아비인 내 의견을 물어본다면 나는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왼쪽보다는 오른쪽에 서 있는 녀석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그러면서 초우가 지목한 것은 폭풍검 서량이었다. 초미는 얼굴을 붉히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아빳!” 하지만 초미는 그 말이 싫지만은 않은지 서량을 살짝 훔쳐보았다. “안녕하신가, 흑풍대주?” 뜻밖에 모습을 드러낸 홍진을 보자 관지는 반갑게 인사하며 그를 반겼다. “예, 안녕하셨습니까? 그런데,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사람을 보내셨으면 제가 찾아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근처에 온 김에 자네 생각이 나서 잠시 들렀네.” “차라도 핝ㄴ 드시겠습니까?” 홍진은 혹시 엿듣는 자가 없는지 주의 깊게 주위를 살펴본 후 낮은 소리로 말했다. “실은 뭔가 좀 아리송한 정보가 입수됐는데, 자네와 상의 좀 할까 해서 일부러 찾아왔네. 괜히 내가 자네를 호출하면 천리독행 부교주 쪽에서 긴장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 말에 관지는 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정본데 그러십니까?” “확실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현재 무림맹의 고수들이 안휘성에 집결하고 있다는 수하들의 보고서가 올라오고 있네.” 마교내의 가장 강력한 첩보 조직인 비마대(秘魔隊)의 수장인 홍진이 하는 말이니 그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관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휘성에 고수들을 파견해서 뭘 한다는 말인가? “안휘성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 정도로 많은 고수를 파견할 만한 일은 보고받은 바가 없네. 그래서 내가 그대를 찾은 것이네. 혹시 요즘 들어 천리독행 쪽의 동태에 뭔가 수상한 점은 안 보이던가?” 물론 홍진도 첩보망을 이용해 철영 부교주를 감시하고 있었지만, 수하들에게서 이렇다 할 보고가 올라온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관지를 찾아온 것이다. 관지도 독자적인 첩보망을 이용해서 철영의 세력을 감시하는 중이었기에, 혹시 그쪽에서 알아낸 것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말이다. “예? 예. 전에 말씀드린 그것 외에는 별로 수상한 점이 포착된 것은 없습니다만.......” 잠시 궁리해보던 홍진이 중얼거렸다. “청해성과 사천성에 비밀 분타를 몇 개 슬그머니 마든 것은 나도 포착했는데....... 설마..., 안휘성에까지 뭔가를 만들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수하들에게 그 방향으로도 조사를 진행하라고 지시해야겠군. 그건 그렇고, 같은 식구들끼리 이렇게 서로 감시해야 하다니. 참으로 처어구니가 없구만. 어쩌다 마교가 이렇게까지 됐는지......” 이때, 관지가 갑자기 검을 번개처럼 뽑아들었다. 천장 위에서 미세한 인기척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막 손을 쓰려는 찰나, 홍진이 다급히 제지했다. “아닐세. 내 수하네.” 뭔가 서로간에 전음이 오고가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홍진이 관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새로운 정보가 도착했네. 우려와는 달리 천리독행 쪽의 소행은 아닌 모양일세.” “그럼?” “아마 사파 쪽에서 말썽꾼이 하나 튀어나온 모양이야. 그자를 척살하기 위해 무림맹의 고수들이 움직이는 것이라는군. 우리로서는 한시름 놓은 셈이지.” 그 말에 관지는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황진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오히려 시작이 아닐까요? 만약 천리독행 부교주가 이 사실을 알아보십시오. 그는 그자를 구출하자고 제안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건을 본교 진출을 위한 시발점으로 삼고자 말입니다.” 그러자 홍진은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맞아, 그럴 수도 있겠군. 수하들 입단속을 잘 시켜야겠어. 그건 그렇고, 나는 이제 이만 가보겠네. 너무 오래 있으면 자네한테도 폐가 될테고, 또 나한테도 별로 좋지 않게 작용할 게 분명하니까.” 홍진이 가버린 후, 관지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젠장, 갈수록 태산이로군.” 계속되는 철영 부고주와의 신경전에 지쳐가고 있던 그였기에, 푸념을 해보는 것이었다. 뇌전검황의 제자 각문파 혹은 무림맹에서 파견된 고수들은 모두들 무영신마 장영길을 쫓고 있었다. 모두가 그의 초상화를 들고, 그에 부합되는 인물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도무지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리저리 서성대며 서로간에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르티어슨 s마을로 들어서며 무사들이 너무 많이 눈에 띄자, 조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오잉? 이상하네. 요 며칠 들어 무장하고 잇는 놈들이 자주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고 있냐?” “제 부하들 중 한놈이 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에요. 그녀석을 잡겠다고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잇는 거죠.”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알만하다는 듯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치챈 묵향이 따지듯 물었다. “아버지! 아직도 그 얘기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계신 것은 아니겠죠?”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음흉스런 어조로 중얼거렸다. “짜식. 뭘 그 정도 가지고 숨기려고 해. 내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니까 그러네. 나도 너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짓은 다 해봤어.” “이해하기는 뭘 이해해요? 나는 그런 짓 해본 적도 없다니까!” 아웅다웅 싸우면서 길을 가던 묵향과 아르티어스. 순간, 묷향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말을 타고 가던 무림인들 중 몇 명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넋이 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묵향은 혹시 자신을 보는 게 아닐 수도 있었으므로 뒤편으로 고개를 돌려봤지만, 아무리 봐도 그쪽 방향에는 놀랄 만한 그 무엇도 눈에 띄지 않았다. 묵향은 그들을 향해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호오. 나를 알아보는 녀석이 있었군. 서로 안면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같이 오붓하게 대화나 좀 나눠볼까?” 묵향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보자 초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과거 자신이 멋도 모르고 함게 여행했었던 악마. 초우는 나중에야 사악하기 그지없는 마두의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마두가 그라는 사실을깨닫고 초우는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허풍쟁이라고 모욕까지 줬었는데, 그러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었던 것이다. 길을 가던 아버지가 갑자기 멈춰 서서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본 초미는 짜증 어린 어조로 외쳤다. “아빠, 뭐 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초우는 그 말을 들을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 암흑마제? 당신이... 어, 어떻게 여기에.......” 초씨세가 가주의 입에서 ‘암흑마제’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아직 까지 상대의 정체를 모르고 있던 일행의 표정이 경악감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뿐. 아직까지 그들은 ‘패력검제’라는 기댈 곳이 있었기에 절망감까지는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묵향을 바라보는 패력검제의 두 눈도 초우처럼 경악감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묵향의 눈꼬리 하늘로 치솟았다. 안 그래도 아르티어스에게 극악한 인물로 오해받고 있었기에 목구멍까지 짜증이 치밀어올라 있었던 중이었다. “네놈도 암흑마제 타령이냐? 오냐, 네놈 눈에는 내가 그렇게 악당으로 보인단 말이지. 그래, 너 오늘 잘 만났다. 악당으로 봤으면 악당답게 행동해줘야겠지.” 갑자기 묵향의 신형이 번쩍 사라진다 싶더니 어느새 그는 초우의 코앞에 서 있었다. 불식간에 당한 일이라 초우가 반사적으로 방어를 하려 했지만 이미 상대의 주먹은 자신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퍽! “크악!” 그 이후로 가해진 구타는 차마 입으로 말하기도 안타까울 정도였다. 묵향이 초씨세가의 가주를 복날 개 패듯 패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처음 그가 초우를 노려볼 때의 그 끔찍한 살기.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모두들 살기에 질려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고 있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패준 후, 그것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는지 발로 몇 번 더 찬 묵향은 이빨 랄리는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다시 한 번 더 그놈의 명호를 말해봐! 아예 파묻어줄 테니까.” 쿨럭쿨럭! 땅바닥에 나뒹굴어 정신을 잃은 듯 쓰러져 있던 초우는 묵향의 발길질에 정신을 차린 듯 다급히 입을 벙긋거렸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삶에 대한 욕구가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이 두들겨 맞았는지 그의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새어나올 뿐이었다. “마, 아니, 처, 천마신교의..., 교주.” 묵향은 싸늘하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그래,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 묵향은 말 위에 탄 채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패력검제 쪽으로 시선을 휙 돌리며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이쪽은 그래도 제법이ㅑ. 화경이라...... 반항하는 맛이 꽤 쏠쏠하겠어.” 먹이를 눈앞에 둔 매처럼 잠시 패력검제를 노려보던 묵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구면이지? 네 녀석 표정만 봐도 다 알아. 이름이 뭐지?” 이때, 패력검제의 뒤편에 있던 서량이 우렁차게 외쳤다.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 그 자신의 공포심을 눌러버렸던 것이다. “감히, 아버님께 그따위 언사를 내뱉다니. 각오해랏!” 서량은 말 위에서 순식간에 뛰어올라 어느새 검을 뽑았는지 필살의 공격을 가해왔다. 그의 검이 휘둘러지며 막강한 검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와 동시에 묵향도 손을 썼다. 그의 손이 강기에 싸여 퍼렇게 변하며, 괴이한 곡선을 그렸다. 순식간에 검기와 강기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검기가 수강(手剛)을 이길 수는 없는 법. 한순간, 묵향의 손이 서량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검막을 뚫고 쑥 들어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때 서량의 목숨을 살린 것은 패력검제였다. 그는 아들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휙 던져버리며, 어느새 뽑아들었는지 검을 들고 묵향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그의 검에서는 서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패도적인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나왔다. 쿠콰쾅! 화경의 고수가 펼치는 검무는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검이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엄청난 강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허공을 수놓았다. 세인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의 파괴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기에, 뒤에 서 있는 일행은 패력검제의 위용에 압도되는 자신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위용을 보이면서도 패력검제의 안색은 점점더 창백하게 바뀌고 있었다. 게다가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마저 흘러내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60여 초식이 지나가버렸으 fwjd도로 쾌속하게 벌어진 격투였기에, 주변에 서 있는 일행은 패려검제를 돕겠다고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챙! 어느 한순간, 두 고수의 격투는 끝나 있어싿. 곧이어 하늘 위에서 핑그르르 돌며 부러진 검신이 날아와 땅에 푹 박혀싿. 그제야 일행은 패력검제의 검끝에 시선을 집중시켜싿. 그의 검은 부러져 있었다. 일행의 안 그래도 커다래진 눈이 한층 더 커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묵향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호, 이제 알겠어. 뇌전감황의 제자였군. 묵직하게 가해지는 검의 압력, 깨끗한 몸놀림. 과연, 그분을 쏙 빼닮았군그래. 어쩐지 나를 알고 있더라니......” 사부의 이름이 나오자 패력검제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사부님도 저놈의 손에 당하셨는데, 나까지? 게다가 사부님께서 쓰셨을 때는 흠집하나 나지 않았던 패왕검마저 부러질 정도라니......’ 뇌전검황은 죽는 순간까지도 복수를 자제하라고 당부했었다. 현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복수는 꿈도 꾸지 말라고 당부했지 않던가. 그제야 사부가 왜 그런 유언을 했는지 이해가 가는 패력검제였다. 패력검제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하지만 담담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말했다. “량아, 이 아비는 이렇게 간다마는, 너는 결코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거라. 상대틑 탈마의 고수. 복수 자체가 불가능함을 깨달아야 하느니라.” 패력검제의 뒤쪽에 도열해 있던 일행은 ‘탈마의 고수’라는 말에 두눈을 부릅떴다. 그렇다. 그들은 잠시 잊고 있었지만, 암흑마제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탈마의 고수였다. 별의별 극악한 방법을 통해 마교사상 그 누구도 깨지 못했던 극마의 벽을 허문 악마. 눈앞에 서 있는 허약해 보이는 청년이 그 악마인 것이다. 갑자기 분위기를 잡으며 유언을 읊조리고 있는 패력검제가 가소롭게 느껴졌는지, 묵향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봐, 헛소리 그만 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바로 이거야. 무영신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패력검제는 잠시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왜 너를 죽여야 하는데?” “사부님은 죽이지 않았소? 그런데, 왜 난?” 묵향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어. 다만, 교주가 그분을 죽여달라고 지시했었거든. 그래서 죽인거지.” “그런..., 것이었소?”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패력검제에게 묵향이 이죽거렸다. “왜? 너도 죽여주랴?” 그제야 패력검제는 한숨을 푹 내쉼 대답했다. “후~,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건 그렇고 아까 질문했던 게 뭐였소?” 묵향은 짜증 나는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빌어먹을! 무영신마 그 새끼가 어디에 있느냐고 몇 번이나 물어야겠어!” “그건 나도 모르겠소. 우리도 그를 찾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말이오.” “흐음..., 모른다는 데야 어떻게 할 수 없지.” 한참을 궁리하던 묵향은 도무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짜증이 나는지 투덜거렸다. “젠장, 이제는 어쩔수 없다. 무영문이든 거지새끼든 그놈들을 잡아족치는 쪽이 훨씬 빠르겠어. 이놈들 어디 걸리기만 해봐라.” 묵향은 고개를 휙 돌려 뒤를 바라보며 외쳤다. “아버지, 빨리 가요!” 그 말에 패력검제등은 경악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마교 교주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화경 이상의 경지에 올라 육체를 초월해 버린다면...... 모두들 놀란 눈으로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들 중 한 명을 빤히 바라보던 묵향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질문을 던졌다. “이봐, 너도 나하고 면식이 있었나? 네 녀석의 나이를 짐작건데 그럴 리는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짐작이 안 된단 말씀이야.” 묵향에게 지명을 당한 옥대진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왜 자신을 지명하며 면식이 있다고 한단 말인가. 독대진은 상대의 공포스런 기세에 질려버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 절대로..., 교주님을 뵌 적이 매, 맹세코..., 없습니다.” 그러자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상한 일이군. 그 눈매가 꽤나 눈에 익은 것 같은데 말씀이야. 그건 그렇고 네놈 이름이 뭐냐? 참, 이 몸한테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저렇게 된다구.” 그러면서 묵향이 가리킨 것은 아직도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초씨세가의 가주였다. 묵향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겼던 옥대진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히익! 오, 옥대진입니다. 강호에서는 매, 매화검으로 통하죠.” ‘매화’하니까 떠오르는 것이 잇었다. 바로 무림맹주 옥청학. 그는 백류매화검법(白流梅花劍法)의 달인이었다. “호오, 옥씨에 매화라. 그러니까 옥청학이 떠오르는군. 그녀석과 어떤 사이지?” 옥대진은 겁에 질려 온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즈, 증조부님이십니다.” 묵향은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3명이나 되는 옥씨를 자신의 손으로 보냈는데, 그놈의 옥씨들은 바퀴벌레들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아직까지도 눈에 띄고 있는 것이다. ‘맞아, 그러고 보니 저 눈매가 그녀와 닮았어. 젠장! 그냥 볼대는 몰랐는데, 놀래가지고 눈을 동그랗게 뜨니까 알겠군.’ 떠오르는 잡생각을 흩어버리듯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든 후 묵향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패력검제 일행은 뒤돌아서서 사라지는 마교 교주의 뒷모습에서 강인함이 아닌 생각지도 못했던 ‘슬픔’을 발견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가 절대자와 고독은 함께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절대자와 슬픔이 함께하는 것일까? 모두들 믿기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묵향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때, 그들의 귓가에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윽!” 그때까지도 땅바닥에 길게 드러누워 있던 초씨세가 가주의 신음소리가 그들의 시선을 되돌렸다. 그제야 초미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켰다. “아빠, 아빠1 정신 차리세요. 곧 의원한테 모시고 갈게요. 조금만 참으세요.” 폭풍검 서량이 다급히 초우를 등에 업고 의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패력거메 일행은 다급히 의원을 찾아가싿. 그리고 일단 생명에는 이상이 없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서야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천하의 초씨세가 가주가 방항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저 꼴이 되다니...... 그런 괴물가 마주한 후, 상처하나 없이 살아나왔다는 것만 해도 기적처럼 느껴졌다. 패력검제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허망하게 패했다는 것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무공이 돌아가신 사부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 더욱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복수를 위해 그토록 무공 수련에 매진했거늘, 사부조차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다니. 하지만 패력검제는 모르고 있었다. 묵향의 무공은 뇌전검황과 겨루던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말이다. 패력검제는 부러진 패왕검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어싿. 한동안 패왕검을 바라보던 그가 눈을 들었을 때, 젊은이들의 안색이 말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두들 넋이 빠진 듯 축 처져 있ㅇTejs 것이다. 호통을 쳐서 그들의 기운을 북돋아줄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금 전, 암흑마제의 앞에 섰을 때가 생각 났던 것이다. 자신도 밀려드는 공포감에 그렇게 긴장했거늘, 하물며 강호 경험이 미숙한 젊은 아이들로서는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패력검제는 생각을 바꿔 젊은이들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 모두들 술이나 한잔 하러 가세. 아무래도 그게 좋겠구먼.” 패력검제는 마지못해 얼어서는 젊은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객잔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갱각 옆 골곡 깊숙한 곳에 거지 둘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뭐지?” “혻, 대낮부터 술을 마신 것은 아닐까요?” 이때, 패력검제의 뇌리를 스치는 말이 있었다. ‘무영문이든 거지새끼든 걸리기만 해봐라.’ 악의에 가득 찬 이 말을 내뱉은 인물은 바로 바교 교주였다. 패력검제는 곧장 거지들에게로 다가갔다. 과연 몸을 살펴보니, 내공을 연성한 흔적이 있었다. 바로 개방의 방도라는 말이었다. “개방도다. 너희들은 이들도 의원데 데려다 주거라.” “옛.” 그의 호위 무사 둘이 거지들을 떠메고 의원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며, 패력검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뱉은 말은 반드시 실행에 옮기고야 마는 사람이로군.” 패력검제의 일행은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이미 몇몇 손님이 돌러앉아 두런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패력검제는 객잔 안을 쭉 둘러보다 뭘 발견했는지 눈빛을 빛내며 동행한 젊은이들에게 물었다. “누가 저 젊은이를 아는 사람이 있느냐?” 패력검제가 가리킨 쪽으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대부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옥대진이 앞으로 나서며 자신있게 말했다. “저녀석은 천지문의 제자입니다. 대협께서도 아시다시피 마교와의 연줄을 이용해 생명을 부지하는 쓰레기들이지요.” “노부는 저 아이의 이름을 물은 걸세.” 딱딱한 어조로 패력검제가 말하자, 옥대진은 찔끔하여 즉시 대답했다. “진팔이라고 하니다.” 그때 진팔은 자신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모를 정도로 얼큰하게 취해 있는 상태였다. 교주에게 받은 막대한 액수의 은자가 있는데, 술값을 두려워하겠는가? 여태껏 돈이 없어서 못 마셨던 술이기에 그 맛이 더욱 각별했는지도 모른다. 진팔이 고개를 들자, 웬 건장한 청년이 무게 있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같이 합석을 해도 되겠는가?” ‘웬 떨거지가...’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진팔은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과 동행하고 있는 자들에게로 시선이 돌려졌다. 그를 중심으로 포진하고 서 있는 장한들은 상당한 수준의 무예를 익힌 자들이었다. 특히나 그 중에서 두쪽에 서 있는 젊은이는 자신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여싿. 그런 인물들과 함께 서 있는 젊은이. 고색창연한 보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런 인물이 보통 사람일 가능성은 없었다. 너무나도 무공이 깊어, 자신이 축량할 수 없을 정도일 수도 있었다. 진팔은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어정쩡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 앉으시죠.” 패력검제는 동행을 향해 구석 쪽에 있는 탁자를 가리키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들은 저쪽에 앉게나. 노부는 이 아이와 잠시 얘기 좀 하고 갈테니까 말일세.” “예.” 그 말을 듣고 진팔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젠장, 암흑마제에 이어 이번에는 반로환동한 고수란 말인가? 씨팔. 남들은 평생에 하나도 만나기 힘들다던데, 나는 왜 이렇게 자주 만나는 거야?’ 패력검제는 자리에 앉으며 슬며시 말을 걸었다. “내 오늘 자넬를 보니, 천지문에 대해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겠군.” 천지문이라는 말이 상대에게서 튀어나오자 진팔은 조금 긴장했다. 상대는 자신의 정체까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으니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짜증이 솟구쳤다. 그렇다고 그 짜증을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런 때, 과거 뼈저린 수업을 통해 얻은 진팔의 학습 효과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접대용 미소를 얼굴 가득 띠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헤헤, 그, 그러십니까?” 조령과 쟈타르는 진팔과 동행하며 느낀 건데, 그는 고수를 용하게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 아주 비굴할 정도로 아부를 잘하는 특징 또한 지니고 있었다. 조령 등은 그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눈앞에 상대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전 형의 반응으로 봤을 때, 저놈도 고수라는 말이군.’ 상대가 엄청난 고수라면 강호의 물정도 모르는 자신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전에 만났던 암흑마제의 경우, 겨우 말 한마디 마음에 들지 않게 했다고 그 많은 사람을 시체로 만들었지 않았던가. 그런 식으로 저세상에 가기는 싫었던 조령등은 입을 꽉 다물고 예의 바르게 경청하는 자세만으 보였다. 그들은 또, 진팔의 신상에 대해 큰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진팔에 들은 것은 매우 단편적인 정보들 뿐,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교 교주와의 친분, 남궁세가를 탈출할 때 목격한 그의 고강한 무공. 그런 것이 거저 얻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 이것저것 알아보려고 그를 꾀어 대낮부터 술을 먹이고 있던 중이었는데, 기회가 저절로 굴러 들어왔으니 참견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내 하나만 물어봄세. 천지문이 현문(玄門)의 한 갈래인가?” 현문이라 함은 도가 계열을 말하는 것이다. “아닙니다. 어르신.” 진팔이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고, 패력검제는 더욱 알 수 없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이상하군. 자네의 냉공은 분명 현문의 것이야. 현문이 아니고서야 그토록 정순한 내력을 쌓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다고 불문의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는 상대를 보며, 진팔은 술이 확 깨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눈에 자신의 내공 내력을 꿰뚫어보다니. 상대는 예감대로 능력을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고수였다. 역시 자신의 선택은 옳았던 것이다. “헤헤, 물론 본가에서는 다른 심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생은 어렸을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것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엄친께서 이것만을 익히라고 딴건 안 그리쳐주셨거든요.” 물어본 것에 대해 상세히 대답을 했기에 어디 한 군데도 흠잡을 데는 없었다. 하지만 무게감 있게 보였던 청년이 그 첫인상과는 달리 아무래도 아첨꾼인 듯하지 않은가?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던 게로군. 자질은 뛰어나나 인성이 저래서야......’ 그렇다고 그것을 입에 담을 패력검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여는 그의 어조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호, 기연을 얻었던 게로군. 뛰어난 자질에, 뒤어난 심법, 아죽 복 받은 젊은이로다.” 그 말에 진팔은 마치 엄청난 욕이라도 얻어먹은 듯 얼굴이 확 달아 올라싿. 술기운이 한꺼번에 머리꼭대기까지 치솟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접대용 미소는 사라지고 진팔의 진면목이 노출되었다. “안, 이게 복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이런 빌어먹을!”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욕설에 패력검제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처음의 그 느낌이 맞았던 것이다. ‘재미있는 놈이로다.’ 진팔은 눈앞에 보이는 술병을 집어 벌컥벌컥 몇 모금 마신 후 노성을 토해냈다. “이 따위 복은 줘도 안 받어! 나~쁜 새끼. 분명히 그것도 어린애 괴롭히는 게 재미있어서 했을 게 뻔해. 내가 모를 줄알아?” 패력검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깊은 사연이 있는 놈인 모양이다. “허어 이 친구, 그러고 보니 술이 많이 되었구먼. 하지만 아무리 추해도 말은 바로 하게나. 무공을 익히는 자가 가장 원하는 것이 최고의 심법이라네.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그걸 얻었으면 크나큰 기연을 얻은 것이 아닌가?” 진팔은 한참 허탈하게 웃더니 술잔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무공이 높아지면서 주위에는 시기와 질투에 가득 찬 놈들이 늘어다더군요. 동문이라는 놈들이 제가 마교의 심법을 익혔다고 뒤에서 험담을 해대는데는 저도 할말이 없더라구요. 노선배께서도 아시다시피, 천지문 하면 강호에서 쓰리게 문파로 취급당합니다. 그리고 그 문도들도 쓰레기로 취급되구요. 밖에서 그런 대접을 받는 것도 억울한데, 안에서까지 그따위 취급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패력검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진팔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구먼. 하지만 그건 모함일세. 자네의 심법은 결코 마교도가 익히는 역혈의 심법이 아니거든.” “노선배께서는 한눈에 알아주시지만, 다른 놈들은 그걸 모르죠. 다만 뒤에서 욕이나 내뱉을 줄 알 뿐....... 개새끼들!” 진팔은 술김을 빌어 이리저리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패력검제는 그런 후배를 놓고 야단을 치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더욱 주정을 부리도록 가려운 데를 긁어 주고 있었다. ‘쌓인 것이 있으면 풀어야 하는 법. 게다가 가만히 듣다보니 꽤나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젊은이로다.’ 한참 듣고 있던 패력검제는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고 있는 진팔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팔에게 옥먹고 있는 상대를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허 참, 그토록 고절한 심법을 가르쳐주고도 이렇듯 욕을 먹다니,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기 짝이 없구먼......” 혼자서 중얼거리는 듯 했지만 진팔이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원래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서는 안된다. 천지문의 문도가 마교 교주에게 무공을 배웠다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생각할 것인가? 안 그래도 마교와 결탁한 쓰레기들이라는 소리가 강호를떠도는데 말이다. 하지만 워낙 취기가 오른 진팔에게는 그걸 인식할 정신이 없었다. 과연 패력검제의 의도대로 술에 취한 진팔은 발끈해서 외쳤다. “큭큭! 그 빌어먹을 자식은 묵향이란 녀석이죠. 바로 그 잘~난 음흑......” 말을 하던 진팔은 아차 했다. 꺼내서는 절대 안 되는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그는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놀라서 상대를 쳐다봤다. 혹시나 몰랐으면 하는 진팔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이미 묵향을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그가 한 일이었나?” 진팔은 눈이 둥그래져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싿. “서, 설마 그, 그를 아십니까?” “물론일세. 방금 전에 만나서 칼부림까지 했었지.” 칼부림까지 했다는 말에 진팔의 놀람은 극에 달했다. ‘젠장. 요놈의 방정맞은 주둥이 때문에 오늘이 내 제삿날이구나.’ 하지만 패력검제는 사색이 되어 있는 진팔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창문을 통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단한 사람이로고. 무공도 뛰어나지만, 그 마음 씀씀이도 대범하기 그지없도다. 뛰어난 심법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냥 가르쳐줄 이가 무림에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무공도, 도량(度量)도 노부의 완패로다. 어쩌면 노부는 그를 오해하고 있었던 듯하구먼.” 뛰는 놈 나는 놈 “이런 젠장!” 온몸을 북북 긁어대던 분타주는 도저히 못 참겠는지, 웃옷을 벗어 들고 이를 잡기 시작했다. 한 놈 한 놈 잡아내어 손톱으로 꽉 눌러 툭 터뜨리면, 시뻘건 피가 손톱을 적신다. “에이 씨팔! 많이도 처먹었군.” 한참 이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는 분타주에게 거지 하나가 황급히 달려와서 말했다. “또 당했삽니다!” 분타주는 손톱 위에 올려놓은 이를 우왁스럽게 부숴버리며 버럭 화를 냈다. “뭐? 이런 빌어먹을! 또 당했어? 상태는 어떻다던가?” “둘 다 의원에 넘겼는데, 생명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확실히 분타주의 몽둥이 찜질이 효과가 크긴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놈에게 걸린 모든 거지가 그야말로 걸레쪽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인원 손실에 의한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젠장! 안 그래도 무영신마를 찾는 데 동원할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거늘, 이런 식으로 부상자가 속출하나 나 보고 어쩌란 말이야.” 분타주는 웃옷을 내팽개쳐버린 후 주위를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거지들 중의 하나가 옷을 주워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까지 그놈에게 당한 형제들의 증원으로 미루어봤을 때, 그놈은 무영신마를 찾고 있는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마교에서 무영신마를 구출하기 위해 파견한 고수가 아닐까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멍청아! 그럼 그놈이 마교도가 아니라면 뭐겠냐?” 분타주가 신경질을 버럭내자, 거지는 찔끔해서는 뒤로 물러섰다. “천하의 개방을 감히 자신의 정보통쯤으로 생각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이런 치욕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총타에 연락해라. 좀 더 많은 고수를 파견해달라고 말이다. 설혹 무영신마를 놓치는 한이 있다라도 그놈만은 기필코 찾아내어 척살해야 할 것이다.” 분타주는 거지들 중의 한 명에게 지시했다. “넌 즉시 그놈에게 당한 형제들을 찾아가 놈의 초상화를 만들어라.” “옛.” 분타주의 지시를 받은 거지들은 각자 맡은 일을 행하러 사방으로 달려갔다. 한 시진쯤 후 초상화를 만들러갔던 중년 거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왔다. 그걸 본 분타주는 의아한 듯 물었다. “자네 왜 그러나?” “이거 한번 보십시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요?” 초상화를 건네받은 분타주는 초상화를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많이 봤을 수밖에 없지. 이거 그 흉악무도한 악흑마제의 초상화 아냐? 워낙 오랫동안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하지만, 본방 최고의 적인 마교의 대가리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니..., 쯧쯧. 그런데, 왜 이 그림을 가져왔냐?” 분타주의 말을 들은 중년 거지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하게 바뀌었다. 분타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 안색이 갑자기 왜 그러냐?” 중년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게 형제들을 괴롭히고 있는 그 괴한의 초상화입니다요.” “헉!” 분타주의 얼굴도 창백하게 질렸다. 하지만 분타주는 잠시 후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려싿. 그렇지만 그의 어조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서, 설마..., 아니겠지. 마교 교주나 되는 놈이 무슨 할짓이 없어서 우리 같은 거지들을 족치고 있겠어?”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갈 수 밖에 없는 것이, 마교 교주를 직접 목격한 개방도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개방도는 교주를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초상화를 보고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수 많은 마교의 고수 중에서 알려진 자들의 얼굴이 초상화를 통해 개방도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저도 그렇게는 생각합니다만...... 타주님, 과거 본방은 무림맹의 부탁으로 몇 번인가 그를 감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본방의 형제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지는 수많은 자료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놈은 거지들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악취미가 있는게 분명합니다.” 중년 거지의 말을 듣고 보니 분투자는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걱. 그것도 그렇구나. 아무래도 총타에 얼른 연락을 넣는 게 좋겠다.” “옛.” 중년 거지는 총타로 연락을 넣기 위해 달려나갔다. 안휘성 분타네 도착한 옥화무제는 인사를 받을 생각도 안 하고 분타주에게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현재 상황은?” “예, 감시 대상은 두 시진 전에 패력검제 일행가ㅗ 출돌했습니다. 상부의 지시대로 최대한 정거리에서 관찰했을 뿐이기에, 서로간에 무슨 이유로 출돌했는지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출돌한 이유야 뻔하겠죠. 멋도 모르고 그 쪽에서 시비를 걸었깄지. 그건 그렇고, 몇 명이나 죽었죠?” “일진검 대협이 중상을 입었을 뿐 사망자는 없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옥화무제가 입을 열었다. “일진검..., 초씨세가의 가주 말인가요?” “예.” “자세히 좀 말해봐요.” 분타주는 정찰조의 보고를 토대로 자신이 아는 한 상세히 옥화무제에게 상황의 전개를 섦여했다. 최대한 멀리서 관찰한 것이었기에, 대략적인 겉핥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옥화무제는 만족했다. “아주 잘됐군요. 그 정도로 끝낸 것을 보면 성격은 옛날 그대로인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가 왜 개방도들을 붙잡아서 고문하고 있는지 그걸 이해할 수가 없네요. 개방쪽에 연락을 보냈나요?” “예.” “그가 무슨 목적으로 개방도를 고문하고 있었던 거죠?” “도무지 이해하기 힘듭니다만, 그는 무영신마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구요? 무영신마? 오호호홋!” 한동안 배꼼이 빠지게 웃음을 터뜨리던 옥화무제는 간신히 진정하고는 중얼거렸다. “정말 재미있는 정보였어요. 아마도 서로 간의 오해가 오해를 부른 모양이군요. 진짜 무영신마가 여기에 있었다면 벌써 누군가가 그를 발견했을 거예요. 처음부터 그는 여기에 없었다는 말이죠.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 군요. 자기 부하의 행방도 모르는 상관이 있을 수는 없죠. 그걸 보면, 그는 꽤 오랜 시간 마교와 연락을 끊고 있었다는......” 분타주는 약간 놀란 듯 질문했다. “그도 마교의 사람이었습니까?” 옥화무제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어요. 그건 그렇고, 이왕에 이렇게 된 거, 그와 만나는 것이 좋겠군요. 그에게 안내하세요.” “옛.” 몇 시진 후, 분타주의 안내로 옥화무제 일행은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묵향을 만났다. 자신만만한 그의 얼굴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20여 년이 흘렀건만, 하나도 변한 게 없는 저얼굴을 다시 보니 갑자기 자증이 나는군. 아니, 오히려 더 젊어진 것 같잖아? 정말 그동안 어디 처박혀서 수련이라도 한 건가’ 하지만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옥화무제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교주님.” “이게 누구신가. 이주 반갑구면.” 필요한 때에 딱 나타난 것이다. 사실 거지새끼나 무영문 떨거지 찾아다니기도 귀찮은 노릇이었는데, 옥화무제가 나타난 것을 보면 뭔가 속셈이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묵향의 반응을 보고 아르티어스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는 사람이냐?” “예.” 묵향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 지금까지 너를 안다던 녀석들과는 사뭇 반응이 틀리군. 거~참, 이상한 일이네~! 혹시 옛날에 너하고 잠자리를 같이 했다던가 뭐 그런 여자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요!” 둘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며, 순간적으로 옥화무제의 안색은 묘하게 변했다. 묵향의 분위기가 뭔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낀 탓이다. ‘누구지? 저자가 존대어를 쓸 인간이 과연 무림에 있었던가?’ 생각이야 djEjgens, 옥화무제는의도한 대로 대화를 하기 위해 운을 떼었다. “오랫동안 출도를 하지 않으셔서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그동안 구석진 시골에서 좀이 쑤셨을 텐데 어떻게 참으셨어요?” “이런이런, 만나자마자 시비를 걸다니...... 수련에 빠져 있다보니 세월이 이렇게 흐른 줄도 몰랐군.” 묵향의 거짓말에 옥화무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이놈이 생사경이라도 깨달은 거야?’ “그건 그렇고, 마침 잘 만났어. 부하 한 놈을 찾고 있는데 말씀이야.” 옥화무제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무영신마 말씀이시군요.” 묵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바로 그 새끼지. 좀 알려주지 않겠나?” 옥화무제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정보에느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겠죠? 무엇을 주실 수 있나요?” 상대의 태도에 묵향은 거칠게 콧바람을 뿜으로 투덜거렸다. “흥! 오랜만에 보니 간덩이 많이 커졌군. 감히 나를 상대로 거래할 생각을 하는 걸 보면......” “호호호, 여태껏 그래왔잖아요. 자, 대가를 주세요. 그럼 알려드리죠.” 어떻게 a보면 교태롭다고 할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옥화무제를 보고, 묵향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새파란 젊은이도 아니고 그런 모습에 혹할 사람도 아닌데, 무슨 짓이야? 나잇값을 좀 하라구. 다 늙은 할망구가 겉만 번지르르 하다고, 참내!” 옥화무제의 뒤편에 서 있던 분타주와 호위 무사들의 이마에 굵은 힘줄들이 솟아오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발작하지 못했다. 태상문주도 가만히 있는 판국에, 자기들이 나설 자리가 아니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더라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옥화무제는 심사가 뒤틀린 듯 이죽거렸다. “내 나이를 생각해서 존장의 예의를 갖추지도 않는 주제에 그딴 망발을 내뱉을 이유는 없잖아요? 나를 너무 젊게 보는 것 같아서 그러고 있었을 뿐이에요. 존장의 예의를 갖춰준다면, 나도 현숙한 여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여드리죠.” “이런 망할. 좋다. 그걸 대가로 바라는 거냐?” 옥화무제는 새침한 어조로 대꾸했다. 존장의 예의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대가로 받는다는 말인가? “농담하는 거예요?” “황금?” “나도 많아요.” “무공?” “익힐만큼 익혔어요.” 이윽고 묵향은 짜증스런 오조로 물었다. “그럼 바라는 게 대체 뭐야?” “엽정서를 써줘요. 천지문에 배푼 것과 똑같은 조건으로 말이에요.” 묵향의 눈이 슬쩍 가늘어지며 살기가 짙어지기 시작해싿. “젠장. 내가 그걸 써주느니, 네년을 잡아 족치는 쪽을 택할 거라는 걸 잘 알텐데?” 하지만 옥화무제는 그 정도 협박은 신경도 안쓴다는 듯 호쾌하게 웃으로 말했다. “오홋홋! 댁의 말을 빌리면, 다 늙은 할망구가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을 거라고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거죠? 유서까지 써놓고 왔으니 그런 협박을 해봤자, 당신이 원하는 답은 결코 얻지 못할 거예요. 당신에게는 지금 이렇게 말다툼하고 있을 시간이 없잖아요. 무영신마의 목숨에 대한 대가 협정한 한 장이라면 아주 좋은 조건이 아니가요? 또 천지문에도 써줬는데, 왜 본문에는 못 써주겠다는 거죠?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묵향은 거칠게 콧바람을 내뿜으며 말했다. “흥! 불공평 좋아하고 있네.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좋다! 무영신마가 죽기라도 하면, 우선 네년의 목을 비튼 후에 그 망할 놈의 무영문을 잿더미로 만들어주마.” 이번의 협박은 약간 통했는지 옥뫄주네는 흠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코앞의 무영신마도 못 찾는 당신이, 지하 깊숙이 숨어 있는 무영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영문은 정보단체다 보니 그 총단의 위치는 철저히 비밀에 싸여 있었다. 게다가 영악한 옥화무제가 지하 깊숙이 숨으라고 지시까지 내려놓고 나왔다면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한참을 말설이던 묵향은 결국 그녀의 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한번 결정한 일은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그답게 옥화무제를 향해외쳤다. “이런 젠장! 좋다. 지필 묵을 가져와.” 그러자 옥화무제의 뒤편에 얌전하게 서 있던 중년의 미부인이 지필묵을 건넸다. 묵향은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리며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의 필체는 성격을 반영하듯 거칠었지만 힘이 넘쳤다. 一 : 이 협정서는 상대방이 해제를 원하거나 상대 문파의 수장(首長)이 바뀌기 전까지는 유효하다. 二 : 피치못할 사정으로 이 협정서를 위반해야 할 일이 발생하면 협정서 해제를 원하기 1달 전에 상대방에게 통보해야 한다. 三 : 천마신교와 무영문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하며, 설혹 실수로 상대의 영역을 침범했다면 무력보다는 상호 토의를 통해 원만히 처리함을 원칙으로 한다. 四 : 쌍방은 상대편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최대한 도와줄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찬찬히 협정서를 훑어보던 옥화무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악필인 듯 하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은 하군요. 그런데, 천지문하고 맺은 협정서하고는 내용이 많이 틀린 것 같은데요?” “지금 그런거 다지게 생겼어? 헛소리말고 서명이나 해!” 이것만 해도 어디냐 싶었는지 옥화무제는 망설이지 않고 서명했다. 모든 작업이 다 끝난 후, 각자에게는 종이 쪽지 한 장씩이 남았다. 옥화무제가 협의서를 소중하게 접어서 품속에 갈무리하는 것을 보며, 묵향이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자,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으니, 무영신마가 있는 곳을 가르쳐줘야겠지?” 옥화무제는 화사하게 미소 지음 대답했다. “물론이죠. 지금 무영신마 장영길은 천마신교 내에 있어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dT는지까지는 알수 없지만 말이에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여기에 있다고 해서 찾아헤매고 있는데 말이야.” 그 말에 옥화무제는 품속을 뒤져 종이 한 장을 더 찾아내어 묵향에게 건네줬다. 묵향이 펼쳐보니 초상화가 그려진 종이였다. “눈에 익은 얼굴이죠?” 묵향은 떨떠름한 오조로 중얼거렸다. “나로군.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척살 대상을 그린 초상화예요. 그들은 이자가 무영신마인줄 착각하고 있었던 거죠.” 으드드득! 묵향은 이빨을 갊 외쳤다. “이 말할 년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나를 가지고 놀아? 협정서 따위 다 필요 없어. 오늘을 네년 제삿날로 만들어주마.” 묵향이 으르렁거리며 막 출수하려는데,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 세월이 헐렀건만, 정말 하나도 변하신 게 없는 것 같네요. 마치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요.” 묵향은 고개를 휙 돌려 방금 말을 꺼낸 중년 부인을 바라봤다. 세월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뺏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미를 더욱 완벽하게 보완해주고 있었다. 얼핏 보면 옥화무제와 약간 닮은 듯도 느껴졌다. 하지만 옥화무제가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20대가 가지는 청순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데 비해, 그녀는 30대 후반의 완숙미를 자아내고 있었다. 뭔가 추억을 그리듯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를 무시하고 묵향은 날카로운 시선을 옥화무제에게로 던졌다. “누구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옥화무제가 대꾸했다. “제 손녀, 영인이죠. 과거에 몇 달 잡아놓고 감상했을 텐데, 잊어버렸어요? 마교의 교주께서, 손녀 앞에서 할머니를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으시겠죠?” 묵향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정말 몇 대 쥐어패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젠장. 얘니 지금이나 잔머리 하나는 못 당하겠군. 하지만 손녀딸로 방패를 삼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물론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게 저를 지켜주겠죠.” 옥화무제는 화사하게 미쇼지으며 품속에 들어 있는 협정서를 토닥거렸다. 옥화무제는 묵향 일행이 사라진 후 분타주에게 명령했다. “무림맹에 전갈을 넣으세요. 현재, 무림맹에서 쫓고 있는 무영신마는 하남성을 향해 빠른 속도로 북상하고 있다고 말이에요.” “예? 왜 그런 거짓 정보를......?” 옥화무제는 그것도 빨리빨리 눈치채지 못하는 분타주에게 짜증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현재 무림맹에 그자의 위치를 알려준다고 해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준비로는 절대로 그를 잡을 수 없어요. 오히려 그를 화나게 만들 뿐이죠. 또, 그를 잡겠답시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힐리겠어요?” 분타주도 그제야 이해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무림맹에서 발동시킨 천라지망은 극마의 수준에 못 미치는 마교의 장로급 정도를 척살하기 위해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천라지만으로 어찌 화경급 고수를 잡을 수 있겠는가? 아니, 상대는 화경의 고수를 격패시켰으니, 그보다 더한 실력자라고 봐야했다. “얼른 무림맹에 전갈을 넣겠습니다.” 허둥지둥 달려가는 분타주의 뒷모습을 보며, 옥화무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쯧쯧, 저런 놈이 분타주라니, 한심하군.’ 옥화무제 일행과 멀이진 후, 아르티어스는 혼자서 키득거리고 있는 묵향을 향해 짜증스런 어조로 투덜거렸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뭐가 재미있는지 혼자 키득거리고 있던 묵향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반문했다. “뭐가요?” “아까 그 계집하고 뭐 하는 짓이냐고.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화를 냈다가. 또 손녀가 옆에 있다고 참아줬다가...... 그냥 처음부터 붙잡아서 쥐어패면 끝날 일을 가지고 . 그것도 안 되면 내가 있잖냐? 그냥 기억을 읽어버리면 순식간에 끝났을 텐데......” “아, 그거요?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 하는 짓이 귀엽잖아요. 얘기해보면 재미도 있고......” 묵향의 대답에 아르티어슨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기야, 너 진짜로 성질나면 언제 그런 거 따지는 녀석이었냐?” “그렇게 하면 재미없죠. 강호를 아무리 떠돌아도 그녀만큼 재미있는 대화 상대를 만나기는 힘들거든요. 그녀의 의도대로 적당히 화도 내주는 척하면서......” “하지만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그런 종이 조각에 서명을 한다는 건 좀......” “그 계집은 자기가 득을 봤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아니죠. 정보 수집은 무영문이 으뜸이니까, 대부분 저쪽의 도움을 받을 일이 많거든요. 또, 서로의 영역을 침범했을 때 어떻게 해준다는 그런 조항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조항이죠. 오히려 무영문의 행동에 제약만 줄뿐이에요. 왜냐하면 본교와 달리 무영문은 모든 게 비밀에 싸여 있는데, 그런 소시를 이쪽에 한다는 자체가 ‘이 근처에 본문의 근거지가 있소’하고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잖아요.” 묵향, 호북성으로 술에 대취한 진팔을 침상에 뉘인 호, 조령이 다시금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패력검제가 말을 걸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합석해도 되겠는가?” 상대는 진팔의 내력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엄청난 고수였다. 그런 엄청난 고수를 옆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그것을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무사들 때문에 그렇게 혼줄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무림에 대한 그녀의 흥미는 아직 식지 않은 모양이다. “예, 무, 물론입니다. 그러고 보니 존성대명도 여쭤보지 못했군요. 소생은 조룡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수하입니다. 무림초출이기에 미흡한 점이 많으니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포권하는 상대에게 패력검제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며 대답했다. “아, 노부는 서진아라고 한다네.” 패력검제는 가벼운 한담을 주고 받으며 조령의 마음을 풀리게 만든후에 마음에 두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물어봄세.” “예.” “천지문의 제자와는 어떤 사이인가?” “예? 천지문... 아, 진형 말씀이신 모양이군요. 그냥 길을 가다가 만난 사이입니다만......” “그런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친한 것 같은데...... 노부는 혹시 약혼자인가 했지.” 상대가 자신이 여자인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하자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고수는 고수로군. 한눈에 알아보는 것을 보면 말이야.’ 조령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죽을 고비를 함께 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선(死線)을 호오, 그 얘기 좀 들려주겠나? 아주 재미가 있을 듯 싶구먼.” 조령은 상대가 그런 말을 한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딱히 상대의 표정에서 악의 같은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혹시 남궁세가하고 친분이 있으세요?” 조령은 처음부터 무림의 매운맛을 한껏 본 상태였다. 매운맛을 보다보면, 그만큼 경험치가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남궁뭐시긴가 하는 작자가 자신에게 써먹었던 방법을 그녀는 그대로 써먹었다. 역시 이래서 무림에서 몇 년 눈칫밥을 먹으면 노련한 강호로 거듭나게 되는 모양이다. 그녀의 의도를 짐작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지만, 패력검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노부는 남궁세가와 별로 친분이 있지 않다네. 원래 노부가 활동하던 곳은 산서성이었거든.” “아, 그러십니까?” 주령은 힐끔힐끔 패력검제의 눈치를 살피며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마교의 교주를 만났던 일을 말이다. 물론, 일이 어떤 방식으로 틀어질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교주가 친절한 척했다든지 하는 부분은 쏙 빼먹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교주가 자네들을 구출해줬다는 말인가?” “결론은 그렇지만, 사실 남궁세가 쪽에서 말실수를 했기에 얻은 어부지리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주는 우리들을 구해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거든요.” 패력검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진팔의 심법은 교주가 전수해준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전수해준 심법을 통해 쌓은 내공을 몰라 볼리 없을 것이다. 자신이 봐도 진팔의 기세는 다른 도가의 무공을 익힌 자들과 미세하기는 하지만 차이를 느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교주가 그 소형제에게 뭐라고 질문을 던지지 않던가?”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령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부를 믿고 사살대로 이야기 해주면 안 되겠는가?” “그..., 그러니까 무섭게 노려보며 태허... 뭐라는 심법을 익히지 않았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태허? 태허로 시작하는 도가의 심법이라..., 물론 소형제와 같은 그런 기세를 지닌 젊은이를 보지 못했으니 절전된 것일 가능성이 크고......” 한동안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패력검제는 이윽고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혹시 그것이 태허무령심법이 아니던가? 노부의 기억으로는 현문이 낳은 최고의 심법들 중에서 태허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은 그것뿐이네만.” “예, 맞습니다! 바로 그거예요. 누구한테 배웠는지 따지더라구요.” “그래서?” “전형은 여태껏 소생과 유람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극존칭을 써대면서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주는 거예요. 저는 일순간 사람이 바뀐 줄 알았다니까요.” 그말에 동감한다는 듯 패력검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흐음, 그 소형제가 그런 특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 “노선배님도 진 형에게 들어서 아시다시피, 교주는 자신이 과거에 가르쳐줬었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친절하게 대해줬어요.” “허~참, 그래서?” “그래서 제가 나중에 교주와 헤어진 다음에 물었죠. 사람이 바뀐 줄 알았다구요. 그랬더니 진 형이 하는 말이 그렇게 안 하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하던데요? 곧바로 대답을 안 하면 고문을 해서라도 알아낸다고 말이에요.” “거참 성질도 급한 사람이로군.” “참, 그리고 교주를 만난 후 진형이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어요.” “뭔가?” “혹시, 노선배께서는 암흑마제라는 명호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세요?” 패력검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있다네. 마교 교주의 명호가 아닌가?” “예. 그런데 교주 앞에서는 절대로 그 명호를 안 쓰는게 좋대요.” 패력검제는 매우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왜냐하면 그 명호를 썼다가 초우가 박살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고?” “그건 마교 교주가 강호에서의 활동을 그만둔 후, 남을 씹기 좋아하는 쓰레기들이 퍼뜨린 명호래요. 그렇기에 아마 그 내력을 교주가 들었다면, 그 성질머리로 봤을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하던데요? 특히, 그의 앞에서 그 명호를 말했다간 그 한마디에 지옥을 경험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노선배님께서도 조심하는게...... 아참! 노선배님께서는 이미 만나셨다니 아시겠군요.” 패력검제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자네들을 좀 더 일찍 만났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건 그렇고, 보아허니 딱히 정해진 행로가 있는 것도 아닌 듯 싶은데...... 이것도 인연인데 본문에 놀러오지 않겠나? 한 며칠 푹 쉬면서 노부의 말벗이나 되어주게.” 패력검제의 정중한 제안에 조령의 마음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것도 혹시..., 함정이 아닐까?’ 관제묘의 뜰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거지들의 수가 급증해 있었다. 주위에서 증원 인력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분타주의 표정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젠장. 어중이떠중이 다 모아놓으니까 쪽수는 많지만 영 마음이 나 놓이는군. 그리고 저놈들이 처먹는 걸 무슨 수로 감당하지?” 식략공급을 비럭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개방의 비애가 분타주의 어조에 묻어 있었다. 갑자기 식구가 늘었다고 해서, 구걸해서 들어오는 식량이 덩달아 증가하는 게 아니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때, 관제묘 안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거지 하나가 그를 불렀다. “타주님, 이것 좀 보십쇼.” “뭐냐?” “이상한 걸 발견했는뎁쇼.” 불타주가 그리고 가자, 거지는 수많은 점과 깨알만큼 작은 글자들이 기록된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암흑마제로 추정되는 인물이 지나간 행로입니다. 그놈이 지나 가면서 형제들을 고문했던 장소들이 표시되어 있죠.” 점들은 어느정도 일정하다고 할 수 있는 행로를 그리고 있었다. 묵향이 지나가다 개방도가 보이기만 하면 잡아다 족쳐버렸으니 그런 흔적이 남은 것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그가 갈 행로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예. 그런데, 무영문의 옥화 봉공님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보내욘 형제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분타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지. 지금 무영문도 무영신마 척살 작업에 적그 동참하고 있지 안느냐? 그런 만큼 그분께서도 현장을 지휘하기 위해 달려오신 것이겠지.” “그런데 이걸 보십시오. 암흑마제의 이동로를 기준으로 예측한다면 이런 식으로 그가 이동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리고 옥화봉공님의 이동로를 기준으로 봤을 때 이렇게 움직인다면?” 그것을 보고 분타주의 안색이 희한하게 바뀌었다. 뭔가 봉잡았다는 표정같기도 하고, 또 엄청난 배신감을 당한 자의 얼굴인 듯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중얼거렸다. “서, 설마..., 그렇지는 않을 거야.” 거지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지만 증거가 있습니다.” “증거? 무슨 증거 말이냐?” “이 두 점이 교차했을 거로 추정되는 시간 이후에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입니다. 무영문에서는 본방에서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한 무영신마를 찾아낸 겁니다. 그가 하남성을 향해 빠른 속도로 북상하고 있다는 연락을 보내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든 고수가 지금 하남성으로 집결 중이죠. 그리고 암흑마제는 더 이상 형제들을 괴롭히지 않고 빠른 속도로 호복성을 향해 이동 중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진짜 옥화 봉공이 그놈과 만나서 모종의 뒷거래를 했단 말인가?” 이리저리 궁리하던 분타주는 거지에게 말했다. “총타에 관련 자료와 함께 이 사실을 전해라. 하지만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결코 안 된다.” “옛! 특급 기밀로 처리하겠습니다.” 교주가 돌아왔다! “크, 큰일났습니다. ” 밖에서부터 소리치며 달려온 부하가 허겁지겁 실내로 들어서자, 천리독행 철영 부교주는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관지 녀석이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느냐?” “그, 그게 아니라 교, 교주가 돌아왔습니다!” 그 말에 철영 부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실이냐?” “옛!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교주를 알아보지 못한 경비 무사들이 경을 쳤다고 합니다.” 철영은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죽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럴 수가...... 분명히 그는 죽었다고 들었거늘.” “혹시, 장인걸이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철영은 수하에게 호통을 쳤다. “본좌가 그것도 못 알아볼 줄 아느냐? 태상교주는 한사코 부인했지만 장인걸이 보내온 것은 분명 교주의 애검이었다. 본좌고 교주의 검도 못 알아볼 줄 알았느냐?” 수하는 납작 엎드려서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요, 용서를......” “검은 무인의 생명. 그것을 뺏긴 자가 아직 살아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인은 자신만의 애병(愛兵)을 생명과도 같이 아낀다. 왜냐하면,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이 익힌 무공과 병기가 전차 조화를 이뤄 더욱 깊은 경지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검이 부러졌다고 해서 도를 주워들었다면, 그가 자신이 지닌 실력을 완벽히 펼쳐낼 수 있을까? 또, 3척 검을 쓰던 자가 2척 검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물론, 절대의 경지를 개척하고 있는 무인들에게 있어서 애병의 존재는 크게 중요한 겅이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의 경지를 개척할 때까지 자신과 함께 자라온 병기는 더 이상 병기가 아니다. 생의 반려자로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병기를 적이 가지고 왔다면, 응당 그 병기의 주인은 죽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교주에게로 가겠다. 준비를 갖춰라.” “옛!” 묵향에게 반 강제로 끌려와 마교에 입교를 하게 된 비운의 사나이 초류빈. 그는 현재 팔자에도 없는 부교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묵향 실종 후에도 이렇다 할 직책을 받지 못한 그는, 묵향이 내려준 조언을 등대 삼아 끝없이 수련에만 매진했다 그리고 그 결과 부교주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젠장! 내가 마교의 부교주라니. 아마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신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서실 거야.” 마교 내에 잇는 거대한 소나무 숲. 이곳이 바로 초류빈의 수련장이었다. 그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식어빠진 음식들을 우물거리면서 중얼거렸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은 그가 워낙 오랫동안 이 숲 속에서 혼자 생활하다 보니 붙은 자연스런 습관이었다. 이런 습관이라도 붙이지 않았다면 말하는 것조차 잊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이 숲 속에 들어와서 홀로 무공 수련을 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3년째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뭔가 사기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한번씩 든단 말이야. 솔잎을 헤아린다고 유언비어를 유포해서 주위 사람들을 안심시켜놓은 후 뭔가 아주 특별한 신공(神功)을 익혔음에 틀림없어. 그래, 어쩌면 교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북명신공이나 천마신공, 혹은 뇌전신공을 숨어서 익히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 여기까지 중얼거리던 초류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말이 안 된다고 느낀 것이다. “쩝, 그건 아니겠지. 그 세가지 무공은 교주만이 익힐 수 있는 건데 어떻게 그 가 익힐 수 있었겠어? 아마도 그것보다는 정파에서 노획했던 무공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을 하나 우연히 발견해서 익혔을 가능성이 크지. 그런 다음 다른 사람들은 익히지 못하도록 파기해 증거를 인멸한 게 틀림없어. 그 인간의 치사함과 간악함으로 미루어봤을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거야.” 초류빈은 자신의 말이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확신에 참어조로 말했다. “맞아 그거야. 그 치사한 녀석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한참을 그렇게 투덜거리던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심마(心魔)야, 심마. 왜 이렇게 그에 대한 생각만 떠오르면 악담을 하게 되는지......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로군.” 초류빈은 벌떡 일어섰다. “쓸데없이 주절거릴 시간이 어디 있어? 배를 채웠으니 다시 시작해 볼까?” 이때,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을 울리며,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오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초류빈의 앞에 부복하며 외쳤다. “부교주님의 뵈옵니다.” “무슨일인데 그렇게 급히 오는 것이냐?” “교주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뭣이?” 초류빈은 갑자기 머리가 띵히지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뇌리에 과거의 그 지독한 기억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교차하기 시작했다. 무공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묵향의 지론에 따라 그는 매일 묵향에게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져야만 해싿. 초류빈의 입장에서 그것은 무공 수련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경험이 그를 화경으로 이끈 열쇠가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초류빈에게 있어서 그 지옥 같은 수련은 꿈에서조차 E올리고 싶지 않은 dkrad일 뿐이었다. “무, 무슨 헛소리냐? 그가 살아있을 리가......” “어찌 감히 부교주님께 허언을 아뢰겠습니까? 지금 모든 장로가 소집되었고, 본교의 주력 고수들이 대거 환영식을 위해 동원되고 잇는 것을 속하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에 달려오는 길입니다.” 수하의 말에 초류빈은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이제 끝장이군.” 하지만 초류빈은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웅혼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 맞아. 그가 옛날의 그가 아니듯 나도 옛날의 내가 아니지. 그동안 나도 엄청난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어. 결코 옛날같이는 되지 않을 거야.” 이리저리 서성이며 자신을 격려하던 초류빈. 하지만 잠시후,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수하에게 명령했다. “아무래도 지금 인사를 가는게 좋겠다. 초연대(楚戀隊)를 집합시켜라.” “존명” 철영 부교주가 자신의 호위대를 이끌고 대연무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는 수천 명에 달하는 마교의 정예고수가 교주의 귀환을 환영하기 위해 좌우편으로 도열해 있었다. 철영은 이빨을 갈지 않을 수 없었다. 관지 장로가 자신만 빼놓고 연락을 돌렸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서둘러 대연무장에 도착한 철영이 주위를 둘러봤을 때, 추류빈 부교주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고 잇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철영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관지가 그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천리독행 부교주님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교주께서 돌아오셨다고 해서 나왔다네.” “아, 예. 원래 환영식에는 부교주님들 이상의 원로 구수분들은 참석 하지 않으셔도 될 것으로 판단했는데, 기왕 오신 거 교주님을 만나보고 가시지요.” 그 말에 철영의 인상은 일그러졌다. 오지 않아도 될 것을 온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물러가자니 모양새가 고약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기다리고 있는 수밖에...... 좌우에 도열하고 있는 수천 명의 정예, 그들 하나하나가 모두 엄청난 마기를 뿜고 있는 극강의 고수였다. 그들을 보고 아르티어스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가 살던 세계에서도 이정도급의 고수들을 이렇게 많이 보유한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엇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와, 이게 다 네 부하들이야? 정말 대단하구먼. 이 정도면 왕국을 세워도 되겠어.” “촌스러운 말 그만하시고 가만히 좀 계세요.” 묵향의 지적에 아르티어스는 그런대로 조용해졌지만, 그 뒤에서 얌전히 따라오고 있던 마사코의 안색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이토록 괴이하면서도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자들의 사이를 걸어간다는 것이 보통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묵향이 앞에서 걸어가고, 가장 뒤에 마사코가 주인의 검을 받쳐들고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마교도들이 약간이긴 하지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교주가 모습을 감춘 지 이미 23년. 단 한번도 교주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자들도 많았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들은 문약한 서생처럼 생긴 새파란 젊은이의 모습을 보고 저자가 진짜 교주인지 강한 불신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로들의 인사를 받으며, 묵향은 흡족한 듯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그대들이 본교를 잘 관리했구나. 수고들 많았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그런데, 설무지는 어디 있느냐?” 그 말에 장로들의 옆쪽에서 있던 늙은이가 대답했다. 그의 눈에는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그가 바로 현재 마교의 군사로 있는 설무지의 아들 설민(雪旻)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몇 달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교주님께서 돌아오시기를 그토록 학수고대하셨었는데.......” 그 말에 묵향의 안색은 급격하게 흐려졌다. 설무지의 소식을 들으니, 자신이 자리를 비운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묵향은 정신을 다잡으며 중얼거렸다. “으음, 본좌도 그건 어쩔 수 없었구나.” 묵향은 군사 옆에 있는 고나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관지, 그의 장례는 잘 치러줬겠지?” 잠시지만 묵향의 표정 변화에서 부하에 대한 사람을 발견한 관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심려 놓으십시오. 군사의 예를 받을어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오랜만에 자네들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이 뿌듯하군. 자 들어가세.” “옛!” 그런데 실내로 들어가려던 묵향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환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 천랑대주. 그동안 극마를 깨달은 모양이군. 축하할 일이야.” 옆에서 관지가 조언했다. “현재는 부교주가 되셨습니다. 현재 천랑대는 한중평 장로가 맡고 있습니다.” 원래 장로의 임명은 교주의 고유 권한이었다. 그렇다보니, 교주가 실종된 상태에서는 장로들 간의 자리 이동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이 죽거나 승진 혹은 은퇴한다면 그 자리가 비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때는 새로운 장로를 한 명 뽑게 된다. 이때, 장로를 어디에다가 배치하느냐가 문제점으로 떠오른다. 빈자리에 바로 신참 장로를 집어넣을 수 는 없기 때문이다. 마교의 무력단체는 그 지닌 바 능력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가장 강한 단체를 맡고 있던 장로가 빠진 자리를 신참 장로가 차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장로 개개인이 지닌 능력에 따라 대대적인 자리 이동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묵향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되었나? 내가 없는 동안 자리이동이 좀 있었겠군.” “예, 태상교주님께서 인사 이동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안드신다면, 다시 빠구셔도됩니다. 장로들의 인사권은 교주님의 권한이시니까요.” 이때, 저쪽에서 초류빈이 수하들을 이끌고 허겁지겁 나타났다. 그는 묵향을 확인한 후, 처음에는 인상이 확 찌그러드는 듯하더니 다음 순간에는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초류빈은 묵향에게 포권하며 외쳤다. “어서 돌아오십시오, 교주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말이 좀 안맞는거 같지만 오타아닙니다. -海東靑 “오오, 자네도 화경을 깨달았는가?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교주님.” “그건 그렇고, 오늘은 이만하고 자네들과는 다음에 만나 담소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오늘은 장로들과 군사에게 본교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보고를 듣는 게 순서인 것 같으니까 말일세.” “예.” 자신의 처소에 돌아온 철영 부교주는 뿌드득 이빨을 갈며 투덜댔다. “젠장! 한눈에 내 경지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교주의 실력이 전혀 녹슬지 않은 모양이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수하의 말에 철영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놓은 것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교주의 자리는 몇 시진 전만 해도 바로 그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상대는 탈마의 고수. 도대체 몇십 년을 기다려야 교주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올지 감도 안 잡혔다. 게다가 그때가 되면 또 다른 극마의 고수들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또다시 그들과 다퉈야 하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다. 기왕에 빼든 칼이다. 이제와서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결정은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교주의 자리는 탄탄해지지 않겠습니까? 고루혈마(姑?血魔) 장로와 염왕적자(閻王笛子) 장로가 뒤를 밀어주고 있는 이때를 놓치시면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장로 서열 3위의 고루혈마 옥관패(玉冠覇)는 500의 절정 고수로 구성된 수라마참대(修羅魔斬隊)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장로 서열 4위의 염왕적자 한중평(寒重平)은 천 명의 절정 고수로 이뤄진 천랑대(千狼隊)를 맡고 있었다. 그들은 둘 다 매우 호전적인 일물들이었다. 그렇기에 철영의 확장 노선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좋다! 오늘밤, 두 장로한테 이리 오라고 일러라.” “옛.” 수하가 밖으로 사라지고 난 후, 철영은 자신의 검을 뽑아들고 투명한 검신을 바라봤다. 섬뜩한 예기가 비쳐지는 그의 검은 뛰어난 장인이 만든 마검(魔劍)이었다. 검의 검신은 그의 광폭한 마음을 반영하듯 검붉은 광택을 띠고 있었다. 철영은 검신을 바라보며 약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격려하고 있었다. “암살당한 교주도 많았지. 자신감 넘치는 교주. 그는 옛날처럼 호위에 별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 바로 그 자신감을 이요하는 거야. 그러면 나의 세상이 열리겠지. 피로 물든 마의 세상이 말이야. 크흐흐흐.” 좌절된 천리독행의 꿈 묵향은 장로들과 군사에 자신의 부재시 행해진 모든 일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강력해진 힘이 몇몇 실력자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설무지는 기존의 5개 무력단체를 해체하여, 6개의 무력 단체로 확대 재편성했다. 혈랑대(血狼隊), 수라마참대, 천랑대, 염왕대(閻王隊), 흑풍대(黑風隊), 자성만마대가 그것이다. 그리고 6개의 무력 단체는 내 총관이자 수석 장로인 마교 서열 4위 수라혈신(修羅血神) 북궁뇌(北宮雷)가 총괄 지휘했다. 하지만 홍진 장로가 맡고 있는 비마대(秘魔隊)는 내총관이 아닌 군사(軍師) 직속의 정보 단체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묵향이 돌아온 만큼 교주 직속으로 변경되었다. 설무지는 묵향이 사라지자 정파와의 쓸데없는 분쟁을 없애기 위해 모든 분타를 철수 시켰다. 현재 외부에 손을 뻗고 있는 것은 홍진이 맡고 있는 비마대뿐이었다. 묵향은 일단 보고를 받은 후, 태상교주가 당행한 인사 이동에 이의가 없음을 밝혔다. 자신들의 자리에 변동이 없을 것임을 확인한 장로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묵향은 자신이 없는 동안 마교를 이끌어온 장로들과 군사에 대한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포상도 두둑하게 지급되었다. 묵향은 마지막으로 설무지의 공적에 대해 얘기했다. 하자만, 묵향은 결코 상대가 죽은 사람이라고 좋은 말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설무지는 본좌가 없는 동안 본교의 발전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공적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잘못한 일까지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본좌가 갑작스럽게 실종되었다고 해도 그렇지, 중원에 산재해 있던 모든 분타를 철수시킨 것은 명백한 그의 실책이다.” 묵향은 실민 군사를 향해 지시했다. “각 성(省)에 1개씩의 분타를 설치해라. 그리고 더욱 사업영역을 확장해라.” “존명!” 묵향은 드넒은 태사의 앞에 시립해 있는 장로들을 쏘아보며 외쳤다. “천하 최강을 자랑하는 본교가 뭐가 무서워서 움츠리고 있단 말이냐?” 묵향은 외총관 삼면인마(三面人魔) 소무면(簫無面) 장로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외총관! 이제부터 자네가 바빠질 것이다.” 외총관은 마교 내 모든 하급 무사를 촐괄 지휘하는 직책이다. 그렇기에 과거 외총관의 직위는 장로 서열 5위정도였다. 하지만 설무지에 의해 분타를 모두 철수한 후, 외총관의 직위는 최하위인 9위로 밀려나 잇었다. 하지만 또다시 마교의 팽창 정책이 시작된다면 자신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지 않겠는가? 당연히 소무면 장로로서는 회색이 만면할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소무면 장로가 고개를 숙이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충성을 다 바쳐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교주님!” “그리고, 현재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던 혈화궁(血花宮)과 만악궁(萬惡宮)도 과거와 같이 외총관 휘하에 두겠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혈화궁은 여인들로만 이뤄진 집단으로서 중원의 화류계에 진출해 있엇다. 그리고 만악궁은 표국, 전당포, 각종 상행위 등을 통해 교내의 자금줄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 마교가 보유하고 있는 각종 전답 등을 통한 수입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교의 분타를 모두 철수시키면서 설무지는 그 둘을 독립시켜버렸다.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하급 무사를 철수시키는 마당에, 그들을 외총관 휘하에 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묵향은 회의석상에 모여 있는 모든 수하를 쭉 둘러본 후 힘있게 외쳤다. “마도 천하가 이룩되는 그 날을 위해 모두들 분골쇄신하라!” “존명!” 우렁차게 대답하는 장로들의 표정에는 기쁨이 묻어 있었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고, 바야흐로 중원 진출이 시작되는 것이다. “자, 오늘은 첫날이니 이정로로 하고 다음에 보기로 하지.” “옛.” 모두들 물러가는 가운데, 옥관패와 한중평 두 장로가 자리에 남았다. 그들은 묵향 앞에 부복하며 외쳤다. “속하들을 용서해주십시오, 교주님!”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저희들은 교주님께서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천리독행 부교주를 교주로 선출하려고 했습니다. 관지 장로가 그것을 막고 있었기에, 결국은 무력으로 본교를 뒤엎을 모의까지 했었습니다.” 그들이 회의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모든 것을 실토하는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만약 지금 토설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이 회의가 끝난 후 관지나 마화가 묵향에게 밀고할 것이 분명해싿. 무슨 일이 있어도 그전에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들이 기억하는 묵향은 용서를 구하면 매우 관대하게 포용해줬었다. 또, 묵향 자신이 돌아오자마자 중원 진출의 포부를 밝혔으니, 현재의 마교에 대해 더 이상 불만 사항도 없었다. 묵향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미소로 화답했다. “난 또 무슨 일이라고. 호랑이가 없으면 당연히 늑대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본교의 율법. 그대들은 율법에 따라 착실히 이행했을 뿐인데, 무슨 용서를 구하겠는가?” 교주의 말에 그들은 감격한 듯 외쳤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교주님!” 회의가 끝난 후 묵향이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환히 미소 짓고 있느 s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묵향은 한눈에 그녀가 누군이 알아봤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싿고 하지만, 그 얼굴을 잊을 수는 없었다. 세월의 장난인지 고집스러워 보이던 그녀의 눈매는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허리에 매인 장검의 붉은 수실에는 아직도 비취로 만든 작은 꽃송이가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마화의 그런 모습은 언제나 묵향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피어오르게 했다. “마화.” 마화는 묵향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너무나도 그리웟던 사람. 하지만 무려 23년이나 소식 한 번 없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의 속을 새까맣게 태워놓고는, 저렇게 뻔뻔스런 얼굴로 태연히 서 있는 것이다. 안길 듯 다가선 마화였으나 묵향의 앞에 선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가밪기 손을 들어 묵향의 뺨을 매섭게 후려쳤다. 아마도 그 오랜 세월 자신을 기다리게 한 원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마화의 행동을 묵향은 그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짝! 매서운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이 묵향의 뺨을 직격하자, 마화는 오히려 깜짝 놀란 듯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가 그냥 맞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화의 손에는 내공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지만, 설혹 강맹한 내공이 실려 있다고 해도 그라면 충분히 막거나 피할 능력이 있지 않은가. 마화는 자신을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묵향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도무지 자신의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늘게 어깨를 떨며 훌쩍거리고 있는 마화를 바라보는 묵향의 표정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수없이 많은 세월을 살아온 그였지만, 이런 상황만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울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놔두기 뭐했던 묵향은 어색한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를 살며시 껴안았다. 어색하게 살짝 껴안았을 뿐이었지만 훌쩍거리던 마화가 자신의 품속으로 파고들자 묵향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마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두 사람의 사이에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나긴 침묵이 흐른 후, 투박스럽기 그지 없는 묵향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자자, 진정하라구.” 마화는 묵향을 올려다보더니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전히 말을 멋대가리 없이 하는 사람이군요. 이런 때는 사랑한다든지 뭐 그런 달콤한 말을 하는 거라구요.” 하지만 묵향은 죄없는 뒤통수만 벅벅 긁을 뿐이었다. 마화는 그런 묵향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묵향과 마화는 탁자에 앉아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 흐르자, 마화는 뭔가 대화를 시작할 만한 화제가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때, 마화는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묵향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교주님은 천리독행 부교주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꽤 쓸 만한 놈으로 생각하는데?” “그는 교주님이 안 계실 때 교주직을 노리던 사람이에요. 그를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괜찮아. 사내라면 그 정도 배포는 지니고 있어야지. 그리고 내가 없을 때 있었던 일 아닌가? 그런 일까지 신경쓴다면 의심하지 않을 놈이 어디 있겠어?” 호탕한 대답에 마화는 한숨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자신감을 빼놓는다면, 자신이 사랑하는 묵향이라는 사내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태평스런 묵향의 모습에 뒷일이 걱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그건 그렇고, 먼저 태상교주님께 가보세요.” “왜?” “태상교주님게서 당신의 검을 보관하고 계시니까요.” “묵혼검을? 뭐, 그건 나주엥 찾아도 상관없잖아. 지금 검을 쓸 일도 없는 말이야. 그건 그렇고, 나하고 함께 온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두 분 다 내전으로 안내했어요. 교주님의 손님들이시니 시녀들에게 최선을 다해 시중을 들라고 지시해뒀죠.” “잘 처리했군. 그렇지만 내가 곁에 있지 않으면 통제가 안 되는 양반이 하나 있어서 지금 가보는게 좋을 같은데......”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무서움을 알리 없늠 마화는 단호하게 말했다. “시녀들이 그분들의 시중을 들어줄 테니 걱정 마시고 태상교주님께 다녀오세요. 자, 빨리 그리로 가세요.” 묵향은 비로소 마화의 눈에서 타협 불가능의 ‘고집’을 읽을 수 있었다.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올랐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녀는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았었다. 묵향은 피식 미소 지었다.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그녀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안녕하셨습니까?” “지금까지는 안녕하지 못했지만, 자네의 태평스런 얼굴을 보니 앞으로는 안녕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군.” “물론 그럴 겁니다. 이 기회에 아예 편히 쉬게해드릴까요?” 묵향의 손이 푸른 강기로 번쩍이는 것을 본 태상교주는 기겁을 하며 다급히 뒷말을 이었다. “말만이라도 고맙기는 하네만..., 노부는 현재 상태에도 만족한다네, 빨리 쉴 생각은 전혀 없어. 그건 그렇고, 어쩐 일인가? 설마, 돌아왔다고 노부에게 신고하려고 온 것은 아닐테고......” “물론이죠. 제 검을 가지고 계시다고 해서 찾으러 왔습니다.” “하여튼..., 쯧쯧” 태상교주는 혀를 차면서 소중히 간직해뒀던 묵혼검을 꺼내어 묵향에게 건넸다. 장인걸은 묵향을 없애기만 하면 자신이 교주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에 자신이 묵향을 없앤 증거로 묵혼검을 마교에 보냈다. 하지만, 장인걸에게 아들을 잃은 태상교주가 그것을 순순히 묵과할 리 없었다. 태상교주는 사자가 가지고 온 묵혼검을 보고는 그것이 가짜라고 일갈하며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장인걸의 사자가 이걸 가지고 왔었지. 하지만 이것 외에 딴 것은 온게 없었다네. 자니게 가지고 있나?” “아뇨, 몽땅 잃어버렸습니다만......” 뻔뻔스런 묵향의 대답에 태상교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허참, 교주의 신물인 묵룡패(墨龍牌)를 잃어버렸으니 어찌할꼬?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는 하루빨리 그것을 되찾아야 할 걸세.” 마교 교주에게는 두 개의 신물이 있었다. ‘화룡도(火龍刀)’로 십대마볍의 수위를 차지하는 마도(魔刀)였고, 또 하나는 한옥(寒玉)으로 만들어진 ‘묵룡패’였다. 화룡도는 묵향이 사용하지 않았기에 마교 내에 잘 간수되어 있었다. 하지만 묵룡패는 언제나 묵향이 지니고 다녔다. 교주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마교의 하급 무사들에게, 묵향이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도 묵룡패만 보여주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묵룡패는 또 다른 용도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인장(印章)의 기능이다. 교주의 인장이 필요한 공식 서류에는 바로 이 묵룡패를 이용한 도장이 찍혔다. 태상교주의 말에 묵향은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새로 하나 만들죠, 뭐.” “뭣이라고? 자네는 역대 교주들의 손을 거쳐 전해져 내려온 묵룡패를 뭐라고 생각하는 겐가? 묵룡패는 바로 본겨의 역사인 것이야!” 열이나서 펄펄 뛰는 태상교주에게 묵향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저는 교주의 힘이 그따위 옥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강자지존! 본교의 율법이죠. 힘이 있으면 교주가 되는 겁니다. 그따위 옥패를 가지고 있다고 교주가 되는 게 아니죠.” 가만히 들어보니 설득력이 있었다. 태상교주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크하하핫! 그렇군,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구면.”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패기 있게 걸어가는 묵향의 뒷모습을 보며 태상교주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내 살아생전에 마도 천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묵향교주, 자네라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어.” 묵향은 밖으로 나서며 중얼거렸다. “도장 하나 새로 파는 김에 잘 드는 비수도 하나 만들어야겠군. 쩝, 고개 썰어 먹는데는 그놈만한게 없었는데 말씀이야.” 묵향이 태상교주를 만나고 있을 때, 철영 부교주는 초조하게 수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수하가 도착하자마자 그는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래, 두 장로에게 연락을 전했느냐?” 수하는 난처한 듯 대답했다. “저......” “무슨 일이냐?” “두 분 장로께서는 이 일에서 손을 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교주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이었다면 부교주님께 충성을 다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고 하시면서......” 철영 부교주는 노기를 터뜨렸다. 그가 분노하자 대기가 함께 요동 치는 듯했다. 수하는 그런 상관에게 두려움을 느끼며 더욱 납작 엎드렸다. “아, 이런 망할 녀석들! 내 그놈들의 간뎅이가 그토록 작은 줄은 미처 몰랐구나. 좋다! 일단 교주를 처리하는 것은 본좌 혼자서 할 것이야.” 호기롭게 외치는 철영에게 수하는 주저주저하며 아뢰었다. “저..., 그런데 염왕적자 장로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그 일에 대해 교주님께 말씀을 올리셨답니다. 지금 고주님께 용서를 구하면 용서받으실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우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철영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뭐, 뭣이라고? 이런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사내라고 믿었건만, 어찌 그리도 입이 가볍단 말이냐? 내 그놈들을 사내라 믿고 함께 일을 도모한 과거가 후회스럽도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철영 부교주도 뒤가 켕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한동안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후, 중얼거렸다. “오냐, 좋다. 내 오늘은 용서를 구하겠다. 하지만 내 이 치욕을 결코 잊이 않을 것이야.” 이빨을 뿌드득 갈며 복수를 맹세하는 철영이었다. 흡성대법을 익히고 싶어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르티어슨 sehwjgl 참을 수 없다는 듯 시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봐, 뭐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시녀는 공손히 대답했다. “예, 하명하시옵소서.” “너 혹시 흡성대법이라는 무공을 알고 있느냐?” 그 말에 시녀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소녀는 미천하여 그런 뛰어난 무공을 익힐 수가 없사옵니다.” 아르티어스는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오, 그 말은 알고는 았다는 거로구나. 그걸 어디에 가면 익힐 수가 있느냐?” “소녀는 알지 못하옵니다. 하지만 한 번씩 여기 들르시는 냉비화녀 부대주님께 물어보시면 답을 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사옵니다.” “그래? 너 당장 가서 그 부대주를 데려오너라.” 잠시 후, 중년의 여인이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실내로 들어왔다. 확실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깅운은 시녀와 격을 달리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 혹시 흡성대법이라는 무공을 알고 있느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마화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묵향이 아르티어스를 대할 때의 태도로 봤을 때, 그가 얼마나 아르티어스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묵향에게 소중한 사람은 자신에게도 소중한 사람인 것이다. “예.” 마화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는 묵향의 전설에 대해 이야기꾼 노인에게 흡성대법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그것을 배우고 싶어 좀이 쑤셨던 것이다. “오오, 그래? 그거 어떻게 하면 익힐수 있지?” “아마, 마존무고(摩尊武庫)에 비급이 있을 겁니다. 업다면 수하들을 시켜 찾아보라고 이르겠습니다. 지금 필요하십니까?” “응, 그래. 될 수 있으면 빨리 가져다주면 좋겠구먼.” 몇 시진 후, 아르티어스에게 시녀가 다가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냉비화녀 부대주께서 이것을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르티어스가 급히 받아서 보니 흡성대법이라고 표지에 써져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음흉스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흐흐흐, 마로 이거야. 이거라구.” 아르티어스는 열심히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걸 나도 써먹어야지. 아들놈도 할 수 있는데, 나라고 못할쏘냐!’ 하는 마음으로 그는 열심히 비급을 읽어나갔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책을 집어던지며 신경질을 버럭 냈다. “이런, 제기랄! 이게 도대체 뭔 소리들인지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있어야 익히든 말든 할 거 아냣!: 아르티어스는 시녀를 노려보며 외쳤다. “도대체 그놈의 마존무고라는 데가 어디있느냐?” 엄청난 광기를 드러내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눈과 마주치자, 시녀는 사시나무 떨 듯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교의 상위급 고수들도 자주 접햅좠지만, 이 정도로 자신에게 위압감을 준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시녀는 재빨리 땅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처박은 후, 아르티어스 어르신께 마조무고로 가는 방법을 아뢰었다. 한동안 묵향으로서는 바쁜 시간들이 지나갔다. 중원의 각 성(省)에 분타를 하나씩 설립하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무림맹 쪽에서 마교의 확장을 눈치챈다면 방해 공작 내지는 정면 충돌까지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기에 이 모든 일은 비밀이에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마교가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중원 각지에 구축된 거점들과 주고받는 문서들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군사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사항들도 종종 발생하고 있었기에, 묵향으로서도 바쁜 나날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르티어스도 그 나름의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오옷! 이런 기가 막힌 수련 방법이 있었다니!” 지금 그가 탐독하고 있는 비금은 흑시마조(黑屍魔爪)라는 마교가 자랑하는 최강의 조법이었다. 물론 아르티어스에게 이것은 조법이든 장법이든 뭐 그런것으 srhkstla도 없었다.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오로지 그 엽기적인 수련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소의 뇌수에 손을 담근 후 익힌다고? 그런 다음, 2성 이상 익힌 상태에서는..., 2성이라는 게 뭔 소리지? 하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자고..., 그러니까 그때부터는 시체를 이용해야 한다 그 말씀이군. 시체에 손을 박아놓고 시독(屍毒)을 흡수한다...... 오! 이보다 더 흥미로운 수련법이 있다는 소리는 내 들어본 적이 엇어. 정말 기가 막히군. 그러니까 수련을 하기게 가장 알맞은 장소는 시독이 풍부하게 함유된 반쯤 썩은 시체를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는 공동묘지와 인접한비밀스러운 장소다.“ 성질 급한 아르티어스는 당장 흑시마조를 익히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급을 들고는 대전으로 달려왔다. 아르티어슨 s상기된 얼굴로 시녀에게 외쳤다. “여봐랏!” “옛!” 시녀가 달려나오자 아르티어스는 다급히 외쳤다. “소의 싱싱한 뇌수를 가져와라! 빨리!” 시녀가 달려간 후, 아르티어스는 싱글거리며 외쳤다. 그의 머리에는 자신의 단짝 친구 레드 드래곤 브로마네스가 떠오르고 있었다. “으하하핫! 브로마네스여. 네놈이 아무리 까불어도 나를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다는 걸 나중에 돌아가서 가르쳐주마. 내가 이렇게 기가 막힌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면 부러워서 죽으려 하겠지? 잠시만 기다리라구. 으흐흐흐” 아리티어스는 이 순간, 이런 재미있는 유희를 즐긴 사실을 필히 고향에 돌아가서 모든 드래곤에게 알려줘야 할 사명감마저도 느꼈다. 이런 흥미진진한 유희를 들려주면 모든 드래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만 해도 어깨가 으쓱해지는 아르티어스 어르신이었다. 이윽고 시녀가 뇌수를 가지고 왔다. 아르티어스는 뇌수 옆에다가 비급을 펴놓고는 비급의 내용을 힐끔거리며 수련을 시작했다. “먼저 뇌수에 손을 박고....... 으흐윽! 물끄덕거리는 감초깅 그야말로 예술이구먼. 그런다음 어디보자......” 헤벌쭉거리며 아르티어스가 비급의 뒷장을 넘겼을 때, 그의 안색이 흢사 똥이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도대체 이게 뭔 소리들이야?” 그 뒷장부터 복잡한 도식과 함게 말도 안되는 소리들이 복잡하게 쓰여 있었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 문구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공 비급이라는 것이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요한 대목은 일부러 어려운 말로 함추갷서 표현하거나 수많은 암호로 나열해놨다. 그렇기에 스승으로부터 그 뜻을 해석받거나 전수받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비급을 집어던지며 외쳤다. “이런 젠장! 이것도 그 모양이잖아. 좀 더 쉬운 책은 없는 거야?” 아르티어슨ㄴ 수건에 손을 쓱쓱 닦으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손만 버렸군.” 하지만 무공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아르티어슨 sEh다시 마존무고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취향에 걸맞는 뭔가 엽기적인 수련법이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손쉽게 익힐 수 있는 그런 비급을 찾아가는 것이리라. 마사코느 마교에 도착한 후, 그야말로 최상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영주들이나 입는 최고급 비단옷이 몇 벌씩이나 주어졌다. 그리고 간소하면서도 맛있는 식사. 처음 왔을 때는 자신의 입맛에 맞이 않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시녀에게 말하자 그 다음부터는 그녀가 원하는 식으로 요리된 음식이 나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마사코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끝냈다. 그녀가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때, 깨끗한 새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주 단순한 형태의 옷이기는 했지만, 비단으로 만든 것이어서 감촉이 너무다도 좋았다. 식사와 차를 즐긴 후 그녀는 언제나 대전 뒤에 만들어진 후원을 산책하기를 즐겼다. 처음 그녀가 후원으로 나왔을 때, 그 규모에 놀라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야마토의 정원은 아주 작고 아기자기한 맛을 풍기는 데 비해, 이곳은 대국답게 그 엄청난 규모라 사람을 압도하는 멋이 있었다. 마사코가 정원을 산채갛고 있을 때, 뒤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마사코가 뒤로 시선을 돌리자, 중년 여인이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중년 여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이곳은 교주님을 위한 정원이에요. 참 아름답죠?” “예.” “그분이 실종되신 후, 설무지 군사께서 만드신 거죠. 여기가 본교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일 거예요.”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중년 여인은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말을 들어보니 당신은 한족이 아니군요. 고향을 떠나 이 먼 곳까지 왜 그분을 따라오신 건가요?” “주군 따라가야 하는 것은 가신(家臣)의 의무라고 배웠습니다.”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걸 그분께서 원하셨을까요? 그 분은 오랫동안 먼 곳을 돌아다니셨던 분이에요.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떠도는 자의 고통을 알고 계신 붕이시죠. 아마 그분께서는 따라오지 말라고 하셨을 게 분명한데, 왜 따라온 거죠?” 마사코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밀무역을 원했던 후지와라 영주님의 명령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교주와 친분이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나, 그것만으로 이런 중요한 비밀을 털어 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뭐라고 대답을 하는 거싱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상대의 말이 들려왔다. “설마, 그 분에게 연정을 품었기에 따라온 것은 아니겠죠?” 그 말에 마사코는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아아, 이 여인이 교주의 부인 아니면 첩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당연히 내가 달가울 리 없겠지. 그래서 나한테 왜 따라온 거냐고 물은거였어.‘ 여인의 질투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괜히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느낀 마사코는 황급히 말했다. 그건 당신이 오해하고 계신 거예요. 저는 절대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강한 부정은 오히려 긍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마사코는 미처 하지 못했다. 기를 쓰고 부인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상대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분은 사람이 아니라 묵룡(墨龍)이세요. 여인이 사랑할 대상이 아니에요. 조금이라도 연정을 품고 있다면 버리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순간 마사코의 머릿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교차했다. 인간이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을 정도로 묵향은 강했다. 게다가 겉모습까지도 자유자재로 바꾸지 않는가. 아르티어스만 황금빛 나는 괴물인 줄 알았는데,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묵향도 괴물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묵룡이라니. 마사코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공포스러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왔다갔다하는 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에, 마사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녀의 침묵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즉 그것을 묵향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동안 가만히 마사코를 바라보던 상대는 미련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사코에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너무나도 험난한 길을 택했군요. 그 선택에 후회가 없기를 바래요.” 이윽고 정신을 차린 마사코는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상대를 향해 황급히 말했다. “잠, 잠깐만요.” 상대는 슬쩍 뒤도 달아서며 말해싿. “무슨 일이지요?” “저..., 어떻게 그런 일을 잘 알고 계시죠? 그러고 보니, 당신은 교주님과 아주 친하신 것 같더군요. 혹시,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서로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상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마화라고 해요.” “아아, 그러십니까? 저는 마사코라고 합니다. 당신은 그분이 묵룡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시는 모양이군요. 너무나도 존경스럽습니다.” 용과 사람의 사랑이라니...... 마사코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존경스럽다고 말하며 슬쩍 넘겨버린 것이다. 마화는 씁쓸한 미소르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사랑이라구요? 어떻게 사랑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겠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둘이서 하는 거예요. 나는 그분을 40년 가깝게 흠모해왔을 뿐이에요.” 40년이라는 말에 마사코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그분이 옆에 계시다는 것, 또 나를 여전히 아껴주신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은 나 하나로 족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거였어요. 그분은 그 어디에도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시죠. 주위의 모든 사람은 그분의 필요 여하에 따라 존재감을 부여받아요. 그런 상황에서 사랑이란 감정은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거예요. 사랑은 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마화의 말에 마사코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당신은 묵룡과 너무도 아픈 사랑을 하고 있었군요.‘ 묵향은 밀실로 은밀히 군사를 불러들였다. 밀실 중앙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커다란 중원지도가 놓여 있었다. 군사가 들어와 예를 갖춘 후, 묵향은 군사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놨다. “군사.” “예.” “배를 타고 서쪽으로 이동했더니 강소성에 도착했다면, 어디서 출발하면 그렇게 되겠는가? 자시들은 야마토라고 하던데, 나로서는 확실한 지명을 알지 못하겠다.” 잠시 궁리를 하던 군사는 이윽고 자신의 생각을 묵향에게 말했다. “강소성에서 동쪽이라면 왜국이나 고려일 것입니다.” “자기들 말로는 야마토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아마 왜극이 맞을 겁니다. 저도 고려 말을 조금은 알고 있는데, 고려를 야마토라고 읽지는 않습니다.” “왜국이라고?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묵향은 지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국과 무역을 하려면 어디쯤에다가 비밀 분타를 설립하는 것이 좋을까?” “왜국과 말씀이십니까? 무역을 시작하시겠다면 당연히 골의 벽란도와 가까운 상동이이 적격일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묵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왜국과 거래를 하는데 어째서 고려의 벽란도하고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하나?” 군사는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거야, 왜국과의 직거래가 불가능하니 그렇습니다. 모든 물품을 고려 상인에게 팔면 되는데, 그들이 1년에 수입하는 물량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워낙 이문이 큰 장사인지라 대상(大商)들이 그 물량을 독점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 시장을 파고들기는 아주 힘들겁니다. 그렇다고 무력을 동원하려고 한다면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는 무림맹과 출돌을 일으킬......” 설명이 길어지자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아아, 본좌는 관허무역이 아니라 밀무역을 하자는 말일세. 중개무역을 하는 고려를 통하지 않으니까 이문이 더욱 커질 게 아닌가?”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하지만 그 일대의 제해권은 고려수군이 잡고 있기에, 밀무역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거야 방법이 있을 거 아닌가? 예를 들면, 본국의 수군으로 가장한다든지......” “물론 최선을 다한다면 수군을 피해가는 것도 큰 문제는 안 될 겁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저희들과 교역을 할 대명(大名)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군사의 말에 묵향은 어리둥절한 듯 되물었다. “대명? 대명이 뭔가?” “그러니까 우리쪽 말로 하자면 지방 영주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아아, 다이묘 말이군.” 묵향의 말에 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알 필요 없지 않은가?“ “옛. 그러니까 우선 우리와의 밀무역을 원하는 대명을 포섭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국으로 사람을 보내어 밀무역을 원하는 대명을 무슨 수로 찾겠습니까? 거기다 왜놈들은 우리쪽과 사는 방식이 너무 틀려서, 협상 자체가 매우 힘듭니다. 만약 그게 쉬운일이었다면, 누구나 밀무역을 했겠지요.” “그건 다 본좌가 알아서 처리해주겠네. 자네는 밀무역을 할 비밀 분타나 사?립할 계획을 짜보게. 자네 생각에는 어디에다가 설립하는게 좋겠나?” “밀무역을 원하신다면 당연히 절강성(絶江省)쪽이 좋습니다.” “그래?” “예. 고려와 본국의 무역은 산동성에서 고려의 벽란도를 축으로 이뤄집니다. 또, 고려와 왜국과의 무역은 고려의 벽란도에서 왜국의 복강(福岡:후쿠오카)을 축으로 이뤄집니다. 이 삼국을 연결하는 주요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각국의 병선(兵船)들이 집중적으로 감시를 합니다. 그런만큼, 무역로와 인접한 강소성(江蘇省)도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거리가 좀 떨어지더라도 절강성 쪽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고 사료됩니다. 또, 고려쪽에서 거리가 많이 떨어지게 되기에 고려 수군의 순시선을 만나게 될 가능성도 거의 없고 말입니다.” “좋아. 그럼 절강성 쪽에 비밀 분타를 한번 설립해보게.” “옛” “최대한 기밀을 요해야 하는 만큼 자성만마대에서 무사들을 뽑아다가 배치하도록.” “존명.” 마교의 현재 상황에 대해 수하들과 장시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묵향에게 아르티어스가 다짜고짜 짜증 어린 어조로 질책했다. “아니, 너가 이럴 수가 있는 거냐?” “뭐가 말이에요.” “고생고생해서 여기까지 데려다줬더니 그 이후부터 애비를 홀대해? 요즘 네 얼굴 구경한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기나 하냐?” 지금 아르티어스는 짜증기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상태였다. 아들놈은 바쁘다고 놀아주지도 않고, 또 무공을 익힌다는 계획도 영 결과가 신통찮았다.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뭔 소린지 알 수가 없으니 배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더라 보니 잔뜩 욕구 불만이 쌓인 아리트어스가 사랑하는 묵향을 통해 위안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짜증스럽게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것도 다 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묵향이 살뜰한 말 한마디만 해줘도 그의 짜증은 순식간에 풀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아르티어스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것이었다. “심심하신 모양이죠? 옛날처럼 일거리 좀 드릴까요? 아버지 일 잘하시잖아요.” 돌아온 묵향의 대답은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나마 예전에 예쁜 여자애의 모습일 때는 그것도 하나의 매력으로 봐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커먼 사내놈 모습을 하고 있는 지금에서는 아르티어스를 더욱 짜증스럽게만 만들 뿐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노성을 터뜨렸다. “뭣이? 이녀석이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 “뭐긴 뭐예요, 아버지지. 시녀도 붙여드렸으니 지금까지처럼 혼자서 노시면 되잖아요. 내가 부하들한테 물으니 무공을 익히신다고 여념이 없으시다면서요. 왜요, 무공 익히는 게 잘 안되세요?” 갑자기 묵향이 아르티어스가 가장 찝찝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공격해 들어오자, 아르티어스는 움찔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르티어스는 버럭 신경질을 냈다. 지금까지 하나의 무공도 익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무척 자존심이 상해 있기도 했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이 애비를 뭐로 보고 그딴 소리를 하는 거냐? 골드 드래곤의 역사상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모르냐?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그놈의 무공이라는 걸 익혀서 보여줄 테니까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에구, 단순하기 그지없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군. 아무리 익혀보세요. 무공 익히기가 어디 쉬운 일인지...... 게다가 동기가 그렇게 불순한데, 아버지가 그딴 마공들을 익히시게 제가 그냥 가만히 놔 둘 것 같아요? 쯧쯧.” 아직까지도 아르티어스가 무공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수하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아르티어스가 찾는 무공은 그야말로 엽기적인 마공들뿐이었다. 중원에 도착해서 아르티어스가 떠든 말들을 기억하고 있던 묵향은 그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그걸 익히면 분명히 그 무공의 위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중원을 떠돌 것이 분명했다. 묵향은 지체 없이 수하들에게 엄명을 내렸었다. ‘아버지가 비급을 확보하도록 최대한 협조를 아끼지 마라. 단, lrmrjt을 익히는 방법은 절대로 알려주지 마라.’ 교주의 명령은 수하들에 의해 성실하게 이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아르티어스, 사고 치다 묵향은 몇 가지 서류를 검토하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랐는지 군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군사, 절강성에 만들고 있는 비밀 분타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묵향의 질문에 군사는 재빨리 대답했다. “예, 아무래도 배가 정박할 만한 선착장을 포함해야 하기에, 장소 물색에 애를 먹었습니다만 일단 쓸 만한 곳을 찾아냈습니다.” “흐음, 잘됐군.” “그런데, 모든 무역을 고려가 독점하고 있기에, 고려에서 수입한 상품들 중에서 어떤 것들이 일본으로 보내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조사하는 데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 조사해야 하는데?” “그야 당연히 이쪽에서 그들이 원하는 상품을 가지고 가야 거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쪽에 주문하고, 이쪽이 그에 맞춰서 물건을 장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고정적인 거래선을 마련한다면, 나중에는 주문을 받는 물건을 나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쉬운 대로 왜구들이 약탈하는 물건들도 조사하라고 홍진 장로에게 일러뒀습니다.” “아아, 그건 군사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묵향은 뒤쪽에 시립해 있던 마사코를 불렀다. “마사코.” “옛.” “군사에게 후지와라 영주가 필요로 하는 목록을 작성해줘라.” “옛.” “마사코가 주는 자료를 가지고 물품을 장만하게. 본좌는 후지와라라는 영주와 거래를 할거야. 그 영주의 영지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마사코가 잘 알 테니 그녀에게 물어보도록.” “오오, 벌써 거래 대상까지 물색해놓으셨습니까? 가장 좋은 물품만을 골라서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군사가 잘 알아서 하게.” “예. 거래대상이 벌써 정해져 있다면, 계획보다 빨리 첫 번째 무역선을 보낼 수 있겠군요. 그럼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군사는 신이 나서 나갔다. 왜국과 직거래를 할 수만 있다면 그 수입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관에 세금도 안 내는 밀무역이 아닌가? 어쩌면 밀무역만으로도 현재 마교 총 수입에 맞먹는 액수를 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요즘 들어 철영 부교주는 아주 기분이 안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묵향을 없애버리겠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설혹 기회가 왔다손 치더라도 감히 출수할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실수는 곧바로 자신의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그건 당연했다. “암습을 하는 데 좀 더 적합한 무공이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그는 마교 서열 100위 안의 고수들만 출입할 수 있는 천마보고(天摩寶庫)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던 도중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로 아르티어스가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런 젠장. 그래, 요렇게 하면 되나?” 그가 익히고 있는 것은 마교의 하급 무사들이 수련할 비급들이 보관되어 잇는 천동무고(天東武庫)에서 가져온, 가장 익히기 쉬운 초보자들을 위한 무공 입문서들 중의 하나였다. 이런 식으로 기초부터 시작하면 언젠가는 자신의 구미에 맞는 흥미로운 무공들을 익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아예 기초부터 익히기 시작한 아르티어스였다. 그는 약간 어설픈 자세였기는 하지만 찌르기와 발차기, 정권 등 가장 초보적인 권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역시 외가무공(外家武功)이라는게 딱 체질에 맞는군. 쉽기도 하고 말이야.” 한참 동안 권법을 수련하던 아르티어스는 잠시 쉬면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그녀석에게 조만간 무공을 익히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그걸 어떻게 만회한다? 예전에 둥루젠에서 했던 것처럼 마법으로 살짝 눈가림을 하면서 권법을 쓰면 속지 않을까?” 잠시 궁리해보던 아르티어스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그래, 그거야. 나는 왜 이렇게 머리가 좋지? 흐흐흐.” 그 다음은 연습만이 남아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주먹을 쭉 뻗자 은근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몇 번을 하면서 빛을 가감한 후, 아르티어스는 바로 이거라는 듯 즐거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법 그럴 듯 하잖아. 아무리 아들놈이라도 속을 수 밖에 없겠어.” 아르티어스가 이러고 있을 때, 철영 부교주가 그 근처를 지나가게 된 것이다. “저런 형편없는 무공을 펼치는 놈이 감히 어디서......?” 원래 이곳은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렇기에 철영은 그런 말을 했던 것인데, 가만히 보니 무공을 펼치는 자의 낯이 익었다. “누구지? 참, 그러고 보니 교주와 함께 들어온 녀석이로군.” 철영이 옆에서 주의 깊게 살펴본 결과, 무공 수위는 형편없음이 분명했다. 뭔가 번쩍번쩍 하면서 강기인지 검기인지 발산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 힘이 집중적으로 터져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펼치는 권법 자체도 하급 무사들이나 익히는 것인데, 그 자세 또한 영 어설프지 않은가. 그리고 권법을 펼치는 자는 70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주안술을 익혀 젊게 보이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아주 뛰어난 고수라면 육신의 노화를 억제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만 봐도 상대는 형편없는 실력을 갖춘 자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교주는 힘들고, 저놈이나 괴롭혀야겠군. 흐흐흐.” 원래 주인이 미우면 그가 기르는 개도 밉게 보이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철영은 슬그머니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갔다. “그것도 지금 무공이라고 펼치는 것인가? 그것도 사람의 출입이 많은 이곳에서...... 창피한 줄을 알아야지. 쯧쯧.” 은근히 속을 긁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한술 더 떠서 떠들어댔다. “뭐야? 남이야 무공 연습을 하든 달밤에 물구나무를 서든 네놈이 뭔 상관인데 그러냐?” 철영이 누군가. 마교의 부교주다. 그런 그에게 아무리 교주와 친분이 있는 놈이라고 해도 이런 되먹지 못한 폭언을 내뱉을 수는 절대로 없었다. 철영은 발끈해서 외쳤다. “뭣이? 네놈이 정녕 죽으려고 작정을 했단 말이냐? 감히 본좌가 누군줄 알고 그딴 망발을 내뱉는다는 말이냐!” “이런 제기랄! 안 그래도 되는 일이 없는데, 별 시덥잖은 녀석까지 와서 시비를 걸어? 너 한번 죽어볼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지만, 철영은 아직까지 손을 쓰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상대는 교주와 친분이 있는 자였다. 그를 건드린 것을 교주가 문책한다면 고스란히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손을 쓴다면? 그때는 반쯤 죽여놓고 교주에게 보고하면 끝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철영은 상대를 향해 욕설만을 날릴뿐이었다. “감히 교주의 위세를 믿고 본좌 앞에서 까불다니...... 네놈이 오늘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이런, 젠장! 너 오늘 한번 죽어봐라. 아들놈 수하라서 그냥 놔둘까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아르티어스는 곧장 자신의 주특기인 마법을 사용했다. 마법을 사용하는 상대와 싸우려면 상대가 마법을 쓸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그 대결에 있어 핵심이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마법을 사용하는 자와 싸워본 경험이 전무했던 철영은 그것을 몰랐다. “라이팅!” 그와 동시에 엄청나게 밝은 빛이 확 뿜어져나오며, 순간저긍로 철영의 시야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대책 안서는 마법 공격들. 불덩어리가 날아가기도 했고, 뇌전이 터져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가하는 주된 공격은 풍계마법이었다. 골드 드래곤은 원래 바람의 정령력을 지닌다. 그런 만큼 아르티어스가 가장 능숙하게 사용하는 마법 또한 바람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압축된 공기 덩어리는 쇳덩어리까지 잘라버리는 가공할 만한 위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상대하기가 까다로울 수 밖에 없었다. 철영은 자신이 지닌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이 해괴하기 그지없는 수많은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가한 대부분의 공격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이지만, 그것을 다 막아내고 있는 것을 보면 철영이 얼마나 뛰어난 고수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연속적으로 가한 수많은 공격을 상대가 깨끗이 막아냈지만, 아르티어스는 그것이 오히려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제법이로군. 흐흐흐, 역시 아들놈의 부하라면 그 정도는 돼야지.” 아르티어스는 순식간에 하늘 위로 치솟아올랐다. 이제 막 반격을 시작하려던 철영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떠졌다. “무, 무슨 경공술이 저런 것도 가능하단 말이냐?” 철영이 알고 있는 한 저렇게 사람이 하늘 위로 수직 상승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만 봐도 상대는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그런 자와 전력을 다해 싸우다 보면 누군가는 큰 부상을 입을 수 밖에 없다. 상대는 교주의 손님이다. 그를 적당히 손봐주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큰 상처를 입게 만든다면 교주에게 문책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가 도망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철영도 바라는 바였다. 하지만 곧 철영은 자신이 이렇게 넋놓고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싿. 상대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몸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흐르고 있는 엄청난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상대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공격을 준비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젠장! 어쩔 수 없구만. 죽어랏!” 철영의 검이 기괴한 초식을 그리며 움직이자, 그에 맞춰 그의 검에서 붉은 빛줄기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그 엄청난 빛다발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뻗어가 상대를 향해 직격했다. 쾅! 커다란 폭발이 있었지만, 그것은 상대의 몸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상대의 몸 주변에 다가가자 무슨 벽에라도 막힌 듯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철영은 이빨을 갈며 외쳤다. “으드드득, 이판사판이다!” 철영의 검이 부르르 떤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가 시전하는 것은 전설적인 무공들 중의 하나인 어검비행(御劍飛行)! 어기동검(御氣動劍)의 원리를 이용해, 먼저 기를 이용해서 검을 날리고 그 검을 시전자가 잠고 날아가는 비행술이다.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는 전설적인 경공술을 시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익힐 수 있는 상승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철영의 몸이 3장 정도 떠올랐을 때, 철영은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붉은빛을 뿜는 덩어리를 보고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악! 저, 저건 뭐냐?” 그 순간 철영은 어검비행을 포기하고, 호신강기를 극도로 끌어올려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쿠쾅! 그 순간 마교 전체를 뒤흔들 정도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사방에서 수많은 마교의 고수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혹여 정파 놈들이 침입한 것일 수도 있기에, 그들은 지체할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온 것은 묵향이었다. 시커먼 먼지가 가라앉으며, 대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잔해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주변의 전각은 폭발의 충격으로 반쯤 허물어져 있었고, 엄청난 구동이가 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구덩이의 한간운데에는 철영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무, 무슨일이에요?” 묵향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마교의 고수들은 하늘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천천히 하늘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약간은 겸연쩍은 듯 말했다. “그, 그게 말이지..., 원래 난 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거든.” “그런데요? 왜 저렇게 되어버린 거죠?” 아르티어스는 뒤통수를 매만지며 겸연쩍개 말을 했다. “그게 저놈이 옆에 와서 시비를 걸잖아. 나도 될 수 있으면 너를 봐서 참고 넘어가주려고 했었지. 그런데 그만......” 묵향은 아르티어스를 째려보며 이죽거렸다. “그으마안?” “싸우다 보니 신이 나잖아. 웬만한 거 가지고는 통하지도 않고, 그래서 그냥 한 방 날려버렸지. 그래도 너 같았으면 끄떡없었을 텐데, 즛쯧......” 묵향은 거의 반쯤 기절해 있는 철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따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를 저 모양으로 만들면 어떻게 해요? 저러다가 죽으면 아버지가 책임지실 거예요?” 갑자기 교주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 주위에 모여들었던 고수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저 노인을 묵향의 손님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건 그 아버지도 보통 고수는 아닌 모양이었다. 철영 부교주가 완전히 박살이 난 것을 보면 말이다. 마교 고수들은 새삼스레 노인을 쳐다봤다. 그리고 저마다 노인의 얼굴을 익히기 위해 자세히 관찰했다. 철영 부교주처럼 멋도 모르고 까불다가 저런꼴이 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을 향해 겸연쩍게 웃음이 지으며 말했다. “헤헤, 책임은 무슨...... 그냥 팔자려니 해야지.” “어이구, 내가 못살아! 빨리 치료나 해줘요!” “보아하니 생명엔 지장이 없는 것 같은데, 귀찮게 치료는 무슨......” 그 순간 묵향이 확 째려보자, 아르티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엉거주춤 철영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아르티어스의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한 번 붙어본 괄과 아들놈보다는 격이 한참이나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실력의 고수였다. 게다가 아르티어스가 낑낑거리며 해독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각종 수련법을 직접 익힌 놈이 아니겠는가? 저놈의 기억만 읽어버린다면...... “으흐흐흐흐......” 자신도 모르게 음흉스런 웃음이 새어나온 아르티어스. 찔끔하며 묵향의 눈치를 봤다. 다행이 아들놈은 웃음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철영에게 다가가서 치료마법을 걸며, 한편으로는 철영의 기억을 읽어들였다. 이해가 가지 않던 수없이 많은 부분이 한꺼번에 이해가 되었다. 각종 혈도라든지 운기조식을 통해 내공을 수련하는 방법, 무공 비급에 나와 있던 복잡하기 그지 없던 수많은 도식이 한 번에 풀리는 것을 느끼며 아르티어스는 광소라도 터뜨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느라 혼이 났다. 아르티어스는 숙소로 돌아가는 즉시 마화를 불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연공실이 하나 필요한데 말이야, 조용하고 커다란 곳이면 도욱 좋겠어.” 철영의 기억을 읽은 후인지라 대화하기가 매우 용이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수련을 할 만한 비밀스런 넓은 공간을 한번 찾아보라고 해야 했을 텐데, 연공실이라고 하니까 상대도 바로 알아듣지 않는가. 처음부터 아무나 잡고 기억을 읽어버려야 했다고 생각해보는 아르티어스였다. 마화는 잠시 생강해보는가 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 “연공실이라면..., 교주님 전용의 연공실이 있는데, 그걸 쓰시는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주님께서는 지금까지 그곳을 한 번도 이용하지 않으셨으니까, 문제될 것도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매우 기분이 좋은지 손바닥을 슬슬 비비며 히죽거렸다. “호오, 그래? 지금 바로 쓸 수 있나?” “아닙니다. 먼저, 수석장로님께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그래, 빨리 좀 해주게.” “예.” 마화는 수석장로를 찾아가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주화입마에 빠진 아르티어스 묵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서류들을 대충 훑어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군사가 뒤어 들어왔다. “큰일났습니다, 교주님!” 묵향은 짜증스런 오조로 외쳤다. “뭐냐?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야?” 군사는 다급한 어조로 보고했다. “섬서성에 분타를 설립하던 중에 본교와 화산파가 충돌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군사는 이 보고를 올리면 교주가 더욱 짜증을 내든지, 아니면 화를 낼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교주의 태도로 봤을 때, 오히려 그 사건을 반기는 듯 하다는 인상을 받고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오, 그러냐? 화산파라고 했어? 그래, 피해는 어느 정도나 되느냐?” “20여 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부상을...... 거기에다가 화산파에 잡혀간 자도 50여명에 이릅니다.” 그 말에 묵향은 다시금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했다. “에이, 뭐야. 그럼 전면전이 벌어진 것도 아니잖아.” 묵향이 이딴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으니 아예 한판 붙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군사는 교주에게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아, 예. 교주님이 걱정하실 만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현재 건설하던 것을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물색해서 그곳에다 섬서 분타를 다시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주님의 허락을 구하려고 찾아뵌 것입니다.” “화산파와 가벼운 출돌 한 번 일으켰다고, 건설하던 분타를 포기한다니 말이 되는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섬서성에 교두보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화산파와 다툼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거기에다가 화산파 뒤에는 무림맹이 있습니다. 아직 중원 전역에 거점 확보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림맹과 충돌하는 것은 시기 상조가 아닐는지요.” 가만히 듣고 보니 군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건 자네 말이 옳군.” “예. 그리고 화산파에는 현천검제(玄天劍帝)라는 화경에 오른 무서운 고수가 있습니다. 그가 장문인이 된 후 화산파는 급성장을 하고 있는데, 혹자들은 화산이 제2d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부러워할 정돕니다.” 군사는 자신이 행한 일에 더욱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묵향의 흥미를 끌었다. 묵향은 그 말을 아주 흥미롭게 들은 후, 호통쳤다. “아니, 겨우 화경의 고수가 무서워서 일을 그렇게 처리한단 말인가?” 묵향이 갑자기 화를 내자 군사는 쥐꼬리만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 놓았다. “예? 그게..., 화산파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무림맹이......” 묵향이 군사의 말을 자르며 호기롭게 말했다. “그건 말이 안 되지. 마도를 추구하는 우리가 뭐가 무서워서 움츠리고 있단 말이냐? 그 화경의 고수라는 놈은 내가 직접 처리해주마.” 묵향이 화를 낸 것은 이 말을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묵향에게 이번사건은 마교를 빠져나라가는 하늘의 계시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군사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그런 일에 부교주를 내보내는 것도 아니고, 몸소 나서신다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예? 하지만 교주님께서 직접 그러실 필요까지는......” “아, 괜찮아 괜찮아. 군사도 중원에 분타를 건설하느라고 바쁜데, 그런 작은 일 정도는 본좌가 처리해줘야지. 그리고 가만히 들어보니, 본좌가 그 일을 치러하는 것이 가장 좋겠구만.” 묵향은 이놈의 따분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어 그 일을 처리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군사는 묵향의 솔선수범에 감격하고 말았다. 하늘처럼 높으신 교주께서 이런 일을 친히 나서시겠다고 하니 감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군사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 그렇게 하실 필요까지는...... 게다가 그를 죽인다면 무림맹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묵향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쩔 건데? 내가 마공을 써서 놈을 죽일 것 같아? 가만 있자, 지금 무림맹주가 어느 파에서 나온 놈이라고 했지?” “무당파입니다. 교주님.” “좋아. 그럼 무당파가 자랑하는 태극혜검법(太極慧劍法)으로 두 조각을 내버리면 되겠네. 본교에 태극혜검이 있는 것을 본좌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 다음 죄를 무당파에 홀딱 뒤집어씌워버리는 거야. 어때?” 묵향의 말에 군사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오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 기회에 각 분타를 돌면서 본좌가 친히 그들의 노고를 치하해주면 수하들의 사기도 높아질테고, 그렇게 되면 공사 속도도 좀더 빨라지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교주님.” “본좌가 없는 동안 밀무역에 관계된 일들은 마사코에게 물어봐. 참, 그러고 바니 절강성 해안에 건설하고 있는 비밀 분타도 한번 둘러봐야겠군. 앞으로 본교에 막대한 수입을 제공해줄 곳인데, 빠뜨리면 안되겠지.” “교, 교주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아아, 괜찮아. 바야흐로 본교가 오랜 기다림을 끝내고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이때에, 높은 자리에 있는 자가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도 좋지 않겠나? 대신, 내가 없는 동안 군사가 모든 것을 잘 처리 해주리라 믿겠네.” 묵향의 믿음에 군사는 더욱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믿어주시다니...... 아마도 그런 믿음에 감격해서 아버지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묵향을 기다리며, 그 믿음에 보답하셨던 모양이라고 군사는 확신했다. “교주님, 속하는 결코 교주님게서 보여주신 믿음에 어긋나지 않도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여태까지 그랬듯이 모든 일을 군사에게 떠넘기고 도망칠 궁리레 여념이 없었던 묵향은 군사가 감정에 북받친 목소리로 충성을 맹세하자, 아무래도 양심에 찔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솔선수범하고 거리가 멀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묵향은 무뚝뚝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뭘 그런거 가지고 감격하고 그러나. 윗사람으로서 부하를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속으로 강호로 나갈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아버지하고 함께 가자고 해야겠군. 아버지도 아주 좋아할 거야.’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기거하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에 가셨느냐?” 교주의 물음에 시비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공손이 대답했다. “예, 나으리께서는 무공을 수련할 장소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냉비화 부대주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부대주님께서는 나으리의 설명을 들으신 다음 연공실 하나를 비워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화를 불러와라.” “예.” 시녀가 물러간 후, 마화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마화는 예를 올린 후, 질문을 던졌다. “교주님,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지?” “예. 오늘 저에게 무공 수련을 할 넓고 조용한 장소를 마련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주님 전용의 연공실을 쓰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죠. 교주님께서는 지금껏 연공실을 한 번도 이용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수석장로님께서도 흔쾌히 허락을 하셨기에 그곳으로 안내해드렸습니다.” “젠장, 또 무슨 엉뚱한 짓을 벌이려고 하는 거지?” 교주 전용의 연공실은 천마대전 지하에 있었다. 연공실에서 수련을 할 때가 가장 취약할 때이므로, 이곳의 경비는 특별히 삼엄했다. 마교내 고수들 중에서도 그 지닌 바 실력에 있어서 정점을 달리는 호법원의 고수들이 연공실의 경비를 담당했다. 평상시에도 그렇지만, 교주가 연공실에 들게 되면 경비의 규모는 더욱 강력해진다. 호법원에서 파견되는 고수의 수가 3배 이상 늘어날 뿐더러, 그 질에 있어서도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 파견된다. 묵향은 천마대전 지하로 들어가는 어두운 통로를다라 걸어 들어갔다. 통로 곳곳에는 기관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호법원의 고수들도 숨어 있었다. 이윽고 묵향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강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묵햑이 열려고 했지만안에서 잠겨 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쾅! 쾅! 문을 두드리자 뭔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냐?” 문 사이로 빼꼼히 몸을 드러내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묵향은 짜증스러운 어조로 질책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무공 수련한다. 왜?” “그러지 말고 같이 유람이나 가시죠. 퀴퀴한 냄새나 나는 지하에서 빈둥거리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지 않겠어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버럭 신경질을 냈다. “뭣이? 빈둥거린다고? 유람은 혼자 다녀와라. 나는 지금 바쁘니까 말이야.” 그런 다음 아르티어스는 철문을 닫아버렸다. 묵향은 지하 통로를 올라가며 중얼거렸다. “젠장, 기껏 생각해주니까. 어쩔 수 없지. 심심한데 초류빈이나 끌고 갈까?” 엄청난 속도로 경공술을 전개하며 달려온 무사는, 소나무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납죽 엎드리며 우렁차게 외쳤다.. “부교주님을 뵙습니다!” 잠시 후 퉁명스런 목소리가 무사의 앞에서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교주님께서 뵞자고 청하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초류빈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끼며 재빨리 물었다. “교주가? 무슨 일이냐?” “예. 화산파의 일도 처리할 겸 함께 강호에 나가시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전갈이 계셨습니다.” 그 말에 초류빈이 의아하게 바귀었다. “화산파의 일? 그게 무슨 말이냐?” 무사는 고개를 숙인 채, 화산파와 있었던 일을 상세히 아뢰었다. 그 말을 듣는 초류빈의 안색이 점점 찌그러졌다. ‘그러니까 교주가 지금 화산파를 박살내러 가는 모양이군. 그런 데는 혼자 갈 것이지 왜 나를 끌고 가려는 거지?’ 순간 초류빈의 뇌리에 묵향과 함께 화산파의 문도들을 도륙내고 잇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싿. 그래도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살육을 피해 도망치던 화산파의 제자 중 하나가 자신을 몰래 훔쳐보며 말한다 ‘저놈은 초씨세가의 초류빈이 아닌가? 저놈이 마교와 결탁했었다니! 이 사실을 빨리 무림맹에 알려야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초류빈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물론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자신을 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있다면,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복면을 쓴다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만약 자신이 쓰는 도법을 알아보는 놈이 있을 수도 있었다. ‘저 마두가 쓰는 무공은 분명히 초씨세가의 것이야. 초씨세가가 마교와 결탁했다는 말인가?’ 이런 식으로 전대도리 가능성도 있었다. 화산의 장무인은 화경의 고수. 거의 자신과 동급일 것이 분명했다. 묵향이 그를 처치해준다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그는 그런 귀찮은 일은 초류빈게게 시킬 것이 뻔했다. 그와 맞서 싸운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밑천을 다 꺼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초류빈이 지닌 무공의 원천이 초씨 세가의 도법임을 몰라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젠장! 빠져나갈 길이 없단 말인가?”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이러둥절해하는 무사의 대답에 초류빈은 아차 했다. 그는 짐짓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교, 교주님께는 본좌가 몸이 안 좋아서 따라갈 수 없으니 그리 아시라고 전해드리거라. 노부 대신 철영 부교주가 있지 않느냐? 그와 함께 가시라고 하면 되겠군.” “저..., 천리독행 부교주님께서는 지금 중상을 당하셔서, 함께 가실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그 말을 들은 초류빈은 갑자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 천리독행이 동행하기 실하도 했다가 그 꼴이 된 것은 아닐까? “중상을 당했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 혹시 교주가 그를......?” “그게 아니옵니다. ” 무사는 마교의 중심부에서 벌어졌던 일을 상세히 아뢰었다. 그 말을 들은 초류빈의 안색은 더욱 찌그러들었다. 교주도 괴물임에 틀림없지만, 그 교주의 아버지라는 작자도 그에 못지않은 게 틀림없었다. 극마의 고수를 그토록 박살을 내놓다니 말이다. “그래, 철영 부교주는 지금 어떻게 되었느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느냐?” “예. 의원의 말로는 초기 치료가 잘되었기에 두어 달만 몸조리 잘하면 쾌차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무사의 보고를 받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초류빈은 갑자기 무사를 향해 기습을 가했다. 엎드린 상태에서 당한 갑작스런 공격이었기에, 무사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혈도를 제압당한 채 눈만 되룩거리고 있는 무사를 향해 초류빈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초류빈은 축 늘어져 있는 무사를 어깨에 걸머지고 어디론가 모습을 감춰버렸다. 교주와 함께 강호에 나가 자신이 마교도가 된 것을 광고하고 싶지 않았던 초류빈은 도주를 결심했다. 물론, 평생 도망다니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교주는 아마도 몇 번 자신을 찾다가 열받으면 혼자 강호로 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때까지만 숨바꼭질을 하면 되는 것이다. 묵향이 유람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는 잔뜩 신이나 있었다. 그의 곁에는 마존무고에서 고르고 골라 가져온 엽기적인 무공 비급이 무려 8권이나 쌓여 있었다. “역시 처음은 흡성대법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 으흐흐흐.” 철영의 기억을 흡수한 것이 과연 큰 효과가 있었는지, 아르티어스는 비급에 기록된 내용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쉬운 걸 가지고 그렇게 헤매고 있었다니...... 자, 어디 시작 해볼까? 흐흐흐.” 아르티어스는 몸속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물론, 호비트의 경우 단전에서 마나를 배내야 하겠지만, 그래곤은 목에 있는 드래곤 하트에서 꺼내야 한다. 하지만 그 정도 융통성도 없는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고는 흡성대법의 구결에 따라 마나를 온몸의 혈도를 따라 움직인 직후에 벌어졌다. 물론 처음부터 조심스럽게 마나를 약간씩만 흘려보내 괜찮다 싶으면 좀 더 그 양을 증대시키는 신중함만 보였더라도 이런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급한 마음에 구결대로 대량의 마나를 한꺼번에 밀어넣었다.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을 대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후였다. 갑자기 온몸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극심한 고통에 아르티어스는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어어억!?” 갑자기 왜 이런 고통이 찾아온 것일까?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아르티어스의 뇌리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 었었다. 마공을 익히던 철영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 “으윽! 이것이 설마 주화입마?” 아르티어스는 흡성대법을 익힐 수 있다는 기쁨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아무리 드래곤이 사람으로 변신했다 하더라도 그 내부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에게 단전이 있다면 드래곤에게는 드래곤 하트가 있었다. 기를 저장하는 위치가 틀린 만큼 그 기가 움직이는 혈도 또한 위치가 틀리다.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기를 일주천시켰으니 당연히 주화입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사력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온몸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보ㄷ는 훨씬 차원이 높은 정신 체계를 지닌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의 손에 희뿌연 빛이 감도는 순간, 고통은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아르티어스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유지하며 일어섰다. “제, 젠장. 죽을 뻔했네.” 몸속에 들끓던 마나를 완전히 소멸시켜 위기를 모면한 탓에 온몸에 힘이 없었다.하지만 아직 드래곤 하트에 남아 있는 마나가 약간은 있었기에, 그는 천천히 연공실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한 글음 한 걸음 옮겨놓기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공실 중앙까지 온 아르티어스는 본체로 현신했다. 그러자 연공실 안은 거대한 골드 드래곤에 의해 꽉 채워졌다. 아르티어는 한껏 고개를 틀어 한쪽으로 돌돌 말고, 또 꼬리도 그런식으로 해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교주 전용의 연공실은 파괴적이기 그지없는 마공을 연성하는 장소인 만큼 대단히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골드 드래곤이 약간 비벼댄다고 해도 무너지거나 할 염려는 없었다. “제, 제기랄. 일단, 한숨 자면서 마나를 보충한 다음에 생각하자.” 거대한 골드 드래곤은 천천히, 하지만 끊임없이 대지로부터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고수를 몰라본 죄 기름 방울이 숯불에 떨어질 때마다 치직거리며 연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 숯불 위에서는 큼직한 토끼 두 마리가 소리를 내며 익고 있었다. 묵향은 토끼가 골고루 익도록 빙글 돌리면서 투덜거렸다. “젠장.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난 것가지는 좋은데, 갑자기 아버지가 보고 싶군. 이럴 때 같이 있으면 좋았잖아. 드래곤 주제에 무슨 얼어죽을 무공을 익히다고 야단이야. 그런거 안 익혀도 충분히 강하면서......” 맑은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 박혀 있고, 대기에는 조금씩 찬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묵향은 품속에서 술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신 후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초류빈 녀석. 심부를 보낸 녀석은 행발불명이고, 그놈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고...... 따라가는게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렇지, 감히 도망을 쳐? 본좌의 명령을 거역한 놈은 어떻게 되는 지 이 기회에 확살하게 보여주겠어.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는 놈이 없도록 말이야.” 다시 술 한 모금을 마신 후, 묵향은 토끼 고기를 약간 옆으로 돌렸다. “젠장, 생각할수록 열이 더 받는군. 어쨌든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나중에...... 그건 그렇게 배를 채운 다음에는 곧바로 사천분타로 가는게 좋겠군.” 이때, 숲 속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3명의 남녀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주위를 주의 깊게 살판 다음 묵향 혼자인 것을 확인하자 안심한 듯했다. 그들 중 한명이 부상을 당했는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것을 보고 함께 있던 여자가 말했다. “사형, 아무래도 지금 치료를 하는게 좋겠어요.” 여인이 치료를 시작하자, 잠시 그것을 지켜보던 사내가 묵향에게로 다가왔다. 사내의 옷을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지만, 상등품의 천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그는 묵향을 잠시 쏘아본 후 의심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주위를 주의깊게 살펴봤다. 사내는 묵향을 향해 정중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의 목젖은 군침을 삼키는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고, 시선을 숯불 위의 토끼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보시오, 토끼 한 마리만 파시면 안 되겠소? 아무리 봐도 혼자 먹기에는 양이 좀 많은 것같은데.....” 묵향은 흥미로운 듯 그들을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만약 그들이 묵향을 알고 있었다면, 묵향의 그 표정만 봐도 소름이 끼쳤을 것이다. 안 그래도 무료하던 참에 이게 웬 떡이냐 하는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가져가시오.” “고맙소.” 그는 아직 채 익지도 않은 토끼 한 마리를 꼬챙이세서 빼낸 후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때, 여인은 상처 입은 사내에게 금창약을 발라주고는 깨끗한 천으로 상처 부위를 감싸고 잇는 중이었다. “사매, 사형의 상처는 좀 어떤가?” “깊게 베이지는 않아쓰니 괜찮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지체하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따돌렸으니 약간 여유가 있을 거야. 그리고 저자는 숯불로 뭉근하게 토끼를 굽고 있으니, 발각될 우려도 별로 없어. 지금 좀 쉬어두자구.” 그들은 곧 토끼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는 것은 잊지 않았다. 3명이 먹기에는 양이 좀 적었는지, 뼈다귀 까지 훑어먹은 뒤 그들은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기력 회복에 운기조식만큼 좋은 것도 없으니까. 일각 정도 운기조식을 한 후, 그들은 다시 일어섰다. 그런다음 그들이 막 떠나려고 할 때, 뒤에서 무심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잊고 가는 거 업소?” 그들은 자신들이 앉아 있었던 곳을 휙 둘러봤다. 아무것도 흘린 것은 없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묵향을 다시 바라보자, 묵향이 퉁명스레 말했다. “토끼 값을 주고 가야 할 것 아니오?” 검은 든 무림인에게 토끼 값을 달라고 하다니, 배짱이 아주 좋은 놈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정파의 제자가 아닌가?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품속에서 전낭을 꺼내며 말했다. “얼마면 되겠소?” “은자 1냥.”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액수다. 은자 1냥이면 한 가족이 1년을 쓸 수 있는 돈이 아닌가? 사내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퉁명스럽게 말이 튀어나왔다. “농담하는 거요?” “나는 돈 가지고 농담해본 적이 없다네.” “그런데, 무슨 토끼 값이 그렇게 비싸다는 거요?” “이 밤중에 산속에 토끼를 잡아다가 구워 파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나? 그런 만큼 내가 부르는 게 값인 거야.” 사내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미친놈이었군.” 그는 동전 몇 개를 꺼내 묵향에게 던진 후,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싿.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그들의 몸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땅 바닥에 푹 쓰러져버려싿. 상대가 무슨 수를 썻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혈도를 제압당한 것이다. 하지만 아혈은 제압당하지 않았는지 목소리를 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헉! 어, 언제 혈도를 제압당했단 말인가?” “젠장. 이보시오, 제발 혈도를 풀어조시오. 우리는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이오.” 묵향은 천천히 다가와서 각자의 품속을 뒤져 전낭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돈을 꺼내어 이리저리 세보더니 중얼거렸다. “호오, 제법 돈이 많구면. 모두 합해 은자 5냥 정도 되겠어.” “전젱, 돈을 가졌으면 혈도를 풀어주시오.” 애처롭게 사정하는 데도 불구하고 묵향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렇게는 못하겠는데? 자네가 약속을 어겼기 대문에, 토끼 값이 은자 10냥으로 늘어나버렸거든. 아직 5냥이 모자라는 셈이지.” 묵향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불가로 돌아간 다음 이리저리 토끼 고기를 찔러본 뒤 중얼거렸다. “이제야 다 익었군.” 저 뒤쪽에서 사정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나직한 목소리로, 묵향이 마지막 뼈다귀를 훑어먹고 내려놓을 때쯤에는 간청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묵향을 설득하기 위해 정중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어디의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혈도 좀 풀어주시오. 우리는 대진문의 제자들이오. 나머지 은자 5냥은 대진문에 도착해서 드리면 안 되겠소?” “......” “지금 시간이 없단 말이오. 우리를 뒤쫓는 것은 극악무도한 마교놈들이오.” “......” “당신도 무림인이라면 우리를 좀 도와주시오. 우리는 강호행을 하던 중 우연히 마교 놈들이 발호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알리러 가던 중이었소. 제발 좀 도와주시오.” 그래도 상대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묵묵부답이었다. 안 그래도 위급한 때에 이런 식으로 잡혀 있다니, 게다가 상대에게서는 단 한마디의 반응도 없고...... 이제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인지 묵향을 향해 고함을 빽 질렀다. “야, 이 개자식아! 뭐라고 말 좀 해보란 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묵묵부답. 오히려 거기에 한술 더 떠 나무등걸에 기대어 잠을 청하려는 모스까지 보였다. 그게 더 그들의 울화를 돋웠는지, 이들은 아예 이성을 잃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분기탱천한 그들의 머릿속에는 상대가 자신들보다 뛰어난 고수라는 생각 따위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횃불을 밝히며 흑의를 입은 무리들이 도착했을 때쯤, 대진문의 제자들은 얼마나 고함을 절러댔는지 쉰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욕설의 질은 더 한층 강회된 것이었다. 한밤중에 질러대는 고성은 낮의 그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퍼져가게 마련이다. 흑의인들은 이 근처에 도착해서 그 소리를 듣고는 곧장 달려올 것이었다. 흑의인들은 대진문의 제자들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힘칫 놀란 듯했다. 그들로서는 대진문의 제자들이 왜 그런 꼴이 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진문의 제자들은 흑의인들이 도착하자, 힘칫 놀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체념한 듯 두 눈을 감았다. 혈도까지 제압당한 상태니, 도저히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다. “저자는 누구냐?” 흑의인들 중의 한 명이 금방 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스 일어서는 묵향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나머지 흑의인들이 묵향을 둘러쌌다. 모두들 휴대하고 있던 병장기를 묵향에게 겨눈 것을 보면 증거 인멸을 하려는 것임이 확실했다. 묵향은 품속으로 손을 넣어 작은 옥패 하나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딴건 얘기해줄 필요가 없겠교, 이게 무너지 알겠나?” 그것은 묵향이 마교에 도착한 후, 잃어버린 묵룡패를 대신해 제작한 흑룡패(黑龍牌)였다. 그것이 제작된 후, 마교에 속한 모든 제자에게 그 형상과 모양에 대한 자료가 자세히 알려졌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놔야 나중에 착오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멀뚱한 표정으로 묵향을 바라봤지만, 처음에 말을 꺼냈던 흑의인은 그것을 알아본 듯했다. 그의 눈은 복면을 쓴 상태였기는 하지만 커다랗게 부릅떠져 있었다. 가는 기겁을 해서는 땅바닥에 머리를 쳐박듯 엎드리며 외쳤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묵향은 대진문 제자들의 옷에 나 있는 검로의 흔적을 보고, 그들이 마교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묵향은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는 생각을 했고, 수하들이 올 때까지 그들을 잡고 장난을 쳤던 것이다. 상관의 모습을 본 수하들은 지체 없이 땅에 고개를 처박으로 따라 외쳤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그것을 본 대진문 제자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핏기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졌다. 마교 교주라니? 이것은 그야말로 이리떼를 피해 호랑이 아가리를 향해 멋도 모르고 달려든 꼴이 아닌가. 묵향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너, 이리와봐.” “옛!” 지명당한 자는 땅바닥을 옆드린 채 엉금엉금 기어 묵향 앞에 도착했다. 묵향은 그의 뒤통수를 갈기며 말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길래 저런 놈들이 숲 속을 돌아다니는 거냐?” “소, 송구하옵니다. 놈들의 무공이 원체 높아......” 분타 건설 현장을 경비하고 있는 무사들의 무공 수위가 대체적으로 낮았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쯧쯧, 이런 놈들을 믿고 일을 맡기고 있었다니......” 그는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려 외쳤다. 그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부디, 용서해주시옵소서!” 묵향은 대진문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저놈들은 어쩔 거냐?” “분타를 건설하는 것을 훔쳐본 놈들이옵니다. 모두 다 척살하라는 지시가 있었사옵니다.” 잠시 궁리하던 묵향은 그에게 지시했다. “뭐, 죽일 필요까지는 없고...... 분타가 건설될 때까지 어디 가둬뒀다가 나중에 풀어줘.” “지시대로 행하겠사옵니다.” “지금 저놈들을 죽여버리면 은자5냥을 손해보잖아.” 엉뚱한 교주의 말에 흑의인들의 우두머리는 순간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예?” 묵향은 흑의인들을 따라가서 사천성 분타주를 만났다. 그는 묵향의 모습을 보자마자 기겁을 해가지고는 머리를 땅바닥에 쿵쿵 찍어대는 아부의 극치를 보여줬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놓친 자들을 교주가 잡아줬다는 것을 알고는 시퍼렇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제, 제발 용서를......” “이봐, 총단에 연락을 넣어서 각 분타에 실력 있는 고수 서너 명씩만 지원해주라고 군사에게 알려라.” “옛.” “지금은 아직 분타가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일까지 책임을 물어 분타주들 목을 벨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앞으로는 좀 더 보안에 신경을 쓰도록 해라.” 분타주는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외쳤다. “충, 충성을 다하여 존명을 완수하겠나이다!” “그리고, 나중에 분타가 완전히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놈들은 놔줘라.” “예?” “대진문에 연락을 넣어 그놈들을 살려줄 테니 은자 5냥을 내놓으라고 해. 그런다음 대진문에서 돈이 도착하면 그놈들을 풀어주라구. 알겠어?” “옛.” 대답은 했지만 분타주는 궁금증을 참기 어려웠는지 교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겨우 은자 5냥입니까? 100냥쯤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그놈들이 본좌한테 빚진게 은자 5냥이니, 그것만 받아. 알겠나?” “옛!” “오면서 보니까 공사는 꽤 순조로운 것 같더군. 고생이 많았겠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묵향은 사천성을 지나 섬서성으로 들어왔다. 일단 섬서성에서 일어난 일은 급히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화산파를 잠잠하게 만들어놔야 공사를 재개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반나절 동안 계속 달려온 묵향은 허름한 객잔이 하나 보이자 곧장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의 경우 경공술을 시전하기에 알맞도록 산길을 주로 애용했으므로, 객잔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서 옵쇼.” 역시 겉에서 본 만큼이나 허름한 객잔이었다. 묵향은 자라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오리탕 한 그릇. 그리고 술을 내오너라.” 점소이는 먼저 엽차를 가져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간단한 소채와 함께 술을 가지고 나왔다. 음식이 만들어지려면 시간이 약간 필요했기 때문이다. 묵향은 술을 따라 천천히 마시며 주위를 둘러봤다. 완연한 봄이어서 그런지 객잔 안은 파리들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묵향은 소채에 앉으려고 윙윙거리는 파리를 내쫓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법 괜찮은 객잔을 고른 모양이군.” 중원은 원채 넓은 곳이라 치안이 형편없는 곳이 많았다. 특히 이런 외진 곳에 위치한 객잔들의 경우, 손님이 먹을 음식에 독약을 탄다든지 수면제를 타서 먹이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뻗어버린 손님의 물품을 강탈하는 데는 아주 좋은 방법이 아닌가? 더군다나 수면제를 목은 손님을 아예 해부해서 인육 요리를 만들어 파는 객잔까지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도는 형편이었다. 그런 만큼 객잔 안에 파리가 왕성하게 서식하고 있다는 것은 음식이 그만큼 안전하다는 반증이었다. 이때, 객잔 문이 열리며 중년 여인과 아리따운 묘령의 아가씨가 객잔 아능로 들어서싿.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챙이 넓은 모자에다 면사까지 끌어내려 자신들의 얼굴을 감추고 잇엇다. 그리고 아가씨의 허리에는 값비싸 보이는 장식을 한 장검이 매어져 있었다. 그녀는 허름하기 그지없는 객잔을 두리번 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서 옵쇼~!” 점소이의 환대와는 달리, 그녀는 중년 여인에게 짜증 어린 어조로 조잘거렸다. “사부님, 딴 데로 가면 안 될까요? 이곳은 너무 지저분해요.” “이 근처에 객잔은 이곳밖에 없다. 자리에 앉자구나.” 아가씨가 사부라고 부른 중년 여인은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객잔에 앉아 있는 손님이라고는 묵향뿐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술쩍 묵향을 봤을 뿐이었지만, 아무래도 뭔가 미심쩍은 것이 있는지 묵향을 지그시 바라봤다. 점소이에게 간단한 음식을 주문한 후, 할 일이 없어진 아가씨는 사부에게 나직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사부가 저쪽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사내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글세...... 왠지 낮이 익은 것 같은 얼굴이기는 한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제자는 묵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시큰둥한 어조로 이죽거렸다. “흔해빠진 인상이라서 그렇겠죠. 눈썹도 굵고..., 전체적으로 선이 굵게 생겼다는 것 말고는 특징이 없는 얼굴이잖아요. 그렇게 미남이라고 할 수도 없구요.” “그럴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제자에게 전음을 날렸다. <그의 손을 한번 봐보거라. 그런 다음 그의 직업이 뭔지 생각해봐.> 제자는 사부가 시키는 대로 상대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내의 손은 백어(白魚)와 같이 하얗고 투명했다. 도대체 무슨 직업에 종사하면 저렇게 계집애같이 예쁜 손을 가지게 될까? 선천적으로 타고났다고 해도, 남자의 특성상 예쁜 손을 유지하기는 대단히 힘들다. 선비집안에서 태어나 아무리 궂은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무공을 연성한 경우였다. 제자는 재빨리 시선을 탁자 밑으로 향했다. 역시 그의 허리에 작은 검이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검신이 살짝 휘어진 것으로 보아, 극도의 쾌검술을 익힌 것 같았다. 그는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상대가 무림인일 걸 알고, 제자는 사부에게 전음을 날렸다. 하지만 상대가 전음 정도쯤은 언제나 엿들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무림인이었군요. 쾌검을 익힌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무공을 익힌 것 같지는 않은데요? 정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태양혈이 솟아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그것 때문에 그를 살표보고 있었던 거란다.> 이때, 점소이가 묵향의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묵향은 입맛을 다시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객잔에 들어설 때만해도 음식의 이상 유무를 알려주던 파리떼는 이제 더 이상 아군이 아닌 그를 귀찮게 만드는 적군으로 바뀌어 있엇따. “젠장,귀찮아 죽겠군.” 묵향은 젓가락 하나를 잡고는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오리탕 주변을 맴돌던 파리들이 이리저리 튕거나가기 시작했다. 내공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렇게 빠른 속도로 휘두른 것도 아니었는데, 파리들은 마치 젓가락을 쫓아와 두들겨 맞는 것처럼 보일지경이었다. 한 대씩 두들겨 맞고 죽은 파리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붕붕거리며 귀찮게 굴던 파리들이 사라지자, 묵향은 그 젓가락을 여펭 놔두고 새로운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묵향이 보여준 한 수를 경탄 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제자는 놀랍다는 듯 사부에게 전음을 날렸다. <정말 대단했어요. 어떻게 내공도 쓰지 않고 파리를 저렇게 잘 잡죠?> <글쎄다. 파리의 움직임을 예측했다고 밖에는 볼수가 없구나.> 이때, 엽차를 한 모금 마시려던 제자의 안색이 확 찌그러들었다. 자신의 찻잔에 죽은 파리 한 마리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벌떡 일어서며 노기에 찬 dmajd으로 뾰족하게 소리쳤다. “이봐, 너 일부러 그랬지? 지금 시비 거는......” 이때, 사부가 제자를 제지했다. “가만히 앉아 있거라.” 울분을 삼키고 있는 제자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녀는 묵향을 향해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고인께서 식사하시는데 저희들이 실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으니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제자는 사부의 언동에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잘못은 저쪽이 했는데 왜 이쪽이 숙이고 들어간담 날인가? 상대는 그녀들 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고 오리탕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상대가 뭐라고 말은 안 했지만 그것을 용서한다는 뜻으로 스승은 해석했다. 만약 진짜 심통이 났다면 검을 빼들든 했을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스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 앉았다. 스승은 손을 들어 자신의 찻잔을 가리켰다. 스승의 손짓을 따라 제자의 눈이 스승의 찻잔 쪽으로 돌아갔다. “헙!” 제자의 눈은 휘둥그레져싿. 그도 그럴 것이 스승의 찻잔 안에는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10여마리가 넘는 파리가 둥둥 떠 있었다. 1마리를 어떻게 찻잔 속에 떨어뜨리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많은 파리를 한순간의 젓가락질로 한 지점에 쳐넣는다는 것은 신기에 가까운 실력이었다. 스승은 찻물을 손가락에 찍어 탁자 위에 글을 썼다. <상당한 실력의 고수가 아니라면 절대로 이렇게 할 수 가 없다.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니, 그 무공의 깊이를 측량할 수가 없구나.> 그 이후, 스승과 제자는 내뱉는 숨소리까지 조심하며 쥐죽은 듯 앉아 있었다. 음식이 나온 후에는 먹는 소리마저 크게 날세라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상대에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원래 이렇게 조심해야만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 그 순간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묵향은 식사를 마친 후, 탁자 위에 동전 몇 개를 나뒀다. 그런 다음 저쪽 구석에 앉은 여인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객잔을 나가버렸다.. 제자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푹 내쉰 후, 혓바닥을 쏙 내밀며 중얼거렸다. “긴장 돼서 죽는 줄 알았어요.” 스승은 나직한 어조로 제자에게 말했다. “강호를 떠돌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되겠지. 하지만, 자심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와 맞서는 실수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도니단다. 외모만으로 상대의 실력을 평가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오늘 깨달았겠지? 너도 고수를 알아보는 안목을 좀 더 키워야 할 필요가 있겠구나.” “가슴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제자는 스승에게 고개 숙여 감사한 후, 잠시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부님,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군가요? 설마, 반로환동의 고수는 아니겠죠?” 제자의 말에 사부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거기까지 생각했다니, 참으로 대견하구나.” 그 말에 제자는 경악감을 감추기 어려운 듯 뽀족한 목소리로 외쳤다. “예에? 진짜 반로환동의 고수였다구욧?” 그 말에 사부는 빙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나도 그 가능성을 생각해봤었다는 말이지. 그가 파리를 잡을 때, 젓가락이 흘러가는 길을 봤단다.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높은 수준의 검로를 밟고 있더구나. 그런 사람이 저렇게 젊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주안술을 익혔거나 반로환동이겠지.” 묵향 사형 아니십니까 묵향은 엄청난 속도로 경공술을 전개하여 산을 넘고, 들판을 달렸다. 가급적 빨리 화산파에 도착해서 일을 마무리지을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저녁 나절쯤 화산 근처에 eckr한 묵향은 일단 허기를 달래기 위해 객점을 찾았다. 저녁 식사를 배불리 한 후, 그는 방을 하나 잡아 간단하게 목욕을 했다. 묵향은 품속에서 서책 한 권을 꺼냈다. 책에는 장중한 문체로 ‘태극혜검법’ 이라는 제목이 쓰여져 있었다. 물론 이것은 진품이었다. 과거 마교의 고수들이 무당파의 본거지를 털고 노획한 무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가지도 무당파에 태극혜검법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 그 검법을 익힌 고수가 살아남았던 모양이다. 묵향은 꼼꼼히 서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검법으로 놈을 업애려면, 우선 검법을 익혀야 할 테니까 말이다. 비금을 앞에서 끝까지 쭉 한 번 훑어본 후, 묵향은 잠시 명상에 잠겼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묵향의 머릿속에는 태극혜검법의 전반적인 초식의 전개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묵향은 눈을 번쩍 떴다. “제법 쓸만한 검법이로군.” 묵향은 창가로 걸어가 화산을 바라봤다. 화산은 중원오악(中元五嶽)의 하나로 꼽힐 만큼 높고 험준했다. 산이 깊고 수려하다 보니 자연 외부인의 출입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곳에 화산파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인데......” 묵향은 화산 장문인을 어떻게 없애버리느냐를 가지고 궁리하기 시작했다. 원래 암습을 한다면 장문인이 혼자 떨어져 있을 때, 혹은 그 주위에 사람이 별로 없을 때 하는 것이 최고였다. 그 편이 그를 처치하기가 편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화산 장문인이 제법 강하다고 해도 묵향의 입장에서 봤을때 그건 강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가서 죽여버린 다음 탈출해도 충분할 텐데, 괜히 그놈의 행적을 조사한다고 시간을 낭비할 팔요가 있을까? 한참을 생각하던 묵향은 침상 옆에 놔뒀던 검을 집어들며 중얼거렸다. “시간을 끌 필요가 뭐가 있겠어.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이 네놈 제삿날이다.” 보름달이 떠올라 주위가 환한 가운데, 화산파의 담장을 넘는 시커먼 인영이 있었다. 이렇게 밝은 보름밤에 침입을 하는 것은 모두들 금기로 삼는다. 왜냐하면 너무 밝기에 금방 자신의 행동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의 얘기고, 묵향 같은 고수에게는 그 어떤 장애도 될 수 없었다. “저곳인가?” 목표물은 현 화산의 장무인. ‘용하게도 화경에 올랐다마는, 네놈은 상대를 잘못 고른 거야.’ 묵향은 품속을 뒤적여 두건을 꺼내 뒤집어쓴 다음, 장문인의 처소를 향해 몸을 날렸다. 화산 장문인은 아직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그는 읽고 있던 서책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허~, 오늘따라 왜 이리 가슴이 뛰는고? 참으로 이상하도다......” 이때, 뭔가 이상한 기척이 그의 미세한 감각에 잡혔다. 화경의 경지에 이른 후 그의 감각은 그전보다 월등하게 발달해 있었다. “응?” 그가 눈길을 돌렸을 때, 그곳에는 복면을 쓴 괴한이 서 있었다. 이렇게 늦은 밤중에 좋은 일로 찾아온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자객인가?” 하지만 장무인은 곧이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객이라면 벌써 기습적인 공격을 가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는 아직까지 검조차 뽑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상대할 것인가? 자신의 이목을 숨기고 이곳까지 들어온 놈이다. 자신이 아무리 화경을 깨달았다고 하나, 아무래도 검이 없는 상태에서 상대하기에는 벅찬 놈인 듯 싶었다. 그렇기에 장무인은 상대의 눈을 노려보며, 상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필요가 있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때,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뽑을 여유를 주겠다.” 복면에 가려 상대의 얼굴은 볼 수 없으나, 그의 눈에는 강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걸 보면 뭔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혹시 검을 가지러 가는 그 순간을 노리는 것인가?’ 장문인은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감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 놀라운 자신감이로다.” 장문인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하여 좌대(座臺)로 다가갔다. 좌대 위에는 두 자루의 검이 놓여 있었다. 위쪽에 놓여 있는 고색창연한 보검은 장문인이 되며 물려받은 화산파의 신물이었다. 그리고 아래쪽에 놓여 있는 평범해 보이는 검은 자신이 줄곧 써왔던 그의 애검이었다. 장무인은 슬쩍 뒤로 손을 뻗어 좌대의 위칸에 놓여 있는 보검을 집어 들었다. 스르르릉. 자신이 얼마나 좋은 검인지 증명이라도 하듯 보검은 투명할 정도로 맑은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뽑혀나왔다. 화산파 무공의 주축은 검법이었다. 물론 권법이나 조법, 장법등이 있었지만, 그것은 보조적인 무공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일단 검이 자신의 손에 쥐어지자, 화산파 장문인의 눈빛이 변했다. 그의 몸 구석구석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장문인은 자객에게 검을 겨누며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지나친 자신감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가르쳐주겠노라.” “호오, 검을 드니까 자신감이 생기는 모양이지?” 상대가 전혀 긴장감을 가지지 않은 것이 의외라는 듯 잠시 상대를 바라보던 장문인은 자객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노부에게 검을 들게 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순간, 안 그래도 엄청난 예기(銳氣:날카로운기운)를 흘리고 있던 보검에서 푸른 빛줄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화경을 증명하는 무공, 어기충검(御氣充劍)이 보검에 사용되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장문인이 격돌하는 순간, 상대는 언제 뽑아들었는지 검을 들고 그에 대용했다. 두 고수의 검이 흘러가며 검강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장문인은 화산파 최고의 검식들이라 할 수 있는 구궁반청검법(九宮反天劍法)과 무극태을검법(無極太乙劍法)을 절묘하게 섞어가며 공격해왔다. 쌍방이 뿜어낸 검강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장문인이 기거하던 처소를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사방에서 화산파의 문인들이 검을 뽑아들고 벌떼처럼 쏟아져 달려왔다. 장문인의 처소가 박살난 후, 그 잔해를 뚫고 두 인영이 튀어나왔다. 장문인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태극혜검이란 말인가? 그런데 어찌하여 무당파에서......” 묵향은 장문인의 말에 일부러 주위 사람들 들으라고 냉혹한 어조로 외쳤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해놔야 더욱 무당파가 의심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헛소리!” 그리고 또다시 두 고수는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결이 시작된 이후부터 장문인의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의문이 솟아올랐다. 왜 상대는 무당파의 비전 검법인 태극혜검을 쓰는가? 암습을 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나온 이유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딱히 괜찮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자가 태극혜검법을 사용해서 무당파와 자신을 이간질하려는 것인가? 하지만 그 가정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었다. 태극혜검을 이토록 깊이 깨우친 자가 무당에서 수련한 검수가 아닐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극혜검의 경우 극소수의 제자만이 익히는 비전절기가 아닌가. 평생 동안 태극혜검을 익힌 무당의 검객들도 저토록 완벽하게 태극혜검을 구사하는가. 상대가 무당에서 자신을 암습하기 위해 파견한 검수라는 가정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허점이 있었다. 처음부터 정면 대결을 할 이유도 없었지만, 무당의 검법을 대놓고 쓸 리도 없었다. 태극혜검을 쓴다는 것은, 아예 대놓고 자신이 무당파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이때, 장문인의 뇌리에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현재 무림맹의 맹주는 무당파가 낳은 전설적인 고수 태극검제였다. 그리고 그가 자랑하는 절기는 태극혜검이었다. 오죽하면 그의 명호가 태극검제겠는가. 그렇다면 그가 비밀리에 키운 제자가 화경을 깨달았다고 치고, 그 제자의 실력을 시험도 할 겸 외부의 고수와 대결을 붙인 것이라면? 그 가정에도 약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가정돌보다는 허점이 작았다. 장문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것이었군. 하지만 노부와 화산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다는 말인가? 네, 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준 후 맹주에게 따질 것이다.” 일단 생각이 정리되고 나자, 장문인은 괴력을 발휘하고 시작했다. 모든 잡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자마자 그가 지금껏 구사한 것 중 최고의 검식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수백 초식이 헐러간 후, 묵향은 뭔가 일이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산 장문인의 실력이 자신의 예상을 훨씬 초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의 본신 무공을 사용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태극혜검만을 사용하여 그를 처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벼락치기로 대충 익힌 검법으로, 화경의 고수를 꺾어야 한다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냥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죽여버린 후, 시체에다 대고태극혜검의 흔적을 남겼어야 했다. 하지만 묵향은 지금껏 그런 식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뛰어난 상대에게는 그만큼의 대접을 해준 무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대는 자신보다 무공이 훨씬 떨어지는 놈이었다. 게다가 비무장이었다. 그런 놈을 향해 암습을 가한다는게 너무나 찝찝했다. 그리고 여기에 오기 전까지 묵향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지내는 따분한 생활만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화끈한 싸움을 하고 싶었다. 게다가 이쪽은 태극혜검법만을 써야한다는 제약 사항까지 붙어 있으니, 꽤 괜찮은 대결이 되지 않겠는가? 저런 괜찮은 상대를 그냥 죽여버린다는 것은 너무나도 아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묵향은 상대에게 검을 뽑게 해줬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제길!” 처음에는 그냥 태극혜검으로 놈을 황천으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게 여의치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도망친 후 다음 기회를 노린다는 것도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상대의 몸에 남을 흔적, 즉 마지막 일격만 태극혜검으로 하기로 생각을 바꾼 것이다. 순간적으로 상대의 검식이 바뀌었다. 검로의 틀을 깨고, 완전히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상대의 검이 그리는 궤적은 상상을 추월할 정도로 기오막측한 것이었다. “헉!” 경악성을 내지르며 장무인은 간신히 상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장문인의 눈은 경악감으로 부릅떠져 있었다. 왜냐하면 상대가 구사한 검법과 유사한 검법을 자신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장문인은 상대가 지니고 있는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무스름한 광택을 내는 짧은 검. 오랜 세월 뇌리에 남아 있었던 자신의 기억과 그것은 일치했다. 장문인은 몸을 뒤로 날려 서로 간의 거리를 순식간에 벌렸다. 그런 다음 다급히 포권하며 외쳤다. “사형을 뵙습니다!” 그 말에 묵향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저놈이 갑자기 못 먹을 거라도 처먹었나? 검을 높이 쳐들며 묵향이 외쳤다. “싸우다 말고 뭔 개소리냐?” “혹시, 묵향 사형이 아니십니까?” <묵향 18권에 계속> 묵향 18-적과의 동침 전동조 지음 ▒ ▒ ▒ 차례 ▒ ▒ ▒ 이건 악몽이야 묵향의 유희 마교와 뒷거래를? 검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 패력검제의 비급 무림맹? 까불어봤자야 사부의 분노 파문당한 화산 장문인 사형이 보고 싶구나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천일루에서의 합주 사형의 복수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먼지 나게 한번 맞아볼래? 뜻밖의 방문객 나는 빨래나 하지 무림맹의 결의 묵향의 제안 양양성 전투 적과의 동맹 부록:마교 세력 재편도 ▒ 이건 악몽이야 화산 중턱에 위치한 한 작은 정자. 화산의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세워져 있었지만, 어두운 밤이어서 그런지 정자 주위는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만약 낮이었다면 주변의 경관은 물론이고 화산파의 모든 건물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총총히 빛나는 별들만이 밤하늘에 떠 있는 게 보일 뿐이었다. 낮이라면 몰라도 이 늦은 밤에 이곳에 올라올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지금 이곳에는 두 명의 사내가 얼굴을 대고 앉아 있었다. 정자는 등잔조차 켜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그 안에 자리잡은 사내들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들과 같은 심후한 내공의 고수들에게 짙은 어둠은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사내는 화산파의 장문인 현천검제(玄天劍帝)였다. 그는 아직까지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멍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선이 조금 굵긴 했지만 그렇게 미남도 아니었고, 또 특이한 인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평범한 얼굴, 하지만 저 얼굴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좀 전에 사형을 만났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장문인실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의 짧은 여유는 현천검제로 하여금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곱씹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건 악몽이야.’ 현천검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사형이 맞으신 겁니까?” 그렇게 묻는 현천검제의 표정은 곤혹스러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받고 있는 당사자 역시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묵향의 사부 유백은 대단히 뛰어난 살수였고, 또 현역에서 은퇴한후에도 많은 제자를 키웠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살수였다. 그렇다 보니 그가 아무리 뛰어난 제자를 키워놨다고 해도 결국은 임무 수행 중에 사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뛰어난 자객에게는 그만큼 난이도가 높은 임무가 주어졌고, 실패할 확률 또한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에 이르러서 그의 제자는 단 두 명만 살아남아있었다. 그건 바로 묵향 자신과 또 한 명……. 하나밖에 없는 사제를 설마 이런 식으로 만나고, 또 어쩌다가 이따위 질문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인지……. 묵향의 머릿속에 과거 사제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던 일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희미한 추억(?)이었다. 사실 그런 일은 피해자야 이를 갈며 분노에 치를 떨지만 가해자는 ‘그런 적이 있었나?’하며 잘 기억도 하질 못하는 법이다. 설사 기억을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한때의 실수였지’하며 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만났을 때의 악몽 때문에 사제가 지금 자신과의 만남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묵향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단지 뭔가 불만이있는 듯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한 번씩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문득 묵향의 뇌리에 ‘세불양립(勢不兩立)’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오, 바로 그거였군. 쪼잔한 녀석. 역시 도사 놈들은 너무 소심하단 말씀이야.’ “왜, 내가 나타난 게 그렇게 곤란하냐?” 묵향의 빈정거림에 현천검제는 난처하는 듯 대꾸했다. “그, 그런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으셔서……. 사형의 제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니 묻는 말입니다.” “쯧, 그게 아니겠지. 정파의 거두라 할 수 있는 화산파의 장문인에게 무림의 공적이라 할 수 있는 대마두가 갑자기 사형이랍시고 나타났으니 당연히 곤란하겠지. 하긴, 생각해보면 자네는 사부님의 정식 제자도 아닌데 나를 사형이라 부르기도 뭣할 테고, 나도 자네에게 사형소리를 듣는 게 썩 기분 좋은 것도 아니니 뭐.” 가만히 생각해보니 묵향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인간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자신은 파멸이었다. 그 생각까지 하자 현천검제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호칭 문제야 그렇다치고, 저를 왜 찾아오셨습니까?” 현천검제의 어조에는 약간의 불쾌감마저 묻어 있었다. 그의 눈은 이제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는 데도 이용되고 있었다. 과거 묵향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름도 기억하기 힘들 정도의 수많은 화산파 제자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지금은 그때와 처지가 달랐다. 대화산파의 장문인, 이것이 현재 그의 위치였다. 그 모습에 묵향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자네가 마교 교주하고 만난다는 소문이라도 퍼질까봐 두려운 모양이지?” 당연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가 장문인직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난 일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무림에서의 명예가 송두리째 날아가버릴 것이다. 아니, 오물을 뒤집어쓴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뿐만아니라 어쩌면 정파의 배반자로 몰려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 말에 현천검제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경에 다다른 그의 오감(五感)은 주위에 인기척이 없음을 알리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단 주위에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후, 그는 강공으로 나왔다. “그래서 저를 협박하시려고 오신 겁니까?” 상대의 얄팍한 위협 따위는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현경의 고수라고 하지만 자신 또한 화경의 고수가 아닌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절대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현천검제였다. 무의식중에 그의 손은 허리에 매여진 보검의 손잡이를 더듬고 있었다. 그런 현천검제가 가소롭다는 듯 묵향이 이죽거렸다. “호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살인멸구라도 하겠다는 모습이군.” “설마요. 현경의 고수를 앞에 두고 그런 재롱을 떨 담량은 아직 없습니다.” 말은 겸손하게 하고 있었지만 현천검제의 눈을 보면 전혀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묵향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곧 힘을 풀었다. 성질 같아서는 몇대 패고 대화를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녀석은 사부께서 남긴 유일한 사제가 아닌가. ‘좀 싸가지가 없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만났으니 내가 참아야겠지.’ 그렇다고는 해도 기분이 언짢았기에 묵향의 말투에는 가시가 돋쳐있었다. “제법 대가리가 컸다 이거로군.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 엉엉 울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할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한데 말씀이야.” 수양이 깊기로 소문난 현천검제였지만 그 말에는 참을 수가 없었는지 그는 안색이 새하얗게 변하며 화를 벌컥 냈다. “누가 빌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과거의 기억을 날조하지 마십시요!” 흥분한 현첨검제를 보면서 묵향은 약간 눈을 크게 뜨며 대꾸했다. “그랬었나?” “물론이죠.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살려달라고 빈 기억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말에 문득 떠오른 게 있었는지 묵향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오, 그래? 도를 닦은 자네가 하는 말이니 믿어주지.” 여기까지 말한 묵향은 더욱 미소를 짙게 지으며 이죽거렸다. “그럼 제발 죽여달라고 빌었던 것을 내가 착각했던 모양이군.” 그때의 악몽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한지 현천검제는 입을 꽉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분노에 가득 찬 마음을 대변이라도 해주는 듯 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런 상대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향은 능청스런 어조로 말을이었다. “자자, 예전의 일이야 그렇다치고, 자네 이따위 허접한 문파에서 고리타분하게 살지 말고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게 어때? 내 수하들 중 예전에 정파랍시고 깝죽거렸던 놈들도 꽤 있거든. 지금은 아주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 역시 뱀 대가리보다는 용 꼬리가 훨씬 멋있지않나? 번쩍번쩍하니 때깔도 좋고 말이야. 그러니…….” 묵향의 딴청에 드디어 현첨검제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는지 화를 버럭 내며 외쳤다. “지금 그따위 농담이나 하시려고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도대체 뭣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묵향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지.” 현천검제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놈의 용 꼬리 얘기를 하러 오신 거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전 뱀 대가리로 만족하니까요.” “그게 아닐세. 이제 농담은 그만두고 좀 진지해져 보세나.” ‘젠장,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다가 갑자기 무게를 잡기는…….’ 울화를 억누르며 현천검제는 묵향을 노려보았지만, 묵향은 전혀 신경도 안 쓰고 느긋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화산파가 누군가하고 시비가 붙었을 텐데?” 현천검제는 그제야 안심한 듯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사제가 화산 장문인이 된 것을 이용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아, 겨우 그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아무리 천마신교가 10만 사파를 이끈다고 하지만, 사파의 작은 한 문파와 화산파의 다툼에 교주께서 직접 나서시다니…, 놀랍기 그지없군요.” 묵향은 짐짓 인상을 찡그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놈들이 본교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밀접한 관계가 있거든.”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본교에서 분타를 건설하는 데 그 떨거지들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전후 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지 현천검제는 고개를작게 끄덕였다.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까?” “자네 쪽에서 억류하고 있는 본교의 일꾼들을 돌려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작업을 하는 데 그놈들이 꼭 필요하거든. 그릭 그곳이 비록 화산파의 세력권이긴 하지만 거리가 꽤 떨어져 있으니 이 일은 그냥 묵인해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 단독으로는 결정하기 힘든 일입니다. 모든권력이 교주에게 집중되어 있는 천마신교에 적을 두고 계신 분께서는 이해하시기 힘드시겠지만, 그런 중대한 사안을 화산파에서는 장문인 혼자 처리할 수 없습니다.” 순간 묵향의 눈이 흉폭하게 번쩍였다. “정녕, 피를 보고 싶다는 말이냐?”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화산파를 쓸어버리고 여기에 본교의 분타를 만들 수도 있음이야. 그걸 잊지 말라구, 알겠어?” 묵향의 말에 현첨검제는 눈을 실쭉하게 뜨고 맞받았다. 그도 검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지금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협박? 협박이 아니라 진실을 얘기해주고 있는 거야. 장문인이 네녀석만 아니었어도…, 젠장!” 그 말을 들은 현천검제의 뇌리를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의 눈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오호라, 바로 그것 때문이었군요. 웬일로 갑자기 저를 찾아오셨나 싶었지요. 게다가 만나자마자 칼부림까지 한 이유가 뭔지 아주 궁금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목적은 저를 죽이려고 오신 거였군요.” 묵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현천검제는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된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따지고 들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것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태극혜검법(太極慧劍法)까지 익히신다고 아주 고생하셨겠군요. 그래, 어설프게 배운 태극혜검법으로는 저를 죽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으셨을 테니, 이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팬 후에 최후의 일검은 태극혜검으로 할 예정이닷!” 순간 묵향의 검이 절반 정도 쑥 뽑혔다. 설마 사형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현첨검제는 바짝 긴장하며 마주 검을 뽑아들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묵향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곧바로 검을 다시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거친 숨을 뿜어내던 묵향은 이윽고 마음을 정리한 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선택은 네 자유다. 대신 한 달간의 말미를 주겠다. 그 안에 그놈들을 석방한다면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겠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현천검제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묵향이 자신을 위해서 상당히 많은 양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교가 지닌 무력을 총동원한다면 화산파는 며칠 버티지도 못하고 쑥대밭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무림맹이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화산파가 멸문당한 후가 될 것이다. 무림맹의 정예들이 준비를 갖추고 화산까지 출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설사 무림맹 전체라고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들 묵향이었다. 그런데도 말을 빙빙 돌리다 결국 한 달이라는 말미를 준 것은 자신을 생각해 배려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현첨검제의 말투도 처음과는 달리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사형께서 하신 제안,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고려해보겠습니다.” 일단 여기에 온 목적은 달성했다고 여겼는지 묵향은 어둠의 장막을 쓰고 있는 화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말이 없던 묵향이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아주 아름다운 곳이로군.” ‘분명 사부님이 마지막으로 터전을 잡고 싶어하실 만한 곳이야. 하지만 사부님이 과연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으셨을까? 사실 그분이 원하셨던 곳은 십만대산이었을 게 분명해. 모든 마교도의 고향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사부님은 왜 십만대산을 떠나 중원을 떠도셨던것일까? 이 못난 제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것일까?’ 묵향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묵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었던 현천검제는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화산은 정말 아름답지요. 이곳에 있다 보면 계절마다 바뀌는 화산의 아름다움에 제가 마치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쁨을 맛볼 수 있을정도니까요.” 하지만 현천검제의 시야에 들어온 묵향의 뒷모습은 화산을 내려다보며 절경에 취해 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유난히도 그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느꼈을 때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이곳은 사부께서 세상을 등진 곳이기도 했다. 현천검제는 멀리 보이는 한 지점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저 나무 아래를 좋아하셨습니다. 저곳에 묻어드렸는데 잠시 가보시겠습니까?” 일순간 묵향의 몸이 격동으로 인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잠시 후 묵향은 공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살아 계실 때 제대로 못 해드렸거늘, 이제 산소에 찾아뵈면 무엇 하겠느냐. 사부님은 계시지 않고 백골만이 묻혀 있을 텐데…….” 묵향은 밤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내뱉듯 말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슬픈 표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묵향을 보며 현천검제는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말은 안 했지만 그가 얼마나 스승을 사랑했는지 그 감정이 전해져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사부와의 인연이 박하여 사형만큼이나 오랜 시간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가끔씩 그분과의 추억이 떠오르곤 했다. 인자하게, 하지만 필요할 때는 매섭게 자신을 가르치던 그분의 모습. 문득 현천검제는 잠시라도 좋으니 그런 사부가 이곳에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제자들이 이렇게 성장한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사형, 술 한잔 안 하시겠습니까?” “술?” “예, 간혹 들르는 좋은 객잔이 있습니다.” “허헛, 별일이군. 화산파는 도가 계열이라고 들었거늘 자네도 술을하는가?” “화산은 무당이나 청성, 점창 등과는 달리 아주 자유로운 편입니다. 너무 도에 얽매이다 보면 오히려 그것이 발목을 잡아 도는 깨닫는 데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자네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하군. 무공도 너무 익히려고 발악을 하다보면 오히려 더욱 안 익혀지는 구석이 있지. 좋아, 술이나 한잔 하세. 오랜만에 사제를 만났는데 술이 없다면 말이 안 되겠지.” 하지만 묵향은 몇 걸음 걸어가다가 돌아서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그만두는 것이 좋겠어. 혹여 나를 알아보는 자가 있다면 자네한테 해가 될 걸세.” 자신을 배려하는 묵향의 말에 사형의 정이 따뜻하게 묻어 있는 듯하여 현천검제는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본문에 난입하실 때는 그런 생각 안 하셨습니까? 염려 놓으십시오. 사형께서는 워낙 오랫동안 칩거하신 뒤라 알아볼 사람이단 한 명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 예로 화산에 수많은 식객이 있었음에도 그 누구 하나 사형을 알아본 사람이 없었지 않습니까? 제가 가끔씩 가는 객잔이 있는데, 이 시간이면 손님이 거의 없어 여유롭게 한잔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규모가 대단히 큰 객잔임에도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런 듯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화 내용은 대부분이 얼마 전에 벌어졌던 요와 금의 전쟁이었다. 객잔의 2층 한구석에 있는 탁자에서는 상인으로 보이는 사내 셋이서 근심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도 금이 버틸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걸세. 전에는 겨우 3만이 침공했으니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그 세 배가 넘는 10만이라고 하지 않나? 요 황제도 이번에는 금을 확실히 박살내려는 모양이야.” 그들 중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사내가 10만이라는 말에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어, 10만이나? 금이 잘 버텨내야 할 텐데 걱정이군.” 처음에 말을 꺼낸 사내는 답답한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글세 말일세. 지금이야 오랑캐들끼리 싸우고 있지만, 요가 만약 금을 멸한 뒤 이곳까지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하군.” “설마, 그럴 리야 있겠나. 황실에서 해마다 요 황제에게 막대한 재물을 가져다가 바친다는 소문이 있다네. 아마도 이곳까지 화가 미치지는 않을 게야.” “허허, 이 사람 보게나. 그 금수만도 못한 오랑캐 놈들을 믿는다는 말인가? 금을 멸하고 더욱 힘이 강성해지면 쳐들어올 게 뻔해. 아, 이건 내가 소문으로 들은 건데 말일세.......” 그러면서 사내는 주위를 한 번 슬쩍 둘러본 후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어디선가 떠도는 유언비어 한 토막을 주워들은 모양이다. 모두들 금과 요의 전쟁의 관심을 쏟고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요와 금에 전쟁은 먼 산 불구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쟁 결과에 따라 자신들의 삶에도 어떤 형식이든 간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옆 자리에 자리잡은 한 쌍의 남녀는 남들이 뭐라 떠들건 신경도 안 쓰고 은밀한 눈길을 주고받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바로 옥대진과 능비화였다. 이 객잔은 능비화의 사문인 화산이 멀지 않았기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2층 구석진 곳에자리를 잡았다. 그것도 모자라 출입문이 잘 보이는 위치에 앉았다. 혹시라도 자신들을 아는 사람들이 객잔에 들어오면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그들과 함께 강호 유람을 시작했던 초미는 지금 제령문에 있었다. 초씨세가의 가주 초우가 마교 교주에게 당한 부상이 매우 심각했기에 그 근처 의원에서 장기간 치룔를 받아야만 했던 데다, 당시 옆에 있었던 패력검제가 제령문이 가까우니 한동안 몸을 추스르고 돌아가시라는 청을 하는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초미는 부상당한 아버지와 함게 패력검제를 따라 제령문으로 가버렸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 청춘 남녀는 단 둘만의 유람을 할 수밖에 없는처지가 되어버렸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그냥 놓쳐버릴 옥대진이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능비화를 꼬시기 시작한 옥대진의 노력이 그 빛을 발한 것인지, 유람이 끝난 이 시점에서 그들은 꽤나 다정한 연인이되어 있었다. 매화검 옥대진의 사문은 무림맹주를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할아버지도 지금 무림맹의 장로가 아닌가. 그런 명문의 자제가, 그것도 7룡에 끼였을 정도로 뛰어난 후기지수인 그가 능비화를 유혹하는 것은 매우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옥대진은 그윽한 눈길로 능비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저와 함게한 강호 유람도 오늘로 끝이라고 생각하니 섭섭하기 그지없구려.” 옥대진의 말이 싫지 않은 듯 능비화는 곱게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물론 그렇소. 하지만 이번이 소저와 함께한 첫 유람이 아니겠소? 아마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이번 강호행을 잊지 못할 것 같구려.” “소녀도 그렇답니다.” 옥대진은 살며시 손을 뻗어 능비화의 손을 감싸쥐며 그윽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금이라도 더 그대와 단 둘이 있고 싶구려.” 능비화와 함께 화산파로 돌아가면 이 유람은 끝이 나게 된다. 그러면 장래를 약속한 사이든 아니든 그녀를 화산파까지 바래다준 이상 옥대진은 무림맹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아쉬움을 달래며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늑대 같은 옥대진의 마음이야 그녀를 데리고 어디 으슥한 곳으로 향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대는 화산파의 영역이었다. 화산의 수많은 속가제자가 요소요소에 박혀 있는 곳인 것이다. 그들의 눈에 띄어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무슨 망신을 당하겠는가. 그렇기에 이곳에 자리를 잡고 시간을 보내고 잇었다.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변명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객잔의 문이 열리며 형형한 눈빛을 뿜어내는 30대 중반 정도의 장년(壯年)이 들어왔다. 계속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능비화였기에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볼수 있었다. “장문.......” 이때, 옥대진이 능비화의 손을 감싸쥐며 속삭였다. “가만히 있으시오. 우리가 워낙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기에 가만히있으면 저분께서도 잘 모르실 것이오. 이제 그대와 단둘이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소. 괜히 다른 사람의 방해로 그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소.” “가가의 말씀이 맞아요.” 능비화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뒤 현천검제의 동태를 살폈다. 저쪽에서 이쪽을 알아본다면 그때 가서 알은 척을 해도 늦지 않으리라생각하며, 현천검제가 슬쩍 객잔 안을 둘러보자 그를 알아본 점소이가 재빨리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역시 그가 자주 찾는 곳이라 그런지 점소이는 상대가 원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었다. “3층에 빈방이 하나 남은 게 있습니다. 하지만 방금 전에 손님이 나가신 다음이라 아직 정리가 안 됐는뎁쇼.” “괜찮다. 그곳을 쓰지.” 현천검제가 그러고 있는 동안 객잔 문을 통해 또 한 명의 사내가 들어섰다. 그 사내는 바로 묵향이었다. “자, 방으로 안내하거라.” “예,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나으리.” 둘은 점소이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있던 능비화와 옥대진은 경악감에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소저?” 능비화에게 속삭이는 옥대진의 음성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화산파의 장문인이 저 극악무도한 마교 교주와 함께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그러소는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능비화라고 그걸 알 도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채 옥대진의 얼굴만 힐끔거리고 있었다. 장문인의 행동을 자신의 연인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걱정만으로도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꽉 차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를 떠납시다.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하시오 혹여 누군가가 이곳을 감시하는 인물이 있을지도 모르오.” 옥대진과 능비하는 서둘러 객점에서 나온 후 자신들이 아는 모든방법을 동원하여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추격자들을 따돌렸다. 갑작스럽게 경공을 전개하기도 하고, 또 그러다가 슬쩍 으슥한 곳에 숨어 미행하는 자가 있는가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기도 했다. 거의 한 시진 동안 그 짓을 하고서야 옥대진은 한시름 놓은 듯 능비화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미행은 없는 듯하오.” “예,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하죠?” 옥대진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림의 정의를 위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일을 세상에 알려야만하오.” 순간 옥대진의 머릿속에는 정파의 영웅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교의 음모를 밝혀내어 정도 무림을 구한 영웅. 자신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옥대진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능비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빨리 화산으로 올라가 장로님들께 보고를 드리는 것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능비화의 심점을 이해한다는 듯 옥대진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소저의 말이 최선의 길이겠지요. 화산파 내에서 조용히 일을마무리 지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사실 이런 일이 밖에 새나간다면 그만큼 큰 치욕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옥대진은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능비화를 마주보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위험부담이 너무 크오.” “예? 미행도 없었으니.......” “미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장문인이 포섭되었을 정도라면 장로님들 중에서도 포섭된 인물이 있을지도 모르오. 얼마나 많은 인물이 마교에 포섭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화산으로 가는 것은 죽으려고 가는 것과 진배가 없소이다. 조용히 일을 무마시키려는 소저의 뜻은 이해하겠으나 저들에게 헛되이 목숨을 잃는다면 저승에 올가가서 통탄한 일이 되지 않겠소?” 사실, 아직 화산파 장로들이 포섭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옥대진이 이렇게 말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화산파에 이 사실을 고한다면 그들은 최대한 쉬쉬하며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음모를 알린 자신의 공적은 그냥 묻혀질 것이 아닌가. 그것은 옥대진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나와 함게 무림맹으로 갑시다. 할아버지께 부탁해서 이번 일이 될수 있으면 조용하게 마무리되도록 하리다.” “너, 너무 고마워요, 가가.” 옥대진의 속셈을 모르는 능비화는 상대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옥대진은 최대한 빨리 무림맹 호북 분타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할아버지에게 전후 사정을 기록한 전서구를 날린다면, 모든 일은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 뒷일은 할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 묵향의 유희 어쩌다 보니 제령문에 오게 된 진팔은 매일매일 열심히 도법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가 도법 수련을 하고 있는 곳운 후원에 마련되어있는 연무장. 말이 연무장이지 그냥 넓은 공터일 뿐이었지만, 진팔에게는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엿다. 제령문에 온 후 별로 할 일도 없었기에 시작한 무공 수련이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더욱 열심히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저 두 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화경에 든 초절정의 고수가 무슨 이유로 자신의 무공을 살펴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혹시 누가 아는가? 뭔가 미비한 점에대해 조언이라도 해줄지 말이다. 진팔은 은근히 기대를 가지며 오늘도 도를 잡고 연무장에 선 것이다. 먼저, 허공에 가상의 적을 눈앞에 그린다. 이때 진팔이 만들어낸 가상의 적은 일전에 큰 위협을 줬던 남궁세가의 창궁십팔수였다. 진팔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서서히 도를 들어올리고는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라. 네가 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도는 더 이상 너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도의 뜻을 꺽으려고 하지 말고 도가 이끄는 대로 초식을 흘리거라. 그렇게 하면 또 다른 경지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진팔이 신도합일(身刀合一)의 경지에 들어섰을 때 삼사저(三師姐)가 들려준 조언이었다. 그가 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하며, 또 가장 좋아하는 삼사저는 천지문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다 그리고 진팔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진팔의 도가 가상의 적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짙은 도기를 뿌려내며 흐르던 도는 어느샌가 진팔의 손을 떠나 호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빗살처럼 허공을 가르던 도는 크게 원을 그리듯 목표인 가상의 적들의 몸을 스치며 지나갔다. 챙! 흐르는 물처럼 적들의 몸을 통과하던 도가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의 손에 튕겨져 나왔다. 진팔은 급히 도를 회수한 뒤 사내를 향해 있는 힘껏 도를 휘둘렀다. 그 순간 엄청난 도기가 허공에 뿌려지며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허어, 저런 2류 도법이나 휘두르는 놈이 어떻게 저 나이에 신도합일을 깨달을 수가 있지?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군. 물론 저놈이 한 20년 정도 더 나이를 먹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겠지. 하지만 저놈 나이는 량이하고 비슷하지 않은가.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태어난 량이에게는 좀 더 무공을 쉽게 익히라고 량이가 어렸을 때 노부가 직접 벌모세수까지 해줬지. 그리고 뛰어난 심법을 익히게 했고, 최상승 검법까지 노부가 직접 가르쳤어. 그런데 어떻게 저놈이 량이와 비슷한 수준이 될 수 가 있단 말인가. 대성하기가 그렇게도 힘들다는 태허무령심법일 익힌 놈이 말이야. 이건 말도 안 돼!” 불신 어린 시선으로 한참 동안 진팔의 수련을 지켜보던 패력검제는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뭔가 있어. 그가 저녀석에게 주목한 뭔가가 말이야. 심법만 가르쳐줘도 저 정도까지 대성할 수 있는 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한 천재적인 재목인 줄 한눈에 알아보고.......” 그러나 곧 말도 안 안된다는 듯 패력검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더 말이 안 돼. 아무리 무림이 낳은 최고의 천재라고 해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저놈이 배운 것은 태허무령심법. 다른 심법은 익힐 수도 없고, 오로지 그 심법만으로 대성을 해야 해. 물론 일정량 이상의 내공을 쌓기만 하면 엄청난 능력을 뿜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술에도 걸리지 않는 현문 최고의 심법이긴 하지. 하지만 이 심법이 지닌 최대의 단점은 연성 초기에 공격을 쌓기가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이야. 그 때문에 열국 현문에서조차 그 누구도 익히지않아 실전되었다고 들었는데.......” 고개를 흔들던 패력검제는 다시 수련을 하고 있는 진팔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태어나면서부터 태허무령심법을 익혔다고 해도 대성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야. 뭔가가 있어, 뭔가가....... 도대체 그게 뭘까?” 진팔의 기대와는 달리 패력검제가 그의 무공을 관찰하고 있는 목적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옥대진과 능비화가 있지도 않은 미행자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숨으며 무림맹 호북 분타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묵향은 홀로 야경을 감상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현천검제는 벌써 자신의 문파로 돌아간 후였다. 아마도 그는 돌아가는 대로 장로들을 소집해 이번에 사로잡은 포로들을 놔줄 것인지 어쩔 것인지 의논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을 놔주지 않는다면 마교와의 충돌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 테니 말이다. “화산에 오르기 전에 방은 잡아놨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묵는 게 더 좋겠군. 이곳 음식이 썩 마음에 든단 말이야. 푹 쉰 다음 내일 출발하면 되겠어.” 타고 온 말은 사천성 분타에 그냥 놔두고 왔고, 이전에 잡아놨던 방에 놔두고 온 물건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그냥 묵는다 해도 걸리적거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묵향은 방 옆에 드리워져 있는 붉은 줄을 살짝 당겼다. 그러자 얼마지나지 않아 점소이가 들어오며 싹싹한 어조로 물었다. “뭐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나리?” “빈방이 있느냐?” “예, 손님. 그런데 어떤 방을 원하십니까? 저희 객잔에는 모두 여섯종류의 방이 있습니가.” 묵향은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간단히 말했다. “가장 좋은 방을 다오.” 그 말에 점소이는 환하게 웃으며 더욱 비굴한 표정으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옛, 지금 방으로 드시겠습니까?” 묵향이 대답 없이 천천히 일어서자 점소이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손님. 묵으실 모란채는 후원에 있습니다. 아주 조용하고 안락하게 꾸며져 있어 손님의 마음에 쏘옥 드실 겁니다.” 그곳은 하룻밤 자는 데 무려 은장 4냥이나 하는 방이다. 이런 돈 많은 손님에게는 최대한의 친절로 모셔야만 뭔가 떨어지는 것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묵향을 안내하는 점소이의 어조에는 애교가 담뿍 묻어 있었다. 점소이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던 묵향은 특이한 인물들을 보게 되었다. 객잔 1층의 한쪽 구석에서 때늦은 저녁식사에 몰두하고 있는 두사람. 바로 점심 나절에 봤던 스승과 제자라던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을 보자 마치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발견한 것처럼 묵향의두 눈이 번쩍 빛났다. “호오, 안 그래도 한 달 동안 뭐 하고 지내나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잘 걸렸군.” 묵향은 10년만에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듯 활짝 미소 띤 얼굴로 여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반갑게 말하는 묵향과는 달리 음식을 먹다가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들었던 두 여인은 묵향의 얼굴을 보자마자 뭔가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그래도 중년 여인 쪽지 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소곳이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두려움 때문인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대협.” 묵향은 상대의 허락도 얻지 않고 의자에 턱 걸터앉은 후 넉살 좋게말했다. “그래, 여기는 어쩐 일인가? 점심 대 본 후에 여기까지 오려면 아주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꽤 길을 서둘러서 온 모양이지?” 그 순간 스승이라던 중년 여인은 상대가 갑자기 뭣 때문에 자신들에게 관심을 나타내게 된 것인지 눈치챈 듯 화들짝 놀라면서 변명을 늘어놨다. “저희도 급한 일 때문에 길을 서두르던 중이었습니다, 대협. 이곳은 아주 번화한 곳이긴 하지만 서안에서 낙양으로 들어가려면 이 관도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을 가지고 저희들이 마치 대협을 미행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묵향은 그것 보라는 듯 말했다. “호오, 강하게 부정하는 것을 보니 꽤 찔리는 게 있나 보군. 노부를 미행하던 놈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다 그렇게 변명하곤 했지. 절대로 미행한 적 없다고 말이야. 좀 더 그럴듯한 변명 없나? 뭔가 새롭고 참신한 변명을 한다면 이번에 한해서 용서해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적이 없었던 중년 여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였다. 분명 자신들에게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성질대로 대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괜히 이곳에서 저자의 칼에 맞아 죽는다면 어디에다가 하소연을 할 것인가? 그녀는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가라앉히고 급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제가 대협을 미행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대협과 저는 점심 나절에 볼 때까지만 해도 일면식도 없었지 않습니까? 서로 만난 적도 없고, 그렇다고 원수진 일도 없는데 제가 왜 대협을 미행한단 말입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묵향을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게다가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는 그녀가 이렇게 사정하고 있는데,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생각이었고, 저 무례하기 그지없는 사내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음에 틀림없다. 상대는 뭔가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을 뿐이다. “글쎄..., 있는지도 모르지. 노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껏 살아오며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됐지. 생판 본 적도 없는놈들이 노부를 죽이겠다고 칼을 들이댄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그러니 솔직히 얘기해봐.” 중년 여인은 어이가 없었다. 이건 전혀 얘기가 통하는 상대가 아닌것이다. '참, 그러고 보니 노리는 놈이 많다고?' 이 말이 떠오르자 중년 여인의 머릿속에는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공격을 당하는 일도 물론 있다. 하지만 나쁜 짓을 하는 놈이 칼을 맞을 확률은 더욱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나 저 인간처럼 아무나 잡고 시비를 걸 정도라면 필히 저놈은 나쁜놈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고도 이렇게 백주대낮에 거리낌없이 어슬렁거리는 걸 보면 실력도 대단한 놈인 것이 틀립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저자가 누구냐 하는 것인데....... 적당히 휘어진 무기의 모양새를 본다면 쾌검이나 쾌도 종류를 익힌 자가 분명했다. 저자의 손 모양이나 점심 때 객점에서 보여준 한 수를 생각해보면 그 추측이 틀림없었다. 사파면서 극악무도하고, 또 쾌검이나 쾌도를 구사한다. 그리고 엄청난 고수.......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인물이있었다. '허억! 서, 설마 저자가 만악검귀(萬惡劍鬼)?' 순식간에 중년 여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만악검귀라면 수없이 많은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른 사파의 고수였다. 물론 그가 무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는 자신보다 강한 자를 상대함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쾌검이 장기였지만 굳이 검술로 승부하지도 않았다. 적의 수가 많으면 독을 사용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상대의 실력을 꽤뚫어보고 불리하다 싶으면 재빨리 모습을 감추는 교활함에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직까지도 그 극악무도한 이름을 중원에 덜치고 있는것이다. '만약 이자가 진짜 만악검귀가 맞다면 내가 이지를 알아봤다는 내색을 해서는 안 돼. 그렇다면 정말 끝장이니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대사형께서 계신 곳으로 이자를 유인하는 것만이 살길이야.' 상대가 말이 없자 묵향은 살짝 인상을 스며 중얼거렸다. “이봐, 변명하는 것을 포기했나? 쯧쯧, 그럼 어쩔 수 없군. 그러고 보니 밤새도록 누군가를 고문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겠군.” “무, 무슨 말슴을 그렇게 하십니까, 대협? 저와 제자는 급한 일이 있어 길을 가던 중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중년 여인이 급하게 변명을 하자 묵향은 빙글거리며 계속 물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두 여인으로서는 묵향의 모습이 마귀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급한 일이 뭐지?” “사형께서 급히 저를 찾으신다는 전갈이 왔거든요.” “호오, 이제는 사형까지 등장하는군, 그래 그 사형이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데?” “개봉 인근에 살고 계십니다.” “개봉이라....... 여기서 꽤 먼 거리군. 걸어서 가자면 며칠 걸리겠어. 그러니까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 말이로군.” 중년 여인은 묵향이 자신의 말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안 그래도 하남성 분타로 갈 예정이었던 묵향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흠, 마침 잘됐군, 노부도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이었거든. 좋다, 만약 사형이라는 자가 있고, 또 너희들을 부른 게 사실이라면 그냥 풀어주지. 하지만 거짓일 때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주마. 거기 있는 꼬마까지 덤으로 말이다.” 심심하던 차에 잘 걸렸다는 듯 환하게 웃는 묵향을 바라보는 두 여인은 마치 악마라도 본 듯 두려움에 부르르 떨었다. “짐을 들고 따라와라. 독채를 잡아놨으니 너희들이 쉴 곳을 주마. 처음부터 잘못했다고 빌었으면 그냥 용서해줄 수도 있었는데, 꼴에 잔대가리를 굴려!” 은근히 으름장을 놓은 묵향은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는 묵향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두 여인의 눈에서 독기 어린 눈빛을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뭘 생각했는지 중년 여인은 곧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호호, 이놈 어디 두고 보자. 사악한 짓만 일삼던 마두의 최후가 어떤 건지 대사형께서 톡톡히 가르쳐주실 게야.' 그날 밤, 살그머니 잠자리에서 나온 두 여인은 주섬주섬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도둑이라도 되는 듯 그들의 행동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짐을 완전히 다 챙기고 살며시 밖으로 나올 때가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행동한 그들이 막상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옆방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참, 잊어버리고 말을 안해줬군.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했다가 잡히면 분근 착골을 당할 거야. 처음 잡혔을 때는 1각, 그 다음은 2각,4각....... 이렇게 두 배씩 늘어나지. 이번에는 경고를 안해줬으니 그냥 넘어가지만, 이 다음에 걸렸을 때는 국물도 없을 줄 알거라.” 젊은 여인은 시선을 돌려 중년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할 것인가? 한참을 고민하던 중년 여인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으며 방으로 되돌아갔다. 아무래도 도망치는 것은 무리가 따르니 훗날을 기약하기로 한 것이다. 두 여인이 일그러진 얼굴로 털썩 침상에 주저앉을 때, 그 옆방에서 묵햐은 고개를 돌려 군사에게 보낼 명령서를 쓰기 시작했다. 특급 지령 이 명령서를 받는 즉시 염왕대 5개 대를 출발시킬 것을 명한다. 염왕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달 26일까지는 화산 인근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염왕대의 지휘자는 행적이 무림맹에 포착되지 않도록 은밀히 행동할 것을 명한다. 만약 무림맹에 행적이 포착되었을 때는 즉시 본교로 귀환하라. 천마신교 교주 묵향 염왕대 5개 대하면 절정 고수가 무려 500명이었지만, 그 정도 전력을 가지고도 화산을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들에다가 묵향이 포함된다면 화산파는 하루아침 해장거리로 둔갑하게 되는것이다. 묵향은 이것을 암호로 작성한 후 흑룡패(黑龍牌)를 꺼내어 인장까지 찍었다. 만약 사제와의 협상이 결렬된다면 묵향은 아예 화산파를 쓸어버릴작정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쓸어버리지 않고 협상씩이나 해줬으니 돌아가신 사부님께 제자로서의 도리는 다한 셈이었다. “될 수 있으면 사제 녀석이 내 말을 들어줬으면 조겟군. 화산파야 멸문당해도 싸지만 하나밖에 없는 사제를 괴롭히는 게 좀 찜찜하니 말이야. 그건 그렇고, 이걸 어떻게 본교에 보내야 하지?” 호위 무사랍시고 따로 데려온 놈도 없었고, 또 본교와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을 미리 준비해놓은 것도 없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젠장, 별게 다 속을 썩이는군. 좋아,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묵향은 슬며시 옆방의 기척을 살폈다. 보아 하니 으름장을 놓은 뒤로 탈출을 포기하고 꿈나라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어느샌가 묵향의모습이 방에서 사라져버렸다. 묵향이 달려간 곳은 화산파 인근에 있는 섬서표국이었다. 표국주 장영달은 그날 저녁 일처리를 끝낸 후 아늑하기 그지없는 비단 침상에 들어 달콤한 꿈속을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잠을 깨야 했다. “으윽!” 장영달이 눈을 떠보니 웬 복면을 뒤집어쓴 괴한이 침상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억!” 괴한은 조용히 하라는 듯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댄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쉬~, 이봐. 은밀하고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왔는데, 소리를 내면 좀 곤란하지 않겠어?” 장영달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섬서표국은 이 일대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큰 표국이었다. 표국에는 비싼 표물이 많이 쌓여 있는 관계로 경비 또한 엄중했다. 그런데 어떻게괴한이 이렇게 쉽게 침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표국주인 자신의 침실에 말이다. 물론 뛰어난 실력을 지닌 무림인이라면 자신의 무공을 믿고 침입해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간 큰 녀석이 없었던 이유는 섬서표국의 배후에 화산파가 있었기 때문이다. 섬서표국과 화산파의 사이가 매우 돈독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심지어 표국주의 첫째아들이 화산파의 속가제자로 들어가 있을정도였으니 말이다. 해마다 엄청난 재물을 화산파에 헌납하기는 했지만, 화산파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섬서표국에 엄청난 혜택을 안겨주었다. 일단 아무리 간 큰 산도적이라도 섬서표국의 물품에는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신용 등급도 대단히 상향 조정되어 수많은 표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섬서표국은 화산파에 퍼다주는 것의 수십 배가 넘는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 섬서표국에 숨어들어와 자고 있는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는 간 큰 놈이 존재할 줄이야. 어느 정도 놀라움에서 벗어난 장영달은 괴한을 바라보며 분노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상대가 여기까지 은밀히 침입한 것으로 보아 고수인 것을 확실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화산파에 대한 믿음이 더욱 컸던 모양이다. “노, 노부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침입한 것이냐?” “섬서표국 국주 아니었나?” “알고도 감히 노부의 침실에 침입했다는 말이냐? 네놈이 대화산파의 비호를 받고 있는 노부를 건드리고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호오, 이거 아주 재미있군.' 화산파의 비호를 받는 표국이 화산파를 멸문시킬 연락을 마교에 전달하게 되었으니 재미있을 만도 했다. 묵향은 말없이 품속을 뒤져서 전표 한 장을 꺼내어 장영달에게 건네줬다. “이게 뭣이냐? 무슨협박..., 헉! 은자 200냥!” 전표를 보자마자 표국주의 안색이 획 바뀌었다. 한 가족의 1년 생활비가 은자 5냥이 넘지 않으니, 200냥이면 그야말로 엄청난 금액인것이다. 그 순간 장영달은 화들짝 일어서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자신이 속옷 바람이라는 것도 잊은 채. “비밀스런 표행을 원하신다면 제대로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무슨일이라도 맡겨만 주신다면 최대한 은밀하고 빠르게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전표를 보는 순간 장영달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이 괴한은 자신에게 뭔가 표행을 맡기려고 온 손님이라는 것을. 이런 직업에 종사하다 보면 간혹 은밀하게 뭔가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던 장영달이었기에 앞에 있는 괴한이 흉악한 도둑이나 강도에서 순식간에 표국에 커다한 이익을 안겨줄 고귀한 손님으로 보였던 것이다. 괴한은 재미있다는 듯 대꾸했다. “자네, 장사하려는 마음가짐이 되었구만. 좋아, 내 한가지 일을 부탁함세. 청해성의 성도(省都) 서녕(西寧)에 가면 환성루(奐晟樓)라는 곳이 있네. 혹시 알고 있는가?” 만약 작은 시골 문파라든지, 뭐 그런 곳이라면 그가 잘 모를 수도 있었다. 표국주의 머릿속에 중원 전체의 지도라도 그가 잘 모를 수도 있었다. 표국주의 머릿속에 중원 전체의 지도라도 들어 있는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괴한이 말한 그곳은 아주 유명한 곳이었기에 장영달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입니다요, 손님. 서녕 최고의 기루가 아닙니까?” “호오, 제대로 알고 있군. 바로 그곳에 이 서신을 전하는 것이 자네의 일일세. 최대한 빨리 전한다면 언제까지 전할수 있는가?” 서신 한 장이다. 그렇다면 무거운 짐을 나를 때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정도로 빨리 보낼수 있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라는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기에 국주는 자신이 생각한 날짜에 하루정도 더해서 대답했다. “적어도 10일은 걸릴 것입니다.” “흠, 10일이라.” 괴한은 옆에 있는 서탁으로 다가가 붓을 꺼내들고는 서신 봉투에 뭔가를 쓱쓱 쓰면서 말을했다. “10일에서 하루 단축될때마다 은자 20냥씩 지급할 것이고, 한시진이 단축될때마다 은자 1냥씩 더주라고 써놨네. 최대한 빨리 전달하면 할수록 더욱 돈을 많이 벌수 있을 거야. 수고가 큰 만큼 그만한 대가를 주는게 당연하지 않겠나?” 장영달은 자신의 탁월한 상술로 하루를 더한것을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었다. 덕분에 은자 20냥을 날로 먹었지 않은가. 역시 사람은 마무리를 잘 써야 하는것이다. “무, 물론입니다, 손님. 정말 통이 크시군요. 손님 같은분을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좋아,그럼 잘해보게나.” “예,맡겨만 주십시오. 틀림없이 만족하실 겁니다.” 장영달이 인사한 후 고개를 들었을때, 이미 그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만약 자신의 손에 쥐어진 은자 200냥짜리 전표와 서신이 없었다면 한바탕 꿈이라도 꾼 줄 알았을 것이다. “참, 그러고보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 순군부터 시간은 바로 돈이었다. 장영달은 여전히 자신이 속옷만 입고 있다는것도 잊은 채 밖으로 뛰어나갔다. “여봐라! 진 표사는 어디에 있느냐? 당장 그녀석을 찾아와라. 빨리!” “옛!” 사람들이 표국 내에서 가장 기마술이 뛰어난 진표사를 찾으러 달려 나간 후에야 장영달은 자신이 방금 당한일이 머릿속에 떠올랏다. “그러고 보니 침입자가 있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밥버러지들을 어떻게 처리하지?” 물론 장영달은 표국의 경비 무사들이 지닌 얄팍한 실력으로 좀 전의 괴한의 침입을 막는다는것이 불가능함을 잘알고 있었다. 방금 전에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감히 나 장영달이 누군 줄알고 머리를 툭툭 때려? “멍청한 자식들! 일주일 급료는 없는줄 알아라.” 장영달이 서신을 전달해야 하는 환성루는 마교의 하급단체들 중 하나인 혈화궁의 본거지였다. 여인들로만 구성된 혈화궁은 화류계에 진출하여 막대한 돈을 벌이들이고 있었는데, 그 수입이 마교 전체수입의 무려 3할이나 차지할 정도엿다. 그 외에 돈벌이 말고도 마교 내의 각 고수들에게 향락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해소시켜주는데 큰 몫을 담당 하고있었다. 거기에다가 외부 고수들의 포섭이나 정보 입수, 요인 암살등과 같은 은밀한 일도 했다. 그런 만큼 묵향의 서신이 그곳에 도착하면 지급으로 마교의 총타에 전달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묵향과 그에게 사로잡힌 두여인은 개봉을 향해 길을 떠났다. 사실 묵향으로서는 의심이 가는 이들을 해치워버리면 간단하게 끝날 일이지만, 화산파의 일이 마무리 지어질때까지 한달 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그동안 뭔가 할 일이 필요했다. 그녀들을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같이 길을 가게 되었는데 서로 통성명이나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설취라고 합니다. 강호의 동도들은 저를 유운비화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이쪽은 제 제자인 송화입니다.” 설취가 이렇듯 소개를 한것은 상대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상대가 만악검귀라고 생각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검귀라는 소문에 의하면 아주 극악무도한 마두라고 했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예의가 없는 더러운 성격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은근슬쩍 이름을 물어보아 정체를 알려했던 것이다. 상대가 누군지를 정확히 알아야 현 상황을 타파할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세워나갈수 있을 테니말이다. 하지만 상대는 묵묵무답,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저희들이 소개를 했으니 그쪽도 신분을 밝히는것이 예의가 아닐런지요.” “이미 다알고 미행 했을 텐데 소개를 할 필요가 있을까?” “자꾸 미행미행 하시는데 저희들은 귀하를 미행한적이 없다니까 그러시네요.” “뭐, 그건 나중에 대사형이라는 사람들 만나보면 자연스레 알수 있겠지.” 그렇게 대답한후 묵향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차분에 생각하기 시작했다. 먼저 건설중인 하남성 분타에 들러 분타주를 치하하고 독려한후 남하하여 호북 분타에 들리는것이 괜찮을듯 했다. 그런 다음 다시 북상해서 화산파로 간다면 얼추 한달 가까이 될것이다. '사제 녀석이 잘해줘야 할 텐데.... 이럴줄 알았으면 무슨짓을 해서라도 초류빈을 끌고 오는건데 그랬군. 사제의 목을 내가 직접 배기는 아무래도 좀 그렇거든 .' ▒ 마교와 뒷거래를 급히 소집된 무림맹의 장로들을 향해 매화문검 옥진호장로가 엄숙하게 말했다. “현천검제가 마교의 간세라는 정보가 입수되었소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큰일이기에 여러분을 급히 소집한 것이오.” 밀실에 모여있는 자들은 모두 현재 무림맹의 핵심을 이루는 장로들이었다. 옥진호 장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로들 중 한명의 얼굴빛이 변하며 역정을 버럭냈다. 그는 바로 청호진인이었다. “매화문검 장로! 그게무슨말이오. 그런 중대한 사항을 맹주님께 아뢰지 않고 장로들끼리 상의하자고 하는 저의가 뭔지 우선 알고 싶소!” 그는 현맹주인 태극검제가 무당에서 뽑아온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이렇듯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만약 중요 사항들을 맹주에게 보고하지 않고 장로들끼리 처리한다면 맹주의 위치는 뭐가 되겠는가.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는것이 아닌가. 하지만 옥진호장로는 온화한 어조로 대응했다. “아아, 청호 장로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지요. 하지만 청호 장로께서 간과하고있는 것이 있소.” 그말에 청호진인은 의아하다는듯 되물었다. “노부가 무엇을 간과하고 있다는 말씀이오?” “만약 이것이 헛소문이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청호 장로께서 지시겠소?” “그, 그건...” 청호진인은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매화문검 장로의 말이 옳은듯 하오. 아직 완전히 확인되지도 않은 민감한 사항을 무턱대고 맹주님께 보고드릴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옥진호 장로는 좌중을 쭉 들러본 후 말을 이었다. “노부는 이 일을 맹주께 보고드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 상의 해보고자 여러분을 모신 것이오. 아직까지 이 사건이 진실인지 아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소이다. 하지만 그 사건의 주체가 화산파 장문인이라는것이 가장 큰 문제요. 완벽한 물증도 없이 공개 석상에서 거론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거물이란 말입니다. 이 일을 조금이라도 잘못 처리하면 무림맹은 씻을 수없는 타격을 받을 수도있소.” “그렇지만 어찌 조사를 한단 말입니까, 매화문검 장로? 화산에다 첩자를 파견해서 조사하다가 그게 들통 나면 무슨 소리를 들으려구요.” 수많은 말이 오고 갔지만 쓸 만한 의견은 없었다. 문파라는 배타적인 단체가 지니는 독특한 특성상 어느날 갑자기 첨자를 투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조사할 대상이 화경의 고수가 아닌가. 그의 이목을 피해가며 정보를 얻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힘들 것이 분명했다. 이때 공수개 장로가 주저주저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꺼냈다. “이번에 본방에서 특급 기밀 정보가 도착했소.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오랜시간 고민했었는데, 마침 화산장문인의 일도 있고 지금 밝히는 것이 좋을듯싶구려.” “무슨 정보인데 그렇게까지 고심을 하셨습니까, 공수개 장로?” 공수개 장로는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후우~,옥화 봉공님의 문제요.” 그 한마디에 모두가 공수개 장로가 왜 그렇게 고심했는지 짐작 할수 있었다. 현재 무림맹에서 옥화 봉공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정보력에서도 개방보다 무영문이 앞서니, 개방의 설 자리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개방에서 옥화 봉공에 대해 뭐라고 한다면 다들 시기와 질투에 의해 모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보니 개방 쪽에서는 더 한층 조심스러워 할수밖에 없었다. 공수개 장로는 말을 이었다. “옥화 봉공께서 마교와 뭔가 뒷거래를 하고 계신 듯하오.” 그말에 모두들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영문은 정파 최고의 정보 단체였다. 게다가 무영문은 옥화무제가 봉공이 된 후 무림맹의 일에 매우 깊숙이 관여 하고있었다. 그런상태에서 그들이 배신한다면 무림맹이 얼마나 큰 타격을 받을지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옥진호 장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씀, 책임 지실수 있소이까?” “죄송한말이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물증을 잡지는 못했소이다. 하지만 얼마전 무영신마 사건때 벌어진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분께서 마교와 뭔가 뒷거래를 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수 있었소.” 그러면서 공수개 장로는 무영신마 사건 때 개방에서 파악한 모든것을 말했다. 그말을 들은 옥진호의 눈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것을 기회로 옥화봉공에게 복수 할수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것이다. 옥진호는 이빨을 뿌드득 갈면서 중얼거렸다. “놀라운 일이군요. 만약에 그 마두가 심기가 깊으신 옥화 봉공까지 끌어들였을 정도라면 현천검제를 포섭하는 거도 일도 아니었겠지요.” 옥진호 장로는 가급적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공수개 장로가 그녀의 배신에 대한 명확한 물증까지 지니고 있었다면 그의 입에서 좀 더 심한 쌍소리가 튀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심증만 있을뿐 물증은 전무했다. 그렇다 보니 아직 까지는 무림맹 봉공으로서의 예우를 해줘야만 하는것이다. “으음, 그렇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물증이 없지않소? 확실한 물증이 잡힐때 까지는 모든 일을 조심스럽게 진행해야만 하오.” “물론이외다. 무영문과 옥화봉공님에 대해서는 공수로 장로께서 수고 해주셨으면하오.” “워낙 무영문이 뛰어난 단체이다 보니 노부가 해낼수 있을지 모르겠소이다. 하지만 개방외에는 그쪽을 조사할 단체가 없으니... 미력하나마 노력해보겠소이다.” “그럼 공수개 장로만 믿겠소.” 옥진호는 공수개 장로를 치하한 후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화산쪽은 어떻게 처리하는것이 좋겠소이까? 고견이 있으신분은 기탄없이 말씀해주시오.” 이회의가 하루종일 진행된것으로만 봐도 장로들이 현천검제의 처리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저게 걸리고, 또 저렇게하면 이게 걸리고... 결국 그들은 맹주에게 이 사실을 밝히고 그의 처분을 기다리자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어찌되었거나 무림맹의 대가리는 맹주니까 말이다. 개방이 자신의 치부를 밝혀내기 위해 눈에 불을켜고 뒷조사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꿈에서도 알 리 없었던 옥화무제는 지금 환희에 찬 순간을 보내고있었다. 이게 꿈이 아니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옥화무제로부터 아무런 말이 없자 보고서를 들고 온 총관은 찜찜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라도 있나 하는 생각에서이다. “워낙 지급으로 도착한 정보 이기에 누락된 부분이 많습니다. 혹시 마음에 안드시는부분이 있으시다면, 좀더 자세히 조사해서 올리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옥화무제는 만족스런 모습을 지으며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패배는 패배니까요.” “작전상 후퇴하는 척하면서 금을 함정으로 몰아넣기 위한 술책일수도 있습니다. 좀더 정보를 취합 하신 후에 행동을 결정하는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옥화무제의 명석한 머리는 벌써 전체적인 상황을 포착한 상태였다. “이게 만약 처음 벌어진 전투라면 총관의 말이 맞겠죠. 하지만 지금 요 황제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고, 게다가 병력도 금에 비해 훨씬 많아요. 그런 얄팍한 작전까지 쓸 이유가 없죠.” 옥화무제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명령했다. “요에다 좀 더 많은 첩자를 파견하세요. 아마 조만간에 요 황제는 더 많은 병력을 파병할게 분명해요.” “어쩌면 금과 휴전할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호오 그럴리는 없을거에요. 아직 요는 이전쟁에 주력부대를 투입하지도 않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자존심만 구기고 휴전을 할리가 없잖아요? 주력부대를 투입해서 완전히 끝장을 낼궁리만 하겠죠.” “기회는 단 한 번 ! 요가 금을 멸하기 위해 대규모 파병을 했을 때, 그 뒤를 치는 거예요!” “태상문주님의 현묘한 계책대로라면 대승은 확실할 것입니다. 어림군의 장군들이 과연 제대로 해낼 수있을지 걱정입니다.” 옥화무제로서도 그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 이었다. 총관의 말은 게속 이어졌다. “본문에서 이미 조사를 끝마쳤듯 요에서도 본국에 많은 첩자를 파견해 놨습니다. 그들은 눈을 피해가며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적절한 순간을 노려 한번에 대규모로 병력을 투입해 파죽지세로 요를 몰아쳐야 합니다. 과연 그런 탁월한 지휘능력이 작금의 어림군 장수들에게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물론태상 문주님께서 직접 군을 지휘하실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질수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지금 형편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동관을 통해 채재상에게 지시를 내리고, 채재상은 추밀원에 지시를 내리고 , 또 추밀원에서는 정군관애, 정군관은 각 장수에게 지시를 내리는 이런 방법으로는 결코 군을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을겁니다.” 잠시 어두운 안색으로 말을 듣던 옥화무제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렷다. “총관의 말이 맞는거 같군요. 그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기회를 놓칠수는 없어요. 다음 기회는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니 말이에요. 실질적으로 군을 움직이는 정군관만 장악할수 있다면 이번 전쟁은 반드시 승리 할수있을거예요.” 총관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옛,곧 동관에게 태상문주님의 명을 전하겠습니다.” “요에 있는 첩자의 수를 늘리세요. 요가 금을 짓밟는다고 정신이 없을때, 그때가 요를 침략할 절호의 기회가 될 테니까요.” “옛,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총관이 나간후 옥화무제는 흥분된 마음으로 다시 한번 보고서를 읽었다. 이제 열받는 요 황제가 대군을 동원하여 금을 치는 것을 기다리는 일만 남은것이다. 그때를 잘 노려서 요를 치면 연운 16주의 탈환은 물론이고, 운만 잘따라준다면 요를 멸망시킬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요를 없애버린다면 그녀의 권력기반은 더욱 튼튼해지는것이다. 옥화무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때를 어마나 기다려 왔던가....” ▒ 검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정자 한가운데에 고아하게 보이는 서탁을 앞에두고 수묵화를 그리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40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그 중년 사내는 그림에 푹 빠져들어 신들린 듯 붓을 놀리고 있었다. 때론 폭풍과도 같이, 때론 봄바람이 살랑더리듯. “후~우.” 잠시 후, 만족스런 한숨을 내쉰 중년 사내는 뒤로 물러서서 화폭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길게 기른 턱수염을 매만지고 있었다. 흑단과도 같이 탐스러운 수염을 매만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미염공(삼국지의 관우를 말함)이 환생한듯 고아하기만했다. “흐음, 근래들어 그린 것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구먼.” 시원한 산들바람에 떠도는 묵향에 취해 있던 중년 사내의 여유로운 한때를 방해한 것은 부산스럽게 들려온 인기척이었다. “허어, 내가 그림을 그릴 때는 이 주위에 함부로 얼씬거리지 말라고 그렇에 일렀거늘...” 잠시 후, 허겁지겁 걸어오는 하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앞에 선 하인이 고개를 조아리자 중년 사내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질책하듯 물었다. “무슨 일이냐?” “주인어른, 유운비화 님께서 오셨습니다.” 하인의 말에 중년사내의 얼굴은 언제 찌푸렸나는듯 활짝 펴졌다. “오오, 사매가? 얼른 이쪽으로 모시고 오지 그랬느냐?” “두칠이가 이쪽으로 모셔오는 중입니다. 아, 저기 오고게십니다” “너는 빨리가서 차를 준비하라고 이르거라” “예.” 하인을 보낸 후 중년사내는 재빨리 자신의 사매에게로 달려갔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인가. 그리고 그녀와 함께 온 사질은 몇년 지난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전에 봤을 때는 풋풋한 소녀였는데 지금은 어엿한 숙녀가 되어있는것이다. 중년 사내는 반갑게 손님들을 맞이했다. “모두들 어서 오너라.” “대사형을 뵙습니다.” “사백님을 뵈옵니다.” “그래,모두들 잘있었느냐?” 사매를 바라보던 중년 사내의 얼굴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가볍게 수인사를 하며 사매의 일행을 둘러보던 그의 두눈이 일순 번쩍였다. “허~, 한눈에 보기에도 하늘이 내린 무굴이로고, 노부는 냉파천이라고 한다네. 무림의 동도들은 나를..” 냉파천은 설취 옆에 멀뚱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묵향을 설취가 이번에는 새로 제자로 삼은 녀석이거나 , 아니면 뭔가 인원이 있어서 자신에게 소개하려고 데려온 무림의 후기지수인줄 착각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명호를 밝히려고 한것인데, 그 말은 곧 석취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게 아닙니다 ,대사형.” 설취는 연신 묵향을 째려보며 그간 자신이 당했던 일을 냉파천에게 꼬치꼬치 일러바쳤다. 말을 하던 설취는 그동안 당했던 설움이 복받쳐오르는지 두 눈에 눈물마저 글썽 거렸다. 사실 그녀 정도 되는 연배의 여고수가 이토록 극심한 수모를 당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제자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모든 사연을 다 들은 냉파천은 처음의 우호적인 표정과는 달리 묵향에게 싸늘한 눈빛을 던졌다. 재야에 숨은 선비처럼 한없이 고아해 보이던 그의 몸에서 일순 일대 종사의 기도가 뿜어져 나와 주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형형한 눈빛을 뿜어내는 그의 태양혈이 점차 안으로 갈무리되어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뛰어난 고수임에 분명했다. 확실히 설취가 믿고 찾아올 만한 고수였다. “네놈이 감히 사매를 괴롭혔다는게 사실이냐?” 설취가 냉파천에게 그간 일을 일러바칠때부터 묵향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알수 있었다. 왜냐하면 묵향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면 그녀가 감히 이런 행동을 할리가 없을테니 말이다. 아마 묵향에게 걸린 그 순간 부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을게 분명하다. 묵향은 냉파천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그간 설취와 송화를 구박했던 것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듯 심드렁하기만했다.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거 같군. 오해는 풀린듯 하니 나는 이만가보겠네.” 오히려 그것이 더욱 냉파천의 심기를 건드렸다.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 저토록 오만방자 할수있단 말인가. 하늘이 내린 근골을 지니고 있으면 무엇하리. 인성이 저 모양이니 장차 무림에 큰 화근이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내 이번에 저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무림을 위해 힘쓸수 있는 인재로 만들어줘야겠군' “이놈! 이런 고약한놈! 네놈의 사부가 누구길래 그토록 오만방자하단 말이냐?” 그말에 묵향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신을 두고 뭐라고하는것은 그래도 참아줄 수있을지 모르지만 감히 사부를 들먹이다니, 그렇다 보니 묵향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도 결코 곱지않았다. “본좌의 사부가 누군지 네놈이 알아서 뭐 할래?” “도무지 말로 해서는 안되는 놈이로다” 냉파천이 손을 쓱 뻗자 정자 한편에 세워놓았던 그의 애검이 둥실 날아와서 그의 손에 잡혔다. 이기동검술을 이용하여 검을 자기의손으로 끌어당긴 모양이다. 그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르릉. 맑은 소리를 울리며 휘황한 광채를 뿜어내는 보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듯 냉파천은 한동안 투명하기 그지없는 검신을 들여다 보고만 있었다. 그러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사매, 사매는 검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 냉파천은 싸가지없는 후기지수를 혼내주면서, 이 기회를 빌어 자신의 성취가 어느정도인지 사매에게 보여주고 싶은모양이었다. 설취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사매가 미흡하여 아직 그정도 까지는...” “사매도 알다시피 몇년전에 만났을때는 나는 더이상 발전하지 않는 무공에 절망하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어. 처음에는 그게 누군지 몰랐는데 이녀석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거야.” 냉파천은 자신이 들고 있는 보검을 가리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녀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날의 감동을 나는 아직도 있지 못하고있지. 굳이 표현하자면, 사모하는 여인을 몇날 며칠동안 따라다니며 사랑을 애걸하다가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느낌이랄까... 그소리를 따라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을때 , 나의 검술이 한단계 더 발전했을을 느낄 수 있었지. 나는 드디어 껍질을 깨고 창공을 노닐 준비를 하기 시작한게야.” “축하드립니다, 대사형.” 설취가 말하자 그옆에 서 있던 송화도 재빨리 입을 열었다. “사백님의 대성을 축하드리옵니다.” 냉파천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사매, 내가 근래에 터득한 검술을 견식하고 그 오의를 가슴깊이 새겨두도록 하거라. 네수련에도 큰 도움이 될것이다.” 앞에 서 있는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른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있는 멍청한 놈이 하는 짓이 꼴같잖아 묵향은 그냥 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지켜보는 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 이건해도 해도 너무하는것이 아닌가. “이봐,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냉파천은 심기가 상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인간성도 형편없지만 인내심은 더욱 없는놈이다. 오냐, 오늘 내가 저놈을 잡고 개값을 물리라. “크흠, 오늘 하늘위에 하늘이 있음을 노부가 손수 가르쳐 주마. 자, 오너라.” 빡! 말을 마치는 순간 냉파천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의 눈에는 아직까지도 저쪽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저놈은 저기에 서있는데, 여기서 내머리를 가격하고 있는 놈은 또 누구란 말인가?' 찰나의 시간이 흐르자 저쪽에 서 있던 사내의 몸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정통으로 머리에 한대 맞은 냉파천은 허공을 날아 땅바닥에 나 뒹굴고 있었다.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다. 잠시후, 냉파천이 이마를 감싸쥐며 몸을 일으켰다. 극심한 통증을 일으키고 있는 이마의 상처에서는 한 줄기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형환위?서,설마 그럴리가.....” 이형환위라면 신법에 있어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속도로 이동하는 전설적인 신법.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이기에 착시현상으로 인해 잔상을 남기는 것이 그 특징이다. “대, 대사형, 괜찮으십니까?” “오냐, 나는 괜찮다. 조금 방심했을 뿐이야.” 말은 그렇게 햇지만 그제야 상대가 엄청난 고수란 것을 알아차린 냉파천이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을 던지는 사매를 뒤로하고 냉차천은 다시 검을 들었다. 사매에게는 조금 방심했다고 했지만 이건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변명이었다. 자신보다 수준이 낮은 인물에게 방심해도 패배할 가능성이있는데. 뛰어난 인물에게 방심했다니..... 죽으려고 환장을 하지않고서야 할 수 없는 행위였다. 냉파천은 상대를 향해 검을 겨누며 정신을 집중했다. 어쩌면 상대는 사매의 말과 달리 썩 괜찮은 놈인지도 모른다. 그 기회를 노려 자신을 죽이지 않고, 이렇게 또한번 기회를 줬으니말이다. 아무리 이형환위라도 대책이없는 것은 아니다. 냉파천은 최대한 공력을 끌어올렷다. 눈으로 보고 움직이면 늦다. 기로 상대의 움직임을 느껴야만 한다. 순간, 냉파천이 선공을 가했다. “호오, 이번에는 좀낮군.” 냉파천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식의 움직임에 따라 그의 검에서는 엄청난 강기의 회오리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푸른빛도 희미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이번공격에 자신의 모든 것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검식으로써 그런 것들을 구현하려면 엄청난 내공의 소모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냉파천의 바람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엄청난 강기의 회오리를 간단히 헤치고 접근해오는 인물. 어기 충검으로 그 공격력이 배가된 냉파천의 검이 그를 베었으나, 간단하게 막히고 말았다. “허억! 이럴수가....” 냉파천은 자신의 검을 맨손으로 잡아낸 상대를 보며 더 이상 할 말을 찾을수가없었다. 그리고 그순간, 냉파천의 머리를 향해 시커먼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혼이 빠져버린 그는 그것을 감지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빠각! “크흑!” 방금전 맞았던 곳을 또맞아서 그런지 냉파천은 정신을 못 차린 채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거릴뿐이었다. “검의 소리가 어쩌고 저쩌고 한거 같은데, 지금 결과를 보아 하니 자네가 한소리는 모두 개소리 였군.” “제, 젠장.” 묵향은 쓰러져 있는 냉파천의 탐스러운 수염을 한손으로 틀어쥐어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수염 위에 붙어있는 머리도 함께 위로 딸려 왔다. 적당한 높이까지 머리가 올라왔다고 느낀순간 묵향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반대편 손을 들어 올렸다. 그손에는 검집 채로 묵혼검이 들려 있었다. 냉파천은 수염이 이런 용도로 사용될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기르지 않았을 것이다. 냉파천이 황당함에 사로 잡혀 있을 때. 묵향의 사정없는 매질이 시작되었다. 퍽퍽! 퍽!퍽퍽!! “끄아아아악!” 한동안 사정없이 두들겨 패던 묵향은 잠시 매질을 멈추고 음흉스런 미소를 보내고 말했다. “오호! 소리 좋~고.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에게 이게 최고지. 이제 정신이 드느냐?” 냉파천은 독기가 가득한 눈길로 상대를 쏘아보며 외쳤다. “바, 반드시 복수를 하고야 말 것이다!” “복수? 좋아. 네놈의 눈빛을 보니 훗날이 기대가 되는군 그래. 오냐, 내 한가지 일러주지. 한낱 쇠붙이에 무슨 주둥이가 있어서 나불나불 떠들어대겠냐?” 묵향은 상대를 도와주기 위해 한말이지만, 그걸 듣는 입장에서는 전혀 그게 아니었다. 완전히 자신을 놀리는 말로 들은 것이다. “젠장, 노부가 이런 꼴을 당하게 될 줄이야. 크흐흑!” 냉파천이 분노에 가득 차 눈물을 떨구건 말건 묵향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건 검이 말을 한것이 아니라 형을 벗어나려는 네마음이 움직인 것이야. 형이라는 것이 뭐냐? 적을 살상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고정화하여 만든 것이 아니냐? 반복하여 수련하는데는 그것이 최선의 길이겠지만, 이 세상에는 완벽한 형이란것이 존재 하지 않는 다는것이 가장 큰 문제지. 너는 지금 형을 깨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거야. 두꺼운 알을 깨야 창공을 노니는 독수리가 될수 있는 듯 형을 깸으로서 더욱 깊은 경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왠지 현기 어린 말이었지만 상대가 자신의 농락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냉파천에게 묵향의 조언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어느누가 자신의 심득을 이렇듯 쉽게 복수를 다짐하는 인물에게 가르쳐줄 리 잇겠는가. 어쩌면 냉파천의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고 볼수 있었다. “그따위 헛소리 듣고 싶은 맘은 없으니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런 빌어먹을 녀석! 정말 대가리에 똥밖에 안 들어 있는 놈이로구나.” 모처럼 친절을 배풀었는데 상대가 이런식으로 나오자 묵향은 화가 치밀수 밖에 없었다. 퍽! “크헉!” 분노에 찬 마지막 일격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냉파천은 1장여를 튕겨 날아간 다음 불썽사납게 땅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냉파천을 날려 버린 후 묵향이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니 피 묻은 수염뭉치가 한 움큼 잡혀있는것이 보였다. 결국 최후에 가해진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수염이 몽땅 뽑혀버린 모양이었다. 묵향은 수염 뭉치를 발치에 던져 버린후 손바닥을 탁탁 털며 중얼거렸다. “젠장 , 괜히 쓰레기를 붙잡고 시간 낭비만 했군.” 이제 볼일은 다봤다는 듯 묵향은 밖으로 나가려다가 한쪽에서 부들부들 떨고있는 설취등을 보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나를 이곳으로 유인하다니, 생각은 좋았다만 실력이 뒷받침 되지 못한것 같군. 그럼 잘있으라구.” 묵향은 말이 끝나자 아주 느긋한 걸음걸이로 되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남의 장원에서 이런 행패를 부렸음에도 자신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해질 리가 없음을 확신하는 듯이 말이다. 설취는 아직까지도 쓰러져서 끙끙 거리고있는 냉파천을 향해 달려갔다. “대사형! 괜찮으세요?” 쓰러져있는 냉파천을 안아 일으키면서도 설취는 이것이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의 대사형이 누구던가. 저 무림맹의 핵을 이룬다는 구파일방의 장로와 겨뤄도 손색이 없는 무예를 익힌 절정의 고수가 아니던가. 그런 그를 이토록 무참하게 박살 내버리다니.... 설취는 멀어져가는 묵향의 뒷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저자의 진정한 무공은 그렇다면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서, 설마 저자가 화경의 고수는 아니겠지?” 이때, 설취는 자신의 웃섶이 축축하게 젖어옴을 느꼈다. 얼마나 분했던지 냉파천이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설취는 대사형의 그런 모습을 차마 볼수가 없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시선은 무의식중에 묵향의 뒷모습을 쫒고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이제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실로 들어서는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뿌드득 하는 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원독이 서린 목소리가 냉파천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두고보자. 내 무슨일이 있더라도 복수를 하고야 말테다.” 무림을 떠돌다 보면 자신보다 강한자를 만날 수도있고, 또 패배 할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언제 이토록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해 본적이 있겠는가, 패자의 수염을 잡고 끌어올려 머리통을 마구 두들겨 패다니. 단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악랄한 짓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매와 사질이 보는 앞에서 그짓을 당한것이다. '이런 식으로 패자를 희롱하다니, 그놈이 사람이란 말인가? 내 그놈 에게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개자식이나 진배가 없지 않겠는가.'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 대사형을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설취는 부드러운 어조로 설득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대사형, 일단 노기를 가라 앉히시고 상처부터 치료하셔야 해요. 복수를 하시려고 해도 몸이 회복 되셔야 할것이 아니에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설취의 가슴속에는 과연 대사형의 복수가 성공 할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싹트고 있었다. 방금 전에 대사형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만 봐도 상대가 얼마나 뛰어난 고수인지 정도는 눈치 챌수 있었기 때문이다 ▒ 패력검제의 비급 “허어, 오늘도 수련한다고 수고가 많구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건 무림인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하는것이죠.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 있으십니까, 어르신?” 진팔이 사근사근한 말투로 대답하는데 영 기분이 찝찝한 패력검제였다. 저런 성격을 지닌 무인을 처음 대하다 보니 좀 적응하기 어렵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런 감정이었다. “뭐 딱히 자네가 도와줄 것은 없고, 자네하고 얘기나 좀 나눌까 해서 이리로 왔네.” “좋습니다. 제방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시원한 저쪽으로....” “저곳이 좋겠구만.” 후원을 가로질러 걸어간 패력검제는 연못 위에 세워둔 작은 정자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뒤따라온 진팔은 예법에 맞게 도를 정자밑에 세워놓고 올라와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어르신?” “자네, 도법을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엄친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무래도 화경의 반열에 오르신 어르신께서 보시기에는 영 미흡하시겠죠? 헤헤, 원래 강호에서도 2류 정도에 놓이는 도법이라서..”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아부를 해대는 것 때문에 패력검제는 진팔의 인간성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그 때문에 그를 이곳으로 데려와서 무려 2개월간이나 관찰해야했던 것이다. 무술 수련을 할 때는 공공연히 , 그 외에 그가 사생활을 즐길때는 아주 비밀리에, 끊임 없이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마지막 한가지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이곳으로 부른것이다. “호오, 자네 제법 주제 파악을 하고 있었군. 그런데 어찌 그따위 도법으로 낙양에 그렇게 큰 문파를 세울수 있었을꼬?” 패력검제가 진팔의 사문을 은근히 비하했으니 화가 날 법도 하련만 진팔의 안색에는 변함이 없었다. 괜히 따져봐야 맞기만 할텐데 미쳤다고 따지겠는가? 그런 면에서는 현실을 상당히 냉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진팔이었다. “그럴리가요. 저를 보고 엄친의 실력을 평가하시면 안됩니다. 엄친께서는 그래도 낙양에서는 제법 이름을 날리고 계시더군요.” '흠, 역시 자신보다 고수 앞에서는 절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놈이로군. 좋아, 조금 더 강도를 높여볼까?' “그래, 자네 사문에 내려오는 도법이 뭔가?” “예, 가장많이 알려져 있는 것은 선풍도법 입니다. 제가 언제나 수련하는 도법이죠. 이름만 근사하지 어르신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큼 그렇게 대단한 무공은 아닙니다. 그리고 문주에게만 전수되는 회류도법이 있습니다만, 저는 배우지 못했기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름만으로 봤을 때는 서로 어느 정도 유사함을 지닌 무공처럼 느껴지는군, 안그런가?” “아무래도 좀 그렇겠죠? 헤헤, 하지만 저도 보지를 못해서 정확한 답을 드리기는...” “흠, 선풍도법이 겨우 2류정도라면 화류도법은 잘해봤자 1류 정도겠군. 진양이 제법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라는 소문은 내 들어본 적 있네만, 도법이 저정도라면 익혀봤자 뻔한것이지. 그의 무공이 소문만 못한 모양이군.” 이번에는 조금 효과가 있었다. 진팔의 호흡이 조금 불안정해진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억양이나 말투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화경의 경지를 개척하신 어르신께서 보기에는 형편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엄친께서는 낙양에서 꽤나 알려진 고수십니다.” “그런가?그렇다면 자네에게 도법을 누가 가르친 것인가?” “여러 어르신께 배웠습니다. 아무래도 사문에 소속되어 있다보면 꼭 한 분 에게만 배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그렇겠지, 좋아, 내 질문을 바꿈세. 선풍도법의 진수를 가르쳐 준 사람은 누군가?” 진양이라는 대답을 기대하면서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 후에 진양을 물고 늘어져 진팔의 성질을 한번 폭팔시켜보려던 의도 였던 것이다. 하지만 진팔의 대답은 패력검제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엇다. “삼사저이십니다.” “삼사저라고?그녀의 이름이뭐지?” “말씀드려도 잘 모르실텐데....” 진팔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소연 사저십니다.” “소연이라고?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군, 아하 자네가 도법이 왜 그 모양인가 했더니 부친이 자네를 가르치기 귀찮아 그녀에게 팔밀이를 해서 그런모양이군, 어쩐지....” 그순간 진팔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는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수 없는지 따지듯 외쳤다. “뭐라고요? 제 실력이 떨어져서 그런것이지 왜 삼사저를 욕하시는 겁니까?” '어쭈? 이번에는 제법 반응이 있는데?' “원래 도의 장점은 무거움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파괴력에 있음을 자네는 모르는가? 여자하고 도법은 처음부터 맞지가 않아. 그렇다면 그녀는 가벼운 도를 이용해 슬그머니 겉핥기를 한게 분명한데, 그걸 배웠으니 자네 도법이 그모양이지.” 이순간 진팔에게 잇어 상대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설홍 상대에게 칼 맞아 죽는다고해도 그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던것이다. “크악! 물론 삼사저께서 가벼운 도를 쓰는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도의 가볍고 무거움이 중요한 것입니까? 도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좀더 깊은 경지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것 아닙니까?” 도의 음성이라는 말을 하는것으로 보아 그 조언을 해준 삼사저라는 여인은 최소한 신도합일을 구현한 인물인 모양이다. 그 정도라면 왠만한 문파에서는 장로급이 아닌가. 패력검제는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밝힐 필요는 없었다. 지금 목적이 그게 아니니까.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더욱 비비꼬인 어조로 응대했다. “도가 하는말? 헛, 이런 답답한 사람을 봤나. 쉿덩어리가 무슨 입이 붙어있다고 말을 해. 그게 다자네 마음속에서 조금씩 형상화되는 깨달음의 발현인 것이지. 그딴걸 그런식으로 표현하다니, 정말 헛배운게 틀림없구먼.” “뮛이라고요? 지금 말다하셨습니까? 뭘 헛 배웠단 말씀이십니까? 제가 그대로 하니까 잘만 되던데.” 두사람의 설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아마도 패력검제가 자신보다 동급이거나 조금 윗줄 정도만 됐어도 진팔은 상대를 그냥 놔두지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화경의 고수 . 아무리 진팔이 꼭지가 있다고 하지만 마지막 이성은 남아 있었기에 도를 뽑아들고 달려드는 사태까지는 가지않았다. 진팔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거리며 사라지고 난후, 패력검제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아무리 감추고 감춰도 본성은 드러나는 법. 저놈에게도 약점이라는게 있었군 그래. 하긴 뭔가 목적이 있어서 자신을 숨기는 놈이라면 결코 저정도 까지 가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뜻밖이야. 목숨까지 내걸고 나한테 따진걸 보면. 저놈은 삼사저를 사랑했단 말인가?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수 있는 놈은 결코 속셈을 감추고 연극을 할 수 없지.” 패력검제는 천천히 일어서서 연못 안을 노니는 잉어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렷다. “소연이라, 그런 숨은 여고수가 있었을 줄이야.... 확실히 무림은 와호잠룡의 세상이로다.” 잠시 잉어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패력검제는 문득 뭔가 떠올랐다는 듯 외쳤다. “이크! 그러고 보니 저놈이 떠나기 전에 어서 가서 붙잡아야 겠군. 그놈의 성격으로 봤을때, 화가 머리 끝까지 났으니 여기에 붙어 있을 리가 없잖아.” “이런 빌어 먹을! 내가 더러워서라도 떠난다, 떠나!” 진팔은 욕설을 내뱉으며 조령의 숙소로 달려가고 있었다. 짐이야 처음부터 가져온것이 없었으니 단촐하게 곧바로 떠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여기까지 함께온 동료들이 있지않은가. 그런데 그순간, 동료들에게 빨리 떠나자는 말을 하려고 달려가던 진팔의 머릿속에 문뜩 떠오르는것이있었다. “이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게 아니잖아. 왜 그녀석을 데려간단 말이야? 오히려 짐 덩어리 일뿐인데. 그토록 무림을 경험하고 싶어했으니 여기다 놔두고 가면 되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돌아서는 진팔의 발걸음이 결코 가벼울 수는 없었다. 조령과 그동안 꽤 정이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단은 빠를수록 좋은법. 마음을 고쳐먹은 진팔은 최대한 경공술을 발휘해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가지도 못해 진팔의 옆에서 엄청난 기세로 접근해오는 뭔가가있었다. “뭐..,뭐지?” 진팔이 채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뒷덜미가 나무에라도 걸린듯 우악스럽게 뒤로 끌어당겨짐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듯 진팔은 팔을 버둥거리며 비명을 지르는것 외에 달리 할게 없었다. “으아아악!” 패력검제가 진팔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확 끌어당겨 내던져 버린것이다. 진팔은 그야말로 패대기쳐진 개구리 꼴이 되고야 말았다. 몇바퀴 구르다가 쭉 뻗은 진팔의 끙끙거리기만 할 뿐 일어서지도 못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땅바닥에 처박혔으니 그 충격이 엄청났던것이다. “으윽! 아이구.” 진팔의 신음하는데도 패력검제는 눈도 깜짝안했다. “노부에게 인사도 않고 가려 한 벌일세, 자 그만하고 일어서서 노부를 따라오게.” 갑자기 왜 패력검제가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는지 도무지 짐작 할수도없었다. 하지만 오라면 가야 하는것이다. 그것이 힘없는 자의 설움이니 말이다. 만약 도망치려고 한다면? 그렇다면 또다시 패대기쳐질 것이 뻔하지 않은가. 진팔은 아픈 곳을 주무르며 절뚝절뚝 패려검제의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없었다. 패력검제가 진팔을 데려간 곳은 그의 서제였다. 그는 진팔에게 자리에 앉아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후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가 서재로 돌아왔을때, 진팔은 그의 손에 비단 보자기로 싼 물건이 들려 있음을 볼수 있었다. 그는 비단 보자기에 싸여있는 물건을 탁자위에 조심스레 올려놨다. 패력검제가 보자기를 풀자 그 안에는 아주 튼튼해 보이는 작은 함이 나타났다. “이게 뭔줄 아느냐?” 진팔이 점쟁이도 아닌데 그걸 어찌 알겠는가. 기분이 상한 진팔이 입을 꽉다물고 있자 패력검제는 피식웃으며 함의 뚜껑을 열었다. “아무래도 노부 때문이 기분이 좀 상했나보군.” '젠장, 나하고 비슷한 동급만 되었어도 뼈를 추려놨을 텐데....' 내심으로는 패력검제의 머리통을 몇 번이나 패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분노한 진팔이었다. 진팔은 공손히(?) 대꾸했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제 주제에 감히 어떻게 화경의 고수이신 제령문주님께 신경질을 낼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염려는 그만 두십시오. 지금까지 그러셨던것처럼 마음껏 저를 놀리시면 될 거 아닙니까?” “으하핫, 노부가 자네를 좀 시험했다고 그것 때문에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노부도 어쩔수 없다네. 과연 자네가 이것을 볼 자격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을 뿐이니 그만 화를 풀게나. 자, 이것을 보게 이것은 본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니 말이야.”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는 말에 진팔의 눈은 무의식적으로 함의 안쪽으로 돌아갔다. 패력검제는 함 안에서 기름종이로 꼭꼭 싸여진 뭔가를 꺼냈다. 그런 다음 천천히 기름종이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두께라던지 크기로 미루어보아 서책임에 분명했다. '설마, 이, 이것이 창룡검법이란 말인가?' 창룡검법은 제령문이 자랑하는 최강의 무공이었다. 그리고 중원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검법이었다. 패력검제가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했으니 분명 창룡 검법일 게 확실했다. 패력검제가 기름종이를 풀어나가자 과연 진팔의 짐작대로 낡은 비급 한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오래전에 만든 듯 허름했고, 또 제목조차 없었지만 일단 창룡검법이라고 생각하니 그 모든 것이 하나 같이 범상치 않다고 느껴졌다. “자, 한번 읽어보게. 이것이 자네에게 더 높은 차원의 무공으로 눈을 뜨게 해줄 걸세.” “그, 그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런 천고의 기회를 얻게 해준 하느님과 부처님, 원시천존님과 패력검제에게 감사하며 진팔은 비급을 넙죽 받아들었다. 예의상 한번 정도 사양할 법도 하련만 진팔은 전혀 그런생각을 하지않았다. 혹시나 사양했다가 '아,그런가?그렇다면 억지로 권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그럼 혼자 잘해보게'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자신만 손해가 아니겠는가. 워낙 낡은 비급이었기에 진팔은 조심조심 책장을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손은 기대감에 넘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비급은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서로 대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허, 창룡검법의 무공 전수 방식은 정말 희한하기 짝이없군. 처음에 무공구결부터 나올줄 알았더니. 과연 최고의 검법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읽는 자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이런 대화체를 선택하다니 말이야.' 그런데 비급을 읽어 내려가는 진팔의 표정이 점차 험악하게 일그러져 가기 시작했다. 나오라는 무공 구결은 나오지않고 갑과 을의 쓰잘데기 없는 잡담만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신변잡담에서부터 시작해서, 간혹 자신이 즐기는 취미 생활 얘기까지 튀어나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절정 무공을 배울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은 모래 밭에 물이 스며들 듯 소리 없이 사라졌다. 분명 패력검제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판단한 진팔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온몸을 부르르 떨수밖에없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보여줄 것처럼 너스레 떨며 자신을 속이다니. 분명 당황해하는 자신의 표정을 바라보며 내심 킥킥거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이빨마저 뿌드득 갈렷다. 하지만 진팔은 잽싸게 마음을 가라앉혀야만 한다. 귀계와 음모가 넘치는 험악한 무림에서 살아나가려면 자존심을 버리고 웃을 줄도 알아야 하니까 말이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비급을 읽어가던 진팔의 두눈이 일순 번쩍였다. 음악에 대한 토론이 끝나자 이번에는 무공의 원초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팔의 얼굴은 다시 심드렁하게 변했다. 얘기가 또다시 뜬금없이 음식얘기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두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의 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보면 아마 이 비급은 갑과 을이 대화한것을 거의 여과없이 기록해놓은것인 모양이다. '빌어먹을 염감탱이 같으니라고, 나이 처먹고 그렇게 할짓이없나? 어린사람 붙잡아놓고 놀리는걸 즐기고 앉아있게.' 자신을 놀리는것이라고 판단한 진팔은 비급을 건성으로 휙휙넘겼다. 무공의 극을 추구하는 자신에게 어느 지방의 차맛이 좋은지, 자기가 즐겨마시는게 어떤 술이라는 등 하는 애기가 무슨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러던 진팔의 손이 어느 순간 딱 멈추었다. '이, 이건!' 세상만사 잡다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사람이 갑자기 자신들이 얻은 검에 대한 심득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진팔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없이 두사람의 토론에 빠져들었다. 한마디 한마디 읽을수록 현기에 넘쳤을 뿐만아니라 자신의 무공으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어느덧 비급의 내용이 끝나자 진팔은 아쉬운듯 눈을 감고 잠시 두 사람의 내용을 음미했다. 읽다 보니 뭔가 절정무공의 끝자락을 붙잡을 것만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갑과 을이라는 두사람을 진팔로서는 상상할수도 없을 만큼 고수였던것이다. 잠시후 눈을 뜬 진팔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패력검제를 쳐다보았다. “이 비급은 대체 뭡니까? 그리고 이 갑과 을이라는 사람은 누구죠?” 그럴줄 알았다는 듯 패력검제는 빙긋이 미소를 지엇다. 만약 진팔의 무공수준이 패력검제의 예상보다 떨어지는 것이었다면 결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할리 없다는것을 잘알고 있었기때문이다. “허, 과연 내눈이 틀리지 않았군. 자네는 내 생각대로 상당한 경지까지 무공을 익히고 있었어. 자 노부가 문제를 하나 내겠네, 여기나오는 두사람 , 즉 갑과 을은 누구겠나?” 족히 수십년은 된 듯한 아주 오래된 비급인것을 보면 그들 중에 패력검제가 들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이때, 진팔의 머릿속에 한때 무림을 뒤흔든 제령문의 절세고수 한명이 떠올랏다. “혹시 뇌전검황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패력검제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제법이로군. 그렇다면 또 다른 한사람은?” 이것은 아주 어려운 질문이었다. 뇌전검황과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을정도의 고수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진팔의 머릿속으로 과거 무림에 명성을 떨쳤던 최강의 고수 여덟명의 위명이 차례로 스치고 지나갔다. 뇌전검황, 무극검황, 만사불황, 옥화무제, 만통음제, 수라도제, 태극검제, 곤륜무제. 모두들 뇌전검황과 비슷한 연배의 고수들인 만큼 그 가능성이 큰 인물들 이었다. 물론 여기서 뇌전검황은 당연히 제외되어야 하고, 다음으로 옥화무제와 수라도제도 제외되었다. 뇌전검황과 담소를 나누기에는 그들의 연배가 아무래도 한 수 뒤쳐지기 때문이다. 또한 만통음제도 제외되었다. 음공의 고수인 그와 뇌전검황이 검법을 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것이다. 만사불황도 제외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 만사불황이 미치기전에 했던일 일수도 있기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렇다면 무극검황, 만사불황, 태극검제, 곤륜무제만 남게된다. 하지만 왠지 비급을 읽다 보니 갑이라는 인물은 정통적인 도인은 아닌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불가 쪽 고수도 아닌듯 하고.., 그렇다면? “혹시 무극검황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패력검제는 이채롭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호오, 어찌 그런생각을 했는가?” 진팔은 자신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환히 웃으며 입을열었다. “여기서 갑이라는 분이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보면, 자신의 심득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조금 도가적인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완전히 정통적인 도사인 것같지는 않거든요. 속가제자 정도라고할까요? 그래서 무극검황 어르신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허허, 놀랍구먼. 젊은 나이에 그정도 안목이 있다는것은 상당한 견문을 쌓지않으면 힘든일이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은 아니시네 갑은 노부의 사부시지.” 그 말에 진팔의 안색이 확 찌푸러 들었다. 처음부터 예상이 잘못된것이다. 도가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면서도 대단히 파격적인 고차원의 심득을 제시하고 있는 인물. 진팔은 그가 뇌전검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뇌전검황이 아니라면 누구라는 말인가? 워낙 파격적인 심득이라 정파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파와의 중도적 색채마저 느끼게 만든 그인물. 그때 문득 진팔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뭔가가있었다. 도가 쪽으로도 무공의 한 뿌리가 닿아 있는 사파의 전설적인 고수 한명이 생각 난것이다. 진팔의 입장에서는 잊고싶은 악몽속의 인물. “호, 혹시.......? 하지만 진팔은 채말을 꺼내다 말고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자신이 알고있는 그 악몽속의 고수가 비록 사파의 인물치고는 조금은 파격적이다 싶은 무공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비급속의 을과 같이 도가의 내용에 해박하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기지 않는다'가 아니라 '믿고 싶지 않았다' 가 보다 정확한 말일것이다. 진팔이 본 비급속의 을은 마치 신선과도 같이 고아하고 세상사에 달관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진팔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그 인물이 떠오르는 것이아닌가. 진팔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거칠게 저엇다. “마, 말도안돼! 어떻게 그 악독하고 흉악한 놈이 을과 같이 도교에 정통하고 고아한 인물이 될수 있겠어!” 그런 진팔의 모습에 패력검제는 이해할수 있다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 '설마'가 맞을걸세. 그는 지금 마교 교주니까.” “뭐라구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경악으로 인해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변한 진팔을 향해 패력검제는 아주 오래전 제령문을 휩쓸었다 혈겁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 그렇다면 여기에 현경의 심득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호들갑스러운 진팔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구휘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현경에 올랏다고 전해지는 인물이 묵향이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그건아닐세. 사부님을 꺾은 그였기에 세상사람들뿐만 아니라 노부조차도 그가 현경과 동급인 탈마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이 비급을 오랬동안 연구하면서 그 당시 그가 현경의 경지가 아닌 화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말을 듣던 진팔이 약간 실망스러운듯 되물었다. “예? 그렇다면 그가 이룬 경지가 현경이 아닌 화경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현경에 도달했다는 전설적 고수들 중 묵향의 심득을 얻을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던 진팔은 화경이라는 패력검제의 말에 왠지 김이 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자 패력검제는 어이가 없다는듯 진팔을 노려보았다. “허, 이런 광오한 놈이 있나! 감히 현경의 심득이 아니라는 말에 그 따위 표정을 짓다니!” 진팔은 패력검제의 반응에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조아리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럼 지금의 그자는 아직도 화경의 경지란 말씀이십니까?” 처참하게 깨졌던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오르지 패력검제는 씁슬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열었다. “그것은 아닐세. 노부는 요 근래에 그와 직접 싸와본 다음에야 깨달았다네. 그는 지금 현경에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말이야.” 말을 하던 패력검제는 허탈한 표정으로 비급을 바라보았다. 강호를 오시하는 그였지만 지금은 왠지 몇십년 폭삭 늙어버린 것 같은 안색을 하고있었다. 잠시 한숨을 내쉰 패력검제는 다시입을열었다. “생각을 해보게나, 사부님께서 그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셨지만 흠짐 하나 나지 않았던 패왕검이 반토막이 되었다네. 나중에 살펴보니 날까지도 많이 상했더군. 물론, 그가 무기를 썼다면 내 이런말도 하지않았을 걸세. 그가 지는 화룡도는 마교교주의 신물이자 중원 10대기병중에서 당당히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신도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는 노부와 싸울때 적수공권이었네.” 진팔은 도저히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패력검제를 바라보았다. “예? 그럴수가...” “그는 노부와 싸우면서 도를 뽑을 필요조차 없다고 느낀 거겠지. 처음에는 노부의 실력이 사부님만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나중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엇네. 그는 사부님과 대결했을때까지만 화경이었지만, 지금은 현경인게야. 그렇기에 이 비급이 보물이라는 걸세. 노부의 말을 이해할수있겠나?” 직접 검을 겨뤄본 패력검제 였기에 묵향의 경지를 명확하게 말할수있는 것이다. 진팔은 패력검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느정도는.....” 화경의 고수가 자신의 심득을 적어놓은 비급은 무공을 익히는 무언으로서는 꿈에서라도 보기를 원할정도로 귀한 보물이다. 몇몇 문파에 그런 비급이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 그 누가 자파의 보물을 아무에게나 보여주겠는가. 당연히 문파 내 가중 깊숙한 곳에 비장해두고, 그 문파의 장문인 정도가 보며 깨우침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팔이 고개를 끄덕엿음에도 불구하고 패력검제는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쯧쯧, 표정을 보니 자네는 아직 이 비급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고있군.” “예? 화경급 고수의 심득이 적힌 비급이라면서요. 저도 그 가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노부가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닐세. 노부가 왜 마교교주를 언급했는지 그 이유를 아직 모르겠는가? 만류귀종이라 했네. 화경이라는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은 수 없이 많다는거지. 하나의 심득을 볼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기연이라 말할 수있는데, 이 비급에는 화경에 이르는 심득이 두가지나 기록이되어 있다네.” 패력검제의 말을 잘 이해할수 없는지 진팔은 의아하다는듯 물었다. “두가지의 길이라구요?” “그렇지. 예전에 사부님께서는 제자인 우리들에게 기회가 있을때마다 당신의 심득을 들려주셨거든. 바로 화경의 경지를 말이야. 하지만 그분께서 하신 말씀들은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었다네. 너무나도 깊은 도가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알아듣는 것조차 힘들었지. 하지만 비급에 쓰인 그의 심득은 완전히 달랐네. 사부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깨우침을 얻으려 했던 노부에게는 완전히 충격이었던 무리였지. 하지만 꾸준히 두사람의 대화하는 내용을 읽다보니 '아하,이말이 바로 그런것이구나'하고 이해할수 있겠더군.” 패력검제는 오랜 세월 비급을 연구하여 겨우화경의 경지에 오를수 있었던것이다. 그렇기에 같은 화경급이라 생각해 묵향에게 과감히 검을 겨눌 수있었던 것이다. 물론 생각과는 달리 허무하리만치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지만. 자신의 말을 열시미 듣는 진팔에게 패력검제가 물었다. “이제 노부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제야 진팔은 제령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이 비급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하기야 패력검제의 말대로라면 이건 제령문이 아니라 무림 최고의 보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진팔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그런 귀한 비급을 왜 일면식도 없는 자신에게 보여주는지 이해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그런데 어떻게 이런 보물을 저에게....?” “왜냐하면, 자네가 노부의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할까? 더군다나 자네는 이 비급에 나와 있는 교주와 인연이 있지않은가. 이번에 노부는 마교교주를 만난뒤 많은것들 깨달았네. 하여튼 노부는 자네가 이것을 읽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결정했다네.” 사실 마교 교주에게 복수하겠다는 집념으로 수십년을 살아온 패력검제에게 묵향과의 싸움에서 패한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분하다는 감정보다는 또다른 무의 경지를 엿봤다는 놀라움이었다. 묵향과의 일전 이후 그의 뇌리 속에는 좀더 높은 무공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염원만이 가득했다. 문파를 키운다거나 사부의 복수를 한다는 생각 따위는 그에게 있어 이제 하찮은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 묵향에게 무공을 배웠다는 진팔을 만나자 패력검제는 왠지 반가웠다.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무의 극점을 걸어가는 동료 무인으로서 묵향을 인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동안 진팔의 성품이나 자질을 시험해 보니 성격은 좀 모가 나 있었지만 무공에 대한 이해나 그의 자질은 가희 발군이었다. 그래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비급을 진팔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문파나 혈연 따위를 따지기보다 먼저 무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선배로서.. 진팔에게 작으나마 화경이라는 무의 경지를 엿볼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 하지만 그건 너무... 마교 교주가 한때의 변덕으로 심법을 저게 전해줬다고 그렇게 생각하실 이유가 있을까요?” “자네는 그것을 한때의 변덕이라고 생각했는가?” 그 반론은 진팔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반론을 제기하기에는 패력검제의 말투가 너무나도 진중했기 때문이다. “만약 심법 하나만 알려줬었다면 노부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사실 태허무령심법이 뛰어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것이네. 하지만 초기에 연성하기가 너무나도 힘들다는 최대의 약점을 안고 있네. 그 때문에 현문에서 조차도 아무도 익히지 않았을 정도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지. 그렇기에 인심 쓰는 척하면서 태허무령심법을 알려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한번 익히기 시작하면 극악하리 만큼 연성속도가 느린 데다가 다른 심법을 쓰면 모든게 허사가 되니,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다면 골탕 먹이기에는 최적의 심법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 그렇습니까?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벌써 대성의 경지를 코앞에 두고 있지 않은가.” “예에?” 진팔은 깜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래 떳다. 태허무령심법을 열심히 수련하고는 있지만 대성의 경지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허허. 아직 몰랐나 보군 그렇기에 그가 장난 삼아 자네에게 태허무령심법을 가르쳐준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걸세, 뮌가 그가 알고 있는 비장의 수법을 써서 심법을 대성할수 있도록 손을 쓴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게지.” “비장의 수법이요? 그냥 지독한 고문만 당했을 뿐인데요.” 고문이라는 말에 패력검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혈도에 강한 자극을 주어 내력을 증진시킬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떠올려보던 패력검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흠, 태허 무령심법의 경우는 그런 방법으로도 내력 증대의 효과가 아주 큰모양이군. 잘 연구해서 나중에 아들놈한테 써먹어봐야겠어.”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는 패력검제의 모습을 보며 진팔은 소름이 끼치는것을 느꼈다. 과거 묵향에게 당했던 그 혹독한 고문이 떠오른 탓이다. “그건 그렇고, 그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지만 자네는 보통 사람보다 두배 정도 빨리 내력을 쌓았다고 봐야 할 걸세. 자네가 설사 하늘이 내린 무골 이라도 이토록 빨리 쌓을수는 없네. 왜냐하면 내공은 그런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기에 노부는 그가 자네에게 대단한 관심을 보였고, 또 은혜를 베풀었다고 확신하고 있는거네. 알겠나?” “그, 그런가요?” 패력검제의 말을 들은 진팔은 황당스럽기 그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닥친 모든 고난을 그의 탓이라 여기며 살아 왔거늘, 자신에게 엄청난 기연을 안겨준 은인이라 말하니 납득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물론 패력검제의 말에 이해는 갔지만, 그렇다고 가슴깊이 쌓아두었던 묵향에 대한 원망을 한순간에 지울수는 없었다. ▒ 무림맹 까불어봤자야 “이상하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보고서를 보던 부문주 매영인의 질문에 대외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상관운 장로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개방에 침투해 있는 첩자들의 보고가 한결같은 점으로 미루어, 틀림없는거 같습니다.” 매영인은 상관운 장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상관운 장로께서는 개방의 속셈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무림맹 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좀 더 강화하고자 하는 속셈이 아닐까요? 사실, 태상문주님께서 무림맹의 봉공이 되신 후부터 거의 모든 중요한 정보는 무영문에서 처리해오고 있지않습니까. 하지만 본문의 영향력이 커진 만큼 무림맹 내에서 개방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고 말았지요. 그들로서는 뭔가 역전할수있는 기회를 노리는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을겁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개방의 첩자들이 계속해서 은밀하게 본문 주위를 맴돌고 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관운 장로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 부문주 매영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냥 납득하고 넘겨버리기엔 사안이 너무 컷다. “그건 그래요. 하지만 개방이 이렇듯 본문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온 적은 지금까지 없었지요. 아무래도 이건 어머님께 보고를 드리는 것이 좋겠군요.” “하지만 문주님 께서는 지금 사천분타에 가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태상문주님과 상의하시는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상관운 장로의 말에 매영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할머니께서는 여러 가지 일로 바쁘시잖아요. 이런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상의 할 필요는 없는거같은데...” 그때 밖에서 문들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운 장로는 회의를 하다 방해를 받자 살짝 눈쌀을 찡그리면서도 문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들어오너라” 안으로 들어온 문사 차림의 사내는 매영인과 상관운 장로에게 공손히 인사한 후 몇 장의 문서를 건네준 다음에 물러갔다. 문서로 눈길을 돌리던 상관운 장로의 눈이 일순 부릅떠졌다. 그는 지체 없이 문서를 매영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문주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어머님께서?” 문서의 맨 앞장에는 문주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매영인은 서둘러 문서 내용을 살펴 보았다. 맨 앞장을 넘기자 문주로부터 온 서신의 암호 해독문이 기록 되어있었다. 특급 기밀문서의 경우 문주 이상만 봐야하기에 암호문인 채로 전달되어 오지만, 1급 이하의 기밀 문서인 경우는 이렇듯 해독되어 전해지는것이다. 1급 기밀 지옥혈귀 천진악이 직접 지휘하는 염왕대 5개 대 출동. 현재 그들의 출동 목적은 파악 불가능함. 그들은 대파산맥을 따라 이동중. 그들이 보유한 전력을 추정하건대, 어쩌면 무림맹과 전면전을 시도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음. 이 사안에 대해 태상문주님께 즉시 보고한 후 대책을 논의할 것. “할머니께서는 어디에 계시죠?” “태상문주님께서는 지금 임청 원수를 만나기 위해 출타 중이십니다.” 매영인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어렸다. 무림을 뒤흔들 수있는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같다는 냄새를 맡은것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할머니께 기별을 넣으세요. 염왕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이에요.” “예,부문주님.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최근 개방의 움직임에 대한것도 알리는게 좋지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만으로도 개방이 본문에 대해 적의를 드러냈다는게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알리시는것이 좋을듯합니다.” “좋아요, 그렇게하죠. 지금 당장 지급으로 할머니께 연락을 넣도록 하세요.” “옛, 부문주님.”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대파산맥의 깊은 밀림 속. 아무리 달빛이 환한 밤이라고는 하지만 우람한 나무들에 가려 빛 한 점 새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대파산맥의 밀림 속을 이동하는 수백명의 인영이있었다. 극도로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도 이렇게 코앞도 안보일정도로 짙은 어둠 속에 싸인 밀림을 통과 하려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무 아래가 아닌 환한 나무위를 초상비의 신법을 이동하여 이동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그런데 가장앞에서 달려가던 인영 중 한명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천근추의 신법을 응용, 밀림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린것이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그 앞에서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눈치챌수 없을정도였다. 그것도 뒤따라가는 것만 해도 버거울 만큼 빠른속도로 이동하던 무리였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이 통과하고 1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두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저 멀리 달빛아래로 보이는 무인들의 뒤를 쫒고있었다. 두사람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그들이 추격하는 무리의 경공술은 가공할 만큼 빨랐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그들뒤에서 한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까 밀림 속으로 소리없이 사라진 바로 그자였다. 그는 튀어나오기가 무섭게 엄청난 속도로 가속하여 달려가기 시작하며 품속에서 비도 두자루를 꺼내 두사람을 향해 던졌다. “감히 염왕대를 추격할 생각을 하다니, 간덩이가 부은 놈들이군.” 그가 던진 두 자루의 비도는 맹렬한 파공음을 흘리며 달빛을 뚫고 날아갔다. “헉, 매복!?” 뒤에서 파공음이 들려오자 추격하던 자들은 찰나의 순간에 자신들의 행동을 선택해야했다. 생사를 가르는 그 순간, 둘의 행동은 완전히 틀렸다. 한명은 본능적으로 옆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암기라면 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또다른 한명은 천근추의 신법을 이용하여 곧장 밀림 아래로 푹 꺼져버렸다. 순간의 선택이 목숨을 좌우 하는 법이다. 황급히 옆으로 몸을 틀어 달려간 자는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뒤따라 날아온 비도에 등판을 꿰뚫리고 말았다. “컥!” 처절한 비명이 고요한 대파산맥의 밀림에 울러 퍼졌다. 하지만 밀림속으로 꺼지듯 몸을 피한자는 살아남을수 있었다. 비도가 그의 몸 대신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스치듯 지나간 암기는 밤하늘을 크게 한 바퀴 돈 뒤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비도를 잡아채며 추격자가 사라진 지점에 도착은 인영은 분하다는듯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는 밀림속을 노려보았다. 그는 바로 염왕대의 책임자인 지옥혈귀 천진악 장로였다. “젠장, 이래서야 아무리 나라도 저놈을 잡을 방법이 없군. 뭐, 좋아. 또다시 쫒아온다면 그때는 반드시 목을 따줄테다.” 말을 마친 그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수하들이 달려간 방향으로 사라져버렸다. 임청 원수는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화사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부채로 살짝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음은 확연히 알수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알수없는 것은 이 여인이 자신을 만나고 싶다고 한 이유였다. 임청 원수는 슬쩍 그녀가 데리고 온 시종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종들은 정자 저 아래쪽에서 자신의 호위병들과 함께 서있었다. 수는 몇되지 않았으니 형형한 눈빛을 뿜어내는것이 모두들 뛰어난 고수인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무림인이라는 것인가? 그런데 왜 무림에 적을두고 있는 여인이 자신을 만나자고 했을까? 그것도 황상폐하께서 총애하시는 내시 동관을 통해서 말이다. “노부를 청한 이유를 듣고 싶소이다.” 여인은 살포시 미소 지은후, 옥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선 제소개를 하는것이 좋겠군요. 원수께 철없는 어린 계집이 쓸데없는 소리 늘어놓는다는 오해를 사기는 싫으니까요. 저는 무영문이라는 단체를 이끄는 매향옥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해도 상대가 잘 모르는듯 하자 옥화무제는 덧붙여말했다. “혹여 무림맹이라는 단체는 아십니까?”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노부가 무림에 대해서는 잘 알지는 못하나 무림맹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거 같소이다.” “외람되긴 하지만 무림맹에서 봉공이라는 직분을 맡고 있다고 하시면 아시겠습니까?” 아무리 무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임청 원수였지만 무림맹이라는 단체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정파세력이니말이다. 군부 에서도 구파 일방의 속가제자 출신인 무장들이 꽤 있었기에 그정도는 아는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봉공이라는 직분이라니 .., 보통 봉공이라 하면 원로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들, 혹은 가장 존경 받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젊은 미녀가 봉공이라 칭하자 임청 원수는 당연히 의심스러울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심을 하기에는 동관이 자신있게 소개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임청원수의 뇌리 속에 뭔가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무림을 활보하는 여자들 중에 자신의 노화를 숨기기위해서 주안술을 익히는 고수도 있다는 말을 떠올린것이다. 그렇다면 저미녀가 사실은 뭔가 요망한 술법을 부린 할망구란 말인가? 그때는 그냥 흥밋거리로 들었는데 진짜 그런 당사자를 만나게 될줄이야. 황급히 자세를 바로한 임청원수가 입을 열었다. “허어, 노부가 몰라 뵙고 큰 실례를 저지를 뻔하엿소. 매향옥 봉공 이셧구려. 그런데 노부를 이곳으로 청한 이유가 무엇인지?” “예, 제가 속한 단체는 정보력에 있어서는 무림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일주일 전에 일어났던 금과 요의 전쟁을 들수있겠군요.” 옥화무제는 요와 금의 제2차 전쟁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군부의 수장인 임청원수도 첩자들의 보고를 통해 비교적 소상하게 그 경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세함에 있어서 무영문을 따라 올수 있을까? 옥화무제가 이것을 상대에게 말하는 것은 무영문의 힘을 슬쩍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효과는 있었다. 임청원수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입가에 감돌던 미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다고 느낄 정도의 미미한 변화 였지만 노회한 옥화무제의 눈을 속이기는 어려웠다. 군부의 책임자보다 더많은 , 그리고 더욱 깊이 있는 정보를 일개 무림인이 알고 있으니 임청원수가 느끼는 당혹감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것이었다. 하지만 오랜 경륜을 지닌 무장답게 임청원수는 곧 평정심을 회복했는지 다시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질문을 던졌다. “호오, 정말 놀랍소이다. 그런데 귀하가 세외의 정세에 그토록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뭔지 묻고 싶소이다.” “제가 무림에 몸담고는 있으나 오랑케에게 중원을 짓밟히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미흡한 본문의 힘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여 찾아뵌 것입니다.” “이토록 황실을 생각해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오.” 고개를 주억거리는 임청원수의 표정에서 옥화무제는 서서히 본론을 꺼낼 시기가 됐음을 느꼈다. “지금 요의 조정은 금을 정벌한 대규모 원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입수한 정보로는 최소한 60만이 넘을 것이 확실하다 하더군요.” 최소 60만 병력이라는 말에 임청 원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만일 그녀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송과의 국경선에 배치되어있는 방어선은 대단히 약화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대규모 원정군이 빠져나갔을때가 요를 칠수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말에 책임을 지실 수 있겠소이까?”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그리고 무림맹은 지금껏 나라에 큰일이 닥쳤을때 최선을 다해 돕지 않았었습니까? 저의 말을 믿으시는게 좋으실 것입니다.” 자신만만한 옥화무제의 말에 임청원수는 두 주먹을 불끈 지었다. 임청 원수는 옛 송의 영토를 요로부터 탈환 할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그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옥화무제는 내심 자신의 계책대로 일이 잘 풀리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원수께서는 조심하셔야 할것이 있습니다. 잠시 이것을 보시겠습니까?” 옥화무제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두툼한 종이 뭉치였다. 임청원수는 그것을 받아들며 궁금하다는듯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무엇이오?” “요에서 본국에 침투시켜놓은 첩자들의 명단입니다.” “뭣이?” 임청 원수는 격동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대부분 모르는 이름들이었으나, 일부 눈에 띄는 이름도 간혹 보였다. “이, 이것을 어떻게 입수했소?” “오래전부터 본문에서는 그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 외에도 더있을지 모르니 조심하시는것이 좋을 것입니다.” “내 이것들을 당장!” 옥화무제는 노화를 터뜨리며 벌떡 일어서는 임청원수를 제지하며 조용히 말했다. “고정하십시오, 원수. 지금 그들을 해치면 안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임청원수에게 옥화무제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후 말을 이었다. “타초 경사라고 했습니다. 힘들여 구축해놓은 첩자망이 한순간에 괴멸당한다면 요 황제가 본국의 의도를 의심할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척살하는 시기는 요를 응징하기 직전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첩자들이 누군지 아니 원수께서 그들의 눈을 피해 작전을 수립하시기도 쉽고, 그들에게 슬쩍 역정보까지 흘릴 수도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습니까?” 노련한 장수답게 임청 원수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즉각 이해했다. 첩자를 죽이지 말고 거짓 정보를 흘리는 데 이용하라는 말이 아닌가? 임청원수는 감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어, 오늘 노부가 크게 개안한 듯하오. 무림에 이토록 지략이 뛰어난 여걸이 있을 줄이야. 그대의 충정 어린말은 감사하게 받아 들이도록 하겠소이다.” 설혹 그것이 빈말일지라도 임청원수를 움직이려는 옥화 무제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임청 원수에게 잘보여놔야 대송 군부를 손쉽게 통재해나갈 수 있게 되는것이다. 상대는 약간의 정보만 줘도 알아서 모든 것을 처리해나갈 정도로 뛰어난 무장이었다. 물론 그 정보가 어떤것일지는 옥화무제가 선택하면 된다. 그렇기에 역으로 말하면 그 약간의 정보로 대송의 군부를 마음대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게되는것이다. 옥화무제는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원수께서 저의 말을 좋게 받아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혹 미천한 계집이 원수께 쓸데없는 말을 한다하여 질책을 받을까 심히 두려웠는데, 이렇게 흔쾌히 믿어주시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허허헛, 노부에게 이토록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셨는데 어떻게 그대를 질책할 수 있다는 말이오.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이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눈 후 옥화무제는 자리를 떠났다. 몇몇 호위를 이끌고 점차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아쉬운듯 바라보던 임청원수는 뒤에 시립하고 있던 부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무림맹의 봉공들 중에서 무영문을 이끄는 매향옥이라는 여인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보도록 하라.” “옛, 원수” “그리고 내일 정군관에서 회의를 열 테니 모든 장군에게 기별을 넣도록하거라.” “옛, 명령을 따르 겠나이다.” 부관이 재빨리 말을 타고 사라지는것을 보며 임청원수는 미소를 지었다. 만약 매황옥이라는 여인이 건네주는 정보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중원을 더럽히고 있는 오랑캐들을 몰아 낼 수 있을게 분명했다. 지피지기 라면 백전 불패라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요의 첩자 명단까지 쥐고 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없는것이다. “으하하하핫!” 정말이지 오랜만에 통쾌하게 웃어보는 임청원수 였다. 옥화무제는 무영문에 돌아오는 즉시 부문주의 집무실로 서둘러 걸음을 옮겻다 “어서 오십시오, 할머니. 가셨던일은 잘되셨습니까?” “오냐, 그건 그렇고 드디어 마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예, 염왕대5개 대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래, 놈들의 위치는?” “대파산맥을 따라 이동중이라고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들의 출동을 포착하는 즉시 비영단 소속 321조와 425조를 추가로 투입하여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어제 들어온 서신에 따르면 그들의 종적을 놓쳤다고 합니다.” “거기가 어디냐?” 매영인은 중원 천지가 자세히 기록된 커다란 지도에서 한 지점을 짚으며 말했다. “예, 바로 이곳입니다.” 옥화무제는 매영인이 가르킨 지점에서 약간 밑쪽인 삼협 부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로 아래로 내려온다면 삼협인근에서 도하할 가능성도 크겠구나” “에,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삼협과 무산 일대에 13개 정찰대를 포진 시키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흠, 그런다고 그들의 꼬리를 잡을수 있을까? 자성만마대나 흑풍대라면 몰라도 염왕대를 추적하기는 쉽지 않을텐데.” 매영인은 옥화무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을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비영단 소속무사들이 그토록 빨리 발각될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괜히 정보를 수집한다고 계속 무사를 파견하다가는 마교의 심사를 건드릴 수도 있었다. “무림맹에 연락을 넣는 것이 좋지않겠습니까? 매영인의 말에 옥화무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흠, 그럴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저들의 목적이 뭔지 알지 못한다. 괜히 일을 키웠다가 놈들이 그냥 슬그머니 돌아가버리면 우리들만 우습게 될 우려가 있어.” “그럴리가 없습니다. 염왕대 5개 대라면 웬만한 문파는 잡초하나 남겨두지 않고 쓸어버릴 만큼 막강한 힘을 지니고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기습을 한다면 지금 가장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서문세가라 할지라도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게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강 겅너 불구경하듯 옥화무제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매영인은 할머니에게 뭔가 다른 속셈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혹시.., 개방을 염두에 두시고 계신건가요?” 그제야 옥화무제는 싸늘하게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지금 그들이 뭣때문에 본문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수는 없다. 하지만 네가 보내준 정보를 분석해봤을 때, 개방이 그런 간 큰 행동을 할 수 있는것은 무림맹이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생각 할 수없지 않겠느냐?” 옥화무제의 말에 매영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럴리가..., 무림맹이 왜 그런짓을 한단 말입니까?” “그거야 아무리 나라도 알 도리가 없지. 정보가 너무나 부족하니까 말이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설마 자신이 마교와 비밀리에 협약을 맺은 일이 들통났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당시 완벽하게 무림맹의 이목을 피해 마교와 비밀 협약을 맺었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옥화무제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되어도 좋다. 염왕대 5개대라면 어딘가를 쓸어버리고도 남을 전력이야. 그렇게 해서 무림맹의 힘이 약화된다면, 결국 그들은 본문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수 없을 게야. 떨어지는 전력을 정보의 힘에 의지할수밖에 없을 테니말이다. 그렇기에 이번 정보를 무림맹에 전달하지 말라는것이다, 알겠느냐?” “예, 할머니.” 명령을 내린 후 , 지도에서 무림맹이 있는 쪽을 내려다 보는 옥화무제의 두눈에는 가소롭다는 눈빛이 있었다. 탁월한 정보력과 명청한 분석력으로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그녀로서는 무림맹이 자신을 향해 뭔가 수작을 부리려고 하느것이 같잖게만 여겨졌던 것이다. ▒ 사부의 분노 묵향은 냉파천을 혼내준후 하남 분타로 향했다. 개봉 인근의 상권은 과거 마교가 틀어쥐고 있었다. 하지만 마교 세력이 배공에서 철수한 이후 그 상권의 이권을 두고 수없이 많은 군소문파가 일어나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묵향은 하남 분타주의 안내를 받으며 건설 현장을 둘러봤다. 거대한 규모의 장원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다른 장원들과 틀린 점이 있다면 각종 기관 장치와 진법을 이용하여 적의 침입을 저지 할수 있는 방어선이 몇 겹이나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현재 기간 장치의 2할 , 진법의 3할이 완성되었습니다.” “모두 열심히 작업했군, 그래 무사들의 숙소 쪽은 어떤가?” “올해 말쯤이면 그런대로 천 명 정도는 수용 가능할 것 같습니다.” 분타주의 보고를 받던 묵향은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좋군, 열심히 해주게. 기본적인 방어 준비가 완비 되는 대로 본교의 정예들을 거느리고 신임 분타주가 임명되어 올 걸세. 그러면 아마 자네의 책임도 많이 가벼워지겠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교주님.” 천천히 건설현장을 둘러보던 묵향은 문득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천 분타를 들렀을 때 보니까 무림맹의 쥐새끼들이 침입해서 곤란을 겪고 있더군. 그에 대한 대비는 어떻게 하고 있나?” “예, 아뢰기 황송합니다만 현재의 경비 무사들로는 벅찬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본교에서 자성만마대의 고수들이 도착한다면 그런대로 완벽한 보안상태를 유지할수 있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자성만마대의 고수들이 파견되어 온다는 말에 묵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보내준다고 통보가 왔나?” “옛, 1개지대를 파견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마교의 각 무력 세력에서 대, 지대의 숫자단위는 큰 차이를 보인다. 2천의 정예를 보유한 염왕대에서 1개 대가 100명이라면, 1만명예 정예를 보유한 자성만마대의 1개 대는 500명이다. 그리고 1개지대는 50명이었다. “그정도면 충분한가?” “옛, 충분합니다, 교주님.” “그 외에 다른것은 없었나? 교에서는 본좌가 이곳으로 올 것을 알고 있을테니 뭔가 본좌한테 전할 것이 있다면 이리로 보냈을 텐데 말이야.” 그 말에 분타주는뭔가 떠오른는 것이 있는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예, 옛! 난데없이 특급기밀 문서가 도착한것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그 암호를 해독할 방법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나뒀는데, 그게 아마 교주님께로 보낸 것인 모양입니다.” “흠, 그런모양이군.”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분타주는 임시로 만든 문서 보관소로 교주를 안내했다. 이곳은 아직 제대로 된 분타가 아니었던 탓에 3급 비밀정도가 최고기밀 문서였기에 급하게 임시로 문서 보관소를 만든것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분타주가 내민 서신의 내용은 아주 짤막했다. 그 내용을 해석해서 읽은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자신이 원하던 바로 그 답장이 었던것이다. 특급기밀 염왕대 출발. 서신 끝에 군사 설민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호오, 돈의 위력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군. 이 정도까지 빨리 연락이 갔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말이야.” 묵향은 빙긋 미소를 지은후 분타주에게 말했다. “정말 수고가 많았네. 그건 그렇고, 혹시 본좌를 찾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 하는말이야. 그런 사람이 있으면 반항하지말고 가르쳐주는게 좋을거야. 알겠냐?” 묵향이 그런 말을 한 것은 혹시라도 아르티어스가 깨어나 자신을 찾으러 다닐까 염려해서였다. 과거 아르티어스가 자신을 찾으러 다닐 때 수하들은 당연히 상관의 행방을 숨기려고 들었었다. 그러다가 얼마나 피해가 막심했었는가. 똑같은 일을 또다시 이곳에서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묵향이었기에 미리 대비를 시켜둔 것이었다. “옛!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교주님. 그런데 어디로 향하실것인지 알려주셔야 하지않겠습니까?” “하남 분타로 갈 거다.” “알겠습니다, 교주님.” 유운비화 설취는 요즘 팔자에도 없는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느라 심사가 편치 못했다. 집주인인 냉파천이 있는데 왜 안주인 노릇을 하고있느냐고? 그야 당연히 냉파천이 복수를 하기 위해 묵향을 뒤쫒아간것이 아니라, 복수할 방법을 찾는다고 끙끙거리더니 앓아 누워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병명은 화병. 아무리 궁리해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복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울화가 골수까지 치밀어오른것이다. 설취는 탕약을 달이고 있던 하녀를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병에 탕약이 들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계속 자리에 드러누워 끙끙거리고 있으니 최소한 기력저하라도 막아보자는 생각에 보약을 달이라고 일렀던것이다. “대사형께서는 잘 드시더냐?” 그녀의 질문에 탕약을 달이고 있던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나으리께서 탕약을 드시지 않는것은 제잘못이 아닙니다. 소녀가 몇번이나 다시 덥혀서 갔사오나 도무지 드시지 않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 어쨌거나 정성껏 달여놓거라. 내가 가서 한번 설득해보마.” “예.” 그때 하인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외쳤다. “마님, 태사께서 오셨습니다!” 또다시 들려온 마님이라는 단어에 그녀의 눈꼬리가 위로 약간 치켜올라갔으나 곧 경악에 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태사라고 하면 바로 자신의 사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헉, 사부님께서? 이일을 어떻게하나? 너는 대사형께 빨리가서 사부님께서 오셨다고 전해드리거라. 그리고 너는 연무장에 있는 화아를 찾아 당장이리로 오라고 하거라. 어서!” “옛!” 지시를 내린 설취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둥지둥 대문으로 달려나갔다. 사부는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고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사부의 모습은 3년전과 바뀐것이 하나도 없었다. 잔주름하나없는 깨끗한 용모, 티끌조차 보기힘든 깨끗한 피부. 등에지고 있는 커다란 보따리만 아니라면 학문을 연마하는 미서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습이었다. “제자가 사부를 뵈옵니다.” “오냐, 오랜만이구나. 그런데 네가 여기는 왜 와 있는게냐?” 말을하던 미서생은 곧 뭔가 이상하다는듯 설취의 안색을 살폈다. “흠, 네 얼굴을 보니 뭔가 근심이 있는 듯한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설취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그래? 그건 그렇다치고 첫째는 어디에 갔느냐? 노부가 오랜만에 찾아왔는데도 아직까지 나와보지도 않다니, 혹시 또 그림을 그린다고 정신이 빠져있는것은 아니겠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설취는 일순 사부의 질문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하늘 같은 사부에게 어찌 만신창이가 된 대사형의 모습을 보일수있겠는가. 급히 생각을 정리한 설취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넘겨보자는 잔꾀에 거짓을 고할수 밖에없었다. “아닙니다. 대사형은.. 갑자기 일이 있어서 외부에 출타 중입니다.” “허허, 이거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네가 와 있지않았다면 헛걸음을 할뻔 하였구나.” “사부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개봉에 일이 있어서 지나가던 길에 들렀다. 그런데 너는 어찌 여기에 와있느냐? 청해성 쪽으로 한바퀴 둘러보겠다고 하지않았더냐?” 사부님의 말에 설취는 곱게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사부님도 참, 그 말씀 드린게 3년전이었다는 것을 잊으셨어요? 벌써 다 둘러보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먼저 사부님께 갈 에정이었는데, 도중에 대사형께 들린거죠.” 그 말에 사부는 놀랍다는 듯 감탄사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허허~, 참 세월이 벌써 그렇게 흘렀단 말이냐?” “사부님, 여기서 이러실게 아니라 안에 들어가셔서 향긋한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오냐, 그러자꾸나.”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예쁘게 차려입은 송화가 달려왔다. 아마도 하인의 연락을 받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새옷으로 갈아입고 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나는 사조를 향해 활짝 미소를 보내며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사조님? 소녀 인사 올리옵니다.” “오냐, 잘있었느냐? 허어, 못본사이에 어엿한 숙녀가 다 되었구나. 이제는 시집을 가도 되겠는걸.” “배울것도 많은데, 시집은 나중에 갈 거예요.” “허허헛, 그래도 안간다는 소리는 하지않는것을 보면 꽤나 솔직하구나.” 그 말에 송화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사조님, 계속 그러시면 저 갈 거예욧!” “오냐오냐, 노부가 잘못했으니 화를 풀거라. 그래 강호초출에 어려움은 없었느냐?” “예, 사부님께서 도와주셔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송화는 사조에게 첫 강호행에 대해 나불나불 얘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사부라면 자신의 제자를 훌륭한 인물로 성장 시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쉽다. 왜냐하면 제자는 자신의 대를 이어나갈 분신, 즉 자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사손쯤되면 얘기는 조금 틀려진다. 할아버지가 손자의 재롱을 탐하게 되는것은 그 아이의 성장에 대해 그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책임지는 것은 부모의 일이 아닌가. 게다가 오랜 삶을 살아온 경험에 의해 아둥바둥 철없는 아이들을 조져바야 오히려 서로간에 상처만 커질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각 개인의 인성과 자질을 따져가며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삶의 지혜를 쌓은 결과 일것이다. “그런데 사문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아주 나쁜사람을 만났어요.” “나쁜사람?” 사조는 사손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담담히 되물었다. 하지만 무심결에 튀어나온 송화의 말에 설취의 안색은 갑자기 창백해졌다. 설취는 사부의 눈치를 살짝살짝 엿보면서 송화에게 눈치없이 쓸데없는 말은 하지말라는듯 마구 눈치를 보냈다. 하지만 오랜 연륜을 쌓아온 사부가 그정도의 눈치도 채지 못할 리 만무했다. '뭔가 있군' “너는 가만히 있거라” 설취에게 경고를 한 후 사부는 송화를 엄격한 표정으로 다그치기 시작했다. 이런 무섭기 그지없는 사조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송화는 거에 질려 자신이 아는대로 미주알고주알 다불어버렸다. “뭣이? 그렇다면 그놈이 지금 출타중이 아니라 부상을 당해 앓아누웠다는 말이냐?” 설취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 사부님. 거짓을 아뢰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내 이놈을 당장! 으드드득, 무엇하는게냐! 어서 첫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거라!” “예.” 설취가 앞장서서 대사형이 앓아누워 있는 방으로 안내하자, 사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으르렁거리며 따라왔다. “내 하라는 수련은 안하고 그림만 그리면서 멋부리고 앉아 있을때부터 알아봤다! 비무에 패해서 사문과 노부의 얼굴에 먹칠을해? 내 이놈을 가만히 두나보자!” 하지만 미서생의 노화는 첫째 제자의 몰굴을 보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탐스럽던 수염의 중간 뭉텅 빠져나가 엉망진창이 되어있었고, 온 얼굴과 이마가 푸르탱탱 울긋불긋 멍이들어 있었던 것이다. 미서생은 곧장 내력을 이용해 첫째의 몸 상태부터 살펴봤다. 이정도로 박살났다면 내상이 심각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하지만 몇번이나 살펴봤어도 내상은 심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했다.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막강한 고수가 첫째를 가지고 놀았다는 결론밖에 나오지않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놈이 너를 이꼴로 만든것이냐?” 냉파천은 그날이 악몽이 떠오르는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닭똥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부에게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통탄스러운 것이리라. “만사불황, 그 미친 것이냐?” 아무런 대답이 없자 사부는 또 다른 용의자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가 떠들어대는 인물들은 무림에서 한 성깔 한다고 알려져있는 화경의 고수들이었다. “수라도제냐? 그렇지 않다면 황룡무제냐?”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설취가 놀라움을 감추며 질문을 던졌다. “사부님께서는 그가 화경의 고수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물론이다. 화경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신검합일에 든 고수를 이토록 손쉽게....이길수가 있단말이냐.” 사부는 '박살내놨다'는 말을 쓰려다가 아무래도 진짜 떡이있는 제자놈이 딱하게 보였는지 슬쩍 말을 바꾸었다. “상대가 사용한 무공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사부님.” 설취의 말에 사부는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며 물었다. “그래? 네가 보기에는 그 무공이 무엇이더냐?”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른 신법을 위주로 한..” 설취의 대답에 사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꾸했다. “오호라, 이형환위! 그렇다면 범인은 화경이 확실하구나.” 설취는 조심스레 자신이 짐작하고 있는 바를 사부에게 말했다. “화경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게냐? 천지인의 삼화와 수목금화토의 오기를 고루 몸안에 이루어 내지 않고서야 어찌 혈육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몸이 잔상을 남길정도로 빨리 움직일수 있겠느냐? “그는 사파의 인물인듯 했습니다. 마의 극한이라 할수있는 극마지체를 이루었을때 이형환위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사부는 뭔가로 머리를 한대 맞은 듯 멍하니 서있었다. 그 가능성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것이다. 사부는 설취에게로 고개를 휙 돌리며 다그쳤다. “그렇다면 너는 그놈이 마교도라고 생각 한단 말이냐?” “예. 그에게서는 사악한 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괴팍스럽기 그지없는 언행으로 봤을때 아무래도 정파는 아닌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부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렷다. “확실히 극마에 든다면 자기의 마기를 완벽하게 숨길수 있지. 정확히 그놈이 여기서 떠난 게 언제더냐?” “6일 전입니다.” “그놈이 어디로 간다고 하더냐?” “그런말은 못 들었습니다. 하지만 개봉 쪽에 볼일이 있다는 말은 했습니다. 어쩌면 정확히 개봉은 아니고, 그 인근에 있는 사파 계열의 어떤 문파, 혹은 마교의 분타쯤 되겠지요.” 미서생은 잠시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래전, 마교는 갑자기 중원 전체에 산재해 있던 분타들을 철수시켰다. 그렇다면 마교의 분타는 아닐테고, 사파 계열의 문파라는 소리인데.... 그놈이 극마라면 최소한 부교주급이니 그런 거물이 행차할 정도라면 결코 작은 문파는 아니겠지?” 싸늘하게 미소 짓는 사부의 얼굴에서는 짙은 살기가 나오고 있었다. ▒ 파문당한 화산 장문인 무림맹의 행동은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무림맹을 구축하고 있는 구심점들 중의 하나인 화산파의 장문인이 변절을 한것이다. 어지간한 인물이 변절을 했다면 이토록 소란을 떨 이유가 없겠지만, 화경의 고수이자 화산파의 장문인이 그 대상이다보니 얼마나 많은 변절자가 있는지 알수도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 보니 무림맹이 동원한 고수들의 수는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무림맹은 일종의 훈련을 한다는 명목하에 출동 명령을 내리는 치밀함을 보였다. 화산을 포위한 마교도 들이 공격을 가해온다는 가정하에 각 장로들이 고수들을 거느리고 중요 지점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일단 포진이 완료되고 살짝 방향만 돌리면 화산파에 대한 완벽한 포위망이 완성되는 것이다. “매화문검 장로님, 모든 장로님이 목표 지점에 도착하여 포진을 완료하셨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옥진호 장로는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겠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모든 장로 중에서 옥진호 장로가 맡은 임무가 가장 중요했다. 그가 직접 화산에 올라 장문인의 변심 여부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무림맹은 화산파를 공격하기 시작할 것이다. 옥진호 장로는 호위무사 10며명을 거느리고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 였기에 산길을 오르는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멈추거라!” 화산의 문도들이 몇 매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높직한 곳에서 침입자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는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옥진호 장로는 품속에서 무림맹을 표시하는 신물을 꺼내어 보이며 외쳤다. “무림맹에서 왔다네! 장로님들을 뵙고 의논 할것이 있어서 찾아왔네. 기별을 넣어주게!” 그말이 떨어지자 마자 한명이 위쪽으로 난 길을 따라 경공을 전개하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마도 무림맹에서 누군가가 찾아왔음을 통보하기 위해서 일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명은 산위에서 허겁지겁 내려와 정중히 인사한 후 입을 열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무림맹에서 지체높은 손님이 찾아왔다는 수하의 보고를 받은 화산파의 장로들은 정문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들은 무림맹에서 파견된 사람이 옥진호 장로 같은 거물이라는 것에 다소 의외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일단 저마다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허어,무림맹에서 손님이 찾아오셨다고 하길래 누구신가 했더니 매화문검 장로님이 아니십니까? 이렇게 멀리까지 왕림해주셔서 몸들 바를 모르겠소이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장문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로들 중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백화 장로가 권했지만, 옥진호 장로는 정중히 사양했다. “장문인은 나중에 뵙기로 하지요. 노부는 일곱 분 장로님과 비밀리에 의논을 드릴것이 있어서 이렇게 달려왔소이다. 잠시 시간을 좀 내주실수 있습니까? 그말에 백화 장로는 어쩔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무림맹은 정파의 으뜸이다. 그렇기에 무림맹 장로의 말은 대단한 권위와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허, 결례이기는 하지만 매화문검 장로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백화 장로는 옥진호 장로를 사위가 활짝 트인 정자로 안내했다. 장로들이 가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조성된 이곳은 일반 제자들이 감히 얼씬할 생각도 하지못해 조용하기 짝기없었다. 그렇기에 백화장로는 밀담을 나누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옥진호 장로는 주위를 세심히 훑어보며 혹여 엿듣는 자가 없는지 살펴본 후, 자신이 알고있는 바를 소상하게 화산파의 장로들에게 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화산파의 장로들은 옥진호 장로의 말에 벌어진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란 말인가. 모두들 옥진호 장로의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때 장로들 중에서 가장 연배가 낮은 석진 장로가 뭔가 짚이는 일이 있는지 옥진호 장로에게 급히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게 9일 전 저녁시간에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옥진호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맞소이다. 본맹의 매화검과 귀파의 능비화 소저가 그날 저녁 객잔에서 마교교주와 화산 장문인이 밀담을 나누기 위해 만나는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자파의 능비화도 봤다는 말에 화산파 장로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누명을 썼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제일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셋째인 공천 장로였다. “사형들, 기억하실 테죠. 9일전이라면 의문의 침입자가 들어온 바로 그날입니다.” 그러자 다른 장로들도 저마다 떠들기 시작했다. “흠, 그러고보니 그날 장문인의 거처가 완전히 박살이 났었지. 그런데 장문인이 그 침입자와 함께 어딘가로 외출을 하지않았나? 그렇다면 그자가 바로 마교교주라는 말인가?” “아마도 그럴 갑니다, 사형. 저는 장문인이 자신의 거처가 박살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그냥 묻어버리려 했던 태도가 뭔가 미심쩍었습니다.” 여기까지 애기가 흘러나왔을 때 백화 장로가 손을 들어 더 이상의 말들을 끊었다. 지금은 자파의 인물둘만 있는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흠, 그얘기는 나중에 우리들끼리 따로하세나.” 그말에 모든 장로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 일은 문 외의 인물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주제로 삼을 얘깃거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화산 장문인이 마교와 결탁했다는 전무후무한 추문이 외부에 퍼질 수도 있는 일이아닌가. “그 일을 알려주시려고 이렇게 친히 발검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화문검 장로님.” “무슨 말씀을. 그런데 일이 고약하게 됐소이다. 덮어놓고 화산파의 장문인을 조사해볼수도 없는노릇이고, 또 조사하지 않고 넘어갈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래서 노부는 그것을 화산파에게 맡기기 위해 찾아뵌 것이외다.” “그렇게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하오이다.” “물론, 이 일에 대해 본맹이 이해할 만한 확답을 장로들께서 내주시지 못하시면 어쩔수없이 본맹이 나설수 밖에 없소이다. 노부는 그걸 전하려고 왔지요.” “무, 무림맹이 나서다니요?” “상대는 화경의 고수가아니겠소? 지금 본맹의 최정예 무사 2천이 화산파 전체를 포위하고 있소이다. 물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그들을 거느리고 온 것이기는 하지만, 될수있다면 그들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소. 지금은 본맹의 장로급 이상만 이 사실을 알고있지만 그들을 동원한다면 비밀을 유지할 자신이없기 때문이외다.” 그말에 장로들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무림맹이 정예 무사 2천을 동원할 정도라면 최악의 경우 화산파 전체와도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백화 장로는 표정을 굳히며 대꾸했다. “마, 말미를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들이 잘 해결해보겠습니다.” “물론이오. 노부도 그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릴수만은 없는 노부의 입장도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사실 각본대로 라면 옥진호 장로가 현천검제를 직접 만나 문책을 했어여만 했다. 하지만 만약 그러다가 그가 진짜 마교의 간세라면? 옥진호 장로는 그 자리에서 목슴을 내놔야 할것이 분명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 그가 현천검제를 만날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화산파의 장문인들을 슬쩍 불러내어 알아서 처리하라고 당부한것이다. 그로인해 일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도 모르고....... 현천검제는 화산파의 장문인이었다. 그런만큼 문의 대소사는 전부 그의 귀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번처럼 무림맹에서 거물급 인사가 찾아왔다면 분명히 그의 귀에 들어갔을것이 분명했다. 현천검제는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을 즐기다가 장로들이 들어서는 기척을 느끼고 눈을떳다. 그는 이미 문도들을 통해 무림맹에서 옥진호 장로가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장문인을 만나기 앞서 화산의 장로들과 뭔가 회담할 것이 있다고 하여 조용한 장소로 안내되었다는 것 또한 이미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는 조용히 명상을 즐기며 회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현천검제는 마당을 쓸고있는 동자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장로님들이 오시니 차를 준비하거라.” “예.” 동자가 나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들 오시오. 그래, 매화문검 장로는 만나보셧소?” “물론입니다, 장문인.” 맏이인 백화 장로는 한동안 난처한 듯 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마냥 시간을 끌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부들이 장문인에게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해보구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것은 곤란했다. 이번 일의 경우 화산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에 철저한 비밀이 요구되는 일인것이다. “여기서는 곤란하고, 잠시 조용한 곳으로 가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러지요.” 현천검제는 차를 준비하고 있는 동자에게 말했다. “내 밖에 잠시 나갔다 올테니 너는 방을 잘 치워놓도록 하여라.” “예.” “자, 가십시다.” 그들은 인적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백화장로는 이곳까지 와서도 말하기가 곤란한 듯 한참을 망설인 후 조심스레 입을열었다. “며칠 전 본문에서 난동을 부린자가 마교의 교주라던데, 그 말이 사실입니까?” 백화 장로의 물음에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않았지만 현천검제의 가슴은 충격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사실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옆에서 또 다른 장로도 거들었다. “장문인, 이건 화산의 미래를 좌우할 만큼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꼭 답을 들려 주셔야겠습니다.” 현천검제는 오랫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대답은 정해진 것. “그가 마교의 교주인 것은 맞소.” 장로들은 경악했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놈이 뮛때문에 장문인을 찾아 왔다는 말씀이십니까?” 장로들이 알기 전 미리 말을 꺼냈으면 좋았을 걸, 하며 후회를 하는 현천검제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무림맹에서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현천검제였다. “얼마 전에 사로잡은 사파의 무리를 석방하고, 그들이 그곳에 정원을 건설하는것을 묵인해달라는 것이었소. 사실 그곳은 본문의 세력권이라고하나 아주 멀리 떨어진 외각에 자리한 곳이니 노부도 그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소.” “정말이십니까?” “왜 노부가 여러 장로 분들에게 거짓말을 하겠소?” 이때 셋째인 공천 장로가 화가 난 어조로 외치며 앞으로 나섰다. 전대 장문인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인덕이 뛰어난 사람이 대사형인 백화라면, 가장 검술이 뛰어난 사람이 바로 공천이었다. 전대 장문인 시절,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고 있었던 공천은 당연히 다음 대 장문인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다음 대 장문인을 지목하는 자리에서 장문인이 의외의 인물을 지목한 것이다. 백화 대사형도 아니고, 자신도아닌 의외의 인물을 말이다. 만약 장문인으로 백화대사형이 지목되었다면 공천도 납득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장문인의 직계도 아니었던 현천검제가 지목 되었으니 공천으로서는 배알이 뒤틀릴 수밖에없었다. 어쩔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오랜 세월 그의 가슴에는 전대 장문인이 뭔가에 홀려 후임자를 잘못 지목했을 거라는 믿음이 굳게 자리잡고있었다. 그런데 기회가 온것이다. 현천검제를 뭉개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공천은 절대 놓칠 수가 없었다. “사형들, 저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마교교주가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입니다!” “셋째는 가만히 있어보게나, 이보시오 장문인. 정말 그것외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까?” “물론 몇가지 더있었소. 하지만 그런 소소한 것까지 장로들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그 말에 공천장로는 말도 되지 않는 다고 소리쳤다. 그건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 였다. 백화 장로는 대화를 나누기에는 너무 시끄러워지자 손을 휘둘러 장로들을 조용히 시킨후 현천검제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장문인께서는 마교와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게십니다. 장문인이 하신 그 말이 그 협의를 더욱 짙게 만들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그것외에 교주와 무슨 말을 주고받으셨습니까?” 백화 장로가 장문인을 의심하는 것은 어찌 보며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마교교주가 왜 화산파에 은밀히 와 장문인을 만난단 말인가. 그것도 혼자. 아무리 그가 무서운 고수라고 해도 장문인이 거처하고 있는 곳은 화산파 내에서도 최고 중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말이다. 더군다나 뭔가 다른 일들이 있는 듯한데 말을 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현천검제의 모습에서 백화 장로의 의심은 점점 깊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오히려 현천검제였다. 아니, 답답하다기보다 오히려 섭섭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여태껏 수십 년을 친하게 지내온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의심으로 가득 찬 심문을 받아야만 하다니.. 현천검제는 자신이 제대로 된 삶을 살아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마교와 내통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신은 자랑스런 대화산파의 장문인으로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오지 않았던가. 분명 야심한 밤에 마교교주가 자신을 찾아와 잠시 얘기를 나누기는 했기에 이러는 것이라는 건 이해할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식으로 추궁을 할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현천검제가 객잔에서 교주와 주고받은 대화는 거의가 사형제로서의 대화였다. 자신이 깨달은 무공의 심득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주로 주고받은것은 대부분 사부와의 추억이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마교와의 내통하고는 한참 먼 얘기였다. 그런다고해서 그런애기를 하고 싶지는 않은 현천검제였다.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데, 만약 교주와 자신이 사형제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더이상 변명의 여지도 없게 될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잠시 복잡한 심기를 억누르던 현천검제는 매서운 눈초리로 장로들을 둘러본후 입을 열었다. 그의 심사를 말해주듯 그의 말투는 당연히 차갑고도 거칠었다. “지금 노부를 심문하고 있는 것이오?” 현천검제가 정공법으로 나오자 장로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오. 수십 년 동안 오직 대 화산파의 중홍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노부요. 그런데 겨우 마교교주와 한번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노부를 이렇게 핍박하실수 있단말이오? 더군다나 마교와 내통했다는 말씀까지 하시다니요.” 두눈을 부릅뜨고 외치는 현천검제의 말투는 마치 피를 토하듯 비통하기만 했다. 백화 장로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변명하듯 다급히 입을열었다. “그렇기에 저희들이 장문인에게 말씀을 드리는것이 아닙니까? 장문인께서 혐의를 벗을 수 있도록 저희들을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마교교주가 겨우 그런 부탁을 하러 이곳까지 직접 올리가 없지 않습니까? 진짜로 그와 주고받은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알려주시면 저희들도 납득 할수 있을겁니다.” “허허, 이런 답답한 사람들을 봤나. 그가 한 애기는 그것이 전부였소. 더이상 말할것이 없으니 노부는 이만 가보겠소.” 현천검제는 가버린후, 장로들은 그 자리에 남아 뒷일의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백화장로는 좀전의 비통에 찬 장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장문인의 말에 거짓은 없는 듯하니 이걸로 사건을 일단락 짓는게 어떻겠느냐?” 그러자 무슨 말이냐는 듯 공천장로가 앞으로 튀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얼마나 흥분냈는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사형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희들도 그말을 납들할수 없는데, 어떻게 무림맹을 납득 시킬 수있다는 말씁이십니까? 지금주위에 무림맹의 무사들이 깔려있다는 사실을 잊으신겁니까?” 그말에 동조하듯 백화장로를 제외한 나머지 장로들은 회의어린 시선으로 장문이이 사라진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공천 장로는 더욱 힘이 나는지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만약 장문인이 말한대로라면 왜 두사람이 객잔까지 가서 술을 마시며 담소를 했다는 말을 하지않겠습니까? 그까짓 사파의 조무래기들을 구하기 위해 마교교주가 혼자 본문을 찾았다는 말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긴 제자를 불러 접대를 하면 그만인 일이거늘..” 장로 중 한명이 자신의 말에 호응을 하자 공천은 지금까지 장문인에게 품고있던 의심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사형들께서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저희들은 모두 화산파에서 가장 뛰어난 기재들로 전대 장문인께 직접 검을 사사했습니다. 그런 저희들보다 그의 무공이 높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사실 건식 사숙께서 가르치신 제자들이 모두 무공이 높다면 이해를 할수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잘아실겁니다.” 공천 장로의 말에 모든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로서도 지금까지 그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지금의 현천검제가 다음 대장문인으로 지목되었을때, 화산파는 발칵 뒤집혔었다. 장문인의 직계가 아닌 제자가 다음 대 장문인으로 지목 받은 적은 화산파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장로와 수뇌부가 반대를 했지만 전대 장문인의 뜻은 완고했다. 무엇보다 현천검제가 장문인직에 무사히 오를 수있었던 이유는 전대 장문인의 직계 제자들보다 월등한 무공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당시 갑작스럽게 무공 실력이 급증한 현천검제를 두고 수많은 소문이 돌기도했었다. 장로들은 전대 장문인의 직계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그누구보다도 공천의 말에 공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쓰는 독특한 검술, 소제는 그게 마교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력한 마교의 무공에 깊이 있는 본문의 내공심법과 만나 그의 경지가 그토록 높아졌다고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어디서 그토록 강한 검술을 배웠겠습니까?” 공천의 말에 몇몇 장로가 동의를 표하며 입을열었다. “소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문인의 독문검법은 정파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무조건 상대를 격살하기 위한 마도에 가까운 검법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모두들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공천 장로는 쐐기를 박듯 현화산파의 상황을 들고나왔다. “저희들은 이대로 물어 날수가 없습니다! 무림맹에 납득할 만한 대답을 내놓는 것도 문제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의를 위해 싸워왔던 대 화산파의 역사에 일대 오점을 남길수도 있다는 사실을 관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공천 장로의 말에 백화장로는 난처하다는듯 중얼거렸다. “허어, 문제로군. 화산파의 선령들께서 부족한 우리들에게 이 난관을 해쳐나갈 지혜를 주셨으며 더 바랄것이 없겠어.” 다음날 저녁, 장로들은 밤새 회의를 거듭한 끝에 다시 한번 장문인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현천검제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러니 와달라는 말에 장로들이 있는 곳으로 갔을때 입을 다물수 없을정도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현천검제의 제자 일곱 명이 심한 고문을 당한듯 처참한 모습으로 쓰려져있었고, 두명의 장로가 검을 뽑아든 채 언제라도 벨 기세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무슨짓이오!” 현천검제의 말에 백화장로가 고개를 수그리며 용서를 빌었다. “이렇게 까지 해야만하는 노부들을 용서하십시오. 장문인, 하지만 장문인께서는 지금 본문이 처해 있는 곤경을 잘 알지 못하십니다. 화산파 전채를 무림맹의 무사들이 철통과 같이 포위하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무림맹이 화산파를 포위하고있다는말에 현천검제는 충격을 받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떳떳했기 때문이다. “겨우 그 일때문에 화산에 검을 겨눈다는 말이오? 증거도 없이?” “물론 저희들도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문인께서는 저희들이 납득할만한 그 어떤 설명도 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상태에서 저희들이 어찌 무림맹을 설득 할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그족에서 의심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감히 대 화산파에 검을 들이대는 행위를 장로들께서 납득하신다는 말이오! 마교교주를 한번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 화산파를 능멸하는 것이 아니고 뮛이겠소! 더군다나 노부가 아니라고 말했으면 그누구보다도 믿고 따라와주어야 할 장로분들께서 이런모습을 보이시다니요!” 노기에 찬 현천검제의 부르짖음에 모두들 움찔했다. 다른 장로들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공천 장로가 얼른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밤새 회의를 할때 제자들을 설득해 진실을 밝히자는 의견을 낸자가 바로 공천이었다. 만약 현천검제가 마교에 포섭되었다면 그의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현천검제의 제자를 잡아 고문까지 해보았지만 신통한 대답을 얻지못하자 다급한 나머지 제자들을 끔직히 아끼는 현천검제를 위협해보자는 방법까지 나오게 된것이다. “대사형, 저말에 속아 넘어가시면 안됩니다! 저놈은 마교와 작당했을게 뻔합니다! 지금 이렇게 넘어 가게 되면 나중에 그검은 흉심을 드러냈을 때 어찌 감당하려하십니까?” 공천 장로는 다급할수 밖에없었다. 지금으로서는 현천검제가 설사 죄가 없다고 하더라도 만들어야 할 상황이었다. 장문인의 제자들을 적당히 구슬려 입을 열게 한다는 것이 손을 과하게 써 고문까지 하게 된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지금 위협까지 하고있지 않은가. 어짜피 기호지세 였다. 일단 시작한 이상 끝을 보지않으면 이쪽이 다치게된다. 공천의 말에 백화 장로를 비롯한 나머지 장로들의 얼굴에도 난감한 기색이 짙게 떠올랏다. 그렇다, 어짜피 엎질러진 물이다. 공천장로의 부추김에 넘어가 현천검제의 제자들을 고문하고 인질로 잡았기에 이제는 물러설수도 없었다. 만약 이대로 물러선다면 후환이 두려왔다. “장문인, 본문을 포위하고 있는 무림맹을 이해시키려면 장문인이 자리에서 물러나셔야 합니다.” 참중한 백화장로의 말에 현천검제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금치못했다. “허헛, 노부가 물러나면 오히려 무림맹이 더욱 노부를 의심할 것이 분명한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하지만, 장문인이 한 해명정도로는 그 누구도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증거는 없지만 무림맹은 두고두고 본문을 의심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화산의 선조들께서 쌓아놓으신 위명을 장문인 하나로 인해 잃어서야 되겠습니까?” 현천검제는 더이상 입을 열수가 없었다. 이런 편협한 사람들과 수십년동안 동문이라고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던것이 통한스럽기만 했던것이다. 얼마나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는 자신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현천검제의 가슴은 미어질듯 아프기만 했다. 더군다나 제자들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위협을 하고 있는 저 모습들을 보라. 자신의 제자들은 저들의 사질이기도 하지않은가. 현천검제는 자랑스럽게만 생각했던 화산파에 대한 자긍심이 일순 역겨움으로 바뀌는것을 느겼다. 통한에 젖어 두눈이 붉게물든 현천검제는 장로들을 찢어 죽일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크흐흣, 이런 썩어빠진 인간들을 노부는 그동안 동문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단 말인가! 지금까지의 생이 후회되는구나! 좋소, 노부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소?” 백화장로는 씁슬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열었다. “먼저 장문인직에서 물러나셔야만 하겠소.” 현천검제는 쓰러져있는 자신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의식을 잃었는지 모두들 미동조차 하지않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물러서지않고 싸운다면? 아무리 그가 화경의 고수라해도 모든 제자를 장로들에게서 안전하게 구해낼 자신은 없었다. 싸운다면 결국은 그가 승리하겠지만, 그동안 그들이 제자들을 해코지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않은가. 현천검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제자들을 구하려면 어쩔수 없는것이다. 게다가 무림맹까지 화산을 포위하고 있다고 하지않은가. “좋소, 장문인직에서 물러나리다 그러면 되겠소?” “장문인직만 내놓는다고 뭐가 해결된단 말입니까? 파문을 시켜야지요, 파문을! 마교와 결탁한자를 계속 본문에 놔둔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백화장로는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둘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나머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4대 3으로 파문시키자는 쪽이 우세였다. 사실 백화장로는 이정도까지 일을 진행시킬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어찌되었던 다수결에 따라 파문을 시켜야하는 입장에 놓인것이다. “장문인, 장문인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장로들의 뜻이 그렇다보니 노부 혼자 힘으로는 어쩔수가 없구려. 장문인을 화산파에서 파문하기로 결정했소이다.” “허허헛, 이렇게 될수도있는가? 좋아, 노부도 노부의 결백을 믿어주지도 않는 자들과 더이상 입씨름 하기싫다.” 그러자 공천 장로가 또다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본문의 문규는 잘 알고 있지않소? 파문당한이상 본문에서 받은것은 본문에 돌려주어야만 할것이오.” 현천검제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사문에서 받은 것은 나갈 때 사문에 돌려줘야 함은 잘알고있네. 하지만 노부가 지닌 무공의 근본은 사문의 것이 아닐세.” 그말에 공천장로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대꾸했다. “물론 그렇겠지. 마공이 그 근본일테니 말이야.” 현천검제는 씁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전대 장문인의 허락을 얻어 노부는 문 외의 인물에게 무공을 전수받았네. 장로들을 그 사실을 잊었단 말인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장로들이 그것을 잊을리는 없었다. 공천장로가 재빨리 말했다. “물론 그자에게서 약간의 검술을 배우는것을 사부님께서 허락하신것은 알고있소. 그리고 그자가 마교의 간세일수도 있다는말이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소. 장문인이 지닌 내공의 근본은 그 누가 뭐라해도 화산의 것이 분명하오. 내공의 근본이 화산의 것인 이상 내공을 폐행야만 하오. 안 그렇소?” 내공을 폐한다 함은 단전을 파괴하겠다는 말이다. 문제는 단전이 파괴되면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폐인이 되는 것이다. 현천검제는 고개를 들어 화늘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 이대로 도망친다면 그누구도 자신을 막을 수 없음을 잘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망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자들의 안위도 걱정되었지만. 무엇보다 화산파의 문도로서 수십년을 살아왔다는 것이 그저 허망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어쩔수없이 모든것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좋소, 사문에게 받은것, 나가는 마당에 사문에 돌려드리리다.” 그렇게 말하는 현천검제의 어조에는 짙은 허탈감마저 어려있었다. 말을 끝맺은 현천검제의 손이 일순 푸른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현천검제는 마음을 굳혔는지 주저하지 않고 손을 기해혈에 깊숙이 박아넣었다. 일평생 쌓아온 내공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은 당연했다. 순간 하단전이 파괴되며 엄청난 충격이 그의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심한 내상까지 입었는지 그의 입가로는 가는 선혈마저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웃섶으로 입가를 쓱 닦은 후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장로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있소.” 백화장로가 안쓰럽다는 듯 그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노부의 제자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 그냥 놔주길 바라오. 그리고 이번에 사로잡아 가둬둔 자들을 무조건 조건없이 풀어주고, 그들이 장원을 건설하는것을 그냥 놔두시오. 그들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마교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얼굴을 붉히며 공천 장로가 끼어들었다. “저자는 이제 본파의 장문인이 아닙니다. 그런만큼 저자의 말에 귀기울일 이유가 있습니까. 저자가 마교에 물들었다면, 제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결단코 이녀석들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쓰러져 있는 현천검제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공천장로가 말했지만, 백화장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그렇게하면 장문인이 파문했다는 것이 외부에 밝혀질수 밖에 없네. 그런만큼 자네의 의견은 받아드릴 수 없어. 대신 이들의 주위를 감시를 붙여 조사를 하다가 낌새가 이상하다면 그때 처지해도 늦지는 않네.”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자 공천장로는 다른 사안은 결코 양보 못하겠다는 거품을 물고 들었다. “저자의 제자들은 그렇다고 쳐도 사파놈들을 풀어준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마교와는 그 어떤 협상도, 타협도 할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사형? 저는 이번 기회에 그놈들의 목을 베어 본문의 영역에 칩입한 사파는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무림맹의 본문의 저의를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상당수의 장로가 공천장로의 뜻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그것을 본 백화장로는 어쩔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장문인의 제자들은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청은 들어드릴수 없겠군요. 그들은 본문에 세력권을 침입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할겁니다.” “클럭! 그게 장로들의 선택이라면 좋을 대로 하시오. 이제 노부는 가봐도 되겠소?” 현천검제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공천 장로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단전이 파괴된 이상 현천검제의 무공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것이다. “대사형, 이자를 그냥 가게 놔둘수는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본문의 장문인이 폐인이 되어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누군가의 눈에라도 띄어보십시오. 그러다가 만약 마교와 결탁한 것이 드러나 장문인직을 물러났다는 소문이라도 나게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되면 본문의 제자들은 얼굴을 들고 밖을 나다닐수 없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이자의 내공을 폐했다고는 하지만, 이자는 본문이 자랑하는 무공을 알고있습니다. 이자가 만약 마교에다가 본문의 무공에 대해 떠벌이기라도 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겠습니까?” “대사형, 셋째 사형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백화장로는 고개를 설레절레 젓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의 어조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장문인 , 노부로서는 어쩔수가 없구료.” 그는 사제들을 향해 지시했다. “장문인을 참회동으로 모셔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수 없었는지 공천장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대사형, 저자를 참회동에 가두시는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탈출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을 방지하려면 누군가가 입구를 지켜야만 할텐데, 누구에게 그 일을 시키실껍니까? 만약 그러다가 입에서 입으로 비밀이 새나가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그냥 지금 죽여버리는것이 가장 뒤끝이 깨끗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허어, 아무리그래도 그럴수는 없는 일이야. 파문당했다고는 하나 어떻게 장문인으로 모셨던 분을 우리 손으로 죽일 숙 있다는 말이냐? 그건 노부가 절대로 허락할수없다.” “그렇다면 최소한 손발의 힘줄이라도 절단해 도망치지 못하게라도 만들어야 함니다. 그편이 휠씬 일이 수월할겁니다.” 그 말에 현천검제의 몸이 일순 움찔거렸지만 이미생을 포기한듯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백화장로는 안쓰럽다는듯 그를 잠시 바라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이상 나은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백화장로는 공천장로를 향해 어쩔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사형이 보고 싶구나 개봉 주위에는 수많은 무림의 문파가 난립해 있었다. 100여 명이 넘는 식객을 갖춘 대규모의 문파만 해도 100여 개에 이르렀다. 게다가 3류 떨거지들이 세운 군소 문파들까지 모두 합하여 그 수를 알려 달라고 묻는다면, 개봉을 본거지로 삼고 있는 개방도들마저도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하루아침에 망하는 문파도 많았고, 또 그만큼 새로 세워지는 문파도 많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알다시피 거대 방파 개방의 본거지는 개봉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가? 그것은 바로 개방이 지닌 특수성 때문이었다. 거지들의 방파인 개방은 다른 여타 문파와 달리 주변의 상권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재물이 많은 개방은 더 이상 거지들의 문파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설혹 어떤 일을 해준 대가로 많은 재물을 획득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개방에서는 그것을 빈민 구제 같은 좋은 일에 쾌척해버렸다. 그렇게에 개방이 정파의 한 기둥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방 외의 다른 문파들은 모두들 하나라도 더 많은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오늘도 피 튀기는 세력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은 사파 계열의 제법 큰 방파인 묵룡문도 예외일 수없었다. 쾅! 문을 부숴버릴 듯 박차고 부문주가 뛰어 들어오자, 용이 그려진 검은 장포를 입고 있던 매섭게 생긴 사내는 깜짝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흑사파 놈들의 침입이냐?” 사내는 오늘도 어딘가에서 싸움을 걸어온 것으로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부문주의 반응은 평상시와 매우 틀렸다. 부문주는 도대체 뭘 봤는지 겁에 질려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무, 문주님! 무, 무서운 고수가 침입했습니다.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빨리!”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무서운 고수라니?” “그, 그, 그게.....” 문주는 답답한지 커다란 손바닥을 들어 부문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봐, 정신 좀 차리고 제대로 보고를 해봐!” “문주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도망치십쇼, 사갈대조차 반 각을 버티지 못하고... 헉!” 부문주가 방금 자신이 들어왔던 문 쪽을 보고 경악성을 지르자 문주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괴이한 몰골의 중년 사내가 흉악하기 그지없는 눈빛을 뿜어내며 서 있었다. 이마는 두툼한 머리띠로 휘휘 휘감았고, 입 또한 목도리를 이용해서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둘로도 가려지지 않는 부분으로 어디서 쥐어 터졌는지 엉망진창인 몰골이 드러나 있었다. 중년 사내의 허리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값비싸 보이는 검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중년 사내는 구태여 이런 싸움에 자신의 애검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는 듯 묵직해 보이는 몽둥이를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중년 사내는 차가운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말씀이야..” 문주라 불린 사내는 얼른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묻고 있는 자가 자신을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라는 것을 말이다. 이런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무공보다 상대의 실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눈치가 필요한 법이다. 당연히 문주의 태도는 공손할 수 밖에 없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거짓말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슬그머니 들어올린 피에 젖은 몽둥이가 그 뒤에 진행될 순서가 뭔지 그들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비록 묵향에게도 손도 못 써보고 무참하게 깨졌다고는 하지만 냉파천의 무공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몽둥이 하나만으로 개봉 인근의 사파 8곳을 박살내며 정보를 끌어모아 새로이 건설중인 마교 하남 분타의 위치를 파악해냈다. 마교에서 묵룡문의 세력을 이용해 하남분타를 건설중이었기에 묵룡 문주를 족치는 것만으로 그 귀중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곧장 하남 분타로 쳐들어갔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황당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신이 올 줄 알기라도 한 듯 하남 분타의 분타주가 친절하게 그 먹잇감의 위치를 술술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아, 안 그래도 오시면 얼른 말씀드리라고 하시더군요. 핫핫핫!” 냉파천으로서는 분타주의 말에 의심을 갖는 것이 당연했다. 비록 하급분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교의 분타가 아닌가. 당연히 먹잇감의 위치를 불지 않기 위해 반항을 할 테고, 자신은 마음껏 그 동안 쌓인 울분을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듯 미소 띤 얼굴로 사근사근하게 말해주니..... 이건 분명 뭔가 음모가 있다고 판단한 냉파천은 더욱 힘있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제야 몇몇 마졸이 반항했지만 냉파천이 휘두른 몽둥이의 얼굴 색깔을 좀 더 붉게 만드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만약 처음부터 적이라 생각하고 힘을 모아 반항을 했다면 그래도 좀 더 버틸 수 있었을것이다. 물론 아직 분타의 틀이 갖춰지지 않은 때였기에 임시 분타주도 무공보다는 건설과 토목 쪽으로 뛰어난 인물이 선정되어 반항을 한다해도 무리는 있었지만 말이다. 지엄하신 교주의명을 받들어 최소한의 방비도 하지 않고 손님을 맞아들이며 위치까지 말해주었거늘 몽둥이 찜질에 머리통이 터진 분타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그로서는 묵향이 말한 자가 이들이아닌 아르티어스였다는 걸 알 리가 없었다. 참회동은 화산의 중턱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동굴이었다. 문규를 어지럽힌 제자가 있다면 이곳에서 며칠 혹은 몇 달 동안 홀로 참회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곤 했다. 물론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문도는 거의 없었기에 참회동은 언제나 비어 있다시피 했다. 지금 참회동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이곳으로 참회하러 온 문도들이 그랬듯 동굴 밖으로 슬그머니 나와 검법 수련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냥 동굴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참회동은 얕은 동굴이었기에 낮이라면 조금 어둡기는 해도 앞을 보는데 크게 지장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약한 빛에 의지해 현천검제는 손목의 힘줄이 잘려 쓸모없이 덜렁거리는 살덩어리로 변한 자신의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쿨럭! 이것이 내 손이란 말인가?” 게다가 발은 또 어떤가. 발목의 힘줄을 잘라버려 아예 걷지도 못하게 만들어 놨다. “아아, 너무나도 허무하구나. 소위 명문 정파라고 말하는 것들이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이토록 악독할 수가 있단 말인가. 설혹 철천지 원수라도 이렇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지는 못할 텐데. 후~, 그때 그냥 도망을 쳤으면...” 거기까지 말한 현천검제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화산의 장문인이었던 내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들이 악독하게 굴었다손 치더라도 그건 몇몇 짐승 같은 놈들이 한 짓이지 화산파가 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오는지 한참 동안 현천검제는 격렬하게 기침을 해댔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손에는 시커멓게 죽은 피가 한 웅큼이나 뱉어져 있었다. 단전이 파괴될때 입은 내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허어,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원망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구나. 그리고 이 꼴을 하고 더이상 살면 무엇 하리. 차라리 자결을 하는 것이 사부님들을 욕보이지 않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그때 시커먼 핏물 사이로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패기 넘치는 사내. 그리 잘 생긴 얼굴이 아님에도 그와 함께 있으면 진정한 사내란 이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던 사내. 어느덧 현천검제의 두 눈가에는 축축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현천검제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허허헛, 그러고 보니 사형이 보고 싶구나. 서로가 가는 길이 달랐음에도 그는 나를 대할 때 언제나 진심이었지.” 물론이었다. 현천검제가 생각해도 묵향 사형의 행동에는 가식이 없었다. 사실 그처럼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고, 또 막강한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다면 굳이 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지않겠는가. 만약 마음에 안 드는 인물이 있다면 그냥 목을 따버리든지, 그것도 귀찮으면 안 보면 그만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 삶 전체가 허무한 것도 아니로군. 훌륭하신 두 분의 사부님을 만날 수 있었고, 또 멋진 사형이 있으니 말이야.”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회색 장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한동안 굵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현천검제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바로 공천 장로였다. 공천 장로는 자신이 어제 가져다놓은 밥 덩이의 표면이 바짝 말라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자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흥! 죽고 싶은 모양이지?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내가 도와줄 수 있겠지만 대사형께서 한사코 반대하시니 말이야. 제길, 네놈의 목을 내 손으로 직접 잘라버리고 싶었는데 말이지. 뭐, 좋아. 네놈이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한껏 비비 꼬여 있는 상대의 말투에 울컥한 현천검제는 분노를 터뜨렸다. “공천 장로! 노부가 그대에게 섭섭하게 대한 적이 없었거늘, 노부한테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뭣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수없이 많은 동문 앞에서 나를 망신 준 것을 네놈은 벌써 잊었단말이냐?” “노부가 언제 그대를 망신 줬다는 말인가?” “크흐흐흣, 전대 장문인의 직계 제자도 아닌 놈이 직계 제자를 능가가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되고도 남음이 있다. 사부님의 제자들 중에서 내가 가장 실력이 뛰어났어. 대사형이 있었지만 무공만은 내가 제일 나았기에 장문인직도 꿈이 아니었지. 그런데 버러지 같은 네놈이.... 네놈이 내 꿈을 모두 망쳐놓았단 말이닷!” 공천 장로는 아직도 그때가 생각나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노기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사부님의 생신 날 있었던 검술 시합에서 당한 치욕적인 패배를 내 어찌 잊을 수가 있단 말이냐. 네놈의 실력이 그 정도쯤 되는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최선을 다 했을 것이야. 하지만 네놈은 내가 너를 봐준다고 살살 공격하는 틈을 이용해서 급습을 가해왔지. 결과는 강한 상대를 깔보다가 오히려 손도 못 써보고 패배한 것으로 사부님께선 이해하셨지. 젠장, 그때부터 나는 사부님의 눈 밖에 나버렸단 말이다. 그게 다 너 때문이다. 아느냐?”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했거늘, 고작 비무에 한 번 패했다고 노부에게 악심을 품었다는 말인가?” 현천검제의 말에 공천은 입에 거품을 물고 악을 써댔다. “고작 그거라고? 네놈은 나를 어쩌다가 한 번 패했다고 상대를 질투하는 그런 한심한 놈인 줄아느냐? 겨우 한두 번의 패배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상대보다 더욱 열심히 검을 갈고 닦으면 언젠가는 상대를 초월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왜냐구? 그건 네놈이 더 잘 알지 않느냐. 같은 조건이라면 내가 말도 안 한다. 너만 어디서 엄청난 검술을 배웠지 않느냐. 나도 그 검술을 배웠다면 네놈한테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또내가 장문인이 되었다면 너보다도 더 화산파를 잘 이끌어나갈 능력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왜 네놈이 그 모든 것을 다 차지하느냔 말이다.” 한동안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공천 장로는 이윽고 냉정을 회복했는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좋다, 앞으로 네놈에게는 물만 주겠다. 밥을 얻어먹고 싶다면 네가 배운 그 검술을 나한테 가르쳐줘야 할 거다. 크흐흐흣, 만약 그걸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물만 쳐먹다가 뒈지게 될테니 말이다.” 공천 장로는 물병을 새것으로 갈아준 다음 밥 덩이는 약이라도 올리듯 천천히 발로 짓이겼다. 두 덩이의 밥을 모두 짓이겨버린 공천 장로는 한껏 비웃음을 날리며 현천검제를 노려보더니 돌아가버렸다. 공천 장로가 돌아간 후, 현천검제는 천천히 기어서 지금까지 먹지 않아 바짝 말라 비틀어진 밥덩이 네 개가 놓여 있는 곳으로 갔다. 발목의 힘줄이 잘려나간 그의 몸으로는 도저히 걸어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냐, 이런식으로 나온다면 누가 오래 버티는지 두고 보자.” 현천검제는 밥 덩이 하나를 쓸모없어진 손으로 간신히 집어올린 후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게 섯거라!” 묵향이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새롭게 추가되어 있었다. 수염을 길게 기른, 속세를 저버린 것 같은 아름다운 용모, 저쪽에 머리띠와 목도리로 자신의 용모를 숨기고 있는 놈이 저 꼴이 되기 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노부를 불렀는가?” “지금 여기에 네놈 말고 또 누가 있다는 말이냐?” 확실히 인적이 드문 곳이라 이곳에는 묵향과 묵향을 뒤쫓아온 패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 그래? 그렇다면 노부를 찾은 이유는?” “물론......” 네놈과 비무를 하기 위해서, 아니 비무를 빙자한 구타를 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말하고자 했으나 아무리 봐도 뭔가 만만해 보이지가 않았다. 미서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무방비 상태인 듯 보였지만 아무리 봐도 일격을 가하기에 마땅한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허~참! 저런 놈을 향해서 검을 뽑아들었다고? 안 죽이고 저 정도로 그친 것만 해도 엄청나게 많이 봐준 거였군.' “자네가 노부의 못난 제자 놈을 손봐주었는가?” 묵향은 피식 미소 지은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워낙 대가리가 단단한 놈이라 아집에서 좀 헤어나오라고 손 좀 봐줬지.” 미서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아집에서 헤어나오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검의 소리 운운하기에 그 다음 단계를 일러줬을 뿐이야. 물론 씨알도 안 먹히기에 화가 나서 그만... 조금 손봐준다고 했던 게 저 모양이 되어버렸지만.” “잠시만 기다리게.” 그는 묵향을 세워놓고는 냉파천에게로 다가가 전후 사정과 상대가 격투 중에 무슨 말은 했는지 자세히 물어봤다. 과연 제자 놈의 말을 들으니 상대가 한 말에 거짓이 없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멍청한 녀석!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면 노부가 여기까지 쫓아올 이유가 없었지 않느냐?” 자신이 생각해도 멍청하기 그지없는 짓을 한 제자 놈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으며 분노를 희석한 그는 다시 묵향에게로 돌아왔다. '꽤 괜찮은 놈인 것 같은데...어떻게 해야 하나?'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묵향을 바라보고 있던 미서생은 문득 입을 열었다. “노부와 술이나 한잔 하겠나?” 갑자기 웬 술인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묵향은 쪼잔하게 그런거 따질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술이라면 환장하는 그였기에 좋고 나쁘고를 따질 이유가 없었다. “술? 거 좋지.” 갑자기 술 얘기가 나오자 미서생을 따라온 제자들은 도무지 작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지입을 헤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빨리 돗자리를 펴지 않고 뭣 하는 게냐?” 그제야 제자들은 사부의 의도를 짐작한 듯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당인 사부를 위해 언제나 술 몇 병 정도는 가지고 다니는 그들이었기에 술자리는 금방 마련이 되었다. 안주는 없었지만 술만은 최고급이었다. 마개를 따자 향긋한 주향이 묵향이 앉아 있는 곳까지 전해져왔다. “좋은 술이로군.” “물론이지. 노부는 언제나 가장 좋은 술만을 마신다네. 자 한잔 들게나.” 커다란 찻잔 가득 술을 따라주는 미서생. 묵향은 서슴없이 술을 쭉 들이켰다. 혹시라도 술 안에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미서생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호오, 화통하게도 마시는구먼. 간뎅이가 작은 놈들은 이런 술을 마실 자격이 없지만, 자네는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치는군. 자, 한 잔 더하게.” 향은 아주 좋았지만 엄청나게 독한 술이었다. 그런데 둘은 그 독한 술을 대화도 없이 쉬지 않고 들이켜고 있었다.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제자들은 처음에는 도무지 사부의 속셈이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술이 몇 병 단위로 비워지자 그들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사부는 놈을 취하게 하여 빈틈을 만들려고 하시는 모양이군. 확실히 능구렁이 영감이란 말씀이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는지 미서생은 묵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흠, 자네 노부의 탄주를 한번 들어볼 텐가? 술자리에 안주는 없어도 되지만 음악이 없어서야 안 되지.” 미서생의 말에 묵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물론이지. 하지만 엉터리 탄주라면 사양하고 싶군. 괜히 이 좋은 기분 망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미서생의 입에서 묵향을 만난 후 처음으로 활달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핫! 물론 엉터리 탄주라면 자네에게 권하지도 않았을 걸세.” 미서생은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보퉁이를 주섬주섬 풀어 고색창연한 금을 꺼냈다. 그 모습을뒤에서 보고 있던 제자들은 손에 땀을 쥐어야만 했다. 사부가 애용하는 저 금에는 혈영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혈영비는 저 옛날 오왕 료를 암살할 때 고기의 뱃속에 숨겨 들어가 살해했다고 해서 어장검으로도 불리는 전설적인 비수였다. 손잡이의 길이 3촌을 합하여 모두 5촌밖에 안 되는 매우 짧은 비수였지만, 상대의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최고의 기습 병기였다. 그렇기에 세인들은 그 짧은 비수를 10대 기병 가운데 여덟 번째로 꼽고 있었다. 과연 언제 혈영비가 그 살인적은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서생의 탄주가 시작되었다. 미서생의 탄금 솜씨는 정말이지 뛰어났다. 탄주를 하기에 앞서 큰소리를 칠 만했다. 때로는 폭풍우가 치듯, 때로는 나비가 꽃을 희롱하듯 흘러나오는 그의 가락은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없었다. 마침내 한 곡이 끝나자 묵향은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그 정도 탄주가 안주라면 술이 더 있어야겠소.” 이 말이 미서생을 매우 기쁘게 했는지 그는 제자들에게 호령하여 숨겨놓은 모든 술을 더 꺼내놓게 하였다. 제자들이 주섬주섬 보따리를 뒤져 꺼내놓은 술은 모두 다섯 병. 술병은 다시 빠른 속도로 비워 지기 시작했다. “내 탄주를 한번 들어보겠소?” 묵향의 말에 미서생은 놀란 듯했다. “호오, 놀랍군. 노부의 탄주를 들은 자들은 감히 노부 앞에서 탄주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데... 역시 배포가 틀리군. 좋아, 여기 있네.” 미서생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자신이 들고 있던 금을 묵향에게 넘겼다. 그것을 본 제자들의 인상이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부는 지금 이곳에 뭐 하러 온 것인지 그 목적을 망각했음에 틀림없었다. 사부가 애용하는 금은 뛰어난 장인이 만든 최고의 명기였다. 제자들에게조차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던 금을 저놈에게 그냥 선선히 넘겨주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그들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사부 외에 이토록 뛰어나게 금을 탄주할 수 있는 인물이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음을 표현해내는 세부적인 기교는 사부에게 떨어질지 몰라도, 그 힘이 넘치는 탄주는 듣는 이로 하여금 거대한 힘에 압도되는 자신을 느끼게 해주었다. 탄주를 들은 후 미서생의 말은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묵향을 대하는 말투도 한 단계 격상되었다. 더불어 상대가 속한 단체도 '마교'가 아닌 '천마신교'로 격상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솜씨구려. 내 천마신교에 이토록 뛰어난 음의 대가가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소이다. 역시, 사람의 선입관이라는 게 얼마나 헛된 것인지 오늘에서야 깨닫게되는구려.” “과찬이오.” “노부의 이름은 석량이라고 하오. 강호의 동도들은 노부를 만통음제라고 부르지요.” 기껏 자신을 소개했지만 상대는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표정을 보면 말투와 달리 그렇게 크게 놀라는 것 같지 않았으니 말이다. “호오, 귀하가 만통음제셨소? 현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금의 대가 앞에서 멋모르고 탄주를 했다니,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낯뜨거운 일이었구먼. 쩝, 어찌되었건 탄주는 임 해버렸으니 어쩌겠소.” 만통음제라면 '음공'의 고수였다. 그런 만통음제에게 상대가 금의 대가라고 칭한 것이 오히려 그를 더욱 기쁘게 했다. 왜냐하면 음공이라는 것은 그 기본 원리를 알고 있는 내공의 고수라면 누구나 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시전자의 무공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살상력도 증가할것이다. 그렇기에 만통음제처럼 금을 자 다루는 사람에게 음공의 고수라는 말보다 금의 대가라는 말이 훨씬 마음에 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하하핫, 겸손하기도 하시구려. 그대의 금 솜씨도 노부 못지않게 뛰어나오. 특히 그 음에 섞여 흘러나오는 내공의 조화는 너무나도 훌륭한 것이었소. 살생만을 위해서 금을 익힌 자는 그렇게 세밀한 내공의 조절을 할 이유도 없고, 또 그런 기법을 익힐 필요도 없지요 그대는 정말로 금을 사랑하시는 모양이구려. 내 오늘 잃어버렸던 지기를 다시 만난 듯하여 너무나도 기쁘구려. 귀하의 존성대명을 알려주실 수 있겠소이까?” “묵향이라고 하오.” 묵향은 이름을 밝혔지만 만통음제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보고 뒤말을 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 매우 재미있었다. 자신에게 붙여진 명호를 아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세인들은 본좌를 암흑마제라고 부르지요.” 순간,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암흑마제라니... 바로 마교의 교주를 칭하는 명호가 아닌가. 온갖 나쁜 말을 다 붙여도 오히려 뭔가 부족한 듯한 그런 놈. 그놈을 일컫는 말이었다. 모두들 그 말이 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었지만 만통음제만은 곧 냉정을 회복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악인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크하하핫! 노부도 암흑마제에 얽힌 기괴한 소문은 들어보았소. 하지만 그대의 탄주를 듣고 그것이 모두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었소이다. 마음이 메마른 악독한 자라면 결코 그대와 같은탄주를 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오.” 만통음제는 묵향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입을 열었다. “혹시 갈 길이 바쁘지 않다면 노부하고 술이라도 한잔 더 하지 않으시겠소? 천마신교의 교주처럼 높으신 분의 발길을 오랫동안 붙잡고 싶은 마음은 없소. 하지만 내 오늘 이토록 마음이 통하는 벗을 만났으니 그대와 함께 조금이라도 더 술잔을 나누고 싶어서 그러니, 노부를 이해해주시구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그제야 묵향의 퉁명스럽던 어조도 한층 누그러져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그럽시다. 나도 오랜만에 음악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자, 가시지요.” 멀어지는 스승과 마교 교주의 뒷모습을 보며 남은 제자들은 기가 막혀서 한동안 말조차 할 수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스승께서 정사 중간쯤의 성향을 가지신 분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마교 교주와 친구를 하자고 드신다면 도대체 어쩌시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 대사형, 아무래도 복수는 물 건너 간 것 같네요.” “지금 복수가 문제냐? 분위기를 보아 하니 사부님께서 마교 교주하고 호형호제하게 생겼는데. 젠장! 빨리 쫓아가서 사부님을 말려야겠다.” 다급히 뒤따라가려는 냉파천을 붙잡으며 설취가 입을 열었다. “그만두시죠. 괜히 이마에 혹 하나 더 붙이시지 마시구려.” “이런 젠장! 처음부터 복수따위는 생각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도대체 왜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거야?” 그 길로 술집에 가서 의기투합해버린 묵향과 만통음제, 둘은 냉파천의 우려대로 아예 의형제까지 맺어버렸다. 물론 뒤쫓아온 제자들이 한사코 만류했지만, 그런다고 자신의 뜻을 굽힐 만한 만통음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앞장서서 만류하던 냉파천의 머리빡에 혹이 몇 덩이 더 생겼을뿐이다. 묵향이 인근 호북성에 건설 중인 호북 분타를 둘러보기 위해 가야한다고 하자, 만통음제는 묵향을 따라나섰다. 화경의 고수인 그에게 남아도는 시간은 주체를 할 수 없는 것. 오랜만에 마음이 맞는 벚을 만났는데 호북성에 함께 가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사부가 마교 교주와 함께 가는데 그것을 그냥 놔둘 제자들도 아니었다. 혹여나 이 악독한 마두가 다른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전체가 묵향의 행동에 따라 움직이게 된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식사후 금을 꺼내는 사부를 잠시 바라보던 냉파천은 슬그머니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사부의 목소리. “어디에 가는 게냐?” “아, 예. 잠시 뒷간에 좀...” 그런다음 그는 슬며시 밖으로 나왔다. “젠장,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지. 사부님께서 계시니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교 놈과 한자리에 어울려야 하다니...” 냉파천이 뒷간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자네 생각이 어찌 그리 본좌의 생각하고 같은지 모르겠군.” “허억!” 냉파천이 황급히 뒤돌아보니 그곳에는 묵향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게 아닌가. 그가 자신의 뒤에 있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냉파천은 식은 땀이 등 뒤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만통음제와 동행을 하면서 묵향의 심사는 별로 좋지를 못했다. 사실 음에 대해 논할 수있는 만통음제와의 시간은 너무도 만족스러운 것이었지만, 뒤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자신을 째려보는 냉파천 때문에 흥이 깨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 한두 번이야 참았지만 아무래도 버릇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냉파천의 뒤를 따라나온 것이다. 당연히 묵향의 말투가 부드러울 수 없었다. “너 말이야. 본좌가 네놈이 좋아서 데리고 다니는 줄 알아? 짜식이 어디 본좌 앞에서 계속 인상을 구기고 있어. 죽고 싶어서 작정했나? 응? 어디 한번 죽어볼래?” 순간 묵향의 몸이 움직였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냉파천의 몸도 움직였다. 현경의 고수 앞에서 방어 동작을 본능적으로 행한 것은 그의 무위가 높아서라기보다는 생존에 대한 본능의 발로였다. 하지만 냉파천의 몸짓은 공허한 것이었다. 퍼버벅! “끄어어억!” 복부를 거칠게 두들겨 맞은 냉파천은 뱃속에 있는 것을 전부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숨이 끊길정도로 아득한 고통에 냉파천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 묵향은 냉파천이 토해낸 토사물이 그의 몸에 묻지 않도록 머리끄뎅이를 붙잡아 뒷간 구멍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또다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구타를 가하기 시작했다. 묵향이 구타하고 있는 곳은 모두 옷으로 가려져서 밖으로 별 표시가 나지않는 부위들뿐이었다. “다음에 한 번만 더 본좌 기분을 상하게 하면, 그때는 알지? 이것들이 형님 얼굴을 봐서 본좌가 참고 넘어가주고 있었더니 주제 파악을 못해. 네녀석은 본좌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단 말이냐? 계속 본좌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아예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알겠느냐?” 만통음제의 나이가 훨씬 더 많은 게 사실이었지만, 묵향이 그를 형으로 대접한 것은 탄금에 대한 그의 뛰어난 재능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형으로 대접한다고 해서 그 형의 제자놈까지 자신의 제자로 대접해줄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는 묵향이었다. 그걸 몰랐던 냉파천은 그날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는 뒷간 구멍위에 볼썽사납게 나자빠진 채 방금 전에 위장 속에 채워넣었던 것을 몽땅 다 토해내야만 했다. 냉파천의 눈에서는 힘없는 자의 설움이 방울방울 눈물이 되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크흐흐흑, 어찌 이럴 수가...” 뒷간에서의 교육이 제대로 통했는지 그날 이후로 묵향을 향하는 냉파천의 대접은 아주 깍듯해졌다. 그 전에는 싫은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었는데, 그 후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만통음제가 아니었다. '허어, 동생의 심기를 건드리더니 기어코 매운 맛을 본 모양이구먼. 그렇다고 해서 동생한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이 일을 어찌할꼬? 잠깐,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자 놈이야 안 되면 나중에 한 놈 더 키워도 되는 거쟎아.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상책이겠군.' 아무리 자신이 음의 대가면 뭣 하겠는가. 듣고 이해해 줄 사람이 없다면 그건 혼자만의 광대짓거리에 불과했다. 음을 타면 그 속에 담긴 슬픔과 기쁨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를 이해해줄 수있는 묵향을 만난 만통음제는 요즘 너무나도 행복했던 것이다. 그 후부터 묵향이 무슨 짓을 하든 그는 모른채로 일관했다. 그런 사부의 속마음을 모르는 냉파천은 사부가 야속했을지 모르지만, 그도 만약 자신의 그림을 제대로 알아줄 벗을 만나게 된다면 사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것이다. ▒ 천일루에서의 합주 호북성에 도착하자 묵향은 일행을 객잔에 남겨두고 혼자 호북 분타에 다녀왔다. 물론 그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 때문에 건설 현장에 가는 것인데 구태여 그들을 데려가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 후 묵향은 서북쪽으로 길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 만통음제의 물음에 묵향이 간단하게 대꾸했다. “화산에 가려 합니다." “호오, 화산에? 좋아, 화산에 들렀다가 거기서 헤어지면 되겠구먼. 동생도 여러 가지로 바쁠텐데 우형이 계속 따라다니며 방해를 할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밤마다 형님과 함께 달빛을 벗 삼아 합주를 하는 재미에 흠벅 취해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소제 너무나도 섭섭합니다." 그 말이 만통음제를 매우 기쁘게 한 모양이었다. “그, 그렇지? 으하하핫! 역시 동생은 음이 뭔지를 안단 말씀이야. 역시 독주보다는 합주가 훨씬 좋은 것이지.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려줄 수 있으니 말일세." “물론입니다, 형님. 그건 그렇고 화아는 천일루에 가봤느냐?" 묵향의 질문에 송화는 재빨리 대답했다. 무림에 첫발을 디디면 꼭 들러야 하는 몇 군데 명소 중 한 곳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니, 어쩌면 그곳에 데려가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뇨. 갈 때는 하남성과 호북성을 거치는 길을 잡았고, 올 때는 좀 급하게 움직이느라..." 물론 묵향한테 붙잡혀서 가게 되었으니 천일루에 들를 여유가 있었겠는가. 묵향은 웃음을 터뜨리며 사과했다. “하하핫, 미안하게 되었구나. 노부와 만나지만 않았다면 아마 그곳에 들렀다 갔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때 노부가 잠시 장난을... 아니 착각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으니 다 이해하거라." 하지만 저게 이해해달라는 사람의 눈빛인가? 조금이라도 말을 잘못했다가는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인간의 눈이지. 그 눈길을 마주한 설취는 찔끔해서 송화를 대신해 재빨리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숙님. 이렇게 된 것도 음을 좋아하시는 사부님께 사숙님을 만나게 해주시려는 하늘의 뜻이었겠지요." 묵향의 옆에 앉아 있었기에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던 만통음제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취아의 말이 옳구나. 이렇듯 동생을 만난 것도 음을 논할 친구를 얻게 해주시려는 하늘의 뜻이었겠지." 만통음제의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묵향은 빙긋 미소 지으며 송화에게 말했다. “좋다. 노부가 화아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그곳에 데려다주지. 천일루에서 보이는 화산의 아름다운 풍취는 정말 꼭 한 번은 봐둘 만하니 말이다." “정말이세요? 고맙습니다, 사숙조님." 제자가 묵향에게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설취는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괴이한 사숙을 맞이하고 나서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인물이 송화였다. 아직 세상 구경을 많이 해보지 못한 그녀에게 사숙은 그저 사숙일 뿐이었다. 그가 마교건 악당이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였기에 묵향도 그녀를 꽤나 총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 비해 설취는 묵향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마교 교주에 대한 소문이 극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교도와 어울리면 무림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것도 하나의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냉파천은 자신의 속마을을 요즘에는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또다시 뒷간 바닥에 나자빠져 뱃곡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토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두 제자가 속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일단 겉으로 드러난 표정은 분위기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억지 장단이라도 맞춰주고 있는 것이 만통음제는 기분이 좋았다. 제자들이 자신을 위해 그렇게 노력해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화아를 위해 우리들이 천일루에서 합주를 들려주마. 화산을 바라보니 눈이 즐겁고, 합주를 들으니 귀가 즐겁지 않겠느냐. 또 훌륭한 음식이 있으니 입과 코가 즐겁고, 시간이 지나면 배까지 즐거워질 테니 가희 극락이 따로 있겠느냐?" “하하핫,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천일루 이곳은 창밖으로 화산이 바라보이는 절경을 마주하고 세워져 있는 커다란 객잔이었다. 물론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팔고 있는 음식의 맛 또한 대단히 뛰어났다. 그렇기에 예전부터 무림 초출이라면 꼭 한 번은 들려야 하는 곳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와봐도 정말 아름다운 곳이군요. 자, 형님부터 먼저 드시죠." 만통음제가 천일루 안으로 들어서자 꽤 똘똘해 보이는 점소이가 달려나오며 외쳤다. “어서옵쇼! 저희 천일루를 방문해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손님은 모두 몇 분이십니까?" “다섯일세." “예,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쇼." 하지만 만통음제는 점소이를 따라가지 않고 다시금 말을 걸었다. “3층에는 자리가 없는가?” “예, 3층은 지금 자리가 없습니다." “허어, 이 큰 객잔에 자리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자리를 한번 마련해보게. 될 수 있으면 창 쪽으로 말이야." 그러면서 만통음제는 품속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어 점소이의 손에 쥐어줬다. 하지만 점소이는 한사코 그 동전을 받지 않을려고 했다. 손님의 기대에 부응해줄 수 없다는 표시였다. “손님,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3층을 통째로 빌리신 손님들이 계시기에..." 그 말이 만통음제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혹시 손님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면 양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점소이의 말을 들어보니 그게 아닌 것이다. “뭣이? 통째로 빌려? 어떤 돈 많은 놈들이 감히 이 큰 객잔의 3층을 통째로 빌렸다는 말이냐! 사람 수가 그렇게 많더냐?" “아, 아닙니다, 손님. 손님 수는 적지만...매우 많은 돈을 지불해주셨기에..." 드디어 만통음제의 화가 폭발했다. “이런 망할 자식들!" 마음이 통하는 의제와 강호 추출을 기념해 줄 사손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물러나면 만통음제로서 지금껏 쌓아놓은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하지만 그런 그의 속도 모르는 점소이는 한사코 말렸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손님! 그분들은 무림인들이십니다. 괜히 시비를 거셔도 뒤끝이 별로 좋지 못하실 겁니다." 이게 결정적이었다. 일반인이라면 아무래도 손대기가 껄끄러운 구석이 있겠지만, 무림인이라고? 만통음제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허허, 노부가 잘 말해 자리를 얻어볼 터이니 그럼 되겠느냐? 너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마." 불안해하는 점소이를 밀치고 3층으로 올라가자, 역시나 가장 전망이 좋은 탁자에 단촐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청춘 남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수는 겨우 5명. 남자 셋에 여자가 둘이었다. '허어, 이것들 봐라? 밑에는 자리가 없어서 난리법석인데 여기는 아주 휑하게 비워놓고 즐기고들 계시구먼.' 묵향 일행이 올라오는 것을 본 그들 중의 한 명이 거만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돈 맣고 세력 있는 집안의 덜떨어진 자식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이봐 점소이, 3층은 우리가 전부 빌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점소이는 난처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저,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이분들이 워낙 막무가내라서..." 말을 듣자마자 사내들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험악한 인상으로 소리쳤다. “이것들이 정말! 내가 감히 누군 줄 알고 까부는 것이냐?" “누군데?" 만통음제가 기가 막히다는 듯 대꾸했다. 사실 적당히 좋은 말로 타일러 자리를 잡으려고 했던 만통음제였지만 사내의 싸가지 없는 말투에 일순 심기가 뒤틀려버린 것이다. “이 몸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대화산파 청심검자 장로님의 속가제자이며, 섬서표국을 이끄시는 분이 나의 아버님이시다." 청심검자라면 바로 화산의 일곱 장로들 중의 여섯째인 노숙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는 매사에 언행을 조심하여 꼭 필요할 때만 검을 휘둘렀기에 젊었을 때 청심검이라는 명호를 얻었고, 또 나이 들어서는 청심검자라고 불리며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호오, 자네의 소개가 꽤나 호화롭구먼. 그렇다면 네 눈앞에 보이는 노부는 누군 줄 아느냐?" 자신의 말을 듣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상대를 보자 보창은 속이 뜨끔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멋을 잔뜩 부린 문사라고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탐스러운 긴 수염을 배꼽까지 기르고, 백옥 같은 피부에 계집애처럼 손가락마저 희고 고왔다. 잘봐줘도 삼십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이까지 감안한다면, 저 놈도 세도 있는 집안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창이 감히 발작하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고?" “좋다. 내가 누군지 말을 해주지 않고 너희들을 닦달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겠지. 내 이름은 석량이라고 한다." 말투와 달리 만통음제가 주먹을 꽉 쥐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들을 가만히 놔둘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일례로 자신이 만통음제라고만 말해주면 저들이 알아서 길 텐데,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주는 것을 보면 그 속셈이 뻔하다고 볼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보창은 석량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이 일대에서 석씨 성을 쓰는 사람 중에서 그가 조심해야 할 만한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석량이라고? 혹시 누구 석량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은 안 계시오?" 동료들 모두가 고개를 살래살래 내젓는 것을 보면 불행하게도 그들은 만통음제의 진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동료들의 행동을 보고 보창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이죽거렸다. “아하하, 형씨는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구려. 하지만 그런 것에 속을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다오." “그래? 그럼 속는 게 뭔지 가르쳐주마." 만통음제의 신형이 번쩍했다고 느껴진 순간, 그는 이미 보창의 멱살을 틀어쥐고 배에다가 몇 대의 주먹질을 끝마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만통음제의 제자들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인해 한껏 부릅떠졌다. 냉파천이 묵향에게 당했던 전설적인 신법, 이형환위가 그들의 사부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만통음제가 보창의 배를 두들기고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뒤로 물러선 후 보창의 토악질이 시작되었다. “우웨에에엑!" 방금 전에 먹고 마셨던 모든 것이 물줄기처럼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만통음제의 몸은 이미 그 사정거리에서 멀리멀리 벗어나있었다. “거참, 많이도 처먹었군. 그래, 다음은 누구냐?" 물어볼 것도 없었다. 방금 전에 바라본, 눈으로 쫓기도 힘들 정도의 빠른 움직임만 보다라도 엄청난 고수임에 분명했다. 괜히 싸움에 말려들어봐야 얻어터지기 밖에 더 하겠는가. 그들은 모두들 슬금슬금 만통음제의 눈치를 보며, 이제는 서 있을 힘도 없는지 엎어져서 토악질을 하고 있는 보창에게로 다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런 다음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쏜살같이 도망쳐버렸다. 만통음제는 뒤에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점소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자, 손님들이 우리들을 위해 애써 자리를 양보해주셨으니 어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해라. 그리고 저 쓰레기들은 빨리빨리 치우고 말이다." “예? 예. 분주대로 하겠습니다." 만통음제는 적당한 자리를 택해 앉으며 겸연쩍다는 듯 말했다. “동생 앞에서 무공을 펼친다는 것이 번데기 앞에서 주름 많다고 자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잘 안다네. 하지만 아무래도 동생이 내 못난 제자 놈을 손봐준 것을 미루어 추축해보건대, 동생이 손을 쓰면 어떻게 될지 뻔하지 않겠나? 아무리 저놈들이 괘씸해도 그렇지, 사손을 위한 자리에서 피를 볼 수야 없지 않은가." 묵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해놓은 짓이 있는데 어찌 그렇지 않다고 발뺌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실이 그렇기도 했고 말이다. “예, 형님의 그 마음 이해합니다. 기분 좋은 자리인 만큼 피를 봐서는 안 되겠죠. 자, 앉으시죠. 오늘은 소제가 크게 한턱 쓰겠습니다." 점소이 몇 명이 달려 올라와 재빨리 청소를 시작하자 주위는 곧 깨끗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묵향은 송화를 가리키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음식은 이 자리의 주빈이 정해야 되겠지?" “저... 좀 비싼 거를 시켜도 되겠죠?" 자신이 말해도 좀 부끄러운지 송화는 혀를 살짝 내밀며 쑥쓰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기에 묵향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으하하핫! 화아는 이 사숙조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여기서 가장 비싼 것을 시켜도 상관없으니 좋을 대로 하거라." 송화는 너무너무 기분이 좋은 듯 상기된 표정으로 이것저것 평소에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내려가고 나자 만통음제는 등에 지고 있던 금을 꺼냈다. 그것에 맞춰 묵향도 품속에서 한 자루의 적을 꺼냈다. 이것은 쌍골죽으로 만들어진 최상품으로 만통음제가 묵향이 피리도 잘 분다는 것을 안 후 서로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묵향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그 후 만통음제는 금을 타고, 묵향은 적을 불며 서로의 우정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금음과 적음이 서로 절묘하게 어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래층에서 우르르르 손님들이 몰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음식을 몇 가지 시키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음식을 직접 가지고 올라오기도 했고, 돈이 있는 자들은 황급히 몸만 올라온 후점소이를 불러 음식을 새로이 주문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점소이에게 자신의 음식을 위로 가져오라고 하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고 위로 올라온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심금을 울리던 가락은 점소이가 음식을 내오면서 잠시 멈췄다. 일단 음식이 나왔으니 먹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눈앞에 들어오는 화려한 화산의 자태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훌륭한 술이 있으니 더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모두들 담소를 나누며 음식을 들고 있는데, 아래쪽이 소란해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도사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저놈입니다요, 사형." 방금 전에 뱃속의 음식을 몽땅 쏟아놓고 간 보창이었다. 보창이 만통음제를 지적하자 도사들이 살기 띤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것을 본 냉파천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묵향 때문에 쌓인 것이 많은 냉파천이었다. “사부님, 제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괜히 사건 크게 일으키지 말고 적당히 하거라." 냉파천은 쓱 몸을 일으키더니 도사들에게 물었다. “화산파에서 왔느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화산의 제자들임에 분명했다. 냉파천은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여기서 푸닥거리할 필요가 있겠느냐. 모두들 따라오너라." 냉파천이 앞장서서 가버리자 화산의 제자들은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자신들은 거의 10여 명인데, 어찌 한 놈이 나서서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대화산파의 제자들을 뭘로 보고 말이다. “어떻게 할까요, 사형?" “뭘 어떻게 해? 저놈부터 박살을 내놓고 다시 올라오면 될 것 아니겠느냐." 사형이라는 자의 지시에 따라 화산파의 제자들은 모두들 냉파천을 따라 아래로 우루루 내려가버렸다. 그 꼴을 본 만통음제는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허허, 처음부터 2층에 자리잡을 걸 그랬나? 오늘같이 좋은 날, 사람 여럿 잡겠구먼." 묵향이 빙긋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누가 잡고 싶어서 잡는 겁니까? 자, 상관 마시고 술이나 한 잔 더 드시죠." 잠시 후, 아래쪽에서 뭔가를 때려잡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배를 두둑이 채운 후 묵향과 만통음제는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천일루내의 모든 손님이 그 행동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음악이 들려올때는 지그시 눈을 감고 감상하고, 한 곡이 끝나고 나면 저마다 담소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아래쪽이 또다시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여러 명의 도사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가세한 것을 보면 아마도 원군을 이끌고 다시 찾아온 모양이었다. “누가 너희들을 이 꼴로 만들었단 말이냐?"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노사가 말하자 절룩거리며 따라 들어온 도사 한 명이 냉파천을 가리키며 악을 썼다. “저기 있는 저놈입니다, 사부님!" 사부라는 자는 한눈에 봐도 꽤 높은 수련을 쌓은 인물이었다. 물론 묵향의 입장에서는 만만하기 그지없는 상대였지만 냉파천이 상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듯 싶었다. 그렇기에 묵향이 아무 말 없이 쓱 일어서려는 순간, 냉파천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부탁해왔다. “제가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자네도 잘 알 텐데?" 그 말에 냉파천은 전음으로 답해왔다. <사부님께서 음악을 사랑하시어 음제의 칭호를 받으시긴 하셨지만 결코 그분의 검술이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형님의 검술 실력을 못 믿는다는 것은 아니네만..." '네녀석의 검술 실력은 못 믿겠다는 거지' 라는 말이 빠져 있다는 것을 냉파천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의 몇 가닥 남지 않은 수염이 분노로 인해 가늘게 떨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감히 발작할 수가 없었다. 실력으로도 안 될 게뻔했지만 상대는 이제 배분까지 자신의 사숙이 되어 있는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냉파천은 노기 띤 어조로 중얼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노부는 화산의 청심검자라고 하오." 그 말에 냉파천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청심검자 노숙. 화산파의 장로였고,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닌 절정 고수라는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그냥 봤을 때와 직접 서로 대치하며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볼 때와는 그 존재감이 사뭇 차이가 있었다. 그제야 냉파천은 묵향이 슬그머니 나서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한눈에 상대의 실력을 알아봤다는 말인가?' 생각은 그랬지만 그렇다고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고 볼 수 있었다. “노부는 냉파천이라고 하오." 그 말에 노숙 장로는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냉파천? 혹시 파열검군이라 불리는 그 냉파천이라는 말씀이오?" “그렇소." 노숙 장로는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파열검군에 대한 풍문은 익히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실력을 지닌 검의 고수로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 개 같은 성격에 대한 몇 토막의 얘기를 말이다. 제자들의 보고를 종합해보면 잘못은 분면 자신의 제자들에게 있었다. 괜한 싸움에 말려들어 얻어터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제자들의 잘못이라고 그냥 웃으며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제자들이 쥐어터지는 모습을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봤다. 그들은 작게는 자신의 제자들이었지만, 크게는 화산파의 제자들이었다. 상대편도 대문파의 제자라면 서로 좋은 말로 화해하면 된다. 하지만 세력도 없는 떠돌이 검객을 상대로 물러선다는 것은 대화산파의 위신에 먹칠을 하게 되는 일인 것이다. 만약 그가 만통음제의 제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상황은 또 다르게 흘러갔겠지만 말이다. “귀하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소. 하지만 감히 화산파에 검을 들이대다니, 그것은 매우 경솔한 행동이었소이다." “노부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멋도 모르고 달려든 그들의 잘못이었지." “쓸데없는 말은 피차간에 하지 맙시다. 화산에 모욕을 줬으니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노숙 장로가 검을 뽑아들자 냉파천 역시 검을 뽑아들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고수 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머! 사부님, 대결이 시작됐어요." “뭐?" 설취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노숙 장로와 대사형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지만 설취는 그들이 결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사형이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자 설취는 대사형의 상대가 손쉬운 인물이 아님을 직감했다. “설마... 저 화산파의 고수가 그렇게 벅찬 상대라는 말인가?" 설취는 이제 다시금 금을 연주하기 위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는 스승에게 따지듯 쏘아붙였다. “사부님! 대사형이 위험에 처해 있는데 금을 타실 기분이 나세요?" 그러자 만통음제는 빙긋 미소 지으며 주얼거렸다. “사선을 넘나드는 수많은 대결 속에서 한 명의 고수가 완성되는 것이다. 생명을 걸지 않고서 어찌 감히 절정의 경지를 넘보려 하느냐. 첫째의 입장에서 본다면 청심검자는 가장 훌륭한 비무 상대다. 나나 동생은 너무나도 높은 경지에 있기에 첫째에게 오히려 도움이도지 않는 부분이 있다. 저녀석도 오늘의 기회를 이용해서 조금이라도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겠지." 만통음제와 묵향의 합주가 시작되는 그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저 아래쪽에서도 두 고수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두 고수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투입하여 이 결전에 임하고 있었다. 자신의 제자들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노숙 장로나위에서 사부와 사숙 그리고 사매와 사질이 지켜보고 있는 냉파천이나 둘 다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설 곳은 없었다. 절정의 반열에 오른 고수 둘이 생사를 도외시하고 격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주위에 모여 있던 구경꾼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들이 날리는 검강과 검기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젠장, 소문보다 더한 놈이구나." “당신도 마찬가지요. 이것도 한번 받아보시오!" 두 고수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검을 주고받았다. 간혹 기합 소리만이 낭랑히 장내를 떠돌 뿐이었다. 둘의 실력은 거의 백중지세. 그렇기에 수백 초식을 주고받았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격투가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었다. 사람의 근력과 공력이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점차 상대의 틈을 노리기 시작했고, 또 일부러 빈틈을 보여주는 척하면서 상대를 함락시킬 계략을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이야앗!" 귀를 찌르는 듯한 기합소리가 끝났을 때, 그들의 격투는 어느새 멈춰 있었다. 냉파천은 자신의 복부 위로 얕게 훑고 지나간 긴 상흔을 보며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 격투가 계속되었기에, 공력이 딸려 호신지기까지 운용할 여력이 없었기에 생긴 상처였다. 냉파천은 뒤로 슬쩍 돌아서서 노숙 장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노부가 졌..." 하지만 그때 냉파천은 자신의 최후 공격이 그런대로 먹혀 들어갔음을 알 수 있었다. 상대 또한 얕기는 했지만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흐흣, 아직 끝난 게 아니로군." 노숙 장로도 자신의 상처를 보며 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듯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렇구료. 그런데 계속하시겠소?" 일단 멈췄던 싸움을 다시 시작하려니 영 흥이 나지 않는 그들이었다. 또다시 시작한다면 누구 하나는 목숨을 내놔야 할지도 몰랐다. 서로 백중지세인 상태에서 비무를 하면 상대를 봐줄 여유 따위는 없으니 패한 쪽은 대부분 큰 상처를 입거나 목숨을 잃기 쉬웠다. 물론 무림에 적을 둔 그들이 목숨을 아까워할 이유는 없었다.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났으니 어느 한쪽이 패할 때까지 뼈가 녹도록 싸워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들의 등에 지어진 짐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노숙 장로의 경우 정파의 핵심 중 하나라는 대화산파의 장로라는 직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가 사문도 알려지지 않은 떠돌이 무사에게 패했다고 한다면, 화산의 명성에 얼마나 큰 누를 끼치게 되겠는가. 냉파천 역시 이 시대 최강의 고수들 중의 한 명인 만통음제의 제자였다. 그런 그가 화산파의 제자 따위에게 패배한다면 사부가 얼마나 낙심할 것인가. 이것을 모두 걸고 싸우기에는 너무나도 명분이 약하다고 느끼는 둘이었다. 그냥 간단하게 사과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던 사소한 시빗거리가 발단이 아니었던가. 화산 쪽은 얻어터진 제자들이 있다고 하지만 먼저 시비를 건 잘못이 있었다. 그리고 저쪽은 좀 과격하게 대처했다는 죄가 있었지만 시비를 건 것은 화산 쪽이 아니었던가. 이해득실을 따져본 노숙 장로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슬쩍 검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역시 귀하의 명성은 명불허전이구료. 노부가 오늘 안계를 크게 넓힌 듯하오." 아무래도 싸울 분위기가 아니다. 그러자 냉파천도 슬그머니 검을 거두며 상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노부도 역시 귀하의 명성은 들었고. 하짐나 오늘 겨뤄보니 소문이 사실보다 조금 부족한 듯 하외다." 이런 식으로 둘 사이에 시작된 비무는 어영부영 끝이 나버렸다. 아무래도 사문의 명성과 사부의 명성을 걸기에는 너무나도 위한한 도박이었던 것이다. 물론 둘은 훗날 어딘가에서 조용히 만나서 다시 한번 박 터지게 싸워 우열을 정할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대리전이 아닌 홀가분한 대결을 원했던 것이다. 격렬하게 비무를 전개하던 대결이 갑자기 끝이 나자, 손에 땀을 쥐고 구경하던 설취는 아직까지도 두 고수 간의 대결이 그녀에게 전해준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사부처럼 뛰어난 안목을 갖추지 못한 송화는 싸움이 끝나자마자 사조에게 외쳤다. “사조님, 방금 전에 비무가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탄주를 멈추지 않고 있던 사조에게서는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괜히 심술이 난 송화는 낮은 어조로 투덜거렸다. “핏, 왜 저렇게 좋은 구경을 안 하시고 금만 타시고 계시지? 대결의 결과를 묻지도 않으시는 걸 보니 사숙의 안전은 걱정도 안 되시는 모양이야." 잠시 후, 냉파천이 올라와서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몹시 목이 말랐는지 차를 들이켠 후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아름다운 합주음에 실린 내공이 들끊어오른 그의 기혈을 살며시 쓰다듬어주고 있었지만, 그는 그런 것까지 눈치챌 만큼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방금 전에 벌어진 그 비무를 되새기고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던 것이다. 냉파천이 눈을 떴을 때, 어느덧 합주는 멈추어져 있었다. “그래, 뭔가 깨달은 것이 있었느냐?" “예, 사부님." “목숨을 건 비무는 언제나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지. 어쨌든 네게 깨달음을 얻게 해줄 만큼 뛰어난 고수들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화산이 명문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구나." 그 말에 공감을 하는지 냉파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 사형의 복수 묵향은 만통음제와 헤어진 후 화산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사제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 들어야 할 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산파로 들어가는 길가에 커다란 방이 붙어 있었다. “본문의 영역에 침입하면 어떻게 되는지..." 쭉 읽어 내려가던 묵향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꼭 죽였다는 표현은 없었지만 전체적인 말투로 봤을 때 처형했다는 냄새를 슬그머니 풍기고 있었다. 사실 죽였다고 하면 관에서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나올 가능성이 다분하므로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경고문을 쓴 것이다. 묵향은 이빨을 갈면서 중얼거렸다. “으드드득! 이 빌어먹을 녀석! 사부의 얼굴을 봐서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어디 두고 보자. 아예 모가지를 비틀어주마." 묵향은 염왕대를 찾아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화산 인근에 숨어 있으라고만 명령을 내려놨으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묵향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묵향은 그들을 찾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가 마교의 고수들은 엄청난 마기를 뿜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것이 마공을 익힌 것에 대한 대가라면 대가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보통 무림맹의 고수들처럼 일반인으로 슬그머니 위장하여 사람들틈에 묻어서 이동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마교의 정예들은 집단을 이뤄 인적이 드문 길을 이용하여 밤에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뛰어난 무공을 지닌 그들에게 그런 것은 큰 장애 요인이 될 수 없었다. 묵향은 염왕대 무사들이 뿜어내는 마기를 찾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민한 감각을 갖춘 묵향에게 있어서 그들을 찾아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예상과는 달리 묵향은 무려 5일이 지난 후에야 가까스로 염왕대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화산이라는 것이 진령산맥의 끝자락에 자리한 곳인 만큼 산세가 험해 숨을 곳이 무진장 많았던 것이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오는 자가 지옥혈귀 천진악이란 것을 알아본 묵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천 장로가 여기는 웬일인가?" 그 말에 천진악은 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본교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기는 수하들이나 저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속하가 인솔하고 왔습니다." “잘했군. 그건 그렇고 뒤를 밟히지는 않았겠지?" 잠시 머뭇거리던 천진악은 솔직히 대답했다. “도중에 무영문으로 추정되는 무리에게 추격을 당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저 멀리 대파산맥 쪽으로 돌아왔기에 그들은 우리들이 화산쪽으로 온 것을 도저히 눈치챌 수 없을 것입니다." “무영문? 확실한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워낙 시간이 촉박했기에 그놈들을 사로잡아 심문할 틈이 없었습니다." “뭐, 놈들을 따돌렸다면 다른 건 상관없겠지. 그런데 화산파에 대한 정보는 입수해놓은 것이 있나?" “물론잆니다, 교주님. 설민 군사의 명령으로 화산파 일대에 비마대의 고수들이 쫙 깔려서 첩보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천진악의 보고에 묵향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알아서 수하들이 척척 일을 잘 처리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호오, 그래? 홍진 대주의 힘이 컸겠군." “물론입니다. 저희들이 도착하자마자 비마대의 대원들로부터 상당한 양의 정보를 전해 받았을 정도니까요." “좋아, 공격이 시작되면 현천검제는 본좌가 맡겠다. 자네는 부하들을 지휘하여 남은 화산 문도들을 도륙내버리도록 해라." 하지만 묵향의 지시에 천진악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물었다. “현천검제는 갑자기 은퇴한 후 행방을 감춘 것으로 보고가 올라와 있는데, 교주님께서는 그가 지금 화산에 있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뭣이? 그게 무슨 말이냐?" 천진악은 서류 몇 장을 묵향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직 그의 실종에 대해서 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이것이 비마대에서 보내온 보고서입니다." 순간 묵향은 현천검제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설마, 그놈들이..." 묵향은 이빨을 으드득 갈면서 천진악에게 명령했다. “비마대에 연락을 넣어 현천검제를 찾아라." “예? 은퇴해서 어디에 숨어버렸는지도 모르는 그를 어떻게..."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던 화경의 고수가 갑자기 은퇴할 리가 없지 않느냐. 뭔가 흑막이 있는 거겠지. 화산을 집중적으로 수색해라. 어쩌면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새로 만들어진 무덤이 있다면 그것도 파 뒤집어서 확인해라.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를 찾아내란 말이다! 알겠느냐?" “존명!" 그로부터 3일 후, 묵향은 비마대와 첩자들이 현천검제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묵향이 10여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그곳으로 달려가자, 흑록색의 우중충한 복장을 하고 있는 3명의 마교도가 동굴 앞에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묵향을 알아본 듯 황급히 오체투지하며 외쳤다. “비마대 제14조장 왕석, 교주님을 배알하옵니다!" 그러자 왕석과 함께 있던 인물들도 황급히 땅바닥에 엎드렸다. 묵향은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됐다, 일어서거라. 그는 어디에 있느냐?" “바로 이곳이옵니다." 왕석이 가리킨 곳은 동굴 안이었다. 묵향은 서둘러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사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제의 모습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팔과 다리의 힘줄은 끊겼고, 제대로 치료가 안 된 상처에서는 파리가 들끓고 있었다. 그리고 개새끼도 아니고 목에는 굵은 쇠사슬이 매여져 동굴 벽에 묶여 있었다. 묵향은 황급히 다가가 사제의 상태를 살펴봤다. 단전이 파괴되며 상당한 내상까지 입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아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이 상태로 며칠만 더 지났다면 묵향은 아마도 사제의 시체와 만났을 가능성이 컸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사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 꼴을 만들었다는 말이냐! 진정한 무인은 죽일지언정 모욕은 주지 말라고 하였거늘..." 묵향은 재빨리 손을 사제의 단전에 가져갔다. 그런 다음 주위에서 기를 빨아들여 사제의 단전에 쏟아부었다. 엄청난 기의 회오리가 사제의 단전에서 소용돌이치며 단전을 복구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괴된 단전을 회복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묵향과 현천검제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묵향이 가진 힘을 모두 끌어올리자 주위에 있던 대자연의 기엥 의해 허공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두어 시진 정도가 흘렀을까, 묵향의 이마에 조금씩 땀방울이 맺힐 때쯤 파괴된 현천검제의 단전이 천천히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화경에 달하는 거대한 공력을 포용할 수 있는 그런 형상으로 말이다. 어느 정도 단전에 대한 치료가 끝나자 묵향은 기를 이끌어 사제의 몸속을 휘돌게 만들었다. 기는 일정한 법칙을 그리며 사제의 몸속을 꾸준히 맴돌면서 내상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제는 정신이 드는지 신음성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제, 정신이 드느냐?" “이, 이 목소리는... 사형이십니까?" “그래, 내가 왔다네." “사형을 뵙기도 전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 사형의 목소리와 모습을 보고 나니 죽어도 여한은 없을 듯하군요. 제가 죽으면 외람된 부탁이지만 사부님 곁에 묻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묵향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다 살려놨는데 자신의 몸 상태도 모르고 유언을 하다니. 하지만 자신을 그렇게까지 생각해준 사제의 마음이 찡하게 와 닿았기에 묵향의 눈에는 어느덧 살짝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묵향은 슬쩍 눈물을 닦아버리고는 품속에서 금창약을 꺼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나중에 죽으면 거기에 묻어주기고 하지. 그 외에 딴 부탁은 없느냐?" “사형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건 뭐 하려고 그러십니까?" 묵향이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는 것을 보고 현천검제가 물은 것이다. 묵향은 피식 웃으며 슬쩍 손을 써서 사제의 턱을 탈골시키며 말했다. “마취제도 없고, 입을 틀어막을 것도 아무것도 없으니 이렇게 하는 것일세. 혹시나 잘못해서 혀를 깨물면 안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런다고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네도 알지? 재주껏 참아보게나." 턱을 탈골시켜버리면 혀를 깨물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묵향이 뭔가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고 생각한 것은 현천검제만의 착각이었을까? '아니, 점혈만 하면 끝나는 일을 턱을 뽑다니... 지금 정신이 있으신겁니까? 없으신 겁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턱뼈가 뽑혀버린 현천검제의 입에서 제데로 된 목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그의 입에서는 괴상한 소리만이 안타깝게 흘러나올 뿐이었다. “으...으...으...읍..." “크흐흐흣, 색깔이 시커먼 것을 보니 확실히 손을 써야겠군." 희번뜩거리는 묵향의 눈을 바라보는 현천검제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 맞아. 저 인간은 그런 놈이었지. 내가 한순간이라도 저 인간을 사형이라고 믿었다니...' 묵향의 비수가 썩어 들어가는 사제의 살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우으으으윽!" 턱이 빠진 탓인지 짐승이 울부짓는 듯한 기나긴 비명소리가 참회동 안을 가득 메웠다. 시커멓게 썩은 핏물이 한동안 쏟아져 나오더니 이윽고 붉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묵향은 그 위에 금창약을 발라준 후 현천검제를 살펴보았다. 지독한 고통 때문인지 치료를 받던 현천검제의 몸은 이미 축 늘어져 있었다. “이런, 벌써 기절해버렸나? 생각보다 약골이었군." 현천검제는 깨어나자마자 묵향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치료가 끝난후 묵향이 그의 턱을 바로 맞춰줬기에 말을 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세상에, 그렇게 무식한 치료법이 있다니... 그리고 혈도만 짚으면 끝날 일을 가지고 다짜고짜 턱뼈를 뽑다니, 지금 제정신입니까?" 묵향은 순간 흠칫하는가 싶더니 곧이어 전혀 몰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그러고 보니 그런 방법도 있었군. 그런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노부가 손을 쓰기 전에 빨리 말해줬으면 서로가 좋았지 않았나. 자넥도 고통을 받지 않았을 테고, 내 귀도 고생을 좀 적게 했을 거고 말일세. 사서 고생을 하다니 자네도 참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군." 턱을 뽑은 후 말했기에 현천검제로서는 그 말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현천검제는 더욱 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저딴 소리를 변명이랍시고 늘어놓고 있다니...' 한 번 상대를 오해하기 시작하니 상대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괘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오랜 세월 쌓아놓은 도력조차 전혀 도움이 안 될 정도였으니, 그가 지금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이해할 만했다. “오리발 내밀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할까봐서 재빨리 턱을 뽑으신거 아닙니까?" 그의 지적에 묵향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는가, 사제. 설마 노부가 사제를 괴롭히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테지? 노부는 그렇게 심성이 악랄한 사람이 아니라네." 묵향의 가증스러움에 현천검제는 치를 떨어야만 했다. '이런 젠장,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런 식으로 나를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주제에. 그런 그렇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 같았는데, 어찌 이렇게 힘이 넘치는 거지?" 그제야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한 현천검제는 기절할 뻔했다. 단전이 파괴되었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회복될 수 있단 말인가? 사형이 천고의 영약이라도 먹인 것인가? 정파라고 자부하던 사형들은 그토록 악랄하기 그지없었는데, 어떻게 마교에 있는 사형은 이토록 정도 많고 멋이 있는지... 한 번 사람을 잘 보게 되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좋게 보이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렇기에 현천검제는 방금 전에 당한 모든 일이 자신의 오해였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사실은 오해가 아니었다. 묵향은 자신을 이토록 귀찮게 만든 사제를 혼내주고 싶어 일부러 그랬던 것이다. “일단 대충 응급조치는 취했으니 운기요상이라도 좀 하게. 내가 강제로 하기는 했지만 자잘한 곳까지 손을 쓰기는 귀찮은 일이거든." 현천검제는 쇠사슬을 철그럭거리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자 묵향이 뒤에서 말했다. “내가 기를 인도할테니 잘 기억하게. 기왕에 내공을 다시 쌓을 건데 가장 좋은 것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묵향의 말뜻을 금세 이해한 현천검제가 물었다. “사형께서 전수하실 심법의 이름은 뭡니까?" “태허무령심법이라는 것일세. 잊혀진 현문의 심법이지. 뛰어난 효능이 있지만 이것을 대성하는 데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익히는 가자 없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절전된 것이라네." 현천검제는 망설일 것도 없이 대답했다. 기왕 사문을 버린 마당에 어떤 심법을 익히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또 사문의 심법을 이용하여 내공을 쌓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거의 한 시진 동안 운기조식을 하던 현천검제가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의 몸을 구속하던 쇠사슬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끝났느냐?" “예." “수하에게 말해놨으니 객잔에 가서 푹 쉬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좀 섭취하도록 해라." “예, 감사합니다, 사형." 현천검제는 잠시 묵향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사형,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은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복수를 원치 않습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흥!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네녀석의 복수를 하러 이 곳에 온 것이 아니다. 주제 파악도 못하고 감히 사형의 청을 거부하는 놈은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보여주려고 찾아왔을 뿐이지. 하지만 일단 와보니 그렇게 간 큰 짓을 하는 놈이 네가 아님을 알고 너를 찾은 거다. 알겠느냐?" 말이라도 좀 좋게 하면 어디가 탈이 나는가? 현천검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거나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 그런데 화산파는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본좌의 말을 거부하는 놈들은 당연히 멸문시켜 버려야지. 내가 그놈들을 그대로 놔둘 리가 없지 않느냐. 화산을 멸문시키는 것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니 절대로 착각하지 말도록 해라." 이미 묵향 사형을 굳게 믿고 있는 현천검제는 상대의 퉁명스런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따뜻하기 그지없는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려고, 내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저렇게 말씀하시는 거로군. 나로 인해 화산파를 공격했다면 내가 너무나도 가슴 아파할 거라는 것을 잘 아실테니 말이야. 사형의 그 따뜻한 마음,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속마음이 그렇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며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도 한때(?) 화산의 제자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화산파를 멸문시킨다면 지금 화산에 남아 있는 자신의 제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기에 현천검제는 자신의 사정을 말하기 위해 묵향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사형, 화산의 전 문도를 쓸어버리는 것은 아무리 사형이시라도 좀 힘드실 텐데요. 웬만큼 하시고 그냥 용서해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큿, 그럴 줄 알고 염왕대를 대기시켜놨으니 걱정 말거라. 자, 그럼 오늘은 푹 쉬거라." 그와 동시에 묵향은 조금 전 현천검제가 그렇게 원했던 행위, 즉 혈도를 제압하는 방법으로 현천검제를 잠들게 만들었다. 괜히 그가 사문에 대한 의리를 지킨답시고 이것저것 떠들면 일이 귀찮아 질 것 같아서였다. 손 다리가 불구라고 해도 그는 현재 화경의 무위를 되찾은 상태였다. 그런 그를 수하 몇 명이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혈도를 제압한 것이다. 하지만 묵향의 이런 행동 때문에 현천검제는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못하고 말았다. 자신의 제자들을 구해달라는... “객잔에 데려가거라." “옛!" “본좌는 화산을 쓸어버린 후 그곳으로 갈 것이야." “알겠습니다, 교주님!" “수하들의 배치는 끝났는가?" 묵향의 물음에 천진악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명만 하십시오." “그럼 지금 시작하기로 하지." 교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천진악은 수하에게 대답했다. “신호를 울려라." 그 명령에 따라 수하 한 명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충분한 내력이 실린 장소성은 화산파 주위를 휘감고 돌며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화산파를 중심으로 다섯 군데에 나누어 대기하고 있던 염왕대가 돌격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앗!" “모두 다 죽여버려랏!" 묵향은 돌격하는 수하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해 지기 전에 끝나겠군." 화산파에서는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침입입니다." “마교 놈들이 침입했다!" 여기저기서 도포 자락을 날리는 화산파의 제자들과 흑록색의 옷을 걸친 마교 고수들 간의 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수는 화산파 쪽이 월등하게 많았지만 마교도들은 염왕대의 고수들. 그것도 처음부터 기습으로 시작된 전투다 보니 마교 쪽으로 전세가 급속도로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화산의 고수들도 적의 침입에 맞서 칠성검진이나 옥청검진 등 각자의 수준에 맞는 검진을 구축하여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끝날 것처럼 보였던 전투는 조금씩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이때, 천진악이 나섰다. 그는 여기저기 전장을 누비며 검진에서 주축이 되는 한두 명만을 없애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진은 자연스럽게 무너졌고, 순간적으로 검진이 와해된 틈을 노려 공격해오는 마교도들에 의해 화산파의 제자들은 하나하나 죽음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묵향은 사방에서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별 신경도 쓰지 않고 화산파의 중심부로 걸어 들어갔다. 과연 그곳에는 대단히 뛰어난 고수들이 칠성검진을 치고 격렬한 저항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봐, 너희들은 딴 데 가봐." “존명!" 그와 동시에 가장 핵심이 되는 칠성검진을 공략하고 있던 마교도 수십 명이 공격을 멈추고 다른 곳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갔다. 칠성검진을 구성하고 있던 자들 중에서 가장 연배가 높아 보이는 듯한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는 바로 장로들 중에서 가장 맏이인 백화 장로였다. “귀하는 누구시오? 노부는 화산의 백화라고 하오." 그때 옆에서 다른 장로가 외쳤다. “대사형, 저자가 바로 장문인실에 침입했던 마교 교주입니다!" 그 말에 백화 장로는 다시 한 번 묵향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그때와 상황도 다르고, 또 옷차림도 틀려서 교주을 못 알아봤음을 용서하시구려. 그런데 무슨 이류로 본문을 침입한 것이오?" 그 말의 대답은 묵향이 아니라 공천 장로가 대신했다. “대사형, 그것도 모르시오? 저자는 지금 그놈의 복수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복수? 누구의 복수를 말하는 것이냐? 오호라, 현천 사제를 말하는 모양이군." 묵향이 사제라고 하자 장로들은 모두 흠칫했다. 사제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교주,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가 어떻게 교주의 사제라는 말씀이오?" “아아, 정식 사제라는 말은 아니야. 내 사부들 중의 한 명이 그놈에게 심심풀이로 검술을 조금 가르쳐준 모양인데, 그 때문에 편의상 사제라고 부르는 거야." 백화 장로는 얼굴 가득 노기를 띠며 따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사로이 사제의 복수를 위해 본문을 공격했다는 말씀이오?" “아니, 그것은 그 멍청한 녀석이 자초한 짓. 녀석은 충분히 도망칠 수도 있었어. 그런데 사문에 대한 얄팍한 충성심이 그놈을 그 모양으로 만든 것이지. 그건 놈의 선택이었다. 어찌 감히 네놈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고 개소리를 하는 거냐." “그렇다면 왜 화산파를 공격한 것이오?" “물론, 본좌와의 협상을 거부했기 때문이지. 그렇게 되면 화산을 완전히 쓸어버릴 것을 네놈들은 몰랐단 말이냐?" 그 말에 장로들은 현천검제가 마지막으로 청했던 부탁을 거절한 걸 떠올렸다. 현천검제는 그것을 거절하면 마교가 곧바로 공격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그럴 수가... 겨우 사파의 작은 문파와의 다툼 때문에 대화산파를 건드린단 말이오? 당신들을 무림맹에서 가만히 놔둘 것 같소?" “호오, 감히 무림맹 따위로 본좌를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냐? 무림맹 따위가 무서웠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다, 이 멍청한 것들아." 현경의 고수가 행하는 기습 공격은 너무나도 무서운 것이었다. 화산의 장로들은 상대가 언제 검을 뽑았는지 그것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동안 입씨름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또 마교의 교주쯤 되는 인물이 이토록 치졸하게 기습을 가해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고 있었던 터라 기습에 대한 대비는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묵향의 목표는 단 한 사람. 칠성검진을 이끌고 있던 핵이라 할 수 있는 백화 장로였다.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연결되는 묵향의 공격은 빛과 같이 빨라서 감히 눈으로 쫓아가기도 힘들 지경이었지만, 백화 장로는 최선을 다해 회피하며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현경의 고수에게 기선을 뺏긴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실책이었다. 주위에 있던 사제들이 대사형을 돕기 위해 뛰어들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결전은 끝난 후였다. “으아아악!" 푸른 빛이 번쩍이는 순간 백화 장로의 두 다리가 뭉텅 잘려 나간 것이다. 피가 뿜어져 흘러내리자 백화 장로는 재빨리 점혈하여 출혈을 막았다. “대사형, 괜찮으시오?" “노부는 괜찮으니 사제들은 저자의 공격을 조심하게. 언제 또다시 기습을 가해올지 알 수 없으니 말일세." 바닥에 주저앉은 채 검을 잡고 전의를 불사르는 백화 장로를 보며 사제들은 다시금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교주라고 해도 자신들 모두를 상대하려면 결코 쉽지는 않을 거라고 서로를 격려하며 말이다. 하지만 한번 빼앗긴 기선은 결코 되찾아올 수가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며 공격을 가해오는 묵향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사이에 이동은 하지 못하고 검만을 휘두를 수 있는 백화 장로가 끼여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존재가 그들의 통합적인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크아아악!" 또다시 피보라가 피어나며 한 사람이 쓰러졌다. 공천 장로의 다리까지 깨끗하게 잘려 나가자 그들은 그제야 백화 장로의 다리를 자른 것이 완전히 고의적인 행위였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렇게 잔인무도할 수가." “네놈은 어떻게 이런 흉악무도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빈틈을 노려 공격한 것도 아니고, 다리만을 자르다니! 네놈이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묵향의 싸늘한 비웃음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얼굴 가죽이 두꺼운지 모르겠군. 자칭 도사라고 하는 네놈들도 그렇게 했쟎아. 안 그래?" 묵향의 지적에 그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들도 현천검제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저놈을 쳐라!" 하지만 이미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던 두 명이 사라진 지금, 그들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을 없었다. 그렇다고 도주한다면? 자신들보다 경공술이 월등히 뛰어난 상대를 앞에 두고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끝까지 저항하는 것 외에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으아아악!" 묵향에게 저항하던 화산의 장로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 명씩, 한 명씩 다리가 떨어져 나간 불구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지만, 희망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한 사람의 다리까지 잘라버린 후, 순간적으로 묵향의 손에서 일곱 줄기의 시퍼런 강기의 덩어리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들은 기묘한 곡선으로 휘어지며 이동하더니 일곱 장로의 단전을 한순간에 꿰뚫었다. “크아아악!" 내가의 공력을 익힌 상승 고수라면 단 한 올의 기만 있어도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 있다. 하지만 단전이 파괴되어 기가 흩어진다면 결코 그런 방식으로는 자살할 수 없게 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뭔지 깨달은 순간, 그들은 사형제의 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놈의 목적을 막는 것. 그것 외에는 복수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묵향의 손에서 일곱 줄기의 지풍이 쏘아져 나와 검을 쥐고 있는 각자의 손을 격중시켜버렸기 때문이다. “크악!" 각자가 쥐고 있던 애검들은 주인의 뜻을 배반하고 맑은 쇳소리를 울리며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크흐흐흣,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어리석은 것들. 이제 네놈들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라." 또다시 묵혼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고, 그들의 팔은 몸에서 떨어져 나가 땅바닥에 뒹굴기 시작했다. “제, 제발 죽여주시오. 그대도 무인이라면 노부들에게 이런 치욕까지 안기지는 말아주시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들을 묵향이 아니었다. 묵향은 그들의 혈도를 점하여 지혈까지 시켜준 다음 싸늘하게 말했다. “물론 무인이게 치욕을 가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네놈들은 도사도, 무인도 아니야. 현천 사제에게 행한 일을 생각해봐라. 네놈들이 과연 무인으로서 행한 일을 했는지 말이야."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단전이 파괴된 화산의 노고수들은 자신들이 현천검제를 제거한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나를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들은 탄식과 신음 소리만을 울릴 수 있을 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에게 죽음이 찾아오기만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뿐. 묵향의 작은 복수가 끝났을 때, 화산에서 들려오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도 이미 멎어 있었다. 천진악은 비참하게 울부짖으며 버둥거리고 있는 화산 장로들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교주께 결과를 아뢰었다. “교주님, 승전을 경하드리옵니다." “모두들 수고했다. 너희들은 이 길로 본교로 돌아가도록 해라." “옛, 그런데 저들은..." 자신이 그들의 목을 잘라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줘도 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묵향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저놈들은 그렇게 죽을 가치조차 없는 놈들이다! 그대로 놔두도록 해라!" “옛! 그런데 화산파의 무공 비급이나 재물 들은 어떻게 처리를 하면 되겠습니까?" “모두 다 끌어내어 본교의 창고에 넣어두도록 해라." “옛!" “그리고 건물에 불을 지르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도록!" “예?" 보통 쑥대밭을 만든 후 불을 지르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런 지시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천진악이었다. “불을 지르면 그것을 보고 어떤 놈이든 올라올 것이 아니냐. 본좌는 화산이 멸문되었다는 것이 빨리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니 저 밑에다가 '본문에 일이 있어 당분간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방을 붙여놓거라. 그러면 너희들이 총타로 돌아가는 데 편리할 뿐더러 저 버러지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참회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얻게 되겠지." 천진악 장로는 교주의 잔인함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묵향은 백화 장로가 사용하던 검을 집어들어 천진악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화산을 멸문시킨 기념품은 챙겨야겠지? 이건 그대가 가지도록!" 그 검은 바로 화산 장문인을 뜻하는 신물인 보검이었다. 천진악 장로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깊숙하게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자신에게도 좋은 검이 있긴 했지만, 이런 훌륭한 기념품을 자신에게 양보하는 교주의 배려에 그는 크게 감동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이건 사제한테 주면 좋아하겠군." 묵향은 또 다른 검을 주줘들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바로 공천 장로가 떨어뜨려놓은 것으로 현천검제의 애검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묵향의 사부인 유백의 애검이었던 명옥검이기도 했다. 검을 주워든 묵향은 천진악을 향해 말했다. “그럼 본좌는 이만 가보겠다. 더 이상 시킬 일은 없으니 수하들과 함께 본교에 귀환하도록 해라." “옛!" 묵향이 돌아가고 난 후, 염왕대는 화산파 곳곳을 뒤져 보검 같은 귀중품들을 모두 챙기기 시작했다. ▒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무림맹의 대회의실에 모인 수뇌부의 안색은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화산파가 멸문당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 물음에 공수개 장로는 고개를 끄덕인 후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오이다.” “흉수가 누군지 밝혀진 게 있소?” 누군가 질문을 던지자 그 대답은 공수개 장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날아왔다. “이런 짓을 할 놈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게 아니겠소!” 그러자마자 사방에서 격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정확한 물증이라는 것이 필요하지요. 심증만 가지고는 무림의 동도들을 움직이기에 불충분하지 않겠소?” “불충분하다고? 마교 놈들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돼! 그놈들은 처음부터 씨를 말려버렸어야 한다구!” “맞소!” “맞기는 뭐가 맞아? 증거가 있어야 한다니까!” 공수개 장로는 손을 들어 장로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자자, 모두들 그렇게 열을 올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증거는 확보되었으니까요. 개방에서 현장을 철저하게 조사한 결과, 수많은 시신에 난 상처라든지, 벽이나 바닥에 난 흔적 등을 종합해볼 때 최소한 30여 종의 마공이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소이다. 지금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으니 어떤 마공들이 사용되었는지도 조만간 밝혀지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왜 마교가 화산파를 멸문시켰을까요?” “단 한 명도 살아남은 자가 없기에 알아낼 방법이 없었소. 물론 마교도 몇 놈을 잡아다가 주리를 틀면 의외로 간단하게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오. 게다가 그놈들이 약삭빠르게도 화산파의 아래쪽 길목에 '오늘은 본문에 일이 있어 손님을 받지 못하니 돌아가시오'라는 글을 붙여놨기에, 아무도 화산파에 변고가 일어났음을 알지 못했소. 나중에 일 때문에 밖에 나갔던 화산의 제자가 돌아와 혈겁이 일어난 것을 보고, 개방에 연락을 보내오기까지 무려 7일 이상이 흘렀단 말이오. 시체들이 썩고 있는 판에 무슨 생존자가 있을 수 있겠소이까?” “그렇다면 아예 생존자라고는 단 한 명도 찾지 못했소이까?”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렇소이다. 하지만 본방에서 다각도로 조사를 해본 결과, 뭔가 화산파와 마교 간에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하고 있소.” 공수개 장로의 말에 모두가 관심을 나타냈다. 잔뜩 궁금증을 담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낀 공수개 장로는 슬쩍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험험, 그러니까 본방에서 그런 추측을 하게 된 것은 그 잔인무도한 살인방법 때문이오.” 정보통 개방이라면 수많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시체들을 다 접해봤을 것이다. 그런데도 말을 하는 공수개 장로의 눈에 짙은 어둠이 끼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눈빛을 회의석상에 있는 사람들이 놓칠 리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현재 정파를 이끌어가는 아주 뛰어난 식견의 소유자들이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화산 장로들에 대한 살해 방법은 잔혹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소. 먼저 팔다리를 자라버리고, 단전을 파괴한 다음, 마지막으로 출혈 과다로 인한 사망을 예방하기 위해 지혈까지 시켜놓았다고 하더군요. 죽음의 공포와 함께, 설혹 누군가에게 구출 된다 하다라도 완벽한 폐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절망감까지 느끼게 만드는 아주 잔인한 방법이었소이다. 내공이 흩어져버렸으니 자살할 방법도 없이 그분들은 처절하게 발악하다가 죽은 것이었소. 심지어 공천 장로의 경우, 발견되었을 때 시신이 사후강직 상태에 놓여 있던 것으로 보아 발견되기 하루 정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좌중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어찌 한 문파의 최고수들을 그런 식으로 처형할 수 있단 말인가. 뭔가 지독한 원한이 있지 않고서야... 그때, 옥진호 장로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는 듯 외쳤다. “그건 원한이 아니라 경고외다!” “경고라니요?” “얼마 전 우리는 마교와 내통하고 있던 현천검제를 제거했지 않소이까? 그에 대한 대답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마교가 하는 일에 훼방을 놓는다면 이렇게 만들어주겠다고 경고를 보낸 것이란 말이오.” 뚜두둑! 분노에 가득 찬 맹주가 무심결에 의자의 손잡이를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 엄청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손잡이가 박살이 났다. 그 소리에 장로들도 놀랐지만 맹주 본인은 더 놀라 했다. 겨우 이런 일로 수십 년을 닦아온 평상심이 무너지다니. “무량수불...” 나직하게 도호를 외며 마음을 다잡은 맹주를 보며 모든 장로가 일제히 외쳤다. “마교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화산파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맹주는 손을 슬쩍 들어 장로들을 조용하게 만든 후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사건은 마교가 본맹에 보내는 선전포고임에 분명하오.” 옥진호 장로에게로 시선을 돌린 맹주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매화문검 장로는 마교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하시오. 마교가 행한 그 잔인무도한 짓을 무림 동도들에게 알리고, 그 힘을 집결시켜 마교의 뿌리를 뽑아야만 하겠소.” “명대로 행하겠습니다.” “매화문검 장로, 마교를 칠 만한 세력을 모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겠소?” “최소한 10만 이상의 인원을 모아야 할 테니, 적어도 2개월 이상은 필요합니다. 격문을 띄워 무림의 공분을 조성한다고 해도 그들이 청해성까지 집결을 완료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무량수불... 마교가 화산을 멸문시킨 것을 묵인한다면 그들은 마음놓고 다른 문파들을 공격할 것이 분명하오. 그런 만큼 본맹은 철저한 보복을 감행하여 마교도들이 다시는 이런 사태를 일으키지 못하게 만들어야만 하오. 이번 공격으로 마교를 멸망시킬 수 있다면 좋겠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더라도 최대한의 피해는 줘야만 할 것이오. 그런 만큼 여러 장로님은 최대한 많은 문파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시오. 마교에 대한 총공격은 3개월 후로 하는 게 좋겠소이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소?” “맹주님의 의견이 지당하십니다!” “좋소. 그렇다면 모든 문파에게 마교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대의에 동참하는 격문을 띄우도록 하시오.” 모든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맹주의 결정에 찬동하며 마교에 대한 전의를 불태웠다. 이제 드디어 마교와의 전면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밀실에서는 경악한 여인의 뾰족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가 화산파를 박살냈다고?” “예, 할머니.” 옥화무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매영인에게 되물었다. “분명히 염왕대 5개 대라고 하지 않았더냐? 겨우 그들만으로 화산을 멸문시킨다는 것이 가능이나 한 일이냐?” “하지만 마교에는 그가 있지 않습니까?” 매영인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옥화무제는 확신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훗, 아무리 그가 있다고 해도 말이 안 된다. 화산에는 현천검제가 있지 않느냐. 아무리 그가 지고한 경지를 개척했다고 해도 겨우 그 정도의 부하들을 거느릐고 화산을 쓸어버리다니... 뭔가 이상하구나. 화산파의 멸문에 대해 좀 더 철저하게 조사해보거라.” “예, 할머니.” 매영인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옥화무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자가 제정신인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산만 쓸어버린다고 해서 일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 이건 아예 전면전을 시작하자는 선전포고를 한 거나 만찬가지가 아닌가?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때 회의실의 굳게 닫혀 있는 문 밖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밖에서는 큰 소리로 외친 것이겠지만 워낙 방음이 잘되는 방이라서 그런지 작게 들려온 것이다. “무림맹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총관은 황급히 문으로 다가갔다. 회의 중인데도 불구하고 가져온 것을 보면 상당히 중요한 전서인 모양이었다. 총관은 문을 살짝 열고 서신을 받아든 다음 다시 문을 굳게 닫았다. “무슨 일인가요?” 서신을 재빨리 읽은 후 총관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무림맹에서 마교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훗, 그 영감으로서도 그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겠지요. 그 외에는요?” “예, 3개월 후 마교의 근거지인 십만대산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무림에 적을 둔 동도들은 무림맹의 결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훗,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요.” 옥화무제는 상관운 장로에게 말했다. “나는 요를 멸하는 일에 얽매이다 보니 아무래도 무림 쪽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어려움이 크군요. 하지만 지금 무림도 격변기에 놓여 있어요. 영인이가 뛰어난 아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연륜이 떨어지니 상관운 장로가 옆에서 잘 보좌해주도록 하세요.” 무영문주는 마교의 움직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사천 분타에 가 있었다. 그런 만큼 총타에서 문주를 지원할 인물이 필요한 것이다. 평상시라면 옥화무제가 있으니 큰 상관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의 정신은 온통 요에 가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무영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부문주인 매영인이었다. “예,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가 돌아온 후 무림이 또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도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루한 소모전으로 일관되다 슬그머니 끝마치게 되겠죠. 아무리 마교의 세력이 강성하다고는 하지만 정파 무림을 한꺼번에 복속시킬 만한 능력은 없어요. 또 정파에서도 그 천혜의 요새인 십만대산을 정벌할 만한 힘이 없구요. 최대한 타격을 입힌 후 후퇴하는 정도로 마무리 짓게 되겠죠.” 매영인도 살짝 고개를 끄덕여 찬성의 뜻을 표했고, 그것은 상관운 장로도 마찬가지였다. “속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태상문주님.” “그렇기에 본문의 역할이 중요한 거예요. 어느 한쪽의 세력이 충돌하지 않도록 중간에서 최대한 둘 사이의 세력을 조율하는 능동적인 대처가 필요해요. 알겠나요?” “예, 할머니.” “옛,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기로 하지요.” 매영인과 상관운 장로가 밀실을 나간 후 총관은 옥화무제에게 질문을 던졌다. “요의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임청 원수에게 전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직 완전한 집계가 끝나지 않았으니 그렇게 서둘러 정보를 전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현재까지 모인 것만 해도 70만이 넘지만, 아직도 더 많은 병사가 이동 중이라는 보고가 있었어요. 어쩌면 80만 정도일지 모르지만 그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겠지요.” “예, 태상문주님. 그건 그렇고, 설마 요 황제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뛰쳐나올 것이라고는 예상 못했었지 않습니까?”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만큼 요 황제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말이겠죠. 요의 군대가 금의 군대와 전쟁을 시작할 때, 그때가 기회가 될 거예요. 본국의 군대가 국경선을 돌파해 침공을 시작했음을 안다 해도 군을 되돌릴 수가 없을 테니 말이에요.” “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에요. 요와 금의 대군이 대치할 때, 그때를 노려 요를 쳐야 해요. 시간이 생명이에요. 이곳 총타로 보내온 정보를 다시 전선에 가 있는 임청 원수에게 전한다는 것은 시간 손실이 너무 커요. 그런 만큼 그에게 곧바로 정보를 전달하라고 하세요. 그러면 최소한 3일의 시간은 단축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흑과 백의 전쟁터. 전쟁의 규칙은 매우 간단했다. 포위만 되면 무조건 전멸. 그런 다음 나중에 어느 쪽이 더 많은 영토를 확보했는지를 따져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방식이다. “허어, 이거 이번에는 제법 저항이 거센걸?” 화경의 고수씩이나 되는 인물이 코앞에 있는 바둑판이 잘 안 보일리가 없거늘, 머리를 바싹 가져다대며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을 보면서 조령은 약이 바짝 올라 조잘거렸다. “아니, 정말 이렇게 무자비하게 두실 거예요? 한 집이라도 살려보겠다고 이렇게 아둥바둥하고 있는 걸 보면, 저 같으면 불쌍해서라도 살려주겠어욧!” 조령은 흰 돌을 쥐고 있는 패력검제의 손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 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지금 심하게 콩닥거리고 있었다. 한 수 둬놓고 보니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제발, 저기 있는 허점을 몰라야 할 텐데...' 하지만 이제 갓 바둑을 시작한 그녀의 눈에도 보이는 허점이 어찌 수십 년 동안 바둑을 둔 패력검제의 눈에 안 보이겠는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잠시 전장을 관찰하던 패력검제는 인정사정없이 그곳에 흰 돌을 쑤셔넣으며 이죽거렸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패력검제가 돌을 놓자마자 조령의 안색이 핼쑥하게 질렸다. “제, 제발 한 수만 물려주시면 안 될까요? 예? 제발~~.” 애처롭게 사정했지만 패력검제는 무자비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일수불퇴!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는 법이라네.” 결국 검은 돌은 단 한 곳에도 진지를 구축하지 못한 채 바둑판 위에는 흰 돌만이 잔뜩 깔려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흰 돌들을 원독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조령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시뻘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찌 초보자를 앞에 두고 이렇게도 무자비한 손속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상대의 심리 상태를 모르는 척 쓱쓱 돌을 주워담던 패력검제는 음흉스런 어조로 조령에게 제안했다. “어때? 또 한 판 하려나?” 그런 패력검제의 모습이 너무나도 얄미워 조령은 순간적으로 발작을 일으킬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상대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차, 참아야 하느니라... 으드득.' 그렇지만 그녀의 미간에 '내천'자가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인내심의 한게가 가까워오고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다섯 점만, 아니 아홉 점만 미리 깔고 두면 안 될까요?” “허어, 어찌 공명정대한 바둑을 둠에 있어서 먼저 우위를 점하고 시작하려 하는고? 절대로 그렇게 해줄수는 없지.” “훌쩍, 훌쩍!” 결국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조령은 기어코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하지만 패력검제의 의지는 단호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네.” “으아아아앙!” 조령이 울면서 어딘가로 뛰쳐나간 후 패력검제는 바둑판을 한쪽 옆으로 치워놓으며 중얼거렸다. “다음에 또다시 바둑 두자고 올 때는 조금 더 실력이 향상되어 있겠군. 어쩌면 다음에는 내기에 질지도 모르겠어. 흐음, 확실히 근성이 있는 아이란 말이야. 그렇게 무자비하게 깨버리는 데도 계속 도전해 오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때 저쪽에서 서량이 차를 가지고 걸어오는 것을 보고 패력검제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네가 늦은 듯하구나. 그 아이는 벌써 가버렸으니 말이다.” 그 말에 서량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하하, 무슨 말씀을. 아버지 드리려고 가져왔지 조령 소저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닙니다.” “그럼 왜 찻잔이 세 개인고?” “제가 만약 두 개를 가져왔는데, 혹시 조령 소저가 있다면 그 둘을 누구에게 줘야 하겠습니까? 아버님께서 언제나 말씀하셨듯이 삶을 평화롭게 살려면 융통성이라는 것이 필요한 법이죠.” 패력검제는 아들의 말에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어서 올라오너라. 오랜만에 너하고 다향을 즐기게 되었구나.” “그런데, 좀 살살 봐주면서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멀리서 슬쩍 보니 너무 심하신 것 같던데요.” “허허, 내가 결코 심산 것이 아니다. 단 한 집이라도 살리면 무공을 가르쳐달라는 조건이 붙어 있는 내기 바둑이다. 결코 양보할 수 없지. 또 겨우 이런 것으로 포기할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어찌 상승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말이냐?” 두 부자가 한담을 나누며 다향을 즐기고 있을 때, 엄청난 속도로 한 인물이 달려와서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문주님, 무림맹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호오, 무림맹에서? 그래,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 “무림맹은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교와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3개월 후에 십만대산을 공략할 테니 각 무림 동도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호소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화산파가 마교에게 멸문당했다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퍼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령문은 이렇다 할 첩보 조직조차 갖추고 있지 않은 작은 문파였고, 또 소주에 새로운 터전을 잡은지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았기에 아무래도 기반이 취약했다. “마교와 전면전을? 놀라운 일이로다. 지금까지 마교와 수많은 다툼이 있었지만 무림맹에서 그렇게까지 강하게 전의를 드러낸 적은 없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슬쩍 패력검제의 눈치를 보며 서량이 말했다. “답신을 빨리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자네는 눈치 빠른 녀석 몇을 데리고 나가 무림맹이 왜 마교와 전면전을 선포한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내라. 갑자기 무림맹에서 이런 강수를 두는 이유가 있을 게다.” “옛, 문주님.” “무슨 일일까요?” 패력검제는 느긋하게 차를 마신 후 대꾸했다. “글쎄, 점쟁이가 아닌 한 나라고 그것을 알 수 있겠느냐?” 사실 그에게 있어서 이제 더 이상 무림맹과 마교의 일은 자신에게 족쇄가 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더욱 높은 경지를 향한 염원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3일 후, 패력검제는 무림맹이 마교와 전면전을 선포한 이류를 다른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으리, 고혼일검 대협께서 오셨습니다.” 고혼일검 여민은 패력검제의 단 하나뿐인 사형이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패력검제의 안색은 환하게 밝아졌다. 패력검제는 서재에서 황급히 달려나오며 외쳤다. “사형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빨리 이쪽으로 모시지 않고.” “예, 도련님께서 모시고 계십니다. 아, 저기 오시는군요.” 낡고 허름한 옷을 걸친 중년 사내가 서량과 담소를 나누며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이마와 빰에 난 긴 상흔만 없었다면 상당히 잘생긴 얼굴이었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사형.” “허허, 문주도 건강한 듯하여 마음이 놓이는구먼. 문주, 드디어 마교놈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찾아왔다네.” “아, 사형께서도 무림맹에서 마교에 전면전을 선포한 사실을 들으셨군요.” “물론이지. 내 그걸 듣자마자 만사를 제쳐놓고 곧장 달려왔다네.” “자자, 안으로 드시지요. 먼길을 달려오셨는데 차로 목이나 축이시면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허허헛, 기왕이면 향기로운 술로 주게.” “무슨 대낮부터 술이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사형과 밤새 마시려고 준비해둔 좋은 술이 있으니까요. 자,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패력검제는 여민이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무림맹이 마교에 대해 그런 초강수를 동원했는지 사형은 들으셨습니까?” “아니, 문주는 그것도 아직까지 몰랐단 말인가?” “예, 여러 가지로 일이 많다 보니...” “마교에서 화산파를 멸문시켰다네.” 화산파가 멸문당했다는 말에 패력검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 그, 그럴 리가...” “기습 공격을 가해 완전히 씨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린 모양이더군. 소문을 듣자마자 노부와 면식이 있는 개방의 분타주를 찾아가 확인까지 했으니 틀림없는 사실일세.” “이상하군요.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는데...” “그라니, 누구를 말하는 겐가?” 여민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채근하자 패력검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슬쩍 넘기며 대화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형께서는 왜 마교가 화산을 공격했는지 아십니까?” “아, 그거야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예? 당연하다니요?” “전에 문주가 노부에게 무영신마를 사냥하려고 하는데 함께 가자고 청하지 않았었나?” “그랬었지요.” “무영신마를 잃은 마교에서는 당연히 복수를 꿈꾸며 이를 갈았을 테고, 그때 재수 없게도 화산파가 걸린 것이 아니겠는가?” 사형의 논리에 패력검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마도 사제의 실력을 인정하는 그였기에 필히 무영신마의 목이 날아갔을 게 분명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지 않은가. “사형께서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무영신마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으로는 뭔가 화산파가 박살날 만한 짓을 마교에게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허허이, 이상한 일이로군. 언제부터 문주가 그렇게 마교를 높이 쳐줬었지? 원래 그놈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살인과 방화를 일삼는 놈들이네. 그놈들이 아버님을 돌아가시게 했을 때도 이유가 있었나? 무엇이건 간에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만 않으면 곧장 죽이고 파괴하는 놈들이 아닌가 말일세.”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화산이라는 문파가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요.” 고혼일검 여민은 예전에 자신들이 당했던 처참한 기억을 떠올렸는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과거 본문에 불어닥쳤던 혈겁을 생각해보게. 처음에는 아버지, 그런 다음 일이 커져서 산 위에 올라갔던 대부분의 사형제... 우리 쪽에서 치밀하게 대비를 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본문까지 잿더미로 만들었을걸? 안 그런가?” “그건 알수가 없으니 논외로 하지요.” “그래, 문주는 언제 출발할 생각이신가?” “글쎄요, 3개월 후라고 하니 시간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완벽한 준비를 갖춘 후 출발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문주 말이 맞는 것 같구먼.” ▒ 먼지 나게 한번 맞아볼래? 염왕대가 마교를 떠나 화산으로 이동할 때는 대파산맥을 빙 돌면서 야음을 틈타 적의 눈을 속여가며 전진했었다. 하지만 일단 임무를 끝마치고 귀환하는 마당에 그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꾸물거리다가 무림맹의 무사들에게 퇴로를 차단당하면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다. 천진악이 거느리고 온 것은 겨우 5개 대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수하들을 독려하여 진령산맥을 타고 최대한 빨리 귀환하는 방법을 택했다. 천진악과 그가 거느리는 염왕대 고수들은 막에 복귀하면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미 비마대를 통해 그들이 이룩한 전과가 마교 내에 널리 알려진 덕분이었다. “염왕대주 천진악 이하 염왕대 5개 대, 임무를 무사히 끝마치고 본교에 귀환했습니다!” 천진악의 보고를 받은 수석장로 수라혈신 북궁뇌의 안색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인명 피해는 없었소?” “약간의 부상자는 있었지만 사망자는 전무합니다.” “크하하핫! 그것 참 통쾌한 소식이로군.” 여기까지 기분 좋게 말한 수석장로의 어조는 갑자기 이빨 갈리는 그것으로 급변했다. 아무래도 천진악이 뭔가 그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 행동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큰 작전을 어떻게 수석장로인 노부도 모르게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대가 노부를 상관으로 생각했다면 떠나기 전에 단 한마디 언질이라도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북궁뇌가 언성을 높이며 질책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그는 수석장로면서 내총관까지 겸하고 있지 않은가. 각 무력 단체를 총괄하는 장로들의 권한이 커지면서 내총관의 권력이 축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목상은 내총관이 총책임을 지게 되어 있었다. 북궁뇌의 눈치를 보면서 천진악은 난처하다는 듯 대꾸했다. “아무래도 따지셔야 할 대상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수석장로님. 저는 화산 인근에 집결하라는 명령만 받고 교를 나섰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보니 화산 인근에 비마대가 쫙 깔려서 화산파의 내부 정보를 전해주더군요. 그것으로 봐서 아마도 군사나 비마대주께서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지 않겠습니까?” 천진악은 슬며시 군사에게로 팔밀이를 했고, 덕분에 수석장로의 노화를 한꺼번에 감당해야 할 입장에 놓인 군사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수석장로는 분노 어린 시선을 군사에게로 돌렸다. “사실이오, 군사?” 군사는 수석장로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수석장로님. 그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어찌 수석장로님께 보고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염왕대를 보내라는 교주님의 명령을 받고 비마대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비마대주께 협조 요청을 했을 뿐, 저도 설마 교주님께서 화산파를 멸문시키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수석장로의 시선을 받은 비마대주 홍진이 다급히 말했다. “교주님께서는 염왕대와 합류한 이유에 화산을 치시겠다는 결심을 하셨습니다. 수하들에게 그 보고를 받았을 때는 이미 일이 끝난 후였습니다.” 화산파와 마교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가로막혀 있었다. 그렇기에 화산이 멸문당한 이후에야 교주가 화산을 치려고 한다는 보고가 흥진에게 도착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질책할 사람도 없었기에 수석장로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젠장! 그렇다면 그 작전은 완전히 교주님께서 즉흥적으로 시행하신 작전이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을 향한 노화는 거두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구먼. 이보게들, 다음부터는 뭔가 조그마한 낌새만 있어도 노부에게 연락 좀 해주게. 알겠는가?” “옛,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젠장, 그 망할 화산파가 끝장나는 통쾌한 순간에 아무것도 모르고 본교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니... 이런 빌어먹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수석장로님. 아마도 곧 그럴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비마대주 홍진의 말에 수석장로의 입은 한껏 벌어졌다. “오오, 비마대주, 뭔가 새로운 정보가 있소?”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무림맹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지 않습니까? 뭔가 복수를 하기 위해 움직이겠지요.” “크흐흐흣, 그 버러지 같은 것들이 움직여봤자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무림맹을 끝장내버릴 것이야. 자, 모두들 축배를 들러 가세나. 노부가 좋은 술을 잔뜩 준비해 놓으라고 일렀다네.” 그날 수석장로는 모든 장로와 통쾌하게 술을 마셨다. 오랜 세월 마교와 다툼을 벌려왔던 적들 중의 하나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그는 다음에는 꼭 자신이 앞장서서 정파 놈들을 쓸어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술잔을 들이켰다. 마교의 장로들은 거의 대부분 무림맹과의 일전을 원하고 있었다. 마교는 그 지닌 바 힘의 크기에 비해 너무도 오랜 세월 숨죽이고 살아왔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은퇴하기 전에 무림맹이 끝장나든지 마교가 멸망하든지 둘 중 하나의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림맹의 멸망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장로들의 움직임과는 달리 갑작스런 무림맹과의 충돌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화산파가 멸문당했다는 보고를 들은 천리독행은 너무나도 놀라 하마터면 숨이 끊어지는 줄 알았다. 중상을 당하고 몸져 누워 있던 그에게 그 소식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의원이 달려와서 침을 놓고 환약을 먹이는 등 치료를 행한 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산파가 멸문당했다고 했느냐?” “예, 부교주님.” '이런 망할! 도대체 교주는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무턱대고 전면전으로 나간다면 이쪽도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할 텐데...' 하지만 그가 수하에게 한 말은 생각과는 다른 말이었다. 마교는 강자지존의 세계. 결코 수하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으으윽, 그래 교내의 반응은 어떻더냐?” “지금 교내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입니다. 본교의 숙적들 중의 하나인 화산파를 멸문시켰으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젠장! 아냐, 상처가 쑤셔서 그러니까 네가 상관할 바 없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래, 장로들의 반응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하에게 천리독행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상처의 통증 따위가 아니었다. 마교의 미래가 한 미치광이 때문에 완전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수석장로께서는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모든 장로를 모아놓고 지금 거나하게 주연을 베풀고 계십니다.” '이런 빌어먹을! 장로들까지도 지금 본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단 말인가? 그래, 초류빈! 그놈이라면 그래도 현실을 직시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야, 그놈은 그런 것에는 처음부터 아무런 관심도 없는 놈이었지. 맞아! 흑풍대주라면 어느 정도 말이 통할지도 몰라. 본교의 미래에 대해 꽤나 깊게 생각했던 놈이니 말이야.' “흑풍대주에게 주연이 끝난 후 노부가 좀 보자고 한다고 전하거라.” “옛!” 주연이 끝나고 찾아온 관지는 침상에 누워 있는 천리독행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속하를 찾으셨습니까, 부교주님?” “노부가 몸이 불편하여 이 상태로 얘기하는 것을 이해하게.” 천리독행은 잠시 관지의 안색을 살피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자네는 이번 승리를 어떻게 보는가? 자네 또한 지존의 자리에 근접했던 사람, 결코 생각이 얕을 거라 여기지 않기에 묻는 것이네.” 관지로서는 상대가 이런 말을 꺼내는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간단하게 대꾸했다.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그 말에 천리독행은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헛, 지금까지 노부와 자네는 서로 대립하며 다른 길을 걸어왔으니 자네가 노부를 의심하는 것을 당연하겠지. 하지만 노부는 이것만은 자네에게 말하고 싶었다네. 무림맹은 결코 약한 집단이 아니야. 서서히 압박하며 무림맹을 뒤에서 떠받치는 군소 방파들을 하나씩 해체시켰어야 했어. 그러지 않은 상태에서 화산파를 치는 것은 적을 더욱 단결시킬 뿐이야. 노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네. 이런 식으로 정면 충돌을 일으켜봐야 본교에게 유리할 것은 하나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교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교도로서 해야 할 최선의 본분이라고 여기고 있습...” 관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리독행이 분통이 터진다는 듯 외쳤다. “이런 제기랄! 자네만은 이 노부의 마음을 알아줄 것으로 생각했거늘... 가보게! 아무래도 노부가 자넬 너무 높게 평가했던 것 같군.” 뚜벅뚜벅 걸어나가던 관지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슬쩍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물론 부교주님의 우려도 이해가 갑니다. 속하도 순간적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분을 부정한다면 지금까지 그분을 믿고 기다린 그 오랜 시간들은 뭐가 되겠습니까? 한번 믿었으니 끝까지 믿어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속하가 너무 주제넘은 말씀을 올렸군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관지가 물러가고 난 후 천리독행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한 번 믿었으니 끝까지 믿어보겠다? 허어, 어쩌면 그게 최선의 선택인지도 모르겠군.” 묵향은 염왕대가 마교에 귀환한 후 정확히 4일 후에 도착했다. 그의 귀환은 매우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왜 묵향이 남의 집에 들어가는 도둑놈처럼 살금살금 돌아왔느냐? 그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묵향은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숲 속으로 들어갔다. 과연 초류빈은 그곳에 있었다. 커다란 도를 끌어안고 나무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잠을 자고 있는 건지 졸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확인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으흐흐, 초류빈 이놈! 내가 네놈을 가만히 놔둘 줄 알았느냐?” 잠시 졸고 있던 초류빈은 지옥에서 울려오는 듯한 울림에 흠칫 잠에서 깼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다리 두 개가 놓여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졸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가깝게 접근해올 때까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초류빈은 그 다리의 임자가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그는 봤다. 악귀처럼 미소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묵향의 얼굴을. 도대체 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분명히 그가 중원을 다 돌아보는데 1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허걱! 교, 교 교주님께서 여, 여기는 어쩐 일로...” 묵향이 씨익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네 쇠가 뭔지는 대충 아는 듯하구나.” “죄, 죄라니요. 결코 저는 교주님께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어쭈? 이젠 발뺌까지? 너, 먼지 나게 한번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냐?” 묵향의 얼굴을 보아 하니 그냥 넘어갈 리는 없을 게 분명했다. 초류빈은 묵직한 도의 손잡이를 꽉 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손아귀에 꽉 차는 든든한 느낌이 초류빈의 떨림을 멎게 해줬다. “먼지 나게 맞다니요? 저도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이겁니다. 그런 식으로 애 취급 하지 마십시오.” “호오, 그래? 놀라운 발전이군. 그렇다면 어떻게 취급해주랴?” “저는 천마신교의 부교주입니다. 그에 걸맞은 대우를 원합니다.” “오랜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군. 좋다, 그럼 네가 부교주면 나는 뭐냐?” 갑자기 이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지만 초류빈은 대답을 해야만 했다. “교주님이시죠.” “네놈이 나를 교주로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했냐?” 허걱, 이런 식으로 공격해오다니, 교주의 머리가 갑자기 명석해지기라도 하셨나? “무, 물론 도망친 것은 잘못한 짓입니다. 하지만 제 입장도 고려를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마교 부교주가 되었음이 세상에 밝혀진다면 초씨세가의 명성에 똥칠을 하게 될...” 순간 분노에 일그러진 묵향의 표정을 보며 초류빈은 자신이 말을 잘못했음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멈췄다. “뭣이? 네놈은 천마신교를 잡배들의 집합소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거지? 똥칠이 어쩌구 어째? 그냥 봐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이 놈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 그 순간 초류빈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왕에 반쯤 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을 거, 반항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공격이었다. 초류빈의 주먹이 묵향의 몸을 꿰뚫는 순간, 초류빈은 공격에 성공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의 주먹에는 그 어떤 감촉도 없었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묵향의 신형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이형환위? 정말 놀랍군. 간발의 순간에 이형환위를 시전할 수 있을 줄이야.' 하지만 그런다고 물러설 초류빈이 아니었다. 초류빈도 화경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던 그의 몸이 그 자세에서 불가사의한 속도로 튕겨 나오며 순식간에 묵향을 따라붙었다. 순간, 초류빈의 손에 들린 거대한 도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쾌속한 움직임을 보이며 강기를 뿜어냈다. 아무래도 교주는 자신이 이런 식의 기습 공격을 감히 가해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간신히 방어하며 정신없이 뒤로 밀리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며 초류빈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나한테도 기회가 온 거야. 흐흐흣, 저 인간만 없앨 수 있다면 나는 자유라구!' 마교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초류빈은 3황 6제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마교에 얽매여 있다 보니 자신이 화경을 깨달았다는 사실 자체를 외부에 숨기고 있었지만, 마교만 벗어난다면 그는 영광스런 초고수들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기도를 쥐고 있는 초류빈의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초류빈은 더욱 공격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거도가 휩쓸고 지나가자 그 강기의 여파로 아름드리 나무들이 쓰러졌고, 땅바닥이 파이며 흙먼지가 짙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눈앞이 보이지 않는 것쯤에 방해를 받을 초류빈이 아니었다. '언제 교주가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가해올지 알 수가 없어. 그러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승기를 잡고 있는 이때 저놈을 확실하게 끝장내야 해.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는 없잖아.' 초류빈은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들을 연속적으로 펼쳐 나가고 있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무작정 공격하는 것은 자멸하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0여 초식도 전개하지 않았는데, 무리한 공력 소모로 인해 기혈이 들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상대가 간신히 공격을 피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가. 교주는 그야말로 간신히 초류빈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어떤 때는 피하는 것이 늦어 강기의 여파가 상대의 몸에 직접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물론 그 정도로는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지만 거의 간발의 차로 목숨을 건진 거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그의 옷은 순식간에 넝마 조각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피하기에 급급했으면 당황해서 미처 검을 뽑을 여유도 없을 정도였다. '이이익, 기회는 이때야! 조금만 더 하면 아예 보내버릴 수 있어. 제발 한 방만 맞아라.' 그런데 이게 100여 초식 이상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초류빈은 자신이 지금 속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상대의 처참한 모습이 그의 생각을 가로막고 있었다. 꼭 한 방만 제대로 치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한 방이 안 들어가는 것이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 아닌가. “헥헥헥!” 자신의 모든 공력을 투입해서 연속 공격을 쉴새없이 퍼부어대던 초류빈은 이제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에는 힘이 빠져 거도를 간신히 들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공격을 당한 상대는 아직도 쌩쌩하지 않은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제 힘이 다 빠졌냐?” 묵향은 악마처럼 눈빛을 빛내며 초류빈에게 이죽거렸다. “오랜만에 재미있었다. 그건 그렇고, 명령 불복종에다 하극상까지 시도했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끄으윽! 여, 역시...” 그 이후, 초류빈이 기거하던 숲에서는 뭐를 때려잡는지 북치는 듯한 타격음과 돼지 멱 따는 듯한 비명소리가 밤새도록 울려 퍼졌다. 묵향이 돌아오자 마교의 모든 고수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화산파라는 거목을 뿌리채 뽑아버리는, 역대 교주들 중에서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그가 돌아오자마자 단번에 해치웠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묵향은 마교에 귀환한 후 장로급 이상의 수뇌부를 소환했다. “그래, 무림맹의 동태는 어떠하던가, 군사?” “예, 무림맹은 전면전을 선포한 후 동조자들을 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속하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웬만한 문파에는 다 격문을 돌렸다고 합니다.” “호오, 그래? 정공으로 들어오시겠다 이거군. 그래, 각 문파에서 호응은 좀 있다고 하던가?” “본교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잠잠했던 탓인지 본교의 무서움을 모르는 수많은 문파가 거기에 동참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때, 수석장로가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교주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중원을 휩쓸 준비는 이미 끝났습니다. 놈들에게 자신들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나 보여줘야만 합니다!” “수석장로의 용맹은 익히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수석장로를 치하한 후 묵향은 홍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비마대주, 놈들이 언제쯤 공격을 가해올 것인지에 대한 정보는 입수했나?” “물론입니다. 교주님. 3개월 후에 총공격을 가해올 것입니다.” “그래, 수고했군.” 묵향은 이번에는 군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군사가 생각한 대응책이 있다면 한번 들어보세.” “아무래도 무림맹은 정파의 연합체입니다. 본교처럼 정예무사들을 항시 보유하고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일단 격문을 돌려 동참할 고수들을 모집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청해성까지 이동한 후, 그곳에서 집결된 세력을 정비하여 본교에 대한 공격을 감행해올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세력이 집결되기 전에 각개격파해 나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흠, 군사의 말에 일리가 있군.” “예, 무림맹이 보유하고 있는 정예 무사는 겨우 5천이 넘지 않습니다. 그리고 8파 1방, 5대세가가 그들이 지닌 모든 힘을 쥐어짠다고 해도 5만이 채 되지 않을겁니다. 그 외 나머지는 숫자만 차지할 뿐 그리 위협적인 전력이 아닙니다.” 군사는 커다란 지도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펼처 놓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무림맹이 본교를 공격했을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 집결지까지는 각자 행동했습니다.소림사의 세력은 소림사대로 이동했고, 무당의 세력은 무당대로....” 군사는 지도를 짚으면서 몇몇 문파가 이동한 통로들을 그려 보인 후 말을 이었다. “놈들이 청해성에 완전히 집결을 완료했을 때는 최소 10만 이상의 엄청난 규모의 세력을 보유하게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 최대의 약점입니다. 강력한 세력을 지닌 몇몇 문파만 청해성에 도착하기 전에 포착하여 괴멸시켜버린다면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묵향은 잠시 지도를 바라본 후 장로들을 쭉 훑어보며 말했다. “그 외에 또 다른 의견은 없는가?” 아무도 의견을 말하지 않았기에 묵향은 군사의 계획대로 작전을 시행할 것임을 밝혔다. “좋다, 자네의 작전대로 수행하기로 하지. 군사는 장로들과 상의하여 세부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한 뒤 본좌에게 제출하라.” “옛, 교주님!”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밖으로 나갈 때 묵향이 군사를 불러세웠다. “군사는 잠깐 나 좀 보세.” “예, 무슨 일이십니까, 교주님? 이번 작전에 대해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딴 일일세, 일본과의 무역 준비는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가?” “옛, 아주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잘만 된다면 2개월 후에 무역선을 출발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묵향으로서도 의외였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배를 건조하는 데 최소한 9개월 이상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어떻게....” “물론 그렇게 보고드렸었습니다. 그것도 본교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수군 전선이 아니겠습니까? 새것으로 건조하려면 보통 사용되는 무역선에 비해 2개월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운 좋게도 노후된 수군 전선 2척을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오, 그래? 상태를 어떻던가?” “조금 수리를 해야 하겠지만 꽤 양호한 편입니다. 수리하는 데 최소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준비가 되는 대로 바로 출발시키도록 하게. 참, 관지에게 빠릿한 놈으로 1천 정도 준비시키라고 해.” 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들을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일본에 보낼 거야.” 그 말에 군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이제 곧 정사대전이 벌어질 판인데 1천의 정예를 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여기는 본좌가 있으니 어떻게든 처리해나갈 수 있어. 1천의 정예를 일본에 보내는 것은 더욱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자 함이야. 그들을 보내 후지와라 영주가 그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도록 도와주면, 대영주로 성장한 그는 본좌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게야. 안 그런가?” “교주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 뜻밖의 방문객 묵향은 회의가 끝난 후 마화를 호출했다. “찾으셨습니까, 교주님?” “흥, 한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는데 말이야.” “무슨 일이십니까?” 묵향은 화산파에서 있었던 일을 마화에게 어기전성으로 설명했다. 묵향의 설명에 마화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현천검제가 누구인가. 현재 3황 5제중에서 5제에 속하는 거물이 아닌가. 그가 교주가 숨겨둔 진사제, 정말 놀라울 뿐이었다. 호사가들은 지금도 3황 5제를 거론하고 있다. 3황은 만사불황과 현무림맹주인 태극검황 그리고 곤륜무황을 이른다. 그리고 5제는 옥화무제 수라도제 현천검제 황룡무제를 이르는 말이다. 과거 3황에 속했던 무극검황과 뇌전검황이 죽은 후, 새롭게 현천검제와 황룡무제가 나타났으니 다시금 3황5제의 시대가 된것이다. “그렇다면 현천..., 아니 사제님과 함께 오신 겁니까?” 마화는 혹시나 현천검제의 신분이 새나가면 묵향에게 곤란한 일이 있을까봐 급히 사제라는 말로 바꿨다. “아니, 나 혼자 먼저 왔어. 그녀석은 내일쯤 올 거야.” “경치 좋으면서도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서 기거하실 곳을 마련해 두겠습니다. 눈치 빠른 하녀 둘 정도를 붙여드리면 지내시기에 불편하지 않으실겁니다.” “그렇게 해줘, 내가 모르고 그녀석 제자들 까지 몽땅 다 죽여버렸거든. 나중에 그놈에게 제자가 있다는것을 알았을땐 이미 늦어버렸지. 하지만 어쩌겠어. 죽은 놈을 살려낼 재주는 나한테 없는데 말이야. 그녀석 말은 안했지만 많이 상심했을거야. 그러니 잘 보살펴 주라구.”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참, 아버지는 아직도 안 나오셨나?” “예, 그때 들어가신 다음 한번도 안 나오셨습니다.” “이런 젠장, 어쩔수 없지, 내가 가보는 수밖에.” 묵향은 마화와 헤어져 자신의 연공실로 갔다. 천마재던 지하로 들어가는 어두운 통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니 갑자기 길이 끝나고 거대한 강철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묵향은 다짜고짜 철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것외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쾅쾅!쾅! “아버지! 문좀 열어봐요! 방해 안할 테니 한가지 부탁만 들어줘요.” 아무리 두들겨도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젠장! 드래곤 주제에 진짜 운기조식이라도 시작한거 아냐?” 문을 몇번 더 두들긴 후, 어쩔수없이 묵향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 수련 중이라면 옆에서 약간의 충격만 줘도 비명횡사로 연결되는 수가 있으므로 조심해야만 했다. “이런 빌어먹을! 더러워서 부탁 안 한다, 안 해! 컴컴한 연공실에서 잘먹고 잘 살아보라구요!” 사실, 연공실 안에 있는 존재가 아르티어스가 아닌 다른사람이었다면 묵향은 문을 때려 부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안에서 무슨일이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드래곤, 지상 최강의 생명체였다. 그런 아르티어스의 생명에 그 누구도 해를 입힐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미련없이 발길을 돌린 것이다. 묵향이 아르티어스를 찾은 것은 사실 현천검제의 치료를 부탁하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지금 치료 안해준다고 해서 묵향에게 답답할 것은 없었다. 자신의 손발이 잘린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묵향은 연공실에서 나온 후 자신의 방으로 갔다. 아무래도 정사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일본과의 밀무역에 대한 일처리를 마무리 지어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엿다. 정사대전이 시작되고 나면 마교에서 외부로 통하는 통로들은 전부 차단될 가능성이 컸다. 그 전에 일본으로 보낼 모든 인원을 현지에 보내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묵향은 자신의 방 구석에 놓여 있던 검들을 집어들었다. 후지와라 영주에게서 선물받은 크고 작은 검 한쌍이었다. 썩좋은 검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검 , 그렇다면 이검을 사용할 곳이 있었다. 마사코는 묵향이 자신의 거처로 들어오자 황급히 일어서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내가 없는 동안 잘 지냈는지 모르겠군. 여기 있는 녀석들은 모두 다 무공에만 미쳐 있을 뿐 그 외에는 거의 백지 상태거든. 그래서 손님 대접을 어떻게하는지 잘모르지.” “아닙니다.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건 그렇고, 너에게 줄 것이 있어서 들렀다. 자 받거라.” 마사코는 묵향이 건네주는 물건이 뭔지 확인한 순간 두 눈이 화둥잔만 해졌다. “예?이..,이건..” “이검은 후지와라 영주가 나에게 준 검이다. 이걸 네게 주마. 너는 이검을 가지고 나를 대신해 후지와라 영주와의 무역을 행하거라. 이검은 네가 나의 대리인임을 증명하는 신물이 될것이다. 알겠느냐?” “옛!” 마사코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한 후 두 손을 높이 들어 검을 받았다. “교역할 물품들 외에 1천 명의 수하를 준비하라 일렀다.” “예?” “물론 배가 2척박에 없으니 이번에 전부 다 데려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만간에 형편이 되는 대로 다 보내줄 거라고 후지와라 영주에게 전해라. 모두 무공이 뛰어난 우수한 무사들이다. 게다가 군에서 활동한 경험도 있기에 전쟁에도 익숙하다 그런만큼 영주가 영토를 넓히는데 큰힘이 될거다.” “주인님의 배려에 영주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출발은 내일이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도록 하거라. 절강성 분타까지는 대단히 멀다. 긴여행이 될거야.” 다음날 새벽, 흑풍대 2개 대 1천 명과 마사코는 절강성에 위치한 비밀 분타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준비가 되는 대로 일본으로 떠날것이다. 물론 이것은 묵향이 후지와라 영주와 좀 더 원할한 무역을 하기위한 배려였다. 후지와라의 세력이 커질수록 더욱 많은 물품을 수출 할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묵향은 세력이 커진 후지와라 영주가 다음에 어떤식으로 도움이 될지에 대해션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 묵향은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마련된 탁자에 앉아 현천검제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현천검제의 숙소는 교내에서도 꽤 외진곳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인적이 없고, 조용해서 좋았다. 아마도 그런 분위기와 사부와의 추억담을 나눌 수 있는 대작 상대가 있기에 묵향이 자주 이곳을 찾게 되는 건지도 몰랐다. “사제한테도 사부님이 시, 서, 화 뭐 이런 것들을 가르친 적이 있냐?” “아뇨, 소제의 미천한 실력으로는 검술 하나만 배우기에도 벅찬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사부님께선 사형에게 더 이상 가르치실 것이 없어 그쪽으로 유도하신게 아닐까요?” “글쎄...,지금 생각해보면 사부님이 가르친 것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어. 얄팍한 지식에 엉터리도 많았지. 하지만 그때는 어찌나 사부님이 존경스러워 보였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다 화끈 거리는구먼. 나도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었거든.” 묵향이 과거 옥영진 대장군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할때, 그 분야에 뛰어난 수많은 사부를 초빙하여 깊이있는 공부를 했다는 것을 현천검제가 알리가 없었다. 그리고 묵향의 경우에도 아르티엔에 의해 모든 기억이 되살려 졌을때. 그때 배운 지식들이 서서히 자신의 밑바탕에 깔리게 되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는 전혀 사형께 그런생각을 해본적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강한 분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폭넓은 식견으로 저를 감탄하게 만드시 거든요.” 묵향은 자신의 앞에 놓인 커다란 사발에 든 독한 화주를 쭉 들이킨후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크흐흣, 사제도 아부가 많이 늘었군. 나도 내 주제 파악 정도는 하고있지. 그 정도는 누구나 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거야.” “그건 아닌거 같은데요.” 묵향은 육포 한 조각을 집어서 질겅질겅 씹으며 커다란 술독에서 술을 떠서는 사발에 채웠다. “나는 처음에 살수로 키워진 소모품이었다네. 보통 살수들은 일회용이나 다름없기에 그렇게 높은 교육은 시키지도 않지. 조용히 침투해서 목표물만 암살한 후 거기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그렇기에 대부분의 살수는 길어봐야 20대 중반쯤이면 살아남은 자가 거의없게 되지.” “그, 그렇습니까?” “그러다가 내 나이 스물둘에 사부를 만났지. 그것으로 살수생활은 끝이었어. 안 그러고 계속 살수를 했다면 나는 서른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거야. 그걸 보면 사부님은 참 대단한 분이셧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형.” 요즘 현천검제는 자신이 얼마나 복 받은 환경아래서 살아왔었는지를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사형은 지금 교주가 되어 온 무림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황폐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이토록 큰 거목으로 성장 할수 있었을까? 정말 존경스럽기까지했다. 묵향은 일어서서 커다란 나무에 다가가 바지춤을 풀며 말했다. “뛰어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복 받은 일이지. 나는 제자를 키워 본적이 없기에 잘 모르지만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훌륭한 제자들을 키운다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일거야. 어찌 되었건 화산파 멸문에 자네 제자들이 휩쓸린 것은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오줌 줄기가 시원하게 뿜어져 나가 나무에 부딪치는 소리와 묵향의 말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저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천검제의 생각은 달랐다. 방금 전의 말은 언제라도 할수 있었다. 꼭 오줌을 누면서 얘기할 필요가 없는것이다. 아마도 사형은 자신에게 대놓고 이런말을 하기 힘들었기에, 자신과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될 일, 즉 오줌을 누면서 얘기를 한것이리라. 묵향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결과, 사형의 속마음은 의외로 여렷다. 전형적인 외강내유형의 성격이었다. 만약 그때, 자신이 화산에 남아있어 사형의 바지라도 붙잡고 늘어지면서 사장했다면 결코 화산을 멸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형은 그런 사람이니까. 오줌을 누고 있는 묵향의 뒷모습을 보며 현천검제의 눈가로 존경심이 가득차 올랐다. 저런 위대한 무인이 자신의 사형이라니,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외각 호위대에서 보내온 전갈입니다. 이것을 지니고 온 자가 교주님을 뷥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어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경비 무사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어 묵향에게 바쳤다. 묵향이 보니 그것은 얼마전에 자신이 직접써서 만통음제에게 준 통행증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온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예, 일단 통행증을 가지고 있기에 귀빈을 모시는 숙소로 안내했습니다.” “잘했다. 안내하거라.” “옛!” 묵향은 경비 무사를 따라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교에도 귀빈을 위한 숙소는 존재한다. 물론 귀빈숙소 라고 해서 그렇게 호화찬란하게 만들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 여행을 한 손님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있을정도로 안락하게 만들어 놓은것은 사실이었다. 중원 곳곳에 산재한 사파의 거두들도 많았기에, 그런 자들이 마교를 방문했을 때 이용하도록 배려해놓은것이다. “여기까지 발걸음을 하시다니, 오랜만입니다 형님.” 만통음제는 인사를 받은후, 간단하게 이런저런 세상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었지만, 오랜만에 동생을 만나 처음부터 언성을 높여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차를 마시며 담소하던 만통음제는 기회를 보아 서두를 꺼냈다. “그런데 동생, 들리는 소문으로는 동생이 화산파를 멸문 시켰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그것 때문에 오셨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네. 하지만 내 화산파를 두둔하고자 이런 말을 꺼낸것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시게” “물론 다짜고짜 오해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형님의 얘기를 다 들어본 후에 판단할 일이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먼. 화산파를 멸문시키면 무림맹과 전면전에 들어 갈수 있다는것을 알고 그렇게 한것인가? “물론이죠.” “혹시 괜찬다면 화산파를 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뭐 말씀 못 드릴 것도 없죠. 제가 최후 통첩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저지른 일이니 저를 탓하시면 안되죠.” 무림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힘이 있다면 빡세게 나갈수 있는것이고, 힘이없다면 강자의 눈치를 보며 알아서 기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간단한 이치조차 행하지 못했다면, 멸문당해도 싼 것이다. “자네가 억지를 부려 화산파를 자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네, 그런데 노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화산파 장로들을 왜 그렇게 처참하게 살해했느냐 하는 것일세. 노부에게 숨길 생각은 하지말게. 개방에 있는 친구녀석이 다 알려줬으니 말이야.” 묵향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숨길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당한만큼 돌려준 것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요.” “당한만큼 이라고? 그게 무슨말인가?”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이나 한잔하시죠. 그리고 제 사제도 소개해 드릴까하는데, 그녀석에게 화산파 얘기는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러지.” 왜 그런조건을 다는 것인지 이해할수는 없었지만, 만통음제는 일단 묵향의 말에 동의했다. 그 사제를 만나면 자연히 알게 될테니 말이다. 만통음제가 본 묵향의 사제는 불구자였다. 그것도 보통 불구자가 아닌, 어떤놈인지 지독한 독수를 써서 손과 발의 힘줄을 잘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불구자였다. 하지만 만통음제를 놀라게 한것은 그 불구자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도였다. 상대의 무공 수위는 놀랍게도 화경에 달해 있었다. 그런데 어찌 화경의 고수가 이 모양이 될수 있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일이었다. “인사 드리거라. 이쪽은 내 의형이시다.” 묵향의 소개에 만통음제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노부는 석량이라고 한다네. 사람들은 노부를 만통음제라고 부르지, 잘 부탁하네.” 현천검제는 마주 포권하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고천이라고 합니다. 사형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들은 만통음제는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고천? 설마 자네가 현천검제라는 것인가?” 현천검제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미천한 검술로 허명만을 얻었을 뿐이지요.” 그의 대답에 만통음제는 화산파의 물락에 뭔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뒷얘기가 있음을 눈치챘다. 화산파를 멸문시킨 당사자와 화산 장문인이 사형제지간이라니, 말도 안된다. 게다가 더욱 말이 안 된다고 느낀것은 왜 현천검제의 몸이 저 모양이 되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만통음제는 자신의 궁금증을 삭이며 묵향을 향해 너스레 떨었다. “내,동생에게 이렇게 훌륭한 사제가 계신 줄은 미처 몰랐구먼.” “뭐라구요? 사제만 훌륭하고 저는 아니라는 식으로 들리는 그 묘한 어감은 뭡니까? 제가 잘못 이해한겁니까?” “설마, 그럴리가 있는가. 자네가 잘못 이해한 걸세.” 그러면서 그는 현천검제에게 시선을 돌려 말을 이었다. “원래 동생이 검술에는 통달했는지 모르지만 인간성은 영 꽝이거든. 그러니 자네도 사형하고 함께 생활하려면 참 힘들겠구먼. 노부가 그 마음 이해하지.” 셋이 함께 한 술자리는 더없이 통쾌한 것이었다. 그리고 만통음제와 묵향의 합주는 현천검제가 지닌 가슴아픈 마음의 상처를 살며시 쓰다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현천검제와 헤어진 후 , 만통음제는 언게 그렇게 유쾌하고 떠들고 놀았냐는 듯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제 때문이었나?” “뭐가 말씀이십니까? 형님은 다 좋은데 한번씩 대가리를 떼고 말씀 하셔서 알아듣기 힘들다니까요.” “화산파를 멸문시킨 것이 사제 때문이었나?” 묵향은 피식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런 시시한 원한 때문에 일개 문파를 박살내지는 않습니다.” “화산 장로들을 그렇게 지독한 방법으로 죽인 것이 사제 때문인 모양이로군.” “물론입니다. 당한 만큼 갚는 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만들었지만, 별로 통쾌하지도 않았고 귀찮기만 하더군요.” “화경의 고수를 저 모양으로 만든다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 먼저 단전부터 파괴했을 텐데 어떻게 치료했나? 아, 그렇게 보지말게. 저 정도 고수를 단전부터 파괴하지 않았다면 어찌 손발의 힘줄을 끊을수 있단 말인가. 그건 말도 안되지.” “놈들이 파괴한것이 아니라 스스로 파괴한 것이었죠. 사제에게 한가지 경고 해줄것이 있어서 그를 찾아갔던 건데, 그 일이 빌미가 되어 파문당한 모양입니다. 그런 다음 저모양으로 만들어 치료도 제대로 안해놓고 토굴속에 가둬놨더군요. 사실, 저놈이 멍청해서 그 꼴을 당한것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경고한 것을 무시한 것은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일이죠. 화산파의 멸문은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잠시나마 동생을 오해한것 같아 너무나도 미안하구먼.” “뭐 어쩔수 없죠. 워낙 악명이 자자하다보니 이제 그런거 신경도 안씁니다. 오히려 요즘은 일부러 상대가 오해하도록 만들고 있죠. 그거 생각외로 재미있습니다. 형님도 한번해보시죠.” 묵향이 조금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만통음제는 두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대꾸했다. “됐네. 우형은 아직까지 동생만큼 얼굴 가죽이 두껍지 못해 그렇게 까지는 못하겠어.” ▒ 나는 빨래나 하지 장덕팔은 지금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정말이지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크고 넓은 저택, 창고 가득히 쌓인 쌀과 고기들 그리고 향기로운 술과 재물들이 넉넉히 쌓여 있어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했었다. 그뿐인가. 50여 명에 달하는 수하는 용맹스럽기 그지없어서 그가 이 일대의 패권을 주름 잡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두목! 빨리 식사하셔야죠. 오늘 할 일도 많은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겁니까?” 장덕팔은 우람한 근육에 수염까지 사방으로 뻗쳐 기골이 장대해 보였지만 어쩐지 그의 모습은 풀이 죽어 보였다. “밥 먹고 나서 할 일은 뭐냐?” 부두목은 우물거리던 음식을 삼킨 후 대답했다. “빨래도 해야 하고, 그들이 묵는 숙소도 청소해야 하는데.., 두목께서는 어떤 걸 하시겠습니까?” “야, 내가 이 나이에 그걸 꼭 해야겠냐? 한때 천령무적이라고 불렸던 내가 말이다.” “에이 두목, 말은 바로 하십쇼. 천령산에 우리 산채 말고 아무도 없었는데, 당연히 우리가 무적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크흐흐흑,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옛날 생각 해봐야 뭐 합니까? 괜히 대들었다가 쥐어터지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다 잊으시라니까요.” 장덕팔은 문득 그놈들이 산채에 들이닥쳤던 때가 생각났다. 두목답게 호기롭게 나섰던 그는 상대가 슬쩍 휘두른 손짓에 거의 2장여를 날아가서 짱돌에 맞은 개구리마냥 땅바닥에 패대기쳐져 비명도 못 지른 채 부들부들 떨었었다. 그때 장덕팔은 고통이 너무나도 심하면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순간 한기가 느껴지며 온몸이 부르르르 떨렸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빨래나 하지. 부두목은 청소를 맡아라.” 물론 장덕팔이 직접 빨래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하들이 빨래하는 것을 감독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요는 빨래만 깨끗하게 해놓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청소는 달랐다. 그 꼴도 보기 싫은 놈들을 다시 봐야 하니까. 부두목은 역시 하~ 하는 표정으로 잔뜩 풀이 죽어 대꾸했다. “예” 한편 장덕팔이 우거지상을 하고 앉아 있는 곳에서 30장(약90m)떨어어진 곳에서는 이곳 산채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자들의 두목이 무료함에 지쳐 크게 하품을 한 후 투덜거리고 있었다. “허, 거참 이상하네. 약속한 3개월이 넘은 지가 언젠데 이놈들은 왜 소식이 없는 거야. 도대체 싸우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에잇, 제기랄! 비마대에 연락은 해봤느냐?” 묵향의 짜증 어린 물음에 혈랑대주 인도 동방뇌무 장로는 밖에 대고 외쳤다. “여봐라!” 수하 한 명이 달려 들어와 부복했다. “옛!” “비마대에서 온 연락은 없었느냐?” 수하의 대답에 동방뇌무 장로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알았다. 나가보거라.” “옛!” 묵향은 지도를 다시 한 번 자세히 훑어봤다. 묵향은 군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진 방어선을 구축했다. 물론 말이 방어선이지 실제로는 무림맹의 최종 집결지인 청해성으로 들어오는 무림맹의 집단들을 기습 공격하여 괴멸시키는 공격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청해성으로 들어가려면 사천성, 섬서성, 산서성을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깊은 산과 계곡이 많아 매복 공격을 가한 후, 도망치기에 적격이었다. 지금 묵향은 마교 최고의 정예인 혈랑대, 수라마참대, 천랑대를 거느리고 매복 공격을 지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수석장로가 지휘하는 수라마참대는 섬서성을 근거지로 삼아, 그 일대에서 이동하는 무림맹의 고수들이 있다면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 때 산서성도 그들의 활동 범위 안에 포함되었다. 사실 수라마참대만으로 2개 성을 맡는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산서성의 일부를 요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요의 군대와 송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곳이라서 다수의 무림인이 병장기를 휴대하고 이동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초류빈 부교주가 지휘하는 천랑대는 사천성을 근거지로 삼아 사천성 일대에서 이동하는 무림인들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묵향이 마교 최고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혈랑대를 거느리고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혹시 수라마참대나 천랑대 단독으로는 건드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무림인이 이동할 때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하게도 대규모로 이동하는 무림인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문파 단위로 이동한다고 해도 최소한 수천씩은 움직여야 하는데 말이다. “거~ 참, 이상한 일이네. 혹시 본교가 노리고 있는 줄 알고 한 놈씩 개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 어떤 미친놈이 위험이 예상되는 지점을 단독으로 통과하겠느냔 말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동방뇌무 장로가 슬그머니 참견했다. “혹시 본교에서 매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집결 장소를 바꾼 것이 아니겟습니까?” “글쎄..., 듣고 보니 그럴수도 있겠군.” 그때 밖에서 흑록색 무복을 입은 무사가 들어오며 말했다. “비마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초조해하던 동방뇌무 장로의 안색이 환해졌다. “오오, 드디어 왔군. 들여보내라.” 비마대 소속 무사는 들어오자마자 납죽 엎드려 오체투지하며 예를 올렸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묵향은 무사가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지금 자신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그것이었으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냐, 그래 어디로 침입하고 있느냐?” “예?” “놈들이 어디로 침입하고 있느냐니까.” 비마대 무사는 교주의 질문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 그는 적의 침입로를 알려주기 위해 파견된 전령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그게 아니오라 속하는 군사께서.., 본교로 돌아오시라고 전하라는 군사님의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습니다.” “돌아오라고? 젠장, 이거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이봐 공식 명령서는 가지고 있겠지?” “예!” 그는 재빨리 품속을 뒤져 밀봉된 서신 한 장을 꺼내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묵향은 그 서신을 휙 낚아챈 후 밀봉을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몇 번을 읽어봐도 진짜로 군사가 보낸 명령서가 확실했다. “이런 젠장!” 묵향은 서신을 옆에 앉아 있던 인도 동방뇌무 장로에게 휙 건네며 외쳤다. “본교로 돌아가자.” 순간, 장덕팔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떠나신다고 하셨습니까?” “오냐, 본좌가 떠난다는 데 있어서 무슨 불만 사항이라도 있냐?” “아,아닙니다. 소인이 무슨 불만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저희를 찾아 주신 것만 해도 영광이었습죠.” “그렇게 생각했었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어찌 소인을 부르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요?” 덩치에 안 어울리게 애교스럽게 질문을 던지는 장덕팔을 보며 묵향은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혹시 계획이 변경되어 본좌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니 청소 깨끗이 해놓고 기다리거라. 그리고 술도 좀 더 구해놓고 말이야. 며칠 안 마셨는데 벌써 술이 떨어지다니.., 쯧쯧.” 며칠 안 마시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거의 한 달 가까이 이곳에서 민폐를 끼쳐놓고 말이다. 하지만 힘없는 자의 설움인가. 장덕팔은 한껏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지키지도 않을 약속인데 입으로 인심 좀 써두면 어떻겠는가. “물론입니다. 다녀오실 동안 깨끗이 청소해놓고, 수하들을 보내 술도 대량으로 구입해두겠습니다. 혹시 그 외에 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없다. 그럼 잘 있거라. 다음에 보자.” 상대가 그 무지막지한 공포스러운 기운을 뿜고 있는 부하들과 함께 사라지자마자 장덕팔은 소리 높이 만세를 외쳐 불렀다. 그런 장덕팔에게 부두목이 다가와서 말했다. “술은 얼마나 사오라고 시킬깝쇼, 두목?” “뭐, 뭣이? 내가 왜 그놈들이 처먹을 술을 사야 한단 말이냐!” “그래도 그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술이 없으면 두목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요.” “허걱! 그, 그렇구나.” 순간 장덕팔은 짐을 싸서 딴 곳으로 이사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묵향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마교 총타에 도착했다. 기록적인 속도로 총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거느리고 있던 집단이 마교최강의 무력 단체인 혈랑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혼자 앞서 달려가고 싶었지만, 혹시 뭔가 엉뚱한 계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하들과 함께 온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교주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군사?” 묵향은 질문을 던지며 단상에 마련되어 있는 호화로운 태사의에 앉았다. “예, 무림맹의 본교에 대한 총공격이 취소되었기에 일이 이렇게 된것입니다.” “뭐?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갠가? 화산파를 박살내 놧는데 그놈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잖아. 혹시 잘못된 정보를 획득하고 놈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 물론 속하도 그 점을 고려하여 치밀하게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게 거짓 정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정보를 획득했기에 그렇게 단정할 수 있단 말이냐?” “예, 사실 본교는 얼마 전까지 정사대전이라는 압력 때문에 모든 정보력을 정파의 움직임을 쫓는 데 투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요와 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변괴를 알아차리는 것이 늦은 것이죠.” 그 말에 묵향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변괴라고? 자세히 말해보게.” “예, 중원의 동북방에 거란족이 세운 대제국 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 위쪽에 여진족이 금이라는 제국을 세웠죠. 이 둘이 얼마 전에 격전을 벌인 모양인데, 놀랍게도 금이 대승을 거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방 오랑캐들이 치고받은 거하고 무림맹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금이 요의 세력을 급속히 흡수하며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 요금전쟁 속에서 어부지리를 챙기기 위해 북진하고 있던 임청원수의 60만 대군을 격파하고 급속도로 남하, 지금 개봉을 포위하고 있다고 합니다.” “뭣이?” “오랑캐들이 황하를 도하하는 것조차 막지 못했을 정도니 황실이 초전에 입은 피해가 얼마나 막심한 것인지 추측하실 수 있을 것 입니다. 어찌되었건 전화가 개봉에 임박해버린 상태니, 개봉을 본거지로 하고 있는 개방이 딴 데 신경쓸 틈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소림사도 그렇게 멀지 않은 위치에 있으니 몸을 사리며 그곳에 신경을 집중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황실에서는 무림맹에 나라가 오랑캐의 발굽에 짓밟히는 것을 막아달라는 칙령까지 내린 모양입니다.” 묵향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큭큭큭, 일이 아주 재미있게 되어버렸군. 이 기회에 세력을 몰아 무림맹을 끝장내버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되겠어.”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태가 좀 심상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예, 교주님. 아무리 오랑캐라는 족속들이 힘에 잘 굴복하여 힘있는 자들에게 빌붙는다고는 하지만, 금이 요를 흡수한 속도는 상식을 뛰어넘은 것이었습니다. 처음 아구다라는 대족장이 금을 건국했을 때 그의 휘하에는 10만도 되지 않은 병력이 모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런 전력으로 대제국 요를 일격에 멸망시켜버린 것입니다. 또 순식간에 요의 세력을 대거 흡수하여 북진하는 어림군의 주력을 괴멸시켜버렸습니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엄청난 대군이 어림군을 덮쳤다고 합니다. 그걸 보면 최소한 어림군에 맞먹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두 달 사이에 이민족 무장들을 복속시켜 자신들의 수하로 부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기에 홍진 대주님께 좀 더 철저히 조사해달라고 부탁해두었습니다.” “조사 결과는 언제쯤 나오겠나?” “길게 잡아도 한 달 이내에는 끝날 것입니다.” “좋아. 그건 그렇고, 며칠 낼로 수라마참대와 천랑대가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모두 돌아오면 연회라도 거나하게 베풀어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도록 하라.” “예, 명대로 시행하겠습니다.” ▒ 무림맹의 결의 무영문의 옥화무제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가 지금껏 쌓아올린 모든 것이 일순간에 가루로 흩어질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니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것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방어를 어떻게 했기에 일격에 황하 방어선이 뚫린단 말이에요!” 총관은 옥화무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까지 확실한 것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초전에 당한 피해가 너무나도 컸던것 같습니다. 미처 황하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전에 놈들이 밀어닥쳤는지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광활한 평원을 주름 잡던 오랑캐들은 본능적으로 물을 겁내게 되어있어요! 그런데도 방어선이 뚫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소, 송구합니다, 태상문주님. 하지만 몇다리 거쳐서 뒤를 조종하는 입장이기에, 급작스런 상황이 전개되면 이쪽에서는 어림군을 통제할 방법이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옥화무제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파고들면서 핏물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그녀도, 또 그녀 앞에 서 있는 총관도 모르고 있었다. “황궁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뭣이? 빨리 들어오너라!” 문사복 차림의 중년인이 허겁지겁 들어오더니 전서 한장을 전했다. 그는 자신의 일을 끝내자 곧바로 인사를 한 후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중년인이 건낸 아주 작은 양피지는 매우 세심하게 처리되어 매미날개처럼 얇았다. 그위로 매우 작은 기호들이 백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암호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옥화무제는 단숨에 내용을 읽어내렸다. “헉!” 전서를 읽은 옥화무제는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는지 전서가 자신의 손에서 떨어진 것도 모른 채 의자에 덜썩 주저 앉았다. 총관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전서를 집어들었다. 암호를 해독해본 총관 역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동관이 보내온 전서는 금과의 화친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서 였다. 물론 황도가 포위되어 있는 데다가 금군을 몰아낼 뾰족한 대책도 없으니 일단 굴욕을 감수하면서 화친을 감행한 후 훗날을 도모 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경악시킨 것은 화친의 조건이었다. 요에 해마다 바치던 양과 똑같은 분량의 세폐를 금이 원하는 것쯤은 충분히 이해할수 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퇴위해야 한다는 조항은 지금껏 옥화무제가 황실에 만들어놓은 모든 끈이 떨어져 나가는것을 뜻했다. 재상 채경이 결사적으로 화친을 반대하고는 있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에 공염불에 불과했다. 개봉을 포위하고 있는 금군의 압력이 있으니 결국은 금과 화친할 수밖에없는 입장이었다. “이럴수가 그동안 황실을 장악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고정하십시오, 태상문주님. 지금 단계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개봉에 주둔하고 있는 황궁은 4만밖에 안됩니다. 아무리 그들이 대송 제국의 최정에라고 해도 수십만의 금군이 공격을 감행한다면 막을 방도가 없지 않겠습니까? “무림맹의 동태는 어떤가요?” “지금 무림맹도 허겁지겁 대처에 나섰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무림맹의 전 세력이 마교를 치기 위해 대거 청해성으로 이동하고 있던 상황 아니었습니까? 급히 그들을 뒤로 빼고 있는 모양이지만 도저히 시간에 맞춰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금군은 바로 코앞에 닥쳐 있으니까요.” “크흐윽!” 입을 꽉 다문 옥화무제의 눈에서 이슬이 맺혀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눈물을 흘린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 그녀에게 있어 황실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다는 것은 그녀의 장대한 꿈이 완전히 끝장났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고정하십시오, 태상문주님.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살아날 길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뭔가 차분히 대책을 마련해본다면 방도가 있을것입니다.” “그렇지! 일단 화친을 맺은 후 채경에게 지시해서 천도를 하게 만드는 거에요.” “예? 천도 말씀 이십니까?” “네, 그래요. 지금 금군을 달래놨다고 하더라도 언제 다시 쳐들어 올지 알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물을 겁내는 오랑캐들이 쳐들어오기 힘든 저장강(양자강) 이남으로 황도를 옮겨야 해요.” 옥화무제의 말에 총관은 기막힌 전략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태상문주님의 혜안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총관은 장강 이남의 도시들 중에서 황도로 쓰기에 적합한 곳이 있을지 알아봐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군부의 동향은 어떻던가요?” “문사들로 구성된 추밀원은 지금 믿을 것이 못 되고, 정군관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고 위급 장수들이 일거에 다 전사해 버렷으니 그럴만도하죠. 하지만 연경 전투에서 살아남은 패잔병들이 후퇴하며 새롭게 전력을 정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옥화무제는 지도를 펼치면서 말했다. “새롭게 천도를 감행한 후 가장 중요한 전장이 될 곳은 바로 여기가 될거에요.” 옥화무제가 가리킨 곳은 양양성이었다. “회하 유역에 수군이 배치되고 젼열이 가다듬어 진다면 금은 결코 회하를 넘어 올수 없어요. 그렇다면 그들은 회하의 상류를 빙 돌아 공격해 들어올 수밖에 없겠죠.” 바로 그 길목을 막고 있는것이 양양성이었다. 총관은 존경심 어린 눈빛으로 옥화무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속하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총관은 사람을 보내서 연경 전투에서 살아남은 장수들을 이쪽으로 돌려주세요. 양양과 무한을 연결하는 방어선만 구축할 수 있다면 훗날을 도모할수도 있어요.”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황도를 옮긴다고 하더라도 양양성이 뚫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에요. 그런만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마세요. 돈, 군량, 무기 등 원하는것은 뭐든지 말이에요. 그리고 본문의 고수들도 파견해서 그들을 돕도록 하세요.” “명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일대에 있는 모든 무림 문파에 격문을 보내 황실을 위해 일어서 달라고 요청하세요. 만약 주변의 무림인들이 돕는다면 충분히 금을 막아낼 수 있을거예요.” “예.”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 제국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뭔가 허점이 될만한 것이 있는지 알아보세요. 저놈들이 본녀에게 이토록 피해를 입혓으니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할 거 아니겠어요?” “물론입니다, 태상문주님. 철저하게 조사하라 이르겠습니다.” 금의 갑작스런 남하로 인해 치욕적인 화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송의 상황은 무림맹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지금 이곳 드넓은 평원에는 수천 명의 무림맹 고수가 진을 치고 있었다. 무림맹의 주력고수들 답게 그들의 눈에는 정기가 가득했다. 그들은 저마다 담소를 나누며 가운데에 쳐진 커다란 천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저 안에서는 무림맹의 수뇌들이 모여 앞으로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의논을 하고있었기에 저곳에서 결정된 사항이 그들의 미래와도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잇었던 것이다. 무림맹의 주력은 금군이 갑작스럽게 남하하여 송의 주력부대를 격파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교 정벌을 포기하고 최대한 빨리 개봉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그들이 개봉에 도착하기도 전에 화친이 성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보고를 받자마자 이곳에 자리를 잡고 회의를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관과 무림은 서로 간섭하지 않음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왔소이다. 그런데 어찌 맹주께서는 금과의 전쟁에 뛰어들려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소이다. 그 때문에 마교를 멸망시키기 위해 장시간 공들여 마련해놓은 모든 개책들이 허사가 되지 않았소이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처음 계획대로 마교를 끝장내야만 합니다.” 맹호검군 백량 장로였다. 그는 마교도라면 치를 떠는 매우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매화문검 옥진호장로 쪽의 사람이기도했다. 사실 옥진호 파의 장로들은 무림맹이 황실의 일에 얽매이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을 지니고있었다. 하지만 맹주는 황실과 민초를 위한다는 생각에 금과의 전쟁에 무림맹에 나설것을 원하고있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회의는 이두 세력간의 의견 절충을 위한 자리라는 성격을 띠고있었다. 역시나 백량 장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맹주 파의 청호진인이 슬그머니 걸고 넘어졌다. “이보시오, 맹호검군 장로, 관과 무림이 서로 불간섭해왔던 건 사실이외다. 하지만 금도 무림에 대해 간섭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과거 요가 남하하여 연운 16주를 차지했을때, 그 일대에 터전을 잡았던 모든 문파는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소이다. 그 이유가 뮛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요? 오랑캐 놈들은 결코 무림을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걸왜 모르신단 말이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공수개 장로가 청호진인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었다. “청호진인 장로의 말씀이 옳은것 같소이다. 이땅을 점령한 오랑캐들은 우리 한족들이 검이나 도, 창 같은 무기류를 소지한 채 돌아다니는 것을 결코 묵인해주지 않을 것이오. 처음 요가 연운 16주를 차지했을때, 그들은 무림세력이 끼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림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었소. 하지만 그게 헛소리가 된 것이 몇달 만이었소이까? 사실 그들에게 저항하는 한족 세력과 무림인들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결국에는 이런저런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요.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권법의 명가인 하북팽가까지 끼어들어 더욱 큰 날리통을 만들지 않았소이까? 연경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란을 진압하는데 수십만의 정병을 쏙아부은 후, 요는 한족은 결코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고 공포했소, 무림인도 포함해서 말이오.” 백량장로는 공수개 장로의 말에 따지고 들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여기 모인 장로들 중에서 가장 많은것을 알고 잇는 정보통 이었기에 부인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망신당했다고 느꼈는지 노기로 인해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거친 숨만 몰아쉴뿐 다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무림맹을 대표하는 맹주 앞이었기 때문이다. 백량 장로가 판정패한 것이 분명해지자 여기저기서 장로들이 중얼거렸다. “결국은 싸울 수밖에 없는 것 같소이다.” “노부도 찬서이오.”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옥진호 장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노부가 우려하는 것은 본맹에서 오랑캐들을 몰아내기 위해 총력을 다할 때, 마교 놈들이 뒤통수를 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오, 처음부터 딴 거 신경쓰지 말고 무조건 마료부터 끝장내 버렸다면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것을....” 그 말을 시작으로 기가 오른 백량 장로가 청호진인 들으라는 긋 큰소리로 말했다. 그의 어조는 그의 심사를 반영하긋 비비 꼬여 있었다. “허, 듣고 보니 매화문검 장로님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그놈들은 에시당초 황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행동해온 무뢰들이 아닙니까. 지금 당장 공수개 장로께서 그놈들이 금과 협약을 맺어 한쪽은 송을 집어먹고, 한쪽은 무림맹을 집어삼키기로 합의했다고 말씀하셔도 노부는 믿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말을 한 당사자는 화가 난 김에 반쯤은 농담 삼아 또 반쯤은 위협 삼아 떠든 말이었던 모양이지만. 그말 들은 다른 장로들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들 모두가 마교 놈들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족속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던 탓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무림맹은 파멸의 길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송은 이미 거의 무너진 상태였고, 그들은 금과 마교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과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맹주의 안색이 급격하게 흐려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맹주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듣고 보고 맹호검군 장로의 말도 그럴듯한 것 같소. 허~ 만약 그렇게 된다면 큰일이 아니겠소?” 맹주는 공수개 장로에게 말했다 “공수개 장로, 혹시 마교 놈들이 금과 손을 잡았다는 정보가 들어온 적은 없었소?”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맹호검군 장로의 말씀을 듣고 보니 뭔가 짚이는 것이 있군요. 마교가 갑자기 왜 화산파를 멸문시켰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바로 정사대전으로 연결될 것을 분명히 알면서 말입니다. 그건 정사대전을 벌이기만 하면 무조건 승리 할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여기까지 들은 옥진호 장로도 뭔가 떠오른다는 긋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 몇달간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면 뭔가 묘하게 끌려다니며 농간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소이까? 먼저 마교 놈들이 화산파를 치면서 바람을 잡고, 본맹의 모든 이목은 마교쪽으로 이동하고, 또 본맹의 모든 세력이 청해성 쪽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금이 남하한다. 덕분에 중간에 끼여버린 본맹은 이도저도 못 해보고 우왕좌왕하다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소이까.” 그 말을 들은 공수개 장로는 피가 나도록 두 손을 꽉 그러쥐었다. 옥진호 장로의 말을 가만히 듣다 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이 망할 마교 놈들이 금과 손을 잡았다는 말인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었던 것은 분명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자신이 실책이었다. “본방에 연락해서 그것이 사실인지 최대한 빨리 확인해보라 이르겠소이다.” 공수개 장로의 말을 들은 맹주는 침중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말에는 깊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 “수고해주시오. 공수개 장로. 만약 마교 놈들이 무림의 일에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 사실이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교의 씨를 말릴 것이오.” “본방은 맹주님의 명을 목숨 바쳐 받들 것입니다.” 그때 옆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백량 장로가 입을 열었다. “만약 금이 마교와 손을 잡았다면 무림의 미래는 풍전등화와 같다도 할수 있는 것입니다. 마교의 총타는 워낙험지에 세워진 남공불락을 자랑하는 요새인 데다. 그들은 또한 수많은 고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교주는 엄청난 마공을 지닌 자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금 황제는 다르지 않습니까? 노부에게 명만 내려주신다면 금 황제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것 아닙니까?” 그 의견에 대한 대답은 옥진호 장로가 대신했다. 괜히 다른 사람들이 이견을 제시하게 하는 것보다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이 자신의 편인 배량 장로의 체면을 보증하는 길이라 여긴 것이다. “그건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외다. 만약 진짜 마교와 금이 동맹을 맺었다면, 그 간교하기 이를 데 없는 마교 놈들이 금황제를 위험에 노출되게 그냥 놔둘 이유가 없지 않겠소이까? 틀림없이 마교의 정예 고수들이 금 황제를 암암리에 보호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외다.” 만약 다른 사람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면 억지라도 부려볼 텐데. 옥진호 장로가 하는 말이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백량 장로였다. 맹주는 좌중을 둘러본 후 더 이상 의견을 말을 인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위엄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자, 일단 서로 간에 합의는 끝난 것 같으니 어느 정도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총타로 돌아가서 대기하도록 합시다. 무작정 여기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회의가 끝난 후 무림맹주 이하 모든 고수는 무림맹으로 돌아갔다. 혹시 마교의 공격이 가해진다면 요새화된 무림맹이 훨씬 더 안전할 것이 분명하기 떄문이다. ▒ 묵향의 제안 족히 수만 명은 넘어 보이는 장정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오랑캐들을 향해 불안에 가득 찬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은 연경 주변에서 벌어진 대회전에서 패해 금군의 포로가 된 송군의 일부였다. 그들은 완전히 무장해제당한 채 상대의 자비만을 바라고 있는 상태였다. 그때 금군의 복장을 한 장수 한명이 앞으로 나서며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도 그는 여진족 처럼 보였지만 어디서 배웠는지 꽤 유창한 한어를 구사하고있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대금 제국 항제를 칭송하고, 또 송나라의 무능함을 욕해대던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 자유를 줄테니 10년동안 금나라를 위해 병역에 종사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포로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제안임에 틀림이 없었다. 병역을 거부한다면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노예가 된다면 자신만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나중에 낳을 자식들까지 모두 노예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되는것이다. 자손 대대로 노예가 되느냐, 아니면 딱 10년만 금을 위해 병역에 종사한 후 풀려나느냐. 이런식의 설득이 여기저기 행해지고 있었다. 연경 근방에서 벌어진 대회전에서 포로가 된 송군의 장졸만 20만에 가까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포로들이 한참 고민에 빠져있을때 그것을 몰래 바라보며 음흉스레 미소 짓고 서 있는 인물이 있었다. 이제 겨우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장수들은 아름다운 수달피를 여기저기 덧붙여 만든 호화로운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여진족 가운데서도 꽤나 높은 지위를 지닌 자의 아들처럼보였다. “고민하는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병역을 선택하게 되겠지.”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여진어가 아니라 아주 매끄러운 한어였다. 그것도중원에서 태어나 자란 인물만이 할수있는. 한동안 포로들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금 중후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 놈들 가운데 무공을 익힌 놈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녀석들은 철저하게 가려내어 따로 모아두었다가 금광으로 보내도록 해라. 주인이 더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은 한 무공을 익힌 노예를 감당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들은 분명 기회를 봐서 은근슬쩍 도망치기 위해서라도 병역보다는 노예가 되려고 할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따로 관리가 필요가 있었다. 그말에 뒤에 서 있던 장수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철저히 가려내겠습니다. 대원수님.” 수하장수의 입에서 대원수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이 젊은 장수가 대원수라는 말인데, 그젊은 나이에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아무리 현 황제인 아구다가 뛰어난 인재를 중용한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한 벼락출세였다. “휘하 장수들은 집합을 마쳤느냐?” “예.” 대원수는 장수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겻다. 커다란 여진식 천막 안에 앉아 있던 여덟 명의 장군은 대원수가 들어오자 황급히 일어서서 군례를 올렸다. 대원수는 호피가 깔려 있는 의자에 앉은 후 근엄한 어조로 장군들에게 말했다. “자, 제장도 앉게나.” 대원수는 장수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입을 열었다. “3일 후, 요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출발 할 것이다. 그런만큼 각자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것이다.” “옛, 대원수님!” 요 근래 금군이 보여준 전광석화 같은 군사 작전은 겉보기 에는 매우 화려해 보였지만 사실 금으로서는 엄청난 무리수를 둔 작전이었다. 모든것이 잘 끝난 데다가 전과도 엄청난 것이었기에 모두들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실 어디 한군데만 삐긋했어도 금은 탐스럽게 자라나던 새싹이 된서리 한 방에 서들어버리듯 그렇게 멸망할 수도 있었다. 금은 처음부터 요 황제를 참살하는 것에 모든것을 걸었다. 다행히 그것에 성공하자 대재곡 요는 구심점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서로가 대권을 이으려는 치열한 권력 암투가 벌어진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금은 포로로 잡은 요의 병사들을 설득해 자신들의 전력으로 흡수하는 것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대제국 요가 지닌 저력은 무시하지 못할 만큰 강력한 것이었다. 하지만 금은 요의 잔당을 토벌하는 대신 남하하기로 결정한다. 송군이 갑자기 북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송은 연운 16주를를 탈환한후 만리장성을 차지할 것이 분명했고. 엄청난 높이와 폭을 지니고 있는 강력한 벙어선이 송의 것이 된다면, 훗날 송과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만리장성이 지니는 방어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금은 요의 잔여 세력 소탕은 아예 잔여 세력 규모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세력을 통합할 만한 인재만 하난 있었어도 수십만의 정병을 끌어모으는 것도 가능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금에게는 천만다행으로 그런 인재는 나타나지 않았고, 소규모 국지전만 여기저기서 벌었지고 있는 상태였다. 어쨌든 그런 우환거리를 뒤에 놔둔 채 남하를 결심한 금 황제의 배포였지만, 전군을 지휘하는 대원수의 능력을 믿지 못했다면 애당초 사작도 안했을 작전이었다. 북진하는 송군은 60만 대군이었다. 그들과 자웅을 겨루는 한판 대경르위해 금군이 동원할수 있어던 병력은 50만. 만약 여기서 패했다면 끝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원수는 한참 연견을 공략하고 있던 송군을 기습적으로 공격 결국 대승을 거두었다. 송군은 7일 밤낮으로 연겨을 함락시키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던 상태였기에 모두들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그런 그들을 뒤에서 쳤으니 어쩌면 금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한 번의 대회전으로 송은 완전히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40만을 이끌고 남하하여 개봉을 공략하기로 하고 대원수는 남아서 송군 포로들을 금의 정력으로 흡수한 후 요의 잔당을 소탕하기로 작전을 짰다. 요의 잔여 세력을 더이상 그냥 방치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금군의 최정예는 모두 대원수 휘하에 있었다. 그렇다 보니 황제가 거느린 병사의 수는 40만이나 되었지만 실살은 요의 투할병으로 구성괸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금 황제은 처음부터 개봉을 함락시킬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사실 현재 점령한 땅 덩어리만 해도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넓었기에 더 이상 점령지를 늘릴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금 황제의 생각을 송의 조정이 알이 없었다. 더군다나 송으로서는 그가 거느린 병력이 요의 투항병인지, 금의 정예인지도 알수가 없었다. 그점을 노려 40만이라는 숫자로 송의 조정과 황실을 위협하여 최대한 많은 이익을 뽑아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황제가 개봉으로 향한 지 7일 후, 대원수는 무려 30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지휘하여 요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북진하기 시작했다. 60만 중 거의 절반 이상이 송군 포로라는 점이 약간의 걸림돌기는 했지만, 대원수는 그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송군출신 포로들을 확실하게 다룰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날도 조령과 내기 바둑 두기에 여념이 없었던 패력검제는 총관이 다가오자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총관은 고개를 조아리며 패력검제에게 말했다. “문주님, 무영문의 옥환 봉공님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옥화 봉공님이? 이리 다오.” “예” 서신을쭉 훑어본 패력검제는 이빨을 뿌드득 간 후 총관에게 말했다. “사형께 연락을 드리거라. 노부는 양양성으로 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알아서 오시겠지.” “예? 감자기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부가 고향을 떠난 지 벌써 몇년이 흘렀느냐. 그런데 점점 고향땅에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은 사라지고, 오히려 지금 있는 곳에서마저 쫓겨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 않으냐. 이번에는 노부가 직접 나서서 한 팔 거들려고 한다.” “예, 알겠습니다.” “진팔에게도 전하거라. 혹여 노부를 따라 양양성에 갈 생각이 있느냐고 말이다.” “예. 문주님.” “저, 바둑은 이제 안 두실 거예요?” “아무래도 지금은 양양성으로 가는 것이 급할 듯 싶으니 그곳에 가서 다시 두도록 하지.” “예. 그러죠 뭐. 안 그래도 한 집도 살릴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러면서 조형은 흰색으로 점철되어 있는 바둑판을 향해 절망적인 시선을 보냈다. 패력검제는 제령문의 무사 50여 명을 이끌고 양양성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가 움직이게 된 것도 다 옥화무제가 그에게 보내낸 서신에 자극을 받은 탓이다. 이렇듯 그녀의 뜻에 따라 양양성을 행해 떠난 무림인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총관이 집무실로 들어오자 옥화무제는 곧장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금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으니 그건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금에 대한 조사는 얼마나 진행 중인가요?” “예. 상당 부분 진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사하던 중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옥화무제는 본능적으로 기회가 왔음을 느끼며 다급히 말했다. “좋은 것을 찾아 낸 모양이군요. 말해보세요.” “예, 속하가 찾아낸 인물은 완옌 렌지에라는 인물입니다.” 옥화무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예. 그렇게 밖으로 자신을 잘 도러내지 않는 인물이라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 대요전쟁관 대송전쟁을 치르며 갑작스럽게 전면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혁혁한 전과를 세운 인물로, 요 황제를 참살한 공로로 대원수의 칭호까지 받았습니다. 금 황제 아구다가 직접 완옌이라는 성을 하사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고 합니다.” “그런데요?” “문제는 그가 지닌 세력이 황제와 거의 동등한 수준이라는 겁니다.” “그럴 리가......” 옥화무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 산에 호랑이가 둘이 있을 수 없듯 한 나라에 최고 권력을 지닌 인물이 둘씩이나 된다는 건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물론 약간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나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세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와 황제를 이간질시킨다면 어떻겠습니까?” “재미있는 제안이군요. 그래, 대원수는 지금 어디에 있죠?” “요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30만 대병을 거으리고 북진 중이라고 합니다.” 그말을 들은 옥화무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건 더 재미있는 정보군요. 그 둘이 가까이 있을 때는 의심 나는 것이 있다면 서로 대화를 해서 풀수가 있겠지만, 대화가 끊어지면 의심이 의심을 낳게 되어 있죠 슬슬 이간질을 시작해보세요.” “예. 태상문주님. 그건 그렇고 . 사실 속하가 찾아뵌 것은 동관으로부터 전서가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동관으로부터? 무슨 일인가요?” “예. 채경재생이 지금 탄핵받고 있는데. 아무래도 현재 자신의 힘으로는 그를 구해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상문주님의 도움을 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마도 구법당 쪽에서 패전의 책임 물어 채경 재상을 탄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상을 탄핵하다니요? 언제부터 구법당의 힘이 그렇게까지 커진거죠?” “과거 금과의 동맹을 표면적이기는 하지만 구법당 쪽에서 행했지않습니까? 금의 세력이 커지기 자연히 기들은 등에 업은 구법당의 세력도 커질 것도 당연한 이기 아니겠습니까?”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감싸쥐엇다. 혹시나 작전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하여 슬며시 구법당을 앞세운 것인데, 오히려 그것이 최악의 패가 되어버린것이다. “이런, 이제는 채경까지......그를 잃는다면 기껏 세워놓은 천도 계획까지 풀거품이 될거예요 최대한 여러 통로를 이용해서 그의 구면운동을 전개해보세요.” “그렇게 해보겠습니다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태상문주님.” 총관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황제도 새로 바꿧었다. 그런 만큼 황제를 등에 업고 깝죽거리던 환관 동관도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마찬가지가 된것이다. 그리고 임청 원수는 전사해버렸고. 이제는 재상 채경까지....이제 그녀가 동원할수 있는 힘이 있는 세도가들은 다 사라져버린것이다. “동관을 통해서 혹시 황제를 배알할수 있을까요? 새로 바뀐 황제만 조종할수 있다면 어쩌면.....” 총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마 힘들 것입니다. 태상문주님. 이번 작전 실패로 인해 태상문주님에대한 상황제의 총애도 끝나버린것 같습니다. 더 이상 황실과 끈을 연결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쨌든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채경의 구명 운동을 전개해보세요. 구법당 쪽 사람들과도 접촉을 해보고 말이에요.” “예.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소식이 더 있습니다.” “뭔가요?” “마교에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이 소식만은 옥화무제가 예상할수 있는 범주를 크게 벗어났던 모양이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뽀족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마교에서요?” “예. 그가 태상문주님을 만나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말에 옥화무제의 안색은 심각하게 바뀌었다. 그녀석이 자신을 만나자고 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만약 무림맹의 고수들이 쳐들어 간다고 할 때 만나자고 했다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마교를 건드릴 자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옥화무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리송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죠?” 옥화무제의 질문에 묵향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아 . 얼굴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그러는 것은 실례지. 아무큰 얼굴을 보니 잘 지내는 모양이군.” “이게 잘 지내는 사람 얼굴로 보여요?” 안 그래도 황실이 절단난 것 때문에 울화가 치밀어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는 옥화무제에게 그런 말을 했으니 좋은 대답이 돌아갈 리가 없었다. “허허. 몰론 사업상 난관이야 많겠지만 그걸 대놓고 남에게 말하는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나? 잘 안되고 잘 되는 척, 잘 되면 저 잘되는 척 그래야 살아남지.” 이 이간이 정말! 마교 교주면 교주답게 놀아야지 지가 무슨 사업가도 아니고 연배도 자기보다 낮은 인간이 무공 좀 세다고 이토록 오만방자하다니. 순간 옥화무제는 약이 바짝 오르는 것이 느꼇지만 그래도 이 사업을 해온 지 수십년 그녀의 얼굴 표정은 저 두꺼운 철판마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호호. 그래 무슨 일로 본녀를 다 찾으셨나요? 저는 그게 가장 궁금하군요.” “한 가지 의뢰를 하고자 하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묵향은 옥화무제의 눈치를 슬쩍 봤다. 물론 상대의 의뢰가 뭔지 매우 궁금한 옥화무제였다. 막 말을 해줄 것 같아 기대감에 마름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상대의 말이 딴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참 그러고 보니 요즘 금나라 때문에 난리가 났다면서? 저 시골 변방에 사는 우리들은 요 근ㄹ에 그걸 들었어. 아주 지밌더라구.” 뭔가 상대에게 놀림을 당하는것 같다는 생각에 옥화무제는 약간 퉁명스레 대꾸했다. “재미도 있었겠군요.” “본의 아니게 금나라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누가 목숨을 건졌는지 그게 빠져 있었다. 알아서 상상하는 말이었다. 물론 묵향이 한 말은 매복 공격에서 벗어난 '정파'를 이를는 것이었겠지만, 옥화무제는 그것을 '마교'로 오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그 당시 겉으로 드러난 전개로 봤을 때 마교가 절대 약세였다. “그렇겠죠. 하지만 공격은 없었으니 서로 간에 좋았던 것 아닌가요?” “뭐. 썩 좋았다고는 볼수 없지. 그건 그렇고, 변방의 소국인 금의 약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하군. 무림 최고의 정보통이 생각하는 시국론이 아주 듣고 싶었거든.” “지금 그거 물어보려고 바쁜 사람을 부른 거예요.” 발끈하는 옥화무제를 향해 묵향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지었다. “물론 아니지.” “그렇다고 뭐예요?” “금에서 한 인물에 대해 조사를 좀 해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어떤 사람이죠?” 뽀루통해 있는 듯 겉모습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관심은 온통 묵향의 다음 말에 가 있었다. 과연 이 엉뚱한 이간이 관심을 보이는 인물은 누구일까? 궁금하지 않을수도 없었다.왜냐하면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것으로 보아 아주 중요한 인물것임에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금에 대해 어느 정도 조사해 봤을 테니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거야. 대원수 완옌 렌지에 바로 이 인물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다줬으면 좋겠어.” “시킬 일은 그것뿐인가요?” “물론 아니지 사실 진짜 부탁하고 싶은 건 아니고...., 어쨋든 당신이 무림맹의 3대 봉공 중 한 명이니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 부탁이나 하나 하려고.”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름이 아니라 이게 진짜였던 것이다. 옥화무제는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자, 빨리빨리 토해내라구, 이 단순무식한 놈아! “뭔데 그래요?” “정파와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싶은데 말이야. 공통의 적은 금나라로 하고 일이지.” 옥화무제는 잠시 할 말을 잊을 정도였다. 저 인간이 원래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중증일 줄은 정말 몰랐다. “연합이라고요?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불구대천의 원수끼리 연합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보라구요!” “그건 그거고 이거는 이거지. 우리들도 송의 충성스런 신하들인데 횡실과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쳐 충성을 다할 생각이 없는 줄 알아?” “물론 없다는 거 다 알아 이놈아!” 하지만 옥화무제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 상대의 기분을 망치게 하지는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교가 한손을 보태주기만 해도 금을 아작내는 것은 한결 편해질 것이 아닌가. “무림맹도 요즘 금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테고, 그런 상황에서 본좌가 뒤통수를 까지 않고 있는 것만 해도 많이 봐주고 있는 거라구 안그래?” 그건 옳은 말이었다. “물론 여기에 찬성하지 않을 바보들도 많을 테니 한 가지 덧붙이기로 하지 만약 무림맹과의 연합의 성립되지 않는다면 본좌는 금에다가 똑같은 제안을 할거야. 바로 그 완옌 렌지에라는 인물에게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옥화무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만약 그렇게 된자면 정파 무림은 씨가 마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무 놀란 탓일까 옥화무제는 자신도 모르게 뽀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당신, 제정신이에요?” “물론 아주 멀쩡해 좋은 대답 기다리지 참 완옌 렌지에에 대한 부탁 잊어버리지 말라구 장차 우리 쪽 고객이 될지도 모르는 인물인데, 어떤 녀녁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협상이 편할 거 아닌가? 크흐흐흣.” 비웃음 날리며 사라지는 묵향의 뒷모습을 옥화무제는 잡아 먹을 노려봤다 만약 묵향이 그완롄 렌지에라는 놈과 협약을 맺는다면 송 제국과 무력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일지도 모른다. “저런 썩어빠진 놈!오랑캐한테 빌붙으려 하다니.....” 현재 송의 정규군은 거의 괴멸당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일부 살아남은 장졸들과 현지의 행방군 그리고 그녀의 부탁을 받은 무림인들이 뒤섞여 새로운 방어선을 서서히 구축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소수기는 하지만 막강한 힘을 지닌 마교가 금에 동참한다면, 그 방어선은 순식간에 붕괴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수도 밀리는데 질까지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이기 떄문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옥화무제가 몰랐던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묵향이 그 누구보다고 금의 멸망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인걸이 만약 요직에 앉아 있다면 마교의 힘만으로 그를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금이라는 엄청난 세력이 그의 뒤를 받쳐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놈의 보호막이라고 할수 있는 금이 무너진 다면? 그놈을 철저하게 뭉개버릴 수 있게 되는 거이다. 그 한지를 모르고 있으니. 옥화무제로서는 묵향이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머리를 쥐어짜도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마교로서는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정파의 세력이 갉혀 들어가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상태다. 그런데 왜 굳이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할수 있는 정파의 손을 잡아가면서까지 금과 싸우려고 하는 것일까? 묵향의 말대로 황실에 대한 충성?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마교도가 활실에 대한 충성을 운운하다니 그렇다면 뮐까? 그렇게 해서 얻을수 있는 게 뭐지? 옥화무제는 오랫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느라 자리에서 일어설줄 몰랐다. ▒ 양양성 전투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뭔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게 틀림없소!” “불구대천의 원수 놈들과 동맹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그놈들이 황실에 대한 충성을 운운하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군!” 옥화 봉공의 말을 들은 무림맹 장로들의 반응이었다. 안 그래도 옥화 봉공이 마교와 뒷거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던 판인데, 그 상황에서 이런 제의를 하다니... 옥화무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쪽에 선택의 여지는 없어요. 그는 만약 이쪽에서 제의를 거부한다면 금에 똑같은 제의를 하겠다고 말했어요. 만약 그가 금과 연합한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고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건가요?” 그 말에 장로들은 모두들 입을 꽉 다물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이후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으니 말이다. 옥화무제는 맹주에게 말했다. “사실 본녀도 그가 왜 이런 제의를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어요. 일단은 그가 금의 멸망을 원한다는 것. 이유야 어떻든 간에 그들과의 제휴를 고려해볼 수는 없을까요?” 맹주는 잠시 생각해본 후 대답했다. “노부는 그가 금의 멸망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금과 모종의 뒷거래를 하면서 간세로서 무림맹에 접근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소. 그런 만큼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소.” 판단은 맹주가 하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맹주가 판단하기 좋게 자료만 전해주면 끝인 것이다. 그렇기에 옥화무제는 고개를 조아리며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공수개 장로.” “예.” “공수개 장로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고 할 수 있겠소. 꼭 노부의 신뢰에 보답해주기를 바라겠소이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맹주와 공수개 장로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옥화무제의 안색은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맹주가 개방을 이렇게 신뢰하게 되었을까? 아무래도 돌아가는 대로 수하들을 시켜 조사하게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는 그녀였다. 금이 건국되었을 때, 그들은 수도를 만주 벌판에 있는 상경으로 정했었다. 하지만 동북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시 연경을 손에 넣은 지금 구태여 수도를 계속 상경으로 고집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금 제국의 전체적인 인구나 생산력을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연경을 수도로 삼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연경의 경우 현재 금군의 가장 큰 집결지라고 할 수 있는 황하 일대와 가깝기에 최전선의 병사들을 통제하기에도 알맞았다. 그에 비하면 상경은 너무 멀었다. 또한 금 제국의 경우 상경에 거대한 궁전을 지어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대로 제국의 모양새를 갖췄다고 새로이 대규모 궁전을 짓느니 연경에 있던 요의 황궁을 접수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사실 연경에 있는 요의 황궁도 송의 왕부를 뜯어고쳐 만든 것이니, 장대했던 연경 왕부 건물이 꽤 많은 민족에게 혜택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허연 수염을 흩날리며 여섯 명의 장수가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그들이 거느리고 온 병사들은 황궁 밖에 대기시켜뒀기에 이들 여섯명만이 다급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황제의 집무실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장수가 그들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며 군례를 올렸다. “어서들 오십시오. 발극력들께서 갑자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발극렬은 금의 가장 강력한 여섯 부족의 부족장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금 제국은 영토는 급속도로 확장된 상태인 데 비해 아직까지 그 정치 형태는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족 연합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발극렬들의 발언권은 대단히 강력했다. “급한 일로 폐하를 뵙고자 한다. 빨리 고하거라.” “예.” 장수는 황제에게 고한 후 발극렬들에게 전했다. “드시지요.” 호화로운 용상에 앉아 발극렬들을 내려다보는 금 황제 아구다. 이민족의 황제라고는 하지만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위엄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저로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었다. 과연 여진족을 통합하고, 대제국 요를 멸하고, 또 송의 대군을 격파하여 연운 16주를 차지한 맹호의 기상을 지닌 영웅이라 할 수 있었다. 황제는 발극렬들의 인사를 받은 후 자리를 권했다. “자, 모두들 자리에 앉으시오. 그래, 무슨 일이 있기에 여섯 발극렬께서 함께 오시었소?” 발극렬들 중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인물이 입을 열었다. “황제시여, 지금 연경에는 대원수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미 들어봤소.” “그런데 어지 이리 태평하게 앉아 계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만약 대원수가 배신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갓 태동하기 시작한 이 나라는 풍전등화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었다. 황제가 거느린 병사들의 수가 더 많다고는 하지만 대원수가 거느린 병사들은 금나라 최고의 정예들이었다. 게다가 대원수는 많은 장수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현 상태에서 맞붙는다면 승산이 전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호기롭게 말했다. “크하하핫, 저 드넓은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그대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간덩이가 작아졌단 말이오? 짐은 그를 믿소. 짐의 형님 오야속께서 돌아가실 때 그분이 후계자로 점찍은 것도 그였소. 하지만 그는 후게자 자리를 짐에게 양보했소. 그 후 그는 짐에게 가장 친한 벗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신하였소. 짐이 여진의 대족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가 짐의 곁에 있어줬기 때문이오. 그런데도 짐이 그를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을 수 있다는 말이오? 짐은 그의 모반을 고하고 있는 그대들은 못 믿어도 수천 리 밖에 떨어져 있는 그는 믿을 수 있소.” “하지만 조사는 해보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가 행동을 개시한 이후라면 늦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조사는 해봐야겠지. 국론홀로(제2부족장)!” “예, 황제시여.” “그 소문을 퍼뜨린 자가 누군지 철저하게 조사해라. 한 달의 시간을 주겠다. 만약 그때까지도 소문의 출처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그대의 목을 걸어야 할 것이다. 알겠는가.” “신,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폐하의 명을 완수하겠나이다.” 한 달 후, 금 황제는 연경에 떠돌던 소문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족에게 매수된 자들이 꾸민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금 황제의 분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배후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매수한 자가 한족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금 황제는 곧장 전 병력을 휘몰아쳐 송의 수도인 개봉을 함락시켜버렸다. 그리고 송 황제와 송의 상황제, 3천에 이르는 조정 대신을 포로로 잡아 만주로 압송해버렸다. 그러고도 금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일격에 송 제국을 멸망시키려는 듯 금군은 노도와 같이 하남을 집어삼킨 후 남쪽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 있으니 바로 회하였다. 상의 폭이 워낙 넓어 강을 건널 엄두조차 내지 못한 금군은 강을 따라 상류 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상류로 가면 당연히 강의 수량은 줄어들 것이고, 도하 작전을 감행하기가 손쉬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들이 만난 것이 회화 상류, 한수 연안에 위치한 전략 요충지에 세워진 양양성이었다.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된 성인 만큼 양양성은 한눈에 척 보기에도 대단히 튼튼하고 견고하게 건설되어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성벽과 그 주위로 둘러쳐진 깊은 해자로 인해 공격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피해를 우려해 그냥 지나쳐 진군하자니 보급로가 문제였다. 드디어 결단을 내린 금군은 서서히 양양성을 몇 겹으로 포위해도 사람이 남을 정도였다. 진팔은 패력검제와 그가 거느린 제령문도 50여 명과 함께 성의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포위진을 갖추고 있는 금의 병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것을 느꼈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처음 봤던 것이다. '저, 저게 도대체 몇 명이야?' 저도 모르게 도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인데, 뒤쪽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겉에 드러난 수에 현혹되지 말거라. 그건 단지 허상일 뿐이다. 눈앞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적 몇 명만 상대하면 된다. 꾸준히 죽이다 보면 자연 이 전쟁은 끝나게 될 게야. 너희들은 이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가 아니다. 그런 만큼 적의 전체 수를 따질 이유가 없다. 알겠느냐?” “예!” 진팔 같은 무림인들도 살이 떨릴 지경인데 성벽에 도열해 있는 일반 병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급 군관들이 오가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병사들은 지시에 따라 커다란 돌덩이라든가 화살 뭉치, 창, 갈쿠리 같은 것들을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여기저기에 쌓아놓고 있었다. 포위를 완료한 금군은 이상하게 생긴 수레 같은 것을 끌어다가 앞쪽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패력검제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저것이 바로 쇠뇌다. 들어본 적이 있느냐?” 들어본 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오늘 처음 봤는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에서는 활을 든 자를 구경하기도 힘든 판에 쇠뇌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모두들 아무런 대답이 없자 패력검제는 나직한 어조로 덧붙였다. “쇠뇌는 커다란 화살을 아주 멀리까지 쏘기 위해 만든 기게다. 노부가 들은 얘기로는 300장이나 되는 거리를 쏜다고 하더구나. 저것으로 쏘는 화살을 보통의 화살처럼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날아오는 힘이 몇 배는 더 강하다고 생각하거라. 놈들과 싸우는 와중에도 저 쇠뇌가 날아올 것에 언제나 대비해라. 그 정도 파괴력이라면 호신지기 따위는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모두들 알겠느냐?” “문주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아마도 공격하지 않을 게다. 전투는 내일 아침에 시작될 게야. 그러니 오늘은 푹 쉬어두거라. 내일은 힘든 하루가 될테니 말이다.” “예!” 패력검제의 예상대로 적들의 공격은 다음날 아침 일찍 시작되었다. 무림인이 늘상 벌이는 그런 소규모 칼싸움만 보아왔던 진팔에게 이 날의 전투는 충격 그 자체였다. 진팔은 이날 이후로 군대라는 것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대부분의 무림인이 그렇듯 진팔도 무공이라고는 모르는 병졸들이 창과 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비웃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병졸들이 모이고 모이니, 이건 감당이 안 될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힘은 약하지만 뭉치면 강하다는 말을 확실히 이해하게 만들어준 사건이었다. 쉬이익! 쇠뇌에서 발사된 수천 개가 넘는 화살이 날카로운 파공성을 흘리며 날아오기 시작했다. 앞쪽에 포진하고 있는 병사들이 황급히 두터운 나무 방패를 꺼내 막아보았지만, 방패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파괴력이 넘치는 화살이었다. 그런 강력한 힘을 지닌 화살을 무림인들이 저마다 자신이 지닌 병장기를 꺼내 막아내는 것을 보고, 송군 병사들은 감탄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쇠뇌를 퍼붓기 시작하면서 적들의 병력이 전진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두들 커다란 자루를 하나씩 등에 지고 방패를 든 한 손으로 앞을 가린 채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송군 병사들은 그들을 향해 사력을 다해 화살을 날렸다. 수많은 적병이 쓰러졌지만, 그래도 적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들은 성벽 아래 도착해서 등에 지고 있던 자루를 해자에다가 던져넣은 후,재빨리 뒤로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양양성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그 양양성을 둘러싸고 있는 깊고 넓은 해자의 규모 또한 작은 강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런 해자를 사람의 등에 진 흙자루로 메우려고 하는 것은 정신이상자나 생각할 만한 일이 아닐까라고 판단할 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30만 명의 병사가 한꺼번에 움직이면 흙자루의 수는 30만 개가 된다. 그 흙자루의 무게가 5관이라고 가정한다면, 일거에 150만 관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대단히 단순무식한 방법이긴 했지만 효과만은 확실했다. 그 넓디넓은 해자를 단 한 시진만에 완전히 메워버렸으니 말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팔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인간이 지닌 힘은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커다란 수래를 동원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사람의 힘만으로 순식간에 그 일을 해치워버린 것이다. 해자가 메워진 후, 적들은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흙자루를 지고 달렸던 짐꾼들이 순식간에 용맹한 병사들로 탈바꿈했다. 그들은 방패를 앞세우고 보무도 당당하게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그들 중의 많은 병사가 아주 기다란 사다리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성벽을 기어오르는 모양이었다. 성벽 위에 포진하고 있던 송군 병사들은 그들이 다시금 사거리 안에 들어오자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금군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동료들이 쓰러지는데도 진격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모두들 흩어져서 성벽 위로 올라오는 적들을 없애라!” 그때부터 지독한 난전이 시작되었다. 밑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질러대는 자들도 있었고, 위에서 던진 돌덩이에 맞아 떨어지는 자들도 있었다. 송군이 긴 막대기를 이용해서 사다리를 밀어버려 성벽 밑으로 떨어지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송군의 피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적들의 쇠뇌 사격은 계속되고 있었기에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했다가는 화살에 맞아 죽기 십상이었다. 적병에게 활을 쏘려다가 오히려 화살에 맞아 죽는 병사들도 있었고, 돌을 던지려다가 죽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적병들이 성벽 위에까지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성벽 여기저기에서는 격렬한 칼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시작된 전투는 그날 밤에야 끝이 났다. 얼마나 많은 적병을 죽였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성벽 밑에는 수많은 적병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송군 병사들은 성벽 위에서 죽은 적병들의 시체를 아래로 던지고 있었다. 따로 묻어줄 곳도 없었고, 그냥 놔두자니 썩어서 냄새가 진동할 게 분명했기에 그냥 성벽 아래로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진팔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퇴각하는 금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공격해오는 적을 격퇴하면 승리의 함성이라도 들려올 법 하건만, 모두들 하루 종일 싸웠기에 진이 빠져 저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채 퇴각하는 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많이 힘들었을 걸세.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피 묻은 손이 자신의 어깨에 올려지는 순간, 진팔은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자신의 어깨에 올라와 있는 이 손. 바로 이 손에 의해 얼마나 많은 금군 병사가 죽어나갔는지를 직접 목격했기에 일어나는 거부 반응이었다. 패력검제는 진팔의 몸을 휘휘 둘러보더니 중얼거렸다.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군.” 그런 다음 패력검제는 자신의 문도들 가운데 부상당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때 진팔의 등 뒤로 슬그머니 접근해오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진팔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자네가 대단한 줄은 익히 알았지만 오늘 보니 정말 대단하더군.” 쟈타르였다. “대단한 사람은 따로 있네. 바로 저 영감 말이야.” 진팔의 손은 저쪽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패력검제를 향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싸웠음에도 그의 다리에는 힘이 넘치고 있었다. 신검합일의 경지에 든 진팔 같은 절정 고수조차 나중에는 내공이 딸려 호신진기니 뭐니 그런 사치스러운 것은 아예 사용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물며 그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하루종일 맨땅에 박치기를 하며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벽 및에서 쏴댄 활과 쇠뇌 들이 폭우가 쏜아지듯 성안으로 날아들었었다. 끊임없이 성벽을 타고 기어올라온 적병들과 칼부림을 하는 와중에도 화살에 대한 주의를 늦추지 않아야만 했다. 장거리에서 발사하는 쇠뇌들은 그 위력은 엄청났지만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그러니 적 아군을 가리지 않고 그 범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 그 편에 아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는 오랑캐들도 많았지만 송군이나 그에 가담한 무림인들의 피해도 막심했다. 진팔이 그런 지독한 난전 속에서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남은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도객인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진팔을 질리게 만든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패력검제였다. 그런데 그런 진팔을 보고 질려 하는 인물도 있으니 세상은 재미있는 것이다. '도대체 저게 인간인가? 젊은 나도 하루 종일 싸웠더니 다리가 다 후들거리는 판인데...' 진팔의 말에 쟈타르는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하하핫, 저 영감은 논외로 쳐야지. 도저히 '인간' 이라고 볼 수 없으니 말일세.” “나 말고 저 친구도 대단하지 않던가?” 진팔은 패력검제의 아들 폭풍검 서량을 가리켰다. “물론일세. 하지만 아무래도 저 사람한테는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더군. 그래도 자네는 꽤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한 동료가 아니었나.” “물론이지. 그건 그렇고 자네가 모시는 상관은 어떤가? 많은 놀랐을 텐데...” 사실 조령과 쟈타르는 이번 전투에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조령은 부상자들을 돌본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쟈타르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보호자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몃도 모르고 그녀를 향해 달려든 금군 네다섯을 벤 것이 그가 한 일의 전부였다. 쟈타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이걸 기회로 제발 정신을 좀 차리셨으면 좋을 텐데...” “자네도 참 고생이 많구먼. 그건 그렇고, 나는 아직까지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 30만에 달하는 적을의 공격을 겨우 3만도 안 되는 수로 막아낸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무리 무림인들이 가세했다고 하지만, 양양성의 성벽이 워낙 높아 적들이 전 병력을 쏟아붓기가 곤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첫날 공성전에서 그렇게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금군은 후퇴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을 포위한 채 아예 지구전으로 들어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양양성 안에 1년 동안 버틸 식량이 있다고는 하지만, 무작정 계속되는 농성은 포위하고 있는 자들보다는 포위당한 자들에게 더욱 가혹한 조건을 안겨주고 있었다. ▒ 적과의 동맹 회하 이북이 모두 금에게 넘어가자 무림맹은 이제 자신들이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아직까지 마교는 조용했다. 만약 이번 전쟁에서 그들이 금의 손을 들어줬었다면 회하의 저지선 따위는 하루아침에 돌파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그 말은 마교가 아직까지는 금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는데, 괜히 무림맹과 동맹을 맺는다는 등 하는 계략을 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무림맹의 수뇌부가 깨달았을 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개봉이 함락된 후니 말이다. “늦은 감이 있으나 이제 선택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오.”맹주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던 장로들은 통탄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도 무림이 황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한족이 세운 제국들은 무림을 인정했지만 이민족이 세운 제국들은 무림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크흐흑, 이런 치욕을 당해야만 하다니...”오열하는 장로들을 향해 맹주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모든 장로님의 마음을 노부가 모르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설혹 악마와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조상님들께서 물려주신 이 땅을 오랑캐 따위에게 내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물론입니다. 마교가 본맹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놈들도 한족이 아닙니까? 일단 여진족 놈들을 몰아낼 때까지는 연합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맹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문득 질문을 던졌다. “누구를 마교에 파견하는 것이 좋겠소?” “옥화 봉공이 가장 적임자일 듯싶습니다. 처음에 마교 놈들이 동맹을 제의했을 때도 그분을 통해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만큼 그분이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좋소, 그렇게 합시다. 옥화 봉공에게 전서를 띄우도록 하시오.”그때 갑자기 백량 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외쳤다. “잠깐!노부가 맹주께 한 가지 질문드릴 것이 있소이다!”“무엇이오, 맹호검군 장로?” “맹주께서는 마교와 금이 합작하지 않았다고 단정 짓고 계십니까?”맹주는 갑자기 백량 장로가 왜 저런 질문을 던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무엇을 듣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맹주는 인내심을 갖고 대답해줬다. “현재까지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소이다.”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백량 장로는 호기롭게 외쳤다. “그렇다면 노부가 전에 맹주께 주청드린 사안을 허락하여주십시오! 제가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금 황제의 목을 베어다가 바치겠소이다!”만약 마교와 금이 합작한 것이 아니라면 금 황제의 주변을 호위할 뛰어난 고수는 거읭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그제야 백량 장로의 뜻을 이해한 맹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허락하겠소이다. 맹호검군 장로께서 성공하기를 빌겠소.”백량 장로는 깊숙이 포권하며 대답했다. 그의 어조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좋은 소식 보내드리겠소이다.” 매화검군 장로가 보무도 당당하게 회의장을 나간 후 맹주는 장로들에게 말했다. “일단 기다려보는 것이 좋겠구려. 금 황제가 죽는다면 금의 세력은 순식간에 위축될 것이 분명하니 구태여 마교와 합작할 이유가 없지 않겠소?”묵향과 옥화무제는 또다시 자리를 함께했다. 중원 무림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경공의 대가들에게 있어서 서로 간의 거리는 큰 문자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예 호위조차 거느리지 않고 있었다. 묵향은 의자에 쓱 앉은 후 객잔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기다리고 있던 옥화무제에게 알은척을 했다.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한 모양이군. 이봐, 점소이.”“옛, 손님” “술 좀 가져와. 그리고 안줏거리 아무거나 하고 말이야.”“옛! 곧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역사적인 동맹이 시작되는 날인데 축배를 들어야 할 것 아니겠어?”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조금 헛다리를 짚기는 했지만 말이다. 옥화무제는 시치미를 떼고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동맹을 제의하러 온 것을 알았죠?”“당연하지. 송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제 그 늙은이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줄 알았겠지. 멍청한 것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옥화무제가 생글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묵향은 짜증난다는 듯 투박스런 어조로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틀렸어요. 그 늙은이들은 아직까지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줄 모르고 있죠.”“이런 제기랄!그럼 뭣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거야?”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옥화무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당신, 옛날에 만났을 때와는 아주 많이 틀려졌다는 거 알아요?”그때 점소이가 술을 가져왓기에 묵향은 신경질적으로 술잔에 술을 따르며 대꾸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본좌가 뭐가 달라졌다고...”“옛날에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했던 적이 있었어요.”“훗, 과찬이군.” “칭찬은 아니에요. 당신이 너무나도 단순무식하게 생각했기에 이쪽에서 판단하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것뿐이니까 말이죠.”묵향은 술을 한 잔 쭉 들이켠 후 무덤덤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뭐, 제대로 봤네. 본좌가 원래 좀 무식하거든.”뻔뻔스레 대꾸하는 묵향을 보며 옥화무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저렇게 얼굴 가죽이 두꺼울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말을 한 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씩 당신의 생각이 보이더군요. 그걸 보면 당신은 굉장히 많이 발전한 거라구요.”묵향은 눈에 이채를 발하며 이죽거렸다. “호오~,그렇게 자신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죠.” 옥화무제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한 뭉치의 문서였다. “그게 뭔데?” “당신이 금과 싸우려는 이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묵향의 손이 휙 움직이더니 문서를 낚아채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문서를 읽오 있는 묵향을 보며 옥화무제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과연 자신의 예상이 맞은 것이다. “당신이 협상을 원했던 완옌 렌지에 대원수가 바로 그예요. 20여 년 이상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니, 그의 능력상 얼마나 큰 세력을 형성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겠죠?”묵향은 문서 더미를 품속에 쑤셔넣으며 중얼거렸다. “물론이지. 그렇게 위험한 놈이 아니었다면 노부가 그토록 혈안이 되어 놈의 행방을 찾을 리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솔직히 의외로군. 설마 대원수 나으리가 되어 계실 줄이야. 이거 크게 한 방 먹었구먼.”묵향의 어감에는 묘한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그가 20여 년간 직접 교육시킨 고수만 1만에 달해요. 물론 그것도 다 천마혈검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겠죠? 그 혼자서 그 많은 고수를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에요.”뿌드드드득! 묵향은 이빨을 갈더니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술잔을 들어 입속에 털어넣었다. 그런 다음 그는 옥화무제에게 말했는데,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는 공포스러운 뭔가가 깔려 있었다. “장인걸이 금에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본좌는 본교의 치부가 밖에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말이야.”“물론이죠. 저는 한 가지 정보를 가지고 여기저기에 뿌릴 정도로 몰염치하지는 않아요. 언제나 한 가지 정보는 한 명의 고객에게. 그게 제 신조죠. 그런 의미에서 정보료를 청구하고 싶은데요.”그 정도는 애교로 생각한다는 듯 묵향은 피식 미소 지으며 품속에서 전표 다발을 꺼냈다. “은자 1천 냥이야.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물론이죠. 고맙게 쓰겠어요.” 그녀는 그 돈으로 군량을 사서 양양성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금 황제 아구다를 참살하겠다며 호언장담한 후 보무도 당당하게 무림맹을 떠났던 백량 장로가 돌아왔다. 그것도 혼자. 그가 거느리고 떠났던 100명의 고수는 단 한 명도 돌아온 자가 없었고 백량 장로 혼자 돌아온 것이다. 무림맹의 수뇌부는 맹 내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인 백량 장로가 수하들은 모두 잃고 엉망진창이 되어 도망쳐온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씀이오?” 백량 장로는 비참한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노부 평생에 이토록 참담한 적은 없었소이다. 노부도 수하들과 함께 죽고 싶었으나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살아 돌아왔소.”“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자, 차근차근 말씀해보시구려.”“개방에서 제공한 지도를 통해 연경궁 내부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소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황제의 행방은 알 수 없었소. 그도 그럴 것이 그자가 그너린 첩실이 한둘이겠소?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나하나 수색하며 내부를 살펴나갈 수 밖에 없었소. 그러다가 그들을 만났소.”백량 장로의 눈에 짙은 두려움이 깔리는 것을 보고 장로들은 말을 재촉했다. “그들이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이오?”“바로 마교 놈들 말이오. 수는 40명 정도였는데, 그 개개인의 실력이 노부와 맞먹을 정도였소. 아니, 어쩌면 더욱 강한지도 모르겠소.”그 말에 장로들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말이 쉬워서 40명이지 무림맹 장로급이 40명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한 명 한 명만 해도 엄청난 실력인데, 만약 그들이 집단으로 움직인다면 화경의 고수라도 찜쪄먹을 수 있을 것이다. 맹주는 경악해서 외쳤다. “그것이 사실이오, 백량 장로?” “노부가 왜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노부가 거느린 수하들은 도무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소. 그들 중에서 겨우 20명이 덤볐을 뿐인데도 순식간에 수하들이 죽어나가더이다. 그래서 노부는 퇴각 명령을 내렸고... 크흐흐흑!”백량 장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기어이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그날 밤에 벌어진 참극을 다시금 회상하자니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한 모양이었다. 잘 갖춰진 함정에 멋모르고 기어들어가 아끼던 수하들만 몽땅 죽이고 돌아왔으니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맹주는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얼마나 화가 치밀었는지 그의 눈가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그토록 중대한 정보를 전해준 백량 장로에게 감사드리오. 노부는 맹주의 권한으로 옥화 봉공을 소환할 것을 명하는 바이오. 무영문이 무림 제일의 정보통인 것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그녀는 마교와 금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획득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오. 그런데도 본맹에게 마교와 합작할 것을 권했다는 것은 명백한 배신 행위. 대신 그녀의 실력을 감안하여 정중히 초청하시오. 그런 후 노부가 직접 손을 쓰겠오.”“알겠습니다, 맹주님.” 며칠 후 옥화무제는 맹주의 부름을 받고 무림맹으로 향했다. 마교와의 동맹 건으로 그녀와 몇 가지 의논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안녕하셨습니까, 맹주님?” “어서오시구려, 옥화 봉공,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그대를 불렀다오. 물론 전서를 통해서 물어볼 수도 있겠으나 서로 간에 오해가 없게하기 위해서는 직접 대화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소?”“물론이지요.” “자, 그러지 말고 자리에 앉으시오.” 곧이어 시녀가 들어와 차를 놔둔 후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나갔다. 맹주는 찻잔 뚜껑으로 둥둥 떠 있는 찻잎을 옆으로 슬쩍 밀며 입을 열었다. “자, 차나 드시면서 얘기합시다. 어렵게 용정차를 구했는데 향이 그만이라오.”옥화무제도 다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예, 참으로 향이 좋군요.” “마교와는 워낙 오랜 시간 반목해왔었기에 갑자기 동맹을 맺는다고 하니 걱정이 앞서는구려. 혹시 그놈들이 금과 짜고 일부러 이쪽에 접근해오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오.”옥화무제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무림맹을 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맹주의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더 중요한 일? 그게 뭔지 말해줄 수는 없겠소?”“그게, 비밀을 지켜야만 하는 정보이기에 본녀가 직접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이건 중요한 일이오. 얼마 전 맹호검군 장로가 수하들을 이끌고 금 황제를 참살하기 위해 떠났었소.”이건 옥화무제도 몰랐던 일이었기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혹시, 맹호검군 장로와 연락이 두절되었기에 본녀를 찾으신 겁니까?”이제 더 이상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옥화무제의 말은 이미 맹호검군 장로가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맹주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옥화 봉공께서는 이미 실패할 것을 알고 계셨던 듯하구려. 그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소?”옥화무제는 난처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방금 전에 말씀드렸던 그 비밀하고 연관되기에 본녀가 직접 말씀드리기가...”급기야 맹주의 입에서는 노기가 섞인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노부도 방금 전에 말했듯 이건 아주 중요한 사안이오! 마교가 이미 금과 내통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았는데, 어찌 옥화 봉공께서는 비밀 타령만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오. 현재 본맹에서는 봉공께서 마교와 내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시는 것이오?”그것은 정말 의외였던 듯, 옥화무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꾸했다. “본녀를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정말 섭섭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의뢰자에게 한 번 판매한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는 본문의 규칙 때문에 본녀에게 지어진 누명을 벗기는 힘들 듯하군요. 대신 한 가지 단서를 말씀드리겠습니다.”“뭣이오?” “개방에 완옌 렌지에 대원수를 조사해보라고 이르십시오. 그의 정체를 파악하신다면 본녀에게 지어진 누명은 자연스레 벗겨질 것입니다.”“완옌 렌지에 대원수?지금 요의 잔당을 토벌하고 있는 금의 맹장을 말씀하시는 것이오?”“예” “그가 어쨌기에...” “그건 맹주님께서 조사햐셔야 할 일이지요. 사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린다고 해서 제게 제이전 누명이 벗겨지겠습니까?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모든 게 다 하서가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직접 조사하시고 진실을 파악해보십시오.”잠시 고민하던 맹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연금당하셔야 할 텐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소?”맹주의 어조에는 짙은 고뇌가 어려 있었으나 돌아오는 옥화무제의 답변은 의외로 밝았다. “어쩔 수 없지요. 맹주께서 차에 산공분까지 푸셨으니 처음부터 그렇게 하실 작정이셨던 것 아닌가요?”옥화무제가 정곡을 찌르자 맹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공분이라면 독은 아니지만, 내가 고수에게는 더없이 치명적이 약물이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소?” 옥화무제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밝은 어조로 대답했다. 전혀 산공분에 중독된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오히려 그 둘의 표정으로 봣을 때 산공분에 중독된 사람은 맹주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처음부터라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이걸 마시는 것을 본녀가 거부한다면 맹주께서는 곧장 제게 손을 쓰실 게 뻔한데, 마시는 것이 현명한 처사겠죠. 안 그런가요?”맹주의 무공이 그녀보다 약간 높은 게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맹주를 뿌리치고 탈출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영문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기에 그녀는 다 알면서도 태연히 차를 마신 것이다. “봉공의 지혜는 정말이지 놀랍구려. 좋소, 내 개방에 통보하여 완옌 렌지에라는 인물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겠소. 그런 후 봉공과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생사람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맹주의 어조는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진실임이 밝혀져 결백이 증명된다 하더라도 맹주와 옥화무제의 사이는 그전처럼 돌아갈 리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밝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본녀의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맹주님.”금 제국의 맹장인 완옌 렌지에에 대한 조사를 부탁받은 공수개 장로는 그를 조사하다가 밝혀낸 몇 가지 사항을 보고하기 위해 맹주를 찾아갔다. “호오~, 그러니까 그자가 여진족이 아니라 한족이란 말이오?”맹주가 놀라워하자 공수개 장로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언제나 무영문에 가려 찬밥 신세였던 개방이 이렇듯 맹주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 보니 신이 날 만도 했다. “예, 맹주님. 저도 그 보고를 접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완옌이라는 성은 황제에게 직접 하사받은 거라고 하더군요.”“그가 얼마나 황제로부터 신임을 받는 인물인지 짐작이 가겠군요. 공수개 장로.”“물론입니다. 지금의 황제를 만든 게 그놈이라고 할 정도로 충성을 다한 모양입니다. 참, 그를 조사하던 중에 한 가지 재미있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뭔데 그러시오?” “이번에 금이 침공한 것에 무영문이 연관되어 있더군요.”“그건 또 무슨 말이오?” “예, 옥화 봉공님이 금 황제와 대원수 사이를 이간시켰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작전 실패로 금 황제가 그 사실을 알게 됐다지 뭡니까? 개봉이 무너진 것도 다 금 황제가 분풀이를 한 것이라고 하더군요.”아마 공수개 장로는 옥화무제의 흠집을 파헤치기 위해 이 보고를 올린 모양이지만, 그 보고를 듣는 맹주의 생각은 달랐다. 이쪽은 이제야 대원수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는데, 옥화무제는 자신들보다 훨씬 더 일찍부터 그에 대한 조사를 햇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간질을 시키려고 했다면 틀림없이 대원수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선행되었을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의 무공 실력은 어느 정도라고 합디까? 금 제국이 자랑하는 맹장인 만큼 그 실력 또한 뛰어나지 않겠소?”“그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최전선에서 검을 휘두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말입니다. 어쩌면 소문과는 달리 맹장이 아니라 군사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가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요 근래의 일이니까요.”“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렇다면 그의 진면목에 대한 정보가 나오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겠소?”“그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지금 저 멀리 요를 토벌한다고 뛰어다니고 있다 보니 조사하는 데 상당히 힘듭니다. 참, 그러고 보니 그에 대해서 이상한 정보가 하나 있더군요.”“.......” “그러니까 그가 아구다의 친분을 맺은 것이 거의 20여 년 전이라고 합니다. 그때 건장한 청년이었다고 해도 20년이 흘렀다면 나이가 최소한 사십은 먹어야 정상인데, 30대 초반 정도로밖에 안 보인답니다. 그걸 보면 어쩌면 그는 무공을 연성한 인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럴 수도 있겠구려. 주안술을 익힌 자라면 상당한 무공 실력을 쌓았다고 봐야 하겠지요. 어찌 되었건 수고하셨소. 오늘 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구려.”“예, 새로운 정보가 도착하는 대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고맙소이다. 무영문을 믿지 못하게 된 지금 노부는 개방만을 믿겠소이다. 열심히 해주시구려.”“예, 맹주님.” 공수개 장로를 돌려보내고 난 뒤 맹주는 창밖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맹주는 공수개 장로에게 일단 적을 알아야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면서 대원수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었다. 무영문과 아무런 연관을 짓지 않았으니, 개방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보에 왜곡을 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점점 그녀가 말한 대로 되어가는 것 같군. 한인에다 무공을 익힌 자라. 만약 그놈이 마교가 보낸 놈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놈이 아구다를 만난 게 20년쯤 전이라면 그자가 마교 교주가 갓 되었을 때쯤인데, 그때부터 여진족에다가 투자를 했다? 아니야. 그토록 멀리 보며 투자를 할 바에는 오히려 요에다가 하는 게 맞았을 거야. 몇 년 후 요가 연운 16주를 집어삼키는 괴력을 발휘했으니 말이야.”맹주는 실내를 서성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옥화무제가 연금되어 있는 곳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는 방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옥화무제는 맹주가 들어오자 방긋 미소 지으며 반겨 맞이했다. 무림맹에서는 그녀에게 아침에 한 잔씩 산공분이 들어 있는 차를 마시게 한 것을 제외한다면 그 어떤 금제도 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신분도 신분이려니와, 혹시나 그 모든 것이 오해로 밝혀졌을 때 뒷감당이 무서웟떤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지내시기는 어떠신가요? 혹여 불편한 데라도 있으시다면.....”“아뇨,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쉬어본 게 몇 십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옥화무제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너희들이 본녀한테 이런 치욕을 주다니, 어디 나중에 두고 보자’ 와 같은 발언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해놓으면 나중에 설사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뒷감당이 힘들어 자신을 살인멸구해버릴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긴 때문이다. “그런데로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구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찾아왔다오.”“예, 말씀하십시오.” “봉공께서는 그가 한족임을 알고 계셨소?”“물론이죠.” 역시 옥화무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정체까지도.... “그가 무림인이라는 사실도 알고 계셨겠구려.”“예.” “그자가 마교도라는 사실도 알고 계셨소?”이 질문은 맹주가 만든 함정이었다. 만약 상대가 마교도가 틀림없다면 그의 실력은 최소한 극마급으로 압축시켜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극마급의 인물이라면 거의 없으니 조사하기도 편할 것이 분명했다. 또한 맹주가 극마급을 생각한 이유는, 공수개 장로가 그는 전혀 무공을 익힌 자 같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마교도가 자신의 마기를 완벽하게 숨기려면 최소한 극마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 그래요. 짧은 시간이었는데, 많은 것을 조사하셨네요.”“그렇다면....” ‘그가 누구일까? 20년쯤 전에 극마의 경지를 깨달은 고수라.’맹주의 머릿속에는 한때 마교를 주름잡았던 4천왕의 명호들이 떠올랐다. 독수마제 한석영, 흑마대제 한중길, 벽안독군 능비계, 흑살마제 장인걸, 이들 중에서 현 교주인 묵향과 끝까지 권력 다툼을 벌였던 인물은 흑살마제였다. ‘참, 그러고 보니 흑살마제가 쫓겨난 것이 20년쯤 전이었지.’“그가 흑살마제 장인걸이었소?” 옥화무제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맹주님께서 제게 유도심문을 하신 것이었군요. 예, 맞아요. 그가 장인걸이에요.”“그렇다면 마교 교주가 연합하여 금을 쳐부수자고 한 것도 장인걸을 치기 위해서...”“예, 장인걸이 금을 뒤에 업고 있는 이상 마교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그를 없앨 수 없어요. 만약 장인걸 혼자라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과거 공포의 대명사였던 천마혈검대까지 거느리고 있거든요.”그 말에 맹주는 경악했다. “천마혈검대! 그, 그랬어구료, 맹호검군 장로가 치를 떠는 인물들이 바로 그놈들이었어!”“이제 본녀에 대한 오해가 좀 풀리셨나요?”“그렇다면, 진작 노부에게 말씀하셨다면 이런 고초를 겪지 않으셔도...”“아뇨, 저도 오랜만에 이걸 핑계로 푹 쉬었으니까요.”옥화무제는 날렵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제 오해가 풀렸으니 본녀는 이만 가봐도 될까요?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테니 말입니다.”맹주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지금 바로 가시면 위험하오. 내공이 돌아오려면 하루는 지나야 할텐데...”“아뇨, 제 수하들이 있으니 그럴 걱정은 없을 겁니다. 그동안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주님.”사뿐히 걸음을 옮기는 옥화무제를 향해 맹주가 말했다. “잠깐.” 옥화무제는 춤이라도 추듯 우아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예? 달리 명하실 것이라도...?” “마교 교주와 협정을 맺게 중간에서 도와주시겠소? 오해가 풀렸으니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오만.”“알겠습니다, 맹주님. 조만간에 좋은 소식 보내드리겠습니다.”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옥화무제의 뒷모습을 보며 맹주는 씁쓸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처음에는 산공분을 먹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저 모습은 산공분을 섭취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키는 사람이 곁에서 보고 있는 상태에서 산공분이 들어 있는 차를 마셨음에도 중독되지 않은 것을 보면, 뭔가 그녀만의 비장의 수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허허허~ 참, 이 일로 그녀와의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처음부터 어느 정도 조사를 해보고 손을 썼어야 하는 건데, 이 일을 어찌할꼬?”그로부터 3주일 후, 정사를 대표하는 두 거두가 만났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만큼 양측의 수행원은 정확히 100명으로 제한됐으며, 그들이 만난 곳 역시 감숙성의 난주 부근이었다. 난주는 과거 송의 북방 방어에 있어 한 축을 담당하던 전략 요충지였으나, 지금은 군데가 떠나 빈껍데기로 전락해버리 도시였다. 사실 송으로서는 제 앞가림도 하기 힘든 판에 이 변방에까지 투입할 병력이 없었던 것이다. 난주 인근에 있는 작은 평야에서 그들은 만났다. 사방이 탁 트인 평원에 놓인 고급스러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의 고수들이 저마자 서열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허허허, 이런 일로 천마신교의 교주와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해본적이 없었소이다.”“그것은 본좌도 마찬가지외다.” 며칠 전부터 양측에서 파견한 대표들이 협정서의 초안을 놓고 최대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애 다퉜었다. 양쪽이 글자 하나를 가지고도 갑론을박해서 결국 양쪽 다 만족할 수 있는 - 하지만 양쪽 다 만족할 수 없는 - 그런 협정서를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양측에서 파견한 대표들이 만들어놓은 협정서는 2부가 제작되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이미 양측 대표단이 싸울 만큼 다 싸운 상태였기에, 두 거두는 시시한 글자 하나 가지고 쪼잔하게 싸울 필요 없이 우아하게 인장만 찍은 후 헤어지면 되는 상황이었다. 마교 교주와 무림맹주는 협정서에 서명한 후 서로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중원을 오랑캐 따위에게 넘겨줘서야 되겠소? 잘해봅시다.”“하하핫, 물론이야. 감히 중원을 넘본 것을 후회하게 해주지.”악수를 하며 나누는 서로의 인사말은 따로 놀 수 밖에 없었다. 중원을 걱정하는 무림맹주의 생각과 달리 묵향의 목표는 오로지 장인걸 하나였기 때문이다. 금은 그를 없애는 데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피차 어쩔 수 없이 당분간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지만 마교와 정파는 불과 물의 관계. 설마 그 누가 마교와 무림맹의 연합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양츠그이 거두가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는 있었지만, 앞으로 두 세력간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 묵향19권 입니다. 이걸 가져가서 무슨짓을 해도 상관안합니다. 대신 출처만 밝혀주세요 출처만 밝혀주신다면 뭐 상관없습니다. JJANG0U.COM 의 by. 岳飛입니다. 출처를 짱공유닷컴으로만 해주시고 배포해주셔도됩니다. ^^;;; 출처남기는거 잊지마세요 ^^ 차례 1. 이이제이(以夷制夷) 2. 격동하는천하 3. 아련한기억 4. 몽고로가는길 5. 진실과 거짓 사이 6. 이어지는 인연 7. 흑풍대의 분전과 오해 8. 무림연합과 대금제국군의 충돌 9. 쓰레기 문파 천지문의 심법 10. 대(代)를 이어가는 우정 11. 뜻밖의 결투 12. 소림으로 돌아온 괴승 13. 개방도의 작당모의 14. 어울리지 않는 동행 15. 야반도주 16. 한 가지 부탁 이이제이(以夷制夷) 무림맹주와 무림사에 길이길이 남을 협정을 맺은 묵향은, 협정을 마친 무림맹주 일행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투덜거렸다,. "젠장, 그 빌어먹을 장인걸 때문에 내가 저런 쓰레기들과 손까지 잡아야 하다니......." 곁에 서 있던 군사 설민은 묵향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어쩔수가 없지 않습니까. 제 아무리 본교의 힘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거대한 제국을 상대로 혼자 싸울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겟습니까" 그 말에 묵향의 안색이 더 일그러지자 설민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다급히 말을 이엇다. "교주님께서 이번 협정에 대해 너무 마음 상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금과의 전쟁 대부분은 정의를 부르짖는 저놈들에게 은글슬쩍 떠넘기고, 본교는 배신자 장인걸을 잡는 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설민의 그 말은 마음에 드었는지 묵향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묵향은 발길을 돌려 수하들과 함꼐 감숙성 분타로 이동했다. 감숙성 분타는 철영 부교주가 오래 전에 몰래 건설해놓은 곳이였기에 현재 무림 각지에 건설되고 있는 타 분타들과는 달리 철통같은 방어진을 이미 갖춰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관지 장로가 흑풍대를 거느리고 비밀리에 이동하여 대기중이었다. 감숙분타에 도착한 묵향은 관지 자올를 은밀히 불렀다. "관지 장로" "예 교주님" "그대는 흑풍대를 이끌고 무한에서 양양성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지키도록 하게나" 묵향의 말이 떨어지자 관지 자올의 몸이 끓어오르는 격동에 부르르 떨었다. 완전무장을 갖춘 흑풍대를 이끌고 감숙분타 에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관지는 이미 이런 명령이 떨어질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는 것과 그것이 명령이 되어 자신에게 하달되었을 때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묵향의 명령은 짧았지만 그의 자금은 주군에 대한 감동과 다시금 대송제국을 위해 한몸 바쳐 싸울 수 있다는 충성심 에 불탔던 것이다. "옛, 목숨을 걸고 명령을 완수하겠나이다." "아 목숨을 걸 필요까지는 없네, 자네는 본교에 아주 소중한 인재니까 말일세 자네는 한 가지만 주의해주면 돼 본교가 개입했음을 장인걸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 알겠나?" "옛 교주님의 말씀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네만 믿겠네, 어찌되었건 한시가 급하니 지금 바로 떠나는 것이 좋을 게야." "존명!" 관지가 서둘러 흑풍대가 대기하고 있는 막사를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묵향은 미소를 지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마교에 몸 담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황실에 대한 충성심과 대송의 앞날을 걱정하는 진정한 장수였다. "관지가갔으니 아마도 장인걸이 직접 나서지 않는 한 방어선이 무너질 일은 없겠지" 묵향은 혼잣말로 중얼거린 후, 뒤돌아서서 설민 군사에게 말했다. "자 이제부터 금을 박살낼 계책이나 의논해보기로 할까?" 그러자 설민은 약간 난감한 기색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상대는 문파가 아니라 불붙듯 강렬한 기세로 일어서고 있는 거대한 제국입니다, 교주님, 아무리 무림맹과 연합했다고는 하나 쉬운 상대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거기에다가 더욱 안 좋은 것은 송 황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설민의 자신 없어 하는 말투에 묵향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이런 망할! 자네는 머리는 좋은데 왜 그렇게 소심한가! 쯧쯧, 설무지는 안 그랬는데 어찌 그 핏줄에서 저 모양인지 모르겠군 잘 들어! 문파나 국가나 다 똑같은 거야, 그놈들을 거대문파 그러니까 무림맹이 조그 더 커졌다고 생각하고 기탄없이 말해 보란 말이야!" 묵향의 질책에 설민은 얼굴을 붉히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하필이면 아버지와 비교해서 말하다니...... 사실 지략으로만 따진다면 자기 아버지를 능가한다고 자부하는 설민이였다. 다만 문제가있다면 그의 아버지와 그가 처한 환경이 다르다는 점이다. 설무지는 묵향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의 계책을 한없이 펼쳐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설민 은 어떠했나? 교주는 행방불명이 된 상태였고, 고집불통의 늙은 아버지와 범과 용같이 무섭기 짝이 없는 말 안 듣는 부교주들 사이에 끼어 수많은 눈치를 봐야만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가 군사의 자리에 올라쓸 때 두 부교주간의 힘의 군형 을 맞추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만약 거기에 실패했다면 마교는 곧장 내전으로 치달았을 테니까 대국적 견지에서 마교의 중흉을 꾀하는 것도 좋다. 설민도 그걸 잘알고는 있었지만, 실행할 여우조차 없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는 마교의 상황을 유지해 나가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랜 세월 지속되다 보니 자연 설민은 윗사람의 눈치를 보는 성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성격이 그렇다고 해도 그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묵향의 말에 울컥하지 않는다면 그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설민은 마음을 굳게 먹고 묵향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처음에는 제법 컸던 목소리가 말이 이어질수록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병법에 이르기를적의 기세가 강할 떄는 피하라고 했습니다. 정면에서 승부하는 것보다는 그들을 피로하게 하여 자신들이 지닌 바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선결과제일 것입니다." 묵향은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 방법을 말해보란 말이야!" 묵향의 노성에 찔끔한 설민은 아까보다 더욱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병법을 쓰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뭐! 이이제이?" 아무래도 묵향의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의 생각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듯하자 설민은 고개를 팍 숙이고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왜 묵향의 말에 자신이 울컥했는지 가슴을 치고 싶은 설민이였다. "예, 그러니까 이쪽에서 금을 치기 전에 먼저 이민족들의 힘을 빌리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금은 이민족도 상대해야 하고, 이쪽 도 상대해야 하고......" "그렇지, 바로 그거야! 홍진장로" 설민의 생각과는 달리 묵향은 이이제이의 계책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교의 정보를 총괄하고있는 미마대 대주인 홍진 장로를 불렀다. "예, 교주님." "금을 칠 만한 세력이 있는가? 참, 그러고 보니 요의 잔존세력들이 아직 남아있다고 들었는데 그들의 세력은 어떤가?" 묵향의 질문에 홍진 장로는 자신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들을 이용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직 남아있기는 하나 현재 잔존하고 있는 요의 세력은 조만간 붕괴될 것이 확실합니다. 뛰어난 인재가 있어 구심점 역활만 제대로 해준다면 애기가 틀려질 수도 있곘습니다만...... 현 상황에서 인재를 키울 여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흠 그렇다면 요의 잔존세력은 도무지 도움이 안 된다 그거로군 그렇다면 고려는 어떤가?" 고려라는 말에 홍진 장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고려의 군사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괜히 금과 전쟁을 해봐야 잃는 것이 많아도 얻을 것은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자신의 계책을 묵향이 받아들인 듯하자 설민은 자신감을 얻었는지 슬쩍 입을 열었다. "교주님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고려는 불가능하겠지만 몽고족이라면 이야기가 틀리지 않겠습니가? 교주님께서도 잘 아시다 시피 그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자들입니다. 이쪽에서 뭔가 그럴듯한 대가만 약속해준다면 전쟁쯤이야 불사하지 않겠습니 까?" 설민의 말에 묵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대송제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은 지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지도 않았지 않은가? 더군다가 몽고를 일통할 만한 실력자도 없다고 들었는데......" 오래 전 찬황흑풍단에 소속되어 자신의 손으로 몽고를 휩쓸었던 묵향이었기에 설민의 의견에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홍진 장로 또한 설민의 의견에 찬동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흠, 설민 군사. 내가 맡은 정보로는 몽고쪽도 힘들 것 같소 누군가가 몽고를 일통할 만큼 큰 세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군소부족들은 각자 족장의 뜻에 따라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이전투구(泥田鬪狗) 를 벌이고 있는 실정이오 특히 몽고의 동남쪽에 위치한 족장들은 상당수 금쪽에 붙기 시작하고 있다고 들었소. 그들로서는 금과 연합하여 요의 잔당을 치는 것이 매우 실속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오" 그 말에 자신 있게 앞을 나섰던 설민의 고개가 팍 수그려졌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묵향이 홍진 장로에게 물었다. "가장 금에 협력적인 부족은 어딘가?" "몽고에서도 흉폭하기로 손가락에 꼽힌다는 타타르 부족입니다." 묵향은 빈정거리듯 말했다. "호오, 흉폭하기 그지없다고? 그렇다면 원수질 일 또한 적지 않았겠군, 그 주위에 있는 족장들 중에서 타타르 족이라면 이를 가는 족장들이 당연히 있을거야, 안 그런가?" "물론 그런 부족도 있습니다. 테무진이라는 젊은 부족장이 타타르족 사람들을 가장 증오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가 지닌 세력 은 너무 보잘 것이 없어......" 홍진 장로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묵향의 생각은 달랐다. 묵향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 왜 그렇게 증오한다고 하던가?" "그의 아버지를 독살했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흠 과연 증오할 만도 하군, 그래 그가 몇 살 때 아버지를 잃었지?" 왜 그런 것을 교주가 궁금해하는지 의아해하면서도 홍진 장로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사실 묵향이 행방불명이 된 후 비마대는 그를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투자했다. 심지어 개방이나 무영문쪽의 정보까지도 슬그머니 사들였을 정도였으니 더 이상아 말이 필요 조차 없을 것이다. 그랬기에 홍진 장로가 몽고의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언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렸을 때라는 것은 확실한 모양입니다." "좋아 바로 그 녀석으로 하자구. 몽고는 그야말로 치열한 약육강식의 세계야 아무리 뛰어난 족장이었다고 해도, 그가 죽은 후 그의 부족이 유지되었을 리가 없지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게 정상이니까 말이야 그런 와중에 젊은 나이에 자신의 힘으로 그 정도까지 세력을 키운것을 보면 보통 놈은 아니야 조금만 도와주며 타타르를 박살내 버릴 거야" 묵향이 태무진을 선택한 데는 과거 몽고 원정 때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과거 철진천이라는 거목 뒤에서 기습해서 척살하자 마자 그를 따르던 몽고부족들은 순식간에 부너져버렸지 않았던가 그들에게 있어서 이미 죽은 자에 대한 의리 따위는 눈꼽만큼도 중요한 것이 아니였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몽고의 대지는 척박했기 때문이다. 더군다가 흉폭하기 그지없다는 타타르 부족이 그 아버지를 죽이고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그의 핏줄을 살려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약간의 세력까지 유지하고있다면 테무진이라는 부족장의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묵향은홍진 장로가 던진 말 몇 마디에 테무진이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금에 협조적인 부족을 없애려면 어차피 누군가를 하나 택해서 키워줘야했다. 그래서 타타르 부족을 가장 증오하는 자를 물어본 것이 였는데, 그 부족장이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다느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묵향이 고개를 주억거자 설민과 홍진 장로는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들로서는 교주가 왜 세력도 미미한 테무진이라는 부족장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자신의 생각대로 테무진이 타타르를 박살냈을 떄를 가장해 봤다. "아마 그 때쯤이면 장인걸이 요를 끝장내버렸을 거야 요가 없어지면 몽고와 금은 국경을 마주하게 되지 그때 태무진을 충돌질해서 금을 괴롭히게 만든다면......" 생각을 정리한 묵향은 곧장 고개를 설민 쪽으로 돌리며 지시했다. "홍진 장로가 말한 그 테무진이라는 족장을 우리쪽으로 끌어들여라 물론 타타르 부족을 상대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겠다며 말이야" 설민은 무걓ㅇ의 명령이 납득되지는 않았지만 하늘 같은 교주의 명령에 감히 토를 달지 모 ㅅ하고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옛 교주님" 묵향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장인걸 그 광활하기 그지없는 대지를 모두 다 지키려면 쉬운 일이 아닐거다 흐흐흐" 혼자 좋아하고 있는 묵향을 향해 홍진 장로가 난처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교주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물론 테무진이 이이제이 병법의 적임자일 수도 있지만 그의 세력은 너무나도 보잘것이 없습니다.오히려 세력이 큰 케레이트 족의 수장 옹칸을 끌어들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는 남부 몽고에서 가장 강 대한 세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송과 교역을 해왔기에 협상의 묘미를 잘 알고 있는 족장입니다. 그렇기에......" 묵향은 더 이상 들을 것 없다는 듯 확정적으로 말했다. "본좌는 테무진이 적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홍진은 필사적으로 간언헀다 사실 그가 생각했을 때 교주의 계획은 너무나도 실현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를 끌어들어 봤자 본교의 지원이 없다면 그다지 쓸모가 없지 않겠습니까? 어느 정도 타타르와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려면 무사나 물자를 지원해줘야 할 텐데, 그렇다고 본교의 무사를 보내줄 수도 없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가 있는 곳은 몽고 의 동북부입니다. 물자를 지원하는 것도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닙니다. 교주님" 홍진 장로는 동의를 구하려는 듯 설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설민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고개를 돌려 홍진 장로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 못브에 홍진 장로는 내심 설민에게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태무진을 어느 정도의 세력까지 키워주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막대한 양의 물자를 지원해줘야 하는데 그 물자를 어떻게 전달한단 말입니까? 두ㅡ넓ㅇ느 몽고벌판을 가로질러야 합니다. 충분한 호위를 붙여야 할 텐데, 언제 장인걸과 전면전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게 많은 고수들을 뺼 수 있곘습니까? 잘해봐야 자성만마대가 한계일 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정도 세력 이 이동한다면 장인걸이 눈치챌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장인걸 또한 사방에 첩자들을 깔아놨을 테니 말입니다." 홍진 장로의 말이 끝나자 딴청을 피우던 설민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홍진 장로의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물자를 호위하기 위해 많은 무사들을 움직인다면 무영문이 눈치챌 게 볼 보듯 뻔합니다. 무림맹가 협야글 맺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우리가 아무 해명 없이 그 정도의 세력을 움직인다면 괜한 의심만 살 수도있습니다." 설민의 말에 묵향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무슨 생각을 했느지 설민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본좌가 직접 이 일을 처리하겠다. 무림맹과 장인걸의 눈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병력으로움직일 것이니 군사는 장영길 장로에게 통보해서 자성만마대 대원들 중에서 5백명만 차출해 두라고 일러라." "교, 교주님 그 정도 일로 교준미께서 직접 가신다는 것은......" "왜, 본좌가 가면 어때서? 본좌가 못미덥다는 말이냐?" 홍진 장로는 당황한듯 고개를 저었다. "저 절대로 그런 뜻은 아닙니다. 교주님 교주님꼐서 가신다면 무슨 걱정이 있곘습니가? 하지만 지금 교주님께서 자리를 비우신다는 것이......" 묵향은 손을 쓱 처들며 홍진 장로의 말을 막았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몽고에서의 일을 끝낸 후 곧바로 남하할 테니 남은 일은 너희들이 잘 처리해주리라 믿는다 만약 돌아왔을 때, 일처리가 시원치 않았을 때는......" 그러면서 묵향은 힐끗 설민과 홍진 장로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들은 찔끔하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곘습니다. 교주님" 사실 묵향이 자리를 비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막강한 본교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격동하는 천하 정사를 대표하는 거두들이 사이좋게 협정서를 교환한 역사적인 날 묵향은 바로 그날 흑풍대를 파견한 후 다음에 시행할 작전을 수립한다고 바빳다. 그렇다면 철천지 원수지간인 양쪽이 협정서를 맺도록 도와준 옥화무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양쪽에서 사례로 받은 선물들을 앞에 수북이 쌓아두고 득의만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을까? 사실 그러고 있어야 함이 정상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끓어오르는 울화를 삭이느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옥화무제는 이가 갈리는 듯한 암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지금 남경에서 고종꼐서 즉위식을 올리셨다고......" 옥화무제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모샇겠는지 자신이 앉아있는 의자의 손잡이 부분을 꽉 움켜쥐었다. 그만큼 지금 총관의 보고가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정강의 변으로 황제와 상황제 그리고 대소신료들은 모두 다 금에 잡혀가버 렸어요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황실의 인물을 끄집어내어 무조건 즉위식만 올리면 되는 것이였는데 그걸 본문이 주도하지 못 했다는게 말이나 되요?" "하... 하지만 정강의 변 이래 워낙 많은 일들이 갑작스레 벌어졌고,,, 그리고 태상문주님께도 자리를 비우셨던 터라......" 콰직! 옥화무제가 움켜쥐고 있던 의자의 손잡이 부분이 그녀의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거친 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울화를 참지 못 한 옥화무제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너무 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어쩔 수 없었던지 옥화무제는 이를 으드득 갈며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아무리 본녀가 없었다고 하지만 , 그걸 주도할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말이 되나요?" 꽝! 그녀의 분노 어린 주먹에 탁자는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순간 보고를 올리던 총관을 찔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옥화무제는 그런 총관 을 한동안 못마땅한듯 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하의 모자람을 이제 와서 탁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휴우~ 본문의 규모는 더욱 커졌지만 너무나도 인재가 없군요 인재가......" 자신의 딸인 문주라도 그녀가 없는 동안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영문이 한관 동관을 배후에서 움직여 천하를 농락할 수 있었던 것도 옥화무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화무제라는 존재가 없다면 그것이 가능 했을까? 옥화무제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과 같은 겅출한 인재가 무영문에 한 명 더 없다는 사실이. 황제 상황제와 함께 고위관료 3천명이 금에 끌려가버린 지금 송은 먼저 황제를 즉위시킨 자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였다. 무영문은 정보단체인 만큼 끌려가지 않은 모든 황족들의 위치도 알고 있었고 그 중 하나를 황제로 즉위시킬 힘도 지니고있었다. 그런데 무영문이 비상할 수 있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런 옥화무제의 분노 어른 눈길을 받으며 총관은 그것이 모두 자신의 책임인양 고개를 들지 못했다. 총관을 날카롭게 노려보단 옥화무제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ㄷ. 사실 이 모든 것이 총관의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자신의 딸인 문주의 잘못이요 또 손녀인 부문주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문주와 부문주를 제데로 보좌하지 못하고 있는 그 나이만 헛 먹은 장로들의 잘못이기도 했다. 노력은 했지만 아직 울화가 가라앉지는 않았는지 옥화무제의 목소리는 거칠게 흔들렸다. "그래 누가 신황제를 옹립하는데 두축이 된 것인가요?" "진회라는 자입니다." 잠시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떠오르지가 않았다. "진회? 그가 어떤 인물인지 철저히 조사해보세요" "이미 조사해보라고 이렀습니다. 현재까지 올라온 자료를 봤을 때 지방의 하급관료로서 그렇게 특별한 데는 없는 인물인 듯합니다." 총관의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이제는 허탈한 심정까지 드는 옥화무제였다. 아예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지방의 하급관료 따위가 황제를 옹립하다니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총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허 그런 인물이 황제를 옹립하도록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니......" 총관은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그와 접촉을 한번 해보세요 이렇게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예 명대로 따르겟습니다. 태상문주님" "아참 그리고 혹시 신황제에 불만을 품고 있는 황족이나 세력이 있는지 조사해보도록 하세요 만약 진회라는 자가 우리과 손을 잡기 거부한다면 그쪽으로도 생각해봐야 할 테니까요" "옛" 바로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총관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재빨리 문쪽으로 갔다 밖에 서 있던 문사차람의 중년인 하나가 총관이 나오자마자 귀에다가 뭔가 소곤소곤 소식을 전한 다음 총총히 물러갔다 총관은 재빨리 되돌아 와 태상문제에게 방금 들어온 정보를 전했다 마교와 관련된 특급 정보였던 것이다. "방금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마교의 흑풍대가 이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교에 흑풍대라는 단체가 있음을 알고 있는 자는 극소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20여 년 전 마교의 내분 때만 활약했을 뿐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영문의 경우 마교에대해 유독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터라 이미 그들의 정체 를 알고 있었다. 그건 묵향의 공포스러운 능력을 일찍이 간파한 옥화무제의 명에 의해 마교와 관련된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정보를 긁어모았기 때문이다. "흑풍대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건 이미 옥화무제가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마교의 실질적인 목표는 금이 아니라 장인걸이었다. 장인걸도 바보 가 아닌 이상 마교가 개입했다는 것은 눈치챈다면 모종의 대비를 해올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미리 차단하려면 장인걸의 촉각에 걸리지 않을 만큼 마교의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강력한 단체를 파견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조건을 갖춘 것은 마교 내에서 흑풍대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흑풍대의 간부들은 모두 다 찬황흑풍단의 무장 출신이었다. 금군을 상대로 한 대규모 접전에도 경험이 풍부할것이 분명했다. "예, 난주 인근의 관도를 빠른 속도로 이동중인 것이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옥화무제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흑풍대는 통상적인 마교의 단체들과 달리 엄청난 중무장을 갖추고 있는데다가 기마대이기에 아주 눈에 잘띄는 무력단체였다. 그런 그들이 십만대산 주위가 아닌 난주 인근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마교와 무림맹이 협정서를 조인 하기 훨씬 이전에 흑풍대가 움직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난주 인근이라고 했나요?" "옜! 태상문주님" "흠 그렇다면 그 정도 병력이 감쪽같이 숨어 있을 만한 규묘의 비밀분타가 그 근처에 있다는 말이군요 몇 개조를 투입해서 비밀 분타의 위치를 파악해 두도록 하세요 나중에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옛" 묵향이 이토록 빨리 움직이기 시작할 줄이야 물론 장인걸에게 하루라도 빨리 복후가 싶은 그의 마음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묵향 이 장인걸에 대한 복수를 완성했을 때 바로 그때가 금이 멸망하는 순간일 것이다. 장인걸이 없이 금이 버틸 재산은 없을 테니 말이다. 금의 멸망 "부드드득!" 금에 대한 일만 생각하자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그녀의 이빨리 갈리기 시작했다 그놈의 금 떄문에 자신이 얼마나 큰 피해를 당했던가 그녀 또한 묵향 못지않게 금에 대해 원한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흑풍대가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주도록 하세요" "옛" "그리고 난주쪽에서 중무장을 한 기마대가 움직이고 있다는것을 안다면 장인걸이 괴이하게 생각할 거예요 이쪽에서도 수많은 첨자 를 운용하고 있듯 저쪽의 첩자들도 사방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들의 첩보망을 철저히 교란하도록 하세요"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몇 달 전 묵향에게 먼지 나게 쥐어터진 후 초류빈은 또다시 심기일전하여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것 외에는 그 꿈에 볼까 두려운 인간의 마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무공을 가르쳐주겠다는 그 말에 혹해서 이곳까지 따라왔는지 내가 미쳤지 젠장!" 초류빈은 식사를 마친 후 식사와 함께 보내진 독환 화주 3병을 마시며 푸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묵향을 다시 만난 이후부터 느는 것은 무공이 아니라 주량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솔잎을 헤아렸다는 것은 순 거짓말인 것 같고 뭔가 엄청난 무공을 비밀리에 수련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씀 이야?" 아무리 주량이 늘었다지만 안 좋은 기분에 독환 화주를 계속 마시자 취기가 조금씩 올라왔다. 하지만 내공을 일으켜 억지로 취기를 억누르지는 않았다. 취한 기분에 속에 있는 불만을 이렇게라도 토해내지 않음녀 울화가 쌓이고 쌓여주화입마라도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똫다시 술병을 들어올려 벌컥벌컥 들이킨 후 초류빈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울분에 참 어조로 외쳤다 "화경에 들었다면 그래도 중원에서 열 손가락에 들어가는 초강자잖아 젠장, 그런데 화경에 들면 뭘해! 그 빌어먹을 새끼에게는 통하 지도 않는데 그나마 성격이라도 좋으면 스승처럼 모시며 존경심이라도 갖지" 혼자 중얼거리던 초류빈은 생가할수록 울화가 치미는지 또다시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취가가 오르자 슬슬 속에 쌓여 있던 불만이 거친 욕설과 함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크아, 그나저나 예전에 사부가 말씀하시기를 무공을 대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성을 제대로 닦아야 한다더니 말짱 다 개소리였어 그렇지가 않다면 저 극아무도한 놈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무공을 익히고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설명이 안 되잖아" 초류빈은 묵향을 만나기 전까지 무공을 사사받았던 예전의 사부 즉 초씨세가의 전대 가주의 말을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사부는 어느정도의 무공까지 숙다이 필요하지만 그 한계를 뚫고 깨달음을 얻어 무공을 태성하기위해서는 폭넓은 자연의 이해와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었다. 그러면서 명상을 통해 자연의 소리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초류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딴 성질따위는 하나도 하지 않고 오로지 묵향에게 맞지 않겠다는 일념 그것 하나 만으로 악착같이 무공을 익혀 화경에 올랐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휴우~ 그 빌엄거을 놈 때문에 내 창창한 인생도 이렇게 비루하게 썩다가 종치게 되는구나 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네 빌어먹을 새끼!" 얼큰히 취한 초류빈이 묵향을 떠올리며 이를 갈 떄였다. "뭐시라?" 갑자기 등 뒤에서 치미는 울화를 참고 있는 듯한 괴이한 울림을 간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바로 뒤에 누군가 있었다 초류빈은 순간 취기가 확 달아다며 등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누가 있어서 자신의 지척까지 기척을 숨기고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류빈은 도를 움켜쥐며 재빠르게 뒤로 돌아서며 외쳤다. "누구냣! 퍽! 초류빈은 순간 머리를 뒤흔드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얼마나 호되게 가격당했는지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돌아섬과 동시에 머리를 공격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픔보다는 어이가없었다. 화경에 다다른 자신이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상대가 이토록 가까이 다가설 떄까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초류빈이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 억지로 울화를 참고 있는 듯한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류빈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왠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두려움에 떨어야 헀다 그만큼 그 목소리가 전해 주는 공포감은 소름 끼칠 만큼 끔찍했던 것이다. "네놈이 본좌를 그렇게 생각하고있었단 말이지? 애써 무공도 가르쳐주고 먹여주고 입혀줬더니 하는 소리 봐라! 오냐 안그래도 장인걸 그놈때문에 짜증이 났었는데, 마침 너 잘 걸렸다. 이 배은망덕한놈 어디 죽어봐라" 순간 초류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제서야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된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그토록 무공을 익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묵향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이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ㄷ. 그리고 그런 무심시한 상대에 대해 아예 반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라는 자각보다는 상대가 안겨주는 공포감이 먼저 떠올랐기 떄문이다. 사실 아무리 묵향이라도 화경에 오른 초류빈의 감각을 속이고이토록 가깝게 접근해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초류빈이 정,상.적일때의 애기다. 지금처럼 솔에 취해 있을 때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묵향에 따라 마교에 들어온 후 초류빈이 매일 당한 것은 지도갛ㄴ 구타였다.비무아닌 비무를 강요했다 그 덕분에 초류빈의 무공이 급상승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그는 묵향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다. 지금까지 그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더욱 높은 경지의 무공을 연성하려고 노력해 온 것도 다 이 악몽과도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초류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른 묵향에게 변명하려고 했다. 안 그러면 맞을 테니까 말이다. "저 제가 잠시 술에 취해서 미쳤나......" 하짐나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분노에 찬 묵향의 발길질에 무자비하게 짓밟혀야만 했다. 퍽! 퍽! "으아아악! 제발 한 번만......" 초류빈은 아예 반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최대한 몸을 움츠려 맞는 부위를 최소화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공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다. 묵향의 무자비한 구타에 본능적으로 행한 행동이었지만 설마 그것이 묵향의 분노를 더욱 돋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오호 호신강기? 몇 대 쥐어 패고 용서해주려 했더니 감히 호신강기를 일으켜 저항을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초류빈은 자신이 ㅗ애 그토록 기를 쓰고 무공을 익였는지 새삼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누가 호신강기를 일으키고 싶어서 일으켰나?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초류빈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빨리 묵향의 분노가 끝나기만을 참고 기다려야 했다. 사실 묵향이 자신을 죽이자고 패는 것도 아니었고 그도 구타라면 당할 만큼 당한 강골이 아닌가 묵향이 처음에 초류빈에게 무공을 가르쳐줄 때 우선 몸으로 먼저 느끼는 것이 진전이 빠르다며 무자비한 구타를 가했기 때문에 맞는 것이라면 이미 이골이 난 상태 였다. 몸을 살짝살짝 비틀어 통증을 최소화하는 기법에 있어서는 아마 무림 내에서 초류빈을 따를 자가 없을지도 몰랐다. 초류빈은 적당히 지병도 질러가며 묵향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이쯤 했으면 화가 풀릴때도 됐는데......"' 그러다가 어느 정도 묵향의 표정이 누그러졌다는 생각이들자 초류빈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사정했다. "잘못했습니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다 보니 술에 취해 그만......" "호오, 아까는 극악무도한 성격이라며? 취중진담이라고 하지 않았냐? 네가 평상시에 생각하는 내 모습이 그런 모양인데 말이야" 초류빈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제가 감히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천마신교가 배출한 가장 위대하신 지존께 제가 그런 망발을 입에 담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 잘못 들으신 거겠죠" 넉살 좋은 그 말에 묵향은 기가 막힐 수밖에 "어엇? 이녀석이 무공은 안 늘고 아부만 늘었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말은 진실이라니까요" 어차피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묵향은 더 이상 따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초류빈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너 나 좀 따라와라" "예? 어, 어디 가십니까?" "이번에 일이 생겨 몽고에 가야 하는데 혼자 가자니 심심해서 말이야 더군다나 명색이 부교주란 허구한 날 처박혀서 밥만 축내지 말고 일을 해야 할 거 아냐!" 묵향에 말에 초류빈의 안색이 팍 일그러졌다 쉽게 말해서 몽고까지 가며 심심하면 쥐어 팰 상대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닌가 마교내에서 묵향의 등쌀에 견딜 수 있는 자라고 해봐야 자신과 천리독행 정도였다. 하지만 천리독행은 몸이 안쾌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만만한 건 자신뿐이었을 것이다. 초류빈은 얼른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괜히 묵향의 심기를 건드려 매를 버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이죠 교주님 하명만 하십시오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겠습니다." 싫어도 초류빈은 눈물을 머금고 묵향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젠장 화경에 오르면 편할 줄 알았는데 어째 좀 더 귀찮아지는 것 같단 말씀이야' 넓은 정원에는 제철을 만난 듯 숨낳은 꽃들이 피어 있다. 떄는 바야흐로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이 아니던가 벌과 나비가 춤을 우고 연못 위로는 잠자리들이 쌍으로 날아다니며 알을 낳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 경치는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연못 앞에 선 사내에게는 그런 것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연못에는 수많은 잉어들이 푸른 물살을 해치며 우아하게 떠돌고 있었지만그 모습 또한 수심어린 그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가주 어인 일로 이 시간에 여기 서 계신 것이오?" 하지만 가주가 가만히 서 있자 중년 여인은 가주에게 다다다서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 어찌 그리 수심에 찬 표정이시오?" 가주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대꾸했다. "아 어머님께서 나오셨습니까?" 가주의 어머니 매화검 이옥연은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지금 남궁세가를 떠받치고 있는 4명의 장로 들중 한 명이었다. 자신의 아들이기에 앞서 남궁세가를 이끌어 가는 가주였기에 그녀는 아들에게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그러신느 게요?" "워낙 세상이 뒤숭숭하다 보니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무림을 뒤흔들고 있는 금 때문인 게요?" "예" 아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옥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림맹주가 마교와 연합을 결심할 정도니 그들의 세력이 보통은 넘는 것 같더구려 하지만 지금껏 무림은 황실의 일에 관려앟ㄴ 적이 없었지 않소? 괜한 싸움에 끼어들어 피를 흘릴 필요는 없겠지요" "물론입니다. 어너니 하지만 5대세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서문세가에서도 문주께서 직접 가신들을 이끌고 참전 하시겠다고 통보를 보내왔습니다." 각 세가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였다. 사실 5대세가라고 불린다고 해서 얻는 것은 명성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무림세가 들 중에서 갖아 세력이 큰 것은 사실이었고 그들의 행보에 모든 세가들의 관심이 집중된 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른 세가들과 달리 서문세가만은 그 중에서 특별한 데가 있었다. 왜냐하면 세가들 중에 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가 유일하게 화경의 고수를 배출했기 떄문이다. 거기에다가 서문세다는 5대세가 의 두번째라고 할 수 있는 종리세가와 사돈지간을 맺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면 당연히 종리세가도 함께 움직일 것이다 또 종리세가가 움직인다면 종리세가의 가주 패도(覇刀) 종리영우와 의형제를 맺은 제갈세가의 가주 패검천령(覇劍天嶺) 제갈기도 움직이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수라도제의 뜻에 따라서 5대세가 중 셋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서문세가의 움직임이 모든 세가들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은 자병한 사실이었다. "으응? 수라도제 어른꼐서?" 이옥연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노회하기 그지없는 그녀는 수라도제가 움직임으로 인해 그에 동참할 세력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말을 확인시켜주듯 가주의 말이 이어졌다. "예 퍄도 어르신께서 동참하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아마 조만간에 제갈세가나 다른 세가들에서도 동참할 거라는 통지가 올 것이 뻔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본가만 몸을 사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곘습니까?"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옥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자신을 얻은 가주는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이렇게 해서 금을 중원에서 몰아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오랑캐를 몰아내는 데 힘을 보텐 사람 들은 모두 황실로부터 큰 포상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멀리 볼 필요는 없겠지요 실패했을 때라는 가정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주의 생각은 어떠신 게요?" "소자는 한 팔을 보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서문세가와 함께 움직이는것이 훨씬 피해가 적지 않겠습니까?" 그 생각에 찬성한다는 듯 매화검 이옥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규모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시오?" "만약이라는 것도 있으니 창궁18수를 포함해서 1천정도를 거느리고 나갈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이옥연의 아미가 꿈틀했다. "가주가 직접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시오? 본가의 과거를 잘 생각해보세요 만약 가주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본가가 어떻게 될지를 말이오" 이옥연의 근심도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의 남편 즉 전대 가주를 잃은 과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주가 혈기방장하기는 했으니근심에 젖어있는 어머니의 눈을 보면서 다시금 자신이 직접 나가곘다는 말을 되풀이할 수 없었다. 잠시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가주를 향해, 이옥연은 슬픈 눈빛으로 무언의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가주는 한숨을 내쉬며 연못쪽으로 시선을돌렸다. "어너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천풍검(天風劍) 곡추에게 지휘를 맡기겠습니다." 그제서야 이옥연은 활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잘 생각하시었소 그러시는 것이 좋겠지요" 남궁세가 양양성으로 고수들을 파견하기로 의견을 모았듯이 무림 전역의 다른 문파들도 양양성으로 문파의 정예들을 출발시켰다. 그것이 현재 무림의 대세였고 또 무림맹이 추진하는 것이었다. 물론 목전의 이익만을 추구하느라 정신 없는 사파계열의 문파들 은 거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천마신교가 한 발자국 물서서서 관망하는 태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림맹과 마교가 협정서를 조인하기는 했지만 그건 아주 극비에 속하는 것이었다. 정파의 핵이라는 무림맹도 마교와 손잡았다는 치부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마교 또한 장인걸의 이목을 의식하여 그것을 비밀로 숨겼기 때문이다. 협정서가 조인된 지 며칠이 지난 후 테무진에게 지원할 방대한 양의 물자가 준비되자 묵향은 초류빈과 함께 몽고로 출발했다 식량 및 무기 등을 싫은 마차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가 테무진에게 지원할 물자의 양이 어느정도인지 능히 잠작할 수 있었다. 마차를 중심으로 좌우에서 자성만마대가 호위했다. 그리고 그 일행의 가장 앞에서 수송대를 지휘하는 이팔삼은 뒤쪽에서 흐희낙락하며 따라오고 있는 상관들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겨우 자성만마대의 제12대장 따위가 교주와 부교주를 호위하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기회에 교주에게 잘 보이겠다는 생각에 무영신마 장영길장로는 함께 따라오고 시어 했지만 이번 호위는 자성만마대 겨우 1개대 500명만 출동하게 되었다. 자성만마대의 전력이 고스란히 총단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도 알 수가 없는데 대주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빝에 있는 사람들은 처지가 달랐다. 모두들 힘든 여정이 될 것이 뻔한 이 일에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서로 간에 책임 떠넘기기를 거듭하다가 결국 선택된 인물이 바로 자성만마대 제 12대장 이팔삼이었다. 자성만마대라면 마교의 무력단체들 중에서 흑풍대를 포함해서 가장 하급에 놓이는 두 단체들 중의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들 중에서 500명을 거느린 대장이라고 해도 무림에서 말하는 신검합일 급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 그가 지고한 두 양반을 모시고 먼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교주와 함꼐 가고 있는 초류빈 부교주의 얼굴이 영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 떨떠름한 면상으로 봤을때 그가 결코 기분 좋아서 따라나서는 것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길을 나선 묵향의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아갈 듯한 상태였다 사실 그와 같은 승부사에게 있어서 교내에 틀어박혀 수하들과 각종 전략과 전술 그리고 모략을 세우는 것은 영 취향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대충 둘러대고 교 밖으로 나서니 이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었다. 묵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여행하기 정말 좋은 날이로군" 하지만 묵향의 말과 달리 하늘은 잔뜩 구름이 끼어 있어 언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뚱한 표정으로 초류빈이 아무런 떄구도 하지 않자 묵향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어조에 무시 못할 여운이 가미되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군 이 좋은 날씨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별로 기분이 안 좋은 듯한데 너, 혹시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냐?" 묵향의 기색이 영 심상치 않아 보이자 초류빈은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한 번 개겨봤다가 무려 2시진을 두들겨 맞은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오로지 아부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무슨 말씀을...... 어떻게 제가 감히 교주님께 불만이 있을 수 있곘습니까? 주변의 풍경이 워낙 뛰어나 잠시 정신이 팔려 있었을 뿐입니다. 교주님을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해가 나오지 않았으니 덥지 않 아서 좋고 바람도 부니 선선해서 좋고 비도 내리지 않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습니까?" 이때 하늘에서 비가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초류빈은 급히 덧붙였다. :허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이 정취까지 더해주는군요 떠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술 한잔 하면 얼마나 끝내주겠습니까?" 그 말에 묵향은 흐믓한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놈도 나하고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역시 교내에 쳐박혀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앞으로 일이 없더라도 자주 데리고 다녀야겠군.. 아마 초류빈이 묵향의 속마음을 알았으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호오 아주 좋은 생각이야 안 그래도 술 생각이 나던 참이었는데 말이야" 묵향은 품속에서 술병을 꺼내어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 초류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네도 한 모금 할 텐가?" 묵향의 제안에 초류빈은 넙죽 술병을 받아들었다. "영광입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에라이 아무리 구타가 무섭다지만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아부를 못하겠군' 묵향이 건네주는 술병을 받아 초류빈은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한 모금 들이킨 초류빈의 표정이 묘했다. 술이 입에 쩍쩍 달라붙었던 것이다. '오호 이거 정말 좋은 술이군 나는 싸구려 백주나 마시고 있는데 이 빌어먹을 놈은 이렇게 좋은 술을 마셔? 젠장 세상은 너무나도 불공평하단 말씀이야' 그들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이팔삼은 기겁을 하고 달려왔다, "교 교주님" 다급히 달려온 이팔삼 대장의 말에 묵향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옛, 근처에 괘 유명한 주루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행렬을 잠시 이곳에서 머물게 한 후 주루까지 호위해드리면 될 것 이라는 이팔삼 대장의 생각이었다. 하늘 같은 교주 님께서 이렇게 노상에서 술을 드신 것을 만약 교의 윗사람들이 알게 되면 교주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고 크나큰 문책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특히 자성만마대의 대주인 장영길 장로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장영길 장로의 경우 한떄 장인걸의 수하였다가 교주님의 은혜를 받아 합류한 인물이었다. 그렇다 보니 처음부터 묵향과 행동을 같이헀던 일부 장로들과 비교한다면 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교주꼐 과잉 충성 하려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교주의 반응은 이팔삼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아닐세 갈 길이 급한데 그럴 필요 없어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그래도......" 안절부절못하던 이팔삼은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곧장 수하에게 명령했다. "이봐, 빨리 가서 교주님께서 드실 만한 고급안주몇 가지를 챙겨도오도록 해라" "옛" 하지만 수하가 명령을 받고 달려가려는 순간 묵향이 말했다. "어허! 그럴 필요 없데두 그러는군 본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면서 묵향의 품속에서 육포를 꺼냈다. 그걸 쭉 찢어서 초류빈에게 한 토막을 건네준 후 말을 이었다. "본좌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니 너무 신경쓰지 말고 자네 할 일이나 하게" 그래도 그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육포를 질겅거리며 씹고 있던 초류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어 괜히 부담가지지 말고 자네 일이나 보게 교주님께서는 먼 길을 가며 갖은 고생을 하게 될 자네들을 배려하여 하시는 말씀이니 부하들이나 잘 챙겨주게나" 이팔삼은 왠지 모를 감동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와 같은 하급고수가 교주님이나 부교주님 같은 지고한 존재들을 가까이서 볼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분들을 이렇듯 가까이서 뫼시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감동스러운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라 너무나도 소탈하지 않은가 마교 내에서 서열 100위권만 되더라도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호사스럽게 움직이려 한다 심지어는 수하들을 마소쯤으로 ㅅ애각하는지 여덟명의 고수를 시켜 가마를 메도록 하고는 타고 다니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저 분들은 마교의 하급고수들처럼 말을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먼 길을 가게 되는 수하들을 베려하는 저 깊고 깊은 마음...... 저런 분들을 위해서라면 이 목숨 바친다 한들 무엇이 아쉬울 것이 있겠는가. 묵향과 초류빈을 향해 마음 속으로 충성을 다짐하는 이팔삼 대장이었다. 대원루라는 화려한 명판과는 달리 대원루는 조그마한 객잔이었다. 객잔 주인인 방 노인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빗줄기를 보며 혀를 찼다. "에잇, 젠장 무슨 비가 이렇게 쏟아지나 오늘 손님 받기는 글렀구먼" 웬만큼 급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이런 굵은 빗줄기를 뚫고 여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법이다. 이제 해가 지려는 참이었기에 사위는 더욱 빠른 속도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 장사는 이만 끝인 모양이다, 문 닫을 준비 하거라" "예 나으리" 점소이는 방 노인의 지시대로 청소를 시작했다. 한참 점소이가 지저분한 곳을 쓸고 닦고 있는데 마을로 백여대에 달하는 마차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무사들의 수만 해도 수백명에 달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방 노인은 재빨리 점소이에게 외쳤다. "손님 받을 준비하거라 주방 화로에 장작 좀 더 집어넣으라고 이르고 빨리!" 얼핏 본 것만 해도 마차와 함께 마을로 들어온 무사들의 수는 수백명에 달했다. 이 마을에 몇 개 있지도 않은 객점이나 객잔들은 모두 다 다음날 아침까지 그들로 북적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마을에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만큼 커다란 객잔이 없으니 말이다. 잠시 후 온몸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인물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옵쇼! 지 모두들 자리에 앉으싶시요 폭우를 뚫고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방 노인은 처음에는 그들이 표사들인 줄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기 떄문이다. 하짐나 방 노인은 곧이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손님들의 몸에서는 사람을 억누르는 것 같은 괴이한 기운이 뻗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표사들은 절대로 몸에서 저런 기운을 뿜어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방 노인의 손님 대하는 태도는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객잔 안으로 들어선 무사들 중 두 사람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초립을 벗어 탁자 옆에 놨다. 그것을 본 점소이는 재빨리 두 사람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사람이 많은 만큼 빨리 빨리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드릴까요 손님?" 점소이가 방글거리는 얼굴로 말을 걸었지만 오히려 그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상대가 대꾸했다. "야 비 맞은 사람 처음보냐? 뭐가 좋아서 해실거리는 거야?" 그러자 그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보통사람들보다 조금 더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봐 비에 젖는 것이 싫으면 내공으로 튕겨버리면 될 일이지 그냥 다 맞아놓고 왜 이제와서 점소이에게 신경을 부리는 거야?" 체격은 앞에 앉아있는 사내에 비해 왜소해보였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말이 떨어지자 그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약간 비굴한 표정으로 꼬리를 말며 허둥지둥 대답했다. "교주님께서 그냥 맞으시는데 어찌 제가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 수하들도 다 저와 같은 생각으로 비를 맞았을 텐데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었군 누가 맞으라고 했냐?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음식이나 시켜" "예? 예 이봐, 오리탕하고 술 좀 가져와" 점소이가 한눈체 척 봐도 그들 간의 상하관계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객잔에는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무사들로 꽉 차 있었지만 유독 이 둘이 앉은 자리에는 그 누구도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이 두 사람이 상당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점소이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금방 갖다 드리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점소이는 다른 사람에게는 주분을 받지도 않고 곧장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주방장에게 처음에 주문하는 오리탕 2그릇은 가장 신경써서 만들라고 주문했다. 겉으로는 안 그렇게 보였지만 어리숙해 보이는 점소 이는 거친 무사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방에서 주문을 받은 식사가 나오기 시작하자 점소이는 몸이 열개라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재빨리 움직일 수밖에 ㅇ 없었다. 이 객전에 이렇게 많은 손님이 일시적으로 들이닥쳤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점소이 한 명만으로는 모자라는 감이 있었다. 그 덕분에 방 노인까지도 음식을 날라야만 했다. 꽈당. 이때 문을 거칠게 열고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장한이 들어왔다 그 또한 빗속을 뚫고 왔기에 온몸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 지고있었다. 그리고 장한의 뒤로 대여섯 명의 수하인 듯한 인물들의 모습도 보였다. 장한의 모습을 보자마자 점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매가 날카로운 장한은 돈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악질적인 포두 녀석이었기 떄문이다. 하지만 곧 점소이는 자신이 언제 움찔했었냐는듯 재빨리 다가가서 방글거리는 얼굴로 인사했다. 어찌되었건 상대는 관부의 힘을 뒤에 업고 있는 포두였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당하지 않으려면 알아서 상대의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 것이다. "어서 옵쇼 임 포두 나으리 죄송스럽지만 지금 빈 자리가 없는뎁쇼 이거 어떻게 하나......" 임 포두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점소이를 옆으로 와락 밀치며 소리쳤다. "본관은 임대방 포두라고 하오. 방금 도착한 상단의 우두머리를 만나고 싶소이다." 옆으로 밀쳐진 점소이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만 앉아있는 탁자쪽으로 향했다. 이제 곧 자신이 우두머리라고 생각한 인물이 일어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점소이의 예상과는 달리 그 옆 탁자에 앉아 있는 장대한 덩치의 사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칼에 베인 듯 보이는 긴 상처가 뺨에 나 있는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시오?" "큰 규모의 상단이 이곳을 토오가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출동했소이다. 이 물건들은 어디로 가는 중이오?" 보나마나 이 물건들이 어디서 왔느냐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가러냐 그리고 서륳는 제대로 가지고 왔느냐 등등 각종 검사를 통해 트집을 잡으며 돈푼이나 뜯어내자는 수작이라는 것을 점소이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식으로 나오는 그에게 살그머니 돈을 쥐어주는 상인들을 몇 번인가 봐 왔기 떄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는 품속에서 명패 하나를 꺼내어 임 포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천마신교에서 필요한 물건들이오" 천마신교라는 말에 점소이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천마신교라면 십만대산에 자리잡은 거대한 무림의 문파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옛날에는 중앙의 통제력이 지방의 곳곳까지 미쳤었다. 그렇기에 유사시에는 군대가 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요와 금에 이르러서는 강대한 이민족 제국들의 여인은 등장으로 그쪽에 신경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에 주원의 서쪽은 지금 거의 방치최다시피 하고 있었다. 언제나 천하가 혼란스러울 때는 자신의 욕심만을 태우는 탐욕스러운 관리가 날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탐욕스러운 관리들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단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대한 무림의 문파들이었다. 중앙에서 지원을 해주지를 못하니, 그들로서는 문파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이 일대는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마교의 세력권이였다. 점소이의 안색도 창백해졌지만 임 포두의 안색은 더더욱 창백해졌다. 임 포두는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 "저렇게 많은 물자를 옮기시다니 고생이 많으시겠군요 하하하, 그럼 수고들 하십시오" 돈푼이나 뜯어먹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행차했던 임포두는 상대가 마교도라는 것을 알자마자 재빨리 꼬리를 말아버렸다. 괜히 기웃거리다가 상대가 시비를 걸면 오히려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임 포두가 사라지고 난 후 마교도들의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는 점소이와 방 노인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으면 친절해 졌다. 등 뒤로는 연신 식은땀이 흘렀지만 말이다. 이렇듯 마교의 세력권 안에서는 관리 매우 협조적으로 움직였기에 묵향 이 이끄는 수송대는 아무런 사고 없이 빠른 속도로 이동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마교의 세력권이 끝나는 시점에서 어떻게 바뀔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아련한 기억 밤하늘을 따라 멀리 퍼져 나가는 금음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슬프다고 설취는 생각했다. 금을 타는 데 있어서 중원에서 몇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사부가 들려주는 금을 거의 매일 밤 듣다보니 그녀의 귀도 금에 한해서는 매우 수준급으로 변해 있었다. 금음의 앞부분만 척 들어도 상대가 얼마나 금을 잘 타는지 파악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묵향의 경우 만통음제의 금음만 들어도 그가 뭘 표현하는 것인지 단번에 알아 맞추지만 아수비게도 설취의 능력은 그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하짐나 곡조에 섞인 대략적인 느낌을 통해 금을 타고 게시는 사부님의 마음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 설취였다. '아마도 마음이 복잡하신 모양이구나 사숙이 보고 싶으신 ㄱ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그녀를 부르는 사부의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취아야" "예 사부님!" 그녀는 급히 사부님의 처소로 달려갔다 만통음제는 금을 소중하게 갈무리해 넣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노부는 양양성에 가야만 하겠구나" 워낙 뜬금없는 말씀이시라 설취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양양성에는 왜 가신다는 것인가? "양양성에 말씀이십니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패력검제가 이끄는 제령문도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고 하더구나 물론, 함께 가자고 네게 강요하지는 않겠다. 황실이 무림에 관여하지 않았듯, 무림도 황실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때 설취보다 먼저 그 제안에 우렁차게 답해 온것은 그의 첫째 제자 냉파천이었다. "저는 사부님을 따르겠습니다. 원칙이 어떻든 그게 무슨 상관이곘습니까?" 그 말에 만통음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너는 이곳에 남아 있거라"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부님께서 사지로 떠나시겠다는데 어떻게 대제자인 제가 이곳에서 발 뻗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제발 그 말씀을 거둬주십시오" 만통음제는 빙긋 미소지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네 마음은 고맙다만 너는 노부의 대제자가 아니냐? 너는 무림에 무명을 휘날리기에 앞서서 문파의 대를 이어야만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ㅇ다.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문파의 명맥이 노부의 대에서 끊겨서야되곘 느냐? 그렇기에 너는 이곳에 남아야만 한다." 냉파천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물러났을 때 설취가 나지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출발은 언제 하시겠습니까 사부님?" "준비도 좀 해야 할 테고... 아무래도 2주쯤 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저는 그동안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오겠습니다.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없는 동안 화야를 아버지께 맡기려고 합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길이기에 그곳에 가보겠다는 말일 것이다. 설취의 할아버지와 만통음제는 막연한 친구 사이였다. 묵향과 만통음제의 관계처럼 그 둘도 무공의 고하와는 상관없이 음악으로 맺어져서 친하게 지냈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설취를 만나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오냐 그렇게 하도록 하거라 조금 늦어지더라도 내 너를 기다리마" "감사합니다. 사부님" 다음날 새벽 설취는 제자 송활르 데리고 길을 떠났다. 보통 사람이라면 다녀오는데 2주일 가지고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먼 거리였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그녀들에게 있어서 그 정도 거리를 오가는 데는 2주일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관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길을 따라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었기에 자주 야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야외에서 하루밤을 보내는 것도 매우 정취가 있다. 모닥불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있는 토끼 고기를 바라보며 옛날 이야기 기라도 나누면 더욱 재미있다. 재미난 추억이 곁들여전 구운 토끼고기는 비록 소금 간밖에 안 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맛은 천하 진미가 부럽지 않을정도로 일품이다. "이렇게 토끼를 구워먹는 것도 아주 오랜만이로구나" "예 사부님" 송화는 토끼다리를 뜯어 먼저 사부에게 건넨 후 자신도 다리 하나를 들고 소금에 살짝 찍어먹으며 말했다. "너무너무 맛있어요" 어쩌면 이것이 제자와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제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설취의 눈빛은 너무나도 따사로웠다. "그래 많이 먹거라 할아버지를 따라가서 처음 사부님을 뵈었을 때가 어제 일인 듯 기억에 생생하구나 사부님께서 환공탈태한 고수라는 사실을 몰랐었던 나는 할아버지께서 후배를 만나러 나들이하신 건 줄 알았었지" 설취는 송화에게 자주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대해 말했었다. 그렇게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는 아니였지만 모든 이들에게서 대협이라며 칭송을 들었을 정도로 그는 명망 있는 고수였다. 거기에다가 지금 그 분의 산소에 가는 길이다 보니 자연 할아버지 와의 추억담이 그들의 대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송화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사조님꼐서는 그때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셨나요? 설취는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란다. 화경의 고수는 주안술을 익힐 필요도 없어 몸이 무공을 펼치기에 최적의 상태로 환공탈태하거든" 그러자 송화는 뭘 생각했는지 꺄르르 웃었다. "호호, 저도 처음 사조님을 뵈었을 때는 정말 당황했거든요 얼굴은 젊은 동안인데 수염을 길게 기르셔서 말이죠 사부님도 그러셨어요?" 그러자 설취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사부님꼐서는 수염을 기르시지 않으셨었지 수염을 깍으신 사부님의 모습은 정말 젊게 보였거든 할아버지께서 사부님을 소개하시며 앞으로 사부로 모시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나는 싫다고 막 떼를 썼었지 너무 젊어서 왠지 오빠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사부라고 부르기는 싫었거든 그런 내 모습을 보신 사부님꼐서는 도저히 위엄이 안 선다고 하시면서 그때부터 수여을 기르시기 시작하셨지" 만통음제의 칠흑처럼 긴 수염을 떠올린 송화는 킥킥거리며 웃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안의 모습에 긴 수염은 도저히 안 어울렸기 때문이다. "킥킥, 사조님께서 수염을 기르신 게 다 이유가 있었군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많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젊은 외모를 하고 계시니 너무 어색하게만 느껴져요" 설취는 살짝 미소지은 후 말했다. "아마도 그건 화경의 고수를 만나는 모든 이들이 가지게 되는 감정일 게다. 뭔가 부자연스러운 것을 대하는 듯한 느낌, 거기에다가 질투심이 서로 반반씩 섞인 것이겠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사제지간의 애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원래 설취는 할아버지의 산소에 들른 다음, 그 인근에 있는 아버지의 장원에 들를 예정이었다. 그곳에 송화를 맡겨놓고 돌아가, 양양성으로 떠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제자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 보니, 설취는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제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 그리고 그녀가 원했던 모든 것을...... 어쩌면 이번에 자신이 목숨을 잃더라도 제자에 의해서 그 모든 것들이 구현되기를 바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ㄱ교한 달빛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설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게속 이야기를 받아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송화의 입에서 불쑥 튀어 나온 질문은 설취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왜 결혼을 안하세요?" 제자의 갑작스러운 당돌한 질문에 당혹스러움을 함꼐 간직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내가 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 그러니까 사부님을 만나기 전이었단다. 내가 할아버지와 함꼐 무림에 처음 나갔을 떄였지 그때 어떤 무인을 만난 적이 있단다." 꿈을 꾸는 듯 과거를 회상하는 사부의 안색을 살피며 송화는 그 사람이 사부의 결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직감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예에? 그 사람이 누군데요?" 송화의 두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나도 고고하게만 느껴졌던 사부의 과거를 들을 기회가 온 것이다. 흥미가 동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설취는 쑥쓰러운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몰라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단편적으로 떠오를 뿐이지 그는 그 당시 악명을 떨치던 무뢰배들을 순식간에 제압해버린 사람이였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그렇게 강하다는 것을 나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었거든, 그래서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구나 사실 그가 검을 쓰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그 흔적은 볼 수 있었단다 할아버지는 그 흔적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그가 엄청난 고수 였다고 말해줬어 할아버지보다도 훨씬 강한......" "그래서요?" 호기심 어린 제자의 눈동자를 보며 설취는 미소지었다. "그래서요는 무슨...... 어찌되었건 그 일이 있는 후부터 만나는 당사자들은 모두 다 그와 비교가 되는거야" 사실 워낙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사람에 대한 거의 모든 기억 자체가 희미했다. 하짐나 그에게서 받았던 몇 가지 특정적인 기억은 남아 그것이 그녀가 남성을 보는 기준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와! 그래서 아직까지...... 참, 그 사람이 누구에요? 사부님께 그 정도 인상을 남겼다면 지금쯤 무림에 명망 있는 대협으로 위명을 떨치고 계시지 않을까요? 어쩌면 아직도 결혼하지 않고 계실 수도 있잖아요?"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단호한 사부의 말에 송화는 눈빛을 빛내며 되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세요?" 설취는 씁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동자공을 익히고 있었거든" 동자공이라는 말에 소오하의 눈이 휘둥잔만해졌다. 그녀도 동자공이 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정말이세요?" "내가 왜 네게 거짓말을 하겠니 그때 내가 동자공이 어떤 무공인지 모르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단다. 할아버지는 아주 난처해 하시며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된다고 하셨지 사실 동자공이 뭔지 나중에 알았을 때 왜 할아버지꼐서 그렇게 난처해하셨는지 이해할수 있었지, 어쩌면 그 때문에 그 사람이 더욱 기억에 남았는지도 몰라 지금도 동자공이라는 말을 들으면 할아버지께 질문을 던져 난처하게 만들던 때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는걸" "서로 결혼은 할 수 없더라도, 왕래를 가질 수는 있잖아요 혹시 그 후에 그 분과 만난 적은 있으세요?" "아니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사부님을 만나고 또 너를 만나고... 이리저리 바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그의 이름까지도 잊어버리고 말았구나, 아주 독특한 이름이었는데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으니......" "그런데, 그 분의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셨어요?" 제자가 매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해씨만 설취는 기억나는 대로 대답해주었다. "그 일일이 있기 전까지 꽤 오랜 시간 동행했었는데도 할아버지조차 그의 진정한 실력을 알지 못했어,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주 겸손한 사라이었거든. 그리고 사건의 발단은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벌어진 것이었어 무림의 명숙이셨던 할압지도 건드리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으니 아주 강한 자들이었지 그런 만큼 그 상황에서 나섰다면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봐야 하지않을까? 그리고 무참하게 모두 적어버린 것을 보면 일단 칼을 뽑으면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야 그런 멋있는 남자는 흔한게 아니거든" 가만히 듣고있던 송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사부의 설명에 매우 근접하는 인물이 한 명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듣고보니 묵향 사숙조 어르신하고 비스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네요 사숙조 어르신 성격이 좀 그렇잖아요?" 그 말에 설취는 발끈했다. 제자의 천진난만한 추측이었지만 그녀의 오랜 추억을 박살내는 그런 말이었기 떄문이다. "뭐? 어떻게 그런 사람하고 비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이냐?" 사부가 노화를 터뜨리자 송화는 찔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기에 사부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이 생각한 바를 설명했다. "사실 나중에 자기가 천마신교 교주라고 밝히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도로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안 하시잖아요 또 여행하면서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거든요 그리고 보통사람들에게 자신이 강자라고 해서 일부러 시비 걸지도 않으시고 말이에요 하지만 그 분과 싸워서 살아남은 사람이 전무하다는 소문을 들은 걸 보면 칼만 뽑으면 정말 무자비하신 모양이던데요. 사숙 어르신 떄의 일을 생각해보세요 한 차원 높은 경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까지 해주시는 자상함을 보이시다가 한번 수틀리니까 사숙님을 무참하게......" 그떄 일이 생각나는지 송화는 두려움에 가볍게 몸을 떨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때 제자의 말을 들으며 설취의 뇌리 저편에 묻혀 있던 한토막의 기억이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길동무를 함께 하자며 의향을 묻자 그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지요 저는 묵향이라 합니다] 설취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 그래 이제 기억이 나 그떄 그 이름을 듣고 참 특이하고 멋있기는 하지만 무인의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토록 오랜세월 기억해내력 애를 썻건만 기억나지 않았던 그 이름이 왜 지금에서야 갑작스럽게 떠올랐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 이름이 자신이 그토록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던 마교 교주 묵향일 줄이야 설취는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이 그일리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동명이인 일수도 있지 않을까? 설취는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마교의 교주, 암흑마제, 악마들의 지배자 온갖 추잡스런 마공 들을 통해 절대의 경지에 들어간 악마 이 모든 것이 동일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이 지금까지 그리워하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인정할수없는 설취였다. 설취는 혼란스러운 심정에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것을 본 소오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사, 사부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한참 머리를 흔들며 괴로워하던 설취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이 때 그녀의 눈과 송화의 눈이 마주쳤다. 제자의 맑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설취는 화들짝 놀랬다. 깨끗한 제자의 눈을 보자 마치 제자가 자신의 속마음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듟한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황급히 송화의 시선을 피하며 설취는 얼버무리듯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취의 표정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사부가 자신의 말에 그토록 충격을 받을 줄 몰랐기에 송화 는 한껏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죄했다. "사부님 제가 너무 경솔한 말씀을 드려서, 사부님의 아픈 기억을 건드렸나 봐요" 설취는 왠지 콧잔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녀는 애써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자에게 말했다. "그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쨋거나 너도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거라, 겸손하며 약자를 보호할 줄 알고 또 꼭 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망설이지 않아야 한다 언제나 손을 쓰기 전에 세 번을 생각하거라 그렇다면 결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설취는 다음에 묵향 사숙을 만나면 반드시 예전에 자신을 만난 적이 있었느냐고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이때, 뭔가 엄청난 기운이 자신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점근해 오고 있음을 뒤늦게 눈치챈 설취는 재빨리 송화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런 다음 검을 뽑아들었다. 워낙 늦게 눈치를 채서 그런지 벌써 침입자는 그녀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후였다. 모습을 드러낸 침입자는 무림인이 아니라 승려들이었다. 어둠을 뚫고 나타난 20여명의 승려들은 어리선가 치열한 격전 이라도 벌인 듯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설취는 승려들의 옷차림이 아니라 이마에 찍힌 계인(戒印)을 유심히 바라 보고있었다. 이마에 계인을 찍는 곳은 소림사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소림승들이란 말인가? 상대가 소림승이건 아니던 간에 일단 적의는 없어 보였다. 설취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이쪽도 적의가 없음을 표시했지만 그래도 상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그것을 보고 승려들 중의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아미타불, 소승은 광료(廣了)라고 하오 시주들의 휴식을 방해한 것같아 죄송하구려" 설취로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광료라는 법명을 들은 적이 없었기 떄문이다. 하지만 저들이 가짜가 아닌 진짜 소림승이라고 가정한다면 광자배가 가지는 배분의 위치는 대단히 높은 것이었다. 현재 소림의 장문인이 대(大)자 배이고 그를 떠받치는 원로들이 덕(德)자배. 실질적인 행동을 하는 승려들 중에서 가장 높은 배분이 그 다음인 광자배인 것이다. 상대가 통성명을 하고 나왔기에 설취또한 마주 포권하며 대답헀다. "유운비화 설취라고 합니다." 그 말에 광료는 함빡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오, 유운비화 시주셨구려 말씀은 몇 번 들은 듯하구려" 설취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선사께서는 소림에서 나오셨습니까?" 그 말에 광료선사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예 그러하오이다. 그건 그렇고 시주께 말을 건 것은 이곳에 얼마나 계셨었는지. 또 계시면서 혹시 무슨 이상한 일을 겪었 다든지 혹은 이상한 기척을 느낀 적은 없는지 하는 것을 묻기 위함이외다" 아마도 광료선사는 이곳에 피워놓은 모닥불을 보고 달려온 모양이다. 그 말에 설취는 적이 안심하며 대답했다. 일단 상대는 누가 뭐라 해도 공명정대하기로 이름난 소림승려니까 말이다. "이 아이는 제 제가 송화라고 합니다. 저희들은 지금 어딘가에 다녀올 곳이 있어 그곳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저녁 나절쯤 이곳에 도착하여 밤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지요 여기 있으면서 지금까지 이상한 기척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소이까?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오이다. 그럼 갈 길이 바빠서 이만......" 승려들은 누간가를 추적하던 중이었던 듯 그 말을 끝으로 재빨리 사라져버렸다. 승려들의 고절한 경신술에 송화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말했다. "소림이 무림의 태두라고 해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게 아니네요 사부님" 설취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림의 힘은 위대하단다 다만, 그들이 지닌 힘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겉으로 약하게 보인다고 해서 다 약한 게 아니거든" "그런데 소림사에서 저토록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 누굴까요?" "글쎄다 광자 배분의 승려가 나섰을 정도라면 대단한 인물을 텐데.. 별로 짚이는 사람이 없구나" 소림승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설취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과연 소림승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까지 소림은 될 수 있으면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의시이 갈 만한 단체나 대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몽고로 가는 길 관도에는 대규모의 군세가 이동중이였다. 9천기에 달하는 인마가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훈련을 잘 받은 병력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예비마 9천필에 여섯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100여대가 뒤따르다 보니 그 규모는 엄청나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바로 이들이 관지가 이끄는 마교의 숨겨진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흑풍대였다. 지금 까지 단 한 번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던 흑풍대가 드디어 위풍당당하게 강호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해가 질 무협.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는 흑풍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흑풍대와 싸우기 위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흑풍대를 돕기 위해 모여 있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놓여 있는 커다란 솥단지에 서는 먹음직스런 음식 내음이 풍겨 낭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는 커다란 건초다발이 놓어져 있었다. 물론 말먹이였다. 옥화무제의 명령을 받은 무영문은 흑풍대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여 이동할수 있도록 이렇듯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먼 길을 달려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자들은 저마다 흑풍대 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말을 받아 끌고 갔다. 병사들이 식사하는 동안 말이 흘린 땀을 건초로 닦아주고 여물과 물을 충분히 먹이기 위해서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흑풍대 대원들은 여기에 무영문도 들이있다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음식과 말먹이를 제공하는 것에 당혹감을 표현했겠 지만 매일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오히려 지금은 그것이 당연스럽게 느껴졌다. 하짐나 그래도 상대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레 그들은 음식에 독이 있는지 살피고 말의 건강상태를 매일 점검하고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보초병들을 세워 무영문도들의 동태를 철저히 감시했다. 어찌되었건 무영문으로 부터 편의를 제공받게 된 후로 흑풍대의 이동속도는 조금 더 빨라졌다. 사람과 말이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보다 좋은 음식물을 먹고 마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급대원들이야 어떻게 생각 했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흑풍대의 천인대장 이상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무영문이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흑풍대가 하루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정확히 예측한 다음, 그곳에다가 음식과 여물 등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는 것이다. 말로는 쉽지만 현재 이동중인 흑풍대의 인원은 보급대의 일꾼들을 포함하여 1만에 가까 웠다. 거기에다가 흑풍대가 보유한 말은 짐말까지 포함해서 2만필에 가까웠다. 그 많은 인마들이 충분히 먹고 마실 정도의 음식을 쉽사리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처음 며칠동안은 준비가 좀 미흡했었다. 갑자기 그 많은 음식과 건초를 확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식을 배급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었다. 그렇기에 모자라는 부분은 흑풍회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그게 하루하루 지날수록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싶은가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모든 흑풍대원들이 식사를 끝내고 취침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말들 또한 배불리 먹고 마신 후 건강점검까지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영 문에서 고용한 대장장이가 말들을 둘러보며 편자의 상태까지 다 점검해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강행군을 해오면서 잃은 말은 단 한 필도 없었다. "과연 정파의 힘은 무섭구나 본교의 세력이 그토록 강성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과 전면전을 펼치지 않는가 궁금했었는데 요즘에서야 그 이유를 알겠다." 관지의말에 마화도 찬성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미 본교에서도 이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덕분에 식량과 건초의 소모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의 사기도 대단히 높구요" "시작부터 아주 좋군" "예" "천인대장들에게 지시해서 수하들과 말의 피로도를 세심히 살피라일러라 그곳에 최대한 빨리 도착할 필요성은 있지만 피곤에 지친 상태로 도착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되니까 말이다" "옛, 명심하곘습니다." 이떄 무영문도 중 한 명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관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보낸 후 입을 열었다. "매일 강행군을 하신다고 수고가 많으십니다. 혹시 마음에 안드시는 점은 있으셨습니까?" 관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듯 신경을 써주어 무영문주께 고마울 따름이네 그건 그렇고 전선에서 들려온 새로운 정보는 없는가?" "예 패력검제 대협께서 돕는데다가, 양양성을 맡고 있는 악비대장군도 대단히 뛰어난 인물입니다. 거기에다가 무당파의 도사들도 무림맹이 참전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이후에 합류하여 사력을다해 저항하고 있으니 쉽사리 함락되지는 않을 겁니다." 관지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드이 기를 쓰고 달려 갔는데 만일 그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성이 함락 된다면 일이 훨씬 힘들어지기 떄문이다. "우리들이 도착하기 전에 함락당한다면 아주 골치 아파지지 그건 그렇고 무림맹의 세력은 패력검제가 거느리고 있는 인원이 다인가?"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무한 방면에 대규모의 세력이 집결중입니다. 아마도 서문세가의 수라도제 대협께서 지휘 하시게 되실 겁니다. 무림맹주께서 직접 나서시지 않는 한 그 분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수라도제가 이끈다면 그들은 꽤 도움이 되겠군 무한을 방위하고 있는 송군의 세력은?" "2만 남짓입니다. 아무래도 송군은 별로 보탬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이 본문의 추측입니다." 잠시 양양성의 정세를 머리에 그려보던 관지는 무영문도가 더 물어볼 것이 없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쳐다 보고 있음을 깨닫고는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런가? 알겠네 알려줘서 고맙군"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중히 인사를 건넨 후, 무영문도는 자신의 일을 보기 위해 가버렸다 아직도 그에게는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기 떄문이다. 다음날 아침 아침식사를 끄낸 흑풍대는 또다시 길을 재촉하며 달려가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무영문도들은 어질러진 장내를 수습한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물론 그들 중에서 진짜 무영문도들은 거의 없었다. 먼 곳에서 품삯을 주고 고용한 일꾼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꾼들이 장내를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무영문도중 한 명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말했다. "휴우 겨우 끝났군" 이곳에 모인 수천 명의 이원들 중에서 진짜 무영문도는 겨우 4명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돈의 힘으로 끌어들인 일꾼 들인 것이다. "그러게 말일세 1만 명분의 음식과 말 2만필이 먹을 사료 그걸 시간 내로 구한다고 뛰어다닌 걸 생각하면 정말 식은 땀이 나는구먼" "그래도 잘 끝나서 다행일세" 사내 중 한명이 흑풍대가 다려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애기는 들었지만 흑풍대의 규모가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게 말일세 저 정도 중무장이라면 군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동료 중 한 명이 맞장구를 치자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만약 저들이 마교집단이라는 것을 몰랐었다면 아마 군대가 이동하는 줄 착각했을 거야, 이 변방에 저토록 잘 갖춰진 송군이 이동하고 있다느 자체가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그 덕분에 저들이 이동하는 것을 수상히 여긴 제324첩보조가 연락을 보내 겨우 저들이 흑풍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 "그러게 말일세 태상문주께서 왜 그렇게 마교에 관련된 정보라면 특급으로 취급을 하시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군 어지간한 문파는 저들만으로도 아직이 날 테니까 말일세" 마교의 막강한 저력의 한 자락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사내는 불현듯 아직도 자신들의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들에게 사내가 소리쳤다. "자, 자네는 흑풍대가 무사히 토오가했다는 것을 총타에 빨리 알리게 그리고 자네는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급하고 말이야 자 모두들 빨리 움직이세, 다음일이 가다리고 있지 않은가." 언제나 바쁜 무영문도들이었다. 양양성을 지원하기 위해 마교와 정파의 정예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싲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양성은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아직까지 무림의 주력이 당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양양성을 포위한 금군은 초반에 워낙 큰 피해를 당해서 그런지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대규모의 공격을 가해오지는 않고 있었다. 오히려 이용하여 성에서 무림고수들이 튀어나와 몇번 휘젖자 금군의 강력한 벙아망을 갖추는 데 더욱 신경을 썼다 그런 다음 포위망이 완벽하게 갖춰지자 어쩌다 한 번씩 공격을 가해 양양성의 전반적인 방어 상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그런느 한편 매일같이 무력 시위를 하여 자신들의 막강한 세력을 보여주며 적의 사기를 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요의 잔당을 처리 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한 완에 렌지에 대원수가 이끈느 주력부대가 나하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지자그 시간을 이용해서 진팔은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자신에게 배정된 숙소에 앉아 끊임없이 명상을 하는 것이다. 그가 주로떠올리는 것은 패력검제가 보여줬었던 놀라운 무공들이었다. 물론 상대의 무공을 훔쳐 배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초식한 초식을 떠올리며 자신이 알고 있는 포식을 대입해보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는 자신과 패력검제간의 가상대결을 끊임없이 해오고 있었다. 물론, 이때 자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큰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안될 듯 하다가도 불현듯떠오르는 생각을 따라 흘러가다보면 그 초식을 막아낼 묘안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럴 때의 진팔의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떠오랐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패력검제의 다음 초식이 그를 숨 막히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럼 다시 진팔은 그 초식을 상대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흐음, 이렇게 반격해 들어올 때 과연 막을 방법이 있나?" 진팔의 머릿속을 떠도는 각종 초식들은 대부분 급조해서 만든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사문의 도법으로는 패력검제의 단 1초식도 감당할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별의별 꽁수를 다 동원하여 상대의 공격을 막는 데 급급해 있는 중이었다. '그 순간 도를 던진 다음 튕겨 나온 도를 붙잡고 재차 휘두르며 영감탱이의 다리를 노린다면...... 으음 그렇게 했다가는 바로 목이 날아가겠군' 열심히 머리를 굴려가며 초식을 생각해보았지만 도무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ㅊ팜을 고민하던 진팔은 거칠게 방바닥을 주먹으로 후려갈기며 투덜거렸다. "에잇, 젠장 어떻게 방법이 없나?" 패력검제와 다투는 데 사용하기에는 사문의 도법이 너무하다고 할 정도로 조약하기 그지 없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떠오르는 냄녀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한두 수는 막을 수 있었고 또 역공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 한두 수를 사용하게 되면 전체적인 초식의 운용이 엉망진창으로 뒤엉키게 된다.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젠장 누구야 금군이라도 쳐들어왔나?' 이런 생각을 잠시 하고 있는데 밖에서 흥분한 조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여기 있죠? 빨리 문 좀 열어봐요" 진팔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칠게 문을 열며 소리쳤다. "이봐요 여기 있죠? 빨리 문 좀 열어봐요" 진팔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칠에 문을 열며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야?" 문밖에는 조령과 자타르가 함께 서 있었다. 진팔은 조령과 자타르를 번갈아 쳐다봤다 자타르의 한심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봤을 때 급한 일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저토록 흥분한 조령은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 궁금증은 조령의 한 마디에 곧바로 풀렸다. "이겼다구요 내가 내기에 이겼어요" 순간 진팔의 이마에 퍼런 핏줄 하나가 튀어나왔다 무슨 전쟁이라도 난 듯 호들갑을 떨기에 나와봤더니 겨우 내기 바둑에 이긴 것 때문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좋아라 웃는 모습을 보니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고 심드렁하게 대꾸헀다. "아아, 패력검제 영감과 시작한 그 내기를 말하는 모양이군 축하하네" 김빠진 목소리롤 진팔이 말하자 조령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따지고 들었다. "이봐요 그 얼굴, 별로 축하하는 표정이 아닌데요" 사실, 매일매일 바둑을 둬서 수백 번을 깨졋으면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지금쯤 바둑판의 한쪽 귀퉁이에 자기 집을 마련할 때도 된것이다 하지만 그걸 곧이 곧대로 애기했다가 무슨 귀찮은 꼴을 당할지 잘 아는 진팔이 아닌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무슨 그런 말을... 나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거야 자 볼 일 다 끝났으면 들어가봐도 되곘어?" "그러지 말고 자 가자구여 이긴 기념으로 한턱 크게 쓸게요 진 소협도 술 좋아하자구요? 한잔 하자구요" "글쎄...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술을 파는 곳이 있을까?" 철없는 조령이야 아무 생각 없었지만, 진팔의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 양양성은 적에게 포위당한 상태다 그리고 그 포위가 언제 풀릴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식량을 통제하게 된다. 먹을 식량도 없는 상항에서 술을 빚을 쌀이 있을까? 조령은 마치 꼬마애에게 말하듯 한껏 으스대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쯧쯧 겉보기와 달리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하시군요" '뭐시라?!' 진팔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건 말건 조령은 신경도 안쓰고 넉살좋게 말했다.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돈만 있으면 웬만한건 다 구할 수 있다구요" 진팔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잔안에는 투명하면서도 독하기 그지없는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것은 바로 술, 조령의 말대로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었던 것이 없었던 것이다. 양양성에 금주령이 내려지고, 식량이 통제되기 전에 만들어진 술인 것이다. 새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통제를 가하겠지만 이미 만들어진 술을 식량으로 바꿔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물론 이런 술은 암암리에 거래가 되었고, 그 가격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비싼 값에 거래가 되었다 흔하디 흔했던 백주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주 귀하신몸으로 변해 있었다.진팔은 술잔을 목구멍 안에 털어 넣었다. 찌르르한 느낌이 오장육부를 진동한다. "크으으~" "어때요? 비싼 돈값은 하죠? 자, 한 잔 더 하라구요" 안 그래도 무공을 수련하며 마음대로 잘 안 풀려 답답하던 참에 술을 마시니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술을 따라주곘다며 옆에 달라붙어 애교를 떠는 조령의 모습이 싫지많은 않았다. '허구한 날 귀찮게만 하더니 가끔은 이쁜 짓도 하는군' 진팔은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조령의 모습이 왠지 이쁘다고 생각되었다. 사람을 좋게 보면 겉모습도 달라 보이는 모양이다. 하기야 지금까지 진팔은 그녀를 반쯤은 애물단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진팔이 화통하게 술을 들이키고 있는데 조령이 의기 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봐요 술 파는 곳이 있는지 찾아보기를 잘했죠? 해보지도 않고. 이러이러할 것이다 하는 지례짐작에 포기하는 것은 못난 사내나 할 짓이라구요" 진팔은 힐끗 조령을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못났다고 말하는데 어느 누구가 기분이 좋겠는가 하지만 술까지 마시게 해주었는데 활르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령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팔이 자신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진 소협은 그게 문제라구요 너무 고지식한 거 말이에요 사람이 좀 유연하게 사고를 할 줄도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조령은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진팔은 그 말을 듣는순간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진팔은 조령의 말을 듣더니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어린애한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더니 역시 그녀의 말대로 자신의 마음가짐이 더욱 큰 문제인지도 몰랐다. 패력 검제가 무림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고수라는 점은 그도 인정하는 바이다. 머릿속으로 대련하면서 패력검제는 기기묘묘한 수를 동원하여 자신의 공격을 막고, 또 공격해 온다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압박감을 흘리면서...... 그러면 자신은 그것을 막는 것만도 벅차다 공격은 엄두도 내기 힘들다 모든 초식이 뒤엉키고, 손발이 따로 놀다가 자멸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마음 속 대련의 기준은 누가 잡은 것인가? 왜 그런 기기묘묘한 초식을 패력검제만 쓸 수 있고 자신은 사문의 초식만 써야 한다고 누가 정해놓은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껏 자신이 뭐 하고 있었나 싶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지는 진팔이었다. 조령은 진팔이 술을 마시다 갑자기 멍하니 생각에 빠젼 듯하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 해요? 술 마시다 말고?" 하지만 진팔은 지금 한가하게 술 마시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일순간에 도를 꺠닫는다고 하더니, 진팔은 지금 그것을 경험하는 중이 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 그의 손발은 어디로든지 뻗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괴이한 초식이라도 사용 가능할 것만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순간 환골탈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울뿐이었다. 이것이 화경의 깨달음이 아니라 해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것을 통해 자신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화경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설 것이다. 진팔은 꿈꾸는 듯 몽롱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아. 나는 아직까지도 내면의 목소리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구나 너무나도 미숙했어" 백주를 훌쩍거리고 있던 조령이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내면의 목소리라니 그건 무슨 소리에요 진소협?" "아아 조 소저는 알 필요 없어 그걸 알 정도 수준이 되려면 이십 년은 검을 더 휘둘러야 할 테니까 말이야" 조령의 아미가 꿈틀하는 것 같았지만 그년느 곧이어 미소 띤 표정으로 애교스럽게 말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가르쳐줘요......" 하지만 진팔의 대답은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서 자기가 아무리 싫어도 필요한 단계를 밟아나갈 수밖에 없어 지금 조 소저는 가르침을 받는 초식을 정확히 이해하고 따라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단계야." 마음이 상했는지 조령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칫 사내가 쪼잔하기는...... 그냥 가르쳐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내가 가르쳐주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자신이 익혀야 할 단계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윗단계를 알아봐야 허사라고 오히려 수련에 방해가 되고 몸만 망칠 뿐이야 알겠어?" 하지만 조령의 입은 오리 주둥이마냥 삐쭉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보며 진팔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조령을 진팔은 귀여운 동생을 대하듯 바라봤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를 때가 오히려 더 좋은 거야 경지가 높아질 수록 골치만 아프지, 조금 지나고 나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거다' 진실과 거짓 사이 요즘 근처에 마적단이 나타났다느니, 떼강도가 출몰했다느니, 산적들이 횡횡한다느니 하는 불안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적은 재산이나마 지니고 있는 자들은 그 소문이 몸을 움츠려야 했다. 옛날이 정말 좋았다. 강력한 대송제국의 힘이 나라 구석구석 까지 뻗치고 있을 때가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에는 엇나가는 사람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방 포두는 치안이 허술하다고 난리를 떠는 지금이 오히려 더 좋았다. 요즘 그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하루하루가 행복하기 그지 없었다. "이봐 박 영감 며칠 전에 땅을 샀다면서? 그렇다면 세금을 내야 할거 아냐?" 자신의 말에 박 영감은 식은땀을 흘리며 애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금이라면 벌써 다 드렸지 않습니까요?" 방포두는 짐짓 고개를 들어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어린 짓을 한두 번 해보는 게 아니다 보니 요령이 생긴 것이다 이럴 때에는 그런 애기에는 관심이 없단느 듯 딴청을 피우는 것이 돈을 뜯어내는 데 훨씬 효과가 있단느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 이런 능구렁이 같으니라구 애절한 목소리로 말하면 내가 마음이 약해질 줄 알았나?' 하지만 내심과는 달리 방 포두는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크흐흣 이봐 세금이라는 것은 말이야 황실에 납부해야 하는 것만이 아니야 자네가 도둑이나 공도 걱정 없이 하루하루 평안 하게 생활 할 수 있는 것도 다 이 방대이(方對二) 어르신이 노력한 결과라는 것도 알아줘야지 황실에서 자네 집에 도둑이 드는지 신경써주는 건 아니거든 안 그래?" 황실의 모든 이목이 금에 쏠러버린 지금 이곳 번경에는 무섭지대나 다름없었다 현감도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해서 치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모든 관리들도 물론 위삿람들을 본받아 방대이 포두도 열심히 치부를 하는 중이었다. "어, 얼마나 드려야 합니까?" "은자 1냥" 순간 박 영감의 안색이 허엏게 변하는 게 보였다. 내가 너무 과하게 불렀나? 아니야 마음이 약해서야 이 사업을 할 수가 없지 이놈저놈 사정 봐주다가 언제 돈을 모은다는 말인다. "왜, 못주겠다는 말인가? 그 땅을 잘 활용하면 그 정도는 쉽사리 뽑아낼 수 있잖아 안 그래?" "하, 하지만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방 포두는 자신이 다 알아서 처리해주겠다는 듯 박 영감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헀다. "허, 이 사람 별 쓸대없는 걱정을 다 하고 있구만 설마하니 내가 자네의 처지를 모르고 이런 말을 했곘는가? 걱정 말게 그저 여기다가 도장만 꽝 찍으면 된다네" 하면서 방 포두가 은근슬쩍 내민 것은 차용증서였다. 방 포두에게 은자 1냥을 빌렸는데 그것을 나중에 갚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고 그뿐만이 아니라 차용증서 한쪽 귀퉁이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그 은자 한 냥을 갚을 때까지 매일 상당히 높은 이자를 지불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박 영감은 차용증서를 내려다보며 치를 떨었다. 은자 한냥을 거저 뜯기는 것만 해도 억울해 죽겠는데 거기에 고리대금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높은 이자까지 받겠다는 심보니 말이다. 이건 완전히 날강도와 다를 바 없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믄약 거절한다면 별의별 트집을 잡아 자신을 괴롭힐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박 영감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도장을 찍고 있는 것을 방 포두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포졸 하나가 허겁지거 달려와서 외쳤다. "방 포두 나으리 거상입니다요 거상" "뭣이?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거상이 마을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여섯필의 말이 끄는 수레가 끝이 안 보일 지경입니다요" "뭣아? 어서 현감 어른꼐 통보를......" 여기까지 말하던 방 포두는 뭘 생각했는지 슬쩍 박 영감의 눈치를 보더니, 포졸의 귀를 잡고 속닥거렸다." "현감 어른께 통보는 드렸느냐?" "아, 아뇨 먼저 포두 어른꼐 알려드리기 위해 달려왔습니다요" "그래?" 방 포두는 박 영감을 서둘러 돌려보냈다. 물론 도장이 쾅 찍힌 차용증서를 받고 말이다. 거상인 만큼 그들을 슬쩍 찌르면 상당한 액수가 튀어나오겠지만 그 대부분은 현감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몰래 가서 찌르면? 물론 현감이 직접 하는 것보다는 액수가 적겠지만 현감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것보다는 훨씬 액수가 크지 않겠는가 만약 제대로만 걸리면 큰 돈을 만질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입이 무거운 놈으로 20명만 대기시켜라" "예?" "멍청하기는! 한두 번 해보는 일도 아닌데 뭘 그러느냐? 척하면 알아들어야 할 것아니냐 물론 이번 건은 좀 덩어리가 큰 만큼 아이들을 세삼하게 골라야 할 것이야" 그 말에 포졸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다. 그제야 방 포두의 속셈을 눈치챈 것이다. "예 바로 애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마을 바깥에 집결시키도록 해라 그리고 다른 녀석들에게는 내가 마을 근방을 순시하러 간다고 하더라고 전하거라" "옛" 어차피 그들을 붙잡아 적당히 구슬러 돈을 뜯어낸느 것은 자신의 역활이였다. 현감이야 관청에 앉아 자신이 뜯어낸 돈을 그저 챙기김나 하지 않는가 문제는 그들이 마을에 머무르냐 아니면 그냥 통과하느냐 에 달려 있다. 만약 머무르지 않고 마을을 통과한다면 미리 마을을 벗어나는 지점에 가 기다린 뒤 그들을 검문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감에게는 그때 자신이 자리에 없어 그들을 심문하지 못했다고 적당히 둘러댈 생각이었다. '흐흐흐 드디어 애월루의 향이를 품게 되는구나.' 과연 부하 녀석이 말대로 거대한 상단이었다. 짐이 잔뜩 실린 마차가 도대체 몇 대나 되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것 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마차 주위를 에워싸고 움직이는 호위무사들이었다. 괴이한 기운까지 물씬 풍기는 것을 보면 상당한 실력자들인 것 같은데 과연 이들을 건드려도 괜찮을까? 좀 찜찜하기는 헀지만 그냥 놔두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저 정도 규모의 상단이라면 은자 10냥 20냥 정도는 돈도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국가의 녹을 먹고 있는 포두가 아닌가 만약 분위기가 이상하면 적당히 둘러대며 빠져나오면 충분할 것이다. 방 포두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천천히 상단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물론 최대한 얼굴 표정을 근엄하게 보이려 애쓰면서 말이다. "잠깐 멈추시오 이건 어디서 오는 마차들이오?" 관복을 입고 있는 그의 물음에 장대한 체구를 지닌 사내가 급히 다가왔다 칼에 난 상처인 듯 보이는 긴 흉터가 뺨에 있어 매우 인상적으로 보이는 인물이었다. "수고들하시는구려 이 물건들은 천마신교에서 필요한 물건들이외다." 하지만 천마신교고 말꼬랑지 신교고 간에 그런 곳이 있다는 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방 포두다 왜냐하면 이곳은 천마신교와 너무도 멀리 떨어진 곳이니 말이다. 자신이 들어보지 못한 상단 이름이었기에 괜히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방 포두는 거만한 표정으로 상단을 쓰윽 둘러보며 물었다. "천마신교라? 하여간에 목적지와 물품들의 품목이 뭔지 알려주시오 물론 관에서 발급한 증빙서류는 갖추고 있겠지요?" 자신이 꼬장꼬장하게 나가자 예상대로 뱜에 상처가 있는 그 장한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은근슬쩍 전냥 하나를 건네주며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수고들 하신느구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일 끝나고 나서 술이나 한잔 하시오" 얼핏 무게를 가늠해보니 제법 묵직했다 아마 상당한 액수일 듯 싶었다. 이쯤에서 그만 둘가? 하지만 곧 방 포두는 생각을 바꿨다 살짝만 찔렀는데도 이 정도인데 조금만 더 귀찮게 하면 짭짤하게 한몫 챙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거둬들이는 은자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니 요심이 그의 눈을 가렸던 것이다. 방 포두는 우선 받은 전냥을 어른 품속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장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어 뭐 이런 걸 다...... 물론 본관은 편의를 봐드리고 싶지만 뒤에 있는 수하들의 이목도 있는지라......" 한 마디로 몇 푼 더 달라는 요구였다 뺨에 흉터가 있는 장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 몇 개인가의 은자를 더끄집어냈다. 방 포두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지금 뭐 하는 겐가?" 장한은 다급히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참 은자를 건네받던 방 포두가 깜짝 놀라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한 주먹감이면 끝날 듯 보이는 삐쩍 마른 녀석이 오만한 자세로 서서 퉁명스레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눈에 척 봐도 세상 물정 모르는 대갓집 도련님 같은 인상이었다. 방 포두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쯧쯧 저런 철없는 놈들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고생하는 거야 아주 일 잘 하고 있구만 뒤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지 끼어들기는 왜 끼어들어; 그런데 그 순간 부잣집 도련님의 오만하기 그지없는 건방진 말투에 방 포두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아니기는...... 왜 저런 쓰레기 같은 놈에게 돈푼을 쥐어 주는 거지?" '뭣이 쓰레기라고? 감히 나 방대이를 쓰레기라고 불러?' 방대이는 노기 띤 어조로 소리쳤다. "아니 감히 이것들이 본관을 쓰레기라고 불러? 좋다 이것 다 필요 없어," 방 포두는 장한에게서 받았던 은자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다음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험악한 그의 표정과는 달리 방대이의 두 눈은 이리저리 굴러간 은자들의 위치를 쫓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회수해야 할 테니까 "애들아 저 마차에 실린 짐들이 어떤 것들인지 철저하게 조사해라 만약 그 속에 금지품목이 단 한개라도 있다면 너희들 모두 껍질을 홀랑 벗겨주마" 저들의 수가 많은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자신에게는 수하가 20여 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이 일대는 모두 자신의 관할구역이다. 거기에다가 내가 눅누가 나를 감히 쓰레기라고 불러? 내가 버럭 화를 냈으니 저런 세상 물정 모르는 대갓집 도련님 따위는 지금 바짝 겁에 질려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저 뺨에 흉터 있는 장한이 다급히 자신에게 다가올 테고 한두 번 튕기다 못이기는 척 하며 은근슬쩍 다시 협상을 하면 될 것이다. 하짐나 이 일은 방대이의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다. 자신이 화를 내면 지금까지 계속 먹혀들어갔듯 이번에도 효과가 확실할줄알았다. 관리들과 잘 지내려는 것이 상인들의 기본태도니까 말이다. 하지만 밥맛 없게 생긴 호리호리한 놈은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체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이 방 포두를 조금 두렵게 만들었다. 헉!이거 혹시 잘못 건드린 거 아냐? "흥 껍질을 벗겨주겠다고? 애들아." 그 말에 주위에 서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하명하십시오" 너무나도 절도 있는 그들의 동작 하나만으로 방 포두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 건드려 놓은 듯하다 재빨리 사태를 파악한 방 포두는 슬금슬금 뒷걸음치며 중얼거렸다. "뭐 말이 그렇다는 말이지요. 핫핫 유쾌한 여행이 되기를 빌겠소이다. 애들아 가자" 그들이 몇 발자국 가지도 못했을 때 뒤에서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잡아서 꿇여라" "존명!"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무사 십여 명이 달려왔다 그 순간 후위에 서 있던 포졸들 중에서 제일 실력이 뛰어나다는 아삼이 재빨리 칼을 빼들었다 하지만 그는 칼을 채 휘두르지도 못했다. 어느새 두들겨 맞았는지 길게 쭉 뻗어버렸고 칼은 저쪽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버렸다. 모두지 방 포두가 생각하고 있던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였다. 물론 방 포두도 잡히지 않기 위해 반항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무지막지한 주먹이 자신의 배에 꽃혔다. 퍼억! "크어어억! 쿠럭쿨럭!" 너무나도 통증이 극심해서 한동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들은 양쪽에서 방 포두의 손을 붙잡아 끌고 갔다. 그 호리호리한 녀석은 자신의 앞에꿇려져서 핼쑥하게 질려 있는 방 포두 이행을 보며 이죽거렸다. "오기는 쉽게 왔는지 몰라도 갈 때는 너희들 마음대로 갈 수 없지 자 기왕에 껍질 벗기는 애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게 어떤 것인지 본좌가 가르쳐주지" 엄청난 실력차, 거기에다가 상대방은 500여 명이나 된다. 옛날이었다면 상부에 통고해서 어림군이라도 충동시킬 여지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자신들도 상부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뇌물을 먹었지만 역으로 자신들의 통제력을 상회할 정도의 무력을 지닌 채 반항하는 자들이 생겼을 때 그것을 막을 방법이 하나도 없음을 방 포두는 꺠달아야만 했다. 방 포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하 하늘을 몰라뵙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버러지 못한 새끼들 여봐라!" "옛" "이런 쓰레기들이 두번 다시 내 눈에 띄지 않게 해라" "존명" "그리고 저놈은 특별히 껍질을 홀랑 벗겨주도록" 그러면서 그는 방 포두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방 포두는 자신은 성질난 김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몽땅 다 뺏겠다는 의미에서 껍질을 홀랑 벗기곘다는 표현을 썼지만 상대의 말은 말 그대로 껍질 그러니까 가죽을 벗기곘다는 소리였다. 그 순간 방 포두의 얼굴 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가죽을 벗긴다고? 어찌 사람 가죽을 벗긴단 말을 저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저놈들은 도대체 사람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백정들이라는 말인가 방 포두는 끌려가면서도 애절한 목소리로 악착같이 용서를 구했다. "대, 대인 제발 살려주십시오 대이이이인!!!" 하지만 흑의를 입은 무사들은 인정사정 없었다. 퍽!퍽! "크아아악!" 우선 모진 구타가 시작되었다. 방 포두와 그의 부하들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지만 하나도 달리진 것은 없었다. 모두들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하기 적전쯤 되어서야 주먹질과 발길질이 멈췄다. 그리고 그들 중의 한 명이 품속에서 작은 칼을 쓱 꺼냈다. 비도(飛刀)로 보이는 그 칼은 아주 얇고도 날카로웠다 그는 칼날을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내가 좀 실수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참으라고 나도 사람가죽 벗기는 것은 처음이라서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방 포두는 극심한 공포를 도저히 참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최근 마교의 동태를 기록해 놓은 보고서를 읽어보던 옥화무제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이건 도대체 뭐죠?" 총관은 옥화무제 옆으로 다가가서 어떤 보고서인지 확인한 후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설명했다. "예. 일단의 마교 세력이 북상하고 잇습니다. 엄청난 수의 수레에 뭔가를 가득 싣고 수송하고 있는게 그게 뭔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옥화무제는 보고서를 찬찬히 흝어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상하군요 이들이 하는 행도은 완전히 '내가 이리로 가고있소'하면서 광고하고 있는거나 다름없잖아요 겨우 자성만마대 1개대 뿐인 전력만으로 말이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마교에서 요 근래에 출발한 또 다른 고수들이 없는지 철저히 조사해보라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미끼인 듯 보이는 그들 주위를 철저히 수색해보라고도 일러두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건진 것이 있었나요? 총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옥화무제에게 보고서를 올리기 전에 자신도 그것을 읽어보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떄문이다. "아쉽게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총타와 아예 연락을 주고받기를 포기한 듯, 그 어떤 연락도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흐음...... 이해하기 힘들군요" 잠시 이리저리 궁리하던 옥화무제가 입을 열었다. "보고서 대로라면, 그들은 몽고쪽으로 가고 있는 모양인데......" "예 방향만으로 따진다면 몽고쪽으로 가는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몽고 남부의 케레이트 부족 같은 경우 돈만 많이 준다면 충분히 포섭 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속하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그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엄청난 마차를 몰고 가면서 호위 무사가 겨우 자성만마대 1개대 뿐이었고 더군다가 가는 길에 포두의 가죽을 벗긴다든지 하는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지금 자신들의 행동을 봐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총관은 잠시 옥화무제의 눈치를 살피며 혀로 입술을 축인 뒤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속하의 생각으로는 양양성으로 가고 있는 흑풍대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연막을 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장인걸의 시선을 몽고쪽으로 돌려놓고 양양성 일대를 쓸어버리겠다는 계획이 아니겟습니까?" 옥화무제는 다시 한번 보고서를 쓱 흝어보며 말헀다. "그게 가장 신빙성 있는 추리겠죠 마교 쪽에서는 본문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흑풍대를 지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사실 장인걸의 모든 이목은 본문이 막아주고 있는데 말이에요" "마교는 아직까지도 그걸 모르고 있을 겁니다." "사실 무영문이 흑풍대의 이목을 가리거나 지원을 해주고 있는 것들은 모두 다 마교와 사전에 합의가 된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마교쪽에서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무영문의 움직임은 은밀한 것이니까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옥화무제가 고개를 들더니 총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몽고로 가고 있는 마교 세력에 대한 정보도 장인걸이 포착하지 못하도록 공작을 펼치도록 하세요" 그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지 의아한 표정으로 총관이 물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장인걸의 세력이 분산되면 분산될수록 더욱 좋지 않습니까?" 그 말에 옥화무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만약 장인걸이 무너지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겠어요? 마교와 무림맹은 또다시 무림을 두고 다퉈야 해요 이번에 마교가 더 많은 피해를 보도록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20여 년 동안 축적된 마교의 힘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하니까 말이에요" 그 말에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헀다. "과연 그렇군요 마교와 무림맹의 세력이 모두 약해질수록 본문의 세력은 강성해질 테니까 말입니다." 무영문의 찬란한 미래가 보이는지 총관은 미소를 씩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미끼로 던져진 자성만마대 1개대는 태상문주님의 보살핌 덕분에 목숨을 벌었다는 것 조차 모르겠군요 대신 양양성에 모인 자들은 그 만큼 더 고생을 하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게 미끼가 아닌 진짜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 결정 때문에 북방의 판도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리라는 것 또한 그들은 알 수 없었다. 묵향 일행이 뇌물을 요구한 포두와 포졸들을 어떻게 했는지는 곧이어 그 일대에 소문이 쫙 퍼져버렸다. 대부분의 포두들은 묵향 일행이 나타나자마자 재빨리 기을 열어줬다 하지만 그 중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인물들도 있었다. 묵향 일행이 변방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 주천을 통과하고자 할 때였다. 백여 명이 넘는 포졸들이 십수 명의 포두들의 지휘를 받아가며 활과 창 등으로 무장을 갖춘 채 방어선을 치고 묵향 일행을 맞이했다. 포두들 중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앞에는 창과 칼을 든 포졸들이, 뒤에는 활을 든 포졸들이 도열해 있다. 활을 든 포졸들은 활 시위를 가득 당신 상태여서 명령만 내리면 곧장 발사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있었다. "너희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냐?" 여태까지 봐오던 부패한 포두들과는 그 움직임부터 판이했다. 포졸들도 포두의 명령에 따라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묵향은 뒤에서 아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들이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팔삼 대장이 앞으로 쓱 나서며 대꾸했다. "우리들은 몽고와 교역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오" "그대들이 이전에 벌인 만행은 잘 알고 있겠지? 감히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에게 상해를 입히다니 그것은 황실의 권위를 넘보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이 상단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당장 앞으로 나와 나의 오라를 받거라" 이팔삼은 마른침을 굴꺽 삼키며 교주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교주를 보며 이팔삼은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즉각 결정했다. "쳐랏!" 이팔삼의 손짓에 백여 명의 자성만마대원들이 전광석화처럼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포졸들이 쏜 화살 수십발이 날아들었다. 자성만마대가 아무리 마교에서 하급 무력다체라고는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포졸들이 쏜 화살에 당할 만큼 만만하지는 않았다. 포졸들은 채 두 번째 화살을 날릴 틈도 없이 제업당했다. 앞에서 창이나 칼을 든 포졸들이 뒤에 활을 든 포졸들을 방어해줘야 함에도 순식간에 무너져버렸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약간의 무공의 맛을 봤다고 자부하는 포두들도 몇 있었지만 정식으로 마교에서 수련을 쌓은 자들과는 수준차이가 벌어져도 너무 심하게 벌어졌다. ㄷ특히나 마교도들이 익히는 마공의 특성상 초기 연성속도는 그 어떤 문파보다도 뛰어났다 물론 윗단계로 올라갈수록 더욱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단점을 무시해버릴 정도로 그 속도가 지니는 매력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웬만큼 뛰언나 고수들 정도야 수로 밀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팔삼 대장은 앞을 가로막고 있던 포졸들을 처리한 후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여태까지 해왔듯 정신 좀 차리게 만들어줘라" "옛, 대장" 어딘가로 끌고 가서 주제 파악 좀 하도록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패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때 묵향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잠깐!" 이팔삼 대장은 재빨리 묵향의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아뢰었다. "지시하실 것이 있습니까?" 이팔삼에게 대답도 하지 않고 묵향은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곳에는 포두와 포졸들이 꿇어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이 어떻게 제압당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묵향은 거만한 표정으로 그들을 쭉 흝어본 후 이죽거렸다. "호오, 이제는 뇌물을 받기 위해 떼거리로 몰려오는구먼 이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려면 포두 정도의 힘으로는 안 될 텐데?" 그러면서 묵향은 제알 앞에 꿇어앉아있는 포두들 중의 한 명에게 물었다. "여기 현감놈이 시킨 것이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포두 한 명이 굵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크흐흐흑! 말세로다 어찌 이런 무뢰배들이 날뛴단 말인가 가욕관에 어림군이 주둔하고 있기만 했어도 네놈들을......" "신세타령은 그만하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지? 여기 현삼놈이 뇌물을 거둬오라고 시키더냐?" "당치도 않은 말을 하지 말거라 현감님꼐서 어떠한 분이신데, 네놈따위가 함부로 입에 담는단 말이냐" 묵향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범인을 말해야 껍질을 벗길 것 아니겠느냐? 자 순순히 이실직고 하지?" 그 말에 포두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목숨이 걸린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 아니다 내가 그랬느니라" 묵향의 눈이 실쭉 가늘어졌다 부하들에게 이 정도의 충성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 현감이 보통 인물물은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다. "크흐흐흣 좋다 현감에게 가서 알아보기로 하지 만약 아니라면 죽을 줄 알아" 그런다음 묵향은 고개를 돌려 이팔삼 대장에게 명령했다. "오늘은 때도 늦었고 쉬어야 할 테니, 주천에서 묵도록 하지" "옛." 묵향은 포두 한 명을 앞세워 현감의 처소로 달려갔다. 물론 초류빈도 함께였다. 달리 할 일도 없었던 초류빈 이었으니 상관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구경도 할겸 겸사겸사해서 따라나선 것이었다. "댁이 이 지방의 현감이시오?" 갑자기 묵향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40대 초반의 현감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근엄한 표정으로 묵향과 함께 온 포두에게 질문부터 던졌다. "관 포두 대체 이 자는 누군가?" 현감의 물음에 관 포두는 면목 없다는 듯 대답했다. "현상 수배 된 일행의 우두머리인 듯합니다 현감어른" 현감은 집무를 수행하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묵향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들은 누구인가? 무슨 일로 안 그래도 어지러운 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것인가?" "글쎼..., 그냥 사인들이라고 해둡시다." "본관이 보고를 듣기로는 저 청해성부터 시작해서 이곳ㅇ로 흘러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상인이라니 그렇다 면 몽고와 상거래를 하기 위해 이동해 온 것인가?" "그렇다고 해둡시다" "그런데, 관의 수색에 불응한 것으로 보아 금지물품을 거래하는 자들인가?" 현감의 질문이 계속될수록 묵향의 대답은 조금씩 퉁명스러워졌다. "그럴지도 모르지" 안하무인격의 상대방의 태도에 분기탱천한 현감은 드디어 노성을 터뜨렸다. "이런 발칙한! 금지물품을 밀거래하는 자들이 어찌 관을 이렇듯 업수이 여긴단 말인가?" 현감의 서리밭 같은 호통에 묵향은 시끄럽다는 듯 귓구멍을 후비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야 당연히 마우것도 모르고 설쳐대는 관청놈들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얼마면 되곘소?" 그 말에 현감이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뭣이? 그게 무슨 말이냐?" "얼마를 드리면 지명수배를 헤제해주고, 이곳을 무사 통과시켜 주겠느냐 이 말이오 사실 당신의 부하들은 내 수하들에게 제압당한 지 오래요 그런 만큼 내 제인을 따르는 것이 당신 신상에 좋을 것이오" 현감은 기가 막힌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이, 이런 발칙한!" 그러자 묵향은 쓱 검을 뽑아들며 짙은 살기를 뿜어냈다. "나도 쓸대없이 살생을 즐기지는 않으니 웬만하면 이 정도에서 타협하는 게 좋지 않겠소? 그렇지 않다면 지금 당신을 벨 수밖에 없소" "이잌! 오냐 벨 테면 베어봐라 관에서는 네놈을 끝까지 추적하여 그 죄값을 치르도록 할 것이다" "호홋 이곳 현에서는 우리들을 잡을 만한 병력이 없지 않소 더군다나 어림군은 이곳을 떠난 지 오래지 않소? 자 어서 선택하시오" 그러면서 묵향은 검을 현감의 목에 가져다 댔다. 여차하면 벨 기세 무걓ㅇ이 내뿜는ㄴ 짙은 살기에 현감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항복하지 않았다. 단지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탄식을 터뜨릴 뿐이었다. "허어, 저런 무뢰배들이 날뛰는데도 어찌할 수 업다니... 대송제국의 앞날이 걱정되는구나" 잠시 그런 현감의 얼굴을 바라보던 묵향은 검을 거둔 후 자리에 앉으며 사과헀다. 사실 방금 전까지 그에게 모질게 대한 것은 상대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이토록 청렴한 관리가 이런 변방에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그대를 잠시 시험해서 미안하게 생각하오 나는 대송제국을 위해서 몽고에 군수물자를 지원해주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오" "뭣이?" "몽고를 충동질하여 금의 뒤를 치기 위해서지 아무래도 변방이 소란스러워지면 금으로서도 모든 병력을 송에다가 쏟아 붓기 힘들어지니 말이오 자 이제 대답이 되었소?"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현감은 묵향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이미 포졸들을 완전히 제압한 상태에서 상대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상대에게 지금까지 놀림을 당한 것 같아 화가 나기는 했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 면 상대의 지위는 대단히 높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중대한 사명을 받은 자라면 결코 신분이 낮을 리가 없기 떄문이다. 그렇기에 현감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황실의 밀명을 받고 움직이는 분이시오?"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소 하지만 귀하처럼 청렴한 관리자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소 " 그 말에 현감은 묵향이 황실과 관련된 인무일 것이라고 지레잠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500명이나 되는 정예 병사를 이끌고 험난한 몽고벌판으로 갈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포두의 가죽을 벗긴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포두가 뭔가 그만한 죌르 지었음이 틀림없었다. 현감은 황송스럽다는 듯 ㄱ개를 조아리며 말헀다. "무슨 말씀을...... 본관은 황상폐하의 명을 충실히 받들 뿐이외다 자, 먼 길에 수고가 많으신데 차라도 한잔 드시며 애기를 하시는 게 좋지 않겠소이까?" 그러면서 현감은 관 포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줄도 모르고 자네들에게 괜한 짓을 시켰구먼 그래 다친 사람은 없는가?" "예 없엇습니다. 현ㄱ마 어른" "자, 돌아가서 볼 일이나 보게나 그리고 나가서 차를 대령하라고 이르게" "예" 묵향을 바라보며 현감은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워낙 나라가 어지럽다 보니 요즘 밀수꾼과 마적단들이 판을 치는지라 귀하신 분께 이런 실례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괜찮소이다. 이런 변방에서 마적단까지 상대하자면 많이 힘드실 것이오 자, 이건 그대에게 주는 자그마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주시오" 현ㄱ마은 묵향이 건네준 전표를 받아본 후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통 큰 액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이렇게까지......" "이건 현감에게 주는 뇌물이나 선물이 아니오 마적단을 상대하고, 이 지방의 치안을 정립하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겠소? 거기에 보태주시오" "가, 감사하오이다." 묵향은 현감과 밤늦게 애기를 나누며 몽고쪽 정세라든지 여러가지 대화를 주고 받았다 현감은 묵향이 황실의 밀명을 받고 행동하는 관리라고 여겼기에 아주 깍듯하게 대접을 해왔다. 그리고 이런 둘을 바라보고 있는 초류빈은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현감과 대륙으 ㅣ정세에 대해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묵향의 모습은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단순무식한 교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현감과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묵향의 말을 듣다보니 자신이 그렇게 많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묵향의 지식이 대단히 폭 넓고도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묵향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현감의 모습을 보며 초류빈은 그가 자신이 아는 묵향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가마저 들었다. 요 며칠간 보여주는 묵향의 모습은 사내인 자신이 보더라도 웬지 너무나도 멋있었다. "허, 거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이어지는 인연 며칠 후 국경을 넘은 묵향 일행은 길 안내를 하기 위해 비마대에서 파견된 막이첨의 안내로 몽고벌판 깊숙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몽고여인과 중원인의 혼혈아였는데, 그 때문인지 몽고어에 매우 능통할 뿐만 아니라 그쪽의 풍습에 대한 지식도 매우 해박 했다. 몽고하면 떠오르는 것이 광대한 평원이겠지만, 그들이 이동하는 이곳은 몽고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싱그러운 초목이 여기저기에 우거져있었다. ,몽고 남쪽은 몽고 전역에 비해 비교적 숲이 많이 우거져 있었고, 물도 흔한 편이었다. 막이첨은 이팔삼 대장하고 낮은 목소리로 뭔가 속닥거리더니 묵향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이 일대는 전부 케레이트 부족의 지배자 옹칸의 영역입니다. 그는 오랜세월 송과 교역을 해 온 인물이기에 아무래도 그에게 몇 가지 선 물을 주고 통행권을 얻는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뇌물을 요구한 관리들을 어떻게 만들어놨는지에 대해 이팔삼 대장에게 들은 막이첨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묵향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몽고에서도 강행돌파를 시도하자고 한다면? 이번 일은 대단히 어려워지면서도 귀찮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본교의 힘이라면 그렇게 안 하고 강행돌파를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한다면 말을 구입하기가 힘들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묵향은 알아서 하라는 듯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몽고에 왔으면 몽고의 예법을 따르는 것이 순리겟지" 뇌물을 주는 것은 순리가 아니었기에 쓰레기들에게 돈을 바칠 이유가 없었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는 묵향의 대답이었다. 묵향에 말에 막이첨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옛, 이팔삼 대장에게 전하곘습니다." 뒤로 돌아서며 막이첨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자신들의 힘으로 돌파해 들어갈 수야 있겠지만 문제는 말을 살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말을 훔치거나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케레이트 부족의 본거지에 도착한 후, 묵향은 이팔삼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네가 옹칸을 구워삶도록 하게, 선물은 준비해 왔겠지?" "옛, 걱정마십시오" 명령을 받은 이팔삼은 수하 몇을 거느리고 옹칸이 기거하는 궁전으로 갔다. 대부분의 몽고 족장들은 궁전 따위를 건설 하지 않았다. 궁전을 만들 물자도 없었지만,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족의 특성상 궁전을 만들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옹칸은 달랐다. 그의 수입원 중에서 가장 굵직한 것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역이였다. 시장은 언제나 한곳에서 고정해서 열릴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상인들이 마음 놓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보호해줘야 했다. 그렇 기에 작은 궁전을 만든 것이다. 이팔삼은 통역관으로 막이첨을 거느리고, 수하 몇 명에서 성대한 선물을 들게 하여 옹칸 을 배알하러 궁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묵향은 이팔삼인 돌아오는 것읋 기다리지 않고 수하들과 함께 마시장으로 나갔다. 그렇게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묵향이 몽고어를 구사하여 상인과 거래를 시작하자, 그를 수행하고 있던 수하들은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천마신교에서 교주는 신적인 존재가 아닌가. 그런 분께서 몽고어를 구사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속사정은 다른 데 있었다. 과거 묵향이 기억을 잃었을 대 옥영진 대장군 밑에서 일하면서 몽고어를 배운 적이 있었다. 거기에다가 하부르라는 몽고처녀와 함께 생활하면서 꽤 많은 몽고어 와 함께 몽고의 풍습도 배워둔 것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들은 묵향이 기억을 되찾으며 잠시 잊혀졌었지만 아르티엔이 기억을 몽땅 되살리며 모든 것을 되찾았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막이첨이라는 통역관이 있었기에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았지만 그가 없는 지금 묵향은 직접 상인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몽고마는 작고 다부지게 생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생긴 대로 아주 끈질긴 생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살아가기에 최악의 조건에 가까운 몽고의 대지에 적응해서 살아가다 보니 그런 식으로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몽고마는 그 작은 덩치 때문에 송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고있었다. 고작해야 싸구려 짐말 정도로 쓰기위해 수입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곳에서는 당당하게 전투마로 활용되고 있었다. 묵향이 사들인 몽고마의 수는 무려 3천필 그날 마시장에 나와 있는 거의 대부분의 몽고마를 사들인 수였다. 묵향은 수하들 에게 명령하여 각자 1필씩의 말을 지니고, 남은 말들에게는 중원에서 가져온 화물들을 실었다. 수레 100대분의 엄청난 분량이였지만 2천 5백필에 달하는 말에다가 나눠 싣다 보니 각 말 등에 실린 분량은 그렇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마차들은 모두 표국 등지에서 빌린 것이기에 몽고접영에서 모두 돌려보내야 했다. 묵향이 수하들에게 지시하여 마부들 에게 품삯을 나눠주고 있을 때, 이팔삼이 도랑왔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 "예 자신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락해줬습니다." "수고했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일찍 출발하기로 하지" "옛." 막이첨은 인도로 묵향 일행은 몽고를 횡당하기 시작했다. 테무진이라는 족장이 있는 곳은 몽고의 동북부엿다. 그런 만큼 오랜 시간 몽고 벌판을 가로지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누구도 묵향이 지휘하는 자성만마대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가져가는 화물을 노린 몽고족들의 공격을 몇 번 받기는 했지만, 몽고족들은 막심한 피해만을 입은 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력(武力)에서 쌍방의 차이는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몽고족들의 공격을 가볍게 물리치는 것으로 그쳤지만 그게 자꾸 반복되자 짜증난 묵향이 공격해 들어온 몽고족을 철저하게 응징해서 본보기를 보였다. 그때 죽인 수백 명이나 되는 몽고족의 시체를 갈기갈기 토막내어 여기저기에 흩뿌려 놨던 것이다. 뒤에 따라오는 또 다른 몽고족이 있으면 보라는 듯.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그들을 건드리느려는 간 큰 몽고부족은 없었다. 설혹 그 와중에서 습격해볼까 하는 마음을 가졌던 몽고부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중원 상단과의 격전에서 가까스러 살아서 도망쳐 나온 생존자들이 그때의 참담한 전투상황 을 사방에 알렸다. 생존자들의 증언까지 듣고 나서도 중원 상단을 건드릴 뜻을 굽히지 않는 몽고부족은 없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공포스러운 집단을 상대로 감히도박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전방에서 약 1천기의 몽고병들이 접근중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묵향은 피식 웃으며 이팔삼에게 명령했다. "호오, 오랜만에 손님이 오시는군 이팔삼 대장! 손님 맞을 준비를 해라" 그 말에 이팔삼은 긴장된 표정으로 명령했다. "모두들 전투준비를 갖춰라, 8개조는 앞으로 2개조는 말을 보호한다." 묵향은 초류빈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씩 미소 짓고는 말했다. "심심할 텐데 자네도 따라가서 몸 좀 푸는 게 어때? 요즘 할 일도 없었잖아." 초류빈은 심드렁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공손한 어조로 대꾸했다. 사실 그처럼 뛰어난 고수가 덜떨어진 몽고병사들하고 싸워봤자 식후 운동거리도 될 수 없었기 떄문이다. "분부대로 시행합죠" 초류빈은 4백명의 자성만마대원들을 이끌고 앞서서 달려나갔다. 하지만 짐작관느 달리 이번에 접근한 무리는 약탈을 위해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보급물을 싣고 오는 묵향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테무진이 부하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몽고기병들은 상대에게 적의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헀다. 몽고병사 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손을 위로 들자 그들은 일제히 멈춰섰다. 우두머리인 몽고병사는 말에서 낼니 후 걸어서 초류빈에게로 다가왔다 공격 의사가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그것을 본 초류빈도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우며 말했다. "공격할 의사는 없는 모양인데? 자네는 어덯게 생각하나?" 초류빈의 말에 이팔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테무진의 영역이 멀지 않았다고 막이첨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테무진이 보낸 사람이 아닐까요?" 이떄, 자신들에게 다가오던 몽고병사가 그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말 사이사이에 '테무진' 이라는 말이 끼어 있었다. "자네 추측이 맞는 모양이군" 초류빈은 말에서 내려 몽고병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팔삼이 따르고 있었다. 몽고병사는 처음 보는 중원풍의 복장을 한 사내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던지면서도 손에 쥐고 있는 가죽부대를 초류빈에게 건넸다. "이, 이게 뭐지?" 초류빈은 이팔삼은 곁눈질로 쳐다봤지만 그라고 상관이 모르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몽고 풍속에 능통한 막이첨은 지금 뒤에 남아 있었다. "젠장, 이걸 어떻게 하라고?" 자신의 말을 알아 들을 턱이 없었다. 몽고병사는 손짓으로 그것을 마시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초류빈이 가죽부대를 슬쩍 흔들어봤다. 뭔가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듯 찰랑거림이 느껴졌다. "아아, 먼 길에 왔으니 물이나 술을 대접하는 것인 모양이군 아주 독특한 풍습이네" 기세 좋게 마개를 열고 한 모금 입 속에 넣었던 초류빈은 하마터면 입 속에 들어온 액체를 푸학하고 토해낼 뻔했다. 이 느끼하면서도 괴이한 맛과 역한 냄새는 도무지 인간이 참고 마실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류빈이 누구인가 그는 마시는 척하면서 입속에 들어온 액체를 다시 혀로 슬슬 밀어 가죽부대 속으로 원상복귀시켰다. 그런 다음 신나게 목젖을 움직여 벌컥벌컥 마시는 척했ㄷ. 하지만 그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마유주는 단 한 방울도 없었다. 몽고병사를 향해 한껏 잘 마셨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뒤 초류빈은 이팔삼을 슬쩍 쳐다봤다. "망할 자식, 혹시 알면서 나한테 엿 먹으라고 가만히 있었던 거 아냐?" 이상한 의심이 들기 시작한 초류빈은 그 가죽부대를 이팔삼에게 건네며 말했다. "자네도 한 모금 하게 환영의 표시니 맛나게 마셔주는 게 예의겠지?" 말이야 그렇지만 초류빈의 어감은 이거 맛나게 안 마시면 반쯤 죽여주겠다는 협박의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이팔삼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사실 이팔삼은 초류빈이 자신에게 가죽부대를 건네주자 가슴이 뛰었다. 자신과 같은 하급무사가 하늘 같은 부교주님과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영광이 아닌가 그런 데 가죽부대를 건네는 순간 초류빈의 말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는 긴장어린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걱 삼키며 가죽부대를 받아들였다. "옛, 감사합니다. 부교주님" 그는 가죽부대를 받아 입가로 가져가며 슬쩍 냄새를 맡아보았다. '허억! 이 무슨 이상야릇한 냄새더냐!' 이팔삼은 그제서야 초류빈이 가죽부대를 건넬 때 퉁명스럽게 말하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냄새만 맡았어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가죽부대를 입가로 가져갔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부교주가 마시라면 마시는 거다 설혹 이 안에 독약이 들어 있다고 해도 맛나게 마셔야만 한다. 이팔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가죽부대를 곧장 입으로 가져가 사력을 다해 벌컥벌컥 들이켰다. 곧이어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괴상한 맛과 함께 위가 독극물이라도 들어온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토해낼 수는 없었다. 이팔삼은 필사적으로 구토를 참아냈다. 사나이 이팔삼 여기까지 와서 상관에게 맞아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몇 모금이나 마셨는지 기억도 안 난다 배가 불러올 떄즘 되어 위장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는지 아니면 헛된 저항을 포기해 버렸는지 잠잠해진 지 오래다. 이팔삼은 가죽부대를 몽고병에게로 다시 넘겼다. 트림이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괜히 트림을 하다가 마유주가 뿜어져 나올까 봐 이팔삼은 배에 힘을 꽉 주고 참아버렸다. 이팔사은 말 없이 엄지손가락을 지켜들며 억지로 활짝 미소지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곧바로 토할 것만 같았기 떄문이다. 그 모습을 보던 초류빈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았던 그 뭔가를 저놈은 아주 맛있다는 듯 벌컥 벌컥 마시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자신이 겪었던 그 고통을 네놈도 어디 한번 당해봐라 하는 심정에서 가죽부대를 건넸던 것인데 저렇게 맛있게 마시다니...... 거참 이상하네 혹시 냄새가 약간 고약해서 그렇지 맛은 아주 괜찮았던 게 아닐까? 가죽부대를 바라보며 별의 별 생각이 초류빈의 뇌리를 떠돌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환영의 의미로 준 마유주를 이렇듯 호쾌하게 들이키자 몽고 병사는 아주 기분이 좋은 듯 환한 웃음을 되돌리며 자신도 벌컥벌컥 마유주는 들이켰다. 묵향이 거느린 본대가 도착한 후에야 막이첨이 달려나와 몽고병사들과 겨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교주님 저 자는 젤메라고 한답니다. 주군인 테무진의 명을 받들어 교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묵향도 그 말을 알아들었지만 그는 모르는 척 막이첨의 통역을 다 듣고 난 후 부하들에게 명령헀다. "좋아 자 가자 조금만 더 지나면 목적지에 도착하곘군" 반나절동안 벌판을 더 가로질러 간 후에야 묵향은 테무진을 만날 수 있었다. 테무진은 키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모든 근육이 잘 발달한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묵향이 가져온 물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기에 놀라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만해도 수천필이다. 이것만 해도 자신의 세력이 월등하게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선물을 가져왔다면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것같았다. 그렇기에 테무진은 상대의 저의를 알고 싶다는 듯 길게 째진 눈으로 슬쩍 묵향을 살펴보았다. "서로 간의 동맹을 위해 이렇듯 먼 길을을 와준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바이오" 테무진은 묵향이 자신의 검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무인이 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탁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기회에 자신이 지닌 검을 자랑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 검은 나의 아버지 예수게이께서 사용하셨던 검이오 아주 훌륭한 보검이지 않소?" 물론 그 모든 말은 사이에 끼어 있는 막이첨이 즉시 통역해줬다 테무진의 말을 들은 묵향의 눈에는 짙은 감회가 서렸다. 어찌 그가 그 검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옥영진 대장군이 자신에게 사용하라고 줬던 청성 이라고 하는 검이었다. 황제가 공을 세운 신하에게 하사한 것인 만큼 장식이 아주 호화로운 검이었다. 그렇다보니 금방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 검을 과거 하부르를 맡긴 사내녀석에게 줬었지 용의 눈을 가지고 있던 뛰어난 아이에게 말이야 저놈은 아마 그 녀석의 아들은 모양이군 아무리 봐도 그 녀석보다는 좀 떨어지는 것 같은데......' 옥영진 대장군의 휘하에서 싸우던 일이 마치 어제 일인 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용의 눈을 지니고 있던 그 아이는 요절하고 말았구나. 하부르......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가 그녀석이 다스리던 부족이라면 그녀 또한 이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그녀도 결혼했을 테고 아마 아이도 있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어덯게 살고 있을까? 너무나도 궁금헀다. 하지만 직므 묵향은 하부르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사적인 감정은 제쳐놓고 묵향은 테무진에게 말했다. "쓸만한 검이긴 하군 하기야 황제가 준 검이라고 옥 대장군에게서 들었는데 나쁜 것일 리가 없지 사실 그때 그놈에게 선물 하기는 좀 아까운 검이었어 그건 그렇고 멍청한 몽고놈 주제에 본좌와 동맹을 맺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이만한 물자까지 힘들여 운반해다가 안겨줬으니 목숨을 걸고 본좌에게 충성해야 해 알겠나?" 동맹을 맺을 상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저놈은 한어를 단 한마디도 모르는데 말이다. 황당하다는 듯 교주를 멍하니 바라보던 막이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통역할까요?" "이런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구 그런 사소한 것까지 본좌가 일일이 다 가르쳐줘야겠나?" 막이첨은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교주님"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테무진을 바라보며 유창한 몽고어로 말했다. "저희 교주님께서는 당신처럼 뛰어나고 용맹스런 부족장을 만나게되어 기쁘다고 하쎳소이다. 더불어 당신이 다스리는 부족과 동맹을 맺게 되어 기쁘다고 하셨소이다. 더불어 당신이 다스리는 부족과 동맹을 맺게 되어 마음이 든ㄷ느하다고 하셨소이다." 막이첨의 통역을 들은 테무진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토록 많은 선물을 가져왔다면 뭔가 바라느 것이 있을 텐데...... 그게 무엇이오?" "우선 본좌가 원하는 것은 타타르 부족의 멸망이야" 그 말에 테무진의 눈이 번쩍 빛났다. 타타르 부족이라면 불구대첩의 원수였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그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대가라면 원하는 대로 해주겠소" "그게 다는 아니야 타타르가 멸망하면 네녀석의 영토는 금과 맞닿게 되겠지 안 그래?" 테무진은 불신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금을 치라는 말이오이까?"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물론" "그건 터무니없는 요구요 금은 워낙 강성한 제국이라 우리들의 감히 건드릴 수 없단는 것을 귀하도 잘 알지 않소" 테무진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묵향은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 이런 멍청한 녀석이 아주 성급하게 판단하는군 내 말은 금을 공격해서 멸망시키든지 아니면 영토를 점령하라는 말이 아니야" 테무진은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달라는 말이시오?" "금과 몽고의 국경선은 아주 길지 이곳저곳 금군의 경계가 약한 곳을 골라서 약탈하고 도망쳐 달라는 말이야 금군과 치고 박으라는 말이 아니란 말이다. 그 정도도 생각 못하는 것을 보면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구먼" 막이첨의 통역을 듣던 테무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리기 시작헀다. 그 일이라면 이 자가 부탁하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척박한 몽고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주위를 약탈해서 그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자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해줄 수 있소이다." "하하핫, 좋아 자네가 나의 이해가 합쳐졌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군 나야 네놈이 금군들과 치고 박다가 죽든지 말든지 별로 신경쓰지는 않겠지만 네놈은 몸을 아끼지 말고 열심히 금의 국경을 괴롭혀야 돼 알겠나?" 묵향과 테무진의 사이에 끼어서 열심히 통역을 하는 막이첨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묵향의 거친 말을 최대한 정중한 용어로 바꿔 다시 태무천에게 통역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협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테무진은 호탕하게 웃은 후 정중하게 말했다. "물론이오 자, 부하들에게 귀한 손님들을 위해 성대하게 잔치를 준비하라고 일렀소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십시다." 일단 여기에 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묵향은 지금껏 테무진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잠깐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혹시 이 부족에 하부르라는 여자가 살고 있나? 과거에 안면이 있기에 여기 있다면 만나봤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테무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하부르는 매우 흔한 이름이기에 그것만 가지고는 그 여자를 찾기는 힘들 거요 우리 부족만 해도 그런 이름을 쓰는 여자가 몇 명이나 있소 그 여자의 나이가 어느 정도 되오?"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40은 넘을 것 같은데?" 잠시 생각해보던 테무진은 자신의 부하들을 불러들여 한참동안 쑤근거렸다. 그런 다음 그는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부족에 그 조건을 충족하는 여자가 세 명 있다고 하오 지금 부하들에게 데려오라고 일렀으니 곧 올 거외다." "허, 그놈 참 행동도 재빠르군" 잠시 후 테무진의 부하 한 명이 몽고여자 세 명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묵향은 그들 중에서 하부르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전체적인 윤곽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얼굴은 하부르와는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ㄷ. 그리고 그들 중에서 하나는 60을 넘어 보일 정도로 팍삭 늙은 여자였다. 묵향은 씁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젠장, 아무래도 내가 아는 그녀는 여기에 없는 것 같군" "그렇소? 그거 유감이구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실망한 듯한 묵향의 기색을 살피며 테무진은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활당한 어조로 말했다. "자자 멀리서 오셨는데 전치나 즐기러 갑시다.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해 두라 일렀소" 테무진은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살찐 말과 양을 잡고 마유주에 취한 젊은이들이 하나 둘씩 나와 몽고식 씨름인 '버흐' 를 즐기며 자신의 용맹을 뽐냈다. 가죽으로 만든 꽉 끼는 반바지와 벗어젖힌 근육질의 상체가 그들을 더욱 용맹스럽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부족장인 테무진과 묵향이 가장 상석에 앉고 묵향의 옆에 초류빈이 자리를 잡았다. 몽고 여자 들이 각종 음식들을 가져왔다. 초류빈은 먼저 보기 좋은 모양으로 잘라놓은 하얀 덩어리를 보고 약간 망설이다가 집어들고는 조금 맛을 봤다. 전체적인 향으로 보아 뭔가 동물의 젖으로 만든 것인 모양인데 고소한 것이 꽤 맛이 괜찮았다. 그걸 몇개인가 집어먹고 있던 초류빈의 눈에 문득 커다란 가죽부대가 보였다. 방금 전에 맛본 음식이 꽤 마음에 들었던 초류빈은 이번에는 가죽 부대에 든 음식물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사발에 조금 따른 후 냄새를 맡았다. '으읔! 정말 이 냄새는 도저히 적으이 안 되는군' 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그는 조금맛을 봤다. 냄새와는 달리 맛은 아주 좋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입 속에 그것을 집어넣은 초류빈의 안색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그것을 마신 것을 후회하며 몰래 옆에다가 뱉어버렸다. 맛은 냄새보다 더욱 고약했던 것이다. "젠장 이따위 걸 마시고 있다니......" 이때 기가 막힌 생각이 초류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혼자 즐거워하다가 이윽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짐짓 커다란 사발을 묵향에게 권하며 말했다. 물론 표정관리를 충분히 하면서 말이다. "아까 막이첨의 말을 듣자하니 여기서는 이 술을 잘 마시면 아주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교주님께서도 한잔 하시죠 동맹을 축하하는 자린데 테무진이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묵향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오 자네가 그런 소소한 것까지 신경쓸 줄이야 제법이군 그럼 따라봐라." "옛." 따르라면 못따를 줄 알았는가 초류빈은 커다란 가죽부대를 가져와서 사발이 넘치기 직전까지 따랐다. 느글느글 거리는 묘한 역한 냄새를 흘리는 희뿌연 액체가 찰랑거렸다. 저걸 한 사발 들이킨다면 뱃속이 아마 뒤집힐 거다 물론 자신은 가죽부대 덕분에 마시는 척만 할 수 있었지만 저렇게 사발에 담아줬으니 어절 수 없이 몽땅 다 마셔야만 한다. 더군다나 지금 이 자리는 동맹을 맺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자리가 아닌가 아무리 제멋대로 인 교주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초류빈은 몇십 년 동안이나 묵혀 두었던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 것만 같은 통쾌함을 느꼇다. 초류빈이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모르는지 묵향은 정중하게 테무진에게 사발을 들어 보인 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오잉? 저럴수가...... 아 아니야 억지로 참고 있는 걸 거야 암, 그렇고 말고' 묵향은 숨도 쉬지 않고 그걸 다 들이킨 다음, 엄지손가락을 지켜들며 활짝 미소짓고는 말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말은 조금 엇갈려 있었다. "젠장. 그래도 옛날처럼 역겹지는 않군" 묵향의 호쾌한 모습에 테무진이 엄청나게 좋아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초류빈은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꼇다. 왜냐하면 묵향이 환히 웃으며 빈 사발을 자신에게 건넸던 것이다. "자, 자네도 한 사발 하지 이거 냄새는 좀 그렇지만 일단 적응만 하면 그런대로 참을 만할 거야 나도 옛날에 어쩔 수 없이 엄청 먹었지" 그때가 생각나는지 묵향이 미소를 지었다 하부르 때문에 과거 그가 얼마나 많은 마유주를 마셔야만 했던가 그 맛이 고소하다고 최면까지 걸어가며 마셨었다. 역한 냄새기는 했지만 그때의 추억을 마시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그런 추억 따위가 있을 리 없는 초류빈에게는 마유준느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았다. 묵향이 넘치게 따라준 마유주는 억지로 한 사발 마신 초류빈은 찡그러진 얼굴 표정으로 억지로 바로 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테무진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지켜들었다. "제,젠장" 입을 열면 마유주가 쏟아져 나올까 봐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하지만 초류빈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테무진은 활짝 미소지었다. 뭐라고 그가 말했지만 초류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뱃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라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아 급하게 자리를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초류빈은 이를 악물며 재빨리 장내를 벗어난 후 경공술을 전개하여 멀리멀리 이동했다. 그리고 그 순간! "쿠어어억!" 묵향에 테무진과 반쯤 설 익은 고기를 맛나게 씹어먹고 있는 동안 초류빈은 뱃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다 땅바닥에 토해내고 있었다. 한참을 토했건만 아직도 그 빌어먹을 마유주의 역한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위장이 뒤집어졌는지 씁쓸한 신맛까지 느껴졌지만 계속해서 헛구역질만 나왔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초류빈의 눈가에 살짝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빌어먹을, 그 새끼는 인간도 아니야! 이걸 참고 마시다니... 우욱!" 열심히 구역질을 하면서 초류빈은 생각했다. 역시 그 인간과 가까이 있어 봐야 좋은 일이라고는 절대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묵향은 이팔삼 대장을 호출했다. 묵향은 부리나케 달려온 이팔삼 대장에게 명령했다. "내일 출발할 것이다. 준비해두도록 해라" 이곳에 온 지 며칠이 흘렀다.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방에게 실례되지 않을 정도로 머물렀다고 ㅏㅍㄴ단한 묵향의 명령이었다. 그 명령에 이팔삼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옛, 교주님" 이곳에 온 지 며칠이 흘렀다.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방에게 실례되지 않을 정도로 머물렀다고 판단한 묵향의 명령이었다. 그 명령에 이팔삼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옛, 교주님" 이제 이 지긋지긋한 몽고족들의 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팔삼 대장의 대답은 평소보다 더욱 기운찬 것이엇다. 그 말을 옆에서 들은 초류빈의 안색도 환하게 밝아졌다. 그 역시 이 황량한 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기야 소기의 목적을 다완수한 지금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때 밖에서 막이첨이 들어와 보고했다. "교주님께 아룁니다." "무엇이냐?" "테무진이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며 교주님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래? 어디로 가면 되지?" "자신의 숙소에서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막이첨의 보고에 묵향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래? 젠장 또다시 마유주를 마셔야 하나? 생각만 해도 속이 느글거리는 것 같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놈에게 나중에 찾아가겠다고 전해라" "옛." 자신의 숙소에 불러들여서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을 보면 묵향을 그만큼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만큼 막대한 물자를 실어다가 줬는데 그 정도 신뢰는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날 저녁 묵향은 막이첨과 함께 테무진의 숙소로 갔다. 커다란 몽고식 파오 안으로 들어가자 테무진이 반기며 맞이했다. 테무진은 자신의 식구들을 묵향에게 소개했다. 테무진의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부인이었다. 그 중 한 명은 테무진의 첫번째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다. 묵향이 인사를 하는데 아무래도 테무진의 어머니라는 인물의 행동이 수상쩍다. 묵향을 보고는 흠칫하는 것 같더니 자세히 관찰하는것이었다. 주름이 깊게 패인 그녀의 얼굴로 봐서 나이가 50은 넘어 보였다 그녀는 묵향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서야 자신이 손님을 앞에 두고 무례한 행동을 하고 있었음을 꺠달았는지 갑자기 허둥지둥 서둘러 며느리에게 마유주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도저히 적응할 수 는 맛이기는 했지만 묵향은 마유주는 벌컥 벌컥 들이켰다. 마유주 한 사발을 묵향이 단숨에 들이키자 테무진은 환히 미소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손님들이 자리를 잡고 앉은 후 그의 부인들이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몽고의 음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흰 음식과 붉은 음식이다. 물론 흰 음식이라는 것은 유제품을 말하는 것이고 붉은 음식은 육고기를 말하는 것이다. 가축들의 젖을 생산할 때는 유제품 의 음식이 주를 이룬다. 가을부터 봄까지 즉 유제품이 생산되지 않을 때는 육류를 섭취하게 된다. 가을에 살찐 가축 들을 잡아 고깃덩이 채로 잘 말려 가루로 만들어 보관했다가 요리해 먹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주된 겨울 음식이 된다. 하지만 오늘처럼 중요한 손님을 초대한 경우에는 살찐 가축을 잡아 요리해서 내놓는다 물론 요리라고 해봐야 대충 삶은 정도다 테무진은 손님들이 음식을 베어먹을 작은 칼을 지니고 있는지 힐끗 바라봤다. 손님들은 그런 칼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알고 그는 칼을 가지고 와서 손님들에게 권했다. 칼을 가지고 있어야만 식사를 할 수 있는 몽고 마음ㅁ만 먹으면 상대를 찔러 죽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몽고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는 것은 서로에 대한 대단한 신뢰의 표시였다. 설 익은 고기를 썩썩 베어먹으며 테무진은 묵향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실 이 초원구석에 박혀 있는 그로서는 나중에 자신의 적이 될 대금제국에 대해 들어본 적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막연하게 엄청나게 강하고 거대한 제국이라는 소문만 들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라도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열심이었다. 마유주를 조금씩 들이키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이 깊도록 애기를 하고야 말았다. 물론 중간에서 그들의 대환느 막이첨이 계속 통역을 했다. 술자리가 파한 후 묵향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파오를 나섰을 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 중원에서 온 손님" 막이첨이 뒤로 돌아선 순간 묵향도 함께 돌아섰다. 막이첨이 통역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묵향도 안 해서 그렇지 어느 정도 몽고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누가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 궁금헀던 묵향이었기에 막이첨이 통역하지도 않았는데 뒤로 돌아선 것이다. 그곳에는 테무진의 어머니라고 소개받았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난처한 듯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냈다. "소님께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기다렸다오" 묵향은 자신과 막이첨을 번갈아서 손짓했다. 둘 중 누구와 애기하고 싶냐는 뜻이었다. 그녀는 묵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님 말이오" 묵향은 막이첨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한 후 그녀에게 약간 어눌하기는 해도 몽고어로 말했다. "무슨 말인데 그러십니까?" 사실 그녀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살아온 묵향이다. 하지만 겉으로 봤을 때 자신은 새파란 청년이고 저 여인은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여인이 ㅏ닌가 그것도 동맹을 맺은 인물의 어머니였다. 괜힌 오해를 불러일으킬 이유도 없었으므로 묵향은 공손하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혹시 손님의 아버지께서는 대송제국의 장군이 아니시오?" 내 아버지가 장군이라고? 이건 무슨 소리인가? 내 아버지라면 여러 수십 년도 전에 죽었을 것이 확실한데.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묵향의 대답을 그녀는 그의 아버지가 장군이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미안하군요 바쁜 사람을 불러세워서...... 하지만 그 사람과 너무나도 닮아서" 닮았다고? 그 말에 묵향은 혹시나 싶어 뒤돌아서는 그녀를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하부르?" 그 말에 그녀는 멈칫하더니 뒤로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두 눈에는 조금씩 물기가 베어나오고 있었다. "여, 역시 그 분의 핏줄이셨군요" 황당스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말이었지만 묵향은 격정에 찬 눈빛으로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하부르라는 이름이 아니시오?" 그러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묵향을 빤히 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 처녀적 이름을 알고 계씨다니 정말 그분의 칫줄이 맞는가 보군요" 그 분의 핏줄이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묵향은 눈앞의 여인이 자신이 찾던 하부르 하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를 발바ㅗ는 묵향의 눈빛은 어느새 아련하게 바뀌어있었다. 묵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헀다. "너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묵향의 말에 하부르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런 하대도 그렇지만 자신을 알아보는 듯했기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네 아들이 테무진이었구나 용의 눈을 가진 그 아이에게 너를 부탁하긴 했지만 설마 그녀석이 너와 결혼했을 줄이야......" 그녀는 뭘 생각했는지 갑자기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묵향을 살펴 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큰 소리 로 말하면 상대가 사라져버리기나 하는 듯 "서, 설마...... 진짜로 당신이십니까?" "맞아 나야 묵향... 아니 국광" 그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그럴 리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하나도 늙지 않다니......" 묵향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중원에는 늙지 않도록 해주는 무술도 있지 배우기가 쉽지는 않지만 나는 그걸 익혔거든 물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오래 살기는 하겠지만 내가 불로불사의 신체를 지닌 괴물이라는 말은 아니야" "저, 정말인가요?" "내가 왜 네게 거짓말을 하겠니?" 묵향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과거의 일들을 하나씩 들려줬다 그녀와 자신이 아니라면 알 수가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말이다. 그것을 듣고서야 그녀는 그가 묵향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묵향에게 다가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만지며 말했다. "그랬군요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당신을 워낙 닮았기에 당신이 남기신 핏줄인 줄 알았답니다." 하부르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헤어진 지 벌써 몇십 년이 흘렀거늘 사람이 어떻게 하나도 변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정말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동안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져요 그렇지만......" 그러면서 그녀는 쭈글쭈글한 자신의 손을 봤다 그것을 보면 이게 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런 하부르를 바라보며 묵향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나한테도 많은 일이 있었거든 예수게이가 죽고 네가 그토록 고생하고 있는 줄 진작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달려왔을 텐데...... 정말 미안하구나" 하부르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니네요 괜찮아요 예수게이는 없지만 대신 그와 나의 핏줄들이 남아있으니까요" 주저 없이 말하는 그녀의 말 속에는 후회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당당함이 묻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묵향은 대견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곧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묵향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왜 테무진은 하부르라는 이름의 여자를 찾을 때 너를 소개시켜 주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벌써 만났을 텐데" "저, 이름을 바꿨어요 예수게이와 결혼하여 호에룬이라고......" 그 말에 묵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 그렇게 된 거였군" 하부르는 묵향과 오랜 시간 옜 이야기를 나눴다 예수게이와의 결혼 아이들을 낳은 것 그리고 남편의 죽음 그 후 엄청난 고생을 하다가 첫 아들인 테무진이 이토록 성장하기까지의 과정 그녀의 추억담은 한편의 경극을 보는 듯 너무나도 극적이었다. 그녀가 나이에 비해 이토록 겉늙은 것도 다 그때의 고생 탓이리라 묵햐은 애정이 담뿍 묻어 있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주며 중얼거렸다. "이제 더 이상 너를 고생시키지 않을 거야 두고 보거라 네 아들은 몽고 제일의 강자로 거듭나게 될 거야 내 말을 믿어도 좋다." 그 말은 하부르에게 들려준다기 보다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팔삼 대장은 묵향을 찾아와 출발 준비가 다 되었음을 보고헀다. "준비는 이미 끝마쳤습니다. 교주님 언제 출발하실 것인지 하명해 주십시오" 이제 이 지긋지긋한 몽고 땅을 벗어난다는 생각에서인지 이팔삼 대장의 목소리는 아주 밝고 힘찼다. "오늘은 출발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짐을 풀라고 지시하도록" 묵향의 명령에 이팔삼 대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계획을 변경하곘다." "옛" "본좐느 조금 더 이곳에 머물 것이야 알겠나?" "존명!" 이팔삼 대장은 갑자기 교주가 왜 생각이 바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묵향 외에는 하부르, 아니 호에룬뿐이었으니 말이다. 어쨌건 교주가 더 무멀고 싶다는 데야 이팔삼이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바로 그날부터 묵향의 테무진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각종 전략과 전술들을 가르쳤다, 과거 옥영진 대장군 휘하에서 엄청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묵향의 지식은 그야말로 방대한 것이었다. 묵향은 테무진에게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주변부족과의 전투에 참가하여 어떻게 병력을 운영하는 것이 최적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인지 눈으로 보여줬다. 영특한 두뇌를 지닌 테무진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상대는 자신을 필요에 따라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몽고의 패자로 키우기 위해 이런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그는 직감했다. 야만의 대지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몸으로 부딪혀가며 배워 나갔을 뿐 체계적인 지식을 정립하지 못한 그였다. 그때끄때 닥친 일에 대한 임기응변에는 능했지만 전체적인 전략을 수립하여 꾸준히 밀어붙이는 것은 아무래도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묵향의 가르침은 그에게 있어서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고 모래에 물이 스며들 듯 묵향이 가르쳐 주는 것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모자라는 부분을 아낌없이 채워주는 상대에 대해 테무진은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왜 자신에게 이런 호위를 베추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의 세력이 엄청나게 크다고 하면 상대의 행동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테무진이 거느린 정도의 작은 부족이라면 몽고벌판에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이다." 테무진과 친밀해진 묵향은 아예 막이첨을 뺴고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테무진의 물음에 묵향은 마치 아들에게 말하는 아버지의 그것처럼 인자한 어조로 대답했다. 테무진을 하부르의 아들로 인정한 후부터 테무진의 대한 묵향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뭐든지 말해보게 내가 아는 한도 안에서는 대답해줄 테니" "왜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소 사실 그대라 거느리고 온 부하들을 봤을 때 당신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인지조차 의심스럽소 직접 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동원하는 거요?" "그건 자네가 호에룬과 예수게이의 아들이기 떄문이지" 그 말에 테무진은 의문에 가득 찬 시선을 보냈다. 그렇다면 이 자는 나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자시보다도 어려 보인느데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자기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데 말이다. "예수게이는 정말 뛰어난 용사였어 내가 하부르, 아니 호에론의 미래를 맡겼을 정도로 말일세 그리고 그 둘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자네야 그런 자네에게 내가 이 정도 해주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는가?" 너무나도 간단한 설명이었다. '어머님을 맡겼다고? 그럼 저 자의 말이 사실인지 어머니께 물어보면 되겠군' 어머니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다고 생각하는 테무진이었다. 사실 어머니가 이방인을 위해 아들인 자기에게 거짓말을ㄹ 할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날 저녁 테무진은 틈을 보다가 어머니 호에룬에게 자신이 묻고자 하는 것을 밝혔다. "이번에 온 대국인 말입니다. 그에 대해서 어머님께 조언을 청하고 싶습니다." 평소에도 태무진이 '지혜로운 분' 으로 칭하며 대소사에 있어서 조언을 청해왔던 호에룬이었다. "무엇을 물어보고 싶은 것이냐?" "예. 그가 어머니를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알고 있는 듯하더군요 이건 중요한 일입니다. 그가 왜 그토록 제게 많은 것을 베푸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야 대처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아아 그것 말이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호에룬은 저으기 당황했다. 사실, 그 근원부터 애기하자면 찬황흑풍단이 몽고를 침략한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우너한 것은 테무진의 할아버지 철진천의 목이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무향은 자기 아들의 할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된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아들에게 밝혀 쓸데없는 복수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호에룬은 생가했다. 그만큼 그가 알고 있는 묵향이라는 사내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한때 사랑했었던 사람이었다. "그 분은 네 아버지의 안다이기 때문이지" 설명은 짧았지만, 그 한 마디로 테무진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몽고에서는 '안다' 라는 풍습이 있었다. 목숨을 맡길만한 친구를 칭하는 명칭이다. 안다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특별한 의식까지 치뤄야만 했다. 그리고 어떤 이를 안다로 삼으면 그가 위급할 때 목숨을 걸고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다. 사실 에수게이의 안다였던 옹칸의 경우 그 안다가 죽음을 당한 것에는 애석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안다의 아들인 테무진에게 해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안다건 뭐건 어찌되었건 사람이 하는 일이다. 자신의 이익과 부족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묵향이라는 자는 어떤가 저 멀리 송제국에서 온 아버지의 안다임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자신에게 베풀지 않는가 세상의 인심이라는 것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것임에도 말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이 있다.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다. 바로 이 자는 아버지의 진정한 안다일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안다라면 자신에게 이렇듯 모든 것을 베푸는 것을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테무진으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는 아주 젊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가 어떻게 아버지의 안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호에룬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분의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단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 그 분의 행동을 보면 짐작하기 힘든 깊은 연륜 이 느껴지지 않느냐? 그것이 그분이 지닌 매력 중에 하나니까 말이다." 묵향을 생각하며 테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다 이 지독한 몽고에서 살아남은 그와 비슷한 연령임에도 불구하고 묵향의 행동은 알 수 없는 노숙함이 있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분의 행동은 바로 그 분의 연류을 나타낸느 거란다 그 분의 나이는 생가보다 아주 많지 내가 처녀 일 때 그 분과 처음 만났었는데 그때도 그 분은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어" 그 말에 테무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ㄷ. 그렇다면 그 인간은 불로불사의 괴물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들의 눈이 휘둥그레지지 호에룬은 살포시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단다 대송제국에는 사람을 젊게 만드는 그러니까 늙는 것을 억제하는 이상한 무술이 있는 모양이다 그 분은 그것을 익혔다고 하시더구나 물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오래 살 뿐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그, 그것이 정말이십니까?" 아들의 말에 호에룬은 미소 띤 어조로 대답헀다. "내가 왜 네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나도 그 분을 여기서 처음 봤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지 아버지와 나를 처음 만나게 해줬던 그 분과 꼭 빼닮은 모습에 그 분의 핏줄인 줄만 알았던 거였지 그래서 망설 이다 말을 걸었는데 옛날 그 분과 나만이 알고 있는 추억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니 그래서 그 분의 핏줄이 아니라 진짜로 그 분인 것을 알았단다" 흑풍대의 분전과 오해 흑풍대는 최대한 빨리 이동하여 양양성 인근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장 금군과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금군의 수는 무리 30만에 달한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들로 구성된 흑풍대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상대로 정면대결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관지는 금군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막사를 치고 금군의 동태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따로 정찰대 30개 조를 뽑아서 금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 무영문이나 비마대에서도 계속적인 정보가 흘러 들엉왔기에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정보의 부족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관지가 과거 대송의 무장 출신이었기에 가능한 한 가지 합동작전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곳에 도착하자 마자 주변의 어림군들에게 전령을 보냈다. 자신이 무림의 강대한 문파들 중의 하나인 천마신교에서 보낸 지원군임을 밝히고 상호 합동작전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적의 정보 외에 아군의 정보도 충분히 입수함으로 인해 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흑풍대가 이곳에 도착한지 1개월 정도가 흘렀을 때 드디어 금군이 움직이기 시작헀다. "무영문에서 금군 20만이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정보는 보내왔고 정찰대 또한 그렇게 보고해 왔습니다." 관지는 지도를 세심히 살펴봤다. 이대로 이동해봐야 아래쪽은 태별산맥(太別山脈)이 가로막고 있다. 그곳을 넘는다면 광활한 곡창지대가 펼쳐진다. 그리고 곡창지대의 중심에는 호복성의 성도 무한이 있었다. ㅇ무한은 한수와 장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놈들이 무한을 노리는 모양이군, 하기야 무한만 점거할 수 있다면 장강을 도하하기는 한결 쉽겠지" 무한은 교통의 중심지인 만큼 운송사업이 발달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배들을 징발하여 장강을 건너기도 쉬울 것이다. 설혹 무한에 있는 배를 모조리 불태운다 하더라도 그곳에 살고 있는 조선공들을 끌어모은다면 배를 건조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 말에 마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틀림없습니다. 무한만 점령할 수 있다면 남양방면으로 뚫린 관도를 통해 보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굳이 무리해서 양양성을 점령하지 않아도 되죠" "그렇다면 선택은 두 가지군 무한을 방어하느냐 아니면 이제 10만으로 줄어든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놈들을 치느냐......" "먼저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놈들을 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마화의 말에 관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양양성은 얼마든지 더 버틸 수 있겠지만 무한은 다르다 양양성을 포위한 적군을 격파할 수는 있겠지만 아마도 그때쯤이면 무한을 잃게 될 거야 그리고 언제 장인걸이 거느린 대군이 남하해 올지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무한을 잃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뼈아픈 손실이 되겠지" "수하들에게 출동준비를 하라 이르게씁니다." "무한쪽에 있는 어림군에도 기별을 넣어라 금의 대군이 무한쪽으로 남하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무영문에도 통고하여 그에 대비하도록! 여기를 최후의 저지선으로 잡으면 될 거야" 마화는 관지가 지도에서 가리킨 지점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것은 무한에서 북쪽으로 15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넓은 평원 이었다. 서쪽으로는 탁 트인 평원이었고 동쪽으로는 야트막하기는 하지만 산들이 펼쳐져 있었다. 일반 병사들에 비해 기동력이 훨씬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흑풍대나 무림인들이 추축이 되어 방어진을 하는 데 있어서 결코 나쁜 지형이 아니었다. 무한은 양양성 처럼 요새화된 도시가 아니다. 그런 만큼 무한에서 시가전을 펼치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는 편이 훨씬 유리할 것은 틀림 없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그쪽으로 이동해서 그들과 합류해야겠군요" 그 말에 관지는 방긋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벌써부터 그쪽으로 갈 필요는 없지"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거기 모여들 병력의 수야 뻔한 것 아니겠나? 고작해야 5만도 안 되겠지 그 수로 20만의 병력과 정면대결을 하자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들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여 적들을 친다 마침 적들은 대별산맥으로 향하고 있다 매복하기 딱 좋은 곳이지 만약 그게 실패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정면대결을 해야겠지만 그러면 피해가 막심할 거야 안 그런가?" 그 말에 마화의 표정에는 얼핏 상관에 대한 존경의 빛이 떠올랐다. 관지에 대한 수하들의 신뢴느 바로 이것에서 비롯된느 것이였다. 최대한 수하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계획을 수립하는 것 바로 이 점 떄문에 수하들은 전장에서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되는 것이었다. 마화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수하들에게 그렇게 지시해두겟습니다." 양양성에서 이탈한 금군 20만은 하루 종일 강행군하여 약 80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다음날도 90리를 행군했다. 목표인 무한까지의 거리는 약 500리 무한을 방어하고 있는 송군이 방어준비를 갖출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그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할 필요성이 있었다. 거기에다가 송군은 지금 파멸 직전이었다. 겨우 양양성을 방어할 수 있을 뿐이 아닌가. 적의 기습을 받을 염려가 없으니 마음껏 강행군 하고 있는 것이다. 이틀 동안 무려 160리 길을 걸어왔기에 병사들은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외각에 보초병들을 세워놓고 모두들 피곤에 지쳐 달콤한 꿈나라로 들어갔다. 두두두두두...... 땅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질 정도다 엄청난 규모의 기마부대가 접근한다는 것을 눈치챈 보초병들이 요란한 소리로 경종을 울려댔다. 그 소리에 막사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던 병사들이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이때 흑색 갑주를 두른 수천의 기병들이 너도나도 손에 횃불을 하나씩 들고 들이닥쳤다. 하지만 자다가 놀라서 깬 금군 병사들에게 그수는 수천이 아니라 수만으로 보였을 게 틀림없다. 기병들은 빠른 속도로 주위를 달려다니며 우왕자왕하는 금군 병사들을 마구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진 창검이 번뜻일 때마다 허둥대던 금군 병사는 시체로 바뀌고 있었다. 금군의 몇몇 장수들이 말을 타고 상대와 대적하기 위해 달려나갔지만 오히려 시체의 수만 늘릴 뿐이었다. "크아악!" 달려나오던 금군 장수를 간단하게 창으로 찔러 죽여버린 후 마화는 소리쳤다. "적이 혼란한 틈에 군량을 불살라라!" 적의 후위부대에는 20만의 인마가 머글 막대한 양의 군량이 있었다. 수천에 달하는 소가 끄는 수레에는 가득가득 군량이 적재되어 있었다. 흑풍대의 1차적 목표는 바로 이 군량이었다. 배가 고픈 상황에서 어찌 군대가 싸우 수 있겠는가 군량을 실은 수레들이 불타오르기 시작헀다. 물론 그것을 막기 위해 금군들이 발악을 했지만 워낙 혼란스런 와중이라 집단적인 반격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소수의 반격쯤이야 흑풍대에게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혀야 한다 서둘러라!" 마화는 소리치며 말에 박차를 가해 적들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뒤를 십여 기의 수하들이 뒤따라 달려갔다. 그날 밤 근군은 지옥이 뭔지 경험해야만 했다. 수만이나 된느 적의 기마대가 새벽녘이 될 때까지 진 안을 휘젓고 다녔던 것이다. 투구를 멋진 깃털로 장식하고 있는 장수는 피로에 찌든 안색으로 막사 밖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금군 병사들이 여기저기에 쓰러진 시체들을 옮긴다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피해는 어떤가?" 그 질문에 그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무장들 중의 한 명이 대답했다. "대단히 막심하옵니다. 원수 특히 치중대에서 수송하고 있던 군량을 모두 잃은 것이 가장 큰 피해이옵니다." 원수는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직까지도 송에 그만한 정예병력이 남아 있을 줄이야...... 놈들의 위치는 파악했느냐?" "척후병들을 보냈지만 아직까지 연락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보내라 적의 규모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엣" 지시를 받은 무장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것을 바라보며 원수는 중얼거렸다. "군량만 불태우고 뒤로 빠진 것을 보면 적의 수는 생가 밖으로 적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 말에 무장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 "회군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원수 지금 남은 군량으로는 얼마 버틸 수가 없사옵니다. 설혹 무한을 점령할 수는 있겠사오나 식량이 없이 그곳에서 어찌 주둔하려고 하시옵니까?"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무장이 신경질을 버럭 내며 외쳤다. "자네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원수 지금 계절은 바야흐로 가을이 아니옵니까? 주위에서 거둬들일 수 있는 양도 꽤 될 것이옵니다. 병사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군량도 적은 양은 아니옵니다. 최소한 10일은 버틸 수 잇사옵니다. 그동안 무한을 점령 하면 문제될 것이 없사옵니다." 그러자 그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 그 옆에 있던 무장 하나가 호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의 수가 적다면 계속 진격하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원수 놈들이 야습을 가해왔다고는 하지만 대비를 잘 갖춘다면 또다시 당할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잠시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군량을 잃은 것은 그만큼 뼈아픈 실책이었던 것이다. 그때 한 무장이 원수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너수께서 야습 한 번에 기가 꺾여서 패퇴했다는 것을 아신다면 황제폐하께서 대로하실 것이옵니다." 그 말에 마침내 원수는 마음을 정한 듯 벌떡 일어서며 명령했다. 부하의 말에는 이리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패퇴한다면 황제폐하께서 아무리 그를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가 없게 된다. 잘못하면 패전의 책임으로 큰 문책을 당할 수도 있었다. "막사 주위의 방책을 치고 기습에 대비해라 오늘 하루는 여기서 푹 수니 다음 내일부터 다시 진군한다" 원수의 지시에 무장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헀다. "옛." 다음날 금군은 다시금 진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이동하지도 않았을 때 3천 기 정도의 기마대가 앞을 가로막았다. 전신을 흑색 갑주 로 감싼 기병들이었다. 바로 간밤에 자신들의 진영을 들쑤셔놨던 그놈들...... 그들을 보자마자 금군 장수들 중 한 명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나갔다. 그는 창을 휘두르며 상대방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그것을 본 상대편 기마무사들 중의 한 명이 안장에서 활을 꺼냈다. 그 무사가 살을 메겨 발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었다. 그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궁술에 조예가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피우우웅__! 대기를 찢을 듯한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끝났을 때, 퍼억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나가던 금군 장수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즉사였다. 그의 시체에는 화살 한 대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것을 본 금군 진영이 술렁거렸다. 샤실 이런 식으로 달려나가면 맞싸워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던가, 그렇지 않고 곧장 화살을 날리다니 너무나도 비열한 행위였다. 하지만 금군의 반응이 어떻든 흑색갑주를 입은 무사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료가 금군무사를 사살한 것이 마치 신호라도 된다는 듯 저마다 말 등에 매여 있던 활을 꺼내들었다. 서로간의 거리는 100장(약300m)이 넘었다. 활의 최대사거리를 한참 벗어나는 그런 거리였다. 아마도 활을 준비한 채로 돌진하면서 쏘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예측한 금군 자웃들은 창병들과 방패수드을 앞에 세우며 적의 돌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기마병들이 화살을 쏴대기 시작했다. 활시위를 가득 당겨 발사한 화살은 하늘을 꿰뚫을 듯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금에 비해 뛰어난 장인들을 보유한 송은 활의 사거리가 훨씬 길다 하지만 길다고 해봐야 유효사거리 100보, 지금처럼 최대사거리로 쏜 다면 250보를 넘기기 힘들다, 그렇지만 금의 장수들은 모르고 있었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것이 송의 활이 아니라 저 이름 높은 고려의 활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동이(東夷)라고도 불릴 만큼 활에 능한 고려인들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강력한 활을 만들 수 있었다. 정교하게 제작된 만큼 습기에 매우 약한 것이 흠이었지만, 그 엄청난 사거리를 생각한다면 그 정도 약점은 약점도 아니었다. 고려의 활은 송의 활에 비해 무려 1.5배가 넘는 사거리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그 활을 사용하는 자들은 무공이 뛰어난 흑풍대의 고수들인 것이다. 똑같은 활을 사용한다고 해도 훨씬 더 멀리 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저 앞 땅바닥에 꽃힐 거라고 예상했던 화살들이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금군지영에 우박처럼 쏟아졌다. "으아악!" 갖가지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에 정신을 차린 인물들은 등에 지고 있던 방패를 꺼내어 막았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화살을 피해 뒤로 도망친 다고 정신이 없었다. "모두들 당황하지 마라 방패수들은 앞으로! 위에서 떨어지는 화살을 막아라!" 몇몇 장수들이 뛰어다니며 혼란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장수에게 창검을 겨누는 자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전위가 혼란의 극에 달해 있을 때, 후위에서 대기중이었던 기마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전위부대를 지휘하던 장수가 앞에서 활을 쏴대는 적들을 쫓아내기 위해 기병을 투입한 모양이다. 기병들이 달려나오지 화살의 목표는 곧장 보병에서 기병쪽으로 돌려졌다. 말과 사람이 화살에 맞아 뒹구는 가운데, 금의 기병들은 미친듯 말을 몰아 서로간의 거리를 좁혀갔다. "하앗! 이럇!" 달리는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금의 기병들은 칼을 뽑아들었다. 이제 곧이어 놈들과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흑색갑주의 기마대는 금군 기병들이 접근해오자 재빨리 말꼬비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놈들을 추격해라" "다시는 화살을 못쏘도록 끝장을 내버려랏!" 곧이어 흑색갑주의 기마대와 금군 기병들 사이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금군 기병의 수는 1만 2천 겨우 3천기밖에 되지 않는 흑색갑주의 기마대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것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병들을 응원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에게 무자비한 화살을 퍼붓던 상대가 저렇듯 죽자 살자 도망치는 모습을 보니 속이 후련했던 것이다. "전군 전투 준비!!" 마화의 명령에 따라 숲 속에 매복하고 있던 흑풍대원들은 병장기를 꺼내들었다. 취향에 따라 장검이나 장도를 쓰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말 등에 비끄러 매뒀던 긴 자루가 붙은 참마도(斬馬刀) 나 장창을 꺼내들었다.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헀다. 잠시 후 매복하고 있던 그들 앞쪽으로 관지 가 지휘하는 부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분노에 찬 함성을 질러대는 금군 기병들이 그 뒤를 바짝 붙어 쫓아갔다. 그와 동시에 마화가 창을 번쩍 들며 외쳤다. "돌격!" 마화의 뒤에 서 있던 6천기의 인마가 그 명령에 따라 매복하고 있던 장소에서 벗어나 대지를 박차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산길을 따라 앞뒤에서 포위당한 금군 기병들은 어디로도 도망칠 데가 없었다. 용맹스럽게 저항했지만, 이미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앞뒤에서 그들을 포위한 자들이 누군가 바로 마교가 자랑하는 흑풍대다 흑풍대를 구성하고 있는 무사들의 무공은 과거 변방의 이민족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찬황흑풍단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 그런자들을 상대로 포위당했으니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피해는?" 부대장인 마화의 짤막한 물음에 각 대의 대장들이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치열한 난전이 벌어진 상황이었기에 아무리 흑풍대라 해도 피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물론 부상자들의 대부분은 격전의 와중에 쓰러지는 말과 함께 넘어져 구르다가 상철르 입은 자들이었다. 마화가 천인대장들의 보고를 받고 있는 동안 관지는 주인을 잃고 돌아다니고 있는 말들을 붙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수하들을 바라보고있었다. "100여 명 정도입니다만 크게 다친 자는 없습니다." "자 철수한다" 그날 저녁 또다시 흑색 갑주를 걸친 3천 기의 기마대가 자신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금군 진영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저들을 격파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1만 2천 기의 기병들이 전멸당했다는 것을 그들도 소문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상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등에 지고 있던 방패를 꺼내어 앞을 가리는 자들도 있었고 방패를 지니고 있지 않은 자들은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추춤추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금군 장수들은 큰 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며 진형을 짜는 데 여념이 없었다. 흑색 갑주의 기마대는 천천히 거리르 좁혀오더니 100장 정도 거리 에서 딱 멈춰섰다. 그리고 그떄 그들 중 한 명이 활을 꺼내들었다. 활을 꺼내드는 것과 살을 메기는 것은 거의 한 순간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병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공포스러운 파공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피우우우웅__! 퍼억! 군사들을 독려하고 있던 금군 장수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안 봐도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은 더욱 공포에 떨기 시작 했다. 이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ㄱ바주를 걸친 무장을 해치운 것이다. 갑옷을 꿰뚫을 정도라면 나무에 가죽을 덧씌울 방패 따위는 있으나 마나가 아닌가. 그것에 생각이 미치자 방패를 들고 있던 병사들은 하나둘씩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겁에 질려 우왕자왕하기 시작했지만 장수들은 그들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상대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병사들이 아닌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몇몇 장수가 말을 몰아 슬금슬금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입으로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척하면서 말이다. 화살은 쉬지 않고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화살이 대기를 가르는 공포스러운 소리가 끝났을 때 어김없이 한 명의 시체가 남는 것이다. 이때, 아직까지 가만히 있던 다른 흑색갑주의 기마대가 앞으로 조금 더 전진해 나오며 화살을 쏴대기 시작했다. 이미 상대의 방패수들은 화살을 막을 형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쏜 화살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금군은 몰랐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고려 활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 먼 거리에서 갑주를 꿰뚫을 정도로 강력한 화살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은 3천의 기병들 중에서 관지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엄청난 수를 지닌 금군이 앞으로 밀어붙일 생각은 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기 싲가하자 그것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병사들의 머리속이 공포라는 감정으로 꽉 차버리면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공포는 옆에 있는 병사들에게 전염되는 것이다. 6만이 넘는 금군의 전군이 겨우 3천기의 기병에 밀려 뒤로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 공포감은 뒤로뒤로 전염되며 중군(中軍)까지도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3천기의 기마대는 그들의 뒤를 여유롭게 쫓아가며 하살을 퍼붓고 있었다. 금군 장수들은 적과 싸운느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거느리는 병사들에게 밀려 우왕자왕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상대가 기병이 아니라면 돌진해서 해치울 가능성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병이 아닌가 이쪽 보병들이 돌격해 들어간다면 슬쩍 뒤로 내뺀 다음 다시 활을 쏠 게 뻔했다. [도저히 저들을 상대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이 병사들의 뇌리에 자리잡고 있는 한 극에 달한 병사들의 혼란을 수습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무엇들 하는 것이냐? 놈들은 겨우 3천이 아니냐!" 갑주에 호화로운 장식을 달고 있는 금군 원수는 입에 거품을 물며 주위에 서 있는 장수들에게 호령했지만 그들이라고 딱히 방법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병사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는 것ㅇ다. "일단 어느 정도 후퇴하셔야 할 듯하옵니다. 운수" "만약 이 상태로 적과 싸운다면 도무지 어떻게 손을 써볼 방법이 없사옵니다." 부하 장수들의 무기력한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원수는 노성을 터뜨렸다. "이 멍청한 놈들! 당장 쇠뇌를......" 여기까지 말한 원수는 황급히 말을 끊었다. 쇠뇌 부대를 모두 양양성에 두고 온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한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도시가 아니다. 무한을 공력하는 데 쇠뇌가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없었다. 20만씩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하는데 쇠뇌쯤 없으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싶어 놔두고 온 것이다. 하짐ㄴ 그것이 천추의 한이 될 줄이야...... "기, 기병들을 내보내라!" 금군 원수는 지금까지 뛰어난 업적을 쌓아온 역전의 맹장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최ㅏ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군 붕괴로 연결되면 안 된다. 붕괴는 곧 패망으로 직결된다 20만이 3천기에 박살나는 말도 안되는 사태가 일어나느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옛.!" 이미 전군(前軍)을 지우너하던 기병 1만 2천을 잃은 상태다 그렇기에 기병은 중군에서 보유하고 있는 1만 5천이 전부였다. 병사들의 혼란을 막는 데 주력하고 있던 기병들은 원수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원래 기병의 역활이라는 것이 최저선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것과 후퇴하는 과정에서 가장 뒤에 남아 후방을 엄호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금군 기병들이 그들을 뒤따라 깊숙이 쪼아올 리 없다. 서로 간의 거리가 적당하게 벌어지면 곧장 흑색갑주의 기마대는 화살을 날렸다. 한 번에 수백 대가 넘는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다. 금군 기병들의 피해가 없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죽고 말이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그렇다고 저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갈 수도 없었다. 어디에 또 다른 패거리를 숨겨놓고 있는지 잠작조차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된 적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밀고 당기기를 하다 보니 금군 기병들의 피해는 가랑비에 옷 젖듯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기병들을 지휘하던 금군 장수는 부하들에게 퇴각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적들에게 계속 휘둘리다 보면 더욱 피해만 늘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군 기병이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 보병대는 한시름 돌릴 여유를 어들 수 있었다. 다시금 전열을 회복하고 방책을 세워 흑색갑주의 기마대의 난입에 ㅂ대비할 수 있었다. 금군은 기병들의 막대한 피해를 등에 업고 전군 붕괴로 이어지는 패퇴를 막을 수 있었다. 대요제국을 멸망시키고 또 대송제국의 주력부대를 멸한 것도 다 이런 금군 장수들의 뛰어난 실력이 밑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날 밤, 금군은 ㄱ적의 난입에 대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보초의 수를 평상시의 열 배로 늘이고 주위에서 나무를 잘라다가 막사 주위에 수많은 방책들을 만들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도어 모든 병사들에게 갑옷을 입은 채 잠을 자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아침 되자 금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엉망하고도 진창이었다. 모두들 갑옷을 입고 잠을 잤기에 온몸이 찌뿌둥했다. 거기에다가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깊게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래서 수면부족으로 머릿속도 멍한 상ㅌ였다 병사들은 삼삼오오모여 적들의 공포스러움에 대해 쑤근거리고 있었고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적과 싸울 수가 있다는 말인가 "퇴각해야만 하옵니다. 원수" 아직까지도 원수는 주저주저하며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20먄이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 무한을 공격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3만이 넘는 병혁만 잃고 후퇴한다면 잘못하면 자신의 목이 날아갈 우려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적과 싸움다운 싸움이라도 해봤으면 모르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병사들은 적과 접전을 벌이지도 못한 상황이 아닌가 휘하에 있는 많은 장수들이 후퇴를 건의하고 있을 때, 정찰 나갔던 병사들의 일부가 돌아왔다. 그들의 보고를 받은 장수는 분노에 가득 한 얼굴로 원수에게 보고했다. "적군의 규모를 파악해냈사옵니다. 원수!" 그 말에 원수는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일단 적의 규모를 알아야 후퇴할 것인지 아니면 진격할 겄인지 결정을 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만약 적의 규모가 이쪽과 대등 한 것이라면 그런 강대한 적을 상대로 후퇴했다고 해도 자신에게 큰 책임이 돌아올 가능성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 어느 정도 규모라고 하더냐?" 관지의 명령으로 적의 척후병들을 눈에 띄는 대로 없앴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일부가 흑풍대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겨우 1만 정도의 기병들이라고 하옵니다." 그 말에 우너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기병만 1만이라는 말이냐? 혹시 보병대으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주위를 샅샅이 뒤지라고 명령헀사옵니다. 이 인근에 소군 보병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하옵니다." 그 말에 원수는 분기탱천해서 으르렁거렸다. "아니 그렇다면 겨우 기병 1 만 기에게 지금껏 조롱을 당하고 있었단 말이냐? 이런 씹어먹을 녀석들! 내 그놈들의 간뎅이가 얼마나 큰지 필히 배를 갈라 볼 것이야!" *** 무림맹에 모인 장로들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무영문에서 방금 전해져 온 한 통의 전서 때문이었다. "크으윽! 공수개 장로 이것이 사실이오이까?" 공수개 장로는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노부가 알아본 바로는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오" "허어, 참 마교놈들이 초전부터 적잖은 전과를 거두고 있다는데 본맹에서 글어 모은 무사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이오?" 그들의 안색이 어두운 이유느 바로 이것이었다. 무림맹은 황실과 민초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대금제국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하고, 무림동도들을 향해 금과의 전쟁에 참가해달라는 격문을 돌렸다. 그 때문에 숨낳은 물미인들이 분연히 일어서서 전쟁터로 달려갔다 그들은 지금 세 방향에서 송군과 협력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달려간 무리는 패력검제의 지휘하에 양야성에서 분전중이었다. 그리고 수전에 능숙한 인물들은 회하에서 주둔중인 수군과 합류하여 금군이 도하 작전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인물들은 모두 수라도제를 중심으로 무한에집결중이었다. 물론 전쟁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도 정파쪽이었고 양양성에서 상당한 전괄르 올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양양성에서 수십만의 금군과 상대로 분전하고 있다고 해도 양양성에서의 전투주체는 악비대장군이 이끄는 송군이였다. 다급히 그쪽으로 달려간 ㅅ수의 무림인들이 협조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교놈들이 단독으로 작전을 감행하여 20만의 금군과 격전을 전개학 있는 것이다. 물론 20만을 상대로 1만으로 덤빈 그놈들이 씨몰살을 당했다면 또 애기가 다르겠지만 적잖은 전과를 올리고 있다고 하니 배가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수개 장로는 자신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놈들이 괘씸하게도 수라도제 대협에게는 무한 인근에서 방어전을 전개하자고 해놓고 자기들끼리만 앞에 나서서 싸운 모야입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격양에 찬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이런 망할 놈들으 봤나 맹주님 이건 놈들이 무한 방어전의 전공을 자기들이 독차지하기 위해 머리를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맞습니다. 뒤늦게 수라도제 대협이 이끈느 세력이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세인들은 처음부터 승리를 거두며 자신들의 힘을 과시한 마교 를 기억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교가 다 이겨놓은 싸움에 무림맹은 그저 들러리를 섰다고 뒤에서 쑤근거릴 게 분명합니다" "수라도제 대협에게 최대한 빨리 이동하여 마교도들과 연합세력을 구축하라고 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쪽의 수가 월등하게 많은 만큼 승리를 거뒀을 대 본맹으 위상이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무당파출신은 청호진인의 말이었다. 무림맹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로 봤을 때 그읭 ㅢ견이 맹주파의 전체적인 의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 말에 옥진호 장로가 정면으로 대치되는 발언을 했다. 마교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물론 옥청학 전대맹주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있었ㄷ. 하짐나 옥화무제가 봉공직을 차지하여 맹주의 신물 빙백수룡 검을 ㄴ놨을 대 전대맹주가 마교의 내전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교와의 합작은 찬성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개인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느 일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생각해서 말했다. "청호 장로님의 의견도 이리가 있소이다. 하짐나 만에 하나 금군이 앞에 두고 해묵은 감정싸움이라도 벌이게 된다면 일이 난감해지지 않겠소이까? 어쩌면 마교쪼에서도 그것을 걱정하여 단독행동을 결심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사실 지금까지 철천지 원수로 지내온 마교와 연합전선을 펼친다는 거은 대단히 힘든 일일 것이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청호진인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수라도제 어르신에게 아랫사람들을 잘 통제해달라고 부탁드린다면 되지 않겠소이까?" 그러자 옥진호 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원수처럼 싸우다가 오늘 갑자기 친해질 수는 ㅇ벗는 일이 아니겠소이가? 물과 불처럼 절대로 융합될 리가 없소이다." 그건 옥진호 장로의 개인적인 감정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의 모든 장로들의 생각도 비슷할 것이다. "그도 그렇기는 하오만...... 어찌되었건 마교놈들이 더 이상 전공으 독점하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연합전선을 펼치지 못하더라도 수라도제 대협에게 전서를 띄워 금군과 싸우도록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오" "곡 그럴 필요가 있겠소이까? 무한 방어는 마교놈들보고 하라고 하고 수라도제 대협에게는 양양성으로 향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소? 지금 양양성은 무한 쪽으로 20만이 빠져 나가 10만의 금군밖에 없지 않소 거기다가 양양성 내에 주둔하고 있는 송군과 패력검제 대렵 의 도움까지 기대할 수 있소이다. 20만의 금군과 싸운느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실익이 클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하오" 상당수의 자오들이 옥진호 장로의 의견에 동의를 표시했다. 사실 마교와 ㅇ녀합하느니 단독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는 쪽이 확실이 이익일 것이다. 그것도 금군을 격파한다는 것 외에 양양성을 구했다는 말까지 챙길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그러자 청호진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잘못하면 옥진호 장로의 의견대로 일이 처리될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옥진호 장로의 의견도 상당히 일리가 있소 그러나 그 의견은 본맹이 왜 금군과 싸운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망각하고 있는 것 같소 물론 양양성을 포위한 금군을 친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그러다 무한이 함락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소?" 옥진호 장로도 지지 않겠다는 듯 대꾸했다. "그들이 예상외로 잘 버틸 수도 있지 않소이가? 그놈들은 지금 자기 들만의 힘으로 싸우고 있소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소? 또 설혹 일이 잘못되어 무한이 함락된다고 하더라도 수라도제 대협보고 양양성을 구한 후 밑으로 남하하여 그들을 치라고 할 수도 있지 않소이까?" "허어, 참 바로 코앞에 적이 있는데 그토록 멀리 돌아서 양양성을 포위한 무리를 치고 또다시 돌아올 이유가 없지 않소이까?" 그 둘이 자신이 세운 작전의 정당성에 대해 설토하고 있을 대 맹주가 손을 들었다. 그것을 보고 그 둘은 실전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장로들의 의견은 필요 없다는 맹주의 의사였으니까 말이다. "두 분 장로님들의 의견이 다 타당한 것 같소 그렇기에 노부가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이 결정을 수라도제 대협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보오 그가 직접 상황을 판단하고 어느 쪽이 더 옳은지 판단하라 하시오" 무한 외각에는 지금 수많은 막사들이 들어서 있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송군에게 사용하는 군용막사처럼 생겼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각 문파에서 파견한 무림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들 송군과 함께 무한 방어를 위해 주둔하고 있는 형국이었기에 송군에서 무림인들의 편의를 위해 보유하고 있던 막사를 지원해준 것이다. 무영문의 지시대로 그들은 이곳에서 금군이남하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하해 오는 금군의 병력은 무려 20만 숫자만 들어고 기가 죽을 정도였다. 아무리 이곳에 3만에 달하는 무림의 고수들이 모여 있다고 하지만 20만의 금군을 상대하는 것에 엄두가 안 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송군에게는 무한 방어를 위해 병력을 ㅂ내주겠다는 통보가 오긴 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막사라든지 식량 따위의 물자만 조금 지웠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통합작전을 벌일 것이라고 통보받은 마교도들 또한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허어, 이 일이 어찌된 일일꼬? 설마 20만의 금군을 우리들의 힘만으로 막아야 한다는 것인가?" 아무리 수라도제가 화경에 이르는 고수라고 하지만 그 엄청난 숫자 앞에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곳에 모인 무림인의 수도 엄청난 것이었다. 각 문파에서 차출된 고수 2만이 집결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 중에서 그 누구도 중무장한 군사들을 상대로 집단전을 벌여본 사람이 없다는 데 있었다. 아무리 병졸들의 무술실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수많은 세대를 거쳐오면 발전시킨 효과적인 살상법을 가지고 있었다. 활, 각종 쇠뇌 투석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수라도제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쪽은 경험이 전무하다 하지만 개개인의 무술실력은 금군보다 뛰어나다 그렇다면 정면대결보다는 기습을 가하는 편이 피해를 줄일 수 있겠지 낮보다는 밤 적들이 도착하는 바로 그날 밤을 노릴 수밖에 없는가?" 이때 무사 한 명이 뛰어난 경신술로 달려와 포권하며 외쳤다. "무림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어디 보자" 무사는 품속에서 서선을 꺼내어 수라도제에게 건냈다. 서신을 읽고 있던 수라도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부다 지금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무림맹의 늙은이들이 미친 것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림맹의 통보로는 현재 일단의 마교세력이 남하해오는 금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무림맹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마교놈들이 겁없이 날뛰다가 몽땅 뒈져버렸으면 기분이 상쾌했겠지만 문제는 그들이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데 있었다. 20만의 금군을 상대로 겨우 1만 남짓한 마교도들이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무림맹이 끌어 모은 정파 세력은 무한 인근에 집결 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무림맹 수뇌부로서는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마교는 적극적으로 참전하고 있는데 비해서 무림맹은 눈치나 보면서 몸을 사리고 있다고 세인들이 판단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들은 수라도제에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가장 옳다고 여기는 것을 시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북상ㅎ여 막도들과 합류하여 연합전ㅅ너을 구축하여 남하하는 금군을 막든지 아니면 남하하는 금군은 마교도들에게 맡기고 양양성으로 직행하여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금군과 싸우라는 것이다. 수라도제는 무사에게 지시했다. "모든 문파의 수장들을 소집하거라" "옛." 무사가 달려가는 것을 보며 수라도제는 감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어 참 겨우 1만으로 20만을 상대할 배짱을 지닌 인물이 마교에는 있었다는 말인가? 참으로 마교가 지닌 저력은 무섭구나" 장내에 처진 막사들 중에서 가장 큰 막사 안에서는 지금 한창 작전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교와 통합작전을 벌일 것인지 아니면 단독작전을 감행하여 양양성으로 향핼 것인지 서로가 일장일단이 있다보니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심 하던 수라도제는 이윽고 마음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서로가 일장일단이 있는 작전이외다, 효율면으로만 따진다면 통합작전을 벌이는 것이 최선의 길이오 하지만 지금까지 원수처럼 지내왔던 마교도들과 통합작전을 벌인다면 제대로 될 리가 없다는 불안도 있소 그렇다면 오히려 단독으로 양양성으로 직행하는 쪽이 훨씬 좋을 듯도 하오" 그러자 각 문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해댔기에 장내는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하게 만든 후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일은 마교를 이끄는 자와 만나본 연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오 통합작전을 벌일 만한 제목이라면 통합작전을 벌이고 만약 그럴 만한 제목이 아니라고 판단됨녀 단독행동을 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 말에 종리세가의 가주 종이영우와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기가 찬성하자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모두들 수라도제의 의견을 따르기로 의견일치를 봤다 무공이나 세력 또 연륜을 봤을 때 수라도제를 앞서가는 인물이 단 한 명도 없 었기에 대부분의 경우 그의 의견대로 실행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종이세가와 제갈세가가 그의 편을 드는데 그 누가 그의 의견에 반대를 할 수 있겠는가 수라도제가 서문세가의 노신들을 불러 짐을 꾸리라고 지시하고 있는데 경비무사 한 명이 달려 들어와 보고했다. "천지문에서 파견한 문도들이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수라도제는 의아하다느 듯 되물었다. "천지문에서?" "옛." 그ㅜ 말에 수라도제와 함께 있던 서문세가의 노신들의 인상이 묘하고 일그러졌다. 천지문이라면 강호에서 유명한 박쥐들의 문파가 아닌가 유일하게 마교와 협정을 맺은 문파 그런 그들이었기에 낙양이 금에 함락되어 피난을 떠난 처지가 되었지만 그 누구 하나 그들을 동정하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이 지운군을 보내온 걳이다. "이런 몰염치한 것들을 봤나 태상가주님 그놈들을 내쳐야만 합니다." 서문세가 노신들의 의견이 이와 같을진대 다른 문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짐나 사루도제는 잠시 고심하지 않을 수없었다. 그들을 도려보내야 하나? 아니면 함께 싸워야 하나 하지만 직므 싸워야 할 상대는 마교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을 의심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지금은 단 한 명의 무인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진 것이 아닐까 수라도제는 침착한 어조로 서문세가의 노신들을 향해 말했다. "노부가 자네들의 마음을 모른느 바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들은 마교와 싸운느 것이 아니지않소/ 지금 금이라는 오랑캐를 앞에 두고 서로간의 해묵은 감정으로 대립하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안되지 않겠소? 모두들 표정관리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소" 태상가주의 말에 노신들은 일단 분노를 억눌렀다. 하짐나 아직 그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에 수라도제는 덧붙여 말했다. "그놈들도 다 쓸 데가 있지 않겠소? 미끼로 써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소모품으로 쓸 수도 있지 않소 그러니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오" 그 말에 노신들의 안색은 확연히 밝아졌다 과연 그렇게 써먹을 수도 있곘다는 생각에서다 사실 상황에 따라 어떤 문파 혹은 어떤 고수 들을 사지로 몰아넣어야 할 때도 있다. 서로가 다 아는 처지에서 사지로 가기를 권하기도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그때 그들을 이용한 다면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과연 태상가주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수라도제는 경비무사에게 말했다. "그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예, 제가 그곳으로 뫼시겠습니다." "허어 천지문도들이 이곳에는 무슨 일일꼬?" "그러게나 말이외다 낙양의 쓰레기들을 이곳에서 보고 될 줄은 몰랐소이다." 경비무사에게 안내를 받아 한곳에 자리를 잡고 대기한느 천지문도들을 향해 여기저기서 비방한느 소리들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래도 그들은 묵묵하게 대기했다. 자신들과 합류하다는 허락이 떨어질 것인지 아니면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인지 조금 있으면 밝혀질 것이다. 그때까지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짙은 푸른색의 날렵한 경장차림의 그들은 하나같이 4척은 됨직한 두툼한 거도를 등에 지고 있었다. 도와 손잡이에 천지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자신들이 천지문 소속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때 황색 경장차림을 한 중년사내 하나가 앞으로 쓱 나서며 천지문도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본인은 하북팽가(河北澎家)의 팽조라는 사라이외다." 팽조가 자기 소개를 하자 천지문도들 중에서 한 명이 나와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그녀는 간편한 경장으로 맵시있게 차려입은 중년여인 이었는데 무공으로 단련된 늘씬한 체형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거기에다가 미모 또한 상당한 수준이 아닌가 물론 젊은 것들과 같은 풋풋한 맛은 없었지만 중년의 여인이 지니고 있는 완숙함이 그 부분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가녀린체형에 이지적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지혜로운 여성이라는 생각은 들어도 전혀 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녀는 천지문도들을 이끌고 있는 소연이라고 합니다. 철혈권(鐵血拳)대협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슬쩍 시비를 걸기 위해 말을 건 것이었는데 계집이 튀어나와 지가기 천지문도들의 수장이라고 소개를 하니 철혈권 팽조로서는 입맛이 씁슬할 수밖에 없었다. 계집을 상대로 시비를 걸어봐야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은 것이다. 물론 강호에서 호젓하게 둘이 만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놔도 상관없겠지만 이곳은 사람들의 이목이 많은 장소다. 조금만 심하게 괴롭혀도 잘못하면 변태 소리를 들을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곳은 그대들 같은 인면수심의 무리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곳이다. 그러니 그만하고 물러가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 말에 소연은 다소곳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것이 무림맹의 결정입니까?" "무림맹에 물어볼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자네 같은 쓰레기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악취 때문에 코를 못들겠으니 꺼져 달라는 말일세 본인의 말을 알아듣겠는가?" 쓰레기라는 말까지 하며 천지문을 격하시켰지만 소연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무림맹에서 돌린 격문에는 천지문ㅇ느 필요 없다는 구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출발하기 전에 이곳에 모인 문파들을 가장 연배가 높으신 수라도제 대협께서 이끄신다고 들었습니다. ㅓㄹ혈검 대협께서 하신 말씀이 수라도제 대협의 의견을 반영하고 계시는 것인가요?"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하북팽가처럼 작은 문파의 문도 따위가 자신의 거취를 결정할 권한은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팽조는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팽조는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의 말은 어느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요와 금에 이르는 오랑캐들이 연경을 점령한 덕분에 고향을 잃어버리고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하북팽가의 고수가 듣기에는 머리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팽조의 귀에 그녀의 말은 하북팽가를 아주 업수이 여기는 것으로 들렸던 것이다. 팽조는 슬쩍 고개를 돌려 저쪽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그 노인이 바로 팽조의 사부였다. 무림명숙인 사부는 자신이 직접 시비 걸기가 뭣했기에 그 제자에게 그들을 망신주고 오라 시킨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잘하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잘못하면 사부님께 누를 끼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팽조는 조금 억지를 부려보기로 했다. "계집이기에 조용히 말로 하려 했거늘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구나 너는 내가 누군 줄 알고 그토록 오만방자한 것이냐?" "하북팽가의 여덞 분 장로들 중의 한분이신 혼원패권(混元覇拳) 팽선대협의 제자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멍청한 것 나를 잘 알고 있으면서 그따위 말대답을 해대다니!" 그와 동시에 팽조의 손이 쾌속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팽조의 움직임에 맞춰 소연도 함께 움직였다. 그녀는 가볍에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은 것이다. "어쭈? 천지문의 잡것이 감히 반항을 해?" 처음에는 무례한 계집의 뺨을 한 대 친느 것으로 징계를 가하고 끝낼 속셈으로 움직인 것이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슬며시 화가 치미 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손에 내력을 뿜어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3성에서부터 시작한 공력을 5성으로 끌어올렸는데도 불구하고 계집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이런 망할 년을 봤나! ㅁ매끈한 얼구을 봐서 다른 사람들에게 표 나지 않도록 5성의 공력만 사용해줬거늘, 아직도 물러서지 않다니' 드디어 팽조의 머리 뚜껑이 활짝 열러버렸다. 팽조는 상대에게 가하는 공력을 점차 가중시키기 시작했ㄷ. 내력이 8성에 이르자 팽조 의 장포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쯤 팽조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어있다. 내력 대결을 펼치는 도중에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점점 더 내공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공력을 다 뿜어내기 시작한 팽조의 안색은 점파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이마에는 핏줄이 곤두서기 시작헀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상대의 표정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제서야 팽조는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후회하기에는 너무나도 늦은 상황이었다. "셋 하면 공력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세요 그렇지 않으면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철혈건 대협"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는 팽조에게는 구원이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공력이 딸린다고 갑자기 멈출 수도 없었다. 순식간에 상대의 기가 자신의 몸을 타고 들어와 오장육부를 바스러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그녀가 한 제안을 먼저 할 수도 없었다. 그건 바로 항복을 뜨하기 때문이다. "하나, 둘 셋!" 팽조는 손을 떼자마자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거칠게 숨을 헐떡거렸다. 누가 봐도 자신의 패배가 분명했다. 저 가냘픈 계집의 내공이 저토록 막강할 줄은 예상도 못했ㄷ. 하지만 그렇다고 꼬리를 말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사문과 사부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젠장! 다시 한 번 해보자" 팽조가 나서러년 순간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는 사라이 있었다. 팽조가 뒤돌아보니 자신을 잡고 있는 것은 그의 사부였다. 사부는 엄한 눈으로 팽조를 흘겨본 후 중얼거렸다. "미숙한 녀석!" 팽조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뒤로 물러서서 운기조식이나 하거라" 팽선은 앞으로 쓱 나서며 날카로운 어조로 소연을 지책했다. "감히 하북팽가를 업신여기다니" "소녀가 무엇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혼원패권 대협 수라도제 대협께서도 같은 의견을 지니고 계시냐고 물은 것이 그토록 큰 실례였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물러나라고 했으면 물러날 것이지 그것에 토를 단 것이 죄이니라 얄팍한 한 수를 익혔다고 기고만장해서 감히 반가에 대들다니 그 죄를 알렷다?" "바른 소리를 한 것이 죄가 된다는 말은 혼원패권 대협께 처음 듣습니다." "아이야 네 입을 원망하거라" 그 순간 팽선의 호가 왜 혼원패권인지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은 실감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펼쳐진 극성의 혼원벽력장은 너무나도 패도적인 기운을 물씬 뿜어내고 있었다. 그 권풍의 기세가 너무나도 강했기에 주위에서 구경하던 자들도 황급히 방어자세를 갖춰 살을 찢는 권풍의 위력을 막기에 급ㄱ브할 따름이었던 것이다. '이거 어쩌면 전력을 다해야 할지도 모르곘는데?' 팽선은 긴장감 때문에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제법 한 가닥 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빨리 끝내기 위해 기습에 가까운 공격을 가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거대한 도 떄문이었다. 그녀의 도가 완만하게 움직인느 순간 불꽃 과 함께 뇌성이 터지며 팽선의 공세를 짓눌러버렸던 것이다. 그렇다 막은 것도 아니고 팽선의 힘보다 더욱 막강한 힘으로 짓눌러버린 것이다. 그 순간 계집이라고 약간 얕잡아 보던 팽선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계집이 보여줄 수 있는 힘과 파괴력이 아니었다. 무거운 무기만을 잡고 수십 년 동안 고련한 사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반응 중도(重刀)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한 대처였던 것이다. '계집이면 계집답게 연검이나 휘두를 것이지, 젠장!' 수라도제가 천지문도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왔을 때는 팽선과 소연의 대결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ㄷ. 권풍과 도기가 흩날리고 그 둘 을 사이에 두고 광풍이 일고 있었다. 수라도제는 그곳에서 두 눈을 반짝이며 관전에 열중하고 있는 무당파의 장로를 발견하고 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처음 파견된 무당파의 고수들은 지금 양양성에서 싸우고 있지만, 그 다음 대규모로 파견 된 고수들은 금군 때문에 양양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곳에 와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수라도제는 다급히 질문을 던졌지만, 장로는 흥미롭다는 듯 장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혼원패구너이 천지문 아이를 상대로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는 중이지요 물론 시비는 혼언패권이 먼저 걸었지만...... 노부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택한 것 같소이다." 그 의견에는 수라도제도 동감이었다. 무시무시한 구너법의 소유자인 팽선을 상대로 웬 중년여인이 분전하고 있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팽선이 우위를 저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중년영니이 일부러 조금씩 양보해 주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할 수라도제가 아니었다. "허헛, 참 일이 고약하게 되어버렸소이다 함께 싸워야 할 동도들이 싸움질을 벌이다니, 그것도 일분의 장로라는 자가 앞장서서 말이오" 그 말에 무당파의 장로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외다 히지만 조금 이씅면 끝날 듯도 하오 슬슬 혼원패권이 밀어붙이고 있지 않소/ 천하의 혼원패권을 상대로 200 여 초식을 버텼다면 저 아이의 실력도 보통은 넘는 게지요" 남들에게 멸시받는 천지문도를 상대로 그것도 이름도 없는 여자를 상대로 200여 초식이나 싸워야 했다면 그의 명성에 흠이 갈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하짐나 무당파의 장로는 지금 그녀가 일부러 상대의 체면을 봐서 전력을 다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수라도제가 파악한 그녀의 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허참 실력만큼이나 마음 씀씀이도 곱구먼' 하지만 감탄만 하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대로 사만히 있는다면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된다 물론 승자는 팽선이겠지만 후에 그가 저 아이가 봐줘서 승리했음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또 그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결코 뒷맛은 꺠끗하지 못할 것이다. 수라도제의 몸이 스르르 사라지는 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몸은 한참 대결 중인 두 고수 사이에 서 있었다. 과연 화경에 다다른 고수라는 윔여에 걸맞는 뛰어난 신법이었다. 워낙 갑작스럽게 수라도제가 등장한 것이었기에 대결에 몰두해 있던 팽선과 소연은 미처 쏘아낸 공격을 회수할 여유조차 확보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소연이 쏘아낸 공력을 회수하련느 순간 그녀의 귀에 부드러운 전음성이 들려왔다. <무리에서 공력을 회수하려고 하지 마라 몸만 상할 뿐이다.> 그 순간 소연은 목소리의 주인공 즉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믿기로 했다. 얼핏 봤을 때 그리 고강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이 곳에 모습을 드러낼 때 그가 사용한 신법만으로도 그는 최강자의 대열에 서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양쪽에서 짓쳐 들어오는 공격을 수라도제는 간단하게 막아냈다. 물론 그것은 그 광경을 옆에서 구경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수라도제 자신은 이를 꽉 깨물어야만 했다. 격전 을 벌이는 둘은 모두 다 엄청난 고수들인 것이다. 수라도제가 아무리 화경에 든 고수라고 하지만 쉽게 막아낼 성질의 공격은 아니었다. 수라도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빠른 것은 눈의 착시현상 때문에 오히려 느린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주위에 서 있는 자들은 거의 대부분은 수라도제가 발휘한 최고의 한 수를 견식하는 영광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진 후, 장내는 정리되었다. 자신이 가한 혼신의 공격을 수라도제가 간단히 막아내버리자 팽선은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마에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자신의 체면이 달린 문제였기에 계집아이를 빨리 제업하기 위해 상당히 무리를 해던 탓이다. "수라도제 대협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시오?" "허허. 이 사람 한 팔 더하겠다고 온 동지를 상대로 드잡이질을 하다니 정신이 있는 겐가? 아무래도 저 아이가 다칠 것 같아서 나설 수밖에 없었다네" 팽선은 수라도제가 한 뒷말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자신의 체면을 지켜주지 않았는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여아가 거도를 들고 다니기에 그냥 장난 좀 쳐본 것 뿐이오" 말을 마친 팽선은 자신의 일이 끄났다는 듯 천천히 장내를 벗어났다. 그동안 수라도제는 소연을 향해 전음을 날리고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신경을 써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수라도제 대협> <허허헛 노부를 알아보다니 영광이로세> <아닙니다, 수라도제 대협의 한 수를 견식할 수 있어 소녀가 더 영광이었습니다.> 소연의 전음에 수라도제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자신이 사용한 한수를 완전히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아차렸다는 말이 아닌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고수가 분명했다. 참으로 무림은 와호잠룡의 세상이라고 생각해보는 수라도제였다. "천지문에서 왔다고 했는가?" 상대가 전음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소연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노부의 소개가 늦었구먼 노부는 서문길제라고 한다네" "예, 소녀는 천지문도를 이끌고 수라도제 대협을 도우라는 문주님의 명을 받들고 온 소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게습니다." 수라도제는 주위를 두러봤다 저ㅉ고에 소연과 비슷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 사내들이 보였다 그 수는 5백여 명 수라도제의 시각에서 봤을 때 적다고 생각할 수 있는 숫자였지만 그것이 천지문의 전체 문도수를 따져본 경우람녀 애기가 완전히 틀려진다. '허어 5백씩이나? 천지문의 규모를 생가했을 대 적지 않은 출혈을 각오한 모양이구만 그것도 저렇게 뛰어난 고수를 앞세우다니......' 수라도제는 아직까지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소연을 아래위로 자세히 한 번 더 흝어봤다 이건 웬만한 명문대파의 장로급이라고 해도 전려 손색이 없는 여고수 거기에다가 그를 더욱 기분 좋게 한 것은 그런 여고수가 거대한 도를 등에 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刀)를 숭상하는 그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소연은 평상시에 가벼운 도를 애용했지만 전쟁터에 나가는 것인 마늠 전투용의 중도 를 가져온 것이었다. 천지문은 작은 문파였다 그런 문파에서 이토록 뛰어난 여고수를 키워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녀를 아낌없이 전장에 투입한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생사를 기약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그녀가 털컥 죽어버린다면 그 피해는 얼마나 크겠는가 그것만 봐도 천지문이 이번 양양성 전투에 어느 정도의 각오로 임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노부와 차나 한잔 하지 않겠는가?" "영광입니다. 수라도제 대협" 소연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후 수라도제를 따라갔다. 수라도제 대협과 담소를 나누며 장내를 빠져 나가는 소연의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서 있던 천풍검 곡추는 입이 바짝 타는 듯 하고 혀로 입술을 축였다. 방금 전에 벌어진 비무를 봤을 때 결국에 가서는 소연이라는 천지문의 고수가 팽선에게 패헀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하북의 범 같은 고수인 팽선을 상대로 저 정도나 버틸 수 있다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곡추 자신도 분노에 가득 찬 팽선을 상대로 100초식이상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것만 봐도 그녀의 실력은 이미 증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어~ 진팔에 이어서 이번에는 소연이라는 여고수의 등장인가? 정말 천지문은 가볍게 볼 문파가 아니로구나" 진팔을 억류하려고 했엇던 남궁세가주의 결정은 정말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내린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생각하는 곡추였다. 무림연합과 대금제국군의 충돌 두려움에 떨던 금군의 모습은 하루의 충분한 휴식과 새로운 방어도구의 장만으로 용기백배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어려 있지 않았다. 적군의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새로운 방어도구가 지급된 것이다. 방패 두 장을 하나로 묶은 것이었는데 적의 화살에 노출되는 병사들만 지니면 되는 것이기에 서로 교대해가며 들고 가면 되니 방패가 2배로 무거워졌다고 하지만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장수들의 설명을 듣고 자신들과 싸우는 적의 규모를 앍 되었ㄷ. 겨우 1만 남짓한 기병들이라니...... 17만 군세를 자랑하는 그들에게 그 수는 가소로운 것이었다. 제 아무리 적의 기마대가 신출귀몰하다 해도 무한만 점령하면 일은 끝나는 것이다. 무한이 주 전쟁이 된다면 그들은 그것을 수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마대의 기동력이 보병들에 비해 월등이 뛰어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도 충분한 활동영영ㄱ을 보유하고 있을 대의 애기다. 어느 한 장소에 얽메이게 되면 그들을 전멸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봐야 했다. 또 다시 금군을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던 도중 관지는 적병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봤다. "일이 조금 어렵게 되었군" 그 말에 제3천인대장 정삼이 의아한 듯 질문을 던졌다. 그는 오랜 세월 관지를 모시고 있었기에 상관이 이런 식으로 넋두리를 하는 것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장" 관지는 금군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쯤이면 풀 죽은 강아지 꼴을 하고 비실비실 움직여야 정상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저놈들이 저렇게도 위풍당당하게 행군하고 있느냐 말이다 아마도 이쪽의 세력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획듯한 모양이야" "그렇다면 어떻게 하죠?" 정삼의 의문에 관지는 간단명료하게 대꾸했다. "뭘 어떻게 하겠나?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자 가자!" 관지의 전투방식은 어제와 바뀐 것이 하나도 없었다. 최대한 적들로부터 떨어진 거리까지 접근해서 화살을 퍼붓는 것이었다. 일단 관지는 말을 타고 병사들을 지휘하는 금군 장수들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중군에 맡기고 거어서 부하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수들이 보이지 않으니 목표는 선두에 선 병사가 될 수밖에 없다. 그의 화살이 파공성을 흘리며 날아가자 처음 두 명까지 화살에 맞아 쓰러졌지만 그 뒤는 쉽지않았다. 각자 방패를 꺼내어 앞을 가린 것이다. 퍽! 관지가 쓴 화살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방패에 꽃혔다. 두 겹을 닷대놓은 것이었기에 뚫지 못한 것이다. "제법이군 조금 더 다가간다" 관지의 명령에 기마대는 서서히 거리르 조히며 화살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100장이었던 서로간으 거리가 차츰 80장 60장으로 좁혀졌다 물론 그렇다고 금군 궁수들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가지느 않았다. "후퇴!" "후퇴하라!" 더 이상 적의 전위부대를 상ㄷ로 이 방법이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관지는 후퇴명령을 내렸다. 물로 아예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적군의 규모는 무려 17만이나 된다. 수십 리에 걸쳐 금군이 행군하고 있는 것이다. 제일 앞에서 걸어가는 적들이야 대비가 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중군이나 호위는 애기가 다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날 흑풍대는 적들의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화살을 무진장 쏴댔다. 하지만 금군은 소수의 적 기마대와 드잡이질을 벌이는 대신 무한 침공을 우선시 하는듯 최대한 방어에 힘쓰며 꾸준히 전진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면힘들겠어" 지도를 봄 관지가 중얼거리는데 제3천인대장 정삼이 들어오면 보고했다. "화살 보급이 끝났습니다. 또다시 출동하실 겁니까?" "아니 오늘은 그만한다. 이런 식으로 화살을 마구 소모한다면 총타에서 많은 화살을 가져왔다고 하나 곧이어 바닥이 드러날 것이 분명하다 더 이상 화살을 헛되이 소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겟습니까?" 관지와 마화 그리고 9명의 천인대장들이 모여 차후의 작전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헀다. 한참 작전토의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10인대장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군례를 올린 후 보고했다. "무한 방향에서 3만여 무리가 이쪽으로 이동해 오고 있습니다. 행색으로 봤을 때 금군은 아닌 듯하고 무림인들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그 보고에 관진느 씁슬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합류지점에서 기다리다가 지쳐서 이리로 올라온 모양이군 좋아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만나봐야겠지" 관지는 마화를 향해 명령했다. "나는 그들을 만나러 가곘자 귀관은 수하들을 인솔하여 작전지역으로 이동하도록" '존명!" 수라도제는 경비무사의 안내를 받아 막사로 들어온 사내를 찬찬히 바라봤다. 다부진 턱과 시원하게 솟은 콧날...... 그러면서도 어떤 일이 라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강인한 정신력을 담은 강렬한 안광(眼光)을 내뿜는 두 눈 그야말로 패기(覇氣)가 넘치는 뒤어난 무사임이 분명 했다. '허 이런 인재가 마교에 있었을 줄이야......' 감탄스러운 시선으로 새삼 다시 한 번 상대를 바라보는 수라도제였다. 상대가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시커먼 갑주로 감싸고 있다 보니 문득 과거 변방의 오랑캐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찬황흑풍단이 생각났다. 검은색 갑주를 입은 단체는 지금까지 그것 말고는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수라도제는 설마하니 상대가 찬황흑풍단과의 연관성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원래 마교도들이 검은 색을 좋아했기에 그저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흑색갑주를 입은 무장은 눈매를 날카롭게 빗내며 입을 열었다. "노부는 흑풍대를 맡고 있는 관지라고 하오 여러 무림의 명숙들을 뵙게 되어 영광이라 생각하오" 자성만마대를 제외한 마교의 상급단체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흑풍대의 경우 마교의 내전에만 출동했을 뿐 정식으로 무림에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ㅇ벗었다. 그렇기에 좌중에 앉아 있는 인물들 중에서 흑풍대라는 단체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소개를 통해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상대는 바로 마교의 아홉 장로들 중의 한 명이었고 마교와 무림맹에 연합하는 한 그만큼의 대우를 해줘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만나서 반갑소이다. 노부는 서문세가의 수라도제라고 하오" 자신의 소개를 한 수라도제는 좌중에 앉아 있는 각 문파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돤지에게 소개했다. 그런 다음 관지에게 말했다. "귀교 단독으로 이곳에서 금군을 상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니 참으로 놀랍소이다. 그건 그렇고 노부들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귀교에서 우리들 과 연합하여 작전을 수행할 의지가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소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봤을 대 귀교는 우리들과의 연합작전을 망설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떄문이오" 그 말에 관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본관이 여러분을 못 믿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소이다. 저들의 수는 엄청났고 이쪽의 수는 양쪽이 연합한다고 해도 매우 적다고 볼 수 있소 그렇기에 이왕이면 본격적인 호전이 시작되기에 앞서 저들의 강성한 기운을 누르고 사기를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소이다. 아마 나중에 귀하들이 기다리고 있는 지점까지 진출한 금군은 오랜 싸움에 지켜 피폐한 몰골로 나타났을 거요 그대, 연합하여 금군을 일거에 소탕할 생각 이었소" "그렇소이까? 그런 줄도 모르고 달려온 노부들의 생각이 댵았는가보오" 수라도제의 말에 관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왕에 여기까지 오셨으니 좀 도와주셔야겠소이다 이곳에 지도가 있소이까?" 곧이어 커다란 지도가 간이탁자위에 깔렸다 관지는 지도의 이곳 저곳을 손으로 짗으며 금군을 상대할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라 도제는 그런 관지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몇 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관지라는 마교의 장로는 마공을 연성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패도적인 마기가 뿜어져 나오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마공 대신에 뭔가 다른 무공을 익힌 모양이다. 그런데 마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마교의 장로가 될 수 있을까? 둘째 지도를 보며 그가 설명하고 있는 작전이다 관지 장로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면 그가 이런 일에 매우 능숙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만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수라도제는 그가 마교도가 아니라 군대의 장군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마굔느 왜 저런 전략과 전술에 능통한 장수 같은 인물을 키웠을까? 셋쨰 저 자는 강철로 만든 갑주를 입고 있었다. 보통 무림인들이라면 웬만해서는 입지 않는 갑주를 말이다. 그 상태에서도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갑주를 그가 평상시에도 자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저 자의 수하들도 갑주를 입고 이쓸 가능성이 컸다. 신검합일급에 이르는 강력한 고수가 저토록 두터운 중갑주를 입을 정도인데 그 부하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마교는 왜 저런 단체를 키워냈을까? 처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예측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지금 현재의 정보들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수라도제는 나중에 무영문족에다가 통지를 해서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마교가 무림일통을 하기 위해 흑풍대를 키운 것이라면 무림 맹쪽에서도 그런 중갑주로 무장한 단체가 하나 필요할 테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수라도제는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은 지금까지 너무나도 마교라는 곳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런 수하들을 키워내고 또 그들의 충성을 받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마교 교준느 상상 이상의 거목일 것이 분명했다. '허어 마교 교준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저런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의도눈 또 뭐란 말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수라도제는 관지에게 점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단지 마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장로라는 사실에 놀랐지만 관지 장로의 설명에 계속되는 동안 적의 허를 찌르는 그의 치밀한 전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술도제는 어느 순간 관지 장로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금군 20만을 상대로 지금까지 싸워왔다는 것이 수긍이 되었다. 아마도 자신들이 도우러 오지 않았다면 그들만으로 금군 20만을 끝장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아까 전에 관지 장로가 말했던 것처럼 약속지젖ㅁ까지 밀고 내려온 금군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일 게 뻔했다. '허어 참으로 탐이 나는 인재로고 이런 자가 어찌 흉악한 마교 무리에 섞여 있단 말인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수라도제는 관지를 바라보며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전략과 전술에 뛰어난 인재가 자신의 밑에 있다면 서문세가는 9파1방을 앞서는 최강의 문파가 될 것이 아닌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금군은 서서히 진격하여 평우너지대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최대한 빨리 무한을 점령하려 했지만 송군이 계속 괴롭혀대기에 어쩔 수 없이 진격 속도가 느려진 것이다. 평워에 도착하여 드넓은 대지에 자라고 있는 곡식들을 보자 금군 병사들의 마음도 한결 안정되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휴대식량이 다 떨어진다고 하여도 ㅚ소한 굶지는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금군이 평원 안으로 한참 진격하고 있을 때 또다시 예의 그 시커먼 갑주를 입은 기마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매일 반복된느 일상사가 시작되다 보니 금군, 병사들은 처음관느 달리 노련하게 그에 대처하기 시작헀다. 여러번 충돌해본 결과 적 기마대가 보유하고 있는 활의 사거리를 파악할 수 있었고 또 그들의 수가 매우 적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날 가해진 공격은 다른 날과는 족므 달랐다. 불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폭넓게 산개해서 쏘아대기 시작한 불화살들은 크게 원을 그리며 여기저기에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이때 괴변이 일어났다. 아무리 계절이 가을이라 초목들이 말라간다고 하지만 저렇듯 활활 타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뭔가 손이라도 써놓았던 듯 불화살이 떨어지자마자 순식간에 불길이 확 퍼져 오르며 사방으로 번져 가자 금군 병사 들의 눈에는 짙은 두려움이 깔리기 시작했다. "제법 하는군"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그에 따라 금군들이 이리저리 우왕자왕 움직이는 것을 보며 수라도제는 감탄스럽다느 듯 중얼거렸다. "지금 돌격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사돈" "허허, 사돈 조금만 더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하오" 종리영우의 말에 대답해준 수라도제는 전장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적들의 주위에 놓아둔 인화물질들이 활활 타오르며 짙은 연기를 뿜어낼 때 바로 그대가 돌격해 들어갈 적기였다. 관지 장로의 작전에 따르면, 적은 이쪽의 군세를 기병 1만으로 알고 있는 점을 최대한 이용하자는 것이다. 적은 아직까지 무림맹 세력이 가세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성공의 열쇠였다. 그리고 관지 장로의 작전은 집단전에 대한 경험이라고는 거의 없는 무림맹 고수들에게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무림맹에서 끌어모은 각 문파들의 무사들은 지금까지 합돌해서 격전을 벌여본 적이 없는 인물들이다. 개개인의 무공은 엄청나게 강할지 몰라도 상대가 조직적으로 대행해 온다면 큰 피해를 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난전으로 이끈 다면 애기가 달라진다. 뒤죽박죽 얽힌 상태에서 작전이고 나발이고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개개인의 무력이 강한 쪽이 승자 가 되는 것이다. 사방에서 치솟는 불길에 당황해하는 금군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수라도제는 이윽고 때가 되었다는 생각했는지 뒤를 돌아보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돌격!" 수라도제가 앞에서 엄청난 경골수을 발휘하여 달려나갔다. 그리고 수많은 문파에서 내노라하는 고수들이 앞 다투어 그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순식간에 벌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방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단발마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렇듯 뒤엉켜서 싸운 다면 무술실력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금군 병졸들이 압도저그로 불리할 것은 당연한 사실이아닌가. 그런 와중에 멀찍이 떨어져서 적을 교란하고 있던 흑풍대가 들이닥쳤다. 그 순간 전장은 더욱 혼전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제는 작전이고 뭐가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적들을 베고 또 베는 것이다. 각각의 승리가 합쳐서서 한 지역의 적을 제압하고 나면 그들은 또 다른 곳으로 달려간다. 이런 식으로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혼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인물들이 몇 있었다. 수십 어쩌면 수백명의 금군을 죽여 없앤 인ㅁ루들이다. 서문세가의 태상가주 수라도제라든지 종리세가의 가수 종리영우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기 그리고 그 외에 많은 수의 무림명숙들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자신들이 쌓아놓고 있었던 이름값을 하려는 듯 가장 위험한 전장에 뛰어들어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하고 있었다. 특히나 그들 중에서 가장 이름 있는 수라도제의 경우 언제나 그에게 따라붙는 '화경의 고수' 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금군 병사들이나 장수들을 그야말로 학살 하고 있는 중이었다. "크아아악!" 메케한 연기가 가득 차 있는 전장에서 비명성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수라도제가 던진 거대한 도가 크게 한 바퀴 돌며 수십 명에 달하는 금군 병사들의 허리를 토막내고 지나간 후 수라도제의 손에 돌아갔다. 고색창연하던 그의 도는 어느새 금군 병사들의 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수라도제는 피에 젖은 거도를 꼬나쥐고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명호에 왜 전쟁의 신 아수라가 들어 있는지 알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금군 병사들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수라도제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단느 말인가? 피에 젖은 도를 쥐고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수라도제가 방금 전 그 엄청난 살육극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거친 욕설을 퍼부으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수라도제의 육중한 도가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사방으로 번뜩하며 검강이 뿜어져 나간 후, 돌진해 들어갔던 금군 병사들의 몸은 예리한 뭔가로 잘려 나간 듯 피보라를 일으키며 산산히 분해되었다. 몸통 에서 떨어져 나간 손과 발이 사방으로 굴러나갔다. 그 순간 금군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지으며 이리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망쳐 봐야 어디로 가겠는가 사방에서 격전의 소용돌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격전의 주인공들 중에는 무림의 명숙들도 있었고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창궁18수 같은 단체로 활동 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모두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이름값에 맞게 금군 병사들을 주살하며 뛰어난 전공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수라도제만이 예상한= 이변이 이 격전지의 한 구석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강호의 쓰레기들로 치부되고 있던 천지문 의 눈부실 정도의 분전이였다. 그들 500명의 인솔자 소연을 중심으로 금군을 상대로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크으윽!" 소연의 거대한 도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서너 명의 금군 병사들이 피를 뿜었다. 창백하기 그지없는 안색을 하고서도 소연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토록 뛰어난 무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바깥 세상에 이름이 안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렇게 지독한 피 냄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었다. 속이 울렁거린다. 속 시원하게 토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 그녀는 천지문의 제자들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는 막중한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천지문도들 중에서 조금 앞서 나간 인물이 여덞 명의 금군에게 포위된느 것을 보자마자 그녀는 신형을 날렸다. "크아아악!" 그녀의 거도가 빛무리를 일으키며 기운차게 회전하는 순간 여덞 명의 금군 병사들은 차마 바라볼 수도 없을 정도로 끔찍한 고깃덩어이로 화해 버렸다. "우욱!" 순간 또다시 그녀의 뱃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년느 그것을 참으며, 다시금 도를 휘둘렀다. 그녀의 부드럽게 흘러내렸단 머리카락은 어느 샌가 붉은 선혈로 뒤덮여져 있었다. 악착같이 저항하던 금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친내 후퇴하기 시작했다. 10만에 달하는 피해를 입은 후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 후 패퇴하는 적드을 추격하며 잔인하기 그지 없는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이날, 금군은 너무나도 막심한 피해를 당했다. 17만에 달하는 병사 들 중에서 살아서 도망친 자들은 겨우 5천도 안 되었다. 원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장수들이 그 혼전의 와중에 죽었고 마교.정파 연합군이 노획한 물자는 너무나도 많아서 쌓아도 쌓아도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멍하니 서 있던 소연의 모습이 수라도제의 눈에 띄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그녀가 사용하던 피 묻은 도가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위로 몇몇 천지문도들이 토악질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수라도제는 침착한 표정으로 주위를 빙 둘러봤다. 이곳은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시페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중에는 꺠끗하게 죽은 시체보다 끔찍한 형상으로 죽은 시체가 더욱 많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이 검이나 도 같은 무기로 인해 죽은 시체였다 뛰어난 내가의 고수들이 무기를 휘둘렀으니 적당한 깊이로 베이는 정도를 넘어 아예 토막이 나버린 것이다. 이번 전재에 참가한 무림맹 소속의 수많은 문파들 중에서 이런 대규모 격전을 겪은 적이 있는 문파가 있을 리 없다. 그렇다 보니 오랜 무림생활을 거치면서 많은 살인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토악질을 하거나 소연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ㅅ라도제는 자신이 왜 소연 같은 뛰어난 여고수를 몰랐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문파 내에게 수련은 열심히 했는지 모르지만 강호 경험은 거의 없는 게 분명했다. 수라도제는 소연에게도 천천히 다가갔다. "몸은 괜찮은가?" 소연은 화들짝 일어서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대협께서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격전장은 처음인지라......" "허허,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네 무림 경험이 좀 있닥 자부하던 사라들도 이런 난장판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인물들은 드물 테니 말일세 그래 천지문의 사상자는 많지 않은가?" 그 말에 소연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소녀가 부족하여 다섯의 부상자가 나왔습니다. 큰 상처는 아니니 대협께서 걱정해주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 말에 수라도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문파에서 사망자가 최소한 몇 명씩은 나왔을 정도로 치여한 격전이었다. 그런데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다니 수라도제는 주위에 흩어져서 쉬고 있는 천지문의 제자들을 살펴봤다 무공이 제법 뛰어난 자도 보였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단 한 명도 사망자가 없었다는 것은 그의 눈앞에 보이는 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여인이 몸을 아끼지 않고 그만큼 열심히 뛰어다녔다는 증거였다. '허어 무공도 뛰어나지만 인성은 더욱 뛰어나도다 그것 참 정말 탐나는 인재로고.....' 수라도제는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 슬하에 자식은 있는가?" 그 말에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아직 결혼은 하지 못했습니다. 대협" 그 말에 수라도제의 입이 귀 밑까지 찢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재빨리 자신의 표정을 바로 잡은 후 넌지시 말했다. "허어, 그런가? 그럼 노부가 중신을 서주면 되겠구먼" 그 말에 소연은 당혹스러운 듯 대답했다. "그, 그러실 필요까지는......" "아닐세 내 좋은 혼처를 알아보지 지금까지는 무공을 연마하느라 주위를 돌보기 힘들었을 테지만 자네처럼 뛰어난 인재가 핏줄을 남기지 않는다면 것도 무림의 크나큰 손실이 아니겠는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라도제의 속셈은 따로 있었ㄷ. 자기 문파에 있는 인재들 중에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녀석을 하나 골라 그녀와 맺어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자연히 남편이 있는 서문세가로 들어올 테니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신의 계획이 마음에 든 듯 흐믓한 미 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수라도제의 눈에 마교도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또 노획품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이런 격전장을 수없이 많이 경험해본 듯한 노숙함이 자연스럽게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그들 모두에게서 마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도 흑풍대라는 단체 자체가 모두 다 마공 대신 뭔가 다른 특별한 무공을 익히는 모양이었다 수라도제는 족므 전 전투에서 흑풍대의 활약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었다 성난 이리떼처럼 몰려다니며 금군 병사들을 휘몰아쳐 가는 그 모습은 수라도제의 등꼴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그들은 체계적으로 금군 병사들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이끌고 온 무림맹의 어줍잖ㅇ느 무사들보다는 훨씬 이러한 전투에 맞는 행동이었고 무공이었다. '확실히 뭔가 있음이 틀림없이 마교가 저들을 키운 것을 보면 말이야 그건 그렇고 참으로 무림은 넓구나 큰 사건이 벌어지자 지금껏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었던 용과 범 같은 인물들이 계속 나타나는 것을 보면 말이야' 잠시 생각하던 수라도제는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을 포섭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군" 문득 수라도제는 소연이 자신의 시선을 따라 마교도들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단하지않나?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격전장을 휩쓸고 다니는 저들을 보며 노부는 감탄을 아낄 수 없었다네 물론, 사네를 빗대로 말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게나" 처음 이런 아수라장에 참여하게 되어 새파랗게 질려 있는 그녀가 혹여 자신이 말한 의도를 잘못 이해했을까봐 급히 덧붙이는 수라도제였다. 하지만 당황한 수라도제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소연은 미소 띤 어조로 대답했다. "오해를 하다니요, 당치도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그 말에 한 결 안심한 듯 수라도제가 말했다. "저들과 자네를 비교하지 말게 저들은 저 옛날부터 격전장을 헤치며 살아온 인물들이라니 물론 마교라는 아수라장을 말이야 철혈을 숭상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아비규환의 전쟁터는 고향처럼 익숙한 곳이겠지" 소연은 수라도제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수라도제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 소연의 모습을 멀리서 훔쳐보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바로 하북팽가의 장로들 중 한 명인 혼원패권 팽서이다. 소연 과의 비무는 도중에 수라도제가 끼어들었기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언젠가 기회가 오기만 한다면 못다 끄낸 승부를 마무리지을 속셈 이었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상대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더 관찰해두는 것이 이익이 아니겠는가 사실 팽선이 무림후배에게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못다 끝낸 승부도 있긴 했지만 비무 중에 느꼈던 묘한 위화감 때문이었다. 자신이 승리하는 것 같기는 했는데, 오랜 무예로 다져전 그의 육감은 한 번씩 위험 신호를 보내왔었다. 그것도 상대를 바짝 몰아붙이며 승기를 타고 있을 떄 그 느낌이 왔던 것이다. 물론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초식을 펼침에 있어서 허점이 없을 수가 없었다. 고수라면 상대의 그런 허점을 파고드는 자이고 하수라면 그 허점을 알아채지는 못한 채 자멸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 팽선은 소연과 비무하면서 한참 공격에 열중하던 순간 갑자기 등 골이 오싹하는 느낌을 몇 번씩인가 받았었다. 공격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진 허점으로 소연의 도가 뚫고 들어오는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짐나 소연은 방어에만 급급할뿐 공격은 가해오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육감이 틀린 것인가? 팽선은 자신과 함께 온 하북팽가의 다른 장로에게 청해 비무를 해봤다 물론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도록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싸웠다 그 장로와 자신의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기에 용호상박의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었ㄷ. 한순간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생명이 위험할 정도다. 치열한 비무는 어느덧 끝났고 그 장로는 돌아가버렸다. 하지만 팽선은 돌아갈 수가 없었다. 치열한 대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등골이 오싹하는 그런 위기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소연과의 비무 때를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허전하기까지 했다. '허어, 참 이상한 이이로다" 한동안 생각을 거듭하던 팽선은 그 장로와는 워낙 오랜 시간 자주 비무를 해봐서 상대의 공격하는 방식을 너무나도 뻔히 알고 있기에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지었었다. 똑같은 공격이라도 예상을 한 것과 모한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에야 팽선은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것은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를 상대했을 때 오는 느낌이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자신의 허점이 드러날 때마다 상대가 그것을 차분히 관찰하여 '저놈을 이 한수에 박살낼까 말까' 궁리하는 그 순간에 오는 위험 신호였던 것이다. 사실 그런 위험 신호를 감지한 것을 보면 소연과 그의 수준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 게 분명했다. 만약 그 차이가 크다면 그런 것을 느끼기도 전에 황천길로 가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종이 몇 장 정도의 간겨일지라도 소연이 그보다 조금 더 높은것은 사실이었다. "허어 참 아마도 수라도제는 저 계집의 간교한 속셈을 한눈에 꿰뚫어보고 내가 더 이상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 끼어든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하자 수라도제가 중간에 끼어든 것이 고맙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저 간악한 계집은 어떤가?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슬슬 밀리는 척하며 노부를 방심하게 만들었다가 나중에 한 방을 노려 노부에게 망신 주려는 속셈이었곘지 젠장 그런것도 모르고 신이나서 저 계집의 장단에 맞춰 놀아주고 있었다니......" 팽선이 지니고 있는 천지문도들에 대한 선입관은 대단히 안 좋은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연이 고운 마음씨 때문에 그 당시 일부러 져주고 있었 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마지막에 팽선이 승리를 거둬버렸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수라도제 때문에 대결은 중지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팽선이 소연의 행동을 오해했다고 해도 그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 받는 팽선이었다. 무림명숙인 자신을 무찌 름으로서 그것을 발판으로 명성을 얻는 것이야 큰 문제가 될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은 늘상 벌어지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아?' 팽선은 분노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노기에 찬 음성으로 외쳤다. "그래 두고보자 내 언젠가는 이 수모를 갚을 날이 있을 것이야" 팽선은 주먹을 꽉 쥐며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처절한 전투가 끝난 후 수라도제가 이끄는 무림맹 연합세력의 고수들은 마교에서 파견한 흑풍대가 보유하고 있는 엄청난 능력을 인정해야만 했다. 사실 대부분의 정파 고수들의 경우, 중갑주를 착용한 그들의 모습에 처음에는 약간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지금 그런 그들을 멸시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막강한 전투력과 조직력으로 시종일관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간 그들에게 약간의 두려움 마저도 느끼고 있었다. 한명 한명을 사대한담녀 이쪽이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평지에서 집단 대 집단으로 싸운다면 누가 그들으 상대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피 튀기는 전투를 벌이기느 했지만 의외로 무림인들의 피해는 적었다. 그것도 다 흑풍대가 전장을 가장 무림인들이 싸우기 편한 상태로 만들어준 덕분 이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흑풍대는 질서정연하게 양양성을 향해 앞서 나가버렸다. 군대처럼 철저하게 체계가 잡힌 그들은 사상자를 처리하는 것에 있어서도 수라도제쪽에 비해 그 속도가 훨씬 빨랐다. 수라도제는 각 문파의 수장들에게 명령하여 사망자의 유품을 수습하고는 간단하게 죽은 자의 넋을 위로했다. 부상자는 부상의 경중에 따라 가벼운 자는 휴대한 약품으로 치료하고 무거운 자는 후송하여 의원에서 치료받게 했다. 중상을 당한 자들에게는 치료가 끝난 후 자신이 소속된 문파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런 다음이야 그들은 흑풍대의 뒤를 딸 이돌하기 시작헀다. 거의 3만명에 이르는 무림인들이 이동하는 것이다 보니 흑풍단에 비해 그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서로 간에 실력차가 매우 심하게 나기에 경공술 을 사용하여 하루종일 달려갈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전체 무림인들의 실력에 따라 5개 무리로 나눴다 물론 구성원 개개인들의 실력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각 문파가 보낸 정예들의 평균적인 실력을 말함이다. 기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적당한 수준의 경공술을 사용하여 이동하게 된 후부터 무림맹 연합의 진격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 며칠동안 강행군을 시작한 후에야 그들은 양양성을 볼 수 있었다. 쓰레기 문파 천지문의 심법 "대원수님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밖에서 달려오는 검은 옷차림의 중년의 문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한인의 생김새였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말 또한 유창한 한어였다. 바로 이 자가 장인걸의 귀 노릇을 하고 있는편복대의 대주였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남쪽 전선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장인걸은 편복대주에게서 문서를 받아들었다 그것은 전서에 기록도니 암호를 풀어 기록해놓은 것이였다. "파저 원수가 패배했다? 놀라운 소식이로구나 뛰어난 용장인 그가 생존자가 수천에 불과할 정도로 대패를 당하다니 이제 더 이상 송에는 그를 상대할 만한 군사력이 없으리라 자신하고 있었거늘...... 아직까지도 그만한 군사력이 남아 있었더란 말이냐?" 편복대주는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헀다. "본대가 풀어놓은 첩자의 보고를 종합해봤을 대 무림인들이 개입한 것이 확실하옵니다." 그 말에 장인걸은 놀랬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림인들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한다면 엄청난 파괴력을 보인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전쟁의 흐름이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뭣이? 무림인이 개입했다고? 그래 그 수는 얼마나 된다고 하더냐?" "엣. 3만 정도라고 들었나이다. 그들이 송군 기병 1만여와 합동하여 작전을 펼쳤다고 하옵니다." "3만이라고?" 무림인 3만이라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옛! 속하가 조사해본 바로는 무림맹주가 격문을 돌려 본국과의 전쟁에 가담하라고 수많은 문파들을 부추겼다고 하옵니다." '크으윽! 무림맹 네놈들이 감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으르릉 거리던 장인걸은 곧이어 뭔가 떠올랐다는 듯 편복대주에게 물었다. "천마신교의 동태는 어떻다고 하더냐? 무림맹에 3만이나 되는 고수들을 이쪽에 동원했다는 것을 알면 천마신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그 말에 편복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속하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천마신교는 금과 전쟁하는 동안 서로 불가침하기로 무림맹과 협약을 맺었닷고 하더이다" 그 말에 장인걸은 노성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이런 망할 녀석들! 손톱만한 기회라도 있다면 마교천하를 이룩하기위해 열과 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 그놈들의 사명이거늘 감히 불가침 협약 을 맺어? 그놈들이 왜 그따위 협약을 맺는다는 말이냐? 혹시 본좌가 이곳에 있음을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 대원수께옵서 이곳에 계신다는 거을 알았다면 진즉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 옳았지 않겠사옵니까? 대원수께옵서 묵향 교주를 처치한 후 천마신교는 지난 20여 년간 아주 조용히 지내왔사옵니다. 대원수께옵서 자신들의 교주를 살해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도다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설무지라는 뛰어난 군사가 살아 있을 때는 그의 능력이 워낙 뛰어난 지라 천마신교를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몇 년이 흘렀사옵니까? 속하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부교주들간에 교주 직을 차지하기 위한 본격적인 내분이 시작되지 않았나 사료되옵니다. 그렇게 되었담녀 마교는 외부에 힘을 쏟을 처지가 아니지 않겠사옵니까?" 그 말이 옳다고 생ㄱ가되었는지 장인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리저리 생각을 정리하던 장인걸은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편보갣주에게 말했다. "양지에 장군을 불러라" 편복대주가 밖으로 나가서 양지에 장군을 부르라고 통고한 후 돌아오자 장인걸은 이리저리 계책을 떠올리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이봐" "옛. 대원수님" "전서구를 띄워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무안 대장군에게 최대한 빨리 후퇴하라 일러라" "예?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무안 대장군은 역전의 명장이옵니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무안 대장군에게 중원군을 보내 그 일에 대해 압력을 가하면서 적들을 양양성에 묶어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아무리 무안 대장군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상대는 무림인들이다. 이쯤에서 손을 터는 것이 좋아 안 그러면 본좌는 파저에 이어 무안까지 잃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지금, 즉시 시행해라" "옛." 평복대주가 무안 대장군에게 전서를 보내기 위해 달려나간 후 양지장군이 도착해싿. 그는 장인걸에게 군례를 올린 후 말했다. "부르셨사옵니까? 대원수님" "그래 본좌는 지금 급히 남쪽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곳을 정히라기 위해 남아야 하는데...... 10만을 줄 테니 그것으로 요의 잔당들을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장인걸이 거느린 대군은 요의 잔당들 중에서 가장 큰 세력들은 다 괴멸시켜 버린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남은 자들만 정리하면 되는 것이다. "속하에게 맡겨만 주신다면 견마지로를 다해 임무를 완수하겠사옵니다." "잔당들의 세력이 날로 감소하고 있는 형편이니.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게다 본좌는 내일 일찍 ㄸ날 것이다. 귀관도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을 게야" "옛" 양양성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던 금군 10만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양양성의 수비군들도 방어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채 금군의 동태를 살폈다. 적들이 공격해 들어오려고 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금군은 질서정연하게 한 곳에 집합하더니 곧 이동하기 시작헀다. 금군이 물러난 다음 날 검은 갑주로 몸을 감싼 기마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마대는 주위를 빙 둘러본 후 곧바로 금군이 물러간 방향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행동으로 봤을 때 도대체 어느쪽 소속인지 알 수 없었다. 금군인지 송군인지, 아니면 무림맹인지...... 그들이 입고 있는 갑주의 형상이 송군의 양식이었기에 어쩌면 송군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송군이라면 왜 악비 대장군에게 인사 도 안 하고 그냥 사라졌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수라도제가 이끄는 2천명의 무림인들이 양양성에 도착했다. 다섯 무리들 가운데 무공이 뛰어난 인물들로 구성된 집단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경공술이 워낙 높은 만큼 최단거기로 가로질러 달려온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양양성을 지키고 있던 패력검제와 양양성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수라도제가 한자리에 만날 수 있었다. 패력 검제에 비해 수라도제가 훨씬 더 연배가 높았기에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패력검제는 먼저 정중히 인사를 건넸ㄷ. "어서 오십시요 수라도제 대협" "만나서 반갑네 그래 얼마나 수고가 많았는가" 둘은 찻잔을 사이에 놓고 지난 애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눈 대화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남하해 오던 20만에 달하던 금군의 궤멸이었다. "피해가 크지는 않았습니까?" "의외로 피해가 적었다네 그것도 다 마교애들 덕분이지" "마교애들이라고요? 마교도 여기에 동참했습닊?" "허어, 참 자네는 못들은 모양이군 마교 교주와 무림맹주가 금을 무찌르자고 협정을 맺은 지가 얼마나 자닜는데...... 하기야 이곳에 고립 되어 있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고 마교 녀석들은 어디 갔나? 우리보다 함참 앞질러 갔으니 벌써 도착했을 텐데 말일세" "예?" 아무리 생각해봐도 패력검제는 여기에서 마교도들을 본 적이 없었다. 잠시 생각해보면 패력검제는 며칠 전에 봤던 기마대를 뗘올릴 수 있었다. 하기야 여기 있으면서 본 특이한 존재는 그 흑색 기마대뿐이었으니 말이다. 혹시 그들이 마교도들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의 몸에서는 그 어떤 마기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저 어제 이상한 무리를 봤는데 말입니다. 모두들 흑색 갑주로 무장을 갖춘 기마대였습니다. 혹시 그들이?" "바로 그들이 내가 말했던 마교도들일세" "예? 아무리 봐도 마교도 같지는 않았는데요? 원래 마교도들은 괴상한 기운을 뿜어내지 않습니까?" 패력검제의 말에 수라도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도 그렇게 느꼈겠지만 참으로 알 수 없는 단체였어 특히나 그 수장되는 인물인 관지라느 장로는 어찌보면 무림인이 아니라 일국의 대장군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 패력검제는 그 말에 놀랍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따. "아니 그런 자가 마교에 있었다는 말입니까?" "노부다 한 번 만나봤는데 관지라는 인물은 정말 마교에서 썩기에 너무나도 아까운 사내더구먼 정말 훌륭한 무인이었다네 자네에게 도 소개시켜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는 표정을 짓던 패력검제는 곧 정색으 하며 입을 열었다. "후퇴하는 금군을 따라 갔으니 조만간 기회가 있겠지요 그건 그렇고 저도 대협꼐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데 그러냐?" "만통음제라고 불리는 분이시죠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 금군 진영을 뚫고 제자와 함꼐 들어오셨지요" 만통음제라는 말에 수라도제는 대단히 흥미가 당시는 모양이었다. 음의 대가라는 풍문은 들었지만, 사실 그도 지금까지 만통음제를 만나본 적이 없었ㅇ니 흥미를 느끼는 것은 당연헀다. "허 그 분이 이곳에 계신다는 말인가. 빨리 만나보고 싶군" 성내의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걸어가자 제법 규모가 큰 객점이 보였다. "바로 이곳입니다." 패력검제는 점소이에게 부탁하여 만통음제에게 자신이 찾아왔음을 알리게했다. 그리고 잠시 후, 웬 중년여인이 가벼운 경장차림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바로 만통음제의 제자인 설취였다. 그녀는 패력검제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패력검제 대협" 설취의 안내로 패력검제와 수라도제는 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신선 같은 모습으로 명상을 즐기고 있던 만통음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만통음제가 내놓는 맛있는 술과 음식을 즐기며 오랜 시간 담소를 나눴다. 모두들 중원을 떨게 만드는 최강 의 고수들인 만큼 처음 만난 자리니 할 애기도 많았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패력검제는 수라도제에게 말했다. "또 한 명 소개할 사람이 있는데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허허 이번에도 3황 5제에속한 인물인가?" "아닙니다. 몇 달 전에 만난 강호의 후기지수인데 대단히 뛰어난 녀석입니다." "말을 하는 패력검제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뛰어난 후기지수가 커다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한번 만나보는 것이 좋겠지"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만통음제도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노부도 함꼐 갔으면 하오" 안 그래도 별로 할 일도 없는데 잘된 것이다. "물론이죠 선배님께서도 꽤 흥미를 느낄 만한 녀석일 겁니다." "바로 저 녀석입니다." 패력검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높디높은 성벽 위에 걸터앉아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 못브을 가만히 지켜보던 만통음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법 쓸 만한 녀석이외다. 도대체 사문이 어디요? 느껴지는 기운으로 봤을 때는 도가 계열이 아닌가 싶은데......" 하지만 수라도제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그녀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그도 만통음제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만난 후 였고 그녀가 풍기는 기운을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밖으로 느껴지지 않는 아주 잘 갈무리된 기도를 말이다. "천지문인가?" 그 말에 만통음제는 아연한 표정으 지엇ㄷ. 왜 여기서 천지문이 갑자기 튀어나온다는 말인가? 천지문은 강호에 소문난 쓰레기 문파였다. 물론 마교와 제휴한 것 떄문에 그런 소문이 퍼져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ㄷ. 교주와 호형호제하는 그에게 있어서 마교에 대한 선입견 따위는 거의 없었다. 그느 자신이 본 것만 믿는 것이다. 그가 강호행 중에 몇 만나봤던 천지문도들 중에서 저런 특이한 기도를 풍기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패력검제의 반응은 예상밖이었다. 패력검제는 기겁하듯 놀랐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패력검제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수라도제느 빙긋이 미소이즈며 말했다. "수많은 강호경험을 쌓다보면 그 정도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법이지" 그 말에 만통음제의 눈이 실쭉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노부에게 빗대서 하는 표현이오?" 잘못하면 싸움 나게 생겼기에 수라도제는 다급히 마 ㄹ했다. "농담이올시다. 원......" 성질도 급하다고 내심 투덜거리며 수라도제는 말을 이엇다. "저 아이와 아주 비슷한 기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얼마 전에 만났는데 그 아이는 천지문의 제자라고 하더군요 아마 며칠 지나면 이곳 에 도착할 것이외다." "호오 그래요? 그 말이 맞는지 나중에 두고 봅시다." 만통음제의 말이었고, 패력검제의 생각은 달랐다. 진팔에게 도를 가르쳤다는 심사저에 관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소연이라는 아이입니까?" 그 말에 이번에는 수라도제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대꾸했다. "어, 어떻게 알았는가?" "물론 저녀석이 알려줘서 알았지요" "그 아이는 벌써 노부가 찍었으니 넘볼 생각 하지 말게" 그 말에 패력검제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새장가라도 드실 생각이십니까?" 수라도제는 당황한 듯 대꾸했다. "그건 아니고...... 노부가 혼처를 알아봐주겠다고 말해놨으니 그리 알란 말일세" 슬며시 그녀를 서문세가의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수라도제였다. 사실 그가 알아봐주는 혼처라고 해봐야 서문세가의 사람일 것이 뻔하니 말이다. "서문세가가 오늘날 왜 그리 세력이 큰지 알겠습니다 오늘 아주 좋은것을 배웠습니다. 그려" 페력검제의 말 속에서 뼈가 있는 듯했지만 수라도제느 빙긋 웃으며 두리둥실하게 대꾸했다. "허 무슨 그런 말을...... 노부는 단지 뛰어난 인재에게 어루리는 넓은 물을 마련해주겠단느 것뿐, 별다른 욕심은 없다네" "조심하시는게 좋을 겁니다. 워낙 덩어리가 커서 털도 안 뽑고 통쨰로 삼키시면 목구멍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그건 무슨말인가?" 하지만 패력검제는 빙글빙글 웃기만할뿐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아는 것이다. 진팔의 기도가 특이한 것은 태허무령심법 떄문이다. 그런데 수라도제의 말에 따른다면 그 소연이라는 아이도 그와 똑같은 심법을 익히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심법또한 교주가 알려줬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둘의 뒤에는 교주가 있다. 수라도제가 그녀를 꿀꺽하겠다고?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어쩌면 교주와 칼부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직접 교주와 싸워본 적이 있는 패력검제가 그렇기에 아무리 수라 도제라 해도 교주와 싸운 후에 어떻게 결론이 날지 뻔히 아는 것이다. 흐흐흣 선배도 한번 당해보시구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 순간 이해할 수 있을 거요 근엄하기 그지없는 수라도제가 볼썽사납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즈럭워지는 패력검제였다. 며칠 후 소연 일행이 도착했다. 그녀를 바라본 만통음제의 고개가 절로 끄덕어졌다. 확실히 수라도제의 말대로 진팔이라는 녀석과 그 기도가 너무나도 흡사했다. "허어 참 저런 고수들을 키울 수 있다니...... 천지문은 소문과 달리 그야말로 용담호혈이로다 그토록 노력해서 노부는 겨우 한 놈을 건졌거늘 천지문주는 복도 많은 인물이로고" 패력검제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그렇지요 저 또한 제 아들놈 하나 겨우 절정의 반열에 올려놨을 뿐이니 말입니다. 가시죠 수라도제 선배가 소연이 라는 아이를 소개해준다고 했으니 만나봐야 할 것이 아니곘습니까?" 사실 수라도제나 만통음제의 경우 신검합일급에 들어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을 것이다. 또, 이번에 결성된 무림맹 연합에 속해 있는 인물들 중에서 그 정도 실력을 지닌 고수들의 수는 제법 많은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각 문파가 자랑하는 정예들을 보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 둘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정하는 것은 첫째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천지문의 제자라는 점이었고 둘째는 그들의 특이한 기도였다. 전문적인 살수처럼 웬만한 이목으로는 정확힌 실력을 꼬집어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이 지닌 기도가 아주 은밀했다. 어떤 심법으로 어떤 무공을 익히며 저렇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인지 아주 궁금하지 않으 수 없었다. "사저!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진팔의 당혹스런 물음에 소연은 살짝 아미를 찌푸리며 대꾸했다." "원래는 임사형꼐서 나오시려고 했었지만 내가 대신 오겠다고 했다 네가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찾아봐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그 말에 진팔은 고개를 푹 수그리며 풀 죽은 어조로 말했다.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저" 진팔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소연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네게서 뿜어 나오는 기세를 보니 그동안 무공이 몰라보게 진보하였구나 아무튼 축하할 일이구나 그래 그 동안 잘 지냈느냐?" "예" 진팔은 뒤쪽을 힐끗 본 다음 소연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사저께 소개시켜드릴 사람이 있는데요" "누군데 그러느냐?" 소연이 보니 저 뒤쪽에서 헛기침을 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중에 한 명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바로 3황 5제의 한 사람 수라도제 대협이다. 그리고 남은 셋이 더 있는데 그 중에서 여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그리 대단한 무공을 지 니고 있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두 사내를 자신에게 소개하겠다는 말일 것이다. 둘 다 삼십대 정도로 보였고 하나같 이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그 말은 그들의 실력이 그녀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나다는 말일 것이다. 저런 사람들과 사제가 어울리고 있었다니...... 그것을 보면 사제의 가출(?)이 꽤 유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는 소연이었다. 패력검제는 수라도제 등과 함꼐 소연을 만나 간단하게 다과를 함께 하며 담소를 나눴다. 그런 다음 패력검제는 그들과 헤어져 문도 들이 거쳐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길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패력검제는 문 앞에 서 있는 남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만통음제와 그의 제자였다. 아마도 경공술을 사용하여 앞질러와 여기서 패력검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서 오시게나 갑자기 찾아와서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구먼" 객에게 주인이 자기 집 앞에서 어서오라는 마을 듣는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우스웠지만, 패력검제는 그들을 거처로 초청했다. 만통음제는 제자를 따로 떼놓고, 패려검제와 둘만 자리를 잡았다. 차가 나온 후 만통음제는 자기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밝혔다. "슬쩍 눈치를 보니까 자네는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더군"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저 두에 얽힌 비밀을 말일세. 천지문의 다른 제자들이 풍기는 기도와 비교했을 때 그 둘은 너무나도 달라 자네는 뭔가 알면서 숨기는 듯한데...... 노부에게 아려줄 수는 없겠나? 비밀은 꼭 지키겠네" 만통음제의 경우 정사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로 인식되고 있엇다. 무림맹에서 하는 일에는 신경도 안 쓰는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보통 사람들이 정파와 사파라는 큰 둘레를 그어놓고 사람을 사귄다면 그는 음악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선을 긋는다는 차이저이 있었다. 그런 인물인 만큼 진팔이 가진 비밀을 알려줘 봐야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천지문이 마교와 협정을 맺은 유일한 문파라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만통음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거야 강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 아닌가." "그걸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서,. 설마 저것이 마공이라는 말인가? 마교의 무공과 정파의 무공이 합쳐지면 저런 독특한 기도를 풍기는 것인가? 이해할 수가 없구먼 노부는 정총적인 현문의 것이라고 봤었는데......" 그 말에 패력검제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마교에서 흘러나온 무공이란느 뜻이었습니다. 마교는 그 어떤 문파보다도 더 많은 정파의 무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각 문파에서 절전된 것까지도 가지고 있죠" 만통음제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오 그래서 자네가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군" "그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이 협정을 맺었단느 것을 다 아는데 무공 몇 가지 흘러들어갔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뭔가?" "저들이 익힌 심법이 현문에서도 잊혀져버린 태허무령심법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만통음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태허무령심법을 익힌 것이 뭐 그렇게 허물이 되곘는가 그게 마교에서 흘러나왔다고 하더라도......" 거기까지 말한 만통음제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현문이 만든 심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바로 태허무령심법이었다. 그런데 왜 그것이 도중에 절전되었을까 그것은 아무도 안 익혔기 때문이었다. 워낙 뛰어난 것이었기에 인정받은 소수만이 익히다가 대가 끊어져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심법이었기에 누구나 다 익히도록 권장되었는데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지독하게 대성하기 어렵다는 점 그렇다고 마교에서 그 심법이 적힌 비급만 슬쩍 건네준 것이 아니라 빨리 익힐 수 있도록 모종의 도움까지 줬다는 말이 된다. 마교가 골빈 집단이 아닌 이상에야 아무나 잡고 그만한 공을 들일 이유가 없다. 진팔과 소연은 어떤 이유에야 아무나 잡고 그만한 공을 들일 잉가 없다 진팔과 소연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마교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되는 인물임이 확실했다. 그만한 투자를 할 만큼 "허어 참 일이 아주 심하게 꼬여 있구먼 그래서 자네가 삼키다가 목에 걸릴 거라고 말했던 것이로군" "하하핫! 그냥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그걸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 말이 그 상황에서 나올 이유가 없었으니 노부가 궁금증을 가지게 된 것이지" 여기까지 말한 만통음제는 느닷없이 전음을 날렸다. >마교 교주가 저들의 뒤에 있는 것인가?> 그러자 패력검제는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떳다. <허어 과연 대단하십니다. 어찌하여 선배님의 명호에 만통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인지 이제서야 알겠습니다.> 만통음제는 피식 미소지은 후 입을 열었다. "그래 저 둘 중에 그가 총애하는 아이는 누구인가? 아마도 자네는 이미 짐작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저라고 그 둘을 다 대해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진팔이라는 녀석이 그의 욕을 엄청하면서 이를 갈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진팔은 아니라고 짐작할 뿐이지요" "그렇다면 소연이라는 아이겠군 그가 왜 그 아이를 그토록 총애하는 것이지? 이해할 수 없구먼" 패력검제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곧 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재님 어쩌면 한순간의 변덕이 아닐까요?" 진팔이의 경우를 보니까 거의 충동적으로 가르쳐준 모양이던데 말입니다. 진팔이 녀석의 말에 따르면 심법을 배운 게 아니라 고문만 당했다 하더군요 어쩌면 혈도에 강한 자극을 준 것을 가지고 고문이라며 엄살을 떠는지도 모르죠" 잠시 말이 없는 만통음제는 전음을 던졌다. <자네, 진골측근마공이라고 들어봤나?> 패력검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ㄷ. "아뇨 들어보기도 처음입니다만" <노부다 알고 있는 친구들 중에 사파의 인물들도 몇 있지 그들에게 서 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적인 쉅들 중에서 몇 가질를 들은 기억이 있네 그 중에 진골축근마공이라는 것이 있지?> "그... 그렇습니까?" <말이 마공이지 그건 마교가 개발한 최고의 속성법이라고 할 수 있다네 그걸 받으면 임의로 환골타태를 한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뼈와 근육이 재배치되지 똑같은 시간 동안 운기를 ㅎ도 그 효과는 몇 배가 될 걸세> 패력검제는 만통음제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무공이었기에 떄문이다. 만약 만통음제의 말대로 그런 마공이 진짜로 존재하고 또 환골탈태를 한 것과 같은 효괄르 볼 수 있다면 신검합일의 경지까지는 순식간에 올라갈 수가 있다는 말이기 떄문이다. "그런 엄청난 무공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효과가 큰 대신 단점도 몇 가지 있지 일단 시전자의 능력이 최소한 극마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시전 받을 때 지독한 고통을 당한다는 점이야 이때 고통을 참지 못하고 단 한번이라도 비명을 지르면 모든 게 허사가 되지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그것을 받을 수 없다고 들었네 아주 재미있는 무공이기에 노부는 아직고 기억하고 있지> 이제서야 패력검제는 왜 만통음제가 전음으로 이 사실을 말해야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ㄷ. 만통음제의 말은 진골축근마공을 그가 직접 시전했음을 알려준느 것이었으니 말이다. <허어, 참 바로 그것이었군요 진팔이 받았다는 것이> <그래 엄청난 기연을 받은 것이지 모든 마교도들이 꿈에도 그리는 대법을 받은 거야> 패력검제는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린 다음 말했다. "저는 또 어떤 혈을 자극하면 내력을 쌓는 속도가 올라가나 하고 연구하고 있었더니 그게 말짱 헛고생이었군요" 만통음제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시행착오의 연속이 아니던가 똑같은 잘못을 연속해서 반복하지만 않는다면 현자로 불리는 세상이지 자넨 생각보다 그는 정사를 불문하고 아주 다방면의 무공에 조에가 깊다네 그를 따라가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일 게야" 대(代)를 이어가는 우정 처음 묵향이 아버지의 안다라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들었을때, 테무진이 느낀 감정은 고마움이었다.다른 안다들은 모두들 등을 돌리는데,묵향만은 자신에게 아낌없는 도움을 베푸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하지만 그건 그가 개인적으로 느낀 감정이었을뿐, 부족의 족장인 입장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언제든지 부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에게 등을 돌릴 수 있는 상태였다. 원래가 몽고라는 대지에 서 살아남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보니 테무진은 고마움을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물정모르고 도움을 주는 묵향을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그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고있었다. 데무진은 묵향과 함께 생활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이조금씩 싹트고 있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묵향이 지니고 있는 지식도 지식이었지만, 여러가지 일이 벌어졌을때 그때그때에 맞는 정확한 판단과 추진력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힘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다.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 어떤 몽고족보다고 더욱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않았다. 그러면서도 부하들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배려하여 최상의 상태로 전투에 임하도록 만들었다. 또, 부하들 각자가 지닌 장점들을 재빨리 파악하여 그들을 적재적소에 투입하여 활용함으로서 부하들이 지닌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그렇다 보니 묵향이 이곳 에 머물면서 거의 사을이 멀다하고 전쟁이 벌어졌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한적이 없었고, 부족의 전사수는 그가 오기 전보다 세 배나 늘어나 있었다 하지만 테무진이 느끼기로는 지금 현재 체제만 유지해도 이 상태에서 부족의 수가 10배가 더 늘어난다고해도 부족은 효율적으로 움직일 것이 확실 했다.어느 날, 묵향은 테무진에게 말했다. "이번 공격 목표는 바르탄 부족으로하지. 인근에 있는 부족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니까 그들을 공략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많은것을 배울수 있을 게야. 나는 이번에 구경만 할 테니 자네가 알아서 처리해봐." 일종의 시험이었다. 묵향은 테무진이 자신이 가르쳐준 지식들을 제대로 활용하는지 알어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테무진 또한 그것을 잘알고 있었다. 존경해 마지 않는 아버지의 안다에게 못난 모습을 보일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신을 믿고 그토록 많은 것을 베풀었는데 말이다.테무진은 곧장밖으로 나가 젤메를 불렀다. "자네가 20명을 이끌고 가서 바르탄 부족을 정찰해라." "옛." 다음 날 정찰을 마친 젤메가 돌아왔다. 젤메의 보고를 찬찬히 들은 테무진은 핵심적인 부하몇을 불러들여 작전을 수립했고, 그것을 묵향에게 들려줬다. 그런다음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바르탄 부족을 치기위해 떠났다.테무진이 바르탄 부족을 공격한 것은 대낮이었다. 왜 밤에 기습을 가하지 않았느냐 하면, 낮에는 젊은이들의 대부분이 양과 말을 방목하기위해 사방으로 흩어진 다음, 밤에 모두 모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밤이 되었을 때가 바르탄 부족을 치기가 더욱 어렵다.테무진의 부대는 가는 길에 2개로 나뉘었다. 전사의 수로 봤을때, 적의 수가 훨씬 많기에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각개격파당할 우려가 있었지만, 테무진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바르탄 부족을 이길 자신이 있었던것이다.바르탄 부족의 본진을 공격하는 것은 젤메에게 맡기고,그는 부하들을 이끌 고 외곽으로 빠졌다. 그리고 바르탄 부족으로 통하는 넓은길을 골라 커다란 말뚝을 두개 박았다. 물론 말뚝 근처에 구덩이를파고, 그 위를 풀로 잘 덮어 표시가 나지않도록 했다. 그런 다음 말뚝의 양쪽에 병사 하나씩을 배치했다.덫이 완성된 후, 테무진은 기다렸다. 아마 조금 있으면 젤메가 적들에게 쫓겨서 이쪽으로 달려올 테니까 말이다. 몽고족의 경우 집에 양식을 대량으로 쌓아두는 것도 아니고, 금은보화를 쌓아두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말과 양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식량이었고, 힘든 겨울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렇기에 부족의 전사들을 모두말과 양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갖춘 채 방목지에서 지낸다. 마을에 남아 있는 것은 모두여자나 어린애, 혹은 노인들뿐인 것이다. 그곳을 젤메가이끄는 기마대가 덮친 것이다. 젤메는 그곳에서 오랜 시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파오 몇채를 불태우고, 남아있는 전사나 늙은이들을 죽였다. 어차피 늙은이들은 필요 없으니 지금 없애 버리는것이다. 그런 다음 주뤼를 둘러봤다.잠시후, 사방에 흩어져서 말과 양을 방목하던 바르탄 부족의 전사등이 용맹스러운 기세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보자마자 젤메는 부하들을 이끌고 다망치기 시작했다. 젤메가 이끄는 기마대가 도망치는것을 본, 바르탄 부족의 기마대도 맹렬히 추격해 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본거지를 불 태우고, 또 동족들을 학살한 놈들이니 추격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왔다." 테무진의 명령으로 말뚝근처에 숨어있던 몽고 전사들은 젤메의 부대가 통과한 후, 곧바로 말뚝사이에 걸쳐져 있던 줄을 잡아당겼다. 그런 다음 재빨리 밧줄을 말뚝에다가 단단히 묵었다. 젤메의 기마대가 건조한 들판을 전속력으로 통과한 후였기에 희뿌연 먼지가 온통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밑에 쳐저 있는 밧줄이 보일리가 만무하다. 앞쪽에서 달려가던 수십필의 말들이 밧줄에 걸려 나뒹굴고 난 다음에야 후미는 가까스로 말을 멈출 수 있었다. "공격!" 바로 그때, 그근처 야트막한 언덕을 엄폐물 삼아 뒤쪽에 숨어 있던 기마대가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활에 화살을 먹여 시위를 가득 당겼다. 몽고 활은 활을 만들 좋은 나무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가, 그것을 잘 만드는 장인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니 그성능만으로 따진다면 정할 현편없는 무기라고 할수 있었다. 아무리 힘껏 쏴봐야 그 사거리는 50보도 채 안된다.하지만 이활을 가지고 마상사격을 한다면 애이가 완전히 틀려진다. 활의 크기가 작기에 휴대하기 편하고, 연사속도가 아주 빨랐다.흔들리는 말 위에서 아무리 훌륭한 활을 가지고 쏜다고 해봐야 제대로 맞출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기에 사거리는 짧더라도 좀 더 빨리, 더욱 많이 쏠 수 있는 활이 그들에게는 더욱 유용했던것이다.밧줄에 막혀 우왕좌왕하고 있는 바르탄 부족의 전사들에게 화살 비자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오른편에서 대규모의 적들이 나타나 화살을 쏘며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방금 전에 부리나케 도망치던 녀석들도 말머리는 돌려 자신들을 덮쳐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적이 쳐놓은 덫에 걸린 것이다. 이 정도까지 된 상태라면 그뒤는 안봐도 뻔하다. 기마대가 지니는 최고 강점은 타인보다 높은 곳에서 싸울수있다는 이점과 그속도에 있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그들에 비해 두방향에서 돌진해 들어간 테무진의 부하들이 몇 배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바르탄 부족의 전사들은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었다.수많은 바르탄의 부족민들이 밧줄에 묶인 상태로 꿇어 앉아 있다.테무진은 바르탄 부족의 주력부대를 격멸함과 동시에 사방에 병사들을 보내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재산, 즉 말과 양을 약탈했다. 그리고 본진에 남아 있던 그들의 처자식의 운명 또한 그와 다를바 없었다. 약탈물들을 한곳에다가 잘 정리해놓은 후, 테무진은 그것을 모든 부족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 보통 상대편 부족을 정벌했을 때, 약탈물은 거의 족장이나 그의 측근 들이 독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몽고세계에서도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뿌리 깊게 내려져있었다. 그렇기에 몽고사회는 핏줄이 매우 중시되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의 아들인지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것이다,하지만 테무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이익분배 방식을 과감하게 깨버렸다. 그도 과거에는 다른 부족들처럼 약탈물을 나눴 었지만, 묵향을 만난 후에 그 방식을 바꿧다. 마교의 경우 능력 위주의 사회가 아닌가. 그렇기에 묵향이 이익분배 방식을 그렇게 바꾸는 것이 좋을거라고 조언했던 것이다.그렇게 바꾸고 나서보니, 평상시에는 몸을 사리던 하층민들이 자신의 명령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싸우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죽거나 다치더라고 승리를 거둔다면 열심히 싸운 만큼의 보상이 뒤따른다는 것을 이해한 뒤부터 그들은 테무진 부족의 강인한 전사로 거듭났던 것이다. 약탈물의 분배가 다 끝난 후, 테무진은 묵향에게 다가가 그의 조언을 청했다. 어머니인 호에룬에게 묵향이 아버지의 안다라는 사실을 들은 이우, 묵향을 향하는 테무진의 대접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마치 아버지를 대하는 듯했던 것이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묵향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는 타고난 전사일세. 내가 더 이상 알려줄 것이 없을 정도야." 그 말에 테무진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났다. "과찬이십니다." "특히나 노획물의 분배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네.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뒷처리는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하도록 하게." 묵향의 조언에 테무진은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헀다. "예, 자나 깨나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네의 부족민도 좀 있으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될 게야. 지금은 수가 많지 않기에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지금의 체계로는 효율적인 통제가 어려울거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묵향은 마교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본교는 효율적인 명령체계를 위해 부하들을 여러 등급으로 나눠둔다네. 본교에는 6개의 무력단체가 있고, 그것들은 6명의 대주들이 맡고 있지. 그리고 각 무력단체는 그규모에따라 10개에서 20개의 대로 나눠 대장이 지휘하지. 그런식으로 자네가 이끄는 전사들이 효율적으로 자네의 명령 을 수행할 수 있도록 체게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할걸세." 잠시 묵향의 말을 곱씹어보던 테무진은 곧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러니까 부족의 전사들을 여럿으로 나눠 각각의 장을 두고, 그 장들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말씁이십니까?" "그렇지. 그렇게 되면 자네는 그 자들만 제대로 통제하면 전체 부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될 거야." 그 말에 테무진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그런 좋은 방법이 있을 줄이야....." 그날 밤 테무진은 부족내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부족을 체계적으로 분리하는 것에 대해 토론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보고크와 밍칸이다.한어로 번역한다면 보고크는 30호장, 밍칸은 300호장이다. 평상시 부족들은 30호 단위로 뭉쳐서 신선한 풀을 찾아 이동하며 방목을 하다가, 유사시에 테무진의 부름에 따라 병력을 차출해서 보내는 방식이다. 그렇게 되면 언제나 얼굴을 맞대고 협동해서 유목을 하던 처지인 만큽 화합도 잘될 것이 분명했다.묵향이 테무진의 거처에 자리 잡은 지도 두달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풍요롭던 가을이 끝났음을 알리듯 새벽에는 서리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묵향은 어제의 전투를 보고 이제 자신이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자신이 없더라도 테무진이 잘해 줄거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찾으셨습니까?교주님." "그래, 내 자네에게 한가이 임무를 내리고자 불렀네." 임무라고 해봐야 이제 중원으로 돌아가겠다는 통보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팔삼 대장은 기운차게 대답했다. "옛, 하명하십시오." "본좌는 내일 중원 으로 떠나고자 한다." "옛, 수하들에게 준비하도록 이르 겠습니다." "자네는 수하들과 남아 테무진을 돕도록 해라." 그 명령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지 이팔삼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찼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가? "예?" "자네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남아 테무진을 도우란 말일세." 아무리 교주의 명령이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그는 완수해야만 했다. 그게 본교의 율법이었으니 말이다. "존명!" 묵향은 자신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이팔삼에게 이곳에서 해야할 일들 을 자세하게 설멸했다. 테무진의 세력규합, 타타르의 멸망, 그 다음 목표는 금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변방이 소란스러워지면 금은 싫어도 정예군을 몽고와의 접경에 배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금과 몽고가 접하고 있는 땅은 너무나도 광대했다. 그 모두를 지키려면 막대한 병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금의 세력이 한곳에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이팔삼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먼 이국땅에서 생활하려면 고생이 심할 것이다. 하지만 자네가 앞으로 하는 모든 일이 본교에 크게 도움이 되는 일임을 언제나 명심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라." "옛, 교주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자네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내리라고 믿기에 이곳에 남으라고 하는 것이야. 본좌의 말을 이해하겠는가?"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묵향은 파오를 나와서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다음에 언제 다시 오게 될지 알수 없었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하부르와 그의 아들이 살고있는 곳이니까 말이다.묵향이 걸어나오자 그곳에는 초류빈과 그의 독립호위대인 초연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떠난 다는 생각 때문인지 초류빈의 안색은 어느 때보다도 회색이 만연했다. "자, 오르시지요." 묵향이 말에 오르자 테무진의 명령에 따라 커다란 사발이 하나 운반되어 왔다. 그리고 그 사발에는 마유주가 잔뜩 들어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묵향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추억삼아 마시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웬만한 솥 단지만큼 큰 사발에 든 마유주를 마신다는 것은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던 것이다.테무진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자, 단숨에 쭉 들이키십시오." 묵향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교주와 부교주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나와 있던 마교도들 중에서 앞으로 나서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막이첨이었다. 몽고의 풍습을 잘알고 있는 그는 난감해하고 있는 교주를 향해 조언을 건네려고 하는 것이다.사실, 하급무사 주에에 하늘 같은 교주님께 참견하는 것은 거의 불경죄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묵형과 지내오며 소탈한 묵향의 성격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좋은 상관 이었던 것이다. "교주님, 빨리 그걸 다 드셔야만 합니다." "왜?" "이것도 다 테무진 족장이 교주님께서 제발 며칠만이라도 더 머물러 달라고 붙잡고 싶어 하는 심정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묵향은 기가 막한다는 듯 대꾸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군. 그냥 며칠만 더 게시다가 가라고 말하면 될 것을, 저렇게 엄청난 마유주를 마시라고 하는게 말이된다고 생각하나?" "몽고에는 귀한 손님이 길을 떠날 때, 손님이 말에 탄후 대접에 마유주를 가득 담아 건네는 풍습이 있습니다." "별말도 안되는 풍습이 다있군." "사실 이건, 귀한 손님을 하루라고 더 붙잡고 싶은 순박한 마음의 표출이라고 보시면됩니다. 이걸 다마신 다음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지거나, 다마시지 못하면 여기에 게속 남아있어야 한다는 규칙이 붙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과연 순박한 마음의 표시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속보이는 행위가 아닌가?두 사람이 낑낑거리며 들고 있을 정도로 큰 마유주 사발이라니, 저걸 먹고 살아있을 정도라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아뮤주 사발을 들이밀 정도로 묵향을 붙잡고 싶어하는 테무진의 마음이 엿보이는 것같아 가슴 한편이 따듯해진다. "풍습이 그렇다면 마셔줘야겠지." 그커다란 사발에 가득 담신 마유주를 쉬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보며 테무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저것을 다 마실 수 있다는 말인가? 부족에서 가장 용맨한 전사며 우람한 덩치의 소유자인 젤메도 저 큰 사발에 든 마유주를 한번에 다 마시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저렇게 체구도 작은사람이 저것을 다 마실 수 있다는 말인가?도저히 경악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끄억! 한 사발만 더 먹인다면 사람 잡겠군. 자, 이제 됐는가?" 일단 사발이 깨끕하게 비자 테무진은 잘 가시하고 인사를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아직까지 절망감에 차 있지는 않았다. 아직 한가지 남아 있는 것이다. 과연 저걸 다 마시고 말을 탈 수 있을까?한번에 마셨으니 취기는 조금 더있다가 올라올 것이다. 말타고 가다가 취해서 떨어지면 하루를 더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묵향은 테무진의 그런 기대를 무참하게 무너뜨렸다. 기운차게 말을 몰라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보며 테무진의 눈에는 촉촉하게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어떻게 저렇게 기운차게 떠나버린단 말인가? 정말이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안녕히 가십시요 아버지의 안다여. 다음에 만났을 때는 몽고를 발 아래 둔 대족장으로서 당신을 성대히 맞이할 것을 맹세합니다.상념에 잠겨있던 테무진은 혼잣말처럼 줄얼거렸다. "도저히 술 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드는군. 젠장, 다음에는 곱절은 더큰 사발을 준비해둬야겠어." 이건 완전히 사람을 잡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기에 그말을 옆에서 들은 막이첨은 쓴웃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뜻밖의 결투 묵향과 초류빈은 엄 청난 속도로 경공술을 전개하며 순식간에 만리정성을 넘어 남하해 오고 있었다. 수하들과 함께 이동하면 편이한 점도 많지만, 되려 불편한 점이 더욱 많았다. 지금도 그런 경우다. 그 둘은 혹 가다가 농담까지 나눠가며 달려가는 것이었지만, 초연대 무사들은 아예 따라올 수가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인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꼭 수하들과 동행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초류빈은 그의 수하들에게 양양성으로 오라는 말만 남기고 묵향과 함께 앞서가고있는 중이었다.묵향과 초류빈이 산서성의 태원(太原) 인근에 이르렀을 때, 고수들끼리 접전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힘과 힘이 충돌한 듯 벼락 치는 듯한 굉음을 뿜어내는 파괴적인 폭발력! 엄청난 공력을 지닌 내가고수들의 겨룸이 진행되고 있는모양이다. 초류빈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도데체 이게 무슨 일이죠? 여기는 금의 영토가 된지 오래일 텐데....." 묵향은 초류빈이 그 소리를 듣기 훨씬 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쪽으로 방향을 잡아 달려가는 중이었다. "모르지. 어떤놈이 그나라 쓰레기들하고 싸우는 중인지." "병사들이 저런 괴력을 지닌 인물과 싸울 수나 있겠습니까? 저 소리는 분명히 엄청난 실력을 지닌 내가고수들이 싸우는 소리가 분명합니다." 그말에 묵향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내 말은 장인걸 패거리를 말하는 거야." 혹시 장인걸의 수하들이 누군가와 싸우고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묵향이 흥미를 느낀 것이었다. 초류빈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묵향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묵향은 그곳에 도착한 후, 실망감 어린 한숨을 푹내쉴 수밖에 없었다. 혹시 천마혈검대에 소속된 놈들이라도 만날수있다면 아작을 내버릴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달려온 것이었건만, 이곳에서 싸우는 것은 모두 승려들이었던 것이다. 이곳에는 지금 수많은 승려들이 단 한명을 상대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남루한 행색을 하고 있는 젊은 승려는 포위당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양측의 싸움을 지켜보던 초류빈은 도무지 그들이 왜 싸우는 것인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모두들 승려의 행색을 하고 있는 데다가, 이마에 계인까지 찍혀있는 것이아닌가. 저렇게 이마에 보라는 듯 계인을 찍고 다니는 자들은 소림승들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집안싸움이라는 말인데, 왜 그들이 소림의 영역에서 엄청나게 떨어진 이곳에서 싸우고 있다는 말인가.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소림의 승려들인 듯한데요? 그런데 소림승들끼리 왜싸우는 걸까요?" 초류빈의 질문에 묵향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하고있는 꼴은 모두 똑같지만 쓰는 무공이 틀리잖아. 저 중간에 있는 놈은 소림의 정통무공이고, 나머지 놈들은 괴상한 무공을 쓰고 있는 걸 모르겠냐? 그렇다면 결론은 뻔한거지. 저놈은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고.....에잇 김샜군.가자" "예? 그건 무슨 말씁이십니까? 소림승이 합공을 당하고 있는데 구해줘야하는거 아닙니까?" 초류빈의 말에 묵향은 한심하다는 듯 대꾸했다. "이녀석이 아직도 자신이 천마신교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 하고있군. 땡초가 누구하고 싸워서 죽건말건 신경쓸 필요가 뭐있냐?" 묵향은 소림승과 싸우는 승려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놈들이 괴상한 무공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본교의 무공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 원류를 따진다면 소림무공과 유사함이있어. 자기들끼리 치고 박는 싸움인데 이쪽에서 낄 이유가 없지않느냐." 초류빈은 묵향이 다방면으로 무공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우선 그한 것은 소림승 을 구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빨리 가자." 잠시망설이던 초류빈은 재빨리 검을 뽑아들고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으로 달려나갔다. "야, 이멍충아. 거기 안 서!" 뒤에서 묵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초류빈은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나중에 묵향에게 명령불복종으로 문책은 당하더라도, 일단 소림승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초씨세가에서 자라난 초류빈으로서 그것은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그는 포위당해있는 소림승의 옆으로 떨어져 내리며 외쳤다. "멈춰라! 감히 소림의 승려를 공격 하다니, 네놈들의 정체가 무었이냐?" 초류빈이 등장하며 사용한 신법이 워낙 뛰어난 것이었기에 괴승들도 감히 그를 경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새로운 적의 출현에 잠시 움찍한 듯했지만, 곧이어 차분히 괴인에 대한 공격태세를 갖췄다. 초류빈은 상대의 반응을 보며 이들 또한 대단히 뛰어난 고수들이라고 생각해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주위를 경계하며 소림승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시오? 선사. 어쩐 일로 이렇듯 협공을 당하시게 되셨소이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소림승에게서 돌아온것은 비릿한 조소였다. "크흐흐흣, 본 부처님을 돕겠다고 나서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도다.네놈 또한 저놈들과 작당하여 본 부처님을 돕는 척하다가 내 뒤총수를 치려는 것이 아니더냐?" 초류빈으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뭐,뭐라구?" 바로 그 순간, 자신을 부처로 자처하는 그 소림승이 초류빈에게 공격을 가해오는 것이 아닌가. 대력금강장을 주축으로하는 소림의 상승무공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권법을 구사하는 소림승의 주먹에 자연스레 푸른빛이 어리는 것만 봐도, 그의 실력은 결코 초류빈의 아래가 아니었다.기겁을 한 초류빈은 다급히 도를 들어 상대의 공격을 방어했다. 도(刀)와 사람의 손이 부딪쳤는데도 피가 튀지 않고 불꽃이 번쩍거리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초류빈은 한 호흡에 수십 초의 공격 을 막아낸 후, 그 충격에 뒤로 주르륵 밀려 소림승으로부터 튕겨 나왔다.포위하고 있던 괴승들 중의 한명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초류빈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어느 방면의 고수이신지 모르겠지만 방금 큰일을 당하실 뻔하셨소이다. 소승은 소림의 덕혜(德慧)라 하오이다.” 초류빈이 소림승을 구출하겠다는 일념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말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초류빈은 기겁해서 외쳤다. “아니, 소림승이셨다는 말씁이십니까? 그렇다면 저 사람은 도데체 누구란 말입니까?” 그말에 덕혜선사는 한숨을 푹 쉰 후 불호를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아미타불…, 저 분은 세간에서는 만사불황(萬邪佛皇)이라고 불리는 분이십니다.” 명호에 ‘황(皇)’자를 아무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황자를 붙이는게 멋있다고 제멋대로 자기 명호에 붙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명호라는 것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붙여주는 것이기 떄문이다.황자가 붙는다면 최고한 화경급의 고수라는 말이다. 그런데 저런 소림승의 모습을 한 화경의 고수는 불계불황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초류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만사불황이요? 불계불황은 알겟는데, 만사불황은 잘…..” 초류빈의 말에 덕혜선사는 습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과거에는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불계(不戒)라고 불렸었지만, 지금은 수많은 사악한 행위들을 한다고 만사불황으로 불리지요. 그런 것도 잘 모르시는 것을 보면 시주께서는 강호사정에 어두운 분이신 모양이구료. 소협의 의협심은 감사하나, 이건 소림 내부의 일이니 마음만 감사히 받겠소이다.” “이런 젠장.” 초류빈은 무의식중에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교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림승을 구해주겟다는 일념으로 나선 것이었건만, 현실은 완전히 자신의 의지와 반대로 되어버린 꼴이 아닌가. 이제 교주에게 명령불복종으로 깨질 것이고, 또 재수없어서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면 저들과도 한 판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초류빈은 ‘그럼 수고들 하십쇼.’ 하며 슬그머니 내빼려고 햇다.하지만 바로 이때, 묵향이 황홀할 만큼 완벽한 경신술을 선보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묵향은 나타나자마자 광소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크하하하핫! 초류빈, 네녀석이 드디어 밥갑ㄹ을 하는구나. 오냐, 안그래도 불계불황을 만나려고 했었건만, 이렇게 기회를 마련해주다니 정말 잘했다.” 그 말에 초류빈의 안색은 똥색으로 물들었다. 과연 현경의 고수. 그 먼 곳에서도 대화를 엿듣다니 도무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때, 소림승들 중에서 가장연배가 높아 보이는 인물이 입을 열였다. “그러는 시주께서는 또 누구시오?” 그말에 묵향은 코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네녀석들은 그걸 알 자격이 없다. 본좌가 왔으니 이제 꺼져 주는 일만 남았군. 좋아, 불계불황, 아니 만사불황. 이제부터 본좌하고 건설적인 대화나 좀 나눠볼까?” 만사불황은 가소롭다는 듯 손가락을 꺽어 뚝뚝소리가 나도록 관절을 풀며 말했다. “크흐흐훗, 별 미친 중생을 다 보겠도다. 본 부처님과 대화를 나눠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고?” “물론 네놈을 본좌의 수하로 삼겠다는 말이지.” 그말에 만사불황은 물론이고 덕혜선사를 비롯한 다른 소림승들도 그 광오함에 어이가없어 멀뚱멀뚱 쳐다봤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진 묵향의 말에 비웃음은 경악에 찬 싸늘한 침묵으로 굳어버렸다. “네놈을 본교의 세 번째 부교주로 만들겠노라.” 너무 놀라 말도 하기 힘들 정도 였지만 덕혜선사는 황급이 정신을 추스린 후 묵향에게 질문을 던졌다. “부교주? 그렇다면 시주께서는 마, 아니 천마신교의 교주 암흑마제란 말씀이시오?” “그렇다.” 덕혜선사는 장중한 어조로 불호를 외운 뒤, 단호하게 외쳤다. “아미타불…., 교주께서 그렇게 하게 놔둘 수는 없소이다. 무림맹과 천마신교가 연합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소림은 교주가 하는 일을 가만히 좌시할 수 만은 없다는 점을 명심해주셨으면 하오.” 묵향은 덕혜선사의 말이 가소롭다는 듯 대꾸했다. “크흐흐, 좌시할 수만은 없다고? 좋아. 마음대로 해봐라. 이봐,초류빈.” 갑자기 교구자 왜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 수 없었던 초류빈이 떨떠름한 어조로 대꾸했다.: “왜요?” “본좌가 저 부처님하고 잠시 볼일을 보는 동안 저 쓰레기들을 막든지 쫓아내든지 마음대로 해라.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면 너 혼자만으로도 충분할 게다.” ‘젠장,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이야.’ 묵향의 말을 들은 초류빈의 얼굴은 그야말로 똥색으로 바뀌어버렸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꼬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소림승을 구하려고 한 소기의 목적과 달리, 이제는 자신이 직접 소림승들을 떄려잡아야 하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도 한눈에 척봐도 보통실력들이 아닌 것 같은 소림의 고수들을 말이다. 소림사를 지탱하는 최정예들, 그들을 초류빈은 혼자서 상대해야하는 것이다.그리고 그 말에 소림승들의 이목도 초류빈에게로 집중되었다. 분명 초류빈이라고헀다. 그렇다면 과거 칠룡사봉에 꼽혔던 초씨세가의 기대주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인물이 아닌가.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헀다. 저 자가 바로 탈명도 초류빈이 분명했다. 정파의 촉망받던 후기지수가 마교의 개가 되어있을 줄이야.떨떠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림승들의 눈을 보는 순간, 초류빈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소림승을 구해주려는 내 마음은 하나도 몰라주고, 마교도라는 말에 자신을 저 따위 눈빛으로 바라보다니….. 좋아, 이판사판이다. 저런 놈들도 승려 라고 내가 구해주겠다고 나섰다니, 이런 빌어먹을!초류빈은 소림승들에게 도를 겨누며 외쳤다. “귀하들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소. 하지만, 구태여 싸우겠다고 나선다면 마다하지는 않겠소.” 소림승들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곧이어 경악감에 바뀌어야 했다. 완전히 한판 하기로 마음먹은 초류빈 의 몸에서 범인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패도적인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리고 위로 쳐든 초류빈의 도에서는 푸른색의 기운이 은은하게 뿡어져나오기 시작했다. 저렇게 자연스레 어기충검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화,화경의 고수?” 그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만사불황과 싸워서 어느정도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익힌 무공에 대해 극성을 지닌 무공을 사용했기에 가능 한 것이었다. 물론 상대가 제대로 깨달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사불황은 반쯤 미친상태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깨달음을 발현할 수 있는 정신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덕분에 지금까지 어느정도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진짜 화경의 고수라면 얘기가 완전히 틀려진다.이떄, 소림승들 중에서 한명이 앞으로 쓱 나서면서 묵직한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희끗희끗한 수염이 그의 나이를 대변해주는 듯했지만, 그의 피부는 젊은이들의 그것인 양 아직도 팽팽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모습만 봐도 상당한 경지의 무예를 연마했음을 알 수 있었다. “노납은 소림의 대정(大正)이라고 하오.” 대정선사라면 현재 소림 장문인의 사형이었다. 젊어서부터 뛰어난 무위를 자랑한 그는 소림사상 다섯 번째로 젊은 나이에 나한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한으로 대표되는 나한전에 들어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뛰어난 무승(武僧)으로서 자질을 인정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나한전을 거쳐 소림방장실을 경호하는 팔대호원에서 수련을 쌓은 그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계율원의 원주로 임명되어 추상과 같은 규율을 소림에 세워나가는 데 앞장서게 된다. 그런 전설 적인 승려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선사. 초면에 이렇듯 무례를 범하게 되었음을 이해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미타불…..,초류빈 시주, 꼭 막아서야만 하겠소이까?” 초류빈은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계속 나간다면 소림승과의 대결은 불가피해진다. 그렇다면 물러설까? 하지만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교주가 자신을 가만히 둘 리가 없기 떄문이다. “어쩔 수 없소이다, 선사. 나를 용서하시구려.” 잠시 생각해보던 대정선사를 문듯 떠오르는 것이 있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화경급의 고수라면 마교의 부교주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아미타불…, 그렇다면 시주가 천마신교의 두번째 부교주라는 것이오?” 초류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소. 자, 어떻게 하시겠소이까? 들어오시겠소? 아니면 물러나시겠소?” 하지만 대정선사는 들어갈 마음도, 또 그렇다고 물러설 마음도 없는 듯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초류빈은 무시하고, 그는 묵향과 만사불황의 동정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만약 교주가 공공사숙을 제압하지만 못한다면 굳이 초류빈과 다출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또소문대로 교주의 무공이 그렇게 높다면 척상대상인 만사불황을 그가 대신죽여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대정선사가 기대하는 최선의길은 서로 싸우다가 둘다 죽거나 큰피해를 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기회를 빌어 무림의 화근이라고 할 수 있는 둘을 동시에 없애 버릴수 있을 테니 말이다.승려들과 초류빈의 대치가 진행되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묵향과 만사불황과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봐, 본좌의 수하로 들어올 생각은 없나? 돈을 좋아한다면 평생 쓸 돈을 줄 것이요, 계집을 좋아한다면 원도 한도 없이 붙여줄 수 있는데 말씀이야.” “크흐흐훗, 본 부처님에게 그 따위 망발을 일삼는 놈이 존재할 줄이야. 좋다. 우선 그 주둥이를 찢어놓은 후에 해탈에 이르게 만들어주겠노라.” 공공대사라면 소림이 자랑하던 최고의 고수였다. 역대 최연소로 나한전에 들었으며, 지객당에 소속되어 있을떄는 300여 명의 무림인들을 상대로 비무를 펼쳐 단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다. 후에 화경에 든 후에도 수련에 방해가 된다며 방장직까지 사양하고 사형에게 물려준 전설적인 인물이었다.하지만 인세의 모든 욕심을 버려야만 해탈할 수 있다는 불경의 가르침을 거역했기 떄문일까? 화경에 든 것에 만족할 줄모르고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르기위해 정진하던 공공대사에게 재앙이 닥쳤다. 어느날 갑자기 미쳐버린것이다.묵향을 공격하는 만사불황은 그의 무공 원류가 소림에 있음을 알려주듯 소림 최강의 무공들을 줄줄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반야신공, 대승범천신공, 무상대능력, 대력금강장, 금강권, 염화지 등등 상대와의 거리를 불문하고 갖가지 무공을 조합하여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하는 언계기를 자랑했다. 그 하나만 봐도 그가 얼마나 숙련된 무승인지 알 수 있었 다.만사불황의 장력에 땅거죽이 푹푹파여들고, 엄청난 먼지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것뿐, 그의 공격은 묵향의 옷깃 한올 건드리지 못했다. 한동안 여유롭게 만사불황의 공격을 피하던 묵향이 김샜다는 듯 투덜거렸다. “젠장, 알짜배기인줄 알았더니 빈껍데기잖아. 빈껍데기 초식만을 기억하고 있을뿐이라니….. 내공만 심후하지, 형편없는 놈아냐!” 미꾸라지처럼 자신의 공격을 피하고만 있는 상대가 얄미웠는지 만사불황은 더욱 공격에 박차를 가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상대의 공격에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한 묵향이 한순간 손을 썻을 때, 묵향은 상대방의 반응이 뭔가 특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빈껍데기뿐인 초식만을 기억하는 자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교묘한 한 수로 묵향의 공격으 피한 만사불황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역공까지 가해왔던 것이다. 그 공격은 방금 전까지 만사불황이 보여줬던 공격과는 판이하게 틀렸다. 강맹한 위력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엄청난 경력을 일으키며 먼지를 비상시키지도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것이 더욱 무서웠다. 만사불황이 가지고 있는 웅후한 공력을 단 한 지점에 집중해놓은 공격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겉으로 봤을 때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전에 펼쳤던 공격에비해 수십배, 아니 수백 배는 강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그공격은제아무리 현경에 든 묵향이라도 회피하기 어려울정도로 쾌속한 속도와 쿄묘한 시간차를 두고있었다.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만 묵향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정도의 반전을 통해 공중에서 세바퀴 몸을 돌리며 재빨리 상대의 공격권에서 빠져나갔다. 한순간의 방심 때문에 일격을 허용할 뻔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묵향의 가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묵향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물론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3할의 실력을 감추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공격은 그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간신이 신검 합일에도 못든 고수가 일순간에 화경을 넘어서는 무공을 사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렇단면 지금까지 만사불황은 본신의 무공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ㅇ벗었다. 반쯤 미친그가 그토록 교활한 수법을 쓸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 다면 이유는 단 하나 뿐이었다. “호오, 그렇군. 네놈의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구나. 이거 까다롭게 되었는데?” 바로 이 점 떄문에 소림에서 파견된 승려들도 소림무공에 극성인 항정멸법신공(抗正滅法神功)을 극성까지 익혔는데도 불구하고 만사불황에게 결정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그를 조금씩 조금씩 밀어붙이고만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묵향은 잠시 망설였다. 과연 저자를 제압할 수 잇을까? 상처없이 제압하기 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다. 혈마(血魔) 선배의 경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상대는 화경의 끝에 도달한 인물이었다. 거기에서 한 발자국을 나아가지 못하고 실패해서 반쯤 미친 것이 아닌가.과거 묵향이 만난 최강의 고수 카렐은 이렇게 말했었다. [의식과 한계이상으로 성장한 무의식이 충돌하며 미쳐버리는 거야] 미쳐버렸으니 이제는 의도한 대로 자신이 깨달은 무공을 펼칠 수 없다. 하지만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무공의 경우는 완전히 애기가 틀리다. 그의 무의식은 현경의 무예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만사불황이 위급시에 무의식적으로 평치는 무공은 화경이 아니라 현경급의 무예였던 것이다. 그런 자를 생포한다? 그건 말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젠장! 어쩐지 너무 쉽다고 생각했어." 묵향은 재차 공격준비를 하고 있는 만사불황을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상대의 공력이 고갈될때까지 슬슬싸워서 힘빼기로 나가볼까? 하지만 공력 만은 3황 중에서도 최강이라는 말을 수십년 전부터 들어론 만사불황이다. 그를 상대로 지구전을 펼친다면 도대체 며칠동안 싸워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묵향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 이런 빌어먹을! 좋다. 본좌가 언제 이것저것 따지고 싸웠었냐? 너이리 와봐. 뼈가 녹도록 한번 싸워보자." 꽉 쥔 묵향의 주먹에서는 우두두둑 하는 소리가 울려 나오고 있었다. “아, 아미타불…..” 대정선사는 너무나도 경악한 나머지 불호마저 외우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어느덧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려내리고 있었다. 마교 교주와 세 시진째 치열한 사투를 전개하고 있는 만사불황, 아니 사숙의 모습은 과거 그가 존경해 마지 않았던 공공대사의 한창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소림승들과 싸우며 공공대사는 생명이 위급할 때 무의식적으로 펼쳐지는 단 한수 만을 보여줬었다. 그리고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소림승들의 포위망을 피해 도망치고, 또다시 포위당해 싸우고…..이런 식의 반복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지금 마교 교주의 공격은 한초식 한초식이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만사불황이 지닌 무의식적인 연계기 한 수 정도로는 한숨을 돌릴 여유조차 확보할 수 없었다. ‘오늘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보게 되는도다.’ 지금껏 그는 공공대사를 뛰어넘을 만큼 강력한 고수가 있음을 한 순간도 믿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밤낮 생각한 것은 사숙, 아니 만사불황을 어떻게 해서라도 제정신으로 돌려놓든가, 아니면 소림의 이름에 똥칠을 하지 못하도록 제거해버리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는 오늘 만사불황을 압도하는 무위를 지닌 인물을 만났다. 지금 만사불황은 정신없이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무공 중에는 깊은 불문의 깨달음을 간직하지 않은 것이 단 한 수도 없었다. 그만큼 상대는 한 순간도 만사불황이 정신을 차릴 수없을 정도로 밀어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묵향은 언제부턴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만사불황을 상대하기가 조금 까다로워졌다고 느꼇다. 그 이유가 뭘까? 치열한 격전의 와중이었기에 이유를 생각 하고 있을 여유는 거의 없었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끊어지고 끊어지던 생각들이 하나씩 연결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묵향의 뇌리를 때리는 것이 있었다. ‘공격이 대단히 능동적이잖아!’ 지금까지 만사불황은 완전히 수동적으로 싸워왔다고 볼수있다. 묵향이 압박을 가하면 가공할 만한 무공이 튀어나오는것이다. 물론 그렇지않을 때는 만사불황이 지니고 있는 맹하기 그지없는 화경에도 못미치는 초식에 의존한 무공이 튀어나온다. 그렇기에 그의 공격은 대단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먼저 시작을 해줘야 그도 공격다운 공격을 할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처인지 모르겠지만 그공격이 대단히 능동적이 되어 가고있었다. 물론, 이건 묵향의 느낌일 뿐이다. 숨쉴 틈 없이 지속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었 기에 상대의 연계기에 의한 반격을 능동적 공격으로 잘못 느꼇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묵향의 느낌은 그것이 연계기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묵향은 공격 의 강도를 낮추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그에 맞춰 만사불황이 묵향을 따라붙으며 무지막지만 공격을 가해왔다. 그 순간, 묵향은 자신의 느낌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슬그머니 물러서면 상대는 멍청하기 그지없는 공격을 가해와야 하는데, 이 엄청난 압박감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묵향의 짐작대로 만사불황은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이 시대 최강의 고수라고 할 수 있는 묵향과 싸우며 만사불황은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순간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고, 외부에서 가해지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의식과 무의식이 합쳐지고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만사불황의 탐욕어린눈매는 이자한 고승의 그것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놀라 운 변화였다. 묵향 같은 고수와 생사를 걸고 접전을 벌이게 된 것은 공공대사로서 생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큰 기연을 얻은 것이라 할수 있었다.묵향은 재빨리 상대의 공격권에서 벗어나며 입을 열었다. "지금껏 말은 많이 들었지만, 공공대사를 뵙게되어 영광이라고 생각하오." 묵향이 정중한 어조로 말하자, 초류빈과 그와 대치하고 있던 승려 들의 시건이 묵향에게로 쏠렸다. ‘저 자가 갑자기 왜 저러지?’ 하는 의문을 담고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말에 대한 화답이 있었다. 만사불황 또한 공격을 멈추고 장중한 움직임으로 합장하며 대답했던 것이다. "아미타불... 노납 역시 시주와 같은 무위를 지닌 인물을 지금껏 대면해본 적이 없었소이다. 시주께서는 대체 누구시오?" 공공대사로서도 황당스럽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엄청난 고수와 싸우고 있지않은가. 왜그와 싸우기 시작했는지는 생각도 나지 안ㅅㅎ았다. 하지만, 태평스럽게 그런생각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상대의 공격이 목전에 임박하고 있는데, 그 따위 생각을 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싸웠고, 그다음에는 호승심 때문에 싸웠다. 그런데, 이제 상대의 정체를 물어볼 여유를 지니게 된 것이다.하지만 만사불황이 정신을 차렸음을 알 리 없는 승려들은 경악했다. 저 정상적이기 그지없는 만사불황의 반응은 또 뭐란 말인가? 어느날 갑자기 미쳤을 때와 같이, 갑자기 그의 정신이 되돌아오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도무지 짐작조차 할수 없었기에 대정선사를 비롯한 승려들은 만사 불황의 언행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묵향은 주위의 반응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고 싸늘하게 미소지으며 공공대사의 물음에 대꾸했다. "본좌는 천마신교의 교주 묵향이라고 하오," 그런 다음 그는 허리에서 검을 쑥 뽑아들며 싸늘하게 외쳤다. "이왕에 이렇게 된 거, 그대를 살려 둘수 없음을 이해하시구려!" 공공대사가 정신을 차렸다면 얘기가 틀리다. 그가 존재한다면 현경의 고수를 보유한 소림사의 위상은 얼마나 높아지겠는가. 지금 그를 없애버리고, 또 저 떨거지 소림승들까지 없애버린다면 소림이 현경의 고수를 배출했다는 사실을 조용히 묻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승부사 묵향이 아닌 마교 교주 묵향으로서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자신이 지닌 전력을 다해 그를 상대하기 위해서 검을 뽑아든 것이다.그 기세에 공공 대사도 감히 경지하지 못하고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이 순간 인자하기만 한 고승의 모습은 사라지고 승부욕에 타오르는 무림인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시주가 마도에 몸담은 자라면 노납도 부득불 손을 써야만 하겠소이다. 부디 극락황생하시길 빌겠소이다. 아미타불…." 한마디로 ‘죽여 버리겠다’ 는 소림식의 엄포였다. 이렇게 해서 무림 역사상 처음 펼쳐지는 현경급 고수들간의 대결이 갑자기 벌어졌다. 한쪽은 소림사가 낳은 최강의 고수였고. 또 다른 한쪽은 마교가 낳은 최강의 고수였다. 불세출의 두고수가 마주한 자리, 어느 한쪽이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었건만 둘 사이에는 폭발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와 범인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었다. 공공대사는 합장을 한 채 온몸의 기를 일주천시켰다. 이순간 지금 까지 그를 괴롭혀 오던 모든 탁기들이 전신모공에서 빠져나가며 청순지체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는 은은한 금광이 뿜어져나왔다.그모습을 보며 대정선사의 입에서는 경악을 담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금강불괴 사숙께서 드디어 정신을 차리신 것인가?" 이제 분명해졌다. 불문의 깊은 깨달음이 담겨 있는 금강불괴신공을 익히기 위한 기본은 중생을 보호하며, 타인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대자대비한 포용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말이다.사숙께서 드디어 정신을 차리셨다는 감동에 대정선사의 눈에는 또 다시 물기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한가하게 감상에 젖어 있을때가 아니었다. 지금 마교 교주는 사숙을 없애려 하고있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공공 사숙을 지켜라." 대정선사의 명령에 따라 승려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묵향과 그들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초류빈은 거도를 쥔손에 힘을 주며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일진이 사나운 하루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아무리 그대들이 소림승이라도 내앞을 지나갈 수는 없다고 했소. 빨리물러나시오." 초류빈의 엄포에 대정선사가 장중한 어조로 대꾸했다. "초류빈 시주. 문답무용(問答無用)이라했소." 더 이상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초류빈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떠그랄!" 소림에 돌아온 괴승 장인걸은 60만 명으로 몸집이 불어난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 중 절반은 요의 잔당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흡수된 거란족 병사 들이었다. 그리고 양지에 장근에게 맡긴 10만 명도 거의 대부분은 거란족 병사들이었다. 장인걸이 봤을 때, 그는 거란족 병사들을 거느린 상황에서도 충분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에게 이곳의 상황을 맡긴 것이었다.물론 그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수도 있었다. 의외의 변수라는 것은 언제나 발생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대로 자신이 대군을 거느리고 한 번 더 올라오면 될것이다. 문제는 지금 강대 한 적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자신이 키운 정예병들을 분산시키면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이었다. 특히나 기적과 같은 역사를 만들어낸 최정예 병사 10만 명은 무슨 일이있어도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60만 대군이 연경 부근을 통과하고 있을 때, 장인걸은 황제를 배알하기위해 연경에 가있었다. "북방을 점령하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대원수." "응당 해야 할일을 했을 분이옵니다, 폐하." "안 그래도 짐이 대원수에게 남방을 평정해달라고 청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듯 빨리 대원수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북방 전선은 벌써 평정되었소?" 그말에 장인걸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신이, 양지에 장군에게 맡겼사오니 그가 잘 해낼 것이옵니다. 그건 그렇고 폐하. 이번에 남방 전선에서 무림인들이 출몰했다고 들었는데 폐 하께서는 그 사실을 들으셨는지요.” 그말에 황제의 안색이 흐려졌다. "물론이오, 적들과 대치하고있는 대원수가 심란해할까봐 짐이 연락하지말라고했었으나, 얼마 전 황궁에도 무림인들로 의심되는 무리들이 침입한 적이있었소." 그 순간, 장인걸의 눈이 번쩍 하고 날카롭게 빛났다. <환영비마(幻影飛魔)장로.> 장인걸의 전음에 굵직굵직한 사내다운 전음이 화답해 왔다. 그가 바로 장인걸이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천마혈검대 40명과함께 남겨뒀던 구양운 장로였다. <예,교주님.> <어떻게 된일 인가 설명해 보게.> <예, 약 100여명의 무림인들이 습격해 온 적이 있습니다. 모두들 대단히 무공이 뛰어난 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검술로 보아 종남파의 고수 들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그보고에 장인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종남파라고? 이런 썩을 놈들을 봤나.> 장인걸은생각을 굳힌 듯 황제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무림맹이 참전을 결의한 것이 확실한 모양이옵니다, 폐하." "무림맹? 무림맹이 무엇이오? 대원수." 황제가 무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자, 장인걸은 무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무림을 활동하는 고수는 크게 두파로 나누어지옵니다. 사파와 정파가 그것이지요." 그러면서 장인걸은 황제에게 무림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세력판도에 이르기까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파의 연합이라고 할수 있는 무림맹이 본국과의 전쟁을 선포한 모양이옵니다." “허어, 참. 경의 말을 들어보면 무림맹이라는 것의 세력도 대단한 모양인데, 그들이적이 되다니 참안타까운일이로고. 그래, 경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보시오?" “본국을 적대하면 어떻게되는지 시범을 보이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 장인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황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을 모두 잡아다가 목을 베자는 말이오? 그들의 무공이 뛰어나다면 모두 잡아들인다는 것은 아주 어려울텐데….” “그것이 아니옵고, 정파에 소속된 거대문파들의 상당수는 북쪽에 자리잡고 있나이다. 즉, 폐하의 영토안에 있다는 말이옵니다. 군사들을 파견하여 그들을 응징하고. 그식솔들을 인질로 잡는다면 무림맹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옵니다.,” 그말에 황제는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호오 그것 참 기가 막힌 의견이로다.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시오.” 예, 폐하.” 황제와의 회담이 끝난 후 장인걸은 재빨리 자신이 이끄는 부대로 돌아갔다. 장인걸이 돌아온 후, 60만 대군은 크게 두개로 나뉘었다. 50만은 양양성 방면에서 후퇴해 오고 있는 무안 대장군의 병력과 합류하기위해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인걸이 직접이끄는 10만은 무림의 각 방파들 을 파괴하기위해 흩어졌던 것이다. 10만 대군 중에서 가장빠른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장인걸이 직접 이끄는 1천 기의 기마대였다. 그들을 목적 지가 워낙 멀다보니 길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서안인근에 있는 검의 명가 종남파였다. 서안까지 가려면 정주와 낙양을 거쳐 머나먼 길을 달려가야한다. 그렇다 보니 길을 서두르는 것이다. 장인걸이 왜 직접 종남파를 택했는가 하면 그들이 황제를 시해하기 위해 황궁에 침입했다는 혐의가 있었기에 철저하게 파괴해버릴 필요성이있기때문이었다. 공공대사는 도망치는 마교도들을 따라 몸을 날리려는 소림승들을 불러세웠다. “멈추거라!” “무슨일입니까?사숙.” 공공대사의 행색은 가공할 만한 묵향의 공격을 받아 엉망진창이 된 상태였다. 소림의 전설이라 할수 있는 연대구품(蓮帶九品)의 최상승 신법을 사용하고 도 이 모양이라니…… 만약 금강불괴 신공을 대성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극심한 부상을 당한 쪽은 초류빈이 아니라 자신일지도 몰랐다.공공대사가 진기를 끊자 그의 몸에서 뿜어나오던 황금빛 광채가 서서히 사라졌다.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론 후, 잠시 말없이 서있던 공공대사는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 물었다. "대정 사질, 그들이 마교도가 맞기는 맞는 것인가?" 그물음에 대정선사는 아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자들 입으로 말헀지 않습니까? 마교의 교주와 부교주라고 말입니다." 공공대사는 도무지 알수 없다는 듯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을 터뜨였다. “어찌 마교의 교주라는 자가 사용하는 무공은 도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상의 절기들이요, 부교주라는 자는 악독한 살수를 쓰지 못하고 시종방어에만 일관하다가 무너진것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도다. 아미타불….." 그말에 대정선사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사숙, 그건 또 무슨 말씁이십니까? 초류빈이라는 시주의 무공은 그야말로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는데 말입니다.” 공공대사는 모여있는 소림승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대정선사가 거느리고 온 승려들은 정확히 152명, 하나같이 뛰어나지 않은 무승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단한명도 중상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아무리 초류빈이 화경에 도달한 고수라고하지만 그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벅찬 수라고 할수 있었다. 하지만 화경에 오른 막강한 고수가 그들중 한명에게도 중상을 입히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사실이었다. 묵향이 공공대사와 싸우면서 지속적으로 초류빈의 안위를 살폈듯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초류빈이 승려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지독한 살 수는 일부러 피했고 또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상황이 몇십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한번도 마지막 일격을 날리지 않았음을 잘알고 있었다. “화경에 이르는 고수와 싸우고 단 한 명도 중상을 당하지 않았음을 사질은 어찌생각하는고?” 사숙의 말을 듣고 나서야 대정선사는 그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력한 화경의 고수라도 싸우다 보면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수가 한명을 족치는데 있어서 최강이라는 나한진법을 익힌 소림승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단한명도 부상당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대정선사기에 사숙의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순후하여 살수를 평치지 않았음이야. 그리고 그 덕분에 노납도 목숨을 건졌고 말일세.” “예? 그건 무슨 말씁이십니까?” 대정선사가 봤을 때, 교주와 사숙은 거의 대등한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초류빈이 부상을 당하자 교주는 황급히 그를 구출해서 탈출한 것이 아니었던가. "사질이 봤을 때, 대등하게 비쳤을지 모르나 그와 노납의 사이에는 종이 몇 장 정도의 간격일지라도 엄연히 실력차가 존재했다네. 그대로 게속 싸웠다면 결국에 가서는 노납이 쓰러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 대정선사는 놀랍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 마물이 그토록 강하다는 말씁이십니까?” 하지만 공공대사는 사질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않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수하를 그토록 아끼는 마교의 교주라. 허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정도가아닌 마도의 길을 걷게 하셨을꼬.” 사실 자신과 비슷한 등급의 고수와 겨루다가 몸을 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묵향은 그걸 해냈다.갑작스럽게 무지막지한 공격을 억수같이 퍼부어 공공대사를 뒤로 밀어버린 후, 재빨리 뒤로 돌아서서 초류빈을 들고 튀었던 것이다.만약 그때 공공대사가 그 틈을 노려 역공을 가해 왔다면 큰 피해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교도라는 자들이 인간이기를 거부할 정도로 비정한 자들 이라고 굳게믿고 있었던 공공대사였기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를 상대로 승리 를 쟁취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그때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기회를 놓치고 나니, 다잡은 물고기를 놓친것 같은 기분에 공공대사는 묵향이 사라진 곳을 향해 아쉬움이 가득 배인 눈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공공대사는 나직이 불호를 외며 뒤로 몸을 돌렸다. 이제서야 사질을 자세히 관찰할 여유를 가지게된 공공대사는 뭔가 오늘 아침과 다르다는 것을 느꼇다. 사질의 얼굴이 이렇게 나이들어 보였었던가? 그것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많이 늙었....." 여기까지 말한 공공대사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 한번주위 에 포진하고 있는 승려들을 둘러봤다. 모두들 낯선 인물들이었다. 그것참 아무리 생각 해도 모를 일이었다. 소림에는 수많은 승여들이 있다. 그 중에도 무승도있고. 불법에만 정진하는 선승(禪僧)도 있다. 그들을 모두 다 공공대사가 알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이처럼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인물들이라면 얘기가 틀려진다.그렇다면 이유는 단 한 가지. 무슨 이유 에선지 모르지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상당한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말일 것이다.그의 기억에 따르면 자신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연공실에서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어디라는 말인가? 너무나도 낯설은 지형과 지물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이곳이 결코 소림인근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거기다가 오늘 아침 까지만 해도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한여름이었지않은가. 그런데, 왜이렇듯 선선한 게절로 바뀌어 있다는 말인가.왜마교의 교주와 부교주와 자신들이 싸우게되었을까?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이엄청난 무위를 지닌 소림의 정예들이 왜 여기에 있다는 말인가. 개개인의 실력으로 보아 모두들 소림내에서 이곳에 모여있단말인가. 그리고 왜 자신은 그들을 따라 이곳에 와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공공대사는 그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이보게." "예, 사숙." 공공대사는 대정선사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없는가?" 그제서야 대정선사는 공공대사가 정신을 차린것이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님을 깨달았다. "저..,사숙. 그, 그것은...." "솔직히 말해보게.자네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노납이 직접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닐 것이야." 공공대사의 엄포에 대정선사는 한숨을 내쉬며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숨겨도, 또 아무리 세월리 흐른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은 만사불황을 기억할 것이다. 그만큼 엽기적인 삶을 살고있는 소림의 무승이었으니 말이다. 거기에다가 세상에 퍼진 애기들은 한 다리 걸치면서 더욱 살이 보태지고 부풀려져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사숙께서 얼마나 상처를 받겠는가. 그럴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직접 애기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 그대로가 아니라 조금 축소된 형태로 말이다.대정선사로부터 자신의 잊혀진 과거사에 대한 얘기를 듣는 공공대사의 눈길은 예상외로 아주 무심했다. 오히려 그 점이 대정선사를 안심 시켰다. 혹시 절망감에 자살이라도 하지 않으실까 하는 두려움에 서는 벗어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랬었는가?" "예, 세상에는 이런저런 소문들이 많이 퍼져 있습니다. 원래 추악한 소문이라는 것이 한 사람씩 건너뛰면서 더욱살이 붙지 않습니까? 그렇다보니 더욱 부풀려져있습니다. 혹시 제가 드린 말씁 외에 딴것 이 있더라도 이해하시고 넘어가시면 되겠습니다." 공공대사는 허탈한 듯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어이가없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가지고 반성을 하거나 사과할수있을까? 반성이라는 것도 자의적으로 저질러놓고는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부터 할 마음도 없었고, 또저지른 기억도 없는데 뭘 반성할 것이 있단 말인가? "허허허..., 이런일이 있을 수 있다니. 물론 과거에 있었던 일을 변명하고 넘어가자면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겠지. 내가 그일을 기억하지 못하니, 만사불황이라는 인물과 노납이 별개의 인물이라 자위하며 살아갈 수도 있음이야.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인게지. 이것도 다 무공에 대한 부질 는 욕망을 끊어 버리지 못하고 한업이 파고든 노납에게 부처님께서 내린 징벌이리니." "사, 사숙.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필요는....." "더 이상 긴 말은 필요 없느니라. 먼저 소림으로 가자. 가서 장문인께.... 참, 장문인께서는 아직도 공지사형께서 맡고 게시느냐? "아닙니다. 지금은 대덕(大德)사형께서 맡고 계십니다." "그러신가....." 장문직이 사질들에게 넘어갈 정도로 오랜 세월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이 더욱 공공대사를 슬프게했다. "자, 앞장서거라. 돌아가자꾸나." 소림으로 돌아가는 공공대사의 뒷모습은, 마교 교주와 싸우며 엄청난 무위를 자랑하던 그의 모습과 달리 너무나도 초라한 것이었다. 묵향은 안전한 지역까지 도망친 이후에야 초류빈을 내려놓으면 말했다. "이런 젠장, 괜찮아?" 초류빈의 상처는 매우 깊었지만, 지혈을 해놓은 상태였기에 출혈은 거의 없었다. 수십 명이 넘는 소림승들에게 속된말로 다구리를 당한 것을 생각한다면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진것이다. 물론 이것도 다 묵향이라는 희대의 고수가 그를 도왔기에 가능해던일이었지만 말이다.초류빈은 고통에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괘,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더욱 얄미웠는지 묵향은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초류빈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망할녀석!내가 그래서 인정사정 봐주지말고 도륙내라고 했잖아. 네놈주제에 어줍잖게 봐주면서 그놈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생각했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묵향은 초류빈의 품속을 뒤져서 금창약을 꺼내 상처에 발라줬다. 자만심이 극에 달한 묵향이야 금창약 따위는 아예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초류빈에게 운기조식을 하라고 이른 다음, 욱향은 그 옆에 주저 앉았다.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도 운기조식중에는 취약한 법이다. 그렇기에 묵향은 초류빈이 안심하고 조식을 할 수 있도록 호법을 서주는 것이다.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공공대사의 움직임이 환영처럼 스쳐지나가고있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신법, 소림이 말하는 연대구품이라는 초상승 절학이다. 그리고 그 화려한 움직임과 함께 터져 나오는 소림의 무학들 . 그하나하나가 아무리 약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격에 바위를 꿰꿇을 정도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땡초들의 무학이 그 정도였던가..... 그놈들이 무림의 대두하고 불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군." 묵향은 씁쓸한 시선으로 초류빈을 힐끗 바라본 후 중얼거렸다. "당분간 이 빚을 같기는 아주 어렵겠어. 물론 내가 혈랑대와 수라마참대를 이끌고 쳐들어간다면 못할것도 없겠지." 곧이어 묵향은 결심을 굳혔다는 듯 주먹을 세차게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오냐, 나중에 장인걸을 끝장낸 후에 그 다음 목표는 소림이다. 아예 무공을 익힐 엄두가 안 나도록 싹 쓸어버리는 거야. 떙중이면 땡중답게 불도에나 힘쓸일이지 감히 무공을 익혀? 그래, 나중에 도고 보자." 초류빈이 운기조식을 통해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자 묵향은 초류빈을 이끌고 산서성에 마련해놓은 비밀분타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몸을 추스린 후, 총타로 돌아가라." "교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빨리 회복할 궁리나 해라. 장인걸과의 접전이 시작되면 네가 필요해질 테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묵향은 밖으로 나오며 산서 분타주에게 물었다. "요즘 양양성쪽의 전황은 어떻다고 하던가?" 그말에 분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당황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곳은 아직 제대로 된 전투 세력을 보유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만큼 이곳에서 정보를 취합하여 총타로 보내는 것은 몰라도, 중앙에서 이쪽으로 정보를 넘겨줄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중원의 전체적인 판도에 대해서 거의 깡통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저, 그게.., 글리는 소문으로는 양양성 인근에서 금의 대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묵향은 차가운 어조로 산서 분타주의 말을 끊었다. "됐네. 본좌가 괜한 것을 물어봤구먼. 이곳의 공사 진행은 어떻가?" 분타주는 이번 질문에는 신들린듯한 어조로 자신감있게 대답했다. "옛,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로 들어섰습니다. 길게 잡아도 2개월내에는 본교의 고수들을 머물게 할수있을것입니다." 묵향은 흡족한 듯 치하했다. "아주 수고가 많았군." "황송합니다. 교주님." 산서성 비밀분타를 나선 묵향은 문득 만통음제가 만나고 싶었다. 만통음제를 만나기 위해 개봉쪽으로 방향을 잡는다고 해봐야 그렇게 많이 돌아가는 길은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혹시 누가 아는가? 형님을 꼬셔서 같이 갈수 있을지 말이다.물론 묵향은 만통음제의 본거지가 어딘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수제자인 냉파천의 거처가 어딘지는 알고있다. 냉파천에게 물어보면 만통음제가 있는 곳을 가르쳐줄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묵향은 냉파천이 살고 있는 장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숭산의 소실봉 중턱에 위치한 소림사는 수많은 크고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져있다. 무려 8천 명에 이르는 수많은 승려들이 거주하는 곳 인만큼 그규모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그중에서도 소림승들이 가장소중히 관리하는 건물들은 몇 개로 압축된다. 소림사의 장문인이 기거하는 방장실(方丈室), 귀중한 불교의 경전들과 무공비급을 보관하는 장격각(이제부터그냥한자안넣겠음 ㅡㅡ 시간잡아먹어서리), 선대 고승들의 유약한 선승들이 불법을 수도하는 게지원이 그것이다.특히나 방장실의 경우 팔대호원을 두어 완벽하게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그토록 삼엄하게 보호되고 있는 방장실에 지금 통보도 하지않은 방문객이 들어왔다. "누, 누구?"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갑작스런 인기척에 장문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순간 수많은 세월을 불법에 정진하여 쌓아온 평정심도 소용이없었다. 여기가 어딘데 외인이 갑작스레 들어올수 있다는 말인가?더군다나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장문인은 하마터면 심장이 멎어버릴 뻔했다. 어떻게 저얼굴을 잊을수 있다는 말인가? 한때 소림의 자랑이었다가, 우환 덩어리로 전락해버린 사내를 말이다. 그 순간 장문인의 뇌리에는 만사불황을 없애버리겠다며 소림사를 나선 사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소림 최고의 정예들이라고 할수 있는 12금강과 32수좌승 그리고 108나한까지 거느리고 길을 나섰다.그덕분에 지금 팔대호원의 핵심전력이라고 할수 있는 32수좌승은 모두 자리를 비운상태였다. 아마도 그 때문에 그가 별 어려움 없이 이곳에 들어왔겠지만 말이다.'그렇다면 그들 모두가 죽었다는 말인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같다. 대정 사제와 한께 간 그들이 누구인가.108나한은 나한전의, 12금강은 장생전의 그리고 32수좌승은 팔대호원의 핵심전력이었다 . 그들 모두가 만사불황에게 목숨을 잃었다면 소림의 위명은 이제 끝장난 거나 다름 없었다. "아, 아미타불.... 어, 어떻게 이곳에 오셨소?" 다리에 힘이 빠져 일어설 수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만사불황이 무너지듯 꿇어 앉으며 오체복지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장문인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왜 갑자기 오체복지를? 이때 만사불황에 가려있던 또다른 인물이 장문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바로 대정사제였다. 대정선사는 장문인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그 심정을 십붙 이해 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대정선사의 인자한 눈매는 슬픔으로 가득 차있었다. "사, 사숙께서 정신을 차리신 겁니까?" 공공대사는 오체복지한 채 장중한 어조로 말했다. "소림 제자 공공, 오랜 방황을 끝내고 소림에 돌아왔음을 장문인께 고하는 바입니다. 그동안 큰 심려를 끼쳐 드린점 너무나도 송구스업기 그지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장문인은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현실같이 않은지 멍한 상태였다. "그동안 쌓은 죄업을 참회하기 위해 참회동에 들고자합니다." 그말에 장문인은 화들짝 놀랬다. 그가 쌓은 죄업이 크다는 점은 장문인도 잘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공 사숙이 누구인가? 현존하는 소림최강의 고수가 아닌가. 그가 말썽을 일르킬때라면 몰라도 정신을 차렸다면 애기가 틀려진다. 지금처럼 세상이 뒤숭숭할때 그의 존재다 ㅇ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그런 그를 참회동에서 썩게 만들 수는 없었다. "사, 사숙. 모르고 한죄는 죄가 아니라고 하였지 않습니까? 그러니." 공공대사는 장문인의 말꼬리는 잘라버리며 말했다. "아무리 기억에 없다고 하나, 소승이 쌓은 업보는 그대로 남아있는 것. 소승이 그 사실을 몰랐다면 모르되 알고도 참회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소승을 잡지 마시기를 간청드립니다. 그럼, 소승은 물러가겠습니다." 장문인에게는 한가지 과제가 사라지고 또 다른 과제가 남겨진 셈이었다. 어제까지만해도 제발 세상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던 인물이 이제는 더없이 소중한 인물이 된것이다. 화경급고수..... 지고한 경지를 개척한 인물이 문파에 존재하느냐 그렇지않느냐에 따라 그위상이 달라지게된다. "후우, 공공 사숙을 저리 보낼 수는 없는데, 도대체 방법이 없겠는가?" 대정선사라고 해서 딱히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로서는 여기까지 오면서 공공사숙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것인지 너무나 잘알고 있다는 것이 더욱 문제였다. "사숙께서는 아마도 참회동에서 생을 마감하시려는 듯하더군요." 그말에 장문인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뭣이? 마감한다고?" "예, 참으로 안타까운일입니다. 본사가 최고로 배출한 현경의고수를 그렇게 잃어야 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말에 장문인은 기절하기 직전까지 몰렸다 "뭐, 뭐라고했나? 현경이라고?" "에, 지금까지 현경의 고수하고 알려진 마교교주와 거의 대등하게 싸우셨습니다. 아마도 정신을 차리시면서 무공은 더욱 진보하신 듯하더군요. 그분께서 그토록 소원하시던 현경에 들었으되 수많은 업보를 쌓으셨으니 참으로 부처님의 오묘한 뜻은 알길이 없습니다." 마교교주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니... 수틀린다고 화산파를 멸문시킨자가 바로 마교 교주였다. 아무리 소림의 저력이 막강하다고 하지만, 힘만을 숭상하는 거대문파 마교와 쌍벽을 이룰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공공 사숙이 함께 한다면 그게 가능해질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문인은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무슨 일이 있더라고 그 분께서 자진하시는 것만은 말려야 하네. 자, 빨리가세나." "예" 개방도의 작당모의 묵향은 관도를 따라 최대한 빨리 이동해서 한때 대송제국의 수도였던 개봉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개봉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한때 호화찬란 한 황국이 들어서 있던 곳은 모조리 불타 버려 이제는 페러만이 남아있었고, 수많은 사람들도 북적거리던 번화한 거리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허어, 놀라운 일이로구나. 천년의 영화를 자랑할 것만 같았던 개봉이 이렇듯 폐허로 변해버리다니...." 묵향이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금군 병사는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도성을 함락시켰으면 하다못해 몇명이라도 남아있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묵향이 이리어지 주위를 둘러보며 가고 있을때, 그의 눈에 개방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지금껏 여러 봤었던 거지와 행색은 똑같았지만, 그 눈동자는 큰차이가 있었다. 게슴츠레 살짝 눈을 감으며 나른 한듯 하품을 하고 있었지만, 살짝살짝 보이는 불타는 듯 번쩍이는 그의 안광은 내가무공을 깊은 수준까지 익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묵향은 슬그머니 늙은 거지에게 다가가 동전푼을 던져주며 질문을 던졌다. "이보시오, 여기있던 금군들은 다 어디 갔소?" 늙은 거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동전을 힐끗바로본후 나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낙양을 치기위해 이동했습죠." "그런가? 이곳에는 한 명도 주둔시키지않고?" "페허가 되어버린 도성따위 무슨필요가 있다고 미련을 가지겠소? 모든보물들을 약탈해서 연경으로 보내버린후, 낙양으로 갔습죠." 딴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양양성의 전투는 어떻게 되었소?" "물론 아직도 열심히 싸우는 중입죠. 그런데 그런 것을 왜 저같은 늙은 거지에게 물으시는 겁니까요? 그런거는 아무나 잡고 물어보면되는데....." "당신한테 안 물어보면 누구한테 물어보겠소? 여기와서 처음보는 개방도인데 말씀이야." 그말에 늙은 거지는 바짝 긴장한 눈치 였다. 하지만 묵향은 그런것은 개의치않고 질문을 마저 던졌다. "개봉에서 개방이 완전히 철수했나? 왜이렇게 거지들이 안보이지? 하나찾는다고 한참을 돌아다녔잖아." "그, 그건 대답해줄수 없소." 그말에 묵향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대답해주는게 신상에 좋을텐데?" 그 누가 있어서 자신이 개방도임을 뻔히 알면서 이토록 핍박을 가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무림최대의 방파라고 할 수 있는데 개방쯤은 물로 봐야 가능한 일이었다. 늙은 거지의 눈이 묵향의 얼굴에 자헤이 머물렀다. 그 순간 그는 상대의 얼굴이 꽤나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거지의 뇌리에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있었다. 수많은 거지들을 학대한 개방의적! "허억! 다, 당신은 서, 설마 암흑마제?" 뒤로 넘어갈 듯한 늙은 거지의 반응에 묵향은 약간 쑥스러운 듯 대꾸했다. "본좌가 그렇게 유명했었나? 하기야 지금까지 때려잡은 개방도만 몇명인지 기억도 안 나는군. 자네도 그 안에 포함되지 말고 그냥 실토하는게 어때?"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거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그럴 수는 없소." "젠장,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너일루 와봐." 묵향은 개방도의 멱살을 잡아 질질 끌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끌려들어가면서도 개방의 늙은 거지는 사력을 다해 반항했다. 물론 이미 점혈을 당한 상태라서 몸으로 저항항 수는 없었겠지만, 그의 입은 아직 살아있었다. "무림맹과 협정서를 주고받은 상태에서 이럴수가 있소? 개방도를 건드린 것이 알려지면 무림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묵향은 늙은 거지의 말에 피식 웃으며 이죽거렸다. "본좌가 언제 그런거 겁내고 살았는 줄 알아? 그리고 협정까지 주고 받은 상태에서 정보를 숨기는 것은 협정위반 아닌 줄 알아? 서로가 피장파장 이야. 알겠어?" "그, 그건 억지요." "억지인지 아닌지는 조금 지나보면 알 거야. 크흐흐훗." 잠시 후 골목길 안에서는 사람 잡는 비명 소리가 구슬프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2각 정도가 흐른 후, 묵향은 손을 탈탈 털면서 골목안에서 느긋한 걸음걸리오 걸어 나왔다. "허엇, 참. 처음부터 얘기해줬으면 그런꼴은 안당했을거 아냐? 멍청한놈! 그래도 머리가 좀 돌아가는 놈이었다면 본좌가 누군이 알아챔과 동시에 몽땅 다 불었을텐데, 어찌 그리고 사서 매를 버는지 원..." 개발의 늙은 거지를 족친 결과 묵향은 자신이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들을 모두 다 알아낼 수 있었다. 그 개방도는 제법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듯 상당히 깊은 수준의 정보까지 알고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는 형님을 만나러 가는 일만 남았군." 묵향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만통음제의 대제자인 냉파천이 기거하는 장원으로 찾아갔다. 고색창연한 장원의 겉모습은 변한것이 하나도 없었다. 묵향 은 만통음제를 만난다는 기쁨에 들떠 대문을 두들겼다. "무슨 일이십니까요?" 문을열던하인은 묵향의 얼굴을 보자마자 바짝 얼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묵향이 이곳에 와서 행패를 부린것을 그하인이 기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인을 개 패듯 패놓은자는 처음봤으니까 말이다. "허억!" 기겁하는 하인에게 묵향은 말을 건넸다. "자네 주인에게로 안내하게." "예? 예" 엄청난 무공을 소유한 냉파천을 박살내놓은 상대니, 하인이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하인은 순순히 냉파천에게로 그를 안내했다. 냉파천은 묵향이 왔음을 알고는 황급히 달려나왔다. 그의 얼굴은 당혹스러움으로 가득차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것이 상대는 사숙이기에 앞서 마교 교주니까 말이다.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사숙." 한참후에 냉파천은 마지못해 사숙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소행이 괘씸하기는 했지만 묵향은 그냥 넘어가기고 했다. 좋은 일로 찾아와서 두들겨 패버릴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형님을 만날려고 찾아왔다네. 어디에 계신가?" "사부님께서는 양양성쪽으로 출발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패력검제 대협과 합류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벌써 떠나버렸다고? 에잉...,한발 늦어버렸군." 더이상 냉파천에게 볼일은 없어진 셈이다. 묵향은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서 몇 발자국 걸어가는 듯하더니 뭔가 할말이 있는 듯 다시 되돌아왔다. "이봐 사질." "예?" 묵향은 냉파천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너 말이야. 앞으로 호칭 똑바로 안 하면 죽여버릴 줄 알아. 알겠어?" 그말이 냉파천은 들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재빨리 대답했다. "옛." 그말을 끝으로 묵향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개봉성 외곽에는 수많은 거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이있다. 거지들의 거처가 그렇듯 그곳에 있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이곳이 북개방의 총타였다. 개방도의 숫자가 워낙 많았기에 개방은 효율적인 방도들의 통제를 위해 편의상 남북개방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모두들 한식구임에는 변함이 없었다.요즘 개방도들은 매우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청난 수의 금군이 몰려와 개봉을 약탈하고 지나간지 채 몇달 지나지도 않았다. 개방의 고수들도 황군들과 함께 그때 방어전을 펼쳤었기에 매우 피해가 컸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후, 뒤처리할 일도 엄청 나게 많았다.그런곳에 개방도들이 발 벗고 나서서 돕고 있었기에 묵향의 눈에 개방도들이 별로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묵향이 유유히 개봉성을 벗어나고 있을 때, 개방의 늙은 거지들이 건물들 중의 한곳에 모여 한창 회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놈을 게속 놔둘 겁니까?" 늙은 거지의 말에 또 다른 거지가 한숨을 푹내쉬었다. 아무리 생각 해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거지도 다른 거지와 같이 누더기를 입고 있었지만, 허리에 개방의 방주를 상징하는 9개의 매듭이 지어져 있는 허리띠를 매고있었다. "파풍개의 용태는 어떻소?" 방주의 질문에 다른 거지가 재빨리 대답했다. "다행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모양입니다. 머리도 식힐 겸, 구걸고 할겸 볕을 쪼인다고 나갔던 그가 너무 오랫동안 오지 않는 것을 괴이 하게 여긴 제자 하나가 그를 찾아 나서지 않았었다면 시체하나 치울 뻔했습니다." 파풍개는 6결제자였다. 그런 만큼 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 또한 대단한 것이었고, 그 덕분에 그가 사라진 것도 빨리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소행도 그놈이 벌인 것이 확실하오?" 방주의 질문에 여기 있는 거지들 중에서 가장 살이 뒤룩뒤룩 찐 자가 노기를 참기 어렵다는 듯 다급히 대답했다. "방주님, 그건 안봐도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놈이 아니라면 어떤 간 큰 놈이 감히 개방의 제자를 걸레 짜듯 쥐어짠단 말씀이십니까?" 이때, 옆에 앉아 있던 거지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허어, 참. 그거 알 수가 없는 노릇이네. 분명 마교에도 정보 조직이 있거늘, 왜 궁금한 일이 있기만 하면 무조건 주위에있는 개방도를 찾아 족치는 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구려." 그말에 살찐 거지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유야 뻔하지 않소? 그놈은 본방의 방도들을 족치는 것에 재미를 붙인것이 틀림없소. 그놈 손에 걸레가 된 제자만 벌써 500여 명을 넘어섰소이다." 바짝마른 거지가 고개를 흔들며 반박했다. "내 생각은 좀 다르오. 그자는 대부분의 경우 수하들을 거느리지 않고 단독행동을 즐기고있소." 그말에 다른 거지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맞아요. 그렇다는 보고는 몇번 받았소이다." 바짝 마른 거지는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호로병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한잔 하고는 싶은데, 회의중이라서 못마시다보니 술이 가득 든 호로병이나 매마지는 것이다. "상상을 해보시오. 자신이 아주 뛰어난 고수하고 말이오. 그리고 부하들과 떨어져서 혼자다니고 있소. 그러다가 덜컥 궁금한 일이 생긴단 말이오. 그때 당신네들 같으면 연락을 넣어 수하들을 불러들인 다음 그것을 물어보는 것이 빠르겟소?아니면 널리고 널린 본방의 제자를 찾아 족치는 것이 빠르겠소?" 그 말에 모든 장로들은 놀라운 발견을 했다는 듯 고해를 끄덕였다.맞다. 만약 자신이 강자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편이 훨씬 편리 하면서도 빠르니까. 사실, 그자처럼 개방이 지닌 힘을 아예 물로 보는 다람이 생각해낼법한 방법이었다. 수틀린다고 화산파도 하루아침에 멸문시키는 놈인데 거지 한둘 족치는 것쯤이야 뭐 그리 큰일이겠는가. "허어, 그렇다고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수만은 없이 않소이까?" "취선개장로. 그런 거까지 생각해봤을 정도라면, 그 해결책도 생각해두신 것이 있겠구려." 취선개는 주위를 쭉 둘러본 다음 말했다. "그 자는 현경의 고수가 아니겠소? 무슨짓을 해도 본방의 능력으로는 그놈을 없앨수 없소. 본방의 식솔이 30만이나 된다고 하지만, 결정적으로 고수다운 고수다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이외다. 그렇다면 대답은 정대진 것이나 다음없소. 그놈이 물어보는 것은 뭐든지 아는 한도 내에서 친절이 가르쳐주는 것 말이오." 그 말에 뚱뚱한 거지가 노성을 터뜨렸다. 그건 말도 안 돼오! 본방도 엄연히 정파의 기둥이란 말이오. 마교 교주놈의 궁금증을 채워줬다는 것이 알려지면 나중에 무슨소리를 듣겠소이까?" "킁! 정파의 기둥이 부상자를 줄여줍니까? 마교가 본격적으로 본방을 치고 들어온것도 아니고 마교 교주혼자서 궁금한거 몇가지 물어보나가 생겨난 다툼이오. 처음부터 붙잡아 고문을 한 것도 아니고, 좋은 말로 질문을 던지다가 이쪽에서 불지 않으니 고문을 가하는 형식이오 일이 끝난 후 증거 인멸을 위해 본방의 제자들을 죽이지도 않았소. 그런 사실을 가지고 그자를 처지하자고 무림공론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소? 젠장! 오히려 본방의능력이 형편없음을 전 무림에 떠벌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취선개의 지적에 장로들은 할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때문에 아직도 그놈을 응징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다가 지금은 무림맹과 마교가 협정까지 맺고 금과 대치하는 상황이오. 그누구도 그가 거지 몇족쳤다고 마교와 싸우려고하지는 않을거란 말이오." "그건 취선개 장로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소이다." "놈을 못잡을 바에는 차라리 부상자라도 줄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니겠소? 거기에다가 그렇게하면 한가지 부수적인 이익도있소. 파풍개가 당함으로 인해 우리들은 그놈이 개봉에 왔었음을 알았소.그리고 그가 뭘 궁금하게 여겼는지도 파풍개를 통해 알수 있었소. 그걸 역으로 이용하면 매우 그럴듯한 정보가 되지않겠소이까?" 개방방주도 그럴듯하다고 느꼇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말했다. "호오, 그건 취선개 장로의 말이 옳은 듯하오." 취선개는 호로병을 한번 더 쓰다듬은 후 말했다. "친절하게 놈에게 정보를 제공하면 놈은 본방의 방도들을 이용하는데 재미를 붗일 수밖에 없을 거요. 최소한 과거보나는 더 자주 본방을 애용하게 되겠지요,. 놈의 위치, 그리고 놈이 원하는 정보. 이 두가지를 파악하면서 게속 놈의 행방을 추적하다보면 어쩌면 기가 막힌 기회를 잡게 될지도 모른다 이겁니다. 그때는 무림맹이나 다른문파의 손을 빌려서 복수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개방방주는 취선개의 마지막말에 무릎을 탁치며 외쳤다. "좋은 생각이오. 그대로 시행하도록 합시다." 이 회의가 끝났을 때쯤에 묵향은 자신도 모르게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정보조직을 공짜로 거느리게 되었다. 물론 그게 나중에 화가될지 복이 될지 아무도 알수 없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동행 요즘 매화검 옥대진은 심사가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그의 바로 곁에는 무림 최고의 재녀라는 4봉 중의 한명이 착 달라붙어 아양을 떨고있음에도 전혀 그의 심사는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더우 그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고 봐야했다.화산장문인인 현천검제의 비리를 폭로하며 자신의 명성을 떨치고자 했지만 그건 하나도 이룩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은 더욱 꼬여들어 연인인 능비화의 뒷배경인 화산파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야심이 큰 옥대진이 능비화를 꼬신 것은 그녀가 강호 후기지수들중 최고라는 4봉의 일원이라는 점 외에도 화산파라는 뒷배경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산파가 사라진 지금, 옥대진에게 있어서 능비화가 지닌 가치는 날로 하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그녀가 4봉만 아니었어도 화산파가 무너진 그순간 옥대진은 능비화를 차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4봉이라는 희소설을 지니고 있었다. '젠장! 4봉만 아니었어도.....' 하지만 그런 옥대진의 마을음 아는지 모르는지 능비화는 옥대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사문도 없어진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옥대진 뿐이었으니 말이다. "자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겐가?" 닥자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준수한 청년은 파양검 황보룡이었다. 말을 걸었는데도 대꾸가 없어서 가만히 상대를 관찰해 보자 뭔가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배경도 옥대진에 못지않은 그였기에 짜증을 감추지못하고 인상을 팍 일그러트렸다.지금 객잔에는 옥대진을 비롯하여 7룡 4봉에 속한 젊은 후기지수 다섯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림맹의 뜻을 좊아 양양성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는 금나라의 잡졸들이 아닌가. 그 곳에서 한바탕 휘저어주면 자신들의 명성이 팍팍 올라갈 것이다. 더욱이 잡졸들이 상대인 만큼 위험부담도 적을게 분명했다. 그런 만큼 이들은 한가로이 유 람을 떠나는 기분으로 양양성을 향하고 있는 중이었던것이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옥대진이 사과했다. "으응?아,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 그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황보룡이 망했다. "걱정말게. 금의 세력이 아무리 강성하다고 하지만, 그들은 무공이라고는 익히지않은 잡졸들이 아닌가." 황보룡의 말에 옥대진이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누가 금나라 잡졸들이 두렵다고 했소?" 이때, 상대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던지 황보룡은 능비화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이 황보룡의 생각이 얕았소이다. 능비화 소저의 처지를 생각하지 못한 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오." 그런 다음 그는 옥대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곳에는 마교의 세력도 있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에 걱정인 게로군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번일이 끝난 후에 그놈들에게 죄값을 물어도 늦지 않을 걸세.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흘러도 늦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누가그따위것걱정이나한데? 이런젠장! 처음부터 초미를 물었어야 했어. 초씨세가의 힘이 조금 미약하다고 하지만, 그계집의 미모는 4봉중에서 으뜸이지 얺은가. 이런 덜떨어진 계집보다는 초미가 백배나은데 말씀이야. 쩝, 바로앞에 앉아서 얌전을 빼고 있는 당소진도 나쁘디는 않군. 하지만 저 계집하고 결혼 한다면 데릴사위로 들어가야 한다는게 영 마음메 안든단 말씀이야.' 옥대진이 자신을 빤히바라보고 있자 능비화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쑥스럽게..., 뭘 그렇게 바라 보니사요?" 위기에 몰린 옥대진은 가증스럽게도 짐짓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느끼한 말로 응답했다. "아니오. 너무나도 그대가 아름다워서 내가 잠시 실례를 했소." 그의 말이 너무나도 뻔뻔스러웠는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헛기침을 크게 터뜨리며 말했다. "험험, 에잇 젠장. 이거 짝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는가." 바로 이때, 객잔 문이 활 짝열리면서 엄청난 기세를 뿜는 무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객잔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주위를 살핀 다음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강인해 보이는 청년이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섰다. 허리에 매인 고색창연한 보검 하나만 봐도 그가 보통 신분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옥대진 등은 벌떡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상대는 화려한 뒷배경을 지닌 그들이라도 무시못할 신부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황룡문의 문주 황룡무제 혁력운이었으니 말이다. "노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그래 자네들은 누구인고?" 황룡무제의 물음에 그들은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황룡무제는 원래 그들의 이름만 듣고 지나칠 생각이었는데, 이들이 현세대의 7룡4봉이라는 점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과거 자신도 7룡4봉의 일원으로 뽑혀 그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졌었지 않았든가.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서있게 되었는 지도 모른다.황룡무제는 따뜻한 말로 후배들을 대하며 그들과 동석했다. "자네들의 준걸한 모습을 보니 노부의 마음이 흡족하구먼. 그래, 자네들도 양양성으로 가는 길이었던가?" "예,선배님. 미약한 힘이지만 저희들도 한판 거들고자 나섰습니다." 황룡무제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헛, 장한 일이로다. 자네들 같은 후기지수들이 있는 한 무림의 앞날은 밝게 빛날 것이야." "과찬의 말씁이십니다." "허허, 참. 자네들 아직 식사 전이라면 노부와 같이 식사를 하지 않겠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옥대진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은 일제히 포권하며 소리쳤다. "영광입니다, 황룡무제 대협!" 말이좋아 3황5제지, 평생가도 그등 중의 단 한 명도 만나기 힘든 게 바로 이 넓고도 넓은 강호다. 그런데 오늘 강호 최강고수 중 한명에 들어있는 후기지수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노강호를 극진히 모시고있었다.모처럼 황룡무제가 강호 후배들을 앞에두고 목에 힘주고 있을때였다. 또다시 객잔 문이 활짝 열리며 아무도 청하지 않은 불청객 한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가 모습을 드러냈을때, 화통하게 술잔을 들이키고 있던 옥대진이 푸학아고 술을 내뿜었다. 그가 뿜어낸 술방울은 앞에 앉아 있던 황보룡이 고스란히 덮어쓰고야 말았다. 활보룡은 화를 버력내며 외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지만 옥대진에게 황보룡이 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화등잔만하게 커져서 밖에서 들어온 인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옥대진 의 상태를 가장 민감하게 느낀것은 당연히 그옆에 앉아있던 능비화였다. 그녀의 시선이 옥대진을따라 움직인 순간, 그녀는 너무나도 놀라 젓가락을 높치고 말았다. 젓가락이 땅바닥을 구르고 있을때, 화룡무제가 무슨일인가하여 쓰윽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봤다. 무림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자의 얼굴을..... "끄어억!" 황룡무제의 입 속에서 괴상한 음성이 튀어나올 무렵, 상대도 혁련운을 알아봤는지 방글거리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워낙 오래전이라 이름은 잊어먹었지만, 그얼굴은 잊을 수가 없지. 아주 건강한 모양이군."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황룡무제의 등을 툭툭 치는 사람. 그 모양을 보고 동석하고 있던 후기짓수들은 경락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황룡무제가 누구인가. 화경에 오른 극강의 고수이자, 황룡문의 문주가 아닌가. 그런 그의 등을 스스럼없이 때릴수 있는 인물이 존재할 줄이야 그누가 상상 이나 했겠는가.하지만 황룡무제는 얼빠진 듯 미소를 지으며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바로 무림역사상 두번째로 현경을 개척했다는 마교 교주였다. 아무리 그라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노, 노야께서도 건강하신 것같아 기쁘군요." 묵향은 옆 탁자에서 의자를 끌어당겨 털썩 주저 앉으며 말했다. "자네도 양양쪽으로 가는모양이지?" "예." 묵향은 넉살좋게도 탁자위에 놓여있는 음식들을 스스럼없이 집어 먹으며 말했다. "잘 됐군. 나도 그쪽으로 가는 길인데 함께 가면 딱이겠군." 초류빈을 돌려보낸 후, 형님과 함께 가고자 개봉에 갔다가 허탕을 친 묵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화경급의 고수를 만났으니, 이게 하늘의 뜻이 아닌가, 웬만한 일은 모두 다 이녀석에게 시켜버리면 아주 편리할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묵향의 생각이야 어떻든 간에 그말을 들은 황룡무제의 얼굴은 똥색으 로 바뀌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와 함께 가기 싫다. 하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 무림맹이 마교와 협정을 맺기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장에서 함께 싸워야 하는 아군이 된것이다. 황룡무제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옥대진과 능비화는 지금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이 자가 현천검제하고도 친하게 밀담을 주고 받더니, 이제는 황룡무제까지? 과연 이 자가 마교교주가 맞기나 맞는 것인가? 어떻게 정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이는 3황 5제의 둘과 이렇듯 스스럼 없이 지내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로서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수 없었다.하지만 그것을 알리없는 다른 후기지수들은 저마다 묵향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황룡무제가 저렇듯 공손히 대하는 것을 보면 무림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명숙일 것이 분명하니 망이다.하지만 옥대진과 능비화는 저마다의 생각에 바쁜지라 묵향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묵향에게는 별다륵 생각이없었다. "이쪽은 공동파의 매화검 옥대진 소협이고, 저쪽은 화산파의 능비화 여협입니다." 자신들이 묵향에게 소개되자 능비화는 찔끔하는 듯 옥대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화산파의 능비화라고?' 묵향은 그때부터 둘의 관계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분위기로 보아하니 꽤나 깊은 사이인 듯한데, 왜 자신을 경계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때, 묵향의 뇌리에 떠오르는 기억이있었다. 맞다. 전에 아르티어스와 여행앴을 때, 패력검제 녀석하고 같이 다니던 아이들이 아닌가. 그렇 다면 충분히 지금까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누군지 저둘은 알고 있을 테니말이다.저쪽에서 모두들 자기소개를 하는데 묵향이라고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기에 묵향은 싱극 미소지으며 말해줬다. "본좌는 천마신교를 책임지고 있는 묵향이라고 한다네." 기 순간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눈치다. 개중에는 자신의 귓구멍을 파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잠시후, 그들은 자신이 들은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감히 마교놈이 합석을 하고 있단 말인가.그런생각이 들자 한 젊은이가 벌떡 일어서며 우렁차게 호령했다. 자신을 팽대성이라고 소개한 우람한 덩치를 지닌 젊은이였다. 팽대성은 건곤신장으로 대변되는 권법의 명문 하북팽가의 후계자겼다. 하북팽가는 권법 으로도 유명했지만, 그 불같이 급한 성질로도 유명했다. "감히 마교놈이 이 자리에 합석하다니 네놈의 간덩이가....." 하지만 팽대성의 말은 도중에 막혀버렸다. 그 옆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앉힌 것이다. 그러면서 노기에 불타오르는 그의 뇌리에 전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보게 팽 소협, 성급한 행동을 자제하게, 방금 저 자가 마교를 책임진다고 했지않은가? 그렇다면.....> '천마신교를 책임진다' 라면 바로 교주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저 자가 암흑마제라는 말인가? 설마하는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묵향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 씩 미소지었다. 그런 다음 결정타를 날려줬다. "남들은 본좌를 암흑마제라고 부른다네, 젊은이들." 그런다음 묵향은 방금 자신에게 따지고 들었던 팽대성에게 미소띤 얼굴로 이죽거렸다. 물론, 그 말을 듣는 팽대성의 입장에서는 그 얼굴이 아마도 악귀의 모습처럼 보였을 테지만. "본좌도 정파놈들하고 여행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것도 네녀석같은 애송이라면 더욱 그렇지. 네놈들을 보자마자 껍질을 홀랑 벗겨놓지않은 것도 다그놈의 무림맹주하고 주고 받은 협정서 덕분이라는 것을 명심하라고. 알겠어?" 그말을 들은 젊은이들은 모두 얼굴색이 새 하얗게 질려버렸다. 하지만 황룡무제는 묵향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지금까지 묵향을 두 번이나 만나고도 살아남아 있는 그였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암흑마제 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실 그의 마음 씀씀이가 대협의 풍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렇지 않다면 커다란 고목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자신과 비무까지 해주면서 가르침을 줬을 리가 없었다. "허허헛, 너무 아이들을 겁주지 마십시오. 협정서가 유효한 한은 동도하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 한잔드시죠." "그러지." "과거 크나큰 은혜를 주셨었는데, 그 사례도 못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셔서 혹시 큰일이라도 당하신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뵈니 과거와 하나도 변하신게 없으시군요." 무림명숙이라는 황룡무제가 이 정도까지 저자세로 나오는데 묵향의 마음이 흡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클, 본좌야 언제나 그렇지 뭐, 자네도 한잔 들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후기지수들은 아연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찌 이런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마교 교주와 황룡문 문주가 저렇듯 가까운 사이라니,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후기지수들은 묵향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황룡무제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룡무제 대협, 저..., 천마신교의 교주님과 함께 가시는 자리에 저희들 같은 무림 밀학들이 함께할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은 먼저 출발했으면합니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하게." 황룡무제가 이끌고 온 황룡문의 무사 수는 100여 명에 이른다. 아무래도 이동할 때는 수가 많은 것보다는 적은 것이 다소 유리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황룡무제는 그들의 부탁을 허락했다. 하지만 옆에서 듣고있는 묵향에게는 그게 그런 뜻으로 들리지 않았다는게 문제다. "호오, 본좌하고 함께 가는게 껄끄러운 모양이군. 천마신교라는 단체가 그렇게 마음에 안드나?" 그말에 젊은이들은 화들짝놀라며 대답했다. "그, 그건 결코 아닙니다. 저희들은 그냥 조금이라도 빨리 달려가기 위해서,....." "아아, 그건 걱정말아. 안 그래도 그곳에는 본좌의 수하들이 먼저가서 열심히 싸우고 있을테니 말이야. 자네들은 천천히 가도 괜찮을거야. 사실, 괜히 피 튀기게 싸워봐야 뭐하나? 산천구경이나 하면서 천천히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지. 안그런가?" 마지막에 가서 황룡무제의 동의를 구하는 묵향이었다. 황룡무제라고 그말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는 없었다. 사실 정사를 불문하고 세력이나 무공만으로 무림명숙의 순서를 잡으라고 한다면 그 첫손에 꼽힐 인물이 묵향이 아니던가. 에전처럼 서로 원수지간일 때는 애기가 달랐겠지만, 지금은 금이라는 적을 앞에 두고 서로 협동해야 하는 처지다. "교주님의 말씀도 옳은듯 합니다. 사실, 아무리 서둘러봐야 며칠 상관이나 있겠습니까?" "하하핫, 본좌의 말이 바로 그말이야. 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아침이나 들지?" 말투는 호탕하면서도 부드러운 듯했지만, 그의 눈초리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만약 자신의 말을 안들으면 곧바로 곤죽을 만들어놓겠다는 의지가 듬뿍 배어 있었던것이다.후기지수들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묵향은 희희낙락하며 중얼거렸다. "과연 명가의 제자들답게 잘먹어서 그런지 기골이 잘대하구먼. 부려먹기 딱이겠어." 야반도주 무림명가의 후손들인 옥대진 등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그들은 모두 무림최고의 후기지수라고 칭해지는 7룡4봉에 까지 뽑히지 않았는다. 그런 그들이 맨날 남의 수발이나 들어야하다니..... 그것도 불구대천인 원수라고 교육받아왔던 마교의 교주를 말이다. 저앞에서 사이좋게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려가고 있는 묵향과 황룡무제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옥대진이 동료들에게 전음을날렸다. <아무래도 탈출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듯 싶소.> 팽대성은 사납게 콧김을 뿜었다. 생각만해도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밤에 실행하는 것이 어떻겠소? 놈도 사람인 이상 밤에 잠을 자지않겠소?> <팽 소협의 말씀이 옳은 듯하오.> 옥대진은 분노는 감출 수 없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황룡무제도 교주녀석과 뭔가 밀월관게가 있는 듯하오. 그렇지 않고서야 그놈이 그토록 오반방자를 떨고 있는데 가만히 놔둘리가 없지 않소? 이 일을 무림맹에 알려 철저히 시비를 가려야 할것이오.> 그말에 황보룡도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옥 소협이 옥진호 대협께 말씀 잘 해주시오. 어떻게 이런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오?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교도와..., 아니 마교 교주놈과 그토록 친밀 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다니 말이오. 이건 틀림없이 뭔가가 있다고 보오.> 그들이 아무리 무림에서 최고의 후기지수라고 알려져 있었고, 또 자신들도 그렇다고 믿고 있었지만 단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있더. 화경급이 넘어가는 인문 들 중에는 다른 사람이 주고 받는 전음을 도청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군다나 현경에 달한 묵향 이 그걸 못알아들을리 없었다.묵향은 살기 찬 미소를 씨익 지으며 중얼거렸다. "호오, 본좌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하지만 묵향과 함께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던 황룡무제는 갑자기 튀어나온 묵향의 말에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씁이십니까? 저는 그냥 양양성에서 패력검제 대협이 붙투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을 뿐인데....." 묵향은 슬며시 둘러댔다. "아, 아닐세. 본좌가 잠시 딴생각을 했다네. 미안하구먼. 그래,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예, 일단은 무한에 포진하고 게시는 수라도제 대협과 행동을 함께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양양성은 금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모양이던데 말입니다. 물론 저 혼자라면 야밤에 간단히 들어갈 수 있겠지만 딸린 식솔들이 있다보니 그렇게는 할 수 없거든요." "그게 좋겠군." 그런데, 대화를 나누는 묵향의 표정이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이라 황룡무제로서는 어리둥절할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객잔의 2층 창문이 살며시 열리고 다섯명의 인영이 소리없이뛰어내렸다. 그들은 창문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재빨리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안 그래도 어두운 밤에, 달빛마저 피하고나자 그들의 모습을 찾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살며시 주위를 살핀 다음 마구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말을 타고 도망칠 요량이었던것이다.하지만 바로 이때, 밤하늘을 꿰뚫고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침입자다!" 물론 묵향이 변성하여 낸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파장은 너무나도 컸다. 객잔에서 자고 있던 황룡문 무사들이 속옷 바람인 것을 개의치 않고 각자 무기를 든채 모두 다 후다닥 튀어나왔던 것이다. 누구의 목솔인지는 알수 없지만 침입자가 들어왔다는데야 안 일어 날수가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어디냐?" 이리저리 손짓과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주위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젊은이들은 황당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대로 숨어있어봐야 조금있으면 들통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자니 저들은 자다가 황급히 일어난 것이 역력한데, 자신들은 단정히 옷까지 입고 있는 데다가 각자 지니고 다니던 짐까지 다 들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 질팡하고 있을 때,황룡문 무사 둘이 구들을 발견했다. "웬 놈들이냐?" 그들이 큰소리를 치자, 곧바로 그곳을 향해 모든 황룡문 무사들이 달려왔다. 무사들이 그 일대에 쫙 깔려 포위망을 형성한 후에야, 그들을 지휘하고 있던 인물이 네명의 무사를 대동한 채 침입자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가 뽑아들고 있는 장검이 달빛을 받아 시퍼런 광택을 뿜고 있었다.이때, 재빨리 옥대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희들입니다, 광 대협." 그말에 황룡문 무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인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옥소협이 이곳에는 왜?" "사실 이렇게 떠나는 것이 에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마교 교주와 행보를 같이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껄끄러운일이라서,.... 그냥 눈감아 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옥대진이 애걸했지만, 광 대협이라는 인물은 난처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 참. 일이 난감하게 되었군. 이렇게 떠날 요량이면 좀 더 조심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소란통에 문주님께서도 일어나셨을텐데...." 아니나 다를까. 저쪽에서 마교 교주와 황룡무제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큰일은 아닙니다, 문주님." 황룡무제는 현장에 도팍한 다음에 어떻게 된일인지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다. 아무리 어둠속에 숨었다고 하지만, 그걸 못알아볼 그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허어, 참."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며 그는 묵향의 눈치를 살폈다. 과연 그가 가만히 있을까? 생각 같아서는 저녀석들 보고 빨리 눈앞에서 꺼지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묵향의 눈치를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묵향은 한껏 비웃음을 머금고 으르렁거렸다. "호오, 이녀석들 봐라. 그래, 본좌가 그렇게 싫었단말이지?"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아니야. 싸가지없는 것들. 같이 가고 싶지않으면 그냥 떠나고 싶다고 말할 것이지 슬그머니 야밤도주를 해? 네놈들의 아버지는 무림에 나가 선배들을 그렇게 대하라고 가르치더냐? 아무래도 본좌가 친히 교육좀 시켜야겠군." 손을 걷어붙이고 묵향이 나서려고 하자, 황룡무제가 말렸다. 가만히 놔눴다가는 그의 성격상 사고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노야께서 나서실 필요까지 있으시겠습니까?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타이르기는 뭘 타일러! 본교에서는 아랫것들 교육을 이렇게 안시키는데, 하여튼 정파라는 것들은 밖으로는 잘난척 떠들면서, 도데체 후배놈들 인성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이따위로 처신하는지.... 쯧쯧, 무공을 익히기에 앞서 인간이 되어야 할 거 아냐!" 그 말에 황룡무제의 안색이 노기로 붉게 물들었다. 어찌 인륜까지도 저버린다는 마교도에게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막무가내로 행동하며 온톤 소란을 일으키는 저따위 인간에게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눈앞의 상대에게 그런소리 떠들어봐야 통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것이다.대신, 황룡무제의 노여움은 저쪽에서 떨고 서 있는 다섯 명의 젊은 교주에게 저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속마음 같아서는 방쯤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명문의 자제들인 만큼 그 뒷배경이 여간 껄끄러운것이 아니기때문 이다. 그렇기에 황룡무제는 자신의 숙소로 걸어가며 말했다. "노야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단 살인은 안 됩니다." "흐흐흐, 본좌도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 염려 놓고 푹 자게나." 음흉스런 웃음 을 흘리며 대꾸하는 묵향이었다. 그런 다음 묵향은 구석에서 떨고 있는 다섯 젊은이들을 향해 이죽거렸다. "자, 자네들은 본좌하고 애기좀해볼까? 왜 야밤도주를 결심한 것인지 아주 궁금하구먼, 서로간에 대화가 좀필요할 것같아. "크으윽! 변태새끼." 그말에 팽대성은 화들짝 놀라 묵향의 눈치를 살피며 황보룡에게 전음을 날렸다. <아서게! 저자가 들을까 겁나네.> 전음을 듣고 정신을 차린 황보룡은 저쪽에서 신음소리를 흘리며 말위에 간신히 앉아 있는 능비화와 당소진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봤다. 덩치좋은 사내인 자신도 온 삭신이 쑤시는데, 그녀들의 상태는 더욱 비참할 것이 뻔했다. <어찌 여자를 그토록 무자비하게 두들겨 팰 수가 있다는 말이오? 역시 저놈은 사악한 마두답게 변태중에서도 변태가 분명하오.> 그날 저녁, 무림최고의 후기지수들중 다섯 명은 묵향에게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았다. 남자고 여자고 그런면에서는 매우 공평하게 취급하는 묵향이었다. 하지만 황보룡의 생각은 달랐다. 덩치 큰 자를 좀더 많이때리고, 여자는 살살때려야 하는 것이라고 굳베 믿고있는 그렸다. 팽대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쯤은 포기한 듯 풀이 죽은 어조로 전음을 날렸다. <허어, 그럼어쩌겠소?때리는데. 맞아야지.> <왜 그리 나약한 말씀을 하시는게요? 팽소협의 덩치가 아깝소이다.> 그 말에 팽대성은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어젯밤의 악몽이 떠올랐던것이다. 어제 저녁 자랑스러운 팽가의 후예가 어찌 마두의 주먹을 맞고 신음을 흘리겠느냐고 저항했고, 묵향은 기꺼운 마음으로 가를 반쯤 죽여놨던것이다.그런 그를 향해 측은한 시선을 보내며, 황보룡은 복수를 다짐했다. <젠장, 이 복수는 언젠가 꼭하고야 말겠소. 두고들보시오.> 옆에서 황보룡과 팽대성이 전음을 나누고 있을때, 옥대진과 능비화도 자기들끼리 전음을 주고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가께서는 좋은 방법이 없으신가요?> 능비화의 전음에 옥대진은 난색을 표했다. <나라고 딱히 좋은 방법이 있을 리가 없지 않소? 어젯밤 그 난리를 피웠는데, 아무래도 슬그머니 도망치는 것은 어려울 듯하오.> 능비화는 앞에서 가고 있는 묵향을 살펴보며 전음을 날렸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을까요? 저 흉악 무도한 자가 가가까지 해칠까봐 너무 두려워요.>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오., 주위에 황룡무제와 그문도들이있소. 그자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대놓고 그런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을거요.> <하지만 화산에서의 일을 생각해보세요.> <아아, 능매는 그가 화산파를 멸문시킨 것때문에 걱정하는 모양인데, 그런걱정은 하지말라니까. 어젯밤 일을 생각해보시오. 능매가 화산파라는 것을 그놈도 분명알고 있었소., 소개를 해줬으니 말이오 하지만 딱히 능매에게만 해코지를 한것도 아니지 않소?> <그 말이 아니에요. 장문인께서 저 자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무림맹에 알린후, 화산파가 멸문당했어요. 아아, 그때 장문인께서 마교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무림맹에 알리지 않았어야 했어요. 가가가 그 사실을 무림맹에 알렸다는 것을 저 자가 눈치 챈다면 가가를 가만히 둘리가 없잖아요.> 능비화의 전음을 듣고서야 옥대진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꼇다. 그렇다. 거기까지는 그도 생각해보지 못했던것이다. <그, 그럴수도 있겠구려, 그럼 어찌하면 좋을까....> 한동안 식은땀까지 흘려대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옥대진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동료 모두에게 전음을 날렸다. <이보시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소.> 옥대진의 전음에 모두들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생각인데 그러시오?> <멀지않은곳에 무당파가 있지 않소? 그리고 갑시다. 거기에서 도움을 청하면 되지 않겠소?> 그말에 모두의 안색이 활짝 밝아졌다. 무당파라면 현 무림맹주인 대극검황을 배출한 검의 명문이 아닌가. 그곳이라면 마교교주도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가장 좋을 것같소.> <누가 황룡무제 어르신께 그말을 전하는 거이 좋을 듯하오.> 옥대진이 제안하자, 황보룡이 자신있게 나섰다. <내가 가겠소.> 묵향은 지금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전음성을 도청하는 재미에 흠뻑취해 있다가 옥대진과 능비화가 나누는 전음을 듣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 말이 아니에요. 장문인께서 저 자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무림맹에 알린후, 화산파가 멸문당했어요. 아아, 그때 장문인께서 마교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무림맹에 알리지 않았어야 했어요. 가가가 그 사실을 무림맹에 알렸다는 것을 저 자가 눈치 챈다면 가가를 가만히 둘리가 없잖아요.> 이전음을 들은 후 묵향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사제가 그 모양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원흉들이 이곳에 있는것이다. 성질 같았으면 곧장 뒤로 달려 가 그연놈들을 단숨에 때려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그렇게 싱겁게 죽이면 안 된다. 저것들 때문에 사제는 모진 고초를 겪었다. 만약 아르티어스가 없었다면 불구의 몸으로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사제가 그런 꼴을 당하도록 만든 연놈들에게 간단하게 죽음을 선물해? 그건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그다음부터 묵향은 저것들을 어떻게 말려 죽일 것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방법들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그리고 묵향이 그러고있는 동안에 황보룡과 황룡무제는 말을끝내고 무당파를 향해 방향을 잡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황룡무제는 무당파와 상당히 친분이 있었다. 특히 무당파의전대장문인과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그렇기에 무당파에 들렀다가 가자는 황보룡의 제란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 부탁 무당파는 지금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과거에도 검의 명가로서 9파1방중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자랑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림 맹주까지 배출했으니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첫 서리를 맞은 나부들은 저마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빛깔로 단장하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ㄷ. 당소진과 능비화는 온몸에서 전해 오는 통증도 잊고 무당산의 절경에 취해 사방을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그리고 7룡 중에서 3명이 이제 마교 교주 라는 찐드기를 털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희희 낙락 하고 있는 중이었다.저 멀리 산문을 지키는 무당 문도들이 보이자 가장 앞서가고 있던 황룡문도들 중의 한 명이 외쳤다. "황룡문에서 왔소이다. 길을 열어주시기를 부탁드리오" 황룡문이라는 말에 도사들 중 한 명이 다급히 달려 내려왔다. 그리고 또 한 명은 내부에 통보하러 달려 들어갔다. 백여 명이나 되는 대단한 인원이다. 거기 에다가 앞쪽에는 황룡문주 황룡무제까지 보였다. 그런 판국이니 산문에 서 있던 도사들의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 없었다. 무당파 내로 깊숙이 안내되어 들어가자 그곳에는 무당파 장문인이 두 명의 장로를 대동한 채 나와 있었다. 황룡문이 그렇게 큰 문파는 아니지만 상대는 화경의 고수였ㄷ. 그가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봤을 때 이 정도 대접은 해줘야 하는 것이다. "허허헛,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많으셨소이다." "예, 장문인꼐서도 건강하신 듯하여 안심입니다. 이 근처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문에는 별고가 없으신지요" "무량수불 다행이 원시천존께서 보우하셔서 그런지 이곳은 무탈하외다" "오다가 보니 사람이 많지 않은 듯한데 모두들 양양성쪽으로 가신 것입니까?" "허허헛, 무림맹이 발 벗고 나서는일인데, 본문이 동참하지 않을 수 있겠소? 자, 안으로 드십시다" "예" 이때 뒤쪽에 서 있던 젊은이들이 앞으로 우루루 달려나와 무당 장문인에게 말했다. 그들은 앞 다투어 자기소개를 한 후, 묵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무당 장문인꼐 꼭 알려드릴 것이 있어서 이렇듯 실례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바로 저 자는 마교의 교주입니다. 정사불립이라는 말이 있는데 장문인께서는 저 자가 무당파 영내를 더럽히는 것을 방관하실 겁니까?" "마교 교주라고?" 장문인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묵향의 아래위를 살펴본 후 묵향에게 말했다. "이 아이들의 말이 사실이오이까?"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임을 인정했다. 장문인은 싸늘하기는 했지만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상대가 마교의 교주인만큼 어느 정도 대우는 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단히 죄송하지만 교주께서는 봊문에서 묵으실 수 없습니다. 물론 무림맹과 마교가 협정을 맺은 것은 노도 역시 잘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기거하도록까지 해드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 않겠소이까?" "장문인의 말이 옳은 듯하군" 돌아서서 몇 발자국 가던 묵향은 갑자기 떠오랐다는 듯 뒤도아서며 장문인에게 말했다. "전대 장문인의 처소가 어딘지 일러주겠나? 아직 살아 있다면 한 번 만나보고 싶구먼" 그 말에 장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사숙께서는 아직 생존해 계시오 그런데 왜 그 분을 만나겠다는 것인지 노도로는 이해할 수가 없구료" 그 말에 묵향이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 여기까지 온 김에 한번 만나보려고 말이야 그때 만났을 때는 정말 정파에도 이런 인물이 있었는가 싶었지 그동안 세월이 참 많이 흘렀으니 서로 간에 나눌 애기도 많을 듯하고...... 거기에다가 혹시 아는가? 노부를 하룻밤 재워줄지 말이야" 아니 하는 애기를 들어보니 이건 완전히 전대 장문인인 장춘진인이 마치 자기 친구라도 되는 듯하지 않은가 누군가 옆에서 들은 사람이 있다면 오해하기 딱 좋은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장문인의 눈썹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교 교주에게 대놓고 분노를 터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숙께서는 귀하와 같은 인물을 아실 리 없으니 농은 그만하시고 돌아가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이떄 저쪽에서 장춘진인이 시동 한 명을 거느랜 채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장춘진인은 황룡무제하고 절친한 사이였기에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마교 교주가 전대 장문인을 찾았기에 주위의 모든 이목은 장춘 진인에게 집중되었다 "오오 어서 오시게나 황룡문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문내의 일이 바빠 자주 찾아뵙지 모샇여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허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빈도도 한 문파를 다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일세 소소한 일이 많아 짬을 낼 틈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네 오랜만에 자네를 보니 해줄 말이 참 많을 듯하이 자 어서 내방으로 가세나" 하지만 주위의 공기가 좀 심상찮으을 느낀 장춘진인은 이리저리 주위를 두러보다가 말했다. "아직 애기가 다 끝난 게 아니었던가?" 무당 장문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마교 교주가 사숙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오랜 친구라면서 말입니다. 사숙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장춘진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마교 교주가? 이상한 일이로다 노도는 그를 알지 못하는데......" 이대 묵향이 쓱 앞으로 나서며 음흉스런 어조로 말했다. "도장은 노부를 모르겠소? 은원을 갚겠다고 그 난리를 친 것이 엊그제 같소만, 노망에 걸리지 않은 이상 그 일을 잊을 수는 없었을 텐데?" 처음에는 잘 모르겠다는 듯 묵향을 바라보던 장춘진인 하지만 은원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뭔가 떠오른느 것이 있었다. 그는 동의를 구하는 듯 황룡무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룡무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그의 기억이 맞다고 알려줬다. "시주는 그때 그......" "맞소 겨우 은자 40냥 가지고 그 난리를 부렸던 묵향이외다" 은자 40냥이라는 말에 장문인의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사실 무 당파에 난입해 들어온 자가 그때 그 자 말고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장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교주를 다시금 노려봤다 그때 저 자가 마교도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가만히 안 놔뒀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회를 놓쳐버리다니...... "허어 참 그 후에 시주에 대한 소식이 없어 궁금해하던 참이었소이다. 나중에 황룡문주에게 시주에 대해 물어봐도 당혹스런 표정으로 대답을 거부하기에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주가 마교에 계셨을줄은 생각도 못했소이다. 챰으로 만나서 반갑구려" 그 말에 묵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교주가 된 것이 뭔 자랑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겠소? 그건 그렇고 여기 장문인은 나를 재워줄 수 없다고 하는데 도장은 어떻소이까? 하루밤 재워주실 수 있겠소?" 그 말에 장춘진인은 소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그깟 게 뭐 큰일이라고 손님을 내치겠소이까? 자 따라오시오!" 손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앞서가는 노도장의 모습은 온갖 세상의 명리를 초탈한 완숙된 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그걸 난들 알겠소?" 묵향에게 모진 고난을 당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하니 그 자가 장춘진인과 면식이 있을 줄이야 이런 식이라면 그를 이곳에서 떼어놓고자 하는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절실함이 옥대진만 하겠는가 그들의 경우 마교 교주와 함꼐 가는 것이 싫다는 것이었을 뿐 그 외의 감정은 없었다. 묵향이 그날 밤 그들을 구타한 것도 선배고수로서의 예우를 안 해줫기 에 일어난 사건이 아닌다. 마교도라서 그런지 자신의 감정을 좀 화끈하게 배출한 것이었을 뿐 다른 선배고수들이라도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화를 냈을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옥대진과 능비화는 지어놓은 죄가 있다보니 속으로 전저긍긍하고 있었다. 혹시 자신들이 밀고자라는 사실을 교주가 눈치챈다면 그날로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 아니겠는가 현천검제만한 고수를 간신히 포섭해놨는데 그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놨으니 화가 날 만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놀라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가 이게 어덯게 된 일이죠? 어떻게 그 자가 전대 장문인까지 알고 있을까요?> <낸들 알겠소? 어쩌면 무당의 전대 장문인도 그 자에게 포섭되었던 인물들 중 하나였을지 모르지> 능비화는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수십 년 전에 만났다고 하고 전대 장문인도 저렇게 꺼리낄 것 없이 자신의 처소로 안내하는 것을 보면...... 혹시 과거에 서로 무림행을 하다가 잠시 면식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황룡무제 대협도 그렇고 전대 장문 어르신도 그렇고...... 그렇다면 어쩌면 장문인꼐서도 저 자와 개인적 친분이 조금 있었을 뿐 내통 한 것이 아닐 수도 있었잖아요> 그 말에 옥대진은 화들짝 놀랬다. 사실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걸 인정한다면 자신은 천고의 죄인이 될 것이 아닌가 죄도 없는 현천검제를 모함한 죄인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슬그머니 그 죄를 지금은 사라진 화산파에다가 전가시켰다. <그, 그럴 리가있겠소? 무림맹은 그 분을 축출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소 화산파에다가 그 사실을 통고한 후에 그 사후보고 만 들었을 뿐이오 그 분을 축출한 것은 순전히 화산파 장로들이 내린 결정이었소 그 분들이 죄도 없는 장문인을 축출할 정도로 어리석을 리가 있겠소?> <그렇지는 않지만......> 옥대진은 앞쪽에서 가고 있는 묵향의 눈치를 살피며 전음을 날렸다. <자자, 쓸대업는 생각은 그만두고 이곳을 조용히 벗어날 궁리나 좀 해봅시다.> 무당 장문인은 갑자기 장춘진인이 자신을 부르자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왔다. 장춘진인의 처소에는 묵향과 황룡무제가 숭사을 앞에 놓고 한참을 담소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ㄷ. "어서 오시게나 장문인" "예, 무슨 일이십니까 사숙" "한 가지 알려둘 일이 있었기에 장문인을 부른 것이네 장문인도 기억하고 있을걸세 과거 교주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를 말일세" 장춘진인의 말에 장문인은 웬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는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예" "그때 ㄴ도는 한 가지 약속으 했었네 무당파의 장문인으로서 말이야 그 약속은 내용은 교주가 청하는 부탁 한 가지를 꼭 들어주겠다는 것이었지 물론 무당이 할 수 있는 일에 한해서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말이세" 장문인은 이미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사숙,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때 상대가 마교도란느 것을 몰랐을 때 한 약속이었지 않습니까? 마교도를 상대로 무슨 약속을 지킨다고 그럿비니까? 그 약속은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말입니다." 장춘진인은 잠시 안타까운 눈빛으로 장문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허 답답한 일이로고 장문인 내 애기를 한번 들어보겠는가?" "예, 말씀하십시오"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장문인도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정(正)의 길을 걷는 자는 마음이 한결 같아야만 하네 상대에 따라 가변적으로 변하는 것은 장문인이 말하는 사를 쫓는 무리들이 하는 일이지 더군다가 도(道)를 이루려는 장문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상대가 누구건 약속이라는 것은 천금과 같이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장 문인의 생각은 어떤가?" 장문인은 잠시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숙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리고는 묵향을 바라보며 딱딱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 본문에 청하고 싶은 게 무엇이오?" 묵향은 피식웃은 뒤 말했다. "그런 것 없소 또, 앞으로도 청할 일은 없을 거외다" 왠지 묵향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장문인이었다 안 그래도 전대 장문인의 부탁 때문에 억지로 한 가지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 까지 자신이 양보했거늘 그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본 후 그게 필요 없다니 꼭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장문인은 발끈해서 외쳤다. "그건 무슨 말씀이오? 뭐든지 한 가지는 들어준다고 빈도가 말했잖소"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때 내가 도장에게 한 가지 청을 들어달라고 한 것은, 그 순간에 무당 장문인을 죽이지 않고 물러날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였소 그렇게 해야 함께 동행하고 있던 내 수하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을 테고 또 그 당시 본교의 교주였던 흑마대제를 납득시킬 수 있었을 테니 말이오 하지만 지금은 본좌가 교주요 본좌는 그런 청 따위 안해도 충분히 무당을 제어할 수 있소 수틀림녀 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이제 대답이 되었소?" 너무나도 광오한 묵향의 대답에 장문인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지, 지금 그 말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오?" 얼굴이 시벌개져서 따지는 장문인을향해 묵향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왜 본좌가 못할 것 같나? 본교에는 본좌 이외에도 극마급 고수가 둘은 더 있다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수들이 있지 그럼 묻겠네 무당에는 그 정도 세력이 있는가?" 당연히 있을 턱이 없다 무당으 대표하는 유일한 화경급 고수는 지금 무림맹주가 되셔서 무림맹에 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무당파의 세력이 강하다고는 해도 단일 문파로 마교에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장문인이었기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자 묵향은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화산파를 본좌가 어떻게 끝장냈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본좌에게 있어서 무당하나 박살내느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는 점을 명심해주셨으면 좋겠소이다 알겠소?" 장문인의 얼굴색이 울그락 불그락 변하는가 싶더니 치미는 화를 도저히 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어딘가 가서 화풀이라도 할 심산인 모양이다. 장문인이 나가고 난 후 묵향은 언제 자신이 그랬ㄴ는 듯 능청스럽게 장춘진인에게 말을 건냈다. "그건 그렇고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흐른 것 같소이다. 도장의 머리카락이 이렇듯 새하얗게 된 것을 보면 말이오" "허허 모든 것이 자연의 이치를 따라 변하는 것 빈도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한 것이야 세월의 흐름에 순응한 게 아니겠소" 말을 하다 잠시 멈춘 장춘진인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묵향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빈도야 그렇다 치고 시주에게는 세월의 흐름조차 비켜 가는 듯하구려 참으로 무림의 복이 아닐 수 없소이다. 무량수불" 묵향은 무슨 소리냐는 듯 피식 웃으며 반박했다. 상대가 무림의 복이라고 지켜세우는 저의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본좌가 생존하고 있음이 복이라는 것은 도장에게서 처음 듣소이다. 도장의 말씀을 무림맹의 떨거지들이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료" "허허, 그 무슨 겸양을 말씀을...... 무림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나선 시주에게 그 누가 그런 표정을 짓는단느 말이오 빈도가 비록 힘없는 늙은 도인에 불과하나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오" 묵향은 그제서야 전대 장문인의 저의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금군의 세력이 워낙 강성하다 보니 지금 본좌에게 아부를 하는 게요?" "무슨 그런 말씀을 천지만물의 모든 것이 흥하기도 하고 또 언젠가는 쇠하는 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소 비록 지금은 금의 세력이 융성하다 하나 그것이 세세토록 이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오 거기에 시주가 한 팔을 보탠는 것 뿐인데 빈도가 왜 아부까지 한다는 말씀이시오?" "참나 자신의 말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까지 들고 나오다니......" 장춘진인은 묵향에 말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어 이ㅉ 심오한 도가의 사상까지 알고 계시다는 말씀이시오? 빈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오" 장춘진인이 놀랄만도 했다. 대립전화의 법칙은 노자의 사상 중에서도 핵심을 이루는 사상으로 어지간히 도가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서는 알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데 극악무도의 대명사인 마교의 두목 묵향이 심오한 도가 사상까지 들먹이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묵향의 한마디에 장춘진인은 등골이 서늘해 지는 느낌이었다. "본좌보고 금군과 박 터지게 싸우라는 소리를 뭐 그렇게 어렵게 빙빙 돌려서 말하는지, 참내 어이가 없어서" 애써 웃는 못브을 유지하고 있는 장춘진인은 묵향이 정말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마교 교주를 무당파에서 뗴놓겠다는 젊은이들의 야무진 꿈은 실현 되지 않았다. 무당파를 나서는 인원의 수는 들어갈 때와 비교해서 하나도 더해지지도 빠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젊은이들은 교주와 헤어질 수 있다는 야무진 꿈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 까지 그들이 통과해온 거리르 따져본다면 무당산을 지나고 나서 양양성까지는 지척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래 양양성에만 도착하면 우리는 해방이야 거기에는 정파의 많은 원로 고수분들이 계실 테고 엄청난 고수들도 있을 거야 거기에서까지 교주가 깝죽거리지는 절대로 못할걸?' 모두 다 그런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며 양양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때 황룡무제가 저 지평선을 가르키며 묵향을 향해 말했다. "저기가 바로 양양성입니다. 아직까지 송군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것을 보면 무사한 모양이군요" "그런 것 같군" 다른 사라들은 이들의 대활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룡무제가 가리키는 곳을 봐도 보이는 것은 거의 없었ㄷ. 아주 눈이 좋은 사람들이라야 겨우 양양성이 있다는 것 정도나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위에 나부끼는 깃발이라니? '저 둘은 저기서 뭔가를 봤다는 말인가?' 7봉 4룡의 젊은이들은 저 두 사람이 얼마나 엄청난 고수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진팔은 수련에 여념이 없었ㄷ. 그때, 자은 꺠우침을 얻은 이후 진팔은 더욱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모든 초식이 물 흐르듯 연결될 것만 같은데, 막상 실행을 ㅎ보면 그게 안 되는 것이다. 애써 노력은 해봤지만 초식이 뒤엉키거나 내력의 흐름이 불안하여 연결이 안 된느 것ㅇ다. 그래도 진팔은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하면 뭔가를 양손에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잡힐 듯 잡힐 듯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 것이다.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해라 무공이란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 것, 그런 식으로 무리하게 초식을 연결하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몸이 상할 수도 있음이야" 진팔은 소연의 말에 한 차례 심호홉을 한 뒤 천천히 몸을 세웠다. "뭔가 될 것도 같은데, 그게 잘 안 되니 정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사저" 소연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미 그녀도 그 길을 가봤기에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 것이다. 만약 초식같이 고정화되어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조언이라도 해주련만 이것은 그거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초식의 틀을 깬 후의 몸놀림은 같은 천지문의 고수라도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각자 초식을 깨는 와중에 깨달은 것이 틀리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조급해 할 것 없다 나도 네 마음 추분히 이해한단다 마음은 앞서가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니 정말 안타깝겠지 하지만 무턱대고 도를 휘두른다고 해봐야 몸만 상할 뿐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보거라 초식의 틀을 완전히 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소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구슬픈 금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만통음제가 타는 금음이었다. 저음(低音)을 찾아 애절하게 흐르는 그의 선율은 너무나도 애달파서 듣는 이의 마음을 침욿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다며 악비 대중군이 제발 밤에는 금을 타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도 슬픈 곡이로구나" 왠지 감상에 젖은 듯한 소연의 중얼거림에 진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음(音)이라고는 잚 ㅗ르지만 저 곡을 들으면 만통음제 어르신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누군가를 정말 그리워하시는 것처럼 아주 애절한 음률이라 듣기에 참으로 안타깝군요" 어느새 소연의 눈가에는 살짝 이슬이 맺혀 있었다. 애절한 금음을 듣고 있자니 가슴 속에 고이 묻어두었던 과거의 상처가 조금씩 파헤 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눅누가를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야" 과거 소연은 장진사형으 사모했었다 하지만 그는 문주의 둘째딸과 결혼해버렸다. 워낙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벌써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저 곡을 듣고 있으니 자꾸 그가 생각나는 것이었다. 소연이 과거의 사랑을 생각하고 있을 때 진팔은 그런 소연을 애절한 눈비층로 바라보고 있었ㄷ. 진팔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첫사랑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사저였으니 말이다. 사랑한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사랑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하지만 진팔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그렇게도 사랑하는 사저가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사저를 바라보던 진팔은 거칠게 머리를 흔든 뒤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 그토록 그리워하시는 분을 꼭 만났으면 좋겠군요" 한동안 양양성을 휘감고 돌던 애절한 금음이 어느 순간 들리지 않았다 잠시 사저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의 늪에 빠져 있었던 진팔은 이를 악물고 연무장으로 걸어나가싿. 미친 듯이 수련이라고 해야 사저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팔다리를 푼 뒤 다시 수련을 시작하려던진팔은 전신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것을 느꼇다. '흐억!' 이게 뭐란 말인가? 너무 쉬어서 몸이 차가워졌나? 그렇게 날씨가 차가워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소림과 ㅎ마께 갑자기 떠오른느 기묘한 불안감을 또 뭐란 말인가 한참동안 수련에 마음을 집중하지 못한 진파은 자시도 모르게 성문 쪽을 바라봤다 마치 불안함의 근원이 그쪽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19권 끝!> 겁나게 힘든 핸드타이핑 작업이 끝났습니다. 진짜 짜증 처음에는 가볍에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으로했었는데... 젠장! 이거 한권을 타이핑한다는거 장난이 아니네요 어쨋든 즐독하시고 이걸 퍼가셔서 뭘 하시던 상관안합니다만 출처만을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소설 핸드타이핑맨 by. 岳飛 by. 블루블랙 블 묵향20권 1.양양성의밤 2.수라도제의 야무진꿈 3.지팔의 수난 4.추혈광마 5.종남파의 멸문 6.벽곡단 1알의 의미 7.10년간 봉문하라 8.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 9.공동파로 가는길 10.흑살마왕 장인걸 11.흔들리는 무림맹 12.운이 좋았다. 13.남양에 던진미끼 14.덫에 걸린 옥대진 15.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16.북쪽이 심상치 않다. 양양성의 밤 전략적인 요충지에 세워진 양양성인 만큼 그 성벽은 대단히 높았다. 높은 지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면 유리함도 있겠지만,지금처럼 사위가 어둑할 때는 접근하고 있는 자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인식하기사 곤란하기도 하다. 성문 위 망루에서 경계를서던 별사들은 100여 기에 달하는 인마가 양양성으로 접근해오자 바짝 경계하며 외쳤다. "누구냐?" "황룡문에서 지원 차 왔소!" 황룡문이라는 문파는 잘 모르겠지만,어찌되었건 무림의 문파 이름인 듯했기에 병사는 아래쪽을 향해 공손히 외쳤다. "자,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성문 위에서 파수를 보던 병사들 중 한 면이 다급히 무림인을 부르기 위해 달려갔다. 한눈에 척 보기에도 상대가 금나라 병사들이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그래도 성문을 열어주려면 그들의 정체를 정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군문에 몸담은 장교가 아닌 무림인을 찾아 달려간 것이다. 잠시후,경공술을 발휘하며 몇몇 무림인들이 달려왔다. 곧이어 그들은 황룡문의 복색을 하고 있는 무사들 앞에 서있는 황룡무제를 발견하고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어서 문을 열어주도록하시오.그리고 자네는 태상문주님께 황룡문주께서 도착하셨다고 전하게나." 빠르게 지시를 내린 한 무인의 뒤에 서있던 무사가 황룡문주의 도착을 전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몸을 몇 바퀴나 회전시키는 화련한 몸놀림을 선보이며 착지한 그는 그대로 허리를 깊숙이 조아리며 포권했다. "무림말학 이청중이 활룡문주님을 뵙습니다." 그 모습을 본 황룡무제는 상대의 매끄러운 신법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허어,대진검 소협의 신법만으로도 서문세가의 저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군." 황룡문주 같은 대단한 인물이 자신의 명호를 알고 있다는 것이 매우 기쁜 듯 이철중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원로에 여기까지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자,안으로 드시지요.이미 기별을 넣었으니 태상문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러면서 이청중은 이제야 서서히 열리고 있는 성문 안쪽을 가리켰다.황룡무제는 흡족한 듯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나."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는 이청주의 뒤를 따라 양양성 내로 들어선 묵향은 황룡무제에게 슬며시 말 했다. "이제 여기서 헤어져야겠군." "아니,숙소도 정하지 않으셨을 텐데,어디 가실 곳이 있으십니까? 여기에 짐결한 무사들을 이끄시는 분은 수라도제 어리신입니다. 저는 지금 그분을 뵈러 갈 건데,노야께서도 함께 가시도록 하시죠." "아닐세.수라도제는 다음에 만나기로 하지.그 전에 만나볼 사람이 있어." "노야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가 없군요.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황룡무제와 헤어진 묵향은 곧바로 만통음제를 찾기 시작했다. 만통음제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처음에는 개방의 거지들을 족쳐 만통음제의 위치를 알려 했으나 굳이 그럴필요가 없었다.만통음제가 이곳에 와서 매일 밤 금을 탔는지, 개방의 거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묵향의 귀에 지나가는 행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허어,오늘은 아직 금음이 들려오지 않는군." "조금 기다려야 할 걸세.아직 해가 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잖은가." "그런가?나는 그 금음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마치 신선이 타는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네.자네는 그렇게 안 느꼈는가?" "맞아,천상의 음률이지." 그 외에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만통음제가 타는 금음에 대한 대화임에 틀림없었다. 묵향은 그들에게 금음이 들려오는 방향을 물은 뒤 그곳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그 근처에 도착한 묵향은 가만히 눈을 감고 만통음제가 뿜어내고 있는 존재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뿜어내는 기의 성질은 조금씩 다르다.더군다나 내공을 연성한 무인이라면 각자 익힌 무공의 성질에 따라 그차이는 더욱 커지기 시작한다.물론 절절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면 몸속에 자신의 기운을 갈무리하여 숨기기에 그것을 포팍하기는 아주 힘들어진다. 더군다나 묵향이 찾고 있는 상대는 반박귀진의 경지에 들어서 있는 만통음제였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묵향보다 급이 떨어지지 않는가.동급만 되어도 찾아내기 힘들겠지만 묵향은 만통음제에 비해 한 차원 높은 고수였다. 잠시 후 눈을 뜬 묵향의 입가에는 만통음제의 기를 찾았는지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수라도제와 황룡무제는 거의 친분이 없는 사이였다.같은 정파 무림소속이라는 점만 빼면 문파간의 교류도 없었고,또 서로를 필요로 하는 입장도 아니었다.수라도제가 봤을 때 황룡문은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신흥방파일 뿐이었고,큰 야망이 없는 황룡무제의 입장에서는 구태여 멀리 떨어져 있는 서문세가라는 거대방파와 친분을 맺기 위해 노력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지극히 의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수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잠시 양양성의 정세에 대한 토론을 나눈 뒤 헤어졌다. 황룡무제가 돌아간 후,수라도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새벽이 되면 칠흑과도 같은 어둠도 더오르는 태양에 흩어져버리듯,욱일승천하는 듯하던 금의 성세(盛世)도 이제 그 끝이 멀지 않은 듯 느껴졌다.수라도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현 무림 최강의 고수들 가운데 무려 4명이나 이곳 양양성에 와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뒤에서 지원하고 있는 무림맹주와 옥화무제까지 합하면 6명이 된다. 미쳐버려 종적이 묘연한 만사불황과 몇 년째 은거중인 곤륜무제을 제외한다면 현 무림의 모든 초고수들이 금과의 전쟁에 뛰어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대세를 따라가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무인들을 총괄 지휘하게 될 사람이 누구인가.바로 수라도제 자신이 아니던가. 그렇게 되면 자신은 엄청난 명예룰 얻게 될것이고,모든 무림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될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수라도제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허헛,참.현천검제가 죽은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로구먼.하산파가 건재했었다면 큰 힘이 되어줬을 것인데……." 바로 이때,문빡에서 경비무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한방중에 태상문주의 휴식을 방해한 것이 죄송한 듯 그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태상문주님.태상문주님을 뵙기를 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어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황룡무제를 만난 뒤 무림에서의 놀아진 자신의 위상에 흐뭇해하던 수라도제는 갑작스러운 경비무사의 말에 그 흥이 깨지자 짜증이 밀려왔다.그렇기에 수하에게 질문을 던지는 수라도제의 음성은 중후하기는 했으나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누군데 그러느냐?" "예,매화검 옥대진 소협과 그분의 친구들입니다." "옥대진이라고?" 수라도제의 안색이 조금 더 찌푸러들었다. 그가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수라도제가 기억하고 있는 옥대진이라는 녀석은 제법 뛰어난 후지기수라고 칭해지는 놈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는 배경 또한 화려했다.아마도 자신의 배경을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감히 노부가 누군 줄 알고……. "내일 날이 밝으면 찾아오라 일러라." 그러자 문밖에서 경비무사가 아닌 다른 젊은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라도제 대협!마교에 관한 일입니다.제발 저희들을 만나주시기를 청합니다." 마교하는 말에 수라도제의 눈썹이 꿈틀했다.지금은 어쩔 수 없이 동맹을 맺고 있으나 그는 평생 동안 마교와 싸워온 사람이 아닌가.결코 마교와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마교에 대한 급한일이라는 말에 옥대진에 대한 불쾌함도 잊을 만큼 마교에 대한 원한이 큰 수라도제였다. "뭣이,마교하고?들라고 해라." "예." 곧이어 문이 열리며 젊은이들이 우루루 들어왔다.모두 다 옥대진과 같은 7룡4봉에 꼽히는 젊은이 들었다. 각대문파의 신진기수라 말해도 충분한 7룡4봉이 한꺼번에 자신을 찾아오자 수라도제는 흥미를 느끼며 질문을 던졌다. "마교에 대한 일이라고?그래,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저희들은 방금 전에 황룡무제 대협과 합께 양양성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일행 중에는 마교 교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뭣이!" 그 말은 정말이지 수라도제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기에 아무리 노회한 그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그 말이 사실이냐?정말 마교 교주가 양양성에 들어 왔단 말이냐?"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허어,참." 혀를 차는 수라도제의 마음은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곳 양양성에 배치된 모든 정파의 고수 들을 지휘라는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아무리 상대가 마교 교주라 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곳에 도착한 즉시 자신을 찾아오거나,적어도 자신이 도착했다는 전갈이라도 보내주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마교 교주라는 놈은 자신이 거느리고 온 세력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토록 정파 무인들을 총괄하는 자신을 업수이 여긴단 말인가.설마 자신의 세력이 더 크니 나보고 알아서 인사하러 오라는 말인가?수라도제로서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지만 그것도 잠시.수라도제는 마음을 바꿨다.자신이 좀더 대범하게 보이는 것이 좋겟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어쨌거나 이곳에서 정파 무림인들을 총괄하는 것은 자신이니까 말이다. 언짢은 기분은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동맹 상대인 마교도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총관을 불러라!빨리." 잠시 후 총관은 헐레벌떡 도착했다.자다가 일어났는지 차림새가 영 말이 아니었지만,그는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수라도제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속하를 급히 찾으셨습니까?태상문주님." "마교도들이 도착했다고 한다.특히 교주까지 온 모양이니 그들에게 최대한 좋은 거처를 마련해 주도록 해라.지금은 동맹자의 입장인 만큼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예,태상문주님." 총관이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할때,옥대진이 그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닙니다,수라도제 대협.마교의 정예세력들이 도착한 것이 아니라 교주 한 명만 저희들과 같이 동행한 것입니다." "뭐?" 그 말에 수라도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이놈이 지금 제정신이라는 말인가?물론 옥대진 한 놈이 와서 이따위 헛소리를 했다면 반쯤 죽여놨갰지만,여럿의 동료들과 함께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보니 옥대진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호위하는 무사들도 없이 말이냐?" "그렇습니다.교주 단 한 명뿐입니다." 수라도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어떻게 교주 혼자 이곳에 오겠는가. 거대 세력의 수장인 교주라면 몇십 명의 호위무사들을 거느리고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가 움직인 곳이 마교의 세력권 내라고 하더라고 믿기가 힘든 일인데 이곳은 얼마전까지 원수같이 지냈던 정파의 핵심전력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닌가?그렇기에 수라도제는 다시 한 번 옥대진을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자네 지금 노부에게 농을 하자는 것인가?" "어지 제가 감히 수라도제 대협께 허언을 아뢸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저희와 함께도착한 황룡무제 대협께 여쭤보십시오.제 말이 거짓인지." 그 말에 수라도제는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도대체 간덩어리가 얼마나 큰 자이기에 이토록 대범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그리고 그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ㄷ도 자신이 지닌 무공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림 역사상 최초로 탈마(脫魔)를 이룩한 자라더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 거짓이 아니로군. 강호에 그 누가 있어서 이토록 대범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수라도제 대협." "뭣이 말이냐?" "저희들이 수라도제 대협을 이렇게 한밤중에 찾아뵌 것은 한 가지 드릴 말씁이 있기때문입니다. 교주는 양반(襄礬)인근에서 저희들과 합류했습니다.그런데 저희들과 합류한 후,교주는 외부와 그 어떤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교주와 연락하기 위해 접근해왔다면 먼저 황룡무제 대협의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그분의 이목을 속이며 접근할 수 있는 고수의 수가 결코 많은 것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이리저리 말이 늘어지는 것 같았기에 수라도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흠,그래서 자네가 노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이 기회에 그자를 제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수라도제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뭣이?그런 망발을 노부에게 하다니,네놈이 제정신이라는 말이냐? 그가 단신으로 이곳에 온 것은 그만큼 무림맹을 신뢰한다는 것을 과시하는 행동이 아니더냐. 그런 그에게 유ㅏ햐룰 거런더묜 무림맹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느냐?" 수라도제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옥대진은 전혀 기죽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단신으로 왔다고 말입니다.이곳에서 그를 없앤다고 하더라도 이쪽과 무관하다면서 시치미 뚝 떼면 그만입니다.안 그렇습니까?"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수라도제의 머릿속은 그게 과연 가능한지에 맞춰져서 바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교도들이 말하는 탈마급의 고수라면,정파에서 말하는 현경급의 고수라는 말이 된다. 현경이라는 경지의 무예를 지닌 자와 단 한 번도 겨뤄본 적이 없었기에 화경급 고수보다 월등하게 강할 것이하는 것만 예측할 수 있을 뿐,그게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곳에는 지금 화경급 고수만 4명이 집결해 있는 것이다. 그 외에 신검합일 정도의 고수들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엄청나게 늘어난다.뭔가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그를 적당한 곳으로 꾀어낸 후 포위하여 공격한다면 충분히 없앨 수도 있을 것이다. 수라도제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자,다급해진 옥대진은 마교 교주를 신랄하게 헐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이라는 적이 사라졌을 때,결국 마교와 정파는 또다시 대결라지 않을 수 없는 구도가 된다. 기왕 그렇게 될 것이 확실한데 이 기회를 빌어 사파의 최강자를 이곳에서 없애버린다면 정도 무림은찬란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말도 덧붙였다. 거기에다 옥대진 외에 다른 후지기수들도 앞 다투어 교주애 대한 악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직접 당한 것이 있는 만큼 그들의 말은 다분히 감정이 서려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과연 교주를 없애는 것이 가능한가를 다지고 있는 수라도제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움직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수라도제의 야무진 꿈 설취는 사부님께 올리기 위해 차를 나르던 중이었다. 이때,갑자기 묵향이 내실 쪽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그것을 보고 설취는 너무나도 놀라서 쟁반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와장창! 이다음 사숙님을 만나면 꼭 물어볼 말이 있었다.하지만 갑자기 그 당사자가 불쑥 나타나다 보니 설퓌는 너무 놀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머릿속을 뱅뱅 돌고 있었지만,막상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안쪽에서 사부의 중후한 목소리가 너자먹허개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그 목소리에 설취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다소곳이 대답했다. "묵향 사숙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부서지듯 벌컥 열리며 만통음제가 달려 나왔다.묵향의 모습을 발견한 만통음제는 얼마나 반가운지 묵향의 손을 덥썩 잡은 뒤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네가 왔구먼.어서 들어오게.동생을 여기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늘…….허허,너무나도 반갑구먼." 마음 속 싶이 우러나는 만통음제의 환대가 묵향으로 하여금 미소짓게했다. 한참동안 묵향에 대한 반가움을 표시하던 만통음제는 고개를 뒤로 돌려 아직까지도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설취를 향해 지시했다. "취아는 빨리 가서 좋은 술을 구해오너라.오늘 같은 날 마시지 않는다면 어제 마신다는 말이냐." "예." 그날 묵향과 만통음제는 밤새도록 술잔을 ㅈ나누며 악기를 연주햤다.오랜시간 지음(知音)을 찾아 외로이 떠돌던 금음(琴音) 은 기날 오랜만에 피리소리를 만나를 만나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며 밤하늘로 퍼져 나갔다. 그날 밤,사저에의 연정에 괴로워하며 우울한 표정으로 밤하늘의 별을 세고 있던 진팔의 귀에 금음이 들려왔다.그런데 지금껏 들어 왔던 것과 달리 애절함보다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끼고 진팔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타는 건가?" 진팔이 그렇게 느낄 정도로 지금까지 들어왔던 만통음제의 금음과는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하지만 진팔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토록 아름다운 음률ㄱ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만통음제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금음을 ㅇ휘감아 돌며 아름다운 피리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그 두 가지 음은 절묘하게 어울리며 진팔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어엇!저 피리소리…….저게 만통음제 어르신이 그토록 찾고 계시건 친구분이신 모양이구나.정말 잘 어울리는군어떤 분 이신지 절말 궁금하네.무림명숙이실 게 분명한데 말이야." 진팔은 어느 고인이 있어 이렇게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낼 수 있는지 상상해 보았다. 분명 티끌 한 점 없는 고아한 풍모의 고인 일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념도 잠시,진팔은 곧 아름다운 선율에 흠뻑 젖어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만통음제는 수라도제를 만나러 갔다. 수라도제가 긴히 할 말이 있다는 전갈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만통음제가 나간 후, 딱히 할일이 없었던 묵향은 악기 손질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묵향이 섬세한 비단천으로 피리를 닦고 있을 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기침하셨습니까? 사숙님." 설취의 다소곳한 음성이었다. "들어오너라." 설취는 방금 만든 향긋한 내음의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노부는 그런거 따지지 않으니 걱정 말거라." 잠시 차를 마시던 묵향은 설취를 지그시 바라봤다. 차를 건넸으면 나가는 것이 순서일 텐데, 나가지 않고 미적거리며 앉아 있다. 묵향이 가만히 그녀의 눈치를 보니 뭔가 자신에게 말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듯 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 형님이 안 계실 때 찾아온 것을 보니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저, 한 가지....." "그래, 말해 보거라." 잠시 망설이던 설취는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혹시 과거 사숙께서 천양에 있는 천일루에 가보신 적이 있는지요." 워낙 뜬금없는 질문이라 묵향은 고래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사실 묵향이 천일루에 간 게 몇십 년전인데 그걸 기억하고 있겠는가. "천일루라....... 글쎄, 가봤는지 안 가봤는지 기억에 없는걸." "천일루에서 무산오웅이라 불리우던 무당파의 다섯 고수를 베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곳이 천일루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당파의 다섯 고수를 벤 기억은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무당파에 찾아가서 무력시위까지 벌인 적이 있었고, 또 며칠 전에 무당파에 찾아갔을 때 무당파의 전대장문인과 함께 얘기까지 나눴으니 그 사건이 기억나지 않을리 없었다. 묵향이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혹시 너도 그곳에 있었느냐?" 설취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사실이었구나. 그때 그사람이 사숙이었어.' "흠, 그곳에 있었던 모양이군. 노부조차 잊어버렸을 정도로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인데,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정말 생각조차 못해봤구나." "소녀가 무림에 나와서 처음 본 일이었는데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혹여 노부가 그때 네게 못할 짓을 했던 게냐?" "아, 아닙니다. 사숙." 화들짝 놀라며 세차게 고개를 젓는 설취였지만, 묵향이 가만히 바라보니 아무래도 느낌상 뭔가 있는 것 같았다. 묵향은 속으로 '젠장, 뭔가 있기는 있군.' 하고 생각했지만, 구태여 물어보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그만 나가보거라, 차는 잘 마시마." "예." 설취가 나가고 난 후 묵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젠장, 저 아이가 무산오웅하고 관계가 있었나? 뭐 , 그래도 어쩔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들의 복수를 한답시고 주제파악도 안하고 칼을 뽑아 들면 어떻게 하지? 형님이 아끼는 제자인데 죽일수도 없고. 거참 일이, 재미없이 꼬이는군." 묵향이 혀를 끌끌 차던 그 시간, 수라도제는 만통음제와 패력검제 그리고 어제 저녁 도착한 황룡무제와 함께 양양성 내에 마련한 자그마한 밀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황룡무제를 소개하며 잠시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수라도제는 정색을 하며 그들을 아침 일찍 이곳으로 청한 이유를 밝혔다. "어제 황룡문주와 함께 마교 교주가 도착했소." 그 말에 패력검제의 눈썹이 그의 격동하는 내면을 반영하듯 꿈틀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황룡무제야 그와 함께 왔으니 알 것이 분명했고, 또 다른 한명인 만통음제는 어제 밤늦게까지 묵향과 술잔을 나눴으니 수라도제의 말이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노부가 그대를 청한 것은 이 기회를 빌어 그를 없애는 것이 어떤지 물어보기 위함이오. 그는 마교가 배출한 최고의 고수라는 칭호를 받고 있고, 그가 교주가 된 이래로 마교의 위세가 날로 상승하고 있음이 사실이지 않소이까. 지금 그는 간 크게도 단 한명의 호위무사도 거느리지 않고 이곳에 와 있소." 여기에는 정파 무림의 핵심전력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화경에 이르는 고수 4명으로만 그를 상대해야 한다면 조금 힘이 모자랄지도 모르지만 각 문파가 자랑하는 신검합일급에 이르는 쟁쟁한 고수들까지 몽땅 다 동원한다면 충분히 교주를 때려잡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수라도제로서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만통음제가 얼굴가득 노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던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노부를 불러내더니 겨우 그따위 망발이나 하려고 한 것이오? 노부는 그런 치졸한 일에 끼지 않겠소, 아니, 만약 노부의 의제를 건드리려 하는 자가 있다면 노부가 직접 그 놈의 멱줄을 따버릴 것이니 그리 아시오!" 만통음제는 벌떡 일어서더니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셋은 한동안 기가 막혀서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설마 만통음제가 마교 교주의 의형일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초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수라도제가 만통음제가 던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패력검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거기에는 반대입니다." "아니, 어떻게 자네까지 그럴 수 있는가? 자네의 사문은 마교와 크나큰 은원관계를 맺고 있음을 노부가 잘 아는데......" 그 말에 패력검제는 손을 내저으며 낮지만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를 암습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수라도제 어르신께 크게 실망했습니다." 황룡무제도 옆에서 고개를 끄떡거리며 힘 있게 말했다. "그 의견에 저도 전적으로 찬성입니다. 이쪽을 믿고 단신으로 온 동맹자에게 취할 행동은 절대로 아니지요. 방금 전에 하신 어르신의 말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른 둘도 벌레 씹은 듯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버린 후, 수라도제는 그 자리에 멍청하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허어, 어찌 이런 일이 있을수가....." 수라도제로서는 황당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는 마교교주를 때려잡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잡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의 무공기 강하다고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닌가. 물론 정의를 추구하는 정파 무림으로서 연수합공으로 습격을 한다는 것이 수라도제로서도 마음에 걸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다 무림정의를 위한 것이 아닌가. "나쁜 녀석들! 우냐, 네놈들은 자기 손을 더럽히기 싫다면 노부 혼자서라도 해주마. 여기 네놈들 말고 고수가 한 명도 없는 줄 아느냐?" 수라도제의 입에서는 다분히 감정적인 어조가 흘러나올 수 밖에 없었다. 수라도제는 크게 소리쳐 모든 무사들을 모이라고 외치려고 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수라도제의 마음 속에서 그래봐야 불가능하다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탈마급 고수 한 명도 감당이 불가능할 지경인데, 거기에 만통음제까지 가세한다면 그들을 없앤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된다. 물론, 그들이 정면대결을 해온다면 엄청난 희생을 치르기는 하겠지만 그들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도망치려고 작정한다면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허허~, 참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노부의 실수로다. 화경까지 올라간 자들이라서 자신이 지닌 무공에 대한 자만심이 크다는 것을 간과한 노부의 실수야. 아직까지 세상의 쓴 맛을 적게 본 그 녀석들의 입장에서, 합공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겠지. 거기에다가 그 늙은 것이 교주 놈과 의형제지간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너무나도 뼈아프구먼........." 수라도제는 묵향이 이들과 조금씩의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때, 차츰 이성을 회복하기 시작하고 있는 수라도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이 떠오르는 순간 그의 머리 속은 흡사 찬물을 들이킨 듯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나저나 이 일을 어찌한다? 그 늙은 것이 교주에게 이 일을 일러바친다면 일이 아주 고약하게 꼬이게 생겼는데?" 아침 일찍 수라도제의 호출을 받고 나갔던 의형이 투덜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보고 묵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만통음제가 이렇듯 화를 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왜 그렇게 심기가 상하셨습니까?" "아, 동생. 내 말 좀 들어보게나. 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는지." 그러면서 그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묵향에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다 들은 묵향이 통쾌하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만통음제는 표정을 굳히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렇게 웃고 있을 시간이 없네. 지금 빨리 짐을 챙겨서 이곳을 뜨는 게 좋을 듯하이. 안 그런가?" 다급한 만통음제의 심정과는 달리 묵향은 웃음을 터뜨리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하하핫! 과연 수라도제. 아마도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기는 싫었겠죠. 형님까지 합세한다면 운 좋으면 성공할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과거 한중길 교주에게 이런 식으로 한 번 당해본 적이 있는 소제입니다.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여기에 온 줄 아십니까? 만약 여기에 형님이 안 계셨다면 저는 부교주들 중에서 한 두명을 데려왔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형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혼자 온거죠. 4:1로도 승산이 있을까 말까 한 일이 3 : 2가 되면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하지만 이곳에는 정파의 수많은 고수들이 모여 있다네. 그들을 모두 동원한다면." 묵향은 싱긋 미소지으며 만통음제의 말을 막았다. "정면대결이라면 모르지만 도망치려고만 들면 그런 놈들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근처에는 제 수하들도 와 있습니다. 그런 만큼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것 따위는 하나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말에 만통음제의 안색에도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그런가?" "자,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시고 양양성이나 좀 구경시켜 주십시오. 주위의 경관이 십만대산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수려하더군요." 진팔의 수난 언제나 그러하듯 진팔은 아침에 일어나 수련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목적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길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진팔의 모습을 소연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씩의 조언은 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자신이 직접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순간이 될 수도 있고, 영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 저 먼 곳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소개해주고 싶은 녀석은 저녀석일세." 그 목소리가 만통음제의 것임을 진팔은 재빨리 알아챘다. 아마도 만통음제는 자신의 지음이 이곳으로 찾아오자, 진팔을 소개해 주려고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진팔 또한 그의 지음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만통음제처럼 선풍도골형의 고귀한 신선같은 모습일까? 아니면 패력검제처럼 이웃집 아저씨같이 소탈한 모습일까? 진팔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재빨리 그곳으로 고개를 휙 돌렸을 때, 그의 눈은 묵향의 눈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끄어어억! 아니 저 인간이 여기에 왜 있는거야?' 순간 진팔은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그의 몸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재빨리 묵향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쓰벌, 설마 만통음제의 지음이 교주일 줄이야.' 진팔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천마신교의 지존이시여'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이곳은 수많은 정파인들이 밀집된 장소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마교 교주 운운한다면 큰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교주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이곳에 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런 말을 뺀 것이다. 교주가 공개적으로 이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던 진팔이 나름대로 세심하게 배려하여 인사를 건넸건만 상대로부터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진팔이 살짝 눈을 들어 바라보니 교주의 시선을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도대체 피도 눈물도 없는 극악무도한 마두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말이다. 진팔이 묵향을 따라 재빨리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소연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삼사저와 면식이 있었나? 그런데 저 눈길이 아무래도.......' 진팔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인데, 그걸 만통음제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만통음제는 짐짓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슬며시 어기전성을 보내왔다. <역시 동생의 눈도 보통이 아니구먼. 여태껏 옆에서 지켜봐서 아는데 상당히 괜찮은 아이지. 동생도 혼자인 것으로 아는데, 이 우형이 월하노인이 되어줄까?> 묵향의 안색이 확 일그러 들었다. 월하노인이라니...., 그건 바로 중매쟁이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자신이 소연을 바라보는 눈길 하나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묵향은 자신이 얼마나 표정관리가 엉망이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때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소연도 진팔이 있는 쪽으로 재빨리 달려왔다. 만통음제가 그의 여제자인 설취와 함께 와 있는 것이다. 만통음제가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했을 때, 최고의 예우를 해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연은 만통음제의 옆에 서 있는 젊은이, 그러니까 묵향에게까지 관심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만통음제 대협." 깍듯이 인사를 건네는 소연을 향해 만통음제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차라도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느냐?" 그 말에 소연은 화사한 미소를 보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만통음제 대협." 일단 만통음제에게 인사를 한 후에야 소연은 묵향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 소연에게 묵향은 싸늘하면서도 거만한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며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아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상대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내기 힘들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양부는 언제나 그녀에게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표정을 달리하면 전혀 딴사람처럼 보이듯, 저기 딱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묵향을 보며 자애로운 양부를 기억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지금 소연은 한가하게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시간 여유가 없었다. 만통음제가 차를 한잔 달라고 하지 않는가. 소연은 다소곳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소연이 안내한 곳은 연무장 인근에 있는 작은 정자였다. 매일 진팔이 이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사제가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차를 가져다 주기 위한 간단한 취사도구를 가져다 둔 것이다. 작은 화로에 불을 붙여 물을 끓이고, 찾잔을 준비했다.그런데 잠시 소연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찻잔이 사제와 자신만을 위해 준비해둔 두 개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둘을 누구에게 권해야 할까? 그녀는 다시 한 번 정자 안을 살펴봤다. 낯선 젊은이와 설취. 그 둘중에 누가 배분이 높은지 지금 당장 추측해내야만 했다. 아무리 설취의 무공이 소연보다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녀의 사부는 만통음제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위치는 강호에서 대단히 높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사부 덕분에 왠만한 문파의 장로급과 상응하는 정도의 배분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 라는 것이 있다. 만약에 저 젊은이 쪽이 배분이 높다면? 저 젊은이에게서 풍겨 나오는 위엄은 분명 범인이 지닐 만한 것이 아니었다. 차가 다 준비되자 소연은 찻잔을 직접 권하는 대신 만통음제가 앉은 자리 앞에 놓았다. 그리고 두번째 찻잔은 설취와 그 젊은이의 사이에 놓았다. 그런 다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워낙 경황중에 준비한 것이라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닐세, 아주 향이 좋구먼." "감사합니다. 대협." 만통음제가 찾잔을 들자, 그 옆에 앉아 있던 젊은이도 찻잔을 들었다. 그것을 보고 소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놀랍게도 젊은이의 배분은 거대문파의 장로급을 상회함이 분명했던 것이다. 혹시나 했던 것이 맞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놀라움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둘을 만통음제는 힐끔힐끔 관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묵향이 소연에게 꽤나 마음이 있는 듯 행동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하는 행동이 너무나도 싸늘하면서도 딱딱하지 않는가. '허 동생이 겉보기와 달리 쑥쓰러움이 많구먼. 자고로 미인은 용기있는 자가 차지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 우형이 나서야겠어. 흐흐흐.' 만통음제는 소연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며 묵향을 소개했다. "아참, 이런 내 정신 좀 보게나. 소개가 늦었구먼. 이쪽은 내 의제일세." 그 말에 진팔은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진팔은 저 극악무도한 마두가 만통음제라는 거목의 의제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놈이 무슨 짓을 한 거지? 맞아, 만통음제 어르신은 속고 계신 거야. 그게 틀림없어. 어르신께서는 저놈이 마두라는 사실을 모르고 계실 거야. 이 일을 어떻게 하지? 살짝 알려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리고 소연은 소연대로 의제라는 말이 감추고 있는 뜻을 곱씹고는 경악하는 중이었다. 그 말은 곧 저 젊은이의 무공 또한 평범한 수준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 아닌가 '또다시 반로환동의 고수라는 말인가? 정말이지 무림은 너무나도 크고 넓구나. 큰 일이 터지자 저런 숨은 고수들이 계속 등장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소연은 살짝 눈을 들어 다시 한 번 그 젊은 이를 힘끌 훔쳐봤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체격은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그리고 타인을 압도하는 저 기도만 아니라면, 저잣거리를 다니다 보면 하루에도 수십번은 만날 수 있는 그런 얼굴일 정도로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눈에 익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지만 말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지문의 소연이라고 합니다." 공공연히 만통음제가 소연에게 자신을 소개하자 묵향은 내심 격동을 감추기 어려웠기에 슬쩍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마도 그 모습이 소연에게는 강인한 자의 거만함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이 때, 만통음제가 덧붙여서 설명했다. "허헛, 노부의 동생은 무림에 마교 교주로 알려져 있다네. 어쩌면 자네들은 천지문도들인 만큼 이미 동생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먼." 그 말을 들은 진팔은 더욱 경악했다. 어떻게 저자가 마두라는 사실을 알고 의동생을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만통음제가 제정신인가? 진팔이 경악하고 있는만큼, 소연 또한 그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동그래졌다. 하지만 잠시의 그 경악감이 지나간 후, 소연은 자신의 결례를 인식하고는 다소곳이 말했다. "교주님께서 천지문에 많은 은혜를 베푸신 점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진양 문주와 한중길 교주와의 일이었으니 본좌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감정르 숨기다보니 오히려 묵향의 말투는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해져 있었다. 소연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목소리에서 감정이 묻어나올 듯 했기에, 묵향은 진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그때 봤을 때에 비해 진일보했구먼, 아주 빠른 성취야. 여기서 싸우면서 뭔가 느낀 게 있는 모양이지?" "예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진팔의 겸손한 대답에 만통음제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작은 깨달음이라..... 절정에 들어가는 초입을 작다고는 볼 수 없지. 그렇지 않은가? 동생." "물론이죠, 무림에 수많은 고수들이 있지만 초식의 틀을 깬 존재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제 그 지고한 경지에 첫발을 들여놓았으니 축하할 일임에 틀림없지요." 그 말에 진팔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런 검론은 듣기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밖에 없는 것이 천지문이라는 문파 자체가 배출한 최고 고수가 신도합일급이니, 그 윗경지에 대한 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던 것이다. "예? 지고한 경지의 첫발이라니요?" "초식의 틀을 완전히 깼을 때, 화경이 열린다는 말이야. 자네의 경우는 이제 걸음마 단계라고 볼 수 있지. 기존 초식을 물흐르듯 연계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를 보고 사람들은 무기와 하나가 되었다고 부르지. 바로 신도합일을 말함이야. 그런데 아무리 완벽한 도법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만든 것인 이상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거든. 그것을 깨닫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초식의 벽을 허물었을 때, 세인들이 말하는 화경에 들었다고 할 수 있지. 그리고 초식을 허무는 것의 완성형을 현경이라고 말하는데, 의식와 무의식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을 때 가능한 것이야." 현경에 대한 얘기는 만통음제도 처음 듣는 말인지라 잠시 묵향이 한 말을 곱씹으며 되새기고 있었다. 그가 가야 할 다음 단계가 바로 현경이니 말이다. 만통음제가 뭔가 묵향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순간, 묵향이 먼저 진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첫발을 들인 기념으로 한수 지도해 주지." 그 말에 진팔의 입이 기쁨으로 쭉 찢어졌다. '흐흐흐, 이런 횡재가 있나, 어제 내가 무슨 꿈을 꿨더라?' 교주의 제의를 받은 진팔은 해묵은 감정이 어느 샌가 증발해 버리는 자신을 느꼈다. 과거 그 때문에 지독한 고생을 한 것도, 또 지금껏 쌓여있던 감정도 모두 다 사라졌다. 무림 최고수가 한 수 가르쳐준다는 데야 사양할 이유가 없겠지만, 진팔은 상대의 제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예? 정말이십니까?" "물론이지, 대신 천지문의 무공을 본좌한테 알려줘야 해. 자네가 가장 자신있게 사용하는 도법과 신법을 말이지." '이런 젠장, 어쩐지 너무 조건이 좋다고 생각했어.' 그 말에 진팔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의는 감사드립니다만, 대인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원래 무공이라는 것이 문외불출이라 가르쳐 드릴수가 없습니다." 해묵은 원한이 사라지고, 교주에 대한 따스하기 그지없는 호의감이 싹트고 있어서 그런지 진팔의 입에서 '대인'이라는 극존칭의 단어가 서슴없이 흘러나왔다. 묵향은 진팔의 대답에 기분이 상한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문외불출 좋아하고 앉아 있네. 본좌가 그딴 쓰레기 같은 도법이 필요해서 네녀석한테 이런 제안을 하고 있는 줄 알아? 네가 익히고 있는 무공만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비무가 가능한지 내가 직접 보여주려는 거야. 아마 네놈은 상당도 해본 적이 없는 세계일걸? 어때 생각할 시간을 딱 1각 주마. 결정하거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만통음제가 끼어들었다. 그도 과연 천지문의 도법이 묵향의 손을 거쳐 어떤 모양으로 거듭나게 될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이보게 소형제. 한 번 해보지 그러는가? 이런 기회는 평생을 통틀어 단 한번도 찾기 어려운 기연임을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쓰레기 같은 도법이라는 말에 울컥하고 있던 진팔이었지만, 만통음제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일리가 있는지라 그는 난처한 얼굴로 소연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녀가 허락만 해준다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팔의 시선을 받은 소연은 잠시 궁리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타인에게 본문의 무공을 무단으로 가르쳐준다는 것은 가장 큰 중죄들 중의 한가지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것을 가르쳐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가. 중원 최강이라 불리는 고수다. 아마도 그가 익히고 있을 막강한 무공들에 비한다면 천지문의 도법은 삼류무공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무공에 대한 그녀의 호기심도 한몫했다. 그가 펼치는 천지문의 도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윽고 결심했는지 소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허락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자 진팕은 다급히 교주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묵향은 활짝 미소지으며 진팔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자네는 정말 탁월한 선택을 한거야. 자 이제 자네가 즐겨 사용하는 무공을 가르쳐줘야겠지?" 상대의 태도가 너무 친근한 것 같아 진팔은 오히려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거 내가 뭔가 속고 있는 거 아냐?' 그렇다고 그걸 상대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진팔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제가 사용하는 도법은 선풍도법입니다. 구결부터 말씀드리자면....." 진팔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리며 묵향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구결은 필요없으니 저기 가서 한 번 시범을 보여 봐." "구결이 없어도 괜찮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죠." 구결을 안 가르쳐줘도 된다는 말에 진팔은 오히려 좋아라했다. 구결이 빠진 껍데기뿐인 도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말 한마디에 진팔의 불안감은 사라졌다. 옆에서 다른사람이 수련하는 모습을 며칠간만 훔쳐봐도 초식의 겉모습은 금방 습득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각 문파가 자랑하는 최강의 무공들이 적전으로만 이어져 내려오는 이유가 뭔가? 그게 다 초식을 사용함에 있어서 내공을 어떤 식으로 운용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고 있는 구결이 없다면 모방 자체가 불가능 하기 때문이 아닌가? 설혹 모방했다손 치더라도 제대로 된 위력은 결단코 나올 수가 없었다. 구결을 알려주지 않아도 되기에, 사문에 큰 죄를 범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진팔은 아주 당당하게 연무장으로 내려가 도법을 시연하기 시작했다. 진팔의 도가 장쾌한 움직임을 보이며 선풍도법의 초식을 하나씩 보여줬다. 진팔이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들을 선보이고 나자, 묵향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비무를 하기 위한 무기를 찾기 위해서였다. 마침 적당한 크기의 나뭇가지가 보였기에 그걸 잘라 대충 다듬은 후 붕붕 소리가 나도록 휘둘렀다. "제법 쓸만하군" 그걸 보며 만통음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 실력의 고수라면 무기가 뭐건 큰 장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일격을 당하는 입장이라면 진짜 도보다는 목도쪽이 훨씬 상처가 적을 것은 확실하지 않겠는가. 묵향이 진팔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가보다 하고 생각하는데, 묵향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왓다. "사람잡는 것도 오랜만이군. 흐흐흐, 네놈의 맷집이 좋기를 바란다." 워낙 낮은 목소리였기에 소연은 묵향의 말을 듣지 못했지만, 만통음제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 말을 듣고 만통음제는 묵향이 왜 진팔과 비무를 하겠다고 한 것인지 한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혹시 해묵은 원한이라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다음에 전개된 비무를 본 만통음제와 소연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묵향이 진팔을 개 잡듯이 때려잡기 시작했기에 그들이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건 처음부터 예상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놀란 것은 묵향이 사용하고 있는 무공에 있었다. 어떻게 단 한번 겉모습만 훑어본 타 문파의 무공을 저렇듯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각 초식의 앞뒤가 뒤바뀌기도 하고, 순서가 뒤죽박죽 뒤셖어 사용되었기에 완전히 다른 도법처럼 보였지만 가만히 따져보믄 천지문의 선풍도법이었다. 소연은 비무를 바라보며 엄청난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묵향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선풍도법이 지닌 진정한 위력이었다. 그녀가 직접 사제와 비무한다고 해도 저 정도까지 완벽한 도법을 구사할 자신은 없었다. 물 흐르듯 완벽하게 이어지는 도법과 신법. 저 모습만 본다면 선풍도법이 어찌 삼류도법이라고 불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묵향의 의도대로 소연은 그 비무의 정수를 마치 모래 물을 흡수하듯 정신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비무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눈들도 있었다. 이곳에 모여있는 또 다른 상승의 고수들이었다. 양양성내에서 강렬한 기와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간간이 폭음까지 들려오니 뭔가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즉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호오, 과연 천지문과 마교가 가깝다고 하더니 그게 거짓이 아닌 모양이군요. 저렇듯 교주가 직접 비무까지 해주니 말입니다." 황룡무제의 말에 그 옆에 서 있던 수라도제는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저게 비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노부가 보기에는 멀쩡한 젊은이 하나 때려잡는 모습으로밖에 안보이는데?" 하지만 묵향과의 대결에서 엄청난 것을 배웠던 황룡무제와 패력검제였다. "저런 생사결에 가까운 치열한 비무를 통해 무인은 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것이 끝나면 뭔가 수확이 있겠지요." 수라도제는 더 이상 비무를 볼 것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것에는 노부도 공감하는 바일세. 하지만 교주가 사용하는 것은 마교의 도법, 진팔이라는 저 청년이 사용하는 것은 천지문의 도법. 과연 무엇을 더 배울 것이 있겠는가?" 수라도제가 이렇게 나오는 것은 교주가 사용하는 무공에 있었다. 교주의 애병이 뭔지는 알 수 없겠지만, 교주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그 모습으로 보아 매우 무게가 가벼운 도든지 아니면 살짝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검일 것이다. 그것만 봐도 빠른 쾌검류를 익히고 있다고 짐작되어지는 그가 저런 둔중한 몽둥이를 들고 무공을 펼치면 제대로 된 위력을 펼칠 수 있겠는가. 거기에다가 교주가 펼치고 있는 저 도식은 또 뭐란 말인가? 한 번 쓱 봐도 저건 초식에 얽매여 있는 하급의 도법이었다. 화경에 이른 그의 입장에서 단 하나도 배울 점이 없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미련없이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때, 그의 뇌리에 어떤 목소리가 울려왔다. <본좌의 실력이 어떤지 궁금해서 찾아왔나?> '헉.' 수라도제는 어기전성이 들려오자마자 누가 그것을 보냈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그딴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이곳에 단 한명밖에 없으므로. 순간 수라도제의 등 뒤로 식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그건 아니오.> 그러자 곧 이어 비비꼬인 어조가 이어져 들려왔다. <의형께 들으니 본좌를 때려잡겠다고 하셨다면서?> 그 말에 수라도제의 안색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제길, 그 영감탱이가 진짜로 고자질을 했구나, 사내놈이 그토록 주뎅이가 가벼워서야............' <정 싸우고 싶다면 칼을 들고 본좌를 찾아와, 반쯤 죽여줄테니까. 그럴 배짱도 없으면 처박혀서 술이나 퍼마셔. 알겠어?> 아무리 수라도제가 묵향보다는 한 수 아래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말이 심하지 않은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묵향보다는 수라도제가 더욱 오랜 세월동안 무림을 종횡해온 고수가 아닌가. 연배는 자신이 높지만, 상대는 마교의 교주였기에 그에 걸맞는 예우를 해주고 있는 것 뿐이었다. <이, 이거 말씀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그에 비해 묵향은 상대의 연배가 높건 낮건 그런 것은 따지지도 않았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냐 그렇지 않느냐만 중요할 뿐... <심하기는 뭐가 심해? 너 오늘 한번 죽어볼래?> 수라도제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않자 다시금 묵향으로부터 어기전성이 들려왔다. <본좌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뒤에서 꽁수 쓰는 놈들이야. 이번은 본좌가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그냥 넘어가주겠지만, 다시 한 번 더 그딴 짓을 하는게 본좌에게 걸리면 죽을 줄 알아.> 지금껏 수라도제에게 누가 감히 이런 식으로 막말을 한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렇기에 수라도제의 안색은 불그락푸르락 정말 가관이었다. 1:1로 싸우면 박살날 것을 뻔히 안다. 하지만 그걸 잘 알면서도 수라도제는 하마터면 도를 뽑아 들고 묵향을 향해 달려들 뻔했다. 나이도 자신보다 어린 것이 그 망할 탈마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선배 고수를 이토록 우습게 본단 말인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수라도제가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그런 그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패력검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안색이 좋지 않으신 듯한데,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패력검제가 옆에서 갑자기 말을 걸었기에 수라도제는 간신히 자신을 억제할 수가 있었다. 수라도제는 떨떠름한 어조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별일 아닐세. 노부는 이만 가보겠네." 수라도제는 교주에게 또 다른 무슨 소리를 들었을 때, 그 다음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서둘러 자리를 피해버렸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겠는가? 더러워서 피하지. 더군다나 저놈의 똥은 대금전쟁을 치르는데 있어서 매우 필요했다. '젠장! 거름이라도 쓸 데가 있으니 똥덩어리 같은 네놈을 상대해 주는거야." 수라도제가 갑자기 자리를 뜬 후에도 황룡무제와 패력검제는 그곳에서 비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잘 몰랐던 부분이 그들의 눈에 잡히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서로가 같은 도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 아니오?" 그 말에 패력검제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노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소." "그렇다면 소형제가 사용하는 저 도법이 마교의 도법이라는 말이요?" 그 말에 패력검제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닌 것 같소이다. 노부가 저 아이를 오랜시간 데리고 있으면서 관찰해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저 아이가 사용하고 있는 도법은 언제나 그가 연습하던 선풍도법이 확실하오." 천지문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천지문 하면 선풍도법을 생각할 정도로 외부에 잘 알려진 도법이었다. 그런 만큼 교주가 선풍도법을 진팔에게 가르쳤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추측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 아이에게 선풍도법의 정수를 알려주기 위해 교주가 저 도법을 배웠다는 말씀이 되지 않소? 교주의 입장에서는 하등의 쓸모도 없는 도법인데, 그걸 한순간의 비무를 위해 배웠을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오." "글쎄요.... 노부의 생각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가 워낙 엉뚱한 인물이라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요." 패력검제의 그 말에는 공감이 가는지 황룡무제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교주와의 비무는 오늘날의 그가 있도록 만들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생사를 건 대결. 그 단 한순간에 무인은 엄청난 지식을 흡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왠만한 경우 고수는 자신과 대결한 하수를 살려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상대가 더욱 크게 성ㅈ장하는 것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주는 자신을 살려줬다. 그런데 교주는 자신을 왜 살려준 것일까? 그것도 두번째 만났을 때는 비무까지 해주고 말이다. '확실히 그릇이 크긴 커. 저런 위대한 인물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만 해도 하나의 복인지도 모르지.' 황룡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비슷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패하는 경우를 당한다면, 왜 하늘이 나를 낳고 또 저놈을 낳았으냐고 통탄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처음부터 싸울 의욕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 때 패력검제가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는 것을 보고, 황룡무제가 말했다. "더 관전하지 않고 가시려고 그러시오?" "그러고는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말이외다. 아무래도 비무가 끝난 후에는 좋은 약이 필요하지 않겠소?" 그러면서 패력검제는 한창 비무중인 진팔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진팔은 지금 오뉴월 복날을 만난 멍멍이처럼 몽둥이 찜질을 당하는 중이었다. "허긴, 노부도 그 생각에는 동감이오. 그런데 저녀석 보기보다는 맷집이 좋구먼. 저렇게 맞아도 또 일어서는 것을 보면 말이오." "일부러 적당히 패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런 식으로 계속 충격이 누적되면 쇳덩이라도 버티겠소? 지금은 정신력 으로 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일 아침이 되면 일어나기도 힘들 거외다." 그 말에 황룡무제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참으로 깊으시구려. 대련이 끝나자마자 치료하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지요." 모두들 혹시 교주가 사실은 천지문과 뭔가 원한이 있었던 게 아닐까하고 생각할 정도로 처절했던 비무가 끝나자마자 만통음제는 묵향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허어, 동생." "왜 그러십니까?" "동생의 지도방법이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네. 하지만 저렇게 무자비하게 두들겨서야 어디 되겠는가." 머리에 정통으로 한 대 맞고 기절한 채 업혀가는 진팔을 가리키며 만통음제가 말했지만, 묵향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사실은 마지막 한 방은 잡생각 떠올리지 말고 푹 쉬라고 의도적으로 날린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사부님께 저런 식으로 당하면서 성장했죠." 그러면서 묵향은 자신의 사부 유백을 떠올렸다. 물론 유백의 방법이 묵향의 방법보다 훨씩 조악하다고 봐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백은 그렇게 큰 깨달음을 지니고 있지 못했기에 가차없이 밀어붙일 수는 없었던 거싱었다. 이렇게 하면 수련시간이 조금 단축된다는 것만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묵향은 달랐다. 사부의 방법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먼저 이론교육부터 시켜놓고, 그 다음은 몸이 그것을 익히게 만든다. 물론 진팔은 이론은 먼저 어느정도 터득한 상태였다. 그것을 몸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이론교육은 생략한채 다짜고짜 매질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수련시키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은 초류빈이라는 실험대상(?)이 이미 증명한 상태였다.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오르면서 말이다. "아, 동생의 사부께서 그런 방법을 창안하신 모양이군. 정말 창의력이 대단하신 분일세." 만통음제는 약간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제자를 교육시키는 것도 좋지만 저토록 지독한 방법을 선택하다니. 도저희 그들 사제지간에 정이라는 것이 있었을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향은 추억어린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대단하신 분이셨죠. 그리고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묵향에게서 사부에 대한 은근한 정이 느껴졌기에 만통음제는 자신의 제자에게도 이 방법을 써볼까 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들기 시작했다. 역시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다 좋은 법이니 말이다. '하루동안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결과가 나타나면 제자 녀석도 이해해 줄거야 암.' "복 받은 녀석이로군. 오늘의 비무는 그녀석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겠지." 묵향이 느긋한 어조로 대꾸했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겨우 하루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일단 시작했으면 뿌리를 뽑아아죠." 그 말을 듣자마자 만통음제는 경악감과 함께 진팔에 대해 불쌍한 감정마저 느꼈다. 설마 그걸 그렇게 지독하게 강행하겠다는 말인가? 만통음제는 방금 전에 세웠던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서는 사랑하는 제자를 이토록 무자비하게 몇날 며칠동안 두들겨 팰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 하지만 그녀석이 그걸 알면 비무를 계속 할 리 있겠나? 우형같으면 아무리 배움도 좋다지만, 오늘 당장 야반도주를 하겠네만." 묵향은 그쯤은 미리 다 생각해놨다는 듯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기절시켜놨잖습니까? 내일 아침까지 아무 생각없이 푹 잘 겁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또 다른 방법도 써 놓은게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결코 야반도주는 할 수 없을 테니까요." "다른 방법이라고? 그게 뭔가?" 하지만 묵향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대신 묵향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돌렸다. "참, 저는 볼일이 있으니 먼저 들어가십시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만통음제의 시선을 뒤로 하고 묵향은 업혀가는 진팔의 뒤를 따라 천지문도들의 숙소로 향했다. 묵향은 천지문 내에서 잡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물을 길어오는 사람. 장작을 져다 나르는 사람. 대부분이 천지문의 문도들 중에서 낮인 지위를 차지고 있는 인물들이었지만, 간혹 하인들도 있었다. 천지문을 거느리고 온 소연이 여고수인 만큼 그녀의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해 데려온 듯한 하녀도 한 명 보였다. '이상하군 내 예상이 틀렸나?' 막 발길을 돌리던 묵향의 눈에 땔감을 나르고 있는 늙은 하인의 모습이 보였다. 묵향은 그 비쩍 마른 늙은이를 향해 한동안 따뜻한 눈길을 보내더니 어기전성을 날렸다. <흑월야사 전룡, 오랜만이구나.> 누가 봐도 닭 한마리 잡을 힘도 없을 것 같아 보이는 허리가 구부정한 늙은 하인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에게서 곧장 묵향에게 전음이 날라왔다. <전룡이 교주님을 뵙습니다.> <자네는 본좌가 내린 명령을 완수했어. 본좌가 원한 것은 3개월이었는데, 이토록 오랜시간 일해주어 너무나도 고맙게 생각한다네. 이제 자네는 자유의 몸일세, 참, 원하는 것이 있는가? 뭐든지 말해도 좋네. 본좌를 위해 일한 것에 대해 대가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래도 뭔가 주고 싶군.> 하지만 전룡의 대답은 묵향의 예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약속한 3개월이란는 시간이 흘렀을 때, 저는 자유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교주님의 실종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남을 것인지, 아니면 떠날 것인지... 하지만 저는 남는 것을 택했습니다. 교주님과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무림에 돌아가봐야 피밖에 볼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나름대로 행복합니다. 그러니 그냥 저를 놔두십시오.> <그런가? 본좌가 괜한 소리를 했군. 그래, 자네가 곁에서 지켜본 내 딸은 어떻던가?> 전룡은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피워 올리며 대답했다. <제가 지금까지 모신 분들 중 최고셨습니다.> <허허헛, 그랬단 말이지? 과연 본좌가 딸 하나는 제대로 택한 모양이군. 그럼 잘 있게. 행복하기를 빌겠네.> <안녕히 가십시오, 교주님> 묵향은 전룡을 만나고 이 피에 절은 강호에 저토록 의리있는 인물이 남아 있다는 것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자신이 존재할 때 충성을 바치는 인물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자신이 없어지자 마교는 어떻게 되었는가. 마화등 몇몇 인물은 충성을 다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도 컸다. 예를 들어 관지가 묵향이 사라진 후에도 그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그것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온건파인 그는 마교의 무시무시한 힘이 강호를 덮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자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실종된 교주가 돌아오는 그날까지 현 상태를 유지하자는 묵향파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런식의 복합된 이유가 존재해서 충성하는 것 처럼 보이는 것과 순수한 충성심 혹은 대가 없는 의리는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묵향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줬다. 그날 저녁, 기절해 있는 진팔을 간호하던 소연의 뇌리를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그 다음은 놀라운 무공을 지켜보느라 잡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듯 시간이 남게 되니 자연 그녀의 사념은 점차 한곳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분이 설마 양부가 아니실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도 닮은 꼴이 아닌가. 그녀가 묵향을 만난 것은 지금까지 세 번 있었다. 한 번은 처음 묵향을 만나 그의 양녀가 되었을 때다. 아마도 그녀의 인생에서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다음은 사형들과 몽땅 다 마교에 잡혀 들어갔을 때다. 그때, 양부가 선물한 장신구는 지금까지도 그녀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걸보면 그분께서는 마교에 몸담고 계신 것이 확실했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직책을 지니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번, 그녀가 양부를 만났을 때....그녀는 장인걸에게 잡혀 들어가 모진 고초를 당한 후였기에 양부를 회상하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그녀 자신이 그곳에 왜 잡혀 들어갔었는지 그리고 왜 자신이 이렇듯 순순히 풀려나왔는지 그것조차 이해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야, 내가 무슨 생각을......" 소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애써 부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양부께서 마교의 교주라니.... 중원 최강의 고수이며, 암흑마제라는 극악무도한 패륜아가 그분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양부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부인했지만, 사려깊은 그녀의 사념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가능성도 있어. 천지문이라는 작은 문파가 마교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 이런 식으로 마교의 보호를 받고 있는 문파는 천지문뿐이라는 것. 아빠가 마교 출신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을 함께 뭉텅그린다면 그분이 아빠일 가능성도 있잖아. 아빠가 교주 정도의 고위 직책을 지니지 않고 계시다면 천지문과의 동맹을 맺을 수 없었을테니까 말이야. 만약 동맹이 한중길 교주 혼자만의 작품이라면 새로이 교주가 바꾸 ㅣ면서 그런 거는 하루아침에 파기되어버렸을 거야. 그걸 보면 현 교주도 천지문과 뭔가 연관이 있다는 말 틀림없어. 그분이 양부야.'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던 소연은 기다리기로 했다. 양부가 자신에게 정체를 밝히기를 말이다. 그분이 자신에게 양부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 것은, 그 말을 꺼내지 못할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테니까..... 매일 당해야 하는 진팔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모두들 그날 하루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교주와 진팔간의 비무는 그 후로도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 교주에게 진팔을 두들기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두들겨 맞는 양에 비례하여 진팔의 실력은 급상승하고 있었다. 두들겨 맞는 것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그가 배우는 속도는 매우 빨라졌다. 안 맞으려면 할 수 없던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을 동작으로 일치시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곧장 몽둥이가 날아오는 것이다. 빡! "크어어어억!" "빨리 일어서."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진팔은 몸을 재빨리 일크켰다. 뭉그적거리다가는 몽둥이가 또 날아온다는 사실을 잘 아는 것이다. '이런 시팔! 차라리 나를 죽여라. 네놈이 나하고 무슨 철전지 원수를 졌다고 이토록 사람을 핍박한단 말이냐.' 속마음은 그랬지만 차마 그걸 말로는 표현하지 못했다. 만약 말로 내뱉었을 때 그 후환이 얼마나 클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희대의 고수가 자신에게 한수 지도해준다는 말에 그저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시작한 비무였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나서 보니 이건 사람잡는 최악의 고문이었다. 만약 이쪽에서 움직임을 멈추면 곧장 다가와서 무자비한 몽둥이질을 가한다. 안 맞으려면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일단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만 하는 거야. 한 번 승낙한 이상 네녀석한테 선택권은 없어. 본좌가 이제 그만 됐다고 할 때까지 무조건 비무를 해야만 해. 도망가면 어쩌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포기하는 게 좋을거다. 만약 네놈이 도망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이 몽둥이로 패 죽여주마. 그리고 저기 서 있는 네놈의 사저라는 저 계집도 덤으로 저승길 동반자로 만들어 주지.> 교주의 살벌하기 그지없는 협박이었다. 물론 묵향은 소연이 듣지 못하게 어기전성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했고, 진팔에게 그 협박은 절대적으로 먹혀 들어갔다. 묵향이 덤으로 죽여버리겠다고 우연히 끼워 넣은 소연은 진팔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진팔이 그녀에게 피해갈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진팔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또다시 교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도망가는 것은 애시당초 글렀고, 남은 것은 한대라도 적게 맞도록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지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맞은데 또 맞지 않기 위해 별의 별 수를 다 쓰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몽둥이를 피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그 순간 사력을 다해 몸을 틀어 지금까지 안 맞은 장소에 몽둥이가 꽂히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까지 부리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움직임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정작 그 자신은 그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정말 놀라운 일이로다." 옆에서 만통음제가 중얼거리자 소연의 시선이 그쪽으로 살짝 돌아갔다. "저렇듯 강제로 무공을 주입시키는 방법이 존재할 줄이야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약간의 깨달음을 얻어 그것을 아직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저런 식으로 강제적으로 그것이 소화되게 만든다. 기발한 착상이야. 노부도 그런 방법을 진작 알았다면 그놈을 몇 단계는 위로 끌어올려 놨을텐데, 안타깝구먼." 아마도 냉파천이 이 말을 들었다면 기겁을 했겠지만, 소연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렇게 극심한 몽둥이지를 당하고 있는 사제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하루하루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 가는 사제의 무공을 봤을 때 그녀는 한편으로 부럽기까지 했다. 만약 비무하는 상대가 사제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을가? '사제 열심히 해. 아빠는 나에게 최고의 무공을 보여주기 위해 사제를 택한 모양이지만, 사제도 이것을 기회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야. 만약 아빠가 나를 비무 상대로 삼아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진팔의 움직임은 며칠 전과 비교도 할 수없을 만큼 발전해 있었다. 잘 연결되지 않아 버벅거리던 초식들이 지금은 제법 부드럽게 연결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게 진팔이 발악할수록 교주가 시전하는 초식의 교모함도 그 정도를 한층 더 깊게 했기에 하루에 두들겨 맞는 양으로 따진다면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진팔은 자신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그 마음 속에는 해묵은 원한까지 더해서 교주에 대한 악감정만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중이었다. 동경과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소연이 비무를 관찰하고 있을 때, 만통음제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자네는 교주를 어떻게 생각하나?"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교주를 어떻게 생각하느냔 말이다. 극악무도한 자라는 소문이 항간에 파다하게 퍼져 있지만, 한 며칠 지켜봤으니 그게 완전히 헛소문임을 자네도 잘 알 걸세. 만약 그런 자라면 노부가 의제를 삼지도 않았겠지." "예, 저도 그런 풍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뵈니 소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되는지 알겠더군요." 그 말에 만통음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상대방도 동생에게 약간의 호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에.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내 듣자하니 자네는 아직까지 홀몸이라면서?" 갑자기 만통음제가 왜 그 말을 꺼냈는지 몰랐기에 소연은 당홍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예? 예." 만통음제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어떤가? 자네가 정파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지만, 천지문과 마교는 그렇게 동떨어진 곳도 아니지 않는가? 동생은 자네가 마음에 있는거 같던데, 자네 의향은 어떤지 묻고 싶구먼." 그 말에 소연은 엄청난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또 무슨 소린가? 양부와 혼인을 하라니 말이다. "좀 소문이 안 좋게 퍼져 있어서 그렇지 저만한 신랑감을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닐 걸세." "저 분의 뜻인가요? 아니면..." 소연이 그 질문한 의도는 생각하지도 않고, 만통음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생의 눈치를 보아하니 그가 소연에게 상당한 호감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동생의 의향을 물어본 후에 자네에게 하는 말일세. 동생은 자네가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던데..." 그 말에 소연은 당황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저... 죄송합니다, 대협." "왜 그러는가? 그가 마교도라서 그러는가?" "그건 아닙니다. 대협. 예전부터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말에 만통음제는 아쉬움이 잔뜩 배인 어조로 댑답했다. "허어. 그런가? 하기야... 마움에 없는 사람하고 함께 살라고 할수도 없는 노릇이지." 미안하다는 투로 만통음제가 대답했지만, 소연은 그 말을 들을 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결혼을 제의해 오다니...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말인가? 그가 만약 자신의 생각대로 양부라면, 결코 결혼을 제의해 올 리가 없지 않는가. 추혈광마 양양성에 모인 화경급 고수들을 총동원하여 마교 교주를 때려 잡으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난 후, 수라도제는 비밀리에 몇몇 문파의 수장들을 소집했다. 물론 수라도제가 교주를 때려잡겠다는 야무진 꿈을 아직까지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모인 신검합일급의 고수들을 총동원할 수 있다면 교주가 아무리 현경급에 준하는 고수라 해도 능히 처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교주 1명만이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옆에 언제나 만통음제가 따라다닌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이 죽자고 싸워준다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겠지만, 도망치려고만 작정 한다면 현재 동원 가능한 수의 3배가 넘는 신검합일급의 고수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잡을 방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 일당들른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기회는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허어, 참 일이 고약하게 되었구먼." 만통음제가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생각해봤을 때, 정찰이라든지 적진시찰 같은 임무를 주어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또. 그의 경우 휘하에 상당한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일정구역을 책임지고 맡아달라고 하며 보내 버릴 수도 없었다. 수라도제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속앓이만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으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때,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기에 약간 짜증스런 어조로 외쳤다. "무슨 일이냐?" 그 말에 오늘 경비책임을 맡은 무사가 살짝 문을 열고 들어와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장 사령이 호위무사를 부탁하러 왔습니다.태상문주님." "호위무사를? 무슨 일인데 그런 부탁을 한다고 하더냐?" "예, 방금 전에 자신을 흑풍대 소속의 무사라고 소개한 자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흑풍대라......." 그게 어떤 단체인지 잠시 생각해보던 수라도제의 머릿속에 흑색 갑주를 걸친 당당하기 그지없는 흑풍대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기까지 함께 왔다가 자신들은 이곳에 머물렀고, 그들은 금군을 추격해서 앞서나갔다. 아마도 그가 전령을 보내 온 모양이다. "그래서?" "예, 그자는 악비 대장군을 면담하기를 청하고 있다고 하더이다. 그런데 그들은 흑풍대라는 단체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데다가, 그가 흑풍대를 사칭한 적의 첩자일수도 있기에 호위를 요청한 모양입니다." "알겠다. 노부가 직접 가보기로 하지." "태상문주님께서 친히 말씀이십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속하가 무공이 뛰어난 자들로..." 수라도제는 손을 들어 상대의 말을 막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니 됐네. 그에게 가서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야." 장 사령의 안내를 받아 수라도제가 가보니 흙먼지가 잔뜩 끼어 있어 희뿌연 회색으로 보이는 갑주를 걸친 인물이 서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초조한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수라도제는 첫눈에 상대가 상당한 수준급의 고수라는 것을 파악했다. 잔잔한 가운데 폭발적인 기도를 내뿜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다른 사람은 먼지에 싸인 더러운 갑주만을 봤겠지만, 수라도제는 먼지 속에 감춰져 있는 핏덩이를 봤다. 도데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육했는지 그의 갑주 전체가 검붉은 핏덩이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저런 살귀가 전령일 가능성은 없었다. 전령으로 보내오기에는 실력이 너무 뛰어난 자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뭐란 말인가? "흑풍대에서 왔다는 자가 자네인가?" "예." 안면보호대에 가려져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사내인줄 알았건만, 놀랍게도 여성의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느껴 졌다. "무슨 일인데 악비 대장군을 만나는 것인지 노부에게 알려줄 수 있겠는가?" 상대는 수라도제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투구 사이로 나와 있는 눈동자를 예리하게 빛내며 되려 질문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새파란 젊은 것이 와서 노부 어쩌구 하고 있으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귀하는 누구십니까?" "사람들은 노부를 수라도제라고 부른다네." 그 말에 상대는 군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대협의 존성대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악비 대장군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군사적인 문제기에 대협께 드릴 말씀은 아니라고 판단 됩니다." 옆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장 사령이 도중에 끼어들었다. "서문 대인, 저자가 주장하는 대로 흑풍대 무사가 맞습니까?" "복색만으로 본다면 흑풍대 소속의 무사가 맞소이다. 천마신교라고 불리는 무림의 단체에서 파견한 9천의 정예들이지요." "9천이라고 하셨소이까?" 장 사령은 기절할 듯 놀랐다. 9천이라는 수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수라도제가 이끌고온 무림인들의 가 공할 만한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본 장 사령이었다. 그런 자들이 9천이라면 엄청난 힘이 아닌가?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코 흑풍대 무사를 홀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장 사령은 급히 흑풍대 무사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대장군께 연락드리리다." 장 사령이 달려가고 난 후, 수라도제는 흑풍대 무사에게 은근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노부는 자신을 밝혔는데, 아직 자네의 소개를 못들었네만 . 알려줄 수 없는 겐가?" "저는 흑풍대 부대주를 맡고 있는 마화라고 합니다." "부대주라고? 허, 놀랍구먼. 자네에게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노부는 지금까지 평생을 천마신교와 싸워왔다네." ".............." 도데체 수라도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마화는 의심 가득한 눈길을 상대에게 보냈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런데 요 근래 들어 지금까지 노부가 마교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제대로 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껏 싸워왔던 천마신교의 하부단체들과 자네들은 너무나도 다르니 말일세." 그 말에 마화는 잔잔한 어조로 대답했다. "서로가 추구하는 이상이 다르니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교는 힘을 숭상할 뿐, 정파에서 생각 하듯이 악에 물든 무리들은 아닙니다. 물론 본교에도 악질적인 인간들이 간혹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파 쪽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건 노부도 인정하는 바일세. 정파라고 자처하는 놈들 중에서도 되먹지 못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어쨌거나 귀교와 정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음이야." "..........." "..........." 그런 다음 오랜시간 침묵이 흘렀다. 얘기를 주도하고 있던 수라도제가 입을 열지 않자, 마화 또한 괜히 모르는 사람과 수다를 떠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자연 침묵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침묵이 깨진 것은 요란한 갑주소리를 내며 다가온 송군 장수들 때문이었다. "귀하가 흑풍대에서 파견되어온 사람인가?" 악비 대장군은 여태껏 보아온 무림인들의 모습과는 전혀 생소한 모습의 마화를 보며 의아스러운듯 질문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렇듯 중무장을 갖춘 무림인은 처음 봤던 것이다. 마화는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악비 대장군이십니까?" 마화의 군례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악비 대장군은 상대가 어쩌면 군부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본관이 악비일세. 그래, 본관에게 급히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다고 했던가?" "예, 이틀 전까지 본대는 양양성에서 퇴각하던 금군을 추격하여 지속적인 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왜 그렇게 금군 쪽에서 양양성에 대해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는지 그제서야 이해한 악비 대장군이 놀라워했다. "오오, 그랬었는가?" "예, 그런데 50만에 달하는 금군이 남하해 오면서 지금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적의 군세가 워낙 엄청나 본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인지라 그것을 전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새로운 적의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에 악비 대장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50만의 적이 새로이 가세했다는 말인가? 그래, 놈들의 움직임은 어떤가? 언제 양양성에 도착하겠는가?" "그들은 본대에게 쫓기던 금군과 합류한 후,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방책을 치며 방어상태를 굳건히 하는 것으로 보아 곧바로 움직일 의사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행동을 시작하는 것은 다음해 봄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대주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본관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둘이 합쳐졌다면 물경60만에 달하는 대군이 되니, 초목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봄이 되기 전까지는 움직이기가 쉽지 않겠지." 잠시 뭔가 생각에 잠겨있던 악비 대장군은 마화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래, 흑풍대주는 어떻게 행동하겠다고 하시던가?" "곧 겨울이 다가오니 조만간 양양성으로 퇴각하시겠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본관도 그게 좋을 듯하구먼." "그리고 흑풍대주께서 대장군께 한 가지 청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뭔가? 본관이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겠네." "각 곳에 주둔중인 송군 진영에 흑풍대의 존재를 천마신교 소속이 아닌 황군 소속의 기마대로 해달라는 청이셨습니다." "이상한 부탁이로군 . 꼭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라도 있는가?" "현재 금군을 지휘하는 장수는 본교의 반역도입니다.만약 그자가 본교에서 고수들을 이곳에 파견했음을 안다면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게 됩니다. 하루라도 빨리 금을 정벌하기를 원하신다면 대주님의 청을 들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잠시 궁리하던 악비 대장군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대주님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편의상 흑풍대는 대장군님의 명령을 받는 것으로 하고 본대에 대장군님의 인장이 찍힌 공식문서를 소지한 전령을 보내주십시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다소 귀찮으시더라도 공식적으로 처리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기왕에 허락한 것인데 확실하게 처리해 줄 테니 염려 놓게나." "옛, 대주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전언을 전했으니, 저는 물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그런 다음 악비 대장군은 옆에 시립하고 서 있는 장 사령에게 명령했다. "먼 길을 달려오시느라 피곤할 텐데 편안한 자리를 주선해 주도록 하게." "옛, 대장군." 철그렁거리는 갑주소리를 울리며 대장군이 멀어진 후, 장 사령은 마화에게 말했다. "본관을 따라오시오.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소이다." "아니, 그것보다 여기에 와 있는 무림인들 중에서 천마신교의 교주님이 계시지 않소?" 그 말에 장 사령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무림인들의 일은 본관이 잘 모르오. 참 여기 계시는 서문 대인께서 그들을 관장하고 계시니 이분께 물어보도록 하시오." 마화가 의문의 눈길을 자신에게 돌렸지만, 수라도제는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교주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를 해치우기에 이번만큼 좋은 기회가 또 있었겠는가. 없애버린 후 그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고 발뺌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을.......... 하지만 이 여인이 이곳에 도착하면서 그 가능성도 이제는 끝이었다 "수라도제 대협, 저희 교주님께서 이곳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밖에 나가서 조금만 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요즘 들어 천지문의 제자 하나를 매일같이 개잡듯 때려 잡고 있다는 것을 성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지금 성 내에는 천지문이 혹시 뭔가 교주의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풍문까지 나돌고 있는 중이 었다. "그러면 지금 천지문의 제자와 한창 비무중일 거라네. 노부를 따라오게. 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줄 사람을 붙여주지." "감사합니다, 대협." 안내자를 소개받은 마화는 먼저 옷가게로 가서 옷부터 구입했다. 요 근래 몇달 동안 야지를 뒹굴며 살아온 그녀였다. 목욕은 물론이고 세탁하기도 힘든 여건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서 썩은 내가 풍기고 있는 상황인데, 그런 옷을 입고 어찌 교주를 만나러 간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몰골을 생각했을 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그 다음으로 행한 행로는 묵향이 기거하고 있는 객잔이었다. 객잔에 도착하여 방을 구한 그녀는 먼저 갑주와 장검에 묻은 피부터 정성껏 닦아 냈다. 그런 다음 기름칠을 골고루 한 후에야, 목욕을 시작했다. 산뜻한 새 옷 으로 단장을 한 마화는 허리에 장검을 차고 밖으로 나왔다. 교주가 있는 곳은 안내자를 돌려보내기 전에 이미 알아둔 상태였기에 그녀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정말 무심하기 그지없다니까. 어떻게 몇 달이 되도록 연락 한번 안 하실 수가 있지? 그 분께서 몽고에서 돌아오셨다는 것도 부교주님께서 연락을 주셨기에 알 수가 있었던 거잖아. 그런데, 부교주님께서 부상을 당할 정도로 강적을 만났던 모양인데, 괜찮으신 건가 모르겠네." 낮은 목소리로 홀로 투덜거리며 길을 가던 마화는 곧이어 건강하기 그지없는 묵향을 볼 수 있었다 "크하하핫! 좀 더 제대로 해봐!" "이런 빌어먹을!" 뻑! "크윽!" "여기도 비었잖아." 빡! "으악!" 매우 즐거운 것 같은 묵향의 모습을 보며 마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도 언젠가 저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옛날에 초 부교주님을 저렇게 신나게 두들겨 패셨었지. 그걸 보면 교주님께서는 저 사내가 마음에 쏙 드신 모양이야. 참, 내. 언제나 애정표현을 저따위로밖에 할 줄 모르다니, 언제 철이 드실지 원....... 쯧쯧, 당하는 사람 입장도 생각하셔야지."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본 묵향이 활달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 마화 아냐. 지겹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더 다져놓고 그리로 갈께." 그 말에 마화는 황당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다져놓다니? 저 양반은 눈 앞의 사내가 고깃덩어리로 보인단 말인가?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 쉬엄쉬엄 하세요. 당하는 사람 입장도 좀 생각 하셔야죠." "무슨 그런 말을. 쇠도 두들겨야 단단해 지는 거야." 그 말에 마화는 기가 막히다는 듯 대꾸했다. "그건 쇠가 아니라 사람인데요." "이거나 그거나 둘 다 똑같은 거야. 잘 연마해놔야 날카로운 무기가 돼지." 한눈을 팔며 마화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진팔을 열심히 쥐어 패는 것을 보면 역시 묵향의 실력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때, 옆에서 소연이 다가오며 마화에게 말을 걸었다. "기다리시기 지루하실 텐데 차라도 한잔 드시겠어요?" 마화는 활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안그래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죠? 옷차림으로 보아하니 시비는 아닌 듯한데........" 그 말에 소연이 살포시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천지문도들을 이끌고 있는 소연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화는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까? 소연이라면 교주의 양녀가 아닌가. 하지만 교주는 그 사실을 감추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진 것. 마음을 정한 마화는 필요 이상으로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천지문이라고? 그 낙양에 있는 천지문 말이냐?" 사실 마화는 성격적으로 아무리 하찮은 인물이라도 이렇듯 다짜고짜 하대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이 상대가 누군지 안다는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그러자면 누가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법한 보편적인 행동을 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화 정도의 지위를 지닌 사람이라면 천지문의 문주라고 해도 그녀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하물며 그문도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마화는 상대가 누군지 잘 알면서 일부러 하대를 사용했다. 그 편이 누가 봐도 자연스러우니까. 그 말에 소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천지문이라면 본교와 약간의 내왕이 있는 관계니, 본녀가 누군지 알려주는 것도 나쁘자는 않겠지. 본녀는 흑풍대 부대주를 맡고 있는 마화라고 한다." 소연이 이곳에 오기 전 흑풍대와 무림연합의 고수들은 연합작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때 소연은 흑풍대라는 것이 마교의 6개 무력세력들 중의 하나라는 말을 수라도제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각 무력세력의 수장들인 대주가 모두 마교의 장로들일 정도니, 그보다 한 단계밖에 떨어지지 않는 부대주의 직위는 얼마나 높겠는가. 천지문의 문도인 자신과 마화라는 이 여인이 지니고 있는 무림에서의 배분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 이나 큰 것이다. 그렇기에 그 말에 소연은 상대의 얼굴조차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더욱 고개를 깊게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차를 올리겠습니다." 조금 지나자 소연은 차를 가져와 마화에게 권했다. 잠시 관전을 하며 차를 마시던 마화는 소연에게 말을 걸었다. 교주의 양녀인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도데체 어떤 여자이기에 교주가 아직까지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교주님과 비무하는 사람도 천지문도 인가?" 별로 할일도 없는 상태였기에 상대가 심심해서 말을 건 것이었다고 해도, 소연으로서는 상대의 질문을 무시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제 사제인 진팔이라고 합니다, 부대주님." "제법 출충한 실력을 가지고 있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아니야. 저 정도 나이에 저만한 실력을 지니기는 어려운 것이지." 상대와 말을 나눈 이유가 어찌되었던간에, 이리저리 대화를 나누다 보니 소연은 조금씩 상대와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상대가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지위에 비했을 때, 상대의 성격이 매우 소탈하고 시원스러웠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간 후......... "하하핫, 아주 재미있군. 그래 자네 결혼은 안했는가?" 왜 마교도인 상대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던 터라 소연은 순순히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혼기를 놓쳤습니다." "그래? 많이 서운해 하셨겠군." "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소연의 동그란 두 눈이 자신을 향한 후에야 마화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편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말이 잘못 튀어나와버린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급히 머리를 굴려 보니 수습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 말은 천지문의 문주, 그러니까 자네의 사부가 서운해 했을 거라는 말이야. 자네의 아이들도 자네를 닮아 무예에 뛰어날 것이 아닌가? 그들이 장차 다음 세대의 천지문을 떠받칠 텐데, 서운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 "무슨 그런 말씀을..., 제가 무공이 뛰어나봐야 얼마나 뛰어나다고요." "본녀가 그 정도도 못 알아본다고 생각했나? 본녀는 지금까지 수 많은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어. 그러다 보면 강한 자를 알아보는 감각이 짐승처럼 예민해지게 되지. 지금까지 내 감각은 틀린 적이 없었어. 단 한번 만 빼고." 소연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말만이라도 상대가 자신을 그렇게 높게 평가해주니 기분은 좋았다. 그렇다 보니 그녀는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그때가 언제인지 물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말을 꺼내놓고 난 후에 소연은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체 높은 상대에게 던질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화는 전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활달한 어조로 대답했다. "뭐 감출 일은 아니니 못 알려줄 것도 없지. 오래전에 본녀가 관부에서 일하고 있을때,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상관으로 부임해 온 적이 있었어. 목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어리숙해 보이는 것이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같았거든." 흥미가 있었지만 감히 대꾸는 못하고 소연은 조용히 귀를 가울였다. "하지만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그자가 세상구경은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죽자고 처박혀서 무공만 익힌 무공광인 줄 내가 알았겠나? 그것도 모르고 대련을 신청했다가 단숨에 묵사발이 난 적이 있었지." "저런......" "사정을 많이 봐줬기에 아무런 상처 없이 끝났었어. 정말 대단하신 분이셨지." "분이셨다고 하시는 걸 보니, 혹시?" 그 말에 마화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어버렸어." 마화의 말도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실상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 사람은 지금의 묵향이 아닌, 과거 몽고벌판을 질타하던 자애로운 묵향이었으니까. "전사....하셨나요?" "전사라고도 할 수 없어. 찬황흑풍단이 해체되던날 . 옥영진 대장군 등 대부분의 고위급 장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어. 살아서 도망간 자들은 반역자의 오명을 뒤집어써야만 했고 말이야." 몽고 원정 때의 각종 고생담, 찬황흑풍단의 몰락, 마교에 입교하게 된 경위 그리고 지금 현재 그녀가 있기까지의 여러가지 일들을 마화는 재밌게 들려줬다. 그녀는 교주의 딸인 소연과 조금 더 가깝게 지내보고 싶었던 것이다. 과연 소연이 알고 있는 묵향은 또 어떤 사람인지 그것도 궁금했고 말이다. 소연도 어느덧 마화의 화술에 끌려들어가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게 되어버렸다. 두 여자는 진팔이 무자비하게 두들겨터지는 장면을 감상하며 서로의 과거를 나눴다. 그 대부분은 추억거리 정도로 치부될만한 쓸모없는 대화들이 었지만, 그녀들 간의 친분을 깊게 만드는데 상당한 도움 이 되었다. 서로 간에 이런저런 많은 대화가 오고간 상태였던 탓인지, 소연은 잠시 주저주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혹시 외람된 부탁이기는 하지만, 사람 하나를 알아봐주실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왜 그런 부탁을 본녀에게 하는 것이지? 무영문이나 개방 쪽이 훨씬 빠를 건데...." "왜냐하면 그분은 천마신교에 소속되어 계셨거든요. 아주 오래전에 그곳에 갔다가 만난 적이 있었죠. 그때 그분이 선물하셨던 장신구를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걸요." 소연이 마화에게 이런 말을 꺼낸 것은 교주가 진짜로 자신의 양부인지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만약 진짜 그가 양부라면 어떤 형태로든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호, 정파의 고수인 자네가 본교의 고수와 친분이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군. 그래, 본녀가 알아봐주도록 하지. 그래, 그 사람의 이름은 뭐지?" 소연은 추억어린 어조로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유향이라고 합니다. 도저히 무인의 이름같지 않으니 오히려 찾기가 쉬우실 거예요." 마화가 마교 내에 있은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유향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기억도 없었다. 하지만 마교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있으니 그런 인물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향이라고? 남자 이름인 것 같은데........ 혹시 한때 사모했던 남자인가?" 그 말에 소연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 제 양부셨어요.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그분을 기다리셨는데, 결국은 나타나지 않으셨지요. 어떻게든지 그분께 연락을 넣어보려고 했지만 천마신교라는 단체가 워낙 비밀에 싸인 곳이라 알아볼 방법이 없었죠.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부대주님이시라면 혹시 알아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염치없지만 용기를 내어 부탁 드리는 겁니다." 양부라는 말에 마화는 유향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소연을 만났을때 교주는 유향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아무리 오랜 세월 이리저리 알아봐도 유향이라는 고수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걸 말을 해줘야하나 말아야 하나........... 마화는 내심 난처 했지만 겉모습만은 시원스럽게 승낙했다. "좋아. 본녀가 총타에 기별을 넣어 알아보도록 하지. 그러자면 조금 시간이 걸릴 거야." 총타가 아니라 저기에서 진팔을 때려잡느라 광분하고 있는 교주에게 물어본 후 그의 결정을 기다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어쨋거나 저들 부녀 간의 일이니까 말이다. 마화는 슬쩍 만통음제를 훔쳐본 후 묵향을 향해 말했다. "교주님, 잠시 따로 얘기를 드리고 싶은데요." 그 말에 묵향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본좌의 의형이시니, 외인이라고 할 수 없지. 말해봐." "소 소저의 일은 계속 이런식으로 끌고 가실 겁니까?" 설마 마화가 양녀 얘기를 꺼내고 나올 줄은 생각도 못해본 터 였기에 묵향은 난감 했다. 이 일은 최대한 기밀을 지키는 것이 좋았는데 말이다. 만통음제를 못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연에 대한 것이라면 조금 얘기가 달라 진다. 묵향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난처 한 듯 대꾸했다. "어흠! 그건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지." 하지만 마화의 대응은 단호했다. "아뇨. 지금 하는 것이 좋겠어요. 소 소저가 유향이라는 사람이 마교에 있을 텐데 그에 대해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오래 전에 자신이 사용한 가명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유향이라고? 그게 누구지?" 마화는 기가막히다는 듯 대꾸했다. "자기가 사용한 가명도 잊어버리셨냐요?" 그 말에 묵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화의 말은 그녀가 지금 자신에 대해서 수소문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뭣?" 묵향은 예상치 못한 마화의 말에 적잖이 놀란 듯했고 만통음제는 옆에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눈을 빛내며 듣고 있었다. 그리고 저 옆에서 차를 장만하고 있는 설취 또한 숨소리마저 죽이고 엿듣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묵향이 마화를 제지하기도 전에 마화의 말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또 다른 일도 아니고 소연에 대한 것이었기에 묵향도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교주님께서 그녀를 끔찍이도 아끼신다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기회를 빌어 그녀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알아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어" 딱 잘라 말하는 묵향을 향해 마화는 다시 한번 설득하기 시작 했다. "그녀는 교주님의 단 하나뿐인 양녀가 아닌가요? 그녀를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시면서도 그녀를 위해 끊임없이 참고 계신다는 것을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그녀도 교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러니 이 기회에." 소연이 묵향의 양녀라는 사실에 만통음제와 설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만통음제의 놀라움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그는 그것도 모르고 월하노인을 자처하여 소연에게 다리까지 놓으려고 했었으니 말이다. "이런! 양녀라고?" 만통음제의 외침에 묵향의 고개가 그쪽으로 획 돌아갔다.깜빡 잊고 있었는데, 객식구들이 자신의 가장 은밀안 부분에 대한 대화를 훔쳐듣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묵향과 눈길이 마주치자 만통음제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우형은 그런지도 모르고 중신을 선다고 나섰었구먼. 이런 실수가 있나..........." 묵향은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중신을 선다고요? 설마 그런 말을 꺼내신 거는 아니겠죠?" "벌써 했는데...당사자에게 직접 말일세. 어쩐지 너무 당황하는 것 같더라니.....어쩌면 그녀도 조금은 자네에 대해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젠장, 약간은 눈치챈 것 같더라구요?" "우형이 보기에는 그랬다네." 옆에서 듣고 있던 마화가 마침 잘 되었다는듯 끼어들었다. "소 소저도 벌써 눈치챘다면 잘 되었네요. 이 기회에 교주님께서 양부라고 당당하게 그녀에게 밝히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말도 안되는 소리! 정과 사는 도저희 어울릴 수 없는 집단임을 잘 알지 않느냐? 아비가 모든 정파인들이 치를 떠는 극악무도한 암흑마제라는 사실을 그 애가 제데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냑 그 애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손 치더라도 주위에 있는 자들은 결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녀가 본교에 들어온다면 그 누구도 그녀를 손가락질 하지 못할 거에요" "그 아이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돼." "만통음제 어르신도 그녀가 어느 정도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 하신다잖아요." 잠시 머리를 굴리던 묵향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오히려 그게 더 잘 되었군. 한가지 얘기를 지어내는 거야. 형님도 조금 도와주셔야 되고 말입니다. 형님은 한 번 더가서 중신에 대해 얘기를 꺼내주세요. 교주가 너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다시 왔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화 너는 가서 유향이라는 인물이 전사 했다고 전하는거야." "예? 전사했다고요?" 묵향은 고개를 끄덕안 후 자신이 방금 생각해낸 줄거리를 말해줬다. 그런 다음 그는 만통음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뭔가 얘기에 허점이 있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만통음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제법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만약 그토록 뛰어난 인물이라면 그 이름을 꺼내자마자 마화가 알아들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묵향은 아차 싶은지 탄성을 지르며 대답했다. "헛,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그렇군! 명호가 있었어. 명호를 하나 지어서...... 그러니까 추혈광마가 좋겠군 척 들어봐도 마교 냄새가 물씬 풍기니까 말이야." 추혈광마. 피를 쫓는 미친 마귀라는 말이 아닌가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것 같았기에 마화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도 그녀가 사랑하는 양부인데 너무 심한거 아닐까요?" 하지만 묵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별로 심할 것도 없어. 오히려 충격적인 명호를 쓰면 정신이 산란해져서 쓸데없는 잡생각을 못하게 되지 그래, 그 명호로만 말했다면 금방 알아들었을 텐데 본명을 밝혀서 네가 못 알아들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총타에 연락을 넣어 답을 받느라고 늦었다고 말이야. 그러면 충분히 대답이 되잖아." 옆에서 듣고 있던 만통음제는 감탄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그런데 오늘 동생을 다시 봤는걸? 담백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이토록 책략을 잘 세울 줄은 미처 몰랐네 그려." 뻔뻔스럽게도 묵향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뭐, 보통이죠 제가 이런데는 머리 회전이 좀 빠르거든요." 자화자찬을 한후, 묵향은 마화를 향해 말했다. "가서 그렇게 말해. 말할 때 표정관리만 잘 하면 믿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마화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좋아요 하명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죠. 하지만 이 얘기는 꼭 해야겠어요." "뭔데?" "그녀에게 상승의 도법을 가르치시고 싶다는 교주님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거기에다가 진 공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너무할 것까지야 있겠느냐? 그 놈도 뭔가를 얻는게 있을 테니 서로가 좋은 것이겠지." "서로가 좋다구요? 그건 순전히 교주님 생각이시겠죠 뭔가 얻는 게 있기 전에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자살해버릴지도 모른 다구요. 만약 뒤가 그렇게 끝난다면 소 소저는 교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묵향은 그 정도 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 극악무도한 마두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겠지. 소문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말이야. 지금껏 본좌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은 망설임 없이 처리해 왔다. 그놈이 죽어도 할 수 없는 것이겠고 그놈이 뭔가를 얻어도 상관 없는 일이다. 본좌가 원하는 것은 그 비무를 보고 소연이가 한 차원 높은 무예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잡아주는 것 더 이상은 기대도 하지 않아." "그렇다면 그렇게 간접적으로 하지 마시고 소 소저와 직접 비무 하시는 것이 빠르지 않겠어요? 엉뚱한 사람 골병들이지 마시고 말이에요." "그녀석이 남자만 되었다면 그렇게 했겠지.그런데 아무리 생각 해도 어디 한군 데라도 팰 데가 있어야 말이지." 묵향의 황당스런 대답에는 마화도 두 손 들어버렸다. 언제는 상대를 두들겨 패는 데 있어서 남녀를 가렸던 사람이었나? 그걸 뻔히 아는데, 저딴 소리를 하다니 말이다. "정말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요." "알았으면 이제 그 얘기는 끝내자구."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묵향은 슬쩍 뒤돌아서서 방문을 열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술 마시러 간다." 옆에서 묵향과 마화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만통음제나 설취는 뭔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상관과 부하 간에 비밀스런 얘기를 엿들은 기분이 아닌, 꼭 뭔가 부부싸움 하는 장면을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한바탕 언쟁이 끝난 후 실내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뒤숭숭했다. 묵향이 나가고 난 후 마화는 장검을 꺼내어 닦기 시작 했다. 아무리 봐도 티끌 한점 없어 보이는 장검을 비단천으로 닦고 또 닦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기분해소 방법인 모양이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기에 장검을 닦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사부님께서도 사숙 어른과 함께 술이나 드시고 오시면 어떻겠어요?" 실내의 분위기가 너무 칙칙하여 난감하던 터에 제자가 그런 부탁을 해오자 만통음제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노부가 제자 하나는 정말 잘 뒀지. 어쩌면 저렇게 총명한지......마침 술 생각도 나는데 잘 되었군, 흐흐흣.' 만통음제는 점잔을 빼며 중후한 어조로 제자에게 대답했다. "허어 노부가 그 생각을 못 했구나 동생이 쓸쓸하게 혼자 마시고 있을 텐데 노부는 동생의 기분이나 풀어주러 가볼까?" 사부가 나가고 난 후 이제 여자들만 남게 되자 설취는 시원스런 어조로 마화에게 말을 걸었다 "마 소저 당신이 한 제안이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교주님도 잘 아실 꺼에요. 그만 기분 풀어요. 우리 술이나 한잔 할까요?" 마화는 억지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는 교주님이 제 말을 안 듣는다고 가분 나빠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는 예전부터 남에말은 잘 안듣는 사람이니까요." 여자들끼리 남아 있다 보니 훨씬 대화하기가 편했다. 더군다나 점소이가 술과 간단한 안주거리까지 가져오자 분위기는 더욱 무르 익었다. "그분은 겉보기와 달리 너무도 마음이 여리시거든요. 자신의여린 마음을 숨기기 위해 언제나 괴팍스럽게 행동하시죠 퉁명스럽게 말하고 못된 행동을 하시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못해요. 그분이 그런 행동을 할때는 다 이유가 있죠. 소 소저 일로 얼마나 슬퍼하시고 계시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마음이 아프군요." 마화와 대화를 나누면서 설취는 마교 교주 로서의 묵향이 아닌 아주 인간적인 묵향을 만날 수 있었다. 과거 그녀의 풋사랑이었던 묵향을 말이다. 설취는 마화의 말을 들으며 과연 그 남자에게 자신이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종남파의 멸문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는 종남산 기슭에는 거대한 문파가 자리잡고 있었다 9파1방에 들어갈 정도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도가계열의 그 문파가 바로 종남파다 종남파는 무림맹에 500이 넘는 고수를 파견하고 있었고 특히 공동파가 득세하고 있었던 무림맹에서 맹호검군 백량이 공동파 출신의 입지를 튼튼하게 굳혔다. 그런데 하지만 호다사마라고 했던가. 요 근래 종남파에는 좋지 않은 일만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백량 장로가 자파출신의고수 100명을 이끌고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전원 사망시킨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말이 쉬워 100명이지 그만한 고수 100명을 키워내는데 들어가는 세월이 하루 이틀인가. 무림맹에는 상당수의 종남파 고수들이 파견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그 속식을 들은 후 종남파는 추가로 또다시 100명의 고수들을 파견했다. 무림맹에서 자파의 영향력을 쥬지하게 위해서는 잃어버린 100명분의 전력을 충당해줄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참에 양양성에서 금군과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자 종남파는 태을검군 송류 장로에게 1천여명의 고수들을 주어 그곳에다가 파견하는 대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종남파가 이보다 적은 수의 고수를 파견한다면 9파1방의 대열에 끼인 거대문파가 겨우 그 정도 밖에 파견하지 않았다고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도 있었기에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래저래 종남파 내에 남아 있는 실력 있는 고수들의 수가 적은 이때, 종남파에는 크나큰 위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배치는 끝났느냐?" "옛 교주님 하명만 하십시오" 장인걸은 저 멀리 수풀을 뚫고 솟아 있는 웅장한 건물들을 보며 슬쩍 비웃음을 던졌다. 설마 자신이 이 먼 종남파 까지 곧장 달려 올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아 시작하거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웅후한 내공이 포함되어 있는 긴 휘파람 소리가 종남산에 울려퍼졌다. 그 장소성에 맞춰 종남파를 포위하고 있는 1천의 달하는 무사들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엄청난 기세로 달려가는 50여명에 달하는 무인들은 무시무시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바로 장인걸이 거느리는 천마혈검대 소속의 고수들인 것이다. 장인걸은 수하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한참동안 구경한 후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장문인의 목은 본좌가 직접 베어주는 것이 예의겠지? 흐흐흐흐" 잠시후 평화롭기 그지없던 종남산은 아비규환의 혈전장으로 바뀌어버렸다. 소연이 마화에게 묵향이라는 인물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 지 며칠이 경과한후 마화는 소연에게 묵향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녀가 며칠이라는 시간을 끈 이유는 양양성에서 마교 총타로 연락을 보내는 데 걸리는 시간 총타에서 조사하는 데 필요한 시간 그리고 답장을 보내오는데 걸리는 시간을 모두 합하여 상대가 타당하다고 여길 정도의 기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소연이 그날 마화를 만날때, 그녀는 마화의 돌연한 행동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흑풍대의 부대주인 마화가 그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흑풍대 부대주 마화가 소 소저를 뵈어요" 그 말만으로도 소연은 마화가 자신에게 양부에 대한 답을 해주러 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마화 간은 사람이 자신에게 이토록 존칭을 쓰며 인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연으로서는 마화처럼 지체 높은 무림 고수들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게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갑자리 왜 이러세요? 그런 인사는 도저히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소연의 마음속에는 마교 교주가 양부일거라는 확신이 서서히 들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있어서 마화로 하여금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 소저의 양부께서는 제가 너무나도 존경했던 분이셨으니까요." 분이셨다는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양부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설레임에 소연은 다급히 질문을 덨졌다. 드디어 양부의 소식을 듣게 외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총타로 부터 답신이 왔군요" "예, 소 소저께 그분의 본명보다는 추혈광마라는 명호를 대셨다면 총타에서 회답을 받는다고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지 않았을 텐데." "추혈광마. 그분의 명호가 추혈광마셨나요?"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명호에 소연은 혼이 다 빠져나가는 듯 했다. 소연은 그 명호 한마디로 자신에게 드토록 다정했던 양부가 마교내에서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능히 상상할 수가 있엇다. 사실 교주가 두번에 걸쳐 만통음제를 매파로 내세워 자신에게 청혼을 했왔을때, 이미 그가 양부가 아닐 수도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것에 대해 크게 실망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예, 소저는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저 이런 말씀드리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분의 명호를 몰랐어요" 이제야 이해가 단다는 듯 마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러셨군요" 그런 마화의 표정을 살피며 소연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분께서는 건강하신가요?" 질문의 받은 마화의 표정에 잠시 당혹감이 어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마화가 이윽고 결심한 듯 말했다. "그분께서는 돌아가셨어요" 사실 마화가 머뭇거린 이유는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해야 한다는 양심상의 문제로 생긴 당혹감이였지만, 소연은 그 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뭔가 말하기 힘든 이유가 있다고 생각 하는 순간, 양부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소연은 왜 마화가 잠시 머뭇거렸는지 이해할수 있었다. 그리고 마화의 말은 그녀의 깊은 슬픔으로 몰고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소연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예? 돌아가셨다고요? 그렇다면 언제... " "소 소저는 아실지 모르지만 장인걸 교주와 교주님간의 내분이 20여년쯤 전에 본교를 벌어졌었죠. 추혈광마 선배님께서는 가장 치열한 내전에 벌어졌었던 총타 기습 작전 때, 장인걸 휘하의 수라마참대 고수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셨어요. 선배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그분이 세운 전공이 워낙 뛰어난 것이기에.. 교주님께서는 그분에 대한 자그마한 사례로 과거 그분께서 이뤄놓으신 것을 아직까지도 유지시키고 계시죠." 그런 말은 들어본 것도 처음이기에 소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예? 그건 무슨말씀이신가요?" "역시 소 소저도 그건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천지만과의 협정을 말하는 거에요. 추혈광마 선배님게서 천지문과의 협정을 주도하신 모양이더군요. 저도 지금껏 무슨 이유로 본교가 천지문과 불합리한 협정을 지속하고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소 소저 덕분에 그 의문을 풀게 되는군요. 설마 그분께 양녀게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었거든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방울씩 눈물을 흘리는 소연을 살짝 껴안으며 마화가 말했다. "선배님의 양녀이니 같은 식구로서 한마디 충고를 드리자면... 그분이 소저의 양부라는 사실을 절대 입밖에 내지마세요. 선배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결코 소저를 좋은시선으로 보지 않을 거예요" 소연이 양부의 사망소식을 들은 다음날, 제 일선에서 금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던 흑풍대가 회군해 왔다. 그들이 성문을 통과해서 당당하게 들어올때 양양성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거대한 덩치의 전투마를 타고 중갑주로 무장한 흑풍대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9천기에 달하는 인마의 모습은 오랜 전투를 치르다가 귀환한 자들답지 않게 너무나도 용맹스러워 보였다. 모두들 얼마나 야지 생활을 오래했는지 갑주는 빛을 잃고 더럽기 그지없었지만, 그들이 타고 있는 거친 콧김을 내뿜는 난폭해 보이는 전투마의 털은 윤기가 흐로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그들이 자신의 몸보다 전투마를 우선적으로 관리해왔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흑풍댕의 대열은 성 내에 마련된 광장까지 이어졌다. 그곳에서 악비 대장군을 비롯한 양양성 내 중요무관들이 흑풍대의 선전을 치하하고 위로하기 위해 기달리고 있었다. 관지 장로는 멀리서부터 악비 대장군의 못브을 확인한 후,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관지 장로는 절도있게 군례를 올린후 말했다. "이렇든 대장군께서 몸소 마중 나오시어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무슨 말씀을.... 황실을 위해 이렇듯 몸 바쳐 일하시는데, 마중 한 번 나온 것이 무슨 큰 대수이겠소이까?" "아무리봐도 오랫동안 군문에 몸담으신 것 같은데, 과거 귀화의 관등성명을 여쭤봐도 실례가 되지 않겠소이까?" "미관말직이었기 때문에 대장군의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소이다" 그렇게 말하는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만 봐도 상당히 높은 지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직감적으로 알수있는 악비 대장군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그것을 숨기고 싶어 하는데 구태여 캐물을 이유는 없었다. 지금 그는 흑풍대가 너무나도 필요했으니 말이다. "허허헛,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어쩔 수 없구려. 자, 음식과 술을 넉넉히 준비했소이다. 모두들 마음껏 먹고 마시며 노고를 푸시기 바라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어 감사하오이다, 대장군." "자 가십시다" 그날 저녘 흑풍대의 무사들은 음식은 배물리 먹었지만,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이곳은 수많은 정파의 무사들이 득실 거리는 곳이다. 최악의 경우 그들이 모두다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는 이상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연회가 끝난 후 관지 장로는 묵향을 찾았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그동안 수고했네. 건강한 자네의모습을 다시금 보게 되어 기쁘구먼." "만남에 가셨던 일은 잘 저치되었다고 부교주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교주님" "축하할 일까지야 있겠는가? 이제 씨는 뿌린것이니 잘 자라기만을 바래야겠지. 그래 금나라쪽의 사정은 어떻던다?" 관지 장로느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영문관의 연계작전을 펼쳤었기에, 금군에 대해 비교적 풍부한 정보를 지니고 있었다. 상대의 병력, 그들이 군수물자를 옮기는 수송경로 그리고 그 경로상에 위치한 몇 곳의 물자집결지 등등... "군수 물자를 대규모로 집결시키고 잇는 곳이 남양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묵향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제법이군, 그런 것까지 소상하게 알려주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런데 그 할망구 속셈을 잘 모르겠단 말이야?" 교주의 시큰둥한 반응에 관지 장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예? 속하는 무영문이 교주님과 어떤 계약을 맺었기에 그들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물론 협정서를 주고받은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할망구가 이토록 전폭적인 협조를 해준 것에 대한 대답이 될수 없어. 뭔가 그걸 통해서 노리는 것이 있겠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여기까지 말한 묵향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런 정보를 듣고도 남양을 치지 않았다니, 자네의 인내심에 탄복했네." "인내심이랄 것도 없습니다. 교주님. 본교에 있으면서 그의 성격에 대해서 많은 말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군량이 집결된 곳을 허술하게 그냥 나웠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본좌도 그걸 우려하는 것일세.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함정일 가능성이 커 . 뭐, 어찌되었건 그쪽으로 안 갔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자, 오늘은 이만 하고 푹 쉬게나. 애기야 내일 나눌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옛, 교주님. 속하는 물러가겠습니다. 관지 장로가 물러가고 난 후 묵향은 무영문이 그런 정보를 넘기면서 노린 것이 뭔지 한참동안 궁리했다. 옥화무제가 이토록 대금전쟁에 깊인 관여하게 된 이유는 금이 그녀가 이룩해놨던 모든것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에 대한 보복심리가 작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묵향으로서는 그녀와 금 간에 있었던 일을 알지 못하니 아무리 생각해봐야 그 이유를 알아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양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와중에 기가 막힌 계책이 떠올랐다. 옥대진과 능비화에게 사제를 대신해서 복수할 수 있는 아주 기막힌 계책이 말이다. 묵향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 거렸다. "이걸 언제 써먹느냐가 문제로군. 흐흐흣." 요즘 들어 수라도제의 심기는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흑풍대가 회군해 오면서 마교 교주를 때려잡으려던 계획은 아주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되려 그 사건 때문에 교주와 자신간의 거리만 넓혀놓지 않았는가. 설상가상으로 다른 화경급 고수들에게는 옹졸한 늙인이 취급을 당하고 말이다. 그것 때문에 성질나서 이따위 계략을 자신에게 간한 젊은 것들을 불러들여 혼 구멍을 내놨지만 수라도제의 속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수라도제는 무림맹 총타로 부터 놀라운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전령으로부터 건네받은 봉서를 읽은 수라도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정녕 이것이 사실이란 말이냐?" 수라도제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전령은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모든 전령이 드러하듯 그는 그 봉서 안에 기록된 내용이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속하는 여기까지 오면서 품 속에서 단 한 번도 봉서를 꺼낸 적이 없사옵니다. 결코 다른 것과 뒤바뀌지 않았을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릴수 있사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교교주와의 사소한 갈등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총관!" "예, 태상문주님." "원로들을 소집해라. 노부가 독단으로 처리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사안이로구나." "옛" 수라도제는 서신을 총관에게 건네주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맹에 전서구를 띄어 이것이 정녕 사실인지 확이해보도록 해라." "옛" 서신을 받아들자마자 총관은 단숨에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서신의 어떤 내용이 수라도제를 그토록 놀라게 만든 것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다 읽은 총관의 표정은 수라도제의 그것보다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느냐?" "맹으로 가는 전서구는 아직 일곱마리나 남아있으니 그쪽으로 연락을 보내는 것은 간단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양양성으로 회답을 보내오는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문파가 무당파니까 맹에서 그곳으로 전서구를 보내고, 거기서부터는 전령이 달려와야 하기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립니다. 아마 짧게 잡아도 3일은 걸릴것입니다, 태상문주님" 비둘기라는 짐승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원하는 자에게 편지를 전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서 본능적으로 날아갈 뿐이다. 그 본능을 이용해서 양양성에서 키우던 전서구를 저 멀리 떨어진 무림맹에서 가지고 있다가 놔준다면 곧장 비둘기는 양양성으로 돌아온다. 또, 양양성에는 무림맹에서 키우던 비둘기를 가지고 있다가 화답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어느 한쪽과의 비둘기를 이용한 연락망을 갖추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일단 새로운 세대의 비둘기들이 그곳에서 태어나 자라는 시간이 필요하니 말이다. 양양성의 일에 무림맹이 끼어든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전서구를 활용한 통신망이 뚫리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허어, 3일이라.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할 터인데. 3일이라고?" 어떻게 할 것인지 수라도제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총관은 사람을 시켜 무림맹을 향해 전서구를 날렸다. 봉서에 기록된 내용의 일부를 기록하고,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혹시 이것이 간악하기 그지없는 적들의 농간일 수도 있기에 확인 작어비 꼭 필요했던 것이다. 으윽고 수라도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장중한 어조로 외쳤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시간을 끌 수가 없다. 각 문파의 수장들을 소집해라. 지금당장!" "옛, 태상문주님"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총관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돌아와서 조심스럽게 수라도제에게 질문을 던졌다 "교주에게도 사람을 보낼까요?" "당연하지 않겠느냐." 총관이 나가고 난 후 수라도제는 심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얼마 전까지 자기를 죽이려고 이쪽에서 모의했다는 것을 놈이 다 알고 있는데, 그놈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다니.." 잠시후, 수라도제의 호출을 받은 수많은 무림의 명숙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수라도제의 지명을 받은 총관의 폭탄과도 같은 정보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금의 정예군에 의해 종남파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 말이 던치는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놀랐다고 하더라도 이곳에 와 있는 종남파의 고수들만큼 경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종남파가 무너지다니. 그게 말이나 되느냐?" 총관은 자신에게 따지슫 외친 사람이 이곳에 종남파의 고수들을 이끌고 온 태을검군 송류 장로인 것을 알고 안타깝다는 듯 대답했다. "태을검군 장로님. 그게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맹에 전서구를 날렸습니다. 아직 맹으로부터 확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안타깝게도 십중팔구는 사실일 겁니다." 사실확인이 아직 안되었다는 말에 송류 장로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듯 콧방귀를 뀌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흥! 그건 더욱 말이 안 돼. 맹호검군 백량이 본문의 정예를 거느리고 무림맹에 가있고, 또 노부가 1천의 고수들을 이끌고 이곳에 와 있다고는 하지만,그렇게 쉽게 무너질 종남파가 아니야. 지금 본문에는 2천이 넘는 고수들이 남아있다네. 자네도 금군과 싸워봤을 테니, 그들이 어느정도 자질을 갖추고 잇는지는 파악 했겠지?"자네에게 잘 훈련된 금군병사 1만명이 있다면 종남파를 쳐부술수 있겠나?" 그 말에 총관은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송류 자로의 말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무공도 모르는 병사 1만으로 종남산을 오른다는 것은 자살하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것이다. 총관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송류 장로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설혹 10만의 병사가 있다고 해도 본문을 하루아침에 멸망사킬 수는 없다네. 그런데 자네는 순식간에 본문이 멸문당했다고 했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건 아무래도 놈들의 농간인듯 싶습니다. 먄약 대협께서 고수들을 이끌고 소림사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곳 양양성이 텅텅 비지 않겠습니까? 양양성 인근에 적의 60만 대군이 집결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놈들은 간악하게도 정보를 조작하여 양양성의 방어가 취약해지도록 만든 후, 대군을 휘몰아쳐 양양성을 공격하려고 획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수라도제 대협!" 그 말에 수라도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도 무림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9파1방에 들어가는 종남파다. 그만큼 무시 못할 저력을 지닌 문파인 것이다. "허어, 노부가 아무래도 경솔했던 듯싶으이.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만큼 위급한 일도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자세한 사정을 확인해보지도 못한 채 회의를 시작한 노부의 실책이 크구먼." 이렇게 회의는 끝났다. 사실 그 누구도 그 서신이 진짜일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기에 취해진 결과였다. "이럴수가..." 며칠후 무림맹으로 부터 전해진 서신을 읽은 수라도제는 손이 미세하고 떨리고 이썽ㅆ다. "무슨일입니까? 태상문주님" "자네도 읽어보게나" 수라도제로부터 서신을 전해 받은 청관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수라도제는 이제 더 이생 생각 할것도 없다는 듯 명령했다 "이제 사실확인이 되었으니, 각 문파의 모든 수장들을 불러모으게" "예, 옛. 태상문주님." 잠시후 회의실에 모여든 무림명숙들의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이었다니.. "총관, 그것이 정녕 사실이었단 말이오?" 며칠 전과는 달리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송류장로에게 총관은 풀이 죽은 어조로 대답했다. "예, 확실합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 때문인지 아연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송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던 총관은 헛기침을 몇번이나 한 후 말을 이었다. "험험. 이제까지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종남파를 무너뜨린 것은 금의 정예군입니다. 종남파 외에 여러 문파들이 금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며, 상당수의 금군은 소림사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금은 송 황싱과의 전쟁에 무림인들이 발 벗고 나선 사실을 알고 무림에 경고를 하기 위해 군사들을 동원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이때 멍청한 표정으로 앚아 있던 송류 장로는 허탈한 듯한 음성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생존자는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그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총관은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만 했다. 조금 지나면 진실이 드러날게 뻔한 만큼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구출한 생존자는 없다고 합니다. 태을검군 장로님. 하지만 아이들이나 아녀자의 시신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놈들이 납치해 갓을 가능성도 다분하다고 합니다." "크흐흐흐흑! 이런 찢어 죽일 놈들!!" 비통하게 오열하고 있는 송류장로 때문에 잠시 회의진행이 늦춰졌다. 무림에서 지니고 있는 송류 장로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그가 이토록 비통해하고 있는 상황엥서 그것을 무시하고 서문세가의 총관따위가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장시간 회의가 진행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수라도제가 앞으로 나섰다. "중원의 북쪽에 위치한 많은 문파들이 금군의 동시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오. 태을검군 장로의 비통한 심정을 노부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우리들은 지금 행동을 시작해야만 하오. 그렇지 않는다면 부쪽에 위치한 모든 문파들이 멸문당한 후가 될테니 말이외다." "수라도제 대협께서는 생각해 두신 것이 있으십니까?" "먼저 소림사로 달려가는 것이 좋을 듯 하외다. 물론 소림이 금군 따위에게 무너지리라 생각 할수는 없겠지만, 이쪽이 도와준다면 훨씬 수월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되오. 소림을 치기위해 남하하고 있는 적도들을 무찌르고 하남성을 제압한다면 그놈들도 더 이상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 섬서, 산서, 하북, 산동에 위치한 각 문파들이 도와주기에도 매우 용이하다는 이점도 있소." 그렇게 말하면서 수라도제는 묵향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지어 놓은 죄가 있다보니 그가 과연 행동을 함께해올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마교 교주는 느긋하게 앉아서 옆에 앉아 있는 만통음제와 뭔가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 뒤에는 흑풍대의 대주가 시립하고 서 있었다. 회의석상에 온 것이었기에 갑주를 입지 않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위풍당당했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글쎄, 금의 영토에 위치한 무림문파가 한둘이 아니니 그들의 구원하는 것이 옳기는해. 하지만 무턱대고 여기 있는 모든 세력을 소림사로 보낸다면 이곳 양양성이 위태롭지 않겠는가? 아무리 계절이 겨울의 초입이라 적이 움직이기 힘들다고 하지만.." "놈들이 행동을 시작하고 있는 지금은 계절이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문파들을 쓸어버리는 데 동원한 것도 금군이고, 양양성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도 금군이 아닙니까?" "아참 , 그건 그렇구만. 하지만 9대문파의 하나인 종남파가 순식간에 무너진것을 보면 똑같은 금군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문파토벌에 동원된 금군병사들의 무공이 훨신 뛰어나겠지." "그야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묵향. 물론 틀리다는 것을 묵향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문파토벌의 전면에는 장인걸 그녀석이 있을 것이 뻔했고, 또 그가 오랜 세월 공들여 키운 뛰어난 병사들이 함께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무공이 어떻건 간에 금의 정예군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양양성 방면에 있는 60만 대군과 합쳐질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이상 모든 것을 연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만큼 수라도제의 작전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보네. 하남성 이북의 모든 문파들이 멸문한다면, 특히나 그 중에도 소림사가 멸문당한다면 그 피해는 너무나도 크지 않겠는가?"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을실 텐데요? 아주 팔팔한 땡중들이 득실거리니까요." 묵향은 일전에 자신과 치열한 격투를 벌였던 공공대사를 말한 것이었다. 하지마 ㄴ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던 만통음제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소림의 무공이 강하다고 하지만, 실전경험에 있어서 아주 취약하다네. 이쪽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소림도 결코 무사하기 힘들게야" 이때, 수라도제가 묵향을 향해 말을 걸었다. "천마신교에서도 이번 작전에 동참해주시겠소?" 그 말에 묵향은 잠시 갈등했다. 사실 자신이 소림을 구하러 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림에는 공공대사르는 썩을 놈이 있지 않은가. 그때 당한 것을 갚아 주러 가도 시원찮은데, 구해주러 갈 이유는 더욱 없었다. 오히려 묵향으로서는 자신을 대신해서 장인걸이 소림사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손 안 대고 코푼 격이니 얼마나 바람직한 전개인가. 하지만 묵향에게는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옥대진과 능비화 두 연놈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소림사 같이 격전이 벌어지는 장소가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양양성에 남아 있어 봐야 내년 봄까지는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희박했다. 묵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본좌도 참여하겠네. 물론, 본좌만 혼자만 갈 것이야. 거의 모든 고수들을 소림사로 뺀다며 ㄴ양양성은 텅 비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런 만큼 수하들에게는 양양성을 지키고 있으라고 명해놓겠네." 교주가 너무나도 선선히 승낙하자, 수라도제는 새삼스럽게 상대를 다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과연 마교라는 최강의 방파를 이끌 만한 인물이로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배포. 확실이 흑풍대주 같은 뛰어난 인물들이 그의 밑에 잇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아무리 마교가 강자지존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계라고 해도, 무공만 강하다고 해서 지존의 자리를 지킬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그 말에 수라도제는 그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도 그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묵향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교주님의 의향이 그러하시다면, 양양성을 맡기겠소이다." 회의실에 나오며 묵향은 관지에게 명령했다. "자네는 흑풍대를 거느리고 이곳에 남게나. 정파의 고수들이 빠져 나간 만큼 양양성의 방어력은 취약해질 테니, 자네와 픅풍대게 메워주게. 자네라면 충분히 해내리라 믿지만, 결코 묵숨을 걸 필요는 없다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관지가 의아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충분히 해내리라 믿는다면서 목숨을 걸지 말라니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이다. 묵향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본교의 싸움이 아니야. 양양성 쯤이야 그냥 내줘도 돼. 본교에 아직 동원하지 않은 엄청난 전력이 남아 있음을 잊지는 않았겠지? 양양성 따위는 나중에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다네. 하지만 자네를 잃으면 본좌는 어디서 자네를 대신할 자를 찾는다는 말인가? 알겠는가?" 그 말에 감동한 관지는 군례를 드리며 힘있게 대답했다. "그대에 보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묵향 20권> 중간부분이에요.벽곡단1알의의미(올리시는 분들 많아서 중복 될까봐 그냥 중간부분 하나 썻어요. | [는]☞묵향☜ 2005.06.04 00:46 뷁픃퉰(audi41) http://cafe.naver.com/mookhang/3288 다른분들이 계속 쓰고 계시는거 같아 저는 중간 부분부터 올릴게요 나중에 차례대로 보세요.. 벽곡단 1알의 의미 맑은 독경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것을 듣고 있는 소림 장문인의 마음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숭산 인근을 포위하고 있는 금군의 존재 때문이었다. 물론 금군 병사들이 소림사에 대해 적대감을 들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그들은 소림으로 들어가는 모든 길목을 막고 무림인인 듯한 자들이 소림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이런 일을 한 번도 당해 본 적이 없는 소림이다 보니 그들이 왜 그곳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 소림은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정파의 무림인들이 마교라는 숙적을 없애기 위해 광분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소림사 최악의 치부라고 할 수 있었던 만사불황을 없애는 데 전력을 투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인생살이는 새옹지마 라고 하듯, 지금껏 화가 되어 왔던 만사불황은 일순간의 각성으로 인해 소림사의 커다란 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많은 방파들이 마교와의 싸움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소림은 그와 무관했다. 하지만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오랜 세월 무림의 일에 무관심했던 대가로 현 장문인인 덕량대사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난제로다. 이 일을 어이하면 좋을꼬?" 이때, 밖에서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장 스님" "무슨 일이냐?" "개방에서 비육걸개 시주께서 오셨습니다." 비육걸개라면 개방의 장로가 아닌가. 외부의 정보가 부족한 이때, 정보에 능한 개방 장로의 등장은 부처님이 내리신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어서 드시라고 해라." "예." 이어서 명호대로 살이 뒤룩뒤룩 찐 거지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에게서 풍기는 악취가 얼마나 지독한지 그가 들어서는 순간 장문인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냄새난다고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개방이 거지들의 문파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커흠, 저, 시, 시주."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아무래도 이곳은 서로 간에 차분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은 것 같구려. 자, 노납을 따라오시구려." 악취를 참지 못하고 누렇게 찌들고 있는 장문인의 표정을 바라보며 비육걸개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요, 뭐." 장문인이 밖으로 나오자, 방장실 앞에서 장로와 함께 온 꾀죄죄한 거지 네 명이 볕이 잘 드는 양지에 앉아 있다가 후다닥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니까 비육걸개까지 모두 5명이 개방에서 파견되어 온 모양이다.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이들이 뿜어내는 악취가 워낙 지독한지라 이들을 어디에다가 기거하게 해줘야 할지 골치부터 아파지는 장문인이었다. "자, 노납을 따라오시게나." "예." 장문인이 비육걸개를 안내한 곳은 방장실 뒤편에 있는 산에 지어놓은 자그마한 암자였다. 비육걸개는 이곳에 오면서 가지고 온 커다란 푸대자루 하나를 등에 지고 뒤따라 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온 거지들 또한 비육걸개가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결코 작지 않은 푸대자루를 하나씩 등에 지고 있었다. 한 번씩 '구구....' 하는 낮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안에는 전서구 등 연락에 필요한 것들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육중한 덩치를 지닌 비육걸개였지만 앞서 달려가는 장문인에 크게 뒤쳐지지 않고 암자에 도착했다. 비육걸개의 경공술이 생각보다 뛰어나다기보다는 방장실에서 암자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점과 장문인이 전력으로 경공술을 펼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아무래도 귀사에 큰 겁란이 닥칠 것이라는 것이 본방의 예측이기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옷섶 안으로 손을 넣어 근지러운 곳을 득득 긁으며 비육걸개가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장문인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런 혐오감보다는 비육걸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안겨준 충격이 더 컸다. "겁란이라니요?아미타불,그게 도대채 무슨 말씀이시오?" "지금 소림을 제외하고 장강 이북에 위치한 많은 문파들이 금군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금군은 각 문파를 공격해서 제압한 후, 문도들을 잡아들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허어, 이상한 일이구려. 지금껏 관부가 무림에 개입한 일이 없었거늘,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한단 말이오?" "아, 대사님께서는 잘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본방의 추축으로는 아마도 양양성에서 있었던 전투에 무림맹이 가세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보복을 가해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놈들은 될 수 있으면 많은 포로들을 잡아들이고 있는데, 아마도 그들을 인질로 삼아 각 문파들에게 압력을 가하려는 행동이 아닐까 하고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허어, 시주의 말을 들어버니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려. 하지만 각 문파들의 반발이 크지 않겠소?" "대사님의 말씀도 옳으십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9대문파의 하나인 종남파까지 무너졌을 정도니 말 다했지 않겠습니까?" 종남파가 무너졌다는 말에 장문인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비육걸개는 피둥피둥하게 찐 살집 안에 감춰진 작은 눈알을 굴려 장문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금껏 황실이 무림을 억누르지 않은 것은 무림을 친다면 황실도 그에 상응하는 피해를 입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금으로서는 잃을 게 없습니다. 안 그래도 무림맹은 금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상태입니다. 무림과 싸우게 된다는 것이 확실시된 이상, 금이 각 문파를 공격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순서였을 뿐입니다." 비육걸개의 말에 장문인은 장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허, 참. 이것 쉬운 문제가 아니구려. 아무래도 노납 혼자서 뭐라고 말할 사안은 아닌 것 같으니 원로들과 대화를 좀 해봐야 할 듯하구려." "서두르시는 것이 좋으실 듯합니다." 그렇게 말한 후 비육걸개는 주위를 빙 둘러봤다. 아무래도 방장실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보니, 인적이 거의 없었다. 숨어서 뭔가 저지르기에 안성맞춤인 장소가 아닌가. 둔중해 보이는 그의 살집에 감춰진 작은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비육걸개는 막 발길을 돌리려는 장문인에게 재빨리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제가 한동안은 귀 사에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여기에서 머물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에 장문인은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토록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인간들을 어디에다가 기거하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그것이 일거에 해결된 것이다. 이곳은 완전히 독립된 작은 암자인 만큼 그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 게 아닌가. "물론이외다. 시주께서 편하실 대로 하시구려. 참 식사도 이곳으로 가져다 드리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그 편이 편리하지 않으시겠소?" 식사시간에 악취를 풍기는 자들이 들어온다면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렇다고 밥덩이를 안겨주며 거지답게 마당에서 밥을 먹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기에 장문인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이었는데, 그 속뜻을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비육걸개는 환히 미소지으며 고마워했다. "물론 그래주시면 저야 고마울 뿐이지요. 다만 좀 많이 부탁드립니다." 비육걸개의 기름진 몸을 힐끔 훔쳐보며 장문인이 중얼거렸다. "많이.....말씀이시오?" "예." "알겠소이다. 그렇게 일러두겠소. 그럼 노납은 이만 가보겠소이다." 장문인이 떠나고 난 후, 비육걸개는 함께 온 거지들 중의 한 명에게 명령했다. "장문인을 만나 소식을 전했다고 총타에 전하거라." "예, 장로님." 그 거지는 자신이 가지고 온 커다란 푸대자루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푸대자루 안에는 제법 큼직한 새장이 하나 들어있었는데, 그 안에는 10여 마리의 비둘기들이 들어 있었다. 거지는 소림사에 무사히 도착해서 비육걸개 장로가 소림사 장문인을 만났음을 아주 작고 얄팍한 양피지에 기록한 후 전통 안에 집어넣었다. 전통을 비둘기 다리에 묶은 후 재빨리 그것을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일단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끝마친 비육걸개는 날카로운 눈매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이 지고 온 커다란 푸대자루를 뒤져 구운 닭 한 마리와 커다란 술병을 꺼냈다. 마개를 뜯은 후 몇 모금 급히 마신 비육걸개는 누가 본 사람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젠장, 소림사에다가도 전서구를 통한 연락망을 갖춰놨었다면 노부가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고 있을 필요가 없잖아." 태산북두라 일컬어지는 소림사에 파견되는 인물인 만큼 격식에 맞게 장로급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모든 장로들은 한결같이 자신만은 가지 않겠다고 한사코 손을 내저으며 거부했다. 그 이유는 바로 술과 음식 때문이었다. 아무리 소림사가 무공으로 유명하지만 사찰은 사찰이다. 신성한 사찰인 만큼 술을 마시기도 힘들 뿐더러, 고기를 먹기는 더욱 힘들 것이 아닌가. 그렇다보니 다른 장로들에 비해서 비교적 술을 적게 탐하고, 음식의 질보다는 양을 선호하는 비육걸개가 뽑히게 된 것이다. 방장 스님이 떠난 후, 몇 시진이 흘러 이윽고 식사시간이 되었다. 젊은 중 서넛이 저마다 커다란 망태기를 하나씩 들고 암자로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거지 한 명이 재빨리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스님 저희들에게 오시는 길이십니까?" 그들 중 한 명이 합장을 한 후 정중하게 거지에게 대답했다. "예, 개방에서 오신 시주님들께 음식을 공양해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아, 예. 이거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넨 후, 거지는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서 볕을 쬐고 있는 동료들에게 외쳤다 "이봐! 밥이다!" 그러자 거지들이 모두들 저마다 자신이 들고 온 포대자루를 뒤적거리더니 큼지막한 바가지를 하나씩 꺼내들고 다가왔다. 그런제 그들 중 한 명은 자신의 바가지 외에 커다란 항아리도 하나 가지고 왔다. 그 항아리를 어디다가 쓰려고 가져온 건지 알지 못 했던 중들의 눈에 잠시지만 이채가 흘렀다. 먼저 밥 한 그릇씩이 저마다 꺼낸 바가지 안에 쏟아졌다. 그런 다음 그릇들에 정갈하게 담겨져 있던 산나물 요리들이 각자의 바가지 안에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담겨졌다. 손님들께 전하는 음식이라 그릇에 담는 데도 정성을 쏟았건만, 곧장 모든 게 엉망으로 뒤섞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젊은 중들은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거지들을 향해 뭐라고 질책하지는 못했다. 방장 스님께서 이들을 정중히 모시라고 했는데, 시비를 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거지들이 거지들 방식으로 먹겠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젊은 중들을 더욱 기가막히게 만든 것은 각자 배식이 끝나자, 남은 음식들을 몽땅 다 커다란 항아리 안에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그들이 이리로 가지고 온 것은 거의 10인분에 달하는 음식이었기에 많은 음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항아리에 때려부어뒀다가 나중에 먹으려고 할 줄이야...................... 보다 못한 중들 중 한 명이 참견했다. "아니, 그렇게 따로 챙겨두실 필요 없으십니다. 남는 것은 그냥 놔두십시오. 저녁때가 되면 다시 음식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거지들 중의 한 명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대꾸했다. 중들의 짐작과는 달리 항아리는 도시락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아닙니다, 스님. 이건 저희 장로님께서 드실 식삽니다. 그분께서 조금 많이 드시거든요. 헤헤." 혼자서 6인분의 식사를 하다니......... 그게 사람인가? 돼지지. 이때, 옆에 있던 거지가 참견을 했다. "다음에 오실 때는 그냥 항아리 두 개에 음식을 듬뿍 넣어서 가지고 오십시오. 그 편이 들고 오시기도 편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희들로서도 그 중 하나를 장로님께 곧장 가져다 드리면 되니까 훨씬 편리하고 말입니다." 젊은 중은 기가 막힌 듯 했지만 일견 일리 있는 말인지라 순순히 응낙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중들이 돌아간 후, 거지들은 돼지죽처럼 이것저것 뒤섞인 식사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물론 수하들이 식사를 시작하고 있을 때, 암자 안에서는 비육걸개가 수하들이 건넨6인분의 식사를 맛나게 먹어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 비육걸개가 항아리를 끼고 앉아 와구와구 음식물을 입 속에 퍼 넣고 있을 때,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장로님!" 비육걸개는 짜증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무슨 일이냐?" "총타로부터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비육걸개는 입 안에 든 음식물을 거의 씹지도 않고 꿀꺼덕 삼킨 후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하필이면 한창 밥 먹고 있을 때 오고 지랄이야. 들어오라고 해!" "옛." 땟국물이 질질 흐르는 거지 하나가 재빨리 암자 안으로 들어왔다. 비육걸개는 한손으로는 입 속에 밥을 꾸역꾸역 퍼 넣으면서 다른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전령으로 온 거지는 그 손에 자신이 가져온 서신을 줘어줬다. 입으로는 열심히 음식을 씹으면서 눈으로는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비육걸개는 갑자기 맹렬하게 음식을 입 속에 퍼 넣더니 더이상 입 속에 넣을 수 없을 지경이 되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서신을 지금 당장 소림방장에게 전해야 했기에 눈물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육걸개의 방문을 받은 장문인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방장 스님은 방금 전에 식사를 마친 상태였다. 느긋한 포만감을 즐기며 향기로운 차 한 잔을 즐기고 있었는데, 악취를 풍기는 인물이 왔으니 결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비육걸개의 말을 들은 장문인의 코에는 더이상 악취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런 하찮은 것에 신경쓸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종남파를 무너뜨린 금군 병력이 본사로 향하고 있다고 하셨소이까?" "예, 방금 전에 본방에서 도착한 서신입니다." 비육걸개는 방금 전달받은 서신을 장문인에게 전달하며 덧붙였다. "아마도 종남파를 파괴하면서 큰 피해를 당했는지 그 수는 1천기 정도로 줄어든 모양입니다. 하지만 종남파를 무너뜨리기 위해 동원된 만큼 그자들이 금군 최고의 정예임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아, 아미타불............" 비육걸개의 말에 방장은 뭐라고 대꾸는 못하고 '아미타불'만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여기저기에 있는 무림방파들을 휩쓴 금군 병사들이 모두 다 소림사로 집결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집결하는 이유는 뭐겠습니까?" "설마, 개방은 그들이 본사를 노리고 있다고 추측한다는 말씀이시오?" "물론이죠. 지금까지 소림은 무림의 일에 거의 간섭하지 않으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랑캐 놈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소림이 언제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병사들을 풀어 세력이 약한 곁가지들을 모두 다 제거한 후, 이곳으로 힘을 집결시키고 있는 겁니다." "허어, 그것 큰일이구려." "이제 다 전해드렸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급히 하던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시구려. 바쁜 와중에 이렇듯 시간을 내어 직접 달려와 주셔서 감사하오이다." 비육걸개는 방장실을 나선 후 구르듯이 달려 암자로 돌아왔다. 어떤 놈이 훔쳐 먹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소중하기 그지없는 밥 때문이었다. 후다닥 도착한 그는 항아리를 자세히 살펴봤다. 조금 양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조금 헷갈리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몇 숟가락 분량이 없어진 것만 같았다, 비육걸개의 투실투실한 뺨이 분노로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식탐이 하해와도 같이 많은 인간들이 다 그렇듯 비육걸개 또한 먹는 것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가 없었다. "아까 그 연락 왔던 놈 잡아와." 그 말에 거지는 아연한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놈이라면 벌써 돌아갔는뎁쇼?" 그 말에 비육걸개는 자신이 우려한 것이 사실이었다는 듯 외쳤다. "이런 망할! 그 새끼가 몰래 처먹고 뒤가 캥기니까 서둘러서 튀었구나." 신경질을 머리끝까지 내고 있는 비육걸개를 바라보며, 거지는 필사적으로 상대를 옹호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놈이 아무리 간뎅이가 크다고 해도, 하늘같으신 장로님의 밥을 슬쩍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비육걸개는 피둥피둥한 살 집에 감춰져 있는 작은 눈알을 굴리며 외쳤다. "너, 그거 목숨 걸고 장담할 수 있어?" 거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덤태기써서 박살난 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말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비육걸개가 뭔가 먹고 있을 때는 근처에도 안 갔었다. 물론 그놈이 결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미친놈이 법 몇 숟가락에 목숨을 걸겠는가. 그것도 내 일도 아닌데 말이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뇨." 비육걸개는 거지의 대답을 보고 그것보라는 듯 더욱 확신에 찬 어조로 명령했다. "너, 빨리 가서 그놈 잡아와." "옛." 거지가 달려 나가고 난 후, 비육걸개는 항아리를 끌어안고 다시금 밥을 와구와구 입 속에 퍼 넣기 시작했다. 비육걸개와 대화를 나눈 후, 장문인의 마음 속은 더욱 심란했다. 아무리 소림이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하지만 몇 번인가 외세의 침공을 당해본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파 무림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마교도들에 의해서였다. 이렇듯 병사들과 대치를 한 적은 지금 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금군 병사 개개인의 힘은 지금껏 싸워왔던 마교도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대금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때, 장문인은 사형인 대정선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급히 말을 걸었다. "공공 사숙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장문인의 다급한 말에 대정선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그는 지금까지 공공대사를 설득하기 위해 참회동에 머물다가 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습니다. 계속 면벽만 하고 계실 뿐..........." "아니, 그렇다고 해도 뭔가 드시는 동안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대정선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하루에 한 번 물과 벽곡단만 드실 뿐, 계속 면벽만 하고 계셔서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을 찾기가 어렵더군요." 몰아의 경지에서 운기조식을 할 때만큼 고수들에게 취약한 때는 없다. 그렇기에 장시간 내공수련을 하자면 어딘가에 꼭꼭 숨어서 하게 된다. 물이야 한 항아리 들고 가면 그만이겠지만, 음식은 다르다. 오랜시간 보관이 힘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 벽곡단이다. 장시간 보관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걸 물과 함께 먹으면 최ㅗ한 굶어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것이다. "하루 세 번이 아니라 한 번이라고요? 그래, 벽곡단은 충분히 드시고 계셨습니까?"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대정선사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힘없이 대답했다. "1알씩 드시고 계셨습니다." 벽곡단1알 이라는 말에 장문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숙께서 아무리 불도를 깊게 깨우치셨다고 하지만, 하루 1알로 되겠습니까? 한 끼 식사로 대여섯 알은 먹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아미타불.... 사숙께서 이러다가 몸이라도 상하시지 않으실지 정말 걱정입니다." "전에 빈도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숙께서는 참회동에서 목숨을.........." "사형! 제발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이성을 잃고 소리치는 장문인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었기에 대정선사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대정선사도 지금 처한 소림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공공대사가 나서지 않는다면 소림은 멸문까지도 생각해야 할 정도가 아닌가. "알겠습니다, 빈도가 다시 한 번 가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형." 대정선사가 돌아간 후, 장문인은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승려들은 아직까지 작금의 사태가 얼마나 소림에 위급한 것인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장문인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소림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놓인 듯 위태롭기 짝이 없음을 . 이 사태를 잘 헤쳐 나가려면 사숙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꿈쩍도 안 하고 있는 것이다. "허어, 이 일을 어찌할꼬?" 사숙께서 해탈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음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 응당 옳은 일이겠지만, 장문인으로서는 그럴 수 가 없었다. 현재 소림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든 일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비육걸개는 한껏 미소 띤 얼굴로 방장실을 찾아왔다. 살이 뒤룩뒤룩 찐 그가 미소를 지으니 너무나도 답답하고 징그럽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방장 스님은 결코 그런 내색은 하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좋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방장스님." 비육걸개의 말에 장문인의 눈빛은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도대체 무슨 소식인데 그런단 말인가? "수라도제 대협께서 양양성에 파견되었던 정예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급히 달려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대단한 희소식임에 틀림없었다. 양양성에 파견되어 있는 고수들은 각 문파에서 고르고 고른 최정예들 아닌가. 그들이 이곳 으로 오고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수라도제 시주께서 말이오? 허어, 참.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그래, 언제 도착하시게 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이까?" "워낙 먼 거리라서 아무리 서두르신다고 해도 5일은 걸릴 겁니다." "아미타불....5일이라....." 지금 소림사를 포위하고 있는 금군의 수는 더욱 늘어나서 이제는 거의 3만 명에 달했다. 조만간에 금군은 행동을 시작할 것이다. 5일이라는 여유가 있을까? 이때, 지객당에 배치되어 있는 중 한 명이 화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객당이라면 소림의 외당을 담당하는 곳이 아닌가.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장문인은 장탄식을 하며 중얼거렸다. "허어, 무슨 일일꼬? 드디어 올 것이 온 겐가?" 잠시 후, 중년의 스님은 장문인에게 예를 건넨 후 다급히 말했다. "금군 장수로부터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방장 스님." "그 시주가 뭐라고 했는데 이렇게 다급히 달려왔느냐." "앞으로 10년간 봉문하라는 말이었습니다. 하루동안 생각 할 여유를 줄 테니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허어, 10년간의 봉문이라........." 봉문하라는 말은 곧 10년 동안 무림에서 완전히 손을 떼라는 말이 아닌가. 물론 지금까지 무림에서 일어나는 일에 가급적이면 관여를 하지 않았던 소림이었다. 그렇기에 봉문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조용히 협상을 해온 것도 아니고, 창칼을 앞세우고 협박을 해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소림사가 창건 되고 수많은 세월 흘러왔지만, 감히 소림사를 상대로 이렇듯 대놓고 협박을 해온 무리는 없었다. "허어, 이거 난제로고." 장문인이 난감해 하는 것도 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소림사에 8천에 이르는 승려들이 있다고 하지만, 선승들을 뺀다면 겨우 5천이 될까 말까한 숫자만 남게 된다. 물론 그 인원만 가지고도 충분히 이길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승리하면 뭐할 것인가? 소림사는 지금 대금제국의 영토 안에 위치해 있다. 즉, 황실의 명령을 안 들으면 반역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소림사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더라도 거대한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옆에서 무림맹이 도와준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여기 집결하고 있는 병사들은 보통의 병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마교의 교주까지 지냈던 장인걸이 20여 년에 걸쳐 힘들여 키운 정예 병사들이 그들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극마급의 초강자인 장인걸도 이미 소림사를 포위하고 있는 수하들과 합류해 있었다. 1천여리나 되는 먼 거리를 수하들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지만 장인걸은 시간절약을 위해 천마혈검대의 고수들만 거느리고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었다. 일반의 병사들이 상대라고 해도 수만에 달하는 숫자를 지니고 있다면 힘든 싸움 이 될 것이지만, 설상가상으로 상대는 장인걸이 직접 거느리는 정예병들이었다. 격전이 시작되면 소림사는 결코 무사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위에 집결한 적은 3만이나 됩니다. 그외에도 사방에서 금군들이 숭산으로 이동해 오고 있습니다. 아마 내일쯤이면 최악의 경우 1만 정도는 더 모일 겁니다." "그 정보는 정확한 것이오이까?" "물론입니다, 방장 스님." 장문인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알겠소이다. 워낙 중대사가 되어놔서 원로들과 상의를 좀 해봐야겠구려." <묵향 20권> 10년간 봉문하라 (완성) | [는]☞묵향☜ 2005.06.05 04:39 뷁픃퉰(audi41) http://cafe.naver.com/mookhang/3385 > > 10년간 봉문하라 > > > >장생전에 장문인의 지시에 따라 소림을 떠받치는 모든 원로들이 집합했다. 평소에는 모두들 늙어서 열반에 드신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 될 정도로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공 자배의 고승들이 모습을 비췄고, 대 자배의 고승들도 이날만큼은 소림에 원로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싶을 정도로 많은 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문인은 장생전에 모인 고승들에게 현재 소림이 처한 위기를 소상히 말했다. >"물론 저들의 수가 엄청나다고 하지만 본사가 지닌 저력이라면 충분히 저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국가라는 데 있습니다. 이번에 저들을 물리친다 해도 얼마지나지 않아 수십만의 금군이 또 다시 몰려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장문인의 말에 월로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공식적으로 입을 연 것은 전대 장문인인 공지대사 였다. >"허어, 본사가 창건된 후 지금까지 수많은 제국들이 하남을 지배했었소이다.하지만 이토록 광오한 요구를 해온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이오." >"사숙 더이상 생각해볼 것도 없습니다. 지금껏 쌍아놓은 소림의 위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저들의 횡포에 굴복한다면 무림동도들이 소림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드높은 명예를 한순간에 떨어뜨리기는 쉽겠지만 그걸 다시 되찾기에는 엄청난 피와 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 입니다." >"사제의 말이 옳소이다. 장문인께서는 상대가 국가라서 저어하시는 모양인데, 병사들이 집단전투에는 이쪽보다 능할지 모르지만, 무공에 있어서는 보잘것이 없지 않습니까? 한밤중에 기습을 가한다면 집단전 같은 거 몰라도 하등의 지장이 없습니다. 또, 수십만의 병사들이 몰려와 도저히 상대하기 힘들다면 퇴각하면 되지요. 남쪽에는 무림맹이 있고 또 대송제국도 건제합니다. 그들과 합류한다면........." >"사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나. 중원불교의 성지인 소림사를 놔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오랑캐의 횡포에 굴복한다는 것이 치욕스럽기는 하지만, 성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지 않은가." >그 후로 수많은 토론이 오고가자 결국 원로들은 두파로 나뉘었다. 하나는 성지를 오랑캐들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치욕스럽더라도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봉문하자는 파와 또 하나는 무림에서 지켜온 대소림의 위상이 있는데 이렇듯 적의 무력에 굴복하여 꼬리를 내리느니 결사항전하자는 파였다. > > > >새벽이 되자, 양쪽은 더이상 설전을 벌이기도 질렸는지 한 가지 타협안을 내놨다. >"공공 사형 께서 돌아오셨다고 하니 그분께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사제의 의견이 옳도다." >공자배의 최연장자라고 할수 있는 공지대사가 그 의견에 찬성하자, 그 말에 모두가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결사항전을 한다고 하더라도 소림 최강의 고수인 그의 도움은 절실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가장 깊은 수련을 쌓았다고 생각되어지는 공공대사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수 많은 원로고승들이 줄을 지어 참회동으로 향했다. 참회동은 소림사의 가장 깊은 곳에 마련된 조사들의 유품을 모아놓은 조사전의 뒷산에 뚫린 동굴이었다. 그렇기에 원로 고승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다른 승려들이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비육걸개는 그모습을 지켜 볼 수 있었다. 자신이 기거하는 암자 또한 소림의 아주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엇? 저분들은! 공자배 고승들이 아닌가?" >공자배라면 전대에 소림사를 이끌던 주축들이었다. 후진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 후, 그들은 단 한번도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정보통이라고 하는 개방에서 조차 대부분의 공자배 고승들은 열반에 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그게 아니었다. 무려 10여 명에 이르는 노승들이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소림사가 뭔가 결단을 내리려고 하는 모양이군." >몰래 가져온 술을 한모금씩 아껴 마시며 구경하고 있던 비육걸개는 그 육중한 몸을 비호처럼 날렸다. 과연 소림의 선택은 뭘까?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신법을 구사하며 조심스럽게 달려가는 비육걸개의 모습은 도저히 돼지 같은 몸매를 지니고 있음을 믿지 못할 만큼 은밀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육걸개의 그런 움직임도 오래가지 않아 소림승들에게 포착되었다. 이곳에 모인 고승들 중에서 무공이 낮은 승려는 단 한명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소림이 감춰두고 있는 최강의 세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거기 숨어있는 시주는 누구신고?" >고승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비육걸개는 쑥스러운 미소를 띠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이 충분히 껴안을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되는 두께를 지닌 나무 뒤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비육걸개. 방금 전에 그 엄청난 덩치가 그토록 가느다란(?) 나무에 의지해 모습을 감출 수 있었다는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비육걸개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장문인이 한 발 앞으로 나와서며 말했다. >"시주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곳은 외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외다. 그러니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 무엇으로도 타협할 수 없는 단호함이 듬뿍 묻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방장 스님. 제가 워낙 궁금증은 참지 못하는지라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비육걸개는 용서를 구한 후 발길을 돌렸다. 암자로 돌아가는 비육걸개의 발걸음에는 아쉬움이 듬뿍 배여 있었다. > > > >"공공 사숙, 참회 도중에 정말 송구스럽습니다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긴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고승들이 참회동 앞에 집결해 있음을 공공대사가 모를 리없었다. 소림의 모든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은 그만큼 중대한 일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잠시 후, 공공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모습은 처음 참회동에 들어갈 때에 비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사실 하루 식사량이 겨우 벽곡단 1알이라는 것은 굶어죽기 딱 알맞은 분량인 것이다. >"무슨 일인고?" >그 말에 공지대사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을 걸었다. >"사제 오랜만이구나." >"예, 사형." >정말 오랜 시간 헤어져 있던 사형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공지 사형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제들이 있었고, 또 사질들도 있었다. >그들의 거의 대부분을 공공대사는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기쁨에 뛸 듯이 기뻐해야 함에도 그들을 바라보는 공공대사의 두눈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상의할 일은 무엇이오이까?" >장문인인 대덕대사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대금제국과의 갈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무력을 앞세운 금제국의 협박을 들어줘야 하는지, 아니면 그에 맞설 것인지...... 그 말을 다 들은 공공대사는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허어, 모든 것이 헛되고도 헛되도다. 명성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자존심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고? 그리고 불제자가 불도를 쌓는데 산 속이면 어떻고, 들판이면 또 어떤고?" >잠시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고승들을 바라보던 공공대사는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노납을 붙잡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모두들 불도에나 정진하시게나." >더이상 대화할 필요를 못느꼈는지 공공대사는 조용히 몸을 돌려 참회동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의 말에 다른 고승들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던 것이다. 자신들이 소림에 들어온 것이 무엇 때문이었던가? 바로 불도를 닦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언제부터 세속적인 명예와 위상에 눈이 멀어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공지대사는 참회동 안으로 들어가는 공공대사를 바라보며 나직이 탄식을 터트렸다. >"허어, 지금까지의 수행이 헛되고도 헛된 것이었구나. 정작 참회동에 들어가야 할 사람은 노납이었는데 그걸 몰랐으니.....아미타불." >공공대사가 한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지만 공지대사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공공대사 말은 불도를 닸는데 있어서 소림사라는 굴레에 집착하고 있는 원로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다. 사실 공공대사의 말은 하나도 틀린 점이 없었다. 불도를 닦는데 소림사에서 닦으면 해탈하고 다른 곳에서 닦으면 해탈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미망 속에서 헤매던 자신을 일깨워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인지 공지대사는 참회동을 향해 합장을 하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장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 많은 것을 배운 듯하이. 그래, 장문인의 생각은 어떤고?" >그 말에 장문인은 합장하며 대답했다. >"사숙어른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원로들과 공공대사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소림의 행동은 무림맹이 전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버렸다. >비육걸개가 멀리서 훔쳐보는 가운데 장문인의 발표가 있었다. 이런 저런 말이 많았지만 그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세속적인 명예와 위상에 연연하지 말고, 불제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라.' >그 말은 곧 10년간 봉문하겠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었다. 선승들은 장문인의 결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대부분의 무승들은 그렇지 못했다. 물론 그들도 승려인 만큼 장문인의 결정이 심히 못마땅했겠지만 그걸 대놓고 따지지는 못했다. 그들이 장문인 앞에서 떠들어 댈 만큼 발언권을 지니고 있지도 못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들 또한 불제자였다. 무공을 익히는 데 불경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오랜 세월 소림에 기거하며 주워들은 풍월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불제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라는데 뭐라고 반박할 것인가. >"젠장! 일이 꼬이는군. 꼬여." >소림의 결정을 확인하자마자 비육걸개는 암자를 향해 구르는듯이 달려갔다. 그는 암자에 도착하자마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며 사이좋게 이를 잡고 있는 거지들을 향해 소리쳤다. >"본방과 무림맹을 향해 전서구를 띄워라 소림은 봉문하기로 결정했다고 말이다." >그 말에 방도들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더니, 곧이어 허둥지둥 전서를 쓰기 시작했다. > >장인걸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소림사가 이쪽의 제의를 수락했다고 했느냐?" >편복대주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교주님." >소림사의 승려들은 상대의 협박 따위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무리들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소림은 찬란한 명예를 지니고 있었고, 지닌 바 힘은 막강했다. 강호에 나가면 소림승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강호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성장한 승려들이 소림의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봉문 제의를 간단히 수락했으니 장인걸로서는 황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이 계획을 세우면서 소림이 그 제의를 순순히 응락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소림사를 공격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보유한 최정예 고수들을 모두 다 집결시켰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소림에 보내는 전령을 일부러 무공을 연성하지 않은 자를 골라서 보내지 않았던가. 소림이 이쪽을 가볍게 보고 대비를 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가벼운 술수였다. >모든 준비를 다 갖춰놓고도 안심이 안 되어 장인걸은 소림사가 거부했을 때 곧바로 공격을 가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많은 병력이 모일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릴 것인디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참이었다. >"허엇, 참. 언제나 본좌의 뒤통수를 치는 땡중들이구먼. 설마, 순순히 백기를 들어버릴 줄이야." >"계획대로 소림사를 공격하실 것이옵니까?" >장인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외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 공격해봐야 얻을 게 없다. 소림사가 지닌 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꼭 필요하다면 혹 모르겠지만, 구태여 찾아가서 싸울 만큼 만만한 상대는 아니야." >그가 무림의 태두라고 불리는 소림사를 박살내려고 한 것은 자신의 말을 안 듣는다면 아무리 강력한 무림의 방파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려 함이었다. 희생은 크겠지만 그만큼 얻는 것 또한 많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소림을친다면 전혀 소기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소림은 이쪽 요구를 들어줬다. 요구를 드어준 자를 쳐서 없앤다면 다른 문파들에게 '이렇게 해도 죽고 저렇게 해도 죽으니 최후의 힘까지 짜내어 발악해라' 하고 충동질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힘들여 잡아들인 인질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인질을 잡고 상대를 협박할 때는 나름대로 신용도를 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인질의 안위를 생각하며 이쪽의 말을 들을 게 아닌가. >"인질들의 정확한 신상명세를 파아하는 작업은 언제 끝나겠는가?" >"수많은 문파에서 잡혀오고 있는지라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교주님" >"그래? 그렇다면 지금까지 작성된 명단을 무림맹에다가 넘기도록 해라. 본국에 반항하는 종남파 제자가 보인다면 종남파에서 잡아온 인질의 목을 벨 것이고, 황보세가의 제자가 반항한다면 황보세가에서 잡아온 인질의 목을 베겠다고 말이야 그렇게 되면 많은 방파들이 무림맹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수 없게 되겠지." >"소림을 파괴하지 못한 이상, 그런 협박을 해도 큰 효과를 기대 할 수 업을 것이옵니다." >"흠,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 그런 말을 꺼낸것으로 보아 자네는 뭔가 생각해둔 것이 있는 모양이군 ."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 소림 대신 공동파를 치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공동파라고?" >"예, 공동파가 무림맹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대단히 높은 것이옵니다. 과거 무극검황 옥청학이 맹중직에 오른 후 장로들을 거의 대부분 공동파 출신의 인물들로 바꿨습니다. 지금 맹주가 태극검황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 아직까지도 상당수의 장로들은 공동파 출신이옵니다. 공동파를 파괴하고 또 그 식솔들을 인질로 잡는다면 대단히 효과가 있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하지만 공동파는 본국의 영토 밖에 위치하고 있지 않느냐?" >"오히려 그때문에 공동파를 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판단되옵니다. 만약 본국의 비위를 거스른다면 어디에 위치하느냐를 불문하고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게 되면 수많은 무림의 방파들이 몸을 사릴 것이옵니다." >그 말이 매우 장인걸의 마음에 들었는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조언을 받아들이도록 하겠네." >"감사하옵니다, 교주님." >"좋아, 무림맹에 사신을 보내는 것은 공동파를 파괴한 뒤로 미루도록 하지." >"현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참, 기왕에 소림사가 문을 닫았으니, 그들을 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이용할 수는 있지 않겠사옵니까?" >"어떻게 말이냐?" >"예, 소림사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대단히 높은 것 이옵니다. 그런 그들조차 본국에 거역하지 못하고 봉문을 선언했다는 것을 중원에 걸쳐 광고하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작은 군소문파들이 감히 본국에 대들 엄두를 낼 수 있겠사옵니까? 거기에다가 그렇게 하면 무림맹과 소림사 간에 갈등도 조성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사옵니까?" >그 말에 장인걸은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로다. 그대로 시행해라." >"옛, 그럼 속하는 물러가겠사옵니다." >"나가는 길에 나하추 원수보고 나한테 오라고 전하게." >"예, 교주님." >편복대주가 물러가고 난 다음 잠시 후에 나하추 원수가 묵직한 갑주를 철그렁거리며 들어왔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군례를 올리며 외쳤다. >"대원수님을 뵈옵니다. 본관을 찾으셨다고 해서 달려왔사옵니다." >"본좌는 공동파를 친 후 귀관과 합류 할 것이다. 그동안 귀관은 본좌를 대신하여 즉시 모든 병력을 이끌고 남양으로 가서 군량을 지켜라." >양양성에서 후퇴한 후 무안 대장군과 5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한 고나합 원수가 합류하여 주둔하고 있는 곳이 노하구 였다. 그리고 이들 60만이나 되는 대군이 소비할 막대한 식량을 비축하고 있는 곳이 바로 남양이었다. 전사한 파저 원수가 양양성을 공격할 당시만 해도 남양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양양성이 쉽사리 함락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라졌다. 이제 전쟁은 지루한 장기전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다가 계절은 지금 겨울을 코 앞에 두고 있지 않은가. 긴 겨울이 지나갈 동안 군사작전을 감행할 수는 없지만, 싸움이 없다고 병사들을 굶길 수도 없는 노릇 이었다. 남양은 금군 60만대군이 수개월전에 걸쳐 소비할 막대한 군량을 쌓아두고 있는 장소였다. 만약 적들이 이곳 남양의 군량을 없애버린다면 60만 대군은 싸우지도 못하고 후퇴할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남양의 방어는 매우 중요한 현안이었다.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겠나이다." "그렇게 장담할 만큼 손쉬운 임무는 아니야. 무림인이라고 불리는 무공이 뛰어난 놈들이 송군을 돕고 있어. 그 점을 감안하여 귀관에게 여섯명의 고수 와 쓸만한 녀석 100명을 골라 주겠네. 그들을 잘 활용한다면 무리믜 떨거지들을 손쉽게 막을 수 있을게야." 그 말에 나하추 원수의 안색은 환하게 밝아졌다. 방금 전 대원수가 거론한 인물들은 모두 다 대원수 직속의 엄청난 수준의 고수들이었다. 특히나 그들 중 여섯은 대원수의 명령만을 받드는 도무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강자들이 었다. 그들을 자신에게 준다면 무공 강한 놈 한둘쯤 야밤에 침투해와도 겁날 것이 없었다. "옛, 감사드리옵니다. 대원수." 소림사가 봉문을 결의한 다음날 오후가 되자 수라도제가 이끄는 1천여 명에 달하는 구원세력이 숭산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다. 쉬지 않고 달려와서 그런지 모두들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고르고 고른 고수들 답게 그 눈빛 만큼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수라도제는 소림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워낙 화급을 요하는 것이었기에 자신이 이끌고 갈 고수들을 실력에 따라 5개의 무리로 나눴다. 각 문파들이 자랑하는 가장 뛰어난 고수들을 1진으로 삼고, 그 외에는 문파별로 평균적인 실력을 측정하여 4개의 무리들로 나눴다. 1진은 수라도제가 직접 지휘하고 그 외의 다른 무리들은 각각 이름있는 명숙들을 선택하여 지휘를 맡겼다. 적들이 소림으로 몰려오고 있는 이상 더이상 지체할 시간여유는 없었기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소림에 도착하라는 지시를 모두에게 내렸다. 그런 다음 수라도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이곳 소림사에 도착한 것이다. 묵향은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사찰을 보며 이죽거렸다. "저기가 그 유명한 소림사로군요." 뭔가 비꼬는 듯한 어조였지만 일단 묵향이 말을 꺼냈기에 만통음제는 질문을 던졌다. "동생은 소림사에 온 것이 처음인가?" "물론이죠. 제가 여기 올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기야 생각해 보니 언젠가는 한 번 여기 와야 할 일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였죠." 묵향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광기가 번쩍인다고 느껴졌다. "허어, 소림이 동생과 뭔가 은원을 맺은 모양이군 이 우형에게도 말 못할 사연인가?" "뭐 그렇게 큰 은원은 아닙니다. 멍청한 부하놈 하나가 땡중들을 만만하게 보고 싸우다가 박살났을 뿐이니까요." 언뜻 들으니까 별로 큰일도 아닌 듯했기에 만통음제는 속으로 저으기 안심했다 사실 이런 시기에 마교가 소림사를 박살내겠다고 든다면 정파와 큰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신은 마교와 정파의 사이에 끼어 아주 입장이 난처해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한담을 나누며 달려가 보니 어느덧 소림사에 도착하게 되었다. 소림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뛴 것은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소림사 정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서 있는 수라도제의 모습이었다. "이상하네, 수라도제 정도의 인물이 도착했다고 하면 소림승들이 화급히 마중나올........!" 바로 그때 수라도제가 보고 있는 쪽을 향해 이리저리 시선을 맞추고 있던 묵향의 눈에도 소림사 정문에 붙어 있는 방이 보였다. '소림은 향후 10년간 봉문하노라' "봉문이라고? 어떻게 이럴 수가!" 경악하는 묵향의 반응을 바라보며 만토음제는 거참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옆에서 바라보니 소림이 봉문한 것에 대해 정파의 거두라는 수라도제보다 오히려 마교 교주가 더욱 경악하고 있는 듯했으니 말이다. "동생도 소림이 봉문한 것이 대단히 의외인 모양이군." "물론 의외지요. 지금껏 본교의 앞을 가로막아온 놈들인데, 왜 금나라에 대해서는 맞설 생각을 안 하는 겁니까?" "글쎄 우형도 소림의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으니 뭐라고 대답해 줄 수가 없구먼." 잠시후 승려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절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는 것을 알고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승려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소승은 지객당의 굉량이라 하오이다. 이곳에 모이신 시주분들의 신색을 보니 모두들 무림을 종횡하시는 영웅들이신 모양인데 어찌 이곳에 왕림하셨소이까?" 굉량이 보니 많은 호걸들 중에서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듯한 새파란 녀석이 앞으로 쑥 나서는 것이 보였기에 씁쓸한 입막을 다셨다. 하지만 그 젊은이의 말을 듣는 순간 굉량의 표정은 경악감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노부는 서문길제라고 하오." 서문길제라면 바로 서문세가를 이끌고 있는 수라도제의 이름이 아니었던가. 환골탈태를 했기에 그토록 젊게 보였던 것이다. 그토록 강한 고수가 많은 무림인들을 이끌고 이곳에 나타날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굉량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아 정중하게 합장을 하며 답례를 했다. 하지만 얼굴과는 달리 그의 말투는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아미타불, 본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이렇듯 여러 무림의 영웅들께서 본사를 도와주러 달려와 주시다니 소승 감격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헛된 걸음을 하시게 되어 뭐라 말씀드리기가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 말에 수라도제도 굉량을 향해 가볍게 포권하여 답례했다 "소림은 정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소이다. 위기에 처해 있다면 응당 도우는 것이 도리지요." 예법에 따른 절차상의 대화는 이 정도로 하고 수라도제는 이제서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정문에 걸려있는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저런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었소이까?" "아미타불, 소승도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방장스님께서 결정하신 것을 소승이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허헛, 참. 지금껏 큰 일만 터지면 꼬리를 감추더니 역시 소림은 믿을게 못되었군. 이런 한심한 무리들을 돕기 위해 밤낮으로 달려온 나 자신이 한심하구나. 허명만 높은 소인배들이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떠들다니..........." 수라도제의 말에 굉량의 안색에 은근한 노기가 서렸다. 소림사를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상대하는 곳이 지객당이었고, 그것은 무림인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굉량의 경우도 지객당에서 생활하며 많은 무림인들과 접했지만 오늘처럼 지독한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만약 다른 중생이 저딴 소리를 했다면 즉시 그 주둥이를 틀어막고 다리를 분질러놓겠지만, 상대는 수라도제였다. 그렇기에 굉량은 감히 발작하지 못하고 못마땅한 어조로 대꾸했다. "시주,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그 말이 되려 수라도제의 심기를 더욱 건드린 듯 그의 언성은 더욱 높아졌다. "지나치기는 뭐가 지나치다는 말이냐! 네놈이 승려고, 또 이곳이 절이기에 노부가 지금 참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곳이 다른 곳이었다면 당장 그따위 결정을 내린 놈의 목을 쳤을 것이다. 알겠느냐?" 수라도제의 노기 어린 질책에 굉량의 안색 또한 노기로 붉게 물들었다. 사실 대부분의 무승들이 그러하듯 굉량 쪼한 대소림을 무시하는 금군들과 싸우고 싶었다. 장문인의 결정만 아니었다면 그 놈들의 머리통을 박살내놨을 것이다. 안 그래도 장문인의 결정이 매우 마음에 안 들었지만 ,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라도제로부터 이런 조소어린 질책까지 받게 되자 수십년 동안 쌓은 불력이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무림최고수들 중 한 명에게 뭐라고 대구할 것인가? 잘못하면 정말 소림을 박살내고도 남을 인물인데 말이다. 그렇기에 굉량은 분노를 참으며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했다. "시주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지객당주님께 시주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본사는 봉문한 만큼 손님을 받지 못하기에, 어려운 발걸음 하셨는데도 차 한잔 대접해 드리지 못하겠군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굉량은 자기 할 말만 퉁명스럽게 내뱉은 후 ,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말상대할 인물까지 없어지자 수라도제는 도저히 노기를 주체하기 힘든 상태였다. 한참동안 거친 숨만 내쉬고 있던 수라도제의 눈에 또다시 문짝에 붙어 있는 방이 보였다. '소림은 향후 10년간 봉문하노라' 수라도제의 손이 어느 순간 등 뒤에 걸린 거도를 향해 움직였다. 쾅! 어느새 뽑혔는지 수라도제의 거대한 도는 한 바탕 칼부림을 일으켰고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소림사의 정문이 엄청난 굉음을 일으키며 희뿌연 먼지를 자욱하게 피워 올렸던 것이다. "사돈, 소림의 행태에 분노하신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과연 이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분노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종리영우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수라도제는 다시금 소림사로 시선을 돌렸다. 이때 자욱하게 피어올랐던 먼지가 서서히 가라 앉으며 박살이 나 있는 소림사의 정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림사의 정문은 100년 된 소나무를 가공하여 만든 대단히 튼튼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문 뒤편으로 아연한 표정으로 서서 멀뚱이 무림의 군웅들을 바라보고 있는 중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을 보고 수라도제는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다. "개새끼들! 그래 10년간 봉문하겠다고? 좋다 봉문의 시작은 네놈들 마음이겠지만 끝도 그렇게 될 성 싶으냐? 이후 소림사 밖으로 나오는 새끼들은 노부가 친히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서 다시 처넣어줄 테다." "허어, 사돈. 노기를 참으십시오. 이렇게 역정만 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듯합니다. 자, 가시지요 술이나 한잔 하면서 노기를 달래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림의 정문이 박살날 정도의 소란이벌어졌는데, 그것을 장문인이 모를 리 없었다. 장문인은 참혹하게 파괴되어 있는 정문을 보고는 한동안 말조차 하지 못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장문인은 정문을 손으로 가리키며 옆에 서 있던 지객당주를 향해 물었다. "아미타불!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장문인의 말에 지객당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수라도제 시주께서 많은 시주들을 이끌고 달려오셨던 모양입니다. 쾅하는 소리를 듣고 소승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이렇게 된 후 였습니다." 그러면서 지객당주는 아예 정문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모습을 하고 있는'정문' 을 손으로 가리켰다. "수라도제 시주께서? 허어, 그 시주의 성정이 불같다고 하더니, 과연 소문대로인 모양이구려." "그런데 문제는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소승이 그 시주께 정문 파괴한 것에 대해 따지려 할 때, 그 분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더군요." 그러면서 지객당주는 수라도제가 떠나기전에 했던 말을 장문인에게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장문인은 깊은 한숨이 섞인 불호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미타불, 난제로고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옛말에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 자신의 이름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지만, 나중에는 이름이 사람을 만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본사는 지금껏 만들어진 위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선택을 했으니, 그만큼 그 시주들이 느꼈던 배신감도 컸던 모양입니다." "아미타불, 노납도 그리 생각하고 있다네 본사가 처음부터 불제자들의 도량으로 알려져 있었다면, 이번 선택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인데...... 허어, 큰일이로다. 정문이 피괴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어쩌면 이번 선택으로 본사가 문을 닫을 수도 있음이니...... 그것이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음이야." 장문인은 깊은 시름에 잠겨 방장실로 돌아갔다. 혼자서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대금제국이라는 적이 버티고 서 있기에 모두들 정신이 그곳에 팔려 있겠지만 10년 후에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만약 그때쯤 금과 무림 간의 분쟁이 끝난 후라면 소림사는 서문세가 , 아니 최악의 경우 무림맹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림사가 지닌 저력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무림맹과 싸워서 살아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어, 늑대를 피해 범의 소굴로 발을 들여놓았음이니..... 이 일을 어찌할꼬? 아참 공공, 아니 공지 사숙께 여쭤보는 것이 옳겠군." 공공대사는 일신에 지닌 무위도 무위지만 워낙 세속에 초탈해 계신듯하여 이런 것을 물어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이런 세속적인 문제는 조금 세속적인 인물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 수라도제가 이끄는 군웅들은 숭산 인근의 객잔에 자리를 잡았다. 3일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길이다. 도중에 건량과 물만으로 끼니를 때우며, 산길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그런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그것이 모두 다 헛고생이었다는 것을 알자, 허탈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었지만, 수라도제 등 몇몇 피로를 모르는 고수들은 아직까지 자리에 남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수준이 떨어지는 자들이야 죽자고 달려온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이곳까지 쉬엄쉬엄 달려온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고수들은 모두 3개의 패거리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패력검제와 황룡무제. 그리고 몇몇 무림의 원로들이었다.술잔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는 중에 간혹 언성까지 높아지는 것을 보면 오늘 보인 소림의 행태에 불만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묵향과 만통음제였다. 그들은 화경을 상회하는 고수들 답게 서로가 어기전성으로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일지도 모르는 다른 놈들을 생각하면 그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라도제와 그의 사돈인 종리영우 그리고 종리영우의 의제인 제갈기 였다. 이들 또한 묵향 일행처럼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대화를 남이 들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부는 기필코 소림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이빨을 뿌드득 갈며 수라도제가 어기전성을 날리자, 그의 앞에서 앉아 있던 종리영우가 부드러운 어조로 다독거렸다. <사돈의 마음을 노부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일을 감정대로 처리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갈기 또한 종리영웅의 의견에 찬성이었다. <형님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그리고 만약 소림에 적개심을 드러낸다고 해도 때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 말에 수라도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때라고 했는가?> <물론입니다. 이번 일로 인해 소림이 간덩이 작은 소인배들의 집합소임이 드러났다고는 하나, 그들이 지닌 저력까지 무시해서는 안 돼지요. 소림과 맞대결을 해서 승리를 거둘 자신이 있는 문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있다면 저 놈뿐일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턱짓으로 제갈기가 슬쩍 가리킨 것은 만통음제와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묵향이었다. 모두들 그쪽을 바라본 후, 한결같이 동의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소림을 징죄하려면 무림의 공분을 일으키고, 무림맹이 직접 나서야만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면 설혹 승리를 거둔다 하더라도 그 피해가 너무나도 클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무림맹은 금을 잡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만큼 소림을 응징하는 것은 금을 박살낸 후가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그 말에 종리영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전음을 날렸다. <듣고 보니 동생의 의견이 옳은 듯하구만.> 하지만 수라도제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모두에게 어기전성을 날렸다. <만약 그때가 되는 모두들 노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사돈. 사돈께서는 소림의 대문이라도 박살내며 분풀이라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노부는 아직도 울화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돈이 노부를 찾는다면 이놈을 들고 즉시 숭산으로 달려가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옆자리에 세워놓은 거도의 손잡이를 슬쩍 잡으며 전음을 날렸다. 그리고 그의 의제인 제갈기 또한 함께 할 것을 맹세했다. <저 또한 형님이 하시는 일에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불러만 주십시오. 만 리 길이라도 마다 않고 달려가겠습니다.> 이때, 점소이의 외침소리가 들려왔기에 그들의 시선은 문 쪽으로 돌아갔다. "아니, 어디서 거지새끼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어! 빨리 밖으로 안 나가?" 비럭질해서 사는 신세인 주제에 도대체 어디서 뭘 처먹었는지 살이 뒤룩뒤룩 찐 거지 하나가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가 점소이에게 욕을 얻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점소이는 맹렬하게 거지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거지는 점소이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성큰 성큰 안으로 들어왔다. 그 때문에 점소이는 할 수 없이 빗자루를 집어 들고 거지를 두들겨 팼지만, 거지는 전혀 아픈 기색조차 없었다. 거지는 객잔 안을 휙 둘러본 후, 수라도제 일핼을 발견하고는 지체치 않고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수라도제 대협." "오, 비육걸개 장로가 아닌가? 반갑구먼. 안그래도 개방 쪽에 연락을 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네를 만나다니...." 하지만 비육걸개가 가깝게 다가오자 수라도제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비육걸개의 몸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겨 나왔기 때문이다. 수라도제는 코를 감싸 쥐며 투덜 거렸다. "크흐 ~ 냄새! 자네도 여전하구먼. 제발 딴 거는 모르겠지만 목욕 좀하게. 코가 심히 괴로우니 말이야." "크크큭. 원래 거지라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 놈들 아니겠습니까? 거지한테 바랄 것을 바라셔야죠." 비육걸개는 너스레를 떨며, 넉살 좋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런 다음 허락도 구하지 않고 상 위에 차려진 비싼 음식들을 입 속에 마구마구 퍼 넣기 시작했다. 그들 간의 대화를 옆에서 유심히 바라보던 점소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 없이 돌아가버렸다. 모두들 칼을 차고 있는 무림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차마 밖으로 나가달라고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한참동안 비육걸개가 맛나게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수라도제는 상대가 도대체 아무런 말도 없이 먹기만 하고 있자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개방의 장로인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수라도제로서는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 자네가 여기는 어쩐 일인가?" 비육걸개는 입 속에 있는 음식을 대충 씹지도 않고 삼킨 다음, 다른 음식을 손으로 움켜쥐며 대꾸했다. "하남 분타에서 영양보충 좀 하고 있다가 대협께서 이곳으로 오신다기에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거 정말 맛있군요, 대협." "영양보충이라니?" "한 며칠 절간에서 지냈었거든요. 원래 절에서 나오는 식사라는게 그렇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개 한 마리 잡아서 영양보충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수라도제는 비육걸개도 소림사 문제로 이곳에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네도 소림사가 봉문한다는 것을 알고 돌아가던 중이었던 게로군." "예, 대협 설마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날 줄은 본방에서도 예측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본방에는 무슨 일 때문에 기별을 넣으려고 하셨습니까?" "숭산에서 철수한 금군의 행방을 묻고자 해서 말일세. 그놈들이 어디로 갔나?" "호북성 방향으로 급히 남하하고 잇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양양성 인근에 포진하고 있는 금군의 주력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겠죠." 그 말에 수라도제는 살기어린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잘됐군. 후발대가 도착하는 즉시 추격하여 그놈들을 박살내버려야겠어." 바로 이때, 저쪽 자리에 앉아 있던 묵향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빙그레 미소지으며 비육걸개에게 말을 걸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옆에서 듣게 되었는데 말씀이야, 자네가 소림에 있다가 왔다고?" 새파란 젊은 것이 처음부터 말을 찍찍 놓고 있으니 비육걸개의 속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니 무림인인 듯한데, 수라도제 일행과 합석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동석하기 힘들 정도로 배분이 낮다고 생각되어졌던 것이다. 비육걸개 또한 개방의 장로인 만큼 묵향의 인상착의 정도는 초상화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설마 이곳에서 정파의 최고수들 중 한명인 수라도제와 같은 객잔에 앉아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허어, 대협과 함께 온 후기지수인 모양이군. 아마 이번이 초출인 모양인데, 상대를 봐가면서 말을 걸게나." 이때 옆에 앉아 있던 수라도제가 아차하면서 재빨리 비육걸개에게 어기전성을 날렸다. <초출이 아니라 마교 교주일세, 말조심 하게나.> 순간 비육걸개의 발그스레하던 뺨은 핏기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져버렸다. "허걱!" "본좌는 상대를 봐가면서 말하는 거니 네놈이 그런 걱정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 나는 네놈이 개방출신이고, 또 소림사에 있다가 왔다는 점이 마음에 든 것뿐이니까 말이야. 자, 이제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대화나 좀 나눠볼까?" 상대의 의향은 들어보지도 않고 묵향은 수라도제를 향해 말했다. "이녀석 좀 빌려가겠네. 죽이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시게나." 묵향의 말은 절대로 죽이지는 않겠지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줄 수는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라도제로서도 의외였던 것이, 비육걸개가 순순히 묵향을 따라 객잔을 나가버렸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가 못가겠다고 버티면서 수라도제에게 구원을 청했다면 자신이 나설 수도 있었다. 그런데 비육걸개가 순순히 교주를 따라서 나가버리자 수라도제로서는 그들 사이를 막아설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재빨리 묵향의 뒤를 좇아 일어섰고, 다른 무림의 명숙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비육걸개가 개 맞듯이 맞고 있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도중에 끼어들어 그를 구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묵향은 멀리 가지도 않았다. 비육걸개를 객잔 뒤편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간후,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소림사가 왜 봉문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은데 말씀이야..... 입을 열지 않거나,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상대의 위협에 비육걸개의 투실투실한 뺨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걸 모를 수 있겠는가. 저놈에게 박살난 제자가 500명을 넘어섰는데 말이다. 오죽하면 개방이 저놈에게만은 정보를 공개하자고 결의했겠는가. "물론입니다." "하기야 잘 알고 있겠군. 본좌가 주리를 튼 개방제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니 말이야. 자 , 빨리 말해보라구." "그게... 이런 말씀드리기가 그렇지만, 사실 본방에서도 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을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묵향은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뭣이? 이것이 정말 관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나?" 비육걸개는 난감하다는 듯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믿지를 않으니 그로서도 난처했던 것이다. "사실입니다. 제가 분명히 수라도제 대협께서 이끄는 구원세력이 곧이어 도착할 것이라는 정보까지 장문인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상외로 장문인은 봉문을 결의했습니다. 싸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승산이 있고도 남으니까 본좌가 그 망할 놈들이 봉문을 선언한 이유를 네놈에게 묻고 있는 거잖아 아무도 소림을 돕지 않았다고 해도, 소림은 싸워서 이길 수 있었어. 그런데 왜 봉문한 것이지?" 그 말에 비육걸개의 투실투실한 살점에 묻혀 있던 자그마한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교주는 뭔가 알고 있는 것이다. 개방이 모르고 있는 뭔가를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호언장담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걸 자신이 모른다는 걸 교주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슬슬 유도심문을 하여 교주가 뭘 알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비육걸개는 개방의 결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주에게 정보를 넘겨주려고 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오늘 큰 건수를 건지게 도리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봉문을 선언하기 전날 장생전에 고승들이 모여 밤새도록 의논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떤 결론이 났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장생전에 들어가서 직접 들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 말입니다 어찌되었건 다음날 아침이 되자 고승들이 모두 장생전에서 나오더군요. 그런 다음 그들은 모두 소림사 뒤에 있는 산봉우리로 올라 갔습니다." 소림사에는 가본 적도 없는 묵향이었기에 거기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소림사 뒷산이라...... 거기에는 뭐가 있지?" "뒷산 쪽으로 가면 먼저 조사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참회동이 나오지요. 그분들이 가는 방향으로 봐서 조사전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참회동으로 가는 것이 확실했니다." "참회동이라고? 그럴 리가." "아닙니다. 그쪽이 확실했습니다. 자신들이 내린 결정이 선대들이 쌓은 업적을 무너뜨리게 도리 것은 당연한 이치니, 어쩌면 그것을 참회하기 위해 가고 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 생각해 봤습니다만......." 비육걸개는 자신의 추리를 묵향에게 말했지만, 묵향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있었다. 그들이 참회동으로 갔다? 왜 참회동으로 갔다는 말일까? 모두 다 참회동으로 몰려간 후 소림의 앞날을 결정할 중차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그렇다면 참회동에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 들어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소림 내에거 그만한 발언권을 지닌 인물이 참회동에서 썩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단 한가지 가능성을 제외 한다면 말이다. 물론 세상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이 있음을 모른다. 왜냐하면 모두들 그가 미쳤다고 확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묵향은 그가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왔음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허어, 그러고 보니 그 미친놈이 참회동에 있었던 모양이군. 그런데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지? 그가 합해진 소림의 힘이라면 금나라쯤이야 겁날 것이 없었을텐데 말이야." 강자지존의 법칙이 통하는 세계에서 성장해온 묵향으로서는 도저히 소림이 내린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어린애와 어른의 싸움에서 어른이 대충 항복해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물론 어른이 어린애에게 뭔가 양보할 이유라도 있다면 또 모른다. 상대를 좋아하든지, 아니면 약점을 잡혔든지.... "약점이라도 잡힌 것인가?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지?" 중얼거리던 묵향은 비육걸개를 향해 매서운 눈초리를 돌리며 질문했다. "그놈의 참회동이 어디있지? 본좌가 알기 쉽게 설명해봐." 비육걸개는 땅바닥에다가 손가락으로 소림사의 내부 건물들을 그리면서 설명했다. "여기는 처음이시라고 하셨으니, 알기 쉽게 설명드리죠. 그러니까 이곳이 저기 보이는 정문, 정문을 들어서서 정면에 보이는 가장 큰 건물이 대웅보전이죠. 대웅보전 뒤편에 있는 건물이 바로 지객당입니다. 그지객당 뒤편으로 몇 개의 건물들을 통과해서 쭉 더 들어가면 3개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곳이 나옵니다." 비육걸개의 설명에 묵향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흠, 그렇구먼." "그 건물들을 통과해서 이쪽으로 더욱 뒤로 들어가면 야트막한 산이 나오는데, 그 중간에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참회동이죠. 참회동으로 올라가는 길 이쯤에 조사전이 있으니 아마도 찾기는 쉬우실 겁니다. 교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경비가 삼엄한지라 손쉽게 침투하시기는 쉽지 않으실텐데요?" 비육걸개가 한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파임을 자처하는 개방도가 아무리 방 내의 결의가 있었다고 해도 마교 우두머리에게 소림사 내부를 자세히 알려주는 짓을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가. 그렇기에 비육걸개가 선택한 것이 이것이었다. 진실을 알려는 주되, 조사전으로 가기에는 가장 험난한 길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조사전으로 가는 길을 가장 알기 쉽게 알려달고 했으니, 이 이상 더 알기 쉬운 길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길들이야 빙빙 돌아가야 하는데 말이다. 그가 알려준 통로는 곧장 방장실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방장실은 소림사 최상급 무승들의 집합체인 팔대호원이 호위하고 있다. 그리고 그쪽으로 가는 도중에 나한전까지 덤으로 붙어있었다. 그야말로 용담호혈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설명을 다 들은 묵향은 다시 한 번 더 땅 위에 그려진 지도를 자세히 바라본 후, 비육걸개에게 말했다. "이렇듯 자세하게 설명해줘서 고맙군. 그럼 기회가 있다면 다음에 또 보기로 하지. 잘 가게나." 엄청난 속도의 경공을 발휘하여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교주를 바라보며 비육걸개는 자신도 모르게 감탐할 수밖에 없었다. "떠그랄! 정말 지랄같이 빠르군!" 잠시 후, 비육걸개는 정신을 차린 듯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냐? 너 같은 놈을 다시 보게. 그건 그렇고 저놈을 나났다는 걸 빨리 총타에 알려야겠어." 비육걸개의 두뇌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마교 교주가 숭산에 있다는 것을 총타에 알리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혹시 교주가 소림사에서 볼일을 마친 후 수라도제 일행에 재 합류 할지도 모르니, 수라도제 일행에다가 개방제자 몇 명을 파견하는 일도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또 뭐를 해야 할까? 이때, 비육걸개의 머릿속에 교주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알송달송한 수수께끼 같은 말. 미친놈이 참회동에 있다고? 그런데 미쳤다면 왜 고승들이 그의 말을 듣고 봉문을 했단 말인가. 미친놈 말을 들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또 그 미친놈만 있으면 소림에게 금나라의 정예병력 쯤이야 하루아침 해장거리도 안 되는 모양이다. 그 미친놈이 누구길래....... 비육걸개는 방금 전 교주가 한 수수께끼 같은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해내기 위해 둔중한 비게 덩어리 속에 감춰진 날카롭기 그지없는 두뇌를 맹렬히 회전시켰다. "미친놈이라..... 그게 교주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칭할 때 즐겨 사용하는 욕인가, 아니면 진짜 상대가 미친 건가........." 이때, 갑자기 비육걸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명호 하나가 있었다. 만사불황! 바로 주화입마에 빠져 미쳐버린 소림사 최강의 무승을 일컫는 명호가 아니었던가. 교주가 말한 미친놈이 바로 그라고 가정한다면, 방금 전에 교주가 한 말이 전체적으로 무리 없이 해석될 수 있었다. "허어, 바로 그거였군. 공공대사가 돌아왔음이야. 그러고 보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비육걸개는 수라도제 일행에게 되돌아가서 이별을 고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하남 분타를 향해 전속력으로 경공을 전개해 달려가버렸다. 이걸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던 수라도제 일행 또한 경악감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고, 공공대사가 제정신을 차렸다는 말이 사실일까요?" "방금 비육걸개가 말했지 않습니까? 아마 사실일 가능성이 클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노부는 소림에 좀 다녀올 테니 남은 일행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수라도제도 공공대사를 만나러 가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물론 다른 사람들도 공공대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한결 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공공대사는 참회동에 들어 있다. 그런 만큼 정식적인 경로를 통해서는 그를 절대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만날 수밖에 없는데, 그걸 감행하자면 무공이 뛰어나야 함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소림의 중심지까지 몰래 숨어들어가자면 보통 실력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돈. 이곳은 안심하시고 다녀오십시오." 수라도제도 소림사의 내부를 소상히 알지는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방장실 뒤편으로는 외인의 출입을 불허하는 곳인 것이다. 그렇기에 수라도제 또한 교주가 들어간 방향, 즉 비육걸개가 알기 쉽게 설명해준 길을 통해 참회동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과연 소림사가 지닌 저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실직적으로 무승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건물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드러나 있는 경비보다 숨어 있는 경비들이 더욱 무서웠다. 매복해 있는 자들의 실력은 세인들이 말하는 신검합일급에 달하는 막강한 실력을 지닌 승려들이었다. 물론 한밤중에 몰래 숨어든다면 조금 더 손쉬웠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대낮이었다. 거기에다가 묵향이 통과하는 경로 상에는 방장실이 있지 않던가.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갈수록 삼엄해지는 경비에 묵향 같은 탈마급 고수로서도 어려움을 느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통과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마교 총타처럼 진세라든지, 함정까지 골고루 깔려 있었다면 그가 아무리 탈마급이라고 해도 몰래 통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저기 있는 것이 조사전인가? 그렇군. 저기 현판에 조사전이라고 써져 있네. 그 뚱뚱이가 제대로 설명했군. 그 럼 저 길로 올라가면 되겠군.' 묵향이 참회동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워낙 비육걸개가 설명을 자세하게 해준 덕분이엇다. '바로 이곳이군.' 묵향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커다란 동굴위에 '參會洞(참회동)'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엇다. 그런데 묵향이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참회동 안에서 웅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시게나." 상대가 어딘가에 숨어서 기습을 가해올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묵향은 서슴지 않고 참회동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제법이로군. 본좌가 왔음을 바로 눈치채는 것을 보면 말이야." "교주와 빈승 간에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니 그것을 어찌 알겠소이까? 다만 자연의 소리가 누군가 이곳에 들어왔음을 알려줬을뿐이지요." 몇날 며칠 동안 동굴 안에서만 기거해온 공공대사였다. 그렇기에 주위에서 들려오는 풀벌레소리라든지 바람소리 등등 각종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시각에는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지 파악하고 있었던 그였기에 순간적인 외부인의 침입을 파악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침입자가 이토록 가깝게 접근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상대의 기척을 파악해낼 수 없자,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침입자의 정체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자는 그가 알기에 단 한 명뿐이었기에. "흠, 그럴 수도 있겠군. 그건 그렇고, 전에 봤을 때보다 좀 야윈 것 같군." "허헛, 한줌 흙으로 돌아갈 육신인데 조금 야위면 어떻겠소이까. 그런데 시주께서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셨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지." "말씀해 보시구려." "왜 봉문을 결정했는가? 소림은 엄청난 힘이 있어. 그것은 그 무엇보다 자네가 잘 알잖아? 그놈의 교리 때문에 살생을 하기 싫었던 것인가? 아니면 뭔가 약점이라도 잡힌 것인가?" "시주, 이곳은 불도를 닦는 곳이라오." 왜 당연한 소리를 떠드는 것인지 의아하게 여기며 묵향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건 본좌도 알고 있어." "그걸 아신다면서 왜 이곳까지 오셨소이까?" "그야......" 말대답을 하려던 묵향은 자신의 실책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상대는 불도를 닦는 승려가 아닌가. 승려가 추구하는 것은 모든 욕망을 버리는 해탈이다. 사실 오욕칠정의 모든 욕망을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인가? 묵향이 살아오면서 그런 참된 구도의 길을 가는 승려는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 그런 승려가 하나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묵향으로서는 그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과거 옥영진 대장군부에서 식객으로 있을 때,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던 묵향이다. 자신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제대로 된 길을 가는 승려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어렴풋이나마 생각해낼 수 있었다. 물론 묵향보고 그 길을 가라고 한다면 결단코 사양하겠지만 말이다. 멈칫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묵향은 공공대사를 새삼스레 다시 한 번 찬찬히 흝어봤다. 혜안이 어린 듯 깊숙이 가라앉는 눈동자. 얼마나 금식하며 참회했는지 헐렁한 가사자락 사이로 깡마른 그의 육신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처음 그의 육신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에 비해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대사께서는 도를 얻은 모양이구려." "허허헛, 얻은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소이다." 공공대사가 옅은 웃음을 짓고 있을 때,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종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누군가가 격투를 벌이는 듯, 병장기소리와 폭음이 들려왔다. "오늘 본사에 손님이 많은 듯하구려." "나가보지 않을 거요?" "빈승이 꼭 나가봐야 할 이유라도 있소이까?" "물론 저녀석도 대사의 손님이니까 그렇지. 간간이 들려오는 폭음. 뇌전도법이 지니는 특징이 아닌가. 아까 객잔에서 거지녀석하고 얘기하고 있을 때 그놈이 엿듣고 있는 건 알았지만, 따라올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하지만 공공대사의 반응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서문세가에서 뛰어난 인재를 배출한 모양이구려." "대사도 알 거외다. 서문길제라고." 아마 공공대사도 알 것이다. 공공대사보다는 30년 정도 연배가 뒤처지지만, 그가 미치기 전쯤에 이미 수라도제는 뛰어난 도객으로 명성이 자자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공대사는 무림의 일에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제 하실 말씀 다 하셨으면 돌아가주시겠소이까? 빈승은 할 일이 있어서....." 축객령에 묵향은 돌아서서 몇 발자국 나가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반전하여 공공대사를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도대체 그가 언제 돌아서서 달려들었는지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언제 뽑아 들었는지 묵혼검이 푸른 궤적을 남기며 빛과 같은 속도로 공공대사를 향해 찔러들어갔다. "왜 안 피하는 게요? 대사의 능력이면 충분할 텐데......" 묵혼검은 공공대사의 세치 앞에 멈춰서 있었다. 하지만 묵향이 무의식적으로 시전한 어검술에서 뿜어 나오는 푸른 강기로 인해 공공대사의 옷은 조금 찢어져 있었고, 옅은 선혈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공공대사는 내공을 한 올도 끌어올리지 않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공공대사는 감정이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시주와 싸울 이유가 없소이다." 공공대사는 묵향의 검에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자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답하는 공공대사의 눈에서 묵향은 더 이상 승부욕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만약 예전의 공공대사였다면 적이 자신을 죽일 마음이 있건 없건 호승심 때문에라도 맛상대를 해왔을 것이다. 엄청난 무위를 과시하며 승부욕에 불타오르던 공공대사를 마주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다고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추구하는 강함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공공대사를 향해 묵향은 존경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검을 거두며 정중하게 말했다. "대사는 정말 도를 얻었구려.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잘 해보시오. 그럼 이만 가보겠소." 뒤돌아서는 묵향을 향해 공공대사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서문 시주가 교주를 따라왔다고 하셨소?" "그렇소만." "그런데 어찌하여 이곳으로 오기에 가장 어려운 길로 오셨소? 그 방향은 방장실이 있어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이라오. 그러니 갈 때는 다른 길로 가시는 것이 편할 거외다." "고맙소." 묵향의 대답은 아무런 감정이 섞여 있지 않은 듯했지만, 그 속마음은 달랐다. 이따위로 길 안내를 한 비육걸개를 다음에 만나면 뼈를 추려놓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놈이 감히 가장 지독한 통로를 안내해? 내 이놈을 가만히 두나 봐라.' 묵향은 참회동을 나서자마자 곧장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숨어 들어올 때야 인기척을 숨길 필요가 있었지만, 볼일 다 마쳤는데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전속력을 다해 경공술을 전개하고 있는 묵향을 따라올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묵향이 보라는 듯 엄청난 파공성을 흘리며 나한전 근처를 통과 할때, 수라도제가 승려들에게 포위된 채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그가 뇌전도법을 사용한 이상, 승려들은 곧장 상대가 누군지 파악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쯤에서 서로 간의 다툼은 끝이 난 모양이었다. "잘 해봐라. 그래가지고야 백날 가도 공공대사를 만날 수 있겠냐? 주제파악을 할 줄 알아야지. 크흐흐흣." 묵향이 비웃음을 흘리며 지나가는 모습을 수라도제라고 못봤을 리가 없었다. 수라도제 같은 고수가 저렇듯 엄청난 파공성을 흘리며 쏘아져 나가는 상대의 기척을 모른대서야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한껏 비웃음을 짓고 있는 묵향의 얼굴을 본 순간 수라도제의 얼굴이 똥이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어엇! 저자는 뭐냐?" "어디서 온 거지?" 수라도제를 포위하고 있던 승려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들 중에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승려가 일갈했다. "동요치 마라. 저자는 밖으로 나가는 자가 아니냐?" 이때 수라도제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장문인이 침중한 안색으로 그에게 말했다. "사질, 자네는 빨리 조사전으로 가보게. 아무래도 그가 튀어나온 방향으로 보아 그쪽인 듯싶으이." "예, 방장 스님." 그 승려가 달려가려 할 때, 수라도제가 입을 열었다. 그의 어조에는 씁쓸함이 짙게 묻어 있었다. "조사전이 아니라 참회동일 것이외다." "아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문 시주." "노부는 마교 교주의 뒤를 쫓아서 이리로 왔소이다. 나는 들켜서 여기 있고, 그는 아마 들어가는데 성공한 모양이오. 그가 저렇듯 기척을 숨기지 않고 달려가는 것을 보니, 이제 볼일은 다 마쳤다는 뜻이겠지요." 그 말에 장문인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빨리 참회동으로...., 아니 노납이 직접 가지." "이보시오, 방장 대사. 노부도 함께 가면 안 되겠소?" "아미타불. 서문 시주. 그곳은 절대로 외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소림의 중지외다. 노납이 그걸 어기면서까지 시주의 청을 들어드릴 수는 없소이다. 용서하시길 바라오이다." 나한전 소속의 무승 몇을 거느리고 재빨리 달려가는 장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라도제는 자신이 경솔했음을 후회했다. 이토록 경비가 엄중할 줄 알았다면 밤에 들어왔을 것이다. 밤이라면 자신의 실력으로 충분히 뚫고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교주와 자신의 실력차는 생각하지도 않고 괜히 따라 들어와서 이런 개망신을 당할 줄이야 그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사실 그도 무림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초강자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시주님께서는 본 사를 위해서 이곳에 오셨었군요.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해주셨다면 서로가 좋지 안았겠습니까? 아마도 이 승려는 수라도제가 마교 교주가 소림사에 침입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막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온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수라도제 같은 무림의 명숙이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소림의 담장을 넘었겠는가? 절간에서 재물을 훔치기 위해 왔을 리도 없고, 무공서를 훔치기 위해 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승려에게 그런 심증을 더욱 명확히 굳혀주는 것이 그가 밤도 아니고 낮에 소림의 담을 넘었다는 사실이었다. 승려가 오해를 하건 말건 수라도제야 지어놓은 죄가 있다 보니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남은 일은 빈승들이 처리할 것이니 시주께서는 그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어쨌건 교주가 이곳에 침입한다는 것을 아시고 여기까지 달려와주신 점, 방장 스님을 대신해서 빈승이 깊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데야 노부도 어쩔 수 없지. 그럼 수고들 하게나." 더 이상 방법이 없음을 알고 수라도제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공동파로 가는 길 수라도제가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객잔 한편에서 만통음제와 교주가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간간이 미소까지 짓고 있는 것을 보면 저 둘은 어기전성으로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공공대사가 뭐라고 하더냐 는 질문을 묵향에게 던지려던 수라도제는 곧 마음을 돌렸다. 비웃음을 흘리며 옆으로 지나가던 묵향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라도제는 내심 이빨을 갈며 다짐했다. '으드드득 오냐, 오늘 밤에 월담을 해주마. 아무리 많은 땡중들이 지키고 있다고 해도, 밤이라면 해낼 수 있어.' 수라도제가 객잔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종리영우와 제갈기가 반겨 맞이했다. <그래, 어찌 되셨습니까? 공공대사는 만나셨습니까?> <부끄럽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의문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수라도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어이없게도 들켜버리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밤에 다시 한 번 더 가보려고 합니다.> <과연 소림의 저력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입니다. 아무리 낮이었다고는 하지만, 사돈께서 침투하시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노부의 생각으로는 그년석이 알려준 침투경로에도 문제가 있는 듯했습니다. 나한전을 가로질러 방장실을 통과하라니, 그게 제정신을 지닌 자가 선택할 침입로겠습니까? 나한전과 팔대호원에서 무승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그 망할 녀석에게 당했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종리영우와 제갈기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비육걸개가 교주에게 너무나도 쉽게 소림사 내부를 알려준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교묘한 함정이 숨어 있을 줄이야. 아마도 비육걸개는 교주가 소림승들에게 들켜서 치도곤을 당하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쪽에 멀쩡한 모습으로 술잔을 들고 있는 교주의 모습을 보아 아쉽게도 비육걸개의 계책은 실패한 모양이다. 이때, 객잔 문이 벌컥 열리며 또다시 비육걸개가 뚱뚱한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다급히 달려온 것인지,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마침 계셨군요, 수라도제 대협." "어? 자네는 간 것이 아니었나?" 비육걸개가 거친 숨을 내쉬며 다급히 말했다. "급한 전갈을 받고 되돌아왔습니다." "급한 전갈이라니...., 도대체 그게 뭔가?" 바로 이때, 묵향이 비육걸개의 뒤로 슬쩍 다가와서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호오, 안그래도 자네를 만나고 싶었는데 정말 잘 되었군. 정말 잘 되었어." 그 말에 비육걸개는 아연한 표정으로 몸을 사리며 중얼거렸다.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묵향은 비육걸개의 멱살을 그러쥐며 으르렁거렸다. "본좌에게 사지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줘? 그러고도 네놈이 무사할줄 알았더냐?" 그 말에 비육걸개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상대의 옷매무새는 몇 시진 전에 봤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소림사 내에서 격전을 벌였다면 그가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뭔가 흔적이 남았을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걸 보면 교주는 아무런 문제 없이 소림사 내부를 들락거렸다는 말이 된다. 다시 한번 교주의 실력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 비육걸개는 실감할 수 있었다. 비육걸개는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교주께서는 분명히 알기 쉽게 설명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 길이 가장 이해하기 편하죠. 그렇게 설명하지 않고, 어떤 산 쪽으로 가서 그쪽에서 동남방으로 몇 리를 가라는 중,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교주께서는 이 일대 지리를 하나도 모르실 텐데, 이해하셨겠습니까?" 딴을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비육걸개의 멱살을 쥔 손아귀의 힘이 조금 풀렸다. 그것을 느낀 비육걸개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교주께서 설마 대낮에 조림의 담을 넘으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밤이라면 교주 님의 실력으로 미루어 충분히 성공하고도 남으실 거라고 믿었기에 감히 그 길을 알려드린 것이었습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본 좌가 오해해서 미안하구먼." 자신의 변명이 먹혀 들어가는 더하자 비육걸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잠시의 시간 여유를 두고 묵향의 이죽거림이 이어져서 들려왔다. "....하고 말할 줄 알았지?" 갑작스런 상황의 반전에 비육걸개는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 "이유가 어찌되었건 너는 좀 맞아야 되겠어." 그 말에 비육걸개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그럴 수가! 맞을 때맞더라도 이유는 알아야....." "맞는 데 이유가 필요해? 그러면 들려주지. 본 좌는 지금 네놈을 두들겨 패고 싶어. 그게 다야." 이어서 화려한 묵향의 몸놀림이 번개처럼 이어졌고, 퍼퍼벅 하는 요란한 격타음이 객잔 안에 울려퍼졌다. "크아아악!" "살결이 물컹물컹한 것이 감촉이 좋구먼. 몇 대 더 패도 되겠어." "제....제발, 그정도면 되셨지 않습니까?" 겉으로 봤을 때 비육걸개의 신색은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방금 전에 객잔 안에 울려퍼졌던 요란한 소리만 아니라면 비육걸개가 엄살을 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수라도제 같은 고수들은 알고 있었다. 묵향이 방금 전에 비육걸개에게 얼마나 지독한 내가중수법을 가했는지 말이다. 겉모습이야 어떤지 몰라도 비유걸개는 지금 혈도가 뒤틀리고 내장이 뒤집혀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기절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보면 비육걸개의 정신력도 그 비대한 덩치만큼이나 대단한 것인 모양이다. 이때, 수라도제가 슬쩍 앞으로 나서며 묵향을 말렸다. "그 정도면 과하게 손을 쓰신 것 아니겠소이까? 이제 그만하고 용서하시는 것은 어떻겠소이까?" 순간 묵향의 살기 어린 시선을 받자 수라도제는 기가 질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 수라도제를 바라보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묵향은 언제 자신이 수라도제를 그렇게 바라봤냐는 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자네도 저놈 때문에 꽤 고생했을 텐데, 용서해줄 마음이 나는 모양이지?" 그 순간 수라도제의 마음 속에는 엄청난 살심이 솟구쳐 올랐다. 감히 이런 식으로 자신을 희롱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갑자기 상대와 자신의 실력차가 떠올랐다. 지금 달려들어봐야 필패. 어쩔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악물며 정신을 수습한 수라도제는 먼저 비육걸개의 뒤틀린 혈도를 바로잡아주며 묵향에게 대꾸했다. "그건 노부의 실력이 모자라서 그리 된 것이니 누구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이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누구나 다 자네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야. 본좌에게는 본좌의 방식이 있는 거라구. 좀더 지근지근 밟아놔야 다시는 그런 짓을....." 살기 띤 어조로 묵향이 다가서는데, 이번에는 뒤에서 패력검제와 황룡무제까지 가세하여 묵향을 말렸다. "노야, 이제 그만하고 용서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객잔 안의 분위기를 살피던 만통음제가 묵향을 향해 손짓하여 말했다. "적당히 하고 이리와서 술이나 마시세. 금군을 앞에 두고 동도들끼리 싸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 만통음제까지 나서는 데야 묵향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한 달은 족히 정양해야 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는데...,너 오늘 운수대통한 줄 알아라." 비육걸개는 입가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소맷자락으로 닦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교주님. 콜룩콜룩! 그건 그렇고 공공대사는 만나셨습니까?" 이 질문은 비육걸개의 함정이었다. 만약 교주가 대답만 해준다면 자신의 추리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곧장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대답을 안 해준다손 치더라도 그 질문을 들은 상대의 표정만봐도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지독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고 돌아 서 있기도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계책을 쓰는 것을 보면 비육걸개도 보통 인물은 아닌 모양이었다. 묵향의 표정에 이채가 어렸다. '어쭈!미련 곰탱이처럼 생겨가지고, 생긴 것 답지 않게 제법이구먼.' "본좌가 공공대사를 만나러 갔었음은 어찌 알았나?" 비육걸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눈치 하나로 먹고사는 개방제자가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는 금방 알지요." "미련해 보이는 덩치에 비해서는 제법이로군. 다시 봐야겠어. 하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은 화를 부른다는 것을 명심하라구." 그렇게 대답한 후 묵향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자신의 추리가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비육걸개가 골똘히 뭔가 생각하고 있을 때, 수라도제가 답답하다는 듯 짜증 어린 어조로 말했다. 방금 전 일어났던 일에 대해, 자신이 교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느끼고 그는 매우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 "급한 전갈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가?" 비틀비틀 간신히 걸음을 옮겨 의자에 주저앉은 비육걸개는 긴 한숨을 푹 내쉰후, 수라도제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지. 지금 1천여의 금군이 엄청난 속도로 서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답니다." 비육걸개의 대답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겨우 저따위 소리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와서 악취를 풍기다니..... 돼지고기 구울 때 육수가 흘러내리듯, 아직까지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비육걸개를 보며 수라도제는 더욱 짜증이 솟구치고 있는 중이었다. 땀까지 가세하다 보니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는 평상시보다 2배는 지독하게 느껴졌다. '뭔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겠군. 도저히 이놈의 악취는 못참겠어.' 속으로 이빨을 갈며 수라도제는 퉁명스런 어조로 되물었다. "겨우 1천의 금군이 움직이는 것이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그렇게 달려온 것인가?" "그게 아닙니다. 대협께서도 금군이 종남파를 멸문시킨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쿨록! 그, 그 때 본방에서도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했었습니다. 시체가 많이 훼손되어 자세한 것까지는 알기 힘들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무공이 사용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종남파를 멸문시킨 것은 수많은 금군 병사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극소수의 정예들에 의해 이뤄진 것입니다." 수라도제는 문득 비육걸개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가 참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인가?" "제가 왜 거짓말을 한단 말씀이십니까? 모든 게 분명한 사실입니다. 본문의 정보가 아니라 무영문에서 흘러들어온 정보니까 말입니다. 그들의 이동속도가 워낙 번개같기에 본방의 제자들로는 그들을 감히 감시할 엄두조차 낼 수 없습니다. 꼭 이동방법이 마......" 여기까지 말한 비육걸개는 고개를 살짝 돌려 힐끔 묵향의 눈치를 살핀후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동방법이 천마신교의 상급 무력단체들과 흡사하다는 겁니다. 인적이 없는 산길을 통해 고속이동을 하는 것이죠. 본방의 제자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직업의 특성상 마을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 집중되지 않습니까? 그렇다 보니 아에 그들의 움직임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무영문에서는 용하게도 그것을 포착한 모양입니다." 수라도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무영문에서 보내온 정보라면 신뢰할 수 있지. 그래 무영문은 그놈들의 목표가 어디라고 예상한다던가?" "공동파일 가능성에 9할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방에서의 판단도 그렇고요." "그 말은 다른 작전을 펼치기 위해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로군." "예, 사실 그 방향으로 움직였을 때, 몇몇 군소방파들도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 방향으로 계속 움직인다면 곤륜파까지도 사정거리에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1할의 가능성을 딴곳에다가 남겨둔 것이겠지요."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종리영우가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곧장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도 형님의 의견에 찬성입니다." 반 시진 후, 수라도제가 거느리는 고수들은 또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소림사까지 달려온 피로를 채 풀기도 전에 또다시 이 동을 시작했다. 소림사까지 달려온 피로를 채 풀기도 전에 또다시 하게 된 강행군이다. 1천여의 고수들을 모두 다 거느리고 가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겠지만, 정작 적을 만났을 때 너무 지쳐버린다면 오히려 짐이 도리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피로하여 또다시 강행군을 할 수 없는 자들은 이곳에 남아 있다가 몸을 추스린 후 양양성으로 되돌아가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후발대들과 연락을 취해 그들 또한 양양성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본좌는 이곳에 남겠소." 교주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자 수라도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정이시오?" "진정이오. 여기까지 달려온 후 곧바로 술 한 잔 했더니 아직 피로가 안 풀려서 말이오." 교주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뻔뻔스럽게 내뱉은 후 당당하게 객잔의 갤실로 들어가버렸다. 기가 막혀서 뭐라고 말도 못하고 있는 수라도제를 남겨놓고 말이다. 이때, 객실로 향하는 교주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만통음제 또한 다급히 말했다. "노부도 빠지겠소. 어어, 과음을 했나? 뒷골이 뻐근하구먼." 속 보이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허둥지둥 만통음제까지 빠져버리고 나자, 수라도제는 어의가 없었다. 강력한 적을 앞에 두고 가장 뛰어난 고수들 중 둘이 빠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끌고 갈 강제적인 수단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제 빠질 사람은 다 빠진 것 같으니 서둘러 출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룡무제의 말에 패력검제 또한 덧붙였다. "아마 그는 이곳에서 할 일이 남아 있는 모양이지요. 그가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없다고 해도 금군쯤이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딴은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출발명령을 내렸다. 이제 500명으로 그 수는 줄어들었지만, 훨씬 더 정예화된 고수들을 이끌고 말이다. "정말 안 갈 건가? 동생, 자네가 이렇게 단독행동을 하면 수라도제는 물론이고 무림맹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만통음제의 물음에 묵향은 피식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그런 거 신경쓰지도 않습니다. 과거부터 원수지간이었고, 또 이번 합작만 끝나고 나면 또다시 원수지간이 도리 텐데 그놈들 입맛에 맞춰 움직여줄 이유가 없죠." "그거야 그렇네만....,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공동파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나?" 묵향은 창문을 통해 수라도제가 거느리는 고수들이 떠나는 모습을 훔쳐보며 말했다. "무림에 수많은 문파들이 있지만, 제가 가장 싫어하는 문파는 딱 하나뿐이죠. 안 그래도 멸문 당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문파를 금나라 녀석들이 대신해서 없애주겠다는데, 제가 그걸 방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말에 이제야 이해가 가는지 만통음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공동파와 워한이 있었던 모양이군." "예, 전대 무림맹주 옥청학이 공동파 출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죠." 묵향의 뇌리에는 옥청학 외에 또 다른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옥령인. 잊고 싶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손이 그녀의 뱃속을 파고들었을 때, 입가로 피를 흘리며 슬픈 눈매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 "이런 젠장!" 묵향은 그녀의 뱃속을 꿰뚫었던 자신의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뱃속을 해집을 때의 느낌이 손을 타고 전해져오는 듯했기에 그 느낌을 떨쳐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묵향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은후,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니.... 하지만 공동파가 사라지고 나면 어쩌면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더불어 그놈의 옥 씨들까지 몽땅 다뒈져버렸으면 좋겠어. 그녀의 눈매를 닮은 놈들은 모두 다 말이야.'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묵향의 옆모습이 왠지 슬퍼 보인다고 느끼는 만통음제였다. '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뭔가 깊은 속사정이 있는 모양인 게로군. 과거의 원한을 떠올리는 사람이 저런 모습일 리 없으니 말이야.' 문득 그게 뭔지 궁금해지는 만통음제였다. 하지만 만통음제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담지 않았다. 쓸데없는 호기심을 보여 동생의 마음을 상하게 할 만큼 미련한 그가 아니었기에. 흑살마왕 장인걸 봉문을 선언한 소림사를 제외하고, 9파1방에 속한 문파들의 대부분의 사정은 요 근래에 멸문당한 종남파의 그것과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 무림맹에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곳에 일정수의 고수들을 파견해야만 했고, 체면유지를 위해 양양성에도 상당한 수의 고수들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특히 그들 중에서도 감숙성 남쪽에 위치한 공동파는 무림맹에 다른 문파들보다는 훨씬 더 많은 고수들을 파견해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림맹주가 무당파의 태극검황으로 바뀐 후에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림맹 내에 공동파의 세력을 더욱 확장시켜 놓을 필요성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공동파의 장문인은 무림맹에서의 세력유지를 위해 많은 고수들을 파견해놓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크흐흐흣, 천하의 공동파도 별것 아니었구먼." 공동파에 혈겁을 일으키고 있는 괴한들 중의 한 명이 내뱉는 말에 장문인은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 공동파를 침입한 괴한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뛰어난 고수들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무시무시한 마기를 뿜어내는 수십 명의 고수들의 존재였다. 그몇 안 되는 고수들이 공동파를 시산혈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약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을 외부에 파견하지 않고 이곳에 남겨두기만 했어도, 이토록 심하게 밀리지는 않았을 것을...... "귀하는 천마신교에서 왔소?" "물론이지. 본교가 아니라면 누가 있어 이토록 많은 고수들을 키운단 말이냐? 알았으면 순순히 항복하거라." "참으로 가증스럽도다. 겉으로는 무림맹과 합작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세력확장을 위해 본문을 치다니. 그게 인간으로서 할 짓이냐?" "물론 승자에게 그런 작은 허물쯤은 용서되는 법이자." 상대는 넉살 좋게 댂했다. 문파의 수장인 장문인 주위에는 그 문파가 보유한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 포진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장문인이 서 있는 그 부근에는 고수들 간의 격돌로 인한 여파로 검기와 검품이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이 격전장의 중심에 태연히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허어, 이거 오늘은 흉다길소(凶多吉小)한 날이로다. 저런 뛰어난 고수들을 이끄는 자가 약자일 리는 없는 법.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혀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설마, 저자가 말로만 듣던 극마의 고수라는 말인가?' 한없이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며 장문인은 상대를 향해 일갓 했다. "그런 돼먹지 못한 궤변은 파락호들에게나 늘어놓게." "쯧,그렇다면 협상결렬인가?" 상대는 가볍게 혀를 차며 이죽거리는 듯했는데, 어느 순간 장문인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빠른 몸놀림을 이용한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헉!" 다급한 신음소리를 삼키며 장문인은 다급히 검을 뽑아들었다.그의 몸이나 다름없이 수십 년을 함께해온 보검을 뽑아들자, 과연 공동파라는 거대문파의 수장답게 장문인은 뛰어난 무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백류매화검법(白流梅花劍法)과 공동파 장문인에게만 전수되는 비전 통천검법(通天劍法)을 절묘하게 구사하며 상대와 격전을 벌였지만, 누가 봐도 장문인이 괴한에게 밀리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수 있었다. 곧이어 장문인 주위에서 마인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던 장로 3명이 장문인을 돕기 위해 달려들었다. "크흐흐흣, 이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지. 하지만, 종남파도 그랬지만 공동파도 허명만 높을 뿐, 명성에 맞는 실력을 지니지는 못하고 있다는 게 유감이야. 본좌는 이렇게 싱거운 싸움을 원한 게 아니었거든." 그와 동시에 괴한의 손이 기괴한 움직임을 드러냈다. "크업!" 펑! 한순간 괴한을 포위하고 있던 4명의 고수들이 뒤로 튕겨 나갔다.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면서도 괴이한 한 수에 당한 것이다. 물론 그들도 공동파가 자랑하는 고수들인 만큼 그 정도에 무너질 리는 없었다. 재빨리 방어자세를 갖추며 다시 한번 접전을 벌일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이때, 뭔가 몸에 이상이 있음을 눈치챈 것은 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장문인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게요? 독이요?"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자신의 몸상태를 점검했다. 방금 상대의 장력에 격중된 부위에 뭔가 부조화가 감지되엇는데,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그 부조화는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조금 쓰라리던 부위가 점차 시간이 지나자 엄청난 통증을 유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흐흐흣, 지금껏 본좌는 독 따위를 쓰는 놈들을 벌레 보듯 했거늘, 하물며 본좌가 그따위 유치한 장난을 치겠느냐?" 네놈들은 본교가 자랑하는 흑살마장에 죽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라." "흑살마장........" 중얼거리는 장문인의 어조에는 절망감이 묻어 있었다. 장력에 스치기만 해도 그 부위가 시커멓게 썩어들어가는 지독한 마공이 바로 흑살마장이었다. 지금 당장 치료하면 생명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막강한 고수를 눈 앞에 두고 어떻게 치료를 받는다는 말인가. 물론 지독하기 그지없는 흑살마장이라고 해도 단점이 없을 수 없다. 공력을 뿜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장력이 발출되는 거리도 다른 장공들에 비해 상대적으로짧다. 더군다나 그것을 10성까지 익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마교 고수들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이것에 도전해보는 것이다. 그런 약점을 지닌 것이 흑살마장인데도, 상대는 한순간에 4번의 장력을 발출했다. 그리고 상대는 엄청나게 뛰어난 신법을 지니고 있었기에, 장력의 사거리 따위는 무의미했다. 장력이 미티는 사거리까지 순식간에 파고들어 일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에서 치밀어 오르는 통증이 점점 더 강렬해지자 장문인은 신음성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크으윽! 귀하는 유감스럽게도 10 성을 다 연성한 모양이구려." 장문인의 질문에 상대는 호기롭게 대꾸했다. "10성뿐이겠느냐? 12성 대성하였느니라." "그.그렇다면 설마... 귀하가 흑살마왕?" 그 말에 흑살마제 장인걸은 눈에 이채를 발하며 이죽거렸다. "호오, 아직까지도 본좌를 기억하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본좌가 누군지 알아챈 그 안목을 높이 사 제일 마지막에 죽여주마." 모두들 점점 더 극심해져오는 통증에 신음성을 흘리면서도 장인걸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런 그들에게 비웃음을 던지며 장인걸이 이죽거렸다. "본좌의 흑살마장에 격중된 이상 살아남기는 힘들것이야. 괜히 힘빼지 말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게다. 크흐흐흣." 바로 이때, 어디선가 긴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문제는 그 휘파람소리에 엄청난 내력이 실려 있어 공동산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장인걸의 안색이 조금 다급해졌다. 단번에 죽일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가이 든 것이다. 그만큼 장소설에 실려 있는 내력은 너무나도 웅후라여 장인걸 같은 극마의 고수조차도 감히 경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장인걸은 망설임 없이 죽각 손을 썼다. 과연 극마의 고수답게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빨랐다. 신형이 번뜩인다. 싶은 순간, 이미 그의 몸은 장문인의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장인걸의 손에서 시커먼 기운이 일렁거린다 싶은 순간 펑하는 굉음과 함께 장문인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봅부에 정면으로 흑살마장을 맞은 장문인이 즉사해버리자,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세명의 고수들 또한 자신들의 처지가 어찌될 것인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앉아서 죽는니 적의 팔 하나라도 자르는 것이 지금 공동파를 향해 접급해오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길이 될 것이다. 서로의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오랜 세월 공동파에서 함께 수련해온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장인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크흐흣, 가소로운 것들." 퍼펑! 장인걸을 향해 몸을 난린 공동파 장로들의 의기는 가상한 것이었으나, 불행히도 그들의 실력은 장인걸 같은 극마급 고수를 상대함에 있어서 너무나도 격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의 몸이 성할 때도 장인걸을 어떻게 하기 힘들텐데, 그들은 지금 극심한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장인걸은 그들을 잔인하게 죽여 나갔다. 장문인과 3명의 장로들을 죽여버린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장인걸은 다시금 몸을 날렸다. 장문인이 있는 전각 주위에는 공동파의 최정예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그들은 지금 침입한 적도들과 사력을 다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장인걸 같은 엄청난 고수가 끼어들어 그들의 뒤통수를 치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천마혈검대의 고수들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장인걸이 손수 손을 쓴 이유는 미지의 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지금 달려오고 있는 적의 실력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렇다면 지금 당장 후퇴해야 하는 것이다. 전각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공동파의 상층부 고수들을 몽땅 해치워버린장인걸은 아직도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장내를 향해 명령했다. "철수하라!" 단 한마디의 명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읶르고 있는 병사들은 재빨리 격전을 멈추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가 공동파로서는 장인걸의 수하들을 도륙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미 장인걸과 그가 거느리고 간 천마혈검대 때문에 공동파의 장로급 이상의 수뇌부는 거의 다 죽음을 당한 상태였기에, 공동파 제자들을 통솔할만한 인물이 없었던 탓이었다. 장인걸이 철수한 지 채 반 각(7분 정도)도 지나지 않아 수라도제가 이끄는 500여명의 고술들이 공동파에 도착했다. 숭산에서 수라도제가 급히 출발했을 때, 장인걸과는 거의 하루 하고도 반나절에 걸친 시간차가 있었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일행들을 독려하여 그것을 겨우 몇 시진의 차이로까지 좁혀놓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가 공동파에 도착했을 때, 수라도제는 자신이 너무 늦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장문인은 어디 계시느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공동파 제자를 붙잡고 질문을 던지자 그는 힘없이 중앙에 서 있는 큰 전각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제자를 아직까지도 자신이 이 아수라장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라도제가 전각으로 급히 달려갔을 때, 그곳에는 수백 구가 넘는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는 공동파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장문인은 어디 계시느냐?" 그 말에 제법 나이든 제자 한 명이 나서며 대답했다. "장문인께서는 괴한들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뭣이?" 수라도제는  제자를 닦달하여 급히 장문인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타문파 장문인의 시신에 손대는 것이 실례임을  알면서도 시신에 난 상처를 헤집기 시작햇다. 흉수가 누구인지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그는 장문인의 내부장기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신음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흐으음. 흑살마장이로구나. 그 저주받은 마공을 쓰는 놈이 아직까지 존재할 줄이야." 그 말에 옆에 서있던 황룡무제가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흑살마장이라면..., 마교가 관계되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지도 모르지. 교주가 말도 안 되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동행을 거부했지 않았는가. 아무래도 교주가 우리들에게 말하지 않은 은밀한 뭔가가 있는 듯하구먼, 그자가 함께 왔으면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당장 추궁했을텐데......" 이때 저쪽에서 공동파 제자들과 뭔가 대화를 주고받던 패력검제가 다급히 다가와 말했다. "그자들이 이곳에서 철수한지 1각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놈들의 수는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갑자기 급습을 당했기에 그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히 알수 없답니다. 하지만 적들 중에서 대단히 뛰어난 고수들이 몇 명 정도 섞여 있는 것은 확실한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설마 마교가 금과 어떤 연관을 지니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군. 지금 당장 출발하세." 수라도제의 명령에 따라 무림연합의 최정예 고수들은 금군의 흔적을 찾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숭산을 향해 달려가던 제 2진의 고수들이 피곤에 지친 안색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제1진으로 가장 선두에 달려갔던 무림연합 고수들 중 500여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2진을 이끌고 있던 공동파 장로는 즉시 그들을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아니, 무슨 일인가?" 집결지는 숭산이 아니었는가?" 제1진의 고수들 중 한 명이 공동파 장로에게 포권하며 인사를 건넨 후 대답했다. "수라도제 대협께서 양양성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수라도제 대협께서? 노부는 이해할 수가 없구나. 대협께서 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는 말이냐?" "소림사는 금의 압력에 굴복하여 10년 동안 봉문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 만큼 소림을 돕기 위해 달려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그 말에 공도파 장로는 장탄식을 터뜨리며 되물었다. "허어, 그게 사실이냐?" "제가 어찌 감히 대협께 허언을 아뢸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소림사가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정말이지 형편없는 작자들이 아닌가?" 이때, 제1진의 무사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던 묵향이 슬그머니 나서며 공동파 장로에게 말을 걸었다. "남의 걱정 하지 말고 자네 걱정이나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런 말을 한 것이 마교 교주임을 알아본 장로는 감히 발작하지는 못하고 불퀘한 듯 대꾸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교주." "돌아가라는 지시만 내려놓고, 정작 그 지시를 내린 당사자인 수라도제는 왜 여기에 없겠는가." 잠시 장로를 비웃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뭇향이 말을 이써다. "물론 자네의 그 머리통으로는 죽었다 깨도 알 수 없을 테니, 본좌가 가르쳐 주지." 그 말에 공동파 장로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햇다. 그것을 보고 처음에 장로와 인사를 나눴던 장한이 다급히 중간에 끼어들었다. "교주님.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아아, 필요가 있고 없고는 본좌가 결정해. 네놈이 참견할 일이 아니란 말이야. 자,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맞아 그 늙은이가 어디로 갔느냐 하면, 바로 자네의 사문인 공동파로 달려갔다네." '무슨 일로 말이오?' 하고 말하는 듯 의문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공동파 장로에게 묵햐이 자세히 설명해 줬다. "금군이 공동파를 기습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정보가 개방에서 들어왔지. 수라도제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공동파를 향해 떠났다네." 공동파 장로는 나지막하게 콧김을 내뿜으며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했다. 마교 교주가 옆에서 깐죽거리는 바람에 상당히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흥, 겨우 금군 졸개들이 움직인 것 가지고 그런 말씀을 하다니요, 교주께서 본문을 걱정해주시는 것은 감사드립니다, 본문은 그렇게 나약한 문가가 아니외다." 하지만 묵향은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혀를 끌끌 차며 어린애라도 가르치듯 말했다. "쯧쯧, 그게 아닐걸? 그놈들 때문에 9파1방에 자리를 잡고 있던 종남파도 멸문 당했다네. 공동파도 혈겁을 피하기는 힘들걸?" 다른 사람들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장인걸이 공동파를 멸문시키려고 작정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목적한 바를 이룰것임을 묵향은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장인걸과 싸워왔기에 상대의 습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주의 지적에 공동파 장로의 조금 창백해졌다. "서, 설마 그럴 리가....." "자네는 확신하나? 공동파가 지닌 힘이 종남파보다 더욱 강하다고 말이야." "....." 공동파 장로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묵향은 싸늘한 비웃음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수라도제가 다급히 움직인 것을 보면 그는 공동파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거야. 만약 공동파가 충분히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그가 생각했다면 뭐 하려고 힘 빼가며 공동산으로 달려갔겠냐? 숭산을 포위했다가 물러가는 금군 놈들의 뒤통수를 쳤겠지. 안 그래?" 여기까지 들으 공동파 장로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었다. 사문인 공동파에 위기가 도래했다는데 교주와의 사소한 시비가 문제가 아닌것ㅇ티다. "이렇듯 본문을 걱정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교주." 공동파 장로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는 제자들을 이끌고 다급히 공동파를 향해 길을 떠났다. 사문의 안위가 걱정스러웠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문파의 고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까지 급히 달려오느라 모두들 지쳐 있기도 했지만, 제1진에 속한 고수들을 통해 양양성으로 돌아가라는 수라도제의 지시가 내려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문파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동파가 박살나든 말든, 남의 집에 불난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길을 떠나는 공동파 제자들 중에 옥대진과 능비화도 끼어 있었다. 그들의 피로에 지친 뒷모습을 묵향은 아주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공동파 장로에게 일부러 이 사실을 알린 것도 다 그곳으로 꼬지가 빠지게 달려가라고 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 공동산으로 달려가 봐야 모든게 다 끝난 후일테니 도착한 후에는 더욱 허탈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묵향의 기분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흔들리는 무림맹 시일이 지나자 공동산에서 벌어진 엄청난 혈겁이 개방을 통해 사방으로 전해졌다. 때마침 수라도제가 이끄는 무림연합의 고수들이 도착하여 멸문당하는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공동파가 입은 피해는 너무나도 막대한 것이었다. 장문인 이하 모든 장로급들, 그리고 실력 있는 제자들의 대부분이 사망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생각해보면 고수들의 상당수를 무림맹이나 양양성 방면에 파견해놓은 것이 정말 공동파로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들이 살아 있었기에 공동파는 언젠가는 그 세력을 회복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그게 가까운 시일 내에는 불가능 하겠지만 말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무림맹은 금이 지닌 저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중원의 북부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무림의 방파들이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그것도 종남파와 공동파 같은 거대문파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거기에다가 무림맹 수뇌부들을 더욱 긴장시킨 것은, 그들과 직접 사투를 벌인 수라도제의 보고 때문이었다. 적을 포착하여 격멸시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피해가 너무나도 막심했다. 100여 명이 사망하고, 300여 명이 중상을 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의 수뇌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중상자들 중에는 황룡무제까지 끼어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피해가 크다고 해도 적들을 완전히 끝장내버렸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무림맹의 수뇌부들을 고민엔 빠뜨린 것은 적도들중에서 상당수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버렸다는 수라도제의 보고 때문이었다. "허어, 어찌 이럴수가 있다는 말이오? 적도들 중에서 화경급 고수와 상대할 만한 초절정급 고수가 존재하다니..... 그게 말이나 돼오?" 일찍이 수하들을 거느리고 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연경으로 쳐 들어갔었던 백량 장로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 태평스럽게 말했다. "노부가 직접 연경에서 놈들과 싸운적이 있소. 수하들을 다 잃고 노부만이 간신히 살아서 도망쳤을 정도로 그놈들은 뛰어난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소이다. 거기에 화경급이 몇 명 섞여 있다고 해서 뭐가 그리 놀라운 일이겠소?" "허어, 그렇게 속 편하게 말할 게 아니외다." 점잖은 직책이었지만 그것이 백량 장로의 속을 뒤집어놓은 모양이었다. 벌떡 자리에 일어선 백량 장로는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그렇기에 그의 손은 자신의 애병이 걸려 있던 허리부근을 무의식적으로 더듬고 있는 중이었다. "뭣이? 속 편하게? 네놈이 노부의 마음을 어찌 알고 그딴 소리를 한단 말이냐?" 방금 전까지 말은 빈정거리듯 했지만, 그의 마음이 그렇게 편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사문인 종남파가 적도들의 손에 피바다가 되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알고도 태연하다면 그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어허, 이게 무슨 짓이오? 맹주님 앞이오. 당장 자리에 앉으시오." 백량 장로는 분노어린 시선으로 상대를 한참 노려보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백량 장로가 자리를 뜸으로 인해 회의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져버렸다. 오랜 시간 지속된 침묵은 공수개 장로가 입을 열면서 끈이 났다. 공수개 장로는 주위의 누치를 살피더니 아무래도 이런식으로 회의가 끝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지금 가장 시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본방에서 한 가지 정보가 올라왔는데, 아무래도 이 점은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는 것이 좋을 듯해서 말씀을 올리겠소이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공수개 장로는 낮게 헛기침을 한 후 말을 이었다. "어흠, 모두들 아시다시피 이번 혈사로 인해 금의 세력이 결코 만만하게 볼수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소이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에 의문이 떠올랐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공수개 장로가 말하는 이유가 뭘까? 하지만 곧이어 그들은 알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것인지. "금은 그들의 영토 밖에 있는 공동파까지 박살내버렸소. 그렇다보니 지금 무림의 각 문파들은 양양성에 내보냈던 정예고수들을 불러들이고 있소이다. 무림의 대의를 따르는 것도 좋지만, 우선 집안을 튼튼히 해놓고 보자는 뜻이겠지요." 그 말에 맹주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청호진인이 놀라서 외쳤다. "아니, 그게 사실이오?" "자세히 알아보면 곧 들통날 일인데 거짓말을 해서 무엇 하겠소? 노부의 말은 사실이외다." "허어, 이것 큰일이구려. 그렇다면 모처럼 집결시켜 놓은 무림연합의 세력이 급격히 저하될 것은 자명하지 않소이까? 소림까지 봉문한 상태인데 일이 어찌되려고 이러는지....." "참 소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소문 들으셨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림의 장문인이 물러났다고 하던데." 누군가 소림사에 대에 들은 풍문을 입에 담자 여기 모인 장로들 중에서 가장 정보가 빠른 공수개 장로가 그 진위를 알려줬다. "대덕대사가 물러나고 새로이 덜략대사가 방장직에 올랐다는 연락을 받았소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다고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소."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공 장로." "수라도제 대협이 소림의 정문을 파괴하며 응징하겠다는 선언을 했으니 소림사로서는 겁이 날 만도 하지 안겠소이까? 그걸 피해가기 위해 대덕대사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명목하에 장문직을 아랫사람에게 넘긴 것이겠지요?" "허어, 그런 속셈이 있었구려. 하여튼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말로만 떠들면서 정말 하는 짓거리가 약팍하기 그지없구려." "그러게 말이외다." 모두들 소림사의 행동에 실망감을 감추기 힘든 모양이다. 이때, 청호진인이 묵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 어찌되었건 소림이 봉문을 선언한 이상 그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소이다. 우선 당면과제는 고수들을 빼내는 이기적인 문파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것이 아니겠소? 빈도의 생각으로는 몇몇 문파들을 골라내어 본보기로 응징을 가하는 것이 좋을듯한데....." 청호진인이 심각한 어조로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공수개 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불가능하외다. 청호진인이 사문인 무당파의 겨우 양양성에서 거리가 멀지 않기에 위급할 때는 즉시 양양성에 주둔중인 고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다른 문파들은 그렇지 못하오. 만약 그들이 이 사실을 들고나오며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한다면 어찌 하시겠소이까?" 공수개 장로의 지적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기에 청호진인으로서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공수개 장로는 그것보라는 듯 천호진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 지금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인은 금군이 보유한 정예군들의 수준을 파악하는 일이외다." "놈들의 능력은 이번에 거의 드러났지 않소이까? 공동파와 종남파를 파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거의 9대문파급,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강력한 정도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물론 그렇소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오. 놈들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해야 이번처럼 뒤통수를 얻어맞지 않을 수 있지 않겠소? 이번에 일어났던 일도 다 놈들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몬한 데서 비롯된 것 이 아니겠소이까?" "허어, 참. 개방에서조차 그 사실을 모르는데, 빈도가 그걸 어찌 알아낸단 말이오? 혹시 무영문 쪽에다가 의뢰를 한다면....." 청호진인은 공수개 장로의 안색이 노기로 시뻘것게 변하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을 멈췄다. 무의식중에 자신이 공수개 장로의 역린을 건드렸음을 느꼈던 것이다. 이때, 지금까지 말 없이 듣고만 있던 맹주가 문득 입을 열었다. "서로 다툴 필요 없네. 금이 보유하고 있는 핵심전력은 이미 파악해 냈으니까?" 그 말에 공수개 장로는 놀라서 외쳤다. "정말이십니까? 맹주님." "물론일세. 노부가 여러 가지로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일단의 마교세력이 금군에 협조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네." 그런 말은 개방출신인 공수개 장로도 처음 듣는 것인지라 불신감 어린 표정으로 반문했다. "도대체 그정보의 출처는 어딥니까? 맹주님." 맹주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무영문일세." 그 말에 공수개 장로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또다시 무영문에 한 발 뒤늦은 것이다. 맹주는 공수개 장로의 표정을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공수개 장로도 그 사실을 알려줬지 않은가?" 이어진 맹주의 말에 공수개 장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런 보고를 올린 기억이 없습니다." "과거 노부를 공 장로에게 완옌 렌지에라는 인물을 조사해 달라고 청한 일이 있었네. 안그런가?" "그... 그렇습니다." "그때 공장로가 노부에게 들려준 답변과 무영문에서 흘러들어온 정보를 종합해 보고 노부는 그런 결론을 내렸던 것일세." "그렇다면 맹주님께서는 마교가 금의 뒤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또 다른 장로가 외쳤다. "그놈들이 갑자기 협정을 맺자고 할 때부터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소이다. 이런 썩을 놈들!"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맹주는 손을 슬며시 치켜들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모두들 조용히 하게나. 노부는 분명히 말했네. 마교세력의 일부가 금에 넘어갔다고 말이야. 만약 지금 마교가 전폭적으로 금을 밀고 있다면 사태는 절망적이겠지만, 원시천존께서 도우셔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네. 지금 금에 협력하고 있는 존재는 과거 마교에서 암흑마제와 교주자리를 다투다가 쫓겨난 인물일세." 그 말에 장로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암흑마제와 권력다툼을 벌어다가 쫓겨난 자라. 이 순간 그들의 뇌리에 한가지 명호가 떠올랐다. 맹주는 말을 멈추고 좌중을 쓱 훓어본 후 말을 이었다. "사파에서는 흑살마제라고 부르고, 정파 쪽에서는 흑살마왕이라고 부르는 장인걸 전 교주가 바로 그 당사자지. 노부는 그가 탈출할 때 천마혈검대까지 거느리고 갔다는 정보까지 입수했다네." 그 말에 모두들 작금의 사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있었다. "그렇다면 마교는 일찍이 그 사실을 알고 동맹을 요청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일세. 그들도 흑살마왕을 치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힘들다고 결론을 내렸겠지. 수라도제의 보고에 따르면 지금 교주는 양양성에 와 있는 모양이야. 교주가 직접 움직일 정도로 마교는 이번 일을 중대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지." "오오, 그런 일이.... 그런데 맹주꼐서 좀 더 빨리 그 사실을 밝히셨으면, 이토록 엄청난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건 노붓가 여러 장로들에게 사과하겠네. 그 정보를 알려준 옥화 봉공은 그 사실을 비밀에 붙여줄 것을 부탁했었네. 흑살마왕이 금에 있다는 것을 조사하여 마교 교주에게 알려준 것이 무영문이었거든. 무영문은 지금까지 한 가지 정보를 한 곳에다가만 판매한다는 규칙을 고수해 오지 않았었나? 그걸 노부 때문에 깨뜨리게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된 이니, 노부가 그 사실을 공포하면 그걸 노부에게 알려준 옥화 봉공의 처지는 어떻게 되겠나? 태상문주가 문의 법규를 어긴 것이니 아주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겠지. 그렇기에 노부는 지금까지 그 사실을 비밀에 붙일 수밖에 없었네." 이제 모든 상황을 이해한 공수개 장로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금이 지니고 있는 세력은 그렇게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흑살 마왕과 그가 거느리는 천마혈검대. 물론 천마혈검대가 엄청난 힘을 지닌 세력임을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소수정예라는 단점을 안고 있습니다." 소수정예가 단점이라는 말에 다른 장로들은 의아스러운 듯했다. 사실 소수정예가 지니는 이점이 더욱 크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은 이어지는 공수개 장로의 말에 그가 뭣 때문에 소수정예가 단점이라고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백량 장로가 금의 황굼에 침입했을 때 그곳에 일단의 마교 교수들이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천마혈검대는 지금 두 토막이 나 있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요. 일부는 황굼을 지키고, 일부는 흑살마왕이 거느리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안 그래도 백명 남짓한 소수로 이워진 천마혈검대를 두 개로 나눈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흑살마왕이 마교에서 쫗겨난 후 20 여 년이 흘렀소이다. 그가 또 다른 고수들을 키웠을 가능성도 생각해둬야 하지 않겠소이까?" 우려 섞인 지적이었지만 그 말에 공수개 장로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흑살마왕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자라고 해도 여진족들을 상대로 무공을 가르쳐봐야 얼마나 가르쳤겠소이까? 쓸만한 고수 2천을 키웠다면 정말 많이 키운 것일 겁니다. 안그렇습니까?" 공수개 장로의 지적에 다른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 또한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 아닌가. 뛰어난 고수 1명을 만드는 데 얼마만한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어야 하는지 잘 아는 것이다. "공수개 장로의 말이 옳습니다." "허어, 금이 엄청난 세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구려. 이건 완전히 자신이 지닌 총력을 다하여 외줄타기를 한 것이 아니오이까?" 지금까지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있던 옥진호 장로가 입을 여었다. "기왕에 알게 된 사실이니, 우리들은 그걸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오오, 옥장로께 뭔가 고견이 있으시오?" "천마혈검대 하나뿐이라고는 하지만, 그 지닌 바 능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소이다. 그들을 없애려면 이쪽의 피해도 적지 않을게 분명하오. 구태여 그런 피해를 자초할 것이 아니라 마교의 일은 마교가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렇다면 천마혈검대는 그렇게 처리한다고 하고, 지금 당면한 과제인 양양성에 주둔중인 고수들의 이탈은 어찌 해결하는 것이 옳겠소이까?" "일단 각 문파들에게 맹의 일에 협조해 달라는 서신을 돌리는 정도로만 해두는 것이 좋겠소이다. 정파 쪽이 더 이상 피해를 당한다면 나중에 금과의 전쟁이 끝난 후, 마교에게 밀릴 가능성이 크니까 말입니다." "노부의 생각도 그렇소이다." 모든 장로들의 의견이 어는 정도 합해지자 가만히 앉아 있던 맹주는 결정을 내렸는지 공수개 장로를 향해 말랬다. "공수개 장로." "예." 개방의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천마혈검대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게. 흑살마왕이 거느린 주력의 위치만 예의주시한다면 언젠가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게 아니겠나?"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맹주님." "청호장로는 각 물파에 서신을 돌려 양양성에서 고수들을 빼내지 못하도록 당부해 주게." "예." "옥진호 장로는 휘하의 고수들을 천마혈검대의 공격권 밖에 위치한 문파들에 파견하여 고수들을 빼내지 못하게 압력을 가하게. 사실 공격권 내에 위치한 문파들이 고수들을 빼내는 것이야 이해해 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문파들이 고 수들을 빼내는 것까 용납해줄 수는 없지 않겠나?" "명대로 따르겠나이다." 장인걸은 공동산에서 정파연합의 고수 500명과 대규모 혈전을 벌인 결과 예상 밖에 큰 피해를 당했다. 어쩌면 장인걸 자신마저도 하마터면 그곳에서 뼈를 묻을 뻔했을 정도로 상대방의 전력은 막강했다. 전 중원을 통틀어 10명도 안 되는 화경급 고수가 무려 셋이나 한꺼번에 등장할 줄은 미처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장인걸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이 그즐 중에 황룡무제가 끼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황룡무제가 극성으로 익힌 무공은 청월검법. 청월검법은 전전대교주였던 한중길이 철저히 연구하여 파훼법까지 만들어놓은 검법이었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상대의 공격로를 환히 꿰뚫고 이었고, 그것이 장인걸의 목숨을 살려줬다. 황룡무제가 쓰러지는 순간 삼재진은 깨져버렸고, 그 틈을 이용하여 장인걸은 탈출에 성공했다. 장인걸과 함께 탈출에 성공한 수하들은 4백도 채 안 되었다. 그나마 천마혈검대 소속의 고수들을 단 한 멸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장인걸로서 는 큰 위안 이었다. 장인걸은 생존자들을 수습하여 곧바로 남양으로 돌아왔다. 적들의 실력을 감안했을 때 아무래도 남양의 수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공동파를 향해 떠날 때의 모습과는 달리 남양으로 돌아온 장인걸과 그 수하들의 모습은 패잔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편복대주는 오체복지하여 사죄했다. "속하를 죽여주시옵소서, 교주님." 씁쓸한 미소를 지은 장인걸을 슬그머니 공력을 일으켜 편복대주를 일으켜 세웠다. "싸우다 보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일이다. 패배할 때마다 수하들의 목을 베어서야 어찌 대업을 이루겠느냐? 다만 똑같은 실수만 되풀이하지 않으면 된다." 이번 장인걸의 패배는 전적으로 편복대주의 책임이 컸다. 그가 모든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만큼, 정파 쪽에서 동원 가능한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 정파쪽에서 동원한 전력은 편복대주가 예흑한 것의 3배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편복대주는 장인걸의 관대함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다시는 그런 실수가 없도록 하겠사옵니다." "어찌 되었건 놈들의 세력이 상상이상으로 강력하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큰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화경급 고수를 셋이나 투입하다니..... 그놈들은 마교가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걱정되지도 않는 모양이지?" "마교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때문이 아니겠사옵니까?" "어찌 되었건 이번 사건으로 한 가지 사실은 명백해졌다. 될 수 있으면 무림맹 놈들과는 정면충돌을 하지 않는 편이 이롭다는 것이 말이다. 편복대주." "옛, 교주님." "사로잡은 인질들의 명단은 준비되었느냐?" "예, 교주님." 그것을 무림맹에 보내거라. 그것을 통해 무림맹 세력들을 이간질한다면 아마도 큰 성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예." "그리고 비교적 방비가 허술한 무림맹 소속의 문파들이 있는지 조사해보도록." 장인걸의 명령에 편복대주는 의아한 모양이었다. "예? 그것은 왜....?" "본좌가 이곳으로 오면서 생각해둔 계책이 있다. 비교적 방비가 허술한 문파 몇 개를 치면서 마교도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원수처럼 지내왔던 마교와 무림맹은 어찌 되겠느냐?" 그 말에 편복대주는 감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훌륭하신 계책이십니다, 교주님. 당연히 휴전은 깨질 것이고 둘은 다시금 아귀다툼을 벌일 것이 분명하옵니다." 장인걸은 흡족한 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무림맹은 더 이상 양양성에 저만한 고수들을 집중 시키지 못할 것이야." "지금 즉시 시행하라." "옛. 교주님." 편복대주는 서둘러 달려나갔다. 이번에야말로 실수하지 않고 정파 놈들을 제대로 함정에 빠뜨려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말이다. 묵향이 양양성으로 돌아온 후, 며칠이 흐르자 공동파에 갔던 수라도제가 돌아왔다. 처음 공동파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갈 때의 자신만만한 모습과는 달리 그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돌아오는 무림연합 고수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마화가 문득 입을 열었다. "교주님께서 함께 가셨어야 했어요." 사실 장인걸이 거기에 있는 줄 알았다면 자신이 직접 가서 목을 땄을 것이다. 하지만 묵향은 그놈이 설마 거기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장인걸은 살아서 돌아간 것이다. 물론 묵향이 기대한 대로 공동파는 묵사발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묵향은 그것이 너무나도 아쉬운지 가볍게 혀를 차며 대꾸했다. "본좌도 알고 있다. 천마혈검대만 보내도 충분했었을텐데..., 설마 그녀석이 직접 움직일 줄이야....." "이번에 흑살마제도 큰 곤욕을 치뤘을 테니, 다시는 이런 모험을 하지 않을 거예요." 장인걸이 이번에 크나 큰 고생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화경급 고수를 무려 3명이나 상대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그곳에 천마혈검대가 없었다면 아무리 장인걸이 기괴한 마공들을 익히고 있었다고 해도 살아서 돌아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언젠가는 기회가 다시 올 거야."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묵향은 마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화!" "예, 교주님." "총타에 연락을 넣어 초류빈과 철영에게 혈랑대와 수라마참대 그리고 천랑대를 이끌고 대별 산맥에서 은밀히 대기하라고 일러라." 상대는 장인걸이었다. 그렇기에 혹시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인선을 해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별산맥은 양양성과 지척에 위치해 있는 험준한 산맥이었다. 고수들을 숨겨뒀다가 써먹기에도 편리하겠지만, 혹시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묵향이 그곳으로 달려가기도 용이할 것이다. "드디어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당분간은 아니야. 이번처럼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해도, 본교의 주력이 십만대산에 틀어박혀 있어서는 도저히 손쓸 기회를 잡을 수가 없어. 좀 더 가까운 곳에 불러들여 놓는게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런 이유라면 초류빈 부교주님은 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직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럴 수도 있겠군. 대신 초류빈에게는 몸이 다 나으면 철영과 합류하라고 지시해."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묵향은 싸늘한 공기를 가슴깊이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아마 봄이 되면 그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조용히 참으면서 기회를 노리다 보면...." "걸려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그만큼 혼이 났으니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궁리해 보면 되겠지. 그건 그렇고, 봄이 되기 전에 그 연놈들부터 처리해야겠군. 지금이 적기인 듯하니까 말이야." 그 말에 마화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연놈들이라뇨?" 묵향은 빙긋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마화는 몰라도 돼. 본좌의 사소한 원한일 뿐이니까." 이때,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흑풍대 소속 무사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교주님. 수라도제가 만통음제 대협과 함께 급히 와달라고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그래? 알겠다. 가겠다고 일러라." "옛." 급히 만통음제와 함께 와달라는 수라도제의 전갈을 받은 묵향은 도대체 무슨 일일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곳으로 갔다. 그 노회한 너구리가 이번에는 어떤 것을 들고 나올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많은 무사들이 대기하고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무슨 함정이라도? 묵향이 수라도제가 와달라고 부탁한 곳에 만통음제와 함께 도착해 보니 뜻밖에도 그곳에는 수라도제 외에 황룡무제와 패력검제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황룡무제는 내상이 아직 완치되지 않은 탓인지 안색이 조금 창백해 보였다. 묵향은 그 셋을 훑듯이 살펴본 후 퉁명스레 말을 걸었다. "뭐가 그리 급하시오?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차를 드시겠소? 아니면 술을?" 그렇게 말하는 수라도제의 어투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묵향은 태연자약했다. 몇 가지 안주거리 옆에 놓여 있던 빈 술잔을 집어들고 술을 따르며 만통음제에게 화기애애하게 말했다. 꼭 술 한 잔 하기 위해 객잔에라도 온 듯. "형님도 한 잔 드시죠." "아니, 됐네." 이런 냉막한 분위기 속에서 어찌 술맛이 난단 말인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른 사람들의 앞에도 모두 찻잔이 놓여 있었다. 수라도제는 꼭 범인을 심문하듯 싸늘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흑살마왕이 금에 있다는 걸 알고 계셨소?" 묵향은 한 잔 쭉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도제는 인상을 더욱 찡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단 한마디 언질이라도 해줄 수 있었잖소. 만약 그랬다면 절대로 그놈이 살아서 돌아갈 수 없었을......" 이때 갑자기 묵향이 수라도제의 말을 끊으며 으르렁거렸다. "내 먹이에 손대지 마 그놈은 본좌가 직접 명줄을 끊어 놓을 거야. 알겠나?" 하지만 수라도제는 콧방귀를 뀌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교주가 직접 갔으면 되었겠구려. 그곳에 가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다니....." "이번에는 본좌가 판단을 조금 잘못했을 뿐이야. 그놈이 거기 있을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요구를 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칼을 들고 그놈을 찾아가서 죽여 없애시오. 그럴 능력이 안 된다면 그딴 요구는 하지도 말고 말이오." "말 다 했는가?" 묵향이 싸늘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지만 수라도제로서도 할 말은 있었다. 뭐 묻은 놈이 뭐 묻은 놈을 나무란다더니, 그짝이 아닌가. "아직 다 못했소. 중원이 얼마나 넓은데, 그놈이 어디에서 튀어 나올 줄 알고 당신에게 그런 약속을 하겠소?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그놈을 만난다면 기꺼이 놈을 당신에게 양보해 주겠소. 하지만 당신이 없는 자리라면 노부는 그놈을 죽여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요. 안 그러면 내가 당할 테니 말이오." 수라도제가 그런 말을 할 만했다. 직접 싸워본 결과 상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었으니까. 묵향은 잠시 생각했다. 사실 이번에 자신이 따라가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으니, 상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요구를 할 만큼 놈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목숨을 보장하기 힘들 정도로. "그건 귀하의 말이 맞는 것 같군. 본좌가 조금 감정에 치우친 듯하니 이해하게." 수라도제는 또다시 범인이라도 심문하듯 싸늘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놈이 익힌 무공이 뭐요? 도대체 어떤 망할 놈의 무공을 익혔기에 도무지 죽지를 않는 거요? 노부가 만약 그런 치명상을 입었다면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그놈은 멀쩡할 수 있다는 말이오?" 그게 묵향의 비위를 건드린 듯 그는 될 대로 되라는 듯 이죽거렸다. "대답하기 싫은데? "대답하시는 게 신상에 좋을 거외다." "신상에 좋을거라고? 흥! 좋을 대로 해봐라."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만통음제가 끼어들었다. 이런식으로 감정적으로 대립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기도 했지만, 괴이한 무공에 대한 흥미도 적지 않았다. "도대체 상대가 어느 정도로 상처를 입었기에 수라도제 대협이 그런 말씀까지 하신단 말씀이시오?" 수라도제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강기에 격중당해 장부가 완전히 뒤흔들렸을 것임이 분명한데도, 전혀 타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기에 하는 말이외다. 우리 셋이서 그놈을 합공했으니, 그놈의 실력이 현경급이 아닌 다음에야 살아 돌아가기 힘들었을 것이 아니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놈은 유유히 살아서 도망쳤소. 황룡문주에게 부상까지 입혀놓고 말이외다." 그 말에 만통음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극마급의 고수와 화경급의 고수가 정면대결을 벌인 적은 거의 없었기에, 서로간의 우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세인들은 서로 엇비슷한 실력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고, 만통음제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라도제의 말을 들어보니 이건 그게 아니지 않은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동생." 수라도제를 생각하면 단 한마디도 대답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만통음제가 질문을 던지니 어쩌겠는가. 묵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단숨에 비운 다음 어쩔 수 없이 대꾸했다. "귀혼강신대법. 그것을 익히면 거의 불사에 가까운 신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왠만한 상처 따위는 곧바로 치료되어 버리죠." "정말 천마신교의 무공은 너무나도 기괴하구먼. 그런 무공이 존재할 줄이야...." "본교의 무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의 무공인가? 그런 무공이 있다는 소리는 지금껏 들어본 적도 없는데 말일세." "혈교의 것이라고 보시면 맞겠죠. 아마도 혈교에 그 비슷한 무공이 있는데, 그걸 본교의 무공과 연결하여 더욱 반전시킨 모양입니다." "허어, 참. 무공의 한계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구먼.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묵향과 만통음제가 나누는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수라도제가 입을 열었다. "귀혼강신대법이라..... 그걸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뭐요?" "알아서 생각해봐. 본좌가 대답해줄 이유는 없으니까." 수라도제의 얼굴이 분노 때문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둘의 눈치를 살피던 만통음제가 또다시 끼어들었다. "우형의 생각으로는 그 무공은 상처회복의 속도를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르게 만드는 것인 모양이군. 하지만 상처회복을 방해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가능성도 있겠지. 예를 들어 양강의 무학을 통해 살을 태워버린다거나, 아니면 극음의 무학으로 살을 얼려버린다거나......" 가만히 듣고 있던 패력검제와 황룡무제가 끼어들었다. "그런 것을 익히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사실 극음이나 극양의 무학을 익힌 자는 흔치 않지 않습니까?" "허어, 듣고 보니 그것 또한 문제로군. 그렇다고 극양이나 극음의 속성을 지닌 신병이기를 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옆에서 듣고 있던 묵향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십니까? 여기만 박살내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 그러면서 묵향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 말에 수라도제를 비롯한 다른 고수들은 처음에는 '그렇게 쉬운 방법이!' 하는 듯 안색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들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만한 고수의 머리통을 박살내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절정의 고수들 간에 있어서 실력의 차이는 종이 몇 장 간격 정도밖에 안 되단다. 그렇기에 이쪽이 조금 더 실력이 높다고 하더라도 방심하면 한순간에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공격목표를 머리로 한정해야만 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될 정도로 불리한 조건에서 싸워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정녕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까?" 패력검제의 질문에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글쎄..... 그건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걸? 사실 본좌는 그 방법만으로 충분했거든." "난제로군요." "뭐 난제랄 것도 없네. 적의 장점을 알려줬으니 이번에는 각자 지닌 장점을 충분히 고찰해볼 필요가 있겠지. 적의 장점을 죽이고, 이쪽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대결에 있어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과제가 아니겠는가?" 그 말에 수라도제는 티껍다는 듯 대꾸했다. "그걸 누가 모르겠소? 그건 그렇고, 귀교에는 그 대법을 익힌 자가 많소? 이번에 그들과 싸울 때, 베어도 죽지 않는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이 꽤 많았기에 하는 말이외다." 그걸 익힌 자가 마교에도 많다면, 앞으로 마교를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수라도제가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묵향은 상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소롭다는 듯 대꾸했다. "쯧, 생과 사가 오가는 지극히 짧은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야. 처음부터 목숨을 잃기 싫은 놈이 어찌 지고한 경지를 깨달을 수 있겠나? 본좌가 집권할 때 그런 놈들은 몽땅 다 목을 따버렸지." 패력검제가 충분히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교주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소이다." 어쩌면 답보상태에서 머물러버릴지도 모르는 자신에게 한 가지 돌파구를 제공해준 것이 교주와의 대결이었다. 교주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 순간 패력검제는 목숨을 걸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주어졌다. 그걸 어떻게 풀어갈지는 자신의 몫이 었지만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황룡무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교주님을 만난 김에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뭔가?" "제가 익힌 것이 청월검법이라는 사실은 아시겠지요?" 묵향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룡무제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귀교에서는 청월검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겁니까?" "어찌 본좌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가?" "흑살 마왕은 제가 공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정확하게 빈틈을 찾아 맞받아쳤습니다. 만약 제 깨달음이 조금만 미약했다면 이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했겠죠. 물론, 그가 다른 사람들의 공격을 그토록 손쉽게 상대했었다면 이런 말은 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황룡무제를 지긋이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던 묵향은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파훼법이 있어." "끄응....." 자신의 짐작이 옳았음을 알고 황룡무제는 신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런 황룡무제를 향해 묵향은 부드러운 어조로 질책했다. "파훼법 따위에 초식을 벗어난 화경급 고수가 걸려들었다는 것은, 자네가 그만큼 상대를 경시했다는 말이 되겠지. 하기야 3대 1로 싸우는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런 쓸데없는 의문을 가지기에 앞서서 자네의 미흡함을 먼저 반성하게. 그게 옳은 수순인 듯하군." 옆에서 이걸 듣고 있던 수라도제는 자신이 한 가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부분을 물어보는 황룡무제나, 그에 대한 답을 친절하게 해주는 교주나 자신이 봤을 때 둘 다 정상은 아니었다. 교주가 황룡무제의 사부도 아니면서 왜 교주가 그런 의문에 대답을 해줘야 한단 말인가. '허어, 내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군.' 그러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자신이 매우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만통음제는 재미있게 듣고 있더니 자신까지 덩달아 끼어들어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공격해 왔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하기야 저렇듯 호기심이 많으니 만통음제라는 명호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패력검제는 이들의 대화를 아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번씩 자신이 궁금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까지 서슴지 않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교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수라도제가 양양성 내의 최고수들을 모두 다 집합시킨 것은, 이번의 실패가 있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교주를 문책하고, 또 장인걸 일당이 지닌 전력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회의장의 분위기는 이게 뭐란 말인가? 각자가 지닌 심득을 나누는 토론장이 되어버렸다. 딱딱한 회의장의 분위기를 보고 처음에는 차를 시켰던 패력검제나 만통음제가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든 것을 보면 대화를 아예 본격적으로 시작할 작정인 듯 했다. '뭔가 있어. 그 이전부터 이들이 교주와 교류가 있었음에 분명해 안 그렇다면.....' 교주가 후진양성을 위해 자신이 지닌 것을 아낌없이 베풀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그 생각을 애써 억눌렀다. 누가 봐도 그건 가능성이 없는 추리였으니까 말이다. 어느 미친놈이 장차 적이 될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무공을 가르친단 말인가? 그것도 얻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원래 무림이라는 것은 약육강식의 비정한 세계다. 협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정파라 해도 그건 사정이 다를 바 없었다. 얼마나 세력이 강하냐에 따라 문파들의 등급이 매겨지고,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는 곳이다. 그렇기에 강한 문파들은 더욱 강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한편으로는 약한 문파가 강성해지는 것을 철저히 억압한다. 자기가 강해지지 못하면 남이라도 약하게 만들어놔야 자신의 강함이 유지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정파들보다도 더욱 강함을 추구하는 곳이 마교가 아니가. 그곳의 교주가 타인의 세력이 커지도록 방치하는 것을 넘어서서, 오히려 도와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야 어떻던 고급스러운 무공이론이 흘러나오자 수라도제도 체면 불구하고 은근슬쩍 거기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이런 기회는 천금을 들여도 얻기 힘든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상대가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거짓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라는 것은 거짓과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닌가. 완전히 없는 말을 지어내서 거짓말을 할 수 없듯, 거짓말들을 종합하여 유추하면 진실을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이곳에서 오고가는 대화를 한꺼풀씩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며 대화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남양에 던진 미끼 "장로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일인데 그러느냐?" 다급히 들어오는 거지를 바라보는 장로의 눈빛은 그의 깊은 수련도를 말해주듯 침착하기 그지 없없다. 그가 바로 개방 최고수라는 부운걸개 장로였다. 그의 무공이 가장 강했기에 2천의 방도를 거느리고 이곳 양양성이라는 사지에 파견나와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의 무공이 가장 강하다면 방주도 이길수 있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건 그가 초식의 묘리를 벗어난다는 화경에 등극했다면 모를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개방 방주에게만 내려오는 반룡장이라는 무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개방 최강의 무공은 강룡십팔장이다. 그 무공헤 대하서 극성인 무공이 바로 반룡장인 것이다. 개방의 선대들은 개방 방주의 권위를 높이고 항차 잇을지도 모르는 모반 따위를 방지하기 위해 반룡장을 개발해서 방주에게만 전수하는 치밀함을 보였던 것이다. 거지는 다급히 말했다. “방금전에 교주를 만났습니다.” 부운걸개 장로는 나른한 듯 하품을 쩍 하더니 퉁명스레 대꾸했다. “여기 교주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뭐 그게 큰 일이라고…” “그게 아닙니다. 교주가 저한테 남양에 대해서 물어보더군요.” 부운걸개 장로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남양이라고? 남양이라면 금군이 군량미를 대량으로 쌓아두고 있는 그곳 말이냐? “물론이죠. 금군의 포진상황과 어느정도 수준의 고수들이 배치되어 있는지 뭐 이런 세세한 것들에 대해서 묻더군요.” “그래서?” “총타의 지시대로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상세하게 대답해줬습니다. 하지만, 그놈은 그것만 가지고 만족하지 못한듯. 2주일 이내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여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암냑 그렇지 않으면 재미없을 거라고 협박하면서 말입니다. 부운걸개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 거렸다. “흠 그놈이 왜 남양에 관심을 보이는 거지?” “어쩌면 그곳을 기습공격하려는 것이 아닐까여? 흑풍대는 지금 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금군과 전투를 벌여오지 않았습니까? 이곳에 수많은 무림연합의 고수들이 와 있지만 그들만큼 금군에게 피해를 가한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잠시 그 가능성에 대해 궁리하던 부운걸개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그말이 맞는 것 같구나. 너는 지금 당장 총타에 전서구를 띄워라.” “…” 전서구야 띄우겠지만 그 전통에 무슨 내용을 집어넣으라는 말인가? 거지가 멍청한 표정으로 서있자 부운걸개 장로는 짜증난다는 듯 덧붙였다. “교주가 원하는 정보를 최대한 빨리 파악하여 이곳으로 보내라는 것과 그놈이 그 정보를 이용하여 남양을 칠 생각인 것 같다고 알리란 말이다.” “옛, 장로님.” 서둘러 달려나가는 거지의 뒷모습을 향해 부운걸개 장로는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양양성에 파견나가 있는 부운걸개 장로로부터 날아온 전서 한장. 마교 교주가 남양에 배치되어 있는 금군 병력에 대한 세밀한 정보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전서에는 자신들이 이미 마교 교주에게 전달한 대략적인 정보의 내용을 밝히고, 이보다 더욱 상세한 정보를 2주일 내로 원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남양을 칠 생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밝히고 있었다. 남양이 지니고 있는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개방 수뇌부였기에, 처음 그 전서를 접하자 환호하지 않을수 없었다. “허어, 이거 교주가 마음에 드는 일을 계획할 때도 있군요. 남양만 불바다로 만든다면 금군은 어쩔수 없이 철군할 수밖에 없을 거외다.” “그러게 말이오. 하루라도 빨리 남양의 상황을 철두철미하게 조사하여 부운걸개 장로에게 보내라고 지시해야 하겠소이다.” “놈들의 군량만 불사를 수 있다면 연경을 탈환할 수 있는것도 꿈은 아니겠소이다.” 이런 저런 고무적인 말들이 장로들 사이에서 오고 갔다. 그럴만도 한 것이 남양에 쌓인 군량미는 60만 대군이 몇 달씩이나 먹을 수 있을만큼 엄청난 양이 아닌가. 그게 모두 잿더미가 된다면 향후 금군은 그정도 군량미가 비축되기 전까지는 그만한 병력을 끌어모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취선개 장로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외다.” “취선개 장로는 또 다른 의견이 있으시오?” “여러 장로님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오. 다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인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자, 생각해 보시오. 이쪽에서 넘겨준 정보만 해도 남양을 치는데 무리는 없을 거외다. 하지만 그넘은 더욱 많은 정보를 요구했소. 경비상태라든지 뭐 그런 자세한 것까지 요구한다는 것은 남양을 칠 생각이 있긴 있되, 정면공격이 아님을 의하는 것이 아니겠소?” 취선개 장로의 지적에 다른 장로들도 생각을 다시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취선개 장로의 추측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으니까. “그, 그렇겠지요. 하지만 어찌 되었건 성공만 한다면 남양의 군량미가 잿더미가 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 않겠소?” 그말에 다른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이자 취선개 장호는 화를 벌컥내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이런 답답한 사람을 봤나!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겠소? 그놈은 소수의 고수들을 남양으로 침투시켜 군량미를 불태울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오. 놈이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들이라고 못할 이유가 있겠소?” 그말에 다른 장로들은 취선개 장로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과거 무림맹의 백량 장로가 황궁에 침입했다가 뜨거운 맛을 본 일이 있지 않소이까? 그런데…” “황궁과 그곳은 다르다고 노부는 생각하오. 거기에다가 무림맹에 가 있는 공수개 장로는 금군이 자랑하는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 바로 천마혈검대라는 전갈을 보내왔소. 바로 마교고수들이 상대라는 말이지요. 마공을 익힌 고수들이 지니고 있는 특징은 누구보다도 여러분들이 장 알지 않소이까?” 그말이 주는 의미를 파악한 다른 장로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옳거니! 취선개 장로의 지적이 옳소이다!” “마기” “호오, 마기가 있었구료” 취선개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교 고수들은 매복을 하지않소. 왜냐하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은연중에 뿜어 나오는 마기 때문에 지신들의 기척이 금방 드러나니깐 말이오. 그 말은 천마혈검대의 고수들이 그곳에서 매복하고 있다고 해도 곧바로 알 수 있으니 그놈들만 피해서 군량미에 불을 지르는 것쯤 일도 아닐수 도 있다는 말이오. 안 그렇소?” “호오, 맞구려. 그말이 옳소이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교주 놈은 그 사실에 착안하여 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오” “그것은 분명하오. 그놈이 지금 거느리고 온 흑풍대는 마교로서는 드물게도 마기를 내뿜지 않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들었소. 그들을 이용하여 기습을 편친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거외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방주는 심려 섞인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듣고보니 취선개 장로의 지적도 옳구려. 하지만 그놈이 구상한 작전을 이쪽에서 가로챈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고 봐야 할 걸세. 안 그래도 그놈은 개방을 못잡아먹어서 안달인데 그런 좋은 건수를 안겨 준다면 아예 씨를 말려버리려고 들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취선개 장로는 눈빛을 교활하게 빛내며 대꾸했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림맹에 그 죄를 뒤집어 씌우면 되니깐요.” “무림맹에?” “예. 무림맹에 작전의 전모를 밝히고 정보를 넘긴다면 무림맹은 본방을 더욱 중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또 본방에서 이 일을 처리하여 타 문파들의 질시를 받는 것보다는 그 편이 휠씬 좋고 말입니다.”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방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윽고 그는 결단을 내렸는지 장로들에게 지시했다. “맹에 전서를 띄우게. 나머지는 공수개 장로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옛” 방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본방이 무영문을 앞지를 날도 멀지 않았구먼, 크흐흐” 한편 양양성에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허어. 자네 오래간만이로구먼.” 교주를 발견한 팽대성의 안색은 한순간에 샛노래 졌다. 양양성으로 오면서 그에게 당했던 악몽이라는 형태를 빌어서 말이다. 그런자를 또다시 보고 싶겠는가? 기골이 장대한 팽대성이었지만, 오늘 그는 생긴 것 답지않은 일을 하고야 말았다. 두 번 다시 그런 지옥을 경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깐. ‘이런 떠그랄! 왜 이새끼가 여기 있는 거야?” “노야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정말 오랜만입니다.” 팽대성은 워낙 솔직담백한 위인이라 기껏 꾸민다고 꾸민 표정이었지만, 싫은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묵향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척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그때, 양양성으로 올 때는 본좌가 좀 과했지? 그냥 따끔하게 충고나 한마디 한다는게, 조금 심했었던 것 같아서 그게 마음에 걸리더구먼.” 교주가 자신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듯하자 팽대성은 자신의 교활함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더욱 연기의 질을 높이고 있었다. ‘개새끼, 알기는 제대로 아는군.’ “과하다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으니 마음 놓으십시오.” “황실을 위해 그리고 무림의 앞날을 위해 목숨걸고 일어선 자네들이 아닌가? 그런 사소한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그렇게 손을 썼었는지…..” 뒷말을 슬쩍 흐리는 묵향이었다. “아닙니다. 저희들로서도 많은 공부가 되었었습니다.” 이런식으로 팽대성을 잡고 시간을 끌며 묵향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최대한 자애롭게 보이는 척하면서 말이다.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던 묵향은 문득 한 가지를 들고 나왔다. “팽가의 본거지는 하북이지?” 그 질문에 팽대성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물론 팽씨세가는 여기저기에 있다. 그렇기에 편의상 그들과 구분짓기 위해 하북팽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팽가들의 힘을 하나로 합친다고 해도 하북팽가 하나를 이길수 없을 정도로 하북팽가의 힘은 막강했다. 그렇기에 팽가하면 하북팽가를 말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하북팽가의 적자를 눈 앞에 두고 본거지가 하북이라니? 그말은 자신이 누군지 안중에도 없었다는 말이 아닌가? 슬쩍 열이 뻗쳤지만 그렇다고 발작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팽가 따위 물로 봐도 하등의 이상이 없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예, 지금은 오랑캐가 점령하고 있어 남쪽으로 터전을 옮긴 상태입니다만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겠지요.” “허어. 참. 자네 본좌를 만난 것을 천행으로 여기게.”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거하고 네놈 만난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팽대성이 어떤생각을 하고 있건간에 교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2주일 내로 본좌는 남양을 치 거야” 교주가 남양을 치건 말건 그거하고 자신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여겼기에 팽대성은 시큰둥한 어조로 장단을 맞춰줬다. “예? 그러십니까? 축하드립니다.”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묵향은 기가 막혔다. 척하면 알아 들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멍청한 놈일줄이야. 어떻게 이런 놈이 최고의 후기지수들 중의 한 명이라는 평을 듣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묵향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상대에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네 남양이 어떤곳인지 아는가?” “제가 미흡하여…” “그곳은 금군이 군량을 대량으로 쌓아놓은 곳이지. 본좌는 그걸 모두 다 잿더미로 만들 계획이야. 먹을게 떨어진 그놈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을테고, 그만한 군량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두 번 다시 남하해 올 엄두도 못내겠지..”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면 방비 또한 만만치 않겠군요” “그렇지는 않지, 자네도 알다시피 상대는 무공도 모르는 졸개들이다. 고수 몇이 숨어들어가서 군량에 불 지르는 것쯤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 아니겠나? 그리고 그런 식으로 군량에 큰 타격을 받으면 금군은 막상 60만 대군을 먹여 살리기가 힘들 테니 상당한 곤욕을 치르게 될테지. 굶주린 병사들은 힘을 쓰지 못하니 연경을 탈환하는 것도 이 제 꿈이 아니란 말이야. 이제 내말을 이해하겠나?”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팽대성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그렀습니까?” “자네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수고해 주고 계시는 본좌를 위해 오늘 술 한잔 사는게 어때?응?” “…..” 갑자기 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리자 팽대성은 황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교주는 팽대성을 끌고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무려 1시진에 가깝게 질퍽하게 퍼 마신후에야 교주는 떠났다.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팽대성은 교주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지닌 힘을 자랑하는 철부지 같은 모습이었고, 어떻게 보면 술 한잔 얻어 마시기 위해 공갈을 일삼는 파락호 같은 모습이었지 않은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교주 정도 되는 사람이 술 한잔 마실 돈이 없어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또 그런 거짓말을 해봐야 무슨 이득이 있다고……. 아무리 팽대성이 미래에는 팽씨세가를 물려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한동안 교주의 술상대를 해준 팽대성은 기분 전환도 할 겸 친구인 옥대진을 찾아갔다. 술을 마시며 교주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자니 오장육부가 뒤집어질 것 같았던 것이다. 간단하게 차를 나누며 얘기를 하던 팽대성이 방금 전까지 자신을 황당하게 만들었던 교주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하여튼 별 미친놈을 다 봤다니깐” 하지만 그 말을 자세히 들은 옥대진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단순한 팽대성에 비해 그는 매우 교활했으니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그건 또 무슨말인가?”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조금 움직이세. 그 말이 사실인지는 금방 알 수 있지 않겠나?” 옥대진은 팽대성을 이끌고 양양성에 파견나와 있는 개방도를 찾아갔다. 평소에 친분이 있는 개방제자였기에 그들은 일의 전말을 어느정도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 개방도가 겨우 4결 제자라서 가장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알 우 없었지만 말이다. 개방도와 헤어진 후. 그들은 그제서야 놀라움에 가득찬 속마음을 털어놓을수 있었다. 교주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정말 사람 놀라게 만드는군” “그러게 말일세. 그게 사실일 줄이야······. 어쩌면 고향으로 돌아갈 날도 그리 멀지 않은 듯하이. 오늘 기분도 좋은데 술이나 한잔 하겠나?” 팽대성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지만, 옥대진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이건 정말 엄청난 기회였다. 사문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자신의 무명을 무림에 알릴 수 있는 두 번 다시 찾기 힘든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 둘만 마시기는 뭣하니, 친구들을 모두 다 모으는 것이 어떤가? 오랜만에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구.” 그 말에 팽대성이 시원스럽게 동의했다. “그거 좋지. 바로 연락하겠네.” 반 시진이 흐른 후, 양양성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객잔에 7룡4봉의 젋은이 다섯 명이 모였다. 폭풍검 서량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옥대진이 팽대성에게 말했다. “폭풍검은 언제 온다고 하던가? 다른 사라들은 벌써 다 모였는데······.” “아, 그는 오지 못한다고 사람을 보내왔네. 요즘 워낙 수련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모양이야.” 묵향이 진팔을 수련시키는 데 자극받은 패력검제는 요즘들어 더욱 수력에 정진하도록 아들인 서량을 닦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코 앞에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가는 진팔의 모습을 본 상태에서 자신의 아들을 가만히 놔둘 패력검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자, 모두들 바쁜 와중에 이렇듯 시간을 내주어 고마워.” 오랜만에 청춘남녀들이 또다시 한자리에 모였으니 분위기 좋은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이곳 양양성에 도착한 후에는 각 문파별로 흩어져서 저마다 바쁘게 움직였기에 서로 할 말들이 많았다. 거기에다가 종남파와 공동파가 박살이 났고, 소림까지 봉문했으니 화제 또한 풍성했다. 술잔을 나누며 얘기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모두들 적당히 술을 마셨을 때, 옥대진은 자신의 가슴에 묻어 두고 있던 계획을 밝혔다. “이번에 마교가 남양을 기습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했지.” “뭣? 그게 정말인가?” “개방 쪽 사람에게 물어봐서 그 진위여부까지 확인했어. 기가 막히게도 그게 정말이지 뭔가.” “허어, 마교가 이번 전쟁에 꽤나 적극적으로 나서는군. 사파라는 것들은 쓰레기라고 들으며 컷는데, 요즘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 “황보 오빠 말이 맞아요. 오히려 마교 쪽에서 훨씬 더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있잖아요? 정파라고 콧대만 세우고 있지 정작 중요한 일에서는 모두 몸만 사리고 있는데 말이에요.” 방금 전에 입을 연 황보룡과 당소진의 의견이 지금 현재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만큼 양양성 공방전에서 세운 마교의 공이 컸으니까. 하지만 옥대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런 말 할 것은 아니지만, 마교는 상당히 실리적으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사실 그들은 큰 테두리는 보지 않고, 한곳에 전력을 집중하여 전공만 세우고 있다고 봐야 할 거야.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런 건 뻔히 알 수 있잖아. 저번 전투에서 정파는 양양성을 사수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어. 하지만 마교는 양양성에 얽매이지 않고 외부에서 싸웠지. 결론은 그놈들에게 좋게 흘러갔지만,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지. 만약 양양성이 무너졌으면 정파는 치명타를 입었겠지만······. 마교는 슬쩍 뒤로 후퇴하기만 하면 되었잖아. 그것만 생각해도 그놈들은 아주 교활하기 짝이 없어. 사실 그놈들에게 있어서 양양성 따위 함락되나 안되나, 대송제국이 무너지느냐 안 무너지느냐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고 봐야 해. 내말이 틀렸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모두들 고개만 주억거릴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것에 자신을 얻은 옥대진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밝혔다. “지금 마교가 남양을 치려는 것은 정면도발을 말하는 게 아니야. 소수의 고수만을 보내어 적의 군량을 불사르겠다는 거지. 남양을 10만에 달하는 대군이 철통같이 수비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잡졸들이잖아. 그들의 이목을 속이고 침투하는 것쯤은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지. 안 그래?” “허, 그럴 수도 있겠군.” “일단 불만 지르고 나면 모두들 불끄기에 정신이 없을 테니 그 혼란을 틈타 탈출하기도 쉬울 거야. 마교는 이렇게 아주 손쉬우면서도 전공은 크게 세울 수 있는 일거리만 찾고 있다는 말이지. 치사한 새끼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황보룡이 외쳤다.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마교도들은 전공에만 목숨을 걸고 있는 소인배들이 아닌가!” “바로 그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걸 우리들이 해치우면 좋지 않겠나?” “그건 무슨 말인가?” “우리들이 남양을 불사른다면 얼마나 큰 공을 세울 수 있겠나? 그리고 여기에 오면서 그 망할 교주 놈에게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말이야.” “크흐흐흣, 그거 좋은 생각이네. 마교 교주 놈든 남양을 불사른다고 계획만 실컷 세우고 있다가 헛물만 켜는 게 되는군.”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하지만 남양에 포진한 금군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데, 우리들만의 힘으로 그게 가능할까?” “허어, 그건 걱정하지 말게, 그 정도는 내가 어떻게 해보지. 자, 오늘은 오랜만에 만났으니 실컷 마셔보세.” 옥대진의 뒤에는 무림맹의 장로인 옥진호가 있지 않은가. 마교 교주는 정보를 정식으로 개방에 요청한 모양이지만, 옥대진은 나름대로 정보를 취득할 방법을 이미 생각해두고 있었다. 양양성에는 외부로 전서구를 보낼 수는 있지만, 전서구가 날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키운 비둘기가 단 한 마리도 없었으니까. 지금 개방도들이 우수한 품종의 비둘기들을 가져다 키우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 결실을 보려면 최소한 6개월은 족히 필요했다. 그런 상황이기에 지금 현재 양양성 일대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곳은 개방의 하남 분타였다. 옥대진은 바로 이 하남 분타에 직접 찾아가 남양일대의 금군 포진상황에 대한 정보를 알아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남 분타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도 몇 있었기에 우선 그들을 통해 알아보고, 그것이 안 된다면 자기 할아버지의 이름을 팔 작정이었다. 무림맹 옥진호 장로의 이름을 팔면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아직 남양에 침투할 세부적인 계획이 짜진 것도 아닌데 그들은 마치 그 일이 성공이라도 한 듯 기분좋게 술잔을 나눴다. 일의 성패를 떠나서 자기들끼리 뭉쳐서 어떤 일을 결행한다는 것만으로도 햇병아리들인 그들은 신이 났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만약 이 일만 성공시킬 수 있다면 자신들의 명성을 무림에 크게 떨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팽대성에게 수작을 부린 묵향은 진팔이 기다리고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얼큰하게 술을 퍼마신 탓인지, 아니면 애송이들을 상대로 함정을 파놓은 탓인지 그의 마음은 흥겹기 그지 없었다. 묵향의 말을 빌리면 남의 불행은 곧 자신의 행복이었으니까. 그것도 특히나 원한이 있는 상대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라, 웬일이래? 이렇게 늦게 나타나다니 말이야.” 진팔은 묵향이 늦게 나타나자 한 대라도 적게 맞게 되었기에 매우 기분이 좋았다. “오, 열심히 수련하면서 기다리고 있었구먼, 제법이야.” ‘당연하지, 한 대라도 적게 맞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하지만 그걸 표정에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진팔은 가능한 한 무표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평상시라면 이 상태에서 곧바로 진팔과 비무를 시작했을 묵향이었다. 하지만 그는 술기운때문인지 평상시에는 하지 않은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차 한 잔 줄 수 있겠느냐?” “예, 교주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소연이 차를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며 묵향은 옛날 생각이 났다. 그 작고 연약했던 아이가 지금은 우아한 여인으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그녀를 곁에서 계속 지켜본 것이 아니라 어쩌다 한 번 씩 만난 것이었기에 묵향이 느끼는 소연의 변화는 너무나도 놀라웠다. ‘이제 제대로 된 짝만 하나 구하면 모든게 완벽하겠구나. 정말 너 같은 딸을 둬서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이게 딸을 가진 부모들의 공통적인 심사일까? 어떤 녀석이 괜찮은 배필일까 이리저리 생각하던 묵향의 뇌리에 갑작스럽게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과거 여자의 모습이었을때, 아르티어스도 이런 생각을 했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피식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남자인데 말이야.’ 생각을 고치며 묵향은 소향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한테 듣자하니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가 있다면서?” 묵향은 소연의 배필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생각없이 꺼낸 말이었지만, 그걸 듣는 소연의 안색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확 일그러졌다. 매파노릇을 해오는 만통음제에게 그토록 정중히 거절했건만, 그게 먹히지 않자 본인이 직접 수작을 걸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답하는 소연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예, 교주님.” 하지만 묵향은 아직까지도 소연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한 채 미소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 행운아가 누군지 내게 알려줄 수는 없겠나?” “죄송합니다. 교주님.” 소연의 냉랭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묵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소연은 차를 묵향에게 가져다준 다음 벌레를 피하듯 서둘러 자리에서 떠나버렸던 것이다. 홀로 찻잔과 함께 남겨진 묵향은 허탈한 듯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원했구나. 만족할 줄 알았어야 했거늘······.” 한꺼번에 차를 쭉 들이킨 묵향은 옆에 세워놓은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손아귀 가득 몽둥이의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자 묵향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떠올랐다. 그녀의 무공을 완성시키는 것. 그러기 위해서 진팔은 희생양이었다. ‘뭐 죽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 그날 진팔은 평상시의 두 배는 더 두들겨 맞아야만 했다. 14장 덫에 걸린 옥대진 묵향이 장인걸을 슬며시 끌어들여 무림맹과 개방 그리고 7룡4봉을 상대로 장난질을 시작했을 때, 장인걸은 자신을 이용하여 장난질을 할 인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 또한 강호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잘난 인물이었기에. 사실 장인걸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바로 마교와 무림맹의 이간질이었다. 그것을 위해 장인걸은 천마혈검대 고수 5명을 선택하여 은밀히 불러 들였다. “본좌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한 가지 명령을 내릴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에 다섯 고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하명하시옵소서” “이것을 읽어 보아라.” 장인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두툼한 문서뭉치가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천천히 날아올라 부복하고 있는 고수들 앞에 놓였다. 그것은 편복대주가 그동안 조사하여 장인걸에게 올린 무림맹에 소속된 각 문파들의 정도였다. 장인걸은 그들 중에서 별로 강하지 못한 군소문파 몇 군데를 선택해서 살생부를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는 너희들이 공격해야 할 문파들에 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 문파들을 멸문시킬 필요는 없고 마교의 소행이라는 증거만 남겨두면 된다. 알겠느냐?” “마공을 사용해도 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물론이다. 가급적이면 정파쪽에 많이 알려진 초식들을 사용하도록 하거라. 자, 즉시 출발하라.” “존명.” 다섯 명의 고수들은 엄청난 속도로 경공을 발하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점차 멀어지는 것을 보며 장인걸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인걸은 마교가 본격적으로 개입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서로를 이간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크흐흐흣, 그래, 마교도의 사명은 마도천하를 이룩하는 것. 묵향 네놈은 본좌를 위해 정파놈들과 피터지도록 싸워야만 해. 그동안 본좌는 마도천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세인들의 머릿속 깊이 각인시켜 주도록 하마.” 장인걸은 자신이 중원의 패권을 쥐기만 하면 정파 무림을 완전히 재기 불능이 되도록 짓밟아놓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을 이꼴로 만들어놓은 묵향이라는 놈도 함께 말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더욱 기분이 좋아지는 장인걸이었다. 모두들 꿍꿍이속을 지니고 여러 가지 일들을 벌이다 보니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개방은 개방대로 단편적이기는 이윽고 마교 교주가 통보했던 2주일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수라도제에게 무림맹주의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태상문주님, 무림맹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전령이 도착했다고? 그런데······.” 수라도제는 총관의 손을 슬며시 흝어봤다. 그런데 총관의 손에는 그 어떤 서신도 들려 있지 않았다. 총관은 수라도제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태상문주께 직접 전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들라고 하게” “옛” 잠시 후 실내로 안내되어 온 전령은 수라도제에게 인사를 건넨 후, 품 속에서 봉서를 ㄲㅓ내어 바쳤다. 수라도제가 봉서에 찍힌 봉인을 보니 무림맹주의 인장이 찍혀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면 대단히 중요한 서신인 모양이다. 수라도제는 서신을 쭉 읽어본 후, 그때까지도 부복하고 있던 전령에게 말했다. “맹주님의 뜻을 받들겠다고 전하게.” “옛, 그렇게 전하겠나이다.” 전령이 나가고 난 후, 수라도제는 총관에게 지시했다. “자네는 빨리 가서 황룡무제와······.” 여기까지 말하던 수라도제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처음에는 패력검제와 황룡무에게 조력을 청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들과 교주의 관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봉서에는 분명히 마교 교주가 눈치채지 못하게 비밀리에 처리하라고 써져 있지 않았던가. “아니지, 본문의 고수들 중 실력있는 자를 10명만 추려 놓게, 경공술과 은잠술이 뛰어난 자들로 말이야.” “옛,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날 저녁, 수라도제는 10여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몰래 양양성을 떠났다. 혹여나 마교 교주가 눈치라도 챌세라 몰래 양양성의 높은 벽을 뛰어넘는 수고까지 아끼지 않으며 말이다. 수라도제 같은 엄청난 실력을 지닌 고수마저도 몰래 이동하는 판에, 묵향이 던진 미끼를 덮썩 문 철부지들은 태평스럽게도 모닥불까지 활활 피워놓고 야영을 즐기고 있었다. 벌써 금의 영토에 들어선 지 며칠이 흘렀건만, 그들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이렇듯 조심성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어둠 속에서 모닥불을 피워놓으면 그 불빛은 아주 먼 곳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그 불빛을 보며 왕정은 무심결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길!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설풍검 왕정은 공동파가 자랑하는 이름 있는 고수들 중 하나였다. 정파의 명숙들 중의 한 명인 그가 마치 삼류 문파의 살수라도 되는 듯 시커먼 야행복에 복면까지 뒤집어쓰고는 모닥불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신세가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강호 경험일 일천해서 그런지 너무나도 미숙해! 출발하기 전에 단단히 주의를 줬어야 했는데······.” 그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저 멀리에서 철없이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놈들 중에 옥대진이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림맹 장로인 옥진호의 손자이기도 했지만, 공동파의 제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배경이 아무리 화려하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왕정같은 고수가 봤을 때 그는 아직까지도 미숙한 철부지나 다름 없었다. 옥대진은 남양을 기습할 계획을 은밀하게 왕정에게 말했고, 그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료들에게는 큰소리를 쳤지만, 위험도가 높은 일인 만큼 조금 겁이 났던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일이 잘못되었을때는 목숨이 날아갈 것이 아닌가? 그런 청을 해온 인물이 자신의 동문사제이기도 했지만, 그의 할아버지인 옥진호의 얼굴을 봐서라도 왕정은 그 청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되어 왕정이 옥대진의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게 된 것이다. “참자, 참아. 몇 년 더 지나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왕정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은밀하게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어제도 이렇게 둘러보다가 한 놈 잡았지 않은가. 오늘 또 하나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은밀히 자리를 옮기던 왕정은 뭔가 섬뜩한 기척을 느꼈다. “헛!”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가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리자, 방금 전까지 그가 숨어있던 지점 근처에 서 있던 나무에 퍽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박혀 들어갔다. 그것만으로도 왕정으로서는 상대의 방향과 위치를 파악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화살이라면 모를까, 암기를 던질 수 있는 거리라면 뻔하니까. 왕정은 기쾌한 신법을 사용하여 미지의 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헛! 추귀보? 자, 잠깐!” 공동파가 자랑하는 보법이 추귀보다. 아마 상대가 그것을 알아본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놈의 요구대로 멈춰줄 왕정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왕정의 허리에서 뽑혀나온 그의 애검은 괴한의 목숨을 끊기 위해 파고 들어갔다. 상대방 또한 자신과 같이 시커먼 복색을 하고 있는 놈이었다. 떨리는 상대의 눈이 극도로 당황한 듯한 그의 심정을 나타내 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정을 봐줄 왕정이 아니었다. ‘제법 실력은 있는 모양인데, 네놈은 사람을 잘못 택한 거야’ 하지만 그 순간 위기를 느낀 상대방이 재빨리 보법을 전개하여 왕정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상대가 방금 전에 사용한 현란한 보법은 왕정도 잘 아는 것이었다. 오늘날 명문들 중의 하나인 황보세가가 있게 해준 보법이었으니까. “어엇! 천왕보? 어떻게······.” 멍청하게 서 있는 왕정을 향해 상대는 소리죽여 웃으며 복면을 벗었다. “크흐흐흣, 여기에 온 것이 노부 혼자만은 아닌 모양이군.”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왕정은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왕정이 절파검 장로님을 뵙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를······.” 그 말에 절파검 황보청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무례는 무슨 무례. 그래도 서로간에 큰 사고가 안 일어나서 다행이구먼, 첫 일격에 최선을 다했었다면, 자네 시체를 볼 뻔했어. 오늘 낮에 본 놈 생각하고 그저 그러려니 하고 대충 공격한 덕분에 목숨 건진 줄 알게.” 절파검 황보청이 이런 말을 할 만도 했다. 황보청은 왕정에 비하면 격이 다를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던 것이다. 황보청 같은 뛰어난 고수가 이런 곳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면 아마도 황보룡도 목숨이 아까워 위쪽에 살짝 도움을 부탁한 모양이다. 황보청은 다시금 복면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자네가 온 줄 알았다면 노부는 오지 않았을텐데······.” 그만큼 자신을 띄어주는 말이었기에 왕정은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제가 오히려 장로님과 동행하게 되어 든든할 따름입니다.” “그런가? 어찌 되었건 자네까지 여기 와 있는 것을 보면, 잘 하면 다른 녀석들도 다른 조력자를 불렀는지도 모르겠균, 다음부터 손 쓸때 좀 더 주의 해야겠어.”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황보청과 왕정은 그때부터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함께 행동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니까 말이다. 수라도제가 양양성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난 다음에야 묵향에게 개방에서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묵향은 그날 관지 그리고 마화와 함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의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수석장로님께서 선물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수석장로가 거느린 주력이 출발했다는 의미였다. 총단에서 날린 전서가 호북분타에 도착하고, 그것을 또다시 양양성으로 가져오는 데 걸린 시간을 고려한다면 수석장로가 거느린 주력은 넉넉잡아도 5일전에 출발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넉넉잡아도 3주 후면 도착하겠군.” 아무래도 야밤에 몰래몰래 이동하려면 시간이 두 배는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예, 그럴 것 같습니다.” 이때, 밖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개방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 말이 들려옴과 동시에 마화는 묵향을 슬쩍 바라봤다. 묵향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녀는 재빨리 넓은 탁자 위에 놓여져 있던 커다란 지도를 접어 구석에다가 치웠다. 마화가 어느 정도 실내를 정리한 후에야 묵향은 문밖에 대고 말했다. “들어오라 일러라” “옛”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땟국물이 흐르는 거지 하나가 들어왔다. 비공식적인 자리라서 매듭이 지어진 허리띠를 차지 않고 있었지만, 상대가 내뿜는 전체적인 기도로 판단했을 때 아마도 4결이나 5결 제자쯤이 아닐까 생각되는 거지였다. “부운걸개 장로님께서 이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거지가 내미는 것은 두툼한 봉서였다. 묵향은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서둘러 봉인을 뜯더내고 내용물을 정신없이 읽으며 거지에게 손짓을 했다. 그 손짓이 나가라는 뜻임을 눈치챘지만 거지는 잠시 시간을 끌며 교주가 그 봉서를 정신없이 읽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런 다음 그는 교주가 자신을 보고 있지도 않은데 정중히 인사를 건넨 후 밖으로 나갔다. 거지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묵향은 봉서의 내용물은 이제 더 이상 읽을 가치도 없다는 듯 집어던지고 오히려 봉인이 뜯겨나각 겉봉만을 세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관지 장로는 도저히 상관의 의중을 알 수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화급을 요하는 서신이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묵향은 겉봉만을 살피며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했다. “전혀! 미끼를 던졌는데 어떤 놈이 걸려들지 그게 궁금하단 말이야. 무림맹일지, 아니면 옥대진 그 새끼일지······. 생각 같아서는 그놈이 걸렸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지만···,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욕심은 버려야겠지, 허, 참. 그놈이 도중에 봉서를 가로채서 읽었다면 뭔가 표시가 있을 줄 알았는데, 재주가 좋은 건지···아니면 안 읽었는지 겉봉만 살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구먼.” “미끼라니요?” “먹음직한 걸 던졌거든, 참, 자네는 오늘 밤 쓸만한 놈 열댓 명 정도 데리고 몰래 성을 빠져 나가게.”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세히 알 거는 없고 은밀히 남양 인근에 갔다가 오면 돼.” “적정을 살피고 오라는 말씀이십니까?” “정찰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은밀히 갔다 오란 말이야. 이런 봉서까지 받았는데 거기 갔다 오지도 않으면 말이 안 되는 거거든. 그냥 갔다가 한 이틀 정도 숨어 있다가 돌아와. 그러면 돼. 그렇게 해야지 이쪽에서 계략을 썼다는 게 드러나지 않지.” 그 정도 말만으로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관지 장로는 고개를 깊숙이 조아리며 대답했다. “존명” 남양 인근에 도착한 수라도제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금군 병사들이 성난 벌 떼라도 된 듯 사방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고, 개중에는 제법 무공을 익힌 듯한 금국 병사들까지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이다. 수라도제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남양에는 장인걸이 그의 정예무사들과 함께 와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남양의 경비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엄중해져 있는 상태였다. “이런 젠장, 어떤 놈이 벌써 벌집을 쑤신 모양이군” “이대로 침투하시겠습니까? 태상문주님” “지금 들어가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아쉬운 일이지만 돌아갈 수밖에······.” 수라도제는 발길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떤 놈이 먼저 여기에 다녀갔을까? 금군이 군량을 야적해놓은 곳에서 불길이 치솟지 않는 것을 보면 먼저 온 놈은 실패한 모양이었다. ‘마교인가?’ 수라도제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교 교주를 옆에서 지켜본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 않은가. 그런 실력자가 일을 처리하면서 이렇게 어리숙하게 끝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수라도제는 너무나도 궁금했다. 이토록 큰 대사를 엉망진창으로 망쳐 놓은 놈들이 과연 어떤 놈들인지 말이다. 하지만 수라도제의 그 궁금증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잠깐!> 수라도제가 어기전성을 발하자 모두들 멈춰선 후 이곳저곳을 향해 날카로운 시건을 던졌지만 그 어떤 이상한 점도 감지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라도제의 귀에는 뚜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련히 들려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말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저쪽이다!> 수라도제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피투성이가 된 4명의 무사들이 금군들을 상대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온 몸이 피투성이라 언뜻 봐서는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을 보고 수라도제는 이들이 누군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황보세가, 사천당문, 공동파인가? 이들이 왜 이곳에?’ 하지만 수라도제로서는 한가하게 생각이나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황보세가의 무공을 사용하던 복면인이 허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기 때문이다. “이런 제기랄!” 욕설을 내뱉으며 수라도제가 도착했을 때, 꿈틀거리고 있는 복면인의 몸에서는 아직까지도 시뻘건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빨랐었더라면 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수라도제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멈춰랏!” 수라도제는 공력을 잔뜩 돋구어 노성을 터뜨렸지만 금군 장병들이 수라도제의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황보세가의 진산절기라고 할 수 있는 뇌진검법을 극성까지 익힌 자를 없애는 데 성공했지 않은가. 만약 상대가 조금 빨리 도착하여 이 둘이 연합했다면 매우 까다로웠을지 모르지만, 저놈 또한 짝잃은 기러기 신세. 지금은 제법 번듯한 신위를 과시하고 있지만 숫자로 밀어붙인다면 저놈 또한 시체로 만들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금군 장수는 그 여세를 몰아 곧바로 수라도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흥! 어리석은 것!” 순간, 수라도제의 등에서 거대한 도가 뽑혀 나왔다. 쿠쿵! 검과 도가 부딪쳤을 뿐인데 거대한 폭발음이 들여오며 사방으로 먼지가 뿜어져나왔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을 뿐인데, 호기롭게 달려들었던 금군 장수는 검이 부숴져 나간 채 뒤로 튕겨 나가서 땅바닥에 처박힌 후 잠시 부들부들 떨다가 축 늘어져 버렸다. 아마도 절명한 듯 했다. 이 한 번의 격돌만으로도 서로간의 실력이 어느 정도로 차이가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한 수를 보자마자 엄청난 마기를 뿜고 있는 금군 장수 한 명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아마도 그가 이 무리의 지휘관인 듯 병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처, 철수해랏!” 금군 장수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일격으로 상대가 사용한 도법을 못알아볼 리 없었다. 뇌전도법. 뇌전도법은 서문세가의 고수들이라면 누구나 다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천마혈검대의 고수를 한 방에 걸레로 만들정도의 인물은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상대가 수라도제임을 알면서도 이곳에 남아 있는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늦은 감이 있었다. 수라도제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도망쳤었어야만 했다. 황보세가의 고수를 죽인다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적들을 쫓아 수하들이 움직이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은 수라도제는 재빨리 자신의 도를 날렸다. 수라도제의 손을 떠난 애도는 엄청난 파공성을 흘리며 금군 장수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 고수는 그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방향을 틀었지만, 애도는 그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 뒤따르며 더욱 거리를 좁혔다. “크아악!” 금군 장수를 선두로 그럴 뒤쫓던 금군 병사들의 허리가 양단되며 피보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초목은 그들이 뿜어낸 핏물에 붉게 물들었다. 휘리리릭! 20여명의 금군 장졸들을 양단해 버린 자신의 애도가 돌아오자 수라도제는 무표정한 안색으로 그것을 잡아 들었다. 그런 다음 그는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려 탈진한 채 여기저기에 앉아 있는 세 명의 젊은이들을 노려봤다. 그제서야 젊은이들 중의 하나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인사를 건넸다.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라도제 대협.” 수라도제가 보니 얼굴에 긴 검상과 핏물에 뒤덮여있어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옥대진이 분명했다. 그를 알아본 수라도제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 젊은이의 앞날이 어찌될지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목숨을 살려줬다? 허··· 과연 이것이 살려준 것인지 노부로서는 알 수가 없구나.” 잠시 탄식한 수라도제는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여 양양성으로 돌아가자.” “옛” 수라도제의 수하들에게 들러쌓여 양양성으로 향하는 옥대진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처음에는 금군으로부터 살아남기에 바빠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수라도제의 탄식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절망감까지 느끼지 않고 있었다. 무림맹 장로인 할아버지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자 남양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모가 서서히 파악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을 제일 몬저 파악한 쪽은 정파 무림의 정보통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방이었다. “무림맹의 허락을 얻어 살아남은 자들을 면담해 본 결과 그들의 단독 범행이라고 합니다.” “단독범행이라고요? 그럴리가···, 절파검 같은 절정고수가 죽었소이다. 이건 각 문파에서 후기지수들을 키워주기 위해······.” “아아, 그건 아닌 것 같소, 노부가 관련된 각 파에 사람을 보내어 직접 확인해봤소. 이건 문파 차원에서 벌인 일이 아니고, 그 어린 것들이 만약을 대비하여 몇몇 고수들에게 호신을 부탁한 정도인 모양이오.” “허어, 그렇다면 일이 아주 고약하게 꼬이겠소이다. 무림맹은 물론이고 마교 교주마저도 본방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텐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마교 교주야 그렇다고 치고, 왜 무림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말이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오? 이번 일을 입안한 것이 본방이 아니오? 그리고 그 어린 것들에게 정보가 새나간 곳도 본방이고 말이오.” “허,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래, 그 놈들에게 정보를 흘린 멍청한 놈들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하셨소?” “아직까지도 조사중이외다. 혐의가 입증된 놈들을 다 잡아들여서 심문하고 있소이다. 하지만 옥대진 그 영악한 놈이 옥진호 장로의 이름을 팔면서 은근히 협박을 했다고 하니······. 그녀석들로서도 협조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런 일이 있다면 분타주에게 보고를 했어야지 슬쩍 정보를 넘기다니 그게 말이 되오? 그런 놈들은 몽땅 다 잡아들여서 박살을 내놔야 하오.” “어쩔수 없지 않소? 다 힘없는 자의 서러움인 것을······. 그건 그렇고 모두들 이 사태를 타개해 나갈 좋은 방법이나 생각해보시구려. 언제까지 이미 지나간 일을 잡고 씨름할 수는 없는 일이잖소?” 이때, 지금까지 아무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취선개 장로가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법은 있소.” “취선개 장로는 뭔가 고견이 있으시오?” “그걸 모두 다 옥대진의 단독범행으로 몰아붙이는 거요. 그러면서 무림맹 장로인 옥진호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소이다.” “옥진호 장로는 맹 내에서 우호세력을 많이 거느린 거물이오. 그렇게 손쉽게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외다.” “물론 그렇소. 하지만 그의 뒤를 떠받치고 있는 공동파가 무너져버린 지금, 그것도 많이 약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오.” “취선개 장로의 말이 맞소이다. 사실 옥진호 장로는 맹 내에서 너무 큰 세력을 지니고 있소. 맹주 쪽에서 봤을 때도 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 틀림없소이다. 넌지시 빌미만 안겨주면 그쪽이 알아서 처리해 주지 않겠소?”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양양성 내에 위치한 넓은 객실에서는 옥대진에 대한 심문이 진행되고 있었다. 취조관과 옥대진이 나눈 말은 옆에 앉아있는 서기가 기록하여 증거로 남기고 있었다. 나중에 그 모든 자료는 무림맹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옥대진에 대한 심문은 말이 심문이지, 맹에서 파견되어 온 취조관에게 오히려 옥대진이 당당하게 외치고 있었고, 그런 그를 향해 취조관이 오히려 쩔쩔매는 기괴한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옥대진이 그 취조관을 심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저는 황실과 무림을 위해서 남양을 공격했을 뿐입니다. 운이 없어 실패했지만, 남양을 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취조관은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어허, 자네는 뭔가 오해하고 있구먼, 노부는 결코 자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네, 다만 그 결과가 안 좋았다고 하는 거야.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여러 고수들이 희생되었다네. 그리고 그 중에는 자네의 약혼녀인 능비화 소저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네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순간 옥대진의 뇌리에는 금군 고수들의 공격을 받고 피를 뿜으며 죽어가던 능비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그는 그녀가 지닌 화산파라는 배경과 전 중원을 통틀어 4명뿐인 4봉이라는 희소성을 사랑했을뿐이니까. 이용가치가 거의 없어져버린 그녀를 향한 옥대진의 사랑 또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죽음은 오히려 앓던 이를 뽑은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옥대진은 얼굴 가득 슬픈 표정을 지으며 발악하듯 외쳤다. “그만하십시오! 그녀의 죽음을 이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제 심정은 편했는 줄 아십니까? 두고 보십시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금나라 놈들 씨를 말려버릴 겁니다.” 취조관은 괜히 약혼자의 말을 꺼냈다고 후회하며 한숨을 푹 내 쉰 후 말했다. “휴···, 자네는 아직까지도 자네 처지를 잘 모르는 모양이군. 맹에서 정예를 투입하여 남양을 치기 직전에 자네들이 들어가서 난장판을 만들었다 그 말일세. 그 덕분에 지금 남양의 방비는 철옹성처름 튼튼하게 되었지. 잘못하면 이적행위를 한 자로 처벌될 수도 있음을 왜 모르는가?” 그 말에 옥대진은 핏대를 올리며 외쳤다. “이적행위라니요!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왜 금에 이로운 행동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남양의 수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알고 그곳을 공격한 것이 어찌 죄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오랑캐가 국토를 유린하는 상황에서 선배님이시라면 그런 정보를 얻었는데 가만히 계셨겠습니까?” 얘기가 계속 겉돌고 있었다. 옥대진은 결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그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었다. 다만 그 시기가 안 좋았을 뿐이었고, 또 실패했다는 것이 문제였으니까 말이다. 만약 이 일이 성공했다면 그는 영웅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한동안 옥대진을 상대로 입씨름을 하던 취조관은 떨떠름한 얼굴로 옥대진의 방을 나섰다. 사실 죄를 고백받는 것쯤이야 오랜 세월 이 직책을 맡아왔던 그에게 있어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주리를 틀어대면 열에 아홉은 없는 죄도 시인했다. 물론 끝까지 죄를 시인하지 않는 자도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어버렸다. 죽어버린 자를 비호하는 자가 있을리 없었으므로 대충 죄를 뒤집어씌워 결과를 발표하면 모든 게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 직책에 오랜 세월 종사한 그인 만큼 이렇게 큰 소리를 쳐 대는 죄인을 상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배알이 뒤틀리는 것을 억지로 참자니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다그치자니 이번 사건에 연루된 자들의 배경이 마음에 걸렸다. 까딱 잘못하면 되려 자신의 목이 날아갈 우려가 있는 것이다. 취조관은 밖으로 나온 후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러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이래서 내가 여기에 오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 했거늘······. 개새끼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있어야 조사를 하든지 심문을 하든지 할 거 아냐!” 그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객잔을 경비하고 있는 책임자가 눈에 띄자 서둘러 그곳으로 다가갔다. “자네 잘 만났군. 안 그래도 찾아가려던 참이었는데” “무슨 하명하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모두들 명문의 자제들인 만큼, 감시에도 만전을 기해야겠지만 결코 그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주게” “물론입니다. 이미 수하들에게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해 뒀습니다.” “잘 했군. 빌어먹을! 저런 세도가의 자제들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원······.” 경비책임자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마 조만간에 위에서 가부간의 결정을 내리시겠지. 사실 맹에서도 그 명문들과 척을 질 결심이 아닌 바에야 어찌 징죄를 할 수 있겠나? 그냥 대충 조사하는 척하다가 모두 방면될 게 분명하지 않겠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만큼 저들의 대접에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야. 저놈들이 나중에 문파에 돌아가서 우리들의 험담이라도 늘어놓으면 자네는 물론이고 나까지도 박살이 나는 수가 있으니까.”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경비책임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내는 길게 자란 턱수염을 부드러운 손짓으로 쓰다듬으며 맹주에게 말을 건넸다. “금으로부터 밀서가 도착했습니다.” 도사들이나 입는 도복을 입고 있는 이 선풍도골형의 사내를 향해 맹주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대답했다. “밀서라······. 무슨 일인데 그들이 노부에게 밀서를 보냈다는 말인고?” “예, 혹시 무슨 사단을 부려놨을 가능성도 있기에 밀서를 개봉한 후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아무런 문제점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그 내용이······.” 독이라든지 기타 이물질 등을 발라서 밀서를 보냈을 수도 있기에 그렇게 조사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왜 이런 말을 맹주에게 한 것일까? 그 이유는 그가 바로 맹주 직속에 있는 감찰부의 수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맹주의 사질이었다. 사실 맹 내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그런 중요한 직책을 다른 인물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는고?” “그들에 대한 적대 행동을 즉각 중지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에 그들이 포로로 잡은 무림인들을 처형하겠답니다.” 그러면서 감찰부주는 두툼한 서신을 맹주에게 전했다. 금 제국이 포로로 잡은 인질들을 출신 문파별로 정리해놓은 목록이 포함되어 있기 떄문이었다. 협박문을 냉철한 표정으로 끝까지 다 읽은 맹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 내용이 발표된다면 무림맹은 크나큰 혼란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기에. “그래, 사질의 생각은 어떤가?” “예, 빈도의 의견을 물으신다면···, 이것을 그냥 밝히는 편이 실보다는 득이 많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대외에 공포하면서 대금 제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간다면 오히려 본맹으로서는 더욱 이익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맹주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숨기지 말고 그냥 드러내자······.” “예, 사실 맹에서 그들이 보내온 서신을 비밀에 붙인다고 해도 한순간을 넘기기 위한 미봉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본 맹에 서신을 보낸 이상, 여기 관련되어 있는 많은 문파들에게 개별적으로 서신을 보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각 문파들을 뒤에서 협박한다면 더욱 큰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맹주는 눈을 번쩍 뜨면서 말했다. “사질의 말이 옳은 듯 하구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파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진대, 그에 대한 대책은 생각해둔 것이 있는가?” “이번 인질사건에 관련이 있는 문파와 연관이 있는 맹의 높은 직위를 지닌 자들을 모두 추려낸 후 한직으로 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됩니다. 혹시 그들이 금에 굴복하여 협조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으로 한다면 반발이 클텐데······.” “이번 밀서를 공개하면서 금에 대한 공분을 유도하면서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려 있을 때 이 일을 비밀리에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호, 그렇겠구먼” 이때,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후, 경비책임자가 들어왔다. 그는 예를 갖춘 후 맹주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수개 장로께서 독대를 청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해야 하올지 하명해 주십시오.” “공수개 장로가? 그가 무슨 일로 독대를 청한다는 말인가? 혹시 요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혈겁 때문인가?” 맹주의 추측도 일리가 있었다. 요즘들어 여기저기에서 마교도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사건이 줄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찰 부주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일 때문이라면 굳이 맹주님께 독대를 청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번에 양양성에서 일어난 사선에 대해 개방에 그 죄가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온 것이겠지요. 사실 개방 젋은 것들에게 정보가 새나가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테니 말입니다.” “그 일로 공수개 장로가 찾아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가 만약 그런 일로 찾아온 것이 맞다면 노부는 실망할 걸세.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숙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감찰부주는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조언했다. “맹주님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십니다. 하지만 상대에 따라 적당히 넘어가시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개방과 사이가 틀어져 봐야 본맹만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감찰부의 정보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점을 유념해 주십시요.” 씁쓸한 표정으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맹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질의 말이 옳은 듯하구먼”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닐세, 그럴 필요 없네, 그냥 앉아 있게” 그렇게 말한 후 맹주는 밖에 대고 외쳤다. “공수개 장로에게 들어오라 이르게” “옛” 곧이어 공수개 장로가 들어왔다. 그는 맹주가 혼자가 아니고, 그 옆에 감찰부주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흠칫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표정을 바로잡으며 맹주에게 인사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자, 자리에 앉으시게. 노부와 독대를 요청했는데, 무슨 일이오? 공수개 장로.” 맹주의 태도는 독대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감찰부주가 있는 이 자리에서 밝히라는 말이었기에 공수개 장로는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곧이어 생각을 바꿨다. 사실 조금 지나면 맹주는 감찰부주나 몇몇 측근들과 대화를 나눌 것이 분명한데 독대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음을 정한 공수개 장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남양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대해 맹주님께 아뢸 말씀이 있어서 감히 독대를 청했습니다.” “그래, 무슨 말씀이시오?” “이번 사건을 맹주님께서는 어떻게 처리하실 요량이신지 여쭤봐도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맹주는 슬쩍 감찰부주를 바라본 후 난감한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허~그것, 참. 난처한 질문이구려.” 물론 맹주가 그에 대한 답을 자신에게 해줄 리가 없음을 공수개 장로도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개방의 잘못은 아예 거론하지도 않고 옥대진을 물고 늘어졌다. “이번 사건의 생존자들 중에서 옥진호 장로의 손자인 옥대진이 끼어있지 않습니까?” “보고서는 받아봤소.” “예, 본방에서는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인 옥대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무림맹의 사활이 걸려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무림맹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말에 맹주는 의아한 듯 질문을 던졌다. “그건 무슨 말이오?” “본방에서는 모든 생존자들과 면담을 했고, 또 이번 사건에 가담한 자들이 소속된 문파들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모두들 한결같이 옥대진의 꼬드김에 넘어가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맹주님께서는 옥진호 장로의 낯을 봐서 그를 용서해 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며 공수개 장로는 맹주의 표정을 힐끔 훔쳐봤다. 사실 맹주로서야 옥진호가 사라져 주는 것을 바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맹주가 옥대진을 봐줄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설혹 맹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은 실례였다. “노부가 인정에 치우쳐서 그를 용서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하지만 노부는 이번 사건을 통해 개방의 정보망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공수개 장로는 펄쩍 뛰듯 놀라며 말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문제가 있다니요.” “젊은 것들만 가서 일을 망쳐놨다면 그들이 치죄하는 것이 옳겠지. 하지만 노부가 받은 보고로는 절파검 같은 절정 고수도 거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가 죽음을 당했을 정도라면 저쪽도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나? 오히려 그 아이들 덕분에 더욱 큰 화를 모면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맹주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맹주가 남양을 치라고 명령한 상대는 수라도제였다. 만약 이번에 금군의 촉각에 걸려든 자가 수라도제였다면, 무림맹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타격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수개 장로는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항변했다. “그건 맹주님께서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물론 절파검이 뛰어난 고수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맹주님께서 남양을 치라고 명령한 사람은 절파검이 아닌 수라도제 대협이 아닙니까? 또, 절파검이 처음부터 침투를 목적으로 그곳에 갔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침투가 아닌 황보세가의 어린 것을 보호하기 위해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 망할 철부지 녀석들이 금군 병사들에게 들키자 어쩔수 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방에서는 이 계획을 맹주님께 말씀드리며 신신당부 드렸었습니다. 정면공격을 해서는 가능성이 없다고 말입니다. 우수한 고수가 인기척을 숨기고 몰래 침투하여 불만 지른 후 재빨리 후퇴해야 한다. 이것이 이번 작전의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제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사실 몰래 침투해도 성공했을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그렇게 시도해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맹주는 공수개 장로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과연! 공수개 장로의 말이 옳은 듯하구려” “이번 사건을 젊은 것들의 객기 정도로 너그럽게 넘어가시겠다는 맹주님의 넓은 마음은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신다면 마교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공수개 장로가 마교를 들고나오자 맹주는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마교가 말이오?” “예, 남양을 칠 계획은 원래 마교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교주가 본방에 정보요청을 했는데, 본방에서 철저하게 조사를 해본 결과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되어져서 그것을 우리 쪽에서 가로채자고 맹주께 청을 드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성공했다면 이쪽에서도 마교 쪽에 대고 할 말은 있었을 겁니다. 그쪽에서 하는 것보다 이쪽에서 처리하는 것이 성공확률이 높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둘러대면서 마교쪽 정보망이라든지 그쪽이 취약한 부분을 물고 늘어지면 어느 정도 그들을 무마시킬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일이 실패한 이상 마교에서 수긍할 만큼 뒤처리를 해줘야만 합니다.” 공수개 장로는 맹주와 감찰부주의 눈치를 힐끗 살펴본 후 말을 이었다. “양양성에서 온 정보에 따르면 교주는 이번 일이 실패하자마자 수라도제 대협의 숙소에 까지 쳐들어가서 난동을 부린 모양이더군요.” 교주는 그날 수라도제의 숙소는 물론이고 양양성에 있는 개방도들까지 묵사발을 만들어놨다. 하지만 공수개 장로는 개방에서 있었던 일을 쏙 빼놓고 수라도제의 일만을 말하는 것이다. 맹주는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다는 듯 혀를 끌끌 찬 후 감찰부주에게 말했다. “쯧쯧, 그런 일이 있었나?” 그 말은 감찰부주도 처음 듣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도 그런 말은 처음 듣는지라······.” “아아, 모두들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하기야 수라도제 대협처럼 속이 깊으신 분이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맹주님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는 연락을 했을 리 없겠지요. 하여튼 부상자가 30여명에 이른다는 것을 보면 교주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은 속이 깊다고 했지만 수라도제의 성질이 개 같다는 사실은 이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죽하면 신경질난다고 소림사 정문을 박살냈겠는가. 그런 인물이 그걸 쉬쉬하며 감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마도 마교 교주에게 줘 터진 것이 쪽팔려서 입을 다물었겠지.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서로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것 큰일이구려”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 마교와의 연합이 파기될 가능성까지 있다고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맹주도 예측하지 못했는지 불신 어린 어조로 물었다. “흑살마왕이 금에 있는데 설마 그럴리가······?” “아닙니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들이 정파와 손을 잡은 이유는 흑살마왕을 잡는 데 그 편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연합작전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지금까지 마교에서 거둔 전과는 엄청난 것이 아닙니까? 3만에 달하는 정파의 고수들에 비해 겨우 1만 남짓한 마교도들이 세운 전과가 더 크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거기에다가 아직까지도 마교는 주력을 투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맹주는 감찰부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감찰부주의 안색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무림맹 내 정보조직의 수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그쪽으로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문득 감찰부주의 뇌리를 스치는 문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마교에서 공식적으로 보내온 항의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는데 공수개 장로의 말을 들으니 마교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맹주님, 공수개 장로님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감찰부주까지 찬성해주자 공수개 장로는 더욱 힘을 얻어 맹주에게 말했다. “맹주님께서는 이번 사건의 사후처리를 마교 쪽에서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잊지 않으셔야만 합니다. 인정에 치우쳐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신다면 마교와의 동맹이 파기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동맹을 파기한다고 했는가? 허어, 그렇다면 요 근래 몇몇 문파에서 일어난 마교도 소행으로 보이는 혈겁도 그들이 본 맹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한 짓거리라는 말인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맹주님. 교주는 지금 양양성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흑풍대도 현재까지는 대단히 협조적이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천마혈검대의 고수들이 저질러놓은 소행이 아닐까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공수개 장로의 말에 감찰부주도 찬성했다. “저희 쪽도 그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사실 마교 쪽의 첫 번째 목표는 흑살마왕입니다. 흑살마왕이 제거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교가 본 맹과 전면전을 벌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건 아마도 흑살마왕이 꾸민 짓거리임에 분명하다고 판단됩니다.” 맹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사실 자신도 그것이 마교쪽의 소행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 외에도 공수개 장로는 이런저런 말을 나눈 후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공수개 장로가 물로가고 난 후 맹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사질, 과연 이런 일로 마교가 동맹을 파기할까?” “개방의 추측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마교에서 항의문이 도착했었는데,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노부도 그걸 읽어봤네. 자신들이 계획한 일을 무림맹이 가로채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것을 점잖은 어조로 질책하고, 더불어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의 조속한 처리와 그 처리과정을 자신들에게 상세하게 보고해 달라고 써져 있었지 않는가? 사실 그쪽에서 충분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는데······.”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공수개 장로의 지적을 받은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뭐가 말인가?” “예, 공수개 장로는 마교 교주가 그 사실을 알자마자 수라도제대협을 찾아가서 행패를 부렸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성질이 급한 인물이 공식적인 통로를 밟아 항의서를 보내다니요. 너무나도 이성적인 행동이 아닙니까? 양양성에서 직접 항의문을 작성하여 수라도제를 통해 무림맹에 보내도 되었을텐데, 왜 굳이 마교 총타로 연락을 보내고 또 그곳에서 무림맹으로 공식서한을 보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까지 치밀한 처리를 한 것을 보면 교주는 만약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동맹파기도 불사하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허어···, 하지만 그는 흑살마왕을 없애기 위해 본맹의 힘이 필요할 텐데······.”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맹주를 향해 감찰부주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조목조목 말했다. “먼저 지금껏 금과 전쟁을 벌이면서 마교에서 투입한 흑풍대의 전과는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사실, 마교의 정예들을 몽땅 투입한다면 본맹이 필요없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한 일입니다. 거기에다가 이번에 남양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마교는 본맹이 오히려 도움이 되기는커녕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훼방 놓는 훼방꾼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믿지 못할 동료는 없는 편이 더욱 편하다는 사실을 맹주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허어, 그럴 수도 있겠구먼.” “지금까지 맹주님께서는 옥진호 장로의 처결을 미뤄오셨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결단을 ㄴ리셔야 할 듯 합니다.” 여태껏 맹주는 옥진호 장로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맹주파로 꼽히는 몇몇 장로들이 그의 제거를 비밀리에 거론해온 적이 있었지만. 맹주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무당산에서 심신을 청결하게 닦아오던 그에게 있어서 권력욕에 물든 그러한 행동들이 다 헛되게만 느껴졌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거론된 옥진호 장로의 제거안은 조금 다른 면모를 띄고 있었다. 옥대진을 처리하려면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옥진호 장로도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무량수불······, 이런 식으로 그를 보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는데······. 이것도 다 원시천존님의 뜻인 게지.” 장로회의 소집을 명받은 옥진호 장로는 여섯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회의장으로 향하는 옥진호 장로의 두 눈은 언제나 그러하듯 주의깊게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경비무사들의 수와 질에서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주위에 낯선 인물들이 눈에 띄지도 않았다. 안면이 있는 문사복 차림의 사내 몇이 두툼한 문서뭉치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옥진호 장로는 허리에 찬 검을 끌러 호위무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회의장 안에까지 호의무사를 거느리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게” “옛” 옥진호 장로는 여러 장로들에게 인사하며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모든 장로들이 다 모인 후, 맹주는 근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러 장로님을을 이곳에 부른 이유는 남양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 때문이외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맹주는 옥진호 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옥진호 장로도 그 사건에 대한 보고서는 받아봤을 줄로 알고 있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자네의 손자가 연루되어 있는 만큼 자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군.” 이미 맹주가 그 말을 할 줄 예상이라도 한 듯 옥진호 장로는 열기 띈 어조로 옥대진을 변호했다. “남양에서의 사건에 대한 보고는 저도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아이들이 맹의 일을 망쳐 놓기는 했지만, 그들이 그 일을 추진한 것이 결코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을 아님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 황실과 무림을 위해 한 일이니 이번 한 번만 관용을 베푸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맹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아이들은 중대한 범죄를 행했네.” 옥진호 장로는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범죄라니요? 무슨 범죄 말씀이십니까?” “자네의 이름을 이용하여 개방에 압력을 가해 정보를 빼냈네. 새파란 젊은 것들이 무림맹의 이름을 이용하여 못된 짓을 했다는 말일세.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말에 옥진호 장로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물론 그것이 큰 죄임으르 알기는 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줄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을 끄집어낸 것을 보면 맹주는 이 일을 결코 대충 넘어가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손자교육을 잘못시킨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것을 아니 다행이로구먼” 빈정거리는 맹주의 말에 옥진호 장로의 안색이 노기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지만 감히 발작하지는 못했다. 이곳은 회의장인 데다가, 맹주는 여기 모은 그 누구보다도 막강한 권력과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대들어봐야 자신만 손해인 것이다. “감찰부에서는 이것이 각 문파의 후배밀어주기가 아닌가 하고 조심스런 의견을 내놓았다네. 각 문파의 고수 여럿이 그 아이들을 호위해 준 것이 그 증거라고 말일세.” “제가 일기로는 그 아이들끼리” 옥진호 장로는 재빨리 맹주의 말을 반박했다. 하지만 맹주는 냉정한 어조로 옥진호 장로의 말을 끊었다. “노부의 말을 다 들어보고 자네의 의견을 말해주게” “예” “그러니까 감찰부에서는 자네의 손자가 자네의 이름과 맹의 권위를 사칭하여 이 일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자네가 직접 주도하여 손자를 움직여 이 일을 추진한 것은 아닌가 보고 있네.” 그 말에 옥진호 장로는 경악해서 외쳤다. 그것은 손자는 물론이고 자신까지 파멸시키고자 하는 소리가 아닌가. “그런 말도 안되는!” “노부로서는 그걸 말도 안되는 소리고 치부하기 어려웠다네. 그 아이들이 움직인 것은 맹에서 남양을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뒷조사를 한창 하던 시점이었네. 그 아이들이 맹에서 비밀리에 추진하던 그 일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사실 손자녀석이 어떻게 꾸민 것인지 옥진호 장로는 알지 못했다. 그 사건에 대해 손자녀석으로부터 그 어떤 언질도 받은 적이 없었고, 또 그 사건 이후로도 손자를 만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 “양양성으로 파견한 취조관이 보내온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은 그 정보를 마교 교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말했다고 하네. 매우 그럴 듯하지. 하지만 남양을 치는 비밀작전을 전개함에 있어서 새파란 젊은 것에게 왜 그런 말을 교주가 했겠나? 또 그 말을 들었다는 팽대성이 마교 교주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팽대성에게 그런 비밀정보를 말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 않는가?” 맹주의 질책에 옥진호 장로는 마지못해 대꾸했다. 스스로도 자신의 대꾸가 가능성이 희박함을 알면서도. “교주가 일부러 흘렀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무림 맹주는 언성을 높이며 질책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수라도제 쪽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 봤네. 마교 교주는 개방으로부터 남양에 대한 정보를 받자마자 무공이 뛰어난 수하들을 골라 은밀하게 남양으로 보냈네. 만약 자네 말대로 남양을 칠 것을 미리 흘린 것이라면, 그는 처음부터 남양을 칠 생각이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그 시점에서 조사한 개방의 정보로는 남양을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었다고 하네. 마교로서는 성공만 한다면 엄청난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을 게야.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서 교주가 얻는게 뭔가?” 설마 교주의 목표가 처음부터 옥대진이었을거라고는 예상도 할 수 없었기에 옥진호 장로는 꿀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그런 만큼 그 정보를 마교 교주로부터 들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봐야 할 것일세. 그렇다면 그 아이들에게 마교가 남양을 치려한다는 정보를 누가 전해줬겠는가? 맹에서도 1급 기밀로 처리되고 있었던 그 정보를 말일세. 그 작전을 진두지휘할 수라도제조차도 그 명령을 받기 직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네. 안 그런가?” “맹주께서는 저를 모함하고 계신 겁니다. 저는 결단코 그런 짓은 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조사해보면 알게 될 일” 퉁명스런 어조로 옥진호 장로에게 대답한 맹주는 여러 장로들을 향해서 말했다. “장로들의 생각은 어떻소? 그대들도 옥진호 장로처럼 노부의 의심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노부도 처음 감찰부에서 보고를 받았을 때, 보고서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네. 그만큼 그 보고서가 노부에게 안겨준 충격은 컸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 그렇기에 노부는 감찰부의 청을 받아들여 옥진호 장로에 대한 치밀한 조사를 명령하고자 하네. 물론 그의 신분이 현직 장로인 만큼, 노부 독단으로 그를 구속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기에 그대들을 소집한 것이니 선택은 그대들이 하게.” 맹주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매우 그럴 듯 해서 옥진호를 지지하는 장로들로서도 뭐라고 나서기가 곤란했다. 더군다나 맹주는 옥진호 장로가 결백하기를 원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모두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쑤군거리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공수개 장로가 선뜻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공수개 장로는 옥진호 장로가 잡혀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맹주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과연 감찰부에서 옥진호 장로를 의심하실 만하군요. 저는 맹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공수개 장로가 앞장서서 바람을 잡자 다른 장로들도 그 의견을 따라올 수 밖에 없었다. 조사한 후 잘못이 밝혀지면 치죄하자는데 뭐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인가. “저희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옥진호 장로는 맹주의 눈치를 살피며 암암리에 공력을 돋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탈출할 결심이었던 것이다. 사실 맹주의 말처럼 일이 공정하게 이뤄질 것이라면 그가 구태여 탈출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무림맹의 높은 직위에 오래 있으면서 모든 일이 그렇게 공평하게만 처리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상대를 정해 일을 시작했으면 그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철저히 짓밟는 것이 정석이었다. 옥진호 장로도 지금껏 몇 번인가 해 왔듯,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옥진호 장로를 맹주는 가소롭다는 듯 슬며시 노려보고 있었다. 화경급에 이른 그가 옥진호 장로가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서로의 눈과 눈니 마주치는 순간, 옥진호 장로는 공력을 풀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물론 저에게 죄가 있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맹세코 저는 손자에게 그런 일을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맹주는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감찰부에서 공정하게 조사해 본 후 결론을 내릴 것이니 그대에게 죄가 없다면 염려하지 말게.” 이렇게 해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옥진호 장로는 투옥되었다. 그리고 바고 그날 연금중인 옥대진 등을 무림맹으로 이송하라는 지시가 양양성으로 날아갔다. 옥대진이 무림맹에 도착했을 때, 그에 대한 대접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옥대진 앞에서 쩔쩔매던 취조관은 서릿발을 휘날리며 옥대진을 추궁하고 있었다. 사람이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야, 이 새끼야. 빨리 안 불어? 네놈은 옥진호 장로의 지시를 받고 남양에 침투했지?” 모진 고문을 당한 옥대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있었기에. “크흐윽. 네, 네놈이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두고 보아라. 할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하지만 취조관은 더 이상 옥대진의 협박을 들을 마음이 없었는지 콧방귀까지 뀌더니 싸늘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흥! 아직까지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군. 내가 너를 이렇게 족칠 수 있다는 것은 네놈의 할아버지가 끝장났기 때문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냐?” 하지만 옥대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완강하게 외쳤다.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할아버지를 뵙게 해다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주마.” “이제 그만 버티고 순순히 시인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지 않겠나? 자, 말해봐. 네놈은 옥영진 장로의 명을 받고 남양에 침투했지?”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한 일이다.” 취조관은 이를 갈며 외쳤다. “독한 새끼! 하지만 네놈이 개겨봤자야. 이봐.” 취조관의 부름에 옆에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좀 더 조져. 내일까지 불지 않으면 네놈도 저 꼴이 될 줄 알아.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후, 그 사내는 몇 가지 새로운 고문기구들을 더 꺼내더니 옥대진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길고 긴 옥대진의 비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취조관은 점점 더 처참한 몰골로 변해가는 옥대진을 냉소 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옥대진에 대한 대접이 이렇게 바뀐 것은 위쪽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하달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상관은 옥대진의 행동이 옥진호 장로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지시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취조관이 너무나도 원하고 있었던 명령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권력을 등에 업고 자신에게 큰소리를 치던 놈이 역으로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니 이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고문하는 재미가 쏠쏠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취조관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새파란 애송이에게 당했었던 갖은 수모를 떠올리며 더욱 그를 닦달하는 중이었다. 며칠 후, 전 무림맹주 옥청학의 아들이자, 무림맹 장로였던 옥진호 장로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공정성을 기한다는 명목하에 진행된 공개재판이었기에 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재판을 참관할 수 있었다. 물론 죄인의 신분이 무림맹의 현직 장로인 만큼 명망 있는 고수들에게만 참관할 자격이 주어졌다. 피고석에 앉아 있는 옥진호 장로는 현직 장로인 점을 고려하여 산공분이 든 차 만을 마셨을 뿐, 그 어떤 제제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재판석에 앉아 있는 그의 신색은 며칠 전 그가 수감되기 전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재판이 진행되자 옥진호 장로의 죄상에 대한 가지각색의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어느 정도 심증은 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정확히 그가 범인이라느느 증거는 될 수 없었다. 만약 이런 식으로 재판이 계속 진행된단면 그는 무혐의로 풀려날 가능성이 매우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감찰부에서 꺼낸 증거품은 장내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옥대진의 친필 자술서 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옥진호 장로에게서 언제, 어떤 식으로 지시를 받았는지 모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자술서는 옥대진이 고문에 못이겨 기록한 것이었다. 자술서의 뼈대는 감찰부에서 직접 만들었고, 그것을 옥대진이 불러주는 대로 직접 쓴 것이었기에 모든 내용은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자술서가 튀어나오자 지금까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옥진호 장로는 노성을 터뜨렸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짓거리! 네놈들이 손자를 고문해서 그것을 쓰게 한 모양인데···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이런 못된 놈들!” “그런 망발로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가문의 영광도 중요하지만, 구태여 이런 추태까지 부릴 필요가 있었습니까?” “추태를 부리기는 누가 부렸다는 것이냐? 그따위로 증거를 날조하다니······.” 하지만 이때 지금까지 조용히 재판을 참관하고 있던 하북팽가의 가주가 드디어 분노를 터뜨렸다.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옥진호 장로가 범인임에 틀림없었다. 모든 증거가 명명백백한데도 아직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뻔뻔스럽게 오리발을 내밀다니······. 그것을 보면서 그는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망할 녀석! 네놈 때문에 노부의 아들이 죽었거늘, 아직까지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말이냐?” 그와 동시에 하북팽가주의 손에서는 매서운 권풍이 쏟아져나갔다. 누가 봐도 일격에 옥진호 장로를 없애버리겠다는 뜻임을 알았지만, 너무나도 강맹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주위에 있는 고수들은 감히 그것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 무표정하게 장로석에 앉아 있던 맹호검군 백량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지금 그는 재판에 참석한다고 무기도 지니지 않은 상태였기에 감히 하북팽가주와 접전을 벌일 수는 없었지만, 그의 한 수 정도는 막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펑! 백량 장로는 강맹한 권풍의 반동을 줄이기 위해 재빨리 뒤로 서너 걸음이나 물러서야만 했다. 자신의 일격을 백량 장로가 막아버리자 하북팽가주는 더욱 분기탱천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까지 백량 장로는 옥진호 장로파로 분류되던 인물이었다. 계속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한다면 백량 장로를 해치우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때, 백량 장로는 몸을 빙 돌려 피고석에 앉아 있는 옥진호 장로를 바라보며 싸늘한 어조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매화문검 장로. 감찰부에서 제시한 증거가 참이오?” 믿고 있던 백량 장로마저 이런 식으로 묻자 옥진호 장로는 벌컥 화를 내며 외쳤다. “자네까지 그런 걸 묻다니······. 저것들 모두가 다 새빨간 거짓임을 자네는 모르겠는가? 정말 답답하구먼. 증거 따위야 얼마든지 조작해서 만들 수 있음을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옥진호 장로의 대답에 백량 장로는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헛, 아직까지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치 않다니······. 노부가 저런 소인배를 믿고 함께 일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허탈하구나.” 백량장로는 그대로 자신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백량 장로라는 걸림돌을 공격하려던 하북팽가주만 우스운 꼴로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어버렸다. 이때, 하북팽가주 옆에 앉아 있던 황보세가주가 그의 손을 슬쩍 잡아끌어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지금 저놈을 죽인다는 것은 안락한 죽음을 선물하는 것과 같소이다. 저런 놈에게 그런 호사를 안겨줄 필요가 있소이까?” 황보세가주는 아들의 목숨은 건졌는지 몰라도 가문에서 손꼽히는 고수들 중의 한 명이었던 절파검 황보청을 잃었다. 그것이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가만히 되어가는 꼴을 보니 완전히 개죽음을 당한 것이 아닌가? 황보세가주가 이빨을 갈 수밖에 없었다. “젠장, 그, 그렇구료. 저런 놈에게는 안락한 죽음도 사치지.” 이번 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황보세가주와 하북팽가주가 옥진호 장로의 유죄를 인정한 것만으로도 장내의 분위기는 그쪽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만큼 두 가문의 위세는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었는가?” 무림맹주의 물음에 감찰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상대로 재판은 순조롭게 끝났습니다.” 그 말에 맹주는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크흠. 그런 거목을 이런 식으로 보내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나도 씁쓸하구먼.”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너무 자숙할 줄 몰랐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참, 사질은 그를 언제 처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빠르면빠를수록 좋겠지요. 참, 황보세가주나 하북팽가주가 가장 지독한 고통을 수반하는 죽음을 내리라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가능한 한 지독한 통증을 유발시키면서 차츰차츰 죽여나가는......” 하지만 맹주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감찰부주의 말을 끊었다. “잠깐! 그건 너무 잔혹한 듯하구먼. 그보다는···, 결론적으로 그는 이적행위를 한 셈이니 오마분시를 하기로 하세” 오마분시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목과 양손, 양발을 각기 말 한 필씩에 연결한 후, 일시에 말들을 출발시켜 토막내어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황실에서 반역도를 처형하는 데 애용되고 있는 무시무시한 처형방법이었다. “보기에는 끔찍할지 모르지만 순간적인 죽음입니다. 황보세가나 하북팽가에서 이의를 제기해오지 않겠습니까?” “그건 노부가 무마시키지. 오마분시로 하게” 맹주의 명령에 감찰부주는 어쩔수 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맹주님.” 16장 북쪽이 심상치 않다. 묵향은 자신이 깔아놓은 미끼를 옥대진이 덥썩 물었음을 알고는 능청스럽게도 무림맹에 공식 항의서까지 보내어 옥씨 일족의 몰락을 부채질 해놓은 상태였다. 물론 자신의 간접적인 위협이 무림맹에 먹혀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대로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관지 장로.” 묵향의 부름에 관지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아마 며칠 내로 양양성에서 철수해야 할지도 모르니 미리 준비를 해두도록 하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갑작스러운 명령이었기에 관지는 잠시 어리둥절한 듯했다. “철수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쩌면 무림맹과 동맹을 파기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라.” 놀란 관지 장로가 뭐라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전에 묵향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그가 이번에 하는 말은 어기전성을 통한 것이었다. <그리 놀랄 필요는 없네. 사실 이건 무림맹에 대한 위협용일 뿐이야. 금에 대한 전쟁을 계속 유지한다는 기본계획에는 변함이 없으니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어. 다만 동맹파기를 한 상태에서 흑풍대를 계속 양양성에 주둔시킬 수는 없지 않겠나? 그렇기에 자네에게 미리 언질을 주는 거야.> 상관의 뜻을 파악한 관지 장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수하들에게 지시해 두겠습니다.” “흠···문제는 동맹파기 선언을 언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냐하는 것인데······. 지금쯤 무림맹에서 뭔가 회답이 올 때도 되었는데, 안 오고 있다는 말씀이야?” 이러고 있을 때 밖에서 경비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을 뵙기를 청하는 자가 있사옵니다.” “호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들라고 해라.” “옛” 곧 문이 열리고 청수한 인상의 도인이 실내로 들어왔다. 그는 교주를 오늘 처음 만났기에,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교주를 보고 약간 의외인 듯 했다. 사실 교주의 모습은 그가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마교도들과는 달리 전혀 마교도같이 생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표정을 정리하여 공손하게 묵향에게 인사를 건넸다. “빈도는 무림맹 장로인 만수라고 하외다.” 무림맹에서 공식적으로 마교 교주에게 보내는 사신이다. 그런만큼 무림맹 장로급은 되어야 하기에 이번에 옥진호를 대신하여 새로이 장로가 된 만수진인이 이곳으로 파견되어 온 것이다. “맹에서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했군. 자, 이리로 앉지.” 만수진인은 묵향이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소이다. “그래, 무슨 일로 본좌를 만나러 왔나?” 만수진인은 단단하게 봉인된 제법 두툼한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이것을 전해드리라는 맹주님의 지시를 받고 왔소이다.” 묵향이 봉인을 뜯어보니 그 안에는 문서봉지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남양사건에 대한 조사와 그에 연관된 자들에 대한 처리결과를 기록해놓은 문서외다.” 묵향은 최종처리가 어떻게 끝났는지 궁금했기에 재빨리 문서를 집어들어 뒷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을 읽으며 묵향은 하마터면 광소를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무림맹 장로가 앞에 앉아있기에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일부러 표정을 더욱 딱딱하게 굳히며 읽고 있었다. 무림맹은 교활하게도 이 기록에서 자신들이 수라도제 등을 투입하여 마교의 공직을 가로채려 했다는 부분은 빼버렸다. 개방에서 들어온 보고서를 옥진호 장로가 빼돌려 자신의 손자에게 일을 맡긴 것으로만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마교가 행하려 했던 일이 완전히 틀어진 것에 대해 사과한다는 내용과 함께 말이다. 모든 죄를 옥진호 장로 개인에게만 뒤집어씌운 것에 묵향은 내심 기가 막혔지만 그걸 내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렇기에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허어, 이런 나쁜 녀석들을 봤나. 본교에서 세운 계책을 자신들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이용하려 들다니······. 그야말로 인두겁을 쓴 놈들이로구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일에 연루된 자들은 모두 다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았소이다.” “옥대진이라는 젊은이도 말인가?” “물론이오. 단 한 명도 예외는 없었소이다.” 그 말을 들은 묵향은 내심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도 감옥에 수감해뒀다고 했다면 이쪽에서 처리할 테니 넘 겨달라고 할 수 있었을텐데······. 일단 일을 시작하자마자 옥 씨 일족을 몰살시켜 버린 것을 보면 현 맹주도 참 냉정하기 그지없는 인물인 모양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맹주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전 무림맹주 옥청학으로부터 시작된 옥 씨 일족의 권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기에 한번 시작을 했으면 아예 끝장을 봐야만 하는 것이다. 묵향은 슬쩍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족감이 깃든 한숨을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현직 장로를 단죄하다니, 무림맹주의 과단성있는 결단과 그 공명정대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구먼.” “과찬이시오.” “하지만··· 이런 종잇조각만으로는 믿기가 힘들지. 최소한 딴 건 몰라도 주모자인 옥진호 장로의 목이라도 소금에 절여 보내주는 것이 서로 간의 신뢰구축을 위해 필요한 절차가 아닐까?” 묵향의 제안에 만수진인의 표정은 조금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있소이다. 구교와 본맹은 오랜 세월 반복과 투쟁을 벌여온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소이까? 그런 만큼 아무리 잘못이 있는 자라고 해도 그가 무림맹의 장로였던 이상 그 목을 잘라서 귀교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외다. 이 점 교주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소이다.” “딴은 그럴 수도 있겠구먼” 묵향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준 것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은 후, 앞으로도 금나라를 박살내는 데 서로가 최대한 협력하자고 다짐한 다음 만수진인을 돌려보냈다. 그런 다음에야 묵향은 혼자서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옆에서 듣기라도 할까봐 조심하는 악동처럼 말이다. 묵향이 한참 신이 나 있을 때, 장인걸의 심정은 그야말고 죽을 맛이었다. 무림맹과 마교를 이간시켰는데도 도무지 그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양양성에서 이탈하는 무림인들은 아직도 없느냐?” 편복대주는 더욱 깊이 부복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하들의 보고로는 양양성에서의 인원변동은 아직도 없다고 하옵니다.” “허, 참. 이상한 일이로다. 지금쯤 뭔가 결론이 날 떄도 되었는데 말이다.” 실패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아직까지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실패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장인걸로서는 작금의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교와 정파는 이토록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이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까? 이때, 편복대주가 장인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양양성에서는 무한에 이르는 방어선을 책임지고 있는 송군 장수는 악비라는 대장군이옵니다.” “그런데?” “그자가 이번에 30만에 달하는 방대한 병력을 훈련시키고 있사옵니다.” “그건 전에 자네가 본좌에게 보고했지 않은가? 그들이 모병하는 것을 기회로 첩자들을 그 속에 칩투시켰다고 말이야.” 편복대주는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교주님. 그들로부터 전해진 정보를 종합해본 결과 아마도 그들의 훈련이 대충 끝마쳐지는 내년쯤이면 송군 쪽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오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었사옵니다.” “헛,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겨우 그 정도 병력으로 공세를 가해올 리가 없지 않은가. 현재 송군이 보유한 병력이라고 해봐야 10만 남짓인데, 거기에 오합지졸 30만을 보태봐야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것이 아닌가? 증원병은 자기들만 준비하고 있는 줄 알다니 한심한 놈들이로고.” 장인걸의 이 말도 일리가 있었다. 송군이 30만의 신병을 모집한 것을 알고, 자신도 황제에게 주청을 드려 여진족과 거란족의 병사 30만을 모집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년이 되면 양쪽 다 30만씩이 준비되는 것이겠지만, 그 질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장인걸이 모집하는 것은 척박한 대지에서 사냥과 전쟁으로 단련된 용사들이었으니 말이다. 장인걸의 지적에 편복대주는 깊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물론 송군의 전력만이라면 그렇사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무림맹의 고수들이 가세한다면 상당한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 말에 장인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허긴, 필요 이상으로 모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 자네가 생각해둔 것이라도 있는가?” “악비라는 자를 제거하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송군의 중추인 그 자만 없애버린다면 송군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는 오합지졸로 전락할 테니 말이옵니다.” 그 말에 장인걸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제거한다? 그자가 있는 양양성은 지금 첩자 한 명 침투시키기가 힘들 정도인데, 어떻게 제거하자는 말인가?” 이것이 지금껏 무인으로 살아왔던 장인걸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편복대주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교활하게 미소지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그건 의외로 간단하옵니다. 교주님. 몇몇, 중요한 관직에 있는 신하들을 매수하거나 협박하여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옵니다. 멍청한 어린 황제만 설득하면 되는데 무엇이 힘들겠사옵니까?” “호오, 본좌는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좋은 계획이로다. 빨리 시행하라.” “옛, 교주님. 그렇게 시행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북쪽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북쪽이 심상치 않다? 그건 무슨 말인가?” “몽고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말이옵니다.” “북쪽에는 양지에 장군의 10만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몽고 놈들의 세력이 커졌다고 해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게야” “아무리 양지에 장군이 뛰어난 용장이라고 하지만 10만으로는 역부족인 듯하옵니다. 몽고족들은 정면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들이닥쳐 병사들을 살해한 후 노략질을 하옵니다. 그러다가 병사들이 출동하면 순식간에 도망쳐버리는지라······.” “젠장, 그런 식이라면 어려울 수도 있겠구먼. 저 망할놈의 무림맹 놈들만 아니라면 본좌가 정예를 이끌고 가서 싹 쓸어버렸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장인걸은 이윽고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장인걸은 이빨을 뿌드득 갈며 외쳤다. “어쩔 수 없구나. 후방에 대기중인 병력을 돌리는 수밖에······. 편복대주!” “옛” “지금까지 모병한 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예, 20만 남짓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내년 봄이면 목표한 30만을 다 모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그 20만을 북쪽으로 돌려라. 그 정도 병력을 준다면 아무리 바보 멍청이라도 송을 끝장낼 때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장인걸은 송을 멸한 후,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자신의 일을 훼방 놓은 몽고놈들의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속으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양쪽은 별다른 움직임 없이 서로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에 드러난 모습이었을뿐, 그 내면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송군은 30만의 신병훈련에 국운을 걸고 있었다. 수라도제와 약조한 대로 봄에 공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전력을 보유하는 것은 필수사항이었으니 말이다. 금군은 금군대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인걸이 봄이 되면 사용하기 위해 새로이 모병해놨던 20만은 몽고족을 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고, 60만의 정예들은 현 위치를 고수하며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편복대주는 송군과 무림맹의 동태도 살피랴, 조정의 중신들도 포섭하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림연합의 고수들은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겉모습은 그랬지만 가급적이면 고수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실력있는 고수들은 문파로 불러들이고, 급수가 떨어지는 자들로 대체하고 있었다. 장인걸의 밀명을 받은 다섯 명의 고수들이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집안을 튼튼히 해놓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묵향은 조용히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장인걸이 언젠가는 허점을 보여주기를 기다리며. 하지만 묵향이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작은 이변이 십만대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어엇? 이게 무슨 조화지?” 수석장로는 불안한 듯이 탁자 위를 바라봤다.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은 마치 약한 지진이라도 난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수석장로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던 군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염려 놓으십시오, 수석장로님. 혹시나 해서 본교의 모든 기록을 조사해봤습니다만, 지금껏 십만대산에서 화산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아마 며칠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 질 겁니다.” 하지만 군사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사실 그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었던것이다. “허어 이러다가 그치면 좋으련만. 그런데 요즘들어 점차 주기적으로 바뀌는 것 같아 아주 불안하단 말씀이야. 혹시 이러다가 쾅하고 터지는거 아냐?” 혹시 부하들이 들었을까봐 군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수석장로에게 사정했다. “제발, 불길한 말씀 좀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군사의 예상과는 달리 불안에 떠는 것은 수뇌부만이 아니었다. 마교 내의 모든 하급 고수들까지도 이 알 수 없는 지진현상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삼삼오오 모여서 여기저기서 쑤근거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왜 이런 현상이 일어아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위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움직임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블 묵향20권 1.양양성의밤 2.수라도제의 야무진꿈 3.지팔의 수난 4.추혈광마 5.종남파의 멸문 6.벽곡단 1알의 의미 7.10년간 봉문하라 8.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 9.공동파로 가는길 10.흑살마왕 장인걸 11.흔들리는 무림맹 12.운이 좋았다. 13.남양에 던진미끼 14.덫에 걸린 옥대진 15.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16.북쪽이 심상치 않다. 양양성의 밤 전략적인 요충지에 세워진 양양성인 만큼 그 성벽은 대단히 높았다. 높은 지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면 유리함도 있겠지만,지금처럼 사위가 어둑할 때는 접근하고 있는 자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인식하기사 곤란하기도 하다. 성문 위 망루에서 경계를서던 별사들은 100여 기에 달하는 인마가 양양성으로 접근해오자 바짝 경계하며 외쳤다. "누구냐?" "황룡문에서 지원 차 왔소!" 황룡문이라는 문파는 잘 모르겠지만,어찌되었건 무림의 문파 이름인 듯했기에 병사는 아래쪽을 향해 공손히 외쳤다. "자,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성문 위에서 파수를 보던 병사들 중 한 면이 다급히 무림인을 부르기 위해 달려갔다. 한눈에 척 보기에도 상대가 금나라 병사들이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그래도 성문을 열어주려면 그들의 정체를 정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군문에 몸담은 장교가 아닌 무림인을 찾아 달려간 것이다. 잠시후,경공술을 발휘하며 몇몇 무림인들이 달려왔다. 곧이어 그들은 황룡문의 복색을 하고 있는 무사들 앞에 서있는 황룡무제를 발견하고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어서 문을 열어주도록하시오.그리고 자네는 태상문주님께 황룡문주께서 도착하셨다고 전하게나." 빠르게 지시를 내린 한 무인의 뒤에 서있던 무사가 황룡문주의 도착을 전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몸을 몇 바퀴나 회전시키는 화련한 몸놀림을 선보이며 착지한 그는 그대로 허리를 깊숙이 조아리며 포권했다. "무림말학 이청중이 활룡문주님을 뵙습니다." 그 모습을 본 황룡무제는 상대의 매끄러운 신법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허어,대진검 소협의 신법만으로도 서문세가의 저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군." 황룡문주 같은 대단한 인물이 자신의 명호를 알고 있다는 것이 매우 기쁜 듯 이철중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원로에 여기까지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자,안으로 드시지요.이미 기별을 넣었으니 태상문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러면서 이청중은 이제야 서서히 열리고 있는 성문 안쪽을 가리켰다.황룡무제는 흡족한 듯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나."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는 이청주의 뒤를 따라 양양성 내로 들어선 묵향은 황룡무제에게 슬며시 말 했다. "이제 여기서 헤어져야겠군." "아니,숙소도 정하지 않으셨을 텐데,어디 가실 곳이 있으십니까? 여기에 짐결한 무사들을 이끄시는 분은 수라도제 어리신입니다. 저는 지금 그분을 뵈러 갈 건데,노야께서도 함께 가시도록 하시죠." "아닐세.수라도제는 다음에 만나기로 하지.그 전에 만나볼 사람이 있어." "노야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가 없군요.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황룡무제와 헤어진 묵향은 곧바로 만통음제를 찾기 시작했다. 만통음제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처음에는 개방의 거지들을 족쳐 만통음제의 위치를 알려 했으나 굳이 그럴필요가 없었다.만통음제가 이곳에 와서 매일 밤 금을 탔는지, 개방의 거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묵향의 귀에 지나가는 행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허어,오늘은 아직 금음이 들려오지 않는군." "조금 기다려야 할 걸세.아직 해가 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잖은가." "그런가?나는 그 금음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마치 신선이 타는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네.자네는 그렇게 안 느꼈는가?" "맞아,천상의 음률이지." 그 외에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만통음제가 타는 금음에 대한 대화임에 틀림없었다. 묵향은 그들에게 금음이 들려오는 방향을 물은 뒤 그곳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그 근처에 도착한 묵향은 가만히 눈을 감고 만통음제가 뿜어내고 있는 존재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뿜어내는 기의 성질은 조금씩 다르다.더군다나 내공을 연성한 무인이라면 각자 익힌 무공의 성질에 따라 그차이는 더욱 커지기 시작한다.물론 절절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면 몸속에 자신의 기운을 갈무리하여 숨기기에 그것을 포팍하기는 아주 힘들어진다. 더군다나 묵향이 찾고 있는 상대는 반박귀진의 경지에 들어서 있는 만통음제였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묵향보다 급이 떨어지지 않는가.동급만 되어도 찾아내기 힘들겠지만 묵향은 만통음제에 비해 한 차원 높은 고수였다. 잠시 후 눈을 뜬 묵향의 입가에는 만통음제의 기를 찾았는지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수라도제와 황룡무제는 거의 친분이 없는 사이였다.같은 정파 무림소속이라는 점만 빼면 문파간의 교류도 없었고,또 서로를 필요로 하는 입장도 아니었다.수라도제가 봤을 때 황룡문은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신흥방파일 뿐이었고,큰 야망이 없는 황룡무제의 입장에서는 구태여 멀리 떨어져 있는 서문세가라는 거대방파와 친분을 맺기 위해 노력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지극히 의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수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잠시 양양성의 정세에 대한 토론을 나눈 뒤 헤어졌다. 황룡무제가 돌아간 후,수라도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새벽이 되면 칠흑과도 같은 어둠도 더오르는 태양에 흩어져버리듯,욱일승천하는 듯하던 금의 성세(盛世)도 이제 그 끝이 멀지 않은 듯 느껴졌다.수라도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현 무림 최강의 고수들 가운데 무려 4명이나 이곳 양양성에 와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뒤에서 지원하고 있는 무림맹주와 옥화무제까지 합하면 6명이 된다. 미쳐버려 종적이 묘연한 만사불황과 몇 년째 은거중인 곤륜무제을 제외한다면 현 무림의 모든 초고수들이 금과의 전쟁에 뛰어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대세를 따라가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무인들을 총괄 지휘하게 될 사람이 누구인가.바로 수라도제 자신이 아니던가. 그렇게 되면 자신은 엄청난 명예룰 얻게 될것이고,모든 무림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될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수라도제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허헛,참.현천검제가 죽은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로구먼.하산파가 건재했었다면 큰 힘이 되어줬을 것인데……." 바로 이때,문빡에서 경비무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한방중에 태상문주의 휴식을 방해한 것이 죄송한 듯 그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태상문주님.태상문주님을 뵙기를 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어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황룡무제를 만난 뒤 무림에서의 놀아진 자신의 위상에 흐뭇해하던 수라도제는 갑작스러운 경비무사의 말에 그 흥이 깨지자 짜증이 밀려왔다.그렇기에 수하에게 질문을 던지는 수라도제의 음성은 중후하기는 했으나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누군데 그러느냐?" "예,매화검 옥대진 소협과 그분의 친구들입니다." "옥대진이라고?" 수라도제의 안색이 조금 더 찌푸러들었다. 그가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수라도제가 기억하고 있는 옥대진이라는 녀석은 제법 뛰어난 후지기수라고 칭해지는 놈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는 배경 또한 화려했다.아마도 자신의 배경을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감히 노부가 누군 줄 알고……. "내일 날이 밝으면 찾아오라 일러라." 그러자 문밖에서 경비무사가 아닌 다른 젊은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라도제 대협!마교에 관한 일입니다.제발 저희들을 만나주시기를 청합니다." 마교하는 말에 수라도제의 눈썹이 꿈틀했다.지금은 어쩔 수 없이 동맹을 맺고 있으나 그는 평생 동안 마교와 싸워온 사람이 아닌가.결코 마교와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마교에 대한 급한일이라는 말에 옥대진에 대한 불쾌함도 잊을 만큼 마교에 대한 원한이 큰 수라도제였다. "뭣이,마교하고?들라고 해라." "예." 곧이어 문이 열리며 젊은이들이 우루루 들어왔다.모두 다 옥대진과 같은 7룡4봉에 꼽히는 젊은이 들었다. 각대문파의 신진기수라 말해도 충분한 7룡4봉이 한꺼번에 자신을 찾아오자 수라도제는 흥미를 느끼며 질문을 던졌다. "마교에 대한 일이라고?그래,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저희들은 방금 전에 황룡무제 대협과 합께 양양성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일행 중에는 마교 교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뭣이!" 그 말은 정말이지 수라도제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기에 아무리 노회한 그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그 말이 사실이냐?정말 마교 교주가 양양성에 들어 왔단 말이냐?"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허어,참." 혀를 차는 수라도제의 마음은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곳 양양성에 배치된 모든 정파의 고수 들을 지휘라는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아무리 상대가 마교 교주라 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곳에 도착한 즉시 자신을 찾아오거나,적어도 자신이 도착했다는 전갈이라도 보내주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마교 교주라는 놈은 자신이 거느리고 온 세력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토록 정파 무인들을 총괄하는 자신을 업수이 여긴단 말인가.설마 자신의 세력이 더 크니 나보고 알아서 인사하러 오라는 말인가?수라도제로서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지만 그것도 잠시.수라도제는 마음을 바꿨다.자신이 좀더 대범하게 보이는 것이 좋겟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어쨌거나 이곳에서 정파 무림인들을 총괄하는 것은 자신이니까 말이다. 언짢은 기분은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동맹 상대인 마교도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총관을 불러라!빨리." 잠시 후 총관은 헐레벌떡 도착했다.자다가 일어났는지 차림새가 영 말이 아니었지만,그는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수라도제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속하를 급히 찾으셨습니까?태상문주님." "마교도들이 도착했다고 한다.특히 교주까지 온 모양이니 그들에게 최대한 좋은 거처를 마련해 주도록 해라.지금은 동맹자의 입장인 만큼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예,태상문주님." 총관이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할때,옥대진이 그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닙니다,수라도제 대협.마교의 정예세력들이 도착한 것이 아니라 교주 한 명만 저희들과 같이 동행한 것입니다." "뭐?" 그 말에 수라도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이놈이 지금 제정신이라는 말인가?물론 옥대진 한 놈이 와서 이따위 헛소리를 했다면 반쯤 죽여놨갰지만,여럿의 동료들과 함께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보니 옥대진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호위하는 무사들도 없이 말이냐?" "그렇습니다.교주 단 한 명뿐입니다." 수라도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어떻게 교주 혼자 이곳에 오겠는가. 거대 세력의 수장인 교주라면 몇십 명의 호위무사들을 거느리고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가 움직인 곳이 마교의 세력권 내라고 하더라고 믿기가 힘든 일인데 이곳은 얼마전까지 원수같이 지냈던 정파의 핵심전력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닌가?그렇기에 수라도제는 다시 한 번 옥대진을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자네 지금 노부에게 농을 하자는 것인가?" "어지 제가 감히 수라도제 대협께 허언을 아뢸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저희와 함께도착한 황룡무제 대협께 여쭤보십시오.제 말이 거짓인지." 그 말에 수라도제는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도대체 간덩어리가 얼마나 큰 자이기에 이토록 대범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그리고 그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ㄷ도 자신이 지닌 무공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림 역사상 최초로 탈마(脫魔)를 이룩한 자라더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 거짓이 아니로군. 강호에 그 누가 있어서 이토록 대범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수라도제 대협." "뭣이 말이냐?" "저희들이 수라도제 대협을 이렇게 한밤중에 찾아뵌 것은 한 가지 드릴 말씁이 있기때문입니다. 교주는 양반(襄礬)인근에서 저희들과 합류했습니다.그런데 저희들과 합류한 후,교주는 외부와 그 어떤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교주와 연락하기 위해 접근해왔다면 먼저 황룡무제 대협의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그분의 이목을 속이며 접근할 수 있는 고수의 수가 결코 많은 것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이리저리 말이 늘어지는 것 같았기에 수라도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흠,그래서 자네가 노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이 기회에 그자를 제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수라도제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뭣이?그런 망발을 노부에게 하다니,네놈이 제정신이라는 말이냐? 그가 단신으로 이곳에 온 것은 그만큼 무림맹을 신뢰한다는 것을 과시하는 행동이 아니더냐. 그런 그에게 유ㅏ햐룰 거런더묜 무림맹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느냐?" 수라도제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옥대진은 전혀 기죽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단신으로 왔다고 말입니다.이곳에서 그를 없앤다고 하더라도 이쪽과 무관하다면서 시치미 뚝 떼면 그만입니다.안 그렇습니까?"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수라도제의 머릿속은 그게 과연 가능한지에 맞춰져서 바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교도들이 말하는 탈마급의 고수라면,정파에서 말하는 현경급의 고수라는 말이 된다. 현경이라는 경지의 무예를 지닌 자와 단 한 번도 겨뤄본 적이 없었기에 화경급 고수보다 월등하게 강할 것이하는 것만 예측할 수 있을 뿐,그게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곳에는 지금 화경급 고수만 4명이 집결해 있는 것이다. 그 외에 신검합일 정도의 고수들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엄청나게 늘어난다.뭔가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그를 적당한 곳으로 꾀어낸 후 포위하여 공격한다면 충분히 없앨 수도 있을 것이다. 수라도제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자,다급해진 옥대진은 마교 교주를 신랄하게 헐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이라는 적이 사라졌을 때,결국 마교와 정파는 또다시 대결라지 않을 수 없는 구도가 된다. 기왕 그렇게 될 것이 확실한데 이 기회를 빌어 사파의 최강자를 이곳에서 없애버린다면 정도 무림은찬란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말도 덧붙였다. 거기에다 옥대진 외에 다른 후지기수들도 앞 다투어 교주애 대한 악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직접 당한 것이 있는 만큼 그들의 말은 다분히 감정이 서려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과연 교주를 없애는 것이 가능한가를 다지고 있는 수라도제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움직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수라도제의 야무진 꿈 설취는 사부님께 올리기 위해 차를 나르던 중이었다. 이때,갑자기 묵향이 내실 쪽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그것을 보고 설취는 너무나도 놀라서 쟁반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와장창! 이다음 사숙님을 만나면 꼭 물어볼 말이 있었다.하지만 갑자기 그 당사자가 불쑥 나타나다 보니 설퓌는 너무 놀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머릿속을 뱅뱅 돌고 있었지만,막상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안쪽에서 사부의 중후한 목소리가 너자먹허개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그 목소리에 설취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다소곳이 대답했다. "묵향 사숙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부서지듯 벌컥 열리며 만통음제가 달려 나왔다.묵향의 모습을 발견한 만통음제는 얼마나 반가운지 묵향의 손을 덥썩 잡은 뒤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네가 왔구먼.어서 들어오게.동생을 여기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늘…….허허,너무나도 반갑구먼." 마음 속 싶이 우러나는 만통음제의 환대가 묵향으로 하여금 미소짓게했다. 한참동안 묵향에 대한 반가움을 표시하던 만통음제는 고개를 뒤로 돌려 아직까지도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설취를 향해 지시했다. "취아는 빨리 가서 좋은 술을 구해오너라.오늘 같은 날 마시지 않는다면 어제 마신다는 말이냐." "예." 그날 묵향과 만통음제는 밤새도록 술잔을 ㅈ나누며 악기를 연주햤다.오랜시간 지음(知音)을 찾아 외로이 떠돌던 금음(琴音) 은 기날 오랜만에 피리소리를 만나를 만나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며 밤하늘로 퍼져 나갔다. 그날 밤,사저에의 연정에 괴로워하며 우울한 표정으로 밤하늘의 별을 세고 있던 진팔의 귀에 금음이 들려왔다.그런데 지금껏 들어 왔던 것과 달리 애절함보다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끼고 진팔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타는 건가?" 진팔이 그렇게 느낄 정도로 지금까지 들어왔던 만통음제의 금음과는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하지만 진팔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토록 아름다운 음률ㄱ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만통음제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금음을 ㅇ휘감아 돌며 아름다운 피리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그 두 가지 음은 절묘하게 어울리며 진팔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어엇!저 피리소리…….저게 만통음제 어르신이 그토록 찾고 계시건 친구분이신 모양이구나.정말 잘 어울리는군어떤 분 이신지 절말 궁금하네.무림명숙이실 게 분명한데 말이야." 진팔은 어느 고인이 있어 이렇게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낼 수 있는지 상상해 보았다. 분명 티끌 한 점 없는 고아한 풍모의 고인 일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념도 잠시,진팔은 곧 아름다운 선율에 흠뻑 젖어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만통음제는 수라도제를 만나러 갔다. 수라도제가 긴히 할 말이 있다는 전갈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만통음제가 나간 후, 딱히 할일이 없었던 묵향은 악기 손질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묵향이 섬세한 비단천으로 피리를 닦고 있을 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기침하셨습니까? 사숙님." 설취의 다소곳한 음성이었다. "들어오너라." 설취는 방금 만든 향긋한 내음의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노부는 그런거 따지지 않으니 걱정 말거라." 잠시 차를 마시던 묵향은 설취를 지그시 바라봤다. 차를 건넸으면 나가는 것이 순서일 텐데, 나가지 않고 미적거리며 앉아 있다. 묵향이 가만히 그녀의 눈치를 보니 뭔가 자신에게 말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듯 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 형님이 안 계실 때 찾아온 것을 보니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저, 한 가지....." "그래, 말해 보거라." 잠시 망설이던 설취는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혹시 과거 사숙께서 천양에 있는 천일루에 가보신 적이 있는지요." 워낙 뜬금없는 질문이라 묵향은 고래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사실 묵향이 천일루에 간 게 몇십 년전인데 그걸 기억하고 있겠는가. "천일루라....... 글쎄, 가봤는지 안 가봤는지 기억에 없는걸." "천일루에서 무산오웅이라 불리우던 무당파의 다섯 고수를 베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곳이 천일루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당파의 다섯 고수를 벤 기억은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무당파에 찾아가서 무력시위까지 벌인 적이 있었고, 또 며칠 전에 무당파에 찾아갔을 때 무당파의 전대장문인과 함께 얘기까지 나눴으니 그 사건이 기억나지 않을리 없었다. 묵향이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혹시 너도 그곳에 있었느냐?" 설취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사실이었구나. 그때 그사람이 사숙이었어.' "흠, 그곳에 있었던 모양이군. 노부조차 잊어버렸을 정도로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인데,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정말 생각조차 못해봤구나." "소녀가 무림에 나와서 처음 본 일이었는데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혹여 노부가 그때 네게 못할 짓을 했던 게냐?" "아, 아닙니다. 사숙." 화들짝 놀라며 세차게 고개를 젓는 설취였지만, 묵향이 가만히 바라보니 아무래도 느낌상 뭔가 있는 것 같았다. 묵향은 속으로 '젠장, 뭔가 있기는 있군.' 하고 생각했지만, 구태여 물어보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그만 나가보거라, 차는 잘 마시마." "예." 설취가 나가고 난 후 묵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젠장, 저 아이가 무산오웅하고 관계가 있었나? 뭐 , 그래도 어쩔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들의 복수를 한답시고 주제파악도 안하고 칼을 뽑아 들면 어떻게 하지? 형님이 아끼는 제자인데 죽일수도 없고. 거참 일이, 재미없이 꼬이는군." 묵향이 혀를 끌끌 차던 그 시간, 수라도제는 만통음제와 패력검제 그리고 어제 저녁 도착한 황룡무제와 함께 양양성 내에 마련한 자그마한 밀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황룡무제를 소개하며 잠시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수라도제는 정색을 하며 그들을 아침 일찍 이곳으로 청한 이유를 밝혔다. "어제 황룡문주와 함께 마교 교주가 도착했소." 그 말에 패력검제의 눈썹이 그의 격동하는 내면을 반영하듯 꿈틀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황룡무제야 그와 함께 왔으니 알 것이 분명했고, 또 다른 한명인 만통음제는 어제 밤늦게까지 묵향과 술잔을 나눴으니 수라도제의 말이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노부가 그대를 청한 것은 이 기회를 빌어 그를 없애는 것이 어떤지 물어보기 위함이오. 그는 마교가 배출한 최고의 고수라는 칭호를 받고 있고, 그가 교주가 된 이래로 마교의 위세가 날로 상승하고 있음이 사실이지 않소이까. 지금 그는 간 크게도 단 한명의 호위무사도 거느리지 않고 이곳에 와 있소." 여기에는 정파 무림의 핵심전력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화경에 이르는 고수 4명으로만 그를 상대해야 한다면 조금 힘이 모자랄지도 모르지만 각 문파가 자랑하는 신검합일급에 이르는 쟁쟁한 고수들까지 몽땅 다 동원한다면 충분히 교주를 때려잡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수라도제로서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만통음제가 얼굴가득 노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던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노부를 불러내더니 겨우 그따위 망발이나 하려고 한 것이오? 노부는 그런 치졸한 일에 끼지 않겠소, 아니, 만약 노부의 의제를 건드리려 하는 자가 있다면 노부가 직접 그 놈의 멱줄을 따버릴 것이니 그리 아시오!" 만통음제는 벌떡 일어서더니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셋은 한동안 기가 막혀서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설마 만통음제가 마교 교주의 의형일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초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수라도제가 만통음제가 던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패력검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거기에는 반대입니다." "아니, 어떻게 자네까지 그럴 수 있는가? 자네의 사문은 마교와 크나큰 은원관계를 맺고 있음을 노부가 잘 아는데......" 그 말에 패력검제는 손을 내저으며 낮지만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를 암습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수라도제 어르신께 크게 실망했습니다." 황룡무제도 옆에서 고개를 끄떡거리며 힘 있게 말했다. "그 의견에 저도 전적으로 찬성입니다. 이쪽을 믿고 단신으로 온 동맹자에게 취할 행동은 절대로 아니지요. 방금 전에 하신 어르신의 말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른 둘도 벌레 씹은 듯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버린 후, 수라도제는 그 자리에 멍청하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허어, 어찌 이런 일이 있을수가....." 수라도제로서는 황당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는 마교교주를 때려잡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잡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의 무공기 강하다고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닌가. 물론 정의를 추구하는 정파 무림으로서 연수합공으로 습격을 한다는 것이 수라도제로서도 마음에 걸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다 무림정의를 위한 것이 아닌가. "나쁜 녀석들! 우냐, 네놈들은 자기 손을 더럽히기 싫다면 노부 혼자서라도 해주마. 여기 네놈들 말고 고수가 한 명도 없는 줄 아느냐?" 수라도제의 입에서는 다분히 감정적인 어조가 흘러나올 수 밖에 없었다. 수라도제는 크게 소리쳐 모든 무사들을 모이라고 외치려고 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수라도제의 마음 속에서 그래봐야 불가능하다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탈마급 고수 한 명도 감당이 불가능할 지경인데, 거기에 만통음제까지 가세한다면 그들을 없앤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된다. 물론, 그들이 정면대결을 해온다면 엄청난 희생을 치르기는 하겠지만 그들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도망치려고 작정한다면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허허~, 참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노부의 실수로다. 화경까지 올라간 자들이라서 자신이 지닌 무공에 대한 자만심이 크다는 것을 간과한 노부의 실수야. 아직까지 세상의 쓴 맛을 적게 본 그 녀석들의 입장에서, 합공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겠지. 거기에다가 그 늙은 것이 교주 놈과 의형제지간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너무나도 뼈아프구먼........." 수라도제는 묵향이 이들과 조금씩의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때, 차츰 이성을 회복하기 시작하고 있는 수라도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이 떠오르는 순간 그의 머리 속은 흡사 찬물을 들이킨 듯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나저나 이 일을 어찌한다? 그 늙은 것이 교주에게 이 일을 일러바친다면 일이 아주 고약하게 꼬이게 생겼는데?" 아침 일찍 수라도제의 호출을 받고 나갔던 의형이 투덜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보고 묵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만통음제가 이렇듯 화를 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왜 그렇게 심기가 상하셨습니까?" "아, 동생. 내 말 좀 들어보게나. 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는지." 그러면서 그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묵향에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다 들은 묵향이 통쾌하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만통음제는 표정을 굳히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렇게 웃고 있을 시간이 없네. 지금 빨리 짐을 챙겨서 이곳을 뜨는 게 좋을 듯하이. 안 그런가?" 다급한 만통음제의 심정과는 달리 묵향은 웃음을 터뜨리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하하핫! 과연 수라도제. 아마도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기는 싫었겠죠. 형님까지 합세한다면 운 좋으면 성공할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과거 한중길 교주에게 이런 식으로 한 번 당해본 적이 있는 소제입니다.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여기에 온 줄 아십니까? 만약 여기에 형님이 안 계셨다면 저는 부교주들 중에서 한 두명을 데려왔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형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혼자 온거죠. 4:1로도 승산이 있을까 말까 한 일이 3 : 2가 되면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하지만 이곳에는 정파의 수많은 고수들이 모여 있다네. 그들을 모두 동원한다면." 묵향은 싱긋 미소지으며 만통음제의 말을 막았다. "정면대결이라면 모르지만 도망치려고만 들면 그런 놈들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근처에는 제 수하들도 와 있습니다. 그런 만큼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것 따위는 하나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말에 만통음제의 안색에도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그런가?" "자,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시고 양양성이나 좀 구경시켜 주십시오. 주위의 경관이 십만대산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수려하더군요." 진팔의 수난 언제나 그러하듯 진팔은 아침에 일어나 수련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목적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길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진팔의 모습을 소연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씩의 조언은 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자신이 직접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순간이 될 수도 있고, 영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 저 먼 곳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소개해주고 싶은 녀석은 저녀석일세." 그 목소리가 만통음제의 것임을 진팔은 재빨리 알아챘다. 아마도 만통음제는 자신의 지음이 이곳으로 찾아오자, 진팔을 소개해 주려고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진팔 또한 그의 지음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만통음제처럼 선풍도골형의 고귀한 신선같은 모습일까? 아니면 패력검제처럼 이웃집 아저씨같이 소탈한 모습일까? 진팔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재빨리 그곳으로 고개를 휙 돌렸을 때, 그의 눈은 묵향의 눈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끄어어억! 아니 저 인간이 여기에 왜 있는거야?' 순간 진팔은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그의 몸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재빨리 묵향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쓰벌, 설마 만통음제의 지음이 교주일 줄이야.' 진팔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천마신교의 지존이시여'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이곳은 수많은 정파인들이 밀집된 장소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마교 교주 운운한다면 큰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교주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이곳에 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런 말을 뺀 것이다. 교주가 공개적으로 이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던 진팔이 나름대로 세심하게 배려하여 인사를 건넸건만 상대로부터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진팔이 살짝 눈을 들어 바라보니 교주의 시선을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도대체 피도 눈물도 없는 극악무도한 마두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말이다. 진팔이 묵향을 따라 재빨리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소연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삼사저와 면식이 있었나? 그런데 저 눈길이 아무래도.......' 진팔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인데, 그걸 만통음제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만통음제는 짐짓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슬며시 어기전성을 보내왔다. <역시 동생의 눈도 보통이 아니구먼. 여태껏 옆에서 지켜봐서 아는데 상당히 괜찮은 아이지. 동생도 혼자인 것으로 아는데, 이 우형이 월하노인이 되어줄까?> 묵향의 안색이 확 일그러 들었다. 월하노인이라니...., 그건 바로 중매쟁이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자신이 소연을 바라보는 눈길 하나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묵향은 자신이 얼마나 표정관리가 엉망이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때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소연도 진팔이 있는 쪽으로 재빨리 달려왔다. 만통음제가 그의 여제자인 설취와 함께 와 있는 것이다. 만통음제가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했을 때, 최고의 예우를 해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연은 만통음제의 옆에 서 있는 젊은이, 그러니까 묵향에게까지 관심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만통음제 대협." 깍듯이 인사를 건네는 소연을 향해 만통음제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차라도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느냐?" 그 말에 소연은 화사한 미소를 보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만통음제 대협." 일단 만통음제에게 인사를 한 후에야 소연은 묵향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 소연에게 묵향은 싸늘하면서도 거만한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며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아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상대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내기 힘들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양부는 언제나 그녀에게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표정을 달리하면 전혀 딴사람처럼 보이듯, 저기 딱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묵향을 보며 자애로운 양부를 기억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지금 소연은 한가하게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시간 여유가 없었다. 만통음제가 차를 한잔 달라고 하지 않는가. 소연은 다소곳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소연이 안내한 곳은 연무장 인근에 있는 작은 정자였다. 매일 진팔이 이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사제가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차를 가져다 주기 위한 간단한 취사도구를 가져다 둔 것이다. 작은 화로에 불을 붙여 물을 끓이고, 찾잔을 준비했다.그런데 잠시 소연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찻잔이 사제와 자신만을 위해 준비해둔 두 개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둘을 누구에게 권해야 할까? 그녀는 다시 한 번 정자 안을 살펴봤다. 낯선 젊은이와 설취. 그 둘중에 누가 배분이 높은지 지금 당장 추측해내야만 했다. 아무리 설취의 무공이 소연보다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녀의 사부는 만통음제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위치는 강호에서 대단히 높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사부 덕분에 왠만한 문파의 장로급과 상응하는 정도의 배분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 라는 것이 있다. 만약에 저 젊은이 쪽이 배분이 높다면? 저 젊은이에게서 풍겨 나오는 위엄은 분명 범인이 지닐 만한 것이 아니었다. 차가 다 준비되자 소연은 찻잔을 직접 권하는 대신 만통음제가 앉은 자리 앞에 놓았다. 그리고 두번째 찻잔은 설취와 그 젊은이의 사이에 놓았다. 그런 다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워낙 경황중에 준비한 것이라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닐세, 아주 향이 좋구먼." "감사합니다. 대협." 만통음제가 찾잔을 들자, 그 옆에 앉아 있던 젊은이도 찻잔을 들었다. 그것을 보고 소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놀랍게도 젊은이의 배분은 거대문파의 장로급을 상회함이 분명했던 것이다. 혹시나 했던 것이 맞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놀라움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둘을 만통음제는 힐끔힐끔 관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묵향이 소연에게 꽤나 마음이 있는 듯 행동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하는 행동이 너무나도 싸늘하면서도 딱딱하지 않는가. '허 동생이 겉보기와 달리 쑥쓰러움이 많구먼. 자고로 미인은 용기있는 자가 차지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 우형이 나서야겠어. 흐흐흐.' 만통음제는 소연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며 묵향을 소개했다. "아참, 이런 내 정신 좀 보게나. 소개가 늦었구먼. 이쪽은 내 의제일세." 그 말에 진팔은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진팔은 저 극악무도한 마두가 만통음제라는 거목의 의제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놈이 무슨 짓을 한 거지? 맞아, 만통음제 어르신은 속고 계신 거야. 그게 틀림없어. 어르신께서는 저놈이 마두라는 사실을 모르고 계실 거야. 이 일을 어떻게 하지? 살짝 알려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리고 소연은 소연대로 의제라는 말이 감추고 있는 뜻을 곱씹고는 경악하는 중이었다. 그 말은 곧 저 젊은이의 무공 또한 평범한 수준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 아닌가 '또다시 반로환동의 고수라는 말인가? 정말이지 무림은 너무나도 크고 넓구나. 큰 일이 터지자 저런 숨은 고수들이 계속 등장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소연은 살짝 눈을 들어 다시 한 번 그 젊은 이를 힘끌 훔쳐봤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체격은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그리고 타인을 압도하는 저 기도만 아니라면, 저잣거리를 다니다 보면 하루에도 수십번은 만날 수 있는 그런 얼굴일 정도로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눈에 익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지만 말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지문의 소연이라고 합니다." 공공연히 만통음제가 소연에게 자신을 소개하자 묵향은 내심 격동을 감추기 어려웠기에 슬쩍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마도 그 모습이 소연에게는 강인한 자의 거만함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이 때, 만통음제가 덧붙여서 설명했다. "허헛, 노부의 동생은 무림에 마교 교주로 알려져 있다네. 어쩌면 자네들은 천지문도들인 만큼 이미 동생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먼." 그 말을 들은 진팔은 더욱 경악했다. 어떻게 저자가 마두라는 사실을 알고 의동생을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만통음제가 제정신인가? 진팔이 경악하고 있는만큼, 소연 또한 그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동그래졌다. 하지만 잠시의 그 경악감이 지나간 후, 소연은 자신의 결례를 인식하고는 다소곳이 말했다. "교주님께서 천지문에 많은 은혜를 베푸신 점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진양 문주와 한중길 교주와의 일이었으니 본좌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감정르 숨기다보니 오히려 묵향의 말투는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해져 있었다. 소연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목소리에서 감정이 묻어나올 듯 했기에, 묵향은 진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그때 봤을 때에 비해 진일보했구먼, 아주 빠른 성취야. 여기서 싸우면서 뭔가 느낀 게 있는 모양이지?" "예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진팔의 겸손한 대답에 만통음제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작은 깨달음이라..... 절정에 들어가는 초입을 작다고는 볼 수 없지. 그렇지 않은가? 동생." "물론이죠, 무림에 수많은 고수들이 있지만 초식의 틀을 깬 존재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제 그 지고한 경지에 첫발을 들여놓았으니 축하할 일임에 틀림없지요." 그 말에 진팔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런 검론은 듣기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밖에 없는 것이 천지문이라는 문파 자체가 배출한 최고 고수가 신도합일급이니, 그 윗경지에 대한 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던 것이다. "예? 지고한 경지의 첫발이라니요?" "초식의 틀을 완전히 깼을 때, 화경이 열린다는 말이야. 자네의 경우는 이제 걸음마 단계라고 볼 수 있지. 기존 초식을 물흐르듯 연계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를 보고 사람들은 무기와 하나가 되었다고 부르지. 바로 신도합일을 말함이야. 그런데 아무리 완벽한 도법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만든 것인 이상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거든. 그것을 깨닫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초식의 벽을 허물었을 때, 세인들이 말하는 화경에 들었다고 할 수 있지. 그리고 초식을 허무는 것의 완성형을 현경이라고 말하는데, 의식와 무의식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을 때 가능한 것이야." 현경에 대한 얘기는 만통음제도 처음 듣는 말인지라 잠시 묵향이 한 말을 곱씹으며 되새기고 있었다. 그가 가야 할 다음 단계가 바로 현경이니 말이다. 만통음제가 뭔가 묵향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순간, 묵향이 먼저 진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첫발을 들인 기념으로 한수 지도해 주지." 그 말에 진팔의 입이 기쁨으로 쭉 찢어졌다. '흐흐흐, 이런 횡재가 있나, 어제 내가 무슨 꿈을 꿨더라?' 교주의 제의를 받은 진팔은 해묵은 감정이 어느 샌가 증발해 버리는 자신을 느꼈다. 과거 그 때문에 지독한 고생을 한 것도, 또 지금껏 쌓여있던 감정도 모두 다 사라졌다. 무림 최고수가 한 수 가르쳐준다는 데야 사양할 이유가 없겠지만, 진팔은 상대의 제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예? 정말이십니까?" "물론이지, 대신 천지문의 무공을 본좌한테 알려줘야 해. 자네가 가장 자신있게 사용하는 도법과 신법을 말이지." '이런 젠장, 어쩐지 너무 조건이 좋다고 생각했어.' 그 말에 진팔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의는 감사드립니다만, 대인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원래 무공이라는 것이 문외불출이라 가르쳐 드릴수가 없습니다." 해묵은 원한이 사라지고, 교주에 대한 따스하기 그지없는 호의감이 싹트고 있어서 그런지 진팔의 입에서 '대인'이라는 극존칭의 단어가 서슴없이 흘러나왔다. 묵향은 진팔의 대답에 기분이 상한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문외불출 좋아하고 앉아 있네. 본좌가 그딴 쓰레기 같은 도법이 필요해서 네녀석한테 이런 제안을 하고 있는 줄 알아? 네가 익히고 있는 무공만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비무가 가능한지 내가 직접 보여주려는 거야. 아마 네놈은 상당도 해본 적이 없는 세계일걸? 어때 생각할 시간을 딱 1각 주마. 결정하거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만통음제가 끼어들었다. 그도 과연 천지문의 도법이 묵향의 손을 거쳐 어떤 모양으로 거듭나게 될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이보게 소형제. 한 번 해보지 그러는가? 이런 기회는 평생을 통틀어 단 한번도 찾기 어려운 기연임을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쓰레기 같은 도법이라는 말에 울컥하고 있던 진팔이었지만, 만통음제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일리가 있는지라 그는 난처한 얼굴로 소연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녀가 허락만 해준다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팔의 시선을 받은 소연은 잠시 궁리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타인에게 본문의 무공을 무단으로 가르쳐준다는 것은 가장 큰 중죄들 중의 한가지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것을 가르쳐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가. 중원 최강이라 불리는 고수다. 아마도 그가 익히고 있을 막강한 무공들에 비한다면 천지문의 도법은 삼류무공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무공에 대한 그녀의 호기심도 한몫했다. 그가 펼치는 천지문의 도법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윽고 결심했는지 소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허락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자 진팕은 다급히 교주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묵향은 활짝 미소지으며 진팔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자네는 정말 탁월한 선택을 한거야. 자 이제 자네가 즐겨 사용하는 무공을 가르쳐줘야겠지?" 상대의 태도가 너무 친근한 것 같아 진팔은 오히려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거 내가 뭔가 속고 있는 거 아냐?' 그렇다고 그걸 상대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진팔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제가 사용하는 도법은 선풍도법입니다. 구결부터 말씀드리자면....." 진팔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리며 묵향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구결은 필요없으니 저기 가서 한 번 시범을 보여 봐." "구결이 없어도 괜찮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죠." 구결을 안 가르쳐줘도 된다는 말에 진팔은 오히려 좋아라했다. 구결이 빠진 껍데기뿐인 도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말 한마디에 진팔의 불안감은 사라졌다. 옆에서 다른사람이 수련하는 모습을 며칠간만 훔쳐봐도 초식의 겉모습은 금방 습득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각 문파가 자랑하는 최강의 무공들이 적전으로만 이어져 내려오는 이유가 뭔가? 그게 다 초식을 사용함에 있어서 내공을 어떤 식으로 운용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고 있는 구결이 없다면 모방 자체가 불가능 하기 때문이 아닌가? 설혹 모방했다손 치더라도 제대로 된 위력은 결단코 나올 수가 없었다. 구결을 알려주지 않아도 되기에, 사문에 큰 죄를 범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진팔은 아주 당당하게 연무장으로 내려가 도법을 시연하기 시작했다. 진팔의 도가 장쾌한 움직임을 보이며 선풍도법의 초식을 하나씩 보여줬다. 진팔이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들을 선보이고 나자, 묵향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비무를 하기 위한 무기를 찾기 위해서였다. 마침 적당한 크기의 나뭇가지가 보였기에 그걸 잘라 대충 다듬은 후 붕붕 소리가 나도록 휘둘렀다. "제법 쓸만하군" 그걸 보며 만통음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 실력의 고수라면 무기가 뭐건 큰 장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일격을 당하는 입장이라면 진짜 도보다는 목도쪽이 훨씬 상처가 적을 것은 확실하지 않겠는가. 묵향이 진팔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가보다 하고 생각하는데, 묵향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왓다. "사람잡는 것도 오랜만이군. 흐흐흐, 네놈의 맷집이 좋기를 바란다." 워낙 낮은 목소리였기에 소연은 묵향의 말을 듣지 못했지만, 만통음제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 말을 듣고 만통음제는 묵향이 왜 진팔과 비무를 하겠다고 한 것인지 한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혹시 해묵은 원한이라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다음에 전개된 비무를 본 만통음제와 소연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묵향이 진팔을 개 잡듯이 때려잡기 시작했기에 그들이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건 처음부터 예상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놀란 것은 묵향이 사용하고 있는 무공에 있었다. 어떻게 단 한번 겉모습만 훑어본 타 문파의 무공을 저렇듯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각 초식의 앞뒤가 뒤바뀌기도 하고, 순서가 뒤죽박죽 뒤셖어 사용되었기에 완전히 다른 도법처럼 보였지만 가만히 따져보믄 천지문의 선풍도법이었다. 소연은 비무를 바라보며 엄청난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묵향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선풍도법이 지닌 진정한 위력이었다. 그녀가 직접 사제와 비무한다고 해도 저 정도까지 완벽한 도법을 구사할 자신은 없었다. 물 흐르듯 완벽하게 이어지는 도법과 신법. 저 모습만 본다면 선풍도법이 어찌 삼류도법이라고 불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묵향의 의도대로 소연은 그 비무의 정수를 마치 모래 물을 흡수하듯 정신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비무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눈들도 있었다. 이곳에 모여있는 또 다른 상승의 고수들이었다. 양양성내에서 강렬한 기와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간간이 폭음까지 들려오니 뭔가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즉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호오, 과연 천지문과 마교가 가깝다고 하더니 그게 거짓이 아닌 모양이군요. 저렇듯 교주가 직접 비무까지 해주니 말입니다." 황룡무제의 말에 그 옆에 서 있던 수라도제는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저게 비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노부가 보기에는 멀쩡한 젊은이 하나 때려잡는 모습으로밖에 안보이는데?" 하지만 묵향과의 대결에서 엄청난 것을 배웠던 황룡무제와 패력검제였다. "저런 생사결에 가까운 치열한 비무를 통해 무인은 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것이 끝나면 뭔가 수확이 있겠지요." 수라도제는 더 이상 비무를 볼 것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것에는 노부도 공감하는 바일세. 하지만 교주가 사용하는 것은 마교의 도법, 진팔이라는 저 청년이 사용하는 것은 천지문의 도법. 과연 무엇을 더 배울 것이 있겠는가?" 수라도제가 이렇게 나오는 것은 교주가 사용하는 무공에 있었다. 교주의 애병이 뭔지는 알 수 없겠지만, 교주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그 모습으로 보아 매우 무게가 가벼운 도든지 아니면 살짝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검일 것이다. 그것만 봐도 빠른 쾌검류를 익히고 있다고 짐작되어지는 그가 저런 둔중한 몽둥이를 들고 무공을 펼치면 제대로 된 위력을 펼칠 수 있겠는가. 거기에다가 교주가 펼치고 있는 저 도식은 또 뭐란 말인가? 한 번 쓱 봐도 저건 초식에 얽매여 있는 하급의 도법이었다. 화경에 이른 그의 입장에서 단 하나도 배울 점이 없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미련없이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때, 그의 뇌리에 어떤 목소리가 울려왔다. <본좌의 실력이 어떤지 궁금해서 찾아왔나?> '헉.' 수라도제는 어기전성이 들려오자마자 누가 그것을 보냈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그딴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이곳에 단 한명밖에 없으므로. 순간 수라도제의 등 뒤로 식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그건 아니오.> 그러자 곧 이어 비비꼬인 어조가 이어져 들려왔다. <의형께 들으니 본좌를 때려잡겠다고 하셨다면서?> 그 말에 수라도제의 안색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제길, 그 영감탱이가 진짜로 고자질을 했구나, 사내놈이 그토록 주뎅이가 가벼워서야............' <정 싸우고 싶다면 칼을 들고 본좌를 찾아와, 반쯤 죽여줄테니까. 그럴 배짱도 없으면 처박혀서 술이나 퍼마셔. 알겠어?> 아무리 수라도제가 묵향보다는 한 수 아래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말이 심하지 않은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묵향보다는 수라도제가 더욱 오랜 세월동안 무림을 종횡해온 고수가 아닌가. 연배는 자신이 높지만, 상대는 마교의 교주였기에 그에 걸맞는 예우를 해주고 있는 것 뿐이었다. <이, 이거 말씀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그에 비해 묵향은 상대의 연배가 높건 낮건 그런 것은 따지지도 않았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냐 그렇지 않느냐만 중요할 뿐... <심하기는 뭐가 심해? 너 오늘 한번 죽어볼래?> 수라도제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않자 다시금 묵향으로부터 어기전성이 들려왔다. <본좌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뒤에서 꽁수 쓰는 놈들이야. 이번은 본좌가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그냥 넘어가주겠지만, 다시 한 번 더 그딴 짓을 하는게 본좌에게 걸리면 죽을 줄 알아.> 지금껏 수라도제에게 누가 감히 이런 식으로 막말을 한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렇기에 수라도제의 안색은 불그락푸르락 정말 가관이었다. 1:1로 싸우면 박살날 것을 뻔히 안다. 하지만 그걸 잘 알면서도 수라도제는 하마터면 도를 뽑아 들고 묵향을 향해 달려들 뻔했다. 나이도 자신보다 어린 것이 그 망할 탈마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선배 고수를 이토록 우습게 본단 말인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수라도제가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그런 그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패력검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안색이 좋지 않으신 듯한데,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패력검제가 옆에서 갑자기 말을 걸었기에 수라도제는 간신히 자신을 억제할 수가 있었다. 수라도제는 떨떠름한 어조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별일 아닐세. 노부는 이만 가보겠네." 수라도제는 교주에게 또 다른 무슨 소리를 들었을 때, 그 다음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서둘러 자리를 피해버렸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겠는가? 더러워서 피하지. 더군다나 저놈의 똥은 대금전쟁을 치르는데 있어서 매우 필요했다. '젠장! 거름이라도 쓸 데가 있으니 똥덩어리 같은 네놈을 상대해 주는거야." 수라도제가 갑자기 자리를 뜬 후에도 황룡무제와 패력검제는 그곳에서 비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잘 몰랐던 부분이 그들의 눈에 잡히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서로가 같은 도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 아니오?" 그 말에 패력검제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노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소." "그렇다면 소형제가 사용하는 저 도법이 마교의 도법이라는 말이요?" 그 말에 패력검제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닌 것 같소이다. 노부가 저 아이를 오랜시간 데리고 있으면서 관찰해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저 아이가 사용하고 있는 도법은 언제나 그가 연습하던 선풍도법이 확실하오." 천지문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천지문 하면 선풍도법을 생각할 정도로 외부에 잘 알려진 도법이었다. 그런 만큼 교주가 선풍도법을 진팔에게 가르쳤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추측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 아이에게 선풍도법의 정수를 알려주기 위해 교주가 저 도법을 배웠다는 말씀이 되지 않소? 교주의 입장에서는 하등의 쓸모도 없는 도법인데, 그걸 한순간의 비무를 위해 배웠을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오." "글쎄요.... 노부의 생각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가 워낙 엉뚱한 인물이라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요." 패력검제의 그 말에는 공감이 가는지 황룡무제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교주와의 비무는 오늘날의 그가 있도록 만들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생사를 건 대결. 그 단 한순간에 무인은 엄청난 지식을 흡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왠만한 경우 고수는 자신과 대결한 하수를 살려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상대가 더욱 크게 성ㅈ장하는 것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주는 자신을 살려줬다. 그런데 교주는 자신을 왜 살려준 것일까? 그것도 두번째 만났을 때는 비무까지 해주고 말이다. '확실히 그릇이 크긴 커. 저런 위대한 인물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만 해도 하나의 복인지도 모르지.' 황룡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비슷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패하는 경우를 당한다면, 왜 하늘이 나를 낳고 또 저놈을 낳았으냐고 통탄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처음부터 싸울 의욕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 때 패력검제가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는 것을 보고, 황룡무제가 말했다. "더 관전하지 않고 가시려고 그러시오?" "그러고는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말이외다. 아무래도 비무가 끝난 후에는 좋은 약이 필요하지 않겠소?" 그러면서 패력검제는 한창 비무중인 진팔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진팔은 지금 오뉴월 복날을 만난 멍멍이처럼 몽둥이 찜질을 당하는 중이었다. "허긴, 노부도 그 생각에는 동감이오. 그런데 저녀석 보기보다는 맷집이 좋구먼. 저렇게 맞아도 또 일어서는 것을 보면 말이오." "일부러 적당히 패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런 식으로 계속 충격이 누적되면 쇳덩이라도 버티겠소? 지금은 정신력 으로 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일 아침이 되면 일어나기도 힘들 거외다." 그 말에 황룡무제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참으로 깊으시구려. 대련이 끝나자마자 치료하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지요." 모두들 혹시 교주가 사실은 천지문과 뭔가 원한이 있었던 게 아닐까하고 생각할 정도로 처절했던 비무가 끝나자마자 만통음제는 묵향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허어, 동생." "왜 그러십니까?" "동생의 지도방법이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네. 하지만 저렇게 무자비하게 두들겨서야 어디 되겠는가." 머리에 정통으로 한 대 맞고 기절한 채 업혀가는 진팔을 가리키며 만통음제가 말했지만, 묵향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사실은 마지막 한 방은 잡생각 떠올리지 말고 푹 쉬라고 의도적으로 날린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사부님께 저런 식으로 당하면서 성장했죠." 그러면서 묵향은 자신의 사부 유백을 떠올렸다. 물론 유백의 방법이 묵향의 방법보다 훨씩 조악하다고 봐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백은 그렇게 큰 깨달음을 지니고 있지 못했기에 가차없이 밀어붙일 수는 없었던 거싱었다. 이렇게 하면 수련시간이 조금 단축된다는 것만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묵향은 달랐다. 사부의 방법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먼저 이론교육부터 시켜놓고, 그 다음은 몸이 그것을 익히게 만든다. 물론 진팔은 이론은 먼저 어느정도 터득한 상태였다. 그것을 몸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이론교육은 생략한채 다짜고짜 매질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수련시키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은 초류빈이라는 실험대상(?)이 이미 증명한 상태였다.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오르면서 말이다. "아, 동생의 사부께서 그런 방법을 창안하신 모양이군. 정말 창의력이 대단하신 분일세." 만통음제는 약간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제자를 교육시키는 것도 좋지만 저토록 지독한 방법을 선택하다니. 도저희 그들 사제지간에 정이라는 것이 있었을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향은 추억어린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대단하신 분이셨죠. 그리고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묵향에게서 사부에 대한 은근한 정이 느껴졌기에 만통음제는 자신의 제자에게도 이 방법을 써볼까 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들기 시작했다. 역시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다 좋은 법이니 말이다. '하루동안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결과가 나타나면 제자 녀석도 이해해 줄거야 암.' "복 받은 녀석이로군. 오늘의 비무는 그녀석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겠지." 묵향이 느긋한 어조로 대꾸했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겨우 하루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일단 시작했으면 뿌리를 뽑아아죠." 그 말을 듣자마자 만통음제는 경악감과 함께 진팔에 대해 불쌍한 감정마저 느꼈다. 설마 그걸 그렇게 지독하게 강행하겠다는 말인가? 만통음제는 방금 전에 세웠던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서는 사랑하는 제자를 이토록 무자비하게 몇날 며칠동안 두들겨 팰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 하지만 그녀석이 그걸 알면 비무를 계속 할 리 있겠나? 우형같으면 아무리 배움도 좋다지만, 오늘 당장 야반도주를 하겠네만." 묵향은 그쯤은 미리 다 생각해놨다는 듯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기절시켜놨잖습니까? 내일 아침까지 아무 생각없이 푹 잘 겁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또 다른 방법도 써 놓은게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결코 야반도주는 할 수 없을 테니까요." "다른 방법이라고? 그게 뭔가?" 하지만 묵향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대신 묵향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돌렸다. "참, 저는 볼일이 있으니 먼저 들어가십시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만통음제의 시선을 뒤로 하고 묵향은 업혀가는 진팔의 뒤를 따라 천지문도들의 숙소로 향했다. 묵향은 천지문 내에서 잡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물을 길어오는 사람. 장작을 져다 나르는 사람. 대부분이 천지문의 문도들 중에서 낮인 지위를 차지고 있는 인물들이었지만, 간혹 하인들도 있었다. 천지문을 거느리고 온 소연이 여고수인 만큼 그녀의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해 데려온 듯한 하녀도 한 명 보였다. '이상하군 내 예상이 틀렸나?' 막 발길을 돌리던 묵향의 눈에 땔감을 나르고 있는 늙은 하인의 모습이 보였다. 묵향은 그 비쩍 마른 늙은이를 향해 한동안 따뜻한 눈길을 보내더니 어기전성을 날렸다. <흑월야사 전룡, 오랜만이구나.> 누가 봐도 닭 한마리 잡을 힘도 없을 것 같아 보이는 허리가 구부정한 늙은 하인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에게서 곧장 묵향에게 전음이 날라왔다. <전룡이 교주님을 뵙습니다.> <자네는 본좌가 내린 명령을 완수했어. 본좌가 원한 것은 3개월이었는데, 이토록 오랜시간 일해주어 너무나도 고맙게 생각한다네. 이제 자네는 자유의 몸일세, 참, 원하는 것이 있는가? 뭐든지 말해도 좋네. 본좌를 위해 일한 것에 대해 대가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래도 뭔가 주고 싶군.> 하지만 전룡의 대답은 묵향의 예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약속한 3개월이란는 시간이 흘렀을 때, 저는 자유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교주님의 실종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남을 것인지, 아니면 떠날 것인지... 하지만 저는 남는 것을 택했습니다. 교주님과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무림에 돌아가봐야 피밖에 볼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나름대로 행복합니다. 그러니 그냥 저를 놔두십시오.> <그런가? 본좌가 괜한 소리를 했군. 그래, 자네가 곁에서 지켜본 내 딸은 어떻던가?> 전룡은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피워 올리며 대답했다. <제가 지금까지 모신 분들 중 최고셨습니다.> <허허헛, 그랬단 말이지? 과연 본좌가 딸 하나는 제대로 택한 모양이군. 그럼 잘 있게. 행복하기를 빌겠네.> <안녕히 가십시오, 교주님> 묵향은 전룡을 만나고 이 피에 절은 강호에 저토록 의리있는 인물이 남아 있다는 것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자신이 존재할 때 충성을 바치는 인물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자신이 없어지자 마교는 어떻게 되었는가. 마화등 몇몇 인물은 충성을 다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도 컸다. 예를 들어 관지가 묵향이 사라진 후에도 그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그것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온건파인 그는 마교의 무시무시한 힘이 강호를 덮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자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실종된 교주가 돌아오는 그날까지 현 상태를 유지하자는 묵향파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런식의 복합된 이유가 존재해서 충성하는 것 처럼 보이는 것과 순수한 충성심 혹은 대가 없는 의리는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묵향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줬다. 그날 저녁, 기절해 있는 진팔을 간호하던 소연의 뇌리를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그 다음은 놀라운 무공을 지켜보느라 잡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듯 시간이 남게 되니 자연 그녀의 사념은 점차 한곳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분이 설마 양부가 아니실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도 닮은 꼴이 아닌가. 그녀가 묵향을 만난 것은 지금까지 세 번 있었다. 한 번은 처음 묵향을 만나 그의 양녀가 되었을 때다. 아마도 그녀의 인생에서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다음은 사형들과 몽땅 다 마교에 잡혀 들어갔을 때다. 그때, 양부가 선물한 장신구는 지금까지도 그녀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걸보면 그분께서는 마교에 몸담고 계신 것이 확실했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직책을 지니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번, 그녀가 양부를 만났을 때....그녀는 장인걸에게 잡혀 들어가 모진 고초를 당한 후였기에 양부를 회상하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그녀 자신이 그곳에 왜 잡혀 들어갔었는지 그리고 왜 자신이 이렇듯 순순히 풀려나왔는지 그것조차 이해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야, 내가 무슨 생각을......" 소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애써 부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양부께서 마교의 교주라니.... 중원 최강의 고수이며, 암흑마제라는 극악무도한 패륜아가 그분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양부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부인했지만, 사려깊은 그녀의 사념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가능성도 있어. 천지문이라는 작은 문파가 마교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 이런 식으로 마교의 보호를 받고 있는 문파는 천지문뿐이라는 것. 아빠가 마교 출신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을 함께 뭉텅그린다면 그분이 아빠일 가능성도 있잖아. 아빠가 교주 정도의 고위 직책을 지니지 않고 계시다면 천지문과의 동맹을 맺을 수 없었을테니까 말이야. 만약 동맹이 한중길 교주 혼자만의 작품이라면 새로이 교주가 바꾸 ㅣ면서 그런 거는 하루아침에 파기되어버렸을 거야. 그걸 보면 현 교주도 천지문과 뭔가 연관이 있다는 말 틀림없어. 그분이 양부야.'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던 소연은 기다리기로 했다. 양부가 자신에게 정체를 밝히기를 말이다. 그분이 자신에게 양부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 것은, 그 말을 꺼내지 못할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테니까..... 매일 당해야 하는 진팔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모두들 그날 하루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교주와 진팔간의 비무는 그 후로도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 교주에게 진팔을 두들기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두들겨 맞는 양에 비례하여 진팔의 실력은 급상승하고 있었다. 두들겨 맞는 것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그가 배우는 속도는 매우 빨라졌다. 안 맞으려면 할 수 없던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을 동작으로 일치시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곧장 몽둥이가 날아오는 것이다. 빡! "크어어어억!" "빨리 일어서."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진팔은 몸을 재빨리 일크켰다. 뭉그적거리다가는 몽둥이가 또 날아온다는 사실을 잘 아는 것이다. '이런 시팔! 차라리 나를 죽여라. 네놈이 나하고 무슨 철전지 원수를 졌다고 이토록 사람을 핍박한단 말이냐.' 속마음은 그랬지만 차마 그걸 말로는 표현하지 못했다. 만약 말로 내뱉었을 때 그 후환이 얼마나 클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희대의 고수가 자신에게 한수 지도해준다는 말에 그저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시작한 비무였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나서 보니 이건 사람잡는 최악의 고문이었다. 만약 이쪽에서 움직임을 멈추면 곧장 다가와서 무자비한 몽둥이질을 가한다. 안 맞으려면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일단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만 하는 거야. 한 번 승낙한 이상 네녀석한테 선택권은 없어. 본좌가 이제 그만 됐다고 할 때까지 무조건 비무를 해야만 해. 도망가면 어쩌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포기하는 게 좋을거다. 만약 네놈이 도망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이 몽둥이로 패 죽여주마. 그리고 저기 서 있는 네놈의 사저라는 저 계집도 덤으로 저승길 동반자로 만들어 주지.> 교주의 살벌하기 그지없는 협박이었다. 물론 묵향은 소연이 듣지 못하게 어기전성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했고, 진팔에게 그 협박은 절대적으로 먹혀 들어갔다. 묵향이 덤으로 죽여버리겠다고 우연히 끼워 넣은 소연은 진팔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진팔이 그녀에게 피해갈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진팔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또다시 교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도망가는 것은 애시당초 글렀고, 남은 것은 한대라도 적게 맞도록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지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맞은데 또 맞지 않기 위해 별의 별 수를 다 쓰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몽둥이를 피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그 순간 사력을 다해 몸을 틀어 지금까지 안 맞은 장소에 몽둥이가 꽂히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까지 부리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움직임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정작 그 자신은 그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정말 놀라운 일이로다." 옆에서 만통음제가 중얼거리자 소연의 시선이 그쪽으로 살짝 돌아갔다. "저렇듯 강제로 무공을 주입시키는 방법이 존재할 줄이야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약간의 깨달음을 얻어 그것을 아직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저런 식으로 강제적으로 그것이 소화되게 만든다. 기발한 착상이야. 노부도 그런 방법을 진작 알았다면 그놈을 몇 단계는 위로 끌어올려 놨을텐데, 안타깝구먼." 아마도 냉파천이 이 말을 들었다면 기겁을 했겠지만, 소연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렇게 극심한 몽둥이지를 당하고 있는 사제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하루하루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 가는 사제의 무공을 봤을 때 그녀는 한편으로 부럽기까지 했다. 만약 비무하는 상대가 사제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을가? '사제 열심히 해. 아빠는 나에게 최고의 무공을 보여주기 위해 사제를 택한 모양이지만, 사제도 이것을 기회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야. 만약 아빠가 나를 비무 상대로 삼아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진팔의 움직임은 며칠 전과 비교도 할 수없을 만큼 발전해 있었다. 잘 연결되지 않아 버벅거리던 초식들이 지금은 제법 부드럽게 연결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게 진팔이 발악할수록 교주가 시전하는 초식의 교모함도 그 정도를 한층 더 깊게 했기에 하루에 두들겨 맞는 양으로 따진다면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진팔은 자신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그 마음 속에는 해묵은 원한까지 더해서 교주에 대한 악감정만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중이었다. 동경과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소연이 비무를 관찰하고 있을 때, 만통음제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자네는 교주를 어떻게 생각하나?"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교주를 어떻게 생각하느냔 말이다. 극악무도한 자라는 소문이 항간에 파다하게 퍼져 있지만, 한 며칠 지켜봤으니 그게 완전히 헛소문임을 자네도 잘 알 걸세. 만약 그런 자라면 노부가 의제를 삼지도 않았겠지." "예, 저도 그런 풍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뵈니 소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되는지 알겠더군요." 그 말에 만통음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상대방도 동생에게 약간의 호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에.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내 듣자하니 자네는 아직까지 홀몸이라면서?" 갑자기 만통음제가 왜 그 말을 꺼냈는지 몰랐기에 소연은 당홍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예? 예." 만통음제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어떤가? 자네가 정파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지만, 천지문과 마교는 그렇게 동떨어진 곳도 아니지 않는가? 동생은 자네가 마음에 있는거 같던데, 자네 의향은 어떤지 묻고 싶구먼." 그 말에 소연은 엄청난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또 무슨 소린가? 양부와 혼인을 하라니 말이다. "좀 소문이 안 좋게 퍼져 있어서 그렇지 저만한 신랑감을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닐 걸세." "저 분의 뜻인가요? 아니면..." 소연이 그 질문한 의도는 생각하지도 않고, 만통음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생의 눈치를 보아하니 그가 소연에게 상당한 호감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동생의 의향을 물어본 후에 자네에게 하는 말일세. 동생은 자네가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던데..." 그 말에 소연은 당황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저... 죄송합니다, 대협." "왜 그러는가? 그가 마교도라서 그러는가?" "그건 아닙니다. 대협. 예전부터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말에 만통음제는 아쉬움이 잔뜩 배인 어조로 댑답했다. "허어. 그런가? 하기야... 마움에 없는 사람하고 함께 살라고 할수도 없는 노릇이지." 미안하다는 투로 만통음제가 대답했지만, 소연은 그 말을 들을 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결혼을 제의해 오다니...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말인가? 그가 만약 자신의 생각대로 양부라면, 결코 결혼을 제의해 올 리가 없지 않는가. 추혈광마 양양성에 모인 화경급 고수들을 총동원하여 마교 교주를 때려 잡으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난 후, 수라도제는 비밀리에 몇몇 문파의 수장들을 소집했다. 물론 수라도제가 교주를 때려잡겠다는 야무진 꿈을 아직까지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모인 신검합일급의 고수들을 총동원할 수 있다면 교주가 아무리 현경급에 준하는 고수라 해도 능히 처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교주 1명만이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옆에 언제나 만통음제가 따라다닌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이 죽자고 싸워준다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겠지만, 도망치려고만 작정 한다면 현재 동원 가능한 수의 3배가 넘는 신검합일급의 고수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잡을 방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 일당들른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기회는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허어, 참 일이 고약하게 되었구먼." 만통음제가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생각해봤을 때, 정찰이라든지 적진시찰 같은 임무를 주어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또. 그의 경우 휘하에 상당한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일정구역을 책임지고 맡아달라고 하며 보내 버릴 수도 없었다. 수라도제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속앓이만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으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때,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기에 약간 짜증스런 어조로 외쳤다. "무슨 일이냐?" 그 말에 오늘 경비책임을 맡은 무사가 살짝 문을 열고 들어와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장 사령이 호위무사를 부탁하러 왔습니다.태상문주님." "호위무사를? 무슨 일인데 그런 부탁을 한다고 하더냐?" "예, 방금 전에 자신을 흑풍대 소속의 무사라고 소개한 자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흑풍대라......." 그게 어떤 단체인지 잠시 생각해보던 수라도제의 머릿속에 흑색 갑주를 걸친 당당하기 그지없는 흑풍대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기까지 함께 왔다가 자신들은 이곳에 머물렀고, 그들은 금군을 추격해서 앞서나갔다. 아마도 그가 전령을 보내 온 모양이다. "그래서?" "예, 그자는 악비 대장군을 면담하기를 청하고 있다고 하더이다. 그런데 그들은 흑풍대라는 단체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데다가, 그가 흑풍대를 사칭한 적의 첩자일수도 있기에 호위를 요청한 모양입니다." "알겠다. 노부가 직접 가보기로 하지." "태상문주님께서 친히 말씀이십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속하가 무공이 뛰어난 자들로..." 수라도제는 손을 들어 상대의 말을 막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니 됐네. 그에게 가서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야." 장 사령의 안내를 받아 수라도제가 가보니 흙먼지가 잔뜩 끼어 있어 희뿌연 회색으로 보이는 갑주를 걸친 인물이 서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초조한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수라도제는 첫눈에 상대가 상당한 수준급의 고수라는 것을 파악했다. 잔잔한 가운데 폭발적인 기도를 내뿜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다른 사람은 먼지에 싸인 더러운 갑주만을 봤겠지만, 수라도제는 먼지 속에 감춰져 있는 핏덩이를 봤다. 도데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육했는지 그의 갑주 전체가 검붉은 핏덩이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저런 살귀가 전령일 가능성은 없었다. 전령으로 보내오기에는 실력이 너무 뛰어난 자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뭐란 말인가? "흑풍대에서 왔다는 자가 자네인가?" "예." 안면보호대에 가려져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사내인줄 알았건만, 놀랍게도 여성의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느껴 졌다. "무슨 일인데 악비 대장군을 만나는 것인지 노부에게 알려줄 수 있겠는가?" 상대는 수라도제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투구 사이로 나와 있는 눈동자를 예리하게 빛내며 되려 질문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새파란 젊은 것이 와서 노부 어쩌구 하고 있으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귀하는 누구십니까?" "사람들은 노부를 수라도제라고 부른다네." 그 말에 상대는 군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대협의 존성대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악비 대장군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군사적인 문제기에 대협께 드릴 말씀은 아니라고 판단 됩니다." 옆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장 사령이 도중에 끼어들었다. "서문 대인, 저자가 주장하는 대로 흑풍대 무사가 맞습니까?" "복색만으로 본다면 흑풍대 소속의 무사가 맞소이다. 천마신교라고 불리는 무림의 단체에서 파견한 9천의 정예들이지요." "9천이라고 하셨소이까?" 장 사령은 기절할 듯 놀랐다. 9천이라는 수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수라도제가 이끌고온 무림인들의 가공할 만한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본 장 사령이었다. 그런 자들이 9천이라면 엄청난 힘이 아닌가?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코 흑풍대 무사를 홀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장 사령은 급히 흑풍대 무사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대장군께 연락드리리다." 장 사령이 달려가고 난 후, 수라도제는 흑풍대 무사에게 은근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노부는 자신을 밝혔는데, 아직 자네의 소개를 못들었네만 . 알려줄 수 없는 겐가?" "저는 흑풍대 부대주를 맡고 있는 마화라고 합니다." "부대주라고? 허, 놀랍구먼. 자네에게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노부는 지금까지 평생을 천마신교와 싸워왔다네." ".............." 도데체 수라도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마화는 의심 가득한 눈길을 상대에게 보냈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런데 요 근래 들어 지금까지 노부가 마교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제대로 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껏 싸워왔던 천마신교의 하부단체들과 자네들은 너무나도 다르니 말일세." 그 말에 마화는 잔잔한 어조로 대답했다. "서로가 추구하는 이상이 다르니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교는 힘을 숭상할 뿐, 정파에서 생각 하듯이 악에 물든 무리들은 아닙니다. 물론 본교에도 악질적인 인간들이 간혹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파 쪽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건 노부도 인정하는 바일세. 정파라고 자처하는 놈들 중에서도 되먹지 못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어쨌거나 귀교와 정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음이야." "..........." "..........." 그런 다음 오랜시간 침묵이 흘렀다. 얘기를 주도하고 있던 수라도제가 입을 열지 않자, 마화 또한 괜히 모르는 사람과 수다를 떠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자연 침묵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침묵이 깨진 것은 요란한 갑주소리를 내며 다가온 송군 장수들 때문이었다. "귀하가 흑풍대에서 파견되어온 사람인가?" 악비 대장군은 여태껏 보아온 무림인들의 모습과는 전혀 생소한 모습의 마화를 보며 의아스러운듯 질문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렇듯 중무장을 갖춘 무림인은 처음 봤던 것이다. 마화는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악비 대장군이십니까?" 마화의 군례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악비 대장군은 상대가 어쩌면 군부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본관이 악비일세. 그래, 본관에게 급히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다고 했던가?" "예, 이틀 전까지 본대는 양양성에서 퇴각하던 금군을 추격하여 지속적인 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왜 그렇게 금군 쪽에서 양양성에 대해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는지 그제서야 이해한 악비 대장군이 놀라워했다. "오오, 그랬었는가?" "예, 그런데 50만에 달하는 금군이 남하해 오면서 지금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적의 군세가 워낙 엄청나 본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인지라 그것을 전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새로운 적의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에 악비 대장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50만의 적이 새로이 가세했다는 말인가? 그래, 놈들의 움직임은 어떤가? 언제 양양성에 도착하겠는가?" "그들은 본대에게 쫓기던 금군과 합류한 후,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방책을 치며 방어상태를 굳건히 하는 것으로 보아 곧바로 움직일 의사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행동을 시작하는 것은 다음해 봄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대주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본관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둘이 합쳐졌다면 물경60만에 달하는 대군이 되니, 초목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봄이 되기 전까지는 움직이기가 쉽지 않겠지." 잠시 뭔가 생각에 잠겨있던 악비 대장군은 마화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래, 흑풍대주는 어떻게 행동하겠다고 하시던가?" "곧 겨울이 다가오니 조만간 양양성으로 퇴각하시겠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본관도 그게 좋을 듯하구먼." "그리고 흑풍대주께서 대장군께 한 가지 청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뭔가? 본관이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겠네." "각 곳에 주둔중인 송군 진영에 흑풍대의 존재를 천마신교 소속이 아닌 황군 소속의 기마대로 해달라는 청이셨습니다." "이상한 부탁이로군 . 꼭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라도 있는가?" "현재 금군을 지휘하는 장수는 본교의 반역도입니다.만약 그자가 본교에서 고수들을 이곳에 파견했음을 안다면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게 됩니다. 하루라도 빨리 금을 정벌하기를 원하신다면 대주님의 청을 들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잠시 궁리하던 악비 대장군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대주님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편의상 흑풍대는 대장군님의 명령을 받는 것으로 하고 본대에 대장군님의 인장이 찍힌 공식문서를 소지한 전령을 보내주십시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다소 귀찮으시더라도 공식적으로 처리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기왕에 허락한 것인데 확실하게 처리해 줄 테니 염려 놓게나." "옛, 대주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전언을 전했으니, 저는 물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그런 다음 악비 대장군은 옆에 시립하고 서 있는 장 사령에게 명령했다. "먼 길을 달려오시느라 피곤할 텐데 편안한 자리를 주선해 주도록 하게." "옛, 대장군." 철그렁거리는 갑주소리를 울리며 대장군이 멀어진 후, 장 사령은 마화에게 말했다. "본관을 따라오시오.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소이다." "아니, 그것보다 여기에 와 있는 무림인들 중에서 천마신교의 교주님이 계시지 않소?" 그 말에 장 사령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무림인들의 일은 본관이 잘 모르오. 참 여기 계시는 서문 대인께서 그들을 관장하고 계시니 이분께 물어보도록 하시오." 마화가 의문의 눈길을 자신에게 돌렸지만, 수라도제는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교주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를 해치우기에 이번만큼 좋은 기회가 또 있었겠는가. 없애버린 후 그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고 발뺌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을.......... 하지만 이 여인이 이곳에 도착하면서 그 가능성도 이제는 끝이었다 "수라도제 대협, 저희 교주님께서 이곳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밖에 나가서 조금만 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요즘 들어 천지문의 제자 하나를 매일같이 개잡듯 때려 잡고 있다는 것을 성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지금 성 내에는 천지문이 혹시 뭔가 교주의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풍문까지 나돌고 있는 중이 었다. "그러면 지금 천지문의 제자와 한창 비무중일 거라네. 노부를 따라오게. 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줄 사람을 붙여주지." "감사합니다, 대협." 안내자를 소개받은 마화는 먼저 옷가게로 가서 옷부터 구입했다. 요 근래 몇달 동안 야지를 뒹굴며 살아온 그녀였다. 목욕은 물론이고 세탁하기도 힘든 여건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서 썩은 내가 풍기고 있는 상황인데, 그런 옷을 입고 어찌 교주를 만나러 간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몰골을 생각했을 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그 다음으로 행한 행로는 묵향이 기거하고 있는 객잔이었다. 객잔에 도착하여 방을 구한 그녀는 먼저 갑주와 장검에 묻은 피부터 정성껏 닦아 냈다. 그런 다음 기름칠을 골고루 한 후에야, 목욕을 시작했다. 산뜻한 새 옷 으로 단장을 한 마화는 허리에 장검을 차고 밖으로 나왔다. 교주가 있는 곳은 안내자를 돌려보내기 전에 이미 알아둔 상태였기에 그녀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정말 무심하기 그지없다니까. 어떻게 몇 달이 되도록 연락 한번 안 하실 수가 있지? 그 분께서 몽고에서 돌아오셨다는 것도 부교주님께서 연락을 주셨기에 알 수가 있었던 거잖아. 그런데, 부교주님께서 부상을 당할 정도로 강적을 만났던 모양인데, 괜찮으신 건가 모르겠네." 낮은 목소리로 홀로 투덜거리며 길을 가던 마화는 곧이어 건강하기 그지없는 묵향을 볼 수 있었다 "크하하핫! 좀 더 제대로 해봐!" "이런 빌어먹을!" 뻑! "크윽!" "여기도 비었잖아." 빡! "으악!" 매우 즐거운 것 같은 묵향의 모습을 보며 마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도 언젠가 저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옛날에 초 부교주님을 저렇게 신나게 두들겨 패셨었지. 그걸 보면 교주님께서는 저 사내가 마음에 쏙 드신 모양이야. 참, 내. 언제나 애정표현을 저따위로밖에 할 줄 모르다니, 언제 철이 드실지 원....... 쯧쯧, 당하는 사람 입장도 생각하셔야지."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본 묵향이 활달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 마화 아냐. 지겹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더 다져놓고 그리로 갈께." 그 말에 마화는 황당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다져놓다니? 저 양반은 눈 앞의 사내가 고깃덩어리로 보인단 말인가?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 쉬엄쉬엄 하세요. 당하는 사람 입장도 좀 생각 하셔야죠." "무슨 그런 말을. 쇠도 두들겨야 단단해 지는 거야." 그 말에 마화는 기가 막히다는 듯 대꾸했다. "그건 쇠가 아니라 사람인데요." "이거나 그거나 둘 다 똑같은 거야. 잘 연마해놔야 날카로운 무기가 돼지." 한눈을 팔며 마화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진팔을 열심히 쥐어 패는 것을 보면 역시 묵향의 실력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때, 옆에서 소연이 다가오며 마화에게 말을 걸었다. "기다리시기 지루하실 텐데 차라도 한잔 드시겠어요?" 마화는 활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안그래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죠? 옷차림으로 보아하니 시비는 아닌 듯한데........" 그 말에 소연이 살포시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천지문도들을 이끌고 있는 소연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화는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까? 소연이라면 교주의 양녀가 아닌가. 하지만 교주는 그 사실을 감추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진 것. 마음을 정한 마화는 필요 이상으로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천지문이라고? 그 낙양에 있는 천지문 말이냐?" 사실 마화는 성격적으로 아무리 하찮은 인물이라도 이렇듯 다짜고짜 하대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이 상대가 누군지 안다는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그러자면 누가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법한 보편적인 행동을 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화 정도의 지위를 지닌 사람이라면 천지문의 문주라고 해도 그녀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하물며 그문도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마화는 상대가 누군지 잘 알면서 일부러 하대를 사용했다. 그 편이 누가 봐도 자연스러우니까. 그 말에 소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천지문이라면 본교와 약간의 내왕이 있는 관계니, 본녀가 누군지 알려주는 것도 나쁘자는 않겠지. 본녀는 흑풍대 부대주를 맡고 있는 마화라고 한다." 소연이 이곳에 오기 전 흑풍대와 무림연합의 고수들은 연합작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때 소연은 흑풍대라는 것이 마교의 6개 무력세력들 중의 하나라는 말을 수라도제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각 무력세력의 수장들인 대주가 모두 마교의 장로들일 정도니, 그보다 한 단계밖에 떨어지지 않는 부대주의 직위는 얼마나 높겠는가. 천지문의 문도인 자신과 마화라는 이 여인이 지니고 있는 무림에서의 배분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 이나 큰 것이다. 그렇기에 그 말에 소연은 상대의 얼굴조차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더욱 고개를 깊게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차를 올리겠습니다." 조금 지나자 소연은 차를 가져와 마화에게 권했다. 잠시 관전을 하며 차를 마시던 마화는 소연에게 말을 걸었다. 교주의 양녀인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도데체 어떤 여자이기에 교주가 아직까지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교주님과 비무하는 사람도 천지문도 인가?" 별로 할일도 없는 상태였기에 상대가 심심해서 말을 건 것이었다고 해도, 소연으로서는 상대의 질문을 무시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제 사제인 진팔이라고 합니다, 부대주님." "제법 출충한 실력을 가지고 있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아니야. 저 정도 나이에 저만한 실력을 지니기는 어려운 것이지." 상대와 말을 나눈 이유가 어찌되었던간에, 이리저리 대화를 나누다 보니 소연은 조금씩 상대와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상대가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지위에 비했을 때, 상대의 성격이 매우 소탈하고 시원스러웠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간 후......... "하하핫, 아주 재미있군. 그래 자네 결혼은 안했는가?" 왜 마교도인 상대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던 터라 소연은 순순히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혼기를 놓쳤습니다." "그래? 많이 서운해 하셨겠군." "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소연의 동그란 두 눈이 자신을 향한 후에야 마화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편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말이 잘못 튀어나와버린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급히 머리를 굴려 보니 수습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 말은 천지문의 문주, 그러니까 자네의 사부가 서운해 했을 거라는 말이야. 자네의 아이들도 자네를 닮아 무예에 뛰어날 것이 아닌가? 그들이 장차 다음 세대의 천지문을 떠받칠 텐데, 서운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 "무슨 그런 말씀을..., 제가 무공이 뛰어나봐야 얼마나 뛰어나다고요." "본녀가 그 정도도 못 알아본다고 생각했나? 본녀는 지금까지 수 많은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어. 그러다 보면 강한 자를 알아보는 감각이 짐승처럼 예민해지게 되지. 지금까지 내 감각은 틀린 적이 없었어. 단 한번 만 빼고." 소연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말만이라도 상대가 자신을 그렇게 높게 평가해주니 기분은 좋았다. 그렇다 보니 그녀는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그때가 언제인지 물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말을 꺼내놓고 난 후에 소연은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체 높은 상대에게 던질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화는 전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활달한 어조로 대답했다. "뭐 감출 일은 아니니 못 알려줄 것도 없지. 오래전에 본녀가 관부에서 일하고 있을때,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상관으로 부임해 온 적이 있었어. 목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어리숙해 보이는 것이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같았거든." 흥미가 있었지만 감히 대꾸는 못하고 소연은 조용히 귀를 가울였다. "하지만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그자가 세상구경은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죽자고 처박혀서 무공만 익힌 무공광인 줄 내가 알았겠나? 그것도 모르고 대련을 신청했다가 단숨에 묵사발이 난 적이 있었지." "저런......" "사정을 많이 봐줬기에 아무런 상처 없이 끝났었어. 정말 대단하신 분이셨지." "분이셨다고 하시는 걸 보니, 혹시?" 그 말에 마화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어버렸어." 마화의 말도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실상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 사람은 지금의 묵향이 아닌, 과거 몽고벌판을 질타하던 자애로운 묵향이었으니까. "전사....하셨나요?" "전사라고도 할 수 없어. 찬황흑풍단이 해체되던날 . 옥영진 대장군 등 대부분의 고위급 장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어. 살아서 도망간 자들은 반역자의 오명을 뒤집어써야만 했고 말이야." 몽고 원정 때의 각종 고생담, 찬황흑풍단의 몰락, 마교에 입교하게 된 경위 그리고 지금 현재 그녀가 있기까지의 여러가지 일들을 마화는 재밌게 들려줬다. 그녀는 교주의 딸인 소연과 조금 더 가깝게 지내보고 싶었던 것이다. 과연 소연이 알고 있는 묵향은 또 어떤 사람인지 그것도 궁금했고 말이다. 소연도 어느덧 마화의 화술에 끌려들어가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게 되어버렸다. 두 여자는 진팔이 무자비하게 두들겨터지는 장면을 감상하며 서로의 과거를 나눴다. 그 대부분은 추억거리 정도로 치부될만한 쓸모없는 대화들이 었지만, 그녀들 간의 친분을 깊게 만드는데 상당한 도움 이 되었다. 서로 간에 이런저런 많은 대화가 오고간 상태였던 탓인지, 소연은 잠시 주저주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혹시 외람된 부탁이기는 하지만, 사람 하나를 알아봐주실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왜 그런 부탁을 본녀에게 하는 것이지? 무영문이나 개방 쪽이 훨씬 빠를 건데...." "왜냐하면 그분은 천마신교에 소속되어 계셨거든요. 아주 오래전에 그곳에 갔다가 만난 적이 있었죠. 그때 그분이 선물하셨던 장신구를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걸요." 소연이 마화에게 이런 말을 꺼낸 것은 교주가 진짜로 자신의 양부인지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만약 진짜 그가 양부라면 어떤 형태로든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호, 정파의 고수인 자네가 본교의 고수와 친분이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군. 그래, 본녀가 알아봐주도록 하지. 그래, 그 사람의 이름은 뭐지?" 소연은 추억어린 어조로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유향이라고 합니다. 도저히 무인의 이름같지 않으니 오히려 찾기가 쉬우실 거예요." 마화가 마교 내에 있은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유향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기억도 없었다. 하지만 마교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있으니 그런 인물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향이라고? 남자 이름인 것 같은데........ 혹시 한때 사모했던 남자인가?" 그 말에 소연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 제 양부셨어요.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그분을 기다리셨는데, 결국은 나타나지 않으셨지요.어떻게든지 그분께 연락을 넣어보려고 했지만 천마신교라는 단체가 워낙 비밀에 싸인 곳이라 알아볼 방법이 없었죠.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부대주님이시라면 혹시 알아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염치없지만 용기를 내어 부탁 드리는 겁니다." 양부라는 말에 마화는 유향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소연을 만났을때 교주는 유향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아무리 오랜 세월 이리저리 알아봐도 유향이라는 고수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걸 말을 해줘야하나 말아야 하나........... 마화는 내심 난처 했지만 겉모습만은 시원스럽게 승낙했다. "좋아. 본녀가 총타에 기별을 넣어 알아보도록 하지. 그러자면 조금 시간이 걸릴 거야." 총타가 아니라 저기에서 진팔을 때려잡느라 광분하고 있는 교주에게 물어본 후 그의 결정을 기다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어쨋거나 저들 부녀 간의 일이니까 말이다. 마화는 슬쩍 만통음제를 훔쳐본 후 묵향을 향해 말했다. "교주님, 잠시 따로 얘기를 드리고 싶은데요." 그 말에 묵향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본좌의 의형이시니, 외인이라고 할 수 없지. 말해봐." "소 소저의 일은 계속 이런식으로 끌고 가실 겁니까?" 설마 마화가 양녀 얘기를 꺼내고 나올 줄은 생각도 못해본 터 였기에 묵향은 난감 했다. 이 일은 최대한 기밀을 지키는 것이 좋았는데 말이다. 만통음제를 못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연에 대한 것이라면 조금 얘기가 달라 진다. 묵향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난처 한 듯 대꾸했다. "어흠! 그건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지." 하지만 마화의 대응은 단호했다. "아뇨. 지금 하는 것이 좋겠어요. 소 소저가 유향이라는 사람이 마교에 있을 텐데 그에 대해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말에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오래 전에 자신이 사용한 가명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유향이라고? 그게 누구지?" 마화는 기가막히다는 듯 대꾸했다. "자기가 사용한 가명도 잊어버리셨냐요?" 그 말에 묵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화의 말은 그녀가 지금 자신에 대해서 수소문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뭣?" 묵향은 예상치 못한 마화의 말에 적잖이 놀란 듯했고 만통음제는 옆에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눈을 빛내며 듣고 있었다. 그리고 저 옆에서 차를 장만하고 있는 설취 또한 숨소리마저 죽이고 엿듣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묵향이 마화를 제지하기도 전에 마화의 말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또 다른 일도 아니고 소연에 대한 것이었기에 묵향도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교주님께서 그녀를 끔찍이도 아끼신다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기회를 빌어 그녀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알아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어" 딱 잘라 말하는 묵향을 향해 마화는 다시 한번 설득하기 시작 했다. "그녀는 교주님의 단 하나뿐인 양녀가 아닌가요? 그녀를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시면서도 그녀를 위해 끊임없이 참고 계신다는 것을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그녀도 교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러니 이 기회에." 소연이 묵향의 양녀라는 사실에 만통음제와 설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만통음제의 놀라움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그는 그것도 모르고 월하노인을 자처하여 소연에게 다리까지 놓으려고 했었으니 말이다. "이런! 양녀라고?" 만통음제의 외침에 묵향의 고개가 그쪽으로 획 돌아갔다.깜빡 잊고 있었는데, 객식구들이 자신의 가장 은밀안 부분에 대한 대화를 훔쳐듣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묵향과 눈길이 마주치자 만통음제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우형은 그런지도 모르고 중신을 선다고 나섰었구먼. 이런 실수가 있나..........." 묵향은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중신을 선다고요? 설마 그런 말을 꺼내신 거는 아니겠죠?" "벌써 했는데...당사자에게 직접 말일세. 어쩐지 너무 당황하는 것 같더라니.....어쩌면 그녀도 조금은 자네에 대해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젠장, 약간은 눈치챈 것 같더라구요?" "우형이 보기에는 그랬다네." 옆에서 듣고 있던 마화가 마침 잘 되었다는듯 끼어들었다. "소 소저도 벌써 눈치챘다면 잘 되었네요. 이 기회에 교주님께서 양부라고 당당하게 그녀에게 밝히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말도 안되는 소리! 정과 사는 도저희 어울릴 수 없는 집단임을 잘 알지 않느냐? 아비가 모든 정파인들이 치를 떠는 극악무도한 암흑마제라는 사실을 그 애가 제데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냑 그 애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손 치더라도 주위에 있는 자들은 결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녀가 본교에 들어온다면 그 누구도 그녀를 손가락질 하지 못할 거에요" "그 아이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돼." "만통음제 어르신도 그녀가 어느 정도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 하신다잖아요." 잠시 머리를 굴리던 묵향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오히려 그게 더 잘 되었군. 한가지 얘기를 지어내는 거야. 형님도 조금 도와주셔야 되고 말입니다. 형님은 한 번 더가서 중신에 대해 얘기를 꺼내주세요. 교주가 너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다시 왔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화 너는 가서 유향이라는 인물이 전사 했다고 전하는거야." "예? 전사했다고요?" 묵향은 고개를 끄덕안 후 자신이 방금 생각해낸 줄거리를 말해줬다. 그런 다음 그는 만통음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뭔가 얘기에 허점이 있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만통음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제법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만약 그토록 뛰어난 인물이라면 그 이름을 꺼내자마자 마화가 알아들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묵향은 아차 싶은지 탄성을 지르며 대답했다. "헛,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그렇군! 명호가 있었어. 명호를 하나 지어서......그러니까 추혈광마가 좋겠군 척 들어봐도 마교 냄새가 물씬 풍기니까 말이야." 추혈광마. 피를 쫓는 미친 마귀라는 말이 아닌가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것 같았기에 마화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도 그녀가 사랑하는 양부인데 너무 심한거 아닐까요?" 하지만 묵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별로 심할 것도 없어. 오히려 충격적인 명호를 쓰면 정신이 산란해져서 쓸데없는 잡생각을 못하게 되지 그래, 그 명호로만 말했다면 금방 알아들었을 텐데 본명을 밝혀서 네가 못 알아들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총타에 연락을 넣어 답을 받느라고 늦었다고 말이야. 그러면 충분히 대답이 되잖아." 옆에서 듣고 있던 만통음제는 감탄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그런데 오늘 동생을 다시 봤는걸? 담백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이토록 책략을 잘 세울 줄은 미처 몰랐네 그려." 뻔뻔스럽게도 묵향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뭐, 보통이죠 제가 이런데는 머리 회전이 좀 빠르거든요." 자화자찬을 한후, 묵향은 마화를 향해 말했다. "가서 그렇게 말해. 말할 때 표정관리만 잘 하면 믿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마화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좋아요 하명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죠. 하지만 이 얘기는 꼭 해야겠어요." "뭔데?" "그녀에게 상승의 도법을 가르치시고 싶다는 교주님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거기에다가 진 공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너무할 것까지야 있겠느냐? 그 놈도 뭔가를 얻는게 있을 테니 서로가 좋은 것이겠지." "서로가 좋다구요? 그건 순전히 교주님 생각이시겠죠 뭔가 얻는 게 있기 전에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자살해버릴지도 모른 다구요. 만약 뒤가 그렇게 끝난다면 소 소저는 교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묵향은 그 정도 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 극악무도한 마두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겠지. 소문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말이야. 지금껏 본좌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은 망설임 없이 처리해 왔다. 그놈이 죽어도 할 수 없는 것이겠고 그놈이 뭔가를 얻어도 상관 없는 일이다. 본좌가 원하는 것은 그 비무를 보고 소연이가 한 차원 높은 무예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잡아주는 것 더 이상은 기대도 하지 않아." "그렇다면 그렇게 간접적으로 하지 마시고 소 소저와 직접 비무 하시는 것이 빠르지 않겠어요? 엉뚱한 사람 골병들이지 마시고 말이에요." "그녀석이 남자만 되었다면 그렇게 했겠지.그런데 아무리 생각 해도 어디 한군 데라도 팰 데가 있어야 말이지." 묵향의 황당스런 대답에는 마화도 두 손 들어버렸다. 언제는 상대를 두들겨 패는 데 있어서 남녀를 가렸던 사람이었나? 그걸 뻔히 아는데, 저딴 소리를 하다니 말이다. "정말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요." "알았으면 이제 그 얘기는 끝내자구."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묵향은 슬쩍 뒤돌아서서 방문을 열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술 마시러 간다." 옆에서 묵향과 마화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만통음제나 설취는 뭔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상관과 부하 간에 비밀스런 얘기를 엿들은 기분이 아닌, 꼭 뭔가 부부싸움 하는 장면을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한바탕 언쟁이 끝난 후 실내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뒤숭숭했다. 묵향이 나가고 난 후 마화는 장검을 꺼내어 닦기 시작 했다. 아무리 봐도 티끌 한점 없어 보이는 장검을 비단천으로 닦고 또 닦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기분해소 방법인 모양이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기에 장검을 닦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사부님께서도 사숙 어른과 함께 술이나 드시고 오시면 어떻겠어요?" 실내의 분위기가 너무 칙칙하여 난감하던 터에 제자가 그런 부탁을 해오자 만통음제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노부가 제자 하나는 정말 잘 뒀지. 어쩌면 저렇게 총명한지......마침 술 생각도 나는데 잘 되었군, 흐흐흣.' 만통음제는 점잔을 빼며 중후한 어조로 제자에게 대답했다. "허어 노부가 그 생각을 못 했구나 동생이 쓸쓸하게 혼자 마시고 있을 텐데 노부는 동생의 기분이나 풀어주러 가볼까?" 사부가 나가고 난 후 이제 여자들만 남게 되자 설취는 시원스런 어조로 마화에게 말을 걸었다 "마 소저 당신이 한 제안이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교주님도 잘 아실 꺼에요. 그만 기분 풀어요. 우리 술이나 한잔 할까요?" 마화는 억지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는 교주님이 제 말을 안 듣는다고 가분 나빠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는 예전부터 남에말은 잘 안듣는 사람이니까요." 여자들끼리 남아 있다 보니 훨씬 대화하기가 편했다. 더군다나 점소이가 술과 간단한 안주거리까지 가져오자 분위기는 더욱 무르 익었다. "그분은 겉보기와 달리 너무도 마음이 여리시거든요. 자신의여린 마음을 숨기기 위해 언제나 괴팍스럽게 행동하시죠 퉁명스럽게 말하고 못된 행동을 하시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못해요. 그분이 그런 행동을 할때는 다 이유가 있죠. 소 소저 일로 얼마나 슬퍼하시고 계시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마음이 아프군요." 마화와 대화를 나누면서 설취는 마교 교주 로서의 묵향이 아닌 아주 인간적인 묵향을 만날 수 있었다. 과거 그녀의 풋사랑이었던 묵향을 말이다. 설취는 마화의 말을 들으며 과연 그 남자에게 자신이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종남파의 멸문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는 종남산 기슭에는 거대한 문파가 자리잡고 있었다 9파1방에 들어갈 정도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도가계열의 그 문파가 바로 종남파다 종남파는 무림맹에 500이 넘는 고수를 파견하고 있었고 특히 공동파가 득세하고 있었던 무림맹에서 맹호검군 백량이 공동파 출신의 입지를 튼튼하게 굳혔다. 그런데 하지만 호다사마라고 했던가. 요 근래 종남파에는 좋지 않은 일만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백량 장로가 자파출신의고수 100명을 이끌고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전원 사망시킨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말이 쉬워 100명이지 그만한 고수 100명을 키워내는데 들어가는 세월이 하루 이틀인가. 무림맹에는 상당수의 종남파 고수들이 파견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그 속식을 들은 후 종남파는 추가로 또다시 100명의 고수들을 파견했다. 무림맹에서 자파의 영향력을 쥬지하게 위해서는 잃어버린 100명분의 전력을 충당해줄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참에 양양성에서 금군과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자 종남파는 태을검군 송류 장로에게 1천여명의 고수들을 주어 그곳에다가 파견하는 대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종남파가 이보다 적은 수의 고수를 파견한다면 9파1방의 대열에 끼인 거대문파가 겨우 그 정도 밖에 파견하지 않았다고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도 있었기에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래저래 종남파 내에 남아 있는 실력 있는 고수들의 수가 적은 이때, 종남파에는 크나큰 위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배치는 끝났느냐?" "옛 교주님 하명만 하십시오" 장인걸은 저 멀리 수풀을 뚫고 솟아 있는 웅장한 건물들을 보며 슬쩍 비웃음을 던졌다. 설마 자신이 이 먼 종남파 까지 곧장 달려 올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아 시작하거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웅후한 내공이 포함되어 있는 긴 휘파람 소리가 종남산에 울려퍼졌다. 그 장소성에 맞춰 종남파를 포위하고 있는 1천의 달하는 무사들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엄청난 기세로 달려가는 50여명에 달하는 무인들은 무시무시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바로 장인걸이 거느리는 천마혈검대 소속의 고수들인 것이다. 장인걸은 수하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한참동안 구경한 후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장문인의 목은 본좌가 직접 베어주는 것이 예의겠지? 흐흐흐흐" 잠시후 평화롭기 그지없던 종남산은 아비규환의 혈전장으로 바뀌어버렸다. 소연이 마화에게 묵향이라는 인물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 지 며칠이 경과한후 마화는 소연에게 묵향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녀가 며칠이라는 시간을 끈 이유는 양양성에서 마교 총타로 연락을 보내는 데 걸리는 시간 총타에서 조사하는 데 필요한 시간 그리고 답장을 보내오는데 걸리는 시간을 모두 합하여 상대가 타당하다고 여길 정도의 기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소연이 그날 마화를 만날때, 그녀는 마화의 돌연한 행동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흑풍대의 부대주인 마화가 그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흑풍대 부대주 마화가 소 소저를 뵈어요" 그 말만으로도 소연은 마화가 자신에게 양부에 대한 답을 해주러 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마화 간은 사람이 자신에게 이토록 존칭을 쓰며 인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연으로서는 마화처럼 지체 높은 무림 고수들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게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갑자리 왜 이러세요? 그런 인사는 도저히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소연의 마음속에는 마교 교주가 양부일거라는 확신이 서서히 들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있어서 마화로 하여금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 소저의 양부께서는 제가 너무나도 존경했던 분이셨으니까요." 분이셨다는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양부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설레임에 소연은 다급히 질문을 덨졌다. 드디어 양부의 소식을 듣게 외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총타로 부터 답신이 왔군요" "예, 소 소저께 그분의 본명보다는 추혈광마라는 명호를 대셨다면 총타에서 회답을 받는다고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지 않았을 텐데." "추혈광마. 그분의 명호가 추혈광마셨나요?"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명호에 소연은 혼이 다 빠져나가는 듯 했다. 소연은 그 명호 한마디로 자신에게 드토록 다정했던 양부가 마교내에서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능히 상상할 수가 있엇다. 사실 교주가 두번에 걸쳐 만통음제를 매파로 내세워 자신에게 청혼을 했왔을때, 이미 그가 양부가 아닐 수도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것에 대해 크게 실망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예, 소저는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저 이런 말씀드리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분의 명호를 몰랐어요" 이제야 이해가 단다는 듯 마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러셨군요" 그런 마화의 표정을 살피며 소연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분께서는 건강하신가요?" 질문의 받은 마화의 표정에 잠시 당혹감이 어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마화가 이윽고 결심한 듯 말했다. "그분께서는 돌아가셨어요" 사실 마화가 머뭇거린 이유는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해야 한다는 양심상의 문제로 생긴 당혹감이였지만, 소연은 그 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뭔가 말하기 힘든 이유가 있다고 생각 하는 순간, 양부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소연은 왜 마화가 잠시 머뭇거렸는지 이해할수 있었다. 그리고 마화의 말은 그녀의 깊은 슬픔으로 몰고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소연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예? 돌아가셨다고요? 그렇다면 언제... " "소 소저는 아실지 모르지만 장인걸 교주와 교주님간의 내분이 20여년쯤 전에 본교를 벌어졌었죠. 추혈광마 선배님께서는 가장 치열한 내전에 벌어졌었던 총타 기습 작전 때, 장인걸 휘하의 수라마참대 고수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셨어요. 선배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그분이 세운 전공이 워낙 뛰어난 것이기에.. 교주님께서는 그분에 대한 자그마한 사례로 과거 그분께서 이뤄놓으신 것을 아직까지도 유지시키고 계시죠." 그런 말은 들어본 것도 처음이기에 소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예? 그건 무슨말씀이신가요?" "역시 소 소저도 그건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천지만과의 협정을 말하는 거에요. 추혈광마 선배님게서 천지문과의 협정을 주도하신 모양이더군요. 저도 지금껏 무슨 이유로 본교가 천지문과 불합리한 협정을 지속하고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소 소저 덕분에 그 의문을 풀게 되는군요. 설마 그분께 양녀게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었거든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방울씩 눈물을 흘리는 소연을 살짝 껴안으며 마화가 말했다. "선배님의 양녀이니 같은 식구로서 한마디 충고를 드리자면... 그분이 소저의 양부라는 사실을 절대 입밖에 내지마세요. 선배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결코 소저를 좋은시선으로 보지 않을 거예요" 소연이 양부의 사망소식을 들은 다음날, 제 일선에서 금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던 흑풍대가 회군해 왔다. 그들이 성문을 통과해서 당당하게 들어올때 양양성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거대한 덩치의 전투마를 타고 중갑주로 무장한 흑풍대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9천기에 달하는 인마의 모습은 오랜 전투를 치르다가 귀환한 자들답지 않게 너무나도 용맹스러워 보였다. 모두들 얼마나 야지 생활을 오래했는지 갑주는 빛을 잃고 더럽기 그지없었지만, 그들이 타고 있는 거친 콧김을 내뿜는 난폭해 보이는 전투마의 털은 윤기가 흐로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그들이 자신의 몸보다 전투마를 우선적으로 관리해왔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흑풍댕의 대열은 성 내에 마련된 광장까지 이어졌다. 그곳에서 악비 대장군을 비롯한 양양성 내 중요무관들이 흑풍대의 선전을 치하하고 위로하기 위해 기달리고 있었다. 관지 장로는 멀리서부터 악비 대장군의 못브을 확인한 후,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관지 장로는 절도있게 군례를 올린후 말했다. "이렇든 대장군께서 몸소 마중 나오시어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무슨 말씀을.... 황실을 위해 이렇듯 몸 바쳐 일하시는데, 마중 한 번 나온 것이 무슨 큰 대수이겠소이까?" "아무리봐도 오랫동안 군문에 몸담으신 것 같은데, 과거 귀화의 관등성명을 여쭤봐도 실례가 되지 않겠소이까?" "미관말직이었기 때문에 대장군의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소이다" 그렇게 말하는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만 봐도 상당히 높은 지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직감적으로 알수있는 악비 대장군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그것을 숨기고 싶어 하는데 구태여 캐물을 이유는 없었다. 지금 그는 흑풍대가 너무나도 필요했으니 말이다. "허허헛,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어쩔 수 없구려. 자, 음식과 술을 넉넉히 준비했소이다. 모두들 마음껏 먹고 마시며 노고를 푸시기 바라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어 감사하오이다, 대장군." "자 가십시다" 그날 저녘 흑풍대의 무사들은 음식은 배물리 먹었지만,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이곳은 수많은 정파의 무사들이 득실 거리는 곳이다. 최악의 경우 그들이 모두다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는 이상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연회가 끝난 후 관지 장로는 묵향을 찾았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그동안 수고했네. 건강한 자네의모습을 다시금 보게 되어 기쁘구먼." "만남에 가셨던 일은 잘 저치되었다고 부교주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교주님" "축하할 일까지야 있겠는가? 이제 씨는 뿌린것이니 잘 자라기만을 바래야겠지. 그래 금나라쪽의 사정은 어떻던다?" 관지 장로느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영문관의 연계작전을 펼쳤었기에, 금군에 대해 비교적 풍부한 정보를 지니고 있었다. 상대의 병력, 그들이 군수물자를 옮기는 수송경로 그리고 그 경로상에 위치한 몇 곳의 물자집결지 등등... "군수 물자를 대규모로 집결시키고 잇는 곳이 남양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묵향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제법이군, 그런 것까지 소상하게 알려주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런데 그 할망구 속셈을 잘 모르겠단 말이야?" 교주의 시큰둥한 반응에 관지 장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예? 속하는 무영문이 교주님과 어떤 계약을 맺었기에 그들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물론 협정서를 주고받은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할망구가 이토록 전폭적인 협조를 해준 것에 대한 대답이 될수 없어. 뭔가 그걸 통해서 노리는 것이 있겠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여기까지 말한 묵향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런 정보를 듣고도 남양을 치지 않았다니, 자네의 인내심에 탄복했네." "인내심이랄 것도 없습니다. 교주님. 본교에 있으면서 그의 성격에 대해서 많은 말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군량이 집결된 곳을 허술하게 그냥 나웠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본좌도 그걸 우려하는 것일세.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함정일 가능성이 커 . 뭐, 어찌되었건 그쪽으로 안 갔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자, 오늘은 이만 하고 푹 쉬게나. 애기야 내일 나눌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옛, 교주님. 속하는 물러가겠습니다. 관지 장로가 물러가고 난 후 묵향은 무영문이 그런 정보를 넘기면서 노린 것이 뭔지 한참동안 궁리했다. 옥화무제가 이토록 대금전쟁에 깊인 관여하게 된 이유는 금이 그녀가 이룩해놨던 모든것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에 대한 보복심리가 작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묵향으로서는 그녀와 금 간에 있었던 일을 알지 못하니 아무리 생각해봐야 그 이유를 알아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양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와중에 기가 막힌 계책이 떠올랐다. 옥대진과 능비화에게 사제를 대신해서 복수할 수 있는 아주 기막힌 계책이 말이다. 묵향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 거렸다. "이걸 언제 써먹느냐가 문제로군. 흐흐흣." 요즘 들어 수라도제의 심기는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흑풍대가 회군해 오면서 마교 교주를 때려잡으려던 계획은 아주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되려 그 사건 때문에 교주와 자신간의 거리만 넓혀놓지 않았는가. 설상가상으로 다른 화경급 고수들에게는 옹졸한 늙인이 취급을 당하고 말이다. 그것 때문에 성질나서 이따위 계략을 자신에게 간한 젊은 것들을 불러들여 혼 구멍을 내놨지만 수라도제의 속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수라도제는 무림맹 총타로 부터 놀라운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전령으로부터 건네받은 봉서를 읽은 수라도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정녕 이것이 사실이란 말이냐?" 수라도제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전령은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모든 전령이 드러하듯 그는 그 봉서 안에 기록된 내용이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속하는 여기까지 오면서 품 속에서 단 한 번도 봉서를 꺼낸 적이 없사옵니다. 결코 다른 것과 뒤바뀌지 않았을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릴수 있사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교교주와의 사소한 갈등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총관!" "예, 태상문주님." "원로들을 소집해라. 노부가 독단으로 처리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사안이로구나." "옛" 수라도제는 서신을 총관에게 건네주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맹에 전서구를 띄어 이것이 정녕 사실인지 확이해보도록 해라." "옛" 서신을 받아들자마자 총관은 단숨에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서신의 어떤 내용이 수라도제를 그토록 놀라게 만든 것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다 읽은 총관의 표정은 수라도제의 그것보다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느냐?" "맹으로 가는 전서구는 아직 일곱마리나 남아있으니 그쪽으로 연락을 보내는 것은 간단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양양성으로 회답을 보내오는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문파가 무당파니까 맹에서 그곳으로 전서구를 보내고, 거기서부터는 전령이 달려와야 하기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립니다. 아마 짧게 잡아도 3일은 걸릴것입니다, 태상문주님" 비둘기라는 짐승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원하는 자에게 편지를 전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서 본능적으로 날아갈 뿐이다. 그 본능을 이용해서 양양성에서 키우던 전서구를 저 멀리 떨어진 무림맹에서 가지고 있다가 놔준다면 곧장 비둘기는 양양성으로 돌아온다. 또, 양양성에는 무림맹에서 키우던 비둘기를 가지고 있다가 화답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어느 한쪽과의 비둘기를 이용한 연락망을 갖추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일단 새로운 세대의 비둘기들이 그곳에서 태어나 자라는 시간이 필요하니 말이다. 양양성의 일에 무림맹이 끼어든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전서구를 활용한 통신망이 뚫리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허어, 3일이라.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할 터인데. 3일이라고?" 어떻게 할 것인지 수라도제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총관은 사람을 시켜 무림맹을 향해 전서구를 날렸다. 봉서에 기록된 내용의 일부를 기록하고,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혹시 이것이 간악하기 그지없는 적들의 농간일 수도 있기에 확인 작어비 꼭 필요했던 것이다. 으윽고 수라도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장중한 어조로 외쳤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시간을 끌 수가 없다. 각 문파의 수장들을 소집해라. 지금당장!" "옛, 태상문주님"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총관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돌아와서 조심스럽게 수라도제에게 질문을 던졌다 "교주에게도 사람을 보낼까요?" "당연하지 않겠느냐." 총관이 나가고 난 후 수라도제는 심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얼마 전까지 자기를 죽이려고 이쪽에서 모의했다는 것을 놈이 다 알고 있는데, 그놈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다니.." 잠시후, 수라도제의 호출을 받은 수많은 무림의 명숙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수라도제의 지명을 받은 총관의 폭탄과도 같은 정보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금의 정예군에 의해 종남파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 말이 던치는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놀랐다고 하더라도 이곳에 와 있는 종남파의 고수들만큼 경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종남파가 무너지다니. 그게 말이나 되느냐?" 총관은 자신에게 따지슫 외친 사람이 이곳에 종남파의 고수들을 이끌고 온 태을검군 송류 장로인 것을 알고 안타깝다는 듯 대답했다. "태을검군 장로님. 그게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맹에 전서구를 날렸습니다. 아직 맹으로부터 확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안타깝게도 십중팔구는 사실일 겁니다." 사실확인이 아직 안되었다는 말에 송류 장로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듯 콧방귀를 뀌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흥! 그건 더욱 말이 안 돼. 맹호검군 백량이 본문의 정예를 거느리고 무림맹에 가있고, 또 노부가 1천의 고수들을 이끌고 이곳에 와 있다고는 하지만,그렇게 쉽게 무너질 종남파가 아니야. 지금 본문에는 2천이 넘는 고수들이 남아있다네. 자네도 금군과 싸워봤을 테니, 그들이 어느정도 자질을 갖추고 잇는지는 파악 했겠지?"자네에게 잘 훈련된 금군병사 1만명이 있다면 종남파를 쳐부술수 있겠나?" 그 말에 총관은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송류 자로의 말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무공도 모르는 병사 1만으로 종남산을 오른다는 것은 자살하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것이다. 총관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송류 장로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설혹 10만의 병사가 있다고 해도 본문을 하루아침에 멸망사킬 수는 없다네. 그런데 자네는 순식간에 본문이 멸문당했다고 했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건 아무래도 놈들의 농간인듯 싶습니다. 먄약 대협께서 고수들을 이끌고 소림사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곳 양양성이 텅텅 비지 않겠습니까? 양양성 인근에 적의 60만 대군이 집결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놈들은 간악하게도 정보를 조작하여 양양성의 방어가 취약해지도록 만든 후, 대군을 휘몰아쳐 양양성을 공격하려고 획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수라도제 대협!" 그 말에 수라도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도 무림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9파1방에 들어가는 종남파다. 그만큼 무시 못할 저력을 지닌 문파인 것이다. "허어, 노부가 아무래도 경솔했던 듯싶으이.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만큼 위급한 일도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자세한 사정을 확인해보지도 못한 채 회의를 시작한 노부의 실책이 크구먼." 이렇게 회의는 끝났다. 사실 그 누구도 그 서신이 진짜일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기에 취해진 결과였다. "이럴수가..." 며칠후 무림맹으로 부터 전해진 서신을 읽은 수라도제는 손이 미세하고 떨리고 이썽ㅆ다. "무슨일입니까? 태상문주님" "자네도 읽어보게나" 수라도제로부터 서신을 전해 받은 청관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수라도제는 이제 더 이생 생각 할것도 없다는 듯 명령했다 "이제 사실확인이 되었으니, 각 문파의 모든 수장들을 불러모으게" "예, 옛. 태상문주님." 잠시후 회의실에 모여든 무림명숙들의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이었다니.. "총관, 그것이 정녕 사실이었단 말이오?" 며칠 전과는 달리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송류장로에게 총관은 풀이 죽은 어조로 대답했다. "예, 확실합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 때문인지 아연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송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던 총관은 헛기침을 몇번이나 한 후 말을 이었다. "험험. 이제까지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종남파를 무너뜨린 것은 금의 정예군입니다. 종남파 외에 여러 문파들이 금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며, 상당수의 금군은 소림사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금은 송 황싱과의 전쟁에 무림인들이 발 벗고 나선 사실을 알고 무림에 경고를 하기 위해 군사들을 동원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이때 멍청한 표정으로 앚아 있던 송류 장로는 허탈한 듯한 음성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생존자는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그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총관은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만 했다. 조금 지나면 진실이 드러날게 뻔한 만큼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구출한 생존자는 없다고 합니다. 태을검군 장로님. 하지만 아이들이나 아녀자의 시신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놈들이 납치해 갓을 가능성도 다분하다고 합니다." "크흐흐흐흑! 이런 찢어 죽일 놈들!!" 비통하게 오열하고 있는 송류장로 때문에 잠시 회의진행이 늦춰졌다. 무림에서 지니고 있는 송류 장로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그가 이토록 비통해하고 있는 상황엥서 그것을 무시하고 서문세가의 총관따위가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장시간 회의가 진행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수라도제가 앞으로 나섰다. "중원의 북쪽에 위치한 많은 문파들이 금군의 동시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오. 태을검군 장로의 비통한 심정을 노부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우리들은 지금 행동을 시작해야만 하오. 그렇지 않는다면 부쪽에 위치한 모든 문파들이 멸문당한 후가 될테니 말이외다." "수라도제 대협께서는 생각해 두신 것이 있으십니까?" "먼저 소림사로 달려가는 것이 좋을 듯 하외다. 물론 소림이 금군 따위에게 무너지리라 생각 할수는 없겠지만, 이쪽이 도와준다면 훨씬 수월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되오. 소림을 치기위해 남하하고 있는 적도들을 무찌르고 하남성을 제압한다면 그놈들도 더 이상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 섬서, 산서, 하북, 산동에 위치한 각 문파들이 도와주기에도 매우 용이하다는 이점도 있소." 그렇게 말하면서 수라도제는 묵향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지어 놓은 죄가 있다보니 그가 과연 행동을 함께해올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마교 교주는 느긋하게 앉아서 옆에 앉아 있는 만통음제와 뭔가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 뒤에는 흑풍대의 대주가 시립하고 서 있었다. 회의석상에 온 것이었기에 갑주를 입지 않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위풍당당했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글쎄, 금의 영토에 위치한 무림문파가 한둘이 아니니 그들의 구원하는 것이 옳기는해. 하지만 무턱대고 여기 있는 모든 세력을 소림사로 보낸다면 이곳 양양성이 위태롭지 않겠는가? 아무리 계절이 겨울의 초입이라 적이 움직이기 힘들다고 하지만.." "놈들이 행동을 시작하고 있는 지금은 계절이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문파들을 쓸어버리는 데 동원한 것도 금군이고, 양양성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도 금군이 아닙니까?" "아참 , 그건 그렇구만. 하지만 9대문파의 하나인 종남파가 순식간에 무너진것을 보면 똑같은 금군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문파토벌에 동원된 금군병사들의 무공이 훨신 뛰어나겠지." "그야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묵향. 물론 틀리다는 것을 묵향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문파토벌의 전면에는 장인걸 그녀석이 있을 것이 뻔했고, 또 그가 오랜 세월 공들여 키운 뛰어난 병사들이 함께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무공이 어떻건 간에 금의 정예군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양양성 방면에 있는 60만 대군과 합쳐질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이상 모든 것을 연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만큼 수라도제의 작전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보네. 하남성 이북의 모든 문파들이 멸문한다면, 특히나 그 중에도 소림사가 멸문당한다면 그 피해는 너무나도 크지 않겠는가?"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을실 텐데요? 아주 팔팔한 땡중들이 득실거리니까요." 묵향은 일전에 자신과 치열한 격투를 벌였던 공공대사를 말한 것이었다. 하지마 ㄴ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던 만통음제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소림의 무공이 강하다고 하지만, 실전경험에 있어서 아주 취약하다네. 이쪽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소림도 결코 무사하기 힘들게야" 이때, 수라도제가 묵향을 향해 말을 걸었다. "천마신교에서도 이번 작전에 동참해주시겠소?" 그 말에 묵향은 잠시 갈등했다. 사실 자신이 소림을 구하러 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림에는 공공대사르는 썩을 놈이 있지 않은가. 그때 당한 것을 갚아 주러 가도 시원찮은데, 구해주러 갈 이유는 더욱 없었다. 오히려 묵향으로서는 자신을 대신해서 장인걸이 소림사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손 안 대고 코푼 격이니 얼마나 바람직한 전개인가. 하지만 묵향에게는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옥대진과 능비화 두 연놈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소림사 같이 격전이 벌어지는 장소가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양양성에 남아 있어 봐야 내년 봄까지는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희박했다. 묵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본좌도 참여하겠네. 물론, 본좌만 혼자만 갈 것이야. 거의 모든 고수들을 소림사로 뺀다며 ㄴ양양성은 텅 비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런 만큼 수하들에게는 양양성을 지키고 있으라고 명해놓겠네." 교주가 너무나도 선선히 승낙하자, 수라도제는 새삼스럽게 상대를 다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과연 마교라는 최강의 방파를 이끌 만한 인물이로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배포. 확실이 흑풍대주 같은 뛰어난 인물들이 그의 밑에 잇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아무리 마교가 강자지존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계라고 해도, 무공만 강하다고 해서 지존의 자리를 지킬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그 말에 수라도제는 그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도 그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묵향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교주님의 의향이 그러하시다면, 양양성을 맡기겠소이다." 회의실에 나오며 묵향은 관지에게 명령했다. "자네는 흑풍대를 거느리고 이곳에 남게나. 정파의 고수들이 빠져 나간 만큼 양양성의 방어력은 취약해질 테니, 자네와 픅풍대게 메워주게. 자네라면 충분히 해내리라 믿지만, 결코 묵숨을 걸 필요는 없다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관지가 의아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충분히 해내리라 믿는다면서 목숨을 걸지 말라니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이다. 묵향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본교의 싸움이 아니야. 양양성 쯤이야 그냥 내줘도 돼. 본교에 아직 동원하지 않은 엄청난 전력이 남아 있음을 잊지는 않았겠지? 양양성 따위는 나중에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다네. 하지만 자네를 잃으면 본좌는 어디서 자네를 대신할 자를 찾는다는 말인가? 알겠는가?" 그 말에 감동한 관지는 군례를 드리며 힘있게 대답했다. "그대에 보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묵향 20권> 중간부분이에요.벽곡단1알의의미(올리시는 분들 많아서 중복 될까봐 그냥 중간부분 하나 썻어요. | [는]☞묵향☜ 2005.06.04 00:46 뷁픃퉰(audi41) http://cafe.naver.com/mookhang/3288 다른분들이 계속 쓰고 계시는거 같아 저는 중간 부분부터 올릴게요 나중에 차례대로 보세요.. 벽곡단 1알의 의미 맑은 독경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것을 듣고 있는 소림 장문인의 마음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숭산 인근을 포위하고 있는 금군의 존재 때문이었다. 물론 금군 병사들이 소림사에 대해 적대감을 들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그들은 소림으로 들어가는 모든 길목을 막고 무림인인 듯한 자들이 소림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이런 일을 한 번도 당해 본 적이 없는 소림이다 보니 그들이 왜 그곳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 소림은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정파의 무림인들이 마교라는 숙적을 없애기 위해 광분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소림사 최악의 치부라고 할 수 있었던 만사불황을 없애는 데 전력을 투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인생살이는 새옹지마 라고 하듯, 지금껏 화가 되어 왔던 만사불황은 일순간의 각성으로 인해 소림사의 커다란 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많은 방파들이 마교와의 싸움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소림은 그와 무관했다. 하지만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오랜 세월 무림의 일에 무관심했던 대가로 현 장문인인 덕량대사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난제로다. 이 일을 어이하면 좋을꼬?" 이때, 밖에서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장 스님" "무슨 일이냐?" "개방에서 비육걸개 시주께서 오셨습니다." 비육걸개라면 개방의 장로가 아닌가. 외부의 정보가 부족한 이때, 정보에 능한 개방 장로의 등장은 부처님이 내리신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어서 드시라고 해라." "예." 이어서 명호대로 살이 뒤룩뒤룩 찐 거지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에게서 풍기는 악취가 얼마나 지독한지 그가 들어서는 순간 장문인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냄새난다고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개방이 거지들의 문파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커흠, 저, 시, 시주."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아무래도 이곳은 서로 간에 차분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은 것 같구려. 자, 노납을 따라오시구려." 악취를 참지 못하고 누렇게 찌들고 있는 장문인의 표정을 바라보며 비육걸개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요, 뭐." 장문인이 밖으로 나오자, 방장실 앞에서 장로와 함께 온 꾀죄죄한 거지 네 명이 볕이 잘 드는 양지에 앉아 있다가 후다닥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니까 비육걸개까지 모두 5명이 개방에서 파견되어 온 모양이다.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이들이 뿜어내는 악취가 워낙 지독한지라 이들을 어디에다가 기거하게 해줘야 할지 골치부터 아파지는 장문인이었다. "자, 노납을 따라오시게나." "예." 장문인이 비육걸개를 안내한 곳은 방장실 뒤편에 있는 산에 지어놓은 자그마한 암자였다. 비육걸개는 이곳에 오면서 가지고 온 커다란 푸대자루 하나를 등에 지고 뒤따라 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온 거지들 또한 비육걸개가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결코 작지 않은 푸대자루를 하나씩 등에 지고 있었다. 한 번씩 '구구....' 하는 낮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안에는 전서구 등 연락에 필요한 것들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육중한 덩치를 지닌 비육걸개였지만 앞서 달려가는 장문인에 크게 뒤쳐지지 않고 암자에 도착했다. 비육걸개의 경공술이 생각보다 뛰어나다기보다는 방장실에서 암자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점과 장문인이 전력으로 경공술을 펼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아무래도 귀사에 큰 겁란이 닥칠 것이라는 것이 본방의 예측이기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옷섶 안으로 손을 넣어 근지러운 곳을 득득 긁으며 비육걸개가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장문인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런 혐오감보다는 비육걸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안겨준 충격이 더 컸다. "겁란이라니요?아미타불,그게 도대채 무슨 말씀이시오?" "지금 소림을 제외하고 장강 이북에 위치한 많은 문파들이 금군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금군은 각 문파를 공격해서 제압한 후, 문도들을 잡아들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허어, 이상한 일이구려. 지금껏 관부가 무림에 개입한 일이 없었거늘,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한단 말이오?" "아, 대사님께서는 잘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본방의 추축으로는 아마도 양양성에서 있었던 전투에 무림맹이 가세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보복을 가해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놈들은 될 수 있으면 많은 포로들을 잡아들이고 있는데, 아마도 그들을 인질로 삼아 각 문파들에게 압력을 가하려는 행동이 아닐까 하고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허어, 시주의 말을 들어버니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려. 하지만 각 문파들의 반발이 크지 않겠소?" "대사님의 말씀도 옳으십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9대문파의 하나인 종남파까지 무너졌을 정도니 말 다했지 않겠습니까?" 종남파가 무너졌다는 말에 장문인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비육걸개는 피둥피둥하게 찐 살집 안에 감춰진 작은 눈알을 굴려 장문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금껏 황실이 무림을 억누르지 않은 것은 무림을 친다면 황실도 그에 상응하는 피해를 입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금으로서는 잃을 게 없습니다. 안 그래도 무림맹은 금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상태입니다. 무림과 싸우게 된다는 것이 확실시된 이상, 금이 각 문파를 공격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순서였을 뿐입니다." 비육걸개의 말에 장문인은 장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허, 참. 이것 쉬운 문제가 아니구려. 아무래도 노납 혼자서 뭐라고 말할 사안은 아닌 것 같으니 원로들과 대화를 좀 해봐야 할 듯하구려." "서두르시는 것이 좋으실 듯합니다." 그렇게 말한 후 비육걸개는 주위를 빙 둘러봤다. 아무래도 방장실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보니, 인적이 거의 없었다. 숨어서 뭔가 저지르기에 안성맞춤인 장소가 아닌가. 둔중해 보이는 그의 살집에 감춰진 작은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비육걸개는 막 발길을 돌리려는 장문인에게 재빨리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제가 한동안은 귀 사에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여기에서 머물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에 장문인은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토록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인간들을 어디에다가 기거하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그것이 일거에 해결된 것이다. 이곳은 완전히 독립된 작은 암자인 만큼 그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 게 아닌가. "물론이외다. 시주께서 편하실 대로 하시구려. 참 식사도 이곳으로 가져다 드리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그 편이 편리하지 않으시겠소?" 식사시간에 악취를 풍기는 자들이 들어온다면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렇다고 밥덩이를 안겨주며 거지답게 마당에서 밥을 먹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기에 장문인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이었는데, 그 속뜻을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비육걸개는 환히 미소지으며 고마워했다. "물론 그래주시면 저야 고마울 뿐이지요. 다만 좀 많이 부탁드립니다." 비육걸개의 기름진 몸을 힐끔 훔쳐보며 장문인이 중얼거렸다. "많이.....말씀이시오?" "예." "알겠소이다. 그렇게 일러두겠소. 그럼 노납은 이만 가보겠소이다." 장문인이 떠나고 난 후, 비육걸개는 함께 온 거지들 중의 한 명에게 명령했다. "장문인을 만나 소식을 전했다고 총타에 전하거라." "예, 장로님." 그 거지는 자신이 가지고 온 커다란 푸대자루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푸대자루 안에는 제법 큼직한 새장이 하나 들어있었는데, 그 안에는 10여 마리의 비둘기들이 들어 있었다. 거지는 소림사에 무사히 도착해서 비육걸개 장로가 소림사 장문인을 만났음을 아주 작고 얄팍한 양피지에 기록한 후 전통 안에 집어넣었다. 전통을 비둘기 다리에 묶은 후 재빨리 그것을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일단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끝마친 비육걸개는 날카로운 눈매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이 지고 온 커다란 푸대자루를 뒤져 구운 닭 한 마리와 커다란 술병을 꺼냈다. 마개를 뜯은 후 몇 모금 급히 마신 비육걸개는 누가 본 사람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젠장, 소림사에다가도 전서구를 통한 연락망을 갖춰놨었다면 노부가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고 있을 필요가 없잖아." 태산북두라 일컬어지는 소림사에 파견되는 인물인 만큼 격식에 맞게 장로급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모든 장로들은 한결같이 자신만은 가지 않겠다고 한사코 손을 내저으며 거부했다. 그 이유는 바로 술과 음식 때문이었다. 아무리 소림사가 무공으로 유명하지만 사찰은 사찰이다. 신성한 사찰인 만큼 술을 마시기도 힘들 뿐더러, 고기를 먹기는 더욱 힘들 것이 아닌가. 그렇다보니 다른 장로들에 비해서 비교적 술을 적게 탐하고, 음식의 질보다는 양을 선호하는 비육걸개가 뽑히게 된 것이다. 방장 스님이 떠난 후, 몇 시진이 흘러 이윽고 식사시간이 되었다. 젊은 중 서넛이 저마다 커다란 망태기를 하나씩 들고 암자로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거지 한 명이 재빨리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스님 저희들에게 오시는 길이십니까?" 그들 중 한 명이 합장을 한 후 정중하게 거지에게 대답했다. "예, 개방에서 오신 시주님들께 음식을 공양해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아, 예. 이거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넨 후, 거지는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서 볕을 쬐고 있는 동료들에게 외쳤다 "이봐! 밥이다!" 그러자 거지들이 모두들 저마다 자신이 들고 온 포대자루를 뒤적거리더니 큼지막한 바가지를 하나씩 꺼내들고 다가왔다. 그런제 그들 중 한 명은 자신의 바가지 외에 커다란 항아리도 하나 가지고 왔다. 그 항아리를 어디다가 쓰려고 가져온 건지 알지 못 했던 중들의 눈에 잠시지만 이채가 흘렀다. 먼저 밥 한 그릇씩이 저마다 꺼낸 바가지 안에 쏟아졌다. 그런 다음 그릇들에 정갈하게 담겨져 있던 산나물 요리들이 각자의 바가지 안에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담겨졌다. 손님들께 전하는 음식이라 그릇에 담는 데도 정성을 쏟았건만, 곧장 모든 게 엉망으로 뒤섞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젊은 중들은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거지들을 향해 뭐라고 질책하지는 못했다. 방장 스님께서 이들을 정중히 모시라고 했는데, 시비를 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거지들이 거지들 방식으로 먹겠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젊은 중들을 더욱 기가막히게 만든 것은 각자 배식이 끝나자, 남은 음식들을 몽땅 다 커다란 항아리 안에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그들이 이리로 가지고 온 것은 거의 10인분에 달하는 음식이었기에 많은 음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항아리에 때려부어뒀다가 나중에 먹으려고 할 줄이야...................... 보다 못한 중들 중 한 명이 참견했다. "아니, 그렇게 따로 챙겨두실 필요 없으십니다. 남는 것은 그냥 놔두십시오. 저녁때가 되면 다시 음식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거지들 중의 한 명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대꾸했다. 중들의 짐작과는 달리 항아리는 도시락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아닙니다, 스님. 이건 저희 장로님께서 드실 식삽니다. 그분께서 조금 많이 드시거든요. 헤헤." 혼자서 6인분의 식사를 하다니......... 그게 사람인가? 돼지지. 이때, 옆에 있던 거지가 참견을 했다. "다음에 오실 때는 그냥 항아리 두 개에 음식을 듬뿍 넣어서 가지고 오십시오. 그 편이 들고 오시기도 편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희들로서도 그 중 하나를 장로님께 곧장 가져다 드리면 되니까 훨씬 편리하고 말입니다." 젊은 중은 기가 막힌 듯 했지만 일견 일리 있는 말인지라 순순히 응낙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중들이 돌아간 후, 거지들은 돼지죽처럼 이것저것 뒤섞인 식사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물론 수하들이 식사를 시작하고 있을 때, 암자 안에서는 비육걸개가 수하들이 건넨6인분의 식사를 맛나게 먹어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 비육걸개가 항아리를 끼고 앉아 와구와구 음식물을 입 속에 퍼 넣고 있을 때,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장로님!" 비육걸개는 짜증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무슨 일이냐?" "총타로부터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비육걸개는 입 안에 든 음식물을 거의 씹지도 않고 꿀꺼덕 삼킨 후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하필이면 한창 밥 먹고 있을 때 오고 지랄이야. 들어오라고 해!" "옛." 땟국물이 질질 흐르는 거지 하나가 재빨리 암자 안으로 들어왔다. 비육걸개는 한손으로는 입 속에 밥을 꾸역꾸역 퍼 넣으면서 다른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전령으로 온 거지는 그 손에 자신이 가져온 서신을 줘어줬다. 입으로는 열심히 음식을 씹으면서 눈으로는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비육걸개는 갑자기 맹렬하게 음식을 입 속에 퍼 넣더니 더이상 입 속에 넣을 수 없을 지경이 되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서신을 지금 당장 소림방장에게 전해야 했기에 눈물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육걸개의 방문을 받은 장문인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방장 스님은 방금 전에 식사를 마친 상태였다. 느긋한 포만감을 즐기며 향기로운 차 한 잔을 즐기고 있었는데, 악취를 풍기는 인물이 왔으니 결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비육걸개의 말을 들은 장문인의 코에는 더이상 악취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런 하찮은 것에 신경쓸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종남파를 무너뜨린 금군 병력이 본사로 향하고 있다고 하셨소이까?" "예, 방금 전에 본방에서 도착한 서신입니다." 비육걸개는 방금 전달받은 서신을 장문인에게 전달하며 덧붙였다. "아마도 종남파를 파괴하면서 큰 피해를 당했는지 그 수는 1천기 정도로 줄어든 모양입니다. 하지만 종남파를 무너뜨리기 위해 동원된 만큼 그자들이 금군 최고의 정예임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아, 아미타불............" 비육걸개의 말에 방장은 뭐라고 대꾸는 못하고 '아미타불'만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여기저기에 있는 무림방파들을 휩쓴 금군 병사들이 모두 다 소림사로 집결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집결하는 이유는 뭐겠습니까?" "설마, 개방은 그들이 본사를 노리고 있다고 추측한다는 말씀이시오?" "물론이죠. 지금까지 소림은 무림의 일에 거의 간섭하지 않으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랑캐 놈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소림이 언제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병사들을 풀어 세력이 약한 곁가지들을 모두 다 제거한 후, 이곳으로 힘을 집결시키고 있는 겁니다." "허어, 그것 큰일이구려." "이제 다 전해드렸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급히 하던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시구려. 바쁜 와중에 이렇듯 시간을 내어 직접 달려와 주셔서 감사하오이다." 비육걸개는 방장실을 나선 후 구르듯이 달려 암자로 돌아왔다. 어떤 놈이 훔쳐 먹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소중하기 그지없는 밥 때문이었다. 후다닥 도착한 그는 항아리를 자세히 살펴봤다. 조금 양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조금 헷갈리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몇 숟가락 분량이 없어진 것만 같았다, 비육걸개의 투실투실한 뺨이 분노로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식탐이 하해와도 같이 많은 인간들이 다 그렇듯 비육걸개 또한 먹는 것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가 없었다. "아까 그 연락 왔던 놈 잡아와." 그 말에 거지는 아연한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놈이라면 벌써 돌아갔는뎁쇼?" 그 말에 비육걸개는 자신이 우려한 것이 사실이었다는 듯 외쳤다. "이런 망할! 그 새끼가 몰래 처먹고 뒤가 캥기니까 서둘러서 튀었구나." 신경질을 머리끝까지 내고 있는 비육걸개를 바라보며, 거지는 필사적으로 상대를 옹호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놈이 아무리 간뎅이가 크다고 해도, 하늘같으신 장로님의 밥을 슬쩍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비육걸개는 피둥피둥한 살 집에 감춰져 있는 작은 눈알을 굴리며 외쳤다. "너, 그거 목숨 걸고 장담할 수 있어?" 거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덤태기써서 박살난 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말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비육걸개가 뭔가 먹고 있을 때는 근처에도 안 갔었다. 물론 그놈이 결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미친놈이 법 몇 숟가락에 목숨을 걸겠는가. 그것도 내 일도 아닌데 말이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뇨." 비육걸개는 거지의 대답을 보고 그것보라는 듯 더욱 확신에 찬 어조로 명령했다. "너, 빨리 가서 그놈 잡아와." "옛." 거지가 달려 나가고 난 후, 비육걸개는 항아리를 끌어안고 다시금 밥을 와구와구 입 속에 퍼 넣기 시작했다. 비육걸개와 대화를 나눈 후, 장문인의 마음 속은 더욱 심란했다. 아무리 소림이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하지만 몇 번인가 외세의 침공을 당해본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파 무림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마교도들에 의해서였다. 이렇듯 병사들과 대치를 한 적은 지금 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금군 병사 개개인의 힘은 지금껏 싸워왔던 마교도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대금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때, 장문인은 사형인 대정선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급히 말을 걸었다. "공공 사숙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장문인의 다급한 말에 대정선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그는 지금까지 공공대사를 설득하기 위해 참회동에 머물다가 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습니다. 계속 면벽만 하고 계실 뿐..........." "아니, 그렇다고 해도 뭔가 드시는 동안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대정선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하루에 한 번 물과 벽곡단만 드실 뿐, 계속 면벽만 하고 계셔서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을 찾기가 어렵더군요." 몰아의 경지에서 운기조식을 할 때만큼 고수들에게 취약한 때는 없다. 그렇기에 장시간 내공수련을 하자면 어딘가에 꼭꼭 숨어서 하게 된다. 물이야 한 항아리 들고 가면 그만이겠지만, 음식은 다르다. 오랜시간 보관이 힘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 벽곡단이다. 장시간 보관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걸 물과 함께 먹으면 최ㅗ한 굶어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것이다. "하루 세 번이 아니라 한 번이라고요? 그래, 벽곡단은 충분히 드시고 계셨습니까?"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대정선사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힘없이 대답했다. "1알씩 드시고 계셨습니다." 벽곡단1알 이라는 말에 장문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숙께서 아무리 불도를 깊게 깨우치셨다고 하지만, 하루 1알로 되겠습니까? 한 끼 식사로 대여섯 알은 먹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아미타불.... 사숙께서 이러다가 몸이라도 상하시지 않으실지 정말 걱정입니다." "전에 빈도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숙께서는 참회동에서 목숨을.........." "사형! 제발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이성을 잃고 소리치는 장문인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었기에 대정선사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대정선사도 지금 처한 소림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공공대사가 나서지 않는다면 소림은 멸문까지도 생각해야 할 정도가 아닌가. "알겠습니다, 빈도가 다시 한 번 가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형." 대정선사가 돌아간 후, 장문인은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승려들은 아직까지 작금의 사태가 얼마나 소림에 위급한 것인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장문인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소림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놓인 듯 위태롭기 짝이 없음을 . 이 사태를 잘 헤쳐 나가려면 사숙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꿈쩍도 안 하고 있는 것이다. "허어, 이 일을 어찌할꼬?" 사숙께서 해탈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음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 응당 옳은 일이겠지만, 장문인으로서는 그럴 수 가 없었다. 현재 소림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든 일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비육걸개는 한껏 미소 띤 얼굴로 방장실을 찾아왔다. 살이 뒤룩뒤룩 찐 그가 미소를 지으니 너무나도 답답하고 징그럽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방장 스님은 결코 그런 내색은 하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좋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방장스님." 비육걸개의 말에 장문인의 눈빛은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도대체 무슨 소식인데 그런단 말인가? "수라도제 대협께서 양양성에 파견되었던 정예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급히 달려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대단한 희소식임에 틀림없었다. 양양성에 파견되어 있는 고수들은 각 문파에서 고르고 고른 최정예들 아닌가. 그들이 이곳 으로 오고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수라도제 시주께서 말이오? 허어, 참.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그래, 언제 도착하시게 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이까?" "워낙 먼 거리라서 아무리 서두르신다고 해도 5일은 걸릴 겁니다." "아미타불....5일이라....." 지금 소림사를 포위하고 있는 금군의 수는 더욱 늘어나서 이제는 거의 3만 명에 달했다. 조만간에 금군은 행동을 시작할 것이다. 5일이라는 여유가 있을까? 이때, 지객당에 배치되어 있는 중 한 명이 화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객당이라면 소림의 외당을 담당하는 곳이 아닌가.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장문인은 장탄식을 하며 중얼거렸다. "허어, 무슨 일일꼬? 드디어 올 것이 온 겐가?" 잠시 후, 중년의 스님은 장문인에게 예를 건넨 후 다급히 말했다. "금군 장수로부터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방장 스님." "그 시주가 뭐라고 했는데 이렇게 다급히 달려왔느냐." "앞으로 10년간 봉문하라는 말이었습니다. 하루동안 생각 할 여유를 줄 테니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허어, 10년간의 봉문이라........." 봉문하라는 말은 곧 10년 동안 무림에서 완전히 손을 떼라는 말이 아닌가. 물론 지금까지 무림에서 일어나는 일에 가급적이면 관여를 하지 않았던 소림이었다. 그렇기에 봉문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조용히 협상을 해온 것도 아니고, 창칼을 앞세우고 협박을 해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소림사가 창건 되고 수많은 세월 흘러왔지만, 감히 소림사를 상대로 이렇듯 대놓고 협박을 해온 무리는 없었다. "허어, 이거 난제로고." 장문인이 난감해 하는 것도 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소림사에 8천에 이르는 승려들이 있다고 하지만, 선승들을 뺀다면 겨우 5천이 될까 말까한 숫자만 남게 된다. 물론 그 인원만 가지고도 충분히 이길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승리하면 뭐할 것인가? 소림사는 지금 대금제국의 영토 안에 위치해 있다. 즉, 황실의 명령을 안 들으면 반역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소림사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더라도 거대한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옆에서 무림맹이 도와준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여기 집결하고 있는 병사들은 보통의 병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마교의 교주까지 지냈던 장인걸이 20여 년에 걸쳐 힘들여 키운 정예 병사들이 그들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극마급의 초강자인 장인걸도 이미 소림사를 포위하고 있는 수하들과 합류해 있었다. 1천여리나 되는 먼 거리를 수하들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지만 장인걸은 시간절약을 위해 천마혈검대의 고수들만 거느리고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었다. 일반의 병사들이 상대라고 해도 수만에 달하는 숫자를 지니고 있다면 힘든 싸움 이 될 것이지만, 설상가상으로 상대는 장인걸이 직접 거느리는 정예병들이었다. 격전이 시작되면 소림사는 결코 무사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위에 집결한 적은 3만이나 됩니다. 그외에도 사방에서 금군들이 숭산으로 이동해 오고 있습니다. 아마 내일쯤이면 최악의 경우 1만 정도는 더 모일 겁니다." "그 정보는 정확한 것이오이까?" "물론입니다, 방장 스님." 장문인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알겠소이다. 워낙 중대사가 되어놔서 원로들과 상의를 좀 해봐야겠구려." <묵향 20권> 10년간 봉문하라 (완성) | [는]☞묵향☜ 2005.06.05 04:39 뷁픃퉰(audi41) http://cafe.naver.com/mookhang/3385 > > 10년간 봉문하라 > > > >장생전에 장문인의 지시에 따라 소림을 떠받치는 모든 원로들이 집합했다. 평소에는 모두들 늙어서 열반에 드신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 될 정도로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공 자배의 고승들이 모습을 비췄고, 대 자배의 고승들도 이날만큼은 소림에 원로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싶을 정도로 많은 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문인은 장생전에 모인 고승들에게 현재 소림이 처한 위기를 소상히 말했다. >"물론 저들의 수가 엄청나다고 하지만 본사가 지닌 저력이라면 충분히 저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국가라는 데 있습니다. 이번에 저들을 물리친다 해도 얼마지나지 않아 수십만의 금군이 또 다시 몰려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장문인의 말에 월로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공식적으로 입을 연 것은 전대 장문인인 공지대사 였다. >"허어, 본사가 창건된 후 지금까지 수많은 제국들이 하남을 지배했었소이다.하지만 이토록 광오한 요구를 해온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이오." >"사숙 더이상 생각해볼 것도 없습니다. 지금껏 쌍아놓은 소림의 위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저들의 횡포에 굴복한다면 무림동도들이 소림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드높은 명예를 한순간에 떨어뜨리기는 쉽겠지만 그걸 다시 되찾기에는 엄청난 피와 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 입니다." >"사제의 말이 옳소이다. 장문인께서는 상대가 국가라서 저어하시는 모양인데, 병사들이 집단전투에는 이쪽보다 능할지 모르지만, 무공에 있어서는 보잘것이 없지 않습니까? 한밤중에 기습을 가한다면 집단전 같은 거 몰라도 하등의 지장이 없습니다. 또, 수십만의 병사들이 몰려와 도저히 상대하기 힘들다면 퇴각하면 되지요. 남쪽에는 무림맹이 있고 또 대송제국도 건제합니다. 그들과 합류한다면........." >"사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나. 중원불교의 성지인 소림사를 놔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오랑캐의 횡포에 굴복한다는 것이 치욕스럽기는 하지만, 성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지 않은가." >그 후로 수많은 토론이 오고가자 결국 원로들은 두파로 나뉘었다. 하나는 성지를 오랑캐들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치욕스럽더라도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봉문하자는 파와 또 하나는 무림에서 지켜온 대소림의 위상이 있는데 이렇듯 적의 무력에 굴복하여 꼬리를 내리느니 결사항전하자는 파였다. > > > >새벽이 되자, 양쪽은 더이상 설전을 벌이기도 질렸는지 한 가지 타협안을 내놨다. >"공공 사형 께서 돌아오셨다고 하니 그분께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사제의 의견이 옳도다." >공자배의 최연장자라고 할수 있는 공지대사가 그 의견에 찬성하자, 그 말에 모두가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결사항전을 한다고 하더라도 소림 최강의 고수인 그의 도움은 절실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가장 깊은 수련을 쌓았다고 생각되어지는 공공대사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수 많은 원로고승들이 줄을 지어 참회동으로 향했다. 참회동은 소림사의 가장 깊은 곳에 마련된 조사들의 유품을 모아놓은 조사전의 뒷산에 뚫린 동굴이었다. 그렇기에 원로 고승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다른 승려들이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비육걸개는 그모습을 지켜 볼 수 있었다. 자신이 기거하는 암자 또한 소림의 아주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엇? 저분들은! 공자배 고승들이 아닌가?" >공자배라면 전대에 소림사를 이끌던 주축들이었다. 후진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 후, 그들은 단 한번도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정보통이라고 하는 개방에서 조차 대부분의 공자배 고승들은 열반에 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그게 아니었다. 무려 10여 명에 이르는 노승들이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소림사가 뭔가 결단을 내리려고 하는 모양이군." >몰래 가져온 술을 한모금씩 아껴 마시며 구경하고 있던 비육걸개는 그 육중한 몸을 비호처럼 날렸다. 과연 소림의 선택은 뭘까?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신법을 구사하며 조심스럽게 달려가는 비육걸개의 모습은 도저히 돼지 같은 몸매를 지니고 있음을 믿지 못할 만큼 은밀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육걸개의 그런 움직임도 오래가지 않아 소림승들에게 포착되었다. 이곳에 모인 고승들 중에서 무공이 낮은 승려는 단 한명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소림이 감춰두고 있는 최강의 세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거기 숨어있는 시주는 누구신고?" >고승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비육걸개는 쑥스러운 미소를 띠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이 충분히 껴안을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되는 두께를 지닌 나무 뒤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비육걸개. 방금 전에 그 엄청난 덩치가 그토록 가느다란(?) 나무에 의지해 모습을 감출 수 있었다는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비육걸개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장문인이 한 발 앞으로 나와서며 말했다. >"시주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곳은 외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외다. 그러니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 무엇으로도 타협할 수 없는 단호함이 듬뿍 묻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방장 스님. 제가 워낙 궁금증은 참지 못하는지라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비육걸개는 용서를 구한 후 발길을 돌렸다. 암자로 돌아가는 비육걸개의 발걸음에는 아쉬움이 듬뿍 배여 있었다. > > > >"공공 사숙, 참회 도중에 정말 송구스럽습니다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긴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고승들이 참회동 앞에 집결해 있음을 공공대사가 모를 리없었다. 소림의 모든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은 그만큼 중대한 일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잠시 후, 공공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모습은 처음 참회동에 들어갈 때에 비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사실 하루 식사량이 겨우 벽곡단 1알이라는 것은 굶어죽기 딱 알맞은 분량인 것이다. >"무슨 일인고?" >그 말에 공지대사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을 걸었다. >"사제 오랜만이구나." >"예, 사형." >정말 오랜 시간 헤어져 있던 사형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공지 사형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제들이 있었고, 또 사질들도 있었다. >그들의 거의 대부분을 공공대사는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기쁨에 뛸 듯이 기뻐해야 함에도 그들을 바라보는 공공대사의 두눈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상의할 일은 무엇이오이까?" >장문인인 대덕대사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대금제국과의 갈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무력을 앞세운 금제국의 협박을 들어줘야 하는지, 아니면 그에 맞설 것인지...... 그 말을 다 들은 공공대사는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허어, 모든 것이 헛되고도 헛되도다. 명성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자존심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고? 그리고 불제자가 불도를 쌓는데 산 속이면 어떻고, 들판이면 또 어떤고?" >잠시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고승들을 바라보던 공공대사는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노납을 붙잡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모두들 불도에나 정진하시게나." >더이상 대화할 필요를 못느꼈는지 공공대사는 조용히 몸을 돌려 참회동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의 말에 다른 고승들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던 것이다. 자신들이 소림에 들어온 것이 무엇 때문이었던가? 바로 불도를 닦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언제부터 세속적인 명예와 위상에 눈이 멀어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공지대사는 참회동 안으로 들어가는 공공대사를 바라보며 나직이 탄식을 터트렸다. >"허어, 지금까지의 수행이 헛되고도 헛된 것이었구나. 정작 참회동에 들어가야 할 사람은 노납이었는데 그걸 몰랐으니.....아미타불." >공공대사가 한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지만 공지대사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공공대사 말은 불도를 닸는데 있어서 소림사라는 굴레에 집착하고 있는 원로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다. 사실 공공대사의 말은 하나도 틀린 점이 없었다. 불도를 닦는데 소림사에서 닦으면 해탈하고 다른 곳에서 닦으면 해탈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미망 속에서 헤매던 자신을 일깨워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인지 공지대사는 참회동을 향해 합장을 하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장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 많은 것을 배운 듯하이. 그래, 장문인의 생각은 어떤고?" >그 말에 장문인은 합장하며 대답했다. >"사숙어른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원로들과 공공대사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소림의 행동은 무림맹이 전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버렸다. >비육걸개가 멀리서 훔쳐보는 가운데 장문인의 발표가 있었다. 이런 저런 말이 많았지만 그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세속적인 명예와 위상에 연연하지 말고, 불제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라.' >그 말은 곧 10년간 봉문하겠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었다. 선승들은 장문인의 결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대부분의 무승들은 그렇지 못했다. 물론 그들도 승려인 만큼 장문인의 결정이 심히 못마땅했겠지만 그걸 대놓고 따지지는 못했다. 그들이 장문인 앞에서 떠들어 댈 만큼 발언권을 지니고 있지도 못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들 또한 불제자였다. 무공을 익히는 데 불경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오랜 세월 소림에 기거하며 주워들은 풍월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불제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라는데 뭐라고 반박할 것인가. >"젠장! 일이 꼬이는군. 꼬여." >소림의 결정을 확인하자마자 비육걸개는 암자를 향해 구르는듯이 달려갔다. 그는 암자에 도착하자마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며 사이좋게 이를 잡고 있는 거지들을 향해 소리쳤다. >"본방과 무림맹을 향해 전서구를 띄워라 소림은 봉문하기로 결정했다고 말이다." >그 말에 방도들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더니, 곧이어 허둥지둥 전서를 쓰기 시작했다. > >장인걸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소림사가 이쪽의 제의를 수락했다고 했느냐?" >편복대주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교주님." >소림사의 승려들은 상대의 협박 따위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무리들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소림은 찬란한 명예를 지니고 있었고, 지닌 바 힘은 막강했다. 강호에 나가면 소림승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강호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성장한 승려들이 소림의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봉문 제의를 간단히 수락했으니 장인걸로서는 황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이 계획을 세우면서 소림이 그 제의를 순순히 응락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소림사를 공격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보유한 최정예 고수들을 모두 다 집결시켰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소림에 보내는 전령을 일부러 무공을 연성하지 않은 자를 골라서 보내지 않았던가. 소림이 이쪽을 가볍게 보고 대비를 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가벼운 술수였다. >모든 준비를 다 갖춰놓고도 안심이 안 되어 장인걸은 소림사가 거부했을 때 곧바로 공격을 가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많은 병력이 모일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릴 것인디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참이었다. >"허엇, 참. 언제나 본좌의 뒤통수를 치는 땡중들이구먼. 설마, 순순히 백기를 들어버릴 줄이야." >"계획대로 소림사를 공격하실 것이옵니까?" >장인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외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 공격해봐야 얻을 게 없다. 소림사가 지닌 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꼭 필요하다면 혹 모르겠지만, 구태여 찾아가서 싸울 만큼 만만한 상대는 아니야." >그가 무림의 태두라고 불리는 소림사를 박살내려고 한 것은 자신의 말을 안 듣는다면 아무리 강력한 무림의 방파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려 함이었다. 희생은 크겠지만 그만큼 얻는 것 또한 많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소림을친다면 전혀 소기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소림은 이쪽 요구를 들어줬다. 요구를 드어준 자를 쳐서 없앤다면 다른 문파들에게 '이렇게 해도 죽고 저렇게 해도 죽으니 최후의 힘까지 짜내어 발악해라' 하고 충동질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힘들여 잡아들인 인질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인질을 잡고 상대를 협박할 때는 나름대로 신용도를 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인질의 안위를 생각하며 이쪽의 말을 들을 게 아닌가. >"인질들의 정확한 신상명세를 파아하는 작업은 언제 끝나겠는가?" >"수많은 문파에서 잡혀오고 있는지라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교주님" >"그래? 그렇다면 지금까지 작성된 명단을 무림맹에다가 넘기도록 해라. 본국에 반항하는 종남파 제자가 보인다면 종남파에서 잡아온 인질의 목을 벨 것이고, 황보세가의 제자가 반항한다면 황보세가에서 잡아온 인질의 목을 베겠다고 말이야 그렇게 되면 많은 방파들이 무림맹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수 없게 되겠지." >"소림을 파괴하지 못한 이상, 그런 협박을 해도 큰 효과를 기대 할 수 업을 것이옵니다." >"흠,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 그런 말을 꺼낸것으로 보아 자네는 뭔가 생각해둔 것이 있는 모양이군 ."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 소림 대신 공동파를 치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공동파라고?" >"예, 공동파가 무림맹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대단히 높은 것이옵니다. 과거 무극검황 옥청학이 맹중직에 오른 후 장로들을 거의 대부분 공동파 출신의 인물들로 바꿨습니다. 지금 맹주가 태극검황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 아직까지도 상당수의 장로들은 공동파 출신이옵니다. 공동파를 파괴하고 또 그 식솔들을 인질로 잡는다면 대단히 효과가 있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하지만 공동파는 본국의 영토 밖에 위치하고 있지 않느냐?" >"오히려 그때문에 공동파를 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판단되옵니다. 만약 본국의 비위를 거스른다면 어디에 위치하느냐를 불문하고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게 되면 수많은 무림의 방파들이 몸을 사릴 것이옵니다." >그 말이 매우 장인걸의 마음에 들었는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조언을 받아들이도록 하겠네." >"감사하옵니다, 교주님." >"좋아, 무림맹에 사신을 보내는 것은 공동파를 파괴한 뒤로 미루도록 하지." >"현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참, 기왕에 소림사가 문을 닫았으니, 그들을 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이용할 수는 있지 않겠사옵니까?" >"어떻게 말이냐?" >"예, 소림사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대단히 높은 것 이옵니다. 그런 그들조차 본국에 거역하지 못하고 봉문을 선언했다는 것을 중원에 걸쳐 광고하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작은 군소문파들이 감히 본국에 대들 엄두를 낼 수 있겠사옵니까? 거기에다가 그렇게 하면 무림맹과 소림사 간에 갈등도 조성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사옵니까?" >그 말에 장인걸은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로다. 그대로 시행해라." >"옛, 그럼 속하는 물러가겠사옵니다." >"나가는 길에 나하추 원수보고 나한테 오라고 전하게." >"예, 교주님." >편복대주가 물러가고 난 다음 잠시 후에 나하추 원수가 묵직한 갑주를 철그렁거리며 들어왔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군례를 올리며 외쳤다. >"대원수님을 뵈옵니다. 본관을 찾으셨다고 해서 달려왔사옵니다." >"본좌는 공동파를 친 후 귀관과 합류 할 것이다. 그동안 귀관은 본좌를 대신하여 즉시 모든 병력을 이끌고 남양으로 가서 군량을 지켜라." >양양성에서 후퇴한 후 무안 대장군과 5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한 고나합 원수가 합류하여 주둔하고 있는 곳이 노하구 였다. 그리고 이들 60만이나 되는 대군이 소비할 막대한 식량을 비축하고 있는 곳이 바로 남양이었다. 전사한 파저 원수가 양양성을 공격할 당시만 해도 남양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양양성이 쉽사리 함락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라졌다. 이제 전쟁은 지루한 장기전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다가 계절은 지금 겨울을 코 앞에 두고 있지 않은가. 긴 겨울이 지나갈 동안 군사작전을 감행할 수는 없지만, 싸움이 없다고 병사들을 굶길 수도 없는 노릇 이었다. 남양은 금군 60만대군이 수개월전에 걸쳐 소비할 막대한 군량을 쌓아두고 있는 장소였다. 만약 적들이 이곳 남양의 군량을 없애버린다면 60만 대군은 싸우지도 못하고 후퇴할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남양의 방어는 매우 중요한 현안이었다.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겠나이다." "그렇게 장담할 만큼 손쉬운 임무는 아니야. 무림인이라고 불리는 무공이 뛰어난 놈들이 송군을 돕고 있어. 그 점을 감안하여 귀관에게 여섯명의 고수 와 쓸만한 녀석 100명을 골라 주겠네. 그들을 잘 활용한다면 무리믜 떨거지들을 손쉽게 막을 수 있을게야." 그 말에 나하추 원수의 안색은 환하게 밝아졌다. 방금 전 대원수가 거론한 인물들은 모두 다 대원수 직속의 엄청난 수준의 고수들이었다. 특히나 그들 중 여섯은 대원수의 명령만을 받드는 도무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강자들이 었다. 그들을 자신에게 준다면 무공 강한 놈 한둘쯤 야밤에 침투해와도 겁날 것이 없었다. "옛, 감사드리옵니다. 대원수." 소림사가 봉문을 결의한 다음날 오후가 되자 수라도제가 이끄는 1천여 명에 달하는 구원세력이 숭산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다. 쉬지 않고 달려와서 그런지 모두들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고르고 고른 고수들 답게 그 눈빛 만큼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수라도제는 소림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워낙 화급을 요하는 것이었기에 자신이 이끌고 갈 고수들을 실력에 따라 5개의 무리로 나눴다. 각 문파들이 자랑하는 가장 뛰어난 고수들을 1진으로 삼고, 그 외에는 문파별로 평균적인 실력을 측정하여 4개의 무리들로 나눴다. 1진은 수라도제가 직접 지휘하고 그 외의 다른 무리들은 각각 이름있는 명숙들을 선택하여 지휘를 맡겼다. 적들이 소림으로 몰려오고 있는 이상 더이상 지체할 시간여유는 없었기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소림에 도착하라는 지시를 모두에게 내렸다. 그런 다음 수라도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이곳 소림사에 도착한 것이다. 묵향은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사찰을 보며 이죽거렸다. "저기가 그 유명한 소림사로군요." 뭔가 비꼬는 듯한 어조였지만 일단 묵향이 말을 꺼냈기에 만통음제는 질문을 던졌다. "동생은 소림사에 온 것이 처음인가?" "물론이죠. 제가 여기 올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기야 생각해 보니 언젠가는 한 번 여기 와야 할 일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였죠." 묵향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광기가 번쩍인다고 느껴졌다. "허어, 소림이 동생과 뭔가 은원을 맺은 모양이군 이 우형에게도 말 못할 사연인가?" "뭐 그렇게 큰 은원은 아닙니다. 멍청한 부하놈 하나가 땡중들을 만만하게 보고 싸우다가 박살났을 뿐이니까요." 언뜻 들으니까 별로 큰일도 아닌 듯했기에 만통음제는 속으로 저으기 안심했다 사실 이런 시기에 마교가 소림사를 박살내겠다고 든다면 정파와 큰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신은 마교와 정파의 사이에 끼어 아주 입장이 난처해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한담을 나누며 달려가 보니 어느덧 소림사에 도착하게 되었다. 소림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뛴 것은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소림사 정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서 있는 수라도제의 모습이었다. "이상하네, 수라도제 정도의 인물이 도착했다고 하면 소림승들이 화급히 마중나올........!" 바로 그때 수라도제가 보고 있는 쪽을 향해 이리저리 시선을 맞추고 있던 묵향의 눈에도 소림사 정문에 붙어 있는 방이 보였다. '소림은 향후 10년간 봉문하노라' "봉문이라고? 어떻게 이럴 수가!" 경악하는 묵향의 반응을 바라보며 만토음제는 거참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옆에서 바라보니 소림이 봉문한 것에 대해 정파의 거두라는 수라도제보다 오히려 마교 교주가 더욱 경악하고 있는 듯했으니 말이다. "동생도 소림이 봉문한 것이 대단히 의외인 모양이군." "물론 의외지요. 지금껏 본교의 앞을 가로막아온 놈들인데, 왜 금나라에 대해서는 맞설 생각을 안 하는 겁니까?" "글쎄 우형도 소림의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으니 뭐라고 대답해 줄 수가 없구먼." 잠시후 승려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절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는 것을 알고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승려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소승은 지객당의 굉량이라 하오이다. 이곳에 모이신 시주분들의 신색을 보니 모두들 무림을 종횡하시는 영웅들이신 모양인데 어찌 이곳에 왕림하셨소이까?" 굉량이 보니 많은 호걸들 중에서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듯한 새파란 녀석이 앞으로 쑥 나서는 것이 보였기에 씁쓸한 입막을 다셨다. 하지만 그 젊은이의 말을 듣는 순간 굉량의 표정은 경악감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노부는 서문길제라고 하오." 서문길제라면 바로 서문세가를 이끌고 있는 수라도제의 이름이 아니었던가. 환골탈태를 했기에 그토록 젊게 보였던 것이다. 그토록 강한 고수가 많은 무림인들을 이끌고 이곳에 나타날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굉량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아 정중하게 합장을 하며 답례를 했다. 하지만 얼굴과는 달리 그의 말투는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아미타불, 본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이렇듯 여러 무림의 영웅들께서 본사를 도와주러 달려와 주시다니 소승 감격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헛된 걸음을 하시게 되어 뭐라 말씀드리기가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 말에 수라도제도 굉량을 향해 가볍게 포권하여 답례했다 "소림은 정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소이다. 위기에 처해 있다면 응당 도우는 것이 도리지요." 예법에 따른 절차상의 대화는 이 정도로 하고 수라도제는 이제서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정문에 걸려있는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저런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었소이까?" "아미타불, 소승도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방장스님께서 결정하신 것을 소승이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허헛, 참. 지금껏 큰 일만 터지면 꼬리를 감추더니 역시 소림은 믿을게 못되었군. 이런 한심한 무리들을 돕기 위해 밤낮으로 달려온 나 자신이 한심하구나. 허명만 높은 소인배들이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떠들다니..........." 수라도제의 말에 굉량의 안색에 은근한 노기가 서렸다. 소림사를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상대하는 곳이 지객당이었고, 그것은 무림인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굉량의 경우도 지객당에서 생활하며 많은 무림인들과 접했지만 오늘처럼 지독한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만약 다른 중생이 저딴 소리를 했다면 즉시 그 주둥이를 틀어막고 다리를 분질러놓겠지만, 상대는 수라도제였다. 그렇기에 굉량은 감히 발작하지 못하고 못마땅한 어조로 대꾸했다. "시주,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그 말이 되려 수라도제의 심기를 더욱 건드린 듯 그의 언성은 더욱 높아졌다. "지나치기는 뭐가 지나치다는 말이냐! 네놈이 승려고, 또 이곳이 절이기에 노부가 지금 참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곳이 다른 곳이었다면 당장 그따위 결정을 내린 놈의 목을 쳤을 것이다. 알겠느냐?" 수라도제의 노기 어린 질책에 굉량의 안색 또한 노기로 붉게 물들었다. 사실 대부분의 무승들이 그러하듯 굉량 쪼한 대소림을 무시하는 금군들과 싸우고 싶었다. 장문인의 결정만 아니었다면 그 놈들의 머리통을 박살내놨을 것이다. 안 그래도 장문인의 결정이 매우 마음에 안 들었지만 ,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라도제로부터 이런 조소어린 질책까지 받게 되자 수십년 동안 쌓은 불력이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무림최고수들 중 한 명에게 뭐라고 대구할 것인가? 잘못하면 정말 소림을 박살내고도 남을 인물인데 말이다. 그렇기에 굉량은 분노를 참으며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했다. "시주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지객당주님께 시주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본사는 봉문한 만큼 손님을 받지 못하기에, 어려운 발걸음 하셨는데도 차 한잔 대접해 드리지 못하겠군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굉량은 자기 할 말만 퉁명스럽게 내뱉은 후 ,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말상대할 인물까지 없어지자 수라도제는 도저히 노기를 주체하기 힘든 상태였다. 한참동안 거친 숨만 내쉬고 있던 수라도제의 눈에 또다시 문짝에 붙어 있는 방이 보였다. '소림은 향후 10년간 봉문하노라' 수라도제의 손이 어느 순간 등 뒤에 걸린 거도를 향해 움직였다. 쾅! 어느새 뽑혔는지 수라도제의 거대한 도는 한 바탕 칼부림을 일으켰고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소림사의 정문이 엄청난 굉음을 일으키며 희뿌연 먼지를 자욱하게 피워 올렸던 것이다. "사돈, 소림의 행태에 분노하신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과연 이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분노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종리영우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수라도제는 다시금 소림사로 시선을 돌렸다. 이때 자욱하게 피어올랐던 먼지가 서서히 가라 앉으며 박살이 나 있는 소림사의 정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림사의 정문은 100년 된 소나무를 가공하여 만든 대단히 튼튼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문 뒤편으로 아연한 표정으로 서서 멀뚱이 무림의 군웅들을 바라보고 있는 중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을 보고 수라도제는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다. "개새끼들! 그래 10년간 봉문하겠다고? 좋다 봉문의 시작은 네놈들 마음이겠지만 끝도 그렇게 될 성 싶으냐? 이후 소림사 밖으로 나오는 새끼들은 노부가 친히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서 다시 처넣어줄 테다." "허어, 사돈. 노기를 참으십시오. 이렇게 역정만 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듯합니다. 자, 가시지요 술이나 한잔 하면서 노기를 달래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림의 정문이 박살날 정도의 소란이벌어졌는데, 그것을 장문인이 모를 리 없었다. 장문인은 참혹하게 파괴되어 있는 정문을 보고는 한동안 말조차 하지 못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장문인은 정문을 손으로 가리키며 옆에 서 있던 지객당주를 향해 물었다. "아미타불!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장문인의 말에 지객당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수라도제 시주께서 많은 시주들을 이끌고 달려오셨던 모양입니다. 쾅하는 소리를 듣고 소승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이렇게 된 후 였습니다." 그러면서 지객당주는 아예 정문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모습을 하고 있는'정문' 을 손으로 가리켰다. "수라도제 시주께서? 허어, 그 시주의 성정이 불같다고 하더니, 과연 소문대로인 모양이구려." "그런데 문제는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소승이 그 시주께 정문 파괴한 것에 대해 따지려 할 때, 그 분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더군요." 그러면서 지객당주는 수라도제가 떠나기전에 했던 말을 장문인에게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장문인은 깊은 한숨이 섞인 불호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미타불, 난제로고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옛말에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 자신의 이름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지만, 나중에는 이름이 사람을 만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본사는 지금껏 만들어진 위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선택을 했으니, 그만큼 그 시주들이 느꼈던 배신감도 컸던 모양입니다." "아미타불, 노납도 그리 생각하고 있다네 본사가 처음부터 불제자들의 도량으로 알려져 있었다면, 이번 선택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인데...... 허어, 큰일이로다. 정문이 피괴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어쩌면 이번 선택으로 본사가 문을 닫을 수도 있음이니...... 그것이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음이야." 장문인은 깊은 시름에 잠겨 방장실로 돌아갔다. 혼자서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대금제국이라는 적이 버티고 서 있기에 모두들 정신이 그곳에 팔려 있겠지만 10년 후에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만약 그때쯤 금과 무림 간의 분쟁이 끝난 후라면 소림사는 서문세가 , 아니 최악의 경우 무림맹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림사가 지닌 저력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무림맹과 싸워서 살아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어, 늑대를 피해 범의 소굴로 발을 들여놓았음이니..... 이 일을 어찌할꼬? 아참 공공, 아니 공지 사숙께 여쭤보는 것이 옳겠군." 공공대사는 일신에 지닌 무위도 무위지만 워낙 세속에 초탈해 계신듯하여 이런 것을 물어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이런 세속적인 문제는 조금 세속적인 인물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 수라도제가 이끄는 군웅들은 숭산 인근의 객잔에 자리를 잡았다. 3일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길이다. 도중에 건량과 물만으로 끼니를 때우며, 산길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그런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그것이 모두 다 헛고생이었다는 것을 알자, 허탈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었지만, 수라도제 등 몇몇 피로를 모르는 고수들은 아직까지 자리에 남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수준이 떨어지는 자들이야 죽자고 달려온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이곳까지 쉬엄쉬엄 달려온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고수들은 모두 3개의 패거리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패력검제와 황룡무제. 그리고 몇몇 무림의 원로들이었다.술잔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는 중에 간혹 언성까지 높아지는 것을 보면 오늘 보인 소림의 행태에 불만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묵향과 만통음제였다. 그들은 화경을 상회하는 고수들 답게 서로가 어기전성으로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일지도 모르는 다른 놈들을 생각하면 그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라도제와 그의 사돈인 종리영우 그리고 종리영우의 의제인 제갈기 였다. 이들 또한 묵향 일행처럼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대화를 남이 들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부는 기필코 소림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이빨을 뿌드득 갈며 수라도제가 어기전성을 날리자, 그의 앞에서 앉아 있던 종리영우가 부드러운 어조로 다독거렸다. <사돈의 마음을 노부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일을 감정대로 처리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갈기 또한 종리영웅의 의견에 찬성이었다. <형님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그리고 만약 소림에 적개심을 드러낸다고 해도 때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 말에 수라도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때라고 했는가?> <물론입니다. 이번 일로 인해 소림이 간덩이 작은 소인배들의 집합소임이 드러났다고는 하나, 그들이 지닌 저력까지 무시해서는 안 돼지요. 소림과 맞대결을 해서 승리를 거둘 자신이 있는 문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있다면 저놈뿐일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턱짓으로 제갈기가 슬쩍 가리킨 것은 만통음제와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묵향이었다. 모두들 그쪽을 바라본 후, 한결같이 동의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소림을 징죄하려면 무림의 공분을 일으키고, 무림맹이 직접 나서야만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면 설혹 승리를 거둔다 하더라도 그 피해가 너무나도 클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무림맹은 금을 잡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만큼 소림을 응징하는 것은 금을 박살낸 후가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그 말에 종리영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전음을 날렸다. <듣고 보니 동생의 의견이 옳은 듯하구만.> 하지만 수라도제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모두에게 어기전성을 날렸다. <만약 그때가 되는 모두들 노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사돈. 사돈께서는 소림의 대문이라도 박살내며 분풀이라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노부는 아직도 울화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돈이 노부를 찾는다면 이놈을 들고 즉시 숭산으로 달려가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옆자리에 세워놓은 거도의 손잡이를 슬쩍 잡으며 전음을 날렸다. 그리고 그의 의제인 제갈기 또한 함께 할 것을 맹세했다. <저 또한 형님이 하시는 일에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불러만 주십시오. 만 리 길이라도 마다 않고 달려가겠습니다.> 이때, 점소이의 외침소리가 들려왔기에 그들의 시선은 문 쪽으로 돌아갔다. "아니, 어디서 거지새끼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어! 빨리 밖으로 안 나가?" 비럭질해서 사는 신세인 주제에 도대체 어디서 뭘 처먹었는지 살이 뒤룩뒤룩 찐 거지 하나가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가 점소이에게 욕을 얻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점소이는 맹렬하게 거지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거지는 점소이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성큰 성큰 안으로 들어왔다. 그 때문에 점소이는 할 수 없이 빗자루를 집어 들고 거지를 두들겨 팼지만, 거지는 전혀 아픈 기색조차 없었다. 거지는 객잔 안을 휙 둘러본 후, 수라도제 일핼을 발견하고는 지체치 않고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수라도제 대협." "오, 비육걸개 장로가 아닌가? 반갑구먼. 안그래도 개방 쪽에 연락을 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네를 만나다니...." 하지만 비육걸개가 가깝게 다가오자 수라도제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비육걸개의 몸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겨 나왔기 때문이다. 수라도제는 코를 감싸 쥐며 투덜 거렸다. "크흐 ~ 냄새! 자네도 여전하구먼. 제발 딴 거는 모르겠지만 목욕 좀하게. 코가 심히 괴로우니 말이야." "크크큭. 원래 거지라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 놈들 아니겠습니까? 거지한테 바랄 것을 바라셔야죠." 비육걸개는 너스레를 떨며, 넉살 좋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런 다음 허락도 구하지 않고 상 위에 차려진 비싼 음식들을 입 속에 마구마구 퍼 넣기 시작했다. 그들 간의 대화를 옆에서 유심히 바라보던 점소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 없이 돌아가버렸다. 모두들 칼을 차고 있는 무림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차마 밖으로 나가달라고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한참동안 비육걸개가 맛나게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수라도제는 상대가 도대체 아무런 말도 없이 먹기만 하고 있자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개방의 장로인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수라도제로서는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 자네가 여기는 어쩐 일인가?" 비육걸개는 입 속에 있는 음식을 대충 씹지도 않고 삼킨 다음, 다른 음식을 손으로 움켜쥐며 대꾸했다. "하남 분타에서 영양보충 좀 하고 있다가 대협께서 이곳으로 오신다기에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거 정말 맛있군요, 대협." "영양보충이라니?" "한 며칠 절간에서 지냈었거든요. 원래 절에서 나오는 식사라는게 그렇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개 한 마리 잡아서 영양보충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수라도제는 비육걸개도 소림사 문제로 이곳에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네도 소림사가 봉문한다는 것을 알고 돌아가던 중이었던 게로군." "예, 대협 설마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날 줄은 본방에서도 예측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본방에는 무슨 일 때문에 기별을 넣으려고 하셨습니까?" "숭산에서 철수한 금군의 행방을 묻고자 해서 말일세. 그놈들이 어디로 갔나?" "호북성 방향으로 급히 남하하고 잇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양양성 인근에 포진하고 있는 금군의 주력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겠죠." 그 말에 수라도제는 살기어린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잘됐군. 후발대가 도착하는 즉시 추격하여 그놈들을 박살내버려야겠어." 바로 이때, 저쪽 자리에 앉아 있던 묵향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빙그레 미소지으며 비육걸개에게 말을 걸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옆에서 듣게 되었는데 말씀이야, 자네가 소림에 있다가 왔다고?" 새파란 젊은 것이 처음부터 말을 찍찍 놓고 있으니 비육걸개의 속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니 무림인인 듯한데, 수라도제 일행과 합석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동석하기 힘들 정도로 배분이 낮다고 생각되어졌던 것이다. 비육걸개 또한 개방의 장로인 만큼 묵향의 인상착의 정도는 초상화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설마 이곳에서 정파의 최고수들 중 한명인 수라도제와 같은 객잔에 앉아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허어, 대협과 함께 온 후기지수인 모양이군. 아마 이번이 초출인 모양인데, 상대를 봐가면서 말을 걸게나." 이때 옆에 앉아 있던 수라도제가 아차하면서 재빨리 비육걸개에게 어기전성을 날렸다. <초출이 아니라 마교 교주일세, 말조심 하게나.> 순간 비육걸개의 발그스레하던 뺨은 핏기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져버렸다. "허걱!" "본좌는 상대를 봐가면서 말하는 거니 네놈이 그런 걱정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 나는 네놈이 개방출신이고, 또 소림사에 있다가 왔다는 점이 마음에 든 것뿐이니까 말이야. 자, 이제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대화나 좀 나눠볼까?" 상대의 의향은 들어보지도 않고 묵향은 수라도제를 향해 말했다. "이녀석 좀 빌려가겠네. 죽이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시게나." 묵향의 말은 절대로 죽이지는 않겠지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줄 수는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라도제로서도 의외였던 것이, 비육걸개가 순순히 묵향을 따라 객잔을 나가버렸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가 못가겠다고 버티면서 수라도제에게 구원을 청했다면 자신이 나설 수도 있었다. 그런데 비육걸개가 순순히 교주를 따라서 나가버리자 수라도제로서는 그들 사이를 막아설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재빨리 묵향의 뒤를 좇아 일어섰고, 다른 무림의 명숙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비육걸개가 개 맞듯이 맞고 있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도중에 끼어들어 그를 구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묵향은 멀리 가지도 않았다. 비육걸개를 객잔 뒤편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간후,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소림사가 왜 봉문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은데 말씀이야..... 입을 열지 않거나,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상대의 위협에 비육걸개의 투실투실한 뺨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걸 모를 수 있겠는가. 저놈에게 박살난 제자가 500명을 넘어섰는데 말이다. 오죽하면 개방이 저놈에게만은 정보를 공개하자고 결의했겠는가. "물론입니다." "하기야 잘 알고 있겠군. 본좌가 주리를 튼 개방제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니 말이야. 자 , 빨리 말해보라구." "그게... 이런 말씀드리기가 그렇지만, 사실 본방에서도 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을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묵향은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뭣이? 이것이 정말 관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나?" 비육걸개는 난감하다는 듯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믿지를 않으니 그로서도 난처했던 것이다. "사실입니다. 제가 분명히 수라도제 대협께서 이끄는 구원세력이 곧이어 도착할 것이라는 정보까지 장문인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상외로 장문인은 봉문을 결의했습니다. 싸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승산이 있고도 남으니까 본좌가 그 망할 놈들이 봉문을 선언한 이유를 네놈에게 묻고 있는 거잖아 아무도 소림을 돕지 않았다고 해도, 소림은 싸워서 이길 수 있었어. 그런데 왜 봉문한 것이지?" 그 말에 비육걸개의 투실투실한 살점에 묻혀 있던 자그마한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교주는 뭔가 알고 있는 것이다. 개방이 모르고 있는 뭔가를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호언장담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걸 자신이 모른다는 걸 교주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슬슬 유도심문을 하여 교주가 뭘 알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비육걸개는 개방의 결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주에게 정보를 넘겨주려고 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오늘 큰 건수를 건지게 도리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봉문을 선언하기 전날 장생전에 고승들이 모여 밤새도록 의논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떤 결론이 났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장생전에 들어가서 직접 들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 말입니다 어찌되었건 다음날 아침이 되자 고승들이 모두 장생전에서 나오더군요. 그런 다음 그들은 모두 소림사 뒤에 있는 산봉우리로 올라 갔습니다." 소림사에는 가본 적도 없는 묵향이었기에 거기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소림사 뒷산이라...... 거기에는 뭐가 있지?" "뒷산 쪽으로 가면 먼저 조사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참회동이 나오지요. 그분들이 가는 방향으로 봐서 조사전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참회동으로 가는 것이 확실했니다." "참회동이라고? 그럴 리가." "아닙니다. 그쪽이 확실했습니다. 자신들이 내린 결정이 선대들이 쌓은 업적을 무너뜨리게 도리 것은 당연한 이치니, 어쩌면 그것을 참회하기 위해 가고 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 생각해 봤습니다만......." 비육걸개는 자신의 추리를 묵향에게 말했지만, 묵향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있었다. 그들이 참회동으로 갔다? 왜 참회동으로 갔다는 말일까? 모두 다 참회동으로 몰려간 후 소림의 앞날을 결정할 중차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그렇다면 참회동에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 들어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소림 내에거 그만한 발언권을 지닌 인물이 참회동에서 썩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단 한가지 가능성을 제외 한다면 말이다. 물론 세상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이 있음을 모른다. 왜냐하면 모두들 그가 미쳤다고 확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묵향은 그가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왔음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허어, 그러고 보니 그 미친놈이 참회동에 있었던 모양이군. 그런데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지? 그가 합해진 소림의 힘이라면 금나라쯤이야 겁날 것이 없었을텐데 말이야." 강자지존의 법칙이 통하는 세계에서 성장해온 묵향으로서는 도저히 소림이 내린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어린애와 어른의 싸움에서 어른이 대충 항복해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물론 어른이 어린애에게 뭔가 양보할 이유라도 있다면 또 모른다. 상대를 좋아하든지, 아니면 약점을 잡혔든지.... "약점이라도 잡힌 것인가?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지?" 중얼거리던 묵향은 비육걸개를 향해 매서운 눈초리를 돌리며 질문했다. "그놈의 참회동이 어디있지? 본좌가 알기 쉽게 설명해봐." 비육걸개는 땅바닥에다가 손가락으로 소림사의 내부 건물들을 그리면서 설명했다. "여기는 처음이시라고 하셨으니, 알기 쉽게 설명드리죠. 그러니까 이곳이 저기 보이는 정문, 정문을 들어서서 정면에 보이는 가장 큰 건물이 대웅보전이죠. 대웅보전 뒤편에 있는 건물이 바로 지객당입니다. 그지객당 뒤편으로 몇 개의 건물들을 통과해서 쭉 더 들어가면 3개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곳이 나옵니다." 비육걸개의 설명에 묵향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흠, 그렇구먼." "그 건물들을 통과해서 이쪽으로 더욱 뒤로 들어가면 야트막한 산이 나오는데, 그 중간에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참회동이죠. 참회동으로 올라가는 길 이쯤에 조사전이 있으니 아마도 찾기는 쉬우실 겁니다. 교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경비가 삼엄한지라 손쉽게 침투하시기는 쉽지 않으실텐데요?" 비육걸개가 한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파임을 자처하는 개방도가 아무리 방 내의 결의가 있었다고 해도 마교 우두머리에게 소림사 내부를 자세히 알려주는 짓을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가. 그렇기에 비육걸개가 선택한 것이 이것이었다. 진실을 알려는 주되, 조사전으로 가기에는 가장 험난한 길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조사전으로 가는 길을 가장 알기 쉽게 알려달고 했으니, 이 이상 더 알기 쉬운 길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길들이야 빙빙 돌아가야 하는데 말이다. 그가 알려준 통로는 곧장 방장실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방장실은 소림사 최상급 무승들의 집합체인 팔대호원이 호위하고 있다. 그리고 그쪽으로 가는 도중에 나한전까지 덤으로 붙어있었다. 그야말로 용담호혈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설명을 다 들은 묵향은 다시 한 번 더 땅 위에 그려진 지도를 자세히 바라본 후, 비육걸개에게 말했다. "이렇듯 자세하게 설명해줘서 고맙군. 그럼 기회가 있다면 다음에 또 보기로 하지. 잘 가게나." 엄청난 속도의 경공을 발휘하여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교주를 바라보며 비육걸개는 자신도 모르게 감탐할 수밖에 없었다. "떠그랄! 정말 지랄같이 빠르군!" 잠시 후, 비육걸개는 정신을 차린 듯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냐? 너 같은 놈을 다시 보게. 그건 그렇고 저놈을 나났다는 걸 빨리 총타에 알려야겠어." 비육걸개의 두뇌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마교 교주가 숭산에 있다는 것을 총타에 알리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혹시 교주가 소림사에서 볼일을 마친 후 수라도제 일행에 재 합류 할지도 모르니, 수라도제 일행에다가 개방제자 몇 명을 파견하는 일도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또 뭐를 해야 할까? 이때, 비육걸개의 머릿속에 교주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알송달송한 수수께끼 같은 말. 미친놈이 참회동에 있다고? 그런데 미쳤다면 왜 고승들이 그의 말을 듣고 봉문을 했단 말인가. 미친놈 말을 들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또 그 미친놈만 있으면 소림에게 금나라의 정예병력 쯤이야 하루아침 해장거리도 안 되는 모양이다. 그 미친놈이 누구길래....... 비육걸개는 방금 전 교주가 한 수수께끼 같은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해내기 위해 둔중한 비게 덩어리 속에 감춰진 날카롭기 그지없는 두뇌를 맹렬히 회전시켰다. "미친놈이라..... 그게 교주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칭할 때 즐겨 사용하는 욕인가, 아니면 진짜 상대가 미친 건가........." 이때, 갑자기 비육걸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명호 하나가 있었다. 만사불황! 바로 주화입마에 빠져 미쳐버린 소림사 최강의 무승을 일컫는 명호가 아니었던가. 교주가 말한 미친놈이 바로 그라고 가정한다면, 방금 전에 교주가 한 말이 전체적으로 무리 없이 해석될 수 있었다. "허어, 바로 그거였군. 공공대사가 돌아왔음이야. 그러고 보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비육걸개는 수라도제 일행에게 되돌아가서 이별을 고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하남 분타를 향해 전속력으로 경공을 전개해 달려가버렸다. 이걸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던 수라도제 일행 또한 경악감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고, 공공대사가 제정신을 차렸다는 말이 사실일까요?" "방금 비육걸개가 말했지 않습니까? 아마 사실일 가능성이 클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노부는 소림에 좀 다녀올 테니 남은 일행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수라도제도 공공대사를 만나러 가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물론 다른 사람들도 공공대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한결 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공공대사는 참회동에 들어 있다. 그런 만큼 정식적인 경로를 통해서는 그를 절대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만날 수밖에 없는데, 그걸 감행하자면 무공이 뛰어나야 함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소림의 중심지까지 몰래 숨어들어가자면 보통 실력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돈. 이곳은 안심하시고 다녀오십시오." 수라도제도 소림사의 내부를 소상히 알지는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방장실 뒤편으로는 외인의 출입을 불허하는 곳인 것이다. 그렇기에 수라도제 또한 교주가 들어간 방향, 즉 비육걸개가 알기 쉽게 설명해준 길을 통해 참회동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과연 소림사가 지닌 저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실직적으로 무승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건물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드러나 있는 경비보다 숨어 있는 경비들이 더욱 무서웠다. 매복해 있는 자들의 실력은 세인들이 말하는 신검합일급에 달하는 막강한 실력을 지닌 승려들이었다. 물론 한밤중에 몰래 숨어든다면 조금 더 손쉬웠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대낮이었다. 거기에다가 묵향이 통과하는 경로 상에는 방장실이 있지 않던가.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갈수록 삼엄해지는 경비에 묵향 같은 탈마급 고수로서도 어려움을 느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통과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마교 총타처럼 진세라든지, 함정까지 골고루 깔려 있었다면 그가 아무리 탈마급이라고 해도 몰래 통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저기 있는 것이 조사전인가? 그렇군. 저기 현판에 조사전이라고 써져 있네. 그 뚱뚱이가 제대로 설명했군. 그럼 저 길로 올라가면 되겠군.' 묵향이 참회동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워낙 비육걸개가 설명을 자세하게 해준 덕분이엇다. '바로 이곳이군.' 묵향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커다란 동굴위에 '參會洞(참회동)'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엇다. 그런데 묵향이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참회동 안에서 웅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시게나." 상대가 어딘가에 숨어서 기습을 가해올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묵향은 서슴지 않고 참회동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제법이로군. 본좌가 왔음을 바로 눈치채는 것을 보면 말이야." "교주와 빈승 간에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니 그것을 어찌 알겠소이까? 다만 자연의 소리가 누군가 이곳에 들어왔음을 알려줬을뿐이지요." 몇날 며칠 동안 동굴 안에서만 기거해온 공공대사였다. 그렇기에 주위에서 들려오는 풀벌레소리라든지 바람소리 등등 각종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시각에는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지 파악하고 있었던 그였기에 순간적인 외부인의 침입을 파악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침입자가 이토록 가깝게 접근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상대의 기척을 파악해낼 수 없자,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침입자의 정체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자는 그가 알기에 단 한 명뿐이었기에. "흠, 그럴 수도 있겠군. 그건 그렇고, 전에 봤을 때보다 좀 야윈 것 같군." "허헛, 한줌 흙으로 돌아갈 육신인데 조금 야위면 어떻겠소이까. 그런데 시주께서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셨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지." "말씀해 보시구려." "왜 봉문을 결정했는가? 소림은 엄청난 힘이 있어. 그것은 그 무엇보다 자네가 잘 알잖아? 그놈의 교리 때문에 살생을 하기 싫었던 것인가? 아니면 뭔가 약점이라도 잡힌 것인가?" "시주, 이곳은 불도를 닦는 곳이라오." 왜 당연한 소리를 떠드는 것인지 의아하게 여기며 묵향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건 본좌도 알고 있어." "그걸 아신다면서 왜 이곳까지 오셨소이까?" "그야......" 말대답을 하려던 묵향은 자신의 실책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상대는 불도를 닦는 승려가 아닌가. 승려가 추구하는 것은 모든 욕망을 버리는 해탈이다. 사실 오욕칠정의 모든 욕망을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인가? 묵향이 살아오면서 그런 참된 구도의 길을 가는 승려는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 그런 승려가 하나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묵향으로서는 그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과거 옥영진 대장군부에서 식객으로 있을 때,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던 묵향이다. 자신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제대로 된 길을 가는 승려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어렴풋이나마 생각해낼 수 있었다. 물론 묵향보고 그 길을 가라고 한다면 결단코 사양하겠지만 말이다. 멈칫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묵향은 공공대사를 새삼스레 다시 한 번 찬찬히 흝어봤다. 혜안이 어린 듯 깊숙이 가라앉는 눈동자. 얼마나 금식하며 참회했는지 헐렁한 가사자락 사이로 깡마른 그의 육신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처음 그의 육신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에 비해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대사께서는 도를 얻은 모양이구려." "허허헛, 얻은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소이다." 공공대사가 옅은 웃음을 짓고 있을 때,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종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누군가가 격투를 벌이는 듯, 병장기소리와 폭음이 들려왔다. "오늘 본사에 손님이 많은 듯하구려." "나가보지 않을 거요?" "빈승이 꼭 나가봐야 할 이유라도 있소이까?" "물론 저녀석도 대사의 손님이니까 그렇지. 간간이 들려오는 폭음. 뇌전도법이 지니는 특징이 아닌가. 아까 객잔에서 거지녀석하고 얘기하고 있을 때 그놈이 엿듣고 있는 건 알았지만, 따라올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하지만 공공대사의 반응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서문세가에서 뛰어난 인재를 배출한 모양이구려." "대사도 알 거외다. 서문길제라고." 아마 공공대사도 알 것이다. 공공대사보다는 30년 정도 연배가 뒤처지지만, 그가 미치기 전쯤에 이미 수라도제는 뛰어난 도객으로 명성이 자자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공대사는 무림의 일에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제 하실 말씀 다 하셨으면 돌아가주시겠소이까? 빈승은 할 일이 있어서....." 축객령에 묵향은 돌아서서 몇 발자국 나가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반전하여 공공대사를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도대체 그가 언제 돌아서서 달려들었는지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언제 뽑아 들었는지 묵혼검이 푸른 궤적을 남기며 빛과 같은 속도로 공공대사를 향해 찔러들어갔다. "왜 안 피하는 게요? 대사의 능력이면 충분할 텐데......" 묵혼검은 공공대사의 세치 앞에 멈춰서 있었다. 하지만 묵향이 무의식적으로 시전한 어검술에서 뿜어 나오는 푸른 강기로 인해 공공대사의 옷은 조금 찢어져 있었고, 옅은 선혈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공공대사는 내공을 한 올도 끌어올리지 않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공공대사는 감정이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시주와 싸울 이유가 없소이다." 공공대사는 묵향의 검에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자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답하는 공공대사의 눈에서 묵향은 더 이상 승부욕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만약 예전의 공공대사였다면 적이 자신을 죽일 마음이 있건 없건 호승심 때문에라도 맛상대를 해왔을 것이다. 엄청난 무위를 과시하며 승부욕에 불타오르던 공공대사를 마주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다고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추구하는 강함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공공대사를 향해 묵향은 존경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검을 거두며 정중하게 말했다. "대사는 정말 도를 얻었구려.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잘 해보시오. 그럼 이만 가보겠소." 뒤돌아서는 묵향을 향해 공공대사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서문 시주가 교주를 따라왔다고 하셨소?" "그렇소만." "그런데 어찌하여 이곳으로 오기에 가장 어려운 길로 오셨소? 그 방향은 방장실이 있어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이라오. 그러니 갈 때는 다른 길로 가시는 것이 편할 거외다." "고맙소." 묵향의 대답은 아무런 감정이 섞여 있지 않은 듯했지만, 그 속마음은 달랐다. 이따위로 길 안내를 한 비육걸개를 다음에 만나면 뼈를 추려놓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놈이 감히 가장 지독한 통로를 안내해? 내 이놈을 가만히 두나 봐라.' 묵향은 참회동을 나서자마자 곧장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숨어 들어올 때야 인기척을 숨길 필요가 있었지만, 볼일 다 마쳤는데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전속력을 다해 경공술을 전개하고 있는 묵향을 따라올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묵향이 보라는 듯 엄청난 파공성을 흘리며 나한전 근처를 통과 할때, 수라도제가 승려들에게 포위된 채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그가 뇌전도법을 사용한 이상, 승려들은 곧장 상대가 누군지 파악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쯤에서 서로 간의 다툼은 끝이 난 모양이었다. "잘 해봐라. 그래가지고야 백날 가도 공공대사를 만날 수 있겠냐? 주제파악을 할 줄 알아야지. 크흐흐흣." 묵향이 비웃음을 흘리며 지나가는 모습을 수라도제라고 못봤을 리가 없었다. 수라도제 같은 고수가 저렇듯 엄청난 파공성을 흘리며 쏘아져 나가는 상대의 기척을 모른대서야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한껏 비웃음을 짓고 있는 묵향의 얼굴을 본 순간 수라도제의 얼굴이 똥이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어엇! 저자는 뭐냐?" "어디서 온 거지?" 수라도제를 포위하고 있던 승려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들 중에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승려가 일갈했다. "동요치 마라. 저자는 밖으로 나가는 자가 아니냐?" 이때 수라도제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장문인이 침중한 안색으로 그에게 말했다. "사질, 자네는 빨리 조사전으로 가보게. 아무래도 그가 튀어나온 방향으로 보아 그쪽인 듯싶으이." "예, 방장 스님." 그 승려가 달려가려 할 때, 수라도제가 입을 열었다. 그의 어조에는 씁쓸함이 짙게 묻어 있었다. "조사전이 아니라 참회동일 것이외다." "아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문 시주." "노부는 마교 교주의 뒤를 쫓아서 이리로 왔소이다. 나는 들켜서 여기 있고, 그는 아마 들어가는데 성공한 모양이오. 그가 저렇듯 기척을 숨기지 않고 달려가는 것을 보니, 이제 볼일은 다 마쳤다는 뜻이겠지요." 그 말에 장문인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빨리 참회동으로...., 아니 노납이 직접 가지." "이보시오, 방장 대사. 노부도 함께 가면 안 되겠소?" "아미타불. 서문 시주. 그곳은 절대로 외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소림의 중지외다. 노납이 그걸 어기면서까지 시주의 청을 들어드릴 수는 없소이다. 용서하시길 바라오이다." 나한전 소속의 무승 몇을 거느리고 재빨리 달려가는 장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라도제는 자신이 경솔했음을 후회했다. 이토록 경비가 엄중할 줄 알았다면 밤에 들어왔을 것이다. 밤이라면 자신의 실력으로 충분히 뚫고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교주와 자신의 실력차는 생각하지도 않고 괜히 따라 들어와서 이런 개망신을 당할 줄이야 그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사실 그도 무림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초강자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시주님께서는 본 사를 위해서 이곳에 오셨었군요.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해주셨다면 서로가 좋지 안았겠습니까? 아마도 이 승려는 수라도제가 마교 교주가 소림사에 침입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막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온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수라도제 같은 무림의 명숙이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소림의 담장을 넘었겠는가? 절간에서 재물을 훔치기 위해 왔을 리도 없고, 무공서를 훔치기 위해 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승려에게 그런 심증을 더욱 명확히 굳혀주는 것이 그가 밤도 아니고 낮에 소림의 담을 넘었다는 사실이었다. 승려가 오해를 하건 말건 수라도제야 지어놓은 죄가 있다 보니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남은 일은 빈승들이 처리할 것이니 시주께서는 그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어쨌건 교주가 이곳에 침입한다는 것을 아시고 여기까지 달려와주신 점, 방장 스님을 대신해서 빈승이 깊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데야 노부도 어쩔 수 없지. 그럼 수고들 하게나." 더 이상 방법이 없음을 알고 수라도제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공동파로 가는 길 수라도제가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객잔 한편에서 만통음제와 교주가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간간이 미소까지 짓고 있는 것을 보면 저 둘은 어기전성으로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공공대사가 뭐라고 하더냐 는 질문을 묵향에게 던지려던 수라도제는 곧 마음을 돌렸다. 비웃음을 흘리며 옆으로 지나가던 묵향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라도제는 내심 이빨을 갈며 다짐했다. '으드드득 오냐, 오늘 밤에 월담을 해주마. 아무리 많은 땡중들이 지키고 있다고 해도, 밤이라면 해낼 수 있어.' 수라도제가 객잔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종리영우와 제갈기가 반겨 맞이했다. <그래, 어찌 되셨습니까? 공공대사는 만나셨습니까?> <부끄럽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의문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수라도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어이없게도 들켜버리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밤에 다시 한 번 더 가보려고 합니다.> <과연 소림의 저력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입니다. 아무리 낮이었다고는 하지만, 사돈께서 침투하시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노부의 생각으로는 그년석이 알려준 침투경로에도 문제가 있는 듯했습니다. 나한전을 가로질러 방장실을 통과하라니, 그게 제정신을 지닌 자가 선택할 침입로겠습니까? 나한전과 팔대호원에서 무승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그 망할 녀석에게 당했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종리영우와 제갈기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비육걸개가 교주에게 너무나도 쉽게 소림사 내부를 알려준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교묘한 함정이 숨어 있을 줄이야. 아마도 비육걸개는 교주가 소림승들에게 들켜서 치도곤을 당하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쪽에 멀쩡한 모습으로 술잔을 들고 있는 교주의 모습을 보아 아쉽게도 비육걸개의 계책은 실패한 모양이다. 이때, 객잔 문이 벌컥 열리며 또다시 비육걸개가 뚱뚱한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다급히 달려온 것인지,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마침 계셨군요, 수라도제 대협." "어? 자네는 간 것이 아니었나?" 비육걸개가 거친 숨을 내쉬며 다급히 말했다. "급한 전갈을 받고 되돌아왔습니다." "급한 전갈이라니...., 도대체 그게 뭔가?" 바로 이때, 묵향이 비육걸개의 뒤로 슬쩍 다가와서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호오, 안그래도 자네를 만나고 싶었는데 정말 잘 되었군. 정말 잘 되었어." 그 말에 비육걸개는 아연한 표정으로 몸을 사리며 중얼거렸다.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묵향은 비육걸개의 멱살을 그러쥐며 으르렁거렸다. "본좌에게 사지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줘? 그러고도 네놈이 무사할줄 알았더냐?" 그 말에 비육걸개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상대의 옷매무새는 몇 시진 전에 봤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소림사 내에서 격전을 벌였다면 그가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뭔가 흔적이 남았을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걸 보면 교주는 아무런 문제 없이 소림사 내부를 들락거렸다는 말이 된다. 다시 한번 교주의 실력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 비육걸개는 실감할 수 있었다. 비육걸개는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교주께서는 분명히 알기 쉽게 설명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 길이 가장 이해하기 편하죠. 그렇게 설명하지 않고, 어떤 산 쪽으로 가서 그쪽에서 동남방으로 몇 리를 가라는 중,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교주께서는 이 일대 지리를 하나도 모르실 텐데, 이해하셨겠습니까?" 딴을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비육걸개의 멱살을 쥔 손아귀의 힘이 조금 풀렸다. 그것을 느낀 비육걸개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교주께서 설마 대낮에 조림의 담을 넘으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밤이라면 교주 님의 실력으로 미루어 충분히 성공하고도 남으실 거라고 믿었기에 감히 그 길을 알려드린 것이었습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본 좌가 오해해서 미안하구먼." 자신의 변명이 먹혀 들어가는 더하자 비육걸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잠시의 시간 여유를 두고 묵향의 이죽거림이 이어져서 들려왔다. "....하고 말할 줄 알았지?" 갑작스런 상황의 반전에 비육걸개는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 "이유가 어찌되었건 너는 좀 맞아야 되겠어." 그 말에 비육걸개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그럴 수가! 맞을 때맞더라도 이유는 알아야....." "맞는 데 이유가 필요해? 그러면 들려주지. 본 좌는 지금 네놈을 두들겨 패고 싶어. 그게 다야." 이어서 화려한 묵향의 몸놀림이 번개처럼 이어졌고, 퍼퍼벅 하는 요란한 격타음이 객잔 안에 울려퍼졌다. "크아아악!" "살결이 물컹물컹한 것이 감촉이 좋구먼. 몇 대 더 패도 되겠어." "제....제발, 그정도면 되셨지 않습니까?" 겉으로 봤을 때 비육걸개의 신색은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방금 전에 객잔 안에 울려퍼졌던 요란한 소리만 아니라면 비육걸개가 엄살을 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수라도제 같은 고수들은 알고 있었다. 묵향이 방금 전에 비육걸개에게 얼마나 지독한 내가중수법을 가했는지 말이다. 겉모습이야 어떤지 몰라도 비유걸개는 지금 혈도가 뒤틀리고 내장이 뒤집혀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기절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보면 비육걸개의 정신력도 그 비대한 덩치만큼이나 대단한 것인 모양이다. 이때, 수라도제가 슬쩍 앞으로 나서며 묵향을 말렸다. "그 정도면 과하게 손을 쓰신 것 아니겠소이까? 이제 그만하고 용서하시는 것은 어떻겠소이까?" 순간 묵향의 살기 어린 시선을 받자 수라도제는 기가 질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 수라도제를 바라보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묵향은 언제 자신이 수라도제를 그렇게 바라봤냐는 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자네도 저놈 때문에 꽤 고생했을 텐데, 용서해줄 마음이 나는 모양이지?" 그 순간 수라도제의 마음 속에는 엄청난 살심이 솟구쳐 올랐다. 감히 이런 식으로 자신을 희롱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갑자기 상대와 자신의 실력차가 떠올랐다. 지금 달려들어봐야 필패. 어쩔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악물며 정신을 수습한 수라도제는 먼저 비육걸개의 뒤틀린 혈도를 바로잡아주며 묵향에게 대꾸했다. "그건 노부의 실력이 모자라서 그리 된 것이니 누구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이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누구나 다 자네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야. 본좌에게는 본좌의 방식이 있는 거라구. 좀더 지근지근 밟아놔야 다시는 그런 짓을....." 살기 띤 어조로 묵향이 다가서는데, 이번에는 뒤에서 패력검제와 황룡무제까지 가세하여 묵향을 말렸다. "노야, 이제 그만하고 용서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객잔 안의 분위기를 살피던 만통음제가 묵향을 향해 손짓하여 말했다. "적당히 하고 이리와서 술이나 마시세. 금군을 앞에 두고 동도들끼리 싸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 만통음제까지 나서는 데야 묵향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한 달은 족히 정양해야 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는데...,너 오늘 운수대통한 줄 알아라." 비육걸개는 입가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소맷자락으로 닦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교주님. 콜룩콜룩! 그건 그렇고 공공대사는 만나셨습니까?" 이 질문은 비육걸개의 함정이었다. 만약 교주가 대답만 해준다면 자신의 추리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곧장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대답을 안 해준다손 치더라도 그 질문을 들은 상대의 표정만봐도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지독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고 돌아 서 있기도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계책을 쓰는 것을 보면 비육걸개도 보통 인물은 아닌 모양이었다. 묵향의 표정에 이채가 어렸다. '어쭈!미련 곰탱이처럼 생겨가지고, 생긴 것 답지 않게 제법이구먼.' "본좌가 공공대사를 만나러 갔었음은 어찌 알았나?" 비육걸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눈치 하나로 먹고사는 개방제자가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는 금방 알지요." "미련해 보이는 덩치에 비해서는 제법이로군. 다시 봐야겠어. 하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은 화를 부른다는 것을 명심하라구." 그렇게 대답한 후 묵향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자신의 추리가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비육걸개가 골똘히 뭔가 생각하고 있을 때, 수라도제가 답답하다는 듯 짜증 어린 어조로 말했다. 방금 전 일어났던 일에 대해, 자신이 교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느끼고 그는 매우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 "급한 전갈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가?" 비틀비틀 간신히 걸음을 옮겨 의자에 주저앉은 비육걸개는 긴 한숨을 푹 내쉰후, 수라도제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지. 지금 1천여의 금군이 엄청난 속도로 서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답니다." 비육걸개의 대답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겨우 저따위 소리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와서 악취를 풍기다니..... 돼지고기 구울 때 육수가 흘러내리듯, 아직까지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비육걸개를 보며 수라도제는 더욱 짜증이 솟구치고 있는 중이었다. 땀까지 가세하다 보니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는 평상시보다 2배는 지독하게 느껴졌다. '뭔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겠군. 도저히 이놈의 악취는 못참겠어.' 속으로 이빨을 갈며 수라도제는 퉁명스런 어조로 되물었다. "겨우 1천의 금군이 움직이는 것이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그렇게 달려온 것인가?" "그게 아닙니다. 대협께서도 금군이 종남파를 멸문시킨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쿨록! 그, 그때 본방에서도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했었습니다. 시체가 많이 훼손되어 자세한 것까지는 알기 힘들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무공이 사용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종남파를 멸문시킨 것은 수많은 금군 병사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극소수의 정예들에 의해 이뤄진 것입니다." 수라도제는 문득 비육걸개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가 참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인가?" "제가 왜 거짓말을 한단 말씀이십니까? 모든 게 분명한 사실입니다. 본문의 정보가 아니라 무영문에서 흘러들어온 정보니까 말입니다. 그들의 이동속도가 워낙 번개같기에 본방의 제자들로는 그들을 감히 감시할 엄두조차 낼 수 없습니다. 꼭 이동방법이 마......" 여기까지 말한 비육걸개는 고개를 살짝 돌려 힐끔 묵향의 눈치를 살핀후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동방법이 천마신교의 상급 무력단체들과 흡사하다는 겁니다. 인적이 없는 산길을 통해 고속이동을 하는 것이죠. 본방의 제자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직업의 특성상 마을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 집중되지 않습니까? 그렇다 보니 아에 그들의 움직임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무영문에서는 용하게도 그것을 포착한 모양입니다." 수라도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무영문에서 보내온 정보라면 신뢰할 수 있지. 그래 무영문은 그놈들의 목표가 어디라고 예상한다던가?" "공동파일 가능성에 9할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방에서의 판단도 그렇고요." "그 말은 다른 작전을 펼치기 위해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로군." "예, 사실 그 방향으로 움직였을 때, 몇몇 군소방파들도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 방향으로 계속 움직인다면 곤륜파까지도 사정거리에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1할의 가능성을 딴곳에다가 남겨둔 것이겠지요."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종리영우가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곧장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도 형님의 의견에 찬성입니다." 반 시진 후, 수라도제가 거느리는 고수들은 또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소림사까지 달려온 피로를 채 풀기도 전에 또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소림사까지 달려온 피로를 채 풀기도 전에 또다시 하게 된 강행군이다. 1천여의 고수들을 모두 다 거느리고 가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겠지만, 정작 적을 만났을 때 너무 지쳐버린다면 오히려 짐이 도리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피로하여 또다시 강행군을 할 수 없는 자들은 이곳에 남아 있다가 몸을 추스린 후 양양성으로 되돌아가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후발대들과 연락을 취해 그들 또한 양양성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본좌는 이곳에 남겠소." 교주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자 수라도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정이시오?" "진정이오. 여기까지 달려온 후 곧바로 술 한 잔 했더니 아직 피로가 안 풀려서 말이오." 교주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뻔뻔스럽게 내뱉은 후 당당하게 객잔의 갤실로 들어가버렸다. 기가 막혀서 뭐라고 말도 못하고 있는 수라도제를 남겨놓고 말이다. 이때, 객실로 향하는 교주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만통음제 또한 다급히 말했다. "노부도 빠지겠소. 어어, 과음을 했나? 뒷골이 뻐근하구먼." 속 보이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허둥지둥 만통음제까지 빠져버리고 나자, 수라도제는 어의가 없었다. 강력한 적을 앞에 두고 가장 뛰어난 고수들 중 둘이 빠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끌고 갈 강제적인 수단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제 빠질 사람은 다 빠진 것 같으니 서둘러 출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룡무제의 말에 패력검제 또한 덧붙였다. "아마 그는 이곳에서 할 일이 남아 있는 모양이지요. 그가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없다고 해도 금군쯤이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딴은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출발명령을 내렸다. 이제 500명으로 그 수는 줄어들었지만, 훨씬 더 정예화된 고수들을 이끌고 말이다. "정말 안 갈 건가? 동생, 자네가 이렇게 단독행동을 하면 수라도제는 물론이고 무림맹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만통음제의 물음에 묵향은 피식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그런 거 신경쓰지도 않습니다. 과거부터 원수지간이었고, 또 이번 합작만 끝나고 나면 또다시 원수지간이 도리 텐데 그놈들 입맛에 맞춰 움직여줄 이유가 없죠." "그거야 그렇네만....,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공동파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나?" 묵향은 창문을 통해 수라도제가 거느리는 고수들이 떠나는 모습을 훔쳐보며 말했다. "무림에 수많은 문파들이 있지만, 제가 가장 싫어하는 문파는 딱 하나뿐이죠. 안 그래도 멸문 당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문파를 금나라 녀석들이 대신해서 없애주겠다는데, 제가 그걸 방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말에 이제야 이해가 가는지 만통음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공동파와 워한이 있었던 모양이군." "예, 전대 무림맹주 옥청학이 공동파 출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죠." 묵향의 뇌리에는 옥청학 외에 또 다른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옥령인. 잊고 싶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손이 그녀의 뱃속을 파고들었을 때, 입가로 피를 흘리며 슬픈 눈매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 "이런 젠장!" 묵향은 그녀의 뱃속을 꿰뚫었던 자신의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뱃속을 해집을 때의 느낌이 손을 타고 전해져오는듯했기에 그 느낌을 떨쳐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묵향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은후,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니.... 하지만 공동파가 사라지고 나면 어쩌면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더불어 그놈의 옥 씨들까지 몽땅 다뒈져버렸으면 좋겠어. 그녀의 눈매를 닮은 놈들은 모두 다 말이야.'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묵향의 옆모습이 왠지 슬퍼 보인다고 느끼는 만통음제였다. '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뭔가 깊은 속사정이 있는 모양인 게로군. 과거의 원한을 떠올리는 사람이 저런 모습일 리 없으니 말이야.' 문득 그게 뭔지 궁금해지는 만통음제였다. 하지만 만통음제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담지 않았다. 쓸데없는 호기심을 보여 동생의 마음을 상하게 할 만큼 미련한 그가 아니었기에. 흑살마왕 장인걸 봉문을 선언한 소림사를 제외하고, 9파1방에 속한 문파들의 대부분의 사정은 요 근래에 멸문당한 종남파의 그것과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 무림맹에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곳에 일정수의 고수들을 파견해야만 했고, 체면유지를 위해 양양성에도 상당한 수의 고수들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특히 그들 중에서도 감숙성 남쪽에 위치한 공동파는 무림맹에 다른 문파들보다는 훨씬 더 많은 고수들을 파견해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림맹주가 무당파의 태극검황으로 바뀐 후에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림맹 내에 공동파의 세력을 더욱 확장시켜 놓을 필요성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공동파의 장문인은 무림맹에서의 세력유지를 위해 많은 고수들을 파견해놓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크흐흐흣, 천하의 공동파도 별것 아니었구먼." 공동파에 혈겁을 일으키고 있는 괴한들 중의 한 명이 내뱉는 말에 장문인은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 공동파를 침입한 괴한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뛰어난 고수들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무시무시한 마기를 뿜어내는 수십 명의 고수들의 존재였다. 그몇 안 되는 고수들이 공동파를 시산혈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약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을 외부에 파견하지 않고 이곳에 남겨두기만 했어도, 이토록 심하게 밀리지는 않았을 것을...... "귀하는 천마신교에서 왔소?" "물론이지. 본교가 아니라면 누가 있어 이토록 많은 고수들을 키운단 말이냐? 알았으면 순순히 항복하거라." "참으로 가증스럽도다. 겉으로는 무림맹과 합작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세력확장을 위해 본문을 치다니. 그게 인간으로서 할 짓이냐?" "물론 승자에게 그런 작은 허물쯤은 용서되는 법이자." 상대는 넉살 좋게 댂했다. 문파의 수장인 장문인 주위에는 그 문파가 보유한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 포진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장문인이 서 있는 그 부근에는 고수들 간의 격돌로 인한 여파로 검기와 검품이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이 격전장의 중심에 태연히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허어, 이거 오늘은 흉다길소(凶多吉小)한 날이로다. 저런 뛰어난 고수들을 이끄는 자가 약자일 리는 없는 법.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혀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설마, 저자가 말로만 듣던 극마의 고수라는 말인가?' 한없이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며 장문인은 상대를 향해 일갓 했다. "그런 돼먹지 못한 궤변은 파락호들에게나 늘어놓게." "쯧,그렇다면 협상결렬인가?" 상대는 가볍게 혀를 차며 이죽거리는 듯했는데, 어느 순간 장문인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빠른 몸놀림을 이용한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헉!" 다급한 신음소리를 삼키며 장문인은 다급히 검을 뽑아들었다.그의 몸이나 다름없이 수십 년을 함께해온 보검을 뽑아들자, 과연 공동파라는 거대문파의 수장답게 장문인은 뛰어난 무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백류매화검법(白流梅花劍法)과 공동파 장문인에게만 전수되는 비전 통천검법(通天劍法)을 절묘하게 구사하며 상대와 격전을 벌였지만, 누가 봐도 장문인이 괴한에게 밀리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수 있었다. 곧이어 장문인 주위에서 마인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던 장로 3명이 장문인을 돕기 위해 달려들었다. "크흐흐흣, 이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지. 하지만, 종남파도 그랬지만 공동파도 허명만 높을 뿐, 명성에 맞는 실력을 지니지는 못하고 있다는 게 유감이야. 본좌는 이렇게 싱거운 싸움을 원한 게 아니었거든." 그와 동시에 괴한의 손이 기괴한 움직임을 드러냈다. "크업!" 펑! 한순간 괴한을 포위하고 있던 4명의 고수들이 뒤로 튕겨 나갔다.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면서도 괴이한 한 수에 당한 것이다. 물론 그들도 공동파가 자랑하는 고수들인 만큼 그 정도에 무너질 리는 없었다. 재빨리 방어자세를 갖추며 다시 한번 접전을 벌일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이때, 뭔가 몸에 이상이 있음을 눈치챈 것은 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장문인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게요? 독이요?"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자신의 몸상태를 점검했다. 방금 상대의 장력에 격중된 부위에 뭔가 부조화가 감지되엇는데,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그 부조화는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조금 쓰라리던 부위가 점차 시간이 지나자 엄청난 통증을 유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흐흐흣, 지금껏 본좌는 독 따위를 쓰는 놈들을 벌레 보듯 했거늘, 하물며 본좌가 그따위 유치한 장난을 치겠느냐?" 네놈들은 본교가 자랑하는 흑살마장에 죽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라." "흑살마장........" 중얼거리는 장문인의 어조에는 절망감이 묻어 있었다. 장력에 스치기만 해도 그 부위가 시커멓게 썩어들어가는 지독한 마공이 바로 흑살마장이었다. 지금 당장 치료하면 생명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막강한 고수를 눈 앞에 두고 어떻게 치료를 받는다는 말인가. 물론 지독하기 그지없는 흑살마장이라고 해도 단점이 없을 수 없다. 공력을 뿜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장력이 발출되는 거리도 다른 장공들에 비해 상대적으로짧다. 더군다나 그것을 10성까지 익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마교 고수들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이것에 도전해보는 것이다. 그런 약점을 지닌 것이 흑살마장인데도, 상대는 한순간에 4번의 장력을 발출했다. 그리고 상대는 엄청나게 뛰어난 신법을 지니고 있었기에, 장력의 사거리 따위는 무의미했다. 장력이 미티는 사거리까지 순식간에 파고들어 일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에서 치밀어 오르는 통증이 점점 더 강렬해지자 장문인은 신음성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크으윽! 귀하는 유감스럽게도 10 성을 다 연성한 모양이구려." 장문인의 질문에 상대는 호기롭게 대꾸했다. "10성뿐이겠느냐? 12성 대성하였느니라." "그.그렇다면 설마... 귀하가 흑살마왕?" 그 말에 흑살마제 장인걸은 눈에 이채를 발하며 이죽거렸다. "호오, 아직까지도 본좌를 기억하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본좌가 누군지 알아챈 그 안목을 높이 사 제일 마지막에 죽여주마." 모두들 점점 더 극심해져오는 통증에 신음성을 흘리면서도 장인걸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런 그들에게 비웃음을 던지며 장인걸이 이죽거렸다. "본좌의 흑살마장에 격중된 이상 살아남기는 힘들것이야. 괜히 힘빼지 말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게다. 크흐흐흣." 바로 이때, 어디선가 긴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문제는 그 휘파람소리에 엄청난 내력이 실려 있어 공동산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장인걸의 안색이 조금 다급해졌다. 단번에 죽일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가이 든 것이다. 그만큼 장소설에 실려 있는 내력은 너무나도 웅후라여 장인걸 같은 극마의 고수조차도 감히 경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장인걸은 망설임 없이 죽각 손을 썼다. 과연 극마의 고수답게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빨랐다. 신형이 번뜩인다. 싶은 순간, 이미 그의 몸은 장문인의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장인걸의 손에서 시커먼 기운이 일렁거린다 싶은 순간 펑하는 굉음과 함께 장문인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봅부에 정면으로 흑살마장을 맞은 장문인이 즉사해버리자,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세명의 고수들 또한 자신들의 처지가 어찌될 것인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앉아서 죽는니 적의 팔 하나라도 자르는 것이 지금 공동파를 향해 접급해오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길이 될 것이다. 서로의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오랜 세월 공동파에서 함께 수련해온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장인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크흐흣, 가소로운 것들." 퍼펑! 장인걸을 향해 몸을 난린 공동파 장로들의 의기는 가상한 것이었으나, 불행히도 그들의 실력은 장인걸 같은 극마급 고수를 상대함에 있어서 너무나도 격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의 몸이 성할 때도 장인걸을 어떻게 하기 힘들텐데, 그들은 지금 극심한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장인걸은 그들을 잔인하게 죽여 나갔다. 장문인과 3명의 장로들을 죽여버린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장인걸은 다시금 몸을 날렸다. 장문인이 있는 전각 주위에는 공동파의 최정예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그들은 지금 침입한 적도들과 사력을 다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장인걸 같은 엄청난 고수가 끼어들어 그들의 뒤통수를 치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천마혈검대의 고수들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장인걸이 손수 손을 쓴 이유는 미지의 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지금 달려오고 있는 적의 실력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렇다면 지금 당장 후퇴해야 하는 것이다. 전각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공동파의 상층부 고수들을 몽땅 해치워버린장인걸은 아직도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장내를 향해 명령했다. "철수하라!" 단 한마디의 명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읶르고 있는 병사들은 재빨리 격전을 멈추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가 공동파로서는 장인걸의 수하들을 도륙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미 장인걸과 그가 거느리고 간 천마혈검대 때문에 공동파의 장로급 이상의 수뇌부는 거의 다 죽음을 당한 상태였기에, 공동파 제자들을 통솔할만한 인물이 없었던 탓이었다. 장인걸이 철수한 지 채 반 각(7분 정도)도 지나지 않아 수라도제가 이끄는 500여명의 고술들이 공동파에 도착했다. 숭산에서 수라도제가 급히 출발했을 때, 장인걸과는 거의 하루 하고도 반나절에 걸친 시간차가 있었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일행들을 독려하여 그것을 겨우 몇 시진의 차이로까지 좁혀놓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가 공동파에 도착했을 때, 수라도제는 자신이 너무 늦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장문인은 어디 계시느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공동파 제자를 붙잡고 질문을 던지자 그는 힘없이 중앙에 서 있는 큰 전각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제자를 아직까지도 자신이 이 아수라장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라도제가 전각으로 급히 달려갔을 때, 그곳에는 수백 구가 넘는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는 공동파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장문인은 어디 계시느냐?" 그 말에 제법 나이든 제자 한 명이 나서며 대답했다. "장문인께서는 괴한들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뭣이?" 수라도제는  제자를 닦달하여 급히 장문인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타문파 장문인의 시신에 손대는 것이 실례임을  알면서도 시신에 난 상처를 헤집기 시작햇다. 흉수가 누구인지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그는 장문인의 내부장기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신음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흐으음. 흑살마장이로구나. 그 저주받은 마공을 쓰는 놈이 아직까지 존재할 줄이야." 그 말에 옆에 서있던 황룡무제가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흑살마장이라면..., 마교가 관계되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지도 모르지. 교주가 말도 안 되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동행을 거부했지 않았는가. 아무래도 교주가 우리들에게 말하지 않은 은밀한 뭔가가 있는 듯하구먼, 그자가 함께 왔으면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당장 추궁했을텐데......" 이때 저쪽에서 공동파 제자들과 뭔가 대화를 주고받던 패력검제가 다급히 다가와 말했다. "그자들이 이곳에서 철수한지 1각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놈들의 수는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갑자기 급습을 당했기에 그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히 알수 없답니다. 하지만 적들 중에서 대단히 뛰어난 고수들이 몇 명 정도 섞여 있는 것은 확실한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설마 마교가 금과 어떤 연관을 지니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군. 지금 당장 출발하세." 수라도제의 명령에 따라 무림연합의 최정예 고수들은 금군의 흔적을 찾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숭산을 향해 달려가던 제 2진의 고수들이 피곤에 지친 안색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제1진으로 가장 선두에 달려갔던 무림연합 고수들 중 500여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2진을 이끌고 있던 공동파 장로는 즉시 그들을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아니, 무슨 일인가?" 집결지는 숭산이 아니었는가?" 제1진의 고수들 중 한 명이 공동파 장로에게 포권하며 인사를 건넨 후 대답했다. "수라도제 대협께서 양양성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수라도제 대협께서? 노부는 이해할 수가 없구나. 대협께서 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는 말이냐?" "소림사는 금의 압력에 굴복하여 10년 동안 봉문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 만큼 소림을 돕기 위해 달려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그 말에 공도파 장로는 장탄식을 터뜨리며 되물었다. "허어, 그게 사실이냐?" "제가 어찌 감히 대협께 허언을 아뢸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소림사가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정말이지 형편없는 작자들이 아닌가?" 이때, 제1진의 무사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던 묵향이 슬그머니 나서며 공동파 장로에게 말을 걸었다. "남의 걱정 하지 말고 자네 걱정이나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런 말을 한 것이 마교 교주임을 알아본 장로는 감히 발작하지는 못하고 불퀘한 듯 대꾸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교주." "돌아가라는 지시만 내려놓고, 정작 그 지시를 내린 당사자인 수라도제는 왜 여기에 없겠는가." 잠시 장로를 비웃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뭇향이 말을 이써다. "물론 자네의 그 머리통으로는 죽었다 깨도 알 수 없을 테니, 본좌가 가르쳐 주지." 그 말에 공동파 장로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햇다. 그것을 보고 처음에 장로와 인사를 나눴던 장한이 다급히 중간에 끼어들었다. "교주님.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아아, 필요가 있고 없고는 본좌가 결정해. 네놈이 참견할 일이 아니란 말이야. 자,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맞아 그 늙은이가 어디로 갔느냐 하면, 바로 자네의 사문인 공동파로 달려갔다네." '무슨 일로 말이오?' 하고 말하는 듯 의문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공동파 장로에게 묵햐이 자세히 설명해 줬다. "금군이 공동파를 기습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정보가 개방에서 들어왔지. 수라도제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공동파를 향해 떠났다네." 공동파 장로는 나지막하게 콧김을 내뿜으며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했다. 마교 교주가 옆에서 깐죽거리는 바람에 상당히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흥, 겨우 금군 졸개들이 움직인 것 가지고 그런 말씀을 하다니요, 교주께서 본문을 걱정해주시는 것은 감사드립니다, 본문은 그렇게 나약한 문가가 아니외다." 하지만 묵향은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혀를 끌끌 차며 어린애라도 가르치듯 말했다. "쯧쯧, 그게 아닐걸? 그놈들 때문에 9파1방에 자리를 잡고 있던 종남파도 멸문 당했다네. 공동파도 혈겁을 피하기는 힘들걸?" 다른 사람들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장인걸이 공동파를 멸문시키려고 작정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목적한 바를 이룰것임을 묵향은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장인걸과 싸워왔기에 상대의 습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주의 지적에 공동파 장로의 조금 창백해졌다. "서, 설마 그럴 리가....." "자네는 확신하나? 공동파가 지닌 힘이 종남파보다 더욱 강하다고 말이야." "....." 공동파 장로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묵향은 싸늘한 비웃음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수라도제가 다급히 움직인 것을 보면 그는 공동파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거야. 만약 공동파가 충분히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그가 생각했다면 뭐 하려고 힘 빼가며 공동산으로 달려갔겠냐? 숭산을 포위했다가 물러가는 금군 놈들의 뒤통수를 쳤겠지. 안 그래?" 여기까지 들으 공동파 장로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었다. 사문인 공동파에 위기가 도래했다는데 교주와의 사소한 시비가 문제가 아닌것ㅇ티다. "이렇듯 본문을 걱정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교주." 공동파 장로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는 제자들을 이끌고 다급히 공동파를 향해 길을 떠났다. 사문의 안위가 걱정스러웠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문파의 고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까지 급히 달려오느라 모두들 지쳐 있기도 했지만, 제1진에 속한 고수들을 통해 양양성으로 돌아가라는 수라도제의 지시가 내려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문파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동파가 박살나든 말든, 남의 집에 불난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길을 떠나는 공동파 제자들 중에 옥대진과 능비화도 끼어 있었다. 그들의 피로에 지친 뒷모습을 묵향은 아주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공동파 장로에게 일부러 이 사실을 알린 것도 다 그곳으로 꼬지가 빠지게 달려가라고 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 공동산으로 달려가 봐야 모든게 다 끝난 후일테니 도착한 후에는 더욱 허탈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묵향의 기분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흔들리는 무림맹 시일이 지나자 공동산에서 벌어진 엄청난 혈겁이 개방을 통해 사방으로 전해졌다. 때마침 수라도제가 이끄는 무림연합의 고수들이 도착하여 멸문당하는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공동파가 입은 피해는 너무나도 막대한 것이었다. 장문인 이하 모든 장로급들, 그리고 실력 있는 제자들의 대부분이 사망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생각해보면 고수들의 상당수를 무림맹이나 양양성 방면에 파견해놓은 것이 정말 공동파로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들이 살아 있었기에 공동파는 언젠가는 그 세력을 회복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그게 가까운 시일 내에는 불가능 하겠지만 말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무림맹은 금이 지닌 저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중원의 북부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무림의 방파들이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그것도 종남파와 공동파 같은 거대문파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거기에다가 무림맹 수뇌부들을 더욱 긴장시킨 것은, 그들과 직접 사투를 벌인 수라도제의 보고 때문이었다. 적을 포착하여 격멸시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피해가 너무나도 막심했다. 100여 명이 사망하고, 300여 명이 중상을 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의 수뇌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중상자들 중에는 황룡무제까지 끼어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피해가 크다고 해도 적들을 완전히 끝장내버렸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무림맹의 수뇌부들을 고민엔 빠뜨린 것은 적도들중에서 상당수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버렸다는 수라도제의 보고 때문이었다. "허어, 어찌 이럴수가 있다는 말이오? 적도들 중에서 화경급 고수와 상대할 만한 초절정급 고수가 존재하다니..... 그게 말이나 돼오?" 일찍이 수하들을 거느리고 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연경으로 쳐 들어갔었던 백량 장로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 태평스럽게 말했다. "노부가 직접 연경에서 놈들과 싸운적이 있소. 수하들을 다 잃고 노부만이 간신히 살아서 도망쳤을 정도로 그놈들은 뛰어난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소이다. 거기에 화경급이 몇 명 섞여 있다고 해서 뭐가 그리 놀라운 일이겠소?" "허어, 그렇게 속 편하게 말할 게 아니외다." 점잖은 직책이었지만 그것이 백량 장로의 속을 뒤집어놓은 모양이었다. 벌떡 자리에 일어선 백량 장로는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그렇기에 그의 손은 자신의 애병이 걸려 있던 허리부근을 무의식적으로 더듬고 있는 중이었다. "뭣이? 속 편하게? 네놈이 노부의 마음을 어찌 알고 그딴 소리를 한단 말이냐?" 방금 전까지 말은 빈정거리듯 했지만, 그의 마음이 그렇게 편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사문인 종남파가 적도들의 손에 피바다가 되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알고도 태연하다면 그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어허, 이게 무슨 짓이오? 맹주님 앞이오. 당장 자리에 앉으시오." 백량 장로는 분노어린 시선으로 상대를 한참 노려보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백량 장로가 자리를 뜸으로 인해 회의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져버렸다. 오랜 시간 지속된 침묵은 공수개 장로가 입을 열면서 끈이 났다. 공수개 장로는 주위의 누치를 살피더니 아무래도 이런식으로 회의가 끝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지금 가장 시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본방에서 한 가지 정보가 올라왔는데, 아무래도 이 점은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는 것이 좋을 듯해서 말씀을 올리겠소이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공수개 장로는 낮게 헛기침을 한 후 말을 이었다. "어흠, 모두들 아시다시피 이번 혈사로 인해 금의 세력이 결코 만만하게 볼수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소이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에 의문이 떠올랐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공수개 장로가 말하는 이유가 뭘까? 하지만 곧이어 그들은 알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것인지. "금은 그들의 영토 밖에 있는 공동파까지 박살내버렸소. 그렇다보니 지금 무림의 각 문파들은 양양성에 내보냈던 정예고수들을 불러들이고 있소이다. 무림의 대의를 따르는 것도 좋지만, 우선 집안을 튼튼히 해놓고 보자는 뜻이겠지요." 그 말에 맹주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청호진인이 놀라서 외쳤다. "아니, 그게 사실이오?" "자세히 알아보면 곧 들통날 일인데 거짓말을 해서 무엇 하겠소? 노부의 말은 사실이외다." "허어, 이것 큰일이구려. 그렇다면 모처럼 집결시켜 놓은 무림연합의 세력이 급격히 저하될 것은 자명하지 않소이까? 소림까지 봉문한 상태인데 일이 어찌되려고 이러는지....." "참 소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소문 들으셨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림의 장문인이 물러났다고 하던데." 누군가 소림사에 대에 들은 풍문을 입에 담자 여기 모인 장로들 중에서 가장 정보가 빠른 공수개 장로가 그 진위를 알려줬다. "대덕대사가 물러나고 새로이 덜략대사가 방장직에 올랐다는 연락을 받았소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다고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소."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공 장로." "수라도제 대협이 소림의 정문을 파괴하며 응징하겠다는 선언을 했으니 소림사로서는 겁이 날 만도 하지 안겠소이까? 그걸 피해가기 위해 대덕대사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명목하에 장문직을 아랫사람에게 넘긴 것이겠지요?" "허어, 그런 속셈이 있었구려. 하여튼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말로만 떠들면서 정말 하는 짓거리가 약팍하기 그지없구려." "그러게 말이외다." 모두들 소림사의 행동에 실망감을 감추기 힘든 모양이다. 이때, 청호진인이 묵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 어찌되었건 소림이 봉문을 선언한 이상 그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소이다. 우선 당면과제는 고수들을 빼내는 이기적인 문파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것이 아니겠소? 빈도의 생각으로는 몇몇 문파들을 골라내어 본보기로 응징을 가하는 것이 좋을듯한데....." 청호진인이 심각한 어조로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공수개 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불가능하외다. 청호진인이 사문인 무당파의 겨우 양양성에서 거리가 멀지 않기에 위급할 때는 즉시 양양성에 주둔중인 고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다른 문파들은 그렇지 못하오. 만약 그들이 이 사실을 들고나오며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한다면 어찌 하시겠소이까?" 공수개 장로의 지적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기에 청호진인으로서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공수개 장로는 그것보라는 듯 천호진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 지금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인은 금군이 보유한 정예군들의 수준을 파악하는 일이외다." "놈들의 능력은 이번에 거의 드러났지 않소이까? 공동파와 종남파를 파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거의 9대문파급,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강력한 정도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물론 그렇소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오. 놈들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해야 이번처럼 뒤통수를 얻어맞지 않을 수 있지 않겠소? 이번에 일어났던 일도 다 놈들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몬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소이까?" "허어, 참. 개방에서조차 그 사실을 모르는데, 빈도가 그걸 어찌 알아낸단 말이오? 혹시 무영문 쪽에다가 의뢰를 한다면....." 청호진인은 공수개 장로의 안색이 노기로 시뻘것게 변하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을 멈췄다. 무의식중에 자신이 공수개 장로의 역린을 건드렸음을 느꼈던 것이다. 이때, 지금까지 말 없이 듣고만 있던 맹주가 문득 입을 열었다. "서로 다툴 필요 없네. 금이 보유하고 있는 핵심전력은 이미 파악해 냈으니까?" 그 말에 공수개 장로는 놀라서 외쳤다. "정말이십니까? 맹주님." "물론일세. 노부가 여러 가지로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일단의 마교세력이 금군에 협조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네." 그런 말은 개방출신인 공수개 장로도 처음 듣는 것인지라 불신감 어린 표정으로 반문했다. "도대체 그정보의 출처는 어딥니까? 맹주님." 맹주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무영문일세." 그 말에 공수개 장로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또다시 무영문에 한 발 뒤늦은 것이다. 맹주는 공수개 장로의 표정을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공수개 장로도 그 사실을 알려줬지 않은가?" 이어진 맹주의 말에 공수개 장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런 보고를 올린 기억이 없습니다." "과거 노부를 공 장로에게 완옌 렌지에라는 인물을 조사해 달라고 청한 일이 있었네. 안그런가?" "그... 그렇습니다." "그때 공장로가 노부에게 들려준 답변과 무영문에서 흘러들어온 정보를 종합해 보고 노부는 그런 결론을 내렸던 것일세." "그렇다면 맹주님께서는 마교가 금의 뒤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또 다른 장로가 외쳤다. "그놈들이 갑자기 협정을 맺자고 할 때부터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소이다. 이런 썩을 놈들!"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맹주는 손을 슬며시 치켜들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모두들 조용히 하게나. 노부는 분명히 말했네. 마교세력의 일부가 금에 넘어갔다고 말이야. 만약 지금 마교가 전폭적으로 금을 밀고 있다면 사태는 절망적이겠지만, 원시천존께서 도우셔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네. 지금 금에 협력하고 있는 존재는 과거 마교에서 암흑마제와 교주자리를 다투다가 쫓겨난 인물일세." 그 말에 장로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암흑마제와 권력다툼을 벌어다가 쫓겨난 자라. 이 순간 그들의 뇌리에 한가지 명호가 떠올랐다. 맹주는 말을 멈추고 좌중을 쓱 훓어본 후 말을 이었다. "사파에서는 흑살마제라고 부르고, 정파 쪽에서는 흑살마왕이라고 부르는 장인걸 전 교주가 바로 그 당사자지. 노부는 그가 탈출할 때 천마혈검대까지 거느리고 갔다는 정보까지 입수했다네." 그 말에 모두들 작금의 사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있었다. "그렇다면 마교는 일찍이 그 사실을 알고 동맹을 요청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일세. 그들도 흑살마왕을 치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힘들다고 결론을 내렸겠지. 수라도제의 보고에 따르면 지금 교주는 양양성에 와 있는 모양이야. 교주가 직접 움직일 정도로 마교는 이번 일을 중대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지." "오오, 그런 일이.... 그런데 맹주꼐서 좀 더 빨리 그 사실을 밝히셨으면, 이토록 엄청난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건 노붓가 여러 장로들에게 사과하겠네. 그 정보를 알려준 옥화 봉공은 그 사실을 비밀에 붙여줄 것을 부탁했었네. 흑살마왕이 금에 있다는 것을 조사하여 마교 교주에게 알려준 것이 무영문이었거든. 무영문은 지금까지 한 가지 정보를 한 곳에다가만 판매한다는 규칙을 고수해 오지 않았었나? 그걸 노부 때문에 깨뜨리게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된 이니, 노부가 그 사실을 공포하면 그걸 노부에게 알려준 옥화 봉공의 처지는 어떻게 되겠나? 태상문주가 문의 법규를 어긴 것이니 아주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겠지. 그렇기에 노부는 지금까지 그 사실을 비밀에 붙일 수밖에 없었네." 이제 모든 상황을 이해한 공수개 장로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금이 지니고 있는 세력은 그렇게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흑살 마왕과 그가 거느리는 천마혈검대. 물론 천마혈검대가 엄청난 힘을 지닌 세력임을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소수정예라는 단점을 안고 있습니다." 소수정예가 단점이라는 말에 다른 장로들은 의아스러운 듯했다. 사실 소수정예가 지니는 이점이 더욱 크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은 이어지는 공수개 장로의 말에 그가 뭣 때문에 소수정예가 단점이라고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백량 장로가 금의 황굼에 침입했을 때 그곳에 일단의 마교 교수들이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천마혈검대는 지금 두 토막이 나 있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요. 일부는 황굼을 지키고, 일부는 흑살마왕이 거느리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안 그래도 백명 남짓한 소수로 이워진 천마혈검대를 두 개로 나눈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흑살마왕이 마교에서 쫗겨난 후 20 여 년이 흘렀소이다. 그가 또 다른 고수들을 키웠을 가능성도 생각해둬야 하지 않겠소이까?" 우려 섞인 지적이었지만 그 말에 공수개 장로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흑살마왕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자라고 해도 여진족들을 상대로 무공을 가르쳐봐야 얼마나 가르쳤겠소이까? 쓸만한 고수 2천을 키웠다면 정말 많이 키운 것일 겁니다. 안그렇습니까?" 공수개 장로의 지적에 다른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 또한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 아닌가. 뛰어난 고수 1명을 만드는 데 얼마만한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어야 하는지 잘 아는 것이다. "공수개 장로의 말이 옳습니다." "허어, 금이 엄청난 세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구려. 이건 완전히 자신이 지닌 총력을 다하여 외줄타기를 한 것이 아니오이까?" 지금까지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있던 옥진호 장로가 입을 여었다. "기왕에 알게 된 사실이니, 우리들은 그걸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오오, 옥장로께 뭔가 고견이 있으시오?" "천마혈검대 하나뿐이라고는 하지만, 그 지닌 바 능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소이다. 그들을 없애려면 이쪽의 피해도 적지 않을게 분명하오. 구태여 그런 피해를 자초할 것이 아니라 마교의 일은 마교가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렇다면 천마혈검대는 그렇게 처리한다고 하고, 지금 당면한 과제인 양양성에 주둔중인 고수들의 이탈은 어찌 해결하는 것이 옳겠소이까?" "일단 각 문파들에게 맹의 일에 협조해 달라는 서신을 돌리는 정도로만 해두는 것이 좋겠소이다. 정파 쪽이 더 이상 피해를 당한다면 나중에 금과의 전쟁이 끝난 후, 마교에게 밀릴 가능성이 크니까 말입니다." "노부의 생각도 그렇소이다." 모든 장로들의 의견이 어는 정도 합해지자 가만히 앉아 있던 맹주는 결정을 내렸는지 공수개 장로를 향해 말랬다. "공수개 장로." "예." 개방의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천마혈검대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게. 흑살마왕이 거느린 주력의 위치만 예의주시한다면 언젠가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게 아니겠나?"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맹주님." "청호장로는 각 물파에 서신을 돌려 양양성에서 고수들을 빼내지 못하도록 당부해 주게." "예." "옥진호 장로는 휘하의 고수들을 천마혈검대의 공격권 밖에 위치한 문파들에 파견하여 고수들을 빼내지 못하게 압력을 가하게. 사실 공격권 내에 위치한 문파들이 고수들을 빼내는 것이야 이해해 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문파들이 고수들을 빼내는 것까 용납해줄 수는 없지 않겠나?" "명대로 따르겠나이다." 장인걸은 공동산에서 정파연합의 고수 500명과 대규모 혈전을 벌인 결과 예상 밖에 큰 피해를 당했다. 어쩌면 장인걸 자신마저도 하마터면 그곳에서 뼈를 묻을 뻔했을 정도로 상대방의 전력은 막강했다. 전 중원을 통틀어 10명도 안 되는 화경급 고수가 무려 셋이나 한꺼번에 등장할 줄은 미처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장인걸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이 그즐 중에 황룡무제가 끼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황룡무제가 극성으로 익힌 무공은 청월검법. 청월검법은 전전대교주였던 한중길이 철저히 연구하여 파훼법까지 만들어놓은 검법이었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상대의 공격로를 환히 꿰뚫고 이었고, 그것이 장인걸의 목숨을 살려줬다. 황룡무제가 쓰러지는 순간 삼재진은 깨져버렸고, 그 틈을 이용하여 장인걸은 탈출에 성공했다. 장인걸과 함께 탈출에 성공한 수하들은 4백도 채 안 되었다. 그나마 천마혈검대 소속의 고수들을 단 한 명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장인걸로서는 큰 위안 이었다. 장인걸은 생존자들을 수습하여 곧바로 남양으로 돌아왔다. 적들의 실력을 감안했을 때 아무래도 남양의 수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공동파를 향해 떠날 때의 모습과는 달리 남양으로 돌아온 장인걸과 그 수하들의 모습은 패잔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편복대주는 오체복지하여 사죄했다. "속하를 죽여주시옵소서, 교주님." 씁쓸한 미소를 지은 장인걸을 슬그머니 공력을 일으켜 편복대주를 일으켜 세웠다. "싸우다 보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일이다. 패배할 때마다 수하들의 목을 베어서야 어찌 대업을 이루겠느냐? 다만 똑같은 실수만 되풀이하지 않으면 된다." 이번 장인걸의 패배는 전적으로 편복대주의 책임이 컸다. 그가 모든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만큼, 정파 쪽에서 동원 가능한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 정파쪽에서 동원한 전력은 편복대주가 예흑한 것의 3배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편복대주는 장인걸의 관대함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다시는 그런 실수가 없도록 하겠사옵니다." "어찌 되었건 놈들의 세력이 상상이상으로 강력하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큰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화경급 고수를 셋이나 투입하다니..... 그놈들은 마교가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걱정되지도 않는 모양이지?" "마교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때문이 아니겠사옵니까?" "어찌 되었건 이번 사건으로 한 가지 사실은 명백해졌다. 될 수 있으면 무림맹 놈들과는 정면충돌을 하지 않는 편이 이롭다는 것이 말이다. 편복대주." "옛, 교주님." "사로잡은 인질들의 명단은 준비되었느냐?" "예, 교주님." 그것을 무림맹에 보내거라. 그것을 통해 무림맹 세력들을 이간질한다면 아마도 큰 성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예." "그리고 비교적 방비가 허술한 무림맹 소속의 문파들이 있는지 조사해보도록." 장인걸의 명령에 편복대주는 의아한 모양이었다. "예? 그것은 왜....?" "본좌가 이곳으로 오면서 생각해둔 계책이 있다. 비교적 방비가 허술한 문파 몇 개를 치면서 마교도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원수처럼 지내왔던 마교와 무림맹은 어찌 되겠느냐?" 그 말에 편복대주는 감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훌륭하신 계책이십니다, 교주님. 당연히 휴전은 깨질 것이고 둘은 다시금 아귀다툼을 벌일 것이 분명하옵니다." 장인걸은 흡족한 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무림맹은 더 이상 양양성에 저만한 고수들을 집중 시키지 못할 것이야." "지금 즉시 시행하라." "옛. 교주님." 편복대주는 서둘러 달려나갔다. 이번에야말로 실수하지 않고 정파 놈들을 제대로 함정에 빠뜨려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말이다. 묵향이 양양성으로 돌아온 후, 며칠이 흐르자 공동파에 갔던 수라도제가 돌아왔다. 처음 공동파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갈 때의 자신만만한 모습과는 달리 그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돌아오는 무림연합 고수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마화가 문득 입을 열었다. "교주님께서 함께 가셨어야 했어요." 사실 장인걸이 거기에 있는 줄 알았다면 자신이 직접 가서 목을 땄을 것이다. 하지만 묵향은 그놈이 설마 거기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장인걸은 살아서 돌아간 것이다. 물론 묵향이 기대한 대로 공동파는 묵사발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묵향은 그것이 너무나도 아쉬운지 가볍게 혀를 차며 대꾸했다. "본좌도 알고 있다. 천마혈검대만 보내도 충분했었을텐데..., 설마 그녀석이 직접 움직일 줄이야....." "이번에 흑살마제도 큰 곤욕을 치뤘을 테니, 다시는 이런 모험을 하지 않을 거예요." 장인걸이 이번에 크나 큰 고생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화경급 고수를 무려 3명이나 상대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그곳에 천마혈검대가 없었다면 아무리 장인걸이 기괴한 마공들을 익히고 있었다고 해도 살아서 돌아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언젠가는 기회가 다시 올 거야."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묵향은 마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화!" "예, 교주님." "총타에 연락을 넣어 초류빈과 철영에게 혈랑대와 수라마참대 그리고 천랑대를 이끌고 대별 산맥에서 은밀히 대기하라고 일러라." 상대는 장인걸이었다. 그렇기에 혹시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인선을 해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별산맥은 양양성과 지척에 위치해 있는 험준한 산맥이었다. 고수들을 숨겨뒀다가 써먹기에도 편리하겠지만, 혹시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묵향이 그곳으로 달려가기도 용이할 것이다. "드디어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당분간은 아니야. 이번처럼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해도, 본교의 주력이 십만대산에 틀어박혀 있어서는 도저히 손쓸 기회를 잡을 수가 없어. 좀 더 가까운 곳에 불러들여 놓는게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런 이유라면 초류빈 부교주님은 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직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럴 수도 있겠군. 대신 초류빈에게는 몸이 다 나으면 철영과 합류하라고 지시해."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묵향은 싸늘한 공기를 가슴깊이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아마 봄이 되면 그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조용히 참으면서 기회를 노리다 보면...." "걸려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그만큼 혼이 났으니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궁리해 보면 되겠지. 그건 그렇고, 봄이 되기 전에 그 연놈들부터 처리해야겠군. 지금이 적기인 듯하니까 말이야." 그 말에 마화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연놈들이라뇨?" 묵향은 빙긋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마화는 몰라도 돼. 본좌의 사소한 원한일 뿐이니까." 이때,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흑풍대 소속 무사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교주님. 수라도제가 만통음제 대협과 함께 급히 와달라고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그래? 알겠다. 가겠다고 일러라." "옛." 급히 만통음제와 함께 와달라는 수라도제의 전갈을 받은 묵향은 도대체 무슨 일일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곳으로 갔다. 그 노회한 너구리가 이번에는 어떤 것을 들고 나올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많은 무사들이 대기하고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무슨 함정이라도? 묵향이 수라도제가 와달라고 부탁한 곳에 만통음제와 함께 도착해 보니 뜻밖에도 그곳에는 수라도제 외에 황룡무제와 패력검제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황룡무제는 내상이 아직 완치되지 않은 탓인지 안색이 조금 창백해 보였다. 묵향은 그 셋을 훑듯이 살펴본 후 퉁명스레 말을 걸었다. "뭐가 그리 급하시오?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차를 드시겠소? 아니면 술을?" 그렇게 말하는 수라도제의 어투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묵향은 태연자약했다. 몇 가지 안주거리 옆에 놓여 있던 빈 술잔을 집어들고 술을 따르며 만통음제에게 화기애애하게 말했다. 꼭 술 한 잔 하기 위해 객잔에라도 온 듯. "형님도 한 잔 드시죠." "아니, 됐네." 이런 냉막한 분위기 속에서 어찌 술맛이 난단 말인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른 사람들의 앞에도 모두 찻잔이 놓여 있었다. 수라도제는 꼭 범인을 심문하듯 싸늘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흑살마왕이 금에 있다는 걸 알고 계셨소?" 묵향은 한 잔 쭉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도제는 인상을 더욱 찡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단 한마디 언질이라도 해줄 수 있었잖소. 만약 그랬다면 절대로 그놈이 살아서 돌아갈 수 없었을......" 이때 갑자기 묵향이 수라도제의 말을 끊으며 으르렁거렸다. "내 먹이에 손대지 마 그놈은 본좌가 직접 명줄을 끊어 놓을 거야. 알겠나?" 하지만 수라도제는 콧방귀를 뀌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교주가 직접 갔으면 되었겠구려. 그곳에 가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다니....." "이번에는 본좌가 판단을 조금 잘못했을 뿐이야. 그놈이 거기 있을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요구를 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칼을 들고 그놈을 찾아가서 죽여 없애시오. 그럴 능력이 안 된다면 그딴 요구는 하지도 말고 말이오." "말 다 했는가?" 묵향이 싸늘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지만 수라도제로서도 할 말은 있었다. 뭐 묻은 놈이 뭐 묻은 놈을 나무란다더니, 그짝이 아닌가. "아직 다 못했소. 중원이 얼마나 넓은데, 그놈이 어디에서 튀어 나올 줄 알고 당신에게 그런 약속을 하겠소?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그놈을 만난다면 기꺼이 놈을 당신에게 양보해 주겠소. 하지만 당신이 없는 자리라면 노부는 그놈을 죽여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요. 안 그러면 내가 당할 테니 말이오." 수라도제가 그런 말을 할 만했다. 직접 싸워본 결과 상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었으니까. 묵향은 잠시 생각했다. 사실 이번에 자신이 따라가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으니, 상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요구를 할 만큼 놈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목숨을 보장하기 힘들 정도로. "그건 귀하의 말이 맞는 것 같군. 본좌가 조금 감정에 치우친 듯하니 이해하게." 수라도제는 또다시 범인이라도 심문하듯 싸늘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놈이 익힌 무공이 뭐요? 도대체 어떤 망할 놈의 무공을 익혔기에 도무지 죽지를 않는 거요? 노부가 만약 그런 치명상을 입었다면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그놈은 멀쩡할 수 있다는 말이오?" 그게 묵향의 비위를 건드린 듯 그는 될 대로 되라는 듯 이죽거렸다. "대답하기 싫은데? "대답하시는 게 신상에 좋을 거외다." "신상에 좋을거라고? 흥! 좋을 대로 해봐라."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만통음제가 끼어들었다. 이런식으로 감정적으로 대립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기도 했지만, 괴이한 무공에 대한 흥미도 적지 않았다. "도대체 상대가 어느 정도로 상처를 입었기에 수라도제 대협이 그런 말씀까지 하신단 말씀이시오?" 수라도제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강기에 격중당해 장부가 완전히 뒤흔들렸을 것임이 분명한데도, 전혀 타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기에 하는 말이외다. 우리 셋이서 그놈을 합공했으니, 그놈의 실력이 현경급이 아닌 다음에야 살아 돌아가기 힘들었을 것이 아니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놈은 유유히 살아서 도망쳤소. 황룡문주에게 부상까지 입혀놓고 말이외다." 그 말에 만통음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극마급의 고수와 화경급의 고수가 정면대결을 벌인 적은 거의 없었기에, 서로간의 우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세인들은 서로 엇비슷한 실력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고, 만통음제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라도제의 말을 들어보니 이건 그게 아니지 않은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동생." 수라도제를 생각하면 단 한마디도 대답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만통음제가 질문을 던지니 어쩌겠는가. 묵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단숨에 비운 다음 어쩔 수 없이 대꾸했다. "귀혼강신대법. 그것을 익히면 거의 불사에 가까운 신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왠만한 상처 따위는 곧바로 치료되어 버리죠." "정말 천마신교의 무공은 너무나도 기괴하구먼. 그런 무공이 존재할 줄이야...." "본교의 무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의 무공인가? 그런 무공이 있다는 소리는 지금껏 들어본 적도 없는데 말일세." "혈교의 것이라고 보시면 맞겠죠. 아마도 혈교에 그 비슷한 무공이 있는데, 그걸 본교의 무공과 연결하여 더욱 발전시킨 모양입니다." "허어, 참. 무공의 한계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구먼.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묵향과 만통음제가 나누는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수라도제가 입을 열었다. "귀혼강신대법이라..... 그걸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뭐요?" "알아서 생각해봐. 본좌가 대답해줄 이유는 없으니까." 수라도제의 얼굴이 분노 때문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둘의 눈치를 살피던 만통음제가 또다시 끼어들었다. "우형의 생각으로는 그 무공은 상처회복의 속도를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르게 만드는 것인 모양이군. 하지만 상처회복을 방해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가능성도 있겠지. 예를 들어 양강의 무학을 통해 살을 태워버린다거나, 아니면 극음의 무학으로 살을 얼려버린다거나......" 가만히 듣고 있던 패력검제와 황룡무제가 끼어들었다. "그런 것을 익히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사실 극음이나 극양의 무학을 익힌 자는 흔치 않지 않습니까?" "허어, 듣고 보니 그것 또한 문제로군. 그렇다고 극양이나 극음의 속성을 지닌 신병이기를 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옆에서 듣고 있던 묵향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십니까? 여기만 박살내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 그러면서 묵향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 말에 수라도제를 비롯한 다른 고수들은 처음에는 '그렇게 쉬운 방법이!' 하는 듯 안색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들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만한 고수의 머리통을 박살내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절정의 고수들 간에 있어서 실력의 차이는 종이 몇 장 간격 정도밖에 안 되단다. 그렇기에 이쪽이 조금 더 실력이 높다고 하더라도 방심하면 한순간에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공격목표를 머리로 한정해야만 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될 정도로 불리한 조건에서 싸워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정녕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까?" 패력검제의 질문에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글쎄..... 그건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걸? 사실 본좌는 그 방법만으로 충분했거든." "난제로군요." "뭐 난제랄 것도 없네. 적의 장점을 알려줬으니 이번에는 각자 지닌 장점을 충분히 고찰해볼 필요가 있겠지. 적의 장점을 죽이고, 이쪽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대결에 있어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과제가 아니겠는가?" 그 말에 수라도제는 티껍다는 듯 대꾸했다. "그걸 누가 모르겠소? 그건 그렇고, 귀교에는 그 대법을 익힌 자가 많소? 이번에 그들과 싸울 때, 베어도 죽지 않는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이 꽤 많았기에 하는 말이외다." 그걸 익힌 자가 마교에도 많다면, 앞으로 마교를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수라도제가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묵향은 상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소롭다는 듯 대꾸했다. "쯧, 생과 사가 오가는 지극히 짧은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야. 처음부터 목숨을 잃기 싫은 놈이 어찌 지고한 경지를 깨달을 수 있겠나? 본좌가 집권할 때 그런 놈들은 몽땅 다 목을 따버렸지." 패력검제가 충분히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교주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소이다." 어쩌면 답보상태에서 머물러버릴지도 모르는 자신에게 한 가지 돌파구를 제공해준 것이 교주와의 대결이었다. 교주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 순간 패력검제는 목숨을 걸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주어졌다. 그걸 어떻게 풀어갈지는 자신의 몫이 었지만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황룡무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교주님을 만난 김에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뭔가?" "제가 익힌 것이 청월검법이라는 사실은 아시겠지요?" 묵향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룡무제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귀교에서는 청월검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겁니까?" "어찌 본좌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가?" "흑살 마왕은 제가 공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정확하게 빈틈을 찾아 맞받아쳤습니다. 만약 제 깨달음이 조금만 미약했다면 이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했겠죠. 물론, 그가 다른 사람들의 공격을 그토록 손쉽게 상대했었다면 이런 말은 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황룡무제를 지긋이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던 묵향은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파훼법이 있어." "끄응....." 자신의 짐작이 옳았음을 알고 황룡무제는 신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런 황룡무제를 향해 묵향은 부드러운 어조로 질책했다. "파훼법 따위에 초식을 벗어난 화경급 고수가 걸려들었다는 것은, 자네가 그만큼 상대를 경시했다는 말이 되겠지. 하기야 3대 1로 싸우는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런 쓸데없는 의문을 가지기에 앞서서 자네의 미흡함을 먼저 반성하게. 그게 옳은 수순인 듯하군." 옆에서 이걸 듣고 있던 수라도제는 자신이 한 가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부분을 물어보는 황룡무제나, 그에 대한 답을 친절하게 해주는 교주나 자신이 봤을 때 둘 다 정상은 아니었다. 교주가 황룡무제의 사부도 아니면서 왜 교주가 그런 의문에 대답을 해줘야 한단 말인가. '허어, 내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군.' 그러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자신이 매우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만통음제는 재미있게 듣고 있더니 자신까지 덩달아 끼어들어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공격해 왔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하기야 저렇듯 호기심이 많으니 만통음제라는 명호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패력검제는 이들의 대화를 아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번씩 자신이 궁금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까지 서슴지 않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교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수라도제가 양양성 내의 최고수들을 모두 다 집합시킨 것은, 이번의 실패가 있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교주를 문책하고, 또 장인걸 일당이 지닌 전력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회의장의 분위기는 이게 뭐란 말인가? 각자가 지닌 심득을 나누는 토론장이 되어버렸다. 딱딱한 회의장의 분위기를 보고 처음에는 차를 시켰던 패력검제나 만통음제가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든 것을 보면 대화를 아예 본격적으로 시작할 작정인 듯 했다. '뭔가 있어. 그 이전부터 이들이 교주와 교류가 있었음에 분명해 안 그렇다면.....' 교주가 후진양성을 위해 자신이 지닌 것을 아낌없이 베풀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그 생각을 애써 억눌렀다. 누가 봐도 그건 가능성이 없는 추리였으니까 말이다. 어느 미친놈이 장차 적이 될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무공을 가르친단 말인가? 그것도 얻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원래 무림이라는 것은 약육강식의 비정한 세계다. 협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정파라 해도 그건 사정이 다를 바 없었다. 얼마나 세력이 강하냐에 따라 문파들의 등급이 매겨지고,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는 곳이다. 그렇기에 강한 문파들은 더욱 강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한편으로는 약한 문파가 강성해지는 것을 철저히 억압한다. 자기가 강해지지 못하면 남이라도 약하게 만들어놔야 자신의 강함이 유지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정파들보다도 더욱 강함을 추구하는 곳이 마교가 아니가. 그곳의 교주가 타인의 세력이 커지도록 방치하는 것을 넘어서서, 오히려 도와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야 어떻던 고급스러운 무공이론이 흘러나오자 수라도제도 체면 불구하고 은근슬쩍 거기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이런 기회는 천금을 들여도 얻기 힘든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상대가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거짓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라는 것은 거짓과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닌가. 완전히 없는 말을 지어내서 거짓말을 할 수 없듯, 거짓말들을 종합하여 유추하면 진실을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이곳에서 오고가는 대화를 한꺼풀씩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며 대화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남양에 던진 미끼 "장로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일인데 그러느냐?" 다급히 들어오는 거지를 바라보는 장로의 눈빛은 그의 깊은 수련도를 말해주듯 침착하기 그지 없없다. 그가 바로 개방 최고수라는 부운걸개 장로였다. 그의 무공이 가장 강했기에 2천의 방도를 거느리고 이곳 양양성이라는 사지에 파견나와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의 무공이 가장 강하다면 방주도 이길수 있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건 그가 초식의 묘리를 벗어난다는 화경에 등극했다면 모를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개방 방주에게만 내려오는 반룡장이라는 무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개방 최강의 무공은 강룡십팔장이다. 그 무공에 대하서 극성인 무공이 바로 반룡장인 것이다. 개방의 선대들은 개방 방주의 권위를 높이고 항상 있을지도 모르는 모반 따위를 방지하기 위해 반룡장을 개발해서 방주에게만 전수하는 치밀함을 보였던 것이다. 거지는 다급히 말했다. “방금전에 교주를 만났습니다.” 부운걸개 장로는 나른한 듯 하품을 쩍 하더니 퉁명스레 대꾸했다. “여기 교주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뭐 그게 큰 일이라고…” “그게 아닙니다. 교주가 저한테 남양에 대해서 물어보더군요.” 부운걸개 장로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남양이라고? 남양이라면 금군이 군량미를 대량으로 쌓아두고 있는 그곳 말이냐? “물론이죠. 금군의 포진상황과 어느정도 수준의 고수들이 배치되어 있는지 뭐 이런 세세한 것들에 대해서 묻더군요.” “그래서?” “총타의 지시대로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상세하게 대답해줬습니다. 하지만, 그놈은 그것만 가지고 만족하지 못한듯. 2주일 이내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여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재미없을 거라고 협박하면서 말입니다. 부운걸개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 거렸다. “흠 그놈이 왜 남양에 관심을 보이는 거지?” “어쩌면 그곳을 기습공격하려는 것이 아닐까여? 흑풍대는 지금 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금군과 전투를 벌여오지 않았습니까? 이곳에 수많은 무림연합의 고수들이 와 있지만 그들만큼 금군에게 피해를 가한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잠시 그 가능성에 대해 궁리하던 부운걸개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그말이 맞는 것 같구나. 너는 지금 당장 총타에 전서구를 띄워라.” “…” 전서구야 띄우겠지만 그 전통에 무슨 내용을 집어넣으라는 말인가? 거지가 멍청한 표정으로 서있자 부운걸개 장로는 짜증난다는 듯 덧붙였다. “교주가 원하는 정보를 최대한 빨리 파악하여 이곳으로 보내라는 것과 그놈이 그 정보를 이용하여 남양을 칠 생각인 것 같다고 알리란 말이다.” “옛, 장로님.” 서둘러 달려나가는 거지의 뒷모습을 향해 부운걸개 장로는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양양성에 파견나가 있는 부운걸개 장로로부터 날아온 전서 한장. 마교 교주가 남양에 배치되어 있는 금군 병력에 대한 세밀한 정보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전서에는 자신들이 이미 마교 교주에게 전달한 대략적인 정보의 내용을 밝히고, 이보다 더욱 상세한 정보를 2주일 내로 원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남양을 칠 생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밝히고 있었다. 남양이 지니고 있는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개방 수뇌부였기에, 처음 그 전서를 접하자 환호하지 않을수 없었다. “허어, 이거 교주가 마음에 드는 일을 계획할 때도 있군요. 남양만 불바다로 만든다면 금군은 어쩔수 없이 철군할 수밖에 없을 거외다.” “그러게 말이오. 하루라도 빨리 남양의 상황을 철두철미하게 조사하여 부운걸개 장로에게 보내라고 지시해야 하겠소이다.” “놈들의 군량만 불사를 수 있다면 연경을 탈환할 수 있는것도 꿈은 아니겠소이다.” 이런 저런 고무적인 말들이 장로들 사이에서 오고 갔다. 그럴만도 한 것이 남양에 쌓인 군량미는 60만 대군이 몇 달씩이나 먹을 수 있을만큼 엄청난 양이 아닌가. 그게 모두 잿더미가 된다면 향후 금군은 그정도 군량미가 비축되기 전까지는 그만한 병력을 끌어모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취선개 장로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외다.” “취선개 장로는 또 다른 의견이 있으시오?” “여러 장로님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오. 다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인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자, 생각해 보시오. 이쪽에서 넘겨준 정보만 해도 남양을 치는데 무리는 없을 거외다. 하지만 그넘은 더욱 많은 정보를 요구했소. 경비상태라든지 뭐 그런 자세한 것까지 요구한다는 것은 남양을 칠 생각이 있긴 있되, 정면공격이 아님을 의하는 것이 아니겠소?” 취선개 장로의 지적에 다른 장로들도 생각을 다시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취선개 장로의 추측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으니까. “그, 그렇겠지요. 하지만 어찌 되었건 성공만 한다면 남양의 군량미가 잿더미가 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 않겠소?” 그말에 다른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이자 취선개 장호는 화를 벌컥내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이런 답답한 사람을 봤나!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겠소? 그놈은 소수의 고수들을 남양으로 침투시켜 군량미를 불태울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오. 놈이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들이라고 못할 이유가 있겠소?” 그말에 다른 장로들은 취선개 장로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과거 무림맹의 백량 장로가 황궁에 침입했다가 뜨거운 맛을 본 일이 있지 않소이까? 그런데…” “황궁과 그곳은 다르다고 노부는 생각하오. 거기에다가 무림맹에 가 있는 공수개 장로는 금군이 자랑하는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 바로 천마혈검대라는 전갈을 보내왔소. 바로 마교고수들이 상대라는 말이지요. 마공을 익힌 고수들이 지니고 있는 특징은 누구보다도 여러분들이 잘 알지 않소이까?” 그말이 주는 의미를 파악한 다른 장로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옳거니! 취선개 장로의 지적이 옳소이다!” “마기” “호오, 마기가 있었구료” 취선개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교 고수들은 매복을 하지않소. 왜냐하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은연중에 뿜어 나오는 마기 때문에 지신들의 기척이 금방 드러나니깐 말이오. 그 말은 천마혈검대의 고수들이 그곳에서 매복하고 있다고 해도 곧바로 알 수 있으니 그놈들만 피해서 군량미에 불을 지르는 것쯤 일도 아닐수 도 있다는 말이오. 안 그렇소? “호오, 맞구려. 그말이 옳소이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교주 놈은 그 사실에 착안하여 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오” “그것은 분명하오. 그놈이 지금 거느리고 온 흑풍대는 마교로서는 드물게도 마기를 내뿜지 않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들었소. 그들을 이용하여 기습을 편친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거외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방주는 심려 섞인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듣고보니 취선개 장로의 지적도 옳구려. 하지만 그놈이 구상한 작전을 이쪽에서 가로챈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고 봐야 할 걸세. 안 그래도 그놈은 개방을 못잡아먹어서 안달인데 그런 좋은 건수를 안겨 준다면 아예 씨를 말려버리려고 들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취선개 장로는 눈빛을 교활하게 빛내며 대꾸했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림맹에 그 죄를 뒤집어 씌우면 되니깐요.” “무림맹에?” “예. 무림맹에 작전의 전모를 밝히고 정보를 넘긴다면 무림맹은 본방을 더욱 중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또 본방에서 이 일을 처리하여 타 문파들의 질시를 받는 것보다는 그 편이 휠씬 좋고 말입니다.”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방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윽고 그는 결단을 내렸는지 장로들에게 지시했다. “맹에 전서를 띄우게. 나머지는 공수개 장로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옛” 방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본방이 무영문을 앞지를 날도 멀지 않았구먼, 크흐흐” 한편 양양성에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허어. 자네 오래간만이로구먼.” 교주를 발견한 팽대성의 안색은 한순간에 샛노래 졌다. 양양성으로 오면서 그에게 당했던 악몽이라는 형태를 빌어서 말이다. 그런자를 또다시 보고 싶겠는가? 기골이 장대한 팽대성이었지만, 오늘 그는 생긴 것 답지않은 일을 하고야 말았다. 두 번 다시 그런 지옥을 경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깐. ‘이런 떠그랄! 왜 이새끼가 여기 있는 거야?” “노야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정말 오랜만입니다.” 팽대성은 워낙 솔직담백한 위인이라 기껏 꾸민다고 꾸민 표정이었지만, 싫은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묵향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척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그때, 양양성으로 올 때는 본좌가 좀 과했지? 그냥 따끔하게 충고나 한마디 한다는게, 조금 심했었던 것 같아서 그게 마음에 걸리더구먼.” 교주가 자신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듯하자 팽대성은 자신의 교활함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더욱 연기의 질을 높이고 있었다. ‘개새끼, 알기는 제대로 아는군.’ “과하다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으니 마음 놓으십시오.” “황실을 위해 그리고 무림의 앞날을 위해 목숨걸고 일어선 자네들이 아닌가? 그런 사소한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그렇게 손을 썼었는지…..” 뒷말을 슬쩍 흐리는 묵향이었다. “아닙니다. 저희들로서도 많은 공부가 되었었습니다.” 이런식으로 팽대성을 잡고 시간을 끌며 묵향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최대한 자애롭게 보이는 척하면서 말이다.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던 묵향은 문득 한 가지를 들고 나왔다. “팽가의 본거지는 하북이지?” 그 질문에 팽대성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물론 팽씨세가는 여기저기에 있다. 그렇기에 편의상 그들과 구분짓기 위해 하북팽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팽가들의 힘을 하나로 합친다고 해도 하북팽가 하나를 이길수 없을 정도로 하북팽가의 힘은 막강했다. 그렇기에 팽가하면 하북팽가를 말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하북팽가의 적자를 눈 앞에 두고 본거지가 하북이라니? 그말은 자신이 누군지 안중에도 없었다는 말이 아닌가? 슬쩍 열이 뻗쳤지만 그렇다고 발작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팽가 따위 물로 봐도 하등의 이상이 없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예, 지금은 오랑캐가 점령하고 있어 남쪽으로 터전을 옮긴 상태입니다만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겠지요.” “허어. 참. 자네 본좌를 만난 것을 천행으로 여기게.”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거하고 네놈 만난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팽대성이 어떤생각을 하고 있건간에 교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2주일 내로 본좌는 남양을 칠 거야” 교주가 남양을 치건 말건 그거하고 자신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여겼기에 팽대성은 시큰둥한 어조로 장단을 맞춰줬다. “예? 그러십니까? 축하드립니다.”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묵향은 기가 막혔다. 척하면 알아 들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멍청한 놈일줄이야. 어떻게 이런 놈이 최고의 후기지수들 중의 한 명이라는 평을 듣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묵향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상대에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네 남양이 어떤곳인지 아는가?” “제가 미흡하여…” “그곳은 금군이 군량을 대량으로 쌓아놓은 곳이지. 본좌는 그걸 모두 다 잿더미로 만들 계획이야. 먹을게 떨어진 그놈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을테고, 그만한 군량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두 번 다시 남하해 올 엄두도 못내겠지..”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면 방비 또한 만만치 않겠군요” “그렇지는 않지, 자네도 알다시피 상대는 무공도 모르는 졸개들이다. 고수 몇이 숨어들어가서 군량에 불 지르는 것쯤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 아니겠나? 그리고 그런 식으로 군량에 큰 타격을 받으면 금군은 막상 60만 대군을 먹여 살리기가 힘들 테니 상당한 곤욕을 치르게 될테지. 굶주린 병사들은 힘을 쓰지 못하니 연경을 탈환하는 것도 이제 꿈이 아니란 말이야. 이제 내말을 이해하겠나?”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팽대성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그렀습니까?” “자네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수고해 주고 계시는 본좌를 위해 오늘 술 한잔 사는게 어때?응?” “…..” 갑자기 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리자 팽대성은 황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교주는 팽대성을 끌고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무려 1시진에 가깝게 질퍽하게 퍼 마신후에야 교주는 떠났다.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팽대성은 교주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지닌 힘을 자랑하는 철부지 같은 모습이었고, 어떻게 보면 술 한잔 얻어 마시기 위해 공갈을 일삼는 파락호 같은 모습이었지 않은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교주 정도 되는 사람이 술 한잔 마실 돈이 없어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또 그런 거짓말을 해봐야 무슨 이득이 있다고……. 아무리 팽대성이 미래에는 팽씨세가를 물려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한동안 교주의 술상대를 해준 팽대성은 기분 전환도 할 겸 친구인 옥대진을 찾아갔다. 술을 마시며 교주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자니 오장육부가 뒤집어질 것 같았던 것이다. 간단하게 차를 나누며 얘기를 하던 팽대성이 방금 전까지 자신을 황당하게 만들었던 교주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하여튼 별 미친놈을 다 봤다니깐” 하지만 그 말을 자세히 들은 옥대진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단순한 팽대성에 비해 그는 매우 교활했으니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그건 또 무슨말인가?”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조금 움직이세. 그 말이 사실인지는 금방 알 수 있지 않겠나?” 옥대진은 팽대성을 이끌고 양양성에 파견나와 있는 개방도를 찾아갔다. 평소에 친분이 있는 개방제자였기에 그들은 일의 전말을 어느정도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 개방도가 겨우 4결 제자라서 가장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알 우 없었지만 말이다. 개방도와 헤어진 후. 그들은 그제서야 놀라움에 가득찬 속마음을 털어놓을수 있었다. 교주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정말 사람 놀라게 만드는군” “그러게 말일세. 그게 사실일 줄이야······. 어쩌면 고향으로 돌아갈 날도 그리 멀지 않은 듯하이. 오늘 기분도 좋은데 술이나 한잔 하겠나?” 팽대성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지만, 옥대진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이건 정말 엄청난 기회였다. 사문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임과 동시에 자신의 무명을 무림에 알릴 수 있는 두 번 다시 찾기 힘든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 둘만 마시기는 뭣하니, 친구들을 모두 다 모으는 것이 어떤가? 오랜만에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구.” 그 말에 팽대성이 시원스럽게 동의했다. “그거 좋지. 바로 연락하겠네.” 반 시진이 흐른 후, 양양성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객잔에 7룡4봉의 젋은이 다섯 명이 모였다. 폭풍검 서량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옥대진이 팽대성에게 말했다. “폭풍검은 언제 온다고 하던가? 다른 사라들은 벌써 다 모였는데······.” “아, 그는 오지 못한다고 사람을 보내왔네. 요즘 워낙 수련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모양이야.” 묵향이 진팔을 수련시키는 데 자극받은 패력검제는 요즘들어 더욱 수력에 정진하도록 아들인 서량을 닦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코 앞에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가는 진팔의 모습을 본 상태에서 자신의 아들을 가만히 놔둘 패력검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자, 모두들 바쁜 와중에 이렇듯 시간을 내주어 고마워.” 오랜만에 청춘남녀들이 또다시 한자리에 모였으니 분위기 좋은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이곳 양양성에 도착한 후에는 각 문파별로 흩어져서 저마다 바쁘게 움직였기에 서로 할 말들이 많았다. 거기에다가 종남파와 공동파가 박살이 났고, 소림까지 봉문했으니 화제 또한 풍성했다. 술잔을 나누며 얘기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모두들 적당히 술을 마셨을 때, 옥대진은 자신의 가슴에 묻어 두고 있던 계획을 밝혔다. “이번에 마교가 남양을 기습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했지.” “뭣? 그게 정말인가?” “개방 쪽 사람에게 물어봐서 그 진위여부까지 확인했어. 기가 막히게도 그게 정말이지 뭔가.” “허어, 마교가 이번 전쟁에 꽤나 적극적으로 나서는군. 사파라는 것들은 쓰레기라고 들으며 컷는데, 요즘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 “황보 오빠 말이 맞아요. 오히려 마교 쪽에서 훨씬 더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있잖아요? 정파라고 콧대만 세우고 있지 정작 중요한 일에서는 모두 몸만 사리고 있는데 말이에요.” 방금 전에 입을 연 황보룡과 당소진의 의견이 지금 현재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만큼 양양성 공방전에서 세운 마교의 공이 컸으니까. 하지만 옥대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런 말 할 것은 아니지만, 마교는 상당히 실리적으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사실 그들은 큰 테두리는 보지 않고, 한곳에 전력을 집중하여 전공만 세우고 있다고 봐야 할 거야.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런 건 뻔히 알 수 있잖아. 저번 전투에서 정파는 양양성을 사수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어. 하지만 마교는 양양성에 얽매이지 않고 외부에서 싸웠지. 결론은 그놈들에게 좋게 흘러갔지만,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지. 만약 양양성이 무너졌으면 정파는 치명타를 입었겠지만······. 마교는 슬쩍 뒤로 후퇴하기만 하면 되었잖아. 그것만 생각해도 그놈들은 아주 교활하기 짝이 없어. 사실 그놈들에게 있어서 양양성 따위 함락되나 안되나, 대송제국이 무너지느냐 안 무너지느냐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고 봐야 해. 내말이 틀렸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모두들 고개만 주억거릴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것에 자신을 얻은 옥대진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밝혔다. “지금 마교가 남양을 치려는 것은 정면도발을 말하는 게 아니야. 소수의 고수만을 보내어 적의 군량을 불사르겠다는 거지. 남양을 10만에 달하는 대군이 철통같이 수비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잡졸들이잖아. 그들의 이목을 속이고 침투하는 것쯤은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지. 안 그래?” “허, 그럴 수도 있겠군.” “일단 불만 지르고 나면 모두들 불끄기에 정신이 없을 테니 그 혼란을 틈타 탈출하기도 쉬울 거야. 마교는 이렇게 아주 손쉬우면서도 전공은 크게 세울 수 있는 일거리만 찾고 있다는 말이지. 치사한 새끼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황보룡이 외쳤다.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마교도들은 전공에만 목숨을 걸고 있는 소인배들이 아닌가!” “바로 그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걸 우리들이 해치우면 좋지 않겠나?” “그건 무슨 말인가?” “우리들이 남양을 불사른다면 얼마나 큰 공을 세울 수 있겠나? 그리고 여기에 오면서 그 망할 교주 놈에게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말이야.” “크흐흐흣, 그거 좋은 생각이네. 마교 교주 놈은 남양을 불사른다고 계획만 실컷 세우고 있다가 헛물만 켜는 게 되는군.”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하지만 남양에 포진한 금군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데, 우리들만의 힘으로 그게 가능할까?” “허어, 그건 걱정하지 말게, 그 정도는 내가 어떻게 해보지. 자, 오늘은 오랜만에 만났으니 실컷 마셔보세.” 옥대진의 뒤에는 무림맹의 장로인 옥진호가 있지 않은가. 마교 교주는 정보를 정식으로 개방에 요청한 모양이지만, 옥대진은 나름대로 정보를 취득할 방법을 이미 생각해두고 있었다. 양양성에는 외부로 전서구를 보낼 수는 있지만, 전서구가 날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키운 비둘기가 단 한 마리도 없었으니까. 지금 개방도들이 우수한 품종의 비둘기들을 가져다 키우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 결실을 보려면 최소한 6개월은 족히 필요했다. 그런 상황이기에 지금 현재 양양성 일대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곳은 개방의 하남 분타였다. 옥대진은 바로 이 하남 분타에 직접 찾아가 남양일대의 금군 포진상황에 대한 정보를 알아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남 분타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도 몇 있었기에 우선 그들을 통해 알아보고, 그것이 안 된다면 자기 할아버지의 이름을 팔 작정이었다. 무림맹 옥진호 장로의 이름을 팔면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아직 남양에 침투할 세부적인 계획이 짜진 것도 아닌데 그들은 마치 그 일이 성공이라도 한 듯 기분좋게 술잔을 나눴다. 일의 성패를 떠나서 자기들끼리 뭉쳐서 어떤 일을 결행한다는 것만으로도 햇병아리들인 그들은 신이 났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만약 이 일만 성공시킬 수 있다면 자신들의 명성을 무림에 크게 떨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팽대성에게 수작을 부린 묵향은 진팔이 기다리고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얼큰하게 술을 퍼마신 탓인지, 아니면 애송이들을 상대로 함정을 파놓은 탓인지 그의 마음은 흥겹기 그지 없었다. 묵향의 말을 빌리면 남의 불행은 곧 자신의 행복이었으니까. 그것도 특히나 원한이 있는 상대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라, 웬일이래? 이렇게 늦게 나타나다니 말이야.” 진팔은 묵향이 늦게 나타나자 한 대라도 적게 맞게 되었기에 매우 기분이 좋았다. “오, 열심히 수련하면서 기다리고 있었구먼, 제법이야.” ‘당연하지, 한 대라도 적게 맞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하지만 그걸 표정에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진팔은 가능한 한 무표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평상시라면 이 상태에서 곧바로 진팔과 비무를 시작했을 묵향이었다. 하지만 그는 술기운때문인지 평상시에는 하지 않은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차 한 잔 줄 수 있겠느냐?” “예, 교주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소연이 차를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며 묵향은 옛날 생각이 났다. 그 작고 연약했던 아이가 지금은 우아한 여인으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그녀를 곁에서 계속 지켜본 것이 아니라 어쩌다 한 번 씩 만난 것이었기에 묵향이 느끼는 소연의 변화는 너무나도 놀라웠다. ‘이제 제대로 된 짝만 하나 구하면 모든게 완벽하겠구나. 정말 너 같은 딸을 둬서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이게 딸을 가진 부모들의 공통적인 심사일까? 어떤 녀석이 괜찮은 배필일까 이리저리 생각하던 묵향의 뇌리에 갑작스럽게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과거 여자의 모습이었을때, 아르티어스도 이런 생각을 했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피식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남자인데 말이야.’ 생각을 고치며 묵향은 소향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한테 듣자하니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가 있다면서?” 묵향은 소연의 배필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생각없이 꺼낸 말이었지만, 그걸 듣는 소연의 안색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확 일그러졌다. 매파노릇을 해오는 만통음제에게 그토록 정중히 거절했건만, 그게 먹히지 않자 본인이 직접 수작을 걸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답하는 소연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예, 교주님.” 하지만 묵향은 아직까지도 소연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한 채 미소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 행운아가 누군지 내게 알려줄 수는 없겠나?” “죄송합니다. 교주님.” 소연의 냉랭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묵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소연은 차를 묵향에게 가져다준 다음 벌레를 피하듯 서둘러 자리에서 떠나버렸던 것이다. 홀로 찻잔과 함께 남겨진 묵향은 허탈한 듯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원했구나. 만족할 줄 알았어야 했거늘······.” 한꺼번에 차를 쭉 들이킨 묵향은 옆에 세워놓은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손아귀 가득 몽둥이의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자 묵향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떠올랐다. 그녀의 무공을 완성시키는 것. 그러기 위해서 진팔은 희생양이었다. ‘뭐 죽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 그날 진팔은 평상시의 두 배는 더 두들겨 맞아야만 했다. 14장 덫에 걸린 옥대진 묵향이 장인걸을 슬며시 끌어들여 무림맹과 개방 그리고 7룡4봉을 상대로 장난질을 시작했을 때, 장인걸은 자신을 이용하여 장난질을 할 인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 또한 강호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잘난 인물이었기에. 사실 장인걸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바로 마교와 무림맹의 이간질이었다. 그것을 위해 장인걸은 천마혈검대 고수 5명을 선택하여 은밀히 불러 들였다. “본좌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한 가지 명령을 내릴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에 다섯 고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하명하시옵소서” “이것을 읽어 보아라.” 장인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두툼한 문서뭉치가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천천히 날아올라 부복하고 있는 고수들 앞에 놓였다. 그것은 편복대주가 그동안 조사하여 장인걸에게 올린 무림맹에 소속된 각 문파들의 정도였다. 장인걸은 그들 중에서 별로 강하지 못한 군소문파 몇 군데를 선택해서 살생부를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는 너희들이 공격해야 할 문파들에 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 문파들을 멸문시킬 필요는 없고 마교의 소행이라는 증거만 남겨두면 된다. 알겠느냐?” “마공을 사용해도 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물론이다. 가급적이면 정파쪽에 많이 알려진 초식들을 사용하도록 하거라. 자, 즉시 출발하라.” “존명.” 다섯 명의 고수들은 엄청난 속도로 경공을 발하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점차 멀어지는 것을 보며 장인걸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인걸은 마교가 본격적으로 개입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서로를 이간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크흐흐흣, 그래, 마교도의 사명은 마도천하를 이룩하는 것. 묵향 네놈은 본좌를 위해 정파놈들과 피터지도록 싸워야만 해. 그동안 본좌는 마도천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세인들의 머릿속 깊이 각인시켜 주도록 하마.” 장인걸은 자신이 중원의 패권을 쥐기만 하면 정파 무림을 완전히 재기 불능이 되도록 짓밟아놓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을 이꼴로 만들어놓은 묵향이라는 놈도 함께 말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더욱 기분이 좋아지는 장인걸이었다. 모두들 꿍꿍이속을 지니고 여러 가지 일들을 벌이다 보니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개방은 개방대로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남양의 정보를 끌어모아 그것을 무림맹에 전달해 주느라고 바빴고, 무림맹은 그 정보들을 취합하여 비밀리에 공격작전을 완성하느라고 바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여있는 옥대진은 한편으로는 개방으로부터 정보를 빼내어 마교보다 먼저 남양을 칠 계획을 짜느라고 바빴다. 그리고 덫을 놓고 있는 묵향은 느긋하게 진팔을 족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덫의 중심에 있는 장인걸은 정파와 마교의 이간질에 정신을 팔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윽고 마교 교주가 통보했던 2주일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수라도제에게 무림맹주의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태상문주님, 무림맹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전령이 도착했다고? 그런데······.” 수라도제는 총관의 손을 슬며시 흝어봤다. 그런데 총관의 손에는 그 어떤 서신도 들려 있지 않았다. 총관은 수라도제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태상문주께 직접 전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들라고 하게” “옛” 잠시 후 실내로 안내되어 온 전령은 수라도제에게 인사를 건넨 후, 품 속에서 봉서를 ㄲㅓ내어 바쳤다. 수라도제가 봉서에 찍힌 봉인을 보니 무림맹주의 인장이 찍혀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면 대단히 중요한 서신인 모양이다. 수라도제는 서신을 쭉 읽어본 후, 그때까지도 부복하고 있던 전령에게 말했다. “맹주님의 뜻을 받들겠다고 전하게.” “옛, 그렇게 전하겠나이다.” 전령이 나가고 난 후, 수라도제는 총관에게 지시했다. “자네는 빨리 가서 황룡무제와······.” 여기까지 말하던 수라도제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처음에는 패력검제와 황룡무제에게 조력을 청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들과 교주의 관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봉서에는 분명히 마교 교주가 눈치채지 못하게 비밀리에 처리하라고 써져 있지 않았던가. “아니지, 본문의 고수들 중 실력있는 자를 10명만 추려 놓게, 경공술과 은잠술이 뛰어난 자들로 말이야.” “옛,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날 저녁, 수라도제는 10여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몰래 양양성을 떠났다. 혹여나 마교 교주가 눈치라도 첼세라 몰래 양양성의 높은 벽을 뛰어넘는 수고까지 아끼지 않으며 말이다. 수라도제 같은 엄청난 실력을 지닌 고수마저도 몰래 이동하는 판에, 묵향이 던진 미끼를 덮썩 문 철부지들은 태평스럽게도 모닥불까지 활활 피워놓고 야영을 즐기고 있었다. 벌써 금의 영토에 들어선 지 며칠이 흘렀건만, 그들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이렇듯 조심성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어둠 속에서 모닥불을 피워놓으면 그 불빛은 아주 먼 곳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그 불빛을 보며 왕정은 무심결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길!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설풍검 왕정은 공동파가 자랑하는 이름 있는 고수들 중 하나였다. 정파의 명숙들 중의 한 명인 그가 마치 삼류 문파의 살수라도 되는 듯 시커먼 야행복에 복면까지 뒤집어쓰고는 모닥불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신세가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강호 경험일 일천해서 그런지 너무나도 미숙해! 출발하기 전에 단단히 주의를 줬어야 했는데······.” 그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저 멀리에서 철없이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놈들 중에 옥대진이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림맹 장로인 옥진호의 손자이기도 했지만, 공동파의 제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배경이 아무리 화려하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왕정같은 고수가 봤을 때 그는 아직까지도 미숙한 철부지나 다름 없었다. 옥대진은 남양을 기습할 계획을 은밀하게 왕정에게 말했고, 그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료들에게는 큰소리를 쳤지만, 위험도가 높은 일인 만큼 조금 겁이 났던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일이 잘못되었을때는 목숨이 날아갈 것이 아닌가? 그런 청을 해온 인물이 자신의 동문사제이기도 했지만, 그의 할아버지인 옥진호의 얼굴을 봐서라도 왕정은 그 청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되어 왕정이 옥대진의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게 된 것이다. “참자, 참아. 몇 년 더 지나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왕정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은밀하게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어제도 이렇게 둘러보다가 한 놈 잡았지 않은가. 오늘 또 하나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은밀히 자리를 옮기던 왕정은 뭔가 섬뜩한 기척을 느꼈다. “헛!”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가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리자, 방금 전까지 그가 숨어있던 지점 근처에 서 있던 나무에 퍽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박혀 들어갔다. 그것만으로도 왕정으로서는 상대의 방향과 위치를 파악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화살이라면 모를까, 암기를 던질 수 있는 거리라면 뻔하니까. 왕정은 기쾌한 신법을 사용하여 미지의 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헛! 추귀보? 자, 잠깐!” 공동파가 자랑하는 보법이 추귀보다. 아마 상대가 그것을 알아본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놈의 요구대로 멈춰줄 왕정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왕정의 허리에서 뽑혀나온 그의 애검은 괴한의 목숨을 끊기 위해 파고 들어갔다. 상대방 또한 자신과 같이 시커먼 복색을 하고 있는 놈이었다. 떨리는 상대의 눈이 극도로 당황한 듯한 그의 심정을 나타내 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정을 봐줄 왕정이 아니었다. ‘제법 실력은 있는 모양인데, 네놈은 사람을 잘못 택한 거야’ 하지만 그 순간 위기를 느낀 상대방이 재빨리 보법을 전개하여 왕정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상대가 방금 전에 사용한 현란한 보법은 왕정도 잘 아는 것이었다. 오늘날 명문들 중의 하나인 황보세가가 있게 해준 보법이었으니까. “어엇! 천왕보? 어떻게······.” 멍청하게 서 있는 왕정을 향해 상대는 소리죽여 웃으며 복면을 벗었다. “크흐흐흣, 여기에 온 것이 노부 혼자만은 아닌 모양이군.”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왕정은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왕정이 절파검 장로님을 뵙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를······.” 그 말에 절파검 황보청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무례는 무슨 무례. 그래도 서로간에 큰 사고가 안 일어나서 다행이구먼, 첫 일격에 최선을 다했었다면, 자네 시체를 볼 뻔했어. 오늘 낮에 본 놈 생각하고 그저 그러려니 하고 대충 공격한 덕분에 목숨 건진 줄 알게.” 절파검 황보청이 이런 말을 할 만도 했다. 황보청은 왕정에 비하면 격이 다를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던 것이다. 황보청 같은 뛰어난 고수가 이런 곳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면 아마도 황보룡도 목숨이 아까워 위쪽에 살짝 도움을 부탁한 모양이다. 황보청은 다시금 복면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자네가 온 줄 알았다면 노부는 오지 않았을텐데······.” 그만큼 자신을 띄어주는 말이었기에 왕정은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제가 오히려 장로님과 동행하게 되어 든든할 따름입니다.” “그런가? 어찌 되었건 자네까지 여기 와 있는 것을 보면, 잘 하면 다른 녀석들도 다른 조력자를 불렀는지도 모르겠군, 다음부터 손 쓸때 좀 더 주의 해야겠어.”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황보청과 왕정은 그때부터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함께 행동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니까 말이다. 수라도제가 양양성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난 다음에야 묵향에게 개방에서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묵향은 그날 관지 그리고 마화와 함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의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수석장로님께서 선물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수석장로가 거느린 주력이 출발했다는 의미였다. 총단에서 날린 전서가 호북분타에 도착하고, 그것을 또다시 양양성으로 가져오는 데 걸린 시간을 고려한다면 수석장로가 거느린 주력은 넉넉잡아도 5일전에 출발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넉넉잡아도 3주 후면 도착하겠군.” 아무래도 야밤에 몰래몰래 이동하려면 시간이 두 배는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예, 그럴 것 같습니다.” 이때, 밖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개방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 말이 들려옴과 동시에 마화는 묵향을 슬쩍 바라봤다. 묵향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녀는 재빨리 넓은 탁자 위에 놓여져 있던 커다란 지도를 접어 구석에다가 치웠다. 마화가 어느 정도 실내를 정리한 후에야 묵향은 문밖에 대고 말했다. “들어오라 일러라” “옛”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땟국물이 흐르는 거지 하나가 들어왔다. 비공식적인 자리라서 매듭이 지어진 허리띠를 차지 않고 있었지만, 상대가 내뿜는 전체적인 기도로 판단했을 때 아마도 4결이나 5결 제자쯤이 아닐까 생각되는 거지였다. “부운걸개 장로님께서 이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거지가 내미는 것은 두툼한 봉서였다. 묵향은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서둘러 봉인을 뜯더내고 내용물을 정신없이 읽으며 거지에게 손짓을 했다. 그 손짓이 나가라는 뜻임을 눈치챘지만 거지는 잠시 시간을 끌며 교주가 그 봉서를 정신없이 읽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런 다음 그는 교주가 자신을 보고 있지도 않은데 정중히 인사를 건넨 후 밖으로 나갔다. 거지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묵향은 봉서의 내용물은 이제 더 이상 읽을 가치도 없다는 듯 집어던지고 오히려 봉인이 뜯겨나각 겉봉만을 세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관지 장로는 도저히 상관의 의중을 알 수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화급을 요하는 서신이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묵향은 겉봉만을 살피며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했다. “전혀! 미끼를 던졌는데 어떤 놈이 걸려들지 그게 궁금하단 말이야. 무림맹일지, 아니면 옥대진 그 새끼일지······. 생각 같아서는 그놈이 걸렸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지만···,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욕심은 버려야겠지, 허, 참. 그놈이 도중에 봉서를 가로채서 읽었다면 뭔가 표시가 있을 줄 알았는데, 재주가 좋은 건지···아니면 안 읽었는지 겉봉만 살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구먼.” “미끼라니요?” “먹음직한 걸 던졌거든, 참, 자네는 오늘 밤 쓸만한 놈 열댓 명 정도 데리고 몰래 성을 빠져 나가게.”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세히 알 거는 없고 은밀히 남양 인근에 갔다가 오면 돼.” “적정을 살피고 오라는 말씀이십니까?” “정찰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은밀히 갔다 오란 말이야. 이런 봉서까지 받았는데 거기 갔다 오지도 않으면 말이 안 되는 거거든. 그냥 갔다가 한 이틀 정도 숨어 있다가 돌아와. 그러면 돼. 그렇게 해야지 이쪽에서 계략을 썼다는 게 드러나지 않지.” 그 정도 말만으로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관지 장로는 고개를 깊숙이 조아리며 대답했다. “존명” 남양 인근에 도착한 수라도제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금군 병사들이 성난 벌 떼라도 된 듯 사방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고, 개중에는 제법 무공을 익힌 듯한 금국 병사들까지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이다. 수라도제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남양에는 장인걸이 그의 정예무사들과 함께 와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남양의 경비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엄중해져 있는 상태였다. “이런 젠장, 어떤 놈이 벌써 벌집을 쑤신 모양이군” “이대로 침투하시겠습니까? 태상문주님” “지금 들어가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아쉬운 일이지만 돌아갈 수밖에······.” 수라도제는 발길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떤 놈이 먼저 여기에 다녀갔을까? 금군이 군량을 야적해놓은 곳에서 불길이 치솟지 않는 것을 보면 먼저 온 놈은 실패한 모양이었다. ‘마교인가?’ 수라도제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교 교주를 옆에서 지켜본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 않은가. 그런 실력자가 일을 처리하면서 이렇게 어리숙하게 끝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수라도제는 너무나도 궁금했다. 이토록 큰 대사를 엉망진창으로 망쳐 놓은 놈들이 과연 어떤 놈들인지 말이다. 하지만 수라도제의 그 궁금증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잠깐!> 수라도제가 어기전성을 발하자 모두들 멈춰선 후 이곳저곳을 향해 날카로운 시건을 던졌지만 그 어떤 이상한 점도 감지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라도제의 귀에는 뚜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련히 들려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말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저쪽이다!> 수라도제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피투성이가 된 4명의 무사들이 금군들을 상대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온 몸이 피투성이라 언뜻 봐서는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을 보고 수라도제는 이들이 누군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황보세가, 사천당문, 공동파인가? 이들이 왜 이곳에?’ 하지만 수라도제로서는 한가하게 생각이나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황보세가의 무공을 사용하던 복면인이 허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기 때문이다. “이런 제기랄!” 욕설을 내뱉으며 수라도제가 도착했을 때, 꿈틀거리고 있는 복면인의 몸에서는 아직까지도 시뻘건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빨랐었더라면 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수라도제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멈춰랏!” 수라도제는 공력을 잔뜩 돋구어 노성을 터뜨렸지만 금군 장병들이 수라도제의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황보세가의 진산절기라고 할 수 있는 뇌진검법을 극성까지 익힌 자를 없애는 데 성공했지 않은가. 만약 상대가 조금 빨리 도착하여 이 둘이 연합했다면 매우 까다로웠을지 모르지만, 저놈 또한 짝잃은 기러기 신세. 지금은 제법 번듯한 신위를 과시하고 있지만 숫자로 밀어붙인다면 저놈 또한 시체로 만들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금군 장수는 그 여세를 몰아 곧바로 수라도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흥! 어리석은 것!” 순간, 수라도제의 등에서 거대한 도가 뽑혀 나왔다. 쿠쿵! 검과 도가 부딪쳤을 뿐인데 거대한 폭발음이 들여오며 사방으로 먼지가 뿜어져나왔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을 뿐인데, 호기롭게 달려들었던 금군 장수는 검이 부숴져 나간 채 뒤로 튕겨 나가서 땅바닥에 처박힌 후 잠시 부들부들 떨다가 축 늘어져 버렸다. 아마도 절명한 듯 했다. 이 한 번의 격돌만으로도 서로간의 실력이 어느 정도로 차이가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한 수를 보자마자 엄청난 마기를 뿜고 있는 금군 장수 한 명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아마도 그가 이 무리의 지휘관인 듯 병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처, 철수해랏!” 금군 장수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일격으로 상대가 사용한 도법을 못알아볼 리 없었다. 뇌전도법. 뇌전도법은 서문세가의 고수들이라면 누구나 다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천마혈검대의 고수를 한 방에 걸레로 만들정도의 인물은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상대가 수라도제임을 알면서도 이곳에 남아 있는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늦은 감이 있었다. 수라도제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도망쳤었어야만 했다. 황보세가의 고수를 죽인다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적들을 쫓아 수하들이 움직이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은 수라도제는 재빨리 자신의 도를 날렸다. 수라도제의 손을 떠난 애도는 엄청난 파공성을 흘리며 금군 장수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 고수는 그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방향을 틀었지만, 애도는 그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 뒤따르며 더욱 거리를 좁혔다. “크아악!” 금군 장수를 선두로 그럴 뒤쫓던 금군 병사들의 허리가 양단되며 피보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초목은 그들이 뿜어낸 핏물에 붉게 물들었다. 휘리리릭! 20여명의 금군 장졸들을 양단해 버린 자신의 애도가 돌아오자 수라도제는 무표정한 안색으로 그것을 잡아 들었다. 그런 다음 그는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려 탈진한 채 여기저기에 앉아 있는 세 명의 젊은이들을 노려봤다. 그제서야 젊은이들 중의 하나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인사를 건넸다.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라도제 대협.” 수라도제가 보니 얼굴에 긴 검상과 핏물에 뒤덮여있어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옥대진이 분명했다. 그를 알아본 수라도제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 젊은이의 앞날이 어찌될지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목숨을 살려줬다? 허··· 과연 이것이 살려준 것인지 노부로서는 알 수가 없구나.” 잠시 탄식한 수라도제는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여 양양성으로 돌아가자.” “옛” 수라도제의 수하들에게 들러쌓여 양양성으로 향하는 옥대진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처음에는 금군으로부터 살아남기에 바빠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수라도제의 탄식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절망감까지 느끼지 않고 있었다. 무림맹 장로인 할아버지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자 남양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모가 서서히 파악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을 제일 몬저 파악한 쪽은 정파 무림의 정보통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방이었다. “무림맹의 허락을 얻어 살아남은 자들을 면담해 본 결과 그들의 단독 범행이라고 합니다.” “단독범행이라고요? 그럴리가···, 절파검 같은 절정고수가 죽었소이다. 이건 각 문파에서 후기지수들을 키워주기 위해······.” “아아, 그건 아닌 것 같소, 노부가 관련된 각 파에 사람을 보내어 직접 확인해봤소. 이건 문파 차원에서 벌인 일이 아니고, 그 어린 것들이 만약을 대비하여 몇몇 고수들에게 호신을 부탁한 정도인 모양이오.” “허어, 그렇다면 일이 아주 고약하게 꼬이겠소이다. 무림맹은 물론이고 마교 교주마저도 본방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텐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마교 교주야 그렇다고 치고, 왜 무림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말이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오? 이번 일을 입안한 것이 본방이 아니오? 그리고 그 어린 것들에게 정보가 새나간 곳도 본방이고 말이오.” “허,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래, 그 놈들에게 정보를 흘린 멍청한 놈들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하셨소?” “아직까지도 조사중이외다. 혐의가 입증된 놈들을 다 잡아들여서 심문하고 있소이다. 하지만 옥대진 그 영악한 놈이 옥진호 장로의 이름을 팔면서 은근히 협박을 했다고 하니······. 그녀석들로서도 협조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런 일이 있다면 분타주에게 보고를 했어야지 슬쩍 정보를 넘기다니 그게 말이 되오? 그런 놈들은 몽땅 다 잡아들여서 박살을 내놔야 하오.” “어쩔수 없지 않소? 다 힘없는 자의 서러움인 것을······. 그건 그렇고 모두들 이 사태를 타개해 나갈 좋은 방법이나 생각해보시구려. 언제까지 이미 지나간 일을 잡고 씨름할 수는 없는 일이잖소?” 이때, 지금까지 아무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취선개 장로가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법은 있소.” “취선개 장로는 뭔가 고견이 있으시오?” “그걸 모두 다 옥대진의 단독범행으로 몰아붙이는 거요. 그러면서 무림맹 장로인 옥진호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소이다.” “옥진호 장로는 맹 내에서 우호세력을 많이 거느린 거물이오. 그렇게 손쉽게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외다.” “물론 그렇소. 하지만 그의 뒤를 떠받치고 있는 공동파가 무너져버린 지금, 그것도 많이 약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오.” “취선개 장로의 말이 맞소이다. 사실 옥진호 장로는 맹 내에서 너무 큰 세력을 지니고 있소. 맹주 쪽에서 봤을 때도 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 틀림없소이다. 넌지시 빌미만 안겨주면 그쪽이 알아서 처리해 주지 않겠소?”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양양성 내에 위치한 넓은 객실에서는 옥대진에 대한 심문이 진행되고 있었다. 취조관과 옥대진이 나눈 말은 옆에 앉아있는 서기가 기록하여 증거로 남기고 있었다. 나중에 그 모든 자료는 무림맹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옥대진에 대한 심문은 말이 심문이지, 맹에서 파견되어 온 취조관에게 오히려 옥대진이 당당하게 외치고 있었고, 그런 그를 향해 취조관이 오히려 쩔쩔매는 기괴한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옥대진이 그 취조관을 심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저는 황실과 무림을 위해서 남양을 공격했을 뿐입니다. 운이 없어 실패했지만, 남양을 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취조관은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어허, 자네는 뭔가 오해하고 있구먼, 노부는 결코 자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네, 다만 그 결과가 안 좋았다고 하는 거야.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여러 고수들이 희생되었다네. 그리고 그 중에는 자네의 약혼녀인 능비화 소저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네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순간 옥대진의 뇌리에는 금군 고수들의 공격을 받고 피를 뿜으며 죽어가던 능비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그는 그녀가 지닌 화산파라는 배경과 전 중원을 통틀어 4명뿐인 4봉이라는 희소성을 사랑했을뿐이니까. 이용가치가 거의 없어져버린 그녀를 향한 옥대진의 사랑 또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죽음은 오히려 앓던 이를 뽑은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옥대진은 얼굴 가득 슬픈 표정을 지으며 발악하듯 외쳤다. “그만하십시오! 그녀의 죽음을 이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제 심정은 편했는 줄 아십니까? 두고 보십시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금나라 놈들 씨를 말려버릴 겁니다.” 취조관은 괜히 약혼자의 말을 꺼냈다고 후회하며 한숨을 푹 내 쉰 후 말했다. “휴···, 자네는 아직까지도 자네 처지를 잘 모르는 모양이군. 맹에서 정예를 투입하여 남양을 치기 직전에 자네들이 들어가서 난장판을 만들었다 그 말일세. 그 덕분에 지금 남양의 방비는 철옹성처름 튼튼하게 되었지. 잘못하면 이적행위를 한 자로 처벌될 수도 있음을 왜 모르는가?” 그 말에 옥대진은 핏대를 올리며 외쳤다. “이적행위라니요!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왜 금에 이로운 행동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남양의 수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알고 그곳을 공격한 것이 어찌 죄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오랑캐가 국토를 유린하는 상황에서 선배님이시라면 그런 정보를 얻었는데 가만히 계셨겠습니까?” 얘기가 계속 겉돌고 있었다. 옥대진은 결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그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었다. 다만 그 시기가 안 좋았을 뿐이었고, 또 실패했다는 것이 문제였으니까 말이다. 만약 이 일이 성공했다면 그는 영웅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한동안 옥대진을 상대로 입씨름을 하던 취조관은 떨떠름한 얼굴로 옥대진의 방을 나섰다. 사실 죄를 고백받는 것쯤이야 오랜 세월 이 직책을 맡아왔던 그에게 있어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주리를 틀어대면 열에 아홉은 없는 죄도 시인했다. 물론 끝까지 죄를 시인하지 않는 자도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어버렸다. 죽어버린 자를 비호하는 자가 있을리 없었으므로 대충 죄를 뒤집어씌워 결과를 발표하면 모든 게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 직책에 오랜 세월 종사한 그인 만큼 이렇게 큰 소리를 쳐 대는 죄인을 상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배알이 뒤틀리는 것을 억지로 참자니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다그치자니 이번 사건에 연루된 자들의 배경이 마음에 걸렸다. 까딱 잘못하면 되려 자신의 목이 날아갈 우려가 있는 것이다. 취조관은 밖으로 나온 후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러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이래서 내가 여기에 오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 했거늘······. 개새끼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있어야 조사를 하든지 심문을 하든지 할 거 아냐!” 그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객잔을 경비하고 있는 책임자가 눈에 띄자 서둘러 그곳으로 다가갔다. “자네 잘 만났군. 안 그래도 찾아가려던 참이었는데” “무슨 하명하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모두들 명문의 자제들인 만큼, 감시에도 만전을 기해야겠지만 결코 그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주게” “물론입니다. 이미 수하들에게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해 뒀습니다.” “잘 했군. 빌어먹을! 저런 세도가의 자제들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원······.” 경비책임자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마 조만간에 위에서 가부간의 결정을 내리시겠지. 사실 맹에서도 그 명문들과 척을 질 결심이 아닌 바에야 어찌 징죄를 할 수 있겠나? 그냥 대충 조사하는 척하다가 모두 방면될 게 분명하지 않겠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만큼 저들의 대접에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야. 저놈들이 나중에 문파에 돌아가서 우리들의 험담이라도 늘어놓으면 자네는 물론이고 나까지도 박살이 나는 수가 있으니까.”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경비책임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내는 길게 자란 턱수염을 부드러운 손짓으로 쓰다듬으며 맹주에게 말을 건넸다. “금으로부터 밀서가 도착했습니다.” 도사들이나 입는 도복을 입고 있는 이 선풍도골형의 사내를 향해 맹주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대답했다. “밀서라······. 무슨 일인데 그들이 노부에게 밀서를 보냈다는 말인고?” “예, 혹시 무슨 사단을 부려놨을 가능성도 있기에 밀서를 개봉한 후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아무런 문제점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그 내용이······.” 독이라든지 기타 이물질 등을 발라서 밀서를 보냈을 수도 있기에 그렇게 조사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왜 이런 말을 맹주에게 한 것일까? 그 이유는 그가 바로 맹주 직속에 있는 감찰부의 수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맹주의 사질이었다. 사실 맹 내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그런 중요한 직책을 다른 인물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는고?” “그들에 대한 적대 행동을 즉각 중지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에 그들이 포로로 잡은 무림인들을 처형하겠답니다.” 그러면서 감찰부주는 두툼한 서신을 맹주에게 전했다. 금 제국이 포로로 잡은 인질들을 출신 문파별로 정리해놓은 목록이 포함되어 있기 떄문이었다. 협박문을 냉철한 표정으로 끝까지 다 읽은 맹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 내용이 발표된다면 무림맹은 크나큰 혼란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기에. “그래, 사질의 생각은 어떤가?” “예, 빈도의 의견을 물으신다면···, 이것을 그냥 밝히는 편이 실보다는 득이 많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대외에 공포하면서 대금 제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간다면 오히려 본맹으로서는 더욱 이익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맹주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숨기지 말고 그냥 드러내자······.” “예, 사실 맹에서 그들이 보내온 서신을 비밀에 붙인다고 해도 한순간을 넘기기 위한 미봉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본 맹에 서신을 보낸 이상, 여기 관련되어 있는 많은 문파들에게 개별적으로 서신을 보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각 문파들을 뒤에서 협박한다면 더욱 큰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맹주는 눈을 번쩍 뜨면서 말했다. “사질의 말이 옳은 듯 하구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파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진대, 그에 대한 대책은 생각해둔 것이 있는가?” “이번 인질사건에 관련이 있는 문파와 연관이 있는 맹의 높은 직위를 지닌 자들을 모두 추려낸 후 한직으로 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됩니다. 혹시 그들이 금에 굴복하여 협조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으로 한다면 반발이 클텐데······.” “이번 밀서를 공개하면서 금에 대한 공분을 유도하면서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려 있을 때 이 일을 비밀리에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호, 그렇겠구먼” 이때,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후, 경비책임자가 들어왔다. 그는 예를 갖춘 후 맹주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수개 장로께서 독대를 청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해야 하올지 하명해 주십시오.” “공수개 장로가? 그가 무슨 일로 독대를 청한다는 말인가? 혹시 요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혈겁 때문인가?” 맹주의 추측도 일리가 있었다. 요즘들어 여기저기에서 마교도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사건이 줄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찰 부주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일 때문이라면 굳이 맹주님께 독대를 청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번에 양양성에서 일어난 사선에 대해 개방에 그 죄가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온 것이겠지요. 사실 개방 젋은 것들에게 정보가 새나가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테니 말입니다.” “그 일로 공수개 장로가 찾아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가 만약 그런 일로 찾아온 것이 맞다면 노부는 실망할 걸세.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숙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감찰부주는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조언했다. “맹주님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십니다. 하지만 상대에 따라 적당히 넘어가시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개방과 사이가 틀어져 봐야 본맹만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감찰부의 정보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점을 유념해 주십시요.” 씁쓸한 표정으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맹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질의 말이 옳은 듯하구먼”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닐세, 그럴 필요 없네, 그냥 앉아 있게” 그렇게 말한 후 맹주는 밖에 대고 외쳤다. “공수개 장로에게 들어오라 이르게” “옛” 곧이어 공수개 장로가 들어왔다. 그는 맹주가 혼자가 아니고, 그 옆에 감찰부주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흠칫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표정을 바로잡으며 맹주에게 인사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자, 자리에 앉으시게. 노부와 독대를 요청했는데, 무슨 일이오? 공수개 장로.” 맹주의 태도는 독대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감찰부주가 있는 이 자리에서 밝히라는 말이었기에 공수개 장로는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곧이어 생각을 바꿨다. 사실 조금 지나면 맹주는 감찰부주나 몇몇 측근들과 대화를 나눌 것이 분명한데 독대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음을 정한 공수개 장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남양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대해 맹주님께 아뢸 말씀이 있어서 감히 독대를 청했습니다.” “그래, 무슨 말씀이시오?” “이번 사건을 맹주님께서는 어떻게 처리하실 요량이신지 여쭤봐도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맹주는 슬쩍 감찰부주를 바라본 후 난감한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허~그것, 참. 난처한 질문이구려.” 물론 맹주가 그에 대한 답을 자신에게 해줄 리가 없음을 공수개 장로도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개방의 잘못은 아예 거론하지도 않고 옥대진을 물고 늘어졌다. “이번 사건의 생존자들 중에서 옥진호 장로의 손자인 옥대진이 끼어있지 않습니까?” “보고서는 받아봤소.” “예, 본방에서는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인 옥대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무림맹의 사활이 걸려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무림맹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말에 맹주는 의아한 듯 질문을 던졌다. “그건 무슨 말이오?” “본방에서는 모든 생존자들과 면담을 했고, 또 이번 사건에 가담한 자들이 소속된 문파들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모두들 한결같이 옥대진의 꼬드김에 넘어가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맹주님께서는 옥진호 장로의 낯을 봐서 그를 용서해 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며 공수개 장로는 맹주의 표정을 힐끔 훔쳐봤다. 사실 맹주로서야 옥진호가 사라져 주는 것을 바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맹주가 옥대진을 봐줄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설혹 맹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은 실례였다. “노부가 인정에 치우쳐서 그를 용서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하지만 노부는 이번 사건을 통해 개방의 정보망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공수개 장로는 펄쩍 뛰듯 놀라며 말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문제가 있다니요.” “젊은 것들만 가서 일을 망쳐놨다면 그들이 치죄하는 것이 옳겠지. 하지만 노부가 받은 보고로는 절파검 같은 절정 고수도 거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가 죽음을 당했을 정도라면 저쪽도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나? 오히려 그 아이들 덕분에 더욱 큰 화를 모면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맹주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맹주가 남양을 치라고 명령한 상대는 수라도제였다. 만약 이번에 금군의 촉각에 걸려든 자가 수라도제였다면, 무림맹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타격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수개 장로는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항변했다. “그건 맹주님께서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물론 절파검이 뛰어난 고수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맹주님께서 남양을 치라고 명령한 사람은 절파검이 아닌 수라도제 대협이 아닙니까? 또, 절파검이 처음부터 침투를 목적으로 그곳에 갔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침투가 아닌 황보세가의 어린 것을 보호하기 위해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 망할 철부지 녀석들이 금군 병사들에게 들키자 어쩔수 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방에서는 이 계획을 맹주님께 말씀드리며 신신당부 드렸었습니다. 정면공격을 해서는 가능성이 없다고 말입니다. 우수한 고수가 인기척을 숨기고 몰래 침투하여 불만 지른 후 재빨리 후퇴해야 한다. 이것이 이번 작전의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제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사실 몰래 침투해도 성공했을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그렇게 시도해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맹주는 공수개 장로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과연! 공수개 장로의 말이 옳은 듯하구려” “이번 사건을 젊은 것들의 객기 정도로 너그럽게 넘어가시겠다는 맹주님의 넓은 마음은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신다면 마교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공수개 장로가 마교를 들고나오자 맹주는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마교가 말이오?” “예, 남양을 칠 계획은 원래 마교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교주가 본방에 정보요청을 했는데, 본방에서 철저하게 조사를 해본 결과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되어져서 그것을 우리 쪽에서 가로채자고 맹주께 청을 드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성공했다면 이쪽에서도 마교 쪽에 대고 할 말은 있었을 겁니다. 그쪽에서 하는 것보다 이쪽에서 처리하는 것이 성공확률이 높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둘러대면서 마교쪽 정보망이라든지 그쪽이 취약한 부분을 물고 늘어지면 어느 정도 그들을 무마시킬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일이 실패한 이상 마교에서 수긍할 만큼 뒤처리를 해줘야만 합니다.” 공수개 장로는 맹주와 감찰부주의 눈치를 힐끗 살펴본 후 말을 이었다. “양양성에서 온 정보에 따르면 교주는 이번 일이 실패하자마자 수라도제 대협의 숙소에 까지 쳐들어가서 난동을 부린 모양이더군요.” 교주는 그날 수라도제의 숙소는 물론이고 양양성에 있는 개방도들까지 묵사발을 만들어놨다. 하지만 공수개 장로는 개방에서 있었던 일을 쏙 빼놓고 수라도제의 일만을 말하는 것이다. 맹주는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다는 듯 혀를 끌끌 찬 후 감찰부주에게 말했다. “쯧쯧, 그런 일이 있었나?” 그 말은 감찰부주도 처음 듣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도 그런 말은 처음 듣는지라······.” “아아, 모두들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하기야 수라도제 대협처럼 속이 깊으신 분이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맹주님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는 연락을 했을 리 없겠지요. 하여튼 부상자가 30여명에 이른다는 것을 보면 교주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은 속이 깊다고 했지만 수라도제의 성질이 개 같다는 사실은 이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죽하면 신경질난다고 소림사 정문을 박살냈겠는가. 그런 인물이 그걸 쉬쉬하며 감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마도 마교 교주에게 줘 터진 것이 쪽팔려서 입을 다물었겠지.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서로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것 큰일이구려”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 마교와의 연합이 파기될 가능성까지 있다고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맹주도 예측하지 못했는지 불신 어린 어조로 물었다. “흑살마왕이 금에 있는데 설마 그럴리가······?” “아닙니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들이 정파와 손을 잡은 이유는 흑살마왕을 잡는 데 그 편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연합작전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지금까지 마교에서 거둔 전과는 엄청난 것이 아닙니까? 3만에 달하는 정파의 고수들에 비해 겨우 1만 남짓한 마교도들이 세운 전과가 더 크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거기에다가 아직까지도 마교는 주력을 투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맹주는 감찰부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감찰부주의 안색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무림맹 내 정보조직의 수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그쪽으로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문득 감찰부주의 뇌리를 스치는 문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마교에서 공식적으로 보내온 항의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는데 공수개 장로의 말을 들으니 마교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맹주님, 공수개 장로님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감찰부주까지 찬성해주자 공수개 장로는 더욱 힘을 얻어 맹주에게 말했다. “맹주님께서는 이번 사건의 사후처리를 마교 쪽에서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잊지 않으셔야만 합니다. 인정에 치우쳐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신다면 마교와의 동맹이 파기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동맹을 파기한다고 했는가? 허어, 그렇다면 요 근래 몇몇 문파에서 일어난 마교도 소행으로 보이는 혈겁도 그들이 본 맹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한 짓거리라는 말인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맹주님. 교주는 지금 양양성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흑풍대도 현재까지는 대단히 협조적이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천마혈검대의 고수들이 저질러놓은 소행이 아닐까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공수개 장로의 말에 감찰부주도 찬성했다. “저희 쪽도 그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사실 마교 쪽의 첫 번째 목표는 흑살마왕입니다. 흑살마왕이 제거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교가 본 맹과 전면전을 벌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건 아마도 흑살마왕이 꾸민 짓거리임에 분명하다고 판단됩니다.” 맹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사실 자신도 그것이 마교쪽의 소행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 외에도 공수개 장로는 이런저런 말을 나눈 후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공수개 장로가 물로가고 난 후 맹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사질, 과연 이런 일로 마교가 동맹을 파기할까?” “개방의 추측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마교에서 항의문이 도착했었는데,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노부도 그걸 읽어봤네. 자신들이 계획한 일을 무림맹이 가로채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것을 점잖은 어조로 질책하고, 더불어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의 조속한 처리와 그 처리과정을 자신들에게 상세하게 보고해 달라고 써져 있었지 않는가? 사실 그쪽에서 충분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는데······.”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공수개 장로의 지적을 받은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뭐가 말인가?” “예, 공수개 장로는 마교 교주가 그 사실을 알자마자 수라도제대협을 찾아가서 행패를 부렸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성질이 급한 인물이 공식적인 통로를 밟아 항의서를 보내다니요. 너무나도 이성적인 행동이 아닙니까? 양양성에서 직접 항의문을 작성하여 수라도제를 통해 무림맹에 보내도 되었을텐데, 왜 굳이 마교 총타로 연락을 보내고 또 그곳에서 무림맹으로 공식서한을 보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까지 치밀한 처리를 한 것을 보면 교주는 만약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동맹파기도 불사하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허어···, 하지만 그는 흑살마왕을 없애기 위해 본맹의 힘이 필요할 텐데······.”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맹주를 향해 감찰부주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조목조목 말했다. “먼저 지금껏 금과 전쟁을 벌이면서 마교에서 투입한 흑풍대의 전과는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사실, 마교의 정예들을 몽땅 투입한다면 본맹이 필요없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한 일입니다. 거기에다가 이번에 남양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마교는 본맹이 오히려 도움이 되기는커녕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훼방 놓는 훼방꾼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믿지 못할 동료는 없는 편이 더욱 편하다는 사실을 맹주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허어, 그럴 수도 있겠구먼.” “지금까지 맹주님께서는 옥진호 장로의 처결을 미뤄오셨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결단을 ㄴ리셔야 할 듯 합니다.” 여태껏 맹주는 옥진호 장로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맹주파로 꼽히는 몇몇 장로들이 그의 제거를 비밀리에 거론해온 적이 있었지만. 맹주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무당산에서 심신을 청결하게 닦아오던 그에게 있어서 권력욕에 물든 그러한 행동들이 다 헛되게만 느껴졌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거론된 옥진호 장로의 제거안은 조금 다른 면모를 띄고 있었다. 옥대진을 처리하려면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옥진호 장로도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무량수불······, 이런 식으로 그를 보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는데······. 이것도 다 원시천존님의 뜻인 게지.” 장로회의 소집을 명받은 옥진호 장로는 여섯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회의장으로 향하는 옥진호 장로의 두 눈은 언제나 그러하듯 주의깊게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경비무사들의 수와 질에서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주위에 낯선 인물들이 눈에 띄지도 않았다. 안면이 있는 문사복 차림의 사내 몇이 두툼한 문서뭉치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옥진호 장로는 허리에 찬 검을 끌러 호위무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회의장 안에까지 호의무사를 거느리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게” “옛” 옥진호 장로는 여러 장로들에게 인사하며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모든 장로들이 다 모인 후, 맹주는 근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러 장로님을을 이곳에 부른 이유는 남양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 때문이외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맹주는 옥진호 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옥진호 장로도 그 사건에 대한 보고서는 받아봤을 줄로 알고 있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자네의 손자가 연루되어 있는 만큼 자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군.” 이미 맹주가 그 말을 할 줄 예상이라도 한 듯 옥진호 장로는 열기 띈 어조로 옥대진을 변호했다. “남양에서의 사건에 대한 보고는 저도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아이들이 맹의 일을 망쳐 놓기는 했지만, 그들이 그 일을 추진한 것이 결코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을 아님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 황실과 무림을 위해 한 일이니 이번 한 번만 관용을 베푸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맹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아이들은 중대한 범죄를 행했네.” 옥진호 장로는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범죄라니요? 무슨 범죄 말씀이십니까?” “자네의 이름을 이용하여 개방에 압력을 가해 정보를 빼냈네. 새파란 젊은 것들이 무림맹의 이름을 이용하여 못된 짓을 했다는 말일세.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말에 옥진호 장로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물론 그것이 큰 죄임으르 알기는 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줄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을 끄집어낸 것을 보면 맹주는 이 일을 결코 대충 넘어가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손자교육을 잘못시킨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것을 아니 다행이로구먼” 빈정거리는 맹주의 말에 옥진호 장로의 안색이 노기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지만 감히 발작하지는 못했다. 이곳은 회의장인 데다가, 맹주는 여기 모은 그 누구보다도 막강한 권력과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대들어봐야 자신만 손해인 것이다. “감찰부에서는 이것이 각 문파의 후배밀어주기가 아닌가 하고 조심스런 의견을 내놓았다네. 각 문파의 고수 여럿이 그 아이들을 호위해 준 것이 그 증거라고 말일세.” “제가 일기로는 그 아이들끼리” 옥진호 장로는 재빨리 맹주의 말을 반박했다. 하지만 맹주는 냉정한 어조로 옥진호 장로의 말을 끊었다. “노부의 말을 다 들어보고 자네의 의견을 말해주게” “예” “그러니까 감찰부에서는 자네의 손자가 자네의 이름과 맹의 권위를 사칭하여 이 일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자네가 직접 주도하여 손자를 움직여 이 일을 추진한 것은 아닌가 보고 있네.” 그 말에 옥진호 장로는 경악해서 외쳤다. 그것은 손자는 물론이고 자신까지 파멸시키고자 하는 소리가 아닌가. “그런 말도 안되는!” “노부로서는 그걸 말도 안되는 소리고 치부하기 어려웠다네. 그 아이들이 움직인 것은 맹에서 남양을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뒷조사를 한창 하던 시점이었네. 그 아이들이 맹에서 비밀리에 추진하던 그 일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사실 손자녀석이 어떻게 꾸민 것인지 옥진호 장로는 알지 못했다. 그 사건에 대해 손자녀석으로부터 그 어떤 언질도 받은 적이 없었고, 또 그 사건 이후로도 손자를 만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 “양양성으로 파견한 취조관이 보내온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은 그 정보를 마교 교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말했다고 하네. 매우 그럴 듯하지. 하지만 남양을 치는 비밀작전을 전개함에 있어서 새파란 젊은 것에게 왜 그런 말을 교주가 했겠나? 또 그 말을 들었다는 팽대성이 마교 교주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팽대성에게 그런 비밀정보를 말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 않는가?” 맹주의 질책에 옥진호 장로는 마지못해 대꾸했다. 스스로도 자신의 대꾸가 가능성이 희박함을 알면서도. “교주가 일부러 흘렀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무림 맹주는 언성을 높이며 질책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수라도제 쪽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 봤네. 마교 교주는 개방으로부터 남양에 대한 정보를 받자마자 무공이 뛰어난 수하들을 골라 은밀하게 남양으로 보냈네. 만약 자네 말대로 남양을 칠 것을 미리 흘린 것이라면, 그는 처음부터 남양을 칠 생각이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그 시점에서 조사한 개방의 정보로는 남양을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었다고 하네. 마교로서는 성공만 한다면 엄청난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을 게야.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서 교주가 얻는게 뭔가?” 설마 교주의 목표가 처음부터 옥대진이었을거라고는 예상도 할 수 없었기에 옥진호 장로는 꿀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그런 만큼 그 정보를 마교 교주로부터 들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봐야 할 것일세. 그렇다면 그 아이들에게 마교가 남양을 치려한다는 정보를 누가 전해줬겠는가? 맹에서도 1급 기밀로 처리되고 있었던 그 정보를 말일세. 그 작전을 진두지휘할 수라도제조차도 그 명령을 받기 직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네. 안 그런가?” “맹주께서는 저를 모함하고 계신 겁니다. 저는 결단코 그런 짓은 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조사해보면 알게 될 일” 퉁명스런 어조로 옥진호 장로에게 대답한 맹주는 여러 장로들을 향해서 말했다. “장로들의 생각은 어떻소? 그대들도 옥진호 장로처럼 노부의 의심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노부도 처음 감찰부에서 보고를 받았을 때, 보고서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네. 그만큼 그 보고서가 노부에게 안겨준 충격은 컸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 그렇기에 노부는 감찰부의 청을 받아들여 옥진호 장로에 대한 치밀한 조사를 명령하고자 하네. 물론 그의 신분이 현직 장로인 만큼, 노부 독단으로 그를 구속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기에 그대들을 소집한 것이니 선택은 그대들이 하게.” 맹주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매우 그럴 듯 해서 옥진호를 지지하는 장로들로서도 뭐라고 나서기가 곤란했다. 더군다나 맹주는 옥진호 장로가 결백하기를 원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모두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쑤군거리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공수개 장로가 선뜻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공수개 장로는 옥진호 장로가 잡혀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맹주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과연 감찰부에서 옥진호 장로를 의심하실 만하군요. 저는 맹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공수개 장로가 앞장서서 바람을 잡자 다른 장로들도 그 의견을 따라올 수 밖에 없었다. 조사한 후 잘못이 밝혀지면 치죄하자는데 뭐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인가. “저희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옥진호 장로는 맹주의 눈치를 살피며 암암리에 공력을 돋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탈출할 결심이었던 것이다. 사실 맹주의 말처럼 일이 공정하게 이뤄질 것이라면 그가 구태여 탈출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무림맹의 높은 직위에 오래 있으면서 모든 일이 그렇게 공평하게만 처리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상대를 정해 일을 시작했으면 그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철저히 짓밟는 것이 정석이었다. 옥진호 장로도 지금껏 몇 번인가 해 왔듯,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옥진호 장로를 맹주는 가소롭다는 듯 슬며시 노려보고 있었다. 화경급에 이른 그가 옥진호 장로가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서로의 눈과 눈니 마주치는 순간, 옥진호 장로는 공력을 풀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물론 저에게 죄가 있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맹세코 저는 손자에게 그런 일을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맹주는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감찰부에서 공정하게 조사해 본 후 결론을 내릴 것이니 그대에게 죄가 없다면 염려하지 말게.” 이렇게 해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옥진호 장로는 투옥되었다. 그리고 바고 그날 연금중인 옥대진 등을 무림맹으로 이송하라는 지시가 양양성으로 날아갔다. 옥대진이 무림맹에 도착했을 때, 그에 대한 대접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옥대진 앞에서 쩔쩔매던 취조관은 서릿발을 휘날리며 옥대진을 추궁하고 있었다. 사람이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야, 이 새끼야. 빨리 안 불어? 네놈은 옥진호 장로의 지시를 받고 남양에 침투했지?” 모진 고문을 당한 옥대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있었기에. “크흐윽. 네, 네놈이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두고 보아라. 할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하지만 취조관은 더 이상 옥대진의 협박을 들을 마음이 없었는지 콧방귀까지 뀌더니 싸늘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흥! 아직까지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군. 내가 너를 이렇게 족칠 수 있다는 것은 네놈의 할아버지가 끝장났기 때문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냐?” 하지만 옥대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완강하게 외쳤다.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할아버지를 뵙게 해다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주마.” “이제 그만 버티고 순순히 시인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지 않겠나? 자, 말해봐. 네놈은 옥영진 장로의 명을 받고 남양에 침투했지?”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한 일이다.” 취조관은 이를 갈며 외쳤다. “독한 새끼! 하지만 네놈이 개겨봤자야. 이봐.” 취조관의 부름에 옆에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좀 더 조져. 내일까지 불지 않으면 네놈도 저 꼴이 될 줄 알아.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후, 그 사내는 몇 가지 새로운 고문기구들을 더 꺼내더니 옥대진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길고 긴 옥대진의 비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취조관은 점점 더 처참한 몰골로 변해가는 옥대진을 냉소 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옥대진에 대한 대접이 이렇게 바뀐 것은 위쪽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하달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상관은 옥대진의 행동이 옥진호 장로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지시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취조관이 너무나도 원하고 있었던 명령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권력을 등에 업고 자신에게 큰소리를 치던 놈이 역으로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니 이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고문하는 재미가 쏠쏠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취조관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새파란 애송이에게 당했었던 갖은 수모를 떠올리며 더욱 그를 닦달하는 중이었다. 며칠 후, 전 무림맹주 옥청학의 아들이자, 무림맹 장로였던 옥진호 장로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공정성을 기한다는 명목하에 진행된 공개재판이었기에 많은 무림의 고수들이 재판을 참관할 수 있었다. 물론 죄인의 신분이 무림맹의 현직 장로인 만큼 명망 있는 고수들에게만 참관할 자격이 주어졌다. 피고석에 앉아 있는 옥진호 장로는 현직 장로인 점을 고려하여 산공분이 든 차 만을 마셨을 뿐, 그 어떤 제제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재판석에 앉아 있는 그의 신색은 며칠 전 그가 수감되기 전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재판이 진행되자 옥진호 장로의 죄상에 대한 가지각색의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어느 정도 심증은 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정확히 그가 범인이라느느 증거는 될 수 없었다. 만약 이런 식으로 재판이 계속 진행된단면 그는 무혐의로 풀려날 가능성이 매우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감찰부에서 꺼낸 증거품은 장내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옥대진의 친필 자술서 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옥진호 장로에게서 언제, 어떤 식으로 지시를 받았는지 모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자술서는 옥대진이 고문에 못이겨 기록한 것이었다. 자술서의 뼈대는 감찰부에서 직접 만들었고, 그것을 옥대진이 불러주는 대로 직접 쓴 것이었기에 모든 내용은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자술서가 튀어나오자 지금까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옥진호 장로는 노성을 터뜨렸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짓거리! 네놈들이 손자를 고문해서 그것을 쓰게 한 모양인데···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이런 못된 놈들!” “그런 망발로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가문의 영광도 중요하지만, 구태여 이런 추태까지 부릴 필요가 있었습니까?” “추태를 부리기는 누가 부렸다는 것이냐? 그따위로 증거를 날조하다니······.” 하지만 이때 지금까지 조용히 재판을 참관하고 있던 하북팽가의 가주가 드디어 분노를 터뜨렸다.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옥진호 장로가 범인임에 틀림없었다. 모든 증거가 명명백백한데도 아직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뻔뻔스럽게 오리발을 내밀다니······. 그것을 보면서 그는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망할 녀석! 네놈 때문에 노부의 아들이 죽었거늘, 아직까지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말이냐?” 그와 동시에 하북팽가주의 손에서는 매서운 권풍이 쏟아져나갔다. 누가 봐도 일격에 옥진호 장로를 없애버리겠다는 뜻임을 알았지만, 너무나도 강맹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주위에 있는 고수들은 감히 그것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 무표정하게 장로석에 앉아 있던 맹호검군 백량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지금 그는 재판에 참석한다고 무기도 지니지 않은 상태였기에 감히 하북팽가주와 접전을 벌일 수는 없었지만, 그의 한 수 정도는 막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펑! 백량 장로는 강맹한 권풍의 반동을 줄이기 위해 재빨리 뒤로 서너 걸음이나 물러서야만 했다. 자신의 일격을 백량 장로가 막아버리자 하북팽가주는 더욱 분기탱천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까지 백량 장로는 옥진호 장로파로 분류되던 인물이었다. 계속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한다면 백량 장로를 해치우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때, 백량 장로는 몸을 빙 돌려 피고석에 앉아 있는 옥진호 장로를 바라보며 싸늘한 어조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매화문검 장로. 감찰부에서 제시한 증거가 참이오?” 믿고 있던 백량 장로마저 이런 식으로 묻자 옥진호 장로는 벌컥 화를 내며 외쳤다. “자네까지 그런 걸 묻다니······. 저것들 모두가 다 새빨간 거짓임을 자네는 모르겠는가? 정말 답답하구먼. 증거 따위야 얼마든지 조작해서 만들 수 있음을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옥진호 장로의 대답에 백량 장로는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헛, 아직까지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치 않다니······. 노부가 저런 소인배를 믿고 함께 일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허탈하구나.” 백량장로는 그대로 자신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백량 장로라는 걸림돌을 공격하려던 하북팽가주만 우스운 꼴로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어버렸다. 이때, 하북팽가주 옆에 앉아 있던 황보세가주가 그의 손을 슬쩍 잡아끌어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지금 저놈을 죽인다는 것은 안락한 죽음을 선물하는 것과 같소이다. 저런 놈에게 그런 호사를 안겨줄 필요가 있소이까?” 황보세가주는 아들의 목숨은 건졌는지 몰라도 가문에서 손꼽히는 고수들 중의 한 명이었던 절파검 황보청을 잃었다. 그것이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가만히 되어가는 꼴을 보니 완전히 개죽음을 당한 것이 아닌가? 황보세가주가 이빨을 갈 수밖에 없었다. “젠장, 그, 그렇구료. 저런 놈에게는 안락한 죽음도 사치지.” 이번 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황보세가주와 하북팽가주가 옥진호 장로의 유죄를 인정한 것만으로도 장내의 분위기는 그쪽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만큼 두 가문의 위세는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었는가?” 무림맹주의 물음에 감찰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상대로 재판은 순조롭게 끝났습니다.” 그 말에 맹주는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크흠. 그런 거목을 이런 식으로 보내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나도 씁쓸하구먼.”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너무 자숙할 줄 몰랐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참, 사질은 그를 언제 처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빠르면빠를수록 좋겠지요. 참, 황보세가주나 하북팽가주가 가장 지독한 고통을 수반하는 죽음을 내리라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가능한 한 지독한 통증을 유발시키면서 차츰차츰 죽여나가는......” 하지만 맹주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감찰부주의 말을 끊었다. “잠깐! 그건 너무 잔혹한 듯하구먼. 그보다는···, 결론적으로 그는 이적행위를 한 셈이니 오마분시를 하기로 하세” 오마분시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목과 양손, 양발을 각기 말 한 필씩에 연결한 후, 일시에 말들을 출발시켜 토막내어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황실에서 반역도를 처형하는 데 애용되고 있는 무시무시한 처형방법이었다. “보기에는 끔찍할지 모르지만 순간적인 죽음입니다. 황보세가나 하북팽가에서 이의를 제기해오지 않겠습니까?” “그건 노부가 무마시키지. 오마분시로 하게” 맹주의 명령에 감찰부주는 어쩔수 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맹주님.” 16장 북쪽이 심상치 않다. 묵향은 자신이 깔아놓은 미끼를 옥대진이 덥썩 물었음을 알고는 능청스럽게도 무림맹에 공식 항의서까지 보내어 옥씨 일족의 몰락을 부채질 해놓은 상태였다. 물론 자신의 간접적인 위협이 무림맹에 먹혀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대로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관지 장로.” 묵향의 부름에 관지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아마 며칠 내로 양양성에서 철수해야 할지도 모르니 미리 준비를 해두도록 하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갑작스러운 명령이었기에 관지는 잠시 어리둥절한 듯했다. “철수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쩌면 무림맹과 동맹을 파기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라.” 놀란 관지 장로가 뭐라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전에 묵향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그가 이번에 하는 말은 어기전성을 통한 것이었다. <그리 놀랄 필요는 없네. 사실 이건 무림맹에 대한 위협용일 뿐이야. 금에 대한 전쟁을 계속 유지한다는 기본계획에는 변함이 없으니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어. 다만 동맹파기를 한 상태에서 흑풍대를 계속 양양성에 주둔시킬 수는 없지 않겠나? 그렇기에 자네에게 미리 언질을 주는 거야.> 상관의 뜻을 파악한 관지 장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수하들에게 지시해 두겠습니다.” “흠···문제는 동맹파기 선언을 언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냐하는 것인데······. 지금쯤 무림맹에서 뭔가 회답이 올 때도 되었는데, 안 오고 있다는 말씀이야?” 이러고 있을 때 밖에서 경비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을 뵙기를 청하는 자가 있사옵니다.” “호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들라고 해라.” “옛” 곧 문이 열리고 청수한 인상의 도인이 실내로 들어왔다. 그는 교주를 오늘 처음 만났기에,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교주를 보고 약간 의외인 듯 했다. 사실 교주의 모습은 그가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마교도들과는 달리 전혀 마교도같이 생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표정을 정리하여 공손하게 묵향에게 인사를 건넸다. “빈도는 무림맹 장로인 만수라고 하외다.” 무림맹에서 공식적으로 마교 교주에게 보내는 사신이다. 그런만큼 무림맹 장로급은 되어야 하기에 이번에 옥진호를 대신하여 새로이 장로가 된 만수진인이 이곳으로 파견되어 온 것이다. “맹에서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했군. 자, 이리로 앉지.” 만수진인은 묵향이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소이다. “그래, 무슨 일로 본좌를 만나러 왔나?” 만수진인은 단단하게 봉인된 제법 두툼한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이것을 전해드리라는 맹주님의 지시를 받고 왔소이다.” 묵향이 봉인을 뜯어보니 그 안에는 문서봉지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남양사건에 대한 조사와 그에 연관된 자들에 대한 처리결과를 기록해놓은 문서외다.” 묵향은 최종처리가 어떻게 끝났는지 궁금했기에 재빨리 문서를 집어들어 뒷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을 읽으며 묵향은 하마터면 광소를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무림맹 장로가 앞에 앉아있기에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일부러 표정을 더욱 딱딱하게 굳히며 읽고 있었다. 무림맹은 교활하게도 이 기록에서 자신들이 수라도제 등을 투입하여 마교의 공직을 가로채려 했다는 부분은 빼버렸다. 개방에서 들어온 보고서를 옥진호 장로가 빼돌려 자신의 손자에게 일을 맡긴 것으로만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마교가 행하려 했던 일이 완전히 틀어진 것에 대해 사과한다는 내용과 함께 말이다. 모든 죄를 옥진호 장로 개인에게만 뒤집어씌운 것에 묵향은 내심 기가 막혔지만 그걸 내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허어, 이런 나쁜 녀석들을 봤나. 본교에서 세운 계책을 자신들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이용하려 들다니······. 그야말로 인두겁을 쓴 놈들이로구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일에 연루된 자들은 모두 다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았소이다.” “옥대진이라는 젊은이도 말인가?” “물론이오. 단 한 명도 예외는 없었소이다.” 그 말을 들은 묵향은 내심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도 감옥에 수감해뒀다고 했다면 이쪽에서 처리할 테니 넘겨달라고 할 수 있었을텐데······. 일단 일을 시작하자마자 옥 씨 일족을 몰살시켜 버린 것을 보면 현 맹주도 참 냉정하기 그지없는 인물인 모양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맹주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전 무림맹주 옥청학으로부터 시작된 옥 씨 일족의 권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기에 한번 시작을 했으면 아예 끝장을 봐야만 하는 것이다. 묵향은 슬쩍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족감이 깃든 한숨을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현직 장로를 단죄하다니, 무림맹주의 과단성있는 결단과 그 공명정대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구먼.” “과찬이시오.” “하지만··· 이런 종잇조각만으로는 믿기가 힘들지. 최소한 딴 건 몰라도 주모자인 옥진호 장로의 목이라도 소금에 절여 보내주는 것이 서로 간의 신뢰구축을 위해 필요한 절차가 아닐까?” 묵향의 제안에 만수진인의 표정은 조금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있소이다. 구교와 본맹은 오랜 세월 반복과 투쟁을 벌여온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소이까? 그런 만큼 아무리 잘못이 있는 자라고 해도 그가 무림맹의 장로였던 이상 그 목을 잘라서 귀교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외다. 이 점 교주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소이다.” “딴은 그럴 수도 있겠구먼” 묵향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준 것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은 후, 앞으로도 금나라를 박살내는 데 서로가 최대한 협력하자고 다짐한 다음 만수진인을 돌려보냈다. 그런 다음에야 묵향은 혼자서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옆에서 듣기라도 할까봐 조심하는 악동처럼 말이다. 묵향이 한참 신이 나 있을 때, 장인걸의 심정은 그야말고 죽을 맛이었다. 무림맹과 마교를 이간시켰는데도 도무지 그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양양성에서 이탈하는 무림인들은 아직도 없느냐?” 편복대주는 더욱 깊이 부복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하들의 보고로는 양양성에서의 인원변동은 아직도 없다고 하옵니다.” “허, 참. 이상한 일이로다. 지금쯤 뭔가 결론이 날 떄도 되었는데 말이다.” 실패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아직까지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실패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장인걸로서는 작금의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교와 정파는 이토록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이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까? 이때, 편복대주가 장인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양양성에서는 무한에 이르는 방어선을 책임지고 있는 송군 장수는 악비라는 대장군이옵니다.” “그런데?” “그자가 이번에 30만에 달하는 방대한 병력을 훈련시키고 있사옵니다.” “그건 전에 자네가 본좌에게 보고했지 않은가? 그들이 모병하는 것을 기회로 첩자들을 그 속에 침투시켰다고 말이야.” 편복대주는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교주님. 그들로부터 전해진 정보를 종합해본 결과 아마도 그들의 훈련이 대충 끝마쳐지는 내년쯤이면 송군 쪽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오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었사옵니다.” “헛,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겨우 그 정도 병력으로 공세를 가해올 리가 없지 않은가. 현재 송군이 보유한 병력이라고 해봐야 10만 남짓인데, 거기에 오합지졸 30만을 보태봐야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것이 아닌가? 증원병은 자기들만 준비하고 있는 줄 알다니 한심한 놈들이로고.” 장인걸의 이 말도 일리가 있었다. 송군이 30만의 신병을 모집한 것을 알고, 자신도 황제에게 주청을 드려 여진족과 거란족의 병사 30만을 모집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년이 되면 양쪽 다 30만씩이 준비되는 것이겠지만, 그 질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장인걸이 모집하는 것은 척박한 대지에서 사냥과 전쟁으로 단련된 용사들이었으니 말이다. 장인걸의 지적에 편복대주는 깊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물론 송군의 전력만이라면 그렇사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무림맹의 고수들이 가세한다면 상당한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 말에 장인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허긴, 필요 이상으로 모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 자네가 생각해둔 것이라도 있는가?” “악비라는 자를 제거하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송군의 중추인 그 자만 없애버린다면 송군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는 오합지졸로 전락할 테니 말이옵니다.” 그 말에 장인걸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제거한다? 그자가 있는 양양성은 지금 첩자 한 명 침투시키기가 힘들 정도인데, 어떻게 제거하자는 말인가?” 이것이 지금껏 무인으로 살아왔던 장인걸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편복대주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교활하게 미소지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그건 의외로 간단하옵니다. 교주님. 몇몇, 중요한 관직에 있는 신하들을 매수하거나 협박하여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옵니다. 멍청한 어린 황제만 설득하면 되는데 무엇이 힘들겠사옵니까?” “호오, 본좌는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좋은 계획이로다. 빨리 시행하라.” “옛, 교주님. 그렇게 시행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북쪽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북쪽이 심상치 않다? 그건 무슨 말인가?” “몽고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말이옵니다.” “북쪽에는 양지에 장군의 10만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몽고 놈들의 세력이 커졌다고 해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게야” “아무리 양지에 장군이 뛰어난 용장이라고 하지만 10만으로는 역부족인 듯하옵니다. 몽고족들은 정면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들이닥쳐 병사들을 살해한 후 노략질을 하옵니다. 그러다가 병사들이 출동하면 순식간에 도망쳐버리는지라······.” “젠장, 그런 식이라면 어려울 수도 있겠구먼. 저 망할놈의 무림맹 놈들만 아니라면 본좌가 정예를 이끌고 가서 싹 쓸어버렸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장인걸은 이윽고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장인걸은 이빨을 뿌드득 갈며 외쳤다. “어쩔 수 없구나. 후방에 대기중인 병력을 돌리는 수밖에······. 편복대주!” “옛” “지금까지 모병한 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예, 20만 남짓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내년 봄이면 목표한 30만을 다 모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그 20만을 북쪽으로 돌려라. 그 정도 병력을 준다면 아무리 바보 멍청이라도 송을 끝장낼 때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장인걸은 송을 멸한 후,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자신의 일을 훼방 놓은 몽고놈들의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속으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양쪽은 별다른 움직임 없이 서로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에 드러난 모습이었을뿐, 그 내면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송군은 30만의 신병훈련에 국운을 걸고 있었다. 수라도제와 약조한 대로 봄에 공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전력을 보유하는 것은 필수사항이었으니 말이다. 금군은 금군대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인걸이 봄이 되면 사용하기 위해 새로이 모병해놨던 20만은 몽고족을 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고, 60만의 정예들은 현 위치를 고수하며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편복대주는 송군과 무림맹의 동태도 살피랴, 조정의 중신들도 포섭하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림연합의 고수들은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겉모습은 그랬지만 가급적이면 고수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실력있는 고수들은 문파로 불러들이고, 급수가 떨어지는 자들로 대체하고 있었다. 장인걸의 밀명을 받은 다섯 명의 고수들이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집안을 튼튼히 해놓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묵향은 조용히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장인걸이 언젠가는 허점을 보여주기를 기다리며. 하지만 묵향이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작은 이변이 십만대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어엇? 이게 무슨 조화지?” 수석장로는 불안한 듯이 탁자 위를 바라봤다.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은 마치 약한 지진이라도 난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수석장로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던 군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염려 놓으십시오, 수석장로님. 혹시나 해서 본교의 모든 기록을 조사해봤습니다만, 지금껏 십만대산에서 화산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아마 며칠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 질 겁니다.” 하지만 군사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사실 그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었던것이다. “허어 이러다가 그치면 좋으련만. 그런데 요즘들어 점차 주기적으로 바뀌는 것 같아 아주 불안하단 말씀이야. 혹시 이러다가 쾅하고 터지는거 아냐?” 혹시 부하들이 들었을까봐 군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수석장로에게 사정했다. “제발, 불길한 말씀 좀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군사의 예상과는 달리 불안에 떠는 것은 수뇌부만이 아니었다. 마교 내의 모든 하급 고수들까지도 이 알 수 없는 지진현상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삼삼오오 모여서 여기저기서 쑤근거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왜 이런 현상이 일어아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위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움직임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묵향21권 묵향 21권 - 교주(敎主)의 딸 차례 1. 깨어나는 드래곤 2. 수라도제의 침묵 3.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음모 4. 마화의 걱정거리 5. 전전긍긍(戰戰兢兢) 6.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 7. 질주(疾走)하는 고수들 8. 악전고투(惡戰苦鬪) 9. 괴멸(壞滅), 그리고 부녀 상봉 10. 혼비백산(魂飛魄散)의 장인걸 11. 패력검제 마교를 가다 12. 황금빛 괴물과의 조우(遭遇) 13. 괴물(?)들의 틈바구니에서 14. 교주의 딸 15. 귀로(歸路)에 생긴 일들 1. 깨어나는 드래곤 여기는 교주 전용의 연공실. 이곳에는 언제부터인가 그 큰 연공실이 비좁을 정도로 거대한 골드 드래 곤이 낮잠을 자고 있는 중이다. 조용하던 연공실이 지진이라도 난 듯 부 르르 갑자기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드르르릉! 거대한 드래곤답게 코고는 소리도 박진감이 넘친다. 코 한번 골 때마다 연 공실이 흔들거릴 정도였다. 드래곤이 코를 골기 시작한 것은깊은 수면 상태 가 이제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 드디어 그가 깨어날때가 거의 다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이어졌던 코골이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아르티어 스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그 큰 입을 쩍 벌리며 하 품을 한바탕 한 후에 중얼거렸다. "젠장. 이렇게 좁은데서 자다보니 온몸이 다 찌뿌두둥 하구먼." 이때, 갑자기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어?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곧이어 여기가 어딘지 떠오른다. 이곳은 바로 마교의 가장 최하층부에 위 치한 교주 전용의 연공실이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이 들어온이유는……. '이런 빌어먹을! 그것 때문에 내가 잠이 들었던 거였지.' 화가 나서 머리를 들자마자 머리통은 즉각 연공실의 천장과 부딪쳤다. 쿵! '으갹! 이런 빌어먹을!' 굉음을 울릴 정도의 엄청난 충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공실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기야 이곳은 교주 전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연공실이다. 역대 교 주들이 패도적인 마공을 연성하면서 애용했던 곳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강 대한 충격을 받아도 무너지지 않도록 특별히 튼튼하게 제작된 곳이었다. 아르티어스는 즉시 주문을 외워 이곳 세계의 토종 호비트로 변신했다. 바로 자신이 드래곤으로 변신하기 직전의 모습으로 말이다. 거대한 황금색 드래곤이 빛과 함께 사라진 후, 그자리에 초로의 노인으로 변한 아르티어스 가 인상을 찌푸린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뭐가 잘못된 거지? 나는 분명히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수가 없는 만큼 또다시 위험 을 감수하며 수련을 감핼할 수도 없었다. 아니, 현재 아르티어스의 몸 상태 로 그것은 거의 자살 행위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오랜 시간잠을 자며 몸을 추스렸다고 하지만, 그의 몸은 아직까지도 완벽한 상태를 되찾은 것은 아니 었던 것이다. "젠장. 아무래도 잘 모르겠군. 어쩔수 없지, 자존심은 상하지만 그놈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빠를지도 모르겠어." 「그놈」이란 바로 자신의 수행을 하나도 도와주지 않고 나 몰라라하고 있 는 그의 양아들 놈을 말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아르티어스가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있을때, 수석장 로가 허둥지둥 달려 들어와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어르신,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곳의 수석 장로를 맡고 있는 북궁뇌(北宮雷)라고 합니다." 하지만 수석장로를 바라보는 아르티어스의 시선은 결코 곱지 못했다. 그는 아들놈을 호출한 것이지 수석장로를 호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렇기에 아르티어스는 수석장로의 인사를 받는 중 마는 둥 하며 짜증어린 목 소리로 되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수석장로를 덮 쳐왔다. 수석장로는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러 교주들을 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압박 감을 받아 본 것은 맹세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네놈이 누군지 내가 알 바가 아니고, 나는 아들놈을 오라고 했는데 왜 네 가 왔느냐?" 수석장로는 간신히 대답했다. "예. 교, 교주님께서는 지금 바쁜일이 있으셔서 밖에 출타 중이십니다."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래?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어서 갔나?" "아뇨, 금이라는 나라와의 전쟁 때문에 가셨습니다."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금이라고? 그놈들 참. 이름 한번 간단해서 좋군. 젠장, 그런 소꿉장난 같 은거나 하지 말고 나한테 부탁하지. 왕이건 황제건 말만하면 뭐든지 다 되 게 해 줄 건데, 뭐하려고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건지……, 쯧쯧 ." 저런 광오한 말을 서습없이 내뱉다니. 말도 완 된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 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수석장로의 머릿속에는 전혀 그런 생각이 떠오르 지 않았다. 아르티어스의 존재감에 짓눌리고 있던 그는 그말이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쯧. 그럼 언제쯤 돌아오느냐?" "예. 속하가 알기로는 아마 몇 달은 족히 걸리시지 않을까 예측하고 있습 니다." 수석장로의 입에서는 어느새 「속하」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강자지존(强者之尊)의 율법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그가 아르티어스를 상전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몇 달? 그렇게 길게? 이놈이 애비를 뭐로 생각하고 있는거야? 어쩔수 없 군." 그렇게 말은 했지만, 아르티어스는 오히려 이것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자신의 망가진 몸이나 추스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들놈처럼 강제적으로 주위의 마나를 확 끌어들여 몸을 치료한수만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귀찮게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르티어스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꼭 그놈의 무공 이라는 것을 익혀야겠다고 다시 한 번 속으로 다짐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무공을 익히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그 러면 나는 아버지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드래곤이 될 수 있겠지. 암, 그렇 고 말고. 으흐흐흣." 아르티어스가 키득거리기 시작하면서 수석장로에게 가해졌던 그 엄청난 존 재감이 갑자기 사라졌다. 더 이상 수석장로를 상대로 화풀이할 마음이 없어 졌던 것이다. "너는 그만 가 보고, 그 마화라는 아이를 불러오너라. 그애가 제법 싹싹하 니 마음에 드니까 말이다." 압박감이 사라지자 수석장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을수 없었 다. "아뢰기 송구스럽습니다만, 마 부대주도 교주님과 함께 갔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르티어스는 음료수를 깨끗하게 비운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다시 연공실로 돌아가 볼까나?" 압박감이 사라져서 그런지, 수석장로릐 머릿속에 갑자기 묵향이 떠날 때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기에 수석장로는 재빨리 아르티어스에게 말했 다. "저…, 어르신. 어르신께서 연공실에서 나오시면. 꼭 전해 달라고 교주 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나를 보고 자기 있는 곳으로 오라는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런 내 색을 하지 않고 퉁명스레 물었다. "뭐냐?" "교주님의 동생분을 치료해 달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부상당한 초류 빈 부교주도 함께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뭣이? 이놈이 나를 뭐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와 동시에 또다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수석장로를 덮쳤다. 이제서야 수 석장로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영감이 기분 나쁠 때마다 자신에게 장난치 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힘없는자기가 참아야지. 수석장로는 이제 다리까지 후들거리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항변했다. "저…, 꼭 치료를 해 달라고 간청드린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간청」했다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뭐 그렇게까지 말했다면 어디 한번 봐줄까나?" 아르티어스의 기분이 약간 좋아진 듯하자, 수석장로는 상대의 마음이 바뀌 기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옛. 즉시 이리로 그분들을 데려오라 전하겠습니다, 어르신." * * * 북쪽의 야만족들에 의해 광활한 대지를 뺏겼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대송 제국의 저력은 바닥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양양성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여 금의 대군이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서서히 바뀌려고 하고 있었다. 재상 진회는 심각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서신을 노려보고 있었 다. 서신의 내용대로라면 친구들과 명승지를 유람하겠다며 나갔던 아름놈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강직한 선비인 진회의 마음을 억 누르고 있는 것은 아들의 목숨 따위가 아니었다. 아들의 목숨이 아무리 중 하다고 하지만, 나라와 황실의 안위보다 중할수가 있겠는가? 이때, 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인. 대인을 뵙겠다고 온 자가 있사옵니다." 사색을 방해받은 진회는 약간의 짜증을 담은 헛기침을 터뜨리며 외쳤다. "커흠, 누군데 그러느냐?" 하인은 재빨리 실내로 들어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것을 드리면 아실 것이라고 했사옵니다." 그러면서 하인이 조심스럽게 진회에게 건넨 건은 얇고 자그마한 어떤 토막 이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쳐다보는 사이 진회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 었다. 저잣거리에 나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을 듯한 싸구려 옥 노리개. 거기에 새겨진 문양 또한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진회는 그것을 받아든 순간 품속을 뒤져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진회의 품속에서는 그것과 똑 같은 조각이 하나 더 튀어나왔다. "흐음……." 두 개의 옥 조각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그것을 확인하며 진회는 신음 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품속에서 나온 또 다른 조각은 아들의 납치범들이 보낸 서신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었기에. "너는 빨리 가서 박 교령(僑令)을 불러오너라." "옛. 대인." 잠시 후, 박 교령이 달려왔다. 군부의 무장다운 장대한 체구를 지닌 그를 보자 적잖게 마음이 놓이는 진회였다. "찾으셨습니까? 대인." 진회는 박 교령에게 지시를 내려 잘 무장한 병사들을 매복시킨 후, 하인에 게 자신을 찾아온 괴한을 이리로 안내하라고 일렀다. 잠시 후, 남루한 흑의를 입은 괴한이 하인의 안내를 받고 들어왔다. 손질도 안한 수염이 사방으로 숭숭 뻗쳐있는 강직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런 데 사내가 실내로 들어서자 진회는 뭔가 기분 나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 마교의 무리들과 몇 번 조우해 본 무림인들이라면 이것이 마공을 연성한 자들이 뿜어내는 독특한 기운인 마기(魔氣)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겠지만, 불행하게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무림인들이 아니었다. 진회는 자신의 기분이 슬그머니 나빠지는 것이, 아들을 납치해 간놈을 만 났기 때문이라고 넘겨짚으며 탐탁치 않은 어조로 외쳤다. "그래, 무슨 일로 노부를 보자고 한 것이냐?" 사내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대꾸했다. "소인과의 대면을 허락하신 것을 보면 대인께서도 이미 짐작하고 계실 것 이 아니겠소이까?" 진회는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으며 퉁명스럽게 외쳤다. "네놈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진회가 이렇게 물은 것은 단독 범행을 저지를 자가 직접 이곳에 찾아오지 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내는 진회의 좌우에 시립하고 서 있는 병사들을 힐끗 바라 본 후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선 좌우를 물리쳐 주셨으면 좋겠소이다. 그리고 저 안에 숨어 있는 쓰 레기들도 말이오." 그러면서 괴한은 진회가 박 교령에게 명하여 병사들을 매복시킨 곳들을 일 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인의 침실 서탁에 서신을 올려놓은 것만으로는 본인의 실력을 믿지 못 하시겠는 모양이지요?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마시고 좌우를 물리치는 것이 어 떻겠소이까?" 순간 진회의 안색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잘 훈련된 황병들에 의해 엄중 하게 경비되고 있는 자신의 처소에 숨어들 정도로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춘 자였다. 더군다나 상대는 여기저기에 황병들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잘 알면서도 저토록 태연자약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할가 궁리하던 진회는 자신의 뒤에 시립하고 서 있던 박 교령에게 명령했다. "좌우를 물려라." 박 교령은 시국이 워낙 어수선했기에 재상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황실에 서 직접 파견한 인물이었다. 물론 무림의 고수처럼 고강한 무예를 지니고 있지는 못했지만, 소림 속가 출신으로서 어느 정도 무공의 겉은 핥은 인물 이었다. 그런 그가 저토록 위험한, 괴이한 기운을 내뿐고 있는 수상쩍은 놈 을 상대로 상관을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킬리 없었다. "결단코 그렇게는 할 수 없사옵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 좌우를 물리치라고 했다." "재상께서는 저자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모르시는……." 하지만 박 교령의 항변은 진회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건 노부도 잘 알고 있다. 이쪽이 대비가 확실히 되어 있음을 잘 알고 들어온 놈이 아니더냐. 저자의 목적은 노부의 목숨 따위가 아니다. 그러니 염려 말고 병사들을 물리거라.' 박 교령은 또다시 뭐라고 항변해 보려 했지만 진회의 눈돈자는 단호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쩔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옛. 명을 따르겠나이다." 괴한이 돌아간 후, 진회는 하녀에게 명하여 뜨거운 차를 내오라고 일렀다. 향긋한 다향을 맡으면서도 진회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방금전에 물러간 사 내가 한 말 때문이었다. "허어, 말을 듣지 않는다면 희야의 목숨을 끊어버리겠다?" 물론 그러고도 통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은 비밀 유지를 위해 자신의 목도 따버리겠다는 추가적인 협박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밤중에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와서 서신을 놔두고 간 놈이다. 진회의 목숨 정도는 언제든지 취 할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행동이었다. "어찌 아들놈의 목숨 따위가 대송제국의 앞날과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겠 는가. 하지만……." 이렇게 말하며 지그시 눈을 감는 진회였다. 둘만 남게 되자 사내는 예상외로 공손한 어조로 제의했었다. 「과거 귀하는 매우 청렴한, 백성들에게 존경받던 관리라고 들었소이다, 뇌물을 받지도 않았지만, 바치지도 않았기에 미관말직(黴官末職)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었지 않았소이까? 만약 귀하가 정녕 백성들을 위하는 관리라 면 그들을 위해 어느 쪽이 좋은지를 생각해 보시구려.」 사내의 말은 언뜻 무례하기 그지없다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은 진회 의 가슴을 들쑤시고 있었다. "백성들을 위하는 길이라……." 현재 송의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오랜 전란 으로 인해 재정은 파탄나기 일보 직전이었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백성들 에게 엄청난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결코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진회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강한 금 제국이 코앞에서 위협 해 대는 지금, 그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다. 다른 방법은 그 결과 가 나오려면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으니말이다. 더군다나 중앙이 어수선한 틈을 악용하여 변방의 관리들까지 온갖 못된 짓 을 다 벌이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아는 진회는 관리들을 파견하여 그것을 뿌 리 뽑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 였던 건이다. 그렇다고 괴한의 요구대로 나라를 망하도록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 가? 송이 망한다면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올 나라는 십중팔구 금일 것 이다. 과연 오랑캐들이 세운 금나라가 백성들을 위해 제대로 된 정치를 펼 수 있을 것인가? 진회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금 찻잔을 들어올렸다. 바로 이때, 총관이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대인! 대인! 큰일 났사옵니다." 사색을 방해받은 진회는 못마땅한 어조로 총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냐?" "황궁에서 태공공(泰公公)께서 오셨사옵니다." "태공공이? 무슨 일인데……." 진회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태공공 같은 높은 직위를 지닌 내시(內侍)가 여기까지 왔을까? 안 그래도 내일 아침이되면 또 다시 등청(登廳)할 텐데 말이다. 진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총관이 외쳤다. "민란이 일어났다 하옵니다." "뭣이?" 민한이라는 말에 진회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민심이 흉흉했기 에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터질 것이라고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그 래도 그의 놀라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금이 압박해 오는것만 해도 정신이 없을 지경인데, 거기에 민란까지 겹친다면 송은 무너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속히 준비를 갖추라 일러라. 입궁할 것이다." 민란을 어떻게 진압하고, 또 그 후속 조치는 어떻게 취할 것인지에대해 중 신(重臣)들과 오랜 시간 토의한 진회는 밤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 다. 민란이라니……. 이제 망해 가는 제국의 말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 하는 듯 하여 그의 마음은 더없이 착잡했다. 그렇기에 그는 하인들에게 일러 간소하게 술상을 봐 오게 이른 다음, 박 교령을 술자리에 청했다. 사실 이 집에서 그와 함께 대작을 할만한 이가 그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자, 자네도 한잔 들지." 그렇게 말하면서 진회가 술병을 집어 들자 박 교령은 황송하다는 듯 재빨 리 잔을 비우고 빈 잔을 받들었다. 진회는 박 교령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 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박 교령. 자네 또한 그렇게 우둔한 사람이 아니니 작금의 상황을 결코 모 르지는 않을 터. 그래, 자네가 보는 송의 미래는 어떠하리라 생각하는가?" "어찌 소인같이 무지한 무관에게 그런 혜안(慧眼)이 있겠사옵니까?" 진회는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공허하게만 들렸다 . "허허헛, 이 사람. 술이 모자랐던 모양이구먼." 진회는 뒤에 시립하고 있던 하녀에게 말했다. "가서 커다란 사발을 가져오너라." 하녀가 사발을 가져오자 진회는 그 사발 가득 독한 술을 따르며 술을 권했 다. "자, 이걸 한잔 쭉 들고 대답해 보게. 오랫동안 자네를 곁에 두고 지켜보 고 있었네. 노부는 그렇게 둔한 사람이 아닐세. 자,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게나. 만약 대답하지 않는다면 벌주를 더 마셔야 할 것이야." 말도 안 되는 위협에 박 교령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불으시니 얕은 소견이지만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사람이 태어 나서 나이 먹으면 죽는 것과 같은 이치로, 나라에도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다고 배웠사옵니다. 유사(有史)이래 수많은 강성한 제국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사옵니다만 그중 4백년을 넘긴 제국은 단 하나도 없었음을 고금(古今 )의 역사서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소장의 얕은 생각으로는 한 번 꺾여진 국운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아니올런지요." 그 말에 진회는 슬쩍 심술이 나서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국운이 무너지던 제국들 중에서도 현명한 군주와 신하들이 나타나 나라를 부흥시킨 예도 있지 않은가?" "물론 드물기는 하오나 있사옵니다. 하지만 그건 외침이 없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않사옵니까? 하물며 군 조직이 완전히 붕괴되고, 각지에서 군벌(軍 閥)들이 일어나 그 세를 확장하는 최악의 상태에 직면하여 다시금 부흥에 성공했던 제국은 단 하나도 없었아옵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결국 송도 그런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인가?" 박 교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있어 왔던 제국들의 흥망만을 얘기했을 뿐이다. 혹 송이 그 모든 악고전을 깨고 새로운 중흥기 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전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그걸 윗사람에게 노골 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회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쭉 비운 후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힘이 하나도 없었다. "쇠퇴하는 국운을 되돌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절대로 아니지." 그날 진회는 대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그날처럼 자신의 능력이 미약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 다는 것만 봐도 송의 국운은 반쯤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안으로는 민란을 진압하며, 밖으로는 강성한 금제국을 상대한 다? 아무리 자신이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건 송의 명줄을 몇 년 더 연장시 키는 것에 불과했다. 그만큼 백성들은 더 많은 고생을 하게 될 것이고……. * * * 초류빈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자신과 동급인 상대를 만났다. 물론 마공을 익 힌 자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것은 현천검제의 존재를 아주 극소수의 인물 들만 알고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초류빈이 그런 것에 무신경했던 이유도 있었다. 그의 경호를 호법원에서 책임지고 있었던 만큼, 초류빈이 알고자 했다면 금방 알 수 있었으니까. 아르티어스는 그 둘을 치료한 후 다시금 연공을 한답시고 연공실로 가버렸 고, 그곳에 남은 둘은 서로의 존재에 경외감을 느끼며 통성명을 주고받았다 . "나는 고천(古闡)이라고 하오. 설마 이곳에서 정파의 무공을 극성으로 익 힌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소." 초류빈도 마주 포권하며 대답했다. "아, 고천 대협이셨구려. 나는 초류빈이라고 하오. 외람되게도 이곳의 부 교주직을 맡고 있소이다." 정파의 무공을 익힌 자가 부교주라는 말에 현천검제의 안색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젠장. 그러고 보니 남의 일이 아니구먼. 나도 곧 있으면 부교주 노릇을 해야 하는 거 아냐?' 한동안 초류빈의 안색을 살피던 현천검제는 마음을 정했는지 슬쩍 상대의 속을 떠봤다. "혹시…, 그 극악무도한 교주에게 붙잡혀 마음에도 없는 부교주 노릇을 하고 계신 것 아니오?" 물론 현천검제는 사형을 극악무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상대 의 속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극악무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너무나도 확실하게 나타났다. 초류빈은 너무 놀랐는지 '흡'하고 숨을 멈추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 히 아무도 엿듣는 자는 없었다. 「극악무도」라는 그 한마디에 초류빈은 오 랜 지기(知己)를 만난 듯 들떠 버렸다. "그, 그럼 당신도?" 다시 한 번 더 엿듣는 자가 없는지 살핀 후 초류빈은 안심하고 속내를 드 러냈다. "그렇다면 그놈이 당신의 손발을 그렇게 만들었단 말이오? 나중에 치료해 줬다고 하지만 정말 하는 짓이 왜 그리 잔인무도한지 모르겠소." 본격적으로 사형의 욕이 시작될 것 같았기에 현천검제는 손을 내저으며 대 꾸했다. "뭐, 그 얘기는 그만합시다. 그때 생각을 하면 나도 속이 쓰리니 말이오. 그런데, 초씨라면…. 혹시 초씨세가의?" 초류빈은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왜 아니겠소. 휴우~,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으니 망정이지. 지금의 내꼴을 보셨으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생각만 해도 두렵소이다." 잠시 우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던 초류빈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형씨는 여기에 어떻게 오셨소? 나야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속아가지고 들어왔소만." "뭐 그렇게까지 터놓고 얘기하시는데, 거짓을 말할 수는 없고……. 죄송하 오. 교주는 나의 사형(師兄)이시라오." "……."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초류빈은 지금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놈이 사형이라고? 이런 젠장. 저놈에게 속아서 별의 별 소리를 다 늘어 놨는데……. 그걸 저놈이 교주에게 일러바치면 그날이 바로 내 제삿날이구나. 초류빈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현천검제는 활짝 미소지으며 활달하게 말했 다.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소. 그런 말을 사형한테 나불거릴 사람은 아니 니 말이오." 그래도 초류빈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듯하자 현천검제는 한숨을 쉬며 뒷말 을 덧붙였다. "사실, 내 처지도 그대와 다를 것이 없소. 대화산파의 장문인이었던 내가 마교의 부교주 노릇을 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던 참이었소. 그렇기에 당신을 만난 것이, 헤어졌던 친지를 몇 년 만에 다시 만난듯하여 말을 건네 본 것 뿐이었소." 초류빈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당신이 화산파의 장문인이셨다는 말씀이오?" "그렇소." "이런일이……. 정말 그대를 본 순간 지기를 만난 듯하더니, 그 느낌이 틀 림이 없었는가 보오.'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형씨에게 말을 건 것이외다." 역시 마교 내의 외톨이 정파들이라 그런지 둘은 말이 잘 통했다.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한없이 주고받았다. 초류빈과 대화를 주고받던 현천검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나는 사형한테 가 봐야 할 듯하오. 치료까지 받았는데도 불구하 고, 여기서 나몰라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사형이 그 성질 머리에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 확실하니 말이오." "확실히 교주의 사형제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구려. 교주의 음흉한 속셈을 그리도 잘 꿰뚫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오. 생각 잘하셨소. 하지만 나 같으면 그냥 두들겨 맞고 말지. 무림에 나가 그 망신을 당할 엄두도 못 낼 텐데…. 참으로 대단하시오." 망신이라는 말에 가슴이 쑤시는 현첨검제였다. 자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산파의 장문인으로 활동한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 은 널려 있을게 분명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밖에서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사형에게 줘 터지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을 테니까. "대단할 것은 없소. 지금 생각해 봤는데 말이오. 그, 사형의 아버지라는 사람, 정말 화타 정도는 되는 신의(神醫)이신 듯 했소." 그 말에 초류빈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치료를 받아 봤으니 말 이다. "그건 동감이오. 무슨 요사스러운 술법을 쓰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한순간 에 상처가 쓱싹 낫는 것을 보고 나는 놀라서 기절할 뻔 했소." "그런 사람이 옆에 없는 상태에서도 사형은 곤죽이 되도록 마음껏 두들기 는데…, 으유~ 그때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오. 몇 날 며칠 동안 사경을 헤 맸으니 말이오." 잠시 공포감에 부르르 떨던 현천검제는 말을 이었다. "든든하게 뒤처리를 해 줄 사람까지 있다면, 이번에는 사형이 무슨짓을 할 지 상상도 하기 싫소. 내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그 말에 모골이 다 송연해지는 초류빈이었다. 하지만 초류빈은 곧 바로 정 신을 차렸다. 도망갈 구멍이 생각났던 것이다. "흐흐흐, 나는 여기에 남아 있을 명분이 있다오. 교주가 나를 보고 본교를 지키라고 했으니, 이곳을 지켜야지 별수 있겠소? 안 된 얘기지만, 형씨 혼 자만 가 봐야겠구려." "……." 잠시 말이 없던 현천검제는 심각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거 혹시 내가 대신해 주면 안되겠소? 형씨는 비교적 오랫동안 행방불명 이 되어 있었으니, 알아볼 사람도 별로 없을 것 아니오?" 초류빈은 빙긋 미소지으며 야멸차게 대꾸했다. "거절하겠소." "……." 둘 사이에는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문득 현천검제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흣. 좋소, 정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형씨가 사형을 어떤 식으로 욕했 는지 모두 다 일러바치겠소. 그래도 괜찮겠소?" 그 말은 즉각 효과를 발휘했다. 초류빈의 안색이 허옇게 바뀌기 시작했으 니 말이다. 하지만 초류빈은 세차게 머리를 휘젓더니 이를 악 물고 대꾸했 다. "좋을대로 해 보시구려. 몇 대 맞고 말지. 가문의 이름에 똥칠하는것은 사 양이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교주한테 걸려서 몇 번 쥐어 터진 적이 있으니 , 아마 교주도 그런 일 가지고 나를 죽이지는 않을게요. 에휴~, 내팔자야."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는 초류빈. 그의 뒷모습을 보고 현천검제가 재빨리 말을 걸었다. "걱정하지 마시구려. 내 답답해서 잠시 농을 해 본 것 뿐이오." 하지만 초류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내저으며 충명스레 말했다. "됐소. 말하건 말건 마음대로 하시오." 초류빈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현천검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 거렸다. "휴~, 나도 예전에는 안그랬는데, 점점 사형을 닮아가나? 뭐, 어쨌건 농담 한마디에 그토록 완벽하게 걸려드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런대로 농담 이란 것도 재미는 있구먼." 다음날 아침 일찍 현천검제는 십만대산을 떠났다. 물론 양양성에 있을 묵 향을 찾아가는 것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나게 될 사형을 찾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색은 전혀 밝지 못했으며 발걸음 역시 굼벵이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마치 억지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말이다. 2. 수라도제의 침묵 가주(家主)가 소수의 호위대를 거느리고 양양성을 향해 출발했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 양양성에 있던 서문세가의 원로들은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자신들이 보고서를 보내면서 가장 우려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보고하지 않을수도 없었다. 태상가주가 이곳에 서문세가의 주력 고수 대부분을 이끌고 와 있는 지금, 가주마저도 다수의 호위무사들을 거느리고 온다면 세가가 텅텅 비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또 가주가 그것을 염려하여 극소수 의 호위만을 거느리고 출발했다면, 가주의 무공을 못 믿는 바는 아니지만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행여 불상사라도 일어날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서문세가의 원로들은 그 모든 걱정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가주가 단 두명의 호위만 거느린 채 무사히 양양성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님. 오시는 길에 불편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원로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길(西門佶)은 황 급히 질문을 던졌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괜찮았네. 그건 그렇고 아버님께서 어찌되신 일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서문길의 눈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원로들은 그의 눈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 모습을 보고 서문길은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된 일이오? 속 시원하게 말해 보시오!" 서문길의 채근에 원로들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대장로가 마지못해 입을 열 었다. 대장로는 허옇게 색이 바란 기다란 수염을 매만지며 난처한 듯 말했 다. "가주님, 일단 진정하시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들어가서 말씀 올리겠습 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성문 앞이 아닌가. 아마도 그 때 문에 대답을 하기 힘들다는 말일 것이다. 그 점에 생각이 미친 서문길은 낮게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험험, 내가 좀 성급했었던 듯하오. 자 안으로 듭시다." "예, 가주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장로님." 밀실에 둘만 남게 되자 서문길은 서둘러 대장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공적 인 자리에서야 가주의 권위라는 것이 있다 보니 하대를 사용했지만, 이렇게 개인것으로 만났을 때는 존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장로는 그만한 대 접을 받을 만한 인문이었으니 말이다. 대장로는 안 그래도 주름살 투성이인 얼굴에 더욱 주름을 깊게 잡으며 한 동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말없이 버티고 있기도 힘들 다고 여겼는지 힘겹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선, 가주님께 자세한 전갈을 보내드리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한 것이라 서신을 통해 전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아버지께서 그리되셨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일의 시작은 한 달 전이었습니다. 무림맹으로부터 남양을 기습 공격 하라는 명령이 갑작스럽게 전달되었지요." 그 말에 서문길은 인상을 약간 찡그리며 끼어들었다. 이미 보고서를 통해 알고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말씀 안 하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장로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 었다. "가주님께서는 모르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작전을 마교에서 계획했 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말에 서문길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마교에서… 말입니까?" "예. 마교에서 계획한 일을 이쪽에서 새치기해서 그 공을 가로채려고 했었 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아시는 대로, 작전은 실패. 자신들이 계획한 일이 무림맹 때문에 완전히 틀어져 버렸으니, 격분한 마교 교주가 이곳으로 난입 해 들어온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순서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 말에 서문길은 탄식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어, 그렇다면 교주가 이곳으로 난입해 들어왔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격노한 그를 막는다고 본문의 고수 30여명이 중경상을 당했습니다. 그때, 태상가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대장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아무리 생 각해도 그때의 일을 가주에게 제대로 설명하는 게 조금 난해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머뭇거림을 서문길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받아들 였다. 대장로의 말은 교주와 아버지가 어떤 형식으로든 부딪쳤다는 말이고, 용과 호랑이가 결코 좋은 뜻으로 만나지 않았으니 뭔가 다툼이 벌어졌을 것 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한 것이 아닐까? 상대는 탈마 의 고수. 결단코 화경급 고수가 넘볼 상대가 아니었다. "충격을 크게 받으셨습니까?" 대장로는 머뭇머뭇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러신 모양입니다." 이제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서문길은 밀실을 나서면 대장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버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대장로는 난갑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금 만나셔도 도움이 안 되실 텐데……." "그건 아버님을 만나 본 후에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오는 경비무사를 향해 서문길은 나지막한 목 소리로 명령했다. "기별을 넣게." "옛." 무사는 굳게 닫혀져 있는 문을 향해 외쳤다. "태상가주님. 가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후 무사가 몇번 더 기열을 넣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혹시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서문길은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문을 벌컥 열고 황급히 달려 들어갔지만, 예상외로 그의 아버지 수라 도제는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버님, 이게 어찌 된 일이십니까?" 수라도제는 자신의 앞에서 눈물 짓고 있는 사내를 못 알아본 듯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곧이어 상대가 누군지 떠올랐는지 멍하던 눈빛이 약간 이나마 되돌아왔다. 그는 힘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냐?" "교주와 한 수 겨루셨다고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걱정할 필요 없었는데……." 힘없는 수라도제의 말에 서문길은 언성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걱정을 안 하게 생겼습니까? 양양성에 모인 모든 무림인들을 지휘하 셔야 할 아버지께서 이러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이제야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는 듯 수라도제는 멍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 그랬었지… 그랬었어." 중얼거리는 수라도제를 바라보며 서문길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현경에 준하는 탈마급 고수. 아버지와 싸웠다면 상대가 이겼을 것이 뻔했다. 등급에서 차이가 너무 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겨우 패배 한 번 당했다고 저렇듯 정신을 못 차리시는 것 까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니 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는 더 이상 아버지와의 대화는 포기하고 대장로에게 일의 전말 을 물어보기로 생각을 굳혔다. 일단 생각을 정한 서문길은 공손한 어조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직 몸이 편찮으신 모양인데 일단 푹 쉬시면서 몸조리 잘 하십시오. 여 기서 일어나는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해 둘 테니 염려 놓으시구요. 큰 일이 벌어지면 아버지께 곧장 연락드리겠습니다." 서둘러 수라도제의 방에서 빠져나온 서문길은 다시금 대장로를 찾아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서두를 던졌으니, 서문길이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대장로의 잘못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예?" "그러니까 교주와 아버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저러시느냐 이겁니 다." "그,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말씁드려야 할지……." 대장로는 대답하기 난처한지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날 있었던 일을. * * * "이 망할 새끼! 본좌에게 물을 먹여?" "왜 이러십니까? 교주." 자신을 말리는 경호무사의 멱살을 그러쥔 다음 묵향은 으르렁거렸다. "본좌가 왜 이러는지는 네놈들이 더 잘 알 것이 아니냐?" 잠시 살기 뛴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던 묵향은 무사를 옆쪽으로 내던지며 외쳤다. 목소리에는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말해 주듯 엄청난 공력이 실 려 있어 웬만한 고수들은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수라도제 이 새끼! 빨리 나왓!" 상대가 아무리 마교의 지존이라고 하지만, 계속 육두문자를 써대자 경호무 사들의 표정도 점차 굳어지기 시작했다. "계속 이러시면 저희들로서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교주." "뭣이? 참지 않으면 네놈들이 어쩔 건데?" 그와 동시에 벌어진 난타전. 사실 이걸 난타전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것이 묵향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던 모든 호위무사들이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은 것이었으니……. 이때, 수라도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교 교주가 왜 이곳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인지 그는 알지 못했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잠시 생각을 정리 하는 중, 밖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 같자 급히 자신의 애도를 집어 들고 달 려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여기저기에 쓰러져서 신 음하고 있는 휘하 고수들을 보고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민에 빠 졌던 시간은 정말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그 순간에 수십 명이 묵사발이 나 서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서문세가에서 골라 뽑은 정예 고수들이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이런 망할 새끼. 잡아땐다고 본좌가 모를 줄 알아?" 수라도제가 봤을 때. 교주는 분노 때문에 이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것은 묵향 자신이 벌여 놓은 일을 은폐시키기 위해 일부러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지만, 수라도제로서는 상대의 음흉한 속셈을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수라도제도 거대 문파를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상대에게 이 런 막말을 듣고 참고 있을리가 없었다. "주둥이에서 튀어나오면 다 말인 줄 아시오? 어디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 이오? 행패…. 흡!" 그 순간 수라도제는 엄청난 살기를 느꼈다. 사실 그도 지금껏 무인으로서 사지를 헤치고 살아남아온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살기 따위에 마 음이 동요될 그가 아니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수라도제는 자심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그리고 묵향은 한 발 한 발 수라도제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고. "이, 이런……." 갑자기 상대의 겉모습에 겁먹은 듯 움직여 버린 자신의 실태(失態)를 깨달 은 수라도제는 황급히 멈춰 섰다. 하지만 방금 전 자신의 모습을 본 가솔들 의 이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솔들에게 있어서 그 가주는 최고여 야만 했다. '오냐, 네놈이 이렇게 노부를 핍박한다면……. 좋아! 이판사판이다.' 수라도제는 오른손에 힘을 주어 거도를 꽉 움켜쥐었다. "호오, 치고 나올 기세구먼." 묵향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오르는 순간. 그때 수라도제로서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괴변이 일어났다. 자신을 향해 덮쳐드는 폭풍과도 같은 엄청 난 기울을 느낀 것이다. '이… 이것은 뭐냐? 살기인가? 기세인가? 그도 아니면…….' 너무나도 엄청난 기운에 수라도제 같은 백전의 노고수라도 정신이 다 혼미 해질 지경이었다. 어느샌가 수라도제의 마음속에는 수십 년 만에 불안과 공 포라는 것이 마구마구 용솟음 치고 있었다. 머리털이 쭈뼛 일어서며, 죽음 이라는 단어까지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한 순간이라도 정신을 잃으 면 그것은 바로 죽음……. 순간, 수라도제는 주위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검을 뽑아들 고 교주를 노려보며 옆의 누군가에게 뭐라고 외치는 서문세가 가솔들의 움 직임이 마치 한순간 정지되는 듯, 아니면 순차적으로 조금씩 연결되는 듯 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어지는 시간이 너무도 길게만 느껴진다. '시, 시간조차 정지되었단 말인가? 아니면 순전히 이건 나만의 느낌이라는 것인가?' 수준 높은 적과 대결하며 한순간 시간이 멈추는 것 같은 현상은 지금껏 살 아오며 수없이 느껴봤던 수라도제다. 순간을 무한히 쪼개어 상대의 반을을 살피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고수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다. 옆에서 구경하던 인물들이 차마 보지도, 아니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 상대의 움직임을 마치 느린동작 처럼 지켜볼 수 있는 자. 곧 자신에 게 주어진 시간을 지배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고수인 것이다. 고오오오……. 마치 폭풍에 휩싸인 듯한 엄청난 기운의 흐름. 기세인 듯, 아니면 살기인 듯도 했지만, 이건 뭔가 지금껏 수라도제가 알고 있던 그런 무형(無形)의 형질이 아니었다. 마치 깊은 물속에라도 빠진 듯 뼈마디가 뭉그러질 정도로 직접적인 압력을 가하고 있으면서도, 두터운 아교질 속에 빠진 것처럼 손가 락 하나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수라도제는 지체치 않고 단전의 기운을 개방해 그 힘에 저항했다. 하지만 깊은 물속에 조약돌 하나 던진 듯 상대의 기세를 도저히 막을 도리가 없었 다. 그 순간 수라도제의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이 있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이 차마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로 띄엄띄엄 천천히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은 이상하게도 현재 수라도제가 느끼는 시간과 그 흐름을 같이하고 있었다. <제법이야. 입만 산 것은 아니었군. 어떠냐? 천외천(天外天)의 무공을 경 험해 본 감상은?> 그것을 듣는 수라도제는 충격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이것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지금 이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고 바 로 저자. 마교 교주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지금 강제적으로 상대의 시간까 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술(邪術) 따위가 아니라 무공이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면…. 서, 설마 이것이 어기상인(御氣傷人)이란 말인가?' 수라도제가 필요 이상의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자신도 세인들이 말하는 소 위 어기상인이라는 무공을 쓸 줄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는 내 공을 끌어올려 자신보다 하수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줌은 물론이고, 3류 정 도쯤 되는 녀석들은 그것만으로도 격살시킬 수 있었다. 그는 이것이 바로 어기상인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당해 보는 이것은? 지금껏 그가 생각해 오던 어기상인과 그 차원 자체가 달랐다. "크어억!" 갑작스럽게 선혈을 뿜어내며 무너지는 수라도제. 아마도 상대의 무공이 자 신이 상상한 것과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정신적 충격이 너무나도 컸던 모양이었다. * * * 대장로는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실질적으로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뭔가 그자가 손을 썼던 것은 분명합니다. 안 그러면 태상문주님께서 그때 그토록 큰 내상을 입으실 이유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대장로의 말을 들은 서문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니, 그게 무슨 말씁이십니까?" "말씀드린 그대로 입니다. 두 분이 그냥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는 말 이지요." "흠. 그렇다면 그 시간은 어느 정도였지요?" 서문길의 예리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주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대장로 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노신(老臣)이 대결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시간을 잰 것이 아니니 정확히 는 알 수 없습니다만, 노신이 기억하기로는 천천히 숫자를 셌을 때, 하나에 서부터 시작해서 오십 정도를 셀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 습니다. 가주님께서도 서로 간에 뭔가 내력 대결이 있었지 않았나 하고 의 심하시는 모양이신데…. 그 짧은 시간에 내력 대결을 펼쳤고, 그 결론이 났 다는 것은 너무 심한 억측이 아니겠습니까?" 「께서도」라는 말을 쓰는 것으로 봐서 대장로도 그런 의심을 해 봤었던 모양이었다. 서문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그렇다면 도저히 알 수가 없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서문길과 대장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문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리고 대장로 는 그때의 일을 가주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해야 했기에 그때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자신이 뭔가 빠뜨린 것이 없는 지 회상하고 있었다.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대장로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참, 태상가주님께서 정신을 차리신 후 노신을 불러 질문하신 것이 있었습 니다." "그게 뭡니까?" "교주와 태상가주님께서 대치하고 계실 때, 뭔가 기파(氣波)같은 것이 느 껴지더냐 하는 것이었지요. 노신이 그런 것은 못 느꼈다고 말씀 올렸더니, 그렇다면 옷소매가 떨리는 것 같은 지극히 작은 외형적 변화라도 없었느냐 고 물으셨죠." "그래서요?" "그 어떤 이상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대답해 드렸습니다. 사실 두 분 은 잠시 서로 노려보고 계셨을 뿐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표정을 일그리시며 그만 나가보라고 하시더군요." "흠. 그렇다면 아버님은 그때 그자와 뭔가 내력 대결을 한 것이 아니었을 까, 아니 내력 대결을 하셨었다고 생각하고 계셨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고 봐야 하겠지만, 태상가주님께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입을 다 물고 계시는데 노신이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서문길은 고개를 갸욱하며 중얼거렸다. "도저히 알 수가 없군요." "어찌되었건. 갑자기 태상가주님께서 쓰러지시는 바람에 그 일은 그냥 묻 혀졌습니다. 태상가주님을 치료하고 간호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교주는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지요." 이때, 똑똑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총관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총관은 대장로와 가주의 눈치를 살피며 황급히 용건을 밝혔다. "가주님께서 대장로님과 사적인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데 이렇듯 방해를 하 게 되어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라서……." "무슨 일인가?" "예. 무림맹에서 급전(急傳)을 보내왔습니다." "급전이라고?" 총관이 건넨 서신을 읽은 서문길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버님께……." 여기까지 말한 서문길은 대장로를 힐끗 바라보더니 말을 멈췄다. 현재 그 의 아버지인 수라도제는 충격을 해소할 시간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을 잘 알면서 아버지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까지 안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대장로가 조언했다. "그렇게 급박한 일이라면. 각 단체의 원로들과 상의하시는 것은 어떻겠습 니까? 어찌되었건 그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니, 그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게 좋겠군요." 서문길은 대장로에게 치하한 후, 총관에게 명령했다. "각 문파의 수장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가 뵙기를 청한다고 전하게." "옛. 가주님." 3.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음모 총관이 물러간 후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양양성에 무리를 이끌고 파견되어 있는 거대 문파들의 대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서문길에 비해 나 이뿐 아니라 배분마저도 훨씬 높은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 있는 모든 세력들 중에서 서문세가의 세력이 가장 컸고, 서문길은 그 가주였기에 그가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게 된것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회의장에 사이좋게 들어온 것은 무림의 원로고수들인 종리영우 와 제갈기였다. 종리영우는 회의장의 상석에 앉아 있는 사위를 보고 따뜻한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노부를 불렀는가? 아무래도 사적인 일은 아닌 듯한데……." "일단 앉으시지요. 장인어른." 제갈기와 종리영우가 자리에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서문길은 좌중을 둘러 본 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위엄에 가득 차 있어 젊은 나 이에 대문파를 이끌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무림맹으로부터 긴급한 서신이 도착했기에 여러분들을 모 셨습니다." 긴급한 서신이라는 말에 좌중에 앉아 있는 수장들의 얼굴에 일순 긴장감이 어렸다. "현재 금의 일부 병력이 본대와 떨어져 나와 회남(淮南)인근에서 도강(渡 江)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개방을 대표해서 자리에 앉아 있던 부운걸개(浮雲乞箇)장로는 서문길의 말 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개방으로부터 그런 비슷한 내용의 정보조차 들은 바 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장인걸이 풀어놓은 편복대와 중원무림의 첩보조 직은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뜬금없는 정보가 튀어나온 것이다. 적이 파 놓은 함정일까? 아니면 연막인가? 그도 아니면 진짜? 부운걸개 장 로로서는 도저치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부운걸개 장로는 조금 미심쩍은 어조로 질문을 던졌지만, 그의 말투는 공손했다. 자신이 서문길보 다 연배가 높다고 하지만 상대는 거대방파를 이끄는 주인이었고, 자신은 개 방의 장로일 뿐이었으니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게 정확한 정보입니까? 제가 맹의 정보력을 못믿는 바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것이 놈들의 농간일 수도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부운걸개의 말에 서문길은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무연문에서 보내온 정보이니 아마도 정확한 것일 겁니다." "무영문이라고 하셨습니까?" 무영문이라는 말에 부운걸개의 안색은 흡사 소태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중원 최고의 정보단체라는 무영문에서 보내온 정보이니 그 정확도는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했다. 정보 판매를 업으로 하는 자들인 만큼, 그 진위(眞僞)를 철저하게 가렸을 것이다. 안그러면 그것으로 먹고 살 수가 없 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부운걸개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번에도 또다시 무영문에 개방이 뒤쳐졌다는 것이 아닌가. 이때, 그의 장인인 종리영우가 끼어들었다. "허, 그거 큰일이로구먼. 그래 놈들이 도강을 준비하고 있는 곳이 어디라 고 하던가?" 그 물음에 서문길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회남 인근이라고 합니다. 대규모 조선소에서 불철주야(不撤晝夜)로 함선들을 건조 중인데, 그 정도 규모의 조선소라면 봄이 될 때쯤에는 최소 한 3만 정도의 인마(人馬)를 수송하기에 충분한 숫자의 배를 건조할 수 있 을 거라고 무영문은 추측했답니다." 그 말에 부운걸개의 안색이 변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건 큰일이 었기 때문이다. "3만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무영문의 정보로는 그렇다고 합니다. 부운걸개 대협." "허~. 무림맹에 긴급서신을 보낼 만도 합니다. 기실 그곳에서 도강에 성공 하기만 한다면 남경까지는 지척이 아닙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황룡무제가 입을 열었다. "그런 중차대한 사안이라면 왜 교주를 빼고 이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인가? 노부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구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갈세가의 가주 패검천령 제갈기가 버럭 외쳤 다. "그놈을 불러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가 뭐가 있겠소? 황룡무제 대협. 회하 (淮河)의 도강을 막기 위해 송군과 연합하여 몇몇 무림명숙들이 힘을 보태 고 있소. 아무리 놈들의 수가 많다고 하지만. 그런 방어선이 쉽사리 뚫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사실 황룡무제에 비해 제갈기의 연배가 훨씬 높았고, 또 지닌 바 세력도 월등하게 컸다. 하지만 황룡무제는 누구나 인정하는 화경급 고수였기에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무림에서 높은 배분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갈 기는 까마득한 후배에게 「대협」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패검천령 대협의 말씀이 옳다고 보오. 오랑캐들은 수전(水戰)에 약하지 않소? 그놈들이 몰래 도강한다면 몰라도 이미 그 의도가 들통난 이상 그곳 에서 도강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오."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부운걸개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 오랑캐들이 수전에 약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그들이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더군다가 놈들의 뒤에는 흑살마왕과 그 졸개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앞 서서 길을 뚫는다면 회하에 주둔 중인 송군들만으로는 도강을 막아 내기에 역부족일 수도 있다고 사료됩니다." 부운걸개 장로의 지적에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과반수가 공동파 인근에서 흑살마왕이 거느린 집단과 피튀기 는 접전을 벌인 경험이 있었기에 상대가 지닌 전투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 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에 여기 모인 인물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종리영우가 먼저 대답 해 왔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충분히 그럴듯하구먼. 그렇다면 자네는 이일을 어떻 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가?" "아직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을 때, 조선소는 물론이고 놈들이 건조하고 있 는 배들을 몽땅 다 불태워 없애 버려야 합니다. 이때, 배를 건조하는데 도 움을 준 장인들을 확실히 처리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려운 작전이 될지도 모르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교주에게 사람을 보 내어……." 부운걸개의 지적에 황룡무제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려했지만 혼원패권(混元覇券) 팽선(彭詵)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는 황룡무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느긋한 표정으로 손을 슬쩍 들며 끼어들었다. "뭐하려고 마교놈들과 합작을 한단 말씁이십니까? 이번 작전은 노부가 맡 겠소이다." 팽선의 자신감 넘치는 제의에 이곳에 모여 있는 다른 이들은 모두 다 반색 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 혼원패권 장로께서 맡아주시겠소이까?" 팽선은 하북팽가의 장로였다. 그가 나선다는 말은 양양성에 와 있는 하북 팽가의 전력(全力)을 투입하겠다는 뜻이니 이곳에 모인 다른 인물들로서는 달갑지 않을 수 없었다. 흑살마왕이 도강을 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중요 거 점에 휘하의 고수들을 배치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만큼, 그들을 뚫고 들어 가서 불을 지르려면 상당한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 희생을 팽 가가 앞서서 책임지겠다는데 그 누가 말리겠는가. 하지만 주위의 반응과 달리 얼굴색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물이 한 명 있 었다. 그는 바로 팽선과 함께 이곳에 파견되어 온 하북팽가의 또다른 장로 인 팽지량(彭志亮)이었다. 그는 다급히 팽성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아니, 대성이를 죽인 금나라 놈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아우 마음은 내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위험이 큰일을 덜컥 떠맡겠다고 나서다니 ……. 지금 제정신인가?> 아마도 팽지량은 가주의 아들 팽대성이 금군들에 의해 참살당한일을 염두 에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팽선은 뭔가 복안이 있는 듯 자신감 있게 대답해 왔다. <형님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알아서 본가에 누가되지 않도록 처리할 테니 말입니다.> <그런 좋은 묘수가 있다면 한번 해 보게.> 동료의 묵인을 얻어내자 팽선은 좌중을 둘러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그곳에는 지금 3만 금군과 흑살마왕이 파견한 일부 고수들이 있지 않겠습 니까?" 이렇게 말한 팽선은 다시 한 번 좌중을 둘러봤다. 모두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팽선은 말을 이었다. "그런 만큼 그곳에 본가의 세력만 이끌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 니다.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이 사실인데…. 그 인선을 저에게 일임해 달라는 것입니다." 팽선의 제안에 종리영우가 찬성했다. "자네의 제안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네. 사지에 들어가 함께 싸울 동료들 인데, 서로가 손발이 맞지 않아서는 안 되겠지."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패도(覇刀) 대협." 모두에게 포권을 하여 사례한 후, 팽선은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일단 계획이 실패했을 때, 치명적인 피해를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차출하는 인원수에 제한을 두는 것이 좋겠지요. 본가에서 5백의 정예를 투 입할 테니, 호명된 문파에서도 5백씩의 인원을 차출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 다." 그 말에 모두들 찬성했다. 사실 거대문파들의 경우 5백 명 정도의 피해라 면 원통하기는 해도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 모두가 찬성하자 패선은 호명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먼저 맹주를 배출한 무림의 태두. 무당에서 모범을 보이는 것 이 옳지 안겠습니까?" 자신의 문파가 호명당할 것을 이미 예상했는지 무당파 장로는 즉각 허락했 다. 사실 자신의 문파가 가장 먼저 호명되었으며, 그 와중에 「태두」라는 명예로운 칭호로 불려 졌기 때문인지 그의 안색은 매우 흡족해 하는 기색마 저 띠고 있었다. "허허헛. 팽선 대협의 제의는 아주 타당하다고 하겠소. 기꺼이 동참라리다 ." 이렇게 말한 무당파 장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칠 일 후에 삼절군(三絶君)이 문도들을 거느리고 도착한다고 하오. 그때 까지 기다려 주실 수 있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되실게요." 삼절군이라면 과거 칠룡에 꼽혔던 무당파 속가제자 능소천(陵紹天)을 말한 다. 과거 잘생긴 그의 외모 때문에 옥면공자(玉面公子)라 불렸던 그는 검( 劍),시(詩),음(音), 이 세 가지에 모두 능통하고, 깊다고 하여 삼절군으로 불리고 있었다. 태극검법의 달인으로서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파 의 제자로서는 특이하게도 피리와 금을 이용한 음공(音攻)에도 조예가 깊은 특이한 고수였다. 물론 무당파 장로의 말대로 그가 가세해 준다면 팽선에게는 큰 힘이 될 것 이겠지만, 팽선에게는 그것이 별로 달가운 제안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욱 명성이 뛰어난 능소천이 합류한다면 자기는 그야말로 개털신세로 전락할 우 려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팽선은 점잔을 빼며 그의 동참을 거절했다. "허어. 이레라구요? 물론 삼절군 대협의 동참은 참으로 큰 힘이 되겠으나, 워낙 급박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라 이레씩이나 기다릴 수는 없을 듯하구려. 어찌되었건, 무당에서 흔쾌히 동참을 허락해 주시니 이 팽모로서는 감사드 리지 않을 수 없소이다." 무당파 장로에게 감사한 후, 팽선은 다음으로 참가할 문파를 지명했다. "다음으로 현재 이곳 양양성을 책임지고 계신 서문세가에서도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서문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흔 쾌히 찬성의 뜻을 밝혔다. "대협께서 저희 가문을 무당 다음에 놓아주시니 영광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당장 당할 피해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모두들 그 다음 은 자신들의 문파가 불려지기를 원하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 이 노회한 팽선이 사람들의 관심사를 그런 식으로 글고 갔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팽선이 거론한 문파는 종남파였다. 물론 종남파의 경우 본문은 금 에 의해 멸문당했지만 송류 장로가 이끄는 종남의 고수들이 이곳 양양성에 모여 있었다. 금이라면 자다가도 이빨을 가는 송류 장로인 만큼 자신들의 호명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빈도를 빼셨다면 칼바람이라도 일으킬 셈이었소이다. 빈도에게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오이다. 혼원패권 대협." "무슨 겸양의 말씀을. 금에게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종남파를 빼 면 안 되겠지요." 그 다음 팽선은 공동파 장로에게로 슬며시 눈길을 던졌다. 종남파 이상으 로 큰 피해를 당한 것이 공동파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동파의 장로는 팽 선의 시선을 슬쩍 외면했다. 그는 피해가 막심할지도 모르는 이번 작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멸문당한 공동파를 새로이 창건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고수 몇 명 잃는 것을 저토록 겁내다니……. 쓰레기 같은 말 코 같으니라구. 쯧쯧, 한때 무림을 휘어잡았단 공동파의 명성도 이것으로 끝이로구먼.'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팽선이 다음으로 시선을 옮긴 인물은 사천성 에서 당문도들을 이끌고 와 있던 당민걸(唐玟傑)장로였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번에 벌어질 전투는 뛰어난 실력의 고수들과 싸우 는 것 보다 다수의 병사들을 상대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 않겠소이까? 그런 만큼 소수로서 다수를 상대하는데 있어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당문 에서 고수들을 보내주셨으면 감사하겠소이다." 안 그래도 당민걸 장로는 자신들의 문파를 호명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당가의 금지옥엽인 당소진(唐素珍)이 금나라 놈들에 의해 심각한 부상을 당한 탓이었다. 물론 수라도제의 적절한 도움으로 그녀의 목숨은 건 졌지만, 여성의 몸에 상처의 흔적이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 가 되겠는가. 옷에 가려진 부분의 상흔이 어느 정도인지 숙부인 그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기 그지없던 그녀의 얼굴 위로 뱀이 기어가는 듯한 검흔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극 심한 분노를 느꼈었다. 더군다나 4봉에 뽑힐 정도로 재색을 겸비했던 그녀 가 밖에 나가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변했으니, 평소 질녀를 매우 사랑했었 던 당민걸의 가슴이 찢어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호명되자마자 당민걸 장로는 희색을 띠며 사례했다. "아무리 많은 병사들이라도 맡겨만 주시오. 당문의 독과 암기가 얼마나 무 서운 것인지 보여주겠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지막이라는 말에 자신들을 호명해 주기를 원하는 수많은 눈들이 팽선에 게로 모아졌다. 내로라하는 문파들만 거론된 만큼, 호명되는 것은 그 문파 의 강성함을 자랑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빠진다면 주위로 부터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동안 시간을 끌며 이리저리 바라보던 팽선은 뜻밖의 문파를 지명했다. "여기에는 참석하지 않은 모양인데, 마지막으로 천지문이 함께 가기를 원 합니다." 모두들 아주 뜻밖이었던지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여기저기에서 쑤근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쑤근거림 정도로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한 장 년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혼원패권 대협의 결정을 노부는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소이다. 이곳에는 오랑캐들에 의해 막심한 피해를 당한 문파들이 많이 있소. 그런데 유독 몇 몇 문파에게만 복수의 기회를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노부는 생각하오 ." 이렇게 말을 꺼낸 인물은 얼마 전 묵향의 계략 때문에 가문의 자랑인 황보 청 장로를 잃은 황보세가의 장로 황보열(皇甫熱)이었다. 물론 이것은 노회하기 그지없는 팽선이 기다리던 제안이었다. 하지만 처음 부터 황보세가를 끼워 넣으려고 했다가는 무림에서 쓴맛 단맛 다 본 이 노 고수가 곧바로 이의를 제기해 올 가능성이 컸다. 현재 팽가에서는 이번 작 전에 고수를 투입할 여유가 없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팽선은 일부 러 금에 큰 피해를 당했으면서도 그 힘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대부분 의 문파들을 거의 다 지명했으면서도 유독 황보세가만을 무시함으로써 상대 의 성질을 긁어놨던 것이다. 그렇다고 팽선이 덥썩 상대의 제안을 수락할 리 없었다. 그렇게 빨리 허락 하면 너무 속보이는 행동이 될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내색을 숨기고 난감한 척 우물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잠시 상대의 속을 태우던 그 가 황보열을 향해 다시 한 번 경고하며 그를 좀 더 덫을 향해 끌어당겼다. "이번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외다. 흑살마왕도 그곳이 송을 침공하기 위 한 비장의 거점인 만큼 상당한 대비를 갖춰 놨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외다 ." 그토록 위험한 곳에 딴사람들은 다 가는데 황보세가만 가면 안 될 이유라 도 있다는 것인가? 매우 자존심이 상한 황보열은 더욱 인상을 굳히며 딱닥 한 어조로 대꾸했다. "본가는 복수를 함에 있어 결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소." 팽모는 짐짓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휴~.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이번에 귀 가문에서는 절파검 황보청 대 협을 잃지 않으셨소이까? 가문의 자랑인 절대고수를 잃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는지 노부는 잘 알고 있소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이 팽모가 어찌 귀 가문에 다시 한 번 출혈을 부탁드릴 용기가 나겠소이까." 그 말에 황보열은 완전히 넘어갔다. 그 증거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안색이 눈 녹듯 풀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황보열은 상대가 자 신을, 아니 황보세가를 이렇듯 끔찍하게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에 감격한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팽선을 향해 포권하며 치하했다. "본가를 그토록 생각해 주시니 가주님을 대신하여 혼원패권 대협께 감사드 리지 않을 수 없겠구려. 하지만 본가에서는 아무리 희생이 크더라도 절파검 장로의 복수를 포기할 마음은 없소. 그런 만큼 대협께서도 본가에서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정말이지 감사하겠소이다." "그토록 말씀하시는데 어찌 허락하지 않겠소이까? 아니, 황보세가에서 이 토록 복수를 원하시는 줄 알았었다면 내 처음부터 황보열 대협께 청했을 거 외다." 서로 간에 어느 정도 타협이 된 것 같자 상석에 앉아 있던 서문길이 낮게 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험험. 황보세가에서 참가를 허락하신 만큼 천지문은 빼는 것이 좋겠습니 다. 다른 분들께서도 천지문과 함께 동행하고 싶어 하지 않으실 테니 말입 니다." 하지만 그 말에 팽선은 이미 생각을 굳혔는지 완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노부가 보기에 천지문은 맹에서 하는 일에 전폭적 지지를 보냄으로써 자 신들의 명예 회복에 나서고 있소이다. 그 작은 문파에서 5백이나 되는 고수 를 양양성에 투입한 것만 봐도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 일이로.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수라도제 대협도 천지문을 좋게 보고 계신 듯했소이다. 그렇 기에 노부는 그들에게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소이다." 팽선의 설득에 모두들 조금씩은 수긍하는 듯했다. 사실 수라도제가 천지문 을 이끄는 소연에게 약간의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그들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으니 말이다. 서문세가 가주 이하 무림명숙들로부터 자신의 계획을 허락받은 팽선은 지 체하지 않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팽선은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제자를 불러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 줬다. "이삼 일 내로 출발할 예정이니 준비에 소흘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 맡겨만 주십시오. 사부님." 사부의 지시에 팽조는 고개를 조아리며 장담했다. 하지만 사부의 말을 듣 고 보니 뭔가 음흉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번 일이 그토록 위험하 다면? 그렇기에 팽조는 슬쩍 자신의 속셈을 사부에게 말해 그 속을 떠봤다. "그런데 사부님. 이번 일이 그토록 위험한 것이라면 그 망할 계집도 함께 끌어들여 사지(死地)로 밀어 넣는 것이 좋지 않았겠사옵니까?" 그 말에 팽선은 참지 못하고 음흉스런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크흐흐흑. 네 생각을 어찌 노부가 모르겠느냐? 노부의 생각도 그러하다." 팽조는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 그러시다면?" "천지문도 함께 갈 것이야. 그렇지만 너는 절대로 이 일에 대해 내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부님." 팽선은 진중한 어조로 제자에게 말했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을 하려면 기밀 유지가 최대의 관건이다. 천지문은 마 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만큼, 절대로 그 혐의가 본가에 돌아와서는 안 된다. 그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팽조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사부님." 그의 목소리에는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담뿍 담겨 있었다. 팽선과 팽조. 두 사제 간이 음흉스런 미소를 주고 받으며 속셈을 토로하고 있을 때,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길은 대장로를 불러들여 이번 일을 상의하고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가주님." "예. 번번히 대장로님께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가주님. 늙은 노신이 아직까지도 가주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문길은 당치않다는 표정으로 대장로를 질책했다. "아직도 정정하시면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건 그렇고, 대 장로님을 청한 것은, 이번 회의에서 혼원패권 장로가 각 문파에서 5백씩, 총 3천5백의 정예를 거느리고 금이 회하를 건너기 위해 전선(戰船)을 제작 하고 있는 곳을 기습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본가에서도 5백을 지원해야 하는데, 대장로님께 그들의 인선을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대장로는 가주가 자신에게 조언을 청해 온 것을 매우 기뻐하며 대답했다. 원래 뒷방 신세를 져야 할 늙은이가 뭔가 일을 맡으면 자신이 아직까지도 쓸모 있구나 하며 기뻐하지 않던가. 그것을 잘 알기에 서문길은 웬만한 일 은 원로들과 상의해서 처리하고 있었다. "혼원패권이 그들을 치휘하게 되는 만큼, 그보다는 한 급 떨어지는 인물을 보내는 것이 다툼이 없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만큼 무공은 다소 떨어 지겠지만 속천(粟闡)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의 성격이 순후하여 혼원패권과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노회한 혼원 패권은 어떻게 끌어들이신 겁니까?" 예상외의 질문에 서문길은 잠시 당황했다. "예?" 대장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능력이 제법 쓸 만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노신이 판단하기로는 남의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가만히 듣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서문길은 떨떠름한 어조로 대꾸 했다. "그가 직접 자원했습니다." "자원했다구요? 흐음…, 그렇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말인데……."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생각에 잠기는 대장로를 향해 서문길은 무릎을 탁 치며 다급히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이해하기 힘든 제안을 했습니다. 천지문을 데려가야겠다 고 말입니다. 천지문이 오명을 지울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그런 것까지 신경써 줄 만큼 천지문과 팽가의 사이가 가까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대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호오. 그것 때문이었군요. 가주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천지문도들이 저희들과 합류하고자 도착했을 때 혼원패권과 충돌을 일으킨적이 있었습니 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예. 태상가주님께서 도중에 끼어들었기에 그 둘의 대결이 끝을 맺었지만, 그때 그 일로 혼원패권은 크게 위신을 상했다고 봐야겠지요. 이름도 없는 여아와 2백초에 달하는 드잡이질을 벌이고도 제압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그때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고 노신은 생각합니다." "허어, 그런 일이라면 말려야겠군요." "가주님께서 마음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아니 겠습니싸?" "하지만 혼원패권 장로의 말에 따르면 아버님께서도 천지문을 꽤 좋게 보 고 계신 모양이던데……. 그것이 조금 걸리는군요." "물론입니다. 어쩌면 태상가주님의 생각도 그 팽가 늙은이의 생각과 똑같 을지도 모릅니다." "예? 그건 무슨 말씁이십니까?" 가주의 의문에 대장로는 예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처음. 태상가주님께서 천지문의 합류를 허락하셨을 때, 그분께서도 쓰레 기 같은 천지문을 그런 용도에 쓰시겠다고 말씀하셨었지요. 그 뒤에 천지문 도들 중의 일부와 친밀한 것처럼 행동하셨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뒤에 마교가 존재하고 있음을 의식하신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야만 그들을 사지에 몰아넣었을 때, 뒤탈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사실 그때 일은 소연을 좋게 본 수라도제가 그들의 참여를 거부하는 원로 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떠든 것이었지만, 대장로는 그것이 수라도제의 본심 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 그런일이 있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서문길의 안색에는 약간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과연,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속과 겉이 다를 수가 있다 니……. 더군다나, 아버지의 그런 노회한 속셈을 곧바로 눈치 챈 것을 보면 대장로도 보통은 넘는 너구리라고 서문길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그런 만큼 가주님께서는 그냥 모른 척하고 가만히 지켜만 보시면 됩 니다. 만약 일이 잘못 틀어져도 그 잘못을 팽가에 뒤집어 씌우면 그만일 테 니 말입니다. 그보다는 가주님께서는 황룡무제 대협과 친분을 유지하고 계 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서문길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뭐, 한때 같은 칠룡(七龍)에 들어있었으니까요." "먼저 그분을 만나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도의 안내를 받고 들어오는 서문길을 본 황룡무제는 급히 일어서서 그를 마중했다. "오오, 어서 오게나. 낮에 봤을 때는 회의 석상이라 인사도 제대로 못했구 먼." 황룡무제의 환대에 서문길은 활짝 미소지으며 응대했다. "아닙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형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어야 하는데, 우 선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이렇게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래. 이게 얼마 만인가? 그러고 보니 한 10년 정도 되었나?" 서문길은 과거를 회상하며 대답했다. "예. 형님 결혼식 때 뵙고, 그 후에는 저도 일이 많다 보니……." "그렇겠지. 자네가 가주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네. 집안에 일이 많다보니 내가 직접 찾아가지 못해 미안하구먼." "아닙니다. 한때 서운하다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저도 가주가 되어 보니 알겠더군요. 틈틈이 무공 수련할 시간을 내기도 빠듯할 정도인데, 일일이 인사치레 하러 다니기는 더욱 힘들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들을 낳으셨다는 말은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만……." 아들 얘기가 나오자 황룡무제의 얼굴에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동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아들 하나만 낳았겠나? 아들 딸 합해서 넷일세." "한참 재미있으……." 서문길은 말을 시작했다가, 곧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다. 지금 여기에는 그 의 부인도, 자식들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황룡무제는 씁쓸한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 "뭐, 나라가 어려운데 어쩔 수 있는가? 참,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나 한 잔 해야지?" 황룡무제의 명령에 잠시 후 술상이 들어왔다. 전시 중이라 그런지 뛰어난 명주(名酒)는 없었지만, 급히 마련한 것 치고는 꽤나 정갈한 상차림이었다. 뱃속에 술이 조금 들어가자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 해졌다. 한동안 한담이 이어지다가 서문길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며칠 후에 삼절군이 온다고 하더군요." "나도 오늘에야 알았네. 뭐, 썩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 났으니 술 한잔은 나눠야겠지." 과거 그가 아무리 실력을 인정받아 칠룡에 꼽혔었다고 하지만, 강호상에도 엄연히 신분의 차이라는 것이 있었다. 같은 칠룡이라고 해도, 황룡문이라는 작은 문파의 제자와 9파1방으로 대표되는 거대문파 무당파 제자의 신분과 같은 수는 절대로 없었다. 그렇다 보니 신분을 떠나 소탈하게 어울렸던 서 문길에 비했을 때, 능소천은 황룡무제와 그렇게 친하지 못했다. "참, 패력검제와는 친분이 좀 있으십니까?" "패력검제? 그와는 여기 있으면서 좀 얘기를 나눴었지. 서로 간에 인연도 좀 있었고 말일세." "그렇다면 한번 자리를 좀 마련해 주시죠." "왜?" "아버지께서 일이 좀 있으셔서 한동안은 제가 여기를 맡아야 할 듯 합니다 . 그런 만큼……." 아마도 이곳 양양성에서 일 처리를 매끄럽게 해 나가려면 이곳에 있는 화 경급 고수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물 어 온 것이었건만 황룡무제는 호탕하게 대답했다. "뭐 그 사람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아주 진중한 인물이라, 쓸데없이 중 간에 나서서 초 치는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래도 여기서 생사를 같이 해야 할 사이인데, 통성명은 해두는 것이 좋 지 안겠습니까? 뭐, 여(呂)형이 살아계셨다면 통성명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죠." 여 형이라면 과거 제령문의 대제자 여정(呂諪)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칠 룡에 꼽혔었지만, 묵향의 칼아래 목숨을 잃은 비운의 고수였다. 서문길은 바로 그 여정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뭐 과거 칠룡에 꼽혔었다가 죽은 이가 어디 그 하나뿐이던가? 내가 칠룡 으로 꼽혔었을 때, 만났던 이들 중에서 지금까지 공식적인 사망자만 셋에 행방불명이 둘일세." 칠룡이라는 단체 자체가 빈자리가 나오면 재빨리 채워지기에 한시대의 7룡 이라고 해서 꼭 7명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빈자리가 나오는 형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결혼해서 빠지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죽어 버린 경우 다. 물론 행방불명은 조금 경우가 틀린데, 10년동안 기다렸다가 그래도 행 방이 묘연하면 사망한 것으로 판정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다. "그러고 보니 탈명도(脫命刀)형 소식은 못 들으셨습니까?" 황룡무제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조심스런 어조로 말했다. "자네도 그때 백씨세가에서 함께 있지 않았던가? 아마 지금 마교에 있을게 분명한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서문길은 술 한 잔을 입속에 털어 넣은 후 말했다. "여기에 교주도 와 있다면서요. 그에게 안 물어보셨습니까?" "글쎄……. 아무래도 대하기 쉬운 인물이 아니다 보니, 그런 걸 물어본 다는 것이 조금 그렇더군." "혹시 죽은 것은 아닐까요? 그 형 마교도라면 이빨을 갈았었잖습니까?"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황룡무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싫었던지 술잔을 입속에 털어 넣으며 중얼저렸다. "뭐, 그런대로 잘 있겠지. 어디서 그놈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못 들 었으니까." 아마도 그 때문에 교주에게 물어보지 못했으리라. 추류빈의 사망 소식을 듣기 싫었기에……. 3일 후, 해질 무렵 팽선이 지휘하는 일단의 무림인들이 금군의 도하를 저 지하기 위해 양양성을 출발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팽선의 요구대로 천지문 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천지문은 이번 작전의 참가를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지문주가 이만큼 큰 출혈을 감수하며 무림에서 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는 마당에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소연으로서 는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팽선이 거느린 3천 5백의 고수들은 작전의 성격이 워낙 기밀을 요하는 만 큼, 아주 은밀하게 이동해야만 했다. 밤에는 이동하고 낮에는 그늘에 숨어 휴식을 취하며 이동하자니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이 목 표 지점에 도착한 것은 출발한 후 4일이 지나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몇몇 노고수들의 눈앞에 드넓은 강이 펼쳐져 있었고, 그 강 너머로 까마득 히 떨어져 있는 넓은 평야와 산들이 보였다. "맹에서 보내온 정보가 맞다면, 놈들의 조선소는 이 강 맞은편에 있을 거 외다." 팽선의 손짓에 따라 공격대로 차출되어 온 각 문파 수장들의 눈길이 일제 히 강 건너편으로 돌려졌다. 그들 중에는 천지문의 소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 수하들은 모두들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각 지파의 수장들만이 이 곳에 모여 적진을 정찰하며 앞으로의 작전을 토의하게 된 것이다. 모두들 강 건녀편을 주의 깊게 살필 수 있는 여유를 준 다음, 팽선은 다시 금 입을 열었다. "개방에서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저 일대는 적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이 펼 쳐져 있다고 하오. 거기다가 여기에서 3일 거리에 3만에 달하는 금의 대부 대가 주둔 중인 만큼, 혹 생존자가 있어 원병을 청한다면 곧장 이리로 대군 이 달려올 거라는 말이오. 그런 만큼 육로로 저곳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하고 노부는 생각하고 있소이다." 그 말에 황보세가의 황보열 장로가 토를 달았다. "그렇다면 강을 던너 기습할 수밖에 없겠는데…, 이 많은 인원을 태울만한 배를 어디서 구하시겠소?" 팽선은 고개를 끄덕여 인정한 후 자신이 생각해 둔 계책을 말했다. "물론 그렇소 그런 만큼 성동격서(聲東擊西)의 병법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면서 팽선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그는 강 건너편을 손가락 으로 짚으며 작전을 설명했다. "우선 노부가 일단의 세력을 거느리고 저 멀리 우회하여 이 지점을 공략하 겠소. 그렇게 되면 자연 이 일대를 수비하고 있는 금군들의 이목은 그곳으 로 집중될 것이 아니겠소? 그때, 이곳에 매복하여 기다리던 매복조가 야음( 夜陰)을 틈타 도강하여 배를 불태우고, 조선공들을 해치우든지 아니면 구출 하여 탈출하는 것이오. 매복조로 5백 정도만을 남겨둔다면 그들이 사용할 배를 구하기도 손쉬울 것이라는 것이 노부의 생각이외다." 팽선은 주위를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혹시 이보다 더 나은 계책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모두의 목숨 이 걸린 일인 만큼, 최대한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 말에 황보열 장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노부가 생각하기에는 그 작전이 매우 좋을 듯하외다. 하지만 누가 매복조 를 이끌 것인지……." 그 말에 팽선은 좌중을 쓱 훑어봤다. 그러자 모두들 팽선과 시선을 마주치 지 않으려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매복조가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 겠지만, 뒤집어서 생각한다면 가장 막심한 피해를 당하는 곳도 매복조일 것 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최악의 경우 몰살당할 가능성마저 있는 상태에서, 사지에 스스로 걸어 들어갈 만큼 어리숙한 인물은 여기에 없었던 것이다. 한 순간 팽선은 한 여인에게로 시선을 집중시키며 입을 열었다. "천지문에서 맡아주겠느냐?"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송류 장로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그건 불가하고.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어찌 천지문 따위에게 맡긴다는 말 씀이시오?" 그 말에 팽선은 비꼬듯 대꾸했다. "호오, 그렇다면 도장께서 가시겠소이까?" 팽선의 그 말 한마디에 송류 장로는 입을 꽉 다물었다. 천지문을 대신해서 그곳에 죽으러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네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다. 가고 싶지 않다면 솔직히 의견을 밝혀도 무 방하다. 워낙 위험한 임무인 만큼 누구도 천지문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야." 물론 이 질문은 팽선이 던진 미끼였다. 강제적인 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밝 히면서 상대를 꼬시는 것이다. 이렇게 해 놔야 자신도 나중에 일이 잘못되 었을 때 발뺌하기 편하고. 또 상대에게 자신이 무슨 악의가 있어서 사지에 보내려고 하는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악의적인 의도에서 보내는 것이기는 했지만, 상대에게는 그걸 숨겨야만 했다. 팽선이 던진 미끼를 소연은 덥썩 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임무를 성공 리에 이끈다면 천지문의 위상은 엄청나게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또, 거절 한다면 지금까지 행해져 왔던 천지문에 대한 비난에다가 '비겁자'라는 조항 이 하나 더 덧붙여질 우려까지 있었다. 그것을 뻔히 알기에 소연은 상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소연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언제 공격을 시작하는 것입니까?" "노부는 전 세력을 이끌고 홍택호 쪽으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송군(宋軍) 의 도움을 받아 적들의 대비가 약한 곳에 도강할 생각이다. 도강과 동시에 회남을 향해 최대한 속도를 내어 진격해 들어가며 놈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야." 팽선은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작전을 설명했다. "아마도 이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금군과 그들을 돕는 마교놈들이 그 보고 를 받고 이동을 시작하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들이 노부가 거느린 세력과 충돌했을 때쯤, 자네가 움직이면 될게야. 그러니까… 노부가 도강한 다음 삼 일 후 밤에 움직이는 것이 최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네." 팽선은 지도에서 시선을 거둬 소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노부는 이제부터 홍택호로 이동하여 그 일대를 책임지고 있는 한세충(韓 世忠)상장군과 접촉할걸세. 만약 그가 전폭적인 협조를 해 준다면 빨리 도 강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를 설득하는데 조금 시일이 걸릴 수도 있을 게야. 그리하여 구체적인 도강 날짜가 잡히면 곧장 자네에게 전령을 보내어 통고할 것이니, 이쪽이 도강한 날부터 시작해서 삼 일이 지난 후 야음을 이 용하여 행동을 개시하면 될 게야. 그때까지 자네는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하게 매복하는 한편, 도강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고 기다 리게나. 알겠는가?" 소연은 포권하며 대답했다. "예.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혼원패권 대협." 혼원패권 팽선이 거느린 세력과 분리되어 천지문도들만 남게 되자, 모두들 소연에게 의문어린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문도들을 대표하여 진팔 이 소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희들은 저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 질문에 소연은 팽선에게 지시받은 작전을 설명했다. 그 말에 진팔은 기 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만약 놈들이 이쪽에 충분한 세력을 남겨둔다면 사지를 향해 스스로 걸어 서 들어가는 꼴이 되는 게 아닙니까?" "혼원패권 대협의 말씀에 따르면 흑살마왕을 추종하여 함께 행동하는 세력 은 예상외로 많지 않다고 하셨다. 쓸 만한 고수들의 수는 2천 정도. 양양성 인근이나 남양에 배치해 놓은 수를 감안한다면 이곳에는 많아 봐야 1백이 안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록 그 이상의 고수들이 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혼원패권 대협이 행동을 개시하여 그들의 시선을 끈다면 다급히 그쪽으로 이동해 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말거라. 이번 일이 성공하건 혹은 실패하건. 가 장 중요한 일을 떠맡았던 본문이 더 이상 멸시받는 일은 앞으로 없어질 것 이다. 우리들은 본문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게야. 알겠느냐?" 확신에 찬 소연의 말에 진팔은 고개를 숙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예." "문도들에게 내일부터 이 부근을 돌면서 쓸 만한 배가 있으면 끌어 모으도 록 하거라. 큰 배는 필요 없고 작은 배가 좋겠구나. 그편이 눈에 띄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바로 강 건너편이 적진인 만큼 이쪽의 움직임이 저들 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할 것이야." "예, 사저." 4. 마화의 걱정거리 한참 동안 연무장에서 진팔을 기다리고 있던 묵향은 드디어 짜증 어린 목 소리로 외쳤다. "이 녀석은 왜 안 나오는 거야?" 옆에 앉아서 함께 기다리고 있던 만통음제가 지루한지 나지막히 하품을 한 후 은근히 비꼬는 듯한 어조로 묵향의 속을 긁었다. "우형이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틀림없이 야반도주를 했을 게야." "그토록 협박을 해 놨……." 그 말에 뒤쪽에 서 있던 마화가 성깔어린 눈매로 묵향을 바라보며 다그쳤 다. "협박이라니요?" 그 말에 묵향은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아, 아니야. 내가 무슨 할 일이 없어서 협박씩이나 하면서까지 놈을 가르 치겠냐?" 마화는 묵향의 변명을 못들은 척 천지문도들이 기거하는 쪽으로 시선을 슬 쩍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소 소저도 안 나오시는 것을 보면 천지문에 무슨 일이 있는 듯 합니다. 제가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묵향은 내심 궁금하면서도 못이기는 척 허락하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가 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으마." "예, 교주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후 마화가 돌아왔다. 그녀는 조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묵향에게 보고 했다.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어젯밤에 출발했다고 합니다. 비밀을 요하는 작전 인 듯 그 행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다면 내일 수련 은 하지 못하겠다고 전갈을 보내는 것이 예의일 텐데…….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비밀 작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묵향은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만통음제의 생각은 달랐다. "그건 당연한 거야. 질녀는 추근덕거리는 자네를 썩 좋게 보지 않고 있을 테니 말하지 않았을 테고, 진팔이 그놈이야 이 기회에 지옥과도 같은 수련 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는데 자네에게 보고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지회 는 이때다 하면서 그냥 내뺀 것이겠지." "그,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놈! 돌아오기만 해 봐라. 본좌가 그냥 놔두나 . 감히 보고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내빼?" 이빨을 뿌드득갈고 있는 묵향을 바라보며 마화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녀가 묵향에게 조심스럽 게 말했다. "비밀 작전이라면 언제나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놔둬 도 상관없을까요?" "괜찮겠지. 그 아이의 실력도 뛰어나지만, 그놈도 옆에 있잖아. 거기에다 가 그런 비밀스러운 작전에 천지문만 보낸 것도 아닐 텐데 뭐가 걱정이야." 묵향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천지문이 지닌 실력이 어떻든 일단 천지문 은 정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문파였다. 신뢰하지 않는 그들에게 단독작 전을 줘서 내보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건 그렇고 선물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으니 물건이 제대로 왔는지 한 번 가 볼까." 선물이라는 것은 물론 묵향의 지시로 대별산맥에 도착한 마교의 주력부대 를 말함이다. 그 말에 마화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오늘 밤 가 보시겠습니까?" 마화의 질문에 묵향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만통음제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슬쩍 끼어들었다. "선물이라니……. 혹시 술인가?" "아닙니다, 형님. 형님께서 관심을 보이실 물건은 아니니 신경쓰지 마십 시오. 그건 그렇고 오늘 할 일이 없어졌는데 함께 술이나 한잔 하시겠습니 까?" "그거 좋지." 묵향이 만통음제와 함께 음악을 논하며 술잔을 나누고 있을 때, 마화는 천 지문이 수행 중이라는 비밀 작전이 뭔지 알아보러 동분서주 했다. 묵향은 양녀인 소연과 진팔의 실력을 믿기에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넘어가 버렸지 만, 마화의 입장은 달랐다. 뭐니뭐니 해도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교주의 양녀가 아닌가. 그녀의 안위를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화가 그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양성 에 모여 있는 무림인들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서문세가의 고위층 인물 들이 마교도인 그녀를 아예 상대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묵향이 서문세가 사람들을 상대로 드잡이질을 해 놨으니 그들이 냉대를 해도 할 말 은 없는 처지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리저리 궁리하던 마화가 발길을 돌린 곳은 묵향과 친분이 있는 황룡무제 의 처소였다. "금군이 회남 인근에서 도하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했었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이번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 서 구태여 귀교의 도움을 받을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교주에게 이번 일을 통보하지 않기로 합의했었소. 뭐, 혼원패권 장로가 큰 소리치고 간 만큼 실 패하지는 않을 테니 귀교에서 걱정해 줄 필요는 없을 듯하구려." "그러십니까? 그런데 그 기습 작전에 동원된 인원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 실 수는 없겠습니까?" "뭐 같은 배를 탄 처지인데 못 아렬 줄 것은 없겠지요. 하북팽가의 고수 5 백을 주측으로 하여 3천5백에 달하는 고수들이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소." 솔직한 대답에 마화는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했다. "예. 이렇듯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룡무제 대협." "무슨 말을……. 교주 같은 냉철하신 분이 그토록 격노하셨던 것으로 보 아 노부가 알지 못하는 뒷사정이 있는 듯한데…, 오히려 정파를 자처하는 이쪽에서 속 좁게 나가는 것 같아서 노부가 되려 교주를 뵐 낯이 없소." 황룡무제를 만나 대화를 나눴지만 그녀가 입수할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 였다. 아마도 패력검제를 찾아가서 물어봐도 더 이상의 정보는 얻기 힘들 듯했다. 그 작전에 투입된 인원과 세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기에 한편으로 는 안심이 되는 마화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제 정보 수집을 그만둘까 하 는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토록 막강한 세력이 동원될 정도의 작전이라면 그게 도대체 뭘까? 그리고 그런 중요한 작전에 왜 천지문이 동원되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마화는 더 이 상 시간을 끌지 않고 무영문에 정보를 의뢰하기로 결심했다. 무영문은 지금 까지 흑풍대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며칠 후 무영문으로부터 전령이 도착했다. 전령이 건네준 서신에는 현재 회남 인근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전의 전개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 다. "왜 천지문만 강 건너편에 대기하고, 다른 문파들은 홍택호로 이동 한 것 이지요?" 그 물음에 무영문에서 온 전령은 미안한 듯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그들이 왜 이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본문과 협동하여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어디서 정보를……?" "아마도 개방에서 정보를 얻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 참. 개방이 있었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마화는 잠시 후 생각을 정리했는지 전령을 치하했다. "이번에도 신세를 지게 되는군요. 여러모로 본교를 도와주고 계신점. 문주 님과 태상문주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옛. 그리고 이번 작전에 대해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정보가 도착할 텐데, 계속 연락을 받으실 건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폐가 안 된다면 부탁드리고 싶군요." "옛.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전령이 돌아간 후, 마화는 관지에게 가서 도움을 청했다. 아무래도 전략이 나 전술 등 작전을 짜는데 있어서는 그가 자신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다. "여기 나와 있는 정보만으로 무림 연합이 사용할 작전이 뭔지를 알수 있겠 느냐 이 말인가?" "예. 장로님." "글쎄……." 관지는 마화가 내민 자료들을 쭉 살펴보더니 중얼거렸다. "무림 연합의 기습조 3천5백이 비밀리에 출발했다. 그러다가 기습 목표 부 근의 상륙지점에 5백여 명만 남고 나머지 3천은 홍택호 쪽으로 방향을 잡고 계속 이동 중이다. 그런 말이군." "예. 장로님. 그 자료만으로 무림 연합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실 수 있겠습 니까?" 그 말에 관지는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기는 한데…. 그런데 자네가 그걸 알아서 뭐 하려고 그러는가?" 관지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만약 이 의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교주 라면 자신에게 직접 물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 람은 마화라는 말인데. 그녀가 그것을 알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관지 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화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냥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관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흔쾌히 대답했다. "뭐, 자네와 나 사이에 못 알려 줄 것도 없겠지. 일단 이들의 행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은 회하(淮河)가 아닌가? 모두다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최상승 경공술이라도 익혔다면 몰라도 3천5백씩이나 되는 인원이 동시에 강을 건넌 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 더군다가 회하의 폭은 대단히 넓기에 경공술 따위로 건널 수 있는 거리가 아니야. 그렇다면 배밖에 답이 없는데, 수백 척씩이나 되는 배를 구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걸?" 마화도 충분히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겠군요." "하지만 5백 정도라면 작은 배 50여 척만 구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그들만으로 목표를 친다는 말씀이신가요? 하지만, 상대방도 그정도 대비 는 해 놨을 겁니다. 그런 곳을 겨우 5백으로 친다는 것은 자살 행위가 아니 겠습니까?" 관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귀관의 말이 옳다. 그 때문에 적들의 이목을 다른 쪽으로 끌어당기 기 위해 이들이 움직이는 것이겠지." 그러면서 관지는 손가락으로 3천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움직이는 선상(線上 )을 쭉 앞질러 가서 홍택호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으로 가면 송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먼저 연락을 넣어 전선(戰船)들을 보내달라고 하여 중간쯤에서 합류할 수도 있겠지. 그 런 다음 송군의 협력 하에 대대적인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금군의 눈길을 끈 다면, 이곳을 지키고 있는 상당수의 고수들이 이쪽으로 이동하지 않을까?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 충분히 가능한 추리라고 봐야겠지." "그렇겠군요." "그 사이에 50여 척의 배를 구한 매복조가 몰래 강을 건너서 적들을 기습 하고 빠지는 거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일세. 물론 저들에게 또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성공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마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관지는 피식 미소짓더니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천문에 능통하지 않은 이상 어찌 감히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겠는가? 너무 나도 많은 변수들이 가로막고 있는데 말일세. 먼저 이 작전의 핵심은 장인 걸처럼 뛰어난 인물을 속여야 한다는 것에 있지. 노부 같으면 그런 요행수 를 바라느니 본교의 혈랑대 같은 최정예를 투입해서 단번에 끝내 버리는 수 법을 사용했을 거야. 요는 불만 지르면 끝이니까." 마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뭐 곡 그렇게 말할 이유는 없겠지. 이쪽을 치고 들어가는 3천이 제대로 해 주기만 한다면 장인걸은 이쪽을 주목할 수밖에 없을 거야." "제대로 해 준다고 하시면?" "이쪽의 세력만으로도 충분히 이 일대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실 히 장인걸에게 인지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겠지. 가령 화경급 고수 몇명이 바람잡이를 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러면 장인걸은 싫어도 이쪽 세력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테니, 상대적으로 이곳은 텅 빌 것이 아니겠 나?" 순간 마화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화경급 고수는 단 한 명도 이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까지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팽선이 이끄는 고수의 수는 3천. 적지 않은 전력이 었다. 그들이라면 혹시 장인걸의 이목을 끌 수 있지 않을까? 마화의 표정을 살피던 관지는 뭔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화가 그걸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듯도 했다. 그렇기 에 그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슬쩍 질문을 던졌다. "이 중에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마화는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대주께서 가지실 선입관을 없애기 위해 몇 가지 정보를 없앤 것이 있습니 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관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말했다. "그래, 그게 무엇인가?" "여기 투입된 문파들의 명단입니다." 관지는 피식 미소지으며 말했다. 마화가 하는 말이 꼭 예전에 군문에 있을 때, 장수들끼리 모여 몇 가지 조건을 놔두고 어떤 계책을 사용하여 적을 공 격할 수 있을지를 토론했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문파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면 그들이 지닌 실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니까 보다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겠지. 말해 보게."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문파는 하북팽가, 무당파, 서문세가, 종남파, 당문 , 황보세가." 여기까지 말하던 마화는 잠시 관지의 표정을 살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천지문입니다." 그 말에 관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천지문을 이끄는 소연과 교주의 관계를 알기 때문이었다. 관지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언성을 높여 질책했다.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기에. "천지문이라고? 그것이 사실인가?" 마화는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가 왜 장로님께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각 문파에서 5백씩의 인원을 지 원받아 총수 3천5백을 동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관지는 자신의 머리를 냉철하게 식힐 필요가 있었 던 것이다. 교주와 관계된 일. 여기서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잠시 생각 을 정리하던 관지가 문득 입을 열었다. "교주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수석 장로님께서 보내신 선물을 보러 가셨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마화는 아무래도 조금 뒤가 캥겼는지 급히 덧붙였다. "교주님께서는 천지문이 비밀 작전에 투입되었다는 것을 이미 아십니다. 교주님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다면서 그냥 넘기셨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 해서……." "흐음……." 마화의 대답에 관지는 신음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묵향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구태여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하 지만 묵향의 양녀가 관계되어 있는 일이기에 마냥 손 놓고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자네의 말대로라면 함께 행동하는 문파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 믿을 만하 다고 하겠다. 서문세가가 주도한다면, 필시 수라도제가 나섰다는 말. 그가 움직인다면 충분히 장인걸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겠지." "예? 그게 아니라…. 저는 이번 작전을 주도하는 것이 하북팽가의 팽선이 라는 장로라고 들었습니다만……." 관지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뭣이? 그렇다면 그들은 결코 장인걸을 속일 수 없다. 그놈들은 장인걸이 그토록 만만하게 보였다는 말인가?" "팽선이 이끄는 3천의 고수라면 그래도 그의 이목을 끌수있지 않을까요?" "그게 말이 되는 추측이라고 생각하는가? 장인걸은 한때 본교의 교주까지 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밑에는 천마혈검대까지 있는데, 겨우 어중이떠 중이 3천을 끌어모아 놓은 것이 무슨 압박감을 주겠느냐는 말이다. 뭔가 심 한 압박감을 가할 수 있어야 상대로 하여금 판단 착오를 강요할 수 있는 거 야." 관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지도를 살펴보더니 마화에게 명령했다. "어쩔 수 없다. 귀관은 즉시 달려가서 교주님께 직접 이 사실을 전해라. 잘못되면 소 소저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말이야." "설마 그 정도까지……." 하지만 관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설마가 아니다. 소 소저께서 저들과 접전을 벌일 곳은 회하 건너편이다. 만약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무슨 짓을 해도 우리들이 그분을 도와드릴 수가 없다." 그 말을 듣고서야 마화는 관지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회하가 문제였던 것이다. 9천에 달하는 흑풍대를 출동시킨다고 해도, 회하 가 가로막고 있는 이상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다 해도 소연을 지원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 많은 인마(人馬)를 한순간에 도강시킬 방법이 없기에. "예. 속하는 즉시 교주님께 가서 보고하겠습니다." "그동안 본관은 만일을 대비하여 천지문과 양양성 간에 연락망을 개설해 두겠으니 그리 알고 있거라." 마화는 군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옛.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묵향과 철영 부교주가 술잔을 기울이며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고 있을 때, 송 제국의 황궁에서도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 었다. 회의라고 해야 참석자는 겨우 세 명 뿐이었다. 왜냐하면 악비 대장군 이 올린 주청(奏請) 자체가 매우 기밀을 요하는 사안(事案)이었기에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고 떠들어 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악비 대장군이 북진을 하겠다니 참으로 대견한 일이로다. 그래, 재상의 생각은 어떠한고?" 황제는 연경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유쾌한 어조로 말했 지만, 진회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건 불가하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옆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유광세(劉光世) 상장군은 황제의 앞이라는 것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고 불신에 가득찬 눈빛 으로 진회를 노려봤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어젯밤 그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고, 진회는 알아서 잘 처리해 주겠다고 확답까지 해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여기 서 딴 소리를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유광세 상장군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회는 시치미를 뚝 떼 고 황제에게 간했다. "황상 폐하께옵서 북쪽의 오랑캐들을 몰아내시고 황토를 수복하고자 하시 는 간절한 마음을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다만 시기가 너무 이르다는 것이 문제이옵니다. 일단, 각 장수들에게 분산되어 있는 병권부터 회수하여 중앙군으로 흡수 통합한 연후에, 그 힘을 더욱 키워 저들을 도모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옵니다." 진회의 말도 일견 일리가 있었다. 현재 송의 중앙군은 완전히 무너진 것이 나 다름없었다. 그 예로 군사편제가 완벽하게 가동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상장군 따위가 감히 황제 앞에 나서서 주청을 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 는 일이었던 것이다. 송의 군사편제에 따르면 일선 장군들의 집합체인 정군관에서 작전을 입안 하여 그것을 추밀원에 보고하면, 추밀원에서 검토하여 수장인 추밀사(樞密 使)가 황제에게 직접 보고를 올린 후 허락을 받아내도록 되어 있었다. 정군관에 소속된 주요 장수들이 연경 대회전에서 대부분 전사했고, 이어진 금군의 내습으로 황도(皇都)가 함락 당하면서 3천에 달하는 신하들이 금의 포로로 잡혀 압송 당했었다. 그 안에는 추밀원에 소속된 핵심 관리들도 포 함되었을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이렇듯 중앙군이 그 기둥뿌리부터 완벽히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 지도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악비 대장군 같은 몇몇 장수들 이 세력을 구축하여 금군에 저항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물론 황실에서 이 들에게 조금이나마 군량이나, 무기 등속의 지원을 해 주고 있는 것이 사실 이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따진다면 이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 는 군벌(軍閥)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 군벌들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자가 바로 악비 대장군이었 지만, 근본적으로 그 주위의 모든 군벌들을 통솔할 권한이 없는 그가 황토 를 수복하기 위해 북침을 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일 수도 있었다. "황상 폐하. 시기가 너무 이르다는 재상의 말씀은 너무나도 소극적인 판단 이라고 사료되옵니다. 소장들은 노도와 같이 전격해 오던 오랑캐의 세력을 지하는 것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저들을 남양 방면으로 패퇴하도록 만들 었사옵니다. 그때 떨어져 나간 오랑캐들의 목만 해도 20여만 개에 달할 정 도이오니 금이 당한 피해는 이루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 아니겠사옵니까? 대승을 거두어 적의 세력이 약해진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다시 북벌을 단 행할 기회가 오겠사옵니까?" 진회는 발끈해서 상장군에게 외쳤다. "어디 쓸모없는 망언으로 황상 폐하의 이목을 가리려고 하는가?" 진회는 고개를 돌려 유광세 상장군을 꾸짖은 후 황제에게 충심어린 어조로 간(諫)했다. "황상 폐하. 금이 10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유념하시옵소서. 설혹, 적병 20만을 물리쳤다고 해도 아직 80만에 달하는 대군이 온전하게 남아있음이옵니다. 요행히 천혜의 험지인 양양성의 지리적 잇점을 활용하여 이번에 대승을 거둔 것도 사실이긴 하옵니다만, 악비 대장군의 주청대로 앞 서 나가 싸운다면 그 지리적인 잇점마저 포기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겠 사옵니까? 지금 악비 대장군의 휘하에 50만에 달하는 병력이 있다고 하지만 , 그들 중 40만은 근래에 급히 징집하여 훈련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오합지 졸(烏合之卒)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유념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그들만으로 80만에 달하는 금의 정병(精兵)과 싸운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 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사옵니까? 그리고 이쪽에서 40만의 병사들을 서둘 러 징집했듯이, 금에서도 틀림없이 수십만의 병사들을 끌어 모았을 것이 틀 림없사옵니다." 그 말에 황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것은 재상의 말이 옳은 듯 하구먼." 그에 질세라 유광세 상장군은 또다시 황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황상 폐하. 재상의 의견이 일견 옳을 수도 있사오나, 전쟁을 하는데는 시 기라는 것이 있사옵니다. 금이 중원의 북방을 삼킨 것은 겨우 1년이 채 지 나지 않았사옵니다. 여기서 저들에게 시간을 더 준다면 점령한 영토를 확실 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안정시킬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하지만 지금 저들을 친다면 그자들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을 맞이하여 자신들이 지닌 전력을 제 대로 발휘하지도 못할 것이 분명하옵니다. 황상 폐하, 시간이 촉박하다는 점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일견 생각해 보면 상장군의 말에도 일리는 있구먼." 이렇듯 오락가락하는 황제 때문에 그 둘은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 해 치열한 설전(舌戰)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점차 회의가 길어지자 유광세 상장군이 문관인 진회에게 말발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원래가 군대 라는 곳이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집단이다보니, 그곳에서 성장한 상장군 에게 진회와의 말싸움에서 이길 것을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주 문이었던 것이다. 밤도 늦어졌기에 황제는 길게 하품을 한 후, 이 지루한 말싸움의 종지부를 찍었다. "경들의 의견이 모두 다 일리가 있다고 여겨지나, 짐은 재상의 의견이 조 금 더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하노라. 지금은 오랑캐들의 세력이 심히 융성하 니, 그들과 맞서는 것 보다는 후일을 도모함이 옳도다." 그 말에 진회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황상 폐하. 영민하신 결정이시옵니다." 황제가 결정을 내려 버리자, 유광세 상장군은 분하고 원통했지만,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황제가 결정한 사 항에 대해 가타부타 하는 것은 잘못하면 대역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는 일 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찌 되었소? 황상 폐하의 윤허는 받았소?" 악비 대장군의 물음에, 유광세 상장군은 고개를 떨구며 풀죽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송구스럽습니다, 대장군." 악비는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송구스럽다니, 설마 황상 폐하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는 말이오? 이상하구 려. 재상께서 옆에서 도와주셨다면 충분히 윤허를 받아낼수 있을 거라고 본 관은 예상했었는데……." 유광세 상장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실대로 실토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북진을 반대한 것이 바로 그 망할 재상 놈입니 다." 악비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뭣이?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을 소장이 어찌 알겠습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악비는 유 상장군에게 의문스런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 "본관이 귀관에게 분명히 말했지 않았었나? 먼저 재상을 찾아뵙고 도움을 청하라고 말이야." "소장을 의심하시다니 참으로 서운합니다, 대장군. 소장은 틀림없이 대장 군께서 명하신대로 재상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재상도 흔쾌히 도 와주겠다고 허락했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황상 폐하 앞에 서서 그렇게 소장의 뒤통수를 칠 줄이야 어찌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유 상장군은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노성을 터뜨 렸다. "젠장! 그런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해대는 망할 새끼는 즉시 모가지를 비 틀어 놧어야 하는데……." "말이 지나치구먼. 그래도 그분께서는 일국의 재상이 아니신가. 그분 나름 대로 뭔가 생각이 있으셨던 것이겠지." 악비는 그래도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유 상장군의 생각을 달랐다. 유 상장군은 황제 앞에서 망신을 당했을 때가 떠오르는지 씨근덕거 리며 외쳤다. "만약 그렇다면 그 전날 소장에게 북잔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해 줬어야 하 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을 해 줄 시간과 기회는 충분히 있었단 말입 니다. 이런 식으로 물을 먹이는 것을 보면 그놈은 틀림없이 오랑캐놈들에게 뇌물이라도 받아 처먹은 게 틀림없습니다."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억측은 입에 담는 게 아닐세. 그렇다면 이 일 을 어찌한다? 이제 봄이 코앞에 닥쳤는데 말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습니다. 이번 일을 황상께 간한 것은 조금 이라도 더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서였지 않습니까? 지원 따위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치고 올라가면 어떻겠습니까? 금과 싸워서 승리만 하면 모든 허물은 묻혀질 겁니다." 악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황상 폐하께서 북진을 불허하셨는데, 병사들을 움직였다가는 곧 바로 항 명죄에 걸린다. 허어~, 이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처음부터 황상 폐하께 간 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구나." "그렇다면 소장을 다시 한 번 더 남경에 보내주십시오. 충분히 자료를 준 비하여 북진의 정당성을 입증한다면 재상도 더 이상 반대하지는 못할 겁니 다." "아닐세. 그것보다는 본관이 직접 재상을 찾아가는 것이 좋겠어. 재상만 잘 설득시킬 수 있다면, 황상 폐하의 윤허를 받아낼 수도 있겠지." "그게 되겠습니까? 만약 그놈이 뇌물을 받아먹은 것이 확실하다면, 대장군 께서 곤경을 당하실 수도 있음이옵니다." "방금 전에도 말했찌만, 뇌물 같은 말도 안되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말게. 내가 예전에 그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생각이 올곧은 훌륭한 분이셨다네 . 그분은 결코 뇌물 같은 것에 흔들리실 분이 아닐세. 알겠는가?" 5. 전전긍긍(戰戰兢兢) 산들바람을 맞아 찰랑거리는 드넓은 홍택호를 가르며 일단의 수군 전선들 이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있다. 3천에 달하는 무림인들을 호송하는 선단(船 團)인 만큼, 그 규모가 작을 수는 없었다. 크고 작은 전선(戰船)들을 모두 합해 50여 척에 달하는 대선단이다. 역풍(逆風)이 불고 있었기에 썩 항해하 기에 좋은 여건은 아니었지만, 전선의 좌우에 수십 개씩 지네발처럼 달려 있는 노들이 기운차게 움직이며 전선을 앞으로 내달리게 만들어 주고 있었 다. "방금 전 한 상장군을 만났는데, 모든 게 예정대로라고 하오. 아마도 잠시 후면 목적지가 보일 거외다." 황보열 장로가 다가와 전하는 말에 팽선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좋은 소식이구려. 그렇다면 잠시 후면 상륙할 수 있겠소이다." "참, 천지문에는 전령을 보냈소이까?" 팽선은 그런 사소한 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호쾌하게 대답했다. "이르다 뿐이겠소. 출발하기 전에 전령을 보냈소. 오늘 상륙할 테니, 사흘 후에 행동을 개시하라고 말이오. 그 외에 개방으로부터 입수한 중요한 정보 들까지 모두 다 전달했으니 잘 해내겠지요." 그러면서 팽선은 슬쩍 미소지었다. 물론 복수라는 중차대한 일이 남아 있는데, 그걸 곧이곧대로 전달해 줄 팽 선 장로가 아니었다. 자신의 상륙 지점부터 시작해서 적들의 움직임 등등… …. 모든것을 조금씩 틀리게 해 놨기에 천지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정보를 안고 막심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으리라. "크흐흐흑. 전멸이라……." 팽선의 말에 황보열은 안색을 달리하며 질책했다. "아직 행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무슨 불길한 말씀이오?" 하지만 팽선은 태연자약하게 변명했다. "노부의 말은 놈들을 전멸시키면 흑살마왕이나 금 황제놈의 안색이 어찌 변할까 궁금하다는 뜻이었소." "하하핫. 옳은 말씀이외다. 아마도 혼자 보기는 아까운 장면이겠지요. 그 걸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것이 한스러울 뿐." 물론 통한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망할 계집이 죽어나가는 꼴을 자신의 눈 으로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때, 장수 한 명이 다가와 군례를 올린 후 팽선에게 전했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으니, 상륙 준비를 하시랍니다." 사실 그건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필요 이상의 친절이었다. 별도의 치중대( 輜重隊)를 필요로 하는 군대와 달리 무림인들은 각자 필요한 건량(乾糧)이 나 무기를 휴대하고 있어서 이곳에 상륙하라는 통보만 해 줘도 곧바로 움직 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도착한 것인가?" 팽선은 상륙 지점 근처를 꼼꼼히 살펴봤다. 역시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 고 저 멀리 수풀 속에 숨어 있는 기마병 몇 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피식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훗. 순찰병들인가?" 순찰병들은 조용히 이쪽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아마도 저들은 이쪽에서 상륙함과 동시에 본대에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달려갈 것이다. 어쩌면 저들 중에 한둘은 벌써 이 근처에 송군의 전선이 떴음을 알리기 위해 달려 갔을지도 모른다. "그래그래, 놈들도 제법 잘 하고 있구먼. 저 정도 준비는 해 두고 있어야 성동격서가 통하지. 놈들이 아예 신경쓰지 않고 있다면 이쪽에서 무슨 짓을 해도 광대놀음일 테니……." 그 말에 찬성한다는 듯 황보열 장로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지만, 정작 사부의 마음을 알아줘야 할 팽조는 그렇지가 못했다. 팽조는 어리둥절한 표 정으로 사부에게 되물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씁이십니까? 사부님." 맹한 팽조의 얼굴에 팽선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쯧. 너는 알 것 없다." 무림맹 3천 고수들의 도하 작전은 너무나도 싱겁게 성공했다. 그들의 도하 시간이 워낙 짧은 것도 있었지만, 단 한 명의 적병도 나타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것은 금 제죽의 국경 방어 방식이 송 제국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 랐기 때문이다. 농경과 상업에 치중하고 있는 송의 경우 외적이 침입해 들어오면 그 피해 를 최소화하기 위해 국경선 안으로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한다. 그렇기에 국경선에는 언제나 적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일정수의 방어 병 력이 항시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목에 치중하는 금의 경우, 국경선은 거의 비워두고 있었다. 영토 는 넓고 인구는 적으니 그 엄청난 국경선 전체에 걸쳐 병력을 배치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적이 침공하면 그때 병력을 끌어모 아 침입한 적을 확실하게 응징한다. 아니 응징하는 정도가 아니라 침입한 국가를 역으로 쳐들어가 다시는 쳐들어 올 생각조차 못하도록 아예 끝장을 내놓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평상시에 국경선을 지킨다고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을 필요가 없는 매우 경제적인 방어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 론 그 때문에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나 마을들의 피해가 크겠지만 말이다. "자, 이제부터가 시작이오. 지금부터 최대한 놈들의 눈에 띄게 행동해야만 하오." "알겠소." 소연은 안으로 겨우 1장 남짓 파고들어간 비좁은 토굴 속에 앉아 이것저것 자신이 취합해 놓은 정보들을 훑어보고 있는 중이다. 매일 밤, 진팔을 보내 어 강 건너편의 적진을 살펴보기까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보가 부족하 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딘가에 고수들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조심스런 진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저. 혼원패권 대협께서 사람을 보내오셨습니다." 진팔의 목소리에 소연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과연 토굴 밖에는 진팔과 함께 낮선 인물이 서 있었다. 흑색무복을 입은 그는, 입구를 위장해 놓은 나뭇가지들을 치우며 토굴 속에서 기어 나오는 소연을 향해 살짝 눈살을 찌 푸리고 있었다. 소연은 그런 상대를 향해 전혀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고 정중히 예를 갖추 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지문의 소연이라 합니다. 워낙 사정이 이렇다 보니 행색이 누추함을 용서하십시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본인은 팽소량(彭素梁)이라 하오." 팽소량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듯 토굴 속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다니, 놀랍소이다. 완벽하게 위장 을 하고 있기에 여기 진 소협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주위를 계속 돌아다녔었 소." 하지만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놀라움을 담고 있다기보다, 지금껏 상대의 위치를 찾지 못해 고생하도록 만든 것에 대한 짜증이 짙게 묻어 있었다. 그 럴 수밖에 없는 것이 팽소량도 적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살금살금 움직여야 했고, 천지문도들도 완벽히 위장한 채 숨어 있다 보니 오랜 시간 서로가 술 래잡기를 한 것이나 다름 없는 꼴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보다 월등히 뛰어 난 실력을 지닌 진팔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팽소량은 이 근처를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느라고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있었던 것이다. "그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혼원패권 대협께서 은밀하게 대기 하라는 명을 내리셨기에……." 물론 팽소량으로서도 상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혼원패권 장로의 명령대로 행동했다는데 그걸 어찌 야단치겠는가. "아, 그걸 탓하자고 꺼낸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오. 다만 이렇듯 훌륭 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워서 꺼낸 말이었소." 팽소량은 품속에 넣고 온 두툼한 밀서를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장로님께서는 정확히 약속된 날짜에 움직이셔야 한다는 것을 재삼 당부하 라고 전하셨소. 그리고 개방으로부터 입수된 최신정보는 물론이고 여러가지 비밀을 요하는 정보들까지 함께 동봉되어 있는 만큼,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후에 서신을 불태우는 것을 잊지 말기 바라오." 소연은 밀서를 품속에 엏으며 팽소량에게 말했다. "여기서 이러실 것이 아니라 혹 저들의 눈에 띌 우려도 있으니 안에서 얘 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팽 대협. 따뜻한 차라도 한잔 하시면서 몸이 라도 좀 녹이시지요." 팽소량은 방금 전 소연이 기어 나왔던 토굴 입구를 힐끔 바라봤다. 시커먼 구멍만 뚫려있었기에 내부가 얼마나 넓은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입구를 아주 작게 뚫어놨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여기 서 있는 진팔이나 소연처럼 바지에 흙을 묻힐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팽소량은 옷을 버려가면서까지 그 속에 들어 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 했다.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빨리 돌아가서 장로님께 서신을 전달했음을 전해 야만 하오. 이곳을 찾느라고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지체한 만큼, 소 소저의 친절을 사양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구려." 팽소량의 속도 모르고 소연은 오히려 미안해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팽 대협. 오히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잡고자 한 저의 잘못입니 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팽소량은 돌아서려다가 멈칫 다시 소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당부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밀서에는 저들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될 내용들 이 많이 있소." 소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읽은 후, 바로 태워 버리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오." 팽소량은 혹시라도 눈을 밟아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건너뛰 며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혹시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적들의 이 목을 속이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 잠시 후, 진팔과 소연은 비좁은 토굴 속에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뭐라고 써져 있습니까? 사저." 소연은 팽선의 서신을 진팔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초닷새니…. 3일 후에 움직이라는구나." 그런 다음 소연은 서신과 함께 동봉되어 있는 자료들을 확인했다. 봉투가 꽤 두툼했던 만큼 자료의 양도 꽤 많았다. 배를 만드는 장인들의 숙소를 포 함한 조선소의 전반적인 배치도. 강 건너편에 있는 금군의 배치 상황과 그 병력 규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차후에 예상되는 적의 이동 경로를 담은 지도였다. 예상되는 적의 이동 경로를 표시해 놓은 지도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는 소연을 향해 궁금하다는 듯 진팔이 질문을 던졌다. "여기 있는 자료들은 모두 다 금군 쪽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것을 태워 버리라고 몇 번씩이나 당부했을까요?" "당연하지 않겠느냐. 적의 예상 이동 경로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 졌겠니 ? 혼원패권 대협의 이동을 적이 포착하고 그에 따른 대응을 해 올 움직임이 니, 이것을 뒤바꿔서 생각한다면 혼원패권 대협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나 겠지. 아마도 그것을 그분께서는 우려하시는 것일 게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중얼거리던 진팔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또다 시 소연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저쪽에서 이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이쪽만 박살나는 거 아닙니까?"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모든 것을 그렇게 따지고 들자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안목이 그렇게 높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혼 원패권 대협의 작전에는 크게 무리한 점이 없다고 생각 되는구나. 우리들에 게 주어진 시간은 넉넉잡고 1시진(2시간).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반시진은 되지 않겠니?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는데 충분한 시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만약 그보다 여유가 적다면 어떻게 합니까?" "계속 안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겠느냐. 이 미 우리들에게 선택의 여지 같은 것은 없어. 모든 것이 예측 한 대로 되기 를 바라며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최대한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방책을 의논 해 보 는 것이 좋겠군요?"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토굴 한쪽 구석에서 늙은 하인이 작은 화 톳불을 피워 차를 끓이고 있었다. 특이하게 화톳불은 불빛도 거의 나오지 않으면서도 한겨울의 토굴 속을 따뜻하게 덥힐 수 있는 온기를 뿜어내고 있 었다. 차가 다 되자, 늙은 하인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오는 찻잔을 소연과 진팔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가씨, 날이 찹니다. 따뜻한 차로 몸이라도 좀 녹이시면서 말씀들 나누 시지요." "고마워요, 왕노(王老)." "뭘요. 이게 다 소인이 해야 할 일인뎁쇼." 왕노는 아주 오랫동안 천지문에서 일해 온 늙은 하인들 중의 하나였다. 양 양성에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 소연이 지원하자 그도 덩달 아서 지원해 왔다. 소연의 말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물론, 소연 외에도 말을 가져온 사람은 여럿 있었고, 또 그런 일 을 처리할 하인도 꽤 있었다. 그렇기에 양양성에 도착한 뒤 왕노는 꼭 말을 돌보는 일뿐 아니라, 하녀를 데려오지 않은 소연의 뒷바라지도 함께 해 줬 었다. 이번 작전에도 남아서 말이나 돌봐 달라는 소연의 요청을 거절하고 왕노는 그녀를 따라왔다. 자신이 없으면 소연의 식사를 누가 돌봐줄 것이냐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얼마나 노인의 고집이 지독스러운지 소연은 어쩔 수 없이 왕노의 청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토굴에서 대기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소연은 왕노를 데려오기를 참 잘했다 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토굴 속에 마른 짚을 깔아 그녀의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 준 것도 왕노였다. 그리고 적의 이목을 피해 숨어 지내야 하는 만큼 , 불의 사용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불빛이야 어떻게든 감출 수 있겠지만, 연기까지 숨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노는 어디서 배웠는지 싸리 나무 가지들을 주워다가 그 껍질을 벗긴 후 잘게 찢어 연기가 나지 않도록 불을 피우는 기발한 방법을 알고 있었고, 덕분에 그녀는 건량이 아닌 따뜻 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진팔은 왕노가 피워 놓은 화톳불을 힐끔 바라봤다. 이것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불이 이렇게 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 했다. 불빛도 거의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연기조차 없었다. "왕노. 이렇게 불 피우는 건 어디서 배웠어요?" 왕노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흐릿한 시선으로 대답했다. "소인이 아주 어렸을 때였습죠. 동네에 살고 있는 파락호 형님에게서 배웠 었는데, 훔친 닭을 몰래 숨어서 잡아먹는 데는 이것 이상 없더구먼요." "참 묘한 재주로군요." "소인도 그렇게 생각합니다요. 어쨌건 소인이 소싯적에 배워 둔 재주가 이 렇게 보탬이 될 수 있다니, 그 형님께 감사할 따름입죠." 왕노의 대답에 진팔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사실 이것은 살수들만이 익히는 기본적인 기술들 중 하나였다. 최대한 자신의 존재가 남에게 발각되 지 않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적인 특성상, 살수라면 응당 이런 특이 한 기술 몇 가지는 필수적으로 익혀야만 했던 것이다. 천지문에 주어진 임무는 두 가지다. 하나는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배들을 불태우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조선소에서 일하는 장인들을 죽이든지, 아 니면 구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전을 추진함에 있어서 천지문을 두 개의 조로 나누는 것이 한 가지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불 지르는 패 거리. 또 하나는 조선공들을 처리하는 패거리. 물론 상황이 허락한다면 구 출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렇지 못할때는 없애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편이 시간이 훨씬 절약될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진팔이 천지문도들 중에서 제법 윗줄에 놓이는 제자들을 모두 다 불러 모 아 소연과 함께 이런저런 계책들을 상의하고 있을 때, 묵햔은 자신을 찾아 양양성에서 급히 달려온 마화를 만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왔느냐? 내일이면 안 그래도 돌아갈 텐데… …." 마화에게 질문하는 묵향의 어조에는 궁금증이 묻어 있었다. 마화는 철영 부교주의 눈치를 슬쩍 살핀다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묵 향에게 양녀가 있다는 사실을 철영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철영은 이미 교주에게 양녀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흑월야 사라고 불리던 전설적인 살수에게 딸의 호위를 부탁했을 때, 우연히도 바로 그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을 철영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교주가 흑월야사에게 한 말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딸을 보호하라. 하지만 능력이 안된다고 느껴지면 딸의 생사 에 연연하지 말고 곧바로 탈출하여 흉수가 누군지만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지켜주지는 못하더라도 복수라면 확실히 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 고 철영은 소름이 돋는 것을 으꼈다. 딸의 존재는 결코 그의 약점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을 모르고 교주의 딸을 건드린 자는 필사(必死)!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안 이후 철영은 교주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 버리려고 노력했다. 괜히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 을 내세워 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번에 장인걸을 상대로 비밀 작전이 시작된다는 보고를 드렸었지 않습니 까?" 마화의 말에 묵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아, 난 또 무슨 일이라고. 그건 전에 내가 별일 아니라고 말했었잖아." "교주님의 명을 거역한 것은 송구스럽습니다만, 속하는 그 작전에 대해 좀 더 조사를 해 봤습니다." "쓸데없는 일을 했군." 마화를 탓하는 듯 했지만, 묵향의 표정은 궁금증을 안고 있었다. 그로서도 사랑하는 소연의 안위가 걸려 있는 일이었기에 결코 냉담 할 수 없었던 것 이다. "쓸데없지는 않았습니다. 정보를 취합해 본 결과 인선에 문제가 좀 있었습 니다." 그 말에 묵향은 급히 되물었다. 이제 더 이상 냉담함을 가장하고 있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어떤 문제가?" 마화는 지금까지 취합된 정보를 보고하고. 관지 장로가 지적한 문제점들을 알려 줬다. 물론 바로 옆에서 흥미롭다는 듯 철영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에, 구체적인 문파명은 물론이고 소연의 이름까지 제외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묵향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뭣이! 수라도제가 빠졌다고? 그렇다면 다른 놈들은? 하다못해 황룡무제가 패력검제 쯤은 거기에 동참했을 것 아닌가?" "이번 작전의 책임자는 하북팽가의 팽선 장로라고 합니다." 묵향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팽선이라고? 이런 빌어먹을. 그따위 미끼로 장인걸을 속이려고 들다니." 지금껏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철영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속사정까지 야 말을 안해주니 알 수가 없었지만, 옆에서 들어 보니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심각하게 대화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교주님. 그런 것에 마음 쓰실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요는 조선소를 초 토화시키키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속하가 수하들을 이끌고 박살 내 버릴까요?" 철영으로서는 기껏 생각해서 꺼낸 제안이었는데, 묵향은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네가 밖으로 나설 때는 장인걸의 숨통을 조일 때 외 에는 없어. 만약 이쪽이 모습을 드러내면 장인걸이 빈틈을 드러낼 것 같으 냐?" "그, 그것도 그렇군요." 마화는 묵향의 말이 지당하다고 여기며 덧붙였다. "마공을 익힌 고수들은 마기가 너무 두드러지기에 그 근처에 매복조차 시 킬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흑풍대를 투입하자니, 회하가 큰 장애물입니 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교주와 부교주 간의 대화에 그녀가 끼어들어 부교주가 어떤 부분을 놓치고 있는지 꼬집어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목숨까지도 위태로운 행위였다. 하지 만 교주와 마화 간의 묘한 분위기를 이미 알고 있었던 철영이었기에 그는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묵향은 마화에게 외쳤다. "당장 작전을 중지시켜라." "예? 하지만 그들이 작전을 중지하려고 할까요? 당장 조선소를 파괴해야만 하는데 말입니다." "이런 젠장. 일이 꼬이는군." 묵향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철영에게 지시했다. "본좌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자네는 이곳에서 꼼짝도 하지 말게. 알겠나 ?" "예. 교주님." 묵향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위치를 알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마화가 대별산맥까지 자신을 찾아오는데 소요한 시간을 계산한다면 지금 묵 향에게 주어진 여유는 거의 없었다. 묵향은 철영 일행으로부터 충분히 거리 가 멀어진 후에야 전점 더 속도를 올리며 마화에게 명령했다. "본좌는 먼저 갈 테니 너는 천천히 와도 돼." "소 소저에게 직접 가실 겁니까?" 순간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말도 안 된다는 듯 내뱉었다. "자네 그렇게 생각이 없나? 만약 거기에 장인걸이 와 있다면 목을 따 버리 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어쩔 건가? 본좌가, 아니 본교가 이번 전쟁에 개입했다는 것을 그놈에게 알려주는 꼴이 될 건데, 그건 생각해 보 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속하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젠장. 그래서 내가 빨리 가 봐야 하는 거라구. 너는 이번 일에 별 필요 없으니 천천히 와도 돼. 그럼 나는 먼저 간다." "예." 묵향은 마화의 대답을 채 듣지도 않고 전속력으로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엄청난 속도에 마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 속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도 빨리 움직여야겠군." 마화는 더욱 속도를 내어 아래쪽에 매어 놓은 말을 찾아 달려갔다. 묵향은 양양성에 도착하자마자 관지를 찾아갔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너는 빨리 준비해서 팽 뭐시기라는 놈에게 가 봐라." 뜬금없는 교주의 명령에 관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묵향은 답답하다는 듯 다시 명령했다. "이대로는 꼼짝도 못하고 장인걸에게 당하게 생겼다며? 그러니까 자네가 흑풍대를 이끌고 가서 도우란 말이다. 출동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화경급 고수 두어 명 붙여줄 테니까, 그 정도 전력이라면 조선소를 박살내는데 모 자람이 없을거야." "예. 곧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관지가 달려 나간 후, 묵향은 곧장 만통음제의 숙소로 달려갔다. 문을 벌 컥 열고 뛰어 들어오는 묵향을 보고 만통음제는 활짝 미소지으며 환대했다. "오. 이제 오는가? 어때? 선물은 마음에 들던가?" 그런 말에 대꾸해 줄 정신이 없었던 묵향은 단도직입적으로 외쳤다. "지금 선물타령 할 때가 아닙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아우가 이렇게 허둥대는 건 처음 보는데……." "쓸데없는 말씀 마시고, 지금 당장 가서 팽 뭐시기라는 놈 좀 도와 주십쇼 ." 뜬금없는 요청에 만통음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팽 뭐였더라? 그 하북팽가의 장로라는 놈 말입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답을 얻을 수 없었던 만통음제는 맹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묵향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우형이 알기로는 팽가의 장로는 모두 다 팽씨들인데……. 그중 누구를 말 하는 것인가?" "이런 젠장. 설명을 하려면 좀 기니까 제 수하놈에게 들으십쇼. 지금 한창 출동 준비를 갖추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알겠네. 하지만 자네가 그 팽 뭐시기라는 자를 도와달라는 이유를 모르겠 군. 우형이 좀 알기 쉽게 설명해 주면 안되겠나?" "제 양녀의 생명이 걸린 일입니다. 이제 되셨습니까?" 만통음제는 흔쾌히 대답했다. "이런, 진작에 그렇게 말했으면 더 이상 군말이 필요 없지 않았나. 내 속 히 가 볼 테니 염려 말게." "그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따로 가 볼 데가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 니다." 묵향은 대충 인사를 갖춘 다음 전속력으로 사라져 버렸다. "허어, 역시 겉은 무뚝뚝하게 행동하지만, 내 짐작대로 속정은 참으로 깊 구먼.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음이야. 참, 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만통음제는 금(琴)속에 숨겨져 있던 혈영비(血影匕)를 꺼내어 품속에 집어 넣으며 밖을 향해 외쳤다. "설취야. 거기 있느냐?" 곧이어 부드러운 음성이 답해 왔다. "예. 사부님." 설취는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찾으셨습니까? 사부님." "보관해 둔 술이 있으면 한 병만 가져다 다오." "예. 사부님." 설취는 재빨리 달려가 몇 병 사뒀던 술들 중에서 한 병을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사부님." 만통음제는 술병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설취에게 말했다. "나는 일이 있어 급히 가 볼 데가 있으니 그리 알거라. 한 며칠 걸릴지도 모르겠구나." "예. 사부님." 만통음제는 더 이상의 얘기는 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밖 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홀로 남은 설취는 지금껏 없었던 사부의 돌발적 인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숙 어르신을 만나러 가시는 건가? 아니야. 그렇다면 저리 서두르실 이 유가 없지. 그렇다면 무슨 일이지?" 흑풍대는 갑작스렁 출동 준비 때문인지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 중에서 관지를 찾는 것은 조금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만통 음제는 이놈 저놈 붙잡고 물어서 결국은 관지를 찾아냈다. 자신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팽선의 위치를 물어보는 만통음제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저희들도 그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가 모실 테니 함께 움직이시 면 편리하실 겁니다. 어르신." "아니, 노부는 위치를 알아야겠네." 꼭 알아야겠다는 데야 어쩔 것인가? 관지는 무영문으로부터 통보받은 팽선 의 마지막 위치를 만통음제에게 알려줬다. "남양 방면으로 서서히 진격하여 금 세력을 압박할 것이 분명한 만큼, 그 들이 그곳에 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대답한 후 관지는 만통음제의 표정을 살피며 덧붙였다. 어찌 보 면 이번에 할 말이 만통음제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저들에게도 대단히 수준있는 고수들이 존재하는 만큼. 단독 행동을 하시 는 것 보다는 저희들과 함께 움직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그런 염려까지 해줄 필요는 없네. 노부의 안전이 위험할 정도로 놈들의 세력이 강하다면, 질녀의 생명 또한 위험할 터. 그 정도 위험은 감 수할 수밖에. 노부는 먼저 갈 테니, 그리 알게." 만통음제는 말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돌아서며 경공을 전개해 버렸다. 만통 음제는 점점 더 가속하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전속력으로 성문 쪽으로 달려 갔다. 성문이 점차 가까워지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는 것으 로 보아 그냥 성벽 위로 뛰어오를 작정인 모양이다. "질녀라니…. 질녀가 누구지?" 곧이어 관지는 만통음제의 질녀가 누군지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교주님께서 만통음제 대협과 의형제를 맺으셨다고 마화 에게 들었으니, 소 소저가 질녀가 되겠군. 그런데 소 소저의 생명이 위험하 다면서 왜 혼원패권에게로 달려가시는 거지?" 관지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연이 팽선 일행과 행동을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관지로서는 만통음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묵향이 다가오자 서문세가의 호위무사들은 긴장하며 그 앞을 가로 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교주님." "수라도제를 만나러 왔다." "태상문주님께서는 교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순간 묵향은 이놈을 박살내 버릴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수라도제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그런 만큼 이 앞에서 다툼을 벌일 수는 없었다. 묵향은 성질을 참으며 호위무사에게 말했다. "일단 기별이나 넣거라. 쓸데없는 잡소리 하지 말고." 하지만 호위무사의 말은 전과 똑같았다. "태상문주님께서는 교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드디어 성질이 나기 시작한 묵향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 내며 호 위무사를 다그쳤다. "뭣이? 이놈이 정말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다는 말인가? 쓸데없는 잡소 리 하지 말고 기별이나 넣어 보라는데, 왜 네놈 따위가 안 된다고 하는 것 이냐?" 호위무사는 묵향의 살기에 압도당해 다리가 후들거리는데도 불구하고, 필 사적으로 외쳤다. "여, 연락을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태상문주님께서는 교주님을……."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묵향은 호위무사의 멱살을 틀어쥐고 으르렁 거렸다. "정녕 네놈이 죽고 싶다는 것이냐?" "하,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때, 뒤쪽에서 호위무사보다는 조금 더 높은 신분을 지닌 자가 모습을 드 러냈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그러다가 그는 호위무사의 머리통에 가려져 있던 교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헉! 교, 교주?" 묵향은 더 이상 하급 무사에게는 볼일이 없다는 듯 그놈을 놔준 다음, 경 악감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는 상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수라도제를 만나러 왔다는데, 저놈이 안 된다고 해서 말이야. 자네는 그 런 말도 안 되는 대답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 무사도 방금 전의 그놈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태, 태상문주님을 만날 수 없소." 묵향은 이빨을 뿌드득 갈며 외쳤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안 그러려고 했는데……. 몇 놈 잡아 죽여야 그놈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태, 태상문주님을 만나 보실 수는 어, 없을거요." 이쯤 되자 묵향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떻게 모두들 한결같이 만날 수 없다는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소란을 일으킨다면 수라도제가 곧바로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도 안 된다고 하지 않는가. '수라도제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묵향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무사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수라도제가 있기는 있는 거냐?" "무, 물론 계십니다. 하지만 교주를 만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묵향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런 제기랄!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떤 놈 이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묵향은 수라도제가 있는 저 내실 안쪽으로 강렬한 투기(鬪氣)를 쏘아 보냈 다. 만약 수라도제가 저 안에 있다면 무슨 일인가 하여 튀어 나올 정도로 지독한. 곧이어 넓은 장원의 여기저기에서 서문세가의 무사들이 저마다 중도(重刀) 를 뽑아들고 달려 나왔다. 하지만 그들 중에 수라도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서문길은 갑자기 느껴지는 엄청난 투기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야 말았다. "허억!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마시고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지만, 서문길은 그것조차 느 끼지 못했다. 순식간에 그 투기는 씻은 듯 사라졌지만, 서문길은 진저리 쳐 지는 그 강렬한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서문세가가 자리 잡고 있는 이 장원에 이토록 어마어마한 투기를 뿌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혹시 아버님이?' 이렇게 생각한 서문길은 지체치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투기가 느껴졌던 정문 쪽으로 다가간 서문길은 자신이 무기를 가져오지 않 은 것을 잠시 한탄했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아니라 누군가 딴 사람이 서문 세가 식솔들과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허참, 아버지 말고 그 누가 있어 그토록 엄청난 투기를 발(發)한단 말인 가?' 확실히 상대의 투기가 엄청나긴 엄청났던 모양이다. 서문세가에서도 제법 실력 있는 고수로 통하는 사촌 형 서문료(西門了)가 두려움에 질려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자세히 보면 그의 다리까지 후들거리 고 있을 정도니 상대가 준 위압감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문길은 짐짓 목소리를 엄중히 하여 외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 말에 서문료가 대답했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의 사촌 동생이라고 하지 만, 문주였다. 그렇기에 그는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마교 교주가 태상문주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하여……." 상대가 마교 교주라는 말에 서문길은 흠칫 놀랐다. 탈마의 고수라고 하더 니 과연 엄청난 기세였다. 칠룡의 동기들과 오래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 지만. 자신이 상대를 기억하고 있지 못하듯, 상대 또한 자신을 알아보지 못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서문길은 슬쩍 포권하여 예를 갖추며 자기를 소 개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본인은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길이라고 합니다. 그래, 무슨 일로 아버지를 뵙자고 하였소이까?" 그 즉시 상대에게서 반응이 왔다. 교주는 서문길을 아래위로 훑어 보더니 중얼거렸다. "가주라고?" 순간 상대의 표정이 변했다. 냉막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어찌나 부드럽게 바뀌던지 그 변화를 지켜보는 서문길이 다 무안해질 지경이었다. "호오. 수라도제에게 이런 훌륭한 아들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구먼. 크흐 흑, 내 사실은 한 가지 긴히 부탁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말씀이야." '단순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속 보인다고 해야 하나…….' 상대의 반응으로 살펴 보건데,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하러 왔을 것이다. 하 지만 이토록 속 보이게 행동을 하다니. 서문길은 그것을 보고 상대의 속셈 이 너무나도 얄팍한 듯하여 기가 막힐 지경이었지만, 상대는 자신의 표정 변화에 스스로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서문길은 자신이 그렇게도 만만하게 보이나 싶어 내심 씁쓸함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무슨 일이신데 그러십니까?" 교주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이목이 좀 많은 듯하니, 어디 조용한 곳이 없을까?" 아닌 게 아니라, 방금 전의 그 투기로 인해 정문 근처에는 서문세가의 무 사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것도 단단히 무장을 갖춘 상태로 말이다. "예. 여기는 좀 어수선 하니 안으로 드시죠." 서문길은 교주를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그는 하녀를 불러 차를 가져 오라고 이른 후, 교주를 향해 말했다. "부탁이 있어서 오셨다니…,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이번에 팽모(彭某)하고 하는 자가 금을 치기 위해 고수들을 이끌고 움직 였다고 들었네." "예." "그런데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본좌가 찾아온 것이지." 일단 상대가 왜 찾아온 것인지 파악해야 하는 것이 선결 과제다. 그래야만 뭔가 협상을 해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서문길은 침착하게 질 문을 던졌다. "어떤 점이 미심쩍으신 겁니까?" "자네도 생각해 보게나. 장인걸이 바보도 아닌 바에야 지금 그가 양동작전 을 쓰려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나?" 이번 작전에 대해 마교 쪽에는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교주가 꽤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에 서문길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을 도대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하지만 교주는 그런 것을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 어디서 들었는지는 상관 없지 않은가? 쓸모도 없는 것을 괜스럽게 따 지고 들어봐야 양쪽이 서로 피곤하기만 한 것을. 그러니 그건 그냥 넘어가 고, 사실인지 아닌지만 말해 주게." "방금 하신 말씀이 맞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기에 본좌가 한 팔 힘을 보태고자 하네." '힘을 보태준다고?' 하지만 서문길은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는 오랜 세월 무림에서 최강의 위치를 유지한 절대적인 고수 였다. 수많은 음모와 귀계가 판치는 무림에서 그런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힘만 강해가지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임을 서문길은 너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문길은 슬쩍 상대의 속을 떠봤다. "힘을 보태신다 하심은?" "흑풍대에게 일러 팽모를 도와주라고 일렀네. 그리고 형님도…, 아니 만통 음제 대협도 도와주기로 했어. 그런 만큼 굳이 모험을 하면서까지 양동작전 을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말일세." 서문길은 교주를 빤히 바라봤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그걸 교주도 눈치 챘는지 곧바로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었다. "본좌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일세. 자네가 사람을 보내 알아보면 곧바로 알 수 있는 일을 본좌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여기 오기 직전에 명령을 내 려놨으니 1시진도 안되어 모두들 출발할거야. 그리고 자네와 얘기가 끝난 후에는 황룡무제한테도 찾아가서 한 팔 거들라고 청할 생각일세. 자네는 젊 어서 잘 모르겠지만, 장인걸 같은 자를 상대하는 데는 괜히 이런저런 꼼수 를 쓰는 것 보다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로 한방에 끝내버리는 것이 훨씬 좋 거든." 그러면서 은근슬쩍 자신의 노회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문길도 그 나름대로 일문을 이끌 체계적인 교육을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람이었다. 그 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곳이 텅텅 비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것을 이용하여 저들이 역으로 양양성으로 치고 들어온 다면 그 일을 어찌 처리하시겠습니까?" "지금은 대군을 움직이기에 적기가 아니야."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만일이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내 그것도 생각해 봤네. 저들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움직여 온다면 이곳에 남아 있는 고수들만으로도 충분히 며칠 정도는 버텨 낼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장인걸이 직접 온다면……." "여기에는 본좌도 있을거고, 패력검제와 수라도제도 남아 있을 텐데 그게 무슨 걱정이겠는가?"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서문길의 흥미는 급격히 떨어졌다. 아버지는 그렇 게 만들어 놓은 사람하고 얘기하기가 심히 껄끄러워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서문길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뭐, 그 얘기는 됐습니다. 교주님께서 혼원패권을 돕겠다고 하시는 점은 감사드립니다. 하실 얘기는 그것뿐이십니까?" 서문길의 시큰둥한 대꾸에 교주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본좌가 하고자 하는 말은 양동작전이 피료 없어진 만큼, 그에 따른 후속 조치도 취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일세." 반쯤 폐인이 되어 있는 아버지 생각에 서문길은 교주를 상대로 심술을 부 리기 시작했다. "작전의 책임자는 혼원패권입니다. 제가 그의 작전에 간섭할 이유가 없고, 또 그럴 권한도 없습니다." 서문길이 그렇게 나오자, 교주는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자네 정말 이러긴가? 서문세가는 양양성에 파견되어 있는 전체 무림인들 의 지휘권을 쥐고 있다고 알고 있네. 그런데 천지문 따위를 뒤로 돌리는 것 이 뭐가 그렇게도 힘들다는 말인가?" "저로서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버지라면 혹 모를까, 저에게 는 양양성의 지휘권은 없으니까여. 그럼 이만……." 서문길은 더 이상 묵향과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때, 교주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치솟는 분노를 한껏 억 누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참인가?"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전에는 전폭적으로 돕겠다고 장담하시 더니, 이제는 이유 없는 협박 이라니요. 뭔가 감추고 계시는 것이 있는 듯 한데. 그걸 속 시원하게 말씀해 주셔야 제가 돕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겠 습니까?" 교주는 처음에는 「어쭈? 제법인데?」하는 듯한 표정으로 서문길을 바라봤 다. 하지만 곧이어 그 표정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감히 이딴 것이 내 말에 토를 달아?」라고 말하는 듯 분노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매서운 표정에 찔끔한 서문길은 감히 눈을 마주보지도 못했다. 교주는 살기어린 어조로 외쳤다. "더 이상 해 줄 말은 없다. 그 망할 놈의 금나라 오랑캐 새끼들보다 먼저 네놈이 저세상에 가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해라." 교주는 자신이 할 말은 다했다는 듯, 더 이상 아무런 말도하지 않고 돌아 가 버렸다. "참내, 이건 아버지보다 더 지랄 같은 사람이로구먼." 서문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어떤 일이 교주같은 냉철한 인물의 역 린(逆鱗)을 건드린 것일까? 서문길은 대장로를 불러들여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상의했다. 일단 서문 길로부터 방금 전에 있었던 모든 일을 다 듣고 난 대장로는 한동안 깊은 생 각에 잠기더니, 뭔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노신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열쇠는 천지문이 쥐고 있는 듯 하군요." "천지문이라구요?" "예.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교주가 여기에 발 벗고 나설 이유가 없지 않겠 습니까? 교주는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천지문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 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게 천지문인지, 아니면 그 문도들 중의 일부만인지 는 알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여기 와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천지문의 진팔이라는 청년과 교주가 매일 같이 비무를 해 줬다는 것 말입니 다."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청년을?" "노신은 그리 생각했습니다만……." "그렇다면 제가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양쪽의 권위를 다 세워주면 되는 것이겠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혼원패권에게 서신을 보내어 마교에서 제안한 작전은 이러이러하고, 또 그쪽에서 막대한 전력을 투입하여 동참하기로 했으니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먼저겠지요. 그런 다음 혼원패권에게 천지문에 퇴각 명령을 내 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는 겁니다. 혼원패권도 그리 멍청한 인물은 아닌만큼, 즉각 천지문에 퇴각 명령을 내릴 겁니다." 대장로의 말은 제법 타당성이 있었다. 아무리 혼원패권이 복수에 눈이 멀 었다고 해도. 거대문파인 서문세가 가주의 청(請)-이 경우에는 요청을 빙자 한 명령이나 다름없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빨리 서신을 작성하여 혼원패권에게 보내겠습니다." 6.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 만통음제는 엄청난 속도로 경공술을 전개했다. 흑풍대의 무사들이라면 회 하를 건너는데 송의 전선(戰船)에라도 의지해야 도강을 할 수 있겠지만, 만 통음제 같은 고수에게 그런 것은 전혀 불필요한 행위였다. 회하가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불구하고 만통음제는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 았다. 곧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만통음제의 몸이 윶기에서 달려가던 그 모습 그대로 강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놀 라운 등평도수의 경공술이었다. 물론, 경공술을 통해 매우 민첩하게 발을 움직이고, 또 일정 수준의 경신 법(輕身法)을 사용하여 몸무게를 가볍게 만들 수만 있다면 물위를 달려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부 경공술에 뛰어난 고수들의 경우 10장( 약 30m) 정도의 폭이 좁은 개천쯤은 그냥 통과 할 정도니 말이다. 물론 그건 폭이 좁을 때의 얘기다. 아무리 실력 있는 고수라도 수십 장이 넘는 폭 넓은 강을 달려서 건넌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통음제는 자신이 화경의 고수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 듯 그 넓은 회하를 단숨에 달려서 건너 버렸다. 만약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기절초풍했을 일대 사건이었지만 강 위를 달려가는 만통음제의 표정 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만통음제는 회하를 건넌 후, 곧장 눈에 띄는 나무 꼭대기로 몸을 날렸다. 그는 나무 꼭대기에서 중심을 잡고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허어, 참. 이 근처라고 들었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듣고 온 정보가 그다지 많지 않다 보니 팽선 일행을 찾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때, 저 먼 곳에 짙은 야행복을 입은 괴한이 은밀하게 이 동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포착되었다. 머리까지 두건으로 가리고 있는 것으 로 보아 결코 팽선 일행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수천 명이나 된다는 팽선 일행이 저렇게 얼굴을 가리고 다닐 이유가 없을 테니까. "흐흐흐.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먹잇감이 제발로 나타날 줄이야……. 저 놈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만통음제의 신형은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기 위해 하강 하듯, 녹의괴한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박덩어리처럼 둥그런 것이 둥둥 떠서 흘러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머리통이었다. 진팔이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한겨울에 강을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요 근래 적진을 정찰하기 위해 밤마 다 헤엄쳐서 건너다니느라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오 늘이 바로 행동을 개시하는 날이었으니까. 강기슭에 도착한 상태에서도 진팔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주위를 세심하게 살폈다. '역시 저기 오는군'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다. 매일 밤, 이곳을 들락거린 결과 경비병들이 언제 순찰을 도는지는 이미 파 악을 끝낸 상태였다. 놈들은 반시진 단위로 순찰을 도니까 저들이 한 바퀴 돌고나면 그다음 경비병들이 올 때까지 반시진의 여유가 있는 셈이다. 경비 병들이 다가오자 진팔의 머리통은 슬그머니 물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경비병의 수는 4명이었는데, 앞에 선 하나만이 밝은 횃불을 들고 있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그런지 그들의 걸음은 매우 빨랐다. 대충 형식적으로 훑어 본 다음 조금이라도 빨리 따뜻한 불가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경비병들이 멀어진 후, 물속에서 천천히 진팔의 머리가 떠올랐다. 진팔은 물속에서 눈만 내놓고 주위를 두리번거린 다음 그들이 완전히 갔다고 판단 된 다음에야 물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온몸에 지독한 냉기가 돌기 시작한다. 오히려 방금 전 살얼음이 맺혀있던 강물속이 더 따뜻했던 것 같은 정도다. 공력을 일주천시 켜 냉기를 막아보려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팔은 손바닥을 세차게 비벼 조금이라도 온기를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우선 손의 감각이라도 살아 나야 무공을 펼치는데 수월할 테니 말이다. '이런 떠그랄. 오늘은 날씨가 지랄 같아서 그런지 더 추운……. 아니군. 초승달까지 완전히 가릴 정도로 구름이 잔뜩 끼었으니, 오히려 하늘이 돕고 있다고 해야 하나? 어쨌건 날씨는 좋은 것 같군.' 너무 추워서 그런지 갑자기 재채기가 나오려고 한다. 진팔은 사력을 다해 참아봤지만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아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크욱." 진팔은 흘러내리는 콧물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소매로 훔치며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한동안 주위를 살펴보던 진팔은 행동으로 들어갔다. 작은 돌멩이를 들어 강의 중심을 향해 힘껏 던진 것이다. 저쪽에서 배를 타고 대기하고 있을 사저에게 신호를 보 내기 위해서였다. 파공성이 흘러나올 정도로 내력을 집어넣은 것도 아니었 건만, 돌멩이는 곧바로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진팔은 곧바로 돌멩이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 '하나 더 던질까?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괜히 소리를 낼 이유는 없으니까.' 진팔이 돌멩이를 하나 더 던질까 말까 궁리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때 , 살그머니 물길을 가르는 소리가 찰그랑찰그랑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팔은 돌멩이를 내려놓고 다시 한 번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진팔은 아직까지 천지문의 행동이 적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자신하고 있었 지만, 그건 순전히 그의 착각이었다. 천지문의 행동은 오래전부터 장인걸 일당의 손아귀 속에 있었다. 밤마다 조선소를 살피러 오는 진팔의 행동을 장인걸은 마치 재미있는 놀이라도 되는 듯 즐겁게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팔이 돌멩이를 던지는 것을 보고 장인걸의 입꼬리는 음흉스럽게 말려 올 라갔다.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드디어 결실의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는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크흐흣. 드디어 두더지들이 움직이는 것인가?" 장인걸은 옆에 서 있는 무사들에게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무사들은 모두 장인걸과 똑같은 시커먼 야행복을 입고 있었는데, 냉막한 표정뿐 아니라 4 척이나 되는 장검(長劍)을 등에 메고 있다는 점까지 똑같았다. 그들의 몸에 서는 무시하기 힘든 괴이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이들은 진 팔의 민감하기 그지없는 이목을 완전히 속일 수 있을 만큼 멀찍이 떨어진 이 산꼭대기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장인걸은 자신의 뒤에 늘어서 있는 4명의 무사들 중 한 명에게 질문을 던 졌다. "왕걸(王傑)대장. 자네 생각은 어떤가? 편복대주의 말대로 화경급 고수가 나타날까?" 제6대장 왕걸이 여기 모여 있는 4명의 대장들 중에서 가장 선임이었기에 그의 의견을 물은 것이다. 하지만 왕걸은 전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속하의 짐작이 무슨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장인걸은 싱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자네 말이 옳군. 한낱 짐작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조금만 기다려 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장인걸은 슬쩍 시선을 돌려 편복대주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쪽에는 쓸 만한 놈이 있다고 하던가?" 장인걸이 말하는 「그쪽」은 팽선 쪽으로 가 있는 제 7대를 말하는 것이었 다. 편복대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쪽에서는 아직까지도 화경급 고수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 하옵 니다." "흐음, 역시 나타난다면 이곳인가?" 장인걸은 좀 더 안력(眼力)을 돋워 칠흑과도 같이 어두운 강물 위를 쏘아 봤다. 과연, 수십 척에 달하는 배들이 살금살금 접근해 오는 것이 보였다. "기대가 되는 도다. 과연 몇 놈이나 올 것인지……. 기왕이면 수라도제가 왔으면 좋겠군. 크흐흐흣." 편복대주는 팽선이 이끄는 세력의 상륙 정보를 듣자마자 곧바로 이것이 놈 을의 계책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잘하면 대어를 낚을 듯한 예감이 들었기에 그는 지체치 않고 장인걸에게 달려갔다. "교주님, 이번에 대어(大漁)를 낚을 수 있을 듯하옵니다." 대어라는 말에 장인걸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대어라고? 그래, 무슨 일인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무림맹에서 파견한 것으로 보이는 상당한 규모의 세력이 홍택호의 상류 쪽에 상륙했다는 정보를 보내왔사옵니다. 회하 강변을 둘러보고 있던 순찰 병들이 그들을 발견했다 하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장인걸은 편복대주에게 질문을 던 졌다. 아무래도 놈들이 노리는 것이 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놈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이지?" 편복대주는 품속에서 널찍한 지도를 꺼내어 장인걸이 잘 볼 수 있도록 펼 쳤다. 그런 다음 그는 상륙 지점에서 적이 움직일 만한 위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들의 행동에 관해 구체적인 보고가 아직 올라오지 않았기에 명확히 단 절할 수는 없사옵니다. 하지만 군사적인 관점에서 유추해 본다면, 현재 저 들이 상륙한 곳에서 움직일 만한 곳은 서주(徐州)외에는 달리 없을 것이옵 니다." 서주는 화북평원의 운송의 중심이자 중요한 상업도시였기에 그곳이 약탈당 하거나 파괴당한다면 금 제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런 말을 듣고도 장인걸은 이해가 안 된다는듯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흐음, 서주라고? 놈들이 그리로 움직여서 뭘 하겠다는 것일꼬?" 만약 장인걸이 진짜 군부의 장수라면 서주를 구하겠다고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인걸은 원래가 뼛속까지 무림인이었다. 지금은 일이 워낙 꼬이다 보니 팔자에도 없는 대원수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군인들의 움직임보다는 무림인의 행동양식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사파라면 혹 모르지만, 정파놈들은 결코 양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를 리가 없다는 점을 말이다. "그렇기에 속하가 군사적인 관점이라고 말씀드린 것이옵니다. 만약 상륙한 대상이 송군이었다면 서주로 직행할 것이 분명하옵니다. 하지만 수하들의 보고대로 이들이 송군이 아니라 무림인들이라면 서주를 공격할 이유가 없습 지요." 편복대주의 말에 장인걸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본좌도 이유를 모르겠구먼. 왜 저들이 저토록 드러나게 행동하는 것인지 말이야. 아무리 허접한 놈들이라도 순찰병 따위에게 발각될 정도라면, 그게 무공을 배운 놈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혹시 송군 놈들이 변복(變服)을 하고 진군하는 것은 아닐까?" "속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즉시 편복대 제14대를 그곳으로 급파했 사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사옵니 다. 그 때문에 수하들의 보고도 받지 않고 교주님께 달려온 것이옵니다." "그래 그것이 뭔가?" "속하의 짐작으로는 이곳이 들통난 것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만……." 편복대주가 가리킨 곳을 본 장인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회하를 건널 군 선들을 건조하고 있는 조선소가 있는 곳. 그곳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장인걸은 노성을 터뜨렸다. "본좌가 그토록 비밀을 유지하는데 만전을 기하라고 재삼 명했건만, 일을 어찌 처리했단 말이냐?" 편복대주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노화를 거두시옵소서, 교주님. 오히려 이것이 하나의 기회가 될수도 있음 이옵니다." 「기회」라는 말에 장인걸의 얼굴에 슬쩍 흥미가 떠올랐다. "기회라니? 무엇이 말이냐?" "저자들이 치려는 것이 조선소가 맞다면, 그곳에 상륙한 것도 무림인이 확 실할 것이옵니다. 송군 떨거지라면 몇만 명이 상륙한다 해도 감히 조선소를 넘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림인이고, 또 조선 소를 넘본다고 가정한다면 한 가지 문제점이 있사옵니다." "뭔가?" "바로 거리이옵니다. 만약 저들이 직접 이곳을 칠 생각이 있었다면, 이렇 게 먼 곳에 상륙하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목표 지점까지의 거리가 400리 에 달하지 않사옵니까? 그자들의 전력이 아무리 뛰어 나다고 해도, 단숨에 치고 들어올 만한 거리는 절대로 아니옵니다." 장인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어딘가 계략이 숨어있다는 말이로구먼." 편복대주는 깊숙이 고개를 숙인 후 대답했다. "예. 속하가 판단하기로는 그것들이 감히 교주님을 상대로 어설픈 성동격 서의 계책을 쓰고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장인걸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편복대주가 펼쳐들고 있는 지도를 살펴본 후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대응책도 마련했겠지?" "예. 전갈을 받자마자 조선소 부근을 은밀히 수색하라고 수하들에게 일러 두기는 했사오나, 보고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일대에 소수의 정예가 치고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속하는 아마도 그 기습조를 지휘하는 자가 최소한 화경급은 될 것이라고 생각했사옵니다. 그 정도는 되 어야만 조선소를 확실하게 파괴할 수 있을 테니 말이옵니다." 편복대주가 아뢰는 계책을 듣고 있는 장인걸의 안색에는 음흉스런 미소가 짙어지고 있었다. "본좌의 생각도 그대와 같도다. 화경급의 고수라……. 크흐흣. 안그래도 놈들에게 뛰어난 고수가 많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잘 되었구나. 이 기회에 몇 놈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장인걸이 이번 작전에 투입한 천마혈검대의 고수는 5개 대. 총인원 40명씩 이나 된다. 대주를 포함한 천마혈검대의 전헤 인원이 81명인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전력을 이곳에 집결시켜 놓은 셈이었다. 그들 중 이천진(李仟振)대 장이 이끄는 제7대, 8명은 팽선 장로가 지휘하는 연합세력이 침입해 온 곳 에 가 있었고, 나머지 4개 대는 이곳에서 장인걸과 함께 대기하고 있는 중 이었다. 이윽고 놈들의 배들이 강가에 접안했고, 수백의 인원들이 앞 다투어 병장 기를 들고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곧 있으면 화경급 고수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장인걸의 심장은 박동수가 조금 빨라졌다. 두근두근. "놈들의 퇴로를 막아라." 조선소 양옆에는 각기 100명씩의 병사들이 작은 배 10척에 나눠 타고는 만 반의 준비를 갖춘 채 출동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인걸의 말은 이들을 출동시켜 퇴로를 막으라는 명령이었던 것이었다. 물론 출동 명령은 불빛이 나 소리 같은 것으 ㄹ신호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적이 모르게 은밀히 움직 여 퇴로를 차단해야 하는 만큼, 그렇게 뻔히 보이는 신호를 줄 수는 없었기 에, 전령이 직접 그들에게 달려가야만 했다. 편복대주가 슬쩍 눈짓으로 신 호를 보내자, 두명의 편복대원들이 각자 맡은 임무대로 매복조를 향해 달려 갔다. 장인걸은 명령을 내린 후, 계속적으로 적들을 살펴봤다. 화경급 고수라 해 도 모든 기척을 숨길 수 있다는 반박귀진(返縛歸眞)의 경지에 들어간 것은 아니기에, 잘 살펴보면 상대가 어느 정도로 뛰어난 고수인지 알아볼 수 있 었다. 하지만 워낙 거리가 멀었기에 극마의 고수인 그라고 해도 상대의 실 력을 한눈에 꿰뚫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일단 공격이 시작된 후, 적들이 반항을 시작해야 화경급 고수가 이 안에 섞여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두운 강위로 20척의 작은 배들이 날쌔게 움직이는 모습이 장인걸의 시야 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즉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제 퇴로가 차단된 이상 놈들은 옴치고 뛸 수 없으니 지닌 실력을 다 발휘하여 이곳을 탈출하 려 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다! 하루아 장군에게 공격 신호를 보내라." "옛. 교주님." 장인걸의 뒤편에 서 있던 제6대장 왕걸이 날카로운 장소성(長騷聲)을 날렸 다. 휘이이익! 그가 분 휘파람에는 강력한 내공이 실려 있어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잠시 후, 저 산 아래쪽에서 「우와아아아!」하는 괴성이 아련히 들려오며 800명 에 달하는 고수들이 적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전 장인걸이 보낸 신호를 들은 하루아 장군이 적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맞춰 강 위에 떠 있는 배들이 일제히 횃불을 밝혀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다. 물론 이것은 적에게 자신들이 있음을 알리려는 의도도 있 었지만, 이렇게 어두워서는 적들을 향해 화살 한발 날리기 힘들기에 주위를 밝히기 위해 횃불을 각 배당 대여섯 개씩이나 밝혀 놓은 것이다. 일단 상대 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드러나자 그들은 각자 활을 꺼내들고 침입자들을 향 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조선소에 침입한 적들은 강쪽으로의 퇴로가 갑자기 막히고, 또 무지막지한 화살 세례가 퍼부어지자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 허둥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때, 하루아 장군이 지휘하는 800명의 고수들이 그들을 덮쳤다.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를 기대어린 눈빛으로 꼼꼼하게 살펴보던 장인걸은 곧이어 허탈한 음성으로 외쳤다. "이럴 수가……. 그토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건만, 쓸 만한 놈은 하 나도 안 왔다는 말인가?" 그 말에 편복대주는 급히 저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래쪽은 너무나도 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교주의 말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편복대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교주는 극마의 고수, 교주가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일 것이다. 편복대주는 급히 부복(俯伏)하고는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으며 사죄했다. "속하가 대세를 잘못 읽어 지고하신 교주님께서 헛걸음하시게 한점 사죄드 리옵니다. 속하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편복대주의 우려와 달리 장인걸은 그리 속 좁은 인물이 아니었다. 장인걸 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작은 부분이 틀렸다고 해서 징죄를 한다면 누가 본좌를 믿고 큰 일을 도모하겠는가? 어찌되었건 자네의 말이 거의 대부분 맞았지 않은가? 그러니 일어서게." "속하의 큰 허물을 이렇듯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니 너무나도 감사 하옵니 다. 교주님." 장인걸은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도 컸던것이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래, 이 대주 쪽은 어떻다고 하던가?" 팽선을 상대하고 있는 제7대의 경우에도 아직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고, 조금씩 미끼를 투입해 가면서 상대편의 전력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 다. 만약 그들 중에 화경급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제7대 혼자서는 상대하기 가 힘들기에, 즉시 전령을 보내오기로 되어있었다. "아직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쪽도 없는 모양이 옵니다." 장인걸은 아쉬운 듯 입맛을 쩍쩍 다시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호랑이는 빠졌더라도 이 정도에서 만족하는 수밖에. 이천 진 대장과 워더리 장군에게 전령을 보내어 더 이상 시간 끌 필요 없이 끝장 내 버리라고 전하게. 이쯤에서 작전을 종료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먼." 워더리 장군은 장인걸의 정예무사 1천과 그 주위에서 끌어 모은 5만에 달 하는 병력을 거느린 채, 공격 명령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워더 리 장군이 거느린 병력으로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천진 대장이 지휘하 는 제7대가 정면에서 공격한다면 그쪽으로 진입해 들어온 무리들도 이곳에 들어온 놈들처럼 전멸을 면키 힘들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교주님." "크흐흐흣. 가소로운 것들. 본좌를 향해 잔머리를 굴리다니……. 단 한 놈 도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음이야." 이렇게 되어 지금까지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여 편복대주가 수립한 조호이 산지계(調虎離山之計)가 막 결실을 거둬들이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 만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던 호랑이가 그물에 걸려들지 않았으니, 말은 그렇 게 했지만 장인걸로서도 내심 아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때, 장인걸의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저 멀리 강 건너편 하늘 위에서 붉 은 불꽃이 번쩍이는 것을 봤던 것이다. 곧이어 그것에 답하듯 그보다 훨씬 더 먼 곳에서 역시 작은 불꽃이 빛났다. 장인걸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꺼져가던 희망이 다시금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호오. 뭔가 또 다른 준비가 있는 모양이군." 장인걸은 다시금 시선을 저 아래쪽의 난장판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크흐흣.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가 되는군. 화경급이라도 뛰어오려나?" 장인걸이 음흉스런 웃음을 토해 내고 있을 때, 갑자기 어둠을 뚫고 녹색 야행복을 입은 사내가 달려왔다. 편복대 소속의 전령이었다. 그는 장인걸을 발견하자마자 땅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외쳤다. "교주님. 이천진 대장님의 전갈이옵니다. 화경급 고수 한 명이 나타났사온 데, 그 처리를 어찌해야 하올지 하명해 주시옵소서." 장인걸의 두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포기했던 꿈이 다시 열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뭣이? 그래, 그놈이 누구라고 하더냐?" "그것까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사옵니다. 턱수염을 아주 길게 기르고 있 는 자이온데, 처음에는 권법을 사용하더니, 잠시 후 떨어져있던 검을 집어 들고 사용했사옵니다." "권법과 검을 사용했다?" 장인걸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수라도제 그 늙은 것은 아닌 모양이군. 어찌되었건 가자. 무슨 일이 있더 라도 그놈만은 필히 죽여야 한다." 막 출발하려던 장인걸이 멈칫 하더니 뒤돌아서서 제8대장. 조대삼(趙大三) 을 호명했다. "조대삼 대장." "옛. 교주님." "이곳에도 혹시 화경급 고수가 출몰할지도 모르니, 자네가 여기에 남아 있 다가 그런 놈이 출현하면 본좌에게 속히 연락을 보내라. 그런 다음 놈을 본 좌가 있는 곳으로 유인해라. 그 뒤는 본좌가 처리하겠노라." "존명." 장인걸은 전력을 다해 경공술을 전개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기에 편복대주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장인 걸이 전력을 다해 경공을 전개하는 것은 그도 처음 봤던 것이다. 곧이어 제6대장 왕걸이 길게 휘파람을 불더니 장인걸의 뒤를 따라 달려갔 고, 다른 대장들도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저 밑에서 따로 대 기하고 있던 천마혈검대원들이 대장들의 뒤를 따라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 가 버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편복대주는 끓어 오르는 자부심에 가슴이 터 질 것만 같았다. 교주의 무공은 극마급이라고 들었으니 엄청나게 대단할 것을 처음부터 짐 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마혈검대원드링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치는 것은 지금 처음 봤던 것이다. 주위의 사람을 압도하는 엄청난 마기(魔氣)를 뿜어 내기에 어느 정도 강할 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 그들 개개인의 실력 이 저 정도일 줄이야. 그들이 달려가는 속도는 결코 교주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빨랐다. 그런 자들이 81명씩이나 교주 휘하에 모여 있는 것이다. '천마혈검대의 모든 고수드링 다 저정도의 실력자들이라면. 교주님께서 중 원을 취하고자 하시는 것도 결코 꿈은 아니야. 아아, 가슴이 끓어오르는구 나. 나는 정말 주인을 잘 만났어.' 옆에 조대삼 대장이 없다면 광소라도 터뜨렸겠지만, 그는 감히 그 앞에서 그런 무례한 짓을 할 수가 없었다. 천마혈검대의 고수들이 뿜어내는 마기는 너무나도 강렬하여 편복대주라 할지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들을 향한 공포감은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복대주는 조대삼 대장을 향해 말을 걸었다. "조대삼 대장님." "왜 그러시오?" "저는 이곳의 일이 다 끝났기에 수하들과 함께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구려. 지금껏 수고가 많았소." "예. 수하 몇을 남겨두고 가겠으니 전령으로 이용하십시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편복대주는 조대삼 대장에게 깊숙이 절을 한 후, 수하들에게 손짓을 하며 돌아갔다. 만통음제는 소연을 찾아 달려가던 중 의문의 고수들을 발견했다. 모두들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는데, 몸에서 뿜어 나오는 짙은 마기만 봐도 마공을 연성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묵향이 이 일대에 투임한 마교단 체는 흑풍대 뿐이었고, 그들은 저렇게 강렬한 마기를 뿜지 않은다. 그렇다 면 저들은 흑살마왕의 수하들임에 분명했다. 관지에게 듣기로는 팽선은 무려 3천에 달하는 고수들을 거느리고 금군을 압박하기 위해 진격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동생은 소연의 목숨이 위험하다 는 말도 했다. 또, 관지는 자신에게 혼자 가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으니 함 께 움직이시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까지 했었다. 그렇다면 동생은, 아니 마 교에서는 장인걸이 팽선의 세력을 격파하기 위해 방대한 전력을 투입했다는 정보를 어디선가 입수했음이 틀림 없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만통음제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8명이나 되는 절정고 수가 수하들도 대동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 다 해도 절대 그들만으로는 3천씩이나 되는 고수를 전멸시킬 수 없다는 것 을 만통음제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 외에도 많은 장인걸의 수하들이 팽선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 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아마 이들은 팽선의 세력을 무찌르기 위한 주 력세력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곳으로 이동하고 있던지, 아니면 그 주력세력 을 이끄는 수뇌부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좋 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지 않은가. 만통음제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그들을 업애 버리기 위해 달려들었다. 1대 8의 싸움.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상대방은 등에서 4척씩이나 되는 핏빛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것을 본 만통음제는 이놈들이 마교에서 흑살마왕과 함께 이탈한 천마혈검대(天魔血劍隊)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천마혈검대는 무림사에 일획을 그을 정도로 막강한 집단이었다. 그들 개개 인의 실력도 무서운 것이었지만, 그들의 진정한 무서움은 그 엄청난 수에 있었다. 일문의 장로급에 해당하는 강자가 101명이나 되는 것이다. 그들이 한꺼번에 진을 짜서 움직이면 설혹 화경급 고수라고 해도 그들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과거 만통음제의 사부는 4천이나 되는 핏빛장검 즉, 천마혈검(天 魔血劍)을 사용하는 마인들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칠 것을 당부했었다. 마교 최강의 단체 천마혈검대를 상대로 혼자 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것과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부가 천마혈검대에 대해 그에게 말해 줄때, 무조건 도망치라고 권한 것 은 천마혈검대의 그 엄청난 숫자 때문이었다. 인간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고 해도, 그 많은 수를 혼자서는 절대로 감당할 수가 없다고 사부는 생각했 던 것이다. 하지만 만통음제는 지금 사부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 었다. 만통음제가 생각하기에 천마혈검대 전체라면 응당 사부의 뜻을 좇아 도망 치는 것이 옳겠지만, 그들 중 8명이라면 한번 해 볼 만한 것이다. 아니, 자 신의 먹잇감으로 딱 좋은 숫자에 불과했다. 만통음제는 그들을 빠른 시간 안에 없애 버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아야만 했다. 그놈들은 그로서도 처음 보는 아주 특이한 진(陳)을 짜서 대항하고 있었기에 상대하 기가 조금 까다로웠던 것이다. 1시진 정도 싸우고 나자 만통음제는 상대가 시전하고 있는 진법에 점차 익 숙해지기 시작했다. 명호에 만박통지(萬博通知) 즉 만통(萬通)이라는 글자 가 들어가는 그다. 진법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이 있는 그에게 그 정도 시간 여유를 준다면 파훼까지는 힘들더라도 그 특성 정도는 파악하게 될 것은 분 명한 사실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만통음제가 서서히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 허점을 파고드 는 만통음제의 예리한 공격에 상대가 조금씩 손해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들은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상대가 불가 능함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흥! 그런다고 순순히 보내줄 것 같으냐?" 등을 보인 순간, 저들의 단결된 방어력은 일순간 무너졌다. 그 틈을 놓칠 만통음제가 아니었다. 순간의 틈을 이용하여 만통음제의 양손에서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두 줄기의 강기가 날아갔다. 화경의 고수가 발출한 것인 만 큼 그것은 엄청난 파괴력을 내재하고 있었다. 목표물로 찍힌 둘은 재빨리 방향을 틀었지만, 뒤쫓아 오는 강기다발도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순식간에 각도를 꺾으며 따라붙었다. 퍼펑! "크윽!" "으악!" 심장 부근을 관통당한 것이다. 볼 것도 없이 즉사였다. 두 놈이 땅 바닥에 나뒹굴고 있을 때. 만통음제는 이미 공격을 가한 놈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두 번째 먹이를 향해 지금까지 품속에 숨겨두고 있던 혈영비를 날렸다 . 혈영비는 저녁노을처럼 붉은 광채를 뿜으며 날아갔다. 검을 사용하는 무 공의 마지막 경지라는 어검술(御劍術)이었다. 날카로운 파공성을 흘리며 날아간 만통음제의 검에 다시금 세 명의 적이 땅바닥에 쓰러졌고, 그때 만통음제의 몸은 어느새 다른 적들을 따라 전력으 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화경을 깨달은 자들이나 할 수 있을 법한 기민하기 그지없는 몸놀림이었다. "이제 세 놈 남은 건가?" 이때 갑자기 만통음제는 자신을 덮쳐오는 강렬한 기운을 느꼈다. "허억!" '뒤로 간 놈이 있었나? 아냐! 그럴 리가, 그쪽으로 간 놈은 몽땅 다 죽였 는데." 그는 재빨리 몸을 틀어 뒤에서 가해진 기습 공격을 전력을 다해 막았다. 그의 손이 기이한 각도를 그리며 움직이며 두터운 강기의 벽을 쌓았다. 퍼펑! 공격은 하나가 아니었다. 무려 다섯 줄기나 되는 강기의 다발들. 아마도 어검술을 쓰면 파공성이 흘러나오기에 좀 더 공력 소모가 크더라도 은밀한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강기를 날린 모양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기습 공격에 만통음제는 크게 낭패를 당할 뻔 했지만, 화경의 고수답게 아무런 피해 없 이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때, 만통음제의 시선에 이미 죽어서 쓰러져 잇어야 할 다섯 놈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놈도 안 죽었잖아. 이게 어찌된……." 만통음제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맞다. 귀혼강신대법(歸魂彊身大法)! 저놈들도 그걸 익혔구나. 하기야 장 인걸과 함께 마교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20여 년인데, 저놈들이 그걸 안 익 혔을 리가 없지.' 수라도제와 패력검제, 황룡무제가 일차적으로 흑살마왕 패거리와 일전을 벌인 후. 그 황당함에 대하여 떠들어댄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그런 희 한한 무공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직접 당해보니 이 시대 최강 자들인 그들이 그토록 당황했던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심장을 바숴 버 렸는데도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인간이 있다니. 정말 경악감을 감추기 힘들었던 것이다.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과 꼭 싸워야 할까?' 하지만 이건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저런 강시 같은 놈들은 기회가 있을 때 보이는 족족 없애 버리는 것이 상 책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있을 때가 최적의 기회라 고 할 수 있었다. "가만있자, 머리통만 박살내면 된다고 했나? 그렇다면 이것 더이 이상 필 요 없겠군." 만통음제는 혈영비를 다시금 품속에 집어넣은 후,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오늘 노부를 만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7. 질주(疾走)하는 고수들 흔히 모든 성들이 그렇듯, 양양성에도 먼 지점을 살펴보기 위해 설치해 둔 망루(望樓)가 몇 개 있다. 망루는 그것을 만드는 목적상 사방이 뻥 뚫린 곳 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높이 또한 높다. 그렇기에 겨울철 망루에 올라가는 초병(哨兵)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지금 처럼 밤이 되면 그 고생은 더욱 배가된다. 살을 에는 찬바람이 곧바로 휘몰 아치며 뼛속까지 얼려놓기 때문이다. "으으윽! 오늘은 어제보다 더 추운 것 같은데?" 다른 초병도 조금이라도 추위를 쫓아보고자 발을 동동 구르며 맞장구를 쳤 다. "그러게 말일세. 하지만 봄도 멀지 않았으니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런데 저 사람은 춥지도 않나? 이 한밤중에 뭐가 보인다고 저러고 있는 지……." 그 말에 다른 초병의 시선도 슬쩍 한족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이정도 추 위는 추위도 아니라는 듯 부동자세로 서서 한족을 응시하고 있는 무사가 보 였다. 망루에 올라 온지 1시진이 다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자세는 처 음과 변화가 없었다. 간혹가다 깜짝이고 있는 그의 눈이, 눈뜬 채로 서서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역시 황군 소속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쉿. 목소리가 크네. 여기서 같이 보초를 서고 있지만 높으신 나으리니까 언행을 조심하라고 박 군관이 당부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우리를 못 믿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직접 보초를 올려 보내다 니……. 여기 와 있는 무림인들도 그러지는 않는데, 너무 심한거 아닌가?" "글쎄 말일세. 하지만 자기들이 본다고 뭐 달라지는게 있겠나? 며칠 지나 지 않아 그만두겠지." 초병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상대를 힐끔 바라 본 후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 렸다. "젠장! 저것들 때문에 졸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짓인지 원……." 이때, 갑자기 저쪽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무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망루 밑으로 뛰어내리더니 어딘가로 쏜살같이 달려가 버렸다. 그리 고 남은 두 명의 초병들은 너무 놀라서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허억! 여, 여기에서 밑으로 뛰어내리다니……." 그들은 저 아래쪽으로 까마득히 애려다 보이는 등불을 보며 경악감을 감추 지 못했다. 이미 묵향은 수하들을 통해 서문길이 팽선 장로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보고 를 들은 상태였다. 서문세가가 차지하고 있는 무림에서의 위치로 봤을 때, 팽선은 결코 그 요청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만큼 팽선의 퇴각 명령 을 받은 천지문은 며칠 내로 양양성으로 돌아 올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일을 제대로 처리해 놓았음을 스스로 흐믁해 하며 묵향은 수하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홍택호 수군사령인 한세충 상장군이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고 합니다. 흑풍대의 규모가 워낙 큰지라 수군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도강을 완료하 는 데는 적어도 이틀은 걸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틀이라……." 잠시 궁리하던 묵향은 보고를 올리고 있던 마화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님의 동향에 대해서 올라온 보고는 없나?" "현재 알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는 단독 행동을 하고 계신다는 것 정도입 니다. 관지 장로는 그분께서 다급히 홀로 떠나셨다고 하셨고, 또 무영문에 서 보내온 보고도 그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어떤 고수가 엄청난 속도로 경공술을 펼치며 질주하는 것을 포착했지만, 그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는 연락을 보내왔으니까요. 그들로서는 그분의 뒤를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 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형님은 왜 혼자 달려간 거지? 알 수 가 없구먼. 그러다가 괜히 장인걸한테 걸리면 험한 꼴 당할 가능성이 큰데 ……. 하기야 형님 실력도 상당하니 큰일이야 있겠나?" 워낙 자신이 두서없이 설명한 탓에 만통음제가 그곳으로 급히 달려간 것은 생각지도 않고, 묵향은 그의 경솔함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서 궁시렁 거리던 묵향은 다시금 마화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천지문은 언제쯤 퇴각해 올 것으로 생각하나?" "일단 서문세가에서 명령서를 팽선에게 보낸 만큼, 그쪽에서 천지문으로 퇴각 명령을 하달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안겠습니까? 조금 기다려 보시 면 결과가 나올 겁니다." 이때, 문을 벌컥 열고 제7대장 차임(車林)이 뛰어 들어왔다. 그가 소연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양양성까지 연결되어 있는 연락망을 맡고있었다. "교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보, 봉화가 올랐습니다." "봉화가?" 그 봉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던 묵향은 마화를 향해 물었 다. "마화! 봉화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마화는 창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관지 장로께서 출진하시기 전에 천지문과 양양성 간에 구축해 놓은 연락 망입니다. 봉화가 올랐다는 것은 작전이 예정대로 실행되었다는 뜻이며, 강 건너편에서 무엇인가 변괴가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묵향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되물었다. "변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강 반대편에서 크게 접전이 벌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적의 함정에 빠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죠."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었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은, 장인걸이 이미 눈치 를 채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고 기다렸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에는 필히 장인걸이 대기 중이리라. 묵향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며 마화에게 명령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 봐야겠다." 묵향은 마화의 말은 듣지도 않고 엄청난 속도로 문을 박차고 달려가 버렸 다. 그런 묵향의 뒤를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마화는 힘없는 목소리 로 중얼거렸다. "서로 간의 거리는 거의 1200여리.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이미 늦었을 거에요." 어느새 마화의 턱밑으로는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 그분께서 얼마나 상심하실까……." "이봐, 마화. 그렇게 큰일이 났다면 철영 부교주한테 연락을 넣는 것이 좋 지 않을까?" 마화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맞다. 묵향도 그렇지만 마 화도 소연의 목숨과 연관지어 너무 큰 심적 부담을 받다 보니 철영 부교주 가 마교의 주력을 이끌고 대별산맥에서 대기 중임을 깜짝 잊은 것이다. "참, 철영 부교주가 있었지. 나는 철영 부교주에게 갈 테니까 뒷일을 부탁 해." "뒷일이라고 해 봐야 뭐 처리할 게 있나? 여기에는 더 이상 병력도 뭐도 남아 있는 게 없는데 말이야." 마화는 급히 밖으로 달려가 자신의 애마에 올라탔다. 대별산맥 부근에 도 착할 때까지는 말을 타고 달려가는 것이 훨씬 빠를 테니까. 남방의 비옥한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양성을 차지해야만 했 다. 결정적인 군사적 요충지인 만큼 과거부터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던 곳이 다 보니, 천혜의 험지를 끼고 있는 난공불락의 성채, 양양성이 건설된 것이 다. 3장에 달할 정도로 드높은 성벽 위에 선 조령은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야경(夜景)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밤바람이 찹니다." 무뚝뚝한 음성이었지만, 그 밑에는 조령에 대한 따뜻한 정이 듬뿍 배여 있 었다. "아아.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답지?" "주위를 한눈에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 축조된 성인 만큼, 경치가 좋을 게 당연하지 안겠습니까?" "조금만 더 여기에 있을래." "밤바람이 찹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수련도 빼먹으시고 여기서 이러고 계신 것을 알면 패력검제 영감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패력검제 영감에게 그 토록 무공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쟈타르의 지적에 조령은 작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투덜거렸다. "쳇! 그게 무슨 지도해 주는 거야? 그런 대단한 고수라면 뭔가 엄청난 무 공이라도 가르쳐 줄 줄 알았는데……." 조령을 바라보는 쟈타르의 무표정한 얼굴에 순간 따뜻한 미소가 어렸다. 이 주인을 모신지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고, 그러다 보니 그녀의 장점과 단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사실 고수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탄탄 한 기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곧바로 그것을 파악한 패력검제는 재미없는 기본기를 계속적으로 수련시켰고, 조령은 그것에 따분해 하고 있는 중이었 다. 하지만 쟈타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있어서 강력한 무공은 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쟈타르의 생각이었으니까. 이때, 저쪽에서 패력검제가 그의 아들 서량을 대동하고 어슬렁거리며 걸어 오는 것이 보였다.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쟈타르는 즉시 그를 알아보고 인 사를 건넸지만, 저 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야경에 매혹되어 있던 조령은 패 력검제가 다가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허어, 지금은 연공(내공 수련)할 시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서 야경을 구경하고 있었구먼." 이제야 패력검제의 등장을 눈치 챈 조령이 서당에 가지 않고 놀고 있다가 스승에게 들킨 철부지 아이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옆에 서 있던 쟈타르가 급히 고개를 숙여 철없는 주인 대신 사과했다. "송구스럽습니다. 패력검제 대협." "자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다네. 자네는 저 아이의 말을 거스를 수 없는 입 장일 테니 말이야. 그건 그렇고, 정말 경치가 좋구먼. 잡다한 것은 다 잊어 버릴 만도 하겠어." 그 말에 조령은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지금이라도……." "아니. 됐느니. 수련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고, 여기서 먼저 마음을 씻 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성벽 밑을 내려다보며, 패력검제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들으라는 듯 중얼 거렸다. "세월이 흐르다보면 언젠가는 고수가 되겠지만, 고수가 되기 전에 먼저 마 음가짐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지. 량아, 네 생각은 어떻느냐?" 갑자기 아버지가 왜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서량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배운 대로 정석적인 대답을 했다. "강절소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들음이 고용하여 소리가 없으니 푸 르고 푸른데 어느 곳에서 찾겠는가. 높지 아니하고 또한 멀지 아니하다. 다 만 모두 사람의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만큼 선인의 지혜를 본받 아 각자 마음의 수련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명문의 후계자답게 글공부도 착실히 한 모양이다. 아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패력검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좋은 대답이다. 세상만사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무 공이 높다는 것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이냐. 촌부들의 눈에는 저 아이 정 도만 되어도 대단한 고수로 비칠 것이다. 그런 만큼 상대적인 잣대인 남의 이목에 신경쓰지 말고, 천천히 단계를 밟아 꾸준히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야 하겠지. 그렇지 않고 과욕을 부린다면 오히려 아니 익힌 것만 못한 사태를 밟게 되는 것이니." 이때,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서량의 표정에 먼저 변화가 찾아왔다. 억 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양새를 보고서야 조령은 패 력검제가 은근히 자신을 질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었다. 뭔가 현묘한 대화가 오가며 깊은 가르침이라도 있는가 해서 귀 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자신의 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니…. '이런 쪼잔한 영감 같으니라구. 처음에는 괜찮다고 해 놓고, 계속 그 부분 을 물고 늘어지면서 은근히 욕을 해대다니……." 조령은 마음이 상했지만 뭐라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이치에는 맞는 것 같 았기에 뭐라고 꼭 꼬집어 반론을 제기할 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패력검제가 휙 뒤로 돌아섰다. 그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모두 들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을 때,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 다. 엄청난 파공성을 흘리며 누군가가 성벽 위로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허억! 저, 저게 사람이라는 말인가?" 십여 장을 도약하여 단숨에 성벽을 뛰어넘은 괴한은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패력검제는 서량에게 지 시했다. "나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겠다. 뒷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거라." "아버지,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패력검제는 단호한 표정으로 암흑 속에 가려져 있는 성벽 아래로 몸을 날 리며 말했다. "저 정도 속도라면 아마도 교주는 지금 자신이 지닌 전력을 다해서 경공을 펼치는 것일 게다. 지금껏 교주가 전력으로 경공을 펼친 적이 없었던 만큼 무슨 큰일이 있는 듯하구나." 패력검제의 모습은 어둠에 완전히 가려져 있어 저 밑에 서 있는 것인지, 아니면 교주가 간 방향으로 이미 치달려가고 있는 중인지 전혀 알 수가 없 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의 목소리 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 나지막하면서도 또렷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조령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보다 훨씬 고수들인 쟈타르나 서량은 패력검제 가 성 밑에 착지하는 순간 맹렬한 속도로 달려갔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에 그들은 방금 전에 들려온 패력검제의 지시가 보통 수준의 무예로는 구현 하기 힘든 것을 잘 알고 경외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조령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 이다. 그녀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교주? 그렇다면 방금 전의 그 사람이 교주라는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서량은 친절하게 대답해 줬다. "그런 모양입니다. 조 소저." "사람이 저렇게 날아갈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어요." "조 소저께서는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각 문파에는 단숨에 높은 곳까지 도약할 수 있는 신법이 하나 정도는 있습니다." "혹시 그것도 문외불출(門外不出)의 비전(秘傳)인가요?" "뭐, 비전이랄 것까지도 없습니다. 겉모습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그 근본은 똑같으니까요. 근력을 뒷받침하는 것이 내공이 아닙니까? 목표한 곳으로 뛰 어오르며, 근력에 더해 내공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요령이지요. 강력한 내 공의 뒷받침만 있다면, 3장에 달하는 성벽쯤은 손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강력한 내공의 뒷받침」이라는 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던 모양이 지만, 조령은 희망을 잃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저… 저도 가능할까요?" 그 말에 서량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조령에게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참새보고 단숨에 천 리를 날아가라는 말과 똑같았으니까. "아마 그건 좀……." "그렇다면 서 소협께서는 그게 가능하세요?" "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가능할 겁니다." 서량이 어느 정도 실력의 고수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는 조령이었다. 그런 그가 겨우 가능할 정도라면, 자신은 언제쯤에나 그걸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한숨만 나오는 조령이었다. 패력검제는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교주와의 거리 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서로 간의 거리는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오로지 그가 교주를 추격할 수 있는 단서는 저 앞에서 느껴지고 있 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상대도 전력을 다하고 있는 만 큼, 그 기척은 눈을감고도 알아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파악되고 있었다. "정말 지독히도 빠르구나." 묵향은 황룡무제와 만통음제만으로도 충분할 것으로 판단하고, 패력검제에 게는 아무런 도움도 청하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지금 묵향이 무 슨 일로, 어디를 급히 달려가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패력검 제는 교주가 그토록 급히 가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서 뒤쫓아 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력 질주가 2각 이상 지속되자 제아무리 화경급 고수 인 패력검제라고 해도 슬슬 무리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판단대로라 면 그때 그는 이 쓸모없는 추격전을 단념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슬슬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한 패력검제는 이를 악물고 추격을 계속 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꼭 서로 간에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그냥 물러선다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공에도 한참 밀리지만, 경공술까지 뒤처진다는 것을 그는 도처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과거 사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경공술이 뛰어나다는 점 하나였다. 그 때문에 그는 화경에 오른 후에도 지 속적으로 경공술을 갈고닦았다. 그렇기에 그는 상대가 자신보다 한 단계 높 은 경지를 개척했다고 할지라도 결코 경공에서 만큼은 뒤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익! 저놈도 사람일 테니 지칠 때가 오겠지. 아니, 저놈도 나처럼 악착 같이 달리고 있을게야. 암. 그렇고 말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고, 공력 또한 차츰 고갈되어 가고 있 었다. 하지만 패력검제는 그것을 무시했다. 저 앞쪽으로 시커먼 물결이 출렁이는 넓은 강이 나타났다. 워낙 전속력으 로 달려가고 있는 만큼 그가 앞쪽에 강이 있음을 인지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강은 그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속력을 줄이 지 않았다. 패력검제는 등평도수의 경공술을 이용하여 놀라운 속도로 강물 위를 내달 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장면을 조령이 봤다면 기절초풍할만큼 놀랐을지 도 모르지만, 그는 그런 잡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내달리기 시작한지 이제 1시진이 다되어가는 것이다.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를 개척한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호흡은 이미 하수들의 그것마냥 거칠어 진지 오래였다. "헉헉! 질 수 없다. 질 수 없어. 헉헉! 사부님의 이름을 걸고… 결코… 질 수 없음이야." 처음보다는 그 속도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패력검제의 신형은 엄청난 속도로 어둠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달려가는 그의 입속은 바짝바짝 말라 들어가다 못해, 단내까지 풍기고 있었다. 8. 악전고투(惡戰苦鬪) 장인걸 등은 편복대의 도움을받아 화경급 고수가 발견된 곳으로 달려갔다. 상대의 정체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의 위치가 포착된 이상 확 실하게 없애 버려야만 했다. 현재 그는 상대편에 화경급 고수 3명이 있다고 알고 있었다. 일전의 격돌을 통해 화경급 3명에서 둘러싸여 곤욕을 치른 경 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신검합일급 고수는 천마혈검대의 존재로 인해 그 수가 적들에 비해 우월하면 우월했지, 결코 상대방에 비해 모자란다고 생각하지 는 않았다. 하지만 그윗단계로 올라가면 절대적으로 이쪽이 밀리는 것이다. 장인걸 혼자서 상대편 셋을 상대하기는 너무나도 벅찼다. 전에는 운이 좋아 서 살아서 나왔지만, 다음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번 기회에 한 명이라도 상대편 화경급 고수의 수를 줄여야만 했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자신을 향해 부복하는 편복대 대원을 향해 장인걸은 서둘러 외쳤다. "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옛. 지시받은 대로 이천진 대장께서 그를 상대하고 계시옵니다." "그렇다면 아직 그놈을 놓치지 않은 모양이로군. 크흐흐흑. 하늘이 본좌를 돕는도다." 장인걸은 자신을 따라온 천마혈검대원들을 둘러본 후 말했다. '제6대만 본좌를 따라오고, 나머지는 이곳에서 대기해라." 그 말에 제6대장 왕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상대는 화경급 고수. 아 무리 교주께서 친히 나서신다고 하지만, 전력을 다하지 않는 이상 놈을 처 치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만큼 상대의 실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 상 황에서 2개 대를 이곳에 남겨 둔다니. 그러고도 놈을 없앨 수 있을까? 하지 만 그는 자신의 의문을 교주에게 말하지 않았다. 상명하복(上命下服). 윗사 람의 명령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 마교의 율법이었으니까. 그는 애써 교주에게 어떤 계책이 있으니까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일 거라고 자위(自慰 )하고 있었다. 장인걸은 야행복 속에 들어 있는 복면을 꺼내어 뒤집어쓰며 제6대의 대원들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복면을 써라." 제6대 대원들이 복면을 착용하고 있을 때, 장인걸은 제9대장 진각(陳慤)에 게 말했다. "진각 대장, 자네 검을 빌릴까? 어차피 여기서는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9대장 진작은 등에 매고 있던 장검을 검집째 풀 어 장인걸에게 바쳤다. 장인걸은 다른 천마혈검대 고수들처럼 천마혈검을 등에 메며 지시했다. "본좌가 신호를 보내면 곧바로 달려와라. 추호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장인걸의 명령에 제9, 10대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낮지만 힘있게 외쳤다. "존명!" "가자." 모두들 똑같은 복색이었고, 거기에 복면까지 뒤집어쓰니 겉모습만으로 그 들 중에서 누가 장인걸인지 찾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극마의 특징인 마기를 완벽하게 감출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다면 그를 찾아 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것으로도 장인걸의 기척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 능했다. 왜냐하면 장인걸은 복면을 뒤집어씀과 동시에 지금껏 억누르고 있 던 마기의 일부를 개방하여 동행하는 천마혈검대원들과 똑같은 수준의 마기 를 흘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상태에서는 그보다 월등 하게 뛰어난 고수인 묵향 정도나 되어야 그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보다 수 준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이 모두 다 천마혈검대원들인 줄 착각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장인걸이 난투장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머리통만이 박살 나거 죽은 일곱 구의 시체였다. 그리고 웬 화경의 고수가 마지막으로 살아 남은 한 놈까지 마저 없애 버리기 위해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추격전을 벌 이고 있는 중이었다. '과연 화경급 고수. 적잖은 피해를 보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 은 몰랐군. 모두들 대법을 극성까지 익히고 있기에 대부분 상아 있을 것이 라고 생각했건만……." 수하들에게 이 정도 피해를 입힌 것만 봐도 확실한 화경급 고수였다. 순간 , 장인걸의 입가에 살기어린 미소가 감돈다. 장인걸은 등 뒤에서 천마혈검 을 뽑아들어 상대를 겨누며 싸늘한 어조로 외쳤다. "쳐랏!" "우와아아!" 장인걸의 명령에 따라 흑의복면을 한 수하들이 불꽃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 방처럼 만통음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만통음제는 결코 피하지 않았 다. 오히려 아홉씩이나 되는 새로운 먹잇감이 나타난 것을 내심 좋아하고 있었다. 놈들의 실력은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다. 놈들이 사용할 무공부터 시작해서 진법, 거기에다가 귀혼강신대법의 대응책까지 알고 있으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역시 그들과 부딪친 결과는 만통음제의 예상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방금 전 여덟 놈을 상대할 때와 똑같은 검술과 진법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이상 이제 천천히 놈들의 힘을 빼놓고, 그다음에 술래잡기만 하면 이놈들도 머지 않아 처음에 덤벼들었던 그놈들처럼 시체로 화할 것이 분명했다. 방금 전까지 만통음제의 공격을 피해 죽자고 도망다니던 그놈도 새로운 지 원군의 합류에 힘을 얻었는지 곧장 그들과 가세하여 만통음제를 공격해 왔 다. 만통음제로서는 가소로운 일이었다.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 그때를 놓 치지 않고 도망쳤다면 목숨만은 건졌을 텐데……. 한동안 정신없는 공방전이 서로 간에 또다시 전개되었다. 바로 이때, 만통 음제가 예상도 하지 못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뒤쪽에서 가해진 공격을 포착 한 만통음제는 재빨리 뒤로 돌아서며 그에 대한 방어를 했다. 장기전을 각 오해야 하는 만큼, 공력을 아끼기 위해 적당한 수준으로 만통음제가 응대한 것이 탈이었다. 상대의 공격이 그의 방어막을 꿰뚫고 들어왔던 것이다. 퍼억! "크윽! 이…. 이럴 수가?" 호신강기 덕분에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만통음제는 이놈들중에 다른 놈들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한 놈이 숨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 렇다면 아주 힘든 싸움이 될지도……. 이때, 방금 전에 자신을 향해 일격을 날린 놈이 뒤쪽으로 슬쩍 빠지더니 날카로운 신호음을 토해 냈다.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것으로 미루어 어쩌 면 이들 외에 매복하고 있는 고수들이 더 있는 모양이다. 만통음제는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기회는 지금뿐일지도 모른다. 더 많은 적들이 도착한 후라면 아예 탈출조차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바로 저쪽에서 응원세력을 불 러들이기 위해 웅혼한 공격이 실린 장소성(長嘯聲)을 날리고 있는 놈은 결 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만통음제는 그것을 행동에 옮겼다. 그는 순식간에 자신이 지닌 공력을 모두 끌어모아 패도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적의 고수 둘을 해치웠을 때, 그의 뒤에서 또 다시 예의 그 특이 한 느낌의 장력이 날아옴을 느꼈다. 피할 시간 여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뒤 돌아서서 그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러고있는 사이 방금 전 자심의 무리 한 공격으로 뚫어 놓은 탈출로가 막힐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뒤쪽으로 공력을 모아 적의 공격에 대비하며 만통음제는 무작정 치달렸다. 펑! "크윽!"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모아 대비했건만, 내장을 뒤흔들 정도의 강력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그는 뒤에서 가해진 충격까지 더 하여 더울 빨 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크흐흐. 제아무리 화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본좌의 흑살마장에 격중된 이 상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야." 이때, 제7대장 이천진이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교주님께서 맡기신 수하들을 모두 잃어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속하의 죄 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장인걸은 오히려 이천진 대장을 부드러운 어조로 격려했다. "자네가 무슨 죄를 지은 것이 있겠는가? 오히려 본좌의 무리한 명령을 이 행하느라 수고한 것에 치하는 못할망정, 무슨 죄를 용서한다는 말인가. 본 좌가 올 때까지 그놈을 잡아두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정말 수고가 많았다." "감사하옵니다. 교주님." "자네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제9, 10대가 도착하면 그들을 본좌에게 로 인도하라." 장인걸은 등에 지고 있던 검집을 끌어 제7대장 이천진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진각 대장에게 전해 주게." "옛." "그럼. 가자." 장인걸은 제6대를 이끌고 만통음제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달려갔다. 방금 전까지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마교놈을 잡느라고 동분서주했었던 만통 음제는 이제 거꾸로 자신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물론 화경급 고수인 그를 추격할 수 있는 자들은 최소한 그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은 되 어야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극 심한 부상을 당한 상태였던 것이다. 처음 그가 탈출할 때만 해도 상처는 그리 심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 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상처가 악화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러려니 했었는데, 상처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점차 증대되자 만통음 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때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과거 그의 사부께서는 마교에서 내려오는 패도적인 마공들에 어떤것이 있 는지 가르쳐 준 적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이 바로 흑살마장 이었다. 흑살마장은 마교가 만들어낸 독성(毒性)을 이용한 장법 중 가장 궁 극적인 형태를 띈 무공이었다. 일반적인 독공들의 경우 그 바탕이 되는 독 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결국 체내에 침투한 것만 없애 버릴 수 있다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흑살마장은 그런 법칙을 깬 무공이기에 독공의 궁극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흑살마장의 무서움은 그 독기가 상대의 체내에 침투하여 조직을 파괴하고 썩게 만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썩어 들어가는 조직에서 새로운 독기 를 만든다는 데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적은 분량의 독기가 침투하더라도 결국 상대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흑살마장은 그것이 지닌 위력만큼이나 익히기가 매우 까다로운 마 공이었다. 장력의 사거리가 짧은 것이야 독공들이 지니는 공통적인 특징이 었지만, 흑살마장은 거기에 더해서 발출하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아주 길었 다. 고수들 간의 싸움은 시간과의 싸움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장심에 독 기를 모은다고 낑낑거리고 있다가는 칼맞아 죽기 십상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과거에는 흑살마장을 익히기만 까다로울 뿐, 고수들을 상대로 는 별 효과도 내지 못하는 엽기적인 독공 정도로만 치부되어 왔었다. 하지 만 장인걸이 그것을 극성까지 익혀 그 엄청난 살상능력을 과시한 이후, 흑 살마장이야 말로 마교의 장법을 대표하는 가장 극악무도한 마공으로 인정받 게 되었다. 그리고 장인걸은 그날 이후 흑살마왕으로 불리고 있었다. 왜 사부님께 배운 것이 지금에야 떠오르는 것인지 머리통을 쥐어 뜯고 싶 어지는 만통음제였다. 생각이 나려면 그 전에 날 것이지. "젠장. 그때 재빨리 응급조치를 취하고, 독기가 퍼지지 않도록 내공으로 억눌렀어야 했거늘. 상대가 장인걸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걸 놓치고 말았구 나." 지금이라도 늦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몇 군데 혈도를 점한 후, 내공을 이 용하여 독기를 억눌렀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응급조치에 불과했다. 어딘가 에 숨어들어가서 흑살마장의 독기를 뽑아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더 상처가 악화되어 결국에는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을 지경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뒤에서 적들이 쫓아오는데, 어디에 숨어들어가서 운기조식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부상을 당한 상태라 그런지 평상시 달리던 것에 비해 속도 도 많이 떨어졌다. 더군다나 전력으로 경공술을 전개하는 것만도 벅찬 일이 었기에, 독기를 완벽하게 억누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것 을 틈타 독기가 조금씩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 다. 만통음제는 저들과의 거리가 조금 떨어지자 곧장 방향을 남쪽으로 틀었다. 팽선 일행이 있는 곳으로 저들을 끌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에게 조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3천씩이나 되는 고 수라면, 저들을 상대로 약간의 시간 정도는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은 어딘가에 숨어 조금이나마 상처를 치료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질녀였다. 질녀가 그곳에 없다면 모르되.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저런 엄청난 적들을 끌고 그곳으로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잘못하 면 질녀의 생명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으니 말이다. 회하의 드넓은 수면이 모습을 드러내자, 만통음제는 이것말 잘 이용해도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통음제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재빨리 강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몽은 극상승의 경공술을 선보이 며 그 넓은 회하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가기 시작했다. "미꾸라지 같은 놈. 도망치는 것 하나는 타고난 것 같구나.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모양이군. 크흐흣." 천마혈검대의 대원 중에는 이토록 넓은 강을 단숨에 건널 만한 실력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들 흩어져서 자신의 몸무게를 조금이라도 분산시키기 위해 발바닥에 널찍한 나무판을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시간 동안 생쥐 같은 놈은 좀 더 멀리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통음 제를 잡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 분명 한데, 왜 장인걸은 미소를 짓고 있을 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천마혈검대 같은 절정급 고수들조차도 단숨에 건널 수 없을 정도로 회하의 폭은 넓었다. 그런 곳을 성한 몸도 아닌 상태에서 단숨에 건너려면 필히 몸에 무리가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흑살 마장의 독기가 더욱 몸속 깊이 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마 이 강을 건넌 후쯤 되면 저놈의 상처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을 다 알면서도 장인걸은 그 혼자 단독으로 추격전을 감행하지 않 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부상을 당했다고 해도 상대는 화경급 고수였다. 자 신의 몸이 아무리 귀혼강신대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 해도, 불사의 몸은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추격하여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게 방해만 해도 놈은 필사(必死)였다. 그걸 뻔히 알면서, 괜한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다고 장 인걸은 판단했던 것이다. "자, 모두들 준비되었으면 가자." 장인걸이 앞장서서 등평도수의 경공술을 이용하여 달려 나갔고, 그의 수하 들은 발바닥에 붙인 넓은 나무판의 힘을 빌려 물 위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만통음제는 강 건너편에서 기다렸다. 기회는 한 번 뿐. 놈이 수하들과 떨 어져서 혼자 강을 먼저 건너왔을 때뿐이었다. 수하들이 도착하기 전에 저놈 만 어떻게 없애 버릴 수 있다면, 겨우 8명밖에 안 되는 천마혈검대쯤은 충 분히 따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저놈은 그토록 압도적인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행동하지 않고, 수하들을 대동하고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욕설이 절로 나올 수밖 에 없었다. "이런 비겁한 새끼! 너 같은 놈은 무인도 아니야. 사내놈이 그렇게 간덩이 가 작다니." 만통음제는 장인걸이 수하들을 대동하고 강을 건너오는 것을 보고, 더 이 상 미련을 가지지 않고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그곳에 있어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에. * * * 조선소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는 처음 잠시 동안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치 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침입자들이 서 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장인걸이 동원한 고수들이 숫자도 많았지만, 질적으 로도 천지문도들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모두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에, 조선소 일대는 각종 병장 기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살기 또한 하늘을 찌를 듯 진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인물들 중 유독 여덟 명만은 따분 한 듯한 표정으로 간혹 하품까지 해대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이들의 눈에는 이 치열한 격정이 오히려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 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은 천마혈검대라는 무적의 단체에 소속된 고수들 이었다. 여기서 싸우고 있는 놈들과는 그 차원이 다른 강자들인 것이다. 제 8대장 조대삼은 조선소에 침입한 적을을 격퇴하라는 교주의 명령을 받았지 만, 전혀 흥이 나지 않는 상태였다. 이곳에 동원된 방어 병력은 무려 천명. 모두 다 마공을 수련한 제법 쓸 만한 고수들이었다. 이들만 동원해도 적을 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는데. 굳이 자신들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까지 쓸 필요가 없듯이 천마혈검대가 이곳에서 할 일은 하나 도 없다고 생각한 조대삼 대장은 수하들과 함께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이나 하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모든것이 조대삼 대장의 예상대로였다. 실력은 물론이고. 숫자까지 이쪽에서 적들을 압도하다 보니 사방에서 죽어 나가는 놈들은 다 침입자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그의 눈에 상당한 실력의 계집과 사 내놈이 포착되었다. "큭큭큭. 제법이로군." 마교도들과 달리 정파의 인물들은 그 기척을 읽기가 어려워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 두 연놈은 특히나 그 기척을 철저하게 감추고 있어서, 수하 몇을 잃고 난 후에야 그들의 실력을 알아본 것이다. 그냥 놔둬도 결국은 이길 것이 분명했지만, 괜히 부하들을 희생시 킬 이유는 없었다. "이런 철통같은 곳을 기습하는데, 아무려면 저 정도는 되는 것들이 와야 정상이겠지. 누가 저놈들을 상대하겠느냐?" 조대삼 대장의 제안이 떨어지자마자, 재빨리 둘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대장. 가만히 서 있자니 심심해서……." 자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둘이 지원하자 조대삼 대장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한 명만 가도 충분할 텐데, 둘씩이나 보내기에는 천마혈검 대의 이름이 지닌 자부심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놈들 중에서 누구를 보내야 하나? 이때, 두 번째로 신청했던 음침한 표정의 사내가 조대삼 대장에게 제안했 다. "대장도 지금 심심할것 아니오? 내가 화려한 구경거리를 제공해 드리지요. 계집의 옷이 한겹씩 벗겨져 나가면 그구경하시는 재미가 쏠쏠하실 겁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그렇기에 조대삼 대장은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좋다, 네가 가라. 대신 저녀석들이 적들을 완전히 제압할 때까지는 구경 거리를 제공해 줘야 한다." 부하들이 적들을 완전히 제압할 때까지 시간을 보낼 구경거리를 달라는 뜻 이었고, 그것은 음침한 사내의 구미에도 맞았다. "대장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크흐흐흣." 그는 등 뒤에서 천마혈검을 뽑아들고는 어슬렁거리며 상대를 향해 걸어갔 다. 저것들을 어떻게 요리하는것이 좋을까 궁리하면서 말이다. 소연과 진팔은 각기 구역을 맡아 문도들을 지휘하며 격전을 벌였다. 조금 이라도 적들에게 밀리는 곳이 있으면 그들이 달려가서 도왔기에 처음 얼마 동안은 천지문이 어느 정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 둘 이 전력을 다해 싸운다면 상당한 희생을 각오하기는 해야겠지만, 적들을 물 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소연은 큰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한 놈을 해치운 다음 재빨리 저 뒤쪽에 포진하고 있는 마인들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소연과 진팔이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저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저 뒤쪽에서 따분한 얼굴로 서 있는 마인들. 그들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주 위를 압도하는 듯한 그 엄청난 마기만으로도 그들이 엄청난 강자들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런 놈들이 여덟 명이다 있는 것이다. 저들이 만약 움 직인다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저들로 하여금 방심하게 하여 조금이 라도 빈틈이 드러나도록 유도하는 길 뿐이었다. 그것 외에는 이곳에서 살아 서 도망칠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들의 전체적인 실력이 훨신 우세하다 보니, 그들은 한 번씩 큰 기술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소연의 감각에 뭔가 강렬한 기파가 느껴졌다. "흡!" 다급히 경악성을 내지르며 소연이 몸을 옆으로 트는 순간, 그녀가 위치하 고 있던 곳으로 시뻘건 강기다발이 통과하는 것이 보였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소연이 급히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어느새 다가왔는 지 장대한 핏빛 혈검을 든 흑의무사 한 명이 다가와 있었다. "클클클, 내 일 검을 피하다니. 제법이야. 제법 감춰 놓고 있는 실력이 있 는 모양이군. 그래봐야 나를 좀 더 즐겁게 해 주는 정도겠지만." 마인은 뱀이 핥듯 끔직한 시선으로 소연의 몸을 구석구석 훑었다. 그는 음 탕스러운 시선으로 소연의 몸 구석구석을 훑어본 후, 음흉스럽게 중얼거렸 다. "훌륭하군. 극상품이야. 크흐흣."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동료들을 돌아봤다.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도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움직임. 소연은 이 틈을 노려 공격할 까 생각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포기하고 방어자세를 갖췄다. 아무래도 뭔 가 꺼림직한 생각이 그녀의 행동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마인은 다시금 시선을 소연에게로 가져간 후.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며 외 쳤다. "자, 관중들을 위해 눈요기감부터 선물해야겠지? 흐흐흣." 마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아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하루아 장군이 부하 들을 독려하고 있었지만, 놈들의 반항은 제법이었다. 아마도 이 상태대로 간다면 놈들을 전멸시키는데 최소한 한두 시진은 걸릴것 같았기에 시간은 넉넉했던 것이다. 천마혈검대는 수십 년 전부터 중원 최강이었고, 마교 내에서 호법원을 제 외한다면 가장 우수한 고수들만의 집합체였다. 거기에다가 장인걸의 마교 이탈 후, 수십 년 동안 인원 충원 없이 계속 유지되어 왔기에, 개개인이 극 마 직전에 이른 최강의 고수들만 모여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단체가 되 어 있는 것이다. 과연 그의 무공은 천마혈검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너무나도 공포스 러웠다. 4척이나 되는 천마혈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소연을 압박해 들어 왔다. 아무리 소연이 뛰어난 고수라고 하지만, 결정적으로 실전 경험이 적 은데다가, 상대는 그녀보다 실력도 높을뿐더러 실전 경험이 풍부한 백전의 노장이었다. 그렇기에 둘 간의 대결이 시작되자 소연은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소연에게는 한 가지 기회가 있었다. 적은 고양이가 쥐를 가 지고 놀 듯 소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놈 의 공격이 가해질 때마다 소연의 옷이 조금씩 그 여파로 인해 찢겨져 나가 고 있었다. 이토록 치욕스러운 일을 지금껏 단 한번도 당해 본 적이 없었던 소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소연에게 너무 많은 시간 을 줬다. 조금씩 조금씩 옷이 찢겨져 나가며 그녀의 속살이 드러나고 있었 고, 상대는 그걸 즐기고 있었다. 무수한 공방이 오갔음에더 불구하고 그녀 에게는 단 하나의 작은 상처조차 없었다. 그것만 봐도 상대가 얼마나 뛰어 난 고수인지 알 수 있었다. <사제. 기회는 단 한 번이야. 이놈을 없앤 후 곧바로 탈출한다.> 소연의 전음에 진팔은 약간 난처한 어조로 답해 왔다. <그, 그렇다면 동문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쩔 수 없다. 이대로 계속 있어도 전멸이야. 최소한 너만이라도 살아서 돌아가야지.> <사, 사저…. 그건…. 제가 남으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될 말. 그건 내 몫이야. 1대 제자들에게 지시를 해라. 이놈을 쓰러뜨 린 후 그때가 기회라고 말이야. 나는 남은 제자들과 함께 사력을 다해 놈들 을 저지하겠다.> 소연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했고. 진팔은 그녀를 막을 방법이 없음을 깨 달았다. 저 마두를 쓰러뜨렸을 때, 얻을 수 있는 시간은 그야말로 순간에 불과할 것이다. 놈들이 동료를 잃은 충격에 잠시 우왕좌왕할 때, 그때가 기 회였다. 그리고 그 기회를 사저와 자신이 말다툼 하는 것으로 보낸다면 탈 출은 불가능. 서로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도 일부가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까 말까 할 정도로 지금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어느덧 진팔의 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사저께서는 끝까지 자신을 희생하시는군요. 좋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살 수 있도록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녕. 내 사랑이여.' <명을 따르겠습니다. 사저.> 진팔은 주위의 적병들과 접전을 벌이는 와중에 슬그머니 상대의 공세에 밀 리는 척 하며 마인을 향해 조금씩 접근해 들어갔다. <지금!> 소연의 신호와 함께 두 사람은 마인을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 격을 퍼부었다. 앞과 뒤에서 공격이 가해진 만큼, 마인이 아무리 그들보다 몇 등급 윗줄에 놓이는 고수라고 해도 죽음을 피하기는 어려울 듯 보였다. 하지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움직임을 그는 해 보였다. 핏빛 장검이 마치 단검이나 되듯 기쾌하게 움직이며 그의 앞뒤로 두터운 보호막을 형성 한 것이다. 붉은 천마혈검이 마인의 앞뒤를 빠른 속도로 휘돌며 움직였기에 , 순간 그 사내의 전신이 붉은빛에 가둬진 듯 보였다. 카캉! 완벽해 보였던 소연과 진팔의 회심의 일격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튕겨낸 후 마인은 음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크흐흣, 이런 난장판을 수없이 헤쳐 나온 노부가 저놈의 움직임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있는 줄 생각했었느냐? 크흐흐흣. 정말 요즘 젋은 것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상대는 실력도 고강했지만, 실전 경험은 진팔과 소연의 것을 합해 놓은 것 보다 몇 배는 된다. 마교라는 철혈의 세계에서 이만한 위치에 올라선 강자 인 만큼. 이런 한 수에 걸려 저세상에 간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소연의 표정에 처음으로 절망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크흐흣. 그래. 좋은 표정이야. 암.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하지만 관객들 은 처음의 그 모습을 더 좋아하겠지.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계집에게서 더 이상 무슨 구경거리가 남아있겠나. 그렇다면 내가 정신 좀 차리게 만들어 줘야겠는 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핏빛 검은 진팔을 노리고 뱀의 혓바닥처럼 민활하 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마혈검은 그 길이가 4천이나 되는데다가 두께 또 한 중검처럼은 아니었지만 보통 검보다는 조금 두꺼운 형태를 지닌 검이었 다. 상당한 무게를 지녔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 검은 너무나도 화려하면서도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이지 성격은 개차반이었지만, 지닌 바 무공 하나 만큼은 엄청난 인물이었다. 검기와 검강이 난무하는 가운데 진팔은 몇 번씩이나 치명상을 입을 뻔 했 지만, 가까스로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만약 요 근래에 마교 교주에게 받 은 특훈(?)이 아니었다면 벌써 몇 번은 저세상에 갔을 것이다. 이때, 옆에 서 소연이 끼어들어 지원하기 시작했다. 마인의 검은 그녀가 공격에 가세하 는 것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유려한 움직임을 그려냈다. 한동안 숨 돌릴 틈 없는 접전이 전개된 후. 마인은 마치 자신이 만들어 놓 은 작품을 감살할 여유가 필요하다는 듯 잠시 뒤로 물러서서 소연의 몸매를 감상했다. 그제서야 소연은 깨달았다. 이제 허벅지까지 드러난 상태라는 것 을. 그리고 놈이 얼마나 교모하게 옷을 잘라냈는지 한쪽 유방까지 반쯤 드 러나 있었다. "사, 사저." 진팔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웃옷을 벗으려는 찰나 마인의 차가운 목소 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 죽고 싶지 않다면 멈춰! 누가 네놈의 볼품 없는 옷을 벗어주라 고 했나?" 소연은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다시 한 번 마인에게로 뛰어들었다. 상대가 아무리 백전의 노장이라고 하지만, 계속 싸우다보면 언젠가는 빈틈이 드러 날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포기하면 결국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적들을 상대로 진팔과 소연이 악전고투하고 있을때, 팽선 패거리쪽의 사정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갑자기 엄청난 병력이 사방에서 몰려들며 치열한 접전이 전개된 것이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파공성을 울리고 있었고, 그 결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며 듣기에 도 섬뜩한 비명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들이 동 원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적병들이 사방에서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었 다. 팽선 장로는 하북팽가의 고수들과 함께 몰려드는 금군들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팽가의 대부분의 고수들은 중도(重刀)를 이용하여 적과 싸우고 있었지만, 일부 권법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은 패도적인 권법을 이용하여 적과 싸우고 있었고, 팽선도 그들 중 하나였다. "하압!" 퍼억! 푸르스름한 강기를 내포하여 강철만큼이나 단단하게 변한 팽선의 권이 병 사의 갑옷을 관통하여 몸속 깊이 틀어박혔다. 팽선이 주먹을 뽑아내자, 그 의 손은 진득한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팽선은 손에 묻은 피를 슬쩍 핥으며 살기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흣. 안그래도 목이 말랐었는데 너무나도 달콤하구먼." 그 흉칙한 모습을 보고 팽선을 포위하고 있던 금군 병사들의 얼굴이 창백 하게 질렸다. 물론 이것은 적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한 연극이었다. 피를 먹는 것을 좋아할 리 없는 팽선이 이런 짓까지 해야 할 정도로 현재의 전황은 너무나더 안 좋았다. "5천의 금군 병사들을 물리친 후, 곧바로 후퇴했어야 했어."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지나간 일이다. 아마도 놈들은 그 5천을 통해 이쪽 이 지닌 전력을 저울질해 본 모양이다. 그런 다음 갑자기 수만이나 되는 병 력을 한꺼번에 투입해 왔다. 물론 병사들의 무공은 형편없기에 자신들의 상 대가 될 수 없었지만, 놈들은 두터운 갑옷과 방패로 무장하고 있다는 문제 점으 ㄹ지니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화살까지 여기저기서 날아오니 여간 상 대하기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때, 팽선은 강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는 자들이 접근해 오는 것을 봤다. 겉으로는 금군 병사들과 다를 바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깊은 수준의 마공을 연성한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저들까지 가세한다면 어쩌면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하는 사태까지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팽선은 힘껏 외쳤 다. "후퇴하라!" 하지만 아무도 팽선의 지시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방에 적병들 천지인데, 후최하는 것이 말만큼 쉬운 것이 아닌 것이다. 팽 선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금군 병사 다섯을 해치운 후, 다른 문파의 수장 들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 사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 있 는 자들끼리라도 뭉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소연과 진팔, 그리고 마인의 대결은 그런 식으로 진행될 듯 보였지만, 이 때 한 가지 변수가 등장했다. 토굴에 남아 있으라는 소연의 명령이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왕노는 이번 기습 작전에 가담했다. 토굴에 혼자 남아 있는 것이 무섭다고 하면서, 불지르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으니 자신을 꼭 데려 가 달라고 소연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소연은 차마 그의 청을 거절하지 못 했다. 잠시의 여유 시간을 이용하여 불만 지르고 튀면 되는 임무였다. 그녀 는 마지못해 왕노의 청을 수락했었던 것이다. 지금 어딘가 구석에 숨어 벌벌 떨고 있어야 할 왕노가 바로 이 격전의 한 복판을 향해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가 천지문도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소연에게 본능적으로 의지하듯, 그렇게 그녀의 뒤에 숨으려는 듯 보였다. 찰나의 순간. 마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들어온 비 수를 바라봤다. "크윽!" 마인으로서는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일격이었다. 왕노의 비수는 마인의 심장을 꿰둟다마자, 즉각 뒤로 빠져나왔다. 그런 다 음 다시 한 번 원호를 그리며 마인의 가슴어림을 깊게 갈라놨다. 왕노의 비 수에서 뿜어 나오는 싸늘한 검기만으로도 그가 뛰어난 실력을 숨기고 있는 고수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돌발적인 상황에 소연과 진팔은 너무나도 경악하여 왕노를 멍청하게 바라 보고 있었다. 그 순간을 이용하여 도망쳤어야 하는데 말이다. 왕노는 답답 하다는 듯 외쳤다. "아가씨! 빨리 몸을 피하십시오." 살수의 장기는 일격필살. 무공은 상대보다 훨씬 떨어지지만, 최대한의 기 회를 노려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무공이었다. 그 런 의미에서 저런 압도적인 무위를 지닌 마인에게 일격에 치명타를 가한 그 는 살수의 정점에 선 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의 선택이 어긋났다. 무엇보다 상대의 대한 정보가 부 족했던 탓이다. 마인은 피를 뿜으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왕 노의 예상과 달리 쓰러지지는 않았다. 대신 마인의 상처는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가슴에 미세한 붉은 상흔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네놈도 실력을 숨긴 고수였다는 말이냐?" 왕노. 아니 흑월야사 전룡은 경악감을 감출 수 없었다. 중원 최강의 고수 라던 묵향마저도 자신의 암습에 치명상을 당했었는데. 자신의 일격을 당하 고도 멀쩡한 저놈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도저히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대충 놀아줄 생각이었는데, 감히 노부의 몸에 상처를 내다니." 마인의 몸에서 풍기던 기운이 일변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몸에서는 살기가 넘쳤다. "철저히 짓밟아 주마." 9. 괴멸(壞滅), 그리고 부녀 상봉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묵향. 그는 지금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 는 중이었기에, 자신이 지금 얼마나 빨리 달려가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 고 있었다. 오로지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시라도 빨리 소연 이 있는 곳에 도착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양양성에서 회남까지는 그 거리가 엄청나게 멀다. 더군다나 크고 작은 강 이 몇 개씩이나 가로막고 있기에 단시간에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 다. 하지만 묵향은 그것을 가능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지 금 강이고 들판이고 가리지 않고 전광과도 같은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 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병장기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가 조금씩 들려온다. 아무리 묵향의 이목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토록 먼 거 리에서 싸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리는 없다. 있다면 바로 내공의 고수 들이 지금 격돌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묵향은 조 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아직까지 소연이가 살아남아 있다는 증거나 다름 없으니까. 조대삼 대장은 격전의 소용돌이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남은 대원들과 함께 수하 한 명이 연놈을 족치는 것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순식간에 회하를 가로질러 오는 정체 모를 고수를 발견하고는 도저히 믿어 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저게 사람이냐? 어찌 사람이 저 넓은 회하를 단숨에 건널 수 있다 는 말이냐?" 조대삼의 옆에 모여 있던 여섯 명의 수하들은 상관의 중얼거림을 듣고 재 빨리 고개를 돌렸다. 과연 어둠을 뚫고 엄청난 속도로 자신들을 향해 돌진 해 오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낮이라면 모를까, 아직은 서로 간의 거 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상대의 얼굴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강물 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던 20여 척의 배들 가운데 다섯 척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물 위를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신법으 로 달려오는 것도 모자라, 괴인은 강 위에 떠 있는 배들까지 공격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걸 본 조대삼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회하를 단 숨에 건너는 것만 해도 도저히 믿기가 힘든 일인데,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 서 그 상태에서 무공까지 사용할 수 있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엄청난 고수인 것 같습니다. 대장. 즉시 교주님께 연락을 드려야하지 않 겠습니까?" 옆에 서 있는 부하가 건의했지만, 조대삼은 전령을 보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상대가 다가오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미 전령을 보내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니, 전령을 보내기는 고사하고 탈출할 시간 여 유조차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미 늦었다. 모두 각개 탈출하라!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즉시 이 사실을 교주님께 알려라." 조대삼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그들은 일제히 일 곱 방향으로 흩어져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자신들 중 몇은 저 괴물같은 고 수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몇 명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 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가소로운 것들! 소연이를 건드리고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하다니." 놈들의 퇴각을 눈치 챈 묵향이 재빨리 공격에 나섰다. 그의 손에서 푸른빛 이 나는 일곱 개의 작은 구슬처럼 생긴 것들이 거의 빛과 같은 속도로 쏘아 져 나갔다. 구슬들은 엄청난 속도로 목표물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천마혈 검대의 고수들은 상대가 괴이하게 생긴 암기를 발사했음을 알고 재빨리 회 피기동을 했지만, 구슬들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목표물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그들은 도저히 이 암기를 피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반격에 나섰다. 그들은 모두다 극마의 경지에 거의 근접한 고수들이었기에, 그 반격은 너무 나도 매서웠다. 천마혈검을 뽑아 휘드르자 수십 개의 강기들이 불을 뿜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검술에 매진한 검귀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푸르게 빛나는 구슬은 핏빛 강기를 뚫고 들어왔다. "허억!" 경악성을 지를 틈도 없이 그들은 다음 행동을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할 듯한 강맹한 검초가 순간적으로 펼쳐졌고, 그들이 쥐고 있는 혈검은 불타오르듯 붉은 빛으로 이글거렸다. 순식간에 극성의 천강혈룡검법 (天降血龍劍法)을 통해 어검술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한 검법과 구슬이 부딪치는 순간 엄청난 대폭발이 일어 났다. 콰쾅! "크허어억!" 조대삼 대장은 비틀비틀 물러섰다. 얼마나 엄청난 폭발이었는지, 마교가 자랑하는 명검인 천마혈검(天魔血劍)은 박살이 나 버렸고, 그의 오른손까지 흔적도 없이 핏덩어리로 화한 후였다. 제8대장은 치명적인 내상까지 입었는 지 무너지듯 쓰러지며 내장부스러기까지 토해 내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좀 나은 편이었다. 수하들은 모두 다 그 폭발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저세상 으로 떠나 버린 상태였으니까. 웬만한 상처쯤은 대법을 통해 치유할 수 있 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번에 받은 충격은 치유력을 한참 넘어서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이 엄청난 폭발 때문에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투는 순식간에 종료되었 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는 와중이었던 장인걸의 수하들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하고, 뒤로 물러서며 폭발이 일어나 곳으로 슬쩍 시선을 돌 렸던 것이다. 하지만 천지문도들은 폭발 따위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그들은 뒤로 물러난 적들이 다시금 공격해 올 때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추스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얼마나 지독한 격전을 벌였는지, 멀쩡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이때, 경악에 찬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허억! 교, 교주!" 방금 전까지 천지문의 젊은 무사와 격돌하고 있었던 천마혈검대의 고수 한 명이 묵향을 알아보고 내지른 경악성이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쑤 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지만 그런 방응을 보인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여기 모여 있 는 고수들의 거의 대부분은 여진족이었기에 한어를 알아들을수가 없었던 탓 이다. 이때, 묵향 또한 또한 경악성을 지른 쪽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중이 었다. 묵향은 그곳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진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의 앞에 서 있는 두명의 천마혈검대원들과 비교했을 때, 그의 행색은 너무 나도 처참한 것이었다. '진팔이만 있다? 그렇다면 소연이는?' 재빨리 주위를 훑던 묵향의 시선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소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묵향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얼 마나 출혈이 심했는지 창백하게 질려 있는 소연의 얼굴을 말이다. 그 순간, 묵향은 소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살아남아 있는 천마혈검 대원들 한 명의 입에서 괴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금군 병사들의 표정이 확 변했다. 아마도 그것이 여진어로 된 명령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명령이 무엇인 지는 곧이어 금군 병사들의 행동으로 드러났다. 금군 병사들이 목숨을 아끼 지 않고 묵향을 향해 악귀처럼 달려들었던 것이다. 묵향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는 소연의 상처가 어느정도인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 여기서 얼핏 느끼기에는 그녀의 기감이 거의 잡히지 않을 정도인 것을 보면, 소연의 상태는 대단히 위중 하다고 봐야 했다. 그 런데,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소연과 자신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것이 다. "크합!" 순간, 묵향을 중심으로 다섯 곳에서 거대한 강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과거 묵향이 검을 이용하여 대지의 기와 자심의 기를 충돌시키던 최강의 검법, 바로 그것이 검 없이 다섯 곳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물론 묵향이 보낸 다섯 줄기의 기가 대지의 기와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쿠콰콰쾅! 엄청난 폭발과 함께 수십, 아니 수백에 달하는 금군 병사들이 도대체 어떻 게 된 것인지도 모른 채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그들의 시체는 엄청난 강기 의 회오리 속에서 조각조각 찢어져 분해되고 있었다. 이 단 한 수에 금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방금전 죽음을 불사 하며 묵향을 향해 달려든던 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짙은 공포 외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금군 병사들을 공격하게 만든 후 그 틈을 이용하여 도망치려고 했던 천마 혈검대원은 너무나도 황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이 순간의 시간도 자신에게 벌어주지 못한 것이다. 병사들을 향해 일격을 날린 묵향은 곧바로 다음 공격을 천마혈검대원을 향해 가해 왔다. 엄청난 기운이 응축되어 있는 예의 그 작고 시퍼런 강기의 구슬. 그 밝은 빛덩어리가 자신을 향해 쏜살같 이 접근해 왔을 때, 그는 자신의 운명을 파악하고 반항조차 잊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쾅! 방금 전까지 진팔과 소연을 상대로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과시하고 있던 그는 시체도 건지기 힘들 정도로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아무리 상대가 탈마급의 고수라고 하지만, 방금 전까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던 그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허무한 최후였다. 거의 모든 옷가지들이 찢겨져 나가 나신이나 다름없는 민망한 상태로 쓰러 져 있었지만, 묵향은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다급히 소연을 끌어안으며 정신없이 외쳤다. "소연아. 소연아! 괜찮느냐?" 그렇게 물어 보고는 있었지만, 지금 소연의 상태를 모를 리 없는 묵향이었 다. 묵향도 오랜 세월 마교에 몸담았었기에 무적의 천마혈검대를 상대로 아 직까지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기적임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 지만 그건 이성적인 판단일 뿐이었고, 감정적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온몸의 경혈이 가닥가닥 끊겨나가 있었고, 여기저기에 난 수많은 상처를 통해 끊임없이 그녀의 생명을 지탱해 줘야 할 피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고수들 간의 대결에서 이토록 작은 상처가 많이 날 수는 없는 법. 이것은 분명히 방금 전 묵향이 해치워 버린 그 두 놈들이 이들을 상대로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가지고 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덕분 에 그녀가 묵향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것이지 만 말이다. 묵향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소연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먼저 급한 대로 혈도를 짚어 지혈부터 시킨 후, 강제적으로 기를 돌려 그녀의 막힌 혈도를 뚫기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묵향은 옆에 망연히 서 있는 진팔을 향해 살기어린 시선을 보냈다. 묵향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진팔이 자신에게 특훈 을 받았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소연이 그보다는 한 수 위였다. 그런데 어 찌 저늠은 아직 무사한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연이만 이 지경이란 말인가. 그것은 소연이 진팔을 보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다가 이 모양이 었음이 틀림없었다. "이런 찢어죽일 놈! 사내놈이 되어가지고 내 딸을 방패로 삼아?" 묵향의 살기어린 눈길을 온몸으로 받은 진팔은 필사적으로 변명하려고 했 다. 이 순간 그에게는 그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살아야겠다 는 생각뿐. "저… 그…, 그건……." "내 딸이 죽기만 해봐. 내 네놈을 결코 가만히 놔두지 않을……." 묵향의 말은 갑자기 끊겼다. 피묻은 소연의 손이 천천히 힘겹게 올라오며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왔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소연아. 애비다. 애비야." 묵향의 격렬한 외침에 소연은 힘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거친 숨을 연신 내 쉬며 말을 이었기에 그녀의 말은 알아듣기조차 힘들었다. "저, 정말 아빠셨… 군요. 설마 아빠가… 교주셨을 줄은……. 정말 하나도 …,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가로 쉼없이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쿨럭하고 기침을 하자, 작은 내장부스러기까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상처에도 불구하고 소연의 정신은 너무나도 또렷했다. 아무리 묵향의 치료가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고 해도 이건 너무 갑자기 상태 가 좋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로 회광반조(廻光返照)임이 틀림없었 다. 바야흐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순간적으로나마 약간의 기운이 돌아오 는 현상. 그렇다면 지금 묵향에게 남은 시간 여유는 찰나에 불과하다는 말 이었다. 출혈 과다에다가 극심한 내상과 외상. 아무리 묵향의 공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공력을 나눠준다고 해서 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을 확 인한 묵향은 더 이상 소연의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다급히 손을 썼다 . 그의 장심(掌心)이 소연의 심장 부근에 놓여지는 순간, 놀랍게도 그의 손 이 투명하게 빛을 뿜기 시작했다. 극성에 달하는 소수마공(素手魔功)이 발 현되는 듯한 형상이었다. 아예 치료를 포기하고 소연을 냉동시켜 버리기로 작심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투명한 빛을 뿜는 것을 진팔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교주의 아버지가 쟈타르의 떨어져나간 손을 이어줬을 때다. 빛 의 느낌이 그때와는 달리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졌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겠 는가. 교주가 사저를 치료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진팔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 조금 여유가 생기자 방금 전 교주가 자신에게 따졌던 말들이 떠올랐던 것 이다. '맞아. 사저를 보고 딸이라고 했찌. 딸? 설마…….' 이때, 진팔의 뇌리에 과거 묵향이 처음 사저와 대면하던 장면들이 떠올랐 다. '맞아. 그래서 그때 사저를 보는 교주의 눈빛이 그랬었던 거로구나.' 소연을 치료하는 묵향의 표정에서 진팔은 소연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치료가 끝난 후 교주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얼굴에 올라와 있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소연의 손을 이끌어 얌전히 누워 있는 자세로 만들었다. 차근차 근 소연의 매무새를 정리하는 교주의 손길은 너무나도 섬세하기 그지 없었 다. 흡사 소연의 몸이 유리로 만든 것이라도 되는듯……. 부녀간의 애틋한 사랑에 진팔이 깊은 감동을 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교주 가 벌떡 일어서더니 하늘을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내 딸이 죽는다면 그에 관계된 놈은 단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 다. 설혹 그것이 무림 전체라 해도!" 그의 음성에는 너무나도 짙은 살기를 내포하고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공 포에 떨게 만들었다. 과연 탈마에 이른 무적의 고수다운 엄청난 신위(神威) 였다. 신검합일에 이르렀다는 진팔조차 두려움에 질려 주저앉았을 정도이니 다른 생존자들이야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었다. 두려움에 떨던 진팔은 묵향에게서 뿜어 나오던 짙은 살기가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옅어지자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새삼스럽 게 묵향을 바라봤다. 성질 더러운 고수쯤으로 생각 될 뿐, 지금껏 진팔은 묵향의 진면목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방금 전에 펼쳐졌던 경천동지 할 무공에다가, 기세만으로도 진팔 정도의 고수를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의 압도적인 무위. 남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던 악동(惡童)같은 인상이 사라지 며 무림 최강의 고수로서의 존재감이 진팔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1각 정도나 흘렀을까? 치밀어 오르던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묵향은 통나무처럼 굳어 있는 소연을 안아들었다. 응급조치도 끝났겠다. 이제 총타 로 그녀를 옮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때, 갑자기 철푸덩하는 소리가 묵향의 귀에 들려왔다. 재빨리 묵향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곳에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보였다. '화경급 고수?' 이곳까지 달려오며, 양양성에서부터 시작해서 누군가가 줄기차게 뒤따라온 다는 것은 묵향도 알고 있었다. 다만 상대가 정확히 누군지를 모르고 있었 을 뿐. 처음에는 워낙 소연의 일에 위급했기에 그의 존재를 무시해 버렸고, 나중에는 너무나도 분노가 치밀어 그를 잊어 버렸었다. 그런데 지금 상대가 내는 기척을 보고 기의 존재를 다시 기억해 낸 것이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묵향은 소연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다음 지체하지 않고 상대를 향해 달려 갔다. 통통 튀듯 물 위를 달려간 묵향은 이제 막 힘이 다해 익사하려는 상 대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어? 패력검제였군. 경공술이 제법인데? 양양성에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을 보면 말이야." 진팔은 묵향이 패력검제의 멱살을 붙잡고는 질질 끌면서 물가로 걸어 나오 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물 위를 달리는 것이야 등평도수라 고 하여 그것이 짧은 거리라면 웬만한 고수라도 시도해 볼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견싱술을 이용하여 몸의 무게를 최대한 줄인 다음, 최대한 빨리 내 달리기만 하면 이론적으로 가능하니까. 하지만 지금 묵향이 보여주는 것은 그런 얄팍한 차원이 아니었다. 전설로 만 전해져 내려오는 무력답수(無力踏水).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고난이도의 경신술을 동원해야만이 그것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 만, 그런 허황된 경공술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 하는 인물들도 있을 정도 로 지금껏 그 존재 자체가 의심되던 경공술 이었다. 사실 물 위를 달리는 것보다 천천히 걷거나, 아니면 서 있는 것이 월등히 힘들 것은 당연한 이치 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묵향은 물 위에 가만히 서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 고 웬 사람을 하나 물속에서 꺼내가지고는 마치 탄탄한 대지 위를 걷듯 질 질 끌고나오고 있는 것이다. 강가에 도착한 묵향은 주위에 떠도는 기를 흡수하여 패력검제쪽으로 유도 하여 그의 몸속에 방대한 양의 기를 채워 넣어줬다. 안 그래도 공력의 고갈 로 인해 한동안 운기조식이라도 하며 기를 보충해야 할 패력검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가 보충되자 그의 몸은 순식간에 어느 정도 평상수준으로 회복 되기 시작했다. 패력검제는 교주가 자신에게 기를 나눠주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놀랐 다. '그 먼 거리를 전력 질주 해 오고도 이자는 아직 나에게 나눠줄 정도의 공력이 남아 있었다는 말인가? 허어, 탈마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로 구나.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군. 저자는 마공을 익혔을 텐데, 어찌하여 그의 내공이 내 것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지?' 하지만 마냥 그런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교주에게 포권하 며 고마움을 전했다. "고, 고맙소이다. 교주." 몸속에 다시금 내공이 차오르자 거칠었던 그의 호흡이 점차 정돈되기 시작 했다. 그리고 난장판이 된 주위의 광경도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는 순간 패력검제는 경악했다. "허억!"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수많은 시체들이 아니었다. 양양성 공방전에서 수많은 금군 병사들을 죽였었던 패력검제인 만큼, 이곳 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좀 본다고 해서 경악할 이유는 없었다. 패력검제가 놀란 것은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에 달하는 사람이 흔적도 없 이 파괴된 듯 보이는, 살점들과 핏물의 흔적 때문이었다. 그 흔적이 가장 짙게 남아있는 곳 중심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다섯 개나 파여져 있었다. 물 론 그 구덩이 부근에는 아예 핏물 따위의 흔적조차 없었다. 강력한 파괴력 덕분에 한 방울의 핏물도 남기지 않고 날아가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 어찌 저것이 인간의 무공이 남긴 흔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패력검제는 주춤주춤 걸어가 커다란 웅덩이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묵향은 이런 식의 시간 낭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봐. 쓸데없는 데 신경쓰지 말고 내 부탁이나 한 가지 들어주는 것이 어 때?" 패력검제는 멍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부탁이라고 하심은?" "저 아이를 총타로 보내줘야겠어. 본좌는 지금 급히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어때? 내 부탁을 들어주겠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묵향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로 보아 이것은 부탁 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사실 묵향은 상대가 거절하면 적당히 다져놓은 후 다시 한 번 더 「부탁」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패력검제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자신 이 누군가. 정파의 기둥으로 추앙받는 3황5제 중의 한 명이 아닌가. 그런 자신을 보고 마교로 심부름을 가 달라니. 그것이 말이 되는가? "그게… 말이외다. 교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저도 정파의 일원이고." 젊잖게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의 말은 곧바로 묵향에 의해 가로막혔다. "허어~, 거 참. 세상사 모든 일을 그렇게 딱딱하게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 는가? 탁 터놓고 부탁함세. 내 딸아이를 총타로 데려다 주게." "딸이라구요?" "만약 형님의 신상에 위급한 일이 있지만 않았다면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야. 물론 자네에게 있어서 거절은 용납되지 않는 것 알 지? 내가 부탁할 사람은 아쉽게도 지금 자네밖에 없어. 만약 거절한다면 두 들겨 패서라도 심부름을 보내야 한단 말일세." 자신을 깔보는 말에 패력검제는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 외에 부탁할 사람이 없다면 솔직히 사정을 설명하고 간곡하게 청해오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꼭 말을 저렇게 삐딱하게 해야만 할까? 하지만 패력검제가 어떻게 생각하건 묵향의 말은 계속되었다. "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빨리 대답하게." 그러면서 파란호들이 행인들을 위협하듯 주먹을 꽉 쥐고 뼈마디를 뚜둑거 리는 행동을 해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이제는 허탈한 느낌마저 드는 패 력검제였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위협을 하시는 거요?」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려던 패력검제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방금 전에는 그냥 흘려들었던 것인데, 그것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교주의 형 님이라면 바로 만통음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형님이라면… 만통음제 대협 말씀이오?" 묵향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패력검제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분이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묵향이 패력검제가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고 「하늘이 나를 돕는다」는 말 을 한 이유는 바로 그 덕분에 만통음제라는 존재가 그의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천지문이 함정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묵향은 이곳에 장인걸의 주력이 있 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장인걸은 없었다. 소수의 천마 혈검대원들만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장인걸은 어디로 간 것일까? 깊게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그가 천마혈검대원들을 이끌고 움직일 이유 는 단 한 가지 뿐이었으니까. 그는 뭔가 굵직한 먹잇감을 찾아내고 그쪽으 로 간 것이 틀림없었다. 팽선 따위는 결코 장인걸이 탐내는 먹잇감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장인걸은 만통음제의 움직임을 포착했다는 말일 것이다. 만약 이곳에 패력검제가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묵향은 만통음제가 어찌되 건 생각도 안 해보고 그냥 총타로 내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만통음제가 위 험하다는 것을 인지한 지금, 묵향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그 것은 바로 소연을 총타로 보내는 일은 패력검제에게 맡기고, 자신은 만통음 제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본다면, 분명히 장인걸은 이곳에서 함정을 파고 기 다리고 있었어야 했어. 하지만 그는 여기에 없었지. 그렇다는 말은 뭔가 아 주 굵직한 먹잇감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갔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그 먹잇감이 만통음제 대협이시라는 말씀이오?" "물론. 장인걸 하나만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는데, 그 녀석에게는 천 마혈검대가 있어. 그렇기에 본좌는 지금 당장 형님을 구하러 가야 한단 말 이야. 안 그래도 시간이 없는데 쓸데없는 질문으로 시간 보내지 말고 빨리 대답해. 바로 해 줄 거냐? 아니면 몇 대 맞고 해 줄거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정파의 원로고수인 만통음제를 위한 것이라는 데 야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좋소. 만통음제 대협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수고는 해 드리기로 하겠소. 물론 귀하의 무력이 겁나서 해 드리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라오." 허락이 떨어지자 묵향은 그에게 몇가지 당부 사항을 전달한 후, 부랴부랴 한 가지 대법(大法)까지 전수한 다음 서둘러서 만통음제를 구출하기 위해 동쪽으로 달려 가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남은 패력검제는 나무토막처럼 꼿 꼿하게 얼어붙어 있는 소연을 어떻게 들고 갈 것인지 궁리해야만 했다. 업 고 갈 도리는 없으니, 안고 가야하나? 아니면 들고 가야 하나? 패력검제가 어떻게 운반할지 궁리하고 있을때, 갑자기 묵향이 되돌아왔다. 그는 아직까지 패력검제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게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여기 있었군." "가신게 아니었소이까?" "가다 보니 한 가지 잊은 게 있어서 급히 되돌아왔지." 가다가 되돌아온 것을 보면 아주 중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패력 검제는 궁금증을 안고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천마동에 내려가서 혹시 생명의 위협을 당할 우려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라니. 패력검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을리가 없다 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달려와 준 상대의 정성이 있기에 뭐라 대꾸하지 않 고 가만히 들었다. "그때는 암호를 하나 말하면 돼. 다크가 아빠에게 부탁하더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하더라고 말해. 잊어버리지 마. 알겠어?" 다크가 아빠에게 부탁한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거참 희한한 암호도 다 있군. 어떤 멍청이가 그런 낯 간지러운 암호를 생각해 놨는지 모르지만 참 웃기는 녀석이었다. 하기야 그토록 중요한 암호라면 상대가 전혀 예상하기 힘든 암호를 만드는 것이 좋기는 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제대로 만든 암호 일지도 모른다. "알겠소. 꼭 기억하도록 하리다." 그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묵향은 다시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남겨진 패력검제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자기가 탈마급이라서 화경인 나는 아예 물로 보이는 모양이지? 참 내. 어 이가 없어서.' 이때, 진팔이 비틀비틀 다가와 패력검제에게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어르신.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마교 총타에 가시는 것이 썩 마음에 내 키시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거기에 가면 사저를 살릴 가능성이 조금이 라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팔은 패력검제가 뭔가 탐탐치 않은 뚱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노파 심에서 다시 한 번 부탁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패력검제의 성질을 긁는 말이었다. '이놈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딴 부탁을 해? 나를 일구이언(一口二言)하는 소인배로 생각했다는 말인가? 나는 한 번 내뱉은 말은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야.' 화가나서 진팔에게 호통을 치려던 패력검제는 문득 과거에 있었던 일이 한 가지 떠올랐다. 자신이 이리저리 진팔을 긁어댔을 때, 유일하게 반을을 보 였던 진팔의 약점. 그것은 바로 소연이었다.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패력검 제의 분노는 눈 녹듯 풀려 버렸다. '뭐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존심을 굽히고 부탁할 수도 있겠지.' 이런 생각이 들자, 패력검제는 호통을 치는 대신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했 다. "자네가 그런 부탁하지 않아도 갈 걸세.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찌 할 건가 ?" "어쩔 것이나 있겠습니까? 먼저 임무를 완수한 후, 생존자를 수습하여 양 양성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 임무가 도대체 뭔가?" "바로 저기에 있는 배들을 모두 불사르는 겁니다. 그리고 장인들도 구출해 야 하구요.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금군 병종들은 한 명도 없으니, 그럭저 럭 해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그럼 수고하게. 나도 가 봐야겠군." "예, 어르신. 부탁드리겠습니다." 10. 혼비백상(魂飛魄散)의 장인걸 패력검제와 헤어진 후 묵향은 전속력으로 동쪽을 향해 달려갔다. 자신이 팽선을 도와주라고 부탁했었던 만큼, 만통음제는 팽선 일행과 함께 있을 것 이 분명했다. 한참 달려가던 그의 기감(氣感)에 강렬한 마기가 포착되었다. 그 순간 묵향은 달리던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좀 더 감각을 집중하여 주위를 살폈다. 마기가 느껴지는 곳은 회하 건너편이었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묵향은 고 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놈들이 팽 뭐시기를 치러가는 것이 맞다면 분명 강 건너편이 아니라 이쪽 편에 있어야 옳은데, 왜 저쪽에 있다는 말인 가? 그것도 한둘이라면 정찰을 목적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텐데, 그 수는 거리가 멀어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절대로 한둘 정도가 아니었 다. "팽선이 있을 거로 생각되는 저쪽으로 달려가야 하나? 아니면 이쪽인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이곳에서 궁리하고 있을 시간 여유도 없었다. 만통음제가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천마혈검대원들 을 거느린 장인걸을 상대로 절대로 이길 수는 없었다. 이때. 묵향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맞다. 저놈들만 없애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잖아." 그렇다 구태여 묵향이 만통음제를 꼭 만나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 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장인걸과 합쳐진 천마혈검대였다. 장인걸 혼자라 면 결코 그의 생명을 위협하기 힘들었다. 몇 수 교환해 보고 힘들 것 같으 면 도망치면 될 테니까. 그런 만큼 저놈들만 없애 버리면, 일단 형님의 목 숨은 안전하다고 봐도 무방해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자 묵향은 전속력으로 마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장인걸이 수하들과 함께 회하를 건넜을 때. 순간적으로 적의 위치를 놓친 적이 있었다. 그로서는 다 잡은 먹이를 놓칠 수도 있는 상황 이었다. 하지 만 그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놈은 자신의 흑살마장에 두 방을 맞았다. 복부에 한 방. 그리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등에 한 방. 복부에 먹인 것은 비교적 놈이 방비하기 쉬웠기에 막 아냈을 가능성이 컸지만, 등판에 먹인 것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호신강기로 등판을 보호했다고 해도,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백 보 양보해서 그마저도 큰 부상을 입히지 못했다고 해도, 조금의 상처라도 입었다면 지금쯤 놈의 몸은 흑살마장의 독기로 엉망이 되어 있을 것이 분명 했다. "수하들을 보내어 양양성으로 들어가는 통로들부터 차단하도록 하겠습니다 ." 선임인 제6대장이 건의해 왔지만 장인걸은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놈이 바보가 아닌 이상, 양양성으로 직행했을 리 가 없다. 우선 우리들을 따돌리기 위해 양양성 쪽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움 직이고 있을게 분명하다. 놈은 부상 때문에 빨리 움직일 수가 없다. 주위부 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이 잡듯 뒤져라." "존명." "놈을 발견하면 절대 공격하면 안 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뒤에서 추격 하며 놈을 포착했음을 알리기만 하면 된다." "존명." 그때부터 도망치는 화경급 고수와 장인걸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물론 여 기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장인걸이었다. 처음에는 8명밖에 되지 않던 수하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9,10대와 이천진 대장이 합류하며 25 명으로 불어났다. 아무리 상대가 화경급 고수라고 하지만, 중상을 당한 상 태에서 그 많은 인원이 쳐놓은 그물망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장인걸은 상대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여 결국 절벽이 있는 곳까지 몰아붙였 다. 비틀거리며 사력을 다해 도망치던 상대는 그곳에서 멈춰섰다. 한쪽이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이상 사방에서 포위될 염려가 없기에, 이곳에서 최 후의 승부수를 던지려는 모양이었다. 깍아지르는 듯한 절벽을 중심으로 천마혈검대는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구축 한 채 장인걸의 명령을 기다렸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공격 명령을 내리 지 않고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느긋한 표정으로 포위망의 중심에 갇혀 있는 화경급 고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흐흣. 이제 도망칠 여력도 없는 것인가?"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장인걸을 향해 제6대장 왕걸이 제안했다. "교주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제 놈은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습니다." 제6대장은 자신만만하게 청했지만, 장인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청을 물리쳤다. "모르는 소리. 아무리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하지만, 놈은 무서운 발 톱을 감추고 있는 맹호(猛虎)다. 저놈은 지금 이쪽에서 공격 해 주기를 애 타게 기다리고 있겠지. 우리들 중의 한 명이라도 저승길 동반자로 삼기 위 해서 말이다. 그냥 놔둬도 죽을 놈 때문에 본좌의 소중한 수하를 한 명이라 도 잃을 수는 없다." 장인걸의 말에 제6대장의 얼굴에 엷은 감동의 빛이 떠올랐다. 수하들을 이 토록 생각해 주는 것에 감동한 모양이지만, 장인걸로서도 이건 선택의 여지 가 없는 일이었다. 저 망할 화경급 고수를 없애는데 이미 제7대 대원 7명을 잃어야만 했다. 원대한 자신의 꿈을 이우려면, 더이상 고수를 희생시킬 수 는 없었다. 과거 그가 마교 총타를 차지하고 있을 때와 달리, 더이상 최상 급 고수의 충원은 불가능했기에. "왕걸 대장." "옛." "자네의 철령전을 빌리 수 있겠나? 본좌에게는 무거운 암기가 없어서 말일 세." 각각의 암기가 지니고 있는 장단점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대부분의 무 림인들의 경우 한 가지 이상의 암기를 휴대했다. 암기의 종류를 크게 나눈 다면, 우모침(牛毛針)처럼 아무 작고 가늘어서 적이 포착하기 힘든 것도 있 었고, 철령전(鐵翎箭)처럼 크고 묵직한 것도 있었다. 우모침은 은밀하게 적 을 공격한다는 암기의 목적에 가장 충실하게 제작된 것이기는 했지만, 그 파괴력이 너무 약했기에 독을 병행하여 사용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독기를 막아줄 특수한 장갑을 끼어야만 하는데다가 웬만한 내공의 고수라고 해도 3 장 이상은 날리기 힘들다는 단점을 안고 있었다. 그에 비해 철련전 같은 무거운 암기는 그 특성이 정반대였다. 크고 무겁기 때문에 독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이 적을 격살할 정도로 강한 파괴력을 지 닌데다가 멀리까지 투척할 수 있다는 큰 잇점이 있었지만 파공성(破空聲)을 감추기 힘들기에 적이 눈치 채고 회피할 가능성이 크다는 단점 역시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이라면 파공성을 쉽사 리 포착하기 힘들기에 철령전 같이 쉽게 쓸 수 있으면서도 강력한 암기가 그 진가를 발휘했다. 제6대장 왕걸은 재빨리 품속에서 철령전 다섯 대를 꺼내어 교주에게 바쳤 다. 왕걸이 애용하는 것은 삼릉철령전(三陵鐵翎箭)이었는데, 6치나 되는 비 교적 큰 크기를 가진 그것은 세모꼴의 강철 살대에 역시 세 조각의 얄팍한 강철 깃털이 달린 화살 같은 형태의 암기였다. 장인걸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가볍게 적을 향해 날렸다. 쇄에에엑--! 묵직한 무게 덕분인지 서로 간의 거리가 무려 10장에 달했는데도 불구하고 철령전은 날카로운 파공성을 흘리며 상대에게로 날아갔다. 순간 인사불성인 듯 보였던 적의 몸이 튕기듯 날아올랐다. 아마도 암기를 피하기 위한 회피 동작인 모양이었지만, 장인걸이 던진 철령전은 그의 발밑으로 통과하는 대 신 곡선을 그리며 위쪽으로 떠올랐다. 막 그의 몸이 철련정에 꿰뚫리려는 순간, 화경급 고수의 몸에 붉은 빛의 장막이 번쩍이더니 철령전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밑으로 내려오는 그의 손에 붉은 빛이 나는 짧은 단검이 들 려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이용하여 철련정을 박살내 버린 듯 보였다. 하지 만 갑자기 몸을 움직인 것이 화근이었는지 땅에 착지하는 순간 비틀거리더 니, 곧 바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봤나? 아직까지 놈에게는 힘이 남아 있어." "속하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교주님." "그렇게 사과할 필요는 없네. 본좌가 저놈을 공격한 것은 자네의 잘못을 탓하고자 한 것이 아니니까." "……." "한 번씩 이렇게 자극을 줘야 놈이 상처를 치료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 리고 더불어서 공격 소모와 함께 독성이 저놈의 몸속으로 더욱 깊게 침투하 게 되겠지. 크흐흣. 이제 놈이 버틸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을거야." 장인걸은 창백한 얼굴로 자시을 노려보고 있는 화경급 고수를 향해 비웃음 을 보내고 있었다. 장인걸이 목표물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저 먼 곳에서 무심쉬한 속도로 접근해 오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얼마나 전력을 다해 경 공술을 펼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미처 자신의 존재감을 감출 여유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모든 것이 하나도 걸러지지 않은 채 장인걸과 그의 수하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상대는 엄청난 고수였다. 장인걸 같은 초고수조차 저 가슴 밑바닥에서 막연한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대체 어떤 놈이지?" 제6대장은 재빨리 장인걸에게 외쳤다. "다른 화경급 고수가 지원하러 오는 모양입니다. 교주님." 제6대장은 다른 대주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들 새로운 적에 대비하라. 전투 준비!" "그게 아니다. 니 느낌은… 본좌로 하여금 이토록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얼마 전 화경급 고수 세 명을 상대로 싸울 때도 이 정도의 압박감은 받지 않았었다. 만약 이것이 일부러 자신의 기척을 극대화하여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정도 존재감을 뿌릴 만한 고수는 장인걸이 알기에 단 한 명뿐이었다. "서, 설마 그놈이 살아 있었다는 말인가?" 장인걸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자신이 낼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속도 로 도망치며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도망쳐라! 빨리!" 장인걸의 갑작스런 후퇴 명령에 수하들은 일순간 당황했다. 그들이 지금껏 장인걸이 이토록 당황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후퇴」라는 말 도 아니고 「도망」이라니, 하지만 그들은 저마다 당황스러움을 감추며 재 빨리 장인걸의 뒤를 따랐다. 후퇴하라면 후퇴 해야 하는 것. 일단 교주의 결정이 내려진 상태에서 반론은 용서되지 않았다. 그것이 장인걸의 방식이 었으니까. 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묵향이 도착했다. 저 멀리 절벽 밑에 만 신창이가 되어 앉아 있는 만통음제의 모습을 본 순간 묵향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이!" 묵향은 재빨리 절벽 위로 몸을 날렸다. 아직 늦지 않았다. 꽤 먼 거리기는 했지만 수십 개가 넘는 강렬한 마기가 이동하는 것이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묵향이 아니었다. "이거나 먹어랏!" 순간, 묵향의 손에서 수십, 아니 수백 개에 달하는 응축된 강기의 구슬들 이 연속적으로 쏟아져 나갔다. 적이 아무리 먼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묵향 같은 고수라면 충분히 몇개의 구슬만을 발출한 후, 그 것들을 기로 조종하 여 놈들의 일부만이라도 확실하게 저세상에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묵향이 그렇게 하는 대신 무차별 공격만 퍼붓고 끝내 버린 것은 놈 들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데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강기가 날아가는 속도 가 빠르다고 하지만, 놈들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 더군다나 놈들은 매우 빠 른 속도로 몰어져 가는 상태였기에, 그 거리는 더욱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 시간 동안 구슬들의 움직임을 조종하고 있을 시간 여유가 그에게는 없었 다. 한시라도 빨리 사경을 헤매고 있을 만통음제를 도와줘야 하는 것이다. 상대를 향해 강기의 구슬들을 날린 후, 그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묵 향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절벽 밑에 내려선 묵향은 만신창이가 된 만 통음제를 보고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이 모든 것이 자심의 탓이었다. 괜히 잘 있는 사람을 보고, 딸아이를 도와 달라고 해 가지고는 이 모양을 만들다니. 자책감과 함께. 질녀를 구하겠다고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홀로 뛰어든 만 통음제에게 너무나도 큰 고마움을 느꼈다. 사실, 이 정도 위험을 당한 상태 라면 팽선에게로 달려가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만통음제는 팽선에게로 가지 않고 이쪽으로 도망쳐 온 것이다. 그쪽으로 가 면 질녀가 위험할 테니까. 그것을 묵향이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아니. 화경씩이나 되는 분이 상처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한 겁니까?" 퉁명스럽게 쏘아대는 말과 달리, 묵향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리는 것을 보 고 만통음제는 씨익 미소지었다. 온몸이 찢어질 정도로 아플텐데도 그에 대 꾸하는 만통음제의 목소리는 유쾌하기까지 했다. 동생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탓이리라. "난들 그렇게 되도록 놔두고 싶어서 놔뒀겠나? 저놈들이 치료를 할 여유를 줘야 말이지." "제가 호법을 서 드리겠습니다. 일단 운기조식을 하여 독기부터 몰아내십 시오." "내 몸 상태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네. 공력의 소모가 너무 심 했어. 지금 운기조식 해 봐야 이미 늦었다네." "공력이라면 제가 나눠드리겠습니다." 묵향은 다급히 말했지만, 만통음제는 처연히 미소지으며 힘없이 중얼거렸 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건 내 자신의 몫일세. 자네가 지닌 것은 역혈의 내공. 정종의 내공을 쌓은 나를 어찌 도울 수 있겠는가. 그러지 말고 이것을 내 제자놈에게 전해 주게." 그러면서 만통음제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작은 비수였다. 하지만 묵향은 비수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급히 외쳤다. "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를 믿고 빨리 운기조식이나 하십시오." "어쩔 수 없군. 내 동생 말대로 함세. 대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유언( 遺言)은 남겨야 할 것이 아닌가?" "빨리 말씀 하십쇼. 시간 없습니다." "비수는 첫째에게. 그리고 금은 동생에게 주겠네. 제자놈들 중에서 그걸 제대로 쓸 수 있는 놈은 하나도 없으니까 말이야. 받아주겠나?" 만통음제는 심각하게 꺼내는 말이었지만, 그것을 듣고 있는 묵향은 건성으 로 대꾸했다. "물론이죠. 감사히 쓰겠습니다. 자, 다 끝나셨으면 빨리." "뭐가 그렇게 급한가? 아직 숨넘어가려면 다소 여유가 있네. 다소 염치없 는 부탁이기는 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제자놈들을 부탁하겠네." "염려 마십쇼." "그리고……." "아. 내가 알아서 모두 다 완벽하게 처리해 줄 테니, 쓸데없는 말 지껄이 지 말고 빨리 운기조식이나 하라는 말입니다." 급기야 묵향이 벌컥 화를 내자, 만통음제는 어쩔 수 없이 운기조식을 시작 했다.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묵향이 슬퍼할까봐 말을 꺼내지 못했 지만 그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독기가 내장까지 침투해 온 상 태에서 공력까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적들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는 한 편, 끓어오르는 독기를 억누르다 보니 공력 소모가 극심했던 탓이다. 이런 상태에서 어찌 살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때, 어디선가 어마어마한 공력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억! 동생이 손을 쓴 건가?' 순간 구는 더욱 심함 절망감을 느꼈다. 역혈의 심법을 통해 쌓은 마교도의 공력이 자신의 공력과 합해질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 제 그것이 자신의 공력과 충돌을 일으키는 순간, 자심의 목숨도 끝날 것이 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충돌할 것으로만 여겨졌던 두 개의 공력은 순식간에 합류하며 세차게 그의 몸속을 치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럴 수가. 동생이 탈마의 고수라서 그런 것인가? 하지만 아무리 경지가 높아진다고 해도, 내공의 기본적인 성질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인가?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만통음제는 정신을 차리고 세차게 흐르는 기운을 조종하기 시작했고, 곧이 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던 그의 상처에서는 시커먼 피 고름과 진물이 콸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속 깊이 퍼져 있던 모든 독기가, 그 부 산물들과 함께 밖으로 밀려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의 반각 정도가 흘렀을까.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진물은 점차 연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 흐름을 멈췄다. 잠시 후 만통음제는 눈을 뜨더니 감 동섞인 어조로 묵향에게 감사했다. "우형의 목숨을 살려주어 무어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구먼." 묵향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옷섶으로 닦아낸 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히려 형님을 사지로 보낸 꼴이 되어 제 가 더 죄송합니다. 이제 독기는 어느 정도 몰아내셨습니까?" "그런 것 같으이. 하지만 이미 완전하게 썩어 들어간 부분은 도려 내야 할 것 같구먼." "그렇다면 빨리 양양성으로 가는 게 좋겠군요. 거기에는 실력 있는 의생들 이 많으니 말입니다." 묵향은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만통음제를 등에 업고 양양성을 향해 달려갔다. 밖에서 요란스러운 말발굽소리가 들린 후, 곧이어 마화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교주님은 무사하셔?" 마화의 목소리에 이어 정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교주님께서는 괜찮으시지만, 만통음제 대협이 큰 부상을 당하셨어. 지금 의생이 치료 중이야." 곧이어 내실로 통하는 문이 벌컥 열리며 마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묵향이 무표정하게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건 그의 몸은 무사한 것 같았으니까. 마화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묵향이 먼저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의 어조로 봤을 때 그 일이 전혀 궁금한 것 같지 않았지만, 마화에 대한 예의상 그걸 물어본다는 인상을 강하게 던져주고 있었다. "정 대장에게 들으니, 철영에게 갔었다면서?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 나?" 마화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화를 벌컥 냈다. 묵향이 묻는 의도가 어찌되었건 . 그녀는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나있었고 그녀는 때마침 그 돌파구를 찾은 셈이었다. "아니, 그렇게 말이 안 통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뾰족한 마화의 외침에 묵향은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조는 여전했다. 왜냐하면 그는 마화가 왜 화가 난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마화의 분노를 달래주기 위해 다 알면서도 말 을 걸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교주님께서 위험하시다고 철영 부교주에게 전한 후, 수하들을 이끌고 그 곳으로 가 달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퉁명스러운 어조로 교주님께서 직접 명령하셨는지 물으면서, 공식적인 명령서를 달라고 하더라구요. 기가 막혀 서." 묵향은 입속에 술을 털어 넣은 후, 부드러운 어조로 마화를 달랬다. "그건 당연한 거야. 내가 명령하지 않는 한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그 녀 석에게 명령해 놨으니 그로서는 달려가서 싸우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 이었겠지. 마화가 이해하라구." "그래도 교주님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면 뭔가 반응이 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쩌면 초류빈이었다면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철영은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 본교에서 성장한 만큼, 그 녀석은 철혈의 율법에 길들여져 있거든. 그놈이 내 명령에 위반대는 행동을 할 때 는, 바로 나를 없애고자 할 때뿐이겠지." "어떻게 그런 무서운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있죠?" "어쩔 수가 없지. 나도 그놈과 똑같은 환경에서 성장했으니까. 어쨌건 나 를 위해서 수고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 나는 그렇게 약하지 않으니까." "예." 서로 간에 대화가 끊기자 마화는 묵향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무표정한 묵향의 얼굴만 보고는 그가 갔던 일이 잘되었는 지, 아니면 잘못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화경을 뚫었다는 만통음제까지 중상을 당해 실려왔을 정도다. 그만큼 장인 걸 쪽에서 단단하게 준비를 하고 이쪽을 기다렸다는 말인데, 그런 상황에서 소연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지금 묵향은 딸을 잃은 아픔을 속으 로 삭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그에게 그 얘기를 꺼내 상처를 다시 헤집 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계속 마화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자, 묵향이 먼저 말을 걸었다. "뭐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나?" "만통음제 대협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정삼에게 들으니 중상을 당하셨다고 하던데요." "위급한 고비는 이미 넘겼으니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썩어 들어간 살 덩이를 도려낸 다음, 잘 치료하면 조만간에 완쾌하실 거야." "잘됐네요." 그렇게 대답한 마화는 다시 한 번 묵향에게 소연에 대한 것을 물으려고 시 도하다가 그만뒀다. 이번 작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관한 것은 무영문 을 통해서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서문세가를 통해 알아 볼 수고 있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마화는 묵향의 앞에 슬쩍 앉더니 그가 입으로 가져가려던 술잔을 가로채서 입속에 털어 넣은 다음. 묵향에게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만통음제께서 위기를 넘기셨는데, 축배를 들어야겠죠? 자, 한잔 드세요." "왜 같이 대작이라도 해 주려고?" "혼자 마시는 것 보다는 같이 마시는 게 좋잖아요." 넉살 좋은 마화의 대답에 묵향은 키득거렸다. 그녀가 은근슬쩍 자리를 잡 고 앉아 자신의 슬픔을 달래주려고 하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도 같이 마시고 싶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 을 것 같아." "왜요? 뭐 할 일이 있으세요?" "그래. 내가 아니고 네가." "제가요?" "응. 잊고 있었는데, 천지문에 사상자가 아주 많은 것 같았어. 이쪽에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아주 힘들 거야." "알겠어요. 지금 바로 준비해서 떠나겠어요. 혹시 지시하실 말씀은 없으신 가요?" "그런 것은 없으니 마화가 알아서 처리해 줘." "예. 그럼 속하는 가 보겠스니다." 마화는 묵향에게 예를 올린 후, 밖으로 나가며 생각했다. '중상자가 많다고 하셨으니.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겠는데? 일단 의생과 약 재. 그리고 부상자를 운반할 마차는 필수겠고…….' 11. 패격검제 마교를 가다. 마교 교주와 헤어진 패력검제는 소연을 어깨에 들쳐 메고 서둘러서 마을을 찾아갔다. 마침 어두움 밤이었기에 망정이지, 거의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 는 그녀를 운반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기절초풍했을 것이 분명했 다. 패력검제는 소연을 숲 속에 숨겨놓은 다음 그녀에게 입혀놓을 만한 옷 부터 구입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워낙 딱딱하게 굳어있었기에 도무지 그 것을 입힐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패력검제가 차선책으로 생각한 것이 그녀를 관 속에 집어넣어 운 반하는 것이었다. 밤이 늦었기에 문을 연 장의사가 단 한곳도 없었지만, 패 력검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잠자던 장의사를 두들겨 깨워 관을 구 입한 그는 재빨리 소연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소연을 관 속에 집어넣은 후, 그녀의 몸을 옷으로 덮었다. 나중에 총타에 도착하게 된다면 필요하게 될 테니까. 그런 다음 그는 관을 들고 객잔(客棧)으로 달려갔다. 객잔의 점소이는 웬 사내가 관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기겁했지만, 패력검제가 돈푼을 던 져주자 두말하지 않고 바로 방으로 안내했다. 만약 그 속에 사람이 들어있 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무리 돈을 많이 쥐어준다해도 절대 방을 빌려주지 않 았겠찌만, 점소이는 전혀 그런 것은 예상 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패력 검제는 그 관이 마치 빈 관이나 되는 듯 아주 손쉽게 다뤘으니까. 방에 들어온 패력검제는 쓰러지듯 침상에 누워서 골아 떨어졌다. 아닌 밤 중에 잠도 자지 않고 천리가 넘는 거리를 전력 질주 했으니, 피곤하지 않다 면 그건 사람도 아닐 것이다. 패력검제가 눈을 뜬 것은 해가 중천에 떠오른 다음이었다. 그는 일어나자 마자 운기조식부터 한 다음 객점(客店)으로 내려가 텅 빈 뱃속부터 채워 넣 었다. 충분한 휴식과 영양가 있는 식사로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패력검제 는 방으로 돌아와 관 뚜껑을 열었다. 관 속에는 소연이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다. 교주가 시전한 대법에 의해 완벽하게 냉동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패력검제가 관을 연 것은 교주의 당부 때문이었다. 지금이 겨울이라 그렇 게 자주 해 줄 필요는 없지만, 하루에 두 번은 꼭 대법을 시전하여 그녀의 냉기를 지속시켜 줘야만 했다. 안 그러면 도중에 냉기가 풀리면서 소연의 목숨이 끊어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패력검제는 양손을 뻗어 한 손은 그녀의 심장에, 또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단전에 장심(掌心)을 밀착시켰다. '처음 하는 건데 잘 될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이 상태에서 운기(運氣)를 어떻게 했더라?' 패력검제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대법이라고 해 봐야 별로 어려울 것은 없어. 한 손은 이곳에, 또 다른 한 손은 이곳에 장심을 밀착시킨 후 운기를 하는 거야. 내가 기(氣)를 이끌 어줄 테니 그 경로를 꼭 명심해. 그리고 그대로 하기만 하면 돼.」 그런 교주의 말에 패력검제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떤 대법이오?」 「사람을 냉동시키는 거라고 할 수 있지. 물론 다른 사람에게 이 방법을 써봤자 헛일이야. 그 뒷감당을 할 수가 없거든. 하지만 총타에는 유일하게 그 뒷감당을 해 줄 만한 사람이 하나 있지. 그분이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어쩌면 소연이를 살릴 수 있을 거야. 본좌 는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네.」 어찌 보면 아주 무책임한 소리였다. 하지만 패력검제는 그 말을 하고 있는 교주의 열기어린 표정에서 희미한 희망을 발견했다. 그는 여기에 마지막 희 망을 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이런 편법이라도 동원하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 분명한 소연이었으니까. 교주가 알려준 대로 기를 움직이자 패력검제의 손은 투명하게 변하면서 은 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옷! 뭔지 모르겠지만, 제법 시각적인 효과는 쓸 만한 걸?' 아직까지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패력검제는 교주가 알려준 대법이 보여주고 있는 시각적 효과에 매료 되고 있었다. 그의 손은 투명할 정도로 희게 변하기 시작했고, 벽옥처럼 푸 르스름한 광채를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너무나도 차가운 느낌을 주는 푸르스름한 광채였다. 냉동시킨다고 하더니 과연 교주가 알려준 대법이라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빙공임이 분명했다. '이거 뜻하지 않게 기연을 얻은 셈인가? 이 정도 수준의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데 말이야. 예상보다는 공력의 소모가 조금 크기는 했지만. 뭐 감당 못할 수준은 아니니까 제법 쓸 만하겠어. 그런데, 이걸 실 전에서 쓴다면 어떨까?" 혼자서 좋아하며 이런저런 초식들을 생각하고 있던 패력검제는 갑자기 고 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이거 비슷한 무공이 있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데 . 그게 뭐였을꼬? 마공이었던가? 아니야. 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봤을 때 정종무공이 분명해. 그렇다면 마교 교주가 어째서 이런 무공을 익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먼." 패력검제가 마교의 정예들과 직접적인 대결을 자주 벌렸었다면 곧 바로 해 답을 찾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소수 마공(素手魔功)의 변형된 형태인 무공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마교의 간판급 무공들 중의 하나인 소수마공을 왜 그가 생각해 내 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그가 지금껏 들었었던 소수마공과 방금 전 자신이 사용한 대법이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소수마공이라고 하면 모두들 소수(素手) 즉, 흰 손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는 점이다. 물론 투명하고 하얀 손이 맞기는 하지만, 그의 경우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보일 정도의 깊이를 담고 있었다. 더군다나 소수마공의 경우 상대를 압도하는 지독한 마기를 뿜어낸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것은 그 어떤 사이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패력검제는 이것이 소수마 공일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던 것이다. 모든 준비가갖춰지자 패력검제는 길을 떠났다. 그는 관을 어깨에 메고 가 급적이면 소연에게 큰 충격이 가지 않도록 조시하며 경공을 전개하며 달려 갔다. 마차를 빌리면 간단히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생각되겠지만, 마차의 고 조상 노면의 굴곡에 따라 잦은 흔들림과 충격이 고스란히 소연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다. 교주는 최대한 충격을 주지 말아줄 것을 그에게 당부했었다. 그 때문에 패력검제는 관을 들고 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 이다. 총타까지 1만 리에 달하는 엄청난 길을 달려가야 한다. 그런 만큼 얼마 전 에 교주를 추격하는 만용을 부릴 때처럼 전력 질주는 절대로 할 수가 없었 다. 안 그래도 그 때문에 아직까지도 근육들은 피로가 안 풀려서 제대로 된 힘을 못 내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쉬엄쉬엄 달려갈 수도 없었다. 교주가 가급적 이 일을 빨리 완료 해 주기를 원했었으니까. 교주는 아무리 늦어도 칠주야(七晝夜)를 초과하면 안 된다는 단서까지 붙였었다. 그 이상 경과되면 소연이 영원히 잠들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면서. 그렇다면 그가 하루에 달려야 하는 거리는 최소한 1 천5백리는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때 내가 왜 교주를 따라갔을꼬? 허허이~, 참. 내가 뭔가에 씌었던 게야 ." 낮은 어조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패력검제는 교주와의 약속을 어길 생각 은 추호도 없었다. 그럴 셈이었다면 그는 처음부터 못하겠다고 거절했을 것 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 * * 아무리 봉우리의 수가 많다고 해도 결코 10만 개씩이나 될 리 없었지만, 어쨌건 사람들은 수 많은 봉우리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십만대산(十萬大 山)이라 부르고 있는 거대한 산악이 저 오지(奧地) 깊은 곳에서 하늘이라도 뚫을 듯 솟아올라 있다. 이곳은 저 먼 옛날부터 마교의 본거지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는데, 워낙 튼튼한 방비와 천연적인 악조건으로 말미암아 단 한 번도 외세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은 것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십만대산은 수십 겹의 방어선이 쳐져 있었는데, 그것을 크게 나눈다면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바깥쪽은 외총관 휘하의 외곽 경비대원들이 맡는 구역 으로써, 그들의 무공수위는 비교적 낮았다. 그리고 안쪽은 내총관 휘하의 자성만마대원들이 투입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그 방비가 튼튼했다. 그리고 총타로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통로들은 염왕대가 맡고 있었으며, 그 외 다 른 단체들은 총타 내부를 경계하거나 빈자리가 생겼을 때를 대비한 대기조 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요 무력세력들의 거의 대부분이 총타를 떠나 버린 상태였 다. 관지 장로가 흑풍대를 이끌고 떠난 것을 시작으로, 얼마 전에는 철영 부교주가 혈랑대와 수라마참대, 그리고 천랑대를 이끌고 교주가 내린 임무 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 버렸다. 그렇기에 지금 현재 십만대산 내부의 경비 는 오로지 자성만마대와 염왕대의 고수들만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이곳은 십만대산의 가장 초입으로 연결되는 널찍한 관도상. 이곳을 경계하 고 있는 것은 외곽 경비대 제15조로서 그 수는 총원 112명. 그리 무공이 뛰 어난 편도 아니었기에, 마교의 입장에서는 그냥 생색용으로 앞에 세워놓은 무사들이었다. 도로상에 목책(木柵)을 세워놓고 검문하고 있던 마졸(魔卒) 셋이 갑자기 쑤근거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웬 사내가 관처럼 생긴 커다란 나무 곽을 등에 지고 눈길을 헤치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달려오는 발걸음 이 가벼운 것으로 보아 짐은 그 크기에 비해 아주 가벼운 듯 보였다. 그렇 다면 관 속의 내용물이 매우 수상쩍어진다. 저 정도 크기에 그토록 가벼운 물건이 존재하다니 말이다. 지금껏 그들이 이곳에 있으면서 총타로 공급되어 들어오는 각종 물품을 실 은 마차들을 수없이 검문해 봤지만, 저런 행색으로 물건을 공급하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기에 그들은 더욱 의아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워낙 추워서 들어오는 물건이 하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뭔가 하 나 있기는 있는 모양이군." "서라! 그 곽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입증부터 내놓고, 곽을 열어 라." 상대가 자신들의 앞에 멈춰 서자, 경비무사들 중의 한 명이 품속을 뒤져 검사도구를 꺼내들었다. 혹시 물품 속에 독극물이라도 들어 있는지, 그런 것을 검사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여기에 처음 와 보는 모양 이었다. 방문자는 우선 곽을 옆에 내려놓고 출입증부터 제시해야 할 텐데, 그는 곽을 땅바닥에 내려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이쪽이 출입증의 진위 여부를 먼저 판단한 후. 출임증에 기록된 내용 과 곽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이 동일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물론 그때 독극물 검사도 함께 하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하지만 그는 곽을 등에 진채 품속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패력검제는 묵향과 헤어진지 80시진(160시간) 만에 십만대산에 도착했다. 그 짧은 시간에 커다란 짐-관-을 들고 1만 리 길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운 그는 지금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공력 소모를 줄이고자 답설무흔(踏雪無痕) 의 경공 따위는 때려 치운지 오래였기에,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은 그 의 체력 소모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십만대산에 도착하기만 했다고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십만대산 외곽을 지키고 있는 마교의 졸개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제서야 패력검제는 자신이 마교의 총타에 왔다는 실감이 났고, 동시에 뭔가 새로운 것을 탐사 하는 듯한 묘한 설레임까지 들고 있었다. 십만대산에 마교 총타가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십 만대산의 위치도 웬만한 무림인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십만 대산에 발이 달려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도 아닌 만큼 그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유명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정파고수도 안에 들어가는데 성 공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십만대산은 철옹성이었던 것이다. 패력검제는 마졸들의 외침에 교주에게서 건네받은 흑룡패를 품속에서 꺼내 들어 응수(應酬)했다. "수석장로에게 안내하거라." 교주가 이것을 자신에게 건네주며 말했었다. 「이것을 보여주면서 수석장로에게로 안내하라고 해. 그러면 해 줄거야.」 흑룡패를 꺼내들자. 과연 반응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패력 검제가 생각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마졸들은 한동안 흑룡패를 살펴보더니 수상쩍다는 듯 그를 다그쳐왔던 것이다. "이것이 뭔데 네 녀석이 감히 지고하신 수석장로님을 뵙게 해 달라는 것이 냐?" 그 옆에 서 있는 놈은 한술 더 떠서 관으 ㄹ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죽거렸 다. "이거 수상한데? 혹시 저 속에 뭔가 이상한 물건이라도 들어 있는거 아냐? 빨리 곽부터 열어라. 네놈이 수석장로님을 팔면 우리들이 겁멀을 줄 알았던 모양인데, 이곳은 그리 허술한 곳이 아니다." 그들의 눈에 눈길을 씨근덕거리며 달려온 패력검제가 결코 고수처럼 보였 을 리가 없었다. 마교의 고수들처럼 강렬한 마기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었고 , 만 리 길을 달려오느라 지쳐서 허연 입김을 연신 뿜어내고 있는 그의 모 습에서 고수의 풍도를 찾으라는 것은 너무나도 무리한 주문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무장을 하지도 않은 채 커다란 관 하나만 달랑 등에 지고 있는 것 으로 보아 짐꿈으로 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 물건이 뭐냐? 빨리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각자 무기를 겨누며 이런 식으로 위협해 오자 패력검제로서는 황당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 이 흑룡패가 제작된 것이 요 근래였기에 그것을 제대 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문제기는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하급무사들에게까지 그 모습이 알려질 정도로 흑룡패가 하 찮은 물건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최소한 조장급 이상은 되어야 이것이 지닌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허허. 말이 안 통하는 놈들이로다. 교주의 부탁으로 수석장로를 만나러 왔거늘……." 하지만 그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장에서 그가 칭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지고한 위치에 계신 높으신 분들이었으므로, 전 혀 현실감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새파랗게 젊은 놈의 말이니 더 볼 것도 없었다. "이런 미친놈. 교주님이 네놈 친구냐?" "정말 수상한 놈이군." 마졸들의 응대에 이제 패력검제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그렇게 만만 하게 보인다는 말인가? "허~, 미친놈이라고? 이런 무례한 놈들을 봤나. 노부가 누군줄 알고 네놈 들이 감히!" "더 이상 상대할 것 없다. 포박해라!" 마졸들이 달려들었지만, 당연히 그들이 패력검제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 주먹질 한 번에 기세좋게 앞서나갔던 동료 하나가 눈길위에 큰 대자로 쭉 뻗어 버리자, 그들 중 한 명이 품속에서 호각을 꺼내어 정신없이 불기 시작 했다. 삐익! 삐익! 삐익! 얼마 지나지도 않아 방금 전 패력검제가 때려눕혔던 마졸들과 똑같은 복장 을 한 자들이 사방에서 달려 나왔다. 이 일대를 맡고 있는 제15조 외각 경 비대 무사들이었다. 물론 15조 대원의 수가 백여 명이기는 했지만 경비하는 지역이 워낙 넓다보니, 각자가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조금씩 차이가 났다. 그렇다 보니 그들은 자연 순차적으로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차례대로 패 력검제에게 한 방씩 맞고 나뒹굴고 있는 실정이었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고 느꼈는지 마졸등 중의 한 명이 호각을 꺼내어 불 었다. 이번에는 방금 전의 그것과는 소리가 조금 틀렸다. 삐이이익! '호오. 이것도 꽤 재미있는데?' 패력검제가 마졸들을 때려잡는 것에 재미가 붙을 때쯤 되어, 이제 진짜들 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마졸들과는 그 차원이 다른 인물들이 말이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현장의 상황을 곧바로 파악한 후, 패력검제를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왔다. "허업! 이건 제법인데!" 한순간에 달려 들어온 자들의 수는 무려 50여 명. 방금 전까지 패력검제를 상대하던 자들과 그 복장은 똑같았으나 각자 휴대한 무기를 장식하고 있는 수실의 색이 자색이라는 점만 달랐다. 그들이 바로 마교의 정예 자성만마대 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녹록치 않은 실력자들이었지만, 그렇다 고 패력검제의 상대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패력검제는 마졸 들 중의 하나에게서 빼앗은 검 한 자루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적당하게 다져 놓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덧 30여 명에 달하는 자성만마대 대원들이 부상을 당해 여기저기에 쓰 러져 있을 때 쯤 되어, 더욱 많은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에서 요란한 호각 음이 들려오고 있었고, 그 소리를 들은 고수들이 이곳으로 몰 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1차적으로 대기조로 편성되어 있었던 자성만마대 대 원 100여명 도착하는가 싶더니 반각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보다 더욱 고수 들이라고 할 수 있는 염왕대 소속의 고수 30명이 도착했다. 염왕대 고수들을 이끌고 도착한 냉막한 표정의 무사는 어지럽게 쓰러져 있 는 수많은 마교 고수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그는 자신의 수하들 을 향해 저놈을 치라는 명령을 내리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저런 뛰어난 고 수가 왜 이곳에 와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 던 탓도 있었지만,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자들 중 부상자도 있기는 했지 만 죽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상대가 이쪽과의 대화를 원한다는 증거였다. "멈춰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패력검제를 향해 부나비처럼 달려들고 있던 마졸들 은 일제히 뒤로 빠졌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보아하니 꽤나 무림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고수인 듯한데. 어찌하여 본교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이오?" 패력검제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니, 그곳에도 역시 똑같은 복장의 마 교 고수가 한 명 서 있었다. 하여튼 모두들 똑같은 복장들을 하고 있다보니 옷값이 적게 들어 좋을 듯하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개성을 무시하는 처사라 고 생각해 보는 패력검제였다. 이때, 패력검제는 그자가 다른 인물들과 조 금 다른 점이 있음을 찾아냈다. 바로 검에 걸려있는 수실의 색이 황색이라 는 점. 아마도 마교에서는 계습의 높낮이를 수실의 색으로 구별하는 모양이 라고 패력검제는 생각했다. "허어, 이제서야 말이 통하는 놈이 왔구먼." "……." 이제야 자신이 말을 할 틈을 얻은 패력검제로서는 상대의 제안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품속을 뒤져 다시 한 번 흑룡패를 꺼내들며 말했다. "이걸 알아보겠나?" 상대방은 잠시 흑룡패를 노려봤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노려본다고 해서 흑룡패가 다른 것으로 둔갑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이것이 바로 흑룡패라 는 확신이 서자 곧장 부복하며 외쳤다. "흑룡패를 뵈옵니다." 뜻하지 않은 상관의 반응에 다른 마졸들도 일제히 부복하며 외쳤다. 그들 중에는 이놈의 흑룡패가 뭔지도 모르는 자가 부지기수였지만, 아무튼 따라 서 외쳤다. "흑룡패를 뵈옵니다." 방금 전 자신에게 칼을 빼들고 달려들 때는 언제고, 이제는 이 작은 옥 조 갓에 부복하다니. 정파인의 한 사람인 패력검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물론 정파의 각 문파에도 문주를 대표하는 신물(信物)이 라는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이 들고 왔다고 해서 이처럼 부복하는 황당한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신물이라는 것은 차기 문주 내정자 라든지 뭐 그런 것을 뜻하는 하나의 증표일 뿐이기에. "수석장로에게 노부를 안내해 주겠는가?" "수석장로님께 말씀이십니까?" 그는 잠시 생각해 본 후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예. 안쪽에 기별을 넣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러는 한편 그는 옆에 서 있는 자에게 뭔가 전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 리고 그 명령이 끝나자 그 명령을 받은 자는 재빨리 어딘가로 떠났다. 패력검제는 황색수실 무사의 안내를 받으며 총타쪽으로 걸어갔다. 물론 등 에 소연이 들어 있는 관을 진 채로 말이다. 그는 주위의 경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구경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십만대산. 말 도 많고 탈도 많은 이 마교의 본거지에 와 본 정파인은 자신뿐일지도 모른 다. 그런 만큼 나중에 문서로라도 이곳에서 그가 본 것을 남겨 혹시 마교와 의 전쟁이 벌어질때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였다. 그러던 와중에 그의 감각에 예리한 고수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 자신을 안 내하는 황색수실의 무사와는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막강한 실려자들의 느낌 . 그 수는 거의 백 명에 달했다. 만약 그들이 기척을 숨길 수 있는 정파의 고수들이었다면 패력검제라 해도 그들의 위치를 눈치채기 어려웠을지 모르 지만, 마교도들은 뛰어난 실력자일수록 그놈의 마기 때문에 더욱 위치 파악 이 용이하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들의 존재를 단숨 에 파악했던 것이다. '일문의 장로급 정도를 상대할 수 있는 고수가 백 명이라. 마교라는 단체 는 정말 대단하구나.' 패력검제가 이렇게까지 칭찬한 자들은 바로 호법원에 속한 고수들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수석장로를 만나겠다고 청했는데, 그가 아무리 교 주의 신물인 흑룡패를 지니고 있다 해도 그를 전폭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기 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이들이 출동한 것이다. 짙은 마기만 아니라면 순박하기 그지없는 촌로(村老)로 보일 정도로, 순후 한 인상의 늙은이가 자기를 소개했다. "어서 오시구려. 노부는 수석장로직을 맡고 있는 북궁뇌(北宮雷)라고 하오 ." 패력검제는 마주 포권하며 인사했다. "노부는 서진(徐眞)이라고 하오." 서진이라는 말에 수석장로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때, 그의 뇌리에 떠 오르는 하나의 명호가 있었기에 그는 경악해서 외쳤다. "귀하가 패력검제란 말씀이오?" 패력검제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 침묵이 너무나도 오랜 시간 계속되었기에 패력검제가 자신의 용건을 먼저 밝히려는 순간, 수석장로가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노부를 만나자고 한 이유는 무엇이오? 그리고 흑룡패를 귀하가 지니고 있 는 이유 또한 듣고 싶소이다." 수석장로의 차가운 눈초리는 만약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패력검제를 결코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수석장로 한 사람이라면 패력검제를 어떻게 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수석장로실 밖에는 호법원의 고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 연락을 받고 초류빈 부교주까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사실상 교주가 총타에 없는 지금, 총타의 가장 윗사람은 초류빈이었기에 흑룡패를 든 괴한이 총타를 방문한 사실을 수석장로가 그에게 안 알렸을 리 없었다. 그런 만큼 패력검제가 제아무리 화경급의 고수라고 해도 수석장로 가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만 내린다면 그는 오늘 이곳에 뼈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 "노부가 이곳에 온 것은 교주의 부탁 때문이오." 또다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수석장로는 「교주의 부탁」이라는 말에 패 력검제를 한 번 보고, 이번에는 패력검제 뒤쪽에 놓여 있는 관을 한 번 바 라봤다. 잠시 후 수석장로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저것과 상관있는 것이오?" 수석장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관이었다. 패력검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그렇소 저것을 교주의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소 . 아마도 지금 연공실에 있을 거라고 했소이다만……." "연공실이라구요?" 잠시 생각하던 수석장로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그분께서 연공실에 계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그분을 직접 만나실 생각이시오?" "그렇게 부탁받았소. 연공실로 내려가서 쇠문을 두들긴 후, 아무런 대꾸가 없을 때는 문을 박살내면 된다고 하더군요." "크헙!" 그 말에 수석장로는 기겁을 했다. 그런 짓을 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 는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하지만 패력검제가 수석장로에게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알려준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바로 그 한마디에 수석장로의 대우 가 달라졌던 것이다. 수석장로는 즉시 밖에 대고 외쳤다. "이분을 즉시 천마동으로 안내해 드리거라." 그런 다음 그는 패력검제에게 덧붙여 말했다. "아무래도 그… 문을 부수는 것은 혼자 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하구려. 노부 는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그럼 마중은 안 하겠소이다. 잘 가시 오." 왜 갑자기 평생 다시는 안 볼 걱처럼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패력검 제로서는 의아했지만, 뭐 사실 마교도하고 자신하고 다시 볼 필요는 없을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일이 끝난 후 자신을 찾지 말고 그냥 돌아가라는 뜻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는 패력검제였다. "호의 고맙소이다. 그럼." 수하들의 안내를 받아 밖으로 나서는 패력검제의 뒷모습을 보며 수석장로 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아마 교주께서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이라도 하시려는 모양이지?" 12. 황금빛 괴물과의 조우(遭遇) 교주전용의 연공실. 그 입구에는 「闡魔洞(천마동)」이라는 편한이 걸려 있었다. 그곳까지 패력검제를 안내해 준 황색수실의 무사는 천마동 앞을 경 비하고 있던 무사들에게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두터운 강철문이 열린 후, 그는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리로 들러가시면 됩니다. 저희들이 안내할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니, 그 다음부터는 혼자 가셔야 합니다." "수고했네." 황색수실의 무사에게 고맙다는 뜻을 전한 후, 패력검제는 시커먼 어둠 속 으로 망설임 없이 발을 들여놓았다. 패력검제는 그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연공실이 나타날 줄 알았다. 하지만 연공실은 나타나지 않고 칠흑같은 어둠 으로 뒤덮힌 동굴만이 끝도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연공실은 총타의 가장 밑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그곳까지의 통로가 긴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동혈의 안쪽으로는 단 한 점의 빛조차 없어. 칠흑과도 같이 어두웠다. 아 마도 교주 정도 되는 고수만이 사용하는 곳이라 무공 수준이 낮은 자들에 대한 일체의 배려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어둠도 패력검제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었다. 한동안 동혈을 따라 내려가던 패력검제는 엄청난 마기를 느꼈다. 제법 실 력 있는 고수들이 매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깜빡 잊고 있었지만, 이 곳은 마교의 지존이 연공을 하는 장소로 들어가는 통로가 아닌가.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연공 중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기에, 외인의 침입에 철저하게 대비해 놨을 것이다. 어쩌면 동혈을 이렇게 어둡게 해놓은 것도 하나의 눈 가림일 수도 있다. 이런 암흑 속에 기관진식을 설치해 놨다면 그 효과는 배 가될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동굴 저 안쪽에서 강렬한 마기 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요소요소에 고수들까지 배치해 놓은 모양이다. 이 정도라면 웬만한 침입자들은 연공실에 도착도 하기 전에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여기에 수석장로에게 허락을 받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침입 한 것이었다면, 아무리 패력검제가 화경에 달하는 고수라고 할지라도 이 일 은 목숨을 건 모험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 동혈 안쪽의 대비는 강 력했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던 음산하기 그지없는 강렬한 기운들이 더 이상 느껴지 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패력검제의 앞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드디어 연공실에 도착한 것이다. 철문을 두드리려면 패력검제의 머릿속에 흥미로운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이 안에 시체라도 잔뜩 들어있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 이었다. 세인들은 암흑마제가 지금의 경지를 개척하기 위해 수많은 천인공 노할 악마적인 대법들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지 금 그것이 사실인지 알 수 있는 천재일우(千栽一遇)의 기회를 그가 잡은 것 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아버지」라는 사람 또한 그것과 관 련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죽기 직전의 사람을 냉동시켜 운반한 다음, 치료 하여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그런 해괴망칙한 소리는 이번에 처음 들어봤으 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가능할 정도의 악마적인 의술을 지닌 자라면, 못할 짓이 뭐가 있겠는가. 두근두근. 패력검제는 가슴이 뛰는 것을 참으며 철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겼지만, 아무 리 기다려도 안에서 반응이 없었다. "뭐야. 이거 혹시 저 위에서 통과해 왔던 것처럼 이 문 뒤에 또 다른 동혈 이 연결되어 있는 건가? 젠장! 그렇다면 좀 더 세게 두들겨야 겠군." 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동혈을 울리며 퍼져나갔지만, 그 어떤 반응도 일어 나지 않았다. "진짜로 문을 때려 부숴야 하나? 그러다가 그 아버지라는 사람이 이 안에 서 연공 중이라면 그 충격에 주화입마를 당할 것이 확실한데……. 아니, 그 자가 의생이라면 연공 중일 리가 없잖아. 뭔가 시체라도 하나 놔두고 해부 하고 있는 중이겠지. 제발 좀 들어라. 얼마나 집중해서 일을 하고 있기에 이 큰 소리를 못 듣는단 말이냐!"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계속해서 문을 두들겼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어 떤 반응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젠장. 할 수 없다. 때려 부수라고 했으니 부숴야지. 아마 이럴 줄 알고 부수라는 말을 한 것이겠지." 그는 손을 쓰기에 앞서 철문이 어느 정도 두께로 제작된 것인지 먼저 면밀 히 살피기 시작했다. 일단 그 두께가 어느 정도 되는지 파악하고, 문을 파 괴하기에 적당한 정도의 내공만 쓸 생각이었다. 그래야 안에 있는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테니까. "아마 3촌은 족히 되는 철판인 듯한데……. 이거 전력을 다해도 부서질지 장담을 못하겠군. 이런 난제가 마지막에 가로막고 있는 줄 알았다면 검을 가져오는 건데 그랬어." 이때, 갑자기 그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교주에게서 배운 대법. 그것은 극한의 빙공인 만큼, 대법을 이용하여 강철을 얼린 후 충격을 가하면 의외로 간단하게 철문이 파괴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그 빙공이 얼마나 강철을 냉동시킬 수 있느냐가 문제겠지만. 힘을 쓸 일이 발생했기에, 패력검제는 우선 등에 지고 있던 관부터 옆에 내려놨다. "크헙!" 패력검제는 기마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철문에 장심을 붙이고 내력을 운용 했다. 그에 따라 예의 그 현상. 즉, 그의 손이 투명하게 빛나며 그 속에 있 는 혈관까지도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철문이 냉각되기 시작 했다. 일단 준비 작업이 완료되자 패력검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한 수를 날릴 준비를 했다. 기마자세로 선 상태에서 기를 일주천시키며 강대한 힘을 끌어모은 패력검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장 강력한 권법에 더해서 교 주에게 배운 대법까지 복합해서 운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교주가 가르쳐 준 그 대법은 놀랍게도 자신이 사용하는 무공에 전혀 거슬리지 않고 독자적으 로 따로 움직이며 더욱 강대한 힘을 더해 주고 있었다. "이얍!" 쿠쾅! 굉음이 울리며 그 커다란 쇠문이 터져 나가 버렸다. 아무리 철문이 냉각된 상태였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나도 엄청난 파괴력이었기에 그것을 시전한 패력검제 조차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헛! 이게 뭐 이렇게 쉬워. 이거 생각보다 문이 약했던 모양이군." 만약 안되면 저 위쪽의 방금 지나왔던 경비무사에게 다가가서 무기를 빌려 올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패력검제는 권 자체가 지니는 파괴력도 파괴력이 었찌만, 마교가 자랑하는 소수마공의 강력한 파괴력이 그에 덧붙여졌기에 가능해진 결과였다. 그냥 작은 구멍만 뚫어 놓고, 속에 질러진 빗장을 벗기고 들어갈 생각이었 는데 일이 좀 커진 듯했다. 기물파괴로 인해 변명의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교주의 부탁대로 한 것인데. 일단 일은 벌어진 것이고, 이 제 당사자를 만나 교주의 부탁으로 왔음을 알리는 일만 하면 끝날 것이다. "계십니까? 방금 전 소란을 일으켜 죄송…, 이… 이게 뭐야? 그… 금?" 패력검제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연공실에는 교주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없었다. 있다면 태산처럼 쌓여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 덩어리. 그가 태 어나서 이렇게 많은 황금을 본 것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연공실이 아니고 마교의 보물창고였다는 말인가? 패력검제는 작금의 상황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에 손을 뻗어 황금 덩어 리를 만져봤다. 차갑기 그지없는 금속성의 감촉. 정확한 것을 알아보려면 이 일부를 전장(錢場=은행)에 가져가야 알 수 있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틀 림없는 황금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연공실은 딴 곳에 있는데 내가 갈림길을 놓쳤나?' "허어, 큰일이군. 보물창고 문짝을 날려놨으니 이 일을 어쩐다?" 패력검제가 한탄하고 있을 때. 문득 그가 만지고 있던 황금 덩어리가 위로 슬쩍 움직였다. "허억! 이, 이건 또 뭐야?" 황금 덩어리가 위로 올라가고, 그곳에는 거대하면서도 투명한 보석 덩어리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크기는 거의 반 장이나 될 정도로 거대해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며 점점 더 현실성이 없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패력검제였다. 이때, 패력검제의 머릿속을 울리는 거대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놈은 뭐냐?> "예…, 예?" <네놈은 뭐냐고 물었다. 왜 문짝을 부수고 들어온 것이지?> 패력검제는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하지만 그가 주위를 둘러볼 것도 없이 . 이 부근에 그 어떤 사람도 없음을 자신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 다면 이건 또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인가? 혹시 어디에 기관장치라도 되어 있는 건가? 이때, 패력검제의 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커다란 보석 덩어리 를 덮고 있던 금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모습을 봤 던 것이다. 꼭 사람이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어? 그러고 보니 저 보석 덩어리도 꼭 눈(目)처럼 생겼군. 거참 희한하게 만들어 놨네. 그런데 왜 이딴 걸 만들어 놨지?' 패력검제가 딴 생각을 하느라고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신경질적인 어조가 들려왔다. <빨리 대답을 해라> 그와 동시에 황금 덩어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패력검제로서는 기절초 풍할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그긍! 거대한 황금 동산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연공실은 무너질 듯 흔들리기 시 작했다. 어떤식으로 기관장치를 만들어놨는지 모르지만, 그 움직임이 정말 이지 패력검제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이때, 패력검제의 앞쪽에 놓여 있던 거대한 황금 덩어리의 일부가 서서히 위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의 정면에 고정되었다. 그 순간 패력검제의 눈에 황금 덩어리의 전체적인 모습이 잡혔다. 그것은 바로 거대한 황금색 괴물의 무시무시한 얼굴 형상이었다. 물론 전설에 들려오는 용이나 이무기의 모습 과 흡사한 구석도 있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이 괴물의 생김새는 그가 들 었던 그 어떤 전설적인 신수(神獸)들의 모습과도 달랐다. 이제 틀림없었다. 이놈의 금빛 나는 거대한 덩어리가 황금 덩어리가 아닌 괴물일지도! "크어억! 이, 이럴 수가!" 패력검제는 너무나도 놀라 혼이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대답을 하기 싫다 이거지?> 앞발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괴물의 일부가 엄청난 속도로 위로 움직였다. 하지만 워낙 동혈이 좁아서 그런지 그것은 굉음을 내며 천장에 부딪치고 말 았다. 천장의 일부가 부서지며 돌조각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서야 패력검 제는 정신을 차렸다. 패력검제는 떠오르는대로 정신없이 외쳤다. "다크가 아빠에게!" 패력검제를 깔아뭉갤 듯 덮쳐오던 괴물의 앞발은 그의 바로 코앞에서 멈칫 멈췄다. 교주가 그때 말해 줬던 「암호」가 통했던 것이다. 그것을 확신한 그는 그 다음 구절도 모두 다 정신없이 외쳤다. 처음 들었을 때 낯 간지러 운 암호라며 경멸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부,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빠를 사, 사랑한다고도 했습 니다." 순간 패력검제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괴물의 입매 부분이 뭔가 슬쩍 말려 올라가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황금색 괴물의 거대한 앞발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이런 젠장! 그래, 말해 봐라.> 그는 관을 가리키며 재빨리 말했다. "저기에 있는 사람을 치료해 달라고 했습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는 데, 아버지라면 고칠 수 있을 거라며……." <이런 젠장! 됐다. 이놈은 애비가 자기 전속 의생이라도 되는 줄 아나?> '애비라고? 이런 젠장. 그렇다면 교주도 저런 괴물이라는 말인가? 하기야 교주의 그 강함은 분명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니……. 그럴수도 있겠 군. 저런 괴물이 둔갑했음에 틀림없음이야.' 이런 패력검제와 아르트어스의 어긋난 만남은 미처 묵향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아르티어스가 연공을 하겠다고 선언한 만큼, 그 속에서 드 래곤인 상태로 낮잠이나 퍼자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해 보지 않았던 것이 다. 묵향이 그 「암호」를 알려준 것은 혹시 문을 때려 부쉈을 때 가해질 치명적인 보복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기 위한 것이었지, 이런 상황에서 그 의 목숨을 살리라는 뜻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황금빛 괴물은 투덜거리며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황금색의 휘황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기에 패력검제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어디에 서나 볼 수 있음직한 초로의 늙은이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황금 동산은 자취를 감춰 버린 후였다. 만약 그 황금 덩어리의 양이 조금 작았다면, 이 영감탱이가 기관을 이용하 여 자신을 농락한 것이라고 단정지었을 패력검제였다. 사실 그런 괴물의 존 재를 믿기에는 패력검제의 나이가 너무 많았으니까. 하지만 기관에 의해 순 식간에 없애기에는 황금 동산의 양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그 황금 동 산처럼 생긴 괴물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생동감이 넘쳤었다. 그렇기에 패력 검제는 이 초로의 노인이 방금 전의 그 엄청난 덩치의 괴물이 둔갑한 것임 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예? 그냥 교주의 심부름으로 이곳에 왔습니다만……."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요 근래에 '마스터급'이 너무 흔하게 보인단 말씀이야. 동생이 라는 놈에 이어서, 수하. 그리고 이번에는 심부름꾼까지 마스터라니." 혼자서 툴툴거리던 노인은 패력검제를 향해 명령했다. "가져와 봐." "옛." 패력검제는 저 노인으로 둔갑한 괴물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마스 터급」이라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걸 몰 라도 괴물의 명령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관을 가져와서 노인 앞에 놓은 다음, 관 속에 들어 있는 소연을 볼 수 있도록 관 뚜껑까지 열어주는 친절까지 아끼지 않았다. 관 속을 들여다본 노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 이죽거렸다. "흐음. 기가 막히구먼. 죽기 직전에 꽁꽁 얼려놨어. 지독한 놈 같으니라구 . 그렇게까지 애비를 부려먹고 싶나? 그냥 죽게 놔두면 그만인데 말이야." 이때, 패력검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초로의 노인이 손 을 뻗어 소연의 가슴언저리에 가져갔을 때, 그의 손에서 눈을 뜨고 구경하 기도 힘들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패력검제가 그 빛이 너무나도 따뜻한 느낌이 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기저기에 흉측하게 입을 벌리고 있던 소연의 크고 작은 상처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손에서 빛이 나오는 것도 믿기 힘든데, 그 빛을 쬔 상처까지 치료되고 있는 것이다. 패력검제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 면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금껏 지니 고 있던 모든 상식에 위배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게 별것이 아닌 듯도 했다. 그런 엄 청난 괴물도 살고 있는데, 그 괴물이 사람으로 둔갑하여 요망한 술법을 좀 부린다고 해서 그게 무슨 큰일이겠는가. 이윽고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던 소연의 얼굴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녀의 눈이 살짝 떠졌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 그녀는 작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 아 빠가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빠는 오랜 침 묵을 깨고 자신이 아빠라는 것을 인정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어디라 는 말인가? 아빠와 만났던 것이 꿈인가? 아니면 지금 자신이 꿈속에 있는 것인가? "아, 아빠는 어디에 계시죠?" 그 말에 초로의 노인이 싸늘한 어조로 대꾸해 왔다. "네년의 아빠를 여기서 찾으면 어찌 하냐?" "……." 소연은 노인의 싸늘한 대꾸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주위를 주의 깊게 둘 러봤다. 다행히 노인의 옆에 눈에 익은 사람이 하나 서 있는게 보였기에 그 녀는 저으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소연의 의식이 돌아오자 패력검제는 그녀 쪽으로는 시선조차 보내지 않으 며 말했다. "의식이 돌아왔으면 빨리 옷부터 입거라. 관 속에 있을게다." 소연이 다급히 옷을 입고 있을 때, 노인은 패력검제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치료 끝났으니 데리고 가. 더 이상 열 받게 하지 말고."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외쳤다. "참! 저 아이는 내 아들과 어떤 관계지?"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얼마 전에 치료한 아들놈의 사제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그놈에게서 느껴 지던 기운하고 저 아이의 기운이 묘하게 일치하는 구석이 있다는 말씀이야 ." "아, 그러고 보니 교주는 소연이 자신의 딸이니까 잘 치료해 달라고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숨겨둔 딸인 모양이었습니다. 저도 여태껏 교주에 게 딸이 있다는 사실은 들은 적도 없으니까요. 참, 그러고 보니 어, 어르신 께는 손녀가 되겠군요." 패력검제가 손녀라는 말을 꺼내고 나서야 소연은 눈앞에 서 있는 촌로가 자신의 할아버지뻘이 됨을 알았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소연이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미흡하시겠지만 예쁘게 봐주셨으면 감사드 리겠습니다." "하, 할아버지? 흐음, 뭔가 기분이 묘하구먼." 사실 드래곤들의 관계에서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을 일은 거의 없다고 봐 도 무방했다. 왜냐하면 분가하면 그걸로 더 이상 아버지의 얼굴을 볼 일은 없었으니까. 만날 도망치고, 또 붙잡혀 두들겨 터지는 가운데 돈독한(?) 관 계를 유지한 아르티어스와 아르티엔의 관계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이다. 물론 소연이 손녀라고 해서 별로 바뀔 것은 없었다. 과거 아르티엔이 다크 를 진정한 손자로서 취급해 주지 않았듯, 아르티어스 또한 소연을 자신의 손녀로 살뜰하게 대해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유희를 즐기던 도중에 덤으로 따라온 존재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소연을 막 대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르티엔이 그렇게 했듯, 유희로서 소연을 자신의 손녀로서 대해줄 용의는 충분히 있었다. "내 손녀라면 좀 더 제대로 치료해 두는 것이 좋겠군. 이리 와 보거라." 하지만 소연은 고개를 숙이며 다소곳이 대답했다. "저 때문에 더 이상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할아버지. 이제 다 나 은 것 같은 걸요. 더 이상 아픈 데도 없는 것 같구요." "그래? 거참 이상하군. 여기저기 결리는 데가 있을 텐데…. 뭐, 네가 그렇 게 말한다면……." 안 그래도 귀찮은 김에 잘됐다고 생각하던 아르티어스의 머리에 번쩍하고 스치는 것이 있었다. 저것이 내 앞에서는 괜찮다고 말해놓고, 아늘놈 앞에 서 여기저기 아프다며 우는소리를 하면 자기만 곤란해지게 되는 것이다. 거 기에 생각이 미치자 아르티어스는 다짜고짜 소연에게 다가가 치료마법을 시 전했다. 그의 손이 다시 한 번 더 빛을 뿌리는 순간, 소연의 몸속 깊은 곳 에 잔재되어 있던 모든 내상까지 완전히 치료되었다. 아르티어스의 행동에 소연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치료마법이라는 것이 있는 줄은 상 상도 못 해 본 그녀였으니까. "정말 놀라워요. 어떻게 하면 손바닥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빛을 내실 수가 있는 거죠?" 자신의 몸 상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치료마법을 시전하는 동안 발현되는 그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은 소연이었다. 치료를 끝낸 후 노인은 패력검제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진짜로 잘 치료해 줬어. 성심성의껏 해 줬으니 이 애비의 은혜 를 결코 잊으면 안 된다고 아늘놈에게 전하도록. 알겠냐?" "옛. 확실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가 봐." 패력검제는 아르티어스의 가 보라는 명령에 나가려고 했지만, 소연이 자신 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망설이는 듯 보였다. 이곳에 남아서 얘기를 좀 나 누자는 것인지, 아니면 함께 나가라는 것인지 할아버지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덧붙였다. "손녀도 함께 데려가게. 나는 여기서 할 일이 좀 많거든." 그 어조를 부드럽게 한 것은 그래도 유희의 규칙상 제대로 된 할아버지 노 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인사한 후 패력검제가 나가려고 할 때, 아르티어스는 지금껏 자신이 잊어 버리고 있는 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것이 이때 갑자기 생각났는가 하면, 그들이 밖으로 나가려고 문쪽으로 가자, 그들의 뒷모습을 살펴보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눈에 박살 나 버린 문짝까지 보였던 것이다. 패력검제의 등 뒤에서 으시시한 음석이 들려왔다. "참, 자네 잊고 가는 게 있군. 다시 이리 와. 그리고 너는 먼저 나가서 좀 기다리거라. 어쩌면 얘기가 조금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예? 무슨 일이신데 그러십니까?" 소연은 인사를 하고 떠났고, 아르티어스의 성질머리를 모르고 있었던 패력 검제는 아르티어스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자신을 왜 부르는지도 모르고. 만 약 그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는 결단코 그곳에 홀로 남는 우를 범하지는 않 았을 것이다. 몇 시진 후, 수석장로는 다시금 자신의 집무실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을 멀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문짝을 때려 부수겠다고 호언장담하 며 들어갔던 패력검제가 살아서 나왔다는 것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로 서는 너무나도 놀라웠던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아르티어스에게 무지막지 하게 깨지기는 했지만, 뒤처리(?)를 비교적 깨끗하게 해 놓은 상태였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수석장로가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명. 패력검제 옆에 앉아 있는 제법 무공이 높아 보이는 여고 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패력검제와 함께 천마동에서 튀어나온 것 을 보면, 처음에 그가 가지고 들어갔던 관 속에 저 여인이 들어있었음을 간 단하게 추리할 수 있었다. 수석장로가 봤을 때도 완전히 재생이 불가능하다 고 생각했던 교주의 사제를 교주의 아버니는 순식간에 고쳐놓은 적이 있었 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관 속에 들어있는 시체마저도 살려냈다는 말이 아닌 가? 생각만 해도 모골이 다 송연해지는 수석장로였다. 이때 서로 간에 흐르던 침묵을 깬 것은 패력검제였다. 그는 여기저기가 결 리는 모양인지 몸 곳곳을 주물러대며 입을 열었다. "여기 조용히 운기조식할 만한 곳이 있으면 안내해 줄 수 있겠소?" "아, 교주님의 부탁을 받고 먼 길을 오셨을 텐데, 내가 너무 무심했었던 듯하구려. 수하들에게 편히 지내실 만한 거처를 마련하라고 이르겠소이다. 한 며칠 푹 쉬면서 노독(路毒)이나 푸시지요." "편의를 봐주셔서 고맙소이다." 수석장로는 밖에 대고 외쳤다. "왕지륜!" "옛. 찾으셨습니까? 수석장로님." "손님들께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숙소를 마련해 드리거라." "옛." 왕지륜은 패력검제와 소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숙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왕지륜과 함께 손님들이 나간 후, 수석장로는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에게 숙소를 안내해 준 것은 그로서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 했기 때문이었으니까. '젠장. 그렇다면 교주께서는 그놈을 죽이려고 그 안에 집어넣으신것이 아 니었다는 말이잖아.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처리를 결정할 사항이 아닌 듯 해. 군사와 상의해 봐야겠군.' "어서오십시오. 수석장로님.' 군사가 건네는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하며 수석장로는 급히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 패력검제가 본교를 방문했다는 얘기 들었나?" "물론입니다. 그런데, 수석장로님께서 별일 아니라고 연락하셨지 않습니까 ?" 수석장로는 그가 천마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 라고 생각하고는 군사에게 별일 아니니 신경 끄라고 연락을 보냈었던 것이 다. "그래. 그랬지. 그런데 조금 일이 틀어졌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군사의 의문에 수석장로는 그간 경과된 일련의 사정들을 밝혔다. "수틀린다고 철영 부교주님을 묵사발내신 분이 아니신가. 그런 분께서 문 짝을 부수고 들어온 그를 그냥 보내 주셨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네." 군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해 본 뒤 반론을 제기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 부슨 것이 아닐까요?" "노부도 혹 그런게 아닌가 하여 호법원에 물어봤네. 그런데, 그곳에 경비 를 서던 자들은 한결같이 엄청난 굉음을 들었다고 증언했다네." "그렇다면 진짜로 부순 모양이군요." "확실하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자가 그곳에서 살아서 나옸기에 문제라는 걸세. 정파의 최고수들 중 한 명이 본교의 사정을 훑듯이 다 관찰해 버렸는 데 가만히 살려서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닐까? 이점에 대해 자네는 어 떻게 생각하는가?" "글쎄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가 이곳으로 들어오며 본교의 내부를 관 찰했다고 해 봐야 얼마나 봤겠습니까? 패력검제는 교주님의 신물을 지니고 본교를 방문했습니다. 그런 만큼 혹시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저희들이 나설 일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뒤처리는 교주에게 맡기자는 의견이었다. 유약한 군사의 성격처럼 조금 은 복지부동적인 의견이었기에 탐탁치 않게 느껴졌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 니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교주가 신물까지 줘가며 일을 맡긴 자인데, 이 쪽에서 어떻게 처리해 놨다가 나중에 교주에게 크게 꾸지람을 당할 가능성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고 보니 자네 말이 옳은 듯도 하구먼." "물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이 사실을 부교주님께 보고해 두는 것이 좋 겠지요. 아무리 부교주님께서 본교의 일에 관심이 없으시다고 하지만, 그래 도 교주님께서는 부교주님께 대리를 맡기셨으니 말입니다." "그게 가장 좋겠군." "수석장로님. 패력검제 같은 인물이 본교를 방문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수석장로님 께서는 패력검 제 때문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지금 놓치고 계신 듯 합니다." 군사의 말에 수석장로는 아차 싶었다. 군사는 마음이 좀 심약한 것이 문제 였지. 그 능력만큼은 아주 쓸만한 인물이라고 수석장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가 문제가 있다고 하면 틀림없이 문제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놓쳤다고? 그게 뭔가." "예. 패력검제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관을 하나 가져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천마동에서 나올 때는 웬 여자와 함께 나오지 않았습니까? 바 로 그 여자를 놓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수석장로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 점을 인정했다. "그러고 보니 천마동에서 나왔을 때, 웬 여자를 함께 대동하고 있었지. 노 부가 보기에 제법 쓸 만한 실력을 닦은 고수처럼 보이더군. 그런데 그 여자 가 왜?" "그 여자가 관 속에 들어 있다가 나온 것을 보면, 이미 죽었었거나 아니면 죽기 직전의 상태에 본교에 들어왔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 다면 관 속에 넣어서 가져왔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 그렇겠지." "그는 이곳에 오면서 교주님의 신물을 가져왔고, 또 어르신께서 그녀를 치 료받게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렇지요?" 수석장로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자, 군사는 말을 이었다. "어르신이 그녀를 순순히 치료해 줬고, 또 문짝을 부순 것까지 용납하신 것을 보면 그녀는 패력검제가 아닌 교주님과 상당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 에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어르신께 치료를 받았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생각 해 보십시오. 교주님께서는 웬만한 경우에는 절대로 어르신께 치료를 부탁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야 수석장로는 군사가 왜 그녀를 언급했는지 이해했다. 수석장로는 경 악성을 내지르며 외쳤다. "허억! 자네 말이 옳구먼. 그렇다면 그녀는 도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저도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만, 이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교주님께 매우 소중한 여인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자네는 빨리 호법원에 달려가 그녀를 경호하라고 요청하게. 그리고 더불 어서 패력검제의 감시도 병행해야겠지. 그자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여기서 무슨 못된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야." "예. 수석장로님. 호계악 대호법님께 제가 직접 가서 부탁하겠습니다. 교 주님의 정인(情人)이실지도 모르는데,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 습니까." 수석장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나는 이 일을 부교주님께 아뢰겠네. 그분도 정파에서 성장하신 분이시니. 패력검제를 만나 그녀가 누군지 좀 알아보라고 부탁드려야겠군." "예.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13. 괴물(?)들의 틈바구니에서 수석장로의 보고를 받은 초류빈은 어이가 없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을 만난 지가 언제인데, 이번에는 제령문의 문주가 본교를 방문했다니. 그것도 교주 의 청으로 그 괴팍스럽기 그지없는 교주의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도대체 어떤 술수를 부렸기에 패력검제가 그런 수고를 한 것이지? 도저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초류빈이 알기에도 교주는 당금 무림에서 그 적수를 찾기 힘든 강자다. 게 다가 그는 중원 최강의 문파라고 할 수 있는 마교의 교주가 아닌가. 그가 말로는 중원일통을 할 생각이 없다고 했었지만, 언제나 그런 위험은 존재한 다고 생각해 왔던 초류빈이었다. 물론 교주가 중원을 피바다로 만들 야욕(野慾)을 부린다고 해 봐야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초류빈은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고, 또 강대한 세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림일통(武林一統)이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무림의 역사가 말해 주지 않는가. 무림일통에 도전 했던 사람은 많았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무림사상 최강이라 불 렸던 전설적인 고수 신검대협(神劍大俠) 구휘(區揮)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지금 가만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번만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초류빈이었다. 어쩌면 교주는 지금 무림일통 작업을 소리 소문 없이 진행 중인지도 몰랐다.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도 모 자라. 지속적으로 외부의 고수들을 포섭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교주가 의형으로 삼았다고 들은 만통음제를 비롯하여, 사제라는 현천검제. 거기에다가 이번에는 패력검제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결국 교주 는 역사상 최초로 무임일통을 이룩한 위대한 고수로서 역사에 우뚝 설 가능 성이 컸다. 물론 이것이 피를 통한 정복이 아니라는 것이 조금 다르겠지만, 어찌되었건 일통은 일통이니까. "젠장. 입으로는 아니라고 그렇게 떠들면서, 뒷꽁무니로 그런 얄팍한 짓거 리를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어쩔 수 없지. 교주의 그 시커먼 속을 알고 있 는 내가 나서야겠어. 패력검제가 완전히 교주에게 넘어간 것은 아닐 테니까 , 아직은 가능성이 있겠지." 중얼거리던 초류빈은 다시 한 번 하늘을 봤다. 수석장로의 말로는 패력검 제가 휴식도 취할 겸 운공조식을 할 조용한 장소를 원했기에 그를 귀빈들이 기거하는 숙소로 안내했다고 했다. "지금쯤 찾아가면 되려나? 아니야, 그것보다는 내일 일찍 찾아가는 것이 좋겠어. 사람이 들어 있는 관을 등에 지고 만 리 길을 달려왔다고 했으니, 지금 찾아가 봐야 헛것이겠지." 초류빈은 다음날 아침 일찍 패력검제와 의문의 여인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 다. 물론 그가 채력검제를 만나려는 이유는 수석장로의 요청대로 여인의 정 체를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주의 야심찬 무림일통 계획에 훼방을 놓으 려는 것이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내실에서 붉은 옷으로 곱게 차려입은 예쁘장한 소녀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제법 물이 오른 몸매로 봐서 16세는 넘은 듯 보였지만, 그녀의 앳된 얼굴로 봤을 때 절대 20살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소녀였다. 초류빈은 이곳에 처음 와 보는지라 그녀가 여기 에 배치되어 있는 하녀인지, 아니면 이곳에 투숙 중인 손님인지 알 수가 없 었다. 그렇기에 그는 실례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이곳에 배치된 시녀인가?" 갑자기 낮선 인물이 급히 다가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로 초류빈을 자세히 살펴봤다. 무기를 휴대하지 않은 걸을 보면, 무사는 아닌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이곳 마교에서 웬만큼 무공을 익힌 차라면 음산하면서도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기 지 않던가. 그런데, 이 청년에게서는 전혀 그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옷조차도 남루한데다, 무척 젊은 얼굴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 해진 것. 그녀는 재빨리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며 말했다. "쉿! 조용히 하고 빨리 나를 따라와요." "……?" 행여 누가 볼세라 재빨리 초류빈을 끌고 나온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잘 오 지 않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갔다.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걸었다. 그녀의 돌연한 행동에 당황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초류빈을 향해. "이제 됐어요. 이봐요, 새로 온 일꾼인 모양인데 이렇게 마구 돌아다니다 가 걸리면 경을 친다구요. 이곳은 본교를 방문하는 특급손님들을 위한 숙소 에요. 저기 커다랗게 마영각(魔迎閣)이라고 써져 있잖아요. 그것도 안 읽었 어요? 아니면 글자도 못 읽는 거예요?" 초류빈은 얼떨결에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로 현판을 다시 한 번 봤다. "빨리 가 봐요. 그나마 나한테 발견된 게 다행인줄 알라구요. 외부에서 들 어오는 일꾼들의 숙소는 저쪽이에요." 하녀는 심각하게 말해 주고 있었지만, 그것을 듣는 초류빈의 표정은 이제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 딴에는 도와준다고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 그것을 지켜보는 초류빈은 순진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 렇게 귀엽고, 재미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저쪽 길을 가리키며 연이어 조잘댔다. "다음부터 이쪽으로 오지 말아요. 알았죠? 아무리 길을 잃었다고 해도 이 쪽으로 오면 절대로 안돼요. 운이 없어서 각주님한테라도 들켰었다면 길을 잃었다는 변명으로 넘어갈 수 없었을 거예요. 곧바로 뇌옥에 갇혀 고문까지 당한다구요. 알았어요? "알려줘서 고맙구려, 소저. 나는 마영각이라는 곳이 그토록 흉험한 곳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설마 들어오는 사람을 모두 다 불문곡직하고 물고를 내다니. 정말이지 지옥과 같은 곳이외다." 자기는 생각해서 말해 준 것이었는데, 상대가 장난기 어린 어조로 응대하 자 하녀는 바짝 약이 오른 모양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말투까지 노인처럼 하는 것이, 꼭 자신을 어린애라고 놀리는 듯했던 것이다. "아니, 이사람이!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 거예요? 무조건 물고를 낸다는 말이 아니었잖아요. 수상한 사람 말이에요. 수상한!" "그렇다면 나는 괜찮겠구려. 나는 누가 봐도 신분이 확실한 사람인데."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인이 무슨 신분이 확실하다는 거예요? 당신들이 움 직일 수 있는 곳은 바로 저쪽 근처라구요. 만약 그곳을 벗어난 것을 들키면 곤장 몇 대 맞는……." 이때, 갑자기 싸늘하기 그지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그 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초 류빈 또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초류빈의 앞에 서 있는 소녀와 똑같은 옷을 입은 여자가 냉엄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어, 언니." 언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 새로 나타난 여인은 각주는 아니고, 조 금 계급이 높은 하녀인 듯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느냐?" 언니라는 하녀의 질책에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이, 이 사람이 길을 잃어서 가르쳐 준다고 그만……." "너는 그만 들어가 보거라."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자 언니라는 하녀는 더욱 냉엄한 어조로 꾸짖었다. "아니, 들러가라는데도 그러는구나. 네 죄는 나중에 묻기로 하겠다. 그동 안 너는 네 방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거라. 알겠느냐?" "네." 소녀가 눈물을 훔치며 마영각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 는 초류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 같은 하급고수가 지고하신 부교주의 얼굴을 알리 없었지만, 그녀는 여유만만한 상대의 표정을 보고 뭔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벌벌 떨고 있어야 옳은데, 그는 싱긋이 미소지으며 아직 까지도 소녀가 들어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녀는 아무래도 뭔가 기분이 찜찜했다. 자신이 혈화궁에서 약간 지위가 높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마교의 총타였다. 그녀보다 월등하게 높은 지위를 지닌 인물들이 널리고 널린 곳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사내가 보여 주는 것 같은 여유는 그런 지위가 높은 인물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조심스런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우선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물고를 내난 것은 그 후라도 늦지 않았다. "길을 잃으셨다고 들었는데, 어디를 가는 중이신지요?" "마영각에 가는 길이었네. 어제 본교를 방문한 남녀가 있을 텐데, 알고 있 는가?" 상대의 점잖은 대답에,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느꼈다. 상대는 허 름한 겉모습과는 달리 교에서 상당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 인물임이 분명해 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하녀는 고개를 조금 더 깊게 조아리며 말했다. "예. 손님들께 어느 분께서 찾아오셨다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자네가 전할 필요까지는 없네. 그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안내하게." "……." 이대로 이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지 않고 안내해도 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안내할 것인가. 잠시 고민한 끝에 그녀는 안내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이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번에 새 로 들어온 손님들이었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어쩐 일인지 호법원에서 파견 된 엄청나게 막강한 고수들에 의해 호위되고 있었다. 뒷일은 호법원의 고수 들이 해결해 줄 것이 분명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하녀는 초류빈을 안내하며 말했다. "손님들은 지금 안전상의 이유로 2층에서 묵고 계십니다." 마영각 안으로 들어선 후, 그녀는 상대를 계단 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하녀가 그를 손님들이 묵고 있는 객실로 안내했을 때, 그녀는 자연스럽게 상대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객실의 문 앞에 서 있던 호법원 소속 고 수들의 행동을 통해서. 객실 문 앞에서 엄청난 마기를 뿜어내며 서 있던 호 법원 고수들은 사내를 보자마자 부복하며 외쳤다. "부교주님을 뵈옵니다." 하녀는 경악 했다. 그녀는 초류빈의 행색으로 봤을 때 누군가 지위가 높은 인물의 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설마 그가 부교주일 줄이 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호법원 고수들처럼 바닥에 엎드리며 「부교주님 을 뵈옵니다」하고 외치고 있었다. "손님들은 일어나셨느냐?" "예." 하녀는 원래 그들 중 한 명이 일어나서 차를 달라고 했다는 말을 해야 했 음에도 그녀 자신의 걱정 때문에 다른 말을 건네 버렸다. 잘못하면 그 소녀 는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 날아갈 우려가 있기에. "몰라 뵙고 크나큰 실례를 저질렀나이다, 부교주님. 혹. 진진이가 부교주 님께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 아이가 아직 이곳에 온 지 얼마되 지 않아 사정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초류빈은 빙긋 미소지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진진이라고 하느냐?" "예. 왕진진(王珍珍)이라고 하옵니다." "본좌에게 실례를 저지른 것은 없었으니 안심하거라. 그리고 그 아이에게 본좌의 신분에 대해 말하여 괜한 걱정을 안기지 않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예." 그럼 가 보거라." 그렇게 말하는 부교주의 안색이 매우 평온했기에 하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일단 목숨은 건진 셈이었으니까. 마영각의 각 객실은 특급손님들을 위한 것인 만큼, 여러 개의 방들을 가지 고 있다. 중앙에 커다란 응접실이 나오고, 그곳을 통해서 6개의 좀 더 작은 방들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는 구조다. 방이 너무 많다고 생각될지 모르 지만, 사실 이곳에 묵을 손님들의 입장에서는 이것도 그 수가 너무 적다고 봐야 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자신들이 거느리고 온 하인, 하녀들과 가족 정도밖에 묵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곳을 방문할 때 거느리고 오는 그 많은 호위무사들은 다 어디에다 투숙하게 하느냐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마교는 이것을 위 해 총단의 외곽 부분에 그들을 위한 숙소를 따로 마련 해 두고 있었다. 사 실 마교쪽에서도 수많은 외부 무사들이 중무장을 갖춘 채 들어온다는 것이 탐탁치 않았기에 취해 놓은 조치였던 것이다. 초류빈이 객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눈이 거실에 앉아 있던 여인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때, 초류빈은 자신이 시간을 잘못 골라서 왔음 을 직감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울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무, 무슨 일인가요?" 초류빈은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패력검제 대협을 만나러 왔는데, 아무래도 시간을 잘못 택한 듯하구려. 본의 아니게 실례를 끼쳐 죄송하오이다." "실례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못난 꼴을 보여드려 오히려 죄송하군요 ."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초류빈은 아무래도 분위기가 껄끄러운 듯하여 분위기 전환 겸 입을 열었다. "패력검제 대협은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소?" "아마 운기조식 중이실 거에요." "그럼 나중에 다시 오겠소." 초류빈이 되돌아 나가려고 하자. 그 여인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조식에 들어가신지 꽤 시간이 흘렀으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 시면 될 겁니다." "그, 그렇소? 그럼 잠시 실례하겠소." 초류빈을 잠시 관찰하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흑풍단에 소속되신 분이신가요?" 초류빈에게서는 전혀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인은 아마도 그 가 흑풍단 소속이지 않을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초류빈은 고개를 가로저 으며 대답했다. "흑풍단 소속은 아니외다. 흑풍단을 알고계신 것을 보니, 양양성에서 오신 모양이구려." "예." "치열한 전투라도 벌어졌었소? 듣기로는 관에 길려서 이곳에 오셨다고 들 었는데……." "예." 그렇게 대답하는 여인의 얼굴에는 짙은 슬픔이 떠올랐다. 눈언저리에 다시 근 옅은 물기가 차오르는 것을 본 초류빈은 황급히 말을 다른 방향으로 돌 렸다. "교주께서는 잘 계시오?" 물론 그 인간이 잘 있을 것임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초류빈이다. 하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교주를 들고 나온 것이다. 수석장로에게 들 으니 이 여인이 교주의 정인쯤 되는 모양인데, 정인 얘기를 꺼내면 그래도 상대의 마음이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말이 상대의 감정 을 더 뒤흔들어 놓은 듯하여 초류빈은 당황했다. '젠장.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아예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하다니. 혹시 교주한테 차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뭐라고 말을 붙이기도 어렵다. 상대는 교주와 관계되어 있는 여인이다. 뭐 라고 잘못 말했다가 그걸 그대로 교주에게 고자질하면 자신만 박살난다는 치명적인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더군다나 초류빈의 경우 그렇게 여자와 깊 게 사귀어 본 적이 없었고, 특히나 요 근래 몇 십 년간은 아예 마교 안에 틀어박혀서 무공만 수련한 상태였다. 그런 만큼 이런 황당한 경우 어떤 식 으로 상대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혹은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때, 응접실과 연결되어 있는 여러 문들 중에서 하나가 열리더니 패력검 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충분한 휴식과 수면, 그리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 취한 덕분인지 그의 눈은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패력검제는 눈앞에 보이는 남자가 탈마급에 달하는 엄청난 고수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런데 그런 자 가 왜 여기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며, 또 소연은 왜 저렇게 울고 있는 것인가? "무슨 일이냐? 혹시 저자가 네게……." 패력검제의 등장이 이 난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손길인 듯하 여 내심 기뻐하고 있던 초류빈은 갑작스럽게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 되자, 화들짝 놀라 양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변명했다. "그, 그건 오해요. 나,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소." 상대의 과잉 반응이 오히려 더 의심스러운지 패력검제는 눈을 실쭉하게 뜨 며 중얼거렸다. "오해라고?" "나는 그저 교주님께서는 안녕하시냐고 물어봤을 뿐이외다. 정말이오." 이때, 흐느끼고 있던 소연이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그녀의 고운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저분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제가 추태를 보여……. 저분께서는 대협을 뵙 고자 이곳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소연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녀가 들어간 방에서 다시금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 안에서도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패력검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사과했다. "요 근래 저 아이에게 좀 일이 있어서 정신적 충격이 컸었던 모양이니. 그 대가 이해하시구려. 방금 전에 그대를 오해했던 것. 미안하오." "뭐…,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나라도 그런 상황을 본다면, 틀 림없이 그런 오해를 했을지도 모르니 말이오. 그건 그렇고 귀하가 패력검제 시오?" "그렇소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귀하는?" "나는 이곳에서 부교주를 맡고 있소." 초류빈은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괜히 초씨세가가 자신 때 문에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처음 상대를 봤을 때 가졌던 느낌이 옳았음을 알고 패력검제는 내심 아주 기분이 좋았다. "아. 부교주셨구려. 마교의 부교주들은 모구 극마급에 오른 초고수라 들었 는데.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외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하마터면 초류빈은 「도대체 저 여자는 누구요? 교주의 정인이오? 아니면 또 다른 뭐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뻔 했다. 하지만 그도 지금껏 수많은 세월을 살아오며, 그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를 정파인 패력검제가 알고 있는 데, 정작 그의 수하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그렇기 에 그는 슬슬 유도심문을 통해 상대가 알고 있는 것을 캐내기로 작심했던 것이다. "정신적 충격이라고 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왜 저분께서 관에 실 려서 온 것이냐 이 말이외다." 초류빈은 자신도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는 척 하기 위해 소연을 「저분」 이라고 칭했다. "하기야 내가 워낙 급히 여기까지 달려왔으니 이곳에는 아직 연락이 안 왔 을 수도 있겠구려. 흑살마왕쪽과 대규모 혈전이 있었소. 거기에서 천지문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고 말이오." 천지문이 어디에 있는 문파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우선 초류빈이 아는 사람이 하나 등장했다. 흑살마왕 장인걸 말이다. 그에 대한 소문이라면 여 기서도 많이 들었었으니, 아무리 초류빈이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해도 그와 교주와의 악연을 모를 리 없었다. "드디어 그와 정면 대결을 시작한 것이오?" 패력검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기에 나도 정확히는 모 르겠지만, 아마도 정면 대결은 아닌 듯 했소. 교주가 거기까지 아무리 미친 듯이 달려갔었다고 하지만, 거리가 거리인 만큼 도착하는데 1시진은 족히 걸렸소. 그동안 놈들의 포위 공격을 천지문이 버텨낸 것만 봐도, 저들도 그 렇게 큰 전력을 그곳에 투입하지 않았음이 분명하지 않겠소?" "그렇겠구려." "일의 경과야 어찌되었건, 천지문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 사실이오. 내가 자세히 파악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아마 도 30명도 살아남지 못한 듯했기 때문이오. 지금껏 함께 생활해 왔던 동문 들이 눈앞에서 그토록 무참한 죽임을 당했는데, 그녀가 충격을 받지 않았을 리가 있겠소? 더군다나 그녀 또한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났을 정도였으 니……." 초류빈은 짐짓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터뜨렸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구려. 교주님의 부탁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저분 을 이곳까지 데려와 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이오. 덕분에 저분의 목숨을 건졌소이다." 상대의 칭찬에 패력검제는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무슨 말씀을. 교주의 부탁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냥 죽게 놔두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아이였소." 패력검제가 「너무나도 아까운 아이」라고 칭찬하다, 초류빈은 재빨리 장 단을 맞춰줬다. 그가 그렇게까지 칭찬하는 것을 보면 무공적인 측면만 보고 얘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공도 그렇지만. 인성 또한 훌륭한 분이시지요. 안 그렇소이까?" "물론이오. 저런 아이도 보기 드물지요. 그 사제라는 녀석도 그렇기는 했 지만……." 여기서 말을 끊은 패력검제는 너무나도 궁금하다는 듯 초류빈에게 질문을 던졌다. 상대는 소연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듯 했으니까. "그런데 내 한 가지만 좀 물어봅시다. 교주의 딸이 왜 천지문에 있었던 거 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묻는 말이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초류빈은 경악했다. "허억! 따, 딸이라고 했소?" "……." 서로간에 긴 침묵이 흘렀다. 패력검제는 자신이 이렇게 간단하게 이놈의 함정에 빠진 것을 내심 한탄하 고 있었다. 교주가 저자에게 소연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안 알려줬다는 것은, 그것을 비밀로 할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입으로 나불나불 알려줘 버렸다니……. 어쩌면 이 일로 인하여 소연의 신상에 위험이 닥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패력검제가 자신의 실언을 자책하고 있을 때, 초류빈은 지금 그 말이 안겨 준 신선한 충격에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교주에게 숨겨둔 딸이 있었 다니, 그 말은 곧 그가 과거 사랑에 빠졌었던 여인이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 물론 실수(?)를 통해 애를 낳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경우 이렇게 지속 적인 사후관리가 이뤄질 가능성이 없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그런 인간이 여자와 사랑에 빠졌었다니. 정말 이건 충격적인 사건이었 다. "교주와 사랑에 빠진 여인이 도대체 누구요?" "……?"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런 괴팍한 인간을 사랑하는 골빈 여자가 있었다니 정말 어떻게 생긴 계 집…, 어어… 방금 한 말은 실수였소. 천하의 교주님을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여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이었으니 행여 오해 하지 말아주시기 바라오." 패력검제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조금 수상쩍다고 느끼자, 초류빈은 급히 말을 이었다. 어쨌건 이자는 교주를 좋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인간 의 본성이 얼마나 사악하고, 또 잔인무도한지도 모르고 말이다. 초류빈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좋소 내 까놓고 말하리다. 내가 누군지 아시겠소?" 마교의 최고위 고수들은 그리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묵 향이 장기간 행방불명되었을 때, 마교는 아예 무림에서의 활동 자체를 중단 했었다. 그런 만큼 상대가 철영이었다고 해도 패력검제가 알아볼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상대는 깊은 한숨을 토해낸 후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후우~. 나도 한때는 잘나가던 정파의 후지기수였소. 칠룡에 들었을 정도 니.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소." 마교 부교주가 예전에 정파의 후지기수였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 상대가 아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노려보자, 초류빈은 자기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말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의심스러우신 모양인데. 내가 무림에서 활동할 때 사람들은 나늘 탈명도( 脫命刀)라고 불렀었소." "헉! 귀하가 탈명도 초류빈이라고요? 그게 사실이오?" "물론이오. 믿지 못하겠다면 내 초씨세가의 비전도법(秘傳刀法)인 72식 광 풍도법(狂風刀法)을 이 자리에서 보여드리겠쏘." 초류빈이 벌떡 일어서자, 패력검제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말렸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까지는 없소이다. 광풍도법이 초씨세가의 비전도법 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도 초씨세가의 인물과 겨뤄 본 적이 없어서 그 초식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니 말이오." "크으. 이 자리에 혁련운 형님만 계셨어도, 내가 누군지 알아 보실텐데…. 참으로 안타깝구려." 혁련운이라면 황룡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양양성에 있을 때 황룡무제한테서 과거 초씨세가의 초류빈에 대한 얘기를 조금 들은 기억 이 났다. "황룡무제를 거론하시는 것을 보니 정말 귀하가 초류빈 대협이 맞는가 보 오." "황룡무제라고요? 무제라니, 형님께서 화경을 깨달으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패력검제의 대답에 초류빈은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크으윽! 젠장. 누구는 무제소리를 들으며 떵떵거리고 있고. 누구는 여기 에 처박혀서 교주한테 허구헌날 두들겨 맞고 살아야 하고….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교주가 그대를 핍박한다는 말씀이오?" 상대가 흥미를 보이자, 초류빈은 기회가 왔다는 듯 주위를 재빨리 둘러봤 다. 문앞에 있는 두 놈 외에도, 윗층에 다섯 놈. 아래츠엥 다섯 놈의 기척 이 느껴졌다. '쓰벌, 많이도 깔아놨군.' 내심 투덜거리며 초류빈은 행여 그놈들이 엿들을 새라 어기전성으로 말했 다. 혹여 호법원 놈들이 이걸 엿듣고 소문이라도 퍼뜨린다면 큰일이라고 생 각했던 것이다. 사실 안 그래도 이단자로 낙인찍힌 몸이었고, 교주 욕을 해 댄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놈들이 들어봤자 별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 했찌만 그 말이 교주에게 전해진다면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또다시 죽도록 얻어터질 테니까. <내 말 좀 들어보시구려.> 한참 동안 이어지는 초류빈의 넋두리. 지금까지 교주에게 그가 당한 억울 하기 그지없는 사연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악의에 가득 찬 비방(誹謗)까지 덧붙여져 있었기에,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알아듣는다면 교주는 심각한 정신이상자이면서도 상당한 수준의 가학성 변태성욕자로 밖 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사악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왜 모두들 그 사내다운 겉모습에 속 아서 교에 들어오는지 알 수가 없소. 내가 그걸 사전에 알기만 했다면 내 꼴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을…….> <허어, 정말 형장의 말을 듣고 보니 모골이 다 송연하구려. 내 교주가 그 런 악질적인 인물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었는데…….> <내 말이 그 말이오.> <교주도 그렇지만. 형장은 더 천마동에 살고 있는 괴물을 알고 계시오?> <천마동에 살고 있는 괴물? 교주의 아버지 말이오?> 상대가 제대로 알아들은 듯하자 패력검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내 어제 천마동에 살고 있는 그 괴물에게 걸려서 혼찌검이 났었 소. 내가 화경의 벽을 깬 이후 그토록 무참하게 두들겨 터지기는 그것이 처 음인 듯하오.> 초류빈은 교주의 아버지가 과거 철영을 묵사발내 버렸던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극마의 경지를 깬 무시무시한 고수인 그를 아주 간단하게 박살내 놨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사람 같지도 않은 자를 괴물이 아 니고 또 뭐라고 부른단 말인가? 그렇기에 초류빈은 상대가 말한 「괴물」이 라는 단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양반도 확실히 괴물이지. 허어, 형장은 그래도 상태가 괜찮으신 것 같 은데. 정말 운 좋았다고 생각하시구려. 그때 철영 부교주는 몇 달은 족히 간병해야 할 정도로 중상을 당했었으니 말이오.> 상대가 호응해 오자 패력검제는 자신이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을 은근슬쩍 물어봤다. <그 아버지를 보니 정말 무시무시한 괴물이던데, 교주도 그런 괴물이오?> 그 말에 초류빈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귓등으로 들으셨소? 내 살다살다 그렇게 지 독한 괴물은 또 처음 봤소.>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서로 간에 말하는 것이 뭔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 었다. 하지만 제각각 생각이 달랐던 그 둘은 그것을 못 느끼고 있었다. 패 력검제는 이미 교주를 괴물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그런 차에 상대가 괴 물이 맞다고 하니,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내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초류빈을 향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형장도 참 괴롭겠소이다. 그런 괴물들 뒤치다꺼리나 해 줘야 하다니……. 여기 있어 봐야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정파로 전향하는게 좋지 않겠소 ?> 초류빈은 뼛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쉰 후 한탄했다. <에휴~. 내 그 생각을 골백번도 더했지만, 나는 평생을 쫓겨 다니며 살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여 패력검제는 어기전성으로 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쫓겨 다니다니요?" <내가 나가면 교주가 그냥 잘먹고 잘살거라 하며 눈감아 줄 것 같소? 그날 부터 나를 잡으려고 사방을 뒤지기 시작할 텐데, 그것을 피해서 도망다녀야 할 것이 아니겠소? 그러다가 붙잡히면 개 맞듯이 맞고 다시 끌려 들어올게 분명하오. 그걸 뻔히 알면서 내가 왜 나가겠소?> <그도 그렇겠구려.> <아무리 제령문이 망했다고 해도 들어갈 곳이 있고, 못 들어갈 곳이 있소. 나처럼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하지 말고, 마교에는 절대로 들어올 생각도 하 지 마시오.> 패력검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형장의 뜻은 잘 알겠는데. 본문이 망했다니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제령문이 망한 것이 아니오?> <제령문은 멀쩡하오. 적어도 내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멀쩡했었소.> <그렇소이까? 아, 오해하지는 마시구려. 내가 제령문이 망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은 며칠 전 이곳에서 현천검제를 만났었기 때문이라오.> 너무 놀란 패력검제는 또다시 어기전성으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뭐요? 멸문당한 화산파의 문주. 현천검제 말이오?" 그 말에 초류빈은 살짝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어기전성을 통해 상대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쉿! 중요한 부분은 제발 좀 어기전성으로 해 주시오. 이 근처에 호법원 놈들이 쭉 깔려 있음을 모르는 거요? 그놈들은 교주의 딸을 보호하라는 명 령도 받았찌만, 당신이 딴 짓을 못하도록 감시하라는 명령도 받고 있소.> <미, 미안하오. 너무 놀라서 그만…….> <현천검제가 둘씩이나 있겠소? 바로 그 현천검제요. 화산파가 쫄딱 망한 후 교주한테 무슨 협박을 당했는지 본교에 입교한 모양이었소.> 명문정파의 문주가 마교에 입교했다니. 패력검제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초류빈에게 말했다 . <지금 그를 만날 수 있겠소?> 초류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힘들 거요. 일이 있다면서 교 밖으로 나갔으니 말이오. 그런데 내가 왜 제령문이 망했는지 물었는가 하면, 그게 아니라면 그대 같은 정파의 명 숙이 왜 마교 내에 들어와 계시느냐 하는 거외다.> 만날 수 없다는 말에 패력검제는 상대가 자신을 떠보기 위해 거짓말을 한 다고 판단했다. 사실 현천검제라면 화산파의 장문인인데, 그가 어찌 화산파 를 멸문시킨 원수의 밑에 들어올 수가 있겠는가. 모두다 거짓말일 것이 분 명했다. 기분이 나빠진 패력검제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건 내 이미 말하지 않았소? 교주의 부탁 때문에 왔다고 말이오. 이제 그것이 끝났으니 양양성으로 돌아갈 거외다." <생각 잘하셨소. 오히려 그것이 좋을 거요. 괜히 마교와 친하게 지내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계속 듣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패력검제였다. 원래가 마교에서 은근슬쩍 자신보고 들어오라고 꼬드기고, 자신은 거절을 해야 옳거늘. 이건 거꾸로 되어 자기보고 절대로 입교하지 말라고 사정을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상대가 초류빈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무래도 뭔가 수상쩍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초류빈을 대충 상대한 후, 오후에 떠나겠다고 통고했 다. 그 말을 들은 초류빈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풀린다고 생각한 것인지 미소를 머금고 대꾸했다. <생각 잘하셨소. 예로부터 까마귀가 노는 곳에는 백로가 가지 않는다고 하 지 않았소? 마의 소굴에서 한시바삐 떠나는 것이 최선의 길이지요.> "……." 정파쪽 입장에서 봤을 때, 골백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낸 인 물이 누군가? 마교의 부교주가 아닌가? 그렇기에 패력검제는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그를 바라봐야만 했다. 14. 교주의 딸 초류빈은 패력검제와 만난 후 군사의 집무실로 갔다. "가신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어떻게 되긴. 오늘 오후에 떠나겠다고 하더구먼. 그러니 수고비 좀 챙겨 줘서 보내라고." "예? 수고비라면 얼마나……." "그야 교주님의 일을 처리하러 왔으니 최소한 은자 천 냥은 내놔야 하는 거 아닌가?" "헉! 천 냥씩이나 말입니까? 그렇게 큰 거금을 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일문의 문주가 움직였으니 그 정도는 줘야 하는게 아닐까? 자그마치 만 리를 달려온 사람일세. 그 정도 고된 일을 시키고도 너무 적게 준다면 교주 님의 체면이 손상될 수도 있지 않겠나?" "예.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군사가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 망설이고 있자 초류빈은 짜증 섞인 어조로 물었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건가? 빨리 말해 보게. 싫으면 관두고." 초류빈이 나가려고 하자 군사는 급히 말했다. "저, 가신 일은……." "방금 말해 줬잖아. 떠난다고." "그게 아니라 그 여자분 말입니다." 군사의 말에 초류빈은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군. 설마 교주님께서 사랑의 열매까지 얻으셨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교주님의 딸이라고 하더군." 그 말에 군사는 경악했다. "예? 그게 정말이십니까?" "본좌가 자네를 상대로 농담이나 하고 있는 줄 알았나?" "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을 일이 아니군요." 군사는 초류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후, 급히 장로회의를 소집했다. 사안의 중요성으로 봤을 때, 그 혼자서 처리할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 갑자기 회의를 소집한 이유가 뭔가? 군사." 수석장로의 물음에 군사는 이번 일이 굉장히 비밀을 요하는 것이라는 듯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부교주님께서 아주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계악 대호법의 말이 이어졌다. "군사. 이건 호법원의 일이니 자네가 관여할 사항이 아닐세."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분의 호위를 위해 내 수하들이 파견되어 있는데, 내가 그것을 모를 줄 알았는가? 부교주님과 패력검제가 주고 받은 말은 모두 다 노부에게 보고되 었고. 노부는 그 후속 조치를 이미 지시했네." 이때, 현 사건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던 수석장로가 끼어들었다. "호법원의 일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그분이 교주님의 정인임이 확실하 다는 말인가?" 호계악 대장로는 짐짓 점잔을 빼며 대답했다. "따님이라고 했습니다." "뭣이? 따님이라고?" "예. 교주님 일가에 대한 경호는 호법원의 고유 권한인 만큼, 저희들이 책 임지겠다는 것이지요. 밖에서 호된 일을 겪으신 모양인데,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경호에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해 뒀습니다." 원래 단일세력만으로 본다면 마교 최강의 세력은 천마혀검대가 아니라 호 법원이었다. 교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교주의 신변을 호위해야 하 는 만큼, 가장 우수한 실력자들이 우선적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장인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큰 피해를 당한 상태에서 도주하는 호법원과 교주 호위대의 잔존세력 300여 명을 치기 위해 천마혈검대와 수라마참대 100명을 투입했다가 엄청난 피해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도 그런 이유에 서다. 만약 그때, 흑풍마령(黑風魔靈) 황노각(黃老角) 대호법을 없애지 못했다면 . 오히려 전멸당한 쪽은 장인걸이 파견한 고수들 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인걸 측의 고수도 대호법을 없애면서 피해가 작았던 것은 아니었다. 장인 걸의 오른팔이었던 멸절신장(滅絶神掌) 제갈천(諸葛天)은 전사했고, 왼팔이 었던 환영비마(幻影飛魔) 구양운(丘陽雲)은 중상을 당했어야 할 정도로 대 호법은 엄청난 강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묵향이 교주직에 오르면서 하늘을 찌르던 호법원의 위세는 바닥으 로 추락했다. 묵향은 호법원의 호위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 다나 장인걸이 이끌고 도주한 천마혈검대와 대적할 혈랑대를 만들기 위해 우수한 고수들도 상당수 뺐겨 버렸다. 이런 식으로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 하고 있던 호법원이었던 만큼. '딸의 호위' 라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대 호법이 그 호위권을 타인에게 양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수석장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속히 그분의 거처를 마천루(魔天樓)로 옮겨야 할 것일세. 군사, 자네는 즉시 마천루에 통고하여 전망이 좋고, 볕이 잘 드는 방을 골라 안락하게 꾸며놓으라고 하게." "예. 수석장로님." 하지만 이미 수하들을 통해 보고를 받은 호계악 대호법은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오후에 패력검제와 함께 교를 나 서실 모양이던데 말입니다." "그게 사실인가?" "예. 저는 수하들에게 그렇게 보고받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막아야 하네. 그분께서는 관에 실려 오실 정 도로 큰일을 당하신 후가 아닌가? 또 다시 밖에 나가셨다가 무슨 봉변이라 도 당하시려고. 이곳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할 걸세." "그러실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교주님께서 그분이 밖에서 기거하도 록 놔두신 것을 보면, 교주님의 허락이 있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렇구먼. 그렇다면 차후에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호 위에 만전을 기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인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꼭 밖으로 나가시겠다면 여문기에게 일러 10개 대를 이끌고 가서 호위에 임하라고 하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장인걸이 직접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분의 신상에 해를 끼칠 수 없을 겁니다 ." 우호법 은편패왕(銀片覇王) 여문기(呂文起)를 포함한 10개 대라면, 호법원 전력의 절반을 그곳에 투입하겠다는 말이었다. 요즘 호법원은 별로 하는 일 이 없었으니 그렇게 많은 전력을 밖으로 빼돌려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 삼면인마(三面人魔) 소무면(蘇無面) 장로가 재동을 걸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 말은 그분의 정체는 철저히 숨겨져 있으며, 본교와 관 련 없다는 듯 행동하신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분의 주위에 마기를 풀풀 풍기는 놈들이 득실거려 보십시오. 그분의 입장이 어떻게 될지 말입니 다. 더군다나 그것으로 인해 그분의 정체가 만천하에 알려질 위험성도 생각 하셔야 될 겁니다. 현재 본교 최대의 적은 장인걸이 아닙니까? 장인걸은 결 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강력한 마기를 풍기는 고수들이 득실거리면 그 는 그것이 뭘 뜻하는지 곧장 눈치 채고 그것을 이용하려 할 겁니다." 수석장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지만 그의 대답은 지극히 회의 적이었 다. "외총관 말도 옳은 듯하군. 하지만 본교의 고수들 중에서 마기를 안 풍기 는 놈이 있어야지."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비교적 마기를 덜 풍기는 놈들로 골라서……." 하지만 그의 말은 호계악 대호법에 의해 도중에 끊겼다. "말도 안되는 소리! 자네 밑에 잇는 놈들이 마기가 약한 것은 그만큼 무공 이 약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런 놈들 수천 명을 집어넣는 것보다는 본원 의 고수들을 투입하는 것이 백 배 낫네." 서로 간에 감정싸움이 될 듯하자 수석장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외총관의 말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해. 그분의 주위에 본교의 인물임이 분명한 자들을 배치한다는 것은 그분께 폐를 끼치는 행위일수도 있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지?" 이때 군사가 수석장로에게 말했다. "홍진 장로님께 부탁하면 되겠군요." 군사는 홍진 장로에게 말했다. "비마대에는 기척을 숨길 수 있는 고수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좀 보 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 말에 홍진장로는 난색을 표했다. "본대의 특성상 기습 공격이라면 혹 몰라도. 정면 대결에 뛰어난 놈은 하 나도 없네. 그런 놈들로 어찌 그분의 경호를 할 수 있겠는가? 암살하는 것 이라면 모르되. 그분을 보호하는 임무라면 절대로 불가하네. 수석장로도 홍진 장로의 생각과 같았다. "으음. 자네 말이 옳은 듯하군. 젠장 여기에 관지 장로가 있었다면, 흑풍 대의 고수들을 뽑아달라고 하면 간단할 것을." 호계악 대호법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즉시 반박했다. "흑풍대 역시 평원의 기마전에 능한 것이지 그분의 호위 역할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역시 본원의 고수들을 투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기를 풍기는 호법원 고수들을 밖에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군사는 머리를 쥐어짜 새로운 방책을 제안했다. "그보다는 초류빈 부교주님의 초연대를 빌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부교주님의 요청에 따라 비마대에서 차출한 고수들이 아닙니까? 그들은 부 교주님께서 특별히 정파의 무예를 가르친 자들인 만큼, 이번 조건에 가장 적합한 듯이 보입니다만." "옳거니. 군사의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야. 그들은 부교주님의 독립 호위대가 아닌가? 어 찌 감히 그들을 빌려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아니라면 따로 보낼 놈들이 없지 않습니까?" "괜히 그러지 말고 호법원 고수들을 투입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좀 눈에 띄는 것이 탈이라서 그렇지,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그분을 보호할 수 있는 강골들이 아닙니까?" 수석장로는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감싸 쥐며 투덜거렸다. "젠장. 호위무사 몇 붙여드리는 것이 이렇게 골치가 아프다니." 마화가 출발한 후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야 천지문이 돌아왔다. 그들이 변 을 당한 곳이 양양성으로부터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만약 마화가 마차 30여 대에 부상자를 치료할 각종 약품은 물론이고 의생 5명까지 데리 고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사망자를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교주님." "먼 길에 수고했다. 가서 푹 쉬도록 하거라." "사상자의 수는 사망……." 하지만 묵향은 손을 내저으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아, 본좌에게 보고할 필요 없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묵향의 무심한 반응에 보고를 하려던 마화는 멈칫 했다. 천지문도들을 데 려왔으니, 지나가는 말로라도 사상자의 수를 물어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묵향이 이미 그곳에 갔었다는 것을 진팔을 통해 들었다. 하지만 교주가 그 곳에서 지체한 시간 매우 짧았고, 아직 경황중이라 천지문이 구체적으로 어 느 정도 피해를 당했는지는 알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찌 저리도 무심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진 공자에게 들으니 교주님께서 패력검제 대협께 부탁하여 소 소저를 총 타로 보내신 모양이시더군요." 묵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대답으로 대신했다. "소 소저는 괜찮으실까요?" "나는 아버지를 믿는다. 그뿐이다." "그렇다면 총타에 기별을 넣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총타까지 만 리가 넘는 길이라고 하지만, 패력검제라면 지 금쯤 총타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살아있을지, 아니면 죽어 버렸는지 이미 결론이 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괜한 짓 할 필요 없다. 살아 있다면 어련히 이곳으로 돌아오려고." "뜻이 그러시다면, 총타에 연락을 보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럼 속하는 물러 가겠습니다." 묵향은 마음속이 복잡한지 손을 한 번 내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묵향이 총타에 연락을 보내지 말라고 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따를 마화 가 아니었다. 아마 묵향은 극심한 갈등에 휩싸여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소연 의 생사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연락이 올 수도 있는 만큼 감히 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냉철하고 과감하면서도 이런 때는 꼭 약한 모습을 보이신단 말이야. 죽었 으면 죽은 거고, 살았으면 산 거지. 나 같으면 그렇게 애태우고 있을 바에 는 하루라도 빨리 결론을 알고 싶을 텐데 말이야." 잠시 후, 양양성의 마교도들의 근거지에서 전서구 몇 마리가 날아 올랐다. 발에 달린 전통에 소연의 생사를 지급으로 전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15. 귀로(歸路)에 생긴 일들 마교에서 벗어나 2시진 동안 줄곧 달리다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객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자꾸나." "예." 물걸레로 탁자를 닦고 있던 점소이가 재빨리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옵쇼!" 점소이는 빈자리를 권하며 싹싹하게 말했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여기 잘하는 게 뭐냐?" 이때, 객장 안으로 마기가 물씬 풍기는 흑의사내들이 드어오는 것을 보고 점소이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재빨리 그곳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패력검제 가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해 주고 말이다. "어서옵쇼. 손님. 날씨가 참 좋죠?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비굴하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점소이의 모습은 확실히 이곳이 마교의 영향 권임을 실감하게 해 주는 것이었지만, 막 점소이에게 주문을 하려던 패력검 제로서는 썩 기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불현듯 저놈들을 박살 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드는 패력검제였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이곳은 마교의 영향권 안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소연이 원 하는 대로 하루라도 빨리 양양성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이놈들과 노닥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저놈들이 아무리 총타에서부터 슬금슬금 따라 오며 신경을 거슬러도 참아야만 했다. 이때, 패력검제로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마인들 중 한 명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점소이를 향해 호통을 쳤던 것이다. "저분들의 주문부터 받지 않고 어찌 이리로 오는 것이냐?" "예? 아, 알겠습니다요." 힘없는 점소이는 하라는 대로 해야만 했다. 그는 재빨리 패력검제에게로 돌아와서 억지로 미소지으며 물었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방금 전에도 물었지만, 여기 잘하는 것이 뭐냐?" 점소이가 양쪽의 주문을 다 받고 주방으로 가 버린 다음. 패력검제는 마인 들을 차근차근 관찰했다. 지금까지 패력검제가 살아오며 이토록 지독한 마 기를 뿜어내는 인물들은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있다면 요 근래 마교 총타에 가서 본 몇몇 인물들이 다였을 정도다. 그들이 내뿜는 마기가 얼마나 지독했으면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곳에서 식사를 즐기고 있던 모든 손님들이 핼쑥해진 안색으로 모두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점소이는 저쪽 구석에서 그들의 눈치를 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 다. 도망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서 이곳에 있다는 것이 그의 두려움에 질 린 표정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보게. 자네들은 누군가?" 상대의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의외로 공손한 대답이 날아왔다. "저는 여문기(呂文起)라고 하고, 이들은 제 수하들입니다." 여문기라.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이다. 사실 마교의 강력한 고수들은 총 타에 꽁꽁 처박혀 있을 뿐. 무림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패력검제 로서는 그 이름만으로는 그가 누군지 알 도리가 없었다. "호, 여 대협이셨구려. 나는 서진이라고 하오. 그리고 이쪽은 내 동행이고 ." 이런 '대마두'를 향해 '대협'이라는 단어를 쓰게 될 줄은 패력검제는 꿈속 에서조차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 대마두셨구려' 하면 괜히 싸움 거는 거 밖에는 안 될 테니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패력검제 대협." "내가 누군지 알고계시니 한 가지 물어보겠소이다. 줄곧 우리를 뒤 따라오 던데, 그 이유가 뭐요? 우연히 길이 겹친 것이오?" "저는 대호법님으로부터 아가씨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했습니다." "아가씨?" 너무나도 의외의 대답이었기에 잠시 멍하게 있던 패력검제는 소연을 손가 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이 아이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예." "허어, 그것 참……." 깜빡 잊고 있었는데, 소연은 교주의 딸이다. 그런 만큼 이들이 소연을 호 위하겠다고 해도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참. 대호법의 명령으로 출동했다고 했소?" "예." 그렇다면 이들은 패력검제도 말로만 들었던 호법원의 고수들임이 틀림없었 다. 호법원이라면 교주 및 그 측근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들만을 경호한다 는 마교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정예 집단이다. 그들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교가 무림을 정복하겠다고 나섰을 때였다. 교주가 교 밖으로 나온 만큼, 그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서 나왔던 것이다. 그런 교 주를 정파의 고수들이 없애기 위해서는 호법원이 치고 있는 보호벽부터 뚫 어야 했기에, 그들과의 정면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때, 그들이 보여 줬던 엄청난 전투력. 그것은 정말 경천동지(驚天動地) 그 자체였다. 패력검제는 새삼 그들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내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그가 들었었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아니, 저들 개개인에게 서 풍겨나오는 엄청난 마기로 봤을 때, 오히려 그 소문이 모자라다는 느낌 까지 들었다. 이때, 소연이 여문기에게 말했다. "대호법께서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곁에는 패력검제 대협께서 계신 만큼, 여 대협께까지 수고를 끼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교로 돌아가 주세요." 여문기는 난처한 표정으로 정중하게 대답했다. "대협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아가씨. 속하, 참으로 듣기가 민망합니다." 여문기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갔찌만, 소연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저런 엄청난 고수에게 하대를 할 만큼 간이 크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보다 신분이 낮다고 막 대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연이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자, 여문기는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속하도 패력검제 대협께서 대단하신 분이 고, 그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아가씨의 말씀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 만 대호법님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파견된 저희들의 사정도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이대로 저희들이 교로 돌아간다면 크게 문책을 당하게 됩니다, 아 가씨." 듣고 보니 여문기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소연은 뭐라고 말은 못하고 난 처한 듯한 표정으로 패력검제만 바라봤다. "……." 이윽고. 패력검제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소연에게 말했다.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사정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패력검제는 이번에는 여문기를 향해 말했다. "여 대협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나로서도 한 가지는 말 해두고 싶은 게 있소이다." "말씀하십시오." "호법원에서 소연이를 호위하겠다고 따라오는 것은 그쪽의 법도가 그런 것 이니 내가 참아야겠지요.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여 대협 일행만 있는 것 은 아닌 듯하오. 우리 주위에 폭 넓게 포진하고 있는 수 많은 고수들은 또 뭐요? 언뜻 느껴지기에도 100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데, 이들도 호법원의 무 사들이란 말이오? 한 명을 호위하는 것으로는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소?" 여문기는 대호법의 명령으로 호법원 세력의 절반을 이끌고 왔다. 모두들 마기가 강한 놈들이기는 했지만, 그 대부분이 꽤 멀리 떨어진 거리에 위치 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도 패력 검제가 그걸 알아본 것이다. "대호법께서는 이 정도는 되어야 아가씨를 충분히 호위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패력검제와 달리 소연은 그것을 미처 못 느꼈지만, 여문기의 말이 사실이 라면 이건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분들은 교에 돌려보내세요." "예? 하지만……." "이곳에는 패력검제 대협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여 대협과 동행하신 분들 도 충분한 실력들을 지니고 계시니 더 이상의 호위는 불필요합니다. 그러니 제발 그들만은 돌려보내세요." 여문기는 한참 동안 난처한 표정으로 궁리했다. 하지만 소연의 말도 충분 히 이해가 가는 것이었기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자네가 가서 외곽 호위를 맡고 있는 녀석들을 돌려보내게." "옛. 우호법님." 그가 달려 나간 후, 여문기는 소연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속하가 아가씨의 부탁을 들어드린 만큼, 아가씨께서도 속하의 청을 좀 들 어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드리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우선 여 대협이라는 호칭은 속하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드려야 합니까?" "정 이름을 부르시기 어려우시다면 그냥 우호법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예." "그리고 원래는 속하가 원거리에서 호위를 해 드리는 것이 옳으나, 이렇게 아가씨 앞에 나선 것은 아무 말 없이 아가씨를 따른다면 혹여 불안감을 드 릴 수도 있기에 저희들의 소개를 올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문기는 자신의 주위에 앉아 있는 9명의 무사들을 소연에게 소개했다. 그 런 다음 여문기는 제발 자신들에게 하대를 해 달라는 것으로 그의 청을 끝 마쳤다. "마지막 청은 받아드릴 수 없어요. 저는 천마신교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 닙니다. 그런데 어찌 혈통만으로 우호법님 같으신 분들에게 하대를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휴우~. 정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일단 첫 만남을 통해 호법원에서 파견된 호위무사들과의 통성명은 끝났다. 그들의 동행을 소연과 패력검제가 어쩔 수 없어서 허락했찌만, 그들이 풍기 는 분위기가 워낙 살벌한 것이었기에 길동무로서 썩 좋은 상대라고는 볼 수 없었다. "수석장로님께서 회신을 보내오셨는데, 소 소저께서는 무사하시답니다." 마화의 말에 묵향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아르 티어스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연을 무사하게 살려내다니, 과연 그는 불가능을 모르는 존재인 모양이다. "정말 잘되었군, 잘되었어." "축하드립니다, 교주님." "그래, 지금 그 아이는 어디에 있다고 하던가? 대접에는 소흘함이 없겠지 ?" "도착하신 다음날 오후, 수석장로님께서 만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양양성 을 향해 패력검제 대협과 함께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을 텐데, 벌써 출발했다고?" "제가 그곳에 있지 않았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석장로님 의 회신에 의하면 완쾌되셨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소 소저께서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동문들의 안위가 걱정되셨던 것이 아닐까요?" "그, 그렇겠군." 일단 소연이 무사한 것이 확인되자, 묵향은 이번에 있었던 작전 전체에 대 해서 냉정하게 생각할 여유를 되찾게 되었다. 한동안 말없이 뭔가 깊은 생 각에 잠겨 있는 묵향을 마화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묵향이 입 을 열었다. "이번 작전에 대해 자네가 입수한 모든 정보를 이리 가져와 봐." "예." 마화가 입수한 정보라고 해 봐야 무연문에서 전해준 것이 다였다. 묵향은 자료를 쭉 훑어본 후 고개를 갸웃 하더니 마화에게 물었다. "천지문의 위상이 그렇게 높았었나?"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이 자료에 따르면 천지문은 매복조로 남고, 나머지는 옆으로 뺑 돌아가서 놈들의 이목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쓰는 모양인데 말이야." "예. 관지 장로님도 아마 그런 계책을 쓰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셨었습 니다." "만약 내가 이렁 계책을 썼다면, 이곳에는 가장 신뢰하는 최정예를 배치했 을 거야. 잠시 동안 나타날 수 있는 적들의 허점을 파고들어 일격을 가한 후 재빨리 후퇴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교주님께서는 팽선이 일부러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 까?" "글쎄…, 그건 알 수 없다. 너는 지금 당장 나가서 좀 더 많은 정보를 수 집해라. 과연 팽선이 왜 이곳에 천지문을 남겨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봐 라." "옛. 교주님." 마화가 달려 나간 후, 묵향은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만약 이것이 팽선 그놈의 농간이라면 기필코 용서하지 않겠다." 소연과 패력검제는 식사를 마친 후 다시금 서둘러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그들 둘만이 아니라 10명이나 되는 꼬리를 매달고. 패력검제는 소연보다 훨 씬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갈 수 있었지만, 소연의 속도에 맞춰 자기 딴에는 천천히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 뒤를 여문기와 그가 이끄는 9명의 호법원 고 수들이 뒤따라왔다. 진팔이나 다른 천지문도들의 안위가 궁금했던 소연이었기에, 그녀는 최대 한 빨리 양양성에 도착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래서 패력검제가 길을 서두 르기는 했찌만, 그는 산야를 관통하는 지름길을 선택하지 않고 관도 부근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숙식을 해결하는 데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만 리가 넘는 길을 달려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패력검제가 생각했을 때, 소연은 죽을 고비를 얼마 전에 넘긴 상태였다. 그녀의 몸이 얼마나 상태가 좋아졌는지는 그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백 보 양보하여 그녀의 몸 상태가 완벽해졌다고 할지라도 그런 짓을 하면 몸에 무리가 간다 . 더군다나 그런 상태에서 산야를 가로지르며 부실한 음식을 섭취하고 노숙 까지 감행한다면 그녀의 몸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패력검 제는 길은 서두르되, 양질의 음식과 따뜻한 잠자리로 최적의 몸 상태를 유 지하는 것을 택한 것이다. * * * 그날 패력검제 일행은 작은 마을의 하나뿐인 객점에서 식사를 하고 가려고 들어갔다. 짙은 마기를 풍기는 여문기 일행이 패력검제의 뒤를 따라 들어와 자리에 앉자 객점 안은 언제나처럼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이 그들의 짙은 마기를 대했을 때, 뭔가 모를 원초적인 공포감을 느낄 것은 당연했다. 손님들은 슬금슬금 도망치듯 객잔을 떠나 버렸다. 패력검제는 요근래 들어 늘상 겪게 되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다른 사람들에 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때, 패력검제는 아직 도 도망가지 않고 웬 사람이 객점의 구석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 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쪽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상에 차려진 몇 가 지 요리를 천천히 먹고 있었다. 죽립(竹笠)을 깊게 눌러쓰고 있었기에 상대 의 용모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고수임이 분명했다. 만약 일반인이라면 여문기등이 내뿜고 있는 마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쳤 을 테니까. 그런데, 특이한 것은 패력검제가 유심히 살펴봤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서 그 어떤 기척도 감지해 낼 수 없다는데 있었다. 설사 저자가 화경에 든 고수라 할지라도 미세한 기척은 감지해 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상대는 반박귀진의 경지에 들어간 현경의 고수쯤 된다는 것일까? 호기심을 느낀 패력검제는 쓱 일어서서 상대에게 다가가 포권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합석해도 괜찮겠소이까?" "그러시구려." "나는 서진이라고 하오. 보아하니 형장께서도 무림에 적을 두고 계신 듯한 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상대는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넉살 좋게 나오는 패력검제를 관찰했다. 순간 패력검제의 눈과 죽립에 감춰져 있던 상대의 눈이 마주쳤다. "화경의 고수?" 상대는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찌 마교의 무리들과 함께 있는 것이지? 댁도 초류빈처럼 마교의 부교주요?" "나는 마교도는 아니오. 그런데 탈명도(脫命刀) 대협이 마교에 있음은 어 찌 알고 계시오? 그것은 나도 요 근래에나 알게 된 것인데." "마교도가 아니라고?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구먼." 혼자 중얼거리던 상대는 마교도들을 쭉 훑어보더니 그들 중 하나를 알고 있는지 아는 척을 했다. "어? 그러고 보니 자네는 우호법이 아닌가?" 그제서야 여문기도 상대를 알아본 모양이다. "이 목소리는…. 서, 설마 어르신이셨습니까?" 여문기와 현천검제는 이미 면식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천검 제가 불구자였을 때, 그의 호위를 호법원에서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날세. 이렇게 교외에서 자네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구먼." "몸이 쾌차하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호법께서는 어르신께서 양양성으로 떠나셨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어르신을 만나뵙게 될 줄은……." 여문기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여문기는 상대의 정체가 현천검제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 그가 양양성을 향 해 간답시고 떠난게 언젠데 아직까지 이 정도밖에 못갔을 거라고 여문기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현천검제는 양양성에 가기 싫어서 미적거리다 보니 이 렇게 된 것이었지만, 어찌되었건 그래서 그들은 여기서 서로 만나게 된 것 이었다. "참, 소개해 드릴 분이 계십니다." 여문기는 소연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분께서는 교주님의 따님 되십니다." 그리고 소연에게는 죽립인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어르신께서는 교주님의 한 분뿐인 사제십니다." "소연이 사숙어르신을 뵙습니다." "허허, 그래 반갑구나. 사형께 이런 질녀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구먼." 이단 청산유수로 대답을 해 놓았지만 현천검제는 곤혹스러움을 떨치기 힘 들었다. 한눈에 척 봐도 질녀는 마인이 아닌 게 분명했다. 물론 그녀가 극 마에 올랐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 했다. 왜냐하면 그 정도 되는 실력자들이 이토록 고강한 호위무사들을 줄줄 이 달고 이동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질녀는 이 앞에 앉 아 있는 화경급 고수의 제자쯤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게 어찌되는 일이지? 마교의 교주가 왜 이렇게 정파쪽 인물들 과 연줄을 많이 만들어 놨단 말인가?' 그리고 서로 간의 오가는 대화를 옆에서 들은 패력검제 또한 혼란에 빠져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처음에는 정파의 인물인 줄 알고 접근 한 것이었는데 , 교주의 사제라고? 그렇다면 상대의 정체는 극마의 고수라는 말이 아닌가. 극마급 고수가 되면 마기를 숨길 수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토록 완벽 하게 숨길 수 잇을 줄은 예상도 해 보지 않았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이 자도 교주처럼 탈마에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서로 간에 뭔가 물어보고 싶기는 한데, 어찌 말을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지 난감하다. 그렇기에 둘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한동안 말이 없다가 현천검 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래. 형장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양양성에 가는 길이었소이다. 방금 전에 들으니 형장께서도 양양성에 가 시는 모양인데, 혹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가시며 서로 말벗이나 하면 좋 지 않겠소이까?" 이들이 매우 급하게 양양성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없는 현천검 제는 재빨리 그것에 찬성했다. 안 그래도 상대의 정체 등등 궁금한 것이 많 았는데, 서로 말벗이나 하며 길을 가자니 혹하지 않을수 없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리다." 일단 교주의 사제에게서 동행 허락을 받아내자, 패력검제는 재빨리 여문기 에게 말했다. "여 대협." "예. 무슨 일이십니까? 대협." "교주의 사제께서 동행을 허락하신 만큼 당신들은 교에 돌아가도 되지 않 겠소?" "하, 하지만 그건……." "소연이를 보호하겠다는 여 대협의 뜻은 잘 알겠지만. 이곳에는 내가 있고 , 또 교주의 사제분도 계시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소? 아니면, 나나 이분의 실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그, 그렇다면 아가씨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여문기는 더 이상 반론할 여지가 없자, 소연에게 구원을 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연이라고 그들의 동행을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객잔이 나 객점에 들면서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켜온 장본인들이 바로 이 호법원 고 수들이었다. 워낙 지독한 마기를 풍겨대다 보니, 주위에 사람이 접근조차 하기 힘든 것이다. 이곳은 아직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고, 또 마교의 세력권에 가까웠기에 그들의 존재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 지만 점점 중원 깊숙이 들어가면 그것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 에 소연은 다급히 패력검제의 뜻에 동조하고 나섰다. "저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그러십니까?" 여문기는 풀이 죽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가씨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속하들은 물러가겠습니다. 평안하게 양양성 에 도착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우호법님. 그리고 다른 분들도요." "패력검제 대협.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동행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평안한 귀로(歸路)가 되기를 빌겠습니다." "여 대협께서도 수고하셨소. 안녕히 가시오." 모두들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 현천검제만은 「패력검제」라는 말에 눈이 둥그래져 있었다. 눈앞의 사내가 화경급 고수임은 짐작했지만, 설마 그가 패력검제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줄기차게 강행군을 한 후, 소연이 피로에 지쳐 잠자리에 들어가자 패 력검제는 현천검제의 방을 찾아갔다. 마침 현천검제도 패력검제의 방에 찾 아갈까 말까 궁리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둘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낮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못 물어봤는데. 패력검제 대협께서는 질녀 의 사부가 되시오?" "그랬으면 좋겠찌만, 그 아이에게는 따로 천지문이라는 사문이 있소이다." 처음부터 헛짚은 것이다. 그렇다 보니 현천검제는 알 수가 없다는 듯 고개 를 갸웃하며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정파의 명숙인 귀하께서 마교들과 어울릴 이유가 없지 않소이까 ? 도저히 나로서는 이유를 모르겠구려." "그건 나도 마찬가지외다. 교주의 사제라면서 소연을 오늘 처음 만난 듯하 고, 그리고 도저히 무공수위는 짐작조차 안되고……. 도대체 마공을 익히기 나 한 것이오? 교주를 봐도 그렇고, 귀하를 봐도 그렇고…, 요즘 마교의 최 상층부가 보여주는 모습은 도무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 투성이외 다. 혹시, 귀하도……." 잠시 망설이던 패력검제는 이왕에 갈데까지 갔다고 느꼈는지 하고자 했던 말을 덧붙였다. "괴물이오?" 패력검제는 심각하게 한 말이었지만, 현천검제는 그것을 농담 섞인 비유로 받아들였다. 확실히 그의 사형은 「괴물」이라는 말을 들을만한 존재였으니 까. 그렇기에 현천검제는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핫핫핫. 무슨 그런 말씀을. 어찌 사형과 나를 견줄 수가 있겠소이까? 어 쩌다가 운이 좋아 사부님과 짧은 연(緣)을 맺어 그분과 사형제가 되었지만, 나로서는 사형을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소이다." "허어… 마교에서는 어떤 식으로 사부를 받는지 알 수 없으나, 사부로부터 짧은 인연을 맺으면 그대 같은 고수가 되는 것이오? 내가 봤을 때, 최소한 극마는 되어 보이는데 말이오." 그 말에 현천검제는 패력검제가 자신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음을 느꼈 다. 하지야, 생각해 보면 그 오해는 현천검제가 유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겼으니까. "아무래도 오해가 심하신 듯하구려. 나의 사문은 마교가 아니라오. 이유가 있어 사문을 밝히기는 좀 그렇지만, 나는 역혈의 내공을 연성 한 적이 없소 . 연이 짧다고 한 것은, 과거 사형을 가르쳤던 사부님과 인연이 닿아 그분 께 10년 정도 검술을 배운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오." 이제야 패력검제는 왜 그리 상대가 마교적인 냄새를 거의 풍기지 않는 것 인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검술을 배웠다고요? 내가 알기로는 마교의 검술은 역천의 내공에 그 바탕 을 두고 있어 정파인들이 익히면 주화입마에 걸리가 딱 알맞은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런데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것이오?" "물론 나도 그렇게 알고 있소. 하지만 그분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무공은 내공에 바탕을 둔 패도적인 검법이 아니었소. 그냥 검의 길 정도였다고나 할까? 아무튼 검을 익히는 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어서 어떤 검술에도 응용이 가능한 것이었소이다. 덕분에 나도 화경을 뚫은 것이었찌 만 말이오." 서로 간의 오해를 없애기 위해 화경의 고수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다. 그 런데, 패력검제로서는 방금 이자가 말한 검의 길, 즉 검로라는 것에 대해 부쩍 흥미가 당김을 느꼈다.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모든 검술의 기본이 되 며, 또 그것을 10년씩이나 가르친다는 말일까?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었 다. "그렇다면 그것을 당신의 사형, 아니 교주도 익혔다는 말이오?" "물론이오. 사형은 사부의 정식제자였고, 무형검법의 기본들은 그 두 분이 함께 연구해서 만든 것이었소. 내가 사부께 듣기로는 이론의 기본은 사부께 서 창안하셨고, 그것을 완성시킨 것은 사형이었소. 사실, 그때 사형께 일이 없었다면 나에게까지 연결되지 않았을 것이었으나, 사부께서는 사형이 죽은 줄 알고 그것이 실전되는 것이 아쉬워 나에게 전수하신 거요. 일은 그렇게 된 거요." 무형검법. 형태가 없는 검법이라는 말인데, 이건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작 명법이었다. 원래가 검법이라는 것은 일정한 검로를 제한하여, 그것을 익히 는 자로 하여금 반복 학습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 그것 을 무형으로 만든다면, 도대체 그걸 어떻게 익힌다는 말일까? 도무지 짐작 조차 할 수 없었다. "호오. 이제야 귀하가 말씀한 사문이 다르다는 말이 이해가 가는구려. 근 데 기왕에 가르쳐 주는 거 그 무형검법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만 가르쳐 주 면 안 되겠소?" 사실 무공을 남에게 가르쳐 달라는 것은 엄청난 실례였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는 패력검제였지만 이토록 염치없게 나온 것은 아마도 그것에 대한 호기심이 그토록 강렬했다는 말일 것이다. 사실 그로 인해 현경의 경지가 개척된 것이라고 그가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방금 말했듯 그 무공은 사형의 것이오. 그렇기에 그걸 귀하에게 알려 줄 수가 없구려." "오히려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아 죄송할 따름이오. 그런데, 무공은 그렇다 치고, 둘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어찌 그리 비슷하오? 사제 간이라 서 그런 거요? 나는 처음 귀하를 봤을 때, 반박귀진에 도달한 현경의 고수 인 줄 알았었소이다." 현천검제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둘의 느낌이 비슷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원인은 완전히 다르오. 사 형이야 탈마에 이르러 반박귀진에 들어간 것이고, 내가 그런것은 하나의 심 법 때문이라오. 혹시 귀하께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태허무령심법을 통해 내공을 연성하면 이렇게 되지요." "헉! 그, 그것이 있었구려." 패력검제는 이제야 자신이 태허무령심법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교주와 관련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그 심법을 익히고 있으니. 이자도 그 것을 익혔다고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답이 나왔을 것을. 태허무령심법을 통해 내공을 쌓으면 기본적으로 안으로 잘 갈무리 된 안정 적인 기도를 보유하게 된다. 그렇기에 소연과 진팔의 경우도 그들의 실력을 다른 사람들이 정확히 알아보기 힘들었던 것인데, 하물며 화경의 고수라면 마치 반박귀진에라도 들어간 듯 아예 정기를 느낄 수조차 없게 되어 버릴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드디어 태허무령심법을 통해 화경에 도달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구려. 참 으로 놀랍소이다. 어찌, 그것을 개발한 도문에서도 아무도 안 익히는 심법 으로 그토록 지고한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인지……." "따지고 들어가면 아주 간단하오. 나는 다른 심법을 통해 화경에 올랐었고 , 화경에 오른 후에 사형이 나의 본신내공을 없애버린 후 대신 태허무령심 법으로 바꿔 버린 것이니까요." "본신내공을 없애 버리고 다른 것으로 채워 넣는다고요? 그게 가능하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사형에게는 가능한 모양이오." 경악감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패력검제를 향해 이번에는 현천검제가 질문을 던졌다. "웬만한 궁금증은 다 해결해 드린 듯하니, 이제 귀하가 대답해 줄 차례인 듯하오. 도대체 마교에는 왜 온 것이오?" 지금껏 상대가 친절하게 대답을 해 줬었기에. 패력검제도 숨기지 않고 대 답해 줬다. 물론 천마동에서 웬 괴물에게 먼지 나도록 박살난 것은 빼고.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형은 정말 발이 넓구려. 정파에사 알아주던 후지기수를 수 하로 두고, 한편으로는 만통음제 같은 명숙을 의형으로 두고 있으니 말이오 . 그런데 이번 일에 귀하가 끼어들어 있는 것은 정말 의외였소. 마교와 제 령문 사이의 은원을 알기 때문이오." "그 당시 그가 사부를 해친 것은 윗사람의 명령을 받고 한 것이오. 그는 자신을 깔보지 않는 자에게는 모질게 대하지 못하는 성격이오. 이런 말하기 는 뭐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대인(大人)의 풍도를 느꼈었소. 그렇기에 이번 에도 그의 청을 수락한 것이고." "큭큭. 대인치고는 좀 말이 거칠다는 게 흠이기는 하지요. 행동으로는 실 컷 잘해 주고 그놈의 입 때문에 항상 오해를 받으니 말이오." 이제 농담이 오가기 시작하자 패력검제는 어쩌면 양양성으로 가는 길이 처 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교 교주의 사제라는 인물이 정파의 인물이라는 것도 기이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찌되었 건 상대는 상당히 소탈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명문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양양성까지 돌아가는 도중에 조금씩이라도 상대가 말한 그 모든 검술의 기 본이 될 수 있다는 기이한 검법이 도대체 뭔지 알아봐야겠다고 작심해 보는 패력검제였다. * * * 과연 이번 작전에서 소연이 생사의 기로에까지 가게 된 것이 우연인지, 아 니면 어떤 놈에 의해 조작된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묵향이 혈안이 되어 있 을 때, 그 모든 일을 만들어 놓은 당사자인 팽선은 간신히 적을 따돌리고 이제 살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작전 으로 인해 너무나도 심한 피해를 당했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 었다. 살아남은 인원은 겨우 천여 명 정도. 각 문파에서 최소한 3백 가까운 정예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 했다. 그것도 적을 간신히 따돌렸기에 그 정도 에 그친 것이지, 지속적으로 놈들과 싸웠었다면 전멸을 면키 힘들었을 것이 다. 팽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목숨을 건진 것은 팽선이 구사한 탈출작 전이 제대로 먹혀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묵향과 만통음제 같은 최강급 고 수들이 뛰어들어 장인걸이 거느린 상층부를 뒤흔들어 놓은 덕분이었다. 장 인걸이 거느린 주력집단의 비보를 접한 워더리 장군은 적을 계속 추격하지 않고 부상자를 수습하여 후퇴하는 길을 택했기에 팽선이 살아남을 수 있었 던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팽선이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그 의 복이 될지, 아니면 더욱 지독한 화가 될지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한편 묵향의 존재를 눈치 챈 장인걸은 공포에 질려 있는 중이었다. 정체 불명의 화경급 고수를 사망 직전까지 몰고 간 상태에서 등장한 묵향. 그의 등장을 눈치 챈 것이 조금이나마 빨랐기에 그는 운좋게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묵향이 뒤쪽에서 퍼부어대던 푸른빛이 나는 아주 작은 구슬 같은 것들. 그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가져다 준 공포는 너무나도 컸다. 다행히도 그것이 무차별적으로 주위에 떨어졌기에 피하는데 크게 어 려움은 없었지만, 그것이 땅에 닿는 순간 일으킨 엄청난 폭발은 아직까지도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워낙 거리가 떨어져 있었기에 피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다음에 또다시 그런 구슬을 단거리에서 맞는 다면? 장인걸로서는 그 뒷일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묵향이 등장했다는 말은, 곧 마교가 자신을 공격해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 했다. 20여 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을 은원에 있어서는 매우 확실하게 처리하 는 묵향이 잊을 리가 없었다. 정파와 함께 마교가 연합하여 공격해 온다면? 어쩌면 무림일통은 커녕 목굼을 내놔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깊이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22권 천마동에서 나온 아르티어스 옹 의문의 마교 고수들 무영문과 개방의 협력 드러나는 혈겁의 비밀 마교 호법원의 비애 이진덕의 똥배짱 현천검제의 생존과 개방 다시 시작되는 비무 묵향의 풀리지 않는 분노 옥화무제의 꿍꿍이 무림맹에서 되살아난 마교의 꿈 악비 대장군 마화도 여라랍니다 길흉화복을 점치는 태을복술원 곤륜파를 끌어들여라 재상 진회의 눈물 행방불명된 악비 대장군 아미파 여승들과 흑풍대 무사 기묘한 동거 이 남자가 살아가는법 천마동에서 나온 아르티어스 옹 천마신교 외총관 삼면인마 소무면 장로는 요즘 들어 무지하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년쯤 전만 해도 거의 아무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려야만 했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하루하루가 눈알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바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묵향 교주가 돌아온후 마교는 노선선을 완전히 바꿨다. 그것은 바로 그가 꿈에도 그리고 있었던 중원 진출이다. 설무지가 중원에 있는 모든 분타들을 철수시켜 버린 상황이었기에, 그는 교주의 명령에 의해 수십 개에 달하는 분타들을 한꺼번에 만들어야만 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일거리인데, 그 외에 새로운 일거리까지 생긴 상황이다. 즉, 교외에 나가 있는 전투대들에 대한 지원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마교를 바쪄나갔음으로 인해 총단의 방어선에는 엄청난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 얼마 전 패력 건제가 난동을 부릴 수 있었던 것도 다 총단 내의 주력 전투대들이 외부로 빠져나갔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상대가 아무리 화경급 고수라고 하지만 겨우 한명이 그토록 난리를 칠수는 없었다. “이봐, 식량 보급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한건 어떻게 되었나?” “최대한 비밀을 요하는 상태에서 식량을 수송하려면, 안휘성 분타에서 보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외총간님.” “안휘성 분타가 3천6백 명이나 되는 인원이 먹을 식량을 비밀리에 수송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까?” “그렇다면 주위에 있는 다른 분들에서 인원을 차출하여 안휘성 분타를 지원해 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일단 모두들 건량을 넉넉하게 지닌 상황에서 출발했으니, 한달은 버틸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군.” 이때, 소무면 장로는 실내로 들어오는 수석장로를 발견하고 재빨리 자리에 있어섰다. “아니, 여기까지 오시다니..., 통보를 주셨으면 제가 그쪽으로 갔을텐데 말입니다.” “아닐세, 한참 바쁜 걸 뻔히 아는데, 노부가 이쪽으로 오는 게 옳겠지. 본교에 있는 거의 모든 세력이 빠져나간 관계로 자네가 고생이 많구먼.” “일거리가 없어서 빈둥거리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낫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구먼.”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말일세.” “무엇을 말입니까?” “내 홍진 장로에게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홍진 장로라면 교주 직속의 정보단체 비마대의 대주다. 그가 해 준 재미있는 얘기라면, 정확히 어떤 내용일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주 비밀스런 정보일 것이다. 그런데 왜 정보 단체의 장도 아닌 자기에게 찾아와서 그것에 대해서 물어본다는 말인가? 소무면 장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떤 재미있는 얘기였습니까?” “초 부교주님께서 요즘 마영각에 간혹 들르신다고 들었는데, 자네도 혹시 알고 있었나?” 초류빈 같은 무공광이 마영각에 들락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소무면 장로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마영각이라고요?” 소무면 장로는 부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명령했다. “마영각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가져와라.” “옛.” 잠시후 부하는 두툼한 문서철을 가져왔다. “흐음..., 그게 사실이라면 마영각주가 올린 보고서에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텐데......” 이리저리 문서를 뒤척거리던 소무면 장로는 이윽고 문서 하나를 집어 들며 외쳤다. “여기 있군요.” 소무면 장로는 문서의 내용을 쏜살같이 읽어 내린 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것을 수석장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허허, 초 부교주님께서 본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대상이 겨우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녀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초 부교주님께서는 원래 여색을 탐하시는 분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거죠. 하룻저녁 수청을 들어드리도록 예쁘게 단장시켜서 그분의 처소로 보내야 할지, 아니면 중매를 서야할지...... 웬만한 계집이라면 중매를 서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겠지만, 그 계집의 신분으로 밨을 때 말을 잘못 꺼냈다가 그게 아닐 경우 되려 이쪽에서 경을 칠 우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것들보다도 부교주님께서 눈독들이고 계신 계집을 다른 놈이 건드리는 거야. 행여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네가 신경 좀 쓰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일세, 알겠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부탁 좀 하겠네. 만약 나중에 이 일로 인해서 노부가 질책을 받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자네는 어찌 될지 알겠지?” 아주 노골적인 협박. 수석장로로서도 딴 일이라면 위쪽의 질책을 당한다 해도 참아 줄 수 있겠지만, 한낱 하녀 하나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게 된다면, 결코 참고 넘길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내 분명히 경고했네.” “예. 예. 걱정마십쇼.” 수석장로가 떠난 후, 소무면 장로는 도저히 못 참겠는지 문쪽에다 대고 외쳤다. “빌어먹을! 그딴 연애질에 관한 건 좀 한가한 사람에게 부탁하십쇼. 안 그래도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한 판에, 지금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한건 처리해 놓은 후, 수석장로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사실 교 내의 주요 무력 단체들이 몽땅 다 빠져나간 상황에서 지금 그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지금 가장 바쁜 사람은 외총관 쪽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무력 단체들이 빠져나간 공백까지 그들이 전부 메워야 했으니 말이다. “향긋한 차나 한잔할까?” 흥얼거리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수석장로, 하지만 그는 이내 자신의 집무실로 서둘러 돌아온 것을 후회해야만 했다. “수석장로님, 천마동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천마동이라는 말에 수석장로의 얼굴에 긴장감이 흐른다. “천마동? 혹, 어른신께서......” “예. 어르신께서 천마동에서 나오셨답니다.” “헉! 그게 사실이냐?” 교주를 제외한 천하의 그 누구도 눈 아래로 보던 수석장로의 안색이 급격하게 새하얗게 변했다. 그만큼 천마동에서 나왔다는 어른신의 존재는 그에게 극심한 부담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예전에는 마화가 어르신을 담당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떠난 후, 어르신은 매우 상대하기 까탈스런 인물로 변해 있었다. 물론 이건 아르티어스 옹을 상대해 줄 묵향이나 마화가 모두 빠져나가 버렸기에 벌어진 결과였지만, 홀로 총단에 남아 노친네의 짜증을 다 받아 줘야 하는 입장에 놓인 수석장로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던 것이다. “옛. 그분께서 나오시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고 하니, 정확한 사실일 것입니다.” “마천루(摩天樓)에 기별을 넣어, 그분께서 나오셨으니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라고 해라. 만약 그분의 마음에 안들었을 시, 본좌가 직접 목을 베겠다고 말이야.” “옛. 즉시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명령한 후, 수석장로는 일이 손에 안 잡히는지 안절부절 못했다. 마교라는 대문파의 수석장로라면 해야 할 일이 녹록하지 않다. 확실히 아르티어스가 천마동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수석장로는 본연의 침참함을 잃어버렸다. 그만큼 아르티어스라는 존재가 주는 압박감이 무겁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갑자기 왕지륜(王志侖)이 다시금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수, 수석장로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어, 어르신께서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시다는 전갈입니다.” 수석장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뭣이? 이런 빌어먹을.” 수석장로는 황급히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후다닥 뛰어 대전 밖으로 뛰쳐나오던 그는 재수 없게도 아르티어스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부하들에게 마천루로 모시라고 명령을 했지만, 아르티어스가 그들의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무슨 볼일이 있는지 수석장로가 근무하는 이쪽으로 곧바로 걸어온 것이다. “오, 안 그래도 자네를 찾아가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군.” 수석장로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뒤 아르티어스를 환영했다. “어, 어르신. 어서 오십시오. 방금 전에 수하로부터 천마동에서 나오셨다는 기별을 받고, 어르신께 인사 여쭈러 서둘러 달려가던 참이었습니다.” 수석장로는 낯짝도 두껍게 둘러댔다. 하지만 그 아부가 통했는지 아르티어스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그랬나? 나를 찾아올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흐흐흣, 내가 자네를 찾은 건 다름이 아니라 한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야.” “하명하십시오.” “아들놈은 지금 어디에 있나?” “지금 양양성에 계십니다.” 당연히 아르티어스로서는 양양성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 리가 없다. “양양성에? 양양성이 어디에 있지?”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던 수석장로와 왕지륜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수석장로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이놈이 조금만 더 빨리 통보해 줬다면, 이 빌어먹을 영감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됐을 것이 아닌가. 뭘 생각했는지 수석장로의 눈빛이 모질게 빛났다. 그는 옆에 서있는 왕지륜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아르티어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중원의 지리를 잘 모르신 테니 차라리 왕지륜이 어르신을 양양성까지 모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놈과 같이 가라고?” 왕지륜은 그 말에 사색이 다 되어 끊임없이 수석장로에게 구원의 눈짓을 보냈지만, 한 번 마음먹은 수석장로에게 그게 통할 리 만무했다. “눈치 빠르고, 행동이 재빠른 놈이니 데리고 다니시면 편하실 겁니다.” 아르티어스는 왕지륜을 아래위로 쭉 훑어본 후 씨익 미소 지었다. “흠, 딴 건 몰라도 맷집은 꽤 괜찮아 보이는군.” 그 말이 수석장로와 왕지륜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들렸다. 수석장로에게는 통쾌함을, 왕지륜에게는 절망의 손길로 다가왔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천마동에 웅크리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발길이 중원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의문의 마교 고수들 중원 최고의 정보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무영문이었지만, 요즘 들어서 정보 수집에 있어 약간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첩보조의 7할 이상이 금나라 쪽에 침투해 있거나 대금전쟁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보니, 다른 쪽으로는 투입할 인원이 없어 구멍이 숭숭 뚫리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같으면 마교의 성지 십만대산(十萬大山)으로 들어가는 통로들은 50개 조에 달하는 비영단원들에 의해 철저하게 감시되었다. 그냥 감시만 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많은 숫자의 첩보조를 필요로 했느냐 하면, 마교 전투 조직의 특이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시피 마교도들은 마기(魔氣)라는 독특한 기운을 뿜어낸다. 무공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마기는 더욱 짙어져, 자신이 숨어 있는 위치를 타인에게 뻔히 드러내게 되는 마교 무사들이 지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추적하기 아주 손쉬울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교도들은 자신들의 문제점을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대처법을 개발해 냈다. 즉, 총단을 떠난 직후부터 전속력으로 냅다 달려가는 것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만큼, 그들을 몰래 추격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전력을 다해 쫓아가도 따라갈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에서 어떻게 기척을 숨길 수 있겠는가. 무영문이 마교 주위에 50개나 되는 첩보조를 배치했었던 이유는 그들이 이동할 만한 통로를 기준으로 인원을 폭넓게 매복시켜, 마죠도의 이동로를 대략적으나마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무영문이 개발해 낸 이 방법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무리해서 추격할 필요 없이, 자신이 매복해 있는 근처로 마교의 전투 집단이 지나가면 그들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잘 봐 뛌다가 상부에 보고만 하면 끝이었다. 상부에서는 각 조가 보내온 보고를 토대로 마교도들의 목표를 대략적이나마 짚어 볼 수 있었다. 사실 그것만 해도 충분했다. 어느 정도 규모의 세력이 대충 어느 쪽으로 이동한다는 것만으로도 무림맹에서 상당한 정보료를 받아 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교를 감시하고 있던 그 많던 인원이 모두 다 빠져나가고 겨우 2개조, 열 명만이 흩어져 이동로를 감시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무영문의 수뇌부들은 그 인원으로 제대로 된 감시가 될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금나라를 조사하는 데만도 엄청난 인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마교도들까지 감시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마교가 그들과 같은 배를 타고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열 명의 인원이 감시할 수 있는 이동로는 열 개밖에 안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십만대산에서 외부로 빠져나가는 수십 개의 이동로 중, 지금까지 마교도들이 가장 많이 이용해 온 곳 열 개를 골라낸 다음 각자 하나씩을 맡았다. 그리로 마교도들이 이동을 하냐, 안하냐는 완전히 운에 맡겨 버렸다. 이동로 하나를 배정받은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왕숙(王淑)이다. 길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그는 매일같이 길 위로 오가는 모든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뭘 발견했는지 무감정하게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그의 눈이 갑자기 부릅떠졌다. “헉! 저게 뭐야?” 그가 발견한 것은 일단의 마교도들이다. 행색만으로는 그자들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모두 다 엄청난 고수들이라는 점이다. 왕숙은 안전을 위해 길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길 아래쪽이 까마득히 내려다보일 정도다. 그런데 이런 먼 곳에 자리 잡은 그에게까지 저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마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사애대의 수를 셌다. 워낙 거리가 멀어 정확히 세기는 좀 힘들었지만, 백 명 안팎임에는 분명했다. “말로만 듣던 수라마참대인가?” 그는 황급히 토굴 속으로 들어갔다. 유사시 숨기 좋도록 위장이 잘되어 있는 토굴 안에는, 그가 오랜 시간 머물며 생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짐을 뒤져 작고 얇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깨알만 한 글자를 빠르게 써넣었다. 「백여 명 규모의 특1급 전투단 출발. -423 왕숙」 그리고는 새장에서 가장 튼튼해 보이는 전서구 한 마리를 꺼내, 양피지를 집어넣은 작은 대롱을 다리에 조심스럽게 맸다. “조심해서 날아가거라.” 전서구를 날린 왕숙은 다시금 처음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왕숙은 길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이해하기 힘든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저놈들이 왜 아직도 저기 있는거지?” 마교도들이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대로라면, 저들은 쏜살같이 달려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어야 했다. 물론, 짤막한 내용의 전서를 보냈기에 왕숙이 지체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기는 했지만, 그들의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면 그의 시야에서 자취를 감추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가만... 저 정도 속도라면 추적이 가능하겠는데?” 왕숙은 춤속에서 비수를 꺼내 나무에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혹, 자신을 찾아올지 모를 일행들에 대한 배려였다. 왕숙이 백여 명의 마교 고수들이 이동하는 것을 포착한 사실은 처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교주를 돕기 위해 양양성으로 이동하는 전투 집단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왕숙으로부터 두 번째 보고를 받았을 때, 무영문의 수뇌부는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백 명에 달하는 고수들 중, 열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다시 총단으로 되돌아갔다는 보고였기 때문이다. 장인걸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교란 작전이라면 얼마 움직이지도 않고 대부분이 그냥 돌아갈 리 없었다. 물론 남은 열한 명만해도 충분히 장인걸의 이목을 끌 만큼 강력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뭔가를 부수러 가는 거라면 이동 속도가 너무 느리다. “진짜 미끼안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무영문의 수뇌부는 자신들이 놓치고 있는 게 한 가지 있음을 깨달았다. 왕숙으로부터 되돌아 갔다고 보고받은 그 90여 명의 고수들이 진짜로 총단으로 되돌아 갔는가? 총단 인근에 배치된 아홉 명에게 긴급히 사람을 보내 알아봤지만, 그들이 총단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숙이 빠져나간 자리를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았기에 빛어진 결과였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한 무영문의 수뇌부는 3개 조를 십만대산 방향에 새로이 투입했다. 2개 조가 맡은 임무는 사라진 90명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1개 조는 왕숙과 교대해서 열한 명으로 이뤄진 마교 고수의 이동을 추적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왕숙이 아무리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특1급에 해당하는 고수들 근처에 접근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상대방은 눈을 감고 있어도 그 존재감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지독한 마기를 언제나 뿜어내고 있었기에 구태여 가깝게 접근해서 관찰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들의 뒤만 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오랜 세월 첩보조에서 잔뼈가 굵은 왕숙은 뭔가 크게 한 건 할 수 있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는 것만 봐도 수상쩍은데, 저들은 마물(魔物)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엄청난 고수들이다. 그런 자들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런 해괴한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이번 일만 제대로 잘 파악해 내면, 그 공을 인정받아 조장으로 진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왕숙은 한밤중에도 몇 번씩이나 일어나 상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이목에 수상한 그림자가 하나 얼핏 보였다. “뭐지?” 왕숙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히 재빠른 놈이라 하마터면 들고양이가 움직인 것으로 착각할 뻔했을 정도였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 한 섣부른 행동은 할 수가 없다. 최악의 경우 상대는 장인걸 쪽으로 보낸 첩자나 암살자일 수도 있었다. 왕숙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더욱 신경 써서 움직이며, 미지의 적을 탐색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상대의 흔적은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왕숙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수상한 그림자의 정체는 물론이고 동료가 있는지, 또 있다면 그 수가 얼마인지 조차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평상시 같았으면, 조별로 행동하기에 자신의 뒤를 맡아 줄 듬직한 동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만큼 그가 받는 심리적 압박감은 더욱 컸다. 한참 주위를 살피던 그의 눈에 나뭇가지가 묘하게 꺾여 있는 게 보였다. 무영문의 첩보 조원들만이 알고 있는 약속이었다. 그걸 알아보자마자 왕숙의 시선은 급히 나무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역시 그의 생각대로 나무의 아래쪽에는 얼핏 봐서는 알아보기 힘들도록 교묘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 안에는 무영문도들끼리 주고받는 은밀한 기호들이 포함되어있다. “162조 도착, 모습을 드러내라고?” 왕숙은 잠시 망설였다. 이게 적의 함정이라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지원 부대가 온 것일 수도 있다. 무영문 같은 첩보 조직의 경우, 은밀하게 행동하기에 같은 편끼리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지 못해 서로 죽이는 참사가 발생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운에 맡기는 수밖에.’ 왕숙은 마침내 결심했다. 무영문도가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기호들. 그것에 자신의 목숨을 건 것이다. 마음을 굳힌 왕숙은 슬쩍 자신의 위치를 드러냈다. 지금까지 꼭꼭 숨어 있던 그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와 똑같은 복장의 복면을 한 인물이 슬며시 그에게 접근해 왔다. “누구십니까?” “지금까지 수고했다.” 복면을 벗자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바로 162조 조장인 조철삼(趙哲三)이었다. 인수인계를 할 때는 정확하게 서로의 정체를 드러내야만 한다. 적에게 속는 것도 방지할 겸,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한 의도였다. ‘지금까지’ 라는 말만으로도 왕숙은 눈앞의 인물이 왜 나타났는지 감을 잡았다. 자신을 대신해서 162조가 마교도들의 감시를 맡게 된 모양이다. “어서 오십시오, 조철삼 조장님.” “혼자서 저들을 감시하며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뭔가 특이한 사항은 없었나?” “상부에 보고한 것 외에 별다른 사항은 없었습니다.” 몇 가지 얘기를 나눈 후, 지금까지 이들을 추격해 왔던 왕숙은 처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십만대산으로 말이다. 조철삼은 저 멀리 마기가 풍겨 오는 지점을 노려봤다. 숲에 가려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마교 고수 한 명 한 명의 위치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그 개개인이 뿜어내는 마기는 강렬했다. 조철삼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공포를 자아내게 만드는 그 무시무시한 기운에 진저를 칠 수밖에 없었다. “젠장. 특1급이라고 하더니, 정말 지독한 마기로군.” 조철삼은 고개를 돌려 그의 부하 둘을 지목하며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저기 보이는 마을을 철저하게 수색해봐. 어쩌면 놈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관도를 통해 뭔가를 수송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조장.” “최대한 신속하게 행동하되, 저놈들이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돼. 알겠나?”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으니 염려 놓으십시오.” 부하들이 달려가고 난 후, 조철삼은 남은 조원들과 함께 마교도들을 감시하기 편한 곳을 찾아 몸을 날렸다. 멀리서 봤을 때 자신의 몸을 완벽히 가려 줄 수 있을 정도로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 위에서 저들의 동태를 감시하려는 것이다. 비영단 소속 162조 조원들은 조철삼의 명령에 따라 그 인근 마을의 물류 이동 상황을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마차를 통해 수송하는 물건들 중에 중요한 것은 없는지 세밀하게 살펴봤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자 점차 수색 범위를 넓혀갔다. “자네는 이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는 영안표국을 살펴보도록 해. 그리고 자네는 전장 쪽을 알아보고......” 162조는 조철삼의 지휘 하에 마교도들을 은밀하게 추격하며, 그들의 행로 부근에 있는 마을들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 봐도 수상한 부분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발견할 수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마교에서 고수들이 아무런 일도 없이 단체로 산보를 나왔을 리는 없지 않는가. 조철삼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고심하고 있을 때 부하들 중 한 명이 슬쩍 입을 열었다. “혹시 누군가를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런 멍청한 녀석, 저렇게 마기를 풀풀 풍기면서 감시가 된다고 생각하나?” 당연한 질책이었다. 마교도들이 뿜어내는 마기는 워낙에 강렬하여, 웬만큼 무공을 익힌 자라면 아주 먼 거리에서도 그 기척을 포착해 낼 수 있다. 그렇기에 숨어서 누군가를 감시하는 것일 거라는 추측은 아예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혹 상대방이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자라면 몰라도. “그렇다면 누군가를 추격하는 것은요?” “추격한다는 놈들이 저렇게 꿈지럭거리며 움직이겠나?” “그렇다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멍청한 놈, 네놈은 그렇게 생각이 없나? 놈들은 계속 이동 중이다. 척 봐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잖아!” 조철삼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부하는 기죽지 않고 또 다른 질문을 해 왔다. 물론 질책하는 조철삼도 부하의 계속된 질문에 짜증을 내면서도 계속 대꾸를 해 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야 말로 정보를 팔아 먹고사는 무영문의 저력인지도 모른다.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며 뭔가 의심스러운 점이 나오면 철저하게 파고 들어가는 이러한 모습이 무영문이 강호 제일의 정보 문파로 군림할 수 있는 힘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호위하는 것은 아닐까요? 멀찌감치 떨어져서 호위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호위를 하려면 곁에 바짝 붙어서 호위해야지, 멀찌감치 떨어져서 할 리가 없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저렇게 짙은 마기를 풍겨 대면서 무슨 호위를 한다는 말이냐? 목표가 바로 이 근처에 있다고 광고할 일이라도 있나?” 조철삼이 이렇게 단정 지을 만도 했다. 그의 부하 둘이 홋시나 해서 수상쩍은 자를 찾아 이 근처를 샅샅이 뒤졌다. 현천검제나 패력검제, 그리고 소연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는 정도의 얄팍한 위장을 했을 뿐이었지만,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두 사내와 동행하는 정파인으로 보이는 그런 여 고수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하지만 부하는 더 이상 그 뒷말을 이어 붙이지 못했다. 조철삼 조장의 사나운 눈빛으로 봤을 때, 그 뒷말을 이어 붙임과 동시에 주먹이 날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무영문이라고는 해도 쫄다구는 적당히 알아서 기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조장님. 출출하지 않으십니까? 식사 준비를 할까요?” 고개를 갸웃하던 조철삼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느껴지던 마기 덩어리들 중에 세 개가 어딘가로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한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는 이곳에서 남은 자들을 감시하고 있거라.” 그들의 이동 속도가 워낙 빠른 것이었기에 부하를 보낼 수는 없었다. 162조에서 가장 빠른 경공 속도를 자랑하는 조철삼이었지만, 상대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만큼 그들의 무공이 엄청나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조철삼이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자신의 기척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기에, 그는 최대한 기척을 숨겨 가며 달려야만 했다. 조철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서 가는 자들의 기척을 놓쳐 버렸다. “젠장, 어디로 갔지?” 이미 기척은 놓쳐 버린 상태였고, 기왕에 내친걸음이었기에 주위를 살피며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던 조철삼은 갑자기 앞에서 엄청난 속도로 접근하는 마기를 느끼고는 깜짝 놀라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세 덩어리의 마기는 그가 숨어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렸다. 마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기다린 후에야 조철삼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갔나?”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놈들은 일행에게로 되돌아간 모양이다. 조철삼도 처음의 위치로 돌아갈까 했지만 쉽게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저들이 이렇게 바쁘게 어딘가에 갔다 온 걸 보면,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마교의 고수들이 온 곳으로 한참을 더 달려가자 조철삼은 작은 장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전혀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장원이었다. “이상하네, 여기는 영안문(永安門)인데......” 조철삼이 영안문에 다가갔을 때, 그는 장원에서 왜 그토록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장원 안에는 시체들만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도 살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설마... 그들이 죽였나?”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그들이 이런 학살극의 장본인이라는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다. 시체에 나 있는 상흔을 살펴봤을 때, 살해에 사용된 무공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을 정도로 흔한 수법들이었다. 그리고 상처의 깊이도 제각각이라 수십 명에 달하는 집단이 이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조철삼은 자신이 따라왔던 그 세 명이 일부러 힘 조절을 해서 의도적으로 이런 흔적을 만들어 놨을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한참 동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시체들을 둘러보던 조철삼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쯧, 일부러 자신이 지닌 무공을 은폐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군.상처만으로 봤을 때는 어떤 놈들이 저질러 놓은 일 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겠는데?” 영안문 같은 저급한 문파를 없애는 데, 그렇게 엄청난 실력자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즉, 살해자의 정확한 실력을 가늠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그가 뒤쫓아 온 마교의 고수들부터 시작해서, 무림의 어지간한 문파의 상층부에 존재하는 고수들이라면 모두 다 용의 선상에 올릴 수 있다는 말이다. 조철삼이 실내로 들어가자 아주 호화로운 장포를 걸친 중년인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두개골이 쩍 갈라진 채 쓰러져 있는 시체가 바로 영안문의 문주인 목진명(木眞明)이었다. “역시, 상처만 봐서는 흉수를 짐작할 수조차 없군.” 이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조철삼의 눈에 이채가 어려다. 누군가 실내를 샅샅이 뒤진 흔적이 보였던 것이다. 물건을 보관해 둘 만한 아주 작은 공간들까지 다 뒤진 것을 보면 범인은 여기서 뭔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뭘 찾은 걸까?” 조철삼도 나름대로 실력을 발휘하여 한 시진 동안 이곳저곳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쓸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돈이라든지, 패물, 귀금속이 보이긴 했지만 장원을 덮친 자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었는지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 은자 1백 냥의 값어치는 족히 되어 보이는 야명주를 발견한 조철삼은 장원을 습격한 자들이 평범한 무리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런 걸 손도 대지 않은 걸 보면 뭔가 있기는 있어.” 조철삼은 슬쩍 야명주를 품속에 넣고 곧장 자신의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이번에 자신이 본 일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깨알만큼 작은 글씨를 쓴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니었기에 능숙하게 두 장을 썼다. 보고서를 다 작성한 그는 그것들을 둘둘 말아 황동으로 만든 작은 대롱 안에 밀어 넣었다. 뚜껑을 꼭 닫으니 물 한 방울 새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밀봉이 됐다. 그중 하나를 전서구의 가느다란 발목에 묶어 하늘로 날려 버린 뒤, 남은 하나의 대롱을 수하들 중 한 명에게 건네주며 명령했다. “혹 모르니 너는 이걸 직접 전달하고, 좀 더 많은 인원을 증원 해 달라고 전해라, 사안은 특(特)이다. 알겠냐?” 수하는 대롱을 받자마자 그것을 자신의 입속, 그러니까 혀 밑에 집어 넣었다. 만약 누군가의 공격을 받거나 하면 그는 그것을 꿀꺽 삼켜 버릴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장.” “수고해라.” 부하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던 조철삼의 머리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지금까지 쫓아갔던 열한 명의 마교 고수들의 목적이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안문 정도를 박살 내기 위해 저 정도의 고수들이 마교를 나왔을 리는 만무했지만, 흉수가 아니라고도 말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목적도 없이 천천히 행동하는 마교 고수들을 본 적이 없기에 조철삼으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무영문과 개방의 협력 해가 떠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총관은 옥화무제를 찾아가 아침마다 하는 정기 보고를 올렸다. 그녀는 아침에 일출을 보는 것을 즐겼기에, 언제나 일출을 본 직후에 총관을 만났던 것이다. 총관의 보고 내용은 대부분 금나라와 관계된 것이었다. 금군의 위치가 변경된 것이 있는지, 그리고 현재 장인걸의 움직임은 어떤지, 또 변방 부근에서 벌어지고 있는 첩보전에 대한 것도 있었다. 요즘 들어 장인걸이 거느린 편복대와 무영문의 첩보조들 간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편복대 쪽이 훨씬 많은 인명 피해를 당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영문 쪽의 인명 피해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금나라에 대한 정보 보고가 끝나가 총관이 마지막으로 보고한 것은 마교에서 양양성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일단의 고수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전에 말씀드렸던 마교의 고수들 말입니다.” “90명의 행방은 찾았나요?”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보다 열한 명의 마교도들에 대한 겁니다만...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이동로에서 꽤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건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예. 그 근방의 두 개 문파가 멸문당했습니다.” 옥화무제는 흠칫했다. 순간적으로 총관이 한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이어 정신을 수습하여 질문했다. “설마... 그들이 그 일을 벌였따는 말은 아니겠죠? 다른 문파들이라면 몰라도, 지금 장인걸을 잡느라고 정신이 없는 마교에서 그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잖아요.”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은밀히 따르며 감시하라고 붙여 놓은 162조에서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그 들 중 세명이 영안문을 멸문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설마......” 금나라를 등에 업은 장인걸을 상대하기 위해 무림맹과 손까지 잡은 마교다. 그런 그들이 무림에 아무 영향력도 없는 이름도 없는 작은 문파들을 왜 멸문시키겠는가. 더군다나 마교의 교주인 묵향과 오랜 시간 거래를 해 왔던 옥화무제였기에 최근 연이어 벌어지는 혈겁이 마교의 짓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마교 역시 용의선상에 둬야 했다. 그렇다면 가장 시급한 것은 혈겁이 벌어진 이유부터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올해 혈겁을 당해 갑작스럽게 멸문당한 문파가 몇 개나 되죠?” “작은 문파까지 모두 다 합한다면 28개입니다. 태상문주님. 그 중 몇 개는 장인걸이 벌인 일로 추정되고, 화산파는 마교가 멸문시켰고, 또 인근 문파와 이권다툼으로......” 옥화무제는 총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직까지 흉수를 파악하지 못한 혈겁들만 따로 모아서 조사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뭔가 연관성이 있나 찾아보시구요.” “그걸 모두 조사하자면 비영단이 최소한 10 개는 필요합니다. 태상문주님.” “......” 옥화무제가 대답을 하지 않자. 총관은 그녀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물었다. “금나라 쪽에서 뺄까요? 아니면 중원의 다른 지역에 이TSms 조들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이 좋을까요?” 옥화무제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비영단 조장 중 가장 인상이 좋고 넉살 좋은 조장이 누구죠?” 그녀의 엉뚱한 말에 총관은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건 왜......” “본문 단독으로 조사하는 것보다 개방을 이용하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제야 옥화무제의 말뜻을 이해한 총관을 재빨리 한 인물을 생각해 내어 천거했다. “212조 조장 이진덕(李振德)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성격이 둥글고 넉살이 좋아 거지들하고도 잘 어울릴 겁니다.” “좋아요. 212조를 그쪽으로 보내도록 하세요.” “존명!” “그리고 마교 고수들의 뒤를 쫓고 있는 비영단에게는 절대로 가까이 저븐하지 말고, 원거리에서만 관찰하라는 명령을 다시 한 번 내리도록 하세요. 우리들이 그들을 쫓는다는 사실을 몰라야 쓸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예요.” “존명!” 총관이 명을 수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옥화무제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뭔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거대한 음모가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50여 식솔을 거느리고 있던 작은 문파 철륭방(鐵隆?)이 멸문당했다는 소식은 별로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사람들을 살해한 잔인한 손속에 대해서는 모두들 눈살을 찌푸리며 성토를 해 댔지만, 정작 그들이 왜 망했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무림에서 철륭방 간은 작은 문파가 멸문당하는 것 쯤은 너무나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 2주일도 지나지 않아, 철륭방 인근에 있는 영안문(永安門)이 멸문당하자 사정이 바뀌었다. 인근 지역의 맹주였던 영안문은 2백에 달하는 식솔을 거느리는 제법 큰 문파였는데, 하룻밤새에 멸문을 당한 것이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철륭방이 멸문당했을 때문 해도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의 관심이 점차 영안문에 쏠리기 시작했다. 까악.까악. 까마귀만이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고 있는 영안문 내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인물들이 있었다. 모두 다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는 거지들이다. 개방의 경우 워낙 그 수가 많기에 웬만한 마을에는 모두 소규모의 분타를 설치해 놨다고 할 정도로 중원 구석구석을 아우르고 그렇기에 영안문에 변괴가 발생했을 때도 개방에서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알아챘다. 대부분의 거지들이 내부를 살펴본다고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을 때, 영안문의 정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 거지 하나가 주저앉아 한가로이 졸고 있었다. 혹시 관부(官府)에서 사람이 나와 쓸데없는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망을 보고 있는 것이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주저앉아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영락없이 졸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과 달리 거지의 눈은 한 번씩 날카롭게 주위를 훑듯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 거지의 시선에 낯선 사내의 모습이 포탁되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다. 비교적 푸짐한 살집을 지닌 인물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인상이 매우 유순해 보였다. 그는 문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지에게로 곧장 다가오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여어~. 수고 많으십니다.” 항상 구박과 경멸의 말투만 들었던 거지는, 상대의 익숙하지 않은 인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자신의 뒤에 누가 서 있는건 아닌지 뒤까지 돌아봐TEk.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사내는 어리둥절해 하는 거지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빙글빙글 웃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책임자께 안내 좀 해주시겠습니까?” 거지는 자신이 개방 소속이라는 것을 상대방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개를 잡는 타구봉에 허름한 거지꼴, 생각나는 방파는 개방뿐이다. 문제는 상대방은 자신을 아는데, 자신은 상대방이 누군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거지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대꾸를 하는 거지의 말투는 퉁명스럽기 그지 없었다. “누구쇼?보아하니 관원은 아닌 듯한데......” “이런, 제가 실례를 했군요.” 뚱뚱한 사내는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명패를 꺼내 거지에게 건네줬다. “무영문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비영단 212조 조장 이진덕이라고 합니다.” 무영문과 개방은 오랜 경쟁 관계에 있는 집단이다. 그렇다 보니 무영문의 핵심 정보 단체인 비영단의 조장이라면 개방의 4결과 5결 제자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지위라는 것을 웬만한 거지라면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감히 상대를 경시하지 못하고 공손하게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우리 타주님을 만나보고 싶다는 겁니까?” “하하, 상의를 드릴 일이 좀 있어서요.” 거지는 자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쩝, 저를 따라오십쇼. 타주님께서는 안쪽에 계시니.” 거지는 사내를 데리고 장원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호기심 때문에 쩍쩍 벌어지려는 입을 애써 닫아야 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왜 이곳에 와서 타주를 찾는 것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타주님, 무영문에서 사람이 왔는데요.” 분타주는 반백의 희끗희끗한 수염이 몇 가닥 난 50대 초반의 중년 거지였다. 얼핏 보면 워낙 비루한 인상이라 적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는데, 수하의 보고를 듣자마자 매섭게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보면 괜히 분타주가 된 게 아닌 모양이다. “무영문이라고?” 거지는 분타주에게 다가가 이진덕에게 받은 명패를 건네주며 말했다. “비영단 소속 212조 조장 이진덕이랍니다.” 과연 거지의 말처럼 명패에는 ‘212’ 라는 숫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분타주는 명패를 자세히 관찰한 후, 그것을 이진덕에게 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일대를 책임지고있는 진곡추(陳哭秋)라 하오. 그런데 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소?” “아, 진타주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진덕이라고 합니다. 초면에 이런 말씀드리기는 좀 멋쩍지만, 뭔가 알아내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뭔가 말하려던 진곡추는 이진덕을 안내해 온 거지가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귀를 쫑긋 세운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을 보자 화를 버럭 냈다. “안 가고 거기서 뭐하는 거야? 네놈은 문 앞이나 잘 지키고 있으라고 했잖아!” “예. 예. 갑니다요. 가요.” 거지가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간 후에야 진곡추는 이진덕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집단이 바로 무영문이기는 했지만, 눈앞의 이 사내는 인상도 좋았고 꽤나 사근사근한 것이 진곡추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영안문의 혈겁을 조사한 바를 말했다. 이번 일로 몇 가지 알려 준 뒤 친분을 맺어 두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글쎄올시다. 흉악무도한 집단이 이 일을 벌였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알아낸 것이 없소. 어린애들까지도 일격에 죽여 버린 걸 보면... 절대로 증인을 남겨놓지 않겠다는 생각인 모양이오.” “얼마 전에 일어난 철륭방의 혈겁을 일으킨 자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계속된 질문에 진곡추는 몇 가닥 남지 않은 수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면서 의문을 계속 던지는 이진덕을 바라봤다. 개방과 맞먹을 정도의 정보력을 가진 무영문이 뭐가 아쉬워 이런 질문을 해대는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진덕이 빤히 자신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흠, 그건 알 수가 없소. 흔적을 남길 정도로 멍청한 놈들이 아니었으니 말이오. 하다못해 시체에 나 있는 상흔으로도 흉수를 파악해 내는 데 실패했소.” “되는 대로 휘둘렀습니까?” 이진덕의 물음에 진곡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웬만한 무림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그런 무공만을 사용했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철륭방에 손을 썻던 패거리에 비해서는 최소한 한 등급 이상 높은 실력을 지닌 자들인 것 같소.” 이진덕은 잠시 진곡추를 바라보더니,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미 몇 가지 단서를 잡으신 듯한데, 저에게도 조금만 좀 알려주십시오. 저도 정보를 날로 먹으려는건 아니니, 서로가 좋은 게 좋은거 아니겠습니까?” “글세... 무슨 말씀이신지?” “요즘 중원 전역에 걸쳐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동시바발덕으로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진곡추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너스레를 떨었다. “호오. 그렇게 잘 아신다면 이쪽에도 좀 알려 주시구려. 이쪽은 전혀 오리무중이니 말이오.” 이진덕이 진곡추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비록 개방이 무영문보다 정보의 질에는 한 수 뒤쳐진다고는 하지만, 중원 전역에 깔려 있는 엄청난 숫자의 개방도들이 물어 오는 정보의 양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수준은 낮더라도 방대한 정보를 폭넓게 획득하는 데 있어서는 무영문보다 개방이 한 수 위라는 것을 이진덕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쪽은 요 근래에야 냄새를 맡았습니다. 하지막 제가 알기에는 귀방은 우리보다 최소한 2주일은 먼저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철륭방의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진 타주께서는 이미 이곳을 샅샅이 다 훑어보셨겠지만, 저는 이제야 겨우 이곳에 도착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외다.” 딱 잘라 말한 진곡추는 가볍게 포권하며 말을 이었다. “본인은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소. 내 수하들에게 일러 놓을 테니, 귀하가 조사하는 데 방해나는 일은 없을 거외다.” 진곡추가 사라지고 난 후, 그 자리에 남은 이진덕은 가볍게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좀 가르쳐 주면 어때서. 조만간에 이쪽에서도 알아낼 일인데......” 이진덕은 뭔가 쓸 만한 것이 남아 있을까 싶어 주위를 기웃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개방 쪽에서 조사하고 남은 찌꺼기들뿐일 것이다. 그리고 뭔가 확실한 물증이 발견되었다면, 그런 중요한 증거물을 그 자리에 그대로 방치해 놨을 리 만무했다. 즉, 이곳을 아무리 뒤져 봐야 헛수고라는 말이다. “젠장, 저놈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나?” 잠시 궁리하던 이진덕은 조금전에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해 줬던 거지를 찾아갔다. “아,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뭡니까?” “진 타주께서 좋아하시는 게 뭔지 좀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한동안은 여기서 귀방의 신세를 져야 할 듯 싶은데, 진 타주님과 사이가 껄끄러우면 일하기 힘들 게 아니겠습니까?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서 이진덕의 손은 어느샌가 그 거지의 주머니 속을 들락거렸다. 갑자기 자신의 주머니가 묵직해지자 깜짝 놀란 거지는 주머니 속에 얼른 속을 집어넣어 봤다. 묵직하게 만져지는 은자 한 냥. 거지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뭐, 이런 걸 다......” “조사가 끝나고 동료 분들과 술이라도 한잔하시죠. 사건 현장을 이 잡듯 뒤지고 나면 모두들 피곤할 텐데, 이런 때는 얼큰하게 한잔하고 푹 쉬는 게 최고 아니겠습니까?” 더럽기 그지없는 거지들과 함께 어울려야 한다는 것은 솔직히 내키지 않지만, 이진덕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으로 보내진 비영단은 겨우 1개 조, 자신을 포함해서 다섯 명뿐이다. 단독 조사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그는 개방과 공동 조사를, 아니 공동 조사라는 명목 하에 개방의 정보를 왕창 빼내 오는 것만이 상에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덕분에 조사는 뒷전이고, 진곡추를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고민스럽기만 한 이진덕이었다. 이진덕이 영안문 혈사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을 나온 지 1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지나갔지만, 좀처럼 혈겁의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이진덕은 진곡추에게 철썩 들러불어 그가 좋아하는 술과 개고기를 대접하며 정보를 빼내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 사실 쓸 만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혹시 자신을 속이고 정보를 빼돌리는 건 아닌지 의심도 해 봤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딱히 단서라고 잡히는 것도 없었고, 중원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혈겁들과의 연관성도 찾기 어려웠다. 이진덕이 진곡추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혹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극진방(戟塵?)이 멸문당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두 사람은 수하들을 이끌고 극진방이 있는 곳을 향해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갔다. 이윽고 극진방에 도착하자, 담벼락 밖으로까지 피비린내가 물씬하게 풍겨 왔다. 장원 안으로 들어서자 처참하게 살해된 시체들이 이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무림에서 밥을 먹고 있다고는 하지만 끔찍하게 살해된 시체를 보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수하들에게 장원 내부를 뒤져 흉수가 남겼음직한 단서를 찾게 한 뒤, 두 사람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시체들을 한 구씩 세심하게 검사하기 시작했다. “사인(死因)은 전과 거의 비슷해. 시체들이 쓰러져 있는 모양으로 봤을 때, 한밤중에 기습을 당한 것 같아, 물론 이쪽에서도 어느 정도 대비를 하고는 있었던 듯 한데, 결국은 그냥 밀려버렸군. 흔적으로 봤을 때 흉수들과의 실력차가 너무 심하게 나는 데다가 숫자까지도 저쪽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아.” 시체를 엎어 놓고 상처를 이러저리 살펴보던 진곡추는 내원 쪽을 힐끗 바라봤다. 내원 역시 시체들이 흘린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흠, 내실 쪽은 제법 격렬한 저항을 한 흔적이 보이는군. 아마 그때쯤 자고 있던 인물들이 깨서 합류한 것이겠지.” 진곡추의 말에 이진덕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사인은 비슷한 것 같지만, 흉수는 완전히 다른데요. 영안문에서 혈겁을 일으킨 자들은 꽤나 고수들인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영안문이 그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기까지 말한 진곡추는 극진방 방주 조태식의 시신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조 방주 정도 되는 실력자를 없애려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텐데, 어떻게 된 것이 극진방의 방도들 외에 흉수의 시체는 단 한 구도 없다는 사실이야.” 상대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는 듯 이진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보를 빼내기 위해 진곡추에게 술과 개고기를 대접하다 보니 지금은 이렇게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형님, 아우하면서 말이다. 진곡추의 성격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것도 도움이 되었지만, 겨우 2주일 만에 형님 동생이라 부를 정도로 신뢰를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진덕의 피나는 노력의 승리라고 봐야 했다. 워낙 게으른 진곡추다 보니 몸에 이가 바글바글 끊고 있었고, 술과 개고리를 대접할 때마다 진곡추의 몸에서 옮겨 오는 이 때문에 온몸을 벅벅 끍어야 하는 끔찍함까지 웃으며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시체를 모두 다 가져갔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아마 그게 정답이겠지.” “그렇다면 흉수는 몇 명 정도가 아닌 상당한 세력의 문파일 확률이 높겠군요.” 잠시 그 동안 일어났던 혈겁을 생각해 보던 진곡추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초절정고수가 아니라면 그 정도 문파를 몰살시키려면 상당한 세력을 보유한 자들이 아니면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근방에 극진방을 칠 만한 규모의 문파들을 수배해서, 그들의 인원 이동을 알아보면 흉수를 파악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동생은 서로가 서로를 몰살시켰다고 생각하는 rps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거대 방파에서 고수들을 투입해 혈겁을 일으킨다는 가정보다는 그게 더 현실성 있는 추리같은데요?” 여기까지 말한 이진덕은 조태식의 시체에서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상흔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상처들은 요 근래에 생긴 상흔들로서, 치료가 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아마도 어디선가 싸우다가 상처를 입은 후, 근처의 실력있는 의생을 불러 치료를 받았겠죠. 그런데 상처가 다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 싸웠으니, 본 실력을 다 발휘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요?” 이진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곡추는 옆에 서 있는 거지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예?” “너는 빨리 이 인근에 있는 의생들을 수소문하여, 2주일 전쯤에 극진방에 상처를 치료해 주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는지 알아봐라.” “옛.” 거지가 달려 나가고 난 후, 진곡추는 이진덕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자네 말대로 극진방이 영안문을 쳤다고 가정하세. 그런데 왜 쳤을까? 이 두 문파는 인접해 있지 않기에 서로 싸울 이유가 거의 없어. 더군다나 한밤중에 기습해서 상대편을 몰살시킬 정도로 원수질 일은 더더욱 없었지.” “아무래도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게 최우선일 듯 합니다.” “흠, 하지만 또 다른 제3의 세력이 이 모든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으니, 거기에 따른 조사도 병행해야겠지.” “물론이죠, 형님.” 언제부터인가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드러나는 혈겁의 비밀 이소청(李燒淸)은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었다. 그의 범 같은 할아버지는 칠웅방(七雄?)의 방주로서, 칠웅방을 세운 일곱 영웅호걸들 준에서 맏형이었다. 그렇기에 이소청은 태어난 이후 줄곧 호사스러운 생활만을 영위해 왔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이렇듯 중상(重傷)을 당한 상태에서 괴한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것이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헉헉헉! 나는 이제 틀린 것 같아.” 지금껏 힘든 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당해 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문파에 찾아든 혈겁은 견디기 힘들 만큼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천하를 오시할 것만 같던 할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나머지 여섯 작은 할아버지들도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어나뒹굴었다. 경우 혈겁을 피해 탈출에 성공하긴 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꿈만 같아 이소청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무섭웠다. 꿈이라면 얼른 깨고 싶은 정도로 공포스러운 악몽이었다. 이소청이 땅바닥에 쓰러진 채 헐떡거리고 있을 때, 그를 붙잡아 일으키는 손이 있었다. 그와 함께 칠웅방을 탈충한 할아버지의 충성스러웠던 가신들 중 한 명이었다. 처음 칠웅방을 함께 탈출했던 열세 명이나 되던 무사들은 다 어디가고 이 사람 혼자만 그의 곁에 남아 있다. 그것도 왼팔이 팔목 어림에서 썩둑 잘려 나간 중상을 당한 상태로 말이다. “도련님. 힘을 내십시오. 이제 조금만 더 가시면 놈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헉헉, 민 단주. 조,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 이소청이 우는 소리를 했지만, 민 단주의 대답은 단호했다. 왼팔이 잘려나간데다가, 적지않은 내상까지 입은 상태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같이 매섭기 그지없다. “언제 놈들이 쫓아올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이번에 놈들의 이목에 포착당하면 도련님의 목숨을 보장 할 수 없습니다.” 그들 일행의 움직임이 놈들에게 포착된 것은 단 한 번이었다. 하지만 그 한번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그가 친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수하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도 함께...... 물론 수하들 중 몇 명은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둘 개개인의 실력이 무척 뛰어날 뿐 아니라, 직접 그들이 죽었는지 확인해 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수길(閔秀吉)은 차라리 자신의 부하들이 단 한 사람도 살아남아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한솥밥 먹던 처지에 너무나도 매정한 심사인 듯싶지만, 그것은 현실을 직시한 그의 바램이었다. 만약 수하들이 무사히 도망쳤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누군가가 적들에게 사로잡힌다면, 그리고 지독한 고문을 당한다면...... 결국 이소청이 갈 행선지를 실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칠웅방의 마지막 남은 핏줄은 흔적도 없이 놈들의 손에 의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막아야 했다. 아버지처럼 존경했던 칠웅방 방주의 죽음조차 외면한 채 치욕스런 도주를 감행한 것도 당신의 마지막 핏줄을 보호해 달라는 방주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민수길은 쓰러지려는 이소청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토해져 나오는 숨은 거칠기 짝이 없었고, 입에서는 단내가 풍기기 시작한 지 오래다. 그러던 그들의 앞에서 갑잡스럽게 인기척이 나타났다. 평상시 같았으면 저들이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몰랐을 그가 아니었지만, 지금 그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헉!” 다급한 숨을 삼킬 때, 상대편도 이쪽에 누군가가 숨어 있음을 감지한 모양이다. “웬 놈이냐?” 이소청은 아예 저항할 엄두도, 그렇다고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오로지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민수길만이 방어 자세를 갖췄을 뿐이다.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장검은 이소청을 끌고 오느라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어디에서 흘러버렸는지 사라져 버린 상태다. 그렇기에 그는 품속에 지니고 있던 짧은 단검을 뽑아들고 상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어둠 속에서 단검이 새파란 빛을 발하자. 상대 쪽도 다급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을 때, 깜짝 놀란 듯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엇! 미, 민 단주님이 아니십니까?”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민수길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단검이 마치 장검이라도 되는 듯 묵직하게 느껴져 들고 있기도 힘들었다. “자, 자네는?” “진천위(陳千位)입니다. 단주님.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십니까? 어찌 하여 이렇듯 큰 부상을 입으시고......” “쉿! 너무 목소리가 크네 자네는 빨리 도련님과 나를 방주께 안내해 주게. 그리고 우리들이 이곳에 왔다는 것은 철저하게 숨겨야만 할 것이야.” “어찌 되었건 서두르시죠, 치료부터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진천위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민수길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칠웅방은 공격해 왔던 자들은 공포스러웠다. “수하들을 시켜서 우리가 이쪽으로 오며 남긴 흔적들을 좀 지워 주게. 그게 우리만이 아니라 사해방(四海?)을 위하는 길이기도 할 걸세.” 민수길의 말에 진천위는 피 냄새를 맡았는지 다급히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문을 열고 황급히 들어오는 중년 사내를 사해방 방주가 반겨 맞이했다. “어서오게나.” 중년 사내는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다급한 어조로 방주에게 질문부터 던졌다. 그만큼 이 일은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1호 경계령을 내리시다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방주님.”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방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 일로 자네에게 사람을 보냈었는데, 서로 길이 어긋났었던 모양이구먼. 그건 그렇고 서서 이럴 것이 아니라 일단 자리에 앉게.” 방주는 중년 사내에게 자리를 권한 후, 나지막한 어조로 방금전에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걸 다 들은 중년 사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천하의 칠웅방이 멸문당했다니...... 더군다나 흉수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군요.” 그 말에 방주도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일세. 그래서 혹 놈들이 본방에도 밀어닥칠 우려가 있기에 1호 경계령을 발동해 놓은 것이야.” 중년 사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칠웅방을 친 흉수들이 왜 우리를 칩니까 그리고 칠웅방이 멸문당한 이유는 뭐라고 하던가요? 뭔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칠웅방 같은 큰 문파가 멸문한 것도, 흉수들이 우리 사해방을 칠지도 모른다는 것도 믿기 힘든 일이군요.” “그건 이미 알아봤다네.” “그 이유가 뭐였습니까?” “뭔가가 있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민 단주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그 너구리같은 놈이 사실대로 얘기해 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네. 그래서 놈이 데리고 온 이소청을 슬쩍 만났지.” 순간, 중년 사내의 얼굴에는 경멸의 기색이 떠올랐다. 칠웅방의 이소청이라면 조부가 일궈 논 가업을 송두리째 말아먹을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망나니였던 것이다. “그 애송이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지. 당장이라도 내쫓을 것처럼 겁을 주니 공포에 질려 줄줄 불더구먼.” 눈물을 흘리며 제발 살려 달라고 하는 이소청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자 중년 사내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요?” “작은 서책 한권과 지도 한 장일세.” 그 말에 중년 사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방주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몇 년 전, 황도(皇都)였던 개봉을 피에 잠기게 했던 정강의 변을 알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아무리 황실과 무림이 연관이 없다고 하나, 그런 대 사건을 제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요나라가 멸망했을 때, 그 영토의 대부분을 흡수한 것은 금나라 오랑캐들이었지. 오랑캐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황도인 개봉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군을 집결시켜 놓고, 무력시위까지 벌이며 은과 비단을 요구했었다고 하네.” “그건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 방주는 의아해하는 중년 사내를 다독거리며 말을 이었다. “가만 들어 보게. 다 연관이 있으니까 말이야. 황제는 오랑태의 대군이 황도 근처에 집결해 있다 보니 겁이 나서 천도를 결심했지. 물론 그걸 오랑캐들이 눈치 채면 가만히 있을 테니. 모든 작업은 비빌리에 실행되었겠고, 사람이야 나중에 일이 급박해지면 한꺼번에 도망치면 되겠지만, 금은보화나 문서, 서책 따위는 그러기가 쉽지 않을 게 아닌가?” 아직까지는 방주가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중년 사내는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물론 그렇겠지요.” “선대로부터 차곡차곡 전해져 내려온 것들이다 보니 그 양이 엄청날 것은 당연지사, 그걸 오랑캐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금씩 밖으로 옮기는 작업이다 보니,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던 모양일세. 또 운반 작업을 한 인물에게 총괄해서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 그놈이 먹고 뛰어 버릴 우려도 있을 테고, 비밀 유지라는 면도 무시하기 힘들었을 테니 말이야. 그래서 이 일에 충성심이 강한 열두 명의 관리가 투입되어, 보물을 골고루 분산시켰다고 하네. 그렇게 해 놔야 나중에 혹 무슨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그중 몇 군데는 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야.” “흠.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군요.” 중년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신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황궁의 보물을 손으로 만지기라도 한 듯 사해방 방주의 얼굴이 탐욕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열두 곳에 흩어져서 보관되던 보물을 나중에 새로운 수도로 천도하게 되면 그곳으로 다시 옮긴다. 꽤 괜찮은 작전이었지. 하지만 이때 갑작스럽 문제가 발생했다네. 바로 정강의 변 말일세. 상황제와 황제, 그리고 3천에 달하는 신하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 연경으로 압송되지 않았나? 그 와중에 열두 군데에 묻어 놓은 보물들의 행방도 묘연해졌다 이 말일세.” 중년 사내의 얼굴도 어느샌가 흥분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방자의 말을 듣다 보니 칠웅방의 혈겁이 바로 그 보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눈치 cos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이번 사건이 바로 그 보물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그곳들 중 한 곳의 지도일세.” 방주의 말애 중년 사내의 호흡이 일순 멎어 버렸다.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놀랬던 것이다. “그, 그 놈팽이 놈이 한 말이 사실일까요? 만약 거짓이라면 보물을 구경도 못 해 보고 사해방의 주춧들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본좌도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다네. 소청이 놈이 지도 얘기만 했었다면 웃기지 말라고 주둥이를 박살 내고 말았겠지.” “그렇다면 또 뭔가를......” 사해방 방주는 목이 타는지 물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후, 속삭였다. “지도와 함께 발견됐다는 서책. 그게 바로 열두 군데 중 한 곳을 책임졌던 관리가 당시의 상황을 꼼꼼히 기록해 놓은 일기라는 거야. 황제로부터 칙명을 받을 때부터 시작해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들을 기록해 놓은 거지. 그놈은 그걸 읽었던 모양이더군. 가만히 얘기를 들어 봐도 전체적으로 아귀가 딱딱 맞아 들어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허무맹랑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었네. 더군다나 그 지도와 책자를 노리고 암중의 세력이 칠웅방을 멸문시키기까지 했으니......” 중년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황궁에 보관되어있던 보물이 비록 열두 군데로 찢겨져 나눠졌다고는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자신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엄청날 것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그 비밀의 끝자락이 닿았다는 것은 어쩌면 신의 뜻일 수도 있었다. “엄청난 기회가 될 수 있겠군요.” “아니면 파멸의 열쇠가 되거나 말이지.” “방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습니까?” 사해방 방주는 대답을 보류한 채 잠시 방 안을 서성거리다 중년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의 두 눈은 이미 탐욕으로 인해 벌겋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위험하기는 해도 일단 굴러 들어온 떡인 만큼 그냥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나? 그리고 저 두 놈을 지금이라도 사해방에서 추방해 버린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이곳에 잠시라도 머물렀다는 사실을 흉수들이 나중에 알아내면 어떻게 되겠나? 비밀이 새어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본방을 가만히 두지 않을게 분명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미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 버렸어.” “그렇다면 그 지도와 책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소청 그놈이 지금 가지고 있습니까?” 그말에 사해방 방주는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본좌가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자 이소청 그놈이 벌벌 떨면서 그러더군. 칠웅방을 탈출하면서 숲 속 어딘가에 감춰뒀는데 자신은 정신이 없어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민 단주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중년 사내는 낙심한 표정이었다. 만약 그들이 지도와 책자를 지니고 있다면 지금 당장 달려가서 그 둘의 목을 베어 버리고, 꿀꺼덕해 버리면 끝인데 일이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 단주와 담판을 지어야 하겠군요. 보물을 찾으면 절반을 주고, 놈을 도와 칠웅방을 재건하는 걸 도와주겠다고 말입니다. 고지식한 민 단주는 아마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중년 사내의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방주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겨우 절반만 먹자는 말인가? 엄청난 금은보화일 텐테......” 중년 사내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음흉스럽게 말했다. “당연히 그놈들에게 보물을 나누어 줄 필요가 없죠. 단지 방주님께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민 단주가 지도와 책자를 숨겨둔 장소가 어딘지를 말하도록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와 책자가 본문의 손아귀에 들어오고 나면 그 다음은... 흐흐흐.” “옮거니! 그렇구먼. 내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방주님께서는 먼저 민 단주의 마음을 얻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 동안 저는 방도들의 입단속을 시킨 뒤, 몇 가지 시급한 일들을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급한 일이라니?” 방주의 질문에 중년 사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중년 사내의 두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머릿속을 정리라도 한 듯 생각에 잠겨 있던 중년 사내는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칠웅방이 무너졌을 정도라면, 그 지도를 노리는 세력의 규모가 상상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만큼 이소청과 민 단주가 본 방으로 도망쳐 오다 남긴 흔적을 철저히 지워야죠. 또 몇몇 부하들을 시켜 아예 다른 쪽으로 흔적을 남겨 놓아 본방에게 의심의 눈초리가 오지 않도록 할 생각입니다.” 중년 사내의 말에 방주는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렇구먼.” “제가 그 부분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 염려하지 마시고, 방주님께서는 그 두 놈을 요리하는데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두 사람은 말을 하다 서로 마주 보더니 갑자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엄청난 보물이 눈앞에 보이기라도 하는 듯. 마교 호법원의 비애 은편패왕(銀片覇王) 여문기(呂文起). 그는 마교 서열 17위에 올라 있는 가공할 고수다. 더군다나 우호법이라는 마교에서도 상당히 높은 지위인 그가 요즘 들어 팔자에도 없는 속칭 ‘개고생’ 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뇌전이 번뜩이는 하늘에 흡사 구멍이라도 뚫린 듯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굵은 나뭇가지에 몸을 기댄 채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비록 나뭇잎이 우거진 나무라고는 하지만 빗물은 거침없이 그의 몸에 두른 기름먹인 얇은 양피지로 만든 우의(雨衣)를 따라 흘러내렸다. 깊게 눌러쓴 삿갓 위로 빗물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물론, 이 정도 빗물쯤이야 내공으로 간단히 튕겨 낼 수 있겠지만, 잠을 자면서도 내공을 운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우의를 입고 있는 것이다. 곧 여명이 밝아올 시간이건만, 구름이 워낙 두텁게 끼어 있어 아직까지도 주위는 칠흑과 같이 어두웠다. “우호법님.” 낮은 목소리였지만, 여문기의 단잠을 깨우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눈을 뜨기 전에 사방에 기파(氣波)를 쏘아, 주변의 기척을 점검했다. 주변에 대한 점검을 끝낸 후에야-물론거기에 소모된 시간은 거의 찰나라고 할 만큼 짧았다-방금 자신의 잠을 깨운 부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특이 사항이라도 있나?”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여문기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휴대하기 편한 것은 좋았지만, 우의를 너무 얇게 만들어 놨기에 조금만 방심해도 찢어지곤 했기 때문에 주의를 요했던 것이다. “경비는?” 그가 데리고 있는 수하들은 2교대로 한 무리는 자고, 또 한 무리는 지금 경계를 서고 있는 중이다. “예, 반 시진 전에 교대했습니다. 우호법님.” 여문기는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빗줄기가 요란스럽게 쏟아져 내리며 인기척을 감지하기 어렵기에 그만큼 경호가 어려워진다. 물론 상대방도 자신들처럼 마기를 풀풀 날린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정파 나부랭이나 살수들이 마기를 풍길 리 없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위치는 마기 때문에 상대에게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기 때문에 더더욱 힘든 경호가 될 수밖에 없다. 차라리 근접해서 경호하는 것이라면 쉽겠지만. 이런 식으로 먼 거리에서 경호를 하다 보니 아무리 무공이 높은 여문기라 해도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이때 누군가가 천천히 이쪽으로 접근해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커다란 빗소리에 섞여 철벅철벅하는 발자국 소리가 낮게 들려왔던 것이다. 경비를 서고 있는 부하들도 그걸 느꼈는지 순식간에 장내에는 긴장감이 고조됐다. 잠시 후,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여문기는 난처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접근해 오는 이가 바로 현천검제였기 때문이다. 아마 현천검제는 자신의 접근을 눈치 챌 수 있도록 일부러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궃은 날씨에 수고가 많구먼.” 돌아가라고 부탁한 것이 며칠 전인데, 여문기와 그의 수하들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이렇듯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아주 멀찌감치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어 소연은 이들의 존재를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화경급 고수인 현천검제의 이목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아가씨를 경호하는 일이 저희들의 임무인데, 수고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새벽에 어쩐 일이십니까? 어르신.” “돌아가라고 했는데도 꼭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해야 하겠는가? 자네도 정말 답답한 사람이구먼.” 그 말에 여문기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저희들의 행동이 눈에 거슬리시더라도 그냥 눈감아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허허, 나는 교주의 사제일세. 그리고 소연이는 교주의 딸이고, 그런 내가 소연이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그러니 호위는 필요 없다고 한 건데, 설마 내가 그렇게 못미더운가?” 화경급 고수의 실력이 못미더울 리 없다. 여문기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절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르신. 저희들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지라. 제발 돌아가라는 말씀만은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 “사정이라고? 무슨 사정 말인가?” 하지만 여문기는 현천검제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때, 여문기의 수하 중 하나가 현천검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속하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윗사람들 간의 대화에 이런 식으로 끼어드는 것은 아주 실례되는 행동이다. 특히나 마교와 같이 상명하복이 철저한 곳이라면 더둑 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대화가 진행된다면 자신의 상관만 애매한 처지에 놓이게 되기 때문에 그는 나중에 여문기에게 묵사발이 날 각오를 하고 앞으로 나선 것이다. 말해 보라는 듯이 현천검제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땅바닥에 부복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발 및은 물이 질척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속하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가씨를 양양성까지 안전하게 모시라는 대호법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현천검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물론 누군가의 명령을 받았으니 자네들이 여기에 있는 것이겠지.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우호법이 말한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는 걸세. 말하기 곤란한 뭔가가 있는 것인가?” 여문기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땅바닥에 부복해 있던 부하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호법께서는 이번 호위를 완수하는 것이 호법원을 중흥시키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천검제도 한 문파를 다스려 봤던 사람이다. 그리고 눈치도 빠르다. 그는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어찌된 일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조직이란 어떤 임무를 맡고 있느냐에 따라 그 위상과 세(勢)가 바뀌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의 호법원은 거의 존재 가치마저 희미한 상황이다. 막강한 고수들이 포진해 있는 호법원이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변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묵향이다.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된 묵향으로 인해 호법원은 기나긴 암흑 속으로 잠겨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호위할 당사자가 없어졌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문제는 묵향이 돌아오고 나서도 그게 계속되었다는 거다. 자신보다 약한 놈들이 경호를 하겠다고 나서니 묵향의 성격상 용납할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거치적거리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는 묵향이었기에 호법원은 그저 밥만 축내며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호법원에게 소연의 존재야말로 한 줄기 서광이나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들로서는 현천검제가 아무리 호위를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부탁을 해도 받아들일 형평이 아니었다. 만약 호위를 포기하고 돌아간다면 호법원은 정말로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까지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허, 결국 괴물 같은 사형이 문제였군.” 잠시 안쓰러운 눈빛으로 여문기를 바라보던 현천검제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선택의 여지도 없는 자네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었군. 본의 아니게 자네에게 심적 부담을 주어 미안하게 되었네.” 이렇게 해서라도 세력을 유지해야 하는 자괴감에 여문기는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어르신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제 호위를 하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네. 그러니 자네들 편한 대로 하게. 다 이해했으니까 말이야. 그럼 수고들 하게.” 슬쩍 손을 흔들며 뒤돌아서는 현천검제를 향해 여문기가 급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 며칠 전 장인걸의 수하와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장인걸의 수하라고?” “예,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만으로 봤을 때, 결코 저의 밑이 아닌 듯했습니다. 아마 천마혈검대 소속의 어떤 녀석이었겠지요.” “그런데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뭔가?” “그놈은 꽤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서 화살을 몇 대 날리고 도망쳤습니다. 수하 셋을 보내 놈을 추격했지만 도중에 놓치고 말았죠. 혹, 놈들이 어르신이나 아가씨께도 그런 식의 공격을 가할지 모릅니다.” “알려 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그런 공격에 당할 내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사실 현천검제 정도 되는 고수를 그런 얄팍한 기습으로 어떻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여문기 정도의 고수에게도 그딴 공격은 먹혀들지 않는데. 어찌 화경급 고수인 현천검제에게 타격을 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소연의 옆에는 또 한 명의 화경급 고수가 동행하 고 있지 않은가. 장인걸이 천마혈검대 전체를 투입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소연에게 위해를 가할 만한 상황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다. 그래도 여문기가 얘기를 꺼낸 것은 혹시나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현천검제가 약간의 경각심만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여문기는 만족이었다. 이진덕의 똥배짱 시체들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던 진곡추는 고개를 갸웃하다 이진덕을 바라보면 중얼거렸다. “상당한 실력자들이야. 안그런가?” “제 실력을 다 드러내 흔적이 남은게 아니므로 장담하기는 힘들지만, 제가 보기에는 거의 신검합일급에 다다른 고수들처럼 보이는군요.” 진곡추는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보기에 흉수는 몇 명 정도겠나?” “최소한 20명은 넘을 겁니다. 물론 그보다 더 적었는지도 모르지만 칠웅방 같은 대문파를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고 멸문시키려면 그 정도 숫자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미리 도망칠 만 한 길목을 다 틀어막아 완벽하게 포위망을 형성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흠. 그렇다면 역시 거대문파가 개입해 있다는 소리가 되겠군.” “그런데 그 정도로 강대한 문파가 왜 혈겁을 일으켰을까요? 저로서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는 게 없는데, 형님은 혹시 아시는게 없습니까? 칠웅방이 어느 거대문파하고 원수를 졌다든지 하는 소문 말입니다. 요즘 저희 무영문에서는 무림쪽에 투입할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보니......” 진곡추는 몇 가닥 남지 않은 수염을 배배 꼬며 생각에 잠겼다. 수염을 꼬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때 하는 진곡추의 독특한 버릇이었다. “다른 문파와 뭔가 문제가 있어서 이런 혈겁이 벌어졌다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지. 보통 이런 일이 생기면 일부러 몇 명 살려줘서 자신들이 얼마나 강한지 사방에 소문이 퍼지도록 유도하잖아? 그런데 이건 마치 비밀이 새 나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완전히 몰살시켰어. 그 이유가 뭘까?” 맞는 말이었다. 문파간의 다툼은 어지간해서는 몰살까지 가지 않는다. 만약 한 문파를 멸망시킨다면 무림에 공표를 해서 우리의 힘이 이 정도라고 과시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때 무공을 모르는 노약자까지 몰살을 시킨다면 너무 잔인하다는 강호의 비관을 들을 게 분명했다. 진곡추는 시체들의 상처를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어쩌면 오랑캐들의 개가 되어 있는 그 마교놈들이 저지른 일이 아닐까? 자세히 보면 여지저기에 약간씩 드러나 있는 흔적들이 아무래도 마공을 익힌 놈들의 소행인 것 같거든.” “그건 아닐 겁니다. 장인걸 패거리가 요 근래 여기저기에서 혈겁을 일으킨 이유는 정파와 마교 간의 이간질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놈은 무림맹과 마교가 협정을 맺었다는 것을 예상도 못했던 거죠. 그렇기에 장인걸 패거리가 혈겁을 일으킨 곳에는 마공의 흔적들이 확실하게 남아 있죠. 사실 그놈들도 정통 마공을 수련했으니, 흉내 내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으니 말입니다.” “......” 진곡추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말을 해 보라는 듯 이진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마공의 흔적들은 너무 작위적입니다. 마공을 익히지 않은 놈들이 자신의 소행을 마교나 장인걸 패거리에게 떠 넘기기 위해 어설프게 마공을 사용한 것 같다는 거죠.” “흠.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이렇게 그 둘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허겁지겁 거지 몇 명이 달려왔다. “타주님! 있습니다. 있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흉수로 짐작되는 수상한 마교 고수들이 이 근처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보고에 진곡추의 눈은 매섭게 빛났다. “흉수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방금 천영분타로부터 들어온 전갈인데, 이쪽으로 이동 중인 마교 고수 열한 명을 확인했답니다.” “열한 명이라고?” 보고를 하는 거지의 얼굴에는 어쩌면 이 지긋지긋한 수색 작업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2주일 동안 단서를 찾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시체들 속에서 살아야 했으니 천영분타에서 들어온 전갈이 반가울 만도 했다. “예. 이틀쯤 전에 이 근처를 통과했다고 하는데요. 혹시 그들이 이 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요?” 진곡추는 이진덕을 바라보며 불쑥 물었다. “흠. 자네 쪽에서 들어온 정보는 없나?” “글쎄요. 저는 형님하고 계속 같이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한번 총타에 알아보기는 하겠지만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릅니다. 제 임무는 이 지역의 정보를 취합하여 위쪽에 보내는 것이다 보니......” “그렇다면 그쪽으로 직접 가 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군.” 어쩌면 흉수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진곡추는 보고를 올린 거지를 향해 다그쳤다. “놈들이 발견된 위치가 어디라고 하더냐?” 거지는 재빨리 천영분타에서 받은 전서를 보며 마교 고수가 발견된 장소를 진곡추에게 보고했다. 그러면서 급히 덧붙여 말했다. “관도(官途)에서 그리 많이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고 하니 서두른다면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진곡추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고? 허, 참나. 그놈들 마교도들 맞어? 아니면 마교도로 위장하고 있는 다른 놈들이야?” 그 말에 이진덕도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놈들이 진짜 마교도라면 따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죠. 마교도들은 총단을 나서는 순간, 그때부터 전력 질주를 통해 최단 시간에 목적지로 이동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데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니 뭔가 수상한 느낌이 드는데요.”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여기서 고민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일단 우리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빠르겠지. 자. 가세.” 여문기가 거느린 수하 열 명은 한 번씩 저 멀리 관도 쪽을 살펴보며 경공을 전개하고 있었다. 경공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인들이 달려가는 것보다 조금 빠른 정도의 속도다. 이렇게 여문기와 그 수하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관도 저쪽에서 말을 타고 이동 중인 소연 일행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에 의해 죽다 살아난 소연을 위해 천천히 움직이다 보니 그들의 이동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우호법님. 이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는 집단이 있습니다.” “아직 놈들의 의도를 모르는 이상 일단 무시하고 계속 이동하라.” 우연히 자신들의 주위를 통과해서 지나가는 무림인들일 수도 있기에 내린 명령이었따. 하지만 상대편은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와 여문기 일행과 맞닥뜨렸다. ‘이런 떠그랄! 진짜 마교도다.’ 온몸에서 물씬 풍겨 나오는 패도적인 기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지금껏 업무의 특성상 몇몇 마교의 고수들을 관찰해 본 적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만큼 자신을 압도하는 기운을 풍긴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여기 있는 열한 명 모두가 다. “네놈들은 뭐냐?” 무시무시한 눈빛을 뿜어내며 마교 고수 중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진곡추는 그 질문에 감히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본능적인 공포감에 질려 혓바닥까지 딱딱하게 굳어 버렸던 것이다. 진곡추처럼 노회한 인물을 이토록 움츠러들게 만들 만큼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마교 고수들은 엄청난 마물들이었다. 이때 진곡추 옆에 서 있던 이진덕이 깊게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그가 진곡추보다 무공이 앞섰기에, 상대의 마기에 조금은 저항할 능력이 되었던 모양이다. “저, 한 가지 말씀을 여쭐 것이 있어서 귀하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뭐냐?” “이틀 전쯤, 이 근처에 있는 칠웅방에서 혈겁이 일어났습니다. 혹시 그 일에 대해 아시는 것이 없는가 하고......” 상대의 입술 끝이 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비웃음이었다. “칠웅방? 그게 어떤 문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문파를 치기 위해 움직이기에는 우리들의 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냐?” 그 말은 사실이었다. 소연을 호위하기 위해 남은 호법원의 고수들은 모두가 다 극마급에 근접하는 거마(巨魔)들이었다. 칠웅방따위는 이들 중 한두 명만 나서도 단번에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만들어 버릴 수가 있다. “그건 충분히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쪽도 혈겁에 대해 조사하던 것이 있기에 귀하들을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귀하들의 정확한 신분을 밝혀 주시겠습니까?” 그냥 보내 주지 않겠다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사실 저들 중 두어 명이 손을 쓰기만 해도 여기 모여 있는 개방과 무영문의 제자들은 일순간에 몰살시켜 버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상대는 콧방귀를 뀌며 비릿한 어조로 대꾸했다. “우리들이 천마신교에서 나왔음을 네놈은 모르겠느냐?” “물론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장인걸의 패거리가 마교와 정파와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못된 짓을 벌이고 다닌다는 것은 귀하도 아실 것이 아닙니까? 그런 만큼 정확한 소속을 밝혀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 쪽에서도 귀하들에 대한 천마신교에 알아보기가 수월할 테니 말입니다.” 지금껏 이진덕을 상대하고 있던 마인이 뒤쪽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이때 이진덕은 볼 수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또 다른 마인이 살짝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그걸 보면 아마도 그자가 이들의 지휘자인 모양이다. “꼭 그런 이유라면 우리들의 신분을 밝힐 필요가 없지 않나? 본교에 알아보거라. 이쪽에 이동 중인 귀교의 고수 열한 명을 발견했는데, 과연 귀교의 인물들이 맞느냐고 말이다. 이제 됐느냐?” 호법원 소속임을 밝히는 순간, 자신들이 누군가를 호위하여 이동 중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렇기에 여문기는 자신들의 소속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외부에 활동 중인 귀교의 고수들이 한두 명도 아니니, 그런 식으로 알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진덕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언제 마교에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려면 확인될 때까지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들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마교 소속이라는 말 한마디만 듣고 그냥 물러서자니 왠지 억울했던 것이다. 그 말에 마교 고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답답하기는 그 쪽도 마찬가지였다. 임무를 수행하려니 신분을 밝히기도 힘들었지만 자칫 자신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혈겁의 흉수로 오해를 살 상황이지 않은가.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교 고수의 얼굴에 점차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엉뚱한 누명을 쓰는 것도 싫었지만, 실력도 안 되는 정파 나부랭이에게 핍박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예전 같으면 감히 얼굴도 쳐다보지 못할 허접 쓰레기들이 말이다. “더 이상 묻지마라. 만약 계속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그건 네놈들에게 뭔가 다른 흑심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와 이진덕과 진곡추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진덕과 마교 고수와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진곡추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것을 느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엄청난 살기에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하지만 애써 혀끝을 깨물어 정신을 차린 진곡추는 타구봉을 움켜쥐고 이진덕의 옆에 섰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형, 동생하며 지낸 이진덕이 아닌가. 어차피 죽을 거라면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화끈하게 싸우다 죽는게 나았다. 무영문과 개방의 고수들은 그 모습에 긴장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뒤에 늘어서서 전투태세를 갖췄다. 장내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과 살기가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마교의 고수들은 그런 진곡추의 행동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여문기가 가만히 있자 그저 살기만 짙게 뿌릴 뿐, 손을 쓰지는 않았다. 그때 관도 쪽에서 누군가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엄청난 경공에 진곡추는 내심 간절하게 소망했다. 지나가던 정파의 은거고수나 기인이기를, 그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달려오는 자에게서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었다. 마교의 책임자로 보이는 자가 새로 나타난 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들려오는 말에 진곡추의 심장이 멎어 버리는 줄만 알았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무슨 일인가? 이쪽에서 살기가 느껴지던데......” 현천검제는 말을 하며 무심결에 상대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설마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랴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삿갓 아래로 살짝 드러난 얼굴만으로 자신을 알아본 놀라운 눈썰미를 지닌 인물이 이곳에 끼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귀, 귀하는......” 이때 진곡추의 귓가에 모기 소리같이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현천검제가 다급히 보낸 어기전성이었다. <쉿, 더 이상 말을 하지 말길 바라오. 내게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제발......> 침중한 안색의 현천검제는 말없이 여문기를 바라보았다. 여문기로부터 전음으로 대충의 사정을 들은 현천검제는 진곡추를 보며 말했다. “이들은 이 근처에서 발생한 혈겁과는 관계가 없소.” 그 순간 진곡추의 귓속으로는 놀랍게도 또 다른 목소리가 함께 들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귀방에 찾아가 내 자초지종을 설명하리다.> 여태껏 뒤에 서 있던 이진덕보다 조금 뒤에 서서 아무 말 없었던 진곡추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쪽에서 오해를 한 듯 싶습니다.‘ 이진덕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진곡추는 재빨리 그를 가로 막으며 말했다. “귀하들에 대한 혐의는 다 벗겨졌습니다. 그러니 이제 가 보셔도 됩니다.” 현천검제는 다급히 자리를 벗어났고, 여문기도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더 이상 쓸데없는 충돌은 원치 않는 듯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출발하라!” 여문기의 지시에 마교 고수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 남은 개방도들과 무영문도들은 그들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모두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긴장이 풀린 탓에 서 있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휴우, 죽는 줄 알았네.” 열한 명의 마인들이 뿜어 대던 기세가 얼마나 공포스러웠던지, 모두들 안색이 핼쑥하게 질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호랑이 간이라도 삶아먹은 듯 빡세게 나갔던 이진덕의 행동 또한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품속을 뒤져 작은 술병을 하나 꺼냈다.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진곡추는 피식 웃었다. “자네도 내심 겁이 나기는 났었던 모양이군. 그런데 자네 배포 한번 대단허이. 난 그놈들의 눈을 마주 보는 것조차 겁나던데.” 이진덕은 기갈이라도 들린 듯 몇 모금 벌컥벌컥 마신 다음, 술병을 진곡추에게 건네며 말했다. “살기를 흉흉하게 뿌려 대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제 느낌으로는 저들이 싸움을 회피하는 듯해서요.” 이진덕의 엉뚱한 대꾸에 진곡추는 욕설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그놈의 느낌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건가?” “물론이죠. 덕분에 엄청난 정보를 얻었지 않습니까?” 물론 생각 밖으로 대단한 정보를 얻기는 얻었다. 하지만 아무리 소중한 정보라도 죽으면 모든 게 끝이 아닌가? “쓰벌! 앞으로 그딴 짓 하고 싶을 때는 너 혼자서해. 엉뚱한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저승 구경시킬 생각하지 말고 말이야.” 마교 고수들이 칠웅방의 혈겁을 일으킨 자들이 아님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들은 지금 살아 있지 못했을 테니까. 마음을 진정시키려 술을 마시는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이미 칠웅방의 혈겁 따위는 잊혀진 지 오래였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죽은 줄 알았던 현천검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현천검제를 향해 마교 고수들의 입에서 나온 ‘어르신’ 이라는 호칭. 왜 저런 마물들이 현천검제를 ‘어르신’ 이라 칭하며 공경하는 것일까? “형님. 아까 그놈들 한눈에 척 봐도 마교의 최정예들 같았죠?” “그래. 그 정도로 짙은 마기를 뿜어내는 놈들은 내 머리에 털나고 처음 봤다.” 이진덕은 은근한 표정으로 진곡추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형님. 아까 제 옆에 서서 같이 싸우시려는 형님의 의리에 정말 감격했습니다. 제가 형님을 만난 건 천생의 복인 듯 합니다.” 진곡추는 멋쩍은 듯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우린 개고리를 함께 나눠 먹은 사이가 아닌가. 뭐 그런 걸 가지고.” “참, 형님께서는 아까 그 고수를 알아보신 것 같던데, 누굽니까?” “......” 너스레를 떨어대던 진곡추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증거였다. “같이 개고기도 나눠 먹은 사인데, 이러깁니까? 대체 누굽니까? 그가 누군데 도중에 나서서 중재역을 자청하신 겁니까?” 진곡추는 귀를 손가락으로 후비며 별거 아니라는 듯 짐짓 능청을 떨었다. “예전에 좀 알던 사인데 뭐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고 하더군. 시간이 되면 같이 개고기나 뜯었으면 좋겠지만 좀 바빠서 나중에 보자고 하던데.” 이진덕의 안색이 딱딱하게 변했다. 마교도들이 ‘어르신’ 이라고 깍듯이 존경했던 정체불명의 고수. 전혀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보면 아마 마기를 숨길 수 있는 극마급을 상회하는 고수임에 분명했다. 아무리 삿갓 아래로 슬쩍 봤을 뿐이지만, 그가 철영 부교주가 아니라는 것은 이진덕도 눈치 챈 상태다. ‘새롭게 등장한 극마급 고수인가? 아니, 그럴 리 없어. 극마급이면 마교에서는 무조건 부교주로 임명 돼. 그렇다면 그들이 부교주님이라고 불렀어야지. 어르신이라고 부를 리 없잖아.’ 물론 그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변장이 너무 어수룩했다. 인피면구라든지, 아니면 다른 완벽한 변장 수단도 잔뜩 있는데 겨우 삿갓 하나 뒤집어쓰고 자신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진곡추 정도가 저런 고수를 예전부터 알고 있다는 말은 곧 잘 알려진 인물이라는 말이다. 즉, 마교 쪽의 숨은 고수는 아니다. 그렇다면 정파 쪽의 인물일지도. 순간, 이진덕의 눈동자는 진곡추를 향해 매섭게 빛났다. 어쩌면 무림을 뒤흔들 엄청난 정보가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팍 온 것이다. 어르신이라는 말의 비밀은 진곡추가 쥐고 있다. 당연히 최대한 구워삶아 정보를 빼내야 한다. “어허, 형님. 섭섭합니다. 좀 같이 알죠. 그는 대체 누구였습니까?” “자네는 몰라도 돼.” 매정하게 대답한 진곡추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참, 거기 가기로 해 놓고 내 정신 좀 보게.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네. 동생. 내가 지금 급한 볼일이 있거든, 나중에 다시 보세.” “형님. 좀 가르쳐 주세요.” 하지만 이진덕의 말에 채 끝나기도 전에 진곡추는 어딘가를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이진덕은 입술을 꽉 깨물고 진곡추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두 사람이 떠나고 난 그 자리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무영문도들과 개방도들이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현천검제의 생존과 개방 진곡추는 자신의 본 것을 즉시 상부에 알렸고, 개방의 수뇌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다급히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그만큼 마교의 무리들과 함께 하는 현천검제가 가져온 파장은 컸던 것이다. “이, 이게 사실입니까?” 취선개(醉線?) 장로의 경악성에, 방주는 옷섶 속으로 손을 넣어 맨살을 득득 긁으며 대꾸했다. “진 타주는 확실한 인물이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미확인 정보를 보고했을 리 없소.” “이게 말이 됩니까? 화산파가 누구에게 멸망당했습니까? 바로 마교놈들의 소행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그가 마교도들과 한 패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틀림없이 진 타주가 적들의 농간에 놀아났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겁니다.” 취선개 장로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비육걸개 장로도 거들었다. “저도 취선개 장로의 말에 동감입니다. 혹시 인피면구를 뒤집어 쓴 가짜에게 속은 게 아닐까요?” 방주는 이런 대답까지 해 줘야 하는 게 별로 내키지 않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보고는 정확하다고 노부는 생각하네. 진 타주는 분명히 현천검제가 자신에게 어기전성을 통해 나중에 본방을 찾아와 해명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했네. 어기전성은 화경급 고수만이 쓸 수 있는 비기야.” 방주를 바라보는 취선개 장로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현천검제는 명예롭게 은퇴를 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방주가 진곡추의 보고를 한 점 의심 없이 신뢰한다고 한다면 그 근거가 있을 것이다. “현천검제가 진짜가 맞다고 해도, 그가 마교도와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방주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았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공수개 장로가 노부만 알고 있으라며 은밀히 알려 준 게 있네.” 이렇게 서두를 뗀 방주는 무림맹에 나가 있는 공수개 장로가 자신에게 알려 줬던 화산파에 얽힌 비사에 대해 조용히 설명했다. “현천검제가 마교의 밀정이었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옥진호 장로가 직접 그를 만나 추궁했고, 며칠 후 그는 은퇴라는 형식을 빌려 화산파를 떠났다고 들었네.”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비육걸개 장로가 허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은퇴한 이유가 그거였다니, 참내......” “그렇다면 무림맹은 그가 마교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겠군요.” “그렇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답답한 듯 취선개 장로는 허리춤에 메어 둔 호로병을 뽑아 들고 벌컥벌컥 몇 모금 마신 후 내뱉듯 말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의 어조에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건 절대로 아닐 겁니다.” “응? 그건 무슨 말인가?” “방주님께서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방주님께서 마교에서 심어놓은 밀정이라고 가정하고, 그 사실을 우리들이 알아챘다고 합시다. 그러면 저희들이 방주님을 그냥 놔 드릴 것 같습니까?” “......” 방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비밀을 그토록 많이 알고 있는 첩자는 절대로 살려서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군다나 현천검제는 9파1방의 중추인 화산파의 장문인이었다. 옆에 앉은 비육걸개 장로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현천검제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도망친 건가?” 그 말에 몇몇 장로가 은연중에 고개를 끄덕여 찬성을 표했다. 사실 화경급 고수가 마음먹고 도망친다면 그걸 어떻게 잡겠는가? “노부의 생각도 그러네.” 방주도 그 의견에 찬성했지만, 취선개 장로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더 말이 안됩니다. 혹 현천검제가 죽었다면 몰라도, 그가 무사히 도망쳤는데 마교에서 화산파를 공격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안그렇습니까? 더군다나 그런 중차대한 사안을 밝히지 않고 묻어 두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 방주는 그제야 자신이 뭘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단전이 파괴되어 병신이 되어 있다면 혹 모르겠지만. 현천검제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과 화산파가 멸문당했다는 사실이 공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현천검제가 멀쩡하게 도망쳤는데, 마교가 화산파를 멸문시키는 초강수를 썼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 수뇌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 대외적으로는 은퇴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현천검제가 밀정이 맞다면 당연히 무림에 공표를 해서 또 다른 피해를 막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다 보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왜곡시킨 당사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공수개 장로가 누군가가 던져 준 엉터리 정보에 놀아났다고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공수개 장로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취선개 장로의 생각은 뭔가? 공수개 장로가 누군가의 역정보에 멍청하게 놀아났다는 건가?” “그게 아닐 공산이 큽니다.” 방주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살짝 살기를 머금었다. “그렇게 결론지은 이유는?” “방금 이 사실을 들은 제가 생각해도 허점투성이인 정보입니다. 그런데 그걸 공수개 장로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마교의 첩자인 현천검제가 은퇴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는 것은 곧 그를 없앴다는 말이나 같은 거니까요.” “그렇겠지. 그렇다면 그가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말인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만약 제가 그런 정보를 획득했다면, 방주님만 알고 계시라면서 살짝 알려 드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이런 부분에서 이빨이 안 맞으니 철저히 조사해 보고 결과를 알려 달라고 협조를 구했겠지요.” “흠. 그렇구먼. 그래......” 취선개 장로는 방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TEk. “우선 이 사실에 대해 공수개 장로와 얘기를 나눠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이게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면 공수개 장로를 해임하고, 다른 사람을 무림맹에 파견해야 할 겁니다. 그를 무림맹에 파견한 것은 본방의 이익을 대변하라는 것이었지. 무림맹의 개가 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잠시 말이 없던 방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침통한 어조로 대답했다. “자네 말이 백번 옳으이.” 현천검제의 등장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던 무림의 또다른 파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는 개방에서부터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개방 방주는 공수개 장로에게 연락을 넣어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통고했다. 직접 무림맹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고 판단한 그는, 개방 총타와 무림맹의 중간 지점쯤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공수개 장로는 무림맹에서 다른 문파의 인물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비교적 말쑥한 차림이었다. 사실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든지. 아니면 몸에서 이나 벼룩이 버글거린다면 다른 무림맹 인사들과 가깝게 지낼 수가 없을게 아닌가. 공수개 장로가 네 명의 호위를 거느리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방주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방주는 비육걸개 장로와 함께 있었는데, 그 둘은 황구 한 마리를 불에 구우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따. 먹성이 좋은 비육걸개가 끼어 있어서 그런지 술병이 아니라 커다란 술독이 옆에 놓여 있었다. “어서 오게. 자. 뭐 하는겐가? 이리 와서 앉게.” 방주는 소탈한 어조로 공수개 장로에게 자리를 권했다. 개고기와 술을 나누며, 가벼운 대화로 시작했기에 처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수개 장로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그 사건을 책임졌던 것은 옥진호 장로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들었던 내용 그대로 방주님께 전해 드렸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 한 가지만 묻겠네. 현천검제는 화산파를 떠났나? 아니면 거기에서 뼈를 묻었나.” 순간 그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방주는 굳은 표정으로 공수개 장로의 대답을 기다렸고, 비육걸개 장로는 투실투실한 살집에 가린 조그마한 눈으로 연신 공수개 장로를 힐끔거렸다. 긴장한 공수개 장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려 등을 축축이 적시는 것을 느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면 방주는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잘못을 옥진호 장로에게 뒤집어 씌웠다. 그라면 이미 죽어 버렸기에 절대 자신에게 안 좋은 증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옥진호 장로는 그가 화산파를 떠낫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옥진호 장로의 표정이나 어감으로 봤을 때, 저는 그가 그곳을 떠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은밀히 그의 행방을 수소문해 봤었습니다만, 어디서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화산에 뼈를 붇은 게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때 자네가 받은 느낌을 그대로 나에게 전해 줬으면 되었을 텐데. 왜 그 부분은 숨겼었나?” “저로서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부분이었기에...... 나중에 확실한 증거가 발견되면 보고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 후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고, 나중에는 화산파까지 멸문해 버려 그 일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방주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풀렸다. 일단 공수개 장로에게는 혐의점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좋아. 자네가 진실을 말했다고 믿겠네. 하지만 차후에도 이런 일이 다시 한 번 더 벌어진다면, 이번 일까지 합해서 크게 문책당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방주님.” “사실, 노부도 현첨검제가 화산에서 뼈를 묻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네. 그 때문에 화가 난 마교가 화산파를 멸문 시켰다고 말이야.” 방주는 잠시 공수개 장로를 지그시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살아 있더군.” “예? 살아 있다구요? 어디에 말입니까?” “지금 양양성으로 가고 있다네.” “잘되었군요.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눈다면 화산파 멸문의 비밀이 풀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씁쓸한 표정으로 방주는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아마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마교도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말일세.” 그 말에 공수개 장로는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방주가 왜 자신을 이렇게까지 닦달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무림맹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을 정도의 엄청난 얘기였던 것이다. 방에 멍하니 앉아 있던 수라도제는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휴우~. 나 혼자 고민해서는 아무리 해도 끝이 나지 않는군.” 너무나도 깊게 사색에 잠겨 있던 그였기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정신이 나갔다는 억측까지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가 마치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는 침상 옆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애도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갑작스럽게 수라도제가 방문을 열고 나오자, 그의 방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두 명의 무사들은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수라도제에게 인사를 했음에도 수라도제는 그에 대한 화답도 안하고 어딘가로 바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경비 무사들은 급히 수라도제를 뒤쫓았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하급 무사 주제에 하늘과도 같은 태상가주께 그런 질문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라도제는 날랜 걸음으로 실내를 빠져나온 후, 자신을 뒤따르던 경비 무사를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가주에게 나를 찾을 필요 없다고 전하거라.” “예?” 그 명령을 끝으로 수라도제는 전속력으로 경공술을 펼쳐 그들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수라도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경비 무사들 중 한 명이 이윽고 정신을 차린 듯 동료의 옆구리를 톡톡 쳤다. “이봐. 방금 우리가 본 분이 태상가주님 맞지?” “으응? 그나저나 태상가주님께서 갑자기 어디로 가신거지?” 그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경비 무사는 다급히 안쪽을 향해 달려 가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가주님께 보고를 드려야 해.” 수라도제가 칩거해 있던 방을 경호하던 경비 무사의 보고는 곧바로 몇 단계를 거쳐 서문길에게 보고 되었다. 보고를 받은 서문길은 총관이 한 보고를 믿기 힘들다는 듯 급히 되물었다. “아버님께서 어딘가로 떠나셨다고?” “옛, 가주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애도(愛刀)를 들고 나가셨답니다.” 수라도제가 오랜 칩거를 깨고 방에서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올리는 총관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건 보고를 받은 서문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 말이 없던 서문길은 뭔가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급히 물었다. “그때, 아버님의 표정이 어떻다고 하던가?” 무장을 하고 나갔다고 하니, 혹시라도 묵향에 다시 한 번 대결을 청하러 가신 게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에 물은 것이다. 그 빌어먹을 마교 교주 놈과의 기싸움 이후, 혼이 빠진 듯 멍하니 방안에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서문길은 마치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언제 그가 아버지의 이런 무력한 모습을 상상이나 해 본 적이 있었겠는가. 격렬한 비무를 한것도 아니건만 묵향이 다녀가고 난 뒤 확연히 변해버린 수라도제의 모습에 서문길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런 수라도제가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니 기쁨도 기쁨이지만 걱정이 앞서는 것도 당연했다. “무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평상시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합니다.” “혹시 모르니 마교도들이 주둔하고 있는 장원 쪽으로 사람들을 보내 철저히 감사하도록 하시오.” “옛! 벌써 조치해 두었습니다.” 안 그래도 총관은 경비 무사들의 보고를 받자마자 첩자들을 대거 마교 쪽으로 보냈다. 서문길은 총관의 신속한 대처가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장원에 기거하고 있는 고수들은 전원 비상 대기하도록 준비하시오. 아버님의 행방이 밝혀지는 대로 출동할 수 있도록 말이오.” “옛. 그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수라도제가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문세가 전체가 들썩였다. 수라도제는 사실상 서문세가의 정신적이 지주였다. 더군다나 지금은 양양성에 모인 정파무림을 이끌고 있는 중심인물이 아닌가. 언제 금나라와 치열한 전투가 전개될지 모르는 만큼 그의 존재 유무는 아주 중요했다. 총관이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서문길은 초조한 듯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의 두 손은 불안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굳게 쥐어져 있었다. “제발 아버님께서 괜찮으셔야 할 텐데. 만약 아버님께서 마음의 벽을 깨고 비상(飛上)을 준비하시는 거라면 천하에 군림하시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길한 생각을 애써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흔든 서문길은 창밖을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시작되는 비무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항상 정문 앞에는 두 명의 무사가 경비를 서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경비 무사의 제지를 받지 않고 그냥 들어가려니 아무래도 찝찝한지, 조령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적막한 상태로 봤을 때, 며칠 전까지 5백여 명이 넘는 문도들이 북적거렸던 장원으라고는 도무지 생각조차 하기 힘들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살아서 돌아온 자가 겨우 50여 명정도밖에 안된다고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조차 중상자가 태반이니......” 장원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가 너무 암울한 탓인지, 조령은 선뜻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어린애마냥 머리통만 대문 안쪽으로 집어넣어 두리번거리며, 혹 아는 사람이 나오지 않나 살펴보고 있을 뿐이다. 이때 갑자기 그녀의 뒤에서 쟈타르의 경악성이 들렸다. “아, 아가씨!” “왜?” 무슨 일인가 싶어 뒤돌아서던 조령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젊은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차가운 눈동자. 그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조령은 본능적으로 솟아오르는 공포심에 몸을 부르르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조령이 장원으로 들어가는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게 불쾌했는지 사내는 퉁명스레 말했다. “이봐. 꼬맹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이따위로 말을 걸었다면 그녀는 아마 사생결단(死生決斷)을 내자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령은 상대가 자신을 모멸적인 말투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 앞에만 서면 흡사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찍소리도 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예? 왜 그러세요?” “들어갈 거냐?” 조령은 황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닌데요.” 젊은 사내는 아마 그런 조령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 나왔다. “들어갈 거 아니면 빨리 비켜.” 조령이 화들짝 놀라 재빨리 옆으로 비켜서자. 사내는 별 괴상한 계집을 다 보겠다는 듯 그녀의 아래위를 힐끔 쳐다보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쟈타르는 젊은 사내의 등장이 불안하게 느껴졌는지 조령에게 돌아갈 것을 권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교주도 진소협을 만나러 오신 모양이니 말입니다.” 그렇다. 방금 그녀가 만난 젊은 사내는 바로 마교의 교주 묵향이었다. 그녀와 묵향과의 첫 대면이 워낙 파격적이었기에 그녀는 지금도 묵향 앞에만 서면 두려움에 질려 제대로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응. 빨리 돌아가자.” 묵향이 장원안으로 들어서자 오고 가던 천지문도들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얼마 전에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때, 자신들을 구해 주기 위해 달려와서 보여줬던 그의 가공할 신위. 그 전에 쩔렁거리며 돌아다닐 때는 몰랐는데, 그날 보여 준 묵향의 가공스런 무공은 천지문도들 가슴속 깊이 공포심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진팔은 지금 어디 있느냐?” 묵향의 물음에 천지문도들 중 한 명이 다급히 앞으로 나서서 진팔의 위치를 가르쳐 줬다. “저, 저쪽에 있을 겁니다. 교주님.” 묵향이 진팔이 있다는 방에 가 보니 그는 반쯤 얼이 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 형제와도 같이 지내던 수많은 동문들이 죽음을 당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흠모했던 사저마저 생사를 알 수 없으니. 넋이 빠질 만도 했다. 초췌한 안색에 허옇게 부르튼 입술이, 그가 얼마나 깊은 상심에 빠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 진팔에게 연민의 눈빛이라도 보내줄 만하건만, 묵향은 냉담하기 그지 없었다. “그 전투 이후 처음 보는군. 몸은 괜찮나?” “어, 어서 오십시오. 교주님.” 평상시에 묵향을 보는 진팔의 눈은 얼마간의 두려움과 존경심, 그리고 원망이 뒤범벅된 것이었따. 하지만 전투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는지 묵향을 마주 보고는 있지만 진팔의 두 눈은 공허하기만 했다. 그러다 뭘 생각했는지 주춤 묵향 곁으로 다가섰다. 소연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차마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 그녀가 잘못되었다는 대답을 교주가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묻자니 두렵고, 묻지 않으려니 답답했다. 진팔은 복잡한 눈빛으로 묵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채 입만 뻐금거렸다. 묵향이 소연의 문제로 자신을 두들겨 팬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어디 하루 이틀 맞았는가? 온몸이 노곤해 질 정도로 두들겨 맞아도, 아니 그러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녀만 무사하다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진팔이었다. 묵향은 그런 진팔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예전에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놈이 약을 먹었는지 감히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성질 같아서는 사지를 부러트려 아예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소연이 아끼는 사제인지라 성질대로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진팔이 왜 이렇게 멍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이 됐다. 아마도 소연의 생사에 대한 근심 때문일 것이다. 묵향은 이미 소연이 회복했다는 보고를 들었음에도 진팔에게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옆에서 소연을 지키라는 뜻으로 귀찮은 무공 때련까지 마다하지 않았는데, 묵향은 시치미를 뚝 떼고, 평상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사내자식이 겨우 한 번 죽을 뻔했다고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서야 쓰나. 이럴 때일수록 모자란 자신의 무공을 갈고 닦는 게 좋아. 빨리 가서 대련할 준비를 갖추고 나오너라.” 그런 묵향이 진팔은 너무나 고마웠다. 언제나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것이다. 자신이 실의에 빠져 있 자 일부러 찾아와 이렇듯 따스하게 배려를 해 주고 있지 않은가. 맞는 말이다. 멍하니 앉아 있는 다고 죽은 사문의 제자들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앞으로 남은 전투를 위해 무공에 전념할 수 있도록 비무를 해 주겠다니. 어쩌면 자신의 무공을 높여 주기 위해 비무를 해준다는 그 말도 안되는 말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 진팔이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여기까지 말하던 진팔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다 묵향의 매서운 눈매를 보니, 대련을 안하겠다는 말을 하면 그 뒤에 어떤 사태가 뒤따를지 뻔히 보였던 것이다.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준비하고 나와!” 고마움에 잠시 잊고 있었던 묵향에 대한 공포심이 진팔을 휘감았다. 진팔은 정신없이 방 안에 나뒹굴고 있던 목검 한 자루와 자신의 애도를 주워들었다. 그게 바로 대련에 필요한 준비물이었으니 말이다. 묵향은 대련에 앞서 진팔이 가져다 준 목검을 잡고 한 가지 검법을 천천히 펼쳐 보이며 물었다. “이 검법을 본 적이 있으냐?” 묵향이 펼쳐 보여 주고 있는 초신을 보던 진팔은 경악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확실히 진팔도 알고 있는 검법이었다. 천마혈검이 아니라 목검으로 펼쳐서 그런지 패도적인 맛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팔이 이 검법을 몰라볼 리 없었다. 자신에게 한 없는 공포와 절망감을 안겨 줬던 검법이었으니까. “이건 본교 최강의 검법 중 하나인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이라는 거다. 천마혈검대원들이라면 필히 이 검법을 익히지. 너도 이번에 한 놈 상대해 봤으니 약간은 눈치 챘겠지만, 도가 계열의 검법들과는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다른 검법이다. 그걸 알지 못하면 목숨을 내놔야 해.” 묵향은 진팔이 관찰할 수 있도록 느릿하게 다섯 번 정도 천강혈룡검법을 펼쳐보여주며, 검법의 초신과 변초가 어떤 것인지 알려줬다. “전체적인 초신들의 모양은 기억할 수 있겠느냐?” “예. 그런대로......” “그럼 이제부터 본좌는 천강혈룡검법만으로 너를 공격하겠다. 재주껏 막거나 피해보거라. 그렇게 둔한 놈은 아니니 며칠 두들겨 맞다 보면 이 검법을 상대할 방법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진팔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삼류검법이라도 묵향의 손에서 펼쳐지면 막기가 힘들다. 그런데 몇 번 본것만으로 마교 최강의 검법 중 하나라는 천강 혈룡검법을 막으라니. 당연히 진팔로서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사정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저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고수들인데, 파훼법이라도 가르쳐 주신다면 몰라도......” 묵향은 기가 막힌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파훼법? 웃기고 있군 동등한 실력쯤 되어야 파훼법이 통하는 거다. 수많은 초식들 중에서 어떤 게 날아올지도 모르고, 또 어떤 식의 조합으로 공격해 올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파훼법을 알아봐야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나? 지금 네가 할 일은 이 초식을 피하는 것을 머리통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일이야. 그 후에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거다.” 아닌 게 아니라, 그날 이후 진팔은 시도 때도 없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시뻘건 장검을 들고 미친 듯 맹공을 퍼붓는 마인. 막을 방법도, 막을 수도 없었다. 너무나 무력했던 그 순간이 하나의 공포로 각인되어 그의 뇌리에 새겨져 있을 정도로 천마혈검대원들이 펼치던 검법은 가공하기만 했다. 그날 이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떠올리며 상대할 방법을 찾아봤지만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무력감은 더욱 커져 가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악몽을 꾸면 당시에 느껴지던 그 지독한 공포와 무력감이 떠올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곤 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자 묵향이 펼치는 검법은 그자가 펼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목검으로 천천히 펼쳐서 그런지 패도적인 맛이 하나도 없었고, 신기하게도 공포나 절망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팔에게 있어서 마교 최고수라는 묵향이 펼치는 검법이 그때 그자가 펼친 것보다 훨씬 더 만만하게 보인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막상 한 수 교환해 본뒤 진팔은 깨달았다. 묵향 쪽이 훨씬 더 수준 높은 검식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그때 그자의 검은 소연과 함께 어떻게 막거나 피하는게 가능했었지만, 이번 경우는 아예 그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대련을 하던 진팔은 서서히 가슴속에 차오르는 공포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 공포의 원인은 무력감에 치를 떨어야 했던 천강혈룡검법 따위가 아니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도저히 반항조차 해 볼 수 없는 묵향의 존재 때문이다. 비무가 끝날 때까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 허우적거려야 할 거라는 원색적인 두려움, 그리고 왠지 이런 고통이 계속 지속될 것 같다는 절망감이 합쳐진 공포였다. 그리고 이런 재수없는 예감은 의외로 잘 들어맞았다. 빠각! “크으윽!” “조금 전에 말했지? 도가의 검법과 그 궤를 달리한다고 말이야. 자, 빨리 일어서!” 마음은 이대로 뻗어 버리고 싶었지만, 어느새 묵향에 의해 길이 잘 들어 버린 진팔의 몸은 생각과는 달리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괜히 꿈지럭거리다 더 매몰차게 두들겨 맞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퍽! 퍽! 우당당탕. 기를 쓰고 막는다고 막아 보지만 목검은 살아 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양 유유히 진팔의 애도를 헤집고 들어와 어지없이 두들겨 댔다. 그럴 때마다 진팔은 이러저리 나뒹굴고 널브러져야 했다. 그리고 그런 끔찍한 고통의 시간은 세 시진에 걸쳐 지속되었고, 진팔은 차라리 밤새 악몽에 시달리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들겨 터져야만 했다. “아이고... 흐윽......” 땅바닥에 큰 대(大)자로 사지를 벌리고 볼썽사납게 널브러져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진팔은 온몸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특히 오랫동안 교주와 대련을 하지 않다가 해서 그런지 몸이 아직 적응을 못 해 더욱 아팠다. 예전에 매일같이 두들겨 터질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차라리 부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치기 어린 생각마저 들었다. 진팔이 절망감에 한숨을 내쉬든 말든 묵향의 생각은 달랐다. 소연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일 때야 진팔은 아무 쓸모가 없었기에 지금까지 그냥 내버려 뒀을 뿐이다. 진팔의 몸이 회복되고 안 되고는 묵향의 관심 밖이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소연이 살아났다는 보고를 들은 것이다. 완쾌한 소연은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이고, 그녀를 가까운 거리에서 호위할 사람은 천지문에서는 진팔밖에 없다. 그런 만큼 놈을 더욱 강하게 만들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번 대련에서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진팔을 몰아붙였다. 물론 두들겨 패다 보니 개인적인 감정까지 이입이 되어 힘이 조금 더 들어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요 근래 묵향은 뭔가 수상쩍은 팽선의 혐의점을 찾아내기 위해 매일 짜증나는 문서를 뒤적이고 있다 보니 신경이 곤두 서 있는 상태였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분면 구린 냄새가 솔솔 나는데 딱히 이거다 하는 증거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짜증은 진팔과의 비무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온몸이 노곤해질 정도로 맞는 진팔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묵향은 그동안 쌓인 짜증이 이래도 안 풀리자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기를 쓰고 뭔가를 배우려고 노력을 해도 시원찮은 놈이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아프다며 엄살을 피우니 쌓인 짜증이 폭발을 했다. 누워 있는 진팔이 채 일어서기도 전에 목검이 날아갔다. 이런 놈은 무공을 배우기 전에 근성부터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목검을 휘둘렀다. “꾸에엑~~~.” 그날 진팔은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진팔은 침상 위에 엎어져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몸이 워낙 욱신거리며 쑤셔 대니 다른 잡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금창약이 안 발린 곳이 있나 살펴보자 온통 시퍼렇게 멍든 것이 자신의 몸이지만 가관이 아니다. “끄응... 그 새끼는 왜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지랄이야. 지랄이. 누가 마교 교주 아니랄까 봐 어찌 그리 악독한지. 아이고, 내 팔자야.” 하소연을 해 봐야 소용도 없겠지만 하소연할 데도 없는지라 그저 끙끙거리며 앏아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잘 차려있는 중년 사내가 뛰어 들어왔다. 과거 여자들의 가슴을 꽤나 울렁거리게 만들었을 법한 수려한 용모의 중년 사네였다. “사매!” 방 안을 두리번 거리던 중년 사내는 침상에 누워 있는 게 소연이 아니라 진팔이라는 것을 알자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 표정은 곧 짜증 어린 것으로 바뀌었다. 금창약을 바르기 위해 웃통을 벗어 젖힌 그의 온몸은 차마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푸르죽죽하게 멍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진팔은 낑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사내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중년 사내가 바로 자신의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임연(任燕) 사형. 그런데 여기엔 갑자기 어쩐 일로......” “왜 네가 여기에 이TSmsrjtdlsi?" 곱지 않은 어조로 물은 것이었건만, 진팔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도 천지문도의 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런 중차대한 일에 어찌 손놓고 방관만 하겠습니까. 당연히 발 벗고 나선 것이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임연은 진팔을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봤다. 비록 무공이 높기는 했지만 진팔은 결코 천지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있음으로 인해 천지문에 분란만 조장 될 뿐이다. 절정고수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것은 어느 문파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임연이 이런 식으로 생각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천지문의 후계 구도 때문이었다. 만약 진팔이 문주가 될 야심이 있다면, 어쩌면 임연은 진팔을 지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봤을 때 진팔은 전혀 문주가 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문주가 될 혈통을 타고 났고, 자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주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로 인해 벌어진 문파 내의 심각한 분열이었다. 장손이 문파를 이어야 한다는 고루한 원들과, 격변하는 무림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문주의 자리를 이어햐 한다는 젊은 제자들과의 격렬한 대립으로 천지문은 지독한 열병을 앓아야만 했다. 진팔은 문주가 되기에는 너무 마음이 여렸다. 일문을 맡기에는 좀 부족한 형을 밀어내는 것도, 그렇다고 자신을 따르는 젊은 제자들을 설득하여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도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주 자리를 둘러싼 내분 속에서 고민하던 진팔이 내린 결론은 훌쩍 떠나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진팔이 문파를 떠나던 날 벌어졌던 문 내의 혼란을 임연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노장파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 비열한 수단을 써서 진팔을 내쫓았다며 소장파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그 이후, 격한 대립 양상을 보인 소장파와 노장파 간의 감정의 골은 회복하기 힘들 만큼 깊어졌다. 그런데 어디론가 사라진 줄 알았던 진팔이 이곳에 있을 줄이야. 소장파들의 구심점이었던 그의 행방이 묘연했기에 갈등이 표면화 되지 않고 있을 뿐이었지. 만약 진팔이 이곳에서 크게 위명을 떨치고 본가로 귀환한다면 잠잠했던 소장파가 절대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 문주직을 둘러싸고 유혈 사태로까지 번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문이 그런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면, 저놈은 또다시 도망칠 게 분명하다. 마치 이 혼란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 그럴 바에는 욕심 많고,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현 문주가 진팔보다 백배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임연의 생각이었다. 이렇듯 처음부터 진팔을 썩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그이다 보니, 진팔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고을 리 없었던 것이다. “뭐? 사문의 일에 발 벗고 나섰다고? 젠장! 너하고는 할 말이 없으니 소 사매를 불러오너라. 사매는 지금 어디 있느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를 받은 문주는 임연을 이곳으로 급히 파견했다. 피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함이다. 임연으로서는 골칫덩이인 진팔보다 책임자인 소연을 찾는 게 당연했다. “사저께서는 지금 여기에 안 계십니다.” 대답을 하는 진팔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애써 잊고 있었는데 임연의 질문으로 인해 소연의 생사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임연으로서는 진팔이 인상을 쓰자 내심 기분이 언짢았다. 사형인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여기 없다고? 그럼 빨리 기별을 넣어 내가 보잔다고 전하거라.” “그럴 수가 없습니다. 교주가 사저를 치료한다고 데려간 후, 아직까지 소식이 없으니 말입니다.” 임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까지 소연이 부상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 중에 부상을 입는 일이야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소연이 부상을 입었다면 양양성으로 데리고 와서 치료했어야지. 왜 마교 교주가 그녀를 데리고 갔단 말인가? 임연으로서는 진팔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교주가 소연을 데려갔다니... 자세히 말해 보거라.” 주저하던 진팔은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마교로부터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듣는 임연의 표정은 점차 분노로 인해 일그러지고 있었다. 마교의 주구라는 오명을 씻어 버리라고 파견된 자들이, 되려 마교와 같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린 꼴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피해는 피해대로 입은 상태에서 이런 결과라니, 그로서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정파의 명문으로 우뚝 서기 위해 엄청난 피를 흘렸건만 전혀 무의미한 희생이 되어 버렸으니, 이걸 문주에게 어떻게 보고하면 좋을지 임연으로서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답답한 듯 실내를 맴돌던 임연은 갑자기 탁자를 꽝 내리치며 소리쳤다. “젠장, 마교의 도움은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했어야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속 편하게 말하면 끝이냐? 왜 쓸데없이 마교와 엮이느냔 말이다.” 임연이 계속 신경질을 내자 진팔도 끝내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마교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 양양성에 살아남아 있을 천지문의 제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임연이 이번 전투에서 죽은 수많은 제자들과 소연의 새상에는 별 관심도 안 보이며, 문파의 평판이 나빠질 것에만 신경을 쓰니 진팔의 화가 폭발한 것이다. “사형은 처참하게 죽은 제자들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단 말입니까? 사저가 어떻게 됐는지 걱정되지도 않아요? 그깟 무림의 평판이 동문들의 목숨보다, 사저보다 더 중요하단 말입니까?” 분노에 부르르 몸을 떠는 진팔의 모습에 임연은 당혹스러웠다. “그, 그게 아니라. 내 말 뜻은 피를 흘리고도 마교의 주구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만약 교주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살아남아 있을 천지문의 제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교주가 도와주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합니까? 사형이 한번 그렇게 해 보시죠. 씨알이나 먹혀 들어가는지.” 흥분한 진팔은 마교도들이 기거하는 숙소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놈의 교주는 저리로 가면 있습니다. 잘난 사형께서 가셔서 한번 따져 보시죠. 도움 따위 줄 필요도 없었는데 왜 도왔냐구요! 그리고 상처를 치료한답시고 데려간 사저는 어떻게 되었냐구요!” 쌓인 것이 폭발하듯 외치는 진팔의 눈가에 옅은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질책을 당하고 있는 임연은 적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질책을 당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누가 누구를 향해 큰소리를 치고 있는 건가? 임연은 당혹스러운 가운데 머리 꼭대기로 열기가 뻗치는 것을 느꼈다. 일처리를 제대로 못해서 사문에 큰 피해를 입혀 놓은 주제에, 뭐가 잘나TEk고 사형에게 따지느냔 말이다. “지금 네가 사형인 나에게 대드는 것이냐?” “대들도록 만든 사람이 누군데 계속 억지를 부리는 겁니까? 에이, 빌어먹을!” 씹어뱉듯 외친 진팔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임연은 절룩거리며 뛰쳐나가는 진팔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사나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무능한 놈 같으니. 무공만 높았지 머리를 쓸 줄 모르니 저 모양이지.” 임연은 시비를 불러 차를 한 잔 내오라고 이른 뒤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리기 위해 함참을 노력해야 했다. 천지문이 정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 얼마나 노력했던가. 마교의 주구라는 소문에 노골적인 무시를 당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말이다. 임연 역시 동문들의 희생이 마음 편할 리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대한 피를 흘리고도 정파로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마교의 주구라는 오해가 더욱 깊어질 듯하니 어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부끄러워애햐 할 진팔이 자신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다니. 임연은 너무도 불쾌했다. 차를 마시던 임연은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밖에 대고 외쳤다. “밖에 누가 있느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제자 한 명이 들어왔다. 그가 이곳에 올 때 데리고 온 제자들 준 한 명이다. “찾으셨습니까 장로님.” “너는 빨리 이번 전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이TSms 제자를 찾아 노부에게 데리고 오너라.” “옛.”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척 보기에도 상당한 중상을 입은 허일평(虛一平)이 들어왔다. 이곳에 파견된 1대제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였다. 잠시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임연은 질문을 던졌다. 본가에 보고를 하기 위해서는 피해 상황과 이번 전투가 어떻게 벌어졌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지금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전투가 벌어졌고,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사망자가 얼마나 되느냐?” 허일평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사망자보다는 생존자의 수가 훨씬 계산하기 쉽습니다. 장로님.” 그 대답에 임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소한 절반 이상의 인원이 사망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게 큰 피해를 당했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하고 있었던 그였기에 표정이 딱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말해보거라.” “저까지 포함하여 46명이 돌아왔습니다. 임 장로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연은 뺀 숫자일 것이다. “......” 임연은 눈앞이 캄캄했다. 이토록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니. 이때, 임연은 방금 전에 진팔이 왜 그렇게 화를 냈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심한 피해를 당한 그에게 찾아와서 문파의 위명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만 떠들었으니 화가 날 만도 했을 것이다. “그중 24명은 워낙 상태가 중하여 더 이상 전장에 투입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장로님.” “도대체 어떻게 싸웠기에 그렇게 막심한 피해를 입었단 말이냐? 상황이 불리하면 재빨리 도망이라도 쳤어야지. 쯧쯧, 그래 어찌 된 일인지 소상하게 말해 보도록 해라.” “임 장로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만, 강이 가로막혀 있어 몸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허일편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의 과정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당시의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보고를 듣는 동안 임연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져 갔다. 그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자 천지문의 제자들은 완전히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내몰아졌다는 것이 빤히 보였던 것이다. 진팔의 말처럼 만약 마교 교주가 무시무시한 신위를 보여 구해 주지 않았다면, 전멸을 당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보고를 마친 허일평을 내보낸 후, 임연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연은 그렇게 머리가 나쁜 사내가 아니다. 정황을 가만히 따져 봤을 때, 정파놈들은 치졸하게도 차도살인의 계책을 써서 자신들을 사지로 내몬 것이 확실했다. 아마 진팔도 확실한 증거가 없는 만큼 자신들이 이용만 당했다는 것을 본문에 보고하지 못한 듯싶었다. 정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천지문에 증거도 없는 심증만으로 보고해 봤자 욕만 먹을 게 뻔했지만. “젠장, 그런 새끼들을 위해서 피 흘려 싸울 필요가 있을까?” 현 천지문의 문주인 진수는 진팔의 형이다. 그는 실리보다는 헛된 공명심(功名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동생인 진팔의 영향이 컸다. 일문의 문주로서 나이차가 꽤 나는 동생에게 무공에서 밀린다는 점. 그것도 문제에게만 전수되는 비전의 도법까지 익히고도 그 모양인 만큼,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문내의 젊은 제자들에게서 무공이 고강한 진팔을 문주로 삼아야 한다는 소리까지 공공연히 나오고 있는 판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무공 말고 다른 부분에서 그가 동생보다 뛰어난 구석이 있으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뭔가 눈에 띄는 업적을 빨리 이룩해 문도들에게 문주로서 인정받기 위해 과도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임연이 그게 집착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진팔을 그렇게 질책해 놨으니, 이 일을 어쩐다? 거참 난감하구먼.” 씁쓸한 마음에 자리를 맴도는 임연의 머릿속에는 이미 진팔에 대한 미안한 감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어떤 식으로 문주에게 보고를 해야 할지 복잡하기만 했다. 묵향의 풀리지 않는 분노 최근 묵향은 아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처음 팽선이 작전을 제대로 세운 것인지 조사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많아질 줄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던 묵향이다. 개방과 무영문, 그리고 서문세가에서 보내온 자료들을 몽땅 모으니 작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양이 많았다. 문제는 그걸 조사하다 보니 뭔가 미비한 부분이 있어 그에 따른 추가 자료를 요청하게 되었고, 덕분에 챙겨 봐야 할 자료의 양은 단숨에 두 배로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런 빌어먹을!” 팔자에도 없는 문서 검토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자 묵향은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쭉 자료들을 훑다 보니 아무래도 팽선이 뭔가 수작을 부린 냄새가 어물어물 나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리 꼼꼼히 살펴봐도 결정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수작을 부린 것으로 보기에는 팽가를 비롯한 정파의 피해가 너무 컸다. 그렇다고 팽가가 세운 작전을 그대로 믿기에도 뭔가 뒷맛이 찜찜했다. 팽가로 쫓아가 사실대로 불라고 몇 대 손보면 좋겠지만 성질대로 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거칠 것 없이 살아온 묵향이자만 지금은 정파와의 협조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그렇기에 묵향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팽가 놈을 향해 달려가 개 패듯 패버리고 싶은 것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래저래 묵향으로서는 짜증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진팔까지 족치며 기분 전환을 꾀했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젠장, 형님을 찾아가서 술이나 마실까?” 마음이 동하자마자 묵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만통음제가 묵고 있는 숙소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가다 보니 짜증보다 더한 감정이 슬슬 고개를 치밀었다. 문득 묵향은 왜 이런 식으로 멍청하게 자료를 찾고 있어야 하는지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흠~ 그런데 내가 왜 팽선이 잘못한 게 있는지 증거를 찾아야 하지?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충분히 있잖아? 무엇보다 감히 소연을 죽음에까지 몰고 간 것만으로도 두들겨 맞아야 할 죄가 되거든.’ 지금까지 묵향이 언제 증거 따지면서 살아왔던가. 물론 팽선을 아무 증거도 없이 조져 버린다면, 한동안 무림맹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언제는 그런 뒷일까지 걱정하며 화산파를 멸문시켰던가.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쓸데없이 이런 거 잡고 계속 시간을 끌 이유가 없지.’ 묵향은 만톤음제의 거처로 향하던 발길을 팽가가 머물고 있는 쪽으로 돌렸다. 기왕 생각난 김에 그동안 쌓인 짜증도 풀 겸, 팽선이나 가볍게 주물러 주러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요즘 들어 팽선은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 이 일을 벌일 때만 해도 양양성에 함께 와 있는 팽지량 장로에게 팽가에 그 어떤 피해도 오지 않도록 처리하겠다며 큰소리친 뒤 작전을 추진했다. 어차피 전투에 참여해야 할 거라면 얄미운 천지문도 정리하고, 팽가의 명성도 얻을 수 있게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 결과는 최악이었다. 가문의 동량이라고 할 수 있는 우수한 고수 184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두 배에 달하는 수가 중상을 당했다. 그중 30여 명은 목숨만 간신히 건졌을 뿐, 폐인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물론 팽가만 이런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게 아니었고, 비록 마교 놈들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니 팽선과 하북팽가로서는 체면치레는 한 것이다. 팽선은 팽가가 앞장서 작전을 성공시켰다는 것으로 애써 자신을 위안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며 팽선의 업적을 칭찬했었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개방 쪽에서 파악한 정보들을 분석해 보니 이번에 팽선이 재안한 작전은 그야말로 상대방의 손가락 끝에서 놀아났음이 증명 되었던 것이다. 원로고수 팽선이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짠 작전은 처음부터 적들에게 읽혔고, 적들이 오히려 팽선이 거느린 세력을 묵사발 내기 위해 역으로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 아가리 속으로 팽선은 순진하게 들어간 것이다. 만약 뒤늦게 마교에서 흑룡대를 투입해 적을 교란해 주지 않았다면 전투에 참여한 무사들은 몽땅 전멸당했을 거라는 게 개방의 분석이었다. 마교를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던 팽선에게 있어서 그것은 최악의 치욕이었다. 쓰레기 같은 마교도 따위에게 목숨을 구원받다니 말이다. 팽가의 가주도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호되게 질책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나쁜 소문일수록 가을 평원에 불들이 번져 가듯 빠르게 퍼지는 법이다. 양양성에 나와 있는 무인들이 이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팽선은 요즘 자신을 바라보는 무인들의 시선이 예전과 다름을 느꼈다. 그리고 그 눈초리 속에는 팽가의 젊은 제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팽선은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듯한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런 팽선에게 또 다른 불행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로님, 마교 교주가 장로님을 뵙고 싶다고 청하고 있습니다.” 팽선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주가 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는 말이냐?” “그건 제자도 잘 모르겠습니다.” 별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 마교로부터 큰 신세를지지 않았던가. “객방으로 모시도록 해라.” 그렇게 지시한 후, 팽선은 가급적 천천히 객방으로 걸어갔다. 그의 방문 목적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행여 자신이 서두른다는 인상을 다른 이들에게 안겨 주기는 싫었던 것이다. 급히 달려가면 교주의 명성에 주눅이 들었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팽선은 마교의 교주를 만나는 것 자체가 썩 내키지 않았다. 팽선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있던 묵향이 그를 따라봤다. 그 눈빛이 너무 매서웠기에 팽선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부 팽선이라고 하오.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는지?” “네게 몇 k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들렀다.” 묵향이 다짜고짜 반말로 말하자 팽선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사실 상대가 정파인이라면 배분이 자신보다 높기에 말을 놔도 할 말은 없겠지만, 놈은 사파가 아닌가. 그것도 팽선이 이를 가는 마교의 교주다. 즉, 두 사람 사이에는 배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대답하는 팽선의 말투는 퉁명스럽기 그지 없었다. “뭘 물어본다는 거요?” “먼저 이번에 모든 계책을 세운 놈이 너냐? 누구 다른 사람의 의견이 들어간 게 있다면 정확하게 말해 봐.” 안그래도 그놈의 작전 때문에 쌓인 게 많은 팽선이다 그런데 막교 교주라는 shaRk지 그걸 들먹이자 팽선의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 “물론 노부가 모든 계획을 짰소. 왜? 귀하에게 작전을 물어보지 않았다고 지금 내게 항의하러 온게요?” 시비를 거는 듯 삐딱한 말투에 묵향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일단 참았다. 아직 물어볼 것이 몇가지 더 남아 있었으니까. “천지문 따위를 기습조로 임명한 이류를 듣고 싶다. 그들 대신 너희 팽가가 가든지, 아니면 다른 문파를 보냈다면 훨씬 적은 피해만으로 그곳을 박살 낼 수 있었을 게 아닌가?” 묵향은 일부러 천지문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고, 팽선은 그걸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기습조로 누구를 보내든, 그건 순전히 내 맘이오. 나는 천지문이 기습을 해 주기를 원했고, 비록 그들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유감이자만 노부의 뜻대로 작전은 성공했소.” 거침없는 팽선의 대답에 묵향의 눈썹이 점차 위로 치켜져 올라가고 있었다. 참기 힘들 정도로 열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묵향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더욱 팽선을 조롱했다. “호오. 놀라운 일이군. 박쥐들의 문파라고 하며 모두들 상대도 안하는 천지문을 자네는 그토록 믿었다니 말이야. 아마 천지문에 줄을 대서 본교에 아부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괜히 그런 식으로 한 단계 건너올 필요 없네. 그런 생각이 있다면 앞으로 본좌에게 직접 얘기하도록 해.” 이죽거리는 묵향의 말에 팽선은 너무나도 화가 나서 안면근육이 제멋대로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따. “귀하, 말씀이 너무 심한 것 같소. 내가 왜 귀교와 친분을 맺고 싶어 한다는 말이오? 행여 그딴 소리 아무 데서나 떠들지 마시오. 다른 문파들의 구설수에 오를까 두렵소.” “그게 아니라면 얘기가 안 되잖아. 천지문은 겨우 문도수가 2천 남짓밖에 되지 않는 작은 문파야 제령문처럼 엄청난 실력이라도 보유하고 있다면 또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거든. 이번 작전에 기습조의 중요성은 어느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지. 그런데 왜 천지문 따위에게 그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 거지? 하마터면 그 때문에 작전이 실패할 뻔했는데 말이야. 물론 천지문이 간신히 임무를 완수했다고는 하지만 하마터면 전멸당할 뻔하지않았나. 만약 팽가가 다른 명문대파가 그 임무를 맡았다면 그 정도까지 피해를 입지 않고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본좌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물론 말도 안되는 소였지만, 팽선은 그곳에 있지 않았기에 정확한 상황을 모른다 묵향은 진팔에게 명령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상대를 물리쳤다고 보고하도록 했다. 그리고 개방과 무영문에까지 연락을 보내 일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령을 내려놓은 상태였기에, 천마혈검대가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팽선이 알리 없었다. 팽선은 버럭 화를 냈다. “어떤 놈이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놈들을 거기에 보냈다고 했소?” “그렇다면 천지문의 실력을 그토록 신뢰했나?” 팽선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딴 놈들이 무슨 실력이 그리 뛰어나다는 거요? 그 망할 계집은 제법 뛰어나지만, 나머지는 다 쓰레기......” 여기까지 말하던 팽선은 아차 싶었다. 갑자기 묵향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봤기 때문이다. “아, 아니......” 어느샌가 묵향의 손은 새파랗게 질린 팽선의 멱줄을 틀어쥐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망할 계집」이 바로 소연을 칭하는 표현이 아니겠는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팽선은 소연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고, 그 때문에 천지문을 사지로 밀어 넣은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물증은 확보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로도 묵향은 충분했다. “망할 계집이라고?” 짝! 짝! 묵향의 손이 휘둘러질 때마다. 팽선의 뺨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휙휙 돌아갔다. “이, 이게 무, 무슨 짓이오?” 짝! 이번에 때린 건 좀 쎘는지 팽선의 입에서 핏줄기와 함께 흰 것이 하나 튀어나와 바닥을 도르르 굴러갔다. 피 묻은 팽선의 이빨이었다. “크윽!” “천지문이 본교와 협정을 맺은 유일한 문파임을 네놈은 잊었느냐? 천지문을 사지로 몰아넣고, 네놈이 살아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니... 정말이지 가소로운 일이군.” 갑자기 뺨을 얻어맞은 팽선은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다급히 공력을 끌어 모아 묵향을 향해 휘둘렀다. 만약 정신이 있었다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이다. 무공의 차이도 차이였지만 반항하다보면 오히려 묵향에게 비무의 명분만을 줄 수도 있다. 노회한 팽선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치미는 분노로 인해 이성이 거의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이얍!” 극성의 혼원벽력장이 바로 코앞에 있는 묵향을 향해 터져 나갔다. 하지만 묵향이 그걸 그대로 맞아 줄 사람이 아니다. 팽선이 공력을 장심에 끌어 모으고 있음을 벌써 눈치 채고 있었다. 묵향이 팽성에게 무공을 펼칠 기회를 준 것은 최후의 공격이 막혔을 때 놈이 느낄 절망감을 노린 것이었따. 콰쾅! 혼원벽력장은 묵향의 바로 코앞에서 엄청난 반발력과 맞부딪쳐 대 폭발을 일으켰다. 그 충격의 여파로 팽선의 몸은 뒤로 날아 문짝을 뚫고 밖으로 뛰어나가 볼썽사납게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쿨럭, 쿨럭!” 내장까지 상했는지 기침을 할 때마다 팽선의 입에서 시뻘건 핏물이 흘러나왔다. 묵향의 행동은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느긋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천천히 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팽가의 장로쯤 되는 놈이 이 정도로 죽으면 말이 안 되지. 자, 일어서서 좀 더 씩씩하게 발악해봐.” 팽선은 두려움에 질려 외쳤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상대. 암흑마제가 중원 최강의 고수라더니, 그 말이 오늘에야 뼈에 사무치게 그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대, 대체 왜 이러는 거요?” “방금 말해 줬잖아. 천지문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라고 말이야.” “겨우 그 따위 쓰레기 같은 문파 때문에 무림맹과 분란을 일으키겠다는 말이오? 당신이 나를 해친다면, 맹이 가만히 있지 않을거요.” 팽가를 들먹여 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기에 팽선은 무림맹을 걸고 넘어졌다. 하지만 그의 위협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호오, 네 말대로 가만히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무림맹의 돌대가리 같은 놈들이 결정하겠지. 하지만 그놈들 머리가 아무리 돌이라고 해도, 겨우 팽가의 장로 하나 죽였다고 감히 본교에 따지려고 할까?” 물론 묵향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교는 얼마 전에 화산파까지 멸문시키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무림맹은 마교와의 전면전으로 들어가는 대신 동맹을 선택했다. 그만큼 지금은 힘을 모아 금나라를 상대해야 했고, 마교와 전면전을 벌이기 꺼려했던 것이다. 팽선의 얼굴에 처음으로 절망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묵향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때, 팽선의 눈에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팽가의 무사들이 보였다. 하기야 팽선이 방문을 뚫고 튕겨져 나갔을 만큼 커다란 소리가 났는데 팽가의 무사들이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말이 되지 않았다. “교주!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장 멈추시오.” 소리친 인물은 이곳에 파견되어 있는 또 한 명의 장로 팽지량이다. 묵향이 팽선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리는 것을 본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왜 교주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행패를 부린다는 말인가? 멈추라고 소리는 질렀지만 교주는 그의 경고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호오, 죽은 척 가만히 있으면 내가 안 때릴 것 같아? 반항을 해 보라구. 이 쓰레기 같은 새끼.” 퍽! 팍! “쿨럭, 쿨럭.” 호되게 맞아 한쪽 구석에 처박힌 팽선의 입에서는 기침을 할 때마다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반항? 반항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 거다. 바로 코앞에서 그가 가장 자신 있는 공격을 날렸는데도 먹혀들지 않았는데, 어찌 반항할 엄두를 낸단 말인가. 축 늘어져 거칠게 기침을 하던 팽선은 자괴감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이런 무력한 모습을 갈아 마시고만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쌓아올린 명성인가. 잠시 기침을 내뱉던 팽선은 이를 갈며 문도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이제 곧 숨이 끊어질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뭐, 뭣들 하는 거냐? 저, 저놈을... 저놈을 쳐라!” 하지만 그 명령에 따르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팽선 같은 엄청난 고수를 순식간에 걸레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다. 마교 최강의 고수라고 칭해지고 있으며, 혹자는 중원 최고수라고도 부르고 있는 자가 바로 마교 교주다. 그런 자를 향해 앞장서서 공격할 마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팽기량은 주위를 한번 훑어본 뒤 제자들이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단숨에 눈치 챘다. 사실 그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으니 일반 제자들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시 한 번 묵향에게 정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교주.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말씀을 해 주시오. 왜 본가의 팽선 장로를 핍박하고 계신 것이오?” “내가 네놈에게 대답해 줄 의무는 없다.” 묵향은 싸늘하게 대답한 후, 팽선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다리를 짓밟아 버렸다. 우드득! “크아아악!” 팽선의 다리뼈가 박살이 나며 기괴한 모양으로 비틀렸다. 묵향은 냉기가 풀풀 날리는 어조로 이죽거렸다. “어때? 강자에게 짓밟히는 기분이 말이야. 네놈이 감히 천지문을 벌레 보듯 하며 짓밟아? 그렇다면 네놈은 나한테 짓밟혀도 할 말이 없다. 강하기만 하면 약자를 짓밟아도 된다고 네놈이 말한거나 다름엇으니까 말이야.” 또다시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팽선의 다른 쪽 다리뼈도 박살이 나 버렸다. 묵향이 내공을 운용해 밟았기에 수많은 뼛조각으로 갈라져 가루가 된 것이다 설혹 화타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조각조각 부서져 버린 팽선의 다리를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팽선은 땅바닥을 데구루루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제발, 제발 살려 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팽지량의 눈에 서서히 공포가 떠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인간이 저토록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잠시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서 있던 팽지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교주, 멈추시오. 계속 팽선 장로를 핍박한다면 노부도 묵과 할 수 없소.” 말은 그렇게 내뱉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에서 묵향이 손을 거두고 물러가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만이 가득했다. “호오. 묵과할 수 없다고? 꼴에 자존심은 있는 모양이군.” 묵향의 이죽거림에 팽지량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물러선다면 팽가의 제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이 사실이 양양성에 운집한 다른 문파에까지 알려진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직한 일이다. 설사 죽음이 빤히 보인다고 하더라도 팽지량은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다. 쳐랏!” “흥. 쓰레기 같은 것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퍼퍼퍽! 묵향의 손이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자 그를 향해 달려들던 팽가의 고수 10여 명이 뒤로 튕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은 극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몸을 버둥거리더니 쭉 늘어져 버렸다. 보기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손짓이었지만 한 방만 맞아도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할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여. 저놈을 죽이란 말이야!”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팽선은 계속 공격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묵향은 덤벼드는 팽가의 고수들을 상대하면서도 짬이 나면 팽선을 두들겨 패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정신을 잃지 않을 정도로 힘 조절을 하면서 말이다. 소연이 죽음의 경계에까지 간 모습을 본 묵향의 분노는 그렇게 컸다. 팔다리를 모조리 박살내 병신을 만들었지만 이 정도로 손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물론 편안한 죽음을 선물할 생각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호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아직 매가 부족한 모양이군.” 퍽! 퍽! “크으으윽! 이, 이런 잔인한 놈......” 어느 순간 팽선은 계속되는 고통이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그래도 묵향의 매질은 계속되었다. 그동안 쌓인 짜증을 한 번에 풀기라도 하려는 듯. “크, 큰일 났습니다, 대주님.” 전황을 표시한 지도를 쳐다보던 관지는 급하게 보고를 하는 부하를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 일사불란한 조직 체계를 자랑하는 흑풍대의 일원으로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부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지금 교주님께서 팽가에 쳐들어 가셔서......” 관지는 그 뒷얘기는 듣지도 않고 지도를 내팽개친 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워낙 서류 작업이 지지부진한 상태였기에 혹여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던 그였다. 물론 팽가를 상대로 혼자 쳐들어간 묵향을 걱정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보다 묵향의 성질을 건들이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마화!” “예. 왜 그러십니까? 장로님.” “큰일 났다. 빨리 흑풍대를 출동 준비시켜라.” 흑풍대 대원 전체가 항시 출동 대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금나라와의 대치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일부는 성 주변을 정찰하거나 물밑 작전에 투입되지만, 그 외의 인원은 개인 훈련을 하거나 술을 마시든 장원에서 멀리 떨어지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 바로 전투 가능한 인원들을 모아라. 중무장을 갖출 필요도 없다. 검 한 자루라도 들고 빨리 모이라고 해!” 관지의 명령에 마화는 급히 끌어 모은 천 명 정도의 흑풍대원들을 이끌고 팽가가 묵고 있는 장원을 향해 달려 나갔다. 모두들 장검 한 자루만 달랑 들고 있을 뿐, 워낙 급하게 나온 탓에 암기를 휴대한 놈조차 거의 없었다. 그건 흑풍대원들이 작고 휴대가 편한 암기보다는 철령전이나 비도(飛刀) 계열의 크고 묵직한 암기만을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화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은 악화되어 있었다. 팽선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묵향을 중심으로 배여 명에 당하는 팽가의 무사들이 나자빠져 있었다. 간혹 신음성을 흘리거나, 바닥을 기어가는 자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몽땅 다 죽여 버린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그나마 마화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묵향을 중심으로 거의 2천이 넘는 팽가의 제자들이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고, 이 진귀한 광경을 구경한답시고 인근의 문파에서 구경나온 자들이 거의 만 명에 육박하는 실정이었따. 거기에 마화가 이끄는 천여 명의 흑풍대원들이 도착한 것이다. 팽가의 무사들은 흑풍대의 등장에 당황한 듯했다. 전면전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상황을 종결할 것인가. 팽지량 장로는 순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상황을 끝내기에는 자존심의 상처가 너무나도 컸다. 그렇다고 대대적으로 전면전을 벌이기에도 만만치가 않았다. 마교 교주가 거느리고 온 흑풍대의 수는 9천이 넘는다. 그리고 그들의 전투력은 금나라와의 전투를 통해 이미 입증된 상태였다. 만약 그들과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양양성에 파견 나온 팽가의 무사들은 절대로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이다. 비감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던 팽기량 장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웅성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그들 중에는 평소 안면이 있던 문파의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팽지량 장로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그대들은 본가가 이런 무뢰배들의 공격을 받고 수모를 당하는 것을 그냥 구경만 할 거요?” 팽지량 장로의 추궁에 종리세가(鍾里世家)의 가주 패도(覇刀)종리영우(鐘里英優)가 앞으로 나서며 묵향에게 말을 걸었다. 그 역시 내키지는 않지만 말을 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보시오. 교주. 도대체 왜 팽가에 난입하여 이런 무도한 일을 벌인 것인지 모두가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 주시구려.” 묵향은 이제 완전히 걸레가 되어 있는 팽선의 옆구리를 한 대 더 걷어찬 후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 “본교는 천지문과 협정을 맺은 관계임을 모두들 잘 알 것이다. 여기 있는 팽선이 천지문과 무슨 원수가 졌는지 본좌는 알지 못하나, 이자는 천지문도들을 사지(死地)로 내몰아 막대한 피해를 안겨줬다. 본좌가 손을 쓴 것은 그 때문이다.” 종리영우는 침중한 표정으로 팽지량을 바라보았다. 만약 묵향의 말이 사실이라면 쉽게 끝날 일이 아니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같이 싸우는 문파를 사지로 몰아넣는다면 누가 무림맹의 명령에 따르겠는가. 그 말이 사실로 들어난다면 맹의 권위는 추락할 것이 분명했다. “팽지량 장로, 귀하가 천지문에 큰 피해를 안기기 위해 일부러 사지로 내몰았다는 교주의 말이 정말이오? 사실대로 말해 주기 바라오.” 그때 정신을 잃은 듯 보이던 팽선이 몸을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고대를 드는데 참혹한 모습이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는 듯 팽선은 죽을힘을 다해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물론 그런 의도로 일을 벌이긴 했지만 아무도 모른다. 자신만 입을 굳게 다물면 끝날 일이다. 묵향의 말에 그렇다고 시인하면 자신의 복수는 물 건너가는 것뿐만 아니라. 자칫 팽가가 무림의 공적으로 밀리게 될 일이다. 그걸 잘 아는 팽선이기에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마, 말도 안되는 어, 억지외다.” 이빨이 몇 개 빠져서인지 발음이 어눌하기만 했다. 하지만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팽지량도 팽선의 주장을 거들고 나섰다 자칫하다가는 팽가가 모든 죄를 뒤집어쓸 것 같다는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모두들 아실 겁니다. 이번 작전에서 피해를 당한 것이 어디 천지문 한 곳뿐이오? 그 교활한 오랑캐들의 계책에 넘어가, 본가는 물론이고, 거기 참가했던 모든 문파들이 다 막심한 피해를 입었소이다. 만약 이 일이 팽 장로의 지휘 능력을 비판하는 것이라면 노부로서도 할 말은 없소. 그가 판단 착오를 해서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 줬다는 것은 더 이상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니 말이오. 하지만 천지문을 상대로 차도살인의 계책을 썼다는 누명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팽지량의 말에 묵향은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것이다. 물론 팽선의 말실수를 이끌어 내기는 했지만 그 당시 그 말을 들은 건 자신뿐이다. 팽선을 묵사발 내기전에 살살 구슬려 확실한 증거를 찾아냈어야 했는데, 분노르 이기지 못하고 손부터 나간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 그러나 묵향은 차후 일어날 사태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벌레 같은 놈들이 자신을 오해해 봐야 어쩌겠는가. 묵향은 주위를 오만하게 둘러보며 소리쳤다. “본좌는 이놈이 죄가 있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른 적절한 응징을 가했을 뿐이다. 만약 팽가 쪽에서 피 값을 받겠다면 상대해 줄 용의는 충분히 있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끝이라는 듯. 묵향은 주위 사람들의 안중에 두지도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주위에 흑풍대 무사들이 깔려 있는 상황이었기에 섣불리 아무도 손을 쓰지는 못했다. 여기서 칼을 휘두르려면 흑풍대를 상대로 대 혈전을 벌일 각오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옆으로 다가오며 마화가 근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대로 가냥 가도 됩니까? 교주님.” 그 말에 묵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나중에 찾아오겠지. 뭐, 제발 그래 준다면 좋겠지만 말이야.” 그동안 쌓여 있던 짜증을 말끔히 풀기는 했지만 그래도 묵향의 분노는 쉽게 가실 줄 몰랐다. 그만큼 중상을 당한 소연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던 것이다. 옥화무제의 꿍꿍이 묵향이 양양성에서 사고 친걸 옥화무제가 모르고 넘어갈 리 없다. 그녀는 사건이 벌어진 지 정확히 하루 뒤에 총관으로부터 자세한 보고를 받았다. 사건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 중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었다. “뭐라고요? 팽선을 아예 폐인으로 만들어 버렸다구요?” “예. 태상문주님.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상태가 너무 안 좋다고 합니다. 그를 치료한 의생의 말로는 뼈가 완전히 가루가 난 상태이기에 완치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결국 절단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답니다.” 옥화무제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뾰족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아니, 그 인간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죠?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혈겁이 벌어지는 등, 정세가 흉흉하기 이를 데 없는데 같은 배를 탄 식구들끼리 싸우면 어쩌자는 거예요.” 여기까지 말하던 그녀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흠칫 놀라더니, 총관에게 다급히 물었다. “혹시 팽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물증을 잡은 게 아닐까요?” “속하가 장담하건데 그건 절대로 아닐 겁니다. 그 문서를 통해 팽선의 죄질을 밝혀낸다는 것은, 본문이라고 해도 불가능 하니까요.” “그가 본문에서만 정보를 받아 낸 게 아니잖아요? 개방이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뭔가 자료를 얻었을지도......” “서문세가와 개방에도 자료 요청을 해서 이미 검토를 끝냈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절대로 물증을 잡아 낼 수 없을 테니 태상문주님께서는 안심하고 계셔도 됩니다.” 총관이 워낙 자신 있게 말했기에, 오히려 옥화무제는 묵향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그는 무슨 배짱으로 팽선을 그렇게 만든 거죠?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이렇게 되면 팽가를 비롯한 다른 문파들과의 사이가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잖아요. 더군다나 이 사실을 알면 무림맹이 가만히 있을까요?” “그럴 가능성도 없잖아 있습니다. 사실 그런 다툼을 사전에 방지하자고 본문에서 정보를 왜곡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어찌 되었건 일은 벌어졌으니 어쩌겠습니까?” “사태가 크게 번지지 않기만을 빌어야겠군요.” 총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옥화무제에게 말했다. “그래도 이번 사건 덕분에 얻은 것도 있습니다.” “얻은 게 있다구요? 그게 뭐죠?” “추밀단(諏密團)에서 꽤나 재미있는 가설 한 가지를 세웠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속하가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었습니다.” 추밀단은 무영문의 두뇌 집단으로서 하부 단체들이 물어온 정보들을 자세히 조사하고 분석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사실 광범위하게 들어오는 정보들 중 대부분이 별 쓸모가 없다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정보들 중 일부는 상대가 일부러 흘려 놓은 엉터리 정보인 경우도 빈번하다. 그걸 제대로 파악하여 진실을 도출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추밀단에서 하는 것이다. “그게 뭔가요?” “놀라지 마십시오, 태상가주님. 어쩌면 교주에게 혈육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묵향은 지금껏 그 어떤 약점도 보이지 않고 있는 완벽에 가까운-어떤 의미로 보면 괴상한-인간이다. 그 나이를 먹을 때까지 결혼이라고는 한 적도 없었고. 그녀가 아는 한 그 어떤 여자를 사귄 적도 없다. 그녀의 사랑하는 손녀 매영인을 붙여 주기까지 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은 인간이 아니던가. 어쩌면 그가 동성연애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해 봤던 그녀다. 옥화무제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시큰둥한 어조로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을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추측은 곤란해요.” 듣는 이로 하여금 호기심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말했는데도 상관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렇기에 총관은 이번에는 방법을 바꿔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게 아닙니다. 자, 들어 보십시오. 마교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천지문 따위와 협정을 맺은 이유가 뭐겠습니까?” “글쎄요. 그 부분은 아직까지도 수수께끼죠. 가장 유력한 가설은 무림맹 체계를 흔들어 보기 위해 일부러 천지문에 접근한 거라고......” “예, 처음에 추밀단에서는 그렇게 추리했었지요. 하지만 본문과 마교가 협정서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게 아니라 것이 밝혀 졌습니다. 교주는 될 수 있으면 협정 따위는 맺지 않으려고 했을 뿐 아니라, 협정 후에는 본문을 일정한 수준의 동반자로서 배려해 주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 교주는 협정서를 가지고 장난 칠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도 않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추밀단주는 생각을 달리해 교주가 천지문을 공식적으로 보호해 주기 위해 협정이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흐음... 보호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천지문 따위를 보호해 주고 싶어 할 이유가 없잖아요.” “예, 처음에는 속하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추밀단주는 이 부분에 대해 깊이 있게 조사를 했고, 결국에는 증거를 잡아냈습니다. 그가 무림맹의 자료실까지 뒤져 확인한 결과 예전에 용천익 당주가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천지문과 협정을 맺던 날 당시 마교측 대표였던 부교주 묵향이 천지문의 아이 한 명을 지독한 수법을 사용해 괴롭히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흥미로운 일이군요. 혹시 아이를 괴롭히면 괘락을 추구하는 그런 변태......” 자신이 생각한 대로 옥화무제가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총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확실히 보고서는 묵향이란 인물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추밀단주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의 성격이 괴팍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협정을 막 끝마친 아주 축하할 만한 자리에서, 그런 괴상한 취미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죠.” “그래서 마공들 중에서 어린아이에게 시전하며, 뭔가 무공 증진에 도움이 되는 그런 게 없나 찾아 봤답니다.” 옥화무제는 다음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찾아볼 필요나 있을까요? 그가 아이에게 추궁과혈(推躬過穴)을 해 줬다면, 꼭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죠. 물론 아이에게 추궁과혈 따위를 해 줄 인간도 아니지만.” 추궁과혈을 할 때, 상대를 두들겨 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총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추궁과혈이 아닙니다. 태상문주님. 그가 그때 사용한 것은 진골축근마공(眞骨縮筋魔功)이라는 마교의 전설적인 대법이었습니다. 사람을 상하게 만드는 무공이 아니다 보니, 마교 밖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공이지요.” 그런 대법이 있다는 건 그녀도 처음 들었기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진골축근마공? 어떤 효능이 있는데 전설적인 대법이라는 거죠?” “추밀단주가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벌모세수(伐毛洗愁)보다 훨씬 뛰어난 효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대법에 성공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성공하기만 한다면 환골탈태한 것과 유사한 근골로 만들어 준다고 하더군요.” “성공하기 힘들다면... 실패하면 어떻게 되죠? 혹시 혈도가 터져 죽는다든지......” “아닙니다. 실패하면 다시는 대법을 받지 못한다는 것 뿐, 다른 부작용은 없다고 합니다.” 옥화무제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 그게 사실이라면 엄청나군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무공을 입수하도록 하세요. 본문이 성장하는 데 큰 힘이 될 테니 말이예요.” “태상문주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대법을 받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고 합니다. 꼭 분근착골을 당하는 것 같이 극심한 고통이 몰려오는 것이......”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옥화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애를 고문했다는 말이 나왔던 거군요.” “예, 어쨌건 대법은 성공한 모양입니다. 그 나이 대에 비해 진팔 공자가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아이의 정체를 밝히자 총관의 예상대로 옥화무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불륜이라는 말일까? “아니, 그렇다면 그 아이가 진양의 둘째 아들 진팔이었단 말인가요?” “예.” “진양의 둘째 아들이 왜 그와 혈연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사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축하해 줄 만한 자리에 우연히 그 꼬마가 있어 대법을 시전해 줬을 수도 있잖아요.” “진팔과 교주와의 인연은 거기에서 끝난 게 아니었으니 문제지요. 교주는 지금도 양양성에서 진팔 공자에게 공공연하게 무공을 가르쳐 주고 있답니다.” 옥화무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런 사실을 오늘에야 본녀에게 말하는 거죠?” “속하가 태상문주님께 보고를 올리지 않은 것은, 그건 누가 봐도 제대로 된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요?” 총관은 고문에 가까운 혹독한 교육법에 대해 설명했고, 그녀는 그제야 그 사실이 왜 자신에게 보고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무영문의 첩자들은 그걸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교주가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생각해 낸 한 가지 방편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천지문이 괴멸당할 뻔했을 때, 그때도 진팔 공자는 천지문도들과 함께 사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결과는 태상문주님께서도 아시는 대롭니다.” “흐음, 그렇다면 교주가 직접 거기까지 달려간 것은 진팔 때문이었다 이 말인가요?” “예, 추밀단에서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지금까지 그와 천지문에 얽힌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옥화무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따. “그와 진팔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게 사실일지도 모르겠네요. 좀 더 확실하게 조사해 보세요. 진팔의 생모와 그 가족관계 등을 철저히 말이예요.” “예. 이미 첩보조 1개 조를 보냈습니다.” “1개 조로는 모자라요. 2, 3개 조를 더 투입하도록 하세요.” “예. 그렇게 조치해 두겠습니다.” “흠, 아무리 그래도 진팔이 그의 아들이라고 보기에는 좀......” “마교는 공식적으로 제자를 받지 않고, 어린애들을 납치해 키우지 않습니까?” “호~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군요.” 여기까지 말하던 그녀의 안색이 확 변했다. 깜빡 잊고 있었는데, 진팔이 그토록 묵향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위해를 가한 자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중원을 통틀어 가장 무서운 고수와 원수를 지게 될 테니 말이다. “이런! 그러고 보니 그가... 혹시 우리쪽에서 정보를 왜곡을 가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은 아니겠지?”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상문주님.” “팽선이 천지문에 덫을 놓은 걸 말하는 거예요. 꼬리 밟히지 않도록 확실하게 처리해 놨죠? 만약 그가 눈치 챘다면 본문은 파멸이예요.” “개방 쪽에 심어 놓은 첩자들을 통해 벌써 문서들은 완벽하게 조작해 뒀습니다. 증거를 남기지 않았으니 우리 쪽에서 정보를 왜곡했다는 걸 절대로 교주가 눈치 챌 수 없을 겁니다.” 옥화무제는 그래도 불안한지 계속 입을 열었다. “팽선의 경우를 봐요. 물증을 잡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신으로 만들어 놨잖아요.” “어쩌면 물증을 잡지 못했기에 죽이지 못한 게 아닐까요?” “죽는 것보다 못할 정도로 아작을 내놨는데도요?” 총관은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만큼 교주가 주는 공포감은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교주의 무서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지 몰라도, 총관과 옥화무제는 그가 저질러 놓은 숨겨진 이야기까기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한 번 앙심을 품으면 무림맹의 맹주조차도 무사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조건 딱 잡아떼는 게 상책입니다. 어쩌면 팽선은 교주의 유도심문에 넘어갔는지도 모르죠. 교주는 증거를 찾을 수 없자. 팽선을 찾아가서 슬슬 찔러 봤을 겁니다. 멍청한 팽선은 거기에 걸려들었고 말입니다.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밖에서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총관이 일어나 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던 문사가 고개를 숙이며 서신 한 통을 전했다. “총관 어르신, 양양성에서 도착한 급전입니다. 교주가 태상문주님을 뵙기를 청하고 있답니다.” “알겠네, 수고했네.” 총관이 뒤로 돌아섰을 때, 옥화무제는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총관은 걱정스레 옥화무제의 안색을 살핀 후, 서신을 읽었다. 옥화무제는 총관의 말을 다 들은 후, 절망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어조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교주가 왜 만현(萬縣)에서 만나자고 하는 거지? 혹시 나를......” “그건 아닐 겁니다. 태상문주님. 그의 성격상 태상문주님께서 정말 의심스러웠다면, 당장 양양성이나 그 인근에서 달려오라고 통보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만현에서 만나자고 한 날짜까지는 여유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 그렇군요.” 약간 안심이 되었는지 그녀의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여유가 좀 생기자, 그녀의 머리도 원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총관의 말이 옳다. 그는 배신자를 싫어했다. 그리고 뭔가를 처리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단숨에 해치워 버린다. 만약 그가 자신을 의심했다면 이미 손을 써 왔을 것이다. “어쩌면 의심은 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정도만 가지고 본녀를 없앨 수는 없을 거예요. 나는 아직 그에게 쓸모가 있을테니까.” “혹시 만나시면 유도심문에 넘어가시면 절대 안됩니다. 딱 잡아떼십시오.” “그건 염려할 필요 없어어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그녀의 뇌리 속에는 사지가 박살 난 처참한 몰골의 팽선이 떠오르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되살아난 마교의 꿈 하북팽가의 장로 팽선이 마교 교주에게 묵사발이 난 사건으로 인해 곤혹스럽기는 서문세가의 가주, 벽력도객 서문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림맹에서 회담이 오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전령을 보냈으면 빨리 답변이 와야 할 거 아냐!” 서문길의 질책에 총관은 쩔쩔매며 대답했다. “무림맹까지의 거리가 있는데, 어찌 그리 빨리 회답이 오겠습니까. 최소한 1주일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서문길은 도저히 짜증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꽝! “젠장, 우르르 몰려와서 별의별 헛소리를 다 해 대는데, 그걸 앞으로 1주일은 더 참고 들어야 한다는 말이냐?” 서문길은 두통이 오는지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반응은 당연했다. 팽선 사건이 벌어진 직후, 양양성에 있는 한다하는 명숙들이 모두 다 그를 찾아와 어떻게 일처리를 하는 것이 옳은지 떠들어 댔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의견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모두 다 중구난방이라는 데 있었다. 교주의 횡포를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마교와 싸울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심지어 그동안 팽선이 거들먹거리던 것이 눈꼴시렸다고 묵사발 난 게 고소하다며 씹어 대는 사람까지,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이 사건을 일으킨 마교 교주에게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주제에 자신에게만 몰려와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으니, 서문길로서는 울화가 치밀 만도 하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배분이 딸린다는 점도 있었지만, 마교와 관계된 일에 앞장서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교처럼 막강한 문파와는 될 수 있으면 개인적인 원한은 지지않는 게 상책이다. 정과 사로 나뉘어 싸울 때야 대충 세력전을 하는 선에서 끝날 수가 있지만, 문파 대 문파가 된다면 마교와 싸워 살아남을 수 있는 문파는 단 하나도 없다. 화산파 같은 대문파도 하루아침에 멸문당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서문길은 이 모든 걸 무림맹에 떠넘긴 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는 상황이었따. “그러지 말고 교주와 만나 얘기라도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답답한 소리! 무림맹에 기별을 넣은 이상, 맹의 결정에 따라야지. 내가 교주와 만나 얘기를 나눈다고 해서, 무슨 해결 방안이 생기겠는가? 자칫 그 불똥이 우리 가문에 튀면 어쩌려고 하는가. 생각 좀 하고 말을 하게!” 서문길의 질책에 총관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속하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서문길도 서문길이었지만 끊임없이 몰려드는 명숙들을 상대해야 하는 총관 역시 죽을 맛이었던 것이다. “이럴 때 아버님이 계셨어야 하는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서문길은 아버지인 수라도제를 떠올렸는지 살짝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어디론가 가 버린 수라도제지만 서문길은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의 벼을 깰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무공을 연마하다 보면 어느 순간 벽을 느끼게 되고, 그 벽을 넘을 수만 있다면 무공이 큰 폭으로 상승하게 된다. 화경의 고수가 벽을 넘는다면 현경이지 않겠는가. 만약 서문길의 바램처럼 수라도제가 현경의 고수가 된다면 무림사가 요동을 칠 게 분명했다. 양양성의 서문길로부터 긴급 보고를 접수한 무림맹의 수뇌부들은 다급히 모여 대책 회의를 가졌다. 아직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한 것이 아니었기에 회의를 주재한 것은 맹주가 아니라 그의 오른팔인 청호 장로였다. 사실, 아직 정확한 내막도 모르는 일을 가지고 맹주가 직접 나서서 회의를 주관할 수는 엇ㅂ었던 것이다. “도대체 교주가 그런 짓을 한 저의(底意)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공수개 장로.” 청호 장로의 질문에, 공수개 장로는 대답하기가 몹시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글쎄올시다. 아직 본방에 요청해 놓은 정보가 도착하지 않아서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그렇다면 언제쯤이면 정확히 알 수 있겠소이까?” “그건 저도 잘......”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백량 장로가 답답하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끼어들었다. “개방만 믿고 기다리고 있을게 아니라, 무영문 쪽에도 정보를 요청하는 게 낫지 않겠소이까?” 공수개 장로는 그 말을 꺼낸 백량 장로를 확 째려보기만 했을 뿐, 뭐라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사실 개방보다 무영문의 정보의 질이 좋다는 것은 자신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무영문 쪽에는 이미 부탁해 뒀소이다.” 청호 장로가 대답했지만 백량 장로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계속 자신의 주장을 주절거렸다. 골수까지 정파인 백량 장로인지라 처음부터 마교와의 협력 관계를 반대했따. 근나라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대세에 밀려 입을 다물고 있던 그에게 이번 사건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가 있겠소이까? 보나마나 마교 놈들이 이번 전쟁에서 발을 빼록 연극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건 아닐게요. 그자는 장인걸과 철천지원수지간이 아닙니까? 원수를 갚으려면 본맹과 힘을 합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그자도 잘 알 텐데, 뭣 때문에 동맹을 파기하는 행동을 했겠습니까?” 그래도 백량 장로는 이죽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글쎄요. 아마 장인걸 쪽에서 기가 막히게 매력적인 제안을 했을지도 모르지요.”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다 청호 장로는 잠시 생각을 해 보다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그가 아무리 생각해도 서로 간의 원한을 잠재울 만한 매력적인 제안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제안이라니요.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놈이 어떤 제안을 한다고 해도 교주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거외다. 서로 간에 쌓인 원한이 얼마나 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자, 생각들 해보시오. 마교가 지금껏 꿈꿔 온 것이 바로 무림일통(武林一統) 아니겠소? 장인걸은 그 꿈을 이워 줄 능력을 지니고 있소. 그놈이야 천하를 손에 넣을 수도 있을 테니, 무림쯤은 뚝 떼어 마교에 줘 버릴 수도 있을 거 아니오.” 그 말이 그럴듯한지 청호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를 처음부터 자신들과 같은 정파의 인물들처럼 생각했기에 제안의 답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사파의 특성을 감안해 본다면 말이 되었다. “허어~ 그것참. 그럴 수도 있겠구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다. 처음 장인걸은 자신만의 힘으로 황실은 물론이고 무림을 몽땅 다 자신의 발아래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무작정 몰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정과 사가 일치단결하여 황실을 돕자, 의외로 무너뜨리기가 힘들어졌다. 이때, 그가 꾀를 낸다. 둘 중 하나를 꼬셔서 자신과 같은 배를 타게 만든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마교의 배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청호 장로는 소름이 오싹 끼는 것을 느꼇다. 백량 장로를 바라본 청호 장로는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큰일이 아닙니까?” 자신의 말이 먹혀 들어가자 백량 장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떠들었다. “흑살마왕이나 암흑마제나 결국은 한 뿌리에서 나온 상종 못할 쓰레기들입니다. 그런 놈들을 믿고 일을 벌인 게 크나큰 실수외다. 그래서 내가 그 잡종들과 동맹을 맺는 걸 그렇게 반대했던 거요.”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청호 장로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탕탕치며 소리쳤다. “자자, 조용히들 하십시다. 아직까지는 암흑마제가 배신을 한 건 아니오. 하북팽가가 큰 피해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쪽에서도 막무가내로 일을 벌인 건 아니고 다른 이유를 댔다고 하지 않소이까?” 기세를 탄 백량 장로는 탁자를 쾅 소리 나게 치며 소리쳤다. “흥. 천지문 말씀입니까? 경우 그따위 하찮은 이유로 팽가를 묵사발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놈이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나 본맹을 하찮게 보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금 당장 뭔가 그에 합당한 응징을 가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맹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 겁니다.” 너무 과격한 주장에 청호 장로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백량 장로를 바라봤다. 만약 그 말이 사실로 드러나면 백량 장로의 말처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를 모아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먼저다. 무림맹의 수뇌부라는 사람이 지혜를 모아 이 사태를 풀 생각은 없고, 무작정 무력을 통한 응징만 주장하고 있으니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 청호 장로로서는 답답했던 것이다. “응징을 가하자구요? 그렇다면 고수들을 투입하여 이 사건의 주모자인 암흑마제의 목을 베자는 말입니까? 아니면 팽가가 박살 난 만큼의 피해를 마교 쪽에 가하자는 겁니까? 참, 팽선이 폐인이 되었으니, 지금 양양성에 와 있다는 그 흑풍대주를 폐인으로 만들면 되겠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만약 진짜 그런 일을 벌인다면, 마교와 정파는 또다시 피를 피로 씻는 전쟁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 것도 금나라라는 오랑캐를 코앞에 두고 말이다. 백량 장로 역시 머리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비꼬는 듯한 청호 장로의 말에 대답을 하기 난처해지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소이다.” “그런 뜻이 아니라니...... 이따위 일로 마교와 반목해 봐야 결국 그들과 결별하는 결과만을 만들게 되지 않겠소? 오랑캐들과 대전을 치를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마교와 사이가 안 좋아져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소.” 이대로 꼬리를 말기엔 백량 장로 역시 싫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마교의 행동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그냥 덮고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소이까?” “이 일을 벌인 암흑마제의 의도가 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그가 장인걸과 몰래 손을 잡은 것만 아니라면, 지금은 놈을 잘 달래서 써먹는 수밖에 없소이다. 그리고 그 울분은 마을 깊숙한 곳에 담아 두고 계시다가 전쟁이 끝나면 마음껏 푸시구려. 그게 좋지 않겠소?”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공수개 장로가 앞으로 나섰다. “청호 진인의 말씀이 옳은 듯 합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마교를 관찰해 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길인 듯싶군요.” 공수개 장로까지 나서자 백량 장로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으면서도 이죽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팽가나 팽가와 친분을 맺고 있는 다른 문파들이 이 일을 어찌 받아들일지......” 그 일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기에 청호 장로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잠시 참아야 했다. “그쪽은 그쪽대로 따로 손을 써야겠지요.” 잠시 궁리를 하던 청호 장로는 백량 장로의 옆에 앉아 있는 만수 장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수 장로.” “예. 말씀하십시오. 사형.” 만수 장로는 무당파 출신으로 청호 장로의 사제이기에 공식석상임에도 불구하고 깍듯이 존대를 쓴 것이다. “자네는 팽가주에게 가서, 봄이 되어 전쟁이 재개되면 마교도들을 가장 앞에 세워 막대한 피를 흘리게 만들 테니 지금은 노화를 풀라고 설 듯 좀 해 주게.” 무림맹의 수뇌부 중 가장 팽가주와 허물없이 지내는 이가 만수 장로이기에 그에게 부탁한 것이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공수개 장로가 조언을 던졌다. “팽가의 경우 하북에서 쫓겨나 오랫동안 객지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맹에서 약간이라도 지원을 해 준다면 팽가주가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호오. 그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려.” 어느샌가 대책 획의 방향이 마교에 대한 보복에서 팽가주를 어떻게 달래느냐 하는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청호 장로는 다른 장로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노기를 어느 정도 가라앉히는 데 최선을 다했다. 괜히 성질이 급한 장로들 중 한둘이 마교 쪽에 감당 못할 짓이라도 해 버리면 큰일이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맹주에게 회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걸어갔다. 이때, 공수개 장로가 맹주에게 드릴 말이 이TEk고 했으므로 그는 공수개 장로와 함께 맹주실로 들어갔다. 마침 맹주는 감찰부주와 담소를 주고 받고 있는 중이었다. “어서 오게, 이리 앉게나.” 둘이 자리에 앉자, 맹주는 청호 장로에게 물었다. “그래, 장로들의 생각은 어떻더냐?” 청호 장로와 감찰부주는 무당파의 은거고수였던 태극검제가 맹주에 선출되었을 때 무림맹에 데리고 온 인물들이다. 둘 다 태극검제의 사질들로서, 뛰어난 실력과 인품을 지닌 무당파의 고수들이었다. 맹주의 물음에 청호 장로는 쓸데없는 부분은 다 빼고, 회의 결과를 간략하게 간추려 대답했다. 그걸 다 들은 맹주는 수염을 쓱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흐음, 결국는 두고 보며 관찰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맹주님.” “청호 사질. 교주가 팽가와 사단을 벌인 이유가 천지문 때문이라고 했느냐?” “예. 서문가주가 보내온 전서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금나라를 상대로 벌였던 작전에서 천지문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게 그 이유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청호 장로는 그때 있었던 작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보고서를 슬쩍 맹주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맹주는 그 걸 펼쳐 보지 않고 청호 장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마교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더냐?” “조금 의심스러운 점은 있었습니다.” 맹주는 감찰부주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청수 사질. 네 생각도 그러하냐?” “예. 저도 사형과 같은 생각입니다. 천지문에서 큰 피해를 당한 것은 유감이지만 증거도 없는데, 팽선 같은 원로고수를 폐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너무 과한 처사였습니다. 혹. 교주가 시비를 걸기 위해 일부러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에는 맹주의 시선이 공수개 장로에게로 옮아갔다. “공수개 장로의 생각은 어떻소? 기왕에 여기 오셨으니 개방의 고견을 들려주시구려.” 공수개 장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저도 그 일 때문에 맹주님께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뵌 겁니다.” 공수개 장로는 청호 장로와 감찰부주의 눈치를 힐끗 살핀 후, 말을 이었다. “어쩌면 교주의 의도는 다른 데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본방의 생각입니다.” “다른 데 있을 수도 있다니요? 그게 뭡니까?” “마교의 꿈 말입니다.” 마치 선문답이나 하자는 듯한 공수개 장로의 대답에 감찰부주의 안색에 약간의 짜증이 떠올랐다. 정보를 다루는 것이 주 업무이다 보니, 얄팍한 정보 하나를 가지고 뭔가 엄청난 것이라도 알고 있다는 듯 시간을 질질 끄는 것이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공수개 장로.” “마교의 꿈이라면 다른 게 있겠습니까? 바로 무림일통을 말하는 것이지요.” “무림일통이라니요. 왜 그 말이 여기서 튀어나오는지 빈도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소이다. 그려.” “단일방파로서는 마교가 최강의 힘을 지니고 있을 겁니다. 역대 마교의 교주들은 그 힘을 이용하여 무림을 정복하려 했고, 좌절당했습니다. 그게 바로 무림의 역사였죠.” “그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오. 그런데 공수개 장로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이 도대체 뭐요?” 감찰부주의 채근에 공수개 장로는 자신이 생각해 온 결론을 밝혔다. “이번에 천지문의 일을 빌미로 해서 팽가를 친 이유는 교주가 자신의 영향력을 무림에 과시하기 위해 벌인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현재 마교는 역대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자성만마대와 함께 마교에서 가장 하급에 꼽히는 것이 바로 흑풍단입니다. 핵심 전투단다 아닌 흑풍대가 대금전쟁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리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모두들 공수개 장로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욱 위험한 것은 그가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만통음제와 의형제를 맺었고, 황룡무제나 패력검제와도 꽤 친분을 쌓은 것으로 좃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현천검제도 그의 수하로 받아들였지요.” 그 말에 감찰부주가 가장 크게 놀랐다. 왜냐하면 정보를 취급하는 그가 이런 얘기를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현천검제라니요? 그는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 말에 청호 장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끼어 들었다. “그건 무슨 말인가? 사제. 화산파에서는 그가 은퇴했다고 발표했었는데......” “사형도 참. 마교의 첩자였던 사람을 어떻게 은퇴시키겠습니까. 죽여 버렸겠죠. 그 때문에 교주가 화가 나서 화산파를 멸문시켜 버린 게 아니겠습니까.” “조용히들 해라.” 맹주는 청호 장로와 감찰부주를 질책한 후, 공수개 장로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자 빨리 말해 보게, 공수개 장로. 그 말을 꺼낸 이유가 뭔가? 혹, 현천검제가 마교에 있는 걸 찾아내기라도 했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단전이 파괴되거나 한 것도 아니고, 아주 건강한 상태로 마교도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럴 수가......” “그리고 무영문의 옥화봉공님도 교주와 상당한 친분을 유지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천검제가 생존해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현 무림에 존재하는 화경급 고수는 아홉 명으로 늘어납니다. 3황6제가 되겠지요. 그들 중 교주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수는 무려 다섯 명이나 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공수개 장로의 말에 좌중에 있던 세 사람은 말문을 잃어야 했다. 맹주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라도 하려는 듯 헛기침을 하며 공수개 장로를 바라보았다. 계속 말을 해 보라는 표시였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교주 같은 최강자를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현 무림에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여럿이서 협공을 할 수밖에 없을텐데, 아홉 명의 화경급 고수들 중 다섯 명을 그가 포섭해 버렸다면 제대로 된 공격이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교주 밑에는 최소한 한 명 이상의 부교주가 존재 하고 있습니다. 극마급인 그들의 존재까지 가세한다면......” “그만! 그 말씀, 책임지실 수 있소?” “물론입니다, 감찰부주. 만약 제가 말한 것 중에 엉터리 정보가 있다면, 제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 공수개 장로가 워낙 자신있게 대답했기에 감찰부주는 입을 꽉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맹주는 이 정보에 대한 판단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엄청난 충격을 준 정보였던 것이다. 개방과 공수개 장로의 공로를 치하한 맹주는 공수개 장로에게 마교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모아 줄 것을 당부했다. 지금으로서는 정보를 통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근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공수개 장로는 마교쪽의 동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시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수개 장로를 내보낸 후,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맹주는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양양성에 가 보는 것이 좋겠구나.”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맹주님.” “수라도제가 제 역할을 못 해 주고 있으니 교주가 그토록 간 크게 나올 수가 있는 게 아니겠느냐? 그가 일처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노부가 가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맹주님. 차라리 이번 기회에 곤륜파를 끌어들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썩 내키지 않는다 듯 맹주가 대꾸했다. 곤륜무황은 그의 오랜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곤륜무황을 말이냐?” “예. 맹주님께서 벌써부터 앞으로 나서신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아직까지는 뭐 하나 제대로 된 정보가 취합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교주가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맹주님께서 양양성에 직접 가 계시는 것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좋다. 그건 네가 알아서 처리하거라.” “예, 맡겨만 주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맹주는 청호 장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영문에서는 뭔가 들어온 정보가 없었느냐? 개방에서 저런 결론을 내렸을 정도인데, 무영문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느냐.“ “아직 아무런 보고도 없었습니다.” “이상한 일이구나. 그렇다면 공수개 장로의 말대로 마교 쪽과 손을 잡은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노회한 옥화 봉공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리 없습니다. 계속적으로 양쪽을 저울질하며 어느 한쪽으로 평행추가 기울 때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계속되는 좋지않은 보고에 맹주는 답답한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중원 전체에 괴이한 혈겁까지 벌어지고 있는데. 정보에 있어 최고라는 무영문까지 믿지 못하는 사태에 이르렀으니 정말 산 넘어 산이로구나, 무량수불.” “심려 놓으십시오, 맹주님. 아직까지는 정확한 흉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저희 감찰부 소속의 고수들까지 다수 파견해 놨으니 조만간 결론을 낼 수 있을 겁니다.” 존경하는 사숙이 한숨을 내쉬자 감찰부주 역시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걱정 마시라고 말은 했지만 아직 흉수에 대한 조그마한 단서조차 찾지 못한 감찰부주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쾅! “이럴 수가 없어, 어떻게 서문세가에서 우리 팽가를 이렇게 무시한단 말인가!” 서문길을 만나 마교에 강력한 대응을 요구하고 돌아온 팽지량 장로는 치미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자신을 상대하던 서문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팽지량이다. 은근히 발을 빼려고 하는 서문길의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우리 팽가가 피를 흘리며 희생을 치렀건만 치하는 고사하고, 이런 무시를 당해야만 하다니......” 이번 작전에 동원되었다가 희생된 제자들을 떠올린 팽지량은 행패를 부린 마교 교주보다, 믿었던 서문길에 대한 원망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한동안 치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탁자 주위를 서성거리던 팽지량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밖을 향해 소리쳤다. “게 누구 있느냐?” “옛!”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2대제자 한 명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어왔다. “너는 당장 이번 전투에 참여한 제자들 중 한 명을 데리고 오너라. 자세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제자여야 한다.” “옛,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팽지량이 힐끗 보니 아직 상처가 채 낫지 않아 안색이 창백했다. 그런 자를 이쪽으로 불러들인 것이 안쓰러웠기에 질문을 던지는 팽지량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이번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끝날 때까지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상세하게 말해 봐라.” “예. 처음 제가 지시를 받은 것은......” 처음에는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그 제자는 어느 순간 슬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사건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제자는 그의 기대보다 훨씬 더 아는 것이 많았다. 천지문과의 불화를 시작으로 작전이 수립되고, 예상과는 달리 없어야 할 적병들이 대거 나타나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던 것까지. 한참 이야기를 듣던 팽지량 장로는 점차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왠지 팽선이 천지문에게 수작을 부렸다는 냄새가 짙게 풍겼던 것이다. 제자가 말한 내용 그대로라면 누구라도 팽선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천지문을 사지로 밀어 넣었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지 않은가. “이놈! 허튼 소리를 했다가는 당장 목을 날려 버리겠다.” “그, 그렇지는 않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들어 본 바에 의하면 팽선보다 마교 교주의 말에 더 믿음이 갔다. 더군다나 이야기를 하는 제자는 2대제자로서 팽선의 행동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던 자였다. 당연히 팽지량으로서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 팽선이 어찌 그런 악수를 저질렀단 말인가.’ 잠시 망연자실해 있던 팽지량은, 정색을 하고 제자를 향해 엄한 어조로 말했다. “추호라도 다른 곳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이런 이야기가 들려오면 내 손으로 네 목을 벨 것이야.” “옛.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입 조심을 하도록 조치를 취하거라. 아니, 아예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도록 해라. 본 세가는 이번 전투로 인해 고귀한 피를 흘렸다는 것 외에는 모두 다 잊어라. 알겠느냐?” 제자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한 듯 긴장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절대 외부로 새 나가지 않도록 단속을 철저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만 나가 보거라.” 제자가 밖으로 나가지 팽지량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노회하던 팽선이 어찌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했단 말인가?” 잘못하면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왔던 팽가의 명성이 일순가에 진흙탕에 나뒹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팽지량은 나오는 한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수심에 잠긴 팽지량은 사지가 박살 나 아예 사람구실을 하기엔 불가능한 팽선의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이 아파 왔다 지금껏 팽가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팽선이었기에 그 안타까움은 더욱 애절했는지도 모른다. 개방도와 만나고 돌아온 현천검제는 눈앞이 깜깜했다. 전통 있는 명문정파의 장문인이었던 자신이 마교의 무리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개방의 입이 얼마나 싼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은가. 다급한 김에 방주를 찾아가 해명을 하겠노라고 말은 했지만 찾아가 만나 봐야 무슨 얘기를 하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 숨어 버리고 싶지만 사형인 묵향을 생각 하니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길이 보이지 않자 현천검제로서는 나오는 게 한숨뿐이었다. “휴우~~~” 이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연이 망를 건넸다. “사숙께서도 무슨 근심이 있으신가요? 근래 두 분 다 왜들 그러시는지......”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패력검제께서는 무슨 고민이라도 있소?” 자신에게로 향하는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현천검제는 은근슬쩍 패력검제를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 패력검제는 그 말에 함참을 망설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댁도 참 용하시오. 그런 괴물들과 함께 잘 지내고 계시는 걸 보면......” “어쩔 수 있소? 팔자려니 해야지.” 패력검제로서는 마치 세상사를 포기한 듯한 현천검제의 태가가 가슴에 와 닫았다. 이해가 충분히 되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를 보고 난 후, 요즘 자다가도 가위에 눌려 벌떡벌떡 일어나곤 하지 않은가. 묵향의 무공을 접했을 때의 아득한 절망감과는 또 다른 완벽한 허탈감이었다. 전설 속의 존재인 용, 그리고 그 용이 아들이고 말하는 마교 교주. 지금까지 살아오며 쌓아 왔던 관념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헛것을 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화타가 환생한다 해도 살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소연이 한순간 빛무리에 휩싸이더니 멀쩡하게 나아 버린 건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리고 꿈에서도 잊기 힘들 정도로 무자비한 구타까지 당한 그였다. 그때는 정말이지 자존심이고 뭐고, 제발 좀 그만 패라고 얼마나 싹싹 빌었던가. 만약 상대가 사람이었다면 약한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목을 베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전설 속의 영물인 용이었다. 그것도 성질이 아주 더러운. 잠시 안쓰러운 눈빛으로 현천검제를 바라보던 패력검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장이 곁에 있는 만큼, 소연이의 안위는 문제가 없을 듯하고, 그래서 본인은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을 듯하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사실 나도 형장에게 그 일을 부탁하려했는데......” 양양성에 가서 사형인 묵향과 수많은 정파인들을 만날 생각을 하자 눈앞이 깜깜했던 현천검제는 건수만 생기면 어딘가로 튈 생각이었다. 그런데 패력검제에게 선수를 빼앗긴 셈이다. “어디로 가시려고?” “허허, 그건 아실 필요 없고, 급한 볼일 한 가지가 생각나서 말이오. 그럼 소연이를 잘 부탁드리겠소.” 그 말을 끝으로 패력검제는 곧바로 몸을 돌려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부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현천검제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악비 대장군 양양과 무한을 거점으로 호북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대 군벌(大軍閥)의 범 같은 장수 악비, 송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금나라 오랑캐를 맞이해 양양성에서 무한에 이르는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마든 대단한 인물이다. 금나라 병사들에게는 수라(修羅)의 화신인 듯 두려움의 대상인 악비였지만 봄이 다가올수록 그의 안색에는 점차 수심이 깊어 갔다. 봄이 되면 수라도제가 무림인들을 이끌고 북진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무림인들이 지닌 가공할 만한 힘을 익히 알고 있는 그였지만, 집단 전투에 취약한 무림인들만으로는 금나라에 커다란 타격을 주기는 힘들다고 악비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접전에 능한 장졸들이 그들과 합류한다면 금나라 오랑캐를 멸망시킨다는 게 가능 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황제로부터 절대 북진을 불허한다는 칙명이 선포되었다는 점이다. 유약한 황제였지만 칙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반역이라는 말과 다름 없다. 한참을 고민하던 악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군. 내가 직접 가서 재상과 담판을 짓는 수밖에.” 화평을 주장하는 재상 진회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황제를 움직일 수 있기에 내린 결론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곁에 있던 유광세 상장군이 반발을 하며 나섰다. “그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놈입니다. 대장군.” “그게 아니라면 방법이 없지 않는냐? 칙령을 철회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군을 움직였다가는 최악의 경우 반역죄에 걸릴 수 있음이야.” “어떤 놈이 감히 대장군을 잡아 금의위의 지하 감옥에 집어넣는다는 말입니까? 그런 놈이 있다면 소장이 직접 목을 베어 버릴 테니, 대장군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물론 자네 말대로야. 하지만 본관이 반역죄를 뒤집어쓴 이상. 장졸들이 본관의 말에 따르겠는가?” 유광세 상장군은 입술을 질끈 깨문 뒤 악비를 바라보았다. “대장군, 본관을 비롯한 모든 병졸들은 언제든 대장군의 명에만 따를 것입니다. 설사 목을 내 놓으라고 명령을 내리신다고 해도 말입니다.” 마음 든든한 유광세 상장군의 말에 악비는 환하게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자네의 충성심은 언제나 나를 든든하게 해 주는구먼. 좋아, 귀관의 말대로 본관의 부하들은 모두 충성을 다할 거라고 믿네. 그렇다면 주위에 있는 다른 군벌들은 본관의 요청에 응해 주겠는가? 반역자의 낙인이 찍혀 있는 본관의 요청에 말이야.” “그, 그건......” 유광세 상장군은 도저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악비의 요청을 들어줄 가능성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상과의 협의가 필요한 걸세. 알겠는가?” “정히 그러시다면... 언제 출발하시겠습니까? 대장군.” “내일 새벽에 출발할까 생각하고 있네. 어느 정도 급한 일은 대부분 다 마무리 지어 놓은 상태니, 본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 해도 큰 문제는 없을거야.” “알겠습니다, 대장군. 호위대를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그러자 악비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황도에 들어가는 것이니 호위병이 많을 필요 없네. 놈들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판국에 쓸데없이 병사를 뺄 수는 없지 않겠나?” “백 명 정도로 준비하겠습니다. 대장군.” 악비는 좀 더 줄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유광세 상장군의 단호한 눈빛을 보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사실 양양성에서 황도인 남경까지는 대단히 먼 거리다. 몇 날 며칠 동안 행군을 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 만큼, 혹시라도 적의 기습을 당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었다. 송을 지탱하는 거목인 악비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철저히 대비하고 싶었던 유광세 상장군에게 있어. 호위병 백 명만 해도 최대한 양보한 숫자였던 것이다 팽가에서 팽선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묵향은 요즘 막힌 속이 뻥 뚫린 듯 개운한 표정이었다. 일을 마무리 지어버렸으니 더 이상 문서를 뒤지고 앉아 있을 필요도 없어졌다. 그런 그의 유쾌한 기분은 진팔과의 비무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소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진팔의 무공을 높일 필요는 있지만 전처럼 비무를 가장한 구타를 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초식을 운용할 때의 주의점을 말해 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 줬던 것이다. 물론 그런 묵향의 호의를 진팔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팽가와의 사건이 있은 뒤 묵향이 신경 쓰고 있다는 천지문에, 그리고 진팔에 쏟아지는 눈길은 엄청났다. 서문세가와 무림맹, 개방, 무영문 할 것 없이 무림에서 정보 조직을 운영하는 어지간한 문파의 시선들이 천지문에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이제 묵향과 진팔의 묘한 관계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철면피에 악독한 묵향이지만 이렇게 타인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전처럼 심하게 굴리기는 힘들 거라는 것이 요즘 갑자기 편해진 비무에 대한 진팔의 판단이었다. 그래도 멍이 든 곳을 또 맞으면 아프기는 하기에 비무만 하면 진팔은 몸서리를 쳐야 했다. 진팔과 비무를 끝낸 뒤 묵향은 느긋한 걸음으로 만통음제에게로 갔다. 오랜만에 같이 음률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통 밤에 찾아갔지만, 오늘은 일이 있었기에 낮에 그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그 도중에 어딘가로 바삐 걸어가고 있는 유광세 상장군을 만났다. 유광세 상장군은 묵향을 보자마자 다가와서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랜만입니다. 묵 대인.” “오, 유 상장군이셨구려. 어딜 그리 바삐 가는 길이시오?” “서문 대인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서문? 수라도제 말씀이오?” “아니요. 그 아드님 말입니다.” 유광세 상장군의 말에 묵향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 cos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악비의 최측근인 유광세 상장군이 이렇게 바삐 서문세가를 향해 발길을 옮기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묵향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혹, 놈들의 움직임이라도 포착되었소?” “그게 아니라 대장군께서 황도에 가시겠다고 하셔서 호위무사를 청하려고 말입니다. 황도까지 거리가 워낙 멀다 보니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대장군의 지시에 의해 호위병을 백 명으로 제한받자, 유광세 상장군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서문세가에 부탁하여 무예가 뛰어난 무사들로 하여금 외곽 호위를 하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을 듣고 “오, 그러쇼? 그럼, 잘해보쇼”하고 느긋하게 대꾸해줄 묵향이 아니다. 심기가 좋지 않은 듯 묵향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단일 세력으로 친다면 무림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마교 교주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서문세가 따위에게 경호를 요청하겠다고 하니 속이 뒤틀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짐짓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구려. 그렇다면 구태여 거기까지 가서 아쉬운 소리 할 필요 없소. 본좌의 수하들을 내드리지. 서문세가의 쓰레기들보다는 훨씬 보탬이 될 거요.” 사실 유광세 상장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파니 샆니 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구분이었다. 근처에 잇Sms 것만으로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마기를 풀풀 풍기는 원(?) 무사들을 보지않은 그였기에 흑풍단의 무사나 정파 소속의 무사나 별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경호를 요청한다고 해서 서문세가에서 흔쾌히 그걸 받아들여 줄지도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관지에게 말해 일정에 맞춰 호위 무사들을 보내 주겠소. 확실하게 경호해야 할 테니, 천인대 하나 정도 보내 드리면 되겠소?” 천인대를 보내 준다는 말에 유광세 상장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황급히 포권하며 기쁨을 표시했다. “가, 감사합니다. 묵 대인.” “뭘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럼 대장군에게 황도에 잘 다녀오시라고 전해 주시구려.” 묵향이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급히 유광세 상장군이 불렀다. “저, 묵 대인.” “왜 그러시오? 다른 용건이 또 있으시오?” “깜빡 잊었는데... 대장군께서는 많은 수의 호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만큼, 천인대는 가급적 대장군의 눈에 띄지 않는 원거리에서 호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지시해 두리다.” 묵향은 유광세 상장군과 헤어진 후, 곧바로 만통음제에게로 갔다. 만통음제는 아직 완벽하게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하루하루 몸조리에 힘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묵향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만통음제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반겨 맞이했다. “어서 오게.”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형님.” 그말에 만통음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묵향의 말이 싫지는 않은 듯 곧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허허, 하루에 한 번은 꼭 찾아오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묵향은 주위를 쓱 둘러보다 불쑥 물었다. “그런데 지련는 어디 갔습니까?” 만통음제는 짐짓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대답했다. “폭풍검을 만나러 갔지.” “폭풍검이요?” 그가 누군지 생각하느라 잠시 말을 멈춘 묵향은 곧 패력검제의 아들인 서량을 말하는 것임을 기억해 냈다. 그런데 그 녀석을 설취가 만나러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놈을 왜 만나요?” “요즘 몸도 찌뿌드드할 텐데 한판 뜨자고 놈이 취아를 꼬셨거든.” 만통음제의 말에 묵향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아니. 그놈이 질녀에게 그딴 소리를 지껄였단 말씀이십니까? 내 그놈의 주둥아리를 확 찢어 놔야......” 씨근거리며 벌떡 일어서서 나가려는 묵향의 손을 만통음제가 급히 붙잡았다. “허, 사람 성질하고는. 녀석이 한 말은 좀더 완곡한 표현이었는데, 옆에서 내가 들어보니 대충 그런 뜯이었다는 말일세.” 묵향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흐음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놈이 질녀와 대련을 해 주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혹시 뭔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게 아닐까요?” 묵향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설취보다 그놈이 훨씬 더 윗줄에 놓이는 고수였기 때문이다. 배울 것도 없는데 왜 자신보다 하수와 수고스럽게 대련을 해 준단 말인가? 뭔가 흑심이라도 품고 있지 않고서야. 만통음제는 음흉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걸 이제야 눈치 챋니, 자네도 참 둔감하기 이를 데 없구먼. 내가 보니, 오래전부터 놈이 취아를 살펴보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었거든.”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렇다면......” “그렇다면은 뭐가 그렇다면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그냥 가만히 놔둬도 뻘 짓만 하다 끝날게 뻔하거든. 첫째 놈도 취아를 마음에 두고 그렇게 공를 들였지 않은가.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하물며 취아보다 훨씬 더 어린 녀석이 까불어 봐야 그 아이가 눈썹 하나 까딱하겠나?” “그래도 사람의 일은 모르지 않습니까? 질녀의 취향이 연하일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보니 그 녀석 꽤 괜찮은 놈인 것 같던데......” “흠,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겠지. 첫째 놈이야 상심하겠지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오늘은 일찍 왔군. 나는 동생이 해질녘이 다 되어서야 올 줄 알았는데 말일세.” 묵향은 요즘 저녁쯤에 문병을 핑계로 술병을 들고 찾아왔다. 함께 가볍게 한잔 마시고, 만통음제의 금에 맞춰 피리로 합주(合奏)를 즐기는 것이 요 며칠간 그들이 해 온 저녁 일과였다. “아, 형님하고 함께 가 볼 데가 있어서요. 요즘 방에만 계셔서 엉덩이가 근질근질하실 거 아닙니까? 그런대로 몸도 쾌차하신 것 같은데. 저하고 같이 바람이나 쐬러 나가시죠.” 만통음제는 묵향의 제안이 솔깃한 모양이다. “그럴까?” 마음이 동한 만통음제는 금(琴)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객잔 문을 나선 그가 어딘가로 가려고 하자 묵향이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 끌며 물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저하고 바람 쐬러 가자니까요.” “갈 때 가더라도 추이ㅏ에게 말해 놓고 가야 할 거 아닌가?” 설취에게 행선지를 얘기하고 오겠다는 말에 묵향은 한심하다는 듯 이죽거렸다. “아니,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면서 제자한테 그런 보고까지 올려야 합니까?” 묵향이 ‘보고를 한다’는 식으로 비꼬자, 만통음제는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사라지면 걱정할 텐데......” “걱정은 무슨 걱정이요.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지혜라구요. 그래야 사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만큼 긴장을 늦추지 않고 생활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사라져서 언제 돌아오겠다” 이렇게 말해 놓으면 “해방이다!” 하면서 열심히 놀 게 당연하죠. 안 그래요?” “흠,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조금 억지스런 주장임에도 만통음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괜히 쓸데없는 것으로 입씨름 해 봤자 입만 아프다. 사실 묵향이 한 번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면 어떤 식으로든 궤변을 늘어놓으면서까지 이기려고 들었다. 또한 이런 식으로 우기는 것이 언제나 보면 별 볼일 없는 사안이었기에 그냥 져 주는 것이기도 했다. 마화도 여자랍니다 제령문도들이 묵고 있는 장원은 양양성의 동문 쪽에 위치해 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10여 필에 달하는 말과 수십 명에 달하는 제령문 식솔들이 지내기에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더군다나 장원에는 무술을 수련할 수 있도록 작은 연무장까지 달려 있었다. 연무장에서 치열한 비무를 하고 있는 남녀. 바로 서량과 설취다. 서량은 폭풍검이라는 명호답게 마치 폭풍과도 같은 사나운 검세로 몰아쳤다. 그리고 그에 대적하는 설취는 구름 사이로 꽃잎이 날아다니듯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로운 검으로 맞서고 있다. 나이는 설취가 일곱 살 정도 연상이었지만, 검술은 서량 쪽이 훨씬 더 깊이 있게 깨닫고 있는 상태다. 설취의 경우 서량과 달리 문파의 대를 이을 필요가 없는 만큼, 만통음제가 그녀의 수련을 심하게 닦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격차였다. 만약 그렇지 않고 설취도 대사형인 냉파천처럼 뼈를 깎는 수련을 시켰다면 서량에게 그리 심하게 뒤처지지는 않았으리라.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좋겠스니다.” 그렇게 말한 서량은 재빨리 옆쪽으로 달려가 미리 준비해 놓은 수건을 가져다가 설취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서 공자. 오랜만에 땀을 흘리니 정말 기분 좋네요.” “시원한 거라도 가져오라고 이를까요?” 그걸 마시면서 잠시 담소라도 나주자는 말이다. 하지만 설취는 살짝 하늘을 살펴본 뒤 고개를 흔들었다. “말씀은 정말 고맙지만 이만 가 봐야겠어요. 사부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테고, 더 이상 서 공자의 시간을 뺏는다는 것도 염치 없는 짓이니 말이예요.” 서량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손을 저었다. “시간을 뺏는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설 소저.” “패력검제 대협께서 출타하신 후, 서 공자께서 문파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신다고 듣었는걸요, 그걸 잘 알면서도......” “전혀 패가 되지 않으니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참, 오랜만에 오셨는데, 조 소저와 얘기라도 나누고 가시죠. 요즘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꽤 적적해 하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조 소저의 말벗이요?” 설취의 반문에 서량은 아차 싶었다. 설취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말을 돌리다 보니 실수를 한 것이다. 근래 조령은 패력검제로부터 무공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패력검제는 조령과 사제지간을 맺지 않았다. 그냥 심심풀이 삼아 무공만 조금씩 가르쳐 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별 볼일 없는 무공들로만 골라서 말이다. 패력검제가 조령을 자신의 정식 제자로 삼지 않은 이유는 그녀의 자질이 형편없다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융는 그녀의 정체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량은 조령과 사형제지간이 아닌 그냥 아버지의 손님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대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 조령의 나이 스물 둘. 일반적인 여성의 나일 봤을 때는 꽤나 나이 먹은 축에 들어가겠지만, 이곳 무림에서는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웬만한 명가의 여식들이라면 무공수련을 끝내고 출도할 때의 나이가 가볍게 서른을 넘겨 버리니 말이다. 더군다나 설취의 경우 제자까지 키우고 있다. 그녀의 제자인 송화의 나이가 조령과 엇비슷할 정도니, 설취에게 조령의 말벗이나 해 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조금 실례되는 부탁일 수도 있다. 일단 말을 꺼내 놓은 상태에서 그걸 깨달은 서량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저, 제가 한 말은 그러니까... 조 소저가 여기 와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고, 또 지금 아버지도 안 계신 만큼 뭔가 조언을 청할 상대도 없고, 그래서 설 소저께서 조 소저를 젲처럼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뭔가 앞뒤가 안맞는 횡설수설이다. 하지만 상대가 당황해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이해하짐 못할 설취가 아니다 그녀는 활짝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서 공자께서 조 소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지 몰랐군요. 패력검제 대협께서 안 계신 동안이라도 제가 신경 써드릴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가, 감사합니다.” “그럼 잠깐 조 소저의 얼굴이나 보고 갈까요?” 서량은 부랴부랴 아랫사람을 불러 조 소저가 어디 있는지 물었지만, 그녀의 행방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문을 지키는 무사에게 알아본 결과 두 시진쯤 전에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하지만 서량은 그녀의 행방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 곁에는 제법 실력 있는 호위 무사가 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그가 이리로 달려올 게 분명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조령의 행방을 찾기 위해 계속 아랫사람을 불렀던 것은 조금이라도 설취와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찾아도 조령의 행방을 알 수 없자 설취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너무 늦어 시간이 안 될 것 같고, 조 소저하고는 다음에 만나서 얘기를 나눠 볼게요.” “예.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대로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지, 설취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량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염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부님.” 그렇게 말하며 사부의 방문을 열었지만, 설취의 예상과 달리 만통음제는 방 안에 없었다. “어디에 가셨지? 잠시 자리를 비우신 모양이네.” 그녀는 급히 물을 끓였다. 몸이 불편한 사부에게 향긋한 차를 올리기 위해서. 하지만 뜨겁게 끓인 물이 차갑게 식을 정도로 기다려도 사부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그녀는 이리저리 객잔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그녀의 생각과 달리 만통음제의 모습은 객잔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셨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일상의 생활로 되돌아 갔다. 비록 상처를 입어 몸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천하에 자신의 사부를 해코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설취였다. 그랬기에 사부가 보이지 않아도 걱정을 하지 않고, 잠시 밖으로 산보를 나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날이 저물고 있는데도 만통음제가 돌아오지 않자 설취의 미간에 근심의 기색이 살짝 떠올랐다. 밤이 되면 묵향 사숙이 매일처럼 그래왔듯이 술병을 들고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런 만큼 사부는 어딘가 볼일이 있어 나갔다고 해도 밤이 되기 전에 돌아와야 했다. 옆에서 보면 샘이 날 정도로 묵향에 대한 만통음제의 애정이 각별하다는 것을 설취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초조한 모습으로 방 안을 서성거리던 설취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가 저물어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사부는 물론이고 매일처럼 모습을 드러내던 묵향 사숙마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지자 설취는 숙소를 나와 묵향이 기거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자신의 사부가 묵향 사숙이 있는 곳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상시의 사부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지금 사부의 몸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장인걸에게 워낙 호되게 당했었기에 상처가 아직까지 완치되지 않았던 것이다. 의생이 만통음제의 몸에서 잘라낸 썩은 살덩이만 해도 한 근은 족히 되었을 정도였으니, 그런 치명상을 당하고도 목숨을 건진 것은 정말이지 기적이었다. 마교의 무사들이 머무르고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설취는 사부의 행방을 묻기 위해 마화를 찾았다. 양양성에서 하루 이틀 얼굴을 보는 것도 아니었고, 모시는 분들끼리 서로 호형호제를 하다 보니 그녀들도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설취로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화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지라 점차 잊혀져 가던 자신의 첫사랑이 불쑥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중년의 나이라고는 해도 아직 누군가와 사랑의 감정을 공유해 보지 못했던 설취로서는 조금씩 되살아나는 예전의 감정을 당혹스런 마음으로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묵향에 대한 마화의 짝사랑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동병상련의 정 때문인지. 설취는 그런 마화를 친언니처럼 따랐다. 마화가 일하는 곳까지 찾아간 설취는 그녀를 보자 반갑게 안사했다. “저 왔어요, 언니.” “어, 왔니? 어서 와.” 하지만 말과 달리 마화의 안색은 썩 밝지 못해따. 어떻게 보면 “꼴 보기 싫은 데 너 왜 왔니?”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에 설취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평상시에는 몰랐는데 오늘 이렇게 보니 마화가 아주 무섭게 보였던 것이다. “저... 시간을 잘못 택해 온 것 같네요. 저는 그만 가 볼께요. 별로 다른 볼일은 없었고... 지나가다가 언니 얼굴이나 볼까 해서 온것뿐이예요.” 허둥지둥 밖으로 다시 나가려는 설취와 옷섶음 꽉 잡아당기며 마화가 급히 말했다. “기왕 왔으니 차라도 한잔하고 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짜증이 묻어 있었다. “저... 그렇지만 언니 기분도 별로 안좋으신거 같고......” “내가?” 그제야 마화는 아차 싶은 모양이다. 무심결에 설취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던 자신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지금 기분이 안 좋은 게 사실이기는 했지만, 기왕에 찾아온 손님을 이대로 보낼 수e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년는 될 수 있으면 밝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털털하게 말했다. “내가 성격이 좀 그래서 그래. 방금 전에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있었거든. 너 때문에 그런거 아니니까 들어와서 차나 한잔하고가.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이렇게 보낼 수는 없잖아. 응?” 상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 그럴까요?” 설취는 마화가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이곳으로 온 용건부터 슬며시 꺼냈다. “언니, 혹시 사부님께서 여기 오시지 않으셨어요?” “글세. 잘 모르겠는......” 여기까지 말하던 마화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눈치 챘다. 그녀는 곧바로 자신이 생각 한 바를 설취에게 말했다. “아마 교주님하고 같이 계실 거야. 교주님께서 말을 두 필 끌고 나가셨거든.” 평상시 묵향은 말을 타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을 타고 이동해 봐야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말 두 필을 끌고 나갔다는 것은. 곧 누군가와 동행을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교주... 사숙님하고요? 사숙께서는 어디에 가셨는데요?” 마화는 설취가 마실 차를 끓이기 위해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도. 상대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옥화무제를 만나러 만현으로 가셨어.” 설취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만현에요? 아주 급한 볼일이 있으셨나 보네요. 지금까지 사부님께서 어딜 가실 때면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곤 했는데, 이번엔 저한테 아무 말도 안하고 가신 걸 보면......” 설취의 물음에 대답을 해 주는 마화의 목소리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급한 볼일이라기보다는 그건 교주님께서 흔히 쓰시는 방법이야. 교주님께서는 자신의 행선지나, 행동할 예정을 수하들에게 말해 주지 않으시거든. 상관의 움직임을 부하들이 정확하게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부하들이 게을러진다는 게 그분의 지론이시지.” 별 해괴한 지론을 다 들어 본다고 생각하며, 설취는 되물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그걸 아는거 하고, 게을러지는 게 무슨 연관이 있죠?” “상관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만큼, 부하들이 마음 놓지 못하고 계속 열심히 일한다는 뜻이지, 아마.”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설취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렇군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하지만 마화는 콧방귀를 뀌며 툴툴거렸다. “흥! 일리가 있기는 뭐가 있어? 그분이 그런 짓 안 해도 모두들 열심히 일해. 그리고 그분도 그걸 잘 알고 있고 말이야. 그러면서도 그런 식으로 둘러대는 건. 교주라는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겠다는 얄팍한 잔꾀라구.” 오랜만에 성깔을 드러내고 있는 마화의 모습에 설취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마화는 차가 끓자 설취에게 따라줬다. 그런 다음 어디선가 술병 하나를 가져온 뒤 자신의 잔에는 차 대신 술을 가득 따르는 것이었다. “미안, 나는 차보다는 이게 좋아서.”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던 설취는, 한 번에 쭉 들이켠 다음 또다시 찻잔에 술을 따르고 있는 마화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 “그렇게 기밀을 요하는 일은 아니냐. 그냥 황도에 갈 일이 생겼는데, 모두들 서로 가겠다고 경쟁이 붙어서 말이지. 나도 가고 싶었는데......” 이제야 마화가 왜 저기압인지 알 수 있었다. “황도에 가지 못하게 되셔서 그런 거군요?” 마화는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는지 흥분해서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정당하게 경쟁에서 졌다면 내가 이렇게 화를 내지 않아. 아, 글쎄 나는 부대주니까 제비를 뽑을 자격이 없다고 하잖아. 쪼잔한 놈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만 제비를 뽑더라구. 하는 짓이 너무 치사하지 않아?”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고, 그런 말을 꺼낸 건 그녀와 가장 친한 임충(任充)이었다. 임충은 이 임무는 천인장이 할 일인 만큼, 부대주인 마화는 빠져 달라고 냉담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때의 뻔뻔하기 그지 없었던 임충의 낯짝을 생각하면 너무 분해서 절로 이빨이 뽀드득 갈리는 마화였다. 설취는 마화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황도에 무척 가고 싶으셨던 모양이죠?”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아무 일도 없고 너무 심심하잖아. 얼마 전에 한바탕 벌어졌던 것도 교주님 혼자서 쓱싹 끝내 버렸고 말이야. 모두들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데 황도에 가면 그러니까... 시장에서 구경도 하고,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것도 있으면 사기도 하고......” 마화의 얘기를 듣는 순간, 설취는 곧바로 머리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마화가 내심 묵향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설취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아마 그 때문에 황도에 가고 싶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는 제대로 된 장신구 하나 구입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죠. 사실 여기는 너무 물건이 없잖아요? 거기 가면 예쁜 속옷도 많을 텐데......” 미끼는 던져졌고, 마화는 아무 생각 없이 덥석 그 미끼를 물었다. “맞아. 맞아. 바로 그거야. 맨날 산간벽지로만 돌아다니다 보니...... 에휴!” 아무리 선머슴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도 여자다. 그것도 사모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묵향 앞에서라면 언제까지라도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마화였다. “그렇다면 이번에 가시는 분께 예쁜 거 좀 사 오라고 부탁하면 되잖아요.” 마화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 그놈도 숙맥이라서 그런 가게에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아? 더군다나 창피하게 속옷을 사다 달라고 어떻게 부탁해. 에휴, 내 팔자야.” 설취는 이런 마화의 털털한 모습이 정말 좋았다. 마화가 투덜거리는 모습을 환히 웃으면서 바라보던 설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럼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좀 드릴까요? 비단으로 된 건데. 감촉이 아주 좋아요.” “정말? 그런데 동생도 입어야 하잖아?” 반색을 하며 좋아라하다 곧 고개를 흔드는 마화의 모습에 설취는 그게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예전에 서역에서 온 상인에게 한 번에 많이 산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저 입을 거 많아요.” “그럼 좀 부탁해도 될까?” 마화가 좋아하는 모습에 미소 짓던 설취가 뭔가 떠오른 듯 불쑥 물었다. “근데 사숙께서는 언제 돌아오실 것 같아요?” 갑작스런 설취의 질문에 마화는 난처한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세, 워낙 대중없이 움직이시는 분이시라서...... 짧으면 3일, 길게 잡으면......”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 말을 이었다. “잘 모르겠네. 몇 달 후, 아니 어쩌면 몇 년 후라도 불쑥 나타나실 수 있는 분이라서 말이야. 가장 오랫동안 행방불명이 되셨던 기록은 24년 3개월이야. 모두들 돌아가신 줄 알았지.” 그 말에 설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요?” “정말이야. 그동안 뭐 하셨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야. 그런 부분은 통 말씀을 안 하시거든.” “사숙께서 속마음을 드러내시지 않아서 섭섭하신가 봐요.” 설취는 이제 비어 버린 자신의 찻잔 가득 술을 따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저도 오랜만에 한잔해도 되죠? 돌아가 봐야 객잔에는 아무도 없으니 말이에요.” “큭큭. 좋지! 오랜만에 의기투합해서 마셔 볼까?” 마화는 설취가 내민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며 웃음을 터트렸다. 양양성을 떠난 묵향과 만통음제는 관도를 타라 의창(宜昌)까지 내려간 다음, 그곳에서 장강을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하면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장강삼협(長江三峽)의 장관이다. 경치만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배라도 한 척 빌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유람이 되겠지만, 묵향은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옥화무제와 약속이 잡혀 있었기에 시간 내에 만현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창에서 만현까지 육로를 이용해 달려갔다. 그 길은 절벽의 중간을 뚫어 내놓은 것이었기에 경치는 멋있을지 몰라도, 담이 작다면 한 발자국도 떼기 힘들 정도로 위험한 길이다. 위태롭기 짝이 없는 한 가닥 길을 중심으로 한쪽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벌벽이요. 그 반대편은 천길 낭떠러지다. 그리고 그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면 싯누런 흙탕물이 마치 황룡이 용트림이라도 하듯 웅장한 기세로 흘러간다. 절벽 위쪽에서 작은 돌 조각이라도 아래로 떨어지면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무서운 것이 사실이지ㅣ만, 옆으로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그런 위험이 한순간에 잊혀질 정도로 황홀한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떻습니까, 형님 꽤 근사하죠?” 풍류를 즐기는 만통음제인 만큼 중원 곳곳에 경치가 좋다는 곳치고 안 가 본 곳이 없었다. 물론 여기도 몇 번씩이나 와 봤었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지만 묵향의 표정을 바라보니 그는 이곳에 처음 와 본 듯했다. 그런 마음을 헤아려 만통음제는 마치 이곳에 처음 와 본 듯 장단을 맞춰 줬다. “호오, 정말 아름다운 곳이로구먼. 그런데 동생은 이런 곳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았나?” 경치를 둘러보면 흡족해하는 만통음제의 모습에 묵향도 기분이 좋은지 히죽 웃었다. 마교의 정보 조직도 때론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며. “부하 놈들 보고 양양성 근처에 경치가 괜찮은 곳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더니, 여기를 권하더군요. 관지 녀석의 말로는 처음 시작하는 경치가 그러니까 뭐라더라? 하여튼 그런 게 있는데, 세가지 경치가 순서대로 연결된다고 하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놈이 그놈이라 어떤 게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그런대로 시간내서 구경해 볼 만은 하죠?” 묵향다운 말에 만통음제는 피식 미소 지으며 절경을 감삼했다. 사실 지금 지나가고 있는곳이 서릉협(西陵峽)의 절경이고, 계속 해서 무협(巫峽)과 구당협(瞿塘峽)이 이어진다. 하지만 선인들이 붙여 놓은 그런 명칭들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위의 경치에 반응하여 가슴 가득 솟구쳐 오르는 이 진한 감동이 더욱 중요한 것이거늘. 더군다나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자신을 위해 마교의 정보 조직까지 움직인 것 같아 그 마음 씀씀이에 만통음제의 눈시울이 슬쩍 붉어졌다. “세 가지 경치면 어떻고, 여섯 가지 경치면 어떤가? 이 아름다운 경치보다 훨씬 좋은 동생이 있는데 말일세.” 말을 잠시 멈춘 만통음제는 품속에 손을 넣어 술병을 꺼내며 환히 웃었다. “허허, 그리고 여기 술이 있으니 더 이상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나?” “물론입니다, 형님.” 두 의형제는 호탕하게 웃음과 술, 그리고 서로 간의 추억을 나누며 만현을 향해 말을 달렸다. 길흉화복을 점치는 태을복술원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점쟁이와 사이비 도사들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민심이 워낙 흉흉한 데다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보니 사이비 도사나 점쟁이에 의지해서라도 미래를 알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금나라 병사들이 침입하여 약탈을 벌이는 바람에 크나큰 공욕을 치른 하남성의 대도시들 중 하나인 낙양(洛陽). 과거에 일어섰던 대 제국들의 황도였던 낙양은 시골에서 올라온 촌부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그 규모가 장대하고 화려했다. 그런 낙양의 뒷골목에는 수십, 아니 수백 군데가 넘는 점을 쳐 주는 점집이나 도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곳이 바로 태을복술원(太乙卜術院)이다. 태을복술원을 운영하는 태을진인(太乙眞人)은 화산에서 수십년 동안 도를 닦아 천기를 읽고, 인생의 길흉화복을 빤히 알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낙양의 고위 관료들도 점을 치기 위해 줄을 설 정도라는 그는 절대로 사람들 앞에서 점괘를 뽑지 않는다는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태을복술원에 들어가면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수많은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손님들이 편안하게 기다릴 수 있도록 잘 꾸며 놓은 넓은 방에 앉아 향긋한 차 한 잔을 마시며 기다리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계집종이 다가와 자신의 차례가 되었음을 알려 준다. 태을진인의 방에 들어가면 방 한쪽을 가득 베울 정도로 거대한 원시천존의 족자가 걸려 있고, 한 속에는 불잔을 든 태을진인이 단아하게 앉아 있다. 탈속해 보이는 태을진인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주역과 산통이 놓여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산통 옆에 지필묵이 완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서 오십시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을진인이 말을 건네자 손님으로 들어온 중년 부인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 왔던 일반 점집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당황한 것이다. 형형색색 무서운 귀신들이 그려진 그림으로 도배된 벽에 위압적인 모습으로 지성을 보이라는 점쟁이와는 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도를 닦아서인지 탈속해 보이는 태을진을을 훔쳐보며 왠지 모를 신뢰감을 느낀 중년 부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땅아이에게 맞선 자리가 들어왔는데, 궁합이 어떤지......” 태을진인은 붓에 먹물을 듬뿍 찍으며 다시 물었다. “상대의 이름은 어떻게 되죠?” 태을진인은 선이 들어온 상대의 이름과 생년월일, 태어난 시각은 물론이고 상대가 거주하는 주소까지 꼼꼼하게 계속 질문하며 기록해 나갔다. 어느 정도 질문이 끝나자 기록된 종이를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따님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만큼, 길일을 택해 몸을 정갈하게 하고 점괘를 뽑아야 하기에 10일 정도 후에야 점괘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때 다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중년 부인은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일반 점집은 방울 몇 번 흔들고, 정성부터 보이라며 돈을 요구하는 게 관례인데 태을진인은 뭔가가 달라도 많이 달랐다. 딸아이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며 길일까지 택해서 몸을 정갈히 하고 점을 치겠다니 그저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저, 복채는 얼마나 드려야 할지......” 불잔을 흔들며 눈을 감고 있던 태을진인이 그 말에 가만히 눈을 떳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허, 도를 깨쳐 부귀영화가 한줌의 티끌처럼 보이는 빈도에게 복채라는 말을 하시다니...... 속되고도, 속되도다. 무량수불.” 그 말에 황급히 중년 부인은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왠지 자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속 좁은 여인네의 말인지라 새겨듣지 마시고, 진인님의 도력에 감복하여 저의 정성을 표시하고 싶었을 뿐이예요.” 그때서야 태을진인의 찌푸려졌던 안색이 조금 펴졌다. “무량수불, 부인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밖으로 나가시면 총관이 있으니 그에게 말씀하시지요.” 중년 부인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린 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중년 부인이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태을진인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다음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방금 전에 기록한 봉투를 집어넣은 후, 뚜껑을 닫고 위에 다시 걸터앉았다. 자리에 걸터앉은 태을진인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점 한 번 보는 데 얼마라고 말하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수작이다. 점집이나 도관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어디 한두 군데를 다녔겠는가. 첫 봐서 돈 푼 꽤나 있게 생긴 사람들은 적당히 그럴듯한 분위기만 잡아 주면 된다. 물론 날로 그냥 먹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밖의 총관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방금 나간 중년 부인은 앞으로 자주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에 흡족한 미소를 짓던 태을진인은 밖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다음 손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호화로운 복장의 중년인이 들어섰다. 중년인이 자리에 앉자 태을진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척을 했다. “아니, 왕 대인 아니십니까? 오늘은 어쩐 일로......” “점괘를 받으러 왔습니다.” “아차, 얼마 전에 친 점괘를 받으러 오셨군요. 오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던 자리 옆쪽에 위치한 서랍을 열자 그 안에는 수백 통이 넘는 봉서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태을진인은 빠르게 봉서들을 뒤져 왕대인의 것을 찾아냈다. 물론 왕대인이라 불린 중년인은 볼 수 없는 위치에 놓여진 서랍 안이었다. “허허, 점괘가 아자 잘 나왔습니다. 왕대인의 운이 이제야 상승세를 타는가 봅니다. 무량수불.” 점괘가 잘 나왔다는 말에 왕대인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봉서를 받아 든 왕대인은 말없이 품속에 전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낙양 인근에서 가장 신용도가 뛰어나다라는 낙양전장에서 발행한 은자 50냥짜리 전표였다. “이건 약소하지만.” “허허, 뭘 이런 것을......” “태을진인께서 애써 점괘를 잘 뽑아 주신 것에 대한 작은 성의일 뿐입니다.” 점잖게 사양하는 듯한 말과는 달리 태을진인은 어느샌가 탁자위에 놓인 전표를 집어 품속에 밀어 넣고 있었다. 왕대인은 다시 품속에 손을 집어 넣더니 봉서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이것에 대해 점을 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태을진인은 봉서를 뜯어 내용을 읽어 본 후,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 경우는 길일이 언제일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일단 오늘 밤 천기를 지어 본 후, 점괙 나오면 그때 댁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복채(卜債)는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허허, 이 바닥의 가격이라는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점괘가 잘 맞늗다는 것을 잘 아시는 분이......” 그 말에 왕대인은 다시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전표 다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 점괘의 선금 은자 천 냥이오. 점괘가 흡족하게 잘 나온다면 잔금으로 은자 천 냥을 더 드리겠소.” 은자 천 냥이면 동전으로 따졌을 때 무려 19만 2천 냥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다. 태을진인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왕대인이 바로 앞에 앉아 있기에 그 정도 감정 표현에 그쳤던 것이다. “호오, 잘 알겠습니다. 왕대인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확실하게 점괘가 나오도록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오.” 용건이 다 끝나자 왕대인은 지체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태을진인은 봉성에 왕 대인의 이름을 기록한 후 앉아 있던 의자 뚜껑을 열어 그 안에 집어넣었다. 오랜만에 큰 건이 걸렸기에 태을진인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기분 좋게 자리에 앉아 밖을 향해 다음 손님을 모시라고 외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문이 벌컥 열리며 새파랗게 질린 시종 하나가 뛰어 들어와 다급하게 말했다. “왠 손님께서 진인을 뵙겠다며 막무가내로, 큭!” 이때, 왠 커다란 손이 나타나 시종의 머리통을 붙잡고 뒤로 잡아당겼다. 우당탕탕.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곧 장대한 체구를 지닌 장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한의 얼굴을 본 태을진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재빨리 밖을 향해 소리쳤다. “총관!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손님을 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와 주십사 하고 말씀드리게. 오늘 영업은 끝이야. 알겠나?” 그렇게 말한 태을진인은 문빡으로 나가 나뒹굴고 있는 시종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곧 차를 내오고, 총관에게 말해 주위에 사람이 얼씬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단속을 하라 전하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종은 태을진인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듯 후다닥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예, 나으리.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태을진인이 방 안으로 들어와 보니 장한은 거대한 도(刀)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살짝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라도제 대협.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어떻게 왕립하셨는지......?” 질문을 던지는 태을진인의 목소리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이 알고 있기로 수라도제는 양양성에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 있는 수라도제는 또 누구란 말인가? 무엇보다 중원 무림을 움직이는 거물과 마주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태을진인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만 같았다. “예전에 낙양에 들렀을 때, 무영문에서 파견 나와 있던 인물이 혹시 연락할 사항이 있으면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면 된다고 했기에 찾아왔네.” “아, 예. 그렇다면 무슨 점을 치시... 죄송합니다. 무슨 정보를 원하십니까?” 태을복술원은 무영문이 정보를 사고팔기 위해 천하에 깔아 둔 지부 중 하나였다. 물론 점을 치는 시늉을 하며 점괘를 뽑아 주는 것도 무영문의 정보를 바탕으로 분석해 주는 것이다. “노부는 소림사 내부의 정확한 건물 배치도를 원하네. 그리고 가장 쉽게 참회동까지 들어갈 수 있는 침입로도 알려 주면 고맙겠군.” 여기까지 말한 수라도제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을진인을 바라보며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 “그래 이 정도를 알아보려면 복채는 얼마나 주면 되겠나?” 수라도제의 짓궂은 질문에 태을진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참회동까지 들어가기 위한 침입로라니...... 설마 소림사의 담이라도 넘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점쟁이를 상대로 하니 확실히 말하기 편하군. 내 의중을 그렇게 빨리 알아채는 것을 보니 말일세. 그래, 언제까지 알려 줄 수 있겠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는데.” 그 말을 듣자 뭘 떠올렸는지 태을진인의 안색이 조금 더 창백해졌다. “직접... 가실겁니까?” “물론.” “월담하지 않으셔도 대협의 신분이시라면 충분히......” 전에 월담을 했다가 붙잡힌 경험이 있으니, 그런 조언은 해 줄 필요가 없네.“ 덤덤한 수라도제의 말에 태을진인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천하의 수라도제가 소림사의 담을 넘었다가 붙잡혔다니 누가 그걸 정말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자신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일을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는 수라도제의 태도였다. 이렇게까지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수라도제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아무래도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태을진인은 생각했다. “아무리 소림사라고 하지만, 대협께서 월담하시는 것을 알아채다니...... 정말 놀랍군요.” 수라도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알고 보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닐세. 방장실 근처를 통과하는 침입로를 택한 노부의 멍청함 때문이었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방장실 근처가 소림사 내에서도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이니 말이다. 태을진인은 잠시 망설였다. 정보를 제공해야 하나? 아니면 정중하게 거절해야 하나? 만약 소림사 내의 침입로를 자신이 가르쳐 줬다는 것을 소림사에서 알게 되는 날에는, 천하 무학의 종주라고 할 수 있는 소림사와 적을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수라도제가 어떤 의도로 소림사의 담을 넘느냐 하는 것이다. 좋게 끝날 일이면 상관없지만, 만약 피를 부르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무영문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태을진인은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의자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의자 뚜껑 안에다가 머리통을 집어넣기라도 할 듯 가까이 가져다 대며 외쳤다. “이봐! 소림사 내부 배치도 한 장 올려 보내 줘. 대충 그려 놓은 걸로 말이야.” 그러자 놀랍게도 의자 안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부 배치도는 뭐 하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올려 보내!” 잠시 후, 의자 안쪽에서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이 뛰어 올라왔다. 아마 의자 밑의 구멍을 통해 지하 밑쪽과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태을진인은 그 종이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쭉 펼쳤다. 소림사내의 건물들이 어떤 식으로 배치되어 있는지 제법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배치도였다. 태을진인은 손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어떤 방향으로 침입하면 가장 쉽게 참회동까지 갈 수 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자신이 워나던 것을 얻었기 때문인지 수라도제는 만족스런 웃음을 흘리며 지도를 잘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을진인이 침중한 음성으로 신신당부했다. “한 가지 꼭 지켜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드린 정보가 무영문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발설치 말아 주십시오.” “염려하지 말게. 노부도 그 정도는 잘 아니까. 그나저나 복채는 얼마나 주면 되는가?” 태을진인은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소림사 건물 배치도 한 장을 나눠 준 것이 그렇게 큰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원본도 아니고 사본 한 장인데, 뭐가 그리 소중하겠는가. 이런 거물을 상대로 어설프게 돈을 요구하기보다는 차라리 빛으로 만들어 두는 게 훨씬 좋겠다고 태을진인은 생각해다. “정보료는 주실 필요 없습니다. 금나라를 상대로 분투하고 계신 대협께 저희 무영문에서 드리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고맙게 받겠네. 선물에 대한 보답은 다음에 꼭 하도록 하지.” 용건이 끝나자 수라도제는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시야에서 수라도제의 모습이 사라지자 태을진인은 긴장감이 풀리는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만큼 수라도제가 뿜어내는 위압감이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튕기듯 일어난 태을진인은 의자 뚜껑을 열어젖히고 밑을 향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봐, 문주님께 전할 특급 정보다. 수라도제가 소림사로 향했다!” “뭐? 수라도제가 소림사에는 왜?” “나도 몰라. 월담을 한 대.” “......!” 더 이상 밑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모두들 너무나도 기가 막혀 말도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어수선해진 실내를 치운 시종이 문짝을 새 걸로 다시 바꿔 달았다. 태을진인은 수라도제가 소림사로 향했다는 정보를 급하게 무영문 총단으로 보낸 뒤 차분히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흠, 양양성을 책임져야 할 수라도제가 왜 이곳에 나타나 소림사의 담을 넘는 침투로를 물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금나라와의 일전이 목전에 다가왔음은 낙양에 있는 자신도 아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수라도제가 누구인가. 양양성에 운집한 정파인들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나타나 소림사의 담을 타 넘는 방법을 물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수라도제와 마교 교주가 부딪칠 뻔했다는 정보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저 서로 노려보다 끝나긴 했지만 그 뒤로 수라도제가 칩거에 들어갔다는 정보였었따. 서문세가가 철저히 입단속을 시킨 탓인지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분면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갑자기 태을진인이 무릎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어쩌면 그때 치열한 기 싸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들은 둘 다 범이이 상상하기도 힘든 경지를 개척한 초절정의 고수들이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봐서는 안 된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수라도제는 그때의 싸움에서 큰 내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칩거에 들어간 것은 내상을 치료하기 위함이고, 소림ㅅ의 담을 타 넘으려 하는 것은 영약으로 유명한 대환단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맞다. 대환단!”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추리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소림사에서 그 귀한 대환단을 순순히 내줄 리 없다. 그러니 그는 담을 넘어가 대환단을 훔치려는 속셈인 모양이다. “젠장. 괜히 지도를 준 것 같군. 그걸 들고 대환단을 훔친 게 밝혀지면 나는 끝장이잖아.” 태을진인은 거칠게 의자 뚜껑을 열고 밑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양양성의 서문세가에 대한 최근 정보들 좀 올려 보내!” 와장창. 그때 갑자기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의자 뚜껑에 머리를 박고 소리치던 태을진인은 흠칫 굳은 채 어정쩡한 자세로 문 쪽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새하얗게 굳었다. 또 한 명의 거물이 출현한 것이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패력검제 대협.” “흠, 여기에 오면 노부가 알고 싶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패력검제는 뭔가 근심이라도 있는지 안색이 초췌했다. 현천검제와 헤어져 근방의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신수(神獸)에 정통한 학자들을 탐문해 보았지만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었따. 그렇기에 중원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낙양까지 단숨에 달려온 것이다. “어떤 정보를 원하시는지요?” 패력검제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괴이지(怪異誌)에 정통한 학자가 누구인지 알려 주게.” “괴, 괴이지요?” 천하에 산재한 신기하고 괴기로운 이야기들을 집대성한 책이 바로 괴이지다. 잡학으로 치부되다 보니 괴이지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학자는 없다. 더군다나 화경급 고수가 괴이지에 정통한 학자를 찾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태을진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학자를 왜 찾으십니까? 어느 정도 내용을 알아야 그에 알맞은 정보를 드릴 것이 아닙니까?” 잠시 주저하던 패력검제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이든 이무기든 신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학자가 필요한 걸세. 그 이유는......” 여기까지 말하던 패려검제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괜히 황금색 괴물을 만났다는 말을 꺼냈다가 미친놈 취급당할 우려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유는... 더 이상 묻지 말게.” 아르티어스를 만난 이후, 패력검제의 내심은 복잡하기만 했다. 전설로만 치부되던 용을 직접 목격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청룡이니, 백호니, 주작이니, 현무니 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뭔지느 모르겠지만 진짜로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괴물이 사람으르 변신하기도 하고,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을 한순간에 살려 내는 것을 직접 보기까지 했지 않은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쌓아 왔던 관념의 룰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부처니 태상도군이니 하는 것도 사실일 수 있지 않을까? 패력검제는 전설로 내려오는 것들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만약 전설이 사실이라면... 무예의 끝을 보는 것보다 더 큰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쪽으로 정통한 학자를 찾아 자문을 구하려는 것이다.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패력검제를 본 태을진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 뚜껑을 열었다. “이봐! 지금 당장 괴이지에 정통한 학자들을 찾아 명단을 올려줘!”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별걸 다 찾는다며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좋이 한 장이 튀어 올라왔다. 명단이 적힌 종이를 받아 든 패력검제는 태을진인을 보며 물었다. “정보료는 얼마나 주면 되겠나?” 태을진인이 패력검제를 힐끗 보니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달라고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한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돈을 달라고 하겠는가.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마자 빠르게 태을진인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정보료는 주실 필요 없습니다. 금나라를 상대로 분투하고 계신 대협께 저희 무영문에서 드리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흠. 자네 제법 마음에 드는군. 자주 찾아오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으로 신형을 날린 패력검제는 순식간에 그 모습을 감춰 버렸다. 태을진인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록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디만 좀 전에 훔쳐본 패력검제의 싸늘한 눈빛에 그의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세차게 뛰고 있었던 것이다. “미치겠군. 갑자기 이런 거물들이 연달아 찾아오다니.”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종이 부서진 문짝을 치우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놔두게. 또 어떤 놈이 찾아올지 모르니 말이야.” 거칠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던 태을진인은 문득 자신의 신상에 뭔가 변화가 찾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평생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두 거물이 연달아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자신이 도무지 이해하기도 힘든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젠장, 용한 점쟁이라도 찾아가서 점이라도 쳐 볼까? 아무래도 이러다가는 명대로 살기 힘들 것 같은데......”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것은 알지만 태을진인의 머릿속은 벌써 낙양에서 소문난 점집을 찾아 영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곤륜파를 끌어들여라 만현에 도착한 묵향은 만통음제를 데리고 그곳에서 가장 좋은 객잔으로 들어갔다. 만통음제에게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3일에 걸친 유람이 조금 힘들었던지 만통음제는 운기조식을 끝낸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묵향은 점소이를 불러 술상을 봐 오라고 이른 후, 달을 벗삼아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탁자 위에는 술잔이 하나 더 놓여 있었다. 세 번째 술병이 비워져 갈 무렵, 옥화무제가 우아한 몸놀림으로 밤하늘을 가르며 객잔 담을 넘어왔다. 그녀는 도착함과 동시에 묵향의 맞은편에 앉아서는 새침한 어조로 따지기 시작했다. 등뒤로는 긴장으로 인해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걸 숨기기 위해 그녀는 더욱 새침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낮에도 시간은 충분한데, 꼭 밤에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죠?” 묵향은 그녀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르며 딴청을 부렸다. “만나자마자 그런 식으로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자 한 잔 하라구.” “당신에겐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이죠? 하지만 나 아주 바쁜 사람이라구요. 그런데 이런 산골짜기로 불러내다니, 대체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아아, 덕분에 구경 잘하면서 왔을 텐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바쁘게 일만 하다 보면 일다 잘 풀리지 않고, 성질만 더러워이잖아. 그래서 오랜만에 바람이나 쐬라고 이쪽으로 불렀지. 어때, 내 배려에 감사하지 않않아?” ‘헉! 뭔가 분위기가 수상쩍은데......’ 상대가 평상시와 달리 너무 능글맞게 나왔기에 옥화무제는 간이 콩알만 해질 수밖에 없었다. 예상과 너무 다른 상대의 행동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저자는 일부러 이러고 있는 줄도 모른다.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래, 시험이 분명해!’ 그렇게 마음을 정한 옥화무제는 최대한 평상시 그를 대하던 것과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마음의 불안 때문이었는지 평상시보다는 많이 퉁명스러웠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를 부른 용건이나 어서 말해요.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나를 직접 봐야겠다고 요청한 거냐 이 말이예요?” “허, 미인의 입에서 이런 쌀쌀맞은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걸 이렇게 감성이 메말랐을 줄이야. 자,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라구 얼마나 아름다워? 은은한 달빛에......” 하지만 묵향의 말은 옥화무제의 신경질적인 어조에 가로 막혔다. “정말 계속 흰소리만 할 거예요? 댁한테 그딴 감성 없다는 거 뻔히 알고 있는데.” “이런, 그대야 말로 나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군. 나는 그렇게 메마른 사람이 아니야. 삶이 나를 그렇게 보이게 했을 뿐이지.” 묵향은 품속에서 피리를 꺼낸 다음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옥화무제는 이 인간이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그저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싸늘한 표정도 잠시, 묵향이 피리를 불기 시작하자 싸늘함은 놀라움으로, 놀라움은 곧 탄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피리 소리에 빨려 들어간 듯 몽롱한 상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놀라운 솜씨!’ 그녀는 피리 소리를 들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녀가 묵향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기억을 잃은 현경급 고수가 옥영진 대장군과 함께 청성루에 왔다는 총관의 보고에 그녀는 다급히 그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달려갔었다. 그때 그녀는 그곳에서 처음 묵향의 탄금을 들었다. 어지간한 예인(藝人)은 감히 연주를 하겠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명성이 높은 청성루였다. 하지만 그때 들은 묵향의 탄금 실력은 청성루에서도 특급으로 인정받을 만큼 뛰어났다.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날카로웠던 그녀의 마음도 평상시와 같아졌고. “음공(音攻)을 익혔나요?” 잠시 피리 소리가 멈췄을 때 옥화무제가 별 생각 없이 건넨 질문이었는데, 그게 묵향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다. 묵향은 피리를 품속에 신경질적으로 집어넣으며 불쾌한 듯 투덜거렸다. “겨우 사람 하나 죽이자고 음(音)을 이 정도까지 익히는 사람을 봤나? 그런 말은 나나 형님에게 모욕이라구.” 여기까지 말한 묵향은 말을 끊고 싸늘한 눈길로 옥화무제를 바라봤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묵향이 먼저 그 침묵을 깼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과 달리 아주 사무적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방금 전의 불쾌함도, 그리고 그녀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느낀 뻔뻔함을 가장한 다정함도 없었다. “장인걸의 정확한 위치, 그리고 그놈에게 위급한 일이 벌어졌을 때 놈을 구하기 위해 달려올 모든 전력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그 정보를 언제까지 제공해야 하죠?” “놈이 죽을 때까지.” 옥화무제는 상대의 제안을 생각해 보는 척하면서 묵향의 안색을 살폈다. 왜 갑작스럽게 이렇게 그의 분위기가 변한 것일까? 처음부터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불쾌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처음에 친한 척 다정하게 말했던 것은 또 무슨 수작이었던 것일까? 워낙 생각이 많은 그녀였기에 태연을 가장하려는 의도와는 달리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이게 아니라 다른 것이었는데, 그와 상관없는 별의별 잡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떠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잡념을 쫓듯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꽤나 힘든 의뢰로군요. 좋아요. 서로 협정도 맺은 사이니 싸게 해 드리죠. 매월 황금 백 냥이에요.” 황금 백 냥이면 은자로 치면 2천 냥이다. 머릿속은 딴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오랜 세월 정보 장사를 해 온 그녀였는지라 그녀의 입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시불이 아니라 매월이라면 엄청난 금액이로군.” “이쪽도 땅 파 먹고 장사하는 건 아니니까요. 대신 그만한 값어치는 한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오랫동안 시간만 끌지 않는다면 그렇게 부담이 갈 금액도 아니잖아요?” “좋아. 양양성에 들어가면 매월 은자 2천 냥씩 그쪽에 지급하라고 명령해 두지. 그리고 또 한가지, 요 근래 무영문에 요청했던 자료들 말인데......” 그말이 나오자 옥화무제는 내심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 근래 행해졌던 작전에 대해 될 수 있으면 마교와 팽가간의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녀의 지시 하에 정보를 조금 왜곡해서 보냈었다. 그걸 묵향이 눈치 챈 것일까? 옥화무제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반문했다. “본문에 요청한 자료라구요?” “그래.” “그런 게 있었나요?” 옥화무제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듯 맹한 어조로 되물었기에 묵향은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중요한 자료인데, 저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이봐, 본교에서 요청한 자료인데, 어떻게 모르고 있을 수가......” “그쪽은 현역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미 딸한테 문주 자리를 물려주고,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는 상태라구요. 내가 꼭 알고 싶어하는 정보가 아닌 한, 모든 것은 딸아이가 처리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다면 모르고 있었나?” “물론이예요 그런데 뭐가 불만이라는 거죠? 당신이 뭔가를 원한다는 공문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답신이 안 왔다는 거예요? 아니면 이쪽에서 보내 준 정보의 수준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거예요?” ‘그 일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군.’ 묵향은 옥화무제의 눈을 자세히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결코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순진하게 빛나고 있었다. 묵향은 옥화무제에 대한 혐의를 풀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신이 원한 정보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옥화무제가 자세히 알고 있었다면, 묵향은 다른 의미에서 그녀가 전해 준 정보를 의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만큼 이 일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은, 묵향에게 전해 주는 정보를 약간이라도 왜곡해놨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흐음, 받기는 했는데 너무 기대에 못 미친 게 사실이라......” 옥화무제를 빤히 바라보던 묵향은 소연이 중상을 당했던 그 작전에 대해 무영문이 확보해 놓은 모든 자료를 워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렇다면 돌아가는 대로 총관을 불러 지시해 놓겠어요. 이쪽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해 주라고 말이예요.” “그렇게 해 주면 고맙지.”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호오, 정보의 여왕이라는 그대가 나한테 물어볼 일이 있다니 놀랍군. 그래, 뭐야?” 비꼬는 상대의 어조에 그만 둘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중원 각지에서 혈겁이 벌어지고 있어요. 혹시 그쪽의 작품이가요?” 자신이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게 불쾌한 모양인지 묵향의 어조는 퉁명스러웠다. “나는 금시초문이야.” “그렇게 믿겠어요.” 둘의 대화는 여기서 끊겼다. 옥화무제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놈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음이 평정되자, 평상시와 같은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묵향의 행동이 아주 불쾌했다. 꼭 상대가 자신을 가지고 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옥화무제가 가만히 눈치를 보니 묵향은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며 술만 들이켜고 있을 뿐, 더 이상 자신과 대화를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처음에는 은근슬쩍 다정하게 대하는 척하더니 이쪽에서 조금 튕겼다고 그걸로 끝이다. ‘속 좁은 인간 같으니라구......’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 쪽에서 분위기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홀가분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새침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 봐야겠군요. 나도 바빠서 말이예요.” “좋을대로, 하는 일 잘되기를 바래.” 그녀는 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덕담을 해 준 보답으로 한 가지 알려 드리죠.”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던 묵향의 시선이 옥화무제에게로 옮겨갔다. “무림맹에서 곤륜파로 사람을 보앴어요.” 묵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꽤나 대단한 정보인 줄 알았는데 사람을 하나 보냈다고 하니 황당했던 것이다. “맹에서 곤륜파에 사람을 보낸 게 나한테 생색을 낼 만큼 그렇게 중요한 정보인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묵향의 반응에 옥화무제는 더욱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항변했다. “물론 문파에 심부름꾼 하나 보내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겠지만, 누굴 보냈으냐 하는 게 문제겠죠.” 그 말에 묵향은 아차 싶었다. “그래, 누굴 심부름꾼으로 보냈는데?” 옥화무제의 눈이 야비하게 반짝 빛났다. 이 순간을 위해 서두를 꺼낸 것이기 때문이다. “무료 봉사는 여기까지. 방금 전에도 말했죠? 한 가지만 알려준다구요. 나머지를 알고 싶으면 돈을 지불하든지, 아니면 직접 알아보세요.” 화사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한 거였지만, 그걸 듣고 있는 묵향의 속은 그녀의 의도대로 확 뒤집혀 버렸다. 무영문이라는 단체 자체가 정보를 사고파는 것이 주업인 만큼, 돈 내라는 것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약 올리듯 하는 말투와 그녀의 표정이 그의 심사를 뒤집어 놨다고 해야 할까? “젠장, 알았어. 직접 알아보지.” “어머머, 그게 생각대로 잘될까 모르겠네~ 어쨋건 이제 더 이상 나한테 볼일은 없는 것 같으니 그만 가 볼게요.” 마지막 한마디까지 비꼬아 준 뒤 옥화무제는 사라져 버렸다. 그녀로서는 오랜만에 작은 복수를 할 수 있었기에 무지하게 통쾌했으리라. 어쩌면 그런 식으로밖에 분풀이를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원통했을지도 모르지만...... 옥화무제가 돌아간 뒤, 묵향은 그녀가 제시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오랜 시간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가 너무 없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골치만 아파질뿐...... 묵향은 양양성에 돌아가는 대로 군사에게 연락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그에 대한 해답을 만통음제로부터 얻어 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새벽, 잠에서 깬 만통음제는 운기조식을 한 후, 묵향과 식사를 했다. 식사 도중에 묵향은 별것 아니라는 듯 슬쩍 물어봤다. “무림맹에서 곤륜파로 꽤나 거물을 판견한 모양이던데, 무슨 일이라고 형님은 생각하십니까?” “거물이라... 무림맹 장로급 정도의 핵심을 말하는 건가?” “예. 대충 그 정도인 모양입니다.” 묵향의 대답에 만통음제는 아주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다른 문파라면 몰라도 곤륜파에 그 정도 거물을 파견한 게 사실이라면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수 도 있겠군.” “어떤 일 말입니까?” “곤륜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무림에 발자취를 남기는 일 말일세.”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이십니까? 곤륜파야 오랜 옛날부터 무림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강인한 문파였느데요.” 만통음제는 손까지 내저으며 묵향의 말을 부인했다.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전혀 그렇지 않아. 곤륜파는 그 규모와 전력에 비해,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 그 이유가 뭐겠나?” 그건 묵향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 원인 제공을 한 게 다름 아닌 그가 몸담고 있는 마교였으니까. 십만대산에서 가장 가까운 정파의 거대문파가 곤륜파다. 그렇다보니 곤륜파와 마교 사이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더군다나 마교가 무림일통을 외치며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큰 피해를 당하는 문파 역시 곤륜파였다. 물론 잃는 것이 큰 만큼, 없는 것 또한 많다. 곤륜파만큼 마교의 무공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한 문파도 없었고, 고수들 간의 실전 경험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곤륜의 도사들은 마교도들과 싸우며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쭉정이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알곡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 형국이다 보니, 곤륜파는 살아남는 데 급급해서 다른 데로 신경을 돌릴 틈이 없었다. 오죽하면 무당파에 버금가는 막강한 전력을 지니고도 9파1방에 끼지도 못했을까. “그야 당연히 본교 때문이죠. 맨날 우리한테 줘 터진다고 다른데 한눈 팔 시간이나 있었겠습니까?” “바로 그걸세. 그래서 그런지 곤륜파는 제자들을 키우는데 전력을 다하지. 다른 문파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일 뿐더러, 그 제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안아.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곤륜파는 오래전에 멸문당했겠지. 문도들의 평균 수명이 곤륜파만큼 낮은 문파도 없으니 말이야.” 묵향은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끈질기기가 바퀴벌레보다 더한 놈들이죠. 본교에게 그토록 오랜 세월 짓밟히고도 살아남았으니까요.” “하지만 요즘 들어 곤륜파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그 이유를 자네는 아는가?” “글쎄요. 본교에서 건드리지 않으니까 힘이 남아도나요?” 되는대로 말한 거였지만, 그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만통음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상대가 자신의 말에 이토록 흥미를 보이며 경청하자 설명해 줄 맛이 났던 것이다. “그래! 바로 그거야. 요 근래 수십 년 동안 마교는 너무나도 조용하게 지냈고, 그 덕분에 소모전을 한 번도 치루지 않은 곤륜으로서는 세력이 필요 이상으로 커져 버린 거지.” “흐음... 그러니까 형님 말씀은 곤륜파가 남아도는 힘을 바탕으로 중원으로 그 세력을 넓혀 올 거다. 이 말씀이로군요.” “그렇지! 동생 말이 맞아. 하지만 곤륜은 정도를 걷는 것으로 알려진 문파가 아닌가? 그런 만큼 생각이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세력을 확장할 수는 없겠지. 다른 문파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으로 파고들어가자면 아무래도 명분이라는 게 필요하거든. ‘우리는 댁들의 영역을 침범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이야. 그런데 이런 명분을 무림맹이 제공해 준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호오, 얘기가 그렇게 연결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무림맹에서 곤륜에 사람을 보냈다는 게 바로 곤륜이 밖으로 나올 명분을 제공한다는 거로군요.” “이 우형의 생각으로는 그런 것이 아닐까 싶구먼. 물론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정확하게 드러나겠지만 말일세.” “흠, 곤륜파라......” 예정에도 없던 곤륜이라는 거대 문파의 개입이 현 전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묵향으로서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말없이 생각에 waru 있는 묵향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재상 진회의 눈물 묵향이 만통음제와 예정에 없던 유람을 하고 있을 때, 대송제국의 재상 진회의 처지도 그와 비슷했다. 물론 그의 경우는 유람이 아니라 지방 순시를 위해 남쪽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망해 가는 제국의 재상이라고 해도,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신분으다. 그렇기에 진회가 갑자기 지방 순시를 결정한 뒤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황도를 떠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수행하는 무리들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수십 명에 달하는 문관들을 중심으로 잡일을 맡을 시종들, 몇십대에 달하는 수레, 거기에다가 이들의 호위를 담당할 5백에 달하는 병사들까지. 지방 순시를 위해 움직이는 행력의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진회가 갑자기 지방 순시를 결정한 것은 바로 악비 대장군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절강성(絶江省)의 항구도시인 항주(抗州)를 둘러볼 목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자리 잡고 있는 남경보다는 항주 쪽이 금나라의 침입으로부터 훨씬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따. 그는 근시일 내로 항주로 천도를 할까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악비를 피할 겸 항주를 직접 봐 두려는 것이었따. 분명 악비는 오랜 시간 양양성을 비워 둘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시간 동안 남방을 순시하며 제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그게 악비의 상경 소식을 들고 밤새워 그가 생각해 낸 가장 원만한 대처법이었다. 자신은 재상이지만 상대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병권을 쥐고 있는 장수다. 뭔가 타협의 여지라도 있다면 만나서 대화를 해 보겠지만, 서로가 원하는 것이 너무나도 달랐다. 이런 경우 그를 없애 버리는 것이 제일 좋을 수도 있겠지만, 진회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애대를 없앤 후의 뒤처리도 문제였지만, 진회는 악비를 아꼈기에 차마 그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진회가 타고 있는 마차는 행렬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그편이 그를 경호하기에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차 창문을 통해 주변의 경치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길가에는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그들의 행색은 초라했지만, 궁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관도(官途) 주변에 늘어서 있는 집들의 굴뚝에는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아스라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질리지도 않고 밖을 내다보고 있던 진회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행렬 앞쪽으로 일행을 선도하고 있던 박 교령이 말을 몰라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박 교령은 진회가 타고 있는 마차와 나란히 가도록 말의 고삐를 조종하며, 창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회를 향해 군례를 올린 후 말했다. “다음 마을에서 쉬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이 지방 태숙 이미 대인께서 편히 묵어가실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뒀다고 하옵니다.” “그렇게 하게.” “옛, 대인.” 박 교령은 말에 박차를 가하며 행렬의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마을에 마련된 숙소에서 진회는 간소하게 식사를 마친후, 박 교령을 불러들였다. “찾으셨사옵니까?” “들어오게.” 박 교령이 들어오자 진회는 주변능 재빨리 살펴본 다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곳과 달리 이곳 태수는 아주 유능한 인물인 모양이야.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일세.” 박 교령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소장도 그렇게 느꼈사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과 실제로 그런 것은 큰 차이가 있지. 귀관은 내가 비밀리에 그들의 실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방책을 강구해 보게.” 순간 박 교령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부릅떠졌다. “암행(暗行)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진회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려고 할 때 어디선가 그의 귓가로 가느다란 목소리를 보내왔다. <그건 안 됩니다. 대인.>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진회는 이러저리 두리번 거리지 않고 마치 상대가 자기 눈앞에 있는 듯 입을 열었다. “아무리 말린다고 해도 나는 할 걸세.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제대로 된 선정을 베푸는 첫 번째 태수일세. 요즘같이 어수선한 시국에 백성들을 위해 바른 길을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런 심지(心地)가 곧 소중한 인재를 여기에서 썩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야.” <정 그러시다면 제가 직접 태수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내가 직접 그가 백성들을 위해 행한 일들을 살펴보고, 백성들에게서 그에 대한 평가를 들은 연후에야 그를 제대로 알 수가 있을 걸세. 짧은 시간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그렇다면 제가 그 일을 대신해 드리겠습니다.> “내 자네를 못 빋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중차대한 일을 다른 이에게 맡길 수는 없다네. 만약 제대로 된 인물이라는 판단이 서면 곧바로 황도로 불러들여 중용할 생각이니 말일세.” <저 혼자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니, 사형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사내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박 교령은 진회에게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이어지지 않자, 초조한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진회에게 물었다. “정말 암행을 하실 생각이시옵니까?”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소중한 인재일세.” 박 교령은 진회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걸 느꼈는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정 그러시다면 암행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밤, 진회는 박 교령이 차출한 20여 명의 날랜 병사들과 함께 몰래 숙소를 빠져나왔다. 박 교령은 자신이 직접 진회의 호위를 맡고 싶었지만, 그는 호위대의 대장이었기에 오히려 타인들의 눈에 잘 띄게 행동해야 했다. 만약 그가 빠져나간다면 진회의 암행이 곧바로 들통 날 게 틀림없다. 그에 비해 진회는 신분이 워낙 높았던 터라 감히 그를 만나겠다고 찾아올 만한 인물은 거의 없었다. 진회가 만나기 싫다고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그에게 접근해 올 수 있는 인물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자 정도다. 진회는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순시 행렬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암행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숙소에서 진회 일행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던 의문의 그림자들. 몸에 착 감기는 흑색 암행복으로 전신을 감싸고, 두건까지 쓰고 있는 괴한들이다. “사형, 왜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저자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다. 정말 실력 있는 자가 재상의 목숨을 노린다면, 겨우 5백밖에 안 되는 허접한 병사들을 염두에나 두겠느냐?”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오히려 이건 기회라고 할 수도 있다. 그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갈 기회를 잡은 건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는 한 복면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시를 내렸다. “너는 지금 당장 현청(顯廳)으로 가서 동정을 살펴라. 과연 그가 기대한 대로 청렴한 관리인지 자세히 확인하란 말이다.” “옛, 사형.” 지시를 받은 복면인은 현청 쪽으로 달려가 버렸고, 남은 자들은 은밀하게 진회의 뒤를 밟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암살자에 대비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진회가 20여 명의 날랜 병사들을 이끌고 몰래 암행을 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강서성(江西省)은 중원에서는 비교적 남쪽에 위치하고 있기에 한겨울이 돼도 그리 춥지 않다. 그 덕분인지 거리에 굶어죽은 시체는 그리 눈에 띄지 않았지만, 고된 삶에 지친 굶주린 백성들은 어디를 가도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그들은 산으로 들로 나다니며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무껍질을 뜯어 집 안 여기저기에 말려 두고 있었다. 진회가 한 농가 안으로 쓱 들어서자 아낙은 어린 아이들을 재빨리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두려움에 질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진회가 아니라 진회 뒤에 서 있는 검을 든 두 명의 병사들을 쳐다본 것이다. 진회는 20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이끌고 이 집에 들어닥치면 농민들이 놀랄 것 같아서 그중 두 명만을 이끌고 들어온 것이었데, 시골 아낙에게는 그들만으로도 마음속 깊은 곳까지 두려움을 안겨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요?” 병사들은 군복을 벗은 상태였고, 진회 역시 호사스런 관복 대신 누구나 입고 다님직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을 진회의 호위가 자신들의 주 임무인지라 진회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검을 휴대한 채 긴장감에 딱딱한 표정이었다. 그 위압적인 모습이 아낙에게 두려움으로 안겨 주고 있었던 것이다. 진회는 어찌 보면 당연한 아낙의 반응에 내심 한숨을 내쉬며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보시게. 예서 하룻밤만 이슬을 피해 갈 수 있겠는가?” 아낙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회의 뒤에 서 있는 병사들이 두 눈을 부릅뜾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탐탁치 않았지만 마지못해 승낙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칼을 든 장정 둘이 뒤에 서 있다. 만약 거절했다가 무슨 봉변이라도 당할지 몰라 내심 두려웠을 것이다. “드, 들어오시우. 자실 건 별로 없지만. 방 한 칸 내드리는 건 어렵지 않수.” 그녀가 일행을 데리고 간 곳은 농가 한쪽 구석의 작은 방이다. 침상이 한 개뿐이라 세 명이 잠을 청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처음 그들의 요구대로 밤이슬을 피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병사들이 방 안을 치우는 동안, 진회는 아낙과 그 아이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볼이 홀쭉한 것이 영양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손님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아이들은 또다시 이리저리 뛰놀기 시작했고, 아낙은 분주히 움직이며 궁색하기는 하지만 먹을 것들을 준비하느라 두 손을 바쁘게 놀려 댔다. 어둠이 짙게 깔리자 그녀의 남편이 돌아왔다. 남편은 밭에서 일을 하다 간혹 그 주변을 돌아다니며 혹 먹을 만한 것이 있는지 돌아다니느라 늦은 것이다. 불빛에 비친 그녀의 남편 역시 얼마나 못 먹었는지 몸은 깡말랐으며, 볼이 홀쭉했다. 집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자 남편은 불안한 눈빛으로 부인을 쳐다보았다. “손님이 있어요.” “손님?” “예. 길손인 모양인데, 하룻밤 이슬이나 피하게 해 달라고 해서......” 내외는 속닥속닥 뭔가 얘기를 주고 받으며 남편은 그날의 수확물을 아내에게 건넸고, 아내는 부엌 안으로 분주히 들락거리며 뭔가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부엌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가지고 나왔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일부를 건네준 후, 나머지를 가지고 진 회가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변변치는 않지만 좀 드시구려. 시장기는 면할 수 있을 테니.” 그녀가 건네준 것은 따뜻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국이었다. 국에는 곡물 같은 것도 조금 보였지만, 그 재료의 대부분은 뭔지 알 수 없는 풀들이다. 일부는 싱싱한 것들. 그리고 일부는 말려서 저장해 뒀던 풀들. 먹을 만하기에 국을 끓여 먹겠지만 진회처럼 궁필한 삶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생소한 음식이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국은 맛이 없었다. 그리고 첫 봐도 영양가도 거의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젓가락으로 박박 긁으며 하나도 남김없이 국물을 들이켰다. 국물이 생각보다 뜨거웠던 탓일까?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슬쩍 손등으로 자신의 눈가를 훔치며 병사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허어, 국물이 너무 뜨겁구먼. 그래도 주린 속에 이거라도 먹으니 한결 든든한걸. 자네들도 어서 들게.” “존명.” 하늘과도 같은 상관이 깨끗이 그릇을 비운 마당에, 그들이 국을 남길 수는 없었다. 이때, 병사들 중 하나가 재빨리 자신이 가져온 짐을 뒤져 건량을 꺼내 왔다. 하인들조차 먹지 않을 정도로 부실한 국이었기에 재상 진회가 시장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것도 같이 드시지요.” “아니, 나는 됐네. 이것만 먹어도 뱃속이 그득한 것 같구먼.” 뱃속이 그득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안타까운 백성들의 삶 때문에 그의 식욕이 사라진 것이다. 식사다 끝나자 진회는 집의 주인을 청했다. 서로 간에 인사를 나눈 후, 진회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은근슬쩍 던졌다. “저녁에 건넨 식사를 보니 식량이 모자라는 것 같던데. 수확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일세 그려.” 진회의 질문에 농부의 눈에 의아함이 짙게 어렸다. 하지만 곧 뒤에 서 있는 병사들의 손에 들린 검을 보자 두려움이 짙게 배인 눈으로 진회를 살펴보며 물었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요?” “내 궁금해서 묻는 걸세. 이 일대에 기근이 들었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본 적도 없었거든.” 그 말에 농부는 퉁명스럽다 싶을 만큼 짧게 대꾸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수.” 진회는 밖으로 나가려는 농부의 손을 잡아 억지로 다시 앉게 한 뒤 다시금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농부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농부의 응대에 병사중 한 명이 화가 치밀어 그의 멱살을 틀어쥐며 윽박질렀다. “이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계속 거짓말을 늘어놓는 게냐! 주리를 틀어야 이실직고할 테냐?” 얼핏 들어 봐도 관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어조요. 단어들이다. 그걸 느낀 농부의 입은 더욱 고집스럽게 꽉 다물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진회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내가 이토록 고집스럽게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말이다. “이보게, 왜 대답을 안 하는가? 설마 우리가 자네를 해칠까 두려워서 그런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묻고 싶은 게 있을 뿐이니 안심하게.” 하지만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살그머니 자신을 훔쳐볼 뿐,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 사내를 보며 진회는 사내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당했기에 항변조차 못할 정도로까지 길들여진 것인지. “말을 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가 없지.” 병사들을 시켜 일을 열게 할 수도 있었지만 진회는 그러지 않고 답답한 듯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는 있지만 농부의 온몸이 두려움에 덜덜 떨리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잠시 애처로운 눈빛으로 농부를 바라보던 진회는 밖으로 나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때 갑자기 아낙이 방 안으로 내달려 들어와서는 남편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이이가 잘못한 것이 없는 데 왜 그러시우? 관에서 나왔다고 사람을 이렇게 핍박해도 되는 거요?” “우리가 관에서 나왔다고 누가 그러던가?” “누가 모를 줄 아우! 저 아랫마을에 사는 김 씨네도 길손을 집에 묵게 해 준 다음 날 관에 잡혀가서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수. 괜히 이러저리 찔러 이쪽에서 말실수하도록 유도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시란 말이우. 따뜻한 방에서 주무실 수 있도록 방까지 내 드렸지 않수! 왜 은혜를 이렇게 웬수로 갚으려고 하시느냐는 말이우.” 남편을 보호하려는 일념에 여인은 두려움에 눈물까지 글썽이면서도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후에야 진회는 복잡한 사정이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마도 이쪽에 있는 관부에 있는 놈이 먼저 선수를 친 듯했다. 길손으로 분장시킨 밀정을 보내 주민들을 슬슬 찔러 본 다음, 이 고을 관리들의 폭정에 대해 사실대로 고해바친 인물들을 잡아 들여 묵사발을 내놓은 모양이다. 처음에 좀 묵어가자는 말을 꺼냇을 때 당혹스러워 하던 그녀의 모습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녀로서는 당연히 모르는 길손들을 집 안에 들이고 싶지 않았으리라. 진회의 경우 부하 둘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차마 묵어가자는 말을 거절하지 못해 일이 이 지경이 된것이겠지만 말이다. “어찌 된 일인지는 대충 알겠으니 마음을 진정하시구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인을 달래며 진회는 품속을 뒤져 은자 두냥을 꺼내 그녀의 손에 꼭 쥐어 줬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다 건네주고 싶지만, 갈 길이 먼 데다가 앞으로도 당신들 같은 처지의 인물들을 계속 만나게 될 테니 그들에게도 뭔가를 줘야 하지 않겠소. 적은 돈이지만 그걸로 곡식을 추수할 때까지 버티도록 하시오.” 진회의 말에 아낙은 잔뜩 고조되었던 긴장이 풀려서인지 울음을 터뜨리며 진회에게 감사의 말을 연발했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남편은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추수하면 뭐합니까? 황충이 떼라도 나타난 듯 집 안을 이 잡듯 뒤져 다 털어갈 텐데......” 진회는 믿기 힘들다는 듯 급하게 물었다. “이 고을 관리들의 폭정이 그토록 심하다는 것이냐?” 남편은 넋이라도 나간 듯 멍하니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것입지요.” 한 번 말문이 터지자 참을 수 없다는 듯 남편은 이 마을 관리들의 폭정이 얼마나 지독한지 진회에게 낱낱이 얘기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듣던 진회의 얼굴이 점차 새하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그의 꽉움켜진 손은 얼마나 그가 분노하고 있는지 핏줄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백성을 수탈하는 탁욕스런 관리일수록 의심이 많다. 관리들에게 있어 백성은 하찮은 무지렁이였고, 자신들의 돈주머니를 채워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관리들은 이들 무지렁이들이 수확물을 속여 자신에게 내야 할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거나, 이 지방을 지나는 길손에게 이런저런 불만을 말해 괜히 높은 곳에 있는 관리의 귀에 정확한 정보가 들어가 자신들이 상납해야 할 뇌물의 양이 많아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좀 더 효율적으로 백성들을 쥐어짜기 위해 ‘밀정’이라는 놈들을 애용했다. 왕적삼(王積三) 포두 또한 바로 이 밀정이라는 놈들을 이용하여 톡톡히 재미를 보고 계시는 나으리들 중 한 명이다. “그러니까 서가 놈 집에 웬 길손이 묵고 있더라는 말이냐?” “예, 그날 같이 논일을 하기로 약조를 했었기에 제가 서가네 집으로 갔었지 않았겠습니다까요. 그런데 서가네 집에서 장정 둘과 서생 하나가 묵고 있더라 이겁니다.” “그자들의 용모는 어떻던가?” “멀리서 얼핏 봤기에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장정 둘은 기골이 아주 장대해 보였습니다요. 그리고 그중 하나는 장검을 들고 있던뎁쇼.” 순간 왕적삼의 눈이 번쩍 빛났다. “장검이라고? 확실하냐?” “예, 틀림없습니다요.” 밀정이 돌아가고 난 후, 왕적삼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흐음, 어디서 보낸 놈들이지?” 지금까지 그의 옆에 말없이 앉아 있던 장 포두가 끼어들었다. “이봐, 생각할 게 뭐 있어. 그냥 해치워 버리면 그만이지.”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허, 쥐새끼 세 마리 해치우는 게 어려울 게 뭐가 있나?” 이들은 지금까지 수상쩍어 보이는 외지인들은 몽땅 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렸다. 물론 그중에는 상부에서 보낸 밀정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뒤가 구린 그들은 수상쩍은 사람도 없앨 겸. 그자들이 지니고 있는 돈도 털어먹을 겸 일석이조의 사냥을 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세 마리가 아니니까 문제지. 그냥 토끼 사냥하듯 때려잡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아.” “무슨 소리야? 좀 전에 세 놈이라고 그놈이 말한 걸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그러자 왕적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놈들 말고 뒤따르는 또 다른 놈들이 있기에 하는 말이야.” “뭘 복잡하게 생각해. 그렇다면 대규모 상단인가 보지.” 장 포두는 예전에 상단을 털어 짭짤한 재미를 본 기억을 떠올리며 갑자기 왕적삼이 왜 이렇게 소심하게 구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단이면 내가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아. 사실 오늘 아침 조가 놈이 찾아와서 말하더군. 어제 저녁 산에서 나물을 캐고 있는데, 산 아래쪽에 20명 남짓한 장정들이 숨어서 서가 놈 집 쪽을 관찰하고 있더라고 말이야. 그런데 문제는 모두들 무장을 하고 있는데다 꽤나 덩치가 있는 놈들이라고 하더라구.” “어라. 그렇다면 상단이 아니라 그거 산적 놈들 아냐?” 왕적삼은 그 말에 동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절이 어수선하다 보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 중 칼을 움켜쥐고 산적으로 직업을 바꾸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흠, 산적이라. 그럴 수도 있겠네.” 장 포두는 왕적삼이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더욱 침을 튀기며 입을 놀렸다. “내 생각에는 그 산적 놈들이 서가 놈의 집에 묵고 있다는 놈들을 쫓아온 거 같아.” 왕적삼은 장 포두의 말이 그럴듯한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몸을 들썩이며 장포두가 말했다. “좋아, 우리도 빨리 움직이자구. 산적들이 그놈들을 노리는 걸 보면 꽤나 큰 건수임에 틀림없어. 보아하니 장정 둘은 서생을 호위하는 보표인 듯한데 그 정도야 문제없잖아.” 신이 난 장 포두와는 달리 왕적삼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장사치 몇 명 죽이고 돈을 뺏는 거야 병사들을 우르르 몰고 가면 되지만, 덩치 좋은 산적들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자칫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산적하고 맞붙어야 하는데, 그건 좀 찝찝하군.” “산적 놈들이 서가 놈 집 근처에 숨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며? 언제 털어먹고 튀어도 이상할 게 없다구. 어쨌거나 돈을 만지려면 어쩔 수 없이 산적 놈들과 맞붙을 수밖에 없잖아. 혹, 그놈들이 우리가 출동한 걸 알면 알아서 도망칠 수도 있으니 거기에 희망을 걸자구. 무엇보다 그 정도의 산적이 쫓아올 정도라면 우리가 만져 보지도 못할 정도의 거금을 지고 있을 지도 몰라.” 장 포두의 말에 왕적삼은 귀가 솔깃했다. 생각해 보니 20명이나 되는 산적들이 몰려올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지니고 있을까? 어쩌면 돈이 아닌 희대의 보물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보표를 고용해 돌아다닐 정도라면 돈푼깨나 가진 놈이 분명했다. 산적이라는 말에 잠시 고개를 숙였던 탐욕의 마음이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왕적삼은 마을에 소속된 병사들을 모두 불러들인다면 산적들이 쉽게 덤벼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혼자 챙겨먹는 것보다 자신에게 떨어지는 양은 적겠지만 산적들이 횡재를 하는 것을 손가락만 빨며 지켜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다면 병사들의 숫자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게 좋겠군.” “물론이지. 내가 이 포두에게도 연락을 넣을게.” 큰 건수라고 생각했는지 병사들을 모으고, 출동 준비를 갖추는 포두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산적들이 언제 행동을 개시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포두들은 병사들이 어느 정도 모이자 즉시 출동했다. 그들은 각자 부하들을 거느리고 세 방향에서 외곽부터 시작해 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왕적삼은 자신이 맡은 방향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이동하며, 요소요소의 길목에 활로 무장한 포졸들을 배치했다. “너는 저쪽에 숨어 있어.” “옛.” 왕적삼은 자신의 지시대로 숲 속으로 달려가는 포졸들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만약 이쪽으로 도망치는 놈이 있으면 무조건 쏴 죽여!” 왕 포두의 지시를 받은 포졸이 히죽 웃으며 자신 있게 대꾸했다. “알고 있습니다. 왕 포두 나으리. 이런 일 어디 한두 번 합니까.” 부하들을 이끌고 왕 포두가 가 버린 후, 그곳에 홀로 남겨진 포졸은 길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자리를 잡자마자 등에 메고 온 활을 내려놓은 다음, 화살을 하나 꺼내 시위에 걸어 두었다. 언제라도 신속하게 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놈들이 빠져나가지 않았어야 할 텐데......” 포졸의 바램은 그것뿐이었다. 만약 저들이 포위망이 구축되기 전에 이미 도망치고 없다면? 그렇다면 자신들을 그들을 쫓아 산길을 달려 또 다시 이동해야만 했다. 될 수 있으면 그런 수고는 안 했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램인 것이다. “오늘은 좀 빨리 끝났으면 좋겠군.” 중얼거리며 산길을 관찰하고 있는 그의 뒤편에 놀랍게도 시커먼 그림자가 얼핏 보였다. 사람의 움직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갑자기 쑥 튀어나왔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우드드득! 포졸은 자신의 뒤편에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손쉽게 목이 꺾여 버렸다. 포졸의 목을 붙잡고 뒤틀어 버린 것은 검은색 야행복과 복면으로 전신을 감싼 괴한이었다. 괴한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포졸의 몸을 살며시 땅바닥에 내려놓은 한편,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잠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주위에서 어떠한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자, 그는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크흐흐, 식은 죽 먹기겠군.” 적당한 곳에 한 명씩 포졸들을 배치하던 왕 포두는 잠시 후면 거금을 만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몹시 좋았다. 사실 산적이 있다고는 해도 지금껏 몇 번씩이나 해 왔던 일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자기 외에도 다른 포두 두 명이 더 병력을 이끌고 오지 않았는가. 동원된 병사만 해도 56명이다. 그럭저럭 무예에 능한 자들은 채 20명이 되지 않지만, 농사만 짓다 칼을 든 산적들 쯤이야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들의 모습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며 줄행랑을 칠지도 모른다. 자신감에 충만한 왕적삼의 관심은 이제 산적들보다 거금을 지니고 있을 서생 놈에게 쏠려 있었다. 사방에 궁수들을 매복시켜놨기에 놈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왕적삼의 머릿속에는 벌써 서가네 집에 묵고 있는 놈들을 잡아 거금을 챙기면 다른 두 명의 포두에게 어느 정도 나눠 줘야 할지 주판을 열심히 튕기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의 뒤를 따르면서 부하를 한 명씩 매복시킬 때마다 죽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 모두들 잠시 휴식.” 고개 하나만 더 넘으면 서가 놈의 집이다. 그렇기에 왕 포두는 부하들을 그곳에 대기시킨 후, 두 명의 포졸만 데리고 고개 위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고개 위에 올라가면 사방을 폭넓게 관찰할 수 있는 만큼, 다른 포두들이 목적지에 도착해 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에 신호에 맞춰 동시에 돌지네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시간이 어긋나면 놈들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개 위에 도착한 왕 포두는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서가네 집을 관찰했다. 순간 왕 포두의 눈이 번쩍 빛났다. 서가네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장정 하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밀정의 보고대로 놈의 기골은 꽤나 장대했다. 제법 검술을 익힌 자인지도 모른다. “흐흐흐, 산적 놈들이 아직 습격을 하지 않은 모양이군. 우리가 먼저 행동을 시작해도 되겠어.” 왕 포두는 품속에서 작은 동경 하나를 꺼내 햇빛을 반사시켜 다른 두 포두들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위치로 신호를 보냈다. 잠시 그렇게 신호를 보냈지만 두 포두들이 있는 족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왕 포두는 살짜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군. 그나저나 산적 놈들보다 먼저 움직여야 할 텐데... 어쩌지?” 산적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만큼 왕 포두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산적들이 먼저 털어 먹고 도망쳐 버린다면, 그들을 잡기 위해 산적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물론 병력의 차가 있으니 산적들을 잡는 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다 눈먼 칼에 다치면 자신만 손해 아닌가. 가장 좋은 방법은 산적보다 저들을 먼저 털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산적들도 포졸들과 싸우느니 그냥 물러날 게 틀림없다. “젠장,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아직까지도 도착하지 않고 말이야.” 투덜거리며 왕 포둑 뒤로 돌아섰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이끌고 온 두 명의 포졸들이 어느새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검은색 야행복을 입은 괴한 하나가 자신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이 아래쪽을 관찰 한다고 뒤쪽에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어떻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부하들을 해치울 수 있었을까? 살기를 뿜어내며 괴한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을 암습하려 한 죄, 죽어 마땅하다.” 순간 왕적삼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장사치나 산적이 아니다.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왕적삼은 잽싸게 칼을 뽑아 들었다. “산적들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한 포졸들에게 손을 쓰다니 당신은 국법이 무섭지도 않소?” 대기하고 있는 포졸들이 들을 수 있도록 왕적삼은 클 소리로 말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목소리는 가늘게 떨려 나왔다. “큭큭, 국법? 감히 네가 국법을 논한단 말이냐?” 괴한의 비아냥거림에 왕적삼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애써 입을 놀렸다. “보아하니 서로 간에 오해가 있는 듯한데 이 정도에서 물러간다면 죄를 묻지 않겠소.” “오호, 죄를 묻지 않는다? 그건 좀 곤란하지. 그리고 네놈이 아니라 내가 너의 죄를 물을 생각이거든.” “다, 당신이 뭔데 포두인 내게 죄를?” “감히 진 대인을 암습하려는 행동 하나만으로도 넌 죽을죄를 지었다.” 순간 왕적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진 대인이라는 말 한마디에 재상 진회가 지방 순시를 나와 있다는 사실이 떠 올랐던 것이다. ‘씨불, 좆됐다. 그냥 주는 거나 챙겨 먹고 돌아가지. 왠 암행?’ 잽싸게 땅바닥에 엎드린 왕적삼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을 했다. 그동안 열심히 모아 놓은 돈도 써 보지 못하고 이대로 죽기엔 너무 억울했던 것이다. “제, 제발 살려 주시오. 집에는 팔십 먹은 노모가......” 퍽! 물론 집에 노모가 있지도 않았지만 상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위해 떠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통하지 않았다. 괴한의 매서운 손에 그는 뒤통수가 함몰되어 저세상으로 가 버렸다. “쓰레기 같은 놈. 이런 것들이 관리랍시고 설치고 있으니, 나라가 이 모양이지.” 괴한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주위의 상황을 점검했다. “이쪽은 얼추 끝났는데 혹시 놓친 놈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 해봐야겠군.” 괴한은 진회를 암중에서 호위하고 있는 복면인들 중 한 명이었다.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포졸들은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다. 그럼에도 이렇게 가차 없이 죽이는 이유는 진회의 암행 순시가 밖에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괴한의 모습은 고개 위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난 진회는 짐을 꾸린 후, 농가의 아낙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남편은 일을 하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만 가 봐야겠네. 어려운 형편에 찾아온 길손에게 온 정을 베풀어 주어 고마울 따름이야.” 진회의 말에 아낙은 코가 땅에 닿도록 연신 절을 하며 감사해 했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들이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요.” 어제저녁 생각지도 않은 은자 두 냥을 얻게 된 것이 그녀 가족에게는 너무나도 큰 축복이었다. 은자 두 냥으로 식량을 사서, 산에서 캔 나물과 나무껍질을 함께 먹는다면 내년 가을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녀에게 있어서 진회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은인들을 이리 보낼 수는 없으니, 제발 애들 아버지가 올 때까지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진회로서는 난감한 부탁이기는 했지만, 여인의 말을 들어 보니 남편은 새벽녘에 손님들께 대접할 음식 재료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아마 늦어도 점심나절이면 도착할 테니, 제발 제대로 된 음식이나마 대접하여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그녀는 간청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청했기에 진회는 할 수 없이 떠나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 아낙의 청을 차마 뿌리치고 떠나지 못한 진회 일행은 그날 점심나절이 다 되어 푹 삶은 닭국을 한 사발 먹은 후에야 그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비록 물을 잔뜩 넣어 끓인 멀건 닭국이었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먹어본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다고 생각한 진회였다. 행방불명된 악비 대장군 임충은 관지 장로의 명령으로 악비 대장군을 호위하고 황도에 와 있었다. 그의 휘하에 있는 1개 천인대를 몽땅 다 데리고 왔지만, 천기나 되는 중무장한 인마를 황도 안에까지 끌고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황도 안에까지 그와 함께 한 인원은 50기뿐이었고, 나머지는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 그가 들은 대로라면, 이번 임무는 임무라기보다 오히려 유람에 가까운 것이었다. 악비 대장군이 황도에 다녀오는 데, 그가 왕복하는 동안 원거리에서 철저히 호위하라는 것이 주된 임무다 황도에는 3만에 달하는 황군이 치안을 유지하고 있기에, 그 안에서까지 그를 호위해 줄 필요는 없었다. 즉, 황도에 도착한 후에는 충분한 자유 시간이 보장되는 최고의 임무였던 것이다. 악비가 일을 다 마칠 때까지 현재 대송제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남경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임충의 마음은 꽤나 들떠 있었다. 황도에 도착한 후, 그는 가장 먼저 50기의 인마가 묵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객잔을 확보했다. 교주의 명령에 의해 이곳에 온 것이었기에 객잔에 묵을 돈은 공금으로 처리된다. 임충은 아주 괜찮은 객잔 하나를 통째로 빌려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수하들과 함께 거하게 술판까지 벌였다.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목에 낀 먼지를 씻어 내기 위해서. “대장. 손님이 오셨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수하의 목소리에 임충은 억지로 눈을 떴다. 새벽녘까지 퍼마신 술이 아직까지도 그의 뒷골을 울리고 있는 중이다. “아이구. 머리야.” 임충은 머리맡에 놓인 주전자를 집어 주전자가 텅 빌 때까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심한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자 그제야 겨우 좀 살 것 같다. “무슨 일이냐?” “소진(蘇進) 교령이 대장을 찾습니다.” 소진 교령이라면 이번에 악비 대장군을 수행하고 황도에 온 장수들 중 하나다. 양양성으로 출발하는 날이 정해지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므로, 악비가 볼일을 모두 마친 것으로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꽤 오래 있을 줄 알았더니 벌써 돌아가나?”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그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문밖에 수하와 함께 서 있는 소 교령의 모습이 보였다. 어깨가 넓은 근육질의 몸매라서 그런지 푸른색의 전포(戰袍)가 아주 잘 어울렸다.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간 그의 사나운 눈매 때문에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황도까지 같이 오는 동안 몇 번 말을 섞어 보니 꽤나 괜찮은 사내였다. 임충은 소 교령을 보자 히죽 웃으며 옷섶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득득 긁었다. 술이 덜 깬 건지, 잠이 덜 깬 건지 몸이 찌뿌둥 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시구려, 소 교령. 같이 해장술이라도 한잔하시겠소?” 소 교령은 창백한 안색으로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큰일 났습니다. 임 대인.” “큰일이라니, 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소 교령은 주위를 둘러본 후, 임충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대장군께서 행방불명되셨소이다.” 너무나도 충격이 컸던 탓일까? 아니면 상대의 말을 믿기 힘들었던 것일까? 임충은 멍한 눈으로 소 교령을 잠시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 농담도 아주 과격하게 하시는구려.” ‘생긴 것만큼이나’ 라는 말이 생략된, 임충의 농이었따. 하지만 소 교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농담이 아니올시다. 대장군께서는 어제 오후에 10여 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입궁하신 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계시단 말이오.” “오랜만에 친한 사람이라도 만나서 늘어지게 술이라도......” 말을 하는 임충의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미인들에게 둘러싸여 흡족한 웃음을 터트리며 술을 마시고 있는 악비 대장군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절대 그럴 리 없소이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사람을 보내어 연락을 주셨을 것이오.” 창백한 소 교령과는 달리 임충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별거 아닌 일 가지고 아침부터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바로 대송제국의 심장부인 황도다. 그리고 악비 대장군은 대송제국을 지탱하는 실세 중의 실세가 아닌가. 오랜만에 입궁한 악비 대장군에게 잘 보이려고 당연히 사람들이 줄을 설 테고, 그러다 보면 연락을 못할 일이 생길 수도 있는건 당연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황궁에 사람을 보내 보면 알 것 아니오. 어제 대장군은 누구를 만나러 입궁하신 거요?” “병참감 왕천(王仟) 장군을 만나러 가셨소. 봄에 공급해 줄 보급품 문제 때문에 상의할 것이 있으니, 양양성 사정에 밝은 고위급 장교를 보내 달라고 왕 장군에게서 연락이 왔었기 때문이오. 대장군께서는 그런 일이라면 당신께서 직접 왕 장군과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며 입궁하셨소.”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 된 것이 아니냐는 듯 임충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병참감? 그렇다면 그자에게 가서 문의해 보면 알 수 있겠구려. 대장군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고.” “본관은 방금 전에 왕 장군과 만나고 오는 길이외다. 괴이하게도 왕 장군은 대장군을 만난 적도 없을뿐더러, 대장군께 사람을 보낸 적도 없다고 말씀하셨소.” 임충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참,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군 그렇다면 왕천이라는 자가 보냈다는 심부름꾼은 어디에 있소?” “알아보고 있는 중이지만 행방이 묘연하오.” 그제야 임충은 사태가 상당히 심감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뭘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젠장, 이런 귀찮은 일이 벌어질 줄 알았으면 인심 쓰는 척하면서 마화에게 양보하는 거였는데......’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다. 한동안 끙끙댔지만,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책임자는 자신이다. 할 수 없이 벌떡 일어서서 방문을 열자 방금 전에 소 교령을 안내해 온 수하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봐. 백인장보고 이리 오라고 해.” “존명!” 얼마 지나지 않아 제 11백인대장 왕덕(王德)이 달려왔다. “찾으셨습니까. 천인장님.” 임충은 왕덕에게 사건의 전말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빨리 대장군을 찾아보라고 명령했다. “누군가 대장군을 접대한다고 거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남경 안의 제법 이름 있는 술집은 몽땅 다 샅샅이 뒤져 보란 말이다.” “옛.” “대신 대장군이 행방불명되었다는 내색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 알겠나?” “수하들에게 주의시키겠습니다.” “그리고 혹 사람이 부족할 수도 있으니, 성 밖에 대기하고 있는 녀석들에게 연락을 보내 자네 백인대의 남은 인원 50명도 이리로 합류하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왕덕을 내보낸 후, 임충은 소 교령에게 말했다. “자네는 그 심부름꿈을 찾아보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을 찾아내야 해. 알겠는가?” “최선을 다하겠소이다. 임 대인.” 소 교령까지 황급히 떠나고 난 후, 홀로 남은 임충은 물부터 벌컥벌컥 들이컸다. 목마름은 이제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그의 속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대장군은 과연 납치된 것인가? 아니면 어딘가에서 술에 취해 골아 떨어져 있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누군가 고위급의 인사와 은밀한 곳에서 만나 밀담을 나무고 있을까? “하루! 하루 동안 전력을 다해서 찾는 거야. 그래도 나타나지 않으면 교주님께 연락을 넣는 수밖에.” 내심 그렇게 결심했지만, 아무래도 뭔가 찜찜했다. 괜히 실종되었다고 보고를 올렸는데, 악비 대장군이 어디선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타나면 자기만 교주에게 왕창 깨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젠장, 아주 재수 더럽게 걸렸어.” 그렇게 말하는 임충의 안색은 마치 소태라도 씹은 듯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순시 행렬이 강서성의 성도(省都) 남창(南昌)을 이틀거리쯤 남겨 놓았을 때 진회는 행렬에 합류했다. 몰래 빠져나간 것이었기에 다시 합류하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박 교령에게 연락을 넣자, 그는 인근에서 가장 큰 주루(酒樓)의 이름을 알려주며 그곳에 준비를 해 두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곧이어 가짜 재상의 화려한 행차가 원청루(園淸樓)를 향했다. 재상께서 인근에서 가장 유명한 원청루에 들러 가벼운 다과를 즐기며 경치를 감상하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병사들이 원청루 주변을 완벽하게 에워싼 후, 잡인의 출입을 금했다. 그런 다음 원청루 안을 샅샅이 뒤져 그곳에 있던 손님들까지 모두 내보냈다. 그런 소란 통에 가짜가 진짜로 교체되었고, 재상을 따라 밖으로 나가 개고생을 하고 돌아온 20여 명의 병졸들도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호화로운 관복으로 갈아입은 진회의 안색은 밝지 못했다. 암행순시를 해 본 결과 백성들의 참담한 현실에 할 말을 잃은 정도였기 때문이다. 굶주려서 뼈만 남은 유랑민, 식량이 없어 자식들을 팔아 버린 부모, 어떠 곳은 심지어 서로 자식을 바꿔 잡아먹기까지 했다. 전쟁의 와중이라 어느 정도 혼란스러울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진회가 착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조심스럽게 시종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섭 대인이 사람을 보내왔사옵니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섭평(攝平)이라면 중서(中書)에서 재상 다음가는 지위에 있는 존재다. 즉, 재상 진회가 황성을 비운 지금, 그가 가장 강력한 실권자라는 말이다. “섭평이? 그래, 무슨 일이라고 하더냐?” “대인께 독대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독대를? 이상한 일이군. 심부름을 온 자가 독대를 청하다니......” 무슨 일인가 하여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숙소로 돌아갈 수도 없다. 경치 구경을 핑계로 여기 와 있으니 그만큼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자에게 이리 오라고 일러라.” “예, 곧바로 사람을 보내겠사옵니다.” 원청루는 3층으로 이뤄진 큰 규모의 주루였다. 진회는 3층에 자리를 잡은 뒤 간단한 요리와 술을 들었고, 1층과 2층은 병사들이 자리 잡고 일절 잡인의 출입을 막고 있는 상태다. 그런 만큼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누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병사의 안대를 받으며 나이 지긋한 문관이 올라왔다. 진회는 한 눈에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자는 바로 섭평의 총광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진회는 눈짓을 하여 병사에게 나가 보라고 지시한 후, 총관을 반겨 맞이했다. “자네는 이 총관이 아닌가. 그래, 무슨 일로 독대를 청했으냐?” “예. 섭 대인께서 이 서신을 재상께 급히 전하라고 하셨사옵니다.” 이 총관은 품속에 소중하게 간직해 온 봉서를 꺼내어 진회에게 바쳤다. 서신을 전하는 데 자신의 가장 충복이라고 할 수 있는 총관을 보낸 것을 보면 대단히 중요한 서신인 모양이다. 진회는 봉서를 뜯은 후, 재빨리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냐? 이게 사실이냐?” 하지만 이 총관은 고개만 더욱 깊게 숙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봉서 안의 내용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너는 지금 즉시 돌아가서 섭평에게......” 진회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총관을 통해 구두로 전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밖에 대고 외쳤다.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시종이 지필묵을 가져오자 그는 섭평에게 전할 내용을 단숨에 써 내려갔다. 그런 다음 서찰을 단단하게 봉인한 후, 이 총관에게 건네주며 신신당부했다. “자네는 지금 즉시 달려가서 이것을 섭평에게 전하게. 최대한 빨리 전해야 하네. 알겠는가?” “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서라도 최대한 빨리 전하겠사옵니다.” 이 총관이 서둘러 밖으로 나간 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인.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대인을 모시면서 지금처럼 동요하고 계신 모습은 처음 뵙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황도에서 보내온 급전일세.” <양양성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라도 했습니까?> 양양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말은 곧 금군이 재차 군사를 일으켜 쳐 내려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악비 대장군이 투옥당했다고 하더군.” 이 말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는지, 상대방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마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내 소문을 들으니 무림에 적을 둔 인물들은 경공술이라는 독특한 기술을 익혀 말보다도 빨리 달린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인가?” <단거리만을 달린다면 말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겠지만, 장거리를 달리면서 말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휴~ 그렇다면 이 총관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만 하는가?” <대인께서 방금 전에 경공술에 대해 물으신 것이 혹시 서신을 얼마나 빨리 전해 줄 수 있으냐 하는 그런 것입니까?> “그 이유였네.” <그것이라면 이 총관보다 최소한 4일 먼저 황도에 서신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회는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일을 벌 수 있다니...... “그게 사실인가?” <예. 저희들은 말이 달리지 못하는 지름길을 달려갈 수 있으니까요.> “그럼 내 자네에게도 서신을 부탁해야겠구먼.” 진회가 서둘러 밀서를 한 통 작성하자마자, 어디선가 흑의복면을 한 인물 하나가 흡사 바닥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하듯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참지정사 섭평에게 전하게.” “예.” 흑의복면인은 밀서를 조심스럽게 품속에 집어넣은 후 진회에게 물었다. “이걸 섭 대인에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최대한 빨리 전해 주기만 하면 되네.” “예,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진회를 경호하기 위해 이곳에 배치도니 인물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경호대주가 직접 그 밀서를 품에 지니고 황도를 향해 달려갔다. 그의 경공 실력이 가장 뛰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직접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섭평에게 밀서를 보낸 후, 진회는 박 교령을 불러올렸다. 박 교령은 재빨리 달려와 예를 갖췄다. “찾으셨사옵니까? 대인.” “지금 바로 황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게. 남은 모든 일정은 취소하도록 하고.” “예? 황도로 말씀이시옵니까?” 갑작스런 진회의 명령에 박 교령은 당황한 듯 물었다. 하지만 곧이어 냉정을 되찾은 그는 진회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바로 돌아가시는 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옵소서.” 평소의 박 교령 답지 않게 간곡하게 청해 오니, 진회로서도 그걸 매몰차게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왜?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 “남창이 바로 코앞이옵니다. 여기까지 오셔서 성주님을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간다면, 예가 아닐 것이옵니다.” 그말을 듣자 진회는 난감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렇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각 성(省)을 맡고 있는 성주들은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이다. 특히 강서성주(江西省主) 조권(趙權)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세를 지닌 황족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얼굴도 보이지 않고 그냥 돌아가기에는 뭔가 찜찜한 인물인 것이다. 더군다나 조권은 재상이 순행 온다는 통지를 받고 지금쯤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뒀을 것이다. 그 준비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연회인데, 거기에 참석할 수많은 손님들에게 이미 초청장을 다 돌려 놨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연회에 초청한 사람들 앞에서 재상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권세를 뽐낼 것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성주를 보지도 않고 황도로 돌아가 버린다면, 연회에 초청받은 손님들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아마도 조권의 권력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깔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런 치욕적인 일을 당한 조 성주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관분할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떠올린 진회는 박 교령의 조언이 적절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회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지시를 내렸다. “자네 말이 옳아. 예정대로 남창을 방문하는 것이 좋겠군. 하지만 그 뒤의 일정은 모두 취소하고, 곧바로 황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게.” “옛. 명대로 조치해 두겠사옵니다.” 박 교령은 절도 있게 대답한 후, 조심스럽게 재상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는 재상이 갑자기 황도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외적이라도 쳐들어 왔다면, 자신의 조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창에 가는 것을 허락한 것으로 보아 정말 화급을 다투는 그런 중대사는 아닌 듯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슨 일일까? “황도에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이옵니까?” 진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악비 대장군이 투옥당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박 교령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예? 어떻게 그럴 수가......” “섭평의 보고에 따르면, 추밀사 류태청이 그를 체포한 모양이야. 황상께 대한 항명죄로 말일세.” 추밀사라면 군부의 최고 기관인 추밀원의 우두머리다. 내각이라고 할 수 있는 중서와 더불어 2부(二府)라 불릴 정도니 추밀사의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인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전의 이야기다. 장수들은 자신들의 병사를 사병화시켜 버린 후, 마치 자기들이 지방의 호족이나 되는 듯 행세하고 있다. 이른바 군벌(軍閥)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추밀원의 지시를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상황이다. 하지만 추밀원은 그들을 징계할 방법이 없었다. 휘하의 모든 장수들이 다 말을 듣지 않는데 그 들을 무슨 방법으로 징계한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이 상황을 더욱 장기화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금나라 오랑캐들이다. 군벌들은 모두 다 금과의 접경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 만큼 그들은 금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만 핶고, 추밀원으로부터 보급 물자를 얻어 내기 위해 그들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추밀원은 추밀원대로 군벌들을 혁파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방어선의 중심축을 담당하고 있는 군벌들 중 일부가 수틀린다고 금나라에 투항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송나가 쫄딱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추밀원은 말 안 듣는 군벌들을 살살 달래 가면서 뒤에서 지원만 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 듯한데, 일정을 계속 유지할실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대인. 이런 중차대한 사유라면 성주님께 잘 아뢰면 그냥 넘어가 주실 지도 모를 일이 아니옵니까?” “아닐세. 이미 섭평에게 지시를 내려놨네. 류태청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를 풀어 주도록 하라고 말일세. 나는 나중에 돌아가서 둘을 화해시키기만 하면 될 게야.”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 일이 결코 말처럼 쉬운 게 아님을 박 교령은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송에서 가장 강대한 병권을 쥐고 있는 대 군벌이다. 그런 자를 감옥에 처박아 놨으니 그게 보통 일이겠는가. “대인, 이왕에 이렇게 된 것. 그자를 없애 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하지만 진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얕은 소견이라 탓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대인께서도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한 번 틀어져 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말이옵니다. 더군다나 그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 시에는 대인께 크나큰 위해가 가해질 수도 있음이옵니다. 그가 병사를 이끌고 황도로 진격한다면......” 하지만 진회는 박 교령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노부는 그를 믿는다. 그는 그렇게 속 좁은 인물이 아니야.” 생각 하고 있는 바는 다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송제국에 대한 충성심이다. 비록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어도 진회에게 있어 이런 혼란한 시국에 악비만큼 듬직한 장수가 없었다. 그런 유능한 장수의 목을 벤다니...... 인재를 아끼는 그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바람을 쐬러 나온 묵향은 풍광이 수려한 만현에 자리 잡고, 모든 일을 잊은 듯 만통음제와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만통음제의 몸이 썩 좋지 못한 상황이라 그와 마음 편히 유람을 다닐 형편은 아니었기에, 이곳 만현 주위의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술과 음(音)을 즐기면서 의형제 간의 정을 흠뻑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묵향의 앞에 갑자기 마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온몸에 먼지투성이인 그녀는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어? 마화가 여기는 어쩐 일이야?” 마화는 묵향에게 인사한 뒤, 그의 뒤편에 서 있는 만통음제에게도 인사했다. 만통음제는 건강을 많이 회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은 듯 약간 핼쑥해 보였다. “본교에서 온 급전입니다, 교주님.” 마화는 만통음제라는 존재 때문에 직접 보고를 올리는 대신, 서찰을 통해 소식을 전했다. 만통음제는 화경급의 고수, 그가 자신의 보고를 엿들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설혹 전음을 사용했다손 치더라도 도청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년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아무 말 없이 서찰을 받아든 묵향은 서찰의 내용을 읽자마자 삼매진화로 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만통음제를 바라봤다. 그도 황도에 만통음제를 데려갈 수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동생. 표정이 많이 굳었구먼.” 묵향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본교에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십만대산에 말인가?” “예, 이렇게 헤어지는 건 썩 내키지 않지만, 지금 당장 떠나야겠습니다.” 십만대산까지는 만 리도 넘는 너무나도 먼 거리다. 자신의 몸상태를 잘 아는 만통음제는 십만대산이라는 말 한 마리에 따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급한 일이라면 내 걱정은 말고 빨리 가 보게. 아직 몸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동생을 걱정시킬 정도는 아니라네.” “죄송합니다, 형님” 만통음제를 속인 것이 조금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마화로 하여금 양양성까지 형님을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닐세. 오랜만에 경치 좋은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야 없지 않겠나, 한동안 이곳에서 유유자적 지내다 돌아갈 생각이네.” “제가 모시고 왔는데, 급하게 일이 생기다 보니 너무 죄송해서......” 만통음제는 이럴 때 도움이 되지 못해 더 미안한 모양이다. 그는 묵향이 부담을 가지고 떠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허허, 별말을 다 하네 그려. 그보다 내 제자에게 내가 이곳에 있다고 전해 주게나. 말을 안하고 와서 걱정할 게야.”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일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달려오도록 하겠습니다.” 묵향은 만통음제와 헤어진 후 마화와 함께 최대한 빨리 황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미파 여승들과 흑풍대 무사 과거 무림맹의 장로, 맹호검군 백량이 금나라 황제의 목을 베겠다며 부하들을 이끌고 금나라 황궁을 급습한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일은 실패였다. 금나라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장인걸이 치밀한 조치를 취해 놓은 상태였기에,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든 것이나 마찬가지의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기습 작전이 실패한 후, 무림맹에서는 금나라에서 보복으로 이쪽 황제의 목을 베기 위해 암살자들을 파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만약 상대가 천마혈검대원들 중 일부를 투입해 온다면, 현재 황궁에 배치된 전력으로 그들을 막아 낼 수가 있을까? 개방에 의뢰해서 알아본 결과, 결론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그만큼 황병들의 무예수준이 기대 이하였던 것이다. 무림맹이 이렇게 부산을 떠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황제의 목을 벨 수만 있다면 전황이 일시에 뒤바뀔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목숨은 중요한 것이다. 무림맹의 지도부는 황궁에 고수들을 투입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곳에 누구를 파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고수들을 파견한다고는 하지만, 황궁은 금남(禁男)의 구역이 아닌가. 그렇다고 맹의 고수들을 거세(去勢)해 환관으로 만들어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생각해 낸 것이 여승들로 이뤄진 문파인 아미파의 투입이었다. 아미파는 9파1방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검의 명문이다. 불교에 심취한 아미파의 고승들은 무림의 일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고, 덕분에 요 근래 다른 문파들이 환란을 겪을 때도 그것을 피해 갈 수가 있었다. 여승이라 황궁에 투입하기도 좋았고, 타 문파에 비해 고수들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다. 고수들을 파견해 달라는 무림맹의 제안을 아미파는 어쩔 수 없이 허락해야만 했다. 만약 이 제의를 거절한다면, 다른 문파들처럼 양양성에 대규모의 고수들을 파견해야만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아미파가 황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한 고수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진사태(瀞眞師太)다. 예순네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릐 미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 행동 하나하나가 불도를 닦는 이들의 모범이 된다고 세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비구니였다. “사부님, 제자 지선(智宣)이옵니다.” 방에서 낮은 목소리로 경전을 외우며 염주를 굴리고 있던 정진사태는 애제자의 목소리에 반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떳다. “들어오너라.” 문이 살며시 열린 후, 궁녀의 복장을 차려입은 지선이 들어왔다. 아미파의 승복을 입고 움직이면, 혹 다른 이들이 수상하게 여길 것 같아서 취한 조치였다. 황실에 파견되어 있는 아미파의 여고수들은 정교하게 만든 가발까지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얼핏 봐서는 일반 궁녀들과의 구분이 불가능했다. 지선은 1대제자였기에 꽤나 나이가 많았지만, 고강한 내공으로 인해 약간 나이든 궁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선은 방금 끓인 향긋한 차를 스승에게 건넨 후, 살짝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연공공(燕公公)께서 스승님을 뵙자고 청해 오셨습니다.” 그 말에 정진사태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천천히 돌고 있던 염주 알이 그 움직임을 딱 멈췄던 것이다. 그녀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 사이에 둘러져 있는 염주는 적동(赤銅)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푸른빛의 녹이 끼어 있어 유서 깊은 물건임을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잠시 후, 마음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는지 정진사태가 입을 열었다. “연공공이?” 그렇게 말하는 정진사태의 표정만 봐도, 내심 그녀가 얼마나 연공공이라는 자를 싫어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연공공은 황궁 내에서 꽤나 높은 직위의 환관인 데다가, 황궁을 경호하는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자의 청을 쉽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정진사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만큼 싫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진사태는 느릿느릿 말했다. “뭔가 깨달음을 얻어, 오늘 아침부터 연공에 들어가 만나 뵙기 힘들겠다고 전하거라.” 그 말에 지선은 환히 웃으며 납죽 고개를 숙인 뒤 외쳤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과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넘치고 있었다. 정진사태 정도 되는 고수가 깨달음을 얻었다면 화경의 벽을 깨트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강호무림에 또 다른 무(武)의 절대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경하드리옵니다, 사부님.” 하지만 정진사태는 고개를 흔들며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경하는 무슨. 그를 만나기 싫어 둘러대는 것이지. 아쉽게도 깨달음과는 관계없는 일이로구나.” “그, 그렇다면......” 여기까지 말한 지선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불자의 신분임에도 거짓을 말할 정도로 사부가 연공공을 만나기 꺼려하는 마음이 전해 왔기 때문이다. “연공공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사부님.” 사부의 방을 나선 지선은 연공공의 처소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사부님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연공공과 대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지위를 고려했을 때, 다른 사람을 보여 청을 거절하는 것은 상당히 실례되는 행위였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요. 그래, 사태(師太)님의 답을 가져오셨나요?” 환관 특유의 찢어지는 듯한 고성. 듣는 이로 하여금 뭔가 속이 메슥거리도록 만드는 오묘한 목소리를 지닌 것이 환관이었지만, 연공공의 목소리는 그 정도가 특히 심했다. 더군다나 위로 쭉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와 얄팍한 입술, 매부리코가 합쳐지자 아무리 좋게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가 없는 인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속살을 훑는 듯한 뱀과도 같은 저 음침한 시선을 받으면 예써 가라앉힌 마음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지선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상대는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자였으므로. “사부님께서는 오늘 아침에 뭔가 작은 깨달음을 얻으신 모양입니다. 그 후로 계속 명상을 하고 계시기에, 아무래도 한동안 밖으로 나오시기 힘들 것 같습니다.” “깨달음이라면... 바로 그 깨달음을 말씀하시는 거요?” 음침한 시선이 그녀를 훑고 지나가자, 지선은 상대가 자신의 속마을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선은 애써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연공공.” “크흠, 살다 보면 크고 작은 깨달음을 조석지가에 얻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그 많은 깨달음 중에서 하나를 더 얻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소이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지선은 실례되지 않을 정도까지만 시간을 끈 뒤 서둘러서 인사를 건넸다. 더 이상 계속 대화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연공공..” “바쁘신 와중에 저와 사태님의 심부름까지 하시게 하여 죄송함을 금할 수가 없군요.” “그럼......” 서로 간에 오고 간 주된 대화를 가만히 곱씹어 보면, 연공공이 한 말은 누구나 흔히 할 수 있을 법한 그런 말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상대의 기분을 극도로 상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방금 전에 오간 대화도 그렇다.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행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그때 지선이 받은 느낌은 ‘알고 있는 것도 실천하지 않는 주제에, 무슨 얼어 죽을 깨달음?’ 이런식으로 비웃는 듯이 느껴졌다는 점이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녀는 다급히 ‘아미타불’을 연호했다. 안 그러면 무심결에 욕설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기에, 오랜 시간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그녀의 심기를 단 몇 마디의 말로 이토록 뒤집어 놓은 것을 보면 연공공이란 인물도 참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현재 궁에 파견되어 있는 아미파의 고수는 책임자인 정진사태를 포함하여 총 245명. 그중 50명 정도가 자신이 맡은 지점에 매복하여 침입자에 대비하고, 나머지는 교대로 휴식을 취하는 식으로 경비를 하고 있다. 그중 지선과 같은 1대제자들이 맡은 일이 가장 중요했다. 정진사태를 보좌하며 2대제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황궁 전체의 방어선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수시로 점검한다. 그리고 황제에 대한 근접 경호 또한 1대제자들이 맡은 임무였다. 그녀들중에서 두 명이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 황제를 경호하게 되는 것이다. 지선은 연공공의 방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맡은 지역을 한 바퀴 빙 돌면서 방어 상태를 점검했다. 처음 그녀가 황궁에 왔을 때는 곧잘 길을 잃어버렸을 정도로 황궁은 대단히 넓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규모의 황궁조차도 옛 황도인 개봉에 비한다면 그 규모가 초라하다 할 정도라고 하니, 지선으로서는 옛 황궁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이태, 그녀의 귀에 작지만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같은 내가고수가 아니라면 듣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의외로 그 소리는 멀리 퍼져 황궁 전체에까지 울렸다. “침입자?” 지선은 지체 없이 호각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녀가 현장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2대제자 다섯 명을 중심으로 3, 4대제자 20여 명이 여덟 명의 사내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사내들은 비무장인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방심 할 수는 없었다. 독이나 암기를 품속에 숨기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쌍방 간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지선의 물음에 2대제자인 혜인(惠仁)은 사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재빨리 대답했다. “몇 시진째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황궁 내부를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관찰해 보니 무공을 익힌 것이 틀림없어 보이기에......” 지선이 사내들을 바라보니 과연 눈빛이 형형하고 태양혈이 불쑥 솟은 것이, 혜인의 말대로 상당한 무공을 연마했음이 분명했다. 지선은 싸늘한 눈빛으로 사내들을 쏘아보며 냉랭하게 외쳤다. “시주들의 정체를 밝혀 주시지요.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이후에 벌어질 사태에 대한 책임은 시주들께서 지셔야 할 겁니다.” 사내들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으로 보아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지 전음을 나누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수 있을지를 저울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선은 제자들에게 은밀히 전음을 날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제자들의 긴장감이 온몸에 느껴질 만큼 장내의 공기는 팽팽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따. 잠시 후, 결론이 났는지 사내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천마신교의 흑풍대 소속 무사들이오.” 마교라는 말에 아미파 여승들의 안색이 조금 더 굳어졌다. 정파의 한 축으로서 마교와 오랜 세월 원수처럼 싸워 왔던 그녀들이니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리라. 더군다나 이곳은 황궁, 마교의 무사들이 왜 왔단 말인가. 사내들을 바라보는 지선의 눈매가 실쭉 가늘어지는 순간이다. “마교의 무사들이 이곳 황궁에는 무슨 일인가요?” “우리들은 양양성에서부터 악비 대장군을 호위하여 이곳 황도로 왔소. 그런데 그분께서 어제 입궁하신 후 행방불명되셨소.”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지선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대장군이 황궁 안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 있느냐?” 물론 그녀의 이런 행위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사실 1대제자인 그녀가 모르는 일을 그녀보다 낮은 위치의 제자들이 알고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물어본 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제자들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순간. 지선의 뇌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금나라와의 전쟁 때문에 무림맹이 마교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저 마교도들이 진짜 마교도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껏 그녀가 상대해 온 마교도들은 하나같이 마기라고 불리는 아주 기분 나쁜 음습한 패도적인 기운을 뿜어냈었다. 그런데 저들은 전혀 그렇지 않지 않은가. 지선은 냉소를 지으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빈니는 시주들의 말씀을 믿기 힘들군요. 먼저 귀하들이 천마신교 소속의 무사들이라는 증거부터 보여 주세요. 빈니는 시주들이 천마신교에 적을 두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 믿기 힘드니 말이예요.” 사내는 어쩔 수 없는지 품속을 뒤져 명패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나는 흑풍대 소속 제 111십인대장 조창(趙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내 수하들이지요.” 하지만 지선은 명패만으로는 도저히 그들이 마교도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명패라고 던져 준 사각형의 길쭉한 나무 전반에 걸쳐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는데, ‘黑風隊一一一(흑풍대 일일일)’ 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글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록 나무의 재질이 귀한 흑단목이었고, 문양이나 글자를 새긴 장인의 솜씨가 훌륭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것이 마교의 명패라는 증거가 될 수 없었다. 지선은 명패를 조창에게 돌려주며 냉랭하게 말했따. “이것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군요.” “그렇다면 천인장께......” 여기까지 말하던 조창은 말을 멈췄다. 자신의 말도 믿어 주지 않는데, 임충의 말이라고 믿어 줄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괜히 임충의 위치를 가르쳐 줬다가, 이들이 임충까지 체포하겠다고 덤비면 그것만큼 난감한 일도 없다. “양양성에 알아보도록 하시오. 아니, 전쟁이 한참이니 이곳에도 양양성 쪽과 연락을 주고받는 곳이 있을 거요. 그곳에 알아보면 본교에서 흑풍대를 양양성에 투입했음을 알 수 있지 않겠소?” “물론 그렇게 하겠어요. 대신 신분이 증명될 때까지 귀하들을 구속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셨으면 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미파 여승들의 긴장감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높아졌다. 반항하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순간 조창은 이들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 생각을 억눌렀다. 괜히 싸울 필요가 없었다. 자신들은 겨우 여덟 명.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상대의 수가 네 배가 넘는다는 것도 불리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은 지금 비무장이라는 사실이다. 황궁에 들어오기 위해 무장을 해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투를 통해 여승들인 것으로 생각되는 상대편의 무공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없다. 조창의 이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 나왔다. “어쩔 수 없구려.” 기묘한 동거 참회동(懺悔洞) 소림승들 중 죄를 지은 자들이 일정 기간 동안 면벽하며 참회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장소다. 물론 아무나 이곳에서 참회를 하는 것은 아니고, 최소한 1개월 이상의 참회를 필요로 하는 중죄를 저지른 승려들만 보내진다. 참회동은 깊게 파여진 굴도 아니고, 그렇다고 벽면이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것도 아니다. 사람이 사는 것 같은 흔적마저도 없다. 있다면 참회동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미약한 불빛뿐이다. 적막만이 감도는 참회동 앞에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라도 하듯 수라도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라도제는 잠시 참회동 안을 바라보다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대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잠시 후, 동굴 안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어오시구려.” 수라도제가 안으로 들어사자. 동굴 안쪽에는 벽을 향해 돌아앉아 있는 노승의 뒷모습이 보였다. 낡은 장삼 위쪽으로 손으로 잡고 살짝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목이 드러나 있다. 3황(三皇)의 으뜸을 차지하고 있는 공공대사의 뒷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했다. 이것은 수라도제가 지금껏 상상해 왔던 공공대사의 모습이 절대로 아니었다. “험험, 불도를 닦으시는 데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도저히 대사를 뵙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공공대사는 면벽을 하고 있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서문 시주.” 공공대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정체를 알아채자 수라도제의 얼굴에는 가벼운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찌 저를... 대사를 뵌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오래전, 시주의 몸에서 느껴지는 것과 똑같은 기운을 지니신 분과 만난 적이 있었지요. 그분의 이름은 서문종(西門宗)이라고 하셨던 것으로 빈승은 기억하고 있으니, 그분의 후예라면 서문씨가 아니겠소이까?” “아버지를 만나셨습니까?” “참으로 대단한 분이셨지요. 그런데 서문 시주께서 빈승을 찾으신 까닭은 무엇이오?” 공공대사를 처음 봤을 때 느껴지던 초라함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정체를 알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아버지와 인연(因緣)이 닿아 있는 무림의 선배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수라도제는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이리로 찾아온 마교 교주를 만나셨을 겁니다. 어쩌면 그자가 자신을 마교 교주라고 소개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수라도제가 묵향의 생김새를 설명하려 하는데, 공공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를 만나 봤소.” “아, 그자가 자신의 소개를 제대로 했었던 모양이군요.” “허허, 아미타불.” 긍정도 부정도 아닌 불호가 들리자 참회동 안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공공대사는 바짝 마른 손가락 사이로 커다란 염주를 습관적으로 돌리고 있을 뿐. 먼저 대화의 물꼬를 틀 마음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다시 한 번 공공대사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자와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그 내용을 시주께서 관심을 가지실 이육 있소이까?” “물론 제가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겠지만......” 수라도제는 갈등하고 있었다.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이런 쓸데없는 소리나 하자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대사께서는 연배도 높으실 뿐 아니라, 3황 중에서 으뜸에 놓이셨지 않습니까? 대사께서 보셨을 때, 그 교주라는 자는 어떤 것 같던가요?” 하지만 공공대사에게서 흘러나온 대답은 수라도제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허허, 3황의 으뜸이라니 별 말씀을......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빈승이 어찌 그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겠소. 단 인연이 있어 마교의 교주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지금껏 빈승이 알고 있던 마교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심성을 지니신 시주였소이다.” “제가 대사께 그자의 심성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말하는 것은 무공입니다. 혹자는 그가 탈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도 하는 그의 무공 말입니다. 대사께서 보시기에 그가 어느 경지에 있으냐 하는 겁니다. 사실은......” 말을 하던 수라도제는 묵향과 마주쳤을 때의 절망감이 떠올랐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또렷한 어조로 그 당시 자신이 겪었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모든 설명를 다 듣고도 공공대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동안 염주알만 굴리고 있던 공공대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하면 시주께서 너무 큰 충격을 받으실 것 같아 저어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구려. 시주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화경과 현경사이의 간격은 넓다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주께서는 화경에 못미친 자와 화경을 이룩한 자의 무공이 비슷하다고 생각하시오?” 수라도제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이제 막 무공에 입문한 무사라면 모르겠지만 어찌 그런 것을 모르겠는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대사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신검합일에 든 자가 화경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닌 의식의 뿔을 깨야 하죠. 그것이 얼마나 힘들면 모두들 그것을 화경의 벽이라고까지 부르지 않습니까.” 가만히 수라도제의 말을 듣던 공공대사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현경 또한 마찬가지외다. 화경의 무공을 지닌 자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기본적인 관념까지 뒤집어 버려야 할 정도로 높은 벽이 존재하지요. 그리고 그 차이는 세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다고 할 수 있소.” 이건 수라도제로서도 전혀 기대를 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같은 화경급 고수로서 묵향과 있었던 일에 대해 토론하고, 상대에게 약간의 도움을 청하고자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공공대사의 대답은 자신과 비슷한 등급의 것이 아닌 한 차원 높은 것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라도제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대사께서는 현경의 벽을 넘으셨다는 말입니까?” “면벽수련을 하다가 두 번째 환골탈태를 경험했지요.” 두 번째 환골탈태. 그것은 곧 현경의 벽을 뚫었다는 말이었다.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끝자락조차 잡을 수 없었던 것을 이 비쩍 마른 노승이 이루어 냈다는 사실에 수라도제는 강한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축하의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겨, 경하드립니다. 대사.”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부질없는 짓. 시주께 축하받을 이유는 없소이다. 아미타불.” 부러운 눈빛으로 공공대사를 바라보던 수라도제는 갑자기 입술을 질끈 깨문 뒤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사, 결례인 줄은 알지만 현경의 벽을 어찌 깨야 합니까? 부디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공공댓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수라도제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그 벽을 넘기 위해 얼마나 고련을 했었던가. 진리는 멀리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깨닫기까지에는 죽음보다 더한 혼란과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평생을 진리처럼 믿어 왔던 관념을 깨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물론 세속의 명리를 초월한 공공대사였기에 자신이 겪었던 깨달음의 조언을 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오히려 상대에게 더욱 큰 혼란만이 안겨 줄 것 같아 망설이는 것이다. 사람마다 체질이나 성품이 다른 것처럼 나타나는 현경의 벽이 같을 리 없다. 그말은 벽을 깨기 위한 실마리는 스스로 얻어야 한다는 말이다. “빈승이 무슨 길을 알려 드릴 수 있겠소. 오히려 시주의 깨달음에 방해만 될 뿐일 게요.” 공공대사의 거절에 수라도제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조언 몇 마디 듣는다고 화경의 벽을 넘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면 무림에 존재하는 화경급 고수의 제자들은 모두 다 화경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례로 그토록 오랜 시간 공들여 교육시킨 자신의 아들마저도 화경으로 만들지 못했다. 벽은 스스로 깨야만 하는 것이다. 누가 대신 깨 줄 수는 없다. 대신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스승의 작은 조언이라도 듣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이라도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수라도제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넉살 좋게 웃으며 들고 있던 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대사의 조언을 듣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말해 주실 때까지 한동안 여기서 기거해야겠군요.” “허허, 나무아미타불.” 능글맞은 모습으로 빙글거리는 수라도제를 바라보던 공공대사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불호를 외울 뿐이었다. 그날부터 수라도제와 공공대사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이 남자가 살아가는 법 교주의 아버지. 즉 아르티어스가 자기 발로 마교를 나가겠다고 하자 수석장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을 것이다. 총단 내에서 그의 골치를 아프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아르티어스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왕지륜이라고 하는 똘똘한 부하 놈을 제공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오래오래 중원 유람을 즐기시라는 바램을 안고, 무려 은자 만 냥이나 되는 전표를 안겨 줬다. 두둑한 돈이 있으니, 유람이 즐겁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눈치 빠른 왕지륜은 총단을 나선 지 채 며칠 지나지도 않아 아르티어스가 원하는 것이 뭔지 파악해 냈다. 아르티어스는 술을 좋아했고, 지방 공유의 색다른 음식을 먹는 것도 좋아했다. 그리고 모든 드래곤들이 다 그렇듯 아부받는 것도 아주 좋아했다. 성깔 있는 노인네인 수석장로를 모시며 터득한 아부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왕지륜의 아부가 잘 먹혀 들어간 것은 문화적 차이가 컸다. 마치 입 안의 혀처럼 곰살맞게 구는 왕지륜의 아부는 지금까지 기사도니 뭐니 하는 인간들의 뻣뻣한 아부와는 비교 자체를 불허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르티어스는 흡족해했고, 왕지륜은 처음과 달리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아르티어스를 모실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살얼음을 걷는 듯한 심정으로 필사적인 아부를 해야 했지만 말이다. 양양성으로 가며 왕지륜은 경치 좋다는 곳이 있으면 조금 길을 돌아가더라도 그쪽을 경유해서 갔고, 맛난 음식을 제공한다는 곳이 있다면 필히 그곳을 들렀다. 거기다가 부드러운 그의 세치 혓바다으로 연신 아부까지 해 대니. 아르티어스로서는 이국적인 풍취를 흠뻑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어쨌건 그 둘은 총단을 떠나 양양성을 향해 천천히 이동했다. 마교 총단에서 양양성으로 들어가는 길이야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왕지륜이 기가 막힌 풍광을 자랑하는 장강삼협을 이동로에서 빼 놨을 리 없다. 만현에 도착한 왕지륜은 최고급 객잔을 골라 가장 훌륭한 방을 빌렸다. 그곳에서 아르티어스가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치해 놓은 후, 그는 밖으로 나가 주위를 돌아다니며 이곳에서 가장 음식 솜씨가 뛰어난 객잔이 어딘지, 그리고 특산의 명주(名酒)는 어떤 것이 있나 알아봤다. 그날 저녁, 화려한 누각에서 아르티어스가 아름다운 여인의 시중을 받으며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을 때, 이제 겨우 퍼지고 앉아서 쉴 여유를 얻게 된 왕지륜은 간단한 안주를 시켜 놓고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젠장. 내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이제 익숙해져 아르티어스를 모시는 것이 그런대로 편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잡아먹을 듯 들볶으면서도, 마음에 들게 잘 처리했을 때는 마치 그게 당연하기라도 한 듯 아무런 치하도 없다. 아르티어스의 행태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었다. 수석장로마저도 그의 앞에서 벌벌 떠는 판에, 자신이 뭐라고 배짱을 튕길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수백 장에 달하는 두툼한 전표 다발들이 만져졌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야말로 돈을 물 쓰듯 써 댔지만, 별로 줄어든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이걸 들고 확 튀어 버려?” 은자 만 냥, 평생 돈을 물 쓰듯 해도 아마 다 쓰기 힘들 것이다. 거대한 장원을 하나 구입하고, 수십 명의 하인과 하녀들을 고용한다. 그런 다음 아름다운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해서, 아들 딸 낳아 오순도순...... 왕지륜의 머릿손에는 귀여운 아이들에게 마교의 검술을 가르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 올랐다. 바로 그때, 문짝이 부서지며 수석장로가 등장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왕지륜은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수석장로님. 여기는 어쩐 일로 친히......” 어디서 쥐어 터졌는지 얼굴이 떡이 되어 있는 수석장로가 악에 받쳐 외쳤다. “어르신을 뫼시고 양양성으로 가라고 했더니, 도중에 돈을 들고 튀어? 이런 망할 새끼. 내가 네놈 때문에 어른신께 얼마나 깨졌는지 알기나 해? 태어난 건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가공할 만한 무공을 지닌 수석장로에게 애초부터 대항은 불가능. 그렇게 자신의 부인과 아들과 딸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여기까지 상상하던 왕지륜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돈 들고 튀어 봐야 마교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면. 아무리 중원이 넓다 해도 숨어 들어갈 곳이 없었다. 마교의 의뢰를 받은 중원의 청부 단체라는 청부 단체들은 몽땅 다 자신을 쫓을테니.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젠장, 양양성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 시중을 들라고 하면 어쩌지?” 어쩔 수 있나? 아르티어스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어야지. 신경질적으로 술을 단번에 들이켠 왕지륜은 기루의 총관을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손님.” 엄청난 돈을 써 대는 특급 손님이다. 그런 만큼 총관의 얼굴에는 비굴한 미소가 연신 떠오른다. “어르신께서 흡족해하시던가? 만약 그분께 내가 나중에 잔소리를 듣게 된다면, 자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게 될 게야.” 그렇게 말하며 왕지륜은 술잔을 꽉 쥐었다 놨다. 그의 손이 펴지자 술잔이 마치 곱게 갈아놓은 모래처럼 가루가 되어 탁자 위에 떨어졌다. 그걸 본 총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보고 이미 느꼈었지만. 이 손님은 무림인이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본루 최고의 기녀들인 매향과 월아가 시중을 들어 드리고 있습니다. 절대 대접이 소홀했다는 말씀은 하시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채찍을 가했으면 이제 당근도 줘야 했다. 왕지륜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잘 모시면 자네에게도 은자 열 냥을 주겠네. 그러니 잘해 주기 바라네. 알겠는가?” 자신에게까지 떨이질 몫이 있다는데, 총관은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염려 놓으십시오. 아예 뼈가 흐물흐물 녹아 버리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헤헤헤.” “자. 빨리 가서 최선을 다해 봐.” “옛.” 오늘도 무사히 끝날 수 있을 것 같다. 왕지륜은 밖에 대고 술상을 좀 더 봐 오고, 예쁜 아가씨 한 명을 들이라고 일렀다. 여자에 둘러싸인 아르티어스는 내일 아침이 될 때까지 자신을 찾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도 좀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순간부터 간덩이가 조금씩 커지고 있는 왕지륜이었다. 양 옆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는 아르티어스, 드래곤이 변신한 몸인 만큼 아무리 먹고 마셔도 살찔 염려가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한참 기분 좋게 즐기고 있을 때. 어디선가 아름다운 음률(音律)이 그의 귀에 흘러 들어왔다. 흘린 듯 그 소리에 취해 있을 때, 옆에 앉아 있는 계집이 콧소리를 울리며 살짝 안겨 왔다. “대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소첩들이 뭐 잘못한 게 있나요?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모처럼 음악에 취해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계집이 옆에서 방해를 하자 아르티어스의 눈이 분노로 번쩍 뜨였다. “이런 멍청한 년, 잘 안 들리잖아!” 아르티어스가 벌떡 일어서자, 계집들이 그의 몸을 재빨리 붙잡았다. 자신들의 시중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엄청난 돈을 지닌 봉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놓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하룻밤 잘만 하면 팔자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상공. 제발 불만이 있으시면......” 실랑이 할 시간도 아까웠기에 그냥 가려 했는데, 감히 엉겨 붙어? 아르티어스의 손이 모질게 움직였다. 짝! “아악!” 갑자기 손찌검을 하자, 그녀들은 놀란 모양이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위대한 종족인 드래곤인 자신에게, 저 계집들은 비천한 호비트의 아종일 뿐이었으니까. 이때 잔잔하게 들려오던 음률이 끊어질 듯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음률을 좀 더 들어 보고 싶었다. 계집과 실랑이를 하고 맀을 틈이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정신을 집중해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팟 하고 그의 몸이 꺼지듯 사라졌다. 공간 이동을 한 것이다. 산 정상 근처 바위 위에 앉아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금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신선이라도 현세에 내려온 듯, 탈속한 분위기를 풍긴다. “호오, 정말 그럴듯하군.” 이렇게 감탄하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몸은 지금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상태다. 아무런 자료도 없는 위치로 공간 이동을 하자니, 당연히 가급적 높은 허공 위쪽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게 가장 안전하니 말이다. 감탄성 때문에 아르티어스의 위치가 상대방에게 들켜 버렸다. 바위 위에 앉아 금을 타던 사람의 시선이 빠른 속도로 주위를 훑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의 기척이 없다. 이때 그는 허공 위에 떠 있는 기척을 읽었다. 당황한 그의 시선이 하늘 위로 향했다. 아르티어스와 상대의 눈이 마주쳤다. 이제 겨우 20대 후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탱탱한 얼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아름다운 수염을 늘어뜨리고 있다. 얼굴이 너무 젊게 보이다 보니 마치 가짜 수염을 단 듯한 느낌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아르티어스로서는 이놈이 장난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모습은 괴이하기만 했다. 달빛 아래 천하의 사고뭉치 아르티어스가 만통음제라는 기인을 만나 얻은 첫인상이었다. 묵향 23권 시간이 없는 관계로 한문은 생략했습니다. - 목 차 - 꽃보직 남경 분타주 창황흑풍단의 흔적 호시절은 가고 급변하는 전장 여우와 너구리 의문의 실종 사건 내 노예가 될래? 동상이몽 동업자 여기가 개방 분타야? 마교 분타야? 악비 대장군의 행방, 그리고 혈전 아아! 화산파여 남경 탈출 여우와 너구리 죽어도 우겨야 할 일 또 다른 변수 복수를 하고 싶은가? 만통음제의 실종 드러나는 진실 사방에는 박쥐들이 득실거린다네 죽어야 할 아군 섭평의 승부수 - 꽃보직 남경 분타주 - 남경으로 황도를 이전한 후, 개방에서는 전 중원에서 남경 분타주만큼 팔자 좋은 보직이없다는 말이 은연중에 나돌고 있었다. 과연 그말이 사실일까? 언뜻 생각해 봐도 남경 같은 대도시의 분타주인 만큼 그가 할일은 엄청나게 많아 봉인다. 비록 오랑캐의 치략으로 대육의 반을 잃었지만 남경은 송제국의 황제가 있는 곳이다. 당연히 황제를 모시는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즐비하고, 또 송제국을 지탱하는 힘인 군부의 중추 추밀원까지 있다. 무림의 정보통을 자처하는 개방으로서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아주 작은 사건 하나라도 절대 허투루 여길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남경 자체가 거대도시인 만큼 복잡다단한 사건들이 줄줄이 벌어질 테니, 남경 분타주는 몇 사람 몫의 일을 처리해야만 겨우 잠을 잘 수 있을 게 분명하다. 물런 이건 언뜻 생각해 봤을 때 나올 수 있는 결론이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현재 송 황실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황명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라고 해 봐야 2만 명의 황벼이 고작이다. 물론 황군 전체 병력은 5만이지만 적어도 3만 명 정도는 황궁 수비를 위해 남아 있어야 하지 때문이다. 그렇다고 각지에 있는 군벌에게 명령을 내린다고 해 봐야 그말이 씨알이나 먹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결국 송 황실에서 떠들어 대는 것은 대부분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기에 구태여 알아 내기 위해 노력할 만한 가치도 없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과거처럼 남경 시내에서 복잡다단한 사건이나 사고가 줄줄이 터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황도를 남경르오 이전한 후, 황군들은 치한 유지를 위해 ㅘㅇ도 내에 존재하는 모든 무림방파들을 도시 밖으로 내쫓하 버렸다. 금과 내통한 첩자나 자객 등 불온한 자들이 들어와서 활동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황실쪽에서 먼저 무림맹에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였기에, 작은 문파들로서는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문파들이 없다 보니세력 다툼도 없었고, 강력한 황군의 존재로 도시 전체가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ㅂ무법천지나 다름 업는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남경은 매우 평온한 상태였다. 황궁에서 나오는 정보는 쓸만한 것이 거의 없고, 남경에서 치고 받던 무림세력들은 다 떠나 버렸고......., 몇몇 뒷골목 주먹패들이 남아 은밀히 ㅔ력을 키우며 이권 다툼을 벌이고 있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조무래기들이었다. 자칫 소란을 피우다 화영들의 눙에 띄는 날에는 조직 자체가 거덜 나고 마니, 뒷골목 주먹패드은 숨소리조차 죽이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개방의 남경 분타는 중원에서 가장 할 일이 없는 분타로 전략해 버렸고, 개방 내에서 남경 분타주야 말로 최고의 꽃보직이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하다지만 남경은 모든 물자가 넘쳐나는 황도가 아닌가. 동냥으로 걷어 들이는 음식은 배터지도록 먹어 대도 남아돌 지경니니, 동냥과 구걸이 본업인 개방의 거지들로서는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생활이었다. "타주님. 총타에서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햇볓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남경 분타주 독두개는 갑작스런 큰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깻는지, 눈곱이 단득 낀 눈으로 거지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곤한 잠을 자고 있는데 왜 깨웠냐는 약간의 노여움과 나른함이섞여 있었다. "뭐야? 새꺄." 거지는 문서를 독두개에게 내밀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총타에서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자신의 낮잠을 깨운 거지를 곱지 못한 시선으로 흘겨본 둑두개는 곧이어 공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타구니를 벅벅 긁으며 공문을 읽어 내려가던 독두개의 입에서 퉁명스러우 말투가 흘러 나왔다. "빌어먹을! 이번에는 또 뭐야? 중원 곳곳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혈겁이 자행되고 있는 만큼, 전 개방도들은 작은 것도 허투루 여기지 말고 정보 수집에 힘쓰라는 지시엿다. 투덜거리던 독두개의 얼굴에 갑자기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남경에는 지금 개방 외에 다른 문파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누굴 감시하고, 또 무슨 정보를 얻기 위해 뛰어다니라는 말인가? 잠시 허골을 응시하던 독두개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개방의 장로가 되어 폼 나게 살아 보겠다던 꿈 때문에 정시없이 뛰어다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허구한 날 배 쫄쫄 굶어 가며 정신없이 일만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일을 해도 개방의 장로가 된다는 것은 요원하기만 했다. 까마귀가 부러워할 정도로 새까맣던 그의 머리가 눈이 부실 정도의 대머리가 되었고, 그 때문에 독두개라는 별호가 붙을 즈음 에서야 마침내 그는 꿈을 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역시 거지 팔자가 상팔자라는 걸 깨달은 후였기 때문이다. 편안한 생활에 젖어 버린 독두개는 내세에 다시 태어나도 남경 분타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요즘 행복했다. "저..., 어떻게 할까요?"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물음에 독두개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졌고, 대신 짜증만이 남았다. 독두개는 거지를 매섭게 노려보며 으르렁 거렸다. "이런 망할 자식!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감히 노부의 낮잠을 깨워? 이 새끼, 너 한번 죽도록 맙아 볼래?" 거지는 쭈뻣쭈뻣하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 "저, 그래도 상부에서 내려온 공문인데......" "여기서 하루 이틀 산 것도 아니고..., 멍청한 놈 같으니라구. 한번 생각을 해 뵈라. 새꺄. 남경에 이렇다 할 만한 문파가 남아 있는게 있냐?" "본방이 있지 않습니까. 혹 불온세력이 본방을 노린다면..." 더 이상 들은 가치도 없다는 듯 독두개는 거지의 머리통을 거칠게 쥐어박으며 소리쳤다. "미친놈! 겨우 거지 새끼 몇 때려잡겠다고 황군 5만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황도에 쳐들어와? 너 같으면 그런 미친 짓을 하겠냐? 앙?" 거지는 흠칫한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독두개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거지의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윽박질렀다. "아무리 빌어먹는 놈이라지만 대가리 좀 굴리며 살어!" 거지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독두개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소리쳤다. "다음에 또 이런 쓸데없는 거 가지고 내 낮잠을 방해했다간 그날이 바로 네놈 제삿날이 될 줄 알아! 알겠냐?" "넷!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타주님" 잠은 이미 깨 버린 상태이기에 독두개는 보고를 마치고 나가려던 거지에게 소리쳤다. "가서 술이나 가져와! 한잔하고 다시 자든지 해야지, 젠장..." 잠시 후 술상이 들어왔다. 뭐, 거지의 술상이라고 해 봐야 커다란 술 한 항아리에 술잔 그리고 구걸로 얻은 몇 ㅏ지 안주가 다였지만 말이다. 기갈이도 들인 듯 한 사발 가득 술을 떠서 벌컥벌컥 들이켜던 둑두개는 갑자기 웃음트트렸다. 공문을 받아 들고 지금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고생하고 있을 다른 분타주들의 처지를 생각하니 너무나도 통쾌했던 것이다. "불쌍한 새끼들. 그러기에 줄을 잘 섰어야지." 물론 독두개의 팔자가 처음부터 이렇게 좋았던 건 아니다. 독두개가 이곳에 왔을 때, 남경은 그리 좋은 부임지가 아니었다. 거대한 남경으니 덩치만큼이나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곳이었던 것이다. 수십 개가 넘는 군소방파들과 수백 개에 다하는 뒷골목 주먹패들이 그 소란통의 주역이었다. 누구 하나 완벽하게 남경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인 사건이 벌어질 정도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그런 피래미들이 얽혀 있는 사건들에 대해 아무리 철저히 조사해서 보고서를 올려 봐야 상부세어는 그 누구도 관신조하 보이지 않았다. 무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그런 시시한 사거들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할 수 는 없었다. 그런 시시한 사건들이 간혹커다란 사건으로 비화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남경 분타는 할 일만 많고 돌아오는것은 하나도 없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일하기 좋은 곳으로 바뀌었으니, 정말 사람 팔자라는 것이 어찌 바뀔지는 알다가도모를 일이다. 이때 또 다른 거지 하나가 누군가를 데리고 독두개에게로 다가왔다. "타주님, 저 서람이 타주님을 뵙고 청할 게 있다고 하는뎁쇼." "청을 한다고?" 독두개는 술잔을 내려놓고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부하 놈이 데려온 사내를 바라봤다. 얼핏 보기에는 사내는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익힌 자였다. 그런데 이런 자가 왜 자신을 찾아왔을까? 상대의 속세믈 알 수 없었던 독두개는 떨떠름한 음성으로 질문은 던졌다. 평소 욕설을입에 달고 사는 그였지만, 처음 보는 손님 앞에서 경박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어수룩한 독두개가 아니었기 짐짓 점잖은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로 노부를 찾아왔소?" 사내는 가볍게 포권을 하며 대답했다. "저는 악비 대장군을 호위하여 이곳에 온 사람입니다." 악비 대장군을 호위해서 왔다면 군부에 소속된 인물이거나 아니면 양양성에 집결해 잇는 무림연합 소속의 무사일 것이다. 아마 그 때문에 부하 놈이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이자를 자신에게 안내해 온 모양이다. 독두개는 사내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는 척을 했다. "아, 악비 대장군. 그저께 도착하셨다고 들었소이다. 그런데 그런 분이 무슨 일로 노부를 찾으셨습니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걸..." 사내는 품속을 뒤져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대룽 같은 걸 다섯개나 꺼내 독두개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대룽의 수가 다섯 개인 것을 보면, 전서구 다섯 마리를 날려 달라는 말이다. 전서구가 날아가는 도중에 매한테 잡아먹히거나 실종되는 사태가 종종 벌어졌기에 보통 두세 마리를 한꺼번에 날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전서구를 다섯 마리나 날려 달라는 것을 보면 정말 중요한 일인 모양이다. "양양성에 최대한 빨리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개방이라면 이것들 중 하나를 내일까지 양양성에 보내줄 수 있겠지요?" 현재 남경까지 양양성까지 가장 빠른 연락망을 갖추고 있는 곳은 개방뿐이었다. 우선 양양성과 그리 멀지 않은 인근 분타로 전서구를 날리고, 그 분타의 전령이 대롱을 가지고 양양성까지 뛰어간다. 이런 연락 방식은 중원 각지에 수많은 분타들을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깔아 놓은 개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양양성이라.... 그럼 이걸 누구에게 전해 주면 되겠소?" 그러면서 독두개는 사내의 눈치를 힘끔 살폈다. 이미 몸에 깊이 배어 버린 자신도 모르게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던진 질문이었다. 독두개는 사내가 양양성에 모여 있는 문파들 중에서도 꽤 세력 있는 문파의 제자일 것이라고 내심 정의를 내린 상태였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사내의 기도는 잘 정리되어 있었다. "양양성 북단에 위치한 매화 장원에 전해 주십시오." "매화 장원? 알겠소이다. 꼭 전해 드리도록 하지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을 끝낸 사내는 품속을 뒤져 전표 한 장을 꺼내 독두개에게 건넸다. 독두개는 무림을 위해 함께 싸우는 처지에 이런 걸 받을 이유가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지만, 사내는 끝내 전표를 독두개의 손에 쥐어 준 후에야 자리를 떳다. "허, 저법 예의라는 걸 아는 놈이로구먼, 아마 뼈다귀가 굵은 명문 출신이라 그러겠지, 그런데 매화 장원이라...? 양양성에서 장원을 할방받았을 정도라면 제법 큰 문파일 텐데, 이떤 문파인지 기억에 없네." 고개를 갸웃거리던 독두개는 부하 한 놈을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이걸 양양성 북단에 위치한 매화 장원에 지급으로 보내라. 그리고 매화 장원에 기거하고 있는 문파가 어딘지 알아 보고, 나한테 회신해 달라고 덧붙이도록 해라. 알겠냐?" "옛. 타주님." 부하가 전서구를 날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사내에게서 건네 받은 전표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쳐다보는 독두개 였다. "허, 자식. 손 하나는 허벌나게 크구만." 아 받겠다고 사양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도 다른 사람처럼 돈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지라고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거나 혹은 아름다운 기녀를 품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절대 구걸로는 맛난 음식과 아름다운 여인을 품을 수 없다. 더군다나 그는 아직 정력이 팔팔한 중년이 아닌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수입에 독두개의 입이 찢어질 정도로 함박 벌어졌다. "흐흐흐, 오랜만에 매향이 년 궁둥이나 두드리러 가 볼까?" 매향이의 허연 궁둥이를 떠올리며 음탕한 미소를 짓던 독두개가 자신의 사타구니를 주물럭거리고 있을 때, 이번엔 늙은 거지하나가 달려 들어왔다. 부분타주인 소팔개 였다. "타주님" 독두개는 사타구니에 올라가 있던 손으로 은근슬쩍 술잔을 잡으며 시치미를 뚝 뗐다. 어느샌가 전표는 그의 품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오, 자네 잘왔네. 마침 술을 마시던 중인데 같이 한잔하지." "그거 좋지요." 환한 표정으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던소팔개는 이곳에 오게 된 용건이 떠올랐는지 급히 말을 꺼냈다. "참, 타주님. 황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황궁에서 거지 소굴로 사람을 보내올 이유가 없었기에 독두개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궁에서..., 왜?" "지선 스님께서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소팔개는 독두개에게 잘 접힌 서신을 건넸다. 지선 스님이라면 현재 황궁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아미파의 1대제자로서, 꽤나 고위급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서신을 보내왔다면 절대 무시할 수가 없다. 급히 서신을 받아 읽던 독두개는 엉덩이에 손을 넣어 벅벅 긁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내용이 꽤나 황당했기 때문이다. 마교 무사들이 악비 대장군이 실종되었다며 황궁에 난입한 것을 자신이 붙잡아 뒀으니, 그들의 신원을 확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지선 스님이 술이라도 한잔하고 쓰셨나? 황궁에 마교 무사들이 난입했다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걸 보면 소팔개도 이미 서신을 읽어본 모양이었다. "내용이 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양양성에 사람을 보내 이쪽으로 마교가 무사들을 파견한 일이 있는지 알아 보라는 말인가? 젠장, 별 괴상망칙한 일을 다 부탁하고 지랄이야." 독두개의 반응에 소팔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악비 대장군이 묵고 계신 숙소로 사람을 보내 보면 되죠. 대장군께서 행방불명되신 게 맞는지 그것부터 확인하는 게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소팔개의 대꾸에 독두개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황군이 우글거리는 황도에서 송을 지탱하는 악비 대장군이 실종되었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더군다나 악비 대장군의 행방을 수소문하겠다며 마교의 무사들이 황궁에 침입했다니. 이건 보나 마나 개방에 뭔가 시켜 먹으려고 하는 아미파의 잔대가리일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우리 개방이 자라대가리인 줄 아나!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둘러대며 부려먹으려고 들다니..., 젠장!" 소팔개는 독두개가 성깔을 부리자 조용히 술잔을 들어 홀짝거렸다. 이럴 때 괜히 나섰다가는 자신까지 줄초상이 난다는 것을 겨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투덜거리던 독두개는 거칠게 술잔을 들어 마신 뒤 중얼거렸다. "대장군을 수행하는 놈들이 대장군의 행방을 순순히 말해 줄거 같아? 보나마나 어딘가에서 기녀 궁둥이나 토닥거리며 은밀한 밀담을 나누고 있을 게 뻔한데...." "가만히 손 놓고 있디 보다야 똘똘한 녀석 몇 뽑아서 그쪽으로 보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혹시 압니까? 그러다 군부의 일급 정보다 걸려들지." "하긴 그것도 그렇군. 그럼 똘똘한 놈 몇 뽕아서 대장군 숙소쪽으로 보내 봐." "이미 보냈습니다. 나륻로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는 척하면 아미파에서도 뭐라 그러지는 못할 겁니다." 아무리 요즘 할 일이 없어 놀며 지내는 남경 분타라고는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썹 휘날리며 뛰어다녀도 시원치 않을 만큼 일거리가 넘쳐 나던 곳이었다. 그런 곳의 부분타주가 능력이 없을 리가 없었다. 독두개는 부분타주의 일 처리에 흐뭇해하며, 상대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준 뒤 말했다. "이래서 내가 자네를 좋아한다니까. 자, 귀찮은 일은 대충 끝난 것 같으니 오랜만에 같이 술이나 함께하지, 자, 마시라구."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은 얼큰히 취기가 오르자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쬐는 양지 쪽으로 자리를 옮겨 낮잠을 즐렸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대륙을 감싸고 있음에도 이곳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 찬황흑풍단의 흔적 - 사내의 청을 받아들여 양양성으로 전통을 보낸 후 3일이 지나자 양양성에 파견 나가 있던 개방 분타로부터 독두개에게 보내는 공문이 도착했다. "큰일났습니다. 타주님!" 한쪽 구석에 앉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있던 독두개는 부하의 호드갑에 깜짝 놀라 자에서 깼다. "또 뭐가 큰일이라는 거야? 새꺄. 너, 별 볼일 없는 일이라면 아에 껍데기를 벗겨..." "양양성에서 지급으로 보낸 공문입니다. 그런데 발신자가 부운걸개 장로님이십니다." 부운걸개 장로가 보냈다는 말에 독두개의 안색이 홱 바뀌었다. 부운걸개 장로 같은 거물이 자신에게 공문을 보내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 내놔 봐!" 빼앗듯이 공문을 받아 읽던 독두개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교에서 대장군의 호위를 위해 무사들을 투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악비 대장군의 실종이 사실인지, 대장군의 본영이 눈에 보일 정도로 술렁거리고 있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문 말미에는 최대한 빨리 악비 대장군의 실종이 사실인지 알아 보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전력을 다해 그를 찾으라는 지시가 적혀 있었다. 독두개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외쳤다. "제자들은 모두 소집해! 비상!" 얼마 지나지 않아 개바으이 남경 분타는 마치 절집이라도 쑤셔 놓은 듯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타 이곳저곳에서 늘어져 있던 거지들이 남경 시내 곳곳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악비 대장군의 실종이라는 일대 사건에 남경 분타릐 전 제자들이 메달린 지도 벌써 4일이 흘렀다. 엄청난 인원이 동원되어 남경 전역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쓸 만한 정보는 하나도 건져 낸 것이 없었다. 그나마 독두개가 처리한 일이라고는 아미파에 '귀하들이 구금하고 있는 자들은 진짜 마교도들이니 풀어 주라'고 통보한 일뿐이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상부에서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도 작은 정보 하나 건긴 게 없다. 악비 대장군의 실종에 대한 이렇다할 정보조차 얻지 못한 독두개로서는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되면 상부에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진급은 고사하고, 무능한 인물로 낙인 찍혀 산골 오지로 좌천될 가능성마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두개 자신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지 않았다. 초조해지기 시작한 독두개는 휘하의 거지들을 연일 닦달하여 족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욕설도 점점 더 원색적이며 걸쭉해졌지만 그런다고 없는 정보가 어디서 튀어나겠는가? 악비 대장군에 대한 작은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독두개는 잠도 오지 않았다. 그날도 수하들이 쓸어온 자잘한 정보들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부분타주 소팔개가 뛰어 들어왔다. 그도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는지 두 눈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의외의 인물이 황도에 나타났습니다. 타주님." "그 새끼가 누군데?" 악비 대장군에 디한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독두개 였기에 그와 관련된 정보가 아니라서 그런지 반응기 심드렁하기만 했다. "왕태위말이니다. 표풍검 왕태위." "왕태위? 그 새끼가 왜?" 독두개가 소팔개의 말에 흥미를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왕태위는 공동파의 1대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자로, 차기 장문인으로 주목받고 잇는 인재였다. 그리고 그가 지금 경호하고 있어야 할 인물은 바로 재상 진회였다. 그런데 그가 재상의 경호는 하지 않고, 왜 황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인가? "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관도 인근을 전속으로 경공술을 전개해서 내달렸답니다." "흐음. 그것 참 요상하네."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독두개는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소팔개를 향해 물었다. "그 영감탱이는 지금 어디에 있지?" 영감탱이가 바로 재상 진회를 말한다는 것을 눈치 챈 소팔개는 자신이 아는 대로 보고했다. "남경으로 상경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창에서 며칠 유숙한 후, 갑자기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고 합니다." "흠... 어쩌면 그 영감탱이가 이번 일을 꾸민 걸 수도 있겠군. 안그래?" "글쎄요?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재상이 이번 일을 꾸몄다면 기밀 유지를 위해 모든 일을 처리할 수족을 여기에 남겨 뒀을 게 아닙니까? 아무리 자신의 호위를 맡고 잇다고는 하지만 이런 민감한 사안에 외부인인 왕태위를 끌어들인다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크죠." "흠, 그건 자네 말이 옳군. 하지만 왕태위가 아무리 경공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남창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머나? 거리로 따진다면 그 영감탱이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빨리 대장군의 실종 소식을 입수했다고 봐야 할 거야. 그런 다음 그 대책을 전할 전령으로 왕태위를 써먹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소팔개는 그 말이 그럴듯한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않다면 재상을 호위하고 있어야 할 왕태위가 전속으로 경공을 전개하며 남경에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무없도가 악비 대장구이 실종된 지금, 갑자스런 왕태위의 등장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로웟다.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현실성 있는 추론인 것 같습니다. 타주님." "어쨋건 왕가 놈에게 꼬리는 하나 붙여, 빠릿빠릿한 놈으로 말이야. 그놈이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지 눈에 불을 켜고 조사하라고 해." "이미 그렇게 처리했습니다." "그거 잘했군." 몇 시진 뒤, 꼬리에 붙여 둔 거지의 보고를 받은 독두개는 왕태위에 대한 의구심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왕태위가 참지정사 섭평의 저택으로 달려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ㅓ곳에서 나왔고, 또 공동파가 황도에 구축해 놓은 분타에 들러 한 시진 정도 머문 후 재상이 있는 남창으로 되돌아갔다는 보고였다. 황궁의 경비를 책임진 것이 아미파라면 고관들의 신변 보호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 공동파다. 그런만큼 공동파의 제자가 참지정사 섭평의집을 들락거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시기였다. 악비 대장군이 실종되어 어수선한 남경에, 재상을 호위하고 있어야 할 왕태위가 무슨 일로 혼자 온 것일까? 그리고 섭평의 집에는 왜 간 것일까? 꽤나 수상쩍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껏 제대로 된 그 어떤 정보도 얻은 게 없었던 독두개는 옳다구나 하며 곧바로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 만약 재상 진회가 악비 대장군의 실종에 관려뇌어 있다면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기녀의 궁둥이를 두드리며 밀담을 나우고 있을 거나고 생각됐던 악비 대장군의 실종은 재상 진회의 개입 여부로 전혀 새로운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롭기 그지없던 남경은 점차 대륙을 뒤흔들 태풍의 눈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묵향이 남경에 도착한 것은 악비 대장군의 실종 사실이 양양성에 보고된 날로부터 8일 후 였다. 마화로부터 연락을 받은 후, 만현에서 남경에 이르는 그 먼 길을 그는 겨우 4일 만에 주파했던 것이다. 그러자면 하루에 최소한 1천 리를 주파해야만 하는 강행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남경에 도착했을 때, 거의 모슴은 상거지와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얼굴은 희뿌연 먼지를 잔뜩 덮어 써서 기괴한 몰골이었고, 의복은 먼지와 땀에 범벅이 되어 더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마화와 만현을 조금 벗어난 후 헤어졌다. 양양성에서 그곳까지 3일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마화는 같이 남경까지 같이오기에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그래서 묵향은 그녀에게 양양성으로 돌아가 추후 대책을 수립하도록 지시한 후 혼자 남경으로 달려온 것이다. 남경은 다른 도시들과 달리 조금 특이한 방어망을 갖추고 있었다. 돌로 만든 높은 성벽으로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게 아니라 도시 주위를 감싸고 있는 여러 개의 언덕에 토성들을 쌓아 방어벽을 형성해 놨다. 그렇기에 남경으로 통하는 관도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성문을 통과할 일은 없었지만 황병들이 군데군데 설치해 놓은 검문소와 맞부칮치게 된다. 묵향이 상거지와 같은 꼴로 남경으로 통하는 서쪽 관도 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성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이 힐끔 거리며 쳐다보았다. 묵향의 지저분한 몰골에 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지면 거지답게 성의 개구멍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한쪽에 안 보이게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나중에 인적이 드물 때들어가야 하는데, 당당하게 검문소 앞으로 걸어갔지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감히 뭐라 하며 나서는 사람은 없엇다. 그 이유는 묵향의 허리에 장검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문소 앞을 지키던 병사들은 묵향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호패를 확인하며 성안으로 사람들을 통과시키던 군관이 묵향을 불러 세운 것이다. "이봐, 너!" 안 그래도 좋은 일로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 아닌 묵향인지라 건방지기 짝이 없는 군관의 말투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군관은 묵향의 허리에 매달려 잇는 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오만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런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을 보았나! 황도에는 무기를 지니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도 모르느냐?" 그러면서 군관은 뒤에 서 있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저놈을 당장 체포해라!" "옛!" 군관과 함께 포진하고 잇던 병사들 중, 10여 명이 칼과 창을 들고 달려들었다. 군관 두쪽에서 황병들의 주력 무기인 신비궁이라 불리는 휴대용 쇠뇌를 지닌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곧이어 이 일이 마무리 지어질 것이라 생각했는지 신비궁을 장전하지도 않고 마치 재미난 볼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구경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태는 그들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곧 제압될 줄 알았던 상대가 의외로 빡세게 나왔기 때문이다. "이건 또 뭐야? 이것들이 정말 죽고 싶나?" 퍼퍼퍼퍽! 몇 차례의 격타음이 들리고 난 후 군관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자신의 명령을 받고 괴한에게 달려들던 10여 명의 병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길바닥에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어떻게 했는지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어느 순간 부하들이 모두 바닥에 쭉 뻗어 신음성만 흘리고 있었다. "무, 무림인?" 멍청하게 서 있던 병사들 중 정신을 차린 두 명이 다급히 신비궁을 장전하려고 했지만, 활과 달리 쇠뇌라는 것이 그리 간단하게 장전되는 게 아니다. 특히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장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묵향은 병사드에게 다가가 신빙궁의 활줄을 쓱 잘라 버리며 중얼거렸다. "이런거 가지고 장난치면 위험하지." 그런 묵향을 향해 군관이 악을 쓰며 외쳤다. "무, 무림인인 모양인데, 감히 황상 폐하의 군대에 손을 대다니, 네, 네놈의 악행에 대해 무, 무림맹에 알려 엄히 문책하도록 하리라!" 물론 주둥이로만 위협하는 것일 뿐, 군관의 발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가 무림맹을 들먹여 위협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만이 무림인을 상대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위협은 상대방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묵향은 같잖다는 듯 살기 어린 미소로 응대했다. 안 그래도 여기까지 쉬지않고 달려오느라 짜증이 머리끝까지 가득 찬 상태다. 그러던 차에 고맙게도 상대바에서 먼저 이렇게 시비를 걸어 주다니. "호오, 무림맹에 알려 날 문책하겠다고? 시비는 네놈이 먼저 걸어 놓고, 누구를 문책한다는 말이냐?" "화, 황도에 무기를 휴대하고 들어갈 수 없음은 무림맹에도 이미 통보해 놓은 상태다. 그런데 어찌하여 네놈은..." "그래? 그럼 실컷 문책해 봐라. 나한테 두들겨 맞은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퍽! 묵향의 손은 겁에 질려 끝까지 주절거리고 있던 군관의 입에 모질게 가격했고, 한 대 맞은 군관은 뒤러 벌러던 나자빠져 버렸다. 땅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고 잇는 군관의입가에는 피에 젖은 이빨 조각 몇 개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별 시덥잖은 놈이 시비를 걸고 있어. 안그래도 짜증나 죽겠는데...." 이때 검문소가 잘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던 언덕 위 토성에서 요란한 경고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수백에 달하는 황병들이 우르르 쏟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젠장. 귀찮게 됐군." 묵향은 최대한 빨리 경공술을 펼쳐 성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런 묵향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다 떨어져 가는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거적때기 위에 앉아 있는 일물. 남경 시내로 들어오는 서쪽 관도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거지였다. 그는 자신의 싱게 묵향의 모습이 들어오자마자 강한 호기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곳 황도는 일반인이 무기를 휴대한 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도 저토록 당당하게 걸어오는 것을 보면 군부 혹은 관부에 소속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걸 확인해 줄 인물들이 저 앞 검문소에 포진해 있었다. 만약 군부 쪽에 소속된 자라면 신분을 증명하는 명패를 군관에게 제시할 게 틀림없다. 그리고 웬만한 명패는 자신이 알아볼 수 있으니, 상대의 정체를 금방 파악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벌어진 사태는 그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괴한은 검문소에 포진한 황병들을 일순간에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후, 엄청난 속도로 경공술을 전개하여 시내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허어, 거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말 화끈한 놈일세. 그나저나 대장군의 실종 때문에 황군들이 독기가 잔득 올라 있는 상황인데 저렇게 황군을 건드리다니. 오늘부터는 몸조심 좀 하는 게 좋겠는걸." 중얼거리던 거지는 벌덕 일어나 분타를 향해 줄달음을 치기 시작했다. 수상한 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굵직한 정보를 물었다는 만족감 때문이었을까? 그의 발걸음은 아주 활기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그가 잇는 곳으로 재앙덩어리가 달려 들어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남경 시내로 들어온 묵향은 먼저 임충 일행이묵고 있는 객잔으로 갔다. 그들이 어느 객잔에 묵고 있는지는 이미 마화에게 들었기에 그곳으로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묵향의 모습에 임충은 기절할 듯 놀라 벌떡 일어섰다. "교, 교주님!" "마화한테 얘기 들었다. 그래. 대장군은 아직도 못 찾았나?" 묵향의 질문에 임충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쥐구멍이라도 옆에 있다면 기어 들어갈 듯이 작은 목소리로. "송구스럽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뭔가 조그마한 단서라도 찾아낸 건 없나?" "며칠 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그러면서 임충은 요 근래 자신이 조사한 것들을 묵향에게 보고했다. "흐음,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 정도까지 조사한 걸 보니 아주 열심히 움직였군, 그런데 내가 가만히 들어 보니 가장 수상한 곳은 황궁인 것 같은데, 왜 거기는 조사하지 않았지?" 임충은 보고를 올리기가 난처했다. 자신이 아는 교주의 성격이이라면 그 일을 듣자마자 아마 황궁 내부를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이 뻔했기때문이다. '그때 일을 보고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묻어 둬야 하나.' 머뭇거리는 임충을 보고 묵향은 무슨 일이 있었음을 대충 짐작 할 수 있었다. 임충은 과거 군부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만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이 당연했다. 묵향은 임충이 머뭇거리는 것이 아마 황실과 자신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까 고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의 가감도 없이 있는 대로 말해도 좋다. 황실과 충돌을 일으킬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묵향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임충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황궁을 조사하러 사람을 보내기는 했었습니다." 그리고는 며칠 전 자신이 황궁 안을 조사하기 위해 투입했던 부하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말은 다 들은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리기는 했지만 약강능 언짢은 표정이었다. "흐음, 그래? 며칠 뒤 부하들은 무사히 돌아왔다 이거지?" "예, 교주님. 그렇지만 그 일 때문에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아미파의 승려들도 그때까지 대장군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걸보면 황실 쪽은 이번 일과 아무런상관이 없어던 게 아닐까요? 지금 황군들도 검문, 검색을 강화하며 열심히 대장군의 행방을 찾고 있는 걸 보면 아마 제 생각이 맞을 겁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묵향의 목소리에는 아직까지도 의심이 완전히 지워진 것이 아니었다. 사실 어떻게 생각해도 가장 수상쩍은 곳이 황실이었으니 말이다. "무영문에는 알렸나?" "예. 하지만 아직까지 그쪽에서도 이렇다 할 정보를 보내온 건 없읍니다." "그래? 그것 참..." 잠시 이리저리 생각을 하던 묵향은 임충에게 명령했다. "무영문에 다시 한 번 더 연락을 넣어라. 만약 내일까지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정보를 이쪽으로 넘기지 못한다면, 내가 그쪽의 정보력에 대해 크게 실망할 거라고 말이야. 알겠나?" "옛! 교주님!" 임충에게 지시한 뒤, 묵향은 미련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니, 어디를 가시려고...?" "개방에 잠시 다녀오겠다." 마침 개방이 마교의 반투쯤 되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개에, 그걸 듣는 임충은 자신이 혹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느꼇다. "개방에 말씀이십니까?" "이곳에도 개방의 분타는 있을 게 아니냐?" "예. 남경 분타가 있습니다." 임충은 얼마 전에 묵향에게 연락을 넣기 위해 개방의 남경 분타에 부하를 보냈던 일을 떠올렸다. 그렇기에 그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분타의 위치를 알고 있는 놈이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괜찮다. 거지 소굴쯤 찾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그렇게 대꾸하며 묵향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던 임충은 갑자기 다급하게 묵향을 향해 소리쳤다. "잠깐만요, 교주님. 그렇게 밖에 나다니시면 귀찮은 일이 벌어지게 될 겂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황도에서는 일반인이 무기를 휴대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대장군의 일로 남경 전체에 비상이 걸려 있죠. 그런 만큼..." 임충은 묵향의 눈치를 힐끔 살피면서 다음 말을 이으려고 했다. 무기는 무인의 생명인 만큼 묵향이 검을 놔두고 갈 리 없으니 자신이 사람을 개방에 보내어 알아 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임충의 예상과 달리 묵향은 곧장 검을 풀어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럼 이건 네가 잠시 맡아 두고 있도록 해라." 묵향의 예상외의 행동에 임충은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예? 예." 얼떨결에 대답한 임충의 손에는 어느샌가 묵향의 신물이자 마교의 지존병기로까지 젹상되어 있는 묵혼검이 들려 있었고, 묵향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 호시절은 가고 - 남경의 서쪽 관로들 담당하고 있던 거지는 분타주가 있는 방문을 힘차게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왔는지 거지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분타주님! 굉장한 놈이 나타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요 며칠 동안 악비 대장군의 실종으로 인해 신경이 얼마나 곤두서 있는지 독두개의 토실토실하던 볼은 헬쑥하게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피로로 인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방금 전에 어떤 놈이 무기를 휴대한 채 서부 제12검문소를 통화하여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야, 이새끼야. 그래서! 그래서 뭐 어쨋다고!" 아무리 환군이 무기를 통제한다고 해도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병기를 놔두고 다닐 무림인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지금 남경에는 고위급 인사들을 호위하기 위해 공동파의 제자들이 와 있지 않는가. 어쩌면 그자는 평복을 입은 공동파의 제자일 수도 있었다. 무림인 하나가 무기를 휴대하고 들어왔다고 난리를 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겨우 그따위 일로 이렇게 호들갑을 떤 거냐고 호통 치려던 독두개의 입은. 거지의 이러지는 말에 의해 쏙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놈이 검문을 하던 군관과 황군 10여 명을 곤죽을 만들어 버리고 들어왔거든요." "씨팔. 그 쌔끼 혼자서?" "예. 어디 산꼴짝에서 무공을 연마하다 하산한 놈인 모양입니다. 문파에 소속된 자라면 남경에 무기를 휴대한 채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텐데 말입니다. 어쨌건 황군들은 지금 그놈을 잡겠다고 남경 전체를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며 난리도 아닙니다." '허, 그것 참. 어느 미친놈이 황군을 때려눕히는 그런 정신 나간 짓을...." 이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독두개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동격서..., 그래! 바로 그거야! 어쩌면 이건 의도된 행동일 수도 이다." "예?" "그 새끼가 서쪽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동안 다른 검문소로 악비 대장군을 빼돌리려는 수작일 수도 있잖아? 빨리 다른 검문소에 연락을 보내. 혹 그사이에 뭔가 외부로 빠져나간 것이 있는지 말이야. 마차라든지 가마. 뭐든지 좋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해." "옛!" "그리고 시내로 잠입했다는 그 새끼의 행방도 반드시 찾아내. 도대체 어느 문파에 소속된 놈인지 알아내란 말이야. 알겠어?" 그 말에 밖으로 나가려던 거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몰골이 아주 지저분한 거으로 봐서는 우리 개방의 인물인 것 처럼 보였는데... 어쨋든 알아 보겠습니다." "이 새끼 봐라. 지저분하면 모두 다 우리 개방 제자들이냐? 그딴 개소리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아구창을 날려 버리겠다. 알겠어?" 성난 독두개의 호통에 거지는 찔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팍 숙였다. "조, 조심하겠습니다. 타주님." 독두개의 명령에 따라 남경 분타에 소속된 모든 거지들이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하지만 독두개는 자신이 구태여 그 괴한을 찾으려고 뛰어다닐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괴한과 조만감에 만가에 되어 왜 내가 남경 분타로 오게 되었는지 한탄하는 처지가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뭔가 상황이 급학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독두개가 방 안을왔다 갔다 하고 있을 때 부분타주가 뛰어 들어왔다. "타주님, 개봉의 총타에서 공문이 도착했습니다." 그의 손에는 개방 총타에서 보낸 전통이 들려 있었는데 황금색 수실로 묶어 촛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특2급의 등그이 책정된 매우 중요한 전서가 들어 있다는 표시였다. 그 전서를 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은 분타주뿌니었기에, 독두개는 자신이 적집 암호를 해독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전통에서 조그마한 쪽지 한 장을 꺼내 깨알만 한 글자로 써져 있는 암호들을 읽어 내려가자니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더군다나 특2급에 해당하는 비밀인 만큼 거기에 사용된 암호 또한 난해하기 그지 없었다. 그야말로 눈도 아프고, 머리에는 쥐가 내릴 지경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극비 내용을 종이에 쓰면서 해독 할 수도 없고.... 잠시 후 독두개가 암호를 다 해독했는지 쪽지에서 눈을 떼자 소팔개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타주님?" 특2급에 해당하는 비밀이었지만 오랜 세월 같이 고락을 겪을 사이였기에 소팔개의 질문에 독두개는 별다른 질책없이 전서의 내용을 자신이 제대로 해독한 것인지 다시 한 번 확인 했다. 잠시 후 독두개는 전서를 찢어 입속에 털어 넣고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킨 뒤 소팔개에게 전음을 날렷다. 전서의 내용 때문이었을까 독두개의 얼굴은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씨팔! 이번 일에서 손을 떼라는 상부의 지시다.> <악비 대장군 사건 말입니까?> 독두개가 고개를 슬쩍 끄덕이자, 소팔개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팔개는 급히 전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악비 대장군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데 그에 대한 조사를 중단 한다는 말입니까?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타주님.>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이치야. 상부에서는 이 일에 황성하가 개입되어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황성사가... 말입니까?> 쾅! 은밀하게 소팔개와 전음을 주고받던 독두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어쩌지 모하겠는지 거칠게 탁자를 내치렸다. 아무리 거지라지만 그 역시 송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새끼들이 아니고서야 황궁 안에서 어찌 악비 대장군같은 거물을 흔적도 없이 납치할 수 있겠냐? 안 그래? 상부에서는 왕태위가 이곳에 온게 그 때문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야.> <그렇다면 이 일에 재상까지 관여되어 있는 게 확실하다는 말입니까?> <그거야 알 수 없지...> 말끝에 흐리는 것으로 독두개는 대화르 마무리 지었다.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은 듯, 독두개는 소팔개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자네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발설하지 않도록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쪽에서 손을 떼면 다른 문파들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지. 상부에서 원하는 건 겉으로 봤을 때는 열심히 조사하는 듯 보이게 행동하되. 절대로 황성사하고는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대충 조사라하는 말이야. 알겠어?> <그렇게 실행하겠습니다.> <좋아. 자네만 믿겠네.> 전음을 마친 독두개나 소팔개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현재 송을 떠받치고 있는 악비 대장군의 실종이 몰고 올 파장이 마치 눈에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길가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중년거지. 그야말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함 거지의 모습이다. 세파에 찌든 얼굴이긴 했지만 잠에 취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있는 모습은 아주 평화롭기만 했다. 하지만 이 거지는 보통 거지가 아니었다. 그는 거지들의 문파인 개방에 소속된 자로서,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근처를 지나는 행인들을 감시하는 주 임무로 하고 있는 자였다. 땡그렁. 앞에 놔둔 깨진 바가지 안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중년 거지는 흠칫 놀라 잠에서 깬 척했다. 그리고 바가지 안에 들어 있는 동전을 확인한 후, 습관적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발했다. "가, 감사합니다. 현세는 물론이고 내세에서도 복을 듬뿍듬뿍 받으실 겁니다요." "이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말씀이야."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동전을 던져 준 상대를 힐끔 살펴보는 중년 거지.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하며 얻은 그만의 비법 덕분에 그는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상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먼지가 잔뜩 끼어 구질구질해 보이지만 꽤나 고급 천으로 만든 옷, 그런대로 준순한 외모, 그리고 젊은 놈이 아무리 거지라지만 중년인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중년 거지는 언짢은 내색을 하지 않으며 슬쩍 상대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주 고운 손으로 지금껏 단 한 번도 거친 일을 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손이다. 그것만으로도 중년 거지는 상대가 신분을 숨긴 세도가의 자식이거나 뭔가가 있는 놈이라는 걸 짐작 할 수 있었다. "뭘 물어보시려 하시늕.? 소인이 알고 있는 거라면 뭐든지 성심껏 말해 드리겠습니다요." 상대는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그래. 이곳에 개방 분타가 잇을 텐데. 자네가 안내 좀 해주겠나?" 하지만 중년 거지는 '개방'이라는 말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개방이라굽쇼? 그게 뭡니까요?" 순간 상대의 표정이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시치미 떼도 소용없으니 말장난으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구. 나는 이곳 분타주와 급히 만나서 상의할 게 있단 말이다." 상대는 이미 다 알고 자신에게 접근해 온 것이다. 중년 거지는 내심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인물을 분타로 데려가야 할까? 아니면...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앗다. 거지 생활을 하며 자연스레 트득한 육감으로 이 이상 시치미를 땠다가는 왠지 온몸이 성하지 않을 것 같다는 묘한 불안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어, 타주님과 면식이 있으십니까요?" "면식은 없지만 마나서 얘기하다 보면 서로 얼굴을 익힐 수 있을거 아닌가? 중원에서 개방을 따라 올 정보 단체가 없으니, 궁금한 것이 있을 때는 자네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최고지. 안그런가?" 그러면서 상대는 바가지 안에 또다시 뭔가는 던져 넣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한눈에 척 봐도 한 냥짜리 은자다. 순간 중년 거지의 눈에 갈등하느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을 분타로 데려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결국 중년 거지는 은자를 움켜쥐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상대를 분타로 안내한다고 해도 그리 해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개방이 다른 문파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가진거라고는 정보뿐인 거지 떼를 공격해서 뭘 얻겠는가? 물론 우련히 상대의 치부에 근접했다가 비명횡사당하는 개방도가 간혹 있기는 했지만, 특별히 재수 없게 걸려든 개방도가 아닌 한 죽임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고급 정보를 취급하는 무영문이라는 단체가 존재하는데 싸구려 정보만을 취급하는 개방도들과 다툼을 벌여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다는 것은 바보 짓이기 때문이다. 중년 거지는 은자를 품속에 감추고 아첨이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저희들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쨋건 저를 따라오시죠. 타주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요." 개방을 찾는다는 것은 곧 정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상대가 저런 엉망진창인 모습으로까지 위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꽤나 비밀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쩌면 꽤 큰 돈을 벌어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의 신분도 꽤나 높은 것 같아 보이니 말이다. 단지 저런 자가 왜 무영문을 찾지 않고 개방을 찾았는지 그게 좀 아리송한 문제이기는 했지만, 상대가 무영문보다 자신들을 더 높이 산다는 말이니 개방도인 그로서는 좋은 기분에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어쩌면 세상 물정 모르는 대갓집 자식일 수도 있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몫 단단히 뜯어낼 수 있겠어. 흐흐흐." 이런 큰 물주를 물어 온 것을 알면 틀림없이 분타주는 자신에게 칭찬ㅈ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거지 패거리라 별로 돈 쓸 일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개방은 생각보다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특히 요즘처럼 먹고 살기 힘들 때는 더욱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개방이 벌이고 있는 사업들 중에서 규모가 큰 것이 바로 빈민구제였기 때문이다. 땅바닥에 퍼지고 앉아 이를 잡고 있던 늙은 거지는 웬 낯선 사내가 분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며 그를 안내해 들어온 중년 거지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봐, 저 사람은 누구야? "아, 소팔개 어르신. 저분께서 타주님을 뵙게 해 달라고 해서 제가 급히 모시고 왔습니다요." 그 말에 늙은 거지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뭣! 이놈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무나 이리 데려오면 어떻게 해?" "허~ 참, 걱정도 팔자십니다요. 거지 소굴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손님을 가려 받겠습니까?" "이런 넋 빠진 놈! 안 그래도 정체불명의 괴한이 나타나서 그놈을 찾는다고 전 제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정신이 없구만, 시키지도 않은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있다니..." 소팔개의 말대로 분타 안은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근래 대장군 실종 사건을 조사한다고 많은 인력을 투입하고 있었는데. 얼마전 무식한 방법으로 검문소를 돌파해 들어온 무림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남은 제자들까지 몽땅 다 투입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놈의 행적이 워낙 시출귀몰하여 아직까지도 어디에 숨어들었는지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기에 소팔개는 애를 태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중년 거지는 소팔개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넉살좋게 대꾸했다. "그래도 귀한 손님인데 어찌 박저아게 청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타주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요?" "조금 전까지 저 뒤쪽에서 정보를 분석하고 계시는 것 앝았는데...." 중년 거지는 묵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굽신거리며 말했다. "여기서조금만 가디리싮. 타주님께 기별을 넣어 보겠습니다요." 분타주가 있다는 고으로 중년 거지가 걸어가는 것을 보며 늙은 거지가 외쳤다. "지금 상당히 기분이 안 좋으시니 잘못하다가는 경친다. 너." "걱정 마십시오. 소팔개 어르신." 중년 거지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자신이 지금 물주를 데리고 왔다는 것 말이다. 아무리 정보를 취급하는 개방도라고는 하지만 하급 제자는 정확한 현 상황을 알지 못했다. 악비 대장군이 실종된 것이며, 괴무사의 출현으로 남경이 발칵 뒤집힌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말이다. 그렇기에 단순하게 물주를 물어 왔으니 아마 분자주도 칭찬을 하면 했지 절대 문책하지는 않을 것이라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타주님, 손님을 모시고 왔는뎁쇼." 이때 독두개는 악비 대장군의 실종으로 인해 머리가 몹시 복잡한 상태였다. 비록 통ㅊ타에서 더 이상 파고들지 말라는 명령을 받기는 했지만 또다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신경은 곤두설 만큼 곤두서 있었다. 더군다나 의문의 괴무사가 검문소에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남경 전역이 발칵 뒤집혀 있지 않은가. "손님이라고?" "예, 타주님. 타주님께 몇 가지 정보를 의뢰할 것이 있다고 하서서요." 부하의 대답에 독두개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소리쳤다. "이런 망할! 이 새끼, 너 죽을래? 그런 일이라면 소팔개에게 데려가면 되잖아! 안 그래도 정신 사나와 죽곘는데...." "그, 그래도 보통 손님이 아니신 것 같아서..." 그러면서 중년 거지는 한쪽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연신 독두개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치 자신이 봉을 한 마리 물어 왔다는 듯. 하지만 이미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독두개의 눈에 부하의 그런 눈짓이 눈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젠장. 이새끼.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눈병이라도 걸렸냐?" "그, 그게아니고... 한눈에 척 봐도 뭔가귀한 집안의..." 더 이상 참지 못한 독두개는 주위에서 잡히는 대로 중년 거지에게 집어 던졌다. 퍽! 바가지 하나가 중년 거지의 머리에 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독두개가 밥을 담아 먹는 바가지였다. 거지에게 있어 보물 1호가 바가지다. 그런데 그런 바가지를 던진 것으로 보아 얼마나 독두개가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크윽! 왜 그러십니까요?" "뭐가 어쩌고 어째? 귀하긴 쥐뿔이 귀해? 저 새끼 하고 있는 꼬라지를 봐라. 몇 날 며칠을 목욕조차 하지 않은 상거지 꼴을 하고 있는데, 붜가 귀한 집 자식이라는 말이야!" 한참 중년 거지를 구박하던 독두개는 갑자기 흠칫한 표정으로 사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독두개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자 중년 거지는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요?" "씨팔! 이상하네. 어딘가 상당히 눈에 익은 상판대긴데... 어디서 봤더라?" 평상시라면 곧바로 기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인물이 이렇듯 허름한 옷차림으로 나타나니 독두개는 좀처럼 사내의 정체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마교 교주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고 단지 본부에서 보내온 초상화로만 봤다는 것도 그의 판단을 헷갈리게 하는 데 크게 작용했다. 둑두개가 연신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을 보녀, 중년 거지는 처음에 자신이 했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저 사내가 꾀죄죄한 모습으로 이곳을 찾은 것은 의 범상치 않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임이 분명하다. 분타주는 상대가 저런 모습으로 변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억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거 보십쇼. 저 말이 맞다니까요. 상당히 이름 있는 문파의 제자이거나 어쩌면 세도가의 자제 분일지도 모릅니다요. 아마 저러고 있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숨기기 위해 변장하고 잇는게 분명합니..." 독두개는 손가락으로 사내를 가리키며 주절거리는 중년 거지의 말을 거칠게 끊었다. 직접 만나 상대의 정체를 알고 싶은 것이다. "이리 데려와 봐" "옛!" 중년 거지의 안내를 받아 가까이 다가온 사내는 마치 오랫동안 독두개와 사귀기라도 한 것처럼 허물없이 말을 건네 왔다. "자네가 분타주인가?" 새파랗게 젊은 것이 대뜸 반말지거리를 해 대자 아무리 개방이 거지들의 문파라고는 하지만, 나이가 중년 후반으로 접어드는 독두개는 슬그머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독두개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무슨 일로 노부를 찾아왔나?" "악비 대장군이 실종되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상대는 아무런 언질도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고 그 말을 들은 독두개는 소스라치듯 놀라 두 눈을 번쩍 떳다. 대장군이 실종되었다는 것은 그도 요 며칠 전에야 파악해 낸 극비 정보였다. 독두개의 표정에 희미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상대의 정체가 뭔데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래, 뭐 좀 알아낸 거 있나?" 독두개는 시치미를 떼며 느물 거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독두개의 말투도 조금 바뀌어 있었다. 이런 고급 정보를 알고 잇을 정도라면 상대의 신분이 예상보다 더 높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쎄요. 대체 누군신지 모르겠지만..., 대장군이 실종되었다는건 어디서 들은 소리요? 노부는 그런 말을 전혀 듣지 못했는데..." "어쭈? 무영문을 비롯해서 웬만한 놈들은 거의 다 알고 있는데, 개방만 모르고 있다고 딱 잡아뗄 거야?"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댁은 뉘신지...?" "거참, 딴놈들은 본좌를 보자마자 나불나불 잘도 가르쳐 주던데, 오래만에 기가 센 놈을 만났군. 뭐, 그것도 좋지. 본좌는 입이 무거운 놈을 아주 좋아하거든." 사내의 얼굴에 희번득거리며 살기 어린 미소가 피어나는 것을 본 순간, 독두개의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그 말에 뭔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개방 제자들은 오랜 세월 정파를 수호해 온 명문이다. 그런 그들이 적의 위협에 쉽게 입을 열 리 없다. 하지만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마귀 같은 존재가 있다. 오죽했으면 개방 방주조차 어지간하면 정보를 가르쳐 주고 그와 절대 충돌하지 말라는 공문까지 전 분타에 내렸겠는가? 그 마귀 같은 존재를 떠올리자 등허리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왔다. 먼지를 뒤집어쓴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었기에, 지금껏 상대가 마교의 교주일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독두개의 입술이바르르 떨리며 힘겹게 열렸다. "큭! 호,혹시..., 교주...?" "오, 이제야 알아보는군. 자네는 머리가 상당히 커 꽤 똘똘할 줄 알았는데, 보기와는 영~ 다르군.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묵향은 씨익 웃으며 독두개의 반질거리는 대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이런 식의대접을 받아 보지 않았던 독두개였기에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지만, 그래도 어쩔것인가? 개기다가는 남ㅕㅇ 분타의 모든 거지드이 몰살당할 것이 뻔하니 참을 수밖에. 독두개는 봉이라며 묵향을 안내해 온 중년 거지를 꼭 박살 내 버리겠다고 내심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래, 이제야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겠군. 대장군의 행방은 찾아냈나?" "아직 알아낸 것이 없습니다." 묵향의 눈이 실쭉 가늘어졌다. "정말이야? 만약 조금이라도 숨긴 게 있었다는 게 나중에 밝혀지면 네놈의 반질거리는 이 머리 가죽을 통째로 벗겨 버리는 수가 있어!" 묵향의 위협에 독두개는 찔끔하며 얼른 입을 열었다.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긴 한데..." "뭐냐?" "그자들이 일을 벌였다는 물증은 없습니다만..." 애매하게 둘러대는 독두개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지 묵향의 눈초리가 더욱 가늘어지며, 매서운 안광을 발했다. "혐의가 있고 없고는 본좌가 결정해. 네놈은 쓸에없는 소리 하지 말고 결론부터 말해 봐." 독두개는 묵향의 추궁에 찔끔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본방에서 조사한 결과, 황성사가 이 일을 관여한 것이 아닌가 하고..." "황성사?"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성사라는 단체의 이름은 처음 들었기에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다 되물었다. "황성사라는 문파도 있었나?" "무림의 문파가 아니고, 황실의 감찰, 첩보 기관입죠." "감찰, 첩보 기관이라면 금의위가 있을텐데?" 묵향이 이렇게 반문한 것은 그의 예전 기억 속에 있는 황실의 첩보, 감찰 기관은 금의위였기 때문이다. 그런 묵향의 모습에 독두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무림인이지만 거대 마교의 교주가 이토록 정보에 어둡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묵향이 지난 몇십 년간 무림을 벗어나 다른 세계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과부 쪽의 일에는 소식이 늦으..." 그렇게 말하던 독두개는 묵향의 매서운 눈초리를 접하자 찔끔 해서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금의위가 이름을 바꾼 게 바로 황성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편제가 조금 바뀌기는 했습니다만, 하는 일은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죠." 묵향으로서는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현재 황실에서 악비 대장군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 아닌가. 그아 없다면 북방의 전선은 절대 유지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를 왜 황실에서 없애려고 든단 말인가? 머리가 돌이 아니고서야... "이해할 수가 없군. 지금 대장군은 황실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일 텐데, 왜?" 너무나 단호하게 자신하는 독두개의 말에 묵향은 이죽거리는 말투로 대꾸했다. "과연 그럴까? 본좌의 수하들에게 시켜도 그 정도는 쉽게 해낼 수 있을텐데?"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겁니다. 지금 황궁은 과거와 달리 아미파의 정예고수들이 겹겹이 지키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천마신교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아미파의 이목까지 완벽하게 속이고 대장군을 납치하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아미파? 참, 아미파의 존재를 잊고 있었군." 묵향은 이곳에 오기 전에 임충으로부터 아미파의 존재에 대해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임충이 보낸 수하들을 순식간에 구금해 버린 것을 보면 나름대로 꽤나 실력 있는 자들이 배치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런 아미파의 이목을 완전히 속이고 대장군을 납치했다면 저들은 황궁의 내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잇다고 봐야 할 것이다. "흠, 범인을 짐작하고 있다면 이미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겠군." 하지만 독두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뇨, 황성사가 개입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린 뒤 조사를 중지했습니다." "왜 그랬지?" "위험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독두개는 황성사를 조사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황성사가 지닌 권력이 거대한 만큼, 만약 누군가가 자신들을 조사한는 것을 눈치 챈다면 그 보복 또한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무영문처럼 자신들의 본거지를 꼭곡 숨기고 있는 비밀스런 단체라면 몰라도, 개방처럼 모든게 다 드러나 있는 문파의 경우 자칫 멸문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조사를 중지한 겁니다." 예전 금의위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던 묵향은 독두개의 말에 고감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조사를 본좌가 대신해 주지. 자네가 지금까지 조사한 모든 정보를 본좌에게 다 넘겨." 황성사가 개입되어 있다는 말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한 묵향의 요구에 독두개는 일순 깜짝노랐지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그저 그런 문파가 아닌 마교의 교주였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독두개의 내심은 일면 착잡하면서도 일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묘한 것이었다. 워낙 세력이 형편없어 마교 교주 같은 놈에게까지 이토록 얕보인다는게 서글펐지만, 그래도 그로 인해 대장군의 대한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지 않을가? 개방은 다른 무림방파들과 달리 일반 백성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들이 먹고사는 방법은 바로 비럭질이었기에 서민들과 부대끼며 살 수 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의 희망이었던 악비 대장군의 실종에 대해 내심 크게 안타까워 하고 있었던 독두개였다. 그랬기에 독두개는 교주에게 성심껏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넘겨줬다. - 의문의 실종 사건 - 황도에서도 방귀깨나 뀐다는 고관대작들의 고래등 같은 저택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등천로다. 예전부터 남경을 다스리는 왕부에서 일하던 신하들이 이 일대에서 살아왔기에, 황도의 그 어떤 곳보다도 치안이 잘 잡혀 있는 곳이다. 밤이 되면 등천로 일대는 황군들이 철통같은 경비망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고관들의 저택이 많은 만큼, 잘못해서 어떤 집에 도둑이라도 드는 날에는 제아무리 위세 좋은 황군 교두라 해도 하루아침에 찍 소리도 못 내고 모가지가 날아갈 게 분명했다.. 특히 오늘 아침에 웬 무장괴한이 검문소를 뚫고 시내로 잠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만큼, 평소에 비해 두 배나 많은 병사들이 배치되어 경비를 펼치고 잇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행동을 비웃기라도 한듯 간 크게도 소부경 추린 대인의 저택 담장을 뛰어넘는 자가 있었다. 저택 내에 50여 명에 달하는 사병들까지 있어 철통같은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괴한은마치 도둑이 빈집이라도 털 듯 여유롭게 저택을 헤집고 다녔다. 괴한이 향한 곳은 추 대인이 깊이 잠들어 있는 침소였다. 얼마나 잘 먹고사는지 젖설이 축 늘어질 정도로 비대한 그는 첩의 옆에 누워요란하게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었다. 괴한은 추 대인을 걔우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멈칫했다. 아무래도 추 대인을 그냥 깨우는 데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깊은 생각에라도 잠긴 듯, 잠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던 괴한은 처음 이곳에 나타났던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사라져 버렸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그 괴한이 다시금 추 대인의 방에 나타났을 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얻서 들쳐 업고 왔는지 꽤나 덩치가 장대해 보이는 장정 하나를 들고(?) 들어왔던 것이다. 괴한은장정을 방바닥에 눕힌후, 자세를 적당히 잡은 다음 무슨 일인지 미동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것일까? 한참 시간이 지나자 추 대인의 코 고는 소리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보통 코 고는 사람들이 똑같은 음정을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소리가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시적인 현상일 테지만 추 대인의 코 고는 소리가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아주 작게 바뀌었을 때,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괴한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엿다. 그 순간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추 대인의 코고는 소리는 딱 멈췄고, 대신 방바닥에 누워 있는 장정이 코를 골더니 그 소리를 넘차 높여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코 고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 바뀐 만큼, 뭔가 미묘한 소리의 변화가 있긴 했다. 하지만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추 대인의 부하들은 그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 버렸다. 아마도 그들은 '아, 쓰펄! 돼지 같은 새끼, 조금 잠잠하나 싶었더니, 또 다시 골아 대기 시작하네'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잠시 주위의 동정을 살피던 괴한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추대인에게로 다가가 그의 머리를 손라락으로 툭 하고 쳤다. 슬쩍 친 것처럼 보였지만, 맞은 추 대인이 느낀 충격은 달랐던 모양이다. 비대한 살집 사이로 감춰져 있던 추 대인의 새까만 눈동자가 번쩍 떠졌고, 벌떡 일어나 앉아 머리통을 감싸 쥐며 끙끙거렸기 때문이다. "하이고... 머리야." 한동안 이마를 비벼 대던 추 대인은 어둠 속 저편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자가 바로 코앞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 대인이 그를 한참 뒤에야 발견한 것은 잠이 번쩍 깰 정도로 고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괴한은 시커먼 옷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얼굴 부위까지 복면으로 가리고 잇어 어둠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괴한을 발견한 순간, 조그마하던 추 대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더 이상 커지기 힘들 정도로 확장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허억! 누, 누구냐?" 추 대인은 깜짝 놀라 겁에 질린 표정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려 됐지만 비대한 살집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연신 영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그건 알 필요 없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추 대인은 목에 힘을 주고 엄포부터 놓았다.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것도 있었고, 밖에 대기하고 있을 경비병이나 공동파 고수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행동이었다. "네 이놈! 감히 본관이 누군 줄 알고!" 하지만 오라는 부하들은 꿈쩍도 않고, 대신 추 대인의 눈앞에 괴한은 손이 어른거리더니 또다시 불꽃이 번쩍였다. 빠각! "크흐윽!" "한 번만 더 헛소리를 나불거리면 아예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리는 수가 있어. 알겠나?" 추린은 머리통을 감싸 쥔 채 다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저택을 경비하는 사병의 수는 거의 50명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10여 명은 뛰어난 무예를 지닌 장정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주위에는 무공을 지닌 호위 한명이 20보 이내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데, 추린이 황성사의 간부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그의 금림자가 된 인물이었다. 언제나 듬직하게 여겼던 그조차도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이렇게 큰 소리를 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추린으로서는 작음의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네놈이 소부경 추린이 맞나?" 육신거리는 머리를 주무르고 있던 추린의 손이 딱 멈췄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의 숨까지 멈췄다. 그는 너무나도 놀랐던 것이다. 좀도둑이라고 생각했던 괴한이 알고 보니 정확히 자신을 알고 침입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재물을 훔쳐가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추린은 등골이 오싹해 옴을 느꼈다. 괴한은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신에게 뭔가 목적이 있어 찾아온 것이다. "맞아? 틀려? 그것부터 빨리 말해." 얼핏 들으면 도저히 협박을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다. 마치 친한 지기와 대화라도 나누는 것처럼 말이다. "....." 추린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괴한은 그에게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흠, 좀 멍청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놈이 맞는 것 같군." 그리고 또다시 눈앞에 불꽃이 번쩍 하며 추린의 의식을 잃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추린은 현 상황이 분명 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괴한이 자신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소부경 추린 대인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추 대인의 애첩이었다. 그녀는 잠결에 침상을 더듬거리다가 추 대인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귓철을 울리는 코 고는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고 있다는 말인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억지로 눈을 떳다. 그리고 발견했다. 방 중앙에 드러누워 코를 골아 대고 있는 낯선 사내를 말이다. "꺄아아악!" 그녀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이어 문짝이 부서지며 흑의를 입은 무사 한 명이 날아 들어왔다. 어느 결에 뽑아 들었는지 흑의무사가 뽑은 든 장검에서는 싸늘한 예기가 뻗어 나와 실내를 난도질할 듯 했다. 하지만 곧이어 흑의무사의 표정은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장검을 휘두를 대상이 없었던 것이다. "추 대인은 어디에 계십니까?" 첩을 향해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는 그에 대답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문짝을 부수고 달려 들어온 외간 남자로 인해 더욱 놀란 상태였다. 필사적으로 이불을 잡아당겨 자신의 알몸을 가리기에 급급해하는 그녀에게 사내의 질문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무사들이 실내로 달려 들어왔을 때, 흑의무사는 첩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하고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사내를 깨우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사내는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라 점혈을 통해 정신을 잃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슨 짓을 해놨는지 모르겠지만 코를 요란하게 골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진 위사." 경비무사들의 책임자는 흑의무사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주저없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한동한 해혈을 하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하던 그는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며 일어섰다. 아직까지도 요란하게 코를 골아 대고 있는 것을 보면, 진 위사의 시도는 실패한 모양이다. 그때서야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게 된 경부무사의 책임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이놈은 장원에서 잡일하는 하인 놈인데 왜 여기에 있지?" "뭐! 잡일하는 하인이라고?" "예, 확실합니다." 흑의무사는 눈썹을 찡그리며 뭔가를 생각하다 경비무사들의 책임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흠, 총관에게는 기별을 넣었는가?" "예,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실 겁니다." 그 말에 흑의무사는 경비무사들까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오자 아예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추 대인의 예첩을 가리켜 말했다. "작은 마님께 다른 숙고를 마련해 드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주변을 철저히 경비하되, 쓸데없이 돌아다녀 소중한 증거가 될 수 있는 발자국 따위를 없애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단단히 주의시키도록 하게." "예." "그리고 공동파에 사람을 보내어 추 대인계서 납치당하셨음을 알리도록 하게." 그런 흑의무사의 말에 경비 책임자는 깜짝 놀라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추 대인의 비대한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그의 안색은 핏기를 잃어버리고 새하얗게 변했다. 하필이면 그가 당번을 서고 있을 때 추 대인이 실종되다니. 혹시라도 나중에 무사히 추 대인이 돌아온다 해도 경비를 잘못 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알기에 그의 안색을 침통할 수밖에 없었다. "저, 납치당하셨다면 공동파가 아니라 형부에 먼저 고하는 게 순서가 아닙니까?" "형부 쪽에서 취급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닐세. 무림의 고수가 연관되어 있어. 형부보다는 공동파 쪽이 훨씬 도움이 될 걸세." "무림인이라구요?" 흑의무사의 말에 경비 책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도에 무림인이라니. 잠시 망연한 표정으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하인을 바라보던 경비무사들의 책임자는 다급이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장삼, 넌 공동파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려라! 그리고 넌 이 방 안으로 그 누구도 들어서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비하도록!" 평온하던 드언로의 아침은 경비무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소란스럽게 깨어나기 시작했다. 공동파 무사들이 추 대인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진 위사는 어디론가 떠나 버린 후였다. 세 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이곳에 도착한 노련해 보이는 중년 무사는 공동파의 1대제자 유정길이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총관과 경비무사들의 책임자를 불러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한 정황을 물었다. "그러니깐 추 대인이 납치당한 것이 틈림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오" 총관의 대답에 유정길은 경비 책임자에게로 시선을 돌려 허락을 구했다. "현장을 좀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 유정길은 자신이 데려온 무사들에게 시선을 돌려 명령했다. "너희들은 이분의 뒤를 따라가서 현장을 철저하게 조사해라. 뭔가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말이다." "옛!" 경비무사들의 책임자의 무사들이 떠난 후, 유정길은 다시금 총관에게로 시선을 도려 물었다. "추 대인의 방에서 발견되었다는 그 하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의 방에 옮겨 놓은 후, 보초를 세워 뒀습니다." "옮겨 두었다구요? 그렇다면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겁니까?" "예. 이상한 것이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계속 요란스럽게 코를 골며 자고 있습니다." 총관은 일부러 진 위사에 대한 말은 생략했다. 진 위사는 황실의 비밀 기관에 소속된 인물이다. 그런 그의 존재를 허락도 없이 외부인에게 발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쪽으로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럽시다. 노부를 따라오시구려." 과연 총관의 말대로 그가 안내한 방 안에는 장대한 체구의 하인 한 명이 요란하게 코를 골며 단잠에 취해 있었다. 유정길은 지체치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 하인의 혈도부터 만져 봤다. 과연 자신의 짐작대로 하인의 혈도는 누군가의 골력에 의해 제압되어 있었다. 그런데 혈도를 제압한 놈이 무슨 장난을 쳐 놨는지, 하인은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요란하게 코를 골고 있었다. 유정길은 일단 해혈을 하기 위해 곧장 자신의 공력을 주입했다. 하지만 하인의 혈도를 막고 있는 상대의 공력을 도저히 제압할 수 가 없었다. 그는 신음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인의 혈도를 풀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바로 혈도를 제압한 괴한의 내공이 자신보다 한 차원 높다는 증거였으니 말이다. 공동파의 1대제자인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라면 결코 무명소졸일 리가 없다. 유정길은 해혈하는 것은 포기하고, 괴한이 흘려 놓은 공력의 기질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괴한이 익힌 무공의 근원을 알아 낼 수만 있다면, 범인이 누군지 추측해 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괴한이 흘려 놓은 내공의 심층부에 파고든 순간, 유정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지금껏 단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광폭한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순식간에 등허리가 축축해질 정도로 식은땀이 솟아났다. 지금것 강호를 돌아다니며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괴이한 기운. 이런 기운을 사용하는 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유정길은 추 대인의 납치 사건에 개입된 인물이 보통 실력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곧이어 의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납치된 인물은 수부경 추린이다. 관부에 대한 지식이 그다지 깊진 않아 소부경이라는 직책이 뭘 하는지는 몰랐지만 한가지는 부명했다. 소부경 추린의 품계는 종5품밖에 안 된다는 것을. 비록 고관대작들이 몰려 살고 있는 이곳이지만 종5품은 그다지 높은 벼슬이 아니다. 복잡다단한 명칭을 지닌 벼슬도 하나의 체계의 의해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품계다. 정으로 9단계. 종으로 9단계. 그 순서는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이런 순서로 교차되며 총 18단계로 형성된다. 그렇게 따졌을 때 종5품이라면 중간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위로 무려 9단계가 더 있으니 말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이런 어중간한 중간관료를 납치하기 위해 직접 움직일 만한 인물은 결코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바로 이때, 엄청난 힘을 내포한 듯 느껴졌던 괴한의 기운이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아마 상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동적으로 해혈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방금전까지 귀청을 찣을 듯 코를 골아 대던 하인은 입맛을 쩝접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사내를 보자 흠칫 놀랐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본 후 이곳이 자신의 방임을 확인하자 하인은 인상을 쓰며 거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 누구야?" "어젯밤에 무슨 일을 했었느냐?" 낯선 사내가 자신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문책하듯 질문부터 퍼붓자, 하인은 처음에는 찔끔하는듯하더니 곧이어 버럭 화를 냈다. "어젯밤 내가 뭘 했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하인은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내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 강짜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노동으로 다져진 우람한 체격과 힘을 믿은 하인은 당연히 발끈하며윽박지르듯 대꾸한 것이다. 하지만 바리 오때, 그 사내의 뒤편에서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헛소리하지 말고, 이 대협의 질문에 빨리 대답하지 못할까!" 사내에게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문 앞에는 총관 나으리가 서이었던 것이다. 총관의 질책에 하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떨떠름한 말투로 대답했다. "어제 저녁을 먹고 난 후, 총관 어르신께서 시키신 대로 쌀하고 포목 따위를 모두 다 내당 창고에 옮겨 뒀습니다요." "그 후에는 뭘 했나?" "씻고 들어와서 잤습니다요." "허어, 거짓말 하지 말고 바른 대로 말해 보게." 유정길이 혹시나 하고 찔러 본 것이지만 하인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총관의 눈치를 슬머니 살피다 떠듬떠듬 실토하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일이 끝난 후 주방에 가서 술 한 잔.., 정말로 딱 한만 마셨습니다요." "같이 일했던 모두와 마신건가?" "그, 그게..." 하인은 총관의 눈치를 힐끔 살피더니 풀이 죽은 어조로 대답했다. "소인 혼자만..."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유정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누가 자네에게 술을 줬나?" "추, 추월이가..., 매, 맹세코 술 한 잔 얻어 마신 것 외에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요." 다급히 변명하듯 대답하는 하인의 말에 유정길은 총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추얼이가 누굽니까?" 유정길의 물음에 총관은 곧바로 대답해 줬다.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일세." "그 하녀도 이곳으로 불러 주십시오." 잠시 후, 예쁘장하게 생긴 하녀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이 불려왔는지는 몰랐지만 이미 충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유정길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어젯밤의 일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녀가 범인과 공모하여 하인에게 술을 먹였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추월이라는 하녀를 철저히 심문해 본 결과 전혀 그렇기 않았다. 먼저 꼬신 것이 추월이가 아니라 그 하인 놈이라는 것과, 둘이 함께 술을 마시며 농탕한 수작을 주고받았다는 것 정도를 더 실토받았을 뿐, 하녀에 대한 심문은 완전히 시간 낭비였을 뿐이다. "이런 젠장!" 유정길은 투덜거리며 발길을 내실쪽으로 돌렸다. 그곳에 남겨둔 제자들이 뭔가 단서를 잡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총관에게 들으니, 추 대인은 250근(약 150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정도로 비대한 덩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 엄청난 덩치를 흔적도 없이 집 밖으로 빼돌리는 것은 제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뭔가 단서를 찾은게 있느냐?" 유정길의 질문에 열심히 방 안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던 제자들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사숙." "베대로 찾아보기나 한 거냐?" 2대제자들을 밀치고 유정길은 자신이 직접 범인들이 남겨 놓았을 법한 단서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시진이 니난 후 유정길은 더 이상의 수색을 포기했다. 범인은 단서가 될 만한 단 하나의 것도 남겨 놓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유정길이 하인의 몸에 금제가 가해졌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았다면 총관을 비롯한 몇몇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사실 그만큼 추 대인을 납치한 자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일 것이다. '대단한 실력의 전문가가동원되었음이 틀림없어. 그러니까 최대한 잡아도 범인의 수는 세 명을 넘지는 않았을 거야.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만큼 실수를 할 확률도 높아지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던 유정길은 도저히 자신의손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분타로 돌아갔다. 분타주께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할 생각 이었던 것이다. 공동파의 남경 분타는 필요에 의해 단기간에 건설된 곳인 만큼, 제대로 분타와의 거리가 먼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대부분의 분타들이 적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어 장치들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이곳은 그런 것이 거의 없었다. 다만 이곳 남경에 파견괸 수백에 달하는 공동파 제자들에 대한 효과적인 지휘 통제를 위한 장치들만이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현재 남경 분타의 분타주로 임명되어 파견 나와 있는 사람은 공동파가 자랑하는 고수들중 하나인 이평 장로였다. 비호겸이라는 명호를 얻을 정도로 빠르면서도 패도적인 검법을 구사하는 그는 심기 또한 매우 깊어 모든 문도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이평 장로를 이곳 황도에 파견했을 정도로 공동파는 황실 및 조정에 연줄을 만드는 것에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등천로에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느냐?" "뭔가 수상한 냄새가 풍깁니다. 장로님." 그렇게 운을 뗀 유정길은 추린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보고 내용을 다 들은 이평 장로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납치된 자의 품계자 종5품이라고 했느냐?" "예. 그렇습니다. 장로님." "흠. 품계가 그리 높지 않은데도 납치를 당하다니. 등천로 일대에는 그보다훨씬 더 높은 품계를 지닌 자들이 수두룩한데 말이다. 혹 그자가 품계는 낮지만 하는 일이 특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소부경이라는 게 뭘 하는 직책인지는 알아 봤겠지?" "예. 제자가 알아 본 바로는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소부의 장이라고 하더군요." 그제서야 이평 장로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흠, 그렇지. 황실의 재산이 엄청날 것은 당연한 이치. 그리고 그것을 관리하는 자라면 얼마나...." 유정길은 이평 장로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재빨이 입을 열어 그의 생각에서 틀린 부분을 짚어 줬다. "아뢰옵기 송구스럽니다만. 제자가 조사해 본 결과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소부정 지닌 권세가 대단했었는지 모르겠지만, 워낙 오랑캐들의 발호가 거세다 보니 황실에 남은 재산도 별로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예전에 황도가 오랑캐들에게 함락 되어 약탈당했고, 그 후 남경에서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리고 와중에도 오랑캐들과 게속 전쟁을 벌여 댔으니 황실에 돈이 남아 있을 턱이 없지 않겠습니까?" "흠흠..., 그건 네말이 옳구나." "그런데 제자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추 대인을 납치한 자들중에 엄청난 고수가 끼어 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인의 점혈을 푸는 과정에서 유정길이 겪은 것을 들은 이평 장로는 더욱 큰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흘려 놓은 실날같은 내고으이 한 자락만으로도 네가 공포심을 느꼈다는 말이더냐?" "예" 유정길은 공동파의 직전제자다. 더군다나 앞으로 공동파를 이끌어 갈 1대제자가 아닌가. 그런 그가 상대가 흘려 놓은 내공의 기운만으로 공포심을 느꼈다니...., 이평 장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상대는 엄청난 실력을 지닌 고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고수가 노리기에는 추린은 너무 작은 송사리였다.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 보거라. 정녕 공포심이 맞더냐?" 유정길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워낙 짧은 시간에 벌어졌던 일이라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원초적인 공포심이나 두려움이라고 할가요? 한순간 전신의 소름이 쫙 돋으며한기가 느껴지는것이....," 지금것 수많은 경험을 쌓은 이평 장로였기에 그는 유정길의 신체적 반응을 공포나 두려움이 아닌 상대가 지닌 무공의 특이성으로 이해했다. "네 말을 들어 보니 상대는 한빙 계열의 무공을 익혔을 수도 있다." "한빙 계열이란 말씀입니까?" "그렇다. 하빙 계열의 내공을 쌓은 자가 점혈을 했다면 그 점혈을 푸는 과정에서 네가 말한 그런 현상을 경험할 수도 있다." 유정길은 이처 그쪽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퍼뜩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이평은 자신의 짐작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하인을 제압해 놓은 자가 한빙 계열의 내공을 쌓았다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어쨋거나 무림인이 이번 사건에 개입되었다면 우리 쪽에서도 좌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겠지. 그런데 어떤 간 큰 자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꼬?" 아무리 소부경 추린이 종5품 지책의 그저 그런 관리라고는 하지만 고관대작의 호위를 주 임무를 맡고 있는 공동파로서는 무림인이라고 밝혀진 이 일의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공동파를 믿고 호위를 맡기겠는가. 황실과의 연줄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공을 들이고 있던 공동파로서는 이일을 어설프게 처리했다가 자신들이 지금까지 쌓아 온 공든 탑이 무너질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유정길의 보고를 듣는 이평 장로의 안색이 그다지 밝지는 못했다. - 내 노예가 될래? - 술을 마시다 황홀한 움률에 끌려 산 정상으로 날아온 아르티어스, 그는 산정상 근처 바위 위에 앉아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금을 타고 있는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잘생긴 얼굴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아름다운 수염. 자신의 아들 묵향만큼은 아니지만 놀라운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저렇게 아름다운 음악까지 연주할 수 있다. 한순간 아르티어스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마치 근산한 물건이라도 보는듯이/ "정말 때깔이 그럴듯하군. 흐흐흐..." 필요에 따라 여러 종족들을 노예로 부려 본 경험이 있는 아르티어스다. 저놈은 엘프처럼 외모도 근사한 데다가 드워프처럼 뛰어난 능력까지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수명까지 꽤나 길 게 뻔하니 일석삼조라고나 할까. 상대는 눈이 휭둥그레져 있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장면은 처음 보는 모양이다. 급히 정신을 수습한 상대가 포권하며 말했다. "귀하의 신법은 노부의 안계를 새로이 넓혀 주는구려. 귀하의 존성대명을 알려 주신다면 영광이겠소. 세상 사람들은 노부를 만통음제라고 부르고 있소만." 정중하게 그지없는 상대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 내 노예가 돼라" 만통음제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지금껏 살아오며 이렇게 완벽하게 미쳐 있는 놈은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뭐, 뭣이? 1백년 넘게 살았지만 그런 망령된 말을 노부에게 재뱉은 자는 귀하가 처음이구려. 대체 귀하는 누구시오?" "뭐, 그건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될 거고, 잘문에나 대답해." "흥! 대답할 가치조차 못 느끼겠소." "크흐흣. 모두들 그런 식으로 떠들어 댔지만 결국은 얌전한 노에가 되었지. 너도 그렇게 될 거야. 너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 깨닫고, 또 내가 너의 주인이 될 만큼 위대한 존재임을 직접 몸으로 확인해 봐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지만 어른 주먹만 한 시뻘건 덩어리 한 개가 아르티어스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걸 본 만통음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중원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지만, 지금껏 그는 저렇게 괴이한 무공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 무슨 사술을...?" 순간 시뻘건 덩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점점 더 가속해서 날아왔기에 만통음제 주변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거의 빛과도 같은 빠르기로 변해 있었다. 그 시뻘건 덩어리가 만통음제의 몸에 관통하는 듯 보였지만, 어느 순간 그의 몸에 희뿌옇게 변하며 사라져 버렸다. 화경의 고수만이 시전 가능하다는 이형환위의 신법. 너무나도 빨리 그가 움직였기에 그곳에 아직까지 그의 잔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씨뻘건 덩어리의 공격은 그걸로 끝나지 않앗다. 마치 눈알이라도 달린 듯 크게 곡석을 그리며 만통음ㅈ에게로 다시 되돌아왔던 것이다. 한동안 꽁지에 불붙은 닭마냥 이리저리 후닥거리며 도망다니는 만통음제를 바라보던 아르티어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무래도 한 개 가지고는 재미없지?" 그와 동시에 아르티어스의 앞에 예의 그 시뻘건 덩어리가 세 개 씩이나 더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들도 만통음제를 향해 날아갔다. 안그래도 피하기 힘들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구체였는데 그게 네 개로 늘어나니 만통음제는 정신없이 다리를 움직여 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열심히 도만 다녀 봐. 내가 장담하건대 한대 맞으면 꽤나 아프걸?" 아르티어스의 빈정거림에 아무리 만통음제가 성인군자라고 해도 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망할 자식! 도대체 나하고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런 짓을 하는 거냐?" "크크크, 내가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지. 내 노예가 되는 것. 내 시종을 들고 나를 위해 싸우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그 괴상한 악기를 연주하는 거야 알겠나?" 학문을 깊이 닦아 상스러운 말투는 입에 담지도 않는 점잖은 성격의 만통음제였지만, 그 말에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만통음제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새끼!" "호오. 아직 주둥이를 놀릴 힘이 남아 있는 모양이군. 좋아. 나는 인자하고 너그러운 분이니, 네가 정신을 차릴때까지 기다려 주마."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 개의 시뻘건 덩어리는 더욱 빠르속도로 만통음제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겨우 두 개의 구체를 히한 후 다른 구체가 저근하기 전에 얻어진 찰나의 시간. 만통음제는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아르티어스를 향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의 특기가 검법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장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만통음제의 손에서 발출된 시퍼런 강기 다발은 쏜살같이 날아갔고, 순식간에 아르티어스의 몸에 격중되었다. 상대가 미처 피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자, 만통음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까짓 게 호신강기를 믿는 모양이지만, 내 의제라 하더라도 그렇게 맨몸으로 버틸 만큼 만만한 일격이 아니다.' 퍼퍼펑! 하지만 만통음제의 기대와는 달리 그가 발출했던 강기 다발은 아르티어스의 몸 근처에 접근하기도 전에 뭔가 강력한 막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며 흩어져 버렸다. 맹세코 그건 상대의 호신강기에 부딪친 반응이 절대로 아니었다. "뭐, 뭐지?" 의외의 상황에 너무나도 놀라 만통음제의몸이 순간 멈칫했다. 펑! "크윽!" 단 한 번의 실수는 그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줬다. 다행히도 구체와 부딪치는 순간 급하게 호신강기를 일으켰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그 일격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을 정도로 시뻘건 구체는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뒤로 튕겨 나가던 그의 몸에 또 다른 구체가 하나 더 날아와 격중했다. 펑! "크윽!" "자자, 어서 나늘 주인님으로 모시겠다고 하지 그래" 마치 놀리는 듯한 아르치어스의 말에 만통음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의 입에서 거친 말투가 튀어나왔다. "개소리하지 마라!" 어쩔 수 없이 만통음제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행위, 즉 자신에게 음제란 칭호를 듣게 만든 금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강기를 통한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웬만한 다른 공격들을 해 봐야 오히려 공력과 체력의 낭비일 뿐이다. 더군다나 지금 그의 몸은 정상도 아니지 않은가. 마음을 굳힌 만통음제의 손이 거칠게 금의 현을 뜯었다. 뚜따당! 이죽거리는 얼굴로 만통음제를 바라보던 아르티어스는 순간 뇌리 속을 파고드는 너무나도 강렬한 충격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누군가. 그는 재빨리 용언마법을 시전했다. 상대가 괴이한 악기를 퉁김과 동시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진 만큼, 상대와 자신의 사이에 얇은 진공의 벽을 만들어 음파를 완전히 차단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순간적인 선택은 옳았다. 그 후로 계속 만통음제가 금을 거칠게 뜯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충격은 없었기 때문이다. "거참, 별 괴상한 수법을 다 보겠군." 보통 사람이라면 그 단 한번의 공격에 귀의 평형중추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을 테지만, 치료마법까지 통달한 아르티어스에게는 그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끝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는 만통음제의 얼굴은 침통하기 그지 없었다. 그의 음파 공격에 저렇듯 끄떡도 하지 않았던 자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지만, 무시무시한 탄금을 하면서도 만통음제는 자신의 공격이 적에게 전혀 먹히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깨닫자마자 만통음제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만통음제와 아르티어스의 사이에 붉은 궤적이 번쩍였다. 만통음제가 숨겨 놓고 있던 최후의 비책 혈영비가 날아갔던 것이다. 혈영비는 작고 앙증맞은 생김새와는 달리 중원 10대 기병의 여덟 번째에 올라가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비수다. 일단 혈영비가 날아가면 기공으로는 절대 막을 수가 없다. 막는 길은 오로지 쳐 내는 것뿐.... 하지만 만통음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자신의 예병이 뭔가 보이지 않는 벽에라도 막힌 듯, 하늘에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호신강기라면 간단히 찢어발기고 들어갔어야 함에도 말이다. 혈영비를 이기어검술로 조종하고 있는 만통음제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더욱 공력을 밀어넣었다 .하지만 혈영비는 요지부동,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만통음제의 행동에 아르티어스는 가소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큭큭큭, 제법 놀라운 공격을 해 대는 놈이로군. 과연 내가 탐을 낼 만한 놈이야." 혈영비가 아르티어스의 주위에 쳐진 방어벽을 뚫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르티어스의 방어벽은 호신강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마법. 그 어떤 마법적, 물리적인 공격도 그가 쳐 놓은 방어벽을 뚫고 들어올 수는 없었떤 것이다. "뭐, 호비트 따위가 까불어 봤자 결국에는 내 발바닥을 핥게 되겠지만 말이야. 크흐흐흣." 만통음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아르티어스는 파이어 볼을 이용해 끊임없이 공격했다.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아르티어스가 하는 공격은 상대에게 치명상을 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어떤 존재든 극한 고통과 공포를 안겨 주면 결국에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르티어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만통음제라는 이놈은 생각보다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마스터급이라서 그런가? 꽤나 시간을 끄는군.' 만통음제를 향한 공격은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ㅗ느 순간, 아르티어스는 때가 왔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또다시 한 방 크게 얻어터진 만통음제가 비실비실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와 똑같은 전개였지만, 그의 눈에는 이제 더이상의 독기도 분노도 그리고 삶에 대한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포자기한 눈이었다. 이제 곧이어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의 노예가 되겠다고 애걸할 것이다. 예전에 수없이 겪어 봤던 다른 놈들처럼 말이다. "서로 간의 실력 차가 얼마나 큰지는 네놈이 더 잘 알 것이 아니냐? 이제 모든걸 포기하고 내 종이 되거라. 그러면 네게...." "큭, 무귀영화? 아니면 인이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도 약속하겠다는 것이냐?" 만통음제는 만신창이가 다 된 몸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단 한 가지는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만통음제는 기력이 다했느지 비틀비틀 간신히 서서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내 비록 힘이 없어 이 지경이 되었지만, 삶에 대한 미련은 없다. 그리고 내가 이리 된 복수는 반드시 내 동생이 해 줄 테니, 네놈에 대한 원망도 없다." "흥! 복수라고? 그게 가능이나 할까나...?" 이때 아르티어스의 머릿속을 번쩍하고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놈이 그토록 믿고 의지하는 혈육이 있다면, 그놈을 인질로 잡으면 모든 게 해결되지 않을까? 아르티어스는 음흉한 속내를 감추며 짐짓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과연 네 동생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가? 네 녀석의 실력을 보건대 네 동생 놈의 실력도 뻔한 것 같은데 말씀이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틀거리던 만통음제의 몸이 일순 꼿꼿하게 펴졌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직하지만 확신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 동생의 이름은 묵향. 천마신교의 교주이며, 모든 사파의 지존이지. 비록 내 몸 상태가 나빠 이렇게 되었지만, 내 동생에게도 이런 행운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만통음제는 힘이 다했는지 앞으로 풀썩 쓰러져 버렸다. 척 보기에도 곧 줄을 거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만통음제가 입은 상처는 처참했다. 아마 아르티어스가 치료를 해주지 않는다면 한 시진 내로 숨이 끊어져 버릴 것이 확실했다. 아르티어스가 비교적 약한 마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장시간에 걸쳐 피해가 누적되다 보니 이제는 그의 생명이 끊어질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르티어슨 만통음제를 치료해 줄 정신이 아니었다. 상대가 내뱉은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무, 묵향?" 화려한 마법들을 선보이며 상대를 농락하고 있었던 아르티어스는 기럽을 하며 허공에서 내려와 쓰러져 있던 만통음제 곁에 섰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자신의 아들인 묵향에게 이렇게 괴상한 형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긴, 얼마 전에는 손녀라는 계집까지 치료해 주지 않았던가? 손녀가 있었던 만큼 형이 없으라는 법도 없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가족에게는 손톱만큼의 관심조차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묵향일 뿐, 그 딸이나 형이라는 존재들은 그저 흔해 빠진 호비트나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이놈이 자신으로 인해 죽게 된 것을 사랑하는 묵향이 알게 되는 것이다. 순간, 아르티어스의 두 손으로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빛이 흐르며 만통음제를 뒤덮었다. 일단 이놈의 목숨만은 살려 놔야 했다. 대충 치료가 끝나 마음의 여유를 얻게 되자 아르티어스는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궁리하며 주위를 서성거렸다. "증거 인멸을 하고 아예 시치미를 뚝 떨까? 흠, 그랬다가 만약 나중에 아들놈이 알게 되면 상당히 곤란한데.... 더군다나 이놈이 가진 재주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건데 그냥 죽이는 것도 좀...."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산 아래쪽에서 누군가를 찾는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어르신~~, 어디에 계십니까? 어르신~~." 왕지륜은 아르티어스가 술을 마시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누각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푸짐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그를 봉이라 생각했는지 기녀가 옆에서 갖은 아양을 떨어 댔다. 하지만 왕지륜의 신경은 온톤 아르티어스쪽을 향해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왕지륜은 술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흐흐, 진작 이렇게 할걸. 돈은 좀 들겠지만 미인들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하니 아~주 조용하군. 덕분에 나도 오래만에 즐겨볼까." 돈은 넉넉하게 있다. 더군다나 아무리 많은 돈을 쓴다고 해도 상부에서 뭐라 그러지 못할 게 분명하다. 까탈스러운 교주의 아버지를 수행하기 위해 돈을 쓰는데 누가 감히 시비를 걸겠는가. 깐깐하기 그지없는 수석장로라고 해도 끽소리도 못할 게 분명했다. 만약 한소리한다면 그 말을 그대로 교주의 아버님께 전해 드리겠다는 응대로 되여 위협까지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술을 몇 잔 마시고 나니 뱃속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그 영감탕구의 비위만 잘 맞추면 이짓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교에 있어봐야 허구한 날 무공을 익히기 위해 비지땀을 흘릴 것이 아닌가. 그것보다는 가끔 쥐어터지긴 해도 어르신을 모시다 보니 이런 쏠쏠한 재미도 있지 않은가. 왕지륜은 기본 좋게 술을 마신 뒤 옆에 앉아 있는 기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총관이 신경을 썼는지 꽤나 미인이었다. 왕지륜이 관심을 보이자 기녀는 콧소리를 내며 품 안으로 안겨 들었다. "흐흐, 요 귀여운 것. 오늘 널 흐물흐물 녹여 주겠다." "정말 대인께서 소첩을 그리해 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한두 번 해본 장사가 아닌지라 기녀는 살짝 앙탈을 부리며 대꾸를 했다. 그말에 왕지륜은 짐짓 인상을 쓰며 무공을 익히느라 강철처럼 단련되어진 자신의 팔뚝을 쓰윽 보여 주었다. "봤지? 그리고 시중 드는 것이 내 마음에 든다면 특별히 네 몫을 더 챙겨 주마." "소첩, 최선을 다해 대인을 모기겠사옵니다." 콧소리를 내며 말을 하던 기녀의 옷고름이 어느샌가 풀어져 뽀얀 가슴이 살짝 보였다. 왕지륜은 음흉하게 웃으며 기녀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아악!" 아르티어스가 있는 곳에서 갑자스런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왕지륜은 불에 덴 듯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아르티어스가 있는 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르티어스는 보이지 않았고, 두 명의 기녀가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중 한명은 얼마나 호되게 맞았는지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그리고 어르신은 어디 계시냐?" 급하게 묻는 왕지륜의 질문에 한 기녀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갑자기 잘 안 들린다고 하시더니 소첩의 따귀를 때린 뒤 귀신처럼 사라져 버리셨습니다." "뭐야! 잘 안들려?" 왕지륜은 아르티어스를 교주가 의부로 삼았을 정도로 엄청난 무공을 지닌 선배고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늙고 별볼일 없이 보이는 아르티어스가 한번 힘을 쓰자 철영 부교주가 묵사발이 나지 않았던가? 그가 마음먹고 신법을 전개한다면 일반인들의 눈에는 귀신처럼 사라지는 것으로 보일게 분염했다. 문제는 기녀의 대답 중에 '잘 안 들렸다'고 한점이다. "누군가가 어르신을 불러낸 것일까?" 천하에 그 누가 아르티어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왕지륜은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교주의 아버지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아마 자신은 갈가리 찢겨 죽을 것이다. 잠시 방 안을 서성거리던 왕지륜은 불안감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마을 주위를 빠르게 수색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종적을 찾지 못한 그는 점차 수색 범위를 더욱 넓혀 나갔다. 그러다가 산 쪽으로 다가갔을 때, 정상쪽에 뭔가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빛이 번쩍 빛났다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잇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왕지륜은 죽을힘을 다해 산 정상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린 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구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르신~~, 어르신 어디 계십니까? 어르신~~." 아르티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증거 인멸을 하려면 저놈까지 죽여야 한다. 더군다나 자신의 시중을 들던 호비트 계집아이들까지 죽여야 할 것이다. 아니, 자신이 왕지륜이라는 놈과 함께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아는 모든 놈들을 없애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 많은 호비트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면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으리라. 죽여 없애는 것도 문제였고, 그냥 놔두자니 그것도 문제였다. 더군다나 아들놈의 의형이라는 놈을 증거 인멸이라는 이유로 그냥 죽이는 것도 좀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처럼 들은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놈이 아니던가. 아르티어스가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왕지륜의 구슬픈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 이상 고민하고 있을 시간 여유마저도 없어지자 아르티어슨 ㄴ한숨을 푹 내쉬며 만통음제를 둘러메고 허공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어딘가로 공간 이동을 한 것이다. 아르티어스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지륜이 도착했다. 아르티어스의 수석장로에게 쥐어터지며 사는 처지이기는 했지만, 그도 마교 내에서 한가락 하는 실력자다. 그런 그에게 이런 어둠따위는 수색에 이무런 지장을 주지 못했다. 왕지륜은 산 정상에 도착해 주위를 둘어봤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누군가 혈투를 벌였음이 분명한 수만흥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 설마 어른신에게 뭔가 변고가?" 다급한 마음에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던 왕지륜은 더 이상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산 아래쪽을 신형을 날렸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양양성에 있는 교주에게 이번 일을 아뢰고 지원을 요청 하려는 것이다. - 동상이몽 동업자 - 유정길이 범인에 단서를 찾는다고 정신이 없을 때, 그 범인은 지하 깊숙한 곳에서 느긋한 표정으로 추린 대인의 주리를 틀고 잇는 중이었다. 아무리 추린이 황궁에서 잔뼈가 굵은 강골이라고 해도 악독하기 그지없는 마교의 고문을 견뎌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크으윽! 나, 날 죽여라, 죽여." "쯧쯧, 죽는 것도 쉬운일이 아님을 잘 알 텐데?"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한 추린이 혀를 길게 내밀고 이로 꽉 깨물려고 했다. 혀를 깨물어 자결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손이 번쩍하는 순간 그의 턱은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가지 못했다. "크으으윽." 추린이 절망감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묵향은 너스레를 떨었다. "이봐, 나는 자네에게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이런 수고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자네 혀가 없어져 버리면 어떻게 대답을 들을 수 있겠나? 그리고 그깟 혓바닥 따위 없어진다고 자네가 자살할 수 있을 것 같나? 다 헛수고야." 퉁명스럽게 말한 뒤 한참 동안 몇 가지 고문을 더 한 후, 묵향은 추린의 아혈을 풀어 주며 질문을 던졌다. "이제 대답할 생각이 들었나? 안그러면 좀 더 하고...." "으윽! 허억, 허억!" 아혈이 집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던 추린은 혈도가 풀리자 숨을 연신 헐떡거리며 그 비대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묵향이 가한 고문은 극악하리만큼 엄청난 고통을 수반했기 때문이다. 추린은 대답을 안 하면 더 고문을 하겠다는 말에 다급히 입을 열었다. "워, 원하는게 도대체 뭐냐?" "황성사에서 악비 대장군을 왜 납치했나?" 그 말에 추린은 고통과는 또 다른 의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이 황성사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르는 극비였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이 황성사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납치까지 했다. 결론은 이 일에 황성사와 적대할 만한 거대 세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추린은 더 이상 고문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모든것을 알고 온 상대이니만큼 순순히 말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의 질문 내용이었다. 악비 대장군을 황성사가 왜 납치를 했냐고 묻다니? 추린은 그런 정보는 알지도 못했고 들은 적도 없었다. "그건 아니다. 우리가 그를 납치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황권에 위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일가 친족들까지도 목을 베야 하는게 너희들의 일이잖아?" "다른 자들이 그 일을 실행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노부는 그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참, 황성사에 다른 두목들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 했군." 악비 대장군을 왜 납치했냐며 슬쩍 너겨 집어 추린의 반응을 본 묵향은 더 이상 이자를 쥐어짜도 나올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하던 묵향은 추린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알고 잇는 다른 두목들의 정체도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설마 나보고 동료들을 팔라는 말인가? 사람 잘못 봤다." 추린은 딱딱하게 굳은 어조로 외쳤지만 묵향은 전혀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빙긋 미소까지 지으며 이죽거렸다. "잘못 봤는지 제대로 봤는지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으, 으아악!" 그 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지독한 고문들이 행해졌고, 결국 추린은 진저리를 치며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말, 말하겠다." "혹시라도 거짓말을 하면 지금까지 받은 고문이 그리워질 정도로 네놈을 어루만져 주마." 묵향의 엄포에 추린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도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웟다. 그런데 더 심한 고문을 하겠다니. 동료를 판다면 자신은 더 이상 조직에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고문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연, 연공공이야." "연공공?" 과거 묵향도 관부에서 일했던 적이 잠시나마 있었기에, 고위직에 앉아 있는 환관을 '공공'이라 부르며 존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놈을 잡기 위해서 황궁으로 쳐들어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하지만 될 수 있으면 황실과는 직접적인 접촉은 피하고 싶었던 묵향이었기에 곧바로 되물었다. "그놈 말고 딴놈은 없어?" 한 번 열린 추린의 입은 묵향의 질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노부가 알고 있는 건 연공공 한 사람뿐이다. 정기적으로 하는 회의에 참석할 때조차도 우리들은 모두 다 복면을 쓴 채 신분을 숨기고 만났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연공공은... 톡특한 목소리로 인해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황궁은 건드리는 것은 좀 찝찝했지만, 기왕에 내친걸음이다. 한 놈 잡아들이나 두 놈 잡아들이나 달라질 게 뭐란 말인가. 결섬이르 굳힌 묵향의 눈초리가 표독스럽게 빛났다. "흠, 연공공이라.... 어쩔 수 없지. 일단 그놈을 잡아들인 후에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봐야겠군." 소부경 추린을 납치한 다음 날 밤, 묵향은 황궁의 높은 담을 넘었다. 연공공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환관으로 꽤나 막강한 권세를 지니고 있는 자인 모양이었다. 거기에다가 권력의 중추라 할 수 있는 황성사의 간부이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황실에서 최고위에 속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놈만 잡아서 족친다면 어쩌면 악비 대장군의 행방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묵향이 황궁의 담을 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황궁 내부에 접근해 들어갈수록 짜증이 슬슬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경비 상태가 엄중해서가 아니라 황궁의 구조가 너무 넓고 복잡한 탓이었다. 일단 황궁 안으로 들어서고 나니 즐비하게 늘어선 건물들로 인해 당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엇다. 물론 잠입해 들어오기 전에 독두개를 닦달하여 황궁 내부를 겨우 지도 한장에 의지해서 찾아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한다?' 한참을 고민해 보았지만 묵향으로서도 결국 방법은 하나뿐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군가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자를 붙잡아 그놈을 이용해서 목적지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 시간이 한밤중인 만큼 홀도 나다니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있다면 두 명씩 조를 짜서 여기저기에 매복하고 있는 놈들뿐이었다. 이때, 묵향의 눈에 순찰을 돌고 있는 황병들이 보였다. '저놈들 중 하나를 붙잡을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10여 명씩 조를 짜서 순시를 도는 황병들 중 하나를 납치할 수는 없다. 그자들은 언제나 일정한 간격으로 정해진 통로를 순찰한다. 그런 그들이 사라진다면 곧이어 주위에 퍼져 있는 경계병들이 눈치 챌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저놈들 중 하나를 붙잡는 수밖에 없겠군.' 묵향이 관심을 돌린 것은 여기저기에 두 명씩 조를 짜서 매복하고 있는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으로 보아 꽤나 무공을 수련한 실력자들이었다. 아마도 무림의 어떤 문파에서 파견한 고수들인 듯싶었다. 그들 중 한 조를 제압할 요량으로 묵향은 약간의 시간을 들여 그들을 관찰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압하는 것을 포기 해야 했다. 그들이 그냥 가만히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신호를 보내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상이 있는지 혹은 제대로 경계를 서고 잇는지 서로 확인하기 위한 행동인 모양이다.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군. 놈들은 1각(약15분)단위로 신호를 주고받고 있어. 그렇다면 저놈들을 제압했다손 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발각된다는 말이잖아. 젠장, 어떻게 해야하나....' 이렇게 하려니 저게 걸리고, 저렇게 하려니 이게 걸리고.... 어떻게도 하지 못하고 궁리만 하고 있는 동안 조금씩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뭘 발견했는지 묵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둠 속에서 이쪽으로 미끄러지듯 접근해 오고 있는 시커먼 인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거물이 만들고 있는 짙은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민첩하면서도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 그자 또한 흑의를 입고 있었고 복면까지 쓰고 있었기에 묵향처럼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가 아니고서는 그 존재를 눈치 채기 어렸웠을 것이다. 묵향은 삼엄하기로 소문난 황궁에 복면이이 출현하여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자 잠시 이곳이 정말 황궁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 복면인을 예의 주시했다. 그러던 묵향의 입가에 뭔가 야릇한 미고사 그려졌다. 흑의에 복면까지 써 어둠 속에 자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감춘 한 인영이 구중심처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 부분이 봉긋하게 솟아올라 잇는 것을 보면 여인임에 분명한 흑의복면인. 건물이 만드는 짙은 그림자를 적절히 이용하며 움직였기에 아무도 그녀의 은밀한 움직임을 파악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흑의복면인은 바로 정진사태의 애제자 지선이었다. 그녀가 이런 괴이한 복장을 하고 황궁에 누비고 있는 것은 무슨 역심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은 그녀가 황궁의 경비를 점검할 차례였기에 이런 괴상한 복장을 황궁 내부를 은밀히 순찰하고 잇었던 것이다. 그녀는 각 요소요소에 매복하고 잇는 아미파 제자들이 근무를 제대로 서고 있는지 점검하고, 나아가 황병들의 근무 상태까지 관찰했다. 만약 이상이 있다면 제자들의 경우 다음 날 아침 호된 기합을 가할 것이고, 황병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면 황군 지휘부에 연락하여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은 자신들이 농땡이를 부린 것을 귀신처럼 파악해 내는 상관의 행동이 놀랍기 그지없다고 느꼈겠지만, 그것도 다 아미파의 1대제자들이 은밀히 암행을 해 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날 있었던 암행의 시작은 에전에 행해졌던 그것들과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예정 에도 없었던 손님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것도 그녀가 적의 존재를 눈치 챘을 때는 이미 상대에게 혈도가 제압당한 후였다. 자신이 지닌 무공에 은근히 자부심을 지니고 잇었던 그녀였기에 그 순간 그녀가 받은 충격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바로 근처에 동문들이 있건만 혈도가 막혀 버린 그녀는 그 어떤 신호도 보낼 수가 없었다. 목소리는 물론이고, 공력을 운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전음도 보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녀를 제압한 괴한은 그녀를 끌고 좀 더 으슥한 곳으로 이동했다. 상대가 뭘 하려는 것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지선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침착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저자가 나를 죽이지 않고 제압한 것을 보면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일 거야. 그게 뭘까? 만약 황궁 내부의 정보를 원하는 것이었다면, 이 주변에 매복하고 있는 다른 자매들을 제압하는 것이 훨씬 편했을 텐데.... 왜 내가 순찰 나온 것을 노려 나를 제압한 거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선의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수많은 생각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있던 지선의 머릿속에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상대 또한 나와 똑같은 임무를 띤 황궁소속의 비밀무사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지선이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이곳이 바로 황궁이기 때문이다. 황병 5만에 무수한 고수들이 철통처럼 경비를 서고 잇는 황궁에 어느 미친놈이 잠입해 들어오겠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충분히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된다. 그가 봤을 때, 지선은 황궁에 침입한 괴한일테니 말이다. 그러자 자신이 황병들의 경비 상태를 알려 줄 때마다 덜떠름한 표정을 짓던 호분중랑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궁의 세부적인 경비 상태를 총책임자인 그보다도 아미파의 여승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아마도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상대는 황궁의 경비 상태를 알아 보기 위해 파견된 관부의 비밀 고수일 수도 잇다. 만약 그렇다면 상대에게 자신이 적이 아님을 최대한 빨리 밝혀야만 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혈도를 완전히 제압당한 상태라 한 올의 공력도 일으킬 수 없는 상태라서, 상대에게 전음조차 날릴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상대가 이쪽의 대답을 들어 보겠다며 기회를 주기 전에는, 그녀는 그 어떤 의사표시도 할 수 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갑자기 상대의 전음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상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정중한 것이었다. <네가 무슨 일로 황궁에 침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알바 아니고, 지금 부터 내말을 듣지 않는다면....,> 말을 채 끝맺지는 않았지만 죽이겠다는 소리라는 걸 쉽게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껏 상대가 같은 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지선은 기가 막힐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상대는 자신도 황궁에 어떤 목적을 지니고 침입한 동업자로 생각한 모양이다. 이때 그녀의 머릿속에 기가 막힌 계책이 떠올랐다. '내가 침입자라고 생각한다면 상대는 내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침입자인 내가 주위에 도움을 청할 리 없으니까. 발각되면 둘 다 죽은 목숨. 나를 동지라고 생각하면 했지 적이라고 생각하며 경계할 이유가 없잖아.' 괴한은 지선의 대답을 듣기 위해 목을 움직일 수 있도록 혈도 몇 군데를 풀어주며 덧붙였다. <거절할 텐가?> 부탁하는 말투였지만 자신이 고개를 가로젓기만 하면 곧장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뚜렷이 느껴졌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살아남는 게 먼저였으니 말이다. 그개를 끄덕이지마자 놀랍게도 상대는 그녀의 혈도를 모두 풀어 줬다 .아마 괴한도 지선이 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했음에 틀림 없었다. 똑같이 황궁에 침투한 처지인데, 설마 황궁 요소요소에 매복해 있는 무사들에게 신호를 보낼 리 없다고 판단했으리라. 혈도가 풀리자 지선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비록 방심을 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전혀 눈치 채지도 못했는데 혈도를 제압당했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월등한 고수라는 소리다. 지선은 섣불리 주위에 잠복해 있는 동문들에게 신호를 보내기보다는, 최대한 이자를 안심시킨 뒤 포위망을 구착하여 제압하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자칫 어설플게 잡으려 들다가는 엄청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뭘..., 도와드리면 되죠?>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나?> 일단 웬만한 곳은 다 알고 있기에 지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상대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상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내가 찾는 인물은 우상시 연공공이라는 환관이다. 그자의 거처를 알고 있나?> 황궁 안에는 수많은 환관들로 득실러리고 있었기에 외인인 지선이 그들의 거처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우상시 연공공이라면 애기가 다르다. 수많은 환관들 중 최고위직인 십상시 중 하나인 '우상시'라는 벼슬을 지닌 환관이 그다. 더군다나 연공공은 그녀가 이곳 황궁에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가장 만나기 싫어했던 민물들 중 하나가 아닌가. '어떻게 해야 하지? 알려 줘야 하나? 아니면 또 다른....' 급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지선이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순간 상대의 손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그녀의 멱줄을 틀어쥐었다. 또다시 어처구니없을 만큼 간단하게 상대에게 붙잡히다니, 지선이 절망감에 고개를 떨굴 때였다. 멱줄을 틀어쥐고 있던 상대의 손에 힘이 주어지며 나지막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헛수고를 했군." 아마도 이렇게 그녀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기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마자 혈도를 풀어 줬던 것이리라. 단숨에 그녀를 제압한 고수답게 그 손아귀가 가하는 힘은 가히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순식간에 목구멍이 틀어막혔기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녀는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공력을 끌어 모아 상대에게 전음을 보냈다. <끄끅... 아, 알아요> 상대는 곧 힘을 풀며 당황한 어조로 전음을 날렸다. <이런, 알아? 대답이 없기에, 그런 줄도 모르고....> 채 하지 않은 뒤의 말은 듣지 않았어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죽여 버리려고 했다는 말일 것이다. 지선은 일단 연공공의 거처를 가르쳐 준다는 말로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 동안 숨결을 가다듬은 후에야 지선은 상대에게 물었다. <연공공의 위치만 알려 주면 저를 살려 주실 건가요?> <물론이지. 도움을 준 사람을 없앨 이유가 없잖아.>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지선이 아니었지만, 현재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방금 전 귀하의 행동으로 봤을 때, 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조금 튕겨 봤는데 상대는 의외로 삐딱하게 나왔다. <그렇다면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야? 각서라도 쓸까? 지금 당장 네년을 죽여 없앨 수도 있음을 너도 잘 알 거 아니냐? 나는 내가 한 말은 철저하게 지켜. 그러니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연공공의 거처나 말해.> 계속 떠들어 봐야 의견차가 좁혀질 리 없었다. 상대의 목소리가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낀 지선은 더 이상 뻗대기를 포기하고 재 빨리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상대의 성격이 그가 지닌 무공만큼이나 성급한 것 같았으니 말이다. <좋아요. 안내하죠. ㅈ자, 나를 따라 오세요.> 지선은 천천히, 하지만 결코 멈춤 없이 궁궐 깊은 곳으로 전진해 들어갔다. 상대는 그녀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기에. 만약 주위에 있는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내려 하다가는 먼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가능성이 컸다. 상대는 그녀가 그런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다. 딱히 괜찮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그녀의 이동은 계속되었고, 연공공의 거처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결국은 지선은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만약 이자가 연공공의 거처에 도착한다면 그의 관심은 당연히 연공공에게 쏠릴 것이다. 그때를 이용하여 동문들과 힘을 합해 이 괴한을 잡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연공공의 목숨이 위태롭게 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럼 어떤가? 안 그래도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인물들 중 하나가 바로 연공공인데 말이다. 마음을 정한 지선은 주변에 경계를 서도 있던 제자들 중 한명에게 비밀리에 전음을 보냈다. <침입자가 있다. 지금 나느 괴한에게 제압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사부님께 연락드리고, 비밀리에 연공공의 숙소 쪽으로 제자들을 집결시켜라. 그자의 목표는 우상시 연공공이다.> 잠시 후, 지선은 아직까지 희미한 촛불이 꺼지지 않고 있는 창문 하나를 가리키며 괴한에게 전음을 보냈다. <바로 저 방이예요. 주변의 경기바 삼엄하니 알아서 조심하도록 하세요. 그럼 저는 가 봐도 될까요?> 하지만 괴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기에 있는 놈이 연공공임을 확인한 후에. 자, 앞장 서라.> 예상대로 상대는 그녀의 잔꾀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생각해도 저 괴한처럼 엄청난 고수로 성장하려면 강호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아 왔을 것이다. 그런 노회한 고수에게 잔꾀가 통할 거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도 않았기에 지선은 실망한 표정을 보이지 않고 앞장 서서 연공고의 침소를 향해 몸을 날렸다. 연공공은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열심히 붓을 놀리며 뭔가를 한참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선으로서도 의외였던 것이 갑자기 창문이 덜컥 열리면서 복면을 뒤어집쓴 자신이 출현했음에도 연공공이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공공은 붓놀림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지선을 향해 소름이 끼칠 것 같은 고음의 느끼한 음성으로 물었다. "늦은 시간인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요?" 그제서야 지선은 1대제자들이 밤마다 황궁을 암행한다는 사실을 연공공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그런 생각을 지선이 떠올리는 순간, 그녀의 뒤에서 음침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과연 돼지 말대로 아주 독특한 음성을 지니고 있군." 그 순간 연공공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쭉 찢어진 눈매에 감춰진 매서운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괴한의 말 한마디에 그 정체를 단숨에 간파해 버렸기 때문이다. "크크큭. 과연 배짱이 있는 놈이로구나. 추린을 납치한 것도 모자라서 감히 황궁에까지 침투해 들어오다니." "너한테는 안 됐다만, 돼지가 기억하는 놈이 너밖에 없어서 말이야." 괴한이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의자에 앉아 있던 연공공의 몸이 쭉 늘어나듯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너무나도 손쉽게 책상을 건너뛰었기에, 마치 처음부터 그의 앞에 책상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연공공의 손에는 어느 틈에 뽑아 들었는지 얇은 연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 연검은 그의 허리띠 뒤쪽에 교묘하게 감춰져 있었기에 그가 뽑아 들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가 무장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가 없었다. 연공공과 지선의 거리는 거의 1장 반(약4.5미터)이나 되었지만, 그의 검은 순식간에 그녀의 코앞에 당도했다. 놀랍게도 연공공은 엄청난 무공을 지닌 고수였다. 그의 연검에서는 시퍼런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고, 푸른 강기마저 아련하게 맺혀 있었다. 엄청난 위력을 내포하고 있는 그 공격을 휩쓸리면 뼈도 추리기 힘들 게 분명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지선은 어떻게 해서든지 연공공의 공격권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연공공의 연검의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기에 도저히 피할 여유가 없었다. 엄청난 공력을 내포한 검격으로 봐서 연공공은 처음부터 지선과 괴한을 한꺼번에 날려 버릴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그걸 깨달은 지선의 눈동자는 절망감에 물들었고, 순간 질끈 눈을 감았다. 캉! 괴이한 소리에 지선은 질끈 감았떤 눈을 살며시 떳다. 자신이 갑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소리가 들려오다니 이상했던 것이다. 이때 그녀의 눈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연공공의 검은 놀랍게도 괴한의 손에 막혀 있었다. 그것도 아무런 무기도 쥐지 않은 적수공구너에 말이다. 괴한의 손은 투명하게 빛나며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런 환상과도 같은 무공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던 지선이었기에 한순간 멍하니 서 있었다. 갑자기 지선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뒤로 날아가 벽에 세차게 부딪쳤다. 괴한이 방해가 되는 그녀를 붙잡아 뒤로 집어 던져 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괴한은 연공공이 자신과 괴한을 한꺼번에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제거야 지선을 황궁과는 관계없는 진짜 침입자로 단정한 모양이다. 연공공의 무공도 놀라웟지만 괴한의 무공은 더욱 놀라웠다. 방해물인 지선이 없어지자 순식간에 연공공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던것이다. 하지만 지선은 느긋하게 그들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괴한의 눈치를 힐끗 본 후, 그가 연공공에 완전히 정신이 펄렸음을 깨닫자마자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밖에는 예상대로 아미파의 제자 50여 명이 완전무장을 갖춘 채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복면을 벗어 던지며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침입자가 있다. 침입자의 무공이 고강하지 정면 대결은 절대 피해야 한다. 모두들 항마연환검진을 펼쳐라." 항마연환검진은 비교적 무공이 약한 다수가 강한 소수를 압박 하는데 최적화된 아미파의 고유의 검진이다. 대부분의 문파들은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진법을 보유하고 있다. 그 하나는 항마연환검진처럼 강한 무공을 보유한 소수의 침입자를 다수로써 대적하기 위해 최적화된 진법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소수로써 다수를 상대하기 위한 진법이다. 아미파의 여승들은 지선을 중심으로 검진의 묘리에 따라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능제강의 이치를 활용 하여 만들어진 항마연환검진을 펼치고 있었기에 그녀들의 움직임은 마치 무희들의 검무를 보는 듯 아름다웠다. 진법을 펼친 채로 그녀들이 조금씩 연공공의 처소로 향해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고 있을 때 였다. 꽈꽝! 갑자기 연공공의 서재 쪽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한쪽 벽이 터져 나갔다. 채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 그 속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지선은 금방 그게 복면괴한이 만든 음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복면괴한은 마지막에 보였던 그 격돌에서 이미 연공공을 제압해 버렸는지, 그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괴한은 밖으로 나오다가 아미파의 고수들이 검진을 펼친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봤다. 그녀들을 지휘하고 있는 지선이 방금 전까지 잣니이 붙잡고 있었던 바로 그 여인임을 알아본 복면괴한의 눈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기색이 묻어 나왔다. 지선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동문들에게 외쳤다. "침입자가 절대 도주하지 못하도록 해라!" 이때 그녀의 옆에 서 있던 2대제자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했다. "저자가 연공공을 인질로 잡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저자와..."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지선은 순간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괴한과 함께 자신까지도 베어 버리려고 하던 연공공의 표독스런 얼굴이 떠올랐다. 그 순간 지선은 동문들에게 외쳤다. "침입자를 저지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황궁이다. 멀지 않은 곳에 황상 폐하께서 계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연공공의 안위 따위에 신경 쓸 필요 없다. 모두들 알겠느냐?" 불도를 닦은 제자들이기에 몇몇은 그녀의 명령에 내심 반발을 했을지 모르지만, 감히 1대제자인 지선에게 대놓고 반론을 제기하는 살마은 없었다. 그리고 지선의 말대로 이곳은 황궁 안이다. 그녀들이 맡은 최우선적인 임무는 황상 폐하를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호위하는 것이다. 모두들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음인지, 항마연환검진은 강한 살기를 내뿜으며 복면괴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비검!" 지선의 지시가 떨어지자 네명의 여승들이 경공을 전개하며 몸을 날렸따.항마연환검진은 소수의 적을 향해 전후좌우를 압박함과 동시에, 뒤쪽에 위치한 제자들 중 네 명씩 하늘로 날아롤라 십자 형태로 교차하며 쉴 새 없이 공중공격까지 가하는 매우 무서운 검진이다. 일단 검진이 발동한 이상 저자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복면괴한이 연공공을 어깨에 짊어진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하늘, 언뜻 보면 네명 밖에 공격자가 없는 공중이 약점으로 느껴지겠지만 그게 항마연환검진의 가장 큰 함정이었다. 도주하기 위해 공중으로 몸을 날리과 동시에 모든 공격이 사장에서 집중되는 것이다. 공중으로 날리느라 행동의 제약이 큰 적은 그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그야말로 하늘은 필사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복면괴한이 하늘로 몸을 띄우자, 지선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엇다. 이제 침입자를 포획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순간 아미파 여승들의 공격이 괴한을 향해 집중되었고, 곧 이어 복면괴한의 가공할 무공이 펼쳐졌다. 괴한은 자신이 팔사의 관문으로 들어섰음을 깨닫자마자, 후퇴하거나 하는 대신 정면 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복면괴한의 손이 황홀하리만큼 아르다운 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사방에서 몰려오는 아미파 여승들의 공격에 그대로 맞부딪쳐갔다. 콰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하늘로 몸을 띄었던 20여 명의 여승들이 돌진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뒤로 튕겨져 나왔다. 그녀들은 복면인과의 격ㄷ돌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제대로 땅에 착지하지도 못하고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럴 수가!" 괴한의 경공술은 너무나도 대단한 것이어서, 연공공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격돌의 반발을 이용해 순식간에 밤하늘 속으로 까마득히 솟아올랐다. 그리고 곧이어 어둠에 녹하 들어가듯 그 종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괴한을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갔던 지선 이하 모든 여승들은 그런 괴한의 뒷모습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들은 괴한의 걸출한 무공에 경악감을 감추기 힘들었던 것이다. 지선이 방으로 들어서자 정진사태가 급히 질문을 던졌다. "침입자가 있다더니 어찌 되었느냐?" "도망쳐 버렸습니다." 보고를 받은 정진사태는 순간 당황한 모양이다. 침입자를 잡지도 못했는데 지선이 돌아왔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적이 탈출했다면 응당 그녀가 앞장 서서 추격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침입자의 무공이 대단히 강했던 게로구나." "예, 사부님. 그자는 제자들이 어찌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거느리고 온 제자들의 무공실력은 정진사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런 그녀였기에 지선의 보고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강하더냐?" "예, 무공도 대단했지만 그자의 경공술은..., 너무나도 엄청나서 도저히 추격 자체가..." "허긴, 한밤중에 경공이 뛰어난 적을 추격해 봐야 좋을게 없지. 그래, 그자의 무공이 그렇게 대단했다면 피해는 키지 않았느냐?" "20여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습니다." "불행 중..." 정진사태의 입에서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지선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침입자가 연공공을 납치해 갔다는 점입니다." 그 말에 정진사태는 굉장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게 사실이냐?" "예" 지선은 사부에게 이번에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말할까 말까 잠시 고심하는 듯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연공공은 실력을 숨기 있던 고수였습니다. 그가..." 그녀는 연공공이 사부와 필적할 정도의 고수라는 걸 말할려고 했었다. 하지만 정진사태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 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지선의 자신의 눈이 낮음에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혹 사부님께서는 그가 무공을 연성했음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지선아. 그토록 무림의 무공이 발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어찌 황궁에서 그냥 보고만 있었겠느냐? 무림의 고수들을 흡수하는 한편, 나름대로 고수들을 키웠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황궁이 지금껏 무림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었겠느냐?" 9파1방과 몇몇 무림의 전부라고 생각할 만큼 자부심이 강했던 지선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물론 마귀의 집단인 마교를 포함해서 말이다. 지선이 고개를 푹 숙이자, 정진사태는 잠시 부드러운 눈길로 제자를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사실 연공공은 대단한 실력의 고수이다. 그런 그나 납치되었다고 하니 내가 놀랐었던 게야. 어쨋거나 일이 아주 고약하게 되었구나." 환관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십상시 중 우상시 연공공이 납치되었다. 그것도 아미파가 철통같은 경계망을 펼치고 있는 황궁안에서 말이다. "무림맹에 기별을 넣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잠시 염주만 굴리며 아무 말 없던 정진사태는 마지못한 듯 중얼거렸다. "그래야겠지.: 대답을 하는 정진사태의 얼굴은 황궁에 드러워진 암운을 감지한 것인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최근 악비 재장군의 가작스런 실종이나 괴한이 침입하여 연공공을 납치핸 간 것이나 천하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정도의 파장이 있을 거라는 것을 예감한 것 이다. - 여기가 개방 분타야? 마교 분타야? - 소팔개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을 때, 독두개는 개 다리를 하나 구워놓고 그걸 안주삼아 열심히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소팔개는 주위를 둘러본 뒤 사람이 없음을 확인했음에도 안심이 안되는지 다급하게 전음을 날렸다. <큰일 났습니다. 타주님.> 하지만 독두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마시고 있던 술장을 마저 깨끗하게 비운 후, 탐탁히 않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큰일? 큰일은 무슨 놈의 큰일. 뭐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잇는게 없는데, 그딴 거 알아서 뭐 해? 자네도 쓸에없는 데 신경쓰지 말고 이리와서 술이나 마셔." 독두개는 아예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사발에 술을 가득 따르더니 소팔개에게 권하는 것이었다. <타주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십쇼.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누가 그걸 몰라? 꺽! 젠장. 그 망할 새끼가 추린을 납치해 이리로 끌고 와서 고문을 했는데, 내가 지금 제정신으로 있게 생겼어?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나는...., 나는 끝장이라구!> 독두개는 도저히 자신이 처한 현실을 참을 수 ㅇ벗었는지 다시금 사발을 번쩍 들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소팔개는 독두개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하게 거의 팔을 잡으며 다급히 말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놈이 누굴 납치해 왔는지 아십니까?> "뭐! 또 잡아 왔어?" <황궁의 실세 중 실세라는 연공공을 잡아 왔단 말입니다!> 독두개는 술이 번쩍 깰 수밖에 없었다. "뭣이? 지, 지금 그놈은 어디에 있나?" <어디긴 어디겠습니까? 지하 창고에 있습죠.> 하루 빌어 하루 먹는 거지들 주제에 무슨 창고가 필요하겠는가 싶겠지만 그들에데고 나름대로 창고의 필요성이 었다. 구걸에 온 돈을 모아 두는 데도 이용되었지만 여음에는 서늘했기에 술을 저장하는 데 딱 좋았고, 추운 겨울밤에는 모두의 숙소이용되기도 했다. 물론 이곳 남경은 지하 창고에까지 들어가 추위를 피해야 할 정도로 추운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소팔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두개는 꽁지에 불붙은 닭마냥 지하 창고를 향해 달려갔다. 종5품 추린만 하더라도 하늘이 아득해질 정도인데 권력의 실새인 연공공까지 납치해 오다니, 이건 개방의 존립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달려가는 독두개의 입에서 마치 비명과도 같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 이런 개새끼! 날 아예 말려 죽이겠다는 거야!!!" 지하 창고를 향해 달려가는 독두개는 정말이지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었다. 극악무도한 마교 교주가 이곳에 등장한 이래, 그는 이곳 개방 분타를 마치 마교 분타라도 되는 듯 애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그 사실을 잘 숨겨 왔지만 그게 언제 들통날지 알수가 없는 노릇이다. 지하 창고로 들어가는 입구는 분타의 뒤편 으슥한 곳에 있었다. 독두개가 다가가자 창고 입구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히히덕거리며 얘기를 나누던 거지 둘이 화들짝 일어나 인사를 건네 왔다. 독두개가 아끼는 술독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기에, 평상시에도 경비를 세워 둘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교주의 만행이 밖에 새나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타주님." "그래, 별 이상은 없었느냐?" "조금 전에 부타주님께서 들어갔다 나오신 것 외에 다른 출입자는 없었습니다." "그래. 수고들 하는구나. 나중에 술독 하나 줄 테니 근무 끝난 후에 나눠 먹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타주님!" 경비를 서고 있는 거지들과 잠시 한담을 주고받은 후, 독두개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으며 독두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쓸모없는 새끼들. 교주가 주구장창 들락거리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는 주제에 이상이 없다고? 저런 밥버러지 같은 새끼들에게 수고했다고 술까지 처먹야햐 하다니. 에고, 내 팔자야.' 남경 분타의 지하 창고는 꽤나 널찍 했지만 바닥에 여러가지 쓸모없는 것들이 널려 있어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등잔이 요요한 빛을 뿜는 가운데, 누군가의 심음성이 음산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끄으윽, 끄응~" 신음성 사이로 음침한 교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비 대장군은 지금 어디에 있지?" 곧이어 남자의 목소리도 아니고 여자의 목소리도 아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괴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그걸 네놈에게 말해 줄 이유가 없다." "호오, 아직 맛을 덜 본 모양이군." 교주가 무슨 짓을 했는지 곧이거 뾰족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끼아아악!" "버텨 봤자 네놈만 손해야. 살아서 나가고 싶으면 빨리 불어. 혹시 대장군의 위치를 잘 모른다면, 저기 있는 돼지처럼 나한테 진신을 대신 말해 줄 사람을 알려줘도 돼." 교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처참한 비명성이 울려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을 즐기는지 교주의 말투는 음침하긴 했지만 상당히 편안한 편이었다. "어때, 이젠 말할 생각이 들었나? 버텨 봤자 소용없어. 그래 봐야 네놈 몸만 상한다니까...." "크흑!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곧이어 교주의 그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올래 살고 싶지 않으니 제발 좀 죽여 봐. 지금껏 네놈과 같은 소리를 한 놈들은 엄청 많았는데, 단 한 놈도 실행을 하지 않고 있으니, 원........." 그 말에 독두개는 자신이 능력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교주의 머리를 박살 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어쩌다 한번 씩 이렇게 이죽거리는 말투로 말할 때는 정말 울화병이라도 생길정도로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그때 안쪽에서 교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들어왔으면 이리 올 것이지, 거기 서서 뭐하고 있나?" 독두개는 어쩔 수 ㅇ벗이 교주에게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교주는 독두개가 고이 모셔 놓은 술독을 열어 입술까지 축이며 연공공을 닦달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자 횃불 아래로 드러나는 전경은 참혹했다. 연공공은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손톱이 뽑혀 버린 것도 모르고, 그 손으로 땅바닥을 긁어 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누군가 접근하자 연공공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그리고 새로 등장한 인물이 누구인지 곧바로 기억해 냈다. 화성사의 간부들 중 하나인 그가 이곳 황도의 개방 분타주 독두개에 대한 보고를 받지 않았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연공공의 얼굴을 보고 있던 독두개는 그의 묘한 표정 변화에서 상대가 자신을 알아봤음을 느꼈다. 정보를 취급하는 단체에 오랜시간 종사해 온 그였기에, 이런 부분에 매우 민감한 신경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독두개로서는 심장이 오르라드는 듯한 공포심을 느꼈다. 만약 저 망할 교주가 나중에 연공공을 풀어 준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회한 독두개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느긋한 어조로 교주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교주님. 원하시던 일에 대한 성과는 좀 있으셨습니까?" 얻어맞을까 봐 감히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독두개가 지신의 존재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묵향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독두개가 갑자기 살갑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자 놈의 저의를 알 수 없었던 묵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꽤 질긴 놈이라 아직까지는 성과가 없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걸 실토할 거야." "만약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면 또다시 황궁에를?" "그거야 알 수 없지." 지금껏 당한게 있었던 연공공은 독두개가 던진 먹이를 덥석 물었다. 사실 장시간 지독한 고문을 당한 연공공이 평정심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교주? 지금 교주라 했느냐? 그렇다면 네놈이 마교라는 단체의 수장이더냐?" 그 말에 묵향은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이런이런, 황성사의 정보력이 형편없는 모양기군, 마교가 아니라 천마신교, 즉 마교지. 이쪽의 명칭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단. 가소로운 것들." "큭! 이런 육시할 놈 같으니라구. 너 같은 극악무도한 놈이 교주로 있으니, 마교로 불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육시란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를 여섯 조각 내어 소금에 절여 각 처에 돌리는 극악한 형벌이다. 물론 그런 소리를 듣고 가만이 있을 묵향이 아니다. 그는 곧장 연공공의 얼굴을 밟고 지그시 힘을 가하며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아직까지도 자신의 처지를 잘 모르는 모양인데......, 본좌를 육시하기 전에, 본좌가 네놈을 먼저 육시할 수 있음을 명심해라." 으지직. 얼굴이 땅바닥에 반쯤 파묻힐 정도의 엄청난 힘이었다. 연공공이 얼마나 고통이 심했는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렇게 말한 묵향은 연공공의 면상을 지그시 노려보더니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고문 도중에 죽어 버리면, 육시를 해서 그 조각들을 황궁에다가 뿌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군." 지금까지도 묵향에게 당하고 있는 분근착골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그런 말까지들으니 연공공으로서는 모골이 송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독두개가 구미가 당기는 듯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뒷탈이 염려스러운데 교주가 연공공을 죽여 준다니 기꺼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연공공의 목을 자르실 겁니까?" "왜? 자네가 자르고 싶나? 뭐, 평상시에 맺힌게 많았다면 육시 하는 것쯤은 자네에게 양보하도록 하지, 지금 하는 꼴 보니, 몇 시진 안기다려도 놈의 몸을 톽칠 수 있을 게야." 연공공의 겉모습은 처참했지만 그보다 오랜시간 가해놓은 분근착골의 영향으로 힌해 그의 근골은 더욱 엉망진창인 상황이었다. 아마 이곳에서 살아나간다고 해도 과거의 무위를 되찾기 위해서는 최소한 6개월은 정양해야 할지도 모른다. 독두개로서야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연공공이 이곳에서 살아나가기를 원치 않기에 묵향의 제안에 구미가 당기는 듯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런 그들을 보며 연공공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 이런 악독한 거지 새끼! 내가 네놈과 무슨 원수가 졌다고 그렇게 악랄하게 구는 것이냐? 이왕에 엎질러진 물이었다. 독두개는 능청스레 말했다. "교주님, 저놈은 척 봐도 절대로 비밀을 발설할 놈이 아닙니다. 그냥 죽여 없애 버리시죠. 제가 술술 불 만한 다른 놈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럴까? 안 그래도 워낙 입이 질긴 놈이라 짜증나던 참이었는데......." 묵향이 슬그머니 자신에게 다가오자 연공공은 다급이 외쳤다. "잠깐! 만약 내가 알고 있는 걸 모두 실토하면 살려 주겠느냐?" 묵향은 연공공의 몸에 가해 놨던 분근착골을 해제하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보고 들은 바에 따르면 추밀사가 이번 일을 벌였다고 들었다." "추밀사?" 묵향은 독두개에게 고개를 휙 돌리며 물었다. "추밀사에 대해 알고 있는대로 말해 봐." 별로 말해 주고 싶은 심정은 아니었지만, 독두개는 자신이 알고 있는대로 알려줬다. 추밀사가 명목상 군부의 수장이긴 하지만 실권은 거의 없다는 점, 현재 그의 입김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군대라면 황군이 전부일 것이라는 정도였다. "추밀사가 대장군을 없애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이유가 있을까?" "그야 군권을 과거처럼 추밀원으로 집중시키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대장군 일 테니까요. 악비 대장군이야말로 최대의 군벌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자신은 군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휘하의 장졸들이 모두 추밀원의 명령보다는 대장군의 명령만 듣고 있죠. 그게 바로 군벌이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이제야 확실하게 꼬리를 잡았군."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은 묵향은 더이상 이곳에서는 볼일이 없다는 듯 어딘가로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지하에는 연공공과 추린, 그리고 독두개만이 남았다. "끄으으윽!" 신음성을 흘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연공공. 그를 보며 한순간 독두개는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를 죽여 입을 막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방은 마교 교주의 하수인이라는 지독항 오명을 뒤집어 쓸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독두개의 눈빛이 일순 악독하게 변했고, 그 표정은 차갑게 굳어졌다. "귀하가 이곳에서 살아나간다면 본방에 크게 위해를 가해 올것이 분명하므로, 부득불 귀하를 처치하는 수밖에 없겠구려. 원망라려면 나보다는 저 망할 교주 새끼를 원하도록 하시오. 모든 일은 그놈이 이곳 남경에 왔기에 시작되었으니." 독두개가 공력을 끌어올리며 치명적인 일력을 준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공공의 안색은 전혀 변동이 없었다. 도저히 탈출할 방법이 없으니 이미 삶을 포기한 것일까? 더군다나 그는 오랜 고문을 당한 후라 몸도 마음도 엉망인 상태였다. 독두개의 손이 번쩍하고 연공공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가 시전하고 있는 것은 개방이 자랑하는 최강의 장법 강룡십팔장으로, 그 한 수에 연공공의 목숨을 앗아 버리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고 있었다. 슈아아악! 삶을 포기한 듯 가만히 서 있던 연공공의 몸이 앞으로 슬쩍 움직였고, 놀랍게도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 독두개의 일격은 옆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한 독두개의 눈에 두려움이 짙게 깔렸다. 그는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연공공은 자신보다도 훨씬 뛰어난 고수였다. 퍽! 단 일격에 독두개는 피를 토하며 쭉 뻗어 버렸다. 극심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독두개의 실력이 그렇게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상대가 교주의 고문으로 인해 파이 한 마리 때려잡을 힘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상대를 과소평가한 것. 그게 그의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쿨럭! 별 쓰레기 같은 것이 감히......." 연공공은 우선 추린에게로 다가갔다. 추린도 자신과 같이 극심한 고문을 당한 상태라 함께 탈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추린은 무공도 익히지 않은 몸이니 상태는 더 심각할 것이다. "이봐, 어서 정신을 차려봐." 축늘어져 있던 추린은 연공공의 채근에 억지로 눈을 떴다. "우, 우상시 공공......?" 추린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연공공의 압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의 입에서 예의 날카로우면서도 살기에 가득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관이 머지않아 황병을 데리고 돌아올 것이니, 그때까지 죽은 척해서 저들의 눈을 피하고 있어라." "아, 알겠습니다." 왠지 모를 한기를 느낀 추린은 연공공을 마주 보지 않고 쓸쩍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귓가에 다시 연공공의 말이 들려왔다. "크크, 네놈이 예서 죽는다면 본관은 억울해서 잠도 못 잘 것이야. 반드시 돌아와 네놈의 주리를 틀고 말 것이다. 부디 꼭 살아 남아 있어라." "그, 그게 무슨...?" 추린은 그제서야 자신이 연공공을 밀고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걸 연공공이 눈치 챘다는 사실도, 추인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애걸하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있는 연공공은 한 번 앙심을 품으면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상대를 파멸시키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제, 제발 용서를......" "이번엔 아주 좋은 것을 배웠다. 분근착골이라는 것을 말이다. 본관이 직접 겪어 보니 네놈에게도 반드시 맛보여 주고 싶구나. 그런 연후 네놈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 버릴 것이다!" 연공공의 추린의 혈도를 짚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밀어 넣은 후, 재빨리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위에 도착한 그는 문에 난 틈새를 이용하여 밖을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무짝이 워낙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것이라, 밖의 상황을 엿ㅅ보기가 아주 힘들었따. 이때 밖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뭣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 거지?" "그냐 모르지. 안에서 한잔 꺾고 계신지 말이야." "빌어먹을! 타주님이 취해 버리면 약속하신 술 한 동이도 그냥 날아가 버리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지 말고 네가 한번 들어가서 살펴 봐." "미쳤냐? 그러다 걸리면 경을 치게 될 텐데....." 목소리로 봤을 때 문앞에서 떠들어 대는 놈은 단 두 명. 둘뿐이라면 자신의 이런 형편없는 몸이라도 어떻게 될 수도 있을 듯했다. 연공공이 문을 살며시 열었을 때 타구봉을 들고 문 앞에서 있던 거지 두명은 독두개가 나오는 줄 알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고개를 조아려 인사를 하였다. "볼일은 끝나셨습......" 그리고 그것은 연공공에게 최고의 기회를 제공해 줬다. 연공공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거지들을 덮쳤다. 퍼퍽! 영문도 모르고 기습 공격을 당한 거지들의 몸이 쓰러지고 있을 때, 연공공은 이미 밖을 향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경공술을 전개하고 있었다. 황궁과 무림맹의 협정에 따라 웬만한 문파들은 다 남경을 떠났다. 공식적으로 무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약육강식의 세계를 살고 잇는 무림인들에게 꽤나 큰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불리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경에 남아 있는 문파들이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무영문이다. 정보를 취급하는 무영문이 이곳 남경을 포기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무영문의 남경 분타는 부호의 저택으로 위장되어 있었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 저택이 왕 노야라는 사람 좋은 은퇴상인의 집으로만 알고 있었다. 왕 노야는 오랑캐들과 국경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쌓았으며, 지금은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이곳 황도에 자리 잡은 뒤 만년을 보내고 있따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도 이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아무리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ㅈ어정했기에 음으로 양으로 아들이 하는 사업을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택의 주인으로 알려진 왕 노야는 후덕한 인상에 살집이 넉넉한 몸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저택안 깊숙이에 위치한 별채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 쪽으로 다가가자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무사들이 재빨리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노야." 왕 노야는 그들의 인사를 받는 중 마는 둥 하며 안드로 들어갔다. 그는 별채의 문을 열기전에 다시 한 번 주위를 쓱 둘러봤다. 그의 타고난 조심성 때문에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 버린 행동이었다. 그는 문 앞에 입을 가져가 속삭이듯 말했다. "왕 타주입니다." 여인의 아름다운 음성이 안에서 가늘게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곱게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탁자에 쌓여 있는 문서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중년 여인은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츤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왕 타주답지 않게 꽤나 서두르는 것 같던데..." 별채 근처에서 왕 오냐의 움직임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별채 밖에서 서둘어 이쪽으로 걸어 들어온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겉보기와 달리 중년 여인은 상당한 고수였던 것이다. "큰일 났습니다. 문주님." 큰일이라는 말에 중년 여인은 문서에서 눈을 떼, 왕노야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장군을 찾아냈나요?" "그게 아니라 교주가 사로를 쳤습니다. "사고란..., 그가 연공공을 죽여 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왕 노야는 방금 전까지 개방 분타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보고했다. 그의 보고 내용은 너무나도 정확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노야가 바로 중원 최고의 정보 조직이라고 불리는 무영문의 남경 분타주였던 것이다. 왕 노야는 묵향이 이곳 남경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다른 곳 같았으면 아무리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묵향의 뒤를 밟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남경이다. 숨기 좋은 엄폐물도 많았고, 뭣하면 수많은 인파들 속에 섞여 들기만 해도 찾아내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묵향이 추격당할 가능성을 없앤답시고 장거리를 전력 질주할 공간도 없었다. "그렇다면 연공공이 탈출했단 말인가요?" "예, 교주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갇혀 있던 창고에서 탈출했다고 합니다. 그를 살려 둔다면 일이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으니 없애 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문주님." 왕 노야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골똘이 생각에 잠기는 아름다운 여인. 이 중년 여인이 바로 옥화무제의 딸이며 현 무영문의 문주인 매설란이었다. 매설란의 딸이 이미 중년의 여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녀 역시 상당한 고수임에 확실했다. 한참 고심을 한 후, 결론을 내렸는지 매설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연공공은 황실을 수호하는 비밀 세력인 친황대의 수장이예요. 가뜩이나 황권이 취약한 상황에서 그를 죽일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만큼 지독하게 당했으니 교주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뽑아들겠죠." "그렇게 되면 교주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왕 노야의 말에 매설란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황실에 그만한 힘이 있을까요? 교주를 없애는 것이 그렇게 쉬웠다면 어떻게 그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그가 살아서 황궁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명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매설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도와줄 필요까지 있을까요?"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개방 분타에 있는 모든 개방도들이 지금 연공공을 척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흐음...."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매설란이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들며 명령했다. "사람들을 보내 연공공이 무사히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개방과의 충돌이...." "연공공 같은 인물을 이런 일로 죽게 놔둘 수는 없어요." "알겠습니다. 문주님." 왕 노야는 서둘러 별채 밖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던 분타원들 중 한명에게 뭐라 지시를 내렸다. 그와 동시에 10여명의 인물들이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아마 연공공의 탈출을 돕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리라. 왕 노야가 다시 방안으로 돌아오자, 매설란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교주가 어디로 갔는지는 보고가 들어왔나요?" "꼬리를 붙여 놓았으니 조만간 연락이 올 겁니다." 이때 밖에서 약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 노야가 문을 열어 주자 문사 차림의 사내 하나가 뭔가 보고를 한 후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교주가 추밀사의 저택으로 들어갔다는 보고입니다." 사내의 보고가 매설란에게는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다. "추밀사? 그렇다면 추밀사가 대장군을 납치했다는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현재 최대의 군벌을 구축하고 있는 악비 대장군만 없어진다면, 지금의 군벌 체제를 타파하고 다시 한 번 과거와 같이 추밀원이 군권을 움켜쥘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매설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확신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악비 대장군이 실종되었을 때, 그녀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미 조사를 했었던 것이다. "그건 말도 안 돼요. 만약 악비 대장군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현재 추밀원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군권을 재편할 수 없어요. 오히려 대장군을 추밀원이 없앴다는 걸 군벌들이 안다면, 위협을 느낀 그들이 일제히 금나라로 넘어가 버릴 우려마저 있죠.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추밀원에서 일을 벌일 수 있을까요?" 그말에 왕노야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매설란도 왕 노야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마 연공공은 추밀사를 의심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매설란은 이번 악비 대장군 납치 사건을 황궁쪽에서 일으킨 일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하지만 추측만 했을뿐, 본격적인 조사를 지시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황궁에는 황성사라는 첩보 단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혹시라도 무영문이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움직이다 황성사에 포착이라도 당한다면, 황궁과 상당ㅎ 껄끄러운 관계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심증은 있었지만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묵향이 황성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내 온 황성 내를 휘저어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서 무영문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껄끄러운 화성사의 시선은 묵향에게로 집중될 것이 틀림없으니 그 틈에 악비 대장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 였다. 덕분에 무영문은 꽤나 많은 정보를 끌어 모아 놓은 상태였다. 매설란이 내린 결론도 그런 정보들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 악비 대장군의 행방, 그리고 혈전 - 우상시 견공공은 중상을 당한 몸이에도 불구하고 개방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황군 진지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무영문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게 가능했었지만, 그들이 워낙 은밀하게 움직였기에 연공공은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황군 진지에 겨우 도착한 연공공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따. 전신에 수많은 상처를 입어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누가 봐도 뭔가 큰 환난을 당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황군 진지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연공공을 발견 하자마자 달려 나왔다. 연공공은 궁내의 환관들이 입는 관복을 착용하고 있었고, 경계를 서고 있던 황군 병사들이 그걸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들은 연공공을 부축하여 병영안으로 들어갔고, 그중 한명은 당직을 서고 있는 장수에게 이 사태를 보고하기 위해 어디론가 달려갔다. 잠시 후,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황군 교령이 한눈에 연공공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우상시 연공공이 아니십니까?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십까?" 그말에 묵향에게 납치돼 온갖 고문을 당했던 것이 떠오르자 연공공은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부를르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 극악무도한 놈들에게 잡혀 갔었으나 다행히 하늘이 도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네." "대잉ㄴ께 무례를 저지른 놈들의 거처를 알려 주십시오. 소장이 달려가 그놈들을 당장!" "그렇게 섣불리 건드릴 수 있는 놈들이 아니야." 황군 교령을 만류하는 연공공의 눈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빛났다. 여거까지 탈출해 오는 동안 틈만 나면 복수를 생각했었다. 지독할 만큼 강렬한 복수심이 그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상대는 이 시대를 양분하고 있는 거대문파들 중 하나인 마교의 수괴다. 풍문에 들었던 것처럼 놈의 무공은 엄청났다. 그런 만큼 조심에 조심을 가하지 않는 한 놈을 놓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개방의 거지들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납치하고 극악한 고문을 행했던 그 빌어먹을 마교 교주 놈을 잡는게 먼저였다. 찹아서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수십 배를 돌려줘야했다. 교주 놈을 잡기 위해 그가 생각해 둔 한 자기 계책이 있었다. 그 계책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놈이 뭘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놈이 어디로 갔는지 알기에 가능했다. "몇가지 도와줄 일이 있네." "하명만 하십시오. 공공" "날래고 믿을 만한 녀석들을 다섯만 뽑아주게. 서신을 보낼게 있다." "예. 즉시 대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교령이 자신의 심복들 중에서 기마술에 뛰어난 자들을 부르러 나간 사이 연공공은 그들에게 맡길 서신을 자석했다. 가장 먼저 그가 쓴 서신은 황궁에 있는 자신의 심복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아무래도 실력 있는 고수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작성한 것은 황성사로 보낼 서신이었다. 자신이 당한 일을 다른 간부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야 공동파와 아미파에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오랜 세월 황궁에서 일해 온 때문인지 우아한 서체로 쭉쭉 써 내려가던 그는 갑자기 붓을 멈추며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이런! 이렇게 쓰면 안되잖아." 황성사에 보내는 서신이야 이번에 그가 당한 불미스런 일들을 사실대로 기록한다고 해도 아미파와 공동파에 보낼 것들까지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사실대로 기록한다면 저들이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마교교주의 무공이 워낙 강한 만큼 그를 없애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만약 교주를 없앴다는 게 마교위 귀에 들어갔다가는 전면전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지금 양양성에서는 마교와 정파라는 것들이 힘을 합쳐 오랑캐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가 교주라는 것을 알면 공동파와 아미파가 자신에게 제대로 된 히을 빌려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쓸까?" 잠시 궁리하던 연공공은 일단 자신을 납치한 괴한이 마교 교주라는 사실을 숨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괴한은 마교 교주가 아니라 강력한 무공을 지닌 '정체불명의 고수'로 바뀌었다. 자신의 서신을 소지한 다섯 명의 전령들이 전력질주하며 만들어 낸 경쾌한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연공공은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이미 마교 교주 놈이 붙잡혀 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제 아무리 놈의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인원과 물자를 동원한 이상. 생고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미파와 공동파는 물론이고, 중무장한 황군 5천까지 동원된다면 그 누가 도망칠 수 있겠는가. "놈을 어떻게 죽여 줄까?" 이리저리 궁리하던 연공공은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는지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그래! 놈이 말했던 대로 육시를 해서 그 잡것들에게 존엄한 황실의 권위에 반기를 들면 어떤 꼴이 되는지 알려 줘야겠어. 그래, 바로 그거야. 케케케케케!" 나름대로 통쾌하게 소리 내어 웃는 연공공이었지만 그 기괴한 고음의 목소리 탓에, 주변에서 웃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 나쁜 경험을 해야만 했다. 연공공의 서신을 찬찬히 읽은 후, 비호검 이평 장로는 그것을 가지고 온 전령에게 물었다. "서신을 읽어 보니 아미파에서도 사람이 나올 거라고 쓰여 있는데..., 그쪽은 황궁에 매인 상대인데 과연 지원 나올 여력이 있겠나?" "우상시 공공의 청인데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당연히 나올 것입니다." 전령의 말에 그제서야 이평 장로는 연공공이 심상시 중 한명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면 설사 황제를 호위하는 무사라도 빼올 것이다. 그만큼 심상시가 휘두르는 권력으 ㅣ힘은 엄청났다. "알겠네. 정해진 시간에 그쪽에 도착할 것이라고 공공께 전해주게나." "예,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이평 장로의 말에 전령은 군례를 올린 뒤 다시 군영으로 돌아갔다. 전령이 돌아가자마자, 이평 장로는 1대제자들에게 다급히 명령했다. "옛, 장로님!" 이평 장로의 명령에 제자들이 무장을 갖추기 위해 밖으로 모두 달려 나갔지만 그의 적전제자인 허진산은 남았다. 허진산은 검대에 놓여있는 사부의 애검을 꺼내, 두손으로 사부께 바치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사부님, 무슨 일이신데 그리 서두르시는 겁니까?" "노부가 그토록 고대하던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이평 장로는 서신을 허진산에게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이 일만 잘 처리해 준다면, 연공공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게다. 그는 황궁의 실세다. 그가 본문을 밀어주기만 한다면, 본문이 다 시 한번 무림에 이름을 떨치는 것도 결코 꿈은 아닐게야." 공동파는 과거 무극검황 옥청하이 무림맹주로 있을 때 최고의 성세를 달렸었다. 하지만 그가 행방불명된 후 거듭되는 불상사로 인해 지금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있는 상태다. 그렇기에 공동파는 다시 한번 재도약의 발판을 황실에서 마련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너무나도 빨리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이다. 급히 서신을 다 읽어본 어진산은 조심스럽게 사부에게 의문나는 것을 물었다. "서신에 따르면 적도를 잡는데 본문만이 아니라 아미파와 황군까지 투입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원된다면 놈들이 낌새를 채고 도망칠 가능성도 있을 뿐만 아니라. 설혹 놈들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공이 그만큼 희석될 것이 뻔합니다. 사부님." 그말에 이평장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객를 끄덕거렸다. "물론이다. 그 때문에 지금 내가 서두를 게야. 최대한 빨리 그곳에 도착하여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놈들을 친다. 알겠느냐?" "옛. 사부님." 이때 밖에서 1대제자들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로님. 출동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평 장로는 검을 집어들고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자, 가자" 이평 장로가 거느린 공동파 제자들은 순식간에 목표 지점인 추밀사의 저택에 도착했다. 목적지가 그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 않았기에, 경공술을 사용해서 내달리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평 장로는 도착하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명령했다. "적도들을 찾아라. 설혹 낌새를 챘다고 하더라도 그리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옛!" 1대제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한 후, 각기 자신들을 따르는 2, 3대제자들을 거느리고 추밀사의 저택 안으로 들진해 들어갔다. "큭, 겨우 적도 몇 놈 잡는데 아미파와 힘을 합치라니, 연공공은 본문의 능력을 너무나도 무시하는군." 그렇게 투덜거리며 어평 장로는 주위를 둘러봤다. 연공공의 말대로 적도들 중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무림인이 있다면. 자신들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기척을 파악하고 벌써 도망쳐 버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집중해서 주위를 둘러봐도 누군가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듯한 기척을 느껴지지 않았다. "깊숙이 숨어버렸다면 골치깨나 아프겠는데........" 지금 그가 우려하는 것은 단 한자기, 놈들이 어딘가로 숨어 들어갔을 경우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수색해 나간다면 결국 잡아 낼 수 있겠지만, 이평 장로는 적도들을 잡는 공을 아미파와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면 결국 적도들을 최단시간 내에 포착하여 격멸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때 갑자기 추밀사의 저택 안으로 돌격해 들어가던 문하제자들이 술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주춤주춤 물러서는 것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암행복을 입은 사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흐훗, 잡았구나." 흐뭇하게 미소 짓는 이평 장로였지만, 그 미소는 얼마가지 못하고 그의 얼굴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니, 얼마나 놀라운 광경을 봤는지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복면인은 공동파의 제자들이 포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 태연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한순간 번쩍하고 시형을 움직였다. 절정의 반열에 오른 이픙 장로조차도 그의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놓쳤을 정도로 그의 움직임은 빨랐다. 퍼퍼퍽! 놀랍게도 그 괴한은 순식간에 세 명의 문하제자들을 때려 눕히더니. 곧바로 그들 중 한 명의 검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복면인을 중심으로 은빛 곡선의 파도가 화려하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문하제자들 십수명이 피를 뿌리며 사방으로 나뒹군것도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 젠장. 고수로구나. 모두들 비켜라. 노부가 상대하겠다. " 이평 장로는 상승의 신법을 발휘하여 공중에서 아홉바퀴나 곡예를 하듯 화려하게 돌며 문하제자들 앞에 착지했고,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은 앞으로 튕겨 나가듯 복면인을 향해 달려 나갔다. 과연 일문의 장로다운 절정의 경곡신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문자헤자들이 더 이상 상하지 않게 자신이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복면인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너무 성급하게 움직인 게 화근이었다. 이평장로는 복면인의 검격이 자신에게 날아온 후에야, 자신이 얼마나 상대를 얕보고 있었는지 깨다았다. 얼핏 봤을 때 복면인의 무공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복면인을 쓸데없는 공력의 낭비를 최대한 자제하며, 상대를 해치우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공격만을 쓰고 있었다. 그 말은 복명인이 정말 엄청난 고수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지금껏 제자들을 상대할 때는 그리 대단한 검식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평 장로를 향해 날아온 것은 그 파괴력부터 상상을 초원하는 것이었다. 극도로 응축된 내공을 담고 있는 강력한 초식. 공동파의 장로답게 목숨의 위협을 느낀 순간. 이평 장로는 사력을 다해 자신이 익힌 무공 중 최강의 초식으로 강력한 검막을 구축했다. 콰콰쾅! 검과 검이 부딪쳤음에도 고막이 멍멍해 질 정도의 굉렬한 폭은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평 장로의 검막이 허무하게 깨져 나갔다. 상대는 상상 이상의 고수였다. 이평 장로가 이런 곳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검막이 깨져 나간 순간, 이평 장로는 무의식중에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서 상대의 검이 자신의 목을 쓸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촌각의 시간이 흘렀어도 적의 공격은 없었다. 어쩌면 적도 자신의 검막을 무너뜨리면서 충격을 받아 연속공격을 가항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채 끈타기도 전에 이평 장로는 정신없이 뒤로 빠졌다. 이평 장로가 황급히 방어자세를 잡을때까지도 복면인의 공격은 없었다. 아니 복면인은 검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의아한 시선으로 이평 장동로가 복면괴한을 바라보고 있을 때 괴한의 입에서 굵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적하마령검법! 그걸 익힌 자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군. 너는 그 검법을 어디서 배웠느냐?" 복면인의 물음에 이평 장로가 오히며 이러둥절해졌다. 저자는 어떻게 제자들도 잘 모르고 있는 이 무공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본다는 말인가? 공동파 수뇌부 몇몇을 제외하면 무림에서 이 무공을 알아볼 사람은 전무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혹 저자가 과거 공동파에서 파문당한 선배였다는 말인가? 짧은 시간이 있지만 그의 머릿속으로 온갖 상념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이평 장로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귀, 귀하는 누구시길래 그걸...?" "젠장! ㅡ녀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군." 마치 살인에 재미라도 들린 듯 닥치는 대로 공동파 제자들을 죽여 대던 괴한은 갑자기 모든 흥이 사라진 듯했다. 그는 의미 모를 말만 남긴 채 그 장소를 이탈할려고 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황궁 쪽 방향에서 수십이 넘는 인영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인영들은 이곳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던 아미파의 지원 세력이었다. 아미파 고수들은 도착하자마자 피바다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복면인을 향해 다짜고짜 공격을 개시했다. 수많은 공동파 제자들의 시선이 널려있는 것을 보아, 복면인과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아미파 제자들은 복면인게 접근하며 저마다 품속에서 아미파 고유의 암기인 조핵정을 꺼내 던졌다. 무림인들의 경우 같은 무파의 소속이라 할지라도 각자 지닌 암기는 저마다의 취향에 따라 달랐지만, 아미파는 모두 조핵정만을 사용했다. 대추씨와 비슷하게 생긴 조핵정을 통짜쇠로 만들어져 제법 묵직했기에 장거리의 적도 공격이 가능했다. 그리고 한쪽은 뾰족하게 또 다른 쪽은 둥글게 만들어져 있어, 살상은 물론이고 적의혈도를 제압할 수도 있었다. 순식간에 수백 발의 조핵정이 발출되어 복면인을 향해 날아갔다. 모두 황궁 경호를 위해 뽑은 아미파의 내로라할 만한 실력 있는 고수들이었기에 암기에는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울리며 날아갔다. 그녀들은 복면인이 벌집이 되어 쓰러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티티팅 일순 복면인의 검이 부드러운 궤적을 그리며 그의 주위로 두터운 벽을 쌓았고,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조핵정들은 콩 볶는 소리와 함께 갈기갈기 찢어져 소멸되어 버렸다. 정말이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들 무위였다.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그녀들은 그와 똑같은 한수를 사용해서 조핵정을 찢어발기던 인물을 이미 경허한 적이 있었다. 아미파 제자들이 저마다 경악성을 질러 댔다. "악! 바로 그자에욧!" "모두들 조심해!" 어젯밤 황궁에서 만난 괴한을 그녀들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 그녀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절감해야만 했다. 괴한가 아미파의 충돌을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짧게 끝났지만 그녀들이 강자에 대한 경외와 공포를 가슴속 깊이 새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엄청난 고수가 황궁에 둘씩이나 잠입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 서 있는 복면인은 어젯 밤 만났던 바로 그놈이 분명했다. 정진사태의 명에 따라 동문들을 이끌고 이곳에 온 지선은 있는 힘껏 외쳤다. "모두 피햇!" 순간 복면인의 앞을 가로막았던 아미파 여승들은 마치 대나무가 쪼개지듯 황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복면인은 미처 옆으로 비키지 못한 여승들을 일말의 주저도 없이 베어 버리며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여승 셋이 피보라를 일으키며 쓰러졌지만, 누구 하나 복면인을 향해 달려드는 자는 없었다. 달려들어 봐야 아예 상대가 안 됨을 그녀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서서 복면인의 사라진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평 장로는 이윽고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돌려 지선에게 물었다. "도대체 저자가 누군지 아시오?" 상대는 공동파 장로였기에 지선은 예의를 갖춰 정중히 대답했다. "소승도 잘 모릅니다." "방금 전에 보니 모두들 저자를 아는 듯하던데...?" 이평 장로의 눈에 의심의 기색이 가득한 것을 보자 지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말이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평 장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진법을 사용했다면..., 혹 항마연환검진을 말하시는 거요?" "그렇습니다. 비호검 대협." "그, 그럴리가......" "아미타불, 한 치의 가감도 없는 사실입니다." 지선의 솔직한 대답에 이평 장로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평 장로는 아미파의 항마연환검진이 얼마나 뛰어난 검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 문파의 최고의 무공이나 검진은 다른 문파들에게 있어 연구의 대상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검진을 그것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발동시킨 걸 혼자서 단숨에 뭉게 버렸다니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비록 믿기 힘든 듯 고개를 가로젓고 있지만 이평 장로는 지선의 말이 사실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방금 전 그가 직접 복면인과 검을 나누지 않았던가. 상대의 무시무시한 검격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다. 잠시 멍하니 서있던 이평 장로는 이윽고 이번 사건에 뭔가 모종의 흑막이 있음을 간파했다. 저토록 무시무시한 실력의 고수라면 필히 무림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자일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그 복면인은 자신의 검법을 한눈에 알아보지 ㅇ낳았떤가. 그런 실력자가 뭣 때문에 연공공의 납치를 관여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이때 실내로 들어갔떤 제자들 중 하나가 이평 장로에게 보고했다. "추밀사 대인을 찾았습니다. 장로님. 지독한 고문을 받은 듯 하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듯 보입니다." "그래? 빨리 의생에게 모시도록 해라." "옛, 장로님." 이평 장로는 자신의 애제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지산아." "옛 사부님!" "일은 거의 끝난 듯하니 뒤처리를 네게 맡기겠다. 노부는 잠시 어디 들렀다가 돌아가마." "알겠습니다. 사부님." 이평 장로가 제자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을 옆에 서 있던 지선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자리를 비운다니. 필시 뭔가를 알아챈 것이 분명하다고 지선은 생각했다. 지선은 재빨리 자신의 사매에게 닽은 지시를 내린 후 어디론가 달려가는 이평 장로의 뒤를 다급히 쫓아갔다. 복면인에게 너무나도 가볍게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평 장로의 실력이 형편없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가 최대 속도로 경공을 전개하자 얼마 지나지도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연공공이 몸을 추스르고 있는 병여잉었다. 경비를 맡고 있던 군관은 이평 장로와 지선을 웬 환관에게로 안내했다. 이평 장로는 그를 처음 만났지만 지선은 연공공의 거쳐를 드나들던 도중에 그를 몇 번인가 본 기억이 있었다. 환관이 지선을 알아보고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아, 지선 스님이셨군요. 그래, 무슨일로 우상시 공공을 찾으시는 겁니까?" 그러나 지선 대신 이평장로가 그 말에 대다했다. "공공께서 이번에 노부와 지선 스님에게 한 가지 일을 맡기셨는데, 그 일로 상의드릴 게 있다고 전하시면 아실 겁니다."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다음에 찾아 주시면 아되겠습니까? 우공공께서는 급한 일이 있으셔서...." 환관은 급한 일이 있다고 대충 얼버무렸지만, 이평 장로는 이미 연공공이 자신들을 왜 만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눈치 채고 있었다. 상승의 고수인 그는 연공공이 있음직한 막사 안쪽에서 누군가가 운기조식을 하고 있을을 기의 움직임을 통해 파악했던 것이다. 그게 아마 연공공일 가능성이 컸다. 지금까지 연공공이 내공의 고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이평 장로에게 있었서는 작금의 사실은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상당히 강력한 기의 파동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연공공은 주위의 이목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전력을 다해 운공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평 장로는 쓸쩍 뒤에 서 있는 지선의 표정을 살폈다. 의외로 그녀의 안색은 평온했다. 마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이평 장로는 다시 환관쪽으로 시서을 돌리며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노부를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예서 기다리겠고." "그래도 이곳에서 기다리시는 건 좀...." "화급을 요하는 일이오. 나중에 공공께서 기침한신 후 귀하가 나를 돌려보내신걸 아신다면 크게 역정 내실지도 모르오 그래도 노부보고 그냥 가라고 하겠소?" 환관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환관이 물러간 후 이평 장로는 지선에게 전음을 날렸다. <자네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모르는 척 할 필요 없네. 그래. 언제부터 알게 되었나? 연공공이 무공을 익혔다는 걸 말일세> <소승도 그걸 안지느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평 장로는 주위를 빙 둘러봤다. 마치 침입자라도 있는지 경계하듯 할이다. 그걸 보며 지선은 왜 이평 장로가 굳이 이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환관에게 고집을 부렸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이평 장로는 지금 누군가가 몰래 침투해 연공공을 해치는 것을 경계하고 잇는 것이다. 마치 그의 호법이라도 되는 듯이. 두사람은 한 시진 정도가 지나서야 겨우 연공공을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시구려. 이 장로." 연공공은 이평 장로의 뒤에 서 있는 지선에게도 아는 척을 잊지 않았따. 하지만 그런 연공공의 대응이 하나도 기쁘지 않은 지선 스님이었다. 딱히 하대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깔보는 듯한 오묘한 말투가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어이쿠, 지선 스님께서도 오셨구려. 거기서 그냥 기다릴 게 아니라 통보라도 해 주지 그러셨소? 그래, 두 분께서는 무슨 일로 나를 찾으셨소?" 이평 장로는 거두절미하고 찾아온 용건부터 말했다. "공공께서 지목하신 그 괴한의 정체를 알고 싶습니다." "괴한들을 잡으셨소?" "잡지 못했기에 묻는 말입니다." 연공공은 이평 장로의 대답에 눈썹을 찌푸리며 자신의 심기가 썩 좋지 않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공동파에 아미파, 거기에다가 황군을 5천씩이나 지원해 주라 일렀거늘. 어찌 그놈들을 놓칠 수가 있단 말이오?" "공공의 말씀대로 그 모든 세력이 연합하여 한꺼번에 공격을 가한다면 잡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하지만 그 많은 수가 일제히 움직이도록 놈들이 수수방관하고 있을 이 없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말씀하신 적도들 중 한 명의 무공은 도저히 믿지 못할 만큼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수십에 달하는 본문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제 목까지 날아갈 뻔했으니까요." "...." "도대체 그자가 누굽니까? 그런 자가 무명일 리 없으니 빨리 정체를 알려 주시지요. 그자에게서 본문의 핏값을 받아 내야겠습니다. 그렇게 채근을 하는데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이평 장로의 눈동자에는 연공공에 대한 의심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말로는 놈들을 잡아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노들을 없앨 마음이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다. 더군다나 서찰에는 분명히 적도들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자신이 본 것은 단 한 명 뿐이었다. "알려 주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연공공은 잠시 고민했다. 이걸 알려줘야 하나? 아니면 숨겨야 하나. 하지만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 아니다. 놈이 벌써 공동자 제자 수십 명을 도륙했을 뿐만 아니라. 이평 장로의 목숨까지 뺐을뻔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 정도 실력을 지닌 자라면 무림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고수임에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바일 테고...., 그렇게 추론해 나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일을 마교 교주가 벌였음을 눈치 챌게 분명했다. 결국 다 눈치 챌게 분며한데 괜히 그 사실을 숨겼다가는 나중에 자신의 의도를 의심받게 될 수 도 있다. 아니. 의심받을 게 분명했다. 마음을 정한 연공공은 헛기침을 몇 번 내뱇은 후 천천히 입응ㄹ 열ㅆ다. "뭐, 꼭 본관이 알려 줄 필요가 있겠소?" 그러면서 연공공은 지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선 스님에게 물어보시오. 그날, 그놈을 본관에게 친절하게 안내해 온 당사자였으니 말이오." 순간 이평 장로의 목이 획 돌아갔다.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지선을 쏘아보며 물었다. "도대체 어찌 된일인가?" 자신의 잘못을 이렇게 대놓고 까발릴 줄은 몰랐기에 지선의 안색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너무 당혹스러웠기에 지선은 일시지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네" 계속된 이평 장로의 채근에 지선은 할 수 없이 그날 자신의 처했었던 상황을 자세히 살명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연공공이 대한히 높은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는 걸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자신은 물론이고 아미파가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연공공의 무공을 믿었기에 괴한을 연공공이 있는 서재 쪽으로 데리고 갈 수 있었노라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지선은 불제자로서 거짓을 입에 담는 것이 못내 괴로워 내심 계속해서 참회진언을 떠올려야 했다.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그자의 무공기 그토록 뛰어난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은 소송의 실수였습니다. 소승으로 인해 크나큰 고초를 겪으신 공공께 사죄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호오~, 지선 스님은 본관이 무공을 익히고 있었음을 어떻게 알고 계셨소?" 나름대로 조심했는데 지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니 연공공으로서는 의외였던 모양이다. 그 질문에 지선은 사부를 팔기로 했다. 이왕 시작한 거짓말이었기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지선은 계속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았다. "예전에 사부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림에 수많은 고수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황궁이 무림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우상시 공공과 같은 뛰어난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지금껏 연공공은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음지에서만 무공과 세력을 키워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무림의 명문이라는 9파1방의 장로급 고수가 말이다. 연공공으로서는 매우 기분 좋을 수밖에 ㅇ벗었다. 더불어 자신의 그 개공생을 하게 만든 지선에게 대가를 츠리게 해주겠다는 마음이 조금은 옅어졌다. "정진사태께서는 실로 대단한 인목을 지니신 분이구려." 얘기가 자꾸 옆으로 새 나가는 듯하자 이평 장로는 연공공을 향해 주의를 환기시켰다. "지선 스님은 알지 못한다고 하니 공공께서 알고 계신 거라도 제발 알려주시길 청합니다." "흠, 괴한의 정체를 알려 주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던 건 아니오. 본관도 그자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지금껏 말하지 못했던 거지요." 그러면서 연공공은 이평 장로와 지선의 눈치를 힐끗 살핀 후 계속 말을 이었다. "본관이 납치되었을 때 그자들끼리 서로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소 적도들 중 거지인 듯 보이는 자가 놈을 보고 '교주'라고 부르더이다. 무림에 마교라는 단체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곳의 수괴를 일컫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소." 연공공의 입에서 마교의 교주라는 말이 나오자 이평 장로는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공공" "본관도 그게 정말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적도들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던 거요. 그자들이 본관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그런 호칭을 입에 올린 것일 수도 있지 않겠소? 이미 황병들을 보내 본관이 잡혀 있던 곳을 치라고 일렸소. 놈들은 ㅂ잡아들여 족쳐 보면, 진짜로 놈의 정체가 마교 교주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겠지요. 본관은 적도들의 정체를 숨기고자 한게 아니라. 확실치 않은 정보를 주어 두분이 일을 추진하는데 혼란을 야기할까 두려워 말하지 않은 것뿐. 다른 뜻은 없었소." "그, 그러셨습니까?" 연공공의 말은 충분히 그럴듯했기에 이평 장로는 더 잇아 따질수가 없었다. 그때 조용히 서 있던 지선이 문득 입을 열었다. "마교 교주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짓을 벌인 것일까요?" 이평 장로는 고개를 가만히 저으며 대꾸했다. "어쩌면 교주가 아닐 가능성도 있지. 아직까지 놈의 정체를 속단하는 것은 금물일세." "하지만 교주의 악행은 아미산에까지 들려오더군요. 소승의 생각으로는 그런 인물과 손을 잡았다는 것 자체가..." 아마도 그녀는 무림에 퍼져 있는 묵향에 대한 소문만으로 어떤 판단을 하는 모양이다. 소문이 진짜라면 그 사악하기 그지없는 마두는 이런 못된 짓을 수천 번은 하고도 남았을 악당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평 장로의 생각은 달랐다. "소문만으로 상대를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맹에서 그런 것도 감안하지 않고 그와 손을 잡았겠느낙? 그리고 마교는 오랑캐들을 상대로 뛰어난 전공을 세움으로써 맹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줬다네." "그렇다면 장로님께서는 범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무공이 매우 강한 자들 중 교주라고 불리는 자가 현 마교 교주인 암흑마제 말고 둘이 더 있지. 그건 바로 혈교의 교주와 마료의 전대교주인 흑살마왕일세. 노부는 암흑마제보다는 흑살마왕 쪽에 더 큰 혐의가 있다고 생각하네만..." 그말에 연공공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 장로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틀릴 수도 있소. 본관이 고문을 당하면서 느낀 건데..., 그자가 악비 대장군을 찾는 이유는 구출하기 위함이었지 찾아내서 죽이고 함은 아닌 듯했고. 물론 그 자체가 연극일 수도 잇으나 적어도 본관은 그자의 언행에서 그렇게 느꼈다는 말이오." 그 말에 지선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양양성에 악비 대장군을 경호해 이곳에 온 무리들 중에 마교도들이 있었습니다." "마교도들이 말인가?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나?" "악비 대장군을 찾겠다며 황군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 10여 명의 마교도들을 며칠간 구금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저확한 신분을 알 수 없었기에 이곳 개방 분타주께 의뢰하여 양양성에 기별을 넣어 달라고 했었지요. 교주가 양양성에 있다고 들었으니 그가 그걸 듣고 황성으로 달려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일으키다는 말인가?" 그 말에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확신한 연공공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선 스님의 말이 사실인지는 조사해 보면 알 수 있겠지요." 연공공이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두 사람도 입을 다물고 이 일로 인해 자파가 어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밖이 시끄러워지더니 중무장한 장수 한 명이 당당한 걸음으로 갑주를 철그렁거리며 들어왔다. 화려한 갑주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높은 직위를 지닌 무장인 듯 싶었다. 그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연공공에게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우상시 공공, 반도들의 저항이 거세기는 했지만 공공께서 지시하신 대로 저들의 소굴을 완전히 소탕했습니다." 장수의 보고에 연공공은 미소 지으며 치하했다. "동중랑장에세 크게 신세를 지는구려." "수고랄게 뭐 있겠습니까? 소장으로서는 그저 공공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그래, 남경 분타주는 사로잡았는가?" "예. 공공. 하지만 워낙 상처가 심해 당장 심문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연공공은 개방의 남경 분타주를 사로잡았다는 보고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죽지 않기만 하면 된다. 감히 자신을 향해 얼른 죽여야 한다고 이죽거리던 그 거지놈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리는 연공공이었다. 탈출하던 중 정상적인 몸이 아닌 상태에서 손을 썻지만, 상대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는 누구보다도 연공공이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상처로 인해 탈출하지도 못하고 사로잡힌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자의 무골수위로 봤을 때 결코 황구에게 사로잡힐만큼 녹록한 인물을 아니었다. "뭐, 심문이야 천천히 해도 되겠지. 그 외에 다른 놈들은 얼마나 붙잡았는가?" "모두 125명을 잡았습니다. 가급적이면 지시대로 생포하라고 노력했사오나. 저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고로 어쩔 수 없이 태반은 사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황군의 주력 병기는 신비궁이라고 불리는 휴대용 쇠뇌였다. 장전하기가 용이하지 않아서 그렇지 유효 사거리가 무려 2배 보나되는 강력한 무기다. 앞쪽에서 칼과 창 등으로 우장한 병사들이 개방도들을 상대하는 동한 뒤쪽에 있는 사수들이 신비궁을 이용하여 저항하는 개방도들을 사살해 버렸던 것이다. 화살이 갑옷을 꿰뚫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그 활의 유효 사거리로 잡는다. 갑옷까지 뚫어 버릴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내포한 화실인 만큼, 개방도들의 무술실력이 웬만큼 뛰어나지 않고서는 신비궁의 밥이 되기 딱 알맞았던 ㄳ이다. "그 정도 잡아들였으면 충분한 것 같구먼. 내 동중랑장의 공을 절대 잊지 않겠네." "공이라니요. 다만 명대로 행했을 따름입니다" "안그래도 신세를 진 김에 한 번 더 손을 빌려 줄 수 있겠는가?" 연공공은 황실의 실세였다. 그런 그에게 빛을 만들어 둔다는 것은 자신의 출세에 든든한 토대가 되어 줄 것이 분명했기에 동중랑장은 흔쾌히 대답했다. "하명만 하십시오." "그 거지 떼들과 모의하여 본관을 납치, 고문했던 자의 정체를 대충 하악해 냈다네 아마 그자는 무림인으로서 마교라는 단체의 수장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는데....., 방금 입구한 정보에 따르면 마교 쪽에서 악비 대장군의 호위로 일부 무사들을 보낸 모양일세. 만약 이번 사단을 일으킨 자가 마교 교주라면, 그자는 지금 자신의 부하들 틈 속에 숨어 있을 게 분명하지 않겠는가?" 재빨리 말귀를 알아들은 동중랑장은 호탕하게 말했다. "대장군을 수행하여 성도에 들어온 자들을 모두 다 체포한 뒤 철저히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다. 우상시 공공." 연공공의 예상대로 묵향은 임충 일행이 기거하고 있는 객잔에 도착해 있었다. 사건을 일으킨 후 부하들 틈에 슬쩍 숨어 들어 위기를 모면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부하들과 함께 양양성으로 돌아가기 윟마이었다. "대장군은 찾으셨습니까? 교주님" 임충의 물음에 묵향은 썩 좋지 못한 표정으로 지시를 내렸다" "모두 출발 준비를 ㅎ다록 해라. 지금 즉시 양양성으로 돌아간다. "예? 그렇다면 악비 대장군은..." 묵향은 내뱉듯 중얼거렸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묵향의 표정으로 봤을 때, 악비 대장군의 죽음 뒤에는 뭔가 치졸하기 그지 없는 음모가 숨어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임충은 감히 그걸 묵향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고 있을 시간도 없었고, 그는 즉각 밖으로 달려ㄱ나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짐을 챙겨라. 양양성으로 회군한다." 부하들에게 명령한 임충은 악비 대장군의 호위대에도 전령을 보냈다. 자신들은 지금 바로 양양성으로 회군할 건데 그쪽은 어떻게 할 거냐고 말이다. 그러면서 임충은 어떻게 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악비 대장군께서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알려줬다. - 아아! 화산파여 - 교통의 중심지 섬서성의 성도 서안에 도착하면, 중원무림을 대표하던 검의 명문 화산파의 성지 화산이 지척에 다가온다 .파문당해 쫓겨나고, 제자들은 주살당하고, 사물은 멸문다하고..... 화산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현천검제에게 있어서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산으로 달려가고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에 현천검제는 씁쓸하지만 했다. 잊고 시은 기억도 있지만 그의 인생에서 제 2의 고향인 화산을 어찌 기억에서 아예 지울 수가 있겠는가. 고민하던 현천검제는 슬쩍 소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사질. 화산에 잠시 들렀다가 가면 안 될까? 물론 갈 길이 바쁘고 또 사질이 양양성에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기를 바라는 것은 잘 알지만...." "저는 상관없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하면서도 소연은 힐끔 현천거제의 눈치를 살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은 결코 5대 명산인 화산에서 유람이나 하자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뭐라 형용하기 힘든 깊을 슬픔이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제가 사숙께 화산에 들렀다 가자고 부탁드리고 싶었어요. 중원 5대 명산 중 한 곳을 구경하다는 게 그리 쉽게 찾아오는 기회는 아니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구먼." 소연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뒤 현첨건제는 화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그의 발검음은 아주 무겁기만 했다. 서안에서 화산까지의 거리는 대략 250여 리. 1만 리 길을 걸어 양양성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에 비하면 지척이나 다름없는 거리다. 둘 다 뛰어난 경공실력을 지닌 고수들이기에 현첨검제가 소연의 상태를 감안하여 쉬어 가며 천천히 달린다고 해도 한 시진 반이면 능히 도착하고도 남았다. 더군다나 현천검제의 배려 덕분에 그녀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져, 지금은 과거의 부상을 입기 전 몸상태로 거의 회복되었을 정도이다. "정말 아름다워요."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기에 화산은 순백의 눈에 덮여 단ㅇ한 자태는 드러내고 있었다. 옛 선인들이 화산을 중원 5대 명산에 넣은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수려한 모습이다. 소연이 화산의 절경에 탄성을 내지르자 현천검제는 씁스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산이 깊고 물이 맑기에 예로부터 도가의 성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었지. 이제는 그것도..." "예? 그게 무슨...?" 괜히 말을 꺼내 봐야 화산 멸문에 마교가 개입되었고, 결국 이곳을 잿더미로 만든 당사자가 소연의 아버지임을 밝혀야 했기에 현천검제는 뒷말을 슬쩍 얼버무렸다. "아니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사부님의 묘소가 있지." 그제서야 소연은 현천검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화산의 풍경을 보면서도 왜 서글픈 표정을 짓는지도. 하지만 그건 소연의 착각이었다. 지금까지 현천검제는 소연에게 자신이 화산파 출신이을 숨겼다. 그렇기에 소연으로서는 그가 바부님의 묘소를 찾기 위해 화산을 오르고 싶어 한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천검제가 사부의 묘가 화산에 있다고 얘기하는 순간, 소연은 그가 혹시 화산파 출신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문득 했다. 현첨검제 같은 위대한 검객을 키우려면 화산파 정도는 외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소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사람이 마교에 몸담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리고 묘소를 보는 순간 소연은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현천검제가 안내해 준 사부의 묘는 별이 잘 드는 아담한 곳에 위치하고는 있었지만 너무나도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홀로 자지 잡고 잇는 이 무덤이 화산파 제자의 것일 리 없다. "인사드리거라. 사형과 내개 검술을 가르쳐 주신 유백 사부님이시다." "소인이 사조님을 뵈옵니다." 예를 다해 인사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아버지의 사숙을 가르치셨다면 필히 마교의 인물일 텐데 왜 정도무림의 성지 중 하나인 이곳 화산에서 쓸쓸하게 홀로 잠들어 계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화산에 비무를 청하러 왔다가 패해서 객사한 다음 이곳에 묻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소연은 감히 그 의문을 현천검제에게 묻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부님과의 추억을 나지막이 들려주는 현천검제의 표정이 너무나도 어두웠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얘기하고 있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유백 사부의 묘소를 떠나 이런저런 얘기를 해 주며 산길을 걷던 현천검제가 뭔가에 놀라기라도 한듯 갑자기 멈워섰다. "무슨 일이세요?" 소연으로서는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전혀 이상한 점을 찾을수가 없었다. 누군가 매복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멀리 고색연한 도관들이 들어서 있을 뿐인데 현천검제가 왜이리 놀란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하지만 소연의 예상과는 달리 현천검제는 바로 그 도관들 때문에 놀라고 있었다. 그는 사형이 화산파를 멸문시킬때 건물들을 몽땅 다 불살라 버렸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잇엇다. 문파 간의 접전이 벌어졌을 때 상대 문파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깨끗이 멀이 버리는 데는 그 방법이 최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형은 건물에 절혀 손대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불태웠는도 모르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저 건물들은 무사한 듯 보였다. 수십년에 걸쳐 봐 왔던 정든 건물들을 향해 현천검제는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소연의 영문도 모르고 뒤 따랐다. 길게 늘어선 늪직한 담장을 뛰어넘자 수많은 도관들이 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이었다. 현천검제가 떨리는 눈으로 아무리 둘러봐도 불에 탄 흔적이 있는 건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때 갑자기 어린 소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오신 시주들이신지 모르오나 본관은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생존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현천검제에게 그 목소리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는 목이 부러질까 의심스러운 정보로 재빨리 그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열두세 살 정도 되었을까? 어린 도사 하나가 헐렁한 도복을 펄럭이며 이쪽으로 다가오 고 있는데 보였다. 화산파 내에는 워낙 많은 무도들이 있었기에 그 어린 도사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현천검제에게 있어 어린 도사가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화산파 제자가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랍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아, 살아 있었구나........' 현첨겅제의 눈에 희뿌연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죄송하지만 본관은 외인을 받지 않습니다. 치성을 드리러 오셨다면 산 아래쪽에 있는..." 이런 도사의 말에 현진검제의 말에 막혔다. "네 사부는 누구냐? 사부는 살아 계시냐?" 어린 도사는 예상회의 질문에 난처한 듯 그 커다란 눈을 굴리며 현천검제의 눈짓을 잠시 살폈다. 지금껏 이런 식으로 물어온 시주가 없었기에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자에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현천검제의 모습에 자파에 악의가 있어 온 삶은 아니리라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사부님은 이번 난에 입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누구에게...." "허억!" 갑자기 들려온 경악성에 현천검제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어떤 도사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충수한 인상의 도사가 두 눈을 부릅뜨고 마치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굳어 있었다. 중년 도사는 바로 대사형이 아끼던 수제자 노궁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현천검제는 지금까지 자신이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소수이기는 했지만 화산파도 다른 9파1방에 소속된 문파들처럼 무림맹에 파견해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현천검제의 몸이 아르티어스의 도움으로 정상적인 ㅅ아태로 회복 되넋도 멀나 전의 일이다. 화산파의 멸문과 믿었던 사형제들의 배신. 수십 년에 걸쳐 공들여 키웠던 제자들의 죽음. 거기에다가 배신자들이 자신에게 가한 악독하기 그지없는 선체적 제제. 아르티어스에 의해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것라고 생각했다. 괴로운 자신의 처지에 그는 화산파에 대한 작은 기억조차 떠올리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래서 지금껏 당시 무림맹에 파견 나갔떤 노궁의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헛.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구나." 벅차오르는 환희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는지 현천검제에 눈에 물기가 어리는 듯 하더니 곧 한붕울의 눈물이 또르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중년 도사는 무너지듯 엎드리며 외쳤다. 그 목소리에는 현천검제와 마찬가지로 격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노궁이 장문인을 뵈옵니다!" 그 모습에 어린 도사의 눈에 놀라움으로 화등잔만 해지더니 노궁을 따라 황급히 납죽 엎드렸다. 지금껏 이곳 화산에서 가장 큰 어른이 바로 노궁이었는데 그런 그가 이런 예를 차릴 정도의 상대라니..., 어린 도사의 눈에 현천검제는 원시천존과 맞먹는 지고한 존재로 비춰졌을 게 뻔하다. 현천검제의 축출은 화산파 내에서도 극소수만이 관여하여 매우 비밀스럽게 이루어졌었다. 그리고 그 통보를 받은 무림맹의 수뇌부에서도 그 사실을 외부에 밝히 않았다. 정도무림의 치부를 대놓고 떠들 수가 없었떤 것이다. 그렇기에 노궁은 지금까지도 현천검제를 장문인으로 알고 있었다. 어린 도사의 마찬가지로 노궁의 말과 행동에 깜짝 놀라기는 소연 역시 똑같았다. 아니, 당혹스러운 감정은 더했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현실이 너무나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마교 교주의 사제인 현천검제가 어찌 화산파의 장문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아무 내색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두사람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만큼 두 사람의 표정은 너무도 격동적이었고 슬펐기 때문이다. 노궁이 고개를 들며 울먹이듯 말했다. "장문 어르신, 정녕 돌아가신 줄만 알았습니다." "허허. 선재, 선재로고." 현천검제 역시 감정이 복받치는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선재라는 말만 되뇌었다. 마교와 달리 무림맹은 9파1방, 5대세가의 연합체였기에 맹주의 권한은 마교 교주만큼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맹주를 배출하지 못한 다른 문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권한이 커진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세력 약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각 문파들은 맹주의 권한을 약하시키는 여러가지 조항들을 만들었고, 그중 가장 갈역한 족쇄가 바로 무림맹은 자체적으로 고수를 키울 수 없다는 조항이었다. 그 대신 보족한 힘의 공백은 각 문파에서 고수드을 파견하는 형식으로 채워졌다. 무림맹에 5천에 달하는 쟁쟁한 고수들이 있긴 했지만, 맹주의 독단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고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맹주를 배출한 문파의 동문제자들이야 쉽게 울직일 수 있겠지만, 그 외의 인원들은 장로회의를 통해 각 문파의 지지를 얻어 낼 후에야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무림맹에 파견된 각 문파의 고수들이 먹고 마시고, 무기를 정비하는 등 생활하기 위해 들어가는 돈은 전액 자비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문파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뛰언 고수를 맹에 파견하는 것은 자신들의 발언권을 확대하려는 의도였다. 그것도 다 맹주의 힘이 약하기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맹주의 힘이 약한 이상 맹에 많은 무력을 파견해 놓은 쪽이 조금이라도 더 발어권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더군다나 무림맹에서는 보다 많은 무사들을 확보하기 위해 맹의 일에 몰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는 문파들의 경우 무림맹의 장로직까지 줬다. 물론 맹의 일에 열성적이 않은 문파들의 경우, 아무리 덩치가 크다 할지 라드 장로직을 주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화산파다. 화산파는 검으로 이름 높은 문파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림맹의 장로직을 얻어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었던 현천검제는 다른 문파들로부터 욕이나 안들을 정도의 최소 인원만을 맹에 파견했기 때문이다. 스 수는 겨우 1백명, 그것도 뛰어난 실력을 지닌 1류고수도 아니었다. 수련에만 매진해 온 문도들에게 잠시 세살 구경이나 하며, 다른 문파의 인재들을 사귀라는 인미에서 파견 했던 것이다. 현천검제는 장문인이 된 직후 이런 인원 1백 명을 뽑아 무림맹에 보내라는 지시를 장로들의 수장인 백화 장로에게 낼렸다.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이 하겠다고 자원한 인물이 바로 공천 장로다. 해마다 수천이 너는 제자들 중 1백명을 뽑아 무림맹으로 보내는 작업이다 보니 어떻게 보면 꽤나 귀찮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을 권리욕이 강한 공천 장로가 떠맡은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무림을 위해 피 흘러 싸우러 가는게 아니다. 넓은 세상 구경과 함께 쟁쟁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어떻게 보면 1년 동안 근사한 휴가를 받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인사권을 쥔 공천장로는 막강한 권력을 쥔 거나 다름 없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뽑은 이원들을 웬수같은 현천검제에게 그가 보고했을 리도 없다. 괜히 보고해 봐야 그 사람들은 뽑은 이유등의 시시콜콜한 내용으로 골머리를 썩을 게 뻔하니 아예 보고 자체를 생략해 버린 것이다. 그런식으로 오랜세월 이어지다 보니 화산의 문도 1백 명이 무림맹에 파견나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현천검제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화산에는 맹에서 돌아온 1백 명과, 이런저런 이유로 그 당시 문을 떠나 있었기에 화를 피할 수 있었던 34명을 더해 총 134명의 문도들이 남아 있었다. 너무나도 오래만에 만난 둘이었기에 서로 할 말도 많았다. 현천검제가 뒤에 서 있는 소연의 존재까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끝없이 이러질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대화를 중단시키는 인물이 있었다. 왠 젊은 도사 한 명이 달려오면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사숙! 드디어 찾아냈답니다." "응?" 현천검제가 고개를 돌렸을 때, 헐레벌떡 달려온 젊은 도사는 턱까지 올라온 숨을 씩씩거리며 다급히 말했다. "개방에서 연락을 왔사온데, 귀주성 개리인근에서 청류 사조님을 뵈었다는 사람이 있답니다." 청류라면 현천ㄱ머제의 사숙으로서 정확히 말한다면, 사부의 사제다. 만약 아직까지도 생존해 있는게 사실이라면 90세가 넘었을 것이다 "청류 사숙께서 살아 계시다고?" 그제서야 젊은 도사는 현천검제를 돌아봤다. 처음에는 사숙께 웬 손님이 찾아오셨나 했는데, 곧바로 그의 머릿속을 뒤흔드는 말. '청류 사숙' 이라는 명칭은 아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는 손님이 아니라 동문 선배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젊은 도사는 실례를 무릅쓰고 뚫어져라 현천검제를 바라봤고 곧이어 상대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젊은 도사는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왕적삼이 장문인을 뵈업니다." "허허. 어서 일어나거라. 그래. 청류사숙께서 살아계시다고??" "예. 개방에서 보내온 연락에 의하면 개리 인근에서 2년전에 사조님을 만났다는 사람이 있다고 ㅎ바니다. 당시 매우 정정하셨다고 나니, 어쩌면..." 아마 노궁은 은거한 전대의 선배들을 찾고 있었떤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화산파는 지금 수뇌부 고수들이 대부분 전멸당한 상태가 아닌가? 그렇기에 노궁은 화산과 연이 닿아 있거나 지금은 은퇴하여 세상을 유림하여 유유자적 살고 잇는 전대의 선배들을 찾으러 사방으로 제자를 보냈다. 물론 개방에도 사람을 보내 그 일에 협조해 줄 것을 잊지 않았다. 노궁은 기쁨에 찬 눈빛으로 현천검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장문인, 어찌해야 할까요?" "사숙께서 살아 계신다면 이곳으로 모시는 것도 좋겠지. 왕적삼, 너는 당장 사숙을 찾아가 본파가 처한 어려움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한다고 전하거라." "예. 명을 받을겠습니다." "노궁은 적삼이 제대로 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동행자를 선택 해 주고 노자도 넉넉하게 주도록 해라." 이렇게 지시를 내리던 현천검제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다급히 물었다. "참, 돈은 충분히 있는지 모르겠구나?" "예. 마교도들은 무공서나 보물같은 비교적 부피가 작은 것들은 약탈했을 뿐, 다른 것은 일체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장문인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런뒤 노궁은 현천검제에게 고개를 조아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노궁과 왕적삼이 자리를 뜬 후 지금껏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서있던 소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숙께서 화산파 장문이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허허, 노부는 유백 사부님과의 인연으로 괴팍하지만 멋있는 사형과 자네같은 아름다우면서도 현숙한 사질을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네." "과, 과찬이십니다. 사숙." 감회에 젖은 눈으로 도관을 바라보던 현천검제의 입에서 소연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싶은 말이 흘러나왔다. "노부의 사문을 이렇게 만드셨지만 그래도 나는 사형과의 인연을 원망하지는 않네. 왜냐하면 그분의 행동에는 언제나 인과율에 따른 명확한 선이 있기 때문이지." "인과율이라니요?" 현천검재는 대답을 하지 않고 허허롭게 웃으며 계속 도관들을 바라보았다. 오랜세월 보수하며 관리해 온 고색찬연한 도관들을 말이다. 적이라 생각되면 풀 한 포기 남기자 ㅇ낳고 초토화를 시켰던 지금까지의 마교의 행동으로 봤을 때 도관이 이렇게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ㅎ사형의 배려였으리라.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기만 하던 사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사형께서는 못난 내게 너무나도 과분하신 분일세.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달리 정도 많으신 분이고 말이야." 잣니을 바라보는 소연에게 현천검제는 그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을 음해하긴 했지만 죽은 제자들은 명문정파ㅇ 화산의 제자들이다. 이미 그들이 모두 죽은 이마당에 그들의 치부를 들춰서 무엇 하겠는가. 그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현천검제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떤 것이다. 화산파가 명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현천검제는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물론 사형의 배려는 가슴이 메이도록 감격스러웠지만 어쨌든 자신은 화산파의 장문인이다. 앞으로의 행보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했다. 화산파의 장문인으로 되돌아온 이상, 오랜 세월 정파의 한 기둥을 담당해온 화산이 악의 무리라는 마교의 손을 대놓고 들어 주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사형에게 검을 겨누고 싶지도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현천검제는 한굼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겠군. 이번 일을 계기로 화산은 다시 태어나게 될 게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연의 질문에 현천검제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코 미소를 지으며 할 소리는 아니었다. "봉문을 할 것일세. 10년이든 20년이든 혼탁해진 화산의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사형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말이야" "그, 그게 무슨...?" "허허, 무량수불." 결심을 굳히고 나자 마음이 평온해진 듯 현천검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도호를 외웠다. 바람이 그의 수염을 살랑이며 지나갔다. 따스한 햇볕이 내려쬐는 도관은 세사와는 동떨어진 듯 마냥 평화롭게만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요란한 종소리가 정적을 깼다. 주위에 있는 새들도 놀랐는지 한순ㄱ나에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노궁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장검이 들려 있었고, 그를 뒤따라 온 여러 명의 도사들도 모두 다 무장을 하고 있었다. "무슨일이냐?" 노궁은 급히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마교도들이 나타났습니다." "마교도가?" "예. 장문인. 무시무시한 고수들을 10여 명씩이나 보낸 걸 보면, 아예 여기를 끝장낼 생각인 모양입니다." 그 말에 현천검제와 소연은 아차 할 수밖에 ㅇ벗었다. 노궁이 말하는 것을 바로 여문기가 이끌고 있는 호법원의 고수들일 것이다. 순간 현천검제는 녹우에게 마교의 고수들이 왜 이곳 화산에 왔는지 이야기를 해 줄까 하다 곧 그 생각을 접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 사실이 밖으로 새 나간다면 소연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나 화산파에도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현천검제는 중후한 어조로 제자들을 꾸짖었다. "뭘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 것이냐? 너희들은 대화산파의 제자들이다. 그런 너희들이 마교도들이 두려워 우와좌왕한다면, 지금 까지 협의를 행하기 위해 수많응 악도들과 싸우다 산화하신 선대의 조사님들께 면목이 서겠느냐?" 현천검제의 질책에 모두들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그들이 설마 극마급에 이르는 고수들이겠느냐? 저들을 대적하는 데는 나 혼자만으로도 족하니 너희들은 안심하고 하던 일에나 전념하도록 하거라." "존명!" 그제서야 자신들의 장문인이 화경급의 고수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모두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셨다. 하지만 장문인 혼자 마교도들과 대적하겠다는 말에 제자들은 도과능로 되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현천검제는 엄한 어조로 어서 도관으로 돌아가 일을 하되 항시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다시 명열을 내렸다. 현천검제는 머뭇거리면서도 자신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는 노궁을 불러세웠다. "궁아, 잠깐 애기할 것이 있구나." "하명하십시오. 장문인." 다른 문하제자들이 모두 도관으로 돌아간 후에야 현천검제는 노궁에게 입을 열었다. "노부는 마교도들을 처리한 뒤 이 처자를 양양성까지 바래댜 주고 돌아오마." "예? 하지만 어찌 자운 혼자서 저 흉악한 마교도들을...." "허허. 그건 노부에게 따로 복안이 있으니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설마 노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현체검제의 말에 노궁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어찌 감히 하늘같은 장문인의 실력을 의심하겠는가?" "아, 아니옵니다. 제자, 장문인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현천검제는 노궁에게 자신과 마교도들과의 관계를 이불러 말해주지 않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때론 진실이 불편할 수도 잇다. 그리고 그런 경우라면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지는 것이 가장 좋을지도 모른다. "그럼 노부가 양양성에 다녀올 때까지 네가 제자들을 잘 통솔하도록 해라." "제자 노궁. 장문 어르신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하겠나이다." - 남경 탈출 - 황군에는 총사령관이 없다. 만약 그가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황제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대신 황군은 다섯명의 중랑장들에 의해 통제된다. 그중 네명이 횡도로 통하는 동서남북의 네 방위선을 지키고, 나머지 한 명인 보준중랑장이 황궁을 수비했다. 이렇게 다섯 명에게 병력을 분산시킴으로 인해 효율성은 좀 떨어질지 모르지만 모반이 일너날 가능성만큼은 최소화해 놓은 것이다. 반란을 일으키려면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중랑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할테니 말이다. 동중랑장은 황도의 동쪽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연공공의 명령을 받자마자 즉시 휘하 병력 중 보병 4천을 동원하여 악비 대장군이 기거하던 관사를 덮쳤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신이 간발의 차이로 목표들을 놓쳤음을 알았다. 관사를 관리하는 총관의 말에 따르면, 대장군의 호위대는 21각쯤 전에 양양성으로 돌아간다며 떠났다는 거였다. "호위대의 수가 얼마나 되나?" 총관은 그들의 수가 모두 1백 기라고 알려 줬다. 모두들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었는데, 그중 활을 휴대한 자는 50여 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까지 말이다. "크흐흣, 예상외로 규모가 작군. 겨우 1백 기쯤 포획하는 건 일도 아니지." 1각(15분) 정도밖에 안 됐다면 아직 황도의 외곽 방어선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물론 그들이 말에 박차를 가해 전속력으로 도망을 친다면 얘기가 드라겠지만, 수많은 행인들로 북적거리는 관도 위를 1기도 아닌 1백 여기가 전력질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한 일이다. 더군다나 황도는 주요 통로마다 검문들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그곳들을 한하나 통과하자면 꽤나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동중랑장은 급히 전령에게 명령했다. "양양성으로 가려면 서쪽 관도를 이용할 테지. 너는 즉시 서중량장께 달려가 놈들을 포획하라 전하거라. 한시가 급하다. 빨리가라!" "옛, 장군" 전령은 서쪽 관문에 위치한 서중랑장의 사령부를 향해 말을 박차를 가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전령을 보낸 뒤 그도 서둘러 병사들을 이끌고 전령의 뒤를 따라갔다. 동중랑장은 병사들을 다그쳐 최대한 빨리 서중랑장의 사령부로 달려갔지만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애석하게도 이미 상황은 끝난 후 였다. 이끌고 간 병사들이 강행군의 여파로 땀을 비 흘리듯 흘러대며 헐떡거리고 있을 때, 동중랑장은 서중랑장의 사령부가 위치한 토성 아래쪽을 즐비하게 널려 있는 시체들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군관들 중 한 명이 그런 동중랑장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군관의 군례를 받으며, 그는 이해할 수 엇ㅂ다는 듯 질문부터 던졌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놈들은 잡았느냐?" "실패했사옵니다." "뭣이?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겨우 1백 여 기에 불과한 놈들을 잡지 못했다니 말이다!" 동중랑장의 협조공문을 지닌 전령이 서중랑장의 사령부에 도착하고, 또 서중랑장의 추포령이 떨어졌을 때쯤 악비 대장군의 호위병들은 검문소에서 통과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멈춰라! 저자들을 체로하라는 서중랑장님의 명이다!" 군관의 명령에 검문소 주위에 있던 모든 황병들이 무기를 들고, 호위병들을 몰아붙였다. 물론 그들은 호위병들이 반항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감히 오합지졸 어림군 병졸 따위가 정예 황병들에게 반항하다니, 죽으려고 환장하지 않고서야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과신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돌파하라!" 뒤에서 들려온 단 한마디 명령에 그들은 땅에 박차를 가해 앞으로 달려들며 창칼을 휘둘려 댔다. 그들 앞에 포진하고 있던 황병의 수는 그렇게 많이 않았기에, 호위병들은 순식간에 검문소를 돌파한 후 서쪽 관도 위를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 중 흑색 갑주를 걸친 자들의 무예는 정말이지 뛰어났었사옵니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황병들을 단칼에 베어 비러며..." 그 말을 동중랑장은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따. 어림군 따위가 황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다니..., 아무리 기마병들어있다고 하지만 , 겨우 1백 기밖에 되지 않는 수가 아닌가. 지나가는 코흘리개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거짓말쟁이라며 조롱당할게 뻔한, 말도 안되는 일이었따. 아직도 두려움에 젖어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는 군관의 말에 동중랑장은 급기야 노기를 터트렸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겐가? 놈들의 무공이 뛰어나다면 쇠뇌를 동원하면 되지 않나? 상자노를 동원하기에 시간이 보조했다면 신비궁만 해도 충분히..." 상자노는 초대형 쇠뇌를 말하는 것으로 , 한 번에 할 발에서 일곱 발 정도의 대형 화살을 발사한다. 1천 보를 상회하는 엄청난 사거리와 아무리 두터운 중갑주라 하더라도 단숨에 꿰뚫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갖춘 최강의 무기였다. 하지만 그걸 상전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게 가장 큰 단점이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이번처럼 순식간에 시작되고, 끝나 버린 격전에 상자노가 사용되지 못한 모양이다. "저 70여 기를 사살하기는 했습니다만, 저들의 무예가 워낙 출중한지라....." 군관의 말에 동중랑장은 콧방귀를 뀌지 않을 수 ㅇ벗었다. 아무리 남은 놈들으 ㅣ무에가 출중하다고 해고 그렇기 1백 기에서 70여기를 죽였다면 겨우 30기 정도가 남는데 그 정도 숫자로 이곳 검문소를 통과해서 도망쳤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흥! 다죽고 겨우 목숨만 건진 30기를 못잡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죄송하옵니다만 장군, 30기 라니요?" "이쪽으로 온 놈들의 수가 1백 기가 아닌가? 그중 70여기를 죽였다면..." "2백여 기가 이리로 왔사옵니다." "그게 사실인가? 본관은 분명 1백 기라고 들었는데......." "확실하옵니다." 이렇게 대답한 군관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처음 악비 대장군과 함께 이곳 검문소를 통과한 기마병들의 수가 150기 였사옵니다. 며칠 후 대장군의 호위대라면서 50기가 더 통과했었구요. 검문소 출입대장을 살펴보시면 제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좋아. 구관의 말대로 놈들의 수가 2백 기였다고 하세.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그, 그건...." 동중랑장의 질책에 군관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곳은 서쪽 방어선의 핵이 아닌가? 좌우로 수천에 달하는 병력이 포진해 있고, 2백 대가 넘는 상자노에 그 몇배나 되는 신비궁이 있지 않나!" 연이은 질책에 군관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이상 군관과 대화를 할 마음이 없어진 동중랑장은 짜증스런 어조로 외쳤다. "에잇! 집어치워라. 서중랑장께서는 어디에 계시나?" "서중랑장께서는 기마병들을 수습하여 놈들을 뒤쫓아 가셨사옵니다." "서중랑장께서 직접?" "예" 각 지대가 보유한 기마병은 5백 기였다. 모두들 엄한 훈련을 받은 강병들이었지만, 저들의 매복기습이라도 받게 된다면 위험할 가능성도 있었다. "놈들의 뭉계가 그토록 출중하다면..., 수가 겨우 130기 밖에 안된다고 하지만 서중랑께서 위험사실 수도 있겠구먼." 그렇게 말한 동중랑장은 급히 뒤에 서 있던 부장을 불렀다. "여보게." "옛" "급히 존진에 전령을 보내 기마대를 이쪽으로 보내라 이르게. 양쪽 합해 1천기라면 아무리 놈들의 무예가 뛰어나다 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지." 부장이 전령을 보내기 위해 어디론가 뛰어가자 동중랑장은 한심스런 눈빛으로 토성 아래에 즐비하게 누워 있는 시체들을 바라봤다. 기마대가 도착하자마자 동중랑장은 그들을 이끌고 적도들의 추격에 나섰다. 연공공은 이번 사건에 악비 대장군의 호위대가 수상쩍으니 그들을 추포하여 심문해 보라는 명을 내렸었다. 그런데 그들이 황군의 포위망까지 돌파하며 도주한 것을 보면 확실히 뭔가 캥기는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놈들을 반스시 추포하지 않을 수 없다. 기마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 시진에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그동안 놈들은 멀리 도망쳤을 테니 더욱 서둘러야 했다. 동중랑장은 힐끗 태양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세 시진 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세 시진 동안 아무리 말에 채찍질을 하며 내달린다고 해도 적도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젠장, 밤을 새워 추격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군." 하지만 동중랑장의 예상과는 달리 한 시진 정도 말을 달리자 서중랑장의 기마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중랑장이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선배였기에 동중랑장은 그가 있는 곳으로 말을 달려가 군례를 올렸다. 서중랑장은 군례를 받아 주며 환히 미소 지었다. "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쪽일세." 서중랑장은 멀리 떨어진 풀숲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숲의 뒤편에서 가느다란 연기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 깨달은 동중랑장은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 저놈들이 지금 제정신입니까? 감히 도망칠 생각은 안 하고 태연히 식자 준비를 하고 있다니..." 하지만 서중랑장의 반응은 달랐다. 서중랑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들의 전투력은 생각외로 강하다네. 황군 5백 기 정도는 상대도 안된다고 여긴 것일수도 있찌. 그렇지 않으면 탈출하던 도중 화살에 상한 자들이 많아 어쩔 수 없이 휴식을 취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낀 것일 수도 있고." "어쨋건 잘됐군요. 저들이 방심하고 있는 이때 치는게 좋겠습니다." "내 생각도 그러네. 만약 자네가 도착하지 않았다 해도 나는 지금쯤 공격 명령을 내렸을 걸세. 그만큼 놓치기 아까운 기회니깐 말이야." 동중랑장은 급히 부관을 호출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듯 얼마 시간이 지나지 ㅇ낳아 달려온 부관에게 그가 명령했다. "모두들 속옷을 찟어 말발굽을 감싸도록 해라." 서중랑장도 옆에서 한가지 명령을 더 내렸다. "말발굽을 다 깜싸고 난 뒤 나뭇가지들을 충분히 모아 오도록 하게." "예? 나뭇가지를 말씀이십니까?" 부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서중랑장은 씩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저들처럼 여기에다가 모닥불을 피우는 게야. 우리들도 여기서 밥을 지어 먹을 테니 안심하고 편히 쉬라고 말일세." 적의 방심을 유도한 후 일거에 들이치자는 계책이다. "호오. 그거 정말 묘책입니다." 손바닥을 탁 치면서 감탄하던 동중랑장. 하지만 그는 곧이어 아차 하는 표정으로 급히 덧붙였다. "그런데 저놈들도 그렇게 위장해 놓은 거면 어떻게 하지요?" "하하. 걱정하지 말게. 저기 저거 보이나? 반짝반짝하는거 말일세" 서중랑장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저들이 쉬고 있다는 풀숲 쪽에서 가끔 뭔가 반짝하고 빛나는 것들이 보였다. "저게 뭡니까?" "이미 정찰병들을 깔아 뒀다네. 놈들이 아직 저곳에 있다는 걸 나한테 알려주는 신호지." 칼날의 면을 이용하여 햇빛을 반사시켜 신호를 보내다니. 과연 노회한 서중랑장이 생각해 낼 만한 계책이었다. 그들은 각기 기마대를 지휘해 양쪽 방향에서 협공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출발하기에 앞서 서중랑장은 모아온 나뭇가지로 여기 저기에 모닥불을 피워 놓으라고 명령했다. 이쪽도 저들처럼 식사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말이다. 수십 개가 넘는 모닥불에서 연기가 피어로기 시작할 때, 그들은 병력을 움직였다. 병사들은 말발굽을 속옷으로 감싸 소리가 나지 않도록 막았고, 최대한 노출을 막기 위해 승마히는 대신 말을 끌고 목적한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까지도 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들이 자신들보다도 훨씬 더 실전 겅험이 많은 능구렁이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서중랑장은 그 사실을 적의 군막 근처에 도착한 후에야 눈치 챘다. 근처 구릉에서 내려다본 적의 군막 안으로 식사를 하며 쉬고 있어야 할 적도들은 보이지 않고 주인없는 모닥불만이 여기저기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헉! 그렇다면 놈들은?" 신호를 보내는 정찰병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서중랑장은 등골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것을 느꼈다. 정찰병들도 저들의 움직임을 포착했을 텐데, 왜 엉터리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던 것일까? 놈들이 어느샌가 정찰병들을 해치우고 대신 신호를 보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서중랑장의 의문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우와아!" 우렁찬 함성과 함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적도들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전원 승마하라!" "당황하지 마라!" 휘하 장수들이 여기저기서 병사들을 격려가는 외침이 들려왔지만, 그것도 곧이어 처참한 비명소리에 묻혔다. 적에게 완벽한 기습을 허용한 대가였다. 서중랑장은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연신 고함을 지르면서도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동중랑장의 기마대는 군막 건너편으로 갔다. 적도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가장 훌륭한 작전이라고 생각해서 실행한 것이었는데, 지금 그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각개 격파당할 가능성마제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서중랑장이 해야 할 일은 이곳에서 멀어지고 있는 일을 동중랑장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가 이쪽으로 제때 달려와 주기만 한다면 충분한 승산을 바라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징을 울려라!" 동시에 서중랑장의 뒤에 서 있떤 병사가 요란스럽게 징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쪽의 위급한 일을 당했다는 신호였다. "모두들 힘을 내라. 동중랑장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님을 서중랑장은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허를 찔렸기 때문이다. 더군다가 적도들은 그 한명 한명이 놀라운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이때 서중랑장의 눈에 적도를중 한 명이 칼을 막는 모습이 보였다. 그자는 자신의 무기로 상대의 공격을 막는 대신 다른 쪽 팔을 들어 비스듬히 칼을 막았는데 일견 잘려 버릴 것 같았던 그의 팔은 황병의 검격을 가볍게 튕겨 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서중랑장의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적도의 팔에 붙어 있는 막대기처럼 생긴 강철보호대를 봤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전에 저런 강철보호대로 적의 공격을 막는 자들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저 영광스러웠던 찬황흑풍단이었다. 서중랑장 역시 젊었을 때 찬황흑풍단에 들어가기 위해 지원했었던 적이 있었으므로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적도들의 행색이 찬황흑풍단과 비슷했다. 흑색 갑주와 팔을 감싸는 강철보호대. 그리고 각자의 앞에 붙어 있는 계급을 나타내는 번호표까지. 서중랑장은 적도들이 분명 찬황흑풍단과 뭔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옥영진 대장군이 참수당했을 때, 찬황흑풍단 역시 해체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흔적이 자신의 눈앞에 다시 나타날 줄이야. 서중랑장의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과거 찬황흑풍단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에 대적한 이미족들 중 살아남은 자는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서중랑장은 큰 소리로 외쳤다. "전원 후퇴하라! 후퇴!" 비명과도 같은 서중랑장의 명령에 많은 병사들이 말머리를 돌려 그의 뒤를 따랐지만, 적들과 교전에 들어간 병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코앞에서 죽기 살기로 칼부림을 나누고 있는 상대를 놔두고 등을 보인다는 것은 죽여 달라고 목을 들이미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길울어 가던 전황이 서중랑장의 후퇴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급격히 적도들 족으로 기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쳐진 황병들을 다 해치워 버린 적도들이 도망치는 서중랑장과 그 부하들을 뒤쫓아 달여왔다. 그리고 목숨을 건 추격전이 벌어졌다. 적도들을 따라잡힌 서중랑장의 부하들은 하나씩 등 뒤로 칼을 맞고 쓰러지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두두두두! 바로 그때 저 앞쪽에서 동중랑장의 기마대가 나타났다. 징소리를 듣자마자 적의 비어있는 굼낙을 가로지르며 전속력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동중랑장의 기마대는 모두들 칼과 창을 뽑아들고, 충돌에 대비한 채 전속력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서중랑장은 그제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목숨만은 건진것이다. 심적 여유를 되찾은 서중랑장은 고개를 슬며시 뒤로 돌렸다. 적도들이 아직까지도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동중ㄹ아장의 기마대가 자타나자 적도들은 뒤로 말러리를 돌려 전장을 이탈하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동중랑장의 기다매가 자신들을 지나쳐 앞으로 내달리려고 할 때, 서중ㄹ아장은 급히 그를 불러 세웠따. "무슨 일이십니까?" "더 이상의 추격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걸세." "예? 하지만....." "한순간에 4백에 가까운 병사들을 잃었네. 저들에게 거의 피해도 주지 못하고 말일세. 말을 타고 갑주를 입고 있지만 저들은 대장군의 호위병이 아니라 무림인이 확실해. 너무나도 뛰어난 실력들을 지니고 있단 말일세." 수많은 전장을 전전하며 용맹을 떨쳤던 서중랑장이다. 그런데 그런 장수가 적에게 이렇게까지 공포를 느끼다니. 동중랑장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앗다. 그러다 문득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 그렇다면 저들이 혹시 1만여 기로 금의 정예 20만을 막았다는 바로 그 흑풍대라는 말입니까?" 흑풍대......., 그러고 보니 찬황흑풍단과 이름까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서중랑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앗다. "아마도 그런 것 같군. 아니, 확실하네." "하지만 우상시 공공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네." "저는 부하들의 실력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말리지는 않겠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동중랑장은 기마대를 이끌고 흑풍대로 추정되는 적도들을 쫓아갔다. 동중랑장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적도들이 마교의 정예 흑풍대라는 것을 어렴풋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서중랑장이 그렇게까지 허무하게 깨질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분명 연공공으로부터 마교의 교주가 그의 부하들과 함께 호위대에 숨어 있으니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부하들이라는게 바로 흑풍대였따니...... 적도들이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을 알았지만 동중랑장은 절대 포기할 수가 ㅇ벗엇따. 연공공의 명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 ㅓ떤 대가를 츠리게 될지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희망은 있었다. 적의 수는 겨우 1백여 기, 오쪽은 5백 기. 5대 1의 싸움이었다. 수적우위에 있는 한, 한번 해 볼만한 싸움이었다. 동중랑장은 불안에 떨면서도 연신 말에 채찍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벗어나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 여우와 너구리 - 연공공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 없었다. 자신을 적도들에게 팔아넘긴 추린을 잡아들여 분근착골을 가해 놨지만, 그의 마음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추린을 제외한다면 자신의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연공공은 포로로 잡아들인 거지들을 심문하면 많은 정보들을 얻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의 오산이었다. 사로잡은 자들 대부분의 워낙 밑바닥에 위치한 놈들이라 아는게 거의 없었떤 탓이다. 개방도 무림의 한 축을 이루는 단체인 만큼 직브이 높은 자일 수록 무공 또한 강했다. 그런 자들을 황병들이 제압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대부분이 탈출해 버리거나 혹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처참하게 사살당했다. 그렇다 보니 분타의 상층부 인문들 중 사로잡힌 자들은 독두개처럼 극심한 부상을 당한 자들뿐이었다. 안 그래도 생사가 오락가락하여 정신이 없는 놈들을 붙잡고 강도 높은 고문을 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렸음에도 제대로 된 정보를 하나도 뽀아내지 못하자. 연공공의 명을 받고 포로를 심문하는 임문을 맡은 군관은 사색이 다 된 얼굴로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송구스럽사옵니다. 우상시 공공" "귀관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은 내 익히 알고 있따." "알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문실에 추린의 시체가 있을 게다" 연공공의 명에 따라 그동안 지도4ㄱ한 고문을 당하다 오늘 아침에야 숨이 끊어진 추린의 시체가 지하실 한편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제 그의 목숨이 끊어졌으니 그 뒤처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귀관은 추린의 시체를 깨끗이 씻고, 잘 단장하여 그의 유족들에게 전해 주거라. 다행히 개방도들의 마수에서 구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미 시기가 늦어 살릴 수는 없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알겠느냐?" "옛.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즉시 시행하도록." "옛" 군관을 내보낸 후, 연공공은 그의 뒤편에 시립하고 서 있는 환관에게 명팼다. "황사를 불러오게." "예. 공공" 환관은 재빨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웬 흑의사내와 함께 들어왔다.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있는 꾀죄죄한 몰골의 사내였는데. 그럼 ㅂ몰골에 미해서는 꽤나 값비싸 보이는 고풍스런 장검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몰골만큼이나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찾으셨습니까? 공공" "황성사에 실력 있는 고문 기술자를 좀 보내 달라고 통보해라. 이쪽에는 쓸모 있는 놈이 없다고 말이야." "존명" 황사는 황성사에게 파견된 인물이었다. 황성사와 연공공을 연결해 주는 끈이면서 감시자라고 할 수 있었다. 연공공은 이미 추린의 처리에 대해 황성사의 허락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추린이 행한 배신 행위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연공공은 그 집행권을 양도받았던 것이다. "저 군관 놈도 쓸데없이 많을 걸 알게 되었는데 살려 두는게 좋을까? 아니면....." 연공공은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방금 전 황사를 불러왔던 환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은 쓸모가 있으니 처리는 나중으로 미루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공공"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지선이라는 계집은 어떻게 하는게 좋겠나?" 지선이라는 말에 환관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자신이 제대로 알아들은 게 확실한지 확인했다. "아미파의 지선 스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본관이 아는 계집들 중 그 계집 말고 또 다른 지선이 있더나?" "지선 스님을 잡아들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길 청하옵니다. 우상사 공공."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느냐?" "예, 지금 아미파는 황궁을 방위하는 데 있어 큰 축을 담당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환관의 말에 연공공은 코웃을 쳤다. "흥! 그럼 네 말은 아미파가 겨우 그 계집 하나 때문에 황실과 척이라도 질 거라는 말이냐?" "지선 스님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속하는 잘 모르오나, 공공의 명이시라면 아미파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내놓겠지만 시기가 너무 좋지 않사옵니다. 그들은 무림에서 큰 축을 담당하는 데 문파가 아니옵니까? 그들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는 바, 지금으로서는 될 수 있다면 너무 자극하지 않는게 좋을 듯 합옵니다." 과연 그럴게 확실했다. 원래 무림인이라는 것들이 자존심 하나에 목숨을 던지는 족속들이 아닌가? 쓸데없이 자신의 분풀이 좀 한다고 척을 지기에 아미파는 아직도 꽤나 쓸모가 있었다. "그 말도 일리는 있구나." 지금 연공공은 마교 교주를 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마교가 지닌 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연공공은 아직 잘 몰랏다. 현재 연공공이 확보한 정보는 황성사가 그동한 수집해 놓은 것과 공동파나 아미파를 통해 얻은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비록 정보가 많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교라는 단체가 무림맹과 거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막강한 단체라는 것을 유추해 대는 데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마교를 치려면 무림맹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런 상황에서 계집 하나 때문에 무림매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아미파의 척을 져 봐야 좋을게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냥 이대로 넘기기에는 지선이라는 계집이 너무 꽤씸했다. 이렇게 내심 고민하고 있을 때 환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공공께서 아직까지도 지선 스님의 처리를 결정하지 못하고 게신 것은 그녀가 쓸모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공공께서 내리신 결정은 언제나 틀림이 없었습니다. 뭔가 걸리는 게 있다면, 그게 해소될 때까지 지선 스님의 처리는 뒤로 미루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연공공은 마음을 굳혔다. 지금은 악독하기 짝이 없던 그 마교 교주라는 놈을 먼저 잡아야 할 때다. 겨우 계집 하나 때문에 그놈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계집은 언제든 잡아들여 분풀이를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네 말이 옳구나. 아무래도 몸이 불편하다 보니 너무 마음이 앞서간 모양이야. 좋은 지적을 해 주었다.: 연공공의 말에 환관은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소인의 말이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공공." 동중랑장은 연공공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황도로 돌아왔다. 그거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연공공은 동중랑장의 빠른 일 처리 속도에 몹시 흡족해 했지만, 곧이어 그가 직접 찾아와 자신에게 사죄를 올리자 그의 눈썹은 분노로 인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뭣이? 내 그대를 그리 보지 않았거늘......"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우상시 공공." 그러면서 동중랑장은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단 한 번의 충돌로 서중랑장의 기마대가 괴멸당했다. 그것도 1백 기의 적도들을 상대로 말이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추격 했찌만, 저녁이 다 되어 갑자기 나타난 대규모의 기마대 앞에서는 추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자들은 거기에서 동료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덕도들의 수는 1천 기가 넘었습니다. 도저히 소장이 거느리고 간 기마대로는 상대를 할 수가....." "그래서 그냥 되돌아왔다는 말인가?" 동중랑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한마디 비꼬아 주려던 연공공은 마지막 순간에 생각을 바꿨따. 아직 동중랑장은 이용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저들의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네에게 일을 부탁한 내 잘못이니 말이야."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허허, 자네의 잘못이 아니라는데도 그러는구먼, 자네의 보고대로라면 상대는 겨우 1만 기로 20만 금군과 대적한 마교의 최정예가 아닌가? 괜한 만용 부리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게 나로서는 더욱 고맙구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소장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공" 연공공은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환광에게로 고개를 돌려 슬쩍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환관은 자그마한 홤을 하나 꺼내 연공공에게 건네줬다. 공공은 그걸 동중랑장에게 건네주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내 일을 열심히 수행해 준 작은 보답일세. 부하들하고 술이나 한잔 나누며 피로를 씻도록 하게나." "감사합니다. 공공"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환태를 해 주자 동중랑장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동중랑장은 박사를 벗어나며 연공공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걸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웃는 얼굴로 동중랑장을 돌려보냈지만 연공공의 속은 분노로 불타으로그 있었다. 놈에게 완벽하게 당한 것이다. 놈이 그토록 오만방자하게 까분 것도 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황도외곽에 1천기에 달하는 정예기마대를 숨겨 놓고 있었다니....... "으드드득!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황병을 끌고가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돌아오다니. 그나저나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이때 기가 막힌 계책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따.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연공공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환관에게 명령했다. "추밀사와 독대를 할 수 있도록 약속을 잡도록 해라. 최대한 빨리." 환관은 잠시 멈칫하더니 급히 되물었다. "... 류대청 말씁니십니까?" "류대청 말고 또 다른 추밀사가 있던가?" "류대청은 지금 금부에 투옥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연공공은 잠시 후 정신을 차렸다. "뭣이? 어찌 그런 중요한 일을 내가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도중에 여러 일들이 겹쳐 미쳐 말쓸드릴 기회가....." 잠시 이리저리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연공공은 씨익 웃으며 물었다. 마치 류태청이 투옥된 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듯. "누가 류태정을 가뒀다고 하더냐?" "참지정사 대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참지정사? 허면, 참지정사와 독대를 할 수 있도록 약속을 잡아주게." "예. 공공." 환관이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가자 연공공은 허공을 응시하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교주 이놈! 내 반드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릴 것이다. 자시만 기다리거라. 크크크크." 아무리 조정에서 크나큰 권세를 누리고 있는 참지정사 섭평이라 해도, 황실의 숨은 실세인 우상시 연공공을 홀대할 수는 없었다. 연공공의 독대 요청을 받은 섭평은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왔다. 기밀이 확실히 보장되는 밀실도 아니고, 병영 안에서 연공공을 만나야 했기에 섭평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연공공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측근들이 철저하게 주위를 경계하고 있으니 참지정사께서는 마음을 편히 하셔도 무방합니다." 섭평은 심중을 들킨 것 같아 찔끔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느긋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험험. 그런데 무슨 일로 공공께서 저를 찾으셨는지....?" "이번에 참지정사께서 큰 분란을 일으켰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분란이라니, 무슨 그런 말씀을.? 혹 황상께 허락을 받지도 않고 류태청을 수감한 일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 일이라면..." 섭평의 말을 듣던 연곡옥ㅇ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아아, 그일이 아니라 악비를 없앤 걸 말하는 겁니다." 그 말에 섭평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마치 자신이 큰 욕이라도 들었다는 듯 정색을 하며 따지고 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연공공, 악비 대장군을 시해한 자는 류태청으로, 추밀원의 권위를 세우고 군별을 타파하기 위해 행한 일이라는 자백까지 받아 냈소.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ㅇ황상께도 고한 일인데 그런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시다니요." "참지정사, 본관은 바보 멍청이가 아닙니다. 이미 황성사에서 뒷조사가 끝난 일인데 계속 아니라고 우기신다면...." 황성사라면 황실의 첩보, 감찰 기관이다. 그제서야 참지정사는 눈앞의 이 늙은 내시가 황성사의 간부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감히 황성사를 입에 담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늙은 내시가 이렇게까지 말을 할 정도라면 이미 황성사에서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들은 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가 자신에게 왜 이런 말을 꺼냈냐는 것이다. 오랜 세월 황궁에서 치열한 암두와 음모를 경험하며 이 자리에까지 올라온 참지정사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더 이상 난 모르는 일이라고 우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노회한 참지정사는 정면으로 부딪치자고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마음을 먹게 된 이유는 이 늙은 내기 놈이 뭔가 자신에게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을 누치 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정체를 누설해 가며 접근해 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섭평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따. "뭘 원하는 게요?" 그제서야 연공공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었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이제는 자신의 입맛대로 천천히 요리를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연공공의 입에서 참지정사 섭평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요구 사항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양양성에 대해서...." - 죽어도 우겨야 할 일 - 개방의 남경 분타는 황병들의 기습으로 처참하게 박살이 났다. 물론 개방도들이 다른 거대방파들의 제자들과 비교했을 때 무공에서 뒤떨어지기도 했지만, 남경 분타를 치기 위해 동원된 황병들의 수가 워낙 많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남경 분타에서는 탈출하는 연공공을 추격하느라 고수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어 전력을 한 군데로 집중시키지도 못했따. 무엇보다 분타의 거지들을 총괄 지휘해야 할 분타주 독두개가 중상을 입어 드러누워 버린 상태다 보니, 변변한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묵사발이 나버렸던 것이다. 남경 분타는 파괴되었지만 의외로 탈출에 성공한 거지들의 수는 많았다. 무공이 뛰어난 거지들의 경우 연공공을 추격하느라 대부분 분타를 떠나 있었기에 직접적으로 전화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들은 남경 분타가 황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재빨리 남경을 탈출했다. 그 무리들 중 소팔개가 끼어 있었다. 소팔개는 탈출에 성공하자마자 그 사실을 총타에 알렸다. 소팔개의 긴급 보고를 받은 개방의 수뇌부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경 분타가 황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인데, 소팔개가 보고한 사건의 전말은 그야말로 개방 수뇌부를 경기 들게 만들기에 족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박칵 뒤집힌 개방의 수뇌부는 긴급 장로회의를 열어 이떻게 이번 사건을 처리해야 할지 치열한 설전을 버이기 시작했다. "아니, 독두개 그놈은 무슨 일 처리를 그따위로 해서 본방을 이토록 난처하게 만든단 말입니까?" "허허. 이보시오. 그게 어찌 독두개 혼자만의 잘못이겠소? 다 본방의 힘이 모자란 탓이지." "빌어먹을! 도대체 그놈은 본방과 무슨 웬수가 졌다고 일을 이렇게 꼬아 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놈이라건 바로 천인공노할 마교 교주를 칭하는 말이었다. "글쎄 말이오. 아니, 그때 놈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요? 이번 일에 대해 확실히 책음을 져야 할게요" "흥! 다른 사람 탓하지 마시오. 당신도 그일에 찬성하지 않았소?" "뭐야? 증거 있어?" 사안이 사안인 만큼 모두들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봐 서로 책임을 미루느라 회의장은 마치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방주의 인상이 어느 순간 확 일그러졌다. 대책을 수립하기보다는 서로 책임을 미루는 장로들의 모습에 울화가 치민 것이다. "자자, 모두들 조용히 하게!" 방주의 명령에 장로들은 언쟁을 멈췄지만, 모두들 하나같이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방주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울화가 치민다고 지금은 질책할 때가 아니다. 최대한 머리를 모아 대책을 수립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이미 엎지러진 물일세. 흔적 없이 주워담는다는 것은 불가능 하지. 지금 자네들이 해야 할 최우선적인 일은 어떻게 하면 이번일을 가급적 모양ㅐ 좋게 얼버무릴 수 있느냐 하는 걸세." 그 말에 평소 개방의 지낭임을 자처하던 비육걸개 장로가 비대한 살집에 감춰진 작은 눈을 교활하게 굴리며 의견을 개진했다. "소팔개의 보고에 따르면,ㅏ 이번 일에는 독두개가 가장 깊게 관여했다고 합니다. 그가 독두개의 지시를 받아 다른 방도들이 모르도록 조심해서 처리했다고 하니, 모든 죄를 독두개에게 뒤집어 씌우면 될 거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소." 사사건건 자신의 의견에 토를 달아 대는 취선개 장로에게 비육걸개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쏘아보며 빈정거렸다. "그게 뭐요?" "이미 남경 분타의 많은 제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이오" "체포된 자들 중 3결 이상의 제자는 몇 되지도 않소. 2결 이하는 아는 것도 별로 없으니 놈들에게 고문을 당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거요." 비육걸개는 두터운 살점만큼이나 두꺼운 얼굴 가죽을 자랑하듯 뻔뻔스레 말했다. 비록 한솥밥을 먹던 식구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그냥 버리자는 의견이었다. 비정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개방이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허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급이 낮을수록 놈들의 고문을 참지 못하고 실토할 가능성이 그만큼 크지 않소?" 취선개 장로의 대꾸에 비육걸개는 답답하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방금 전에도 말했잖아! 아는 게 있어야 실토하지" "닥치고, 내 말 좀 들어 봐. 물론 그놈들은 아는 게 별로 없지. 하지만 '교주가 정보 제공을 요청해 올 때, 전폭적인 협조를 해주라'는 지시는 2결제자 이상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게 문제라는 거요. 고문을 참지 못한 놈들이 그 사실에 대해 나불거리면 본방은 끝장이지. 그말을 듣고 본방과 교주 사이를 오해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소? 이제 내 말의 요지를 이해하겠소?" 모두들 공감하는 모양인지 장로들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젠 독두개만의 문제가 아니다. 황실과 척을 진것이 분명한 교주와 개방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오해가 일어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크흠...." "그렇다면 빨리 사람을 보내 그놈들을 구출하든가, 그도 여의치 않으면 죽여서 입막음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오?" 또다시 취선개 장로가 톡 쏘자. 울컥한 비육걸개 장로는 자신이 직접 나거겠다고 외치려다가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두 명이라면 몰라도 포로로 잡힌 자는 1백 명이 훨씬 넘는다. 그들 모두를 구출하는 것도 어렵지만 죽여서 입막음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5만이나 되는 황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황도에서 일을 벌여야 하는 데다, 자칫 이 일에 개방의 상층부가 개입되었다는 조그마한 심증이라도 안겨 줬다가는 개방은 그야말로 파명당할 가능성 마저 안고 있었다. 비육걸개 장로는 살집에 묻힌 자그마한 눈동자를 연신 뒤룩거리더니 퉁명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마치 그럼 넌 뭔가 방도가 있느냐는 듯한 어투였다. "젠장.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취선개 장로는 짐칫 목소리를 낮춰 차분히 설명했다. "일단 이번 일을 독두개의 단독범행으로 몰아가는 거요. 그리고 나머지 정보 제공의 건은 이번에 맹과 마교 간의 동맹이 체결된 만큼 동맹의 의리상 마교 쪽에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해 주라는 명령이었다고 밀어부티는거요. 동.맹.의.의.리 말이오. 알겠소?" 취선개 장로는 특히 '동맹의 의리'라는 말에 힘을 줬다. "흠, 현재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겠구려." 나름대로 취선개 장로의 의견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는지 방주는 장로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또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은 없소?" 다른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취선개 장로는 자신의 의견을 보충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지금까지 논의된 사항에 대해서는 각 분타들에 재시를 하달해 증언에 함에 있어 한 치의 어긋남이 없도록 조치해야 할겁니다. 그 외에 다른 일들은 본방에 유리한 방향으로 즉흥적으로 처리하거나 아니면 그건 비밀이니 상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증언해 줄 수 있다고 둘러대는 겁니다. 그런 다음 즉시 이쪽으로 보고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방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의 뜻을 표했다. "취선개 장로의 의견대로 하는 게 좋겠소." 어느 정도 대책이 수립되었다고 느꼈는지 비육걸개 장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무림맹에 파견 나가 있는 공수개 장로에게 연락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공수개 장로도 뭘 좀 알고 있어야 변명이라도 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방주는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경 분타의 참사에 대한 대책을 조금씩 틀이 잡혀 가는 것 같았지만, 과연 이런 변명이 먹힐지는 아직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각 분타에 지시 사항을 하다하러 밖으로 분주하게 나가는 장로들을 바로보는 방주의 안색은 침중하기 그지 없었다. 개방의 수뇌부가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공수개 장로는 맹주쪽에서 자신을 호출하기 전에 이번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받아 볼 수 있었다. 그는 즉시 맹주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미리 선수를 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공수개 장로가 맹주의 칩무실에 들어섰을 때, 맹주인 태극검황 청령진은 그의 측근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토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맹주는 굳은 표정으로 공수개 장로의 인사를 받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공 장로가 노부를 보자고 한 게, 혹 남경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오?" 갑자스런 맹주의 질문에 공수개 장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따. "그, 그렇습니다. 맹주님." "조금 전에 추밀원에서 항의문이 도착했고. 남경에서 마교 교주가 혈겁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지만 거기에 개방의 남경 분타가 관여했다고 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소리요?" 공수개 장로는 재빨리 총타에서 보내온 대책 방법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총타에서는 이번 일의 책임을 모두 다 독두개 혼자의 잘못으로 밀어붙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노련한 공수개 장로는 처음부터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본방에서 올라온 보고서에 따르면 유감스럽게도 그게 대부분 사실인 모양이빈다." "허어. 그럴 수가 . 노부는 설마 하고 있었거늘..." 맹주가 항탄하고 있을 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감찰부주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자세히 설명 좀 해 보시오. 어째서 마교 교주가 일으킨 혈겁에 남경 분타가 끼어든 것인지 말이오. 혹 개방 수뇌부의 지시가 있었던 거요?" 공수개 장로는 펄쩍 뛰며 무인했다.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남경 분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조사하기 위해 총타에서 대대적으로 인력을 동원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 일에 장로급 다섯명과 4결제자 5백명이 동원됐소이다. 남경에서 탈출한 모든 거지들을 조사하고 있으며, 그들 간에 대질 심문까지 벌이고 있단 말이오. 만약 총타에서 그런 일을 지시한 것이라면, 구채여 그리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 개방의 호들갑이 연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좌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고 자신의 변명이 썩 먹혀 들어가는 것 같이 않자. 공수개 장로는 재빨리 마을 이었다. "황군은 남경 분타를 괴멸시키며 분타주 독두개를 포함해 1백명이 넘는 방도들을 잡아갔소이다. 그쪽에서도 나름대로 조사를 벌일 텐데. 우리쪽에서 제식구 감싸기 식의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놔 봐야 헛게 아니겠소이까?" 당연한 말이었기에 감찰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다면 개방에서 조사한 바를 들어 봅시다." 공수개 장로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총타에서 치밀하게 조사한 결과, 나경 분타주인 독두개가 마교에 포헙되어 이번 사건을 일으켰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합니다. 부분타주인 소팔개를 비롯해서 그곳에서 탈출해 온 모든 방도들을 철저하게 조사해 봤지만, 독두개 외에 다른 자들이 마교도들과 작당한 징후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답니다. 거의 대부분의 방도들이 교주가 남경에 나타났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그건 확실할 겁니다. 그나저나 독두개, 그 빌어먹을 배반자 때문에 남경 분타의 모든 방도들이 오욕을 뒤집어쓰고 황군에 체포되었으니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믿어도 되겠소?" "맹주님, 오랜 세월 동안 저희 개방은 협의의 최선봉에 섰던 문파입니다. 비록 독두개와 같은 추잡한 배신자로 인해 이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개방도들이 그놈과 같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분타주가 마교에 포섭된 이상, 그 밑에 있는 제자들이야 분타주의 명령에 따라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공수개 장로는 짐짓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독두개가 한 일이라고 해 봐야 황도에서 입수한 정보들을 취합하여 마교에 넘겨주거나 그들이 일을 벌일 창고를 빌려 준 정도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창고 안에 술이라든지 뭐 그런것들이 있다며 일반 방도들에게는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려놓고 밖에 경비까지 세워 놨다고 하니. 그 속에서 교주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다른 방도들이 알 수가 없었을 게 아닙니까?"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 일쯤이야 방도들에게 아무런 읫미도 받지 않고 독두개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가벼운 일이라고 자신들도 느꼈으니까. "만약 방도들로 하여금 무장을 갖춘 뒤 황궁으로 돌격하라든지 아니면 대신들 중 몇몇을 암살하라든지 하는 그런 망령된 명영을 독두개가 내렸었다면 곧바로 소팔개 등 간부들이 놈의 변심을 눈치 챘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난 적도 없었습니다. 충분히 말이 되는 설명이었기에 맹주와 그 측근들은 공수개 장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허, 정말 안타까운 일이오. 어찌 그 간악한 마교의 꼬임에 빠져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안타까운 듯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맹주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게 분명했다. 무림맹으로서도 이번 일에 대해 빠져 나갈 명분이 필요했었고, 그걸 공수개 장로가 제공해 준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정파 최고의 정보 단체인 개방을 못 믿게 되는 최악의 사태로 발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공수개 장로는 자신의 말이 완벽하게 먹혀들었다고 판단했다. 이제는 마무리만 하면 끝이다. 공수개 장로는 짐짓 허심탄회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저도 총타로부터 보고서만 받은 상황이기에 정확한 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추밀원과 형부에 알아 보시면 제가 한 말이 사실인지 바로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황군들이 남경분타를 기습하여 체포한 인물이 독두개 혼자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보나마나 다른 거지들은 모두 다 심문할 테고, 그럼 이번 일이 독두개 혼자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입김이 가했졌던 것인지 금방 알아낼 수 있겠지요." 맹주는 처음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로 공수개 장로르 바라보았다. "그건 공수개 장로의 말씀이 옳은 듯하구려. 그렇다면 공식적으로 개방이 이번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믿어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맹주님." "좋소. 그럼, 이번 사건을 일으킨 마교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의논해 보기로 합시다. 도대체 교주의 의도가 뭔 것 같소? 이런 일을 벌여서 뭘 얻을 수 있기에 이토록 터무니 없는 짓을 저지른단 말이오?" 공수개 장로는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소팔개의 증언에 따르면 교주는 아마도 실종된 악비 대장군을 찾고 있었던 듯합니다. 비록 다소 무리한 방법을 동원하긴...." 하지만 공수개 장로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분노한 감찰부주가 더 이상 들을 가치고 없다는 ㅇ듯 소리쳤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는 여기저기서 보내온 항의문들이 쥐어져 있었다. "다소 무리라니요? 이것들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교주는 남경에 도착한 첫날 관도를 검문 중인 황병들을 구타했을 뿐 아니라, 우상시와 추밀사 그리고 소부경 같은 고위관리들을 차례로 납치해서 고문을 가했다고 합니다. 거군다나 소부경은 그 후 유증으로 사망했을 정도로 지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공동파, 아미파와 충돌을 이르켜 수십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발생시켰다고 쓰여 있습니다. 교주가 남경에서 한 행위는 맹과 황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습니다." 감찰부주의 옆에 앉아 있던 청호진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만약 대장군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즉시 맹에 알려 황실에 파견 나가 잇는 공동파와 아미파에 협조를 구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결코 이런 유혈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막아서는 아미파와 공동파의 제자들에게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살수를 써 수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이 과연 동맹을 맺은 맹에 할 행동입니까? 더군다나 그 당시 교주는 야행복에 복면까지 착용했다고 합니다. 그걸 보면 그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싶어 했음이 분명했고, 그 말은 곧 그의 행동이 결코 떳떳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맹주는 침증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추론이오." 터지기 시작한 봇물인 듯 청호진인의 입에서는 계속해서마교에 대한 규탄이 흘러나왔다. 오랑캐의 침입으로 일시지간 동맹을 맺고 있지만 두 거대세력의 내부에는 이렇듯 불신이 팽패해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얼마 전 교주는 팽선을 비롯한 하북팽가의 정예들과 난투극을 벌였습니다. 다행히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마 팽선을 비롯해서 수많은 팽가의 고수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지요. 그걸 가만히 참고 넘기니까 이번에는 이예 이렇게 간 큰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말에 감찰부주 역시 동감의 뜻을 표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언제까지나 교주의 횡포를 눈감아 줄 수는 없습니다. 추밀원이 맹에 엄중히 항의해 온 것뿐만 아니라..., 공동파와 아미파 역시 맹의 결단을 원하고 있습니다." 감찰부주의 말에 고무된 듯 청호진인도 옆에서 거들었다. "교주의 정확한 의중을 알지 못하는 이상. 이런 식의 공동 전선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맹주님." 맹주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오.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말을 마친 맹주는 더 이상의 의견 개진을 불허한다는 듯 두눈을 질끈 감았다. 뭐라 반론을 말하려던 청호진인은 그 모습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맹주의 집무실에 무거운 침묵이 갈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공수개 장로만이 성공적으로 일 처리를 해냈다는 만족감에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또 다른 변수 - 묵향이 남경에서 벌여 놓은 사건 때문에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튀지 않도록 개방과 무림맹이 저마다 잔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묵향은 남경에 파견되었던 흑풍대를 이끌고 서둘러서 양양성으로 돌아왔다. 황궁을 들쑤셔 놓은 엄청난 사건을 벌여 놓고도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조차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이번 사건에 대해 책임을 져햐 할 사람은 따로 있었기에 그런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르다 보니 모든 협의는 묵향에게로 돌아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사건에서 애꿎게 묵향에게 고문을 당한 연공공이 자신을 향해 이를 갈고 있다는 사실은 묵향으로서도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남경 분타가 황군들의 의해 피로 씻겼음도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교주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묵향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는 것을 본 마화는 악비 대장군의 행방을 찾았느냐는 질문을 도저히 던질 수가 없었따. 묵향의 안색만 봐도 남경에 갔던 일이 실패했음을 뻔하니 말이다. 묵향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며 명령했다. "관지 장로에게 나한테 오라고 전해 줘." "예.ㅣ 교주님." 묵향이 방으로 들어간 후, 마화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묵향과 함께 남경에서 돌아온 흑풍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벼운 부상자들은 의생을 찾아 치료를 받으러 갔고, 말에서 짐을 풀어 옮긴 후 말을 돌보고 있었다. 먼거리를 달려온만큼 세심하게 보살펴 주지 않으면 말이 병이 나기 때문이다. 마화는 그들 중에서 임충의 모습을 발견하자 그에게로 달려갔다. 임충의 갑옷에도 치열한 격전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녀는 거두절미하고 대뜸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뭐가 말이야?" 대답을 하는 임충의 표정 역시 묵향과 같이 잔뜩 굳어 있었따. 마화는 그런 임충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도 계속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된 거냐니까?" 그제서야 마화가 뭘 알고 싶어 하는 것인지 눈치챈 임충은 침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악비 대장군이 죽었다고 하시더군." "죽, 죽어? 악비 대장군이?" "그래. 분명히 죽었다고 하셨어." "그, 그런...." 마화가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임충은 어쩔 수 없이 보충 설명을 해야 했다.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몰라. 교주님은 남경에 도착하시자마자 바로 움직이셨거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악비 대장군이 죽었다고 양양성으로 회군한다고 하시길래 그냥 따라왔을 뿐이야." 그말에 마화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명색이 흑풍대 천부장이 호위하던 악비 대장군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게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 그렇다고 교주님의 명령을 내가 거부했어야 한다는 말이야?" 임충이 화를 벌컥 내자 마화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비록 답답해서 임충에게 뭐라 하기는 했지만 묵향의 성격은 자신 역시 뼈저리게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마교에서는 워낙 주변에서 그의 행동을 지켜조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묵향이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홍진이나 군사 들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인지 잘 설명해 줬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설명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 마화가 슬쩍 엉망이 된 임충의 흑색 갑주를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이건 또 뭐야? 왜 이랬어?" "젠장. 나도 잘 몰라. 회군을 하려는데 갑자기 황군들이 우리를 잡으려 하기에 빠져나도나 보니 이렇게 된 거야." "흠. 흔적을 보니 오랜만에 화끈하게 한판 붙은 거 같은데?" 짐짓 마화가 활달하게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충의 표정은 쉽게 펴지지가 않았다. 임충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마화는 임충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쾌할하게 말했다. "짜식.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상을 찌푸르기 잇으니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 진짜 더럽게 험악해 보인다." "너, 너, 내 엉덩이 자꾸 치지 말랬지?" "에라. 이 쫌생이 같은 놈아. 이까짓 엉덩이 좀 만진다고 지랄을 하기는. 이따 밤에 보자. 내 거하게 한잔 사마." 완전 남자의 탈을 쓴 여자라며 투덜거리는 임충을 뒤로하고, 마화는 관지 장로의 집무실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왜국과의 무역은 전적으로 절강성 분타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분타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소주와 항주 등 대도시들이 위치해 있기에 후지와라 영주가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들을 사들이는데 있어 다른 분타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국에서 생산되는 물품들 중에서 중원에서 탐낼 만한 것은 없었기에 수출 대금은 전액 은으로 결제 받았다. 은괴는 현금이나 마찬가지다. 분타에서는 후지와라 영주에게서 받은 은괴로 또 다른 물품들을 상인들로부터 사들여 일본으로 보내는 일을 되풀이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은괴가 수익금으로 남게 된고, 그것들은 모수 신용도 높은 전장의 전표로 바뀌어 십만대산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영주가 원하는 물품들은 모두 다 부피가 작은 고가의 사치품들이었기에 숨겨서 옮기기에도 좋아. 수송 과정에서 타인의 의심을 살 가능성도 극히 적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 어떤 물건도 수입하지 않았기에 그걸 팔다가 관부에 꼬리를 밟힐 우려도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밀수츨은 마교에게 아무런 잡음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이익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절강성 분타주가 보낸 서신이 양양성에 도착했다. 봉인된 서신의 겉면에 기록된 암호는 [부친본가입납] 즉, 교주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이것을 받아 든 관지 장로는 한순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분타주 따위가 교주에게 직통으로 서신을 보낸다는 건 말도 안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정상적익인 경로를 밟는다면 분타주는 십만새산에 있는 외총관에게로 서신을 보내고, 외총관이 그 내용을 검토한 후 군사에게로, 그리고 군사가 그걸 검토하여 교주에게 보고하는 식의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그런 정상적인 보고 경로를 완전히 무시한 서신이었기에 관지 장로는 서신을 개봉해서 읽어 봤다. 과연 이걸 교주님께 저냏 드려도 상관없을지, 그리고 경로를 무시할 만큼 화급을 요하는 일인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기대에 못 미치는 형편없는 내용이라면 관지 장로는 월권행위를 한 절강성 분타주를 작살내 버릴 실산이었다. 단단히 봉인된 겉봉을 뜯어내자 그 안에 또 다른 봉투가 하나더 나왔다. 봉투에 쓰인 기록자는 마사코. 밀무역에 있어서 묵향이 전권을 맡기 대리인이었다. 마사코의 이름을 보자 그제서야 관지 장로는 서신이 이쪽으로 온 것을 이해했다. 절강성 분타에서 양양성까지의 거리만 해도 무려 3천 리 길이다. 정상적인 보고의 경로를 따른다면 십만대산까지 무려 1만2천리에 달하는 거리를 달려갔다가, 또 다시 교주의 승인을 받기 위해 양양성으로 와야하고, 그후 절강성 분타로 교주의 지시가 하달되려면 최소한 2만 5천리가 넘는 길을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체계를 무시하고 곧바로 양양성으로 서신을 보내는게 훨씬 빠르지 않겠는가, 현재 묵향 진영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서로 간의 거리가 너무나 많이 떨어져 있어. 연락을 보내는 데 있어 굉장히 많은 시간 낭비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무림맹과의 전쟁에만 치중하면 되었던 시절에는 마교의 연락망은 이상없이 잘 움직였다. 왜냐하면 대개 십만대산과 무림맹의 중간쯤에서 접전이 벌어졌었기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서로가 비교적 공평한 조건에서 싸우고 있었던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교 정보의 집결지인 십만대산에서 동쪽으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게 문제였다. 정보의 대부분이 전서구를 통해 오고 가고 있기는 했지만, 비둘기가 제 아무리 빨리 난다고 해도 1만리가 넘는 거리를 오간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 낭비임에 분명했다. 더군다나 도중에 여러 이유로 사라져 버리는 비둘기들도 많았고..... 관지 장로는 며칠 전 수령해둔 마사코의 서신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하를 통해 남경으로 갔던 묵향이 돌아왔다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다. 악비 대장군의 실종에 대한 일도 물어볼 겸, 서신을 전해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쾅! 그 순간 거칠게 문이 열리며 마화가 뛰어 들어왔다. "관지 장로님. 교주님께서 찾으십니다." "허허, 좀 살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안되나? 안그래도 지금 교주님께 가려고 하던 참이었네." 관지 장로는 묵향의방에 들어가며 고개를 조아렸다. "찾으셨습니까? 교주님." 묵향은 관지에게 의자를 권했다. "음. 그쪽에 앉게" "옛" "자네가 생각 했을 때, 관군의 도움이 없다고 해도 금을 격파하는데 문제가 없겠나?" 전혀 생각지도 ㅁ소했던 묵향의 엉뚱하기까지 한 질문에 관지 장로는 의하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장군을 찾지 못하신 겁니까?" "아니. 찾긴 찾았지." "그런데 왜....?" "내가 그를 찾아냈을 때는 이미 목이 잘린 시체가 되어 있었으니 문제지" 현재 고작화된 전황에서 악비 대장군의 중요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관지 장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럴 수가......" "그래서 자네에게 묻는 걸세. 관군의 도움 없이도 금군을 격파흔 것이 간으한지 말이야." 관지 장로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생각을 해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쪽에서 확고한 명령 체계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면 저들의 수가 많다고 해도 충분히 대적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악비 대장군이 사라진 지금 구심점이 없어졌다는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주님. 본교와 무림맹은 오랜 시간 견원지간으로 지내 왔지 않습니까? 그 둘을 이어 줄 연결 고리가 없어진 지금. 마약 적을 앞에 두고 자중지란이라도 벌어진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묵향이 악비 대장군의 실종을 알자마자 남경까지 쫓아간 것이 아니겠는가. "흠,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대적을 앞에 두고 본교와 다툼이나 벌이고 있을 정도로 수라도제가 멍청한 인물은 아니야."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연합을 이끄는 자는 수라도제가 아니라 서물길이라는 젊은 가주가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뭐 좀 지나면 그 늙은이도 정신을 차리지 않을가? 아무리 내가 조금 맛뵈기를 보여 줬다고 하지만,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었고..." '그 맛뵈기 때문에 한동한 수라도제가 정신이 나가 있었다는 게 문제겠지요'라고 반론하고 싶었지만, 관지 장로는 감히 그걸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어쨋든 사람을 보내 수라도제에게 본좌가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고 전하게. 내가 몇 가지 실마리를 던져 준다면 곧바로 재기 할 수 있을 거야." 관지 장로는 묵향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 그 말에 경악했다. 수라도제가 지금 저렇게 된 것은 묵향과 부딪쳤을 때 당시의 그로서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기 때문이다. 초라함과 좌절감으로 인해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을 잡자 수라도제는 한동안 넋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한 단계 높은 무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현경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 준다니. 관지 장로가 생각하기에도 엄청나게 파격적인 말이었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관지를 향해 묵향은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왜? 내가 못할 것 같나?" "아, 아뇨. 하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 수라도제는 양양성에 없으니까요." "무림맹에 갔나?" "정확한 행방을 알 수가 없스빈다. 수하들을 풀어 알아 본 결과 며칠 전 갑자기 혼자서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고 합니다." "그럼 서문길에게 사람을 보내 수라도제에게 연락을 취해 달라고 해. 한 단체의 수장이라는 놈이 그렇게 쉽게 자리를 비우겠나? 아들에게는 자신의 행선지를 말하고 잠시 바람을 쏘이러 어딘가로 갔겠지." "떠난 게 확실합니다. 맹에서 수라도제의 후인으로 곤륜무황을 보내오겠다고 우리 쪽에 통보를 해 왔기 때문입니다. 전혀 생각도 못해 본 일이었기에 묵향은 가벼운 놀아움을 표시했다. "곤륜무황을? 그게 사실인가?" "예. 교주님. 봄이 오기전에 곤륜파 문도들을 이끌고 이곳에 도착할 거라고 하더군요." "알 수가 없군.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윗대가리르 교체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들인지..... 쯧쯧, 어쩔 수가 없군. 그럼 나중에 곤륜무황을 만나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지" 수라도제는 엄청난 기회가 그냥 사라져 버렸음을 알았다면 아마 땅을 치고 통곡할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그 후의 대화는 후임자인 곤륜무황이 도착하면 금과의 전투를 어떻게 치러 나갈 것인지로 집중되었다. 작전 토의가 대충 끝난 후, 관지 장로는 품에서 서신하나를 꺼내 묵향에게 내밀었다. "절강상 분타에서 마사코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교주님." "마사코가?" 봉인을 뜯은 후, 찬찬히 서신을 읽어 본 묵향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묵향은 서신을 관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렇게 안 봤는데. 후지와라 영주도 되게 웃기는 놈이군. 지원군을 파병해 주겠다니 말이야." 영주가 보내는 병력이라고 해 봐야 뻔한 게 아니겠는가. 보나마나 생색내기에 불과한 병력일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서신을 읽은 관지 장로도 씁쓸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쪽에서 흑풍대 1천기를 보낸 보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보답? 그게 더 웃기다는 거지. 흑풍대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이미 확인해 봈을 텐데 . 지원군은 무슨 얼어 죽을 지원이야. 대충 정리가 끝났으면 흑풍대나 돌려보내든지. 그도 아니면 돈이나 보내든지..." "서신을 보니 마사코도 그에 대해 언급을 해 놨지 않습니까? 핗에 대한 보답은 피로 지불하는 게 그들의 방식이라고 말입니다. 지원군에 대한 보답은 지원군뿐이라는 거지요. 마사코도 교주님께서 이 제안을 거절하지 말아 달라고 청하고 있지 않습니까? 호의를 거절한다는 것은 영주에게 모욕을 주는 행위라고 말입니다." "웃기는 놈들이지. 걸핏하면 모욕이니 뭐니..., 쓸데없는걸 가지고 목숨을 건다니까." 그러면서 묵향은 오래전 왜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놈들은 자신의 체면 유지를 위해서라면 목숨마저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앗다. 그 때문에 몇 명이나 되는 영주의 무사들을 때려잡았지 않았던가. 하긴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배를 가른던 놈들도 있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영주의 지원에 감사드린다고 하더라는 답신을 보내라고 마사코에게 전해라." "예. 교주님." "그리고 영주가 보내올 지원군들을 먹일 수 있도록 식량을 충분히 확보해 두라고 절강성 분타주에게 지시하도록. 뭐, 지원이라고 해 봐야 체면치례로 몇백 명 정도 보내오는 걸 테니. 이런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퉁명스레 말하는 묵향의 모습에 관지 장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절강성 분타주에게 지원군이 도착하면 이쪽으로 보내지 말고 근처 경치 좋은 데로 데리고 가서 편안하게 쉬디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하라고 해. 실력도 없고 숫자도 얼마 되지도 않는 병사들을 어디가 써먹겠나?" 관지 장로도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했다. 지원군이라고 와 봐야 신경만 쓰ㅇ니다. 물론 실력이 엄청난 고수들이라면 얘기가 달라기젰지만 현 소아황에서는 그놈들을 챙겨 주느라 오히려 일거리만 늘어날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렇게 지시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교주님." "그리고 다음부터 절강성 쪽에서 오는 서신은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그런 하찮은 것까지 나한테 물어볼 필요는 없으니 말일세." "잘 알겠습니다. 교주님." 말을 끝낸 묵향은 오랑캐의 병사들 사이에 숨어 있는 장인걸 패거리를 어떻게 끌어내 박살을 낼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 복수를 하고 싶은가? - 묵향 일행이 양양성에서 도착했다는 것이 곧바로 유광세 상장군에게 보고했다. 상장군은 즉시 대장군을 수행한 호위대장을 불렀들였다. 호위대장은 황성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로 부상을 당한 상태였지만, 절룩거리면서도 상장군을 찾아가 사건의 전말을 자신이 아는한도 내에서 자세하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상장군은 크게 놀랐다. 그리고 분노했다. 가만히 들어 보니 대장군은 누군가에 의해 이미 살해당했음이 분며했다. 그리고 황군으로 호위대 전체를 없애 버림으로써 양양성에 그 소식이 전해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황군을 움직일 정도였으니 이 사건의 주모자는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자일 것이다. 어쩌면 재상 진회일 수도 있었고 최악의 경우 황제의 뜻일 수도 있었다. 그 음모의 주재자가 누구이든 간에 명백한 것은 자신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었던 악비 대장군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상장군은 당장 부관으로 하여금 악가군의 상층부에 해당하는 장수들을 모두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악가군의 존립이 위태로울 수 있는 사안이었기에 긴급회의를 하려는 것이다. 부관이 밖으로 뛰어나가자 잠시 군막 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리던 상장군은 여유 시간을 이용해 묵향부터 먼저 만나 보기로 마음먹었다. 호위대장을 통해 들은 것만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호위대장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서의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알아 본 인물이 묵향이었고, 악비 대장군의 죽음 역시 그의 입을 통해 들었다고 하지않은가. 마교에 할당한 장원에 도착한 유광세 상장군은 묵향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번 일에 교주께서 발 벗고 나서 주셔서 감사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예를 차릴 정신이 없는지라 거두절미하고 묻겠소. 호위대장에게 들으니 대장군께서 돌아가셨다고 하셨다던데..., 그게 사실이오?" 질문에 던지는 시커먼 수염 사이로 보이는 상장군의 얼굴에는 이미 묵향의 대답을 알고 있었기에 짙은 슬픔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오. 수하들의 보고를 받은 즉시 황성으로 달려가 백방으로 찾았으나 내가 대장군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목이 잘린 후였소." "그, 그렇다면 시신은....." 이미 죽어 버린 시신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슬픔에 잠긴 상장군의 얼굴을 보니 차마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묵향은 대충 얼버무리듯 말했다. "안타깝게도 시신을 제대로 수습할 상황이 아니었소. 그것보다는 상장군께서는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시오?" "그건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경에서 대장군을 구금하고 있던 추밀사라는 놈을 족치다 보니 대장군 제거에 대한 명령을 내린 자가 참지정사 섭평이라는 걸 알아냈소." 뿌드드득! 이갈리는 소리와 함께 원독에 가득 찬 상장군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참지정사, 이 쳐 죽일 놈!" 그 모습에 묵향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문제는 섭평이 하수인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오. 대장군이 재상을 만나러 가자마자 재상은 지방 순시를 핑계로 급히 황성을 떠난 걸로 알고 있소. 그 후 섭평이 이런 일을 벌였다면 재상에게 모종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소?" 참지정사 섭평은 재상 진회의 심복 같은 이물이었으니 당연히 재상 진회의 명이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으으, 기어이 재상 그놈이." "어떻게 하시겠소? 대장군의 복수를 위해 황성으로 진격하겠다면 도와줄 수는 있소." 잠시 분노에 온몸을 떨며 이를 북북 갈아 대던 상장군은 곧이어 그 말뜻이 가지는 의미를 께달았는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곧 반란을 일으키라는 말이 아닌가? 그는 급히 좌우로 둘러보며 혹 엿들은 자가 없는지 확인부터 했다. "반, 반란을 일으키라는 말씀이십니까?"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내 말은 반란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오. 순수하게 복수를 말하는 거요. 복수. 황성으로 쳐들어가 대장군의 죽음에 관련된 모든 자들의 목을 쳐 버리란 말이외다." "하, 하지만 황상 폐하의 명없이 군사를 움직인다는 것은...." 상장군은 난처하다는 듯 말했지만, 묵향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상장군의 말대로 패하면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쓰겠지요. 하지만 복수에 성공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요. 뭐, 선택은 상장군이 하시오. 지금 당장 대답해 달라는 것은 아니오. 휘하 장수들과 충분히 의논해 본 뒤에 대답해도 좋소." 그제서야 상장군은 고개를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묵 대인께서는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로서는 달라지는게 하나도 없소. 금나라만 박살 낼 수 있다면 그거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이니까." 사실 묵향의 속마음이야 금나라가 아닌 장인걸 패거리였지만 유광세 상장군에게 솔직하게 말해 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묵향을 만나고 돌아오는 유광세 상장군의 머릿속은 정보를 얻기 위해 찾아갔을때 보다 오히려 더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악비 대장군의 죽음이 이면에는 송제국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재상진회가 버티고 있었다. 만약 교주의 말대로 군사를 일으킨다면 황군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물론 상장군은 황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황군이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교주가 전폭적으로 도와만 준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충성스런 군인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군사를 일으키려는 그의 결정을 망설이게 만들고 있었다.실패하면 반역자의 오명을 뒤집어써야 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깊은 생각에 잠겨 상장군이 사령부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그를 발견한 부관이 헐레벌떡 달여왔다. 지금껏 상장군을 찾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었던 모양인지 부관은 거친 숨을 매밷고 있었다. "상장군, 황실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전령이?" 자신을 찾아 부관이 여기까지 달려온 걸 보면 아마 그 전갈은 자신이 직접 받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 모양이다. 상장군은 서둘러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황실에서 왔다는 전령은 상장군에게 군례를 울린 후 봉서를 바쳤다. 겉봉을 보니 송서를 보낸 곳은 추밀원이 아니라 형부였다. "이상하군. 형부에서 왜 나한테.." 봉인을 뜯어 내용물을 살펴보자 황도에서 도주한 대장군 호위대를 전원 형부로 압송하라는 명령서가 튀어나왔다. 여기서 말하는 '대장군 호위대'라는 것이 대장군을 호위하기 위해 움직였던 묵향과 그 수하들까지 포함한 것이었기에 상장군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명령서를 한참 읽어 있던 상장군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령서에 말미에 대장군 호위대의 죄목이 적혀 있었는데 방금 전 대화를 나눴어던 묵향이 한 말과 뭔가 미묘하게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일이지...." 투덜거리던 상장군은 전령에게 물었다. "이것 외에 다른 지시 사항은 없었느냐?" "예, 상장군. 저는 이 명령서를 꼭 상장군께만 전달한 후 수령증을 받아오라는 명령만을 받았습니다. 여기....." 상장군은 전령이 내미는 수령증을 서명해 줬다. "그래. 수고했다. 가 보거라." "옛" 전령을 내보낸 후, 상장군은 얽힌 실타래마냥 혼란스럽기만 한 머릿속을 털어 버리고 싶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장군에게는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유광세 상장군은 긴급 소집한 장수들과의 회의에서 악비 대장군의 죽음을 밝히지 않았다. 뭔가 확실한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악비 대장군의 죽음을 묻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랫동안 감추어 둘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상장군은 장수들에게 대장군의 실종에 흔들리지 말고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해 달라는 당부로 회의를 끝맺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장수들 중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순우기 장군에게 상장군이 슬쩍 손짓을 보냈다. 잠시 자신과 얘기를 나누고 돌아가라는 신호였다. 순우기 장군은 굵은 눈썹, 다듬지 않은 사방으로 뻗친 호랑이 같은 수염. 그리고 투박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단순무식한 무장의 전형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수많은 병서를 읽어 아주 박식한 모사형의 장군이었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악비 대장군 덕분에 이제 경우 30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장군으로까지 진급해 있었던 것이다. 둘만 남게 되자 상장군은 묵향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 뒤 그자음에 형부에서 보낸 명령서를 건네줬다. "형부에서는 황도에서 도주한 자들이 대장군의 납치에 주변 혹은 주변들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니 모두 다 체포하여 황도로 압송해 달라고 명령했네." 명령서에 따르면 형부에서는 대장군의 실종 사건에 관련된 몇 가지 조사를 할 것이 있어 서중랑장에게 협조를 구해 대장군의 호위대를 불러 세워싸고 한다. 그리고 그 부분은 호위대장의 보고와도 일치했다. 그런데 호위대는 조사에 불응하여 황군의 포위망을 뚫고 양양성 방향으로 도주해 버렸다고 쓰여 이었다. 몰론 이것은 참지정사 섭평이 형부에 입김을 넣어 발송한 것이었지만, 그런 자세한 속사정까지 상장군이 알 리 없었다. 하지만 순우기 장군은 명령서의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핵심을 곧바로 파악해 냈다. "흥! 이건 아주 치졸한 이간책입니다. 상장군." "이간책이라고?" "예. 대장군을 시해한 섭평은 황군을 풀어 호위대가 이쪽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을 겁니다. 그렇게 해 놔야 대장군께서 돌아가셨다는 걸 우리들이 모를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게 실패하고 나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서를 보내 묵 대인과 우리들을 이간질하는 거죠." "귀관의 말이 옳구먼. 어쩐지 뭔가 찜찜하더라니." 순우기 장군은 다시 한 번 명령서를 읽어 본 후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거 일이 아주 고약하게 되었습니다. 검문에 불응하고 도주한 자들 모두를 당장 체포하여 형부로 압상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제 시간 여유도 별로 없습니다. 상장군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상장군은 어쩔 수 엇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묵 대인은 행동하라고 권했었네." "행동이라면..., 혹 반란을 말씀하시는...?" "무, 무슨말을 그렇게 하는 겐가?" 상장군은 급히 좌우를 둘러봤다. 혹 누가 엿듣는 자가 있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넓은 회의실에서 그들 단 두 사람뿐이었다. 상장군은 목소리를 한층 낮춰서 말했다. "묵 대인의 말은 병령을 이끌고 황성으로 쳐들어가 대장군의 죽음에 관계된 버러지 같은 간신배들을 처형한 후 양양성으로 회군하는 걸 말하는 거였네. 대장군 같은 위대한 무인을 정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해해 버린 놈들을 몽땅 다 때려잡고 제국의 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말이지. 결코 반란을 일으키자는 게 아니라는 말일세." 상장군의 말에 순우기 장군은 의외로 적극적인 찬성의 뜻을 표했다. 그는 황실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군문에 투신한 게 아니라, 악비대장군을 존경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군대를 이끌고 가 간신배들을 소탕하자는 묵향의 의견에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저는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황실을 믿고 오랑캐 무리들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황상의 존엄을 높이 세운다는 명분이라면 충분히 병사들을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상장군은 가만히 고개르 저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황성으로 군대를 돌린다는 것 자체만으로 자칫 반역의 무리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는걸 왜 모르나?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닐세." 상장군은 오랑캐와 싸우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기는 싫었다. 하지만 순우기 장군은 계속 상장군을 충동질했다. "어차피 남아일생 아닙니까? 성공하면 영웅이 될 것이오. 실패하념 만고의 역적이 되겠지요. 제 생각으로는 묵대인께서 도와만 주신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제 그만! 그 얘기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게." 그 말을 끝으로 완고하게 입을 다무는 상장군의 모습에 순우기 장군 역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잠시 어새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그러다 문득 순우기 장군이 입을 열었다. "하여튼 상장군께서는 앞으로 행동을 조심하셔야 할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형부에서 이런 명령서까지 보낼 정도라면 황성사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마 벌써 상장군 주위에 감시자들이 붙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대장군을 감시했었던 자들이 상장군을 감시하는 것으로 임무 교대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하겠죠." "그, 그렇겠군. 알겠네. 내 조심하다록 하지." "그럼, 저는 이만" 예를 올리고 돌아서서 회의실 밖으로 나가는 순우기 장군의 미릿속에는 이미 자신들의 뜻을 지지해 줄 장수들을 어떻게 포섭해야 할지 계획이 하나 둘씩 짜여 가고 있었다. - 만통음제의 실종 - 묵향은 저 멀리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낙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으려면 한 시진은 더 기다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는 아름다운 노을이라도 감상하듯 멍하니 그쪽을 응시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마화는 평소답지 않게 은근히 분위기를 잡고 있는 묵향에게 선뜻 말을 걸 수가 없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묵향이 저렇듯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소연이 치명상을 입었을 때뿐이었다. 소연은 지금 완쾌되어 이곳 양양성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뭔가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하지만 마화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교에서 온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는 패력검제와 함께 이쪽으로 출발했다고 했다. 현천검제의 경우 마교 내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로 되어 있었기에 그가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화는 몰랐다. 어찌 되었건 소연에게 패력검제라는 화경급 고수가 함께하는 이상, 그녀가 또다시 생명을 위협을 받을 상황은 일어나기 힘들것이라는 게 마화의 판단이었다. 그러고 혹시라도 그녀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묵향보다는 마화가 그 사실을 먼저 알앗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마교에서 오는 모든 보고서를 묵향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ㄷ마당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동안 묵향의 눈치를 살피던 마화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와 임충을 찾아갔다. "무슨 일인데?" "혹시 총단에서 온 보고서들 중에서 나 모르게 교주님께 전달 된게 있었어?" 임충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도 안된다는 듯 대꾸했다. "그런게 있을 리 없잖아" "그렇지?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군." "대체 무슨 소리야?" "황도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봐" 남경에 다녀온 훠터 묵향이 왠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마화가 이렇게 단언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물론 악비 대장군이 죽는 큰일이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묵향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라는 게 마화의 생각이었다. 계속된 마화의 추궁에 임충은 귀찮다는 듯 투덜거렸다. "젠장! 전에 너한테 다 말해 줬잖아." "그거말고 또 다른 일이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로서 마화의 에감음 정확한 것이었다. 지금 묵향은 오래전에 죽은 한 여인을 추억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옥령인. 그녀의 혈족을 비롯해. 그녀를 추억할 만한 모든 것을 다 없애 버린 후 묵향은 그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황도에서 공동파의 한 무인이 적하마령검법을 펼치는 걸 본 순간, 그녀와 옭힌 수많은 추억들이 번개처럼 묵향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설마 그녀의 전인이 있을 줄이야., 그런데 그 녀석은 그 검법을 누구에게 배웠을까? 그녀에게 직접 배웠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군. 어딘가에 비급이 남아 이었다는 말이겠지.' 그녀의 흔적을 찾아서 없애 버릴까? 아니면 그냥 놔둘까? 좀 더 세월이 지난 후, 어쩌면 그놈 말고도 적하마령검법을 익힌 자들이 더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그런 놈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마음이 싱숭생숭 해질 가능성이 있을 바에는 아예 모든 흔적을 완벽하게 없애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새각을 하면서도 묵향은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적하마령검법이야말로 그녀가 이 세상에 남겨 놓은 마지막 흔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과 만났음을 증명하는......... 저녁이 될 때까지도 묵향의 표정이 펴질 줄을 몰랐다. 임충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한 마화가 묵향에게 뭔가 말은 걸고 싶은데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궁리하고 있을 때. 한 중년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마화를 발견하자 애써 침통한 표정을 감추려 노력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머나먼 변방에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중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마교 총단이 훨씬 더 변방에 있는 것이겠지만, 마교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총단의 중심이고 이쪽이 변방인 것이다. 살갑게 인사하는 그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패도적인 기운, 세인들이 마기라고 부르는 음산한 기운이었지만 십만대산을 떠난 후 오래만에 접해 보는 기운이라 그런지 마화에게는 왠지 정감까지 느껴 졌다. 이토록 강렬한 마기라면 상승의 경지에 접어든 고수라는 증명이나 다름없다. 순간 마화의 머릿속에 상대가 누군지 떠올랐다. "아! 혹시 수석장로님을 모시고 있는....." 겉으로 뿜어지는 패도적인 기운과 달리 상대는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왕지륜이라고 합니다. 부대주님." "그런데 그대가 여기까지 어쩐 일로 왔지요?" "교주님께급히 전해야 할 사항이 었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교주님께서는...." 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화가 느끼기에 묵향은 지금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지만 십만대산에서 이 정도의 고수가 전령으로 달려올 정도라면 뭔가 급한 보고 사항이 있다는 말이었다. 이찌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왕지륜이 다급히 물어왔다. "교주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 표정이 워낙 절박했기에 마화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교주의 집무실을 가리켰다. 그러자 왕지륜은 상관인 마화에게 실례인 줄 알면서도 곧바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지금 교주께 전해야 하는 중대한 비보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교주의 아버지께서 실종되셨다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왕지륜은 무릎을 꿇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음성에는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혹시 이로 인해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교주님. 큰일 났습니다!" 하지만 묵향이 대꾸없이 멍하니 서 있자 왕지륜은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교주님. 큰일 났습니다!" 그제성 왕지륜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린 묵향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왕지륜은 묵향이 물어오자 고개를 푹 숙이며 처연한 음석으로 외쳤다. "교주님의 아버님께서 실종되셨습니다. 지금 즉시 수색대를 보내야..." "아.버.지가 실종되셨다고?" 옛 사랑의 추억을 회상하던 걸 방해받은 것만도 열받는 일인데 그놈이 꺼낸 말이 단 한마디도 듣고 있을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으니..... 묵향의 안색에 살짝 분노가 비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눈치 채지 못한 왕지륜은 마치 큰일이라도 일어났다는 듯 홀들갑을 떨었다. 그것도 다 자신이 아르티어스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는 지금 그게 자신의 목줄을 죄고 있는 행위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예. 그러니까 어르신이 갑자기 교주님을 만나 보고 싶어 하시기에 이쪽으로 모시고 오는 도중 기방에 들렀습니다. 최대한 대접을 잘하여 모시라는 수석장로님의 당부가 있으셨던 터라. 최고의 기녀들과...." 묵향은 이런 헛소리를 계속 듣고 있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엇다. 자신도 감히 감당이 안 되는 괴물이 바로 아버지인 아르티어스 아닌가. 하지만 왕지륜은 그런 묵향의 생각을 모르는지라 계속 주절거리며 그때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이 세상에 누가 본좌의 아버지를 감히 해할 수 있단 말이냐?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하신거겠지." "저, 그래도 실종이 분명...." 순간 묵향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하지만 애써 긇어오르는 분노를 눌러 참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묵향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 속에는 더이상 입을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진한 살기마저 가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다. 다 알아들었으니 이제 나가서 푹 쉬도록 해라." "예? 하지만 그게..., 아버님께서 실종되셨는데..." 퍽! 그와 동시에 왕지륜은 지독한 두통과 함께 온 천지가 환한 빛에 감싸이는 걸 봤다. 잠시 기절대 있던 그는 곧이어 정신을 차리자마자 재빠리 부복했다. 그러면서 힐끔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연적 하나가 나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신경질이 난 교주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연적을 자신에게 집어 던진 모양이다. "요, 용서를..." "꺼지라면 꺼질 것이지 왜 말귀를 못알아들어!" "옛! 교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후다닥 밖으로 튀어나온 왕지륜은 이마에 튀어나온 혹을 무지르며 마화에게 슬쩍 물었다. "어르신께서 실종되셨는데도 아예 신경도 안 쓰시고.., 오늘 교주님께서 별로 기분이 안 좋으신가요?" 마와는 마치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 딱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나직하게 대답했다. "황성에서 돌아오신 후 별로 심기가 편치 않으세요. 그리고 교주니께서 알았다고 하셨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군요." "예효~. 수석장로님께 어떻게 보고드려야 할지..." "있는 그대로 보고하세요. 교주님께서는 어른신의 실종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다고 말이에요. 그러면 수석장로님께서도 이해할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부대주님." 마화의 말대로라면 좋겠지만 보나마나 수석장로는 자신을 엄청갈굴 게 뻔했기에 힘없이 십만대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왕지륜이었다. 왕지륜이 돌아가고 며칠이 지난 후 임충과 이러쿵 저러쿵 잡담을 나누고 있던 마화에게 거지 한 명이 안내되어 들어왔다. 거지에게서 지독한 악취가 풍겨 나오자 임충은 마치 급한 일거리라도 생각난 듯 재빨리 도망쳐 버렸고, 그녀 혼자 남아 그 지독한 악취와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거지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죠?" "의창 분타에서 흑풍대 부대주님께 전달해 달라면서 이걸..." 거지는 품속에서 뗏국물이 좌르르 흐르는 서신을 꺼내어 마화에게 건넸다.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자세히 보니 서신 위로 이 몇 마리가 슬금슬금 더니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차마 서신에 소을 뻗치지 못하고 난처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흑 이게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나요?" 그 질문에 거지는 퉁명스에 대꾸했다. 상대가 꽤나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지만 마교도들에 대해 썩 좋지 못한 선입견을 지니고 있던 그였기에 대화를 즐길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저는 서신만 전달받았을 뿐.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서신을 직접 받아야만 했다. "수고했어요. 이건 수고비라고 하기는 뭇하지만 동료들과 술이라도 한잔...." 은자 한 냥을 건네준 뒤 서둘러 거지를 돌려 보낸 그녀는 이부터 잡기 시작했다. 손톱에서 세 마리를 꼭꼭 찍어 죽인 후 더 이상은 없는 듯하자 그녀는 서신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바로 그녀의 두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큰일났습니다. 교주님." 너무 급한 나머지 묵향이 요 근래 이상한 분위기를 잡고 있다는 것마저도 잊어버린 마화였다. 창백하게 질린 마화의 얼굴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묵향이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이, 이걸..." 마화는 서신을 묵향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만통음제 대협께서 실종되신 듯합니다." 서신을 읽던 묵향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며칠 전에는 웬 멍청한 새끼가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지껄여 대더니, 오늘은 또 마화가 그와 유사한 소리를 해 대고 있는 것이다. 만통음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만큼 녹록한 인물이 아니다. 현 강호에서 화경에 이른 만통음제를 어찌해 볼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당연히 이건 어떤 놈이 농간을 부리는 게 분명하다고 묵향은 판단했다. "꽤나 질이 나쁜 농담이로군. 이걸 가지고 온 놈은 누구지? 그 놈을 잡아들여 족쳐 봐.뭔가 나오겠지." "개방도가 가져왔습니다. 의창 분타에서 보낸 거라고 하더눅요." 마화의 대답이 의외였던 모양이다. "개방도가 확실해? 장인걸이 아니고?" "확실합니다." 그러면서 마화는 묵향에게 알리지 않았던 사실 한 가지를 말했다. 묵향이 황성에 가 있을 때였다. 묵향의 명령으로 마화가 양양성에 먼저 돌아와 있을 때 설취가 그녀를 찾아왔었다. 섭취는 마화가 묵향을 만나러 갔다 온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평소 친분이 있었던 그녀와 애기도 나눌 겸 사부의 안부도 물음 겸 해서 찾아왔던 것이다. 얘기를 나누던 도중 그녀는 사부가 홀로 만현에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질녀가 만현으로 달려갔다는 말인가?" "예. 만통음제 대협의 몸도 안 좋으시니 수중이라도 들어 드릴생각이었겠죠. 그런데 만현에 도착해 보니 대협은 이미 떠나고 없으시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의 행방을 수소문 하면서 양양성 방향으로 내려오던 도중, 의장 인근에서 그분의 종적이 끊어 졌다고 합니다." 묵향의 입장에서 보면 뜬금없는 말이기는 했지만, 분명 그런 비슷한 내용이 서신 군데군데 적혀 있었다. 묵향이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은 앞부분의 설명이 다 빠진채 결과만 쓰여 있는 탓이리라.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묵향의 음성에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평상시의 만통음제라면 모를까 그는 장인걸과의 격전에서 입은 부상을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서신을 질녀가 보낸 게 확실한 건가?" "예. 필체는 다르지만 내용상으로 봤을 때 우리 둘만 알고 있는 사실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습니다. 아마 전서구를 통해 날아온걸 해독하여 서신을 옮겨 적은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뭔가 말을 꺼내려던 묵향은 멈칫했다. 흑풍대를 동원할 생각이었지만, 상대는 화경급 고수마저도 납치한 실력자들이다. 흑풍대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묵향은 생각을 바꿔 명령했다. "지급으로 철영 부교주에게 연락을 보내라. 당장 혈랑대를 의창으로 보내 달라고 말이야." "옛 교주님." 묵향은 자신의 애검 묵혼을 집어 들며 말했다. "나는 먼저 의창에 가 있겠다." 혈랑대는 장인걸이 거느린 천마혈검대와 맞먹는 전력을 지닌 마교 최강의 전투 단체 였다. 그들을 동원할 결단을 내린 걸 보면 묵향이 얼마나 만통음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드러나는 진실 - 황도에 돌아온 재상 진회는 즉시 추밀사 류태청을 불러들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엇다. 왜냐하면 류태청은 이미 처형당한 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처형에는 참지정사 섭평이 깊숙이 관계되어 있었다. 진회는 그걸 알아내자마자 즉시 섭평을 불러들였다. "본관이 도착하기 하루 전에 서둘러 류태청을 처형한 이유부터 물어보고 싶구려." 서슬 시퍼런 진회의 질책에도 섭평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가 모든 죄를 자보한 상태였고, 황상 폐하의 윤허마저 떨어진 상황이었기에 처형을 뒤로 미룰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의 죄가 명명백백하다고 해도 그 정도의 고위관리를 겨우 며칠 동안 심문하고 처형했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도대체 그를 그렇게 서둘러 처형한 저의가 뭔가? 혹 내가 그를 만나면 자네에게 곤란한 상황이라도 생기나?" "무, 무슨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문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류태청의 처형을 주도한 인물은 형부의.." 진회는 거칠게 탁자를 탕 하고 치며 외쳤다. "자네. 지금 본관을 놀리는 것인가?" "예?" "어서 진실을 말해 보게. 이미 악비 대장군도 류태청도죽어 버렸네. 자네느 본관이 믿고 의지했었던 자네마저 처형해 버리기를 원하는가?" "..." 진회의 분노가 진짜임을 눈치 챈 섭평은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려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악가기 시작했다. 지금 같은 상화에서 어설프게 대답을 했다가는 분명 자신의 목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게뻔했다. 그런 그의 뇌리에 연공공과의 밀담이 떠올랐다. 연공공이 자신에게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마교의 교주라는 자를 반역죄로 엮어 달라는 것이다. 그 요구에 참지정사 섭평은 흔쾌히 승낙했다. 안 그래도 그놈의 마교 교주는 찢어 죽이고 싶은 놈이었다. 자신이 세워 놨었던 모든 계획이 어긋나게 된 게 바로 그 망할 교주 새끼 때문이니까. 처음 류태청으로 하여금 악비 대장군을 구속하게 한 명분은 바로 역모 혐의였다. 일단 잡아들인 다음 자백만 받아 낸다면, 그를 역적으로 처형한다 해도 그 누구도 반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강도 높은 고문을 가하며 추궁했음에도 불구하고 악비는 끈질기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섭평은 걱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지독한 놈이라도 고문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이니 결국에는 죄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교 교주라는 놈 때문에 벌어졌다. 그가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압박해 들어왔기에 섭평은 교주가 악비가 구금되어 있는 위치를 알아내기 전에 그를 처혀해 버리는 수밖에 다른도리가 없었다. 악비가 그놈에 의해 구출되면 자신은 분노에 가득찬 악비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게 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악비에게 반역을 도모했다는 시인을 받아 내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반역도 안 할 인물을 죽인 셈이니 그 죄를 누군가는 덮어써야만 했다. 그것도 진회가 황궁에 돌아오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악비에게 반역을 도모했다는 시인을 받아 내지못했다는 데 있었다. 반역도 안 할 인물을 죽인 셈이니 그 죄를 누군가는 덮어써야만 했다. 그것도 진회가 황궁에 돌아오기 전에 말이다. 그래서 그는 증거 인멸도 할 겸, 류태청이 독단적으로 악비를 처형한 것으로 뒤지어씌워 사건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진회가 류태청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루라도 빨리 그를 처형하기 위해 발이 닳도록 황궁을 뛰어다니며 황제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계속된진회의 추궁에 섭평은 재빨리 잔대가리를 굴렸다. 진회에게 역모와 같은 어설픈 거짓을 말했다가는 당장 자신의 목이 날아갈 게 뻔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섭평은 어쩔 수 없이 정면 돌파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밀약을 맺은 연공공이 망므에 걸리기는 했지만 자신부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섭평의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온 후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휴~~. 군벌 체제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엇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예. 재상께서도 아시다시피 국경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다 무림인들의 덕분 아니겠습니까? 악비는 그런 무림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힘을 키우고 있는 해충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지금 악가군에 35만 대군이 있다고 하지만, 그 대부분은 쓰레기나 다름 없는 오합지졸들입니다. 과연 그런 병사들을 이끌고 북진해서 1백만에 달하는 금의 정예대군을 격파할 수 있겠습니까?" "..."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기에 진회로서도 반론을 제기하기가 힘들었다. "그건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하지만 무림인들이 지금과 같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걸 간파한 악비는 북진을 한다고 하고서는 무림인들의 뒤를 슬금슬금 따라다니며 그들이 세운 공을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꿀꺽 삼키려는 속셈이었을게 분명합니다. 즉, 악비가 앉아 있는 그 자리에 누구를 집어넣어도 경과는 똑같아진다는 말이지요." 악비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던 진회는 말도 안된다는 듯 대꾸했다. "꼭 그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 "즈김까지 진행된 결과가 모든 걸 말해 주지 않습니까? 양양성에서 무한에 이르는 방어선을 유지하고 잇는 것은 악가군이 아닙니다. 일당 백의 무서운 무술실력을 지닌 무림인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이지요. 지난 가을에 무한 일대로 침입해 들어왔던 금의 별동대 20만이 겨우 3만 남짓밖에 안되는 무림인들에게 전멸당했던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흐음..." "무림인들이 양양성 방어전에 가장 큰 공을 세웠지만, 그 뒤 승전에 따른 혜택은 누가 가장 크게 봤습니까? 바로 악비였지 않습니까? 금나라와의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는 여러 군병들이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황실의 지원을 거의 못 받고 있습니다. 악비 대장군이 30만 대병을 모집해서 무장시키고 또 훈련시키고 있는 동안 다른 군벌들이 증원한 병력을 모두 다 합쳐도 10만이 될까 말까 한게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러하고 악비가 송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장군이나 하면 그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벌써 군벌을 해체하고 추밀원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을 테니 말입니다." 악비 대장군을 없애야 했던 이유를 참지정사 섭평을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그중에는 그가 억지로 갖다 붙인 것도 몇 가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현 상황을 직시한 것이었기에 진회로서도 그말에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화가진행될수록 진회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가고 있었다. 그만큼 진회는 악비를 아꼈기 때문이다. "악비 대장군에게 힘을 몰아 준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입니다. 당장 노도와도 같이 밀려드는 금의 세력을 저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시간적 여유르르 얻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방어의 개념을 뛰어넘어 북진을 단행하려고까지 하고 있지않습니까? 만약 이시점에서 북진을 하고 또 금을 정벌하는 데 성공해 보십시오. 송제국의 모든 것이 악비의 손에 놀아날 위험성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될 것입니다." 섭평의 생각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의 말대로 분명 악비가 북진을 감행하여 성공한다면 악비의 위명과 힘을 황실의 힘을 훨씬 넘어서게 될 것이다. 지금도 35만 악가군은 황실에서 내리는 명령보다 악비 대장군을 더 따르고 있을 ㅈ어도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때쯤 실전을 통해 35만 악가군은 정예병으로 변화해 있을 터이다. 그런 악비 대장군이 혹시라도 불온한 마음을 먹는다면 송황실에서는 아무런 제재도 할 수 엇을 게 뻔하다. 진회의 표정이 약간 변화하자 섭평은 아치 자신의 충심을 왜 몰라주느냐는 듯 외쳐싿. "그런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재상께서도 악비가 북진하겠다고 하는 걸 끝까지 반대하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진회가 북진을 반대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 한 번의 승리로 인해 송의 명줄이 조금이라도 더 연장되는 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진회는 송이 재기 불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길은 중원의 중인이 한시라도 빨리 바뀌는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 진회가 송의 멸망에 대한 망므을 완전히 굳히지 못한 이유는 바로악비의 존재 때문이다. 이 걸출한 무인이 잃어버린 북쪽 영토를 되찾고, 또 뒤이어 금나라까지 멸한다면 더 이상 송을 위협할 이민족은 없어진다. 또다시 수백년간 제국이 존속할 가능성을 얻게 될수도 있다는 말이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현명한 황제가 나오고, 자신의 온힘을 다해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런 희망이 진회로 하여금 송이 망가도록 그냥 방치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악비의 죽음은 그 모든 가능성을 없애 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길은 한 가지뿐이다. 송의 멸망을 가속화시켜 조금이라도 빨리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도록 만드는 것. 그것만이 도찬에 빠져 있는 백성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는 길이 될 것이다. 진회는 한숨을 푹 내쉰 후 정색하며 섭평에게 명령을 내렸다. "추밀원이 반드시 군권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자네가 한번 그렇게 만들어 보게." 갑작스런 진회의 명령에 섭펴은 찔끔했다.. "예? 그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내 황상 폐하께 고하여 자네에게 추밀원을 맡기도록 하겠네." "예? 그, 그건..." 진회의 말에 섭평이 당혹스러워할 만도 했다. 자신에게 추밀원을 맡기겠다는 말은 곧 자신의 직위를 강등하겠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지금 추밀원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추밀사였던 류태청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있엇던 것이다. "자네는 지금까지 나한테 군권이 추밀원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나? 그럼 그렇게 해보게. 지금 추밀원은 유명무실한 상태지만 구벌들로부터 군권을 회수한다면 과거처럼 증서성과 쌍벽을 이루게 될 걸세. 왜. 그렇게 만들 자신이 없나?" 진회의 도발에 섭평은 안색을 굳히며 대답했다.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여기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대답한다면 악비를 없앤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알겠네. 내일 정식으로 폐하의 첩지가 내려갈 걸세." 예를 표한 후 진회으 집무실을 빠져나오는 섭평의 안색은 이러다 숙청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한직으로 끌어내린 후 적당한 누명을 씌어 제거하는 것. 그게 지금까지 섭평 자신이 가장 즐겨 써 왔던 정적 제거의 수법이었다. - 사방에는 박쥐들이 득실거린다네 - 공식적으로 악비 대장군은 현재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추밀원에서는 그의 후임자에 대해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현재는 아쉬운 대로 대장군의 임무를 유광세 상장군이 대리하고 있는상황이었다. "황도에서 방금 전에 도착한 공문입니다. 상장군." 증서성에서 도착한 공문을 읽기 시작한 상장군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재상 진회의 인장이찍혀 있는 공문에는 악비 대장군이 감히 황실에 역심을 품었기에 그 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장군 따위가 감히 반란을 획책할 수 있었던 것은 휘하에 있는 병사들을 사병화시키는 군벌 체재게 있다고 규정했다. 그렇기에 이후로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재발되지 않도록 군벌을 타파하고 병권을 과거와 같이 추밀원으로 귀속하겠다는 내용이엇다. 공문을 읽고 있던 상장군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윽고 공문은 그의 굳건한 손아귀 안에서 꾸깃꾸깃 구겨져 버렸다. "이런 나쁜 놈들! 황실과 민초들을 위해 불철주야 최선을 다하신 대장군께 이딴 말도 안되는 죄명을 덮어씌우다니. 대장군, 혹시 원통해서 눈도 못감고 돌아가신건 아니요? 크흐흐흑." 오랜 세월 악비 대장군과 함께 전장을 누빈 사장군이다. 그랬기에 악비 대장군이 단 한번도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살지 않았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엇다. 그런 대장군에게 역심을 품었다는 더러운 죄명을 뒤집어 씌워 죽이다니. 지금껏 그가 이뤄놓은 공로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한동안 악비 대장군을 생각하며 목을 놓아 오열하던 상장군은 어느 정도 감정이 진정되자 밖에 대고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 거칠게 쉬어 있었다. "순우기 장군더러 이리 오라고 전하라." "옛. 상장군." 잠시 후 순우기 장군이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상장군." "이걸 한번 읽어 보게." 공문을 다 읽은 순우기 장군은 뭔가 미심쩍은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상장군을 향해 입을 열었는데, 악비 대장군의 억울한 죽음 분노하기는 커녕 뭔가 숨기는 것이라도 있는 듯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군벌 타파를 하겠다는 공문이로군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상장군. 과거부터 군궐은 추밀원에 있었으니 돌려 달라면 줘야 하겠죠. 더군다나 직므은 대장군께서도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말입니다." 쾅!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순우기 장군의 말에 상장군은 탁자를 치며 벌덕 일어섰다. "자, 자네 어찌 그런 말을...." "시세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대장군께서도 돌아가신 이 마당에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지 않습니까." 순우기 장군은 말을 하면서도 연신 눈을 찡긋거리며 귓볼을 만지작 거렸다. 노화를 트트리려던 상장군은 그 순간, 얼마 전에 대장군을 감시하던 첩자들이 자신에게 붙엇을 거라며 조심하라던 순우기 장군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순우기 장군의 눈가는 이미 물기로 흠뻑 젖어 있었다. 상장군은 장탄식을 터트리며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맞장구를 치려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분로로 인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겠지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황실에서 이렇게 하지 않고 그냥 대장군께 군권을 내놓으라고 말만 했어도 그냔 내놨을텐데... 참으로 애석하구먼." 너무나 원통했기에 상장군의 입에서 할 필요가 없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갑장기 순우기 장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장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기분도 그런데 술이나 한잔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혹시라도 상장군이 말실수라도 할까 봐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상장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오늘은 흠뻑 취해 보고 싶구먼." "마침 서문세가에 좋은 술을 있다고 하니 들러서 한 동이만 라라고 하죠." 두 사람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서문세가를 향해 곧 바로 걸어갔다. 서문세가에 도착하자 순우기 장군은 일단 서물길 가주에게 면회 신청을 한 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와중에 목소리를 낮춰 상장군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현재 무림세력의 지휘부인 이곳 서문세가까지 첩자들이 따라올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앞으로 한층 더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상장군." "그게 무슨 말인가?" "그 공문을 보고 뭔가 느끼신 게 없으셨습니까?" "글쎄..., 놈들이 대장군에게 말도 안되는 더러운 오명을 뒤집어씌워 죽인 뒤 군권을 회수하려고 한다는 것 정도?"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재상은 능구렁이 찜 쩌먹을 정도로 노회한 인물입니다. 에정에 상장군께서도 황도에서 그에게 뒤통수를 맞아 보지 않으셨습니까?" 황제 앞에서 당했던 그날의 치욕이 떠오르자 유광세 상장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황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 믿으라'며 호언장담을 하더니. 막상 황제의 코앞에서 딴소리를 지껄여 자신을 완전히 물먹이지 않았던가. 썩 유쾌하지 못한 과거를 떠올리며, 상장군은 퉁명스런 어조로 되물었다. "그 얘기를 꺼낸 이유가 뭔가?" "그렇게 노회한 인물이 이렇게 뻔히 보이는 술책을 쓸 리가 없다는 거지요. 재상이 이런 공문을 보낸 의도는 좀 더 깊숙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어떤 저의로 이런 공문을보낸 것인지 말이니다." "저의?" "예. 이런 말도 안되는 공문을 받고 분노하지 않을 군벌은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지금 당장 군궐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네놈들도 대장군처럼 참수형에 처하겠다고 하는 위협이나 다름없으니 말입니다. 이걸 보시고 상장군께서도 불같이 분노를 터뜨리지 않으셨습니까?" 듣고 보니 이상했다. 황성에 주둔해 있는 황군이라고 해 봐야 경우 5만이 전부다. 악가군이 아니라도 서너 개 군벌만 힘을 합친 다면 충분히 황실을 뒤집어엎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그렇군. 설마 미친 게 아니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공문을 보낼 수가 없을텐데." "그러니깐 드리는 말씀입니다. 진회의 진짜 저의가 뭔지 말입니다. 아마도 뭔가 믿는 구석이 없지 않고서는 마치 반란이라도 일으키려면 일으키라는 식의 충동질을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유광세 상장군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아무리 믿는 구석이 있다고는 해도 그렇게 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병법 중에 타초경사 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부러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하여 뱀의 반응 살펴보는 거지요. "흐음..., 그렇다면 내 반응을 살펴보기 위한 첩자들도 있겠군." "예. 상장군 그 때문에 상장군을 뫼시고 여기로 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네가 철저하게 내 주위를 한번 점검해 보게. 뭔가 수상쩍은 놈이 있는지 말이야" 그 말에 수누기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는 것보다는 묵 대인에게 부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묵 대인에게?" "예. 제가 원하는 것은 은밀하게 첮자를 찾아내자는 것이지 찾아서 죽이자는 게 아니니까요." "아니, 우리를 감시하는 놈들을 찾아 죽여 버리면 되지. 뭐 하려 그놈들을 살려 두나?" 거칠 것없이 전장을 휩쓸고 다녔던 상장군으로서는 첩자들의 눈과 귀를 피해 이런 식으로 밀담을 나누는 것이 너무 답답하기만 했다. 순우기 장군은 그런 상장군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미소지으며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그들을 찾아서 없앤다는 건 이쪽에서 뭔가 찔리는 일을 행하고 있다는 걸 상대에게 알려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대신 첩자들이 누군지 알고 있다면, 암도진창의 계책을 써먹을 수 있지요. 그래서 묵 대인에게 부탁하여 무공이 뛰어난 자들로 하여금 은밀하게 첩자들을 찾아내자는 말입니다." 암도진창이란 허위정보를 누설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계책이었다. "첩자들을 역이용해서 허위 정보를 흘리고 앉아 있을 시간 여유가 있을까? 형부에서 명령서가 날아온 지 꽤나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그 말에 순우기 장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씨익 미소 지었다. "재상이 보낸 이번 공문으로 인해 시간 여유가 충분히 생겼으니. 그리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형부에서 묵 대인 일행을 체포해서 압송하라고 한 이유는 그들에게 대장군 납치 혐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재상이 자기가 대장군을 처형했다고 공표했는데 형부의 명령에 따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상장군은 그제어샤 형부에서 온 명령서의 내용을 기억해 냈다. "오호라. 그렇구먼. 그럼 이제부터 천천히 기회를 엿보며 일을 추진해도 되겠구먼." "예,,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ㄷ최대한 조심. 또 조심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입니다. 진회가 뭘 믿고 이런 식으로 일을 ㅓㄹ이고 있는지 알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젊은 장수들을 포섭하여 일을 벌일 준비를 해야겠지요." "일을 벌이다니.., 혹시 자네 말은?" "얼마 전에 상장군께서 묵 대인에게 들을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에 잠시 상장군은 대잡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악비 대장군을 역모라는 음모로 잡아 죽인 자들이 대장군의 심복인 자신을 가만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해야겠지? 아니. 하겠네.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는가?" "당연히 도와 드려야지요. 대장군을 죽인 놈들을 치는 일인데제가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제 목숨이라도 드리겠습니다." 그런 순우기 장군의 말에 상장군은 감격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내가 어찌 행동하면 되겟는가?" "거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훈련교두이신 여문덕 상장군께서 이 일에 돔창해 주셔야 합니다. 여무덕 상장군은 매사에 모든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는 전투보다는 병찰 쪽에 더욱 뛰어난 자질을 지닌 장수였다. 그렇기에 악비는 훈련교두라는 직책과 함께 30만 신병의 훈련을 그에게 맡겼던 것이다. 순우기 장군의 말에 상장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빙그레 웃었다. "나보다 더 대장군께 충성을 다했던 사람이 바로 여문덕이네. 아직 대장군의 죽음에 대한 음모를 알지 못해서 그렇지. 만약 알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한 팔 거들겠다고 뛰어올게 분명해." 악가군이 흔들릴까. 상장군이 철저하게 악비 대장군의 주금을 비밀로 했기 때문에 아직까지고 여문덕 상장군은 어떤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에 순우기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번 거사는 거의 성공한 것이나 진배가 없습니다. 여 상장숭께도 진회가 보낸 공문이 갔을 테니. 지금쯤은 그분도 일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조금은 눈치 채고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몇몇 장수들과 이미 접촉해 운을 띄워 보았는데 모두들 분노하여 참여하겠다고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그럼 저는 본격적으로 나머지 장수들과 접촉해 거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포섭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허어, 대장군께서 자네를 총애하며 아끼신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 그렇다면 나는 여문덕이를 만나 이야기를 해 보겠네." 하지만 순우기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현 시점에서 상장군께서 움직이신다면 괜한 의심을 받기 쉬울겁니다. 차라리 묵 대인을 만나 저사를 도와준다는 확답을 다시 한번 받으십시오. 그리고 첩자건에 대한 도움도요." "그래, 자네 말대로 하지. 그럼 여문덕이는?" "제가 며칠 뒤 병사를 보충받기 위해 무한으로 가야 하니 그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그럼 자네가 힘 좀 써 주게. 내 자네만 믿겠네." 잠시 후 총관이 나와 서문길 가주에게로 두 사람을 안내해 갔다. 악비 대장군의 명에 따라 무림인들과의 협조를 얻기 위해 평소 자주 이곳을 들락거렸기에 서문길과도 충분히 안면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물길과 한동안 봄에 재게될 금과의 전쟁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술 한 동이를 청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문길을 흔쾌히 총관을 시켜 술을 가져오게하면서도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이곳에서 드시지요. 왜 다른 곳으로 가서 드시려고 하십니까?" "하하. 마음이 답답한 듯하여 사방이 툭 트인 곳에서 마시려고요." 서문길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물었다. "혹시 아름다운 미인들과 함께 드시려고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까?" "미인? 핫핫핫. 미인은 없지만 밤이 되었으니 박쥐들은 있겠군요. 그놈들과 같이 술을 마시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을 법합니다. 그려." 두사람이 술을 가지고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 서문길도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 시비에게 술상을 차려오라 지시를 내렸다. 그 또한 가슴이 답답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무 말도 없이 어딘가로 떠난 아버지 수라도제를 생각하면 말이다. 다음 날 점심 무렵 유광세 상장군은 시찰을 한다는 명목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마교가 있는 장원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하지만 묵향은 만날 수는 없었다. 뭔가 일이 있어서 한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무슨 일때문에 교주님을 찾으시는 겁니까? 교주님께서는 가능하다면 상장군의 요청을 모두 들어 드리라고 명령하셨으니 부담 갖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흑풍대주 관지 장로가 그렇게 말했지만 상장군으로서는 선뜻 입을 열기가 곤란했다. 잘못하면 반역죄를 덮어쓸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만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상장군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찾아왔소이다." 그러면서 상장군은 추밀원이나. 황성사에서 양양성에 집어넣은 첩자들을 찾아 줄것을 요청했다. 물론 순구이 장군의 말대로 첩자들이 누군지만 파악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찹자를 찾아내는 일은 의외로 힘들다. 하지만 그 첩자가 감시할 인물이 누군지만 ㅇ나다면 의외로 쉽게 찾아낼 수도 있다. 상장군은 첩자가감시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로 자신과 함께 순우기 장군. 그리고 10여 명에 이르는 고위급 장수들을 지명해 주었다. 그러고 그날부터 관지 장로는 그들에게서 두명씩 눈치 빠른 녀석들을 뽑아서 붙여 놨다. 그들의 임무는 상장군이 말해 준 인물들을 감시한 ㄴ또 다른 인물들이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엇다. - 죽어야 할 아군 - 며칠 뒤, 순우기 장군은 유광세 상장군의 명을 받고, 여문덕 상장군을 회유하기 위해 무한으로 달려갔다. 평송에도 자주 무한을 들락거리던 그였기에 여 상장군은 순우기 장군을 아무런 의심없이 맞이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상장군."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로 귀관이 직접 달려왔는가?" "1천 명 정도 병력을 보충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 금군과전투가 재개되지 않겠습니까? 그에 따른 작전 토의를 하기 위해 왔습니다." 순우기 장군은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상장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저들의 예상 이통로와 함께 그것을 저지할 방법에 대해 몇가지 안을 마련해 봤습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서신을 받아 든 상장군은 앞부분을 읽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우기 장군의 설명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서신은 유광세 상장군이 직접 쓴것이었는데, 간신배들을 척살하고 황실의 위엄을 드노이자며 이번 거사에 함께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이, 이게 도대제 뭔가?" "요즘 워낙 첩자들이 날뛰다 보니, 보안 유지를 위해 조심을 좀 해 놓은 겁니다." 상장군은 그 말을 즉시 이해했다. 혹시 누군가 엿듣고 있는지 모르니 조심하자는 말인 것이다. 서신을 다 읽은 상장군은 그걸 다시금 순우기 장군에게 돌려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서신의 내용이 가져다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정말이지..., 파격적인 작전이로구먼." "과찬이십니다. 상장군." "다른 장수들도 그 작전에 대해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상장군. 안 그래도 썩.어.빠.진 금나라를 정벌할 기회이니 특히 젊은 장수들이 적극 지지하고 있습니다." 아미 이들의 대화 내용을 첩자가 엿들었다고 해도 봄이 되면 시작될 금나라와의 전투에 대한 작전 토의를 나누고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던 여문덕 상장군은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대답해 줘야 하나?" "그건 아닙니다만 될 수 있으면 빨리 답을 달라는 유상장군의 청이셨습니다." "알겠네. 내긍정적으로 생각해 봄세." 순우기 장군은 여 상장군이 일단 반쯤 승낙했음을 눈치 챘다. 그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서신에는 요 근래의 중서성에서 날아온 진회의 포고문을 기억해 보라고 쓰여 있었다. 상장군은 그 공문을 찾아내서 다시 읽어 볼 필요도 없었다. 아직까지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진회가 대장군을 모반죄로 참수한 이상, 조만간에 그의 부하들인 자신들도 체포될 것이 확실하다. 진회가 마수를 뻗쳐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손을 써야만 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도 대 장군처럼 개죽음을 당할 게 분명하니 말이다. 여문덕 상장군은 마음이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야 어찌 되어도 좋지만 거사가 실패한다면 자신을 믿고 무한으로 모여든 여씨 일가는 모두 머리가 잘려 효수될 것이 아닌가. 역모죄는 삼족이 몰살이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마음에 쉽게 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고지식하다고 할 정도로 올곧은 성품 때문이었다. 비록 고위직은 아니었지만 그의 가문은 지금껏 송 황실에 수많은 충신들을 배출하였고, 그 역시 그런 명예로운 자시의 가문을 긍지로 여겼다. 그런 그에게 황실을 향해 같이 진격을 하자니, 잘못되면 가문의 이름에 똥물을 끼얹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랬기에 거사에 동참하겠다는 말을 선뜻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도 유광세 상장군의 진영에 합류해야 할것이다.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재상 진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비 대장군의 참살을 강해했을 정도로 섭평은 배짱도 컸지만, 그걸 받쳐 줄 만큼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진회와 달리 커다란 야심이 있었다. 군궐을 추밀원에 귀속 하라는 진회의 명령도 있었고, 또 그걸 도와주겠다는 약속도 받아 냈다. 그런데 진회는 무슨 생각인지 자신의 이름으로 각 군별에 악비 대장군이 역모를 꾀했기에 처형했다는 공문을 발송했다. 그리고 그 공문에는 다시는 악비와 같은 자가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 모든 군권을 추밀원으로 귀속시키겠다는 내용까지 담았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섭평은 벌쩍 뒤었다. 공문을 받아 든 각 군벌들의 반응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살살 꼬드겨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말을 듣지 않으면 악비처럼 죽이겠다는 위협을 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35만이라는 엄청난 병력을 보유하고 잇는 악가군의 고위급 장수들이 어쩌면 황성을 향해검을 겨누게 될지도 몰랐다. 역모죄로 처형당한 악비 대장군의 심복들을 황실에서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을 그들도 잘 알테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군권을 추밀원으로 회수한단 말인가. 섭평은 진회가 지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섭평은 한동안 자택에서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진회가 이제 곧 뭔가 트집을 잡아 자신을 제거하기 전에 그동안 긁어 들인 재산을 들고 먼 이국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섭평은 이 상황이 자신에게 크나큰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각 군별에 보낸 공문의 발송자는 바로 진회였다. 기왕에 진회가 악역을 자처한 이상 섭평으로서는 이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야만 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진회의 가슴에 검을 겨눠야 했다. 한동안 침거하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섭평은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진회를 천하의 간신배로 만들어서라도 주인을 잃은 악가군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대신자신의 계책을 진회가 눈치 채면 곤란하므로 그는 '신임 추밀사로서 군사들의 사기를 점검하기 위해 전선을 시찰하러 가겠다'는 정도로 둘러댔다. 황도에서 출발하여 가장 먼저 송군 최대의 집결지인 무한에 들렀다가 그 다음 양양성으로 올라간다. 그런 다음 회하를 따라 내려오며 그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 군벌들과 만나 회담을 나눈다는 것이었다. 진회 일파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연막을 치기 위해 모든 군벌들을 다 만난다는 식으로 일정을 보고했지만, 그의 전선 시찰의 핵심은 악가군의 장악이었다. 무한의 여문덕 상장군과 양양성의 유광세 상장군을 직접 만나 그들만 회유할 수 있다면 진회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윛에 올라선다는 것도 꿈이 아닌 것이다. 섭평의 전선 시찰 계획에 대한 공문은 증서성은 물론이고, 각 군별들에게도 보내졌다. 추밀사가 방문하는 만큼 경계 재세애 만전을 기하라는 내용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그 공문을 받아 보고 입이 찢어져라 광소를 터트린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발고 유광세 상장군이었다. 혹시 주위에 있는 첩자들이 행여 들을세라 입으로 떠들지는 못했지만, 이전 그에게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이 새끼가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군. 크흐흐흣." 섭평은 자신이 대장군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런 대담한 계획을 세운 모양이지만, 유광세 상장군은 이미 묵향에게서 그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이건 복수의 기회임과 동시에 여문덕 상장군을 끌어들일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순우기 장군이 무한에 다녀온 이후 아직까지 여문덕 상장군에게서 회신이 없었다. 하지만 섭평의 목을 벤 후 군사를 일으킨다면 황실에서는 악가군 전체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여문덕 상장군도 어쩔 수 없이 동참할 수밖에 없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자신은 아니라고 말하려 해도 황실에서 믿어 주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대장군을 모시고 있었다는 원죄에 반란의 무리라는 낙인까지. 그렇게 해서라도 여문덕 상장군이 합류할 수만 있다면 무려 31만 이라는 엄청난 대군이 아군이 되는 것이다. 유광세 상장군은 '관지 장로와 군무에 관련된 몇 가지 상항에 대해 대화를 나눌 것이 있다'고 둘러댄 후, 마교도들이 머물고 있는 매화 장원으로 향했다. 요즘들어 순우기 장군과 비밀스런 대화를 나눌 일이 생기면 상장군은 종종 그곳을 애용하곤 했다. 안그래도 관지 장로가 사방에 첩자가 있음을 알고 있는 처지이니 다른 곳에서 수근거리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쪽이 낫다고 말해기 때문이다. "섭평이 도착하는 날 경행하는게 좋겠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상장군. 섭평의 도착에 맞춰 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여문덕 상장군과 만나 담판을 짓는게 좋지 않을까?" "괜히 첩자들을 자극할 만한 행동은 자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보다는 섭평의 목을 벤 후 곧바로 무한으로 달려가는 게 더 좋지않겠습니까?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면 곧바로 동참해 오실 겁니다. "그렇군. 그게 좋겠어. 대장군 휘하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반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놓였으니 동참할 수밖에 없겠지." 유광세 상장군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첩자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그동안 대장군의 복수를 아예 포기한 듯 행동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짓을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광세 상장군과 순우기 장군은 기밀 유지를 위해 밀실을 빌려 대화를 나누고 있엇지만, 사실 그들의 대화를 은밀히 엿듣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두 장군의 회동이 끝난 후에는 언제나 관지 장로를 찾아가 그들이 나눈 대화를 요약해서 보고했다. 오랜 세월 군부에 몸담았었던 관지 장로는 마화의 보고에 씁쓸한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허어. 대장군의 죽음에 이어 이제는 모반이라는 말인가?" "정확히 말해 모반은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대장군의 복권과 복수, 그리고 썩어 빠진 관료들의 숙청이니까요." "하지만 일단 실행이 된 후에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게 아니야. 한 번 군사를 일으키면 그렇게 쉽게 물러설 수가 없는 거지. 저들의 처음 의도는 순수할지 몰라도 나중에 권력을 잡고나면 어떻게 변질될지 알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물러섰다고 해도 조정에서 저들을 반역도로 규정하고 군사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나? 그런 우려가 있는 한 황도에서 물러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장로님" 관지 장로는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자칫 자신의 잘못된 결정에 마교 전체가 반역의 무리로 낙인이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해 교주님께서도 어느 정도 알고 계신 듯햇다. 황실에 대한 반란이나 반역이라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기에 나한테 언질을 주지 않으신 듯하지만..., 어찌 되었거나 지금은 그냥 두고 볼 수 밖에" 이때 밖에서 경계병이 들어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절강성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라." 절강성 분타주가 보내온 두 번째 서신이었다. 이번에도 정상적이 보고 경로를 무시한 것이기는 했지만 관지 장로는 서신을 가ㅕ온 전령을 아무런 문책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서신이 왔을 때 묵향으로부터 왜의 지원군에 대한 처리의 전권을 위임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 묵향은 만통음제를 찾는다고 출타 중이다. 그렇기에 관지 장로는 서신을 묵향에게로 보내는 대신 자신이 일기 시작했다. 절강성에서 보내온 내용이야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서니을 읽어 내려가던 관지의 눈이 곧 화등잔만해졌다. "뭐, 뭐야? 1만이라고?" 옆에 앉아 있던 마화가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1만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장로님" "허어, 이런 기가 막힌 일이...., 후지와라 영주가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하더니 1만 명이나 되는 완전 무장 병력이 지금 절강성에 도착했다는군. 이걸 어떻게 해야하지?" "교주님께서도 알고 계신 일인가요?" 관지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좌우로 흔들었다. "알고는 계시지만 설마 `1만 명이나 올 줄을 교주님께서도 모르신다네. 동맹군의 의리상 몇백 명 정도 올 줄 알았지. 설마 이 정도가 올 줄이야." 말을 하던 관지 장로는 갑자기 짜증니 나는지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교주님께 받은 지시는 지원군이 오면 적당히 경치 좋은 대로 데리고 가서 유람이나 시키다가 돌려보내라는 것이었는데, 무슨 수로 1만 명이나 되는 놈들을 다 유람을 시켜? 더 골치가 아픈 것은 이들을 인솔하고 온 장군이라는 놈이 주제 파악도 못하고 자신들을 가장 중요한 격전지로 보내 달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모양이야." 이야기를 듣던 마화의 눈에 서신의 안쪽에 또 다른 서신이 하나 더 들어 있는 게 보였다. 급히 꺼내 보니 그걸 보낸 인물은 바로 왜에 가있는 정상 천인대장이었다. 그의 서신을 읽어 본 결과 왜 이렇게 많은 병력이 지원군이랍시고 도착한 것인지 그 이유를 알수 있었다. 왜에 파견된 흑풍대는 단기간에 너무나도 엄청난 전공을 세워 버렸다. 그들의 전투력이 얼마나 놀라웠었던지, 그들 1천 기마대가 앞장서기만 해도 웬만한 성주들은 그냥 성문을 열고 항복해 버렸을 항복해 버렸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당연히 주위에 있는 수많은 여주들이 앞 다투어 동맹을 청해 왔다. 막강한 전력을 지닌 후지와라 영주와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후지와라 영주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주위의 영주들이 자신의 핵심 전력이라 믿고 있는 흑풍대가 언젠가는 중원으로 돌아갈 거라는 점 말이다. 그 때문에 흑풍대원들이 고향을 잊어버리고 왜에 정착할 수있도록 수많은 선물을 안기고, 또 예쁜 여자들까지 방에 들여보내 줬지만 결과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묵향에 대한 그들의 충섬심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후지와라 영주는 자선책을 생각해 냈다. 흑풍대를 왜에 붙잡아 둘 수 없다면, 그들이 중원으로 떠나기 전에 화근거리를 몽땅 다 없애 버리면 될 것이 아닌겠는가. 그래서여러 중신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서 생각해 낸 계책이바로 지원군 파병이었다. 물론 말이 좋아 지원군이지.실상은 충성도를 믿기 힘든 영주라든지 혹은 그 추종다들의 세력 약화가 주목적이었다. 그렇기에 정상 천인대장은 서신에서 후지라와 영주가 왜에서 파견된 지원군을 가장 지독한 격전장으로 보내 몽땅 다 소모시켜 달라는 묵향에게 부탁하더란 말을 써 놓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충분히지불하겠다는 말까지 말이다. 서신 말미에는 그렇게 해야만 하루라도 빨리 자신들이 이곳을 떠나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는 푸념도 적혀 있었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구만. 어쩐지...,지원군 사령관이라는자가 격전장으로 보내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는게 이런 이유때문이었군." "교주님께 연락을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마화의 말에 관지 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겨우 1만밖에 안 되는데 그걸가지고 교주님의 심기를 어지럽게 할 필요가 있겠나? 안 그래도 만통으제 대협의 실종으로 정신이 없을실텐데...." "그렇다면 그들을 중원인으로 변장시켜 양양성으로 이동시키는 건 어떨까요? 무기만 딸로 수송한다면 큰 문제없이 해결될 듯도 합니다만." 잠시 생각해 보던 관지 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1만이나 되는 중무장 병력이 수십척의 배에 나눠 타고 상륙했는데 그걸 군부에서 모르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조용이 히동시키려고 하다가 오히려 괜한 오해를 살 우려도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추밀원과 무림맹에 정식으로 통지하는 게 좋을듯한군. 사실 1만이라고 해 봐야 그리 대단한 전력도 아니니 떳떳하게 밝히고 이동시키는게 뒤탈이 없을 거야." "그렇다면 이동로는 어디로 잡을가요?" 관지 장로는 손가락으로 지도 위를 쓱 훑으며 말했다. "절강성에서 관도를 따라 항주, 소주를 거쳐 진강까지 간 다음 거기에서 배편으로 무한까지 이동시킨다. 그런 다음 무한에서 양양성까지 행군시키면 되겠지" "그럼 그렇게 통보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화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가자, 관지 장로는 머리가 아픈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력에 도움도 되지않을 1만이지만 어쨌든 그들의 뒤치다꺼리는 관지장로의 몫이기 때문이다. 마교의 모든 정보는 십만대산으로 집결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총단에서 홍진과 군산 설민이 정보를 취합한 후 그중 묵향에게 보고할 만한 것들을 골라내어 양양성으로 보내 주는 방식이다. 물론 화급을 다투는 중요한 정보들의 경우 곧바로 관지 장로나 묵향에게 보고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적군의 이동 같은 더 이상의 가공이나 포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 1차적인 정보들이었다. 여기저기서 모은 자잘한 정보들을 종합하여 거기서 추론해내는 2차적인 정보의 경우, 십만대산에서 취합되고 정리된 후에야 보내오게 된다. 그런 탓에 관지 장로는 쓸 만한 정보를 입수하는데 있었더 항상 한박자 느린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고, 정확한 상황 판단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물론 관지 장로도 자신이 처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개방과 무영문으로부터 그때그때 최신 정보를 얻어 냄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집단에서는 자시들이 얻어 내는 모든 정보를 관지 장로에게 전달해 주는 게 아니라, '마교 쪽에 알려 줘도 무방하다'라고 판단되는 정보들만을 보내 줬고, 그 대부분은 금나라의 동태에 집중되어 있었다. 악비 대장군이 죽임이라는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야 이런 정보 취합 방식으로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황실과 무림맹과의 관계가 악화된 직므으로서는 금나라를 제외한 정보망에 엄청난 구멍이 뚫린 셈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관지 장로는 섭평이 류태청에게 악비 대장군은 구금하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의 죽음이 알려지는 것을 우려해 황군으로 하여금 양양성으로 돌아가려는 호위대를 강제로 막다가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묵향이 황성에서 어떤 식으로 악비 대장군을 찾고 그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개방과 아미파, 공동파가 얼마나 마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묵향이 옥령인과의 추억에 젖어 이러한 부분을 관지 장로에게 제대로 말을 해 주지 않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더군다나 만통음제의 실종이라는 급박한 일로 묵향이 자리를 비우게 될 줄 그가 누가 알아겠는가. 그 때문에 관지 장로는 현재 관부와 무림맹에서 마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섭평의 승부수 - 황성에서 무한은 1천 5백여 리나 덜어져 있다. 전선 시찰이 화급을 요하는 게 아니었다면 섭평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뱃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화급을 요하는 일이었다. 재상 진희가 손을 쓰기 전에 악가군 장수들을 회유하는 것만이 자신이 살길이었다. 만약 진회가 역모를 이유로 그을을 숙청하고, 대신 자신의 심복들을 악가군에 배치한다면 군권은 자신이 아닌 재상에게로 귀속될 우려가 있다. 섭평은 기밀 유지를 위해 자신의 사병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훈련에 아낌없는 투자를 한 강병들이었기에 무예도뛰어난 데다가 승마 실력들도 좋았다. 더군다나 황병들이 보유한 것 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준마들을 지니고 있었기에 예정보다 반나절이나 빨리 무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북성의 성도 무한에 도착한 첫날, 섭평은 호북성 성주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안부를 전했다. 무한까지 온 마당에 성주를 만나지 않고 자신의 볼일만 본 뒤 딴 데로 가 버릴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성주와의 만남을 예의에 어긋나지 않은 선에서 최대한 짧게 끝낸 다음 섭평이 서둘러 달려간 곳은 병영이엇다. 그는 극소에서 수많은 병사들과 만나 간단하게나마 그들이 원하는 것을 물어봤고, 또 불편한 사항은 뭔지 들어 주는 척 대화를 나눴다. 그는 특히 ㅓㄻ은 장수들과의 대화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밤이 되자 여무덕 상장군이 주최한 조촐한 연회가 벌어졌다. 섭평은 그 자리에서도 장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은 무인들을 무시하는 고고한 선비와는 거리가 머 존재임을 알렷다. 밤이 깊어져 연회가 파했을 때, 섭평은 여문덕 상장군에게 술이나 한잔 나누자며 청했다. 섭평과 그 수행원들을 위해 마련한 둔 저택에는 그의 사병들이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한눈체 척 봐도 대단히 훈련이 잘된 병사들이엇다. "자자, 이리 오시게. 방금 전 귀관이 베풀어 준 연회에 대한 보답도 할 겸, 여러 장수들 앞에서는 사적인 대화도 나누기 힘들었기에 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일세. 그러니 부닮없이 마음껏 즐기게나." 여문덕 상장군은 섭평이 지나치리만큼 친근하게 자신을 대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재상 진회가 보내온 공문에는 분명히 추밀원으로 모든 군권을 귀속시키겠다고 쓰여 있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자신은 역모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은 악비 대장군의 심복이다. 당연히 뭔가 트집을 잡아 자신의 목을 날리기 위해 섭평이 애를 쓸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여문덕으로서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자리를 권하는 섭평의 손짓에 여문덕은 예를 표하며 앉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써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을 물엽 섭평은 슬쩍 말을 꺼냈다. "악비 대장군이 아무리 황실에서 감당하기 힘들 대군벌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금나라의 침공을 저지한 크나큰 공을 세운 장수였지. 내 귀관만큼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황도에서 몇 번 만나 본 느낌으로도 뛰어난 실력에 비해 참 겸손한 인물이었어." 악비 대장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왔던 장수인 만큼 자신의 상관을 칭찬하는데 기분이 나쁠 리 없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여문덕 상장군의 표정이 천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일세의 영웅을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야만 했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 아닌가? 그것도 이렇게 중요한 시국에 말일세.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이끼를 던지는데도 불구하고 여문덕은 여전히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런 말을 꺼내는 상대의 진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상께서 결정하신 일을, 일개 무장이 어찌 감히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어허, 황상 폐하께서 임명하신 분인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니셨다는 건 그 누구도 이론의 여지가 없지.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잘못하신거야." "..." 슬쩍 여문덕의 눈치를 살핀 섭평은 상대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섭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문덕의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갑작스러운그 행동에 여문덕은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문승 행동이시옵니까?" "자네에게 죄를 청하기 위함일세. 사실 악비 대장군을 감옥에 가두라고 지시를 내린 사람이 바로.., 날세." "그, 그게 무슨...?" 오랜 세월 음모와 권력 다툼으로 밤을 새우는 황궁에서 직므의 자리에까지 올라온 섭평이었기에 그는 사람을 다를 줄 알앗다. 여문덕 같은 고지식한 자는 쉽게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룻밤 사이에 그의 마음을 얻어야 한는 섭평으로서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래서 상대의 평정심을 일단 흔들어 놔야 했던 것이다. "악비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재상이 그를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나는 급한 마음에 일단 류태청으로 하여금 그를 수감하게 하였네. 설마하니 추밀원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에게까지 손을 쓸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거지. 시간을 번 뒤 황상 폐하께 고해 악비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설마 류태청이 재상의 손에 놀아나는 놈이었을 줄이야. 어찌 되었든 악비의 죽음에는 그것을 막지 못한 내 잘못도 크다는 말일세." 지금까지 대장군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여문덕에게 그의 고백은 섭평을 다시 보게 만들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섭평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섭평은 알고 있었다. 거짓말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1할의 거짓을 위해 9할의 진실이 포함되어 있어냐 한다는 사실을. 류대청이 마교 교주라는 놈에게 고문을 당해 모든 것을 실토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악비의 심복들인 유광세 상장군이나 여문덕도 알고 있을 게 아닌다. 하지만 진회가 악비를 처형한 것은 자신이라고 공표를 했다는 것에 생각이 스치자 자신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이 든 것이다. 섭평은 짐짓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상은 내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생각을 했는지 나를 바로 이 추밀원에 쳐박아 버리더군." 그 말은 충분히 여문덕으로서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사실 섭평은 얼마 전까지만해도 참지정사. 그러니까 부재상이라는 지고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실권도 없는 이름뿐이 추밀사로 좌천된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상장군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악비 대장군 때문일 줄이야..., 섭평은 그야말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진회에게 밉보여 시골 구석으로 좌천당한 거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돌아가신 대장군을 대신해 추밀사 대인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일세. 좌천당할 것이 두려워 아부만을 일삼는다면 장차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그러면서 섭평은 슬그머니 뭔가를 여문덕 앞에 밀어 놓았다. 여문덕은 그게 뭔가 하고 바라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건 피에 절은 관복과 잘린 머리카락이었다. 그게 누구 것인지 여문덕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이것은?" "대장군의 유품일세. 그의 심복이었던 자네와 유광세 상장군에게 전해 주려고 몰래 감춰 뒀었다네. 그걸 이제야 전해 줄 수 있에 되었구먼." "뭐, 뭐라고 감사를 올려야 할지...." 유품을 받아 드는 여문덕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장군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억울하게 죽은 그의 원혼을 위로하며 제사를 지내려 했으니 시체는 고사하고 유품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에게 대장군의 유품을 받게 될줄이야. 여문덕의 두 눈에 점차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섭평은 잠시 여문덕이 충분히 슬픔에 잠겨 들 시간을 계산한 뒤 비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재상은 과거에는 청렴하고 사리사욕에 얽매이지 않은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지금은 너무 번질되어 버렸다네.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악비 대장군같은 거목을 찍어 내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섭평은 여문덕의 손을 덥썩 붙잡으며 간절히 부탁했다. "장군이 나를 좀도와주게. 황실의 안녕과 제국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재상과 같은 썩어 빠진 뿌리는 캐내어야만 하네." 슬픔에 잠겨 있던 여문덕은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첩자들이 우글거리는 판에 이런 민감한 말을 다하니..., 여문덕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무리 술에 취하셨다고는 하나 말씀이 너무 과하십니다." "혹시 첩자들에 대한 걱정이라면 접게나." 섭평은 집 주위를 엄중하게 에워싸고 있는 무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은 오랫동안 본가에서 키운 내 사병들일세. 저들 역시 의기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 절대 첩자 따위는 없을 내 보증하지. 나는 오늘 상장군의 진심을 알고 싶었기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걸세. 될수 있다면 숨김없이 허심탄회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군." 진심 어린 섭평의 간청에 여문덕은 난처한표정으로 대답했다. "대인을 도와 드리고 싶으나 소장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말게. 자네와 나는 한배를 탈 수밖에 없는 입장이 아닌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재상은 악비 대장군을 모반죄로 처형한 것을 만천하에 공포했네. 그런데 그 모반이라는 것이 대장군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미 숙청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유 상장군에게 들은 바 있기에 여문덕은 침착한 어조로 응수했다. "그런 말씀을 제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자네가 나를 돕는다면 나 또한 자네가 숙청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맹세하겠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일세. 우리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재상을 견제하도록 하세나." "아무리 추밀사 대인이시라도 그런 약속은 마음대로 할수가 없..." 여문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섭평은 말을 끊었다. "물론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네. 하지만 악비 대장군의 무죄를 증명하고 그를 복권시킬 수만 있다면 그 누구도 자네게 모반죄 따위를 물을 수는 없을 걸세." 대장군의 복권이라는 말에 여문의 상장군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가능하겟습니까?" "가능하네. 현재 송제국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잇는 악가군이 나를 밀어만 준다면 말일세.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는 군제를 개편, 이름뿐인 추밀사가 아니라 진정한 군부의 수장으로 거듭날 수가 있지. 그렇게만 된다면 그 힘을 이용해서 재상을 탄핵할 수 있지 않겠나? 충분히 가능성이 잇는 말이었다. 과거 군권을 지니고 있을 때 추밀원은 중서성과 쌍벽을 이뤘었다. 즉, 중서겅의 수장인 재상과 추밀원의 수장인 추밀사는 거의 동등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다. 평화시에도 그렇게 추밀ㅇ사의 권력이 막강했었는데 지금은 금나라를 앞에 둔 전시가 아닌가? "..." "내일 본관은 양양성으로 떠나 유광세 상장군도 설득할 생각일세. 자네가 동참해 준다면 양양성으로 향하는 내 마음도 가벼워 질 텐데.... 부디 대장군과 같은 삶이 반역자으 ㅣ오명을 후세에 남기는 일은 없었으면 ㅈ호겠구먼. 허허이. 참으로 난제로구먼 난제야."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문덕 상장군은 쉽사리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섭평이 한 제의 때문이었다. 고지식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현재의 조정을 개혁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모든 대소신료들이 힘을 합치기는커녕, 저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광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떨치고 일어나야 할 때라는 것도 알앗다. 하지만 어떤 모습으로 떨치고 일어나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분명한 건 더 이상 고민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여문덕은 대장군의 유품을 앞에 놓고 무릎을 꿇으며 중얼거렸다. "장군. 소장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장군이 아니 계시니 전혀 앞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장군. 소장 어찌하면 좋겠냔 말입니다."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밤이 깊어 갈수록 가슴을 메이는 여문덕의 비통한 음성 또한 켜켜이 쌓여만 갔다.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난 섭평은 숙취로 인한 두통을 억누르기 위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침음성을 흘렸다. "으윽..."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것은 아니었지만 황도에서 이곳까지 강행군을 한 탓에 피로가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주량에 훨씬 못 미치게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섭평은 크게 취했다. "대인. 기침하셨습니까? 시비들에게 식사를 준비하라 이를까요?" "아니다. 그나저나 상장군은 기침하셨느냐?" "지금 당장 달려가 알아 보고 오겠습니다." 그 말에 섭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아니다. 내가 직접 가 보마." 여문덕을 찾아가는 섭평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토록 구슬렸는데도 여문덕은 단 한 마디도 승낙의 뜻을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섭평이 여문덕의 방 앞에 도착하자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장군, 기침하셨소?" 그러자 잠시 후 목이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시죠." 문도 열어 보지 않고 감히 자신에게 들어오라고 하다니. 섭평의 안색이 불쾌감으로 붉게 달아올랐지만 애써 참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으 여문덕이 대장군의 우픔을 앞에 두고 좌정을 하고 있었다. 밤을 꼬박 세웠는지 그의 안색은 초췌했다. 섭평은 뭔가 말을 꺼내려 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낮은 여문덕의 얼굴을 보니 왠지 말을 꺼내 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르는 가 싶더니 여문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섭평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대인, 부족한 몸이지만 제가 필요하시다면 그 뜻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런 갑자기 왜이러시오? 어서 일어나시오." 섭평은 기쁨에 환히 웃으며 여문덕을 서둘러 일으켜 세웠다. "우리들은 송의 정기를 다시 세우기 위해 뜻을 모은 동지가 아니겠소. 절대 장군에게 실망을 끼치지 않도록 내 노력하리다." "대인, 소장의 목숨을 바치오리다." 흡족한 기분으로 여문덕과 함께 아침을 먹은 후 섭평은 양양성에서 유광세 상장군이 칼을 갈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곳으로 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엇다. 한 건 처리했다는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 오른 것도 잠시, 곧이어 그의 머릿속은 유광세 상장군은 어떻게 요리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하게 얽혀 들고 있었다. 바로 이때 였다. 자신을 향해 급히 달려오고 있는 여문덕 상장군의 모습이 보였다. 섭평의 자리에서 일어나 온화한 미소를 보냈다. "어허, 아직 출발하려면 멀었는데, 벌써 배웅을 나오셨소?" "큰일 났습니다. 대인."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는 섭평에게 여문덕은 전서를 내밀며 말했다. "대규모의 왜구가 절강성에 상륙했다고 합니다." "뭣이?" 섭평은 급히 전서를 읽시 시작했다. 놀랍게도 절강성에 상륙한 왜구의 규모는 무려 1만.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였다. 추밀원에서는 그에게 순서를 중지하고 당장 황도로 돌아올 것을 청하고 있었다. 순간 섭평의 마음속에는 갈들이 일었다. 그에게 있어서 유광세를 포섭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여문덕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의 수가 훨씬 많지만, 그들은 아직 제대로 훈련이 안 된 신병들이다. 하지만 유광세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은 대 송제국 최고의 정예인 것이다. 그런 엄청난 세력을 보유한 유광세 상장군의 포섭을 포기하고 황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는 입장이다. 만약 이 공문을 무시한다면 곧바로 재상 진회에게 보고가 올라갈 게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진회가 자신이 이쪽으로 온 진정한 의도를 눈치 챌 우려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진회는 자신을 가만히 둘 리가 없다. 결국 섭평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태할 수밖에 없었다. 목수을 걸고 유광세 상장군을 포섭하러 가든지 아니면 아직가지는 자신의 힘이 모자람을 통감하며 진회의 눈치를 살펴야 할지.... "크으으.., 이걸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묵향> 24권에 계속 오타가 조금 많습니다. 시간에 촉박해서 작성한거라... 그래도 재미있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작성자 by 못이룬꿈